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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없어 무두묘인가?

경남 진양군 사봉면 무촌리 중촌동에 위치한 사봉 무촌 마을에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 해서 '무두묘(無頭墓)'라 붙리던 순교자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 1822-1866년)의 묘가 있다.
 
정찬문의 묘에서 내려다보면 사봉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그 옛날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그가 지금도 마을 사람들을 향해 굳은 믿음을 당부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묘가 서 있는 허유 고개는 신자들이 수시로 넘나들었던 고개로 사봉 주유소를 끼고 약 600미터 남짓 올라가면 묘가 나온다.
 
정찬문은 1822년 10월 13일 진양 정(鄭)씨 양반 가문의 부친 정서곤과 모친 울산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진양 정씨 가문은 일찍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는 지조로 낙향한고려 말 대사헌 정온(鄭溫)의 후예로 정찬문 역시 선대의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강한 절개와 지조 있는 인품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천주교 신자 집안의 여자인 윤씨와 혼인한 뒤 부인의 권면으로 입교해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 활동에 충실한 생활을 했다. 특히 이들 부부가 전교 활동을 했던 시기는 철종 재위 기간 13년간과 고종 즉위 직후, 천주교 박해의 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던 과도기적 시기였기에 비교적 박해에 위협받지 않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66년 가장 혹독한 박해 중 하나로 꼽히는 병인박해로 그는 진주 포교에게 체포된다.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그는 결코 배교를 입에 담지 않았으며 굳건한 신앙을 고백했다. 특히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아기를 등에 업고 주먹밥을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는 그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쓰기까지 커다란 공헌을 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끝에 결국 그는 진주옥에서 참수 치명한다. 그 때가 1866년 12월 20일,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사촌들은 참수되어 머리없이 몸체만 있는 유해로 장사를 지냈다. 그래서 인근 지역에서는 머리가 없다 해서 무두묘로 전해져 오다가 1947년 당시 문산본당 주임 서정도 베르나르도 신부가 광산 김씨라는 사람의 증언을 듣고 무두묘를 확인해 기념비를 세웠다.
 
아쉬운 것은 남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형리들에게 온갖 고초를 겪어 가면서 아기를 등에 업고 옥바라지를 하던 윤씨가 허유 고개를 떠나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는 것이다.
 
남편의 순교를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했던 부인은 이웃과 친지들의 미움을 사게 됐고, 결국 이런 구박과 핍박을 받으며 눈물로 나날을 보내던 부인은 견디다 못해 남편의 고향인 이곳 허유 고개를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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