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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지

지금은 그 위치조차 희미한 나주 무학당은 광주 대교구 내에서는 유일하게 순교터가 있었던 곳이다.
 
무학당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현재 나주 초등 학교 안의 한쪽 화단이 박해 당시 사형 터로 쓰였던 무학당의 원래 터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더구나 지금은 그나마 주춧돌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 무상한 세월과 함께 후손들의 못난 신앙을 돌이켜보게 한다.
 
나주(羅州)는 전라 남도의 주읍(主邑)으로 옛날부터 크게 번창한 고장이었다. 여기에 정식으로 본당이 설정된 것은 1935년 5월의 일이다. 하지만 나주 본당의 뿌리는 1866년 병인박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무학당에서 얼마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고문 끝에 순교했는지 그 정확한 수나 사연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치명 일기」에 이곳에서 치명한 세 분 순교자에 대한 단편적인 사연들만이 기록돼 있을 뿐이다.
 
그중의 한 분은 전라 복도 용담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교우가 됐다가 정읍에서 체포되어 이곳으로 압송된 것으로 알려진 강영원(바오로)이다. 그는 천주학을 버리라는 강요 속에서도 굳게 신앙을 지키다가 마침내 1872년 3월 9일 백지 사형(白紙死刑)으로 치명했다. 물에 적신 얇은 창호지를 여러 겹 얼굴에 발라 질식케 하는 백지 사형은 그 사형 방법이 간편한 반면에 극심한 고통을 주기 때문에 박해 시대에 여러 곳에서 사용되던 사형 방법이었다.
 
반면 전라 북도 무장, 암틔라는 곳에서 살던 유치성(안드레아)이 강영원과 함께 붙잡혀 나주읍으로 압송됐는데 그 역시 같은 날 처형됐다. 하지만 그는 강영원과는 달리 쏟아지는 돌더미 속에서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기록에 남아 있는 마지막 순교자인 유문보(바오로)는 다른 두 치명자보다 며칠 늦은 3월 15일 나주에서 옥사했다.
 
어느 한 사람 소중하지 않다 할 수 없는 이들 순교자들이 흘린 피 위에 나주 지역의 천주교는 그 터를 닦았다 하겠다. 비록 그 순교 터의 위치는 어느덧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억하는 이도 없이 잊혀졌다 할지라도 그곳 땅과 하늘에 서려 있는 확고한 믿음은 후손들에게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터를 닦은 나주에는 1933년에 와서 임시 공소가 서고 이듬해에는 대지 3천 평을 확보, 임시 성당과 사제관을 준공했으며 1935년에 들어서 비로소 본당이 설정된다.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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