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

4. 해방후 활동(1945∼1975)

1) 정치 사회 및 교회 사회복지적인 배경

(1) 해방과 민족동란 그리고 현대화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36년간의 일제식민통치에서 벗어나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 해방은 민족의 자주 독립운동에 의해 우리 스스로 찾아 얻은 것이라기 보다는 미·소 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연합군의 전쟁의 승전으로 인해 주어진 것이기에 심각한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결국 6·25 민족 상잔의 비극도 겪어야 했으며, 일제 잔재의 청산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오히려 세계의 동서 양극의 이데올로기체제 속으로 북과 남이 선택할 기회도 없이 급속도로 끼어 들어가버렸다.

1948년 9월 9일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했고, 그들은 남한에 대한 군사력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강력한 군대를 조직, 훈련했다.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초대 정부수반에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한편 정부수립후 2년 1950년 6월 25일 우리는 외세의 영향으로 민족의 분열로 국토가 분단되는 전쟁을 겪어야 했다. 1953년 7월 27일 많은 상처와 피해를 뒤로한 채 전쟁은 휴전되었다.

전쟁 후 복구과정에서 남한 정부는 부정과 부패에 가득찬 모습으로 일관했고 마침내 국민은 4월 19일 의거를 일으켰다. 장면 총리를 수반으로 한 민주당 정권의 출범 1년 정치적 혼란기를 겪던 1961년 5월 16일 군사쿠테타가 일어나 남한은 우익 군사 독재정권의 지배시기로 들어가게 된다. 1965년 6월 22일 어설프고 잇속 빠른 공화당 정권은 한일기본조약과 각종 부속협정을 조인하고, 1965년 2월부터 베트남 전쟁에 우리 젊은이들은 미국의 용병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젊은이들의 피의 희생 위에 월남특수가 이루어졌고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인력과 군납과 상품수출 등으로 외화 획득을 하였다. 그리고 1964년부터 중앙정보부로 통칭되던 정보공작정치가 시작되었다.

결국 해방은 되고 전쟁도 끝났지만 우리 민족은 분열되었고 국토는 분단된 채 살아야만 했다. 자연히 북과 남은 각기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세계 강국과의 관계를 맺어야 했고, 반공 이데올로기와 독재 정권에 시달려야 했다.

1971년 3선 개헌으로 대통령이 된 후 박정희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내세워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10월 17일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해 장기집권화를 꿈꾼다. 이에 1975년 3월 1일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함세웅 신부 등이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며 유신헌법의 부당성을 폭로했다.

이러한 격동기에 교회도 커다란 몸살을 앓아야 했다. 북에서는 '반동분자'요 남에서는 '체제거부론자'로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 교회는 민중을 그 선물로 받았으며 명동성당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듯이 하느님 백성의 윤리적인 보루로서 설 수 있었다.

교회는 1946년 8월 일제 치하에서 정간되었던 '경향잡지'가 속간하였고 '위조지폐사건'으로 폐쇄된 정판사를 인수하여 대건 인쇄소를 세우고 이어 10월에 일간지 '경향신문'을 창간하였다. 이어 '가톨릭 청년'이 속간하였다. 교육분야에 있어서는 종래의 초등교육에 머무르고 있던 학교들이 중등 및 고등교육으로 개편하였으니, 동성상업학교는 인문 중·고등학교로 개편되었고, 계성, 논산의 대건, 부평의 박문, 안성의 안법학교 등이 중고등학교로 승격되었다. 무엇보다도 종래의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가 1947년 5월 성신대학으로 승격되었고 이에 따라 소신학교도 성신대학 부속중학교로 승격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顯揚會)'의 창설이었다. 이 현양회는 이미 1939년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아 발족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마침내 그 창설이 실현되었다. 그후 현양회는 새남터를 위시한 순교지의 확보, 순교 자료의 수집과 간행을 통해 순교자의 현양과 동시에 신자들에게 한국 순교자에 대한 신심을 높이고 순교정신을 심어주며 한국 민족의 진리에 대한 헌신을 되새겨 긍지를 가지도록 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교황청은 1947년 8월 평양교구장이었던 메리놀회 번(Patrick Byrne, 1888-1950) 주교를 한국의 임시 교황사절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교황청이 그 때까지 일본 교황사절에 속해 있던 한국에 고유한 교황사절을 파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제일 먼저 승인한 결과가 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232)

한편 북에서는 소련군의 북한 주둔과 더불어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종교박해가 감행됨으로써 덕원수도원이 폐쇄되었고,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 및 신자들이 희생을 당했다.

전쟁 중인 1951년 군종단이 창설되어 많은 젊은 사제들이 '황금어장'이라는 군사목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휴전 후 많은 이들이 천주교회로부터 정신적 물적인 지원을 받으러 귀의하게 되었다. 특히 이 때 천주교 각 본당들은 외국으로부터 원조물자를 나눠주는 배급소의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속칭 '밀가루 신자'를 양산하게도 되었다. 1950년대의 한국교회의 신자증가율은 평균 16.5%였다.(한국천주교회연감, 1994, 143)

1948년 11월 주한 교황사절 방 주교(Rev. Patrick J. Byrne, M. M. : 동란 중 납북)의 지시에 따라 기후근 신부는 한국천주교중앙위원회의 조직 준비를 하다가, 1953년 3월 12∼14일 주교회의 연례회의에서 활동재개가 결정되고, 1955년 7월 7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1962년 9월 8일 문교부의 사단법인 허가를 받았다.

또한 본당 위주의 사목형태에서 직능별 평신도 사도직 단체들이 생겨났고 전국적인 조직을 하게 됨으로써 교회는 특수사목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띄게 되었다. 1954년 결성된 '대한 가톨릭 대학생 총 연합회'는 이어 '국제 가톨릭 대학생 운동 연맹'(Pax Romana)에도 가입하였다. 또 1958년 11월에는 서울교구 박성종 신부와 서울대병원 간호사들이 함께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의 한국지부를 결성하게 된다.

1962년 3월 10일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변화와 쇄신의 물결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1960년대 한국교회는 '현대화'(Aggiornamento)를 기치로 자신의 쇄신과 선교적 역할 그리고 민족 사회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여 인권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 발전을 위한 교회 고유의 역할을 모색하기 시작하여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올바른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다. 한국 주교단에서는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을 계기로 하여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공동 사목교서를 발표하였다. 이 후 교회는 사회 문제를 그리스도교적인 시각에서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해나갔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의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가톨릭 농민회'가 조직되어 농민의 권익향상을 위해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3선 개헌'과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의 박정희 장기집권에 대해 주교단은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1971. 1. 11)는 공동교서를 발표했다. 1974년 8월 26일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고 그 사건으로 인해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5년 1월 1일부터 미사를 모국어로 집전하게 되었고, 토착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시도가 있었다. 1967년 새 가톨릭 교리서가 출간되었다. 1968년 7월 23일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중앙협의회'가 결성되고 각종 평신도 사도직 단체가 결성되어 나갔다. 같은 해 병인 순교자 24위의 시복식이 로마에서 있었고, 1969년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는 추기경으로 서품되었다.

한편 사회복지계에는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의 기독교 사회사업학과가 설치되고, 1953년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에, 1957년에는 서울대학교에, 1961년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교)에, 1962년 중앙대학교에, 1964년 성심여자대학(현 가톨릭대학교)에, 1968년 서울여자대학에, 1969년 숭전대학교와 부산대학교에 사회사업학과가 설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1956년 한국사회사업학회가 설립되었고, 1966년에는 한국사회사업가협회가 발족해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권오구 : 280, 444)

(2) 교구 분할

서울 관구에는 이미 1939년 3월 17일에 분할되어 있던 춘천 교구와 함께, 서울 대교구로부터 1958년 6월 23일 대전 교구가, 1961년 6월 6일 인천 교구가, 1963년 10월 7일 수원 교구가, 1965년 3월 22일 원주 교구가 분할되어 서울 관구를 이루었다.

대구 관구에는 대구 대교구로부터 1957년 1월 21일 부산 교구가, 1958년 6월 23일 청주 교구가, 1966년 2월 15일 마산 교구가, 1969년 5월 29일 안동교구가 분할되어 대구 관구를 이루었다.

광주 관구에는 광주 대교구로부터 1971년 6월 28일 제주 교구가 신설되어 기존의 전주 교구와 광주 대교구와 함께 광주 관구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의란과 연길 교구는 1946년 4월 11일 중국 봉천 관구로 흡수되어 덕원 자치 수도원구에 속한 채 함흥 교구와 평양 교구와 함께 침묵의 교회가 되어버렸다.

(3) 수도회의 생성 및 활동의 변화

1943년 12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생제(Singer, 成) 신부는 일제 말기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불우한 이들을 돕기 위한 '성가 소비녀'(Holy Family Sisters)라는 이름의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이 공동체가 시작되자 1943년 이재현 신부, 공베르(A. Gombert) 신부와 함께 생제(Singer) 신부가 회칙을 작성하여 노기남 주교의 인준을 받고 창립인가도 받았다. 1945년 6월 수련생활을 위하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로부터 지도를 받았고, 1947년 1월에 첫 허원식을 라리보 주교에 의해 거행할 수 있었다.

1953년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양로원'을 인수받아 1979년 증축한 후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하고 있다. 1958년 8월에는 서울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한 뒤 1969년 서울 하월곡동으로 이전하고 가톨릭의대 부속병원인 종합병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한편 1962년에는 소사에 있는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착수하였다. 이밖에 편물과 보세가공을 가르치는 '나자렛 기술학원'(1960-1969)과 '미망인 양재소'(1964-1980)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968년 8월에는 서울 혜화동에 있던 본원을 현재의 서울 정릉1동으로 이전하여 1969년 1월 창립 25주년과 함께 신축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77년 개원한 신체장애인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인 '안나의 집'등의 특수사목활동분야에서 충실히 활동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608)

1945년 8.15광복 이후, 1391년 9월 한국에 진출한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러시아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사상통일공작'에 의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월남하기 시작한 수녀들은 남한의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인 1951년 4월 유을준 의사와 함께 부산 초량동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2년부터는 지원자들도 입회하기 시작하였고,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했던 수련장 베다(Konig Beda) 수녀도 1958년 3월 다시 내한하여 수련지도를 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 동래구 광안동에 대지를 마련하여 1965년 우선 수련원부터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후 본원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9년 경기도 부천·소사에 지원(支院)을 설립하고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462)

한편 광복이후 북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성 오틸리엔의 성 베네딕토 수도회를 비롯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등은 점차적으로 모두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 시대 식민정부의 탄압으로 사회복지 활동에서 밀려나 본당 내의 종교적인 업무에 국한되기 시작된 수도회의 활동 특별히 여성 수도자들의 사회복지 활동은 해방 후 북쪽 지역에 세워진 공산당이 점거하고 종교에 대한 사상적인 거부와 남쪽 지역에 세워진 우익 반공 정권에 의한 군부통치로 점차 그 폭이 좁아졌다. 그래서 본당 차원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단순한 자선의 형태를 제외하고는 수도자들의 몫은 교리교육과 전례 준비 및 신자 단체 지도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 이 시대에는 본당에 파견된 성직자와 여성 수도자들과는 달리 사회 속으로 직접 달려들어가는 사목의 형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른바 특수사목이라는 형태로 발전되는 양상이다. 그것은 사제가 지역적인 단위로 구분되는 본당들에 파견되어 그 본당에서 신자들의 복음화와 공동체의 형성과 양성을 위해 사목하지 않고, 사회의 비복음적인 환경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복음을 전하거나 복음을 받아들인 신자들을 더욱 더 깊이 복음화하는 직능별, 그룹별로 사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도자들도 본당에 파견되어 본당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 활동에 기여하지 못하게 되자, 수도회 자체로 사회복지사업을 설립하거나 정부로부터 운영권을 위임받아서 운영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본당의 모든 사회복지 활동이 멈춰 선 것은 아니었다. 꾸준히 그리고 새로이 본당들은 설립되어 갔고 새로 신설된 본당의 사목자와 그 곳에 파견된 수도자들은 그 지역사회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와 선교의 실현으로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거듭되는 활동에 대한 박해와 근대화 교육 및 사회화 현상은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인들을 규격화 제도화 되어나가는 사회의 틀에서 밀려나가게 된 것이다.

1937년 9월 한국에 진출한 프란치스코회는 1947년에 한국인 안선호(安仙鎬, 베다) 신부가 캐나다 유학길에 오르고, 남은 신부들도 각기 수련을 위해 출국하였다가 1950년 6월에 다시 입국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수도원 건물은 공산군에게 점령당하고, 유엔군이 수복한 뒤로는 피난민 자녀들을 위한 교육장으로 쓰인 것이, 현재 대성(大成)중·고등학교로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 6월 17일 진주에 있던 콘스탄치오 신부가 옥봉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천, 의령등 하동 지방에 두루 복음을 전파하였다. 1959년에는 4명의 이탈리아 회원들이 삼천포(三川浦)에도 본당을 신설하여 남해(南海)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6월에는 경남 산청면 내리(內里)에 2만 8,000여평의 대지를 마련하여 성심원(聖心院)이란 나환자 자활촌을 만들었다. 한편 대전에서는 공 안드레아 신부가 1959년 1월 목동본당의 주임신부로, 그리고 4월에는 벨레로즈 신부가 노기남 주교의 명으로 서울교구의 본당을 맡았다.

1960년 진주지방에서 콘스탄치오 형제에 의하여 병실 39동과 대수술실을 갖춘 나환자들을 위한 성심 인해병원이 개설되었다. 전국에서 나환자들이 모여들어 수일간에 200여명의 환자를 수용하였다. 이 해에 사천에도 본당을 신설하였다. 대전 수도원에서는 1961년에 첫 단순서원식이 있었다. 한편 성심원의 원장 정 시온 신부는 나환자를 위한 자활부락 건설에 착안하여 현대식 주택 개량에 힘써 1964년까지 가옥 82동을 건립하고 농토를 마련하는 한편, 정미소, 축사, 목공소, 매점, 창고, 보육원, 세탁소, 이발소, 미장원까지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추게 하였다.

이렇듯 눈부신 발전으로 1963년 12월 10일에는 로마본부로부터 일본과 한국 프란치스코회 총장대리로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李) 신부가 임명되어 한국에 부임, 한국본부 설치를 서둘렀다. 장소를 물색한 결과 수림으로 둘러싸인 작은 언덕 위에 수도원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1965년 9월 8일에 낙성된 지금의 프란치스코회 본부 정동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명도원이란 이름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의 언어교육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 학원이 개설되었다.

한편 이 수도회는 직접 선교도 중요하지만,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뜻을 따라 사회에 평화를 심고, 사회사업과 특수사목에 치중함으로써 사회복지 활동에 힘썼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는 각자 소속본당에서 그리고 신심단체에서 핵심멤버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단체라기 보다 개인적 수덕에 전념하는 조용한 단체라는 인상을 주고 있으나, 이들이 수도생활을 통해 체험한 영성생활을 교회 안에서 실천함으로써 사도직 활동에 좋은 표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선활동으로 교회사업을 비롯하여 성소후원회, 군종후원회, 교도소후원회, 은퇴사제후원회, 구라회, 불우 이웃돕기 등에 대부분의 형제회가 단체 혹은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운영하고 있는 소년원, 양로원, 나환자촌, 신학원 등의 방대한 사업을 돕고 있다.

1946년 4월 21일 개성에서 방유룡 신부가 윤병현, 홍은순 수녀와 함께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S.K.M. - Congregationis Religiosae Sororum Beatorum Martyrum Coreanorum)를 창설하였다.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는 완덕을 취하여 점성, 침묵, 대월로 면형무아의 삶을 지향하고 한국 순교자들의 고귀한 순교정신으로 복음을 선포하며 이름 위해 형제들이 일치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형제애로 살며(요한 15,13 참조) 봉헌의 삶으로 하느님을 증거하고자 한다.

특수 목적으로 한국 순교자들을 현양하며 순교자들의 신앙의 모범을 통해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하고 동양의 고유 문화를 연구하고, 한국의 전통을 살리고 보존하여 그리스도교 토착화에 힘쓰고 있다.

한편 이 수도회는 정신지체 장애인 조기교육원인 임마누엘 조기교육원을 비롯하여, 서울의 맹인 성모 자애 재활원, 성모자 보육원, 엠마우스 근로 여성 회관, 도봉 독서실, 중계 복지마을 등의 사회복지 활동을 활발히 이루고 있다.

한편 1956년 3월에는. 국제 가톨릭 형제회(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가 한국에 진출했다. 가톨릭 형제회는 불일치와 부정의가 있는 현실에 도전함으로써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복음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주력한다. 전·진·상(全眞常) 정신을 중요시하며, 全은 온전한 자아의 봉헌을, 眞은 참다운 사랑을, 常은 끊임없는 기쁨 속에서의 생활하고자 한다.(가톨릭대사전 : 176)

1956년 9월 1일 서울 가톨릭대학교 교수인 윤을수(라우렌시오) 신부는 사회 사업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벌응절리에 '인보성체수도회'(C.B.S.S./Congregation Caritatis S.S. Sacramenti)를 설립했다. 그리고 11월 19일에는 이들을 비롯해서 사회사업에 전념할 여성들을 위한 사회사업여자전문학교인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했다. 그 후 1957년 3월 9일 구산후생학교를 수도반과 사회반으로 분리하여 수도자로서의 양성도 별도로 실시하여, 25명을 서원시켰다.

이 수도회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시는 성체성사로써 요구호자에게 응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원천을 둔 인보정신이다. 이것은 개인의 노력과 요구호자를 도와주는 사회사업으로서 인보의 덕을 준수하므로 포교사업에 직접 협력함을 말한다. 이들은 인간의 행복이 자아에 대한 참된 겸손, 남에 대한 사랑 즉 인보정신에 있다고 보고 그 기초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둔다. 그리고 그 사랑의 표지는 행복이며, 행복은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값진 재산으로 삼고, 그 행복이 물질이나 부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기의 처지를 알고 만족하여 자기를 나눔으로써 스승 그리스도의 행복을 맛들이고 그분께 모든 근원을 두고자 한다. 이들은 서울과 수원, 대전과 전주 및 광주대교구에서 유아 교육 및 보육과 장애인 및 노인 복지에 힘쓰고 있다.(천주교회 연감, 1994, 516)

'성심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56년 10월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가톨릭 교육을 통한 것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서울 교구장 노기남(바오로) 주교는 이 수녀회에 한국 진출을 요청하였다. 성심수녀회는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1800년 11월 21일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 (Madeleine Sophie Barat)가 동료수녀들과 함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서원을 함으로써 창립되었다. 바라 성녀는 "이 회의 유일한 창립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이다."라고 말하면서 젊은이의 교육을 통해 예수성심께 영광을 드릴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1956년 10월 한국에 처음 진출한 창설수녀들은 서울 분원장인 맥하디 홀린트(Mchardy Flint) 수녀 등 모두가 7명이었으며, 그들의 국적은 각기 달라 호주, 애란, 중국, 일본, 몰타, 폴란드, 벨기에 등이었다. 7명의 창설자들은 잠시도 그들의 사명인 가톨릭 교육을 잊지 않았고 진출 후 곧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들 가운데 주 매분 수녀는 곧 모든 사람에게 한국인으로서 받아들여질 만큼 한국어에 능통해 졌다.

1956년 11월 한국에서의 첫 교육사업인 성심여자 중학교는 소정의 시험을 치러 18명의 신입생으로 역사적인 입학식을 가졌는데 (모집인원 30명에 49명이 응시했으나 전형 결과 18명만 합격시켰다.) 이처럼 적은 숫자로 학교를 경영한다는 사실에 한국교육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모든 면에서 전통적인 성심학교 교육은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1961년 총원장 수녀가 극동지구와 북미지역 대원장 수녀를 동반하고 한국에 온 것을 계기로 하여 한국에서의 성심교육은 큰 계기를 맞이하였다. 총원장 수녀는 성심 여자 중·고등학교와 성심여자대학의 신설을 허락한 것이다.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물론 '성심'에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성심'에서 대학까지 마칠 수 있게 해 줄 것과 이 좋은 교육이 초등학교부터 일관성 있게 이루어지길 총원장에게 간청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그리하여 성심 초등학교는 1963년에, 성심여자대학은 1964년에 각각 신설되었으나 '성심'이 꿈꾸는 일관교육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것은 성심 초등학교의 졸업생이 나온 다음 중학교가 평준화됨으로써 졸업생 중 성심여중에 추첨으로 입학한 학생이 단 한 명이라는 결과를 빚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성심 수녀회는 인력과 재정 등 여러 사정도 고려하여 고등학교와 대학교육에 전념키로 하고 중학교와 초등학교는 폐지시키기로 하였다.

한편 1964년에 춘천에 설립된 성심여자대학(현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가톨릭대학교)에는 사회사업학과가 개설학과로 포함되어, 한국 교회 사회사업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성심여대는 1971년대 이후에 봉천동 지역사회복지에 힘썼고, 1973년에는 그 지역에 성심여대사회사업실습연구원을 세웠고, 1992년과 1995년에 각각 부천시에서 '춘의'와 '한라' 종합사회복지관을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1998. 10. 30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학생과장 김중실의 답변; 춘의 종합사회복지관의 답변과 답신)

1978년 3월에는 강원도 사북읍 고한리 광산촌에 분원을 설치하여 본당사목과 산재병원에서의 간호활동, 유아교실을 통한 가족상담 및 피정지도, 광부환자 및 가족방문 등의 사도직에도 봉사하고 있다.(교회와 역사 86호 7 -1982. 9. 25)

1960년 3월 25일에는 '성모 영보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성모 영보 수녀회(聖母 領報 修女會)는 한국인에 의해 한국에서 설립된 관상(觀想) 수녀회이며 반봉쇄(半封鎖) 수녀회이다. 이 수녀회의 정신은 실제로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 빈궁한 자를 돕고, 근면한 생활로 노동의 존귀함을 드러내자는 데에 있다. 예수께서 가난한 이와 병들어 신음하는 자와 더불어 생활하셨던 모습대로 그들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버림받은 사람을 위해 기도와 노동과 봉사로 정신적으로 부유해지고자 한다.

이 수녀회는 1955년 당시 가톨릭대학 교수이며 성서학자인 선종완(宣種完 라우렌시오) 신부가 그 선친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 일부를 매각한 돈과 성서 번역을 위해 사육하였던 메추라기 수입을 보태 경기도 부천시에 12정보의 땅을 매입함으로써 태동되어, 2년후인 1960년 3월 25일 정식으로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이 수녀회의 특징은 초등학교 졸업정도의 학력이 낮은 처녀들에게도 입회를 허용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초창기에 처녀들로서는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노동과 가난 가운데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메마른 땅에 농사를 지어 수확한 감자로 주식을 삼으며, 메추라기와 젖소와 칠면조를 사육하고 미사용 포도주를 시도하는 한편 인천에 나가 우유를 판매하는 등 자립하고자 하였다. 흙벽돌로 지은 초라한 건물과 성당에서 생활하고 기도하면서 성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 생활을 이웃 주민들에게 증거하고자 하였다.

수녀들은 안양 성 라자로원에서 1976년부터 수녀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수용된 나병환자들을 돕고있다. 또한 파주군 광탄의 시몬의 집에서는 1980년부터 수녀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수용되어있는 폐결핵 환자들의 간호와 세탁, 식사 등 궂은 일을 비롯하여 구령사정도 돌보고 있다. 전북 함열본당 상지원에서는 60세대의 음성 나환자 간호 및 미감아 교리지도를 담당하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 각 곳에서 일반인들이 꺼리는 봉사활동에 투신하고 있다.(교회와 역사 70호 7쪽)

1877년 1월 6일 마리 드 라 파시옹 (Marie de la Passion)에 의해 인도 오타카문드 (Otacamund)에서 창설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Congregatio Missionariarum Mariae Franciscanarum)가 1954년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내한하려 하였으나 중국에서의 수녀원 추방정책으로 인해 1958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진출하였다. 1960년 5월 부산 양정동에 정착하여 성모의원과 함께 수예실을 운영하였다. 1975년 2월에는 부산성모의원을 폐쇄하고, 의료혜택이 더욱 필요한 성 프란치스코의원을 개원하였다.

한편 부산에서는 1961년 3월 성모여자중학교, 1964년 성모여자고등학교를 개교했으나 1974년 성모여중을 폐교하고 1979년 6월 성모여고를 부산교구에 이관하였다. 1966년 서울 가리봉동에 수녀원과 의원건물을 완공함으로써 모두 이전하여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1974년에는 부산에 있던 수련원도 서울로 이전하였다. 1972년 일본관구소속에서 준관구로, 1978년 정식관구로 승격되었다. 1979년에는 원래 학교부지로 매입했던 곳에 선화기숙사가 완공되어 5월 1일 첫 기숙생을 입사시켰다. 현재 한국관구 본부가 있는 서울 가리봉동 수녀원을 비롯하여 부산 양정동 수녀원, 강원도 정선수녀원에서는 관구장 수녀를 비롯한 65명의 (1983년 말 현재)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363)

1960년 12월 서울대교구 명수대 본당 이경재(李庚宰 알렉산드로, 성 라자로 마을 원장) 신부가 사회 홍보 수단을 통한 복음선포를 하고 있는 '성 바오로 딸 회'를 초청하여, 일본 관구에서 이탈리아 수녀들이 진출했다. 그리고 1961년 12월 2일 마르첼리노(Marceline) 신부가 한국에 '성 바오로 수도회'(Pia Societas Sancti Pauli-S.S.P.)를 세우고, 매스 미디어를 통한 복음선포를 위해 1964년 10월 15일 성 바오로 출판사를 세웠다.

성 바오로 수도회는 1914년 8월 20일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에 의해서 이탈리아 알바(Alba) 시에 창설된 수도회다. 성 바오로 딸 회는 1915년 6월 15일 설립되었다. 주보로 사도 바오로를 모시는 이 수도회들은 사회 홍보 수단을 통하여 포교에 종사한다. 현대문명의 이기인,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출판물 등 각종 홍보수단에서 흘러 넘치는 비도덕과 오류와 악의 소리를 눌러 이기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이 수도회의 특수목적은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령을 위해 효과적이고 신속한 홍보수단을 이용하여 가톨릭 전교에 힘을 다하고 있다.

성서, 영성, 교리, 전례, 문학, 청소년, 아동용 등의 서적이 출판되었고, 1974년 3월에는 문맹인들과 교회에 자주 올 수 없는 노동자들과 어려운 이들 및 시청각 장애인들과 다각적인 복음선포를 위해 소리와 영상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인간전체를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된다는 사명에 따라 시청각 교리교재 연구소에서는 교회의 전례생활과 영성에 도움을 주는 레코드, 카세트도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435)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가 1964년 4월 10일 장화자(힐데갈드) 수녀에 의해 부산 동항 천주교회 구내에서 창설됐다. 장 수녀는 독일문학을 전공키 위해 서독에 유학 중 영세 입교하여 유학생의 신분으로 전교에 힘쓰다가 복음전파를 위한 수도회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학위 취득마저 포기하고 귀국했으며 그 후에도 몇 차례 서독왕래를 거듭한 끝에 당시 부산지방에서 선교 중이던 트라우너(Trauner, Anthony)신부의 지도로 마침내 이 수녀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같은 해, 같은 장소에 '마리아회 수녀회'가 창설되어 수녀원의 장소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은 한 곳에서 두 수녀회가 새로 발족할 수는 없다는 교구장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러한 사정으로 수녀원은 1967년 11월 21일 대전교구장 황민성(베드로) 주교의 배려로 대전시 대흥동에 자리잡게 되었다.

1967년 대전에 본원을 설치한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는 최초의 사목활동으로 교도소와 소년마을에 대한 선도사업, 문창동 본당에서의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수녀회에서는 본당사목(유치원 포함) 외에 갖가지 특수사목활동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데 그 중요한 것으로는 대전시내 각 군 부대에 대한 교리 및 성가지도, 각급 학교에 강사 파견, 병원 및 벽지 의료기관에 대한 간호수녀의 파견, 교도소 및 소년원에 대한 전교활동, 양로원 사목, 농장에 대한 축산과 농경지도, 탁아소에 대한 봉사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공군 기지 교회, 제2사관학교생도 등에 대한 교리 및 성가 지도, 각 대학교 및 중고등학교의 강사 파견, 병원과 벽지 의료기관에 대한 월 1회 미사봉헌과 매주 마다 교리지도 등을 하고 있으며 수도회 자체사업으로는 양로원 운영과 농장경영을 하고있다.(교회와 역사 85호 7-1982. 8. 25발행)

1964년 6월 10일로서 당시 독일에 유학 중이던 예수회 박고영 신부가 '동정 성모 수녀회'(Institutum Beatae Mariae Virginis)의 교육사업을 보고 한국에의 진출을 요청하였다. 동정성모회는 1609년 영국인 메리워드(Mary Ward)에 의해 벨기에의 성 오메(St. Omer)에서 창설된 여자 활동 수도회이다. 창설자 메리워드는 2년의 준비 끝에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이 수도회를 창설했는데 이름 그대로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고 성모마리아의 여종으로서의 봉사를 목표로 청소년 교육과 그 밖의 모든 자선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당시 나타나기 시작했던 사도활동들은 봉쇄와 병행되거나 지방주교에게만 인정받을 수 있었으므로 이 수도회는 교회로부터 완전한 승인을 얻기까지 300년 동안 반대와 오해를 받는 등 갖가지 고난과 시련의 특이한 역사를 겪었다. 창설자인 메리워드는 교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수차례나 로마와 도버해협을 건너 왕래하고 유럽전역을 도보로, 마차로 여행하면서 후세에 "사도 바오로 이후 주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긴 여행을 해낸 여성"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 비오 10세는 수도회 창설 300년만인 1909년 4월 20일 인준을 하였다.

서울 분원의 회원들은 대방동에 있는 공군부대와 개봉동, 오류동, 본당 등에 나가 사목활동을 펴고 있으며 월1회 성소자 모임도 지도하고 있다. 대전 공동체는 1965년 학교건물과 수도원건물이 완공되면서 시작되어 성모 초등학교와 성모여자 고등학교 등 청소년 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성모 초등학교는 1966년 2월 17일에 개교하여 "감사할 줄 알며 거짓 없고 자기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어린이"를 배출시키고 있다. 또한 성모여자고등학교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을 위하여 몸바칠 여성"이라는 여성상의 구현을 위하여 전인교육을 이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충북 보은 분원에서는 성모병원, 성모유치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북 이리에서는 성모의원과 2개 시와 6개 군의 나환자 정착촌 12개에서 의료 및 구호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곳 성모의원에서는 나환자 전용병동도 새로 건립하였다. 또한 경남 충무분원에서는 본당사목과 충무유치원 사업을 돕고 있으며 진해분원에서는 군종사목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해군 사관학교 등 각 군부대에 나가 군종사목에 종사하는 한편, 군인가족들에는 가정방문과 그룹활동 등을 통해 교리교육과 성경연구를 실시하고 있다.

동정성모회는 현재보다 견고하고 지속적인 사도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분원확장을 보류하고 회원들의 영성교육과 사도직을 위한 전문직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94년에 한국진출 30주년을 지낸 한국 동정 성모회는 400여년간 학교 교육에 헌신하여 온 수도 공동체의 정신을 이어 받아 자신의 카리스마인 교육은 물론이고 앞으로 신앙의 옹호와 전파를 위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이면 어떤 분야에서도 투신할 각오를 다지며 동시에 새로운 변모와 발전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다.(교회와 역사 81호 7-1982. 4. 25발행; 한국가톨릭대사전 : 309)

1965년 1월 8일, 1963년 수원교구장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가 독일 파다본의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Congregation of the Sisters of St. Vincent de Paul)에 수녀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고 1964년 11월 7일 9명의 한국인 지원자들을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 파견했고, 세 명의 독일 수녀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특히 병자들의 간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선교사로 한국에 진출했다.(한국천주교회연감, 1994 : 499)

1966년 5월 전주교구장 한공렬 주교의 요청으로, 가정과 사회로부터 멸시당하고 버림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전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착한 목자 수녀회'(Good Shepherd Sisters)가 한국에 진출하였다. 17세기 오라토리오회(Oratoriani) 요한 에우데스(John Judes) 신부에 의해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1835년 성녀 마리 유프레시아(Mary Jubhrasia)에 의해 프랑스 앙제(Angers)에 설립된 이 수도회는 1966년 5월 전북 옥구군 옥봉면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여, 1969년 10월 수녀원과 기숙사. 기술학교를 개원하였고, 의료봉사사업과 혼혈아 입양사업도 추진하였다.

1966년 대구대교구 안동 감목 대리 구인덕(Celestin Coyos, 具仁德) 신부의 초청으로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안동에 진출했다. 구인덕 신부는 농촌 지역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위해 룩셈부르크 관구의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를 요청했다.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Sisters of the Christian Doctrine)는 장 바틀로(Jean Vatelot, 1688∼1748) 신부가 1700년 알사스 로렌 지방의 오랜 국경 분쟁으로 인해 황폐해된 상황에서 교육사업과 간호 사업을 통해 그 지역 주민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삶의 희망과 인간다운 삶을 찾도록 하기 위하여 설립하여, 본당이나 동네, 소외된 지역 등 생명에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부르심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그들을 파견해왔다.

룩셈부르크 관구 소속의 셀린(Celine Knauf) 수녀와 안젤린(Angelin Kellen) 수녀가 1966년 9월 17일 한국에 파견되어 이틀 후부터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명도원에서 1년간 한국어 교육을 받은 후 1967년 안동시 율세동 393번지 3만여평의 부지에 상지전문대학과 수녀원 신축을 시작하였다. 1967년에 상지대학을 세우고, 상지기숙사를 운영했다. 그리고 상지전문대학 부속 유치원과 가은 유치원, 상주 남성동 유치원, 안동시 종합 사회 복지관 어린이 집, 대구 월성 가톨릭 종합 사회복지관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 안동교구청 사목국에서 일하면서 생명의 공동체 운동으로 농민 교육을 통해 얻어진 10여개의 공동체를 조직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본당과 노인 및 의료, 종합복지를 하고 있다. 한편 부산교구에서는 교도소와 구치소, 소년원, 감별소에서 봉사하며 특히 소년원의 원생들을 위한 재활교육을 통해 교도사목을 하고 있다.(교회와 역사 235호 18-1994. 12. 25 발행)

1848년 아델콘드윌브링(Adelgonde Wolbring)과 리제테 퀼링(Lisette Kuhling)이 독일에서 창설한 '노틀담 수녀회'가 1967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여성교육사업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형제사랑으로 돌보면서 더욱 건설적인 세계를 이룩하고자 한다. 노틀담 수녀회는 여성교육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업을 하는 활동 수녀회이며 한국에 진출한 노틀담은 독일의 베스트후알렌(Westfalen) 의 코스펠트에 본부를 둔(Sisters of Notre Dam of Amersfoort) 수녀회이다. 이 수녀회는 이탈리아, 영국, 네델란드, 브라질 등지에도 진출하여 유치원, 초중고교, 대학의 경영, 기숙사, 양로원, 병원 등의 사업을 통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돌봄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는 하느님 사업에 봉사하고 있다. 1968년 8월부터 1971년까지는 지방 출신 여대생들의 기숙사업을 하였다. 엄격한 기숙사 규칙을 펴나가면서 그 부모들과 편지 교환도 하고 면담도 하였다. 그러나 성소 지원자가 불어나자 기숙사의 방 때문에 중단하였다.

그리고 이 수도회의 사업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버스 안내양들을 보살핀 일이다. 수녀들이 버스를 탔다가 발견한 비참한 사정은 종점에서 종점까지 몇 번이고 타고 다녔고 그들의 숙소까지 살폈다가 놀란 참상과 애처로움에서 빚은 사업이었다. 처음에는 버스 회사측의 반대도 받았고 훼방을 겪기도 하였다. 교육은 장래 이 나라의 어머니일 많은 아가씨들에게 정서 교육과 가정 여성으로서의 필수기능과 상식 영어와 한자 상식까지도 가르쳤다. 솜씨자랑 전시회도 몇 번 열고 나서는 인도적인 처우개선과 침실개선도 이룩하게 한 빛을 던지기도 하였다.

1972년 10월 4일에 차린 부산의 유치원은 오전만 보모 노릇을 하는 유치원 교육 혁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일 교육과 생활실습 성교육에 3위 1체 교육방식을 본뜨는 유치원이 자꾸 생겨나게 했다. 1975년에는 농어촌 유치원 교육을 위해서 오산 지역의 마을회관 등으로 나가서 부산유치원 방식을 베풀고 있다.(교회와 역사 65호 7쪽; 가톨릭대사전 : 254)

1971년 '경로수녀회'(Little Sisters of Poor)가 한국에 진출했다. 예수의 진복팔단 정신을 생활 방침으로 삼고, 1840년 쟌느 주강(Jeanne Jugan)수녀가 불쌍한 한 할머니를 간호함으로써 시작된 이 수녀회는 교황청 직속 수도단체로서 양로사업만을 위해 활동하며, 프랑스 브르타뉘(Bretagne)주 생폴(Saint Paul)에 본부가 있다. 1971년 9월 한국에 진출한 수녀회 회원들은 명도원에서 언어교육을 마친 뒤 1973년 7월 청주교구에서 운영하던 성심원을 인수받아 활동하기 시작함으로써 한국지부가 설립되었다. 초대 지부장으로는 브뤼네(Bunet) 수녀가 취임하였다.(가톨릭대사전 : 69)

1973년 1월 31일 '마리아 수녀회'가 창설되었다. 마리아 수녀회의 창설동기는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소 신부) 가 부산 송도(현 남부민동) 본당주임으로 있을 적이었다. 너무나 가난한 참상, 너무나 외로운 사람들의 처참한 상태를 그냥 볼 수가 없었던 소 신부는, 우선 버림받은 고아들만이라도 주님의 일꾼이 되어 돌봐 줄 사람들을 구했다. 당시 부산 교구장 최 재선 주교와 의논하여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모든 자금은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모금해다가 재단법인을 결성했다. 우선 송도 본당 한쪽 헛간 바닥에 거적을 깔고서 시작한 마리아 수녀회의 공식 창설일은 1964년 8월 1일이다. "이 어린이들 중에 하나라도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 (마태 18,5) 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과 부모가 없어 버림받는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모성애로써 봉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 등 기도 생활과 함께 복음적 실천과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창설한 수도회다. 그리하여 버림받은 어린이와 불우한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수도회다. 회원은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의 까리따스 수녀회의 전통을 따른다.

마리아의 수녀회에서 행하는 사업의 규모는 아동복지 사업과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고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버림을 받아서 마음과 몸이 몹시 지쳐있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는 지체부자유와 정신 박약한 가련한 어린이도 320여명이나 된다. 이들은 수녀들의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로써 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구나, 어떤 과오를 저지른다고 해도 따뜻한 사랑과 손길로써 보호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낙원이다.

의료사업인 부산의 결핵요양소와 서울의 갱생원은 시 당국의 경영난으로 믿고 넘겨 준 의료기관인데, 모두 무료치료를 베풀고 있다. 서울 갱생원 원생 중 회갑을 지낸 환자들은 서울 소년의 집 구내로 옮겨서 양로원 같이 보살피고 있다. 교육사업은 모두 수녀회가 전액 부담하되, 부산으로 집결시킨 유치부를 마치면 부산의 중학교로 보낸다. 중학교를 마치면 남자는 기계공고로 전학시키고 여자는 고입예비고사에 합격하면 학구배치에 따라 여러 일반여고로 보내어, 학비 잔액을 부담하여 통학시킨다. 공업고교 과정을 마친 남자는 노동부가 시행하는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직을 시킬 수 있고 공전으로 전학 수용시켜 무상교육의 혜택을 지속시킨다. 여자의 경우는 여고를 마치고 대입 예시 합격하면 간호전문대, 교육대, 사범계 등으로 진학시켜 무상 교육 혜택은 연장된다.(교회와 역사 67호 7)

(4) 가톨릭 구제위원회(Catholic Relief Service : C.R.S) 생성 및 활동

'가톨릭 구제위원회'는 미국 천주교회의 주교회의 산하로 공식적인 해외 원조 기관인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각지에 산재한 난민을 구호하고 전쟁 희생자와 빈민을 돕기 위해 조직된 각국의 사회사업단체들을 금품으로 지원해 주기 위해 1943년에 조직되었다.

한국의 가톨릭 구제위원회는 1946년 처음으로 구호사업을 시작했으며, 1952년 외원법에 의하여 외원 단체로 보건사회부에 등록하였다. 가톨릭 구제위원회는 자체 사업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미국 정부, 한국 정부, 한국 천주교회 각 교구와 협력하여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가톨릭 구제위원회의 사업은 양곡 사업, 의료 사업, 사회 경제 개발 사업, 지역 사회 개발 사업 등에 대한 후원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1947년부터 1963년 사이에 가톨릭 구제위원회의 원조 총액은 140만 달러 정도였으며, 1964년에는 약 350만 달러였고, 1965년 이후는 연간 약 140만 달러 이상이었다. 이 혜택을 받은 자 수는 75만∼8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임진창, 1976, 43-44) 이것은 주로 양곡 사업, 의료 사업, 지역 사회 개발 사업 등에 대한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양곡 사업은 모자 보건, 아동 급식, 학교 급식, 근로 지원 사업, 극빈자 구호 사업 등이며, 지역 사회 개발 사업은 농로 개설, 축산, 저수지 축조, 관개, 주택, 간척, 신용 조합 육성 등을 위한 직접 또는 간접 원조이고 의료사업은 비타민제, 기타 의약품 등의 공급과 병원의 설립 운영을 위한 원조 및 의료 기구의 지원 등이었다.

이러한 가톨릭 구제위원회의 활동은 1960년대 한국 천주교회의 지역 사회 개발 사업으로 연결된다. 가톨릭 구제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들여온 수많은 물자와 자금을 해방 직후부터 6·25를 통해 피난민 구호 사업의 일환으로 투입했고 미공법 제480호로 들여온 잉여 양곡과 의류 등은 피난민과 빈민들에게 광범위하게 분배되어 당시 우리 국민들 중 그 혜택을 입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종교를 초월하여 배부되었다.

1963년부터는 이 잉여 농산물과 자금이 비로소 사회 개발 사업에 지원되기 시작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196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사회 개발 사업을 시작한 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 컸다. 그것은 공의회가 인간의 현세적 생활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평가한 데서 온 결과이다.

그뿐 아니라 한국 정부가 공업화 우선 정책을 펴게 되어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이 생기게 되고 농촌이 침체되는 등 새로운 양상의 사회 문제가 유발되었다. 그 중에서도 소득의 격차와 노동자 권익 옹호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사회 현상에 교회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한편 가톨릭 노동 청년회와 장년회 그리고 가톨릭 농민회 등이 주교회의 안에 전국의 사도직 단체로서 발족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한국 사회에 큰 업적을 남긴 미국 가톨릭 구제위원회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개인별 국민 소득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1974년에 한국에서 철수하고 미국 가톨릭 여성연합회가 주관하던 양친 사업(Help a Child Program)이 구제회의 명의로 계속 활동하다가 1975년 가톨릭 구제위원회의 재산 일체(서울 장충동 1가 37번지 3 소재 대지 269평 및 지상 건물)와 그 활동을 한국 인성회에 양도했다.(박석돈, 전게논문, 28; 가톨릭 대사전1 : 140)

(5) 나환우복지 사업

나병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나학계(癩學界)에서는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소외에 깊은 연민과 자비심,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하였다.(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 그리고 열 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면서 "나병환자를 깨끗이 고쳐주어라."(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고 분명하게 지시하였다. 그 후 가톨릭 교회는 나환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1978년 말 전세계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의료시설 중 나환자촌은 537개소에 이른다.(가톨릭대사전 : 233)

해방시기 우리 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라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환경조건이 좋지 않아 1948년에 서울대교구에서 세브란스 병원 부속 결핵요양소를 구입하였던 자리(현재 성 라자로마을 자리)로 1951년 7월 15일에 이전하고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라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충남 강경, 전북 이리 등지에 진료 및 구호를 위한 이동진료를 시작하였다.(이들 지역 중 진료소가 있던 고성, 옥천, 포항 등은 나중에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

각 교구별 나환자마을은 춘천교구 1개소, 원주교구 1개소, 대전교구 1개소, 인천교구 2개소, 수원교구 3개소, 대구대교구 4개소, 부산교구 4개소, 마산교구 4개소, 안동교구 6개소, 광주교구 7개소, 전주교구 4개소 등이다. 이들 각 정착마을에 살고 있는 나환자는 13,382명이다.(가톨릭대사전 : 233; 1998년 11월 17일 한국가톨릭나사업연합회 박명진 답신)

나환우들을 위한 정착마을은 일제시대인 1931년 경북 고령에 은양원(恩養園)이 생긴 이래 해방후인 1946년 경남 하동에 영신원(永信園), 1951년에 익산농장, 1953년 강원도 원주에 대명원, 전북 고창에 동혜원(同惠園), 전남 나주에 현애원(玄愛園), 1954년에 성신원(聖信園), 경천원(敬天園), 1956년에 전남 나주에 호혜원(互惠園), 경북 문경에 계명원(啓明園), 충남 논산에 성광원(星光園), 1958년 경기도 용인에 동진원(東震園), 경북 상주에 성심원(聖心園), 1959년 전남 함평에 재생원(再生園), 경북 영덕에 신애원(信愛園), 1960년 경북 봉화에 갱화원, 1961년 경북 월성에 희망원(希望園), 전북 김제에 신암농장과 비룡농원(飛龍農園), 1962년 전남 광주에 성모마을, 경북 의성에 신락원, 인천 북구에 경인농장, 경남 김해에 새마을 건설원, 1963년 경기도 양평에 상록원, 1964년 전남 장성에 성진원, 1965년 경남 거창에 협성농장, 1966년 경기도 양주에 천성농장, 1967년 부산 서구에 용호농장, 1968년 전북 익산에 상지원(上智園), 인천 남구에 부평농장, 경북 칠곡에 칠곡농장, 1979년 전남 장성에 시목농장, 부산 서구에 계림농장 등이 설립되었다.(가톨릭대사전 : 164; 가톨릭중앙의료원 50년사 : 501-547)

이렇게 천주교의 자활정착사업이 효과를 거두자 정부에서는 나병강제격리 수용법을 폐지하게 되었다.(가톨릭대사전 : 164)

한편, 1961년 11월 2일 '한국천주교 나사업협회'(회장 윤을수 신부, 총재 Caroll 주교)가 정식 발족하고 11월 3일에 주교회의의 인준을 받았다.(가톨릭중앙의료원 50년사 : 510) 그후 1967년 10월 18일 1961년에 발족한 한국나사업협회의 뒤를 잇고 한국 구라사업을 위해 평생을 바친 스위니 신부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서 구라사업을 하고 있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한국 가톨릭 나사업가 연합회'를 재창립하였다. 설립 목적은 '한국 천주교회의 구라사업을 대행, 사업기관의 협의 기구, 나환자의 지위 향상, 복지증진, 자립지원, 신앙지도'이며, 주요사업으로는 '의료사업 지원, 복지 및 정착사업 지원, 신앙교육, 홍보, 후원회 육성, 기타 등'이다.(1998년 11월 17일 한국가톨릭나사업연합회 박명진 답신)

1968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세계 나병의 날'인 1월 마지막 주일을 '구라주일'로 선포하고 매년 이날 전국의 각 본당 및 가톨릭 기관을 대상으로 나병에 대한 계몽과 구라사업에 협조를 호소하고 모금을 했다. 1972년 구라주일 헌금이 230만여원이다가 1980년에는 4,700여만원으로 증가했다.(1991년부터는 구라주일이 없어지고 대신 '사회복지주일'이 생겼다.)

1970년 1월 제3회 구라주일을 맞아, 한국은행 부산지점에 근무하던 김광자 양이 약간의 선물을 마련, 칠곡 가톨릭 피부과 병원을 방문했다가 너무나 많은 나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어 빈약한 선물을 내놓지 못하고 돌아와서 동료 여행원들과 이야기하다가 20여명의 아가씨들이 나환우들의 후원을 결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모임'이란 뜻으로 릴리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릴리회가 서울등지로 확산하여 1971년에는 회원이 64명으로 늘었다. 1974년에는 459명의 회원이 1,947,850원의 회비를 냈다. 그리고 릴리회는 금융기관에서 일반인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릴리회의 성금은 첫째 손발이 없는 나환자들에게 의수족을 지원하고, 둘째 갖가지 신체적 장애로 사회복귀가 어려운 자에게 성형 및 정형 등의 재활수술비를 지원하고, 셋째 나환우들의 각종 크고 작은 수술비를 지원하며, 넷째 전국에 산재한 나환자들의 진료비를 지원하고, 다섯 번째 나환자 자녀 교육을 위한 장학금을 지원하고, 여섯 번째 자활능력이 없는 무의무탁한 자들을 수용소에 보호조치하고, 일곱 번째 기타 나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사업비를 지원하는데 쓰고 있다.(박석돈, 상게논문, 60-61)

(6) 신용협동조합(Credit Union) 운동

종교나 직장, 지역 등 상호유대를 가진 개인 또는 단체간의 협동조직을 기반으로 자금의 조성과 이용을 통해 서로의 복리를 도모하는 비영리 금융 운동인 신용협동조합 운동은 1850년 독일에서 처음으로 도시와 농촌에 조합이 창설된 후 이탈리아 등 세계 각국으로 보급되어 갔다.

우리 나라에서는 1960년 5월 1일 부산 중앙본당 신자들과 메리놀 병원 직원들로 구성된 성가(聖家) 신용협동조합이 그 효시가 되었다. 이 조합은 메리놀 수녀회 메리 가브리엘라(Mary Gabriella Mulherin) 수녀의 정성어린 노력에 의해 탄생했다. 수녀는 '한국 신용협동조합의 어머니'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고, 2개월 후 6월 26일에는 서울에서 가톨릭중앙조합이 창립되어 신용협동조합 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1964년 4월 55개의 조합이 모여 한국 신용협동조합연합회를 결성했고, 5월에는 국제기구에도 가입하였다.

1972년에는 신용협동조합법(법률 2338호)이 시행되어, 출자와 대출한도, 이자율, 예탁금, 상환준비금 등의 규정에 따라 법적 보장을 받게 되었다. 1979년에는 조합원 70만명과 자금 1,000억원을 돌파하는 발전을 보였다. 한편 신협이사회의 협동교육원 건물은 현재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729; 교회와 역사 80호 7)

(7) 사회복지 대학 설립과 사회복지 전문 수도회 창설

1956년 11월 19일 '인보성체수도회'(隣保聖體修道會)의 창설자인 윤을수 신부는 6.25 사변 중 군종신부로 복무하면서 전쟁고아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전쟁 후에도 계속 고아 육영사업을 전개, 이들에게 봉사할 여성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사회사업여자전문학교인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하였고, 성체회 수녀들이 사회복지 활동을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167)

그래서 윤 신부는 사회사업을 통하여 전교활동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성경, 교회사, 교리, 윤리, 성사, 라틴어, 종교음악과 그 외는 초급대학 일반과목에 준한다. 입회자격은 고등학교 졸업자로 또는 동등한 자격을 가진 만 17세 이상 25세 미만의 여성으로 본당신부의 추천을 받은 자이며 학제는 2년으로 일단 입학하면 기숙사에서 합숙하며 준 수도생활을 하였다. 실습은 각 지역으로 파견되어 의료반과 동반한 무의촌 순방, 요구호자 가정조사 및 돌봄, 개간지, 개척지에서 조력, 섬지방 순방 등을 하여 표양으로 전교하기 시작했다.

1956년 8월 서독 ꋅ헨에서 사회사업가 대회에 참석한 윤을수 신부가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서구에 사회사업 사조는 과거 소규모적인 시설 사회사업(양로원, 고아원)에서 벗어나 광범위한 사회사업 즉 지역사회 개발에 대하여 착안하여 그 방면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음을 보고 그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바 있었으며 특히 로마에 본부를 둔 "국제 천주교 사회사업연맹"(까리따스)으로부터 공산주의와 대항하는 일반사회사업 보다는 지역사회를 위한 사회사업가를 양성할 목적으로 이곳에 소재하는 보육원(골롬바 어린이집)을 개교했다. 이와 같이 종전의 사회사업과는 달리 각 지역에서 걸쳐 그 지역에 순응하여 지도자로서가 아닌 협조자로서 일하며 그 지역 복구 향상을 위하여 헌신하므로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자 했다.(1959년 11월 22일자 가톨릭 신문에서 발췌)

(8) 노동사목과 농민사목

가난한 이들을 향한 교회의 사목은 두 가지 형태를 띄고 있다. 하나는 '자선'이요, 하나는 '정의'이다. 가난한 이에게 직접 그 물질적인 필요를 제공하는 '자선'의 형태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와 가난한 이들에게 가난을 극복하고 대처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의'의 형태의 사목이 '가톨릭 노동 청년회'다.

벨기에의 까르딘(Joseph Cardijn) 추기경은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가장 좋은 선교사는 가난한 노동자 자신이요, 청년 노동자 한 사람은 온 세상의 금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귀중하다."고 하면서 청년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문제를 자신들이 직접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되돌아보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도록 1919년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Jeunesse Ouvriere Chretienne/ Y.C.W.-Young Christian Worders)를 만들었다. 그리고 가톨릭 노동 장년회(C.W.M.-Christian Workers Movement/MMTC)도 결성되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청년노동자로 구성되어 청년노동자들과 함께, 청년노동자들의 손으로, 청년노동자들을 위하여 노동계를 그리스도적인 생활양식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 단체는 첫째, 일상생활을 통하여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둘째, 하루하루의 생활환경 속에서 동료노동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수련을 쌓아야만 하며, 셋째, 청년노동자들에게 공동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에 있어서나 일치되어야 할 상황 속에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청년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신앙의 진리'에서 출발하지만, 세상은 억압과 굶주림, 전쟁, 부정부패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및 착취와 산업재해 등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꺼져버린 것처럼 보이는 '경험의 진리'를 직면하여, 젊은 노동자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을 만들어 이 세상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실천의 진리'를 살고자 하는 3가지의 기본 진리 위에 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관찰'하고, 그리스도의 뜻과 말씀에 비추어 '판단'하여, 주님 사랑의 그 방법으로 '실천'하는 원칙으로 산다.

그러므로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각 모임과 행사 등을 짜고 행함으로써 스스로 양성되는 '양성운동'이며, 노동자들 자신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노동자 운동'이고,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교회와 사회 안에서 노동계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대표운동'이며, 홀로 떨어져 있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는 '봉사운동'이고, 노동자들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어떠한 노동자들과도 연대하는 '대중운동'이며,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일하는 직장과 가정과 동료관계를 변화시키는 '전교운동'이며, 세계 100여개국에 퍼져있는 회원들과의 연대 안에 활동하는 '국제운동'이다.

우리 나라에는 1958년 11월 16일 박성종 지도신부가 서울대 부속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원 9명과 함께 모임을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16) 곧이어 1958년 살레시오회 소속인 수아레스(Joseph Suarez) 신부가 서울 도림동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도림동 본당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어 나갔다.(가톨릭대사전 : 828)

한편 한국 가톨릭 농민회는 1964년 10월 가톨릭노동청년회의 '농촌청년부'로 시작하여 1966년 10월 한국 가톨릭 농촌 청년회(J.A.C.) 창립총회를 가진 후 1970년 9월 제7차 가톨릭 농민회 국제연명(MIJARC) 총회에 대표자를 파견, 정회원국으로 가입함과 아울러 1972년 3월 제 3차 전국 대의원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한국 가톨릭농민회'로 정식 출범하였다. 그 뒤 같은 해 10월 바티칸 소재 국제가톨릭농촌단체협의회(I.C.R.A.)에 가입하였다. 1973년에는 가톨릭 평신도사도직 중앙협의회에 가톨릭 농민회(Catholic Farmaer's Movement)가 가입하였다.

농민 스스로의 단결과 협력으로 농민의 권익을 위하고 인간적 발전을 도모하며, 사회정의의 실현을 통한 농촌사회의 복음화와 인류공동체 발전에 기여함으로 1954년 유럽의 8개국 18개 운동단체들이 가톨릭 농민회 국제연맹(Mouvement International de la Jeunesse Agricole et Rural Catholiques)을 창설하였다. 1958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으며 벨기에 루벵에 국제본부가 있다.

가톨릭 농민회는 첫째, 농민문제의 기본문제인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지실태조사를 실시하여 그 해결을 촉구하는 한편 농민의 토지상실, 농촌오염, 투기자본의 농토잠식, 부실경지정리로 인한 문제 등으로부터 농민보호활동을 추진하며 영세한 농업구조가 안고있는 불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각종 협동활동을 추진하여 협동의식을 높이고, 둘째, 농산물에 대한 정당한 값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활동하고, 셋째, 농업관계 조합장 선거제 실시 등 실제적인 조합운영의 활동을 제시하며, 넷째, 민주적인 농업정책이 실현될 수 있도록 법적인 보장을 위한 농림관계법의 공청회를 유관 단체와 함께 개최하여 자주적인 농민의사와 법이 잘 화합될 수 있도록 활동한다. 그리고 다섯째, 농민들의 진정한 생산문화를 찾을 수 있도록 농민문화부활을 위한 활동을 한다.(가톨릭대사전 : 16)

(9) 사회복지 전문 사도직 단체 결성

1961년 2월 8일 조성세(안드레아)를 비롯한 다섯 명의 회원이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The Assocaition of St. Vincent de Paul)를 결성하고 그 활동을 시작했다.(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답신, 1998.4)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프레데릭 오자남과 파리 소르본 대학교의 5∼6명의 학생들에 의해 1833년 프랑스 파리에서 "그리스도교적 사랑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대적인 도전에 맞서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창설되었다. 이들은 자선 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모범으로 삼고 의탁한다. 세계 122개국 140만 명에 달하는 남녀 회원으로 구성된 국제적인 조직체이며, 회원들은 매주 여가를 이용하여 남을 도움으로써 주님의 증인이 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다."(마태 26,11)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회원들은 자신에게 허용된 시간과 재물을 봉사에 활용한다. 회원들은 평신도들의 형제적 단체로서 곤경에 처해있는 자기 이웃 안에서 하느님께 봉사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존재를 증거한다. 그리스도께서 이웃들 가운데서 계속 생활하시고 고통을 받고 계시다고 믿고, 또 도움을 받는 사람을 개종시키기 위해서나 개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길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봉사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가난한 형제들이 모여서 보다 가난한 형제들, 즉 영신적이든, 물질적이든, 혹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가난한 형제들의 어려움을 경감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 곤경에 처해 있는 어떠한 사람이든지 가리지 않고 모두 도우려고 한다.(천주교 서울대교구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원 수첩, 16)

한국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1961년 1월 5일 전주교구 파디주교의 주선으로 시작되었다. 1월 6일 서울 명동 성당의 라우렌시오 신부의 설립의뢰로 게이노씨와 노기남 대주교의 후원으로 회칙을 번역하고 활동을 시작하였고, 1월 29일 청주 교현협의회, 춘천 운교동 협의회, 서울 명동협의회를 설립하였다. 1973년 9월 17일 아일랜드 더블린 총이사회에서 한국이사회의 설립을 승인하였다. 1975년 2월 21일에는 한국 이사회가 창립되었고, 11월 15일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회의(PANASCO Ⅱ)에 참여하였고 1979년 11월 6일부터 11일까지는 프랑스의 세계 총회에 참석하였다. 1981년 5월 3일 상계동의 음성 나환자 마을을 방문하고 1982년 4월 18일 용문 결핵환자요양소(희망의 집)에 노력봉사 하였다. 1987년 11월 14일 서울대교구 김정남 바르나바 신부가 전국 지도신부에 취임하였다. 1989년 2월 19일에는 호주 뉴질랜드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회의(PANASCO Ⅲ)에 참석하였고, 8월 26일에는 '간병인회'를 창립하였다. 1990년 9월 23일 빈첸시오 설립 30주년 기념으로 '천사의 집'을 건립 기공하였다. 1991년 1월 30일에는 빈첸시오 여성 성가단이 결성되었고, 3월 17일에는 '가톨릭 미용인회'가 빈첸시오회 소속으로 결성되었다. 1992년 2월 2일 김정남(바르나바) 신부의 지도로 협의회 조직이 형성되어 신내동 무의탁 할머니를 성가복지병원에서 진료를 받도록 도와주었으며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바자회를 개최하며 각 명절 때마다 외롭고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전달하며 실천적인 사랑을 행하고 있다. 1992년 11월 6일부터 24일에는 파리 세계총회에 참석하였고, 1993년 4월 30일에는 제2 천사의 집 건립기금 2천만원을 광주대교구에 전달하였다. 1994년 5월 5일에는 '천사의 집' 봉헌식을 가졌고, 11월 2일부터 7일까지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회의(PANASCO Ⅳ)에 참석하였다. 1995년 9월 4일부터 21일까지는 회장단 10명이 뉴질랜드 협의회를 방문하였으며, 1996년 8월 22일부터 25일까지는 사이판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회의(PANASCO Ⅴ)에 참여하였다. 12월 13일에는 제2 천사의 집 건립기금 5천만원을 추가로 총 1억 4천만원을 광주대교구에 전달하였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한국이사회 제17차 총회자료, 10-11)

이 단체 외에도 1974년 6월 명동성당 소속 봉사 단체인 '나눔의 집'이 발족했다. 김몽은 본당신부의 지휘하에 따로 지도신부를 두고 약 10여명의 회원으로 시작되었다. 그 취지는 우리 주위에 있는 가난한 형제들에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먼저 본당의 주보와 팜플렛을 통하여 일반교우들에게 집에서 입지 않는 옷가지나 사용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물품을 수집하여 이를 아주 싼값으로 다른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는 방식이다.

회원들은 평일에 각자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수집해 둔 의류의 세탁 및 정리를 하고 매주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물품을 판매해왔다. 판매이외에도 수집한 물품은 극빈자, 결핵 환자, 낙도의 어린이들에게 탁송했다. 본당에서 판매한 물품의 수익금은 저축하여 헌금으로 극빈자를 돕기로 했다. 그리고 매년 정기적으로 본당에서 바자회를 개최하여 본당 전교우로 하여금 이에 적극 참여하고 불우한 형제들을 돕는 정신적인 자세를 불러일으켰다. 바자회는 고아원 및 기타 사회사업 단체에게 위탁판매를 할 기회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 경우 수익금은 '나눔의 집'회원들이 만든 것과 본당의 다른 단체에서 협조한 것들이었다. 바자회의 수익금은 지금까지 충주 성심 농아학원을 도왔고 그밖에 양동 나환자촌에 경운기 한대를 기증한바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활동은 회원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에 대단히 좋은 계기가 되며 형제애를 피부로 느끼게 했다.(나눔 1호 3-1976. 9. 27발행)

2) 분야별 천주교 사회복지사업

(1) 나환우복지

1945년 살레시오 수도회가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산 55의 1에 살레시오 돈 보스꼬의 집을 설립했다. 사회로부터 경원되고 있는 불우한 "한센씨 병(나병)" 환자 가정의 미감아동들에게 일반 가정의 어린이와 똑같은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감아동시설이다. 교육비가 부족한 형편이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보다 바람직한 어린이의 보호, 교육과 원의 운영을 위해서는 외국인에 의한 원조보다 우리 이웃의 사랑과 도움을 더욱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나눔지 12호, 1979. 5. 25 : 5)

1950년 6월 2일, 1945년 광복후 서울 근교에 떠돌아다니던 많은 나환자들을 접한 메리놀회 소속 캐롤 주교는 이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오류동에서 성 라자로원을 창설하였다. 1948년 시흥군 의왕읍 오전리 87번지에 20만평의 대지를 구입한 서울대교구는 1951년 성 라자로원을 그곳으로 이전시키면서 1955년에는 가톨릭 의대 부속 성 라자로 의원을 개원하였다. 이 때부터 재가(在家)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이동진료를 시작하였는데 1962년 정착촌을 마련하고 나환자들을 이곳에 모여 살도록 하였다.(가톨릭대사전 : 321) 라자로원의 운영과 생활은 미국 가톨릭구제회(N.C.W.C)의 보조와 성모병원에서 대부분 충당해 주었고 치료와 투약은 성모병원의 만성병 연구소를 중심으로 하여 의대생들이 무료로 해 주었다.(샬트르 100년사 : 513; 1000)

그간 서울 교구에 마련되어있던 성 라자로 마을은 수원교구가 분리, 독립된 이후인 1967년 수원교구로 이양되었다. 1975년 성당을 축성하였고 1981년 설립30주년을 맞아 피정의 집을 개설하였다. 1985년 현재 성 라자로 마을에는 나환자 정착촌을 비롯하여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동, 진료소, 성당, 교육관, 수녀원, 휴게실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1971년 창간된 마을회보가 간행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321)

1983년에 이경재 알렉산델 신부가 라자로 마을 내에 피정의 집 '아론의 집'을 완공하고 그 관리를 부산 성 베네딕토 수녀원에 위임했다. 유아원은 개설이 어려워 중단되었고, 1985년 1월에는 성 라자로 마을에서 1976년부터 환자 간호를 담당하던 성모 영보 수녀회가 떠나고 성 베네딕도 수녀원으로 이전되었다.

부산 성 베네딕토회 수녀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부서지고 찢겨진 나환자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위로가 되어주고 있다. 또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각계 각층에 불러일으키고 형제적 사랑의 나눔을 위해 수시로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들과 원생들의 가교가 되어 주며, 희생과 고통의 그리스도 신비체를 몸소 체험함으로써 힘든 봉사 속에서도 큰 기쁨으로 나날을 봉헌하고 있다.(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 486)

1956년 나환자 이동 병원 진료소인 양생원이 발족했다. 라 다두라는 나환자의 어머니가 논산 성당을 다니다가 1956년 3, 4월경 성가소비녀회의 창설자 성재덕 신부를 찾아와 자기 아들이 마을에서 못살고 외진 곳에서 사는데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 당시 10세대 정도의 나환자들이 외진 곳에서 정부의 대책도 없이 소외된 채로 있었다. 그들은 걸식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성 신부가 그녀의 청을 듣고 진료반을 보내줌으로써 나환자 이동 병원 진료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정석주, 박병태, 김재영 외 17명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서로 돕고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 명칭을 양생원(養生圓)으로 발족하고 가톨릭 구제회에서 구호를 받게 되었다. 진료반이 이곳에 올 때 N.C.W.C(미국 천주교 전재부흥위원회)의 보조로 밀가루, 옥수수 등과 구호품이 전달되었다. 이후 나환자 집단이 점점 불어났고 성 신부의 도움으로 논산 본당을 통해 정식으로 밀가루, 옥수수 가루를 배급받게 되었다. 훗날 성광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1960년 5월에 양생원을 성광원으로 개칭하고 논산군 광석면 율리 산 49의 2번지 부지 22,440평을 매입 계약했다. 이는 충남 나협회의 주선으로 정부에서 매입 기증한 땅이다. 당시 나환자들은 59명이었고 이때 비로소 나환자 정착지로 책정되어 현재에 이른다. (교회와 역사 207호, 1992. 8.25 : 4)

1957년 12월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Handmaid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는 나환자들을 정기적으로 치료하고 투약하는 한편 이동진료를 실시하기 위해 다미안피부병진료소를 설립하고, 경상북도 영일군 의창면에 나환자 정착촌도 마련해 주었다.(가톨릭대사전 : 1213)

1959년 6월, 1937년 9월 한국에 진출한 프란치스코회는 경남 산청면 내리에 나환자 자활촌인 성심원을 건립했다.(가톨릭대사전 : 1220) 성심원은 그리스도의 복음정신과 프란치스꼬 성인의 모범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며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받은 나환우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치료와 생활보호에 헌신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아 주며 신앙생활을 통해 기쁨과 감사의 삶으로 이끌어 주고자하는 목적으로 설립했다.

1959년 6월 18일 진주시 현남동 구생원(나환자집단시설)에서 종교적 갈등으로 추방된 천주교신자들이 갈데 없는 유랑인이 되었을 때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주 콘스탄시오 신부가 현 성심원부지를 구입하여 나환우 60여명을 피신시키며 "성심원"을 개원하였다.

나병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사회와 가족들의 냉대 속에서 살아온 400여 명의 성심원 가족들은 90%가 중복장애인이다. 나환우들은 60여개의 동으로 형성된 독신사, 가정사, 부부요양소에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꼬 수도회)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의 수도자들과 직원,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 성심원에서의 사회사업은 불구 노약 나환인을 수용보호하며, 나병에 대한 대중 교육 및 계몽, 그리고 나환인 자녀들에게 장학제도를 실시하며 성당과 교육관을 이용하여 종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성심원의 김정이 크레센시아의 답신, 1998. 9. 5)

그리고 1959년 프란치스코회가 산청에 성심인애병원을 설립했고, 1960년에는 칠곡에 가톨릭 피부과 의원을 설립했으며(가톨릭대사전 : 164), 진주지방에서는 콘스탄치오 수사 주도로 병실 39동과 대수술실을 갖춘 나환자를 위한 성심 인해병원을 설립했다.(가톨릭대사전 : 1220) 한편 1960년에는 또 전주교구와 프랑스 국제농촌개발협조회(CIDR)가 공동으로 이리성모병원 설립했다.(가톨릭대사전 : 164)

1960년 재단법인 대구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에서 대구시 봉덕동에 가톨릭 피부과 의원을 설립했다. 대구대교구 서정길 주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환자의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덜어주고 피부진료를 통해 나환자를 조기발견 치료하여 그들의 사회복귀를 도와주며 나병 등으로 급증하는 장애인들을 위한 의료적, 사회적 재활사업을 통하여 국민보건향상에 기여하고자 대구시 봉덕동에 설립하였다.

과거 일제통치시대 나환자는 강제 수용되었는데 해방과 6·25 사변 등 사회혼란으로 나환자들은 수용소를 뛰쳐나와 거리를 배회하며 유랑 구걸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이러한 나환자들의 참상을 알고 계시는 서정길 대주교에게 어느 나환자가 찾아와 구호를 요청하게 되자 교구청에 근무하고 있는 오지리인 뤼듸 신부에게 이 일을 맡아 나환자를 도와주라는 것이 동기가 되어 천주교 대구대교구 구라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뤼듸 신부는 자기본국을 통하여 자선사업단체인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에 재정지원을 얻게되어 나환자를 위한 구라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우선 나환자들이 구걸하지 않고 일정한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의성 신락원과 고령 은양원 두 곳에다 정착장을 마련하였다. 이때는 환자의 치료도 중요하였지만 이들이 당장 거처해야 할 주택과 먹을 식량이 더 긴박한 문제였으니 구호 사업과 치료사업을 동시에 전개해야할 실정이었다.

나환자의 치료를 위해 이들을 간호하며 돌봐줄 사람을 구하던 차에 마침 멀고 먼 이국땅 오지리에서 간호원(엠마 프라이싱거) 한 분이 지원하게 되어 그를 받아들여 이곳으로 오게 하였다. 나환자도 일반환자와 같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을 수 있는 현대식 병원을 건립하고자 부지를 물색하고 이곳에다 대지를 마련하여 막상 병원을 세우려 하니 주민들이 반대하여 이명우 부주교를 비롯하여 서순봉 교수, 지방관서장 등이 주민들을 설득시켜 합의를 보고 나환자를 수용할 때에는 담장을 쌓아 입원환자는 병원 밖으로 못 다니도록 한다는 주민들의 요구조건을 들어 병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나환자의 입원치료를 위한 병실이 건립되자 고령 은양원에서 나환자를 돌보고 있던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가 이곳 병원으로 숙소를 옮겨 병실을 관리하게 되고 대구 가톨릭 간호협회와 경북의대 부속병원의 협조를 얻어 입원환자의 진료와 정착장(은양원, 신락원) 환자도 매일 정기 순회진료를 하게 되었다. 당시 재정사정은 빈약하여 병원 건립뿐만 아니라 운영비, 인건비, 치료약품까지 외국원조단체인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었다. 또한 N.C.W로부터 밀가루, 옥분, 헌옷 등 구호물자가 전달되어 입원환자 부근에 살고 있는 어려운 재가 나환자에게 배분해 주었다. 초창기 이곳은 병원이라기보다는 나환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용시설에 불과한 형편이었다.

병원 본관건물이 세워지고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가 원장직을 맡게된 후부터는 병원형태로 차츰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을 포함한 많은 외래환자들이 병원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 중 여러 명의 초기 나환자를 발견하여 치료해줌으로써 나병퇴치에 좋은 성과를 얻게 되었다. 이곳에 장기수용 되어있던 나환자는 경남 산청병원으로 이송하고 이곳 병실은 단기 입원실로 바꾸어 많은 나환자에게 치료의 혜택을 고루 줄 수 있도록 입원 대상을 넓혔다.

또한 엠마 원장은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와 서독구라협회 영국 등으로부터 우리 나라 나병관리사업에 필요한 지원을 많이 얻을 수 있어 나사업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 피부과 의원은 일반 외래피부환자 진료수입과 릴리회 성금 등으로 자체에서 구라사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은 퍽 자랑스러운 일이다. 다행히 최근 나병으로 발견되는 신환자 발생이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가톨릭 피부과 의원은 오직 나환자들에게 각종 치료의 혜택과 생계대책을 마련하는 등 설립자의 정신에 따라 성실히 나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가톨릭 피부과 의원 답신, 1998. 5.20)

1961년 가톨릭중앙의료원에 만성병연구소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나환자들을 위해 오스트리아 부인회(오지리 부인회)의 한국지부가 대구에 설립되었다.(가톨릭대사전 : 164)

1961년 소록도 국립 나병원 원장은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5천여 나환자 자녀들이 양육과 교육을 가톨릭 교회의 수녀들에게 맡기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뜻을 광주대교구장이던 현 대주교에게 알렸다. 현 대주교는 까리따스 수녀회에게 소록도 미감아 보육소의 운영을 청했다.

130여명의 미감아들이 있었는데 가장 나빴던 것은 아이들의 식생활이었고 방한 시설도 형편없어 겨울에는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수녀들은 병원 당국에서 어떤 뚜렷한 대책이 없음을 알게 되자 평양교구 안 주교를 통하여 N.C.W.C(가톨릭 구제회)의 원조로 어느 정도 식생활을 개선하는 동시에 당시 까리따스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편물학원에 의뢰하여 털스웨터를 짜서 입히는 등 영적 교육과 아울러 할 수 있는 한 물적 혜택을 주도록 노력하면서 부모의 사랑조차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까리따스 특유의 가정적 정신으로 돌보았다.

한편 수녀들은 병원측 관계자들이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예산과 물건을 중간에서 빼돌려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맞서서 아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그들과 갈수록 어려운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과 함께 이 보육소의 국가운영이 강조되어 병원 측으로 이관되자 많은 아쉬움을 간직한 채 4년 반 정도 계속되었던 이 사업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교회와 역사 223호, 1993. 12. 25 : 22쪽)

1962. 베네딕도회가 성주성심의원을 개원했고, 1966년에는 베네딕도회가 대구 파티마의원을 설립했으며, 1946년에 발족한 서독구라회(DAHW)가 한국에 진출하여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에 주한 대표부를 설치했다.(가톨릭대사전 : 164)

1967년 8월 22일 작은 자매 전교회(Little Missionary Sisters)가 전라북도 고창에 나환자 마을 동혜원에 분원을 설치했다.(가톨릭대사전 : 993) 작은 자매 전교회 수녀들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 봉헌을 가장 가난한 이들 속에서 행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생활은 오직 하느님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가난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전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적인 우정의 분위기 안에서 사업을 하지 않고 그들의 가장 긴급한 필요성에 응답하는 봉사와 선물의 자세로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나누는 것입니다." 라는 회헌을 바탕으로 나환우들의 정착 마을에서 기도의 우월성과 작은 프라테르니타(형제애를 나누는 곳이란 뜻) 생활을 통해 형제애를 증거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봉사를 하기 위하여 작은 자매 전교회에서 서 이멜다 자매와 나 마리아 데레사 자매가 동혜원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고창 본당에 배 요셉 신부가 있을 때 시작하였으며 마을에 280-300명 정도가 있었는데 계발이 안되어 길도 없었고 외부에서의 도움의 손길이 없었으며 치료실이나 약품제공도 없어 개인적으로 치료를 하고 있었다. 수녀들의 이동이 있었으나 계속해서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산 17번지에 주거하고 있다.(작은자매전교회의 답신, 1998. 4. 23)

1967년 10월 18일 한국 가톨릭 나사업가 연합회(Catholic Leprosy Workers Association of Korea)가 1961년 창립한 한국 천주교 나사업협회의 뒤를 이어 재창립되었다. 이 연합회는 나병으로 신음하는 형제들이 자립 갱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사업을 하기 위해 발족되었다. 1968년 5월 한국 주교회의 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주요 사업내용으로는 신용조합 육성을 통한 자활지원, 부랑나환자들을 위한 정착마을 지원, 환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 등으로 전국 37개의 정착마을과 3개의 불구나환자들의 수용시설을 운영, 지원하고 있고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비롯한 11개 수도단체와 가톨릭 피부과 병원 등 11개 회원기간들이 진료와 정착사업을 돕고있다.(가톨릭대사전 : 1244)

1970년 2월 3일 나환자들을 위한 한국의 원조단체인 릴리회가 김광자씨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리고 1971년에는 벨기에의 나환자 원조재단인 다미안 재단이 안동에 한국지부를 설립했고 1974년에는 영주에 다미안 의원을 설립했고 성 골롬반 수녀회 수녀들이 봉사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164; 93)

(2) 아동복지

① 보육원

1915년 대구대교구에서 설립하여 운영해오던 백백합 보육원에서는 해마다 성장아들이 많아졌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들의 사회적 적응을 위한 교육과 결혼문제 등 새롭게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생겨났다. 때마침 1967년이래 사회복지 사업에 관한 국가의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보육원에서는 성장한 여아들을 사회에 진출시켜 사회인으로 경험을 얻도록 배려하는 국가의 시책에 준하여 해마다 성장한 아이들을 사회로 복귀시켰다.

한편 1968년부터 시청에서는 복지사업기관인 일시보호소를 대구본원과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운영을 하도록 요청했고 일시보호소에 대한 사무감사가 엄격해졌다. 그러나 이때는 마침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가 설립된 직후라서 재정상의 어려움이 많아 수녀원에서는 이를 보류해오다가 1969년 11월 17일에 시설의 운영을 독립시켰다. 그리고 백백합 보육원 분원도 독립분원으로 설립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902)

1915년에 매스트르 신부에 의해 설립된 영해회 고아원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다시금 피난생활이 시작되었다. 1950년 7월 16일에는 수녀원과 보육원을 모두 인민위원회에게 접수당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은 식량과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고아들을 데리고 충무로에 있는 가정보육사범학교 건물로 옮겨갔다. 거기서도 다시 쫓겨나 필동에 있던 이범석 장군의 저택에서 얼마간 지냈으나, 서울 탈환작전으로 필동일대가 불바다로 변하여 다시 명동의 본원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서울이 수복되어 안정되는가 싶었으나 12월 21일 중국 지원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다시 악화되었다. 이에 서울시 사회과의 지시로 10세 미만의 어린 고아들을 안양으로 소개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1951년 1월 20일 UN군 비행기의 오폭으로 안양에 소개되어 있던 50여명의 어린이들이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자 남은 아이들은 일주일 후 다시 서울 본집으로 들어와 지내면서 부족한 식량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 한편 1951년 1월 3일에 10세 이상의 아동들은 대구로 피난하여 성 요셉 식당의 유치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한편 전쟁 기간 중 서울에서는 영아원이 파괴되었으므로 전쟁 전에 격리실로 사용하던 건물에 100여명의 전쟁 고아들을 수용하여 돌보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던 120여명의 아이들은 1952년 9월 1일, 대구시 대봉동 173번지에 원사를 신축하여 이사하였다. 이렇게 서울과 대구에서의 고생을 하던 당시에는 미군들의 원조가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파괴된 서울 원사를 신축하기 위해 1953년 가을에 공사를 착공하여 이듬해 10월 7일 축성하였는데 연건평 330평의 3층 벽돌집에 110명의 아이들이 입주하였다. 1954년에 용산에 있던 아이들이 다시 명동으로 합해지고 1957년 11월 7일에는 대구에 있던 아이들도 전원 복귀하였다. 1966년 9월 24일에는 명칭을 '천주교 성 바오로 보육원'으로 변경하였다. 1969년 9월 23일에는 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천주교 쌘뽈 유지재단으로 명의를 이전했고 아동복지시설 인가를 갱신하였다.

이처럼 숱한 역경과 어려움을 헤쳐오며 수녀들은 어린이들을 사랑과 인내로써 양육하고 이들이 떳떳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돌보아왔다. 이미 보육원 초기부터 원내에서는 필요한 공부와 수예, 재봉 등을 가르쳐 왔고 1930년경부터는 좀더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여 유치반, 초등반, 중등반 등으로 나누어 일반 학교와의 유대관계를 맺어나갔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학령기에 달한 모든 아이들을 계성초등학교로 통학시키고 가능한 대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교육시키려 하였다. 또한 적령기에 달하면 교우가정에 혼인을 시키기도 하고 자립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은퇴한 후에도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곤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아보육사업은 차츰 방향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사회가 안정되면서 고아의 수는 점차로 줄어들었고 대신 양로사업이나 정신 박약아, 장애인 등과 같은 특수 사회사업에의 요청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변천 및 요청에 따라 사업 전환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남아 있던 81명의 원아들 중 9명은 연고자에게 인도하였고 3명은 국내 입양, 4명의 국외 입양, 가출 2명, 그리고 63명은 다른 사회복지기관으로 나누어 이주시켰다. 이렇게 하여 성 바오로 보육원은 1977년 9월 6일 폐원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995)

1946년 2월 10일 부산 교구 범일동 본당의 주임 정재석 신부가 해방 후 후견인 없는 어린이들을 본당 근처의 30평짜리 한옥에서 수용하던 '소화보육원'이 '소화영아재활원'(小花櫖兒再活院)으로 개칭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운영을 맡게 되었다.

한편 한국전쟁으로 부산은 피난민으로 붐볐고 소화 보육원은 서울과 대구의 수녀회에서 운영하던 두 보육원 아이들을 피난 수용하는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 전쟁기간동안 피난민들이 느는 만큼 고아가 늘어가자 정부당국의 후원자 은인들의 도움으로 급히 144명의 원사를 마련하였고 원아들의 보건위생과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의 진료를 위하여 부속 건물로 진료소도 지었다. 이것이 '데레사 의원'의 시작이 되었다.

소화보육원의 원아 수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늘어갔지만 시설은 날로 협소해졌다. 또한 본당과 학교 사이에 자리잡은 보육원은 보육환경이 부적당했고 이전 문제가 거론되었다. 부산교구청에서는 교구소속 대지였던 남구 남천동의 431평 대지에 새원사를 지어 1963년 9월 12일에 옮기게 되었다. 당시 보육원과 부속 데레사 의원의 운영권자가 모호하여 실무상에 애로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교섭한 결과 부산교구장 이갑수 가브리엘 주교는 1977년 3월 30일에 소화보육원의 운영권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에 정식으로 이양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943)

1946년 서울대교구가 불우아동 및 부상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성심원'을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설립하여, 그 운영을 파티마 성모 수녀원에 맡겼다.(가톨릭대사전 : 555)

1947년 8월 25일 강릉 본당의 주임사제 성 골롬반회 소속 제라프티(Brain Geraphty, 池) 신부가 '성심 보육원'을 세우고 60여명 고아들을 양육을 위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초청했다. 수녀들은 원아들은 대부분 남자 아이들이어서 이들에게 공부 이외에도 기술이나 밭농사를 가르쳤다. 한국전쟁 때에는 대구로 피난하여 원아들을 돌보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보육원 외에 본당에서 전교도 하였는데 점차 원아의 수가 줄어 1962년에 보육원을 폐원했다.(샬트르 100년사 : 967)

1951년 3월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1907-1971) 신부는 1·4후퇴 때 경기도 안양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가 수원으로 잠시 피해있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황인경 말가리다 수녀와 몇 명의 수녀들을 초청하여 청평 고아원을 맡겼다. 한편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회의 수녀들은 수원에서 아이들을 모아 서울로 상경하여 자하문 밖 윤현궁 별장에서 고아원을 운영하고,. 또한 소사에서도 아이들을 모아 황 수녀를 비롯하여 박동자 에메 드 마리 수녀, 최종희 토마스 수녀 등이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청평에 있던 고아원도 운영하게 되어 소사, 자하문 밖, 청평의 세 고아원에서 헌신적으로 일하게 되었다.

고아원 운영은 미군들이 많이 도와주었고 김명순 유스티나 수녀는 아이들에게 학습지도 및 교리 등을 가르쳤고 아이들을 인근의 중·고등학교까지 보내기도 하였다. 그 후 청평에 새 건물을 짓고 자하문과 소사에 있던 아이들을 모두 청평으로 모아 돌보았다.(샬트르 100년사 : 988)

1952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사회복지법인인 '덕산 신생원'이 설립되어, 요보호 아동을 수용, 보호하고 원생을 초, 중,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고 졸업 후에는 기술을 습득시켰다.(가톨릭대사전 : 555)

1952년 김영식 베드로 신부는 무의무탁한 전쟁고아 15명을 모아 '연백성모원'을 설립하였는데 전쟁이 끝난 무렵에는 고아가 120명이나 되었다. 점차 연로하게된 김영식 신부는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창설자인 방유룡(안드레아) 신부를 통하여 연백성모원을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맡겼다. 그리고 원아들의 보건후생대책과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위하여 1955년 6월 27일에 설립한 성모자애병원의 운영권을 보육원을 운영하고 원아들을 잘 보육하는 조건으로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이양하였다. 당시 집은 75평의 목조 2층 건물이었고 수용능력은 50명 정도 되었다. 보육원에는 여자들만이 있었고 많을 때에는 120명까지도 되었다.

1964년 병원 맞은편에 집 3채를 짓고 병원에서 분리되었다. 미군부대에서 두 채를 지어주고 당시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가 한 채를 지어주었다. 보육원 운영비는 성모자애병원과 N.C.W.C와 미군부대의 원조도 받고 시청에서 1인당 보리와 양쌀이 하루 3홉씩 나오는데 그것도 18세 이하만 배급을 주었다. 서 수산나 수녀가 영어를 잘하여 보육원 원아들에게 영어발음을 우리말로 토를 달아 노래를 가르쳐 미군부대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씩 노래를 불러주었으며 꽃꽂이도 하여 미군부대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원아들이 백여명이 넘을 때도 많았는데 식비보다 교육비가 많이 들어갔다. 원아들 중에 공부를 잘하면 대학까지도 시키고 그렇지 못한 원아들에게는 양재 편물 등 기술교육을 시켜 자립할 수 있게 하였다. 원아들이 전부 여아들이므로 수녀들은 특별히 신경을 써서 늦게 귀원하거나 늦게 외출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특별히 가정적인 교육을 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수녀들이 항상 원아들과 한 상에서 식사를 하고 원아들이 병이 나면 간호를 하였다.

그 후 미군부대의 원조가 끊어져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한 원아는 정신병이 생겼는데 수녀들이 3년 동안 정신병원에 데리고 다녀 완치되었다. 현재는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시는 옷도 흔하지 않고 제품이 많지 않으므로 수녀들이 옷도 만들어 입히고 간식도 만들어 먹였다. 수녀들이 미숙하나마 최선을 다해 어머니 역할을 하였다. 1978년 4월에 정부의 소수 수용기관 통폐합 정책으로 대부분의 고아들을 자립시키고 나머지 어린이들은 혜성보육원에 통합하게 되어 보육원을 폐쇄하였다.(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 1998. 4. 28일자)

1954년 8월 11일 김기봉(金基奉 필립보, 1914∼1967) 신부가 사회부장관으로부터 재단법인 성모건설원을 인가받았다.

북한 지역에서 사목하다가 부산으로 돌아온 김기봉 신부는 청학동 본당의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강당을 신축하여 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수녀원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어 영도 신성동 3가에 '성모 건설원'(聖母建設園이란 고아원을 설립하여 사회 사업을 시작하였다.

6·25 한국전쟁 중 최후의 거점이었던 부산에서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었고, 그런 중에 버려지거나 방황하는 아이들이 많이 생겨났다. 김기봉 신부는 그러한 아이들을 돌보아야겠다고 생각하여 영도 청학동 본당에서 신선동 본당을 독립시키는 한편 그 안에 고아원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먼저 신선동 3가 84번지에 있는 목조 건물을 매입하여 본당 신설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당시 신선동 3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 페트릭 데니어 특무상사의 협조를 얻어 황무지 930평을 정리하는 한편 1954년 8월 11일에는 사회부장관으로부터 재단법인 성모건설원을 인가받았다.

1955년 1월 1일자로 본당 승격된 신선동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김기봉 신부는 미군들의 협조를 얻어 1956년 11월에 건평 60평의 성당과 사제관을 낙성하였다. 이어 8월까지 고아원 원사 2동과 부속건물 2동을 완공하여40명의 원아들을 수용하였다. 원아들은 점점 증가되어 1956년 10월에는 70여명을 수용하였다. 그 후 성모건설원은 1957년 5월에 정부로부터 시설 기구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1959년 이후에는 정부 보조 및 의원 단체의 보조가 끊어질 우려가 보이므로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에 호소하여 많은 원조를 받았다. 그 결과 새 원사를 광안동의 대지에 신축하고 이듬해 10월에는 성모건설원을 신선동으로부터 이전하였으며 이때부터는 본당 사목생활을 마감하고 성모건설원에만 주력하였다.

1957년 8월 26일 운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대양중공업고등학교를 천주교 부산교구 재단에서 인수하자 대양 중고교(지금은 중학교만 남아 있음)의 4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1960년 5월 13일까지 교육사업에도 헌신하였다. 교훈은 충직, 진실, 덕망이었다. 특히 학교 내에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여 전교에 주력함으로써 수많은 학생들을 영세시켰다. 이어 1963년 1월에는 광안동 성모건설원 2층에 신경전문치료병원인 '성 필립 신경정신과'를 개설하였다. 정신신경 계통의 환자 치료를 목적으로 하였고, 나아가 거기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성모건설원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대지 165평, 건평 65평, 병실 10개, 침대 20개, 의사 1명, 조수 2명, 간호사 1명의 규모로 연간 9,89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당시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주임이던 오석환 교수가 담당의사로 초빙되었고 오석환 교수에 이어 팽갑주씨가 담당 의사로 근무하였는데 운영난으로 3년만에 폐원하였다. 병원의 일반 진료소는 병원 주위의 난민들의 구제치료 및 성모건설원 아이들의 치료를 하였다.

한편 1967년 4월 6일 김기봉 신부는 숙환으로 휴양 중이던 부산 광안동 성모건설원에서 선종하였다. 4월 7일 서품 동기인 최재선 주교의 집전으로 영결미사가 봉헌되었고, 부산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교회와 역사 208호, 1992. 9. 25 : 11)

1954년 9월 1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부산 동대신동에 한국전쟁 후 고아와 기아 및 혼혈아 등을 수용하여 양육 및 입양하기 위해 성모보육원을 설립했다.(그러나 특수아동의 수용보호 및 치료시설의 필요에 따라 1998년 12월 10일에 부산해운대구에 지체 부자유 영아의 재활치료 및 수용시설인 '아이들의 집'으로 그 목적을 변경하였다. 주요사업 내용은 부모가 없는 장애아동을 수용 보호하여 행복한 삶에의 원동력이 되도록 도우며, 또 갓난아기부터 보이타 치료를 집중적으로 하여 장애를 가볍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만 1세 이상 교육가능급 생활교육 아동에게 조기교육을 실시하여 인지능력을 높이고 지능개발을 돕는다. 또 개별적으로 언어지도를 한다. 1998년 2월 현재 정원 41명 중에 현 인원은 46명이고 시설은 대지 7,721㎡에 임야 23,502㎡이다. 마리아 동에는 경당과 아동방, 의무실, 치료실, 식당, 주방, 세탁실 등이 있고 요셉 동에는 사무실과 교육실, 그룹방 등이 있고, 강당과 놀이방이 설치되어있는 유희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매월 1,000여명 이상의 봉사자들이 아이들의 집에서 시설물과 정원 손보기, 밭일, 아이들 밥 먹이기, 주방과 빨래방 돕기, 시설물과 정원 손보기, 밭일, 그 외의 일들을 도와주고 있다.)(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복지시설 - 1998년 6월 11일 '아이들의 집' 담당 수녀의 답신)

1955년 전쟁 후 인천 교구 소사본당의 신성우(마르코) 신부가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어 번 돈과 인근 미군부대의 원조와 은인들의 도움으로 1954년 11월 28일 114평의 성당을 준공하고, '성가 보육원'과 양로원을 만들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야간학교도 설립하였다.(가톨릭대사전 : 680)

1963년 5월 대구에 요보호 아동들을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하고 퇴소 후에는 독립생계를 유지토록 자립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한국 SOS 어린이 마을'이 설립되었다.(가톨릭대사전 : 555)

SOS 어린이 마을이 한국 땅에 설립된 지 33년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임스트에 첫 SOS 어린이 마을이 세워진 후 유럽 외의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대구에 SOS 어린이 마을이 설립되었다. 1982년 설립된 서울 마을은 16명의 어머니들이 16가정을 꾸려오고 있다. SOS 어린이 마을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한 생애를 바치는 거룩한 사랑으로 인위적으로 맺어진 아이들을 형제, 자매로 키우며 하루 24시간 365일을 자기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만 전념한다. 마을에 오는 어린이들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가정을 잃고 주위로부터도 소외되어 버림을 받아야 했던 아픔과 상처를 지닌 체 마을 식구가 된다.

모든 어린이들은 아름답고 밝은 미래를 여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며 소망이다. SOS (Save Our Souls)어린이 마을은 소외되고 아픈 상처를 안고 마을로 오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심리와 정서를 치유해 주어 차별 없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찾아주며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고 어린이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을 되찾아 주어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시켜 준다. 나아가서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사회 안에 살면서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자기자신을 책임지며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성장하게 도와준다.(1998년 현재 서울마을에는 149명의 아동들이 자신의 SOS 어머니와 새로운 형제, 자매를 만나 잃어버렸던 가족의 사랑과 보금자리를 찾아 생활하고 있다. 중고생 남학생들을 위한 집으로 기숙사3동과 그 후에 자립을 돕기 위한 자립관 2동이 마련되어 있고 헤르만 그마이너의 사회복지관에서는 유치원을 운영하여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SOS 마을의 모습을 엮고 있다.)(서울 SOS 어린이 마을 - 1998. 4월 서울 SOS 어린이 마을의 답신에 의거)

대전 교구 라리보(원형근) 주교가 고아들을 모아 '애육원'을 설립하여 당시 대흥동 본당신부였던 오기선 신부에게 운영을 맡겼다. 오기선 신부가 대흥동 본당에 18년간 사목하다가 1965년 서울로 올라가게 되자 대전교구에서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수녀를 초빙하였다. 그리하여 김복남(아가다) 수녀와 여금순(세시리아) 수녀를 1965년 8월 10일 파견하였으며 김 아가다 수녀는 보육원 일을 하고 여 세시리아 수녀는 본당 일을 하였다.

수녀들이 처음 파견될 당시 원아동에는 4세에서 25세의 청년까지 있었으며 남녀 합쳐서 80여명 되었다. 취학전 아동이 10여명 되고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대학생까지 있었다. 1966년 대흥동 본당에 본당수녀로 공영숙(마리아) 수녀와 김선옥(루시아) 수녀, 윤영란(베드로) 수녀가 파견되어 정식으로 본당 일을 하였다.

김 아가다 수녀가 애육원에 처음 부임하여 갔을 때 아무 것도 없어 교우들에게 된장과 간장까지도 기증을 받았다고 한다. 김 아가다 수녀는 살림을 하나 하나 장만해 가면서 원아들에게 가정적분위기를 만들어 주어 가며 예모있는 사람으로 교육하였다. 1967년 애육원은 용전리로 이사하였다. 용전리에는 논과 밭이 있어 소, 돼지, 닭도 키우고 동물의 분뇨로 농사를 지으니 일년에 벼를 100가마정도 추수하고 콩도 심고 채소는 농사 짖는 것으로 풍족하게 먹였다. 여름에 오이는 매일 큰 광주리로 하나씩을 땄다고 한다. 교우들한테서 원아들이 입을 옷가지를 얻어 한 보따리 그득히 이고 논 밭길을 한시간 정도 걸어 애육원 가까이 오면 원아들이 뛰어나오며 반갑게 "지금 오셔유!" 하면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듯하였다고 한다.

1969년 9월 13일 애육원의 원아들이 갈마동의 프란치스코 수사원에서 하는 보육원과 합치게 되어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수녀들은 철수하였다.(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답신에 의거)

1964년 5월 까리따스 수녀회에서 농장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농장은 1964년 5월 전남 영암군 신북면에 임야 4만 7천 평을 매입하고 이를 개간하여 배, 포도, 복숭아 등의 과일 나무를 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4년 가까운 기간은 외부 사람에게 위임하여 관리했으나 1969년 11월부터 까리따스 수녀회에서 관리를 시작했다. 긴 수도복을 입은 수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는 모습은 인근 주민들과 함께 일하는 이들 눈에 이상하게 보였지만 그들도 차차 수녀들의 인애와 사랑을 알게 되어 신앙에 대해 나아가서는 수도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생활은 당시나 지금이나 의식 속에 박혀 있는 노동에 대한 그릇된 인식, 그로 인해 할 수만 있다면 농촌을 떠나려는 농민들의 마음 속에 노동의 가치와 일하면서 기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1971년에는 10,000여평의 주위 야산과 논 3,000여평을 매입하여 식생활을 해결하게 되었고 농장은 6만 여평이 되었다. 1972년에는 주위 농민들의 일손을 도와주기 위해 탁아소를 건립하여 256명의 어린이들을 모아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베풀면서 동시에 이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부모들까지 신앙을 갖도록 하여 농촌사목의 한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후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젊은 세대가 줄어듦으로 인해 어린이들도 줄어들어 1975년에는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해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오고 전화가 가설됨으로 인해 문화 혜택을 받게 되었다. 1970년 이후에는 매년 수련자들이 이곳에 2-3주씩 머물면서 수녀들의 일손을 도움으로써 노동과 자연 안에서 만남의 현존을 체험하게 되고 노동의 가치와 농민들과의 연대감을 재인식하는 소중한 기간이 되어 현재는 수련 프로그램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농장 사업을 통해 '일하는 것이 본회의 특징이다'라는 창설자의 정신을 되새기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을 통해 많은 경제적 도움을 받았지만 앞으로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수도회 정신을 살리는 사업들을 적극 뒷받침함과 동시에 농장 자체로도 해야 할 일을 모색하고 있다.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에 비해 지금은 일손 부족으로 적기에 손질을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안고 있지만 이는 농촌 전반의 문제이기에 젊은 회원들의 자발적인 투신과 희생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진단하고 있다.(교회와 역사 223호 22쪽-1993. 12. 25발행)

1973년 1월 31일 부산 송도(현 남부민동)의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소 신부)가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한 부산 소년의 집을 설립하고, 소년의 집을 운영할 '마리아 수녀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1975년 5월 5일에는 어린이 마을을 설립했다.(교회와 역사 67호 7쪽)

② 유치원

1952년 2월 1일 전주교구 대동 본당에 김재덕 신부가 임대 사용 중이던 대지 및 건물을 매입하여 구내에 성모당과 '성모유치원'을 설립하였다.(가톨릭대사전 : 1093)

1954년 4월 6일 1949년 대구교구에서 현 범어동 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1951년 성당을 신축하고 계산동 본당 소속 공소를 범어동 성당으로 승격시켰다. 초대본당주임 권영조(마르코) 신부가 1954년 4월 6일부터 샛별유치원을 개원하여서 가톨릭적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샬트르 100년사 : 905)

대전교구 대흥동 본당에 파견된 서울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은 희망의원(현 성모병원)의 일을 돌보기 시작했고, 1956년에는 대덕군 산내면에 교회묘지를 조성, 1957년에는 '소화(小花) 유치원'을 개원하였다.(가톨릭대사전 : 279)

1956년 12월 4일 하양. 본당 주임 이임춘(펠릭스) 신부의 초청으로 서울에서 공순옥 마리 헬렌 수녀와 강봉순 로렌죠 수녀가 전교와 유치원을 담당하기 위하여 부임하였다. 수녀들은 신부의 뜻을 따라 마을 중앙에 성가진료소를 조그맣게 개원하게 되어 간호수녀 1명이 추가 파견되었으며 1961년 본당 증축에 잇따라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1963년에는 강당과 유치원이 신축되어 소화유치원 설립인가를 받았다.

하양은 농민이 많은 소규모의 읍이라 운영상의 애로점이 많아서 1968년 성가진료소는 문을 닫아 의료사도직을 그만 두게 되었고, 1969년에는 유치원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1975년 신학기에 유치원을 다시 개원하여 평신도가 운영했는데 1977년 2월에 본당신부의 요청으로 유치원수녀가 다시 부임하게 되었다. 1977년 3월부터는 무학중고등학교 종교과목을 담당하면서 본당 일도 도울 수 있는 수녀가 파견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918)

1964년 4월 서울대교구 영등포 본당에 '샛별유치원'이 개원했다. 1945년 11월 서울대교구 영등포 본당 박일규(朴一奎 안드레아) 3대 주임신부가 부임한 후 청년회원들이 주동이 되어 영청보(永靑報)를 월간으로 발행하는 한편, 대건상사(大建商社)라는 이름의 천주교 복지센타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던, 영등포 본당은 1963년 10월 구로동 본당을 분할하고, 이듬해 4월에 샛별 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68년 3월에는 불우 청소년 교육을 위한 애전 고등 공민학교를 구 성당에 개교하였다. 1970년 11월 박성종(朴成鍾 프란치스꼬) 신부가 13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뒤 본당 평협과 부인회가 조직되었고 1973년 여름에 인근 수재민 2,600여명을 애전학교에 수용하고 구호의 손길을 펴기도 했다.(한국가톨릭대사전 : 828; 교회와 역사 74호 6쪽)

1970년 2월 28일 부산 성 베네딕도회의 수녀들이 '분도 유치원'을 설립했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회헌 '봉사' 부분에 "우리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돌보며 가르친다."(회헌 4,33)고 되어 있는 것처럼, 어린이들이 맑은 웃음과 밝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사랑과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복음선포의 가장 효율적이며 바람직한 방법 중 하나이다. 이러한 취지로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는 주의환경이 삭막하고 놀이터가 없어서 거리에 방치된 어린이들이 마음놓고 뛰어 놀며 학습할 수 있는 장소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 2월, 2반으로 편성된 분도 유치원을 본원 울타리 안에 개원하였다. 주변에 큰 주택단지가 형성됨에 따라 유치원을 찾는 어린이들이 점차 많아져 1972년과 1974년, 1976년에 각각 1반씩을 증설하였다. 유치원은 점차로 정성이 깃든 알뜰한 교육의 장으로, 사랑을 쏟는 어린이 동산이 되었다. 분도 유치원은 수녀원 울안의 모든 장소가 어린이를 위한 자연학습장이 되어 산과 나무, 채소밭, 꽃, 새와 곤충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이 시내에 널리 알려지자 해마다 원아모집 때가 되면 많은 학부모들로 붐볐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수녀원 주변에 있는 가난한 어린이들에게는 입학의 문이 좁아지는 등 본래의 취지에 맞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수녀원에서는 인근의 어린이들에게 놀이터를 개방하기 시작하였고 1976년 5월에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수녀원 경내에 '성 분도 어린이집'을 개설하였다.(그러나 한 울타리 안에서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분리 운영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했다. 이에 1978년에는 어린이집을 분도 유치원에 통합하여 유치원 5반 중 1반은 보육료를 감면 받는 어린이들로 편성하였는데, 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그 이듬해부터는 통합하여 5반을 고르게 편성하였다. 1982년에 분도 유치원은 새로 지은 은혜의 집 1층으로 옮겼으나 도로 가까이에 있어 사고의 위험이 높고 터마져 떨어져있는 데다가 수녀원 경내의 좁은 자연환경이 아쉬워 2년만인 1984년에 다시 옛 건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후 건물이 너무 낡아서 1990년 7월 19일부터 개축공사를 시작하여 9월 4일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하였다.)(부산 성베네딕도 은혜 60년사 : 454)

1970년 7월 8일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이 성남에 사회복지 법인 성체회를 설립하면서 '새싹 어린이집'을 설립했다. 1970년경 서울 청계천에 철거민들이 성남으로 피난 와서 살게 되었다. 그때에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생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어른들은 맞벌이 부부로 일터로 나가거나 또는 부모가 질병으로 앓고 있는 가정의 어린이들을 인보성체수도회의 수녀들이 돌보기 시작하면서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처음에 천막을 치고 어린이 260명에게 점심과 간식을 만들어 먹였다. 정부에서 쌀,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를 보내주어서 매일 밥, 빵, 수제비, 과자를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목욕시키고 손톱을 깍아주고, 머리를 잘라주는 신변보호, 지도뿐이 아니라 교육을 더불어 하면서 하루종일 어린이와 같이 지내게되자 일손이 필요해서 일반교사를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에 150평의 건물을 증축하여 식당과 교실 3개, 부엌을 건축하였다. 이곳에서 자란 어린이는 학교에 가고 해마다 새로운 어린이는 어린이집에 들어오고 있다. 새싹어린이집은 인보성체수도회 전 회원들의 노력의 성과인 창립인가 10주년 기념 바자회의 수익금과 모금액의 일부로 10월 28일 원사 기공식을 갖고 12월 12일 520명의 어린이와 귀빈학부형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였다. 설립당시는 '새싹 어린이집'이라고 명칭하였고 1998년 현재는 성체 유치원이라고 칭한다.

근로 또는 질병으로 인하여 아동을 보호할 능력이 결여된 보호자의 아동을 입소하여 시설생활을 통하여 집단생활을 경험하게 하고 부모를 대신하여 아동을 양육함으로서 아동의 복지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며 유용한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함을 목적으로 한다. 어린이 생활지침은 첫째 어린이들에게 생활을 통하여 집단생활을 경험하게 하여 보살펴주고 개별적인 필요를 만족 시켜줄 수 있도록 협력해 준다. 둘째 정서적 안정감을 조성케하여 심신이 조화있게 발달되도록 도모한다. 셋째 세심한 주의가 미친 환경 속에서 어린이의 건강, 안정등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습관과 태도를 올바로 길러준다. 넷째 적극적인 활동을 촉구하여 자주 및 협조정신을 배양한다. 다섯째 생활면을 통한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하여 흥미와 관심을 갖도록 한다. 여섯째 사회 생활에서 필요한 언어 동작을 정확히 익히도록 한다. 일곱째 각 개인의 특성을 중요시하여 창의력 개발에 힘쓴다. 여덟째 실생활을 통해 사고 능력의 기초를 닦는데 노력한다.

성남 성체 유치원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창립자 윤을수 신부의 말씀을 따르고 있다. "남을 대할 때 행동이나 태도가 언제나 유쾌하고 온화하고 그리고 평화스럽고 재미있게 상종하라.", 그리고 사목활동 할 때 "음식에 굶주리고 병고에 신음하고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쓸 수 있는 재주, 기능, 시간 등을 이용해서 정신적 위안을 주고 물질적 후원을" 당부하였고 그 말씀을 생활 속에 잠재하고 있다.(나눔지 3호 2쪽-1977. 2. 22발행; 가톨릭대사전 667; 성체회의 복지시설-1998. 4월 성체 어린이집 수녀의 답신)

1971년 6월 5일부터 군인가족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김계춘(金啓春 도미니코) 신부가 '장미유치원' 설립하고 운영을 샬트르 수녀회에 맡겼다. 장미 유치원은 군인가족의 자녀들을 위해 시작되었다. 군인가족은 자주 거주지를 이동하게 되므로 어린이 교육이 소홀하게 되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한 문제점을 안게 되며 가족의 신앙교육도 어려운 점이 많아 1971년에 당시 군종의 김계춘 신부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유치원 설립준비를 하였다. 곧이어 이소동 장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71년 봄에 유치원을 짓고 '장미유치원'이라 칭하였다. 이외에도 비품 등 설비를 위해 소종철 참모총장은 피아노와 집기류 등을 기증하고 원호담당관과 장교회에서도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1년 6월 5일부터 임계신 수녀가 출퇴근하며 유치원 교육을 담당하였고 6월 22일 2학급 운영 승인 인가를 받아 2학기부터 군인자녀들을 입학시켜 39명의 첫 해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71년 9월 2일에는 건물 낙성식과 개원식을 정식으로 갖고 관리권을 수녀원에 위임한다는 계약을 문서화하였다. 군인자녀가 80%를 차지하는 장미유치원은 원생들이 자주 이동되는 특수성 때문에 학기초에 정원을 초과하여 입학시킨다. 연령별 학급편성과 교사의 증원이 요청되었으나 교육비를 인상할 수 없고 입원대상 아동이 지역상 한정되어 있으며 이동이 잦은 관계로 실시치 못하던 중 1989년 군인아파트가 대전으로 이전함과 더불어 유치원과 아파트 사목을 위해 파견된 수녀들은 1988년 12월에 귀원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1004)

1971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Order of the Blessed Korean Martyrs)의 방유룡 신부가 '복자유치원'을 개원하여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에 그 운영권을 위임했다.(가톨릭대사전 : 1259)

1972년 10월 4일 노틀담 수녀회는 부산지역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수녀원 아래 식당을 교실로 개조하여 아미동에 거주하는 불우한 환경의 어린이들 24명을 돌보아 주는 것으로 '노틀담 유치원'을 시작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가정의 자녀들과 직장 여성의 자녀들을 우선적으로 받아 교육함으로써 수녀회의 고유한 목적과 방법에 따르는 조기 교육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차츰 학부모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원아수가 급증하여 1974년 7월 16일 유치원을 신축하여 축성식을 거행하고 감사 미사를 봉헌하였다.(교회와 역사 226호 16-1994. 3. 25 발행)

1975년 3월 노틀담 수녀회가 '오산 어린이집'을 개원했다. 1972년 3월 18일 오산읍 창학리에 10,230평 대지를 구입하여 노틀담 수녀회에서는 오산 수녀원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각 가정을 방문하여 어머니들이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과 지역사회의 요구를 듣고 사도직의 방향을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가난한 농촌 주민들의 자녀, 직장을 가진 어머니와 인근 공장 직원들의 자녀들을 맡아 돌보며 아울러 주변 농촌지역에도 관심을 주어 수녀들이 직접 나가서 어린이들을 지도하기로 하였다. 1975년 3월에 유치원 건물을 준공한 후 정식인가가 나기까지 약 2년 동안 '어린이집'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1976년 9월 1일 오산읍에서 떨어진 서리에서 '이동 어린이 집'을 개원하여 그 곳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봉사하게 되었다.(교회와 역사 226호 16-1994. 3. 25 발행; 가톨릭대사전 : 254)

(3) 교육복지

해방 후 마산 완월동 본당 박성춘(레오) 신부는 학원 건물을 이용하여 성지여자중학원을 설립, 3학급의 인가를 받았으며 본관 신축을 목표로 미군부대에 원조자재를 요청하는 한편 학교부지에서 캐낸 화강석을 다듬어 공사에 착수하였다. 1949년 5월 28일 박성춘 신부는 성지학원을 여자중학교로 승격시킬 목적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구천주교유지재단 이사회를 거쳐 문교부의 정식인가를 얻어 성지여자초급중학교의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6월 20일 개교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임시 휴교 중 12월 12일 김영호(金永浩 멜키오르, 1912-1978) 신부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2월 25일에는 성탄축하 음악, 연극을 수녀 반주로 시민극장에서 2일간 공개하여 시민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1951년 7월 김영호 교장신부는 어려운 재정 아래 힘겨운 노력으로 미 해병대의 보조를 받아 중지된 공사에 착공하여 석조건물 본관 10개 교실을 완공하였고, 8월 31일에는 대한민국 교육법 개정에 의하여 3년제 6학급의 여자중학교로 인가 받고 9월에는 성지여자고등학교를 부설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1952년 4월 15일에는 성지여자고등학교로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김영호 신부가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여 중·고를 겸임하였다.

1957년 11월 제 3대 정삼규(鄭三圭 요한) 신부가 취임한 후 교사증축에 전력을 기울여 구 체육관과 학교 관리실, 도서실 등을 준공하였다. 도서실에 큰 관심을 가진 정의순 베드로 수녀의 운영으로 도서관교육 우수학교로 인정을 받았으며 1960년도부터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서무과장직을 맡게 되었다. 1961년 학생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윤필순 쟌 마리 수녀가 제 4대 교장에 취임하게 된다.

1965년 2월 부산교구에서 마산교구가 신설 분리되어 부산 데레사여중고와 마산 성지여중고의 교장 교감이 교체되어 성지여중고의 제 5대 교장에는 김재석(金在石 요셉) 신부가, 교감에는 김영옥 이냐시오 수녀가 부임해 왔으며 김재석 신부 재직 당시 마산교구 김수환 주교 성성식이 성지학교 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다음 해 12월 김영옥 수녀가 제 6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중학교 6교실에 증축되었다.

1968년 2월제 7대 교장으로 최계주 골롬바 수녀가 취임하여 현 성지분원 건물을 새로 지어 이사하였고 철거한 구 수녀원 자리에 고등학교 별관 3층 14개 교실을 신축하여 고3 진학반의 학업 분위기를 높였다. 1970년 12월에는 고등학교 24학급의 증설인가를 받았고 이듬해 8월에는 현 도서관 4층 교사를 준공하였으며 기숙사 운영으로 배드민턴 선수의 숙식 제공 등 학교전반에 걸친 알찬 발전을 기하였다. 1973년 3월 제 8대 교장에 박정희 엘리사벳 수녀가 취임하여 첫 사업으로 완월동 성당 부지매입에 협조하여 학교 내에 자리하고 있던 성당을 학교에서 쓰고 본당성당을 신축 이전하기로 결정하였고 학교 내에 있던 주교관도 문화관으로 이전하였으며 구 체육관이 배드민턴 연습과 시합에 부적당함을 절감하여 체육관을 지어 선수양성에 전력하였다. 구체육관은 개조하여 가정실습실, 인쇄실, 도서관으로 사용하였다. 1975년 12월에는 고등학교 33학급의 증설인가를 받아 본관 석조 3층을 지었다.(샬트르 100년사 : 954)

한편 해방 이후, 북한에 있는 그리스도교 계통의 모든 교육 기관들은 공산정권에 의하여 제약을 받거나 폐교되었다. 원산본당의 경우, 원산 본당의 탁 파비안 신부가 거리에서 소련군 장교에게 체포되어 7시간의 심문을 받고, 아무런 혐의가 없음이 밝혀진 후에, 그래도 주어진 한계 내에서는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탁 신부는 1945년 9월, 주민들이 간절히 원하던 여성 교육 기관인 '효성 가정여학교'를 창설하였다. 원산의 해성학교 교사는 소련군 당국으로부터 그들의 자녀를 위한 초등학교와 기숙사로 징발되었으므로 수녀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사는 협소한 호수천신학교뿐이었다. 학교의 교장직은 이 보니파시아 수녀가 맡게 되었고, 재단 이사장직은 탁 파비안 신부가 맡았다. 학교의 창립자는 탁 파비안 신부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이전부터 이 보니파시아 수녀는 한국 여성의 교육을 이상적으로 전개해 나갈 교육 기관 설립을 늘 꿈꾸어 왔었다. 그러나 공산 치하에서 이러한 교육적 이상을 실현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한때는 제 후밀리타스 수녀와 청원자 이 마리아가 교사로서 함께 활동하였으나 모든 교직원이 미 신자들이었고 더욱이 공산 정권 하에서는 신앙 안에서의 이상적인 여성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2년제인 이 가정 학교는 겨우 1회의 졸업생을 배출시킨 후 1947년 가을 폐교되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공립학교에 편입되었다. 이후 학교 건물은 수녀원에 통지도 없이 공산정권 관리의 양성을 위한 학교로 징발되었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50)

1945년 인천교구 답동본당의 6대 임종국 신부가 부평의 소화 고등여학교를 인수받아 인천 박문중학교로 개편하고, 여자 중고등학교도 병설하였다.(가톨릭대사전 : 270)

1946년 1월 14일, 수원교구 북수동 본당에 1934년에 4년제 소화학술강습소로 창설된 소화 초등학교가 정식 인가를 받았다.(샬트르 100년사 : 874)

1951년 8월, 1901년 안성본당의 초대주임사제인 공베르(A. Gombert) 신부가 세운 안법학교가 1912년에는 여자부를 신설했고 발전하여 안법고등학교로 개교했다.(한국가톨릭대사전 : 775)

1946년 서울대교구의 동성중고등학교가 6년과정 인문계 중학교로 개편되었다.(가톨릭대사전 : 309)

1946년, 1909년 프랑스 선교사 라크루(Marcellus Lacrouts) 신부가 제주도에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인 신성학교가 1916년 일제의 우민화정책에 따라 탄압을 받고 무기휴교를 당했다가 1964년 신성여자중학원으로 재 개교하였다. 1953년 고등학교를 병설하였고 1977년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800번지의 현 교사로 이전하였다.(가톨릭대사전 : 766)

1950년 6월 25일, 1895년부터 약현 (현 중림동) 성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약현서당이라는 교육기관이 1901년에는 두세(Doucet)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고, 1906년에는 남자학교 건물을 새로이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학교라고 하다가 1909년 가명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는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던 가명학교가 .1927년 가명 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하여 폐교되었다.(가톨릭대사전 : 4)

1952년 7월 수원교구 서정리 본당의 3대 주임사제 유수철(도미니꼬) 신부가 부임하여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야간학교를 개설하였다. 1953년 5월 유 신부는 효명중학교(曉明中學校)를 설립하고 1955년 미839부대의 지원을 얻어 285평의 교사를 증축, 그 뒤 고등학교까지 병설하여 실업계공업학교를 거쳐 종합학교로 발전시켰다.(가톨릭대사전 : 598)

장호원본당 제6대 주임인 파디(Pardy, 1893-1938) 신부는 당시 장호원에 공립인 남자중학교만 있을 뿐 고등학교가 없는 것을 보고 전교를 위해서도 남자 고등학교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학교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52년에 매괴상업고등학교의 기성회가 결성되고 1953년에 1학급 73명의 학생이 입학하였으며 교사는 6명이었다. 그러나 교실이 없었으므로 매괴국민학교의 교사를 이용하였다. 1954년 매괴상업고등학교로 인가를 받고 학급도 6학급으로 늘어나자 1958년에 한·양식 성당과 사제관 및 한국 전통의 돌담을 헐고 그 자리에 학교 건물을 지었다. 그러다가 1965년에는 남학생 모집을 중지하고 매괴여자중학교 인가신청을 냈는데 남학생만을 모집하기로 구두로 결정했던 장호원 공립 중학교의 교장이 갑자기 이동되자 그 결정이 무효화되어 장호원 중학교에서도 여학생만을 모집하게 되었다. 이에 두 학교 모두 여학생만을 모집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미 인가신청을 냈고 또 남녀공학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운영상에 큰 곤란을 겪으면서도 1966년 3월, 128명의 학생으로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교명과 거행되었다. 11월에는 매괴상업고등학교를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교명과 학칙을 변경하였다. 매괴상업고등학교는 1967년을 마지막으로 제12회 졸업생을 내었고 1970년에는 학칙변경 후 첫번 여학생 졸업생을 내었다. 교명은 바꾸었지만 졸업횟수는 그대로 계승하여 제 13회 졸업생으로 하였다.

또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은 취업을 위한 실력향상뿐만 아니라 천주교 학교의 특색인 종교교육에 중점을 두어 중1부터 고3까지 매주 1시간씩의 종교수업이 있고 또 한 시간씩의 예비자 교리 또는 신자 재교육을 실시하여 매년 약250여명의 영세자를 배출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856)

해방 직후 1945년 12월 29일 범일동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정재석(鄭在石 요셉) 신부는 학교 설립의 뜻을 가지고 후원자들을 모으고 기성회를 조직하여 팔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어려운 상황으로 학교설립을 위한 기도는 무산되고 이듬해인 1946년 3월 성당 구내에 소화보육원을 설립했다. 한편 당시 항구도시 부산은 귀환동포 속에 섞인 고아들이 많았으므로 해가 거듭됨에 따라 원아들의 수가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피난민으로 초만원을 이루자 보육원의 수용능력은 한계에 다달았고 환자 치료문제가 대두되었다. 정 신부는 1951년 10월 관계 당국의 협조를 얻어 데레사 진료소를 설립하여 원아들의 건강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특히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도 치료, 투약함으로써 봉사하였다.

1951년 1·4 후퇴 후 부산은 다시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공지는 도로변 산중턱까지 판잣집으로 뒤덮였다. 당시 서울에서 온 중학 이상의 각종 학교는 학생들의 임시 수용을 위해 각양각색의 가교사를 세웠는데 이때 범일동 성당 구내에는 교장 박순경 루시아씨에 의해 서울 수도여자 중고등학교의 가교사가 서게 되었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고 정부가 환도하자 피난학교들도 환교하게 되었다. 이때 정 신부는 수도여고 가교사를 인수하고 교직원을 확보하여 1954년 4월 20일 학생을 모집했고 교명을 데레사 여자중고등학교라 하였다. 이 학교는 같은 해 5월 10일에 중학교 3학급 고등학교 2학급인 160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그 해 9월 1일 정 신부는 노력 끝에 문교부로부터 중학교 9학급 고등학교 6학급의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정 신부는 시내 대학교수 여러 명을 강사로 초빙하는 등 데레사 여고를 명문으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교사들도 사명감을 가지고 학교교육을 위해 심혈을 바쳤다. 당시 학생들에게는 점심시간에 우유를 끓여 공급하였는데, 소화보육원 수녀들이 협력해 주었다.

1955년 8월 1일 정 신부와 교직원들은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 교실 14개를 신축했고, 1956년 3월 1일에는 범일동 가교사를 떠나 수정동 신축교사로 이사했다. 1957년 5월 30일 부산교구가 대구교구에서 분리됨으로써 부산교구유지재단이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인 최재선 주교가 취임하였다. 데레사 여자중고등학교는 부산교구 유지재단에서 운영 관리하였고 정 신부가 7월 10일 다시 제 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정 신부는 당시 신설된 부산교구를 위해 할 일이 많았으므로 학교 실무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를 초청하여 전담시키기로 내정하였다. 그 당시 학교는 교사수녀의 부족을 메우기 위한 최재선 주교의 착상으로 여러 회의 수녀들을 강사로 채용하게 되었는데 복자회에서 가정과, 분도회에서 음악과, 프란치스코회에서는 영어과를 담당하는 국제 수녀학교를 방불케 하였으나 박정희 교감수녀의 지도 하에 서로 협조함으로써 활기 넘치는 학교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59년 9월 범일동구역에 본관 5층 22개 교실이 완공되어 이전함으로써 산위 가교사 신세를 면했다. 학교분원은 보육원분원의 큰 마루방 하나를 얻어 침실과 공동실로 사용하였고 공지에 온돌 하나와 부엌을 만들어 침실 겸 식당으로 사용하는 등 옹색한 살림살이였으나 성당과 시장이 가까워 편리한 점도 있었다.

데레사 여자중고등학교는 교통이 편리하고 학교시설 등 교육환경이 갖추어진 범일동 본교사로 이전한 후부터 우수한 학생모집, 교원책용, 가톨릭 이념에 충실한 인문계 여자고등학교로서의 면모를 점차적으로 갖추게 되었다. 1972년 3월에는 문교부 시책에 따라 중·고교가 분리되므로 정의순 베드로 수녀가 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윤필술 쟌 마리 수녀가 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중고교 교장 겸임시대의 막을 내렸다.(샬트르 100년사 : 934)

성심 수녀회(Society of the Sacred Heart)가 서울 원효로의 옛 예수성심신학교 및 성당 건물을 인수하고 1957년 2월 12일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57년 4월 18일 성심여자중학교의 첫 입학식을 가졌다. 1960년 3월에는 성심여자고등학교가 개교하는 한편, 1963년 성심초등학교, 1964년 성심여자대학이 각각 서울과 춘천에서 개교하였다. 대학이 설립되면서 아울러 가난한 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서울 관악구 봉천4동 76번지에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천막학교를 개설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하였다.(한국가톨릭대사전 : 649)

그후 1971년에 성심여자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3대 학장 노에노트백(Maria Noe-Nordberg) 수녀는 이 천막학교를 좀 더 전문화하여 지역사회 부랑아와 가난한 이들에게 타자기 수리와 무선 통신 교육을 시켜 면허를 취득하도록 하기 위한 '돈 보스꼬의 집'을 설립했다. 이곳이 1973년에는 '성심여자대학 부설 사회사업실습 연구원'으로 그리고 1975년에는 성심여대 부설 사회복지관(초대관장 김융일 교수)으로 개명되어 학교 사회사업과 지역사회복지를 하고 사회사업학과생들을 실습시키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봉천여중생 중 문제학생을 대상으로 한 특별지도와 저소득층들을 위해 부업알선과 기술지도, 생활자금대부 등을 하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했다. 이 사회복지관은 1975년 성심여자대학이 부천으로 이사하면서 1976년 폐쇄되었으며, 성심여자대학(현 가톨릭대학교)의 사회사업은 1992년과 1995년에 각각 부천시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는 '춘의'와 '한라' 종합사회복지관으로 연결되었다.(1998년 10월 30일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김중실 학생과장의 답변; 1998년 11월 10일 성심수녀회 답신)

1957년 5월 계성여자중고등학교의 운영권이 서울교구로부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로 이관되었다. 수녀들의 수고로 1958년 10월 11일에 성지관의 낙성을 보았다. 성지관이 낙성될 무렵의 학생 수는 중학교 15학급에 930명, 고등학교 10학급 583명으로 모두 1,513명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도 계속적인 학급증설이 불가피하게 되어 1961년에는 본관 3층이, 1963년에는 성지관 4층이 증축되었고 1973년에는 성미관이 완공되었다. 한편 내실에도 힘을 기울여 훌륭한 교사진의 확보를 중요하게 여겨서 제9대 조규옥 마리 안젤리카 교장은 교사들의 처우를 점차적으로 개선하여 타학교에 비해 파격적인 대우를 해 줌으로써 훌륭한 교사들을 많이 영입할 수 있었다. 1969년 3월에 중·고교가 행정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중학교 초대 원장으로 고영희 뻬르뻬뚜아 수녀가 취임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각종 교육제도의 개혁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고 이 영향으로 학교도 여러 면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고등학교 평준화로 학력 면에서뿐만 아니라 종교교육면에서도 이질화가 나타났으나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종교교육의 활성화에 꾸준히 힘써 교직원의 대부분이 입교하였고 매년 세례를 받는 학생도 증가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799)

1954년 광주 교구장 현 헤롤드 주교는 살레시오회 선교사 신부인 마르텔리 신부를 비롯한 살레시오 수도회를 광주에 초청한 후 1958년에는 가톨릭 여성교육을 위해 성 요한 보스꼬의 예방 교육 정신에 따른 전인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시작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선교사 살레시오 수도회의 지부장인 Archimede Martelli 신부가 전남 광주에서 1958년 여자중학교를, 그리고 1961년에는 여자고등학교를, 1963년에 살레시오 초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설립당시의 규모는 초등학교는 12학급이었고 중학교는 9학급, 고등학교는 9학급이었다.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Da mihi animas cetera tolle") 라는 돈 보스코의 설립목적에 따라 소외되고, 가난한 청소년들이 정직한 시민, 착한 그리스도 인이 되도록 교육하고 있다.(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1998. 4월 살레시오 수녀회의 답신)

1958년, '박문학교' 제3대 교장으로 박영숙 데오판 수녀가 취임하면서부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을 위임받았고 제 4대 교장인 이밀마 데레사 수녀 때 남녀 병설 12학급으로 인가 받으면서 안정된 환경 속에서 계속적인 발전을 해나갔다. 1961년부터 다시 인천교구에서 학교운영을 맡게 되자 수녀들은 계속 머무르며 교사 혹은 서무로서 일하였다. 그러다가 1977년 3월 2일에 제 10대 교장으로 이종후 빌뚜데스 수녀가 취임하여 제 3대, 제 4대의 수녀교장 이후 약 15년만에 다시 수녀가 학교운영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해 6월에 도서실을 개설하였고 1981년 11월에는 12개 교실을 증축하여 학교시설을 확장하였다. 이듬해에는 교내방송국을 개설하였으며 1984년 12월에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명문사학으로서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학부형들의 참여와 활동 또한 대단하여 인천시내학교 어머니 글짓기 대회, 어머니 합창대회, 어머니 배구대회 등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하였다.

1988년 2월 최 루시아 임마꿀레 수녀가 제11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현재는 교육시설을 완비하고 특별히 예능교육, 정보처리기능교육, 조기영어교육 등을 실시하면서 기초학력을 신장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또 매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담임교사들이 직접 맡고 있어 신앙생활과 실생활과의 연결 및 품성교육을 겸하고 있으며, 천주교회 학교의 특성을 잘 살려 나가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860)

1959년 2월 성신대학이 가톨릭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성모병원도 가톨릭대학 의학부 제1부속병원으로 병원명을 바꿨다.(가톨릭대사전 : 18)

1960년 3월 15일 충남 천안시에서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의 방유룡 신부와 공동 창설자인 윤병현(안드레아) 수녀가 복자정신과 순교정신을 현양하고 전인교육에 의하여 미래의 민족운명을 좌우할 여성교육을 담당코자 복자여자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61년 3월 8일 설립인가를 받고 1961년 4월 4일 중학교를 개교했다. 1962년 3월 31일 김정진(바오로) 신부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63년 3월 2일 복자여자고등학교를 개교하게 되었으며 제2대 교장으로 백남익(디오니시오) 신부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71년 개교 10주년 때는 사회전, 바자회, 주산 타자 경기를 하였으며 무용, 음악, 연극 등 예술제도 하였다. 1974년 제4대 교장으로 양위순(아가다)수녀가 취임하였으며 상고, 가정과를 모두 인문 고등학교로 변경인가 받고 학급도 증설하였고 1976년에는 중·고등학교를 분리, 운영체제에 들어갔다.(가톨릭대사전 : 1260; 한국순교복자 수녀회-1998. 4. 28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

1961년 12월 19일 논산 부창동 본당 생제신부가 중·고 각각 6학급씩 설립인가를 받아 1962년 3월 9일 해성 여자중고등학교로 개교했다. 1952년 전투가 소강된 상태에서 육군 제2훈련소가 논산에 위치하게 되면서부터 논산군의 인구는 급격히 팽창하여 20만으로 불어났고 읍내 인구만도 3만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논산에는 여학교가 없어서 여학생들은 멀리 대전으로 또는 20리 떨어진 논산보다 작은 강경으로 통학해야 했다. 주민들은 계속 도청에 여학교를 설립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냉담한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힘에 벅찬 여학교 경영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에 천주교 재단의 대건중고교가 새 교사로 신축 이전하면서 구 교사가 남게되자 당시 논산 부창동 본당의 생제신부가 여학교를 시작할 것을 착안하고 이를 추진하다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이 사업을 의뢰하였다. 수녀원에서는 이 학교를 이양 받기는 하였으나 그 당시 학교를 위한 인력, 재력의 지원을 해 줄 형편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침 전주 성심여중고에서 철수하게된 3명의 수녀들이 오게되어 개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인력자원이 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848)

쌘뽈 여자 중·고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논산은 개교당시 교통수단이 매우 불편할 뿐 아니라 제2훈련소의 설치로 급격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활지도가 큰 문제로 등장하였으므로 학교에서는 기숙사를 실비로 운영하여 원거리 통학생의 편리를 도모하는 한편 다른 지방에서 온 많은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돕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를 알게 된 당시 충남교구장 라리보 주교가 기숙사를 위해 140만환을 기증해 주어서 1962년 5월 31일 축성식을 마치고 학생들을 입사시켰는데 위치는 현재의 강당 앞부분이었다. 그 당시 입사비는 2,000환, 월사비는 13,000환이었고 수녀들과 가깝게 생활한 까닭인지 후에 이곳을 거쳐 수녀가 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워낙 건물이 낡고 위험해서 계속 학생들을 받기가 곤란하여 입시생수를 단계적으로 줄이다가 1979년에 폐사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850)

부창동 본당과 한 울 안에 있어 긴밀한 관계아래 서로 도와가며 생활하고 있는 쌘뽈 여자중고등학교는 한때 송구부와 무용부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고 완전 개가식 도서관은 충남에서 손꼽히는 우수한 도서관이며 방송실은 TV를 통한 학습지도뿐만 아니라 부족하기 쉬운 정서순화를 위해 명상의 시간을 마련하여 학생과 교사가 다함께 참여하여 이 시간의 활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가톨릭 정신에 입각하여 설립된 학교이니만큼 종교교육에도 힘을 쏟고있다. 중 1부터 고 2까지 매주 1시간씩 종교수업을 실시하고 있으며 종교수업 이외에 예비자 교리시간을 운영하여 많은 학생들이 세례를 받고있다. 교사들을 위한 교리시간도 마련하여 교사중 2/3가 신자교사가 되었다. 학생들의 종교활동으로는 중학교 8팀, 고등학교 11팀의 레지오 마리애가 활동중이고 학년별 예비자 교리는 교장수녀를 비롯하여 모든 수녀들이 담당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848)

1962년 성가 소비녀회가 소명 여자중고등학교를 인수 운영했다.(가톨릭대사전 :608)

1962년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원산 본당 분원에서 해성국민학교와 해성유치원, 호수천신빈민학교와 약방 및 농아학교를 운영했다.(가톨릭대사전 : 462)

1963년 3월 12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각 학교 1학급 50명씩 충청남도 교육위원회로부터 인가를 받아 대건중고등학교가 사용했던 목조건물의 일부를 교사로 인수받고 샌뽈 초등학교를 개교하였는데 위치는 현 쌘뽈 여중고의 교문과 차고 쪽이었다. 초대교장은 쌘뽈 여중고의 교장이었던 박상일 수녀가 겸임하였고 착실한 초등학교로 인정받으며 발전하였으나 남녀공학으로 변경시키는데 필요한 대지부족 문제와 쌘뽈 여중고를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장기적인 안목과 재정상의 이유로 재학생들을 모두 이웃의 초등학교에로 분산 전학시키고 개교 5년만인 1968년도에 졸업생 없이 폐교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851)

1963년 메리놀 수녀회가 1962년 설립한 메리놀 병원의 부속 '메리놀 간호전문대학'를 개교하고, 1967년 부산교구로 이관했다.(가톨릭대사전 : 383; 교회와 역사 80호 7)

1964년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부산에 '성모여자고등학교'를 개교한 후 1979년 6월 부산교구로 이관했다.(가톨릭대사전 : 366)

1964년 국제 가톨릭 형제회(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가 전주에 가톨릭 여학생관을 설립했다.(가톨릭대사전 : 176)

1965년 동정 성모 수녀회가 대전에 대전 성모 여자 중학교와 1966년 2월 17일 성모 초등학교를 설립했다.(교회와 역사 81호 7-1982. 4. 25발행; 한국가톨릭대사전 : 309)

1967년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안동시 율세동 393번지 30,000여평의 부지에 젊은이들의 전인 교육과 기능인 양성을 목표로 신축하여 1969년 10월에 학교법인 상지학원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70년 상지 여자실업 전문학교로 개교하면서 상과 40명, 의상과 80명, 보육과 40명, 총 160명 정원으로 시작하였다. 같은 해 12월 학교 법인 상지학원 상지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면모를 갖추었고 다시 1990년에 현재 상지전문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사회복지학과 신설). 당시 상지 전문대학의 설립은 수도권 중심으로 집중된 한국적 교육 풍토에 이정표 역할을 담당하였다.(1990년에 이르러 교수인원의 확보와 질 높은 교육을 위해 운영권을 교구로 이양하였다.)

그리고 수녀회에서는 학업 때문에 안동에 올라온 타지방 학생들을 위하여 상지기숙사를 운영하기 시작되었다. 숙식을 함께 제공하는 '기숙사'와 경제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저렴하게 방만 빌려주는 '자취사'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데 지원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입소 경쟁률이 높아짐에 따라 점진적인 확장 계획도 생각하고 있다. 현재 수녀 1명이 기숙사 사감으로 파견되어 다양한 월례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인간교육과 생활교육을 시도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198; 교회와 역사 235호 18-1994. 12. 25 발행)

1967년, 골롬반 수녀회가 전라남도 목포시 산정동 97번지에 1955년에 성 골롬반 병원을 개원하면서 준비한 성신간호전문대학(Holy Spirit College of Nursing)을 설립했다. 당시 광주 교구장이던 헨리(Harold Henry,玄, 골롬반회 소속) 주교는 병원과 학교를 같이 설립하기로 하여, 1963년 4월에 학교법인 설립허가를 받았고, 1966년 11월 학교설립인가를 얻어 1967년에 개교하게 된 것이다. 1972년 3월부터 학교명을 골롬반 간호 전문학교로, 다시 1979년 1월부터 성신 간호 전문대학으로 개편인가를 받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성신간호전문대학은 순수한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하여 하느님과 이 세상, 개인의 변화를 교육이념으로 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적인 생활에 입각한 삶을 이해, 실천하며, 병원 및 지역사회의 발전과 보건향상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여 효율적인 의사소통과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이해하도록 하고 보건요원으로서의 책임감을 갖도록 하게 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647)

1968년 3월, 1964년 4월에 샛별 유치원을 개원한 서울대교구 영등포 본당에서 불우 청소년 교육을 위한 애전 고등공민학교를 구 성당에 개교하였다. 1970년 11월 朴成鍾(프란치스꼬) 신부가 13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뒤 본당 평협과 부인회가 조직되었고 1973년 여름에 인근 수재민 2,600여명을 애전학교에 수용하고 구호의 손길을 펴기도 했다.(교회와 역사 74호 6쪽)

1968년 5월 동성중고등학교에 김수환 추기경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가톨릭대사전 : 309)

1974년 3월 성 바오로 딸 수도회가 시청각 교리교재 연구소를 개설하여 문맹인들과 교회에 자주 올 수 없는 노동자들과 어려운 이들 및 시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시청각을 이용하여 다각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435)

1974년에는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분도 출판사가 서울분원에 지사를 설치하여 동사 발행의 출판물 보급과 선전에 힘쓰고 있다. 그 후 1979년부터는 분도 회관 건물을 분원 및 신학원으로 사용하고 분원과 신학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성 베네딕도 피정의 집'으로 개칭하여 주로 신자들의 피정을 위해 사용토록 하고있다.(교회와 역사 98호 1988. 8) 1974년 12월 11일 인보성체 수도회가 수원교구 김효신 신부로부터 용인군 포곡면 전대리 199번지에 있는 불우 청소년을 위한 '효신 실업학교'를 인수하여 일반과목 외에 여학생들에게도 공업과 농업을 남학생들에게도 가정을 가르치며 운영하기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667; 1998년 11월 14일 인보성체수도회 한 율리엣다 수녀 답신)

1975년 노틀담 수녀회가 인천의 박문 여자중고등학교를 인천 교구로부터 위임받아 경영하기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254; 교회와 역사 65호 7)

(4) 야학 및 기술복지

1960년 성가 소비녀회가 편물과 보세가공을 가르치는 '나자렛 기술학원'(1960-1969)과 '미망인 양재소'(1964-1980)를 운영했다.(가톨릭대사전 : 608)

1962년 7월 11일 까리따스 수녀회가 학동에 '까리따스 문화 복장 학원'이라는 이름의 편물 양재 학원을 설립했다. "본회는 돈 보스꼬의 정신을 충실히 살아 온 창설자 안토니오 가보리 사제를 본받아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하여 도덕적 종교교육을 베풀며 필요에 따라서는 직업의 실천지도를 향한다."(회헌 12)는 정신 아래 농촌의 가난한 아가씨를 위한 직업 교육의 일환으로 학동 본원에 직업학교를 개설하여 편물과 양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입학 당시에는 대부분 생활이 넉넉지 못한 60명이 넘는 시골 아가씨들과 부인들이었는데 이중에는 미감아들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무료로 기숙사를 마련해 주는 등 아낌없는 배려와 함께 그들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차차 기성복 이용도가 높아지고 사회인들이 많은 학원을 세움으로 인해 학생들을 확보할 수 없는데다가 일반인들의 유행에 민감하게 따르지 못하는 수녀들의 취약점 등으로 인해 저조한 현상을 보이다가 이들의 직업 교육을 위해 시대와 지역사회의 필요에 의해 성립된 이 학원은 그 목적을 최대한으로 실현시키면서 까리따스 수녀원의 정신을 펼 수 있던 사업이었다.(교회와 역사 223호 22-1993. 12. 25발행)

1964년 성가 소비녀회가 '미망인 양재소'를 운영했다.(가톨릭대사전 : 608)

1969년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이 사회복지 법인체로 인가되었다. 산업혁명으로 황폐해진 유럽의 한 농촌에서 버려진 불우청소년들을 모아 오직 사랑으로 돌보며 그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교육가이며 신부였던 보스코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교육방침을 따라 사랑 가득한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는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은 소년들을 보호 수용하는데 그쳤던 초창기와는 달리 변천하는 사회의 기능에 맞추어 기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1985년 현재 가구제작과, 목공예과, 배관과의 3개 과를 두고있다. 1년 과정의 기술습득 후에는 취업까지 알선해 주고 있는데 만 14세-18세의 보호자가 없거나 극빈가정의 청소년들에게 입학의 기회를 주고있다. 거의 100%의 취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 기술원 원아들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취업 한 달만에 보따리를 싸서 다시 기술원으로 되돌아오거나 이곳저곳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례가 많다. 이처럼 많은 것은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들의 불안정한 성격 탓이라고 볼 때 이들에게만 성실치 못하다는 비난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곳 기술원은 이들의 정서지도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있다. 60여명의 원아들에 20명이 넘는 직원은 이들의 사랑의 손과 발이 되어 생활부터 진료등 모든 것을 부모처럼 닦아주며 다듬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나눔지 28호 10-1985. 1. 15발행)

1973년 8월 마리스타 교육수도회에서 합정동 서울 본원과 9월에는 안동에 각각 마리스타 교육관을 설립했다. 1973년 8월 합정동으로 수도원을 이전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게 된 마리스타 수도회는 본격적으로 사도직 활동을 모색한 결과 그 첫 번째 결실로서 1973년 9월 안동에 첫 분원을 설치하게 되었다. 안동 지방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안동 교구가 인적, 물적으로 가장 가난하였고 진출한 수도회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안동 주변지역의 주민 대부분의 생업이 농업으로서 유교가 지배적인 지역이었기에 선교하기에 매우 어려운 조건들이 많았으나 바로 이런 소외된 지역이야말로 마리스타교육 수도회가 일할 곳이기에 첫 진출지로 결정한 것이다.

먼저 안동에서 공부하고 있는 타지방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및 독서실을 운영하였고 또한 실기 교육원을 설립하였다. 특히 이 교육원에서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의 교육에 주력하여 여학생들을 위해서는 주산, 타자, 부기를 남학생을 위해서는 조각, 선반, 자동차 정비에 관한 과목을 두어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동시에 일반 학교 교과 과목을 둠으로서 청소년들의 사회 진출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교육관 운영이 안정권에 들어서자 교구에 이를 양도하고 분원을 철수하였다.(교회와 역사 244호 13-1995. 9. 25발행)

(5) 장애인복지

1957년 10월 10일 서울대교구 돈암동 본당에 농아부를 창립했다. 그리스도의 정신에 기초하여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교회와 사회에 농아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고취하며 농아인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 활동과 회원들의 복지 증진에 주력하는 데에 그 설립목적이 있다.

1957년 10월 10일에 서울시 돈암동 본당에서 1926년 원산 본당에서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원들에 의해 처음 시작한 농아인을 위한 교리반이 해방 이후 다시 시작되었다. 1959년 농아 중학생 6명이 중림동의 약현 성당에 찾아가 이 시몬스덕 수녀와 상의하여 농아부가 설립되고 그 후 농아부는 여러 차례 수녀가 교체되었다. 1965년 서울대교구 명동성당에 농아부가 창립되고, 1965년 학생회가 발족되어 활동하다가 1969년 중림동 약현 성당에서 명동성당의 주교관 뒤 여성회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가 1980년 명동성당의 협조로 교육관에서 사무실을 갖추는 등 숱한 이동과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정착이 가능하게 되었다.(1981년 1월 25일 안경렬 사회복지부 신부와 함께 복지회관에서 가톨릭 농아복지회 발족 준비회의를 가졌다. 1986년 3월 2일 명동에서 창립기념미사를 올림으로써 농아선교회가 창립되었다. 초대회장에 나수웅씨, 부회장은 곽태일씨가 선출되어 농아선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설립 취지는 다음과 같다. 극소수를 제외한 이 나라 대다수의 농아인은 온갖 역경과 고통에 좌절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삶을 포기하다시피 살아가고 있다. 농아인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써 복음대상에서 제외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여 교회와 사회에 농아인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고취하여 전국 교회내의 농아인의 복음화 및 복지증진에 주력함을 그 목적으로 하며 또한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 내용으로는 선교사업과 각종 보도매체를 통하여 농아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계몽과 사회적인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홍보사업으로는 매주일 발행되는 주간소식지와 두 달에 한 번 후원회의 소식과 기타 사항을 알리는 회보가 있고, 친목행사와 매년 정기적으로 기초반, 회화반으로 구분하여 수화교육을 실시하여 수화보급에 노력하며 수화교육을 마친 자로서 농아인과 함께 하고자 하는 직장인 모임인 반딧불, 주부모임인 반석회의 봉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2현재 평택 농아 양로원을 후원하고 있다.

또 1989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수화미사는 일반인의 미사에 농아인들을 위해 미사통역을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전례가 농아들에 의해 준비되고 행하여지는 미사이다. 정순오 신부의 집전으로 수화와 말을 병행하므로 일반신자도 참례할 수 있으며 특히 매달 첫째 주일에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1998. 7. 14 가톨릭 농아 선교회 김기영 루도비꼬의 답신)

1960년 5월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허 까리타스 수녀가 무주택자인 농아들에게 집을 주고 생계를 돕는 일거리를 주어 자립정신을 키우고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어 상호 협조하는 정신과 바른 심성으로 용기있게 살아가도록 하고 농아인의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애덕 농아자활원'을 설립했다. 애덕 농아자활원은 1961년 5월 미아3동(현 애화학교) 대지 1,500평 위에 설립(26가구주거) 하여 생활수단으로 미 8군 골프장 닦기, 뉴질랜드산 토끼양육, 국수공장 운영, 극빈자를 위한 식당운영 등을 전전하다가 71년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허 까리따스 수녀가 서독에서 인형 옷의 수출계약을 맺고 온 것을 계기로 1985년 현재까지 인형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봉제완구는 미8군 및 동남아 등지에 수출하고 있으며 1976년 6월에는 수유3동에 APT시 연립주택을 건립하고 자활원 낙성식과 함께 전가구가 이주해옴에 따라 총26세대 15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세대 반 이상이 자체 내 인형공장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고 그 외에는 다른 곳으로 목수, 재단, 양복 일을 하고있다.(나눔지 47호 3-1985. 5. 18발행; 1998년 11월 10일 애덕 농아자활원 박 베니카 수녀 답신)

1971년 6월 3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243번지에 '명휘원'을 준공했다.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은 故의민 황태자 영왕의 환국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어려운 이웃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르며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직업재활 교육원인 명휘원, 장애인 근로시설인 해동일터, 지체장애인 특수교육기관인 명혜학교, 명휘 어린이집, 명휘 체육센터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명휘 종로 복지관은 구 재단법인 보린회를 명휘원으로 개칭하여 설립한 터에 1967에서 1978년까지 장애인 재활시설로 운영해 오다가 1978년 명휘원이 광명시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YMCA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

장애인이 가진 잠재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기 위하여 각 개인에게 알맞은 재활 교육과 인성교육을 단계적으로 실시하여 직업능력을 갖춘 기능인을 양성하는 동시에 건전한 인격을 갖춘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양재과, 편물과, 공예과, 보호자립장이 있다.(1998. 6월 시립 명휘 어린이집 이 안토니나 수녀의 답신)

1974년 서울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농아들을 위한 초 중등 교육기관인 애화학교를 서울시 도봉구 미아3동 124의 2번지에 설립했다. 그리고 함께 개설한 청각장애인 상담소 운영을 통하여 농아에 대한 정규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설립하였다. 전인교육을 통하여 건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하고, 1인1기(一人一技)의 기능을 연마케 하여 농아들이 독립된 인격체로 자립할 수 있게 함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있다.(가톨릭대사전 : 596)

(6) 행려자복지

1958년 12월 31일 대구광역시가 행려자들을 위한 '희망원'을 설립하여 대구대교구 천주교 유지재단에 운영을 위탁하였다. 대구광역시립 희망원은 대구 광역시 산하 부랑인 복지시설로 1958년 12월 31일 설립되어 1980년 4월 1일 대구광역시로부터 재단법인 대구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에서 수탁운영을 받아 부랑인 복지사업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희망원은 가톨릭 교회의 사랑과 평화의 이념을 바탕으로 현 사회 속에서 자립생활을 못하거나 무의무탁한 부랑인들을 수용 보호하여 조기에 사회복귀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부랑인들에게 이들의 특성에 맞는 전문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가족 찾기 상담, 장애 극복을 위한 치료, 생활의 정상화를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정상적인 조기 사회복귀를 위하여 자활 사업과 노임 소득사업을 통한 기술 습득, 취업 알선 등의 재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서로 돕자"라는 원훈 아래 부랑인의 시설입소, 수용보호 및 퇴소 등의 합리화로 보호수준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며 부랑인 각자의 특성에 따라 분리수용을 함으로써 전문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자활사업을 내실화하여 자립 가능한 자는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조기복귀 시킨다. 한편 시설을 개방하여 지역사회의 자원으로도 활용하고 있다.(1998. 4 희망원의 답신)

1971년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 수도회가 걸인 수용소인 '갱생원'을 설치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수사들은 광주시 변두리에 걸인수용소인 갱생의원을 설치하는 한편 그 안에 정신과 병실을 설치하여 한정된 수의 환자들에게 획기적인 치료방법을 시도하였다. 1973년에는 '천주의 성 요한의원' 내에 정신과 외래를, 1980년에는 정신과 입원실을 개설하여 정신질환 치료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울러 정신과 간호원 훈련 등 의료교육사업 및 '소년의 집' 이라는 고아원도 경영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1132)

(7) 근로자복지

1963년 수원교구에서 안양 근로자 회관을 설립했다. 근로자들 스스로가 그리스도 신앙을 바탕으로한 건전한 가치관을 형성하도록 돕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수원교구 설정당시 윤공희 대주교와 전 루가 신부가 당시 산업개발과 함께 안양 지역내 공장으로 취업차 모여드는 젊은 남녀 근로자들을 위한 사업으로의 계획을 추진시키고자 1965년 국제 가톨릭형제회원 서정림 말가리다(독일인), 한성인 벨따(한국인)에게 근로자 및 부랑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으로 운영책임을 맡기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안양지역은 제지공장과 섬유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수자원이 풍부한 조건에 따라 등장한 이 산업은 노동 집약적인 공장이므로 노동력이 대거 지방에서 유입되었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과 나이 어린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는 상황에서 그들을 위한 복지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저학력의 10대와 20대 초반의 소녀노동자들을 위한 특수사목이 요청됨을 교회는 인식하게 되었고 그들을 위한 기숙사 사업을 통하여 생활교육과 사회적응에 필요한 교육들을 실시하였으며 지역의 노동자들을 가톨릭 노동 청년회 운동에 동참하도록 조직하여 나갔다. 훗날 사회상황의 변화로 가톨릭 노동자 회관, 전진상 사회복지관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998. 5월 가톨릭 근로자 회관 답신; 가톨릭대사전 : 15, 176)

1966년 6월 서강대학교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Institute for Labor and Management)가 설립되었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노동문제, 즉 노동자의 소외와 빈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 각종 산업재해 등을 조사, 연구, 교육함으로써 공동선(共同善)이 구현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연구와 교육을 한다. 산업 노동관계의 각종 자료조사, 조사결과의 출판, 노동조합지도자 및 사용자들의 교육 등이 있다. 그 중 노동조합 지도자와 사용자에 대한 교육을 중점사업으로 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565)

1968년 노틀담 수녀회에서 여대생을 위한 기숙사업을 비롯한 버스안내양들을 위한 교양교육사업 전개했다.(가톨릭대사전 254; 교회와 역사 65호 7쪽)

1970년 살레시오 수녀회에서 '마자렐로 센터'를 설립하고 버스 안내양들에게 숙박시설을 제공하기 위하여 시작하였으나 버스회사 자체 내에서 이들을 수용하게 되어 1976년부터는 인근공장지역의 근로여성들을 위한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로 변경하여 이들에게 안전한 숙박시설과 여성 교양 및 종교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전인적 인격 성장과 여성적인 품위를 지니도록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1996년부터는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영등포 구청의 시설인가로 '아동직업 보도시설'로 변경하여 가출소녀들을 위해 미용 등 직업기술 교육과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한 때 마자렐로 센터 내에 마자렐로 중학교를 개설하여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여성에게 무료중학과정을 실시하여 8회에 걸쳐 221명을 배출했다. 1981년 중학교 교육이 의무화됨에 따라 폐교되었다. 그후 1989년 자녀의 교육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저학력 주부를 위한 중학과정(2년) 및 교양, 종교과정을 위해 1학급 (30-40명)을 개설하여 1993년에는 같은 여건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시작하여 1998년 현재 중, 고등학교 4학급에 110여명의 주부들이 공부를 하고있다.)(1998년 4월 살레시오 수녀회의 답신)

1973년 왜관 성 베네딕토 대 수도회에서 경북 구미시 송정동에 '근로 여성 복지관'을 설립하여, 구미공단 근로여성들의 인격도야 및 생활향상을 위해 기능교육, 취미교육, 교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555)

(8)청소년복지

1955년 성 베네딕토 수도회는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마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왜관에서도 분도 출판사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교회의 문서전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가톨릭대사전 464)

1975년 1월 1일 마리아의 수녀회에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 42-5번지의 시립 '서울 소년의 집'의 운영을 맡았다. 서울시립 소년의 집은 시립아동보호소의 장기수용아동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재단법인 마리아 수녀회가 0세-18세 미만의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와 아울러 아동의 교육을 위하여 3월 5일에는 '소년의집 초등학교'를 병설 운영하고 졸업 후 부산소년의 집으로 전원, 소년의 집 (알로이시오) 중학교와 소년의 집 (알로이시오) 전자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계속 수학(修學)하여 졸업과 동시에 취업, 자립하여 건전한 시민으로 육성케 하기 위하여 1975년 서울시 은평구 응암동에 설립되었다.

서울특별시 시립 소년의 집에서는 0세-18세 미만의 요보호 아동과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가 아동을 양육하기에 부적당하거나 양육할 능력이 없는 경우에 수용 보호하게 되며 입소절차는 요보호 아동이 발생하면 일시보호 후에 상담조사를 하여 감별을 한 후 수용보호를 하게 된다.(1998년 6월 11일; 11월 6일 서울특별시립 소년의 집 답신)

(9) 노인복지

1953년 1월 성가 소비녀회가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양로원'을 인수하여 1979년 증축한 후 경기도 부천에서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하고 있다. 한편 1977년에는 미아리 본원에서 신체 장애인 노인을 위한 양로원 '안나의 집'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608)

1952년 10월 하순경, 당시 논산 본당에서 일하고 있던 오채경(말지나) 수녀가 성당 문전에 쓰러져 있는 노걸인 노파를 발견하였다. 오 수녀는 중병인 노인에게 세례를 주어 부엌 방을 마련하고 간호하였는데 일주일 남짓하여 선종하자 장례까지 치러 주었다. 그 후로 계속해서 무의무탁한 노인들이 모여와 입주를 간원하여 논산 천주교회의 생제(Pierre Singer, 成在德) 신부는 1953년 1월 3일 양로원을 세워 이들을 부양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원장으로는 생제신부가 부임하였으며, 1965년 재단법인 대전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으로 인가 받은 후에는 수녀들이 원장으로 부임하여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쌘뽈원이 쌘뽈 여자 중·고등학교 부지 내에 있었으나 1971년에 현 위치에 대지 585평을 매입하여 1977년 3월에 건물(236평)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1978년 9월 15일에 입주하였다. 이로써 학교 재단과 분리하여 독립 운영하게 되었다.(1998. 4월 쌘뽈원 글라라 수녀의 답신)

한편 1973년에 쌘뽈원이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으로 인정되었다.(1979년 5월에는 용인주택, 영안실, 창고 등을 준공하고 1981년에는 격리수용실을 세웠다. 또 1986년 10월 18일에는 보사부의 도움으로 2층에 60평 넓이의 경당을 마련하였다. 현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6명의 수녀들이 4명의 직원과 함께 50여명의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으며 대건 중고등학교의 강석준(미카엘) 신부가 매일 미사를 비롯하여 고백성사 및 병자성사 등을 집전 해 주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555; 1998년 4월 쌘뽈원 글라라 수녀의 답신)

1959년 인천교구 소사 본당 주임사제 신 신부가 성가양로원을 설립했다.(가톨릭대사전 : 680)

1966년 5월 3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수녀원 내에 노인 수녀들을 위한 '베타니아의 집'을 설립했다. 수도회의 연륜이 100년이 되어감에 따라 연로한 수녀들의 거처문제가 생기고 노후 요양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1936년 7월 8일 용산 삼호정(현 산천동)에 바오로 보육원 분원을 신축하여 50여명의 아이들을 분산 이주시켰을 때 원아들을 돌보고 가까이 있는 수녀원 묘지도 돌볼겸해서 보육원 2층을 노인수녀들의 거처로 정하였는데 이를 휴양지가 생긴 시초로 볼 수 있다. 1954년에 보육원이 명동으로 다시 합해진 후 이 건물은 백합유치원으로 개조되었고 1964년에는 수도회 관구로 사용할 2층 건물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교통의 불편 등으로 인해 2년만에 관구는 다시 명동으로 옮겨지고 관구 건물은 대신 1966년 5월부터 휴양의 집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7년에 본원에 있던 바오로 보육원이 폐원되어 건물이 비게 되었다. 이때 백합 유치원의 건물이 너무 낡아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재정적인 여유가 없음으로 1978년 3월 27일, 휴양의 집은 베타니아의 집으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은퇴한 노인 수녀들이 남은 여생을 기도와 휴식으로 보낼 수 있는 집으로 운영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808)

1970년 12월 1일 모 안스가리오 신부는 소외되고 버림받은 무의탁 노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구미시에 '성심양로원'을 설립하였으며 성심양로원은 "내가 온 것은 그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0,10)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식 단독주택으로 입원이 가능한 인원은 60명이다.(1998. 9. 2 성심양로원의 답신)

1970년 왜관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선산 성심 양로원을 설립하여 노인들을 돌보다가 1992년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에 인계했다.(6.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조직이후의 활동 참조, 교회와 역사 235호 21-1994. 12. 25발행)

1973년 7월 경로수녀회(Little Sisters of Poor)가 청주교구로부터 성심원을 인수받았다.(가톨릭대사전 : 69)

(10) 교정복지

1970년 4월 서울대교구에 교도소 후원회(교도사목회)가 발족했다. 교도소 수감자의 처우 개선(Prison reform)과 수감자에 대한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특수사목의 한 분야인 교회의 교도사목(Prison evangelization)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즉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게 하고…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게 하셨다."(루가 4,18)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초기교회 때에는 박해받는 신자들의 방문을 위주로 하다가 313년 종교자유후엔 일반 수감자의 방문으로 바꾸었다. 325년 니체아 공의회에서 가난한 자의 대리인(procuratores pauperum)에게 교도소를 방문하여 수감자에게 봉사할 것을 명했고, 에우제니오 4세(1435년), 바오로 6세(1611년), 인노첸시오 10세(1655년) 교황 등은 수감자의 처우 개선에 관한 규칙을 제정하였다.

한국에서는 초기 박해시대와 일제시대에는 간헐적이고, 개별적으로 시행되다가 1970년 4월 교도소 사목본부(Pastoral Center for Prisoner Evangelization)를 설립하고 교구별 사목본부를 두었다. 그리고 그 밑에 교도소 후원회와 교도소 사목자문위원을 두어 수감자에 대한 복음 전도와 사회선도교육을 실시한다. 월간지로 '새남터'를 발행하고 있다.

한편 교도사목회(Prison Apostolate)는 교도소 수감자들의 복음화와 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위하여 1970년 4월 2일 발족한 평신도 단체다. 당시 김홍섭 판사와 고중렬 교도관, 박귀훈 신부 외 몇 명이 중심이 되어 '교도소 후원회'를 발족함. 1974년에는 각 교도소용 명상자료와 성가녹음테이프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1975년 7월 기관지 '빛'을 발간했고, 1978년 8월에는 '교도사목후원회'로 개칭했고, 1980년 2월에 다시 '교도사목회'로 개칭했다.(가톨릭대사전 : 118)

(11) 의료복지

해방 후에도 무난하게 운영되어 가던 성모병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내무성 중앙병원으로 징발되었다. 이후 3개월간 인민군은 성모병원과 주교관에 상주하면서 이곳의 물건을 징발 사용하고 미처 피난하지 못해 남아있던 수녀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노기남 주교의 권고에 의해서 유을준씨는 피난 당시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던 중림동 성당구내의 가명초등학교를 기반으로 새 병원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서울교구와 미국 원조기관인 C.A.C(가톨릭 자선회 : Catholic Charities)의 지원을 받아 1954년 3월 1일 '성 요셉 자선병원'을 개원하였다. 이어 '성 요셉 간호 고등 기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성 요셉 자선병원은 1955년 10월 가톨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이 되고, 성요셉 병원이 개원하면서 자선진료가 이원화되어 외래환자의 진료는 구 성모병원(명동 2가 1) 목조건물 1층에서 수행하며, 가톨릭구제회와 가톨릭사회복지회에서 제공하는 각종 구호물자를 배급하여 질병의 치료와 의식주를 돕는 긴급 구호사업도 병행하여 수행하였다. 한편 구 성모병원 외래에서 발견되는 입원환자는 성요셉병원으로 이송하여 자선 환자용으로 배정된 복지 병동의 20병상을 활용하여 입원진료가 수행되었다.(가톨릭중앙의료원 50년사 : 494)

성모병원은 1957년에 양기섭(베드로) 신부가 제4대 병원장으로 취임하면서 크게 발전하여 이듬해 3월 종합병원으로 승격되었다. 1957년, 신축병원을 기공하여 1961년 12월 1일, 지하 2층, 지상 8층에 300병상 수를 갖춘 현대식 병원이 준공되고, 1966년에 병원 본관에 이어 7층 건물을 신축, 정신과 병동을 개설했다. 성요셉 병원은 초기부터 성가 소비녀회 수녀들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성가 소비녀회에서 미아리에 성가병원을 개원하게 되자 그곳으로 떠나게 되어 1959년 3월 6일부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병원 관리를 맡게 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813)

1966년 3월 1일 가톨릭중앙의료원 기구 개편에 따라 사회의학처(초대처장 부영발 신부)가 창설되고 무료진료서는 사회의학처 산하 기구로 편제되어 자선진료의 체제가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1967년 2월 1일 서울특별시 시립 갱생원과 진료 계약을 체결한 이후 의지할데 없는 불우한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는 시설이나 기관과 계속 진료 계약을 맺어왔다.

1974년 8월 30일 그간 자선 환자의 입원진료를 수행해 오던 중림동의 성요셉 병원이 폐쇄되고,(샬트르 100년사 : 521) 9월 2일자로 중구 저동 1가 2-3에 지하1층 지상3층의 건물(32병상)을 신축 개원하여 그간 구 성모병원 목조건물 1층에서 수행해 오던 외래진료와 성요셉 병원에서 수행해오던 입원 환자의 진료 및 기타 자선환자 진료에 수반된 제반 업무가 통합되어 독립된 자선의료기관으로서 구료 업무를 시작했다. 그동안 불러왔던 '무료진료소'라는 명칭은 '자선진료소'로 개칭하고, 사회의학처 산하에 있던 자선진료소가 가톨릭중앙의료원 산하기구로 편제되었다. 자선진료소의 신축 개원으로 독립된 예산이 배정되었고, 자선환자의 구료 뿐만아니라 이들의 재활 후생복지 등 종합적인 의료복지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사회사업가를 채용(구종회)하여 자선 환자의 적격 여부를 사정하고 기타 진료 과정에 수반된 사회 심리적인 문제의 상담과 조언, 재활 후생복지 등의 의료사회사업적인 기능이 보완되었다. 그리고 1976년 9월 2일 자선진료비로 충당되는 불우환자의 진료비 외에 환자들의 복지차원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성모병원 직원들이 성모자선회를 발족했다.(가톨릭중앙의료원 50년사 : 495-496)

한편 성모병원 원목과와 호스피스과에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들이 환자들의 정신적 치유와 죽음을 맞는 환자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지니게 함으로써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813)

1954년 4월 서울대교구 성신(현 가톨릭) 대학에 의학부가 신설됐다. 그리고 1955년 10월 성모병원도 성신대학 의학부 제1부속병원으로 개명했다.(가톨릭대사전 18)

1946년 3월 15일 대구의 백백합보육원의 원아들의 보건위생을 위해 설립된 시약소가 미군정청(美軍政廳) 당국으로부터 '성 요셉 의원'이란 이름으로 다시 후생시설 등록증명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 시대적 변천과 의학기술의 눈부신 발전 및 종합병원과 전문의들의 속출로 성 요셉 의원은 1973년에 접어들면서 정리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902)

1946년 9월 23일 가톨릭대학 의학부 부속 성모병원은 산업재해병원이 위치한 사립병원 사토오 병원을 인수(가톨릭대사전 : 18) 1947년에 제기동 본당 수녀원 옆에 집을 한 채 사서 진료실을 꾸미기 시작하여, 지역 주민을 위한 '성모병원 제기동 진료소'를 개설했다. 여의사 이혜춘을 채용하여 정식으로 가난한 지역사회의 주민들을 위한 진료업무를 시작했다. 방 5개로 이루어진 진료소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거처하는 2개의 방, 그리고 조그만 부엌과 마루 등의 구조로 되어있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의사가 피랍되고 병원건물이 많이 파괴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9·28 수복 후 병원수리를 하고 홍순자 아드리아나 수녀를 중심으로 다시 진료를 시작하지 병원이 없어 헤매던 사람들이 줄지어 모이기 시작했다. 홍연봉 다니엘라 수녀, 조복순 엘리아 수녀가 간호 수녀였고 한 푼이라도 싸게 약을 구입하기 위해 황수자 베네딕다 수녀는 남대문까지 걸어다니며 약을 사오기도 했으며 손수건에 민속 그림을 그려 미군들에게 판매하여 조금씩 모은 돈으로 병원을 확장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청량리에 대지 400평을 확보하고 약과 물건을 2 : 1의 비율로 나누어 1957년 12월 8일 성 바오로 의원이 분가하였다. 가난한 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가난하게 시작하여 보람있게 일하면서 진료 이외에도 양주군, 고양군 등 교외지역에 사는 환자들 방문과 교리반 봉사 등 전교에도 힘을 썼던 제기동 성모 의원은 이후 원주에 성 바오로 병원 분원이 세워지자 1969년 7월 1일로 폐원하고 원주로 이전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829)

1950년 5월 1일 대구대교구에서 '해성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성가병원' 설립을 설립했다. 최덕홍(요한, 1902-1954) 주교는 대구교구장으로 착좌한 후 대구에 가톨릭 병원의 설치를 시도하던 중 평신도 박영대 씨의 개인병원이었던 '대구중앙병원'을 구입하여 교구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최주교는 개업을 위한 준비와 병원운영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1950년 3월 23일부터 고도리 마리비안네 수녀와 김순심 베놔 수녀 그리고 최서시 십자가의 요한 수녀 3명이 임시 파견되어 병원개업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 병원은 오랫동안 운영 난으로 부진했던 시설인 만큼 안팎으로 손댈 곳이 많았다. 3명의 수녀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어 본원 수녀들과 수련자들까지 동원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해성병원'(海星病院)이라는 이름으로 1950년 5월 1일에 개업하였다. 그 당시 병원에는 내과, 소아과, 안과 등 4과의 의사 4명이 있었고, 수녀 공동체에는 분원책임으로 부임한 하외학 데레사 수녀와 병원에 근무하는 수녀 3명, 그리고 지원자를 합하여 7명이었다. 개업 후 55일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병원은 피난민 수용소처럼 되었다가 곧 이어서 야전병원으로 변하였다. 의사들도 차례로 피난 가고 그 중 최 의사 한 사람만이 끝까지 남아서 수녀들과 함께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돌보았다.

1955년 안정을 되찾은 후 '해성병원'을 '성가병원'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서정길(요한 1911-1987) 주교는 대구교구장으로 착좌한 후 대구교구의 숙원사업인 가톨릭 종합병원의 설립을 시도했다. 서정길 주교는 1960년에 이르러 독일 미제레올(Misereor)의 후원으로 병원신축을 계획하면서 덕원에서 월남하여 대구에 안착하기 시작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운영을 맡겼다. 1962년 8월 30일 '파티마 병원'으로 개칭했다.(샬트르 100년사 : 974)

1950년 4월 15일 태평양전쟁과 북한 지역의 공산화로 철수했던 메리놀회 수녀들이 부산에 메리놀 병원을 개원했다. 그러나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1952년 제2진의 수녀들은 재차 부산에 진출하여 전쟁중인 비상시를 위하여 장기간의 의술봉사를 하여 왔으며 음식과 옷을 나누어주기도 하였고 결핵요양소와 교리학습을 위한 장기 계획도 수립하게 되었다. 1956년 충북 괴산군 중평읍에 메리놀 의원을 개원하여 의술치료와 보건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1962년 부산 메리놀 병원이 주한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대식 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1963년 메리놀 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은 콘로이(Conroy)수녀가 맡았으며 1967년 메리놀 병원의 관리가 부산교구로 이관되었다.(교회와 역사 80호 7쪽)

성서 상에 표현된 그리스도의 치유행적에서 보듯 원래 가톨릭의 의료활동은 초대교회 때부터 의료사업을 통해 병마와 싸우는 이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고 회복시켜 줄 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감동적이고 구체적으로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병든 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는 일을 사명으로 믿고 있었다. 현재 행하고있는 가톨릭 교회의 의료사업에도 의료활동과 기도를 통한 치유의 효과를 동시에 함으로써 인간들이 현세에서의 병과 죽음을 극복하고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종말론적인 희망을 살리기 위해서 전력해 왔다.

메리놀 병원의 최초 설립자인 부산시 북병동 81-8번지는 본래 일본인 후쿠다 이와까기의 소유의 별장이었던 곳으로 4,278평의 대지에 일본식 2층 목조건물과 몇 개의 부속건물, 정원 등이 있었다. 이곳은 해방이 되면서 적산으로 경상남도 관재국에 접수되었는데 당시 부산진 본당의 정재석 신부가 중앙성당 초대 주임신부인 이명우 신부의 명의로 관재국과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메리놀회에 원조를 요청하였던 바 메리놀 수녀회에서 기꺼이 수락하고 병원설립을 위해 1949년 12월 28일 로사 제제레파, 안드레아, 로사리마 수녀를 1차 선견대로 부산에 보냈다. 또한 나중에 토지매입 비용도 메리놀 수녀회에서 대신 부담하고 북한 땅에서 다 이루지 못한 자선의료사업과 육영 사업 등을 1950년 4월 15일 메리놀 병원을 이곳에서 개원함으로써 이루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병원이라기보다는 진료소에 가까운 역할을 한 것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영리적이 아니고 무료진료였으며 빈민구제사업의 일익도 담당하여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보급시키는 등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동시에 영신적인 전교사업을 위해 출발하였다. 이러한 것은 부산·경남지역에서는 최초의 한국가톨릭 의료활동으로 지역사회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구현시키고 가톨릭의 의료 및 사회사업 전체를 진보시키는 시발이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메리놀 병원에서는 단순히 진료뿐만이 아닌 여러 사회복지 활동을 함께 이루어 나갔다. 첫째 구호 활동.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환자를 진료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전쟁으로 인한 경제의 파탄으로 말미암아 빈곤이라는 것이 더 큰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중산층의 부재(不在)로 인해 부자가 아니면 모두 가난뱅이 뿐이었다. 그래서 전쟁동안 수십만 명의 피난민들이 새로운 거주지에 정착하여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 때까지는 막대한 양의 원조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또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어느 정도라도 영양공급이 되어야 하는데 굶주리다 보니 의약품만으로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가슴아픈 일은 무료로 준 다량의 치료약과 영양제를 복용치 않고 그들의 생계를 위해 그것을 팔아 생계를 보태는 이들이 허다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비극적인 6·25 사변의 후유증으로 인해 한국의 전통적인 숙명론을 강화시켰고 살아남기 위한 막바지 몸부림을 통하려 뿌리 깊었던 체면의식을 일거에 상실시켜 버렸다. 타기관에서도 구호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구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더 많았으며 특히 부산에는 자기자신과 그 가족들의 생계를 해결할 방도가 전혀 없는 절망적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1951년 4월부터 구호활동을 메리놀 병원 주도하에 시작해 나갔던 것이다. 구호계획은 결핵환자 방문 치료프로그램에 들어있는 가족들과 병원에 찾아오는 극빈자를 상대로 시행되어 나갔다. 당뇨병, 신장염, 간장질환, 영양실조, 심장병 등 특수한 환자의 경우에는 음식물에 대해서도 의사가 처방을 내려서 나누어주었는데 이 경우는 구호라기 보다는 의료행위 그 자체였다.

주로 구호품은 많은 어린이들을 가진 미망인이거나 부모중 한 명이 심각한 병에 걸린 경우와 어린 형제들끼리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에 지급되었다. 또한 아버지가 군에 입대하였을 경우와 어머니가 여럿의 아이를 내버려두고 떠난 상태에 있는 가족에게 지급되었다. 식량은 필요한 때 개인적으로 항상 지급되었는데 주로 쌀, 밀가루, 육류, 통조림, 지방우유, 땅콩버터, 건포도, 말린 자두, 콩 등이었다. 쌀, 야채 등은 자선기금 가구의 세대주에게 매주 목요일 아침에 배급되었다.

그리고 구호진료에만 그치지 않고 화재민들의 재생을 격려하며 장기간동안 급식을 계속 제공하였다. 이때 N.C.W.C 한국지부에서도 화재민을 수용하고 있는 학교구내에 급식소를 설치하고 이들이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매일 식량을 공급하였다.

둘째 입양사업. 병원에서 진료를 받던 5살 미만의 아이들 중에서 어머니들이 사망하거나 아이들을 돌 볼 능력이 없는 어머니들이 많았다. 미혼모나 부모가 있어도 살기가 힘들어 빈민구호 활동을 하고 있는 메리놀 병원에다 아이를 버리면 아이를 무사히 키워주지 않겠나 하는 기대감에 바쁘게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사이에 병원에 그냥 놔두고 가거나 심지어는 아침에 병원문 앞에 핏덩어리를 그냥 내버려두고 가는 경우가 허다하여 한때는 고아들이 초만원을 이룬 적도 있었다. 이에 할 수 없이 수녀들은 갓난아이들을 따뜻하게 하려고 포대기에 싸서 두꺼운 마분지로 만들어진 상자에 넣어 간이 난로 가까이에 두고 돌보면서 일하였다.

이러한 문제로 입양계획을 세워 병원에 오는 환자들 중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성이나 입양을 원하는 가정에 그들의 가정을 조사한 후 정식입양을 시켰으며 얼마동안은 병원에서 그 가정에 유아용 우유를 계속 공급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입양된 아이들 중 갓난아이는 일단 병원에 있게 하여 몸무게가 안정되고 면역이 완전하게 될 때까지는 입양한 부모에게 정기적인 방문표를 주어 아이들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나중엔 노골적으로 자기의 아이를 입양시켜 달라는 어머니들의 문의가 쇄도한 적도 있었다. 수많은 아이들은 자기를 키워줄 새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병원 내에서 자라다보니 수녀들을 자기의 어머니로 알았고 입양되어 헤어질 땐 그 동안의 정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힘들게 달래야만 했다. 1954년 9월 1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들이 성모보육원을 개설하자 그곳으로 아이들을 옮겼으며 이때 입양된 아이들은 약200명이나 되었다.

셋째 육아실 및 육아상담실(Well Baby Clinic) 설치. Well Baby Clinic은 1954년 2월에 입양계획의 결과로써 시작되었다. 입양될 때까지는 버려진 아이를 키우면서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육아실과 육아상담실이 생겨났던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약35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번 오후에 수녀의사 감독 하에 한국인 간호원과 간호보조원 각 1명이 돌봐주었다. 이때 육아실에는 생모의 젖이 부족한 아이, 친지가 양육하며 어머니가 없는 아이, 입양된 아이, 소아과에 입원할 정도의 심각한 질병을 가진 아이로 분류하여 진료를 하였는데 대부분이 극도의 영양실조에 걸려있었다.

당시에는 일반시장과 가정에서는 원유나 분유를 구하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공급처도 찾기가 힘들어 우선 병원에서 직접 분류된 이 아이들에게 미음과 분유, 우유병 등을 공급해 주었고 보호자들에게는 우유병을 소독하는 법과 육아법을 가르쳤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소아진료소에서는 모든 소아환자에게 유아용 우유를 무료로 제공해 주었으며 수유하는 장소도 따로 만들어 주었다.

넷째 나자렛 워크겼(Nazareth Work Shop). 전쟁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약50만 명에 이르는 전쟁 미망인들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위한 생활대책이 강구되지 않고 있어서 한때는 생계유지를 위한 매춘이 성행되어 성윤리를 무너뜨리고 기약할 수 없는 삶에서 비롯된 향락주의로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많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수천 명의 여성과 그에 딸린 어린아이들이 비참한 빈곤으로 산중턱 판자촌이나 피난민 오막살이 집에서 살며 오직 구호품에만 매달리는 실정이었다. 이에 KAVA(외국 민간 원조기간 한국협회) 이사이며 평소 전쟁 미망인을 위한 복지활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메리놀회 메리 가브리엘라 뮬헤린(Mary Gabriella Mulherin) 수녀는 한국 국민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값싼 구호품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이라고 역설하고 병원 울타리내 한 건물을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집이라는 뜻으로 '나자렛 집' 이라고 칭하고 여기서 1953년 5월 19일 전쟁미망인 계획(Widows' Projects) 의 일환으로 나자렛 워크겼을 실시하였다.

이 워크겼은 전쟁과부와 피난민 여성들이 그들 스스로 가족들의 생계비를 버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즉 쌀과 옷 등을 무기한으로 제공하는 구호사업 대신 그들이 직접 돈을 벌 수 있게끔 조성해 주는 것이었다. 우선 이들에게 자수와 바느질, 편물, 재봉질 등 수공예 중심으로 기술훈련을 시키고 생산능력을 갖추게 하여 생산된 물건의 판로는 수녀들이 책임지고 개척하였다. 여기서 생산되는 물품은 카드종류와 인형, 털 스웨터, 수예품 등으로 기존시장은 부산에 있는 외국군인들이 주일날 모이는 장소로 정해졌다. 이곳은 나자렛 워크겼에서 생산되는 생산품의 중요한 판매처로 계속되었고 다른 판로는 작은 시장과 백화점내의 작은 상점들이었다.

워크겼의 방법은 기술훈련을 시켜서 미망인들이 자기 집에서 직접 일을 할 수 있게 하여 일하면서 자기의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재료구입과 판로에 관한 것은 워크겼에서 책임을 지며 이들에겐 인건비를 지불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이 그 수입으로 구호에만 의존하던 것을 면하게 하고 그들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꾸려 가게끔 조성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의 꾸준한 생산활동을 보장해주기 위해 자수, 편물, 재봉질, 기타 수공예 기술 등을 가르치는 기술자를 나자렛 집에 두었으며 12∼15명 정도의 작업반을 정규 고용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미망인과 피난민 여성들이 워크겼에서 기술훈련을 받아 고용되었고 그 후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일자리나 사업장으로 옮겨갔으며 나머지는 병원 내 나자렛 집에서 계속 일을 하였다.(메리놀 병원의 답신-1998. 4. 20)

1951년 11월 5일, 1945년 8.15광복 이후 북한에서 추방된 올리베티아노 수녀회의 수녀들은 월남하여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에, 유을준 아타나시오 의사와 함께 부산 초량동에 자선병원을 개설했다. 당시 이렇다 할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수녀들은 병원 한 모퉁이를 분원으로 삼고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1954년 2월, 병원장 유을준 의사가 병원 전체를 수녀원에 양도하고 떠남에 따라 성분도병원은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의료봉사의 초석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14일에는 정식 병원으로 인가를 받아 내과, 소아과, 외과, 이비인후과, 안과, 치과, 임상병리과 등 7개의 진료과목을 갖추었다. 1955년 5월 15일에는 병원을 3층(본관 건평 474평)으로 증축하고 1960년 9월에는 병원을 5층(별관 건평 438평)으로 증축하였다.

부산 성 분도 병원은 1965년 11월 29일에 비영리 종합병원으로 허가를 받고, 12월에는 수련의 교육병원으로 지정받았다. 그후 수차례의 증축공사, 의료장비와 의료진 확충을 통해 1975년 5월 9일에는 종합병원 인가를 받고, 1988년에는 총 99실 301개 병상을 갖춘 병원으로 성장하여 부산 지역사회의 보건 향상에 이바지하게 되었다.(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 453) 한편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461)

1951년 8월 10일 설립된 성 골롬바 병원은 운현궁 마마께서 윤을수 신부에게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것을 사용권을 위임하여 처음에 골롬바 어린이집으로 시작하였다. 고아들이 점점 많아지자 청평으로 고아원을 옮기고 결핵 요양원으로 변경하였다. 시작할 때 당시 성 루가 병원 박병래 원장이 주치의였으나 환자유치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세브란스 흉부 내과 과장이었던 김기호 박사가 주치의로서 환자를 관리하고 치료해 주었다. 장기치료가 요구되는 결핵환자들이 좋은 환경에서 휴양하며 치료하였고 병실은 11실이 있었다. 1966년 2월에 폐원하였다.(1998년 4월 8일 인보성체수도회 이 마리 세실리아 수녀 증언)

샬트르 성 바오로회의 수녀들은 1951년 9월 10일 소화보육원 어린이들과 부근의 가난한 집안의 어린이들의 치료를 위하여 비영리기관으로 범일동 본당 구내에 데레사 의원을 개설하였다. 이곳에는 소아과와 내과를 두고 전임의사 1명과 간호수녀 2명이 종사하였다. 데레사 의원도 소화보육원과 같은 사정으로 1971년 남천동 보육원 뒤 언덕에 신축하여 영아들의 진료와 인근 주민들의 치료에도 기여하게 하였다. 그 당시 보육원 원아 수는 남아 43명, 여아 80여명이었다. 신축공사는 건축비를 절감하기 위해 직영으로 했는데 수녀들은 일꾼보다 앞장서서 벽돌운반이나 잡석처리를 하며 건축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여 변두리 주민들도 버스를 타고 나가 종합병원을 찾았고, 의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시설 또한 과학화되어 가는 가운데서 모든 설비가 미비한 데레사 의원은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교구의 시책대로 이 건물을 내놓고 현재 영아재활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 이전했다가 1977년 12월 28일 폐원하였다.(샬트르 100년사 945)

1955년 골롬반 수녀회(Missionary Sisters of St. Columban)에서 춘천에 성 골롬반 의원을 개설했다. 이미 이들은 1955년 광주교구의 헨리(Harold Henry, 玄) 주교의 초청으로 엔다(Enda Staunton)수녀를 비롯한 4명의 수녀들이 한국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들은 그해 목포에 수녀원을 설립, 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사업에 착수하였다. 1960년에는 제주도 한림에 진료소를 개설함과 아울러 성 골롬반 선교회 신부들의 협조를 얻어 직조업에 착수, 지역개발에 이바지하는 동시에 부녀자들의 경제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1963년에는 삼척에도 의료시설을 개설(성 요셉의원), 1975년에는 영주에 분원을 설치하여 수녀들이 나환자 진료소인 다미안 의원에서 근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1971년 서울에 본원을 신축, 수녀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사업과 지방에서 활동중인 수녀들의 뒷받침을 해주고 있으며, 서울에서 수녀들은 서울 가톨릭의대와 협력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산하 '행복한 가정운동'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47명의 수녀들이 서울의 본원과 목포, 춘천, 제주, 삼척, 영주 등 5개 분원에서 의료사업, 간호원 교육사업, 사회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93)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Sisters of our Lady of perpetual Help)는 1951년 3월 7일 부산 메리놀 병원이 개원되자 회원들은 병원 일을 도우면서 세탁일, 자수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피난민들과 고아들을 돌보며 교리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현재의 성모보육원이다.(가톨릭대사전 : 831) 1955년에는 서울 영등포구 흑석동으로 본원을 이전하고 성 마리아 의원을 개원하였다. 그러나 한편 이 마리아 의원이 가톨릭 의대 부속병원으로까지 성장하기도 하였으나 1980년 2월 복음 사도직을 원칙으로 하는 수도회로서 경영주가 될 수 없다는 이유와 기타의 이유로 폐원하였다.(교회와 역사 103호 10쪽) 그후 1971년 8월에는 부인들로 구성된 성모자매회를 발족하였다. 1980년에는 경기도 용인군에 소화의원을 개설하여 영세민을 위한 진료를 했다.(가톨릭대사전 : 831)

1956년 12월 4일 하양본당의 본당 주임 이임춘(펠릭스) 신부의 초청으로 서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공순옥 마리 헬렌 수녀와 강봉순 로렌죠 수녀가 전교와 유치원을 담당하기 위하여 부임하였다. 수녀들은 신부의 뜻을 따라 마을 중앙에 성가진료소를 조그맣게 개원하게 되어 간호수녀 1명이 추가 파견되었다. 하양은 농민이 많은 소규모의 읍이라 운영상의 애로점이 많아서 1968년 성가진료소는 문을 닫아 의료사도직을 그만 두게 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918)

1950년 월남한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수녀들과 6.25동란으로 피난 나온 수녀들이 부산에서 미군들의 삯빨래 등으로 생활하다가 1951년 10월 20일 당시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주선으로 대구 남산동 본당 내 사제관 일부에서 정착하였고 1955년 1월 현 대구 신암동에 건물을 신축하여 1956년 대구 분원이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고 초대 원장에는 오테마라(M. Othemara Ammann) 수녀가 임명되면서 파티마 의원을 개원했다.(가톨릭대사전 : 462)

1971년 원목실에 수녀들이 외래입원환자와 직원들의 신앙, 상담을 위하여 파견되어 병원장에 메리 엑네스 수녀가, 원목실장에 김원집 수녀가 맡게 되었다. 설립당시 입원환자 침상은 300개 정도가 있었지만 현재는 500여개의 침상과 평신도 2명, 신부 1명, 그리고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 7명이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직원수도 800명으로 증가하였고 자원봉사자수도 200명으로 증가하였다. 파티마 병원은 "들어라, 너는 병중에서 주님을 떠나지 말아라. 항상 기도하면 주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다."(집회 38,9)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병원의 이념은 첫째 파티마병원은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가톨릭 교회 전통인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둘째 파티마병원을 찾는 모든 이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양질의 진료로서 고통받는 이들을 낫게 하고 심리적, 정신적 및 영적인 안정과 평화를 찾도록 도와주며 최선의 예방 및 재활에 힘써 건강한 생활을 하도록 돕는다. 셋째 질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인간 삶의 한 부분이며 오히려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환자와 그의 가족들에게도 병을 치유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인간다운 품위를 지니도록 그들을 돕는다. 넷째 각 개인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진료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며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돌본다. 다섯째 모든 인간생명의 신비와 존엄성이 진료활동 전반에 걸쳐 존중되도록 교회의 가르침을 준수한다. 여섯째 성 베네딕도가 가르친 대로 "병든 형제를 그리스도처럼 섬기고 돌볼" 뿐 아니라 치유사도가 동참하는 동료들과 형제적 연대성을 증진시켜 그리스도적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힘쓴다. 일곱째 양질의 진료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갖추고 책임 있는 관리로 이들 목적을 달성하도록 노력한다.(1998년 8월 28일 대구 파티마병원의 이 헬만 수녀의 답신)

1956년 6월 6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후암동에 복자의원을 개원하고 김순옥(아오스딩) 수녀와 손순분(요한) 수녀, 강신자(루시아) 수녀, 박순옥(뻬르뻬뚜아) 수녀를 파견하였다. 당시 복자수도원에 윤 수사가 내과의사였으므로 윤 수사가 진료를 담당하고 손순분 수녀와 강 루시아 수녀가 간호사일을 담당하였다. 후암동은 부촌이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복자의원에 환자가 오지 않아 운영이 안되었다. 병원이 지대가 높아 물이 밤에만 약간 나와 수녀들이 다라이와 동이를 이고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병원건물은 수도여고 방순경 교장의 집이었다. 방 교장은 당시 전후가 되어 수녀원 경제가 어려운 것을 알고 수도여고 응접실 커버와 커튼을 병원수녀들에게 주어 수녀들이 교장 사택에 가서 세탁하여 손질을 하여 수도여고에 갖다 주었다. 복자의원은 개원한지 약1년만에 문을 닫았다.(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

1958년 8월 성가 소비녀회가 서울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했다.(가톨릭대사전 : 608)

1958년, 1593년 포루투갈의 천주의 성 요한에 의하여 창설되어 광주교구의 헨리(Henry) 주교의 초청으로 1958년 한국에 진출한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 수도회(Hospitaler Brothers of St. John of God)가 '천주의 성 요한 의원'을 개원하여 이 지방의 가난한 주민들과 노동자계급의 의료요구에 응하게 되었다. 1971년에는 광주시 변두리에 걸인수용소인 갱생의원을 설치하는 한편 그 안에 정신과 병실을 설치하여 한정된 수의 환자들에게 획기적인 치료방법을 시도하였다. 1973년에는 '천주의 성 요한의원' 내에 정신과 외래를, 1980년에는 정신과 입원실을 개설하여 정신질환 치료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울러 정신과 간호원 훈련 등 의료교육사업 및 '소년의 집' 이라는 고아원도 경영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1132)

1960년 5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부산 양정동에 정착하여 성모의원과 함께 수예실을 운영했다.(가톨릭대사전 : 366)

1960년 골롬반 수녀회가 제주도 한림에 진료소를 개설했다.(가톨릭대사전 93)

1961년 4월 1일 가톨릭 중앙 의료원에 부속으로 나병연구를 위한 '만성병 연구소'(Institute of Chronic Diseases)를 설립했다. 천주교 구라회 설립자인 미국 메리놀회 서 요셉 신부(Rev. Joseph A.Sweeney. MM)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미생물과학교실의 협조를 얻어 다음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첫째 나병의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에 관한 연구, 둘째 의학과, 간호학과 학생의 나병교육과 임상실습, 셋째 나환자의 외래진료와 이동진료를 통해 나병의 조기발견과 치료 및 예방, 넷째 나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및 경제적 재활협조.

만성병 연구소의 사업내용은 나병에 관한 역사적인 연구와 기초의학 및 임상의학 분야에 관한 연구를 하며 의과대학 학생과 간호학생들에게 나병에 관한 교육과 실습, 국제 교류를 통한 정보교환, 재가 나환자의 외래진료, 경기도 한강 이북지역에 있는 7개 나병 음성자 정착마을과 4개시 8개군 보건소 등록 재가 나환자의 나병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딸회와 공동으로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순회진료를 실시한다.

성 라자로 마을 나환자를 위한 순회진료를 실시하며 나환자 보조금 지급을 대행하기 시작했다.(릴리회 지원아래 극빈 재가 나환자의 자녀를 위한 학비보조금 지급 대행, 한국 가톨릭 나사업연합회 지원으로 재가 나환자의 생계자금 지급 대행), 치과치료 알선, 강원도 내 강릉, 동해, 삼척, 속초, 태백 등 5개시와 고성, 명주, 삼척, 양양, 영월, 정선, 평창 등 7개군에서의 재가 나환자의 발견과 보건소에 등록된 나환자의 치료를 천주교 구라회와 공동으로 이동진료를 실시하고 있다.

1970년에는 충남지역 정착마을 나환자를 대상으로 또 1976년에는 강원도 원주에 있는 대명원과 경천농원에 의학과, 간호학과 하계 진료봉사 학생들과 진료봉사를 통하여 나병의 임상실습을 지도하였다. 1972년 천주교 구라회 이동진료 업무가 한강 성심병원 부속 한국 의과학 연구소로 이관되면서 천주교 구라회의 이동진료 업무는 중단되었다. 그 후 대한나관리협회 경기지부 진료반 창설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1975년부터 1979년 6월까지 4회 경기도 전역의 이동진료를 하였으며 진료지역으로는 염광농원, 동진원, 부평농장, 청천농장, 경인농장, 삼성농장, 의왕농장, 간석농장, 경성농원, 고운마을, 성생농장, 천성농장, 상록촌, 금촌농장 및 포천농축단지 등에 살고 있는 나음성자들과 경기도 일원의 재가 나환자들에게 나병진료와 합병치료를 실시하고 있다.(가톨릭 중앙 의료원 부속 나병연구기관 '만성병연구소'-1998. 4. 22 홍보과 이승우(바오로)의 답신)

1961년 5월 15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서울 청량리에 성 바오로 병원을 설립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하고 있던 제기동 성모병원이 차츰 번창하여 입원실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늘어나므로 홍순덕 이렌 수녀, 의사인 홍순자 아드리아 수녀, 이계 요세파 수녀는 1961년 5월 15일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여 가톨릭 의대 부속병원으로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70년 10월 15일에는 강원도 원주시에 분원을 개원하여 빈곤하고 불우한 벽지의 형제들에게 의료혜택을 주고 원성군 내 산간벽지를 순회하며 무료진료를 실시하는 등 사회복지사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75년 3월 연건평 4천평, 지하 2층, 지상 10층의 신관기공식을 가진 후 76년 11월 6일 당시로는 청량리 일대에 제일 높은 건물로 청량리를 상징하는 새 병동을 준공하기에 이르러 250개의 병상으로 확장하였다. 종합병원, 부속병원으로서의 모든 기능을 갖추고 발전시켜 나가면서 개원 20년 사이에 모두 17개의 임상과를 두게 되었다.

한편 의료사업 외에도 원내봉사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있는데 1985년 7월 5일 병원장을 고문으로 하여 발족시킨 자선회는 가난한 이웃과 고통받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 준다는 취지아래 매월 작은 둥지회, 외방선교회, 결핵돕기회, 늘푸른 나무, 해성 영아원 등을 돕고 있으며 또한 사정이 어려운 병원 직원들에게도 도움을 주고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선회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년에 한 두 번씩 바자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1978년 7월 1일에 세워진 장학회는 구내매점 운영으로 얻어지는 이익금을 기반으로 장학금 재원을 확보하여 그해 8월 19일에 장학금을 지급한다. 인천 혜성보육원의 원아들과 쌘뽈 양로원의 노인들을 위해서도 무료진료를 하고 있다.(1986년부터는 애덕의 집 지체부자유자들의 진료를 무료로 담당하고 있으며 성직자 및 수도자들에게도 많은 혜택을 주고 인근의 불우한 주민 돕기에도 솔선수범하고 있는데 무료입원 및 통원환자는 월 평균 10-20명에 이르고 있다. 성 바오로 병원은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니만큼 환자의 질병 뿐만 아니라 영적 간호의 중요성도 인식하여 1973년 7월 16일 병원 내에 원목실을 신설하여 가톨릭 병원으로서의 본연의 사목활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1986년으로 개원 25주년을 맞은 성 바오로 병원은 단순히 육신의 병을 치료해주는 병원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복음의 증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816)

1961년 10월 30일, 1894년 인천 교구 답동 본당에서 운영하던 해성 보육원의 원아들과 인천 제물포의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개원한 해성병원이 시설 인가를 받았다. 1970년 5월 30일에는 병원의 원사 1층을 대폭 수리, 이전하여 병원시설을 보완하였다. 1975년 인천의 답동에 있던 해성보육원은 1948년 용현동에 분원을 마련한 이후 영아원까지 모두 용현동으로 이전하자 아기들의 치료를 위해 1주일에 2∼3번씩 답동에서 왕진을 다녀야 했다. 또 급하면 가까운 의원으로 아기를 데리고 나가야 하는 불편 등으로 인하여 1984년 4월 28일에 해성병원은 인천의 해성보육원으로 이전하였다.(샬트르 100년사 : 860)

1962년 8월 30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대구에서 운영하던 '성가병원'이 폐원되고, 대구대교구장으로 착좌한 서정길(요한 1911-1987) 주교가 독일 미제레올(Misereor)의 후원으로 병원신축을 계획하면서 마침 덕원에서 월남하여 대구에 안착하기 시작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운영을 맡겨 현 파티마병원의 신축을 보게 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974)

메리놀 수녀회는 1962년 2월 인천교구 답동 본당에서의 종교활동을 돕고 학생지도 및 영어지도를 실시하여 왔으며 1967년 3월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회관에서 청소년 지도자 강습과 여성들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1963년 경기도 강화읍에 그리스도왕 의원이 설립되어 메리놀회 수녀들이 의사와 간호원으로 일하였으며 전교사업도 함께 도왔다. 1969년 초 요안 서빈 수녀는 백령도에 소재한 김 안드레아 병원에서 간호과 책임자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74년 대한 적십자가 인수할 때까지 섬사람의 건강과 아울러 간호보조원 교육과 훈련을 부지런히 했었다.

그후 메리놀 수녀회는 전남 소록도에 있는 국립병원에 자원봉사 간호원으로 활동하고 1973년 성신강림 대축일 김수환 추기경의 허락을 얻어 2명의 수녀가 그리스도께 헌신할 조그마한 단체의 조직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공업단지 근처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진료소의 간호원으로 상담자로서, 노조에서 간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 등을 맡아보게 되었다. 1976년 9월 가이에르 수녀가 서강대에서 영어를 담당하는 외에 경북 울진 진료소 활동, 부평 본당에서 종교사업과 노동자를 위한 사업활동, 1979년 10월 광주의 천주의 성 요한 병원에서 환자가족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1980년 거창 나환자 마을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1981년 11월부터 성남시에서 2명의 수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과 전교활동에 힘쓰고 있다.(교회와 역사 80호 7쪽)

1963년 1월 김기봉 신부는 광안동 성모건설원에 신경 전문 치료병원인 '성 필립 신경 정신과'를 개설했다.(교회와 역사 208호 11-1992. 9. 25발행) 1963년 골롬반 수녀회가 삼척에 성 요셉의원을 설립했다.(가톨릭대사전 : 93)

1955년 6월 27일 인천직할시 북구 부평 6동에서 김영식(베드로) 신부에 의해 설립된 연백성모원의 원아들을 위한 성모 자애 병원이 1963년 4월 9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인수되었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1963년 4월 9일 황우경(스테파노) 수녀와 박순옥(ꥉ뻬뚜아) 수녀를 파견하였으며 1963년 6월 30일 정수자(막달레나) 수녀와 1963년 7월 20일 심상임(막달레나) 수녀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한국순교복자 수녀회는 같은 해에 밀양의 성모성심병원도 인수하였다.(가톨릭대사전 : 1260)

김 신부는 6·25라는 참혹한 전쟁 후 이 땅에 전쟁의 상처가 널려있었고 황폐하고 굶주리고 병든 자들과 전쟁으로 혼혈 고아들이 많이 발생된 비참한 사회상황을 보면서, 미 제 8057부대 가진스키 중령과 솔지반 군종신부, 그리고 가톨릭 구제회 한국 지부장 캐롤 몬시뇰의 협조로 1954년 9월 22일 성모자애병원의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연건평 119평 아담한 2층 건물을 완공하고 1955년 5월 5일 낙성식을 가졌다. 1955년 6월 27일부로 원아 후생 보건 사업으로 내과, 외과, 방사선과 등 3개 과에 초대 의무원장이신 노신주씨 외 의사 2명과 간호사 2명, 그 외에 5명 등 10명이 가족적인 분위기로 첫 개원을 하게되었다. 병원이 개원되면서 미8군에서는 더욱 관심 있게 원조를 베풀어 1958년에는 미8군 제 6의료창 사령관으로부터 링켈, 다이아징 등 19종에 달하는 의약품을 미8군 군사 원호청을 통해 전달되었다.

1962년 1월 9일 총 건평 211평에 현대식 병실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입원실과 특히 산부인과에서는 최신식 자동분만대를 설치하고 당시 제 3대 병원장 진병집 원장의 운영방침의 일환으로 월간 1500명의 환자들 중에서 무의무탁한 환자들은 무료로 치료해 주었고 그로 인해 병원을 찾는 환자는 급증하였다.

탁월한 의사진과 의료기구 등을 설치한 성모자애병원은 1962년 4월 7일 가톨릭의대부속병원으로 약정편입, 새로운 발족을 함에 따라 의사진을 보강하는 한편 진료의 학술적인 탐구를 위해 대학에 의사 인사권을 맡기어 보다 훌륭한 의료진을 보강하였다. 성모 자애 병원이 부속병원으로 새로이 발족함에 따라 지역보건 향상에 기여는 물론 불우한 환자들의 쇄도 양상은 진료비가 저렴하고 특히 미8군으로부터 원조를 받은 X-ray기와 산모를 위한 무통분만기로 분만은 거의 무료봉사를 하였던 실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병원은 미8군 지정병원, 공무원 요양지정병원, 산업재해 보상보험 지정병원, 한국 자동차 보험지정병원, 경찰 전문학교 지정병원으로 되어 있었다. 특히 성모자애병원은 미제 121명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임상검사 및 조직 검사를 함께하고 있었다. 한편 모자 보건에 대한 계몽운동이 잘 안되어 있어 분만은 거의 무료 봉사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모자 보건 계몽 및 무의촌 이동 진료를 계획하고 최초로 무료 이동 진료를 실시하여 인술을 베풀었다.

그 외에도 인천시 북구 가정동과 자매결연을 맺고 영세민 구호로 밀가루 20포와 매월 1회 순회 무료진료를 실시하였다. 이외에도 병고와 가난으로 사경에 처한 지역주민들을 무료로 인술을 베풀어 지역주민을 감격하였다.(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1998. 4. 28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의 답신)

1964년 가톨릭중앙의료원에 자선진료소를 설립했다. 자선 진료소는 산발적이고 비전문적으로 실시되어온 구호사업을 조직적이고 전문적으로 실시하여 효율적인 구호사업으로 도모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과 취지가 있다. 대상은 일반 극빈환자, 의료보호 환자, 학술상 희귀병을 가진 극빈환자, 그리고 다른 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가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치료를 중단해야 하는 경우에도 혜택을 주고있다. 환자가 찾아오면 사회사업가가 대상자의 적격여부를 면접과 가정방문을 통해서 선별한다. 대상자로 선정된 환자라고 할지라도 진료비 전액을 지불해 주는 것은 아니다. 환자가 부담할 수 있는 능력만큼 부담시키고 그 차액을 보조해 준다.

그러나 대부분이 극빈자이기 때문에 환자부담은 소액일 뿐이었다.(1984년의 경우 입원과 외래, 이동진료소를 포함하여 자선진료소를 이용한 환자수는 모두 2,980명으로 1억5천6백여만원의 의료비가 지급되었다. 자선진료소의 의료비는 가톨릭중앙의료원에 의해서 지급되어진다. 그러나 이곳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생활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퇴원 후 또는 입원시에 의료적인 도움 외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가정문제를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환자들 뿐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 나서서 의료혜택을 베풀고 있는데 시립남부 부녀보호소, 마포구 도화동, 성 라자로 마을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지역사회 보건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가톨릭 외대생들로 조직된 하계 진료반은 매년 무의촌 지역을 방문하여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전하고있다.)(나눔지 63호 3-1985. 9. 7발행)

1965년 3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가 강릉에 '갈바리 의원'을 개원했다. 60년대 초 강릉지역의 가난하고 열약한 지역에 후천성 질환, 특히 결핵과 영양실조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으나 이에 대응할 병원은 전무상태였다. 그 당시 도림병원과 명주의원 외에 다른 의료시설이 없어서 춘천교구의 교구장 이셨던 퀸란 주교가 호주에 있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을 초대하여 이 지역에서 의료봉사를 하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3월에 강릉에 설립하였고 외래 의원으로 (1998년 현재) 하루 평균 10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갈바리 의원은 예수님의 치유의 현존을 모든 이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1998. 3. 31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답신)

1965년에는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수녀들이 대구 시립병원과 희망원에서, 1968년에는 국군간호학교에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가톨릭대사전 : 462) 1966년 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가 극빈 폐결핵 환자들을 위한 춘광 대구 요양원을 세웠다.(가톨릭대사전 : 555)

1967년 6월 3일, 프랑스 파리에서 1633년 뱅상 드 폴 (Vicent de Paul) 신부와 루이즈 드 마빌락 (Luise de Mavillac)에 의하여 창설되어, 가난해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사회사업과 양로사업을 추진하는 빈첸시오 수녀회(Barmherzige Schwestern vom HL. Vincenz Paul zu Parderborn)가 수원에 가톨릭 의과대학 제5 부속병원으로 성 빈센트 병원을 개원했다.(가톨릭대사전 : 526)

빈센트 성인의 정신에 따라 병원을 통하여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고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한국의 정황은 6·25전쟁이 끝난 지 10년 남짓한 기간이었으므로 외국, 주로 미국의 원조에 의하여 겨우 전후의 복구가 마무리되는 듯한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어려운 때였다. 따라서 이 수원지역은 수도 서울에서 불과 40㎞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병든 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의료시설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실정이었다.

이때 수원교구가 설립되어 윤공희(빅토리노) 신부가 주교 품에 오르면서 초대교구에 수도회와 교회의 의료기관이 설립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던 차에 마침 교황 대사로 있던 ANTONIO DEL GUIDICE 신부로부터 독일 파데르본(Paderborn)에 있는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권고에 따라 한국에 전교하기 위하여 대상지역을 물색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교황대사의 주선으로 이들을 초청하게 되었다. 이 초청을 받은 수녀회에서는 이를 기꺼이 수락하여 1차로 두 명의 수녀를 파견하여 윤공희 주교와 논의하고 모든 상황을 파악한 후 귀국하여 본원에 결과보고를 하였다. 결과보고를 접수한 수녀회에서는 공동체를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이 공동체의 주보이신 빈센트 성인의 정신에 따라서 의료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제반준비를 추진하게 되었다. 따라서 1964년부터 수원시 지동 93번지 일대에 부지를 구입하는 한편 같은 해 11월에는 한국의 수녀가 되고자하는 지원자 9명이 독일 모원으로 가게되었다. 이들은 수녀가 되어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귀국하여 당시 한국 분원과 병원발전을 위한 초석으로의 역할을 하게된다.

자선진료는 병원의 설립이념에 따라서 병원이 개원된 지 약 5개월 후인 1967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 외래진료실은 진찰실과 대기실, 약국을 갖추고 주3회, 월, 수, 금요일에 1일 70-80명을 진료하였으며 입원 진료 시설은 5개의 병실에 욕실, 남녀화장실, 간호사실을 갖춘 25병상 규모로 이중 남녀 성인 환자용으로 각각 10병상씩 할애하고 소아환자를 위하여 5병상을 마련하였다. 또한 자선진료를 위한 전담인력을 배려하였던 바 자선병동 개설 당시 전담의사는 이정동 수련의였으며 간호인력은 이위순 수간호사를 비롯한 5명의 간호사와 4명의 간호보조원이 배치되어 수고하였다. 자선 진료 과목은 병원내 전 의료진의 도움으로 당시 개설되었던 모든 임상과를 망라하였다.

그러나 제한된 진료시설에 무료진료를 받고자 하는 환자의 수효가 점차 늘어감에 따라 부득이 자선 무료진료 대상자를 선별하여 진료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지라 이를 위하여 행정서관인 읍·면·동회장과 각 본당 신부들의 협조를 의뢰하여 극빈자 카드 소지자와 본당 신부들의 추천을 받아오는 환자, 기타 가난하다고 인정되는 환자 순으로 대상을 정하고 입원의 우선순위도 정하였던 바 가정내의 역할 면에서는 가장이나 젊은이, 어린이, 학생순으로 하였고 상병에 의한 우선 순위는 부인과 수술, 탈장, 맹장, 내과적 질환, 기타질환 순으로 하여 입원시켰다. 또한 당시 사회적 여건이 어려운 때인지라 성 빈센트 병원에서의 자선무료진료는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소문이 널리 퍼짐에 따라 찾아오는 환자들을 보면 수원지역을 비롯한 경기도 남부뿐만이 아니라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의 거의 대한민국 전역이 대상이었다.

병원이 개원된 1967년 6월이래 1978년까지 사회구호 사업은 병원을 찾아오는 가난한 환자들에 대한 자선진료를 위주로 하여 시행되어 오다가 1979년부터는 연 3-4회씩 의사와 간호사, 구급차와 의약품을 동원하여 무의촌을 찾아다니면서 의료봉사활동을 전개하여 왔다. 병원에 천주교 신앙단체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와 '레지오 마리애회'가 일찍부터 조직되었고 이들의 자선봉사활동 또한 활발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기쁨이 되고 있다.(1998. 5. 2일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답신)

1967년 10월 6일 마리아의 전교자 성 프란치스꼬 수녀회가 성 프란치스코 의원을 설립했다. "예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 23),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파견되었다." 라는 성서 말씀과 회헌을 바탕으로 1967년에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의료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1967년 설립 당시에는 가리봉 지역이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의사 2명과 약사 1명 그리고 간호사 1명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 형태로 시작하였다. 1997년 현재는 의사 1명, 간호원 4명, 보조원 3명, 사무직원 1명이 활동하고 있다.(1998. 4. 21일 성 프란치스꼬 수녀회의 답신)

1967년 11월 1일 성 빈센트 병원 내에 자선 진료소가 개설되었다. 자선 진료소는 전 의료진의 지원과 협조로 성 빈센트 병원의 진료 과목과 동일하게 운영되었다. 제한된 진료 시설에 비해 무료 진료를 희망하는 환자수는 급증하고 있어 부득이 대상자를 선별해서 진료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던 중 1977년 의료 보험 제도의 도입으로 1978년 11월에 자선 진료제도는 폐지되었다.

그 대신 타병원에서 진료를 꺼리는 의료 보호 환자에 대한 진료를 확대하는 한편, 생활이 어려우면서도 의료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감면해 주는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 1967년 11월부터 1978년 11월까지의 자선 진료 실적은 연인원 외래환자 58,717명에 입원 환자가 52,700명에 이르렀으며, 1978년 11월부터 1991년 말까지의 의료보호 환자의 진료 실적은 연인원 외래 환자 54,497명에 입원환자는 106,371명에 달하였다.(교회와 역사 271호 12-1997. 12. 25발행)

1967년 동정 성모 수녀회가 충북 보은 분원에서 성모병원을 개원했다. 한편 전북 이리에서는 성모의원과 2개 시와 6개 군의 나환자 정착촌 12개에서 의료 및 구호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곳 성모의원에서는 나환자 전용병동도 새로 건립하였다.(교회와 역사 81호 7-1982. 4. 25 발행; 가톨릭대사전 : 309)

1968년 3월 8일 대구 가톨릭 사회복지회는 대구 결핵 요양원을 설립했다. 재단법인 '태린회'로 발족되어 폐결핵환자 수용시설로 인가를 받아 대구시립 희망원에서 결핵환자 54명을 인수하여 1968년 3월 8일 개원한 대구 결핵 요양원은 치료시기를 놓친 빈곤한 폐결핵 환자의 치료기간 중 입원보호와 대구 가톨릭 의료원 내과 전문의의 월 2회 진찰, 투약, 주사 등과 또한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한의사회의 주 2회의 한방진료, 치료 및 자활에 도움이 될 생활교육, 기능교육, 신앙생활을 지도하며 취업 등 사회재활에 도움이 될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 입원 대상자는 생활보호 대상자나 무의무탁한 폐결핵 환자로 14세 이상인 자이며, 그 외 수술 후나 균음전된 환자와 계속적인 투약과 치료가 필요한 환자이다.(1998. 5. 20일 대구 결핵요양원의 유재명의 답신)

1969년 9월 1일 마리아 수녀회가 결핵 요양소를 설립했다. 의료사업인 부산의 결핵요양소와 서울의 갱생원은 시 당국의 경영난으로 믿고 넘겨 준 의료기관인데, 모두 무료치료를 베풀고 있다. 그리고 1970년 3월 1일에는 무료진료소를 설립했다.(교회와 역사 67호 7쪽)

1970년 10월 7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돌보고자 하는 수도회의 목적과 정신에 따라 당시 의료시설이 충분치 못하여 거의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던 강원도 원주교구로부터의 봉사요청을 받아들여 원주시 변두리에 성 바오로 병원 원주 분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원주시 개운동(開運洞)에 대지가 1,000평 건평이 350평에 달하는 2층 병원 건물을 신축하고 1970년 10월 7일에 병원 낙성식과 축성식을 가졌다. 그 해 10월 15일 개원한 이래 원주 성 바오로 병원은 원주교구에서 일반진료와 극빈 환자들을 꾸준히 치료하여 왔다. 또한 매주 수요일마다 강원도 횡성군, 원성군, 평창군 등의 무의촌에 이동진료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원주지역내에 의료기관이 확충되고 의료보험의 확산으로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한 이전문제가 논의되어 오다가 결국 인천 해성보육원 어린이들을 위한 해성의원에 통합하기로 하고 1985년 10월 31일, 개원 16년만에 문을 닫았다. 그 동안 의사수녀를 비롯하여 간호수녀들의 노고가 컸고 직접 간접으로 의료활동을 통한 복음화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큰 몫을 담당해 온 원주 성 바오로병원 자리에는 병원건물을 개축한 '성 바오로의 집'이 개원되어 지역사회 교육의 장으로 쓰여지게 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1003)

1970년 10월 20일 마리아 수녀회가 구호병원을 설립했다.(교회와 역사 67호 7쪽) 1972년 동정성모회가 나환우 진료 및 일반 진료를 위하여 전주교구 이리에 성모병원을 설립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목적으로 나환자 치료사업과 나병 퇴치에 역점을 두고 지역사회에 보건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침상 수는 19병상으로 나환자 입원용으로만 이용되고 있으며, 기타 외래 환자는 연평균 81,540명이다. 주요 이용자는 생활정도가 중하위 계층의 40대 후반이다. 그러나 나환자들의 고령화 현상으로 인해 점차 나사업의 활동 범위가 축소되면서 재활과 복지, 그리고 임종을 돕는 호스피스에 역점을 두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망을 심어 주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또한 지역사회의 보건 향상에도 일익을 담당하면서 현재 8명의 회원들이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309; 교회와 역사 81호 7-1982. 4. 25발행; 교회와 역사 242호 11-1995. 7. 25발행)

1972년 11월 성체회 수녀들이 성남시 어머니들의 모자보건사업을 위해 '성모 조산소'를 시작했다. 성모 조산소의 목적은 모자보건 사업이었지만 그곳의 실정에 맞게 하다보니 피치 못하고 의료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수진동 성당을 무대로 신자중심의 가족계획 상담실을 운영하면서 임산부들의 전인교육을 위해 힘썼고 그에 따른 문제점들을 발견하다가 보니 전적인 의료봉사를 하게 된 것이다.

그 뒤 가톨릭 구제위원회에 의뢰하여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를 얻어다가 가가호호 방문하여 나누어주곤 하였다. 또한 무료진료를 주1회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광주대단지가 성남시로 승격된 이후 안정이 되면서 조산소 사업을 마치고 잠시 유아원으로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1989년부터는 현재의 인보의 집 할머니들을 위한 무료양로원으로 운영되고 있다.(1998. 4월 평택본당 안 세시리아 수녀의 답신; 나눔지 3호 2-1977. 2. 22발행; 가톨릭대사전 : 667)

1973년 11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가 포천에 평화의 모친의원을 개원했다.(이 의원은 1987년 폐원되고, 양로원으로 변했다.)(1998. 3. 31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답신)

1974년 여름 메리놀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메리놀회 미국 수녀들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울산 현대 조선소에서 부속병원을 세울 예정인데 가서 봉사할 뜻이 있는지를 문의해 왔다. 이에 수녀들은 지대한 관심을 갖고 그해 10월 5일 병원 설립 워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1975년 2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병원지대를 1차 답사하여 회사측과 설계를 의논하고 1975년 8월 1일 설립자와 수녀회와의 병원관리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다. 9월 15일에는 110병상 규모의 현대조선소 부속병원의 준공을 보게되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1972년 현대조선소를 시작한 후 3년만에 근로자 15,000명의 복지 및 그 가족들과 주변 주민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느꼈고 당시 조선소 내에는 진료소가 1개 있었으나 초창기 조선소의 어려움 속에서 사고가 잦고 사망자도 상당수 있었다. 응급환자 발생시 시내 병원까지는 16㎞ 거리에 약 1시간이 소요되어 구내병원 설치를 절감한 것이다.

수녀들이 이곳에서 봉사하게 되자 조선소 주민들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그 당시 울산 시민은 20만 이었으나 시내에 성당은 하나뿐이었다. 시내까지는 한시간이 소요되며 방어진에 공소가 있을 뿐 조선소 주위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약화되어 갔는데 냉담 신자들이 먼저 수녀들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첫해 성탄미사에는 비가 왔고 경당은 좁아 만원이 되어 창문을 열어놓고 우산을 든 100여명의 신자들이 사랑의 잔치에 참여하는 노천미사가 되었다. 이듬해 2월부터는 정원에서 본당 주임 오수영(히지노) 신부의 협조아래 주일미사를 봉헌하였다. 수녀들은 낮에는 병원에서 근로자와 간부를 차별함이 없이 고통받는 환자들을 따뜻하게 돌보고 밤에는 첫영세 교리반, 부인회, 청년회, 예비자 교리반, 레지오 마리애등 준본당과 같이 말씀의 선포와 증거로써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려는 노력을 하였다.

병원 개월 후 7년만에 맞은편 산을 깎아 1982년 8월 28일 현대식 병원이 준공되어 10월 1일에 개원하였다. 이때 조선소 당국에서 수녀들의 봉사에 대한 신뢰와 감사의 뜻으로 바다의 샛별이신 성모님을 기리는 '현대해성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하도록 하였다. 1985년에는 개원 10주년을 맞이하는 해를 계기로 하여 정주영 회장은 병원과 수녀원 사이에 있는 언덕을 깎아 10억 비용을 들여 1,000명을 수용, 주보를 성 바오로로 하는 성당을 지어 부산교구에 바쳐 1986년 11월 1일 헌당식을 가졌다.(샬트르 100년사 : 949)

1975년 2월 1일 국제 가톨릭 형제회(AFI)가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으로 소외되고 병들어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의료사회사업을 행함으로써 영세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아울러 지역사회의 문제를 함께 발견하고 걱정하고 해결하는데 참여함으로써 세상에 복음을 선포 증거하고자 서울 영등포구 시흥2동 200-2(현 금천구 시흥5동 200-2)에 사회복지사 유송자(데레사)와 약사 최소희(데레사), 간호사(현 의사) 마리헬렌 브라써(배현정) 3인이 의료사회사업기관 전·진·상 복지관을 설립했다.

현재 사회사업부에서는 의료, 가정, 부부, 청소년, 아동, 생활법률 문제 등을 상담하는 상담실, 영세민 자녀들을 위한 무료 유치원, 무료 공부방, 장학사업 및 거택 보호자들인 노인 100명에게 한국 노인복지회의 후원과 복지관의 보조로 매월 10,000원씩 지급하며 무료진료, 가정방문 등의 노인재가복지, 이·미용 무료봉사 그리고 타 해당 복지기관과의 연계활동을 하며 후원회와 봉사자 관리를 하고 있다.

전진상 의원 진료부에서는 진료 대상을 면접하여 진료비를 정하고 등록하여 가정의학과 진료와 전문과목 진료를 하고 타병원에 진료 의뢰를 하며 지속적으로 환자를 관리하며, 가정호스피스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전진상 약국에서는 전진상 의원 진료 환자에 대한 투약과 내방 환자 상담 및 교육을 실시하고 이익금 전액을 복지관 활동비로 환원 활용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176; 1998년 11월 6일 전진상 복지관의 답신)

3) 사회복지 활동의 시대적 성격과 그 의의

이미 앞의 '3. 일제식민시기의 활동'에서 보았듯이 일제 식민통치 시대에 일본인들은 한국을 쉽게 통치하기 위해서, 한국인 우민화 정책을 썼다. 그 정책 중의 하나가 당시 민중 계몽을 위한 교육과 운동을 하던 종교인들을 제어하려고 했다. 식민지 정부는 1915년 '포교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정부의 허가를 받고 선교하도록 함과 동시에 '사립학교 규칙 개정령'을 통해 종교계 학교에서 교수시간을 통해서나 교내에서 일체 종교교육을 실시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명령을 어겼을 때는 포교규칙에 의해 언제든지 포교의 담임자나 그 방법을 바꾸고 본당을 폐쇄할 수 있다는 위협을 가했다. 그리고 또 한편 교원자격증이 없는 이들을 학교 교단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정책에 의해 대중 운동적인 성격이 강한 교육복지나 시약소 등의 의료복지 활동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독일 성 베네딕토 수도회를 불러 '숭의학교'라는 사범대학을 세우는 등의 저항을 계속했으나, 일제의 탄압에 의해 2년만에 폐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 선교사들은 교단에서 떠나야만 했고, 특별히 여성 수도자들은 본당 내의 종교활동이나 예비자 교리, 가정방문, 제의실 담당 등의 일로 전환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그런데 해방이 된 후에 이러한 변화가 다시 복원되지 못하고, 오히려 고착화되었다. 그래서 첫째 교회의 기본 사목조직인 본당에서는 지역사회 주민들을 위한 사회복지활동을 변화하는 사회 환경에 맞추어 더욱 더 창의적이고도 발전적으로 힘쓰기 보다 단순 자선차원에서 머물고 종교적인 의미로서만 축소되는 선교와 종교 행사에 더욱 치중하게 되었다. 외부의 많은 박해와 통제로 빚어진 환경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 오히려 본말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과거에 본당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지역사회복지는 결과적으로 축소되었다.

둘째 교구와 본당의 이러한 흐름과는 별도로 전문화되고 세속화되는 사회 환경에 맞추어 수도회가 본당이나 교구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회복지시설을 신설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복지 전문 수도회와 사도직 단체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 특이하다. 아울러 분화·전문화되고 체계화·체제화되어 가는 사회 환경에 맞추어 나가다 보니 교회인이라기보다는 전문가적인 모습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셋째 교육복지의 경우에 일제말기부터 이어져온 종교인들에 대한 자격증 취득 요구는 결과적으로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비롯한 요구호자에 대한 복지 측면에서 벗어나 교육이라는 특수한 분야에 집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가 교육계나 의료계 등의 전문 분야에 기여하는 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의 복음선포로서의 복지사업과는 별도로 진행되어 나갔다. 그래서 과거 모든 교회의 복지의 방향과 대상이 복음선포와 가난한 이 우선이었던 것이 점차로 공교육이란 미명아래 윤리와 인간 생명과 사회의 기초를 제공하는 종교교육은 소홀해 지고 선착순 접수라는 경쟁 논리로 변화됨으로써 교회 사업의 복음적인 모습을 반감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이 논문은 1998년 가을학기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은 논문입니다. 첨가나 수정하시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면 아래의 주소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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