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연대별 기록3



3. 일제식민시기의 활동(1910∼1945)

1910. 9 마산 완월동 본당의 부속건물에서 성지여자중고등학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54쪽)

성지여자중고등학교 聖旨女子中高等學校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54쪽)

1910년 9월, 마산 완월동에 초대 주임으로 무세 신부가 부임하여 복음을 전파하면서 지방 교육사업과 민중계몽의 필요성을 통찰하고 빈민대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본당 부속건물에서 성지학원을 개설하였다. 무세 신부는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통치 아래 우리말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없는 시기에 외국인으로서, 또한 천주교 신부로서 우리 교육에 공헌한 바가 실로 크다 하겠다. 1932년 제 2대 본당 주임으로 베르몽(Jules Bermond, 1881-1967) 신부가 마산교구에서는 첫째로 완월동성당을 석조로 완공하고 성지학원 교사를 개축했으며, 벽돌 2층의 수녀원 건물을 마련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를 초청하므로 정 미카엘 수녀와 노 바르토로메오 수녀가 파견되었다. 분원이 창설되자 정 미카엘 수녀는 전교를, 노 바르토로메오 수녀는 학원교사로 수년간 열성적으로 일했다. 1935년 성지학원 내에 성지 강습회를 부설하고 청소년의 중등교육을 시작하였으나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지강습회는 일단 폐쇄되고 '사립학술강습회'로 개칭하여 인가를 받았다.

해방이 되자 본당 박성춘(레오) 신부는 학원 건물을 이용하여 성지여자중학원을 설립, 3학급의 인가를 받았으며 본관 신축을 목표로 미군부대에 원조자재를 요청하는 한편 학교부지에서 캐낸 화강석을 다듬어 공사에 착수하였다. 1949년 5월 28일 박성춘 신부는 성지학원을 여자중학교로 승격시킬 목적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구천주교유지재단 이사회를 거쳐 문교부의 정식 인가를 얻어 성지여자초급중학교의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6월 20일 개교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임시 휴교 중 12월 12일 김영호(金永浩 멜키오르, 1912-1978) 신부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2월 25일에는 성탄축하 음악, 연극을 수녀 반주로 시민극장에서 2일간 공개하여 시민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1951년 7월 김영호 교장신부는 어려운 재정 아래 힘겨운 노력으로 미 해병대의 보조를 받아 중지된 공사에 착공하여 석조건물 본관 10개 교실을 완공하였고, 8월 31일에는 대한민국 교육법 개정에 의하여 3년제 6학급의 여자중학교로 인가 받고 9월에는 성지여자고등학교를 부설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1952년 4월 15일에는 성지여자고등학교로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김영호 신부가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여 중·고를 겸임하였다. 1957년 11월 제 3대 정삼규(鄭三圭 요한) 신부가 취임한 후 교사증축에 전력을 기울여 구 체육관과 학교 관리실, 도서실 등을 준공하였다. 도서실에 큰 관심을 가진 정의순 베드로 수녀의 운영으로 도서관교육 우수학교로 인정을 받았으며 1960년도부터는 수녀들이 서무과장직을 맡게 되었다. 1961년 학생과장으로 재직중이던 윤필순 쟌 마리 수녀가 제 4대 교장에 취임하게 된다.

1965년 2월 부산교구에서 마산교구가 신설 분리되어 부산 데레사여중고와 마산 성지여중고의 교장 교감이 교체되어 성지여중고의 제 5대 교장에는 김재석(金在石 요셉) 신부가, 교감에는 김영옥 이냐시오 수녀가 부임해 왔으며 김재석 신부 재직 당시 마산교구 김수환 주교 성성식이 성지학교 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다음 해 12월 김영옥 수녀가 제 6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중학교 6교실에 증축되었다.

1968년 2월제 7대 교장으로 최계주 골롬바 수녀가 취임하여 현 성지분원 건물을 새로 지어 이사하였고 철거한 구 수녀원 자리에 고등학교 별관 3층 14개 교실을 신축하여 고3 진학반의 학업 분위기를 높였다. 1970년 12월에는 고등학교 24학급의 증설인가를 받았고 이듬해 8월에는 현 도서관 4층 교사를 준공하였으며 기숙사 운영으로 베드민턴 선수의 숙식 제공 등 학교전반에 걸친 알찬 발전을 기하였다. 1973년 3월 제 8대 교장에 박정희 엘리사벳 수녀가 취임하여 첫 사업으로 완월동성당 부지매입에 협조하여 학교 내에 자리하고 있던 성당을 학교에서 쓰고 본당성당을 신축 이전하기로 결정하였고 학교 내에 있던 주교관도 문화관으로 이전하였으며 구 체육관이 베드민턴 연습과 시합에 부적당함을 절감하여 체육관을 지어 선수양성에 전력하였다. 구체육관은 개조하여 가정실습실, 인쇄실, 도서관으로 사용하였다. 1975년 12월에는 고등학교 33학급의 증설인가를 받아 본관 석조 3층을 지었다. 1977년 12월 부산교구 학교재단에서 분리, 성지재단을 창설하여 장병화(張炳華 요셉) 주교가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함으로 부산교구에 종속되었던 10년동안의 불편을 덜게 되었다. 1978년 동편 기숙사 단층건물을 철거하고 중학교 운동장을 확장함과 동시에 수녀원 서편 공지에 선수기숙사 및 합숙소를 신축하여 중·고 베드민턴 선수 전원이 입주하였다.

1979년 중·고 분리시책에 따라 중·고가 완전히 분리되어 중학교는 김재석 신부가 제 9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고등학교에는 박정희 수녀가 유임하였다. 그 해 봄 별관에 4층 3개 교실을 증축, 교사 학생용 식당을 신축하였고 음료수 자동판매기 2대를 설치하였다.

1982년 봄 최신 방송실 겸 영사실을 만들어 각 교실에 텔레비젼 장치를 하여 방송수업을 할 수 있게 하였다. 1983년 9월 1일에 제 9대 교장으로 김옥순 마리세실 수녀가 취임하여 시설 현대화로써 교육환경을 일신하였다. 1984년에는 컴퓨터실 및 어학실습실 설치로 학생들의 어학실력 향상에 시대와 더불어 호흡을 맞추고 있다. 성지학교는 학교명과 같이 교직원 학생전원이 하늘의 거룩한 뜻을 준행하는 그리스도교적 덕성을 기르고자 애쓰고 있다. 1985년 2월에는 근로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한 산업체 특별학급을 부설하여 현재 12학급에 이르렀다. 1987년 3월 중학교 김재석 교장신부의 별세로 근화여자중학교 교감 김수덕 아녜스 말가리다 수녀가 중학교 제 10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수녀 중심 학교운영으로 교육을 통한 선교에 쇄신분발의 뜻을 새롭게 하였다.

현재 9명의 수녀가 중·고 교장, 서무, 경리, 교사 등으로 일하면서 학교의 행정, 관리 등 여러 분야를 담당하여 학교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

1910. 9. 15 평안남도 진남포 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진남포본당 鎭南浦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86쪽)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해성학교와 마리아유치원, 그리고 양로원과 고아원 사도직에 봉사하였다. 진남포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르레드(Jules Lereide, 申승겸, 1883-1917) 신부의 요청으로 1910년 9월 15일에 이 펠릭스 수녀와 이 마리아 수녀가 파견되어 지정(智貞)여학교에 근무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후 1914년 본당신부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병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본국으로 소환되어 가자 수녀들은 본원으로 귀원하였다. 그러다가 1921년 제 4대 본당신부인 뤼카(Francois Lucas, 1878-1934) 신부의 부탁으로 그해 10월 11일 오채경 말지나 수녀와 강옥섬 아오스딩 수녀가 7년만에 다시 파견되어 본당에서 설립한 해성학교와 마리아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리아 유치원은 1918년에 본당의 남녀청년회에서 문맹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설립한 것으로 1918년 그들은 50명의 원아를 수용하여 기초교육사업을 벌였다. 1921년 6월에 뤼카 신부가 본당에 부임하면서 그는 전통적 미풍양속을 내세워 남녀7세 부동석에 의한 도덕관을 주장하여 마리아유치원 여자부를 분리하여 해성학원(海星學院)이라 이름하고 직접 운영하면서 남자부는 신자 유지들에게 일임하였다. 수녀들이 처음 부임했을 때는 학생수가 33명이었는데 이듬해 봄에는 70여명, 가을에는 100여명이 넘게 되어 갑·을·병 3반에 유치반 한 반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1926년 4월에 메리놀회의 더피(Patrick Duffy)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마리아유치원과 해성학교의 시설을 보강하였다. 이후 해성학교와 더불어 유치원은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1930년 4월 스위니 신부는 100여평의 학교 건물을 신축하고 사립학교 인가를 받아 해성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가 되었다. 1935년 3월에는 6년제로 개편함으로서 학교의 규모와 교육내용을 더욱 충실히 하였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학교수녀들의 공로가 컸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1937년도 해성학교의 현황을 보면 800여평의 대지 위에 건물 216평, 11학급 642명의 학생들과 4명의 수녀들을 비롯한 13명의 교사들이 있었다. 이외에도 본당 내에는 1931년, 포스피칼(Hubert Pospichal) 신부가 무산아동을 위해 세운 성심학원과 5개의 공소에 상설야학이 있어 문맹퇴치에 공헌하였다.

마리아유치원은 1945년 초, 일인들의 강압으로 폐원되었다. 그러나 해성학교는 공립학교로 잠시 흡수되었다가해방이 된 후 다시 교회에서 운영하여 왔으나 1947년도를 마지막으로 공산정권에 몰수당하였다. 1933년 스위니 신부는 본당에 양로원과 고아원을 개설하여 무의무탁한 노인, 불구자, 고아들을 수용하고 그 자신의 독자적인 부담으로 이를 운영하였다. 스위니 신부가 떠난 후에 운영난에 봉착했으나 이 소식이 일반사회에 전해지자 1936년 진남포부 당국에서 양로원 운영보조비로 500원을 보조하여 줌으로써 교회에서는 더욱 용기를 내어 양로사업에 진력하게 되었다. 1933년부터 1937년 사이의 부양자 총수는 98명, 1937년도 수용인원은 58명이었다. 이 양로원과 고아원은 많은 시련속에서도 꾸준히 운영되어 오다가 1945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남포본당에서 철수한 이후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수녀들에 의해 돌보아졌고 침묵의 교회가 되기 바로 직전,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었다.

본당내 시약소 사도직은 양기섭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있던 1941년 양기섭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사업을 계승하였다. 양 신부는 1943년에 성심학원과 유치원의 문을 닫고 그해 10월 3일 소화병원을 신설하였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등의 진료과목에 입원실 7개, 의사 3명 그리고 간호수녀 3명으로 구성된 손색없는 의료진으로 외래환자를 진료하면서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봉사를 함으로써 의술로나 운영에 있어서 호평을 받았다. 전교에도 많은 도움을 주며 발전해 갔으나 1945년 10월에 폐원되었다.

진남포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104쪽)

1900년 평남 진남포시 용정리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성 안나. 초대 주임신부로는 파리외방전교회의 포리(Faurie) 신부가 부임하면서 1916년에는 돈의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어 2대 주임신부 레드(Lereide)는 1908년 성당을 신축하고 이듬해 지정여학교를 개설했으며 4대 주임신부인 뤼카(Lucas) 는 해성학교를 설립한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인해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 회의 선교사들이 일제(日帝) 당국에 체포 구금 될 때까지 본당사목을 담당하여 이 시기에 성당이 신축되고 시약소와 양로원이 개설되었다. 1942년 양기섭(베드로) 신부가 9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43년 본당의 소화 병원을 개설 하는 등 1945년 까지 전력을 다하여 사목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1대 주임 조문국 신부가 6.25 동란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북한공산 정권에 체포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었다. 본당운영의 사업체로는 해성학교, 마리아 유치원, 성심학원, 양로원, 시약소, 소화병원등이 있었다.

1910. 원주본당에서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 설립 (891쪽 원주본당)

원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91쪽)

원주교구 소속의 본당으로서 현재는 강원도 원주시 원동 85-1 소재의 주교자 원동이며 본당주보는 '천주 성총의 모친' 이다. 1896년 당시의 풍수원을 맡고있던 르메르(Le Merre) 신부가 원주군청 가까이에 거처할 집을 구입하고 그해 8월 17일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1901년 1월 조제(Jaugey) 신부가 5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10년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28년 7대 정규랑(레오) 신부가 부임하여 10년간 사목하는 동안 원주본당은 크게 발전하였다. 1931년 4년제의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나 1937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고 1934년에는 소화유치원을 설립한다.

1910. 숭공학교 건립, 실업교육을 실시 (462쪽 베네딕토회)

베네딕토회 (영) Benedictine Order O.S.B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일정한 장소에 정주 하면서 공동체생활을 통한 철저한 수도생활이 가장 우선적인 베네딕토회의 목적이지만 지역교회의 필요성에 따라 교육, 학문, 포교활동 등 다양한 활동에 종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에 종사할 경우 반드시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기 때문에 대수도원의 공동체를 이탈하여 혼자 생활하면서 활동해야 할 때에는 일시적 혹은 임시적으로만 활동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베酈기토회 수도원안에서의 학교운영이나 신학, 철학, 과학 등의 연구활동 및 예술활동 등의 문화활동은 세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09년에 한국에 진출한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토회도 선교를 목적으로 독일에서 발족되었다. 이 수족은 1884년 베네딕토회의 회원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안에서는 수도자, 밖에서는 선교사, 그래서 포교 성 베네딕토회로도 불리는 이 수도회는 이러한 창설의 기본정신에 따라 다른 선교회처럼 일정한 지역을 맡아서 교구와 본당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하는 교구내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교운영, 예술활동 등을 통해서 문화적으로 교구 전체의 사목을 돕는데 있었다. 그러나 창설 즉시 진출한 동아프리카(현 탄자니아) 에서는 부득이 교구중심의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한국에서는 교육사업을 통한 기본적인 선교방침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한국진출 : 성 오틸리엔의 성 베네딕토회는 당시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1909년 2월 사우어(Sauer) 신부 등 2명의 수사신부가 내한하여 서울 백동(現 惠化洞)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함경남도 덕원을 거쳐 경상북도 왜관에 정착할 때까지 많은 어려움과 수난을 당하였다.

⸁ 서울시대(1909∼1920) : 사범학교 설립과 운영계획으로 뮈텔 주교가 초청한 본 수도회는 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서울 백동 낙산 아래 10헥타르(약3만평)의 땅을 매입하여 수도원의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고 1911년 3층 벽돌로된 거대한 수도원을 완공시켰다. 이미 1909년 말 정식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아울러 1910년에는 내한 목적으로 숭공학교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1913년 수도원은 대수도원으로 승격하였으나 숭신학교는 폐교하게 되었다. 지원자가 없다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몇몇 수사들이 중국으로 동원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목공, 철공, 열차,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직공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이 수도회는 수도생활뿐 아니라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포교수도회로서 본당사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의 반대로 이를 서울에서 실현시키지 못하고 함경남북도와 간도지방을 관할하는 원산교구가 설정되던 1920년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여 숭공학교를 폐교하고, 1927년 서울의 수도원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 덕원시대(1920∼1949) :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에서는 아프리카 포교지가 붕괴된 뒤 자연 한국 포교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20년 8월 5일에 교황청에서도 한국의 원산교구 위임을 허락하자 곧 1921년 5월 1일 사우어 신부는 주교로 성성되었다. 교구 사목은 원래 이 회의 선교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서울의 베네딕토회원들은 이 제의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6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1927년 덕원의 새 수도원을 완공하여 그 해 11월부터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덕원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리하여 덕원수도원은 원산 포교지에 있어서 수도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되어 1940년 1월 12일 덕원면속구가 될 때까지 수도원 생활뿐만 아니라 원산교구 내에 있어서의 본당사목활동, 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야만 했다. 이에 투칭(Tutzing)의 포교 베네딕토회 수녀들이 1925년 11월 원산으로 내한하여 본당사목활동을 도울 뿐만 아니라 빈민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인 해성학교, 유치원 시약소 등을 개설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40년 덕원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다. 이 밖에 덕원수도원에서는 출판시설을 갖추어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바오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다. 일제의 탄압속에도 이처럼 발전한 수도회는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주둔하고, 1946년 토지개혁이 실시된 뒤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결국 1949년 5월 9일에 수도원의 모든 장상을 비롯한 신부, 수사들은 체포되어 독일인 신부 6명과 한국인 신부 5명이 1950년 10월 처형되었고, 사우어 대 수도원장을 비롯한 18명의 신부, 수사, 수녀 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954년 1월 42명의 신부. 수사·신부들이 생환되어 2년간의 휴양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서의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 왜관시대(1952∼현재) : 1951년 미국을 방문중이던 샹트오틸리엔의 크리소스토모 종원장은 당시 미국에 체류중인 스위스 출신의 전 연길교구 선교사 비테를리 신부에게 한국에 다시 진출하여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회를 건설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그를 한국 베네딕토회의 장상으로 임명하였다. 비테를리 신부는 일본을 거쳐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남쪽으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토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테를리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 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이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식구가 크게 증가되었다.

1955년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바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왜관에서도 분도 출판사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교회의 문서전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1971년 4월 왜관수도원의 대 원장직이 이동호 신부에게 이양됨으로써 베네딕토회는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또한 덕원교구에서 활약하던 스위스의 올리베타노 수녀들도 다시 한국에 진츨하여 각기 대구와 부산에 수도원 공동체를 신설함으로써 베네딕토회 여자수도회도 남한에서 완전히 그 기반을 굳혔다.

1911. 3. 20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약현본당에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6쪽)

1911. 숭신학교 건립, 사범교육을 실시 (462쪽 베네딕토회)

베네딕토회 (영) Benedictine Order O.S.B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일정한 장소에 정주 하면서 공동체생활을 통한 철저한 수도생활이 가장 우선적인 베네딕토회의 목적이지만 지역교회의 필요성에 따라 교육, 학문, 포교활동 등 다양한 활동에 종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에 종사할 경우 반드시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기 때문에 대수도원의 공동체를 이탈하여 혼자 생활하면서 활동해야 할 때에는 일시적 혹은 임시적으로만 활동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베酈기토회 수도원안에서의 학교운영이나 신학, 철학, 과학 등의 연구활동 및 예술활동 등의 문화활동은 세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09년에 한국에 진출한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토회도 선교를 목적으로 독일에서 발족되었다. 이 수족은 1884년 베네딕토회의 회원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안에서는 수도자, 밖에서는 선교사, 그래서 포교 성 베네딕토회로도 불리는 이 수도회는 이러한 창설의 기본정신에 따라 다른 선교회처럼 일정한 지역을 맡아서 교구와 본당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하는 교구내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교운영, 예술활동 등을 통해서 문화적으로 교구 전체의 사목을 돕는데 있었다. 그러나 창설 즉시 진출한 동아프리카(현 탄자니아) 에서는 부득이 교구중심의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한국에서는 교육사업을 통한 기본적인 선교방침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한국진출 : 성 오틸리엔의 성 베네딕토회는 당시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1909년 2월 사우어(Sauer) 신부 등 2명의 수사신부가 내한하여 서울 백동(現 惠化洞)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함경남도 덕원을 거쳐 경상북도 왜관에 정착할 때까지 많은 어려움과 수난을 당하였다.

⸁ 서울시대(1909∼1920) : 사범학교 설립과 운영계획으로 뮈텔 주교가 초청한 본 수도회는 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서울 백동 낙산 아래 10헥타르(약3만평)의 땅을 매입하여 수도원의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고 1911년 3층 벽돌로된 거대한 수도원을 완공시켰다. 이미 1909년 말 정식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아울러 1910년에는 내한 목적으로 숭공학교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1913년 수도원은 대수도원으로 승격하였으나 숭신학교는 폐교하게 되었다. 지원자가 없다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몇몇 수사들이 중국으로 동원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목공, 철공, 열차,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직공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이 수도회는 수도생활뿐 아니라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포교수도회로서 본당사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의 반대로 이를 서울에서 실현시키지 못하고 함경남북도와 간도지방을 관할하는 원산교구가 설정되던 1920년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여 숭공학교를 폐교하고, 1927년 서울의 수도원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 덕원시대(1920∼1949) :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에서는 아프리카 포교지가 붕괴된 뒤 자연 한국 포교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20년 8월 5일에 교황청에서도 한국의 원산교구 위임을 허락하자 곧 1921년 5월 1일 사우어 신부는 주교로 성성되었다. 교구 사목은 원래 이 회의 선교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서울의 베네딕토회원들은 이 제의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6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1927년 덕원의 새 수도원을 완공하여 그 해 11월부터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덕원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리하여 덕원수도원은 원산 포교지에 있어서 수도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되어 1940년 1월 12일 덕원면속구가 될 때까지 수도원 생활뿐만 아니라 원산교구 내에 있어서의 본당사목활동, 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야만 했다. 이에 투칭(Tutzing)의 포교 베네딕토회 수녀들이 1925년 11월 원산으로 내한하여 본당사목활동을 도울 뿐만 아니라 빈민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인 해성학교, 유치원 시약소 등을 개설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40년 덕원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다. 이 밖에 덕원수도원에서는 출판시설을 갖추어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바오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다. 일제의 탄압속에도 이처럼 발전한 수도회는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주둔하고, 1946년 토지개혁이 실시된 뒤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결국 1949년 5월 9일에 수도원의 모든 장상을 비롯한 신부, 수사들은 체포되어 독일인 신부 6명과 한국인 신부 5명이 1950년 10월 처형되었고, 사우어 대 수도원장을 비롯한 18명의 신부, 수사, 수녀 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954년 1월 42명의 신부. 수사·신부들이 생환되어 2년간의 휴양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서의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 왜관시대(1952∼현재) : 1951년 미국을 방문중이던 샹트오틸리엔의 크리소스토모 종원장은 당시 미국에 체류중인 스위스 출신의 전 연길교구 선교사 비테를리 신부에게 한국에 다시 진출하여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회를 건설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그를 한국 베네딕토회의 장상으로 임명하였다. 비테를리 신부는 일본을 거쳐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남쪽으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토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테를리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 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이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식구가 크게 증가되었다.

1955년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바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왜관에서도 분도 출판사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교회의 문서전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1971년 4월 왜관수도원의 대 원장직이 이동호 신부에게 이양됨으로써 베네딕토회는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또한 덕원교구에서 활약하던 스위스의 올리베타노 수녀들도 다시 한국에 진츨하여 각기 대구와 부산에 수도원 공동체를 신설함으로써 베네딕토회 여자수도회도 남한에서 완전히 그 기반을 굳혔다.

1912. 안법학교 여자부를 신설 (775쪽 안성본당)

안성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75쪽)

주보로 '착한 의견의 모친'을 모시고 있는 이 본당은 1901년 아산 공세리 본당에서 분할되어 창설되었다.

초대신부인 공베르(A. Gombert) 신부는 통진군수를 지낸 백 씨의 집을 사서 임시성당으로 살았다. 그는 1901년 1월 안법학교를 설립하고 운영비를 자비로 댔다. 1912년에는 안법학교 여자부를 신설하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 2명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1915. 10. 15 대구에 백백합보육원(白白合保育院)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02쪽)

백백합보육원 白白合保育院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902쪽)

보육원은 1915년 10월 15일 대구교구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설립하여 그 운영을 대구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맡겼다. 보육원은 처음에는 수녀원 건물의 일부를 사용하였다. 대구본당(현 계산동 대주교좌 성당)의 초대주임 로베르 신부는 대구지방의 고아양육을 위해 이미 프랑스인 양모를 정하여 그들의 양육비 보조금을 받아냈고 본당신자 유지들에게 양육비를 지원하여 고아들을 맡겨 양육하고 있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이러한 고아 약 30여명을 맞아들여「천주교수녀원부설 여자고아원」을 시작했다. 1922년 이후 원아수의 증가에 따라 고아원 건물을 점차적으로 증축 혹은 신축하여 영아부, 육아부, 아동부 등을 분리시켰다. 한편 수녀회의 지원자들의 수가 많아지고 수련원 개설문제가 제기됨과 아울러 원아수의 급증으로 1925년에는 고아원 설립 10주년 기념으로 원사를 신축하였고 그 당시 관공서 기관에 수용되어 있던 어린이 40여명을 인계받아 양육하였다. 일제말(日帝末)인 1944년 2월 10일, 그 명칭을「천주교 백백합 보육원」으로 개칭했다. 보육원이 설립되던 당시부터 어린이들의 보건위생을 위하여 수녀원내에 진료소가 부설되었다. 이 진료소에서는 보육원아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주변의 극빈자들에게도 자선 활동의 일환으로 무료진료 및 시약을 해왔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져서 수녀들을 믿고 의지하는 신자들은 물론이고 외교인들도 즐겨 이곳을 찾아와서 외래환자가 많아졌다. 이에 수녀원에서는 이 진료소를 평신도 의사 박영대(대구 중앙병원장)선생을 촉탁의사(囑託醫師)로 모시고 월요일마다 외래환자들이 진찰을 받게하고 그 밖의 요일에는 수녀들이 의사의 처방대로 치료시약하도록 하였다. 1934년에는 이를「대구성요셉의원」으로 확장 개칭하였다.

해방 이후 1946년 3월 15일에는 미군정청(美軍政廳) 당국으로부터 다시 후생시설 등록증명을 받았다. 성요셉의원은 원래에 보육원 어린이들의 보건위생을 위하여 설립된 시설이었다. 그러나 시대적 변천과 의학기술의 눈부신 발전 및 종합병원과 전문의들의 속출로 성요셉의원은 창설당시의 목적에 부응되기가 어려웠다. 이에 수녀회에서는 1973년에 접어들면서 이 의원을 서서히 정리, 폐원하였다.

한편 보육원에서는 해마다 성장아들이 많아졌고 그들의 사회적 적응을 위한 교육과 결혼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많았다. 때마침 1967년 이래 사회복지 사업에 관한 국가의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보육원에서는 성장한 여아들을 사회에 진출시켜 사회인으로 경헙을 얻도록 배려하는 국가의 시책에 준하여 해마다 성장한 아이들을 사회로 복귀시켰다. 한편 1968년부터 시청에서는 복지사업기관인 일시보호소를 대구본원과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운영을 하도록 요청했고 일시보호소에대한 사무감사가 엄격해졌다. 그러나 이때는 마침 대구관구가 설립된 직후라서 재정상의 어려움이 많아 수녀원에서는 이를 보류해오다가 1969년 11월 17일에 시설의 운영을 독립시켰다. 그리고 백백합보육원 분원도 독립분원으로 설립되었다.

1916. 6 황해도 사리원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3쪽)

사리원본당 沙里院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73쪽)

매화동 본당의 관할공소로서 1897년에 개설된 황해도 사리원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된 것은 1916년 6월이었다. 이곳의 첫 주임사제로 부임한 이기준(李起俊 도마, 1884-1977) 신부는 1921년 성모성심학원(聖母聖心學院)이라는 일종의 개량서당(改良書堂)을 개설하고 초등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사리원본당의 제 4대신부로 부임한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1874-1961) 신부는 성당건축과 함께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수녀원을 준공한 이후 1934년 12월 4일, 김명제 신부는 전교와 유치원, 학원 등을 맡아 일해 줄 수녀들을 초청하였다. 수녀들은 본당일과 봉화유치원, 명성학원(1939년에 4년제 여자국민학교로 개칭, 인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전교와 교육사업에 열중하면서 일제말의 어려움을 견디어 나갔다.

사리원본당의 사목을 도우며 열심히 일해 오던 수녀들은 1940년대 후반기를 기하여 그들의 사도직을 떠나와야 했다. 즉 해방 후 3명의 본당수녀 중 유치원을 담당하던 홍석영 모니카 수녀가 1947년에 요양차 본가인 은율로 돌아가고 같은 시기에 강봉련 제노베파 수녀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서울 본원으로 떠남에 따라 황인경 말가리다 수녀만이 남아 본당일을 하였다. 홍석영 수녀가 담당하던 유치원은 홍 수녀가 사리원에 부임한 1935년에 수녀원에 사무실을 겸한 방 하나를 마련하여 교우집 아이들 40여명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 되었다. 1937년 11월 28일에는 정식인가를 받아 1개반 80여명 정원으로 봉화유치원을 개원하여 10여년간 일하였으나 1947년 홍 수녀가 이곳을 떠남으로써 수녀없이 유치원이 유지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공산당에 의해 폐원되었다. 한편 사리원본당에서는 1939년에 명성학원(明星學院)이라는 4년제 여자국민학교를 개설하였는데 개원 초에는 일반 공·사립학교에의 입학시기를 놓친 나이 많은 처녀들이 대부분 입학하였다. 성당 지하실에 칸막이로 2개 교실을 만들어 1개 교실에서 2개 학년이 합반으로 수업하였다. 초창기의 학원선생은 최진옥 마티아, 남순우 레지나, 김 멜라니아, 조환 예로니모 등 서울 분원에서 파견되어 온 지원자들이었는데 이들이 1∼2년간 교사로 봉직한 후 본원으로 복귀한 후에는 유자격 평신도 여교사들이 가르쳤다. 명성학원은 일제의 정책으로 비록 인가를 받지 못하였으나 4년제에서 6년제로 발전하고 질적으로도 다른 학교에 뒤지지 않는 교육을 실시하여 졸업생들 중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우수한 자질을 발휘한 여성들이 많았다.

수녀들이 모두 떠난 후 혼자 남아 있던 황인경 수녀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0월에는 본당신부가 납치되고 폭격이 심해지자 사복차림으로 해주까지 왔으나 월남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래서 황 수녀는 사리원으로 되돌아 갔다가 두번째 시도 끝에 해주 부근의 한 포구에서 나룻배를 타고 월남하였다.

1916. 일제의 탄압에 따라 신성학교 폐교 (722쪽 신성학교)

신성학교 晨星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22쪽)

1909년 프랑스 선교사 라크루(Marcellus Lacrouts) 신부가 제주도에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으로 현재의 신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16년 일제의 우민화정책에 따라 탄압을 받고 무기휴교를 당했다가 1964년 신성여자중학원으로 재개교하였다. 1953년 고등학교를 병설하였고 1977년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800번지의 현 교사로 이전하였다.

1918. 진남포 본당에 마리아유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진남포본당 鎭南浦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86쪽)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해성학교와 마리아유치원, 그리고 양로원과 고아원 사도직에 봉사하였다. 진남포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르레드(Jules Lereide, 申승겸, 1883-1917) 신부의 요청으로 1910년 9월 15일에 이 펠릭스 수녀와 이 마리아 수녀가 파견되어 지정(智貞)여학교에 근무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후 1914년 본당신부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병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본국으로 소환되어 가자 수녀들은 본원으로 귀원하였다. 그러다가 1921년 제 4대 본당신부인 뤼카(Francois Lucas, 1878-1934) 신부의 부탁으로 그해 10월 11일 오채경 말지나 수녀와 강옥섬 아오스딩 수녀가 7년만에 다시 파견되어 본당에서 설립한 해성학교와 마리아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리아 유치원은 1918년에 본당의 남녀청년회에서 문맹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설립한 것으로 1918년 그들은 50명의 원아를 수용하여 기초교육사업을 벌였다. 1921년 6월에 뤼카 신부가 본당에 부임하면서 그는 전통적 미풍양속을 내세워 남녀7세 부동석에 의한 도덕관을 주장하여 마리아유치원 여자부를 분리하여 해성학원(海星學院)이라 이름하고 직접 운영하면서 남자부는 신자 유지들에게 일임하였다. 수녀들이 처음 부임했을 때는 학생수가 33명이었는데 이듬해 봄에는 70여명, 가을에는 100여명이 넘게 되어 갑·을·병 3반에 유치반 한 반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1926년 4월에 메리놀회의 더피(Patrick Duffy)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마리아유치원과 해성학교의 시설을 보강하였다. 이후 해성학교와 더불어 유치원은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1930년 4월 스위니 신부는 100여평의 학교 건물을 신축하고 사립학교 인가를 받아 해성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가 되었다. 1935년 3월에는 6년제로 개편함으로서 학교의 규모와 교육내용을 더욱 충실히 하였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학교수녀들의 공로가 컸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1937년도 해성학교의 현황을 보면 800여평의 대지 위에 건물 216평, 11학급 642명의 학생들과 4명의 수녀들을 비롯한 13명의 교사들이 있었다. 이외에도 본당 내에는 1931년, 포스피칼(Hubert Pospichal) 신부가 무산아동을 위해 세운 성심학원과 5개의 공소에 상설야학이 있어 문맹퇴치에 공헌하였다.

마리아유치원은 1945년 초, 일인들의 강압으로 폐원되었다. 그러나 해성학교는 공립학교로 잠시 흡수되었다가해방이 된 후 다시 교회에서 운영하여 왔으나 1947년도를 마지막으로 공산정권에 몰수당하였다. 1933년 스위니 신부는 본당에 양로원과 고아원을 개설하여 무의무탁한 노인, 불구자, 고아들을 수용하고 그 자신의 독자적인 부담으로 이를 운영하였다. 스위니 신부가 떠난 후에 운영난에 봉착했으나 이 소식이 일반사회에 전해지자 1936년 진남포부 당국에서 양로원 운영보조비로 500원을 보조하여 줌으로써 교회에서는 더욱 용기를 내어 양로사업에 진력하게 되었다. 1933년부터 1937년 사이의 부양자 총수는 98명, 1937년도 수용인원은 58명이었다. 이 양로원과 고아원은 많은 시련속에서도 꾸준히 운영되어 오다가 1945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남포본당에서 철수한 이후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수녀들에 의해 돌보아졌고 침묵의 교회가 되기 바로 직전,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었다.

본당내 시약소 사도직은 양기섭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있던 1941년 양기섭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사업을 계승하였다. 양 신부는 1943년에 성심학원과 유치원의 문을 닫고 그해 10월 3일 소화병원을 신설하였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등의 진료과목에 입원실 7개, 의사 3명 그리고 간호수녀 3명으로 구성된 손색없는 의료진으로 외래환자를 진료하면서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봉사를 함으로써 의술로나 운영에 있어서 호평을 받았다. 전교에도 많은 도움을 주며 발전해 갔으나 1945년 10월에 폐원되었다.

1919. 가명보통학교로 승격 (4쪽 가명학교)

가명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쪽)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보통학교. 약현성당에는 이미 1895년부터 약현서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실시해 왔으며 1901년에는 두세(Doucet)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에는 남자학교 건물을 새로이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학교라고 하였다. 이들 2개의 학교는 1909년 가명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는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27년 가명 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하여 폐교되었다.

1920. '조선노동 공제회 결성' (246쪽 노동운동)

노동운동 (영) labor move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46쪽)

노동운동이란 근내적 임금노동자 계층이 자신의 생활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전개하는 조직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노동자의 일상적인 욕구, 임금등의 근로조건 유지 개선을 기본목표로 하는 동시에 자본의 강력한 지배에서 벗어나 사회의 떳떳한 구성원이 되려는 노동자의 조직적인 운동이다. 노동운동은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생산자로서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을 유지, 개선하기 위해 전개하는 노동조합 운동

둘째, 시민으로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을 만들어 나가는 정치운동

세째, 소비자로서 노동자사 보다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전개하는 각종 협동조합운동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19세기 말 임금노동자가 출현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3.1운동이 실패한 뒤 대중적 조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정부와 사용자와 노동자의 주역에 의해 구체적으로 다듬어 지는 것이 노동운동의 성격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 이 삼자가 걸어온 역사적 체험과 기능상의 특수성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된 다른 나라 노동의 궤적과는 다른 형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1921. 5. 15 원산본당에 야학강습소 개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선수녀원사 75쪽, 173쪽)

원산본당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75쪽, 173쪽)

원산본당의 제 9대 본당 신부로는 포교 성 베네딕도회의 옥 안드레아 엑카르트(Andreas Eckardt, 1884-?)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 쌍트 오틸리엔에 학교 설립의 뜻을 전하였고, 서울에서 초빙하여 온 오병주 선생과 함께 1921년 5월 15일, 온돌방 2칸을 빌려 야학 강습소를 개설하였다.

미취학 아동이 많음을 안타까이 여긴 엑카르트 신부는 스스로 교단에 서서 지도 하였으며, 빈곤한 어린이들에게는 일체의 학비를 면제시키고 학용품까지도 대주면서 신 교육을 펼쳐 나갔다. 3개월 후에는 학생이 60명에 달하여 주야로 강습소를 운영하였다. 한국 사람들의 높아가는 향학열에 따라 입학 지원자는 격증하였고, 일반 사회에서 완전한 초등교육 기관으로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에 1922년 3월 7일에는 4년제 보통학교로 승격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나 운영난에 봉착하자 옥 신부는 교사 한 명의 급료를 원산 본당의 유지비에서 엄출키로 하였으며, 한 명분은 옥 신부 자신이 부담하였고, 나며지 한 명은 원산 교회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그밖의 경비는 원산 사회 유지들의 보조금과 학생들의 수업료로 메꾸어 갔다. 이후 1923년 4월 1일부터 학교 경영은 원산 본당에서 맡기로 하였다. 1924년 4월, 학생수가 450명에 달하여 교사 증축이 불가피하게 되자 건평 450의 벽돌건물을 건축하였고, 1926년 4월 부터는 교육 기간을 6년으로 연장하였다. 이렇듯이 해성학교는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학생 수가 더욱 증가하였다.

청각 장애자 교리 -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이 처음으로 청각 장애자에게 교리를 지도한 것은 1930년초, 원산 본당에서였다.

교육의 혜택을 못받아 문맹을 면치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던 그리소스토마 수녀가 하루는 열심한 신자 가정에 청각 장애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의 부모들이 청각 장애자인 아들 요한의 첫 영성체 때문에 고심하는 것을 알게된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요한을 정상아들의 교리반에 출석시켜 교리 지도를 시도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소스토마 수녀의 지극히 정성어린 지도로 첫영성체와 견진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 때가 대개 1930년대 초반으로 알려진다. 그리소스토마 수녀 다음으로 청각 장애자에게 교리를 지도한 이는 일본안 막달레나 수녀였다. 막달레나 수녀에 이어 청각 장애자를 지도한 이는 까리따스 수녀였다. 까리따스 수녀가 원산 본당에서 본격적으로 청각장애자 교리지도를 한 것은 1940년 이후부터였다. 그러나 이전에도 한 두명이 개인으로 교리를 배웠다. 정상인 교리지도도 힘겨운데 수화까지 익혀가며 장애자에게 교리지도하는 것은 참으로 큰 인내를 수반하였지만 까리따스 수녀는 개인으로 찾아오는 장애자를 위해 이런 많은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하였다.

1921. 5 원산본당에서 빈민아동을 위하여 해성학교를 설립 (889쪽 원산본당)

원산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89쪽)

1887년 함경남도 원산시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함경도의 첫 본당이었다.

1920년 8월 5일 원산교구가 설정되고 초대 교구장에 사우어(B. Sauer) 주교가 임명되자 원산본당은 원산교구로 이관되고 동시에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원산교구로 이관된 후 에카르트(A. Eckardt) 신부가 부임하여 1921년 빈민아동 교육을 위해 해성학교를 설립하였다. 1925년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원산교구에 진출하여 본당내에 야학, 시약소, 노인과 아동을 위한 교리강습소, 해성유치원 등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1921. 5 해성학교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24쪽)

해성학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24쪽)

1921년 5월, 워산 본당으로 부임해온 옥 엑카르트(Andreas Eckardt)신부가 원산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너무 많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서울에서 함께 온 오병주 선생과 동년 5월 15일부터 본당내에 온돌방 두칸을 빌려 야학 강습소로 개설하였다. 처음에 7명의 학생을 모아 이 야학 강습소로 출범하여 1922년 3월 7일부터는 4년제의 해성 보통학교로 승격하였고, 1926년 4월 1일부터 학업연한을 6년제로 연장하였다. 1928년에는 15학급의 학생 689명, 교사 17명으로 늘어났다. 학교 이름을「해성(海星)」이라고 지은 이유는 성모님의 이름을 따서 바다의 별이라는 뜻이 포함된 것이다. 성모님께서 넓은 바다에서 환히 비추어 주는 별처럼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지혜를 비추어 줌으로써 장차 이 나라에 큰 별이 되어 달라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제 당시 천주교회에서 세우는 보통학교는 대개「해성」이라는 학교명으로 통일한 것이다.

포교 성 베네딕도회의 수녀들이 원산 해성학교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1926년 그리소스토마 수녀가 해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동년 2학기부터는 방과 후에 해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예비수녀로서 맨처음 교사직에 있었던 이는 서울에서 온 청원자 김 데레사였다. 동년 3월 14일에는 원산에서 제일 인정받는 일본인 여학교에서 해성학교 학생들의 음악 발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원산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어린이들의 음악발표회였다. 유 플라치도 노이기르크(Placidus Neugirg, 兪, 1894. 10. 7 - 1967. 9. 7)신부가 어린이들과 함께 협주를 하였으며, 제일 갈채를 받았던 것은 그리소스토마 수녀가 지도했던 '나비'유희였다. 손님들의 대부분은 학부모들과 교회를 옹호하는 이들이었으며 그 외에 교인들도 있었다. 프로가 끝날 때마다 박수 갈채가 대단하였다. 동년 10월 20일, 또다시 일본 여학교에서 연주회가 있었다. 찬조출연으로 서울에서 온 독일인 스투데니(Studeny)와 유 플라치도 신부가 바이올린과 피아노로 멋진 연주를 하여 많은 갈채를 받았다. 이런 행사로 인하여 해성학교는 원산 전역에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원산에서 해성학교를 찾는 어린이들 중에는 15세부터 19세까지 나이가 많은 청소년들도 더러 있었다. 왜냐하면 돈도 없고 학교도 부족하여 취학의 기회를 놓친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성학교를 세웠기 때문에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아울러 이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교리를 지도하려고 노력했다. 본당 소속의 사립 국민학교의 해성보통학교에서는 교장은 명예직으로 원산 본당 신부가 역임하였으며, 부 교장인 오 병주 선생이 행정 처리를 하였다. 오병주 선생은 부 교장으로서뿐 아니라 신 보니파시오 주교의 비서로 수도원의 땅 매매 등의 행정 처리도 담당하였다.

1921. 6 진남포 본당에 마리아유치원 여자부를 분리하여 해성학원을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진남포본당 鎭南浦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86쪽)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해성학교와 마리아유치원, 그리고 양로원과 고아원 사도직에 봉사하였다. 진남포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르레드(Jules Lereide, 申승겸, 1883-1917) 신부의 요청으로 1910년 9월 15일에 이 펠릭스 수녀와 이 마리아 수녀가 파견되어 지정(智貞)여학교에 근무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후 1914년 본당신부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병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본국으로 소환되어 가자 수녀들은 본원으로 귀원하였다. 그러다가 1921년 제 4대 본당신부인 뤼카(Francois Lucas, 1878-1934) 신부의 부탁으로 그해 10월 11일 오채경 말지나 수녀와 강옥섬 아오스딩 수녀가 7년만에 다시 파견되어 본당에서 설립한 해성학교와 마리아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리아 유치원은 1918년에 본당의 남녀청년회에서 문맹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설립한 것으로 1918년 그들은 50명의 원아를 수용하여 기초교육사업을 벌였다. 1921년 6월에 뤼카 신부가 본당에 부임하면서 그는 전통적 미풍양속을 내세워 남녀7세 부동석에 의한 도덕관을 주장하여 마리아유치원 여자부를 분리하여 해성학원(海星學院)이라 이름하고 직접 운영하면서 남자부는 신자 유지들에게 일임하였다. 수녀들이 처음 부임했을 때는 학생수가 33명이었는데 이듬해 봄에는 70여명, 가을에는 100여명이 넘게 되어 갑·을·병 3반에 유치반 한 반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1926년 4월에 메리놀회의 더피(Patrick Duffy)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마리아유치원과 해성학교의 시설을 보강하였다. 이후 해성학교와 더불어 유치원은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1930년 4월 스위니 신부는 100여평의 학교 건물을 신축하고 사립학교 인가를 받아 해성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가 되었다. 1935년 3월에는 6년제로 개편함으로서 학교의 규모와 교육내용을 더욱 충실히 하였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학교수녀들의 공로가 컸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1937년도 해성학교의 현황을 보면 800여평의 대지 위에 건물 216평, 11학급 642명의 학생들과 4명의 수녀들을 비롯한 13명의 교사들이 있었다. 이외에도 본당 내에는 1931년, 포스피칼(Hubert Pospichal) 신부가 무산아동을 위해 세운 성심학원과 5개의 공소에 상설야학이 있어 문맹퇴치에 공헌하였다.

마리아유치원은 1945년 초, 일인들의 강압으로 폐원되었다. 그러나 해성학교는 공립학교로 잠시 흡수되었다가해방이 된 후 다시 교회에서 운영하여 왔으나 1947년도를 마지막으로 공산정권에 몰수당하였다. 1933년 스위니 신부는 본당에 양로원과 고아원을 개설하여 무의무탁한 노인, 불구자, 고아들을 수용하고 그 자신의 독자적인 부담으로 이를 운영하였다. 스위니 신부가 떠난 후에 운영난에 봉착했으나 이 소식이 일반사회에 전해지자 1936년 진남포부 당국에서 양로원 운영보조비로 500원을 보조하여 줌으로써 교회에서는 더욱 용기를 내어 양로사업에 진력하게 되었다. 1933년부터 1937년 사이의 부양자 총수는 98명, 1937년도 수용인원은 58명이었다. 이 양로원과 고아원은 많은 시련속에서도 꾸준히 운영되어 오다가 1945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남포본당에서 철수한 이후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수녀들에 의해 돌보아졌고 침묵의 교회가 되기 바로 직전,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었다.

본당내 시약소 사도직은 양기섭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있던 1941년 양기섭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사업을 계승하였다. 양 신부는 1943년에 성심학원과 유치원의 문을 닫고 그해 10월 3일 소화병원을 신설하였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등의 진료과목에 입원실 7개, 의사 3명 그리고 간호수녀 3명으로 구성된 손색없는 의료진으로 외래환자를 진료하면서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봉사를 함으로써 의술로나 운영에 있어서 호평을 받았다. 전교에도 많은 도움을 주며 발전해 갔으나 1945년 10월에 폐원되었다.

1921. 10. 7 매괴여학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7쪽)

매괴국민학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57쪽)

장호원의 초대신부인 부이용 신부는 1907년 민응식의 집 행랑채를 이용하여 매괴학당을 설립하고 남학생을 모아 가르쳤는데 교재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유년필독(幼年必讀)을 사용, 통감부의 일본인 관리들로부터 금서를 가르친다 하여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수가 점점 증가하여 60명에 달함으로 교사가 비좁아지자 1908년 3월에 학교를 크게 세워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는 발전을 보였고 이어 여학교도 설립하였는데 수녀들의 필요성을 절감한 부이용 신부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교는 1912년 10월 7일 매괴축일에 개교하였다. 여학교는 수녀들의 헌신으로 외교인들에게까지 좋은 인상을 주어 딸을 가진 부모들이 공립보다는 매괴학교로 보내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부족, 부모들의 몰이해, 유능한 교사부족 등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다. 결국 보통학교와 공립학교로 전학해 버리는 학생들이 점차로 늘어가게 됨에 따라 6년제였던 매괴학교는 부득이 4년제만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2년에 6년제로 다시 복귀한 후 1936년에는 공식학교 인가를 받고 3층 교사를 증축하여 교명을 매괴심상소학교(怘塊尋常小學校)라 하고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함으로써 1939년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일본인들이 이 학교를 빼앗아 공립화하고 교명을 욱산(旭山)으로 바꾸어 운영하였는데 1945년 해방을 맞아 다시 찾게 되었다. 그후 매괴학교는 1953년 매괴상업고등학교로 승격되었고 1966년에는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확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국민학교는 운영난이 심화되고 교육전망의 분석 결과 그 전망이 밝지 못하여 1972년 2월 28일자로 폐교하였다.

1921. 해성유치원 개원 (929쪽 의주본당)

의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29쪽)

1911년 평북 의주군 의주읍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모승천.

1921년 해성유치원과 1924년 해성학원이 개설되었고 1926년 메리놀회 수녀들에 의해 시약소와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광복 후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김교명 신부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1922. 3. 7 해성학교가 4년제로 승격됨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24쪽)

해성학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24쪽)

1921년 5월, 워산 본당으로 부임해온 옥 엑카르트(Andreas Eckardt)신부가 원산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너무 많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서울에서 함께 온 오병주 선생과 동년 5월 15일부터 본당내에 온돌방 두칸을 빌려 야학 강습소로 개설하였다. 처음에 7명의 학생을 모아 이 야학 강습소로 출범하여 1922년 3월 7일부터는 4년제의 해성 보통학교로 승격하였고, 1926년 4월 1일부터 학업연한을 6년제로 연장하였다. 1928년에는 15학급의 학생 689명, 교사 17명으로 늘어났다. 학교 이름을「해성(海星)」이라고 지은 이유는 성모님의 이름을 따서 바다의 별이라는 뜻이 포함된 것이다. 성모님께서 넓은 바다에서 환히 비추어 주는 별처럼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지혜를 비추어 줌으로써 장차 이 나라에 큰 별이 되어 달라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제 당시 천주교회에서 세우는 보통학교는 대개「해성」이라는 학교명으로 통일한 것이다.

포교 성 베네딕도회의 수녀들이 원산 해성학교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1926년 그리소스토마 수녀가 해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동년 2학기부터는 방과 후에 해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예비수녀로서 맨처음 교사직에 있었던 이는 서울에서 온 청원자 김 데레사였다. 동년 3월 14일에는 원산에서 제일 인정받는 일본인 여학교에서 해성학교 학생들의 음악 발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원산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어린이들의 음악발표회였다. 유 플라치도 노이기르크(Placidus Neugirg, 兪, 1894. 10. 7 - 1967. 9. 7)신부가 어린이들과 함께 협주를 하였으며, 제일 갈채를 받았던 것은 그리소스토마 수녀가 지도했던 '나비'유희였다. 손님들의 대부분은 학부모들과 교회를 옹호하는 이들이었으며 그 외에 교인들도 있었다. 프로가 끝날 때마다 박수 갈채가 대단하였다. 동년 10월 20일, 또다시 일본 여학교에서 연주회가 있었다. 찬조출연으로 서울에서 온 독일인 스투데니(Studeny)와 유 플라치도 신부가 바이올린과 피아노로 멋진 연주를 하여 많은 갈채를 받았다. 이런 행사로 인하여 해성학교는 원산 전역에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원산에서 해성학교를 찾는 어린이들 중에는 15세부터 19세까지 나이가 많은 청소년들도 더러 있었다. 왜냐하면 돈도 없고 학교도 부족하여 취학의 기회를 놓친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성학교를 세웠기 때문에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아울러 이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교리를 지도하려고 노력했다. 본당 소속의 사립 국민학교의 해성보통학교에서는 교장은 명예직으로 원산 본당 신부가 역임하였으며, 부 교장인 오 병주 선생이 행정 처리를 하였다. 오병주 선생은 부 교장으로서뿐 아니라 신 보니파시오 주교의 비서로 수도원의 땅 매매 등의 행정 처리도 담당하였다.

1922. 4. 1 교회에서 인수하여 5년제 갑종상업학교로 변경하면서 남대문 상업고등학교로 개칭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동성중고등학교 東星中高等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제단법인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중등교육 기관. 학교내에 을조(乙組) 를 편성하여 신학교의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을조의 경우 남대문 상업학교의 교육과정을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받고 방과 후 신학원에서 신학교육에 필요한 라틴어와 교리및 지도신부의 영성을 받았다. 1968년 5월 김수환 추기경이 이사장으로 취임되어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마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3. 숭애의숙학교를 설립 (1096쪽 중평본당)

증평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096쪽)

주보로 '치명자의 모후'를 모시는 이 본당은 1919년 장호원 본당에서 분할되어 처음에는 충북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에 성당을 짓고 1920년 윤의병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창설되었다. 그러나 '고마리 본당'은 지리적으로 부적당한 위치에 있었음으로 1936년 4월에 폐지되어 공소로 되고, 그 대신 증평본당이 신설되었다.

1923. '조선 노동동맹' 결성 (246쪽 노동운동)

노동운동 (영) labor move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46쪽)

노동운동이란 근내적 임금노동자 계층이 자신의 생활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전개하는 조직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노동자의 일상적인 욕구, 임금등의 근로조건 유지 개선을 기본목표로 하는 동시에 자본의 강력한 지배에서 벗어나 사회의 떳떳한 구성원이 되려는 노동자의 조직적인 운동이다. 노동운동은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생산자로서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을 유지, 개선하기 위해 전개하는 노동조합 운동

둘째, 시민으로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을 만들어 나가는 정치운동

세째, 소비자로서 노동자사 보다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전개하는 각종 협동조합운동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19세기 말 임금노동자가 출현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3.1운동이 실패한 뒤 대중적 조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정부와 사용자와 노동자의 주역에 의해 구체적으로 다듬어 지는 것이 노동운동의 성격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 이 삼자가 걸어온 역사적 체험과 기능상의 특수성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된 다른 나라 노동의 궤적과는 다른 형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1923. 은율본당 내 성모유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9쪽)

은율본당 殷栗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79쪽)

1887년, 로(Jean Rault, 1860-1902) 신부가 황해도의 고정 선교사로 임명되어 은율에서 40리 상거한 장련(長連)에 정착하여 전교하면서 은율에 처음 공소를 개설한 이래, 1902년 5월에 공소로부터 본당으로 승격된 황해도 은율본당 관내에서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물론 유치원마저도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아쉬움을 느껴왔다. 그러다가 이보환(李1褓煥 요셉, 1893-1944) 신부가 부임한 후 유치원부터 설립하기로 중론이 모아져 300원의 기금으로 1923년에 성모유치원(후에 해성유치원, 은율유치원으로 개명)을 개원하였다. 첫해에 원아수는 54명에 달하였고, 유자격 교사 2명이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한편 1929년 4월 8일, 은율본당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1895-1950 행불) 신부는 가정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해성야학원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개설하자 8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 해성학원과 앞의 유치원을 위해 1931년 8월 18일 은율분원이 신설되어 이화 우술라 수녀와 김 발렌티나 수녀, 그리고 송 에밀리아 수녀 등 3명의 수녀가 파견되었다. 수녀들은 학원 학생들 뿐만 아니라 유치원 원아들에게도 교리와 유희, 노래 등을 열심히 가르치고 전교도 하게되자 세인의 평판도 좋아지고 학교와 유치원이 크게 발전하였다.

1936년에는 본당유지의 기증으로 2층 연와조 양관(洋館)을 건축, 1층을 유치원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평양 대신리본당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1905-1982) 신부는 축성식에 참석했다가 시설이 미비한 것을 보고 돌아가 미끄럼틀과 그네 등을 평양에서 제작하여 기증했다. 그리고 성모 유치원의 명칭도 은율유치원으로 바꾸었다.

8·15해방 후 북한지역의 공산화로 인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철수하였다.

1924. 명월구본당 교우촌 내에 보록학교 개설 (389쪽 명월구본당)

명월구본당 明月構本堂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89쪽)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본당.

1924년 교우촌 내에 보록학교가 개설된 후 1926년 대령동 본당의 창설과 함께 대령동 본당의 공소로 개설되었고, 이어 1931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36년 신첨본당을 분리, 창설하는 한편, 올리베타노 베네딕토 수녀회 분원을 설치하여 동(同)회의 수녀들로 하여금 진료소를 운영케 하였다. 그 후 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42년 성당 신축을 시작하였으나, 1945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교회의 재산을 몰수 당함으로써 폐쇄된 이후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다.

본당내의 신심단체로 부인들의 모임인 안나회를 포함하여 3개의 단체가 있었고, 본당 운영의 사업체로 해성학교, 진료소가 있었다.

1924. 해성학원 개원 (929쪽 의주본당)

의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29쪽)

1911년 평북 의주군 의주읍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모승천.

1921년 해성유치원과 1924년 해성학원이 개설되었고 1926년 메리놀회 수녀들에 의해 시약소와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광복 후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김교명 신부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1924. 가명·약명학교가 통합되어 가명보통학교로 인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6쪽)

약현본당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76쪽)

서울 약현본당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학교와 유치원 사도직에 봉사하였다. 약현본당에서는 이미 1895년부터 약현서당을 세워 어린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해 왔으며 1901년에는 특히 여자 어린이의 교육에 관심을 가진 두세(Camille Doucet, 1853-1917)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학생은 30여명이었으며 2명의 한국인 수녀가 매일 아침 학교에 나와 교리, 경문, 바느질 등을 가르치고 본원으로 돌아갔다. 1906년에 남자 학교 건물을 새로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加明)학교라 하였다. 1909년에는 두 학교가 가명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초기부터 꾸준히 아이들을 가르쳐 오던 수녀들은 1911년 3월 20일 정식으로 분원이 설립되어 더욱 학교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약현분원은 서울 시내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설립된 수녀원의 분원이었다. 당시 두세 신부는 어려운 재정난 속에서도 두 학교를 공립학교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고 노력하며 교과목을 공립학교와 같게 하고 또 교육도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떨어지지 않게 운영하였다.

수녀들은 이렇게 정성껏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학교발전에 헌신하였다. 그후 비에모(Paul Villemot, 1869-1950) 신부가 1918년에 모든 면에 손색이 없도록 여학교를 개축하였고 이듬해인 1919년에는 남학교를 신축하였다. 그해 6월 15일 뮈텔 주교는 두 학교의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때까지도 남학교는 약명, 여학교는 가명으로 불리웠고 1922년도 재학생수는 남학교 250명, 여학교 220명이었다.

이 무렵 천주교회의 교육사업은 몇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우선 재정난으로 인한 운영의 난관이 있었고 또 1915년에 개정된 [사립학교규칙]에서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을 금하였으므로 학교 창설자의 목적과 의의가 위협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10년간의 유예기간이 있었으므로 그 기간을 최대한 이용하였고, 그 이후에 교리교육을 방과후에 실시하는 방법을 마련하였다. 또 한가지 문제는 1924년부터는 모든 교사들에게 교원자격증이 엄격히 요구될 것이었으므로 인적·물적자원의 결핍상태에서 어렵게 운영되고 있는 본당학교들이 현상유지나 될지 불안한 점이었다. 이런 문제들이 당시 천주교 학교 전체가 겪는 어려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계성보통학교는 1924년에 6년제 지정보통학교 인가를 받았고 이어 약명·가명 양교 역시 1924년에 지정보통학교 인가를 위한 교섭을 시작했다.

이듬해에 양교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명보통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어 학업을 마친 학생들에게 공립상급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졸업장을 줄 수 있게 되었다. 1926년도부터는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여자부가 좋은 성적을 내게 되어 이로 인해 입학지원자가 초과되어 교사를 증축해야 했다. 당시 가명학교는 재학생이 약600명의 큰 학교로 발전되어 있었으며 증축공사는 1928년 6월 10일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1930년에는 4,000원의 공사비를 들여 여자부 교사를 증축하기 위해 임시로 봉래정 전 남대문상업학교 교사로 옮겨가 수업을 하였다. 증축공사 준공 후에는 학예회를 열어 일반 학부형들에게 기쁨을 주었으며 이후 해마다 개최하는 학예회 및 전람회는 일반의 호평을 받았다. 가명학교의 발전과 함께 한 수녀들의 헌신은 이후 일제말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으나 한국전쟁 후 1954년부터는 성가회 수녀들이 약현본당에 오게되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철수하였다.

1924. 12. 8 원산본당 학교와 성당 축성식 (함경도 천주교회사 자료집 제2집-원산교구연대기,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원산본당 元山本堂 (함경도 천주교회사 자료집 제2집-원산교구연대기,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공립국민학교의 권리와 의무를 다 누리고 있는 원산본당 학교는, 1924년 4월에 3학년이 이미 있던 2학년에 추가되었고, 그렇게 공립학교처럼 6학년이 될 때까지는 매년 성장할 것이다. 이 학교는 남학교인 동시에 여학교인데, 국가의 인가에 따라 학교 조직이 완료되면, 600명의 소년과 300명의 소녀들을 가르치게 된다. 이제 소녀들을 따로 가르쳐야 하고 또 소년들이 각 학년마다 그 숫자가 많아서 두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 교실을 증가시키는 것이긴급하게 필요해졌다. 옛 학교의 교실 4개만을 가지고는 벌써 불충분하게 되었고 그래서 일부 소년들은 오전에, 또 다른 일부 소년들은 오후에 같은 교실에서 가르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24년 9월 말, 주교가 간도로 견진성사를 주러가는 도중에 며칠 간 이곳에 들렀을 때, 이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 건축은 각각 60명 가량을 수용하는 교실 4개의 전체 신축 학교 계획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미장이일은 베드로 수사의 감독하에 중국인들이 했고, 조수일은 대개가 가난한 교우들인 조선인들이 했으며, 목수일은 야누아리오와 고트립(아우어) 두 수사가 맡아 했다.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12월 초, 건물 골격이 완성되어 최소한 그것을 임시로 널판지로 덮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3월 말, 작업이 계속되어, 5월 중순에는 드디어 건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더 큰 과제가 생겼다. 원산의 작은 성당은 아마 세상의 모든 주교좌 성당 중에서 가장 빈약하고 가장 작은 성당일 것이다. 주일이나 첨례때에는 미사를 두 번 드리는데도 교우들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서 있거나 장궤를 하고도 자리가 없었다. 여름에는 더워서 안에 있을 수가 없다. 성당에서의 주교 미사란 공간의 부족으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작년의 통계에 따르면 신자수는 시내가 452명이고 근교에 130명이 있다. 그러므로 더 큰 성당을 건축하는 것이 불가결하게 되었다. 주교님과 많은 상의와 계획 끝에 결국 국민학교를 곧 전부 건축하고, 그 건물의 일부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빈약한 포교지 자금을 동원하는 크고도 의협적인 결정이었다.

봄 동안에 바위들을 폭파하고, 머릿돌을 놓았다. 5월말에는 건축이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미장이일은 중국인 진 요셉 도제들을 데리고 했는데, 그들가운데는 교우들도 여러명 있었다. 11월 말, 건물은 전차 완성단계에 들어섰다. 이 건물은 이미 봄에 완공 된 건물을 포함하고 있는데, 1층에는, 각각 60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9개의 교실이 있고, 중간건물 2층에는, 교실 1개와 교사실, 그밖에 성당과 제의실이 있다. 12월 초에 몇몇 교실과 성당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12월 8일에 축성을 하게 되었다. 성당의 시설을 위해서는 성 분도 수도원이 관대하게 많이 기여했다.

1925. 교황청 인가 (16쪽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노동청년회 (영) Jeunesse Ouvriere Chretienne /Young Christian Word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쪽)

청년노동자로 구성되어 청년노동자들과 함께, 청년노동자들의 손으로, 청년노동자들을 위하여 노동계를 그리스도적인 생활양식으로 만들고자 하는 단체로서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세가지 성격을 갖고 있다.

첫째, 일상생활을 통하여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둘째, 하루하루의 생활환경 속에서 동료노동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수련을 쌓아야만 한다.

셋째, 청년노동자들에게 공동적으로 해결 되어야 하는 문제에 있어서나 일치되어야 할 상황속에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청년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벨기에의 가르딘(Joseph Cardijn)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1925. 빈민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 해성학교, 유치원, 시약소를 개설하여 활동 (462쪽 베네딕토회)

베네딕토회 (영) Benedictine Order O.S.B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일정한 장소에 정주 하면서 공동체생활을 통한 철저한 수도생활이 가장 우선적인 베네딕토회의 목적이지만 지역교회의 필요성에 따라 교육, 학문, 포교활동 등 다양한 활동에 종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에 종사할 경우 반드시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기 때문에 대수도원의 공동체를 이탈하여 혼자 생활하면서 활동해야 할 때에는 일시적 혹은 임시적으로만 활동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베酈기토회 수도원안에서의 학교운영이나 신학, 철학, 과학 등의 연구활동 및 예술활동 등의 문화활동은 세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09년에 한국에 진출한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토회도 선교를 목적으로 독일에서 발족되었다. 이 수족은 1884년 베네딕토회의 회원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안에서는 수도자, 밖에서는 선교사, 그래서 포교 성 베네딕토회로도 불리는 이 수도회는 이러한 창설의 기본정신에 따라 다른 선교회처럼 일정한 지역을 맡아서 교구와 본당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하는 교구내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교운영, 예술활동 등을 통해서 문화적으로 교구 전체의 사목을 돕는데 있었다. 그러나 창설 즉시 진출한 동아프리카(현 탄자니아) 에서는 부득이 교구중심의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한국에서는 교육사업을 통한 기본적인 선교방침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한국진출 : 성 오틸리엔의 성 베네딕토회는 당시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1909년 2월 사우어(Sauer) 신부 등 2명의 수사신부가 내한하여 서울 백동(現 惠化洞)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함경남도 덕원을 거쳐 경상북도 왜관에 정착할 때까지 많은 어려움과 수난을 당하였다.

⸁ 서울시대(1909∼1920) : 사범학교 설립과 운영계획으로 뮈텔 주교가 초청한 본 수도회는 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서울 백동 낙산 아래 10헥타르(약3만평)의 땅을 매입하여 수도원의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고 1911년 3층 벽돌로된 거대한 수도원을 완공시켰다. 이미 1909년 말 정식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아울러 1910년에는 내한 목적으로 숭공학교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1913년 수도원은 대수도원으로 승격하였으나 숭신학교는 폐교하게 되었다. 지원자가 없다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몇몇 수사들이 중국으로 동원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목공, 철공, 열차,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직공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이 수도회는 수도생활뿐 아니라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포교수도회로서 본당사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의 반대로 이를 서울에서 실현시키지 못하고 함경남북도와 간도지방을 관할하는 원산교구가 설정되던 1920년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여 숭공학교를 폐교하고, 1927년 서울의 수도원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 덕원시대(1920∼1949) :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에서는 아프리카 포교지가 붕괴된 뒤 자연 한국 포교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20년 8월 5일에 교황청에서도 한국의 원산교구 위임을 허락하자 곧 1921년 5월 1일 사우어 신부는 주교로 성성되었다. 교구 사목은 원래 이 회의 선교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서울의 베네딕토회원들은 이 제의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6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1927년 덕원의 새 수도원을 완공하여 그 해 11월부터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덕원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리하여 덕원수도원은 원산 포교지에 있어서 수도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되어 1940년 1월 12일 덕원면속구가 될 때까지 수도원 생활뿐만 아니라 원산교구 내에 있어서의 본당사목활동, 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야만 했다. 이에 투칭(Tutzing)의 포교 베네딕토회 수녀들이 1925년 11월 원산으로 내한하여 본당사목활동을 도울 뿐만 아니라 빈민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인 해성학교, 유치원 시약소 등을 개설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40년 덕원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다. 이 밖에 덕원수도원에서는 출판시설을 갖추어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바오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다. 일제의 탄압속에도 이처럼 발전한 수도회는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주둔하고, 1946년 토지개혁이 실시된 뒤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결국 1949년 5월 9일에 수도원의 모든 장상을 비롯한 신부, 수사들은 체포되어 독일인 신부 6명과 한국인 신부 5명이 1950년 10월 처형되었고, 사우어 대 수도원장을 비롯한 18명의 신부, 수사, 수녀 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954년 1월 42명의 신부. 수사·신부들이 생환되어 2년간의 휴양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서의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 왜관시대(1952∼현재) : 1951년 미국을 방문중이던 샹트오틸리엔의 크리소스토모 종원장은 당시 미국에 체류중인 스위스 출신의 전 연길교구 선교사 비테를리 신부에게 한국에 다시 진출하여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회를 건설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그를 한국 베네딕토회의 장상으로 임명하였다. 비테를리 신부는 일본을 거쳐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남쪽으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토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테를리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 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이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식구가 크게 증가되었다.

1955년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바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왜관에서도 분도 출판사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교회의 문서전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1971년 4월 왜관수도원의 대 원장직이 이동호 신부에게 이양됨으로써 베네딕토회는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또한 덕원교구에서 활약하던 스위스의 올리베타노 수녀들도 다시 한국에 진츨하여 각기 대구와 부산에 수도원 공동체를 신설함으로써 베네딕토회 여자수도회도 남한에서 완전히 그 기반을 굳혔다.

1925. 계성보통학교 유치반으로 계성유치원 시작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1쪽)

계성유치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11쪽)

계성유치원은 1925년 계성보통학교 유치반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명동본당에서 박종기 스콜라스티카 수녀가 예비자반을 운영하며 이 예비반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읽고 쓰는법을 가르쳤는데 반응이 좋아 곧 유치반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교실부족으로 곧 중지되었다가 1927년에 교실이 증축되면서 1928년부터 다시 유치원생을 모집하여 학교부속사업으로 운영해 왔다. 그 후 1935년에 3,000원의 경비를 들여 원사를 낙성하고 9월 2일부터 원아를 모집, 9월 8일에 개원식을 갖고 정식으로 출발하였다. 여기에 최초로 부임한 수녀는 김정녀 울프러시아수녀 였다.

1941년 9월 18일 화재로 유치원이 전소하여 종현성당 강당 지하실에서 수업을 하면서 복구작업에 착수하여 1942년 봄에 새 원사의 낙성을 보았으며 원아들의 다양한 재능은 전국에 알려졌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폐원되었다가 1954년 4월 5일부터 다시 그전 국민학교 자리에서 문을 열었으나 그 자리에 성신대학 의학부(현 가톨릭 의과대학)가 개교함에 됨으로써 또 다시 폐원되었다.

그 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계성여중고, 국민학교를 직영하게 되면서 유치원 설립의 필요성을 느껴 1966년 10월 28일 당시의 관구장 방 아녜스 데레즈 수녀를 설립자로 하여 재설립 하였고 1967년 3월 7일 계성여중고 탁구장으로 쓰던 건물을 개조하여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71년 3월 1일 계성국민학교 지하 1,2층 348.05평에 최신시설을 갖춘 새 원사로 이전하였다. 1972년 5월 23일 재단법인 천주교 쌘뽈수도원 유지재단으로 설립자 명의변경이 이루어졌다. 1986년 계성국민학교 보수공사 이후 계성여고 생활관으로 이전, 원아수를 줄이고 임시로 사용하였다. 1987년 8월 15일부터 용산의 현 위치에 634.23평에 이르는 계성유치원과 함께 437.84평의 수녀원 건물의 착공작업에 들어가 1988년 12월 말에 준공을 보고 1989년 신학년부터 8학급 240명의 원아를 모집하여 새로운 최신식 시설을 갗추고 원아교육에 임하고 있다.

수녀원 직영인 유치원인 만큼 다른 어떤 유치원에서보다 창의적이고 수도회 고유의 카리스마를 실천하는 교육기관이 되도록 유념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1926. 4. 1 해성학교는 6년제로 학업연한을 연장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24쪽)

해성학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24쪽)

1921년 5월, 워산 본당으로 부임해온 옥 엑카르트(Andreas Eckardt)신부가 원산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너무 많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서울에서 함께 온 오병주 선생과 동년 5월 15일부터 본당내에 온돌방 두칸을 빌려 야학 강습소로 개설하였다. 처음에 7명의 학생을 모아 이 야학 강습소로 출범하여 1922년 3월 7일부터는 4년제의 해성 보통학교로 승격하였고, 1926년 4월 1일부터 학업연한을 6년제로 연장하였다. 1928년에는 15학급의 학생 689명, 교사 17명으로 늘어났다. 학교 이름을「해성(海星)」이라고 지은 이유는 성모님의 이름을 따서 바다의 별이라는 뜻이 포함된 것이다. 성모님께서 넓은 바다에서 환히 비추어 주는 별처럼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지혜를 비추어 줌으로써 장차 이 나라에 큰 별이 되어 달라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제 당시 천주교회에서 세우는 보통학교는 대개「해성」이라는 학교명으로 통일한 것이다.

포교 성 베네딕도회의 수녀들이 원산 해성학교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1926년 그리소스토마 수녀가 해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동년 2학기부터는 방과 후에 해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예비수녀로서 맨처음 교사직에 있었던 이는 서울에서 온 청원자 김 데레사였다. 동년 3월 14일에는 원산에서 제일 인정받는 일본인 여학교에서 해성학교 학생들의 음악 발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원산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어린이들의 음악발표회였다. 유 플라치도 노이기르크(Placidus Neugirg, 兪, 1894. 10. 7 - 1967. 9. 7)신부가 어린이들과 함께 협주를 하였으며, 제일 갈채를 받았던 것은 그리소스토마 수녀가 지도했던 '나비'유희였다. 손님들의 대부분은 학부모들과 교회를 옹호하는 이들이었으며 그 외에 교인들도 있었다. 프로가 끝날 때마다 박수 갈채가 대단하였다. 동년 10월 20일, 또다시 일본 여학교에서 연주회가 있었다. 찬조출연으로 서울에서 온 독일인 스투데니(Studeny)와 유 플라치도 신부가 바이올린과 피아노로 멋진 연주를 하여 많은 갈채를 받았다. 이런 행사로 인하여 해성학교는 원산 전역에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원산에서 해성학교를 찾는 어린이들 중에는 15세부터 19세까지 나이가 많은 청소년들도 더러 있었다. 왜냐하면 돈도 없고 학교도 부족하여 취학의 기회를 놓친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성학교를 세웠기 때문에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아울러 이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교리를 지도하려고 노력했다. 본당 소속의 사립 국민학교의 해성보통학교에서는 교장은 명예직으로 원산 본당 신부가 역임하였으며, 부 교장인 오 병주 선생이 행정 처리를 하였다. 오병주 선생은 부 교장으로서뿐 아니라 신 보니파시오 주교의 비서로 수도원의 땅 매매 등의 행정 처리도 담당하였다.

1926. 호수천신학교 발족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5쪽)

호수천신학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5쪽)

1938년 11월, 해성유치원이 이전하고 빈민학교인 '호수천신학교' 에서 '성데레사 집' 아래층을 모두 인수하게 되자 가난한 아이들의 기쁨은 매우 컸다. 호수천신학교를 통해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국민학교의 교과과정과 교리를 가르치는 그리소스토마 수녀의 열성적인 모습은 이 학교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다. 350명이나 되는 호수천신학교의 학생들은 '성데레사 집' 아래층에 있는 3개의 교실에서 오전, 오후로 나누어 공부하였다.

30년대 초반까지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거리에서나 어디서든지 가난하고 방황하는 어린이들을 만나면 학용품을 마련하여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애국정신을 심어주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굳건한 의지를 갖도록 일깨워주었다. 그리소스토마 수녀의 확고한 교육 이념 하에서 호수천신학교의 어린이들은 한글을 터득하고 점차 신앙에 눈뜨게 되었다. 1926년 발족을 본 호수천신학교는 1941년 4월에 드디어 정식 국민학교로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이전까지는 호수천신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적으로 중학교의 입학 자격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호수천신학교가 정식 국민학교로 인가됨에 따라 이제까지의 특과 4년제 과정에서 6년의 정규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치게 되었다.

6년의 정규 소학교 과정을 마치게 되면 병원의 보조원으로 일 할 수도 있고 똑똑한 아이는 그 곳에서 실습하다가 간호원 자격시험도 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입학을 원하는 어린이들은 더욱 늘어갔으나 여러가지 여건 상 이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음이 그리소스토마 수녀에게는 무엇보다 큰 고통이었다. 호수천신학교는 정식학교로 인가를 받은 후에는 남학생도 입학시켰으나 늘 여학생의 수가 훨씬 많았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여자보다 남자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었고 여자에게 돈을 들여가면서 공부시키려는 열의가 없었기 때문에학비가 저렴한 이 학교에는 여학생들이 더 많이 입학했던 것이다.

1941년부터는 일본인 막달레나 수녀와 사베라 수녀 그리고 지원자 한 명이 그리소스토마 수녀를 도와 함께 일하였다. 호수천신학교의 학생수가 증가됨에 따라 매년 영세자가 속출하였기 때문에 수녀들에게 큰 보람을 안겨 주었다.

1926. 원산본당에서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은 소학교 교육의 기초를 여자어린이들에게 지도 - 호수천사빈민학교의 시작 (함경도 천주교회사 334쪽)

원산본당의 교육활동과 의료활동 (함경도 천주교회사 334쪽)

베네딕도 수도회의 표어처럼 수녀들도 "기도하고 일하라"는 뜻에 충실히 따랐다. 그 중에서도 수녀들은 원산 정착 이래 교육과 의료활동에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우선 교육활동은 1926년부터 크리소스토마 슈미트 수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에 여자 어린이들을 모아 작은 수녀원 마당에서 교리 지도를 하였고, 이어 해성학교 운동장 옆에 있는 초가집(해성학교 초기에 야학 강습소로 사용하던 집)을 빌려 어린이들에게 소학교 교육의 기초를 지도하였으며, 새 수녀원(성 임마꿀라따의 집)이 완공되면서 옛 수녀원(성 데레사의 집) 한쪽에 교실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薡 여기에 나오는 어린이가 점점 늘어 곧 100명 이상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빈민학교인 "호수천신학교"의 시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녀원에서는 1927년 4월 1일, 호수천신학교 한쪽에 "해성유치원"을 개원하여 수녀와 예비수녀가 원아들의 교육을 맡도록 하였다.

호수천신학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여자 소학교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유치원도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게 되었다.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1938년 학생수가 350명 정도에 이르자 성 데레사의 집 아래층에 3개의 교실을 마련하였고, 4년제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이 학교는 비록 빈민학교로 출발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과 교육 체제가 보통학교에 손색이 없게 되었고, 마침내 1941년 4월에는 6년제 정식 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학교에는 남녀 모두에게 입학을 허가하고 있었으나 주로 여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한편 해성유치원은 1931년 9월 30일에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유치원 책임자는 처음에 이센가르도 그라프 수녀, 다아틸디스 수녀 등이 맡다가 언어 소통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1933년 6월 부터는 한국인 김 데레사 수녀가 책임을 맡았다. 그 후 유치원에서는 원아들이 늘어남에 따라 3반으로 나누어 운영하였으며, 1938년 11월에는 수녀원 앞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전하였다.

의료활동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원산 수녀원이 자리잡게 되면서 이미 헤르메티스 그로호 수녀가 시작하였었다. 그 뒤 시약소 운영에는 1926년 10월에 입국한 푸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Fruktuosa Gerstmayer) 수녀가 참여하였으며, 헤르메티스 수녀가 1927년 7월 필리핀으로 요양차 떠나면서 푸룩투오사 수녀가 혼자 시약소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 시약소는 개설한지 얼마 안되어 주민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었고 날로 일손이 부족하게 되어 1928년 6월에 입국한 오트마라 암만 수녀가 푸룩투오사 수녀를 도와 일하게 되었다. 1929년 4월 사우어 주교는 수녀원을 방문하고 5칸 정도의 가옥을 매입하여 시약소로 사용토록 해주었다. 이때부터 시약소는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로 불리었다.

시약소에서 1928년 한 해 동안 치료한 환자수는 4,700명에 달하였으며 그중 400명이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1930년에는 4,800명이 치료를 받았다. 프룩투오사 수녀는 독일에서 약 조제법에 대해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직접 약초를 뜯어다가 갖가지 약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투약하거나 치료에 이용하였다. 1938년, 시약소가 새로 건립된 유치원 1층으로 이전된 뒤 수녀원에서는 독일인 의사 디오메데스 메페트르(Diomedes Meffert) 수녀의 명의로 허가를 받아 이를 운영하였는데, 이때부터 최 리오바 수녀가 간호 수녀로 프룩투오사 수녀를 도와 진료에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약소라기 보다는 '무료진료소' 형태를 띠게 되었다.

1926. 시약소와 고아원 건립 (929쪽 의주본당)

의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29쪽)

1911년 평북 의주군 의주읍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모승천.

1921년 해성유치원과 1924년 해성학원이 개설되었고 1926년 메리놀회 수녀들에 의해 시약소와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광복 후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김교명 신부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1926. 봉삼유치원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0쪽)

매화동본당 怟花洞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970쪽)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전신은 마렴 공소였다. 이 마렴 공소가 1896년 8월에 본당으로 승격되어 황해도에서 첫번째 본당이 되었다. 다음 해에 매화동으로 이전하였고 2대 본당신부인 우도(Paul Oudot, 1865-1913) 신부의 초청으로 1909년 10월 1일 박 뱅상 수녀와 배 베로니카 수녀가 파견되어 분원이 개설되었는데 이들은 황해도에 파견된 최초의 수녀들이었다. 수녀들은 본당의 여학교 운영을 맡아 여학생들의 신앙생활이나 교과과정을 지도함에 있어서 그곳의 신도와 주민들에게 완전한 만족감을 주었다. 특히 여학교에서는 1912년부터 우도신부의 장려로 양잠강습소를 개설하여 양잠기술을 널리 보급하여 주민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본당신부가 소집되어 본국으로 돌아가자 수녀들도 본원으로 귀원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동안 학교는 신자들의 자치에 맡겨졌었다. 수녀들의 재파견은 1919년 10월 샤보(Jules Chabot, 1886-1953) 신부의 귀임에 따라 이루어졌다. 1925년에는 수녀들에 의해서 본당의 가톨릭 여자 청년회가 창설되었고 1926년에는 유치원과 시약소가 개설되었는데 교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해 오던 수녀원은 1934년에 강양자 마리레지스 수녀가 새로 파견되어 옴으로써 4명으로 인원이 보강되었다.

해방 후에는 북한 인민정권의 방침에 의해 수녀들은 학교를 사임하고 본당일만 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어왔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5일에는 수백명의 좌익 폭도들이 매화동을 습격하여 많은 주민들과 수녀들을 학살하였다. 이때 김정자 수녀와 김정숙 수녀는 그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강양자 수녀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11월 2일에 죽은 두 수녀를 성당 뒷산에 안장하고 나서 무사히 월남하여 매화동에서 겪은 동산 치하의 생생한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황해도에서 제일 먼저 설립되었던 매화동분원은 북한에 있던 분원 중 가장 늦게까지 수녀들이 남았었던 분원이기도 하였다.

매화동에서 수녀들이 봉사했던 봉삼학교와 봉삼유치원, 그리고 소화시약소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도신부는 1898-1899년 사이에 종교교육과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안악지방에서는 이 봉삼학교를 안악지방 최고(最古)의 사학(私學)이라 일컬었다. 1899년에 학생수가 45명이던 남자부에서는 교리공부와 한문을 가르쳤으며 남자부에 이어 별도로 시작한 여자부에서는 기도문 이와에 한글과 가사도 가르쳤다. 초창기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1907년에 근대 초등교육기관으로 정식 설립되었고 2년 후에는 사립학교 인가를 받은 후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의 지도를 맡겼다. 매화동에 파견된 박 뱅상 수녀와 배 베로니카 수녀는 여학생들의 신앙생활과 가사 등과 같은 교과과정을 지도하였는데 1919년 당시 4년제 보통학교 과정이던 봉삼학교의 여자부 교과과정을 보면 1학년에서 영세문답, 고해문답, 성체문답을 배우고 첫 영성체를 한 후 견진문답과 조만과를 배웠으며 학과는 기초를 공부하였다. 2학년 때부터 조선어, 산술, 수신(修身) 등의 과목을 배웠는데 주로 김정자 수녀가 가르쳤다. 처음에는 방 2개, 부엌 1개의 초가집에서 따로 공부하였으나 1923년부터는 남녀공학이 되어 함께 공부하였다. 5대 신인균(申麟均 요셉) 신부가 재임하던 1934년에는 학생수가 500명으로 증가하고 6년제 학교가 됨에 따라 교실을 증축하고 보통학교(사립봉삼보통학교) 인가를 신청했으나 후임 신부인 이선용(李善用 바오로, 1897-1953) 신부가 학교유지 문제를 우려하여 인가신청을 철회하는 바람에 사립봉삼학교로만 존속하다가 해방 후 공산치하가 되면서 인민학교로 흡수되어 버렸다. 수녀들은 분원이 생긴 이래 공산당에게 화를 당하기까지 줄곧 봉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봉삼유치원에서도 매화동본당의 4대 주임신부인 퀴클리에(Leon 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가 1926년에 성당 근처의 집 한 채를 매입하고 봉삼유치원을 개원하여 김정숙 수녀가 담당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편 시약소는 본당에서 운영하는 유일한 자선 의료기관이었는데 평일에는 환자들에게 시약만 하였고 의사들에 의한 진료는 주일에만 있었다. 이곳에서 봉사한 의사는 하(河) 의사와 표(表) 의사였고 박 뱅상 수녀와 강양자 수녀가 간호를 담당하였다. 수녀들은 위의 유치원과 시약소 사도직을 봉삼학교와 함께 공산당에게 화를 입기까지 성실히 계속해 나갔다.

1926. '조선노동총연맹' 결성 (246쪽 노동운동)

노동운동 (영) labor move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46쪽)

노동운동이란 근내적 임금노동자 계층이 자신의 생활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전개하는 조직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노동자의 일상적인 욕구, 임금등의 근로조건 유지 개선을 기본목표로 하는 동시에 자본의 강력한 지배에서 벗어나 사회의 떳떳한 구성원이 되려는 노동자의 조직적인 운동이다. 노동운동은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생산자로서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을 유지, 개선하기 위해 전개하는 노동조합 운동

둘째, 시민으로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을 만들어 나가는 정치운동

세째, 소비자로서 노동자사 보다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전개하는 각종 협동조합운동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19세기 말 임금노동자가 출현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3.1운동이 실패한 뒤 대중적 조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정부와 사용자와 노동자의 주역에 의해 구체적으로 다듬어 지는 것이 노동운동의 성격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 이 삼자가 걸어온 역사적 체험과 기능상의 특수성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된 다른 나라 노동의 궤적과는 다른 형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1926. 시약소와 고아원 설립 (823쪽 영유본당)

영유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32쪽)

1902년 평남 평원군 영유읍 이화리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성파트리시오.

초대 주임신부로 섭가지본당 주임이던 망(Meng) 신부가 부임하여 교세신장에 주력하는 한편 1908년 영청(永淸) 학교를 개설하였고 1911년 보댕(Bodin) 신부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1916년까지 사목하였다.

1924년 부터 메리놀회 신부들이 본당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부터 교세가 신장되어 본당내에 시약소, 양로원, 고아원, 기술학교 등이 개설되었다. 또한 1925년 지역 최초의 고딕식 연과조성당이 건축되고 이듬해 메리놀 수녀회 한국지부가 본당에 설치되어 본당의 사무와 부속사업을 전담하게 되었다.

광복 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12월 10일 주임신부이던 홍도근(요한) 신부가 체포되고, 이어 1950년 6월 25일 성당을 비롯한 사제관, 양로원, 수녀원 등 모든 부속건물이 몰수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1926. 청진(淸津)본당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51쪽)

청진본당 淸津本堂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51쪽)

청진본당은 마르코 바인거(Markus Bainger, 方, 1981. 9. 6 - 1945. 9. 17)신부에 의해 1926년, 함경북도 청진시 포경동(浦傾洞)에 창설되었다. 본당의 주보는 성신이었다. 1935년, 나남(羅南) 본당을 분활, 독립시키고 1945년, 바인거 신부가 병사하자 이 재철(李載喆, 베드로, 1913-1950. 6. 24)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청진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분원이 창설된 것은 1940년 7월 22일이었으며 분원의 주보는「예수성심」이었다. 암브로시아 원장수녀는 일제의 침략 전쟁과 황국 신민화 정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과감히 분원 창설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본당 내의 빈민학교에서는 김 악녜스 수녀가 정식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옵타다 수녀와 사베라 수녀는 전교를 맡아하였다. 박 골룸바 수녀는 시약소를 맡아서 도처에서 몰려오는 환자들을 최선을 다하여 돌보아 주었을 뿐 아니라 본당의 교리반도 맡아 일하였다. 켈트루드 분원장 수녀는 학교의 교리반과 본당의 제의방, 임마꿀라따회도 겸하여 맡아 일하였다. 옵타다 수녀는 부인 예비자반과 아울러 주방을 맡아 많은 희생을 치루며 봉사하였다. 수녀들의 전교열에 부응하여 객실에는 예비자들이 끊일 사이 없이 모여들었다. 사베라 수녀는 청진에 사는 일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이처럼 수녀들은 많은 일들을 불평없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성실히 해 나갔던 것이다.

청진은 북쪽이었으므로 겨울에는 추위때문에 종종 수도 파이프가 얼어 곳곳에서 터지곤 하였다. 지하실에 배수관을 설치해야 되었지만 당시는 남자들은 모두 전쟁에 나가고 없었으므로 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배수관을 설치하였다. 배급타기도 수월치 않아 아침식사는 바나나 말린 것 2쪽과 우유 한 컵으로, 점심은 콩깻묵밥으로 저녁에는 죽으로 식생활을 해 나갔다. 그나마 옵타다 수녀가 텃밭에서 가꾼 채소로 부족한 영양을 보충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총독부의 신사참배에 대한 압력이 증가됨에 따라 수녀들은 이에 대치할 명분 때문에 고심해야 되었고 밤에는 야경을 돌아야 했는데 수녀들도 어쩔 수 없이 일제의 지시대로 밤중에 방한복을 착용하고 야경 교대 순번에 맞추어 참례했다. 이런 어려운 일을 늘 분원장 수녀가 앞서서 지도해 나갔다.

1927. 4. 1 원산본당에서 해성유치원을 설립 (함경도 천주교회사 334쪽)

원산본당의 교육활동과 의료활동 (함경도 천주교회사 334쪽)

베네딕도 수도회의 표어처럼 수녀들도 "기도하고 일하라"는 뜻에 충실히 따랐다. 그 중에서도 수녀들은 원산 정착 이래 교육과 의료활동에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우선 교육활동은 1926년부터 크리소스토마 슈미트 수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에 여자 어린이들을 모아 작은 수녀원 마당에서 교리 지도를 하였고, 이어 해성학교 운동장 옆에 있는 초가집(해성학교 초기에 야학 강습소로 사용하던 집)을 빌려 어린이들에게 소학교 교육의 기초를 지도하였으며, 새 수녀원(성 임마꿀라따의 집)이 완공되면서 옛 수녀원(성 데레사의 집) 한쪽에 교실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薡 여기에 나오는 어린이가 점점 늘어 곧 100명 이상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빈민학교인 "호수천신학교"의 시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녀원에서는 1927년 4월 1일, 호수천신학교 한쪽에 "해성유치원"을 개원하여 수녀와 예비수녀가 원아들의 교육을 맡도록 하였다.

호수천신학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여자 소학교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유치원도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게 되었다.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1938년 학생수가 350명 정도에 이르자 성 데레사의 집 아래층에 3개의 교실을 마련하였고, 4년제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이 학교는 비록 빈민학교로 출발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과 교육 체제가 보통학교에 손색이 없게 되었고, 마침내 1941년 4월에는 6년제 정식 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학교에는 남녀 모두에게 입학을 허가하고 있었으나 주로 여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한편 해성유치원은 1931년 9월 30일에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유치원 책임자는 처음에 이센가르도 그라프 수녀, 다아틸디스 수녀 등이 맡다가 언어 소통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1933년 6월 부터는 한국인 김 데레사 수녀가 책임을 맡았다. 그 후 유치원에서는 원아들이 늘어남에 따라 3반으로 나누어 운영하였으며, 1938년 11월에는 수녀원 앞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전하였다.

의료활동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원산 수녀원이 자리잡게 되면서 이미 헤르메티스 그로호 수녀가 시작하였었다. 그 뒤 시약소 운영에는 1926년 10월에 입국한 푸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Fruktuosa Gerstmayer) 수녀가 참여하였으며, 헤르메티스 수녀가 1927년 7월 필리핀으로 요양차 떠나면서 푸룩투오사 수녀가 혼자 시약소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 시약소는 개설한지 얼마 안되어 주민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었고 날로 일손이 부족하게 되어 1928년 6월에 입국한 오트마라 암만 수녀가 푸룩투오사 수녀를 도와 일하게 되었다. 1929년 4월 사우어 주교는 수녀원을 방문하고 5칸 정도의 가옥을 매입하여 시약소로 사용토록 해주었다. 이때부터 시약소는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로 불리었다.

시약소에서 1928년 한 해 동안 치료한 환자수는 4,700명에 달하였으며 그중 400명이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1930년에는 4,800명이 치료를 받았다. 프룩투오사 수녀는 독일에서 약 조제법에 대해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직접 약초를 뜯어다가 갖가지 약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투약하거나 치료에 이용하였다. 1938년, 시약소가 새로 건립된 유치원 1층으로 이전된 뒤 수녀원에서는 독일인 의사 디오메데스 메페트르(Diomedes Meffert) 수녀의 명의로 허가를 받아 이를 운영하였는데, 이때부터 최 리오바 수녀가 간호 수녀로 프룩투오사 수녀를 도와 진료에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약소라기 보다는 '무료진료소' 형태를 띠게 되었다.

1927. 덕원신학교 건립 (462쪽 베네딕토회)

베네딕토회 (영) Benedictine Order O.S.B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일정한 장소에 정주 하면서 공동체생활을 통한 철저한 수도생활이 가장 우선적인 베네딕토회의 목적이지만 지역교회의 필요성에 따라 교육, 학문, 포교활동 등 다양한 활동에 종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에 종사할 경우 반드시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기 때문에 대수도원의 공동체를 이탈하여 혼자 생활하면서 활동해야 할 때에는 일시적 혹은 임시적으로만 활동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베酈기토회 수도원안에서의 학교운영이나 신학, 철학, 과학 등의 연구활동 및 예술활동 등의 문화활동은 세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09년에 한국에 진출한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토회도 선교를 목적으로 독일에서 발족되었다. 이 수족은 1884년 베네딕토회의 회원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안에서는 수도자, 밖에서는 선교사, 그래서 포교 성 베네딕토회로도 불리는 이 수도회는 이러한 창설의 기본정신에 따라 다른 선교회처럼 일정한 지역을 맡아서 교구와 본당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하는 교구내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교운영, 예술활동 등을 통해서 문화적으로 교구 전체의 사목을 돕는데 있었다. 그러나 창설 즉시 진출한 동아프리카(현 탄자니아) 에서는 부득이 교구중심의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한국에서는 교육사업을 통한 기본적인 선교방침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한국진출 : 성 오틸리엔의 성 베네딕토회는 당시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1909년 2월 사우어(Sauer) 신부 등 2명의 수사신부가 내한하여 서울 백동(現 惠化洞)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함경남도 덕원을 거쳐 경상북도 왜관에 정착할 때까지 많은 어려움과 수난을 당하였다.

⸁ 서울시대(1909∼1920) : 사범학교 설립과 운영계획으로 뮈텔 주교가 초청한 본 수도회는 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서울 백동 낙산 아래 10헥타르(약3만평)의 땅을 매입하여 수도원의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고 1911년 3층 벽돌로된 거대한 수도원을 완공시켰다. 이미 1909년 말 정식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아울러 1910년에는 내한 목적으로 숭공학교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1913년 수도원은 대수도원으로 승격하였으나 숭신학교는 폐교하게 되었다. 지원자가 없다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몇몇 수사들이 중국으로 동원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목공, 철공, 열차,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직공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이 수도회는 수도생활뿐 아니라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포교수도회로서 본당사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의 반대로 이를 서울에서 실현시키지 못하고 함경남북도와 간도지방을 관할하는 원산교구가 설정되던 1920년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여 숭공학교를 폐교하고, 1927년 서울의 수도원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 덕원시대(1920∼1949) :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에서는 아프리카 포교지가 붕괴된 뒤 자연 한국 포교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20년 8월 5일에 교황청에서도 한국의 원산교구 위임을 허락하자 곧 1921년 5월 1일 사우어 신부는 주교로 성성되었다. 교구 사목은 원래 이 회의 선교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서울의 베네딕토회원들은 이 제의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6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1927년 덕원의 새 수도원을 완공하여 그 해 11월부터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덕원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리하여 덕원수도원은 원산 포교지에 있어서 수도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되어 1940년 1월 12일 덕원면속구가 될 때까지 수도원 생활뿐만 아니라 원산교구 내에 있어서의 본당사목활동, 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야만 했다. 이에 투칭(Tutzing)의 포교 베네딕토회 수녀들이 1925년 11월 원산으로 내한하여 본당사목활동을 도울 뿐만 아니라 빈민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인 해성학교, 유치원 시약소 등을 개설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40년 덕원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다. 이 밖에 덕원수도원에서는 출판시설을 갖추어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바오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다. 일제의 탄압속에도 이처럼 발전한 수도회는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주둔하고, 1946년 토지개혁이 실시된 뒤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결국 1949년 5월 9일에 수도원의 모든 장상을 비롯한 신부, 수사들은 체포되어 독일인 신부 6명과 한국인 신부 5명이 1950년 10월 처형되었고, 사우어 대 수도원장을 비롯한 18명의 신부, 수사, 수녀 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954년 1월 42명의 신부. 수사·신부들이 생환되어 2년간의 휴양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서의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 왜관시대(1952∼현재) : 1951년 미국을 방문중이던 샹트오틸리엔의 크리소스토모 종원장은 당시 미국에 체류중인 스위스 출신의 전 연길교구 선교사 비테를리 신부에게 한국에 다시 진출하여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회를 건설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그를 한국 베네딕토회의 장상으로 임명하였다. 비테를리 신부는 일본을 거쳐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남쪽으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토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테를리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 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이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식구가 크게 증가되었다.

1955년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바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왜관에서도 분도 출판사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교회의 문서전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1971년 4월 왜관수도원의 대 원장직이 이동호 신부에게 이양됨으로써 베네딕토회는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또한 덕원교구에서 활약하던 스위스의 올리베타노 수녀들도 다시 한국에 진츨하여 각기 대구와 부산에 수도원 공동체를 신설함으로써 베네딕토회 여자수도회도 남한에서 완전히 그 기반을 굳혔다.

1927. 영유여자기예학교 설립 (823쪽 영유본당)

영유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32쪽)

1902년 평남 평원군 영유읍 이화리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성파트리시오.

초대 주임신부로 섭가지본당 주임이던 망(Meng) 신부가 부임하여 교세신장에 주력하는 한편 1908년 영청(永淸) 학교를 개설하였고 1911년 보댕(Bodin) 신부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1916년까지 사목하였다.

1924년 부터 메리놀회 신부들이 본당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부터 교세가 신장되어 본당내에 시약소, 양로원, 고아원, 기술학교 등이 개설되었다. 또한 1925년 지역 최초의 고딕식 연과조성당이 건축되고 이듬해 메리놀 수녀회 한국지부가 본당에 설치되어 본당의 사무와 부속사업을 전담하게 되었다.

광복 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12월 10일 주임신부이던 홍도근(요한) 신부가 체포되고, 이어 1950년 6월 25일 성당을 비롯한 사제관, 양로원, 수녀원 등 모든 부속건물이 몰수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1928. 5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사들은 덕원에서 의료활동을 시작 (함경도 천주교회사 266쪽)

베네딕도 수도회의 의료활동 (함경도 천주교회사 266쪽)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온 후 가장 두드러진 역할 중의 하나는 의료봉사 활동이었다. 이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요셉 그라하머(J. Grahamer) 수사와 김재환(플라치도) 수사였다. 덕원 수도원에서 정식으로 일제당국의 인가를 얻어 의원을 개설한 것은 1928년 5월 부터였다. 당시 그리하머 수사는 이미 그의 치료솜씨에 고무된 많은 인근부민들로부터 칭송을 얻고 있었는데 서울의 국립병원 원장의 추천을 얻어 3년동안 의사 실습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교부받았다. 그는 서울에 있을 당시 10년 동안 공립 병원과 대학 병원에서 많은 수술을 도움으로써 이 자격증을 얻게 되었다. 그라하머 수사는 개원 즉시 김 플라치도 수사와 1명의 여자 간호원의 도움을 받아 헌신적으로 또 기술적으로 많은 환자들에게 봉사하였다. 실제로 개설 인가가 나오기도 전에 매일 20-30명의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였는데 그중 14,350명은 내과 환자들이었고, 4,530명은 외과 환자들이었다. 그 후 이 의원이 정부의 승인을 받게 되자 환자들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하여 매일 50-60명의 환자가 의원 문을 두드렸다.

처음 의원에서는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로 약을 주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원가만을 지불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28년 5월부터 1929년 1월까지 원산약국에서 제공한 약값만 해도 2,720엔(500마르크 이상)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의원에서는 점차 무료진료를 축소하고 약값을 올려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치료비는 1회에 대략 50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비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하루의 수입은 38억원에 불과하였고 반면에 지출은 인건비를 제외하고도 35원이나 되었지만, 영적이익이 너무 커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수도원은 물론이고 신학교, 본당 등에 천연두, 콜레라, 티푸스 등이 전염할 때면 이들 두 수사의 일은 더욱 바빠졌다. 1929년 여름에 이들은 작은 병원을 건립하였다. 그때까지도 치료실과 붕대실이 불충분하여 그라하며 수사는 조수 3명과 함께 손님을 위한 건물의 방 한 칸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방은 약국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이제 병원이 새로 마련되어 의사를 위한 방 2개 대기실과 약국을 위한 방들이 각각 하나씩 마련되었다. 그러나 수요에 비해 여전히 건물을 비롯한 제반 시설이 부족하였으며 병원의 운영은 자선 사업의 일환으로 행해졌으므로 거듭 적자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의료활동이 가톨릭을 홍보하여 신앙을 갖도록 인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선교와 마찬가지로 항상 모든 경우에 즉각적인 효과를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라하머 수사는 수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부득이 소액의 입장권을 발행하였다. 그러자 많은 환자들이 오지 않게 되었지만 이것은 그라하머 수사 환자 모든 환자들을 볼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한 조치였다. 2명의 수사는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지치고 굶주린 데다가 수도원에 돌아와서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그들을 찾는 환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1930년대 초에는 도움을 청하는 환자수가 평균 50-6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그라하머 수사는 주로 병원 안에서 일을 처리했고 중병일 경우에만 왕진을 나갔으나, 김 플라치도 수사는 붕대 가방을 들고 매일같이 나가다녔다. 마을에서 올 수 없는 병자들이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의료적 방문활동을 통해 직접 가톨릭 교리를 전하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라하머 수사와 김 플라치도 수사는 환자를 돌보는 중에 수많은 임종대세를 베풀 수 있었다. 이들은 1928년 5월에 의료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1930년 1월까지 1년 6개월 동안에만도 104명에게 임종 대세를 주었는데, 육체적으로 더 이상 구제될 희망이 없는 대부분의 환자들의 경우 죽기전에 대부분 임종 대세를 받으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요셉 그라하머 수사는 일에 지쳐 한때 본국으로 요양차 귀국하였고, 그동안 김 플라치도 수사가 혼자서 의료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약 1년만인 1932년에 그라하머 수사가 여러 가지 물약과 약제들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의료 활동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33년의 기록에 의하면, 1932년 1년동안 덕원병원에서는 21,065번의 진찰을 했고, 27,210회 약품을 조제하였으며, 2,070번 왕진을 해야만 했다. 2명의 수사가 이러한 의료활동을 담당하였으니, 그들의 노고가 얼마나 많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라하머 수사는 유럽에서 돌아오자마자 병원 증축에 착수하였다. 이 증축은 1933년 봄에 완성되었는데, 이로써 병원은 대기실 1개, 진찰실 1개, 붕대실 1개, 전기 방사선 치료실 1개, 약국 1개, 수술실 1개 등을 갖추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옛 야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8개의 병실 겸 입원실을 만들었는데 병실들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덕원 병원에서는 1934년 후반에 들어 다시 병실을 증축하게 되었다. 늘어나는 환자에 비해 병실이 턱없이 부족하였으므로 그라하머 수사는 환자들을 이웃에 있는 신자들의 집에까지 수용해야 했었다. 이에 그라하머 수사는 병원 소유의 한옥을 헌 다음 그곳에 병실로 쓰일 건물을 마련하였는데, 11월경에는 건물이 거의 완공되어 2인용 병실 6개, 욕실과 세면장, 작은 약국 1개, 휴게실 1개 등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병원은 이미 독일에서의 후원금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이 무렵부터는 완전히 자비로 운영해야만하였고, 이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이 후에도 병원은 나날이 성장해 갔으며, 그만큼 환자나 예비자들도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라하머 수사는 1935년 1월 16일에 그의 수도 허원 은경축을 지냈고, 다음해에는 두번의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일시활동을 중단해야만 했었다. 뿐만 아니라 1937년 5월 26일에는 방화로 보이는 화재가 병원에 발생하여 건물 일부가 손상을 입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활동에 대한 그라하머 수사와 김 플라치도 수사의 열정과 전교활동에 대한 노력으로 두 문제에서 모두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34년에서 1935년까지의 결실을 예로 들면, 이 1년간의 진료자수는 21,065명이었고, 약품을 나누어 준 수는 27,210명에 달하였다.

1928. 혜화동으로 이전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동성중고등학교 東星中高等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제단법인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중등교육 기관. 학교내에 을조(乙組) 를 편성하여 신학교의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을조의 경우 남대문 상업학교의 교육과정을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받고 방과 후 신학원에서 신학교육에 필요한 라틴어와 교리및 지도신부의 영성을 받았다. 1968년 5월 김수환 추기경이 이사장으로 취임되어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마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9. 3. 15 기명·성모학교가 성모보통학교로 승격 개칭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관후리 본당 囥後里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67쪽)

평양 관후리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성모보통학교와 양로원, 그리고 무료숙박소에서 그들의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1896년 르장드르(Louis Le Gendre, 崔昌根, 1866-1928) 신부는 평양 외성(外城)에 평안도 지방의 첫 본당인 평양본당을 세웠고 다시 1898년 5월 9일에 평양시내 중심인 장대현(將台峴)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그후 2대 본당신부인 르메르(Louis Le Merre, 1858-1928) 신부는 1909년 봄, 사제피정 후 스타니슬라 원장수녀에게 학교교사로서 일할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미 1905년에 평양 관후리본당 내에 남자교육기관인 기명학교를 설립한 바 있는 르메르 신부는 이듬해 5월 1일에는 여학생들을 위한 성모여학교를 세웠고 이들을 위한 교사로서 수녀들이 적임자라 생각하였으므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르메르 신부는 수녀들의 숙소 마련과 매월 생활비 6원씩과 연료와 채소, 여비 그리고 의복비 등을 본당에서 부담하기로 수녀원 측과 결정을 보았다. 이에 따라 가밀 원장수녀는 지방으로의 첫 파견을 결정하였고 1909년 9월 14일에 수녀 둘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쌘쟝 수녀와 김 세리나 수녀로서 이들이 평양에 도착함으로써 평안도에서는 최초로 수녀들의 전교와 교육활동이 시작되었다. 수녀들을 찾는 아동들과 부모들의 수가 나날이 늘어나게 되어 수녀들은 학교에서 교사의 직책을 맡아 볼 뿐 아니라 학부모들의 온갖 일에 상담역까지 보게 되어 교육 뿐만 아니라 전교사업에도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1929년 3월 15일, 기명·성모의 양교가 병합되어 6년제 지정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아 성모보통학교로 승격 개칭되었고 이후 성모학교는 평양교육계에서 명문으로 알려져 입학지원자가 늘어나게 됨에 따라 1936년 10월에는 본당 주임 크노르(Joseph W. Connors, 權) 신부의 노력으로 상수구리(上水口里)에 세워진 3층 철근 콘크리이트 최신식 건물의 긴축교사 낙성식과 함께 신교사로 학교 전부를 이전하였다. 이 건물은 공사비 75,000원의 거액을 투자하여 연건평 533평에 스팀시설과 실내수도, 수세식 화장실, 전기시설 등을 구비하였으며 교실 12, 교무실 1, 실험실습실을 갖추었다. 성당 경내에 있는 구 교사는 수리를 거쳐 성모학원, 성모유치원, 주일학교, 신자집회소 등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이후 성모보통학교는 시설면에서나 교육 내용면에 있어서 명실공히 평양굴지의 명문교로 발전하였다.

1940년 6월 27일 한국 최초의 방인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가 창립된 지 8년만에 첫서원식을 가져 11명의 수녀를 배출하고 그해 7월 관후리본당에 분원을 설치하게 됨에 따라 30여년간 교육사업과 전교 및 자선사업을 맡아오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모든 소임을 성모회의 수녀들에게 인계하고 그해 7월 30일 본원으로 복귀하였다.

1934년 1월 본당주임 크노르 신부는 성당 내에 있던 성모학교 구 교사 중 한 건물을 정식 양로원사로 정하고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을 모았다. 재정은 본당신부가 맡고 수녀들은 이들을 정성껏 돌보아 오던 중 분원철수에 따라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에서 인수하여 1949년까지 운영하였다. 양로원과 함께 설치되어 무의무탁한 걸인과 고아 등 15명을 수용하고 수녀들이 돌보았는데 후에 양로원에 흡수되었다.

1929. 3. 15 기명과 성모학교를 병합하여 성모보통학교로 승격 개칭 (624쪽 성모보통학교)

성모보통학교 聖母普通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24쪽)

기명학교와 성모여학교의 후신(後身). 1898년에 평양의 제 2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르 메르(Le Merre) 신부는 평안도 전지역을 관장하면서 포교에 전념하는 한편, 교육사업에도 눈을 돌려, 1905년 9월 1일 관후리 천주교회 안에 남자 교육기관인 기명학교를 설립하고 1906년 5월 1일에는 여성에게도 신학문(新學問)을 배울 기회를 주기 위하여 성모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에 20평과 10평 규모의 교실 2개를 가지고 유아반과 소학교반으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사방에서 아동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들었으므로 다시 교실을 새로 증축하여 여학교를 따로 신설한 것이다. 이에 여학생을 담당케 하기 위해 서울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의 수녀들을 교사로 초빙하여 학생지도와 포교사업에 봉사케 하니 학생수는 날로 늘어나고 전교사업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27년 평양교구가 설립되면서 1929년 3월 15일에 기명과 성모의 두 학교를 병합하여 성모보통학교로 승격 개칭하게 되었고, 1936년 10월에는 상수구리(上水口里)에 3층 철근 콘크리크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였는데, 성모보통학교는 날로 발전하여 명실공히 평양 굴지의 명문학교가 되었다. 이에는 30여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한 성 바오로회 수녀들의 공이 컸다. 그들은 1940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 사업을 인계하고 서울 본원으로 돌아갔다. 1945년 광복후 공산당 치하에서 몰수당하여 폐쇄되었다.

1929. 4. 8 은율본당 내 해성야학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9쪽)

은율본당 殷栗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79쪽)

1887년, 로(Jean Rault, 1860-1902) 신부가 황해도의 고정 선교사로 임명되어 은율에서 40리 상거한 장련(長連)에 정착하여 전교하면서 은율에 처음 공소를 개설한 이래, 1902년 5월에 공소로부터 본당으로 승격된 황해도 은율본당 관내에서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물론 유치원마저도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아쉬움을 느껴왔다. 그러다가 이보환(李1褓煥 요셉, 1893-1944) 신부가 부임한 후 유치원부터 설립하기로 중론이 모아져 300원의 기금으로 1923년에 성모유치원(후에 해성유치원, 은율유치원으로 개명)을 개원하였다. 첫해에 원아수는 54명에 달하였고, 유자격 교사 2명이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한편 1929년 4월 8일, 은율본당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1895-1950 행불) 신부는 가정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해성야학원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개설하자 8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 해성학원과 앞의 유치원을 위해 1931년 8월 18일 은율분원이 신설되어 이화 우술라 수녀와 김 발렌티나 수녀, 그리고 송 에밀리아 수녀 등 3명의 수녀가 파견되었다. 수녀들은 학원 학생들 뿐만 아니라 유치원 원아들에게도 교리와 유희, 노래 등을 열심히 가르치고 전교도 하게되자 세인의 평판도 좋아지고 학교와 유치원이 크게 발전하였다.

1936년에는 본당유지의 기증으로 2층 연와조 양관(洋館)을 건축, 1층을 유치원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평양 대신리본당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1905-1982) 신부는 축성식에 참석했다가 시설이 미비한 것을 보고 돌아가 미끄럼틀과 그네 등을 평양에서 제작하여 기증했다. 그리고 성모 유치원의 명칭도 은율유치원으로 바꾸었다.

8·15해방 후 북한지역의 공산화로 인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철수하였다.

1929. 덕원본당에서 야학교를 운영 (함경도 천주교회사 299쪽)

덕원본당 (함경도 천주교회사 299쪽)

덕원본당에서는 각 공소마다 야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활동은 특히 전교의 차원에서 아주 효과가 있었다. 당시 조선의 각 청년회에서는 활발히 야학 활동을 벌여 애국 계몽운동의 차원에서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다. 반면에 덕원 본당에서 설립한 야학교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일반 야학교와는 달랐으므로 일본 경찰은 가톨릭 교회 측에서 야학교를 설립하는 데 대해 어느 정도 중립을 지켜 주었다. 그러나 국민 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결국 야학교는 조선 청년들의 교육열에 부응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활동이 지식의 전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교리의 전달에 있었고, 또 그들 자신이 국민 교육의 기초가 학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느끼고 있었을지라도 자연히 이것은 민중계봉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야학교는 덕원 본당 관내에서만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교구에서는 각 본당에 야학을 장려하고 있었고, 실제로 다른 곳에서도 야학이 큰 결실을 맺곤 하였다. 베네딕도 회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우선 어린이들과 젊은 사람들을 위한 예비자교리와 교리 강의를 체계화하고, 강화하고자 하였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확실한 교리 내용을 전달해 줌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양육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 교사들은 공립학교나 사립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세속의 일반 과목도 가르쳐 주어야 했다.

야학교에서의 수업은 덕원에서는 대체로 일요일과 첨례날에 이루어졌으며, 지방 공소에서는 일이 끝난 저녁때나 추수가 끝난 늦가을 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덕원본당과 같은 경우는 수도원에서 두번 강의를 하였는데, 즉 일요일 성당에서 본미사 후에 어린이들과 성인들을 위해 함께 수업을 열고, 또 한번은 더 늦은 시간에 어린이들만을 위해서 두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야학에 다니는 학생 대부분이 외교인들이라는 점이다. 야학 초기인 1929년의 기록에서도 "현재 50명의 소년들과 35명의 소녀들이 이 강의를 듣고 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외인들이다. 특히 여기(덕원을 말함)에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어느 마을의 외인 어린이들이 이날에 아주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들은 일요일 수도원의 기도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와서는 가끔 오후에 만도 후까지 남아 있는다."고 하여 외교인들이 야학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야학 활동이 전교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30. 성모병원 설립 (731쪽 신의주본당)

신의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31쪽)

1922년 평북 신의주시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천주성신(天主聖神). 1910년 인천에서 신의주로 이주해 온 김소사가 이듬해 구네군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한 후로 신의주 일대가 전교되기 시작하여 1912년 공소가 개설되었고, 그 뒤 1921년 신의주가 평안북도의 도청소재지가 되면서 교세가 급격히 신장, 1922년 신의주시 초음동에 성당이 건축되고 초대 주임신부로 박정렬 신부가 부임하였다. 1924년 본당이 신의주시 전사동으로 이전되었고, 4대 주임 페티프런(Petipren) 신부 시절인 1930년 메리놀 수녀회 분원이 설치됨과 동시에 의사수녀, 간호원 수녀들이 시약소와 성모병원을 개설하였다. 본당운영의 사회사업체로는 1930년 개설된 성모병원, 시약소, 야간학교 등이 있었다.

1930. 원산본당의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청각 장애인을 위한 교리 시작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75쪽, 173쪽)

원산본당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75쪽, 173쪽)

원산본당의 제 9대 본당 신부로는 포교 성 베네딕도회의 옥 안드레아 엑카르트(Andreas Eckardt, 1884-?)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 쌍트 오틸리엔에 학교 설립의 뜻을 전하였고, 서울에서 초빙하여 온 오병주 선생과 함께 1921년 5월 15일, 온돌방 2칸을 빌려 야학 강습소를 개설하였다.

미취학 아동이 많음을 안타까이 여긴 엑카르트 신부는 스스로 교단에 서서 지도 하였으며, 빈곤한 어린이들에게는 일체의 학비를 면제시키고 학용품까지도 대주면서 신 교육을 펼쳐 나갔다. 3개월 후에는 학생이 60명에 달하여 주야로 강습소를 운영하였다. 한국 사람들의 높아가는 향학열에 따라 입학 지원자는 격증하였고, 일반 사회에서 완전한 초등교육 기관으로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에 1922년 3월 7일에는 4년제 보통학교로 승격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나 운영난에 봉착하자 옥 신부는 교사 한 명의 급료를 원산 본당의 유지비에서 엄출키로 하였으며, 한 명분은 옥 신부 자신이 부담하였고, 나며지 한 명은 원산 교회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그밖의 경비는 원산 사회 유지들의 보조금과 학생들의 수업료로 메꾸어 갔다. 이후 1923년 4월 1일부터 학교 경영은 원산 본당에서 맡기로 하였다. 1924년 4월, 학생수가 450명에 달하여 교사 증축이 불가피하게 되자 건평 450의 벽돌건물을 건축하였고, 1926년 4월 부터는 교육 기간을 6년으로 연장하였다. 이렇듯이 해성학교는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학생 수가 더욱 증가하였다.

청각 장애자 교리 -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이 처음으로 청각 장애자에게 교리를 지도한 것은 1930년초, 원산 본당에서였다.

교육의 혜택을 못받아 문맹을 면치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던 그리소스토마 수녀가 하루는 열심한 신자 가정에 청각 장애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의 부모들이 청각 장애자인 아들 요한의 첫 영성체 때문에 고심하는 것을 알게된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요한을 정상아들의 교리반에 출석시켜 교리 지도를 시도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소스토마 수녀의 지극히 정성어린 지도로 첫영성체와 견진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 때가 대개 1930년대 초반으로 알려진다. 그리소스토마 수녀 다음으로 청각 장애자에게 교리를 지도한 이는 일본안 막달레나 수녀였다. 막달레나 수녀에 이어 청각 장애자를 지도한 이는 까리따스 수녀였다. 까리따스 수녀가 원산 본당에서 본격적으로 청각장애자 교리지도를 한 것은 1940년 이후부터였다. 그러나 이전에도 한 두명이 개인으로 교리를 배웠다. 정상인 교리지도도 힘겨운데 수화까지 익혀가며 장애자에게 교리지도하는 것은 참으로 큰 인내를 수반하였지만 까리따스 수녀는 개인으로 찾아오는 장애자를 위해 이런 많은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하였다.

1931. 9. 30 원산본당의 해성유치원은 정식설립인가를 받음 (함경도 천주교회사 334쪽)

원산본당의 교육활동과 의료활동 (함경도 천주교회사 334쪽)

베네딕도 수도회의 표어처럼 수녀들도 "기도하고 일하라"는 뜻에 충실히 따랐다. 그 중에서도 수녀들은 원산 정착 이래 교육과 의료활동에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우선 교육활동은 1926년부터 크리소스토마 슈미트 수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에 여자 어린이들을 모아 작은 수녀원 마당에서 교리 지도를 하였고, 이어 해성학교 운동장 옆에 있는 초가집(해성학교 초기에 야학 강습소로 사용하던 집)을 빌려 어린이들에게 소학교 교육의 기초를 지도하였으며, 새 수녀원(성 임마꿀라따의 집)이 완공되면서 옛 수녀원(성 데레사의 집) 한쪽에 교실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나오는 어린이가 점점 늘어 곧 100명 이상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빈민학교인 "호수천신학교"의 시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녀원에서는 1927년 4월 1일, 호수천신학교 한쪽에 "해성유치원"을 개원하여 수녀와 예비수녀가 원아들의 교육을 맡도록 하였다.

호수천신학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여자 소학교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유치원도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게 되었다.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1938년 학생수가 350명 정도에 이르자 성 데레사의 집 아래층에 3개의 교실을 마련하였고, 4년제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이 학교는 비록 빈민학교로 출발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과 교육 체제가 보통학교에 손색이 없게 되었고, 마침내 1941년 4월에는 6년제 정식 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학교에는 남녀 모두에게 입학을 허가하고 있었으나 주로 여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한편 해성유치원은 1931년 9월 30일에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유치원 책임자는 처음에 이센가르도 그라프 수녀, 다아틸디스 수녀 등이 맡다가 언어 소통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1933년 6월 부터는 한국인 김 데레사 수녀가 책임을 맡았다. 그 후 유치원에서는 원아들이 늘어남에 따라 3반으로 나누어 운영하였으며, 1938년 11월에는 수녀원 앞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전하였다.

의료활동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원산 수녀원이 자리잡게 되면서 이미 헤르메티스 그로호 수녀가 시작하였었다. 그 뒤 시약소 운영에는 1926년 10월에 입국한 푸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Fruktuosa Gerstmayer) 수녀가 참여하였으며, 헤르메티스 수녀가 1927년 7월 필리핀으로 요양차 떠나면서 푸룩투오사 수녀가 혼자 시약소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 시약소는 개설한지 얼마 안되어 주민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었고 날로 일손이 부족하게 되어 1928년 6월에 입국한 오트마라 암만 수녀가 푸룩투오사 수녀를 도와 일하게 되었다. 1929년 4월 사우어 주교는 수녀원을 방문하고 5칸 정도의 가옥을 매입하여 시약소로 사용토록 해주었다. 이때부터 시약소는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로 불리었다.

시약소에서 1928년 한 해 동안 치료한 환자수는 4,700명에 달하였으며 그중 400명이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1930년에는 4,800명이 치료를 받았다. 프룩투오사 수녀는 독일에서 약 조제법에 대해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직접 약초를 뜯어다가 갖가지 약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투약하거나 치료에 이용하였다. 1938년, 시약소가 새로 건립된 유치원 1층으로 이전된 뒤 수녀원에서는 독일인 의사 디오메데스 메페트르(Diomedes Meffert) 수녀의 명의로 허가를 받아 이를 운영하였는데, 이때부터 최 리오바 수녀가 간호 수녀로 프룩투오사 수녀를 도와 진료에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약소라기 보다는 '무료진료소' 형태를 띠게 되었다.

1931. 원주본당 내에 4년제의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운영 (891쪽 원주본당)

원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91쪽)

원주교구 소속의 본당으로서 현재는 강원도 원주시 원동 85-1 소재의 주교자 원동이며 본당주보는 '천주 성총의 모친' 이다. 1896년 당시의 풍수원을 맡고있던 르메르(Le Merre) 신부가 원주군청 가까이에 거처할 집을 구입하고 그해 8월 17일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1901년 1월 조제(Jaugey) 신부가 5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10년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28년 7대 정규랑(레오) 신부가 부임하여 10년간 사목하는 동안 원주본당은 크게 발전하였다. 1931년 4년제의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나 1937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고 1934년에는 소화유치원을 설립한다.

1931. 양로원 개설 (823쪽 영유본당)

영유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32쪽)

1902년 평남 평원군 영유읍 이화리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성파트리시오.

초대 주임신부로 섭가지본당 주임이던 망(Meng) 신부가 부임하여 교세신장에 주력하는 한편 1908년 영청(永淸) 학교를 개설하였고 1911년 보댕(Bodin) 신부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1916년까지 사목하였다.

1924년 부터 메리놀회 신부들이 본당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부터 교세가 신장되어 본당내에 시약소, 양로원, 고아원, 기술학교 등이 개설되었다. 또한 1925년 지역 최초의 고딕식 연과조성당이 건축되고 이듬해 메리놀 수녀회 한국지부가 본당에 설치되어 본당의 사무와 부속사업을 전담하게 되었다.

광복 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12월 10일 주임신부이던 홍도근(요한) 신부가 체포되고, 이어 1950년 6월 25일 성당을 비롯한 사제관, 양로원, 수녀원 등 모든 부속건물이 몰수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1932. 4 성지여자중고등학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54쪽)

성지여자중고등학교 聖旨女子中高等學校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54쪽)

1910년 9월, 마산 완월동에 초대 주임으로 무세 신부가 부임하여 복음을 전파하면서 지방 교육사업과 민중계몽의 필요성을 통찰하고 빈민대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본당 부속건물에서 성지학원을 개설하였다. 무세 신부는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통치 아래 우리말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없는 시기에 외국인으로서, 또한 천주교 신부로서 우리 교육에 공헌한 바가 실로 크다 하겠다. 1932년 제 2대 본당 주임으로 베르몽(Jules Bermond, 1881-1967) 신부가 마산교구에서는 첫째로 완월동성당을 석조로 완공하고 성지학원 교사를 개축했으며, 벽돌 2층의 수녀원 건물을 마련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를 초청하므로 정 미카엘 수녀와 노 바르토로메오 수녀가 파견되었다. 분원이 창설되자 정 미카엘 수녀는 전교를, 노 바르토로메오 수녀는 학원교사로 수년간 열성적으로 일했다. 1935년 성지학원 내에 성지 강습회를 부설하고 청소년의 중등교육을 시작하였으나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지강습회는 일단 폐쇄되고 '사립학술강습회'로 개칭하여 인가를 받았다.

해방이 되자 본당 박성춘(레오) 신부는 학원 건물을 이용하여 성지여자중학원을 설립, 3학급의 인가를 받았으며 본관 신축을 목표로 미군부대에 원조자재를 요청하는 한편 학교부지에서 캐낸 화강석을 다듬어 공사에 착수하였다. 1949년 5월 28일 박성춘 신부는 성지학원을 여자중학교로 승격시킬 목적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구천주교유지재단 이사회를 거쳐 문교부의 정식 인가를 얻어 성지여자초급중학교의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6월 20일 개교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임시 휴교 중 12월 12일 김영호(金永浩 멜키오르, 1912-1978) 신부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2월 25일에는 성탄축하 음악, 연극을 수녀 반주로 시민극장에서 2일간 공개하여 시민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1951년 7월 김영호 교장신부는 어려운 재정 아래 힘겨운 노력으로 미 해병대의 보조를 받아 중지된 공사에 착공하여 석조건물 본관 10개 교실을 완공하였고, 8월 31일에는 대한민국 교육법 개정에 의하여 3년제 6학급의 여자중학교로 인가 받고 9월에는 성지여자고등학교를 부설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1952년 4월 15일에는 성지여자고등학교로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김영호 신부가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여 중·고를 겸임하였다. 1957년 11월 제 3대 정삼규(鄭三圭 요한) 신부가 취임한 후 교사증축에 전력을 기울여 구 체육관과 학교 관리실, 도서실 등을 준공하였다. 도서실에 큰 관심을 가진 정의순 베드로 수녀의 운영으로 도서관교육 우수학교로 인정을 받았으며 1960년도부터는 수녀들이 서무과장직을 맡게 되었다. 1961년 학생과장으로 재직중이던 윤필순 쟌 마리 수녀가 제 4대 교장에 취임하게 된다.

1965년 2월 부산교구에서 마산교구가 신설 분리되어 부산 데레사여중고와 마산 성지여중고의 교장 교감이 교체되어 성지여중고의 제 5대 교장에는 김재석(金在石 요셉) 신부가, 교감에는 김영옥 이냐시오 수녀가 부임해 왔으며 김재석 신부 재직 당시 마산교구 김수환 주교 성성식이 성지학교 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다음 해 12월 김영옥 수녀가 제 6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중학교 6교실에 증축되었다.

1968년 2월제 7대 교장으로 최계주 골롬바 수녀가 취임하여 현 성지분원 건물을 새로 지어 이사하였고 철거한 구 수녀원 자리에 고등학교 별관 3층 14개 교실을 신축하여 고3 진학반의 학업 분위기를 높였다. 1970년 12월에는 고등학교 24학급의 증설인가를 받았고 이듬해 8월에는 현 도서관 4층 교사를 준공하였으며 기숙사 운영으로 베드민턴 선수의 숙식 제공 등 학교전반에 걸친 알찬 발전을 기하였다. 1973년 3월 제 8대 교장에 박정희 엘리사벳 수녀가 취임하여 첫 사업으로 완월동성당 부지매입에 협조하여 학교 내에 자리하고 있던 성당을 학교에서 쓰고 본당성당을 신축 이전하기로 결정하였고 학교 내에 있던 주교관도 문화관으로 이전하였으며 구 체육관이 베드민턴 연습과 시합에 부적당함을 절감하여 체육관을 지어 선수양성에 전력하였다. 구체육관은 개조하여 가정실습실, 인쇄실, 도서관으로 사용하였다. 1975년 12월에는 고등학교 33학급의 증설인가를 받아 본관 석조 3층을 지었다. 1977년 12월 부산교구 학교재단에서 분리, 성지재단을 창설하여 장병화(張炳華 요셉) 주교가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함으로 부산교구에 종속되었던 10년동안의 불편을 덜게 되었다. 1978년 동편 기숙사 단층건물을 철거하고 중학교 운동장을 확장함과 동시에 수녀원 서편 공지에 선수기숙사 및 합숙소를 신축하여 중·고 베드민턴 선수 전원이 입주하였다.

1979년 중·고 분리시책에 따라 중·고가 완전히 분리되어 중학교는 김재석 신부가 제 9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고등학교에는 박정희 수녀가 유임하였다. 그 해 봄 별관에 4층 3개 교실을 증축, 교사 학생용 식당을 신축하였고 음료수 자동판매기 2대를 설치하였다.

1982년 봄 최신 방송실 겸 영사실을 만들어 각 교실에 텔레비젼 장치를 하여 방송수업을 할 수 있게 하였다. 1983년 9월 1일에 제 9대 교장으로 김옥순 마리세실 수녀가 취임하여 시설 현대화로써 교육환경을 일신하였다. 1984년에는 컴퓨터실 및 어학실습실 설치로 학생들의 어학실력 향상에 시대와 더불어 호흡을 맞추고 있다. 성지학교는 학교명과 같이 교직원 학생전원이 하늘의 거룩한 뜻을 준행하는 그리스도교적 덕성을 기르고자 애쓰고 있다. 1985년 2월에는 근로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한 산업체 특별학급을 부설하여 현재 12학급에 이르렀다. 1987년 3월 중학교 김재석 교장신부의 별세로 근화여자중학교 교감 김수덕 아녜스 말가리다 수녀가 중학교 제 10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수녀 중심 학교운영으로 교육을 통한 선교에 쇄신분발의 뜻을 새롭게 하였다.

현재 9명의 수녀가 중·고 교장, 서무, 경리, 교사 등으로 일하면서 학교의 행정, 관리 등 여러 분야를 담당하여 학교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

1932. 해성학교 개교 (822쪽 연길상시본당)

연길상시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22쪽)

1931년 창설되어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한국순교복자.

초대주임으로 퀴겔겐(Kugelgen) 신부가 부임하여 이듬해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고 해성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본당설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본당운영의 사업체로 해성학교, 야학, 유치원등이 있었다.

1932. '천주교 고아원'의 명칭을 '천주교 보육원'으로 변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95쪽)

성바오로보육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95쪽)

한국 천주교회의 고아구제사업은 교회 초창기에서부터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명도회(明道會) 등의 평신도 단체에 의해 시작되었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부터는 더욱 체계적인 교회의 사업으로 정착되었다. 이에 따라 성영회(聖櫖會)가 1854년도에 설립되어 고아들을 양육하였는데 특히 메스트르(Ambroise Maistre, 李 1808-1857) 신부는 성영회 사업을 확고히하고 발전시키는데 힘썼다. 그는 보육원 건물을 세우고자 희망했으나 그당시에는 아직도 박해가 극심하던 터라 주로 신자들의 가정에 위탁, 양육 시켰다. 그뒤 병인박해로 일시 중단되었던 교회의 고아구제사업은 1880년 블랑(Jean Blanc 白圭三, 1844-1890) 신부에 의해 재개되었고 1884년 그가 조선교구의 제7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자 그는 고아구제사업을 우선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3월 15일, 서울 곤당골(현 을지로 1가)에 있는 기와집을 구입하여 [천주교고아원]이란 이름으로 보육원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고아원이었다.

블랑 주교는 고아들의 양육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수녀를 청하여 마침내 1888년 7월 22일, 4명의 수녀가 최초로 서울에 도착하기에 이르렀다. 도착 직후 수녀들은 정동에서 약 한달간 머무른 다음 종현에 있는 기와집 두 채를 고쳐 1888년 9월, 정동의 수녀원과 곤당골의 고아원을 모두 옮기고 9월 8일, 정식으로 [천주교고아원]을 인수받아 수도회 부속사업으로 경영하게 되면서 원장에 자카리아(Zacharie Heurtault) 수녀가 취임하였다. 이때의 고아의 수는 남아가 80명, 여아가 65명이었다.

수녀들의 보살핌으로 원아들이 급증하여 150명이 넘게되자 1889년, 목조 2층 원사와 평가(平家)를 신축 낙성하였는데 이 원사가 완성된 후로는 이곳에서 남자 아이들에게는 한문과 경문을 그리고 돗자리 짜는 법과 기타 여러가지 실업을 가르쳤고 여아들에게는 바느질과 가사를 가르쳐 구제 및 교육계몽사업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많은 어린이들이 들어왔지만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병이나 굶주림의 빈사상태에서 왔기 때문에 당시 수녀원의 지도신부였던 코스트 신부의 대세를 받고 사망하는 어린이의 수도 또한 많았다. 수녀들은 격무와 재정난 등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정성껏 고아들을 돌보았는데 주일마다 대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고아들의 깔끔한 옷차림과 성당에서의 나무랄데 없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또한 아이들은 수녀들로부터 성가를 배워 미사 때 노래하였는데 그 노래 소리가 마치 프랑스의 성가대가 부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1901년 부터는 운영상의 여러 가지 사정을 참작하여 신입 남아들의 수용을 중지하고 여아들만 돌보게 되었다. 특별한 수입원이 없던 당시로서는 존타그부인이 운영하고 있던 존타그 호텔(Sontag Hotel)에서 나오는 세탁물이나 외국인들의 세탁물을 해주고 받는 돈이 생활에 큰 보탬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정도 수도원과 고아원이 자리를 잡아 갈 때 스타니슬라 원장수녀가 별세하여 1910년 1월 1일에 제 3대 원장으로 가밀 수녀가 취임하였다. 가밀 수녀는 이후 33년간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든든한 기반을 닦아놓았다. 초기부터 샤르트르 본부와 프랑스 성영회에서 보내주는 보조금이 고아원 운영의 큰 부분을 차지해 왔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러한 외국의 원조가 끊기고 보조금도 1/3로 줄어들어 극심한 재정난에 이르게 되었다. 국내사정도 약화되어 쌀값 등 생필품 값이 크게 올라 생활유지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홍수 등으로 인해 더욱 크게 늘어난 고아들을 원하는 대로 다 받을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수녀들은 극도의 내핍생활을 해가며 한편으로 새 고아원을 짓기 위한 절약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하여 1925년부터 고아원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다만 얼마라도 건축비에 보태기 위해 1925년, 1926년, 1927년 세차례에 걸쳐 이틀씩 바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동안 40여년간 저축했던 돈과 수녀들과 고아들이 수공예품을 만들어 판 돈, 그리고 국내·외의 관대한 회사에 의하여 드디어 1926년 5월, 벽돌 3층으로 된 고아원 본원사를 신축 낙성하여 입주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녀들의 손에 의해 구호되고 양육된 고아의 수는 4.500명이 넘었다. 1932년에는 천주교고아원에서 천주교 보육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고아들의 수가 많아져 수용능력이 부족하게 되자 용산 삼호정(현 산천동)에 1만 8천원의 공사비로 3층의 보육원 분원 건물을 지어 1936년 7월 8일 라리보 주교의 주례로 강복식을 거행하고 50여명을 수용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소개령(疏開令)에 의해서 보육원을 옮기기 위해 1944년 겨울부터 하우현천주교회로 짐을 옮기고 아이들을 피난시키던 중 해방이 되어 다시 본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다시금 피난생활이 시작되었다. 1950년 7월 16일에는 수녀원과 보육원을 모두 인민위원회에게 접수당하고 수녀들은 식량과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고아들을 데리고 충무로에 있는 가정보육사범학교 건물로 옮겨갔다. 거기서도 다시 쫓겨나 필동에 있던 이범석 장군의 저택에서 얼마간 지냈으나 서울 탈환작전으로 필동일대가 불바다로 변하여 다시 명동의 본원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서울이 수복되어 안정되는가 싶었으나 12월 21일 중국 지원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다시 악화되었다. 이에 서울시 사회과의 지시로 10세 미만의 어린 고아들을 안양으로 소개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1951년 1월 20일 UN군 비행기의 오폭으로 안양에 소개되어 있던 50여명의 어린이들이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자 남은 아이들은 일주일 후 다시 서울 본집으로 들어와 지내면서 부족한 식량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 한편 1951년 1월 3일에 10세 이상의 아동들은 대구로 피난하여 성요셉식당의 유치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한편 전쟁 기간 중 서울에서는 영아원이 파괴되었으므로 전쟁전에 격리실로 사용하던 건물에 100여명의 전쟁 고아들을 수용하여 돌보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던 120여명의 아이들은 1952년 9월 1일, 대구시 대봉동 173번지에 원사를 신축하여 이사하였다. 이렇게 서울과 대구에서의 고생을 하던 당시에는 미군들의 원조가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파괴된 서울 원사를 신축하기 위해 1953년 가을에 공사를 착공하여 이듬해 10월 7일 축성하였는데 연건평 330평의 3층 벽돌집에 110명의 아이들이 입주하였다. 1954년에 용산에 있던 아이들이 다시 명동으로 합해지고 1957년 11월 7일에는 대구에 있던 아이들도 전원 복귀하였다. 1966년 9월 24일에는 명칭을 [천주교 성바오로보육원]으로 변경하였다. 1969년 9월 23일에는 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천주교쌘뽈유지재단으로 명의를 이전했고 아동복리시설 인가를 갱신하였다.

이처럼 숱한 역경과 어려움을 헤쳐오며 수녀들은 어린이들을 사랑과 인내로써 양육하고 이들이 떳떳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돌보아왔다. 이미 보육원 초기부터 원내에서는 필요한 공부와 수예, 재봉 등을 가르쳐 왔고 1930년경 부터는 좀더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여 유치반, 초등반, 중등반 등으로 나누어 일반 학교와의 유대관계를 맺어나갔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학령기에 달한 모든 아이들을 계성국민학교로 통학시키고 가능한 대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교육시키려 하였다. 또한 적령기에 달하면 교우가정에 혼인을 시키기도 하고 자립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은퇴한 후에도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곤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아보육사업은 차츰 방향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사회가 안정되면서 고아의 수는 점차로 줄어들었고 대신 양로사업이나 정신 박약아, 장애인 등과 같은 특수 사회사업에의 요청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변천 및 요청에 따라 사업 전환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남아 있던 81명의 원아들 중 9명은 연고자에게 인도하였고 3명은 국내 입양, 4명의 국외 입양, 가출 2명, 그리고 63명은 다른 사회복지기관으로 나누어 이주시켰다. 이렇게 하여 성바오로보육원은 1977년 9월 6일 폐원되었다.

1933. 회령본당의 을라프 신부는 초등교육기관인 '명악학교'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50쪽)

회령본당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50쪽)

회령본당은 1926년 갈리스토 신부에 의해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에 창설되었으며 본당의 주보는 '성 야고버'였다. 1931년 5월, 을라프 그라프(Olaf Graf, 1900. 1. 16 - 1976. 12. 31)신부가 보좌로 부임했고 동년 11월 갈리스토 신부가 영흥본당으로 전임되자 을라프 신부가 2대 주임이 되었다. 을라프 시부는 1933년 초등교육기관인 명악학교를 개설하였고, 1935년 유명한 예술적인 회령 성당을 건축하였다.

회령의 주민들은 처음보는 수녀들의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곤 하였다. 함흥교구의 가장 북방의 전교지인 회령본당은 원산 본원에서도 기차로 10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었으므로 본원과의 연락이 어려웠다. 회령에서도 시약소를 개설하여 최리오바 수녀가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나 많은 환자들이 시약소를 찾자 인근에서 약방이나 의원을 경영하는 이들이 이를 시기하여 무면허 시약소로 고발하는 바람에 시약소는 얼마 후에는 하는 수 없이 문을 닫아야 했다. 시약소가 문을 닫은 후 최리오바 수녀는 명악학교에서 방과 후 교리지도를 맡아 하였다. 다니엘라 분원장도 늘 함께 교리지도를 도왔다. 정식 교사 자격증을 소지한 윤 마우라 수녀는 교직에 임하면서 본당의 제의방을 도왔다. 처음부터 회령본당의 수녀가족은 독일인 분원장 수녀를 도와가며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다.

1938년 10월 다니엘라 수녀가 폐결핵으로 본원으로 가게되자 후임으로 에와 수녀가 분원장이 되었다. 동년 11월 다니엘라 수녀는, 역시 폐결핵 초기로 병 중에 있던 장 스콜라스티카 수녀와 함께 병 치료 차 마닐라로 갔다. 1939년 6월 6일 겔트루드 링크 수녀가 휴양차 회령으로 가게 되었고, 이어 1940년 3월 26일에는 박 골룸바 수녀가 회령으로 가서 폐쇄되었던 시약소도 다시금 개설하게 되었다. 시약소는 수녀원 옆의 한옥 한 채을 사서 박 골룸바 수녀가 맡아 원할하게 운영하였으나 이번에도 주위의 시기로 인해 1940년 6월 말경에 다시 문을 닫고 말았다.

1933. 진남포본당에 양로원과 고아원을 개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진남포본당 鎭南浦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86쪽)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해성학교와 마리아유치원, 그리고 양로원과 고아원 사도직에 봉사하였다. 진남포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르레드(Jules Lereide, 申승겸, 1883-1917) 신부의 요청으로 1910년 9월 15일에 이 펠릭스 수녀와 이 마리아 수녀가 파견되어 지정(智貞)여학교에 근무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후 1914년 본당신부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병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본국으로 소환되어 가자 수녀들은 본원으로 귀원하였다. 그러다가 1921년 제 4대 본당신부인 뤼카(Francois Lucas, 1878-1934) 신부의 부탁으로 그해 10월 11일 오채경 말지나 수녀와 강옥섬 아오스딩 수녀가 7년만에 다시 파견되어 본당에서 설립한 해성학교와 마리아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리아 유치원은 1918년에 본당의 남녀청년회에서 문맹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설립한 것으로 1918년 그들은 50명의 원아를 수용하여 기초교육사업을 벌였다. 1921년 6월에 뤼카 신부가 본당에 부임하면서 그는 전통적 미풍양속을 내세워 남녀7세 부동석에 의한 도덕관을 주장하여 마리아유치원 여자부를 분리하여 해성학원(海星學院)이라 이름하고 직접 운영하면서 남자부는 신자 유지들에게 일임하였다. 수녀들이 처음 부임했을 때는 학생수가 33명이었는데 이듬해 봄에는 70여명, 가을에는 100여명이 넘게 되어 갑·을·병 3반에 유치반 한 반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1926년 4월에 메리놀회의 더피(Patrick Duffy)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마리아유치원과 해성학교의 시설을 보강하였다. 이후 해성학교와 더불어 유치원은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1930년 4월 스위니 신부는 100여평의 학교 건물을 신축하고 사립학교 인가를 받아 해성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가 되었다. 1935년 3월에는 6년제로 개편함으로서 학교의 규모와 교육내용을 더욱 충실히 하였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학교수녀들의 공로가 컸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1937년도 해성학교의 현황을 보면 800여평의 대지 위에 건물 216평, 11학급 642명의 학생들과 4명의 수녀들을 비롯한 13명의 교사들이 있었다. 이외에도 본당 내에는 1931년, 포스피칼(Hubert Pospichal) 신부가 무산아동을 위해 세운 성심학원과 5개의 공소에 상설야학이 있어 문맹퇴치에 공헌하였다.

마리아유치원은 1945년 초, 일인들의 강압으로 폐원되었다. 그러나 해성학교는 공립학교로 잠시 흡수되었다가해방이 된 후 다시 교회에서 운영하여 왔으나 1947년도를 마지막으로 공산정권에 몰수당하였다. 1933년 스위니 신부는 본당에 양로원과 고아원을 개설하여 무의무탁한 노인, 불구자, 고아들을 수용하고 그 자신의 독자적인 부담으로 이를 운영하였다. 스위니 신부가 떠난 후에 운영난에 봉착했으나 이 소식이 일반사회에 전해지자 1936년 진남포부 당국에서 양로원 운영보조비로 500원을 보조하여 줌으로써 교회에서는 더욱 용기를 내어 양로사업에 진력하게 되었다. 1933년부터 1937년 사이의 부양자 총수는 98명, 1937년도 수용인원은 58명이었다. 이 양로원과 고아원은 많은 시련속에서도 꾸준히 운영되어 오다가 1945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남포본당에서 철수한 이후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수녀들에 의해 돌보아졌고 침묵의 교회가 되기 바로 직전,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었다.

본당내 시약소 사도직은 양기섭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있던 1941년 양기섭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사업을 계승하였다. 양 신부는 1943년에 성심학원과 유치원의 문을 닫고 그해 10월 3일 소화병원을 신설하였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등의 진료과목에 입원실 7개, 의사 3명 그리고 간호수녀 3명으로 구성된 손색없는 의료진으로 외래환자를 진료하면서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봉사를 함으로써 의술로나 운영에 있어서 호평을 받았다. 전교에도 많은 도움을 주며 발전해 갔으나 1945년 10월에 폐원되었다.

1933. 고산 분원에서 본당활동, 해성유치원, 해성보통학교, 약방, 농장을 운영 (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베네딕토수녀회 (라) Benedictina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 수녀회로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와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있는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830년 1월 9명의 동정녀들이 블룸(Joset Lenoz Blum)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자매들의 학원'이라는 공동체 생활이 효시가 된 후 1892년 9월 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타노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회의 수족에 연합됨으로써 발족된 수녀회로서 1931년 9월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904년 7월 27일 성 오틸리엔(St. Ottilien)의 모원으로부터 분할 독립된 투칭(Tutzing)의 모원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투쟁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수녀들이 1925년 11월 25일 한국에 진출하였다.

⸁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 1931년 9월 한국 진출. 1963년 10월 교황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설립목적은 지역사회의 여성교육과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할 봉사자를 양성하는데 있다. 1931년 당시 욘갈 교구장 브레허(T. Breher, 白)주교의 요청으로 6명의 수녀가 처음 내한하여 연길교구 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용정하시 본당에 첫 분원이 생긴 이후 1945년까지 7개의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원수에 있어서도 1939년까지 20명의 수녀가 스위스 모원으로부터 파견되었고, 1944년까지 21명의 한국인 수녀가 서원하였다. 그러나 1945년 8.15광복 이후 러시아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사상통일공작'에 의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월남하기 시작한 수녀들은 남한의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인 1951년 4월 유을준 의사와 람께 부산 초량동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2년 부터는 지원자들도 입회하기 시작하였고,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했던 수련장 베다(Konig Beda) 수녀도 1958년 3월 다시 내한하여 수련지도를 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 동래구 광안동에 대지를 마련하여 1965년 우선 수련원부터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후 본원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9년 경기도 부천·소사에 지원(支院)을 설립하고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의료봉사활동 이외에도 부산에서는 1949∼1980년에 걸쳐 10개의 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울산·대구·마산 그리고 미국의 뉴옥 등지에서도 전교활동을 하고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교구청 사목국, 해외교포 사목 등 특수 사목에서도 활동을 하고있다. 1972년 12월 대리구(代理區)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에 임남훈 수녀가 피임되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1년 6월 관구로부터 교황청 직속 수녀회로 승격되어 모원과 동등한 자립수녀회로 인가를 받고 초대 총원장에 김지상 수녀가 피임되었다.

⸂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원산교구의 활동 : 1920년 8월 25일 원산교구가 설정됨에 따라 성 베네딕토 남자 수도회는 그 사목을 위임맡아 덕원으로 수도원을 이전하고 함경남·북도의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수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당시 교구장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는 독일의 투찡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rers of Tutzing)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4명의 수녀가 1925년 11월 21일 내한하였다. 1926년 수녀원에서 방 한칸을 내어 전교를 시작하여 그 예비자반은 후에 '호수천사학교'로 발전하였고 1927년 6월 6일에는 새 수녀원의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며 아울러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분원장으로는 마틸데 히르시 수녀가 임명되었고 1927년 5월 3일 첫 지원자를 받았다. 1926년에 사목활동을 시작한 원산수녀원에서는 해성국민학교, 해성 유치원, 본당활동,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또한 1926년에 신설된 함흥 분원에서는 본당활동과 학교에서의 전교활동을, 1940년 신설된 청진 분원에서는 성심의원 운영과 본당활동을, 1948년 신설된 흥남 분원에서는 본당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서양수녀들의 일어 사용, 3개월 마다의 거주신청 경신, 신사참배, 국내여행 신고, 식량난 등은 물론 1944년에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모든 학교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광복 후에도 소련군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학교와 유치원이 소련군 장교숙소와 군인 교육기관으로 바뀌고 토지개혁으로 인한 농토도 몰수당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정치보위부 교화소로 옮겨졌다가 5월 16일 일부 수녀들은 수녀원으로 되돌아왔으나 곧 해산당하였고 서양수녀들은 서양신부, 수사들과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54년 1월 22일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대구에서의 활동 : 1950년부터 월남한 수녀들과 6.25동란으로 피난나온 수녀들이 부산에서 미군들의 삯빨래 등으로 생활하다가 1951년 10월 20일 당시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주선으로 대구 남산동 본당 내 사제관 일부에서 정착하였고 1955년 1월 현 대구 신암동에 건물을 신축하여 정착하였다. 1956년 대구 분원이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고 초대 원장에는 오테마라(M. Othemara Ammann) 수녀가 임명되었다. 대구에서의 활동으로는 1956년 현재 파티마의원을 개원하고 1958년에는 대구 신암동 본당에, 1960년에는 반야월 본당에, 1955년에는 대구 시립병원과 희망원에서, 1968년에는 국군간호학교에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대구시내 3개본당(신암동, 공평동, 동인동), 서울시내 3개본당(왕십리, 돈암동, 동선동), 경북 성주, 상주, 김천, 경산, 함창, 경남 마산에 각각 분원고 선교활동, 의료활동, 교육활동에 적어도 4명 이상의 수녀가 파견되어 있다.

1934. 대구 백백합보육원내에 진료소가 개설되어 그 이름을 대구성요셉의원으로 개칭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02쪽)

백백합보육원 白白合保育院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902쪽)

보육원은 1915년 10월 15일 대구교구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설립하여 그 운영을 대구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맡겼다. 보육원은 처음에는 수녀원 건물의 일부를 사용하였다. 대구본당(현 계산동 대주교좌 성당)의 초대주임 로베르 신부는 대구지방의 고아양육을 위해 이미 프랑스인 양모를 정하여 그들의 양육비 보조금을 받아냈고 본당신자 유지들에게 양육비를 지원하여 고아들을 맡겨 양육하고 있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이러한 고아 약 30여명을 맞아들여「천주교수녀원부설 여자고아원」을 시작했다. 1922년 이후 원아수의 증가에 따라 고아원 건물을 점차적으로 증축 혹은 신축하여 영아부, 육아부, 아동부 등을 분리시켰다. 한편 수녀회의 지원자들의 수가 많아지고 수련원 개설문제가 제기됨과 아울러 원아수의 급증으로 1925년에는 고아원 설립 10주년 기념으로 원사를 신축하였고 그 당시 관공서 기관에 수용되어 있던 어린이 40여명을 인계받아 양육하였다. 일제말(日帝末)인 1944년 2월 10일, 그 명칭을「천주교 백백합 보육원」으로 개칭했다. 보육원이 설립되던 당시부터 어린이들의 보건위생을 위하여 수녀원내에 진료소가 부설되었다. 이 진료소에서는 보육원아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주변의 극빈자들에게도 자선 활동의 일환으로 무료진료 및 시약을 해왔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져서 수녀들을 믿고 의지하는 신자들은 물론이고 외교인들도 즐겨 이곳을 찾아와서 외래환자가 많아졌다. 이에 수녀원에서는 이 진료소를 평신도 의사 박영대(대구 중앙병원장)선생을 촉탁의사(囑託醫師)로 모시고 월요일마다 외래환자들이 진찰을 받게하고 그 밖의 요일에는 수녀들이 의사의 처방대로 치료시약하도록 하였다. 1934년에는 이를「대구성요셉의원」으로 확장 개칭하였다.

해방 이후 1946년 3월 15일에는 미군정청(美軍政廳) 당국으로부터 다시 후생시설 등록증명을 받았다. 성요셉의원은 원래에 보육원 어린이들의 보건위생을 위하여 설립된 시설이었다. 그러나 시대적 변천과 의학기술의 눈부신 발전 및 종합병원과 전문의들의 속출로 성요셉의원은 창설당시의 목적에 부응되기가 어려웠다. 이에 수녀회에서는 1973년에 접어들면서 이 의원을 서서히 정리, 폐원하였다.

한편 보육원에서는 해마다 성장아들이 많아졌고 그들의 사회적 적응을 위한 교육과 결혼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많았다. 때마침 1967년 이래 사회복지 사업에 관한 국가의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보육원에서는 성장한 여아들을 사회에 진출시켜 사회인으로 경헙을 얻도록 배려하는 국가의 시책에 준하여 해마다 성장한 아이들을 사회로 복귀시켰다. 한편 1968년부터 시청에서는 복지사업기관인 일시보호소를 대구본원과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운영을 하도록 요청했고 일시보호소에대한 사무감사가 엄격해졌다. 그러나 이때는 마침 대구관구가 설립된 직후라서 재정상의 어려움이 많아 수녀원에서는 이를 보류해오다가 1969년 11월 17일에 시설의 운영을 독립시켰다. 그리고 백백합보육원 분원도 독립분원으로 설립되었다.

1934. 소화국민학교는 4년제 소화학술강습소로 창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74쪽)

북수동본당 소화국민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74쪽)

1934년, 4년제 소화학술강습소로 창설되어 샤르트르 수녀회의 수녀들이 교사로서 일하였고 1946년 1월 14일에는 소화국민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계속해서 수녀들은 교사, 경리, 서무 등 다양하게 활동하며 1961년에 북수동 분원이 철수하기까지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북수동분원이 재차 개원된 1965년 이후로는 학교수녀는 1명이 파견되어 월1회 미사조회와 교리교육, 상담 등을 담당하면서 어린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어린이들의 특별활동을 위하여 강사들을 초청하여 다양하고 활발하게 학습시키고 있는 소화국민학교는 수원시의 유일한 사립국민학교로서 12학급, 660여명의 학생들에게 알차고 효율적인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소화국민학교가 명문국민학교로서 널리 알려져 있음은 해마다 나타나는 높은 입학경쟁률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1934. 원주본당 내 소화유치원 설립 (891쪽 원주본당)

원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91쪽)

원주교구 소속의 본당으로서 현재는 강원도 원주시 원동 85-1 소재의 주교자 원동이며 본당주보는 '천주 성총의 모친' 이다. 1896년 당시의 풍수원을 맡고있던 르메르(Le Merre) 신부가 원주군청 가까이에 거처할 집을 구입하고 그해 8월 17일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1901년 1월 조제(Jaugey) 신부가 5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10년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28년 7대 정규랑(레오) 신부가 부임하여 10년간 사목하는 동안 원주본당은 크게 발전하였다. 1931년 4년제의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나 1937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고 1934년에는 소화유치원을 설립한다.

1934. 성모학원 개설 (779쪽 안주본당)

안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79쪽)

1930년 평남 안주군 안주읍 북문리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본당.

초대주임신부로는 바론신부가 부임하여 1937년까지 사목하면서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고 성모학원과 성모병원을 개설하였다.

1935. 3. 경성부 영락정 1정목 39번지(현 중구 저동1가 39번지)에 소재한 무라까미(村上)병원을 인수하여 성모병원으로 개칭, 초대 병원장에 박병래 박사가 부임 25병상으로 시작 (18쪽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8쪽)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이어받아 자선과 의료사업으로 지역사회 주민에 대한 보건증진에 이바지하는 한편 유능한 의료인을 양성, 연구를 통한 의술 향상으로 의학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여 1935년 3월 11일 경성구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설립한 병원이다.

1935. 3 신고산 본당의 나 카누토 신부가 '해성 보통학교'를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48쪽)

신고산본당 新高山本堂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48쪽)

신고산은 소역까지 포함하여 경원선 상행의 일곱째 역에 위치한 읍으로써 명승지와 연결이 된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기도 맑고 조용한 분워기의 고장으로서 휴양지로도 적당한 곳이었다. 신고산에는 고산(高山)본당이 있었는데 이는 1896년, 함경남도 내평리에 창설된 내평본당이 1930년, 교통이 편리한 고산역 부근으로 이전되면서 신고산의 고산본당으로 개칭된 것이었다. 또한 고산본당은 원산교구가 설정된 이후 1921년부터 베네딕토회 신부들이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다.

수녀원은 벽돌로 지은 남향의 단층 건물이었으며 수녀원 한편에는 유치원 건물도 건축하였다. 텃밭 끝쪽에는 한옥이 한 채 있었는데 이를 수리하여 시약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밭에는 파스칼 판가우어(Paschalis Fangauer, 1882. 1. 8 - 1950. 4. 16) 수사가 수녀들을 위해 여러가지 과실수와 채소 등을 심어 주었다. 1935년 3월, 나 카누토 신부가 신고산의 본당 회장이 살던 집을 매입하여 본당에서 경영하는 시립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명은 '해성 보통학교'로서 소학교의 교과과정을 가르쳤다. 수업은 수사와 몇 명의 평교사가 맡아 하였는데 방과 후에는 늘 5, 6명씩 청원자와 수녀들이 교리시간을 배정 받고 철저히 교리지도를 했다. 이 지역에는 공립보통학교도 있었으나 해성학교에 입학을 원하는 학생이 늘어남에 따라 교리반의 학생도 증가되어 수녀들의 일도 더욱 많아졌다.

1936년 4월부터 시작된 고산본당의 성당신축은 1937년 6월 20일에 완공되어 유 플라치도 본당신부의 주례로 축성하였다. 새 성당은 2,500평 부지에 건평 122평으로 아름다운 성전이었다. 사제관도 곁에 지었으며, 옛 사제관을 헐어서 해성학교를 증축하였다.

시약소는 처음에 수녀원 객실에서 하다가 후에는 텃밭 끝쪽에 위치한 한옥으로 옮겼다. 시약소의 방 한개는농지에서 일하는 가족이 사용하였다. 신고산본당에서는 의사 면허를 가진 이가 없었으므로 독립적으로 시약소를 운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고산의 시약소는 원산본당의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에 속해져서 인가를 받은 후 의사인 디오메데스 수녀가 매월 한 번씩 다녀갔다.

1935. 9. 8 계성유치원 개원식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1쪽)

계성유치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11쪽)

계성유치원은 1925년 계성보통학교 유치반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명동본당에서 박종기 스콜라스티카 수녀가 예비자반을 운영하며 이 예비반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읽고 쓰는법을 가르쳤는데 반응이 좋아 곧 유치반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교실부족으로 곧 중지되었다가 1927년에 교실이 증축되면서 1928년부터 다시 유치원생을 모집하여 학교부속사업으로 운영해 왔다. 그 후 1935년에 3,000원의 경비를 들여 원사를 낙성하고 9월 2일부터 원아를 모집, 9월 8일에 개원식을 갖고 정식으로 출발하였다. 여기에 최초로 부임한 수녀는 김정녀 울프러시아수녀 였다.

1941년 9월 18일 화재로 유치원이 전소하여 종현성당 강당 지하실에서 수업을 하면서 복구작업에 착수하여 1942년 봄에 새 원사의 낙성을 보았으며 원아들의 다양한 재능은 전국에 알려졌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폐원되었다가 1954년 4월 5일부터 다시 그전 국민학교 자리에서 문을 열었으나 그 자리에 성신대학 의학부(현 가톨릭 의과대학)가 개교함에 됨으로써 또 다시 폐원되었다.

그 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계성여중고, 국민학교를 직영하게 되면서 유치원 설립의 필요성을 느껴 1966년 10월 28일 당시의 관구장 방 아녜스 데레즈 수녀를 설립자로 하여 재설립 하였고 1967년 3월 7일 계성여중고 탁구장으로 쓰던 건물을 개조하여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71년 3월 1일 계성국민학교 지하 1,2층 348.05평에 최신시설을 갖춘 새 원사로 이전하였다. 1972년 5월 23일 재단법인 천주교 쌘뽈수도원 유지재단으로 설립자 명의변경이 이루어졌다. 1986년 계성국민학교 보수공사 이후 계성여고 생활관으로 이전, 원아수를 줄이고 임시로 사용하였다. 1987년 8월 15일부터 용산의 현 위치에 634.23평에 이르는 계성유치원과 함께 437.84평의 수녀원 건물의 착공작업에 들어가 1988년 12월 말에 준공을 보고 1989년 신학년부터 8학급 240명의 원아를 모집하여 새로운 최신식 시설을 갗추고 원아교육에 임하고 있다.

수녀원 직영인 유치원인 만큼 다른 어떤 유치원에서보다 창의적이고 수도회 고유의 카리스마를 실천하는 교육기관이 되도록 유념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1935. 10. 14 답동본당 부속병원 건물을 확장 개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60쪽)

답동본당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60쪽)

인천 답동본당은 1897년에 건물이 완성되었으나 점차로 신자들이 증가하자 드뇌(Eugene Deneux, 全學俊, 1873-1947) 신부는 1933년, 성당의 신축공사에 착수, 1937년 6월 30일에 현재 모습의 성당을 건립하였다. 1982년 8월 9일에 답동성당은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 본당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첫 파견된 이래 본당 신부를 도와 전교는 물론 불우한 이웃들과 환자돌보기, 해성보육원 창설에 따른 고아들의 양육, 보호에 전력하였고 본당 내에 병원, 학교, 유치원이 설립됨에 따라 다양한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70년대에 인천교구청 기구확장에 따라서 교구사목국, 교육국, 성서후원회에서도 봉사하게 되어 인천교구 사목의 활성화에 협조를 하고 있다. 현재 11명의 수녀들이 함께 모여사는 답동분원은 각기 맡은 소임의 다양함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한 공동체로 생활하고 있다.

해성병원 - 1894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이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후 환자들에 대한 진료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그 것이 해성병원의 시초이다. 1935년 10월 14일, 아일랜드인 필로메나(Philomena Ralph) 수녀가 내한하여 보육원 아동들과 일반 환자를 위해 부속병원을 본격적으로 확장 개설하였고 1938년 10월 15일에 드뇌 신부는 사재(私財)를 들여 부속병원용 건물 3층을 현대식으로 신축하였다. 이 건물에는 16개의 방이 있었으나 주로 보육원 아동들을 위한 시설이라 입원시설은 없고 진찰과 시약만 하였다.

그 후 1961년 10월 30일에는 해성병원의 시설을 인가받았고 1970년 5월 30일에는 병원의 원사 1층을 대폭 수리, 이전하여 병원시설을 보완하였다. 1975년 인천의 답동에 있던 해성보육원은 1948년 용현동에 분원을 마련한 이후 영아원까지 모두 용현동으로 이전하자 아기들의 치료를 위해 1주일에 2∼3번씩 답동에서 왕진을 다녀야 했다. 또 급하면 가까운 의원으로 아기를 데리고 나가야 하는 불편 등으로 인하여 1984년 4월 28일에 해성병원은 인천의 해성보육원으로 이전하였다. 1991년 현재 1985년 11월에 이전해온 원주 바오로 병원과 통합되어 홍순자 아드리아나 의사수녀 외에 2명의 수녀들이 보육원 아기들과 인근 주민들의 진료에 힘쓰면서 의료사도직을 통한 복음전파에 노력하고 있다. 해성병원은 초기에는 서울보다도 훨씬 활발한 의료활동을 전개했었다. 그러나 이 병원은 본디부터 보육원 원아들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수녀회 에서는 수녀들을 기타 다른 의료기관으로 많이 파견한 이유 등으로 인해 해성병원은 보육원 부속병원으로서만 계속 작은 규모로 유지되어오고 있다.

박문유치원 -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드뇌 신부에 의해 1937년 3월 1일에 설립된 박문유치원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인천에서 우수한 유치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한동안 휴원하기도 했으나 1957년에 2학급으로 증설되면서 시설도 과학교육에 입각한 교구를 점차로 구비하고 강당, 보육실, 자료실, 양호실, 소꼽방, 실내·외 유구장, 풀장 등 다양한 설비를 갖추었다. 또한 위치도 답동성당 구내인데다가 이웃에 국민학교와 수녀원 등이 있어 좋은 교육환경을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 4,64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박문유치원은 학습발표, 리듬악기 발표, 연극발표회 등 다양한 발표회와 전인교육을 통해 매해 150명의 원아들을 교육하고 있다.

박문국민학교 - 1899년 인천 답동에 수녀원이 설치되면서부터 수녀들은 꾸준히 보육원 원아들과 신자들의 자녀 및 무산아동(無産兒童)들을 모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기관이 발전하여 1900년 9월 1일에 인천항사립박문소학교가 설립되었다. 그후 드뇌 신부는 1914년에 급증하는 아동들을 수용하기 위해 인천사립박문소학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6월, 남자부 교사 6학급을 다시 신축하여 1917년 4월 1일에는 이 2개교를 합병하여 인천박문학교로 개칭하였다. 수녀들은 박문학교 여자부를 운영하면서 특히 매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갖고 교리, 성서, 역사, 복음 등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 당시 수녀들의 학교는 제물포에 있는 학교들 중에서 가장 좋은 학교로 평가받고 있었다.

1925년 11월 27일에는 1922년에 개정된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인천사립박문보통학교로 6년제 정식인가를 받았다. 그후 1938년 4월 1일에는 개정교육령에 의해 인천박문심상소학교로, 1941년에는 다시 인천박문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6월 3일에는 건물 소개령으로 인해 남자부 교사를 헐게 되어 공립국민학교로 편입시켰으며 여자부 교사만이 남게 되었다. 당시 교사수녀들은 매일 아침 신사참배를 위해 학생들을 인솔하고 신사에 다녀와야 했으며, 남자부교사가 소개된 후에도 여자부를 위해 끝까지 헌신하면서 학교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1958년, 제 3대 교장으로 박영숙 데오판 수녀가 취임하면서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을 위임받았고 제 4대 교장인 이밀마 데레사 수녀 때 남녀 병설 12학급으로 인가받으면서 안정된 환경속에서 계속적인 발전을 해나갔다. 1961년부터 다시 인천교구에서 학교운영을 맡게 되자 수녀들은 계속 머무르며 교사 혹은 서무로서 일하였다. 그러다가 1977년 3월 2일에 제 10대 교장으로 이종후 빌뚜데스 수녀가 취임하여 제 3대, 제 4대의 수녀교장 이후 약 15년만에 다시 수녀가 학교운영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해 6월에 도서실을 개설하였고 1981년 11월에는 12개 교실을 증축하여 학교시설을 확장하였다. 이듬해에는 교내방송국을 개설하였으며 1984년 12월에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명문사학으로서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학부형들의 참여와 활동또한 대단하여 인천시내학교 어머니 글짓기 대회, 어머니 합창대회, 어머니 배구대회 등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하였다.

1988년 2월 최루시아 임마꿀레 수녀가 제11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현재는 교육시설을 완비하고 특별히 예능교육, 정보처리기능교육, 조기영어교육 등을 실시하면서 기초학력을 신장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또 매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담임교사들이 직접 맡고 있어 신앙생활과 실행활과의 연결 및 품성교육을 겸하고 있으며,천주교회 학교의 특성을 잘 살려 나가고 있다. 1989년말 현재 교장수녀와 함께 교사수녀 1명, 일반교사 18명, 직원 9명 등이 972명의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가톨릭 회관 - 1973년 3월 1일 인천 가톨릭회관이 준공되고 1975년 3월 31일부터 이명자 마리안나 수녀가 부임하여 교구의 전반적인 사목을 돕다가 1980년부터는 회관 내에있는 각 국이 분리 운영되어 사목국, 교육국, 성소후원회에 각각 담당수녀가 파견되어 교구사목을 돕고 있다.

〈사회복지부〉- 1985년 11월 10일에 류병순 마리 도미니카 수녀는 답동분원에서 자체적인 사회복지활동을 전개, 주로 청소년 근로자를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고 그후 1987년 3월 2일 이춘근 시몬 스독 수녀가 교구 사회복지부에서 개설하여 답동분원으로 이관한 해성어머니 한글교실을 담당하면서 답동분원의 사회복지 활동은 본격화 되었다. 해성어머니 교실은 문맹인 주부들에게 글을 가르쳐 가정 및 신앙생활의 향상을 돕기 위해 마련陖는데 종교와는 관계없이 25세 이상의 주부들을 대상으로 2년의 기간동안 한글교육과 산수, 일반 교양강좌를 실시하고 있으며 매일 평균 100명 정도의 주부들이 참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위한 교리반도 운영하여 문맹으로 인해 각 본당에서 교리를 배우지 못했던 영세자 및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1935. 성모병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3쪽)

성모병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13쪽)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경성교구 청년 연합회]를 추측으로 하여 병원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라리보 주교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온 교구민들이 힘을 모아 병원을 건립하는데에 이르게 되었다. 즉 1935년 경성교구에서는 당시 경성부 영락정 1정목 39번지에 소재하고 있던 일본인 무라카미 병원을 인수하여 성모병원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성모병원 본관은 540평 대지에 350평 건평으로 목조 2층 건물이었다.

초대 병원장으로 박병래가 부임하였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회계, 물품관리, 사무, 간호 등을 위해 9명의 수녀가 파견되어 병원 2층에 수녀원을 마련하고 분원을 이루게 되었다.

1936년 5월 1일 많은 이들의 기대와 축복 속에 개원한 성모병원은 서울교구의 첫 의료사업이요, 가톨릭 교회내 최초의 정식 병원답게 훌륭한 의술과 친절한 태도로써 일반인들에게 매우 호평을 받아 개원 초부터 외래 환자만도 하루에 100명을 훨씬넘었다. 특히 헌신적인 간호수녀들의 봉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처음에 25병상 규모로 시작된 성모병원은 날로 발전됨에 따라 확장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마침 용산에 있던 예수성심학교를 일제가 일본 군대막사로 징발하려고 획책하자 교구에서는 신학생들을 덕원 신학교로 이전시키고 그곳에다 성모병원 분원을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5월 원효로 성모병원 분원이 개원되었고 이곳에서도 6명의 수녀들이 파견되어 간호와 병원운영을 도와주었다.

해방 후에도 무난하게 운영되어 가던 성모병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내무성 중앙병원으로 징발되었다. 이후 3개월간 인민군은 성모병원과 주교관에 상주하면서 이곳의 물건을 징발 사용하고 미처 피난 하지 못해 남아있던 수녀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최종희 토마스 수녀는 인민군들 몰래 식량과 물건을 감추어 놓았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3번이나 총살당할 뻔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인민군의 정령하에서 성모병원의 기능은 거의 마비되었으나 서울이 수복되자 병원은 재정비되어 활기를 되찾았다. 1956년 5월 1일에는 개원 20주년을 맞이하여 의의깊은 축하식을 가졌는데 이때 홍순덕 이렌 수녀가 20주년 근속 표창을 받았다.

한편, 1954년에 설립된 성신대학 의학부에 이어 중림동 성당 구내에 성 요셉자선병원과 성요셉간호고등기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성요셉자선병원은 1959년에 병원을 확장, 신축하여 유로 병상 60베드와 무료 병상 20베드를 갖추고 자선진를 담당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1959년 3월 6일부터 성요셉병원의 관리를 성가회로부터 인계받아 맡게 되었다. 또 방용자 데레사 수녀는 성요셉간호고등기술학교의 교감으로 부임받았다. 이처럼 병원과 학교에서 일하게 된 수녀들은 처음에는 성모병원 분원에 속하여 있었으나 1960년에 따로 성요셉 분원을 설립하고 윤성기 토마스 수녀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윤 수녀가 성모병원 분원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성요셉분원은 성모병원 분원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1962년 8월에 가서야 완전히 독립된 분원으로 재발족되었는데 수녀들은 간호사로, 교사로, 간호사 기숙사의 사감으로 다양한 사도직을 수행해 나갔다. 이 성요셉병원은 성모병원 내에 자선진료소가 설립되어 자선진료의 임무가 이전된 데다가 병원관리 효율성 문제, 노후된 건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1974년 8월 31일자로 폐원되었고 이에 따라 이곳

분원수녀들은 다시 성모병원과 통합되었다.

성모병원은 1957년에 양기섭(베드로) 신부가 제4대 병원장으로 취임하면서 크게 발전하여 이듬해 3월 종합병원으로 승격되었다. 날이 갈수록 병원 신축의 필요성이 더해갔고 또 가톨릭중앙의료원으로서의 병원기구로 개편하고자 하는 의도하에 1957년, 신축병원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엄청난 건축비용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결국 1961년 12월 1일, 지하 2층, 지상 8층에 300병상수를 갖춘 현대식 병원이 준공되었다. 병원이 준공됨에 따라 수녀원도 신관 7층으로 이전하였으나 1966년에 병원 본관에 이어 7층 건물을 신축, 정신과 병동을 개설하자 수녀원을 다시 이 병동의 6, 7층으로 이전하여 안정된 생활공간을 이루고 원목실, 의무기록실 등에도 새로이 파견되는 등 사도직에 활기를 띠어갔다. 설립 초부터 여의도로 이전하기까지 병원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어 온 성모병원 수녀원은 현재 새로 신축된 병원 별관 건물인 요셉관 4, 5층을 수녀원으로 마련하고 24명의 수녀가 간호과, 경리과, 회계과, 원목과, 호스피스과, 방사선과, 자제과, 임상병리과, 약제과, 검사실, 양재실, 영양실 등 여러 부서에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원목과와 호스피스과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녀들은 환자들의 정신적 치유와 죽음을 맞는 환자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지니게 함으로써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한편 가톨릭 의대 및 간호대학에서 강사 및 교수로 일하는 수녀들은 약리학, 간호학, 종교 등을 가르치고 있다.

1935. 나자렛 양로원과 영해 고아원 설립 (278쪽 대신리본당)

대신리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78쪽)

1934년 평양시 대신리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의 본당.

초대 주임신부로는 양기섭(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을 신축하였다 대신리 본당의 신심단체로는 청년으로 조직된 예수성심회, 40세 이상의 여교우들로 조직된 성부 안나회, 40세 이하의 교우들로 조직된 소화 데레사회,

미혼 여성들로 조직된 성모성심회, 남녀 중학생으로 조직된 미사회등이 있었다.

1935. 성모병원 개원 (779쪽 안주본당)

안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79쪽)

1930년 평남 안주군 안주읍 북문리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본당.

초대주임신부로는 바론신부가 부임하여 1937년까지 사목하면서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고 성모학원과 성모병원을 개설하였다.

1935. 메리놀 수녀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입원실과 무료진료소 설립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 (영) Maryknoll Sisters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는 1912년 메리 로저스수녀에 의해 창립되었다. 창립정신은 인류에게 책임을 다하고 도움을 주고 문화적 배경과 지역적 제한 경제, 사회, 종교적인 범주를 벗어나 모든 국가간의 평화와 정의와 우정을 도모하고 나누는데 있다. 1924년 10월 메리놀회 신부들의 초청으로 평북 의주에 처음 진출하였다.

북한에서의 활동 (1926∼1942) :

1924년 부터 시작된 의주에서의 활동은 처음에는 본당 사목과 가정방문이었으나, 얼마 후 소규모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3명의 수녀를 의주에 남겨두고 1926년 수녀회 한국지부를 영유(永柔)로 옮기고 그곳에 여자기예학원을 세워 15세 전후의 소녀들에게 기술습득의 길을 열어주는 사업을 하였다. 또한 시약소와 고아원을 설치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1933년 멜시 수녀 등 3명은 신의주로 파견되어 성모회를 창설하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가정방문과 외래환자 진료소와 이동진료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1932년 메리놀회 신부의 요청으로 평양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한국여성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이 모임은 후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라는 수녀원의 창설동기가 되었다. 1935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입원실과 무료진료소를 설립하였으며 1936년 본당 사업과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또한 진남포에서는 1934년 부터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활동을 중지하고 메리놀회 수녀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해방후의 활동 (1950∼현재) :

본국에 철수했던 메리놀회 수녀들은 전쟁이 끝나자 1950년 제1진이 다시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의료사업과 전교사업을 통하여 주민들에게 봉사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1952년 제2진의 수녀들은 제차 부산에 진출하여 전쟁중인 비상시를 위하여 장기간의 의술봉사를 하여 왔으며 음식과 옷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결핵요양소와 교리학습을 위한 장기 계획도 수립하게 되었다. 휴전 후 메리놀 수녀들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956년 충북 괴산군 중평읍에 메리놀의원을 개원하여 의술치료와 보건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1960년 부산에서 가별(Gabrialla) 수녀가 신용협동조합을 처음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지금은 협동교육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1962년 부산 메리놀병원이 주한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대식 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1963년 메리놀 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은 콘로이(Conroy)수녀가 맡았으며 1967년 메리놀 병원의 관리가 부산교구로 이관되었다. 1962년 2월 인천교구 답동 본당에서의 종교활동을 돕고 학생지도 및 영어지도를 실시하여 왔으며 1967년 3월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회관에서 청소년 지도자 강습과 여성들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1963년 경기도 강화읍에 그리스도왕 의원이 설립되어 메리놀회 수녀들은 의사와 간호원으로 일하였으며 전교사업도 함께도왔다. 1969년 초 요안 서빈 수녀는 백령도에 소재한 김안드레아병원에서 간호과 책임자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74년 대한 적십자가 인수할 때까지 섬 사람의 건강과 아울러 간호보조원 교육과 훈련을 부지런히 해왔었다. 백령도에서 철수하여 본원에서 일하던 3명의 수녀들은 전남 소록도에 있는 국립병원에 자원봉사 간호원으로 활동하고 1973년 성신강림 대축일 김수환 추기경의 허락을 얻어 2명의 수녀가 그리스도께 헌신할 조그마한 단체의 조직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공업단지 근처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진료소의 간호원으로 상담자로서, 노조에서 간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 등을 맡아보게 되었다. 1976년 9월 가이에르 수녀가 서강대에서 영어를 담당하는 외에 경북 울진 진료소 활동, 부평 본당에서 종교사업과 노동자를 위한 사업활동 1979년 10월 광주의 천주의 성요한병원에서 환자가족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1980년 거창 나환자 마을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1981년 11월 부터 성남시에서 2명의 수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과 전교활동에 힘쓰고 있다.

1936. 2. 18 성모 자애원 설립 (예수성심시녀회의 복지시설)

성모자애원 (예수성심시녀회의 복지시설) - 1998. 5. 27일 예수성심시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가난한 이들안에 예수성심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라"는 창설자 신부님의 정신과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예수성심의 사랑을 나누어 그들이 삶의 기쁨과 구원에 희망을 가지고 사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우므로써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 하고자 한다.

1936. 2 성모자애원 설립 (1213쪽 포항예수성심시녀회)

포항예수성심시녀회 浦項∼聖心侍女會 (영) Handmaid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13쪽)

1935년 12월 경상북도 영천군 용평리에서 루이 데랑드 신부의 지도아래 6명의 처녀들이 삼덕당(三德堂)이란 이름으로 창설한 수녀회. 복음삼덕(福音三德)을 수련하는 곳이라는 뜻. 삼덕당에서 시작된 창설 당시의 회원들은 본당사목을 도우며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36년 2월에는 '성모자애원'(聖母慈愛院)을 설립하여 고아들과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1940년 5월에는 들랑드 신부가 경상북도 영천본당으로 부임됨에 따라 수녀원과 사업체의 일부가 이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4년 7월 부터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활동은 고사하고 심문과 고문으로 고생하다가 8.15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 후 회원수의 증가로 부득이 경상북도 영일군 대송면으로 1950년 3월 이전하였지만 곧 6.25전쟁의 어려움을 겪었다. 1952년 9월 8일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수녀회의 인가를 받고 수도회명도 '포항예수성심시녀회'로 개칭하였다. 그 뒤 1954년 12월 첫 서원식이 거행되었고, 1957년 12월에는 나환자들을 위한 '다미안피부병진료소'를 개설하여 정기적인 치료, 투약, 이동진료 등을 실시하는 한편, 경상북도 영일군 의창면에 정착촌도 마련해 주었다. 1965년 3월에는 서정길 대구교구장과 함께 첫 총회를 개최하여 김장주 수녀가 초대 총원장에 취임하였다. 1968년 10월에는 포항종합제철 부지 선정으로 인하여 현 소재지인 영일군 영일읍 대잠동으로 본부를 이전하게 되었고, 수련소는 대구시 남구 대명동에 자리잡게 되었다. 1977년 6월에는 포항에 있는 본원에 포항성모병원을 건립하여 보다 효율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현재 탁정자 총원장과 수녀를 비롯한 335명의 회원들이 1983년 12월 말 현재 포항의 본원과 성모자애원, 성모병원 그리고 대구교구를 비롯한 전국 10개 교구 70여개 본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1936. 4 흥남본당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5쪽)

흥남본당 興南本堂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5쪽)

흥남(興南) 본당은 함경남도 함주군 흥남읍 하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당은 1936년 4월에 건립되었다. 흥남 본당은 함흥본당의 공소로 시작하여 1936년 4월 성당의 건축이 완공되자 초대 본당 신부로 북청(北靑) 본당의 주임이었던 임 갈리스토 히머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으로 승격된 것이다. 주보는 성 펠리치타스(St. Felicitas)였다. 아담한 흥남 본당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황토 언덕 위에 오똑하니 솟아 있었으며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하였고 전경이 아름다웠다.

초대 본당 신부인 임 갈리스토 신부는 본당 구역 내에 빈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해성학원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앞섰으며 이를 통하여 많은 선교 활동도 펴 나갔다. 제 2대 본당 신부로는 구대준(具大俊, 가브리엘 ; 1912. 음4. 27 - 1950. 5. ?) 신부가 부임했다. 1942년에 구 대준 신부는 보좌신부를 거치지 않고 원산교구의 삼목 본당(三木本堂) 중의 하나인 흥남본당의 주임 신부로 곧바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구 대준 신부는 나라 사랑의 뜻이 투철한 사제로서 일제 말의 사설 학원 폐지 압력에도 굴치 않고 해성학원을 운영하였으며 1944년에는 사제관을 내놓아 대건의원(大建醫院)을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을 시도하였다.

구 대준 신부는 사제관인 붉은 벽돌 이층 건물을 병원 청사로 내놓고 자신이 공경하던 한국의 첫번 사제인 김 대건의 이름을 따서「대건의원」을 개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 다음 구대준 신부는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선교 수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겔트루드 원장수녀는 이러한 구 대준 신부의 갸륵한 선교 정신에 감복하여 요청대로 선교 수녀를 파견하여 1948년 5월 20일, 흥남분원의 설립을 보게 된 것이다. 흥남 본당에는 수녀원 건물이 따로 없었으므로 수녀들은 학원으로 사용했던 교실 한칸을 칸막이로 막아서 생활하였다.

흥남 본당에는 열심한 신자들이 많아서 선교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으므로 본당 사목은 곧 활기를 띠게 되었고 특별히 본당의 강 술호(姜述鎬, 요셉) 회장은 수녀원의 일과 본당의 일을 적극적으로 돌봐주었다.

그런데 1949년 1월 25일, 구대준 신부는 한국의 북단인 회령과 계림의 본당 신부로 전임되었고 제 3대 본당 신부로 독일인 어 게롤드 신부가 부임하여 왔다. 구대준 신부는 이러한 시기에 독일인 신부를 북쪽으로 보내는 일은 위험한 일이라고 제의하고 위험한 북쪽 전교지에 부임을 자청하였던 것이다.

수녀들은 생활의 보탬을 위해 돼지를 기르기도 하였는데, 본당 신자들이 돼지먹이를 모두 갖다 주었다. 이렇듯 본당 신자들이 수녀들을 관심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므로 수녀들 또한 특별한 사랑으로 신자들을 대하였다. 1949년 1월 새로 부임해온 어 게롤드 신부는 포교 성 베네딕도회와 같은 소속이었으므로 가끔 수녀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곤 하였으며 늘 화목한 분위기에서 흥남 본당의 수녀 가족은 즐겁고 보람된 선교 활동을 펴 나갔다. 그러나 1949년 5월 14일 공산당에 의해 본당이 폐쇄되었으므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이 흥남 본당에서 선교한 것은 겨우 1년 남짓한 기간이었다.

1936. 5 성모병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3쪽)

성모병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13쪽)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경성교구 청년 연합회]를 추측으로 하여 병원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라리보 주교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온 교구민들이 힘을 모아 병원을 건립하는데에 이르게 되었다. 즉 1935년 경성교구에서는 당시 경성부 영락정 1정목 39번지에 소재하고 있던 일본인 무라카미 병원을 인수하여 성모병원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성모병원 본관은 540평 대지에 350평 건평으로 목조 2층 건물이었다.

초대 병원장으로 박병래가 부임하였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회계, 물품관리, 사무, 간호 등을 위해 9명의 수녀가 파견되어 병원 2층에 수녀원을 마련하고 분원을 이루게 되었다.

1936년 5월 1일 많은 이들의 기대와 축복 속에 개원한 성모병원은 서울교구의 첫 의료사업이요, 가톨릭 교회내 최초의 정식 병원답게 훌륭한 의술과 친절한 태도로써 일반인들에게 매우 호평을 받아 개원 초부터 외래 환자만도 하루에 100명을 훨씬넘었다. 특히 헌신적인 간호수녀들의 봉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처음에 25병상 규모로 시작된 성모병원은 날로 발전됨에 따라 확장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마침 용산에 있던 예수성심학교를 일제가 일본 군대막사로 징발하려고 획책하자 교구에서는 신학생들을 덕원 신학교로 이전시키고 그곳에다 성모병원 분원을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5월 원효로 성모병원 분원이 개원되었고 이곳에서도 6명의 수녀들이 파견되어 간호와 병원운영을 도와주었다.

해방 후에도 무난하게 운영되어 가던 성모병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내무성 중앙병원으로 징발되었다. 이후 3개월간 인민군은 성모병원과 주교관에 상주하면서 이곳의 물건을 징발 사용하고 미처 피난 하지 못해 남아있던 수녀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최종희 토마스 수녀는 인민군들 몰래 식량과 물건을 감추어 놓았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3번이나 총살당할 뻔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인민군의 정령하에서 성모병원의 기능은 거의 마비되었으나 서울이 수복되자 병원은 재정비되어 활기를 되찾았다. 1956년 5월 1일에는 개원 20주년을 맞이하여 의의깊은 축하식을 가졌는데 이때 홍순덕 이렌 수녀가 20주년 근속 표창을 받았다.

한편, 1954년에 설립된 성신대학 의학부에 이어 중림동 성당 구내에 성 요셉자선병원과 성요셉간호고등기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성요셉자선병원은 1959년에 병원을 확장, 신축하여 유로 병상 60베드와 무료 병상 20베드를 갖추고 자선진를 담당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1959년 3월 6일부터 성요셉병원의 관리를 성가회로부터 인계받아 맡게 되었다. 또 방용자 데레사 수녀는 성요셉간호고등기술학교의 교감으로 부임받았다. 이처럼 병원과 학교에서 일하게 된 수녀들은 처음에는 성모병원 분원에 속하여 있었으나 1960년에 따로 성요셉 분원을 설립하고 윤성기 토마스 수녀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윤 수녀가 성모병원 분원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성요셉분원은 성모병원 분원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1962년 8월에 가서야 완전히 독립된 분원으로 재발족되었는데 수녀들은 간호사로, 교사로, 간호사 기숙사의 사감으로 다양한 사도직을 수행해 나갔다. 이 성요셉병원은 성모병원 내에 자선진료소가 설립되어 자선진료의 임무가 이전된 데다가 병원관리 효율성 문제, 노후된 건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1974년 8월 31일자로 폐원되었고 이에 따라 이곳 분원수녀들은 다시 성모병원과 통합되었다.

성모병원은 1957년에 양기섭(베드로) 신부가 제4대 병원장으로 취임하면서 크게 발전하여 이듬해 3월 종합병원으로 승격되었다. 날이 갈수록 병원 신축의 필요성이 더해갔고 또 가톨릭중앙의료원으로서의 병원기구로 개편하고자 하는 의도하에 1957년, 신축병원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엄청난 건축비용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결국 1961년 12월 1일, 지하 2층, 지상 8층에 300병상수를 갖춘 현대식 병원이 준공되었다. 병원이 준공됨에 따라 수녀원도 신관 7층으로 이전하였으나 1966년에 병원 본관에 이어 7층 건물을 신축, 정신과 병동을 개설하자 수녀원을 다시 이 병동의 6, 7층으로 이전하여 안정된 생활공간을 이루고 원목실, 의무기록실 등에도 새로이 파견되는 등 사도직에 활기를 띠어갔다. 설립 초부터 여의도로 이전하기까지 병원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어 온 성모병원 수녀원은 현재 새로 신축된 병원 별관 건물인 요셉관 4, 5층을 수녀원으로 마련하고 24명의 수녀가 간호과, 경리과, 회계과, 원목과, 호스피스과, 방사선과, 자제과, 임상병리과, 약제과, 검사실, 양재실, 영양실 등 여러 부서에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원목과와 호스피스과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녀들은 환자들의 정신적 치유와 죽음을 맞는 환자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지니게 함으로써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한편 가톨릭 의대 및 간호대학에서 강사 및 교수로 일하는 수녀들은 약리학, 간호학, 종교 등을 가르치고 있다.

1936. 5. 14 동평학교 개교 (310쪽 동평학교)

동평학교 洞平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10쪽)

평양교구 대신리 본당에서 1936년 5월 14일 개교한 학교. 그 해 4월 25일 6년제 국민학교로 인가받고 교사가 준공되는 동안 성당내 가(假)교실에서 수업하였다. 이듬해 부근의 동덕학교가 폐교됨에 따라 학생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동평학교는 적령기를 넘도록 취학하지 못한 빈민 학생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여 많은 학생들에게 취학의 기회를 주었다. 1948년 10월 폐교되었다.

1936. 메리놀 수녀회에서 본당사업과 유치원을 설립 운영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 (영) Maryknoll Sisters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는 1912년 메리 로저스수녀에 의해 창립되었다. 창립정신은 인류에게 책임을 다하고 도움을 주고 문화적 배경과 지역적 제한 경제, 사회, 종교적인 범주를 벗어나 모든 국가간의 평화와 정의와 우정을 도모하고 나누는데 있다. 1924년 10월 메리놀회 신부들의 초청으로 평북 의주에 처음 진출하였다.

북한에서의 활동 (1926∼1942) :

1924년 부터 시작된 의주에서의 활동은 처음에는 본당 사목과 가정방문이었으나, 얼마 후 소규모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3명의 수녀를 의주에 남겨두고 1926년 수녀회 한국지부를 영유(永柔)로 옮기고 그곳에 여자기예학원을 세워 15세 전후의 소녀들에게 기술습득의 길을 열어주는 사업을 하였다. 또한 시약소와 고아원을 설치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1933년 멜시 수녀 등 3명은 신의주로 파견되어 성모회를 창설하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가정방문과 외래환자 진료소와 이동진료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1932년 메리놀회 신부의 요청으로 평양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한국여성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이 모임은 후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라는 수녀원의 창설동기가 되었다. 1935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입원실과 무료진료소를 설립하였으며 1936년 본당 사업과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또한 진남포에서는 1934년 부터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활동을 중지하고 메리놀회 수녀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해방후의 활동 (1950∼현재) :

본국에 철수했던 메리놀회 수녀들은 전쟁이 끝나자 1950년 제1진이 다시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의료사업과 전교사업을 통하여 주민들에게 봉사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1952년 제2진의 수녀들은 제차 부산에 진출하여 전쟁중인 비상시를 위하여 장기간의 의술봉사를 하여 왔으며 음식과 옷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결핵요양소와 교리학습을 위한 장기 계획도 수립하게 되었다. 휴전 후 메리놀 수녀들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956년 충북 괴산군 중평읍에 메리놀의원을 개원하여 의술치료와 보건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1960년 부산에서 가별(Gabrialla) 수녀가 신용협동조합을 처음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지금은 협동교육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1962년 부산 메리놀병원이 주한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대식 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1963년 메리놀 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은 콘로이(Conroy)수녀가 맡았으며 1967년 메리놀 병원의 관리가 부산교구로 이관되었다. 1962년 2월 인천교구 답동 본당에서의 종교활동을 돕고 학생지도 및 영어지도를 실시하여 왔으며 1967년 3월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회관에서 청소년 지도자 강습과 여성들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1963년 경기도 강화읍에 그리스도왕 의원이 설립되어 메리놀회 수녀들은 의사와 간호원으로 일하였으며 전교사업도 함께도왔다. 1969년 초 요안 서빈 수녀는 백령도에 소재한 김안드레아병원에서 간호과 책임자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74년 대한 적십자가 인수할 때까지 섬 사람의 건강과 아울러 간호보조원 교육과 훈련을 부지런히 해왔었다. 백령도에서 철수하여 본원에서 일하던 3명의 수녀들은 전남 소록도에 있는 국립병원에 자원봉사 간호원으로 활동하고 1973년 성신강림 대축일 김수환 추기경의 허락을 얻어 2명의 수녀가 그리스도께 헌신할 조그마한 단체의 조직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공업단지 근처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진료소의 간호원으로 상담자로서, 노조에서 간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 등을 맡아보게 되었다. 1976년 9월 가이에르 수녀가 서강대에서 영어를 담당하는 외에 경북 울진 진료소 활동, 부평 본당에서 종교사업과 노동자를 위한 사업활동 1979년 10월 광주의 천주의 성요한병원에서 환자가족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1980년 거창 나환자 마을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1981년 11월 부터 성남시에서 2명의 수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과 전교활동에 힘쓰고 있다.

1936. 매괴학교를 매괴심상소학교로 교명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7쪽)

매괴국민학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57쪽)

장호원의 초대신부인 부이용 신부는 1907년 민응식의 집 행랑채를 이용하여 매괴학당을 설립하고 남학생을 모아 가르쳤는데 교재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유년필독(幼年必讀)을 사용, 통감부의 일본인 관리들로부터 금서를 가르친다 하여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수가 점점 증가하여 60명에 달함으로 교사가 비좁아지자 1908년 3월에 학교를 크게 세워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는 발전을 보였고 이어 여학교도 설립하였는데 수녀들의 필요성을 절감한 부이용 신부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교는 1912년 10월 7일 매괴축일에 개교하였다. 여학교는 수녀들의 헌신으로 외교인들에게까지 좋은 인상을 주어 딸을 가진 부모들이 공립보다는 매괴학교로 보내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부족, 부모들의 몰이해, 유능한 교사부족 등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다. 결국 보통학교와 공립학교로 전학해 버리는 학생들이 점차로 늘어가게 됨에 따라 6년제였던 매괴학교는 부득이 4년제만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2년에 6년제로 다시 복귀한 후 1936년에는 공식학교 인가를 받고 3층 교사를 증축하여 교명을 매괴심상소학교(怘塊尋常小學校)라 하고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함으로써 1939년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일본인들이 이 학교를 빼앗아 공립화하고 교명을 욱산(旭山)으로 바꾸어 운영하였는데 1945년 해방을 맞아 다시 찾게 되었다. 그후 매괴학교는 1953년 매괴상업고등학교로 승격되었고 1966년에는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확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국민학교는 운영난이 심화되고 교육전망의 분석 결과 그 전망이 밝지 못하여 1972년 2월 28일자로 폐교하였다.

1936. 6년제 초등교육기관 동평학교 설립(278쪽 대신리본당)

대신리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78쪽)

1934년 평양시 대신리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의 본당.

초대 주임신부로는 양기섭(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을 신축하였다 대신리 본당의 신심단체로는 청년으로 조직된 예수성심회, 40세 이상의 여교우들로 조직된 성부 안나회, 40세 이하의 교우들로 조직된 소화 데레사회,

미혼 여성들로 조직된 성모성심회, 남녀 중학생으로 조직된 미사회등이 있었다.

1936. 안법학교를 보통학교로 승격 (775쪽 안성본당)

안성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75쪽)

주보로 '착한 의견의 모친'을 모시고 있는 이 본당은 1901년 아산 공세리 본당에서 분할되어 창설되었다.

초대신부인 공베르(A. Gombert) 신부는 통진군수를 지낸 백 씨의 집을 사서 임시성당으로 살았다. 그는 1901년 1월 안법학교를 설립하고 운영비를 자비로 댔다. 1912년에는 안법학교 여자부를 신설하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 2명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1937. 3. 1 박문유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60쪽)

답동본당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60쪽)

인천 답동본당은 1897년에 건물이 완성되었으나 점차로 신자들이 증가하자 드뇌(Eugene Deneux, 全學俊, 1873-1947) 신부는 1933년, 성당의 신축공사에 착수, 1937년 6월 30일에 현재 모습의 성당을 건립하였다. 1982년 8월 9일에 답동성당은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 본당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첫 파견된 이래 본당 신부를 도와 전교는 물론 불우한 이웃들과 환자돌보기, 해성보육원 창설에 따른 고아들의 양육, 보호에 전력하였고 본당 내에 병원, 학교, 유치원이 설립됨에 따라 다양한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70년대에 인천교구청 기구확장에 따라서 교구사목국, 교육국, 성서후원회에서도 봉사하게 되어 인천교구 사목의 활성화에 협조를 하고 있다. 현재 11명의 수녀들이 함께 모여사는 답동분원은 각기 맡은 소임의 다양함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한 공동체로 생활하고 있다.

해성병원 - 1894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이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후 환자들에 대한 진료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그 것이 해성병원의 시초이다. 1935년 10월 14일, 아일랜드인 필로메나(Philomena Ralph) 수녀가 내한하여 보육원 아동들과 일반 환자를 위해 부속병원을 본격적으로 확장 개설하였고 1938년 10월 15일에 드뇌 신부는 사재(私財)를 들여 부속병원용 건물 3층을 현대식으로 신축하였다. 이 건물에는 16개의 방이 있었으나 주로 보육원 아동들을 위한 시설이라 입원시설은 없고 진찰과 시약만 하였다.

그 후 1961년 10월 30일에는 해성병원의 시설을 인가받았고 1970년 5월 30일에는 병원의 원사 1층을 대폭 수리, 이전하여 병원시설을 보완하였다. 1975년 인천의 답동에 있던 해성보육원은 1948년 용현동에 분원을 마련한 이후 영아원까지 모두 용현동으로 이전하자 아기들의 치료를 위해 1주일에 2∼3번씩 답동에서 왕진을 다녀야 했다. 또 급하면 가까운 의원으로 아기를 데리고 나가야 하는 불편 등으로 인하여 1984년 4월 28일에 해성병원은 인천의 해성보육원으로 이전하였다. 1991년 현재 1985년 11월에 이전해온 원주 바오로 병원과 통합되어 홍순자 아드리아나 의사수녀 외에 2명의 수녀들이 보육원 아기들과 인근 주민들의 진료에 힘쓰면서 의료사도직을 통한 복음전파에 노력하고 있다. 해성병원은 초기에는 서울보다도 훨씬 활발한 의료활동을 전개했었다. 그러나 이 병원은 본디부터 보육원 원아들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수녀회 에서는 수녀들을 기타 다른 의료기관으로 많이 파견한 이유 등으로 인해 해성병원은 보육원 부속병원으로서만 계속 작은 규모로 유지되어오고 있다.

박문유치원 -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드뇌 신부에 의해 1937년 3월 1일에 설립된 박문유치원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인천에서 우수한 유치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한동안 휴원하기도 했으나 1957년에 2학급으로 증설되면서 시설도 과학교육에 입각한 교구를 점차로 구비하고 강당, 보육실, 자료실, 양호실, 소꼽방, 실내·외 유구장, 풀장 등 다양한 설비를 갖추었다. 또한 위치도 답동성당 구내인데다가 이웃에 국민학교와 수녀원 등이 있어 좋은 교육환경을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 4,64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박문유치원은 학습발표, 리듬악기 발표, 연극발표회 등 다양한 발표회와 전인교육을 통해 매해 150명의 원아들을 교육하고 있다.

박문국민학교 - 1899년 인천 답동에 수녀원이 설치되면서부터 수녀들은 꾸준히 보육원 원아들과 신자들의 자녀 및 무산아동(無産兒童)들을 모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기관이 발전하여 1900년 9월 1일에 인천항사립박문소학교가 설립되었다. 그후 드뇌 신부는 1914년에 급증하는 아동들을 수용하기 위해 인천사립박문소학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6월, 남자부 교사 6학급을 다시 신축하여 1917년 4월 1일에는 이 2개교를 합병하여 인천박문학교로 개칭하였다. 수녀들은 박문학교 여자부를 운영하면서 특히 매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갖고 교리, 성서, 역사, 복음 등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 당시 수녀들의 학교는 제물포에 있는 학교들 중에서 가장 좋은 학교로 평가받고 있었다.

1925년 11월 27일에는 1922년에 개정된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인천사립박문보통학교로 6년제 정식인가를 받았다. 그후 1938년 4월 1일에는 개정교육령에 의해 인천박문심상소학교로, 1941년에는 다시 인천박문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6월 3일에는 건물 소개령으로 인해 남자부 교사를 헐게 되어 공립국민학교로 편입시켰으며 여자부 교사만이 남게 되었다. 당시 교사수녀들은 매일 아침 신사참배를 위해 학생들을 인솔하고 신사에 다녀와야 했으며, 남자부교사가 소개된 후에도 여자부를 위해 끝까지 헌신하면서 학교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1958년, 제 3대 교장으로 박영숙 데오판 수녀가 취임하면서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을 위임받았고 제 4대 교장인 이밀마 데레사 수녀 때 남녀 병설 12학급으로 인가받으면서 안정된 환경속에서 계속적인 발전을 해나갔다. 1961년부터 다시 인천교구에서 학교운영을 맡게 되자 수녀들은 계속 머무르며 교사 혹은 서무로서 일하였다. 그러다가 1977년 3월 2일에 제 10대 교장으로 이종후 빌뚜데스 수녀가 취임하여 제 3대, 제 4대의 수녀교장 이후 약 15년만에 다시 수녀가 학교운영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해 6월에 도서실을 개설하였고 1981년 11월에는 12개 교실을 증축하여 학교시설을 확장하였다. 이듬해에는 교내방송국을 개설하였으며 1984년 12월에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명문사학으로서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학부형들의 참여와 활동또한 대단하여 인천시내학교 어머니 글짓기 대회, 어머니 합창대회, 어머니 배구대회 등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하였다.

1988년 2월 최루시아 임마꿀레 수녀가 제11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현재는 교육시설을 완비하고 특별히 예능교육, 정보처리기능교육, 조기영어교육 등을 실시하면서 기초학력을 신장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또 매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담임교사들이 직접 맡고 있어 신앙생활과 실행활과의 연결 및 품성교육을 겸하고 있으며,천주교회 학교의 특성을 잘 살려 나가고 있다. 1989년말 현재 교장수녀와 함께 교사수녀 1명, 일반교사 18명, 직원 9명 등이 972명의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가톨릭 회관 - 1973년 3월 1일 인천 가톨릭회관이 준공되고 1975년 3월 31일부터 이명자 마리안나 수녀가 부임하여 교구의 전반적인 사목을 돕다가 1980년부터는 회관 내에있는 각 국이 분리 운영되어 사목국, 교육국, 성소후원회에 각각 담당수녀가 파견되어 교구사목을 돕고 있다.

〈사회복지부〉- 1985년 11월 10일에 류병순 마리 도미니카 수녀는 답동분원에서 자체적인 사회복지활동을 전개, 주로 청소년 근로자를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고 그후 1987년 3월 2일 이춘근 시몬 스독 수녀가 교구 사회복지부에서 개설하여 답동분원으로 이관한 해성어머니 한글교실을 담당하면서 답동분원의 사회복지 활동은 본격화 되었다. 해성어머니 교실은 문맹인 주부들에게 글을 가르쳐 가정 및 신앙생활의 향상을 돕기 위해 마련陖는데 종교와는 관계없이 25세 이상의 주부들을 대상으로 2년의 기간동안 한글교육과 산수, 일반 교양강좌를 실시하고 있으며 매일 평균 100명 정도의 주부들이 참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위한 교리반도 운영하여 문맹으로 인해 각 본당에서 교리를 배우지 못했던 영세자 및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1937. 4. 12 혜화 유치원 개원식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33쪽)

혜화 유치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33쪽)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보존케 하여 한국의 얼을 심어야 되겠다는 오기선(요셉) 신부의 취지에 따라 옛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사용하던 철공소를 유치원 원사로 하여 1937년 1월 26일 장면을 초대 원장으로 그해 4월 12일 개원식을 갖었다. 개원당시 정원에서 4명이 초과된 94명 2학급으로 원아들이 입학하였다. 그 후 많은 학부형들이 수녀들이 하는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어린 자녀들의 교육을 수녀들에게 맡기기를 원했기 때문에 혜화 유치원은 혜화동 본당에 분원이 설립된 이래 계속 수녀들의 보살핌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대표적인 유치원으로 성장하여왔다.

조화있는 인간성을 갖추기 위해 짜여진 교육과정 속에서 매주 종교담화 및 성서이야기 등을 시간표에 넣고 시행하며 좀더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 연령별로 구분, 재원반, 유치반, 유아반으로 구성하여 운영하고있다.

1937. 5대 드뇌 신부 해성병원 건립, 수녀원과 고아원, 병원과 학교, 유치원을 건립함 (270쪽 답동본당)

답동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70쪽)

인천직할시 중심부에 자리잡고있는 답동본당은 1889년에 설립되었다.

초대 빌렘(J. Wilhelm) 신부가 부임하여 지금의 본당자리에 부지 3,212평을 마련하여 성당건립 정초식을 가졌다. 그 후 제5대 드뇌(E. Deneux) 신부가 고아원과 그밖에 수녀원 건물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인천시립박문소 학교를 건립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초급과정의 교육을 가르쳤다.

1937. 11. 28 봉화유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3쪽)

사리원본당 沙里院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73쪽)

매화동 본당의 관할공소로서 1897년에 개설된 황해도 사리원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된 것은 1916년 6월이었다. 이곳의 첫 주임사제로 부임한 이기준(李起俊 도마, 1884-1977) 신부는 1921년 성모성심학원(聖母聖心學院)이라는 일종의 개량서당(改良書堂)을 개설하고 초등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사리원본당의 제 4대신부로 부임한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1874-1961) 신부는 성당건축과 함께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수녀원을 준공한 이후 1934년 12월 4일, 김명제 신부는 전교와 유치원, 학원 등을 맡아 일해 줄 수녀들을 초청하였다. 수녀들은 본당일과 봉화유치원, 명성학원(1939년에 4년제 여자국민학교로 개칭, 인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전교와 교육사업에 열중하면서 일제말의 어려움을 견디어 나갔다.

사리원본당의 사목을 도우며 열심히 일해 오던 수녀들은 1940년대 후반기를 기하여 그들의 사도직을 떠나와야 했다. 즉 해방 후 3명의 본당수녀 중 유치원을 담당하던 홍석영 모니카 수녀가 1947년에 요양차 본가인 은율로 돌아가고 같은 시기에 강봉련 제노베파 수녀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서울 본원으로 떠남에 따라 황인경 말가리다 수녀만이 남아 본당일을 하였다. 홍석영 수녀가 담당하던 유치원은 홍 수녀가 사리원에 부임한 1935년에 수녀원에 사무실을 겸한 방 하나를 마련하여 교우집 아이들 40여명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 되었다. 1937년 11월 28일에는 정식인가를 받아 1개반 80여명 정원으로 봉화유치원을 개원하여 10여년간 일하였으나 1947년 홍 수녀가 이곳을 떠남으로써 수녀없이 유치원이 유지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공산당에 의해 폐원되었다. 한편 사리원본당에서는 1939년에 명성학원(明星學院)이라는 4년제 여자국민학교를 개설하였는데 개원 초에는 일반 공·사립학교에의 입학시기를 놓친 나이 많은 처녀들이 대부분 입학하였다. 성당 지하실에 칸막이로 2개 교실을 만들어 1개 교실에서 2개 학년이 합반으로 수업하였다. 초창기의 학원선생은 최진옥 마티아, 남순우 레지나, 김 멜라니아, 조환 예로니모 등 서울 분원에서 파견되어 온 지원자들이었는데 이들이 1∼2년간 교사로 봉직한 후 본원으로 복귀한 후에는 유자격 평신도 여교사들이 가르쳤다. 명성학원은 일제의 정책으로 비록 인가를 받지 못하였으나 4년제에서 6년제로 발전하고 질적으로도 다른 학교에 뒤지지 않는 교육을 실시하여 졸업생들 중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우수한 자질을 발휘한 여성들이 많았다.

수녀들이 모두 떠난 후 혼자 남아 있던 황인경 수녀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0월에는 본당신부가 납치되고 폭격이 심해지자 사복차림으로 해주까지 왔으나 월남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래서 황 수녀는 사리원으로 되돌아 갔다가 두번째 시도 끝에 해주 부근의 한 포구에서 나룻배를 타고 월남하였다.

1937. 마전동본당 운영의 성심학교(聖心學校) 개교 (369쪽 마전동본당)

마전동본당 麻田洞本堂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9쪽)

1939년 평북 신의주시 마전동에 창설되어 1942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본당. 1937년 신의주본당 운영의 성심학교가 신의주시 마전동에 설립된 후, 마전동 일대의 교세가 급격히 신장되자 1939년 신의주본당으로부터 분할 창설되었다. 초대 주임신부로 마컴(Markham, 馬)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의 기초작업에 노력을 기울이고 1940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에 분원을 설치, 본당일과 성심학교의 서무일을 전담케 하였다. 이어 2대 주임신부로 기본스(Gibbons 盧) 신부가 부임했으나 몇개월 사목한 후 서포(西浦)의 교구청으로 전임되어 1940년 말 크레이그(Craig)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크레이그 시부는 마전동 외곽지대의 전교에 힘쓰며 야학을 개설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목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회 성직자들이 일제에 체포, 구금되자 마전동본당은 신부 없는 본당이 되었고, 1942년 2월 신의주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은 오기선신부가 마전동 본당에 주재하며 신의주 일대를 사목하였으나 이해 6월 오기선 신부가 신의주 본당으로 이사함으로써 마전동 본당은 신의주 본당에 병합되었다. 마전동본당 운영의 성심학교는 1942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개교하여 빈민아동들을 교육했으나 1947년 가을 북한 공산정권에 몰수되었다.

1938. 4. 1 해성학교의 학교명을 '원산 해성 심상소학교'로 변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6쪽)

해성학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6쪽)

해성학교는 1938년 4월 1일, 학교명을 '원산 해성 심상소학교(元山海星尋常小學校)로 변경하였다. 1937년 12월의 학교 현황을 보면 학교 대지의 총 면적이 3,542평, 교사 건평이 656평, 재적학생수(12학급) 734명, 직원수 14명, 졸업생수(10회) 807명(남자 542명, 여자 265명)이었다. 또한 1937년 당시 해성학교에서 10년이상 근속한 교직원은 오병주 부교장, 이와야 도메 선생, 이겸순(李謙順)선생, 최창희(崔昌曦)선생 등 네 사람이나 되었다.

1922년 3월 7일, 해성학교가 4년제 보통학교로 승격됨에 따라 정규교사 자격증 소지자만이 근무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비수녀와 서원수녀에 이르기까지 교사자격증의 소유자는 모두 해성학교에서 교직에 봉사하였다. 학교의 모든 행정도 맡아서 수행하며, 수도자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지녔던 오병주 교감은 수녀들의 교무실을 2층에 마련해 주고 필요한 사항은 전화로 연락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로써 수녀들은 수업시간 이외는 사무실에서 모든 사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적극적인 교육의 장이었던 해성학교가 시설면과 수준히 점차 높아짐에 따라 학생수가 종전보다 월등히 많아졌다.

이에 따라 교리반의 학생수도 점차 많아졌다. 방과 후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녀들에게 교리지도를 받았다. 서양수녀들도 입국 후 어느정도 언어소통이 가능하게 되면 교리반을 맡아 선교에 열과 성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1937년부터 강화된 일본어 사용이 이중적인 부담을 주었다. 일제는 1940년 이후 해성학교의 교리수업도 꼭 일본어로 진행시키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래서 서양인 수녀들에게는 더욱 큰 부담이 되었으나 그것이 선교에 대한 열정을 제어할 수는 없었다.

1940년 2월 11일, 일제는 창씨개명을 실시하여 학교의 모든 학적부와 출석부에는 2개의 성(姓)이 올려졌다. 또한 일제는 1941년 3월 31일, 국민학교 규정을 공포하여 소학교의 명칭을 국민학교로 바꾸고 국민학교에서 한국어 학습을 완전히 폐지하도록 하였다.

1938. 6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8쪽)

1939. 4년제 여자국민학교인 명성학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3쪽)

사리원본당 沙里院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73쪽)

매화동 본당의 관할공소로서 1897년에 개설된 황해도 사리원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된 것은 1916년 6월이었다. 이곳의 첫 주임사제로 부임한 이기준(李起俊 도마, 1884-1977) 신부는 1921년 성모성심학원(聖母聖心學院)이라는 일종의 개량서당(改良書堂)을 개설하고 초등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사리원본당의 제 4대신부로 부임한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1874-1961) 신부는 성당건축과 함께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수녀원을 준공한 이후 1934년 12월 4일, 김명제 신부는 전교와 유치원, 학원 등을 맡아 일해 줄 수녀들을 초청하였다. 수녀들은 본당일과 봉화유치원, 명성학원(1939년에 4년제 여자국민학교로 개칭, 인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전교와 교육사업에 열중하면서 일제말의 어려움을 견디어 나갔다.

사리원본당의 사목을 도우며 열심히 일해 오던 수녀들은 1940년대 후반기를 기하여 그들의 사도직을 떠나와야 했다. 즉 해방 후 3명의 본당수녀 중 유치원을 담당하던 홍석영 모니카 수녀가 1947년에 요양차 본가인 은율로 돌아가고 같은 시기에 강봉련 제노베파 수녀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서울 본원으로 떠남에 따라 황인경 말가리다 수녀만이 남아 본당일을 하였다. 홍석영 수녀가 담당하던 유치원은 홍 수녀가 사리원에 부임한 1935년에 수녀원에 사무실을 겸한 방 하나를 마련하여 교우집 아이들 40여명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 되었다. 1937년 11월 28일에는 정식인가를 받아 1개반 80여명 정원으로 봉화유치원을 개원하여 10여년간 일하였으나 1947년 홍 수녀가 이곳을 떠남으로써 수녀없이 유치원이 유지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공산당에 의해 폐원되었다. 한편 사리원본당에서는 1939년에 명성학원(明星學院)이라는 4년제 여자국민학교를 개설하였는데 개원 초에는 일반 공·사립학교에의 입학시기를 놓친 나이 많은 처녀들이 대부분 입학하였다. 성당 지하실에 칸막이로 2개 교실을 만들어 1개 교실에서 2개 학년이 합반으로 수업하였다. 초창기의 학원선생은 최진옥 마티아, 남순우 레지나, 김 멜라니아, 조환 예로니모 등 서울 분원에서 파견되어 온 지원자들이었는데 이들이 1∼2년간 교사로 봉직한 후 본원으로 복귀한 후에는 유자격 평신도 여교사들이 가르쳤다. 명성학원은 일제의 정책으로 비록 인가를 받지 못하였으나 4년제에서 6년제로 발전하고 질적으로도 다른 학교에 뒤지지 않는 교육을 실시하여 졸업생들 중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우수한 자질을 발휘한 여성들이 많았다.

수녀들이 모두 떠난 후 혼자 남아 있던 황인경 수녀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0월에는 본당신부가 납치되고 폭격이 심해지자 사복차림으로 해주까지 왔으나 월남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래서 황 수녀는 사리원으로 되돌아 갔다가 두번째 시도 끝에 해주 부근의 한 포구에서 나룻배를 타고 월남하였다.

1940. 3. 26 회령본당에서 시약소 개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50쪽)

회령본당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50쪽)

회령본당은 1926년 갈리스토 신부에 의해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에 창설되었으며 본당의 주보는 '성 야고버'였다. 1931년 5월, 을라프 그라프(Olaf Graf, 1900. 1. 16 - 1976. 12. 31)신부가 보좌로 부임했고 동년 11월 갈리스토 신부가 영흥본당으로 전임되자 을라프 신부가 2대 주임이 되었다. 을라프 시부는 1933년 초등교육기관인 명악학교를 개설하였고, 1935년 유명한 예술적인 회령 성당을 건축하였다.

회령의 주민들은 처음보는 수녀들의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곤 하였다. 함흥교구의 가장 북방의 전교지인 회령본당은 원산 본원에서도 기차로 10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었으므로 본원과의 연락이 어려웠다. 회령에서도 시약소를 개설하여 최리오바 수녀가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나 많은 환자들이 시약소를 찾자 인근에서 약방이나 의원을 경영하는 이들이 이를 시기하여 무면허 시약소로 고발하는 바람에 시약소는 얼마 후에는 하는 수 없이 문을 닫아야 했다. 시약소가 문을 닫은 후 최리오바 수녀는 명악학교에서 방과 후 교리지도를 맡아 하였다. 다니엘라 분원장도 늘 함께 교리지도를 도왔다. 정식 교사 자격증을 소지한 윤 마우라 수녀는 교직에 임하면서 본당의 제의방을 도왔다. 처음부터 회령본당의 수녀가족은 독일인 분원장 수녀를 도와가며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다.

1938년 10월 다니엘라 수녀가 폐결핵으로 본원으로 가게되자 후임으로 에와 수녀가 분원장이 되었다. 동년 11월 다니엘라 수녀는, 역시 폐결핵 초기로 병 중에 있던 장 스콜라스티카 수녀와 함께 병 치료 차 마닐라로 갔다. 1939년 6월 6일 겔트루드 링크 수녀가 휴양차 회령으로 가게 되었고, 이어 1940년 3월 26일에는 박 골룸바 수녀가 회령으로 가서 폐쇄되었던 시약소도 다시금 개설하게 되었다. 시약소는 수녀원 옆의 한옥 한 채를 사서 박 골룸바 수녀가 맡아 원할하게 운영하였으나 이번에도 주위의 시기로 인해 1940년 6월 말경에 다시 문을 닫고 말았다.

1940. 9. 1 재령 성심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338, 983쪽)

재령 성심의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338, 983쪽)

재령본당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1891-1943)신부는 의료사업을 통한 사랑의 실천과 전교에 뜻을 두고 문창리 관문거리에 있는 삼성의원을 인수하여 설비를 새로 갖추고 1940년 9월 1일 성심의원으로 개원하였다. 그리고 이 병원의 운영을 위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요청하여 3명의 수녀가 재령본당에 파견되었다.

이 성심의원은 내과와 소아과 7개의 병실을 갖추었고 정식 의사가 2명에 간호사로 구성되어 손색없는 병원으로 날로 번창하였다. 한편 전 데오도리나 수녀는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일제 말엽에 시작한 병원이었으나 교회의 병원이라서인지 일본의 방해나 간섭은 없었고 오히려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수녀들은 구호대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구호하고 치료하는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당의 박해가 시작되자 병원을 처분하고 수녀들은 본원으로 돌아갔고 책임자인 이 아뽈리나 수녀만이 재령에 남아 진료를 계속하였다. 3·8선으로 인해 서울에서 수녀들을 파견할 수가 없어 몇 개월 후에 장연분원의 박막례 알릭스 수녀와 매화동분원의 박백상 수녀가 재령으로 와서 합류하였으나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1974년 7월 10일 해주본당의 김철규(바르나바) 신부의 주선으로 모두 월남하였다.

1940. 청진 분원에서 성심의원 운영(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베네딕토수녀회 (라) Benedictina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 수녀회로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와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있는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830년 1월 9명의 동정녀들이 블룸(Joset Lenoz Blum)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자매들의 학원'이라는 공동체 생활이 효시가 된 후 1892년 9월 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타노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회의 수족에 연합됨으로써 발족된 수녀회로서 1931년 9월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904년 7월 27일 성 오틸리엔(St. Ottilien)의 모원으로부터 분할 독립된 투칭(Tutzing)의 모원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투쟁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수녀들이 1925년 11월 25일 한국에 진출하였다.

⸁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 1931년 9월 한국 진출. 1963년 10월 교황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설립목적은 지역사회의 여성교육과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할 봉사자를 양성하는데 있다. 1931년 당시 욘갈 교구장 브레허(T. Breher, 白)주교의 요청으로 6명의 수녀가 처음 내한하여 연길교구 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용정하시 본당에 첫 분원이 생긴 이후 1945년까지 7개의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원수에 있어서도 1939년까지 20명의 수녀가 스위스 모원으로부터 파견되었고, 1944년까지 21명의 한국인 수녀가 서원하였다. 그러나 1945년 8.15광복 이후 러시아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사상통일공작'에 의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월남하기 시작한 수녀들은 남한의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인 1951년 4월 유을준 의사와 람께 부산 초량동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2년 부터는 지원자들도 입회하기 시작하였고,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했던 수련장 베다(Konig Beda) 수녀도 1958년 3월 다시 내한하여 수련지도를 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 동래구 광안동에 대지를 마련하여 1965년 우선 수련원부터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후 본원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9년 경기도 부천·소사에 지원(支院)을 설립하고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의료봉사활동 이외에도 부산에서는 1949∼1980년에 걸쳐 10개의 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울산·대구·마산 그리고 미국의 뉴옥 등지에서도 전교활동을 하고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교구청 사목국, 해외교포 사목 등 특수 사목에서도 활동을 하고있다. 1972년 12월 대리구(代理區)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에 임남훈 수녀가 피임되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1년 6월 관구로부터 교황청 직속 수녀회로 승격되어 모원과 동등한 자립수녀회로 인가를 받고 초대 총원장에 김지상 수녀가 피임되었다.

⸂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원산교구의 활동 : 1920년 8월 25일 원산교구가 설정됨에 따라 성 베네딕토 남자 수도회는 그 사목을 위임맡아 덕원으로 수도원을 이전하고 함경남·북도의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수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당시 교구장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는 독일의 투찡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rers of Tutzing)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4명의 수녀가 1925년 11월 21일 내한하였다. 1926년 수녀원에서 방 한칸을 내어 전교를 시작하여 그 예비자반은 후에 '호수천사학교'로 발전하였고 1927년 6월 6일에는 새 수녀원의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며 아울러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분원장으로는 마틸데 히르시 수녀가 임명되었고 1927년 5월 3일 첫 지원자를 받았다. 1926년에 사목활동을 시작한 원산수녀원에서는 해성국민학교, 해성 유치원, 본당활동,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또한 1926년에 신설된 함흥 분원에서는 본당활동과 학교에서의 전교활동을, 1940년 신설된 청진 분원에서는 성심의원 운영과 본당활동을, 1948년 신설된 흥남 분원에서는 본당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서양수녀들의 일어 사용, 3개월 마다의 거주신청 경신, 신사참배, 국내여행 신고, 식량난 등은 물론 1944년에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모든 학교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광복 후에도 소련군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학교와 유치원이 소련군 장교숙소와 군인 교육기관으로 바뀌고 토지개혁으로 인한 농토도 몰수당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정치보위부 교화소로 옮겨졌다가 5월 16일 일부 수녀들은 수녀원으로 되돌아왔으나 곧 해산당하였고 서양수녀들은 서양신부, 수사들과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54년 1월 22일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대구에서의 활동 : 1950년부터 월남한 수녀들과 6.25동란으로 피난나온 수녀들이 부산에서 미군들의 삯빨래 등으로 생활하다가 1951년 10월 20일 당시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주선으로 대구 남산동 본당 내 사제관 일부에서 정착하였고 1955년 1월 현 대구 신암동에 건물을 신축하여 정착하였다. 1956년 대구 분원이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고 초대 원장에는 오테마라(M. Othemara Ammann) 수녀가 임명되었다. 대구에서의 활동으로는 1956년 현재 파티마의원을 개원하고 1958년에는 대구 신암동 본당에, 1960년에는 반야월 본당에, 1955년에는 대구 시립병원과 희망원에서, 1968년에는 국군간호학교에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대구시내 3개본당(신암동, 공평동, 동인동), 서울시내 3개본당(왕십리, 돈암동, 동선동), 경북 성주, 상주, 김천, 경산, 함창, 경남 마산에 각각 분원고 선교활동, 의료활동, 교육활동에 적어도 4명 이상의 수녀가 파견되어 있다.

1941. 4 호수천신학교가 정식 국민학교로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음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5쪽)

호수천신학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5쪽)

1938년 11월, 해성유치원이 이전하고 빈민학교인 '호수천신학교' 에서 '성데레사 집' 아래층을 모두 인수하게 되자 가난한 아이들의 기쁨은 매우 컸다. 호수천신학교를 통해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국민학교의 교과과정과 교리를 가르치는 그리소스토마 수녀의 열성적인 모습은 이 학교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다. 350명이나 되는 호수천신학교의 학생들은 '성데레사 집' 아래층에 있는 3개의 교실에서 오전, 오후로 나누어 공부하였다.

30년대 초반까지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거리에서나 어디서든지 가난하고 방황하는 어린이들을 만나면 학용품을 마련하여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애국정신을 심어주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굳건한 의지를 갖도록 일깨워주었다. 그리소스토마 수녀의 확고한 교육 이념 하에서 호수천신학교의 어린이들은 한글을 터득하고 점차 신앙에 눈뜨게 되었다. 1926년 발족을 본 호수천신학교는 1941년 4월에 드디어 정식 국민학교로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이전까지는 호수천신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적으로 중학교의 입학 자격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호수천신학교가 정식 국민학교로 인가됨에 따라 이제까지의 특과 4년제 과정에서 6년의 정규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치게 되었다.

6년의 정규 소학교 과정을 마치게 되면 병원의 보조원으로 일 할 수도 있고 똑똑한 아이는 그 곳에서 실습하다가 간호원 자격시험도 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입학을 원하는 어린이들은 더욱 늘어갔으나 여러가지 여건 상 이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음이 그리소스토마 수녀에게는 무엇보다 큰 고통이었다. 호수천신학교는 정식학교로 인가를 받은 후에는 남학생도 입학시켰으나 늘 여학생의 수가 훨씬 많았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여자보다 남자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었고 여자에게 돈을 들여가면서 공부시키려는 열의가 없었기 때문에학비가 저렴한 이 학교에는 여학생들이 더 많이 입학했던 것이다.

1941년부터는 일본인 막달레나 수녀와 사베라 수녀 그리고 지원자 한 명이 그리소스토마 수녀를 도와 함께 일하였다. 호수천신학교의 학생수가 증가됨에 따라 매년 영세자가 속출하였기 때문에 수녀들에게 큰 보람을 안겨 주었다.

1941. 9. 24 성심의원 축성식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03쪽)

성심의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03쪽)

1941년 9월 24일, 함흥 분원에서는 경 엘리지오 신부가 '성심의원' 축성식을 하였고, 개원식의 축하객 중에는 당시 한국 의학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수녀원을 도운 김명학 박사의 가족이 모두 참석하여 수녀들을 기쁘게 하였다. 의원에서 길을 건너 층계를 올라가면 수녀원이었다. 함흥의 '성심의원'은 건물의 구조가 네모로 되었고, 그 건물은 가운데 굴뚝이 높이 솟아 있어서 '굴뚝이 있는 집'이라고 칭하여졌다. 의원은 다움날인 9월 25일에 개원하였다.

성심 의원장인 디오메데스 수녀는 하루 60-80명의 환자들을 진료하였으며, 때때로 왕진도 가야했다. 성심의원에는 새벽 4시부터 사람들이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의사인 디오메데스 수녀는 아침 미사 후에 의원에 나가면 거의 밤 12시가 되어서야 수녀원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당시는 공심재를 엄하게 지키던 때였으므로 저녁 12시 10분전에 들어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와 다시금 환자를 진료해야 되는 경우도 많았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인근에 널리 알려진 '성심의원의 원장, 독일의 유명한 박사, 하늘이 낸 의술을 가진 독일의사'라는 칭호를 받고 동분서주했다.

1944년 2월 10일, 디오데메스 수녀가 심한 고열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원산의 프로테스탄트에서 운영하는 '구세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폐렴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충분한 영양 섭취와 요양을 해야한다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디오메데스 수녀가 요양하고 있는 동안 한국인 의사의 청원자 비르깃다(마리아 루까스 수녀, 李鍾元)가 약 3개월간 요양한 후, 계속 쉬라는 의사의 지시도 무시한 채 가난한 환자들을 다시 진료하였다. 의원의 초창기에는 대개 독일에서 약을 원조받고 있었기 때문에 진료에 어려움이 적었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의약품을 수송하기가 여려워졌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의약품의 부족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를 대할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원산을 거쳐 매월 1회씩 신고산의 약방도 순회하며 한달동안 기다린 환자들을 치료하느라고 개인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디오메데스 수녀가 진료하는 날이면 두 곳의 시약소 앞에는 환자들이 긴 대열을 지녀 진료를 받으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한달에 한번씩 다니러 오는 수녀를 기다리다 병사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선교수녀들에게서 대세를 받고 귀천할 수 있겠지만 디오메데스 수녀는 자신을 기다리다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채 병사하는 환자 때문에 늘 마음 아파했다.

1943. 진남포 소화병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진남포본당 鎭南浦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86쪽)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해성학교와 마리아유치원, 그리고 양로원과 고아원 사도직에 봉사하였다. 진남포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르레드(Jules Lereide, 申승겸, 1883-1917) 신부의 요청으로 1910년 9월 15일에 이 펠릭스 수녀와 이 마리아 수녀가 파견되어 지정(智貞)여학교에 근무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후 1914년 본당신부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병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본국으로 소환되어 가자 수녀들은 본원으로 귀원하였다. 그러다가 1921년 제 4대 본당신부인 뤼카(Francois Lucas, 1878-1934) 신부의 부탁으로 그해 10월 11일 오채경 말지나 수녀와 강옥섬 아오스딩 수녀가 7년만에 다시 파견되어 본당에서 설립한 해성학교와 마리아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리아 유치원은 1918년에 본당의 남녀청년회에서 문맹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설립한 것으로 1918년 그들은 50명의 원아를 수용하여 기초교육사업을 벌였다. 1921년 6월에 뤼카 신부가 본당에 부임하면서 그는 전통적 미풍양속을 내세워 남녀7세 부동석에 의한 도덕관을 주장하여 마리아유치원 여자부를 분리하여 해성학원(海星學院)이라 이름하고 직접 운영하면서 남자부는 신자 유지들에게 일임하였다. 수녀들이 처음 부임했을 때는 학생수가 33명이었는데 이듬해 봄에는 70여명, 가을에는 100여명이 넘게 되어 갑·을·병 3반에 유치반 한 반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1926년 4월에 메리놀회의 더피(Patrick Duffy)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마리아유치원과 해성학교의 시설을 보강하였다. 이후 해성학교와 더불어 유치원은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1930년 4월 스위니 신부는 100여평의 학교 건물을 신축하고 사립학교 인가를 받아 해성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가 되었다. 1935년 3월에는 6년제로 개편함으로서 학교의 규모와 교육내용을 더욱 충실히 하였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학교수녀들의 공로가 컸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1937년도 해성학교의 현황을 보면 800여평의 대지 위에 건물 216평, 11학급 642명의 학생들과 4명의 수녀들을 비롯한 13명의 교사들이 있었다. 이외에도 본당 내에는 1931년, 포스피칼(Hubert Pospichal) 신부가 무산아동을 위해 세운 성심학원과 5개의 공소에 상설야학이 있어 문맹퇴치에 공헌하였다.

마리아유치원은 1945년 초, 일인들의 강압으로 폐원되었다. 그러나 해성학교는 공립학교로 잠시 흡수되었다가해방이 된 후 다시 교회에서 운영하여 왔으나 1947년도를 마지막으로 공산정권에 몰수당하였다. 1933년 스위니 신부는 본당에 양로원과 고아원을 개설하여 무의무탁한 노인, 불구자, 고아들을 수용하고 그 자신의 독자적인 부담으로 이를 운영하였다. 스위니 신부가 떠난 후에 운영난에 봉착했으나 이 소식이 일반사회에 전해지자 1936년 진남포부 당국에서 양로원 운영보조비로 500원을 보조하여 줌으로써 교회에서는 더욱 용기를 내어 양로사업에 진력하게 되었다. 1933년부터 1937년 사이의 부양자 총수는 98명, 1937년도 수용인원은 58명이었다. 이 양로원과 고아원은 많은 시련속에서도 꾸준히 운영되어 오다가 1945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남포본당에서 철수한 이후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수녀들에 의해 돌보아졌고 침묵의 교회가 되기 바로 직전,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었다.

본당내 시약소 사도직은 양기섭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있던 1941년 양기섭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사업을 계승하였다. 양 신부는 1943년에 성심학원과 유치원의 문을 닫고 그해 10월 3일 소화병원을 신설하였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등의 진료과목에 입원실 7개, 의사 3명 그리고 간호수녀 3명으로 구성된 손색없는 의료진으로 외래환자를 진료하면서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봉사를 함으로써 의술로나 운영에 있어서 호평을 받았다. 전교에도 많은 도움을 주며 발전해 갔으나 1945년 10월에 폐원되었다.

1944. 8. 10 계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797쪽)

계성여자고등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797쪽)

계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가 설립된 것은 1944년 8월 10일의 일이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고성순 양셀모 수녀와 고두희 레몬다 수녀가 학교교사로 파견되어 출퇴근 하였고 1945년 고성순 수녀가 장질부사로 사망하자 대신 강봉련 제노베파 수녀가 부임하였다. 당시에는 이미 성당 구내에 계성유치원, 계성국민학교, 계성여학원 등 세 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여기에 학교를 세울 뜻을 굳힌 것은 식민지 지배 말기에 이르러 일제가 의무교육을 방지하여 사립국민학교를 공립으로 흡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학교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성당 구내에까지 일본인들의 간섭이 뻗치게 되어 자주적인 교육이 불가능해 질 것임으로 차제에 국민학교 남자부는 폐지하고 여자부만을 살려서 동성상업고등학교(현 동성중고등학교)와 맞먹는 여학교를 세워 교육구국과 가톨릭적 여성의 양성이라는 뜻을 펼치기 위해 학교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1957년 5월에 계성여학교의 운영권이 서울교구로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로 이관되자 수녀원에서는 학교발전을 위해 한층 더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1958년 10월 11일에 성지관의 낙성을 보았다. 성지관이 낙성될 무렵의 학생수는 중학교 15학급에 930명, 고등학교 10학급 583명으로 모두 1,513명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도 계속적인 학급증설에 불가피하게 되어 1961년에는 본관 3층이, 1963년에는 성지관 4층이 증축되었고 1973년에는 성미관이 완공되었다. 한편 내실에도 힘을 기울여 훌륭한 교사진의 확보를 중요하게 여겨서 제9대 조규옥 마리 안젤리카 교장은 교사들의 처우를 점차적으로 개선하여 타학교에 비해 파격적인 대우를 해 줌으로써 훌륭한 교사들을 많이 영입할 수 있었다. 1969년 3월에 중·고교가 행정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중학교 초대 원장으로 고영희 뻬르뻬뚜아 수녀가 취임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각종 교육제도의 개혁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고 이 영향으로 학교도 여러면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고등학교 평준화로 학력면에서뿐만 아니라 종교교육면에서도 이질화가 나타났으나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종교교육의 활성화에 꾸준히 힘써 교직원의 대부분이 입교하였고 매년 세례를 받는 학생도 증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을 건학이념으로 삼아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성장해 오던 계성여자중학교는 좁은 구내에서 중고등학교가 함께 생활하게 됨에 따라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과 과다학급 운영의 어려움을 덜고 고등학교만이라도 건실하게 키워가야 하겠다는 결단아래 개교한지 43년만인 1987년 2월 28일 제38회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이와같이 학교발전 계획에 따른 중학교의 폐교와 교사정비 작업이 1987년 초에 이르러 마무리되자 교육의 내적충실을 위하여 교직원과 학생 모두가 한마음으로 서로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학교장은 모두 수녀가 맡게 되었으므로 교장의 교체가 일반 사학에 비해 잦은 편이었다. 그러므로 교장의 장기근속에서 오는 어떤 압력이나 파벌조성 등 흔히 있을 수 있는 사학의 질병이 없는 장점도 있었지만 반면에 교육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되기 쉬운 결함도 없지 않았다. 교사 수녀들로는 학교 초창기부터 소수의 대학 출신 수녀들이 파견되었으며 종교교과와 수녀들이 전공한 일반 학과의 과목을 가르쳤다. 이밖에 학교의 도서실과 서무·경리직도 수녀들이 맡아 알뜰한 운영으로 학교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수녀들은 계성 초창기부터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거쳐 학교를 재건하고 학교의 내외적 성장과 발전을 이루기까지 교사들과 함께 열심히 일했으며 특히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직영의 교육기관이므로 교회의 교육목적을 소홀히 함이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품성교육과 종교교육에 충실을 다하였다. 현재 교장수녀를 비롯하여 13명의 수녀들이 교사로서, 혹은 서무나 도서실 등 각 부서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

1944. 흥남본당의 구대준 신부는 대건의원을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5쪽)

흥남본당 興南本堂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5쪽)

흥남(興南) 본당은 함경남도 함주군 흥남읍 하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당은 1936년 4월에 건립되었다. 흥남 본당은 함흥본당의 공소로 시작하여 1936년 4월 성당의 건축이 완공되자 초대 본당 신부로 북청(北靑) 본당의 주임이었던 임 갈리스토 히머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으로 승격된 것이다. 주보는 성 펠리치타스(St. Felicitas)였다. 아담한 흥남 본당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황토 언덕 위에 오똑하니 솟아 있었으며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하였고 전경이 아름다웠다.

초대 본당 신부인 임 갈리스토 신부는 본당 구역 내에 빈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해성학원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앞섰으며 이를 통하여 많은 선교 활동도 펴 나갔다. 제 2대 본당 신부로는 구대준(具大俊, 가브리엘 ; 1912. 음4. 27 - 1950. 5. ?) 신부가 부임했다. 1942년에 구 대준 신부는 보좌신부를 거치지 않고 원산교구의 삼목 본당(三木本堂) 중의 하나인 흥남본당의 주임 신부로 곧바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구 대준 신부는 나라 사랑의 뜻이 투철한 사제로서 일제 말의 사설 학원 폐지 압력에도 굴치 않고 해성학원을 운영하였으며 1944년에는 사제관을 내놓아 대건의원(大建醫院)을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을 시도하였다.

구 대준 신부는 사제관인 붉은 벽돌 이층 건물을 병원 청사로 내놓고 자신이 공경하던 한국의 첫번 사제인 김 대건의 이름을 따서「대건의원」을 개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 다음 구대준 신부는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선교 수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겔트루드 원장수녀는 이러한 구 대준 신부의 갸륵한 선교 정신에 감복하여 요청대로 선교 수녀를 파견하여 1948년 5월 20일, 흥남분원의 설립을 보게 된 것이다. 흥남 본당에는 수녀원 건물이 따로 없었으므로 수녀들은 학원으로 사용했던 교실 한칸을 칸막이로 막아서 생활하였다.

흥남 본당에는 열심한 신자들이 많아서 선교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으므로 본당 사목은 곧 활기를 띠게 되었고 특별히 본당의 강 술호(姜述鎬, 요셉) 회장은 수녀원의 일과 본당의 일을 적극적으로 돌봐주었다.

그런데 1949년 1월 25일, 구대준 신부는 한국의 북단인 회령과 계림의 본당 신부로 전임되었고 제 3대 본당 신부로 독일인 어 게롤드 신부가 부임하여 왔다. 구대준 신부는 이러한 시기에 독일인 신부를 북쪽으로 보내는 일은 위험한 일이라고 제의하고 위험한 북쪽 전교지에 부임을 자청하였던 것이다.

수녀들은 생활의 보탬을 위해 돼지를 기르기도 하였는데, 본당 신자들이 돼지먹이를 모두 갖다 주었다. 이렇듯 본당 신자들이 수녀들을 관심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므로 수녀들 또한 특별한 사랑으로 신자들을 대하였다. 1949년 1월 새로 부임해온 어 게롤드 신부는 포교 성 베네딕도회와 같은 소속이었으므로 가끔 수녀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곤 하였으며 늘 화목한 분위기에서 흥남 본당의 수녀 가족은 즐겁고 보람된 선교 활동을 펴 나갔다. 그러나 1949년 5월 14일 공산당에 의해 본당이 폐쇄되었으므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이 흥남 본당에서 선교한 것은 겨우 1년 남짓한 기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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