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연대별 기록2



2. 종교자유획득과 수도회 결성이후의 활동(1886∼1910)

1886. 성영회의 고아사업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인계함 (650쪽 성영회)

성영회 (라) Sancta Infantia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50쪽)

버림받은 아동들을 위한 구제사업기관.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인 홀본 잔송(Holbon Jansong)에 의해 창설되었다. 모든 어린이들을 구제하기에는 재원이 모자랐으므로 죽음의 위함에 처해있는 어린이들에 세례를 주고 살아나면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맡겨 이를 키우도록 하는 방식으로 어린이 구호사업을 폈다. 우리나라에는 1852년 8월 말에 조선에 입국한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우리나라 각지를 돌며 전교활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죽음에 직면한 고아가 많음을 보고, 파리에 있는 성영회 본부에 재정적인 원조를 청하여 1855년경에 고아들에 대한 구제사업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사업인데 메스트르 신부는 죽어 가는 외교인 어린이들에게 영세를 주는 한편 고아들을 모아 몇몇 독실한 여교우들로 하여 이들을 돌보게 하였고, 점차 고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어린이들은 신자가정에 맡겨 키우게 하는 한편, 그들이 커 감에 따라 자립할 수 있도록 생업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그의 이러한 자비심에 감동되어 새로 입교하는 자가 자연 많았고,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여러 곳으로 번져 나갔으나 재정상의 어려움과 박해로 인해 사업은 더욱 어려워 졌다. 그러나 1875년 12월 20일 메스트르 신부가 충남 합덕에서 선종한 뒤에도 이 사업은 계속되어 1859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신자로서 대세를 받고 죽은 아이가 701명, 프랑스의 고아원 본부에서 보내온 경비로 양육하는 고아가 43명에 달한다. 이 사업은 1859년 까지는 서울에 유모(乳母)를 둔 고아원으로 발전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다가 1880년에 다시 계속되어 1886년 부터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인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영회의 고아사업은 개화와 더불어 전국의 주요 도시에 퍼져갔고, 남자에게는 목공, 약국, 철공 등의 기술을 습득케 하고, 여자에게는 재봉틀 사용법을 가르치는 등 직업교육을 시킴으로써, 자립의 길을 열어 주는 근대적인 고아구제사업으로 발전해 갔다.

성영회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156쪽)

병인 박해로 중단을 강요당했던 고아 구제사업은 개항 이후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자 다시 시작되었다. 고아 구제사업이 재착수한 때는 1885년 3월 15일이었다. 서울의 성영회 고아원은 그 후 계속 원아들의 숫자가 증가되었고, 1886년에는 수용된 원아가 80명에 이르렀으며 1890년에는 182명으로 증가되어갔다.

고아들의 수는 늘어갔으며 고아 수용시설에 보호되고 있는 아동들 외에도 성영회의 전통에 따라 신도 가정에 위탁되고 있는 아동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처럼 수용시설이나 신도 가정에서 양육되고 있던 고아들을 전문적으로 보호해 줄 수녀들이 요청되었고 여기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고아들의 보호에 본격적으로 종사하게 되었다.

1888.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종현성당의 뒷쪽에 있던 시설에서 고아들을 보호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60쪽)

종현 고아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160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조선에 진출한 직후 고아원의 운영과정에서 드러난 일부 난관을 극복하면서 수녀원의 전체 구성원이 고아를 위한 봉사에 투신하고 있었다.

1903년 종현의 고아원에서는 32명의 수녀들이 이소사(李召史)등 여직원 11명 및 남직원 3명과 함께 고아들을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고아원에서는 길에 버려진 아이들을 수용하기도 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고아원에서 원아를 받아들인 규정은 아마도 성영회의 규정을 원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영회에서는 남아의 경우 6세 이하, 여아는 8세 이하는 맡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었으며, 두 돌이 차지못한 아이를 유모가 없을 경우에는 받지 말아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아동을 받아들일 때에는 친권을 포기하겠다는 부모의 각서를 받았다. 아동을 받아들일 때 부모의 친권을 포기하도록 했던 것은 원아의 양육에 대한 부모의 간섭으로 예상되는 폐단을 미리 막기 위해서였다. 이 고아원에서는 남아와 여아들이 별도로 나뉘어 보호되고 있었다. 고아들 중에는 정박아도 있었다. 종현 고아원의 원아들은 거의 200명 내외의 숫자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1888년 당시 원아들은 종현성당의 뒷쪽에 있던 변변치 않은 시설에 보호되고 있었다. 그 시설은 남녀 원아들이 각각 수용되어 있던 남당과 여당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남당은 지형적으로 낮은 곳에 있었고 20여개의 층계를 올라가면 수녀원 건물이 있었다. 또 수녀원에서 10개의 층계를 지나 올라가면 여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건물은 원아들의 숫자가 늘게 되자 수용의 한계에 부딪혀 새로운 건물을 신축해야 했다. 그리하여 새 건물을 세우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고 신축된 건물은 1890년 9월 8일 성모성탄 첨례날 축성되었다. 신축건물로는 원사와 평사가 각각 1동씩 있었다. 원사에는 7세 이상의 아동들을 수용하고 평가에는 유아와 영아들을 수용했다. 이 원사는 목조 2층으로 건평이 241평이나 되는 당시에는 상당히 큰 건물이었다.

종현 고아원은 초기부터 겨울철 난방에는 석탄난로를 쓰고 있었고 석탄 창고가 별도로 있었다. 그런데 1889년에 세운 원사의 건물만으로는 장소가 점차 비좁아졌다. 그리하여 1894년과 1895년에는 남아들을 여아들과 분리해서 수용하고자 하는 계획이 진행되어 나가기도 했다.

수녀원과 교구에서는 남자원들을 별도로 수용할 건물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남자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의 시설을 확충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난관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재정적인 부담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고아원에 인접한 건물 한 채를 구입하는 데에도 8,000냥(약 2,300달러)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현 고아원에서는 남자 원아들의 신규 수용을 중지했고, 수용되어 있던 남자들도 신도 가정에 위탁하여 양육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종현 고아원의 남자 원아수는 이렇게 감소되어 갔지만 여자 원아들의 신규 수용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자 원아들만으로도 기존의 공간이 부족하게 되자 1906년 늦은 봄에는 전에 석탄 창고가 있던 곳에 들어서 있던 한옥을 개축하고 넓혀서 여당에서 지내던 5-6세 부터 10세의 여아들을 돌보았다.

1889. 답동본당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60쪽)

답동본당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60쪽)

인천 답동본당은 1897년에 건물이 완성되었으나 점차로 신자들이 증가하자 드뇌(Eugene Deneux, 全學俊, 1873-1947) 신부는 1933년, 성당의 신축공사에 착수, 1937년 6월 30일에 현재 모습의 성당을 건립하였다. 1982년 8월 9일에 답동성당은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 본당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첫 파견된 이래 본당 신부를 도와 전교는 물론 불우한 이웃들과 환자돌보기, 해성보육원 창설에 따른 고아들의 양육, 보호에 전력하였고 본당 내에 병원, 학교, 유치원이 설립됨에 따라 다양한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70년대에 인천교구청 기구확장에 따라서 교구사목국, 교육국, 성서후원회에서도 봉사하게 되어 인천교구 사목의 활성화에 협조를 하고 있다. 현재 11명의 수녀들이 함께 모여사는 답동분원은 각기 맡은 소임의 다양함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한 공동체로 생활하고 있다.

해성병원 - 1894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이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후 환자들에 대한 진료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그 것이 해성병원의 시초이다. 1935년 10월 14일, 아일랜드인 필로메나(Philomena Ralph) 수녀가 내한하여 보육원 아동들과 일반 환자를 위해 부속병원을 본격적으로 확장 개설하였고 1938년 10월 15일에 드뇌 신부는 사재(私財)를 들여 부속병원용 건물 3층을 현대식으로 신축하였다. 이 건물에는 16개의 방이 있었으나 주로 보육원 아동들을 위한 시설이라 입원시설은 없고 진찰과 시약만 하였다.

그 후 1961년 10월 30일에는 해성병원의 시설을 인가받았고 1970년 5월 30일에는 병원의 원사 1층을 대폭 수리, 이전하여 병원시설을 보완하였다. 1975년 인천의 답동에 있던 해성보육원은 1948년 용현동에 분원을 마련한 이후 영아원까지 모두 용현동으로 이전하자 아기들의 치료를 위해 1주일에 2∼3번씩 답동에서 왕진을 다녀야 했다. 또 급하면 가까운 의원으로 아기를 데리고 나가야 하는 불편 등으로 인하여 1984년 4월 28일에 해성병원은 인천의 해성보육원으로 이전하였다. 1991년 현재 1985년 11월에 이전해온 원주 바오로 병원과 통합되어 홍순자 아드리아나 의사수녀 외에 2명의 수녀들이 보육원 아기들과 인근 주민들의 진료에 힘쓰면서 의료사도직을 통한 복음전파에 노력하고 있다. 해성병원은 초기에는 서울보다도 훨씬 활발한 의료활동을 전개했었다. 그러나 이 병원은 본디부터 보육원 원아들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수녀회 에서는 수녀들을 기타 다른 의료기관으로 많이 파견한 이유 등으로 인해 해성병원은 보육원 부속병원으로서만 계속 작은 규모로 유지되어오고 있다.

박문유치원 -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드뇌 신부에 의해 1937년 3월 1일에 설립된 박문유치원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인천에서 우수한 유치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한동안 휴원하기도 했으나 1957년에 2학급으로 증설되면서 시설도 과학교육에 입각한 교구를 점차로 구비하고 강당, 보육실, 자료실, 양호실, 소꼽방, 실내·외 유구장, 풀장 등 다양한 설비를 갖추었다. 또한 위치도 답동성당 구내인데다가 이웃에 국민학교와 수녀원 등이 있어 좋은 교육환경을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 4,64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박문유치원은 학습발표, 리듬악기 발표, 연극발표회 등 다양한 발표회와 전인교육을 통해 매해 150명의 원아들을 교육하고 있다.

박문국민학교 - 1899년 인천 답동에 수녀원이 설치되면서부터 수녀들은 꾸준히 보육원 원아들과 신자들의 자녀 및 무산아동(無産兒童)들을 모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기관이 발전하여 1900년 9월 1일에 인천항사립박문소학교가 설립되었다. 그후 드뇌 신부는 1914년에 급증하는 아동들을 수용하기 위해 인천사립박문소학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6월, 남자부 교사 6학급을 다시 신축하여 1917년 4월 1일에는 이 2개교를 합병하여 인천박문학교로 개칭하였다. 수녀들은 박문학교 여자부를 운영하면서 특히 매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갖고 교리, 성서, 역사, 복음 등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 당시 수녀들의 학교는 제물포에 있는 학교들 중에서 가장 좋은 학교로 평가받고 있었다.

1925년 11월 27일에는 1922년에 개정된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인천사립박문보통학교로 6년제 정식인가를 받았다. 그후 1938년 4월 1일에는 개정교육령에 의해 인천박문심상소학교로, 1941년에는 다시 인천박문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6월 3일에는 건물 소개령으로 인해 남자부 교사를 헐게 되어 공립국민학교로 편입시켰으며 여자부 교사만이 남게 되었다. 당시 교사수녀들은 매일 아침 신사참배를 위해 학생들을 인솔하고 신사에 다녀와야 했으며, 남자부교사가 소개된 후에도 여자부를 위해 끝까지 헌신하면서 학교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1958년, 제 3대 교장으로 박영숙 데오판 수녀가 취임하면서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을 위임받았고 제 4대 교장인 이밀마 데레사 수녀 때 남녀 병설 12학급으로 인가받으면서 안정된 환경속에서 계속적인 발전을 해나갔다. 1961년부터 다시 인천교구에서 학교운영을 맡게 되자 수녀들은 계속 머무르며 교사 혹은 서무로서 일하였다. 그러다가 1977년 3월 2일에 제 10대 교장으로 이종후 빌뚜데스 수녀가 취임하여 제 3대, 제 4대의 수녀교장 이후 약 15년만에 다시 수녀가 학교운영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해 6월에 도서실을 개설하였고 1981년 11월에는 12개 교실을 증축하여 학교시설을 확장하였다. 이듬해에는 교내방송국을 개설하였으며 1984년 12월에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명문사학으로서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학부형들의 참여와 활동또한 대단하여 인천시내학교 어머니 글짓기 대회, 어머니 합창대회, 어머니 배구대회 등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하였다.

1988년 2월 최루시아 임마꿀레 수녀가 제11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현재는 교육시설을 완비하고 특별히 예능교육, 정보처리기능교육, 조기영어교육 등을 실시하면서 기초학력을 신장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또 매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담임교사들이 직접 맡고 있어 신앙생활과 실행활과의 연결 및 품성교육을 겸하고 있으며,천주교회 학교의 특성을 잘 살려 나가고 있다. 1989년말 현재 교장수녀와 함께 교사수녀 1명, 일반교사 18명, 직원 9명 등이 972명의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가톨릭 회관 - 1973년 3월 1일 인천 가톨릭회관이 준공되고 1975년 3월 31일부터 이명자 마리안나 수녀가 부임하여 교구의 전반적인 사목을 돕다가 1980년부터는 회관 내에있는 각 국이 분리 운영되어 사목국, 교육국, 성소후원회에 각각 담당수녀가 파견되어 교구사목을 돕고 있다.

〈사회복지부〉- 1985년 11월 10일에 류병순 마리 도미니카 수녀는 답동분원에서 자체적인 사회복지활동을 전개, 주로 청소년 근로자를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고 그후 1987년 3월 2일 이춘근 시몬 스독 수녀가 교구 사회복지부에서 개설하여 답동분원으로 이관한 해성어머니 한글교실을 담당하면서 답동분원의 사회복지 활동은 본격화 되었다. 해성어머니 교실은 문맹인 주부들에게 글을 가르쳐 가정 및 신앙생활의 향상을 돕기 위해 마련陖는데 종교와는 관계없이 25세 이상의 주부들을 대상으로 2년의 기간동안 한글교육과 산수, 일반 교양강좌를 실시하고 있으며 매일 평균 100명 정도의 주부들이 참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위한 교리반도 운영하여 문맹으로 인해 각 본당에서 교리를 배우지 못했던 영세자 및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1894. 제물포 수녀원이 설립되고 수녀들은 시약소를 설치하여 무료진료 활동을 시작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86쪽)

제물포 시약소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186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일반 환자를 위한 의료 사도직 분야에 직접 투신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여름 부터였다. 이때 제물포에 진출한 수녀들은 수녀원 건물의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에 입주하였고 시약소를 설치하여 무료진료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약소에는 많은 환자들이 찾아왔다. 1897년 8월 이후 1898년 4월 까지 8개월 동안에 제물포 시약소에는 모두 2,623명의 외래환자를 받아들여 진료했고, 275명의 환자를 직접 방문해서 치료해 주었다. 이는 이 기간동안 시약소에서 월평균 327,88명의 환자를 받아들여 진료했고 또 34.88명의 환자들을 직접 방문해서 치료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는 휴일을 포함해서 매일 평균 11명 정도의 외래환자를 진료했고 한 곳 이상의 가정을 수녀들이 직접 방문해서 치료했음을 뜻한다. 이때 제물포 시약소에는 보통 2명의 수녀가 봉사하고 있었고, 이들은 각기 오전·오후로 시간을 분담해서 진료와 시약을 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제한된 봉사인원을 가지고서는 외래환자를 받는 일과 방문진료를 다함께 진행시키기가 어려웠다.

무료 시약소는 질병의 치료와 더불어 선교를 목적으로 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약소에서는 외래환자와 왕진환자의 숫자를 집계함과 함께 의료 사도직의 실천과정에서 베푼 임종대세자의 숫자도 파악하고 있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환자를 왕진하면서 그들의 영혼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고, 죽을 위험이 있는 환자들에게 대세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대세를 받은 환자가 살아날 경우에는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인근의 신도들과 연락을 취하여 주었다.

이시기에 있어서 의료사도직 분야는 환자를 위해서는 치유와 구원을, 교회를 위해서는 선교의 성과를, 수녀회 자신을 위해서는 소명의 확인을 가능케 해주는 일이었다. 이 당시의 의료사업은 그 규모나 시설면에 있어서 그리고 의료행위의 수준에 있어서는 결코 완벽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교회에서 운영하는 본격적인 의료기관의 출현을 촉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894. 8. 18 해성 보육원(海星保育院)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331, 508, 509, 671, 672, 867쪽)

해성보육원 海星保育院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331, 508, 509, 671, 672, 867쪽)

1894년, 인천 답동(옛 제물포)본당에 분원을 설립한 이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전교는 물론 보육원과 무료진료소 운영 등 활발한 사도직을 전개하여 왔다. 보육원은 남녀 어린이를 모두 돌보았다. 또한 이 보육원의 발전에 있어서는 본당 신부였던 드뇌 신부의 공이 매우 컸다. 드뇌 신부는 수십년을 두고 사재(私財)를 기울여 수녀원과 원아들을 돌보아 주었으며 용현동, 영종도 등지에 농지 20만평을 매수하여 보육원에 기증함으로써 운영에 확고한 재정기반을 수립해 주었다. 그러나 이곳도 특별한 수입원이 없이 외부의 원조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로부터의 원조가 거의 중단되자 유지들의 기부를 호소하거나 바자회를 열어 운영에 보태기도 하였다.

꾸준히 고아들을 돌보아 오던 인천 해성보육원에서는 해방과 더불어 연합군의 상륙으로 혼혈아가 급증하자 1948년 12월 15일, 용현동에 원사를 신축하여 해성보육원의 분원을 설치하였다. 초창기에는 남아들만 수용하였고 이곳에서 재배한 야채 등을 답동 보육원의 부식으로 날라다 먹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외국인이었던 아델 원장수녀와 필로메나 수녀는 일본으로 피난하고 100명의 원아들은 송도로, 후에는 덕적도로도 피신을 하여 큰 화를 면했으나 시설 일부는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고 비품과 서류 등은 분실되었다. 전쟁이 종식된 후에는 미군들의 원조를 받아 재건에 힘썼다. 1952년 부터 정부 대행 구호단체로 등록되어 국가 보조를 받기 시작하였고 그래 9월에는 용현동 소재 농지 9,000여평을 자경농지로 인정받아 자체경작을 하게 되었다. 1964년에는 원사 7동을 짓고 이듬해 3동이 추가로 신축되어 모두 10동의 한국식 가옥이 마련되었다. 각 집에는 서로 나이가 다른아동 12명과 보모 1명으로 가족 단위를 구성함으로써 가정의 분위기를 느끼며 생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용현동 보육원 분원이 확장되면서 1966년 7월 11일에는 해성 보육원으로 부터 독립하여 [해성육아원]이라 칭하고 시설 인가를 받게 되었다. 1975년에는 답동에 남아 있던 영아원까지 용현동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감소되는 원아수로 인하여 1980년에는 육아원을 폐지하고 영아양육만을 하였고, 1984년 부터는 여기에 미혼모들을 수용, 그들의 출산과 산후조리를 도왔다. 1987년 부터는 '해성영아 일시 보호소'로 지정되어 인천지역에서 발생하는 기아, 미아, 요보호 아동들을 일정 기간 동안 보호, 양육하면서 상담 후에 귀가 또는 입양시키고 있다.

1983년 6월 30일에 장애인실, 치료실, 상담실, 미혼모실 등의 후생복지시설을 고루 갖춘 신축건물을 준공했는데 이 건물은 아동들의 신체발육, 정서안정, 건강관리를 위해 통풍과 채광에 역점을 두었다. 아동들의 압양의 경우 국내입양을 주로 권하고 있으며 이때는 입양아가 잘 적응하여 성장하도록 사후지도에 노력하고 있다. 1987년 4월에는 구건물 4동을 철거하고 공지정원을 조성함으로써 아름답고 훌륭한 환경과 현대식 건물을 갖추었다. 여기에서 수녀들은 요보호 아동의 보호양육사업, 국내 및 국외 입양사업, 미혼모 보호사업, 지체부자유아 및 정신박약아 보호양육사업 등 많은 사회사업 활동을 사랑과 봉사로써 수행하고 있다. 1991년 현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이곳에 지체부자유아 및 정신박약아들을 위한 보호, 양육과 치료, 탁아소 운영도 새로히 계획하고 있다.

1894. 8. 18 제물포에 수녀원 설립되고 고아들이 수녀원에서 보호받음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 회 100년사 164쪽)

제물포 고아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164쪽)

1894년 8월 18일 제물포에 수녀원이 세워지고 수녀들이 부임하게 되자 고아들을 보호하는 사도직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물포의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과 환자들을 보살피던 중 그해 가을에 길에 버려져 있던 네 살인 교우 여아와 12세된 여자 어린이를 수녀원에서 양육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제물포 고아원의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1894년 중에 이미 8명의 고아가 수녀원에서 보호받고 있었고 그후 1895년에 이르러서는 원아의 숫자가 15명에 이르게 되었다.

제물포 고아원은 1896년 8월 15일 별도의 건물을 낙성했다. 이 건물은 건평이 120평에 이르렀고 건물의 건축공사는 제물포 본당의 마라발 신부가 지휘 감독했다. 이 건물은 원아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활용되었으나 곧 수용의 한계에 부딪혀 1909년에는 다시 새로운 건물을 지어야 했다. 제물포 고아원도 남아와 여아들이 모두 수용되어 있었다. 또한 영아들을 위한 영아원도 별도로 운영되고 있었다.

1894. 해성보육원 설립 (나눔지 27호 6쪽) - 1984. 11. 15발행

해성보육원 (나눔지 27호 6쪽) - 1984. 11. 15발행

1894년 "바다의 별"이라는 의미를 지닌 해성 보육원은 1894년 샤르트르 수녀회의 3명의 벽안의 수녀가 제물포 답동성당에 전교차 왔다가 길에 버려진 불구 고아들을 성당으로 데려다 보살핌으로서 시작 되었다.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8:5)의 주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벽안의 수녀들은 고아들과 아픔을 같이하며 고아들의 대리자로써 어린양을 돌보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실천한다. 해성보육원 에서는 1984년 현재 가정파탄으로 버려진 0-6세 까지의 아이들 150여명이 수녀님들과 보모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고 있다.

1895. 약현성당 어린이 교육 (4쪽 가명학교)

가명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쪽)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보통학교. 약현성당에는 이미 1895년부터 약현서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실시해 왔으며 1901년에는 두세(Doucet)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에는 남자학교 건물을 새로이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학교라고 하였다. 이들 2개의 학교는 1909년 가명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는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27년 가명 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하여 폐교되었다.

1895. 약현성당 설립, 어린이들에게 초등교육 실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6쪽)

약현본당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76쪽)

서울 약현본당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학교와 유치원 사도직에 봉사하였다. 약현본당에서는 이미 1895년부터 약현서당을 세워 어린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해 왔으며 1901년에는 특히 여자 어린이의 교육에 관심을 가진 두세(Camille Doucet, 1853-1917)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학생은 30여명이었으며 2명의 한국인 수녀가 매일 아침 학교에 나와 교리, 경문, 바느질 등을 가르치고 본원으로 돌아갔다. 1906년에 남자 학교 건물을 새로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加明)학교라 하였다. 1909년에는 두 학교가 가명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초기부터 꾸준히 아이들을 가르쳐 오던 수녀들은 1911년 3월 20일 정식으로 분원이 설립되어 더욱 학교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약현분원은 서울 시내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설립된 수녀원의 분원이었다. 당시 두세 신부는 어려운 재정난 속에서도 두 학교를 공립학교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고 노력하며 교과목을 공립학교와 같게 하고 또 교육도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떨어지지 않게 운영하였다.

수녀들은 이렇게 정성껏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학교발전에 헌신하였다. 그후 비에모(Paul Villemot, 1869-1950) 신부가 1918년에 모든 면에 손색이 없도록 여학교를 개축하였고 이듬해인 1919년에는 남학교를 신축하였다. 그해 6월 15일 뮈텔 주교는 두 학교의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때까지도 남학교는 약명, 여학교는 가명으로 불리웠고 1922년도 재학생수는 남학교 250명, 여학교 220명이었다.

이 무렵 천주교회의 교육사업은 몇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우선 재정난으로 인한 운영의 난관이 있었고 또 1915년에 개정된 [사립학교규칙]에서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을 금하였으므로 학교 창설자의 목적과 의의가 위협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10년간의 유예기간이 있었으므로 그 기간을 최대한 이용하였고, 그 이후에 교리교육을 방과후에 실시하는 방법을 마련하였다. 또 한가지 문제는 1924년부터는 모든 교사들에게 교원자격증이 엄격히 요구될 것이었으므로 인적·물적자원의 결핍상태에서 어렵게 운영되고 있는 본당학교들이 현상유지나 될지 불안한 점이었다. 이런 문제들이 당시 천주교 학교 전체가 겪는 어려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계성보통학교는 1924년에 6년제 지정보통학교 인가를 받았고 이어 약명·가명 양교 역시 1924년에 지정보통학교 인가를 위한 교섭을 시작했다.

이듬해에 양교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명보통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어 학업을 마친 학생들에게 공립상급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졸업장을 줄 수 있게 되었다. 1926년도부터는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여자부가 좋은 성적을 내게 되어 이로 인해 입학지원자가 초과되어 교사를 증축해야 했다. 당시 가명학교는 재학생이 약600명의 큰 학교로 발전되어 있었으며 증축공사는 1928년 6월 10일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1930년에는 4,000원의 공사비를 들여 여자부 교사를 증축하기 위해 임시로 봉래정 전 남대문상업학교 교사로 옮겨가 수업을 하였다. 증축공사 준공 후에는 학예회를 열어 일반 학부형들에게 기쁨을 주었으며 이후 해마다 개최하는 학예회 및 전람회는 일반의 호평을 받았다. 가명학교의 발전과 함께 한 수녀들의 헌신은 이후 일제말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으나 한국전쟁 후 1954년부터는 성가회 수녀들이 약현본당에 오게되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철수하였다.

1896. 10. 1 황해도 매화동본당은 공소에서 승격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0쪽)

매화동본당 怟花洞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970쪽)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전신은 마렴 공소였다. 이 마렴 공소가 1896년 8월에 본당으로 승격되어 황해도에서 첫번째 본당이 되었다. 다음 해에 매화동으로 이전하였고 2대 본당신부인 우도(Paul Oudot, 1865-1913) 신부의 초청으로 1909년 10월 1일 박 뱅상 수녀와 배 베로니카 수녀가 파견되어 분원이 개설되었는데 이들은 황해도에 파견된 최초의 수녀들이었다. 수녀들은 본당의 여학교 운영을 맡아 여학생들의 신앙생활이나 교과과정을 지도함에 있어서 그곳의 신도와 주민들에게 완전한 만족감을 주었다. 특히 여학교에서는 1912년부터 우도신부의 장려로 양잠강습소를 개설하여 양잠기술을 널리 보급하여 주민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본당신부가 소집되어 본국으로 돌아가자 수녀들도 본원으로 귀원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동안 학교는 신자들의 자치에 맡겨졌었다. 수녀들의 재파견은 1919년 10월 샤보(Jules Chabot, 1886-1953) 신부의 귀임에 따라 이루어졌다. 1925년에는 수녀들에 의해서 본당의 가톨릭 여자 청년회가 창설되었고 1926년에는 유치원과 시약소가 개설되었는데 교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해 오던 수녀원은 1934년에 강양자 마리레지스 수녀가 새로 파견되어 옴으로써 4명으로 인원이 보강되었다.

해방 후에는 북한 인민정권의 방침에 의해 수녀들은 학교를 사임하고 본당일만 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어왔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5일에는 수백명의 좌익 폭도들이 매화동을 습격하여 많은 주민들과 수녀들을 학살하였다. 이때 김정자 수녀와 김정숙 수녀는 그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강양자 수녀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11월 2일에 죽은 두 수녀를 성당 뒷산에 안장하고 나서 무사히 월남하여 매화동에서 겪은 동산 치하의 생생한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황해도에서 제일 먼저 설립되었던 매화동분원은 북한에 있던 분원 중 가장 늦게까지 수녀들이 남았었던 분원이기도 하였다.

매화동에서 수녀들이 봉사했던 봉삼학교와 봉삼유치원, 그리고 소화시약소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도신부는 1898-1899년 사이에 종교교육과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안악지방에서는 이 봉삼학교를 안악지방 최고(最古)의 사학(私學)이라 일컬었다. 1899년에 학생수가 45명이던 남자부에서는 교리공부와 한문을 가르쳤으며 남자부에 이어 별도로 시작한 여자부에서는 기도문 이와에 한글과 가사도 가르쳤다. 초창기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1907년에 근대 초등교육기관으로 정식 설립되었고 2년 후에는 사립학교 인가를 받은 후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의 지도를 맡겼다. 매화동에 파견된 박 뱅상 수녀와 배 베로니카 수녀는 여학생들의 신앙생활과 가사 등과 같은 교과과정을 지도하였는데 1919년 당시 4년제 보통학교 과정이던 봉삼학교의 여자부 교과과정을 보면 1학년에서 영세문답, 고해문답, 성체문답을 배우고 첫 영성체를 한 후 견진문답과 조만과를 배웠으며 학과는 기초를 공부하였다. 2학년 때부터 조선어, 산술, 수신(修身) 등의 과목을 배웠는데 주로 김정자 수녀가 가르쳤다. 처음에는 방 2개, 부엌 1개의 초가집에서 따로 공부하였으나 1923년부터는 남녀공학이 되어 함께 공부하였다. 5대 신인균(申麟均 요셉) 신부가 재임하던 1934년에는 학생수가 500명으로 증가하고 6년제 학교가 됨에 따라 교실을 증축하고 보통학교(사립봉삼보통학교) 인가를 신청했으나 후임 신부인 이선용(李善用 바오로, 1897-1953) 신부가 학교유지 문제를 우려하여 인가신청을 철회하는 바람에 사립봉삼학교로만 존속하다가 해방 후 공산치하가 되면서 인민학교로 흡수되어 버렸다. 수녀들은 분원이 생긴 이래 공산당에게 화를 당하기까지 줄곧 봉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봉삼유치원에서도 매화동본당의 4대 주임신부인 퀴클리에(Leon 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가 1926년에 성당 근처의 집 한 채를 매입하고 봉삼유치원을 개원하여 김정숙 수녀가 담당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편 시약소는 본당에서 운영하는 유일한 자선 의료기관이었는데 평일에는 환자들에게 시약만 하였고 의사들에 의한 진료는 주일에만 있었다. 이곳에서 봉사한 의사는 하(河) 의사와 표(表) 의사였고 박 뱅상 수녀와 강양자 수녀가 간호를 담당하였다. 수녀들은 위의 유치원과 시약소 사도직을 봉삼학교와 함께 공산당에게 화를 입기까지 성실히 계속해 나갔다.

1896. 평양교구의 관후리 본당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관후리 본당 囥後里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67쪽)

평양 관후리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성모보통학교와 양로원, 그리고 무료숙박소에서 그들의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1896년 르장드르(Louis Le Gendre, 崔昌根, 1866-1928) 신부는 평양 외성(外城)에 평안도 지방의 첫 본당인 평양본당을 세웠고 다시 1898년 5월 9일에 평양시내 중심인 장대현(將台峴)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그후 2대 본당신부인 르메르(Louis Le Merre, 1858-1928) 신부는 1909년 봄, 사제피정 후 스타니슬라 원장수녀에게 학교교사로서 일할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미 1905년에 평양 관후리본당 내에 남자교육기관인 기명학교를 설립한 바 있는 르메르 신부는 이듬해 5월 1일에는 여학생들을 위한 성모여학교를 세웠고 이들을 위한 교사로서 수녀들이 적임자라 생각하였으므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르메르 신부는 수녀들의 숙소 마련과 매월 생활비 6원씩과 연료와 채소, 여비 그리고 의복비 등을 본당에서 부담하기로 수녀원 측과 결정을 보았다. 이에 따라 가밀 원장수녀는 지방으로의 첫 파견을 결정하였고 1909년 9월 14일에 수녀 둘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쌘쟝 수녀와 김 세리나 수녀로서 이들이 평양에 도착함으로써 평안도에서는 최초로 수녀들의 전교와 교육활동이 시작되었다. 수녀들을 찾는 아동들과 부모들의 수가 나날이 늘어나게 되어 수녀들은 학교에서 교사의 직책을 맡아 볼 뿐 아니라 학부모들의 온갖 일에 상담역까지 보게 되어 교육 뿐만 아니라 전교사업에도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1929년 3월 15일, 기명·성모의 양교가 병합되어 6년제 지정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아 성모보통학교로 승격 개칭되었고 이후 성모학교는 평양교육계에서 명문으로 알려져 입학지원자가 늘어나게 됨에 따라 1936년 10월에는 본당 주임 크노르(Joseph W. Connors, 權) 신부의 노력으로 상수구리(上水口里)에 세워진 3층 철근 콘크리이트 최신식 건물의 긴축교사 낙성식과 함께 신교사로 학교 전부를 이전하였다. 이 건물은 공사비 75,000원의 거액을 투자하여 연건평 533평에 스팀시설과 실내수도, 수세식 화장실, 전기시설 등을 구비하였으며 교실 12, 교무실 1, 실험실습실을 갖추었다. 성당 경내에 있는 구 교사는 수리를 거쳐 성모학원, 성모유치원, 주일학교, 신자집회소 등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이후 성모보통학교는 시설면에서나 교육 내용면에 있어서 명실공히 평양굴지의 명문교로 발전하였다.

1940년 6월 27일 한국 최초의 방인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가 창립된 지 8년만에 첫서원식을 가져 11명의 수녀를 배출하고 그해 7월 관후리본당에 분원을 설치하게 됨에 따라 30여년간 교육사업과 전교 및 자선사업을 맡아오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모든 소임을 성모회의 수녀들에게 인계하고 그해 7월 30일 본원으로 복귀하였다.

1934년 1월 본당주임 크노르 신부는 성당 내에 있던 성모학교 구 교사 중 한 건물을 정식 양로원사로 정하고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을 모았다. 재정은 본당신부가 맡고 수녀들은 이들을 정성껏 돌보아 오던 중 분원철수에 따라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에서 인수하여 1949년까지 운영하였다. 양로원과 함께 설치되어 무의무탁한 걸인과 고아 등 15명을 수용하고 수녀들이 돌보았는데 후에 양로원에 흡수되었다.

1899. 모성학교의 전신인 한문서당 개설 (394쪽 모성학교)

모성학교 慕聖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94쪽)

황해도 재령 본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초등교육기관. 재령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르각(Le Gac) 신부는 선교의 전 단계로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899년 한문서당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모성학교의 전신이었다. 그후 2대주임 멜리장(Melizan)신부가 부임하면서 개신교의 교세가 급격히 신장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신식학교의 설립, 운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그 때까지 운영해 오던 한문서당을 개화된 신식학교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1909년 멜리장 신부는 초등학교 인가를 받아 교명을 모성학교로 하였다. 모성학교는 그 후 10여년간 운영되다가 재정난에 부딪혀 1918년 자진 폐교하였다.

1900. 9. 1 인천항사립박문소학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60쪽)

답동본당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60쪽)

인천 답동본당은 1897년에 건물이 완성되었으나 점차로 신자들이 증가하자 드뇌(Eugene Deneux, 全學俊, 1873-1947) 신부는 1933년, 성당의 신축공사에 착수, 1937년 6월 30일에 현재 모습의 성당을 건립하였다. 1982년 8월 9일에 답동성당은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 본당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첫 파견된 이래 본당 신부를 도와 전교는 물론 불우한 이웃들과 환자돌보기, 해성보육원 창설에 따른 고아들의 양육, 보호에 전력하였고 본당 내에 병원, 학교, 유치원이 설립됨에 따라 다양한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70년대에 인천교구청 기구확장에 따라서 교구사목국, 교육국, 성서후원회에서도 봉사하게 되어 인천교구 사목의 활성화에 협조를 하고 있다. 현재 11명의 수녀들이 함께 모여사는 답동분원은 각기 맡은 소임의 다양함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한 공동체로 생활하고 있다.

해성병원 - 1894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이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후 환자들에 대한 진료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그 것이 해성병원의 시초이다. 1935년 10월 14일, 아일랜드인 필로메나(Philomena Ralph) 수녀가 내한하여 보육원 아동들과 일반 환자를 위해 부속병원을 본격적으로 확장 개설하였고 1938년 10월 15일에 드뇌 신부는 사재(私財)를 들여 부속병원용 건물 3층을 현대식으로 신축하였다. 이 건물에는 16개의 방이 있었으나 주로 보육원 아동들을 위한 시설이라 입원시설은 없고 진찰과 시약만 하였다.

그 후 1961년 10월 30일에는 해성병원의 시설을 인가받았고 1970년 5월 30일에는 병원의 원사 1층을 대폭 수리, 이전하여 병원시설을 보완하였다. 1975년 인천의 답동에 있던 해성보육원은 1948년 용현동에 분원을 마련한 이후 영아원까지 모두 용현동으로 이전하자 아기들의 치료를 위해 1주일에 2∼3번씩 답동에서 왕진을 다녀야 했다. 또 급하면 가까운 의원으로 아기를 데리고 나가야 하는 불편 등으로 인하여 1984년 4월 28일에 해성병원은 인천의 해성보육원으로 이전하였다. 1991년 현재 1985년 11월에 이전해온 원주 바오로 병원과 통합되어 홍순자 아드리아나 의사수녀 외에 2명의 수녀들이 보육원 아기들과 인근 주민들의 진료에 힘쓰면서 의료사도직을 통한 복음전파에 노력하고 있다. 해성병원은 초기에는 서울보다도 훨씬 활발한 의료활동을 전개했었다. 그러나 이 병원은 본디부터 보육원 원아들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수녀회 에서는 수녀들을 기타 다른 의료기관으로 많이 파견한 이유 등으로 인해 해성병원은 보육원 부속병원으로서만 계속 작은 규모로 유지되어오고 있다.

박문유치원 -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드뇌 신부에 의해 1937년 3월 1일에 설립된 박문유치원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인천에서 우수한 유치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한동안 휴원하기도 했으나 1957년에 2학급으로 증설되면서 시설도 과학교육에 입각한 교구를 점차로 구비하고 강당, 보육실, 자료실, 양호실, 소꼽방, 실내·외 유구장, 풀장 등 다양한 설비를 갖추었다. 또한 위치도 답동성당 구내인데다가 이웃에 국민학교와 수녀원 등이 있어 좋은 교육환경을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 4,64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박문유치원은 학습발표, 리듬악기 발표, 연극발표회 등 다양한 발표회와 전인교육을 통해 매해 150명의 원아들을 교육하고 있다.

박문국민학교 - 1899년 인천 답동에 수녀원이 설치되면서부터 수녀들은 꾸준히 보육원 원아들과 신자들의 자녀 및 무산아동(無産兒童)들을 모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기관이 발전하여 1900년 9월 1일에 인천항사립박문소학교가 설립되었다. 그후 드뇌 신부는 1914년에 급증하는 아동들을 수용하기 위해 인천사립박문소학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6월, 남자부 교사 6학급을 다시 신축하여 1917년 4월 1일에는 이 2개교를 합병하여 인천박문학교로 개칭하였다. 수녀들은 박문학교 여자부를 운영하면서 특히 매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갖고 교리, 성서, 역사, 복음 등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 당시 수녀들의 학교는 제물포에 있는 학교들 중에서 가장 좋은 학교로 평가받고 있었다.

1925년 11월 27일에는 1922년에 개정된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인천사립박문보통학교로 6년제 정식인가를 받았다. 그후 1938년 4월 1일에는 개정교육령에 의해 인천박문심상소학교로, 1941년에는 다시 인천박문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6월 3일에는 건물 소개령으로 인해 남자부 교사를 헐게 되어 공립국민학교로 편입시켰으며 여자부 교사만이 남게 되었다. 당시 교사수녀들은 매일 아침 신사참배를 위해 학생들을 인솔하고 신사에 다녀와야 했으며, 남자부교사가 소개된 후에도 여자부를 위해 끝까지 헌신하면서 학교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1958년, 제 3대 교장으로 박영숙 데오판 수녀가 취임하면서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을 위임받았고 제 4대 교장인 이밀마 데레사 수녀 때 남녀 병설 12학급으로 인가받으면서 안정된 환경속에서 계속적인 발전을 해나갔다. 1961년부터 다시 인천교구에서 학교운영을 맡게 되자 수녀들은 계속 머무르며 교사 혹은 서무로서 일하였다. 그러다가 1977년 3월 2일에 제 10대 교장으로 이종후 빌뚜데스 수녀가 취임하여 제 3대, 제 4대의 수녀교장 이후 약 15년만에 다시 수녀가 학교운영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해 6월에 도서실을 개설하였고 1981년 11월에는 12개 교실을 증축하여 학교시설을 확장하였다. 이듬해에는 교내방송국을 개설하였으며 1984년 12월에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명문사학으로서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학부형들의 참여와 활동또한 대단하여 인천시내학교 어머니 글짓기 대회, 어머니 합창대회, 어머니 배구대회 등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하였다.

1988년 2월 최루시아 임마꿀레 수녀가 제11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현재는 교육시설을 완비하고 특별히 예능교육, 정보처리기능교육, 조기영어교육 등을 실시하면서 기초학력을 신장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또 매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담임교사들이 직접 맡고 있어 신앙생활과 실행활과의 연결 및 품성교육을 겸하고 있으며,천주교회 학교의 특성을 잘 살려 나가고 있다. 1989년말 현재 교장수녀와 함께 교사수녀 1명, 일반교사 18명, 직원 9명 등이 972명의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가톨릭 회관 - 1973년 3월 1일 인천 가톨릭회관이 준공되고 1975년 3월 31일부터 이명자 마리안나 수녀가 부임하여 교구의 전반적인 사목을 돕다가 1980년부터는 회관 내에있는 각 국이 분리 운영되어 사목국, 교육국, 성소후원회에 각각 담당수녀가 파견되어 교구사목을 돕고 있다.

〈사회복지부〉- 1985년 11월 10일에 류병순 마리 도미니카 수녀는 답동분원에서 자체적인 사회복지활동을 전개, 주로 청소년 근로자를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고 그후 1987년 3월 2일 이춘근 시몬 스독 수녀가 교구 사회복지부에서 개설하여 답동분원으로 이관한 해성어머니 한글교실을 담당하면서 답동분원의 사회복지 활동은 본격화 되었다. 해성어머니 교실은 문맹인 주부들에게 글을 가르쳐 가정 및 신앙생활의 향상을 돕기 위해 마련陖는데 종교와는 관계없이 25세 이상의 주부들을 대상으로 2년의 기간동안 한글교육과 산수, 일반 교양강좌를 실시하고 있으며 매일 평균 100명 정도의 주부들이 참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위한 교리반도 운영하여 문맹으로 인해 각 본당에서 교리를 배우지 못했던 영세자 및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1900. 인천 사립 박문소 학교 설립 (현 가톨릭회관 자리) (270쪽 답동본당)

답동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70쪽)

인천직할시 중심부에 자리잡고있는 답동본당은 1889년에 설립되었다.

초대 빌렘(J. Wilhelm) 신부가 부임하여 지금의 본당자리에 부지 3,212평을 마련하여 성당건립 정초식을 가졌다. 그 후 제5대 드뇌(E. Deneux) 신부가 고아원과 그밖에 수녀원 건물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인천시립박문소 학교를 건립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초급과정의 교육을 가르쳤다.

1900. 돈의학교 개교 (305쪽 돈의학교)

돈의학교 敦義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5쪽)

평양교구 진남포본당이 운영하던 초등교육 기관으로 1900년에 설립되었다. 초대교장 이평택(파트라치오) 을 중심으로 착실하게 성장한 돈의학교는 설립 몇해 만에 평안도에서 손꼽히는 사립학교로 부상하였다. 2대 교장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을 맞아 더욱 충실하게 성장하였으며 민족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전통있는 학교가 되었다. 1908년 교사를 증축하여 300여명을 교육시키는 커다란 학교로 발전하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일어나고 이에 따라 본당주임 르레드(Jules Lereide, 申) 신부가 본국으로 소환되어 가면서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916년 폐교하였다.

1901. 1 안법학교 설립 (775쪽 안성본당)

안성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75쪽)

주보로 '착한 의견의 모친'을 모시고 있는 이 본당은 1901년 아산 공세리 본당에서 분할되어 창설되었다.

초대신부인 공베르(A. Gombert) 신부는 통진군수를 지낸 백 씨의 집을 사서 임시성당으로 살았다. 그는 1901년 1월 안법학교를 설립하고 운영비를 자비로 댔다. 1912년에는 안법학교 여자부를 신설하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 2명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1901. 왕림본당 내 후에 광성국민학교로 발전한 삼덕학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2쪽)

왕림본당 旺林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1002쪽)

'갓등이'라 불리우던 왕림본당은 경기도 와성군 봉담면 왕림리에 있는 유서 깊은 성당으로 1893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Laurent Imbert, 1796-1839) 주교가 은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1888년 7월, 앙드레(Jacques Andre, 1861-1890)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 한강 이남 경기도에서 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1901년에는 웅장한 기와집 성당을 신축하였고 그 뒤에 삼덕학교(三德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광성국민학교로 발전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57년간 왕림본당에서 일했으며 1981년 지역적인 여건으로 광성국민학교가 폐교되고 그 자리에 한국에서의 제4 신학교인 수원 가톨릭대학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오랜 역사를 지니며 많은 수녀들이 사도직을 수행해 왔던 왕림본당은 1984년 1월 19일에 철수되었다.

1901. 두세(Doucet)신부가 여학교 설립 (4쪽 가명학교)

가명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쪽)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보통학교. 약현성당에는 이미 1895년부터 약현서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실시해 왔으며 1901년에는 두세(Doucet)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에는 남자학교 건물을 새로이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학교라고 하였다. 이들 2개의 학교는 1909년 가명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는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27년 가명 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하여 폐교되었다.

1902. 5 공소에서 은율 본당으로 승격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9쪽)

은율본당 殷栗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79쪽)

1887년, 로(Jean Rault, 1860-1902) 신부가 황해도의 고정 선교사로 임명되어 은율에서 40리 상거한 장련(長連)에 정착하여 전교하면서 은율에 처음 공소를 개설한 이래, 1902년 5월에 공소로부터 본당으로 승격된 황해도 은율본당 관내에서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물론 유치원마저도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아쉬움을 느껴왔다. 그러다가 이보환(李1褓煥 요셉, 1893-1944) 신부가 부임한 후 유치원부터 설립하기로 중론이 모아져 300원의 기금으로 1923년에 성모유치원(후에 해성유치원, 은율유치원으로 개명)을 개원하였다. 첫해에 원아수는 54명에 달하였고, 유자격 교사 2명이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한편 1929년 4월 8일, 은율본당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1895-1950 행불) 신부는 가정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해성야학원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개설하자 8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 해성학원과 앞의 유치원을 위해 1931년 8월 18일 은율분원이 신설되어 이화 우술라 수녀와 김 발렌티나 수녀, 그리고 송 에밀리아 수녀 등 3명의 수녀가 파견되었다. 수녀들은 학원 학생들 뿐만 아니라 유치원 원아들에게도 교리와 유희, 노래 등을 열심히 가르치고 전교도 하게되자 세인의 평판도 좋아지고 학교와 유치원이 크게 발전하였다.

1936년에는 본당유지의 기증으로 2층 연와조 양관(洋館)을 건축, 1층을 유치원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평양 대신리본당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1905-1982) 신부는 축성식에 참석했다가 시설이 미비한 것을 보고 돌아가 미끄럼틀과 그네 등을 평양에서 제작하여 기증했다. 그리고 성모 유치원의 명칭도 은율유치원으로 바꾸었다. 8·15해방 후 북한지역의 공산화로 인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철수하였다.

1904. 5대 드뇌 신부가 고아원을 위해 해성보육원 건물 확장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을 신축함 (270쪽 답동본당)

답동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70쪽)

인천직할시 중심부에 자리잡고있는 답동본당은 1889년에 설립되었다.

초대 빌렘(J. Wilhelm) 신부가 부임하여 지금의 본당자리에 부지 3,212평을 마련하여 성당건립 정초식을 가졌다. 그 후 제5대 드뇌(E. Deneux) 신부가 고아원과 그밖에 수녀원 건물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인천시립박문소 학교를 건립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초급과정의 교육을 가르쳤다.

1905. 9. 1 관후리 본당내에 기명학교를 설립 (624쪽 성모보통학교)

1906. 5. 1 성모여학교 설립 (624쪽 성모보통학교)

성모보통학교 聖母普通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24쪽)

기명학교와 성모여학교의 후신(後身). 1898년에 평양의 제 2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르 메르(Le Merre) 신부는 평안도 전지역을 관장하면서 포교에 전념하는 한편, 교육사업에도 눈을 돌려, 1905년 9월 1일 관후리 천주교회 안에 남자 교육기관인 기명학교를 설립하고 1906년 5월 1일에는 여성에게도 신학문(新學問)을 배울 기회를 주기 위하여 성모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에 20평과 10평 규모의 교실 2개를 가지고 유아반과 소학교반으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사방에서 아동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들었으므로 다시 교실을 새로 증축하여 여학교를 따로 신설한 것이다. 이에 여학생을 담당케 하기 위해 서울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의 수녀들을 교사로 초빙하여 학생지도와 포교사업에 봉사케 하니 학생수는 날로 늘어나고 전교사업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27년 평양교구가 설립되면서 1929년 3월 15일에 기명과 성모의 두 학교를 병합하여 성모보통학교로 승격 개칭하게 되었고, 1936년 10월에는 상수구리(上水口里)에 3층 철근 콘크리크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였는데, 성모보통학교는 날로 발전하여 명실공히 평양 굴지의 명문학교가 되었다. 이에는 30여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한 성 바오로회 수녀들의 공이 컸다. 그들은 1940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 사업을 인계하고 서울 본원으로 돌아갔다. 1945년 광복후 공산당 치하에서 몰수당하여 폐쇄되었다.

1906. 약명(藥明)학교 남학교 설립 (4쪽 가명학교)

가명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쪽)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보통학교. 약현성당에는 이미 1895년부터 약현서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실시해 왔으며 1901년에는 두세(Doucet)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에는 남자학교 건물을 새로이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학교라고 하였다. 이들 2개의 학교는 1909년 가명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는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27년 가명 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하여 폐교되었다.

1907. 9 소의학교라는 교명으로 외교인이 설립한 초등교육기관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동성중고등학교 東星中高等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제단법인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중등교육 기관. 학교내에 을조(乙組) 를 편성하여 신학교의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을조의 경우 남대문 상업학교의 교육과정을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받고 방과 후 신학원에서 신학교육에 필요한 라틴어와 교리및 지도신부의 영성을 받았다. 1968년 5월 김수환 추기경이 이사장으로 취임되어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마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7. 장호원 본당내 소규모 학교를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5쪽)

장호원본당 長湖院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855쪽)

장호원본당의 초대 신부였던 부이용(Camille Bouillon, 1869-1947) 신부는 한때 민비가 피신해 있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이 의병과 일본인들과의 격전으로 거의 불타 버리자 남은 집을 헐값에 매입, 1896년 12월 5일에 한국식 건물로 임시성당을 지었는데 당시 교우수는 5∼6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년후인 1897년에는 46명의 영세자와 관할 공소가 27개나 되는 본당으로 커지자 1903년 새 성당을 신축했고 1907년부터는 소규모로 학교를 설립하여 남학생들을 모집했고 곧이어 여학생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여학교 설립에 따른 교사의 필요성과 사목보조자로서의 필요성을 절감한 부이용 신부는 오래 전부터 수녀 파견을 요청한 결과 1912년 10월 3일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이 안나 수녀와 전(?) 수녀가 파견되었다.

수녀들은 본당과 학교의 소임을 겸하여 열심히 활동하였다. 1914년 성체성혈대축일에 지방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체거동을 하면서 수녀들은 소녀 복사단을 만들어 흰옷에 푸른색 띠를 두르게 하고 꽃을 뿌리게 했는데 그때의 모든 행사 절차가 지금까지도 그대로 존속되어 오고 있으며, 그때 당시의 성가대도 수녀가 지도하였다.

이처럼 본당과 학교에서 수녀들은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으나 본당에서 도저히 수녀들의 생활비를 지출할 수 없게 되자 1932년 8월에 철수하였다. 그러다가 1944년 6월 20일 당시 대동아 전쟁의 막바지에 외국인 사제들이 모두 감금당하자 한국인 유영근(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일본인들이 강탈하려는 사제관을 지키는 한편 수녀들의 손이 필요한 곳이 많음을 보고 다시 초청하였다.

지금까지 77년에 걸쳐 모두 80명의 수녀들이 거쳐간 이곳 장호원본당은 현재 교장수녀를 포함하여 학교수녀 6명, 본당수녀 2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본당수녀들은 학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청년지도, 예비자교리와 가정방문 등 전교에 힘쓰고 있다. 그런데, 행정구역상 장호원이 경기도와 충청북도로 나뉘어져 경기도에서는 장호원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지니게 되었고 충청북도에서는 음성군 감곡면이 되어 현재는 감곡본당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1907. 봉삼학교는 근대초등교육기관으로 정식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0쪽)

매화동본당 怟花洞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970쪽)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전신은 마렴 공소였다. 이 마렴 공소가 1896년 8월에 본당으로 승격되어 황해도에서 첫번째 본당이 되었다. 다음 해에 매화동으로 이전하였고 2대 본당신부인 우도(Paul Oudot, 1865-1913) 신부의 초청으로 1909년 10월 1일 박 뱅상 수녀와 배 베로니카 수녀가 파견되어 분원이 개설되었는데 이들은 황해도에 파견된 최초의 수녀들이었다. 수녀들은 본당의 여학교 운영을 맡아 여학생들의 신앙생활이나 교과과정을 지도함에 있어서 그곳의 신도와 주민들에게 완전한 만족감을 주었다. 특히 여학교에서는 1912년부터 우도신부의 장려로 양잠강습소를 개설하여 양잠기술을 널리 보급하여 주민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본당신부가 소집되어 본국으로 돌아가자 수녀들도 본원으로 귀원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동안 학교는 신자들의 자치에 맡겨졌었다. 수녀들의 재파견은 1919년 10월 샤보(Jules Chabot, 1886-1953) 신부의 귀임에 따라 이루어졌다. 1925년에는 수녀들에 의해서 본당의 가톨릭 여자 청년회가 창설되었고 1926년에는 유치원과 시약소가 개설되었는데 교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해 오던 수녀원은 1934년에 강양자 마리레지스 수녀가 새로 파견되어 옴으로써 4명으로 인원이 보강되었다.

해방 후에는 북한 인민정권의 방침에 의해 수녀들은 학교를 사임하고 본당일만 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어왔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5일에는 수백명의 좌익 폭도들이 매화동을 습격하여 많은 주민들과 수녀들을 학살하였다. 이때 김정자 수녀와 김정숙 수녀는 그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강양자 수녀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11월 2일에 죽은 두 수녀를 성당 뒷산에 안장하고 나서 무사히 월남하여 매화동에서 겪은 동산 치하의 생생한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황해도에서 제일 먼저 설립되었던 매화동분원은 북한에 있던 분원 중 가장 늦게까지 수녀들이 남았었던 분원이기도 하였다.

매화동에서 수녀들이 봉사했던 봉삼학교와 봉삼유치원, 그리고 소화시약소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도신부는 1898-1899년 사이에 종교교육과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안악지방에서는 이 봉삼학교를 안악지방 최고(最古)의 사학(私學)이라 일컬었다. 1899년에 학생수가 45명이던 남자부에서는 교리공부와 한문을 가르쳤으며 남자부에 이어 별도로 시작한 여자부에서는 기도문 이와에 한글과 가사도 가르쳤다. 초창기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1907년에 근대 초등교육기관으로 정식 설립되었고 2년 후에는 사립학교 인가를 받은 후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의 지도를 맡겼다. 매화동에 파견된 박 뱅상 수녀와 배 베로니카 수녀는 여학생들의 신앙생활과 가사 등과 같은 교과과정을 지도하였는데 1919년 당시 4년제 보통학교 과정이던 봉삼학교의 여자부 교과과정을 보면 1학년에서 영세문답, 고해문답, 성체문답을 배우고 첫 영성체를 한 후 견진문답과 조만과를 배웠으며 학과는 기초를 공부하였다. 2학년 때부터 조선어, 산술, 수신(修身) 등의 과목을 배웠는데 주로 김정자 수녀가 가르쳤다. 처음에는 방 2개, 부엌 1개의 초가집에서 따로 공부하였으나 1923년부터는 남녀공학이 되어 함께 공부하였다. 5대 신인균(申麟均 요셉) 신부가 재임하던 1934년에는 학생수가 500명으로 증가하고 6년제 학교가 됨에 따라 교실을 증축하고 보통학교(사립봉삼보통학교) 인가를 신청했으나 후임 신부인 이선용(李善用 바오로, 1897-1953) 신부가 학교유지 문제를 우려하여 인가신청을 철회하는 바람에 사립봉삼학교로만 존속하다가 해방 후 공산치하가 되면서 인민학교로 흡수되어 버렸다. 수녀들은 분원이 생긴 이래 공산당에게 화를 당하기까지 줄곧 봉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봉삼유치원에서도 매화동본당의 4대 주임신부인 퀴클리에(Leon 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가 1926년에 성당 근처의 집 한 채를 매입하고 봉삼유치원을 개원하여 김정숙 수녀가 담당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편 시약소는 본당에서 운영하는 유일한 자선 의료기관이었는데 평일에는 환자들에게 시약만 하였고 의사들에 의한 진료는 주일에만 있었다. 이곳에서 봉사한 의사는 하(河) 의사와 표(表) 의사였고 박 뱅상 수녀와 강양자 수녀가 간호를 담당하였다. 수녀들은 위의 유치원과 시약소 사도직을 봉삼학교와 함께 공산당에게 화를 입기까지 성실히 계속해 나갔다.

1908. 3 매괴학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7쪽)

매괴국민학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57쪽)

장호원의 초대신부인 부이용 신부는 1907년 민응식의 집 행랑채를 이용하여 매괴학당을 설립하고 남학생을 모아 가르쳤는데 교재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유년필독(幼年必讀)을 사용, 통감부의 일본인 관리들로부터 금서를 가르친다 하여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수가 점점 증가하여 60명에 달함으로 교사가 비좁아지자 1908년 3월에 학교를 크게 세워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는 발전을 보였고 이어 여학교도 설립하였는데 수녀들의 필요성을 절감한 부이용 신부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교는 1912년 10월 7일 매괴축일에 개교하였다. 여학교는 수녀들의 헌신으로 외교인들에게까지 좋은 인상을 주어 딸을 가진 부모들이 공립보다는 매괴학교로 보내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부족, 부모들의 몰이해, 유능한 교사부족 등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다. 결국 보통학교와 공립학교로 전학해 버리는 학생들이 점차로 늘어가게 됨에 따라 6년제였던 매괴학교는 부득이 4년제만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2년에 6년제로 다시 복귀한 후 1936년에는 공식학교 인가를 받고 3층 교사를 증축하여 교명을 매괴심상소학교(怘塊尋常小學校)라 하고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함으로써 1939년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일본인들이 이 학교를 빼앗아 공립화하고 교명을 욱산(旭山)으로 바꾸어 운영하였는데 1945년 해방을 맞아 다시 찾게 되었다. 그후 매괴학교는 1953년 매괴상업고등학교로 승격되었고 1966년에는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확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국민학교는 운영난이 심화되고 교육전망의 분석 결과 그 전망이 밝지 못하여 1972년 2월 28일자로 폐교하였다.

1908. 명의학교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7쪽)

이천본당 伊川本堂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7쪽)

이천 본당은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개하리(江原道 伊川郡 伊川面 開下里)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천에 선교사가 정착한 것은 1892년,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인 노(Jean Rault, 1860. 11. 25 - 1902. 9. 13) 신부가 염산리(簾山里)에 정착하면서부터 였다. 초대 노 신부 당시 이천의 신자 수는 900여명이었다. 그 뒤에 강 레옹 뒤테르트르(Leon Dutertre, 姜 良, 1866. 1. 3 - 1904. 3. 11)가 선교하였고, 1896년 포내(浦內) 본당을 분할하였다. 포내 본당은 임시 폐쇄되었다가 1928년에 다시 이천본당에서 관할하였다. 1908년, 염산리에서 이천읍 내의 개하리로 본당을 이전하는 한편, 그 해에 '경천애국(敬天愛國)'을 교지로 한 명의(名義)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천본당은 산간벽지에 위치하고 있어 교구장의 방문이 없다가 1936년 11월 16일, 서울교구장 원 라리보 주교의 사목방문이 이루어져 200여명의 신자들이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1937년도에는 신자수가 1220명으로 증가되었다. 1939년 4월 25일 춘천 지목구가 설정됨에 따라 이천 본당은 이에 편입되었으며 해방 후 이천 본당은 공산 정권하에서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으나 근근이 선교는 계속할 수 있었다.

1948년 중순경 이천 본당의 김봉식 신부가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선교수녀를 청하였다. 김 신부는 김 요세파 수녀의 남동생으로 연길 대목구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해방 후 소련군의 진주로 인하여 남쪽으로 피신하였으며, 이천 본당 재임시 공산 정권의 반종교정책에 역행하여 전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1909. 9. 14 관후리 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관후리 본당 囥後里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67쪽)

평양 관후리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성모보통학교와 양로원, 그리고 무료숙박소에서 그들의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1896년 르장드르(Louis Le Gendre, 崔昌根, 1866-1928) 신부는 평양 외성(外城)에 평안도 지방의 첫 본당인 평양본당을 세웠고 다시 1898년 5월 9일에 평양시내 중심인 장대현(將台峴)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그후 2대 본당신부인 르메르(Louis Le Merre, 1858-1928) 신부는 1909년 봄, 사제피정 후 스타니슬라 원장수녀에게 학교교사로서 일할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미 1905년에 평양 관후리본당 내에 남자교육기관인 기명학교를 설립한 바 있는 르메르 신부는 이듬해 5월 1일에는 여학생들을 위한 성모여학교를 세웠고 이들을 위한 교사로서 수녀들이 적임자라 생각하였으므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르메르 신부는 수녀들의 숙소 마련과 매월 생활비 6원씩과 연료와 채소, 여비 그리고 의복비 등을 본당에서 부담하기로 수녀원 측과 결정을 보았다. 이에 따라 가밀 원장수녀는 지방으로의 첫 파견을 결정하였고 1909년 9월 14일에 수녀 둘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쌘쟝 수녀와 김 세리나 수녀로서 이들이 평양에 도착함으로써 평안도에서는 최초로 수녀들의 전교와 교육활동이 시작되었다. 수녀들을 찾는 아동들과 부모들의 수가 나날이 늘어나게 되어 수녀들은 학교에서 교사의 직책을 맡아 볼 뿐 아니라 학부모들의 온갖 일에 상담역까지 보게 되어 교육 뿐만 아니라 전교사업에도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1929년 3월 15일, 기명·성모의 양교가 병합되어 6년제 지정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아 성모보통학교로 승격 개칭되었고 이후 성모학교는 평양교육계에서 명문으로 알려져 입학지원자가 늘어나게 됨에 따라 1936년 10월에는 본당 주임 크노르(Joseph W. Connors, 權) 신부의 노력으로 상수구리(上水口里)에 세워진 3층 철근 콘크리이트 최신식 건물의 긴축교사 낙성식과 함께 신교사로 학교 전부를 이전하였다. 이 건물은 공사비 75,000원의 거액을 투자하여 연건평 533평에 스팀시설과 실내수도, 수세식 화장실, 전기시설 등을 구비하였으며 교실 12, 교무실 1, 실험실습실을 갖추었다. 성당 경내에 있는 구 교사는 수리를 거쳐 성모학원, 성모유치원, 주일학교, 신자집회소 등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이후 성모보통학교는 시설면에서나 교육 내용면에 있어서 명실공히 평양굴지의 명문교로 발전하였다.

1940년 6월 27일 한국 최초의 방인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가 창립된 지 8년만에 첫서원식을 가져 11명의 수녀를 배출하고 그해 7월 관후리본당에 분원을 설치하게 됨에 따라 30여년간 교육사업과 전교 및 자선사업을 맡아오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모든 소임을 성모회의 수녀들에게 인계하고 그해 7월 30일 본원으로 복귀하였다.

1934년 1월 본당주임 크노르 신부는 성당 내에 있던 성모학교 구 교사 중 한 건물을 정식 양로원사로 정하고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을 모았다. 재정은 본당신부가 맡고 수녀들은 이들을 정성껏 돌보아 오던 중 분원철수에 따라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에서 인수하여 1949년까지 운영하였다. 양로원과 함께 설치되어 무의무탁한 걸인과 고아 등 15명을 수용하고 수녀들이 돌보았는데 후에 양로원에 흡수되었다.

1909. 성 베네딕도 수도회 한국 진출 (교회와 역사 98호 7쪽) - 1988. 8. 25발행

베네딕도 수도회 (교회와 역사 98호 7쪽) - 1988. 8. 25발행

베네딕도 수도회는 수도회의 시조로 불리우는 베네딕도 성인이 서기 530년경 이탈리아의 몬테까시노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 효시이다. 회원들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정신을 받들어 그분이 사랑하셨던 것을 사랑하고 그분이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며 복음적 권고에 따를것을 서약함으로서 하느님과 일치할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베네딕도 성인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규칙서는 수도생활의 제도와 양식을 규정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수도회에서 지켜지고 있다.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한국에 처음 진출한 것은 1909년이었다. 조선교구장 뮈델 주교의 요청에 따라 이해 3월 사우에르신부 등 2명의 수사신부가 내한한데 이어 그 해 11월에는 수사 6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1911년 당국의 설립인가를 받아 최초의 사립 사범학교인 숭덕사범학교를 세우고 23명의 학생으로 개교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지원자의 부적으로 2년 뒤 폐교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수도회는 그후 1920년 8월 원산교구가 새로이 설정되자 이 교구를 맡아 함경남도와 간도를 포교지방으로 관할하게 되었다. 사우에르 신부가 초대주교로 취임하였으며 1927년에는 서울의 수도원을 함경남도 덕원으로 옮기는 한편 그 곳에 이상적인 신학교와 자선병원, 인쇄공장 등을 설치하여 전교, 의료, 교육, 출판사업 등에 있어 빛나는 업적을 남기었다.

1974년에는 분도출판사가 서울분원에 지사를 설치하여 동사 발행의 출판물 보급과 선전에 힘쓰고 있다. 그 후 1979년 부터는 분도회관 건물을 분원 및 신학원으로 사용하고 분원과 신학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성 베네딕도 피정의 집'으로 개칭하여 주로 신자들의 피정을 위해 사용토록 하고있다.

1909. 가명학교로 통합 (4쪽 가명학교)

가명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쪽)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보통학교. 약현성당에는 이미 1895년부터 약현서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실시해 왔으며 1901년에는 두세(Doucet)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에는 남자학교 건물을 새로이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학교라고 하였다. 이들 2개의 학교는 1909년 가명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는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27년 가명 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하여 폐교되었다.

1909. 신성학교 설립 (722쪽 신성학교)

신성학교 晨星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22쪽)

1909년 프랑스 선교사 라크루(Marcellus Lacrouts) 신부가 제주도에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으로 현재의 신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16년 일제의 우민화정책에 따라 탄압을 받고 무기휴교를 당했다가 1964년 신성여자중학원으로 재개교하였다. 1953년 고등학교를 병설하였고 1977년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800번지의 현 교사로 이전하였다.

1909. 모성학교는 초등학교 인가를 받아 교명을 모성학교라 함 (394쪽 모성학교)

모성학교 慕聖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94쪽)

황해도 재령 본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초등교육기관. 재령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르각(Le Gac) 신부는 선교의 전 단계로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899년 한문서당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모성학교의 전신이었다. 그후 2대주임 멜리장(Melizan)신부가 부임하면서 개신교의 교세가 급격히 신장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신식학교의 설립, 운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그 때까지 운영해 오던 한문서당을 개화된 신식학교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1909년 멜리장 신부는 초등학교 인가를 받아 교명을 모성학교로 하였다. 모성학교는 그 후 10여년간 운영되다가 재정난에 부딪혀 1918년 자진 폐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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