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

2. 종교자유획득과 수도회 결성이후의 활동(1886∼1910)

1) 정치 사회 및 교회 사회복지적인 배경

(1) 한불수호조약으로 인한 종교자유와 사회복지 활동

이 시대에는 1886년 한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간에 맺은 한불수호조약으로 인해 천주교를 자유롭게 믿고 그 신앙에 따라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계약으로 인해 외국인 사목자들은 최소한 선교사라는 자격으로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프랑스인이라는 자격으로 프랑스 여권을 가지고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99년 내무지방국장 정준시(鄭駿時)와 뮈텔 주교 사이에 약정된 교민조약(敎民條約)에서 비로소 조선인들의 신교자유가 전제되었고, 교인들에게도 일반인들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비로소 인정되었다. 이어 1904년 외무대신과 법국공사 사이에 약정된 선교조약에서든 조선인의 신교자유 외에 선교사가 개항지 이외의 지방 다른 지역에서도 토지를 매입하고 건축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종교의 자유로 인해 교회는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고 교회 본연의 자세인 하느님 사랑의 표징인 이웃 사랑이 은밀히 숨겨진 채 이루어졌다가 선교와 사회복지활동이라는 개방적이고도 외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활기를 띄게 되었다.

(2) 수도회의 진출과 사회복지 활동

일찍이 한국에는 파리외방전교회가 들어와 선교를 담당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첫째 현지인 성직자의 양성, 둘째 신자 신앙생활의 심화, 셋째 미신자에 대한 복음 전파를 그 목표로 삼고 있는 선교회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1836년 이미 3명의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 방인 성직자로 양성하고자 했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본바 있다. 이들은 제천의 배론에 성요셉 신학당을 설립하여 국내에서 성직자를 양성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로 폐쇄되었고, 그후 1910년 한일합방까지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 신학교에서 18명의 한국인 신부를 배출하였다. 그후 1942년 서울 교구장직을 한국인 주교에게 넘길 때까지 100여명의 한국인 신부를 길러냈다.(김선용 : 44)

1883년 7월에 제7대 조선교구장으로 일본 나가사끼에서 성성식을 가졌던 블랑(Blanc, 白圭三) 주교가 고아구제를 위해 수도회의 한국 진출을 적극 추진했다. 블랑 주교는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회복지사업을 돌아보고 난 뒤, 조선에서도 수도자들을 초빙하여 선교사업과 사회복지사업을 맡겨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후 한불조약이 체결되자 곧 이듬해인 1888년 7월에 프랑스의 샬트르에 본원을 두고 있었던 성 바오로회를 초빙하게 되어 한국에 서구 수도회가 조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에 진출하자마자 영해회를 비롯한 고아원들과 양로원 및 시약소를 비롯한 교육복지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후임자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초청으로 1909년 (隆熙 2년)에 독일 바라리아의 성 오틸리엔 베네딕도회의 남녀 수도회가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서울에다 수도원과 학교를 설립하여 고등교육과 기술교육 활동에 종사했다. 이들은 1909년 사범 교육기관으로서 숭신학교를 설립하고 신자 교사 양성에 착수하였다.(김선용 : 47)

그러나 한일합방으로 조선인의 교육열이 저하된 상태에서 교사 양성 기관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5년만에 폐교하게 되었다. 베네딕도회원들은 숭신학교 외에도 숭신공고를 세우고 직업교육을 통해 조선인의 경제적 자립을 증진시키려 하였다.(백 플라치도(Placidus, O.S.B.), 1984 : 786-794) 그러나 독일이 제 1차 대전에서 패하자 교육사업조차 유지하게 어렵게 되었다.(최석우, 1983 : 237-238)

1920년 원산, 덕원, 함흥, 연길 등지에서 수천 명의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해 초등학교를 세워 교육하였고 또한 자선병원을 세워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그리고 덕원에서는 신학교를 설치하여 성직자 양성에 힘썼고, 수도원 안에 인쇄소를 차려서 당시 한국 최초의 미사경본을 출판하였으며, 신약 복음서 및 서간편이 번역되었고, 그 외에도 다수의 신심서적이 한글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1945년 공산정권이 3·8선 이북을 점령하여 1949년에는 수도원이 폐쇄되자 1952년 왜관으로 수도원을 옮겼다.(김선용 : 48)

2) 분야별 천주교 사회복지사업

(1) 아동복지 - 영해회 운영의 변화

1886년 종현으로 옮겨진 영해회 고아원의 고아의 수가 250명을 넘자 블랑 주교는 1888년 9월 18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을 초청하여 고아원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때 고아의 수는 남아가 80명 여아가 65명이었고, 유모에게 양육되던 유아는 30명, 고아원에 상주하면서 고아를 돌보는 여인들은 18명이었다.

원장 자카리야 수녀를 비롯한 7명의 수녀들은 고아원 건물을 목조 2층 241평으로 새로 짓고, 남자아이들은 한문과 경문을 그리고 돗자리 짜는 법과 기타 여러 가지 실업을 가르쳤고 여아들에게는 바느질과 가사를 가르쳐 구제 및 교육계몽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빈사상태로 들어와 그냥 고아원 지도신부인 코스트 신부에게 대세를 받고 사망하는 어린이도 많았다.

고아원에서는 길에 버려진 아이들을 수용하기도 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고아원에서 원아를 받아들인 규정은 아마도 성영회의 규정을 원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영회에서는 남아의 경우 6세 이하, 여아는 8세 이하를 맡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었으며, 두 돌이 차지 못한 아이를 유모가 없을 경우에는 받지 말아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아동을 받아들일 때에는 친권을 포기하겠다는 부모의 각서를 받았다. 아동을 받아들일 때 부모의 친권을 포기하도록 했던 것은 원아의 양육에 대한 부모의 간섭으로 예상되는 폐단을 미리 막기 위해서였다.(샬트르 100년사 : 160)

원아들 중 남자에게는 목공, 약국, 철공 등의 기술을 습득케 하고, 여자에게는 재봉틀 사용법을 가르치는 등 직업교육을 시킴으로써, 자립의 길을 열어 주는 근대적인 고아구제사업으로 발전해 갔다.(가톨릭대사전 : 650)

1901년부터는 운영상의 여러 가지 사정을 참작하여 신입 남아들의 수용을 중지하고 여아들만 돌보게 되었다. 특별한 수입원이 없던 당시로서는 존타그 부인이 운영하고 있던 존타그 호텔에서 나오는 세탁물이나 외국인들의 세탁물을 해주고 받는 돈이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03년 종현의 고아원에서는 32명의 수녀들이 이소사(李召史)등 여직원 11명 및 남직원 3명과 함께 고아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샬트르 100년사 : 160)

한편 영해회 고아원은 1875년 12월 20일 충남 합덕에서 매스트르 신부가 선종한 후에도 계속 되어 1977년 9월 6일까지 성 바오로 보육원이란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폐쇄되었고, 지금은 인천의 해성보육원으로 연결되어 운영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995)

한편 1894년 8월 18일 제물포(현 답동) 성당의 마라발 신부는 샬트르 수녀회에게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8,5)라고 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8명의 어린이들을 수녀원에서 키우도록 함으로써 제물포 고아원이 시작되었다. 1895년에는 고아가 15명으로 늘자 마라발 신부는 1896년 8월 15일 120평의 고아원 건물을 별도로 신축하게 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164)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이 고아원은 '바다의 별'이라는 뜻의 해성보육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나눔 1984. 11) 한편 1899년부터 보육원 원아들과 신자들의 자녀들 및 무상아동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박문유치원, 박문초등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2) 교육복지

조선의 개화기에 한국 천주교회는 민중계몽운동을 통해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서구 문명에 개방되어가면서 사회화의 과정을 겪으며 이에 소외되는 서민들의 문맹을 퇴치하고 과학 기술의 이해와 습득을 위해 교육을 했기에 여기서는 교육을 광의의 사회복지 활동의 범주 안에 넣는다.

서울대교구 종현(현 명동) 본당은 1882년에 인현서당을 설립하였다. 이 서당은 1909년에 계성초등학교로 공식적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 학교는 구한말에 발간된 '경향잡지'와 같은 교회잡지에 1906년부터 기사화 되기 시작했다.(샬트르 100년사 : 793)

1895년 약현(현 중림동) 성당에서는 약현서당을 통해 어린이들을 교육했다. 그 후 1901년에는 두세(Doucet)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학생은 30여명이었으며 2명의 한국인 수녀가 매일 아침 학교에 나와 교리, 경문, 바느질 등을 가르치고 본원으로 돌아갔다. 1906년에는 남자학교 건물을 새로이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학교라고 하였다. 이들 2개의 학교는 1909년 가명(加明)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는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하여 폐교되었다. 그래서 결국 같은 자리에 1927년 가명학교의 부설로 세워진 가명유치원만이 그 맥을 잊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4, 샬트르 100년사 : 976)

1898년에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우도(Paul Oudot, 1865-1913) 신부는 종교교육과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봉삼학교를 설립하였다. 봉삼학교는 안악지방에서 1899년 45명의 남학생들에게 교리공부와 한문을 가르쳤으며, 여자부에서는 기도문 이외에 한글과 가사를 가르쳤다. 1907년 이 학교는 초등교육기관으로 정식 설립되었고 2년 후에는 사립학교 인가를 받은 후, 샬트르 수녀회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의 지도를 맡겼다. 수녀들은 1912년부터 우도신부의 장려로 양잠강습소를 개설하여 양잠기술을 널리 보급하여 주민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하기도 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970)

평양 관후리 본당의 2대 주임신부인 르메르(Louis Le Merre, 1858-1928) 신부는 1905년에 평양 관후리본당 내에 남자교육기관인 기명학교를 설립하고 이듬해 5월 1일에는 여학생들을 위한 성모여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909년 봄, 사제피정 후 샬트르 수녀회 스타니슬라 원장수녀에게 학교교사로서 일할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한편 수녀들은 낮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학부모들과 주민들의 상담을 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967)

황해도 재령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르각(Le Gac) 신부는 선교의 전 단계로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899년 한문서당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모성학교의 전신이었다. 그 후 2대주임 멜리장(Melizan)신부가 부임하면서 개신교의 교세가 급격히 신장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신식학교의 설립, 운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그 때까지 운영해 오던 한문서당을 개화된 신식학교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1909년 멜리장 신부는 초등학교 인가를 받아 교명을 모성학교로 하였다.(모성학교는 그 후 10여년간 운영되다가 재정난에 부딪혀 1918년 자진 폐교하게 된다.)(가톨릭대사전 : 394)

1899년 인천 제물포 성당에 샬트르 수녀원이 설치되면서부터 수녀들은 꾸준히 보육원 원아들과 신자들의 자녀 및 무산아동(無産兒童)들을 모아 가르쳤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이러한 교육복지는 훗날 제물포 본당의 제5대 주임신부인 드뇌(E. Deneux) 신부에 의해 1900년 9월 1에 인천항 사립 박문소학교로 승계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860, 가톨릭대사전 : 270)

평양교구 진남포 본당은 가난한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1900년에 돈의학교를 설립하였다. 초대교장 이평택(파트라치오)을 중심으로 착실하게 성장한 돈의학교는 설립 몇 해 만에 평안도에서 손꼽히는 사립학교로 부상하였다. 2대 교장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을 맞아 더욱 충실하게 성장하였으며 민족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전통 있는 학교가 되었다. 1908년 교사를 증축하여 300여명을 교육시키는 커다란 학교로 발전하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일어나고 이에 따라 본당주임 르레드(Jules Lereide, 申) 신부가 본국으로 소환되어 가면서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916년 폐교하였다. (가톨릭대사전 : 305)

수원 교구의 안성본당은 1901년 아산 공세리 본당에서 분할되어 주보로 '착한 의견의 모친'을 모시며 설립되었다. 초대신부인 공베르(A. Gombert) 신부는 통진군수를 지낸 백 씨의 집을 사서 임시성당으로 살았다. 그는 성당의 신설과 함께 1901년 1월 안법학교를 설립하고 그 운영비를 자비로 댔다. 1912년에는 안법학교 여자부를 신설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 2명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가톨릭대사전 : 775)

1901년 수원교구 왕림 본당의 앙드레(Jacques Andre, 1861-1890) 신부가 성당 뒤에 '삼덕학교'(三德學校)를 세워 가난한 이들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광성초등학교'로 발전하였다.(1981년 지역적인 여건으로 광성초등학교가 폐교되고 그 자리에 한국에서 네 번째 신학교인 '수원 가톨릭대학'이 들어서게 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1002)

1907년 9월 서울에 신자 아닌 일반 외교인이 '소의학교'라는 교명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을 세웠는데 훗날 이 학교가 동성중고등학교가 되었다.(가톨릭대사전 : 309)

수원교구 장호원 본당의 초대 신부였던 부이용(Camille Bouillon, 1869-1947) 신부는 한때 민비가 피신해 있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이 의병과 일본인들과의 격전으로 거의 불타 버리자, 남은 집을 헐값에 매입, 1896년 12월 5일에 한국식 건물로 임시성당을 지었다. 당시 교우 수는 5∼6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년후인 1897년에는 46명의 영세자와 관할 공소가 27개나 되는 본당으로 커지자 1903년 새 성당을 신축했다. 1907년부터는 '매괴학당'을 설립하여 남학생들을 모집했고, 곧이어 여학생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교재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유년필독(幼年必讀)을 사용, 통감부의 일본인 관리들로부터 금서를 가르친다 하여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수가 점점 증가하여 60명에 달함으로 교사가 비좁아지자, 1908년 3월에 학교를 크게 세워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는 발전을 보였고 이어 여학교도 설립하였는데, 수녀들의 필요성을 절감한 부이용 신부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교는 1912년 10월 7일 매괴축일에 개교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855. 857)

1908년 수원교구 이천 본당은 염산리에서 이천읍 내의 개하리로 본당을 이전하는 한편, 그 해에 '경천애국(敬天愛國)'을 교지로 한 '명의(名義)학교'를 설립하였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7쪽)

1909년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의 요청에 따라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조선에 진출해, 1911년 당국의 설립인가를 받아 최초의 사립 사범학교인 '숭덕사범학교'를 세우고 23명의 학생으로 개교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지원자의 부족으로 2년 뒤 폐교할 수밖에 없었다.(교회와 역사 98호 1988. 8)

1909년 프랑스 선교사 라크루(Marcellus Lacrouts) 신부가 제주도의 가난한 집안의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신성학교'를 설립하였다.(이 학교는 현재의 신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16년 일제의 우민화정책에 따라 탄압을 받고 무기휴교를 당했다가 1964년 신성여자중학원으로 재 개교하였다. 1953년 고등학교를 병설하였고 1977년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800번지의 현 교사로 이전하였다.) (가톨릭대사전 : 722)

(3) 의료복지 - 시약소

1894년 제물포 고아원의 고아들을 위한 시약소(현 해성병원)가 설립되었다. 그런데 이 제물포 시약소는 일반에게도 개방되었다. 그래서 1897년 8월 이후 1898년 4월까지 8개월 동안에 제물포 시약소에는 모두 2,623명의 외래환자를 받아들여 진료했고, 275명의 환자를 직접 방문해서 치료해 주었다. 이는 이 기간동안 시약소에서 월평균 327.88명의 환자를 받아들여 진료했고 또 34.88명의 환자들을 직접 방문해서 치료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는 휴일을 포함해서 매일 평균 11명 정도의 외래환자를 진료했고 한 곳 이상의 가정을 수녀들이 직접 방문해서 치료했음을 뜻한다. 이때 제물포 시약소에는 보통 2명의 수녀가 봉사자들과 함께 봉사하고 있었고, 이들은 각기 오전·오후로 시간을 분담해서 진료와 시약을 했다.

각 본당에서는 고아원과 양로원과 함께 고아와 노인 그리고 지역사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진료와 시약소가 설립되어 의료복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의료사도직 분야는 환자를 위해서는 치유와 구원을, 교회를 위해서는 선교의 성과를 가져오고, 수녀들과 평신도 봉사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확인해 주었다. 이 당시의 의료사업은 그 규모나 시설 면에 있어서 그리고 의료행위의 수준에 있어서는 의사 한 두명과 자원봉사자로 구성되어 결코 완벽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교회에서 운영하는 본격적인 의료기관의 출현을 촉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샬트르 100년사 : 186)

(4) 기타 - 문화·언론복지 : 경향신문 발간

일제 침략 시대에 교회가 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는 문화와 언론을 통한 활동 뿐이었기에 여기서는 이를 광의의 사회복지 틀 안에 넣는다.

1906년 10월 19일 서울대교구는 경향신문을 창간했다. 당시 교회는 교육을 통해 국민의 민족자립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이 다른 한편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우리 민족은 개화라는 미명아래 자행된 일제 식민주의의 침투에 대항하여 참다운 개화가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치며, 일면 저항으로, 일면 계몽으로 언론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투쟁의 역사는 전기(1896-1904)와 후기(1905-1910)로 양분할 수 있는데, 천주교회가 경영한 경향신문은 후기에 속한 것이었다.

'경향신문'은 순 한글의 주간지로서 1906년 10월 19일에 창간된 이래 1910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기까지 4년간 계속되었다. 경향신문은 참된 개화가 어떤 것인가를 거듭 천명하였고, 그 때마다 자강운동적(自强運動的)인 개화관을 분명히 하였다. 동시에 외적이요 형식적인 개화가 아니라 윤리덕의 실천, 즉 내적 개화를 지향해야 하고 또한 이 내적 개화야말로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해 가장 급하고 가장 필요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러한 개화는 외적 변혁이나 법의 개정만으로 인내와 용기가 요구되는 과업임을 아울러 지적하였다.(경향신문, 1907.1.11. 논설)

그리하여 경향신문은 무지에 대한 계몽, 무엇보다도 교육의 필요성을, 사대주의에 대한 자주를 그리고 개혁과 개방을 수시로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경향신문이 간행 2년에 접어들면서 이미 체제와 내용과 구독자의 수에 있어서 다른 신문을 능가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비단 천주교인뿐만 아니라 개신교인을 포함한 일반독자를,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널리 일본과 하와이, 미국 등지에서 확보함으로써 한때 최고의 발행 부수를 기록하기까지 하였다.(서울교구연보, 1907)

그러나 1910년 8월 한일합방과 더불어 이 땅의 언론이 완전히 자유를 박탈당하게 되면서 9월 10일, 경향신문은 총독부로부터 이후 종교사항에 국한되지 않는 한 신문이 계속될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위협에도 간행을 계속하다가, 사장 프랑스인 드망즈(Florian Demange, 安世華)신부는 여러 번의 출두명령을 거절하면서 12월 30일자 220호 신문을 검열을 거치지 않고 폐간호로 발행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35)

국토수호를 위한 민족운동은 일면 군사대결의 의병운동과 일면 문화 투쟁의 애국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어 나아갔다. 천주교회는 후자의 운동을 위주로 하였다. 그러나 전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교회는 경향신문을 통하여 의병운동에 대해 지지를 보냈다. 1904년 일본이 이른바 황무지 개간안을 구실로 우리 농민들의 토지를 강점하고자 했을 때 신자들은 이를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명동성당에서 기도회를 개최하였고, 나아가서는 전국 각지에 회람장을 돌려 지방민들도 상경하여 서대문에서 집회를 갖고 일제의 침략을 규탄할 것을 호소하였다.(뮈텔 문서, 1904-91. The Korea Daily News, 1904. 7. 28) 이 무렵 지방에서는 친일어용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무엇보다도 천주교인을 침해하는 사례가 자주 발생했다. 일진회가 한일합병을 발설하자 경향신문은 일진회원들의 매국적인 발언을 취소하고 해산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36)

한편 천주교 청년신자들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1906년이래 평양과 신천(信川) 등지에서는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애국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특히 신천의 일신회(一新會)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평신도들은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비록 당시 교회당국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으나, 국권수호운동 중에서 역시 안중근의 의거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100여년의 박해만 거듭 당해오던 교회의 책임자들은 이러한 폭력적인 저항운동에 대해 우려하기도 했으나 그 활동이 중지되지는 않았다.

3) 사회복지 활동의 시대적 성격과 그 의의

이 시기의 천주교 사회복지 활동은 초창기 빈민구제와 고아 및 환자 치료 활동의 연속과 아울러 개화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의 사회화와 문화화 과정에서 문맹퇴치 등을 위한 사회 기초 교육복지에 힘썼다.

1893년의 통계에 의하면 천주교에서 설립, 경영하는 학교가 36개교, 학생수가 246명이다. 그 후 11년후인 1904년에는 75개교 693명으로 늘었다. 근대화가 진행되던 그 시대에 교회는 문맹 퇴치와 가난한 이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사회와 민족적인 요구에 응답하였다. 한편 여성 수도회의 진출로 수녀들이 1900년부터는 여아와 여성들의 개화와 교육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5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보호정치는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평신도와 일반인들도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되었지만, 1908년 공포된 사립학교령으로 인해 인가 청원서가 각하 되었다. 1910년도 교구통계를 보면 천주교 학교 총수가 124개인데 반해 학부가 발표한 것은 46개교로 나타남으로써 78개교가 인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35)

한편 이 시기 천주교 사회복지사업의 특징은 그 사업의 주체가 오늘날에 비해 교구가 아니라 각 본당이었다는 것이다. 신부들은 주교로부터 본당에 파견 받아 그 본당과 그 본당 관할구역 지역사회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필요와 욕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해 고아와 문맹인, 빈민, 노인 등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데 그 사명을 다했다. 천주교회 각 본당들은 그 지역사회의 가난한 이들의 기쁜 소식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한편 교회는 일제침략에 대항하여 민족 계몽운동과 한일합병의 기도를 분쇄코자 다각적으로 노력했다. 그럼으로써 이 시기의 교회는 그 시대의 사회가 요구하는 민족적인 욕구에도 민감하고도 충실히 그 사명을 다하고자 했다.



이 논문은 1998년 가을학기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은 논문입니다. 첨가나 수정하시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면 아래의 주소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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