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자료실 > 가톨릭 전례 > 화답송

나기정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화답송

대화는 말하고 듣기이다. 곧 대화는 서로가 주고받는 말이다. 혼자서 말하고 듣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면 상대가 듣고 또 상대가 말하면 내가 듣는 것이 대화이다.
 
이렇게 정보를 서로 주고받을 뿐 아니라, 또한 한 쪽이 묻고 다른 한 쪽이 대답하기도 한다. 상대가 나에게 묻는데 거기에 맞추어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것을 말하면 '동문서답'한다고 한다. 동쪽을 물었는데 서쪽을 가리키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묻는 말에 잘 맞추어서 대답하거나 또는 무슨 이야기에 대해 맞장구를 치듯이 조화있게 수긍하면 잘 '화답'한 것이 된다.
 
미사에도 '화답하는 부분'들이 있다. 특히 말씀 전례가 그렇다. 말씀 전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부분이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공동체가 화답하는 대화형식으로 짜여있다. 제1독서를 듣고 화답송으로 응답하고, 또 제2독서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복음 환호송으로 응답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러 오시는 주님을 환영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고 사제가 그 말씀에 대해 강론을 하면, 공동체는 신앙고백과 보편 지향 기도로 화답한다. 모든 기도에서나 전례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바로 이러한 대화형식이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와 나누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듣기만 하시고 우리가 말하는 독백형식은 잘못된 것이다.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은 않고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는 어른 말씀을 잘 듣지 않고 자기 고집만 부리는 철부지 아이와 같다. 반대로 하느님께서만 말씀하시고 공동체는 듣기만 하는 것도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도일 수 없다. 또 전례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엉뚱한 생각(분심)을 한다면 거기에 합당한 대답을 드릴 수 없다. 당연히 올바른 기도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독서 말씀을 듣고도 '화답송'을 하지 않고 묵묵부답하는 경우를 본다. 하느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는데 대답하지 않는 것은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관심을 기울인다면, 화답송의 내용도 쉽게 공감하여 같은 마음으로 화답할 수 있을 것이다. 잘 대답하려면 상대가 건네는 이야기를 관심있게 들어야 한다.
 
이렇게 기도는 대화이기 때문에, 독서 말씀에 응답하는 화답송도 말씀 전례에서 근본적인 요소이며, 전례를 거행하는 지금의 우리 공동체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잘 듣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떻게 화답송을 잘 드릴 수 있을까? 이 노래는 대부분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화답 시편'이라고도 불렸다. 화답 시편은 옛날 유다인들이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 성서 봉독을 전후하여 시편을 읊었던 관습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는 4세기경에 독서 후에 시편이나 창작 성가를 흔히 불렀다. 시편 외에도 성서의 찬가나 창작 성가를 많이 불렀기 때문에 화답송은 교회의 아주 오래된 전례 성가에 속한다. 그 이후 교리적인 이유로 대부분의 창작 성가를 멀리함으로써 '시편'이 교회의 공식 노래로 자리잡게 된다. 이렇게 시편이, 봉독한 독서에 대한 화답의 노래가 되었다.
 
그런데 한때(6세기)는 독서에 대한 화답이 아니라 복음 전 노래로 이해되어 독서와 무관한 내용의 화답 시편이 선택되기도 하였다. 동문서답이 아닐 수 없다. 또 7세기에는 '층계송'이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독서대보다 한 단계 낮은 층계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으로, 성가대가 거기서 불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은 화답송의 의미로는 적합하지 않은 이름이다.
 
"화답송은 독서대나 적당한 자리에서 시구(詩句)를 노래하고 교우들이 후렴을 응답한다"(미사 전례 총지침, 36항). 이것은 화답송이 시편이고, 시편도 성서로서 하느님의 말씀에 해당하기 때문에 독서대에서 노래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응송' 부분은 성가대나 선창자가 하고 공동체는 '후렴'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화답송은 독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잘 짜여있으며 찬미, 감사, 고백, 결심, 청원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독서 말씀을 잘 들을 뿐 아니라 독서 말씀과 조화를 이룬 화답송의 응송 부분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가 담긴 하느님의 말씀(성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내 마음을 담아 후렴을 함께 노래하거나 읊어야 한다. 물론 함께 노래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독서를 듣고 선창자가 화답송 후렴을 선창한 뒤에 공동체가 그 후렴을 따라 반복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음을 열고 귀기울인다면, 그 후렴의 구절을 쉽게 반복하여 외울 수 있다. 책 같은 것이 꼭 눈앞에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상대가 이야기할 때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 또한 상대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물며 상대가 하느님이시라면 더욱더 그러하지 않겠는가. 열린 마음으로 말씀에 귀기울이는 자세를 갖는다면, 우리는 쉽게 응답하고 잘 화답할 수 있다. 잘 들으면 거기서 신앙이 생긴다.
[이글은 대구대교구 나기정 신부님께서 경향잡지(1998년 4월)에 기고하신 글입니다.]
 

 관련 자료

가톨릭 자료실 > 가톨릭 전례 > 화답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