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연대별 기록1



1. 초기교회 신앙정립과정의 활동(1777∼1886)

1855.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성영회 본부에 재정적인 원조를 청하여 고아구제사업을 펴기 시작 (650쪽 성영회)

1866. 병인박해로 성영회의 고아구제사업이 중단 (650쪽 성영회)

1880. 성영회의 고아구제 사업이 계속됨 (650쪽 성영회)

성영회 (라) Sancta Infantia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50쪽)

버림받은 아동들을 위한 구제사업기관.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인 홀본 잔송(Holbon Jansong)에 의해 창설되었다. 모든 어린이들을 구제하기에는 재원이 모자랐으므로 죽음의 위함에 처해있는 어린이들에 세례를 주고 살아나면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맡겨 이를 키우도록 하는 방식으로 어린이 구호사업을 폈다. 우리나라에는 1852년 8월 말에 조선에 입국한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우리나라 각지를 돌며 전교활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죽음에 직면한 고아가 많음을 보고, 파리에 있는 성영회 본부에 재정적인 원조를 청하여 1855년경에 고아들에 대한 구제사업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사업인데 메스트르 신부는 죽어 가는 외교인 어린이들에게 영세를 주는 한편 고아들을 모아 몇몇 독실한 여교우들로 하여 이들을 돌보게 하였고, 점차 고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어린이들은 신자가정에 맡겨 키우게 하는 한편, 그들이 커 감에 따라 자립할 수 있도록 생업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그의 이러한 자비심에 감동되어 새로 입교하는 자가 자연 많았고,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여러 곳으로 번져 나갔으나 재정상의 어려움과 박해로 인해 사업은 더욱 어려워 졌다. 그러나 1875년 12월 20일 메스트르 신부가 충남 합덕에서 선종한 뒤에도 이 사업은 계속되어 1859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신자로서 대세를 받고 죽은 아이가 701명, 프랑스의 고아원 본부에서 보내온 경비로 양육하는 고아가 43명에 달한다. 이 사업은 1859년 까지는 서울에 유모(乳母)를 둔 고아원으로 발전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다가 1880년에 다시 계속되어 1886년 부터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인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영회의 고아사업은 개화와 더불어 전국의 주요 도시에 퍼져갔고, 남자에게는 목공, 약국, 철공 등의 기술을 습득케 하고, 여자에게는 재봉틀 사용법을 가르치는 등 직업교육을 시킴으로써, 자립의 길을 열어 주는 근대적인 고아구제사업으로 발전해 갔다.

성영회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156쪽)

병인 박해로 중단을 강요당했던 고아 구제사업은 개항 이후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자 다시 시작되었다. 고아 구제사업이 재착수한 때는 1885년 3월 15일이었다. 서울의 성영회 고아원은 그 후 계속 원아들의 숫자가 증가되었고, 1886년에는 수용된 원아가 80명에 이르렀으며 1890년에는 182명으로 증가되어갔다.

고아들의 수는 늘어갔으며 고아 수용시설에 보호되고 있는 아동들 외에도 성영회의 전통에 따라 신도 가정에 위탁되고 있는 아동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처럼 수용시설이나 신도 가정에서 양육되고 있던 고아들을 전문적으로 보호해 줄 수녀들이 요청되었고 여기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고아들의 보호에 본격적으로 종사하게 되었다.

1882. 계성국민학교의 전신인 인현서당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793쪽)

계성국민학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792쪽)

계성국민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은 공식연도는 1909년이나 구한말에 세워진 발간된 [경향잡지]와 같은 교회잡지에 이미 1906년부터 계성학교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975년까지 는 1906년을 개교연도로 삼고 개교 기념행사를 가져왔다. 1882년부터 1883년도 조선교구 통계표에 당시 종현본당 신부였던 블랑 신부가 "1882년 본당 관하에서 운영되던 학교가 하나있고 11명의 학생이 재학중이었다,"라고 기록한 것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교구 6대 교구장이던 리델 (Felix Ridel, 李福明, 1830-1884) 주교가 1882년 9월, 종현성당 관하 인현동에 세운 초등교육기관인 인현서당을 말하는 것으로 계성국민학교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따라 최종적인 고증을 거쳐 개성국민학교의 개교 원년을 1882년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 1883년 8월에는 인현서당을 종현으로 옮겨 종현성당, 한한학원 또는 종현학원 등으로 불렸는데 이 서당은 천주교회의 전액 부담으로 운영되면서 1886년에는 40명 가량의 학생들에게 국어와 한문 읽기, 쓰기 등을 가르쳤다. 그 후 1906년에 본당신부였던 프와넬 (Victor Poisnel, 朴道行, 1855-1925) 신부의 적극적인 재정 후원과 최봉섭의 협조를 얻어 종현학원을 개편 확장하여 비로소 신식교육기관으로 탈바꿈 하였다.

그 후 본당 교육사업의 발전을 위해 1924년 4월 17일 남·여 학교를 통합하여 총독부로부터 정식 6년제 계성지정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이때부터 공립상급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졸업장을 줄 수 있게 되었다. 2년 뒤에는 계성보통학교 남자부 교사를 2층 양옥으로 건축하였으며 교실부족으로 이듬해에 또 증축 하였다. 1924년에는 보호자회를 설립하였고 1928년에는 동창회를 창립하여 학교발전을 도모하였다. 이와같은 내외적 성장과정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학교 발전을 도모하였으며 김 세리나 수녀, 박영숙 데오판 수녀등이 오랫동안 교사로 헌신하였다. 1938년 4월, 경성계성심상소학교로 교명을 개칭하였다. 한편 일제의 탄압으로 나라안의 모든 학교가 국어교육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을 당시에도 계성학교는 방과후에 종교교육을 통해 한글을 계속 가르치기도 하였다. 1941년 4월, 계성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어린이들의 종교교육에도 주의를 기울여 주 1시간의 교리교육을 실시, 희망자에게 세례를 주어 1972년부터 1989년까지 547명의 영세자와 282명의 첫영성체자를 내었다. 앞으로도 예상되는 학급당 인원수의 감축에 따라 수업료의 증가요인이 내재되어있고 사립학교라는 특성에 따른 여러 가지 어려움들도 없지는 않으나 종교적인 일체감에 의한 화합분위기와 오랜역사와 전통속에서 긍지있는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다.

1885. 3 블랑신부는 곤당골(現 을지로 1가)에 집 한 채를 마련해 고아원을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40쪽)

블랑 Blanc, Jean Marie Gustave, 1844-1890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40쪽)

파리 외방전교회원. 제7대 조선교구장. 주교. 한국명 백규삼(白圭三).

1884년 6월 20일 프랑스에서 한국 교회의 제6대 교구장이던 리델(Ridel, Felix Clair, 李福明, 1830-1884)주교가 서거(逝去)하게 되자, 1878년 이래 부주교의 직책을 맡고 있던 블랑 신부가 1883년 나가사키에서 주교로 성성괴어 조선교구의 제7대 교구장에 정식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가 교구장에 취임한 1883년은 한국에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묵인되던 때였다. 오랫만에 지상에 나와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은 교회는 직접선교를 중심으로 하되 간접선교인 사회사업에도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교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간접선교의 활동으로는 고아원과 양로원의 운영을 들 수 있다.

블랑 주교는 한불통상조약이 체결되기 한 해 전인 1885년 3월에 서울 곤당골(現 을지로 1가)에 집 한 채를 구입해서 고아원을 설립하여 무의무탁한 아이들을 받아들여 열심한 교우 몇 명을 채용하고 그들을 돌보아 주게 하였다. 블랑 주교는 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해 온 5개월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고아원의 운영을 위해서는 수녀들의 봉사가 절실히 요청됨을 인식하여 있었다. 그래서 그는 파리외방전교회의 본부에 제출한 1885년도 연말보고서에서 "이 고아원을 맡아 줄 몇 명의 수녀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바램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게 된 직접적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한편, 블랑은 조선교구의 교구장에 취임하기 전 주교 서품을 받기 위해 일본 나가사키에 갔다. 그때 그는 1878년 이래 일본에 진출하여 고아원, 진료소 등 교회 내 여러 분야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활동을 본 바 있었다. 또한 그는 이미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 해외선교에 종사하고 있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알고 있었으며 이 수녀회가 가난한 이들의 교육과 환자 방문 등을 중심으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조선 교회에도 이러한 수도회가 필요함을 느꼈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의 조선 진출을 권유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블랑 주교가 1885년 3월에 시작한 고아원은 점차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1885년 고아원이 설립된 직후 39명의 아동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1886년 고아원에 수용된 원아 수는 모두 250명이 넘었다. 또한 블랑 주교는 1885년 고아원과 함께 양로원을 개설했다. 블랑 주교는 1886년 종현에 집 두 채를 더 사서 남녀 고아원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윗집에는 여아를 수용하고 아랫집에는 남아를 수영한 후 남당(男堂), 여당(女堂)이라 불렀다. 남당, 여당의 두 집에는 주방, 세탁소, 간호, 교사 등 각 부면에 사람을 두고 운영해 왔다. 블랑 주교가 고아원을 운영하고자 한 데에는 최소한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즉 그 하나는 버림받은 고아들을 구제하여 훌륭한 천주교 신자로 키우고, 또 하나는 병든 어린이를 치료하고 죽음이 임박한 어린이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1885. 3. 15 블랑신부는 '천주교 고아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95쪽)

성바오로보육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95쪽)

한국 천주교회의 고아구제사업은 교회 초창기에서부터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명도회(明道會) 등의 평신도 단체에 의해 시작되었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부터는 더욱 체계적인 교회의 사업으로 정착되었다. 이에 따라 성영회(聖櫖會)가 1854년도에 설립되어 고아들을 양육하였는데 특히 메스트르(Ambroise Maistre, 李 1808-1857) 신부는 성영회 사업을 확고히하고 발전시키는데 힘썼다. 그는 보육원 건물을 세우고자 희망했으나 그당시에는 아직도 박해가 극심하던 터라 주로 신자들의 가정에 위탁, 양육 시켰다. 그뒤 병인박해로 일시 중단되었던 교회의 고아구제사업은 1880년 블랑(Jean Blanc 白圭三, 1844-1890) 신부에 의해 재개되었고 1884년 그가 조선교구의 제7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자 그는 고아구제사업을 우선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3월 15일, 서울 곤당골(현 을지로 1가)에 있는 기와집을 구입하여 [천주교고아원]이란 이름으로 보육원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고아원이었다.

블랑 주교는 고아들의 양육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수녀를 청하여 마침내 1888년 7월 22일, 4명의 수녀가 최초로 서울에 도착하기에 이르렀다. 도착 직후 수녀들은 정동에서 약 한달간 머무른 다음 종현에 있는 기와집 두 채를 고쳐 1888년 9월, 정동의 수녀원과 곤당골의 고아원을 모두 옮기고 9월 8일, 정식으로 [천주교고아원]을 인수받아 수도회 부속사업으로 경영하게 되면서 원장에 자카리아(Zacharie Heurtault) 수녀가 취임하였다. 이때의 고아의 수는 남아가 80명, 여아가 65명이었다.

수녀들의 보살핌으로 원아들이 급증하여 150명이 넘게되자 1889년, 목조 2층 원사와 평가(平家)를 신축 낙성하였는데 이 원사가 완성된 후로는 이곳에서 남자 아이들에게는 한문과 경문을 그리고 돗자리 짜는 법과 기타 여러가지 실업을 가르쳤고 여아들에게는 바느질과 가사를 가르쳐 구제 및 교육계몽사업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많은 어린이들이 들어왔지만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병이나 굶주림의 빈사상태에서 왔기 때문에 당시 수녀원의 지도신부였던 코스트 신부의 대세를 받고 사망하는 어린이의 수도 또한 많았다. 수녀들은 격무와 재정난 등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정성껏 고아들을 돌보았는데 주일마다 대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고아들의 깔끔한 옷차림과 성당에서의 나무랄데 없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또한 아이들은 수녀들로부터 성가를 배워 미사 때 노래하였는데 그 노래 소리가 마치 프랑스의 성가대가 부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1901년 부터는 운영상의 여러 가지 사정을 참작하여 신입 남아들의 수용을 중지하고 여아들만 돌보게 되었다. 특별한 수입원이 없던 당시로서는 존타그부인이 운영하고 있던 존타그 호텔(Sontag Hotel)에서 나오는 세탁물이나 외국인들의 세탁물을 해주고 받는 돈이 생활에 큰 보탬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정도 수도원과 고아원이 자리를 잡아 갈 때 스타니슬라 원장수녀가 별세하여 1910년 1월 1일에 제 3대 원장으로 가밀 수녀가 취임하였다. 가밀 수녀는 이후 33년간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든든한 기반을 닦아놓았다. 초기부터 샤르트르 본부와 프랑스 성영회에서 보내주는 보조금이 고아원 운영의 큰 부분을 차지해 왔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러한 외국의 원조가 끊기고 보조금도 1/3로 줄어들어 극심한 재정난에 이르게 되었다. 국내사정도 약화되어 쌀값 등 생필품 값이 크게 올라 생활유지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홍수 등으로 인해 더욱 크게 늘어난 고아들을 원하는 대로 다 받을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수녀들은 극도의 내핍생활을 해가며 한편으로 새 고아원을 짓기 위한 절약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하여 1925년부터 고아원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다만 얼마라도 건축비에 보태기 위해 1925년, 1926년, 1927년 세차례에 걸쳐 이틀씩 바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동안 40여년간 저축했던 돈과 수녀들과 고아들이 수공예품을 만들어 판 돈, 그리고 국내·외의 관대한 회사에 의하여 드디어 1926년 5월, 벽돌 3층으로 된 고아원 본원사를 신축 낙성하여 입주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녀들의 손에 의해 구호되고 양육된 고아의 수는 4.500명이 넘었다. 1932년에는 천주교고아원에서 천주교 보육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고아들의 수가 많아져 수용능력이 부족하게 되자 용산 삼호정(현 산천동)에 1만 8천원의 공사비로 3층의 보육원 분원 건물을 지어 1936년 7월 8일 라리보 주교의 주례로 강복식을 거행하고 50여명을 수용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소개령(疏開令)에 의해서 보육원을 옮기기 위해 1944년 겨울부터 하우현천주교회로 짐을 옮기고 아이들을 피난시키던 중 해방이 되어 다시 본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다시금 피난생활이 시작되었다. 1950년 7월 16일에는 수녀원과 보육원을 모두 인민위원회에게 접수당하고 수녀들은 식량과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고아들을 데리고 충무로에 있는 가정보육사범학교 건물로 옮겨갔다. 거기서도 다시 쫓겨나 필동에 있던 이범석 장군의 저택에서 얼마간 지냈으나 서울 탈환작전으로 필동일대가 불바다로 변하여 다시 명동의 본원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서울이 수복되어 안정되는가 싶었으나 12월 21일 중국 지원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다시 악화되었다. 이에 서울시 사회과의 지시로 10세 미만의 어린 고아들을 안양으로 소개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1951년 1월 20일 UN군 비행기의 오폭으로 안양에 소개되어 있던 50여명의 어린이들이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자 남은 아이들은 일주일 후 다시 서울 본집으로 들어와 지내면서 부족한 식량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 한편 1951년 1월 3일에 10세 이상의 아동들은 대구로 피난하여 성요셉식당의 유치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한편 전쟁 기간 중 서울에서는 영아원이 파괴되었으므로 전쟁전에 격리실로 사용하던 건물에 100여명의 전쟁 고아들을 수용하여 돌보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던 120여명의 아이들은 1952년 9월 1일, 대구시 대봉동 173번지에 원사를 신축하여 이사하였다. 이렇게 서울과 대구에서의 고생을 하던 당시에는 미군들의 원조가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파괴된 서울 원사를 신축하기 위해 1953년 가을에 공사를 착공하여 이듬해 10월 7일 축성하였는데 연건평 330평의 3층 벽돌집에 110명의 아이들이 입주하였다. 1954년에 용산에 있던 아이들이 다시 명동으로 합해지고 1957년 11월 7일에는 대구에 있던 아이들도 전원 복귀하였다. 1966년 9월 24일에는 명칭을 [천주교 성바오로보육원]으로 변경하였다. 1969년 9월 23일에는 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천주교쌘뽈유지재단으로 명의를 이전했고 아동복리시설 인가를 갱신하였다.

이처럼 숱한 역경과 어려움을 헤쳐오며 수녀들은 어린이들을 사랑과 인내로써 양육하고 이들이 떳떳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돌보아왔다. 이미 보육원 초기부터 원내에서는 필요한 공부와 수예, 재봉 등을 가르쳐 왔고 1930년경 부터는 좀더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여 유치반, 초등반, 중등반 등으로 나누어 일반 학교와의 유대관계를 맺어나갔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학령기에 달한 모든 아이들을 계성국민학교로 통학시키고 가능한 대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교육시키려 하였다. 또한 적령기에 달하면 교우가정에 혼인을 시키기도 하고 자립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은퇴한 후에도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곤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아보육사업은 차츰 방향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사회가 안정되면서 고아의 수는 점차로 줄어들었고 대신 양로사업이나 정신 박약아, 장애인 등과 같은 특수 사회사업에의 요청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변천 및 요청에 따라 사업 전환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남아 있던 81명의 원아들 중 9명은 연고자에게 인도하였고 3명은 국내 입양, 4명의 국외 입양, 가출 2명, 그리고 63명은 다른 사회복지기관으로 나누어 이주시켰다. 이렇게 하여 성바오로보육원은 1977년 9월 6일 폐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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