충청도 임천(林川)의 괴인돌이라는 마을. 오늘날의 행정 구역 명칭으로 충청 남도
충화면 지석리는 두 명의 선인, 곧 손선지(베드로, 1820-1866년)와 정문호(바르톨로메오, 1801-1866년)가 탄생하는 영광을 얻었다.
1백 년 박해사에서 가장 혹독했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성인 한재권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두 성인의 유해는 천호 성지에
묻혀 있다. 이들 두 성인은 팔이 부러지고 살이 터져 나가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도 오히려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에 용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려서 입교한 손선지는 열심한 신앙으로 이미 16세 때 샤스탕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병인박해 때 그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해 12월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잡혀 전주 감영에서의 신문 중 회장임이 탄로난다. 그리 인해 손선지는 공소를 거쳐간 서양 신부와
교회 서적의 출처를 알려는 관헌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옥중에서도 회장의 직무를 다해 갇혀 있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12월 13일 그는 대성동, 성지동
등지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 유해는 전주 서천교를 넘어 용마루재와 유상리(柳上里) 뒷산에
묻혔다가 그 아들에 의해 이곳에 욺겨졌다.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나 원을 지낸 적도 있는 정문호 성인은 임천(林川)에서 천주교를 알게 되자 곧 입교했다. 그는 교우들 뿐만 아니라
외교인들에게조차 깊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박해를 피해 교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때에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았다.
그 해 12월 초 사람을 보내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기도 했는데 그 소식을 미처 듣지도 못하고 12월 5일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붙잡혀 순교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문호는 옥중에서도 항상 기도로 순교를 예비했고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은 우리가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이라며
자신의 순교를 기쁨으로 맞았다.
이들 두 성인은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백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