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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외로운 넋

1866년 병인박해 당시의 순교자 구(具) 다두의 묘소는 아직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 다른 수많은 성지, 사적지들과 마찬가지로 잡초만이 무성해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경상 남도 남단 함안군 대산면 가등 부락에 모셔진 순교자 구 다두의 묘가 확인된 것은 그가 순교한 지 너무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23세의 꽃 같은 나이로 오직 천주를 모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던진 청년 구 다두, 순교한 뒤 그의 유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혹독하기 그지 없었던 박해 속에서 누가 감히 천주학쟁이로 지목받아 처형된 이들의 유해를 고이 보전하도록 배려했을 것인가. 지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인들과 잘 알려진 순교자들은 물론, 천행으로 가족이나 친지의 배려와 증언 등을 통해 유해가 따로 모셔지거나 적어도 그 행적을 찾을 수 있는 순교자들은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들의 덕분이다. 하지만 그렇게 잘 알려진 순교자들보다는 오히려 전혀 아무런 기록도 증언도 없이 다만 아침 햇살이 비치면 사라지는 이슬처럼 형장에서 희광이의 칼날 아래 스러진 이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구 다두 역시 자칫하면 그 유해도 행적도 묘연할 뻔했으나 천행으로 그 묘소가 학인됨으로써 후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으로 남겨지고 있다.
 
구 다두의 묘를 확인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함안 본당 대산리 공소 회장인 윤 바오로의 증언에 힘입은 바 크다. 윤 바오로는 구다두의 처조카인 최성순을 통해 구 다두의 묘가 "신(愼)씨라는 사람의 묘벌 안에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증언의 내용은 관내 대산면 하기리에 사는 한 노인의 말, 즉 "신(愼)씨 묘소 안에 진주 옥에서 풀려 나와 그 장독(杖毒)으로 죽은 사람의 묘가 있다."고 하는 말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리하여 신씨 묘소를 살펴본 결과, 신씨네 묘 우측에서 봉분이 거의 없어진 묘를 발견하게 되었고 발굴 결과 구 다두의 묘소임을 확인했다.
 
구 다두는 원래 함안 미나리골의 중인 계급 출신으로 신심이 돈독하고 믿음에 충실해 1866년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까지 가서 전교 활동을 한 바 있다.
 
그러나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그 해 진주 포교에게 잡힌 그는 인정 사정 두지 않는 혹독한 매를 맞고 겨우 풀려 나온다. 하지만 무수한 매가 남긴 장독(杖毒)은 그로 하여금 풀려 나온 지 불과 7일 만에 선종하게 한다.
 
그 때 그의 나이 23세. 지금 같으면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고 바야흐로 사회에 첫발을 디디려는 젊은이가 눈뜨고 차마 못 볼 그 숱한 매를 한몸에 받고, 또한 살아서 호강하지도 못하고 죽어서조차 제대로 된 묘석 하나 없는 쓸쓸한 묘소에 묻혔던 것이다.
 
지금은 간단한 제대와 아담한 하얀 십자가가 순례자의 눈길을 끈다. 그나마도 없었다면 이곳이 순교자의 묘임을 어느 누가 알아볼 수 있으랴.[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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