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연대별 기록5


5. 인성회 조직 이후의 활동(1975∼1991)

1975. 6. 25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인성회 발족 (968쪽)

인성회 (영) Human Development Committee-Bishops Conference of Korea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69쪽)

인성회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인성회'의 약칭이다. 1. 개괄 ① 소속 : 인성회는 주교회의 산하 전국 위원회(National Committee) 중 일개 위원회이며 주교위원회(Episcopal Commision) 가운데에는 사회 주교 위원회(Commision for Social Affairs) 에 소속되어 있다. 성청에는 Caritas Internationalis에 정회원으로 소속되어 있으며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인간 발전위원회 OHD-FABC에 소속되어 있다. ② 목적 : 인성회는 종교, 사상, 이념에 관계없이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같은 인간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존엄성을 지키면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인간공동체 건설에 교회가 기여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③ 기능 : 이와같은 목적을 수행시키기 위하여 ㉮ 교회의 대 사회적 활동과 사업을 교회 내외적으로, 또한 국내외적으로 대표하고 이와 유사한 민간기구 및 국제기구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 교회의 대 사회적 사업을 활성화 시키며 격려, 조화 시키고 정책을 제시하는 등의 조정역할을 하며 ㉰ 인적, 기술적, 물질적 자원을 개발, 동원, 배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④ 관장분야 : 이와 같은 기능은 교회의 ㉮ 제반 긴급 구호 및 자선활동 ㉯ 복지사업 ㉰ 개발활동 ㉱ 사회의식계발운동에 걸쳐 발휘된다. ⑤ 조직 : 인성회는 주교단에서 선출된 담당주교가 대표, 지휘, 감독을 총괄한다. 담당주교 산하에 전국위원회를 설치하여 그 구성을 인성회 각 교구 위원회 대표, 사회사업 전국기구 대표, 위촉위원, 사무국장으로 되어있다. 각 교구는 교구 형편에 맞게 인성회 교구위원회를 설치토록 되어 있으며, 전국위원회 사무국을 중앙에 설치하여 제반 업무를 수행토록 되어 있다.

2. 설립배경 : 한국전쟁 후 서울 대교구 윤을수 신부가 한국 카리타스(Caritas Coreana)를 설립하여 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구로 발전시킬 의도였으나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유명무실해졌고, 그 뒤 대전 교구장 황민성 주교의 명의로 명맥을 이어 오다가 평양교구 관리자이며 미국 가톨리 구제위원회(Catholic Relief Services - U.S.C.C) 책임자 캐롤 몬시뇰(Msgr. George M. Carroll. M.M)이 조정자로 임명되었으나 역시 명칭만의 기구로 존속되었다. 1971년 12월 아시아지역국 교회의 카리타스 설치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당시 발족한 교황 자문 기구인 Cor Unum의 성격이 명확히 규정되지 못하였기에 구체적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 캐롤 몬시뇰은 주교회의에 한국 카리타스 부활을 위한 제의를 하였다. 1974년 당시 교황청 Cor Unum위원인 박희섭이 '한국 가톨릭 사회발전 심의회' 설립을 주교회의에 제출하였으며, 한국에서의 철수를 고려 중이던 미국 가톨릭 구제위원회는 '개발사업 및 복지사업을 위한 제안서'를 제출하여 한국 카리타스의 부활을 요청하였다. 1974년 11월 춘계 정기총회는 카리타스의 부활을 원칙적으로 결정하였으나 구체적 기구 성격에 대한 두가지 제안의 통합을 모색키 위하여 12월 마닐라에서 개최된 아시아 대륙 카리타스협의회에 박희섭, 최재선 양인을 파견하여 이 회의에 참석한 교황청 실무자와 접촉토록 하고 각국 교회기구에 대한 연구결과를 보고토록 하였다. 1975년 춘계 주교총회는 양인의 보고서를 토대로 지학순 주교에게 양 제안의 통합안을 성안토록 위임하였으며 이 통합방안은 동년 6월 25일 주교단의 인준을 받아 인성회란 명칭으로 정식 발족을 보게 되었으며 총재 주교로 지학순 주교를 선임하게 되었다.

3. 활동의 원칙 : ① 정신 : 인성회 헌장 취지문에서 밝혔듯이 사회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 복음적인 정신으로 ㉯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교회론에 입각하여 ㉰ 역대교황들의 사회회칙 및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따라서㉱ 한국상황에 대한 한국적 전통과 문화를 고려하며 ㉲ 현 한국교회의 체질에 맞도록 활동을 한다.

② 대상 : 인성회 활동의 대상은 우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며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단체·기관·공동체 등이다. 긴급한 재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만성적 빈곤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 불의한 제도나 구조로 고통받고 소외받은 사람들이다.

③ 방법 :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접근방법은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과 요구가 다양하기에 다양성있는 방법을 존중한다. 긴급구호, 사회봉사적 복지적 접근, 개발을 통한 개선적 접근, 운동을 통한 개혁적 방법을 다 함께 인정한다. 그러나 중효한 점은 가난의 원인제거에 대한 접근방법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제 원칙은 이미 교회가 수백년동안 쌓아온 전통적 체험 위에서 근대에 들어와 제시되고 있는 교회의 가르침, 사회과학적 접근방법 및 새로운 형태로 근래에 제시되고 있는 방법들을 포괄적으로 포함한다.

④ 실천적 적용 : 이러한 방법의 실천적 적용은 현대세계와 현 한국실정 및 현 교회체제를 고려하여 우선적으로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자각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웃사랑 실천에 기본을 둔 교회공동체의 사회의식계발과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투신을 긴급한 과제로 삼는다. 아울러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는 제반 구호활동, 자선활동, 복지사업, 개발활동, 사회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단체·기관·공동체들을 활성화시키고, 격려하며, 조화시키고 조정하며 지원하는 접근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실천적 적용이 효과적이기 위하여 교계제도상의 조직과 제도속에서도 특히 교구의 자율적 수행과 대사회적 활동에 종사하는 교회 공식 기구와 단체들의 자율성을 권장하고 존중한다.

4. 활동내용 : 교계제도 속에서 활동하기에 당연히 인성회 교구위원회의 설립과 활성화 및 적극적인 활동을 필요로 한다. 특히 교구 산하의 제반 사회적 사업과 활동이 사목적 성격으로 통합되고 조정되어 교구장을 머리로 교구 상황과 여건 및 능력에 맞는 활동이 전개되어 지역 속에서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는 모습을 드러내며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도구가 되도록 한다. 교회 내의 수많은 사회적 사업과 활동을 하는 기구나 단체 또는 기관들의 상호 유기적 연결과 협조, 공동목표의 설정과 자원의 공정한 배분 등은 효과적인 사회사업과 활동의 요체가 된다. 이를 위하여 분야별 직종별 기존 사업과 활동들을 협의체적으로 모이게 하고 특히 편중된 분야에는 적절한 권고를 하여 낙후된 분야에는 적극적 참여를 권장하고 전연 손대지 못하는 분야에는 적극적 참여를 권장하고 유도하며 지원하는 활동을 한다.

가장 중요하고도 심혈을 기울이는 활동은 '사순절 운동'이다. 이는 전세계 교회가 사순절기간 동안 벌이는 신자 신앙쇄신교육과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의 운동이다. 전통적 사순적 개념인 회개와 보속을 새롭게 환기시키며 이를 현대적으로 의미를 부여시키고 실천하도록 권고하는 단식재, 사순절운동의 본질인 이웃사랑 실천,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의식 및 사회의식을 강조하는 교육 및 피정, 공동체적 나눔의 표현인 공동헌금이 사순절운동의 요체이다. 교체 또는 특정한 이들의 전문적인 전유물로 인식되어 왔기에 일반신자들의 참여가 유도되지 못하였으며 항상 외국에 의존하는 형태였기에 사순절운동은 신자의식 계발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인성회 교구 위원회의 활성화 및 사회사목 기관단체들의 효과적인 조정을 위하여는 종사자들에 대한 교육과 연수가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전국차원에서 개최되는 전국세미나는 교구 및 사회사목 기관 단체에서 참여하는 중요한 훈련이다. 아울러 특정한 주제로 열리는 연수회도 관심있는 종사자들을 훈련시키는 중요한 기회이다. 사회사목에 필요한 제반정보와 자료의 발간은 중요한 업무이며, 각종 사회 사업이나 활동 단체들에 대한 전문적 서비스도 중요한 일이다. 국제적 협력은 전국위원회 사무국이 주로 담당한다.

1975. 7. 기관지 '빛'을 발간 (118쪽 교도사목회)

교도사목회 (영) Prison Apostolat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18쪽)

교도소 수감자들의 복음화와 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위하여 1970년 4월 2일 발족한 평신도단체. 당시 김홍섭 판사와 고중렬 교도관, 박귀훈 신부외 몇 명이 중심이 되어 '교도소 후원회'를 발족함. 1974년에는 각 교도소용 명상자료와 성가녹음테이프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1975. 9. 1 현대해성병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9쪽)

현대해성병원 現代海星病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9쪽)

1974년 여름 메리놀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메리놀회 미국 수녀들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울산 현대 조선소에서 부속병원을 세울 예정인데 가서 봉사할 뜻이 있는지를 문의해 왔다. 이에 수녀들은 지대한 관심을 갖고 그해 10월 5일 병원설립워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1975년 2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병원지대를 1차 답사하여 회사측과 설계를 의논하고 1975년 8월 1일 설립자와 수녀회와의 병원관리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다. 9월 15일에는 110병상 규모의 현대조선소 부속병원의 준공을 보게되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1972년 현대조선소를 시작한 후 3년만에 근호자 15,000명의 복지 및 그 가족들과 주변 주민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느꼈고 당시 조선소 내에는 진료소가 1개 있었으나 초창기 조선소의 어려움 속에서 사고가 잦고 사망자도 상당수 있었다. 응급환자 발생시 시내 병원까지는 16㎞ 거리에 약 1시간이 소요되어 구내병원 설치를 절감한 것이다.

수녀들이 이곳에서 봉사하게 되자 조선소 주민들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그 당시 울산 시민은 20만 이었으나 시내에 성당은 하나뿐이었다. 시내까지는 한시간이 소요되며 방어진에 공소가 있을 뿐 조선소 주위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약화되어 갔는데 냉담신자들이 먼저 수녀들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첫해 성탄미사에는 비가 왔고 경당은 좁아 만원이 되어 창문을 열어놓고 우산을 든 100여명의 신자들이 사랑의 잔치에 참여하는 노천미사가 되었다. 이듬해 2월 부터는 정원에서 본당 주임 오수영(히지노) 신부의 협조아래 주일미사를 봉헌하였다. 수녀들은 낮에는 병월에서 근로자와 간부를 차별함이 없이 고통받는 환자들을 따뜻하게 돌보고 밤에는 첫영세 교리반, 부인회, 청년회, 예비자 교리반, 레지오 마리애등 준본당과 같이 말씀의 선포와 증거로써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려는 노력을 하였다.

병원 개월 후 7년만에 맞은편 산을 깎아 1982년 8월 28일 현대식 병원이 준공되어 10월 1일에 개원하였다. 이때 조선소 당국에서 수녀들의 봉사에 대한 신뢰와 감사의 뜻으로 바다의 샛별이신 성모님을 기리는 '현대해성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하도록 하였다. 1985년에는 개원 10주년을 맞이하는 해를 계기로 하여 정주영 회장은 병원과 수녀원 사이에 있는 언덕을 깎아 10억 비용을 들여 1,000명을 수용, 주보를 성 바오로롤 하는 성당을 지어 부산교구에 바쳐 1986년 11월 1일 헌당식을 가졌다. 수녀들은 이방인 고장에 주님의 빛이 빛나게 하신 놀라운 섭리와 사랑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맡은 바 임무에 성실하며 주님의 복음전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75. 9 부천 성심여자대학교 분교 신설 (649쪽 성심수녀회)

성심수녀회 (영) Society of the Sacred Hear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49쪽)

1800년 11월 21일 성녀 마를렌 소피바라(Madeleine Sophie Barat) 수녀가 프랑스에서 창립한 수녀회.

1956년 10월 10일 한국 진출. 젊은 이들의 교육으로써 예수 성심에게 영광을 주는 것을 창립 목적으로 하여 1956년 한국에 진출하자 곧 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미 1908년 일본에 진출한 수녀회의 극동관구장 브리짓 키오(Brigid Keogh) 수녀에게 한국 진출을 요청하자 관구장이 직접 내한하여 현 수녀원과 성심여자고등학교가 있는 서울 원효로의 옛 예수성심신학교 및 성당 건물을 이수하고 1956년 10월 서울 분원장 맥하디 플린트(McHardy Flint) 수녀 외 7명이 내한하였다. 수녀회 본부에서의 10만달러 예치로 법인설립을 하고, 많은 어려움 끝에 1957년 2월 12일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57년 4월 18일 성심여자중학교의 첫 입학식을 가졌다.

1960년 3월에는 성심여자고등학교가 개교하는 한편, 같은 해 9월 미국 수련원으로부터 한국인 수녀 2명이 내한하여 더욱 활동하기에 좋아졌다. 교육의 일괄성을 위하여 1963년 성심국민학교, 1964년 성심여자대학이 각각 서울과 춘천에서 개교하였다. 아울러 가난한 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서울 봉천동에서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천막학교를 개설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하였다. 1975년과 1982년에 교육의 효율화를 위하여 중학교와 국민학교를 각각 폐교하였고 1975년 3월 한국지구로 독립하여 승격됨과 동시에 같은해 9월에는 부천(富川)에 성심여자대학의 분교를 신설하였다. 1978년에는 강원도 사북읍 고한리 광산촌에서 활동을 실시하였다. 현재 서울 원효로의 본원을 비롯하여 춘천, 원주, 인천의 분원과 함께 서울 원효로에 수련원공동체가 있고, 한국지구장 한순희 수녀를 중심으로 43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1975. 9 농어촌 유치원 교육을 위하여 오산에 마을회관을 운영 (254쪽 노트르담 수녀회)

노트르담수녀회 (영) Congregation of the Sisters of Notre-Da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54쪽)

1848년 아델콘드윌브링(Adelgonde Wolbring)과 리제테 퀼링(Lisette Kuhling)이 독일에서 창설한 수녀회. 1967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여성교육사업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형제사랑으로 돌보면서 더욱 건설적인 세계를 이룩하고자한다.

1975. 9 농어촌 지역의 유치부 교육을 실시 (교회와 역사 65호 7쪽)

노틀담 수녀회 (교회와 역사 65호 7쪽)

노틀담 수녀회는 여성교육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업을 하는 활동 수녀회이며 한국에 진출한 노틀담은 독일의 베스트후알렌(Westfalen) 의 코스펠트에 본부를 둔(Sisters of Notre Dam of Amersfoort) 수녀회이다. 이 수녀회는 이탈리아, 영국, 네델란드, 브라질 등지에도 진출하여 유치원, 초중고교, 대학의 경영, 기숙사, 양로원, 병원 등의 사업을 통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돌봄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는 하느님 사업에 봉사하고 있다.

1968년 8월 부터 1971년 까지는 지방 출신 여대생들의 기숙사업을 하였다. 엄격한 기숙사 규칙을 펴나가면서 그 부모들과 편지 교환도 하고 면담도 하였다. 그러나 성소 지원자가 불아나자 방 때문에 중단하였다.

그리고 이 수도회의 사업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버스 안내양들을 보살핀 일이다. 수녀들이 버스를 탔다가 발견한 비참한 사정은 종점에서 종점까지 몇 번이고 타고 다녔고 그들의 숙소까지 살폈다가 놀란 참상과 애처러움에서 빚은 사업이었다. 처음에는 버스회사측의 반대도 받았고 훼방을 겪기도 하였다. 교육은 장래 이 나라의 어머니일 많은 아가씨들에게 정서 교육과 가정 여성으로서의 필수기능과 상식 영어와 한자 상식까지도 가르쳤다. 솜씨자랑 전시회도 몇번 열고 나서는 인도적인 처우개선과 침실개선도 이룩하게 한 빛을 던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이 계속되기에는 너무나 에로사항이 많다고 한다.

1972년에 10월 4일에 차린 부산의 유치원은 오전만 보모 노릇을 하는 유치원 교육 혁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일 교육과 생활실습 성교육에 3위 1체 교육방식을 본뜨는 유치원이 자꾸 생겨나게 했다. 1975년에는 농어촌 유치원 교육을 위해서 오산 지역의 마을회관 등으로 나가서 부산유치원 방식을 베풀고 있다.

1975. 9. 15 110병상의 현대조선소 부속병원 준공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9쪽)

국제가톨릭형제회 (영)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76쪽)

불일치와 부정의가 있는 현실에 도전함으로써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복음을 기초로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주력한다. 全眞常 정신을 중요시하며 全은 온전한 자아의 봉헌을 뜻하며 眞은 참다운 사랑을 뜻하며 常은 끊임없는 기쁨 속에서의 생활을 뜻한다.

1975. 9. 26 파티마 결핵 요양원 설립 - 1998. 9. 3 파티마 결핵요양원의 오세레나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파티마 결핵 요양원 - 1998. 9. 3 파티마 결핵요양원의 오세레나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이시대와 지역사회의 요청에 따라 의료를 통한 사도직 수행과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으며 이와 같은 사도직 수행을 통해서는 지역사회의 발전과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키 위하여 1975년 9월 26일에 설립된 파티마 결핵 요양원은 저소득층 결핵환자의 입원치료 및 요양을 목적으로 경상북도 칠곡군에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 왕 레지날도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당시는 66병상의 의원 규모로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의사와 방사선기사와 임상병리사가 각 1명씩 주 1회 파견되었으며 요양원의 운영은 대구 파티마 병원의 수입 및 수도원의 예산으로 운영되었다.

故 왕 레지날도 신부가 선교활동 중에 결핵에 감염되었으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의 어려움을 보고 그들을 치료하고 요양시킬 요양원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설립케 되었다.

1982년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로 요양원은 이양되었고 1992년 7월에는 결핵환자수의 감소와 의료보험으로 인한 입원 환자수가 감소하여 폐원하게 되었다.

1975. 시흥에 전진상가정 복지센터설립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국제가톨릭형제회 (영)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76쪽)

불일치와 부정의가 있는 현실에 도전함으로써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복음을 기초로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주력한다. 全眞常 정신을 중요시하며 全은 온전한 자아의 봉헌을 뜻하며 眞은 참다운 사랑을 뜻하며 常은 끊임없는 기쁨 속에서의 생활을 뜻한다.

1975. 성모유치원 신축 개원 (1093쪽 중앙본당)

중앙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093쪽)

전주교구의 주보자 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1993년 12월 당시 교구장인 김양홍(스테파노) 신부가 여러 교우들의 청원에 의하여 전주 전동본당에 있는 한옥 사무실을 철거하고 그곳에 '비성거리'라는 공소를 신축하고 이후 1947년 까지는 공소시기로 있다가 그 해 비성거리 성당을 설립하여 초대 주임신부로 김재덕 신부가 부임하였다. 김신부는 장래 순교자기념본당을 세우려는 포부와 함께 전주시내에 전동본당 하나로써는 너무복잡하고 또한 비성거리의 성당이 너무 협소함으로 전주시 대동에 일산가옥 2층을 임차하여 '대동성당'을 개설하였다.

1952년 2월 1일 임대 사용 중이던 대지및 건물을 매입하여 구내에 성모당과 성모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인 중앙본당은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 639의 40에 소재한다.

1975. 골룸바노 수녀회의 수녀들은 영주의 다미안 의원에서 봉사활동 (93쪽 골룸바노 수녀회)

골룸바노 수녀회 (영) Missionary Sisters of St. Columban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3쪽)

성 골룸바노 수녀회는 1922년 2월 1일 아일랜드에서 당시 성 골롬바노 선교회 총장인 존 블로윅(John Blowick)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포교활동을 함에 있어서 포교지의 전통적인 관습을 극복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전교수녀들의 적극적이며 정성어린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골롬바노회 내에 전교수녀회를 창설하게 된 것이다. 이 수녀회원들은 각 지역에서 전교활동 외에 주로 의료사업, 교육사업, 사회사업 등을 하고 있다.

한국진출 : 1955년 광주교구의 헨리(Harold Henry, 玄) 주교의 초청으로 엔다(Enda Staunton)수녀를 비롯한 4명의 수녀들이 한국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들은 그해 목포에 수녀원을 설립, 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사업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에 춘천에도 성 골롬바노 의원을 개설, 1960년에는 제주도 한림에 진료소를 개설함과 아울러 성 골룸바노 선교회 신부들의 협조를 얻어 직조업에 착수, 지역개발에 이바지하는 동시에 부녀자들의 경제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1963년에는 삼척에도 의료시설을 개설(성 요셉의원), 1975년에는 영주에 분원을 설치하여 수녀들이 나환자 진료소인 다미안 의원에서 근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1971년 서울에 본원을 신축, 수녀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사업과 지방에서 활동중인 수녀들의 뒷바침을 해주고 있으며, 서울에서 수녀들은 서울 가톨릭의대와 협력하여 한국 천주교 회의 산하 '행복한 가정운동'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47명의 수녀들이 서울의 본원과 목포, 춘천, 제주, 삼척, 영주 등 5개 분원에서 의료사업, 간호원 교육사업, 사회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1975. 분도학교 설립 (1305쪽 홍제동본동)

홍제동본동 (1305쪽)

서울대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그리스도왕. 1941년 중림동 성당의 관할 공소로 발족.

9대 주임신부인 이석충 신부는 1975년 분도학교를 설립하여 불우한 아이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76. 2. 24 황령산 '분도어린이집' 개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6쪽)

성 분도 봉사자의 집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6쪽)

부산 성분도병원에서는 1975년 1월부터 '구호과'를 '사회봉사과'로 바꾸고 염일례 그라치아 수녀를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무료진료환자 중에 많은 이가 황령산 기슭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생활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를 답사하였다. 전포동 황령산 기슭에는 부산시에서 거두어 온 쓰레기가 쌓여있고, 양주변에 거지, 넝마주이, 노무자, 전과자, 결핵환자, 정신병자, 알콜중독자, 나환자들이 사회에서 소외된 채 천막이나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들은 식수마저 해결하기 어려운 인간 이하의 상황에 있었고, 버려지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은 우선 그들을 방문하여 인간적인 만남을 시작하였으며, 서서히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여 벗이 되어갔다. 마침내 공동묘지 주변에 10평의 천막을 치고 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돌보았다. 염일례 그라치아 수녀와 김옥순 비아 수녀가 수련원 청원자들과 함께 수녀원에서 출퇴근하였다. 좀 후에는 7세 미만의 어린이들을 오전에 돌보고 오후에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목요일 오후에는 성분도병원의 무료 이동진료반의 봉사로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이 어린이집은 1년 6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수녀들과 청원자들은 버려진 어린이와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공동묘지 사잇길을 오르내리면서 어린이 교육과 급식, 환자방문, 빨래, 집안정리, 치료 등의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 봉사활동은 1977년, 황령산 공동묘지지역 재개발 계획에 따라 공동묘지와 무허가 판자촌이 철거당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수녀들은 철거민과 함께 문현동 산동네로 자리를 옮겨 개천가에 25평짜리 판잣집을 매입하고 1977년 10월 29일 염 그라치아 수녀와 여숙련 헬레나 수녀가 주축이 된 '성분도 봉사자의 집'을 열었다.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 속에 가난한 자로 살면서 그들에게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와 기쁨과 평화를 되찾아 주는 편한 이웃이 되었다. 수녀들은 수련원 청원자들과 실습기 수련 수녀들의 협조로 버려진 임종자들을 돌보고, 탁아소를 운영하며 이웃들의 시급한 일손이 되어줌으로써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또한 그들의 일터를 함께 찾고 복지시설과 공공기관에 드나들면서 사회의 보호 손길을 트는 일도 수녀들의 몫이었다. 이와 함께 성 분도병원의 무료 이동진료와 예비자교리, 미사 등 정기적인 모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점차 이 지역에 고층아파트와 큰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자 봉사의 영역과 성격을 조금씩 바꾸어 탁아소 및 주민봉사와 아울어 상담과 기도를 주로 하게 되었다. 부산은 물론 멀리에서도 매일 10-30여 명의 방문자들이 찾아와 상담을 하였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머물며 성체를 모신 경당에서 성체조배, 성서묵상 등 개인기도를 하며 쉴 수 있었고 기도모임을 통해 서서히 용서와 화해, 치유를 체험하였다.

1982년 8월, 장마와 폭우로 개천이 넘쳐 판잣집이 무너녔지만 그 자리에 같은 규모의 집을 새로 짓고 11월 4일에 축복하였다. 이 집은 장기 휴양자와 임종자들,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머무는 쉼터가 되고, 탁아소와 학생들의 독서실, 기도의 집이 되며, 봉사자들에게는 선업과 나눔의 자리가 되고 있다.

1976. 5 성 프란치스코의원 개원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 (라) Congregatio Missionariarum Mariae Franciscanaru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6쪽)

1877년 1월 6일 마리 드 라 파시옹 (Marie de la Passion)에 의해 인도 오타카문드 (Otacamund)에서 창설된 수도회. 1954년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내한하려 하였으나 중국에서의 수녀원 추방운동으로 1958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진출하였다.

1960년 5월 부산 양정동에 정착하여 성모의원과 함께 수예실을 운영하였다. 1975년 2월에는 부산성모의원을 폐쇄하고, 의료혜택이 더욱 필요한 성 프란치스코의원을 개원하였다. 한편 부산에서는 1961년 3월 성모여자중학교, 1964년 성모여자고등학교를 개교했으나 1974년 성모여중을 폐교하고 1979년 6월 성모여고를 부산교구에 이관하였다. 1966년 서울 가리봉동에 수녀원과 의원건물을 완공함으로써 모두 이전하여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1974년에는 부산에 있던 수련원도 서울로 이전하였다. 1972년 일본관구소속에서 준관구로, 1978년 정식관구로 승격되었다. 1979년에는 원래 학교부지로 매입했던 곳에 선화기숙사가 완공되어 5월 1일 첫 기숙생을 입사시켰다. 현재 한국관구 본부가 있는 서울 가리봉동 수녀원을 비롯하여 부산 양정동 수녀원, 강원도 정선수녀원에서는 관구장 수녀를 비롯한 65명의 (1983년 말 현재)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76. 5. 1 가톨릭사회복지회 발족 (24쪽 가톨릭사회복지회)

가톨릭사회복지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4쪽)

위기에 처해있는 이웃을 도움으로써 복지사회 구현에 기여하고 하느님 나라에 모든 사람이 동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1976년 5월 1일 발족한 서울대교구의 복지기관

첫째, 서울교구 내의 사회사업기관들 간에 서비스의 통합 조정의 기능을 맡아 효과적으로 돕는 일,

둘째, 사회복지 서비스의 기능이 미개발인 분야에 대해서는 직접 그 기능을 제공하고,

셋째, 새로운 프로그램의 개발사업을 추진하는 동시에 인력 개발을 추진확대해 가는 일

1976. 9. 1 노틀담 수녀회는 오산에서 떨어진 거리에 '이동 어린이 집' 개원 (교회와 역사 226호 16쪽) - 1994. 3. 25 발행

오산 어린이의 집 (교회와 역사 226호 16쪽) - 1994. 3. 25 발행

1972년 3월 18일 오산읍 창학리에 10,230평 대지를 구입하여 노틀담 수녀회에서는 오산 수녀원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각 가정을 방문하여 어머니들이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과 지역사회의 요구를 듣고 사도직의 방향을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가난한 농촌 주민들의 자녀, 직장을 가진 어머니와 인근 공장 직원들의 자녀들을 맡아 돌보며 아울러 주변 농촌지역에도 관심을 주어 수녀들이 직접 나가서 어린이들을 지도하기로 하였다. 1975년 3월에 유치원 건물을 준공한 후 정식 인가가 나기까지 약 2년 동안 '어린이집'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1976년 9월 1일 오산읍에서 떨어진 서리에서 '이동 어린이 집'을 개원하여 그 곳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봉사하게 되었다. 그 후 구역이 좀더 넓은 가장리로 옮겨 2년여 동안 어린이들의 정서 함양과 간접적인 신앙교육에 주력하였다. 1979년 3월 7일에는 '이동 어린이 집'운영을 신자 수도 많고 교육을 필요로 하는 어린이들이 더 많은 벌음리로 옮겨 1985년 2월 21일까지 봉사하다가 문교 정책에 의한 국민학교에 새로운 병설 유아원이 생긴 관계로 더 이상 수녀원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폐원하게 되었다. 이로써 오산읍의 '노틀담 유치원'과 '이동 어린이 집'의 이원적인 유아 교육 사도직은 일원화가 되었다.

1976. 10 결핵요양소 '시몬의 집' 개설 운영 (24쪽 가톨릭 사회복지회)

가톨릭사회복지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4쪽)

위기에 처해있는 이웃을 도움으로써 복지사회 구현에 기여하고 하느님 나라에 모든 사람이 동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1976년 5월 1일 발족한 서울대교구의 복지기관

첫째, 서울교구 내의 사회사업기관들 간에 서비스의 통합 조정의 기능을 맡아 효과적으로 돕는 일,

둘째, 사회복지 서비스의 기능이 미개발인 분야에 대해서는 직접 그 기능을 제공하고,

셋째, 새로운 프로그램의 개발사업을 추진하는 동시에 인력 개발을 추진확대해 가는 일

1976. 12. 9 신정동공소와 화곡동본당의 신월동공소를 통합하여 신정동 본당으로 승격신설 (나눔지 1996. 여름 38쪽)

신정동 본당 (나눔지 1996. 여름 38쪽)

논밭 사이사이의 구릉아래로 조선조시대의 전형적 농가 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이 지역은 1921년 이전에는 김포군 양동면 양천에 속하여 천주교의 전파로 점차 신자들이 모여살기 시작하다가 양화진 남쪽에 목동리 공소가 생기면서 점차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목동리 공소에는 신정리를 비롯해서 등촌리, 염창리, 화곡리, 신월리, 가양리, 방화리 등이 이에 속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은 1964년 10월부터 용산구 남산 기슭의 속칭 해방촌과 성북동 등 서울 시내의 철거민들이 신정 2동 안양천 제방 등에 집단 이주하여 판자집을 짓고 정착하면서 이지역 상주인구 판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외에도 외지로부터 많은 인구가 전입해 왔으므로 신자수도 증가하여 1972년 목동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였고, 다시 1976년 12월 9일 신정동공소와 화곡동 본당의 신월동공소를 통합하여 신정동본당으로 승격신설되었다.

초대주임신부는 성 골롬반 수도회의 진제랄드 신부가 부임하여 초기 800여 명의 신자로 시작하여 성당의 건축을 완료하였고 사목회, 연령회, 청년회 등 주요 평신도 단체들이 결성되어 대사회적인 활동과 함께 초본당적인 친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등 활발한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2대 오 안드레아 신부 재임기에 이르러 더욱 높아졌다.

이는 빈첸시오회의 구성과 적극적인 이웃돕기활동등으로 나타났다. 주요 사회봉사활동으로는 한강성심병원 의료진의 지원으로 관내 무료진료소가 실시되었고, 장학금 지급, 장애인 수용소 방문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84년에는 신월동본당을 분가하였고, 그후 400평의 대지에 5천여명의 신자에 이르도록 3대 조피트리시오 신부, 4대 신오복 안토니오 신부, 5대 차가롤로 신부에 이르도록 주임신부는 골롬반수도회의 외국선교사들에 의해 본당이 운영되어 왔다.

1988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서울대교구 소속 조학문 신부가 6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전개하였고, 계속해서 한국신부가 본당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7대 이재돈 신부, 제8대 김준철 신부에 이어, 현재는 김태선 주임신부가 제9대 본당사제로 부임하여 이형재 보좌신부와 순교복자수도회 수녀들과 함께 사목협의회(회장 : 고영동)를 중심으로 7천 5백여명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랑으로 봉사하는 본당 공동체의 운영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많은 활동 중 신정동본당은 93년부터 특별히 교구차원에서 벌이는 환경보전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사목회 안에 환경보전분과를 두어 한마음 한몸 운동본부 생활실천부에서 주관하는 환경학교를 열어 200여명을 배출하였으며, 환경문제를 연구 실천하기 위하여 하늘 땅 물 벗 모임을 만들어 연구부와 재활용부, 도농직거래부, 그리고 무공해비누 등을 만들거나 수집한 것을 실비로 판매하는 사업부 등으로 조직 운영을 하고 있다. 또 수익금은 본당 내 불우이웃돕기 단체인 빈첸시오회에서 사용함으로써 자연환경을 창조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고,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더불어 사는 공동체활동으로 본당 활성화에 커다란 기폭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더불어 사는 본당 공동체의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본당의 사회복지 활동은 많은 부분에 있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정동 본당의 주요 사회복지활동에 대해서 사회복지분과 신순철 위원장은 본당의 특성과 활동계획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사회복지단체의 후원사업으로 주로 무의탁 행려자를 위한 의료시설인 성가복지병원과 요셉의원을 돕는 외에 한빛종합사회복지관을 매월 정기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둘째는 불우이웃돕기를 위하여 부활과 추석시기에 어려운 이웃 30가정에게 생계비 지원을 하고 있으며, 또한 관내의 행려자와 신문배달학생, 우체부, 청소부 등에게도 사랑의 나눔을 하고 있다. 셋째로는 청소년 장학 사업으로 이웃의 신정5동, 등촌동, 한빛, 신월 등 지역사회복지관의 추천을 받아 법적으로 보호를 못받고 있는 결손가정이나 생활이 어려운 소년소녀가장의 학자금 지원으로 중학생과 고등학생 10여명에게 4회에 걸쳐 분기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넷째로는 모금활동으로 사순시기에 전 신자를 대상으로 저금통을 가정마다 나눠주어 성지주일 공동 헌금의 날에 함께 거두어 이웃돕기 성금으로 쓰여진다. 다섯째는 연중 사랑의 나눔바자 개최로 지난 89년 이후 해마다 서울대교구 사회복지회 산하 장애인복지기관들을 초대하여 신자와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장애인 단체를 소개하고 장애인이 직접 만든 물품들을 전시하며 또 판매를 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사랑의 나눔장터에는 장애인단체들의 자립의욕을 고취시키고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본당 차원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매해마다 계속해서 열고 있는데, 장애인에 대한 사회인식을 높이고 신자들과의 만남으로 지역사회 안에서의 열린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장애인 단체들의 판로 개척과 자립의욕을 높이는데 많은 공헌을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 행사는 연중 활동 중 신정동본당에서 가장 뜻깊게 준비하는 일중에 하나인데 본당 공동체의 날처럼 각 단체들이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함께 먹거리 장터도 운영하여 바자 분위기도 조성하고, 판매 이익금은 참가한 장애인단체들에게 20만원씩 전달하고 한마음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1976.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설립 (555쪽 사회사업)

사회사업 (영) Social servic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5쪽)

가톨릭 교회는 단순한 전례의 공동체나 신앙의 공동체일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빛(마태 5,13-16)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사회안의 어두운 곳을 찾아서 어두움을 없애고 광명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너무도 어두운 곳이 많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사람, 육체는 건강하나 정신이 병든사람, 정신은 건강하나 육체가 병든사람 등이 있다.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을 살펴주고 그들의 희망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버림받고 소외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현세적인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교회의 사업중에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문화사업, 사회사업등이 포함된다.

*구미근로여성복지관 - 1973년 경북 구미시 송정동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구미공단 근로여성들의 인격도야 및 생할향상을 위해 기능교육, 취미교육, 교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설립단체는 왜관 성 베네딕토 대 수도원이다.

*국제마리아의 사업회 -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고 1969년(여자), 1974년(남자)에 설립되었다.

주된 활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회원이 소득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퍼콜라레 운동을 하는 남녀 회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덕산 신생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으로서 1952년에 설립된후 요보호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하고 원생을 초·중·고등학교에 진학 시키고 졸업 후에는 기술을 습득시키고 있다.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 1976년 경남 마산시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정기프로그램으로 학습반과 취미반이 있고 특별 프로그램으로 젊은이 교실, 사임당교실, 성교육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 1979년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설립하였다. 불우이웃 청소년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의식개발, 교육, 협동, 우정, 자립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쎈뽈원 - 충남 논산군 논산읍에 있으며 1973년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이 되었다. 노인복지시설을 설치운영하며, 성인불구자의 복지사업을 하고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 1966년에 설립되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근로자의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기업인의 이해를 촉구시키고 노사간의 긴밀한 협조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곳이다.

*성심원 - 서울대교구가 불우아동 및 부상아동을 보호하기위해 1946년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설립하였다. 파티마 성모수녀원에서 담당운영하고 있다.

*성인복지원 - 1976년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설립, 부양가족이 없고 경제적으로 자활이 분리한 60세 이상의 여자노인을 수용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 본부는 서울 명동에 있으며 마음의 가난함을 생활화하는 단체로 1961년 설립되었다. 주된사업은 환자, 가난한자, 걸인을 돌보고 노쇠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며 불우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이다.

*소화영아재활원 - 1946년 소아보육원으로 출발하였다. 주된사업은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사업이며, 부산교구재단에서 운영하고있다.

*엠마우스집 - 1981년 설립된 것으로 성인지체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 - 1969년에 불우아동을 수용하여 직업보도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성 빈첸시오 청소년 복지회에서 설립하였다.

*춘광대구 요양원 - 극빈 폐결핵 환자 요양원으로 1966년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진영성모의원 별관 -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불우한 결핵환자를 고쳐주는 것이 주된목적이다.

*한국 SOS 어린이 마을 - 요보호 아동들을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하고 퇴소후에는 독립생계를 유지토록 자립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꽃동네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중 특기해야 할 것은 충북 무극에 있는 꽃동네로 청주교구 오웅진 신부가 혼자서 걸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면서 시작되었다. 꽃동네의 특징은 구걸할 수만 있으면 퇴거토록 하는 것으로 자생의 능력이 전혀 없는 노인만을 보호하는 곳이다.

*성모 자애원 - 예수성심 시녀회가 심신 장애아를 재활시키는 곳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 6.25 이후 기아가 날로 증가하여 버림받은 생명들을 입양, 양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릴리 어린이집 - 6-7세의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을 받아 교육하고 있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의 근로자의 집 - 근로자의 수용과 교육에 힘쓴다.

*성 프란치스코의 집 -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일을한다.

*마리아 자매원 - 문제청소년을 교도하고 상담과 숙소를 제공하여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국민학교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이수시킨다.

*성심 양로원 - 불우한 노인을 수용하여 물질적 정신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성가 양로원 - 무의탁 노인들을 구호한다.

*백백합 보육원 -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호, 육성한다. 설립단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다.

*해성 보육원 - 요보호 아동과 지체 부자유자아 및 정박아 수용 및 양육, 국내외 입앙을 하고있다.

이상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 중 그 일부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나 이 이외에도 수십개의 사회사업단체가 있으며 그들은 보이지 않게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사업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첫째, 교회는 특별히 정부나 일반 사회단체에서 망각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소외된 계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이 하기 어려운 사업을 찾아서 그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임무다.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회사업은 양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몇명을 도와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교회의 사회사업은 어떤 기관이나 단체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사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자기의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인의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회사업가이며 모든 신자가정은 사회사업단체인 것이다. 세째, 교회 당국이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재정적 뒷바침을 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성당도 지어야 하고 문화사업도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오늘의 현실 안에서 연장시키는 일이다. 특히 도시교구나 본당에서는 그 지역사회안에 어두움을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여 그들을 위한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정말 가톨릭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1976. 안양 성 라자로원에서 성모 영보 수녀회의 수녀들이 활동 (교회와 역사 70호 7쪽)

성모 영보 수녀회 (교회와 역사 70호 7쪽)

성모영보 수녀회는 한국인에 의해 한국에서 설립된 관상(觀想) 수녀회이며 반봉쇄(半封鎖) 수녀회이다. 이 수녀회의 정신은 실제로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 빈궁한 자를 돕고, 근면한 생활로 노동의 존귀함을 드러내자는 데에 있다. 예수께서 가난한 이와 병들어 신음하는 자와 더불어 생활하셨던 모습대로 그들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버림받은 사람을 위해 기도와 노동과 봉사로 정신적으로 부유해지고자 한다. 이 수녀회는 1985년 당시 가톨릭대학 교수이며 성서학자인 宣種完 라우렌시오 신부가 그 선친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 일부를 매각한 돈과 성서 번역을 위해 사육하였던 메추라기 수입을 보태 경기도 부천시에 12정보의 땅을 매입함으로써 태동되었다. 2년 후인 1960년 3월 25일 정식으로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이 수녀회의 특징은 국민학교 졸업정도의 학력이 낮은 처녀들에게도 입회를 허용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초창기에 처녀들로서는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노동과 가난 가운데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메마른 땅에 농사를 지어 수확한 감자로 주식을 삼으며, 메추라기와 젖소와 칠면조를 사육하고 미사용 포도주를 시도하는 한편 仁川에 나가 우유룰 판매하는 등 자립하고자 하였다. 흙벽돌로 지은 초라한 건물과 성당에서 생활하고 기도하면서 성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 생활을 이웃 주민들에게 증거하고자 하였다. 수녀들은 안양 성 라자로원에서 1976년부터 수녀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수용된 나병환자들을 돕고있다. 또한 파주군 광탄의 시몬의집 에서는 1980년부터 수녀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수용되어있는 폐결핵 환자들의 간호와 세탁, 식사 등 궂은 일을 비롯하여 구령사정도 돌보고 있다. 전북 함열본당 상지원에서는 60세대의 음성 나환자 간호 및 미감아 교리지도를 담당하고 있다.

1976. '피정의 집' 을 마련하여 주민들과 피정과 연수활동에 제공 (1259쪽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영) Order of the Blessed Korean Martyrs (1259쪽)

1953년 10월 30일 방유룡 신부에 의해서 창설된 방인 수도회. 당시 서울 제기동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방신부는 1964년 개성에서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를 창설한 이후 곧 남자 수도회를 창설하려 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하여 서울 제기동 본당에서 순교자적 정신의 실천으로 보다 더 완전한 신앙생활, 보다 더 완전한 구원에의 참여, 자아를 성화하여 이웃을 성화시키려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1955년 7월 현재 본원이 위치한 서울 성북동에 흙벽돌집을 만들어 입주하였고 그 당시 시유지였던 이 곳에 주변빈민아동들을 위한 공민학교 운영을 하기위해 가건물을 지어 서울시로부터 소유권을 불하받은 때인 1969년까지 학교운영을 해왔다.

1976. 마산에 국립결핵병원을 설립 (993쪽 작은자매전교회)

작은자매전교회 (영) Little Missionary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93쪽)

1951년 10월 이탈리아의 쿠네오(Cuneo) 에서 가스파리노(Gasparino) 신부가 창설한 수도회. 1963년에 한국진출.예수의 생활과 같이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는 형제, 자매들의 선교단체이다. 현재 한국에는 작은 자매전교 수녀회만 진출하였는데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회 신부의 추천으로 이탈리아 모원 소속인 4명의 수녀가 1965년 부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6. 국립결핵병원에 작은자매 전교회 활동 (작은자매 전교회의 사목시설)

국립결핵병원 (작은자매 전교회의 사목시설) - 1998. 4. 23일 작은자매전교회의 답신에 의거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결핵환자들에게 신앙과 기도의 은혜를 전달하기 위해 병고를 함께 나누며 긴급한 필요성들에 응답하며 봉사하기 위하여 마산시 합포구 가포동 486번지에 정루시아 자매와 김아녜스 자매가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병원안에 작은 프라테르니타를 형성하여 2자매가 살기 시작하고 가포 공소가 생겨났다. 마산교구의 협조자 하마리아씨가 10여년 그 곳에서 봉사하다가 수도회에 넘겨줄 의사를 표시하였고 작은자매 전교회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병원 내에는 불교와 기독교 단체도 존재하고 있음) 자매들의 이동이 있었지만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976. 마리아의 집 개원 (나눔지 26호 8쪽) - 1984. 9. 15발행

마리아의 집 (나눔지 26호 8쪽) - 1984. 9. 15발행

1976년 '한 영혼은 온 세상보다 귀중하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착한목자 수녀회는 윤락여성들 가운데 임신을 하게되는 경우에 그들과 새로운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마리아의 집'을 개원하게 되었다. 서강대 부근에서 얻은 작은 셋집에서 임신을 하게된 윤락여성들을 돌보면서 이들의 안전한 출산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육신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구원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육신을 당장 구원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사회에 나가 또다시 옛날의 비참한 길을 다시 밟지 않도록 새로운 영혼의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마리아의 집'은 서울에서 춘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10년전 윤락여성들이 많이 찾아왔던 것에 반해 지금은 가정의 잦은 불화로 가출하여 누구의 보살핌도 없는 여성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미혼모들이 마리아의 집에서 보호를 받고 정작 사회로 나가게 되면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 때문과 자신의 문제, 기술교육 기관 등 재활의 기틀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교육기관이 없기때문에 재활문제등이 생겨나지만 "나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느끼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한 미혼모의 고백에서 착한목자 수녀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빛 안에서 재생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1976.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개원 (928쪽 의정부본당)

의정부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28쪽)

1945년 8.15 광복 후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덕정리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김피득(베드로) 신부는 본당을 매각하고 의정부시 의정부동에 설립하였다. 1953년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계광(요한) 신부는 주한 미 1군단의 원조와 교구청의 지원으로 새 성당건물을 준공하고 이듬해에는 역시 미 1군단의 도움으로 유치원 건물을, 1957년 에는 본당부속 성모병원을 건축한다. 이계광 신부는 1967년 전임되기까지 16년간 재임하면서 성당건립과 전교사업은 물론 교육과 의료사업에도 크게 전력하여 본당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1973년 6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한 최서식(라우렌시오) 신부는 1976년 본당부속 성모병원을 가톨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등록시키는 동시에 새로 마련한 420평 대지 위에 현대식 병원을 그해 12월에 준공하였다.

1981년 부활절을 기하여 의정부4동 본당을 신설, 분리 독립시킴으로써 이 본당 명칭은 의정부2동 본당으로 바뀌었다. 이 본당의 주보는 성모성심이며, 경내에 성가수녀회 수녀원과 유치원이 있다.

1976. 복자여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분리 운영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복자여자 중·고등학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 1998. 4. 28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복자정신과 순교정신을 현양하고 전인교육에 의하여 미래의 민족운명을 좌우할 여성교육을 담당코저 1960년 3월 15일 충남 천안시에서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공동 창설자인 윤병현(안드레아) 수녀가 설립하였다.

복자여자 중학교는 1961년 3월 8일 설립인가가 났으며 1961년 4월 4일 중학교가 개교되었다. 1962년 3월 31일 김정진(바오로) 신부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63년 3월 2일 복자여자고등학교를 개교하게 되었으며 제2대 교장으로 백남익(디오니시오) 신부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71년 개교 10주년때는 사회전, 바자회, 주산 타자 경기를 하였으며 무용, 음악, 연극 등 예술제도 하였다. 1974년 제4대 교장으로 양위순(아가다)수녀가 취임하였으며 상고, 가정과를 모두 인문 고등학교로 변경인가 받고 학급도 증설하였고 1976년에는 중·고등학교를 분리, 운영체제에 들어갔다. 1986년 25주년때는 "복자의 밤"을 9월 25일 하오 6시 30분부터 화려한 막을 올렸다. 1400여명 복자의 딸들이 모인 교정에서 시낭송, 독창, 무용을 하였으며 체육대회, 취미전, 백일장을 하였다. 1991년 개교 30주년에는 학예 발표회, 각종 전시회가 있었으며 개교 30주년 및 한글날 기념 제9회 교내 백일장 대회가 있었다. 학교교육에서 종교교육에서 종교교사를 따로 두어 종교수업, 종교행사, 진로지도 상담을 해주고 있으며 종교 특별반 운영등의 업무를 배당하여 매년 다양하고 심도깊은 종교교육을 시키고 있다. 종교수업은 종교담당 수녀가 맡고 종교행사는 종교과 교사들이 주축을 이루어 일반교사들 협조를 받아 나날이 그 본래의 취지를 잘 살려나가고 있다.

1993년 충남 교육청으로부터 독서교육 시범학교로 지정되었다. 한글날을 전후하여 매년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글날 기념 백일장을 실시하여 우수한 작품을 뽑아 시상하고 있다. 도서관도 정비하여 현재 17500여권의 장서와 380석의 열람실과 냉난방 시설을 완비하고 사서교사와 사무직원을 전담 배치하여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반개가식으로 개관하고 일요일은 물론 방학중에도 항시 개관 함으로 열람석은 연중 무휴 초만원을 이루고 있으며 독서교육 우수교로 선정된바 있다.

복자여자 중·고등학교에서는 팽배해 가는 개인 집단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 주의의 시대에서 밝은 미래사회를 만들고자 학생들에게 3가지 중점적인 실천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첫째로 5개의 이웃 돕기회 (성모자애재활원을 돕는 복두례회, 결핵환자를 돕는 릴리회, 장애 어린이 교육을 돕는 엠마누엘회, 보육시설을 돕는 목련회, 장애자와 환자들을 위한 꽃동네회)를 조직하여 전체 교직원과 학생들이 적어도 1개이상의 회원이 되어 매원 자신들이 희망한 일정금액의 회비를 모아 이웃돕기를 실시하고 있다. 둘째로 일년중 적어도 한번, 각 학급별로 주말을 이용하여 학급활동의 일환으로 가까운 이웃에 있는 고아원, 양로원 등의 사회복지 시설을 담임교사와 함께 방문하여 학용품, 놀이기구 등을 전달하고 간단한 다과도 함께 니누며 대화, 놀이 등으로 이웃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현장교육을 실시하며 셋째로 3학년 학생들은 매년 고입, 대입 시험이 끝나고 학창시절을 정리할 무렵에 충북 음성군에 꽃동네를 직접 방문하여 청소세탁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복자 여자 중·고등학교는 전인교육이란 차원에서 학생 개개인의 취미와 특기를 고려하여 클럽활동 부서 35개반을 조직하고 운영하고 있다.

복자여자 중·고등학교에서는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근검절약 정신을 길러 저축을 증대시키고 자조자립 정신들 기르고자 1978년에 학생, 교직원이 공동출자하여 천안복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여 수신업무와 공동구매 업무를 실시하고 있다. 복자여자고등학교는 일반계여자 고등학교로써 근래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대학입시의 경쟁대열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학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학교교육의 본질을 이탈하면서 이 대열에 설 수는 없다. 학교교육을 제자리에 세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부모들의 진학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고 교사들 또한 걱정스러운 생각이 만만치 않았으나 육성회, 자모회를 통하여 자녀들에게 대한 과잉기대나 경쟁적인 입시 뒷바라지보다 걬의 지혜와 도리를 일깨워 선량아로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지도하여 먼저 자녀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쌓는 가족관계를 만들어 갈 것을 부탁하고 직원연수를 통하여 바른교육풍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심어주면서 치열한 보충수업 경쟁에서 벗어나 독서교육을 강화하고 자율학습을 정착시켜 특별활동이 활발하여 지고 이웃사랑이 생활화되어 가게 하면서도 대학 진학이 또한 향상되어 가고 있다. 현지 16명의 수녀가 교장 및 교사 사무직 등에서 일을 하고 있다.

1977. 1. 28 법인설립 허가변경 "사회복지법인 성모자애원" (예수성심시녀회의 복지시설)

성모자애원 (예수성심시녀회의 복지시설) - 1998. 5. 27일 예수성심시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가난한 이들안에 예수성심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라"는 창설자 신부님의 정신과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예수성심의 사랑을 나누어 그들이 삶의 기쁨과 구원에 희망을 가지고 사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우므로써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 하고자 한다.

1977. 4. 3 예천본당의 수녀들이 파견된 한일의원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1쪽)

예천본당 醴泉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1쪽)

경상북도의 북부지방에 있는 안동교구 소속인 예천분원에 처음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가 파견된 것은 1977년 2월 26일, 예천 한일신용협동조합 이사들의 초청으로 조합에서 운영하는 '한일의원'을 위해서였다. 김순림 가브리엘 수녀와 간호수녀들인 남순자 아가다 수녀, 김순연 오틸리아 수녀가 파견되었다.

그 해 4월 3일 한일의원이 개원되어 간호수녀들이 병원에서 근무하자 본당에서도 수녀를 청하여 9월9일 전교수녀로 서차선 유리안나 수녀가 부임하여 예천에서 의원과 본당에 봉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78년 한일의원이 운영난으로 폐원되어 간호수녀들이 철수하고 김순림 가브리엘 수녀와 서 유리안나 수녀만 남아 전교에 힘을 다했다. 예천본당의 현재 신자수는 2,200여명에 가깝고 매년 140여명씩 영세자를 내지만 농촌지역이라 중학교 졸업만 하면 도시로 진출하여 젊은층이 줄어감으로 인해 교세 확장이 부진한 편이다. 그 반면 반모임이 활발하여 본당 전체가 활기를 띠고 교사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주일학교가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지금은 2명의 수녀가 활발히 움직이는 모든 단체에 더욱 활력을 불어 넣어주며, 젊은층의 많은 전출로 인해 발생한 본당 운영의 어려움을 극복하기로 노력하고 있다.

1977. 6 포항성모병원 건립 (1213쪽 포항예수성심시녀회)

포항예수성심시녀회 浦項∼聖心侍女會 (영) Handmaid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13쪽)

1935년 12월 경상북도 영천군 용평리에서 루이 데랑드 신부의 지도아래 6명의 처녀들이 삼덕당(三德堂)이란 이름으로 창설한 수녀회. 복음삼덕(福音三德)을 수련하는 곳이라는 뜻. 삼덕당에서 시작된 창설 당시의 회원들은 본당사목을 도우며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36년 2월에는 '성모자애원'(聖母慈愛院)을 설립하여 고아들과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1940년 5월에는 들랑드 신부가 경상북도 영천본당으로 부임됨에 따라 수녀원과 사업체의 일부가 이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4년 7월 부터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활동은 고사하고 심문과 고문으로 고생하다가 8.15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 후 회원수의 증가로 부득이 경상북도 영일군 대송면으로 1950년 3월 이전하였지만 곧 6.25전쟁의 어려움을 겪었다. 1952년 9월 8일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수녀회의 인가를 받고 수도회명도 '포항예수성심시녀회'로 개칭하였다. 그 뒤 1954년 12월 첫 서원식이 거행되었고, 1957년 12월에는 나환자들을 위한 '다미안피부병진료소'를 개설하여 정기적인 치료, 투약, 이동진료 등을 실시하는 한편, 경상북도 영일군 의창면에 정착촌도 마련해 주었다. 1965년 3월에는 서정길 대구교구장과 함께 첫 총회를 개최하여 김장주 수녀가 초대 총원장에 취임하였다. 1968년 10월에는 포항종합제철 부지 선정으로 인하여 현 소재지인 영일군 영일읍 대잠동으로 본부를 이전하게 되었고, 수련소는 대구시 남구 대명동에 자리잡게 되었다. 1977년 6월에는 포항에 있는 본원에 포항성모병원을 건립하여 보다 효율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현재 탁정자 총원장과 수녀를 비롯한 335명의 회원들이 1983년 12월 말 현재 포항의 본원과 성모자애원, 성모병원 그리고 대구교구를 비롯한 전국 10개 교구 70여개 본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1977. 6. 6 안나의 집 준공식 및 축성식 (성가소비녀회의 복지시설)

안나의 집 (성가소비녀회의 복지시설) - 1998. 5. 29일 안나의 집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서울시 성북구 길음 1동에 자리잡고 있는 안나의 집은 1977년 불우 할머니 15분의 입소로 시작되었다.

성가소비녀회를 창설한 성베드로 신부의 취지에 따라 일반시설에서 입소조차 제외된 무의무탁하여 불구인 할머니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양로시설로 국가보조 없이 수녀원 재단에서 자체부담하여 수녀들이 직접봉사하고 있다. 1998년 현재 정원은 32명이며, 입소대상은 65세 이상의 할머니로 생활보호 대상자, 불구이거나 노환의 할머니, 법정 전염성이 없고 정신질환이 없는 할머니이다.

1977. 10. 29 '성분도 봉사자의 집' 개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6쪽)

성 분도 봉사자의 집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6쪽)

부산 성분도병원에서는 1975년 1월부터 '구호과'를 '사회봉사과'로 바꾸고 염일례 그라치아 수녀를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무료진료환자 중에 많은 이가 황령산 기슭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생활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를 답사하였다. 전포동 황령산 기슭에는 부산시에서 거두어 온 쓰레기가 쌓여있고, 양주변에 거지, 넝마주이, 노무자, 전과자, 결핵환자, 정신병자, 알콜중독자, 나환자들이 사회에서 소외된 채 천막이나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들은 식수마저 해결하기 어려운 인간 이하의 상황에 있었고, 버려지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은 우선 그들을 방문하여 인간적인 만남을 시작하였으며, 서서히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여 벗이 되어갔다. 마침내 공동묘지 주변에 10평의 천막을 치고 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돌보았다. 염일례 그라치아 수녀와 김옥순 비아 수녀가 수련원 청원자들과 함께 수녀원에서 출퇴근하였다. 좀 후에는 7세 미만의 어린이들을 오전에 돌보고 오후에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목요일 오후에는 성분도병원의 무료 이동진료반의 봉사로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이 어린이집은 1년 6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수녀들과 청원자들은 버려진 어린이와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공동묘지 사잇길을 오르내리면서 어린이 교육과 급식, 환자방문, 빨래, 집안정리, 치료 등의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 봉사활동은 1977년, 황령산 공동묘지지역 재개발 계획에 따라 공동묘지와 무허가 판자촌이 철거당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수녀들은 철거민과 함께 문현동 산동네로 자리를 옮겨 개천가에 25평짜리 판잣집을 매입하고 1977년 10월 29일 염 그라치아 수녀와 여숙련 헬레나 수녀가 주축이 된 '성분도 봉사자의 집'을 열었다.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 속에 가난한 자로 살면서 그들에게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와 기쁨과 평화를 되찾아 주는 편한 이웃이 되었다. 수녀들은 수련원 청원자들과 실습기 수련 수녀들의 협조로 버려진 임종자들을 돌보고, 탁아소를 운영하며 이웃들의 시급한 일손이 되어줌으로써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또한 그들의 일터를 함께 찾고 복지시설과 공공기관에 드나들면서 사회의 보호 손길을 트는 일도 수녀들의 몫이었다. 이와 함께 성 분도병원의 무료 이동진료와 예비자교리, 미사 등 정기적인 모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점차 이 지역에 고층아파트와 큰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자 봉사의 영역과 성격을 조금씩 바꾸어 탁아소 및 주민봉사와 아울어 상담과 기도를 주로 하게 되었다. 부산은 물론 멀리에서도 매일 10-30여 명의 방문자들이 찾아와 상담을 하였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머물며 성체를 모신 경당에서 성체조배, 성서묵상 등 개인기도를 하며 쉴 수 있었고 기도모임을 통해 서서히 용서와 화해, 치유를 체험하였다.

1982년 8월, 장마와 폭우로 개천이 넘쳐 판잣집이 무너녔지만 그 자리에 같은 규모의 집을 새로 짓고 11월 4일에 축복하였다. 이 집은 장기 휴양자와 임종자들,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머무는 쉼터가 되고, 탁아소와 학생들의 독서실, 기도의 집이 되며, 봉사자들에게는 선업과 나눔의 자리가 되고 있다.

1977. 오산유치원 개원 (254쪽 노트르담 수녀회)

노트르담수녀회 (영) Congregation of the Sisters of Notre-Da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54쪽)

1848년 아델콘드윌브링(Adelgonde Wolbring)과 리제테 퀼링(Lisette Kuhling)이 독일에서 창설한 수녀회. 1967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여성교육사업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형제사랑으로 돌보면서 더욱 건설적인 세계를 이룩하고자한다.

1977. 연성원 설립 (나눔지 23호 9쪽) - 1984. 3. 15발행

연성원 (나눔지 23호 9쪽) - 1984. 3. 15발행

경기도 광주군 광지원리. 남한산성의 동쪽 기슭 아래에 동녘의 햇살을 가장 먼저받는 사랑의 집인 연성원은 1977년 김몽은 신부 및 법조계의 라향윤씨와 고형원씨 등이 설립하였다. 소년보호 위탁처분 대상자로서 보호자 없는 불우 청소년을 위탁받아 이들이 사회악으로 부터 물들지 않고 학과공부와 기술연마 및 가톨릭을 통한 사랑과 은총, 평화와 희망을 배움으로써 사회의 올바른 인간으로 연성하는 곳이다.

1977. 노인학교 개설 (1093쪽 중앙본당)

중앙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093쪽)

전주교구의 주보자 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1993년 12월 당시 교구장인 김양홍(스테파노) 신부가 여러 교우들의 청원에 의하여 전주 전동본당에 있는 한옥 사무실을 철거하고 그곳에 '비성거리'라는 공소를 신축하고 이후 1947년 까지는 공소시기로 있다가 그 해 비성거리 성당을 설립하여 초대 주임신부로 김재덕 신부가 부임하였다. 김신부는 장래 순교자기념본당을 세우려는 포부와 함께 전주시내에 전동본당 하나로써는 너무복잡하고 또한 비성거리의 성당이 너무 협소함으로 전주시 대동에 일산가옥 2층을 임차하여 '대동성당'을 개설하였다.

1952년 2월 1일 임대 사용 중이던 대지및 건물을 매입하여 구내에 성모당과 성모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인 중앙본당은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 639의 40에 소재한다.

1977. 성모조산소 새로운 건물로 이전 (성체회의 복지시설)

성모 조산소 (성체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평택본당 안 세시리아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1970년대 초 경기도 광주 대단지로 불리던 지금의 성남시에서 폭동이 일어났었다. 서울시의 인구분산 계획의 일환으로 남한산성 밑자락을 불도저로 밀어내고 비탈진 지형위에 서울의 청계천 위에 밀집되어 살던 판자촌 주민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땅 20평과 천막 1개를 주어 이곳으로 이주시켜 놓은 것이다.

이곳으로 옮겨온 노동자들의 하루 생계터전은 청계천 주변의 노상이었다. 성모 조산소의 목적은 모자보건 사업을 위해서 였지만 그곳의 실정에 맞게 하다보니 피치못하고 의료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수진동 성당을 무대로 신자중심의 가족계획 상담실을 운영하면서 임산부들의 전인교육을 위해 힘썼고 그에따른 문제점들을 발견하다가 보니 전적인 의료봉사를 하게 된 것이다. 어떤 임산부는 낙태경험이 11-13번까지 있었다. 그 임산부는 입이 돌아가고 눈은 초점이 흐려지고 낙태의 후유증으로 건강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으며 영양실조에까지 겹쳐 고생하고 있었다. (당시는 지금 같은 시술이 발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만 하여도 성남에는 전문의가 거의 없었다. 일명 무자격 의원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일반조산소에도 낙태시술을 위법으로 하고 있었다. 성체회 수녀들은 그곳의 조산원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밤중에 왕진이 들어와 찾아가 보니 언덕을 넘어 비탈길 중턱에 움막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촛불 하나로 부엌과 방한칸을 비추어주고 있는데 방으로 들어가 보니 너무 비좁아서 산모는 대각선으로 누워있고 비지땀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하였다. 이상은 없는것 같은데 초산에다 가난하여 영양이 없고 두려워 겁을 많이 먹은것 같았다. 포도당 주사를 넣어주고 순산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부엌도 구차하게 이를데 없었다. 그 뒤 가톨릭 구제위원회에 의뢰하여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를 얻어다가 가가호호 방문하여 나누어주곤 하였다.

또한 무료진료를 주1회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광주대단지가 성남市로 승격된 이후 안정이 되면서 조산소 사업을 마치고 잠시 유아원으로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1989년 부터는 현재의 인보의 집 할머니들을 위한 무료양로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1977. 신체장애 양로원인 '안나의 집' 운영 (608쪽 성가수녀회)

성가수녀회 (영) Holy Family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08쪽)

1943년 12월 생제(Singer) 신부에 의해 창설된 방인 수도회. 일제 말기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불우한 이들을 돕기 위한 '성가 소비녀'의 공동체가 시작되자 1943년 이재현 신부, 공베르(A. Gombert) 신부와 함께 생제(Singer) 신부가 회칙을 작성하여 노기남 주교의 인준을 받고 창립인가도 받았다. 1945년 6월 수련생활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로부터 지도를 받았고, 1947년 1월에 첫 허원식을 라리보 주교에 의해 거행할 수 있었다. 1953년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양로원'을 인수받아 1979년 증축한 후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하고 있다. 1958년 8월에는 서울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한 뒤 1969년 현재의 서울 하월곡동으로 이전하고 가톨릭의대 부속병원인 종합병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한편 1962년에는 소사에 있는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착수하였다. 이밖에 편물과 보세가공을 가르치는 '나자렛 기술학원'(1960-1969)과 '미망인 양재소'(1964-1980)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968년 8월에는 서울 혜화동에 있던 본원을 현재의 서울 정릉1동으로 이전하여 1969년 1월 창립 25주년과 함께 신축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74년 성가회 명칭을 '성가수녀회'로 개칭하면서 1976년에는 새 회헌과 규칙의 인준도 받았다. 1985년 현재 3개의 병원과 1개의 학교를 비롯하여 1977년 개원한 신체장애양로원인 '안나의 집'등의 특수사목활동분야에서 활동할 뿐만 아니라 본당 사목활동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977. 황령산 어린이집에서의 어린이교육과 급식, 환자방문, 빨래, 집안정리, 치료 등의 봉사는 판자촌의 철거로 폐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6쪽)

성 분도 봉사자의 집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6쪽)

부산 성분도병원에서는 1975년 1월부터 '구호과'를 '사회봉사과'로 바꾸고 염일례 그라치아 수녀를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무료진료환자 중에 많은 이가 황령산 기슭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생활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를 답사하였다. 전포동 황령산 기슭에는 부산시에서 거두어 온 쓰레기가 쌓여있고, 양주변에 거지, 넝마주이, 노무자, 전과자, 결핵환자, 정신병자, 알콜중독자, 나환자들이 사회에서 소외된 채 천막이나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들은 식수마저 해결하기 어려운 인간 이하의 상황에 있었고, 버려지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은 우선 그들을 방문하여 인간적인 만남을 시작하였으며, 서서히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여 벗이 되어갔다. 마침내 공동묘지 주변에 10평의 천막을 치고 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돌보았다. 염일례 그라치아 수녀와 김옥순 비아 수녀가 수련원 청원자들과 함께 수녀원에서 출퇴근하였다. 좀 후에는 7세 미만의 어린이들을 오전에 돌보고 오후에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목요일 오후에는 성분도병원의 무료 이동진료반의 봉사로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이 어린이집은 1년 6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수녀들과 청원자들은 버려진 어린이와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공동묘지 사잇길을 오르내리면서 어린이 교육과 급식, 환자방문, 빨래, 집안정리, 치료 등의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 봉사활동은 1977년, 황령산 공동묘지지역 재개발 계획에 따라 공동묘지와 무허가 판자촌이 철거당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수녀들은 철거민과 함께 문현동 산동네로 자리를 옮겨 개천가에 25평짜리 판잣집을 매입하고 1977년 10월 29일 염 그라치아 수녀와 여숙련 헬레나 수녀가 주축이 된 '성분도 봉사자의 집'을 열었다.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 속에 가난한 자로 살면서 그들에게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와 기쁨과 평화를 되찾아 주는 편한 이웃이 되었다. 수녀들은 수련원 청원자들과 실습기 수련 수녀들의 협조로 버려진 임종자들을 돌보고, 탁아소를 운영하며 이웃들의 시급한 일손이 되어줌으로써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또한 그들의 일터를 함께 찾고 복지시설과 공공기관에 드나들면서 사회의 보호 손길을 트는 일도 수녀들의 몫이었다. 이와 함께 성 분도병원의 무료 이동진료와 예비자교리, 미사 등 정기적인 모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점차 이 지역에 고층아파트와 큰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자 봉사의 영역과 성격을 조금씩 바꾸어 탁아소 및 주민봉사와 아울어 상담과 기도를 주로 하게 되었다. 부산은 물론 멀리에서도 매일 10-30여 명의 방문자들이 찾아와 상담을 하였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머물며 성체를 모신 경당에서 성체조배, 성서묵상 등 개인기도를 하며 쉴 수 있었고 기도모임을 통해 서서히 용서와 화해, 치유를 체험하였다.

1982년 8월, 장마와 폭우로 개천이 넘쳐 판잣집이 무너녔지만 그 자리에 같은 규모의 집을 새로 짓고 11월 4일에 축복하였다. 이 집은 장기 휴양자와 임종자들,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머무는 쉼터가 되고, 탁아소와 학생들의 독서실, 기도의 집이 되며, 봉사자들에게는 선업과 나눔의 자리가 되고 있다.

1977. 상지회관 사회복지부 개설 (나눔지 1996. 여름 57쪽)

상지회관 사회복지부 (나눔지 1996. 여름 57쪽)

상지회관 사회복지부는 1976년 상지회관 피정의 집이 건축되면서 저소득가정의 주부들에게 노동의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써 생계를 돕고 주부들의 바쁜 일손을 도와준다는 설립 목적으로 가지고 성북구 지역복지를 위해 1977년에 설립되었으며, 서울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주된 사업내용은 파출부의 교육(한달에 한 번) 및 직업보도와 파출부의 주택문제 해결, 파출부 자녀들의 학비조달(장학금) 등이다.

1978. 5. 31 성 분도 치과의원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9쪽)

성 분도 치과의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9쪽)

1965년 수녀원 새 건물이 부산 광안동에 준공된 후에도 부산 초량동에 있는 성 분도 병원에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그대로 남게 되어 광안동 새 건물에는 공간의 여유가 있었다. 또 수녀원 주위에 점차 주택들이 들어서자 이웃을 위한 봉사를 모색하게 되었고, 초량 성 분도병원을 모체로하여 광안동에서도 의료봉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1969년 8월 22일, 작은 규모로 내과, 소아과, 치과를 개설하여 의원을 열었는데 이것이 바로 성 분도 치과의원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1966년 2월부터 현 변전소 자리에 임시 치과진료소를 차려 남복순 골룸바 수녀가 봉사를 시작하여 치과 전문의 2-3명과 수련원 자매들의 봉사로 인근 주민들의 구강보건에 기여해오고 있었다. 당시 성당 아래층과 수녀원 한 모퉁이를 이용하여 병원 개설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 졌다. 그러나 개설 2년반만에 내과, 소아과를 폐쇄하고, 치과만을 유지하면서 '성 분도 치과의원' 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1978년 5월 31일, 부산직할시장으로부터 의료기관 개선신고필증을 받았다. 이 의원은 시작 때부터 10여 년 간, 남 골롬바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로 기틀을 닦았다. 인근 이웃에 대한 의료봉사는 물론 수도가족과 성직자, 다른 수도회 수도자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81년 12월 8일, 현재 건물로 이전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78. 8 '교도사목후원회'로 개칭 (118쪽 교도사목회)

교도사목회 (영) Prison Apostolat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18쪽)

교도소 수감자들의 복음화와 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위하여 1970년 4월 2일 발족한 평신도단체. 당시 김홍섭 판사와 고중렬 교도관, 박귀훈 신부외 몇 명이 중심이 되어 '교도소 후원회'를 발족함. 1974년에는 각 교도소용 명상자료와 성가녹음테이프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1978. 9. 1 '성체 어린이집'으로 명칭 변경 (성체회의 복지시설)

성체 어린이집 (성체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성체 어린이집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1970년경 서울 청계천에 철거민들이 성남으로 피난와서 살게 되었다. 그때에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생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어른들은 맞벌이 부부로 일터로 나가거나 또는 부모가 질병으로 앓고 있는 가정의 어린이들을 인보성체 수도회의 수녀님들이 돌보기 시작하면서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처음에 천막을 치고 어린이 260명에게 점심과 간식을 만들어 먹였다. 정부에서 쌀,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를 보내주어서 매일 밥, 빵, 수제비, 과자를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목욕시키고 손톱을 깍아주고, 머리를 잘라주는 신변보호, 지도 뿐이 아니라 교육을 더불어 하면서 하루종일 어린이와 같이 지내게되자 일손이 필요해서 일반교사를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에 150평의 건물을 증축하여 식당과 교실 3개, 부엌을 건축하였다. 이곳에서 자란 어린이는 학교에 가고 해마다 새로운 어린이는 어린이집에 들어오고 있다.

새싹어린이집은 인보성체수도회 전 회원들의 노력의 성과인 창립인가 10주년 기념 바자회의 수익금과 모금액의 일부로 10월 28일 원사 기공식을 갖고 12월 12일 520명의 어린이와 귀빈학부형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였다. 설립당시는 '새싹어린이집'이라고 명칭하였고 1998년 현재는 성체 유치원이라고 칭한다.

근로 또는 질병으로 인하여 아동을 보호할 능력이 결여된 보호자의 아동을 입소하여 시설생활을 통하여 집단생활을 경험하게 하고 부모를 대신하여 아동을 양육함으로서 아동의 복지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며 유용한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함을 목적으로 한다. 어린이 생활지침은 다음과 같다.

⸁ 어린이들에게 생활을 통하여 집단생활을 경험하게 하여 보살펴주고 개별적인 필요를 만족 시켜줄 수 있도 록 협력해 준다.

⸂ 정서적 안정감을 조성케하여 심신이 조화있게 발달되도록 도모한다.

⸃ 세심한 주의가 미친 환경속에서 어린이의 건강, 안정등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습관과 태도를 올바로 길러준다.

⸄ 적극적인 활동을 촉구하여 자주 및 협조정신을 배양한다.

⸅ 생활면을 통한 여러가지 현상에 대하여 흥미와 관심을 갖도록 한다.

⸆ 사회 생활에서 필요한 언어 동작을 정확히 익히도록 한다.

⸇ 각 개인의 특성을 중요시하여 창의력 개발에 힘쓴다.

⸈ 실생활을 통해 사고 능력의 기초를 닦는데 조력한다.

성남 성체 유치원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창립자 윤을수 신부의 말씀을 따르고 있다. "남을 대할 때 행동이나 태도가 언제나 유쾌하고 온화하고 그리고 평화스럽고 재미있게 상종하라.", 그리고 사목활동 할 때 "음식에 굶주리고 병고에 신음하고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쓸 수 있는 재주, 기능, 시간 등을 이용해서 정신적 위안을 주고 물질적 후원을" 당부하였고 그 말씀을 생활속에 잠재하고 있다.

1978. 10 사랑의 고리회 발족 (나눔지 25호 6쪽) - 1984. 7. 15발행

사랑의 고리회 (나눔지 25호 6쪽) - 1984. 7. 15발행

처음에는 1달에 1번정도 모임을 갖다가 1978년 10월에 공동체로 탄생된 사랑의 고리회는 사랑의 선교회 총장인 앤드류 신부님의 도움으로 설립되었다. 이곳에는 22세에서 35세까지의 활동이 가능한 신체장애자 여성으로 기도를 통해 장애자들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장애자들을 방문하거나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맞아서 어려운 고통도 함께 나누며 이곳에 올 수 없는 경우에는 편지를 써주기도 한다. 하느님께 모든것을 맡기며 하느님의 계획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1978. 10. 20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으로 명휘원 신축 이전

명휘원 - 1998. 6월 시립 명휘 어린이집 이 안토니나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은 故의민 황태자 영왕의 환국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어려운 이웃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르며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직업재활 교육원인 명휘원, 장애인 근로시설인 해동일터, 지체장애인 특수교육기관인 명혜학교, 명휘 어린이집, 명휘 체육센터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장애인이 가진 잠재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기 위하여 각 개인에게 알맞는 재활 교육과 인성교육을 단계적으로 실시하여 직업능력을 갖춘 기능인을 양성하는 동시에 건전한 인격을 갖춘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양재과, 편물과, 공예과, 보호자립장이 있다.

해동일터 (장애인 근로시설)

사회적 여건상(도로, 건축, 교통) 취업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후원자 김해동님의 도움으로 1996년 12월 해동일터를 건축하여 장애인 종합 복지 대책의 일환으로 자립 및 생산활동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미 직업교육을 받았으나 신체적 조건으로 인하여 일반 직장에 취업이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하여 기능의 습득과 다양한 직업을 주어 재활 및 자립 기반을 구축한다. 양재자립, 편물자립, 단순작업이 있다.

명휘 공동가정 '희망' (Group Home)

명휘원에서는 지역 사회 내에 위치한 아파트를 구입하여 그룹홈 '희망'을 운영하고 있다. 담당 사회복지사를 파견하여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사회재활 서비스를 제공하여 사회 통합과 정상화 및 사회 자립을 이룰 수 있도록 교육시킨다. 1996년 7월에 6명이 입주하여 공동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지역사회 내에서의 재활교육과 다양한 서비스를 지원하고, 독립생활, 여가생활, 가족과 지역 주민과의 유대 강화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그리고 사회적응 훈련과 직업생활 교육, 사회재활 교육 등을 지원하고 있다.

명혜학교 (지체장애인 특수 중·고교)

故의민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께서 1982년 명혜학교를 개교하였다. 1988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 명혜학교를 인수하고 1990년 고등부를 개교하였으며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자활인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명혜학교에서는 정상적인 학습이 가능한 학생에게 인문계 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적용하고 학습지체 학생에게는 지체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적용한다. 이 밖에 장애특성에 따른 재활훈련을 실시하고 개인의 적성에 알맞는 특별활동과 직업교육을 시킨다.

명휘어린이집

전국 경제인 연합회에서 창립 30주년을 맞아 사회복지사업의 일환으로 6억원을 안산시에 지원하였고 안산시 가정복지과에서는 219평 대지 위에 300평의 건물(지하 1층, 지상 3층)로 1992년 11월에 완공하였다. 1993년 3월 1일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에서 안산시로 부터 위탁운영을 하게 되었다. 명휘 어린이집은 현대사회의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여성의 사회 참여 증가 및 가족 구조의 핵가족화로 급증하고 있는 보육 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전문적인 보육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영·유아의 건전한 육성과 보호자의 경제적·사회적 활동의 지원을 통한 가정복지 증진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 되었다. 생활보호 대상자와 편모편부 슬하에 있는 어린이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영·유아실, 소꼽방, 몬테소리 특별실, 실내·외 놀이터, 양호실, 식당, 교재 자료실을 갖추고 어린이들의 연령별로 12학급을 편성하여 교사 13명이 유아반 120명, 영아반 43명의 어린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있다. 명휘어린이집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발견하는 신앙 교육을 통하여 기쁘게 생활하는 어린이, 마음이 따뜻한 어린이, 행동이 올바른 어린이, 건강한 어린이로 성장하도록 인성 교육에 힘쓰고 있다.

명휘 종로 복지관

명휘종로복지관은 구 재단법인 보린회를 명휘원으로 개칭하여 설립한 터에 1967에서 1978년까지 장애인 재활시설로 운영해 오다가 1978년 명휘원이 광명시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YMCA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1990년 명휘종로 복지관은 이사회를 통하여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기로 결정하여 서울시 종로구청의 공적부조와 약간의 후원금으로 걸식노인을 대상으로 무료급식소를 열었다. 1992년 2월 부터는 지역사회의 맞벌이 부부의 육아를 위하여 종로구청에 인가를 받아 성모 어린이집을 개원하였다.

노인복지-탑골공원을 이용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루 평균 150여명, 월 평균 3,750여명에게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

명휘 체육센터

스포츠 활동을 통한 장애인의 정신적, 신체적 재활과 장애인에 대한 지역 주민의 이해 증진, 명랑하고 활기찬 생활을 강조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78. 12 섭리의 집 설립

섭리의 집 - 1998. 5. 21일 섭리의 집 윤석만님의 답신에 의거

섭리의 집은 자손이 없고 가진것도 없으며 또한 의지할곳도 없는 불우한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나실때까지 쉬는 곳으로 1978년 12월에 서울시 금천구 시흥5동에 현재 수원교구 소속사제인 파 레몬드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곳은 보통 가정집을 매입하여 25명 정도의 진학하지 못한 미감아들을 모집하여 기술교육을 시켜 취직을 알선하여 주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하지 못하는 미감아들을 모집하여 본인이 원하는 기술교육을 하였으나 2년도 못되어 희망자가 없으므로 기술교육은 포기하고 외로운 할머니들을 받들어 세상을 떠나실때까디 모시고 생활하고 있다.

1978. 12. 2. 보령 종합병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43쪽)

보령종합병원 保寧綜合病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43쪽)

아산재단에서는 우리나라 의료 취약지구 중 5곳에 병원을 세워 지역사회의 의료발전과 사회사업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계획하에 보령에 종합병원을 세웠다. 아산재단의 이사장 정주영은 환자진료에 헌신할 수 있는 수녀들을 요청, 이에 1978년 12월 2일 최광필 클레멘스 수녀를 분원장으로 하여 간호수녀인 최옥화 세레나 수녀와 민명희 필로메나 수녀, 그리고 영양사로 김순희 로자리아 수녀, X-Ray 기사로 윤형숙 마리아 수녀가 파견되었다. 일반기관에서 일하는 만큼 수도생활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간혹 있기는 하나 수녀들의 모든 언행이 곧 전교와도 연관된다는 생각으로 주어진 전문분야의 일 이외에도 환자나 어려운 이들을 방문하고 환자들 대세나 직원들의 상담역으로 이들의 영신사정을 돌보아 주는 일에 보람을 찾고 있다. 같은 보령군에서 본당 사도직에 임하고 있는 대천분원과는 서로 협력하고 격려해 가면서 필요한 때에는 본당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한다. 현재 7명의 수녀들은 간호과 및 방사선과, 영양사, 물품구매관리, 원목실 등에서 일하면서 지역사회 주민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78. 12. 2 인제병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4쪽)

인제병원 麟蹄病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4쪽)

강원도의 벽지 주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기 위해 인제병원을 설립한 아산재단은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를 더욱 헌신적으로 할 수 있는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78년 12월 2일에 서정향 쟌 젬마 수녀, 노연신 안당 수녀, 김영신 데오필 수녀 그리고 홍혜경 마리엣다 수녀가 파견되었다. 그후 간호, 보급과, 검사실, 약국, 원목 등 여러 부서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또 틈나는 대로 인제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는 등 10년 가까이 봉사해 오다가 급격한 환자의 감소로 인한 재단측의 재정적 곤란 및 수녀 인력의 불필요함 등을 감안한 결과 아산재단과 합의하여 1987년 1월 31일자로 인재병원에서 철수하였다.

1978. 칠곡 가톨릭 피부과 병원에서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사도직 전개 (교회와 역사 235호 22쪽) - 1994. 12. 25발행

칠곡 가톨릭 피부과 병원 (교회와 역사 235호 22쪽) - 1994. 12. 25발행

칠곡 가톨릭 피부과 병원의 사도직은 1978년 엠마 프라이징거 여사의 초청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의료 기술과 인력을 가진 여로 수도회에 부탁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한 엠마 프라이징거 여사의 부탁을 들은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회원수가 부족하였지만 오직 도와주고 함께 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회원 파견을 시작하였다. 그 후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많은 나환자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의 나눔으로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점차 나환자의 수가 감소 추세에 있고 또 병원도 안정기에 접어들어 봉사가 예전처럼 절박하지도 않아서 보다 필요한 곳에의 투신을 위해 1994년 7월에 분원을 철수하였다.

1978. 예수 그리스도의 집 남자 기숙사 개설 (나눔지 108호 3쪽) - 1979. 7. 15발행

예수 그리스도의 집 (나눔지 108호 3쪽) - 1986. 7. 26발행

다미안 사회복지회를 새로지어 만든 생활공동체 [착한 사마리아인 모임]은 30여년을 한국 땅에서 나환자, 불우 청소년, 사회에서 소외당한 이들을 돕고 있는 벨기에인 파 레몬드 신부의 사랑과 나눔의 결실로 맺어졌다.

노동관계사목으로 35세에 한국에 온 파 신부는 소록도 인근 전남 고흥의 녹동성당에 부임한다. 소록도는 나환자들이 살고있는 특수지역으로 당시에는 나환자의 자녀들인 미감아는 부모와는 떨어져서 살아야만 되어 자녀들은 자연히 소록도의 인근지방에서 많이 살고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국민학교를 졸업하거나 중퇴하는것이 보통이었고, 식모나 식당등에 취업하여 일을 하지만 부모가 나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붸겨나는 일이 예사여서 그들의 생활이란 매우 가슴아픈 일들이 많았다. 파 신부는 그런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키기로 결심하고 시골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서울이나 부산같은 대도시에서 하숙을 시키며 기술교육을 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던중 75년에는 아주 서울로 올라와 응암동에 아이들이 함께 살도록 하였다. 다시 78년도에는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지원으로 신림동에 남자청소년을 위한 생활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떠오르는 별, 그리고 미래의 주인인 청소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며 때때로 실수하며 부모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를 당하거나 부모로 부터 버림을 받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권리 또한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집은 정녕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으로 그늘 밑 들풀을 어루만져 비춰주는 한줄기 빛처럼 살며시 오늘을 비추어 주고있다.

1978. 양로원 설치운영 (1093쪽 중앙본당)

중앙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093쪽)

전주교구의 주보자 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1993년 12월 당시 교구장인 김양홍(스테파노) 신부가 여러 교우들의 청원에 의하여 전주 전동본당에 있는 한옥 사무실을 철거하고 그곳에 '비성거리'라는 공소를 신축하고 이후 1947년 까지는 공소시기로 있다가 그 해 비성거리 성당을 설립하여 초대 주임신부로 김재덕 신부가 부임하였다. 김신부는 장래 순교자기념본당을 세우려는 포부와 함께 전주시내에 전동본당 하나로써는 너무복잡하고 또한 비성거리의 성당이 너무 협소함으로 전주시 대동에 일산가옥 2층을 임차하여 '대동성당'을 개설하였다.

1952년 2월 1일 임대 사용 중이던 대지및 건물을 매입하여 구내에 성모당과 성모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인 중앙본당은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 639의 40에 소재한다.

1978. 성언 양로원 설립 (교회와 역사 227호 18쪽) - 1994. 4. 25 발행

성언 양로원 (교회와 역사 227호 18쪽) - 1994. 4. 25 발행

'의지할 곳이 없어 소외된 노인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은 바로 거룩한 말씀의 회의 창립목적(회헌과 회칙 제3조)에 분명히 제시된 활동 내용이다. 일가 친척이 없거나 길거리에 버려진 할머니들을 마치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살아가는 성언 양로원. 노인들의 여생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잘 준비하여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함을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곳에 양로원이 들어선 것은 1978년. 착한 목자 수녀회에서 1964년 윤락 여성을 지도하기 위하여 운영하던 기술학교 자리에 설립인가를 내어 1980년도에 할머니 30분을 받으면서부터이다. 65세 이상의 할머니만 모여 사는 이곳은 현재 33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원하면 예비자 교리 후 영세를 받는데 3명만 제외하고 현재 모두 신자이며 매주 옥동 본당의 신부님이 와서 미사를 봉헌한다. 노인들도 직접 활동은 못하지만 옥봉 성당 레지오 팀의 협조 단원으로 기도, 묵상 등을 활동으로 대신하며 수녀들의 지도로 간단한 청소, 빨래, 산책 등으로 생활한다. 총 책임 수녀 외에 총무, 간호사, 당사, 생활지도, 기사 수녀 등 모두 6명의 회원들이 봉사하고 있다.

이곳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성격이나 모든 면이 '정상적이지 못한' 노인들을 '정상적인 상태'로 선도하는 데 있다. 이미 오랜 세월을 어렵게 지냈던 노인들에게 남은 것은 배고픔과 이웃에 대한 원망,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뿐 순수함이 결여된 이들에게 아무리 좋은 방법의 선도라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홀로 어렵게 살다가 공동체 생활에 익숙하지 못함은 당연한 현상이고 사회에 대한 반감과 비뚤어진 시각 등이 신앙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설득하고 교리를 가르쳐 영세시키는 노력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웃에 옥봉 성당의 교우들이 방문하여 도와주고 장례식에는 성당의 애령회에서 지금까지 임종한 할머니 165명의 장례 예절 일체를 봉사해 주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1979. 2 소록도본당내 '쌘뽈유치원'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25쪽)

소록도본당 小鹿島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25쪽)

소록도에 국립나병원이 설치되던 시초에는 환자들을 입원과 동시에 무조건 장로교에 입적시켜서 1916년에서 1935년까지는 장로교 중심으로 생활이 이루어졌다. 1935년에 3명의 천주교신자 환자들이 입원함으로써 차츰 신자가 늘자 광주교구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1946년에 이곳에 공소가 설치되었고, 한국전쟁이후 신자수의 증가로 전교회, 청년회 성가단 등이 조직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0년 8월 13일에는 본당으로 승격, 성 골롬반회의 미국인 미카엘(James Michaels, 권) 신부가 부임하여 사목하였는데 가톨릭구제회(N.C.W.C)의 혜택도 있어 신자수가 1,100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해마다 신규 영세자 보다는 사망자가 늘어나고 음성환자로 확인되어 자활촌으로 전출하는 환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1978년 4월 27일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이곳으로 왔을 때는 신자들이 420명이었으며, 그 중 젊은이는 34명이었고, 아홉마을에 걸쳐 사도회장과 총무 등의 조직은 형식상 조직되어 있었으나 본당운영은 매우 어려웠다. 섬 전체가 국립나병원 통제 하에 놓여있어 외부인사의 출입이 거의 없고,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으며〔제2의 안내소〕를 경계로 하여 도민들의 왕래도 제한되고 있으며 환자들은 외부와 완전 단절된 곳에 고립되어 있다. 본당설립 이후 18년동안 외국인 본당신부 10여명이 사목하였던 곳이다. 이곳에 수용된 환자 3,000명 중 2,600명이 장로교 신자로서, 말단 행정까지 그들이 관장하여 가톨릭 신자는 거의가 고령자이거나 중환자들이었다. 1961년 10월 11일 까리따스 수녀회의 수녀들이 미감아보육원을 돌보다가 그만 두었고, 1965년 2월 24일 오스트리아 그리스도왕 시녀회에서 3명의 간호수녀가 파견되어 현재까지 봉직하고 있다. 1973년 2월에 성체수녀회에서 본당수녀를 파견하였으나 1975년 7월에 철수하였고 1974년 5월 30일부터 현재까지 메리놀회 간호수녀 3명이 병원에서 봉사하고 있다. 1978년 3월 13일의 방문 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파견을 결정했다. 수녀들은 두개의 본당, 즉 관사(官舍)와 병사(病舍)본당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수녀원에서 양성당은 약 2㎞의 거리라 원내에 경당을 차려 성체를 모셨다. 이 섬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란 서로 잘 아는 사이라 보통으로 모든 행사가 온 섬에 알려지기 마련이고 옛 풍습을 고수하며, 서로간의 친목, 단결하는 장점이 있는가 하면, 허례와 낭비도 많다. 외국선교사의 놀라운 신앙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치본당의 규모를 갖추지 못한 것이 무리도 아니다. 가족 가운데는 학업, 취업관계로 낮에는 섬을 떠나는 유동 인구도 많아 평일에는 수, 금요일에 미사를 드리는데 참여하는 신자는 손꼽을 정도이고 주일미사 참석자도 몇명 안되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직원들의 자녀교육이었다. 그리하여 1979년 2월부터 '쌘뽈유치원'을 개원하여 36명의 원아들을 받아 이경례 비비안나 수녀가 담당하였다. 이어서 주일학교, 중고등학생회, 청년회, 레지오 마리애, 성체회를 조직하면서 신앙생활을 체험시키고, 1979년부터는 간호보조원양성소 학생들중 희망자를 대상으로 교리교육을 실시한 결과 매년 10여명의 영세자들이 나왔다. 성인 영세자들도 열심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부진하던 본당에거 그간 총 330여명의 새 교우가 탄생하게 된 것은 유치원 어린이들을 통하여 부모들에게 미친 영향이 컸다. 그러는 사이에 관사지대의 신자수가 장로교의 두배로 늘었다. 신앙생활에 열심해진 신자들은 멀리하던 병사와의 친근감도 생겨 병사본당까지 가서 미사에 참여하는 이도 있고, 특히 성탄, 부활 전야미사, 성모의 밤 전례등은 합동으로 올리게 되었다.

병사본당의 예비자는 소수이지만 굳은 뜻과 용기로 박해를 각오하고 개종하는 환자들이라 열성이 대단하다. 병사성당은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어 크기는 하지만 환자들 300여명이 마루바닥에 앉았다 섰다 할 때마다 그 소란과 아픔과 불편은 표현하기 어려웠다. 양 벽은 진물자국으로 때묻었으며, 나무에 밴 악취는 청소, 소독이 해결해 주지 못하였다. 1983년 7월 10일 (구라주일)에 구라사업 연합회장이었던 이경재(李庚宰 알렉산드로) 신부의 노력에 의해 모인 헌금으로 병사본당의 마루를 인조석으로 바꾸고 의자를 설치하여 환자들의 거동을 편리하게 해 주었으며, 수리가 필요한 부분들을 다듬어서 성당의 모습이 새로워졌다. 또한 1982년에는 구라사업 연합회로부터 25인승 버스를 얻어 먼 곳에서 오는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수녀들은 이 밖에도 섬 북쪽에 있는 환자전용의 교도소를 방문하고 예비자 교리와 미사 등을 통해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 한편,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소록도방문 이후부터는 교회와 사회의 관심이 높아져 많은 봉사위문단과 각 본당의 봉사자들이 섬을 방문해 오곤 한다. 이제 이곳 환자들은 대구본원을 외가집이라 부를 정도로 수녀들을 따르며 밝게 생활하고 있다.

1979. 3 안내교양센터 개원 (254쪽 노트르담 수녀회)

노트르담수녀회 (영) Congregation of the Sisters of Notre-Da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54쪽)

1848년 아델콘드윌브링(Adelgonde Wolbring)과 리제테 퀼링(Lisette Kuhling)이 독일에서 창설한 수녀회. 1967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여성교육사업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형제사랑으로 돌보면서 더욱 건설적인 세계를 이룩하고자한다.

1979. 3. 13 노틀담 수녀회는 '안내양 교양 센타' 설립 (교회와 역사 226호 18쪽) - 1994. 3. 25 발행

안내양 교양 센타 (교회와 역사 226호 18쪽) - 1994. 3. 25 발행

1969년 당시 버스 운송 사업은 주식회사 제도가 아닌 개인 사업이므로 안내양들의 대부분은 차주의 고용인으로서 그집에 더부살이를 하거나 3∼4명이 함께 자취를 하는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용주들의 엄한 감시와 비협조적인 태도, 안내양 자신들의 심리적 저조 상태 등 이러한 여건 속에 그들을 한곳에 모은다는 것은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난관을 뚫고 노틀담 수녀회의 수녀들은 서울 9번 버스 종점인 수유리를 방문하여 80여명의 안내양들을 대상으로 어린이 옷 만들기 등 여성의 기본적인 가사일 등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 12월 25일 수유리에 있는 안내양 기숙사에서 신자이면서 냉담 중이던 안내양들에게 고백성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함과 동시에 뜻깊은 성탄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 이듬해인 1971년 12월 22일 KBS방송국에서는 수녀회에서 펼치는 안내양 교육에 대한 관심을 갖고 마리아 알렉산드라 수녀와 몇 명의 안내양들이 참석하여 대담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게 되었고 이러한 기회로 사회가 안내양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버스 안내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더불어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한 안내양들은 긍지를 지닐 수 있게 되었으며 1979년 3월 13일 비번인 안내양들이 30명씩 각기 다른 곳에서 자유로이 모여와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생활하고 가는 '안내양 교양 센타'의 발족을 보았다. 종전까지는 9번 버스 안내양들의 지도를 회사로 직접 나가서 하였는데 이때부터 수녀원의 한 건물을 교육 장소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0여명의 안내양들과 회사의 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내양 교양 센타(현 쥴리의 집)를 개원하였다. 직접적으로 연 2회, 3∼4개월 기간으로 안내양들을 상대로 실시하는 교양교육과 간접적으로는 자동차 노동조합 후원으로 근로자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일, 부녀 부장들을 교육하는 일들로 안내양들의 처우 개선 및 지위 향상은 물론 그들을 위한 사회와 국가의 관심과 배려에 주요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그러나 1982년 시 행정의 결정에 따른 버스 운송 자율화와 더불어 안내양 승차 제도가 폐지되자 1984년 4월 부터 종전의 '안내양 교양 센타'를 '쥴리학원'으로 개명하고 방송 통신 고등학교 과정 이수를 돕는 사도직을 시작하여 이 과정을 밟는 근로 청소년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다.

1979. 3. 23 대구 가톨릭 병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88쪽)

대구 가톨릭 병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88쪽)

대구대교구에서는 이 시대에 의료사업을 통한 사회봉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79년 3월 23일 가톨릭병원 신축을 위한 기공식을 거행한 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수녀회에서는 이 요청에 응답하여 1980년 2월 부터 한업덕 마리 아오스딩 수녀, 윤성기 토마스 수녀가 이 병원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초대원장인 이문희 주교와 부원장이며 병원 건축담당장인 젤라(Stanislao Gzella,길) 신부 및 행정처장인 스테파노 선생과 함께 병원설립의 선발대가 되어 실제적인 개원준비에 적극 협력하였다. 6월 19일에는 안옥화 쎈땅 수녀 그리고 6월 24일에 메리놀병원에서 오기옥 아나다시아 수녀가 보충파견되었다. 병원이 세워진 곳은 일명 뱀사골이라는 야산으로 병원건물도 아직은 골조공사만 이루어진 때였다. 수녀들은 간호과의 업무를 돌보기도 하고 재봉실, 세탁부, 영양실 관계 등을 맡았다. 초창기의 어설프고 어수선함 속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수녀들의 숨은 희생과 초인적인 노력으로 마침내 8월 12일 250병상 규모의 가톨릭병원 개원식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병원은 개원하였으나 아직 병원경영 자체로서는 걱정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교구민들의 기도와 많은 은인들의 돌봄과 교구병원에 대한 신자들의 아끼는 마음으로 병원은 곧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선의의 신자들의 자원봉사활동 등으로 병원은 생기를 띠었고, 병원을 찾는 환자수도 차츰 늘어났다. 10월 1일에 제2대 병원장으로 박창수(朴昌壽 요한) 신부가 취임하여 직원들을 격려하며 병원관리를 철저히 함으로써 몇 개월만에 병원운영이 본 궤도에 올라서게 되었다.

병원은 계속 발전 일로에 있었으나 병원장 박창수 신부의 중환으로 1982년 7월 7일 제3대 병원장으로 박병원(朴炳元 필립보)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고, 그해 가을 별관 병동 신축공사로 320병상, 1983년 여름에는 본관건물을 증축으로 396병상, 1985년 봄에는 별관병동 증축으로 441병상을 보유한 종합병원으로 성장해서 대구지역 사람들의 영육간의 건강에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1979. 4. 13 가톨릭 맹인 선교회 발족 (나눔지 18호 2, 3쪽) - 1983. 3. 15 발행

가톨릭 맹인 선교회 (나눔지 18호 2, 3쪽) - 1983. 3. 15 발행

맹인의 복음화와 맹인 선교자로서의 자질 개발과 맹인의 선교활동을 지원하고 점자 및 녹음 테이프 서적을 출판, 보급하므로써 맹인의 독서 생활에 기여하는 동시에 맹인의 재활 및 복지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서 1979년 4월 13일에 창립하였다. 시행중인 사업은 맹인미사와 점자 강습회, 녹음도서관을 운영하며 맹인의 원할한 사회참여를 목적으로 한다.

1979. 5. 1 선화기숙사 완공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 (라) Congregatio Missionariarum Mariae Franciscanaru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6쪽)

1877년 1월 6일 마리 드 라 파시옹 (Marie de la Passion)에 의해 인도 오타카문드 (Otacamund)에서 창설된 수도회. 1954년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내한하려 하였으나 중국에서의 수녀원 추방운동으로 1958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진출하였다.

1960년 5월 부산 양정동에 정착하여 성모의원과 함께 수예실을 운영하였다. 1975년 2월에는 부산성모의원을 폐쇄하고, 의료혜택이 더욱 필요한 성 프란치스코의원을 개원하였다. 한편 부산에서는 1961년 3월 성모여자중학교, 1964년 성모여자고등학교를 개교했으나 1974년 성모여중을 폐교하고 1979년 6월 성모여고를 부산교구에 이관하였다. 1966년 서울 가리봉동에 수녀원과 의원건물을 완공함으로써 모두 이전하여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1974년에는 부산에 있던 수련원도 서울로 이전하였다. 1972년 일본관구소속에서 준관구로, 1978년 정식관구로 승격되었다. 1979년에는 원래 학교부지로 매입했던 곳에 선화기숙사가 완공되어 5월 1일 첫 기숙생을 입사시켰다. 현재 한국관구 본부가 있는 서울 가리봉동 수녀원을 비롯하여 부산 양정동 수녀원, 강원도 정선수녀원에서는 관구장 수녀를 비롯한 65명의 (1983년 말 현재)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79. 5. 18. 한국가톨릭간호협회 발족 (1244쪽 한국가톨릭간호협의회)

한국가톨릭간호협회 (영) Catholic Nurses Association of Korea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44쪽)

가톨릭 신앙과 복음적 정신의 함양으로 선교활동을 함과 동시에 회원으로써 침목과 자질향상, 그리고 보다 저극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하기 위하여 1979년 5월에 발족한 간호인 협회. 1979년 2월에 이전부터 모임을 가져오던 성모병원 가톨릭간호원회가 협회를 발족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함으로써 1979년 5월 18일 전국의 가톨릭신자 간호원 130여명을 중심으로 서울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교육회관에서 발기총회를 갖게 되었다. 1981년 주교회의의 인준을 받고 1982년 4월 국제협회에 가입하였다. 주요활동 내용은 의료봉사활동과 세미나이며, 1982년 현재 서울교구 외에 6개 교구에 간호원회가 조직되어 있다.

1979. 6 성모여고를 부산교구에 이관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 (라) Congregatio Missionariarum Mariae Franciscanaru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6쪽)

1877년 1월 6일 마리 드 라 파시옹 (Marie de la Passion)에 의해 인도 오타카문드 (Otacamund)에서 창설된 수도회. 1954년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내한하려 하였으나 중국에서의 수녀원 추방운동으로 1958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진출하였다.

1960년 5월 부산 양정동에 정착하여 성모의원과 함께 수예실을 운영하였다. 1975년 2월에는 부산성모의원을 폐쇄하고, 의료혜택이 더욱 필요한 성 프란치스코의원을 개원하였다. 한편 부산에서는 1961년 3월 성모여자중학교, 1964년 성모여자고등학교를 개교했으나 1974년 성모여중을 폐교하고 1979년 6월 성모여고를 부산교구에 이관하였다. 1966년 서울 가리봉동에 수녀원과 의원건물을 완공함으로써 모두 이전하여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1974년에는 부산에 있던 수련원도 서울로 이전하였다. 1972년 일본관구소속에서 준관구로, 1978년 정식관구로 승격되었다. 1979년에는 원래 학교부지로 매입했던 곳에 선화기숙사가 완공되어 5월 1일 첫 기숙생을 입사시켰다. 현재 한국관구 본부가 있는 서울 가리봉동 수녀원을 비롯하여 부산 양정동 수녀원, 강원도 정선수녀원에서는 관구장 수녀를 비롯한 65명의 (1983년 말 현재)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79. 10 광주 천주의 성요한병원에서 환자가족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 (영) Maryknoll Sisters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는 1912년 메리 로저스수녀에 의해 창립되었다. 창립정신은 인류에게 책임을 다하고 도움을 주고 문화적 배경과 지역적 제한 경제, 사회, 종교적인 범주를 벗어나 모든 국가간의 평화와 정의와 우정을 도모하고 나누는데 있다. 1924년 10월 메리놀회 신부들의 초청으로 평북 의주에 처음 진출하였다.

북한에서의 활동 (1926∼1942) :

1924년 부터 시작된 의주에서의 활동은 처음에는 본당 사목과 가정방문이었으나, 얼마 후 소규모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3명의 수녀를 의주에 남겨두고 1926년 수녀회 한국지부를 영유(永柔)로 옮기고 그곳에 여자기예학원을 세워 15세 전후의 소녀들에게 기술습득의 길을 열어주는 사업을 하였다. 또한 시약소와 고아원을 설치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1933년 멜시 수녀 등 3명은 신의주로 파견되어 성모회를 창설하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가정방문과 외래환자 진료소와 이동진료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1932년 메리놀회 신부의 요청으로 평양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한국여성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이 모임은 후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라는 수녀원의 창설동기가 되었다. 1935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입원실과 무료진료소를 설립하였으며 1936년 본당 사업과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또한 진남포에서는 1934년 부터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활동을 중지하고 메리놀회 수녀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해방후의 활동 (1950∼현재) :

본국에 철수했던 메리놀회 수녀들은 전쟁이 끝나자 1950년 제1진이 다시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의료사업과 전교사업을 통하여 주민들에게 봉사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1952년 제2진의 수녀들은 제차 부산에 진출하여 전쟁중인 비상시를 위하여 장기간의 의술봉사를 하여 왔으며 음식과 옷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결핵요양소와 교리학습을 위한 장기 계획도 수립하게 되었다. 휴전 후 메리놀 수녀들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956년 충북 괴산군 중평읍에 메리놀의원을 개원하여 의술치료와 보건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1960년 부산에서 가별(Gabrialla) 수녀가 신용협동조합을 처음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지금은 협동교육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1962년 부산 메리놀병원이 주한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대식 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1963년 메리놀 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은 콘로이(Conroy)수녀가 맡았으며 1967년 메리놀 병원의 관리가 부산교구로 이관되었다. 1962년 2월 인천교구 답동 본당에서의 종교활동을 돕고 학생지도 및 영어지도를 실시하여 왔으며 1967년 3월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회관에서 청소년 지도자 강습과 여성들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1963년 경기도 강화읍에 그리스도왕 의원이 설립되어 메리놀회 수녀들은 의사와 간호원으로 일하였으며 전교사업도 함께도왔다. 1969년 초 요안 서빈 수녀는 백령도에 소재한 김안드레아병원에서 간호과 책임자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74년 대한 적십자가 인수할 때까지 섬 사람의 건강과 아울러 간호보조원 교육과 훈련을 부지런히 해왔었다. 백령도에서 철수하여 본원에서 일하던 3명의 수녀들은 전남 소록도에 있는 국립병원에 자원봉사 간호원으로 활동하고 1973년 성신강림 대축일 김수환 추기경의 허락을 얻어 2명의 수녀가 그리스도께 헌신할 조그마한 단체의 조직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공업단지 근처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진료소의 간호원으로 상담자로서, 노조에서 간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 등을 맡아보게 되었다. 1976년 9월 가이에르 수녀가 서강대에서 영어를 담당하는 외에 경북 울진 진료소 활동, 부평 본당에서 종교사업과 노동자를 위한 사업활동 1979년 10월 광주의 천주의 성요한병원에서 환자가족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1980년 거창 나환자 마을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1981년 11월 부터 성남시에서 2명의 수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과 전교활동에 힘쓰고 있다.

1979. 11. 30 노동문제 상담소 건립 (245쪽 노동문제상담소)

노동문제상담소 (영) Labor Counselling Offic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45쪽)

급격한 산업화로 인하여 야기되는 노동문제에 관하여 근로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일반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1979년 11월 30일 설치된 상담소. 주로 노동업무에 관한 상담업무로서 근로기준법 관계, 노동조합법 관계, 노동쟁의 조정법 관계등과 함꼐 노동사목 관계가 가장 많다.

1979. 12. 8 살레시오 기숙사 개원 (살레시오회의 복지시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살레시오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의 답신에 의거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아동으로써 보호자가 없는 아동친권자나 후견인이 입소를 신청한 아동 또는 가정법원 소년부에서 보호 위탁된 아동을 입소시켜 그들을 선도하여 건전한 국민으로 육성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가정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보호 위탁된 아동, 아동상담소로부터 보호 위탁된 아동, 서울가정법원으로부터 6개월간 보호 위탁된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 교육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목공예 직업훈련 - 목공예 이론과 실습을 통해 기술습득과 기능사 2급, 3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직업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참여하는 기능인으로 양성하며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직업인으로 교육한다. 1년의 기초과정인 훈련과와 훈련과를 수료한 학생으로 취업을 위한 종합 기술과로 향상과가 있으며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국가지방기능올림픽 대회와 국가전국기능올림픽대회에 참가하여 입상할 경우 국제기능올림픽 대회의 참가기회를 부여한다. 향상과를 수료한 18세 이상의 학생으로 적성에 맞는 가구회사, 목공소, 실내 인테리어 등을 선정하여 취업알선을 해주고 있다. 건축과, 실내디자인과의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 희망자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 도자기과 직업훈련 - 도자기 실습을 통해 흙에서 전달되는 부드러움과 차분히 만들어야 하는 작업과정을 통해 정서적인 인격도야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며 더 나아가 전문적인 기술습득과 자격증을 취득해 본인 스스로의 성취감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교육한다. 도자기의 여러 성형방법을 통해 학생 자신에 대한 내적인 안정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도 자신감있게 살아갈 수 있는 인격형성과 적성에 맞는 학생을 선별하는 기초반과 기능사 시험의 응시를 원하거나 전문적인 기술습득을 통해 취업을 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산업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배양하는 정규반으로 편성되어 있다. 정규반을 졸업한 학생으로 기능사 시험의 응시를 원하거나 전문적인 기술 습득을 통해 취업을 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산업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배양한다.

⸃ 상담지도 -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내의 아동을 대상으로 처음 입소시부터 마지막까지 안에서 부딪히면서 겪게되는 성장상, 생활상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파악하여 해결책을 유도함으로서 보다 나은 인격체로서의 성장을 도모하고 퇴소후의 자신과 사회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키움으로서 바람직한 미래 설계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 정 기 상 담 : 4/4분기로 전체아동들의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내에서의 생활을 점검하여 쉽게 눈에 안 띄는 아동들과의 상담을 통해 원할한 적응을 돕는다.

* 문제아동상담 : 타 아동과의 관게, 생활면에서 어려움이 있는 아동을 발견해서 상담을 통해 원할한 적응을 돕는다.

* 퇴소아동상담 : 퇴소를 앞두고 있는 아동을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설장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미래 계획을 세우도록 해서 재비행의 방지와 건강한 사회인으로의 방향을 제시한다.

* 학생상담 : 학교내에서의 생활태도, 부족과목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도모함으로써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아동의 원할한 학교생활이 되도록 돕는다.

⸄ 일반학과교육 -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내의 아동을 대상으로 보다 나은 자기성장과 사회적응을 도모하기 위하여 학력취득에 그 목적을 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마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학생들을 위해 한글기초반,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자격과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검정고시반을 운영

학업능력등급을 기준으로 한글, 산수기초,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을 공부한다.

과목합격으로 인해 정규수업 이외의 과목보충이 필요한 아동과 보충수업을 희망하는 아동을 대상으로 개인지도 수업진행, 외부에서 일반학교에 다니는 아동을 대상으로 개인지도를 한다. 그리고 특별활동으로는 연극, 태권도, 그림, 영어회화, 기타반, 바둑반, 피아노, 컴퓨터, 전자조립, 드럼등의 특별활동을 실시한다.

⸅ 종교교육 - 교리교육(매주1시간)과 종교행사를통해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나누는 그리스도인으로 육성하고자 한다.

1998년 3월말 현재 정원 80명 중, 남학생 54명이 생활하고 있으며 "특히 보다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징표가 되며 그 전달자가 된다." 라는 회헌에 따라 봉사하고 있다.

1979.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설립 (555쪽 사회사업)

사회사업 (영) Social servic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5쪽)

가톨릭 교회는 단순한 전례의 공동체나 신앙의 공동체일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빛(마태 5,13-16)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사회안의 어두운 곳을 찾아서 어두움을 없애고 광명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너무도 어두운 곳이 많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사람, 육체는 건강하나 정신이 병든사람, 정신은 건강하나 육체가 병든사람 등이 있다.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을 살펴주고 그들의 희망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버림받고 소외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현세적인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교회의 사업중에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문화사업, 사회사업등이 포함된다.

*구미근로여성복지관 - 1973년 경북 구미시 송정동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구미공단 근로여성들의 인격도야 및 생할향상을 위해 기능교육, 취미교육, 교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설립단체는 왜관 성 베네딕토 대 수도원이다.

*국제마리아의 사업회 -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고 1969년(여자), 1974년(남자)에 설립되었다.

주된 활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회원이 소득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퍼콜라레 운동을 하는 남녀 회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덕산 신생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으로서 1952년에 설립된후 요보호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하고 원생을 초·중·고등학교에 진학 시키고 졸업 후에는 기술을 습득시키고 있다.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 1976년 경남 마산시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정기프로그램으로 학습반과 취미반이 있고 특별 프로그램으로 젊은이 교실, 사임당교실, 성교육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 1979년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설립하였다. 불우이웃 청소년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의식개발, 교육, 협동, 우정, 자립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쎈뽈원 - 충남 논산군 논산읍에 있으며 1973년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이 되었다. 노인복지시설을 설치운영하며, 성인불구자의 복지사업을 하고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 1966년에 설립되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근로자의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기업인의 이해를 촉구시키고 노사간의 긴밀한 협조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곳이다.

*성심원 - 서울대교구가 불우아동 및 부상아동을 보호하기위해 1946년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설립하였다. 파티마 성모수녀원에서 담당운영하고 있다.

*성인복지원 - 1976년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설립, 부양가족이 없고 경제적으로 자활이 분리한 60세 이상의 여자노인을 수용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 본부는 서울 명동에 있으며 마음의 가난함을 생활화하는 단체로 1961년 설립되었다. 주된사업은 환자, 가난한자, 걸인을 돌보고 노쇠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며 불우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이다.

*소화영아재활원 - 1946년 소아보육원으로 출발하였다. 주된사업은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사업이며, 부산교구재단에서 운영하고있다.

*엠마우스집 - 1981년 설립된 것으로 성인지체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 - 1969년에 불우아동을 수용하여 직업보도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성 빈첸시오 청소년 복지회에서 설립하였다.

*춘광대구 요양원 - 극빈 폐결핵 환자 요양원으로 1966년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진영성모의원 별관 -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불우한 결핵환자를 고쳐주는 것이 주된목적이다.

*한국 SOS 어린이 마을 - 요보호 아동들을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하고 퇴소후에는 독립생계를 유지토록 자립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꽃동네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중 특기해야 할 것은 충북 무극에 있는 꽃동네로 청주교구 오웅진 신부가 혼자서 걸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면서 시작되었다. 꽃동네의 특징은 구걸할 수만 있으면 퇴거토록 하는 것으로 자생의 능력이 전혀 없는 노인만을 보호하는 곳이다.

*성모 자애원 - 예수성심 시녀회가 심신 장애아를 재활시키는 곳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 6.25 이후 기아가 날로 증가하여 버림받은 생명들을 입양, 양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릴리 어린이집 - 6-7세의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을 받아 교육하고 있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의 근로자의 집 - 근로자의 수용과 교육에 힘쓴다.

*성 프란치스코의 집 -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일을한다.

*마리아 자매원 - 문제청소년을 교도하고 상담과 숙소를 제공하여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국민학교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이수시킨다.

*성심 양로원 - 불우한 노인을 수용하여 물질적 정신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성가 양로원 - 무의탁 노인들을 구호한다.

*백백합 보육원 -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호, 육성한다. 설립단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다.

*해성 보육원 - 요보호 아동과 지체 부자유자아 및 정박아 수용 및 양육, 국내외 입앙을 하고있다.

이상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 중 그 일부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나 이 이외에도 수십개의 사회사업단체가 있으며 그들은 보이지 않게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사업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첫째, 교회는 특별히 정부나 일반 사회단체에서 망각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소외된 계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이 하기 어려운 사업을 찾아서 그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임무다.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회사업은 양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몇명을 도와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교회의 사회사업은 어떤 기관이나 단체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사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자기의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인의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회사업가이며 모든 신자가정은 사회사업단체인 것이다. 세째, 교회 당국이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재정적 뒷바침을 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성당도 지어야 하고 문화사업도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오늘의 현실 안에서 연장시키는 일이다. 특히 도시교구나 본당에서는 그 지역사회안에 어두움을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여 그들을 위한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정말 가톨릭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1979. 용문 무료결핵요양소인 희망의 집 개설 (나눔지 23호 8쪽) - 1984. 3. 15발행

희망의 집 (결핵요양원) (나눔지 23호 8쪽) - 1984. 3. 15발행

1979년 불우결핵 환자들을 위한 조그만 보금자리가 용문에 탄생되었다. 이후 뜻을 같이하는 많은 가족들의 관심과 나눔으로 발전하고 있다. 1984년 현재는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공동운영방식은 1983년 5월 23일 희망의 집의 운영위원회가 공식적으로 구성되고 정관이 확정 됨으로써 명문화되었다.

1979년 가을 경기도 용문 근처에 처음으로 요양원 설립에 착수한 이래 많은 은인들의 나눔으로 1984년 현재는 약 43,000평의 산록위에 환우들의 거처 2동, 수녀원 1동, 성당 1동, 피정의 집 1동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환우들을 돌보는 일은 1980년 3월 부터 성가회 수녀님 3분이 상주 하시면서 담당하고 계신다.

1979.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 선화기숙사 설립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의 복지시설)

선화기숙사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의 복지시설) - 1998. 4. 21일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의 답신에 의거

1979년 당시 구로공단이 생김으로써 공단내에 여성 근로자가 급증하여 시골에서 올라온 아가씨들을 위한 기숙사의 필요성에 의해 그들에게 여성교육과 종교교육, 취미생활등을 통해 전인교육을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구로구 가리봉동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원 내에 이영주 마리안나 수녀에 의해 설립되었다. 공단 지역내의 근로자에 한하여 입사시켜 정원이 100명 정도였으나 급격한 사회 변화로 시내 기숙사 및 복지 아파트가 많이 생기므로 이용자가 줄었고 1989년 기숙사 수리후에 운영의 어려움으로 이용자의 폭을 공단지역 내의 근로자에 제한 시키지 않고 기타지역의 여성 근로자 까지도 넓히게 되었다. 1998년 현재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야간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4명과 직장여성이 50명 정도 되었다. 1997년만 해도 정원 72명에서 수용인원은 68명 정도였는데 현재 IMF로 직장을 잃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숙생들이 있어 현재 인원은 54명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인간개발을 통하여 복음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이 선화 기숙사의 바탕이 된다.

1979. 아욱실리움 센터 설립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아욱실리움 센터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살레시오 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청소년들의 전인교육으로 돈보스꼬의 독특한 삶의 스타일(일상의 성덕), 활동양식(da mihi animas ceter tolle -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 기도방법(일이 곧 기도 - 기도정신으로 성화된 일), 사목적 관계양식을 통하여 고유한 교육방법을 발전시킨 예방교육법에 따라 소외되고, 가난한 청소년들이 정직한 시민, 착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정신에 따라 1979년 경남 마산에서 선교사 살레시오 수녀회의 지부장 Catarina Moore 수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마산 지역에 공단을 만들면서 많은 여공들과 시골에서 상경한 어린 소녀들이 많아 이들의 복지를 위해 기숙사를 개설하여 120명을 수용하고 이들에게 여성교양 프로그램 및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의 생활을 통해 행복한 여성으로의 오늘을 해결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92년 창원에 공단조성 계획이 있어 그곳으로 이전하면서 지역의 필요성에 따라 수련관으로 변경하여 창원지역의 청소년들을 위한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기숙사의 연장으로는 나자렛 집(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기관) 출신의 여중고생과 지방에서 온 창원지역 거주의 야간 여고생을 위한 기숙사로 약 20여명의 여학생들의 학교 교육과 병행하여 가정일을 배우고 온전한 여성으로의 성장과 자립을 돕고 있다.

1979. 소화영아재활원은 '영아불구시설'로 용도를 변경하여 장애인 수용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3쪽)

소화영아재활원 小花櫖兒再活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3쪽)

소화영아재활원은 원래 소화보육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8·15 해방 후 부산 범일동 본당 주임 정재석 신부가 후견인이 없는 불쌍한 어린이들을 모아서 본당 근처에 있던 30평짜리 한옥에 수용한 것이 소화보육원의 출발이다. 정 신부는 이 사업의 운영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위촉하였다. 1946년 2월 10일에 분원이 설립되어 파견된 수녀들은 협소한 집에서 갖추어진 시설도 없고 보건위생 조건도 불비한 가운데서 초창기의 정신 그대로 가난과 겸손 그리고 인내로써 사랑의 일을 말없이 계속하였다. 그러던 사이에 한국전쟁으로 부산은 피난민으로 붐볐고 소화보육원은 서울, 대구의 수녀회에서 운영하던 두 보육원 아이들을 피난 수용하는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 전쟁기간동안 피난민들이 느는 만큼 고아가 늘어가자 정부당국의 후원자 은인들의 도움으로 급히 144명의 원사를 마련하였고 원아들의 보건위행과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의 진료를 위하여 부속건물로 진료소도 지었다. 이것이 데레사의원의 시작이 되었다.

소화보육원의 원아수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늘어갔지만 시설은 날로 협소해졌다. 또한 본당과 학교 사이에 자리잡은 보육원은 보육환경이 부적당했고 이전 문제가 거론되었다. 부산교구청에서는 보육원 대지를 내놓고 교구소속 대지였던 남구 남천동으로 이전하라고 하였다. 부산의 변두리였던 남천동은 그 당시 황무지와 다름없었던 거의 쓸모없는 땅이었다. 431평의 대지에 새원사를 지어 1963년 9월 12일에 옮기게 되었다.

당시 보육원과 부속 데레사의원의 운영권자가 모호하여 실무상에 애로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교섭한 결과 부산교구장 이갑수 가브리엘 주교는 1977년 3월 30일에 소화보육원의 운영권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에 정식으로 이양하였다.

한편 1979년까지 보육하던 영아원의 영아들은 차차 입양되고 이곳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영아불구시설'로 전환시켜 영아장애인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영아들의 질병은 다양하였고 병원왕래에 교통편이 원할하지 못해 어려움이 컸다. 이 사정을 아산재단에 알려 1979년 6월에 미니버스를 얻게되었다. 이 해 연말부터 수녀들의 사업이 알려져 수용 인원수가 많아져서 새로운 시설로의 이전이 요청되었다. 그래서 데레사의원이 폐원된 후 여러번 시설변경이 시도되었던 종전의 병원건물을 시청의 원조로 개수하여 1980년 4월에 입주하였다. 1980년 초에 비만오면 웅덩이로 변하는 건물 앞의 공지를 교육청에서 학교건립을 위하여 퍼내는 흙을 얻어 매립했다.

시대적 요구와 소명감에서 시작한 이 일은 시행착오를 거듭하여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경험부족과 재정적인 어려움, 주위의 이해부족 등 어려움이 말할 수 없었다. 정상아 15명당 보모 1명으로 해결될 수 있는 영아원 운영이 장애인인 경우에는 5명에 보모 1명이라도 힘겨운 일이다. 장애인의 유형은 가지가지이다. 그러나 장애인들도 조기치료를 하면 효과적이므로 치료기구, 물리치료실 등의 구비에 필요한 재정적인 뒷바침이 있어야 한다.

1980년 말에 소화영아불구시설을 '소화영아재활원'으로 명칭변경 신청하였다. 기존건물을 다시 개수공사하여 시설을 갖추어 1981년 1월 19일에 소화영아재활원으로 개원한 후 수녀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던 중 1987년 남천동 재활원 자리에 교구청사를 이전하려는 교구의 계획으로 다시 재활원의 이전문제가 대두되었다. 무척 난처했고 앞으로도 이런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부산교구청과는 상관없이 사업체를 단독으로 운영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재활원을 위하여 교구청측에서 내놓은 부곡동 야산에는 그 동안 재활원 사목실을 빌려 상담해오던 심장환자 상담소를 위한 건물 신축이 계획되어 1988년 2월 1일 기공식을 가졌고 1989년 10월에 완공을 았다.

1980. 2. 다시 '교도사목회'로 개칭(118쪽 교도사목회)

교도사목회 (영) Prison Apostolat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18쪽)

교도소 수감자들의 복음화와 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위하여 1970년 4월 2일 발족한 평신도단체. 당시 김홍섭 판사와 고중렬 교도관, 박귀훈 신부외 몇 명이 중심이 되어 '교도소 후원회'를 발족함. 1974년에는 각 교도소용 명상자료와 성가녹음테이프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1980. 4. 1. 대구시립희망원 재단법인 대구 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에서 수탁운영 (대구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희망원 (행려자) (대구 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 1998. 4월 희망원의 답신에 의거

대구광역시립희망원은 대구 광역시 산하 부랑인 복지시설로 1958년 12월 31일 설립되어 1980년 4월 1일 대구광역시로부터 재단법인 대구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에서 수탁운영을 받아 부랑인 복지사업을 실천한지 17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희망원은 가톨릭 교회의 사랑과 평화의 이념을 바탕으로 현사회속에서 자립생활을 못하거나 무의무탁한 부랑인들을 수용보호하여 조기에 사회복귀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부랑인들에게 이들의 특성에 맞는 전문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가족찾기 상담, 장애극복을 위한 치료, 생활의 정상화를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정상적인 조기 사회복귀를 위하여 자활사업과 노임소득사업을 통한 기술습득, 취업알선 등의 재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서로돕자"라는 원훈 아래 부랑인의 시설입소, 수용보호 및 퇴소등의 합리화로 보호수준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며 부랑인 각자의 특성에 따라 분리수용을 함으로써 전문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자활사업을 내실화하여 자립 가능한 자는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조기복귀 시킨다. 시설을 개방하여 지역사회의 자원으로 활용한다.

1980. 4. 마산 가톨릭 사회복지 회관의 일을 관장 (198쪽 그리스도의 성혈흠숭수녀회)

그리스도의 성혈흠숭수녀회 (영) Adorers of the Blood of Chris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98쪽)

1834년 3월 4일 마리아 데 마티아스 (Maria de Mattias) 가 교육혜택을 받지못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이탈리아 아쿠토(Acuto) 에 개설함으로 설립된 수녀회. 1977년 9월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수녀회의 근본정신인 성혈흠숭은 '애덕 그 차체' 를 뜻하며 이웃에 대한 봉사를 통해 구원사업에 동참한다.

가톨릭 사회복지회의 일을 관장

1980. 7. 6 대구 가톨릭병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88쪽)

대구 가톨릭 병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88쪽)

대구대교구에서는 이 시대에 의료사업을 통한 사회봉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79년 3월 23일 가톨릭병원 신축을 위한 기공식을 거행한 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수녀회에서는 이 요청에 응답하여 1980년 2월 부터 한업덕 마리 아오스딩 수녀, 윤성기 토마스 수녀가 이 병원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초대원장인 이문희 주교와 부원장이며 병원 건축담당장인 젤라(Stanislao Gzella,길) 신부 및 행정처장인 스테파노 선생과 함께 병원설립의 선발대가 되어 실제적인 개원준비에 적극 협력하였다. 6월 19일에는 안옥화 쎈땅 수녀 그리고 6월 24일에 메리놀병원에서 오기옥 아나다시아 수녀가 보충파견되었다. 병원이 세워진 곳은 일명 뱀사골이라는 야산으로 병원건물도 아직은 골조공사만 이루어진 때였다. 수녀들은 간호과의 업무를 돌보기도 하고 재봉실, 세탁부, 영양실 관계 등을 맡았다. 초창기의 어설프고 어수선함 속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수녀들의 숨은 희생과 초인적인 노력으로 마침내 8월 12일 250병상 규모의 가톨릭병원 개원식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병원은 개원하였으나 아직 병원경영 자체로서는 걱정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교구민들의 기도와 많은 은인들의 돌봄과 교구병원에 대한 신자들의 아끼는 마음으로 병원은 곧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선의의 신자들의 자원봉사활동 등으로 병원은 생기를 띠었고, 병원을 찾는 환자수도 차츰 늘어났다. 10월 1일에 제2대 병원장으로 박창수(朴昌壽 요한) 신부가 취임하여 직원들을 격려하며 병원관리를 철저히 함으로써 몇 개월만에 병원운영이 본 궤도에 올라서게 되었다.

병원은 계속 발전 일로에 있었으나 병원장 박창수 신부의 중환으로 1982년 7월 7일 제3대 병원장으로 박병원(朴炳元 필립보)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고, 그해 가을 별관 병동 신축공사로 320병상, 1983년 여름에는 본관건물을 증축으로 396병상, 1985년 봄에는 별관병동 증축으로 441병상을 보유한 종합병원으로 성장해서 대구지역 사람들의 영육간의 건강에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1980. 파주군의 시몬의집과 전북 함열본당의 상지원 성모 영보 수녀회의 수녀들이 활동 (교회와 역사 70호 7쪽)

성모 영보 수녀회 (교회와 역사 70호 7쪽)

성모영보 수녀회는 한국인에 의해 한국에서 설립된 관상(觀想) 수녀회이며 반봉쇄(半封鎖) 수녀회이다. 이 수녀회의 정신은 실제로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 빈궁한 자를 돕고, 근면한 생활로 노동의 존귀함을 드러내자는 데에 있다. 예수께서 가난한 이와 병들어 신음하는 자와 더불어 생활하셨던 모습대로 그들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버림받은 사람을 위해 기도와 노동과 봉사로 정신적으로 부유해지고자 한다. 이 수녀회는 1985년 당시 가톨릭대학 교수이며 성서학자인 宣種完 라우렌시오 신부가 그 선친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 일부를 매각한 돈과 성서 번역을 위해 사육하였던 메추라기 수입을 보태 경기도 부천시에 12정보의 땅을 매입함으로써 태동되었다. 2년 후인 1960년 3월 25일 정식으로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이 수녀회의 특징은 국민학교 졸업정도의 학력이 낮은 처녀들에게도 입회를 허용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초창기에 처녀들로서는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노동과 가난 가운데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메마른 땅에 농사를 지어 수확한 감자로 주식을 삼으며, 메추라기와 젖소와 칠면조를 사육하고 미사용 포도주를 시도하는 한편 仁川에 나가 우유룰 판매하는 등 자립하고자 하였다. 흙벽돌로 지은 초라한 건물과 성당에서 생활하고 기도하면서 성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 생활을 이웃 주민들에게 증거하고자 하였다. 수녀들은 안양 성 라자로원에서 1976년부터 수녀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수용된 나병환자들을 돕고있다. 또한 파주군 광탄의 시몬의집 에서는 1980년부터 수녀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수용되어있는 폐결핵 환자들의 간호와 세탁, 식사 등 궂은 일을 비롯하여 구령사정도 돌보고 있다. 전북 함열본당 상지원에서는 60세대의 음성 나환자 간호 및 미감아 교리지도를 담당하고 있다.

1980. 서울 봉천동에 가마니촌을 설립 (994쪽 작은자매전교회)

작은자매전교회 (영) Little Missionary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93쪽)

1951년 10월 이탈리아의 쿠네오(Cuneo) 에서 가스파리노(Gasparino) 신부가 창설한 수도회. 1963년에 한국진출.예수의 생활과 같이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는 형제, 자매들의 선교단체이다. 현재 한국에는 작은 자매전교 수녀회만 진출하였는데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회 신부의 추천으로 이탈리아 모원 소속인 4명의 수녀가 1965년 부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80. 거창 나환자 마을에서 환자를 돌봄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 (영) Maryknoll Sisters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는 1912년 메리 로저스수녀에 의해 창립되었다. 창립정신은 인류에게 책임을 다하고 도움을 주고 문화적 배경과 지역적 제한 경제, 사회, 종교적인 범주를 벗어나 모든 국가간의 평화와 정의와 우정을 도모하고 나누는데 있다. 1924년 10월 메리놀회 신부들의 초청으로 평북 의주에 처음 진출하였다.

북한에서의 활동 (1926∼1942) :

1924년 부터 시작된 의주에서의 활동은 처음에는 본당 사목과 가정방문이었으나, 얼마 후 소규모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3명의 수녀를 의주에 남겨두고 1926년 수녀회 한국지부를 영유(永柔)로 옮기고 그곳에 여자기예학원을 세워 15세 전후의 소녀들에게 기술습득의 길을 열어주는 사업을 하였다. 또한 시약소와 고아원을 설치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1933년 멜시 수녀 등 3명은 신의주로 파견되어 성모회를 창설하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가정방문과 외래환자 진료소와 이동진료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1932년 메리놀회 신부의 요청으로 평양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한국여성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이 모임은 후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라는 수녀원의 창설동기가 되었다. 1935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입원실과 무료진료소를 설립하였으며 1936년 본당 사업과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또한 진남포에서는 1934년 부터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활동을 중지하고 메리놀회 수녀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해방후의 활동 (1950∼현재) :

본국에 철수했던 메리놀회 수녀들은 전쟁이 끝나자 1950년 제1진이 다시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의료사업과 전교사업을 통하여 주민들에게 봉사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1952년 제2진의 수녀들은 제차 부산에 진출하여 전쟁중인 비상시를 위하여 장기간의 의술봉사를 하여 왔으며 음식과 옷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결핵요양소와 교리학습을 위한 장기 계획도 수립하게 되었다. 휴전 후 메리놀 수녀들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956년 충북 괴산군 중평읍에 메리놀의원을 개원하여 의술치료와 보건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1960년 부산에서 가별(Gabrialla) 수녀가 신용협동조합을 처음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지금은 협동교육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1962년 부산 메리놀병원이 주한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대식 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1963년 메리놀 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은 콘로이(Conroy)수녀가 맡았으며 1967년 메리놀 병원의 관리가 부산교구로 이관되었다. 1962년 2월 인천교구 답동 본당에서의 종교활동을 돕고 학생지도 및 영어지도를 실시하여 왔으며 1967년 3월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회관에서 청소년 지도자 강습과 여성들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1963년 경기도 강화읍에 그리스도왕 의원이 설립되어 메리놀회 수녀들은 의사와 간호원으로 일하였으며 전교사업도 함께도왔다. 1969년 초 요안 서빈 수녀는 백령도에 소재한 김안드레아병원에서 간호과 책임자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74년 대한 적십자가 인수할 때까지 섬 사람의 건강과 아울러 간호보조원 교육과 훈련을 부지런히 해왔었다. 백령도에서 철수하여 본원에서 일하던 3명의 수녀들은 전남 소록도에 있는 국립병원에 자원봉사 간호원으로 활동하고 1973년 성신강림 대축일 김수환 추기경의 허락을 얻어 2명의 수녀가 그리스도께 헌신할 조그마한 단체의 조직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공업단지 근처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진료소의 간호원으로 상담자로서, 노조에서 간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 등을 맡아보게 되었다. 1976년 9월 가이에르 수녀가 서강대에서 영어를 담당하는 외에 경북 울진 진료소 활동, 부평 본당에서 종교사업과 노동자를 위한 사업활동 1979년 10월 광주의 천주의 성요한병원에서 환자가족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1980년 거창 나환자 마을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1981년 11월 부터 성남시에서 2명의 수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과 전교활동에 힘쓰고 있다.

1980. 소화의원 개원 (831쪽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영) Sisters of our Lady of perpetual Help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31쪽)

1932년 6월 27일 당시 평양교구장인 몬시뇰에 의해 창설된 방인수녀회. 1950년 12월 부산 메리놀 수녀들과 함께 메리놀 병원과 군부대 세탁일을 하면서 피난민과 고아들을 돌보았는데 이것이 현재의 성모보육원이다. 1955년 수녀원을 흑석동으로 이전하고 그 옆에 성 마리아 의원을 개원하였다. 1971년 8월에는 부인들로 구성된 성모자매회를 발족하였다. 1980년에는 경기도 용인군에 소화의원을 개설하여 영세민을 위한 진료를 시작하였다.

1981. 1. 1 마리아 수녀회 갱생원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의 창설동기는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소 신부) 가 부산 송도(지금은 남부민동) 본당주임으로 있을적이었다. 너무나 가난한 참상, 너무나 외로운 사람들의 처참한 상태를 그냥 볼 수가 없었던 소 신부는, 우선 버림받은 고아들만이라도 주님의 일꾼이 되어 돌봐 줄 사람들을 구했다. 당시 부산 교구장 최 재선 주교와 의논하여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모든 자금은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모금해다가 재단법인을 결성했다. 우선 송도 본당 한쪽 헛간 바닥에 거적을 깔고서 시작한 마리아 수녀회의 공식 창설일은 1964년 8월 1일이다. "이 어린이들 중에 하나라도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 (마태 18,5) 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과 부모가 없어 버림받는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모성애로써 봉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 등 기도 생활과 함께 복음적 실천과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창설한 수도회다. 그리하여 버림받은 어린이와 불우한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수도회다. 회원은 빈첸시오 바오로 성인의 까리따스 수녀회의 전통을 따른다. 마리아의 수녀회에서 행하는 사업의 규모는 아동복지 사업과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 고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버림을 받아서 마음과 몸이 몹시 지쳐있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는 지체부자유와 정신 박약한 가련한 어린이도 320여명이나 된다. 이들은 수녀들의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로써 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구나, 어떤 과오를 저지른다고 해도 따뜻한 사랑과 손길로써 보호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낙원이다.

의료사업인 부산의 결핵요양소와 서울의 갱생원은 시 당국의 경영난으로 믿고 넘겨 준 의료기관인데, 모두 무료치료를 베풀고 있다. 서울 갱생원 원생 중 회갑을 지낸 환자들은 서울 소년의 집 구내로 옮겨서 양로원 같이 보살피고 있다. 교육사업은 모두 수녀회가 전액 부담하되, 부산으로 집결시킨 유치부를 마치면 부산의 중학교로 보낸다. 중학교를 마치면 남자는 기계공고로 전학시키고 여자는 고입예비고사에 합격하면 학구배치에 따라 여러 일반여고로 보내어, 학비 잔액을 부담하여 통학시킨다. 공업고교 과정을 마친 남자는 노동부가 시행하는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직을 시킬 수 있고 공전으로 전학 수용시켜 무상교육의 혜택을 지속시킨다. 여자의 경우는 여고를 마치고 대입 예시 합격하면 간호전문대, 교육대, 사범계 등으로 진학시켜 무상 교육 혜택은 연장된다.

1981. 1. 6 서초동 천주교회 설립 (나눔지 1996. 봄 34쪽)

서초동 본당 (나눔지 1996. 봄 34쪽)

강남 서초동에 위치한 서초동 천주교회는 곳곳에 비닐하우스와 꽃마을 철거민들이 상주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고소득층이 지역주민의 대부분인 지역적 특징을 가지고 잇다. 일반적으로 복지 수혜의 필요성과 욕구에 비례하여 사회복지가 발전하는 데 반해 서초동 천주교회는 부유층 신자들의 높은 시혜욕구와 열정을 잘 유도·수렴하여 본당 주변 지역의 사회복지활동 뿐만 아니라 타 지역 및 비신자들까지도 대상으로 하는 폭넓은 수영으로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사회복지 활동을 펴 나가고 있다.

1981년 1월 6일에 설립된 서초동 천주교회는 초대 김유종 주임신부에서 현재 4대의 곽성민 주임신부, 신경남, 김시용 보좌신부와 성가소비녀회가 담당하고 잇다. 사목협의회 산하 10개 분과, 6개 지역 39구역, 181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신자수는 약 1만 2천 2백명에 이르고 있다.

서초동 천주교회의 사회복지활동은 사목협의회(회장 : 임한진) 산하 사회복지분과내 빈첸시오회, 소년소녀가장돕기 후원회, 나눔의 묵상회, 한마음 한몸 운동, 천주교 석문복지재단 등 5개 단체가 주축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회복지활동 내용을 보면 첫째, 1988년에 시작된 빈첸시오회는 4명의 임원진을 포함하여 약 2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후원해 주는 명예회원들은 약 160여명에 이른다. 주요 활동 내용으로는 ① 성당 관내의 불우 교우 및 노인들에 대한 쌀과 성금을 지급하는 불우 이웃 나눔 ② 극빈환자 투약 및 진료비, 의료팀 지원 등의 의료시설 지원, ③ 신망애의 집 등 4군데의 사회복지시설에 월별로, 두엄자리 등 12군데 사회 복지시설에 분기별로 일정액을 지원하는 복지시설 나눔 ④ 고등학생 11명, 중학생 9명으로 총 20명에게 수업료 전액을 지원하는 학자금 지원 ⑤ 그밖에 돈이 많이 들어 치료받거나 수술받기 어려운 극빈환자들에게 수술비의 일정금액을 본당에서 지원하고 나머지 비용은 강남성모병원 자선병동 등에 협조를 구해서 시술을 해 주고, 퇴원 후에도 사후조치의 일환으로 병이 완쾌될 때까지 본당의 레지오 봉사단들이 조를 구성하여 봉사하고 있다.

둘째, 소년소녀 가장돕기 후원회(회장 : 박남식)는 현재 확보된 6억 3천만원 정도의 기금을 가지고 불우한 소년소녀가장들이 자립할 때까지 지속적인 후원을 해 주고 있다. 1989년부터 1995년까지 총 125명의 소년소녀가장에게 약 1억 9천 정도의 후원금을 지급하였다.

셋째, 천주교복지법인 석문복지재단은 서초동 천주교회의 현석문 주보성인의 이름을 따서 설립한 것으로 소년소녀가장돕기후원회 활동자금의 집행을 담당하고 있다.

넷째, 복음의 핵심인 이웃사랑과 나눔을 묵상함으로써 신앙과 일상생활 속에서 나눔을 실천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는 나눔의 묵상회는 현재까지 26명 정도가 교육에 참가하였으며, 교육비의 50%를 본당에서 지원해 주고 있다.

이밖에 이색적인 복지 활동인「축복미 나눔」은 3대 김병일 신부가 1994년도에 새롭게 주창한 것으로 농민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하여 혼배 성사시에 화환 대신 쌀로 신혼부부를 축하해 주도록 제도화하여 그 쌀로 육아시설, 양로원, 무료급식소, 의료시설 등 사회복지시설에 94년도에 20㎏들이 196포, 95년도에 109포를 나눔하였으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다.

사회복지활동을 위한 자금은 본당 지원, 특별성금, 후원회비 모음, 기타 기탁금과 지금은 없어진 물품 판매 등으로 조성해 왔다. 곽성민 주임신부는 1996년부터 보다 많은 전신자들의 사회복지활동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기존의 사회복지 예산을 삭감한 대신 빈첸시오 명예회원 가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으며, 사순절 5주간 동안의 2차 헌금을 불우이웃 나눔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지속적인 평가를 통해 사회복지 활성화를 도모하면서 다양하고 전문적인 사회복지활동을 펼쳐 나가고 있는 서초동 천주교회의 사회복지분과를 중심으로 한 사회복지활동은 본당의 사회복지를 전담하는 기구 역할의 한정성을 뛰어 넘어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원봉사에 대한 끊임없고 식지 않는 열정이 이러한 활동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으며, 복지활동의 내면에서나 구체적 실행방법에 있어서도 전문 사회복지 기관에 못지 않는 전문성을 발휘하면서 거듭나고 있다.

1981. 4. 20 비들기 교실 개실 (나눔지 17호 10쪽) - 1983. 1. 15발행

비들기 교실 (나눔지 17호 10쪽) - 1983. 1. 15발행

비들기 교실은 만 18-25세의 손을 사용할 수 있는 지체부자유자들을 1-2년간 재단, 미싱, 봉재, 교리, 음악, 미술 등 전 과목을 무료로 지도하여주며, 기술연마에 앞서 인화단결에 교육중심을 두어 화목한 사랑의 교실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지난 81년 4월 20일에 개실되어 제1기 수료생을 이미 배출하였다. 비들기 교실의 교사진들은 모두 각 방면의 1급교사로서 이 교실은 후원회의 성금과 희사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1981. 5. 2 엠마누엘 장애 어린이집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엠마누엘 장애 어린이집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 자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이 세상에 사랑의 신비를 갖춘생명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아픔으로 일찍 고달픔을 배운 어린이들을 찾아 정성스럽게 보살피며 그들에게 하느님의 더 높은 희망과 삶의 보람을 찾아주고자 1981년 5월 2일 인천광역시 부평구에서 황해도 연백본당 주임사제 김영식 베드로 신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엠마누엘 어린이집은 장애아동(정신지체, 언어지진, 자폐, 정서불안) 들의 조기교육기관이다. 장애자들은 사회적 편견으로 이중의 고통과 불행을 겪는다. 김영식(베드로) 신부는 황해도 연안에서 1947년 10월 7일 무의무탁한 고아들을 가정적인 보육방법으로 육성하고자 연백성모원을 설립하였다. 성모자애병원은 1955년 6월 27일 설립되어 전쟁고아들과 주민들에게 봉사해오다가 1963년 4월 병원과 연백성모원이 한국순교복자 수녀회로 양도되었으며 1978년 4월에는 정부의 소수수용기관 통폐합 정책으로 대부분의 고아들을 자립시키고 나머지 어린이들은 혜성보육원에 통합되었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이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박루시아 수녀와 전난향(데레사) 수녀를 일본에 파견하여 가마쿠라에 소재한 성모방문회에서 운영하는 심신장애자 교육원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와 전적으로 가난하여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온 장애아동 7명으로 시작되었다. 아동들의 장애상태는 정신박약, 자폐증, 다운증후군, 정서장애 아동들이었다. 정신적, 신체적인 결함을 갖고 자유룰 누리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애를 가진 아동에 대한 조기교육인 것이다. 이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엠마누엘 어린이집 조기교육원을 설립하여 장애별 아동들의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여 사회의 한 일원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며, 그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 더욱 희망찬 삶을 찾아주고자 개원을 하게된 것이다.

1982년 2월 물리치료실을 신설하고 재활의학과 의사 및 물리치료사가 정기치료를 시작하였다. 1983년 3월 제2대 원장으로 최영숙(바오로) 수녀가 부임하면서 특수조기교육원으로 시설을 변경하였다. 언어치료와 유아반을 신설하고 몬테소리 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의 범위를 넓혔다. 1987년 2월 박병례(루시아) 수녀가 캐나다에서 특수교육 연수를 받고 제3대 원장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독일 까리따스의 원조로 1988년 1월에 엠마누엘 어린이집 기공식을 갖게되었으며 1989년 7월 5일 준공식을 하였다. 시설은 수치료실, 대근육실, 생활훈련실, 시청각실, 교육실, 음악치료실, 언어치료실, 개별지도실, 양호실, 자료도서실, 강당, 교무실, 사무실, 원장실, 탈의실, 식당, 주방, 자원봉사자실 등이며 1998년 현재 장애아동은 3세에서 8세까지 52명의 어린이가 교육을 받고 있으며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장애아동을 위하여 매달 무료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981. 6. 30 사랑의 선교 수녀회 한국에 진출 (교회와 역사 278호 19쪽)

사랑의 선교 수녀회 (교회와 역사 278호 19쪽)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설립한 마더 데레사 수녀의 세속이름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ojaxhu) 이다.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에서 태어난 그녀는 신심 깊은 알바니아계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아 일찍이 예수회 선교사가 지도하는 본당의 청소년 단체인 신심회에 가입하는 등 신앙 생활에 열심이었다. 어느날 인도 벵골지방에서 예수회 선교사가 보내 온 편지를 신심회 회원들과 돌려 가며 읽은 그녀는 큰 감화를 받아 1928년 11월 29일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는 로테로 수녀회(동정성모회) 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6일 켈커타에 도착하여 1931년 5월 24일에 '예수의 작은 꽃'으로 알려진 리지외의 데레사를 수도명으로 택하였다.

전체 인구의 30%가 절대 빈곤 계층인 인도는 힌두이즘이라는 종교 전통과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 제도인 카스트로 인해 그러한 사회적 현실이 당연시되어 왔으며,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시도와 노력이 부족하였다. 켈커타 거리에는 불평등과 사회적 무관심으로 연일 수많은 빈민들이 굶주리거나 질병으로 고통당하다 죽어 갔다. 20년 가까이 그들과 같은 지역에서 생활해 왔던 데레사 수녀는 자신이 재직 중인 고등학교의 상황과는 너무나 다른 인도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점차 빈민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조금씩 키워가게 되었다. 그러던 1946년 9월 10일, 그녀는 피정차 히말라야 산 기슭의 다르질링으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신 주님을 섬기고 따르라는 '부르심 안에서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일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강한 확신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자신의 원의를 총원장 수녀에게 밝혔으며, 그로브터 1년반 만인 1948년 4월 12일에 재속 수녀로서 빈민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해도 된다는 교황청의 허락을 얻어냈다.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 가시기 직전에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목마르다" (요한 19,28)에 근원을 두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목마름을 축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그분을 간호애 주고 먹을 것을 주며 옷을 입혀 주고 그분을 방문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란 단순히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사람,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태아, 인종 차별을 당하는 사람, 알코올 및 마약 중독자, 삶의 희망과 신앙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 성령의 힘 안에서 희망을 갖지 못한 모든 이들을 뜻한다.

"가진 것이 많으면 베풀 것이 없다" 고 했던 마더 데레사 수녀는 그 어떠한 富도 피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회원들 역시 고통이 뒤따르지 않는 활동은 사회사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예수의 인류를 위한 끝없는 목마름을 채워 드리기 위해 가장 가난한 모습 속에 투영되어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가장 완전한 신뢰와 자아 포기, 그리고 항상 기뻐하는 정신으로 함께 나누고 있다.

한국 진출과 현황

1981년 5월 마더 데레사 수녀의 방한을 계기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정식으로 초청함에 따라 같은 해 6월 30일 세명의 인도 회원이 입국하였다. 원래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본부에서는 9월경에 회원을 파견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하였다가 일본·대만과 동시 진출이 결정되면서 당초 계획보다 3개월 앞당겨 회원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봉천동 본당 관할 봉천 1동 공소의 사제관에서 2개월동안 생활하다가 같은 해 8월 21일 봉천 1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용산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휴양의 집'으로 거처를 임시 옮겼으며, 1981년 9월에는 휴양의 집 내에 평화의 집(양로원)을 마련하여 20여 명의 무의탁 할머니들을 돌보면서 본격적인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2년 1월에는 11명의 지원자가 입회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9명이 같은 해 6월 수련을 위해 필리핀으로 떠났다. 그후 1983년 4월에 경기도 안양시 안양 2동에 본원을 건립하였으나 안양시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수녀원 부지 가운데 일부가 편입됨에 따라 1993년 10월 8일 안산시 고잔동 656-25번지에 수녀원을 완공하고 이듬해 5월 10일 본원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1985년 6월 14일에는 인천시 만수동에 첫 번째 분원을 마련하고 온정의 집 (양로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현재 안산과 인천의 양로원에서 각각 40여명의 할머니 들을 돌보는 외에 시립병원을 방문하여 임종 직전의 무의탁 행려 환자들을 데려와 임종을 지키고 있으며 극빈자 가정도 방문하여 봉사하고 있다.

한국 진출 17년째를 맞이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1998년 5월 현재 종신 서원자 9명, 유기서원자 2명 등 총 11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데 지원자 부족으로 사도직 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업은 그분의 방법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기에 수녀회를 알리기 위한 특별한 홍보 활동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 최근 한국의 수도회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인 거의 유사한 형태의 사도직 활동으로 인해 획일화되고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이때, 오직 자신들이 봉사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원자로 그 섬김의 생활이 널리 퍼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거절당하고 버림받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체험할 때, 그리고 자기들을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상대방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 전에 먼저 함께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기꺼이 함께 있을 때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사랑이 참되다면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려 들 것입니다."

1981. 10. 7 성모 어린이집 설립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25년사 382쪽)

성모 어린이 집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25년사 382쪽)

1981년 세계 신체 장애자의 해를 맞아 설립된 성모 어린이 집은 뇌성마비아들을 조기 발견하여 신체 기능을 회복시키는 물리 치료 및 탁아 사업을 하고 있다.

성모 어린이 집의 특징은 치료와 교육을 병행하는 시설을 갖추고 5세까지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지적, 감각, 운동, 시각 등의 효과를 이용하여 물리 치료를 하는 것이다.

물리치료는 Vojita방법으로 1980년 연세대학교에서 이론에 대한 강의가 있었고 1981년 9월 3명의 독일인 물리치료사들이 한국에 나와 실습을 시킨 최근에 도입된 치료법이다.

개원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성모 어린이 집에는 십여 명의 어린이들이 치료를 받고 있으며 좋은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윤 알마 수녀는 물리 치료와 전반적인 사무 관계를 담당하고 있으며 길 발렌티나 수녀는 어린이들의 식생활과 건강을 돌보며 장애자 어린이들의 필요에 응하고 있다.

1981. 부평 성모자애병원부설 심신장애자조기교육원 설립 (1260쪽 한국순교복자수녀회)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영) Sisters of the Blessed Korean Martyrs (1260쪽)

1946년 4월 21일 방유룡 신부에 의해 창설된 방인 수녀회.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한국 순교 선열들의 순교정신으로 생활하며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창설되었고 1951년 12월 교황창의 인가를 받았다. 원래 1930년대부터 한국인에 의한 수녀회를 창설하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정책으로 실패하고 광복된 이듬해 개성 동홍동본당에서 창설회원 윤병현, 홍은순 회원과 함께 발족회를 가지면서 점성정신(點性精神), 침묵대월(沈默對越) 등 한국적인 수덕론을 제창하였다. 창설되던 해 10월에는 6명의 회원이 더 입회하였고, 소착복식도 처음 행해졌다. 한편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양재학원을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개성에 단독주택을 구입하여 본격적인 수도생활이 시작되었다. 6.25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서울 청파동으로 본원을 이전하였으나 곧 피난길에 올랐다가 1952년 12월이 되어서야 다시 서울에 정착하여 첫 착복식을 갖게 되었다. 그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련지도를 받기도 하면서 1954년 12월 5명이 첫서원을 하였다. 1957년 9월에는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성모성심병원을 인수하여 운영케 되었다. 1960년에는 충청남도 천안에 복자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3년에는 밀양성모성심병원에 이어 부평의 성모자애병원을 인수하고, 1967년에는 교포들을 위하여 일본 오오사까에 분원을 설치하였다.

1981. 지체부자유자를 위한 특수학교인 은혜국민학교 개교 (713쪽 시튼 까리따스수녀회)

시튼 까리타스수녀회 (영) Seton Sisters of Charity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13쪽)

1870년 성녀 엘리자벳 앤 시튼(Elizabeth ann Seton) 수녀에 의해 미국에서 창설된 수녀회. 1960년 한국 진출.

겸허와 사랑, 소박을 하나로 구체화 시킬 수 있는 교육사업을 중요한 사업으로 하고 있다. 당시 광주교구장 헨리(Hennry) 주교의 초청으로 처음 목포에 4명의 수녀가 내한하였다. 1961년 강진의 금릉중학교를 인수하기 위해 강진으로 이전하여 1962년 3월 금릉여자중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1965년 한국인 첫 지원자를 받았고, 1972년 수련소가 한국내에 설치되었다. 1973년 서울 성북동으로 진출하였다. 1979년 2월 목포 연동본당으로 처음 본당활동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11월 광주 근교에 수련원을 증축하였다. 1981년에는 지체부자유자를 위한 특수학교인 은혜국민학교를 개교하였다. 현재,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에 소재한 본원을 비롯하여 4개의 분원 및 특수학교 1개교, 중 고등학교 1개교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1. 갈바리 호스피스 개원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갈바리 호스피스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 1998. 3. 31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답신에 의거

강릉에서 사도직을 통하여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실현하기 위하여 호스피스 병동을 개설하여 특히 가난하고 외롭게 죽어가는 이들을 위하여 1981년에 설립하였다. 1998년 현재 12병상의 말기환자의 입원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말기환자를 가정방문하여 치료하고 있다. 1989년 폐원 되었다가 1996년 6월에 다시 재 개원 하였으며 갈바리 산 위에서 서 계셨던 마리아의 어머니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고 죽어가는 죄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 함으로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1981. 지체부자유자를 위한 물리치료실 개설 (366쪽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영) Little Company of Mary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6쪽)

1877년 7월 2일 메리 포터(Mary Poter) 수녀에 의해서 영국에서 창설된 수녀회. 1963년 11월 23일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낡은 공장터에서 시작된 초창기에는 주로 임종중에있는 영혼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하여 가난한 형제, 자매들과 함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을 기본정신으로 하여 1886년 5월 교황청의 정식인가를 받았다. 1963년 당시 춘천교구장 퀸란(Thomas Quinlan) 주교의 요청으로 호주관구 소속 마크 메이어(Sr. Mark Maher) 수녀 외 2명의 수녀가 내한하여 강원도 지방에 정착,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 3월 15일 강릉 갈바리의원을 개원하여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였고, 1973년 11월 20일에는 포천 평화의 모친의원을 개원한 뒤 1980년에는 치과를, 1981년에는 지체부자유자를 위한 물리치료시설을 개설하였다. 1974년 11월 15일에는 서울분원을 신설하고, 1975년 현 서울 후암동으로 이전하였다.

1981. 안동교구에서부터 다미안 피부과 의원을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에 위탁운영 위임 (교회와 역사 244호 15쪽) - 1995. 9. 25발행

다미안 피부과 의원 (교회와 역사 244호 15쪽) - 1995. 9. 25발행

영주에 있는 다미안 피부과 의원은 6·25 동란 때 간호 장교로 참전하였던 벨기에인 데레사 캄비에(Therese Cambier)여사가 안동교구 내에서 구라 사업을 목적으로 다미안 재단 한국 지부를 설립하고 경북 영주시 상망동259-1번지에 진료소와 병동을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 1981년 부터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에서 안동교구로 부터 운영과 관리를 위임받아 운영하고 있다. 의료사업으로는 신환자 조기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외래 진료, 4개 군, 2개의 시 800여 나환자들을 위한 이동 진료 및 단기 입원 치료와 재활치료를 하고 있다. 또한 교육사업은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의 주된 내용으로서 신앙 교육의 차원에서 6개 정착 마을의 주민들과 입원환자들을 위해 교리교육, 말씀의 전례, 피정을 지도하고 있고 매년 정착 마을 자녀들을 위해 여름 산간학교를 개최하고 있으며 영농 교육을 위해 강사를 초청하고 기타 상담 및 가정 방문도 하고 있다. 또한 사회사업 차원에서 정착 마을 자녀들을 위한 장학 사업과 학자금, 생계비, 자립금, 교육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초기에는 골롬반 수녀회와 함께, 지금은 성모 영보 수녀회와 함께 환우들의 전인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나병 퇴치 사업도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여 향후 20-30년이면 구라 사업 종결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구라사업의 마지막 단계인 불구 노약자 시설 설립의 필요성에 따라 갈 곳 없는 노인 나환우들을 위한 양로원과 외래 진료등을 다미안 병원 안에 건립하여 1990년 4월 27일 두봉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시에 거행되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외국 원조에 의존하였던 구라사업 기관들은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되었지만 후원회가 결성되어 후원금으로 이를 충당하고 있다.

1982. 3. 1 애덕의 집 개원 (새벽지 73호 21쪽)

애덕의 집 (새벽지 73호 21쪽) - 1982. 4. 1발행

1982년 3월 1일 둔총동에 소재를 둔 애덕의 집에서 많은 본당 신자들과 후원자들을 모시고 본당신부(안상무)의 집전으로 축성미사가 거행되었다. 애덕의 집은 김근영씨의 노고와 희생으로 창설되었으며 행려자와 신체장애자 25명을 보호할 수 있는 조그마한 한옥집이 본당 신자들과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개설되었다. 1982년 현재 8명의 무의무탁하신 분들이 생활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좀더 많은 신체장애자와 행려자들을 보호할 계획이다.

1982. 3. 15 갈릴리 집 설립 (예수성심시녀회의 복지시설)

갈릴리 집 (예수성심시녀회의 복지시설) - 1998. 5. 15 김마리요셉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갈릴리 집은 발달 장애 아동의 조기교육을 위하여 1982년 미국의 메리놀회 안 예도 신부(Rev. Edward Wheland M.M)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발달이 늦어진 유치원 전의 아동들에게 특수교육을 실시하여 그들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동시에 현재 가지고 있는 장애정도를 줄이며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장애를 미리 예방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대상 아동은 정신지체, 다운 증후군, 언어장애, 자폐증, 학습장애아, 과잉행동등 발달 장애아들로서 사회적응훈련, 신변처리, 인지, 언어, 운동성 등을 영역별로 나누어 지도하는 것을 주요 교육내용으로 하고 있다. 프로그램은 portage Guide to Early Education을 기본으로 한다. 입학은 교육받기를 희망하는 부모님들과의 상담을 통하여 가능하며, 공·사립 특수학교의 유치부 입학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보통 1∼2년간 지도한다. 갈릴리 집의 정신은 장애아도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소중한 존재이며 사랑받을 수 있는 고유한 개성과 인격을 지니고 있음으로 이 어린이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충실히 기초를 닦아주고자 하며 그리하여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됨이 없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활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있다.

1982. 4 밀알회에서 정신지체아 및 보호자 상담 시작 (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밀알재활원 (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 1998. 8. 25일 밀알재활원의 답신에 의거

장애인에게 장애를 최대한 극복 할 수 있도록 제반, 재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장애인의 사회통합 및 사회복귀를 촉지하고,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자 1989년 서울 후원회를 조직하여 배종호(도마) 신부가 설립하였다. 대지 2,183평중에 364평이 본건물이고 작업장 및 관사가 150평이다. 밀알재활원에서 실행중인 작업은 다음과 같다.

직업재활사업 - 기초학습지도, 대인관계훈련, 사회생활훈련, 현장적응훈련

사회적응 프로그램 - 다양한 주변환경의 체험을 통하여 지역사회 내에서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는 능력 배양

교육 프로그램 - 신변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는 기능을 기르고 단체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습관을 기름

건강증진활동 - 일상생활 속에서 체력단련의 기회를 도모하고 운동을 통하여 서로간의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여 서로의 이해와 수용의 폭을 넓힘

여가활동 - 일상적인 집단생활에서의 분위기를 바꿔주고 야외활동을 통하여 자연환경속에서 다양한 학습의 기회를 제공

앞으로는 연장장애인 자립생활을 위한 공동 생활가정(GROUP HOME)을 운영할 예정이며 밀알재활원의 입소대상은 강원도내 거주하는 18세 이상 30세 미만의 정신지체인, 생활보호 대상자, 읍·면·동사무소 또는 시·군 사회복지과에 의뢰하면 입소할 수 있다.

밀알재활원은 지적능력과 사회적응 능력의 자체로 스스로 삶의 개발이 어려운 사람들의 삶 터가 되며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임을 서로 믿으며 장애를 극복하려는 굳은 의지들이 모인 소중한 공동체이다.

1982. 4 서울, 순천 SOS 어린이 마을 설립

서울 SOS 어린이 마을 - 1998. 4월 서울 SOS 어린이 마을의 답신에 의거

SOS 어린이 마을이 한국땅에 설립된지 33년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임스트에 첫 SOS 어린이 마을이 세워진 후 유럽 외의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대구에 SOS 어린이 마을이 설립되었다. 1982년 설립된 서울 마을은 16명의 어머니들이 16가정을 꾸려오고 있다. SOS 어린이 마을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한 생애를 바치는 거룩한 사랑으로 인위적으로 맺어진 아이들을 형제, 자매로 키우며 하루 24시간 365일을 자기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만 전념한다. 마을에 오는 어린이들은 어린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가정을 잃고 주위로부터도 소외되어 버림을 받아야 했던 아픔과 상처를 지닌 체 마을 식구가 된다. 98년 현재 서울마을에는 149명의 아동들이 자신의 SOS 어머니와 새로운 형제, 자매를 만나 잃어버렸던 가족의 사랑과 보금자리를 찾아 생활하고 있다. 중고생 남학생들을 위한 집으로 기숙사3동과 그 후에 자립을 돕기 위한 자립관 2동이 마련되어 있고 헤르만 그마이너의 사회복지관에서는 유치원을 운영하여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SOS 마을의 모습을 엮고 있다. 모든 어린이들은 아름답고 밝은 미래를 여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며 소망이다. SOS (Save Our Souls)어린이 마을은 소외되고 아픈상처를 안고 마을로 오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심리와 정서를 치유해 주어 차별 없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찾아주며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고 어린이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을 되찾아 주어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시켜 준다. 나아가서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사회안에 살면서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자기자신을 책임지며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성장하게 도와준다.

1982. 10 익산 남촌 마을에 나환우 정착 생활 시작 (교회와 역사 242호 11쪽) - 1995. 7. 25발행

익산 남촌 마을 (교회와 역사 242호 11쪽) - 1995. 7. 25발행

1974년 소록도에서 가톨릭 신자 7만명이 익산 남촌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형성된 이 마을에 회원들이 파견된 때는 1982년 10월 부터이다. 익산 마을의 경우 당시 주위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활발히 활동하였기 때문에 천주교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으며 신자 세대는 정착촌 중에서도 극심한 가난과 소외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인근 본당들의 도움이 늘어났고 회원들이 나환우들의 신앙 및 생활 지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나환우 가족들의 생활 수준도 향상되었다. 1983년 3월 부터는 유아원도 개설 운영함으로써 나환우 2세들의 바른 성장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1982. 12. 8 마리아의 집 설립 (예수성심시녀회)

마리아의 집 (예수성심시녀회) - 1998. 5. 27일 예수성심시녀회의 답신에 의거

무의 무탁한 18세 이상의 성인 여자 지체장애인으로서 재활이 가능한자를 위한 마리아의 집은 1982년 경북 포항시 남구에서 설립되었다. 이곳에서는 신앙생활 및 정서교육, 의료재활, 직업재활의 사업을 하고 있다.

1982. 12. 17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을 서울특별시에서 설립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 1998. 6. 11일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기획실장 정진모님의 답신에 의거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에 위치한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은 상담, 치료, 교육 및 직업훈련 등을 통하여 장애인들의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고 그 기능을 원할히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복지이념을 구현하고자 설립되었다.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의 관훈은 "마음을 자유롭게, 능력을 당당하게, 인생을 소중하게"이며 복지회관의 이용대상은 지체, 정신지체, 청각 언어 및 정서 장애인 등 으로 시각장애와 정신질환은 예외이다. 특전은 생활보호 대상자는 치료, 교육, 훈련비 등 이용료가 면제되고 영세가정을 상담 후 이용료가 면제된다.

1998년 현재 시설현황은 대지 14,463㎡에 본관동, 직업훈련장, 보호작업장, 리포츠 센터가 있으며 복지관은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에서 위탁운영하고 있다.

1982. 12. 7 장애자 종합 복지관 개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25년사 372쪽)

장애자 종합 복지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25년사 372쪽)

서울 특별시는 1981년 12월 1일 강동구 명일동 5번지 5,000평의 부지 위에 장애자를 위한 종합 복지관을 설립하고 1982년 7월 완공 단계에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 운영을 위탁해 왔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는 장애자를 위한 특수 사도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1982년 8월 24일자로 곽요안나 수녀, 염보나벤뚜라 수녀, 윤알마 수녀, 신마리데레사 수녀를 파견하여 동년 11월 1일자로 정니꼴라오 수녀를 추가 파견하여 12월 17일 개관하였다.

장애자 복지관은 장애자의 재활을 목적으로 운영되며 교육 내용은 상담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적응 훈련과 도자기, 수예, 목공예의 기술 습득, 물리 치료를 통한 신체 기능 회복을 원칙으로 하며 대상은 지체, 정박, 언어, 청각 장애자들이고 일일 수용능력은 120명 내외다.

시설을 살펴보면 상담실, 물리 치료실, 작업 훈련실, 오락실, 기도실 등 다양한 설비를 갖추고 있다. 수녀들은 전체 운영과 진료 및 상담 교육을 통해 사회 복음화를 목적으로 일하고 있다.

1982. 파티마 결핵 요양원은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로 이양 - 1998. 9. 3 파티마 결핵요양원의 오세레나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파티마 결핵 요양원 - 1998. 9. 3 파티마 결핵요양원의 오세레나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이시대와 지역사회의 요청에 따라 의료를 통한 사도직 수행과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으며 이와 같은 사도직 수행을 통해서는 지역사회의 발전과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키 위하여 1975년 9월 26일에 설립된 파티마 결핵 요양원은 저소득층 결핵환자의 입원치료 및 요양을 목적으로 경상북도 칠곡군에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 왕 레지날도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당시는 66병상의 의원 규모로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의사와 방사선기사와 임상병리사가 각 1명씩 주 1회 파견되었으며 요양원의 운영은 대구 파티마 병원의 수입 및 수도원의 예산으로 운영되었다.

故 왕 레지날도 신부가 선교활동 중에 결핵에 감염되었으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의 어려움을 보고 그들을 치료하고 요양시킬 요양원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설립케 되었다.

1982년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로 요양원은 이양되었고 1992년 7월에는 결핵환자수의 감소와 의료보험으로 인한 입원 환자수가 감소하여 폐원하게 되었다.

1983. 2. 7 애기들의 집 개설 (나눔지 18호) - 1983. 3. 15발행

애기들의 집 (나눔지 18호 16쪽) - 1983. 3. 15발행

지난 1983년 2월 7일 난지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유아들을 위한 애기들의 집이 개설되었다. 명동본당 주임신부(김수창)와 가톨릭 사회복지회 지도신부(최선웅)의 공동 후원으로 지난 해 11월 부터 준비작업을 거쳐 시작된 이 사업은 주민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불어 넣어주며 주민들과 함께 이웃사랑의 실천을 목적으로 하여 맞벌이 부부들의 자녀를 보호하며 정서생활을 통한 조기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대지 30평에 건평 8평의 판자집을 개조하여 만든 애기들의 집은 만2세-5세의 유아들로써 1983년 현재 16명의 유아들이 2명의 교사에 의해 탁아보호와 지도를 받고 있으며 이 외에 지역 주민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전교사업과 청소년 교육사업, 지역주민 조직사업, 사회복지회 상담실과 연결된 주민 상담사업등을 펼쳐 나갈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1983. 7. 1 늘 푸른나무 개설 (나눔지 88호 2쪽) - 1986. 3. 8발행

늘 푸른나무 (나눔지 88호 2쪽) - 1986. 3. 8발행

정신지체 장애자들의 기술교육을 위하여 1983년 7월 1일에 문을 연 사회복지회 산하단체인 '늘 푸른나무'가 늘어나는 장애자들의 수용과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84년 3월 1일 수유3동에서 마포구 대흥동에 있는 새교육장으로 옮기었다. '늘 푸른나무'는 지능지수 40이상의 훈련 가능한 정신지체 장애자중 18세이상 남자들에게 목공예 교육을 통해 잠재능력을 개발하고 사회성을 높이기 위한 훈련등을 하고있다.

1983. 9. 15 성 라자로 마을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파견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86쪽)

성 라자로 마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86쪽)

성 라자로 마을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채 불구의 몸으로 유랑하는 나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이 땅에서 나병을 영구히 퇴치하려는 목적으로 조지 캐롤(George Carroll) 몬시뇰에 의해 1950년 6월 2일 문을 열었다. 현재 이곳에는 음성나환자로 이루어진 자활주민 235명(79세대)과 양성·불구·보호 환자 110명(남 58, 여 52명)이 모여 살고 있으며, 나환자연합회와 국립나병연구소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이 마을에 수녀를 파견한 것은 성 라자로 마을에 1983년에 피정의 집 '아론의 집'이 완공되자 이경재 알렉살델 신부가 그 관리를 수녀원에 위임해 옴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1983년 9월 15일, 양명숙 세라피나 수녀, 진말돌 프란치스까 수녀가 아론의 집 담당으로, 유국향 로마나 수녀가 유아원 개설 준비 담당으로 파견되어 설립하였다. 이어 정인순 이레나 수녀가 경리 담당으로, 양희진 아숨다 수녀가 전교사목 담당으로 파견되었다. 유아원은 개설이 어려워 중단되었고 1985년 1월에는 성 라자로 마을에서 환자 간호를 담당하던 성모영보수녀회가 떠나가 이 분야의 일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맡게 되었다.

이 지원은 양성나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봉사의 특수성 때문에 원칙적으로 종신서원수녀만을 파견하고 있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부숴지고 찢겨진 나환자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위로가 되어주고 있다. 또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각계 각층에 불러 일으키고 형제적 사랑의 나눔을 위해 수시로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들과 원생들의 기교가 되어 주며, 희생과 고통의 그리스도 신비체를 몸소 체험함으로써 힘든 봉사 속에서도 큰 기쁨으로 나날을 봉헌하고 있다.

1983. 9. 30 지산 자활원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69쪽)

지산자활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69쪽)

지산자활원은 메리놀 수녀회가 사회에서 소외당해온 장애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재봉기술을 가르쳐 다시 사회에 나가 자립하도록 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장애자 복지시설이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이곳에서 봉사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9월 28일이다. 그간 메리놀 수녀회에서 맡아온 자활원의 관리운영을 위탁받아 최금순 베로니까 수녀와 이사순 크리스티나 수녀를 이곳에 파견하였다. 이곳 자활원의 초기 지원생활은 물질적으로는 모든 면에서 많이 부족하였지만 하느님께서 더 큰 사랑과 은총으로 축복해 주심을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자활원은 여러 가지로 변모하였고 많는 지원수녀들의 나눔으로 지금은 경제적으로 조금씩 안정되어 간다. 한국외방선교수녀회 예비수녀들이 청소를 도와주고 있으며, 이웃들은 여럭 가지 생활용품을 도와주고 있다. 이곳 지원수녀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나눔이 더욱 풍요롭다는 것을 느끼며 많은 것에 감사하며 생활하고 있다.

1983. 12 고아원인 '소년의 집' 운영 (1132쪽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수도회)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수도회 (영) Hospitaler Brothers of St. John God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132쪽)

1593년 포루투갈의 천주의 성 요한에 의하여 창설된 수도회. 1958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광주교구의 헨리(Henry) 주교의 요청으로 애란관구 소속 5명의 수사가 처음으로 내한하여 정착한 뒤 활동을 개시하여 '천주의 성 요한 의원' 을 개원하였다. 이 지방의 가난한 주민들과 노동자계급의 의료요구에 응하게 되었다. 1971년에는 광주시 변두리에 걸인수용소인 갱생의원을 설치하는 한편 그 안에 정신과 병실을 설치하여 한정된 수의 환자들에게 획기적인 치료방법을 시도하였다. 1973년에는 '천주의 성 요한의원' 내에 정신과 외래를, 1980년에는 정신과 입원실을 개설하여 정신질환 치료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울러 정신과 간호원 훈련 등 의료교육사업 및 '소년의 집' 이라는 고아원도 경영하고 있다.

1984. 2 부지를 마련하여 '사랑의 집' 신축공사 (프란치스꼬 전교봉사 수녀회의 복지시설)

사랑의 집 (프란치스꼬 전교봉사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9. 3 사랑의 집 답신에 의거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이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 18-19) 는 성서말씀에 입각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가난하고 병들어 소외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시설에서도 가정과 같은 안정되고 따뜻한 사랑안에서의 노후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함을 목적으로 하여 1984년 7월 6일에 설립되었다.

노인 요양원 사랑의 집을 운영하는 단체는 프란치스꼬 전교봉사 수녀회이며 이곳에서는 65세 미만부터 80세 이상의 할머니 할아버지 50분이 생활하고 계신다. 사랑의 집에서 시행하고 있는 주요사업은 다음과 같다.

① 노인 간호와 치료사업 - 의사의 처방에 따른 약투여, 재활운동, 물리치료

② 노인의 오락 프로그램 - 생활체조시간, 노래방, 민속놀이, 생일잔치

③ 노인의 상담사업 - 말벗 등으로 할머니의 대화를 듣고 요구를 나눔

④ 호스피스 간호 - 말기환자나 임종이 가까운 노인께 안정을 주는 영적 간호

⑤ 일상적인 서비스사업 - 와상노인의 욕창예방 등, 식사, 대변, 목욕 서비스

12명의 직원과 천주교 레지오 단체에서 주 2회 정규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직원들의 업무분담과 주말을 활용하여 고교생, 대학생, 일반 자원봉사자들이 지역사회의 관심사로 활동하고 있다.

1984. 3 서교본당 사회복지 후원회 조직 (나눔지 43호 4쪽) - 1985. 4. 20발행

서교본당 사회복지 후원회 (나눔지 43호 4쪽) - 1985. 4. 20발행

'형제적 사랑과 복음적 청빈속에 가난하고 약한 이들과 함께있는 교회'를 위해서 1984년 3월 사회복지 후원회를 서교본당에서 조직하여 본당지역 사회복지를 위하여 봉사활동을 하고있다. 후원회원 모집과 기금확보, 본당 교우들에게 불우한 이웃을 물질적이고 정신적으로 도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사랑의 나눔 정신을 계몽하는데 중점을 둔다.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 사랑의 고리(신체 장애자), 사랑의 선교회(삼선교), 은퇴신부등을 방문하여 후원금 위문품을 전달하며 본당지역내 가난한 교우, 불우한 상가집, 수재민, 노인들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서 믿음의 순교자가 되었으니 300년대의 우리교회는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눔으로서 새 생명을 찾도록 증거할 수 있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는 것이다.

1984. 4 '안내양 교양센타'를 근로 청소년들을 위한 '쥴리의 집'으로 변경 운영 (교회와 역사 226호 18쪽) - 1994. 3. 25 발행

안내양 교양 센타 (교회와 역사 226호 18쪽) - 1994. 3. 25 발행

1969년 당시 버스 운송 사업은 주식회사 제도가 아닌 개인 사업이므로 안내양들의 대부분은 차주의 고용인으로서 그집에 더부살이를 하거나 3∼4명이 함께 자취를 하는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용주들의 엄한 감시와 비협조적인 태도, 안내양 자신들의 심리적 저조 상태 등 이러한 여건 속에 그들을 한곳에 모은다는 것은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난관을 뚫고 노틀담 수녀회의 수녀들은 서울 9번 버스 종점인 수유리를 방문하여 80여명의 안내양들을 대상으로 어린이 옷 만들기 등 여성의 기본적인 가사일 등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 12월 25일 수유리에 있는 안내양 기숙사에서 신자이면서 냉담 중이던 안내양들에게 고백성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함과 동시에 뜻깊은 성탄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 이듬해인 1971년 12월 22일 KBS방송국에서는 수녀회에서 펼치는 안내양 교육에 대한 관심을 갖고 마리아 알렉산드라 수녀와 몇 명의 안내양들이 참석하여 대담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게 되었고 이러한 기회로 사회가 안내양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버스 안내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더불어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한 안내양들은 긍지를 지닐 수 있게 되었으며 1979년 3월 13일 비번인 안내양들이 30명씩 각기 다른 곳에서 자유로이 모여와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생활하고 가는 '안내양 교양 센타'의 발족을 보았다. 종전까지는 9번 버스 안내양들의 지도를 회사로 직접 나가서 하였는데 이때부터 수녀원의 한 건물을 교육 장소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0여명의 안내양들과 회사의 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내양 교양 센타(현 쥴리의 집)를 개원하였다. 직접적으로 연 2회, 3∼4개월 기간으로 안내양들을 상대로 실시하는 교양교육과 간접적으로는 자동차 노동조합 후원으로 근로자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일, 부녀 부장들을 교육하는 일들로 안내양들의 처우 개선 및 지위 향상은 물론 그들을 위한 사회와 국가의 관심과 배려에 주요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그러나 1982년 시 행정의 결정에 따른 버스 운송 자율화와 더불어 안내양 승차 제도가 폐지되자 1984년 4월 부터 종전의 '안내양 교양 센타'를 '쥴리학원'으로 개명하고 방송 통신 고등학교 과정 이수를 돕는 사도직을 시작하여 이 과정을 밟는 근로 청소년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다.

1984. 5. 5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정신적, 물질적으로 좌절된 이들이 삶의 의욕과 자립의 가능성을 실천으로 확인하고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함께 살아가는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1984년 5월 5일 김몽은 신부가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에 설립하였다. 그 후 1995년 4월 27일 김몽은 신부는 엠마우스를 재단법인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증여하고 운영권을 이양하였다.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은 1976년 김몽은 신부가 옥수동에 저소득 근로여성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여 돌보기 시작한데서부터 출발한다. 김몽은 신부는 옥수동 땅을 매각하고 또 일본 엠마우스와 프랑스의 국제엠마우스의 도움으로 마포구 하수동(현재 상수동)의 부지 101평을 매입하여 지하 1층, 지상 2층 연건평 143평에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을 건립하였으며 1984년 5월 5일에 축성식을 가졌다. 엠마우스 회관의 설립목적은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타격을 받아 좌절된 근로 여성들에게 노동을 통하여 자립성을 키우고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보다 더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형제애를 나누고 삶의 보람을 체험케 한다는데 있다. 엠마우스 운동의 정신은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에게 사랑만이 인류를 결속할 수 있고 공동번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운동의 목표는 모든 인간사회와 국가를 돕고 고통의 나눔,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주장하고 그 성취를 목적으로 한다. 회관 설립당시 한국사회는 산업의 발달과정에서 지방의 소년소녀들이 직장을 찾아 상경하였으나 거주할 곳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향근로여성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1984년 7월 1일에 근로여성 2명이 들어와 엠마우스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차츰 엠마우스 식구들이 늘어 한때는 28명의 근로여성들이 좁은 공간에서 모여 살기도 하였다. 근로여성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숙소를 제공하고 낮에는 직장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밤에는 따뜻한 가족적 분위기 속에서 신앙으로 이끌어 주었다. 또한 이들에게 3년내에 독립을 권장하고 새로 이향한 근로여성을 새식구로 맞이했다. 1984년 부터 1992년까지 엠마우스를 거쳐간 여성은 약 80명이었다.

1984년 11월 24일부터 엠마우스 정신에 입각한 폐품수집을 시작하였다. 폐품의 주류는 의류이며 선별작업을 통해 쓸만한 것은 상설 판매장에 전시하여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싼값에 나누어져 좋은 호응을 얻었다. 이 사업의 폐품 재활용 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자원 절약으로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될뿐만 아니라 환경보전과 사랑과 나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또한 있는 자와 없는 자, 즉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소통과 나눔을 하는 매개체역활을 하고 있다.

회관 뒤 한옥을 매입하여 폐품선별 작업장, 식당, 성당 등을 증축하여 1990년 12월 23일 완공하였다. 엠마우스 저소득 근로여성을 위한 것에서 사회의 새로운 요구를 찾기 위해 재검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첫째 산업화의 발전에 따라 좋은 시설의 기숙사를 갖춘 기업체가 많아졌고 둘째, 근로자에 대한 대우가 향상되어 곧 자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신지체 장애자들을 위한 시설의 필요성을 알게되었고 엠마우스 사업목적을 변경하였다. 즉 현사회에서 소외된 정신지체 장애자들을 대상으로 특성에 따라서 일상생활 적응 훈련(신변처리, 가사에 필요한 실습청소) 정서지도 및 사회적응 훈련을 시키기 위해 주간(월-토)에 엠마우스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는 각자 가정으로 돌아가는 이용시설로 변경하였다. 1992년 6월에는 근로여성들이 모두 자립하여 나갔고 본격적인 정신지체 장애 여성공동체로 자리를 잡아갔다. 1994년 8명의 정신지체 장애여성들에게 첫영성체 준비를 시작하였다. 매주 교리봉사자들의 교리와 특히 여름 5박6일 간의 여름캠프에서는 집중교리를 했다. 동년 12월 17일에는 5명의 엠마우스 자매들이 첫 영성체를 하였다. 1995년도에는 엠마우스 식구들을 위하여 보호작업장과 직업개발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다. 준비작업으로 손바느질을 연습하고 있다.

1998년 엠마우스 공동체의 기본수단인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이것을 선별 정리하여 상설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재활용품을 활용하고 있다. 또한 정신지체 장애여성 8명과 수녀 4명 그리고 사랑과 나눔을 통하여 자신보다 더 가난한 자들을 돕고자하는 봉사자들과 함께 엠마우스 공동체로 인류의 존엄성을 귀중히 여기고 평화와 공동번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984. 5. 23 김효주 아녜스의 집 개설 (나눔지 100호 2쪽) - 1984. 5. 31발행

김효주 아녜스의 집 (나눔지 100호 2쪽) - 1984. 5. 31발행

한국 순교성인의 이름을 딴 '김효주 아녜스의 집'이 개설되어 18명의 식구(국민학생 7명, 한복, 미싱, 편물, 양재 등을 배우는 기술교육생 7명, 환자 2명, 상주봉사자 2명이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있는 청소년 자매들의 집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임의 지원으로 응암동 '데레사의 집'에서 분가하여 서로를 돕고 사랑하며 자활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1984. 7. 6 독일 까리따스 후원과 원주교구의 도움으로 '사랑의 집' 개원식 (프란치스꼬 전교봉사 수녀회의 복지시설)

사랑의 집 (프란치스꼬 전교봉사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9. 3 사랑의 집 답신에 의거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이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 18-19) 는 성서말씀에 입각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가난하고 병들어 소외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시설에서도 가정과 같은 안정되고 따뜻한 사랑안에서의 노후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함을 목적으로 하여 1984년 7월 6일에 설립되었다.

노인 요양원 사랑의 집을 운영하는 단체는 프란치스꼬 전교봉사 수녀회이며 이곳에서는 65세 미만부터 80세 이상의 할머니 할아버지 50분이 생활하고 계신다. 사랑의 집에서 시행하고 있는 주요사업은 다음과 같다.

① 노인 간호와 치료사업 - 의사의 처방에 따른 약투여, 재활운동, 물리치료

② 노인의 오락 프로그램 - 생활체조시간, 노래방, 민속놀이, 생일잔치

③ 노인의 상담사업 - 말벗 등으로 할머니의 대화를 듣고 요구를 나눔

④ 호스피스 간호 - 말기환자나 임종이 가까운 노인께 안정을 주는 영적 간호

⑤ 일상적인 서비스사업 - 와상노인의 욕창예방 등, 식사, 대변, 목욕 서비스

12명의 직원과 천주교 레지오 단체에서 주 2회 정규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직원들의 업무분담과 주말을 활용하여 고교생, 대학생, 일반 자원봉사자들이 지역사회의 관심사로 활동하고 있다.

1984. 7 성가정회관 설립 (680쪽 소사본당)

소사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80쪽)

8.15광복 이듬해인 1946년 4월 인천본당(답동)으로부터 분리되어 설정된 본당이다.

1949년 2월 신성우(마르꼬)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신축자금을 마련중에 6.25동란이 발발하자 1.4후퇴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도망와서 폭격으로 불탄 임시성당을 복구하였다. 수복 후 신자수가 늘어나자 주일미사도 근처의 솔밭에서 지내야 되는 형편임으로 신신부는 자신이 농사를 지어서 번돈과 인근 미군부대의 원조와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54년 11월 28일 114평의 성당을 준공하였다.

보육원과 양로원을 만들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야간학교도 설립하였다.

소사본당은 봉사하는 교회, 믿음을 다지는 교회를 지향하는 신자들의 의지를 모아 450평에 달하는 현대식 '성가정회관'을 지어 1984년에 개관하였다. 이곳은 교회는 물론 지역사회를 위하여 완전히 개방하고 있는데 특히 젊은이들의 교육장과 상담실을 비롯, 직장인들의 회합, 피정교육 및 각종 문화교육센터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1985. 2. 1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성모자애 보육원을 인수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성모 자애 보육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처음에 한 개인에 의하여 1962년 6월 16일에 설립하여 운영되어 왔으며 1971년 12월 20일 도봉구 상계동으로 시설이전을 하였다. 시설도 부족한데다가 수차에 걸쳐 운영진이 바뀌면서 성장과정 어린이들에게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어 서울시에서 가장 낙후된 환경과 시설로 지목, 폐원 위기의 어려운 형편에 이른 것을 서울 가톨릭 사회복지회에서 직접 인수하여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운영토록 주선하였다.

1985년 2월 차영자(요한) 수녀와 김정자(쁘로따시오) 수녀, 김경숙(마리아) 수녀가 파견되었으며 한달 후인 3월 김용자(아가다) 수녀가 파견되었다.

1985년 1월 31일 58명의 어린이를 인수하였다. 수녀들이 처음 파견되어 갔을때 다 쓰러져가는 몇 재의 붉은 벽돌집이 있고 그 안에는 문도 없고, 눈이나 비가 오면 화장실이 넘쳐 오물은 방안까지 스며들고 마당은 수렁이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보다 더 슬프게 만드는 것은 어린이들의 얼굴 표정에서 감정을 찾아볼 수 없고 차갑고 굳은 표정이었다. 정박아로 특별 치료와 교육이 필요한데도 방치되어 있는 어린이들, 간염에 걸려있는 어린이가 무려 30명이 넘고 게다가 3명은 결핵을 앓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있었다. 간장, 고추장, 된장부터 구걸해야 하는 형편에 어린이들에게 영양가있는 음식을 마련해 준다는 일은 꿈만 같았다. 수녀들은 동분서주 하며 은인을 구하였다. 원아들에게 공부할 수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전에 원장 사택을 개축하여 도서관을 만들어 주었다. 신학생들도 고락을 함께 해주며 어린이들의 학습지도를 해주었다. 이렇게 겨우 자리가 잡혀가는데 7개월만에 성모자애원은 무주택 주민을 위한 택지개방 지역로 묶여 철거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간의 줄기찬 노력과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과 격려가 있었다. 3년간의 가건물 생활, 천막 생활 끝에 비로소 1987년 여름 현재의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었다. 성모자애원에는 가정교육의 하나로 웃어른 공경, 올바른 마음과 몸가짐, 바른 언어 사용, 책임감있는 생활, 질서있는 생활, 양보하는 생활을 가르치고있다. 그 외에도 학습지도, 지속적인 신앙교육, 정서교육을 시키고 상담도 해주고 있다.

수녀들의 기도와 사랑, 후원자들의 알뜰한 보살핌과 자원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봉사는 결국 어린이들의 냉랭한 가슴안에 서서히 따스함이 스며들어 있고 그들안에 사랑의 싹을 트일 수 있었다. 수녀들은 봉사자 어머니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역할 등의 교육이 있다면 부지런히 좇아가 교육을 받는다. 성모자애원은 매달 첫째 주 월요일에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보육원 출신자 세쌍의 혼배가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였다.

원장 차요한 수녀는 성모자애원의 고아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여 고운 문화재단에서 제정한 제 1회 고운봉사상을 수상하였다. 원아들이 학교에서 시설 아동이라는 것을 다른 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학교에서 해 오라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주고 있다. 그렇게 하기까지는 원아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도시락 반찬에도 마음을 쓰고 있다. 많은 은인들과 수녀들의 정성으로 현재 원아들은 모두 건강하고 명랑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1985. 4. 12 성모 자애 장애인 종합 복지관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성모 자애 장애인 종합복지관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사회복지사업법 제 2조의 각호의 규정에 의한 요보호아동, 탁아시설, 노인복지시설 및 장애자 기타 요보호자를 수용하고 이들을 자활 자립할 수 있도록 선도함에 있어 이에 수반되는 사회사업을 그 목적으로 1985년 4월 12일에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에 설립하고 서울시가 맹인들을 위해 새로 조성되는 맹인촌의 운영권을 가톨릭 서울교구 사회복지회에 맡기고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인수하였다.

맹인들이 대우빌딩 뒤 힐튼 호텔과 주차장 일대 양동에서 거주하면서 인근 남대문과 서울역에서 구걸을 하였다. 맹인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 때문에 집이나 방을 임대받기가 어려우므로 양동에서 맹인들 외에도 넝마주이, 지체장애자, 윤락여성들의 살고있었다. 정부에서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하여 남대문과 서울역 맞은편 등지에서 구걸하던 맹인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사회복지 시설이었다. 보사부에서 상계동 856번지의 건물을 착공하여 1985년 4월 15일 완공하였다. 서울시가 맹인들을 위해 새로 조성되는 맹인촌의 운영권을 가톨릭 서울교구 사회복지회에 맡기게 되었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성모자애재활원을 맡게된 동기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으로서 103위 성인을 주심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뜻이 우선이고, 200주년 모토가 "이 땅에 빛을" 인데다가 맹인 개안수술도 있어서 아주 걸맞는 사명을 띄게 된다는 데에도 의의가 있었으며 수녀원에서 거리가 가까워 수련자들의 교육에도 좋다고 사료되었기 때문이다.

이 성모자애 재활원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장애자들에게 가족 단위로 혜택을 주는 전용주택이었다. 부실공사를 하여 시공자 측에 개수를 요구했으나 쉽게 보수공사를 해주지 않아 준공운 차일 피일 미뤄지게 되었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는 1985년 4월 12일 김복례(마르타) 수녀와, 이영옥(요셉) 수녀, 차희연(로즈마리) 수녀를 파견하였다. 한편으로는 이옥보(야고보) 수녀와 조정자(야고보) 수녀를 일본에 파견하여 그곳에 맹인시설을 돌아보게 하였다. 1985년 4월 15일 서울 맹인자립회 회원 78세대 260명이 입주하였다.

지상 3층, 지하 1층의 붉은 벽돌 연립주택 식의 78세대 260명이 가족단위로 생활할 수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꾀 쓸만해 보였지만 그 내부는 하자 없는 부분을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건물 내부에 방음 방수처리가 안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지하에도 하수구가 없어서 곳곳에서 새어나온 하수가 고이게 되면 영락없이 모터나 인력으로 물을 퍼내야 하는 실정이었다. 부실 공사로 누전이 되었으며 물이 새어 맹인들의 이부자리가 전부 젖기도 하였다. 성모자애 재활원 주변지여이 아파트 단지 조성으로 인한 주거 밀집 지역으로 개발되면서 인근 주민들이 본 시설에 대해 이전을 촉구하고 민원사례가 쇄도하였다.

성모자애 장애인 종합 복지관의 수용보호는 3년간의 직업재활교육(점자, 안마, 침술 등의 각 기능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자격증을 취득하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립을 도모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었으나 교육을 할 공간이 너무 협소하고 공사 시초부터 부실 공사로 인하여 벽의 균열, 누수, 전기 누전 등 하자가 많고 화재 등 재해의 발생소지가 높고, 시설 낙후로 불가피하게 외곽으로 이전해야 될 상황에서 시 구청의 도움을 받아 외각 토지를 물색하였으나 자연녹지, 자연보호, 농지 전용지 등으로 적절치 않아 결국 군사 보호지역이나 상대 녹지인 현 소재지를 1992년 3월에 계약하고 6월에 상계동 856번지를 매도하고 1993년 11월 율현동으로 이전하였다. 1991년 1월 한국 맹인직능개발센타 신축 추진 발대식을 갖고 1993년 12월 10일 기공식을 하였으며 1994년 3월 14일 신축공사 착공식을 하여 1997년 1월 28일 수용시설에서 이용시설로 그 용도를 변경하였다.

1985. 6. 14 인천에 온정의 집(양로원) 운영 (교회와 역사 278호 19쪽)

사랑의 선교 수녀회 (교회와 역사 278호 19쪽)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설립한 마더 데레사 수녀의 세속이름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ojaxhu) 이다.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에서 태어난 그녀는 신심 깊은 알바니아계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아 일찍이 예수회 선교사가 지도하는 본당의 청소년 단체인 신심회에 가입하는 등 신앙 생활에 열심이었다. 어느날 인도 벵골지방에서 예수회 선교사가 보내 온 편지를 신심회 회원들과 돌려 가며 읽은 그녀는 큰 감화를 받아 1928년 11월 29일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는 로테로 수녀회(동정성모회) 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6일 켈커타에 도착하여 1931년 5월 24일에 '예수의 작은 꽃'으로 알려진 리지외의 데레사를 수도명으로 택하였다.

전체 인구의 30%가 절대 빈곤 계층인 인도는 힌두이즘이라는 종교 전통과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 제도인 카스트로 인해 그러한 사회적 현실이 당연시되어 왔으며,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시도와 노력이 부족하였다. 켈커타 거리에는 불평등과 사회적 무관심으로 연일 수많은 빈민들이 굶주리거나 질병으로 고통당하다 죽어 갔다. 20년 가까이 그들과 같은 지역에서 생활해 왔던 데레사 수녀는 자신이 재직 중인 고등학교의 상황과는 너무나 다른 인도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점차 빈민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조금씩 키워가게 되었다. 그러던 1946년 9월 10일, 그녀는 피정차 히말라야 산 기슭의 다르질링으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신 주님을 섬기고 따르라는 '부르심 안에서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일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강한 확신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자신의 원의를 총원장 수녀에게 밝혔으며, 그로브터 1년반 만인 1948년 4월 12일에 재속 수녀로서 빈민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해도 된다는 교황청의 허락을 얻어냈다.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 가시기 직전에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목마르다" (요한 19,28)에 근원을 두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목마름을 축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그분을 간호애 주고 먹을 것을 주며 옷을 입혀 주고 그분을 방문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란 단순히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사람,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태아, 인종 차별을 당하는 사람, 알코올 및 마약 중독자, 삶의 희망과 신앙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 성령의 힘 안에서 희망을 갖지 못한 모든 이들을 뜻한다.

"가진 것이 많으면 베풀 것이 없다" 고 했던 마더 데레사 수녀는 그 어떠한 富도 피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회원들 역시 고통이 뒤따르지 않는 활동은 사회사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예수의 인류를 위한 끝없는 목마름을 채워 드리기 위해 가장 가난한 모습 속에 투영되어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가장 완전한 신뢰와 자아 포기, 그리고 항상 기뻐하는 정신으로 함께 나누고 있다.

한국 진출과 현황

1981년 5월 마더 데레사 수녀의 방한을 계기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정식으로 초청함에 따라 같은 해 6월 30일 세명의 인도 회원이 입국하였다. 원래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본부에서는 9월경에 회원을 파견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하였다가 일본·대만과 동시 진출이 결정되면서 당초 계획보다 3개월 앞당겨 회원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봉천동 본당 관할 봉천 1동 공소의 사제관에서 2개월동안 생활하다가 같은 해 8월 21일 봉천 1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용산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휴양의 집'으로 거처를 임시 옮겼으며, 1981년 9월에는 휴양의 집 내에 평화의 집(양로원)을 마련하여 20여 명의 무의탁 할머니들을 돌보면서 본격적인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2년 1월에는 11명의 지원자가 입회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9명이 같은 해 6월 수련을 위해 필리핀으로 떠났다. 그후 1983년 4월에 경기도 안양시 안양 2동에 본원을 건립하였으나 안양시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수녀원 부지 가운데 일부가 편입됨에 따라 1993년 10월 8일 안산시 고잔동 656-25번지에 수녀원을 완공하고 이듬해 5월 10일 본원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1985년 6월 14일에는 인천시 만수동에 첫 번째 분원을 마련하고 온정의 집 (양로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현재 안산과 인천의 양로원에서 각각 40여명의 할머니 들을 돌보는 외에 시립병원을 방문하여 임종 직전의 무의탁 행려 환자들을 데려와 임종을 지키고 있으며 극빈자 가정도 방문하여 봉사하고 있다.

한국 진출 17년째를 맞이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1998년 5월 현재 종신 서원자 9명, 유기서원자 2명 등 총 11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데 지원자 부족으로 사도직 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업은 그분의 방법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기에 수녀회를 알리기 위한 특별한 홍보 활동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 최근 한국의 수도회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인 거의 유사한 형태의 사도직 활동으로 인해 획일화되고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이때, 오직 자신들이 봉사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원자로 그 섬김의 생활이 널리 퍼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거절당하고 버림받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체험할 때, 그리고 자기들을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상대방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 전에 먼저 함께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기꺼이 함께 있을 때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사랑이 참되다면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려 들 것입니다."

1985. 10. 7 애덕의 집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3쪽)

애덕의 집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3쪽)

애덕의 집은 평신도인 김근영 안토니오가 자신의 병고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더 병들고 버림받은 무의탁 행려 환자들을 데려다 돌보며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공동체 인원이 차츰 많아지자 김근영의 뜻에 감동한 각계각층의 도움으로 둔촌동에 집을 마련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김근영원장이 1985년초에 병으로 사망하자 그 후 6개월 동안은 봉사자들끼리 운영해 오다가 이 집이 사회사업 기관으로 변질되기를 원치않던 고인의 유언을 따라 김수환 추기경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그 운영을 의뢰하였다. 이에 1985년 10월 7일, 이유순 아뽈리나 수녀를 비롯하여 최광필 클레멘스, 노연신 안당, 홍경희 헬렌 까리따스 수녀가 파견되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정식 분원이 되었다. 현재 애덕의 집은 무의탁 남자 장애인만을 수용하고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는데 30여명의 이들 환자들의 연령은 10대에서 80대까지 다영하며 장애 상태는 뇌성마비, 중풍, 하반신 마비 등이다. 그런데 현 시설은 대부분 거동이 힘든 환자들이 오르내리기에 벅찬 계단이 많고 협소하여 매우 불편할 뿐 아니라 시설미비로 정부 보조마저 받기 어려운데다 증축할 공간이 없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보다 나은 환경과 시설을 구비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여 보살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경기도 벽제에 땅을 구입하고 1989년 봄부터 건축을 시작하였다.

1985. 10. 25 보금자리 설립 - 1998. 9. 3 보금자리의 오세레나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보금자리 - 1998. 9. 3 보금자리의 오세레나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파티마 요양원에서 완치 가능성이 없는 결핵환자 중 무의탁자나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임종의 집이 되고 있는 보금자리는 1985년 10월 25일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설립하였다. 설립 당시에는 농지와 축사가 딸린 판자집 방 1칸 규모로 시작하여 현재 12명이 거주 가능한 주택의 규모이며 봉사자의 도움으로 농사 및 가축사육자가 생활을 이룬다. 결핵요야원과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건강관리를 해주며 운영은 후원회의 회비로 이루어 나간다.

파티마 결핵 요양원 입원환자 중 무의탁자나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완치 가능성 없이 임종만을 기다려야 되는 경우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없어서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파티마 결핵 요양원 폐문 후 타 의료기관에서 의뢰하는 난치성 결핵환자 또는 결핵 합병증으로 사회생활이 곤란한 무의탁자들을 수용하여 임종의 집 겸 사회복귀를 위한 자활 자립의 집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1985. 10. 31 원주 성바오로병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3쪽)

원주 성바오로 병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3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돌보고자 하는 수도회의 목적과 정신에 따라 당시 의료시설이 충분치 못하여 거의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던 강원도 원주교구로부터의 봉사요청을 받아들여 원주시 변두리에 성바오로병원 원주 분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원주시 개운동(開運洞)에 대지가 1,000평 건평이 350평에 달하는 2층 병원 건물을 신축하고 1970년 10월 7일에 병원 낙성식과 축성식을 가졌다. 그 해 10월 15일 개원한 이래 원주 성바오로병원은 원주교구에서 일반진료와 극빈환자들을 꾸준히 치료하여 왔다. 또한 매주 수요일마다 강원도 횡성군, 원성군, 평창군 등의 무의촌에 이동진료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원주지역내에 의료기관이 확충되고 의료보험의 확산으로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한 이전문제가 논의되어 오다가 결국 인천 해성보육원 어린이들을 위한 해성의원에 통합하기로 하고 1985년 10월 31일, 개원 16년만에 문을 닫았다. 그동안 의사수녀를 비롯하여 간호수녀들의 노고가 컸고 직접 간접으로 의료활동을 통한 복음화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큰 몫을 담당해 온 원주 성 바오로병원 자리에는 병원건물을 개축한 [성 바오로의 집]이 개원되어 지역사회 교육의 장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1985. 12. 청소년을 위한 [나눔의 집] 개설 (나눔지 92호 3쪽) - 1986. 4. 5발행

나눔의 집 (나눔지 92호 3쪽) - 1986. 4. 5발행

글라렛 수도회에서는 무작정 상경한 가출 청소년이나 공단지역 등에서 일을 하다가 실직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나눔의 집] (지도-한상수 신부)을 운영하고 있다.

비행 및 실직 청소년의 자립을 돕기 위하여 마련된 중간의 집(Halfway House) 형태의 [나눔의 집]은 청소년 들이 점차로 증대하고 있고 이들의 비행급증과 집단화, 그리고 난폭화 경향은 이미 사회문제로 크게 대두되고있다. 아동복지법상 18세 이상의 고아는 현실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시설보호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이나 이들의 문제해결을 도와주기 위한 복지시설이 너무 부족하고 더구나 소단위의 자립을 돕는 중간시설은 전무한 상태이다. 이러한 우리사회의 실정에 비추어 볼때 [나눔의 집]은 불우한 청소년들에게는 구원의 집이다. 공장에서의 실직, 무작정 상경, 소년원에서의 퇴원 등의 원인으로 당장 갈곳없는 청소년들이 모여 형제적인 사랑으로 생활을 나누며 약 3개월 정도 거주하면서 독립기반이 마련되면 작은 공동체를 이루도록 도와주고 그들이 나눔의 집과 연관을 갖고 서로 도우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있다. 운영을 맡고있는 안정선씨는 이곳에 살고있는 식구들의 공통적인 특징은「열심히 살려고 하나 현실적인 바탕이 없어 자기와의 갈등으로 늘 미래에 대한 불안속에 지낼때가 많다」고 한다. [나눔의 집]은 취업전 숙식 제공이나 가출 청소년의 귀가를 도와주고 취업알선 그리고 상담을 통하여 그들의 자아발견과 사회적응을 도와주는데 한 몫을 하고있다. 앞으로는 불우 청소년과 후원자의 자매결연, 여자청소년을 위한 소녀의 집 운영 등 보다 적극적인 청소년 보호선도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1985. 강원도에 마리스타 교육원 개설 (교회와 역사 244호 13쪽) - 1995. 9. 25발행

마리스타 교육원 (교회와 역사 244호 13쪽) - 1995. 9. 25발행

⸁ 안동 : 1973년 8월 합정동으로 수도원을 이전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게 된 마리스타 교육원은 본격적으로 사도직 활동을 모색한 결과 그 첫번째 결실로서 1973년 9월 안동에 첫 분원을 설치하게 되었다. 안동지방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안동교구가 인적, 물적으로 가장 가난하였고 진출한 수도회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안동 주변지역의 주민 대부분의 생업이 농업으로서 유교가 지배적인 지역이었기에 선교하기에 매우 어려운 조건들이 많았으나 바로 이런 소외된 지역이야말로 마리스타교육 수도회가 일할 곳이기에 첫 진출지로 결정한 것이다. 먼저 안동에서 공부하고 있는 타지방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및 독서실을 운영하였고 또한 실기 교육원을 설립하였다. 특히 이 교육원에서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의 교육에 주력하여 여학생들을 위해서는 주산, 타자, 부기를 남학생을 위해서는 조각, 선반, 자동차 정비에 관한 과목을 두어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동시에 일반 학교 교과 과목을 둠으로서 청소년들의 사회 진출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교육관 운영이 안정권에 들어서자 교구에 이를 양도하고 분원을 철수하였다.

⸂ 원주 : 1985년에 교육원(강원도 원주시 봉산2동)을 개설하여 피정지도와 교구 청소년들과 교리교사들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진광고등학교 지도 교사들의 교육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에 교구차원에서 교육관이 종합 사회 복지관으로 변경되면서 분원은 철수하였다.

⸃ 서울 : 본원인 합정동 수도원 안에 위치한 마리스타 교육관에서도 고등학생, 대학생, 일반인들에게 피정장소를 제공하고 지도하고 있다. 또한 본당 주일학교와 몇몇 단체에 속한 청소년들에게 교리교육도 하고있다. 교육관 운영을 위해 현재는 일반 레지오 단원을 위한 피정, 예비자 피정, 선택 프로그램 등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청소년 교육에 전력하면서 전문성을 살려 나갈 예정이다.

1985. 경기도 부천에서 '천주교양로원'을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 (608쪽 성가수녀회)

성가수녀회 (영) Holy Family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08쪽)

1943년 12월 생제(Singer) 신부에 의해 창설된 방인 수도회. 일제 말기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불우한 이들을 돕기 위한 '성가 소비녀'의 공동체가 시작되자 1943년 이재현 신부, 공베르(A. Gombert) 신부와 함께 생제(Singer) 신부가 회칙을 작성하여 노기남 주교의 인준을 받고 창립인가도 받았다. 1945년 6월 수련생활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로부터 지도를 받았고, 1947년 1월에 첫 허원식을 라리보 주교에 의해 거행할 수 있었다. 1953년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양로원'을 인수받아 1979년 증축한 후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하고 있다. 1958년 8월에는 서울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한 뒤 1969년 현재의 서울 하월곡동으로 이전하고 가톨릭의대 부속병원인 종합병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한편 1962년에는 소사에 있는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착수하였다. 이밖에 편물과 보세가공을 가르치는 '나자렛 기술학원'(1960-1969)과 '미망인 양재소'(1964-1980)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968년 8월에는 서울 혜화동에 있던 본원을 현재의 서울 정릉1동으로 이전하여 1969년 1월 창립 25주년과 함께 신축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74년 성가회 명칭을 '성가수녀회'로 개칭하면서 1976년에는 새 회헌과 규칙의 인준도 받았다. 1985년 현재 3개의 병원과 1개의 학교를 비롯하여 1977년 개원한 신체장애양로원인 '안나의 집'등의 특수사목활동분야에서 활동할 뿐만 아니라 본당 사목활동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985. 칠곡에 나환자 피부과 병원 (198쪽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영) Sisters of the Christian Doctrin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98쪽)

1700년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여교사, 간호원 몇명과 함께 프랑스의 장 바텔로(Gean Vatelot)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1966년 한국에 진출하여 안동교구의 초청으로 룩셈부르크 관구 소속 수녀 3명이 처음으로 내한하여 상지전문대학을 설립하는 한편, 1970년에는 수녀원 독립건물을 신축하였다.

1986. 3. 23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창립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 1998. 7. 14일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김기영 루도비꼬님의 답신에 의거

그리스도의 정신에 기초하여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교회와 사회에 농아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고취하며 농아인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 활동과 회원들의 복지 증진에 주력하는데에 그 설립목적이 있다.

1957년 10월 10일에 서울시 돈암동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농아인 교리반을 만드셨다. 1959년 농아 중학생 6명과 중림동의 약현성당에 찾아가 이 시몬스덕 수녀님과 상의하여 농아부가 설립되고 그 후 농아부는 여러차례 수녀님이 교체되었다. 1965년 학생회가 발족되어 활동하다가 1969년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명동성당의 주교관 뒤 여성회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가 1980년 명동성당의 협조로 교육관에서 사무실을 갖추는 등 숱한 이동과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정착이 가능하게 되었다.

1981년 1월 25일 안경렬 사회복지부 신부님과 함께 복지회관에서 가톨릭 농아복지회 발족 준비회의를 가졌다. 1986년 3월 2일 명동에서 창립기념미사를 올림으로써 농아선교회가 창립되었다. 초대회장에 나수웅씨, 부회장은 곽태일씨가 선출되어 농아선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설립 취지는 다음과 같다. 극소수를 제외한 이 나라 대다수의 농아인은 온갖 역경과 고통에 좌절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삶을 포기하다시피 살아가고 있다. 농아인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써 복음대상에서 제외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여 교회와 사회에 농아인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고취하여 전국 교회내의 농아인의 복음화 및 복지증진에 주력함을 그 목적으로 하며 또한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 내용으로는 선교사업과 각종 보도매체를 통하여 농아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계몽과 사회적인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홍보사업으로는 매주일 발행되는 주간소식지와 두달에 한번 후원회의 소식과 기타 사항을 알리는 회보가 있고, 친목행사와 매년 정기적으로 기초반, 회화반으로 구분하여 수화교육을 실시하여 수화보급에 노력하며 수화교육을 마친 자로서 농아인과 함께 하고자 하는 직장인 모임인 반딧불, 주부모임인 반석회의 봉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현재 평택농아양로원을 후원하고 있다.

또 수화미사는 일반인의 미사에 농아인들을 위해 미사통역을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전례가 농아들에 의해 준비되고 행하여 지는 미사이다. 정순오 신부님의 집전으로 수화와 말을 병행하므로 일반신자도 참례할 수 있으며 특히 매달 첫째 주일에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1986. 5. 6 의정부 성모병원 종합병원으로 승격 (의정부 2동성당의 복지시설)

의정부 성모병원 (의정부 2동성당의 복지시설) - 1998. 3. 28일 의정부2동성당의 이영래님의 답신에 의거 - 의정부본당 50년사 중에서 발췌

의정부시 교외의 쾌적한 환경 속에 자리잡은 의정부 성모병원은 가톨릭 정신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발휘함으로 자선과 의료봉사로 지역주민들의 보건 증진에 이바지 하는한편 사목을 통해 환자의 영육을 함께 치료하는데에 그 뜻을두고 1957년 5월 7일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271번지에 석조건물 2백65㎥를 건축하여 외과, 산부인과 2개과로 최초 개원하였다. 그 후 1976년 5월 1일부터 4차에 걸친 대대적인 증·개축을 실시하여 대지 2천8백16㎥, 연건평 5천90㎥(지하 1층 지상 4층) 의 병원사옥을 완공한 후, 점차 현재의 규모인 1백50병상으로 확충하여 왔다. 개원 이래 약 20년간을 의정부 천주교회 부속으로 지역사회 의료발전을 위하던 중 의료진과 재정상의 여러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러나 1976년 5월 1일 가톨릭대학의학부 제 7부속병원이 됨으로써 CMC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으며 1986년 5월 6일 종합병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급격히 변화하는 주변환경과 의료시설의 한계로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아래 1993년 5월 3일 대지2만1천94㎥, 연건평3만3천4백74㎥(지하1층 지상9층)규모의 신축병원을 완공하여 이전한 후 94년 3월 부터 5백 병상을 완전 가동하게 됨으로써 한수 이북유일의 대학 병원으로서 그 막중한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1986. 8. 15 오순절 평화의 마을 설립

오순절 평화의 마을 - 1998. 5. 28일 오순절 평화의 마을 답신에 의거

사회복지법인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복지사업법 제2조에서 정하는 부랑인 보호사업과 장애인 복지사업, 그리고 지역사회 복지사업을 수행하여 사회복지 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1986년 8월 15일 설립되었다. 설립자는 오수영(히지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이며 경남 밀양시 삼랑진, 부산 무의탁 임시보호소, 여주 평화 재활원이 있다.

오수영 원장신부가 부산 동항성당에 주임신부로 부임한지 2개월이 지난 1986년 4월에 알콜 중독으로 몸을 제대로 못 추리는 김 비오 형제(55)와 그의 두 아들이 오수영 원장신부에蕁게 보호를 요청해 왔다. 김비오형제는 알콜중독으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하여 가장으로서의 가족들에 대한 부양능력이 없는 데다 부인마저 집을 나가 버려 학교에 다녀할 아들들은 막막한 상태로 아버지를 따라온 것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을 그냥 외면할 수 없었던 오수영 원장신부는 우선 이들을 맞아들에 허기진 배와 피로에 지친 몸을 쉬게 하였다. 도시빈빈과 결손가정이 많았던 이 지역에 오수영 원장신부의 향적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소식을 들은 병들고 생활능력이 없는 어머니와 어린자녀다섯, 그리고 자녀들로부터 소외받고 보호받을 수 없는 노인들, 교도소에서 출감하여 갈 곳이 없는 이들, 알콜 중독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찾아와 보호를 요청하였다. 어느날 이른 새벽에는 이름도 나이도 부모도 모르는 어린 정신지체아를 사제관 앞에 버리고 가버린 사람도 있었다. 마치 날이 저물면 둥지를 찾아드는 새들처럼 수없이 사제관을 찾아오는 이들 앞에서 본당 사목활동만으로도 바쁜 오수영원장신부였지만 어쩔 수 없이 두 배의 마음을 써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처하게 된 오신부는 일단 성당 안 10평 남짓한 창고를 개조하여 방3칸을 만들어 이들을 쉬게 하였으나 먹이고 입히는 문제는 말 그대로 속수무책 이었다. 교구에서 지급되는 사제 생활비를 몽땅털어 넣기도 하고 오신부의 뜻을 이해한 신자들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여 지내면서 그해 8월경에는 50여명이라는 대가족이 꾸려지게 되었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오순절날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기도하며 하나로 모여 있던 사도들 위에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불의 사랑을 체험한 사도들과 모든 신도들은 찬미와 기도와 영가를 부르며 초대교회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사도2,42-47 : 4,32-37).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나누는 가운데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나눔과 섬김, 사랑과 일치의 삶을 살았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바로 이 초대교회공동체의 정신으로 살아감으로써 세상을 복음화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이웃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구현하려고 어려운 이들끼리 함께 모여 서로를 아끼고 위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삼랑진

삼랑진읍 미전리에 위치한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부랑인 선도시설로서 부랑인, 행려환자, 무연고자등을 수용하고 있고, 수녀원 및 수도회와 피정센터가 함께 있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 재단의 본원으로서 대부분의 주요업무는 이곳에서 담당한다. 대지면적은 9천 4백 5십 9평방미터이고 98년 5월 현재 수용인원은 404명(남264명, 여 140명)이고 직원은 40여명이고 수녀회와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는 수도자들은 80여명이다.

소재지 : 우 628-900 경남 밀양군 삼랑진읍 미전리 636/ 전화 0527)52-4241/ 모사전보 0527)51-1984

여주분원

93년 10월경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장안리 산5번지 임야 2만 3천5백여평을 이강훈씨로부터 기증을 받음으로 장애인 시설 계획을 구체화 한다. 이에따라 94년 10월 7일 여주분원 축성미사를 가짐으로 분원을 신설하게 된다. 그러나 기증받은 땅이 정지 과정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게 되어 95년 5월 22일 여주군 점동면 청안리 산 29번지 외 1필지 11만 7천 6백㎡을 재매입하여 평화재활원 건립을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1995년 9월 14일 평화재활원 기공식을, 96년 6월 14일에는 그 중 "평화수련원 및 성당착공식"을 하였다. 1차로 건립되는 건물은 영유아를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이다.

무의탁 장애인을 보호함으로 삶의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이들을 건전하게 교육하여 개개인의 가치개발과 지역사회 복지증진 및 밝은 사회조성에 기여하고자 시작된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장안리 산 51번지에 있는 여주평화재활원은 면적이 7만7천6백53평방미터로 영유장애아100여명을 보호할 수 있는 여주 천사들의 집과 성인당애인 200여명을 보호할 수 있는 평화재활원이 있다. 1997년 5월 23일축성을 가진 여주 천사들의 집에는 98년 5월 현재 영유장애아들이 30여명 생활하고 있고 성인장애인을 위한 평화재활원은 올해(1998년) 10월경에 준공예정에 있다.

소재지 : 우 469-870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청안리 산29번지/ 전화 0337)84-0553/ 모사전보 0337)84-0522

부산임시대기소

부산 무의탁임시호보소는 대지 면적이 3천 7백 84평방미터이고 부산시 해운대구에 위치하고 있다. 94년부터 이곳을 임시 대기소로 이용하였는데 구청에서 입소심사를 마친 원생을 삼랑진 평화의 마을에 이주시킬 때까지 임시로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수용인원은 유동적이기는 하나 대체적으로 20여명 정도 머물게 되고 법닝 업무를 관장하는 직원과 시설내의 있는 수녀원의 지도자가 원생들을 돌보고 있다.

소재지 : 우 608-062 부산시 남구 우암2동 125/ 전화 051)69-2016/ 모사전보 051)645-3389

1986. 9. 28 맹인선교회 부설「라파엘의 집」설립 (나눔지 119호 3쪽) - 1986. 10. 11발행

라파엘의 집 (나눔지 119호 3쪽) - 1986. 10. 11발행

신체적인 장애로 인하여 무가치한 존재로 여김받고 소외되어 있는 맹인 중복 장애아들을 위한 재활시설이 마련되었다. 서울 가톨릭 맹인선교회에서는 라파엘의 집(원장-이수남) 을 개설하면서 축성식을 갖었다. '라파엘의 집'은 올해 4월 맹인선교회 부회장인 이수남씨가 자택이었던 종로구 평동 13-27 소재의 대지 45평, 건평 41평의 가옥 1채를 회사하였다. '라파엘의 집'에 입소할 수 있는 장애자는 맹인으로서 언어 청각기능에 장애를 지니거나 정신지체자, 지폐성향을 지닌자에 한하는데 이러한 중복 장애자의 수용보호에도 재활훈련과 교육, 신앙생활을 지도하며 장애자 및 가족의 상담과 중복장애자들의 재활 및 교육에 관한 조사와 관련자료의 수집과 홍보활동을 통한 중복장애자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높이는 계몽활동도 활발히 벌일 예정이다.

1987. 1. 31 인제병원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4쪽)

인제병원 麟蹄病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4쪽)

강원도의 벽지 주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기 위해 인제병원을 설립한 아산재단은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를 더욱 헌신적으로 할 수 있는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78년 12월 2일에 서정향 쟌 젬마 수녀, 노연신 안당 수녀, 김영신 데오필 수녀 그리고 홍혜경 마리엣다 수녀가 파견되었다. 그후 간호, 보급과, 검사실, 약국, 원목 등 여러 부서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또 틈나는 대로 인제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는 등 10년 가까이 봉사해 오다가 급격한 환자의 감소로 인한 재단측의 재정적 곤란 및 수녀 인력의 불필요함 등을 감안한 결과 아산재단과 합의하여 1987년 1월 31일자로 인재병원에서 철수하였다.

1987. 2. 16 작은 프란치스꼬의 집 개설 (나눔지 140호 2쪽) - 1987. 3. 14발행

작은 프란치스꼬의 집 (나눔지 140호 2쪽) - 1987. 3. 14발행

차가운 길모퉁이에 버려진 형제, 자매들을 위한 집이 개설되었다. 불구의 몸을 이끌고 자신보다 더 고통받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자신을 산 제물로 주님께 봉헌하고자 우총평(프란치스꼬) 형제에의해 설립된 작은 프란치스꼬의 집은 현재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기력조차 없는 15명의 형제, 자매에게 구원의 안식처가 되고있다.

1987. 2. 27 부산 가톨릭 농아선교회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파견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71쪽)

하나의 집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71쪽)

'하나의 집'은 부산지역내에 거주하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시설공간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부산 가톨릭 농아선교회'는 1965년 3월 1일에 발족하여 1990년 3월 27일에 부산교구 교구액션단체로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87년 2월부터였다. 1986년 2월 4일부터 부산 가톨릭농아선교회 지도신부였던 박용조(프란치스꼬) 신부가 1986년 9월 13일 수정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후 수녀원에 지도수녀를 요청함에 따라 송순자(토마시나) 수녀를 1987년 2월 27일 파견하였다.

당시 부산교구내 장애인 신자수는 2,000 여명으로 집계되었는데 , 이들 중 대다수가 본당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조차 포기하는 상태에 있었다. 박용조 신부는 청각장애인들의 특성을 고려한 사목 프로그램을 전개할 공간이 없어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성분도 치과 옆 공터를 최적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박 신부는 장애자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땅을 빌려줄 것과, 장애자회관을 운영해 줄 것 등을 수녀원에 제안하였다.

수녀원에서는 1987년 3월 총회 의결회의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에 부산교구에서는 수녀원 경내 성분도치과 옆 공터에 천주교 부산교구 장애인회관으로 70평의 조립식건물을 지어 '하나의 집'이라 명명하고 1987년 12월 6일 축복하였다. 축복식에 앞서 9월에 부산 가톨릭농아선교회 본부를 수정성당으로부터 이곳 하나의 집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이미 해오던 활동을 수용하고, 일관성 있는 프로그램을 계획하여 청각장애인을 위한 사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하나의집에서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봉사하고 있다.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수화강습이 주야로 있는데, 1991년 말 현재 약 500명이 수료하였다. 검정고시 중비를 위한 야학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개최되고 있으며, 중고등학생들의 학습지도(영어, 수학), 문장공부 등이 있다. 전체적인 계획과 운영에는 수화교실을 통해 배출된 '더불어회'봉사자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다른 지역의 농아선교회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해마다 1번씩 전국 청각장애인들이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함께 모여 피정을 하고 있다. 하나의 집에 파견된 수녀는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레지오마리애를 지도한다. 때때로 청각장애인들의 직업알선을 위해 나서기도 하고, 직장애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을 돕기 위해 대신 변호사를 찾아보고 법정에 서기도 한다. 청각장애인들이 병원이나 관공서에 갈 때에 함께 가서 수화통역을 하기도 하고, 가정방문을하여 가정과 사회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갈등 등을 들어주며 신앙생활을 격려하기도 한다. 보청기를 보급하고, 청각장애인 가정에 초인종 대신 깜빡이는 전등불을 달아주고 전화대신 FAX를 설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그들의 곤란을 덜어주는 구체적인 방법이 되었다. 하나의 집의 또 하나의 활동은 청각장애인들의 자녀들(정상아)을 위한 유아원 운영이다. 하나의 집 유아원에서는 약 10명의 어린이들에게 유년에 익혀야 할 좋은 습관과 성격형성, 언어교육 등 세밀한 지도를 하고 있다.

1987. 3. 1 심장환자 상담소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6쪽)

심장환자상담소 心臟患者相談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6쪽)

가난속에서 고통당하는 심장환자 어린이들을 돌보는일로 14년간 애써온 김옥희 미카엘라 수녀를 중심으로 하여 1987년 3월에 한업덕 아오스딩 수녀와 박정희 엘리사벳 수녀가 함께 새 분원을 설립하였다. 김 수녀가 심장병환자 어린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1973년 메리놀병원 소아과 병동에서 근무했을 때부터였다. 죽음을 눈앞에 둔 세살난 어린이의 어머니를 납득시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주었는데 놀랍게도 소생하였기에 퇴원 후에도 계속 찾아보고 성모의원, 국제약국에서 약을 얻어 주기도 하였지만 심장수술이 필요한 이 어린이를 위해서는 구원의 길이 막막하였다. 수술비는 물론이고 국내 어느병원에서도 이 어린이를 도와줄 곳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부산 하야리아(Hajaleah) 미군 부대의 주선과 메리놀 간호학교장 콘로이(Conroy) 수녀의 도움으로 이 어린이는 1975년 12월에 미국 미네소타 메트로폴리탄(Minesota Metropolitam) 병원에서 수술을 받도록 예약되었고 항공료도 뜻있는 학생들과 본당의 협조로 모금되었다. 이 어린이의 수술이 성공했고 그 희소식이 각처에 알려지게 되어 모여 오는 환자들을 버려두지 못하게 되었다. 1973년 3월부터 메리놀 간호전문대학 응접실을 빌려 매월 1회씩 심장병 환자의 상담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부산 하야리야 부대에 이어서 서울 용산 미8군 121병원에서도 4-5명의 환자를 무료로 진찰해 주었고 정밀검사를 해 주었다. 그리고 차후에는 서울대학병원 세브란스 병원에서도 검사와 미국에 갈 수 있는 진단서를 알선해 주게 되었다.

그 이후 국내 각처, 특히 큰도시의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서도 심장병 치료의 문을 열어 주었다. 즉, 대구 영남병원, 메리놀병원, 부산 백병원, 고신의료원, 부산침례병원, 서울에서는 성 바오로 병원, 성남 인하대학병원, 부천 세종병원 등이었다. 현재 대구 영남병원 심장내과 심봉섭 과장, 흉부외과 강면식 과장과 이철주 과장은 매월 첫주에 부산까지 와서 환자 100여명에게 무료진찰을 해주고 있으며 수술받은 환아들을 보살펴 주고 있다. 세브란스 병원의 조범구 박사는 매월 둘째주일에 정기적으로 왕진해 주고 있다.

1991년 현재 환아수는 4,500여명이며, 크고 작은 수술에 응한 어린이들이 2,114명이고 그 중 사망수는 93명이다. 그 후 부산교구의 시책으로 소화영아재활원이 다시 자리를 내 놓아야 하게 되자 1987년 3월 1일 부터 부산 감만동에 임시로 심장환자 상담소를 개설하는 한편, 부곡동 부지에 상담소를 위한 건물을 신축, 1988년 12월 3일에 완공하여 이전하였다.

1987. 3. 16 탁아소인 솔샘 아가방 개설 (나눔지 142호 2쪽) - 1987. 3. 28발행

솔샘 아가방 (나눔지 142호 2쪽) - 1987. 3. 28발행

도봉구 미아동에 솔샘 아가방 탁아소가 개설되었다. 지역의 영세민 맞벌이 부부들의 취학전 아이들을 오전8시부터 오후 7시까지 맡아, 대리모로서의 역할을 하며 아이들의 사회성과 정서교육등을 담당하며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을 덜어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도와준다.

1987. 5 마이러 하우스 개설 (나눔지 166호 4쪽) - 1987. 9. 12일 발행

마이러 하우스 (나눔지 166호 4쪽) - 1987. 9. 12일 발행

구리본당 관내에 새로이 양로원이 개설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외로운 노인 한분을 가정에 모시면서 시작된 할머니의 집이 이제는 7명으로 늘어 양로원으로 꾸며져 운영되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사능리 소재의 마이러 하우스는 87년 현재 65세에서 91세까지의 외로운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다.

1987. 6. 30 도봉 독서실 개관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도봉 독서실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 28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1987년 6월 30일 서울시 도봉구 방학 1동에 청소년 문화 함양과 쾌적한 면학 분위기 조성, 학생들의 지적 수준과 학습능률을 높이기 위해 도봉구의 지원아래 세워졌으며 학생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데 있고, 청소년들의 올바른 자유정신을 양양하고 진리에 입각한 인격완성을 위해 그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도봉구청으로부터 1990년 6월 1일 재단법인 한국순교복자수녀회로부터 위탁을 받았다.

도봉동의 동명은 마을이 서울근교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에 있음으로 얻어진 이름이다. 옛날부터 이 풍경좋은 도봉산에 많은 명사들이 찾아들어 머물러 경치를 사랑하였다. 너와 내가 없는 둥근 지구라는 원탁에서 공존하며 국가와 국가간에 경쟁의 변모속에 고도의 경제성장과 문화발전이 민족의 내일을 탈바꿈시키고 있는 세대라 하겠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경쟁에서 보다 부강된 국력의 초석의 기반을 다지기위해서는 전국민이 언제 어디서나 필요에 따라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탐독하고 연구할 수있는 면학장소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으며 인구증가와 경제발전에 따라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독서실이 절대시 필요하였다. 인구는 기하급수로 급증하고 주택사정은 날이 갈수록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다. 단칸방을 쓰고있는 가구는 전체 가구의 32.9%이며, 2개 이하는 전체의 67.1%이다. 특히 서울은 단칸방을 사용하고 있는 가구가 전체가구중 33.7%로 각종 환경공해와 학습장소가 어려운 면학도들에게 학습의욕과 능률을 증진시킬 수 있는 사회교육 시설이 필요시 된다고 보겠다. 전국 도서관 수는 3621개관이 있으나 도서관 및 학교 도서관으로써 일반대중이 필요로 하는 공공도서관은 전국적으로 약 122개로써 극히 부족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을 뿐더러 필요에 따라서는 도서관에 입관하려고 하여도 대개의 공공도서관은 이른 새벽부터 초만원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어 몇시간씩 기다려야 입관할 수 있는 현상이다.

지역적으로 부족한 공공도서관의 기능을 대신하고 영세자녀 및 불우한 면학도 들에게 학습장소를 마련하여 주어 국가와 사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홍익인간을 육성시키는 학술도장으로 모든 국민에게 평생을 통한 도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며 국민의 자질을 향상하게 함으로써 정의로운 민주복지사회의 건설과 문화창달을 기여하려는 것이 사설 도서실의 의무이며 임무라 할 수 있겠다.

도봉 독서실은 대지가 315평이며 건물이 361평으로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되어있으며 1987년 6월 30일 개관식을 하였다. 1987년 6월 1일 도봉구청과 한국순교복자수녀회와 위탁체결을 하였다.

1987년 6월 22일 윤행자 요셉 수녀와 이옥보 야고보 수녀가 파견되었으며 동년 8월에 김복례(마르타) 수녀가 파견되고 동년 9월에 이은경 아가다 수녀가 파견되었다.

도봉 독서실 이용자는 년 평균 15만명에서 16만명에 이르며 수용인원은 438석이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우리나라의 다도정신과 선비 사상과 화랑 사상을 자연스럽게 점하게 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워주고 공동생활 속에서 서로 협동하며 질서를 스스로 지킬 줄 아는 어린이로 성장시키기 위해 유치원 아이들에게 다례를 가르치고 지역주민 가정주부들에게도 다도를 가르치기도 하였었다. 청소년들이 자기안의 모든 잡념, 즉 불만스러운 생각과 헛된욕심 나쁜 생각등을 버리고 마음을 순수하에 가짐으로써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정신통일을 이룩하며 더욱 열심히 공부에 몰입할 수 있도록 단전호흡 좌선을 교육시킨 일도 있었다.

1993년도에는 학생들에게 타자교육을 시켰다. 학생들에게 종교비디오를 보여 주고 일본인 후레아 신부가 도봉독서실에 상주할 때는 후레아 신부가 한달에 한번씩 와서 독서실에서 미사를 하였다. 수녀들이 정숙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주고 있어서 청소년 선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음으로 학부모들과 지역주민에게 상당히 좋은 호평을 받고있다. 1998년 현재 수녀 3명이 청소년과 지역 주민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다.

1987. 7. 11 성 분도 장애자 직업 재활원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87쪽)

성 분도 장애자 직업 재활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87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은 1985년 8월, 임시총회에서 재활병원이나 재활원을 세우기로 뜻을 모으게 되었다. 마침 1985년 9월에 서울시에서 장애자 직업 재활 시설 건립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보사부에 설립계획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1985년 11월 19일, 염보현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장애자 복지시설 건립 지원계획을 통보받게 되었다. 장애자재활원 개원 준비를 위해 1986년 2월부터 전정숙 체칠리아 수녀를 책임자로 3월부터 이경희 알비나 수녀와 8월부터 이현숙 안나마리 수녀가 임명되었다. 1986년 5월 12일,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진우리 661번지에 매입해두었던 부지에 서울시의 경제적 지원과 소사땅을 매각한 금액으로 연건평 1,250여 평 규모의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을 기공하였다. 그리고 1987년 2월, 임남훈 그레고리아 수녀, 이정모 베닉나 수녀, 이영자 요한닛다 수녀, 진말둘 프란치스까 수녀, 이 알비나 수녀, 이 안나마리 수녀, 송경자 마리데레사 수녀가 서울 분도병원에 기거하면서 재활원의 준비와 기초작업을 하였다. 이들은 그 해 6월 28일에 곤지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성 분도 직업 재활원은 1987년 5월 25일, 정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앗다. 1987년 7월 2일에 준공식을 갖고 7월 11일 성 베네딕도 대축일에 개원식을 가졌다. 이 재활원은 "신체적 결함을 지닌 장애자들에게 심성개발과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키워주고, 직업 자립성을 증진시켜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설립 이념에 따라 구체적으로 직업재활, 사회교육, 심리상담을 도모하고 원생작품 직매장과 기숙사를 운영한다. 직업 훈련 과목은 도지기공예과, 직조공예과, 양재과, 자수과, 편물과, 제도과, 전산과이며, 과별로 전문교사들이 지도하고 있다. 그밖에 심성개발훈련, 신앙교육, 교양문학, 교양영어, 검정고시반, 요육훈련, 음악, 미술 등의 일반 교양과목과 다양한 수련회들을 병행한다. 의료재활을 위해 작업치료실과 운동치료실 시설을 갖추고, 직업치료사가 상주하며 치료하고 있으며 전문적인 의료재활을 위하여 강남성모병원의 재활의학과, 재활심리학과, 신경내과 등 전문의사들의 지원을 받아 매월 1-2회 이상 정기진료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 교육비는 전원 무료이며, 기숙사는 여자 기숙사만 운영되는데, 기숙사비도 생활보호대상자의 경우는 무료이고, 일반장애자에게는 실비만 받고 있다.

원생 작품바자회는 1988년 5월 20-21일 처음으로 개최한 이래 해마다 열고 있으며 1988년 7월에는 개원 1주년을 맞아〈성 분도의 참벗들〉이란 재활원 회보를 창간하였다.

1989년 5월 10일에는 서울 진로 도매센터 지하 1층에 2년 계약으로 상설매장을 마련하여 재활원교육을 수료한 장애자의 생활자립을 돕기 위해 그들의 작품을 전시 판매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작품을 계속 충분히 공급할 수가 없어 계약 2년후인 1991년 4월말에 매장운영은 그만두었다.

1988년 8월 31일에 제1기생을 배출한 이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의 벽을 넘어 어엿한 직장인이나 사회인으로 자리잡은 졸업생들이 늘고 있다.

1987. 8. 29 요셉의원 개원 (나눔지 166호)

요셉의원 (나눔지 166호 2쪽) - 1987. 9. 12발행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질병문제에 보다 깊이 동참하려는 지역의료인들의 노력의 결실로 2차진료기관인 요셉의원이 문을 열었다. 앞으로 요셉의원은 난곡, 신림동, 구로1동, 구로3동, 성남시 은행동 및 상대원동 지역의 가난한 주민으로서 지역 주말진료를 일단 거친 후 지역보건종사자의 의뢰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 진료를 하게 된다.

1987. 9. 9 노틀담 장애자 교육원 개설 (나눔지 168호 4쪽) - 1987. 10. 3 발행

노틀담 장애자 교육원 (나눔지 168호 4쪽) - 1987. 10. 3 발행

서울시와 재단법인 노틀담수녀회에서 공동재원으로 장애자들을 위한 장애자교육원이 건립되었다. 인천시 북구 계산동 산40번지에 8246평의 대지에 1540평의 지하1층, 지상3층의 초현대식 건물로 준공되었다. 노틀담장애자 교육원의 주요사업은 편물, 자수, 칠보, 금속공예의 직업훈련을 비롯하여 신체적인 기능회복을 위한 각종치료와 교양교육, 그리고 재활상담과 생활훈련 등으로 사회적응을 위한 구체적인 적응훈련, 예절교육 등 사회진출에 대비한 교육을 실시하는데 교육비는 무료이다. 노틀담 수녀회는 23세에 반신불수 장애자가 되었다가 신앙의 기적으로 완치된 프랑스태생 쥴리수녀에 의하여 1804년 창설된 수녀회이다.

1987. 9. 9 노틀담장애인교육원은 직업재활기관으로 설립되어 운영 (재단법인 노틀담수녀회의 복 지시설)

노틀담복지관 (재단법인 노틀담수녀회) - 1998. 6. 11 복지관의 민병흔 마리 율리안나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노틀담복지관은 인천 계양구에 위치한 장애인 복지관으로써, 재단법인 노틀담수녀회에서 지난 10년간 직업재활기관으로 운영하다가 98년도부터 장애인 종합복지관으로 사업이 전환되어 인천지역 장애인을 대상으로 조기교육, 언어치료, 물리치료, 심리치료, 사회성개발프로그램, 직업적응훈련, 보호작업장, 제과제빵과, 그룹홈, 주간보호, 재가복지봉사센터, 부모 집단활동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1981년 UN이 정한 세계장애인의 해를 맞아 우리나라에서도 1981년 심신장애인복지법이 제정되었다. 80년대까지 수용시설 중심으로 전개되어 오던 장애인복지는 80년대 이후들어 이용시설(장애인복지관)이 증가되어 지역사회의 재가장애인을 위한 복지서비스가 획대되는 시기였다. 특히 1988년 서울 장애인올림픽대회를 전후하여 장애인 복지는 성장과 발전을 하게 된다. 노틀담 복지관의 전신인 노틀담장애인 교육원이 설립된 시기도 이 시기이며 적절한 직업재활기관이 없었던 당시에 노틀담장애인 교육원은 그리스도교 정신과 사회복지 이념을 바탕으로 장애인의 전인교육과 직업재활을 통해 경제적 자립능력을 갖추게 하여 사회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데 도움을 주고자 설립되었다. 노틀담복지관은 크리스챤 정신과 사회복지 이념을 바탕으로 장애인에 대한 종합적인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사회의 장애 인식개선과 참여를 통하여 지역장애인의 자활 자립과 장애인 복지 실현을 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장애인복지도 많은 발전과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특히 직종중심의 직업훈련은 노동부 고용촉진공단에서 그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고 그 결과 복지관은 직종 중심의 직업 훈련 사업보다는 지역내 중증장애인들이 필요로 하는 좀더 체계적이고 폭넓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지역사회 중심의 재활사업으로 전환을 (1992. 2. 14 시설 허가) 하게된다.

재단법인 노틀담수녀회는 하느님을 선포하고 우리시대에 가장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중 하나인 장애인들을 도와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 회복과 생존을 위한 사회적, 경제적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며 장애인들을 경영사명의 대상으로 하여 노틀담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다.

1987. 9 '성 분도 빛둘레 집'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7쪽)

성 분도 빛둘레집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7쪽)

성분도빛둘레집에는 탁아소와 국민학생들을 위한 공부방이 있다. 1987년 이 지원을 설립할 당시 당감동 화장막 뒷산 골짜기는 전과자들의 무허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수녀들은 이곳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봉사할 것이 있지 않나 생각되어 1987년 9월 조그만 전셋집을 얻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폭우로 집이 무너지자 옆의 공터를 빌려 천막집을 건립하여 탁아소와 독서실을 마련하고 '성 분도 빛둘레집'이라 이름하고, 축복식과 개원미사를 봉헌하였다. 봉사자들이 놀이터를 만들고, 가야 본당 레지오단원들의 협조를 받아 계단과 마당을 조성하였다.

현재 이곳은 인근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는 등 도시 계획으로 인해 철거될 위기에 놓여 있다.

1987. 12. 6 부산 '하나의 집' 축성식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71쪽)

하나의 집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71쪽)

'하나의 집'은 부산지역내에 거주하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시설공간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부산 가톨릭 농아선교회'는 1965년 3월 1일에 발족하여 1990년 3월 27일에 부산교구 교구액션단체로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87년 2월부터였다. 1986년 2월 4일부터 부산 가톨릭농아선교회 지도신부였던 박용조(프란치스꼬) 신부가 1986년 9월 13일 수정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후 수녀원에 지도수녀를 요청함에 따라 송순자(토마시나) 수녀를 1987년 2월 27일 파견하였다.

당시 부산교구내 장애인 신자수는 2,000 여명으로 집계되었는데 , 이들 중 대다수가 본당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조차 포기하는 상태에 있었다. 박용조 신부는 청각장애인들의 특성을 고려한 사목 프로그램을 전개할 공간이 없어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성분도 치과 옆 공터를 최적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박 신부는 장애자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땅을 빌려줄 것과, 장애자회관을 운영해 줄 것 등을 수녀원에 제안하였다.

수녀원에서는 1987년 3월 총회 의결회의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에 부산교구에서는 수녀원 경내 성분도치과 옆 공터에 천주교 부산교구 장애인회관으로 70평의 조립식건물을 지어 '하나의 집'이라 명명하고 1987년 12월 6일 축복하였다. 축복식에 앞서 9월에 부산 가톨릭농아선교회 본부를 수정성당으로부터 이곳 하나의 집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이미 해오던 활동을 수용하고, 일관성 있는 프로그램을 계획하여 청각장애인을 위한 사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하나의집에서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봉사하고 있다.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수화강습이 주야로 있는데, 1991년 말 현재 약 500명이 수료하였다. 검정고시 중비를 위한 야학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개최되고 있으며, 중고등학생들의 학습지도(영어, 수학), 문장공부 등이 있다. 전체적인 계획과 운영에는 수화교실을 통해 배출된 '더불어회'봉사자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다른 지역의 농아선교회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해마다 1번씩 전국 청각장애인들이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함께 모여 피정을 하고 있다. 하나의 집에 파견된 수녀는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레지오마리애를 지도한다. 때때로 청각장애인들의 직업알선을 위해 나서기도 하고, 직장애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을 돕기 위해 대신 변호사를 찾아보고 법정에 서기도 한다. 청각장애인들이 병원이나 관공서에 갈 때에 함께 가서 수화통역을 하기도 하고, 가정방문을하여 가정과 사회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갈등 등을 들어주며 신앙생활을 격려하기도 한다. 보청기를 보급하고, 청각장애인 가정에 초인종 대신 깜빡이는 전등불을 달아주고 전화대신 FAX를 설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그들의 곤란을 덜어주는 구체적인 방법이 되었다. 하나의 집의 또 하나의 활동은 청각장애인들의 자녀들(정상아)을 위한 유아원 운영이다. 하나의 집 유아원에서는 약 10명의 어린이들에게 유년에 익혀야 할 좋은 습관과 성격형성, 언어교육 등 세밀한 지도를 하고 있다.

1987. 모현 호스피스 설립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복지시설)

모현 호스피스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 1998. 3. 31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답신에 의거

갈바리 산 위에 서계셨던 마리아의 어머니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고 죽어가는 죄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목적으로 1987년에 설립되었다. 서울지역의 암 환자를 위하여 가정방문하여 의료적, 영적, 심리적인 도움을 주기 위하여 가정방문팀을 만들었으며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창설자의 정신을 더욱 가깝게 실천하기 위함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998년 현재 의사, 간호사, 상담사가 가정방문팀으로 구성되어있어 호스피스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1987. 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 개설 (나눔지 1996. 봄 15쪽)

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 (나눔지 1996. 봄 15쪽)

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는 아동복지행정의 제일선 전문치료기관으로서 문제행동아동(비행, 가출, 도벽, 허언, 환각제사용, 학교 부적응 등)의 일시 보호 치료 및 정서장애아동(심리적 요인으로 인한 장애)을 통원치료하여 아동의 문제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고 다각적인 방법을 통하여 임상적 치료를 도모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구체적인 사업내용으로는 만3세-18세 미만의 남자 아동과 청소년으로써 요보호 아동의 일시보호와 일시적 위탁보호, 그리고 이들의 가족상담과 부모교육, 보호아동의 학습지도 문제행동아동(가출, 도벽, 학교 부적응, 환각제 사용 등)의 놀이치료와 상담치료,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 정서장애아동 언어지체, 정서불안, 행동장애, 주의산만, 과격행동, 적응장애 등) 들에게 주 1-2회의 통원 놀이치료와 부모상담, 서울가정법원으로부터 보호관찰 처분 및 수강명령을 받은 청소년들의 단기 전문교육 및 상담, 부모역할 훈련 프로그램, 실습생 지도 및 자원봉사자 교육을 하고 있다.

1988. 2. 15 서울시에서는 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의 운영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위탁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7쪽)

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7쪽)

1987년 말, 서울시에는 장안동에 동부시립아동상담소를 신설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위탁경영을 요청하였다. 수녀회에서는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해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카리스마를 재확인 시켜줄 수 있는 뜻깊은 사업이라 생각하고 많은 이의 관심과 기도속에 파견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1988년 2월 15일에 조영숙 쟌 뽀린수녀, 정인순 아졔스 수녀, 정신채 라파엘라 수녀, 김보애 안나 수녀가 입주하게 되었다. 수녀들은 개관을 위해 약 2개월간 기자재를 준비한 후 1988년 4월 13일에 개소식을 가졌으며 7월 말에는 수녀원도 그 옆에 따로 신축되어 안정된 생활공간을 이루게 되었다.

이 아동상담소는 오늘날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요보호아동과 일반 가정의 문제아동을 돕기위한 기관이다. 종래의 우리나라 아동상담소들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여 단지 일시보호 수용하여 각 시설로 배치해 주는 정도에 그쳤다. 이 아동상담소는 이러한 이제까지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아동상담소 본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대상아동들은 만3세에서 18세 까지로서 문제아동들, 즉, 자폐증, 중증정서장애자, 술, 담배, 환각제 사용 청소년, 폭력적인 아동, 가출소년들에게 심리검사와 전문가에 의한 놀이치료, 시청각운동, 작업을 동반한 상담 심리치료를 시행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가족 구성원의 상호관계를 상담 지도하고 치료함으로서 아동들이 올바른 대인관계를 갖고 가정 및 학교,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통원치료와 보호치료를 겸하고 있는데 보호치료의 경우 그 규정은 6개월 기간이고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며 현 수용능력은 80명 정도이다. 현재 사회사업 전문가들을 포함한 30여명의 일반직원들과 6명의 수녀들이 미숙함과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청소년들을 위한 이 뜻깊은 예방 차원적 사도직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88. 4. 9 정신지체장애자들의 집 '맑음터' 개설 (나눔지 196호 4쪽) - 1988. 4. 16발행

맑음터 (나눔지 196호 4쪽) - 1988. 4. 16발행

여자 정신지체 장애자들을 위한 기술교육장인 '맑음터'가 개설되었다. 16세-25세 정도의 훈련가능급의 여자 정신지체장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곳은 생활교육과 함께 학습지도 및 염색 등의 재활을 위한 훈련과정을 통해 자활을 목적으로 88년 현재 4명의 학생이 등록하여 통원교육을 받고있다.

1988. 5. 8 불우노인을 위한 급식소 '낙원노인정' 개설 (나눔지 251호 2쪽) - 1989. 5. 13발행

낙원노인정 (나눔지 251호 2쪽) - 1989. 5. 13발행

가톨릭 사회복지회는 가톨릭 실업인회의 후원과 성가소비녀회의 도움으로 파고다 공원내의 불우노인과 노인행려자들을 위한 급식소인 '낙원노인정'을 개설하였다. 개설에 앞서서 5월 6일에는 성가소비녀회의 수녀들과 민주노인회, 지역본당신자등 80여명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을 갖었다.

1988. 6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법인 인가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 1998. 6. 10일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의 홍보담당 원유일님의 답신에 의거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이 위치하여 있는 봉산동은 원주선과 중앙선철도 주변으로 형성된 지역으로서 설립당시(1990년)에는 원주시내에서 가장 낙후되고 영세민과 저소득층이 밀집되어 거주하던 곳이었으나 1995년 부터 도시재개발 지역으로 신 아파트와 고급주택이 들어서면서 계층간의 빈부격차가 심해져 이들을 통합할 수 있는 주민참여 프로그램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다. 이에 따라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은 사회복지이용시설로서 지역 특성에 맞는 복지사업으로 하느님의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역주민들에게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 좀 더 나은 생활,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통한 주민의 복지증지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복지관에서는 종교 이념에 관계 없이 장점, 약점, 경제 상태, 신체, 정신적인 태도나 행동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며 스스로 자기가 나갈 방향을 결정하려는 본인의 의사와 자유를 존중하며 자립원조에 필요한 것만을 제공한다.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은 천주교 원주 교구 사회사업국내 지역사회복지부에서는 그동안 부분적으로 해오던 지역사회복지업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원주 시내에서 저소득층들과 도시 빈민층들이 밀집되어 살고 있는 곳을 대상으로 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 극빈가정자녀, 알콜중독환자, 무의탁 노인, 가출 청소년, 긴급 구호대상자들의 발견, 상담 및 방문, 사회복지시설과 연결하여 간병인과 봉사자 연결, 가정 돕기 등의 사업을 실시하여 왔고 좀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전문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기 위하여 천주교 교육원 이었던 봉신2동 현재의 위치에 정부의 보조를 받아 지하 1층, 지하 2층의 연 건평 5백평 규모로 증축하여 맞벌이 가정을 위한 탁아방, 청소년 독서실, 상담실, 회의실, 부업교실등 각종 직업훈련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여 지역주민들의 교육과 계몽, 봉사활동과 나눔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1990년 11월에 개관을 하게 되었다.

1988. 7. 1유당마을 개원 (나눔지 209호 2쪽) - 1998. 7. 16발행

유당(裕堂)마을 (나눔지 209호 2쪽) - 1998. 7. 16발행

국내 최초의 유료양로원이 수원에 설립되었다. 대지 4,159평, 연건평 1,502평으로 1인용 24실, 2인용 20실, 44인용 6실로 총 인원 88명이 입주 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추었다. 입주자격은 만 65게 이상의 신체건강한 노인으로 소정의 생활비 부담능력이 있으면 거주가 가능하다. 시설면을 살펴보면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영양사 및 조리사가 상주하여 1일 3식 및 간식 1회를 제공하며 의사의 지시가 있는 식이요법의 필요시에는 그에따른 특별식을 제공한다. 건강관리를 위해서는 의무실에 의사, 간호사를 배치하여 건강상태를 파악하고 건강상담 및 잔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며 각종 오락시설과 문화체육시설로 노인들의 심신이 건강한 생활유지를 위한 시설을 갖추었다. 또한 생활전반과 인간관계, 재산관계 등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필요시 이에 응할 수 있도록 1급 사회복지사가 상주하여 노인들을 보살핀다. 유당마을은 노년생활을 알차고 보람있게 자립하여 보낼 수 있도록 한다.

1988. 7. 10 인천 답동성당에 인천 가톨릭 농아 선교회 설립

인천 가톨릭 농아 선교회 - 1998. 7. 9일 인천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답신에 의거

농아인의 선교수화 교육을 통한 수화 보급을 위해서 1988년 7월 10일 답동성당의 이춘근 시몬스톡 수녀님에 의해 설립되었다. 현재는 봉사자 20명과 농아인 10명, 지도수녀, 지도신부와 함께하고 있다.

당시는 인천지역 농아들의 전교가 필요했기에 설립되었다.

1988. 7. 26 성 분도 어버이 집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8쪽)

성 분도 어버이 집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8쪽)

현시대에는 노인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는 수도자나 성직자의 부모중에 고령이거나 병환 중인데 돌보는 이가 없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들만이라도 어떻게 도와 드릴 수 없을까하여 노인들을 위한 소박한 집을 구상하게 되었다. 우선 본원에 인접해 있는 집한채를 사서 '성 분도 어버이 집'이라 이름하고 1988년 7월 26일 성 요아킴과 안나 축일에 축복하고 문을 열었다. 아직까지는 수도자나 성직자의 친부모는 모시지 못하였고, 돌보아주는 이 없는 노인들 특히 위급한 행려환자 할머니들을 모시어 돌보고 있다. 현재 성 분도 어버이집에는 20명의 할머니가 살고 있는데, 거의 60세 이상의 할머니들로서 가나과 질병으로 신변처리가 거의 불가능하고 생계아 어려운 중에 임종을 기다리던 상태에서 이웃이나 천주교 신자들을 통해 이곳에 오게 되었다. 이들은 호적에응 가족이 기록되어 있어 시립양로원 등 정부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딱한 처지에 있었다. 다행히 이곳 어버이집에서 지내는 동안 건강상태가 좋아지는 할머니들이 늘어나서 분도유치원 뒷편에 작은 집 한채를 더 사서 '보금자리'라 부르고 중환자 할머니들을 따로 모시게 되었다. 성 분도 어비이 집은 설립 준비부터 현재까지 염일례 그라치아 수녀가 책임을 맡고 있으며 수녀들의 간헐적인 협조를 받았다. 1989년 2월부터 지금까지 진정애 마인라드 수녀가 함께하고 있고, 1991년 6월부터는 김해숙 프리스카 수녀도 돕고 있다. 또한 이곳은 실습기 수련수녀 1명 혹은 2명이 파견되는 훌륭한 수련의 도장이기도 하다. 어버이집에는 치매증 때문에 방금 식사를 마치고 상을 물려 놓고도 들어서는 방문객에게 "나에게는 밥 안준다"며 호소하는 할머니, 한밤중에 빨래를 한다며 방망이로 큰 소리를 내는 할머니, 밤마다 아들이 죽었다며 장판과 벽지를 찢으며 무덤을 만드는 할머니, 병원 한번 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된 할머니, 누군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임종이 가까워도 마음이 편치 않은 할머니……들이 있다. 가난과 질병 때문에 외롭고 춥고 배고파야 했던 지난 날이, 이해받지 못하고 상처받고 서러웠던 일들이 때로는 임종이 가까워도 풀리지 않는 안타까움을 겪기도 한다. 수녀들은 이들의 마지막 순간까지 손발이 되어 줄 뿐 아니라, 기구한 삶을 살아온 할머니들이 자신의 한편생을 새로운 눈으로 되돌아보고 정리 하면서 용서를 받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며 모든 이와 화해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이승을 하직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함께 아파하며 함께 울기도 한다. 수녀들은 이곳의 할머니들을 친부모 모시듯 섬기면서 갖가지 가시밭길을 걸어온 그들에게서, 또 그 생애에서 인간의 아름다움과 존엄함.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와 구원을 깨달으며 고달픔도 잊고 늘 기쁨과 감사에 벅차한다.

1988. 8. 3 4평의 공간으로 꾸러기 동산 개원

꾸러기 동산 어린이 집 - 1998. 6. 13일 원장 이화복님의 답신에 의거

꾸러기 동산 어린이집이 위치한 구로 3동은 한국 수출 산업공단과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철강, 전자, 봉제 등 소규모의 가내 공장들이 밀접해 있어 공장과 주거지역이 혼재된 곳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이 공장 노동자, 일일 노동자들이며 좁은 골목과 나무 한그루, 놀이터 조차 제대로 없는 환경에서 방치되어 있는 많은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시키고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는 안전하고 교육적인 환경의 필요성을 절감한 6명의 여성들이 탁아소를 설립하여 운영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4세-5세 대상의 어린이 집은 몇 군데 있으나 12개월 미만의 영아, 탁아 공부방 시설의 부재로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고 2-3년간은 직장을 가지기 어려우며 유치원, 국민학교 어린이들은 주변의 열악한 환경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부부가 함께 일을 해야만 하는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일을 할 수 가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지역의 현실에서 영아 탁아, 유치 탁아, 공부방의 필요성에 대한 주민들의 요구가 있었으나 공간의 협소함으로 그 요구를 수용할 수는 없었다. 이에 꾸러기 동산 어린이집은 맞벌이 가정의 부모들에게는 안심하고 자녀를 맡김으로 해서 가정 경제 및 사회경제에 도움을 주고 어린이들에게는 편안하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자랄 수 있는 교육의 공간을 위해 건물신축을 하였고 1997년에는 서울시 모범시설로 지정이 되었다.

1988. 8. 24. 서울시로부터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교호시설 인가 (살레시오회의 복지시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살레시오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의 답신에 의거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아동으로써 보호자가 없는 아동친권자나 후견인이 입소를 신청한 아동 또는 가정법원 소년부에서 보호 위탁된 아동을 입소시켜 그들을 선도하여 건전한 국민으로 육성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가정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보호 위탁된 아동, 아동상담소로부터 보호 위탁된 아동, 서울가정법원으로부터 6개월간 보호 위탁된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 교육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목공예 직업훈련 - 목공예 이론과 실습을 통해 기술습득과 기능사 2급, 3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직업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참여하는 기능인으로 양성하며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직업인으로 교육한다. 1년의 기초과정인 훈련과와 훈련과를 수료한 학생으로 취업을 위한 종합 기술과로 향상과가 있으며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국가지방기능올림픽 대회와 국가전국기능올림픽대회에 참가하여 입상할 경우 국제기능올림픽 대회의 참가기회를 부여한다. 향상과를 수료한 18세 이상의 학생으로 적성에 맞는 가구회사, 목공소, 실내 인테리어 등을 선정하여 취업알선을 해주고 있다. 건축과, 실내디자인과의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 희망자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 도자기과 직업훈련 - 도자기 실습을 통해 흙에서 전달되는 부드러움과 차분히 만들어야 하는 작업과정을 통해 정서적인 인격도야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며 더 나아가 전문적인 기술습득과 자격증을 취득해 본인 스스로의 성취감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교육한다. 도자기의 여러 성형방법을 통해 학생 자신에 대한 내적인 안정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도 자신감있게 살아갈 수 있는 인격형성과 적성에 맞는 학생을 선별하는 기초반과 기능사 시험의 응시를 원하거나 전문적인 기술습득을 통해 취업을 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산업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배양하는 정규반으로 편성되어 있다. 정규반을 졸업한 학생으로 기능사 시험의 응시를 원하거나 전문적인 기술 습득을 통해 취업을 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산업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배양한다.

⸃ 상담지도 -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내의 아동을 대상으로 처음 입소시부터 마지막까지 안에서 부딪히면서 겪게되는 성장상, 생활상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파악하여 해결책을 유도함으로서 보다 나은 인격체로서의 성장을 도모하고 퇴소후의 자신과 사회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키움으로서 바람직한 미래 설계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 정 기 상 담 : 4/4분기로 전체아동들의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내에서의 생활을 점검하여 쉽게 눈에 안 띄는 아동들과의 상담을 통해 원할한 적응을 돕는다.

* 문제아동상담 : 타 아동과의 관게, 생활면에서 어려움이 있는 아동을 발견해서 상담을 통해 원할한 적응을 돕는다.

* 퇴소아동상담 : 퇴소를 앞두고 있는 아동을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설장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미래 계획을 세우도록 해서 재비행의 방지와 건강한 사회인으로의 방향을 제시한다.

* 학생상담 : 학교내에서의 생활태도, 부족과목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도모함으로써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아동의 원할한 학교생활이 되도록 돕는다.

⸄ 일반학과교육 -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내의 아동을 대상으로 보다 나은 자기성장과 사회적응을 도모하기 위하여 학력취득에 그 목적을 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마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학생들을 위해 한글기초반,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자격과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검정고시반을 운영

학업능력등급을 기준으로 한글, 산수기초,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을 공부한다.

과목합격으로 인해 정규수업 이외의 과목보충이 필요한 아동과 보충수업을 희망하는 아동을 대상으로 개인지도 수업진행, 외부에서 일반학교에 다니는 아동을 대상으로 개인지도를 한다. 그리고 특별활동으로는 연극, 태권도, 그림, 영어회화, 기타반, 바둑반, 피아노, 컴퓨터, 전자조립, 드럼등의 특별활동을 실시한다.

⸅ 종교교육 - 교리교육(매주1시간)과 종교행사를통해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나누는 그리스도인으로 육성하고자 한다.

1998년 3월말 현재 정원 80명 중, 남학생 54명이 생활하고 있으며 "특히 보다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징표가 되며 그 전달자가 된다." 라는 회헌에 따라 봉사하고 있다.

1988. 8. 31 부산 성분도병원을 부산교구에 헌정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3쪽)

부산성분도병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3쪽)

1951년 11월 5일, 유을준 아타나시오 의사와 함께 부산 초량동에 자선병원을 개설한 부산 성 베네딕도회의 수녀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병원을 운영하였다. 당시 이렇다 할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수녀들은 병원 한 모퉁이를 분원으로 삼고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1954년 2월, 병원장 유을준 의사가 병원 전체를 수녀원에 양도하고 떠남에 따라 성분도병원은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의료봉사의 초석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14일에는 정식 병원으로 인가를 받아 내과, 소아과, 외과, 이비인후과, 안과, 치과, 임상병리과 등 7개의 진료과목을 갖추었다.

1955년 5월 15일에는 병원을 3층(본관:건평 474평)으로 증축하고 1960년 9월에는 병원을 5층(별관:건평 438평)으로 증축하였다.

부산 성분도병원은 1965년 11월 29일에 비영리 종합병원으로 허가를 받고, 12월에는 수련의 교육병원으로 지정받았다. 그후 수차례의 증축공사, 의료장비와 의료진 확충을 통해 1975년 5월 9일에는 종합병원 인가를 받고, 1988년에는 총 99실 301개 병상을 갖춘 병원으로 성장하여 부산 지역사회의 보건 향상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1977년 11월부터 전개한 원목활동은 해를 거듭할 수록 그 활동범위와 대상을 넓혔고, 환자와 직원, 수녀들 사이의 신앙일치와 친교에도 큰 몫을 하였다. 그리고 환자방문과 상담, 도서대여, 직원과 환자의 교리강좌와 신심활동 등을 통해 외교인에게는 신앙의 빛이 되고 신앙인들에게는 성화를 위한 장(場)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의료봉사는 여러 면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급속한 발전은 새로운 전문지식과의 시설, 의료장비들을 끊임없이 요구하였고, 또 의료보험제도의 실시와 함께 모든 것이 제도화, 대형화되었다. 그러므로 수녀원의 의료봉사는 과학화, 기계화, 전문화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 생명에의 경외심을 높이고,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더 많은 노력과 인내와 봉사를 요구받고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보건후생사업이 점점 조직화, 대형화, 제도화되어감에 따라 가난한 이,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가 어려워지고 수녀원의 병원운영은 많은 과제와 어려움을 안게 되었다. 특히 1988년 4월 병원에 노동조합이설립되면서 노동쟁의, 파업 등으로 병원운영이 어려워지자, 1988년 8월 31일에 조건없이 병원을 부산교구에 헌정한 뒤, 1988년 9월 부터는 원목실을 비롯한 몇 부서에 약 10명의 수녀가 일반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고 1989년 봄부터는 병원의 거처를 거두고 수녀원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1988. 12. 8 대철 베드로의집 설립

대철 베드로의집 - 1998. 6. 30일 대철베드로의집 김혜경 데레사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강원도 정선군 내의 탄광촌의 결손가정의 아동들을 보호하여 육성하기 위하여 1988년 12월 8일에 성모카테키스타회의 이수자 시도니아 수녀에 의해 설립되었다. 98년 현재 연면적 745평, 건평 156평에 아동 20명, 직원 4명이 탄광마을의 특성과 어려움속에서 만들어진 고아와 결손가정 아이들을 가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함께하고 있다. 현재 10명 미만의 아동과 더욱 친밀한 가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계획하고 있는 중이다.

1988. 12. 10 고아와 기아의 수용시설에서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치료시설로 아이들의 집 용도 변경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복지시설)

아이들의 집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6. 11일 아이들의집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6·25 동란 후 고아와 기아, 혼혈아들을 수용하여 양육 및 입양을 목적으로 1954년 9월 1일 강 베드로 수녀가 부산 동대신동에 설립하였다. 그러나 특수아동의 수용보호 및 치료시설의 필요에따라 1998년 12월 10일에 부산해운대구에 지체 부자유영아의 재활치료 및 수용시설인 아이들의 집으로 그 목적을 변경하였다.

주요사업 내용은 부모가 없는 장애아동을 수용보호하여 행복한 삶에의 원동력이 되도록 도우며, 또 갓난아기 부터 보이타 치료를 집중적으로 하여 장애를 가볍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만 1세이상 교육가능급 생활교육 아동에게 조기교육을 실시하여 인지능력을 높이고 지능개발을 돕는다. 또 개별적으로 언어지도를 한다. 1998년 2월 현재 정원 41명 중에 현 인원은 46명이고 시설은 대지 7,721㎡에 임야 23,502㎡이다. 마리아동에는 경당과 아동방, 의무실, 치료실, 식당, 주방, 세탁실 등이 있고 요셉동에는 사무실과 교육실, 그룹방 등이 있고, 강당과 놀이방이 설치되어있는 유희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매월 1,000여명 이상의 봉사자들이 아이들의 집에서 시설물과 정원 손보기, 밭일, 아이들 밥 먹이기, 주방과 빨래방 돕기, 시설물과 정원 손보기, 밭일, 그외의 일들을 도와주고 있다.

1988. 서울에 '나자렛 집' 설립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나자렛 집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5. 16 광주 나자렛 집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국가경제가 윤택해지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증가하면서 가정교육력이 떨어지고 여성의 자기인식과 자기실현 욕구는 이혼율의 증가를 초래하여 이에 따른 결손가정, 가정파탄, 가정교육의 약화등이 강화되면서 청소년의 가출, 비행, 청소년 가장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버려진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적인 배려로 1988년 서울에 '나자렛 집'을 신설하여 가정공동체를 이루었다. 나자렛집의 규모는 15-20명의 청소년들이 3명의 수녀와 함께 가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살면서 교육을 받고 있으며 서울, 광주, 대전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가출소녀들의 일시보호와 귀가지도 및 사회복귀를 도우며, 시민교양교육, 초·중등교육, 직업·기술교육, 소녀들과 후원자의 결연 및 장학을 위한 교육을 하고있다.

1988. 마리스타 기술교육원 설립 (교회와 역사 244호 14쪽) - 1995. 9. 25발행

마리스타 기술 교육원 (교회와 역사 244호 14쪽) - 1995. 9. 25발행

마리스타 기술 교육원(충북 중원군 산척면 영덕리 262-11)의 전신은 사회 복지가인 애드나 스미드씨가 1964년 서울역 부근에서 방황하던 구두닦이 청소년들을 돌보기 위하여 용산에서 시작한 '요한 보스코' 고아원이다. 그런데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시 당국으로 부터 고아원 이전을 요청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고아원 운영이 불가능하게 되자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가 이를 인수하여 충북 중원군에 새 건물을 짓고 기술 교육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는 부모가 없거나 가정 불화로 가출한 청소년, 결손 가정의 자녀와 영세민 자녀, 그리고 다른 사회복지 시설에서 잘 적응하지 못한 12-18세의 청소년들을 수용하여 사회적응을 위한 학습교육과 기술훈련을 연마시켜 직업인으로 양성시키고 있다. 졸업 후에는 취업알선까지 해주며 그들이 진정한 사회인으로 뿐만 아니라 4명의 수사와 일반 교사 및 보모들이 목공, 금속 공예, 배관 등의 기술교육과 함께 신앙교육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1989. 1. 19 무료급식소인 대구 요셉의 집 설립

요셉의 집 -1998. 5. 22일 요셉의 집 김아오스딩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대구시 중구 교동 26-10에 자리잡고 있는 요셉의 집은 1989년 1월 19일 예수성심 시녀회의 최분이(소피아) 수녀와 이사장 탁정자 씨가 불우 결식 노인들에게 중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설립하였다. 예수성심시녀회의 창설자 신부님의 "남이 하기 싫은 일은 내가한다."라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는 말씀에 바탕을 두고 활동하고있다. 설립당시는 좌석수 28석에 급식일수는 주6회 였던 것이 98년 현재 좌석수 48석에 급식일수는 주 5회로 변경하였다. 현재 급식인원은 400명이다.

1989. 4. 25 성가정 입양원 신축건물 기공식 (나눔지 250호 4쪽) - 1989. 5. 6발행

성가정 입양원 (나눔지 250호 4쪽) - 1989. 5. 6발행

새생명의 귀한 아기들을 하느님의 사랑안에서 성가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한 성가정 입양원이 개설되었다. 대지 600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사무실과 상담실, 신생아실, 유아실, 결연자대기실, 자료실, 소성당, 수녀원, 강당, 식당, 미혼모숙소 등으로 일시보호아동 30명 까지 수용할 수 있는 시설과 함께 피정과 연수교육을 겸할 수 있는 교육시설을 갖추게 된다.

1989. 5. 5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살레시오의 집 설립

살레시오의 집 - 1998. 8. 26일 살레시오의 집의 답신에 의거

살레시오의 집은 사회와 자신의 삶에 적응치 못하는 노약자와 정신질환자, 심신장애자 등 생활능력이 없는 무의무탁한 부랑인들을 교회의 복음적 가르침에 따라 적당한 보호, 선도함을 목적으로 하여 1989년 5월 5일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설립되었다. 설립 당사자는 우총평 프란치스꼬, 김양순 요한나프란치스카이며 현 건물에 안채 약 15평 정도의 규모이며 교우 임희만 요셉형제의 전답 2,200평(2,000만원)을 50만원에 계약하여 6명의 식구를 이끌고 배론성지 입구 옛 살레시오의 집에 입주하였다.

1994년 1월 12일에 살레시오의 집은 부랑인시설로 인가를 받았다가 1998년 1월 1일에는 정신지체 장애인의 재활시설로 인가를 받았다. 살레시오의 집은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생활하고 있다.

1989. 5. 9 성모조산소 양로원으로 용도변경 (성체회의 복지시설)

성모 조산소 (성체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평택본당 안 세시리아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1970년대 초 경기도 광주 대단지로 불리던 지금의 성남시에서 폭동이 일어났었다. 서울시의 인구분산 계획의 일환으로 남한산성 밑자락을 불도저로 밀어내고 비탈진 지형위에 서울의 청계천 위에 밀집되어 살던 판자촌 주민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땅 20평과 천막 1개를 주어 이곳으로 이주시켜 놓은 것이다.

이곳으로 옮겨온 노동자들의 하루 생계터전은 청계천 주변의 노상이었다. 성모 조산소의 목적은 모자보건 사업을 위해서 였지만 그곳의 실정에 맞게 하다보니 피치못하고 의료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수진동 성당을 무대로 신자중심의 가족계획 상담실을 운영하면서 임산부들의 전인교육을 위해 힘썼고 그에따른 문제점들을 발견하다가 보니 전적인 의료봉사를 하게 된 것이다. 어떤 임산부는 낙태경험이 11-13번까지 있었다. 그 임산부는 입이 돌아가고 눈은 초점이 흐려지고 낙태의 후유증으로 건강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으며 영양실조에까지 겹쳐 고생하고 있었다. (당시는 지금 같은 시술이 발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만 하여도 성남에는 전문의가 거의 없었다. 일명 무자격 의원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일반조산소에도 낙태시술을 위법으로 하고 있었다. 성체회 수녀들은 그곳의 조산원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밤중에 왕진이 들어와 찾아가 보니 언덕을 넘어 비탈길 중턱에 움막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촛불 하나로 부엌과 방한칸을 비추어주고 있는데 방으로 들어가 보니 너무 비좁아서 산모는 대각선으로 누워있고 비지땀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하였다. 이상은 없는것 같은데 초산에다 가난하여 영양이 없고 두려워 겁을 많이 먹은것 같았다. 포도당 주사를 넣어주고 순산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부엌도 구차하게 이를데 없었다. 그 뒤 가톨릭 구제위원회에 의뢰하여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를 얻어다가 가가호호 방문하여 나누어주곤 하였다.

또한 무료진료를 주1회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광주대단지가 성남市로 승격된 이후 안정이 되면서 조산소 사업을 마치고 잠시 유아원으로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1989년 부터는 현재의 인보의 집 할머니들을 위한 무료양로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1989. 7. 1 중복장애자 소공동체 '사랑손' 개설 (나눔지 259호 4쪽) - 1989. 7. 8발행

사랑손 (나눔지 259호 4쪽) - 1989. 7. 8발행

중복장애자의 지속적인 재활 및 사회참여를 위한 보호 작업장이 오랜 검토와 준비작업 끝에 사당동에 공동체의 집을 마련하였다. 89년 현재는 단순정신지체장애자 5명으로 요보호장애자와 훈련 가능급 장애자들로 구성되어 차츰 훈련적응이 되면 자립작업장으로 교육시켜 나갈 계획이다. 본회 재활 사업부 에서는 정신지체와 중복장애자들이 늘어감에 따라 비둘기 교실 수료자중 사회취업이나 자립이 불가능한 중복장애자들에게 생활과 보호작업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1989. 11 밀알회 서울 후원회 조직 (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1990. 5 밀알회 춘천 후원회 조직 (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밀알재활원 (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 1998. 8. 25일 밀알재활원의 답신에 의거

장애인에게 장애를 최대한 극복 할 수 있도록 제반, 재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장애인의 사회통합 및 사회복귀를 촉지하고,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자 1989년 서울 후원회를 조직하여 배종호(도마) 신부가 설립하였다. 대지 2,183평중에 364평이 본건물이고 작업장 및 관사가 150평이다. 밀알재활원에서 실행중인 작업은 다음과 같다.

직업재활사업 - 기초학습지도, 대인관계훈련, 사회생활훈련, 현장적응훈련

사회적응 프로그램 - 다양한 주변환경의 체험을 통하여 지역사회 내에서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는 능력 배양

교육 프로그램 - 신변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는 기능을 기르고 단체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습관을 기름

건강증진활동 - 일상생활 속에서 체력단련의 기회를 도모하고 운동을 통하여 서로간의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여 서로의 이해와 수용의 폭을 넓힘

여가활동 - 일상적인 집단생활에서의 분위기를 바꿔주고 야외활동을 통하여 자연환경속에서 다양한 학습의 기회를 제공

앞으로는 연장장애인 자립생활을 위한 공동 생활가정(GROUP HOME)을 운영할 예정이며 밀알재활원의 입소대상은 강원도내 거주하는 18세 이상 30세 미만의 정신지체인, 생활보호 대상자, 읍·면·동사무소 또는 시·군 사회복지과에 의뢰하면 입소할 수 있다.

밀알재활원은 지적능력과 사회적응 능력의 자체로 스스로 삶의 개발이 어려운 사람들의 삶 터가 되며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임을 서로 믿으며 장애를 극복하려는 굳은 의지들이 모인 소중한 공동체이다.

1989. 보스꼬 자습실을 개설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4호 40쪽) - 1995년 가을 발행

보스꼬 자습실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4호 40쪽) - 1995년 가을 발행

작고 허름한 집들이 빽빽히 자리잡고 있는 구로동은 공단지역인 만큼 사람들로 밀집되어 있다. 단칸방에 3대가 함께 사는 가정도 있으니 아이들이 공부할만한 공간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밤이 되면 집대신 골목에서 자리를 잡고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며 지나가는 아이들의 지갑을 노리는 탈선 천소년들이 서성인다.

구로3동 천주교회에서는 본당에서 주로 주일에만 사용하는 교육관 시설을 평일에 지역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보스꼬 자습실을 1989년에 개원하였다. 현재 중학생 40명이 이용하고 있으며 교육관 프로그램 담당을 겸임한 선생님 한분과 자원봉사자 9명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상선정 기준은 없으며 이용회비는 월 10,000원이다. 보스꼬 자습실의 운영비는 본당에서 보조하고 있으며, 자원봉사자는 본당 청년회를 통하여 연결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고, 교사회는 주1회 열리는데 주로 교안작성 및 교육과 정보교환이 이루어진다.

중학생들이기 때문에 영어와 수학을 주로 배우고, 아이들의 정서교육을 위해 한달에 1회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이 시간에는 체육대회, 레크레이션, 장기자랑, 비디오를 상영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더 외로워져 간다. 아마도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 아이들은 더더욱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런 면에서 자습실은 친구를 만들어 주는 역할도 한다. 같이 공부도 하고, 행사도 준비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때 아이들은 가난을 부끄러움이 아닌 불편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990. 5 평화의 모친의 집으로 재 설립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평화의 모친의 집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 1998. 3. 31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답신에 의거

1973년 11월 평화의 모친의원으로 개원하였다가 1987년 폐원하였다. 그 후 같은 건물에 무의탁 노인들을 위하여 양로시설로 변경하여 1990년 5월에 설립되었다. 1998년 현재 포천에 위치하고 있으며 20명-25명의 할머니들을 수용할수 있는 규모이다.

1990. 6. 1 서울시 도봉구청으로 부터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위탁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도봉 독서실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 28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1987년 6월 30일 서울시 도봉구 방학 1동에 청소년 문화 함양과 쾌적한 면학 분위기 조성, 학생들의 지적 수준과 학습능률을 높이기 위해 도봉구의 지원아래 세워졌으며 학생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데 있고, 청소년들의 올바른 자유정신을 양양하고 진리에 입각한 인격완성을 위해 그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도봉구청으로부터 1990년 6월 1일 재단법인 한국순교복자수녀회로부터 위탁을 받았다.

도봉동의 동명은 마을이 서울근교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에 있음으로 얻어진 이름이다. 옛날부터 이 풍경좋은 도봉산에 많은 명사들이 찾아들어 머물러 경치를 사랑하였다. 너와 내가 없는 둥근 지구라는 원탁에서 공존하며 국가와 국가간에 경쟁의 변모속에 고도의 경제성장과 문화발전이 민족의 내일을 탈바꿈시키고 있는 세대라 하겠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경쟁에서 보다 부강된 국력의 초석의 기반을 다지기위해서는 전국민이 언제 어디서나 필요에 따라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탐독하고 연구할 수있는 면학장소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으며 인구증가와 경제발전에 따라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독서실이 절대시 필요하였다. 인구는 기하급수로 급증하고 주택사정은 날이 갈수록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다. 단칸방을 쓰고있는 가구는 전체 가구의 32.9%이며, 2개 이하는 전체의 67.1%이다. 특히 서울은 단칸방을 사용하고 있는 가구가 전체가구중 33.7%로 각종 환경공해와 학습장소가 어려운 면학도들에게 학습의욕과 능률을 증진시킬 수 있는 사회교육 시설이 필요시 된다고 보겠다. 전국 도서관 수는 3621개관이 있으나 도서관 및 학교 도서관으로써 일반대중이 필요로 하는 공공도서관은 전국적으로 약 122개로써 극히 부족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을 뿐더러 필요에 따라서는 도서관에 입관하려고 하여도 대개의 공공도서관은 이른 새벽부터 초만원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어 몇시간씩 기다려야 입관할 수 있는 현상이다.

지역적으로 부족한 공공도서관의 기능을 대신하고 영세자녀 및 불우한 면학도 들에게 학습장소를 마련하여 주어 국가와 사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홍익인간을 육성시키는 학술도장으로 모든 국민에게 평생을 통한 도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며 국민의 자질을 향상하게 함으로써 정의로운 민주복지사회의 건설과 문화창달을 기여하려는 것이 사설 도서실의 의무이며 임무라 할 수 있겠다.

도봉 독서실은 대지가 315평이며 건물이 361평으로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되어있으며 1987년 6월 30일 개관식을 하였다. 1987년 6월 1일 도봉구청과 한국순교복자수녀회와 위탁체결을 하였다.

1987년 6월 22일 윤행자 요셉 수녀와 이옥보 야고보 수녀가 파견되었으며 동년 8월에 김복례(마르타) 수녀가 파견되고 동년 9월에 이은경 아가다 수녀가 파견되었다.

도봉 독서실 이용자는 년 평균 15만명에서 16만명에 이르며 수용인원은 438석이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우리나라의 다도정신과 선비 사상과 화랑 사상을 자연스럽게 점하게 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워주고 공동생활 속에서 서로 협동하며 질서를 스스로 지킬 줄 아는 어린이로 성장시키기 위해 유치원 아이들에게 다례를 가르치고 지역주민 가정주부들에게도 다도를 가르치기도 하였었다. 청소년들이 자기안의 모든 잡념, 즉 불만스러운 생각과 헛된욕심 나쁜 생각등을 버리고 마음을 순수하에 가짐으로써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정신통일을 이룩하며 더욱 열심히 공부에 몰입할 수 있도록 단전호흡 좌선을 교육시킨 일도 있었다.

1993년도에는 학생들에게 타자교육을 시켰다. 학생들에게 종교비디오를 보여 주고 일본인 후레아 신부가 도봉독서실에 상주할 때는 후레아 신부가 한달에 한번씩 와서 독서실에서 미사를 하였다. 수녀들이 정숙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주고 있어서 청소년 선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음으로 학부모들과 지역주민에게 상당히 좋은 호평을 받고있다. 1998년 현재 수녀 3명이 청소년과 지역 주민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다.

1990. 6. 16 대전 성모의 집 축성식 (동정성모회의 복지시설 - 교회와 역사 242호 12쪽) - 1995. 7. 25발행

성모의 집 (동정 성모회의 복지시설 - 교회와 역사 242호 12쪽) - 1995. 7. 25발행

대전교구에서는 성체대회 한마음 한몸 운동의 일환으로 하루 세끼 식사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기 위하여 무료 급식 식당을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시청에서 장소를 제공하면서 이 사업을 동정성모회에 부탁하였다. 이에 동정 성모회에서도 1989년 한국 진출 25주년을 기념하면서 그 동안의 표현으로 이 사업을 맡게 되었다. 대전시 동구 삼성 1동 노인 회관 2층에 성모의 집을 신축하여 1990년 6월 16일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의 주례로 축성하였다. 하루 이용자는 대개 노약자, 행려자, 무의탁자 등이고 매일 12시 부터 오후 1시 30분 까지 대략 230-250명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가진 것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시작된 성모의 집은 대전교구 30개 본당에서 매일 12-15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식사 준비, 배식, 설거지를 도와주는 등 대전 교구 신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운영되고 있다. 점심 제공 이외에도 무료 진료, 혜택 주선, 이발, 예비자 교리, 봉사자 및 이용자들의 사적지 순례 등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봉사자 1일 피정, 동구청의 재정 지원으로 성모의 집 공간 확장등도 계획하고 있다.

1990. 10. 11 중계마을 복지회관을 노원구에서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중계마을 복지회관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지역내의 주민 특히 저소득층의 주민들을 위해 봉사함으로 균형있는 지역사회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1990년 10월 11일 노원구에서 설립하였다.

서울 특별시의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노원구에 설鱁립된 중계마을 복지회관은 저소득 밀집지역에 위치한 복지시설로써 여성의 직업사회 증가 및 맞벌이 가정이 늘고 있는 요즈음 주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적합한 환경에서의 아동 보호 사업이 필요하여 설립되었고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위탁운영하게 되었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히에서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이 사도직의 목적과 효과로써 저소득 지역 주민에게 자립기관을 형성하고 생활수준의 향상과 정신적으로 윤택한 삶으로 이끌어 기쁨과 고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평화와 사랑을 심어 이 지역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위탁운영하게 되었다. 대지가 274평이며 건물이 329평이다. 지하는 공동 작업장이며 1층은 어린이집, 할아버지방, 조리실, 사무실, 2층은 공부방, 마을회관 그리고 3층은 관리인실이다. 1990년 10월 11일 양기희(베네딕타) 수녀, 권우이(막달레나) 수녀, 이정자(마리아) 수녀, 이국희(데레사) 수녀, 나옥자(젬마) 수녀 5명이 파견되었다. 어린이집은 아동의 발달과정에 적합한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어 건전하고 조화로운 신체 발달과 성장을 하도록 해 주고 있다. 어린이집 원훈은 "슬기롭고, 착하게, 바르고 튼튼하게"이다.

공부방은 주거환경이 협소한 가정의 청소년들에게 학습의욕을 고취시키고 보다 건전한 활동을 하도록 생활공간 및 학습장을 제공하고 있으며 영어, 수학, 한문 등 특강시간을 마련해 주고 중학생 대상으로 주2회 영어공부를 시키고 있다. 공부방은 좌석이 114석이며 운영시간은 06:00 - 22:00이다.

노인정은 지역 노인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노인들과의 친목을 더해주며 건전한 생활과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노인정의 노인들을 위하여 한의학과 교수를 초방히여 건강 관리에 대한 교육도 실시하고 무료진료도 하고 있다. 노인들을 위하여 야유회도 하고 생활보호 대상자들에게 현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1998년 현재 수녀들이 어린이집과 노인정, 청소년 독서실,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의 건강을 위해 수녀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있다.

1990. 11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 개관 - 초대원장 최기식 신부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 1998. 6. 10일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의 홍보담당 원유일님의 답신에 의거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이 위치하여 있는 봉산동은 원주선과 중앙선철도 주변으로 형성된 지역으로서 설립당시(1990년)에는 원주시내에서 가장 낙후되고 영세민과 저소득층이 밀집되어 거주하던 곳이었으나 1995년 부터 도시재개발 지역으로 신 아파트와 고급주택이 들어서면서 계층간의 빈부격차가 심해져 이들을 통합할 수 있는 주민참여 프로그램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다. 이에 따라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은 사회복지이용시설로서 지역 특성에 맞는 복지사업으로 하느님의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역주민들에게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 좀 더 나은 생활,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통한 주민의 복지증지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복지관에서는 종교 이념에 관계 없이 장점, 약점, 경제 상태, 신체, 정신적인 태도나 행동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며 스스로 자기가 나갈 방향을 결정하려는 본인의 의사와 자유를 존중하며 자립원조에 필요한 것만을 제공한다.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은 천주교 원주 교구 사회사업국내 지역사회복지부에서는 그동안 부분적으로 해오던 지역사회복지업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원주 시내에서 저소득층들과 도시 빈민층들이 밀집되어 살고 있는 곳을 대상으로 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 극빈가정자녀, 알콜중독환자, 무의탁 노인, 가출 청소년, 긴급 구호대상자들의 발견, 상담 및 방문, 사회복지시설과 연결하여 간병인과 봉사자 연결, 가정 돕기 등의 사업을 실시하여 왔고 좀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전문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기 위하여 천주교 교육원 이었던 봉신2동 현재의 위치에 정부의 보조를 받아 지하 1층, 지하 2층의 연 건평 5백평 규모로 증축하여 맞벌이 가정을 위한 탁아방, 청소년 독서실, 상담실, 회의실, 부업교실등 각종 직업훈련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여 지역주민들의 교육과 계몽, 봉사활동과 나눔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1990년 11월에 개관을 하게 되었다.

1990. 12. 8 오순절 평화의 마을 그리스도 우리 평화의 집 축성식

오순절 평화의 마을 - 1998. 5. 28일 오순절 평화의 마을 답신에 의거

사회복지법인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복지사업법 제2조에서 정하는 부랑인 보호사업과 장애인 복지사업, 그리고 지역사회 복지사업을 수행하여 사회복지 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1986년 8월 15일 설립되었다. 설립자는 오수영(히지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이며 경남 밀양시 삼랑진, 부산 무의탁 임시보호소, 여주 평화 재활원이 있다.

오수영 원장신부가 부산 동항성당에 주임신부로 부임한지 2개월이 지난 1986년 4월에 알콜 중독으로 몸을 제대로 못 추리는 김 비오 형제(55)와 그의 두 아들이 오수영 원장신부에蕁게 보호를 요청해 왔다. 김비오형제는 알콜중독으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하여 가장으로서의 가족들에 대한 부양능력이 없는 데다 부인마저 집을 나가 버려 학교에 다녀할 아들들은 막막한 상태로 아버지를 따라온 것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을 그냥 외면할 수 없었던 오수영 원장신부는 우선 이들을 맞아들에 허기진 배와 피로에 지친 몸을 쉬게 하였다. 도시빈빈과 결손가정이 많았던 이 지역에 오수영 원장신부의 향적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소식을 들은 병들고 생활능력이 없는 어머니와 어린자녀다섯, 그리고 자녀들로부터 소외받고 보호받을 수 없는 노인들, 교도소에서 출감하여 갈 곳이 없는 이들, 알콜 중독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찾아와 보호를 요청하였다. 어느날 이른 새벽에는 이름도 나이도 부모도 모르는 어린 정신지체아를 사제관 앞에 버리고 가버린 사람도 있었다. 마치 날이 저물면 둥지를 찾아드는 새들처럼 수없이 사제관을 찾아오는 이들 앞에서 본당 사목활동만으로도 바쁜 오수영원장신부였지만 어쩔 수 없이 두 배의 마음을 써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처하게 된 오신부는 일단 성당 안 10평 남짓한 창고를 개조하여 방3칸을 만들어 이들을 쉬게 하였으나 먹이고 입히는 문제는 말 그대로 속수무책 이었다. 교구에서 지급되는 사제 생활비를 몽땅털어 넣기도 하고 오신부의 뜻을 이해한 신자들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여 지내면서 그해 8월경에는 50여명이라는 대가족이 꾸려지게 되었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오순절날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기도하며 하나로 모여 있던 사도들 위에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불의 사랑을 체험한 사도들과 모든 신도들은 찬미와 기도와 영가를 부르며 초대교회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사도2,42-47 : 4,32-37).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나누는 가운데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나눔과 섬김, 사랑과 일치의 삶을 살았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바로 이 초대교회공동체의 정신으로 살아감으로써 세상을 복음화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이웃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구현하려고 어려운 이들끼리 함께 모여 서로를 아끼고 위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삼랑진

삼랑진읍 미전리에 위치한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부랑인 선도시설로서 부랑인, 행려환자, 무연고자등을 수용하고 있고, 수녀원 및 수도회와 피정센터가 함께 있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 재단의 본원으로서 대부분의 주요업무는 이곳에서 담당한다. 대지면적은 9천 4백 5십 9평방미터이고 98년 5월 현재 수용인원은 404명(남264명, 여 140명)이고 직원은 40여명이고 수녀회와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는 수도자들은 80여명이다.

소재지 : 우 628-900 경남 밀양군 삼랑진읍 미전리 636/ 전화 0527)52-4241/ 모사전보 0527)51-1984

여주분원

93년 10월경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장안리 산5번지 임야 2만 3천5백여평을 이강훈씨로부터 기증을 받음으로 장애인 시설 계획을 구체화 한다. 이에따라 94년 10월 7일 여주분원 축성미사를 가짐으로 분원을 신설하게 된다. 그러나 기증받은 땅이 정지 과정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게 되어 95년 5월 22일 여주군 점동면 청안리 산 29번지 외 1필지 11만 7천 6백㎡을 재매입하여 평화재활원 건립을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1995년 9월 14일 평화재활원 기공식을, 96년 6월 14일에는 그 중 "평화수련원 및 성당착공식"을 하였다. 1차로 건립되는 건물은 영유아를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이다.

무의탁 장애인을 보호함으로 삶의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이들을 건전하게 교육하여 개개인의 가치개발과 지역사회 복지증진 및 밝은 사회조성에 기여하고자 시작된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장안리 산 51번지에 있는 여주평화재활원은 면적이 7만7천6백53평방미터로 영유장애아100여명을 보호할 수 있는 여주 천사들의 집과 성인당애인 200여명을 보호할 수 있는 평화재활원이 있다. 1997년 5월 23일축성을 가진 여주 천사들의 집에는 98년 5월 현재 영유장애아들이 30여명 생활하고 있고 성인장애인을 위한 평화재활원은 올해(1998년) 10월경에 준공예정에 있다.

소재지 : 우 469-870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청안리 산29번지/ 전화 0337)84-0553/ 모사전보 0337)84-0522

부산임시대기소

부산 무의탁임시호보소는 대지 면적이 3천 7백 84평방미터이고 부산시 해운대구에 위치하고 있다. 94년부터 이곳을 임시 대기소로 이용하였는데 구청에서 입소심사를 마친 원생을 삼랑진 평화의 마을에 이주시킬 때까지 임시로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수용인원은 유동적이기는 하나 대체적으로 20여명 정도 머물게 되고 법닝 업무를 관장하는 직원과 시설내의 있는 수녀원의 지도자가 원생들을 돌보고 있다.

소재지 : 우 608-062 부산시 남구 우암2동 125/ 전화 051)69-2016/ 모사전보 051)645-3389

1990.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 설립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 - 1998. 5. 17일 성 바오로청소년의 집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가출 청소년이나 부모의 결별이나 중대한 이유로 양육이 불가능한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이 시급하였기 때문에 1990년 성 바오로 애덕원장이 경북 군위군 부계면에 설립하였다. 교호시설인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은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부량아동을 입소시켜 그들을 선도하고 건전한 국민으로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입소 대상은 만7세에서 15세 사이의 남자로, 일시보호소를 통해 주무관청에서 의뢰한 자와 긴급히 보호하여야할 필요가 있는 요보호 아동이며, 만 19세가 되면 퇴소함을 원칙으로 한다.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은 우선 개인과 가족에 대해 개인 및 집단 상담을 통해 가정문제를 예방 치료하며, 초, 중등과정은 학교를 보낸다. 또 가족기능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름, 겨울방학 때마다 가정생활을 실습시킨다.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의 말씀에 바탕을 두며, 문제 청소년 발생의 예방, 근면한 생활로 자립정신을 함양시켜주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육성하여 복지를 증진시켜 보다 밝은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미래를 지향한다.

1990. 상지전문대학의 운영을 안동교구로 이양 (교회와 역사 235호 18쪽) -1994. 12. 25발행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영) Sisters of the Christian Doctrine (교회와 역사 235호 18쪽) - 1994. 12. 25 발행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1700년 프랑스 알사스 로렌 지방에서 장 바틀로(Jean Vatelot, 1688∼1748)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 당시 독일과 프랑스는 알사스 로렌 지방을 사이에 두고 오랜 국경 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였고 가난과 질병, 무질서와 혼란 등 전쟁이 남긴 온갖 병폐의 만연, 특히 젊은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윤리적 탈선에 빠지는 심각한 현상이 가정과 사회를 짖누르고 있었다. 바틀로 신부는 교육사업과 간호 사업을 통해 그 지역 주민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삶의 희망과 인간다운 삶을 찾도록 하기 위하여 본당이나 동네, 소외된 지역 등 생명에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부르심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그들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이런 시작은 곧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를 탄생시켰다. 현재 프랑스 낭시(Nancy)에 총원을 둔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유럽, 남미, 아프리카, 한국 등지에서 1천여명의 회원들이 주로 교육 사업을 하며 의료사업, 윤락 여성들과 가출 소녀들의 재교육 등 특수 교육 및 전교 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한국 진출

1966년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안동에 진출한 것은 당시 대구대교구 안동 감목 대리 구인덕(Celestin Coyos, 具仁德) 신부의 초청으로 시작되었다. 구인덕 신부는 농촌 지역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맡아줄 수 있는 수녀회를 찾고 있었다. 이때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룩셈부르크 관구장이 이 요청을 검토한 후 받아들여 룩셈부르크 관구 소속의 셀린(Celine Knauf) 수녀와 안젤린(Angelin Kellen) 수녀가 1966년 9월 17일 한국에 파견되었다. 두 수녀는 이틀 후부터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명도원에서 1년간 한국어 교육을 받은 후 1967년 안동시 율세동 393번지 3만여평의 부지에 상지전문대학과 수녀원 신축을 시작하였다. 1968년 처음으로 지원자들이 입회하여 1970년 청원기를 시작하고 1972년 율세동 수녀원이 축성되었다. 수녀회 진출의 처음 목적은 안동 지역에서의 교육 사업 전개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특성상 수도회의 봉사의 손길을 요구하는 데가 너무도 다양하여 가능하면 창립정신을 살리면서 교회의 요구에 능동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 교육사업

상지전문대학 : 1967년 안동시 율세동 393번지 30,000여평의 부지에 젊은이들의 전인 교육과 기능인 양성을 목표로 신축하여 1969년 10월에 학교법인 상지학원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70년 상지 여자실업 전문학교로 개교하면서 상과 40명, 의상과 80명, 보육과 40명, 총 160명 정원으로 시작하였다. 이때 셀린 수녀, 안젤린 수녀, 아녜스 수녀가 각각 불어와 의상학, 영어를 강의하였다. 같은 해 12월 학교 법인 상지학원 상지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면모를 갖추었고 다시 1990년에 현재 상지전문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당시 상지 전문대학의 설립은 수도권 중심으로 집중된 한국적 교육 풍토에 이정표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 유아 교육학과, 식품 영양학과 등 총 14개 학과에 3천여명이 재학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에 이르러 운영권을 교구로 이양하였다. 사실 현 교육 현장의 상황으로 전문대학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수도회 내에서도 교수 인원 확보에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수녀회 차원보다는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교육의 질을 높이고자 교구로 운영권을 이양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교수직과 서무과장, 사서과장, 기숙사 운영을 위하여 회원들이 파견되고 있다.

상지 기숙사 : 학업 때문에 안동에 올라온 타지방 학생들을 위하여 시작되었다. 숙식을 함께 제공하는 '기숙사'와 경제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저렴하게 방만 빌려주는 '자취사'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데 지원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입소 경쟁률이 높아짐에 따라 점진적인 확장 계획도 생각하고 있다. 현재 수녀 1명이 기숙사 사감으로 파견되어 다양한 월례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인간교육과 생활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사실 현재 고등학교의 교육 현실은 오직 입시 위주로만 운영되어져 전인교육을 위한 기회들이 매우 적다. 때문에 수도회에서는 이 기숙사 생활을 통해서라도 참된 인간교육과 복음화를 시도하고 있다. 또한 기숙사 학생들 중에 봉사하는 회원들의 모습을 보고 성소를 택하는 경우도 있어 성소 개발의 어장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상지전문대학 부속 유치원 : 전문대학 부속 유치원으로서의 새로운 교육 이론을 도입하여 유치원 교사 양성에 도움을 주며 어린이들에게는 기본 생활 습관 지도를 교육 목표로 삼아 운영하고 있다. 이외 유아교육의 현장으로 가은 유치원, 상주 남성동 유치원, 안동시 종합 사회 복지관 어린이 집, 대구 월성 가톨릭 종합 사회복지관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가천 청소년 교육원 : 1980년 대구대교구가 오스트리아의 원조를 받아 교육원을 설립한 3년 후인 1983년부터 정식으로 파견되었다. 특히 수녀회 카리스마의 교육적인 면을 적극적으로 살릴 수 있는 현장인 교육원은 그 교육 목적을 "내 안에서, 이웃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자"로 삼고 교육 지침으로 자연을 통하여 자신을 살펴보고 희망과 용기를 가진 새로운 생활태도를 수용하여 타인을 새롭게 만남으로써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발견, 기도와 전례를 통하여 신앙 생활의 기쁨을 체험하도록 돕고 있다.

⸂ 안동교구청 사목국

⸃ 생명의 공동체

교구청 사목에서 농민 교육의 일환으로 실시한 공소 봉사자 학교 1기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모임으로 주로 10여 개 농민 고동체들과 안동, 영주, 상주, 점촌, 예천의 도시 주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모임에서는 삶의 방향을 생명의 가치관, 공생의 가치관으로 전환하여 주로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 지역에 조직되었다. 이 모임의 활성화를 위하여 1991년 9월 당시 사목국 장인 조창래 신부의 요청으로 회원이 파견되었다. 주요 활동 내용은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생활양식의 변혁 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 본당사목

⸅ 노인복지

⸆ 의료복지

⸇ 종합복지

⸈ 부산교구 교도사목

1992년 9월 3일 부산 주례 본당에 파견을 시작하면서 부산교구도 교도 사목을 위해서도 회원이 파견되었다. 주요 활동은 부산 교도소, 구치소, 소년원, 감별소에서 봉사하고 있는데 특히 소년원의 원생들을 위한 재활교육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교도사목 후원자들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5,000여 명의 수인들을 위해 따뜻한 손길을 펼치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 교육 수녀회 회원 각자는 내적 생활의 시간, 일과 휴식 시간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명확히 하는 개인 내규를 설정하고 생활한다. 개인 내규는 세상 한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더 잘 살도록 도와 준다.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자 하는 회원들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모범을 보이신 스승이며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모든 것에서 생명에 봉사하고자 한다. 또한 인간의 진보와 발전에 관계되는 모든 것에 개방되어 있으며 인간의 모든 면, 즉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정신적 차원에서 모든 인간이 성숙한 인간으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할 때까지 인간생명에 종사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1970년대에 안동으로 진출한 것은 사실 모험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안동은 인구 12만명의 농촌으로 둘러쌓여 있는 유교가 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활동에 수반되는 어려움은 너무나 분명했다. 때문에 서울과 대구 등 도시로 진출코자 하는 유혹도 많았지만 창립자의 정신대로 스승이며 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모든 것에서 생명에 봉사하는 교육자들이 되기 위해 안동에 정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4년 10월 17일 관구 설정 축하 미사를 봉헌하는 기쁨을 맞게 되었다.

시대의 고통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소명, 사건이나 고통안으로 뛰어든 성서의 말씀을 사는 회원들, 비록 오늘의 현실이 어둡고 폭력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고통의 현장이기에 그 안에는 무수한 인간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 소명은 더욱 다급해지고 교회는 산적된 문제들을 끌어안은 채 화의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문제, 전인적 인격의 형성,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오늘도 교회의 딸로서 산다.

1990. '안양 근로자 회관'에서 '안양 가톨릭 근로자 회관'으로 명칭이 변경

안양 가톨릭 근로자 회관 - 1998. 5월 가톨릭 근로자 회관 답신에 의거

근로자들 스스로가 그리스도 신앙을 바탕으로한 건전한 가치관을 형성하도록 돕는 목적에서 1963년 설립되었다. 수원교구 설정당시 윤공희 대주교님과 전 루까 신부님께서 당시 산업개발과 함께 안양지역내 공장으로 취업차 모여드는 젊은 남녀근로자들을 위한 사업으로의 계획을 추진시키고자 국제 가톨릭형제회원 서정림 말가리다(독일인), 한성인 벨따(한국인)에게 근로자 및 부량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으로 운영책임을 맡기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안양지역은 제지공장과 섬유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수자원이 풍부한 조건에 따라 등장한 이 산업은 노동집약적인 공장이므로 노동력이 대거 지방에서 유입되었다. 특히 여성노동자들과 나이어린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는 상황에서 그들을 위한 복지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저학력의 10대와 20대초반의 소녀노동자들을 위한 특수사목이 요청됨을 교회는 인삭하게 되었고 그들을 위한 기숙사 사업을 통하여 생활교육과 사회적응에 필요한 교육들을 실시 하였으며 지역의 노동자들을 가노청운동에 동참하도록 조직하여 나갔다.

1987년 당시 노동자들의 대 투쟁을 통하여 이곳에 살던 많은 근로자들이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다. 노동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그들은 근로자 회관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긴장했기 때문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감시를 당하게 되었고 전직 혹은 퇴사를 강요당하게 되어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붙여 가톨릭의 위상으로 그런 견해들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으로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1998년 사업의 확장과 아울러 이용자들이 복지관으로 부르게 되므로 이름을 전·진·상 사회복지관으로 변경하였다. 이 전·진·상 사회복지관의 카리스마는 설립자들이 JOC활동을 통하여 노동사목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으므로 가노청의 정신이 활동정신이 되었으며 AFI 의 우선적인 방향 중 "현실참여를 통한 인간해방"을 기초로 하여 활동하고 있다. 1998년 현재 지하 1층, 지상 3층에 여자 근로청소년 80명 수용의 기숙사 시설과 회의실, 강의실, 식당, 휴게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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