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

3. 일제식민시기의 활동(1910∼1945)

1) 정치 사회 및 교회 사회복지적인 배경

(1) 한일합병과 일제식민통치

1910년 8월 22일 우리 나라는 일본의 강제침략으로 인한 '한일합방' 조약으로 주권을 상실했고, 우리 나라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라는 일제 식민정부의 35년간의 잔악한 통치아래 들어갔다.

한편 교회도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한일합병 이전 선교사들에게 호의를 보이며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환심을 얻으려는 방법을 사용하던 일본은 합병 이후 태도를 돌변하여 순수한 교회의 선교 영역까지 간섭하고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915년 8월 일제는 소위 '포교규칙'(布敎規則)을 제정·공포함으로써 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선교조차 할 수 없도록 하였다. 본당 신설 역시 사전에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야 했고 총독부가 본당의 신설 이유와 그 유지방법의 충분성을 판단해서 허가를 했다.

또한 포교규칙 중에는 총독부가 포교 담임자나 포교 방법이 부적당하다고 인정할 때는 언제나 포교의 담임자나 그 방법을 바꿀 수 있는 규정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식민지 통치당국은 계속 포교규칙을 조사하고 감시한다는 구실아래 수시로 교회에 경찰을 출입시켜 회장과 열심한 신자들을 괴롭혔다.(서울교구연보, 1916)

한일합방 당시 한국 교회는 73,517명의 신자가 있었고, 비교적 높은 신자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공언하는 총독부의 회유정책 아래서 교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예견하며 교구를 분할하였다. 그러나 교구 분할 이후 신자의 증가는 급격히 둔화되어 갔다. 즉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19년 3·1 운동에 이르기까지 신자수의 연평균 증가율은 2.10%로서 개화기의 증가율 6.98%에 비해 현격하게 둔화되었다. 연평균 증가율 2.10%는 당시 인구의 자연 증가율보다 조금 웃도는 숫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종교열의 감소, 종교 활동에 대한 일제의 규제, 민족의 장래에 대한 희망의 상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려 했던 교회 당국자의 태도 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한국천주교회 연감, 1994 : 138)

(2) 성직자 수도자들의 사회교육

1915년에는 포교 뿐만 아니라 종교교육을 탄압하기 위한 규칙도 공포하였다. 이것이 '사립학교규칙 개정령'이다. 일제는 교육과 종교의 분리를 내세워 모든 종교계 학교에서 교수시간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교내에서도 종교교육을 실시하지 못하게 완전히 금지시켰다. 일제는 교회내의 주일학교까지 간섭하여 통계상 참고자료를 삼고자 하는데 불과하다는 구실로 해마다 주일학교의 아동수, 교원수, 행사, 소요 경비와 재원의 출처 등에 대한 보고를 요구하였다.(뮈텔 문서, 1912-19; 1920-111) 결국 천주교에서 경영하던 사범학교 또한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개교 2년만인 1913년 자진 폐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 선교사들은 교단에서 떠나야만 했었고, 특별히 여성 수도자들은 본당 내의 종교활동이나 예비자 교리, 가정방문, 제의실 담당 등의 일로 전환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샬트르 100년사 : 228)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일제의 교사자격증 요구는 교회 교역자들에게 교사양성을 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학교를 떠난 수도자들은 한글교육을 통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됨으로써 민족자주와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되었다.

(3) 지방 교구 설정

1831년 9월 9일이래 그 동안 조선대목구로 명명되어 오던 한국교회가 1911년 4월 8일부터는 서울대목구를 중심으로 지방교구가 설정되어 나갔다. 1911년에는 대구대목구가 분리 신설되었고, 1920년 8월 5일에는 원산대목구, 1927년 3월 17일에는 평양지목구, 1928년 7월 3일에는 의란지목구와 7월 17일에는 연길지목구가, 1939년 4월 25일에는 춘천지목구가, 1940년 1월 12일에는 원산대목구에서 함흥대목구가 분리 설정되었고, 1937년 4월 13일에는 대구대목구에서 전남지구를 중심으로 광주지목구가, 전북지구에서 전주지목구를 설정함으로써 9개 교구가 되어 각 교구별로 독립적으로 선교와 복지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4) 수도회의 진출과 방인 수도회 설립 및 사회복지 활동

1909년 뮈텔 주교는 성 오틸리엔의 성 베네딕토회를 초청해 사우어(Sauer) 신부와 2명의 수사신부가 내한하여 서울의 백동(현 혜화동)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10년에 숭공학교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으로 숭신학교는 폐교되었다.

1921년 5월 1일 사우어 신부는 원산교구의 주교로 성성되고, 이에 투칭(Tutzing)의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 of Tutzing) 수녀 4명이 1925년 11월 원산으로 부임하여 본당사목활동을 도울 뿐만 아니라, 빈민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인 해성학교, 유치원 시약소 등을 개설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수녀원에서 방 한 칸을 내어 전교를 시작하여 그 예비자반은 후에 '호수천사학교'로 발전하였고 1927년 6월 6일에는 새 수녀원의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며, 아울러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분원장으로는 마틸데 히르시 수녀가 임명되었고, 1927년 5월 3일 첫 지원자를 받았다. 1926년에 사목활동을 시작한 원산수녀원에서는 해성국민학교, 해성 유치원, 본당활동,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또한 1926년에 신설된 함흥 분원에서는 본당활동과 학교에서의 전교활동을, 1940년 신설된 청진 분원에서는 성심의원 운영과 본당활동을, 1948년 신설된 흥남 분원에서는 본당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40년 덕원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다. 이 밖에 덕원 남자 수도원에서는 출판시설을 갖추어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바오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서양수녀들의 일어 사용, 3개월마다의 거주신청 경신, 신사참배, 국내여행 신고, 식량난 등은 물론 1944년에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모든 학교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주둔하고, 1946년 토지개혁이 실시된 뒤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결국 1949년 5월 9일에 수도원의 모든 장상을 비롯한 신부, 수사들은 체포되어 독일인 신부 6명과 한국인 신부 5명이 1950년 10월 처형되었고, 사우어 대 수도원장을 비롯한 18명의 신부, 수사, 수녀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954년 1월 42명의 신부. 수사·수녀들이 생환되어 2년간의 휴양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서의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55년이래 왜관에서 출판사업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462)

뮈텔 주교는 1922년 평양교구 설정을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과 상의하여, 마침 1918년부터 중국 광동, 광서 교구에 진출하여 활동하던, 동방선교를 목적으로 창설된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평양교구를 맡기게 되었다.

1923년 5월 10일 번(P. J. Byrne, 方) 신부와 10월 22일 클리어리(P. Cleary, 吉) 신부, 11월 24일에는 모리스(John Edward Morris, 睦) 신부가 내한하여 의주를 중심으로 평양교구 신설 준비를 하였고, 1924년 10월에는 한국인 장정온(앙넷다) 수녀와 김 말가리다 수녀를 비롯한 메리놀 수녀회의 수녀 6명도 선교활동을 돕기 위해 내한하여 역시 평북 의주에 거처를 정하였다.(천주교 평양교구사, 1981 : 70-86)

수녀들은 1926년 평북에 영유에 수녀원을 준공하고 수년원 내에 '기예학원'을 설치하고 15세 전후의 소녀들에게 자수를 가르치고, 본당 전교사업을 돕는 시약소를 설치하여 가난한 이에게 진료의 혜택을 베풀고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1927년 3월 17일에 평양교구가 감목 대리구로 되었고 교구장에 번 신부가 임명되었다.(상게서 : 81-82) 메리놀 수도회는 개척자다운 정신으로 활발히 선교활동을 하여 북한지역인 신의주에서는 외래환자 진료소, 이동진료를 통한 의료복지에 구체적인 성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진남포에서는 1934년 사제들이 본당에서 복음화에 열성을 올리자 수녀들이 가정방문 및 교리교육을 하면서 부녀자와 소녀들을 모아 클럽활동을 운영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메리놀 수녀회의 한국에서의 가장 큰 업적은 일제치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첫 한국인 여자 방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를 창설해 주었고, 성모회가 한국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자리잡아 한 수녀회로서 충분히 성장하여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국가적으로나 국제 정치적으로 험난해지자 평양교구 제2대 교구장 모리스 몬시뇰은 한국 수녀회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 1931년 수녀원 건물을 준비했다. 모리스 교구장은 이미 한국인 수녀회의 창립을 위해 5명의 지원자들을 평양 성모학교에 입학시켜 공부하게 하고 각 본당 신부들에게 수녀원의 창립사업을 알리고 지원자들을 추천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김선용 : 52;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50년사 : 46-51)

1932년 6월 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축일을 맞아 수녀회가 창립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마음 한 뜻'으로 공동생활(사도 4,32 참조)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하느님께로 '마음을 드높이고'(Sunrsum Corda),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라(1고린 9,22 참조)는 창립정신을 간직하고, 메리놀회 장 앙넷다 수녀가 초대 원장이 되었다.

1935년에는 영주군 화산면 용평리에서 델랑드(Louis Deslande, 南) 신부의 지도 아래 6명의 지원자들이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본당의 일을 도우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생을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청빈과 순명, 정결을 수련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삼덕당'이란 이름 하에 작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 성심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이 수녀회는 1936년 2월 18일부터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과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설립된 '성모자애원'(현재는 보육원과 양로원으로 나뉘어 있음)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 안에 예수 성심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라."는 특별한 소명을 깨닫고 사회사업 분야에서 많은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1942년 7월 17일부터는 일제의 탄압으로 전체 회원들이 4개월 동안 감옥에 감금되어 수없이 많은 신문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다행히 그해 11월 22일 성모자헌축일에 석방되어 더욱 열심히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생활을 계속하였다.(1956년에 다미엔 피부 진료소를 개설하여 나환자들을 진료해 주고 정착촌을 마련해 주고 또 이동 진료를 통해 계속 치료해 주며, 가난하고 불우한 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특수 소명에 충실하면서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도구로서 끊임없이 정진하고 있다.)(김선용 : 54)

1925년에는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함경남도 원산에서 덕원 성 베네딕도회의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의 명으로 의료복지와 초등학교, 유치원을 경영하기 위해 진출하였다. (현재 대구 파티마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김선용 : 54)

1931년 11월 6일에 연길 교구의 테오도르 브레허(Teodor Breher, O.S.B.) 교구장에 의해 스위스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연길에 진출하였다. 이 수녀들은 첫째 동양교회에서 여성 신자들을 위한 복음선포자로, 둘째 육신의 치료로 영혼을 구원할 방문 치료자로, 셋째 초등학교 취학 연령을 넘긴 여성들을 위한 교사로, 넷째 수도생활을 동경하는 젊은이들의 선구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수녀들은 진료를 통한 간접선교에서부터 직접선교에도 참여했다.(김선용 : 56) 이들은 1933년 고산 본당에서 본당 사목에 참여하고 해성유치원과 해성보통학교, 약방, 농장 등을 운영했다.(가톨릭대사전 : 462)

1937년 9월 캐나다 성 요셉 관구의 드콰이어 (J. Dequire, 요한)와 벨레로즈(M. Bellerose)신부가 부산에 도착하면서부터 프란치스코회(Franciscan Order) 한국 관구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1223년 9월 27일 아씨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에 의하여 창설된 최초의 탁발 수도회다. 이 회의 정신은 복음을 완전무결하게 생활화하는데 있다. 즉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께서 성인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하느님께 반대되는 모든 이기적인 경향, '육의 정신'을 버리고 주님의 정신대로 사는 것이 형제들의 이상인 것이다. '작은 형제'란 주님의 정신에서 흘러나온 성인의 독특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피조물과 형제적인 일치가 될 수 있는 가난과 겸손의 뿌리이다.

1938년 12월 15일 대전 목동(牧洞)에 수도회를 건립하여 '천사의 모후 성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소위 태평양전쟁이 발발되자 일제는 죄 없는 선교사들까지 적으로 몰아 모진 감금생활을 겪게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옥고에서 풀려났으나, 후유증으로 한 회원은 끝내 병사하고 말았다. 이들은 전쟁 후 자선활동으로 교회사업을 비롯하여 성소후원회, 군종후원회, 교도소후원회, 은퇴사제후원회, 구라회, 불우 이웃돕기 등에 대부분의 형제회가 단체 혹은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운영하고 있는 소년원, 양로원, 나환자촌, 신학원 등의 방대한 사업을 돕고 있다.(한국가톨릭대사전 : 1220쪽)

1940년 프랑스의 멕틸드 수녀와 마들렌 수녀가 혜화동에 작은 집을 마련하여 '가르멜여자수도회'를 설립하였다.(가톨릭대사전 : 3)

1943년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프랑스인 생제(Singer, 成) 신부에 의해 '성가소비녀회'가 창립되었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생제 신부는 혜화동 본당 신부 시절 '동정녀의 집'을 마련하여 가난한 이들의 종으로서 평생을 살도록 하였다.

(5) 교회 복지활동의 확대

1904년부터 교회는 개화기의 온건한 민족주의 운동으로서의 애국 계몽 운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반침략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황무지 개간이란 미명아래 행해지는 국토침략을 막기 위해 서울 명동성당에서 황무지 개간령에 반대하는 기도회를 개최하였으며, 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신자들은 기꺼이 참여하여 투쟁하였다. 경상도 일원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상태는 일본군에 잡혀 사살될 때까지 묵주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안중근도 만주의 하얼빈에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한 후 "십자성호를 긋고 대한 만세를 불렀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애국심과 신앙심의 조화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조선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국채 1,300만 원을 차관함으로써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벌어진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한 서상돈은 대구 지방의 대표적 신자였다. 경향신문과 교회를 통한 국채 보상 운동은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일합방이 강행된 후에도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족 운동은 계속되었다. 황해도 지방의 유력한 신자인 안명근을 중심으로 한 '안악사건', '105인 사건'의 천주교 신자 이기당을 중심으로 한 간도 지방의 독립 운동 단체인 '광제회', 통화현의 '자치회'의 조직을 비롯 '병학교'의 설립은 대대적인 무장 저항 운동의 준비였다.(한국천주교회연감, 1994, 141)

일제치하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 학생들은 만세시위가 벌어졌던 바로 1919년 3월 1일 저녁 교내에서 신학원이 떠나갈 듯 만세를 외친 다음 교외로 나와 군중들과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또한 대구의 유스띠노 신학교에서도 3월 8일에 있을 만세시위에 합세하고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제작하다가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제재를 받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부족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3·1 운동 이후에도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고,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많은 이들이 이 운동에 기도와 희생으로 참여했다.

다른 한편 교회는 이 시기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회복지 활동을 다양하고 더욱 폭넓게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1850년대부터 고아원, 양로원, 시약소 중심으로 시작되어온 교회의 복지활동은 자선 중심에서 정의부문에까지 확대되어 나갔다.

평신도 특히 청년운동이 그 부문이었다. 3·1 운동 이후 특별히 청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 교회는 전국 각지 본당에서 제각기 활동하고 있는 청년회들을 통합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1922년 지방대표회의를 소집하고 경성구 천주교회 청년연합회를 발족시켰다.(경향잡지, 1922. 6. 274-277; 서울교구연보 1922)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백주년을 맞이하여 청년연합회는 의료복지의 필요성을 강력히 제기하여 의료기관의 신설을 제일 필요하고 적절한 기념사업으로 제창하였다. 그 결과 1935년 서울에 불우한 환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성모병원을 설립하였다.(가톨릭중앙의료원 50년사 : 493)

또 한편 청년연합회원들은 사회사업에 헌신하는 동시에 교육사업과 출판 언론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당시 공립학교의 물질주의적 교육에 대항하고, 나아가서 천주교의 사회관과 도덕관을 사회에 침투시키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생각되었으므로, 우선 천주교회에서 인수한 남대문 상업학교의 유지를 전국 신도들에게 호소, 이 학교를 우수한 학교로 발전하게 만들었다.(서울교구연보 1930)

서울과 대구의 청년회는 복음과 천주교 정신을 사회에 전하고 윤리를 바로 잡기 위해 신문형식의 기관지를 발간하였다. 1927년 대구남방천주교청년회의 '천주교회보'와 경성구천주교회 청년연합회의 '별'이 그것이다. 교회 책임자들은 교회 출판사업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이상의 기관지들을 1933년 6월에 '가톨릭 청년'지로 흡수 통일시켰다. 가톨릭 청년지는 순수 종교지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사회, 법률, 언어, 과학, 미술, 의학, 문예 분야 뿐만 아니라 방송 용어까지 마련함으로써 명실공히 계몽지로서의 역할에 진력하려 했다. 이 잡지는 가톨릭 정신을 사회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당시 교회관, 윤리관, 사회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산주의, 사회주의, 유물론, 진화론 등 당시의 사상이나 시대 사조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가톨릭 청년은 독일의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는 글도 실었다.

가톨릭 청년지는 억압받고 가난한 조선 민족의 현실에 대해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내용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사회 구조의 모순이나 식민지 아래에서의 일제의 착취에 대해 정면으로 공격하지는 못했지만 민중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하고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사회정의를 부르짖었다. 청년지는 이후 4년간 계속되면서 1930년대 문단에 가톨릭 문학운동을 제기하고 그 기운을 드리웠다.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되자 교회는 이에 따라 새 철자법을 이용하여 경향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청년지에서도 이병기의 '조선어 강좌'를 두어 한글 연구를 촉진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민족 정신의 고취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가톨릭 청년지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상기시키고, 가톨릭과 민족 문화를 접맥하는 방편으로 '다산 선생의 서세 백년을 맞이하며'라는 특집을 통해 다산을 향토 문화 건설의 지성인 신자로 제시했다. 그를 '동방의 태양', '조선 과학계의 명성', '위대한 과학자', '사상계의 선구자'로 제시하면서 일제에 조선 민족의 우수성을 증언하고 조선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고취하고자 했다.

(6) 태평양전쟁 속의 교회복지 활동의 피해

1941년 12월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함경도에서 활동하던 독일인 사제와 수사들의 여행을 제한하였고, 평양교구장인 미국인 메리놀회 번(Patrick Byrne, 方益恩, 1888-1950) 주교와 사제 35명, 광주와 춘천의 아일랜드인 주교와 사제 32명을 구금하였고, 이듬해 미국인 사제들을 본국으로 추방하였다. 또한 모든 외국인 주교들을 일본인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일제는 또한 사립학교를 모두 국유화하기 시작했다. 1942년 서울의 용산 신학교를 폐교시켰고, 대구 신학교도 폐교시켰으며 덕원의 신학교는 인가된 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병사들이 점령했다. 사제와 신학생들이 군인이나 노무자로 강제 징용되었고 평양의 대성당을 위시하여 곳곳에서 성당들을 군용으로 징발했다.(경향잡지, 1946. 9. 25) 이렇게 외국인 사제들을 추방하자 그곳에 있던 고아원들의 원아들은 명동의 샬트르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이송되어야만 했다.

일제는 일본 가톨릭 교회를 통해 신사참배(神社參拜)가 우상숭배가 아님을 알리고 강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외국인 선교사들을 제외한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은 이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거부함으로써 성당과 학교, 병원 등 자신이 근무하던 직장에서 떠나야 했고, 심지어는 투옥되었다.

2) 분야별 천주교 사회복지사업

(1) 아동복지

① 보육원

1910년 1월 1일, 1855년에 매스트르 신부가 설립한 영해회의 3대 원장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가밀 수녀가 취임했다. 프랑스 성영회와 샬트르 수도회에서 보내주는 보조금이 고아원 운영의 큰 부분을 차지해 왔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러한 외국의 원조가 끊기고 보조금도 1/3로 줄어들어 극심한 재정난에 이르게 되었다. 국내사정도 약화되어 쌀값 등 생필품 값이 크게 올라 생활유지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홍수 등으로 인해 더욱 크게 늘어난 고아들을 원하는 대로 다 받을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1925년부터 고아원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다만 얼마라도 건축비에 보태기 위해 1925년, 1926년, 1927년 세차례에 걸쳐 이틀씩 바자회(Bazzar)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 바자회는 한국 최초의 모금 운동의 일환으로 벌어진 행사이기도 했다. 주로 외국인들의 협조로 치러진 바자로 재료와 수공값 5백여원을 제하고도 몇 백원이 남게 되어 고아들의 며칠 양식이 되었다.(경향잡지, 1915년 12월 25일자 : 531) 그리하여 그 동안 40여년간 저축했던 돈과 수녀들과 고아들이 수공예품을 만들어 판 돈, 그리고 국내·외의 관대한 희사에 의하여 드디어 1926년 5월, 벽돌 3층으로 된 고아원 본원사를 신축 낙성하여 입주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녀들의 손에 의해 구호되고 양육된 고아의 수는 4,500명이 넘었다. 보육원 초기부터 원내에서는 필요한 공부와 수예, 재봉 등을 가르쳐 왔고 1930년경부터는 좀더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여 유치반, 초등반, 중등반 등으로 나누어 일반 학교와의 유대관계를 맺어나갔다.

1932년에는 '천주교 고아원'에서 '천주교 보육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고아들의 수가 많아져 수용능력이 부족하게 되자 용산 삼호정(현 산천동)에 1만 8천원의 공사비로 3층의 보육원 분원 건물을 지어 1936년 7월 8일 라리보 주교의 주례로 강복식을 거행하고 50여명을 수용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소개령(疏開令)에 의해서 보육원을 옮기기 위해 1944년 겨울부터 하우현 천주교회로 짐을 옮기고 아이들을 피난시키던 중 해방이 되어 다시 명동으로 돌아왔다.(샬트르 100년사 : 995)

1915년 10월 15일 대구교구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대구본당(현 계산동 대주교좌 성당)의 초대주임 로베르 신부와 대구지방의 고아양육을 위해 이미 프랑스인 양모를 정하여 그들의 양육비 보조금을 받아냈고 본당신자 유지들에게 양육비를 지원하여 고아들을 맡겨 양육하던 고아원을 샬트르 수녀회에 맡겼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이러한 고아 약 30여명을 맞아들여 '천주교 수녀원부설 여자 고아원'을 시작했다. 1922년 이후 원아수의 증가에 따라 고아원 건물을 점차적으로 증축 혹은 신축하여 영아부, 육아부, 아동부 등을 분리시켰다. 한편 수녀회의 지원자들의 수가 많아지고 수련원 개설문제가 제기됨과 아울러 원아수의 급증으로 1925년에는 고아원 설립 10주년 기념으로 원사를 신축하였고 그 당시 관공서 기관에 수용되어 있던 어린이 40여명을 인계 받아 양육하였다. 일제 말인 1944년 2월 10일, 그 명칭을 '천주교 백백합(白白合) 보육원'으로 개칭했다.(샬트르 100년사 : 902)

1926년 평남 평원군 영유읍 이화리 소재 영유 본당은 본당 내에 시약소와 고아원을 설립하여 메리놀 수녀들이 부임했다.(가톨릭대사전 : 832)

1926년 함남 청진시 포경동(浦傾洞) 소재 청진 본당의 초대 주임 마르코 바인거(Markus Bainger, 方, 1891. 9. 6 - 1945. 9. 17)신부는 본당 내에 빈민학교를 개설하고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를 초대하였다. 본당 내의 빈민학교에서는 김 아녜스 수녀가 정식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박 골롬바 수녀는 시약소를 맡아서 도처에서 몰려오는 환자들을 최선을 다하여 돌보아 주었을 뿐 아니라 본당의 교리반도 맡아 일하였다. 켈트루드 분원장 수녀는 학교의 교리반과 본당의 제의방, 임마꿀라따회 지도도 겸해 일하였다. 옵타다와 사베라 수녀는 부인 예비자반과 아울러 주방을 맡아 많은 희생을 치르며 봉사하였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51쪽)

1935년 평양시 대신리 본당 양기섭(베드로) 신부는 영해 고아원을 설립했다.(가톨릭대사전 : 278)

② 어린이집, 탁아소, 유치원

1918년 평남 진남포 본당의 남녀청년회에서 문맹퇴치운동의 일환으로 마리아 유치원을 설립하여 50명의 원아를 수용하여 기초교육사업을 벌였다. 1921년 6월에 마리아 유치원 여자부를 분리하여 '해성학원(海星學院)'이라 이름하고 직접 운영하면서 남자부는 신자 유지들에게 일임하였다. 1921년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원들이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해 학생수가 33명이었는데 이듬해 봄에는 70여명, 가을에는 100여명이 넘게 되어 갑·을·병 3반에 유치반 한 반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마리아 유치원은 1945년 초, 일인들의 강압으로 폐원되었다. (샬트르 100년사 : 986; 가톨릭대사전 : 1104)

1921년 평북 의주 본당은 해성유치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24년 해성학원이 개설되었고 1926년 메리놀회 수녀들에 의해 시약소와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광복 후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김교명 신부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가톨릭대사전 : 929)

1923년, 황해도 은율 본당은 관내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물론 유치원마저도 없어 많은 신자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아쉬움을 느껴오다가 이보환(李褓煥 요셉, 1893-1944) 신부가 부임한 후 유치원부터 설립하기로 중론이 모아져 300원의 기금으로 '성모유치원'(후에 해성유치원, 은율 유치원으로 개명)을 개원하였다. 첫해에 원아수는 54명에 달하였고, 유자격 교사 2명이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1936년에는 본당유지의 기증으로 2층 연와조 양관(洋館)을 건축, 1층을 유치원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평양 대신리 본당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1905-1982) 신부는 축성식에 참석했다가 시설이 미비한 것을 보고 돌아가 미끄럼틀과 그네 등을 평양에서 제작하여 기증했다. 그리고 성모 유치원의 명칭도 '은율 유치원'으로 바꾸었다. 8·15해방 후 북한지역의 공산화로 인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철수하였다. (샬트르 100년사 : 979)

1925년 서울대교구 명동 성당은 계성보통학교에 유치반을 개설하였다. 처음에는 명동본당에서 박종기 스콜라스티카 수녀가 예비자반을 운영하며 이 예비반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는데 반응이 좋아 곧 유치반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교실부족으로 곧 중지되었다가 1927년에 교실이 증축되면서 1928년부터 다시 유치원생을 모집하여 학교부속사업으로 운영해 왔다. 그 후 1935년에 3,000원의 경비를 들여 원사를 낙성하고 9월 2일부터 원아를 모집, 9월 8일에 개원식을 갖고 정식으로 출발하였다. 1941년 9월 18일 화재로 유치원이 전소하여 종현성당 강당 지하실에서 수업을 하면서 복구작업에 착수하여 1942년 봄에 새 원사의 낙성을 보았으며 원아들의 다양한 재능은 전국에 알려졌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폐원되었다가 1954년 4월 5일부터 다시 그전 초등학교 자리에서 문을 열었으나 그 자리에 성신대학 의학부(현 가톨릭 의과대학)가 개교하게 됨으로써 또 다시 폐원되었다가 1967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의해 다시 재개하여 1987년 용산으로 이전, 오늘에 이르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811)

1926년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제4대 주임신부인 퀴클리에(Leon Curlier, 南一浪, 1863-1935)신부가 성당 근처의 집 한 채를 매입하고 '봉삼 유치원'을 개원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907; 970)

1927년 서울대교구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은 가명학교의 부설로 '가명 유치원'을 설립하여, 1882년 인현서당으로 시작하여 1950년에 폐교된 가명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4)

1927년 4월 1일 원산본당에서 '해성 유치원'을 설립하고 1931년 9월 30일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1933년 6월부터는 유치원은 성 베네딕토 수녀회 한국인 김 데레사 수녀가 책임을 맡았다. 그 후 유치원에서는 원아들이 늘어남에 따라 3반으로 나누어 운영하였으며, 1938년 11월에는 수녀원 앞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전하였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165; 함경도 천주교회사 334)

1934년 원주교구 원주본당에서 정규랑(레오) 신부가 '소화유치원'을 설립했다.(가톨릭대사전 : 891)

1937년 황해도 사리원 본당의 김명제(金命濟) 신부는 샬트르 수녀회원들과 함께 '봉화유치원'을 설립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며 전교와 교육사업에 열중하면서 일제 말의 어려움을 견디어 나갔다.(샬트르 100년사 : 973)

1937년 3월 1일 인천교구 답동 성당 드뇌 신부는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박문유치원'을 설립하였다. (그후 한국전쟁으로 한동안 휴원하기도 했으나 1957년에 2학급으로 증설되면서 시설도 과학교육에 입각한 교구를 점차로 구비하고 강당, 보육실, 자료실, 양호실, 소꼽방, 실내·외 유구장, 풀장 등 다양한 설비를 갖추었다. 또한 위치도 답동성당 구내인데다가 이웃에 초등학교와 수녀원 등이 있어 좋은 교육환경을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 4,64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박문유치원은 학습발표, 리듬악기 발표, 연극발표회 등 다양한 발표회와 전인교육을 통해 매해 150명의 원아들을 교육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860)

1937년 4월 12일 서울교구 백동(현 혜화동) 성당 오기선(요셉) 신부는 우리 나라 어린이들이게 우리말과 우리 글을 보존케 하여 한국의 얼을 심어야 되겠다는 취지로 옛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사용하던 철공소를 유치원 원사로 수리하여, 1937년 1월 26일 장면을 초대 원장으로 그해 4월 12일 '혜화 유치원'을 개원했다. 개원당시 정원에서 4명이 초과된 94명 2학급으로 원아들이 입학하였다. 조화있는 인간성을 갖추기 위해 짜여진 교육과정 속에서 매주 종교담화 및 성서이야기 등을 시간표에 넣고 시행하며 좀더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 연령별로 구분, 재원반, 유치반, 유아반으로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833)

(2) 교육복지

1900년 9월 1일에 인천 교구 답동 본당의 드뇌 신부는 '인천항 사립 박문소학교'를 설립하여 보육원 원아들과 신자들의 자녀 및 무산아동(無産兒童)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후 드뇌 신부는 1914년에 급증하는 아동들을 수용하기 위해 인천사립박문소학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6월, 남자부 교사 6학급을 다시 신축하여 1917년 4월 1일에는, 이 2개교를 합병하여 '인천박문학교'로 개칭하였다. 수녀들은 박문학교 여자부를 운영하면서 특히 매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갖고 교리, 성서, 역사, 복음 등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

1925년 11월 27일에는 1922년에 개정된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인천사립박문보통학교'로 6년제 정식인가를 받았다. 그후 1938년 4월 1일에는 개정교육령에 의해 '인천박문심상소학교'로, 1941년에는 다시 '인천박문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6월 3일에는 건물 소개령으로 인해 남자부 교사를 헐게 되어 공립 초등학교로 편입시켰으며 여자부 교사만이 남게 되었다. 당시 교사수녀들은 매일 아침 신사참배를 위해 학생들을 인솔하고 신사에 다녀와야 했으며, 남자부교사가 소개된 후에도 여자부를 위해 끝까지 헌신하면서 학교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샬트르 100년사 : 860)

1910년 9월, 마산 완월동에 초대 주임으로 무세 신부가 부임하여 복음을 전파하면서 지방 교육사업과 민중계몽의 필요성을 통찰하고 빈민대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본당 부속건물에서 '성지학원'(현 성지 여자 중고등학교)을 개설하였다. 무세 신부는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통치 아래 우리말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없는 시기에 외국인으로서, 또한 천주교 신부로서 우리 교육에 공헌한 바가 실로 크다 하겠다. 1935년 성지학원 내에 성지 강습회를 부설하고 청소년의 중등교육을 시작하였으나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지강습회는 일단 폐쇄되고 '사립학술강습회'로 개칭하여 인가를 받았다.(샬트르 100년사 : 954; 가톨릭대사전 : 1104)

1910년 9월 진남포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르레드(Jules Lereide, 申승겸, 1883-1917) 신부가 '지정(智貞)여학교'를 세우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을 교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1914년 본당신부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병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본국으로 소환되어 가자 학교가 임시폐교 되었다.

1930년 4월 스위니 신부는 100여평의 학교 건물을 신축하고 사립학교 인가를 받아 '해성학교'가 4년제 보통학교가 되었다. 1935년 3월에는 6년제로 개편함으로서 학교의 규모와 교육내용을 더욱 충실히 하였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1937년도 해성학교의 현황을 보면 800여평의 대지 위에 건물 216평, 11학급 642명의 학생들과 4명의 수녀들을 비롯한 13명의 교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해성학교는 공립학교로 잠시 흡수되었다가 해방이 된 후 다시 교회에서 운영하여 왔으나 1947년도를 마지막으로 공산정권에 몰수당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986; 가톨릭대사전 : 1104)

1911년 서울 백동(현 혜화동)에 성 오틸리엔의 성 베네딕토회 사우어(Sauer) 신부는 '숭신학교'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 때문에 1943년에 폐교당했다.

1898년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우도(Paul Oudot, 1865-1913) 신부는 종교교육과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봉삼학교'를 개설하고, 1912년에는 매화동 본당의 여학교에서 샬트르 수녀회원들이 종교교육과 조선어, 산술, 수신(修身) 등의 과목을 가르쳤고 우도신부의 장려로 '양잠강습소'를 개설하여 양잠기술을 널리 보급하여 주민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했다. 그런데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본당신부가 소집되어 본국으로 돌아가자 샬트르 수녀들도 본원으로 귀원하여, 한동안 학교는 신자들의 자치에 맡겨졌었다.

1919년 10월 샤보(Jules Chabot, 1886-1953) 신부가 귀임하여 1925년에는 수녀들에 의해서 본당의 가톨릭 여자 청년회가 창설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907; 970)

1912년 공베르(A. Gombert) 신부는 안성 본당에 1901년에 설립된 '안법학교'에 여자부를 신설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 2명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가톨릭대사전 : 775)

1916년 일제의 우민화 정책에 따라 1909년 프랑스 선교사 라크루(Marcellus Lacrouts) 신부가 제주도에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인 '신성학교'가 탄압을 받고 무기휴교를 당했다. (그후 1964년 신성여자중학원으로 재 개교하였다. 1953년 고등학교를 병설하였고 1977년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800번지의 현 교사로 이전하였다.)(가톨릭대사전 : 722)

1895년부터 서울 대교구 약현 본당은 약현서당을 세워 어린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해 왔으며 1901년에는 특히 여자 어린이의 교육에 관심을 가진 두세(Camille Doucet, 1853-1917)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학생은 30여명이었으며 서울 교구에 첫 분원을 두게 되는 2명의 샬트르 한국인 수녀가 매일 아침 학교에 나와 교리, 경문, 바느질 등을 가르치고 본원으로 돌아갔다. 1906년에 남자 학교 건물을 새로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加明)학교라 하였다. 1909년에는 두 학교가 가명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22년도 재학생수는 남학교 250명, 여학교 220명이었다. 1926년도부터는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여자부가 좋은 성적을 내게 되어 이로 인해 입학지원자가 초과되어 교사를 증축해야 했다. 당시 가명학교는 재학생이 약600명의 큰 학교로 발전되어 있었으며 증축공사는 1928년 6월 10일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1930년에는 4,000원의 공사비를 들여 여자부 교사를 증축하기 위해 임시로 봉래정 전 남대문상업학교 교사로 옮겨가 수업을 하였다. 이 학교는 1950년 6·25 동란으로 폐교되었다.(가톨릭대사전 : 4; 샬트르 100년사 : 976)

1921년 10월 7일 장호원의 초대 신부인 부이용 신부는 1907년 민응식의 집 행랑채를 이용하여 '매괴학당'을 설립하고 남학생을 모아 가르쳤는데, 교재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유년필독(幼年必讀)을 사용, 통감부의 일본인 관리들로부터 금서를 가르친다 하여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수가 점점 증가하여 60명에 달함으로 교사가 비좁아지자 1908년 3월에 학교를 크게 세워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는 발전을 보였고 이어 여학교도 설립하였는데 수녀들의 필요성을 절감한 부이용 신부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교는 1912년 10월 7일 매괴축일에 개교하였다.

한편 여학교는 수녀들의 헌신으로 외교인들에게까지 좋은 인상을 주어 딸을 가진 부모들이 공립보다는 매괴학교로 보내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부족, 부모들의 몰이해, 유능한 교사부족 등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다. 결국 보통학교와 공립학교로 전학해 버리는 학생들이 점차로 늘어가게 됨에 따라 6년제였던 매괴학교는 부득이 4년제만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2년에 6년제로 다시 복귀한 후 1936년에는 공식학교 인가를 받고 3층 교사를 증축하여 교명을 매괴심상소학교(怘塊尋常小學校)라 하고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함으로써 1939년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일본인들이 이 학교를 빼앗아 공립화하고 교명을 욱산(旭山)으로 바꾸어 운영하였는데 1945년 해방을 맞아 다시 찾게 되었다. (그후 매괴학교는 1953년 매괴상업고등학교로 승격되었고 1966년에는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확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초등학교는 운영난이 심화되고 교육전망의 분석 결과 그 전망이 밝지 못하여 1972년 2월 28일자로 폐교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857)

1922년 3월 7일부터 원산 본당의 옥 엑카르트 신부는 야학 강습소를 4년제의 해성 보통학교로 승격하였고, 처음에는 옥 신부 개인이 사재를 털어 운영하다가 1923년 4월 1일부터는 원산 본당에서 운영비를 충당했다. 1924년 4월, 학생수가 450명에 다하여 교사증축이 불가피하게 되자 건평 450의 벽돌건물을 건축하였고, 1926년 4월 1일부터 학업연한을 6년제로 연장하였다. 1928년에는 15학급의 학생 689명, 교사 17명으로 늘어났다.

학교 이름을 '해성'(海星)이라고 지은 이유는 성모님의 이름을 따서 바다의 별이라는 뜻이 포함된 것이다. 성모님께서 넓은 바다에서 환히 비추어 주는 별처럼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지혜를 비추어 줌으로써 장차 이 나라에 큰 별이 되어 달라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제 당시 천주교회에서 세우는 보통학교는 대개 '해성'이라는 학교명으로 통일한 것이다. 원산에서 해성학교를 찾는 어린이들 중에는 15세부터 19세까지 나이가 많은 청소년들도 더러 있었다. 왜냐하면 돈도 없고 학교도 부족하여 취학의 기회를 놓친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성학교를 세웠기 때문에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아울러 이 아이들에게 종교교육도 시켰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124; 가톨릭대사전 :, 889)

1922년 4월 1일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현 서울대교구 유지재단)은 1907년 개교한 '소의학교'를 인수하여 5년제 갑종상업학교로 변경하면서 남대문 상업고등학교로 개칭했다. 그리고 학교 내에 을조(乙組)를 편성하여 신학교의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을조의 경우 남대문 상업학교의 교육과정을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받고 방과 후 신학원에서 신학교육에 필요한 라틴어와 교리 및 지도신부의 영성을 받았다. (1968년 5월 김수환 추기경이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현재는 정진석 대주교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마련되었다.)(가톨릭대사전 : 309)

1923년 충북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 본당 윤의병 신부는 성당을 짓고 '숭애 의숙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후 증평본당에 흡수되었다.(가톨릭대사전 : 1096)

1924년 연길 교구. 명월구 본당 교우촌 내에 '보록학교'를 개설 된 후 1926년 대령동 본당의 창설과 함께 대령동 본당의 공소로 개설되었고, 이어 1931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36년 신첨본당을 분리, 창설하는 한편, 올리베타노 베네딕토 수녀회 분원을 설치하여 동(同)회의 수녀들로 하여금 진료소를 운영케 하였다. 그 후 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42년 성당 신축을 시작하였으나, 1945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교회의 재산을 몰수당함으로써 폐쇄된 이후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다. 1946년 폐쇄되었다. (가톨릭대사전 : 389)

1924년 4월 17일 서울교구 명동 성당에서 1882년 설립하여 운영하는 '인현서당'은 남·여 학교를 통합하여 총독부로부터 정식 6년제 '계성지정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이때부터 공립상급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졸업장을 줄 수 있게 되었다. 2년 뒤에는 계성보통학교 남자부 교사를 2층 양옥으로 건축하였으며 교실부족으로 이듬해에 또 증축하였다. 1924년에는 보호자회를 설립하였고 1928년에는 동창회를 창립하여 학교발전을 도모하였다. 1938년 4월, 경성계성심상소학교로 교명을 개칭하였다. 한편 일제의 탄압으로 나라안의 모든 학교가 국어교육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을 당시에도 계성학교는 방과후에 종교교육을 통해 한글을 계속 가르치기도 하였다. 1941년 4월, 계성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샬트르 100년사 : 793)

1924년 12월 8일, 함경도 원산 본당은 교실 4개에 한 교실에 60명씩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4월에 이미 있던 2학년에 3학년이 추가되었고, 매년 한 학년씩 추가할 예정으로 건물을 지어 11월 말 1단계가 완공되었다. 1층에는, 각각 60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9개의 교실이 있고, 중간건물 2층에는, 교실 1개와 교사실, 그밖에 성당과 제의실이 있다. 12월 초에 몇몇 교실과 성당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12월 8일에 축성을 하게 되었다. 성당의 시설을 위해서는 성 분도 수도원이 관대하게 많이 기여했다. 학교의 건물이 완성되고 조직이 짜이면 600여명의 소년과 300명의 소녀들이 동시에 공부하게 된다.

미장이일은 베드로 수사의 감독 하에 중국인들이 했고, 조수일은 대개가 가난한 교우들인 조선인들이 했으며, 목수일은 야누아리오와 고트립(아우어) 두 수사가 맡아 했다.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12월 초, 건물 골격이 완성되어 최소한 그것을 임시로 널빤지로 덮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 아직 학생들이 다 들어차지 않은 국민학교 건물에서는 새로운 원산 본당을 지을 때까지 임시로 원산 시내의 452명과 근교의 130명의 신자들의 주교미사를 드릴 성당으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빈약한 포교지 자금을 동원하는 크고도 위협적인 결정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원산교구연대기, 1991)

1926년 원산본당에서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은 '호수 천사 빈민학교'를 통해 여자 어린이들을 지도했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가르침에 맞추어 크리소스토마 슈미트 수녀는 처음에 여자 어린이들을 모아 작은 수녀원 마당에서 교리 지도를 하였고, 이어 해성학교 운동장 옆에 있는 초가집(해성학교 초기에 야학 강습소로 사용하던 집)을 빌려 어린이들에게 소학교 교육의 기초를 지도하였으며, 새 수녀원(성 임마꿀라따의 집)이 완공되면서 옛 수녀원(성 데레사의 집) 한쪽에 교실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나오는 어린이가 점점 늘어 곧 100명 이상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빈민학교인 "호수천신학교"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927년 4월 1일, 호수천신학교 한쪽에 "해성유치원"을 개원하여 수녀와 예비수녀가 원아들의 교육을 맡도록 하였다. "호수천신학교를 통해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초등학교의 교과과정과 교리를 가르치는 그리소스토마 수녀의 열성적인 모습은 이 학교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다. 30년대 초반까지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거리에서나 어디서든지 가난하고 방황하는 어린이들을 만나면 학용품을 마련하여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애국정신을 심어주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굳건한 의지를 갖도록 일깨워주었다. 그리소스토마 수녀의 확고한 교육 이념 하에서 호수천신학교의 어린이들은 한글을 터득하고 점차 신앙에 눈뜨게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호수천신학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여자 소학교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유치원도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게 되었다.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1938년 학생수가 350명 정도에 이르자 성 데레사의 집 아래층에 3개의 교실을 마련하였고, 4년제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이 학교는 비록 빈민학교로 출발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과 교육 체제가 보통학교에 손색이 없게 되었고, 마침내 1941년 4월에는 6년제 정식 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학교에는 남녀 모두에게 입학을 허가하고 있었으나 주로 여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1926년 발족을 본 호수천신학교는 1941년 4월에 드디어 정식 초등학교로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이전까지는 호수천신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적으로 중학교의 입학 자격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호수천신학교가 정식 초등학교로 인가됨에 따라 이제까지의 특과 4년제 과정에서 6년의 정규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게 되었다.

6년의 정규 소학교 과정을 마치게 되면 병원의 보조원으로 일 할 수도 있고 똑똑한 아이는 그 곳에서 실습하다가 간호원 자격시험도 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입학을 원하는 어린이들은 더욱 늘어갔으나 여러 가지 여건 상 이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음이 그리소스토마 수녀에게는 무엇보다 큰 고통이었다. 호수천신학교는 정식학교로 인가를 받은 후에는 남학생도 입학시켰으나, 늘 여학생의 수가 훨씬 많았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여자보다 남자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었고 여자에게 돈을 들여가면서 공부시키려는 열의가 없었기 때문에 학비가 저렴한 이 학교에는 여학생들이 더 많이 입학했던 것이다. 1941년부터는 일본인 막달레나 수녀와 사베라 수녀 그리고 지원자 한 명이 그리소스토마 수녀를 도와 함께 일하였다. 호수천신학교의 학생수가 증가됨에 따라 매년 영세자가 속출하였기 때문에 수녀들에게 큰 보람을 안겨 주었다.(함경도 천주교회사 334;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165)

1927년, 1920년 8월 원산교구를 맡아 함경남도와 간도를 포교지방으로 관할하게 된 성 베네딕토 수도회는 서울의 수도원을 함경남도 덕원으로 옮기는 한편 그 곳에 이상적인 신학교와 자선병원, 인쇄공장 등을 설치하여 전교, 의료, 교육, 출판사업 등에 있어 빛나는 업적을 남기었다.(가톨릭대사전 : 462)

1927년 평북 영유 본당에 메리놀회 수녀들이 부임하면서 시약소와 양로원, 고아원 및 여자들을 위한 영유 여자 '기예학교'를 설립했다.(가톨릭대사전 : 823)

1929년 3월 15일, 1805년 평양 관후리 본당 르메르(Le Merre) 신부가 평안도 전지역을 관할하며 사목하다가 세운 기명(남아)·성모(여아)의 양교가 1927년 평양교구가 설립되면서 병합되어 6년제 지정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아 성모보통학교로 승격 개칭되었다. 1936년 10월에는 본당 주임 크노르(Joseph W. Connors, 權) 신부의 노력으로 상수구리(上水口里)에 세워진 3층 철근 콘크리이트 최신식 건물의 신축교사 낙성식과 함께 신교사로 학교 전부를 이전하였다. 이 건물은 공사비 75,000원의 거액을 투자하여 연건평 533평에 스팀시설과 실내수도, 수세식 화장실, 전기시설 등을 구비하였으며 교실 12, 교무실 1, 실험실습실을 갖추었다. 성당 경내에 있는 구 교사는 수리를 거쳐 성모학원, 성모유치원, 주일학교, 신자집회소 등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한편 1940년 6월 27일 한국 최초의 방인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가 창립된 지 8년만에 첫 서원식을 가져 11명의 수녀를 배출하고 그해 7월 관후리본당에 분원을 설치하게 됨에 따라 30여년간 본당에서 교육사업과 전교 및 자선사업을 맡아오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철수했다. (1945년 광복후 공산당 치하에서 몰수당하여 폐쇄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967; 가톨릭대사전 : 624)

1931년 강원도 원주시 원동 85-1 소재의 원주교구 주교좌 성당이며 '천주 성총의 모친'을 주보성인으로 모신 원주 본당 내에 정규랑(레오) 신부가 4년제의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다 1937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다.(가톨릭대사전 : 891)

1932년 연길 상시 본당 초대주임 퀴겔겐(Kugelgen) 신부는 '해성학교' 개교하고 야학과 유치원을 운영하였다.(가톨릭대사전 : 822)

1933년 함북 회령 본당의 2대 주임 을라프 그라프(Olaf Graf, 1900. 1. 16 - 1976. 12. 31) 신부는 초등교육기관인 '명악학교' 설립하고 본당의 주보성인을 '성 야고보'로 정하고 1935년 회령 본당의 성당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본당 사목과 시약소와 명악학교의 방과 후 교리지도를 했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150)

1934년 수원 북수동 본당은 4년제 '소화 학술 강습소'를 개설했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교사로 참여했다. 그후 1946년 1월 14일에는 소화 초등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874)

1935년 3월, 1896년 설립된 함남 내평리의 내평 본당이 1930년 교통이 편리한 고산역 부근으로 이전하면서 신고산의 고산 본당으로 개칭되고, 성 베네딕토회 나 카누토 신부가 '해성 보통학교'를 설립했다. 이 해성학교는 소학교의 교과과정을 가르쳤다. 수업은 수사와 몇 명의 평교사가 맡아 하였는데 방과후에는 늘 5, 6명씩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청원자와 수녀들이 교리지도를 했다. 그리고 수녀원의 한편에 유치원도 설립하였고 시약소도 운영하였다.

1936년 4월부터 시작된 고산본당의 성당신축은 1937년 6월 20일에 완공되어 유 플라치도 본당신부의 주례로 축성하였다. 새 성당은 2,500평 부지에 건평 122평으로 아름다운 성전이었다. 사제관도 곁에 지었으며, 옛 사제관을 헐어서 '해성학교'를 증축하였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148)

1936년 함남의 흥남 본당 초대 본당 신부인 임 갈리스토 신부는 본당 구역 내에 빈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해성학원'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앞섰으며 이를 통하여 많은 선교 활동도 펴 나갔다. 제 2대 본당 신부 구대준(具大俊, 가브리엘 ; 1912. 음4. 27 - 1950. 5. ?) 신부는 나라 사랑의 뜻이 투철한 사제로서 일제 말의 사설 학원 폐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해성학원을 운영하였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5)

1936년 5월 14일 평양교구 대신리 본당은 '동평학교'를 설립하였다. 4월 25일 6년제 초등학교로 인가 받고 교사가 준공되는 동안 성당 내 가(假)교실에서 수업하였다. 이듬해 부근의 동덕학교가 폐교됨에 따라 학생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동평학교는 적령기를 넘도록 취학하지 못한 빈민 학생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여 많은 학생들에게 취학의 기회를 주었다. 1948년 10월 폐교되었다.(가톨릭대사전 : 310)

1944년 8월 10일 서울대교구 명동 성당은 계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를 설립하였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고성순 양셀모 수녀와 고두희 레몬다 수녀가 학교교사로 파견되어 출퇴근하였다.

당시에는 이미 성당 구내에 계성유치원, 계성초등학교, 계성여학원 등 세 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여기에 학교를 세울 뜻을 굳힌 것은 식민지 지배 말기에 이르러 일제가 의무교육을 빙자하여 사립초등학교를 공립으로 흡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학교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성당 구내에까지 일본인들의 간섭이 뻗치게 되어 자주적인 교육이 불가능해 질 것임으로 차제에 초등학교 남자부는 폐지하고 여자부만을 살려서 동성상업고등학교(현 동성중고등학교)와 맞먹는 여학교를 세워 교육구국과 가톨릭적 여성의 양성이라는 뜻을 펼치기 위해 학교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797)

(3) 야학 및 기술교육복지

1910년, 1901년 1월 원주교구 원주본당에 5대 주임사제로 부임한 조제(Jaugey) 신부가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가톨릭대사전 : 891)

1910년 서울 백동(현 혜화동)에 성 오틸리엔의 성 베네딕토회 사우어(Sauer) 신부는 '숭공학교'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몇몇 수사들이 중국으로 동원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목공, 철공, 열차,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직공들을 배출하였다.(가톨릭대사전 : 462)

1916년 6월 황해도 사리원 본당의 첫 주임사제로 부임한 이기준(李起俊 도마, 1884-1977) 신부는 1921년 '성모성심학원'(聖母聖心學院)이라는 일종의 개량서당(改良書堂)을 개설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973)

1921년 5월 15일 원산본당의 제 9대 본당 주임 포교 성 베네딕도회의 옥 안드레아 엑카르트(Andreas Eckardt, 1884-?) 신부가 부임하여 '쌍트 오틸리엔' 학교 설립의 뜻을 전하였고, 서울에서 초빙하여 온 오병주 선생과 함께 1921년 5월 15일, 온돌방 2칸을 빌려 '야학 강습소'를 개설하였다. 미취학 아동이 많음을 안타까이 여긴 엑카르트 신부는 스스로 교단에 서서 지도하였으며, 빈곤한 어린이들에게는 일체의 학비를 면제시키고 학용품까지도 대주면서 신교육을 펼쳐 나갔다. 3개월 후에는 학생이 60명에 달하여 주야로 강습소를 운영하였다. 그후 이 야학은 '해성보통학교'로 승격된다. 1938년 4월 1일 해성학교는 학교명을 '원산 해성 심상소학교'(元山海星尋常小學校)로 변경하였다. 1937년 12월의 학교 현황을 보면 학교 대지의 총 면적이 3,542평, 교사 건평이 656평, 재적학생수(12학급) 734명, 직원수 14명, 졸업생수(10회) 807명(남자 542명, 여자 265명)이었다. 또한 1937년 당시 해성학교에서 10년이상 근속한 교직원은 오병주 부교장, 이와야 도메 선생, 이겸순(李謙順)선생, 최창희(崔昌曦)선생 등 네 사람이나 되었다.

방과후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들에게서 교리지도를 받았다. 서양수녀들도 입국 후 어느 정도 언어소통이 가능하게 되면 교리반을 맡아 선교에 열과 성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1937년부터 강화된 일본어 사용이 이중적인 부담을 주었다. 일제는 1940년 이후 해성학교의 교리수업도 꼭 일본어로 진행시키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래서 서양인 수녀들에게는 더욱 큰 부담이 되었으나 그것이 선교에 대한 열정을 제어할 수는 없었다. 1940년 2월 11일, 일제는 창씨개명을 실시하여 학교의 모든 학적부와 출석부에는 2개의 성(姓)이 올려졌다. 또한 일제는 1941년 3월 31일, 초등학교 규정을 공포하여 소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초등학교에서 한국어 학습을 완전히 폐지하도록 하였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75; 166; 173)

1929년 4월 8일, 황해도 은율 본당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1895-1950 행불) 신부는 가정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해성야학원'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개설하자 8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샬트르 100년사 : 979)

1929년 덕원본당에서는 각 공소마다 '야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활동은 특히 전교의 차원에서 아주 효과가 있었다. 당시 조선의 각 청년회에서는 활발히 야학 활동을 벌여 애국 계몽운동의 차원에서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다. 반면에 덕원 본당에서 설립한 야학교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일반 야학교와는 달랐으므로 일본 경찰은 가톨릭 교회측에서 야학교를 설립하는 데 대해 어느 정도 중립을 지켜 주었다. 그러나 국민 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결국 야학교는 조선 청년들의 교육열에 부응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활동이 지식의 전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교리의 전달에 있었고, 또 그들 자신이 국민 교육의 기초가 학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느끼고 있었을지라도 자연히 이것은 민중계몽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야학교는 덕원 본당 관내에서만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교구에서는 각 본당에 야학을 장려하고 있었고, 실제로 다른 곳에서도 야학이 큰 결실을 맺곤 하였다. 베네딕도 회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우선 어린이들과 젊은 사람들을 위한 예비자교리와 교리 강의를 체계화하고, 강화하고자 하였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확실한 교리 내용을 전달해 줌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양육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 교사들은 공립학교나 사립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세속의 일반 과목도 가르쳐 주어야 했다.

야학교에서의 수업은 덕원에서는 대체로 일요일과 첨례날에 이루어졌으며, 지방 공소에서는 일이 끝난 저녁때나 추수가 끝난 늦가을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덕원본당과 같은 경우는 수도원에서 두 번 강의를 하였는데, 즉 일요일 성당에서 본미사 후에 어린이들과 성인들을 위해 함께 수업을 열고, 또 한번은 더 늦은 시간에 어린이들만을 위해서 두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야학에 다니는 학생 대부분이 외교인들이라는 점이다. 야학 초기인 1929년의 기록에서도 "현재 50명의 소년들과 35명의 소녀들이 이 강의를 듣고 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외인들이다. 특히 여기(덕원을 말함)에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어느 마을의 외인 어린이들이 이날에 아주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들은 일요일 수도원의 기도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와서는 가끔 오후에 만도 후까지 남아 있는다."고 하여 외교인들이 야학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야학 활동이 전교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함경도 천주교회사 : 299)

1931년 평남 진남포 본당의 포스피칼(Hubert Pospichal) 신부가 무산아동을 위해 세운 '성심학원'과 5개의 공소에 '상설야학'이 있어 문맹퇴치에 공헌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954; 가톨릭대사전 : 1104)

1934년 평남 안주군 안주읍 북문리의 안주본당에 바론 신부가 성모학원을 개설했다. (가톨릭대사전 : 779)

1937년 평북 신의주시 마전동 본당 마컴(Markham, 馬)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의 기초작업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본당 구내에 '성심학교'를 개교했다. 그리고 1940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에 분원을 설치, 본당일과 성심학교의 서무 일을 전담케 하였다. 성심학교는 1942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개교하여 빈민아동들을 교육했으나 1947년 가을 북한 공산정권에 몰수되었다.(가톨릭대사전 : 369)

1939년 황해도 사리원 본당의 김명제 신부는 1939년에 '명성학원'(明星學院)이라는 4년제 여자 초등학교를 개설하였는데 개원 초에는 일반 공·사립학교에 입학시기를 놓친 나이 많은 처녀들이 대부분 입학하였다. 성당 지하실에 칸막이로 2개 교실을 만들어 1개 교실에서 2개 학년이 합반으로 수업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973)

1940년 평북 신의주시 마전동 본당에 말 크레이그(Craig)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마전동 외곽지대의 전교에 힘쓰며 야학을 개설하여 어려운 이들을 위한 교육을 하였다.(가톨릭대사전 : 369)

(4) 장애인복지

1930년 초 원산 본당에 부임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이 처음으로 청각 장애인에게 교리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교육의 혜택을 못 받아 문맹을 면치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던 그리소스토마 수녀가 하루는 열심한 신자 가정에 청각 장애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의 부모들이 청각 장애인인 아들 요한의 첫 영성체 때문에 고심하는 것을 알게된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요한을 정상아들의 교리반에 출석시켜 교리 지도를 시도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소스토마 수녀의 지극히 정성어린 지도로 첫영성체와 견진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리소스토마 수녀 다음으로 청각 장애인에게 교리를 지도한 이는 일본인 막달레나 수녀였다. 막달레나 수녀에 이어 청각 장애인을 지도한 이는 허 까리따스 수녀였다. 까리따스 수녀가 원산 본당에서 본격적으로 청각장애인 교리지도를 한 것은 1940년 이후부터였다. 그러나 이전에도 한 두명이 개인으로 교리를 배웠다. 정상인 교리지도도 힘겨운데 수화까지 익혀가며 장애인에게 교리지도하는 것은 참으로 큰 인내를 수반하였지만 까리따스 수녀는 개인으로 찾아오는 장애인을 위해 이런 많은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하였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75; 173)

(5) 노인복지

1924년 평남 평원군 영유읍 이화리 소재 영유 본당에 메리놀회 신부들이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본당 구내에 양로원과 시약소, 고아원, 기술학교 등을 개설하고 1926년 메리놀 수녀회 한국지부가 본당에 설치되어 사목에 참여했다. 1950년 6·25 동란으로 폐쇄됐다.(가톨릭대사전 : 823)

1933년 평남 진남포 본당의 스위니 신부는 본당에 양로원과 고아원을 개설하여 무의무탁한 노인, 불구자, 고아들을 수용하고 그 자신의 독자적인 부담으로 이를 운영하였다. 스위니 신부가 떠난 후에 운영 난에 봉착했으나, 이 소식이 일반사회에 전해지자 1936년 진남포부 당국에서 양로원 운영보조비로 500원을 보조하여 줌으로써 교회에서는 더욱 용기를 내어 양로사업에 진력하게 되었다. 1933년부터 1937년 사이의 부양자 총수는 98명, 1937년도 수용인원은 58명이었다. 이 양로원과 고아원은 많은 시련 속에서도 꾸준히 운영되어 오다가 1945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남포 본당에서 철수한 이후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수녀들에 의해 돌보아졌고 침묵의 교회가 되기 바로 직전,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986; 가톨릭대사전 : 1104)

1934년 1월 평양 관후리 본당 주임 크노르 신부는 성당 내에 있던 성모 학교 구 교사 중 한 건물을 정식 양로원사로 정하고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을 모았다. 재정은 본당신부가 맡고 샬트르 수녀들이 이들을 정성껏 돌보아 오던 중 분원 철수에 따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 인수하여 1949년까지 운영하였다. 양로원과 함께 설치되어 무의무탁한 걸인과 고아 등 15명을 수용하고 수녀들이 돌보았는데 후에 양로원에 흡수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967)

1935년 평양시 대신리 본당 양기섭(베드로) 신부는 나자렛 양로원을 설립했다.(가톨릭대사전 : 278)

1936년 2월 18일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는 "가난한 이들 안에 예수성심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라"는 창설자 신부님의 정신과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예수성심의 사랑을 나누어 그들이 삶의 기쁨과 구원에 희망을 가지고 사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 하고자, '성모자애원'(聖母慈愛院)을 설립하여 고아들과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가톨릭대사전 : 1213; 1998년 5월 27일자 수녀회의 답신)

(6) 의료복지

1915년 대구교구에 천주교 수녀원 부설 여자 고아원이 설립되던 당시부터 어린이들의 보건위생을 위하여 수녀원내에 진료소가 부설되었다. 이 진료소에서는 보육원아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주변의 극빈자들에게도 자선 활동의 일환으로 무료진료 및 시약을 해왔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져서 수녀들을 믿고 의지하는 신자들은 물론이고 외교인들도 즐겨 이곳을 찾아와서 외래환자가 많아졌다. 이에 수녀원에서는 이 진료소를 평신도 의사 박영대(대구 중앙병원장)선생을 촉탁의사(囑託醫師)로 모시고 월요일마다 외래환자들이 진찰을 받게 하고 그 밖의 요일에는 수녀들이 의사의 처방대로 치료 시약하도록 하였다. 1934년에는 이를 '대구성요셉의원'으로 확장 개칭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902)

1924년 평남 평원군 영유읍 이화리 소재 영유 본당에 메리놀회 신부들이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본당 구내에 양로원과 시약소, 고아원, 기술학교 등을 개설하고 1926년 메리놀 수녀회 한국지부가 본당에 설치되어 사목에 참여했다. 1950년 6·25 동란으로 폐쇄됐다.(가톨릭대사전 : 823)

1926년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퀴클리에(Leon Curlier) 신부는 본당에 '소화시약소'를 개설하여 운영했다. 평일에는 환자들에게 시약만 하였고 의사들에 의한 진료는 주일에만 있었다. 이곳에서 봉사한 의사는 하(河) 의사와 표(表) 의사였고 샬트르 수녀회원들이 간호를 담당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907; 970)

1926년 함남 청진시 포경동(浦傾洞) 소재 청진 본당의 초대 주임 마르코 바인거(Markus Bainger, 方, 1891. 9. 6 - 1945. 9. 17)신부는 본당 내에 시약소와 '성심의원'을 개설하고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를 초대하였다. 박 골롬바 수녀는 시약소를 맡아서 도처에서 몰려오는 환자들을 최선을 다하여 돌보아 주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에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서양수녀들의 일어 사용, 3개월마다의 거주신청 경신, 신사참배, 국내여행 신고, 식량난 등은 물론 1944년에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모든 학교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압수 당하였다. (광복후에도 소련군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학교와 유치원이 소련군 장교숙소와 군인 교육기관으로 바뀌고 토지개혁으로 인한 농토도 몰수당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정치보위부 교화소로 옮겨졌다가 5월 16일 일부 수녀들은 수녀원으로 되돌아왔으나 곧 해산 당하였고 서양수녀들은 서양신부, 수사들과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54년 1월 22일 본국으로 귀국하였다.)(가톨릭대사전 : 462;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51)

1927년 4월 29일 원산교구 원산 본당은 베네딕토 수녀원의 헤르메티스 그로호 수녀를 통해 시약소를 시작하였었다. 그 뒤 1926년 10월에 입국한 푸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Fruktuosa Gerstmayer) 수녀가 참여하였으며, 헤르메티스 수녀가 1927년 7월 필리핀으로 요양차 떠나면서 푸룩투오사 수녀가 혼자 시약소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 시약소는 개설한지 얼마 안되어 주민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었고 날로 일손이 부족하게 되어 1928년 6월에 입국한 오트마라 암만 수녀가 푸룩투오사 수녀를 도와 일하게 되었다. 1929년 4월 사우어 주교는 수녀원을 방문하고 5칸 정도의 가옥을 매입하여 시약소로 사용토록 해주었다. 이때부터 시약소는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로 불리었다.

시약소에서 1928년 한 해 동안 치료한 환자 수는 4,700명에 달하였으며 그중 400명이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1930년에는 4,800명이 치료를 받았다. 프룩투오사 수녀는 독일에서 약 조제법에 대해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직접 약초를 뜯어다가 갖가지 약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투약하거나 치료에 이용하였다. 1938년, 시약소가 새로 건립된 유치원 1층으로 이전된 뒤 수녀원에서는 독일인 의사 디오메데스 메페트르(Diomedes Meffert) 수녀의 명의로 허가를 받아 이를 운영하였는데, 이때부터 최 리오바 수녀가 간호 수녀로 프룩투오사 수녀를 도와 진료에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약소라기보다는 '무료진료소' 형태를 띠게 되었다.(함경도 천주교회사 : 334;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168)

1928년 5월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사들은 덕원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했다. 요셉 그라하머(J. Grahamer) 수사와 김재환(플라치도) 수사는 정식으로 일제당국의 인가를 얻어 의원을 개설했다. 당시 그리하머 수사는 이미 그의 치료솜씨에 고무된 많은 인근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얻고 있었는데 서울의 국립병원 원장의 추천을 얻어 3년 동안 의사 실습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교부받았다. 그는 서울에 있을 당시 10년 동안 공립 병원과 대학 병원에서 많은 수술을 도움으로써 이 자격증을 얻게 되었다. 그라하머 수사는 개원 즉시 김 플라치도 수사와 1명의 여자 간호원의 도움을 받아 헌신적으로 또 기술적으로 많은 환자들에게 봉사하였다. 실제로 개설 인가가 나오기도 전에 매일 20-30명의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였는데 그중 14,350명은 내과 환자들이었고, 4,530명은 외과 환자들이었다. 그 후 이 의원이 정부의 승인을 받게 되자 환자들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하여 매일 50-60명의 환자가 의원 문을 두드렸다.

처음 의원에서는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로 약을 주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원가만을 지불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28년 5월부터 1929년 1월까지 원산약국에서 제공한 약값만 해도 2,720엔(500마르크 이상)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의원에서는 점차 무료진료를 축소하고 약값을 올려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치료비는 1회에 대략 50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비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하루의 수입은 38원에 불과하였고 반면에 지출은 인건비를 제외하고도 35원이나 되었지만, 영적 이익이 너무 커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수도원은 물론이고 신학교, 본당 등에 천연두, 콜레라, 티푸스 등이 전염할 때면 이들 두 수사의 일은 더욱 바빠졌다. 1929년 여름에 이들은 작은 병원을 건립하였다. 그때까지도 치료실과 붕대실이 불충분하여 그라하머 수사는 조수 3명과 함께 손님을 위한 건물의 방 한 칸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방은 약국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이제 병원이 새로 마련되어 의사를 위한 방 2개 대기실과 약국을 위한 방들이 각각 하나씩 마련되었다. 그러나 수요에 비해 여전히 건물을 비롯한 제반 시설이 부족하였으며 병원의 운영은 자선 사업의 일환으로 행해졌으므로 거듭 적자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의료활동이 가톨릭을 홍보하여 신앙을 갖도록 인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선교와 마찬가지로 항상 모든 경우에 즉각적인 효과를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라하머 수사는 수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부득이 소액의 입장권을 발행하였다. 그러자 많은 환자들이 오지 않게 되었지만 이것은 그라하머 수사 혼자 모든 환자들을 볼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한 조치였다. 2명의 수사는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지치고 굶주린 데다가 수도원에 돌아와서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그들을 찾는 환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1930년대 초에는 도움을 청하는 환자수가 평균 50-6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그라하머 수사는 주로 병원 안에서 일을 처리했고 중병일 경우에만 왕진을 나갔으나, 김 플라치도 수사는 붕대 가방을 들고 매일같이 나가 다녔다. 마을에서 올 수 없는 병자들이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의료적 방문활동을 통해 직접 가톨릭 교리를 전하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라하머 수사와 김 플라치도 수사는 환자를 돌보는 중에 수많은 임종대세를 베풀 수 있었다. 이들은 1928년 5월에 의료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1930년 1월까지 1년 6개월 동안에만도 104명에게 임종 대세를 주었는데, 육체적으로 더 이상 구제될 희망이 없는 대부분의 환자들의 경우 죽기 전에 대부분 임종 대세를 받으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요셉 그라하머 수사는 일에 지쳐 한때 본국으로 요양차 귀국하였고, 그 동안 김 플라치도 수사가 혼자서 의료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약 1년만인 1932년에 그라하머 수사가 여러 가지 물약과 약제들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의료 활동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33년의 기록에 의하면, 1932년 1년 동안 덕원병원에서는 21,065번의 진찰을 했고, 27,210회 약품을 조제하였으며, 2,070번 왕진을 해야만 했다. 2명의 수사가 이러한 의료활동을 담당하였으니, 그들의 노고가 얼마나 많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라하머 수사는 유럽에서 돌아오자마자 병원 증축에 착수하였다. 이 증축은 1933년 봄에 완성되었는데, 이로써 병원은 대기실 1개, 진찰실 1개, 붕대실 1개, 전기 방사선 치료실 1개, 약국 1개, 수술실 1개 등을 갖추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옛 야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8개의 병실 겸 입원실을 만들었는데 병실들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덕원 병원에서는 1934년 후반에 들어 다시 병실을 증축하게 되었다. 늘어나는 환자에 비해 병실이 턱없이 부족하였으므로 그라하머 수사는 환자들을 이웃에 있는 신자들의 집에까지 수용해야 했었다. 이에 그라하머 수사는 병원 소유의 한옥을 헌 다음 그곳에 병실로 쓰일 건물을 마련하였는데, 11월경에는 건물이 거의 완공되어 2인용 병실 6개, 욕실과 세면장, 작은 약국 1개, 휴게실 1개 등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병원은 이미 독일에서의 후원금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이 무렵부터는 완전히 자비로 운영해야만하였고, 이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이 후에도 병원은 나날이 성장해 갔으며, 그만큼 환자나 예비자들도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라하머 수사는 1935년 1월 16일에 그의 수도 허원 은경축을 지냈고, 다음해에는 두 번의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일시활동을 중단해야만 했었다. 뿐만 아니라 1937년 5월 26일에는 방화로 보이는 화재가 병원에 발생하여 건물 일부가 손상을 입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활동에 대한 그라하머 수사와 김 플라치도 수사의 열정과 전교활동에 대한 노력으로 두 문제에서 모두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34년에서 1935년까지의 결실을 예로 들면, 이 1년간의 진료자수는 21,065명이었고, 약품을 나누어 준 수는 27,210명에 달하였다.(함경도 천주교회사, 266)

1930년 평북 신의주시 신의주 본당의 4대 주임 페티프런(Petipren) 신부가 메리놀 수녀회의 의사수녀, 간호원 수녀들을 불러 시약소와 성모병원을 개설하였다. 본당운영의 사회사업체로는 1930년 개설된 성모병원, 시약소, 야간학교 등이 있었다.(가톨릭대사전 : 731)

1930년 원산교구 신고산 본당 시약소는 처음에 본당 수녀원 객실에서 하다가 후에는 텃밭 끝쪽에 위치한 한옥으로 옮겼다. 시약소의 방 한 개는 농지에서 일하는 가족이 사용하였다. 신고산본당에서는 의사 면허를 가진 이가 없었으므로 독립적으로 시약소를 운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고산의 시약소는 원산본당의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에 속해져서 인가를 받은 후 의사인 디오메데스 수녀가 매월 한 번씩 다녀갔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148)

1934년 평남 안주군 안주읍 북문리의 안주본당에 바론 신부가 성모병원을 개설했다. (가톨릭대사전 : 779)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경성교구 청년 연합회'를 추측으로 하여 병원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라리보 주교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온 교구민들이 힘을 모아 병원을 건립하는 데에 이르게 되었다. 즉 1935년 경성교구에서는 당시 경성부 영락정 1정목 39번지(현 중구 저동1가 39번지)에 소재하고 있던 일본인 무라카미(村上) 병원을 인수하여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이어받아 자선과 의료사업으로 지역사회 주민에 대한 보건증진에 이바지하는 한편 유능한 의료인을 양성, 연구를 통한 의술 향상으로 의학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여 가난하고 불우한 환자를 돌보기 위해 25병상의 성모병원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성모병원 본관은 540평 대지에 350평 건평으로 목조 2층 건물이었다.(가톨릭대사전 : 18; 가톨릭중앙의료원 50년사 : 493-494)

초대 병원장으로 박병래 박사가 부임하였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회계, 물품관리, 사무, 간호 등을 위해 9명의 수녀가 파견되어 병원 2층에 수녀원을 마련하고 의료복지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1936년 5월 1일 많은 이들의 기대와 축복 속에 개원한 성모병원은 서울교구의 첫 의료사업이요, 가톨릭 교회 내 최초의 정식 병원답게 훌륭한 의술과 친절한 태도로써 일반인들에게 매우 호평을 받아 개원 초부터 외래 환자만도 하루에 100명을 훨씬 넘었다. 특히 헌신적인 간호수녀들의 봉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처음에 25병상 규모로 시작된 성모병원은 날로 발전됨에 따라 확장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마침 용산에 있던 예수성심학교를 일제가 일본 군대막사로 징발하려고 획책하자 교구에서는 신학생들을 덕원 신학교로 이전시키고 그곳에다 성모병원 분원을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5월 원효로 성모병원 분원이 개원되었고 이곳에서도 6명의 수녀들이 파견되어 간호와 병원운영을 도와주었다.(샬트르 100년사 : 813)

1935년 메리놀 수녀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입원실과 무료진료소를 설립했다.(교회와 역사 80호 7쪽)

1935년 함북 회령 본당 을라프 신부는 시약소를 개설하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최 리오바 수녀에게 맡겨 운영하였다. 그러나 많은 환자들이 시약소를 찾자 인근에서 약방이나 의원을 경영하는 이들이 이를 시기하여 무면허 시약소로 고발하는 바람에 시약소는 얼마 후에는 하는 수 없이 문을 닫아야 했다. 1940년 3월 26일에는 박 골롬바 수녀가 회령으로 가서 폐쇄되었던 시약소도 다시금 개설하게 되었다. 시약소는 수녀원 옆의 한옥 한 채를 사서 박 골롬바 수녀가 맡아 원활하게 운영하였으나 이번에도 주위의 시기로 인해 1940년 6월 말경에 다시 문을 닫고 말았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150)

1935년 10월 14일 인천교구 답동 본당 드뇌 신부는 1894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본당에 부임시키면서 시작된 진료활동을 확장시켜 사재로 본당의 부속병원인 해성병원을 3층 현대식 건물로 확장 개설하고, 아일랜드인 필로메나(Philomena Ralph) 수녀를 부임시켜 보육원 아동들과 일반 환자를 위해 적극적인 의료복지를 시작했다. 이 건물에는 16개의 방이 있었으나 주로 보육원 아동들을 위한 시설이라 입원시설은 없고 진찰과 시약만 하였다. (샬트르 100년사 : 860)

1940년 9월 1일 재령 본당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1891-1943)신부는 의료복지사업을 통한 사랑의 실천과 전교에 뜻을 두고 문창리 관문거리에 있는 '삼성의원'을 인수하여 설비를 새로 갖추고 1940년 9월 1일 '성심의원'으로 개원하였다. 그리고 이 병원의 운영을 위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 3명이 본당에 부임했다.

이 성심의원은 내과와 소아과 7개의 병실을 갖추었고 정식 의사가 2명에 간호사로 구성되어 손색없는 병원으로 날로 번창하였다. 한편 전 데오도리나 수녀는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일제 말엽에 시작한 병원이었으나 교회의 병원이라서인지 일본의 방해나 간섭은 없었고 오히려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수녀들은 구호대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구호하고 치료하는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그러나 해방 후 공산당의 박해가 시작되자 병원을 처분하고 수녀들은 본원으로 돌아갔고 책임자인 이 아뽈리나 수녀만이 재령에 남아 진료를 계속하였다. 3·8선으로 인해 서울에서 수녀들을 파견할 수가 없어 몇 개월 후에 장연분원의 박막례 알릭스 수녀와 매화동분원의 박백상 수녀가 재령으로 와서 합류하였으나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1944년 7월 10일 해주본당의 김철규(바르나바) 신부의 주선으로 모두 월남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338; 983)

1941 평남 진남포 본당에 양기섭 신부가 부임하여 1943년 10월 3일 시약소와 소화병원을 신설하였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등의 진료과목에 입원실 7개, 의사 3명 그리고 간호수녀 3명으로 구성된 손색없는 의료진으로 외래환자를 진료하면서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봉사를 함으로써 의술로나 운영에 있어서 호평을 받았다. 전교에도 많은 도움을 주며 발전해 갔으나 1945년 10월에 폐원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986; 가톨릭대사전 : 1104)

1941년 9월 25일 함흥 본당의 경 엘리지오 코러(Eligius Kohler, 景; 1899. 9. 15 - 1963. 6. 11) 신부는 '성심의원'을 개원하며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를 초대하였다. 함흥의 '성심의원'은 건물의 구조가 네모로 되었고, 그 건물은 가운데 굴뚝이 높이 솟아 있어서 '굴뚝이 있는 집'이라고 칭하여졌다.

성심 의원장인 디오메데스 수녀는 하루 60-80명의 환자들을 진료하였으며, 때때로 왕진도 가야했다. 성심의원에는 새벽 4시부터 사람들이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의사인 디오메데스 수녀는 아침 미사 후에 의원에 나가면 거의 밤 12시가 되어서야 수녀원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1944년 2월 10일, 디오데메스 수녀가 심한 고열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원산의 프로테스탄트에서 운영하는 '구세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폐렴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충분한 영양 섭취와 요양을 해야한다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디오메데스 수녀가 요양하고 있는 동안, 한국인 의사인 청원자 비르깃다(마리아 루까스 수녀, 李鍾元)가 약 3개월간 가난한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의원의 초창기에는 대개 독일에서 약을 원조 받고 있었기 때문에 진료에 어려움이 적었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의약품을 수송하기가 어려워졌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원산을 거쳐 매월 1회씩 신고산의 약방도 순회하며 한달 동안 기다린 환자들을 치료하느라고 개인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디오메데스 수녀가 진료하는 날이면 두 곳의 시약소 앞에는 환자들이 긴 대열을 지어 진료를 받으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씩 다니러 오는 수녀를 기다리다 병사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선교 수녀들에게서 대세를 받고 귀천할 수 있겠지만 디오메데스 수녀는 자신을 기다리다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병사하는 환자 때문에 늘 마음 아파했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203)

1944년 함남 흥남 본당의 구 대준 신부는 사제관을 내놓아 대건의원(大建醫院)을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을 시도하였다. 구 대준 신부는 사제관인 붉은 벽돌 이층 건물을 병원 청사로 내놓고 자신이 공경하던 한국의 첫번 사제인 김 대건의 이름을 따서 '대건의원'을 개설하기에 이른 것이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245)

(7) 기타 - 문화·언론복지

언론분야에 있어서의 교회의 활동은 '경향잡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경향신문이 폐간된 후 교회는 1911년부터 순 종교지 경향잡지를 간행하였다. 그러면서 경향신문의 '법률문단'란만은 경향잡지에서 계속시키기로 하여 이를 통해 새로운 법을 소개하고 비판하고 해석하면서 일반 대중에게 법을 계몽시켜 왔었다. 그러나 일제는 우민정치의 일환으로 경향잡지의 법률문단란이 종교적인 내용이 아니라면서 동란의 폐지를 거듭 강요해왔다. 이러한 일제의 간섭과 제재에 항거하던 끝에 애석하게도 경향잡지는 일제말기에 폐간을 당했다.

3) 사회복지 활동의 시대적 성격과 그 의의

이 시기에는 조선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한일합방으로 인한 한국인의 주권상실이다. 그로 인해 한국인은 정상적이고도 성숙한 삶을 향한 모든 방편을 일본 식민지 지배정부로부터 제한 받아야만 했다.

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의 모든 종교의식과 사목 그리고 신앙생활 일체를 간섭과 제한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고자 한 자신의 사명을 실현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아울러 교회는 사회복지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게 된다. 그것은 개화기에 이루어진 단순한 교육과정을 넘어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향한 정신 계몽 운동이며, 사회교육의 분야가 그것이다. 이러한 의식 개혁과 민족 자주 운동은 비록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주축인 교회의 책임자들에게는 우려와 주저함이 없지 않았지만, 한국인 성직자들과 수도자, 평신도들은 주체적으로 청년연합회를 결성하고 가톨릭 청년지를 창간하여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사회 복음화 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교회는 언론 복지를 통해 민중의 계몽과 교회의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교육복지를 통해 근대화 운동과 반침략 운동을 전개했다. 예천의 인성학교는 '보국애인'을 설립 취지로 삼고, 이천의 삼애학교는 '애주(愛主), 애국, 애인'을 교훈으로 삼았으며, 안악의 봉산학교는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과 도덕의 마음을 배양함과 국태민안'을 설립취지로 내세웠다.

이 시기에는 교회 내적인 변화도 많았다. 그것은 교구의 분할과 그로 인한 본당의 신설과 본당의 복음선포와 복지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수도자들의 진출과 결성이 그것이다. 1884년부터 조선교구로 통칭되던 서울교구는 10개 교구로 분할되며, 분할 된 교구의 거의 모든 본당의 사목에 수도자들이 참여하였다. 특별히 여성 수도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각 본당의 사목자들은 복음 선포의 일환으로 관할 구역 내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아낌없이 베풀어 본당마다 학교나 학원 또는 강습소를 통한 문맹 퇴치와 기술 교육복지, 육신의 건강을 통한 영적인 성숙을 가져오는 의료복지, 영유아와 고아를 위한 보육원과 유치원의 아동복지, 양로원을 지어 오갈 데 없는 노인을 돌보는 노인복지, 장애인들을 위한 장애인 복지 등의 사회복지사업을 교구나 수도회가 아닌 본당이 주체가 되어 그 본당이 위치한 관할 구역의 지역 사회 복지를 구현하였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마치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마태 6,33)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현하기라도 하듯 본당의 성당 건물보다 사회복지 사업용 건물을 우선적으로 건축하는 경우도 있어,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현존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변화된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교육복지 측면에서는 과거 성직자 수도자들의 무료 봉사 내지 저급 임금으로 운영되던 본당의 학교들이 정식 교원자격증자를 채용토록 함으로써 교사 봉급이 상당한 재정적인 부담이 생겨나 운영상의 난관이 있었다.

그리고 1915년에 개정된 '사립학교규칙'에서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을 금하였으므로 학교 창설자의 목적과 의의가 위협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10년간의 유예기간이 있었으므로 그 기간을 최대한 이용하였고, 그 이후에 교리교육을 방과후에 실시하는 방법을 마련하였다.

또 한가지 문제는 1924년부터는 모든 교사들에게 교원자격증이 엄격히 요구될 것이었으므로 인적·물적 자원의 결핍상태에서 어렵게 운영되고 있는 본당학교들이 현상유지나 될지 불안한 점이었다. 이런 문제들이 당시 천주교 학교 전체가 겪는 어려움이었다.

또한 의료복지의 측면에서도 이러한 부담은 비슷했다. 과거의 무료 시약소가 이제는 정식 자격증을 취득한 의사와 처방으로만 가능하게 되었고, 또 다른 복지분야에서도 모든 것을 인·허가제도로 묶어 둠으로써 사회의 인적·물적인 교류와 연대를 경직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이 교회 사회복지활동이 전문성을 띄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은 긍정적인 면이지만, 그 취지가 자격증을 빌미로 봉사자들을 통제하려는 일제 식민정부의 의도였기 때문에 교회의 선교 및 복지 활동은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한편 당시 일본 식민 정부는 천주교의 많은 선교와 사회복지 활동을 통제하고자하는 의도로 사회의 다른 여타 종사자들과 달리 종교지도자들의 전문성을 제도적으로 인정하지 않아 종교 지도자들의 활동을 많이 위축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이 시기에 교회 복지사업에 피부적으로 와 닿는 일차적인 피해는 특별히 개화기의 교회 사회복지 활동의 대명사처럼 불릴 만큼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오던 교육복지분야의 종교교육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 선교사들은 교단에서 떠나야만 했었고, 특별히 여성 수도자들은 본당 내의 종교활동이나 예비자 교리, 가정방문, 제의실 담당 등의 일로 전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아쉽게도 이러한 수도자들의 역할 축소와 포교에 대한 제한적인 이해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모르는 채 꽤 오랜 기간 교회의 분위기 안에서 굳어져 일부 교회 인사들에게는 오히려 그러한 것이 본당 선교와 사목의 정상적이고도 당연한 형태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애처로운 결과마저도 가져오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 교구의 분할과 수도원의 진출 및 결성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일이었지만, 수도원 자체적으로도 사회복지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동안은 본당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신자들과 함께 그 지역사회의 사회복지활동을 함께 결정하고 함께 추진해 나갔지만 이 시기부터는 수도회가 어느 한 지역사회에 진출하여 그 지역사회의 필요와 요구를 복음적인 시각으로 채워주고자 하는 시도가 국내에서도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논문은 1998년 가을학기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은 논문입니다. 첨가나 수정하시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면 아래의 주소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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