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연대별 기록4



4. 해방후 활동(1945∼1975)

1945. 8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은율본당에서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9쪽)

은율본당 殷栗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79쪽)

1887년, 로(Jean Rault, 1860-1902) 신부가 황해도의 고정 선교사로 임명되어 은율에서 40리 상거한 장련(長連)에 정착하여 전교하면서 은율에 처음 공소를 개설한 이래, 1902년 5월에 공소로부터 본당으로 승격된 황해도 은율본당 관내에서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물론 유치원마저도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아쉬움을 느껴왔다. 그러다가 이보환(李1褓煥 요셉, 1893-1944) 신부가 부임한 후 유치원부터 설립하기로 중론이 모아져 300원의 기금으로 1923년에 성모유치원(후에 해성유치원, 은율유치원으로 개명)을 개원하였다. 첫해에 원아수는 54명에 달하였고, 유자격 교사 2명이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한편 1929년 4월 8일, 은율본당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1895-1950 행불) 신부는 가정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해성야학원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개설하자 8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 해성학원과 앞의 유치원을 위해 1931년 8월 18일 은율분원이 신설되어 이화 우술라 수녀와 김 발렌티나 수녀, 그리고 송 에밀리아 수녀 등 3명의 수녀가 파견되었다. 수녀들은 학원 학생들 뿐만 아니라 유치원 원아들에게도 교리와 유희, 노래 등을 열심히 가르치고 전교도 하게되자 세인의 평판도 좋아지고 학교와 유치원이 크게 발전하였다.

1936년에는 본당유지의 기증으로 2층 연와조 양관(洋館)을 건축, 1층을 유치원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평양 대신리본당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1905-1982) 신부는 축성식에 참석했다가 시설이 미비한 것을 보고 돌아가 미끄럼틀과 그네 등을 평양에서 제작하여 기증했다. 그리고 성모 유치원의 명칭도 은율유치원으로 바꾸었다.

8·15해방 후 북한지역의 공산화로 인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철수하였다.

1945. 9 효성가정여학교 창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50쪽)

효성 가정여학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50쪽)

해방 이후, 북한에 있는그리스도교 계통의 모든 교육 기관들은 공산정권에 의하여 제약을 받거나 폐교되었다. 원산본당의 경우, 원산 본당의 탁 파비안 신부가 거리에서 소련군 장교에게 체포되어 7시간의 심문을 받고, 아무런 혐의가 없음이 밝혀진 후에, 그래도 주어진 한계내에서는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45년 9월, 주민들이 간절히 원하던 여성 교육 기관인 '효성 가정여학교'를 창설하였다. 원산의 해성학교 교사는 소련군 당국으로부터 그들의 자녀를 위한 국민학교와 기숙사로 징발되었으므로 수녀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하는 협소한 호수 천신학교 뿐이었다. 학교의 교장직은 이 보니파시아 수녀가 맡게 되었고, 재단 이사장직은 탁 파비안 신부가 맡았다. 학교의 창립자는 역사 탁 파비안 신부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이전부터 이 보니파시아 수녀는 한국 여성의 교육을 이상적으로 전개해 나갈 교육 기관 설립을 늘 꿈꾸어 왔었다. 그러나 공산 치하에서 이러한 교육적 이상을 실현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한때는 제 후밀리타스 수녀와 청원자 이 마리아가 교사로서 함께 활동하였으나 모든 교직원이 미 신자들이었고 더우기 공산 정권하에서는 신앙 안에서의 이상적인 여성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2년제인 이 가정 학교는 겨우 1회의 졸업생을 배출시킨 후 1947년 가을 폐교되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공립학교에 편입되었다. 이후 학교 건물은 수녀원에 통지도 없이 공산정권 관리의 양성을 위한 학교로 징발되었다.

1945. '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 발족(246쪽 노동운동)

노동운동 (영) labor move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46쪽)

노동운동이란 근내적 임금노동자 계층이 자신의 생활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전개하는 조직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노동자의 일상적인 욕구, 임금등의 근로조건 유지 개선을 기본목표로 하는 동시에 자본의 강력한 지배에서 벗어나 사회의 떳떳한 구성원이 되려는 노동자의 조직적인 운동이다. 노동운동은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생산자로서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을 유지, 개선하기 위해 전개하는 노동조합 운동

둘째, 시민으로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을 만들어 나가는 정치운동

세째, 소비자로서 노동자사 보다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전개하는 각종 협동조합운동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19세기 말 임금노동자가 출현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3.1운동이 실패한 뒤 대중적 조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정부와 사용자와 노동자의 주역에 의해 구체적으로 다듬어 지는 것이 노동운동의 성격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 이 삼자가 걸어온 역사적 체험과 기능상의 특수성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된 다른 나라 노동의 궤적과는 다른 형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1945. 6대 임종국 신부 부천의 소화여자 고등학교를 인천 박문고등학교로 개편 (270쪽 답동본당)

답동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70쪽)

인천직할시 중심부에 자리잡고있는 답동본당은 1889년에 설립되었다.

초대 빌렘(J. Wilhelm) 신부가 부임하여 지금의 본당자리에 부지 3,212평을 마련하여 성당건립 정초식을 가졌다. 그 후 제5대 드뇌(E. Deneux) 신부가 고아원과 그밖에 수녀원 건물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인천시립박문소 학교를 건립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초급과정의 교육을 가르쳤다.

1945. 돈 보스꼬의 집 설립 (나눔지 12호 5쪽) - 1979. 5. 25발행

돈 보스꼬의 집 (나눔지 12호 5쪽) - 1979. 5. 25발행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산 55의 1에 자리잡고있는 돈 보스꼬의 집은 지난 6.25 동란때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기 까지 불우아동을 위하여 애써오고 있다. 특히 사회로부터 경원되고 있는 불우한 "한센씨 병(나병)" 환자 가정의 미감아동들에게 일반 가정의 어린이와 똑같은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감아동시설]이다. 교육비가 부족한 형편이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보다 바람직한 어린이의 보호, 교육과 원의 운영을 위해서는 외국인에 의한 원조보다 우리 이웃의 사랑과 도움을 더욱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1946. 1. 14 소화국민학교 인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74쪽)

북수동본당 소화국민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74쪽)

1934년, 4년제 소화학술강습소로 창설되어 샤르트르 수녀회의 수녀들이 교사로서 일하였고 1946년 1월 14일에는 소화국민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계속해서 수녀들은 교사, 경리, 서무 등 다양하게 활동하며 1961년에 북수동 분원이 철수하기까지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북수동분원이 재차 개원된 1965년 이후로는 학교수녀는 1명이 파견되어 월1회 미사조회와 교리교육, 상담 등을 담당하면서 어린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어린이들의 특별활동을 위하여 강사들을 초청하여 다양하고 활발하게 학습시키고 있는 소화국민학교는 수원시의 유일한 사립국민학교로서 12학급, 660여명의 학생들에게 알차고 효율적인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소화국민학교가 명문국민학교로서 널리 알려져 있음은 해마다 나타나는 높은 입학경쟁률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1946. 2. 10 소화영아재활원(小花櫖兒再活院)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3쪽)

소화영아재활원 小花櫖兒再活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3쪽)

소화영아재활원은 원래 소화보육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8·15 해방 후 부산 범일동 본당 주임 정재석 신부가 후견인이 없는 불쌍한 어린이들을 모아서 본당 근처에 있던 30평짜리 한옥에 수용한 것이 소화보육원의 출발이다. 정 신부는 이 사업의 운영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위촉하였다. 1946년 2월 10일에 분원이 설립되어 파견된 수녀들은 협소한 집에서 갖추어진 시설도 없고 보건위생 조건도 불비한 가운데서 초창기의 정신 그대로 가난과 겸손 그리고 인내로써 사랑의 일을 말없이 계속하였다. 그러던 사이에 한국전쟁으로 부산은 피난민으로 붐볐고 소화보육원은 서울, 대구의 수녀회에서 운영하던 두 보육원 아이들을 피난 수용하는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 전쟁기간동안 피난민들이 느는 만큼 고아가 늘어가자 정부당국의 후원자 은인들의 도움으로 급히 144명의 원사를 마련하였고 원아들의 보건위행과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의 진료를 위하여 부속건물로 진료소도 지었다. 이것이 데레사의원의 시작이 되었다.

소화보육원의 원아수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늘어갔지만 시설은 날로 협소해졌다. 또한 본당과 학교 사이에 자리잡은 보육원은 보육환경이 부적당했고 이전 문제가 거론되었다. 부산교구청에서는 보육원 대지를 내놓고 교구소속 대지였던 남구 남천동으로 이전하라고 하였다. 부산의 변두리였던 남천동은 그 당시 황무지와 다름없었던 거의 쓸모없는 땅이었다. 431평의 대지에 새원사를 지어 1963년 9월 12일에 옮기게 되었다.

당시 보육원과 부속 데레사의원의 운영권자가 모호하여 실무상에 애로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교섭한 결과 부산교구장 이갑수 가브리엘 주교는 1977년 3월 30일에 소화보육원의 운영권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에 정식으로 이양하였다.

한편 1979년까지 보육하던 영아원의 영아들은 차차 입양되고 이곳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영아불구시설'로 전환시켜 영아장애인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영아들의 질병은 다양하였고 병원왕래에 교통편이 원할하지 못해 어려움이 컸다. 이 사정을 아산재단에 알려 1979년 6월에 미니버스를 얻게되었다. 이 해 연말부터 수녀들의 사업이 알려져 수용 인원수가 많아져서 새로운 시설로의 이전이 요청되었다. 그래서 데레사의원이 폐원된 후 여러번 시설변경이 시도되었던 종전의 병원건물을 시청의 원조로 개수하여 1980년 4월에 입주하였다. 1980년 초에 비만오면 웅덩이로 변하는 건물 앞의 공지를 교육청에서 학교건립을 위하여 퍼내는 흙을 얻어 매립했다.

시대적 요구와 소명감에서 시작한 이 일은 시행착오를 거듭하여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경험부족과 재정적인 어려움, 주위의 이해부족 등 어려움이 말할 수 없었다. 정상아 15명당 보모 1명으로 해결될 수 있는 영아원 운영이 장애인인 경우에는 5명에 보모 1명이라도 힘겨운 일이다. 장애인의 유형은 가지가지이다. 그러나 장애인들도 조기치료를 하면 효과적이므로 치료기구, 물리치료실 등의 구비에 필요한 재정적인 뒷바침이 있어야 한다.

1980년 말에 소화영아불구시설을 '소화영아재활원'으로 명칭변경 신청하였다. 기존건물을 다시 개수공사하여 시설을 갖추어 1981년 1월 19일에 소화영아재활원으로 개원한 후 수녀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던 중 1987년 남천동 재활원 자리에 교구청사를 이전하려는 교구의 계획으로 다시 재활원의 이전문제가 대두되었다. 무척 난처했고 앞으로도 이런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부산교구청과는 상관없이 사업체를 단독으로 운영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재활원을 위하여 교구청측에서 내놓은 부곡동 야산에는 그 동안 재활원 사목실을 빌려 상담해오던 심장환자 상담소를 위한 건물 신축이 계획되어 1988년 2월 1일 기공식을 가졌고 1989년 10월에 완공을 보았다.

1946. 3 '대한 노동조합 총연맹' 결성 (246쪽 노동운동)

노동운동 (영) labor move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46쪽)

노동운동이란 근내적 임금노동자 계층이 자신의 생활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전개하는 조직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노동자의 일상적인 욕구, 임금등의 근로조건 유지 개선을 기본목표로 하는 동시에 자본의 강력한 지배에서 벗어나 사회의 떳떳한 구성원이 되려는 노동자의 조직적인 운동이다. 노동운동은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생산자로서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을 유지, 개선하기 위해 전개하는 노동조합 운동

둘째, 시민으로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을 만들어 나가는 정치운동

세째, 소비자로서 노동자사 보다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전개하는 각종 협동조합운동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19세기 말 임금노동자가 출현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3.1운동이 실패한 뒤 대중적 조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정부와 사용자와 노동자의 주역에 의해 구체적으로 다듬어 지는 것이 노동운동의 성격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 이 삼자가 걸어온 역사적 체험과 기능상의 특수성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된 다른 나라 노동의 궤적과는 다른 형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1946. 9. 23 현 산업재해병원이 위치한 생산사립병원 사토오병원을 인수 (18쪽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8쪽)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이어받아 자선과 의료사업으로 지역사회 주민에 대한 보건증진에 이바지하는 한편 유능한 의료인을 양성, 연구를 통한 의술 향상으로 의학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여 1935년 3월 11일 경성구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설립한 병원이다.

1946. 성심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사회사업 (영) Social servic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5쪽)

가톨릭 교회는 단순한 전례의 공동체나 신앙의 공동체일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빛(마태 5,13-16)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사회안의 어두운 곳을 찾아서 어두움을 없애고 광명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너무도 어두운 곳이 많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사람, 육체는 건강하나 정신이 병든사람, 정신은 건강하나 육체가 병든사람 등이 있다.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을 살펴주고 그들의 희망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버림받고 소외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현세적인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교회의 사업중에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문화사업, 사회사업등이 포함된다.

*구미근로여성복지관 - 1973년 경북 구미시 송정동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구미공단 근로여성들의 인격도야 및 생할향상을 위해 기능교육, 취미교육, 교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설립단체는 왜관 성 베네딕토 대 수도원이다.

*국제마리아의 사업회 -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고 1969년(여자), 1974년(남자)에 설립되었다.

주된 활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회원이 소득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퍼콜라레 운동을 하는 남녀 회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덕산 신생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사 회복지법인으로서 1952년에 설립된후 요보호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하고 원생을 초·중·고등학교에 진학 시키고 졸업 후에는 기술을 습득시키고 있다.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 1976년 경남 마산시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정기프로그램으로 학습반과 취미반이 있고 특별 프로그램으로 젊은이 교실, 사임당교실, 성교육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 1979년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설립하였다. 불우이웃 청소년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의식개발, 교육, 협동, 우정, 자립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쎈뽈원 - 충남 논산군 논산읍에 있으며 1973년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이 되었다. 노인복지시설을 설치운영하며, 성인불구자의 복지사업을 하고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 1966년에 설립되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근로자의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기업인의 이해를 촉구시키고 노사간의 긴밀한 협조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곳이다.

*성심원 - 서울대교구가 불우아동 및 부상아동을 보호하기위해 1946년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설립하였다. 파티마 성모수녀원에서 담당운영하고 있다.

*성인복지원 - 1976년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설립, 부양가족이 없고 경제적으로 자활이 분리한 60세 이상의 여자노인을 수용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 본부는 서울 명동에 있으며 마음의 가난함을 생활화하는 단체로 1961년 설립되었다. 주된사업은 환자, 가난한자, 걸인을 돌보고 노쇠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며 불우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이다.

*소화영아재활원 - 1946년 소아보육원으로 출발하였다. 주된사업은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사업이며, 부산교구재단에서 운영하고있다.

*엠마우스집 - 1981년 설립된 것으로 성인지체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 - 1969년에 불우아동을 수용하여 직업보도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성 빈첸시오 청소년 복지회에서 설립하였다.

*춘광대구 요양원 - 극빈 폐결핵 환자 요양원으로 1966년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진영성모의원 별관 -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불우한 결핵환자를 고쳐주는 것이 주된목적이다.

*한국 SOS 어린이 마을 - 요보호 아동들을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하고 퇴소후에는 독립생계를 유지토록 자립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꽃동네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중 특기해야 할 것은 충북 무극에 있는 꽃동네로 청주교구 오웅진 신부가 혼자서 걸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면서 시작되었다. 꽃동네의 특징은 구걸할 수만 있으면 퇴거토록 하는 것으로 자생의 능력이 전혀 없는 노인만을 보호하는 곳이다.

*성모 자애원 - 예수성심 시녀회가 심신 장애아를 재활시키는 곳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 6.25 이후 기아가 날로 증가하여 버림받은 생명들을 입양, 양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릴리 어린이집 - 6-7세의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을 받아 교육하고 있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의 근로자의 집 - 근로자의 수용과 교육에 힘쓴다.

*성 프란치스코의 집 -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일을한다.

*마리아 자매원 - 문제청소년을 교도하고 상담과 숙소를 제공하여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국민학교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이수시킨다.

*성심 양로원 - 불우한 노인을 수용하여 물질적 정신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성가 양로원 - 무의탁 노인들을 구호한다.

*백백합 보육원 -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호, 육성한다. 설립단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다.

*해성 보육원 - 요보호 아동과 지체 부자유자아 및 정박아 수용 및 양육, 국내외 입앙을 하고있다.

이상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 중 그 일부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나 이 이외에도 수십개의 사회사업단체가 있으며 그들은 보이지 않게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사업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첫째, 교회는 특별히 정부나 일반 사회단체에서 망각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소외된 계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이 하기 어려운 사업을 찾아서 그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임무다.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회사업은 양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몇명을 도와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교회의 사회사업은 어떤 기관이나 단체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사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자기의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인의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회사업가이며 모든 신자가정은 사회사업단체인 것이다. 세째, 교회 당국이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재정적 뒷바침을 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성당도 지어야 하고 문화사업도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오늘의 현실 안에서 연장시키는 일이다. 특히 도시교구나 본당에서는 그 지역사회안에 어두움을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여 그들을 위한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정말 가톨릭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1946. 6년과정 인문계 중학교로 개편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동성중고등학교 東星中高等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제단법인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중등교육 기관. 학교내에 을조(乙組) 를 편성하여 신학교의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을조의 경우 남대문 상업학교의 교육과정을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받고 방과 후 신학원에서 신학교육에 필요한 라틴어와 교리및 지도신부의 영성을 받았다. 1968년 5월 김수환 추기경이 이사장으로 취임되어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마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6. 신성여자중학원으로 재개교 (722쪽 신성학교)

신성학교 晨星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22쪽)

1909년 프랑스 선교사 라크루(Marcellus Lacrouts) 신부가 제주도에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으로 현재의 신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16년 일제의 우민화정책에 따라 탄압을 받고 무기휴교를 당했다가 1964년 신성여자중학원으로 재개교하였다. 1953년 고등학교를 병설하였고 1977년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800번지의 현 교사로 이전하였다.

1947. 7. 10 재령 성심의원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338, 983쪽)

재령 성심의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338, 983쪽)

재령본당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1891-1943)신부는 의료사업을 통한 사랑의 실천과 전교에 뜻을 두고 문창리 관문거리에 있는 삼성의원을 인수하여 설비를 새로 갖추고 1940년 9월 1일 성심의원으로 개원하였다. 그리고 이 병원의 운영을 위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요청하여 3명의 수녀가 재령본당에 파견되었다.

이 성심의원은 내과와 소아과 7개의 병실을 갖추었고 정식 의사가 2명에 간호사로 구성되어 손색없는 병원으로 날로 번창하였다. 한편 전 데오도리나 수녀는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일제 말엽에 시작한 병원이었으나 교회의 병원이라서인지 일본의 방해나 간섭은 없었고 오히려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수녀들은 구호대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구호하고 치료하는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당의 박해가 시작되자 병원을 처분하고 수녀들은 본원으로 돌아갔고 책임자인 이 아뽈리나 수녀만이 재령에 남아 진료를 계속하였다. 3·8선으로 인해 서울에서 수녀들을 파견할 수가 없어 몇 개월 후에 장연분원의 박막례 알릭스 수녀와 매화동분원의 박백상 수녀가 재령으로 와서 합류하였으나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1974년 7월 10일 해주본당의 김철규(바르나바) 신부의 주선으로 모두 월남하였다.

1947. 8. 25 성심보육원아들의 양육을 위해 강릉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강릉본당 江陵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1947년 성골롬바노회의 제라프티(Brain Geraphty, 池) 신부가 60여명 고아들의 양육을 위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를 요청하여 공순옥 마리 헬렌 수녀를 비롯한 4명의 수녀가 강원도 강릉에 있는 성심보육원에 파견되었다. 원아들은 대부분 남자 아이들이어서 이들에게 공부 이외에도 기술이나 밭농사를 가르쳤다. 한국전쟁 때에는 대구로 피난하여 원아들을 돌보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보육원 외에 본당에서 전교도 하였는데 점차 원아의 수가 줄어 1962년에 보육원을 폐원하고 전교만 하다가 몇 달 후에 전교 수녀들도 철수하였다.

1947. 성모병원 제기동 진료소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9쪽)

제기동 성모의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9쪽)

1944년, 제기동본당에 수녀원 분원이 생겼고 1946년에 회사받은 돈으로 집 한채를 사서 그 방 하나에 진료실을 꾸미고 진료하기 시작하였가. 그러다가 1947년, 미군의 원조와 본원의 도움으로 병원을 건립하여 성모병원 제기동 진료소라 이름하고 여의사 이혜춘을 채용하여 정식으로 진료업무를 하게 된 것이 성모의원의 시작이다. 이 진료소는 거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손으로 지어진 병원으로 규모는 작았지만 가난한 지역사회 주민들을 위한 사도직의 터전이었기에 자랑스러웠다. 방 5개로 이루어진 진료소와 수녀들이 거처하는 2개의 방, 그리고 조그만 부엌과 마루 등의 구조를 가진 작은 병원이었지만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며 발전해 나가던 중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의사가 피랍되고 많이 파괴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9·28 수복 후 병원수리를 하고 홍순자 아드리아나 수녀를 중심으로 다시 진료를 시작하지 병원이 없어 헤매던 사람들이 줄지어 모이기 시작했다. 홍연봉 다니엘라 수녀, 조복순 엘리아 수녀가 간호 수녀였고 한 푼이라도 싸게 약을 구입하기 위해 황수자 베네딕다 수녀는 남대문까지 걸어다니며 약을 사오기도 했으며 손수건에 민속 그림을 그려 미군들에게 판매하여 조금씩 모은 돈으로 병원을 확장시키려 노력했다.

이 병원은 성바오로병원이 생기기 전까지는 유일한 수녀원 직영병원이었기 때문에 20여년 동안 수녀들의 치료와 휴양에 큰 도움을 주었고 한때 본원이 경제적으로 곤란했을 때에는 큰 힘이 되었다. 점차로 환자가 늘어나 입원실이 부족하게 되고 교통도 불편하여 병원 확장이 불가피하게 되자 당시 내한한 르네 총장수녀의 도움으로 청량리에 대지 400평을 확보하고 약과 물건을 2 : 1의 비율로 나누어 1957년 12월 8일 성바오로의원이 분가하였다. 가난한 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가난하게 시작하여 보람있게 일하면서 진료 이외에도 양주군, 고양군 등 교외지역에 사는 환자들 방문과 교리반 봉사 등 전교에도 힘을 냵던 제기동성모의원은 이후 원주에 성 바오로 병원 분원이 세워지자 1969년 7월 1일로 폐원하고 원주로 이전되었다.

1947. 안법국민학교를 초급중학교로 승격 (775쪽 안성본당)

안성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75쪽)

주보로 '착한 의견의 모친'을 모시고 있는 이 본당은 1901년 아산 공세리 본당에서 분할되어 창설되었다.

초대신부인 공베르(A. Gombert) 신부는 통진군수를 지낸 백 씨의 집을 사서 임시성당으로 살았다. 그는 1901년 1월 안법학교를 설립하고 운영비를 자비로 댔다. 1912년에는 안법학교 여자부를 신설하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 2명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1948. 성 나자로 마을이 있는 자리에 있던 세브란스 병원 부속 결핵요양소를 사들여 성 나자로 요양원 설립 (233쪽 나환자촌)

나환자촌 (영) leper colonie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33쪽)

나병은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불치의 전염병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1947년 설파제의 발견과 그 발달로 인해 효과적인 치료가 가능해졌고 1950년 이후 부터는 불치의 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예수그리스도는 나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소외에 깊은 연민과 자비심 미치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 하였다. (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 그리고 열 두제자를 세상에 파견하면서 "나병환자를 깨끗이 고쳐주어라." (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고 분명하게 지시하였다. 그 후 가톨릭 교회는 나환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1978년 말 전세계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의료시설 중 나환자촌은 537개소에 이른다.

한국 천주교회의 구라사업은 1950년대부터 시작된다. 1945년 이후 평양교구장인 캐롤(George Carroll)주교는의료사업을 전개한다.

각 교구별 나환자촌은 춘천교구 1개소, 대전교구 1개소, 수원교구 2개소, 부산교구 3개소, 마산교구 1개소, 안동교구 6개소, 광주교구 2개소, 전주교구 9개소 등이다. 이들 각 정착촌에 살고 있는 나환자는 1만9,916명이다.

1949. 5. 14 흥남본당은 공산당에 의해 폐쇄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5쪽)

흥남본당 興南本堂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5쪽)

흥남(興南) 본당은 함경남도 함주군 흥남읍 하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당은 1936년 4월에 건립되었다. 흥남 본당은 함흥본당의 공소로 시작하여 1936년 4월 성당의 건축이 완공되자 초대 본당 신부로 북청(北靑) 본당의 주임이었던 임 갈리스토 히머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으로 승격된 것이다. 주보는 성 펠리치타스(St. Felicitas)였다. 아담한 흥남 본당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황토 언덕 위에 오똑하니 솟아 있었으며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하였고 전경이 아름다웠다.

초대 본당 신부인 임 갈리스토 신부는 본당 구역 내에 빈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해성학원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앞섰으며 이를 통하여 많은 선교 활동도 펴 나갔다. 제 2대 본당 신부로는 구대준(具大俊, 가브리엘 ; 1912. 음4. 27 - 1950. 5. ?) 신부가 부임했다. 1942년에 구 대준 신부는 보좌신부를 거치지 않고 원산교구의 삼목 본당(三木本堂) 중의 하나인 흥남본당의 주임 신부로 곧바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구 대준 신부는 나라 사랑의 뜻이 투철한 사제로서 일제 말의 사설 학원 폐지 압력에도 굴치 않고 해성학원을 운영하였으며 1944년에는 사제관을 내놓아 대건의원(大建醫院)을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을 시도하였다.

구 대준 신부는 사제관인 붉은 벽돌 이층 건물을 병원 청사로 내놓고 자신이 공경하던 한국의 첫번 사제인 김 대건의 이름을 따서「대건의원」을 개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 다음 구대준 신부는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선교 수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겔트루드 원장수녀는 이러한 구 대준 신부의 갸륵한 선교 정신에 감복하여 요청대로 선교 수녀를 파견하여 1948년 5월 20일, 흥남분원의 설립을 보게 된 것이다. 흥남 본당에는 수녀원 건물이 따로 없었으므로 수녀들은 학원으로 사용했던 교실 한칸을 칸막이로 막아서 생활하였다.

흥남 본당에는 열심한 신자들이 많아서 선교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으므로 본당 사목은 곧 활기를 띠게 되었고 특별히 본당의 강 술호(姜述鎬, 요셉) 회장은 수녀원의 일과 본당의 일을 적극적으로 돌봐주었다.

그런데 1949년 1월 25일, 구대준 신부는 한국의 북단인 회령과 계림의 본당 신부로 전임되었고 제 3대 본당 신부로 독일인 어 게롤드 신부가 부임하여 왔다. 구대준 신부는 이러한 시기에 독일인 신부를 북쪽으로 보내는 일은 위험한 일이라고 제의하고 위험한 북쪽 전교지에 부임을 자청하였던 것이다.

수녀들은 생활의 보탬을 위해 돼지를 기르기도 하였는데, 본당 신자들이 돼지먹이를 모두 갖다 주었다. 이렇듯 본당 신자들이 수녀들을 관심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므로 수녀들 또한 특별한 사랑으로 신자들을 대하였다. 1949년 1월 새로 부임해온 어 게롤드 신부는 포교 성 베네딕도회와 같은 소속이었으므로 가끔 수녀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곤 하였으며 늘 화목한 분위기에서 흥남 본당의 수녀 가족은 즐겁고 보람된 선교 활동을 펴 나갔다. 그러나 1949년 5월 14일 공산당에 의해 본당이 폐쇄되었으므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이 흥남 본당에서 선교한 것은 겨우 1년 남짓한 기간이었다.

1950. 5. 1 '해성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성가병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4쪽)

성가병원 聖家病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4쪽)

최덕홍(요한, 1902-1954) 주교는 대구교구장으로 착좌한 후 대구에 가톨릭 병원의 설치를 시도하던 중 평신도 박영대씨의 개인병원이었던 '대구중앙병원'을 구입하여 교구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최주교는 개업을 위한 준비와 병원운영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1950년 3월 23일 부터 고도리 마리비안네 수녀와 김순심 베놔 수녀 그리고 최서시 십자가의 요한 수녀 3명이 임시 파견되어 병원개업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 병원은 오랫동안 운영난으로 부진했던 시설인 만큼 안팎으로 손댈 곳이 많았다. 3명의 수녀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어 본원 수녀들과 수련자들까지 동원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해성병원'(海星病院)이라는 이름으로 1950년 5월 1일에 개업하였고 이와 동시에 분원도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그 당시 병원에는 내과, 소아과, 안과의 4과와 4명의 의사가 있었고, 수녀 공동체에는 분원책임으로 부임한 하외학 데레사 수녀와 병원에 근무하는 수녀 3명, 그리고 지원자를 합하여 7명이었다. 개업 후 55일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병원은 피난민수용소처럼 되었다가 곧 이어서 야전병원으로 변하였다. 의사들도 차레로 피난가고 그 중 최 의사 한 사람만이 끝까지 남아서 수녀들과 함께 전쟁을으로 인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돌보았다. 1955년 안정을 되찾은 후 '해성병원'을 '성가병원'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서정길(요한 1911-1987) 주교는 대구교구장으로 착좌한 후 대구교구의 숙원사업인 가톨릭 종합병원의 설립을 시도했다. 서정길 주교는 1960년에 이르러 독일 미제레올(Misereor)의 후원으로 병원신축을 계획하면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한국관구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침 덕원에서 월남하여 대구에 안착하기 시작한 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에서 이를 수락하여 현 파티마병원 신축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운영이 부진하던 성가병원을 점차적으로 정리하다가 파티마병원 개원 전, 1962년 8월 30일로 문을 닫았다.

1950. 4. 15 부산에 메리놀 병원 개원 (메리놀 병원)

메리놀병원 - 1998. 4. 20일 메리놀 병원의 답신에 의거

성서 상에 표현된 그리스도의 치유행적에서 보듯 원래 가톨릭의 의료활동은 초대교회때부터 의료사업을 통해 병마와 싸우는 이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고 회복시켜 줄 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감동적이고 구체적으로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병든 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는 일을 사명으로 믿고 있었다. 현재 행하고있는 가톨릭 교회의의료사업에도 의료활동과 기도를 통한 치유의 효과를 동시에 함으로써 인간들이 現世에서의 병과 죽음을 극복하고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종말론적인 희망을 살리기 위해서 전력해 왔다.

메리놀 병원의 최초 설립자인 부산시 북병동 81-8번지는 본래 일본인 후쿠다 이와까기의 소유의 별장이었던 곳으로 4,278평의 대지에 일본식 2층 목조건물과 몇개의 부속건물, 정원 등이 있었다. 이곳은 해방이 되면서 적산으로 경상남도 관재국에 접수되었는데 당시 부산진 본당의 정재석 신부가 이곳에 임시 거주하고 있던 미 군정청 관재처장의 매부인 정모씨와 친분관계에 힘입어 중앙성당 초대 주임신부인 이명우 신부의 명의로 관재국과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당시 그 땅으로 어떠한 구체적인 사업을 할 계획은 없었지만 지금의 중앙성당을 매입할시 무연고자들의 무단점유로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다 "이 재산은 로마 교황청 직속 소유재산 임" 이란 큰 팻말을 붙여놓고 관리하고 있었다.

그 후 부산지역을 관리하고 있던 대구 대교구에선 이곳 부산지역의 중여성이 증가됨에 따라 가톨릭의 의료 및 사회사업으로서 사회적 진출에 유의하고 가톨릭대병원을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원래 큰 사업이었던 탓에 경제적 능력은 전무하다시피한 실정이었다.

이와같은 사정으로 원조를 메리놀회에 요청하였던바 메리놀 수녀회에서 기꺼이 수락하고 병원설립을 위해 1949년 12월 28일 로사 제제레파, 안드레아, 로사리마 수녀를 1차 선견대로 부산에 보냈다. 또한 나중에 토지매입 비용도 메리놀수녀회에서 대신 부담하고 북한 땅에서 다 이루지 못한 자선의료사업과 육영 사업등을 1950년 4월 15일 메리놀 병원을 이곳에서 개원함으로써 이루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병원이라기 보다는 진료소에 가까운 역할을 한 것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영리적이 아니고 무료진료 였으며 빈민구제사업의 일익도 담당하여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보급시키는 등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동시에 영신적인 전교사업을 위해 출발하였다. 이러한 것은 부산·경남지역에서는 최초의 한국가톨릭 의료활동으로 지역사회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구현시키고 가톨릭의 의료 및 사회사업 전체를 진보시키는 시발이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 구호 활동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환자를 진료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전쟁으로 인한 경제의 파탄으로 말미암아 빈곤이라는 것이 더 큰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중산층의 부재(不在)로 인해 부자가 아니면 모두 가난뱅이 뿐이었다. 그래서 전쟁동안 수십만명의 피난민들이 새로운 거주지에 정착하여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 때까지는 막대한 양의 원조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또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어느 정도라도 영양공급이 되어야 하는데 굶주리다 보니 의약품만으로 치료가 되는것이 아니었다.

가슴아픈 일은 무료로 준 다량의 치료약과 영양제를 복용치 않고 그들의 생계를 위해 그것을 팔아 생계를 보태는 이들이 허다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비극적인 6·25 사변의 후유증으로 인해 한국의 전통적인 숙명론을 강화시켰고 살아남기 위한 막바지 몸부림을 통하려 뿌리 깊었던 체면의식을 일거에 상실시켜 버렸다. 타기관에서도 구호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구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더 많았으며 특히 부산에는 자기자신과 그 가족들의 생계를 해결할 방도가 전혀 없는 절망적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1951년 4월 부터 구호활동을 메리놀 병원 주도하에 시작해 나갔던 것이다. 구호계획은 결핵환자 방문 치료프로그램에 들어있는 가족들과 병원에 찾아오는 극빈자를 상대로 시행되어 나갔다. 당뇨병, 신장염, 간장질환, 영양실조, 심장병 등 특수한 환자의 경우에는 음식물에 대해서도 의사가 처방을 내려서 나누어 주었는데 이 경우는 구호라기 보다는 의료행위 그 자체였다. 주로 구호품은 많은 어린이들을 가진 미망인 이거나 부모중 한명이 심각한 병에 걸린 경우와 어린 형제들끼리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에 지급되었다. 또한 아버지가 군에 입대하였을 경우와 어머니가 여럿의 아이를 버려두고 떠난 상태에있는 가족에게 지급되었다. 식량은 필요한 때 개인적으로 항상 지급되었는데 주로 쌀, 밀가루, 육류, 통조림, 지방우유, 땅콩버터, 건포도, 말린자두, 콩 등이었다. 쌀, 야채등은 자선기금 가구의 세대주에게 매주 목요일 아침에 배급되었다.

그리고 구호진료에만 그치지 않고 화재민들의 재생을 격려하며 장기간동안 급식을 계속 제공하였다. 이때 N.C.W.C 한국지부에서도 화재민을 수용하고 있는 학교구내에 급식소를 설치하고 이들이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매일 식량을 공급하였다.

⸂ 입양사업

병원에서 진료를 받던 5살 미만의 아이들 중에서 어머니들이 사망하거나 아이들을 돌 볼 능력이 없는 어머니들이 많았다. 미혼모나 부모가 있어도 살기가 힘들어 빈민구호 활동을 하고 있는 메리놀병원에다 아이를 버리면 아이를 무사히 키워주지 않겠나 하는 기대감에 바쁘게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사이에 병원에 그냥 놔두고 가거나 심지어는 아침에 병원문 앞에 핏덩어리를 그냥 버려두고 가는 경우가 허다하여 한때는 고아들이 초만원을 이룬적도 있었다. 이에 할 수 없이 수녀들은 갓난아이들을 따뜻하게 하려고 포대기에 싸서 두꺼운 마분지로 만들어진 상자에 넣어 간이난로 가까이에 두고 돌보면서 일하였다. 이러한 문제로 입양계획을 세워 병원에 오는 환자들 중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성이나 입양을 원하는 가정에 그들의 가정을 조사한 후 정식입양을 시켰으며 얼마동안은 병원에서 그 가정에 유아용 우유를 계속 공급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입양된 아이들 중 갓난아이는 일단 병원에 있게하여 몸무게가 안정되고 면역이 완전하게 될 때까지는 입양한 부모에게 정기적인 방문표를 주어 아이들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나중엔 노골적으로 자기의 아이를 입양시켜 달라는 어머니들의 문의가 쇄도한 적도 있었다. 수 많은 아이들은 자기를 키워줄 새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동안 병원내에서 자라다보니 수녀들을 자기의 어머니로 알았고 입양되어 헤어질 땐 그동안의 정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힘들게 달래야만 했다. 1954년 9월 1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들이 성모보육원을 개설하자 그곳으로 아이들을 옮겼으며 이때 입양된 아이들은 약200명이나 되었다.

⸃ 육아실 및 육아상담실(Well Baby Clinic) 설치

Well Baby Clinic 은 1954년 2월에 입양계획의 결과로써 시작되었다. 입양될때 까지는 버려진 아이를 키우면서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육아실과 육아상담실이 생겨났던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약35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번 오후에 수녀의사 감독하에 한국인 간호원과 간호보조원 각 1명이 돌봐주었다.

이때 육아실에는 생모의 젖이 부족한 아이, 친지가 양육하며 어머니가 없는 아이, 입양된 아이, 소아과에 입원할 정도의 심각한 질병을 가진 아이로 분류하여 진료를 하였는데 대부분이 극도의 영양실조에 걸려있었다.

당시에는 일반시장과 가정에서는 원유나 분유를 구하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공급처도 찾기가 힘들어 우선 병원에서 직접 분류된 이 아이들에게 미음과 분유, 우유병등을 공급해 주었고 보호자들에게는 우유병을 소독하는 법과 육아법을 가르쳤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소아진료소에서는 모든 소아환자에게 유아용 우유를 무료로 제공해 주었으며 수유하는 장소도 따로 만들어 주었다.

⸄ 나자렛 워크겼(Nazareth Work Shop)

전쟁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약50만명에 이르는 전쟁 미망인들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위한 생활대책이 강구되지 않고 있어서 한때는 생계유지를 위한 매춘이 성행되어 성윤리를 무너뜨리고 기약할 수 없는 삶에서 비롯된 향락주의로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많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이었고 수천명의 여성과 그에딸린 어린아이들이 비참한 빈곤으로 산중턱 판자촌이나 피난민 오막살이 집에서 살며 오직 구호품에만 매달리는 실정이었다. 이에 KAVA(외국 민간 원조기간 한국협회) 이사이며 평소 전쟁 미망인을 위한 복지활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메리놀회 메리 가브리엘라 뮬헤린(Mary Gabriella Mulherin) 수녀는 한국 국민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값싼 구호품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이라고 역설하고 병원 울타리내 한 건물을 예수와 성모마리아의 집이라는 뜻으로 '나자렛 집' 이라고 칭하고 여기서 1953년 5월 19일 전쟁미망인 계획(Widows' Projects) 의 일환으로 나자렛 워크겼을 실시하였다. 이 워크겼은 전쟁과부와 피난민 여성들이 그들 스스로 가족들의 생계비를 버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즉 쌀과 옷 등을 무기한으로 제공하는 구호사업 대신 그들이 직접 돈을 벌 수 있게끔 조성해 주는 것이었다. 우선 이들에게 자수와 바느질, 편물, 재봉질 등 수공예 중심으로 기술훈련을 시키고 생산능력을 갖추게 하여 생산된 물건의 판로는 수녀들이 책임지고 개척하였다. 여기서 생산되는 물품은 카드종류와 인형, 털 스웨터, 수예품 등으로 기존시장은 부산에 있는 외국군인들이 주일날 모이는 장소로 정해졌다. 이곳은 나자렛 워크겼에서 생산되는 생산품의 중요한 판매처로 계속되었고 다른 판로는 작은 시장과 백화점내의 작은 상점들이었다.

워크겼의 방법은 기술훈련을 시켜서 미망인들이 자기 집에서 직접 일을 할 수 있게하여 일하면서 자기의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재료구입과 판로에 관한것은 워크겼에서 책임을 지며 이들에겐 인건비를 지불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이 그 수입으로 구호에만 의존하던 것을 면하게 하고 그들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꾸려 가게끔 조성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의 꾸준한 생산활동을 보장해주기 위해 자수, 편물, 재봉질, 기타 수공예 기술등을 가르키는 기술자를 나자렛 집에 두었으며 12∼15명 정도의 작업반을 정규고용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미망인과 피난민 여성들이 워크겼에서 기술훈련을 받아 고용되었고 그 후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일자리나 사업장으로 옮겨갔으며 나머지는 병원내 나자렛 집에서 계속 일을 하였다.

1950. 5 신교육법에 의해 3년 과정으로 된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조직변경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동성중고등학교 東星中高等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제단법인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중등교육 기관. 학교내에 을조(乙組) 를 편성하여 신학교의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을조의 경우 남대문 상업학교의 교육과정을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받고 방과 후 신학원에서 신학교육에 필요한 라틴어와 교리및 지도신부의 영성을 받았다. 1968년 5월 김수환 추기경이 이사장으로 취임되어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마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 6. 2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에 성 라자로 마을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86쪽)

성 라자로 마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86쪽)

성 라자로 마을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채 불구의 몸으로 유랑하는 나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이 땅에서 나병을 영구히 퇴치하려는 목적으로 조지 캐롤(George Carroll) 몬시뇰에 의해 1950년 6월 2일 문을 열었다. 현재 이곳에는 음성나환자로 이루어진 자활주민 235명(79세대)과 양성·불구·보호 환자 110명(남 58, 여 52명)이 모여 살고 있으며, 나환자연합회와 국립나병연구소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이 마을에 수녀를 파견한 것은 성 라자로 마을에 1983년에 피정의 집 '아론의 집'이 완공되자 이경재 알렉살델 신부가 그 관리를 수녀원에 위임해 옴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1983년 9월 15일, 양명숙 세라피나 수녀, 진말돌 프란치스까 수녀가 아론의 집 담당으로, 유국향 로마나 수녀가 유아원 개설 준비 담당으로 파견되어 설립하였다. 이어 정인순 이레나 수녀가 경리 담당으로, 양희진 아숨다 수녀가 전교사목 담당으로 파견되었다. 유아원은 개설이 어려워 중단되었고 1985년 1월에는 성 라자로 마을에서 환자 간호를 담당하던 성모영보수녀회가 떠나가 이 분야의 일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맡게 되었다.

이 지원은 양성나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봉사의 특수성 때문에 원칙적으로 종신서원수녀만을 파견하고 있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부숴지고 찢겨진 나환자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위로가 되어주고 있다. 또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각계 각층에 불러 일으키고 형제적 사랑의 나눔을 위해 수시로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들과 원생들의 기교가 되어 주며, 희생과 고통의 그리스도 신비체를 몸소 체험함으로써 힘든 봉사 속에서도 큰 기쁨으로 나날을 봉헌하고 있다.

1950. 6. 25 동란으로 폐교 (4쪽 가명학교)

가명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쪽)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보통학교. 약현성당에는 이미 1895년부터 약현서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실시해 왔으며 1901년에는 두세(Doucet)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에는 남자학교 건물을 새로이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학교라고 하였다. 이들 2개의 학교는 1909년 가명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는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27년 가명 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하여 폐교되었다.

1950. 11 매화동 본당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0쪽)

매화동본당 怟花洞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970쪽)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전신은 마렴 공소였다. 이 마렴 공소가 1896년 8월에 본당으로 승격되어 황해도에서 첫번째 본당이 되었다. 다음 해에 매화동으로 이전하였고 2대 본당신부인 우도(Paul Oudot, 1865-1913) 신부의 초청으로 1909년 10월 1일 박 뱅상 수녀와 배 베로니카 수녀가 파견되어 분원이 개설되었는데 이들은 황해도에 파견된 최초의 수녀들이었다. 수녀들은 본당의 여학교 운영을 맡아 여학생들의 신앙생활이나 교과과정을 지도함에 있어서 그곳의 신도와 주민들에게 완전한 만족감을 주었다. 특히 여학교에서는 1912년부터 우도신부의 장려로 양잠강습소를 개설하여 양잠기술을 널리 보급하여 주민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본당신부가 소집되어 본국으로 돌아가자 수녀들도 본원으로 귀원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동안 학교는 신자들의 자치에 맡겨졌었다. 수녀들의 재파견은 1919년 10월 샤보(Jules Chabot, 1886-1953) 신부의 귀임에 따라 이루어졌다. 1925년에는 수녀들에 의해서 본당의 가톨릭 여자 청년회가 창설되었고 1926년에는 유치원과 시약소가 개설되었는데 교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해 오던 수녀원은 1934년에 강양자 마리레지스 수녀가 새로 파견되어 옴으로써 4명으로 인원이 보강되었다.

해방 후에는 북한 인민정권의 방침에 의해 수녀들은 학교를 사임하고 본당일만 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어왔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5일에는 수백명의 좌익 폭도들이 매화동을 습격하여 많은 주민들과 수녀들을 학살하였다. 이때 김정자 수녀와 김정숙 수녀는 그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강양자 수녀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11월 2일에 죽은 두 수녀를 성당 뒷산에 안장하고 나서 무사히 월남하여 매화동에서 겪은 동산 치하의 생생한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황해도에서 제일 먼저 설립되었던 매화동분원은 북한에 있던 분원 중 가장 늦게까지 수녀들이 남았었던 분원이기도 하였다.

매화동에서 수녀들이 봉사했던 봉삼학교와 봉삼유치원, 그리고 소화시약소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도신부는 1898-1899년 사이에 종교교육과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안악지방에서는 이 봉삼학교를 안악지방 최고(最古)의 사학(私學)이라 일컬었다. 1899년에 학생수가 45명이던 남자부에서는 교리공부와 한문을 가르쳤으며 남자부에 이어 별도로 시작한 여자부에서는 기도문 이와에 한글과 가사도 가르쳤다. 초창기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1907년에 근대 초등교육기관으로 정식 설립되었고 2년 후에는 사립학교 인가를 받은 후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의 지도를 맡겼다. 매화동에 파견된 박 뱅상 수녀와 배 베로니카 수녀는 여학생들의 신앙생활과 가사 등과 같은 교과과정을 지도하였는데 1919년 당시 4년제 보통학교 과정이던 봉삼학교의 여자부 교과과정을 보면 1학년에서 영세문답, 고해문답, 성체문답을 배우고 첫 영성체를 한 후 견진문답과 조만과를 배웠으며 학과는 기초를 공부하였다. 2학년 때부터 조선어, 산술, 수신(修身) 등의 과목을 배웠는데 주로 김정자 수녀가 가르쳤다. 처음에는 방 2개, 부엌 1개의 초가집에서 따로 공부하였으나 1923년부터는 남녀공학이 되어 함께 공부하였다. 5대 신인균(申麟均 요셉) 신부가 재임하던 1934년에는 학생수가 500명으로 증가하고 6년제 학교가 됨에 따라 교실을 증축하고 보통학교(사립봉삼보통학교) 인가를 신청했으나 후임 신부인 이선용(李善用 바오로, 1897-1953) 신부가 학교유지 문제를 우려하여 인가신청을 철회하는 바람에 사립봉삼학교로만 존속하다가 해방 후 공산치하가 되면서 인민학교로 흡수되어 버렸다. 수녀들은 분원이 생긴 이래 공산당에게 화를 당하기까지 줄곧 봉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봉삼유치원에서도 매화동본당의 4대 주임신부인 퀴클리에(Leon 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가 1926년에 성당 근처의 집 한 채를 매입하고 봉삼유치원을 개원하여 김정숙 수녀가 담당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편 시약소는 본당에서 운영하는 유일한 자선 의료기관이었는데 평일에는 환자들에게 시약만 하였고 의사들에 의한 진료는 주일에만 있었다. 이곳에서 봉사한 의사는 하(河) 의사와 표(表) 의사였고 박 뱅상 수녀와 강양자 수녀가 간호를 담당하였다. 수녀들은 위의 유치원과 시약소 사도직을 봉삼학교와 함께 공산당에게 화를 입기까지 성실히 계속해 나갔다.

1950. 오류동에서 성 라자로원을 창설 (321쪽 라자로 마을)

라자로 마을 (영) St. Lazarus Villag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21쪽)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 오전리 87번지 소재의 나환자 정착촌. 1945년 광복후 서울 근교에 떠돌아 다니던 많은 나환자들을 접한 메리놀회 소속 캐롤 주교는 이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50년 오류동에서 성 라자로원을 창설하였다. 1951년 시흥에 20만평의 대지를 구입한 성 라자로원은 그곳으로 이전하면서 1955년에는 가톨릭 의대 부속 성 라자로 의원을 개원하였다. 이 때부터 재가(在家)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이동진료를 시작하였는데 1962년 정착촌을 마련하고 나환자들을 이곳에 모여 살도록 하였다. 그간 서울 교구에 마련되어있던 성 라자로 마을은 수원교구가 분리, 독립된 이후인 1967년 수원교구로 이양되었다. 1975년 성당을 축성하였고 1981년 설립30주년을 맞아 피정의 집을 개설하였다. 1985년 현재 성 라자로 마을에는 나환자 정착촌을 비롯하여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동, 진료소, 성당, 교육관, 수녀원, 휴게실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1971년 창간된 마을회보가 간행되고 있다.

1950. 사리원 본당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3쪽)

사리원본당 沙里院本堂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973쪽)

매화동 본당의 관할공소로서 1897년에 개설된 황해도 사리원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된 것은 1916년 6월이었다. 이곳의 첫 주임사제로 부임한 이기준(李起俊 도마, 1884-1977) 신부는 1921년 성모성심학원(聖母聖心學院)이라는 일종의 개량서당(改良書堂)을 개설하고 초등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사리원본당의 제 4대신부로 부임한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1874-1961) 신부는 성당건축과 함께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수녀원을 준공한 이후 1934년 12월 4일, 김명제 신부는 전교와 유치원, 학원 등을 맡아 일해 줄 수녀들을 초청하였다. 수녀들은 본당일과 봉화유치원, 명성학원(1939년에 4년제 여자국민학교로 개칭, 인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전교와 교육사업에 열중하면서 일제말의 어려움을 견디어 나갔다.

사리원본당의 사목을 도우며 열심히 일해 오던 수녀들은 1940년대 후반기를 기하여 그들의 사도직을 떠나와야 했다. 즉 해방 후 3명의 본당수녀 중 유치원을 담당하던 홍석영 모니카 수녀가 1947년에 요양차 본가인 은율로 돌아가고 같은 시기에 강봉련 제노베파 수녀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서울 본원으로 떠남에 따라 황인경 말가리다 수녀만이 남아 본당일을 하였다. 홍석영 수녀가 담당하던 유치원은 홍 수녀가 사리원에 부임한 1935년에 수녀원에 사무실을 겸한 방 하나를 마련하여 교우집 아이들 40여명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 되었다. 1937년 11월 28일에는 정식인가를 받아 1개반 80여명 정원으로 봉화유치원을 개원하여 10여년간 일하였으나 1947년 홍 수녀가 이곳을 떠남으로써 수녀없이 유치원이 유지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공산당에 의해 폐원되었다. 한편 사리원본당에서는 1939년에 명성학원(明星學院)이라는 4년제 여자국민학교를 개설하였는데 개원 초에는 일반 공·사립학교에의 입학시기를 놓친 나이 많은 처녀들이 대부분 입학하였다. 성당 지하실에 칸막이로 2개 교실을 만들어 1개 교실에서 2개 학년이 합반으로 수업하였다. 초창기의 학원선생은 최진옥 마티아, 남순우 레지나, 김 멜라니아, 조환 예로니모 등 서울 분원에서 파견되어 온 지원자들이었는데 이들이 1∼2년간 교사로 봉직한 후 본원으로 복귀한 후에는 유자격 평신도 여교사들이 가르쳤다. 명성학원은 일제의 정책으로 비록 인가를 받지 못하였으나 4년제에서 6년제로 발전하고 질적으로도 다른 학교에 뒤지지 않는 교육을 실시하여 졸업생들 중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우수한 자질을 발휘한 여성들이 많았다.

수녀들이 모두 떠난 후 혼자 남아 있던 황인경 수녀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0월에는 본당신부가 납치되고 폭격이 심해지자 사복차림으로 해주까지 왔으나 월남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래서 황 수녀는 사리원으로 되돌아 갔다가 두번째 시도 끝에 해주 부근의 한 포구에서 나룻배를 타고 월남하였다.

1950. 캐롤 주교와 이경재 신부가 안양 나자로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13쪽, 1000쪽)

안양 나자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13쪽, 1000쪽)

1950년경에 캐롤(George Carroll 1906-1981) 주교와 이경재(알렉산데르) 신부가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나환자들을 위해 이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 안양 나자로원의 출발이다. 나자로원의 운영과 생활은 미국 가톨릭구제회(N.C.W.C)의 보조와 성모병원에서 대부분 충당해 주었고 치료와 투약은 성모병원의 만성병 연구소를 중심으로 하여 의대생들이 무료로 해 주었다. 또 성모병원에서는 수녀들의 생활비도 대주었다. 그러나 이듬해 교구 분할이 되면서 이전까지 서울 교구에 속해 있던 나자로원이 수원교구 산하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에 자연히 성모병원의 보조와 진료가 중단되었다. 이 진료는 이후 1971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수원교구에서는 운영상의 난점등을 들어 미감아 학교를 해체하라 하였고 수녀들도 나환자들과의 생활 등에 어려움을 느껴오던터라 파견된지 1년만에 철수하였다. 이때 7명의 미감아들은 지방에 있는 부모에게 보내고 남은 20여명은 백령도 미감아 수용소로 보냈다. 그후 이곳에서 1975년에 홍경희 헬렌 까리따스 수녀가 7개월 정도 자원봉사를 하기도 하였다.

1951. 3 청평고아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8쪽)

청평고아원 淸平孤兒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8쪽)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사방에서 고아들이 생기고 수녀들은 피난 도중에도 계속 늘어나는 고아들을 돌보아야 했다. 1·4후퇴 때 경기도 안양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가 수원으로 잠시 피해있던 황인경 말가리다 수녀와 몇 명의 수녀들은 그때 고아원을 맡아달라는 윤을수(尹乙洙, 로렌죠, 1907-1971) 신부의 청에 따라 수원에서 아이들을 모아 서울로 상경하여 자하문 밖 윤현궁 별장에서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또한 소사에서도 아이들을 모아 황 수녀를 비롯하여 박동자 에메 드 마리 수녀, 최종희 토마스 수녀 등이 돌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청평에 있던 고아원도 운영하게 되어 소사, 자하문 밖, 청평의 세 고아원에서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고아원 운영은 미군들이 많이 도와주었고 김명순 유스티나 수녀는 아이들에게 학습지도 및 교리 등을 가르쳤고 아이들을 인근의 중·고등학교까지 보내기도 하였다. 그 후 청평에 새 건물을 짓고 자하문과 소사에 있던 아이들을 모두 청평으로 모아 돌보다가 1959년 6월에 철수하였다.

1951. 4 유을준 의사와 함께 부산 초량동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 (461쪽 베네딕토 수녀회)

베네딕토수녀회 (라) Benedictina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1쪽)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 수녀회로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와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있는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830년 1월 9명의 동정녀들이 블룸(Joset Lenoz Blum)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자매들의 학원'이라는 공동체 생활이 효시가 된 후 1892년 9월 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타노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회의 수족에 연합됨으로써 발족된 수녀회로서 1931년 9월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904년 7월 27일 성 오틸리엔(St. Ottilien)의 모원으로부터 분할 독립된 투칭(Tutzing)의 모원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투쟁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수녀들이 1925년 11월 25일 한국에 진출하였다.

⸁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 1931년 9월 한국 진출. 1963년 10월 교황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설립목적은 지역사회의 여성교육과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할 봉사자를 양성하는데 있다. 1931년 당시 욘갈 교구장 브레허(T. Breher, 白)주교의 요청으로 6명의 수녀가 처음 내한하여 연길교구 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용정하시 본당에 첫 분원이 생긴 이후 1945년까지 7개의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원수에 있어서도 1939년까지 20명의 수녀가 스위스 모원으로부터 파견되었고, 1944년까지 21명의 한국인 수녀가 서원하였다. 그러나 1945년 8.15광복 이후 러시아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사상통일공작'에 의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월남하기 시작한 수녀들은 남한의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인 1951년 4월 유을준 의사와 람께 부산 초량동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2년 부터는 지원자들도 입회하기 시작하였고,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했던 수련장 베다(Konig Beda) 수녀도 1958년 3월 다시 내한하여 수련지도를 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 동래구 광안동에 대지를 마련하여 1965년 우선 수련원부터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후 본원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9년 경기도 부천·소사에 지원(支院)을 설립하고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의료봉사활동 이외에도 부산에서는 1949∼1980년에 걸쳐 10개의 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울산·대구·마산 그리고 미국의 뉴옥 등지에서도 전교활동을 하고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교구청 사목국, 해외교포 사목 등 특수 사목에서도 활동을 하고있다. 1972년 12월 대리구(代理區)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에 임남훈 수녀가 피임되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1년 6월 관구로부터 교황청 직속 수녀회로 승격되어 모원과 동등한 자립수녀회로 인가를 받고 초대 총원장에 김지상 수녀가 피임되었다.

1951. 8 안법고등학교 개교 (775쪽 안성본당)

안성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75쪽)

주보로 '착한 의견의 모친'을 모시고 있는 이 본당은 1901년 아산 공세리 본당에서 분할되어 창설되었다.

초대신부인 공베르(A. Gombert) 신부는 통진군수를 지낸 백 씨의 집을 사서 임시성당으로 살았다. 그는 1901년 1월 안법학교를 설립하고 운영비를 자비로 댔다. 1912년에는 안법학교 여자부를 신설하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 2명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1951. 8. 10 골롬바 어린이집 설립 (성체회 복지시설)

성 골롬바 병원 (성체회 복지시설) - 1998. 4. 8일 성체회 한율리엣다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1951년 8월 10일 운현궁 마마께서 윤을수 신부에게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것을 사용권을 위임하여 처음에 골롬바 어린이 집으로 시작하였다. 고아들이 점점 많아지자 청평으로 고아원을 옮기고 결핵 요양원으로 변경하였다. 시작할때 당시 성 루가 병원 박병래 원장이 주치의였으나 환자유치 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세브란스 흉부 내과 과장이었던 김기호 박사가 주치의로서 환자를 관리하고 치료해 주었다. 장기치료가 요구되는 결핵환자들이 좋은 환경에서 휴양하며 치료하였고 병실은 11실이 있었다. 1966년 2월에 폐원하였다.

1951. 9. 10 데레사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5쪽)

데레사의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5쪽)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의 수녀들은 1951년 9월 10일 소화보육원 어린이들과 부근의 가난한 집안의 어린이들의 치료를 위하여 비영리기관으로 범일동본당 구내에 데레사의원을 개설하였다. 이곳에는 소아과와 내과를 두고 전임의사 1명과 간호수녀 2명이 종사하였다. 데레사의원도 소화보육원과 같은 사정으로 1971년 남천동보육원 뒤 언덕에 신축하여 영아들의 진료와 인근 주민들의 치료에도 기여하게 하였다. 그 당시 보육원 원아수는 남아 43명, 여아 80여명이었다. 신축공사는 건축비를 절감하기 위해 직영으로 했는데 수녀들은 일꾼보다 앞장서서 벽돌운반이나 잡석처리를 하며 건축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여 변두리 주민들도 버스를 타고 나가 종합병원을 찾았고, 의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시설 또한 과학화되어 가는 가운데서 모든 설비가 미비한 데레사의원은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교구의 시책대로 이 건물을 내놓고 현재 영아재활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 이전했다가 1977년 12월 28일 폐원하였다.

1951. 11. 5 부산 성분도병원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3쪽)

부산성분도병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3쪽)

1951년 11월 5일, 유을준 아타나시오 의사와 함께 부산 초량동에 자선병원을 개설한 부산 성 베네딕도회의 수녀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병원을 운영하였다. 당시 이렇다 할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수녀들은 병원 한 모퉁이를 분원으로 삼고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1954년 2월, 병원장 유을준 의사가 병원 전체를 수녀원에 양도하고 떠남에 따라 성분도병원은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의료봉사의 초석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14일에는 정식 병원으로 인가를 받아 내과, 소아과, 외과, 이비인후과, 안과, 치과, 임상병리과 등 7개의 진료과목을 갖추었다.

1955년 5월 15일에는 병원을 3층(본관:건평 474평)으로 증축하고 1960년 9월에는 병원을 5층(별관:건평 438평)으로 증축하였다.

부산 성분도병원은 1965년 11월 29일에 비영리 종합병원으로 허가를 받고, 12월에는 수련의 교육병원으로 지정받았다. 그후 수차례의 증축공사, 의료장비와 의료진 확충을 통해 1975년 5월 9일에는 종합병원 인가를 받고, 1988년에는 총 99실 301개 병상을 갖춘 병원으로 성장하여 부산 지역사회의 보건 향상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1977년 11월부터 전개한 원목활동은 해를 거듭할 수록 그 활동범위와 대상을 넓혔고, 환자와 직원, 수녀들 사이의 신앙일치와 친교에도 큰 몫을 하였다. 그리고 환자방문과 상담, 도서대여, 직원과 환자의 교리강좌와 신심활동 등을 통해 외교인에게는 신앙의 빛이 되고 신앙인들에게는 성화를 위한 장(場)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의료봉사는 여러 면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급속한 발전은 새로운 전문지식과의 시설, 의료장비들을 끊임없이 요구하였고, 또 의료보험제도의 실시와 함께 모든 것이 제도화, 대형화되었다. 그러므로 수녀원의 의료봉사는 과학화, 기계화, 전문화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 생명에의 경외심을 높이고,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더 많은 노력과 인내와 봉사를 요구받고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보건후생사업이 점점 조직화, 대형화, 제도화되어감에 따라 가난한 이,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가 어려워지고 수녀원의 병원운영은 많은 과제와 어려움을 안게 되었다. 특히 1988년 4월 병원에 노동조합이설립되면서 노동쟁의, 파업 등으로 병원운영이 어려워지자, 1988년 8월 31일에 조건없이 병원을 부산교구에 헌정한 뒤, 1988년 9월 부터는 원목실을 비롯한 몇 부서에 약 10명의 수녀가 일반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고 1989년 봄부터는 병원의 거처를 거두고 수녀원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1952. 2. 1. 성모유치원 설립 (1093쪽 중앙본당)

중앙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093쪽)

전주교구의 주보자 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1993년 12월 당시 교구장인 김양홍(스테파노) 신부가 여러 교우들의 청원에 의하여 전주 전동본당에 있는 한옥 사무실을 철거하고 그곳에 '비성거리'라는 공소를 신축하고 이후 1947년 까지는 공소시기로 있다가 그 해 비성거리 성당을 설립하여 초대 주임신부로 김재덕 신부가 부임하였다. 김신부는 장래 순교자기념본당을 세우려는 포부와 함께 전주시내에 전동본당 하나로써는 너무복잡하고 또한 비성거리의 성당이 너무 협소함으로 전주시 대동에 일산가옥 2층을 임차하여 '대동성당'을 개설하였다.

1952년 2월 1일 임대 사용 중이던 대지및 건물을 매입하여 구내에 성모당과 성모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인 중앙본당은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 639의 40에 소재한다.

1952.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 (461쪽 베네딕토 수녀회)

베네딕토수녀회 (라) Benedictina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1쪽)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 수녀회로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와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있는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830년 1월 9명의 동정녀들이 블룸(Joset Lenoz Blum)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자매들의 학원'이라는 공동체 생활이 효시가 된 후 1892년 9월 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타노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회의 수족에 연합됨으로써 발족된 수녀회로서 1931년 9월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904년 7월 27일 성 오틸리엔(St. Ottilien)의 모원으로부터 분할 독립된 투칭(Tutzing)의 모원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투쟁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수녀들이 1925년 11월 25일 한국에 진출하였다.

⸁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 1931년 9월 한국 진출. 1963년 10월 교황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설립목적은 지역사회의 여성교육과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할 봉사자를 양성하는데 있다. 1931년 당시 욘갈 교구장 브레허(T. Breher, 白)주교의 요청으로 6명의 수녀가 처음 내한하여 연길교구 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용정하시 본당에 첫 분원이 생긴 이후 1945년까지 7개의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원수에 있어서도 1939년까지 20명의 수녀가 스위스 모원으로부터 파견되었고, 1944년까지 21명의 한국인 수녀가 서원하였다. 그러나 1945년 8.15광복 이후 러시아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사상통일공작'에 의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월남하기 시작한 수녀들은 남한의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인 1951년 4월 유을준 의사와 람께 부산 초량동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2년 부터는 지원자들도 입회하기 시작하였고,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했던 수련장 베다(Konig Beda) 수녀도 1958년 3월 다시 내한하여 수련지도를 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 동래구 광안동에 대지를 마련하여 1965년 우선 수련원부터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후 본원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9년 경기도 부천·소사에 지원(支院)을 설립하고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의료봉사활동 이외에도 부산에서는 1949∼1980년에 걸쳐 10개의 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울산·대구·마산 그리고 미국의 뉴옥 등지에서도 전교활동을 하고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교구청 사목국, 해외교포 사목 등 특수 사목에서도 활동을 하고있다. 1972년 12월 대리구(代理區)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에 임남훈 수녀가 피임되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1년 6월 관구로부터 교황청 직속 수녀회로 승격되어 모원과 동등한 자립수녀회로 인가를 받고 초대 총원장에 김지상 수녀가 피임되었다.

1952. 연백성모원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연백성모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김영식 베드로 신부는 1952년 무의무탁한 전쟁고아 15명을 모아 연백성모원을 설립하였는데 전쟁이 끝난 무렵에는 고아가 120명이나 되었다. 점차 연로하게된 김영식 신부는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창설자인 방유룡(안드레아) 신부를 통하여 연백성모원을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맡겼다. 그리고 원아들의 보건후생대책과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위하여 1955년 6월 27일에 설립한 성모자애병원의 운영권을 보육원을 운영하고 원아들을 잘 보육하는 조건으로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이양하였다. 당시 집은 75평의 목조 2층 건물이었고 수용능력은 50명 정도 되었다. 보육원에는 여자들만이 있었고 많을 때에는 120명 까지도 되었다. 1964년 병원 맞은편에 집 3채를 짓고 병원에서 분리 되었다. 미군부대에서 두채를 지어주고 당시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가 한채를 지어주었다. 보육원 운영비는 성모자애병원과 N.C.W.C와 미군부대의 원조도 받고 시청에서 1인당 보리와 양쌀이 하루 3홉씩 나오는데 그것도 18세 이하만 배급을 주었다. 서 수산나 수녀가 영어를 잘하여 보육원 원아들에게 영어발음을 우리말로 토를달아 노래를 가르쳐 미군부대에 가서 일주일에 한번씩 노래를 불러주었으며 꽃꽃이도 하여 미군부대로 부터 원조를 받았다. 원아들이 백여명이 넘을 때도 많았는데 식비보다 교육비가 많이 들어갔다. 원아들중에 공부를 잘하면 대학까지도 시키고 그렇지 못한 원아들에게는 양재 편물 등 기술교육을 시켜 자립할 수 있게 하였다.

원아들이 전부 여아들이므로 수녀들은 특별히 신경을 써서 늦게 귀원하거나 늦게 외출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특별히 가정적인 교육을 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수녀들이 항상 원아들과 한상에서 식사를 하고 원아들이 병이나면 간호를 하였다.

미군부대의 원조가 끊어져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한 원아는 정신병이 생겼는데 수녀들이 3년동안 정신병원에 데리고 다녀 완치되었다. 현재는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시는 옷도 흔하지 않고 제품이 많지 않으므로 수녀들이 옷도 만들어 입히고 간식도 만들어 먹였다. 수녀들이 미숙하나마 최선을 다해 어머니 역할을 하였다. 1978년 4월에 정부의 소수 수용기관 통폐합 정책으로 대부분의 고아들을 자립시키고 나머지 어린이들은 혜서보육원에 통합하게 되어 보육원을 폐쇄하였다.

1952. 덕산 신생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사회사업 (영) Social servic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5쪽)

가톨릭 교회는 단순한 전례의 공동체나 신앙의 공동체일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빛(마태 5,13-16)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사회안의 어두운 곳을 찾아서 어두움을 없애고 광명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너무도 어두운 곳이 많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사람, 육체는 건강하나 정신이 병든사람, 정신은 건강하나 육체가 병든사람 등이 있다.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을 살펴주고 그들의 희망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버림받고 소외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현세적인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교회의 사업중에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문화사업, 사회사업등이 포함된다.

*구미근로여성복지관 - 1973년 경북 구미시 송정동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구미공단 근로여성들의 인격도야 및 생할향상을 위해 기능교육, 취미교육, 교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설립단체는 왜관 성 베네딕토 대 수도원이다.

*국제마리아의 사업회 -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고 1969년(여자), 1974년(남자)에 설립되었다.

주된 활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회원이 소득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퍼콜라레 운동을 하는 남녀 회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덕산 신생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으로서 1952년에 설립된후 요보호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하고 원생을 초·중·고등학교에 진학 시키고 졸업 후에는 기술을 습득시키고 있다.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 1976년 경남 마산시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정기프로그램으로 학습반과 취미반이 있고 특별 프로그램으로 젊은이 교실, 사임당교실, 성교육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 1979년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설립하였다. 불우이웃 청소년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의식개발, 교육, 협동, 우정, 자립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쎈뽈원 - 충남 논산군 논산읍에 있으며 1973년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이 되었다. 노인복지시설을 설치운영하며, 성인불구자의 복지사업을 하고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 1966년에 설립되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근로자의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기업인의 이해를 촉구시키고 노사간의 긴밀한 협조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곳이다.

*성심원 - 서울대교구가 불우아동 및 부상아동을 보호하기위해 1946년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설립하였다. 파티마 성모수녀원에서 담당운영하고 있다.

*성인복지원 - 1976년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설립, 부양가족이 없고 경제적으로 자활이 분리한 60세 이상의 여자노인을 수용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 본부는 서울 명동에 있으며 마음의 가난함을 생활화하는 단체로 1961년 설립되었다. 주된사업은 환자, 가난한자, 걸인을 돌보고 노쇠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며 불우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이다.

*소화영아재활원 - 1946년 소아보육원으로 출발하였다. 주된사업은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사업이며, 부산교구재단에서 운영하고있다.

*엠마우스집 - 1981년 설립된 것으로 성인지체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 - 1969년에 불우아동을 수용하여 직업보도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성 빈첸시오 청소년 복지회에서 설립하였다.

*춘광대구 요양원 - 극빈 폐결핵 환자 요양원으로 1966년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진영성모의원 별관 -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불우한 결핵환자를 고쳐주는 것이 주된목적이다.

*한국 SOS 어린이 마을 - 요보호 아동들을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하고 퇴소후에는 독립생계를 유지토록 자립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꽃동네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중 특기해야 할 것은 충북 무극에 있는 꽃동네로 청주교구 오웅진 신부가 혼자서 걸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면서 시작되었다. 꽃동네의 특징은 구걸할 수만 있으면 퇴거토록 하는 것으로 자생의 능력이 전혀 없는 노인만을 보호하는 곳이다.

*성모 자애원 - 예수성심 시녀회가 심신 장애아를 재활시키는 곳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 6.25 이후 기아가 날로 증가하여 버림받은 생명들을 입양, 양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릴리 어린이집 - 6-7세의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을 받아 교육하고 있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의 근로자의 집 - 근로자의 수용과 교육에 힘쓴다.

*성 프란치스코의 집 -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일을한다.

*마리아 자매원 - 문제청소년을 교도하고 상담과 숙소를 제공하여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국민학교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이수시킨다.

*성심 양로원 - 불우한 노인을 수용하여 물질적 정신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성가 양로원 - 무의탁 노인들을 구호한다.

*백백합 보육원 -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호, 육성한다. 설립단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다.

*해성 보육원 - 요보호 아동과 지체 부자유자아 및 정박아 수용 및 양육, 국내외 입앙을 하고있다.

이상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 중 그 일부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나 이 이외에도 수십개의 사회사업단체가 있으며 그들은 보이지 않게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사업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첫째, 교회는 특별히 정부나 일반 사회단체에서 망각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소외된 계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이 하기 어려운 사업을 찾아서 그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임무다.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회사업은 양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몇명을 도와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교회의 사회사업은 어떤 기관이나 단체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사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자기의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인의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회사업가이며 모든 신자가정은 사회사업단체인 것이다. 세째, 교회 당국이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재정적 뒷바침을 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성당도 지어야 하고 문화사업도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오늘의 현실 안에서 연장시키는 일이다. 특히 도시교구나 본당에서는 그 지역사회안에 어두움을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여 그들을 위한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정말 가톨릭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1953. 1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양로원'을 인수 (608쪽 성가수녀회)

성가수녀회 (영) Holy Family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08쪽)

1943년 12월 생제(Singer) 신부에 의해 창설된 방인 수도회. 일제 말기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불우한 이들을 돕기 위한 '성가 소비녀'의 공동체가 시작되자 1943년 이재현 신부, 공베르(A. Gombert) 신부와 함께 생제(Singer) 신부가 회칙을 작성하여 노기남 주교의 인준을 받고 창립인가도 받았다. 1945년 6월 수련생활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로부터 지도를 받았고, 1947년 1월에 첫 허원식을 라리보 주교에 의해 거행할 수 있었다. 1953년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양로원'을 인수받아 1979년 증축한 후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하고 있다. 1958년 8월에는 서울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한 뒤 1969년 현재의 서울 하월곡동으로 이전하고 가톨릭의대 부속병원인 종합병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한편 1962년에는 소사에 있는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착수하였다. 이밖에 편물과 보세가공을 가르치는 '나자렛 기술학원'(1960-1969)과 '미망인 양재소'(1964-1980)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968년 8월에는 서울 혜화동에 있던 본원을 현재의 서울 정릉1동으로 이전하여 1969년 1월 창립 25주년과 함께 신축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74년 성가회 명칭을 '성가수녀회'로 개칭하면서 1976년에는 새 회헌과 규칙의 인준도 받았다. 1985년 현재 3개의 병원과 1개의 학교를 비롯하여 1977년 개원한 신체장애양로원인 '안나의 집'등의 특수사목활동분야에서 활동할 뿐만 아니라 본당 사목활동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953. 1. 3 쌘뽈원 설립 (대전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쌘뽈원 (대전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 1998. 4월 쌘뽈원 글라라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1952년 10월 하순경, 당시 논산 천주교회에서 일하고 있던 오채경(말지나) 수녀가 성당 문전에 쓰러져 있는 노걸인 노파를 발견하였다. 오 수녀는 중병인 노인에게 세례를 주어 부엌방을 마련하고 간호하였는데 일주일 남짓하여 선종하자 장례까지 치루어 주었다. 그 후로 계속해서 무의무탁한 노인들이 모여와 입주를 간원하므로 논산 천주교회의 생제(Pierre Singer, 成在德) 신부는 1953년 1월 3일 양로원을 세워 이들을 부양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원장으로는 생제신부가 부임 하였으며, 1965년 재단법인 대전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으로 인가받은 후에는 수녀들이 원장으로 부임하여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쌘뽈원이 쌘뽈여자 중·고등학교 부지내에 있었으나 1971년에 현 위치에 대지 585평을 매입하여 1977년 3월에 건물(236평)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1978년 9월 15일에 입주하였다. 이로써 학교 재단과 분리하여 독립운영하게 되었다.

1979년 5월에는 용인주택, 영안실, 창고 등을 준공하고 1981년에는 격리수용실을 세웠다. 또 1986년 10월 18일에는 보사부의 도움으로 2층에 60평 넓이의 경당을 마련하였다.

현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6명의 수녀들이 4명의 직원과 함께 50여명의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으며 대건중고등학교의 강석준(미카엘) 신부가 매일 미사를 비롯하여 고백성사 및 병자성사 등을 집전 해 주고 있다.

1953. 5 서정리본당의 5대 유신부는 효명중학교 설립 (598쪽 서정리본당)

서정리본당 西井里本堂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98쪽)

평택 본당 관할의 공소로 출발한 서정리는 성녀 소화 데레사를 주보로 모시고, 이 지방의 중심에 위치하여 날로 교세가 발전함에 따라 1932년 5월, 몰리마르(Josephus Molimard) 신부가 평택본당 신부로 있으면서 이 곳에 본당을 세우기 위하여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서정리에 대지 200평을 구입, 근방 20여 공소의 성금을 모아 1934년 10월에 연와조 57평의 성당과 사제관을 세웠다. 몰리마르 신부는 평택에 주재하면서 주일마다 이 곳을 찾아와 미사를 드리다가 1938년 10월에는 프랑스인 교우들의 지원으로 고딕식 100평의 현 성당과 65평의 사제관을 짖고, 그 자신이 서정리본당의 신부로 옮겨와서 1947년 8월까지 사목할동에 열중하였다.

그 뒤 클리어리(Patrick Cleary, 吉)신부가 2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는데 6.25동란으로 귀국하니, 한때 사제없는 본당이 되기도 하였다. 1952년 7월 유수철(도미니꼬)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야간학교를 개설하였다. 1953년 5월 유신부는 효명중학교(曉明中學校)를 설립하고 1955년 미839부대의 지원을 얻어 285평의 교사를 증축, 그 뒤 고등학교까지 병설하여 실업계공업학교를 거쳐 종합학교로 발전시켰다. 1961년 4대 강원유(요한) 신부를 거쳐, 윤병희(바오로) 신부가 5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자 1962년 12월 '레지오 마리애 샛별 꾸리아'를 창단하여 지도신부를 겸하였다. 이 본당에는 현재 2,019명의 신자가 있고, 공소는 8개소이다.

1953. 신성고등학교를 병행 (722쪽 신성학교)

신성학교 晨星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22쪽)

1909년 프랑스 선교사 라크루(Marcellus Lacrouts) 신부가 제주도에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으로 현재의 신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16년 일제의 우민화정책에 따라 탄압을 받고 무기휴교를 당했다가 1964년 신성여자중학원으로 재개교하였다. 1953년 고등학교를 병설하였고 1977년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800번지의 현 교사로 이전하였다.

1953. 본교로 복귀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동성중고등학교 東星中高等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제단법인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중등교육 기관. 학교내에 을조(乙組) 를 편성하여 신학교의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을조의 경우 남대문 상업학교의 교육과정을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받고 방과 후 신학원에서 신학교육에 필요한 라틴어와 교리및 지도신부의 영성을 받았다. 1968년 5월 김수환 추기경이 이사장으로 취임되어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마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3. 매괴상업고등학교의 1학기 입학식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6쪽)

매괴여자 중·상업고등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6쪽)

장호원본당 제6대 주임인 파디(Pardy, 1893-1938) 신부는 당시 장호원에 공립인 남자중학교만 있을 뿐 고등학교가 없는 것을 보고 전교를 위해서도 남자 고등학교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학교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52년에 매괴상업고등학교의 기성회가 결성되고 1953년에 1학급 73명의 학생이 입학하였으며 교사는 6명이었다. 그러나 교실이 없었으므로 매괴국민학교의 교사를 이용하였다. 1954년 매괴상업고등학교로 인가를 받고 학급도 6학급으로 늘어나자 1958년에 한·양식 성당과 사제관 및 한국 전통의 돌담을 헐고 그 자리에 학교 건물을 지었다. 그러다가 1965년에는 남학생 모집을 중지하고 매괴여자중학교 인가신청을 냈는데 남학생만을 모집하기로 구두로 결정했던 장호원 공립 중학교의 교장이 갑자기 이동되자 그 결정이 무효화되어 장호원 중학교에서도 여학생만을 모집하게 되었다. 이에 두 학교 모두 여학생만을 모집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미 인가신청을 냈고 또 남녀공학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운영상에 큰 곤란을 겪으면서도 1966년 3월, 128명의 학생으로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교명과 거행되었다. 11월에는 매괴상업고등학교를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교명과 학칙을 변경하였다. 매괴상업고등학교는 1967년을 마지막으로 제12회 졸업생을 내었고 1970년에는 학칙변경 후 첫번 여학생 졸업생을 내었다. 교명은 바꾸었지만 졸업횟수는 그대로 계승하여 제 13회 졸업생으로 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매괴국민학교에서만 일해왔으나 1966년 3월 부터는 교구장의 요청으로 매괴여자 중·상업고등학교에서도 사도직이 시작되었다. 수녀들은 교장, 교사, 사서, 서무 등의 소임을 맡아 학교 행정 및 운영에 최선을 다하여 학교를 발전시켜 왔다. 특히 예의 범절과 생활지도에 역점을 두고 지도하고 있으며 교사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상업학교 학생에게 필수적인 주산·부기·타자 등의 실기 급수 수준을 계속 향상시켜왔다. 또 적극적 취업알선과 성적 우수자 및 가정 형편이 곤란한 학생들에게 교내의 각종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실력있는 학생들이 많이 지원하게 되어 음성군 내의 으뜸 여학교로 성장하였다. 특히 1988년 2학기에는 전국 상업학교 학력대회에서 개인 2등, 5등, 9등을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내었으며 전체적으로는 2등을 차지하여 이제는 상업학교로서는 군내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명실공히 명문이 되었으며 취업률도 거의 100%에 이르고 있다. 이 결과 군내의 타학교들이 학생모집에 부심하는 반면 매괴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는 6학급 정원모집의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였고 오히려 입학 시험 경쟁률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취업을 위한 실력향상뿐만 아니라 천주교 학교의 특색인 종교교육에 중점을 두어 중1부터 고3까지 매주 1시간씩의 종교수업이 있고 또 한시간씩의 예비자 교리 또는 신자 재교육을 실시하여 매년 약250여명의 영세자를 배출하고 있다.

1954. 3. 1 성 요셉 자선병원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21쪽)

성요셉병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21쪽)

노기남 주교의 권고에 의해서 유을준씨는 피난 당시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던 중림동 성당구내의 가명국민학교를 기반으로 새 병원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서울교구와 미국 원조기관인 C.A.C(가톨릭 자선회 : Catholic Charities)의 지원을 받아 1954년 3월 1일 성요셉자선병원을 개원하였다. 이듬해인 1955년 10월 가톨릭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으로 된 후 계속 발전하여 1959년에는 병원을 신축, 완공하였다. 새롭게 신축된 성요셉자선병원은 병실수 35개로 치과를 제외한 전과목을 진료하였다.

이 병원은 초기부터 성가회 수녀들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성가회에서 미아리에 성가병원을 개원하게 되자 그곳으로 떠나게 되어 1959년 3월 6일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병원 관리를 맡게 되었다. 파견된 수녀들은 처음에는 성모병원에 속하여 있었으나 1960년에 성요셉병원 분원을 설치하고 윤성기 토마스 수녀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윤 수녀가 성모병원 수녀원 원장이 되자 다시 성요셉병원 분원은 성모병원 원장수녀의 책임하에 있게 되었다. 그후 1962년에 가서야 완전한 분원으로 발족하였다.

성요셉병원은 설립 초부터 자선진료 담당 병원으로서 유료병상 60베드와 무료병상 20베드를 갖추고 무료진료와 실비진료를 겸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성모병원 내에 자선진료소가 설립되어 자선진료의 임무가 이전됨과 더불어 위치에 따른 병원관리의 효율성 문제, 낡은 건물로 인한 붕괴 위험성 등으로 1974년 8월 31일자로 폐원되었다.

1954. 4. 6 범어동 본당 내 샛별 유치원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05쪽)

범어동본당 泛魚洞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05쪽)

1949년 대구교구에서 현 범어동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1951년 성당을 신축하고 계산동본당 소속 공소를 범어동성당으로 승격시켰다. 초대본당주임 권영조(마르코) 신부가 본당 전교와 유치원을 위해 수녀파견을 요청하자 1953년 4월 1일 정갑순 알로이시오 수녀와 이봉순 방지거 수녀가 부임하였고 1954년 4월 6일부터 샛별유치원을 개원하여서 가톨릭적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에 결핵환자 수용소가 된 동부시립병원이 바로 옆에 있어서 2명의 수녀는 비참하게 죽어가는 환자들을 방문하면서 위로하여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한편 지산동을 중심으로 범물동, 두산동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던 범어동 본당 소속 지산공소가 1975년 4월부터 준본당으로 승격되어 노경삼(다니엘) 신부가 그곳에 부임하면서, 수녀의 도움을 청하여 그 당시 샛별유치원 책임자였던 권영자 말가리다 수녀가 약 1년 반동안 주일마다 미사준비, 주일학교 교리교육 등을 맡아 협력하였다. 1977년에 대구대교구 산하 지산본당으로 승격되었고, 본당 가까이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가 수련원을 마련하여 자리잡은 고로 소임수녀들이 나와서 봉사하게 되었다. 그동안 1,000여명의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발전을 거듭해 왔던 샛별유치원이 수도회 방침에 의해 1983년 2월 2일 폐원되었다.

1954. 4. 성신대학에 의학부가 신설 (18쪽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8쪽)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이어받아 자선과 의료사업으로 지역사회 주민에 대한 보건증진에 이바지하는 한편 유능한 의료인을 양성, 연구를 통한 의술 향상으로 의학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여 1935년 3월 11일 경성구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설립한 병원이다.

1954. 5. 10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34쪽)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34쪽)

해방 직후 1945년 12월 29일 범일동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정재석(鄭在石 요셉) 신부는 학교 설립의 뜻을 가지고 후원자들을 모으고 기성회를 조직하여 팔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어려운 상황으로 학교설립을 위한 기도는 무산되고 이듬해인 1946년 3월 성당 구내에 소화보육원을 설립했다. 한편 당시 항구도시 부산은 귀환동포 속에 섞인 고아들이 많았으므로 해가 거듭됨에 따라 원아들의 수가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피난민으로 초만원을 이루자 보육원의 수용능력은 한계에 다달았고 환자 치료문제가 대두되었다. 정 신부는 1951년 10월 관계 당국의 협조를 얻어 데레사진료소를 설립하여 원아들의 건강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특히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도 치료, 투약 함으로써 봉사하였다. 1951년 1·4 후퇴 후 부산은 다시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공지는 도로변 산중턱까지 판자집으로 뒤덮였다.

당시 서울에서 온 중학 이상의 각종 학교는 학생들의 임시 수용을 위해 각양각색의 가교사를 세웠는데 이때 범일동성당 구내에는 교장 박순경 루시아씨에 의해 서울 수도여자중고등학교의 가교사가 서게 되었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고 정부가 환도하자 피난학교들도 환교하게 되었다. 이때 정신부는 수도여고 가교사를 인수하고 교직원을 확보하여 1954년 4월 20일 학생을 모집했고 교명을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라 하였다. 이 학교는 같은 해 5월 10일에 중학교 3학급 고등학교 2학급인 160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그 해 9월 1일 정 신부는 노력끝에 문교부로부터 중학교 9학급 고등학교 6학급의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정 신부는 시내 대학교수 여러 명을 강사로 초빙하는 등 데레사여고를 명문으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교사들도 사명감을 가지고 학교교육을 위해 심혈을 바쳤다. 당시 학생들에게는 점심시간에 우유를 끓여 공급하였는데, 소화보육원 수녀들이 협력해 주었다.

1955년 8월 1일 정 신부와 교직원들은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 교실 14개를 신축했고, 1956년 3월 1일에는 범일동 가교사를 떠나 수정동 신축교사로 이사했다. 1957년 5월 30일 부산교구가 대구교구에서 분리됨으로써 부산교구유지재단이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인 최재선 주교가 취임하였다.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는 부산교구 유지재단에서 운영 관리하였고 정 신부가 7월 10일 다시 제 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정 신부는 당시 신설된 부산교구를 위해 할 일이 많았으므로 학교 실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를 초청하여 전담시키기로 내정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최재선 주교의 초청으로 서울 계성여자중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던 박정희 엘리사벳 수녀가 교감으로, 왜관 순심중학교의 서상분 말다 수녀가 교사로 취임함으로 데레사학교 분원은 1957년 8월 31일에 창설되었다. 부임 초기 수녀들은 범일동 소화보육원 분원에서 기거하며 통근하다가 10월경 가교사 옆에 있는 대지 300평 5칸 목조건물을 구입하여 두 수녀가 입주하게 되었다. 한편 이해 11월 21일에는 [레지오 마리애]교내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여 최재선 주교 임석하에 첫 회합을 개최하는 등 교내 종교활동 활성화에도 노력하였다. 12월 김숙경 마리 루이 수녀가 서무과장직을 맡아 긴급한 본교사 건축에 뜻을 두고 제반 경비절약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듬해 1월경 김필양 에프렘 수녀가 부임하여 집안 살림을 맡게 되어 교사수녀들은 학교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학교는 교사수녀의 부족을 메우기 위한 최재선 주교의 착상으로 여러 회의 수녀들을 강사로 채용하게 되었는데 복자회에서 가정과, 분도회에서 음악과, 프란치스코회에서는 영어과를 담당하는 국제 수녀학교를 방불케 하였으나 박정희 교감수녀의 지도 하에 서로 협조함으로써 활기 넘치는 학교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59년 9월 범일동구역에 본관 5층 22개 교실이 완공되어 이전함으로써 산위 가교사 신세를 면했다. 학교분원은 보육원분원의 큰 마루방 하나를 얻어 침실과 공동실로 사용하였고 공지에 온돌 하나와 부엌을 만들어 침실 겸 식당으로 사용하는 등 옹색한 살림살이였으나 성당과 시장이 가까워 편리한 점도 있었다.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는 교통이 편리하고 학교시설 등 교육환경이 갖추어진 범일동 본교사로 이전한 후부터 우수한 학생모집, 교원책용, 가톨릭 이념에 충실한 인문계 여자고등학교로서의 면모를 점차적으로 갖추게 되었다.

1972년 3월에는 문교부 시책에 따라 중·고교가 분리되므로 정의순 베드로 수녀가 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윤필술 쟌 마리 수녀가 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중고교 교장 겸임시대의 막을 내렸다. 1981년 4월 30일 문현자 호스띠아 수녀가 제6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수녀원 분원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3층으로 된 학교건물을 증축하게 되었다. 이에 수녀들은 남천동 생활관에서 기거하며 통근을 하다가 건물이 완공된 6월에 학교 건물 1층에 부설된 현 수녀원 분원건물로 입주하였다. 문현자 교장수녀가 취임했던 당시는 1980년 7·30조치로 과열과외가 사라지고 학원 정상화 작업이 정착되어 가면서 동시에 교복 자율화로 자칫 방종과 이탈현상이 예상되는 때였으므로 취임 후 전인교육의 구체화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정신에 바탕을 둔 믿음과 사랑으로써 성실하고 슬기로우며 아름다움을 지닌 한국 여성을 키운다"는 학교교육 목표의 근본 정신을 구현할 방안으로 학생들의 정신적 방향을 이끌어 갈 표상으로서 모녀상(母女像)을 세웠다. 또한 교회학교의 특색을 살려 "종교교육을 통한 품성 도야"를 교육방침으로 설정하고 그 구체적 실천 방안을 사랑의 실천, 정직한 마음, 감사하는 생활 등으로 구분하여 전인교육의 기본 덕목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위한 행사로 '성모의 밤'과 '소화에서 만납시다'를 연말에 종교반 중심으로 개최하여 헌금과 행사 이익금을 고아원과 소록도 나환자 수용소에 보내고 있다. 또한 정직한 마음의 실천을 위해 교내에서의 습득물 신고제를 두고 적극권장, 지도하고 있다.

1954. 8. 11 김기봉 신부는 사회부장관으로부터 재단법인 성모건설원을 인가받음 (교회와 역사 208호 11쪽) - 1992. 9. 25발행

김기봉 金基奉, 필립보, 1914∼1967 (교회와 역사 208호 11쪽) - 1992. 9. 25발행

舊敎友 집안인 깁기봉 신부의 가계는 연안 김씨인 것만 확인된다. 1938년 6월 11일 사제로 서품된 김 신부의 첫 부임지는 구태인읍본당에 부임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말기에 접어 들자 일제의 압박은 더욱 극심해졌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이거하였다. 당시 만주 지역은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일제가 메리놀회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기에 만주 지역의 사목은 평양교구에서 도와주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평양교구 자체도 원래 메리놀회의 선교 지역이었고, 선교사들이 추방되었기에 1943년 6월 29일 洪龍浩(프란치스코) 주교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신부 수가 많지 않았고, 1942년 2월 부터 평양교구에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하던 서울교구 소속 신부들이 교구 귀속문제로 인하여 1944년 12월경 서울교구로 돌아 갔기에 평양교구 자체도 형편이 대단히 어려웠다. 만주에 이어 북경의 北堂성당에서 사목하던 김기봉 신부는 중국이 공산화되고 북한에서의 여러 상황이 심상치 않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부산교구로 돌아왔다.

부산으로 돌아온 김기봉 신부는 청학동 본당의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강당을 신축하여 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수녀원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어 영도 신성동 3가에 聖母建設園이란 고아원을 설립하여 사회 사업을 시작하였다. 6·25 한국전쟁 중 최후의 거점이었던 부산에서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들었고, 그런 중에 버려지거나 방황하는 아이들이 많이 생겨났다. 김기봉 신부는 그러한 아이들을 돌보아야 겠다고 생각하여 영도 청학동 본당에서 신선동본당을 독립시키는 한편 그 안에 고아원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먼저 신선동 3가 84번지에 있는 목조 건물을 매입하여 본당 신설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당시 신선동 3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 페트릭 데니어 특무상사의 협조를 얻어 황무지 930평을 정리하는 한편 1954년 8월 11일에는 사회부장관으로부터 재단법인 성모건설원을 인가받았다.

1955년 1월 1일자로 본당 승격된 신선동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김기봉 신부는 미군들의 협조를 얻어 1956년 11월에 건평 60평의 성당과 사제관을 낙성하였다. 이어 8월까지 고아원 원사 2동과 부속건물 2동을 완공하여40명의 원아들을 수용하였다. 원아들은 점점 증가되어 1956년 10월에는 70여명을 수용하였다. 그 후 성모건설원은 1957년 5월에 정부로부터 시설 기구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1959년 이후에는 정부 보조 및 의원 단체의 보조가 끊어질 우려가 보이므로 가톨릭 부인회에 호소하여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로부터도 많은 원조를 받았다. 그 결과 새 원사를 광안동의 대지에 신축하고 이듬해 10월에는 성모건설원을 신선동으로부터 이전하였으며 이때 부터는 본당 사목생활을 마감하고 성모건설원에만 주력하였다.

1957년 8월 26일 운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대양중공업고등학교를 천주교 부산교구 재단에서 인수하자 대양 중고교(지금은 중학교만 남아 있음)의 4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1960년 5월 13일까지 교육사업에도 헌신하였다. 교훈은 충직, 진실, 덕망이었다. 특히 학교 내에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여 전교에 주력함으로써 수많은 학생들을 영세시켰다. 이어 1963년 1월에는 광안동 성모건설원 2층에 신경전문치료병원인 '성 필립 신경정신과'를 개설하였다. 정신신경 계통의 환자 치료를 목적으로 하였고, 나아가 거기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성모건설원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대지 165평, 건평 65평, 병실 10개, 침대 20개, 의사 1명, 조수 2명, 간호사 1명의 규모로 연간 9,89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당시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주임이던 오석환 교수가 담당의사로 초빙되었고 오석환 교수에 이어 팽갑주씨가 담당 의사로 근무하였는데 운영난으로 3년만에 폐원하였다. 병원의 일반 진료소는 병원 주위의 난민들의 구제치료 및 성모건설원 아이들의 치료를 하였다.

1967년 4월 6일 김기봉 신부는 숙환으로 휴양 중이던 부산 광안동 성모건설원에서 선종하였다. 4월 7일 서품 동기인 최재선 주교의 집전으로 영결미사가 봉헌되었고, 부산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54. 9. 1 부산 동대신동에 고아와 기아등을 수용하는 시설인 성모보육원 설립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복지시설)

아이들의 집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6. 11일 아이들의집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6·25 동란 후 고아와 기아, 혼혈아들을 수용하여 양육 및 입양을 목적으로 1954년 9월 1일 강 베드로 수녀가 부산 동대신동에 설립하였다. 그러나 특수아동의 수용보호 및 치료시설의 필요에따라 1998년 12월 10일에 부산해운대구에 지체 부자유영아의 재활치료 및 수용시설인 아이들의 집으로 그 목적을 변경하였다.

주요사업 내용은 부모가 없는 장애아동을 수용보호하여 행복한 삶에의 원동력이 되도록 도우며, 또 갓난아기 부터 보이타 치료를 집중적으로 하여 장애를 가볍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만 1세이상 교육가능급 생활교육 아동에게 조기교육을 실시하여 인지능력을 높이고 지능개발을 돕는다. 또 개별적으로 언어지도를 한다. 1998년 2월 현재 정원 41명 중에 현 인원은 46명이고 시설은 대지 7,721㎡에 임야 23,502㎡이다. 마리아동에는 경당과 아동방, 의무실, 치료실, 식당, 주방, 세탁실 등이 있고 요셉동에는 사무실과 교육실, 그룹방 등이 있고, 강당과 놀이방이 설치되어있는 유희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매월 1,000여명 이상의 봉사자들이 아이들의 집에서 시설물과 정원 손보기, 밭일, 아이들 밥 먹이기, 주방과 빨래방 돕기, 시설물과 정원 손보기, 밭일, 그외의 일들을 도와주고 있다.

1954. '대한 노동조합 총연맹' 명칭을 '대한 노동조합 총 연합회'로 개정 (246쪽 노동운동)

노동운동 (영) labor move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46쪽)

노동운동이란 근내적 임금노동자 계층이 자신의 생활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전개하는 조직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노동자의 일상적인 욕구, 임금등의 근로조건 유지 개선을 기본목표로 하는 동시에 자본의 강력한 지배에서 벗어나 사회의 떳떳한 구성원이 되려는 노동자의 조직적인 운동이다. 노동운동은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생산자로서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을 유지, 개선하기 위해 전개하는 노동조합 운동

둘째, 시민으로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을 만들어 나가는 정치운동

세째, 소비자로서 노동자사 보다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전개하는 각종 협동조합운동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19세기 말 임금노동자가 출현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3.1운동이 실패한 뒤 대중적 조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정부와 사용자와 노동자의 주역에 의해 구체적으로 다듬어 지는 것이 노동운동의 성격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 이 삼자가 걸어온 역사적 체험과 기능상의 특수성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된 다른 나라 노동의 궤적과는 다른 형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1954.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사회사업 (영) Social servic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5쪽)

가톨릭 교회는 단순한 전례의 공동체나 신앙의 공동체일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빛(마태 5,13-16)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사회안의 어두운 곳을 찾아서 어두움을 없애고 광명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너무도 어두운 곳이 많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사람, 육체는 건강하나 정신이 병든사람, 정신은 건강하나 육체가 병든사람 등이 있다.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을 살펴주고 그들의 희망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버림받고 소외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현세적인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교회의 사업중에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문화사업, 사회사업등이 포함된다.

*구미근로여성복지관 - 1973년 경북 구미시 송정동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구미공단 근로여성들의 인격도야 및 생할향상을 위해 기능교육, 취미교육, 교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설립단체는 왜관 성 베네딕토 대 수도원이다.

*국제마리아의 사업회 -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고 1969년(여자), 1974년(남자)에 설립되었다.

주된 활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회원이 소득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퍼콜라레 운동을 하는 남녀 회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덕산 신생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으로서 1952년에 설립된후 요보호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하고 원생을 초·중·고등학교에 진학 시키고 졸업 후에는 기술을 습득시키고 있다.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 1976년 경남 마산시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정기프로그램으로 학습반과 취미반이 있고 특별 프로그램으로 젊은이 교실, 사임당교실, 성교육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 1979년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설립하였다. 불우이웃 청소년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의식개발, 교육, 협동, 우정, 자립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쎈뽈원 - 충남 논산군 논산읍에 있으며 1973년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이 되었다. 노인복지시설을 설치운영하며, 성인불구자의 복지사업을 하고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 1966년에 설립되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근로자의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기업인의 이해를 촉구시키고 노사간의 긴밀한 협조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곳이다.

*성심원 - 서울대교구가 불우아동 및 부상아동을 보호하기위해 1946년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설립하였다. 파티마 성모수녀원에서 담당운영하고 있다.

*성인복지원 - 1976년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설립, 부양가족이 없고 경제적으로 자활이 분리한 60세 이상의 여자노인을 수용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 본부는 서울 명동에 있으며 마음의 가난함을 생활화하는 단체로 1961년 설립되었다. 주된사업은 환자, 가난한자, 걸인을 돌보고 노쇠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며 불우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이다.

*소화영아재활원 - 1946년 소아보육원으로 출발하였다. 주된사업은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사업이며, 부산교구재단에서 운영하고있다.

*엠마우스집 - 1981년 설립된 것으로 성인지체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 - 1969년에 불우아동을 수용하여 직업보도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성 빈첸시오 청소년 복지회에서 설립하였다.

*춘광대구 요양원 - 극빈 폐결핵 환자 요양원으로 1966년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진영성모의원 별관 -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불우한 결핵환자를 고쳐주는 것이 주된목적이다.

*한국 SOS 어린이 마을 - 요보호 아동들을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하고 퇴소후에는 독립생계를 유지토록 자립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꽃동네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중 특기해야 할 것은 충북 무극에 있는 꽃동네로 청주교구 오웅진 신부가 혼자서 걸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면서 시작되었다. 꽃동네의 특징은 구걸할 수만 있으면 퇴거토록 하는 것으로 자생의 능력이 전혀 없는 노인만을 보호하는 곳이다.

*성모 자애원 - 예수성심 시녀회가 심신 장애아를 재활시키는 곳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 6.25 이후 기아가 날로 증가하여 버림받은 생명들을 입양, 양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릴리 어린이집 - 6-7세의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을 받아 교육하고 있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의 근로자의 집 - 근로자의 수용과 교육에 힘쓴다.

*성 프란치스코의 집 -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일을한다.

*마리아 자매원 - 문제청소년을 교도하고 상담과 숙소를 제공하여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국민학교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이수시킨다.

*성심 양로원 - 불우한 노인을 수용하여 물질적 정신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성가 양로원 - 무의탁 노인들을 구호한다.

*백백합 보육원 -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호, 육성한다. 설립단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다.

*해성 보육원 - 요보호 아동과 지체 부자유자아 및 정박아 수용 및 양육, 국내외 입앙을 하고있다.

이상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 중 그 일부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나 이 이외에도 수십개의 사회사업단체가 있으며 그들은 보이지 않게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사업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첫째, 교회는 특별히 정부나 일반 사회단체에서 망각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소외된 계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이 하기 어려운 사업을 찾아서 그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임무다.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회사업은 양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몇명을 도와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교회의 사회사업은 어떤 기관이나 단체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사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자기의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인의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회사업가이며 모든 신자가정은 사회사업단체인 것이다. 세째, 교회 당국이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재정적 뒷바침을 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성당도 지어야 하고 문화사업도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오늘의 현실 안에서 연장시키는 일이다. 특히 도시교구나 본당에서는 그 지역사회안에 어두움을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여 그들을 위한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정말 가톨릭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1955. 6. 27 성모 자애 병원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성모 자애 병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가톨릭 의과대학 성모자애병원은 가톨릭 정신에 입각하여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전인적 건강을 구현하기 위한 의료기관이다. 국민보건과 불우한 환자구료를 위한 교육, 연구, 진료를 사명으로 지역사회 의료복지 향상에 기여함을 목저으로 한다. 특히 최대 다수 주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최상의 진료를제공한다. 1955년 6월 27일 에 인천직할시 북구 부평 6동에서 김영식(베드로) 신부에 의해 설립되어 1963년 4월 9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인수받았다. 부평이란 이름은 고려 충선왕 2년(1310년)에 부평구라고 불려진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원래 부평지역은 현 계산동이 그 중심지였으나 부평역이 생기면서 그 주변과 시장지역을 부평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지역은 본시 부평군 부내면 대정리로 1940년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소화정이라 불렸으며 해방과 더불어 1946년 부평동으로 개칭되었다. 김영식 신부는 황해도 연안에서 1947년 10월 7일 무의무탁한 고아들을 가정적인 보육방법으로 육성하고자 사회사업법인 연백성모원을 설립하였다. 그후 김신부는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1953년 5월에 원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인천시 북구 부평동 665번지에 자리잡고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점차 연로하게되자 김신부는 원아들을 잘 돌볼 수 있는 수도회를 찾던 중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창설자이신 방유롱(안드레아) 신부를 통하여 연백성모원을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맡겼다. 그리고 원아 보건 후생 대책과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위하여 1955년 6월 27일에 설립한 성모자애병원을 보육원으로 운영하고 원아들을 잘 보육하는 조건으로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운영권을 이양하였다. 이때의 집은 75평의 목조 이층 건물이었고 수용능력은 50명이었으나 당시 4세에서 20세 까지의 70여명의 보육원생들이 함께 생활하였으며 이때부터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사회복지 사도직과 의료봉사 사도직이 인천교구에서 시작되었다. 김영식 신부는 1963년 1월 7일 상호 11시 5분에 숙환으로 성모병원에서 선종하였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1963년 4월 9일 황우경(스테파노) 수녀와 박순옥(ꥉ뻬뚜아) 수녀를 파견하였으며 1963년 6월 30일 정수자(막달레나) 수녀와 1963년 7월 20일 심상임(막달레나) 수녀를 파견하였다. 김신부는 6.25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었고 이땅에는 전쟁의 상처가 널려있었고 황폐하고 굶주리고 병든 자들과 전쟁으로 혼열 고아들이 많이 발생된 비참한 사회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김신부는 미 제 8057부대 가진스키중령과 솔지반 군종신부, 그리고 가톨릭 구제회 한국 지부장 캐롤 몬시뇰의 협조로 1954년 9월 22일 성모자애병원의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연건평 119평 아담한 2층 건물을 완공하고 1955년 5월 5일 낙성식을 가졌다. 1955년 6월 27일부로 원아 후생 보건 사업으로 내과, 외과, 방사선과등 3개과에 초대 의무원장이신 노신주씨 외 의사 2명과 간호사 2명, 그 외에 5명 등 10명이 가족적인 분위기로 첫 개원을 하게되었다. 병원이 개원되면서 미8군에서는 더욱 관심있게 원조를 베풀어 1958년에는 미8군 제 6의료창 사령관으로부터 링켈, 다이아징 등 19종에 달하는 의약품을 미8군 군사 원호청을 통해 전달되었다.

1962년 1월 9일 총건평 211평에 현대식 병실 50명을 수용할 수있는 입원실과 특히 산부인과에서는 최신식 자동분만대를 설치하고 당시 제 3대 병원장이신 진병집 원장의 운영방침의 일환으로 월간 1500명의 환자들 중에서 무의무탁한 환자들은 무료로 치료해 주었고 그로 인해 병원을 찾는 환자는 급증하였다. 탁월한 의사진과 의료기구등을 설치한 성모자애병원은 1962년 4월 7일 가톨릭의대부속병원으로 약정편입, 새로운 발족을 함에 따라 의사진을 보강하는 한편 진료의 학술적인 탐구를 위해 대학에 의사 인사권을 맡기어 보다 훌륭한 의료진을 보강하고 내과에 가톨릭 의대 교수인 이순익 박사와 정형외과 과정으로 서독 하이델베르그대학에서 다년간 연구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부속병원으로 신 발족함에 따라 지역보건 향상에 기여는 물론 불우한 환자들의 쇄도 양상은 진료비가 저렴하고 특히 미8군으로부터 원조를 받은 X-ray기와 산모를 위한 무통분만기로 분만은 거의 무료봉사를 하였던 실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병원은 미8군 지정병원, 공무원 요양지정병원, 산엽재보상보험지정병원, 한국 자동차 보험지정병원, 경찰 전문학교 지정병원으로 되어 있었다. 특히 성모자애병원은 미제 121명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임상검사 및 조직 검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한편 모자 보건에 대한 계몽운동이 잘 안되어 있어 분만은 거의 무료 봉사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모자 보건 계몽 및 무의촌 이동 진료를 계획하고 최초로 무료 이동 진료를 실시하여 인술을 베풀었다.

그 외에도 인천시 북구 가정동과 자매결연을 맺고 영세민 구후로 밀가루 20포와 매월 1회 순회 무료진료를 실시하였다. 이외에도 병고와 가난으로 사경에 처한 지역주민들을 무료로 인술을 베풀어 지역주민을 감격하였다. 1980년 3월에 대한병원 협회로부터 인턴 및 레지던트 수련 병원으로 지정을 받아 많은 수련의들을 배출하였으며 1981년 5월에 성모 자애 병원 부설 심신장애자 조기교육원을 개원하여 그 명칭을 엠마누엘 어린이 집이라 현판하였다.

이어 1982년 7월에는 인구증가와 더불어 환자가 급증함에 따라 병상을 증설하여 총 310병상을 확보하고 1983년 3월 1일부로 피부과와 신경정신과를 개설하였으며, 지하 1층과 지상 3층에 1층을 증축하여 보험계 및 중앙공급실 및 교수 연구실로 이용하고 있으며 1984년 3월에 안과를 개설하고 환자진료에 임하고 있으며 1985년 2월 지하 1층과 지상 5층 별관 준공을 하였다. 연탄가스와 중독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대형 고압산소기를 설치하여 인접 각 시군에서 발생되는 가스 중독으로 인한 환자의 사망 예방과 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85년 2월에 준공된 지하 1층 지상 5층의 현대식 건물은 임상검사실 및 스텝 연구실과 의학도서실등을 확장하고 동년 4월에 사회사업과를 신설하였으며 1986년 5월에 비뇨기과를 신설하여 병상수 310베드와 진료과목 16개과로 인천 직할시내 유일한 종합병원으로서 의료계의 일익을 담당할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성모 자애 병원은 사회적인 발전과 의료 정책 변화 등에 편승하여 1988년 2월 1일 기획실을 신설하고 동년 3월 1일 호스피스과를 신설하여 임종 환자까지도 돌보게 되었으며 1989년 2월 종합검진센타를 신설하고 동년 6월 전산실을 설치하였으며 1990년 9월 1일 안전관리과을 신설하였다. 1992년 7월에는 신관건물에 1층(130평)을 증축하여 405병상을 확보하고 오늘도 가톨릭 중앙의료원 이념 실천과 환자진료를 위한 교육, 연구, 진료를 사명으로 지역 사회의 의료 복지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성모 자애 병원에서는 의료서비스 개선을 위하여 교직원 소양교육도 실시하고 병원 부조리 사정추진 계획의 일환으로 환자들의 불편과 불만을 스스로 시정하고 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보다 나은 양질의 진료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환자 불편 불만 신고센타를 설치 운영하는 한편 원내 1층 외래 및 각 병동마다 환자 불편 불만 신고함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내원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보다 나은 진료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전교 직원 및 환자들을 대상으로 쓰레기 줄이기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으며 쓰레기 줄이기 운동전개의 일환으로 음료수병 및 캔종류, 꽃다발 등을 사양하는 홍보물을 현관에 계시하여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원목실의 수녀들은 환자들이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입원중에도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환자 방문과 상담을 하고있다. 말기 호스피스 환자들은 가정간호로 직접 가정방문을 통하여 마지막까지 인간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임종 후 사후처리까지 돕고있다. 사정의 여의치 못한 사람들은 임종방으로 모시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직장 내에서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직원을 위한 피정, 성지순례, 미사, 재교육, 예비자 교리 등 각종 신심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1955. 10. 성신대학 의학부 제1부속병원으로 인가 (18쪽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8쪽)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이어받아 자선과 의료사업으로 지역사회 주민에 대한 보건증진에 이바지하는 한편 유능한 의료인을 양성, 연구를 통한 의술 향상으로 의학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여 1935년 3월 11일 경성구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설립한 병원이다.

1955.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 성 바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 교육에 전력. 분도출판사 설립 (462쪽 베네딕토회)

베네딕토회 (영) Benedictine Order O.S.B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일정한 장소에 정주 하면서 공동체생활을 통한 철저한 수도생활이 가장 우선적인 베네딕토회의 목적이지만 지역교회의 필요성에 따라 교육, 학문, 포교활동 등 다양한 활동에 종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에 종사할 경우 반드시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기 때문에 대수도원의 공동체를 이탈하여 혼자 생활하면서 활동해야 할 때에는 일시적 혹은 임시적으로만 활동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베酈기토회 수도원안에서의 학교운영이나 신학, 철학, 과학 등의 연구활동 및 예술활동 등의 문화활동은 세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09년에 한국에 진출한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토회도 선교를 목적으로 독일에서 발족되었다. 이 수족은 1884년 베네딕토회의 회원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안에서는 수도자, 밖에서는 선교사, 그래서 포교 성 베네딕토회로도 불리는 이 수도회는 이러한 창설의 기본정신에 따라 다른 선교회처럼 일정한 지역을 맡아서 교구와 본당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하는 교구내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교운영, 예술활동 등을 통해서 문화적으로 교구 전체의 사목을 돕는데 있었다. 그러나 창설 즉시 진출한 동아프리카(현 탄자니아) 에서는 부득이 교구중심의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한국에서는 교육사업을 통한 기본적인 선교방침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한국진출 : 성 오틸리엔의 성 베네딕토회는 당시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1909년 2월 사우어(Sauer) 신부 등 2명의 수사신부가 내한하여 서울 백동(現 惠化洞)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함경남도 덕원을 거쳐 경상북도 왜관에 정착할 때까지 많은 어려움과 수난을 당하였다.

⸁ 서울시대(1909∼1920) : 사범학교 설립과 운영계획으로 뮈텔 주교가 초청한 본 수도회는 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서울 백동 낙산 아래 10헥타르(약3만평)의 땅을 매입하여 수도원의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고 1911년 3층 벽돌로된 거대한 수도원을 완공시켰다. 이미 1909년 말 정식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아울러 1910년에는 내한 목적으로 숭공학교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1913년 수도원은 대수도원으로 승격하였으나 숭신학교는 폐교하게 되었다. 지원자가 없다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몇몇 수사들이 중국으로 동원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목공, 철공, 열차,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직공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이 수도회는 수도생활뿐 아니라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포교수도회로서 본당사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의 반대로 이를 서울에서 실현시키지 못하고 함경남북도와 간도지방을 관할하는 원산교구가 설정되던 1920년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여 숭공학교를 폐교하고, 1927년 서울의 수도원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 덕원시대(1920∼1949) :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에서는 아프리카 포교지가 붕괴된 뒤 자연 한국 포교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20년 8월 5일에 교황청에서도 한국의 원산교구 위임을 허락하자 곧 1921년 5월 1일 사우어 신부는 주교로 성성되었다. 교구 사목은 원래 이 회의 선교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서울의 베네딕토회원들은 이 제의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6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1927년 덕원의 새 수도원을 완공하여 그 해 11월부터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덕원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리하여 덕원수도원은 원산 포교지에 있어서 수도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되어 1940년 1월 12일 덕원면속구가 될 때까지 수도원 생활뿐만 아니라 원산교구 내에 있어서의 본당사목활동, 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야만 했다. 이에 투칭(Tutzing)의 포교 베네딕토회 수녀들이 1925년 11월 원산으로 내한하여 본당사목활동을 도울 뿐만 아니라 빈민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인 해성학교, 유치원 시약소 등을 개설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40년 덕원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다. 이 밖에 덕원수도원에서는 출판시설을 갖추어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바오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다. 일제의 탄압속에도 이처럼 발전한 수도회는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주둔하고, 1946년 토지개혁이 실시된 뒤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결국 1949년 5월 9일에 수도원의 모든 장상을 비롯한 신부, 수사들은 체포되어 독일인 신부 6명과 한국인 신부 5명이 1950년 10월 처형되었고, 사우어 대 수도원장을 비롯한 18명의 신부, 수사, 수녀 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954년 1월 42명의 신부. 수사·신부들이 생환되어 2년간의 휴양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서의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 왜관시대(1952∼현재) : 1951년 미국을 방문중이던 샹트오틸리엔의 크리소스토모 총원장은 당시 미국에 체류중인 스위스 출신의 전 연길교구 선교사 비테를리 신부에게 한국에 다시 진출하여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회를 건설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그를 한국 베네딕토회의 장상으로 임명하였다. 비테를리 신부는 일본을 거쳐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남쪽으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토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테를리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 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이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식구가 크게 증가되었다.

1955년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바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왜관에서도 분도 출판사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교회의 문서전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1971년 4월 왜관수도원의 대 원장직이 이동호 신부에게 이양됨으로써 베네딕토회는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또한 덕원교구에서 활약하던 스위스의 올리베타노 수녀들도 다시 한국에 진츨하여 각기 대구와 부산에 수도원 공동체를 신설함으로써 베네딕토회 여자수도회도 남한에서 완전히 그 기반을 굳혔다.

1955. 성가보육원을 유치 (680쪽 소사본당)

소사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80쪽)

8.15광복 이듬해인 1946년 4월 인천본당(답동)으로부터 분리되어 설정된 본당이다.

1949년 2월 신성우(마르꼬)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신축자금을 마련중에 6.25동란이 발발하자 1.4후퇴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도망와서 폭격으로 불탄 임시성당을 복구하였다. 수복 후 신자수가 늘어나자 주일미사도 근처의 솔밭에서 지내야 되는 형편임으로 신신부는 자신이 농사를 지어서 번돈과 인근 미군부대의 원조와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54년 11월 28일 114평의 성당을 준공하였다.

보육원과 양로원을 만들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야간학교도 설립하였다.

소사본당은 봉사하는 교회, 믿음을 다지는 교회를 지향하는 신자들의 의지를 모아 450평에 달하는 현대식 '성가정회관'을 지어 1984년에 개관하였다. 이곳은 교회는 물론 지역사회를 위하여 완전히 개방하고 있는데 특히 젊은이들의 교육장과 상담실을 비롯, 직장인들의 회합, 피정교육 및 각종 문화교육센터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1955. 성 라자로 의원 개원 (321쪽 라자로 마을)

라자로 마을 (영) St. Lazarus Villag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21쪽)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 오전리 87번지 소재의 나환자 정착촌. 1945년 광복후 서울 근교에 떠돌아 다니던 많은 나환자들을 접한 메리놀회 소속 캐롤 주교는 이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50년 오류동에서 성 라자로원을 창설하였다. 1951년 시흥에 20만평의 대지를 구입한 성 라자로원은 그곳으로 이전하면서 1955년에는 가톨릭 의대 부속 성 라자로 의원을 개원하였다. 이 때부터 재가(在家)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이동진료를 시작하였는데 1962년 정착촌을 마련하고 나환자들을 이곳에 모여 살도록 하였다. 그간 서울 교구에 마련되어있던 성 라자로 마을은 수원교구가 분리, 독립된 이후인 1967년 수원교구로 이양되었다. 1975년 성당을 축성하였고 1981년 설립30주년을 맞아 피정의 집을 개설하였다. 1985년 현재 성 라자로 마을에는 나환자 정착촌을 비롯하여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동, 진료소, 성당, 교육관, 수녀원, 휴게실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1971년 창간된 마을회보가 간행되고 있다.

1955. 춘천에 성 골롬바노 의원을 개설 (93쪽 골룸바노 수녀회)

골룸바노 수녀회 (영) Missionary Sisters of St. Columban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3쪽)

성 골룸바노 수녀회는 1922년 2월 1일 아일랜드에서 당시 성 골롬바노 선교회 총장인 존 블로윅(John Blowick)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포교활동을 함에 있어서 포교지의 전통적인 관습을 극복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전교수녀들의 적극적이며 정성어린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골롬바노회 내에 전교수녀회를 창설하게 된 것이다. 이 수녀회원들은 각 지역에서 전교활동 외에 주로 의료사업, 교육사업, 사회사업 등을 하고 있다.

한국진출 : 1955년 광주교구의 헨리(Harold Henry, 玄) 주교의 초청으로 엔다(Enda Staunton)수녀를 비롯한 4명의 수녀들이 한국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들은 그해 목포에 수녀원을 설립, 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사업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에 춘천에도 성 골롬바노 의원을 개설, 1960년에는 제주도 한림에 진료소를 개설함과 아울러 성 골룸바노 선교회 신부들의 협조를 얻어 직조업에 착수, 지역개발에 이바지하는 동시에 부녀자들의 경제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1963년에는 삼척에도 의료시설을 개설(성 요셉의원), 1975년에는 영주에 분원을 설치하여 수녀들이 나환자 진료소인 다미안 의원에서 근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1971년 서울에 본원을 신축, 수녀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사업과 지방에서 활동중인 수녀들의 뒷바침을 해주고 있으며, 서울에서 수녀들은 서울 가톨릭의대와 협력하여 한국 천주교 회의 산하 '행복한 가정운동'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47명의 수녀들이 서울의 본원과 목포, 춘천, 제주, 삼척, 영주 등 5개 분원에서 의료사업, 간호원 교육사업, 사회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1955. 성 마리아 의원 개원 (831쪽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영) Sisters of our Lady of perpetual Help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31쪽)

1932년 6월 27일 당시 평양교구장인 몬시뇰에 의해 창설된 방인수녀회. 1950년 12월 부산 메리놀 수녀들과 함께 메리놀 병원과 군부대 세탁일을 하면서 피난민과 고아들을 돌보았는데 이것이 현재의 성모보육원이다. 1955년 수녀원을 흑석동으로 이전하고 그 옆에 성 마리아 의원을 개원하였다. 1971년 8월에는 부인들로 구성된 성모자매회를 발족하였다. 1980년에는 경기도 용인군에 소화의원을 개설하여 영세민을 위한 진료를 시작하였다.

1955. 성 마리아 의원 개원 (교회와 역사 103호 10쪽)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교회와 역사 103호 10쪽)

여명기 : 한국여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 분의 일에 동참하고자 했던 것은 선조들이 신앙을 받아들인 지 10년후 상 골롬바 여회장의 활약과 당시 사회 관습에서 용납되지 않던 동정생활을 하며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던 이 누갈다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신유교난에 순교하므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쳤으며 이들이 품었던 원의는 한국인 수녀회를 탄생시키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창설기(1832∼1940) : 8명의 지원자와 3명의 지도수녀가 1932년 6월 27일 John E. Morris 평양 교구장의 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교구장이 수녀회의 창립을 선언함으로써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탄생되었다. 이 수녀회의 명칭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라고 한 것은 길의 인도자로 알려진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의 특별한 인도로 창립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기원을 내포하고 있다. 1935년 메리놀 회원인 한국인 장 앙네다 수녀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원자들의 지도수녀로 부임해 옴으로써 본격적인 수도자 양성이 시작되었다. 같은해 수녀회 회헌과 설립 인가를 로마 성청에 신청하였다. 1938년 2월 25일에 교황청수도자성성으로부터 수도회 설립인가와 회헌을 인준받았다.

시련기(1941∼1950) :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1942년 6월 메리놀 외방선교회 성직자 수도자들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면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내외적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1942년 12월 장 앙네다 수녀는 오 주교의 임명으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수도복으로 갈아 입고 초대원장으로 부임하였다.

1950년 5월 14일 인민군 검찰요원에 의해 수녀원을 몰수 당하고 회원들은 강제 해산되어 본가로 귀가하게 되었다. 수녀원을 떠난 회원들은 어디를 가도 정치보위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재건기(1950∼1960) :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진주고 평남지방에 흩어져 있던 서원수녀 16명이 평양 상수구리 수녀원에 모여 재건에 착수하였다. 또한 평양 교구 복구작업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각 본당에 파견되어 정리사업을 서둘렀다.

1951년 3월 7일 부산 메리놀 병원이 개원되자 회원들은 병원일을 도우면서 세탁일, 자수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피난민들과 고아들을 돌보며 교리를 가르치는 등 사명을 다하였다. 1955년에는 서울 영등포구 흑석동으로 본원을 이전하고 성 마리아 의원을 개원하였다. 이 마리아 의원이 가톨릭 의대 부속병원으로 까지 성장하였으나 1980년 2월 복음 사도직을 원칙으로 하는 수도회로서 경영주가 될 수 없다는 이유와 기타의 이유로 폐원하였다.

발전기(1960∼현재) : 1963년 정릉 현 위치에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1970년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수도생활을 쇄신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회헌을 개정하기도 하였다. 70년대 중반기에서 부터 회원들의 영성생활을 강화하는 한편, 3대 서원을 중심으로 한 내적 생활을 반성하고 점차적으로 수련을 시작하였다.수녀들은 교회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심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청소년을 위한 사도직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도수녀들을 파견하였으며 교육관을 개관하기도 하였다.

70년대 말기에 와서는 매해 창립 이념에 따른 실행 목표를 정하고 안으로는 수도 생활을 재 정립하고 밖으로는 창립 목적인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55. 대구 시립병원과 희망원 운영 (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베네딕토수녀회 (라) Benedictina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 수녀회로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와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있는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830년 1월 9명의 동정녀들이 블룸(Joset Lenoz Blum)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자매들의 학원'이라는 공동체 생활이 효시가 된 후 1892년 9월 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타노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회의 수족에 연합됨으로써 발족된 수녀회로서 1931년 9월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904년 7월 27일 성 오틸리엔(St. Ottilien)의 모원으로부터 분할 독립된 투칭(Tutzing)의 모원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투쟁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수녀들이 1925년 11월 25일 한국에 진출하였다.

⸁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 1931년 9월 한국 진출. 1963년 10월 교황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설립목적은 지역사회의 여성교육과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할 봉사자를 양성하는데 있다. 1931년 당시 욘갈 교구장 브레허(T. Breher, 白)주교의 요청으로 6명의 수녀가 처음 내한하여 연길교구 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용정하시 본당에 첫 분원이 생긴 이후 1945년까지 7개의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원수에 있어서도 1939년까지 20명의 수녀가 스위스 모원으로부터 파견되었고, 1944년까지 21명의 한국인 수녀가 서원하였다. 그러나 1945년 8.15광복 이후 러시아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사상통일공작'에 의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월남하기 시작한 수녀들은 남한의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인 1951년 4월 유을준 의사와 람께 부산 초량동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2년 부터는 지원자들도 입회하기 시작하였고,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했던 수련장 베다(Konig Beda) 수녀도 1958년 3월 다시 내한하여 수련지도를 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 동래구 광안동에 대지를 마련하여 1965년 우선 수련원부터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후 본원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9년 경기도 부천·소사에 지원(支院)을 설립하고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의료봉사활동 이외에도 부산에서는 1949∼1980년에 걸쳐 10개의 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울산·대구·마산 그리고 미국의 뉴옥 등지에서도 전교활동을 하고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교구청 사목국, 해외교포 사목 등 특수 사목에서도 활동을 하고있다. 1972년 12월 대리구(代理區)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에 임남훈 수녀가 피임되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1년 6월 관구로부터 교황청 직속 수녀회로 승격되어 모원과 동등한 자립수녀회로 인가를 받고 초대 총원장에 김지상 수녀가 피임되었다.

⸂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원산교구의 활동 : 1920년 8월 25일 원산교구가 설정됨에 따라 성 베네딕토 남자 수도회는 그 사목을 위임맡아 덕원으로 수도원을 이전하고 함경남·북도의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수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당시 교구장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는 독일의 투찡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rers of Tutzing)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4명의 수녀가 1925년 11월 21일 내한하였다. 1926년 수녀원에서 방 한칸을 내어 전교를 시작하여 그 예비자반은 후에 '호수천사학교'로 발전하였고 1927년 6월 6일에는 새 수녀원의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며 아울러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분원장으로는 마틸데 히르시 수녀가 임명되었고 1927년 5월 3일 첫 지원자를 받았다. 1926년에 사목활동을 시작한 원산수녀원에서는 해성국민학교, 해성 유치원, 본당활동,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또한 1926년에 신설된 함흥 분원에서는 본당활동과 학교에서의 전교활동을, 1940년 신설된 청진 분원에서는 성심의원 운영과 본당활동을, 1948년 신설된 흥남 분원에서는 본당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서양수녀들의 일어 사용, 3개월 마다의 거주신청 경신, 신사참배, 국내여행 신고, 식량난 등은 물론 1944년에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모든 학교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광복 후에도 소련군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학교와 유치원이 소련군 장교숙소와 군인 교육기관으로 바뀌고 토지개혁으로 인한 농토도 몰수당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정치보위부 교화소로 옮겨졌다가 5월 16일 일부 수녀들은 수녀원으로 되돌아왔으나 곧 해산당하였고 서양수녀들은 서양신부, 수사들과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54년 1월 22일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대구에서의 활동 : 1950년부터 월남한 수녀들과 6.25동란으로 피난나온 수녀들이 부산에서 미군들의 삯빨래 등으로 생활하다가 1951년 10월 20일 당시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주선으로 대구 남산동 본당 내 사제관 일부에서 정착하였고 1955년 1월 현 대구 신암동에 건물을 신축하여 정착하였다. 1956년 대구 분원이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고 초대 원장에는 오테마라(M. Othemara Ammann) 수녀가 임명되었다. 대구에서의 활동으로는 1956년 현재 파티마의원을 개원하고 1958년에는 대구 신암동 본당에, 1960년에는 반야월 본당에, 1955년에는 대구 시립병원과 희망원에서, 1968년에는 국군간호학교에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대구시내 3개본당(신암동, 공평동, 동인동), 서울시내 3개본당(왕십리, 돈암동, 동선동), 경북 성주, 상주, 김천, 경산, 함창, 경남 마산에 각각 분원고 선교활동, 의료활동, 교육활동에 적어도 4명 이상의 수녀가 파견되어 있다.

1956. 3. 국제가톨릭형제회 한국진출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국제가톨릭형제회 (영)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76쪽)

불일치와 부정의가 있는 현실에 도전함으로써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복음을 기초로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주력한다. 全眞常 정신을 중요시하며 全은 온전한 자아의 봉헌을 뜻하며 眞은 참다운 사랑을 뜻하며 常은 끊임없는 기쁨 속에서의 생활을 뜻한다.

1956. 6. 6 후암동 병원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후암동 병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복지시설)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후암동에 복자의원을 개원하고 김순옥(아오스딩) 수녀와 손순분(요한) 수녀, 강신자(루시아) 수녀, 박순옥(뻬르뻬뚜아) 수녀를 파견하였다. 당시 복자수사원에 윤수사가 내과의사였으므로 윤수사가 진료를 담당하고 손순분 수녀와 강루시아 간호사일을 담당하였다. 병원수녀들은 청파동 본원으로 거의 미사를 다녔으며 때로는 후암동 성당에서 미사를 하기도 하였다. 어느 때는 창설신부가 병원에 와서 미사를 하였다. 당시 손순부 수녀와 박순옥 수녀는 아스피랑스였는데 겨울에 검정 무명두루마기를 입었다고 한다.

후암동은 부촌이기 때문에 적은 복자의원에 환자가 오지 않아 운영이 안되었다. 병원이 지대가 높아 물이 밤에만 약간나와 수녀들이 다라이와 동이를 이고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병원건물은 수도여고 방순경 교장의 집이었다. 방교장은 당시 전후가 되어 수녀원 경제가 어려운것을 알고 수도여고 응접실 커버와 커튼을 병원수녀들에게 주어 수녀들이 교장 사택에 가서 세탁하여 손질을 하여 수도여고에 갔다 주었다.

복자의원은 개원한지 약1년만에 문을 닫았다.

1956. 11. 19. 구산후생학교 개교 (성체회 자료)

구산후생학교 - 1959. 11. 22일 가톨릭 신문에서 발췌

사회사업을 통하여 전교활동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1956년 11월 19일에 설립되었다. 성경, 교회사, 교리, 윤리, 성사, 라틴어, 종교음악과 그외는 초급대학 일반과목에 준한다. 입회자격은 고등학교 졸업자로 또는 동등한 자격을 가진 만 17세이상 25세 미만의 여성으로 교구장이나 수도원장의 추천을 받은자이며 학제는 2년 으로 일단 입학하면 기숙사에서 합숙하며 준 수도생활을 하였다. 실습은 각 지역으로 파견되어 의료반과 동반한 무의촌 순방, 요구호자 가정조사 및 돌봄, 개간지, 개척지에서 조력, 섬지방 순방등을 하여 표양으로 전교한다. 1956년 8월 서독 ꋅ헨에서 사회사업가 대회에 참석한 윤을수 신부가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서구에 사회사업 사조는 과거 소규모적인 시설 사회사업 (양로원, 고아원)에서 벗어나 광범위한 사회사업 즉 지역사회 개발에 대하여 착안하여 그 방면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음을 보고 그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바 있었으며 특히 로마에 본부를 둔 "국제 천주교 사회사업연맹" (까리따스)으로 부터 공산주의와 대항하는 대는 일반사회사업 보다는 지역사회를 위한 사회사업가를 양성할 목적으로 이곳에 소재하는 보육원(골롬바 어린이집)에 개교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전의 사회사업과는 달리 각 지역에서 걸쳐 그 지역에 순응하여 지도자로서가 아닌 협조자로서 일하며 그지역 복구 향상을 위하여 헌신하므로 보다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1956. 구산후생학교가 설립되어 성체회 회원의 양성 (167쪽 구산후생학교)

구산후생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7쪽)

성체회(聖體會)창설자인 윤을수 신부가 설립한 특수목적기관. 윤신부는 6.25 사변 중 군종신부로 복무하면서 전쟁고아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전쟁 후에도 계속 고아 육영사업을 전개, 이들에게 봉사할 여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여성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56. 12. 4 하양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파견되어 성가진료소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18쪽)

하양본당 河陽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18쪽)

하양본당은 1915년에 용평본당 소속 하양공소로 시작되었다가 1931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무학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하양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처음으로 파견된 것은 1956년 12월 4일이었다. 본당 주임 이임춘(펠릭스) 신부의 초청으로 서울에서 공순옥 마리 헬렌수녀와 강봉순 로렌죠 수녀가 전교와 유치원을 담당하기 위하여 부임하였다. 수녀들은 신부의 뜻을 따라 마을 중앙에 성가진료소를 조그맣게 개원하게 되어 간호수녀 1명이 추가파견되었으며 1961년 본당 증축에 잇따라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1963년에는 강당과 유치원이 신축되어 소화유치원 설립인가를 받았다.

하양은 농민이 많은 소규모의 읍이라 운영상의 애로점이 많아서 1968년 성가진료소는 문을 닫아 의료사도직을 그만 두게 되었고, 1969년에는 유치원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1975년 신학기에 유치원을 다시 개원하여 평신도가 운영했는데 1977년 2월에 본당신부의 요청으로 유치원수녀가 다시 부임하게 되었다. 1977년 3월 부터는 무학중고등학교 종교과목을 담당하면서 본당 일도 도울 수 있는 수녀가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1984년 2월 15일을 마지막으로 무학중고등학교 종교교사 파견도 그만두고 본당 전임수녀 2명과 유치원수녀를 합하여 3명의 공동체가 되었다. 그 후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운영상의 애로점이 거듭되어 수녀 사도직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음을 식별하여 1987년 2월 23일부로 유치원에서 손을 떼고 현재는 전교수녀 2명만이 본당 신자들의 전례생활과 신앙생활을 도와주고있다.

1956. 파티마 의원 개원 (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베네딕토수녀회 (라) Benedictina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 수녀회로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와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있는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830년 1월 9명의 동정녀들이 블룸(Joset Lenoz Blum)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자매들의 학원'이라는 공동체 생활이 효시가 된 후 1892년 9월 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타노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회의 수족에 연합됨으로써 발족된 수녀회로서 1931년 9월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904년 7월 27일 성 오틸리엔(St. Ottilien)의 모원으로부터 분할 독립된 투칭(Tutzing)의 모원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투쟁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수녀들이 1925년 11월 25일 한국에 진출하였다.

⸁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 1931년 9월 한국 진출. 1963년 10월 교황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설립목적은 지역사회의 여성교육과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할 봉사자를 양성하는데 있다. 1931년 당시 욘갈 교구장 브레허(T. Breher, 白)주교의 요청으로 6명의 수녀가 처음 내한하여 연길교구 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용정하시 본당에 첫 분원이 생긴 이후 1945년까지 7개의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원수에 있어서도 1939년까지 20명의 수녀가 스위스 모원으로부터 파견되었고, 1944년까지 21명의 한국인 수녀가 서원하였다. 그러나 1945년 8.15광복 이후 러시아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사상통일공작'에 의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월남하기 시작한 수녀들은 남한의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인 1951년 4월 유을준 의사와 람께 부산 초량동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2년 부터는 지원자들도 입회하기 시작하였고,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했던 수련장 베다(Konig Beda) 수녀도 1958년 3월 다시 내한하여 수련지도를 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 동래구 광안동에 대지를 마련하여 1965년 우선 수련원부터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후 본원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9년 경기도 부천·소사에 지원(支院)을 설립하고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의료봉사활동 이외에도 부산에서는 1949∼1980년에 걸쳐 10개의 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울산·대구·마산 그리고 미국의 뉴옥 등지에서도 전교활동을 하고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교구청 사목국, 해외교포 사목 등 특수 사목에서도 활동을 하고있다. 1972년 12월 대리구(代理區)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에 임남훈 수녀가 피임되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1년 6월 관구로부터 교황청 직속 수녀회로 승격되어 모원과 동등한 자립수녀회로 인가를 받고 초대 총원장에 김지상 수녀가 피임되었다.

⸂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원산교구의 활동 : 1920년 8월 25일 원산교구가 설정됨에 따라 성 베네딕토 남자 수도회는 그 사목을 위임맡아 덕원으로 수도원을 이전하고 함경남·북도의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수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당시 교구장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는 독일의 투찡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rers of Tutzing)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4명의 수녀가 1925년 11월 21일 내한하였다. 1926년 수녀원에서 방 한칸을 내어 전교를 시작하여 그 예비자반은 후에 '호수천사학교'로 발전하였고 1927년 6월 6일에는 새 수녀원의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며 아울러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분원장으로는 마틸데 히르시 수녀가 임명되었고 1927년 5월 3일 첫 지원자를 받았다. 1926년에 사목활동을 시작한 원산수녀원에서는 해성국민학교, 해성 유치원, 본당활동,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또한 1926년에 신설된 함흥 분원에서는 본당활동과 학교에서의 전교활동을, 1940년 신설된 청진 분원에서는 성심의원 운영과 본당활동을, 1948년 신설된 흥남 분원에서는 본당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서양수녀들의 일어 사용, 3개월 마다의 거주신청 경신, 신사참배, 국내여행 신고, 식량난 등은 물론 1944년에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모든 학교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광복 후에도 소련군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학교와 유치원이 소련군 장교숙소와 군인 교육기관으로 바뀌고 토지개혁으로 인한 농토도 몰수당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정치보위부 교화소로 옮겨졌다가 5월 16일 일부 수녀들은 수녀원으로 되돌아왔으나 곧 해산당하였고 서양수녀들은 서양신부, 수사들과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54년 1월 22일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대구에서의 활동 : 1950년부터 월남한 수녀들과 6.25동란으로 피난나온 수녀들이 부산에서 미군들의 삯빨래 등으로 생활하다가 1951년 10월 20일 당시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주선으로 대구 남산동 본당 내 사제관 일부에서 정착하였고 1955년 1월 현 대구 신암동에 건물을 신축하여 정착하였다. 1956년 대구 분원이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고 초대 원장에는 오테마라(M. Othemara Ammann) 수녀가 임명되었다. 대구에서의 활동으로는 1956년 현재 파티마의원을 개원하고 1958년에는 대구 신암동 본당에, 1960년에는 반야월 본당에, 1955년에는 대구 시립병원과 희망원에서, 1968년에는 국군간호학교에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대구시내 3개본당(신암동, 공평동, 동인동), 서울시내 3개본당(왕십리, 돈암동, 동선동), 경북 성주, 상주, 김천, 경산, 함창, 경남 마산에 각각 분원고 선교활동, 의료활동, 교육활동에 적어도 4명 이상의 수녀가 파견되어 있다.

1956. 나환자 이동 병원 진료소인 성광원이 양생원이라는 이름으로 발족 (교회와 역사 207호 4쪽)- 1992. 8. 25발행

성광원 (교회와 역사 207호 4쪽) - 1992. 8. 25발행

성광원의 처음 이름은 양생원이라 했다. 양생원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라 다두라는 나환자의 어머니가 논산 성당의 신자였다. 1956년 3, 4월경 그녀는 성재덕 신부를 찾아와 자기 아들이 마을에서 못살고 외진곳에서 사는데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 당시 10세대 정도의 나환자들이 외진 곳에서 정부의 대책도 없이 소외된 채로 있었다. 그들은 걸식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성 신부가 그녀의 청을 듣고 진료반을 보내줌으로써 나환자 이동 병원 진료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정석주, 박병태, 김재영 외 17명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서로 돕고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 명칭을 양생원(養生圓)으로 발족하고 가톨릭 구제회에서 구호를 받게 되었다. 진료반이 이곳에 올 때 N.C.W.C(미국 천주교 전재부흥위원회)의 보조로 밀가루, 옥수수 등과 구호품이 전달되었다. 이후 나환자 집단이 점점 불어났고 성 신부의 도움으로 논산 본당을 통해 정식으로 밀가루, 옥수수 가루를 배급받게 되었다.

1960년 5월에 양생원을 성광원으로 개칭하고 논산군 광석면 율리 산 49의 2번지 부지 22,440평을 매입 계약했다. 이는 충남 나협회의 주선으로 정부에서 매입 기증한 땅이다. 당시 나환자들은 59명이었고 이때 비로소 나환자 정착지로 책정되어 현재에 이른다.

1956. 충북 괴산군 증평읍에 메리놀의원을 개원 (383쪽 메리놀 수녀회)

메리놀 수녀회 (영) Maryknoll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83쪽)

1912년 미국 가톨릭 외국선교단체 메리놀 수도회 내에서 메리로저스(Mary Rogers) 수녀에 의해서 창설된 수녀회. 1924년 10월 한국진출. 메리놀 수도회의 수녀들은 본당활동과 의료사업, 교육사업등에 종사하였고 여자기예학원과 시약소및 고아원을 설립하여 기술교육 및 봉사활동을 하였다. 1932년에는 평양으로 진출하여 한국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후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라는 수도회가 되었다.

진남포에서는 1934년부터 부녀자와 소녀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3년 부터는 서울 영등포 공업단지에서 단체활동을 실시하였다. 1974년에는 전남 소록도 국립병원에서, 1976년 부터는 경북 울진군에서, 1977년 부터는 경기도 부평에서, 1979년 부터는 전남 광주의 천주의 성 요한 병원에서 각각 의료활동을 돕고있다.

1956. 충북 괴산군 증평읍에 메리놀의원 개원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 (영) Maryknoll Sisters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는 1912년 메리 로저스수녀에 의해 창립되었다. 창립정신은 인류에게 책임을 다하고 도움을 주고 문화적 배경과 지역적 제한 경제, 사회, 종교적인 범주를 벗어나 모든 국가간의 평화와 정의와 우정을 도모하고 나누는데 있다. 1924년 10월 메리놀회 신부들의 초청으로 평북 의주에 처음 진출하였다.

북한에서의 활동 (1926∼1942) :

1924년 부터 시작된 의주에서의 활동은 처음에는 본당 사목과 가정방문이었으나, 얼마 후 소규모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3명의 수녀를 의주에 남겨두고 1926년 수녀회 한국지부를 영유(永柔)로 옮기고 그곳에 여자기예학원을 세워 15세 전후의 소녀들에게 기술습득의 길을 열어주는 사업을 하였다. 또한 시약소와 고아원을 설치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1933년 멜시 수녀 등 3명은 신의주로 파견되어 성모회를 창설하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가정방문과 외래환자 진료소와 이동진료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1932년 메리놀회 신부의 요청으로 평양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한국여성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이 모임은 후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라는 수녀원의 창설동기가 되었다. 1935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입원실과 무료진료소를 설립하였으며 1936년 본당 사업과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또한 진남포에서는 1934년 부터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활동을 중지하고 메리놀회 수녀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해방후의 활동 (1950∼현재) :

본국에 철수했던 메리놀회 수녀들은 전쟁이 끝나자 1950년 제1진이 다시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의료사업과 전교사업을 통하여 주민들에게 봉사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1952년 제2진의 수녀들은 제차 부산에 진출하여 전쟁중인 비상시를 위하여 장기간의 의술봉사를 하여 왔으며 음식과 옷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결핵요양소와 교리학습을 위한 장기 계획도 수립하게 되었다. 휴전 후 메리놀 수녀들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956년 충북 괴산군 중평읍에 메리놀의원을 개원하여 의술치료와 보건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1960년 부산에서 가별(Gabrialla) 수녀가 신용협동조합을 처음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지금은 협동교육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1962년 부산 메리놀병원이 주한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대식 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1963년 메리놀 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은 콘로이(Conroy)수녀가 맡았으며 1967년 메리놀 병원의 관리가 부산교구로 이관되었다. 1962년 2월 인천교구 답동 본당에서의 종교활동을 돕고 학생지도 및 영어지도를 실시하여 왔으며 1967년 3월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회관에서 청소년 지도자 강습과 여성들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1963년 경기도 강화읍에 그리스도왕 의원이 설립되어 메리놀회 수녀들은 의사와 간호원으로 일하였으며 전교사업도 함께도왔다. 1969년 초 요안 서빈 수녀는 백령도에 소재한 김안드레아병원에서 간호과 책임자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74년 대한 적십자가 인수할 때까지 섬 사람의 건강과 아울러 간호보조원 교육과 훈련을 부지런히 해왔었다. 백령도에서 철수하여 본원에서 일하던 3명의 수녀들은 전남 소록도에 있는 국립병원에 자원봉사 간호원으로 활동하고 1973년 성신강림 대축일 김수환 추기경의 허락을 얻어 2명의 수녀가 그리스도께 헌신할 조그마한 단체의 조직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공업단지 근처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진료소의 간호원으로 상담자로서, 노조에서 간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 등을 맡아보게 되었다. 1976년 9월 가이에르 수녀가 서강대에서 영어를 담당하는 외에 경북 울진 진료소 활동, 부평 본당에서 종교사업과 노동자를 위한 사업활동 1979년 10월 광주의 천주의 성요한병원에서 환자가족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1980년 거창 나환자 마을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1981년 11월 부터 성남시에서 2명의 수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과 전교활동에 힘쓰고 있다.

1956. '편선자선교회'에서 명명을 개칭, 같은해 교황청으로부터 인준을 받음 (176쪽 국제가톨릭 형제회)

국제가톨릭형제회 (영)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76쪽)

불일치와 부정의가 있는 현실에 도전함으로써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복음을 기초로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주력한다. 全眞常 정신을 중요시하며 全은 온전한 자아의 봉헌을 뜻하며 眞은 참다운 사랑을 뜻하며 常은 끊임없는 기쁨 속에서의 생활을 뜻한다.

1956. 대구 파티마 병원이 설립되어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 파견

파티마병원 - 1998년 8월 28일 대구 파티마병원의 이 헬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파견되어 있는 대구 파티마병원은 1956년 대구 동구 신암동에 설립되었다. 1971년 원목실에 수녀들이 외래입원환자와 직원들의 신앙, 상담을 위하여 파견되어 병원장에 메리 엑네스 수녀가, 원목실장에 김원집 수녀가 맡게 되었다. 설립당시 입원환자 침상은 300개 정도가 있었지만 현재는 500여개의 침상과 평신도 2명, 신부 1명, 그리고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 7명이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직원수도 800명으로 증가하였고 자원봉사자수도 200명으로 증가하였다. 파티마병원은 "들어라, 너는 병중에서 주님을 떠나지 말아라. 항상 기도하면 주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다." (집회 38,9)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 병원의 이념은 다음과 같다.

1. 파티마병원은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가톨릭 교회 전통인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2. 파티마병원을 찾는 모든 이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양질의 진료로서 고통받는 이들을 낫게하고 심리적, 정신적 및 영적인 안정과 평화를 찾도록 도와주며 최선의 예방및 재활에 힘써 건강한 생활을 하도록 돕는다.

3. 질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인간삶의 한 부분이며 오히려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환자와 그의 가족들에게도 병을 치유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인간다운 품위를 지니도록 그들을 돕는다.

4. 각 개인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진료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며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돌본다.

5. 모든 인간생명의 신비와 존엄성이 진료활동 전반에 걸쳐 존중되도록 교회의 가르침을 준수한다.

6. 성 베네딕도가 가르친 대로 "병든 형제를 그리스도처럼 섬기고 돌볼" 뿐 아니라 치유사도가 동참하는 동료들과 형제적 연대성을 증진시켜 그리스도적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힘쓴다.

7. 양질의 진료와 서어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갖추고 책임있는 관리로 이들 목적을 달성하도록 노력한다.

1957. 2 성심여자중학교 개교 (교회와 역사 86호 7쪽) - 1982. 9. 25발행

성심수녀회 (교회와 역사 86호 7쪽) - 1982. 9. 25발행

성심수녀회는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1800년 11월 21일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 (Madeleine Sophie Barat)가 동료수녀들과 함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서원을 함으로써 창립되었다. 바라 성녀는 "이 회의 유일한 창립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이다."라고 말하면서 젊은이의 교육을 통해 예수성심께 영광을 드릴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성심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것은 1956년 10월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가톨릭 교육을 통한 것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서울 교구장 노기남(바오로) 주교는 이 수녀회에 한국 진출을 요청하였다. 1956년 10월 한국에 처음 진출한 창설수녀들은 서울 분원장인 맥하디 홀린트(Mchardy Flint) 수녀 등 모두가 7명이었으며 그들의 국적은 각기 달라 호주, 애란, 중국, 일본, 몰타, 폴란드, 벨기에 등이었다. 7명의 창설자들은 잠시도 그들의 사명의 가톨릭 교육을 잊지 않았고 진출 후 곧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들 가운데 주 매분 수녀는 곧 모든 사람에게 한국인으로서 받아들여질 만큼 한국어에 능통하여 졌다.

1956년 11월 한국에서의 첫 교육사업인 성심여자 중학교는 소정의 시험을 치러 18명의 신입생으로 역사적인 입학식을 가졌는데 (모집인원 30명에 49명이 응시했으나 전형 결과 18명만 합격시켰다.) 이처럼 적은 숫자로 학교를 경영한다는 사실에 한국교육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모든 면에서 전통적인 성심학교 교육은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1961년 총원장 수녀가 극동지구와 북미지역 대원장 수녀를 동반하고 한국에 온 것을 계기로 하여 한국에서의 성심교육은 큰 계기를 맞이하였다. 총원장 수녀는 성심 여자 중·고등학교와 성심 여자대학의 신설을 허락한 것이다.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물론 '성심'에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성심'에서 대학까지 마칠 수 있게 해 줄것과 이 좋은 교육이 국민학교부터 일관성있게 이루어지길 총원장에게 간청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그리하여 성심 국민학교는 1963년에, 성심여자대학은 1964년에 각각 신설되었으나 '성심'이 꿈꾸는 일관교육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것은 성심 국민학교의 졸업생이 나온 다음 중학교가 평준화됨으로써 졸업생 중 성심여중에 추첨으로 입학한 학생이 단 한명이라도 결과를 빚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성심 수녀회는 인력과 재정 등 여러사정도 고려하여 고등학교와 대학교육에 전념키로 하고 중학교와 국민학교는 폐지시키기로 하였다.

1978년 3월에는 강원도 사북읍 고한리 광산촌에 분원을 설치하여 본당사목과 산재병원에서의 간호활동, 유아교실을 통한 가족상담 및 피정지도, 광부환자 및 가족방문 등의 사도직에도 봉사하고 있다.

1957. 4 성심여자중학교 개교 (649쪽 성심수녀회)

성심수녀회 (영) Society of the Sacred Hear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49쪽)

1800년 11월 21일 성녀 마를렌 소피바라(Madeleine Sophie Barat) 수녀가 프랑스에서 창립한 수녀회.

1956년 10월 10일 한국 진출. 젊은 이들의 교육으로써 예수 성심에게 영광을 주는 것을 창립 목적으로 하여 1956년 한국에 진출하자 곧 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미 1908년 일본에 진출한 수녀회의 극동관구장 브리짓 키오(Brigid Keogh) 수녀에게 한국 진출을 요청하자 관구장이 직접 내한하여 현 수녀원과 성심여자고등학교가 있는 서울 원효로의 옛 예수성심신학교 및 성당 건물을 이수하고 1956년 10월 서울 분원장 맥하디 플린트(McHardy Flint) 수녀 외 7명이 내한하였다. 수녀회 본부에서의 10만달러 예치로 법인설립을 하고, 많은 어려움 끝에 1957년 2월 12일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57년 4월 18일 성심여자중학교의 첫 입학식을 가졌다.

1960년 3월에는 성심여자고등학교가 개교하는 한편, 같은 해 9월 미국 수련원으로부터 한국인 수녀 2명이 내한하여 더욱 활동하기에 좋아졌다. 교육의 일괄성을 위하여 1963년 성심국민학교, 1964년 성심여자대학이 각각 서울과 춘천에서 개교하였다. 아울러 가난한 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서울 봉천동에서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천막학교를 개설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하였다. 1975년과 1982년에 교육의 효율화를 위하여 중학교와 국민학교를 각각 폐교하였고 1975년 3월 한국지구로 독립하여 승격됨과 동시에 같은해 9월에는 부천(富川)에 성심여자대학의 분교를 신설하였다. 1978년에는 강원도 사북읍 고한리 광산촌에서 활동을 실시하였다. 현재 서울 원효로의 본원을 비롯하여 춘천, 원주, 인천의 분원과 함께 서울 원효로에 수련원공동체가 있고, 한국지구장 한순희 수녀를 중심으로 43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1957. 5 계성여자중고등학교의 운영권이 서울교구로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로 이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799쪽)

계성여자고등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797쪽)

계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가 설립된 것은 1944년 8월 10일의 일이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고성순 양셀모 수녀와 고두희 레몬다 수녀가 학교교사로 파견되어 출퇴근 하였고 1945년 고성순 수녀가 장질부사로 사망하자 대신 강봉련 제노베파 수녀가 부임하였다. 당시에는 이미 성당 구내에 계성유치원, 계성국민학교, 계성여학원 등 세 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여기에 학교를 세울 뜻을 굳힌 것은 식민지 지배 말기에 이르러 일제가 의무교육을 방지하여 사립국민학교를 공립으로 흡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학교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성당 구내에까지 일본인들의 간섭이 뻗치게 되어 자주적인 교육이 불가능해 질 것임으로 차제에 국민학교 남자부는 폐지하고 여자부만을 살려서 동성상업고등학교(현 동성중고등학교)와 맞먹는 여학교를 세워 교육구국과 가톨릭적 여성의 양성이라는 뜻을 펼치기 위해 학교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1957년 5월에 계성여학교의 운영권이 서울교구로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로 이관되자 수녀원에서는 학교발전을 위해 한층 더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1958년 10월 11일에 성지관의 낙성을 보았다. 성지관이 낙성될 무렵의 학생수는 중학교 15학급에 930명, 고등학교 10학급 583명으로 모두 1,513명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도 계속적인 학급증설에 불가피하게 되어 1961년에는 본관 3층이, 1963년에는 성지관 4층이 증축되었고 1973년에는 성미관이 완공되었다. 한편 내실에도 힘을 기울여 훌륭한 교사진의 확보를 중요하게 여겨서 제9대 조규옥 마리 안젤리카 교장은 교사들의 처우를 점차적으로 개선하여 타학교에 비해 파격적인 대우를 해 줌으로써 훌륭한 교사들을 많이 영입할 수 있었다. 1969년 3월에 중·고교가 행정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중학교 초대 원장으로 고영희 뻬르뻬뚜아 수녀가 취임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각종 교육제도의 개혁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고 이 영향으로 학교도 여러면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고등학교 평준화로 학력면에서뿐만 아니라 종교교육면에서도 이질화가 나타났으나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종교교육의 활성화에 꾸준히 힘써 교직원의 대부분이 입교하였고 매년 세례를 받는 학생도 증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을 건학이념으로 삼아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성장해 오던 계성여자중학교는 좁은 구내에서 중고등학교가 함께 생활하게 됨에 따라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과 과다학급 운영의 어려움을 덜고 고등학교만이라도 건실하게 키워가야 하겠다는 결단아래 개교한지 43년만인 1987년 2월 28일 제38회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이와같이 학교발전 계획에 따른 중학교의 폐교와 교사정비 작업이 1987년 초에 이르러 마무리되자 교육의 내적충실을 위하여 교직원과 학생 모두가 한마음으로 서로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학교장은 모두 수녀가 맡게 되었으므로 교장의 교체가 일반 사학에 비해 잦은 편이었다. 그러므로 교장의 장기근속에서 오는 어떤 압력이나 파벌조성 등 흔히 있을 수 있는 사학의 질병이 없는 장점도 있었지만 반면에 교육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되기 쉬운 결함도 없지 않았다. 교사 수녀들로는 학교 초창기부터 소수의 대학 출신 수녀들이 파견되었으며 종교교과와 수녀들이 전공한 일반 학과의 과목을 가르쳤다. 이밖에 학교의 도서실과 서무·경리직도 수녀들이 맡아 알뜰한 운영으로 학교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수녀들은 계성 초창기부터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거쳐 학교를 재건하고 학교의 내외적 성장과 발전을 이루기까지 교사들과 함께 열심히 일했으며 특히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직영의 교육기관이므로 교회의 교육목적을 소홀히 함이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품성교육과 종교교육에 충실을 다하였다. 현재 교장수녀를 비롯하여 13명의 수녀들이 교사로서, 혹은 서무나 도서실 등 각 부서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

1957. 8. 26 김기봉 신부는 대양 중공업고등학교의 4대 교장으로 취임 (교회와 역사 208호 11쪽) - 1992. 9. 25발행

김기봉 金基奉, 필립보, 1914∼1967 (교회와 역사 208호 11쪽) - 1992. 9. 25발행

舊敎友 집안인 깁기봉 신부의 가계는 연안 김씨인 것만 확인된다. 1938년 6월 11일 사제로 서품된 김 신부의 첫 부임지는 구태인읍본당에 부임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말기에 접어 들자 일제의 압박은 더욱 극심해졌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이거하였다. 당시 만주 지역은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일제가 메리놀회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기에 만주 지역의 사목은 평양교구에서 도와주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평양교구 자체도 원래 메리놀회의 선교 지역이었고, 선교사들이 추방되었기에 1943년 6월 29일 洪龍浩(프란치스코) 주교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신부 수가 많지 않았고, 1942년 2월 부터 평양교구에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하던 서울교구 소속 신부들이 교구 귀속문제로 인하여 1944년 12월경 서울교구로 돌아 갔기에 평양교구 자체도 형편이 대단히 어려웠다. 만주에 이어 북경의 北堂성당에서 사목하던 김기봉 신부는 중국이 공산화되고 북한에서의 여러 상황이 심상치 않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부산교구로 돌아왔다.

부산으로 돌아온 김기봉 신부는 청학동 본당의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강당을 신축하여 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수녀원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어 영도 신성동 3가에 聖母建設園이란 고아원을 설립하여 사회 사업을 시작하였다. 6·25 한국전쟁 중 최후의 거점이었던 부산에서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들었고, 그런 중에 버려지거나 방황하는 아이들이 많이 생겨났다. 김기봉 신부는 그러한 아이들을 돌보아야 겠다고 생각하여 영도 청학동 본당에서 신선동본당을 독립시키는 한편 그 안에 고아원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먼저 신선동 3가 84번지에 있는 목조 건물을 매입하여 본당 신설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당시 신선동 3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 페트릭 데니어 특무상사의 협조를 얻어 황무지 930평을 정리하는 한편 1954년 8월 11일에는 사회부장관으로부터 재단법인 성모건설원을 인가받았다.

1955년 1월 1일자로 본당 승격된 신선동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김기봉 신부는 미군들의 협조를 얻어 1956년 11월에 건평 60평의 성당과 사제관을 낙성하였다. 이어 8월까지 고아원 원사 2동과 부속건물 2동을 완공하여40명의 원아들을 수용하였다. 원아들은 점점 증가되어 1956년 10월에는 70여명을 수용하였다. 그 후 성모건설원은 1957년 5월에 정부로부터 시설 기구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1959년 이후에는 정부 보조 및 의원 단체의 보조가 끊어질 우려가 보이므로 가톨릭 부인회에 호소하여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로부터도 많은 원조를 받았다. 그 결과 새 원사를 광안동의 대지에 신축하고 이듬해 10월에는 성모건설원을 신선동으로부터 이전하였으며 이때 부터는 본당 사목생활을 마감하고 성모건설원에만 주력하였다.

1957년 8월 26일 운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대양중공업고등학교를 천주교 부산교구 재단에서 인수하자 대양 중고교(지금은 중학교만 남아 있음)의 4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1960년 5월 13일까지 교육사업에도 헌신하였다. 교훈은 충직, 진실, 덕망이었다. 특히 학교 내에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여 전교에 주력함으로써 수많은 학생들을 영세시켰다. 이어 1963년 1월에는 광안동 성모건설원 2층에 신경전문치료병원인 '성 필립 신경정신과'를 개설하였다. 정신신경 계통의 환자 치료를 목적으로 하였고, 나아가 거기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성모건설원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대지 165평, 건평 65평, 병실 10개, 침대 20개, 의사 1명, 조수 2명, 간호사 1명의 규모로 연간 9,89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당시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주임이던 오석환 교수가 담당의사로 초빙되었고 오석환 교수에 이어 팽갑주씨가 담당 의사로 근무하였는데 운영난으로 3년만에 폐원하였다. 병원의 일반 진료소는 병원 주위의 난민들의 구제치료 및 성모건설원 아이들의 치료를 하였다.

1967년 4월 6일 김기봉 신부는 숙환으로 휴양 중이던 부산 광안동 성모건설원에서 선종하였다. 4월 7일 서품 동기인 최재선 주교의 집전으로 영결미사가 봉헌되었고, 부산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57. 8. 31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34쪽)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34쪽)

해방 직후 1945년 12월 29일 범일동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정재석(鄭在石 요셉) 신부는 학교 설립의 뜻을 가지고 후원자들을 모으고 기성회를 조직하여 팔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어려운 상황으로 학교설립을 위한 기도는 무산되고 이듬해인 1946년 3월 성당 구내에 소화보육원을 설립했다. 한편 당시 항구도시 부산은 귀환동포 속에 섞인 고아들이 많았으므로 해가 거듭됨에 따라 원아들의 수가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피난민으로 초만원을 이루자 보육원의 수용능력은 한계에 다달았고 환자 치료문제가 대두되었다. 정 신부는 1951년 10월 관계 당국의 협조를 얻어 데레사진료소를 설립하여 원아들의 건강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특히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도 치료, 투약 함으로써 봉사하였다. 1951년 1·4 후퇴 후 부산은 다시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공지는 도로변 산중턱까지 판자집으로 뒤덮였다.

당시 서울에서 온 중학 이상의 각종 학교는 학생들의 임시 수용을 위해 각양각색의 가교사를 세웠는데 이때 범일동성당 구내에는 교장 박순경 루시아씨에 의해 서울 수도여자중고등학교의 가교사가 서게 되었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고 정부가 환도하자 피난학교들도 환교하게 되었다. 이때 정신부는 수도여고 가교사를 인수하고 교직원을 확보하여 1954년 4월 20일 학생을 모집했고 교명을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라 하였다. 이 학교는 같은 해 5월 10일에 중학교 3학급 고등학교 2학급인 160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그 해 9월 1일 정 신부는 노력끝에 문교부로부터 중학교 9학급 고등학교 6학급의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정 신부는 시내 대학교수 여러 명을 강사로 초빙하는 등 데레사여고를 명문으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교사들도 사명감을 가지고 학교교육을 위해 심혈을 바쳤다. 당시 학생들에게는 점심시간에 우유를 끓여 공급하였는데, 소화보육원 수녀들이 협력해 주었다.

1955년 8월 1일 정 신부와 교직원들은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 교실 14개를 신축했고, 1956년 3월 1일에는 범일동 가교사를 떠나 수정동 신축교사로 이사했다. 1957년 5월 30일 부산교구가 대구교구에서 분리됨으로써 부산교구유지재단이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인 최재선 주교가 취임하였다.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는 부산교구 유지재단에서 운영 관리하였고 정 신부가 7월 10일 다시 제 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정 신부는 당시 신설된 부산교구를 위해 할 일이 많았으므로 학교 실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를 초청하여 전담시키기로 내정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최재선 주교의 초청으로 서울 계성여자중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던 박정희 엘리사벳 수녀가 교감으로, 왜관 순심중학교의 서상분 말다 수녀가 교사로 취임함으로 데레사학교 분원은 1957년 8월 31일에 창설되었다. 부임 초기 수녀들은 범일동 소화보육원 분원에서 기거하며 통근하다가 10월경 가교사 옆에 있는 대지 300평 5칸 목조건물을 구입하여 두 수녀가 입주하게 되었다. 한편 이해 11월 21일에는 [레지오 마리애]교내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여 최재선 주교 임석하에 첫 회합을 개최하는 등 교내 종교활동 활성화에도 노력하였다. 12월 김숙경 마리 루이 수녀가 서무과장직을 맡아 긴급한 본교사 건축에 뜻을 두고 제반 경비절약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듬해 1월경 김필양 에프렘 수녀가 부임하여 집안 살림을 맡게 되어 교사수녀들은 학교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학교는 교사수녀의 부족을 메우기 위한 최재선 주교의 착상으로 여러 회의 수녀들을 강사로 채용하게 되었는데 복자회에서 가정과, 분도회에서 음악과, 프란치스코회에서는 영어과를 담당하는 국제 수녀학교를 방불케 하였으나 박정희 교감수녀의 지도 하에 서로 협조함으로써 활기 넘치는 학교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59년 9월 범일동구역에 본관 5층 22개 교실이 완공되어 이전함으로써 산위 가교사 신세를 면했다. 학교분원은 보육원분원의 큰 마루방 하나를 얻어 침실과 공동실로 사용하였고 공지에 온돌 하나와 부엌을 만들어 침실 겸 식당으로 사용하는 등 옹색한 살림살이였으나 성당과 시장이 가까워 편리한 점도 있었다.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는 교통이 편리하고 학교시설 등 교육환경이 갖추어진 범일동 본교사로 이전한 후부터 우수한 학생모집, 교원책용, 가톨릭 이념에 충실한 인문계 여자고등학교로서의 면모를 점차적으로 갖추게 되었다.

1972년 3월에는 문교부 시책에 따라 중·고교가 분리되므로 정의순 베드로 수녀가 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윤필술 쟌 마리 수녀가 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중고교 교장 겸임시대의 막을 내렸다. 1981년 4월 30일 문현자 호스띠아 수녀가 제6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수녀원 분원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3층으로 된 학교건물을 증축하게 되었다. 이에 수녀들은 남천동 생활관에서 기거하며 통근을 하다가 건물이 완공된 6월에 학교 건물 1층에 부설된 현 수녀원 분원건물로 입주하였다. 문현자 교장수녀가 취임했던 당시는 1980년 7·30조치로 과열과외가 사라지고 학원 정상화 작업이 정착되어 가면서 동시에 교복 자율화로 자칫 방종과 이탈현상이 예상되는 때였으므로 취임 후 전인교육의 구체화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정신에 바탕을 둔 믿음과 사랑으로써 성실하고 슬기로우며 아름다움을 지닌 한국 여성을 키운다"는 학교교육 목표의 근본 정신을 구현할 방안으로 학생들의 정신적 방향을 이끌어 갈 표상으로서 모녀상(母女像)을 세웠다. 또한 교회학교의 특색을 살려 "종교교육을 통한 품성 도야"를 교육방침으로 설정하고 그 구체적 실천 방안을 사랑의 실천, 정직한 마음, 감사하는 생활 등으로 구분하여 전인교육의 기본 덕목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위한 행사로 '성모의 밤'과 '소화에서 만납시다'를 연말에 종교반 중심으로 개최하여 헌금과 행사 이익금을 고아원과 소록도 나환자 수용소에 보내고 있다. 또한 정직한 마음의 실천을 위해 교내에서의 습득물 신고제를 두고 적극권장, 지도하고 있다.

1957. 10. 10 돈암동 천주교회에 농아부 창립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 1998. 7. 14일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김기영 루도비꼬님의 답신에 의거

그리스도의 정신에 기초하여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교회와 사회에 농아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고취하며 농아인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 활동과 회원들의 복지 증진에 주력하는데에 그 설립목적이 있다.

1957년 10월 10일에 서울시 돈암동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농아인 교리반을 만드셨다. 1959년 농아 중학생 6명과 중림동의 약현성당에 찾아가 이 시몬스덕 수녀님과 상의하여 농아부가 설립되고 그 후 농아부는 여러차례 수녀님이 교체되었다. 1965년 학생회가 발족되어 활동하다가 1969년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명동성당의 주교관 뒤 여성회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가 1980년 명동성당의 협조로 교육관에서 사무실을 갖추는 등 숱한 이동과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정착이 가능하게 되었다.

1981년 1월 25일 안경렬 사회복지부 신부님과 함께 복지회관에서 가톨릭 농아복지회 발족 준비회의를 가졌다. 1986년 3월 2일 명동에서 창립기념미사를 올림으로써 농아선교회가 창립되었다. 초대회장에 나수웅씨, 부회장은 곽태일씨가 선출되어 농아선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설립 취지는 다음과 같다. 극소수를 제외한 이 나라 대다수의 농아인은 온갖 역경과 고통에 좌절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삶을 포기하다시피 살아가고 있다. 농아인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써 복음대상에서 제외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여 교회와 사회에 농아인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고취하여 전국 교회내의 농아인의 복음화 및 복지증진에 주력함을 그 목적으로 하며 또한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 내용으로는 선교사업과 각종 보도매체를 통하여 농아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계몽과 사회적인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홍보사업으로는 매주일 발행되는 주간소식지와 두달에 한번 후원회의 소식과 기타 사항을 알리는 회보가 있고, 친목행사와 매년 정기적으로 기초반, 회화반으로 구분하여 수화교육을 실시하여 수화보급에 노력하며 수화교육을 마친 자로서 농아인과 함께 하고자 하는 직장인 모임인 반딧불, 주부모임인 반석회의 봉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현재 평택농아양로원을 후원하고 있다.

또 수화미사는 일반인의 미사에 농아인들을 위해 미사통역을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전례가 농아들에 의해 준비되고 행하여 지는 미사이다. 정순오 신부님의 집전으로 수화와 말을 병행하므로 일반신자도 참례할 수 있으며 특히 매달 첫째 주일에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1957. 12 다미안피부병진료소 설립 (1213쪽 포항예수성심시녀회)

포항예수성심시녀회 浦項∼聖心侍女會 (영) Handmaid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13쪽)

1935년 12월 경상북도 영천군 용평리에서 루이 데랑드 신부의 지도아래 6명의 처녀들이 삼덕당(三德堂)이란 이름으로 창설한 수녀회. 복음삼덕(福音三德)을 수련하는 곳이라는 뜻. 삼덕당에서 시작된 창설 당시의 회원들은 본당사목을 도우며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36년 2월에는 '성모자애원'(聖母慈愛院)을 설립하여 고아들과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1940년 5월에는 들랑드 신부가 경상북도 영천본당으로 부임됨에 따라 수녀원과 사업체의 일부가 이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4년 7월 부터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활동은 고사하고 심문과 고문으로 고생하다가 8.15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 후 회원수의 증가로 부득이 경상북도 영일군 대송면으로 1950년 3월 이전하였지만 곧 6.25전쟁의 어려움을 겪었다. 1952년 9월 8일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수녀회의 인가를 받고 수도회명도 '포항예수성심시녀회'로 개칭하였다. 그 뒤 1954년 12월 첫 서원식이 거행되었고, 1957년 12월에는 나환자들을 위한 '다미안피부병진료소'를 개설하여 정기적인 치료, 투약, 이동진료 등을 실시하는 한편, 경상북도 영일군 의창면에 정착촌도 마련해 주었다. 1965년 3월에는 서정길 대구교구장과 함께 첫 총회를 개최하여 김장주 수녀가 초대 총원장에 취임하였다. 1968년 10월에는 포항종합제철 부지 선정으로 인하여 현 소재지인 영일군 영일읍 대잠동으로 본부를 이전하게 되었고, 수련소는 대구시 남구 대명동에 자리잡게 되었다. 1977년 6월에는 포항에 있는 본원에 포항성모병원을 건립하여 보다 효율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현재 탁정자 총원장과 수녀를 비롯한 335명의 회원들이 1983년 12월 말 현재 포항의 본원과 성모자애원, 성모병원 그리고 대구교구를 비롯한 전국 10개 교구 70여개 본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1957. 소화(小花) 유치원 개원 (279쪽 대전본당)

대전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79쪽)

이 본당은 일제 하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대전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신설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당시의 관할구역은 대전을 비롯하여 충남의 대덕군(大德郡), 연기군(燕岐郡), 충북의 청주(淸州), 영동군(永同郡), 보은군(報恩郡), 옥천군(沃川郡)일원이었다.

1921년 초대 이종순 신부는 이미 매입해 둔 목동(牧洞) 소재 1만여평 대지 위에 성당 및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1926년 루블레 주임신부는 현 대흥동(大興洞) 성당을 준공 낙성하고 그 곳으로 이전했으며, 목동의 구 성당은 철폐하였다. 1941년 소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본당 주임신부 코르미어(Pierre Cormier, 高) 신부를 비롯한 3명의 신부가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85년 5월 본당이 재부활되면서 목동의 구성당으로 이사하였고, 본당 명칭이 목동본당으로 정착되었다. 한편 1948년 대흥동 본당에는 서울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이 파견되어 상주하면서 희망의원(현 성모병원)의 일을 돌보기 시작했고, 1956년에는 대덕군 산내면에 교회묘지를 조성, 1957년에는 소화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71년 현재의 목동본당이 신축 축성되었고, 한편 대흥동본당은 대전교구 주교좌 성당으로서 1962년 대규모의 성당건물(523평)이 신축되었다.

1958. 3 성 골롬바 병원 개원 (성체회 복지시설)

성 골롬바 병원 (성체회 복지시설) - 1998. 4. 8일 성체회 한율리엣다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1951년 8월 10일 운현궁 마마께서 윤을수 신부에게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것을 사용권을 위임하여 처음에 골롬바 어린이 집으로 시작하였다. 고아들이 점점 많아지자 청평으로 고아원을 옮기고 결핵 요양원으로 변경하였다. 시작할때 당시 성 루가 병원 박병래 원장이 주치의였으나 환자유치 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세브란스 흉부 내과 과장이었던 김기호 박사가 주치의로서 환자를 관리하고 치료해 주었다. 장기치료가 요구되는 결핵환자들이 좋은 환경에서 휴양하며 치료하였고 병실은 11실이 있었다. 1966년 2월에 폐원하였다.

1958. 8 서울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 (608쪽 성가수녀회)

성가수녀회 (영) Holy Family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08쪽)

1943년 12월 생제(Singer) 신부에 의해 창설된 방인 수도회. 일제 말기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불우한 이들을 돕기 위한 '성가 소비녀'의 공동체가 시작되자 1943년 이재현 신부, 공베르(A. Gombert) 신부와 함께 생제(Singer) 신부가 회칙을 작성하여 노기남 주교의 인준을 받고 창립인가도 받았다. 1945년 6월 수련생활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로부터 지도를 받았고, 1947년 1월에 첫 허원식을 라리보 주교에 의해 거행할 수 있었다. 1953년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양로원'을 인수받아 1979년 증축한 후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하고 있다. 1958년 8월에는 서울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한 뒤 1969년 현재의 서울 하월곡동으로 이전하고 가톨릭의대 부속병원인 종합병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한편 1962년에는 소사에 있는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착수하였다. 이밖에 편물과 보세가공을 가르치는 '나자렛 기술학원'(1960-1969)과 '미망인 양재소'(1964-1980)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968년 8월에는 서울 혜화동에 있던 본원을 현재의 서울 정릉1동으로 이전하여 1969년 1월 창립 25주년과 함께 신축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74년 성가회 명칭을 '성가수녀회'로 개칭하면서 1976년에는 새 회헌과 규칙의 인준도 받았다. 1985년 현재 3개의 병원과 1개의 학교를 비롯하여 1977년 개원한 신체장애양로원인 '안나의 집'등의 특수사목활동분야에서 활동할 뿐만 아니라 본당 사목활동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958. 11. 16 간호원 9명과 박성종 지도신부가 함께 결성 (16쪽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노동청년회 (영) Jeunesse Ouvriere Chretienne /Young Christian Word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쪽)

청년노동자로 구성되어 청년노동자들과 함께, 청년노동자들의 손으로, 청년노동자들을 위하여 노동계를 그리스도적인 생활양식으로 만들고자 하는 단체로서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세가지 성격을 갖고 있다.

첫째, 일상생활을 통하여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둘째, 하루하루의 생활환경 속에서 동료노동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수련을 쌓아야만 한다.

셋째, 청년노동자들에게 공동적으로 해결 되어야 하는 문제에 있어서나 일치되어야 할 상황속에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청년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벨기에의 가르딘(Joseph Cardijn)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1958. 12. 31 대구시립희망원 설립 (대구 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희망원 (행려자) (대구 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 1998. 4월 희망원의 답신에 의거

대구광역시립희망원은 대구 광역시 산하 부랑인 복지시설로 1958년 12월 31일 설립되어 1980년 4월 1일 대구광역시로부터 재단법인 대구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에서 수탁운영을 받아 부랑인 복지사업을 실천한지 17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희망원은 가톨릭 교회의 사랑과 평화의 이념을 바탕으로 현사회속에서 자립생활을 못하거나 무의무탁한 부랑인들을 수용보호하여 조기에 사회복귀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부랑인들에게 이들의 특성에 맞는 전문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가족찾기 상담, 장애극복을 위한 치료, 생활의 정상화를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정상적인 조기 사회복귀를 위하여 자활사업과 노임소득사업을 통한 기술습득, 취업알선 등의 재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서로돕자"라는 원훈 아래 부랑인의 시설입소, 수용보호 및 퇴소등의 합리화로 보호수준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며 부랑인 각자의 특성에 따라 분리수용을 함으로써 전문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자활사업을 내실화하여 자립 가능한 자는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조기복귀 시킨다. 시설을 개방하여 지역사회의 자원으로 활용한다.

1958. '천주의 성 요한 의원' 개원 (1132쪽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수도회)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수도회 (영) Hospitaler Brothers of St. John God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132쪽)

1593년 포루투갈의 천주의 성 요한에 의하여 창설된 수도회. 1958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광주교구의 헨리(Henry) 주교의 요청으로 애란관구 소속 5명의 수사가 처음으로 내한하여 정착한 뒤 활동을 개시하여 '천주의 성 요한 의원' 을 개원하였다. 이 지방의 가난한 주민들과 노동자계급의 의료요구에 응하게 되었다. 1971년에는 광주시 변두리에 걸인수용소인 갱생의원을 설치하는 한편 그 안에 정신과 병실을 설치하여 한정된 수의 환자들에게 획기적인 치료방법을 시도하였다. 1973년에는 '천주의 성 요한의원' 내에 정신과 외래를, 1980년에는 정신과 입원실을 개설하여 정신질환 치료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울러 정신과 간호원 훈련 등 의료교육사업 및 '소년의 집' 이라는 고아원도 경영하고 있다.

1958. 살레시오 여자중학교 설립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살레시오 초·중·고등학교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살레시오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1954년 광주 교구장 현 헤롤드 주교는 살레시오회 선교사 신부인 마르텔리 신부를 비롯한 살레시오 수도회를 광주에 초청한 후 1958년에는 가톨릭 여성교육을 위해 성 요한 보스꼬의 예방 교육 정신에 따른 전인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시작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전남 광주에서 살레시오 초등학교는 1963년에 여자중학교는 1958년에, 그리고 여자고등학교는 1961년에 선교사 살레시오 수도회의 지부장인 Archimede Martelli 신부가 설립하였다. 설립당시의 규모는 초등학교는 12학급이었고 중학교는 9학급, 고등학교는 9학급 이었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 라는 돈 보스코의 설립목적에 따라 소외되고, 가난한 청소년들이 정직한 시민, 착한 그리스도 인이 되도록 교육하고 있다.

1958. 성 라자로원은 경기도 시흥의 세브란스결핵요양소를 매입하여 이전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59. 2 성신대학이 가톨릭대학으로 교명이 변경, 가톨릭대학 의학부 제1부속병원으로 병원명을 바꿈 (18쪽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8쪽)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이어받아 자선과 의료사업으로 지역사회 주민에 대한 보건증진에 이바지하는 한편 유능한 의료인을 양성, 연구를 통한 의술 향상으로 의학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여 1935년 3월 11일 경성구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설립한 병원이다.

1959. 6 프란치스코회는 경남 산청면 내리에 나환자 자활촌인 성심원을 건립 (1220쪽 프란치스코회)

프란치스코회 (라) Ordo Fratrum Minorum (영) Franciscan Order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20쪽)

1223년 9월 27일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에 의하여 창설된 최초의 탁발 수도회.

프란치스코는 1182년 이탈리아의 부유한 집에 태어나 귀족적인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어느날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무너져 가는 주님의 성전을 고쳐라."는 계시를 받고, 모든 재산을 버린 뒤 거룩한 복음에 따라 1206년 부터 기도와 보속의 회개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회의 정신은 복음을 완전무결하게 생활화하는데 있다. 즉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께서 성인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하느님께 반대되는 모든 이기적인 경향, '육의정신'을 버리고 주님의 정신대로 사는 것이 형제들의 이상인 것이다. '작은 형제'란 주님의 정신에서 흘러나온 성인의 독특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피조물과 형제적인 일치가 될 수 있는 가난과 겸손의 뿌리이다.

한국진출 : 프란치스코회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37년 9월 캐나다 성 요셉관구의 드콰이어 (J. Dequire, 요한)과 벨레로즈(M. Bellerose)신부가 부산에 도착한 뒤부터이다. 이들은 대전에 수도원을 건립하기로 작정하고 9월 30일부터 대전에서 거주하였다. 1938년 8월 피에르(Pierre) 신부가 입국하여 가족은 3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1938년 12월 15일 대전 목동(牧洞)에 수도회를 건립하여 '천사의 모후 성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소위 태평양 전쟁이 발발되자 일제는 죄 없는 서교사들까지 적으로 몰아 모진 감금생활을 겪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옥고에서 풀려났으나, 휴유증으로 한 회원은 끝내 병사하고 말았다.

1947년에 한국인 안선호(安仙鎬, 베다) 신부가 캐나다 유학길에 오르고, 남은 신부들도 각기 수련을 위해 출국하였다가 1950년 6월에 다시 입국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수도원 건물은 공산군에게 점령당하고, 유엔군이 수복한 뒤로는 피난민 자녀들을 위한 교육장으로 쓰인 것이, 현재 대성(大成)중·고등학교로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 6월 17일 진주에 있던 콘스탄치오 신부가 옥봉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천, 의령등 하동 지방에 두루 복음을 전파하였다. 1959년에는 4명의 이탈리아 회원들이 삼천포(三川浦)에도 본당을 신설하여 남해(南海)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6월에는 경남 산청면 내리(內里)에 2만 8,000여명의 대지를 마련하여 성심원(聖心院)이란 나환자 자활촌을 만들었다. 한편 대전에서는 공 안드레아 신부가 1959년 1월 목동본당의 주임신부로, 그리고 4월에는 벨레로즈 신부가 노기남 주교의 명으로 서울교구의 본당을 맡았다. 1960년 진주지방에서 콘스탄치오 형제에 의하여 병실 39동과 대수술실을 갖춘 나환자들을 위한 성심 인해병원이 개설되었다. 전국에서 나환자들이 모여들어 수일간에 200여명의 환자를 수용하였다. 이 해에 사천에도 본당을 신설하였다. 대전 수도원에서는 1961년에 첫 단순서원식이 있었다. 한편 성심원의 원장 정 시온 신부는 나환자를 위한 자활부락 건설에 착안하여 현대식 주택 개량에 힘써 1964년까지 가옥 82동을 건립하고 농토를 마련하는 한편, 정미소, 축사, 목공소, 매점, 창고, 보육원, 세탁소, 이발소, 미장원까지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추게 하였다.

이렇듯 눈부신 발전으로 1963년 12월 10일에는 로마본부로부터 일본과 한국 프란치스코회 총장대리로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李) 신부가 임명되어 한국에 부임, 한국본부 설치를 서둘렀다. 장소를 물색한 결과 수림으로 둘러싸인 작은 언덕 위에 수도원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1965년 9월 8일에 낙성된 지금의 프란치스코회 본부 정동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명도원이란 이름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의 언어교육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 학원이 개설되었다. 현재 이회가 맡고 있는 직접 선교의 본당은 8개(1개 준본당 포함)본당이다. 이곳에서 9명의 성직자와 6명의 평신도 형제들이 일하고 있다. 과거 이 회에서는 16개의 본당을 관할한 적도 있었으나 8개의 본당을 교구에 이양하였다. 이것은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이 직접 선교도 중요하지만, 가난하고 겸손하긴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뜻을 따라 사회에 평화를 심고, 사회사업과 특수사목에 치중하는 신앙에서 온 결과였다.

한편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는 각자 소속본당에서, 그리고 신심단체에서 핵심메머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단체라기 보다 개인적 수덕에 전념하는 조용한 단체라는 인상을 주고 있으나, 이들이 수도생활을 통해 체험한 영성생활을 교회안에서 실천함으로써 사도직 활동에 좋은 표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선활동으로 교회사업을 비롯하여 성소후원회, 군종후원회, 교도소후원회, 은퇴사제후원회, 구라회, 불우 이웃돕기 등에 대부분의 형제회가 단체 혹은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운영하고 있는 소년원, 양로원, 나환자촌, 신학원 등의 방대한 사업을 돕고 있다.

1959. 6. 18 성심원 설립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복지시설) - 1998. 9. 5 성심원의 김정이 크레센시아님의 답신에 의거

성심원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복지시설) - 1998. 9. 5 성심원의 김정이 크레센시아님의 답신에 의거

그리스도의 복음정신과 프란치스꼬 성인의 모범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며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받은 나환우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치료와 생활보호에 헌신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아 주며 신앙생활을 통해 기쁨과 감사의 삶으로 이끌어 주는데에 성심원의 설립목적이다.

1959년 6월 18일 진주시 현남동 구생원(나환자집단시설)에서 종교적 갈등으로 추방된 천주교신자들이 갈데 없는 유랑인이 되었을 때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주 콘스탄시오 신부가 현 성심원부지를 구입하여 나환우 60여명을 피신시키며 "성심원"을 개원하였다.

나병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사회와 가족들의 냉대 속에서 살아온 400여 명의 성심원 가족들은 90%가 중복장애인이다. 나환인들은 60여개의 동으로 형성된 독신사, 가정사, 부부요양소에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꼬 수도회)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의 수도자들과 직원,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 성심원에서의 사회사업은 불구 노약 나환인을 수용보호하며, 나병에 대한 대중 교육 및 계몽, 그리고 나환인 자녀들에게 장학제도를 실시하며 성당과 교육관을 이용하여 종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959. 프란치스코회가 산청에 성심인애병원 설립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59. 성가양로원 설립 (680쪽 소사본당)

소사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80쪽)

8.15광복 이듬해인 1946년 4월 인천본당(답동)으로부터 분리되어 설정된 본당이다.

1949년 2월 신성우(마르꼬)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신축자금을 마련중에 6.25동란이 발발하자 1.4후퇴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도망와서 폭격으로 불탄 임시성당을 복구하였다. 수복 후 신자수가 늘어나자 주일미사도 근처의 솔밭에서 지내야 되는 형편임으로 신신부는 자신이 농사를 지어서 번돈과 인근 미군부대의 원조와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54년 11월 28일 114평의 성당을 준공하였다.

보육원과 양로원을 만들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야간학교도 설립하였다.

소사본당은 봉사하는 교회, 믿음을 다지는 교회를 지향하는 신자들의 의지를 모아 450평에 달하는 현대식 '성가정회관'을 지어 1984년에 개관하였다. 이곳은 교회는 물론 지역사회를 위하여 완전히 개방하고 있는데 특히 젊은이들의 교육장과 상담실을 비롯, 직장인들의 회합, 피정교육 및 각종 문화교육센터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1960. 3 성심여자고등학교 개교 (649쪽 성심수녀회)

성심수녀회 (영) Society of the Sacred Hear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49쪽)

1800년 11월 21일 성녀 마를렌 소피바라(Madeleine Sophie Barat) 수녀가 프랑스에서 창립한 수녀회.

1956년 10월 10일 한국 진출. 젊은 이들의 교육으로써 예수 성심에게 영광을 주는 것을 창립 목적으로 하여 1956년 한국에 진출하자 곧 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미 1908년 일본에 진출한 수녀회의 극동관구장 브리짓 키오(Brigid Keogh) 수녀에게 한국 진출을 요청하자 관구장이 직접 내한하여 현 수녀원과 성심여자고등학교가 있는 서울 원효로의 옛 예수성심신학교 및 성당 건물을 이수하고 1956년 10월 서울 분원장 맥하디 플린트(McHardy Flint) 수녀 외 7명이 내한하였다. 수녀회 본부에서의 10만달러 예치로 법인설립을 하고, 많은 어려움 끝에 1957년 2월 12일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57년 4월 18일 성심여자중학교의 첫 입학식을 가졌다.

1960년 3월에는 성심여자고등학교가 개교하는 한편, 같은 해 9월 미국 수련원으로부터 한국인 수녀 2명이 내한하여 더욱 활동하기에 좋아졌다. 교육의 일괄성을 위하여 1963년 성심국민학교, 1964년 성심여자대학이 각각 서울과 춘천에서 개교하였다. 아울러 가난한 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서울 봉천동에서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천막학교를 개설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하였다. 1975년과 1982년에 교육의 효율화를 위하여 중학교와 국민학교를 각각 폐교하였고 1975년 3월 한국지구로 독립하여 승격됨과 동시에 같은해 9월에는 부천(富川)에 성심여자대학의 분교를 신설하였다. 1978년에는 강원도 사북읍 고한리 광산촌에서 활동을 실시하였다. 현재 서울 원효로의 본원을 비롯하여 춘천, 원주, 인천의 분원과 함께 서울 원효로에 수련원공동체가 있고, 한국지구장 한순희 수녀를 중심으로 43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1960. 3. 15 복자 여자 중·고등학교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복자여자 중·고등학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 1998. 4. 28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복자정신과 순교정신을 현양하고 전인교육에 의하여 미래의 민족운명을 좌우할 여성교육을 담당코저 1960년 3월 15일 충남 천안시에서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공동 창설자인 윤병현(안드레아) 수녀가 설립하였다.

복자여자 중학교는 1961년 3월 8일 설립인가가 났으며 1961년 4월 4일 중학교가 개교되었다. 1962년 3월 31일 김정진(바오로) 신부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63년 3월 2일 복자여자고등학교를 개교하게 되었으며 제2대 교장으로 백남익(디오니시오) 신부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71년 개교 10주년때는 사회전, 바자회, 주산 타자 경기를 하였으며 무용, 음악, 연극 등 예술제도 하였다. 1974년 제4대 교장으로 양위순(아가다)수녀가 취임하였으며 상고, 가정과를 모두 인문 고등학교로 변경인가 받고 학급도 증설하였고 1976년에는 중·고등학교를 분리, 운영체제에 들어갔다. 1986년 25주년때는 "복자의 밤"을 9월 25일 하오 6시 30분부터 화려한 막을 올렸다. 1400여명 복자의 딸들이 모인 교정에서 시낭송, 독창, 무용을 하였으며 체육대회, 취미전, 백일장을 하였다. 1991년 개교 30주년에는 학예 발표회, 각종 전시회가 있었으며 개교 30주년 및 한글날 기념 제9회 교내 백일장 대회가 있었다. 학교교육에서 종교교육에서 종교교사를 따로 두어 종교수업, 종교행사, 진로지도 상담을 해주고 있으며 종교 특별반 운영등의 업무를 배당하여 매년 다양하고 심도깊은 종교교육을 시키고 있다. 종교수업은 종교담당 수녀가 맡고 종교행사는 종교과 교사들이 주축을 이루어 일반교사들 협조를 받아 나날이 그 본래의 취지를 잘 살려나가고 있다.

1993년 충남 교육청으로부터 독서교육 시범학교로 지정되었다. 한글날을 전후하여 매년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글날 기념 백일장을 실시하여 우수한 작품을 뽑아 시상하고 있다. 도서관도 정비하여 현재 17500여권의 장서와 380석의 열람실과 냉난방 시설을 완비하고 사서교사와 사무직원을 전담 배치하여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반개가식으로 개관하고 일요일은 물론 방학중에도 항시 개관 함으로 열람석은 연중 무휴 초만원을 이루고 있으며 독서교육 우수교로 선정된바 있다.

복자여자 중·고등학교에서는 팽배해 가는 개인 집단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 주의의 시대에서 밝은 미래사회를 만들고자 학생들에게 3가지 중점적인 실천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첫째로 5개의 이웃 돕기회 (성모자애재활원을 돕는 복두례회, 결핵환자를 돕는 릴리회, 장애 어린이 교육을 돕는 엠마누엘회, 보육시설을 돕는 목련회, 장애자와 환자들을 위한 꽃동네회)를 조직하여 전체 교직원과 학생들이 적어도 1개이상의 회원이 되어 매원 자신들이 희망한 일정금액의 회비를 모아 이웃돕기를 실시하고 있다. 둘째로 일년중 적어도 한번, 각 학급별로 주말을 이용하여 학급활동의 일환으로 가까운 이웃에 있는 고아원, 양로원 등의 사회복지 시설을 담임교사와 함께 방문하여 학용품, 놀이기구 등을 전달하고 간단한 다과도 함께 니누며 대화, 놀이 등으로 이웃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현장교육을 실시하며 셋째로 3학년 학생들은 매년 고입, 대입 시험이 끝나고 학창시절을 정리할 무렵에 충북 음성군에 꽃동네를 직접 방문하여 청소세탁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복자 여자 중·고등학교는 전인교육이란 차원에서 학생 개개인의 취미와 특기를 고려하여 클럽활동 부서 35개반을 조직하고 운영하고 있다.

복자여자 중·고등학교에서는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근검절약 정신을 길러 저축을 증대시키고 자조자립 정신들 기르고자 1978년에 학생, 교직원이 공동출자하여 천안복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여 수신업무와 공동구매 업무를 실시하고 있다. 복자여자고등학교는 일반계여자 고등학교로써 근래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대학입시의 경쟁대열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학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학교교육의 본질을 이탈하면서 이 대열에 설 수는 없다. 학교교육을 제자리에 세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부모들의 진학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고 교사들 또한 걱정스러운 생각이 만만치 않았으나 육성회, 자모회를 통하여 자녀들에게 대한 과잉기대나 경쟁적인 입시 뒷바라지보다 걬의 지혜와 도리를 일깨워 선량아로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지도하여 먼저 자녀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쌓는 가족관계를 만들어 갈 것을 부탁하고 직원연수를 통하여 바른교육풍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심어주면서 치열한 보충수업 경쟁에서 벗어나 독서교육을 강화하고 자율학습을 정착시켜 특별활동이 활발하여 지고 이웃사랑이 생활화되어 가게 하면서도 대학 진학이 또한 향상되어 가고 있다. 현지 16명의 수녀가 교장 및 교사 사무직 등에서 일을 하고 있다.

1960. 3. 25 성모 영보 수녀회 설립 (교회와 역사 70호 7쪽)

성모 영보 수녀회 (교회와 역사 70호 7쪽)

성모영보 수녀회는 한국인에 의해 한국에서 설립된 관상(觀想) 수녀회이며 반봉쇄(半封鎖) 수녀회이다. 이 수녀회의 정신은 실제로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 빈궁한 자를 돕고, 근면한 생활로 노동의 존귀함을 드러내자는 데에 있다. 예수께서 가난한 이와 병들어 신음하는 자와 더불어 생활하셨던 모습대로 그들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버림받은 사람을 위해 기도와 노동과 봉사로 정신적으로 부유해지고자 한다. 이 수녀회는 1985년 당시 가톨릭대학 교수이며 성서학자인 宣種完 라우렌시오 신부가 그 선친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 일부를 매각한 돈과 성서 번역을 위해 사육하였던 메추라기 수입을 보태 경기도 부천시에 12정보의 땅을 매입함으로써 태동되었다. 2년 후인 1960년 3월 25일 정식으로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이 수녀회의 특징은 국민학교 졸업정도의 학력이 낮은 처녀들에게도 입회를 허용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초창기에 처녀들로서는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노동과 가난 가운데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메마른 땅에 농사를 지어 수확한 감자로 주식을 삼으며, 메추라기와 젖소와 칠면조를 사육하고 미사용 포도주를 시도하는 한편 仁川에 나가 우유룰 판매하는 등 자립하고자 하였다. 흙벽돌로 지은 초라한 건물과 성당에서 생활하고 기도하면서 성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 생활을 이웃 주민들에게 증거하고자 하였다. 수녀들은 안양 성 라자로원에서 1976년부터 수녀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수용된 나병환자들을 돕고있다. 또한 파주군 광탄의 시몬의집 에서는 1980년부터 수녀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수용되어있는 폐결핵 환자들의 간호와 세탁, 식사 등 궂은 일을 비롯하여 구령사정도 돌보고 있다. 전북 함열본당 상지원에서는 60세대의 음성 나환자 간호 및 미감아 교리지도를 담당하고 있다.

1960. 5 부산 양정동에 정착하여 성모의원과 함께 수예실을 운영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 (라) Congregatio Missionariarum Mariae Franciscanaru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6쪽)

1877년 1월 6일 마리 드 라 파시옹 (Marie de la Passion)에 의해 인도 오타카문드 (Otacamund)에서 창설된 수도회. 1954년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내한하려 하였으나 중국에서의 수녀원 추방운동으로 1958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진출하였다.

1960년 5월 부산 양정동에 정착하여 성모의원과 함께 수예실을 운영하였다. 1975년 2월에는 부산성모의원을 폐쇄하고, 의료혜택이 더욱 필요한 성 프란치스코의원을 개원하였다. 한편 부산에서는 1961년 3월 성모여자중학교, 1964년 성모여자고등학교를 개교했으나 1974년 성모여중을 폐교하고 1979년 6월 성모여고를 부산교구에 이관하였다. 1966년 서울 가리봉동에 수녀원과 의원건물을 완공함으로써 모두 이전하여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1974년에는 부산에 있던 수련원도 서울로 이전하였다. 1972년 일본관구소속에서 준관구로, 1978년 정식관구로 승격되었다. 1979년에는 원래 학교부지로 매입했던 곳에 선화기숙사가 완공되어 5월 1일 첫 기숙생을 입사시켰다. 현재 한국관구 본부가 있는 서울 가리봉동 수녀원을 비롯하여 부산 양정동 수녀원, 강원도 정선수녀원에서는 관구장 수녀를 비롯한 65명의 (1983년 말 현재)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60. 칠곡에 가톨릭 피부과 의원 설립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60. 충남 천안에 복자여자중고등학교 설립 (1260쪽 한국순교복자수녀회)

1960. 프란치스코회는 진주에 나환자를 위한 성심 인해병원을 설립 (1220쪽 프란치스코회)

프란치스코회 (라) Ordo Fratrum Minorum (영) Franciscan Order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20쪽)

1223년 9월 27일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에 의하여 창설된 최초의 탁발 수도회.

프란치스코는 1182년 이탈리아의 부유한 집에 태어나 귀족적인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어느날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무너져 가는 주님의 성전을 고쳐라."는 계시를 받고, 모든 재산을 버린 뒤 거룩한 복음에 따라 1206년 부터 기도와 보속의 회개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회의 정신은 복음을 완전무결하게 생활화하는데 있다. 즉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께서 성인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하느님께 반대되는 모든 이기적인 경향, '육의정신'을 버리고 주님의 정신대로 사는 것이 형제들의 이상인 것이다. '작은 형제'란 주님의 정신에서 흘러나온 성인의 독특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피조물과 형제적인 일치가 될 수 있는 가난과 겸손의 뿌리이다.

한국진출 : 프란치스코회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37년 9월 캐나다 성 요셉관구의 드콰이어 (J. Dequire, 요한)과 벨레로즈(M. Bellerose)신부가 부산에 도착한 뒤부터이다. 이들은 대전에 수도원을 건립하기로 작정하고 9월 30일부터 대전에서 거주하였다. 1938년 8월 피에르(Pierre) 신부가 입국하여 가족은 3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1938년 12월 15일 대전 목동(牧洞)에 수도회를 건립하여 '천사의 모후 성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소위 태평양 전쟁이 발발되자 일제는 죄 없는 서교사들까지 적으로 몰아 모진 감금생활을 겪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옥고에서 풀려났으나, 휴유증으로 한 회원은 끝내 병사하고 말았다.

1947년에 한국인 안선호(安仙鎬, 베다) 신부가 캐나다 유학길에 오르고, 남은 신부들도 각기 수련을 위해 출국하였다가 1950년 6월에 다시 입국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수도원 건물은 공산군에게 점령당하고, 유엔군이 수복한 뒤로는 피난민 자녀들을 위한 교육장으로 쓰인 것이, 현재 대성(大成)중·고등학교로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 6월 17일 진주에 있던 콘스탄치오 신부가 옥봉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천, 의령등 하동 지방에 두루 복음을 전파하였다. 1959년에는 4명의 이탈리아 회원들이 삼천포(三川浦)에도 본당을 신설하여 남해(南海)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6월에는 경남 산청면 내리(內里)에 2만 8,000여명의 대지를 마련하여 성심원(聖心院)이란 나환자 자활촌을 만들었다. 한편 대전에서는 공 안드레아 신부가 1959년 1월 목동본당의 주임신부로, 그리고 4월에는 벨레로즈 신부가 노기남 주교의 명으로 서울교구의 본당을 맡았다. 1960년 진주지방에서 콘스탄치오 형제에 의하여 병실 39동과 대수술실을 갖춘 나환자들을 위한 성심 인해병원이 개설되었다. 전국에서 나환자들이 모여들어 수일간에 200여명의 환자를 수용하였다. 이 해에 사천에도 본당을 신설하였다. 대전 수도원에서는 1961년에 첫 단순서원식이 있었다. 한편 성심원의 원장 정 시온 신부는 나환자를 위한 자활부락 건설에 착안하여 현대식 주택 개량에 힘써 1964년까지 가옥 82동을 건립하고 농토를 마련하는 한편, 정미소, 축사, 목공소, 매점, 창고, 보육원, 세탁소, 이발소, 미장원까지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추게 하였다.

이렇듯 눈부신 발전으로 1963년 12월 10일에는 로마본부로부터 일본과 한국 프란치스코회 총장대리로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李) 신부가 임명되어 한국에 부임, 한국본부 설치를 서둘렀다. 장소를 물색한 결과 수림으로 둘러싸인 작은 언덕 위에 수도원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1965년 9월 8일에 낙성된 지금의 프란치스코회 본부 정동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명도원이란 이름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의 언어교육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 학원이 개설되었다. 현재 이회가 맡고 있는 직접 선교의 본당은 8개(1개 준본당 포함)본당이다. 이곳에서 9명의 성직자와 6명의 평신도 형제들이 일하고 있다. 과거 이 회에서는 16개의 본당을 관할한 적도 있었으나 8개의 본당을 교구에 이양하였다. 이것은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이 직접 선교도 중요하지만, 가난하고 겸손하긴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뜻을 따라 사회에 평화를 심고, 사회사업과 특수사목에 치중하는 신앙에서 온 결과였다.

한편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는 각자 소속본당에서, 그리고 신심단체에서 핵심메머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단체라기 보다 개인적 수덕에 전념하는 조용한 단체라는 인상을 주고 있으나, 이들이 수도생활을 통해 체험한 영성생활을 교회안에서 실천함으로써 사도직 활동에 좋은 표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선활동으로 교회사업을 비롯하여 성소후원회, 군종후원회, 교도소후원회, 은퇴사제후원회, 구라회, 불우 이웃돕기 등에 대부분의 형제회가 단체 혹은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운영하고 있는 소년원, 양로원, 나환자촌, 신학원 등의 방대한 사업을 돕고 있다.

1960. 제주도 한림에 진료소를 개설 (93쪽 골룸바노 수녀회)

골룸바노 수녀회 (영) Missionary Sisters of St. Columban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3쪽)

성 골룸바노 수녀회는 1922년 2월 1일 아일랜드에서 당시 성 골롬바노 선교회 총장인 존 블로윅(John Blowick)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포교활동을 함에 있어서 포교지의 전통적인 관습을 극복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전교수녀들의 적극적이며 정성어린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골롬바노회 내에 전교수녀회를 창설하게 된 것이다. 이 수녀회원들은 각 지역에서 전교활동 외에 주로 의료사업, 교육사업, 사회사업 등을 하고 있다.

한국진출 : 1955년 광주교구의 헨리(Harold Henry, 玄) 주교의 초청으로 엔다(Enda Staunton)수녀를 비롯한 4명의 수녀들이 한국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들은 그해 목포에 수녀원을 설립, 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사업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에 춘천에도 성 골롬바노 의원을 개설, 1960년에는 제주도 한림에 진료소를 개설함과 아울러 성 골룸바노 선교회 신부들의 협조를 얻어 직조업에 착수, 지역개발에 이바지하는 동시에 부녀자들의 경제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1963년에는 삼척에도 의료시설을 개설(성 요셉의원), 1975년에는 영주에 분원을 설치하여 수녀들이 나환자 진료소인 다미안 의원에서 근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1971년 서울에 본원을 신축, 수녀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사업과 지방에서 활동중인 수녀들의 뒷바침을 해주고 있으며, 서울에서 수녀들은 서울 가톨릭의대와 협력하여 한국 천주교 회의 산하 '행복한 가정운동'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47명의 수녀들이 서울의 본원과 목포, 춘천, 제주, 삼척, 영주 등 5개 분원에서 의료사업, 간호원 교육사업, 사회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1960. '나자렛기술학원' 운영 (608쪽 성가수녀회)

성가수녀회 (영) Holy Family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08쪽)

1943년 12월 생제(Singer) 신부에 의해 창설된 방인 수도회. 일제 말기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불우한 이들을 돕기 위한 '성가 소비녀'의 공동체가 시작되자 1943년 이재현 신부, 공베르(A. Gombert) 신부와 함께 생제(Singer) 신부가 회칙을 작성하여 노기남 주교의 인준을 받고 창립인가도 받았다. 1945년 6월 수련생활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로부터 지도를 받았고, 1947년 1월에 첫 허원식을 라리보 주교에 의해 거행할 수 있었다. 1953년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양로원'을 인수받아 1979년 증축한 후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하고 있다. 1958년 8월에는 서울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한 뒤 1969년 현재의 서울 하월곡동으로 이전하고 가톨릭의대 부속병원인 종합병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한편 1962년에는 소사에 있는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착수하였다. 이밖에 편물과 보세가공을 가르치는 '나자렛 기술학원'(1960-1969)과 '미망인 양재소'(1964-1980)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968년 8월에는 서울 혜화동에 있던 본원을 현재의 서울 정릉1동으로 이전하여 1969년 1월 창립 25주년과 함께 신축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74년 성가회 명칭을 '성가수녀회'로 개칭하면서 1976년에는 새 회헌과 규칙의 인준도 받았다. 1985년 현재 3개의 병원과 1개의 학교를 비롯하여 1977년 개원한 신체장애양로원인 '안나의 집'등의 특수사목활동분야에서 활동할 뿐만 아니라 본당 사목활동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960. 양생원이 성광원으로 개칭 (교회와 역사 207호 4쪽) - 1992. 8. 25발행

성광원의 처음 이름은 양생원이라 했다. 양생원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라 다두라는 나환자의 어머니가 논산 성당의 신자였다. 1956년 3, 4월경 그녀는 성재덕 신부를 찾아와 자기 아들이 마을에서 못살고 외진곳에서 사는데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 당시 10세대 정도의 나환자들이 외진 곳에서 정부의 대책도 없이 소외된 채로 있었다. 그들은 걸식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성 신부가 그녀의 청을 듣고 진료반을 보내줌으로써 나환자 이동 병원 진료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정석주, 박병태, 김재영 외 17명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서로 돕고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 명칭을 양생원(養生圓)으로 발족하고 가톨릭 구제회에서 구호를 받게 되었다. 진료반이 이곳에 올 때 N.C.W.C(미국 천주교 전재부흥위원회)의 보조로 밀가루, 옥수수 등과 구호품이 전달되었다. 이후 나환자 집단이 점점 불어났고 성 신부의 도움으로 논산 본당을 통해 정식으로 밀가루, 옥수수 가루를 배급받게 되었다.

1960년 5월에 양생원을 성광원으로 개칭하고 논산군 광석면 율리 산 49의 2번지 부지 22,440평을 매입 계약했다. 이는 충남 나협회의 주선으로 정부에서 매입 기증한 땅이다. 당시 나환자들은 59명이었고 이때 비로소 나환자 정착지로 책정되어 현재에 이른다.

1960. 전주교구와 프랑스 국제농촌개발협조회(CIDR)가 공동으로 이리성모병원 설립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60. 대구시 봉덕동에 가톨릭 피부과 의원 설립 (재단법인 대구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가톨릭 피부과 의원 (재단법인 대구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 1998. 5. 20일 가톨릭 피부과 의원 답신에 의거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환자의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덜어주고 피부진료를 통해 나환자를 조기발견 치료하여 그들의 사회복귀를 도와주며 나병등으로 급증하는 장애인들을 위한 의료적, 사회적 재활사업을 통하여 국민보건향상에 기여하고자 대구시 봉덕동에 서정길 대주교가 설립하였다.

과거 일제통치시대 나환자는 강제 수용되었는데 해방과 6·25 사변 등 사회혼란으로 나환자들은 수용소를 뛰쳐나와 거리를 배회하며 유랑구걸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이러한 나환자들의 참상을 알고 계시는 서정길 대주교님께 어느 나환자가 찾아와 구호를 요청하게 되자 교구청에 근무하고 있는 오지리인 뤼듸 신부에게 이 일을 맡아 나환자를 도와주라는 것이 동기가 되어 천주교 대교구 구라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루듸 신부는 자기본국을 통하여 자선사업단체인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에 재정지원을 얻게되어 나환자를 위한 구라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우선 나환자들이 구걸하지 않고 일정한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의성 신락원과 고령 은양원 두곳에다 정착장을 마련하였다. 이때는 환자의 치료도 중요하였지만 이들이 당장 거처해야 할 주택과 먹을 식량이 더 긴박한 문제였으니 구호 사업과 치료사업을 동시에 전개해야할 실정이었다. 나환자의 치료를 위해 이들을 간호하며 돌봐줄 사람을 구하던 차에 마침 멀고 먼 이국땅 오지리에서 간호원(엠마 프라이싱거) 한분이 지원하게 되어 그를 받아들여 이곳으로 오게하였다. 나환자도 일반환자와 같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을 수 있는 현대식 병원을 건립하고자 부지를 물색하고 이곳에다 대지를 마련하여 막상 병원을 세우려 하니 주민들이 반대하여 이명우 부주교를 비롯하여 서순봉 교수, 지방관서장 등이 주민들을 설득시켜 합의를 보고 나환자를 수용할 때에는 담장을 쌓아 입원환자는 병원 밖으로 못다니도록 한다는 주민들의 요구조건을 들어 병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나환자의 입원치료를 위한 병실이 건립되자 고령 은양원에서 나환자를 돌보고 있던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가 이곳 병원으로 숙소를 옮겨 병실을 관리하게 되고 대구 가톨릭 간호협회와 경북의대 부속병원의 협조를 얻어 입원환자의 진료와 정착장(은양원, 신락원) 환자도 매일 정기 순회진료를 하게 되었다. 당시 재정사정은 빈약하여 병원 건립 뿐만 아니라 운영비, 인건비, 치료약품까지 외국원조단체인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었다. 또한 N.C.W로 부터 밀가루, 옥분, 헌옷 등 구호물자가 전달되어 입원환자 부근에 살고 있는 어려운 재가 나환자에게 배분해 주었다. 초창기 이곳은 병원이라기 보다는 나환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용시설에 불과한 형편이었다. 병원 본관건물이 세워지고 엠마 프라이싱거 여서께서 원장직을 맡게된 후부터는 병원형태로 차츰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을 포함한 많은 외래환자들이 병원을 이용하게 되었도 그 중 여러명의 초기 나환자를 발견하여 치료해줌 으로서 나병퇴치에 좋은 성과를 얻게 되었다. 이곳에 장기수용되어있던 나환자는 경남 산청병원으로 이송하고 이곳 병실은 단기 입원실로 바꾸어 많은 나환자에게 치료의 혜택을 고루 줄 수 있도록 입원 대상을 넓혔다. 또한 엠마 원장은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와 서독구라협회 영국 등으로부터 우리나라 나병관리사업에 필요한 지원을 많이 얻을 수 있어 나사업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 피부과 의원은 일반 외래피부환자 진료수입과 릴리회 성금 등으로 자체에서 구라사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은 퍽 자랑스러운 일이다. 다행히 최근 나병으로 발견되는 신환자 발생이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가톨릭 피부과 의원은 오직 나환자들에게 각종 치료의 혜택과 생계대책을 마련하는 등 설립자의 정신에 따라 성실히 나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96년 9월, 35년동안 가톨릭 피부과 의원을 이끌어 왔던 엠마 프라이싱거 원장이 정년으로 퇴임하고 96년 10월 부터는 3대 원장 채 영희(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엠마 프라이싱거 전임원장의 업적과 정신을 유지,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사회복지법인 엠마재단을 설립하였고 동 법인에서는 장애인재활시설 및 재활병원을 운영할 계획에 있으며 이로 인해 나병등으로 인하여 복합장애를 지닌 장애인들을 위하여 보다 양질의 재활의료서비스를 제공하므로써 그들의 사회복귀를 도울 것이다.

1961. 2. 8 조성세(안드레아)를 비롯한 다섯명의 회원이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활동을 시작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영) St. Vincent de Paul - 1998. 4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답신에 의거

자선과 정의의 정신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려 노력한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靈性은 빈첸시오 聖人께서 보여주신 은사를 따라 빈첸시오회 회원들과 사랑의딸회 수녀들이 상호 협력한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다."(마태 26,11) 라는 말씀에 따라 회원들은 자신에게 허용된 시간과 재물을 봉사에 활용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움이 만족스러운 해결을 이루도록 돕는다.

1961년 1월 6일 서울 명동성당이 라우렌시오 신부의 설립 의뢰로 뉴질랜드 회장 게이노와 노기남 대주교의 후원으로 회원 5명이 모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1년 5월 3일 상계동의 음성 나환자 마을을 방문하고 1982년 4월 18일 용문 결핵환자요양소(희망의 집)에 노력봉사 하였다. 1992년 2월 2일 김정남(바르나바) 신부의 지도로 협의회 조직이 형성되어 신내동 무의탁 할머니를 성가복지병원에서 진료를 받도록 도와주었으며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바자회를 개최하며 각 명절때마다 외롭고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전달하며 실천적인 사랑을 행하고 있다.

1961. 3 부산에 성모여자중학교 개교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 (라) Congregatio Missionariarum Mariae Franciscanaru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6쪽)

1877년 1월 6일 마리 드 라 파시옹 (Marie de la Passion)에 의해 인도 오타카문드 (Otacamund)에서 창설된 수도회. 1954년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내한하려 하였으나 중국에서의 수녀원 추방운동으로 1958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진출하였다.

1960년 5월 부산 양정동에 정착하여 성모의원과 함께 수예실을 운영하였다. 1975년 2월에는 부산성모의원을 폐쇄하고, 의료혜택이 더욱 필요한 성 프란치스코의원을 개원하였다. 한편 부산에서는 1961년 3월 성모여자중학교, 1964년 성모여자고등학교를 개교했으나 1974년 성모여중을 폐교하고 1979년 6월 성모여고를 부산교구에 이관하였다. 1966년 서울 가리봉동에 수녀원과 의원건물을 완공함으로써 모두 이전하여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1974년에는 부산에 있던 수련원도 서울로 이전하였다. 1972년 일본관구소속에서 준관구로, 1978년 정식관구로 승격되었다. 1979년에는 원래 학교부지로 매입했던 곳에 선화기숙사가 완공되어 5월 1일 첫 기숙생을 입사시켰다. 현재 한국관구 본부가 있는 서울 가리봉동 수녀원을 비롯하여 부산 양정동 수녀원, 강원도 정선수녀원에서는 관구장 수녀를 비롯한 65명의 (1983년 말 현재)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61. 4. 1 만성병 연구소 설립 (가톨릭 중앙 의료원 부속 나병연구기관)

만성병 연구소 (영) Institute of Chronic Diseases (가톨릭 중앙 의료원 부속 나병연구기관) - 1998. 4. 22일 홍보과 이승우(바오로)님의 답신에 의거

가톨릭중앙의료원 부속 나병연구기관으로 천주교 구라회 설립자인 미국 메리놀회 서요셉 신부(Rev. Joseph A.Sweeney. MM)의 제정적 지원을 받아 가톨릭 대학교 의과대학 미생물과학교실의 협조를 얻어 다음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가. 나병의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에 관한 연구

나. 의학과, 간호학과 학생의 나병교육과 임상실습

다. 나환자의 외래진료와 이동진료를 통해 나병의 조기발전과 치료 및 예방

라. 나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및 경제적 재활협조

만성병 연구소의 사업내용은 나병에 관한 역사적인 연구와 기초의학 및 임상의학 분야에 관한 연구를 하며 의과대학 학생과 간호학생들에게 나병에 관한 교육과 실습, 국제 교류를 통한 정보교환, 재가 나환자의 외래진료, 경기도 한강 이북지역에 있는 7개 나음성자 정착마을과 4개시 8개군 보건소 등록 재가 나환자의 나병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딸회와 공동으로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순회진료를 실시한다. 성 나자로 마을 나환자를 위한 순회진료를 실시하며 나환자 보조금 지급대행 (릴리회 지원아래 극빈 재가 나환자의 자녀를 위한 학비보조금 지급 대행, 한국 가톨릭 나사업연합회 지원으로 재가 나환자의 생계자금 지급 대행), 치과치료 알선, 강원도 내 강릉, 동해, 삼척, 속초, 태백 등 5개시와 고성, 명주, 삼척, 양양, 영월, 정선, 평창 등 7개군에서의 재가 나환자의 발견과 보건소에 등록된 나환자의 치료를 천주교 구라회와 공동으로 이동진료를 실시하고 있다.

1970년에는 충남지역 정착마을 나환자를 대상으로 또 1976년에는 강원도 원주에 있는 대명원과 경천농원에 의학과, 간호학과 하계 진료봉사 학생들과 진료봉사를 통하여 나병의 임상실습을 지도하였다.

1972년 천주교 구라회 이동진료 업무가 한강 성심병원 부속 한국의과학연구소로 이관 되면서 천주교 구라회의 이동진료 업무는 중단되었다. 그 후 대한나관리협회 경기지부 진료반 창설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1975년부터 1979년 6월까지 4회 경기도 전역의 이동진료를 하였으며 진료지역으로는 염광농원, 동진원, 부평농장, 청천농장, 경인농장, 삼성농장, 의왕농장, 간석농장, 경성농원, 고운마을, 성생농장, 천성농장, 상록촌, 금촌농장 및 포천농축단지 등에 살고 있는 나음성자들과 경기도 일원의 재가나환자들에게 나병진료와 합병치료를 실시하고 있다.

1961. 만성병연구소가 가톨릭중앙의료원에 개설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61. 5 애덕 농아자활원 설립 (나눔지 47호 3쪽) - 1985. 5. 18발행

애덕 농아자활원 (나눔지 47호 3쪽) - 1985. 5. 18발행

애덕 농아자활원은 1961년 5월 미아3동(現애화학교) 대지 1,500평 위에 설립(26가구주거) 하여 생활수단으로 미 8군 골프장 닦기, 뉴질랜드산 토끼양육, 국수공장 운영, 극빈자를 위한 식당운영등을 전전하다가 71년 허 까리따스 수녀님 (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이 서독에서 인형옷 수출계약을 맺고오심을 계기로 1985년 현째까지 인형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봉제완구는 미8군 및 동남아 등지에 수출하고 있으며 1976년 6월에는 수유3동에 APT시 연립주택을 건립하고 자활원 낙성식과 함께 전가구가 이주해옴에 따라 총26세대 15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세대 반 이상이 자체내 인형공장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고 그 외에는 다른 곳으로 목수, 재단, 양복일을 하고있다. 자활원 설립목적은 무주택자인 농아들에게 집을 주고 생계를 돕는 일거리를 주어 자립정신을 키우고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약간 아쉬운 점은 성당에 나가도 통역해줄 사람이 없다는 점과 수화로 미사를 집전하실 수 있는 사제가 안계시다는 점이다. 앞으로 수화교리사및 통역사 양성이 시급하다.

1961. 5. 15 성 바오로 병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6쪽)

성 바오로 병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6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하고있던 제기동 성모병원이 차츰 번창하여 입원실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늘어나므로 홍순덕 이렌 수녀, 의사인 홍순자 아드리아 수녀, 이계 요세파 수녀는 1961년 5월 15일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여 가톨릭 의대 부속병원으로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70년 10월 15일에는 강원도 원주시에 분원을 개원하여 빈곤하고 불우한 벽지의 형제들에게 의료혜택을 주고 원성군 내 산간벽지를 순회하며 무료진료를 실시하는 등 사회복지사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75년 3월 연건평 4천평, 지하 2층, 지상 10층의 신관기공식을 가진 후 76년 11월 6일 당시로는 청량리 일대에 제일높은 건물로 청량리를 상징하는 새 병동을 준공하기에 이르러 250개의 병상으로 확장하였다. 종합병원, 부속병원으로서의 모든기능을 갖추고 발전시켜 나가면서 개원 20년 사이에 모두 17개의 임상과를 두게 되었다.

한편 의료사업 외에도 원내봉사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있는데 1985년 7월 5일 병원장을 고문으로 하여 발족시킨 자선회는 가난한 이웃과 고통받는 이들에게 힘이되어 준다는 취지아래 매월 작은 둥지회, 외방선교회, 결핵돕기회, 늘푸른 나무, 해성영아원 등을 돕고 있으며 또한 사정이 어려운 병원직원들에게도 도움을 주고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선회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년에 한 두 번씩 바자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1978년 7월 1일에 세워진 장학회는 구내매점 운영으로 얻어지는 이익금을 기반으로 장학금 재원을 확보하여 그해 8월 19일에 장학금을 지급한다. 인천 혜성보육원의 원아들과 쌘뽈양로원의 노인들을 위해서도 무료진료를 하고있다. 또한 1986년 부터는 애덕의 집 지체부자유자들의 진료를 무료로 담당하고 있으며 성직자 및 수도자들에게도 많은 혜택을 주고 인근의 불우한 주민돕기에도 솔선수범하고 있는데 무료입원 및 통원환자는 월 평균 10-20명에 이르고 있다. 성바오로 병원은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니만큼 환자의 질병뿐만아니라 영적 간호의 중요성도 인식하여 1973년 7월 16일 병원내에 원목실을 신설하여 가톨릭 병원으로서의 본연의 사목활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1986년으로 개원 25주년을 맞은 성바오로병원은 단순히 육신의 병을 치료해주는 병원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복음의 증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61. 10. 30 해성병원 시설 인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60쪽)

답동본당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60쪽)

인천 답동본당은 1897년에 건물이 완성되었으나 점차로 신자들이 증가하자 드뇌(Eugene Deneux, 全學俊, 1873-1947) 신부는 1933년, 성당의 신축공사에 착수, 1937년 6월 30일에 현재 모습의 성당을 건립하였다. 1982년 8월 9일에 답동성당은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 본당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첫 파견된 이래 본당 신부를 도와 전교는 물론 불우한 이웃들과 환자돌보기, 해성보육원 창설에 따른 고아들의 양육, 보호에 전력하였고 본당 내에 병원, 학교, 유치원이 설립됨에 따라 다양한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70년대에 인천교구청 기구확장에 따라서 교구사목국, 교육국, 성서후원회에서도 봉사하게 되어 인천교구 사목의 활성화에 협조를 하고 있다. 현재 11명의 수녀들이 함께 모여사는 답동분원은 각기 맡은 소임의 다양함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한 공동체로 생활하고 있다.

해성병원 - 1894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이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후 환자들에 대한 진료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그 것이 해성병원의 시초이다. 1935년 10월 14일, 아일랜드인 필로메나(Philomena Ralph) 수녀가 내한하여 보육원 아동들과 일반 환자를 위해 부속병원을 본격적으로 확장 개설하였고 1938년 10월 15일에 드뇌 신부는 사재(私財)를 들여 부속병원용 건물 3층을 현대식으로 신축하였다. 이 건물에는 16개의 방이 있었으나 주로 보육원 아동들을 위한 시설이라 입원시설은 없고 진찰과 시약만 하였다.

그 후 1961년 10월 30일에는 해성병원의 시설을 인가받았고 1970년 5월 30일에는 병원의 원사 1층을 대폭 수리, 이전하여 병원시설을 보완하였다. 1975년 인천의 답동에 있던 해성보육원은 1948년 용현동에 분원을 마련한 이후 영아원까지 모두 용현동으로 이전하자 아기들의 치료를 위해 1주일에 2∼3번씩 답동에서 왕진을 다녀야 했다. 또 급하면 가까운 의원으로 아기를 데리고 나가야 하는 불편 등으로 인하여 1984년 4월 28일에 해성병원은 인천의 해성보육원으로 이전하였다. 1991년 현재 1985년 11월에 이전해온 원주 바오로 병원과 통합되어 홍순자 아드리아나 의사수녀 외에 2명의 수녀들이 보육원 아기들과 인근 주민들의 진료에 힘쓰면서 의료사도직을 통한 복음전파에 노력하고 있다. 해성병원은 초기에는 서울보다도 훨씬 활발한 의료활동을 전개했었다. 그러나 이 병원은 본디부터 보육원 원아들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수녀회 에서는 수녀들을 기타 다른 의료기관으로 많이 파견한 이유 등으로 인해 해성병원은 보육원 부속병원으로서만 계속 작은 규모로 유지되어오고 있다.

박문유치원 -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드뇌 신부에 의해 1937년 3월 1일에 설립된 박문유치원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인천에서 우수한 유치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한동안 휴원하기도 했으나 1957년에 2학급으로 증설되면서 시설도 과학교육에 입각한 교구를 점차로 구비하고 강당, 보육실, 자료실, 양호실, 소꼽방, 실내·외 유구장, 풀장 등 다양한 설비를 갖추었다. 또한 위치도 답동성당 구내인데다가 이웃에 국민학교와 수녀원 등이 있어 좋은 교육환경을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 4,64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박문유치원은 학습발표, 리듬악기 발표, 연극발표회 등 다양한 발표회와 전인교육을 통해 매해 150명의 원아들을 교육하고 있다.

박문국민학교 - 1899년 인천 답동에 수녀원이 설치되면서부터 수녀들은 꾸준히 보육원 원아들과 신자들의 자녀 및 무산아동(無産兒童)들을 모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기관이 발전하여 1900년 9월 1일에 인천항사립박문소학교가 설립되었다. 그후 드뇌 신부는 1914년에 급증하는 아동들을 수용하기 위해 인천사립박문소학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6월, 남자부 교사 6학급을 다시 신축하여 1917년 4월 1일에는 이 2개교를 합병하여 인천박문학교로 개칭하였다. 수녀들은 박문학교 여자부를 운영하면서 특히 매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갖고 교리, 성서, 역사, 복음 등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 당시 수녀들의 학교는 제물포에 있는 학교들 중에서 가장 좋은 학교로 평가받고 있었다.

1925년 11월 27일에는 1922년에 개정된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인천사립박문보통학교로 6년제 정식인가를 받았다. 그후 1938년 4월 1일에는 개정교육령에 의해 인천박문심상소학교로, 1941년에는 다시 인천박문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6월 3일에는 건물 소개령으로 인해 남자부 교사를 헐게 되어 공립국민학교로 편입시켰으며 여자부 교사만이 남게 되었다. 당시 교사수녀들은 매일 아침 신사참배를 위해 학생들을 인솔하고 신사에 다녀와야 했으며, 남자부교사가 소개된 후에도 여자부를 위해 끝까지 헌신하면서 학교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1958년, 제 3대 교장으로 박영숙 데오판 수녀가 취임하면서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을 위임받았고 제 4대 교장인 이밀마 데레사 수녀 때 남녀 병설 12학급으로 인가받으면서 안정된 환경속에서 계속적인 발전을 해나갔다. 1961년부터 다시 인천교구에서 학교운영을 맡게 되자 수녀들은 계속 머무르며 교사 혹은 서무로서 일하였다. 그러다가 1977년 3월 2일에 제 10대 교장으로 이종후 빌뚜데스 수녀가 취임하여 제 3대, 제 4대의 수녀교장 이후 약 15년만에 다시 수녀가 학교운영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해 6월에 도서실을 개설하였고 1981년 11월에는 12개 교실을 증축하여 학교시설을 확장하였다. 이듬해에는 교내방송국을 개설하였으며 1984년 12월에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명문사학으로서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학부형들의 참여와 활동또한 대단하여 인천시내학교 어머니 글짓기 대회, 어머니 합창대회, 어머니 배구대회 등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하였다.

1988년 2월 최루시아 임마꿀레 수녀가 제11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현재는 교육시설을 완비하고 특별히 예능교육, 정보처리기능교육, 조기영어교육 등을 실시하면서 기초학력을 신장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또 매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담임교사들이 직접 맡고 있어 신앙생활과 실행활과의 연결 및 품성교육을 겸하고 있으며,천주교회 학교의 특성을 잘 살려 나가고 있다. 1989년말 현재 교장수녀와 함께 교사수녀 1명, 일반교사 18명, 직원 9명 등이 972명의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가톨릭 회관 - 1973년 3월 1일 인천 가톨릭회관이 준공되고 1975년 3월 31일부터 이명자 마리안나 수녀가 부임하여 교구의 전반적인 사목을 돕다가 1980년부터는 회관 내에있는 각 국이 분리 운영되어 사목국, 교육국, 성소후원회에 각각 담당수녀가 파견되어 교구사목을 돕고 있다.

〈사회복지부〉- 1985년 11월 10일에 류병순 마리 도미니카 수녀는 답동분원에서 자체적인 사회복지활동을 전개, 주로 청소년 근로자를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고 그후 1987년 3월 2일 이춘근 시몬 스독 수녀가 교구 사회복지부에서 개설하여 답동분원으로 이관한 해성어머니 한글교실을 담당하면서 답동분원의 사회복지 활동은 본격화 되었다. 해성어머니 교실은 문맹인 주부들에게 글을 가르쳐 가정 및 신앙생활의 향상을 돕기 위해 마련陖는데 종교와는 관계없이 25세 이상의 주부들을 대상으로 2년의 기간동안 한글교육과 산수, 일반 교양강좌를 실시하고 있으며 매일 평균 100명 정도의 주부들이 참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위한 교리반도 운영하여 문맹으로 인해 각 본당에서 교리를 배우지 못했던 영세자 및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1961. 살레시오 여자고등학교 설립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살레시오 초·중·고등학교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살레시오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1954년 광주 교구장 현 헤롤드 주교는 살레시오회 선교사 신부인 마르텔리 신부를 비롯한 살레시오 수도회를 광주에 초청한 후 1958년에는 가톨릭 여성교육을 위해 성 요한 보스꼬의 예방 교육 정신에 따른 전인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시작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전남 광주에서 살레시오 초등학교는 1963년에 여자중학교는 1958년에, 그리고 여자고등학교는 1961년에 선교사 살레시오 수도회의 지부장인 Archimede Martelli 신부가 설립하였다. 설립당시의 규모는 초등학교는 12학급이었고 중학교는 9학급, 고등학교는 9학급 이었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 라는 돈 보스코의 설립목적에 따라 소외되고, 가난한 청소년들이 정직한 시민, 착한 그리스도 인이 되도록 교육하고 있다.

1961. 오스트리아 부인회 (오지리 부인회)설립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61. 소록도 국립 나병원에서 까리따스 수녀원에 미감아 보육소의 운영을 부탁 (교회와 역사 223호 22쪽) - 1993. 12. 25발행

소록도 미감아 보육소 (교회와 역사 223호 22쪽) - 1993. 12. 25발행

미야사끼 까리따스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 5년 후인 1961년 당시의 소록도 국립 나병원 원장은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5천여 나환자 자녀들이 양육과 교육을 가톨릭 교회의 수녀들에게 맡기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뜻을 당시 교구장이던 현 대주교에게 알렸고 이 요청이 전달되자 장상들은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130여명의 미감아들이 있었는데 가장 나빴던 것은 아이들의 식생활이었고 방한 시설도 형편없어 겨울에는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수녀들은 이것들을 해결해 줄 것을 병원 당국에 청했으나 병원측에도 어떤 뚜렷한 대책이 없음을 알게 되자 평양교구 안주교님을 통하여 N.C.W.C(가톨릭 구제회)의 원조로 어느 정도 식생활을 개선하는 동시에 당시 까리따스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편물학원에 의뢰하여 털쉐타를 짜서 입히는 등 영적 교육과 아울러 할 수 있는 한 물적 혜택을 주도록 노력하면서 부모의 사랑조차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까리따스 특유의 가정적 정신으로 돌보았다. 특히 어려웠던 점은 병원측 관계자들이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예산과 물건을 중간에서 빼돌려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알게 된 수녀들은 그들과 맞서서 아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그들과 갈수록 어려운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과 함께 이 보육소의 국가운영이 강조되어 병원측으로 이관되자 많은 아쉬움을 간직한 채 4년 반 정도 계속되었던 이 사업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

1962. 2 전진상 교육관을 완공하여 운영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국제가톨릭형제회 (영)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76쪽)

불일치와 부정의가 있는 현실에 도전함으로써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복음을 기초로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주력한다. 全眞常 정신을 중요시하며 全은 온전한 자아의 봉헌을 뜻하며 眞은 참다운 사랑을 뜻하며 常은 끊임없는 기쁨 속에서의 생활을 뜻한다.

1962. 3. 9 쌘뽈여자중고등학교 개교식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48쪽)

쌘뽈여자중고등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48쪽)

1952년 전투가 소강된 상태에서 육군 제2훈련소가 논산에 위치하게 되면서부터 논산군의 인구는 급격히 팽창하여 20만으로 불어났고 읍내 인구만도 3만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논산에는 여학교가 없어서 여학생들은 멀리 대전으로 또는 20리 떨어진 논산보다 작은 강경으로 통학해야 했다. 주민들은 계속 도에 여학교를 설립해 줄것을 호소하였으나 냉담한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힘에 벅찬 여학교 경영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에 천주교재단의 대건중고교가 새 교사로 신축 이전하면서 구 교사가 남게되자 당시 논산 부창동본당의 생제신부가 여학교를 시작할것을 착안하고 이를 추진하다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이 사업을 의뢰하였다. 수녀원에서는 이 학교를 이양받기는 하였으나 그 당시 학교를 위한 인력, 재력의 기원을 해 줄 형편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침 전주 성심여중고에서 철수하게된 3명의 수녀들이 오게되어 개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인력자원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 여학교는 1961년 12월 19일 해성여자중고등학교로 중·고 각각 6학급씩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1962년 3월 9일 개교식을 갖게되었다.

부창동 본당과 한 울 안에 있어 긴밀한 관계아래 서로 도와가며 생활하고 있는 쌘뽈여자중고등학교는 한때 송구부와 무용부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고 완전 개가식 도서관은 충남에서 손꼽히는 우수한 도서관이며 방송실은 TV를 통한 학습지도뿐만 아니라 부족하기 쉬운 정서순화를 위해 명상의 시간을 마련하여 학생과 교사가 다함께 참여하여 이 시간의 활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가톨릭 정신에 입각하여 설립된 학교이니만큼 종교교육에도 힘을 쏟고있다. 중 1부터 고 2까지 매주 1시간씩 종교수업을 실시하고 있으며 종교수업 이외에 예비자 교리시간을 운영하여 많은 학생들이 세례를 받고있다. 교사들을 위한 교리시간도 마련하여 교사중 2/3가 신자교사가 되었다. 학생들의 종교활동으로는 중학교 8팀, 고등학교 11팀의 레지오 마리애가 활동중이고 학년별 예비자 교리는 교장수녀를 비롯하여 모든 수녀들이 담당하고 있다.

1962. 5. 31 쌘뽈 기숙사 축성식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0쪽)

쌘뽈 기숙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0쪽)

쌘뽈여자 중·고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논산은 개교당시 교통수단이 매우 불편할 뿐 아니라 제2훈련소의 설치로 급격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활지도가 큰 문제로 등장하였으므로 학교에서는 기숙사를 실비로 운영하여 원거리 통학생의 편리를 도모하는 한편 다른 지방에서 온 많은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돕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를 알게 된 당시 충남교구장 라리보 주교가 기숙사를 위해 140만환을 기증해 주어서 1962년 5월 31일 축성식을 마치고 학생들을 입사시켰는데 위치는 현재의 강당 앞 부분이었다. 그 당시 입사비는 2,000환, 월사비는 13,000환이었고 수녀들과 가깝게 생활한 까닭인지 후에 이곳을 거쳐 수녀가 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워낙 건물이 낡고 위험해서 계속 학생들을 받기가 곤란하여 입시생수를 단계적으로 줄이다가 1979년에 폐사하였다.

1962. 6. 16 성모자애 보육원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성모 자애 보육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처음에 한 개인에 의하여 1962년 6월 16일에 설립하여 운영되어 왔으며 1971년 12월 20일 도봉구 상계동으로 시설이전을 하였다. 시설도 부족한데다가 수차에 걸쳐 운영진이 바뀌면서 성장과정 어린이들에게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어 서울시에서 가장 낙후된 환경과 시설로 지목, 폐원 위기의 어려운 형편에 이른 것을 서울 가톨릭 사회복지회에서 직접 인수하여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운영토록 주선하였다.

1985년 2월 차영자(요한) 수녀와 김정자(쁘로따시오) 수녀, 김경숙(마리아) 수녀가 파견되었으며 한달 후인 3월 김용자(아가다) 수녀가 파견되었다.

1985년 1월 31일 58명의 어린이를 인수하였다. 수녀들이 처음 파견되어 갔을때 다 쓰러져가는 몇 재의 붉은 벽돌집이 있고 그 안에는 문도 없고, 눈이나 비가 오면 화장실이 넘쳐 오물은 방안까지 스며들고 마당은 수렁이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보다 더 슬프게 만드는 것은 어린이들의 얼굴 표정에서 감정을 찾아볼 수 없고 차갑고 굳은 표정이었다. 정박아로 특별 치료와 교육이 필요한데도 방치되어 있는 어린이들, 간염에 걸려있는 어린이가 무려 30명이 넘고 게다가 3명은 결핵을 앓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있었다. 간장, 고추장, 된장부터 구걸해야 하는 형편에 어린이들에게 영양가있는 음식을 마련해 준다는 일은 꿈만 같았다. 수녀들은 동분서주 하며 은인을 구하였다. 원아들에게 공부할 수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전에 원장 사택을 개축하여 도서관을 만들어 주었다. 신학생들도 고락을 함께 해주며 어린이들의 학습지도를 해주었다. 이렇게 겨우 자리가 잡혀가는데 7개월만에 성모자애원은 무주택 주민을 위한 택지개방 지역로 묶여 철거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간의 줄기찬 노력과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과 격려가 있었다. 3년간의 가건물 생활, 천막 생활 끝에 비로소 1987년 여름 현재의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었다. 성모자애원에는 가정교육의 하나로 웃어른 공경, 올바른 마음과 몸가짐, 바른 언어 사용, 책임감있는 생활, 질서있는 생활, 양보하는 생활을 가르치고있다. 그 외에도 학습지도, 지속적인 신앙교육, 정서교육을 시키고 상담도 해주고 있다.

수녀들의 기도와 사랑, 후원자들의 알뜰한 보살핌과 자원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봉사는 결국 어린이들의 냉랭한 가슴안에 서서히 따스함이 스며들어 있고 그들안에 사랑의 싹을 트일 수 있었다. 수녀들은 봉사자 어머니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역할 등의 교육이 있다면 부지런히 좇아가 교육을 받는다. 성모자애원은 매달 첫째 주 월요일에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보육원 출신자 세쌍의 혼배가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였다.

원장 차요한 수녀는 성모자애원의 고아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여 고운 문화재단에서 제정한 제 1회 고운봉사상을 수상하였다. 원아들이 학교에서 시설 아동이라는 것을 다른 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학교에서 해 오라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주고 있다. 그렇게 하기까지는 원아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도시락 반찬에도 마음을 쓰고 있다. 많은 은인들과 수녀들의 정성으로 현재 원아들은 모두 건강하고 명랑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1962. 7. 11 '까리따스 문화 복장 학원'이라는 이름의 편물 양재 학원 설립 (교회와 역사 223호 22쪽) - 1993. 12. 25발행

편물 양재 학원 (교회와 역사 223호 22쪽) - 1993. 12. 25발행

"본회는 돈보스꼬의 정신을 충실히 살아 온 창설자 안토니오 가보리 사제를 본받아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하여 도덕적 종교교육을 베풀며 필요에 따라서는 직업의 실천지도를 향한다."(회헌 12)는 정신 아래 농촌의 가난한 아가씨를 위한 직업 교육의 일환으로 1962년 7월 11일 '까리따스 문화 복장 학원'이란 이름을 걸고 학동 본원에 직업학교를 개설하여 편물과 양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입학 당시에는 대부분 생활이 넉넉치 못한 60명이 넘는 시골 아가씨들과 부인들이었는데 이중에는 미감아들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무료로 기숙사를 마련해 주는 등 아낌없는 배려와 함께 그들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러나 차차 기성복 이용도가 높아지고 사회인들이 많은 학원을 세움으로 인해 학생들을 확보할 수 없는데다가 일반인들의 유행에 민감하게 따르지 못하는 수녀들의 취약점 등으로 인해 저조한 현상을 보이다가 이들의 직업 교육을 위해 시대와 지역사회의 필요에 의해 성립된 이 학원은 그 목적을 최대한으로 실현시키면서 까리따스 수녀원의 정신을 펼 수 있던 사업이었다.

1962. 8. 30 '성가병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4쪽)

성가병원 聖家病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4쪽)

최덕홍(요한, 1902-1954) 주교는 대구교구장으로 착좌한 후 대구에 가톨릭 병원의 설치를 시도하던 중 평신도 박영대씨의 개인병원이었던 '대구중앙병원'을 구입하여 교구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최주교는 개업을 위한 준비와 병원운영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1950년 3월 23일 부터 고도리 마리비안네 수녀와 김순심 베놔 수녀 그리고 최서시 십자가의 요한 수녀 3명이 임시 파견되어 병원개업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 병원은 오랫동안 운영난으로 부진했던 시설인 만큼 안팎으로 손댈 곳이 많았다. 3명의 수녀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어 본원 수녀들과 수련자들까지 동원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해성병원'(海星病院)이라는 이름으로 1950년 5월 1일에 개업하였고 이와 동시에 분원도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그 당시 병원에는 내과, 소아과, 안과의 4과와 4명의 의사가 있었고, 수녀 공동체에는 분원책임으로 부임한 하외학 데레사 수녀와 병원에 근무하는 수녀 3명, 그리고 지원자를 합하여 7명이었다. 개업 후 55일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병원은 피난민수용소처럼 되었다가 곧 이어서 야전병원으로 변하였다. 의사들도 차레로 피난가고 그 중 최 의사 한 사람만이 끝까지 남아서 수녀들과 함께 전쟁을으로 인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돌보았다. 1955년 안정을 되찾은 후 '해성병원'을 '성가병원'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서정길(요한 1911-1987) 주교는 대구교구장으로 착좌한 후 대구교구의 숙원사업인 가톨릭 종합병원의 설립을 시도했다. 서정길 주교는 1960년에 이르러 독일 미제레올(Misereor)의 후원으로 병원신축을 계획하면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한국관구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침 덕원에서 월남하여 대구에 안착하기 시작한 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에서 이를 수락하여 현 파티마병원 신축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운영이 부진하던 성가병원을 점차적으로 정리하다가 파티마병원 개원 전, 1962년 8월 30일로 문을 닫았다.

1962. 소명여자 중고등학교를 인수 (608쪽 성가수녀회)

성가수녀회 (영) Holy Family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08쪽)

1943년 12월 생제(Singer) 신부에 의해 창설된 방인 수도회. 일제 말기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불우한 이들을 돕기 위한 '성가 소비녀'의 공동체가 시작되자 1943년 이재현 신부, 공베르(A. Gombert) 신부와 함께 생제(Singer) 신부가 회칙을 작성하여 노기남 주교의 인준을 받고 창립인가도 받았다. 1945년 6월 수련생활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로부터 지도를 받았고, 1947년 1월에 첫 허원식을 라리보 주교에 의해 거행할 수 있었다. 1953년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양로원'을 인수받아 1979년 증축한 후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하고 있다. 1958년 8월에는 서울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한 뒤 1969년 현재의 서울 하월곡동으로 이전하고 가톨릭의대 부속병원인 종합병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한편 1962년에는 소사에 있는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착수하였다. 이밖에 편물과 보세가공을 가르치는 '나자렛 기술학원'(1960-1969)과 '미망인 양재소'(1964-1980)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968년 8월에는 서울 혜화동에 있던 본원을 현재의 서울 정릉1동으로 이전하여 1969년 1월 창립 25주년과 함께 신축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74년 성가회 명칭을 '성가수녀회'로 개칭하면서 1976년에는 새 회헌과 규칙의 인준도 받았다. 1985년 현재 3개의 병원과 1개의 학교를 비롯하여 1977년 개원한 신체장애양로원인 '안나의 집'등의 특수사목활동분야에서 활동할 뿐만 아니라 본당 사목활동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962. 성모 자애원 설립 (나눔지 67호 3쪽) - 1985. 10. 5발행

성모 자애원 (나눔지 67호 3쪽) - 1985. 10. 5발행

성모자애원의 설립은 1962년 개신교 신자가 개원하여 운영하던 중 다시 불교와 개신교를 넘나드는 파란을 격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폐쇄위기에 있는 자애원을 가톨릭 사회복지회가 85년 8월에 인수하였다. 성모자애원에는 6개동의 집이 있다. 한동은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5개동에 5세-18세 70명의 아동이 살고있다. 2-3개의 방과 마루, 화장실로 이루어져있는 각 집에는 연령, 성별로 나누어 한집에 10-15명의 아이들이 잠을 자고 공부를 한다. 아이들에게 특별한 질병은 없지만 영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병에대한 저항력이 없다. 성모자애원의 운영은 서울시에서 지원과 신자들의 기부금과 수녀회의 도움으로 아이들의 생활과 교육을 돌보고 있다.

1962. 부산에 메리놀 병원 개원 (383쪽 메리놀 수녀회)

메리놀 수녀회 (영) Maryknoll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83쪽)

1912년 미국 가톨릭 외국선교단체 메리놀 수도회 내에서 메리로저스(Mary Rogers) 수녀에 의해서 창설된 수녀회. 1924년 10월 한국진출. 메리놀 수도회의 수녀들은 본당활동과 의료사업, 교육사업등에 종사하였고 여자기예학원과 시약소및 고아원을 설립하여 기술교육 및 봉사활동을 하였다. 1932년에는 평양으로 진출하여 한국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후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라는 수도회가 되었다.

진남포에서는 1934년부터 부녀자와 소녀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3년 부터는 서울 영등포 공업단지에서 단체활동을 실시하였다. 1974년에는 전남 소록도 국립병원에서, 1976년 부터는 경북 울진군에서, 1977년 부터는 경기도 부평에서, 1979년 부터는 전남 광주의 천주의 성 요한 병원에서 각각 의료활동을 돕고있다.

1962. 부산 메리놀병원이 주한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대식건물로 설립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 (영) Maryknoll Sisters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는 1912년 메리 로저스수녀에 의해 창립되었다. 창립정신은 인류에게 책임을 다하고 도움을 주고 문화적 배경과 지역적 제한 경제, 사회, 종교적인 범주를 벗어나 모든 국가간의 평화와 정의와 우정을 도모하고 나누는데 있다. 1924년 10월 메리놀회 신부들의 초청으로 평북 의주에 처음 진출하였다.

북한에서의 활동 (1926∼1942) :

1924년 부터 시작된 의주에서의 활동은 처음에는 본당 사목과 가정방문이었으나, 얼마 후 소규모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3명의 수녀를 의주에 남겨두고 1926년 수녀회 한국지부를 영유(永柔)로 옮기고 그곳에 여자기예학원을 세워 15세 전후의 소녀들에게 기술습득의 길을 열어주는 사업을 하였다. 또한 시약소와 고아원을 설치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1933년 멜시 수녀 등 3명은 신의주로 파견되어 성모회를 창설하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가정방문과 외래환자 진료소와 이동진료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1932년 메리놀회 신부의 요청으로 평양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한국여성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이 모임은 후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라는 수녀원의 창설동기가 되었다. 1935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입원실과 무료진료소를 설립하였으며 1936년 본당 사업과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또한 진남포에서는 1934년 부터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활동을 중지하고 메리놀회 수녀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해방후의 활동 (1950∼현재) :

본국에 철수했던 메리놀회 수녀들은 전쟁이 끝나자 1950년 제1진이 다시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의료사업과 전교사업을 통하여 주민들에게 봉사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1952년 제2진의 수녀들은 제차 부산에 진출하여 전쟁중인 비상시를 위하여 장기간의 의술봉사를 하여 왔으며 음식과 옷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결핵요양소와 교리학습을 위한 장기 계획도 수립하게 되었다. 휴전 후 메리놀 수녀들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956년 충북 괴산군 중평읍에 메리놀의원을 개원하여 의술치료와 보건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1960년 부산에서 가별(Gabrialla) 수녀가 신용협동조합을 처음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지금은 협동교육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1962년 부산 메리놀병원이 주한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대식 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1963년 메리놀 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은 콘로이(Conroy)수녀가 맡았으며 1967년 메리놀 병원의 관리가 부산교구로 이관되었다. 1962년 2월 인천교구 답동 본당에서의 종교활동을 돕고 학생지도 및 영어지도를 실시하여 왔으며 1967년 3월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회관에서 청소년 지도자 강습과 여성들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1963년 경기도 강화읍에 그리스도왕 의원이 설립되어 메리놀회 수녀들은 의사와 간호원으로 일하였으며 전교사업도 함께도왔다. 1969년 초 요안 서빈 수녀는 백령도에 소재한 김안드레아병원에서 간호과 책임자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74년 대한 적십자가 인수할 때까지 섬 사람의 건강과 아울러 간호보조원 교육과 훈련을 부지런히 해왔었다. 백령도에서 철수하여 본원에서 일하던 3명의 수녀들은 전남 소록도에 있는 국립병원에 자원봉사 간호원으로 활동하고 1973년 성신강림 대축일 김수환 추기경의 허락을 얻어 2명의 수녀가 그리스도께 헌신할 조그마한 단체의 조직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공업단지 근처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진료소의 간호원으로 상담자로서, 노조에서 간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 등을 맡아보게 되었다. 1976년 9월 가이에르 수녀가 서강대에서 영어를 담당하는 외에 경북 울진 진료소 활동, 부평 본당에서 종교사업과 노동자를 위한 사업활동 1979년 10월 광주의 천주의 성요한병원에서 환자가족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1980년 거창 나환자 마을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1981년 11월 부터 성남시에서 2명의 수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과 전교활동에 힘쓰고 있다.

1962. 원산 수녀원에서 해성국민학교, 해성유치원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운영 (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베네딕토수녀회 (라) Benedictina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 수녀회로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와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있는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830년 1월 9명의 동정녀들이 블룸(Joset Lenoz Blum)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자매들의 학원'이라는 공동체 생활이 효시가 된 후 1892년 9월 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타노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회의 수족에 연합됨으로써 발족된 수녀회로서 1931년 9월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904년 7월 27일 성 오틸리엔(St. Ottilien)의 모원으로부터 분할 독립된 투칭(Tutzing)의 모원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투쟁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수녀들이 1925년 11월 25일 한국에 진출하였다.

⸁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 1931년 9월 한국 진출. 1963년 10월 교황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설립목적은 지역사회의 여성교육과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할 봉사자를 양성하는데 있다. 1931년 당시 욘갈 교구장 브레허(T. Breher, 白)주교의 요청으로 6명의 수녀가 처음 내한하여 연길교구 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용정하시 본당에 첫 분원이 생긴 이후 1945년까지 7개의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원수에 있어서도 1939년까지 20명의 수녀가 스위스 모원으로부터 파견되었고, 1944년까지 21명의 한국인 수녀가 서원하였다. 그러나 1945년 8.15광복 이후 러시아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사상통일공작'에 의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월남하기 시작한 수녀들은 남한의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인 1951년 4월 유을준 의사와 람께 부산 초량동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2년 부터는 지원자들도 입회하기 시작하였고,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했던 수련장 베다(Konig Beda) 수녀도 1958년 3월 다시 내한하여 수련지도를 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 동래구 광안동에 대지를 마련하여 1965년 우선 수련원부터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후 본원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9년 경기도 부천·소사에 지원(支院)을 설립하고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의료봉사활동 이외에도 부산에서는 1949∼1980년에 걸쳐 10개의 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울산·대구·마산 그리고 미국의 뉴옥 등지에서도 전교활동을 하고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교구청 사목국, 해외교포 사목 등 특수 사목에서도 활동을 하고있다. 1972년 12월 대리구(代理區)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에 임남훈 수녀가 피임되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1년 6월 관구로부터 교황청 직속 수녀회로 승격되어 모원과 동등한 자립수녀회로 인가를 받고 초대 총원장에 김지상 수녀가 피임되었다.

⸂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원산교구의 활동 : 1920년 8월 25일 원산교구가 설정됨에 따라 성 베네딕토 남자 수도회는 그 사목을 위임맡아 덕원으로 수도원을 이전하고 함경남·북도의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수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당시 교구장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는 독일의 투찡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rers of Tutzing)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4명의 수녀가 1925년 11월 21일 내한하였다. 1926년 수녀원에서 방 한칸을 내어 전교를 시작하여 그 예비자반은 후에 '호수천사학교'로 발전하였고 1927년 6월 6일에는 새 수녀원의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며 아울러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분원장으로는 마틸데 히르시 수녀가 임명되었고 1927년 5월 3일 첫 지원자를 받았다. 1926년에 사목활동을 시작한 원산수녀원에서는 해성국민학교, 해성 유치원, 본당활동,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또한 1926년에 신설된 함흥 분원에서는 본당활동과 학교에서의 전교활동을, 1940년 신설된 청진 분원에서는 성심의원 운영과 본당활동을, 1948년 신설된 흥남 분원에서는 본당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서양수녀들의 일어 사용, 3개월 마다의 거주신청 경신, 신사참배, 국내여행 신고, 식량난 등은 물론 1944년에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모든 학교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광복 후에도 소련군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학교와 유치원이 소련군 장교숙소와 군인 교육기관으로 바뀌고 토지개혁으로 인한 농토도 몰수당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정치보위부 교화소로 옮겨졌다가 5월 16일 일부 수녀들은 수녀원으로 되돌아왔으나 곧 해산당하였고 서양수녀들은 서양신부, 수사들과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54년 1월 22일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대구에서의 활동 : 1950년부터 월남한 수녀들과 6.25동란으로 피난나온 수녀들이 부산에서 미군들의 삯빨래 등으로 생활하다가 1951년 10월 20일 당시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주선으로 대구 남산동 본당 내 사제관 일부에서 정착하였고 1955년 1월 현 대구 신암동에 건물을 신축하여 정착하였다. 1956년 대구 분원이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고 초대 원장에는 오테마라(M. Othemara Ammann) 수녀가 임명되었다. 대구에서의 활동으로는 1956년 현재 파티마의원을 개원하고 1958년에는 대구 신암동 본당에, 1960년에는 반야월 본당에, 1955년에는 대구 시립병원과 희망원에서, 1968년에는 국군간호학교에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대구시내 3개본당(신암동, 공평동, 동인동), 서울시내 3개본당(왕십리, 돈암동, 동선동), 경북 성주, 상주, 김천, 경산, 함창, 경남 마산에 각각 분원과 선교활동, 의료활동, 교육활동에 적어도 4명 이상의 수녀가 파견되어 있다.

1962. 베네딕도회가 성주성심의원 개원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62. 원산 수녀원에서 해성국민학교, 해성유치원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운영 (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베네딕토수녀회 (라) Benedictina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 수녀회로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와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있는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830년 1월 9명의 동정녀들이 블룸(Joset Lenoz Blum)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자매들의 학원'이라는 공동체 생활이 효시가 된 후 1892년 9월 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타노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회의 수족에 연합됨으로써 발족된 수녀회로서 1931년 9월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904년 7월 27일 성 오틸리엔(St. Ottilien)의 모원으로부터 분할 독립된 투칭(Tutzing)의 모원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투쟁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수녀들이 1925년 11월 25일 한국에 진출하였다.

⸁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 1931년 9월 한국 진출. 1963년 10월 교황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설립목적은 지역사회의 여성교육과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할 봉사자를 양성하는데 있다. 1931년 당시 욘갈 교구장 브레허(T. Breher, 白)주교의 요청으로 6명의 수녀가 처음 내한하여 연길교구 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용정하시 본당에 첫 분원이 생긴 이후 1945년까지 7개의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원수에 있어서도 1939년까지 20명의 수녀가 스위스 모원으로부터 파견되었고, 1944년까지 21명의 한국인 수녀가 서원하였다. 그러나 1945년 8.15광복 이후 러시아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사상통일공작'에 의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월남하기 시작한 수녀들은 남한의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인 1951년 4월 유을준 의사와 람께 부산 초량동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2년 부터는 지원자들도 입회하기 시작하였고,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했던 수련장 베다(Konig Beda) 수녀도 1958년 3월 다시 내한하여 수련지도를 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 동래구 광안동에 대지를 마련하여 1965년 우선 수련원부터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후 본원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9년 경기도 부천·소사에 지원(支院)을 설립하고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의료봉사활동 이외에도 부산에서는 1949∼1980년에 걸쳐 10개의 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울산·대구·마산 그리고 미국의 뉴옥 등지에서도 전교활동을 하고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교구청 사목국, 해외교포 사목 등 특수 사목에서도 활동을 하고있다. 1972년 12월 대리구(代理區)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에 임남훈 수녀가 피임되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1년 6월 관구로부터 교황청 직속 수녀회로 승격되어 모원과 동등한 자립수녀회로 인가를 받고 초대 총원장에 김지상 수녀가 피임되었다.

⸂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원산교구의 활동 : 1920년 8월 25일 원산교구가 설정됨에 따라 성 베네딕토 남자 수도회는 그 사목을 위임맡아 덕원으로 수도원을 이전하고 함경남·북도의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수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당시 교구장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는 독일의 투찡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rers of Tutzing)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4명의 수녀가 1925년 11월 21일 내한하였다. 1926년 수녀원에서 방 한칸을 내어 전교를 시작하여 그 예비자반은 후에 '호수천사학교'로 발전하였고 1927년 6월 6일에는 새 수녀원의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며 아울러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분원장으로는 마틸데 히르시 수녀가 임명되었고 1927년 5월 3일 첫 지원자를 받았다. 1926년에 사목활동을 시작한 원산수녀원에서는 해성국민학교, 해성 유치원, 본당활동,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또한 1926년에 신설된 함흥 분원에서는 본당활동과 학교에서의 전교활동을, 1940년 신설된 청진 분원에서는 성심의원 운영과 본당활동을, 1948년 신설된 흥남 분원에서는 본당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서양수녀들의 일어 사용, 3개월 마다의 거주신청 경신, 신사참배, 국내여행 신고, 식량난 등은 물론 1944년에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모든 학교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광복 후에도 소련군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학교와 유치원이 소련군 장교숙소와 군인 교육기관으로 바뀌고 토지개혁으로 인한 농토도 몰수당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정치보위부 교화소로 옮겨졌다가 5월 16일 일부 수녀들은 수녀원으로 되돌아왔으나 곧 해산당하였고 서양수녀들은 서양신부, 수사들과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54년 1월 22일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대구에서의 활동 : 1950년부터 월남한 수녀들과 6.25동란으로 피난나온 수녀들이 부산에서 미군들의 삯빨래 등으로 생활하다가 1951년 10월 20일 당시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주선으로 대구 남산동 본당 내 사제관 일부에서 정착하였고 1955년 1월 현 대구 신암동에 건물을 신축하여 정착하였다. 1956년 대구 분원이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고 초대 원장에는 오테마라(M. Othemara Ammann) 수녀가 임명되었다. 대구에서의 활동으로는 1956년 현재 파티마의원을 개원하고 1958년에는 대구 신암동 본당에, 1960년에는 반야월 본당에, 1955년에는 대구 시립병원과 희망원에서, 1968년에는 국군간호학교에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대구시내 3개본당(신암동, 공평동, 동인동), 서울시내 3개본당(왕십리, 돈암동, 동선동), 경북 성주, 상주, 김천, 경산, 함창, 경남 마산에 각각 분원고 선교활동, 의료활동, 교육활동에 적어도 4명 이상의 수녀가 파견되어 있다.

1963. 1 김기봉 신부는 광안동 성모건설원에 신경 전문 치료병원인 '성 필립 신경 정신과' 개설 (교회와 역사 208호 11쪽) - 1992. 9. 25발행

김기봉 金基奉, 필립보, 1914∼1967 (교회와 역사 208호 11쪽) - 1992. 9. 25발행

舊敎友 집안인 깁기봉 신부의 가계는 연안 김씨인 것만 확인된다. 1938년 6월 11일 사제로 서품된 김 신부의 첫 부임지는 구태인읍본당에 부임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말기에 접어 들자 일제의 압박은 더욱 극심해졌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이거하였다. 당시 만주 지역은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일제가 메리놀회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기에 만주 지역의 사목은 평양교구에서 도와주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평양교구 자체도 원래 메리놀회의 선교 지역이었고, 선교사들이 추방되었기에 1943년 6월 29일 洪龍浩(프란치스코) 주교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신부 수가 많지 않았고, 1942년 2월 부터 평양교구에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하던 서울교구 소속 신부들이 교구 귀속문제로 인하여 1944년 12월경 서울교구로 돌아 갔기에 평양교구 자체도 형편이 대단히 어려웠다. 만주에 이어 북경의 北堂성당에서 사목하던 김기봉 신부는 중국이 공산화되고 북한에서의 여러 상황이 심상치 않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부산교구로 돌아왔다.

부산으로 돌아온 김기봉 신부는 청학동 본당의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강당을 신축하여 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수녀원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어 영도 신성동 3가에 聖母建設園이란 고아원을 설립하여 사회 사업을 시작하였다. 6·25 한국전쟁 중 최후의 거점이었던 부산에서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들었고, 그런 중에 버려지거나 방황하는 아이들이 많이 생겨났다. 김기봉 신부는 그러한 아이들을 돌보아야 겠다고 생각하여 영도 청학동 본당에서 신선동본당을 독립시키는 한편 그 안에 고아원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먼저 신선동 3가 84번지에 있는 목조 건물을 매입하여 본당 신설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당시 신선동 3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 페트릭 데니어 특무상사의 협조를 얻어 황무지 930평을 정리하는 한편 1954년 8월 11일에는 사회부장관으로부터 재단법인 성모건설원을 인가받았다.

1955년 1월 1일자로 본당 승격된 신선동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김기봉 신부는 미군들의 협조를 얻어 1956년 11월에 건평 60평의 성당과 사제관을 낙성하였다. 이어 8월까지 고아원 원사 2동과 부속건물 2동을 완공하여40명의 원아들을 수용하였다. 원아들은 점점 증가되어 1956년 10월에는 70여명을 수용하였다. 그 후 성모건설원은 1957년 5월에 정부로부터 시설 기구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1959년 이후에는 정부 보조 및 의원 단체의 보조가 끊어질 우려가 보이므로 가톨릭 부인회에 호소하여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로부터도 많은 원조를 받았다. 그 결과 새 원사를 광안동의 대지에 신축하고 이듬해 10월에는 성모건설원을 신선동으로부터 이전하였으며 이때 부터는 본당 사목생활을 마감하고 성모건설원에만 주력하였다.

1957년 8월 26일 운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대양중공업고등학교를 천주교 부산교구 재단에서 인수하자 대양 중고교(지금은 중학교만 남아 있음)의 4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1960년 5월 13일까지 교육사업에도 헌신하였다. 교훈은 충직, 진실, 덕망이었다. 특히 학교 내에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여 전교에 주력함으로써 수많은 학생들을 영세시켰다. 이어 1963년 1월에는 광안동 성모건설원 2층에 신경전문치료병원인 '성 필립 신경정신과'를 개설하였다. 정신신경 계통의 환자 치료를 목적으로 하였고, 나아가 거기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성모건설원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대지 165평, 건평 65평, 병실 10개, 침대 20개, 의사 1명, 조수 2명, 간호사 1명의 규모로 연간 9,89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당시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주임이던 오석환 교수가 담당의사로 초빙되었고 오석환 교수에 이어 팽갑주씨가 담당 의사로 근무하였는데 운영난으로 3년만에 폐원하였다. 병원의 일반 진료소는 병원 주위의 난민들의 구제치료 및 성모건설원 아이들의 치료를 하였다.

1967년 4월 6일 김기봉 신부는 숙환으로 휴양 중이던 부산 광안동 성모건설원에서 선종하였다. 4월 7일 서품 동기인 최재선 주교의 집전으로 영결미사가 봉헌되었고, 부산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63. 3. 12 쌘뽈 국민학교 개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1쪽)

쌘뽈 국민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1쪽)

쌘뽈 국민학교는 1963년 3월 12일 각 학교 1학급 50명씩 충청남도 교육위원회로부터 인가를 받아 대건중고등학교가 사용했던 목조건물의 일부를 교사로 인수받고 개교하였는데 위치는 현 쌘뽈여중고의 교문과 차고 쪽이었다. 초대교장은 쌘뽈여중고의 교장이었던 박상일 수녀가 겸임하였고 착실한 국민학교로 인정받으며 발전하였으나 남녀공학으로 변경시키는데 필요한 대지부족 문제와 쌘뽈여중고를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장기적인 안목과 재정상의 이유로 재학생들을 모두 이웃의 국민학교에로 분산 전학시키고 개교 5년만인 1968년도에 졸업생 없이 폐교하였다.

1963. 4. 9 성모 자애 병원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인수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성모 자애 병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가톨릭 의과대학 성모자애병원은 가톨릭 정신에 입각하여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전인적 건강을 구현하기 위한 의료기관이다. 국민보건과 불우한 환자구료를 위한 교육, 연구, 진료를 사명으로 지역사회 의료복지 향상에 기여함을 목저으로 한다. 특히 최대 다수 주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최상의 진료를제공한다. 1955년 6월 27일 에 인천직할시 북구 부평 6동에서 김영식(베드로) 신부에 의해 설립되어 1963년 4월 9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인수받았다. 부평이란 이름은 고려 충선왕 2년(1310년)에 부평구라고 불려진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원래 부평지역은 현 계산동이 그 중심지였으나 부평역이 생기면서 그 주변과 시장지역을 부평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지역은 본시 부평군 부내면 대정리로 1940년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소화정이라 불렸으며 해방과 더불어 1946년 부평동으로 개칭되었다. 김영식 신부는 황해도 연안에서 1947년 10월 7일 무의무탁한 고아들을 가정적인 보육방법으로 육성하고자 사회사업법인 연백성모원을 설립하였다. 그후 김신부는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1953년 5월에 원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인천시 북구 부평동 665번지에 자리잡고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점차 연로하게되자 김신부는 원아들을 잘 돌볼 수 있는 수도회를 찾던 중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창설자이신 방유롱(안드레아) 신부를 통하여 연백성모원을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맡겼다. 그리고 원아 보건 후생 대책과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위하여 1955년 6월 27일에 설립한 성모자애병원을 보육원으로 운영하고 원아들을 잘 보육하는 조건으로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운영권을 이양하였다. 이때의 집은 75평의 목조 이층 건물이었고 수용능력은 50명이었으나 당시 4세에서 20세 까지의 70여명의 보육원생들이 함께 생활하였으며 이때부터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사회복지 사도직과 의료봉사 사도직이 인천교구에서 시작되었다. 김영식 신부는 1963년 1월 7일 상호 11시 5분에 숙환으로 성모병원에서 선종하였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1963년 4월 9일 황우경(스테파노) 수녀와 박순옥(ꥉ뻬뚜아) 수녀를 파견하였으며 1963년 6월 30일 정수자(막달레나) 수녀와 1963년 7월 20일 심상임(막달레나) 수녀를 파견하였다. 김신부는 6.25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었고 이땅에는 전쟁의 상처가 널려있었고 황폐하고 굶주리고 병든 자들과 전쟁으로 혼열 고아들이 많이 발생된 비참한 사회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김신부는 미 제 8057부대 가진스키중령과 솔지반 군종신부, 그리고 가톨릭 구제회 한국 지부장 캐롤 몬시뇰의 협조로 1954년 9월 22일 성모자애병원의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연건평 119평 아담한 2층 건물을 완공하고 1955년 5월 5일 낙성식을 가졌다. 1955년 6월 27일부로 원아 후생 보건 사업으로 내과, 외과, 방사선과등 3개과에 초대 의무원장이신 노신주씨 외 의사 2명과 간호사 2명, 그 외에 5명 등 10명이 가족적인 분위기로 첫 개원을 하게되었다. 병원이 개원되면서 미8군에서는 더욱 관심있게 원조를 베풀어 1958년에는 미8군 제 6의료창 사령관으로부터 링켈, 다이아징 등 19종에 달하는 의약품을 미8군 군사 원호청을 통해 전달되었다.

1962년 1월 9일 총건평 211평에 현대식 병실 50명을 수용할 수있는 입원실과 특히 산부인과에서는 최신식 자동분만대를 설치하고 당시 제 3대 병원장이신 진병집 원장의 운영방침의 일환으로 월간 1500명의 환자들 중에서 무의무탁한 환자들은 무료로 치료해 주었고 그로 인해 병원을 찾는 환자는 급증하였다. 탁월한 의사진과 의료기구등을 설치한 성모자애병원은 1962년 4월 7일 가톨릭의대부속병원으로 약정편입, 새로운 발족을 함에 따라 의사진을 보강하는 한편 진료의 학술적인 탐구를 위해 대학에 의사 인사권을 맡기어 보다 훌륭한 의료진을 보강하고 내과에 가톨릭 의대 교수인 이순익 박사와 정형외과 과정으로 서독 하이델베르그대학에서 다년간 연구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부속병원으로 신 발족함에 따라 지역보건 향상에 기여는 물론 불우한 환자들의 쇄도 양상은 진료비가 저렴하고 특히 미8군으로부터 원조를 받은 X-ray기와 산모를 위한 무통분만기로 분만은 거의 무료봉사를 하였던 실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병원은 미8군 지정병원, 공무원 요양지정병원, 산엽재보상보험지정병원, 한국 자동차 보험지정병원, 경찰 전문학교 지정병원으로 되어 있었다. 특히 성모자애병원은 미제 121명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임상검사 및 조직 검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한편 모자 보건에 대한 계몽운동이 잘 안되어 있어 분만은 거의 무료 봉사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모자 보건 계몽 및 무의촌 이동 진료를 계획하고 최초로 무료 이동 진료를 실시하여 인술을 베풀었다.

그 외에도 인천시 북구 가정동과 자매결연을 맺고 영세민 구후로 밀가루 20포와 매월 1회 순회 무료진료를 실시하였다. 이외에도 병고와 가난으로 사경에 처한 지역주민들을 무료로 인술을 베풀어 지역주민을 감격하였다. 1980년 3월에 대한병원 협회로부터 인턴 및 레지던트 수련 병원으로 지정을 받아 많은 수련의들을 배출하였으며 1981년 5월에 성모 자애 병원 부설 심신장애자 조기교육원을 개원하여 그 명칭을 엠마누엘 어린이 집이라 현판하였다.

이어 1982년 7월에는 인구증가와 더불어 환자가 급증함에 따라 병상을 증설하여 총 310병상을 확보하고 1983년 3월 1일부로 피부과와 신경정신과를 개설하였으며, 지하 1층과 지상 3층에 1층을 증축하여 보험계 및 중앙공급실 및 교수 연구실로 이용하고 있으며 1984년 3월에 안과를 개설하고 환자진료에 임하고 있으며 1985년 2월 지하 1층과 지상 5층 별관 준공을 하였다. 연탄가스와 중독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대형 고압산소기를 설치하여 인접 각 시군에서 발생되는 가스 중독으로 인한 환자의 사망 예방과 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85년 2월에 준공된 지하 1층 지상 5층의 현대식 건물은 임상검사실 및 스텝 연구실과 의학도서실등을 확장하고 동년 4월에 사회사업과를 신설하였으며 1986년 5월에 비뇨기과를 신설하여 병상수 310베드와 진료과목 16개과로 인천 직할시내 유일한 종합병원으로서 의료계의 일익을 담당할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성모 자애 병원은 사회적인 발전과 의료 정책 변화 등에 편승하여 1988년 2월 1일 기획실을 신설하고 동년 3월 1일 호스피스과를 신설하여 임종 환자까지도 돌보게 되었으며 1989년 2월 종합검진센타를 신설하고 동년 6월 전산실을 설치하였으며 1990년 9월 1일 안전관리과을 신설하였다. 1992년 7월에는 신관건물에 1층(130평)을 증축하여 405병상을 확보하고 오늘도 가톨릭 중앙의료원 이념 실천과 환자진료를 위한 교육, 연구, 진료를 사명으로 지역 사회의 의료 복지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성모 자애 병원에서는 의료서비스 개선을 위하여 교직원 소양교육도 실시하고 병원 부조리 사정추진 계획의 일환으로 환자들의 불편과 불만을 스스로 시정하고 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보다 나은 양질의 진료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환자 불편 불만 신고센타를 설치 운영하는 한편 원내 1층 외래 및 각 병동마다 환자 불편 불만 신고함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내원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보다 나은 진료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전교 직원 및 환자들을 대상으로 쓰레기 줄이기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으며 쓰레기 줄이기 운동전개의 일환으로 음료수병 및 캔종류, 꽃다발 등을 사양하는 홍보물을 현관에 계시하여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원목실의 수녀들은 환자들이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입원중에도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환자 방문과 상담을 하고있다. 말기 호스피스 환자들은 가정간호로 직접 가정방문을 통하여 마지막까지 인간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임종 후 사후처리까지 돕고있다. 사정의 여의치 못한 사람들은 임종방으로 모시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직장 내에서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직원을 위한 피정, 성지순례, 미사, 재교육, 예비자 교리 등 각종 신심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1963. 5 대구 SOS 어린이 마을 설립

서울 SOS 어린이 마을 - 1998. 4월 서울 SOS 어린이 마을의 답신에 의거

SOS 어린이 마을이 한국땅에 설립된지 33년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임스트에 첫 SOS 어린이 마을이 세워진 후 유럽 외의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대구에 SOS 어린이 마을이 설립되었다. 1982년 설립된 서울 마을은 16명의 어머니들이 16가정을 꾸려오고 있다. SOS 어린이 마을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한 생애를 바치는 거룩한 사랑으로 인위적으로 맺어진 아이들을 형제, 자매로 키우며 하루 24시간 365일을 자기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만 전념한다. 마을에 오는 어린이들은 어린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가정을 잃고 주위로부터도 소외되어 버림을 받아야 했던 아픔과 상처를 지닌 체 마을 식구가 된다. 98년 현재 서울마을에는 149명의 아동들이 자신의 SOS 어머니와 새로운 형제, 자매를 만나 잃어버렸던 가족의 사랑과 보금자리를 찾아 생활하고 있다. 중고생 남학생들을 위한 집으로 기숙사3동과 그 후에 자립을 돕기 위한 자립관 2동이 마련되어 있고 헤르만 그마이너의 사회복지관에서는 유치원을 운영하여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SOS 마을의 모습을 엮고 있다. 모든 어린이들은 아름답고 밝은 미래를 여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며 소망이다. SOS (Save Our Souls)어린이 마을은 소외되고 아픈상처를 안고 마을로 오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심리와 정서를 치유해 주어 차별 없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찾아주며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고 어린이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을 되찾아 주어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시켜 준다. 나아가서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사회안에 살면서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자기자신을 책임지며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성장하게 도와준다.

1963. 서울에서의 첫 수련을 시작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국제가톨릭형제회 (영)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76쪽)

불일치와 부정의가 있는 현실에 도전함으로써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복음을 기초로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주력한다. 全眞常 정신을 중요시하며 全은 온전한 자아의 봉헌을 뜻하며 眞은 참다운 사랑을 뜻하며 常은 끊임없는 기쁨 속에서의 생활을 뜻한다.

1963. 가톨릭 피부과 의원이 대구시 북구 읍내동으로 이전 (재단법인 대구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가톨릭 피부과 의원 (재단법인 대구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 1998. 5. 20일 가톨릭 피부과 의원 답신에 의거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환자의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덜어주고 피부진료를 통해 나환자를 조기발견 치료하여 그들의 사회복귀를 도와주며 나병등으로 급증하는 장애인들을 위한 의료적, 사회적 재활사업을 통하여 국민보건향상에 기여하고자 대구시 봉덕동에 서정길 대주교가 설립하였다.

과거 일제통치시대 나환자는 강제 수용되었는데 해방과 6·25 사변 등 사회혼란으로 나환자들은 수용소를 뛰쳐나와 거리를 배회하며 유랑구걸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이러한 나환자들의 참상을 알고 계시는 서정길 대주교님께 어느 나환자가 찾아와 구호를 요청하게 되자 교구청에 근무하고 있는 오지리인 뤼듸 신부에게 이 일을 맡아 나환자를 도와주라는 것이 동기가 되어 천주교 대교구 구라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루듸 신부는 자기본국을 통하여 자선사업단체인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에 재정지원을 얻게되어 나환자를 위한 구라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우선 나환자들이 구걸하지 않고 일정한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의성 신락원과 고령 은양원 두곳에다 정착장을 마련하였다. 이때는 환자의 치료도 중요하였지만 이들이 당장 거처해야 할 주택과 먹을 식량이 더 긴박한 문제였으니 구호 사업과 치료사업을 동시에 전개해야할 실정이었다. 나환자의 치료를 위해 이들을 간호하며 돌봐줄 사람을 구하던 차에 마침 멀고 먼 이국땅 오지리에서 간호원(엠마 프라이싱거) 한분이 지원하게 되어 그를 받아들여 이곳으로 오게하였다. 나환자도 일반환자와 같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을 수 있는 현대식 병원을 건립하고자 부지를 물색하고 이곳에다 대지를 마련하여 막상 병원을 세우려 하니 주민들이 반대하여 이명우 부주교를 비롯하여 서순봉 교수, 지방관서장 등이 주민들을 설득시켜 합의를 보고 나환자를 수용할 때에는 담장을 쌓아 입원환자는 병원 밖으로 못다니도록 한다는 주민들의 요구조건을 들어 병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나환자의 입원치료를 위한 병실이 건립되자 고령 은양원에서 나환자를 돌보고 있던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가 이곳 병원으로 숙소를 옮겨 병실을 관리하게 되고 대구 가톨릭 간호협회와 경북의대 부속병원의 협조를 얻어 입원환자의 진료와 정착장(은양원, 신락원) 환자도 매일 정기 순회진료를 하게 되었다. 당시 재정사정은 빈약하여 병원 건립 뿐만 아니라 운영비, 인건비, 치료약품까지 외국원조단체인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었다. 또한 N.C.W로 부터 밀가루, 옥분, 헌옷 등 구호물자가 전달되어 입원환자 부근에 살고 있는 어려운 재가 나환자에게 배분해 주었다. 초창기 이곳은 병원이라기 보다는 나환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용시설에 불과한 형편이었다. 병원 본관건물이 세워지고 엠마 프라이싱거 여서께서 원장직을 맡게된 후부터는 병원형태로 차츰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을 포함한 많은 외래환자들이 병원을 이용하게 되었도 그 중 여러명의 초기 나환자를 발견하여 치료해줌 으로서 나병퇴치에 좋은 성과를 얻게 되었다. 이곳에 장기수용되어있던 나환자는 경남 산청병원으로 이송하고 이곳 병실은 단기 입원실로 바꾸어 많은 나환자에게 치료의 혜택을 고루 줄 수 있도록 입원 대상을 넓혔다. 또한 엠마 원장은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와 서독구라협회 영국 등으로부터 우리나라 나병관리사업에 필요한 지원을 많이 얻을 수 있어 나사업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 피부과 의원은 일반 외래피부환자 진료수입과 릴리회 성금 등으로 자체에서 구라사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은 퍽 자랑스러운 일이다. 다행히 최근 나병으로 발견되는 신환자 발생이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가톨릭 피부과 의원은 오직 나환자들에게 각종 치료의 혜택과 생계대책을 마련하는 등 설립자의 정신에 따라 성실히 나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96년 9월, 35년동안 가톨릭 피부과 의원을 이끌어 왔던 엠마 프라이싱거 원장이 정년으로 퇴임하고 96년 10월 부터는 3대 원장 채 영희(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엠마 프라이싱거 전임원장의 업적과 정신을 유지,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사회복지법인 엠마재단을 설립하였고 동 법인에서는 장애인재활시설 및 재활병원을 운영할 계획에 있으며 이로 인해 나병등으로 인하여 복합장애를 지닌 장애인들을 위하여 보다 양질의 재활의료서비스를 제공하므로써 그들의 사회복귀를 도울 것이다.

1963. 하양본당의 소화유치원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18쪽)

하양본당 河陽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18쪽)

하양본당은 1915년에 용평본당 소속 하양공소로 시작되었다가 1931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무학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하양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처음으로 파견된 것은 1956년 12월 4일이었다. 본당 주임 이임춘(펠릭스) 신부의 초청으로 서울에서 공순옥 마리 헬렌수녀와 강봉순 로렌죠 수녀가 전교와 유치원을 담당하기 위하여 부임하였다. 수녀들은 신부의 뜻을 따라 마을 중앙에 성가진료소를 조그맣게 개원하게 되어 간호수녀 1명이 추가파견되었으며 1961년 본당 증축에 잇따라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1963년에는 강당과 유치원이 신축되어 소화유치원 설립인가를 받았다.

하양은 농민이 많은 소규모의 읍이라 운영상의 애로점이 많아서 1968년 성가진료소는 문을 닫아 의료사도직을 그만 두게 되었고, 1969년에는 유치원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1975년 신학기에 유치원을 다시 개원하여 평신도가 운영했는데 1977년 2월에 본당신부의 요청으로 유치원수녀가 다시 부임하게 되었다. 1977년 3월 부터는 무학중고등학교 종교과목을 담당하면서 본당 일도 도울 수 있는 수녀가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1984년 2월 15일을 마지막으로 무학중고등학교 종교교사 파견도 그만두고 본당 전임수녀 2명과 유치원수녀를 합하여 3명의 공동체가 되었다. 그 후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운영상의 애로점이 거듭되어 수녀 사도직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음을 식별하여 1987년 2월 23일부로 유치원에서 손을 떼고 현재는 전교수녀 2명만이 본당 신자들의 전례생활과 신앙생활을 도와주고있다.

1963. 살레시오 초등학교 설립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살레시오 초·중·고등학교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살레시오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1954년 광주 교구장 현 헤롤드 주교는 살레시오회 선교사 신부인 마르텔리 신부를 비롯한 살레시오 수도회를 광주에 초청한 후 1958년에는 가톨릭 여성교육을 위해 성 요한 보스꼬의 예방 교육 정신에 따른 전인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시작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전남 광주에서 살레시오 초등학교는 1963년에 여자중학교는 1958년에, 그리고 여자고등학교는 1961년에 선교사 살레시오 수도회의 지부장인 Archimede Martelli 신부가 설립하였다. 설립당시의 규모는 초등학교는 12학급이었고 중학교는 9학급, 고등학교는 9학급 이었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 라는 돈 보스코의 설립목적에 따라 소외되고, 가난한 청소년들이 정직한 시민, 착한 그리스도 인이 되도록 교육하고 있다.

1963. 수원교구에서 안양 근로자 회관 설립

안양 가톨릭 근로자 회관 - 1998. 5월 가톨릭 근로자 회관 답신에 의거

근로자들 스스로가 그리스도 신앙을 바탕으로한 건전한 가치관을 형성하도록 돕는 목적에서 1963년 설립되었다. 수원교구 설정당시 윤공희 대주교님과 전 루까 신부님께서 당시 산업개발과 함께 안양지역내 공장으로 취업차 모여드는 젊은 남녀근로자들을 위한 사업으로의 계획을 추진시키고자 국제 가톨릭형제회원 서정림 말가리다(독일인), 한성인 벨따(한국인)에게 근로자 및 부량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으로 운영책임을 맡기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안양지역은 제지공장과 섬유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수자원이 풍부한 조건에 따라 등장한 이 산업은 노동집약적인 공장이므로 노동력이 대거 지방에서 유입되었다. 특히 여성노동자들과 나이어린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는 상황에서 그들을 위한 복지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저학력의 10대와 20대초반의 소녀노동자들을 위한 특수사목이 요청됨을 교회는 인삭하게 되었고 그들을 위한 기숙사 사업을 통하여 생활교육과 사회적응에 필요한 교육들을 실시 하였으며 지역의 노동자들을 가노청운동에 동참하도록 조직하여 나갔다.

1987년 당시 노동자들의 대 투쟁을 통하여 이곳에 살던 많은 근로자들이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다. 노동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그들은 근로자 회관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긴장했기 때문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감시를 당하게 되었고 전직 혹은 퇴사를 강요당하게 되어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붙여 가톨릭의 위상으로 그런 견해들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으로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1998년 사업의 확장과 아울러 이용자들이 복지관으로 부르게 되므로 이름을 전·진·상 사회복지관으로 변경하였다. 이 전·진·상 사회복지관의 카리스마는 설립자들이 JOC활동을 통하여 노동사목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으므로 가노청의 정신이 활동정신이 되었으며 AFI 의 우선적인 방향 중 "현실참여를 통한 인간해방"을 기초로 하여 활동하고 있다. 1998년 현재 지하 1층, 지상 3층에 여자 근로청소년 80명 수용의 기숙사 시설과 회의실, 강의실, 식당, 휴게실이 있다.

1963. 삼척에 성 요셉의원을 설립 (93쪽 골룸바노 수녀회)

골룸바노 수녀회 (영) Missionary Sisters of St. Columban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3쪽)

성 골룸바노 수녀회는 1922년 2월 1일 아일랜드에서 당시 성 골롬바노 선교회 총장인 존 블로윅(John Blowick)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포교활동을 함에 있어서 포교지의 전통적인 관습을 극복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전교수녀들의 적극적이며 정성어린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골롬바노회 내에 전교수녀회를 창설하게 된 것이다. 이 수녀회원들은 각 지역에서 전교활동 외에 주로 의료사업, 교육사업, 사회사업 등을 하고 있다.

한국진출 : 1955년 광주교구의 헨리(Harold Henry, 玄) 주교의 초청으로 엔다(Enda Staunton)수녀를 비롯한 4명의 수녀들이 한국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들은 그해 목포에 수녀원을 설립, 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사업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에 춘천에도 성 골롬바노 의원을 개설, 1960년에는 제주도 한림에 진료소를 개설함과 아울러 성 골룸바노 선교회 신부들의 협조를 얻어 직조업에 착수, 지역개발에 이바지하는 동시에 부녀자들의 경제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1963년에는 삼척에도 의료시설을 개설(성 요셉의원), 1975년에는 영주에 분원을 설치하여 수녀들이 나환자 진료소인 다미안 의원에서 근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1971년 서울에 본원을 신축, 수녀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사업과 지방에서 활동중인 수녀들의 뒷바침을 해주고 있으며, 서울에서 수녀들은 서울 가톨릭의대와 협력하여 한국 천주교 회의 산하 '행복한 가정운동'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47명의 수녀들이 서울의 본원과 목포, 춘천, 제주, 삼척, 영주 등 5개 분원에서 의료사업, 간호원 교육사업, 사회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1963. 밀양 성모성심병원과 부평 성모자애병원 인수 (1260쪽 한국순교복자수녀회)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영) Sisters of the Blessed Korean Martyrs (1260쪽)

1946년 4월 21일 방유룡 신부에 의해 창설된 방인 수녀회.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한국 순교 선열들의 순교정신으로 생활하며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창설되었고 1951년 12월 교황창의 인가를 받았다. 원래 1930년대부터 한국인에 의한 수녀회를 창설하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정책으로 실패하고 광복된 이듬해 개성 동홍동본당에서 창설회원 윤병현, 홍은순 회원과 함께 발족회를 가지면서 점성정신(點性精神), 침묵대월(沈默對越) 등 한국적인 수덕론을 제창하였다. 창설되던 해 10월에는 6명의 회원이 더 입회하였고, 소착복식도 처음 행해졌다. 한편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양재학원을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개성에 단독주택을 구입하여 본격적인 수도생활이 시작되었다. 6.25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서울 청파동으로 본원을 이전하였으나 곧 피난길에 올랐다가 1952년 12월이 되어서야 다시 서울에 정착하여 첫 착복식을 갖게 되었다. 그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련지도를 받기도 하면서 1954년 12월 5명이 첫서원을 하였다. 1957년 9월에는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성모성심병원을 인수하여 운영케 되었다. 1960년에는 충청남도 천안에 복자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3년에는 밀양성모성심병원에 이어 부평의 성모자애병원을 인수하고, 1967년에는 교포들을 위하여 일본 오오사까에 분원을 설치하였다.

1963. 성심국민학교 개교 (649쪽 성심수녀회)

성심수녀회 (영) Society of the Sacred Hear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49쪽)

1800년 11월 21일 성녀 마를렌 소피바라(Madeleine Sophie Barat) 수녀가 프랑스에서 창립한 수녀회.

1956년 10월 10일 한국 진출. 젊은 이들의 교육으로써 예수 성심에게 영광을 주는 것을 창립 목적으로 하여 1956년 한국에 진출하자 곧 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미 1908년 일본에 진출한 수녀회의 극동관구장 브리짓 키오(Brigid Keogh) 수녀에게 한국 진출을 요청하자 관구장이 직접 내한하여 현 수녀원과 성심여자고등학교가 있는 서울 원효로의 옛 예수성심신학교 및 성당 건물을 이수하고 1956년 10월 서울 분원장 맥하디 플린트(McHardy Flint) 수녀 외 7명이 내한하였다. 수녀회 본부에서의 10만달러 예치로 법인설립을 하고, 많은 어려움 끝에 1957년 2월 12일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57년 4월 18일 성심여자중학교의 첫 입학식을 가졌다.

1960년 3월에는 성심여자고등학교가 개교하는 한편, 같은 해 9월 미국 수련원으로부터 한국인 수녀 2명이 내한하여 더욱 활동하기에 좋아졌다. 교육의 일괄성을 위하여 1963년 성심국민학교, 1964년 성심여자대학이 각각 서울과 춘천에서 개교하였다. 아울러 가난한 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서울 봉천동에서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천막학교를 개설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하였다. 1975년과 1982년에 교육의 효율화를 위하여 중학교와 국민학교를 각각 폐교하였고 1975년 3월 한국지구로 독립하여 승격됨과 동시에 같은해 9월에는 부천(富川)에 성심여자대학의 분교를 신설하였다. 1978년에는 강원도 사북읍 고한리 광산촌에서 활동을 실시하였다. 현재 서울 원효로의 본원을 비롯하여 춘천, 원주, 인천의 분원과 함께 서울 원효로에 수련원공동체가 있고, 한국지구장 한순희 수녀를 중심으로 43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1963. 성심국민학교 개교 (교회와 역사 86호 7쪽) - 1982. 9. 25발행

성심수녀회 (교회와 역사 86호 7쪽) - 1982. 9. 25발행

성심수녀회는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1800년 11월 21일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 (Madeleine Sophie Barat)가 동료수녀들과 함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서원을 함으로써 창립되었다. 바라 성녀는 "이 회의 유일한 창립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이다."라고 말하면서 젊은이의 교육을 통해 예수성심께 영광을 드릴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성심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것은 1956년 10월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가톨릭 교육을 통한 것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서울 교구장 노기남(바오로) 주교는 이 수녀회에 한국 진출을 요청하였다. 1956년 10월 한국에 처음 진출한 창설수녀들은 서울 분원장인 맥하디 홀린트(Mchardy Flint) 수녀 등 모두가 7명이었으며 그들의 국적은 각기 달라 호주, 애란, 중국, 일본, 몰타, 폴란드, 벨기에 등이었다. 7명의 창설자들은 잠시도 그들의 사명의 가톨릭 교육을 잊지 않았고 진출 후 곧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들 가운데 주 매분 수녀는 곧 모든 사람에게 한국인으로서 받아들여질 만큼 한국어에 능통하여 졌다.

1956년 11월 한국에서의 첫 교육사업인 성심여자 중학교는 소정의 시험을 치러 18명의 신입생으로 역사적인 입학식을 가졌는데 (모집인원 30명에 49명이 응시했으나 전형 결과 18명만 합격시켰다.) 이처럼 적은 숫자로 학교를 경영한다는 사실에 한국교육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모든 면에서 전통적인 성심학교 교육은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1961년 총원장 수녀가 극동지구와 북미지역 대원장 수녀를 동반하고 한국에 온 것을 계기로 하여 한국에서의 성심교육은 큰 계기를 맞이하였다. 총원장 수녀는 성심 여자 중·고등학교와 성심 여자대학의 신설을 허락한 것이다.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물론 '성심'에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성심'에서 대학까지 마칠 수 있게 해 줄것과 이 좋은 교육이 국민학교부터 일관성있게 이루어지길 총원장에게 간청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그리하여 성심 국민학교는 1963년에, 성심여자대학은 1964년에 각각 신설되었으나 '성심'이 꿈꾸는 일관교육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것은 성심 국민학교의 졸업생이 나온 다음 중학교가 평준화됨으로써 졸업생 중 성심여중에 추첨으로 입학한 학생이 단 한명이라도 결과를 빚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성심 수녀회는 인력과 재정 등 여러사정도 고려하여 고등학교와 대학교육에 전념키로 하고 중학교와 국민학교는 폐지시키기로 하였다.

1978년 3월에는 강원도 사북읍 고한리 광산촌에 분원을 설치하여 본당사목과 산재병원에서의 간호활동, 유아교실을 통한 가족상담 및 피정지도, 광부환자 및 가족방문 등의 사도직에도 봉사하고 있다.

1963. 부속 메리놀 간호전문대학 개교, 1967년 부산으로 이관 (383쪽 메리놀 수녀회)

메리놀 수녀회 (영) Maryknoll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83쪽)

1912년 미국 가톨릭 외국선교단체 메리놀 수도회 내에서 메리로저스(Mary Rogers) 수녀에 의해서 창설된 수녀회. 1924년 10월 한국진출. 메리놀 수도회의 수녀들은 본당활동과 의료사업, 교육사업등에 종사하였고 여자기예학원과 시약소및 고아원을 설립하여 기술교육 및 봉사활동을 하였다. 1932년에는 평양으로 진출하여 한국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후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라는 수도회가 되었다.

진남포에서는 1934년부터 부녀자와 소녀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3년 부터는 서울 영등포 공업단지에서 단체활동을 실시하였다. 1974년에는 전남 소록도 국립병원에서, 1976년 부터는 경북 울진군에서, 1977년 부터는 경기도 부평에서, 1979년 부터는 전남 광주의 천주의 성 요한 병원에서 각각 의료활동을 돕고있다.

1963. 메리놀 간호전문학교 설립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 (영) Maryknoll Sisters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는 1912년 메리 로저스수녀에 의해 창립되었다. 창립정신은 인류에게 책임을 다하고 도움을 주고 문화적 배경과 지역적 제한 경제, 사회, 종교적인 범주를 벗어나 모든 국가간의 평화와 정의와 우정을 도모하고 나누는데 있다. 1924년 10월 메리놀회 신부들의 초청으로 평북 의주에 처음 진출하였다.

북한에서의 활동 (1926∼1942) :

1924년 부터 시작된 의주에서의 활동은 처음에는 본당 사목과 가정방문이었으나, 얼마 후 소규모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3명의 수녀를 의주에 남겨두고 1926년 수녀회 한국지부를 영유(永柔)로 옮기고 그곳에 여자기예학원을 세워 15세 전후의 소녀들에게 기술습득의 길을 열어주는 사업을 하였다. 또한 시약소와 고아원을 설치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1933년 멜시 수녀 등 3명은 신의주로 파견되어 성모회를 창설하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가정방문과 외래환자 진료소와 이동진료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1932년 메리놀회 신부의 요청으로 평양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한국여성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이 모임은 후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라는 수녀원의 창설동기가 되었다. 1935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입원실과 무료진료소를 설립하였으며 1936년 본당 사업과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또한 진남포에서는 1934년 부터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활동을 중지하고 메리놀회 수녀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해방후의 활동 (1950∼현재) :

본국에 철수했던 메리놀회 수녀들은 전쟁이 끝나자 1950년 제1진이 다시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의료사업과 전교사업을 통하여 주민들에게 봉사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1952년 제2진의 수녀들은 제차 부산에 진출하여 전쟁중인 비상시를 위하여 장기간의 의술봉사를 하여 왔으며 음식과 옷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결핵요양소와 교리학습을 위한 장기 계획도 수립하게 되었다. 휴전 후 메리놀 수녀들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956년 충북 괴산군 중평읍에 메리놀의원을 개원하여 의술치료와 보건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1960년 부산에서 가별(Gabrialla) 수녀가 신용협동조합을 처음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지금은 협동교육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1962년 부산 메리놀병원이 주한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대식 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1963년 메리놀 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은 콘로이(Conroy)수녀가 맡았으며 1967년 메리놀 병원의 관리가 부산교구로 이관되었다. 1962년 2월 인천교구 답동 본당에서의 종교활동을 돕고 학생지도 및 영어지도를 실시하여 왔으며 1967년 3월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회관에서 청소년 지도자 강습과 여성들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1963년 경기도 강화읍에 그리스도왕 의원이 설립되어 메리놀회 수녀들은 의사와 간호원으로 일하였으며 전교사업도 함께도왔다. 1969년 초 요안 서빈 수녀는 백령도에 소재한 김안드레아병원에서 간호과 책임자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74년 대한 적십자가 인수할 때까지 섬 사람의 건강과 아울러 간호보조원 교육과 훈련을 부지런히 해왔었다. 백령도에서 철수하여 본원에서 일하던 3명의 수녀들은 전남 소록도에 있는 국립병원에 자원봉사 간호원으로 활동하고 1973년 성신강림 대축일 김수환 추기경의 허락을 얻어 2명의 수녀가 그리스도께 헌신할 조그마한 단체의 조직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공업단지 근처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진료소의 간호원으로 상담자로서, 노조에서 간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 등을 맡아보게 되었다. 1976년 9월 가이에르 수녀가 서강대에서 영어를 담당하는 외에 경북 울진 진료소 활동, 부평 본당에서 종교사업과 노동자를 위한 사업활동 1979년 10월 광주의 천주의 성요한병원에서 환자가족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1980년 거창 나환자 마을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1981년 11월 부터 성남시에서 2명의 수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과 전교활동에 힘쓰고 있다.

1963. 한국 SOS어린이마을 설립 (555쪽 사회사업)

사회사업 (영) Social servic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5쪽)

가톨릭 교회는 단순한 전례의 공동체나 신앙의 공동체일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빛(마태 5,13-16)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사회안의 어두운 곳을 찾아서 어두움을 없애고 광명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너무도 어두운 곳이 많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사람, 육체는 건강하나 정신이 병든사람, 정신은 건강하나 육체가 병든사람 등이 있다.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을 살펴주고 그들의 희망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버림받고 소외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현세적인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교회의 사업중에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문화사업, 사회사업등이 포함된다.

*구미근로여성복지관 - 1973년 경북 구미시 송정동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구미공단 근로여성들의 인격도야 및 생할향상을 위해 기능교육, 취미교육, 교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설립단체는 왜관 성 베네딕토 대 수도원이다.

*국제마리아의 사업회 -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고 1969년(여자), 1974년(남자)에 설립되었다.

주된 활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회원이 소득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퍼콜라레 운동을 하는 남녀 회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덕산 신생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으로서 1952년에 설립된후 요보호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하고 원생을 초·중·고등학교에 진학 시키고 졸업 후에는 기술을 습득시키고 있다.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 1976년 경남 마산시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정기프로그램으로 학습반과 취미반이 있고 특별 프로그램으로 젊은이 교실, 사임당교실, 성교육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 1979년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설립하였다. 불우이웃 청소년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의식개발, 교육, 협동, 우정, 자립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쎈뽈원 - 충남 논산군 논산읍에 있으며 1973년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이 되었다. 노인복지시설을 설치운영하며, 성인불구자의 복지사업을 하고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 1966년에 설립되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근로자의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기업인의 이해를 촉구시키고 노사간의 긴밀한 협조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곳이다.

*성심원 - 서울대교구가 불우아동 및 부상아동을 보호하기위해 1946년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설립하였다. 파티마 성모수녀원에서 담당운영하고 있다.

*성인복지원 - 1976년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설립, 부양가족이 없고 경제적으로 자활이 분리한 60세 이상의 여자노인을 수용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 본부는 서울 명동에 있으며 마음의 가난함을 생활화하는 단체로 1961년 설립되었다. 주된사업은 환자, 가난한자, 걸인을 돌보고 노쇠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며 불우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이다.

*소화영아재활원 - 1946년 소아보육원으로 출발하였다. 주된사업은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사업이며, 부산교구재단에서 운영하고있다.

*엠마우스집 - 1981년 설립된 것으로 성인지체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 - 1969년에 불우아동을 수용하여 직업보도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성 빈첸시오 청소년 복지회에서 설립하였다.

*춘광대구 요양원 - 극빈 폐결핵 환자 요양원으로 1966년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진영성모의원 별관 -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불우한 결핵환자를 고쳐주는 것이 주된목적이다.

*한국 SOS 어린이 마을 - 요보호 아동들을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하고 퇴소후에는 독립생계를 유지토록 자립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꽃동네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중 특기해야 할 것은 충북 무극에 있는 꽃동네로 청주교구 오웅진 신부가 혼자서 걸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면서 시작되었다. 꽃동네의 특징은 구걸할 수만 있으면 퇴거토록 하는 것으로 자생의 능력이 전혀 없는 노인만을 보호하는 곳이다.

*성모 자애원 - 예수성심 시녀회가 심신 장애아를 재활시키는 곳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 6.25 이후 기아가 날로 증가하여 버림받은 생명들을 입양, 양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릴리 어린이집 - 6-7세의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을 받아 교육하고 있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의 근로자의 집 - 근로자의 수용과 교육에 힘쓴다.

*성 프란치스코의 집 -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일을한다.

*마리아 자매원 - 문제청소년을 교도하고 상담과 숙소를 제공하여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국민학교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이수시킨다.

*성심 양로원 - 불우한 노인을 수용하여 물질적 정신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성가 양로원 - 무의탁 노인들을 구호한다.

*백백합 보육원 -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호, 육성한다. 설립단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다.

*해성 보육원 - 요보호 아동과 지체 부자유자아 및 정박아 수용 및 양육, 국내외 입앙을 하고있다.

이상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 중 그 일부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나 이 이외에도 수십개의 사회사업단체가 있으며 그들은 보이지 않게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사업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첫째, 교회는 특별히 정부나 일반 사회단체에서 망각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소외된 계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이 하기 어려운 사업을 찾아서 그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임무다.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회사업은 양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몇명을 도와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교회의 사회사업은 어떤 기관이나 단체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사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자기의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인의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회사업가이며 모든 신자가정은 사회사업단체인 것이다. 세째, 교회 당국이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재정적 뒷바침을 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성당도 지어야 하고 문화사업도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오늘의 현실 안에서 연장시키는 일이다. 특히 도시교구나 본당에서는 그 지역사회안에 어두움을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여 그들을 위한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정말 가톨릭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1964. 샛별유치원 개원 (828쪽 영등포 본당)

영등포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28쪽)

서울 대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요한 돈 보스코. 현 명칭은 도림동본당. 1929년 이전부터 약현(중림동) 본당의 영등포 공소로서 발족, 1936년 영등포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58년 살레시오회 소속인 수아레스(Joseph Suarez) 신부가 본당주임으로 부임, 같은 해에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 가 도림동 본당을 중심으로 창설, 1963년 9월 현 성당지대에 현재의 성당을 준공하였다. 1964년에는 샛별유치원이 개원하였고, 1968년에는 불우 청소년을 위한 애전 고등공민학교가 개교하였다.

1964. 4 샛별유치원 개원 (교회와 역사 74호 6쪽)

영등포 본당 (교회와 역사 74호 6쪽)

서울 영등포구 道林洞 본당은 명동, 중림동, 혜화동 본당에 이어 서울에서 네 번째로 설정된 천주교회이다. 이 교회는 江南 永登浦 지역의 유일한 천주교회였기 때문에 명칭도 영등포 본당으로 불리웠다. 본당이 설정되기 전에는 중림동 천주교회에서 관할하는 공소에 속했다. 1930년 6월경 교우들의 열성으로 영등포 경찰서 뒷쪽에 5백圓을 들여 8間의 경당을 신축하였다. 150명 가량의 교우들은 태반이 지방에서 상경한 노동자들이었다. 이때 까지도 영등포는 아직 서울시에 편입되지 못하고 경기도 시흥군에 속해 있었으나 신흥 공업지구로 발전됨에 따라 인구가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1936년에 교우 수는 460여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예수 성심회를 중심으로 다각적인 본당 승격운동을 벌인 결과 그 해 5월 10일 혜화동 본당에서 사목하던 徐起昌(프란치스코) 신부를 초대 본당 주임신부로 맞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21일 徐신부는 영등포에 작은 성당을 건축하고 본당주보를 돈 보스꼬로 삼았다.

1945년 11월 朴一奎(안드레아) 3대 주임신부가 부임한 후 청년회원들이 주동이되어 永靑報를 월간으로 발행하는 한편, 大建商社라는 이름의 천주교 복지센타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1963년 10월 구로동 본당을 분할하고, 이듬해 4월에 샛별 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68년 3월에는 불우 청소년 교육을 위한 애전고등공민학교를 구 성당에 개교하였다. 1970년 11월 朴成鍾(프란치스꼬) 신부가 13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뒤 본당 평협과 부인회가 조직되었고 1973년 여름에 인근 수재민 2,600여명을 애전학교에 수용하고 구호의 손길을 펴기도 했다.

1964. 5 까리따스 농장 시작 (교회와 역사 223호 22쪽) - 1993. 12. 25발행

까리따스 농장 (교회와 역사 223호 23쪽) - 1993. 12. 25발행

농장은 1964년 5월 전남 영암군 신북면에 임야 4만 7천평을 매입하고 이를 개간하여 배, 포도, 복숭아 등의 과일 나무를 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4년 가까운 기간은 외부 사람에게 위임하여 관리했으나 1969년 11월 부터 까리따스 수녀회에서 관리를 시작했다. 긴 수도복을 입은 수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는 모습은 인근 주민들과 함께 일하는 이들 눈에 이상하게 보였지만 그들도 차차 수녀들의 인애와 사랑을 알게 되어 신앙에 대해 나아가서는 수도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생활은 당시나 지금이나 의식 속에 박혀 있는 노동에 대한 그릇된 인식, 그로 인해 할 수만 있다면 농촌을 떠나려는 농민들의 마음 속에 노동의 가치와 일하면서 시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1971년에는 10,000여평의 주위 야산과 논 3,000여평을 매입하여 식생활을 해결하게 되었고 농장은 6만 여평이 되었다. 1972년에는 주위 농민들의 일손을 도와 주기 위해 탁아소를 건립하여 256명의 어린이들을 모아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베풀면서 동시에 이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부모들까지 신앙을 갖도록 하여 농촌사목의 한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후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젊은 세대가 줄어듬으로 인해 어린이들도 줄어 들어 1975년에는 폐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해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오고 전화가 가설됨으로 인해 문화 혜택을 받게 되었다. 1970년 이후에는 매년 수련자들이 이곳에 2-3주씩 머물면서 수녀들의 일손을 도움으로써 노동과 자연 안에서 만남의 현존을 체험하게 되고 노동의 가치와 농민들과의 연대감을 재인식하는 소중한 기간이 되어 현재는 수련 프로그램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농장 사업을 통해 '일하는 것이 본회의 특징이다'라는 창설자의 정신을 되새기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을 통해 많은 경제적 도움을 받았지만 앞으로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수도회 정신을 살리는 사업들을 적극 뒷바침함과 동시에 농장 자체로도 해야 할 일을 모색하고 있다.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에 비해 지금은 일손 부족으로 적기에 손질을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안고 있지만 이는 농촌 전반의 문제이기에 젊은 회원들의 자발적인 투신과 희생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진단하고 있다.

1964. 8. 1 마리아 수녀회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의 창설동기는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소 신부) 가 부산 송도(지금은 남부민동) 본당주임으로 있을적이었다. 너무나 가난한 참상, 너무나 외로운 사람들의 처참한 상태를 그냥 볼 수가 없었던 소 신부는, 우선 버림받은 고아들만이라도 주님의 일꾼이 되어 돌봐 줄 사람들을 구했다. 당시 부산 교구장 최 재선 주교와 의논하여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모든 자금은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모금해다가 재단법인을 결성했다. 우선 송도 본당 한쪽 헛간 바닥에 거적을 깔고서 시작한 마리아 수녀회의 공식 창설일은 1964년 8월 1일이다. "이 어린이들 중에 하나라도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 (마태 18,5) 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과 부모가 없어 버림받는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모성애로써 봉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 등 기도 생활과 함께 복음적 실천과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창설한 수도회다. 그리하여 버림받은 어린이와 불우한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수도회다. 회원은 빈첸시오 바오로 성인의 까리따스 수녀회의 전통을 따른다. 마리아의 수녀회에서 행하는 사업의 규모는 아동복지 사업과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 고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버림을 받아서 마음과 몸이 몹시 지쳐있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는 지체부자유와 정신 박약한 가련한 어린이도 320여명이나 된다. 이들은 수녀들의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로써 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구나, 어떤 과오를 저지른다고 해도 따뜻한 사랑과 손길로써 보호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낙원이다.

의료사업인 부산의 결핵요양소와 서울의 갱생원은 시 당국의 경영난으로 믿고 넘겨 준 의료기관인데, 모두 무료치료를 베풀고 있다. 서울 갱생원 원생 중 회갑을 지낸 환자들은 서울 소년의 집 구내로 옮겨서 양로원 같이 보살피고 있다. 교육사업은 모두 수녀회가 전액 부담하되, 부산으로 집결시킨 유치부를 마치면 부산의 중학교로 보낸다. 중학교를 마치면 남자는 기계공고로 전학시키고 여자는 고입예비고사에 합격하면 학구배치에 따라 여러 일반여고로 보내어, 학비 잔액을 부담하여 통학시킨다. 공업고교 과정을 마친 남자는 노동부가 시행하는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직을 시킬 수 있고 공전으로 전학 수용시켜 무상교육의 혜택을 지속시킨다. 여자의 경우는 여고를 마치고 대입 예시 합격하면 간호전문대, 교육대, 사범계 등으로 진학시켜 무상 교육 혜택은 연장된다.

1964. 10 한국가톨릭농민회-가톨릭노동청년회 '농촌청년부'로 시작(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64. 성심여자대학교 개교 (649쪽 성심수녀회)

성심수녀회 (영) Society of the Sacred Hear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49쪽)

1800년 11월 21일 성녀 마를렌 소피바라(Madeleine Sophie Barat) 수녀가 프랑스에서 창립한 수녀회.

1956년 10월 10일 한국 진출. 젊은 이들의 교육으로써 예수 성심에게 영광을 주는 것을 창립 목적으로 하여 1956년 한국에 진출하자 곧 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미 1908년 일본에 진출한 수녀회의 극동관구장 브리짓 키오(Brigid Keogh) 수녀에게 한국 진출을 요청하자 관구장이 직접 내한하여 현 수녀원과 성심여자고등학교가 있는 서울 원효로의 옛 예수성심신학교 및 성당 건물을 이수하고 1956년 10월 서울 분원장 맥하디 플린트(McHardy Flint) 수녀 외 7명이 내한하였다. 수녀회 본부에서의 10만달러 예치로 법인설립을 하고, 많은 어려움 끝에 1957년 2월 12일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57년 4월 18일 성심여자중학교의 첫 입학식을 가졌다.

1960년 3월에는 성심여자고등학교가 개교하는 한편, 같은 해 9월 미국 수련원으로부터 한국인 수녀 2명이 내한하여 더욱 활동하기에 좋아졌다. 교육의 일괄성을 위하여 1963년 성심국민학교, 1964년 성심여자대학이 각각 서울과 춘천에서 개교하였다. 아울러 가난한 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서울 봉천동에서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천막학교를 개설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하였다. 1975년과 1982년에 교육의 효율화를 위하여 중학교와 국민학교를 각각 폐교하였고 1975년 3월 한국지구로 독립하여 승격됨과 동시에 같은해 9월에는 부천(富川)에 성심여자대학의 분교를 신설하였다. 1978년에는 강원도 사북읍 고한리 광산촌에서 활동을 실시하였다. 현재 서울 원효로의 본원을 비롯하여 춘천, 원주, 인천의 분원과 함께 서울 원효로에 수련원공동체가 있고, 한국지구장 한순희 수녀를 중심으로 43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1964. 성심여자대학교 개교 (교회와 역사 86호 7쪽) - 1982. 9. 25발행

성심수녀회 (교회와 역사 86호 7쪽) - 1982. 9. 25발행

성심수녀회는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1800년 11월 21일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 (Madeleine Sophie Barat)가 동료수녀들과 함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서원을 함으로써 창립되었다. 바라 성녀는 "이 회의 유일한 창립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이다."라고 말하면서 젊은이의 교육을 통해 예수성심께 영광을 드릴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성심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것은 1956년 10월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가톨릭 교육을 통한 것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서울 교구장 노기남(바오로) 주교는 이 수녀회에 한국 진출을 요청하였다. 1956년 10월 한국에 처음 진출한 창설수녀들은 서울 분원장인 맥하디 홀린트(Mchardy Flint) 수녀 등 모두가 7명이었으며 그들의 국적은 각기 달라 호주, 애란, 중국, 일본, 몰타, 폴란드, 벨기에 등이었다. 7명의 창설자들은 잠시도 그들의 사명의 가톨릭 교육을 잊지 않았고 진출 후 곧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들 가운데 주 매분 수녀는 곧 모든 사람에게 한국인으로서 받아들여질 만큼 한국어에 능통하여 졌다.

1956년 11월 한국에서의 첫 교육사업인 성심여자 중학교는 소정의 시험을 치러 18명의 신입생으로 역사적인 입학식을 가졌는데 (모집인원 30명에 49명이 응시했으나 전형 결과 18명만 합격시켰다.) 이처럼 적은 숫자로 학교를 경영한다는 사실에 한국교육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모든 면에서 전통적인 성심학교 교육은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1961년 총원장 수녀가 극동지구와 북미지역 대원장 수녀를 동반하고 한국에 온 것을 계기로 하여 한국에서의 성심교육은 큰 계기를 맞이하였다. 총원장 수녀는 성심 여자 중·고등학교와 성심 여자대학의 신설을 허락한 것이다.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물론 '성심'에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성심'에서 대학까지 마칠 수 있게 해 줄것과 이 좋은 교육이 국민학교부터 일관성있게 이루어지길 총원장에게 간청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그리하여 성심 국민학교는 1963년에, 성심여자대학은 1964년에 각각 신설되었으나 '성심'이 꿈꾸는 일관교육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것은 성심 국민학교의 졸업생이 나온 다음 중학교가 평준화됨으로써 졸업생 중 성심여중에 추첨으로 입학한 학생이 단 한명이라도 결과를 빚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성심 수녀회는 인력과 재정 등 여러사정도 고려하여 고등학교와 대학교육에 전념키로 하고 중학교와 국민학교는 폐지시키기로 하였다.

1978년 3월에는 강원도 사북읍 고한리 광산촌에 분원을 설치하여 본당사목과 산재병원에서의 간호활동, 유아교실을 통한 가족상담 및 피정지도, 광부환자 및 가족방문 등의 사도직에도 봉사하고 있다.

1964. '미망인 양재소' 운영 (608쪽 성가수녀회)

성가수녀회 (영) Holy Family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08쪽)

1943년 12월 생제(Singer) 신부에 의해 창설된 방인 수도회. 일제 말기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불우한 이들을 돕기 위한 '성가 소비녀'의 공동체가 시작되자 1943년 이재현 신부, 공베르(A. Gombert) 신부와 함께 생제(Singer) 신부가 회칙을 작성하여 노기남 주교의 인준을 받고 창립인가도 받았다. 1945년 6월 수련생활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로부터 지도를 받았고, 1947년 1월에 첫 허원식을 라리보 주교에 의해 거행할 수 있었다. 1953년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양로원'을 인수받아 1979년 증축한 후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하고 있다. 1958년 8월에는 서울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한 뒤 1969년 현재의 서울 하월곡동으로 이전하고 가톨릭의대 부속병원인 종합병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한편 1962년에는 소사에 있는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착수하였다. 이밖에 편물과 보세가공을 가르치는 '나자렛 기술학원'(1960-1969)과 '미망인 양재소'(1964-1980)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968년 8월에는 서울 혜화동에 있던 본원을 현재의 서울 정릉1동으로 이전하여 1969년 1월 창립 25주년과 함께 신축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74년 성가회 명칭을 '성가수녀회'로 개칭하면서 1976년에는 새 회헌과 규칙의 인준도 받았다. 1985년 현재 3개의 병원과 1개의 학교를 비롯하여 1977년 개원한 신체장애양로원인 '안나의 집'등의 특수사목활동분야에서 활동할 뿐만 아니라 본당 사목활동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964. 가톨릭중앙의료원 자선진료소 설립 (나눔지 63호 3쪽) - 1985. 9. 7발행

가톨릭중앙의료원 자선진료소 (나눔지 63호 3쪽) - 1985. 9. 7발행

가톨릭이 이땅에 전래되어 200년의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전교사업 못지않게 활발하게 전개해온 또하나의 활동으로 의료사업을 꼽을 수 있을것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이 가난한 이에게는 생명의 양식을, 그리고 육신이 병든 이에게는 따뜻한 치유의 손길로서 질병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병자들의 빛이 되었듯이 가톨릭에 있어서 의료사업은 생명의 존엄성의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를 갖고 행하여져 왔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실리와 이익을 추구하는 하나의 기업으로 전락하여 다른 일반병원 못지않게 넘기힘든 높은 문턱을 유지하여 왔다.

명동 성모의원은 잘 알려져 있지만 명동 성모병원과 산재병원으로 연결된 구름다리 넘어 길건너 한쪽에 위치한 이 자선 진료소를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않다. 1964년 설립된 자선 진료소는 산발적이고 비전문적으로 실시되어온 구료사업을 조직적이고 전문적으로 실시하여 효율적인 구료사업으로 도모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과 취지가 있다. 대상은 일반 극진환자, 의료보호 환자, 학술상 희귀병을 가진 극빈환자, 그리고 다른병원에 입원 중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치료를 중단해야 하는 환자들에게 혜택을 주고있다. 어떤 경로로든 환자가 찾아오면 사회사업가가 대상자의 적격여부를 면접과 가정방문을 통해서 선별한다. 대상자로 선정된 환자라고 할지라도 진료비 전액을 지불해 주는 것은 아니다. 환자가 부담할 수 있는 능력만큼 부담 시키고 그 차액을 보조해 준다. 그러나 대부분이 극빈자이기 때문에 환자부담은 소액일 뿐이었다. 84년의 경우 입원과 외래, 이동진료소를 포함하여 자선진료소를 이용한 환자수는 모두 2,980명으로 1억5천6백여만원의 의료비가 지급되었다. 자선진료소의 의료비는 가톨릭중앙의료원에 의해서 지급되어진다. 그러나 이곳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생활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퇴원 후 또는 입원시에 의료적인 도움외에 여러가지 복합적인 가정문제를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환자들 뿐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나서서 의료혜택을 베풀고 있는데 시립남부 부녀보호소, 마포구 도화동, 성나자로 마을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지역사회 보건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가톨릭 외대생들로 조직된 하계진료반은 매년 무의촌 지역을 방문하여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전하고있다.

1964. 성모여자고등학교 개교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 (라) Congregatio Missionariarum Mariae Franciscanaru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6쪽)

1877년 1월 6일 마리 드 라 파시옹 (Marie de la Passion)에 의해 인도 오타카문드 (Otacamund)에서 창설된 수도회. 1954년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내한하려 하였으나 중국에서의 수녀원 추방운동으로 1958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진출하였다.

1960년 5월 부산 양정동에 정착하여 성모의원과 함께 수예실을 운영하였다. 1975년 2월에는 부산성모의원을 폐쇄하고, 의료혜택이 더욱 필요한 성 프란치스코의원을 개원하였다. 한편 부산에서는 1961년 3월 성모여자중학교, 1964년 성모여자고등학교를 개교했으나 1974년 성모여중을 폐교하고 1979년 6월 성모여고를 부산교구에 이관하였다. 1966년 서울 가리봉동에 수녀원과 의원건물을 완공함으로써 모두 이전하여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1974년에는 부산에 있던 수련원도 서울로 이전하였다. 1972년 일본관구소속에서 준관구로, 1978년 정식관구로 승격되었다. 1979년에는 원래 학교부지로 매입했던 곳에 선화기숙사가 완공되어 5월 1일 첫 기숙생을 입사시켰다. 현재 한국관구 본부가 있는 서울 가리봉동 수녀원을 비롯하여 부산 양정동 수녀원, 강원도 정선수녀원에서는 관구장 수녀를 비롯한 65명의 (1983년 말 현재)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64. 전주에 가톨릭 여학생관을 설립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국제가톨릭형제회 (영)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76쪽)

불일치와 부정의가 있는 현실에 도전함으로써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복음을 기초로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주력한다. 全眞常 정신을 중요시하며 全은 온전한 자아의 봉헌을 뜻하며 眞은 참다운 사랑을 뜻하며 常은 끊임없는 기쁨 속에서의 생활을 뜻한다.

1964. 구산후생학교 제정난으로 폐교 (167쪽 구산후생학교)

구산후생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7쪽)

성체회(聖體會)창설자인 윤을수 신부가 설립한 특수목적기관. 윤신부는 6.25 사변 중 군종신부로 복무하면서 전쟁고아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전쟁 후에도 계속 고아 육영사업을 전개, 이들에게 봉사할 여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여성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65. 3. 갈바리 의원 개원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갈바리 의원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 1998. 3. 31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답신에 의거

60년대 초 강릉지역의 가난하고 열약한 지역에 후천성 질환, 특히 결핵과 영양실조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으나 이에 대응할 병원은 전무상태였다. 그 당시 도림병원과 명주의원외에 다른 의료시설이 없어서 춘천교구의 교구장 이셨던 퀸란 주교님이 호주에 있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을 초대하여 이 지역에서 의료봉사를하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3월에 강릉에 설립하였고 외래 의원으로 (1998년 현재) 하루 평균 10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갈바리 의원은 예수님의 치유의 현존을 모든이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65. 8. 10 애육원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애육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답신에 의거

라리보(원형근) 주교가 고아들을 모아 애육원을 설립하여 당시 대흥동본당 신부였던 오기선 신부에게 운영을 맡겼다고 한다. 오기선 신부가 대흥동 본당에 18년간 사목하다가 1965년 서울로 올라가게되자 대전교구에서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수녀를 초빙하였다. 그리하여 김복남(아가다) 수녀와 여금순(세시리아) 수녀를 1965년 8월 10일 파견하였으며 김 아가다 수녀는 보육원일을 하고 여세시라아 수녀는 본당일을 하였다.

수녀들이 처음 파견될 당시 원아둥에는 4세에서 25세의 청년까지 있었으며 남녀 합쳐서 80여명되었다. 취학전 아동이 10여명되고 국민학생 중고등학생 대학생까지 있었다. 1966년 대흥동 본당에 본당수녀로 공영숙(마리아) 수녀와 김선옥(루시아) 수녀, 윤영란(베드로) 수녀가 파견되어 정식으로 본당일을 하였다.

김 아가다 수녀가 애육원에 처음 부임하여 갔을 때 아무것도 없어 교우들에게 된장과 간장까지도 기증을 받았다고 한다. 김아가다 수녀는 살림을 하나 하나 장만해 가면서 원아들에게 가정적분위기를 만들어 주어 가며 예모있는 사람으로 교육하였다. 1967년 애육원은 용전리로 이사하였다. 용전리에는 논과 밭이 있어 소, 돼지, 닭도 키우고 동물의 분뇨로 농사를 지으니 일년에 벼를 100가마정도 추수하고 콩도심고 채소는 농사짖는 것으로 풍족하게 먹였다. 여름에 오이는 매일 큰 광주리고 하나씩을 땄다고 한다.

교우들한테서 원아들이 입을 옷가지를 얻어 한 보따리 그득히 이고 논 밭길을 한시간 정도 걸어 애육원 가까이 오면 원아들이 뛰어나오며 반갑게 "지금 오셔유" 하면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듯하였다고 한다. 애육원의 원아들이 갈마동의 프란체스코 수사원에서 하는 보육원과 합치게 되어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수녀들은 1969년 9월 13일 철수하였다.

1965. 대전 성모여자 중학교를 개교 (309쪽 동정성모회)

동정성모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1609년에 영국인 메리 워드(Mary Ward)에 의해서 벨기에의 성 오메(St. Omer) 에서 창설된 활동여자 수도회. 청소년 교육과 그밖의 모든 자선사업활동을 전개하던 이 수도회는 초창기 교회로부터 반대와 오해를 받기도 하다가 1909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서 인준을 받았다. 1956년 8명의 한국여성이 입회.

현재 초대관구장 박기주 수녀를 중심으로 서울, 대전, 충북, 보은, 전북, 이리, 경남 진해, 충무에서 활동하고 있다.

1965. 명동성당에 농아부 창립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 1998. 7. 14일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김기영 루도비꼬님의 답신에 의거

그리스도의 정신에 기초하여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교회와 사회에 농아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고취하며 농아인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 활동과 회원들의 복지 증진에 주력하는데에 그 설립목적이 있다.

1957년 10월 10일에 서울시 돈암동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농아인 교리반을 만드셨다. 1959년 농아 중학생 6명과 중림동의 약현성당에 찾아가 이 시몬스덕 수녀님과 상의하여 농아부가 설립되고 그 후 농아부는 여러차례 수녀님이 교체되었다. 1965년 학생회가 발족되어 활동하다가 1969년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명동성당의 주교관 뒤 여성회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가 1980년 명동성당의 협조로 교육관에서 사무실을 갖추는 등 숱한 이동과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정착이 가능하게 되었다.

1981년 1월 25일 안경렬 사회복지부 신부님과 함께 복지회관에서 가톨릭 농아복지회 발족 준비회의를 가졌다. 1986년 3월 2일 명동에서 창립기념미사를 올림으로써 농아선교회가 창립되었다. 초대회장에 나수웅씨, 부회장은 곽태일씨가 선출되어 농아선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설립 취지는 다음과 같다. 극소수를 제외한 이 나라 대다수의 농아인은 온갖 역경과 고통에 좌절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삶을 포기하다시피 살아가고 있다. 농아인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써 복음대상에서 제외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여 교회와 사회에 농아인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고취하여 전국 교회내의 농아인의 복음화 및 복지증진에 주력함을 그 목적으로 하며 또한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 내용으로는 선교사업과 각종 보도매체를 통하여 농아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계몽과 사회적인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홍보사업으로는 매주일 발행되는 주간소식지와 두달에 한번 후원회의 소식과 기타 사항을 알리는 회보가 있고, 친목행사와 매년 정기적으로 기초반, 회화반으로 구분하여 수화교육을 실시하여 수화보급에 노력하며 수화교육을 마친 자로서 농아인과 함께 하고자 하는 직장인 모임인 반딧불, 주부모임인 반석회의 봉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현재 평택농아양로원을 후원하고 있다.

또 수화미사는 일반인의 미사에 농아인들을 위해 미사통역을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전례가 농아들에 의해 준비되고 행하여 지는 미사이다. 정순오 신부님의 집전으로 수화와 말을 병행하므로 일반신자도 참례할 수 있으며 특히 매달 첫째 주일에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1965. 수원교구에서 국제 가톨릭 형제회에 근로자 회관의 운영 및 건립사업을 위임

안양 가톨릭 근로자 회관 - 1998. 5월 가톨릭 근로자 회관 답신에 의거

근로자들 스스로가 그리스도 신앙을 바탕으로한 건전한 가치관을 형성하도록 돕는 목적에서 1963년 설립되었다. 수원교구 설정당시 윤공희 대주교님과 전 루까 신부님께서 당시 산업개발과 함께 안양지역내 공장으로 취업차 모여드는 젊은 남녀근로자들을 위한 사업으로의 계획을 추진시키고자 국제 가톨릭형제회원 서정림 말가리다(독일인), 한성인 벨따(한국인)에게 근로자 및 부량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으로 운영책임을 맡기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안양지역은 제지공장과 섬유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수자원이 풍부한 조건에 따라 등장한 이 산업은 노동집약적인 공장이므로 노동력이 대거 지방에서 유입되었다. 특히 여성노동자들과 나이어린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는 상황에서 그들을 위한 복지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저학력의 10대와 20대초반의 소녀노동자들을 위한 특수사목이 요청됨을 교회는 인삭하게 되었고 그들을 위한 기숙사 사업을 통하여 생활교육과 사회적응에 필요한 교육들을 실시 하였으며 지역의 노동자들을 가노청운동에 동참하도록 조직하여 나갔다.

1987년 당시 노동자들의 대 투쟁을 통하여 이곳에 살던 많은 근로자들이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다. 노동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그들은 근로자 회관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긴장했기 때문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감시를 당하게 되었고 전직 혹은 퇴사를 강요당하게 되어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붙여 가톨릭의 위상으로 그런 견해들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으로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1998년 사업의 확장과 아울러 이용자들이 복지관으로 부르게 되므로 이름을 전·진·상 사회복지관으로 변경하였다. 이 전·진·상 사회복지관의 카리스마는 설립자들이 JOC활동을 통하여 노동사목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으므로 가노청의 정신이 활동정신이 되었으며 AFI 의 우선적인 방향 중 "현실참여를 통한 인간해방"을 기초로 하여 활동하고 있다. 1998년 현재 지하 1층, 지상 3층에 여자 근로청소년 80명 수용의 기숙사 시설과 회의실, 강의실, 식당, 휴게실이 있다.

1966. 2. 17 동정 성모회는 대전에 성모국민학교를 설립 (교회와 역사 81호 7쪽) - 1982. 4. 25발행

동정 성모 수녀회 (라) Institutum Beatae Mariae Virginis (교회와 역사 81호 7쪽) - 1982. 4. 25발행

동정성모회는 1609년 영국인 메리워드(Mary Ward)에 의해 벨기에의 성 오메(St. Omer)에서 창설된 여자 활동 수도회이다. 창설자 메리워드는 2년의 준비끝에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이 수도회는 창설했는데 이름 그대로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고 성모마리아의 여종으로서의 봉사를 목표로 청소년 교육과 그밖의 모든 자선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당시 나타나기 시작했던 사도활동들은 봉쇄와 병행되거나 지방주교에게만 인정받을 수 있었으므로 이 수도회는 교회로부터 완전한 승인을 얻기까지 300년동안 반대와 오해를 받는 등 갖가지 고난과 시련의 특이한 역사를 겪었다. 창설자인 메리워드는 교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수차례나 로마와 도버해협을 건너 왕래하고 유럽전역을 도보로, 마차로 여행 하면서 후세에 "사도 바오로 이후 주 그리스도를위해 가장 긴 여행을 해낸 여성" 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 비오 10세는 수도회 창설 300년만인 1909년 4월 20일 인준을 하였다. 동정 성모회의 한국 진출은 1964년 6월 10일로서 당시 독일에 유학중이던 예수회 박고영 신부가 이 수도회의 교육사업을 보고 한국에의 진출을 요청한 것이 그 실마리가 되었다.

서울 분원의 회원들은 대방동에 있는 공군부대와 개봉동, 오류동, 본당 등에 나가 사목활동을 펴고 있으며 월1회 성소자 모임도 지도하고 있다. 대전 공동체는 1965년 학교건물과 수도원건물이 완공되면서 시작되어 성모국민학교와 성모여자 고등학교 등 청소년 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성모국민학교는 1966년 2월 17일에 객교하여 "감사할 줄 알며 거짓 없고 자기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어린이"를 배출시키고 있다. 또한 성모여자고등학교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을 위하여 몸바칠 여성"이라는 여성상의 구현을 위하여 전인교육을 이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충북 보은 분원에서는 성모병원, 성모유치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북 이리에서는 성모의원과 2개 시와 6개 군의 나환자 정착촌 12개에서 의료 및 구호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곳 성모의원에서는 나환자 전용병동도 새로 건립하였다. 또한 경남 충무분원에서는 본당사목과 충무유치원 사업을 돕고 있으며 진해분원에서는 군종사목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해군 사관학교 등 각 군부대에 나가 군종사목에 종사하는 한편, 군인가족들에는 가정방문화 그룹활동 등을 통해 교리교육과 성경연구를 실시하고 있다.

동정성모회는 현재보다 견고하고 지속적인 사도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분원확장을 보류하고 회원들의 영성교육과 사도직을 위한 전문직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94년에 한국진출 30주년을 지낸 한국 동정 성모회는 400여년 간 학교 교육에 헌신하여 온 수도 공동체의 정신을 이어 받아 자신의 카리스마인 교육은 물론이고 앞으로 신앙의 옹호와 전파를 위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이면 어떤 분야에서도 투신할 각오를 다지며 동시에 새로운 변모와 발전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다.

1966. 3 매괴상업고등학교를 매괴중·상업고등학교로 교명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6쪽)

매괴여자 중·상업고등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6쪽)

장호원본당 제6대 주임인 파디(Pardy, 1893-1938) 신부는 당시 장호원에 공립인 남자중학교만 있을 뿐 고등학교가 없는 것을 보고 전교를 위해서도 남자 고등학교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학교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52년에 매괴상업고등학교의 기성회가 결성되고 1953년에 1학급 73명의 학생이 입학하였으며 교사는 6명이었다. 그러나 교실이 없었으므로 매괴국민학교의 교사를 이용하였다. 1954년 매괴상업고등학교로 인가를 받고 학급도 6학급으로 늘어나자 1958년에 한·양식 성당과 사제관 및 한국 전통의 돌담을 헐고 그 자리에 학교 건물을 지었다. 그러다가 1965년에는 남학생 모집을 중지하고 매괴여자중학교 인가신청을 냈는데 남학생만을 모집하기로 구두로 결정했던 장호원 공립 중학교의 교장이 갑자기 이동되자 그 결정이 무효화되어 장호원 중학교에서도 여학생만을 모집하게 되었다. 이에 두 학교 모두 여학생만을 모집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미 인가신청을 냈고 또 남녀공학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운영상에 큰 곤란을 겪으면서도 1966년 3월, 128명의 학생으로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교명과 거행되었다. 11월에는 매괴상업고등학교를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교명과 학칙을 변경하였다. 매괴상업고등학교는 1967년을 마지막으로 제12회 졸업생을 내었고 1970년에는 학칙변경 후 첫번 여학생 졸업생을 내었다. 교명은 바꾸었지만 졸업횟수는 그대로 계승하여 제 13회 졸업생으로 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매괴국민학교에서만 일해왔으나 1966년 3월 부터는 교구장의 요청으로 매괴여자 중·상업고등학교에서도 사도직이 시작되었다. 수녀들은 교장, 교사, 사서, 서무 등의 소임을 맡아 학교 행정 및 운영에 최선을 다하여 학교를 발전시켜 왔다. 특히 예의 범절과 생활지도에 역점을 두고 지도하고 있으며 교사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상업학교 학생에게 필수적인 주산·부기·타자 등의 실기 급수 수준을 계속 향상시켜왔다. 또 적극적 취업알선과 성적 우수자 및 가정 형편이 곤란한 학생들에게 교내의 각종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실력있는 학생들이 많이 지원하게 되어 음성군 내의 으뜸 여학교로 성장하였다. 특히 1988년 2학기에는 전국 상업학교 학력대회에서 개인 2등, 5등, 9등을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내었으며 전체적으로는 2등을 차지하여 이제는 상업학교로서는 군내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명실공히 명문이 되었으며 취업률도 거의 100%에 이르고 있다. 이 결과 군내의 타학교들이 학생모집에 부심하는 반면 매괴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는 6학급 정원모집의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였고 오히려 입학 시험 경쟁률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취업을 위한 실력향상뿐만 아니라 천주교 학교의 특색인 종교교육에 중점을 두어 중1부터 고3까지 매주 1시간씩의 종교수업이 있고 또 한시간씩의 예비자 교리 또는 신자 재교육을 실시하여 매년 약250여명의 영세자를 배출하고 있다.

1966. 4 안양 나자로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13쪽, 1000쪽)

안양 나자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13쪽, 1000쪽)

1950년경에 캐롤(George Carroll 1906-1981) 주교와 이경재(알렉산데르) 신부가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나환자들을 위해 이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 안양 나자로원의 출발이다. 나자로원의 운영과 생활은 미국 가톨릭구제회(N.C.W.C)의 보조와 성모병원에서 대부분 충당해 주었고 치료와 투약은 성모병원의 만성병 연구소를 중심으로 하여 의대생들이 무료로 해 주었다. 또 성모병원에서는 수녀들의 생활비도 대주었다. 그러나 이듬해 교구 분할이 되면서 이전까지 서울 교구에 속해 있던 나자로원이 수원교구 산하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에 자연히 성모병원의 보조와 진료가 중단되었다. 이 진료는 이후 1971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수원교구에서는 운영상의 난점등을 들어 미감아 학교를 해체하라 하였고 수녀들도 나환자들과의 생활 등에 어려움을 느껴오던터라 파견된지 1년만에 철수하였다. 이때 7명의 미감아들은 지방에 있는 부모에게 보내고 남은 20여명은 백령도 미감아 수용소로 보냈다. 그후 이곳에서 1975년에 홍경희 헬렌 까리따스 수녀가 7개월 정도 자원봉사를 하기도 하였다.

1966. 5. 3 베타니아의 집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08쪽)

베타니아의 집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08쪽)

수도회의 연륜이 100년이 되어감에 따라 연로한 수녀들의 거처문제가 생기고 노후 요양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1936년 7월 8일 용산 삼호정(현 산천동)에 바오로 보육원 분원을 신축하여 50여명의 아이들을 분산 이주시켰을 때 원아들을 돌보고 가까이 있는 수녀원 묘지도 돌볼겸해서 보육원 2층을 노인수녀들의 거처로 정하였는데 이를 휴양지가 생긴 시초로 볼 수 있다. 1954년에 보육원이 명동으로 다시 합해진 후 이 건물은 백합유치원으로 개조되었고 1964년에는 수도회 관구로 사용할 2층 건물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교통의 불편 등으로 인해 2년만에 관구는 다시 명동으로 옮겨지고 관구 건물은 대신 1966년 5월부터 휴양의 집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7년에 본원에 있던 바오로 보육원이 폐원되어 건물이 비게 되었다. 이때 백합 유치원의 건물이 너무 낡아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재정적인 여유가 없음으로 1978년 3월 27일, 휴양의 집은 베타니아의 집으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은퇴한 노인 수녀들이 남은 여생을 기도와 휴식으로 보낼 수 있는 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편 1978년 폐원되었던 백합유치원 옆에 있던 휴양의 집 건물에는 2명의 수녀가 남아서 수녀원 묘지를 돌보며 집을 지키고 있었다. 1981년 9월 1일부터 약 1년간은 당시 한국에 진출하여 갈 곳을 마련하지 못한 사랑의 선교수녀회에 집을 내주고 그곳에서 기반을 닦도록 도움을 주었다. 1982년 4월 26일에는 용산에 있던 수녀원 묘지를 용인으로 모두 이장하였다. 이후 백합유치원 건물은 1983년 9월에 모두 철거했고 수녀원 건물은 1985년 7월에 철거했다. 이후 약 4, 5년간은 공터로 남겨두었으나 시에서 공한지세를 재촉하므로 1987년 8월 15일 명동에 있던 계성유치원을 이전할 목적으로 이 자리에 유치원과 더불어 특수사목에 종사할 수녀들의 거처를 함께 짓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8년 12월 13일에 준공을 하고 계성유치원이 이전하면서 새로 산천동 분원이 설립되었다. 명동 베타니아의 집은 1984년 1월 25일 노인 수녀들에게 알맞는 구조로 개축 수리하기로 하고 공사기간동안 수녀들은 성바오로 병원과 소래, 용현동, 논산 쌘뽈여자중고등학교 등의 분원으로 분산 이주하였다가 5월 27일 수리가 끝남에 따라 다시 베타니아의 집으로 돌아왔다.

1966. 9. 24 '천주교 보육원'에서 '천주교 성 바오로 보육원'으로 명칭을 변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95쪽)

성바오로보육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95쪽)

한국 천주교회의 고아구제사업은 교회 초창기에서부터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명도회(明道會) 등의 평신도 단체에 의해 시작되었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부터는 더욱 체계적인 교회의 사업으로 정착되었다. 이에 따라 성영회(聖櫖會)가 1854년도에 설립되어 고아들을 양육하였는데 특히 메스트르(Ambroise Maistre, 李 1808-1857) 신부는 성영회 사업을 확고히하고 발전시키는데 힘썼다. 그는 보육원 건물을 세우고자 희망했으나 그당시에는 아직도 박해가 극심하던 터라 주로 신자들의 가정에 위탁, 양육 시켰다. 그뒤 병인박해로 일시 중단되었던 교회의 고아구제사업은 1880년 블랑(Jean Blanc 白圭三, 1844-1890) 신부에 의해 재개되었고 1884년 그가 조선교구의 제7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자 그는 고아구제사업을 우선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3월 15일, 서울 곤당골(현 을지로 1가)에 있는 기와집을 구입하여 [천주교고아원]이란 이름으로 보육원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고아원이었다.

블랑 주교는 고아들의 양육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수녀를 청하여 마침내 1888년 7월 22일, 4명의 수녀가 최초로 서울에 도착하기에 이르렀다. 도착 직후 수녀들은 정동에서 약 한달간 머무른 다음 종현에 있는 기와집 두 채를 고쳐 1888년 9월, 정동의 수녀원과 곤당골의 고아원을 모두 옮기고 9월 8일, 정식으로 [천주교고아원]을 인수받아 수도회 부속사업으로 경영하게 되면서 원장에 자카리아(Zacharie Heurtault) 수녀가 취임하였다. 이때의 고아의 수는 남아가 80명, 여아가 65명이었다.

수녀들의 보살핌으로 원아들이 급증하여 150명이 넘게되자 1889년, 목조 2층 원사와 평가(平家)를 신축 낙성하였는데 이 원사가 완성된 후로는 이곳에서 남자 아이들에게는 한문과 경문을 그리고 돗자리 짜는 법과 기타 여러가지 실업을 가르쳤고 여아들에게는 바느질과 가사를 가르쳐 구제 및 교육계몽사업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많은 어린이들이 들어왔지만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병이나 굶주림의 빈사상태에서 왔기 때문에 당시 수녀원의 지도신부였던 코스트 신부의 대세를 받고 사망하는 어린이의 수도 또한 많았다. 수녀들은 격무와 재정난 등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정성껏 고아들을 돌보았는데 주일마다 대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고아들의 깔끔한 옷차림과 성당에서의 나무랄데 없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또한 아이들은 수녀들로부터 성가를 배워 미사 때 노래하였는데 그 노래 소리가 마치 프랑스의 성가대가 부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1901년 부터는 운영상의 여러 가지 사정을 참작하여 신입 남아들의 수용을 중지하고 여아들만 돌보게 되었다. 특별한 수입원이 없던 당시로서는 존타그부인이 운영하고 있던 존타그 호텔(Sontag Hotel)에서 나오는 세탁물이나 외국인들의 세탁물을 해주고 받는 돈이 생활에 큰 보탬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정도 수도원과 고아원이 자리를 잡아 갈 때 스타니슬라 원장수녀가 별세하여 1910년 1월 1일에 제 3대 원장으로 가밀 수녀가 취임하였다. 가밀 수녀는 이후 33년간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든든한 기반을 닦아놓았다. 초기부터 샤르트르 본부와 프랑스 성영회에서 보내주는 보조금이 고아원 운영의 큰 부분을 차지해 왔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러한 외국의 원조가 끊기고 보조금도 1/3로 줄어들어 극심한 재정난에 이르게 되었다. 국내사정도 약화되어 쌀값 등 생필품 값이 크게 올라 생활유지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홍수 등으로 인해 더욱 크게 늘어난 고아들을 원하는 대로 다 받을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수녀들은 극도의 내핍생활을 해가며 한편으로 새 고아원을 짓기 위한 절약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하여 1925년부터 고아원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다만 얼마라도 건축비에 보태기 위해 1925년, 1926년, 1927년 세차례에 걸쳐 이틀씩 바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동안 40여년간 저축했던 돈과 수녀들과 고아들이 수공예품을 만들어 판 돈, 그리고 국내·외의 관대한 회사에 의하여 드디어 1926년 5월, 벽돌 3층으로 된 고아원 본원사를 신축 낙성하여 입주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녀들의 손에 의해 구호되고 양육된 고아의 수는 4.500명이 넘었다. 1932년에는 천주교고아원에서 천주교 보육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고아들의 수가 많아져 수용능력이 부족하게 되자 용산 삼호정(현 산천동)에 1만 8천원의 공사비로 3층의 보육원 분원 건물을 지어 1936년 7월 8일 라리보 주교의 주례로 강복식을 거행하고 50여명을 수용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소개령(疏開令)에 의해서 보육원을 옮기기 위해 1944년 겨울부터 하우현천주교회로 짐을 옮기고 아이들을 피난시키던 중 해방이 되어 다시 본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다시금 피난생활이 시작되었다. 1950년 7월 16일에는 수녀원과 보육원을 모두 인민위원회에게 접수당하고 수녀들은 식량과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고아들을 데리고 충무로에 있는 가정보육사범학교 건물로 옮겨갔다. 거기서도 다시 쫓겨나 필동에 있던 이범석 장군의 저택에서 얼마간 지냈으나 서울 탈환작전으로 필동일대가 불바다로 변하여 다시 명동의 본원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서울이 수복되어 안정되는가 싶었으나 12월 21일 중국 지원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다시 악화되었다. 이에 서울시 사회과의 지시로 10세 미만의 어린 고아들을 안양으로 소개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1951년 1월 20일 UN군 비행기의 오폭으로 안양에 소개되어 있던 50여명의 어린이들이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자 남은 아이들은 일주일 후 다시 서울 본집으로 들어와 지내면서 부족한 식량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 한편 1951년 1월 3일에 10세 이상의 아동들은 대구로 피난하여 성요셉식당의 유치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한편 전쟁 기간 중 서울에서는 영아원이 파괴되었으므로 전쟁전에 격리실로 사용하던 건물에 100여명의 전쟁 고아들을 수용하여 돌보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던 120여명의 아이들은 1952년 9월 1일, 대구시 대봉동 173번지에 원사를 신축하여 이사하였다. 이렇게 서울과 대구에서의 고생을 하던 당시에는 미군들의 원조가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파괴된 서울 원사를 신축하기 위해 1953년 가을에 공사를 착공하여 이듬해 10월 7일 축성하였는데 연건평 330평의 3층 벽돌집에 110명의 아이들이 입주하였다. 1954년에 용산에 있던 아이들이 다시 명동으로 합해지고 1957년 11월 7일에는 대구에 있던 아이들도 전원 복귀하였다. 1966년 9월 24일에는 명칭을 [천주교 성바오로보육원]으로 변경하였다. 1969년 9월 23일에는 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천주교쌘뽈유지재단으로 명의를 이전했고 아동복리시설 인가를 갱신하였다.

이처럼 숱한 역경과 어려움을 헤쳐오며 수녀들은 어린이들을 사랑과 인내로써 양육하고 이들이 떳떳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돌보아왔다. 이미 보육원 초기부터 원내에서는 필요한 공부와 수예, 재봉 등을 가르쳐 왔고 1930년경 부터는 좀더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여 유치반, 초등반, 중등반 등으로 나누어 일반 학교와의 유대관계를 맺어나갔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학령기에 달한 모든 아이들을 계성국민학교로 통학시키고 가능한 대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교육시키려 하였다. 또한 적령기에 달하면 교우가정에 혼인을 시키기도 하고 자립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은퇴한 후에도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곤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아보육사업은 차츰 방향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사회가 안정되면서 고아의 수는 점차로 줄어들었고 대신 양로사업이나 정신 박약아, 장애인 등과 같은 특수 사회사업에의 요청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변천 및 요청에 따라 사업 전환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남아 있던 81명의 원아들 중 9명은 연고자에게 인도하였고 3명은 국내 입양, 4명의 국외 입양, 가출 2명, 그리고 63명은 다른 사회복지기관으로 나누어 이주시켰다. 이렇게 하여 성바오로보육원은 1977년 9월 6일 폐원되었다.

1966. 대전 성모국민학교 개교 (309쪽 동정성모회)

동정성모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1609년에 영국인 메리 워드(Mary Ward)에 의해서 벨기에의 성 오메(St. Omer) 에서 창설된 활동여자 수도회. 청소년 교육과 그밖의 모든 자선사업활동을 전개하던 이 수도회는 초창기 교회로부터 반대와 오해를 받기도 하다가 1909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서 인준을 받았다. 1956년 8명의 한국여성이 입회.

현재 초대관구장 박기주 수녀를 중심으로 서울, 대전, 충북, 보은, 전북, 이리, 경남 진해, 충무에서 활동하고 있다.

1966.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설립 (555쪽 사회사업)

사회사업 (영) Social servic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5쪽)

가톨릭 교회는 단순한 전례의 공동체나 신앙의 공동체일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빛(마태 5,13-16)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사회안의 어두운 곳을 찾아서 어두움을 없애고 광명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너무도 어두운 곳이 많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사람, 육체는 건강하나 정신이 병든사람, 정신은 건강하나 육체가 병든사람 등이 있다.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을 살펴주고 그들의 희망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버림받고 소외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현세적인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교회의 사업중에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문화사업, 사회사업등이 포함된다.

*구미근로여성복지관 - 1973년 경북 구미시 송정동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구미공단 근로여성들의 인격도야 및 생할향상을 위해 기능교육, 취미교육, 교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설립단체는 왜관 성 베네딕토 대 수도원이다.

*국제마리아의 사업회 -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고 1969년(여자), 1974년(남자)에 설립되었다.

주된 활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회원이 소득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퍼콜라레 운동을 하는 남녀 회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덕산 신생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으로서 1952년에 설립된후 요보호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하고 원생을 초·중·고등학교에 진학 시키고 졸업 후에는 기술을 습득시키고 있다.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 1976년 경남 마산시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정기프로그램으로 학습반과 취미반이 있고 특별 프로그램으로 젊은이 교실, 사임당교실, 성교육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 1979년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설립하였다. 불우이웃 청소년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의식개발, 교육, 협동, 우정, 자립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쎈뽈원 - 충남 논산군 논산읍에 있으며 1973년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이 되었다. 노인복지시설을 설치운영하며, 성인불구자의 복지사업을 하고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 1966년에 설립되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근로자의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기업인의 이해를 촉구시키고 노사간의 긴밀한 협조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곳이다.

*성심원 - 서울대교구가 불우아동 및 부상아동을 보호하기위해 1946년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설립하였다. 파티마 성모수녀원에서 담당운영하고 있다.

*성인복지원 - 1976년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설립, 부양가족이 없고 경제적으로 자활이 분리한 60세 이상의 여자노인을 수용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 본부는 서울 명동에 있으며 마음의 가난함을 생활화하는 단체로 1961년 설립되었다. 주된사업은 환자, 가난한자, 걸인을 돌보고 노쇠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며 불우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이다.

*소화영아재활원 - 1946년 소아보육원으로 출발하였다. 주된사업은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사업이며, 부산교구재단에서 운영하고있다.

*엠마우스집 - 1981년 설립된 것으로 성인지체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 - 1969년에 불우아동을 수용하여 직업보도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성 빈첸시오 청소년 복지회에서 설립하였다.

*춘광대구 요양원 - 극빈 폐결핵 환자 요양원으로 1966년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진영성모의원 별관 -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불우한 결핵환자를 고쳐주는 것이 주된목적이다.

*한국 SOS 어린이 마을 - 요보호 아동들을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하고 퇴소후에는 독립생계를 유지토록 자립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꽃동네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중 특기해야 할 것은 충북 무극에 있는 꽃동네로 청주교구 오웅진 신부가 혼자서 걸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면서 시작되었다. 꽃동네의 특징은 구걸할 수만 있으면 퇴거토록 하는 것으로 자생의 능력이 전혀 없는 노인만을 보호하는 곳이다.

*성모 자애원 - 예수성심 시녀회가 심신 장애아를 재활시키는 곳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 6.25 이후 기아가 날로 증가하여 버림받은 생명들을 입양, 양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릴리 어린이집 - 6-7세의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을 받아 교육하고 있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의 근로자의 집 - 근로자의 수용과 교육에 힘쓴다.

*성 프란치스코의 집 -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일을한다.

*마리아 자매원 - 문제청소년을 교도하고 상담과 숙소를 제공하여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국민학교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이수시킨다.

*성심 양로원 - 불우한 노인을 수용하여 물질적 정신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성가 양로원 - 무의탁 노인들을 구호한다.

*백백합 보육원 -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호, 육성한다. 설립단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다.

*해성 보육원 - 요보호 아동과 지체 부자유자아 및 정박아 수용 및 양육, 국내외 입앙을 하고있다.

이상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 중 그 일부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나 이 이외에도 수십개의 사회사업단체가 있으며 그들은 보이지 않게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사업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첫째, 교회는 특별히 정부나 일반 사회단체에서 망각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소외된 계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이 하기 어려운 사업을 찾아서 그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임무다.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회사업은 양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몇명을 도와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교회의 사회사업은 어떤 기관이나 단체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사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자기의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인의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회사업가이며 모든 신자가정은 사회사업단체인 것이다. 세째, 교회 당국이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재정적 뒷바침을 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성당도 지어야 하고 문화사업도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오늘의 현실 안에서 연장시키는 일이다. 특히 도시교구나 본당에서는 그 지역사회안에 어두움을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여 그들을 위한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정말 가톨릭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1966. 베네딕도회가 대구 파티마의원 설립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66. 왜관 베네딕토수도원에 주한 대표부 설치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66.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에서 상지전문대학을 설립 (198쪽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영) Sisters of the Christian Doctrin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98쪽)

1700년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여교사, 간호원 몇명과 함께 프랑스의 장 바텔로(Gean Vatelot)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1966년 한국에 진출하여 안동교구의 초청으로 룩셈부르크 관구 소속 수녀 3명이 처음으로 내한하여 상지전문대학을 설립하는 한편, 1970년에는 수녀원 독립건물을 신축하였다.

1967. 6 수원에 성 빈센트 병원을 개원 (526쪽 빈첸시오회)

빈첸시오회 (독) Barmherzige Schwestern vom HL. Vincenz Paul zu Parderborn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26쪽)

프랑스 파리에서 1633년 뱅상 드 폴 (Vicent de Paul) 신부와 루이즈 드 마빌락 (Luise de Mavillac)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가난해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사회사업과 양로사업을 추진한다.

1967. 6. 3 가톨릭의과대학 제5부속병원으로 성 빈센트 병원 개원 및 축성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성 빈센트 병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 1998. 5. 2일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답신에 의거

빈센트 성인의 정신에 따라 병원을 통하여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고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목적으로 1963년도에 설립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의 정황은 6·25전쟁이 끝난지 10년 남짓한 기간이었으므로 외국, 주로 미국의 원조에 의하여 겨우 전후의 복구가 마무리되는 듯한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어려운 때였다. 따라서 이 수원지역은 수도 서울에서 불과 40㎞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병든 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의료시설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실정이었다.

이때 수원교구가 설립되어 윤공희(빅토리노) 신부가 주교품에 오르면서 초대교구에 수도회와 교회의 의료기관이 설립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던 차에 마침 교황 대사로 있던 ANTONIO DEL GUIDICE 신부로 부터 독일 파데르본(Paderborn)에 있는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권고에 따라 한국에 전교하기 위하여 대상지역을 물색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교황대사의 주선으로 이들을 초청하게 되었다. 이 초청을 받은 수녀회에서는 이를 기꺼이 수락하여 1차로 두명의 수녀를 파견하여 윤공희 주교와 논의하고 모든 상황을 파악한 후 귀국하여 본원에 결과보고를 하였다. 결과보고를 접수한 수녀회에서는 공동체를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이 공동체의 주보이신 빈센트 성인의 정신에 따라서 의료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제반준비를 추진하게 되었다. 따라서 1964년부터 수원시 지동 93번지 일대에 부지를 구입하는 한편 같은해 11월에는 한국의 수녀가 되고자하는 지원자 9명이 독일 모원으로 가게되었다. 이들은 수녀가 되어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귀국하여 당시 한국 분원과 병원발전을 위한 초석으로의 역할을 하게된다.

이와같이 제반준비가 진행되면서 드디어 1965년 1월 8일 독일 파데르본(Padeborn) 모원에서 세명의 수녀가 파견되어 병원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에 착수하게 되고 그해 3월 19일 해방과 더불어 기공식을 하게된다. 병원건물은 착공한지 2년만인 1967년 5월 10일 준공하였고 그해 6월 3일 가톨릭의과대학 제5부속병원으로 개원 및 축성하게된다.

자선진료는 병원의 설립이념에 따라서 병원이 개원된 지 약 5개월 후인 1967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 외래진료실은 진찰실과 대기실, 약국을 갖추고 주3회, 월, 수, 금요일에 1일 70-80명을 진료하였으며 입원 진료 시설은 5개의 병실에 욕실, 남녀화장실, 간호사실을 갖춘 25병상 규모로 이중 남녀 성인 환자용으로 각각 10병상씩 할애하고 소아환자를 위하여 5병상을 마련하였다. 또한 자선진료를 위한 전담인력을 배려하였던바 자선병동 개설 당시 전담의사는 이정동 수련의였으며 간호인력은 이위순 수간호사를 비롯한 5명의 간호사와 4명의 간호보조원이 배치되어 수고하였다. 자선 진료 과목은 병원내 전 의료진의 도움으로 당시 개설되었던 모든 임상과를 망라하였다. 그러나 제한된 진료시설에 무료진료를 받고자 하는 환자의 수효가 점차 늘어감에 따라 부득이 자선 무료진료 대상자를 선별하여 진료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인지라 이를 위하여 행정서관인 읍·면·동회장과 각 본당 신부님들의 협조를 의뢰하여 극빈자 카드 소지자와 본당 신부님들의 추천을 받아오는 환자, 기타 가난하다고 인정되는 환자 순으로 대상을 정하고 입원의 우선순위도 정하였던 바 가정내의 역할 면에서는 가장이나 젊은이, 어린이, 학생순으로 하였고 상병에 의한 우선 순위는 부인과 수술, 탈장, 맹장, 내과적 질환, 기타질환 순으로 하여 입원시켰다. 또한 당시 사회적 여건이 어려운 때인지라 성 빈센트 병원에서의 자선무료진료는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소문이 널리 퍼짐에 따라 찾아오는 환자들을 보면 수원지역을 비롯한 경기도 남부뿐만이 아니라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의 거의 대한민국 전역이 대상이었다.

병원이 개원된 1967년 6월 이래 1978년 까지 사회구호 사업은 병원을 찾아오는 가난한 환자들에 대한 자선진료를 위주로 하여 시행되어 오다가 1979년 부터는 연 3-4회씩 의사와 간호사, 구급차와 의약품을 동원하여 무의촌을 찾아다니면서 의료봉사활동을 전개하여 왔다.

병원에 천주교 신앙단체인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와 '레지오 마리애회'가 일찍부터 조직되었고 이들의 자선봉사활동 또한 활발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기쁨이 되고 있다.

1967. 8. 13 안양 나자로원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13, 1000쪽)

안양 나자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13쪽, 1000쪽)

1950년경에 캐롤(George Carroll 1906-1981) 주교와 이경재(알렉산데르) 신부가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나환자들을 위해 이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 안양 나자로원의 출발이다. 나자로원의 운영과 생활은 미국 가톨릭구제회(N.C.W.C)의 보조와 성모병원에서 대부분 충당해 주었고 치료와 투약은 성모병원의 만성병 연구소를 중심으로 하여 의대생들이 무료로 해 주었다. 또 성모병원에서는 수녀들의 생활비도 대주었다. 그러나 이듬해 교구 분할이 되면서 이전까지 서울 교구에 속해 있던 나자로원이 수원교구 산하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에 자연히 성모병원의 보조와 진료가 중단되었다. 이 진료는 이후 1971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수원교구에서는 운영상의 난점등을 들어 미감아 학교를 해체하라 하였고 수녀들도 나환자들과의 생활 등에 어려움을 느껴오던터라 파견된지 1년만에 철수하였다. 이때 7명의 미감아들은 지방에 있는 부모에게 보내고 남은 20여명은 백령도 미감아 수용소로 보냈다. 그후 이곳에서 1975년에 홍경희 헬렌 까리따스 수녀가 7개월 정도 자원봉사를 하기도 하였다.

1967. 8 전라북도 고창에 나환자촌인 동혜원을 설립 (993쪽 작은자매전교회)

작은자매전교회 (영) Little Missionary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93쪽)

1951년 10월 이탈리아의 쿠네오(Cuneo) 에서 가스파리노(Gasparino) 신부가 창설한 수도회. 1963년에 한국진출.예수의 생활과 같이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는 형제, 자매들의 선교단체이다. 현재 한국에는 작은 자매전교 수녀회만 진출하였는데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회 신부의 추천으로 이탈리아 모원 소속인 4명의 수녀가 1965년 부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67. 8. 22 동혜원에 작은자매 전교회 회원들이 사목활동을 시작 (작은자매 전교회의 복지시설)

동혜원 (작은자매 전교회의 복지시설) - 1998. 4. 23일 작은자매전교회의 답신에 의거

"하느님께 대한 우리 봉헌을 가장 가난한 이들 속에서 행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생활은 오직 하느님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가난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전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적인 우정의 분위기 안에서 사업을 하지 않고 그들의 가장 긴급한 필요성에 응답하는 봉사와 선물의 자세로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나누는 것입니다." 라는 회헌을 바탕으로 나환우들의 정착 마을에서 기도의 우월성과 작은 프라테르니타(형제애를 나누는 곳 이란 뜻) 생활을 통해 형제애를 증거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봉사를 하기위하여 작은자매 전교회에서 서 이멜다 자매와 나 마리아데레사 자매가 동혜원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고창 본당에 배 요셉 신부님이 계실때 시작하였으며 마을에 280-300명 정도가 있었는데 계발이 안되어 길도 없었고 외부에서의 도움의 손길이 없었으며 치료실이나 약품제공도 없어 개인적으로 치료를 하고 있었다. 자매들의 이동이 있었으나 계속해서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산 17번지에 주거하고 있다.

1967. 10. 6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 부속의원 설립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의 복지시설)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 부속의원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의 복지시설) - 1998. 4. 21일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의 답신에 의거

"예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기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 23),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파견되었다." 라는 성서말씀과 회헌을 바탕으로 1967년에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의료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에서 설립하였다.

1967년 설립 당시에는 가리봉 지역이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의사 2명과 약사 1명 그리고 간호사 1명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 형태로 시작하였다. 1997년 현재는 의사 1명, 간호원 4명, 보조원 3명, 사무직원 1명이 활동하고 있다.

1967. 10. 한국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 발족 (1244쪽 한국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

한국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 (영) Catholic Leprosy Workers Association of Korea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44쪽)

나병으로 신음하는 형제들이 자립 갱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사업을 하기위해 1967년 10월 18일 발족된 연합회. 1968년 5월 한국 주교회의 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주요 사업내용으로는 신용조합 육성을 통한 자활지원, 부랑나환자들을 위한 정착마을 지원, 환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 등으로 전국 37개의 정착마을과 3개의 불구나환자들의 수용시설을 운영, 지원하고 있고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비롯한 11개 수도단체와 가톨릭 피부과 병원 등 11개 회원기간들이 진료와 정착사업을 돕고있다.

1967. 11. 1 성 빈센트 병원 내에 자선 진료소 개설 (교회와 역사 271호 12쪽) - 1997. 12. 25발행

자선 진료소 (교회와 역사 271호 12쪽) - 1997. 12. 25발행

1967년 11월 1일 성 빈센트 병원 내에 개설된 자선 진료소는 전 의료진의 지원과 협조로 성 빈센트 병원의 진료 과목과 동일하게 운영되었다. 제한된 진료 시설에 비해 무료 진료를 희망하는 환자수는 급증하고 있어 부득이 대상자를 선별해서 진료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던 중 1977년 의료 보험 제도의 도입으로 1978년 11월에 자선 진료제도는 폐지되었다. 그 대신 타병원에서 진료를 꺼리는 의료 보호 환자에 대한 진료를 확대하는 한편, 생활이 어려우면서도 의료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감면해 주는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 1967년 11월 부터 1978년 11월 까지의 자선 진료 실적은 연인원 외래환자 58,717명에 입원 환자가 52,700명에 이르렀으며, 1978년 11월 부터 1991년 말까지의 의료보호 환자의 진료 실적은 연인원 외래 환자 54,497명에 입원환자는 106,371명에 달하였다.

1967. 11. 21 대전 대흥동에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 설립 (교회와 역사 85호 7쪽) - 1982. 8. 25발행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 (교회와 역사 85호 7쪽) - 1982. 8. 25발행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는 1964년 4월 10일 장화자(힐데갈드) 수녀에 의해 부산 동항 천주교회 구내에서 창설된 방인 수도회이다. 장 수녀는 독일문학을 전공키 위해 서독에 유학 중 영세입교하여 유학생의 신분으로 전교에 힘쓰다가 복음전파를 위한 수도회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학위 취득마저 포기하고 귀국했으며 그 후에도 몇차례 서독왕래를 거듭한 끝에 당시 부산지방에서 선교중이던 트라우너(Trauner, Anthony)신부의 지도로 마침내 이 수녀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같은 해, 같은 장소에 마리아회 수녀회가 창설되어 수녀원의 장소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은 한 곳에서 두 수녀회가 새로 발족할 수는 없다는 교구장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러한 사정으로 수녀원은 1967년 11월 21일 대전교구장 황민성(베드로) 주교의 배려로 대전시 대흥동에 자리잡게 되었다.

1967년 대전에 본원을 설치한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는 최초의 사목활동으로 교도소와 소년마을에 대한 선도사업, 문창동 본당에서의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수녀회에서는 본당사목(유치원 포함) 외에 갖가지 특수사목활동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데 그 중요한 것으로는 대전시내 각 군 부대에 대한 교리 및 성가지도, 각급학교에 강사 파견, 병원 및 벽지 의료기관에 대한 간호수녀의 파견, 교도소 및 소년원에 대한 전교활동, 양로원 사목, 농장에 대한 축산과 농경지도, 탁아소에 대한 봉사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공군 기지 교회, 제2사관학교생도 등에 대한 교리 및 성가 지도, 각 대학교 및 중고등학교의 강사 파견, 병원과 벽지 의료기관에 대한 월 1회 미사봉헌과 매주 마다 교리지도 등을 하고 있으며 수도회 자체사업으로는 양로원 운영과 농장경영을 하고있다.

1967. 성신간호전문대학 개교 (647쪽 성신간호전문대학)

성신간호전문대학 聖神看護專門大學 (영) Holy Spirit College of Nursing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47쪽)

골롬바노 수녀회가 1967년 전라남도 목포시 산정동 97번지에 설립한 학교. 이 학교는 골롬바노 수녀회가 1955년에 성 골롬반병원을 개원하면서 이미 설립하기로 확정되었었다. 당시 광주 교구장이던 헨리(Harold Henry,玄, 골롬바노회 소속) 주교는 병원과 학교를 같이 설립하기로 하여, 1963년 4월에 학교법인 설립허가를 받았고, 1966년 11월 학교설립인가를 얻어 1967년에 개교하게 된 것이다. 1972년 3월부터 학교명을 골룸반간호전문학교로, 다시 1979년 1월부터 성신간호전문대학으로 개편인가를 받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성신간호전문대학은 순수한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하여 하느님과 이 세상, 개인의 변화를 교육이념으로 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적인 생활에 입각한 삶을 이해, 실천하며, 병원 및 지역사회의 발전과 보건향상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여 효율적인 의사소통과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이해하도록 하고 보건요원으로서의 책임감을 갖도록 하게 하고 있다.

1967.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안동에 상지전문대학을 설립 (교회와 역사 235호 18쪽) - 1994. 12. 25 발행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영) Sisters of the Christian Doctrine (교회와 역사 235호 18쪽) - 1994. 12. 25 발행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1700년 프랑스 알사스 로렌 지방에서 장 바틀로(Jean Vatelot, 1688∼1748)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 당시 독일과 프랑스는 알사스 로렌 지방을 사이에 두고 오랜 국경 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였고 가난과 질병, 무질서와 혼란 등 전쟁이 남긴 온갖 병폐의 만연, 특히 젊은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윤리적 탈선에 빠지는 심각한 현상이 가정과 사회를 짖누르고 있었다. 바틀로 신부는 교육사업과 간호 사업을 통해 그 지역 주민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삶의 희망과 인간다운 삶을 찾도록 하기 위하여 본당이나 동네, 소외된 지역 등 생명에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부르심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그들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이런 시작은 곧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를 탄생시켰다. 현재 프랑스 낭시(Nancy)에 총원을 둔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유럽, 남미, 아프리카, 한국 등지에서 1천여명의 회원들이 주로 교육 사업을 하며 의료사업, 윤락 여성들과 가출 소녀들의 재교육 등 특수 교육 및 전교 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한국 진출

1966년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안동에 진출한 것은 당시 대구대교구 안동 감목 대리 구인덕(Celestin Coyos, 具仁德) 신부의 초청으로 시작되었다. 구인덕 신부는 농촌 지역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맡아줄 수 있는 수녀회를 찾고 있었다. 이때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룩셈부르크 관구장이 이 요청을 검토한 후 받아들여 룩셈부르크 관구 소속의 셀린(Celine Knauf) 수녀와 안젤린(Angelin Kellen) 수녀가 1966년 9월 17일 한국에 파견되었다. 두 수녀는 이틀 후부터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명도원에서 1년간 한국어 교육을 받은 후 1967년 안동시 율세동 393번지 3만여평의 부지에 상지전문대학과 수녀원 신축을 시작하였다. 1968년 처음으로 지원자들이 입회하여 1970년 청원기를 시작하고 1972년 율세동 수녀원이 축성되었다. 수녀회 진출의 처음 목적은 안동 지역에서의 교육 사업 전개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특성상 수도회의 봉사의 손길을 요구하는 데가 너무도 다양하여 가능하면 창립정신을 살리면서 교회의 요구에 능동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 교육사업

상지전문대학 : 1967년 안동시 율세동 393번지 30,000여평의 부지에 젊은이들의 전인 교육과 기능인 양성을 목표로 신축하여 1969년 10월에 학교법인 상지학원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70년 상지 여자실업 전문학교로 개교하면서 상과 40명, 의상과 80명, 보육과 40명, 총 160명 정원으로 시작하였다. 이때 셀린 수녀, 안젤린 수녀, 아녜스 수녀가 각각 불어와 의상학, 영어를 강의하였다. 같은 해 12월 학교 법인 상지학원 상지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면모를 갖추었고 다시 1990년에 현재 상지전문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당시 상지 전문대학의 설립은 수도권 중심으로 집중된 한국적 교육 풍토에 이정표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 유아 교육학과, 식품 영양학과 등 총 14개 학과에 3천여명이 재학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에 이르러 운영권을 교구로 이양하였다. 사실 현 교육 현장의 상황으로 전문대학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수도회 내에서도 교수 인원 확보에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수녀회 차원보다는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교육의 질을 높이고자 교구로 운영권을 이양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교수직과 서무과장, 사서과장, 기숙사 운영을 위하여 회원들이 파견되고 있다.

상지 기숙사 : 학업 때문에 안동에 올라온 타지방 학생들을 위하여 시작되었다. 숙식을 함께 제공하는 '기숙사'와 경제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저렴하게 방만 빌려주는 '자취사'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데 지원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입소 경쟁률이 높아짐에 따라 점진적인 확장 계획도 생각하고 있다. 현재 수녀 1명이 기숙사 사감으로 파견되어 다양한 월례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인간교육과 생활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사실 현재 고등학교의 교육 현실은 오직 입시 위주로만 운영되어져 전인교육을 위한 기회들이 매우 적다. 때문에 수도회에서는 이 기숙사 생활을 통해서라도 참된 인간교육과 복음화를 시도하고 있다. 또한 기숙사 학생들 중에 봉사하는 회원들의 모습을 보고 성소를 택하는 경우도 있어 성소 개발의 어장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상지전문대학 부속 유치원 : 전문대학 부속 유치원으로서의 새로운 교육 이론을 도입하여 유치원 교사 양성에 도움을 주며 어린이들에게는 기본 생활 습관 지도를 교육 목표로 삼아 운영하고 있다. 이외 유아교육의 현장으로 가은 유치원, 상주 남성동 유치원, 안동시 종합 사회 복지관 어린이 집, 대구 월성 가톨릭 종합 사회복지관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가천 청소년 교육원 : 1980년 대구대교구가 오스트리아의 원조를 받아 교육원을 설립한 3년 후인 1983년부터 정식으로 파견되었다. 특히 수녀회 카리스마의 교육적인 면을 적극적으로 살릴 수 있는 현장인 교육원은 그 교육 목적을 "내 안에서, 이웃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자"로 삼고 교육 지침으로 자연을 통하여 자신을 살펴보고 희망과 용기를 가진 새로운 생활태도를 수용하여 타인을 새롭게 만남으로써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발견, 기도와 전례를 통하여 신앙 생활의 기쁨을 체험하도록 돕고 있다.

⸂ 안동교구청 사목국

⸃ 생명의 공동체

교구청 사목에서 농민 교육의 일환으로 실시한 공소 봉사자 학교 1기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모임으로 주로 10여 개 농민 고동체들과 안동, 영주, 상주, 점촌, 예천의 도시 주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모임에서는 삶의 방향을 생명의 가치관, 공생의 가치관으로 전환하여 주로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 지역에 조직되었다. 이 모임의 활성화를 위하여 1991년 9월 당시 사목국 장인 조창래 신부의 요청으로 회원이 파견되었다. 주요 활동 내용은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생활양식의 변혁 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 본당사목

⸅ 노인복지

⸆ 의료복지

⸇ 종합복지

⸈ 부산교구 교도사목

1992년 9월 3일 부산 주례 본당에 파견을 시작하면서 부산교구도 교도 사목을 위해서도 회원이 파견되었다. 주요 활동은 부산 교도소, 구치소, 소년원, 감별소에서 봉사하고 있는데 특히 소년원의 원생들을 위한 재활교육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교도사목 후원자들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5,000여 명의 수인들을 위해 따뜻한 손길을 펼치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 교육 수녀회 회원 각자는 내적 생활의 시간, 일과 휴식 시간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명확히 하는 개인 내규를 설정하고 생활한다. 개인 내규는 세상 한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더 잘 살도록 도와 준다.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자 하는 회원들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모범을 보이신 스승이며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모든 것에서 생명에 봉사하고자 한다. 또한 인간의 진보와 발전에 관계되는 모든 것에 개방되어 있으며 인간의 모든 면, 즉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정신적 차원에서 모든 인간이 성숙한 인간으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할 때까지 인간생명에 종사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1970년대에 안동으로 진출한 것은 사실 모험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안동은 인구 12만명의 농촌으로 둘러쌓여 있는 유교가 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활동에 수반되는 어려움은 너무나 분명했다. 때문에 서울과 대구 등 도시로 진출코자 하는 유혹도 많았지만 창립자의 정신대로 스승이며 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모든 것에서 생명에 봉사하는 교육자들이 되기 위해 안동에 정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4년 10월 17일 관구 설정 축하 미사를 봉헌하는 기쁨을 맞게 되었다.

시대의 고통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소명, 사건이나 고통안으로 뛰어든 성서의 말씀을 사는 회원들, 비록 오늘의 현실이 어둡고 폭력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고통의 현장이기에 그 안에는 무수한 인간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 소명은 더욱 다급해지고 교회는 산적된 문제들을 끌어안은 채 화의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문제, 전인적 인격의 형성,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오늘도 교회의 딸로서 산다.

1967. 보은 성모의원을 개설 (309쪽 동정성모회)

동정성모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1609년에 영국인 메리 워드(Mary Ward)에 의해서 벨기에의 성 오메(St. Omer) 에서 창설된 활동여자 수도회. 청소년 교육과 그밖의 모든 자선사업활동을 전개하던 이 수도회는 초창기 교회로부터 반대와 오해를 받기도 하다가 1909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서 인준을 받았다. 1956년 8명의 한국여성이 입회.

현재 초대관구장 박기주 수녀를 중심으로 서울, 대전, 충북, 보은, 전북, 이리, 경남 진해, 충무에서 활동하고 있다.

1967. 충북 보은 분원에서 성모병원 설립 (교회와 역사 81호 7쪽) - 1982. 4. 25발행

동정 성모 수녀회 (라) Institutum Beatae Mariae Virginis (교회와 역사 81호 7쪽) - 1982. 4. 25발행

동정성모회는 1609년 영국인 메리워드(Mary Ward)에 의해 벨기에의 성 오메(St. Omer)에서 창설된 여자 활동 수도회이다. 창설자 메리워드는 2년의 준비끝에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이 수도회는 창설했는데 이름 그대로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고 성모마리아의 여종으로서의 봉사를 목표로 청소년 교육과 그밖의 모든 자선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당시 나타나기 시작했던 사도활동들은 봉쇄와 병행되거나 지방주교에게만 인정받을 수 있었으므로 이 수도회는 교회로부터 완전한 승인을 얻기까지 300년동안 반대와 오해를 받는 등 갖가지 고난과 시련의 특이한 역사를 겪었다. 창설자인 메리워드는 교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수차례나 로마와 도버해협을 건너 왕래하고 유럽전역을 도보로, 마차로 여행 하면서 후세에 "사도 바오로 이후 주 그리스도를위해 가장 긴 여행을 해낸 여성" 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 비오 10세는 수도회 창설 300년만인 1909년 4월 20일 인준을 하였다. 동정 성모회의 한국 진출은 1964년 6월 10일로서 당시 독일에 유학중이던 예수회 박고영 신부가 이 수도회의 교육사업을 보고 한국에의 진출을 요청한 것이 그 실마리가 되었다.

서울 분원의 회원들은 대방동에 있는 공군부대와 개봉동, 오류동, 본당 등에 나가 사목활동을 펴고 있으며 월1회 성소자 모임도 지도하고 있다. 대전 공동체는 1965년 학교건물과 수도원건물이 완공되면서 시작되어 성모국민학교와 성모여자 고등학교 등 청소년 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성모국민학교는 1966년 2월 17일에 객교하여 "감사할 줄 알며 거짓 없고 자기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어린이"를 배출시키고 있다. 또한 성모여자고등학교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을 위하여 몸바칠 여성"이라는 여성상의 구현을 위하여 전인교육을 이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충북 보은 분원에서는 성모병원, 성모유치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북 이리에서는 성모의원과 2개 시와 6개 군의 나환자 정착촌 12개에서 의료 및 구호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곳 성모의원에서는 나환자 전용병동도 새로 건립하였다. 또한 경남 충무분원에서는 본당사목과 충무유치원 사업을 돕고 있으며 진해분원에서는 군종사목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해군 사관학교 등 각 군부대에 나가 군종사목에 종사하는 한편, 군인가족들에는 가정방문화 그룹활동 등을 통해 교리교육과 성경연구를 실시하고 있다.

동정성모회는 현재보다 견고하고 지속적인 사도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분원확장을 보류하고 회원들의 영성교육과 사도직을 위한 전문직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94년에 한국진출 30주년을 지낸 한국 동정 성모회는 400여년 간 학교 교육에 헌신하여 온 수도 공동체의 정신을 이어 받아 자신의 카리스마인 교육은 물론이고 앞으로 신앙의 옹호와 전파를 위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이면 어떤 분야에서도 투신할 각오를 다지며 동시에 새로운 변모와 발전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다.

1968. 3 애전고등공민학교 개교 (교회와 역사 74호 6쪽)

영등포 본당 (교회와 역사 74호 6쪽)

서울 영등포구 道林洞 본당은 명동, 중림동, 혜화동 본당에 이어 서울에서 네 번째로 설정된 천주교회이다. 이 교회는 江南 永登浦 지역의 유일한 천주교회였기 때문에 명칭도 영등포 본당으로 불리웠다. 본당이 설정되기 전에는 중림동 천주교회에서 관할하는 공소에 속했다. 1930년 6월경 교우들의 열성으로 영등포 경찰서 뒷쪽에 5백圓을 들여 8間의 경당을 신축하였다. 150명 가량의 교우들은 태반이 지방에서 상경한 노동자들이었다. 이때 까지도 영등포는 아직 서울시에 편입되지 못하고 경기도 시흥군에 속해 있었으나 신흥 공업지구로 발전됨에 따라 인구가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1936년에 교우 수는 460여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예수 성심회를 중심으로 다각적인 본당 승격운동을 벌인 결과 그 해 5월 10일 혜화동 본당에서 사목하던 徐起昌(프란치스코) 신부를 초대 본당 주임신부로 맞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21일 徐신부는 영등포에 작은 성당을 건축하고 본당주보를 돈 보스꼬로 삼았다.

1945년 11월 朴一奎(안드레아) 3대 주임신부가 부임한 후 청년회원들이 주동이되어 永靑報를 월간으로 발행하는 한편, 大建商社라는 이름의 천주교 복지센타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1963년 10월 구로동 본당을 분할하고, 이듬해 4월에 샛별 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68년 3월에는 불우 청소년 교육을 위한 애전고등공민학교를 구 성당에 개교하였다. 1970년 11월 朴成鍾(프란치스꼬) 신부가 13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뒤 본당 평협과 부인회가 조직되었고 1973년 여름에 인근 수재민 2,600여명을 애전학교에 수용하고 구호의 손길을 펴기도 했다.

1968. 3. 8 대구 결핵 요양원 설립 (대구 가톨릭 사회복지회)

대구 결핵 요양원 (대구 가톨릭 사회복지회) - 1998. 5. 20일 대구 결핵요양원의 유재명님의 답신에 의거

재단법인 '태린회'로 발족되어 폐결핵환자 수용시설로 인가를 받아 대구시립희망원에서 결핵환자 54명을 인수하여 1968년 3월 8일 개원한 대구 결핵 요양원은 치료시기를 놓친 빈곤한 폐결핵 환자의 치료기간 중 입원보호와 대구 가톨릭 의료원 내과 전문의의 월 2회 진찰, 투약, 주사 등과 또한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한의사회의 주 2회의 한방진료, 치료 및 자활에 도움이 될 생활교육, 기능교육, 신앙생활을 지도하며 취업 등 사회재활에 도움이 될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 입원 대상자는 생활보호 대상자나 무의무탁한 폐결핵 환자로 14세 이상인 자이며, 그외 수술후나 균음전된 환자와 계속적인 투약과 치료가 필요한 환자이다.

1968. 5. 김수환 추기경 이사장으로 취임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동성중고등학교 東星中高等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제단법인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중등교육 기관. 학교내에 을조(乙組) 를 편성하여 신학교의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을조의 경우 남대문 상업학교의 교육과정을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받고 방과 후 신학원에서 신학교육에 필요한 라틴어와 교리및 지도신부의 영성을 받았다. 1968년 5월 김수환 추기경이 이사장으로 취임되어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마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8. 여대생을 위한 기숙사업을 비롯한 버스안내양들을 위한 교양교육사업 전개(254쪽 노트르담 수녀회)

노트르담수녀회 (영) Congregation of the Sisters of Notre-Da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54쪽)

1848년 아델콘드윌브링(Adelgonde Wolbring)과 리제테 퀼링(Lisette Kuhling)이 독일에서 창설한 수녀회. 1967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여성교육사업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형제사랑으로 돌보면서 더욱 건설적인 세계를 이룩하고자한다.

1968. 여대생을 위한 기숙사업을 비롯한 버스안내양들을 위한 교양교육사업 전개 (교회와 역사 65호 7쪽)

노틀담 수녀회 (교회와 역사 65호 7쪽)

노틀담 수녀회는 여성교육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업을 하는 활동 수녀회이며 한국에 진출한 노틀담은 독일의 베스트후알렌(Westfalen) 의 코스펠트에 본부를 둔(Sisters of Notre Dam of Amersfoort) 수녀회이다. 이 수녀회는 이탈리아, 영국, 네델란드, 브라질 등지에도 진출하여 유치원, 초중고교, 대학의 경영, 기숙사, 양로원, 병원 등의 사업을 통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돌봄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는 하느님 사업에 봉사하고 있다.

1968년 8월 부터 1971년 까지는 지방 출신 여대생들의 기숙사업을 하였다. 엄격한 기숙사 규칙을 펴나가면서 그 부모들과 편지 교환도 하고 면담도 하였다. 그러나 성소 지원자가 불아나자 방 때문에 중단하였다.

그리고 이 수도회의 사업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버스 안내양들을 보살핀 일이다. 수녀들이 버스를 탔다가 발견한 비참한 사정은 종점에서 종점까지 몇 번이고 타고 다녔고 그들의 숙소까지 살폈다가 놀란 참상과 애처러움에서 빚은 사업이었다. 처음에는 버스회사측의 반대도 받았고 훼방을 겪기도 하였다. 교육은 장래 이 나라의 어머니일 많은 아가씨들에게 정서 교육과 가정 여성으로서의 필수기능과 상식 영어와 한자 상식까지도 가르쳤다. 솜씨자랑 전시회도 몇번 열고 나서는 인도적인 처우개선과 침실개선도 이룩하게 한 빛을 던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이 계속되기에는 너무나 에로사항이 많다고 한다.

1972년에 10월 4일에 차린 부산의 유치원은 오전만 보모 노릇을 하는 유치원 교육 혁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일 교육과 생활실습 성교육에 3위 1체 교육방식을 본뜨는 유치원이 자꾸 생겨나게 했다. 1975년에는 농어촌 유치원 교육을 위해서 오산 지역의 마을회관 등으로 나가서 부산유치원 방식을 베풀고 있다.

1968. 애전 고등국민학교 개교 (828쪽 영등포 본당)

영등포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28쪽)

서울 대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요한 돈 보스코. 현 명칭은 도림동본당. 1929년 이전부터 약현(중림동) 본당의 영등포 공소로서 발족, 1936년 영등포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58년 살레시오회 소속인 수아레스(Joseph Suarez) 신부가 본당주임으로 부임, 같은 해에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 가 도림동 본당을 중심으로 창설, 1963년 9월 현 성당지대에 현재의 성당을 준공하였다. 1964년에는 샛별유치원이 개원하였고, 1968년에는 불우 청소년을 위한 애전 고등공민학교가 개교하였다.

1968. 쌘뽈 국민학교 폐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1쪽)

쌘뽈 국민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1쪽)

쌘뽈 국민학교는 1963년 3월 12일 각 학교 1학급 50명씩 충청남도 교육위원회로부터 인가를 받아 대건중고등학교가 사용했던 목조건물의 일부를 교사로 인수받고 개교하였는데 위치는 현 쌘뽈여중고의 교문과 차고 쪽이었다. 초대교장은 쌘뽈여중고의 교장이었던 박상일 수녀가 겸임하였고 착실한 국민학교로 인정받으며 발전하였으나 남녀공학으로 변경시키는데 필요한 대지부족 문제와 쌘뽈여중고를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장기적인 안목과 재정상의 이유로 재학생들을 모두 이웃의 국민학교에로 분산 전학시키고 개교 5년만인 1968년도에 졸업생 없이 폐교하였다.

1968. 대전 성모여자고등학교의 설립인가를 받음 (309쪽 동정성모회)

동정성모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1609년에 영국인 메리 워드(Mary Ward)에 의해서 벨기에의 성 오메(St. Omer) 에서 창설된 활동여자 수도회. 청소년 교육과 그밖의 모든 자선사업활동을 전개하던 이 수도회는 초창기 교회로부터 반대와 오해를 받기도 하다가 1909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서 인준을 받았다. 1956년 8명의 한국여성이 입회.

현재 초대관구장 박기주 수녀를 중심으로 서울, 대전, 충북, 보은, 전북, 이리, 경남 진해, 충무에서 활동하고 있다.

1969. 9. 1 마리아 수녀회 결핵 요양소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의 창설동기는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소 신부) 가 부산 송도(지금은 남부민동) 본당주임으로 있을적이었다. 너무나 가난한 참상, 너무나 외로운 사람들의 처참한 상태를 그냥 볼 수가 없었던 소 신부는, 우선 버림받은 고아들만이라도 주님의 일꾼이 되어 돌봐 줄 사람들을 구했다. 당시 부산 교구장 최 재선 주교와 의논하여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모든 자금은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모금해다가 재단법인을 결성했다. 우선 송도 본당 한쪽 헛간 바닥에 거적을 깔고서 시작한 마리아 수녀회의 공식 창설일은 1964년 8월 1일이다. "이 어린이들 중에 하나라도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 (마태 18,5) 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과 부모가 없어 버림받는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모성애로써 봉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 등 기도 생활과 함께 복음적 실천과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창설한 수도회다. 그리하여 버림받은 어린이와 불우한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수도회다. 회원은 빈첸시오 바오로 성인의 까리따스 수녀회의 전통을 따른다. 마리아의 수녀회에서 행하는 사업의 규모는 아동복지 사업과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 고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버림을 받아서 마음과 몸이 몹시 지쳐있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는 지체부자유와 정신 박약한 가련한 어린이도 320여명이나 된다. 이들은 수녀들의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로써 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구나, 어떤 과오를 저지른다고 해도 따뜻한 사랑과 손길로써 보호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낙원이다.

의료사업인 부산의 결핵요양소와 서울의 갱생원은 시 당국의 경영난으로 믿고 넘겨 준 의료기관인데, 모두 무료치료를 베풀고 있다. 서울 갱생원 원생 중 회갑을 지낸 환자들은 서울 소년의 집 구내로 옮겨서 양로원 같이 보살피고 있다. 교육사업은 모두 수녀회가 전액 부담하되, 부산으로 집결시킨 유치부를 마치면 부산의 중학교로 보낸다. 중학교를 마치면 남자는 기계공고로 전학시키고 여자는 고입예비고사에 합격하면 학구배치에 따라 여러 일반여고로 보내어, 학비 잔액을 부담하여 통학시킨다. 공업고교 과정을 마친 남자는 노동부가 시행하는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직을 시킬 수 있고 공전으로 전학 수용시켜 무상교육의 혜택을 지속시킨다. 여자의 경우는 여고를 마치고 대입 예시 합격하면 간호전문대, 교육대, 사범계 등으로 진학시켜 무상 교육 혜택은 연장된다.

1969. 요한보스코 기술교육원 사회복지법인체로 인가 (나눔지 28호)

요한보스코 기술교육원 (나눔지 28호 10쪽) - 1985. 1. 15발행

산업혁명으로 황폐해진 유럽의 한 농촌에서 버려진 불우청소년들을 모아 오직 사랑으로 돌보며 그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교육가이며 신부였던 보스코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교육방침을 따라 사랑으로 가득한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는 요한보스코 기술교육원은 소년들을 보호 수용하는데 그쳤던 초창기와는 달리 벼천하는 사회의 기능에 맞추어 기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985년 현재 가구제작과, 목공예과, 배관과의 3개과를 두고있다. 1년 과정의 기술습득 후에는 취업까지 알선해 주고 있는데 만 14세-18세의 보호자가 없거나 극빈가정의 청소년들에게 입학의 기회를 주고있다. 거의 100%의 취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 기술원 원아들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취업 한달만에 보따리를 싸서 다시 기술원으로 되돌아 오거나 이곳저곳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례가 많다. 이처럼 많은 것은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들의 불안정한 성격탓이라고 볼 때 이들에게만 성실치 못하다는 비난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곳 기술원은 이들의 정서지도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있다. 60여명의 원아들에 20명이 넘는 직원은 이들의 사랑의 손과 발이 되어 생활부터 진료등 모든것을 부모처럼 닦아주며 다듬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1969. 국제마리아의 사업회(여자) 설립 (555쪽 사회사업)

사회사업 (영) Social servic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5쪽)

가톨릭 교회는 단순한 전례의 공동체나 신앙의 공동체일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빛(마태 5,13-16)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사회안의 어두운 곳을 찾아서 어두움을 없애고 광명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너무도 어두운 곳이 많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사람, 육체는 건강하나 정신이 병든사람, 정신은 건강하나 육체가 병든사람 등이 있다.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을 살펴주고 그들의 희망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버림받고 소외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현세적인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교회의 사업중에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문화사업, 사회사업등이 포함된다.

*구미근로여성복지관 - 1973년 경북 구미시 송정동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구미공단 근로여성들의 인격도야 및 생할향상을 위해 기능교육, 취미교육, 교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설립단체는 왜관 성 베네딕토 대 수도원이다.

*국제마리아의 사업회 -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고 1969년(여자), 1974년(남자)에 설립되었다.

주된 활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회원이 소득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퍼콜라레 운동을 하는 남녀 회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덕산 신생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으로서 1952년에 설립된후 요보호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하고 원생을 초·중·고등학교에 진학 시키고 졸업 후에는 기술을 습득시키고 있다.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 1976년 경남 마산시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정기프로그램으로 학습반과 취미반이 있고 특별 프로그램으로 젊은이 교실, 사임당교실, 성교육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 1979년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설립하였다. 불우이웃 청소년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의식개발, 교육, 협동, 우정, 자립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쎈뽈원 - 충남 논산군 논산읍에 있으며 1973년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이 되었다. 노인복지시설을 설치운영하며, 성인불구자의 복지사업을 하고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 1966년에 설립되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근로자의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기업인의 이해를 촉구시키고 노사간의 긴밀한 협조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곳이다.

*성심원 - 서울대교구가 불우아동 및 부상아동을 보호하기위해 1946년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설립하였다. 파티마 성모수녀원에서 담당운영하고 있다.

*성인복지원 - 1976년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설립, 부양가족이 없고 경제적으로 자활이 분리한 60세 이상의 여자노인을 수용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 본부는 서울 명동에 있으며 마음의 가난함을 생활화하는 단체로 1961년 설립되었다. 주된사업은 환자, 가난한자, 걸인을 돌보고 노쇠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며 불우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이다.

*소화영아재활원 - 1946년 소아보육원으로 출발하였다. 주된사업은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사업이며, 부산교구재단에서 운영하고있다.

*엠마우스집 - 1981년 설립된 것으로 성인지체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 - 1969년에 불우아동을 수용하여 직업보도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성 빈첸시오 청소년 복지회에서 설립하였다.

*춘광대구 요양원 - 극빈 폐결핵 환자 요양원으로 1966년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진영성모의원 별관 -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불우한 결핵환자를 고쳐주는 것이 주된목적이다.

*한국 SOS 어린이 마을 - 요보호 아동들을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하고 퇴소후에는 독립생계를 유지토록 자립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꽃동네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중 특기해야 할 것은 충북 무극에 있는 꽃동네로 청주교구 오웅진 신부가 혼자서 걸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면서 시작되었다. 꽃동네의 특징은 구걸할 수만 있으면 퇴거토록 하는 것으로 자생의 능력이 전혀 없는 노인만을 보호하는 곳이다.

*성모 자애원 - 예수성심 시녀회가 심신 장애아를 재활시키는 곳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 6.25 이후 기아가 날로 증가하여 버림받은 생명들을 입양, 양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릴리 어린이집 - 6-7세의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을 받아 교육하고 있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의 근로자의 집 - 근로자의 수용과 교육에 힘쓴다.

*성 프란치스코의 집 -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일을한다.

*마리아 자매원 - 문제청소년을 교도하고 상담과 숙소를 제공하여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국민학교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이수시킨다.

*성심 양로원 - 불우한 노인을 수용하여 물질적 정신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성가 양로원 - 무의탁 노인들을 구호한다.

*백백합 보육원 -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호, 육성한다. 설립단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다.

*해성 보육원 - 요보호 아동과 지체 부자유자아 및 정박아 수용 및 양육, 국내외 입앙을 하고있다.

이상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 중 그 일부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나 이 이외에도 수십개의 사회사업단체가 있으며 그들은 보이지 않게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사업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첫째, 교회는 특별히 정부나 일반 사회단체에서 망각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소외된 계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이 하기 어려운 사업을 찾아서 그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임무다.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회사업은 양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몇명을 도와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교회의 사회사업은 어떤 기관이나 단체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사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자기의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인의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회사업가이며 모든 신자가정은 사회사업단체인 것이다. 세째, 교회 당국이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재정적 뒷바침을 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성당도 지어야 하고 문화사업도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오늘의 현실 안에서 연장시키는 일이다. 특히 도시교구나 본당에서는 그 지역사회안에 어두움을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여 그들을 위한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정말 가톨릭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1969. 안양 가톨릭 근로자 회관(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69. 안양의 근로자 회관을 설립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국제가톨릭형제회 (영)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76쪽)

불일치와 부정의가 있는 현실에 도전함으로써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복음을 기초로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주력한다. 全眞常 정신을 중요시하며 全은 온전한 자아의 봉헌을 뜻하며 眞은 참다운 사랑을 뜻하며 常은 끊임없는 기쁨 속에서의 생활을 뜻한다.

1969. 안양 가톨릭 근로자 회관 설립 (15쪽 가톨릭 근로자회관)

가톨릭근로자회관 (영) Catholic Worker's Center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5쪽)

사회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에게 각종 문화적인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가톨릭이 설립, 운영하고 있는 사회복지기관으로 노동자에 대한 노동교육을 행하고, 노동자들에게 숙식 및 회합실, 행사장을 제공한다.

1970. 2. 3. 릴리회 (김광자창설)설립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70. 2. 28 부산 성 베네딕도회의 수녀들은 분도 유치원 설립 (부산 성베네딕도 은혜 60년사 454쪽)

분도유치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4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회헌 '봉사' 부분에 "우리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돌보며 가르친다."(회헌 4,33)고 되어 있는 것처럼, 어린이들이 맑은 웃음과 밝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사랑과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복음선포의 가장 효율적이며 바람직한 방법 중 하나이다. 이러한 취지로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는 주의환경이 삭막하고 놀이터가 없어서 거리에 방치된 어린이들이 마음놓고 뛰어놀며 학습할 수 있는 장소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 2월, 2반으로 편성된 분도유치원을 본원 울타리 안에 개원하였다. 주변에 큰 주택단지가 형성됨에 따라 유치원을 찾는 어린이들이 점차 많아져 1972년과 1974년, 1976년에 각각 1반씩을 증설하였다. 유치원은 점차로 정성이 깃든 알뜰한 교육의 장으로, 사랑을 쏟는 어린이 동산이 되었다. 분도유치원은 수녀원 울 안의 모든 장소가 어린이를 위한 자연학습장이 되어 산과 나무, 채소밭, 꽃, 새와 곤충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이 시내에 널리 알려지자 해마다 원아모집 때가 되면 많은 학부모들로 붐볐다. 이렇게 되자 수녀원 주변에 있는 가난한 어린이들에게는 입학의 문이 좁아지는 등 본래의 취지에 맞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수녀원에서는 인근의 어린이들에게 놀이터를 개방하기 시작하였고 1976년 5월에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수녀원 경내에 '성분도어린이집'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한 울타리 안에서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분리 운영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했다. 이에 1978년에는 어린이집을 분도유치원에 통합하여 유치원 5반 중 1반은 보육료를 감면받는 어린이들로 편성하였는데, 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그 이듬해부터는 통합하여 5반을 고르게 편성하였다.

1982년에 분도유치원은 새로 지은 은혜의 집 1층으로 옮겼으나 도로 가까이에 있어 사고의 위험이 높고 터마져 떨어져있는 데다가 수녀원 경내의 좁은 자연환경이 아쉬워 2년만인 1984년에 다시 옛 건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후 건물이 너무 낡아서 1990년 7월 19일부터 개축공사를 시작하여 9월 4일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하였다.

1970. 3. 1 마리아 수녀회 무료진료소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의 창설동기는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소 신부) 가 부산 송도(지금은 남부민동) 본당주임으로 있을적이었다. 너무나 가난한 참상, 너무나 외로운 사람들의 처참한 상태를 그냥 볼 수가 없었던 소 신부는, 우선 버림받은 고아들만이라도 주님의 일꾼이 되어 돌봐 줄 사람들을 구했다. 당시 부산 교구장 최 재선 주교와 의논하여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모든 자금은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모금해다가 재단법인을 결성했다. 우선 송도 본당 한쪽 헛간 바닥에 거적을 깔고서 시작한 마리아 수녀회의 공식 창설일은 1964년 8월 1일이다. "이 어린이들 중에 하나라도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 (마태 18,5) 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과 부모가 없어 버림받는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모성애로써 봉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 등 기도 생활과 함께 복음적 실천과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창설한 수도회다. 그리하여 버림받은 어린이와 불우한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수도회다. 회원은 빈첸시오 바오로 성인의 까리따스 수녀회의 전통을 따른다. 마리아의 수녀회에서 행하는 사업의 규모는 아동복지 사업과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 고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버림을 받아서 마음과 몸이 몹시 지쳐있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는 지체부자유와 정신 박약한 가련한 어린이도 320여명이나 된다. 이들은 수녀들의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로써 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구나, 어떤 과오를 저지른다고 해도 따뜻한 사랑과 손길로써 보호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낙원이다.

의료사업인 부산의 결핵요양소와 서울의 갱생원은 시 당국의 경영난으로 믿고 넘겨 준 의료기관인데, 모두 무료치료를 베풀고 있다. 서울 갱생원 원생 중 회갑을 지낸 환자들은 서울 소년의 집 구내로 옮겨서 양로원 같이 보살피고 있다. 교육사업은 모두 수녀회가 전액 부담하되, 부산으로 집결시킨 유치부를 마치면 부산의 중학교로 보낸다. 중학교를 마치면 남자는 기계공고로 전학시키고 여자는 고입예비고사에 합격하면 학구배치에 따라 여러 일반여고로 보내어, 학비 잔액을 부담하여 통학시킨다. 공업고교 과정을 마친 남자는 노동부가 시행하는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직을 시킬 수 있고 공전으로 전학 수용시켜 무상교육의 혜택을 지속시킨다. 여자의 경우는 여고를 마치고 대입 예시 합격하면 간호전문대, 교육대, 사범계 등으로 진학시켜 무상 교육 혜택은 연장된다.

1970. 4. 교도소 후원회(교도사목회) 발족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70. 경기도 성남시에 성체어린이집 개설 (667쪽 성체회)

성체회 (영) Congregation of the Blessed Sacra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67쪽)

1958년 6월 5일 윤을수 신부가 경기도 소사에서 창설한 수녀회

청결, 청빈, 순명으로 주의 영광을 현양함과 동시에 포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회사업으로 애덕을 실천하고자 한다. 인보 수도회의 정신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성체성사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곧 그 인보에 그 원천을 두고있다.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정신임을 생활로써 보여주신 창립자를 본받아 모든 요구호자들이 그들의 가정을 성화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도록 사회사업과 복음선포에 임하면서 시대와 지역교회의 요구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1951년 윤을수 신부가 군종생활을 하면서 5명의 전쟁고아들을 보살핀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1956년 전쟁고아들을 돌볼 여성들을 위한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하고 학교내에 따로 인보성체회를 신설하였다.

창설 직후부터 예산, 인제, 나자로 요양원, 서울 영등포, 용인, 원주, 백령도, 흑산도,공주, 서울 성 골롬반 의원,진안, 남원, 이리, 순천, 진해 등 전국에 회원들이 활동하였다.

1983년 말 80여개의 본당을 비롯하여 사회사업, 교육기관, 의료기관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1970. 성체회 수녀들이 성남에 새싹 어린이 집을 설립 (나눔지 3호 2쪽) - 1977. 2. 22발행

새싹 어린이 집 (나눔지 3호 2쪽) - 1977. 2. 22발행

성남 새싹 어린이 집은 1970년에 성남시 직업여성들을 위해 성체회에서 설립한 탁아소이다. 철거와 집단 이주라는 갑작스러운 생활환경변화와 직장 관계로 부모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어린아이들을 탁아보호하는 것이다. 노천천막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새싹 어린이 집]을 개설하기까지 6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곳을 거쳐간 어린이는 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시설관계로 더 많은 어린이를 수용하지 못함은 가슴아픈 일이나 부족한 가운데서 어린 새싹을 돌보고 있다.

1970. 7. 8 '새싹 어린이집' 설립 (성체회의 복지시설)

성체 어린이집 (성체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성체 어린이집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1970년경 서울 청계천에 철거민들이 성남으로 피난와서 살게 되었다. 그때에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생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어른들은 맞벌이 부부로 일터로 나가거나 또는 부모가 질병으로 앓고 있는 가정의 어린이들을 인보성체 수도회의 수녀님들이 돌보기 시작하면서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처음에 천막을 치고 어린이 260명에게 점심과 간식을 만들어 먹였다. 정부에서 쌀,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를 보내주어서 매일 밥, 빵, 수제비, 과자를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목욕시키고 손톱을 깍아주고, 머리를 잘라주는 신변보호, 지도 뿐이 아니라 교육을 더불어 하면서 하루종일 어린이와 같이 지내게되자 일손이 필요해서 일반교사를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에 150평의 건물을 증축하여 식당과 교실 3개, 부엌을 건축하였다. 이곳에서 자란 어린이는 학교에 가고 해마다 새로운 어린이는 어린이집에 들어오고 있다.

새싹어린이집은 인보성체수도회 전 회원들의 노력의 성과인 창립인가 10주년 기념 바자회의 수익금과 모금액의 일부로 10월 28일 원사 기공식을 갖고 12월 12일 520명의 어린이와 귀빈학부형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였다. 설립당시는 '새싹어린이집'이라고 명칭하였고 1998년 현재는 성체 유치원이라고 칭한다.

근로 또는 질병으로 인하여 아동을 보호할 능력이 결여된 보호자의 아동을 입소하여 시설생활을 통하여 집단생활을 경험하게 하고 부모를 대신하여 아동을 양육함으로서 아동의 복지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며 유용한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함을 목적으로 한다. 어린이 생활지침은 다음과 같다.

⸁ 어린이들에게 생활을 통하여 집단생활을 경험하게 하여 보살펴주고 개별적인 필요를 만족 시켜줄 수 있도 록 협력해 준다.

⸂ 정서적 안정감을 조성케하여 심신이 조화있게 발달되도록 도모한다.

⸃ 세심한 주의가 미친 환경속에서 어린이의 건강, 안정등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습관과 태도를 올바로 길러준다.

⸄ 적극적인 활동을 촉구하여 자주 및 협조정신을 배양한다.

⸅ 생활면을 통한 여러가지 현상에 대하여 흥미와 관심을 갖도록 한다.

⸆ 사회 생활에서 필요한 언어 동작을 정확히 익히도록 한다.

⸇ 각 개인의 특성을 중요시하여 창의력 개발에 힘쓴다.

⸈ 실생활을 통해 사고 능력의 기초를 닦는데 조력한다.

성남 성체 유치원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창립자 윤을수 신부의 말씀을 따르고 있다. "남을 대할 때 행동이나 태도가 언제나 유쾌하고 온화하고 그리고 평화스럽고 재미있게 상종하라.", 그리고 사목활동 할 때 "음식에 굶주리고 병고에 신음하고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쓸 수 있는 재주, 기능, 시간 등을 이용해서 정신적 위안을 주고 물질적 후원을" 당부하였고 그 말씀을 생활속에 잠재하고 있다.

1970. 10. 7 원주 성바오로병원의 낙성식과 축성식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3쪽)

1970. 10. 15 원주 성바오로병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3쪽)

원주 성바오로 병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3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돌보고자 하는 수도회의 목적과 정신에 따라 당시 의료시설이 충분치 못하여 거의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던 강원도 원주교구로부터의 봉사요청을 받아들여 원주시 변두리에 성바오로병원 원주 분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원주시 개운동(開運洞)에 대지가 1,000평 건평이 350평에 달하는 2층 병원 건물을 신축하고 1970년 10월 7일에 병원 낙성식과 축성식을 가졌다. 그 해 10월 15일 개원한 이래 원주 성바오로병원은 원주교구에서 일반진료와 극빈환자들을 꾸준히 치료하여 왔다. 또한 매주 수요일마다 강원도 횡성군, 원성군, 평창군 등의 무의촌에 이동진료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원주지역내에 의료기관이 확충되고 의료보험의 확산으로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한 이전문제가 논의되어 오다가 결국 인천 해성보육원 어린이들을 위한 해성의원에 통합하기로 하고 1985년 10월 31일, 개원 16년만에 문을 닫았다. 그동안 의사수녀를 비롯하여 간호수녀들의 노고가 컸고 직접 간접으로 의료활동을 통한 복음화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큰 몫을 담당해 온 원주 성 바오로병원 자리에는 병원건물을 개축한 [성 바오로의 집]이 개원되어 지역사회 교육의 장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1970. 10. 20 마리아 수녀회 구호병원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의 창설동기는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소 신부) 가 부산 송도(지금은 남부민동) 본당주임으로 있을적이었다. 너무나 가난한 참상, 너무나 외로운 사람들의 처참한 상태를 그냥 볼 수가 없었던 소 신부는, 우선 버림받은 고아들만이라도 주님의 일꾼이 되어 돌봐 줄 사람들을 구했다. 당시 부산 교구장 최 재선 주교와 의논하여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모든 자금은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모금해다가 재단법인을 결성했다. 우선 송도 본당 한쪽 헛간 바닥에 거적을 깔고서 시작한 마리아 수녀회의 공식 창설일은 1964년 8월 1일이다. "이 어린이들 중에 하나라도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 (마태 18,5) 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과 부모가 없어 버림받는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모성애로써 봉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 등 기도 생활과 함께 복음적 실천과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창설한 수도회다. 그리하여 버림받은 어린이와 불우한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수도회다. 회원은 빈첸시오 바오로 성인의 까리따스 수녀회의 전통을 따른다. 마리아의 수녀회에서 행하는 사업의 규모는 아동복지 사업과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 고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버림을 받아서 마음과 몸이 몹시 지쳐있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는 지체부자유와 정신 박약한 가련한 어린이도 320여명이나 된다. 이들은 수녀들의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로써 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구나, 어떤 과오를 저지른다고 해도 따뜻한 사랑과 손길로써 보호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낙원이다.

의료사업인 부산의 결핵요양소와 서울의 갱생원은 시 당국의 경영난으로 믿고 넘겨 준 의료기관인데, 모두 무료치료를 베풀고 있다. 서울 갱생원 원생 중 회갑을 지낸 환자들은 서울 소년의 집 구내로 옮겨서 양로원 같이 보살피고 있다. 교육사업은 모두 수녀회가 전액 부담하되, 부산으로 집결시킨 유치부를 마치면 부산의 중학교로 보낸다. 중학교를 마치면 남자는 기계공고로 전학시키고 여자는 고입예비고사에 합격하면 학구배치에 따라 여러 일반여고로 보내어, 학비 잔액을 부담하여 통학시킨다. 공업고교 과정을 마친 남자는 노동부가 시행하는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직을 시킬 수 있고 공전으로 전학 수용시켜 무상교육의 혜택을 지속시킨다. 여자의 경우는 여고를 마치고 대입 예시 합격하면 간호전문대, 교육대, 사범계 등으로 진학시켜 무상 교육 혜택은 연장된다.

1970. 12. 1 성심양로원 설립

성심양로원 - 1998. 9. 2 성심양로원의 답신에 의거

모 안스가리오 신부는 소외되고 버림받은 무의탁 노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구미시에 성심양로원을 설립하였으며 성심양로원은 "내가 온 것은 그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0,10)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식 단독주택으로 입원이 가능한 인원은 60명이다.

1970. 왜관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선산 성심 양로원을 설립 (교회와 역사 235호 21쪽) - 1994. 12. 25발행

선산 성심 양로원 (교회와 역사 235호 21쪽) - 1994. 12. 25발행

1970년 왜관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설립한 선산 성심 양로원을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인수받은 것은 1992년이었다. 버림받은 병자들에게 봉사하는 것 역시 창립의 중요한 목적인 만큼 인수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현재 3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선산 성심 양로원은 일반 양로원과는 달리 노인 마을 형태로서 노인들이 그 동안 생활 해 온 방식대로 자유롭게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65세 이상의 무의탁 노인들이 생활하고 있는 양로원의 일상은 미사, 기도모임, 교리, 면담이 있고 특별행사로 소풍, 생일잔치, 민속의 날과 어버이 날 행사, 성지 순례를 하고 있다. 또한 봉사자들이 와서 세탁, 김장, 이·미용, 농사일, 청소, 봉사와 정기 검진도 하고 있다.

노인들 가운데 홀로 어렵게 생활한 경우가 많아 공동체 생활에 익숙하지 못하고 사회에 대한 반감과 타인에 대한 미움 등이 자칫 신앙생활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요한 10, 10)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된 회원들의 봉사와 헌신은 노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넉넉하였다. 청원자들이 이곳에서 봉사함으로써 이론을 실천하는 교육의 장으로서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1971. 6. 3 명휘원 준공(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243번지)

명휘원 - 1998. 6월 시립 명휘 어린이집 이 안토니나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은 故의민 황태자 영왕의 환국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어려운 이웃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르며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직업재활 교육원인 명휘원, 장애인 근로시설인 해동일터, 지체장애인 특수교육기관인 명혜학교, 명휘 어린이집, 명휘 체육센터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장애인이 가진 잠재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기 위하여 각 개인에게 알맞는 재활 교육과 인성교육을 단계적으로 실시하여 직업능력을 갖춘 기능인을 양성하는 동시에 건전한 인격을 갖춘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양재과, 편물과, 공예과, 보호자립장이 있다.

해동일터 (장애인 근로시설)

사회적 여건상(도로, 건축, 교통) 취업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후원자 김해동님의 도움으로 1996년 12월 해동일터를 건축하여 장애인 종합 복지 대책의 일환으로 자립 및 생산활동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미 직업교육을 받았으나 신체적 조건으로 인하여 일반 직장에 취업이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하여 기능의 습득과 다양한 직업을 주어 재활 및 자립 기반을 구축한다. 양재자립, 편물자립, 단순작업이 있다.

명휘 공동가정 '희망' (Group Home)

명휘원에서는 지역 사회 내에 위치한 아파트를 구입하여 그룹홈 '희망'을 운영하고 있다. 담당 사회복지사를 파견하여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사회재활 서비스를 제공하여 사회 통합과 정상화 및 사회 자립을 이룰 수 있도록 교육시킨다. 1996년 7월에 6명이 입주하여 공동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지역사회 내에서의 재활교육과 다양한 서비스를 지원하고, 독립생활, 여가생활, 가족과 지역 주민과의 유대 강화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그리고 사회적응 훈련과 직업생활 교육, 사회재활 교육 등을 지원하고 있다.

명혜학교 (지체장애인 특수 중·고교)

故의민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께서 1982년 명혜학교를 개교하였다. 1988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 명혜학교를 인수하고 1990년 고등부를 개교하였으며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자활인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명혜학교에서는 정상적인 학습이 가능한 학생에게 인문계 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적용하고 학습지체 학생에게는 지체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적용한다. 이 밖에 장애특성에 따른 재활훈련을 실시하고 개인의 적성에 알맞는 특별활동과 직업교육을 시킨다.

명휘어린이집

전국 경제인 연합회에서 창립 30주년을 맞아 사회복지사업의 일환으로 6억원을 안산시에 지원하였고 안산시 가정복지과에서는 219평 대지 위에 300평의 건물(지하 1층, 지상 3층)로 1992년 11월에 완공하였다. 1993년 3월 1일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에서 안산시로 부터 위탁운영을 하게 되었다. 명휘 어린이집은 현대사회의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여성의 사회 참여 증가 및 가족 구조의 핵가족화로 급증하고 있는 보육 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전문적인 보육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영·유아의 건전한 육성과 보호자의 경제적·사회적 활동의 지원을 통한 가정복지 증진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 되었다. 생활보호 대상자와 편모편부 슬하에 있는 어린이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영·유아실, 소꼽방, 몬테소리 특별실, 실내·외 놀이터, 양호실, 식당, 교재 자료실을 갖추고 어린이들의 연령별로 12학급을 편성하여 교사 13명이 유아반 120명, 영아반 43명의 어린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있다. 명휘어린이집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발견하는 신앙 교육을 통하여 기쁘게 생활하는 어린이, 마음이 따뜻한 어린이, 행동이 올바른 어린이, 건강한 어린이로 성장하도록 인성 교육에 힘쓰고 있다.

명휘 종로 복지관

명휘종로복지관은 구 재단법인 보린회를 명휘원으로 개칭하여 설립한 터에 1967에서 1978년까지 장애인 재활시설로 운영해 오다가 1978년 명휘원이 광명시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YMCA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1990년 명휘종로 복지관은 이사회를 통하여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기로 결정하여 서울시 종로구청의 공적부조와 약간의 후원금으로 걸식노인을 대상으로 무료급식소를 열었다. 1992년 2월 부터는 지역사회의 맞벌이 부부의 육아를 위하여 종로구청에 인가를 받아 성모 어린이집을 개원하였다.

노인복지-탑골공원을 이용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루 평균 150여명, 월 평균 3,750여명에게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

명휘 체육센터

스포츠 활동을 통한 장애인의 정신적, 신체적 재활과 장애인에 대한 지역 주민의 이해 증진, 명랑하고 활기찬 생활을 강조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71. 7. 프란치스코회는 성북동에 평화의 모후 신학원을 설립 (1220쪽 프란치스코회)

프란치스코회 (라) Ordo Fratrum Minorum (영) Franciscan Order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20쪽)

1223년 9월 27일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에 의하여 창설된 최초의 탁발 수도회.

프란치스코는 1182년 이탈리아의 부유한 집에 태어나 귀족적인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어느날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무너져 가는 주님의 성전을 고쳐라."는 계시를 받고, 모든 재산을 버린 뒤 거룩한 복음에 따라 1206년 부터 기도와 보속의 회개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회의 정신은 복음을 완전무결하게 생활화하는데 있다. 즉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께서 성인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하느님께 반대되는 모든 이기적인 경향, '육의정신'을 버리고 주님의 정신대로 사는 것이 형제들의 이상인 것이다. '작은 형제'란 주님의 정신에서 흘러나온 성인의 독특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피조물과 형제적인 일치가 될 수 있는 가난과 겸손의 뿌리이다.

한국진출 : 프란치스코회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37년 9월 캐나다 성 요셉관구의 드콰이어 (J. Dequire, 요한)과 벨레로즈(M. Bellerose)신부가 부산에 도착한 뒤부터이다. 이들은 대전에 수도원을 건립하기로 작정하고 9월 30일부터 대전에서 거주하였다. 1938년 8월 피에르(Pierre) 신부가 입국하여 가족은 3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1938년 12월 15일 대전 목동(牧洞)에 수도회를 건립하여 '천사의 모후 성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소위 태평양 전쟁이 발발되자 일제는 죄 없는 서교사들까지 적으로 몰아 모진 감금생활을 겪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옥고에서 풀려났으나, 휴유증으로 한 회원은 끝내 병사하고 말았다.

1947년에 한국인 안선호(安仙鎬, 베다) 신부가 캐나다 유학길에 오르고, 남은 신부들도 각기 수련을 위해 출국하였다가 1950년 6월에 다시 입국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수도원 건물은 공산군에게 점령당하고, 유엔군이 수복한 뒤로는 피난민 자녀들을 위한 교육장으로 쓰인 것이, 현재 대성(大成)중·고등학교로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 6월 17일 진주에 있던 콘스탄치오 신부가 옥봉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천, 의령등 하동 지방에 두루 복음을 전파하였다. 1959년에는 4명의 이탈리아 회원들이 삼천포(三川浦)에도 본당을 신설하여 남해(南海)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6월에는 경남 산청면 내리(內里)에 2만 8,000여명의 대지를 마련하여 성심원(聖心院)이란 나환자 자활촌을 만들었다. 한편 대전에서는 공 안드레아 신부가 1959년 1월 목동본당의 주임신부로, 그리고 4월에는 벨레로즈 신부가 노기남 주교의 명으로 서울교구의 본당을 맡았다. 1960년 진주지방에서 콘스탄치오 형제에 의하여 병실 39동과 대수술실을 갖춘 나환자들을 위한 성심 인해병원이 개설되었다. 전국에서 나환자들이 모여들어 수일간에 200여명의 환자를 수용하였다. 이 해에 사천에도 본당을 신설하였다. 대전 수도원에서는 1961년에 첫 단순서원식이 있었다. 한편 성심원의 원장 정 시온 신부는 나환자를 위한 자활부락 건설에 착안하여 현대식 주택 개량에 힘써 1964년까지 가옥 82동을 건립하고 농토를 마련하는 한편, 정미소, 축사, 목공소, 매점, 창고, 보육원, 세탁소, 이발소, 미장원까지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추게 하였다.

이렇듯 눈부신 발전으로 1963년 12월 10일에는 로마본부로부터 일본과 한국 프란치스코회 총장대리로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李) 신부가 임명되어 한국에 부임, 한국본부 설치를 서둘렀다. 장소를 물색한 결과 수림으로 둘러싸인 작은 언덕 위에 수도원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1965년 9월 8일에 낙성된 지금의 프란치스코회 본부 정동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명도원이란 이름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의 언어교육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 학원이 개설되었다. 현재 이회가 맡고 있는 직접 선교의 본당은 8개(1개 준본당 포함)본당이다. 이곳에서 9명의 성직자와 6명의 평신도 형제들이 일하고 있다. 과거 이 회에서는 16개의 본당을 관할한 적도 있었으나 8개의 본당을 교구에 이양하였다. 이것은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이 직접 선교도 중요하지만, 가난하고 겸손하긴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뜻을 따라 사회에 평화를 심고, 사회사업과 특수사목에 치중하는 신앙에서 온 결과였다.

한편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는 각자 소속본당에서, 그리고 신심단체에서 핵심메머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단체라기 보다 개인적 수덕에 전념하는 조용한 단체라는 인상을 주고 있으나, 이들이 수도생활을 통해 체험한 영성생활을 교회안에서 실천함으로써 사도직 활동에 좋은 표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선활동으로 교회사업을 비롯하여 성소후원회, 군종후원회, 교도소후원회, 은퇴사제후원회, 구라회, 불우 이웃돕기 등에 대부분의 형제회가 단체 혹은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운영하고 있는 소년원, 양로원, 나환자촌, 신학원 등의 방대한 사업을 돕고 있다.

1971. 한국가톨릭성령쇄신봉사자위원회 한국진출 (1250쪽 한국가톨릭성령쇄신봉사자위원회)

한국가톨릭성령쇄신봉사자위원회 (영) National Catholic Charismatic Service Committee (1250쪽)

성령쇄신운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전후하여 교회내에서 일어난 교회쇄신운동 가운데 하나이다.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를 체험 함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예수그리스도와 더욱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동료들과 따뜻한 사랑을 나누며 내적으로 충만한 평화와 기쁨 속에서 살며,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보다 활기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성령쇄신운동은 교회를 쇄신하는데 있어서 제도나 구조의 개혁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성령의 은사에 의해서 교회는 개혁된다고 한다.

성령쇄신운동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71년 당시 카리타스회 선교사로 파견되어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을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던 시미드(Erna Schmid) 수녀가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던 성령쇄신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와 이 운동을 전파하였다.

1971. 대구 파티마 병원 원목실에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활동

파티마병원 - 1998년 8월 28일 대구 파티마병원의 이 헬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파견되어 있는 대구 파티마병원은 1956년 대구 동구 신암동에 설립되었다. 1971년 원목실에 수녀들이 외래입원환자와 직원들의 신앙, 상담을 위하여 파견되어 병원장에 메리 엑네스 수녀가, 원목실장에 김원집 수녀가 맡게 되었다. 설립당시 입원환자 침상은 300개 정도가 있었지만 현재는 500여개의 침상과 평신도 2명, 신부 1명, 그리고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 7명이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직원수도 800명으로 증가하였고 자원봉사자수도 200명으로 증가하였다. 파티마병원은 "들어라, 너는 병중에서 주님을 떠나지 말아라. 항상 기도하면 주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다." (집회 38,9)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 병원의 이념은 다음과 같다.

1. 파티마병원은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가톨릭 교회 전통인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2. 파티마병원을 찾는 모든 이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양질의 진료로서 고통받는 이들을 낫게하고 심리적, 정신적 및 영적인 안정과 평화를 찾도록 도와주며 최선의 예방및 재활에 힘써 건강한 생활을 하도록 돕는다.

3. 질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인간삶의 한 부분이며 오히려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환자와 그의 가족들에게도 병을 치유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인간다운 품위를 지니도록 그들을 돕는다.

4. 각 개인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진료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며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돌본다.

5. 모든 인간생명의 신비와 존엄성이 진료활동 전반에 걸쳐 존중되도록 교회의 가르침을 준수한다.

6. 성 베네딕도가 가르친 대로 "병든 형제를 그리스도처럼 섬기고 돌볼" 뿐 아니라 치유사도가 동참하는 동료들과 형제적 연대성을 증진시켜 그리스도적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힘쓴다.

7. 양질의 진료와 서어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갖추고 책임있는 관리로 이들 목적을 달성하도록 노력한다.

1971. 걸인 수용소인 갱생원 설치 (1132쪽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수도회)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수도회 (영) Hospitaler Brothers of St. John God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132쪽)

1593년 포루투갈의 천주의 성 요한에 의하여 창설된 수도회. 1958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광주교구의 헨리(Henry) 주교의 요청으로 애란관구 소속 5명의 수사가 처음으로 내한하여 정착한 뒤 활동을 개시하여 '천주의 성 요한 의원' 을 개원하였다. 이 지방의 가난한 주민들과 노동자계급의 의료요구에 응하게 되었다. 1971년에는 광주시 변두리에 걸인수용소인 갱생의원을 설치하는 한편 그 안에 정신과 병실을 설치하여 한정된 수의 환자들에게 획기적인 치료방법을 시도하였다. 1973년에는 '천주의 성 요한의원' 내에 정신과 외래를, 1980년에는 정신과 입원실을 개설하여 정신질환 치료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울러 정신과 간호원 훈련 등 의료교육사업 및 '소년의 집' 이라는 고아원도 경영하고 있다.

1971. 마자렐로 센터 설립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마자렐로 센터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 살레시오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1971년 버스 인내양들에게 숙박시설을 제공하기 위하여 시작하였으나 버스회사 자체내에서 이들을 수용하게 되어 1976년 부터는 인근공장지역의 근로여성들을 위한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로 변경하여 이들에게 안전한 숙박시설과 여성 교양 및 종교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전인적 인격 성장과 여성적인 품위를 지니도록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1996년 부터는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영등포 구청의 시설인가로 '아동직업 보도시설'로 변경하여 가출소녀들을 위해 미용 등 직업기술 교육과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마자렐로 센터 내에 마자렐로 중학교를 개설하여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여성에게 무료중학과정을 실시하여 8회에 걸쳐 221명을 배출하고 1981년 중학교가 의무화 됨에 따라 폐교되었고 1989년 자녀의 교육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저학력 주부를 위한 중학과정(2년) 및 교양, 종교과정을 위해 1학급 (30-40명)을 개설하여 1993년에는 같은 여건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시작하여 1998년 현재 중, 고등학교 4학급네 110여명의 주부들이 공부를 하고있다.

1971. 장미유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4쪽)

장미유치원 薔薇幼稚園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4쪽)

1971년에 군인가족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김계춘(金啓春 도미니코) 신부의 초청으로 송제세 레지나 수녀가 본원에서 출퇴근하면서 서울 이태원에 있던 군인아파트 내의 신자들에게 교리를 1주일에 1번씩 가르쳤고 1971년 6월 5일부터 임계신 스테파노 수녀가 역시 본원에서 출퇴근하며 유치원을 담당하였고 1972년부터는 아파트 내 자모들을 위한 교리를 1주일에 3일간 하면서 성모회를 창립하여 전교에 힘을 쏟았다.

장미 유치원은 군인가족의 자녀들을 위해 시작되었다. 군인가족은 자주 거주지를 이동하게 되므로 어린의 교육이 소홀하게 되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한 문제점을 안게 되며 가족의 신앙교육도 어려운 점이 많아 1971년에 당시 군종의 김계춘 신부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유치원 설립준비를 하였다. 곧이어 이소동 장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71년 봄에 유치원을 짓고〔장미유치원〕이라 칭하였다. 이외에도 비품 등 설비를 위해 소종철 참모총장은 피아노와 집기류 등을 기증하고 원호담당관과 장교회에서도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1년 6월 5일부터 임계신 수녀가 출퇴근하며 유치원 교육을 담당하였고 6월 22일 2학급 운영 승인 인가를 받아 2학기부터 군인자녀들을 입학시켜 39명의 첫 해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어 1971년 9월 2일에는 건물 낙성식과 개원식을 정식으로 갖고 관리권을 수녀원에 위임한다는 계약을 문서화하였다. 군인자녀가 80%를 차지하는 장미유치원은 원생들이 자주 이동되는 특수성 때문에 학기 초에 정원을 초과하여 입학시킨다. 연령별 학급편성과 교사의 증원이 요청되었으나 교육비를 인상할 수 없고 입원대상 아동이 지역상 한정되어 있으며 이동이 잦은 관계로 실시치 못하던 중 1989년 군인아파트가 대전으로 이전함과 더불어 유치원과 아파트 사목을 위해 파견된 수녀들은 1988년 12월에 귀원하였다.

1971. 복자유치원을 개원하여 복자수녀원에 그 운영권을 위임 (1259쪽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영) Order of the Blessed Korean Martyrs (1259쪽)

1953년 10월 30일 방유룡 신부에 의해서 창설된 방인 수도회. 당시 서울 제기동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방신부는 1964년 개성에서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를 창설한 이후 곧 남자 수도회를 창설하려 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하여 서울 제기동 본당에서 순교자적 정신의 실천으로 보다 더 완전한 신앙생활, 보다 더 완전한 구원에의 참여, 자아를 성화하여 이웃을 성화시키려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1955년 7월 현재 본원이 위치한 서울 성북동에 흙벽돌집을 만들어 입주하였고 그 당시 시유지였던 이 곳에 주변빈민아동들을 위한 공민학교 운영을 하기위해 가건물을 지어 서울시로부터 소유권을 불하받은 때인 1969년까지 학교운영을 해왔다.

1971. 다미안 제단 대구와 안동에 한국부지 설립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72. 2. 28 매괴국민학교 폐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7쪽)

매괴국민학교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발행 857쪽)

장호원의 초대신부인 부이용 신부는 1907년 민응식의 집 행랑채를 이용하여 매괴학당을 설립하고 남학생을 모아 가르쳤는데 교재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유년필독(幼年必讀)을 사용, 통감부의 일본인 관리들로부터 금서를 가르친다 하여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수가 점점 증가하여 60명에 달함으로 교사가 비좁아지자 1908년 3월에 학교를 크게 세워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는 발전을 보였고 이어 여학교도 설립하였는데 수녀들의 필요성을 절감한 부이용 신부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교는 1912년 10월 7일 매괴축일에 개교하였다. 여학교는 수녀들의 헌신으로 외교인들에게까지 좋은 인상을 주어 딸을 가진 부모들이 공립보다는 매괴학교로 보내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부족, 부모들의 몰이해, 유능한 교사부족 등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다. 결국 보통학교와 공립학교로 전학해 버리는 학생들이 점차로 늘어가게 됨에 따라 6년제였던 매괴학교는 부득이 4년제만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2년에 6년제로 다시 복귀한 후 1936년에는 공식학교 인가를 받고 3층 교사를 증축하여 교명을 매괴심상소학교(怘塊尋常小學校)라 하고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함으로써 1939년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일본인들이 이 학교를 빼앗아 공립화하고 교명을 욱산(旭山)으로 바꾸어 운영하였는데 1945년 해방을 맞아 다시 찾게 되었다. 그후 매괴학교는 1953년 매괴상업고등학교로 승격되었고 1966년에는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확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국민학교는 운영난이 심화되고 교육전망의 분석 결과 그 전망이 밝지 못하여 1972년 2월 28일자로 폐교하였다.

1972. 10. 부산 부민동에 유치원을 개원 (254쪽 노트르담 수녀회)

노트르담수녀회 (영) Congregation of the Sisters of Notre-Da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54쪽)

1848년 아델콘드윌브링(Adelgonde Wolbring)과 리제테 퀼링(Lisette Kuhling)이 독일에서 창설한 수녀회. 1967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여성교육사업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형제사랑으로 돌보면서 더욱 건설적인 세계를 이룩하고자한다.

1972. 10. 4 노트르담 수녀회는 부산에 유치원 설립 (교회와 역사 65호 7쪽)

노틀담 수녀회 (교회와 역사 65호 7쪽)

노틀담 수녀회는 여성교육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업을 하는 활동 수녀회이며 한국에 진출한 노틀담은 독일의 베스트후알렌(Westfalen) 의 코스펠트에 본부를 둔(Sisters of Notre Dam of Amersfoort) 수녀회이다. 이 수녀회는 이탈리아, 영국, 네델란드, 브라질 등지에도 진출하여 유치원, 초중고교, 대학의 경영, 기숙사, 양로원, 병원 등의 사업을 통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돌봄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는 하느님 사업에 봉사하고 있다.

1968년 8월 부터 1971년 까지는 지방 출신 여대생들의 기숙사업을 하였다. 엄격한 기숙사 규칙을 펴나가면서 그 부모들과 편지 교환도 하고 면담도 하였다. 그러나 성소 지원자가 불아나자 방 때문에 중단하였다.

그리고 이 수도회의 사업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버스 안내양들을 보살핀 일이다. 수녀들이 버스를 탔다가 발견한 비참한 사정은 종점에서 종점까지 몇 번이고 타고 다녔고 그들의 숙소까지 살폈다가 놀란 참상과 애처러움에서 빚은 사업이었다. 처음에는 버스회사측의 반대도 받았고 훼방을 겪기도 하였다. 교육은 장래 이 나라의 어머니일 많은 아가씨들에게 정서 교육과 가정 여성으로서의 필수기능과 상식 영어와 한자 상식까지도 가르쳤다. 솜씨자랑 전시회도 몇번 열고 나서는 인도적인 처우개선과 침실개선도 이룩하게 한 빛을 던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이 계속되기에는 너무나 에로사항이 많다고 한다.

1972년에 10월 4일에 차린 부산의 유치원은 오전만 보모 노릇을 하는 유치원 교육 혁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일 교육과 생활실습 성교육에 3위 1체 교육방식을 본뜨는 유치원이 자꾸 생겨나게 했다. 1975년에는 농어촌 유치원 교육을 위해서 오산 지역의 마을회관 등으로 나가서 부산유치원 방식을 베풀고 있다.

1972. 10. 4 부산 노틀담 유치원 설립 (교회와 역사 226호 16쪽) - 1994. 3. 25 발행

노틀담 유치원 (교회와 역사 226호 16쪽) - 1994. 3. 25 발행

1972년 10월 4일 부산지역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수녀원 아래 식당을 교실로 개조하여 아미동에 거주하는 불우한 환경의 어린이들 24명을 돌보아 주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가정의 자녀들과 직장 여성의 자녀들을 우선적으로 받아 교육함으로써 수녀회의 고유한 목적과 방법에 따르는 조기 교육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차츰 학부모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원아수가 급증하여 1974년 7월 16일 유치원을 신축하여 축성식을 거행하고 감사 미사를 봉헌하였다.

1972. 11 성체회 수녀들이 성남 성모조산소를 운영 (나눔지 3호 2쪽) - 1977. 2. 22발행

성모 조산소 (나눔지 3호 2쪽) - 1977. 2. 22발행

성모조산소는 1972년 11월에 성남시 어머니들의 모자보건사업을 위해 시작되었다. 집단이주를 할 철거민들이 정착하기 까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애로가 많았으나 그 중 가장 큰것은 의료혜택이었다. 특히 높은 출산율과 저임금, 그리고 산후처리의 불충분으로 인해 신생아 사망율이 아주 높았다. 기아에 못이겨 자기 아이를 닭으로 착각하고 삶은 1972년 2월에 있었던 그 일은 우리모두를 경악케 했었다. 이러한 성남시의 비참한 모자를 위해 성체회의 두명의 수녀가 전세방을 얻어 조산소를 시작한 것이다. 산모와 아기와 함께 침식을 하며 밥과 빨래시중은 물론 가정분만때는 보호자 역활도 해야 한다. 굶주림에 못이긴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지 않아서 죽어가는 아기를 발견하여 임종을 돕는가 하면 한밤중에 임신중독산모가 찾아와 사정을 할 때면 모든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일을 시작하고는 한다. 새생명의 비극을 막기 위해 "행복한 가정운동"도 하고 청소년 상담도 하며 산모와 어린생명을 돌보고 있다.

1972. 나환자를 위한 이리 성모병원을 개설 (309쪽 동정성모회)

동정성모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1609년에 영국인 메리 워드(Mary Ward)에 의해서 벨기에의 성 오메(St. Omer) 에서 창설된 활동여자 수도회. 청소년 교육과 그밖의 모든 자선사업활동을 전개하던 이 수도회는 초창기 교회로부터 반대와 오해를 받기도 하다가 1909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서 인준을 받았다. 1956년 8명의 한국여성이 입회.

현재 초대관구장 박기주 수녀를 중심으로 서울, 대전, 충북, 보은, 전북, 이리, 경남 진해, 충무에서 활동하고 있다.

1972. 전북 이리에 성모의원 설립 (교회와 역사 81호 7쪽) - 1982. 4. 25발행

동정 성모 수녀회 (라) Institutum Beatae Mariae Virginis (교회와 역사 81호 7쪽) - 1982. 4. 25발행

동정성모회는 1609년 영국인 메리워드(Mary Ward)에 의해 벨기에의 성 오메(St. Omer)에서 창설된 여자 활동 수도회이다. 창설자 메리워드는 2년의 준비끝에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이 수도회는 창설했는데 이름 그대로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고 성모마리아의 여종으로서의 봉사를 목표로 청소년 교육과 그밖의 모든 자선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당시 나타나기 시작했던 사도활동들은 봉쇄와 병행되거나 지방주교에게만 인정받을 수 있었으므로 이 수도회는 교회로부터 완전한 승인을 얻기까지 300년동안 반대와 오해를 받는 등 갖가지 고난과 시련의 특이한 역사를 겪었다. 창설자인 메리워드는 교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수차례나 로마와 도버해협을 건너 왕래하고 유럽전역을 도보로, 마차로 여행 하면서 후세에 "사도 바오로 이후 주 그리스도를위해 가장 긴 여행을 해낸 여성" 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 비오 10세는 수도회 창설 300년만인 1909년 4월 20일 인준을 하였다. 동정 성모회의 한국 진출은 1964년 6월 10일로서 당시 독일에 유학중이던 예수회 박고영 신부가 이 수도회의 교육사업을 보고 한국에의 진출을 요청한 것이 그 실마리가 되었다.

서울 분원의 회원들은 대방동에 있는 공군부대와 개봉동, 오류동, 본당 등에 나가 사목활동을 펴고 있으며 월1회 성소자 모임도 지도하고 있다. 대전 공동체는 1965년 학교건물과 수도원건물이 완공되면서 시작되어 성모국민학교와 성모여자 고등학교 등 청소년 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성모국민학교는 1966년 2월 17일에 객교하여 "감사할 줄 알며 거짓 없고 자기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어린이"를 배출시키고 있다. 또한 성모여자고등학교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을 위하여 몸바칠 여성"이라는 여성상의 구현을 위하여 전인교육을 이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충북 보은 분원에서는 성모병원, 성모유치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북 이리에서는 성모의원과 2개 시와 6개 군의 나환자 정착촌 12개에서 의료 및 구호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곳 성모의원에서는 나환자 전용병동도 새로 건립하였다. 또한 경남 충무분원에서는 본당사목과 충무유치원 사업을 돕고 있으며 진해분원에서는 군종사목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해군 사관학교 등 각 군부대에 나가 군종사목에 종사하는 한편, 군인가족들에는 가정방문화 그룹활동 등을 통해 교리교육과 성경연구를 실시하고 있다.

동정성모회는 현재보다 견고하고 지속적인 사도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분원확장을 보류하고 회원들의 영성교육과 사도직을 위한 전문직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94년에 한국진출 30주년을 지낸 한국 동정 성모회는 400여년 간 학교 교육에 헌신하여 온 수도 공동체의 정신을 이어 받아 자신의 카리스마인 교육은 물론이고 앞으로 신앙의 옹호와 전파를 위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이면 어떤 분야에서도 투신할 각오를 다지며 동시에 새로운 변모와 발전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다.

1972. 이리 성모 의원 설립 (전주교구) (동정성모회의 복지시설 - 교회와 역사 242호 11쪽) - 1995. 7. 25발행

이리 성모 의원 (동정성모회의 복지시설 - 교회와 역사 242호 11쪽) - 1995. 7. 25발행

1972년 나환우진료 및 일반 진료를 위하여 설립되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목적으로 나환자 치료사업과 나병 퇴치에 역점을 두고 지역사회에 보건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침상 수는 19병상으로 나환자 입원용으로만 이용되고 있으며, 기타 외래 환자는 연평균 81,540명이다. 주요 이용자는 생활정도가 중하위 계층의 40대 후반이다. 그러나 나환자들의 고령화 현상으로 인해 점차 나사업의 활동 범위가 축소되면서 재활과 복지, 그리고 임종을 돕는 호스피스에 역점을 두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망을 심어 주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또한 지역사회의 보건 향상에도 일익을 담당하면서 현재 8명의 회원들이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73. 1. 31 마리아 수녀회에서 부산 소년의 집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의 창설동기는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소 신부) 가 부산 송도(지금은 남부민동) 본당주임으로 있을적이었다. 너무나 가난한 참상, 너무나 외로운 사람들의 처참한 상태를 그냥 볼 수가 없었던 소 신부는, 우선 버림받은 고아들만이라도 주님의 일꾼이 되어 돌봐 줄 사람들을 구했다. 당시 부산 교구장 최 재선 주교와 의논하여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모든 자금은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모금해다가 재단법인을 결성했다. 우선 송도 본당 한쪽 헛간 바닥에 거적을 깔고서 시작한 마리아 수녀회의 공식 창설일은 1964년 8월 1일이다. "이 어린이들 중에 하나라도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 (마태 18,5) 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과 부모가 없어 버림받는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모성애로써 봉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 등 기도 생활과 함께 복음적 실천과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창설한 수도회다. 그리하여 버림받은 어린이와 불우한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수도회다. 회원은 빈첸시오 바오로 성인의 까리따스 수녀회의 전통을 따른다. 마리아의 수녀회에서 행하는 사업의 규모는 아동복지 사업과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 고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버림을 받아서 마음과 몸이 몹시 지쳐있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는 지체부자유와 정신 박약한 가련한 어린이도 320여명이나 된다. 이들은 수녀들의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로써 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구나, 어떤 과오를 저지른다고 해도 따뜻한 사랑과 손길로써 보호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낙원이다.

의료사업인 부산의 결핵요양소와 서울의 갱생원은 시 당국의 경영난으로 믿고 넘겨 준 의료기관인데, 모두 무료치료를 베풀고 있다. 서울 갱생원 원생 중 회갑을 지낸 환자들은 서울 소년의 집 구내로 옮겨서 양로원 같이 보살피고 있다. 교육사업은 모두 수녀회가 전액 부담하되, 부산으로 집결시킨 유치부를 마치면 부산의 중학교로 보낸다. 중학교를 마치면 남자는 기계공고로 전학시키고 여자는 고입예비고사에 합격하면 학구배치에 따라 여러 일반여고로 보내어, 학비 잔액을 부담하여 통학시킨다. 공업고교 과정을 마친 남자는 노동부가 시행하는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직을 시킬 수 있고 공전으로 전학 수용시켜 무상교육의 혜택을 지속시킨다. 여자의 경우는 여고를 마치고 대입 예시 합격하면 간호전문대, 교육대, 사범계 등으로 진학시켜 무상 교육 혜택은 연장된다.

1973. 7 경로수녀회가 청주교구로부터 성심원을 인수 받음 (69쪽 경로수녀회)

경로수녀회 敬老修女會 (영) Little Sisrers of Poor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9쪽)

1971년 한국에 진출한 수녀회, 예수의 진복팔단 정신을 생활 방침으로 1840년 쟌느 주강(Jeanne Jugan)수녀가 불쌍한 한 할머니를 간호함으로써 시작된 이수녀회는 교황청 직속 수도단체로서 양로사업만을 위해 활동하며 프랑스 브르타뉘(Bretagne)주 생폴(Saint Paul)에 본부가 있다. 1971년 9월 한국에 진출한 수녀회 회원들은 명도원에서 언어교육을 마친 뒤 1973년 7월 청주교구에서 운영하던 성심원을 인수받아 활동하기 시작함으로써 한국지부가 설립되었다. 초대 지부장으로는 브뤼네(Bunet) 수녀가 취임하였다.

1973. 8 합정동 서울 본원에 마리스타 교육관 설립 (교회와 역사 244호 13쪽) - 1995. 9. 25발행

마리스타 교육원 (교회와 역사 244호 13쪽) - 1995. 9. 25발행

⸁ 안동 : 1973년 8월 합정동으로 수도원을 이전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게 된 마리스타 교육원은 본격적으로 사도직 활동을 모색한 결과 그 첫번째 결실로서 1973년 9월 안동에 첫 분원을 설치하게 되었다. 안동지방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안동교구가 인적, 물적으로 가장 가난하였고 진출한 수도회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안동 주변지역의 주민 대부분의 생업이 농업으로서 유교가 지배적인 지역이었기에 선교하기에 매우 어려운 조건들이 많았으나 바로 이런 소외된 지역이야말로 마리스타교육 수도회가 일할 곳이기에 첫 진출지로 결정한 것이다. 먼저 안동에서 공부하고 있는 타지방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및 독서실을 운영하였고 또한 실기 교육원을 설립하였다. 특히 이 교육원에서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의 교육에 주력하여 여학생들을 위해서는 주산, 타자, 부기를 남학생을 위해서는 조각, 선반, 자동차 정비에 관한 과목을 두어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동시에 일반 학교 교과 과목을 둠으로서 청소년들의 사회 진출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교육관 운영이 안정권에 들어서자 교구에 이를 양도하고 분원을 철수하였다.

⸂ 원주 : 1985년에 교육원(강원도 원주시 봉산2동)을 개설하여 피정지도와 교구 청소년들과 교리교사들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진광고등학교 지도 교사들의 교육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에 교구차원에서 교육관이 종합 사회 복지관으로 변경되면서 분원은 철수하였다.

⸃ 서울 : 본원인 합정동 수도원 안에 위치한 마리스타 교육관에서도 고등학생, 대학생, 일반인들에게 피정장소를 제공하고 지도하고 있다. 또한 본당 주일학교와 몇몇 단체에 속한 청소년들에게 교리교육도 하고있다. 교육관 운영을 위해 현재는 일반 레지오 단원을 위한 피정, 예비자 피정, 선택 프로그램 등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청소년 교육에 전력하면서 전문성을 살려 나갈 예정이다.

1973. 9 마리스타 교육수도회 에서는 안동에 마리스타 교육원을 설립 (교회와 역사 244호 13쪽) - 1995. 9. 25발행

마리스타 교육원 (교회와 역사 244호 13쪽) - 1995. 9. 25발행

⸁ 안동 : 1973년 8월 합정동으로 수도원을 이전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게 된 마리스타 교육원은 본격적으로 사도직 활동을 모색한 결과 그 첫번째 결실로서 1973년 9월 안동에 첫 분원을 설치하게 되었다. 안동지방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안동교구가 인적, 물적으로 가장 가난하였고 진출한 수도회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안동 주변지역의 주민 대부분의 생업이 농업으로서 유교가 지배적인 지역이었기에 선교하기에 매우 어려운 조건들이 많았으나 바로 이런 소외된 지역이야말로 마리스타교육 수도회가 일할 곳이기에 첫 진출지로 결정한 것이다. 먼저 안동에서 공부하고 있는 타지방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및 독서실을 운영하였고 또한 실기 교육원을 설립하였다. 특히 이 교육원에서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의 교육에 주력하여 여학생들을 위해서는 주산, 타자, 부기를 남학생을 위해서는 조각, 선반, 자동차 정비에 관한 과목을 두어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동시에 일반 학교 교과 과목을 둠으로서 청소년들의 사회 진출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교육관 운영이 안정권에 들어서자 교구에 이를 양도하고 분원을 철수하였다.

⸂ 원주 : 1985년에 교육원(강원도 원주시 봉산2동)을 개설하여 피정지도와 교구 청소년들과 교리교사들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진광고등학교 지도 교사들의 교육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에 교구차원에서 교육관이 종합 사회 복지관으로 변경되면서 분원은 철수하였다.

⸃ 서울 : 본원인 합정동 수도원 안에 위치한 마리스타 교육관에서도 고등학생, 대학생, 일반인들에게 피정장소를 제공하고 지도하고 있다. 또한 본당 주일학교와 몇몇 단체에 속한 청소년들에게 교리교육도 하고있다. 교육관 운영을 위해 현재는 일반 레지오 단원을 위한 피정, 예비자 피정, 선택 프로그램 등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청소년 교육에 전력하면서 전문성을 살려 나갈 예정이다.

1973. 11. 평화의 모친의원 개원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평화의 모친의 집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 1998. 3. 31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답신에 의거

1973년 11월 평화의 모친의원으로 개원하였다가 1987년 폐원하였다. 그 후 같은 건물에 무의탁 노인들을 위하여 양로시설로 변경하여 1990년 5월에 설립되었다. 1998년 현재 포천에 위치하고 있으며 20명-25명의 할머니들을 수용할수 있는 규모이다.

1973. 성남시에 성모조산원을 개원 (667쪽 성체회)

성체회 (영) Congregation of the Blessed Sacra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67쪽)

1958년 6월 5일 윤을수 신부가 경기도 소사에서 창설한 수녀회

청결, 청빈, 순명으로 주의 영광을 현양함과 동시에 포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회사업으로 애덕을 실천하고자 한다. 인보 수도회의 정신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성체성사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곧 그 인보에 그 원천을 두고있다.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정신임을 생활로써 보여주신 창립자를 본받아 모든 요구호자들이 그들의 가정을 성화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도록 사회사업과 복음선포에 임하면서 시대와 지역교회의 요구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1951년 윤을수 신부가 군종생활을 하면서 5명의 전쟁고아들을 보살핀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1956년 전쟁고아들을 돌볼 여성들을 위한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하고 학교내에 따로 인보성체회를 신설하였다.

창설 직후부터 예산, 인제, 나자로 요양원, 서울 영등포, 용인, 원주, 백령도, 흑산도,공주, 서울 성 골롬반 의원,진안, 남원, 이리, 순천, 진해 등 전국에 회원들이 활동하였다.

1983년 말 80여개의 본당을 비롯하여 사회사업, 교육기관, 의료기관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1973. 쎈뽈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으로 인정 (555쪽 사회사업)

1973. 구미 근로여성복지관 설립 (555쪽 사회사업)

사회사업 (영) Social servic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5쪽)

가톨릭 교회는 단순한 전례의 공동체나 신앙의 공동체일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빛(마태 5,13-16)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사회안의 어두운 곳을 찾아서 어두움을 없애고 광명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너무도 어두운 곳이 많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사람, 육체는 건강하나 정신이 병든사람, 정신은 건강하나 육체가 병든사람 등이 있다.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을 살펴주고 그들의 희망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버림받고 소외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현세적인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교회의 사업중에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문화사업, 사회사업등이 포함된다.

*구미근로여성복지관 - 1973년 경북 구미시 송정동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구미공단 근로여성들의 인격도야 및 생할향상을 위해 기능교육, 취미교육, 교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설립단체는 왜관 성 베네딕토 대 수도원이다.

*국제마리아의 사업회 -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고 1969년(여자), 1974년(남자)에 설립되었다.

주된 활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회원이 소득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퍼콜라레 운동을 하는 남녀 회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덕산 신생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으로서 1952년에 설립된후 요보호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하고 원생을 초·중·고등학교에 진학 시키고 졸업 후에는 기술을 습득시키고 있다.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 1976년 경남 마산시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정기프로그램으로 학습반과 취미반이 있고 특별 프로그램으로 젊은이 교실, 사임당교실, 성교육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 1979년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설립하였다. 불우이웃 청소년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의식개발, 교육, 협동, 우정, 자립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쎈뽈원 - 충남 논산군 논산읍에 있으며 1973년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이 되었다. 노인복지시설을 설치운영하며, 성인불구자의 복지사업을 하고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 1966년에 설립되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근로자의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기업인의 이해를 촉구시키고 노사간의 긴밀한 협조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곳이다.

*성심원 - 서울대교구가 불우아동 및 부상아동을 보호하기위해 1946년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설립하였다. 파티마 성모수녀원에서 담당운영하고 있다.

*성인복지원 - 1976년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설립, 부양가족이 없고 경제적으로 자활이 분리한 60세 이상의 여자노인을 수용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 본부는 서울 명동에 있으며 마음의 가난함을 생활화하는 단체로 1961년 설립되었다. 주된사업은 환자, 가난한자, 걸인을 돌보고 노쇠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며 불우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이다.

*소화영아재활원 - 1946년 소아보육원으로 출발하였다. 주된사업은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사업이며, 부산교구재단에서 운영하고있다.

*엠마우스집 - 1981년 설립된 것으로 성인지체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 - 1969년에 불우아동을 수용하여 직업보도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성 빈첸시오 청소년 복지회에서 설립하였다.

*춘광대구 요양원 - 극빈 폐결핵 환자 요양원으로 1966년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진영성모의원 별관 -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불우한 결핵환자를 고쳐주는 것이 주된목적이다.

*한국 SOS 어린이 마을 - 요보호 아동들을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하고 퇴소후에는 독립생계를 유지토록 자립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꽃동네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중 특기해야 할 것은 충북 무극에 있는 꽃동네로 청주교구 오웅진 신부가 혼자서 걸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면서 시작되었다. 꽃동네의 특징은 구걸할 수만 있으면 퇴거토록 하는 것으로 자생의 능력이 전혀 없는 노인만을 보호하는 곳이다.

*성모 자애원 - 예수성심 시녀회가 심신 장애아를 재활시키는 곳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 6.25 이후 기아가 날로 증가하여 버림받은 생명들을 입양, 양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릴리 어린이집 - 6-7세의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을 받아 교육하고 있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의 근로자의 집 - 근로자의 수용과 교육에 힘쓴다.

*성 프란치스코의 집 -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일을한다.

*마리아 자매원 - 문제청소년을 교도하고 상담과 숙소를 제공하여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국민학교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이수시킨다.

*성심 양로원 - 불우한 노인을 수용하여 물질적 정신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성가 양로원 - 무의탁 노인들을 구호한다.

*백백합 보육원 -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호, 육성한다. 설립단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다.

*해성 보육원 - 요보호 아동과 지체 부자유자아 및 정박아 수용 및 양육, 국내외 입앙을 하고있다.

이상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 중 그 일부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나 이 이외에도 수십개의 사회사업단체가 있으며 그들은 보이지 않게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사업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첫째, 교회는 특별히 정부나 일반 사회단체에서 망각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소외된 계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이 하기 어려운 사업을 찾아서 그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임무다.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회사업은 양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몇명을 도와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교회의 사회사업은 어떤 기관이나 단체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사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자기의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인의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회사업가이며 모든 신자가정은 사회사업단체인 것이다. 세째, 교회 당국이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재정적 뒷바침을 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성당도 지어야 하고 문화사업도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오늘의 현실 안에서 연장시키는 일이다. 특히 도시교구나 본당에서는 그 지역사회안에 어두움을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여 그들을 위한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정말 가톨릭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1973. 가톨릭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에 가톨릭농민회 가입 (16쪽 가톨릭농민회)

가톨릭농민회 (영) Catholic Farmaer's Move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쪽)

농민 스스로의 단결과 협력으로 농민의 권익을 위하고 인간적 발전을 도모하며, 사회정의의 실현을 통한 농촌사회의 복음화와 인류공동체 발전에 기여함으로 1954년 유럽의 8개국 18개 운동단체들이 가톨릭 농민회 국제연맹(Mouvement International de la Jeunesse Agricole et Rural Catholiques)을 창설하였다. 1958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으며 벨기에 루벵에 국제본부가 있다.

한국가톨릭농민회는 1964년 10월 가톨릭노동청년회의 '농촌청년부'로 시작하여 1966년 10월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J.A.C.) 창립총회를 가진 후 1970년 9월 제7차 가톨릭 농민회 국제연명(MIJARC) 총회에 대표자를 파견, 정회원국으로 가입함과 아울러 1972년 3월 제 3차 전국 대의원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한국 가톨릭농민회'로 정식 출범하였다. 그 뒤 같은 해 10월 바티칸 소재 국제가톨릭농촌단체협의회(I.C.R.A.)에 가입하였다.

첫째, 농민문제의 기본문제인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지실태조사를 실시하여 그 해결을 촉구하는 한편 농민의 토지상실, 농촌오염, 투기자본의 농토잠식, 부실경지정리로 인한 문제 등으로부터 농민보호활동을 추진하며 영세한 농업구조가 안고있는 불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각종 협동활동을 추진하여 협동의식을 높인다.

둘째, 농산물에 대한 정당한 값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활동한다.

셋째, 농업관계 조합장 선거제 실시등 실제적인 조합운영의 활동을 제시한다.

네째, 민주적인 농업정책이 실현될 수 있도록 법적인 보장을 위한 농림관계법의 공청회를 유관 단체와 함께 개최하여 자주적인 농민의사와 법이 잘 화합될 수 있도록 활동한다.

다섯째, 농민들의 진정한 생산문화를 찾을 수 있도록 농민문화부활을 위한 활동을 한다.

1974. 3. 시청각 교리교재 연구소 개설 (435쪽 바오로 수도회)

바오로 수도회 (라) Pia Societas Sancti Pauli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35쪽)

1914년 8월 20일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에 의해서 이탈리아 알바(Alba) 시에 창설된 수도회.

주보로 사도 바오로를 모시는 이 수도회는 사회 홍보 수단을 통하여 포교에 종사한다. 현대문명의 이기인,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출판물 등 각종 홍보수단에서 흘러넘치는 비도덕과 오류와 악의 소리를 눌러 이기기위한 목적으로 창설 되었다. 이 수도회의 특수목적은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령을 위해 효과적이고 신속한 홍보수단을 이용하여 가톨릭 전교에 힘을 다하고 있다.

출판분야에는 현재까지 성서, 영성, 교리, 전례, 문학, 청소년, 아동용 등의 서적이 출판되었다.

소리와 영상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인간전체를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된다는 사명에 따라 시청각 교리교재 연구소에서는 교회의 전례생활과 영성에 도움을주는 레코드, 카세트도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1974. 6 나눔의 집 발족 (나눔지 1호 3쪽) - 1976. 9. 27발행

나눔의 집 (나눔지 1호 3쪽) - 1976. 9. 27발행

명동성당 소속봉사 단체인 <나눔의 집>은 1974년 6월에 발족했다. 김몽은 본당신부의 지휘하에 따로 지도신부를 두고 약 10여명의 회원으로 시작되었다. 그 취지는 우리 주위에 있는 가난한 형제들에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먼저 본당의 주보와 팜플렛을 통하여 일반교우들에게 집에서 입지않는 옷가지나 사용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물품을 수집하여 이를 아주 싼값으로 다른 형제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방식이다. 회원들은 평일에 각자 남은시간을 이용하여 수집해 둔 의류의 세탁 및 정리를 하고 매주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까지 물품을 판매해왔다. 판매이외에도 수집한 물품은 극빈자, 결핵 환자, 낙도의 어린이들에게 탁송했다. 본당에서 판매한 물품의 수익금은 저축하여 헌금으로 극빈자를 돕기로 했다. 그리고 매년 정기적으로 본당에서 바자회를 개최하여 본당전교우로 하여금 이에 적극 참여하고 불울한 형제들을 돕는 정신적인 자세를 불러일으켰다. 바자회는 고아원 및 기타 사회사업 단체에게 위탁판매를 할 기회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 경우 수익금은 "나눔의 집"회원들이 만든것과 본당의 다른 단체에서 협조한 것들이었다. 바자회의 수익금은 지금까지 충주 성심 농아학원을 도았고 그 밖에 양동 나환자촌에 경운기 한대를 기증한바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활동은 회원들의 사기를 북돋으는 데에 대단히 좋은 계기가 되며 형제애를 피부로 느끼게 했다.

1974. 10. 5 현대해성병원 설립위원회 발족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9쪽)

현대해성병원 現代海星病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9쪽)

1974년 여름 메리놀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메리놀회 미국 수녀들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울산 현대 조선소에서 부속병원을 세울 예정인데 가서 봉사할 뜻이 있는지를 문의해 왔다. 이에 수녀들은 지대한 관심을 갖고 그해 10월 5일 병원설립워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1975년 2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병원지대를 1차 답사하여 회사측과 설계를 의논하고 1975년 8월 1일 설립자와 수녀회와의 병원관리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다. 9월 15일에는 110병상 규모의 현대조선소 부속병원의 준공을 보게되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1972년 현대조선소를 시작한 후 3년만에 근호자 15,000명의 복지 및 그 가족들과 주변 주민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느꼈고 당시 조선소 내에는 진료소가 1개 있었으나 초창기 조선소의 어려움 속에서 사고가 잦고 사망자도 상당수 있었다. 응급환자 발생시 시내 병원까지는 16㎞ 거리에 약 1시간이 소요되어 구내병원 설치를 절감한 것이다.

수녀들이 이곳에서 봉사하게 되자 조선소 주민들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그 당시 울산 시민은 20만 이었으나 시내에 성당은 하나뿐이었다. 시내까지는 한시간이 소요되며 방어진에 공소가 있을 뿐 조선소 주위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약화되어 갔는데 냉담신자들이 먼저 수녀들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첫해 성탄미사에는 비가 왔고 경당은 좁아 만원이 되어 창문을 열어놓고 우산을 든 100여명의 신자들이 사랑의 잔치에 참여하는 노천미사가 되었다. 이듬해 2월 부터는 정원에서 본당 주임 오수영(히지노) 신부의 협조아래 주일미사를 봉헌하였다. 수녀들은 낮에는 병월에서 근로자와 간부를 차별함이 없이 고통받는 환자들을 따뜻하게 돌보고 밤에는 첫영세 교리반, 부인회, 청년회, 예비자 교리반, 레지오 마리애등 준본당과 같이 말씀의 선포와 증거로써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려는 노력을 하였다.

병원 개월 후 7년만에 맞은편 산을 깎아 1982년 8월 28일 현대식 병원이 준공되어 10월 1일에 개원하였다. 이때 조선소 당국에서 수녀들의 봉사에 대한 신뢰와 감사의 뜻으로 바다의 샛별이신 성모님을 기리는 '현대해성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하도록 하였다. 1985년에는 개원 10주년을 맞이하는 해를 계기로 하여 정주영 회장은 병원과 수녀원 사이에 있는 언덕을 깎아 10억 비용을 들여 1,000명을 수용, 주보를 성 바오로롤 하는 성당을 지어 부산교구에 바쳐 1986년 11월 1일 헌당식을 가졌다. 수녀들은 이방인 고장에 주님의 빛이 빛나게 하신 놀라운 섭리와 사랑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맡은 바 임무에 성실하며 주님의 복음전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74. 수원교구로 부터 효신실업학교를 인수하여 운영 (667쪽 성체회)

성체회 (영) Congregation of the Blessed Sacra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67쪽)

1958년 6월 5일 윤을수 신부가 경기도 소사에서 창설한 수녀회

청결, 청빈, 순명으로 주의 영광을 현양함과 동시에 포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회사업으로 애덕을 실천하고자 한다. 인보 수도회의 정신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성체성사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곧 그 인보에 그 원천을 두고있다.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정신임을 생활로써 보여주신 창립자를 본받아 모든 요구호자들이 그들의 가정을 성화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도록 사회사업과 복음선포에 임하면서 시대와 지역교회의 요구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1951년 윤을수 신부가 군종생활을 하면서 5명의 전쟁고아들을 보살핀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1956년 전쟁고아들을 돌볼 여성들을 위한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하고 학교내에 따로 인보성체회를 신설하였다.

창설 직후부터 예산, 인제, 나자로 요양원, 서울 영등포, 용인, 원주, 백령도, 흑산도,공주, 서울 성 골롬반 의원,진안, 남원, 이리, 순천, 진해 등 전국에 회원들이 활동하였다.

1983년 말 80여개의 본당을 비롯하여 사회사업, 교육기관, 의료기관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1974. 국제마리아의 사업회(남자) 설립 (555쪽 사회사업)

사회사업 (영) Social servic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5쪽)

가톨릭 교회는 단순한 전례의 공동체나 신앙의 공동체일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빛(마태 5,13-16)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사회안의 어두운 곳을 찾아서 어두움을 없애고 광명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너무도 어두운 곳이 많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사람, 육체는 건강하나 정신이 병든사람, 정신은 건강하나 육체가 병든사람 등이 있다.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을 살펴주고 그들의 희망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버림받고 소외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현세적인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교회의 사업중에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문화사업, 사회사업등이 포함된다.

*구미근로여성복지관 - 1973년 경북 구미시 송정동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구미공단 근로여성들의 인격도야 및 생할향상을 위해 기능교육, 취미교육, 교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설립단체는 왜관 성 베네딕토 대 수도원이다.

*국제마리아의 사업회 -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고 1969년(여자), 1974년(남자)에 설립되었다.

주된 활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회원이 소득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퍼콜라레 운동을 하는 남녀 회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덕산 신생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으로서 1952년에 설립된후 요보호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하고 원생을 초·중·고등학교에 진학 시키고 졸업 후에는 기술을 습득시키고 있다.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 1976년 경남 마산시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정기프로그램으로 학습반과 취미반이 있고 특별 프로그램으로 젊은이 교실, 사임당교실, 성교육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 1979년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설립하였다. 불우이웃 청소년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의식개발, 교육, 협동, 우정, 자립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쎈뽈원 - 충남 논산군 논산읍에 있으며 1973년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이 되었다. 노인복지시설을 설치운영하며, 성인불구자의 복지사업을 하고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 1966년에 설립되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근로자의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기업인의 이해를 촉구시키고 노사간의 긴밀한 협조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곳이다.

*성심원 - 서울대교구가 불우아동 및 부상아동을 보호하기위해 1946년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설립하였다. 파티마 성모수녀원에서 담당운영하고 있다.

*성인복지원 - 1976년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설립, 부양가족이 없고 경제적으로 자활이 분리한 60세 이상의 여자노인을 수용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 본부는 서울 명동에 있으며 마음의 가난함을 생활화하는 단체로 1961년 설립되었다. 주된사업은 환자, 가난한자, 걸인을 돌보고 노쇠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며 불우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이다.

*소화영아재활원 - 1946년 소아보육원으로 출발하였다. 주된사업은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사업이며, 부산교구재단에서 운영하고있다.

*엠마우스집 - 1981년 설립된 것으로 성인지체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 - 1969년에 불우아동을 수용하여 직업보도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성 빈첸시오 청소년 복지회에서 설립하였다.

*춘광대구 요양원 - 극빈 폐결핵 환자 요양원으로 1966년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진영성모의원 별관 -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불우한 결핵환자를 고쳐주는 것이 주된목적이다.

*한국 SOS 어린이 마을 - 요보호 아동들을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하고 퇴소후에는 독립생계를 유지토록 자립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꽃동네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중 특기해야 할 것은 충북 무극에 있는 꽃동네로 청주교구 오웅진 신부가 혼자서 걸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면서 시작되었다. 꽃동네의 특징은 구걸할 수만 있으면 퇴거토록 하는 것으로 자생의 능력이 전혀 없는 노인만을 보호하는 곳이다.

*성모 자애원 - 예수성심 시녀회가 심신 장애아를 재활시키는 곳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 6.25 이후 기아가 날로 증가하여 버림받은 생명들을 입양, 양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릴리 어린이집 - 6-7세의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을 받아 교육하고 있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의 근로자의 집 - 근로자의 수용과 교육에 힘쓴다.

*성 프란치스코의 집 -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일을한다.

*마리아 자매원 - 문제청소년을 교도하고 상담과 숙소를 제공하여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국민학교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이수시킨다.

*성심 양로원 - 불우한 노인을 수용하여 물질적 정신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성가 양로원 - 무의탁 노인들을 구호한다.

*백백합 보육원 -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호, 육성한다. 설립단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다.

*해성 보육원 - 요보호 아동과 지체 부자유자아 및 정박아 수용 및 양육, 국내외 입앙을 하고있다.

이상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 중 그 일부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나 이 이외에도 수십개의 사회사업단체가 있으며 그들은 보이지 않게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사업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첫째, 교회는 특별히 정부나 일반 사회단체에서 망각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소외된 계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이 하기 어려운 사업을 찾아서 그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임무다.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회사업은 양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몇명을 도와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교회의 사회사업은 어떤 기관이나 단체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사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자기의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인의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회사업가이며 모든 신자가정은 사회사업단체인 것이다. 세째, 교회 당국이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재정적 뒷바침을 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성당도 지어야 하고 문화사업도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오늘의 현실 안에서 연장시키는 일이다. 특히 도시교구나 본당에서는 그 지역사회안에 어두움을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여 그들을 위한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정말 가톨릭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1974. 벨기에 다미안재단이 영주다미안의원을 설립 (164쪽 구라사업)

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74. 베네딕토 수녀원이 서울애화학교 설립 (596쪽 서울애화학교)

서울애화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96쪽)

성 베네딕토 수녀원이 설립한 초·중등 농아교육기관, 1974년 개설한 청각장애자 상담소 운영을 통하여 농아에 대한 정규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설립하였다. 전인교육을 통하여 건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하고, 1인1기(一人一技)의 기능을 연마케 하여 농아들이 독립된 인격체로 자립할 수 있게함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있다. 서울시 도봉구 미아3동 124의 2번지 소재.

1975. 1. 1 서울특별시 시립 소년의 집 설립

서울특별시립소년의집 - 1998. 6. 11일 서울특별시립소년의 집의 답신에 의거

서울시립소년의 집은 시립아동보호소의 장기수용아동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재단법인 마리아 수녀회가 0세-18세 미만의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와 아울러 아동의 교육을 위하여 소년의집 초등학교를 병설 운영하고 졸업 후 부산소년의 집으로 전원, 소년의 집 중학교와 소년의 집 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계속 수학(修學)하여 졸업과 동시에 취업, 자립하여 건전한 시민으로 육성케 하기 위하여 1975년 서울시 은평구 응암동에 설립되었다.

서울특별시 시립 소년의 집에서는 0세-18세 미만의 요보호 아동과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가 아동을 養育하기에 부적당하거나 養育할 능력이 없는 경우에 수용보호하게 되며 입소절차는 요보호 아동이 발생하면 일시보호 후에 상담조사를 하여 감별을 한 후 수용보호를 하게 된다.

1975. 1. 10 마리아 수녀회에서 서울 소년의 집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의 창설동기는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소 신부) 가 부산 송도(지금은 남부민동) 본당주임으로 있을적이었다. 너무나 가난한 참상, 너무나 외로운 사람들의 처참한 상태를 그냥 볼 수가 없었던 소 신부는, 우선 버림받은 고아들만이라도 주님의 일꾼이 되어 돌봐 줄 사람들을 구했다. 당시 부산 교구장 최 재선 주교와 의논하여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모든 자금은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모금해다가 재단법인을 결성했다. 우선 송도 본당 한쪽 헛간 바닥에 거적을 깔고서 시작한 마리아 수녀회의 공식 창설일은 1964년 8월 1일이다. "이 어린이들 중에 하나라도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 (마태 18,5) 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과 부모가 없어 버림받는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모성애로써 봉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 등 기도 생활과 함께 복음적 실천과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창설한 수도회다. 그리하여 버림받은 어린이와 불우한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수도회다. 회원은 빈첸시오 바오로 성인의 까리따스 수녀회의 전통을 따른다. 마리아의 수녀회에서 행하는 사업의 규모는 아동복지 사업과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 고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버림을 받아서 마음과 몸이 몹시 지쳐있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는 지체부자유와 정신 박약한 가련한 어린이도 320여명이나 된다. 이들은 수녀들의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로써 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구나, 어떤 과오를 저지른다고 해도 따뜻한 사랑과 손길로써 보호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낙원이다.

의료사업인 부산의 결핵요양소와 서울의 갱생원은 시 당국의 경영난으로 믿고 넘겨 준 의료기관인데, 모두 무료치료를 베풀고 있다. 서울 갱생원 원생 중 회갑을 지낸 환자들은 서울 소년의 집 구내로 옮겨서 양로원 같이 보살피고 있다. 교육사업은 모두 수녀회가 전액 부담하되, 부산으로 집결시킨 유치부를 마치면 부산의 중학교로 보낸다. 중학교를 마치면 남자는 기계공고로 전학시키고 여자는 고입예비고사에 합격하면 학구배치에 따라 여러 일반여고로 보내어, 학비 잔액을 부담하여 통학시킨다. 공업고교 과정을 마친 남자는 노동부가 시행하는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직을 시킬 수 있고 공전으로 전학 수용시켜 무상교육의 혜택을 지속시킨다. 여자의 경우는 여고를 마치고 대입 예시 합격하면 간호전문대, 교육대, 사범계 등으로 진학시켜 무상 교육 혜택은 연장된다.

1975. 인천의 박문여자중고등학교를 위임 경영 (254쪽 노트르담 수녀회)

노트르담수녀회 (영) Congregation of the Sisters of Notre-Da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54쪽)

1848년 아델콘드윌브링(Adelgonde Wolbring)과 리제테 퀼링(Lisette Kuhling)이 독일에서 창설한 수녀회. 1967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여성교육사업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형제사랑으로 돌보면서 더욱 건설적인 세계를 이룩하고자한다.

1975. 3 인천 교구의 박문여자중고교의 위임경영 (교회와 역사 65호 7쪽)

노틀담 수녀회 (교회와 역사 65호 7쪽)

노틀담 수녀회는 여성교육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업을 하는 활동 수녀회이며 한국에 진출한 노틀담은 독일의 베스트후알렌(Westfalen) 의 코스펠트에 본부를 둔(Sisters of Notre Dam of Amersfoort) 수녀회이다. 이 수녀회는 이탈리아, 영국, 네델란드, 브라질 등지에도 진출하여 유치원, 초중고교, 대학의 경영, 기숙사, 양로원, 병원 등의 사업을 통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돌봄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는 하느님 사업에 봉사하고 있다.

1968년 8월 부터 1971년 까지는 지방 출신 여대생들의 기숙사업을 하였다. 엄격한 기숙사 규칙을 펴나가면서 그 부모들과 편지 교환도 하고 면담도 하였다. 그러나 성소 지원자가 불아나자 방 때문에 중단하였다.

그리고 이 수도회의 사업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버스 안내양들을 보살핀 일이다. 수녀들이 버스를 탔다가 발견한 비참한 사정은 종점에서 종점까지 몇 번이고 타고 다녔고 그들의 숙소까지 살폈다가 놀란 참상과 애처러움에서 빚은 사업이었다. 처음에는 버스회사측의 반대도 받았고 훼방을 겪기도 하였다. 교육은 장래 이 나라의 어머니일 많은 아가씨들에게 정서 교육과 가정 여성으로서의 필수기능과 상식 영어와 한자 상식까지도 가르쳤다. 솜씨자랑 전시회도 몇번 열고 나서는 인도적인 처우개선과 침실개선도 이룩하게 한 빛을 던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이 계속되기에는 너무나 에로사항이 많다고 한다.

1972년에 10월 4일에 차린 부산의 유치원은 오전만 보모 노릇을 하는 유치원 교육 혁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일 교육과 생활실습 성교육에 3위 1체 교육방식을 본뜨는 유치원이 자꾸 생겨나게 했다. 1975년에는 농어촌 유치원 교육을 위해서 오산 지역의 마을회관 등으로 나가서 부산유치원 방식을 베풀고 있다.

1975. 3. 2 서울소년의집 초등학교 개교

서울특별시립소년의집 - 1998. 6. 11일 서울특별시립소년의 집의 답신에 의거

서울시립소년의 집은 시립아동보호소의 장기수용아동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재단법인 마리아 수녀회가 0세-18세 미만의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와 아울러 아동의 교육을 위하여 소년의집 초등학교를 병설 운영하고 졸업 후 부산소년의 집으로 전원, 소년의 집 중학교와 소년의 집 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계속 수학(修學)하여 졸업과 동시에 취업, 자립하여 건전한 시민으로 육성케 하기 위하여 1975년 서울시 은평구 응암동에 설립되었다.

서울특별시 시립 소년의 집에서는 0세-18세 미만의 요보호 아동과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가 아동을 養育하기에 부적당하거나 養育할 능력이 없는 경우에 수용보호하게 되며 입소절차는 요보호 아동이 발생하면 일시보호 후에 상담조사를 하여 감별을 한 후 수용보호를 하게 된다.

1975. 3 노틀담 수녀회는 '오산 어린이 집' 개원 (교회와 역사 226호 16쪽) - 1994. 3. 25 발행

오산 어린이의 집 (교회와 역사 226호 16쪽) - 1994. 3. 25 발행

1972년 3월 18일 오산읍 창학리에 10,230평 대지를 구입하여 노틀담 수녀회에서는 오산 수녀원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각 가정을 방문하여 어머니들이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과 지역사회의 요구를 듣고 사도직의 방향을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가난한 농촌 주민들의 자녀, 직장을 가진 어머니와 인근 공장 직원들의 자녀들을 맡아 돌보며 아울러 주변 농촌지역에도 관심을 주어 수녀들이 직접 나가서 어린이들을 지도하기로 하였다. 1975년 3월에 유치원 건물을 준공한 후 정식 인가가 나기까지 약 2년 동안 '어린이집'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1976년 9월 1일 오산읍에서 떨어진 서리에서 '이동 어린이 집'을 개원하여 그 곳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봉사하게 되었다. 그 후 구역이 좀더 넓은 가장리로 옮겨 2년여 동안 어린이들의 정서 함양과 간접적인 신앙교육에 주력하였다. 1979년 3월 7일에는 '이동 어린이 집'운영을 신자 수도 많고 교육을 필요로 하는 어린이들이 더 많은 벌음리로 옮겨 1985년 2월 21일까지 봉사하다가 문교 정책에 의한 국민학교에 새로운 병설 유아원이 생긴 관계로 더 이상 수녀원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폐원하게 되었다. 이로써 오산읍의 '노틀담 유치원'과 '이동 어린이 집'의 이원적인 유아 교육 사도직은 일원화가 되었다.

1975. 5. 1 현대해성병원 건축공사에 착공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9쪽)

현대해성병원 現代海星病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9쪽)

1974년 여름 메리놀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메리놀회 미국 수녀들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울산 현대 조선소에서 부속병원을 세울 예정인데 가서 봉사할 뜻이 있는지를 문의해 왔다. 이에 수녀들은 지대한 관심을 갖고 그해 10월 5일 병원설립워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1975년 2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병원지대를 1차 답사하여 회사측과 설계를 의논하고 1975년 8월 1일 설립자와 수녀회와의 병원관리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다. 9월 15일에는 110병상 규모의 현대조선소 부속병원의 준공을 보게되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1972년 현대조선소를 시작한 후 3년만에 근호자 15,000명의 복지 및 그 가족들과 주변 주민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느꼈고 당시 조선소 내에는 진료소가 1개 있었으나 초창기 조선소의 어려움 속에서 사고가 잦고 사망자도 상당수 있었다. 응급환자 발생시 시내 병원까지는 16㎞ 거리에 약 1시간이 소요되어 구내병원 설치를 절감한 것이다.

수녀들이 이곳에서 봉사하게 되자 조선소 주민들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그 당시 울산 시민은 20만 이었으나 시내에 성당은 하나뿐이었다. 시내까지는 한시간이 소요되며 방어진에 공소가 있을 뿐 조선소 주위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약화되어 갔는데 냉담신자들이 먼저 수녀들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첫해 성탄미사에는 비가 왔고 경당은 좁아 만원이 되어 창문을 열어놓고 우산을 든 100여명의 신자들이 사랑의 잔치에 참여하는 노천미사가 되었다. 이듬해 2월 부터는 정원에서 본당 주임 오수영(히지노) 신부의 협조아래 주일미사를 봉헌하였다. 수녀들은 낮에는 병월에서 근로자와 간부를 차별함이 없이 고통받는 환자들을 따뜻하게 돌보고 밤에는 첫영세 교리반, 부인회, 청년회, 예비자 교리반, 레지오 마리애등 준본당과 같이 말씀의 선포와 증거로써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려는 노력을 하였다.

병원 개월 후 7년만에 맞은편 산을 깎아 1982년 8월 28일 현대식 병원이 준공되어 10월 1일에 개원하였다. 이때 조선소 당국에서 수녀들의 봉사에 대한 신뢰와 감사의 뜻으로 바다의 샛별이신 성모님을 기리는 '현대해성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하도록 하였다. 1985년에는 개원 10주년을 맞이하는 해를 계기로 하여 정주영 회장은 병원과 수녀원 사이에 있는 언덕을 깎아 10억 비용을 들여 1,000명을 수용, 주보를 성 바오로롤 하는 성당을 지어 부산교구에 바쳐 1986년 11월 1일 헌당식을 가졌다. 수녀들은 이방인 고장에 주님의 빛이 빛나게 하신 놀라운 섭리와 사랑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맡은 바 임무에 성실하며 주님의 복음전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75. 5. 5 마리아 수녀회에서 어린이 마을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의 창설동기는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소 신부) 가 부산 송도(지금은 남부민동) 본당주임으로 있을적이었다. 너무나 가난한 참상, 너무나 외로운 사람들의 처참한 상태를 그냥 볼 수가 없었던 소 신부는, 우선 버림받은 고아들만이라도 주님의 일꾼이 되어 돌봐 줄 사람들을 구했다. 당시 부산 교구장 최 재선 주교와 의논하여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모든 자금은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모금해다가 재단법인을 결성했다. 우선 송도 본당 한쪽 헛간 바닥에 거적을 깔고서 시작한 마리아 수녀회의 공식 창설일은 1964년 8월 1일이다. "이 어린이들 중에 하나라도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 (마태 18,5) 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과 부모가 없어 버림받는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모성애로써 봉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 등 기도 생활과 함께 복음적 실천과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창설한 수도회다. 그리하여 버림받은 어린이와 불우한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수도회다. 회원은 빈첸시오 바오로 성인의 까리따스 수녀회의 전통을 따른다. 마리아의 수녀회에서 행하는 사업의 규모는 아동복지 사업과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 고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버림을 받아서 마음과 몸이 몹시 지쳐있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는 지체부자유와 정신 박약한 가련한 어린이도 320여명이나 된다. 이들은 수녀들의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로써 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구나, 어떤 과오를 저지른다고 해도 따뜻한 사랑과 손길로써 보호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낙원이다.

의료사업인 부산의 결핵요양소와 서울의 갱생원은 시 당국의 경영난으로 믿고 넘겨 준 의료기관인데, 모두 무료치료를 베풀고 있다. 서울 갱생원 원생 중 회갑을 지낸 환자들은 서울 소년의 집 구내로 옮겨서 양로원 같이 보살피고 있다. 교육사업은 모두 수녀회가 전액 부담하되, 부산으로 집결시킨 유치부를 마치면 부산의 중학교로 보낸다. 중학교를 마치면 남자는 기계공고로 전학시키고 여자는 고입예비고사에 합격하면 학구배치에 따라 여러 일반여고로 보내어, 학비 잔액을 부담하여 통학시킨다. 공업고교 과정을 마친 남자는 노동부가 시행하는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직을 시킬 수 있고 공전으로 전학 수용시켜 무상교육의 혜택을 지속시킨다. 여자의 경우는 여고를 마치고 대입 예시 합격하면 간호전문대, 교육대, 사범계 등으로 진학시켜 무상 교육 혜택은 연장된다.


E-mail : peters1@seoul.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