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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정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자비송

요즈음은 '창미사'라는 말을 자주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미사를 드릴 때에 보면 변하지 않고 항상 똑같은 구절들이 있다. 이것을 '통상문'이라 한다. 이 '미사 통상문'은 개정을 하여 1996년 12월부터 사용하고 있다. 항상 같은 말마디로 구성되어 있는 이 통상문 가운데 주일이나 대축일처럼 미사를 장엄하게 봉헌할 때, 통상 노래로 하는 부분이 있다. 곧 자비송, 대영광송, 거룩하시도다, 하느님의 어린양 등 이 네 가지가 노래로 하는 부분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구절들을 - 물론 그 이상도 포함하여 - 노래로 부르며 봉헌할 때 이것을 '창미사'라 하고 이 노래들을 '창미사곡'이라 한다.
 
그래서 창미사에서는 '자비송'을 노래로 부른다. 그런데 자비송은 참회예식 다음에 연결되어 있어서 흔히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간절한 노래로 생각한다. 그러나 곧이어 연결되는 '대영광송'을 보면, 밝고 활기찬 노래로서, 후반부에 자비송과 비슷한 구절이 나오는데 오히려 자비송이 '하느님의 영광'과 관련된 노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자비송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애절함의 노래인가, 아니면 대영광송처럼 환호 노래인가 하는 의문이다.
 
사실 참회 부분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에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사의 시작예식(입당에서 본기도까지) 안에 이 노래가 현위치에 자리잡은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일이었다. 그것이 ㉮와 ㉯ 형식이고, ㉰ 형식은 자비송과 하나로 엮어놓아서 다양하게 선택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애절함의 노래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미사 전례 총지침에서도 "교우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노래이므로 미사에 참석하는 교우, 성가대가 모두 함께 노래하는 것이 좋다."(30항)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예로부터 이 노래는 '환호'였다. 옛날에 임금이 행차하거나 개선 장군이 돌아올 때 군중들이 환호하던 외침이었다. 그들은 "키리에, 엘레이손~(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소리질렀다. 당대에는 높으신 어른들을 '주님(키리에)'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환호(acclamatio)란 한 무리의 군중이 외치는 큰소리이다. 회중이 열광하여 외치는 소리가 환호이다. 마치 축구 경기장에서 골을 터뜨리면 관중이 환호하며 외치는 것과 같다. 인기있는 유명 가수가 등장하면 '오빠부대'가 고함을 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선거 유세장에서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박수치며 고함치는 것과 같다. 열광하여 큰소리로 고함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환호는 초대교회에서(4-5세기) 전례에 받아들여 노래하였다. 선창자나 독송자가 일련의 기도를 하면, 회중 전체가 "키리에, 엘레이손!" 하고 화답하였다. 일상적인 환호였던 것을 전례에서 간청기도에 화답하는 공동체의 응답 환호로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비송은 무엇을 두고 환호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주인들'보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크신 어른이시오 유일한 주인이시라는 뜻에서 '주님'이라 외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에 대해 환호하고 열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스타(별)'이신 셈이다. 세상의 어두움을 비추러 오신 별이시다. 어떤 뮤지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슈퍼 스타'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래서 자비송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주님의 '자비'가 핵심은 아니다. 자비송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자비를 청하는 것은 그 다음의 상황이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는 것은 자기를 지극히 낮추어야 가능하다. 겸손이 요구된다. 나를 낮추고 겸손되어 종의 위치에 설 때에 '주님'이라 고백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기 때문에, 당신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환호가 참회예식 다음에 바로 이어지거나 또는 참회를 청하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비'를 청하는 간구로 쉽게 생각한다. 더욱이 우리말로 바꾸어놓은 것을 보면, '주님'보다 '자비'에 시선이 더 쏠리게 마련이다. 서양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번역된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말 그대로 "키리에, 엘레이손!"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자비송이 참회와 맛물려 있기에 참회의 용서를 청하는 '자비'에만 초점을 맞추어 역해석하는 것은 온전한 이해가 아니다. 오히려 대영광송 후반부에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 초대교회 때부터 노래로 환호하였다는 점, 그리고 핵심은 '주님이시다'라는 사실에 맞추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앞뒤가 바뀌면 곤란하다. 마치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참회하고 고백하는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를 청하기 위해 주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기에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을 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강조하느냐에 따라 주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도 달라진다.
[이글은 대구대교구 나기정 신부님께서 경향잡지(1998년 2월)에 기고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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