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본론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

1. 초기교회 신앙정립과정의 활동(1777∼1886)

1) 정치 사회 및 교회 사회복지적인 배경

(1)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

1777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당대 비집권파인 남인 선비 권철신, 정약전 등을 중심으로 사회개혁을 추구하기 위한 강학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 모임에 이벽이 참여하여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학문(西學) 서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차츰 천주교라는 종교의 형태를 띄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연구하던 서적은 당시 중국에 와서 선교하던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天主實義)등으로서, 그 내용은 보유론(補儒論-유교를 보완하는 천주학)이었다.(김옥희, 1979 참조) 이 강학회 후에 이벽은 쉬운 한글로 '천주공경가'를 지어 일반 대중이 쉽게 신앙을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이벽은 1783년에 조선정부로부터 중국에 동지사(冬至使)로 파견되는 부친을 따라 이승훈을 북경에 가서 서학에 대해 배워오도록 하였다. 이승훈은 6개월 동안 북경에 가서 천주교리를 받고 1784년 남(쪽 성)당의 알렉산델 데 고베아(de Govea) 주교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달레, 1980 : 305 참조)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천주교회의 지역교회는 외국에서 선교사가 들어와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는 선교사에 선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학습연구와 그에 따른 신앙추구로 이루어졌다는 면에서 유래가 없는 창립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과 함께 강학회는 단순히 학습연구의 모임 성격에서 종교단체의 성격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승훈은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권일신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로, 정약종은 아우구스티노로, 정약용은 세례자 요한으로, 이벽은 세례자 요한으로 세례명을 주고 그들을 중심으로 선교를 해 나가 교회 공동체가 확장되어갔다. 그러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벌어졌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명동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탐색한 끝에 그곳에 천주교인들의 집회장소라는 것을 알게 되어 김범우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주범 격인 이승훈, 권철신, 이벽 등은 권문세도가의 자제이므로 중인인 역관 김범우를 잡아 종교를 버리도록 요구하고 그를 단양 읍으로 귀양보내 결국 그는 귀양지에서 순교하고 말았다.(상게서 : 317 참조)

1786년 박해가 가라앉자 이들은 천주교 복음을 입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의 신앙을 자신의 삶으로, 즉 자신의 피로 서명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나 자신들의 신앙공동체가 박해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굳은 신앙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것처럼 교계제도를 만들기 위해 "자기들끼리 신부를 내는 것보다 더 잘하는 일은 없다고 믿었었다."(전게서 : 323) 그래서 이승훈 베드로는 북경에서 주교, 신부, 그 밑의 성직자들로 된 가톨릭의 교계제도를 본떠 조직을 세우고,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이존창 곤자가의 루도비꼬,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최창현 요한 등으로 지역을 책임질 신부들을 선정하여 가성직 제도를 만들었고 이들은 전국 각지에 파견되어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가성직제도가 불법이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 깨달아 중국의 주교에게 문의한 2년 후 자발적으로 해체하고 선교사제를 모시기로 결의하였지만, 그 동안 그들은 성세성사와 고해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를 집전하고 미사를 열심히 봉헌한 것 같다. 성세성사를 제외한 나머지 성사는 무효이긴 하지만, "그들의 성직 수행이 도처에 열심을 촉진하고 전국에 신앙을 전파함에 새로운 충동을 주었음은 확실하다."(전게서 : 324) 실제로 이승훈 역시 성사가 중단된 이래 최초의 열성이 식어지고 많은 성과가 유지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고 한다.(Choi, 1961 참조)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고해성사에 관한 부분이다. 천주교의 고해성사는 죄를 사해주고 그 잠벌을 보속(補贖)으로 없애는데, 그들이 준 보속이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이웃사랑이라는 그리스도교 정신을 매우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사회복지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쓴 프랑스 외방선교회 달레(C. h. Dallet)의 기록에 의하면, 심한 죄는 체벌로 다스린 데 반하여 대부분의 소죄들은 보속을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 베풀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희생하기' 등의 희사로 주었다.(달레 : 324 참조)

이렇게 함으로써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천주교회를 통해 이 땅에서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더욱 더 명확해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희생으로 이웃에게 자선을 베풂으로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며, 그래서 그 구체적인 형태로 사회복지 활동을 고해성사의 보속으로 정하여 의무로 부과하게 된 것이다.

(2) 사목자들의 사목 서한에서

김대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 169)는 서울 한양에서 1845년 3월 27일 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열 번째 서한에서,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즉 천연두)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 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고 적고 있다.

최양업 신부(정진석 역, 1995 : 77)는 "이 모든 질병이 물의 비위생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니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아시면 분명하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고 적고 있다. 최양업 신부가 도양골에서 1850년 10월 1일 그의 마카오 신학교 시절 스승인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이 일곱 번째 편지에는 최 신부가 고국에서 선교하면서 필요한 두 가지 청을 담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공중 위생을 위한 물의 정화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선교에 필요한 성물' 등을 보내 달라는 청이다.

천주교 사목자인 최 신부가 선교를 하면서 스승에게 청하는 내용에서 직접 선교에 필요한 성물이나 상본 등에 앞서 일반인들의 공중 위생을 위한 물의 정화 방법을 청하는 내용은 참으로 천주교회와 교회의 선교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제시해주고 있다.

김대건 신부와 그는 당시 프랑스 외방선교회 선교사제들의 신학 원칙과 종교 신심에 지나치게 충실하다고들 하는 얀세니즘적인 엄격한 신학교육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들이 고국에 귀국하여 선교하면서 그들에게 신학과 사목을 가르친 스승에게 이러한 청을 한다는 것은 그들이 사회복지를 교회 선교의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한 방편이라고 교육받았거나 그들이 보아온 사목의 형태를 선교지에서도 자연스럽게 적용하고자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앞둔 박해의 선교 현장 속에서도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풀어주고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려는 노력을 교회 사목의 일차적인 선교 목표요 방법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편 이들이 받은 교육은 정통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예수도 제자들을 파견할 때 첫 번째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리교육과 두 번째 그 교리가 현실로 드러나는 이른바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이웃사랑으로서의 사회복지 그리고 세 번째로 그러한 사업을 계속할 사도양성을 지시하였다.(마태 9,35-38 참조)

최신부의 이러한 사목 정신은 계속 이어진다. 그는 열성적인 교우 최경환 프란치스코에 대해 보고하는 1851년 10월 15일의 여덟 번째 편지에서 프란치스코가 몇 시간 기도하고 몇 시간 신심독서를 하는지를 말하기에 앞서 이웃사랑의 형태로서의 사회복지 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흉년이 되면 프란치스코는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상게서 : 99)

그리고 그는 일반 대중의 문맹을 극복하기 위한 한글교육을 강조했으며(전게서), 또 교우들을 위해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工課)와 같은 기도서와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등의 천주교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또 서민들에게 맞는 수준에서 교리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쉬운 한글로 된 '천주가사'를 지어 보급했다.(전게서 : 31)

그리고 그는 1859년 10월 11일에 보낸 열 일곱 번째 편지에서, 1857년 8월 2일에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제목의 사목 교서에 나타난 매스트르 신부가 세운 아동복지시설 '영해회'에 대한 한국 내의 활동과 한국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관심 있게 기술하고 있다.(전게서 : 165)

그는 또한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사목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의 언어인 한글을 익혀와야 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아울러 당시 조선의 문화와 사회제도를 설명하면서 양반제도에 대해서 신분적인 차별과 무노동 고소득이란 면에서 비판적인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일러둠으로써, 만민이 평등하고 부지런히 일해 사는 건전한 사회상을 펼치고자 하였다.(전게서 : 88)

그리고 또 리델(Ridel) 이 주교는 옥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소, 이 나라에 머물게 두시면 이 땅에서 죽을 것이오. 그 동안 자선사업을 하겠고. 예건데 병원이나 고아원 같은 것을 설치하여 빈궁한 병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며, 무의무탁한 고아들이나 내버린 아이들을 거두어 양육하여 주는 등 갖가지 박애사업에 노력하겠소."(박충신, 1966)

이상의 사목자들의 서한들을 보면 당시 사목자들은 사회복지에 대한 명확한 시각과 교회 선교와 복지의 통합된 사목의 방향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교우촌

달레는 "교우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박해를 피해 이 산 저 산으로 숨어 다니면서도 굶어죽는 일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식사 때마다 얼마 안되는 음식도 나누어 먹었으며, 또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그 끼니에 먹을 쌀의 양에서 한줌의 쌀을 꺼내어 별도로 저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달레) 이를 "좀도리 쌀" 혹은 "줌쌀"이라고도 하고(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공문 제97-3, 1997), 이는 현재 천주교회의 모든 자선 헌금과 헌미 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행동 정신이다.

이들은 박해 속에서 사람들의 밀고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심한 경우에는 교우촌 전체가 불에 타서, 다른 교우촌으로 도망을 다녀야 했고, 또 전염병에 시달려야 했다. 형편이 좀 나은 교우들은 이들을 한 식구로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였다. 특히 체포된 교우들의 석방을 위해 모금을 하고 사식을 넣어 주었으며, 순교한 이들의 가족 중에 과부, 홀아비, 노인, 고아가 된 이들이 생기면 격려하는 등 박애정신은 물론 가톨릭 교회의 기본 원리인 사랑을 실천하여 두터운 공동체적 연대를 보여주었다.(노길명, 1984 : 172)

(4) 신자들의 자선활동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기 시작함으로써 신자들 중에는 천주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웃사랑이라는 형태의 사회복지를 실현하게 되었다. 박해시대의 신도들은 스스로 가난하였지만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를 보살폈으며, 감옥에 있는 이를 돌보고 죽은 자를 묻어 주었다. 그들은 자선행위가 '사랑의 의무'인 동시에 '정의의 의무'를 실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공문 제97-3, 1997)

홍유한은 "하루는 그가 말을 타고 질퍽한 길을 가다가 무거운 짐을 진 한 노인을 보았다. 동정심이 일어, 말에서 내려 자기 대신 그를 말에 태우고 자기는 걸으면서 그를 인도하였다." 이 모습은 당시 신분사회의 엄격한 구분 아래에서도 신분의 차이를 넘어 사회의 금기를 깨면서까지 어려운 처지에 놓인 노인을 돌보는 애덕을 실천한 행위이다. 또 "자기가 판 밭이 방금 산사태로 인하여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그 값을 산 사람에게 보내어 그 사람이 사양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받게 하였다."고 나타나 있다.(달레 : 296-297)

원베드로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어 그들을 구해주었고,(전게서) 박취득(라우렌시오)는 형조의 심문에 "제4계는 부모와 어른과 임금과 관장을 공경하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륜이 아니겠습니까? <중략> 얼마 안 되는 제 재산을 헐벗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기 위해 쓰고 있으니, 그것은 재산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전게서 : 410-411)라고 응대함으로써 교회의 사회복지 정신을 실현했다고 본다.

그뿐 아니라 강완숙(골롬바)는 "비상한 정력과 활동력을 타고났고 하늘의 특별한 은총의 도움을 받아 모든 자선사업을 고무하고 지도하였다."(전게서 : 392)고 기술함으로써 그가 이미 그 형태와 내용이 명확치는 않지만 어떤 자선사업을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운영하거나 최소한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전게서)

김시우(알렉스)는 오른쪽 몸이 반신불수였으나 너무 가난하여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신자들의 애긍시사로 연명할 수 있었고(전게서 : 56), 김명숙 부자는 애긍시사를 많이 하여 갖가지 자선행위를 하였다.(전게서 : 60)

김종한(안드레아)는 경상도 안동고을 우련밭이라는 산골 깊숙한 속에 숨어살면서 오로지 애긍시사에만 힘쓰다 1815년에 체포되었다.(전게서 : 16) 그는 자선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애덕이 있으면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애덕을 위해 이 세상을 세우셨습니다. 만일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보존되겠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다.(상게 공문) 그는 자선이 애덕의 실천이며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뜻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1839년 순교한 조신철(가를로)는 동지사로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온 후, 애긍시사로 신입교우들을 도움으로써 모범이 되었고, 박사의는 부조를 자기보다 더 가난한 신자들에게 희사하였다.(전게서 : 171)

신자들이 자선을 베풀었던 대상은 일차적으로 동료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불우한 이웃을 돌보는 데는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박해하고 밀고했던 사람들까지 도와줌으로써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갔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면서 신자들을 밀고했던 배교자 전지수가 잘못을 저질러 자신이 고발했던 신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감옥에 투옥 당하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가 고발하여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이 매일 매일 그들의 얼마 안 되는 배급을 나누어주어 그의 목숨을 건져주었고, 그가 석방되어 거의 알몸으로 나갈 때도 신자들은 그가 옷을 가릴 옷을 주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증거 하였다.(전게 공문)

1839년에 순교한 최경환(프란치스코)은 자선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결부하여 인식하고 실천했다.(전게 공문; 달레 : 430-431) "하느님이신 스승의 영광을 위한 그분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정다운 애정과 결부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최양업 : 99) 또 그는 "장을 보러갈 때는 그중 나쁜 것을 골라서 사며 그것을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찌꺼기를 사는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하고 대답하셨습니다."(달레 : 430-431)

1839년에 순교한 최해성(요한)은 "몹시 가난하게 살며, 재산이 보잘 것 없는데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긍하는 것을 결코 있지 않았습니다."(달레 : 474) 그의 이 모습은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남은 부분을 희사한 것이 아니라, 불우한 이웃을 위해 자신에게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까지도 희생하고 나누는 것이 자선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나눔은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어 생활비를 모두 바친 과부의 동전'(마르 13,44)과도 같다.(전게 공문) 그리고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 구하신 주님의 뒤를 따라 자기의 모든 것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 희생하려는 구원을 위한 희생제사를 자신들의 몸으로 산 것이다.

이문우(요한)은 1839년 박해 때 모금운동을 벌여 갇힌 사람들에게 전달했다.(달레 : 490) 민극기(스테파노)는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치고 자선사업에 힘써 선교사들이 그의 열성과 박애심을 높이사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기까지 하였다.(전게서 : 527)

김옥현은 대야불에 살았는데 그가 기르다 죽은 영애와 걸아들을 달성 넘어 말무덤에 손수 이장했는데 그 수가 60여명이었고 기미년 흉년에는 배고파 쓰러지는 노파들을 자택으로 업어다가 수용 구호한 수가 수십 명에 달했다.(권정복, 1952 : 51)

서상돈은 사람을 대할 때 빈부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고 그의 사랑채에는 식객이 항상 십여명씩 있었고 주일에는 수십 명씩 있었는데 이들에게 용돈까지 주어가며 환대했다. 또 매년 춘추로 빈민들에게 양곡 수백 석씩을 희사하여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가 되었다.(전게서 : 58-59)

이상의 모습은 한국천주교회사 초창기에 간행된 서적들을 통하여 자선을 애덕의 중요한 부분으로 제시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쏉기략'이라는 양심성찰에 관한 책에서는 애덕과 관련하여 자선을 설명하면서 자선을 실천하지 않는 행위를 경계하고 있다.(전게 공문) 또한 초기 신자들의 가성직제도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천주교 사제의 의해서 고해성사를 통해 죄의 사함에 이어 잠벌을 없애주는 보속의 형태로 의무적으로 주어졌고, 한편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자선행위를 교회 신자생활의 권장행위로 사목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박석돈은 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었고 둘째로 고아와 노인들의 영혼을 구하는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한국가톨릭대사전 : 개정판 1권, 1995) 그는 또 이러한 자선행위들이 1917년 2월 1일에 설립된 인애회에 계승 발전되어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박애사업을 했다고 주장했다.(박석돈 : 27) 이에 대해 권정복은 "미사 애긍을 목적으로 고 이기운 회장, 고 백응도 회장, 고 이계제 회장의 발기로 1917년 2월 1일 대구본당 인애회를 설립하고 회원은 남녀 구별 없이 매년 초에 소정한 회비(당시 년 10전)를 납부하면 1년간 회원 자격을 가지게 되는 데 매년 이와 같이 갱신하여 회원을 모집하는 제도였다."(권정복 : 64)고 하였고, 박석돈은 이것이 현재의 적십자회원자격이라고 쓰고 있다.(박석돈 : 27)

인애회는 "사망하는 회원에게는 연미사 한 대를 드려주고, 살아있는 회원을 위해서는 매년 생미사 한 대를 올리며 수납된 회비로서 무의무탁한 노약자들이 거처할 집을 제공하며 사망 시에 초상을 치러주었다."(권정복 : 64) 이 인애회의 성격은 양로원의 운영과 그 후원사업을 하는 노인복지에 해당한다.

박석돈은 이러한 인애회의 사업정신은 1970년대 대구 까리따스와 1980년 인성회로 연결되고 있으며, 노약자를 돌본 그 정신은 칠곡군 동명면에 있는 '성가양로원'에서 잇고 있다고 주장했다.(박석돈 : 28)

2) 분야별 천주교 사회복지사업

(1) 아동복지 - 영해회

1854년에는 '영해회'라는 명칭으로 아동복지사업을 시작하였다.(조화영 : 418) 이 영해회는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홀본 잔송(Holbon Jansong)에 의해 창설되어, 죽음의 위험에 처해있는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살아나면 그리스도교 가정에 맡겨 이를 키우도록 하는 어린이 구호사업인 성영회(Sancta Infantia)의 한국명이다.(가톨릭대사전 : 650)

우리나라에는 '명도회'(明道會)라는 평신도 단체에 의해 고아구제사업이 시작되었고, 1852년 8월말에 조선에 입국한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우리 나라 각지를 돌며 전교활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죽음에 직면한 고아가 많음을 보고, 파리에 있는 성영회 본부에 재정적인 원조를 청하여 1854년경에 고아들에 대한 구제사업을 펴기 시작하였다. 매스트르 신부는 파리 성영회 본부에 보낸 1854년 10월 22일자 서한에서, 초기에는 3명의 여인들이 고아들에게 세례를 주고 아주 어린아이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독실한 여교우 2명 총 5명이 자원봉사의 형식으로 돌보도록 하다가 자원봉사만으로는 늘어나는 고아들을 다 돌볼 수 없어, 유모에게 매달 8프랑씩 지불하며(박석돈 : 34) 유료로 위탁하여 키우도록 하면서, 고아들이 커 감에 따라 자립할 수 있도록 생업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게 함으로써 근대아동복지사업의 문을 열었다.

영해회의 자세한 성격은 뵈르뇌(Berneux) 장주교가 각처 공소(公所-신부가 상주하지 못하는 작은 성당)의 회장집에 비치한 1857년 8월 2일자 '장주교윤시제우서'(달레 : 261)의 부록으로 발표된 '영해회 규식'에 잘 나타나 있다.(박석돈 : 35) 영해회 규식이 정한 조건에 따라 아이를 맡길 때도 증인 1인과 연서로 영해회의 모든 조건을 따르고 아이를 다시 찾지 않겠다는 일종의 친권포기의 서약서를 2부 작성하여 1부는 회장이 보관하고 또 1부는 신부가 보관하도록 했다.(박석돈 : 37)

1859년 11월 7일자 포교 성성에 보낸 장주교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신자로서 대세를 받고 죽은 아이가 701명, 프랑스의 고아원 본부에서 보내온 경비로 양육하는 고아가 43명에 달한다. 이 사업은 1859년까지는 서울에 유모(乳母)를 둔 고아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1866년 병인박해로 장주교가 순교한 후 중단되었다.(달레 : 392)

그후 1880년에 블랑(Jean Blanc)주교에 의해 다시 시작되어 원아들이 계속 증가하게 되어 1885년 3월 15일에는 서울 곤당골(현 을지로 1가)에 있는 기와집을 사서 옮겼고, 1885년 3월 서울 고아원에는 26명이었고, 대구에는 60∼70명의 고아들이 보호되고 있었다. 1886년에는 수용된 원아가 80명에 이르러 종현(현 명동 성당)에 두 개층의 집으로 옮겨져 위층에는 여아를 아래층에는 남아를 수용하였다. 한편 대구고아원의 경우에는 1886년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부임한 후 1893년까지 계속되었다.(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이하 '샬트르 100년사'로 표기 : 156)

(2) 교육복지

① 문맹퇴치와 방인 사제 양성 및 한불자전 발간

1836년에 모방신부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3명의 소년을 중국 마카오에 유학시켜 신학을 공부하도록 하였으며, 1855년 매스트르 신부는 충청도 제천의 배론에 신학당(현 가톨릭대학교의 시효)을 세워 한국교회의 복음선포를 위한 방인(한국인) 성직자를 배출하고자 교육하기 시작하였고, 1866년에는 서울에 일반학교를 세워 운영하기 시작하여 가난한 이들의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복지를 하였다.(노길명 : 188-213)

그리고 1866년에는 다블뤼(Daveluy) 주교에 의해 준비되다가 박해로 중단되었다가 다시 리델(Redel) 주교에 의해 1880년 4·6배판으로 694면에 11만 자의 한글 단어를 프랑스어로 풀이한 '한불믁뎐'과 334면의 한글문법서인 '한어문전'(韓語文典)이 일본에서 인쇄 편찬되었다.(가톨릭대사전, 1271)

② 인현서당

1882년 9월 조선(현 서울대)교구 6대 교구장이던 리델(Felix Ridel, 李福明, 1830-1884) 주교가 종현(현 명동) 성당 관할 인현동에 인현서당을 세웠다. 이 서당은 훗날 계성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882년부터 1883년도 조선교구 통계표에 당시 종현본당 신부였던 블랑 신부가 "1882년 본당 관할에서 운영되던 학교가 하나있고 11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1883년 8월에는 인현서당을 종현으로 옮겨 종현성당 한한학원 또는 종현학원 등으로 불렸는데, 이 서당은 천주교회의 전액 부담으로 운영되면서 1886년에는 40명 가량의 학생들에게 국어와 한문 읽기, 쓰기 등을 가르쳤다. 그 후 1906년에 본당신부였던 프와넬 (Victor Poisnel, 朴道行, 1855-1925) 신부의 적극적인 재정 후원과 최봉섭의 협조를 얻어 종현학원을 개편 확장하여 비로소 신식교육기관인 계성지정보통학교로 탈바꿈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793)

한편 1883년 원산 읍민들이 설립한 '원산학교'가 있었고, 정부에 의해 일종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동문학'(통변학교)이 통상아문의 부속기관으로 설립되었고, 1885년에는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Appenzeller)에 의해 '배재학당'이 시작되었고, 1886년에는 '육영공원'(Royal English School)과 스크랜튼(Scranten) 부인에 의해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

(3) 노인복지 - 양로원

블랑주교는 1885년에는 7월 2일에는 종로 똥골(현 관철동)에 큰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양로원을 설치하여 노인복지를 시작하였다.(유홍렬, 1962 : 289) 설립 당시 "남녀 노인들의 수는 20여명에 달하며, 현재 입원 신청자의 수도 상당합니다.<중략> 그러나 동냥으로 연명하거나, 외교인 집에 살면서 죽을 위험에 있어도 성사마저 받을 수 없는 불쌍한 노인들의 사정은 얼마나 딱한지요!"(서울교구연보, 1885)

1886년 블랑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양로원은 계속해서 교우들과 외교인들로 꽉 차 있습니다.<중략> 상황에 따라서 이 양로원 사업에 다른 목적을 첨가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즉, 이 양로원은 시약소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젊을지라도 중한 환자이면 이 시약소에 입원시켜 치료해 주고 있는데<하략>" 라고 썼다.(샬트르 100년사 : 183쪽) 이를 보면 양로원은 노인들과 오갈 데 없는 환자들을 위한 시약소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92년 블랑 주교의 후임인 뮈텔 주교의 일기 1892년 1월 31일자와 6월 2일가, 18일자, 19일자에는 양로원에서 미사를 드리고, 성체강복과 종부성사를 주었고, 식사를 했다는 내용이 쓰여있는 것으로 보아 이 양로원은 꽤 오래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뮈텔 주교 일기Ⅰ : 34; 60; 61; 62)

(4) 의료복지 - 시약소

1857년에는 매스트르 신부가 프랑스 성영회의 도움으로 국내에서 영해회를 시작하면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치료를 위한 의료복지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교구장 베르뇌(simeon Berneux, 장경일) 주교가 로마 교황청에 보낸 11월 7일자 서한을 보면, "한 중요한 도시에 세운 시약소 덕택으로 저희는 더 많은 우상 숭배자 자녀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약소는 1866년 대박해로 중단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158) 장 주교는 전국의 중요 도시마다 시약소를 두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복지를 하였다.(최석우, 1982)

한편 1885년 2월 15일에는 개신교 선교사인 알렌(Allen)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광혜원(제중원)이란 이름으로 국립병원을 개설했다.(김원모, 근대한국외교사연표 : 118) 그리고 1908년에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다.(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1982 : 215)

3) 사회복지 활동의 시대적 성격과 그 의의

이 시대에는 교회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곧 형제들, 그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생활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실현에 옮기며 살았다.

특히 이러한 사실은 사목자들의 서한에서 나타났듯이 김대건 신부가 박해로 인한 죽음의 현장에서도 천연두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고쳐주기 위해 그 치료방법을 청하였고, 최양업 신부가 스승 신부에게 청한 목록 속에 선교에 필요한 성물을 보내달라고 하기 보다 먼저 우선 백성들이 비위생적인 물로 인해 생겨나는 잔병에서 헤어나도록 해주기 위해 공중 위생을 위한 물의 정화방법을 알려달라고 청하였으며 또 매스트르 신부도 1855년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을 양성하기 이전에 우선 1854년에 고아원을 설립한 모습들 속에서 사목자들은 사회복지활동을 종교의 교리를 선포하는 것에 우선시하거나 적어도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동등하게 간주하였고 평신도들도 자신들의 삶으로 이러한 신앙을 살았다.

이러한 모습이 고난과 박해의 피난시절과 형장에까지도 드러남으로써, 한국천주교회는 초기교회 때부터 사회복지로 드러나는 이웃사랑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응답이요 증거로 삼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교우들은 자신의 몸을 바쳐 순교하듯이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게 된 것이다.

한편 권오구는 '사회복지발달사'에서 "근대적 성격의 사회복지 시설사업으로는 조선 말엽인 고종 25년(서기 1888년) 3월에 불란서 교회에 의하여 지금의 서울 명동에 처음으로 천주교회 고아원이 창설된 것이 그 시발이다. 갑오경장 이듬해인 고종 32년(서기 1895년) 3월에 인천에 천주당부속 고아원이 설립되었고, 광무 10년(서기 1906년) 3월에는 이지화가 설립한 경성고아원이 세 번째이다.…"(권오구 : 241-242)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언급한 명동의 천주교회 고아원의 설립 주체를 불란서 교회라고 밝히고 있으나, 그것은 정확한 기술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느 선교사가 다른 나라 교회에 가서 선교를 하더라도 그의 선교는 그의 출신지의 선교가 아니라 그가 선교하는 지역의 선교가 된다. 또한 그가 언급한 명동은 당시 한국 교회인 '조선교구'의 성당이다. 그러므로 그 설립의 주체는 불란서 교회가 아니라 한국 교회이며 또한 그가 언급한 대로 한국 최초의 고아원을 설립한 주체가 천주교라는 것은 맞지만 그 설립연도와 고아원의 명칭도 1854년의 한국 천주교회의 불란서 선교사 매스트르 신부의 영해회로 보아야 한다.

그가 언급한 명동의 천주교회의 고아원과 인천의 천주당부속 고아원은 모두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운영하던 것이었고, 수녀회의 기록에도 그 시작을 1854년으로 기술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157) 수녀회의 기록에는 1854년 매스트르 신부가 불란서 교회의 성영회의 지원으로 세운 영해회 고아원이 1866년 병인대박해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885년 3월 15일에 재착수 했다고 밝히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159; 서울교구연보 1885 재인용) 그리고 권오구가 밝힌 1888년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조선교구로부터 운영을 위임받은 해이다. "1888년 9월 8일 성모성탄 축일에 블랑주교로부터 고아원을 인수받아 수도회의 부속사업으로 경영하게 되었고 고아원의 원장에 자카리아 수년가 취임했다.(유홍렬 : 295 재인용) 자카리아 수녀는 블랑 주교에 이어 이 고아원의 제2대 원장이 되었다. 인수 당시 고아의 수는 남아가 80명 여아가 65명이었고 유모에게 양육되던 유아가 30명이나 되었으며, 고아들을 돌보는 여인들도 18명이나 있었다.(샬트르성바오로 수녀회 85년사 : 145, 567)"(샬트르 100년사 : 160) 그리고 권오구가 밝힌 '1895년의 인천의 천주당부속 고아원'에 대한 수녀회의 기록은, "1894년 8월 18일 제물포에 수녀원이 세워지고,… 네 살인 교우 여아와 12세된 여자 어린이를 수녀원에서 양육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제물포 고아원의 시작이었다.(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85년사 : 582-583 재인용)"(샬트르 100년사 : 164)고 밝히고 있다.

또한 권오구는 노인복지시설에 대해 기록하면서 "노인복지시설의 시작에 있어서는 1988년 천주교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 백규삼 주교가 샬트르 성바오로 수도회 본부 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양로원을 신설하고 길가에 버려져 배고픔과 추위로 죽음 외에 가망을 가지 못한 남녀 노인들을 수용하였으니 현재 양로의 수는 40명에 달하였나이다.'라고 하고 이를 위해 바오로 수도회 수녀들을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김덕준 : 29 재인용) 이것이 한국 양로시설사업의 시작이라고 한다"(권오구 : 242)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의 재인용 기록에 나타나듯이 1988년에 이미 양로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글에 나오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의 기록에도 "개화기 조선 교회에서 양로원을 설립한 때는 1885년 7월 2일이었다. 양로원은 그해 3월 15일에 설립된 고아원보다 약 4개월 늦게 시작되었다."고 나타나 있다. 그리고 같은 쪽에는 1886년의 블랑주교의 양로원에 대한 보고 편지도 게시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183)



이 논문은 1998년 가을학기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은 논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