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접하고 있는 문경새재를 넘어서면 괴산국 남동쪽 끝에 연풍면이
나선다. 해발 1,017미터의 험준한 고갯길, 새재의 서쪽 기슭에 연풍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연풍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황석두 루가의 고향이며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돼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연풍 마을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다.
구름도 쉬어 넘는다지만 산이 높은 까닭만은 아닐 것이다. 그 옛날 선인들이 새재로 불린 험한 길을 처음 내고 넘나들면서부터 고갯길 구비구비
서린 슬픈 내력들에 구름인들 차마 어찌 그냥 넘어설 수 있었으랴.
연풍은 전체가 소백 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이고 문경군과 접경지대에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 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의 요로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 됐었다.
남부 여대(男負女戴)로 보따리를 싸서 박해의 서슬을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험의 도주로를 이용해 여차 하면 밤을 틈타
험준한 산 속으로 숨어들어 새재 제 1, 2, 3관문 성벽 밑에 있는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죄인 아닌 죄인, 도둑 아닌 도둑으로 한스럽게 살았던 교우들이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잠깐 눈을 붙인 틈을 타 숨죽여 가며 드나들던 그 수구문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연풍과 새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최양업 신부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유학해 13년간의 각고 끝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49년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운다.
은신처로서 새재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그는 김대건
신부가 1년 남짓 사목한 데 비해 오랫동안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읍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했다는 최 신부는 생전에 쉴 새 없이 넘나들던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옯겨져 묻힌다.
연풍에서는 황석두 루가(1811-1866년)
성인의 발자취가 빛을 발한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온 그는 3년 동안의 벙어리 흉내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킨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안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두고 성서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토록 했다.
뿐만 아니라 신앙에 눈뜬 뒤 그는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해 페레올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가 있을 정식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허락을 못했다. 병인박해 때는 다블뤼 안 주교,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칼을 받아 순교한다.
연풍에는 또 한가지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9명의 성직자를 잃었다. 천신만고로 세 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칼레 신부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칼레 신부가 연풍을 지나다가 포졸들에게 발각돼 도망 치다가
붙잡히려는 찰나에 그만 전대가 풀어져 돈이 떨어졌다. 그를 쫓던 포졸들은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틈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공소로 옛날 향청 건물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3백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다. 하지만 매입후 논과 집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3개나 발견됐다.
또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가시화 됐다. 1979년에는 평해 황씨 문중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 1982년 연풍성지로 이장했다.
연풍성지와 관련하여 선종하신 오기선(요셉) 신부님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매년 2만여 명씩 순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연풍 성지에는 황석두 성인과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 5인의 성인상과 함께 순교 현양비가 건립돼 있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과 국내 최대의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제관을 비롯한 기념관 건립이 진행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새재와
연풍에 어린 복음의 발자취
새들도 쉬어 가며 넘는다는
문경 새재(鳥嶺). 서울에서 충주와 수안보 온천 지대를 지나 30여 리를 가면
만나는 곳이 충청도 연풍(延豊)이고, 이곳에서 다시 심하게 굽은 고개를 올라
조령, 조곡, 주흘 등 세 개의 관문을 지나면 경상도 문경이 나온다. 그러나 이제
터널이 개통되면서 어렵게 새재를 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연풍은 본래 산수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화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조령 관문 아래의
수옥 폭포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 자리잡고 있으니, 풍수지리적으로는
최적의 거주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연풍은 이제 지리적 위치보다는 천주교 성지로서
교우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면 이 지역에 교우들이
거주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미 1790년대 후반, 교우들이 새재를 넘나들
무렵부터 한두 명의 교우들이 이곳에 자리잡았다. 그들은 이내 교우촌을 일구고
포졸들에게 쫓기는 교우들을 받아들여다. 또 훗날 최양업 신부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경상도의 비밀 교우촌을 찾아보기 위해 연풍을 거쳐 새재를 넘었으며, 그것도
포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으레 성벽 아래의 수구문(水口門)을 이용해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 문경 새재와
연풍은 복음의 연결 통로였지만, 한편으로는 박해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포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새재를 넘나들었고,
그 아래의 연풍 주막에 묵으면서 신자들을 색출하여 공을 세우고자 하였다. 실제로
1866년에 박해를 피해 다니던 칼래 신부는 연풍 주막을 지나가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위험에 빠진 적도 있었다.
제가 연풍 주막 앞을
막 지나치려고 할 때 포졸들이 의심을 품고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면서 뒤따라와
이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앞장서서 걸어가던 유 토마스가 심하게 시비를
걸자 포졸들이 모두 거기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저는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 와중에서 저의 전대가 떨어져 돈이 튀어나오자 포졸들은 저를 잊어
버리고 돈을 줍는 데만 정신이 팔렸습니다(칼래 신부의 1866년 6월 10일자 서한
중에서).
연풍과 관련하여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곳이 바로 황석두(루가) 성인의 고향이요, 연풍 성지는 곧
그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부유한 평해 황씨 집안에서
태어난 황석두는 일찍부터 과거 공부에 노력해왔으나, 25세 무렵인 1837년경에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는 구름이 걷힌 하늘을 보는 듯한 기쁨에 넘쳐 세상의 모든
욕심을 버리게 되었다. 더욱이 부친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2년 동안 벙어리 노릇까지
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 생활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았다. 부친이 사망한
뒤 가세가 기울면서 그는 투기 행위를 하였고, 이로써 10년 동안 교회 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추방 같은 것이었다. 이 추방 기간 동안
그는 더 열심한 신앙인이 되었으며, 그 결과 1858년에는 회장으로 임명되고,
다블뤼 주교의 복사요 제자가 되어 번역 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8년 뒤 대박해가 전국을
휩쓸게 되었을 때 황석두도 체포되어 다블뤼 주교와 함께 있게 되었다. 이때
그는 끝까지 주교를 따라가겠다고 작정할 정도로 이미 순교할 원의가 충만하였다.
그러므로 서울로 압송된 뒤에도 신앙을 증언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학식과 교리를
바탕으로 박해자들을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충효는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것이 제일이요, 임금과 부모께 대한 것은 그 다음일 뿐입니다.
세속 일에서도 친구나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을 고발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
한 형제인 교우들을 고발하고 교회 일을 발설하겠습니까? 관장께서 이를 강요하는
것은 어찌된 도리입니까? 1866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세상에
널리 편 것은 어느 성인도 가르칠 수 없는 진리이니, 어찌 그 가르침을 배반하겠습니까?([우포도청등록],
병인 2월 3일, 황석두 공초)
물처럼 흐르는 그의 호교론에
관장은 말문이 막힐 정도였고, 모두 어안이 벙벙하였다. 결국 그에게는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었으며, 임금의 재가가 떨어지자마자 포졸들은 선교사와 장주기와 함께
그를 옥에서 끌어내 닷새가 걸려서야 보령의 갈매못 형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월 30일(음력 2월 14일). 그곳 백사장에서 형을 집행하였으니, 당시 황석두의
나이는 54세였다.
순교자들의 시체는 나흘
동안 형장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중에서 황석두의 시신은 가장 먼저 가족들에
의해 고향 선산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순교자들은 홍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882년에
발굴되어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1000여 년이 지난
1968년에 황석두가 복자품에 오르면서 연풍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79년에는
마침내 평해 황씨 선산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무덤이 발굴되어 성지로 이장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6호(1999년 7월), pp.129-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