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

5. 인성회(仁成會) 조직 이후의 활동(1975∼1991)

1) 정치 사회 및 교회 사회복지적인 배경

(1) 군부 독재 정권과 교회의 사회 정의 구현 및 평화 (통일) 운동

1978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사회 각계에서 반독재 투쟁의 불이 붙는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사건을 계기로 부산과 마산의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한 정치적 불안 속에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피살되었다. 그러자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이들을 중심으로 새 사회를 이루려는 희망에 젖었다.

그러나 이어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집권초기부터 광주의 시민들을 공비와 불순세력으로 몰아 짓밟고 제5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제5공화국은 민주주의의 토착화, 복지사회의 건설, 정의사회의 구현, 교육개혁과 문화창달이라는 4가지 국정지표를 정했으나 그 정통성 시비에 휘말렸다. 전 정권은 이를 만회하기라도 하듯 1986년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1988년에 열릴 서울 올림픽을 유치해 국제적인 인정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한편 사회복지계는 1983년 사회복지사업법이 개정되어 종전의 '사회복지종사자자격증' 제도가 '사회복지사' 제도로 그 명칭이 변경됨으로써 사회복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사기 진작은 물론 사회복지 발전을 이루는 계기를 조성하였다.

1988년 2월 25일 출범한 노태우 제6공화국 정권은 보통사람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 경제와 사회의 균형적인 발전을 통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갈등문제, 그리고 지역간의 격차를 해소하겠다고 주장하면서 민주화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렇게 진행되지 못했다.

제5, 6공화국의 정치,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고, 103위 순교 성인의 시성식을 한국의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집전으로 거행하게 되었으며, 1989년 서울에서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여 세계 교회에 한국교회의 성장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에는 1981년 1월부터 1984년 11월까지 진행된 '200주년 기념 전국 사목 회의'를 주목할 수 있다. 이 회의에는 하느님 백성 전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참여하여 교회의 쇄신과 민족 복음화를 논의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준하여, 전국 각 교구의 모든 차원에서 교회의 내적 반성과 대화라는 두 분양의 12의제를 4년에 걸쳐 토의했다. 보편 교회 안에서 신앙의 원리 원칙에 충실하면서 민족의 고유한 문화 유산을 계시의 빛으로 조명 수용하여 토착화의 가능성을 탐구하여 적극 추진하고, 이 땅의 민족 문화 창달과 인간다운 삶을 증진시키고자 했다. 이 사목회의의 내용이 수렴되어 1992년 3월 26일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가 확정됨으로써, 1962년 교계 설정에 이어 마침내 고유한 교회법적 토대까지 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0년대에 들어서도 연평균 7.54%의 높은 신자 증가율을 지속해 오고 있다. 그리하여 1981년 140여 만 명이던 신자수가 1986년 초에 200만 명, 1992년에 3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와 같이 급격한 교세 증가가 가능했던 이유로는 먼저 한국 현대 사회의 제반 사항을 주목할 수 있다. 즉 1980년대의 한국사회는 남북 분단 체제 아래서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말미암아 인간 소외의 현상이 심화되고 인간 존엄성이 침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아 정체의 확립 등을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천주교회를 찾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회적 정황 속에서도 천주교회의 성장 속도가 이 시기 프로테스탄트 교회나 전통 교회의 그것보다는 2배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의 한국 천주교회가 위기상황에 대처해 나가려는 의지와 노력이 다른 종교 집단보다 상대적으로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교회는 이러한 의지 외에도 자신의 각종 역량(신학적,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을 강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의 사회개발 또는 사회복지를 위한 활동, 그리고 인간 기본권의 옹호 내지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한 활동이 일반인들의 공감을 얻게 되어, 교회의 급격한 성장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한 노력과 평화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1980년대의 교회는 광주 민중 항쟁에 대한 참여와 지원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1986년에는 '민주 개헌' 촉구 운동의 일환으로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이 일반 국민들의 광범위한 참여 속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갔으며, 1987년에는 '민주 개헌' 촉구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른바 6·29선언을 가능케 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또한 이 해에 '민주쟁취공동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88년 '정의 구현 전국 연합'이 발족하게 되었다. 교회는 또한 노동 운동도 상당히 위축되었으나 교회의 노동 운동가들은 1985년 '노동법 개정 청원 운동' 등의 대중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노동상담소 활동 등을 통해 노동자의 권익 신장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반면에, 이 시기 농민 운동은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가톨릭 농민회는 전국농민회의 결성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현대 한국의 농민운동이나 농업 문제를 이해하는 관건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아울러 '평화 운동'(또는 통일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주교회의는 1985년 '북한선교위원회'를 구성하여 신심 운동을 시작으로 북한 선교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1988년 그 산하에 '통일사목연구소'를 발족시켜 민족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 그리고 북한 선교에 관한 문제의 체계적 연구를 시도했다.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를 향해 이 시기에 일어난 사건은 1988년 통일열사 조성만 군의 죽음, 1989년 임수경 양과 문규현 신부의 북한 방문 등이 교회 안팎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한편 1980년대에 전개된 교회의 사회 참여 활동이 지닌 특징을 1970년대와 비교해 보면, 일반 신자들의 적극적 참여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 운동이 성직자, 수도자들이 주도한 운동이었다면, 1980년대의 운동은 평신도들이 성직자, 수도자들과 함께 전개한 운동으로서 그 성격도 '이웃을 위한 운동'으로부터 '이웃과 함께하는 운동'으로 변모되어 갔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 교회는 해외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이미 1930년대 중국이나 일본에 성직자를 파견한 일이 있고, 1950년대이래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도 한국 성직자들이 활동해 왔으나 그 경우는 대부분 그곳에 사는 교포들을 위한 사목이었다. 그러나 1981년 한국 외방 선교회에서 파푸아뉴기니에 4명의 선교 사제를 파견함으로써 현지인을 위한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북한 교회의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1988년 '조선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되었다. 같은 해 교황청에서는 북한 신자 등을 바티칸에 초청한 바 있고, 평양에 장충단 성당이 준공되어 천주교회의 활동이 다시 전개되기 시작했다 북한의 신자와 교회는 오랜 침묵 끝에 부활의 움직임을 보였다.(한국천주교회연감, 1994, 144-146)

1990년 6월 21일 자정 이란 북서부 카스피해 인접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5만여명의 사망자와 20여만명의 부상자 50여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고, 9월 9일부터 11일까지 서울과 중부지방에 집중 호우가 쏟아져 157명이 사망·실종하고 18만명의 이재민을 냈다. 경기도 고양군 행주대교 아래의 둑이 터져 근방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고, 11일 오후 6시에는 경인 철도가 끊겨 교회는 주교회의와 해당 교구 단위로 수해복구와 수재민의 정신적인 안정과 회복을 위해 노력봉사와 수재의연금을 국내외에 전달했다.(조선일보 1990. 12. 22 : 12-13; 가톨릭신문 1990. 12. 23 : 12)

1991년 1월부터 세계는 걸프전을 맞아 냉전체제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신세계질서의 서막을 열었고, 10월에는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중동평화회의가 열렸으나 냉전체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전쟁과 분쟁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3월 26일과 6월 20일 지방의원 선거로 지방자치제가 30년만에 부활했다. 이로 인해 사회복지계에도 지방자치제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과거 중앙정부의 예산지원이 지방정부와의 구분과 조정이 있었으며 특별히 사회복지 시설과 기관의 입소와 이용대상에 지방별로 차등을 두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북한당국이 1949년부터 1950년까지 남한과 북한에서 납치해간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들의 생사여부화 행방을 확인해 달라는 서한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통해 북에 전달했다. 9월 17일에는 제 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다.(조선일보 1991. 12. 26 : 9; 가톨릭신문 1991. 12. 22)

(2) 군종 교구 신설

군인들의 사목을 위한 군종단이 이미 1951년 2월 1일 창단되어 군 사목에 열중하고 있었으나, 단순히 각 교구에서 자원 형식으로 모집되고 일정기간의 임기가 끝나면 교구로 돌아가는 체제에서 군인 사목을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1989년 10월 23일 군종교구가 신설되고 초대교구장에 정명조 주교가 성성되었다. 한편 1990년도에는 제7대 전주교구장으로 이병호 주교와 제2대 안동교구장으로 박석희 주교가 성성되었고, 원주교구 김지석 신부가 교구장승계권을 가진 부주교로 임명됐다.

(3) 사회복지 담당 주교회의 공식 조직 인성회 발족

1975년 6월. 26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인성회'가 설립되었다. 인성회는 한국전쟁 후 서울 대교구 윤을수 신부가 한국 카리타스(Caritas Coreana)를 설립하여 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구로 발전시킬 의도였으나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유명무실해졌고, 그 뒤 대전 교구장 황민성 주교의 명의로 명맥을 이어 오다가 평양교구 관리자이며 미국 가톨릭 구제위원회(Catholic Relief Services - U.S.C.C.) 책임자 캐롤 몬시뇰(Msgr. George M. Carroll. M. M)이 조정자로 임명되었으나 역시 명칭만의 기구로 존속되었다. 1971년 12월 아시아지역국 교회의 카리타스 설치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당시 발족한 교황청 사회복지위원회(Cor Unum)의 성격이 명확히 규정되지 못하였기에 구체적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 캐롤 몬시뇰은 주교회의에 한국 카리타스 부활을 위한 제의를 하였다. 1974년 당시 교황청 사회복지위원회(Cor Unum) 위원인 박희섭이 '한국 가톨릭 사회발전 심의회' 설립을 주교회의에 제출하였으며, 한국에서의 철수를 고려 중이던 미국 가톨릭 구제위원회는 '개발사업 및 복지사업을 위한 제안서'를 제출하여 한국 카리타스의 부활을 요청하였다. 1974년 11월 춘계 정기총회는 카리타스의 부활을 원칙적으로 결정하였으나 구체적 기구 성격에 대한 두 가지 제안의 통합을 모색키 위하여 12월 마닐라에서 개최된 아시아 대륙 카리타스협의회에 박희섭, 최재선 양인을 파견하여 이 회의에 참석한 교황청 실무자와 접촉토록 하고 각국 교회기구에 대한 연구결과를 보고토록 하였다. 1975년 춘계 주교총회는 양인의 보고서를 토대로 지학순 주교에게 양 제안의 통합 안을 성안토록 위임하였으며 이 통합방안은 동년 6월 25일 주교단의 인준을 받아 인성회란 명칭으로 정식 발족을 보게 되었으며 총재 주교로 지학순 주교를 선임하게 되었다.

인성회는 종교, 사상, 이념에 관계없이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같은 인간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존엄성을 지키면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인간공동체 건설에 교회가 기여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성회는 주교회의 산하 전국 위원회(National Committee) 중 한 위원회이며 주교위원회(Episcopal Commission) 가운데에는 사회 주교 위원회(Commission for Social Affairs) 에 소속되어 있다. 성청에는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에 정회원으로 소속되어 있으며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인간발전위원회(OHD-FABC)에 소속되어 있다.

인성회는 목적을 수행시키기 위하여 첫째 교회의 대 사회적 활동과 사업을 교회 내외적으로, 또한 국내외적으로 대표하고 이와 유사한 민간기구 및 국제기구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둘째 교회의 대 사회적 사업을 활성화시키며 격려, 조화시키고 정책을 제시하는 등의 조정역할을 하며, 셋째 인적, 기술적, 물질적 자원을 개발, 동원, 배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인성회는 교회의 첫째 제반 긴급 구호 및 자선활동, 둘째 복지사업, 셋째 개발활동, 넷째 사회의식계발운동을 관장하여 그 기능을 발휘한다.

인성회는 주교단에서 선출된 담당주교가 대표, 지휘, 감독을 총괄한다. 담당주교 산하에 전국위원회를 설치하여 그 구성을 인성회 각 교구 위원회 대표, 사회사업 전국기구 대표, 위촉위원, 사무국장으로 되어있다. 각 교구는 교구 형편에 맞게 인성회 교구위원회를 설치토록 되어 있으며, 전국위원회 사무국을 중앙에 설치하여 제반 업무를 수행토록 되어 있다.

인성회는 첫째 인성회 헌장 취지문에서 밝혔듯이 사회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첫째 복음적인 정신으로, 둘째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교회론에 입각하여, 셋째 역대교황들의 사회회칙 및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따라서, 넷째 한국상황에 대한 한국적 전통과 문화를 고려하며, 다섯째 현 한국교회의 체질에 맞도록 활동한다는 활동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

인성회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단체·기관·공동체 등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 긴급한 재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만성적 빈곤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 불의한 제도나 구조로 고통받고 소외 받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인성회의 접근방법은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과 요구가 다양하기에 다양성 있는 방법을 존중한다. 긴급구호, 사회봉사적 복지적 접근, 개발을 통한 개선적 접근, 운동을 통한 개혁적 방법을 다 함께 인정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가난의 원인제거에 대한 접근방법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제 원칙은 이미 교회가 수백년 동안 쌓아온 전통적 체험 위에서 근대에 들어와 제시되고 있는 교회의 가르침, 사회과학적 접근방법 및 새로운 형태로 근래에 제시되고 있는 방법들을 포괄적으로 포함한다.

이러한 방법의 실천적 적용은 현대세계와 현 한국실정 및 현 교회체제를 고려하여 우선적으로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자각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웃사랑 실천에 기본을 둔 교회공동체의 사회의식계발과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투신을 긴급한 과제로 삼는다. 아울러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는 제반 구호활동, 자선활동, 복지사업, 개발활동, 사회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단체·기관·공동체들을 활성화시키고, 격려하며, 조화시키고 조정하며 지원하는 접근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실천적 적용이 효과적이기 위하여 교계제도상의 조직과 제도 속에서도 특히 교구의 자율적 수행과 대사회적 활동에 종사하는 교회 공식 기구와 단체들의 자율성을 권장하고 존중한다.

인성회는 교계제도 속에서 활동하기에 당연히 인성회 교구위원회의 설립과 활성화 및 적극적인 활동을 필요로 한다. 특히 교구 산하의 제반 사회적 사업과 활동이 사목적 성격으로 통합되고 조정되어 교구장을 머리로 교구 상황과 여건 및 능력에 맞는 활동이 전개되어 지역 속에서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는 모습을 드러내며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도구가 되도록 한다. 교회 내의 수많은 사회적 사업과 활동을 하는 기구나 단체 또는 기관들의 상호 유기적 연결과 협조, 공동목표의 설정과 자원의 공정한 배분 등은 효과적인 사회사업과 활동의 요체가 된다. 이를 위하여 분야별 직종별 기존 사업과 활동들을 협의체적으로 모이게 하고 특히 편중된 분야에는 적절한 권고를 하여 낙후된 분야에는 적극적 참여를 권장하고 전혀 손대지 못하는 분야에는 적극적 참여를 권장하고 유도하며 지원하는 활동을 한다.

인성회가 가장 중요하고도 심혈을 기울이는 활동은 '사순절 운동'이다. 이는 전세계 교회가 사순절기간 동안 벌이는 신자 신앙쇄신교육과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의 운동이다. 전통적 사순적 개념인 회개와 보속을 새롭게 환기시키며 이를 현대적으로 의미를 부여시키고 실천하도록 권고하는 단식재, 사순절운동의 본질인 이웃사랑 실천,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의식 및 사회의식을 강조하는 교육 및 피정, 공동체적 나눔의 표현인 공동헌금이 사순절운동의 요체이다. 교체 또는 특정한 이들의 전문적인 전유물로 인식되어 왔기에 일반신자들의 참여가 유도되지 못하였으며 항상 외국에 의존하는 형태였기에 사순절운동은 신자의식 계발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인성회 교구 위원회의 활성화 및 사회사목 기관단체들의 효과적인 조정을 위하여는 종사자들에 대한 교육과 연수도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전국차원에서 개최되는 전국세미나는 교구 및 사회사목 기관 단체에서 참여하는 중요한 훈련이다. 아울러 특정한 주제로 열리는 연수회도 관심 있는 종사자들을 훈련시키는 중요한 기회이다. 사회사목에 필요한 제반정보와 자료의 발간은 중요한 업무이며, 각종 사회 사업이나 활동 단체들에 대한 전문적 서비스도 중요한 일이다. 국제적 협력은 전국위원회 사무국이 주로 담당한다.(가톨릭대사전 : 968)

1975년 6월 주교회의에서 설립된 인성회는 그해 7월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의 준회원이 되었고, 아시아 주교회의 인간발전위원회(OHD-FABC)의 회원, 가톨릭 난민 구호위원회(ICMC)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1976년 4월 아시아 인간발전협력체(APHD)의 정회원이 되어, 원조 업무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1977년 2월부터 사순절 운동을 시작했고, 7월에는 안양과 시흥지역의 수재민 긴급 구호에 나섰다. 그리고 9월에는 월남 탈출 난민 제3국 정착사업을 시작했다. 1978년에는 각 교구 인성회가 설립되고 연수회를 지원하게 되었다. 11월에는 제4차 아시아 사회 문제 주교 세미나(BISA Ⅳ)에 참석하였다. 1979년 2월 '세계 아동의 해'사업을 시작했고, 5월에는 제11회 국제카리타스 로마 총회에 참석하여 정식 회원의 인준을 받았다. 11월에는 전국 연수회를 시작했다.

1980년 2월에는 '가톨릭 결핵사업가 협회'를 결성하고, 10월에는 '가톨릭 아동복지 협의회'를 결성했다. 1981년 2월에는 '세계 신심 장애인의 해' 사업을 주교단의 담화와 함께 시작했고, 9월에는 태풍 아그네스로 인한 피해 긴급 구호에 들어갔다. 1982년 9월에는 태풍 앨리스의 피해 긴급 구호에 들어갔고, 10월에는 전국 사무국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1983년 1월에는 아시아 주교단의 한국 현장 체험을 실시했고, 5월에는 제12차 국제카리타스 총회에 참석하였다. 1984년 8월에는 빈민 의료 문제 국제 세미나에 참석하였고, 10월부터 인성회 활성화를 위한 연구 작업에 착수했으며, 12월에는 아프리카 기아민 돕기 모금을 실시하였다.

1985년 3월에는 '천주교 도시 빈민 사목협의회'를 결성하였고, 8월에는 한국 주교단이 현장 체험을 하였다. 11월에는 '가톨릭 장애인 복지협의회'를 결성하였고, '제1차 가톨릭 복지 대회'를 개최하였다. 12월에는 멕시코의 지진과 콜롬비아 화산 폭발로 인한 피해의 긴급 구호 원조를 하였다. 1986년 1월에는 제7차 아시아 사회 문제 주교 연수회에 참가하였고, 9월에는 '교회 빈민 의료협의회'를 결성하였다. 11월에는 제2차 가톨릭 복지 대회를 개최하였고, '한국 가톨릭 사회복지 협의회'를 결성하였다. 1987년 5월에는 제 13차 국제카리타스 로마 총회에 참석하였으며, 이 후 월 회보 '하나 되어'를 창간하여 발간하기 시작했다. 7월에는 태풍 셀마 피해의 구호 사업을 하였고, 11월에는 '한국 가톨릭 무의무탁 복지협의회'를 결성하였다. 1988년 6월에는 인성회의 영문 소식지 'COMMENT'를 발간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종교 문화에 관한 신학자들이 내한했다. 10월에는 아시아 인간 발전 협력체 한국 사업을 평가했고, 12월에는 주교단이 '자선주일'을 설정하였다. 1989년 7월에는 남부지역의 집중 호우 피해 긴급 구호를 하였고, 10월 기초 교회 공동체 연수회의 외국 전문가들을 초청하였고, '아시아 주교회의 인간발전 위원회 국제 연수회'를 한국에서 개최하였다. 11월에는 인성회 총무에 서울대교구 추영호 신부가 취임하였다.

1990년 5월에는 아시아 인간 발전 협의체(APHD) 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하였고, 국제 카리타스의 에이즈 전문가가 내한하여 연수회를 열었다. 그리고 12월에는 박석희 주교가 인성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91년 1월에는 제1회 '사회복지주일' 헌금을 실시하였고, 인성회 활성화 및 개편 작업을 시작했다. 6월에는 걸프전 난민의 구호를 위한 전국 헌금을 실시하였고, 11월에는 주교회의 총회에서 인성회를 사회복지위원회로 개칭하고 개편하는 규약을 인준하여, 12월에는 '가톨릭 사회복지 협의회'가 해산하여 사회복지위원회로 흡수됨으로써 인성회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시대가 막을 내렸다.(한국천주교회연감, 1994, 165-166)

(4)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발족

서울대교구는 위기에 처해있는 이웃을 도움으로써 복지사회 구현에 기여하고 하느님 나라에 모든 사람이 동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72년 5월 교구사제 이문주 신부와 안경렬 신부 2인을 독일로 파견 교육시키고 1976년 5월 24일 서울 카리타스기구로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를 설립하고 지도신부에 안경렬 신부를 임명했다. 사목적인 설립이념은 인간의 존엄성에 의거하여 정의와 평등, 나눔의 정신으로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발견하여 인간발전을 위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기본정신으로 삼았다. 이를 위하여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 협력하여 지역사회 안에 있는 교회의 모든 단체 및 개인의 복지자원 동원으로 사회복지 기능을 통합하여 선교 3세기를 향한 새로운 사회복지사업의 발전과 토착화를 꾀하기 위해 1983년 전국 교구에서는 처음으로 보건복지부에 사회복지법인으로 인가를 받아 교회의 사회선교의 밑거름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는 첫째 교회의 사회복지사업의 발전과 토착화를 모색하고, 둘째 교구 공동체 의식의 함양과 사회복지 기능의 통합과 지원, 셋째 교회의 모든 복지단체의 총괄적인 중재와 조정, 넷째 본당과 지역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의 동원과 개발, 다섯째 교회 사회복지정책 연구 및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1998년 현재 가톨릭사회복지회의 주요시책과 사업내용으로는, 첫째 본당 사회복지분과연수회, 자원봉사자교육, 사회사업과정교육, 여성사목세미나, 상담과정교육, 사회복지단체 종사자 피정, 나눔의 묵상회, 사회복지 공개강좌 등의 사회사목의 참여의식 개발을 위한 교육 및 훈련을 한다.

둘째 탁아소, 공부방, 청소년, 장애인, 노인 및 행려자, 재가노인, 여성, 가정 호스피스 등의 활동지원과 지역내 소공동체의 지원육성을 통해 지역사회 사목을 위한 본당 사회복지 활동의 활성화, 분야별 협의회를 지원 및 개발한다.

셋째 법률, 정신건강, 세무, 재활, 호스피스, 입양,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을 위한 면접상담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나눔의 전화를 통해서도 상담을 하고 있다.

넷째 장애인의 보다 나은 삶과 자립재활을 돕기 위한 교육연구, 장애인 복지기관들의 조정 및 지원, 정신지체인 종교교육 연구회, 장애인 부모회 조직, 사랑의 보청기 보내기 운동, 정서교육 위원회(핸드벨 강습), 재가장애인 재활사업(가정방문 봉사자 파견), 장애아 대리보호의 집 등을 통해 장애인의 재활의욕 고취 및 사회의식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섯째 입양대상아동 및 양부모 상담, 일시보호소 운영, 가정위탁, 입양가정 모임, 양부모 교육, 국내입양 활성화를 위한 세미나 등을 통해 국내입양 사업을 전개한다.

여섯째 계간 '나눔', 학술연구지 '나눔연구', 나눔수첩, 자원봉사활동사례집, 사순절 저금통, 본당 및 지역주민 사회복지 욕구조사, 자원봉사자 활동사례집, 각종 세미나 자료집 발간 등을 통한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홍보 및 연구조사를 한다.

일곱째 사회복지주일, 사순절, 자선주일의 공동헌금, 바자개최 및 개인 및 후원단체모금, 유료주차장의 운영, 화재보험 서울교구 대리점을 운영하여 모금 및 수익사업을 통한 후원활동을 하고 있다.

여덟째 임종 후 유가족 회원들에게 장의절차를 주선, 상례절차 봉사에 대한 순회교육, 말기 암환자와 가족을 대상으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이해와 보살핌을 주고 있고, 호스피스 봉사자 교육, 사별가족의 지원, 가톨릭호스피스협회 구성 및 지원 등을 통한 선종 및 가정 호스피스 활동의 교육 및 상담을 하고 있다.

아홉째 기술 및 교양교육, 가정문제 상담, 취업 및 부업상담, 아동 및 청소년을 위한 탁아소 및 공부방 운영, 강당 및 식당운영,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재가복지센타 운영 등으로 중구 및 신당동의 저소득 지역주민을 위한 종합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제공 참여하고 있다.

열번째 사회복지법인 운영에 따른 대정부관계 보고 및 취득과 인·허가사항, 법인의 재산관리, 미인가 산하단체 및 서울시 위탁시설에 대한 법적 지원 등의 업무 등의 법인사무를 하고 있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의 분야별 활동 현황으로는, 첫째 아동 및 청소년 복지는 17개의 유아원, 15개의 공부방, 청소년 시설 단체 종사자들의 '지역아동연합회'와 '공부방연합회', '청소년복지협의회' 및 시 위탁시설로 2개의 보육원, 5개의 독서실, 3개의 청소년기숙사, 2개의 직업훈련원과 16개의 나눔의 집, 장학후원회 등의 활동을 한다.

둘째 장애인 복지는 '장애인 복지협의회'와 '정신지체부모회', '시각장애인부모회', '특수교사회' 등으로 구성되어 효과적인 재활서비스의 제공을 위한 공동교육과 심포지움, 공동행사, 정책건의, 교재개발 등의 프로그램과 재가장애인 재활사업과 장애인 결혼상담실을 운영하며 10개의 정신지체인 단체, 5개의 지체장애인 단체, 3개의 시각장애인 단체, 2개의 언어·청각 장애인 단체, 2개의 특수학교, 5개의 장애아 조기교실, 3개의 장애인 종합복지관, 1개의 장애아 대리보호 탁아시설 등의 활동을 한다.

셋째 여성 복지는 매매춘 여성 및 학대받는 여성 등 소외받은 여성을 위한 복지사업과 불우여성의 인권보호를 목적으로 여성사목종사자들이 '여성복지사목위원회'를 구성하고, 'AIDS의 치료와 예방', '가정폭력 어떻게 막을 것인가', '어린이를 위한 평화교육', '가족내에서의 갈등 해결', '아동학대 예방' 등의 세미나와 6개의 쉼터와 상담실, 2개의 파출부 및 직업교육 알선상담소, 1개의 문맹여성을 위한 부녀 한글교실 등의 활동을 한다.

넷째 노인복지는 노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고취시키고 교회내 노인복지사업을 촉진시켜 노인들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주고자 11개의 노인보호시설, 7개의 행려자시설, 7개의 행려자 식당 등의 단체가 모여 '노인복지협의회'를 구성하여 활동한다.

다섯째 의료복지는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불의한 이들을 대상으로 구호 및 의료복지사업을 수행하여 그들이 자립해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가톨리중앙의료원 산하의 강남, 여의도, 의정부성모병원의 사회사업과에서 행하는 자선진료, 도티기념병원, 성가복지병원, 요셉의원, 전진상복지관의원 등이 가난한 이들과 행려자들을 위하여 전문적인 진료활동을 한다.

여섯째 상담 분야는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적인 갈등과 불의의 사고, 억울한 일 등에 대해 법률, 정신건강, 세무, 재활, 청소년, 가정문제, 입양 분야의 전문상담위원과 상담훈련교육을 이수한 나눔의 전화봉사자의 상담과 알코올 상습자들과 도박중독자들을 위한 전문 상담소와 청소년을 위한 나눔의 집과 까르딘 상담터 상담소가 있다.

일곱째 종합복지 분야는 지역내의 저소득층 주민을 위해 잠실, 성동(장애인), 하상(장애인), 신당, 한빛, 등촌7동, 공릉종합사회복지관의 지역사회복지와 재가복지센터의 운영 및 미진학 청소년과 저소득 시민을 위한 서울종합직업훈련원등을 운영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24; 1998년 11월 13일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정선희 사회복지사 답신)

(5) 사회복지 전문 수도회의 활동

1975년 6월, 이미 1966년 한국에 진출한 '착한 목자 수녀회'가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수녀원과 근로자들의 휴식처를 설립한 뒤 찾아오는 여성 근로자들을 위한 기숙사를 필요로 하다가, 1976년 3월 전북 옥구군 옥봉의 수녀원과 기술학교를 완전 폐쇄하고 서울로 이전하면서, 서울 청파동에서 '마리아 자매원'이란 이름으로 메리놀 회 신부가 운영하던 여성 근로자 및 문제 여성을 위한 기숙사를 성수동으로 이전하여 인수하고, 1981년 증축하여 운영하다가 1992년에 잠정적으로 중지하였다. 한편 1977년 신촌에 예수회의 집을 전세 내어 '마리아의 집'으로 이름을 짓고 미혼모를 수용하여 정신적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79년에는 신촌에서 운영하던 것을 춘천 효자동의 교육관으로 옮겼다가, 1985년에 춘천 석사동에 미혼모의 집 '마리아의 집'을 신축하여 이전했다.(가톨릭대사전 : 1115; 한국천주교회 연감, 1994 : 505)

1978년 4월 10일 가난한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께 봉사하고자 설립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Filles de le Charite de St. Vincent de Paul : D.C.)가 경기도 군포시 재궁동 749번지에 진출했다. 이 사도생활단은 안양에 정착하여 라자로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한편 가톨릭대학교 의학부 부설 만성병 연구소와 함께 경기도 한강 이북지역에 있는 7개 나병 음성자 정착마을과 4개시 8개군 보건소 등록 재가 나환자의 나병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순회진료를 실시하고 있다.(한국천주교회연감, 1994 : 521; 가톨릭대사전 : 525; 가톨릭 중앙 의료원 부속 나병연구기관 '만성병연구소'-1998. 4. 22 홍보과 이승우(바오로)의 답신)

1981년 6월 30일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했다. 1981년 5월 마더 데레사 수녀의 방한을 계기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정식으로 초청함에 따라 같은 해 6월 30일 세 명의 인도 회원이 입국하였다. 이들은 봉천동 본당 관할 봉천 1동 공소의 사제관에서 2개월 동안 생활하다가 같은 해 8월 21일 봉천 1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용산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휴양의 집'으로 거처를 임시 옮겼으며, 1981년 9월에는 휴양의 집 내에 '평화의 집'(양로원)을 마련하여 20여 명의 무의탁 할머니들을 돌보면서 본격적인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3년 10월 8일 안산시 고잔동 656-25번지에 수녀원과 '임종의 집'을 완공하고 이듬해 5월 10일 본원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1985년 6월 14일에는 1983년부터 운영해 오던 어린이집을 인천시 만수동으로 이전하고 '온정의 집'(양로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현재 안산과 인천의 양로원에서 각각 40여명의 할머니들을 돌보는 외에 시립병원을 방문하여 임종 직전의 무의탁 행려 환자들을 데려와 임종을 지키고 있으며 극빈자 가정도 방문하여 봉사하고 있다.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마더 데레사 수녀가 1950년 10월 7일 설립했다. 데레사 수녀의 세속 이름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ojaxhu)이다.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에서 태어난 그녀는 신심 깊은 알바니아계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아 일찍이 예수회 선교사가 지도하는 본당의 청소년 단체인 신심회에 가입하는 등 신앙 생활에 열심이었다. 어느 날 인도 벵골지방에서 예수회 선교사가 보내 온 편지를 신심회 회원들과 돌려 가며 읽은 그녀는 큰 감화를 받아 1928년 11월 29일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는 로테로 수녀회(동정성모회) 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6일 캘커타에 도착하여 1931년 5월 24일에 '예수의 작은 꽃'으로 알려진 리지외의 데레사를 수도명으로 택하였다.

전체 인구의 30%가 절대 빈곤 계층인 인도는 힌두이즘이라는 종교 전통과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 제도인 카스트로 인해 그러한 사회적 현실이 당연시되어 왔으며,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시도와 노력이 부족하였다. 캘커타 거리에는 불평등과 사회적 무관심으로 연일 수많은 빈민들이 굶주리거나 질병으로 고통당하다 죽어 갔다. 20년 가까이 그들과 같은 지역에서 생활해 왔던 데레사 수녀는 자신이 재직 중인 고등학교의 상황과는 너무나 다른 인도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점차 빈민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조금씩 키워가게 되었다. 그러던 1946년 9월 10일, 그녀는 피정차 히말라야 산 기슭의 다르질링으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신 주님을 섬기고 따르라는 '부르심 안에서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일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강한 확신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자신의 원의를 총원장 수녀에게 밝혔으며, 그로부터 1년반 만인 1948년 4월 12일에 재속 수녀로서 빈민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해도 된다는 교황청의 허락을 얻어냈다.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목마르다" (요한 19,28)에 근원을 두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목마름을 축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그분을 간호해 주고 먹을 것을 주며 옷을 입혀 주고 그분을 방문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란 단순히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사람,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태아, 인종 차별을 당하는 사람, 알코올 및 마약 중독자, 삶의 희망과 신앙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 성령의 힘 안에서 희망을 갖지 못한 모든 이들을 뜻한다.

"거절당하고 버림받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체험할 때, 그리고 자기들을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 전에 먼저 함께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기꺼이 함께 있을 때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사랑이 참되다면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려들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베풀 것이 없다."고 했던 마더 데레사 수녀는 그 어떠한 부(富)도 피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회원들 역시 고통이 뒤따르지 않는 활동은 사회사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예수의 인류를 위한 끝없는 목마름을 채워 드리기 위해 가장 가난한 모습 속에 투영되어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가장 완전한 신뢰와 자아 포기, 그리고 항상 기뻐하는 정신으로 함께 나누고 있다.(한국천주교회 연감, 1994 : 490; 교회와 역사 278호 19쪽)

한편 1963년 설립된 사랑의 선교 수사회는 1977년 7월 5일 한국에 진출하여, 서울 관구 본원은 오갈데 없는 행려, 장애인들 20여분을 가족으로 모시고 있고, 서울 삼선동 분원은 노숙, 행려자들을 위한 목욕, 빨래 시설을 운영하고 있고, 부산 분원은 20여분의 행려, 장애인들을 모시고 있고, 광주 분원은 외부방문을 하고 있으며 인천 분원은 수련원으로 전신마비 장애인 1분을 모시고 살고 있으며 모든 분원에 매일 외부(시장, 빈민가, 지하도 등지)로 방문 활동을 하고 있다.(1998년 11월 5일 사랑의 선교 수사회 이요한 수사 답변)

1989년 4월 25일 서울대교구 사회복지회에서 성가정 입양원을 설립하고 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에 운영을 맡겼다. 성가정 입양원은 여러 가지 이유로 버려진 새생명의 귀한 아기들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한편 성가정 입양원은 그 동안 국내외에서 사회문제로 제기되었던 해외입양을 국내입양으로 돌리는 첫 번째 입양기관으로 정부에 등록되었다.(나눔지 250호 4-1989. 5. 6발행) 1996년 10월에는 화곡동에 '성심 미혼모의 집'(현 성가정 입양원 부설 미혼모의 집)도 개설하여 운영하기 시작한다.

(6) 무의탁자 복지사업

1980년대부터 교회는 무의탁자에 대한 복지 사업을 적극적으로 시작했다. 무의탁자 복지사업은 부랑인 수용 보호 사업과 재가 무의탁 노인 및 도시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한 식사 제공 사업 등이다. 부랑인 수용 보호 시설은 초기 한국 교회의 자선 구빈 사업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돌본다는 것을 예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25-37)로 가르쳐 주신 교회의 기본적인 의무로 생각해 왔다. 교회는 이러한 정신으로 가난하고 의지할 데가 없는 이들을 돌보는 부랑인 복지사업을 펼쳐왔다. 그러나 교회의 재정 능력의 한계로 그 규모와 보호의 내용상 많은 제약을 받아왔다. 1981년 정부는 전국적으로 부랑인 실태 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국가적 차원에서 부랑인 대책을 수립, 1982년부터 중앙 정부의 지원 아래 부랑인 보호 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지방 자치단체 또는 민간에 의해 행해져오던 부랑인 수용 보호 시설이 피보호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와 온갖 비리, 부정 등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정부는 부랑인 수용 시설의 정비 및 지원을 강화하고 그 운영을 종교 재단에 위탁하기로 함으로써 전국적으로 각 교구 또는 수도회에서 부랑인 수용 시설을 위탁 운영하게 되었다.

부랑인 시설의 입소 대상은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가 있어도 보호할 능력이 없는 65세 이상의 노인, 12세 미만의 아동, 고질적인 정신 질환 또는 심신 장애 등 생활능력이 없는 부랑인, 일정한 주거가 없이 구걸하는 부랑인으로서 본인이 시설 수용 보호를 원하는 자를 심사위원회에서 심사하여 입소시켜 보호한다.

부랑인의 발생요인은 개인적·가정적·사회적 요인을 볼 수 있다. 개인적 요인으로는 개인의 능력 부족, 나태성, 질병 및 장애 등을 들 수 있다. 가정적 요인으로는 가정의 보호 능력 상실, 결손 가정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적 요인으로는 사회 변화에 따른 적용 능력의 결여 등을 들 수 있다.

1980년대에는 부랑인들에 대한 이러한 문제 파악과 아울러 사회복지의 개별화·전문화 추세에 맞추어 점점 탈시설화 현상을 가져오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각 교구 사회복지회가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자원 봉사자 교육을 실시, 식사 준비와 도시락이나 반찬 제공, 빨래, 목욕, 심부름, 말벗, 기타 집안일 돌보기 등의 재가 무의탁 노인들의 가사 돌보기로 재가복지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 부랑인,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재가복지는 점차 장애인과 소년·소녀 가장 등에도 필요한 사업으로 인정되어 지역 복지 이념과 정상화 이념(normalization)에 따라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1980년대 후반부터 교회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부랑인 및 저소득 주민들을 위한 무료식당을 운영하여 식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과거 배급을 나눠주던 시기로 되돌아간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단순히 독거 노인들에게만 식사가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혜택을 입으려고 찾아오는 현상이다. 경제적으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다고 자처하는 우리 나라에서 아직 절대 빈곤의 수준에서 생활하는 주민이 많다는 사실은 부의 재분배에 대해 심각하게 숙고해 보아야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가톨릭 대사전1, 145)

(7) 장애인 복지 사업

교회의 장애인 복지는 1930년 초 원산 본당에 부임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이 처음으로 청각 장애인에게 교리를 지도함으로써 시작되었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 75; 173)

그후 1955년 충주 성심학교를 통해 특수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재개되어 1970년대까지는 10여개의 재활 사업과 특수학교가 설립되었다. 교회가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갖는 근저에는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창조신학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교회의 장애인 복지 이념은 장애인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받고 이에 상응하는 처우를 받으며, 장애를 이유로 차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 복지는 장애인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복귀하여 자신의 복지를 스스로 구현할 수 있도록 돕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장애인 복지사업은 일반인들의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 그리고 동료애를 간직하도록 교육하고, 소수인인 장애인들이 정상인이라고 하는 일반인들과 함께 사회생활과 직장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재활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특별히 1980년대에 와서는 1981년 유엔(UN)이 '세계 장애인의 해'를 선언함으로써 교회가 장애인 복지에 더욱 더 활기를 띄게 되었다. 1992년 말 현재 전국 장애인 복지 시설 199개소 중 3분의 1을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1 : 146)

(8) 분업·전문화된 사회 사업

1980년대에 들어 교회는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상담소, 단주, 단도박 모임, 출소자 모임 등을 통해 전문 사회 사목을 시작했다. 1982년 5월 1일 서울 가톨릭 사회복지회에 '내담 상담실'을 개설하였고, 같은 해 9월 5일에는 '나눔의 전화'를 개설하여 전화상담을 시작했다. 1983년에는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단주 모임'을, 1984년에는 도박 상습자들을 위한 '단도박 모임'을 통해 개별 및 집단 사회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또 1988년에는 출소자 공동체를 설립하여 교정사회사업을 시작하였고, 1989년에는 장애인 결혼 상담사업을 시작하였다.

한편 현대에 들어서 사회사업은 단지 사랑과 관심과 자선만으로 해결되던 과거와는 달리 다양하고 세분화되며 전문성을 띄어야만 한다. 그만큼 사회는 복잡해지고 인간관계 역시 복잡하고 다양하게 연결됨으로써 현대 사회복지의 대상자들도 복잡하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 상처와 소외의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치유되고 변화되는 데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책임 있고 양질의 좋은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격증의 취득여부를 떠나 그리스도교적인 헌신성과 전문성을 간직해야 한다.(가톨릭대사전1 : 146)

(9) 한마음 한몸 운동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천주교 신자들이 우리 민족의 하나됨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영신적 능력과 물질적 재화를 자기 희생의 정신에서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이웃과의 나눔을 실천하여 이념과 빈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모든 이가 하나로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려는 생활운동으로 '한마음 한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1988년 10월 10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추계 주교회의에서 설립을 결의해, 7년동안 사랑의 나눔을 실천해 쌀 모으기 운동으로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는 공동체에 원조하고 헌혈, 장기기증, 환경 보전 운동을 중점적으로 추진했다.(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한마음 한몸'운동본부 : 2)

2) 분야별 천주교 사회복지사업

(1) 나환우복지

1978년 엠마 프라이징거 여사의 초청으로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칠곡 가톨릭 피부과 병원'에서 사도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후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많은 나환자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의 나눔으로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점차 나환자의 수가 감소 추세에 있고 또 병원도 안정기에 접어들어 봉사가 예전처럼 절박하지도 않아서 보다 필요한 곳에의 투신을 위해 1994년 7월에 분원을 철수하였다(교회와 역사 235호 22-1994. 12. 25발행)

1978년. 파 레이몬드 신부는 다미안 사회복지회를 설립하여 30년 동안 한국 땅에서 나환자, 불우 청소년, 사회에서 소외당한 이들을 돕는 '착한 사마리아인 모임'을 통한 사랑과 나눔의 결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집' 남자 기숙사가 개설되었다.

노동관계 사목으로 35세에 한국에 온 파 신부는 나환자들이 살고 있는 소록도 인근 전남 고흥의 녹동 성당에 부임하여,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나환자들의 자녀('미감아'라고 불림)들이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중퇴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식모나 식당 등에 취업하여 일을 하다가도 부모가 나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사회상황을 보고, 그런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키기로 결심하고 시골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 하숙을 시키며 기술교육을 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던중 75년에는 아주 서울로 올라와 응암동에 아이들이 함께 살도록 하였다. 다시 78년도에는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지원으로 신림동에 남자청소년을 위한 생활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떠오르는 별이며 미래의 주인인 청소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며 때때로 실수하며 부모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를 당하거나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주며, 예수 그리스도의 집은 정녕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으로 그늘 밑 들풀을 어루만져 비춰주는 한줄기 빛처럼 살며시 오늘을 비추어 주고있다.(나눔지 108호 3-1979. 7. 15발행)

1980년, 1976년부터 안양 성 라자로원에서 나병환자를 돕던 성모 영보 수녀회 수녀들이 파주군 광탄의 '시몬의 집'에 와서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폐결핵 환자들의 간호와 세탁, 식사 등 궂은 일을 비롯하여 구령사정도 돌보고 있다. 한편 성모 영보 수녀회는 전북 함열 본당 상지원에서는 60세대의 음성 나환자 간호 및 미감아 교리지도를 담당하고 있다.(교회와 역사 70호 7쪽)

1980년 메리놀 수녀회(Maryknoll Sisters)는 1976년 9월 가이에르 수녀가 서강대에서 영어를 담당하는 외에 경북 울진 진료소에서 활동하고, 부평 본당에서 종교사업과 노동자를 위한 사업활동을 하며, 1979년 10월 광주의 '천주의 성 요한 병원'에서 환자가족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을 하고, 1980년 거창 나환자 마을에서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교회와 역사 80호 7쪽)

1981년, 6·25 동란 때 간호 장교로 참전하였던 벨기에인 데레사 캄비에(Therese Cambier)여사가 안동교구 내에서 구라사업을 목적으로 다미안 재단 한국 지부를 설립하고 경북 영주시 상망동 259-1번지에 진료소와 병동을 건립하면서 시작된 영주의 다미안 피부과 의원이,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에서 안동교구로부터 운영과 관리를 위임받아 운영을 시작했다.

의료사업으로는 신환자 조기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외래 진료, 4개 군, 2개의 시 800여 나환자들을 위한 이동 진료 및 단기 입원 치료와 재활치료를 하고 있다. 또한 교육사업은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의 주된 내용으로서 신앙 교육의 차원에서 6개 정착 마을의 주민들과 입원환자들을 위해 교리교육, 말씀의 전례, 피정을 지도했고 매년 나환우 정착 마을 자녀들을 위해 여름 산간학교를 개최했으며 영농 교육을 위해 강사를 초청하고 기타 상담 및 가정 방문도 했다. 또한 사회사업 차원에서 정착 마을 자녀들을 위한 장학 사업과 학자금, 생계비, 자립금, 교육비 등을 지원했다.

초기에는 골롬반 수녀회와 함께, 지금은 성모 영보 수녀회가 환우들의 전인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나병 퇴치 사업도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여 향후 20-30년이면 구라사업 종결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구라사업의 마지막 단계인 불구 노약자 시설 설립의 필요성에 따라 갈 곳 없는 노인 나환우들을 위한 양로원과 외래 진료 등을 다미안 병원 안에 건립하여 1990년 4월 27일 두봉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에 거행되었다.(교회와 역사 244호 15쪽-1995. 9. 25발행)

1982년 10월 익산 남촌 마을에, 1974년 소록도에서 가톨릭 신자 나환우들이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주위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활발히 활동하였기 때문에 천주교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으며 신자 세대는 정착촌 중에서도 극심한 가난과 소외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인근 본당들의 도움이 늘어났고 회원들이 나환우들의 신앙 및 생활 지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나환우 가족들의 생활 수준도 향상되었다. 1983년 3월부터는 유아원도 개설 운영함으로써 나환우 2세들의 바른 성장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교회와 역사 242호 11쪽-1995. 7. 25발행)

1983년 9월 15일 성 라자로 마을에 성모 영보 수녀회가 떠나고 환자 간호업무를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맡겼다.(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 486쪽) 그리고 1985년 칠곡에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Sisters of the Christian Doctrine)가 나환자 피부과 병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198)

(2) 아동복지

① 보육원

1982년 4월 서울과 순천에 'SOS 어린이 마을'이 설립되었다. SOS 어린이 마을이 한국 땅에 설립된 지 33년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임스트에 첫 SOS 어린이 마을이 세워진 후 유럽 외의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대구에 SOS 어린이 마을이 설립되었다. 1982년 설립된 서울 마을은 16명의 어머니들이 16가정을 꾸려오고 있다. SOS 어린이 마을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한 생애를 바치는 거룩한 사랑으로 인위적으로 맺어진 아이들을 형제, 자매로 키우며 하루 24시간 365일을 자기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만 전념한다. 마을에 오는 어린이들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가정을 잃고 주위로부터도 소외되어 버림을 받아야 했던 아픔과 상처를 지닌 체 마을 식구가 된다. 98년 현재 서울마을에는 149명의 아동들이 자신의 SOS 어머니와 새로운 형제, 자매를 만나 잃어버렸던 가족의 사랑과 보금자리를 찾아 생활하고 있다. 중고생 남학생들을 위한 집으로 기숙사3동과 그 후에 자립을 돕기 위한 자립관 2동이 마련되어 있고 헤르만 그마이너의 사회복지관에서는 유치원을 운영하여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SOS 마을의 모습을 엮고 있다. 모든 어린이들은 아름답고 밝은 미래를 여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며 소망이다. SOS (Save Our Souls)어린이 마을은 소외되고 아픈 상처를 안고 마을로 오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심리와 정서를 치유해 주어 차별 없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찾아주며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고 어린이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을 되찾아 주어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시켜 준다. 나아가서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사회 안에 살면서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자기자신을 책임지며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성장하게 도와준다.(1998. 4월 서울 SOS 어린이 마을의 답신)

1983년 2월 7일 난지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유아들을 위한 '애기들의 집'이 개설되었다. 명동본당 주임신부(김수창)와 가톨릭 사회복지회 지도신부(최선웅)의 공동 후원으로 지난 해 11월부터 준비작업을 거쳐 시작된 이 사업은 주민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불어 넣어주며 주민들과 함께 이웃사랑의 실천을 목적으로 하여 맞벌이 부부들의 자녀를 보호하며 정서생활을 통한 조기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대지 30평에 건평 8평의 판잣집을 개조하여 만든 애기들의 집은 만2세-5세의 유아들로써 1983년 현재 16명의 유아들이 2명의 교사에 의해 탁아보호와 지도를 받고 있으며 이 외에 지역 주민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전교사업과 청소년 교육사업, 지역주민 조직사업, 사회복지회 상담실과 연결된 주민 상담사업 등을 펼쳐 나갈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나눔지 18호-1983. 3. 15발행)

1983년 12월, 1958년에 한국에 진출하여 '천주의 성 요한 의원'을 개원하고, 1971년 광주시 변두리에 걸인수용소인 갱생의원을 설치하는 한편 그 안에 정신과 병실을 설치하여 한정된 수의 환자들에게 획기적인 치료방법을 시도하며, 973년 '천주의 성 요한의원' 내에 정신과 외래를, 1980년에는 정신과 입원실을 개설하여 정신질환 치료에 노력을 기울이던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수도회(Hospitaler Brothers of St. John God)가 고아원인 '소년의 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1132)

1984년 11월 22일, 1962년 6월 16일 사설로 설립되어 1971년 12월 20일 도봉구 상계동으로 시설 이전을 한 보육원을 서울 가톨릭 사회복지회에서 인수하여 성모자애 보육원이란 이름으로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에 운영을 맡겼다. 1985년 2월 1일 차영자(요한) 수녀와 김정자(쁘로따시오) 수녀, 김경숙(마리아) 수녀가 파견되었으며 한달 후인 3월 김용자(아가다) 수녀가 파견되어 58명의 어린이를 인수하였다. 1985년 12월 상계동 재개발 사업으로 1987년 6월 28일 노원구 상계6동 726-4(현 771-1)로 시설을 신축 이전했다.

성모자애원에는 6개 동의 집이 있다. 한 동은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5개 동에 5세-18세 70명의 아동이 살고있다. 2-3개의 방과 마루, 화장실로 이루어져있는 각 집에는 연령, 성별로 나누어 한집에 10-15명의 아이들이 잠을 자고 공부를 한다. 아이들에게 특별한 질병은 없지만 영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다. 성모자애원의 운영은 서울시에서 지원과 신자들의 기부금과 수녀회의 도움으로 아이들의 생활과 교육을 돌보고 있다.(나눔지 67호 3쪽 - 1985. 10. 5발행)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의 수녀들이 자애원에 처음 파견되어 갔을 때 다 쓰러져가는 몇 재의 붉은 벽돌집이 있고 그 안에는 문도 없고, 눈이나 비가 오면 화장실이 넘쳐 오물은 방안까지 스며들고 마당은 수렁이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보다 더 슬프게 만드는 것은 어린이들의 얼굴 표정에서 감정을 찾아볼 수 없고 차갑고 굳은 표정이었다. 정박아로 특별 치료와 교육이 필요한데도 방치되어 있는 어린이들, 간염에 걸려있는 어린이가 무려 30명이 넘고 게다가 3명은 결핵을 앓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있었다. 간장, 고추장, 된장부터 구걸해야 하는 형편에 어린이들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마련해 준다는 일은 꿈만 같았다. 수녀들은 동분서주하며 은인을 구하였다.

원아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 전에 원장 사택을 개축하여 도서관을 만들어 주었다. 신학생들도 고락을 함께 해주며 어린이들의 학습지도를 해주었다. 이렇게 겨우 자리가 잡혀가는데 7개월만에 성모자애원은 무주택 주민을 위한 택지개방 지역으로 묶여 철거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간의 줄기찬 노력과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과 격려가 있었다. 3년간의 가건물 생활, 천막 생활 끝에 비로소 1987년 여름 현재의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었다. 성모자애원에는 가정교육의 하나로 웃어른 공경, 올바른 마음과 몸가짐, 바른 언어사용, 책임감 있는 생활, 질서 있는 생활, 양보하는 생활을 가르치고있다. 그 외에도 학습지도, 지속적인 신앙교육, 정서교육을 시키고 상담도 해주고 있다.

수녀들의 기도와 사랑, 후원자들의 알뜰한 보살핌과 자원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봉사는 결국 어린이들의 냉랭한 가슴 안에 서서히 따스함이 스며들어 있고 그들 안에 사랑의 싹을 트일 수 있었다. 수녀들은 봉사자 어머니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역할 등의 교육이 있다면 부지런히 좇아가 교육을 받는다. 성모자애원은 매달 첫째 주 월요일에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보육원 출신자 세 쌍의 혼배가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였다.

원장 차 요한 수녀는 성모자애원의 고아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여 고운 문화재단에서 제정한 제 1회 고운봉사상을 수상하였다. 원아들이 학교에서 시설 아동이라는 것을 다른 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학교에서 해 오라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주고 있다. 그렇게 하기까지는 원아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도시락 반찬에도 마음을 쓰고 있다. 많은 은인들과 수녀들의 정성으로 현재 원아들은 모두 건강하고 명랑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1998년 4월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담당 수녀의 답신; 1998년 11월 10일 성모자애보육원 답신)

② 어린이집, 탁아소, 유치원

1976년 2월 24일 부산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황령산에 '분도 어린이집'을 개원했다. 부산 성 분도 병원에서는 1975년 1월부터 '구호과'를 '사회봉사과'로 바꾸고 염일례 그라치아 수녀를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무료진료환자 중에 많은 이가 황령산 기슭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생활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를 답사하였다. 전포동 황령산 기슭에는 부산시에서 거두어 온 쓰레기가 쌓여있고, 양주변에 거지, 넝마주이, 노무자, 전과자, 결핵환자, 정신병자, 알콜중독자, 나환자들이 사회에서 소외된 채 천막이나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들은 식수마저 해결하기 어려운 인간 이하의 상황에 있었고, 버려지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마침내 공동묘지 주변에 10평의 천막을 치고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돌보았다.

7세 미만의 어린이들을 오전에 돌보고 오후에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목요일 오후에는 성분도 병원의 무료 이동진료반의 봉사로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이 어린이집은 1년 6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수녀들과 청원자들은 버려진 어린이와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공동묘지 사잇길을 오르내리면서 어린이 교육과 급식, 환자방문, 빨래, 집안정리, 치료 등의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 봉사활동은 1977년, 황령산 공동묘지지역 재개발 계획에 따라 공동묘지와 무허가 판자촌이 철거당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 456)

1976년 9월 1일 노틀담 수녀회(Congregation of the Sisters of Notre-Dam)는 오산에서 떨어진 거리에 '이동 어린이 집'을 개원했다. 1972년 3월 18일 오산읍 창학리에 10,230평 대지를 구입하여 노틀담 수녀회에서는 오산 수녀원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각 가정을 방문하여 어머니들이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과 지역사회의 요구를 듣고 사도직의 방향을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가난한 농촌 주민들의 자녀, 직장을 가진 어머니와 인근 공장 직원들의 자녀들을 맡아 돌보며 아울러 주변 농촌지역에도 관심을 주어 수녀들이 직접 나가서 어린이들을 지도하기로 하였다. 1975년 3월에 유치원 건물을 준공한 후 정식 인가가 나기까지 약 2년 동안 '어린이집'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1976년 9월 1일 오산읍에서 떨어진 서리에서 '이동 어린이 집'을 개원하여 그 곳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봉사하게 되었다. 그 후 구역이 좀더 넓은 가장리로 옮겨 2년여 동안 어린이들의 정서 함양과 간접적인 신앙교육에 주력하였다. 1979년 3월 7일에는 '이동 어린이 집'운영을 신자 수도 많고 교육을 필요로 하는 어린이들이 더 많은 벌음리로 옮겨 1985년 2월 21일까지 봉사하다가 문교 정책에 의한 초등학교에 새로운 병설 유아원이 생긴 관계로 더 이상 수녀원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폐원하게 되었다. 이로써 오산읍의 '노틀담 유치원'과 '이동 어린이 집'의 이원적인 유아 교육 사도직은 일원화가 되었다.(교회와 역사 226호 16-994. 3. 25 발행; 가톨릭대사전 : 254)

1979년 2월 소록도 본당 내 '쌘뽈유치원'이 개원했다. 소록도에서 사는 환자 가족 가운데는 학업, 취업관계로 낮에는 섬을 떠나는 유동 인구도 많아 평일에는 수, 금요일에 미사를 드리는데 참여하는 신자는 손꼽을 정도이고 주일미사 참석자도 몇 명 안되었다. 그래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직원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1979년 2월부터 '쌘뽈유치원'을 개원하여 36명의 원아들을 받아 이경례 비비안나 수녀가 담당하였다. 이어서 주일학교, 중고등학생회, 청년회, 레지오 마리애, 성체회를 조직하면서 신앙생활을 체험시키고, 1979년부터는 간호보조원양성소 학생들 중 희망자를 대상으로 교리교육을 실시한 결과 매년 10여명의 영세자들이 나왔다. 성인 영세자들도 열심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부진하던 본당에 그간 총 330여명의 새 교우가 탄생하게 된 것은 유치원 어린이들을 통하여 부모들에게 미친 영향이 컸다. 그러는 사이에 관사지대의 신자수가 장로교의 두 배로 늘었다. 신앙생활에 열심해진 신자들은 멀리하던 병사와의 친근감도 생겨 병사본당까지 가서 미사에 참여하는 이도 있고, 특히 성탄, 부활 전야미사, 성모의 밤 전례 등은 합동으로 올리게 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925)

1981년 5월 20일 서울 마천동에 인근 공수부대 장교부인들이 저소득층지역을 대상으로 봉사하기 위해 설립한 새마을 유아원을 강동구청(현 송파구청)장이 1988년 9월 15일 '88탁아원'으로 재개원하고 1991년 3월 '마천 어린이집'으로 개칭하여 성가소비녀회에게 운영을 맡겼다. 현재 성가소비녀회는 교회의 미래를 지향하는 전문사회복지기관으로서 사회복지사업의 발전과 토착화를 모색하고 교구공동체의식의 활성화와 사회복지기능의 혼합을 이루어 교회의 모든 단체 및 개인의 복지지원을 동원함으로써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발견하여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1998년 11월 5일 마천 어린이집 윤 프란치스카 수녀 답변)

1982년 12월 7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영유아에 대한 적절한 환경과 전문적인 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 보육사업을 시행함으로써 영유아의 건전한 보육과 보호자의 경제적인 활동을 통하여 가정 복지를 증진하고 교회와 지역사회간의 유대강화를 통해 선교의 보탬이 되도록 관악구 신림10동 산 69-2에 대지 446평 건물 72평의 조립식 건물을 세우고 '율곡 어린이집'을 개원했다.(1998년 11월 6일 율곡 어린이집 답신)

1987년 3월 16일 도봉구 미아동에 탁아소인 솔샘 아가방이 개설되었다. 지역의 영세민 맞벌이 부부들의 취학전 아이들을 오전8시부터 오후 7시까지 맡아, 대리모로서의 역할을 하며 아이들의 사회성과 정서교육 등을 담당하며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을 덜어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도와준다.(나눔지 142호 2쪽-1987. 3. 28발행)

1987년 9월 부산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성 분도 빛둘레 집'을 설립했다. 성 분도 빛둘레 집에는 탁아소와 초등학생들을 위한 공부방이 있다. 1987년 이 지원을 설립할 당시 당감동 화장막 뒷산 골짜기는 전과자들의 무허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수녀들은 이곳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봉사할 것이 있지 않나 생각되어 1987년 9월 조그만 전셋집을 얻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폭우로 집이 무너지자 옆의 공터를 빌려 천막집을 건립하여 탁아소와 독서실을 마련하고 '성 분도 빛둘레 집'이라 이름하고, 축복식과 개원미사를 봉헌하였다. 봉사자들이 놀이터를 만들고, 가야 본당 레지오 단원들의 협조를 받아 계단과 마당을 조성하였다.(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 457)

1988년 2월 7일 서울 신림동 애기방 하경희와 부천 우리 아가방의 양금자, 우리두리 탁아소의 이미선, 김현숙이 서울 및 경인지역의 도시빈민지역을 중심으로 맞벌이 부부들의 자녀들을 위한 유아원과 공부방에 종사하고 있는 자원봉사교사들의 긴밀한 정보교환과 연대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아동의 심신을 보호하고 정상적인 발달을 도모하며 아울러 청소년문제의 예방사업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이원규 신부를 지도신부로 모시고 '가톨릭 지역아동 연합회'를 발족했다. 그후 1993년 2월 24일에는 '가톨릭 공부방협의회'가 발족했다.(1998년 11월 13일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정선희 사회복시사 답신)

1988년 8월 3일 서울특별시 구로 3동에 4평의 공간으로 '꾸러기 동산 어린이집'이 개원했다. 꾸러기 동산 어린이집이 위치한 구로 3동은 한국 수출 산업공단과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철강, 전자, 봉제 등 소규모의 가내 공장들이 밀접해 있어 공장과 주거지역이 혼재된 곳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이 공장 노동자, 일일 노동자들이며 좁은 골목과 나무 한 그루, 놀이터조차 제대로 없는 환경에서 방치되어 있는 많은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시키고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는 안전하고 교육적인 환경의 필요성을 절감한 6명의 여성들이 탁아소를 설립하여 운영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4세-5세 대상의 어린이 집은 몇 군데 있으나 12개월 미만의 영아, 탁아 공부방 시설의 부재로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고 2-3년간은 직장을 가지기 어려우며 유치원,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주변의 열악한 환경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부부가 함께 일을 해야만 하는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일을 할 수 가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지역의 현실에서 영아 탁아, 유치 탁아, 공부방의 필요성에 대한 주민들의 요구가 있었으나 공간의 협소함으로 그 요구를 수용할 수는 없었다. 이에 꾸러기 동산 어린이집은 맞벌이 가정의 부모들에게는 안심하고 자녀를 맡김으로 해서 가정경제 및 사회경제에 도움을 주고 어린이들에게는 편안하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자랄 수 있는 교육의 공간을 위해 건물신축을 하였고 1997년에는 서울시 모범시설로 지정이 되었다.(1998. 6. 13일 원장 이화복의 답신)

1988년 12월 8일 성모 카테키스타회가 강원도 정선군 내의 탄광촌의 결손가정의 아동들을 보호하여 육성하기 위하여 '대철 베드로의 집'을 설립했다.(98년 현재 연면적 745평, 건평 156평에 아동 20명, 직원 4명이 탄광마을의 특성과 어려움 속에서 만들어진 고아와 결손가정 아이들을 가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함께하고 있다. 현재 10명 미만의 아동과 더욱 친밀한 가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계획하고 있는 중이다.)(1998. 6. 30일 대철 베드로의 집 김혜경 데레사 수녀의 답신)

1990년 3월 19일 서울대교구 구로3동 성당의 이해섭 신부가 영세민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 자녀들의 교육과 정서를 함양하여 부모님과 이웃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 돈 보스코의 예방 교육 정신인 자애, 이성, 종교를 바탕으로 유아들을 위한 '요셉 놀이방'을 설립했다.(1998년 11월 6일 요셉 놀이방 답신)

1990년 12월 8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신 성모님을 본받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특별히 가난한 자, 고통당하는 자,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해야 한다."(회헌 5조 20)는 정신에 따라 지역주민 대부분이 맞벌이 가내수공업을 하고 있는 성북구 정릉3동에 맞벌이 부부와 결손 가정의 아동을 보호하고 학습을 지도하며, 어려운 가정을 방문하고 환자와 노인을 돌보며 지역 주민과 함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성모의 집'을 설치했다.

1991년 6월 13일 서울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가난한 이와 소외된 이를 우선적으로 돌본다."는 회헌의 정신에 따라 서울 구로구 고척2동 241-180번지에 결손가정의 여자아이들을 위한 생활공동체 '만남의 집'을 설치했다. 현재는 노동자 교육과 지역의 가난한 환자 돌보기는 중지하고 결손가정 아이들 유아 1명, 초등학생 5명, 중학생 4명, 고등학생 2명 총 12명이 수녀 3명과 함께 살고 있다.(1998년 11월 7일 만남의 집 양 비안네 수녀 답신)

(3) 교육복지

1975년 9월, 3월에 한국지구로 독립 승격된 성심수녀회(Society of the Sacred Heart)가 부천에 성심여자대학교 분교를 신설했다.(가톨릭대사전 : 649)

1976년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복자여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분리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1978년 복자여자 중·고등학교에서는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근검절약 정신을 길러 저축을 증대시키고 자조자립 정신을 기르고자 학생, 교직원이 공동 출자하여 '천안 복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여수신 업무와 공동구매 업무를 실시하고 있다.

복자여자 중·고등학교에서는 팽배해 가는 개인 집단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 주의의 시대에서 밝은 미래사회를 만들고자 학생들에게 3가지 중점적인 실천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첫째로 5개의 이웃 돕기회 (성모 자애 재활원을 돕는 복두레회, 결핵환자를 돕는 릴리회, 장애 어린이 교육을 돕는 엠마누엘회, 보육시설을 돕는 목련회, 장애인과 환자들을 위한 꽃동네회)를 조직하여 전체 교직원과 학생들이 적어도 1개이상의 회원이 되어 매월 자신들이 희망한 일정금액의 회비를 모아 이웃돕기를 실시하고 있다. 둘째로 일년중 적어도 한번, 각 학급별로 주말을 이용하여 학급활동의 일환으로 가까운 이웃에 있는 고아원, 양로원 등의 사회복지 시설을 담임교사와 함께 방문하여 학용품, 놀이기구 등을 전달하고 간단한 다과도 함께 나누며 대화, 놀이 등으로 이웃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현장교육을 실시하며 셋째로 3학년 학생들은 매년 고입, 대입 시험이 끝나고 학창시절을 정리할 무렵에 충북 음성군에 꽃동네를 직접 방문하여 청소세탁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복자 여자 중·고등학교는 입시 위주의 전쟁터 같은 교육환경을 극복하고자 전인교육이란 차원에서 학생 개개인의 취미와 특기를 고려하여 클럽활동 부서 35개반을 조직하고 운영하고 있다.(1998. 4. 28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

1977년 12월 부산교구 학교재단에서 분리, 성지재단을 창설하여 장병화(張炳華 요셉) 주교가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함으로 부산교구에 종속되었던 10년 동안의 불편을 덜게 되었다. 1979년 중·고 분리시책에 따라 중·고가 완전히 분리되어 중학교는 김재석 신부가 제 9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고등학교에는 박정희 수녀가 유임하였다. 성지학교는 학교명과 같이 교직원 학생전원이 하늘의 거룩한 뜻을 준행하는 그리스도교적 덕성을 기르고자 애쓰고 있다. 1985년 2월에는 근로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한 산업체 특별학급을 부설하여 현재 12학급에 이르렀다.(샬트르 100년사 : 954)

1979년 6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는 성모여고를 부산교구에 이관하고, 1979년에는 원래 학교부지로 매입했던 서울 가리봉동에 여성 근로자들을 위한 선화기숙사를 완공하여 5월 1일 첫 기숙생을 입사시켰다.(가톨릭대사전 : 366)

1981년 4월 30일 부산 범일동 데레사 여자 중고등학교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문현자 호스띠아 수녀가 제6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는 1980년 7·30조치로 과열과외가 사라지고 학원 정상화 작업이 정착되어 가면서 동시에 교복 자율화로 자칫 방종과 이탈현상이 예상되는 때였으므로 취임 후 전인교육의 구체화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정신에 바탕을 둔 믿음과 사랑으로써 성실하고 슬기로우며 아름다움을 지닌 한국 여성을 키운다"는 학교교육 목표의 근본 정신을 구현할 방안으로 학생들의 정신적 방향을 이끌어 갈 표상으로서 모녀상(母女像)을 세웠다. 또한 교회학교의 특색을 살려 "종교교육을 통한 품성 도야"를 교육방침으로 설정하고 그 구체적 실천 방안을 사랑의 실천, 정직한 마음, 감사하는 생활 등으로 구분하여 전인교육의 기본 덕목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위한 행사로 '성모의 밤'과 '소화에서 만납시다'를 연말에 종교반 중심으로 개최하여 헌금과 행사 이익금을 고아원과 소록도 나환자 수용소에 보내고 있다. 또한 정직한 마음의 실천을 위해 교내에서의 습득물 신고제를 두고 적극권장, 지도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934)

1983년 3월 1일 대구대교구에서 설립한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는 전인교육을 통하여 봉사로 이웃과 함께하는 민주시민을 육성하고, 폭넓은 복지이론을 탐구하는 연구인을 육성하고, 지식과 기술을 겸비 실천하는 사회복지인을 육성하기 위해 전준우 교수를 학과장으로 사회복지학과를 설치하여 198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여명의 사회복지사를 배출했다.(1998년 11월 3일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조교 이지현 답변)

(4) 야학 및 기술복지

1975년 서울대교구 홍제동 본당의 .9대 주임신부인 이석충 신부는 1975년 '분도학교'를 설립하여 불우한 아이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가톨릭대사전 : 1305)

1988년 마리스타 교육 수도회가 충북 중원군 산척면 영덕리 262-11에, 사회 복지가인 애드나 스미드 씨가 1964년 서울역 부근에서 방황하던 구두닦이 청소년들을 돌보기 위하여 용산에서 시작한 '요한 보스코' 고아원을 인수하여, 마리스타 기술교육원으로 설립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부모가 없거나 가정 불화로 가출한 청소년, 결손 가정의 자녀와 영세민 자녀, 그리고 다른 사회복지 시설에서 잘 적응하지 못한 12-18세의 청소년들을 수용하여 사회적응을 위한 학습교육과 기술훈련을 연마시켜 직업인으로 양성시키고 있다. 졸업 후에는 취업알선까지 해주며 그들이 진정한 사회인으로 뿐만 아니라 4명의 수사와 일반 교사 및 보모들이 목공, 금속 공예, 배관 등의 기술교육과 함께 신앙교육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교회와 역사 244호 14-1995. 9. 25발행)

(5) 장애인복지

1978년 10월 서울 사랑의 선교회 총장 앤드류 신부의 도움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임을 갖다가 공동체로 탄생되었다. 이곳에는 22세에서 35세까지의 활동이 가능한 신체장애인 여성으로 기도를 통해 장애인들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장애인들을 방문하거나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맞아서 어려운 고통도 함께 나누며 이곳에 올 수 없는 경우에는 편지를 써주기도 한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하느님의 계획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나눔지 25호 6-1984. 7. 15발행)

1978년 10월 20일 명휘원이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으로 신축 이전했다.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은 故의민 황태자 영왕의 환국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어려운 이웃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르며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직업재활 교육원인 명휘원, 장애인 근로시설인 해동일터, 지체장애인 특수교육기관인 명혜학교, 명휘 어린이집, 명휘 체육센터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장애인이 가진 잠재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기 위하여 각 개인에게 알맞은 재활 교육과 인성교육을 단계적으로 실시하여 직업능력을 갖춘 기능인을 양성하는 동시에 건전한 인격을 갖춘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양재과, 편물과, 공예과, 보호자립장이 있다.(1998. 6월 시립 명휘 어린이집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이 안토니나 수녀의 답신)

1979년 4월 13일 가톨릭 사회복지회가 서울 살레시오 수도원에 '가톨릭 맹인 선교회'를 발족했다. 맹인의 복음화와 맹인 선교자로서의 자질 개발과 맹인의 선교활동을 지원하고 점자 및 녹음 테이프 서적을 출판, 보급함으로써 맹인의 독서 생활에 기여하는 동시에 맹인의 재활 및 복지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서 창립하였다. 시행중인 사업은 맹인미사와 점자 강습회, 녹음도서관을 운영하며 맹인의 원활한 사회참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나눔지 18호 2, 3-1983. 3. 15 발행) 1982년에는 점자도서관을 개관했고, 1986년에는 맹중복장애아동 시설인 서울 라파엘의 집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1989년에는 사회복지법인 하상복지회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1991년에는 여주 라파엘의 집을 개원했다.(1998년 11월 3일 하상 장애인 종합복지관 김주희 사회복지사 답변)

현재는 주일미사와 교리교육, 신심행사, 맹인들의 레지오 활동, 기도모임, 푸른군대 회합 등의 선교사업과, 생활이 어려운 맹학생과 맹인자녀를 대상으로 한올호 장학사업과 점자 신앙서적을 발행 및 보급하고 점자주보를 발행하는 교육 홍보사업, 맹인친목행사, 맹인용 컴퓨터 프로그램 갤발 및 보행훈련 등의 자활사업, 장애아 조기교육실과 각종치료교육실, 점자도서관 및 재활공학센터와 무료급식사업 및, 중증 장애인 수용시설인 서울과 여주의 '라파엘의 집'과 무의 무탁의 맹인 남성을 수용 및 보호를 위한 '바르티메오의 집'과 연변 하상 시각 장애인 재활센터 및 맹인 여성들을 위한 기도공동체 오틸리아 공동체와 하상 장애인 종합 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다.(1998년 11월 10일 서울 가톨릭 맹인 선교회 답신)

1980년 말에 소화영아불구시설을 '소화영아재활원'으로 명칭변경 신청하였다. 해방 후 부산 교구 범일동 본당 정재석 신부에 의해 시작된 소화보육원은 1979년까지 보육하던 영아원의 영아들이 차차 입양되고 수용인원이 줄어들자 시대의 요구에 따라 '영아불구시설'로 전환시켜 영아장애인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기존건물을 다시 개수 공사하여 시설을 갖추어 1981년 1월 19일에 소화영아재활원으로 개원한 후 수녀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던 중 1987년 남천동 재활원 자리에 교구청사를 이전하려는 교구의 계획으로 다시 재활원의 이전문제가 대두되었다. 무척 난처했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부산교구청과는 상관없이 사업체를 단독으로 운영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래서 재활원을 위하여 교구청 측에서 내놓은 부곡동 야산에는 그 동안 재활원 사목실을 빌려 상담해오던 심장환자 상담소를 위한 건물 신축이 계획되어 1988년 2월 1일 기공식을 가졌고 1989년 10월에 완공을 보았다.(샬트르 100년사 : 943)

1981년 4월 20일 가톨릭 사회복지회에 비둘기 교실이 개설했다. 비둘기 교실은 만 18-25세의 손을 사용할 수 있는 지체부자유자들을 1-2년간 재단, 미싱, 봉재, 교리, 음악, 미술 등 전 과목을 무료로 지도하여주며, 기술연마에 앞서 인화단결에 교육중심을 두어 화목한 사랑의 교실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지난 81년 4월 20일에 개실되어 제1기 수료생을 이미 배출하였다. 비둘기 교실의 교사진들은 모두 각 방면의 1급교사이며, 이 교실은 후원회의 성금과 희사금으로 운영되고 있다.(나눔지 17호 10-1983. 1. 15발행)

1981년 5월 2일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는 엠마누엘 장애 어린이집을 설립했다. 이 세상에 사랑의 신비를 갖춘 생명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아픔으로 일찍 고달픔을 배운 어린이들을 찾아 정성스럽게 보살피며 그들에게 하느님의 더 높은 희망과 삶의 보람을 찾아주고자 1981년 5월 2일 인천광역시 부평구에서 황해도 연백본당 주임사제 김영식 베드로 신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엠마누엘 어린이집은 장애아동(정신지체, 언어지진, 자폐, 정서불안) 들의 조기교육기관이다. 장애인들은 사회적 편견으로 이중의 고통과 불행을 겪는다. 김영식(베드로) 신부는 황해도 연안에서 1947년 10월 7일 무의무탁한 고아들을 가정적인 보육방법으로 육성하고자 연백성모원을 설립하였다. 성모자애병원은 1955년 6월 27일 설립되어 전쟁고아들과 주민들에게 봉사해오다가 1963년 4월 병원과 연백성모원이 한국순교복자 수녀회로 양도되었으며 1978년 4월에는 정부의 소수수용기관 통폐합 정책으로 대부분의 고아들을 자립시키고 나머지 어린이들은 혜성보육원에 통합되었다.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는 이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박 루시아 수녀와 전난향(데레사) 수녀를 일본에 파견하여 가마쿠라에 소재한 '성모 방문회'에서 운영하는 심신장애인 교육원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와 전적으로 가난하여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온 장애아동 7명으로 시작되었다. 아동들의 장애상태는 정신박약, 자폐증, 다운증후군, 정서장애 아동들이었다. 정신적, 신체적인 결함을 갖고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애를 가진 아동에 대한 조기교육인 것이다. 이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엠마누엘 어린이집 조기교육원을 설립하여 장애별 아동들의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여 사회의 한 일원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며, 그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 더욱 희망찬 삶을 찾아주고자 개원을 하게된 것이다.

1982년 2월 물리치료실을 신설하고 재활의학과 의사 및 물리치료사가 정기치료를 시작하였다. 1983년 3월 제2대 원장으로 최영숙(바오로) 수녀가 부임하면서 특수조기교육원으로 시설을 변경하였다. 언어치료와 유아반을 신설하고 몬테소리 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의 범위를 넓혔다. 1987년 2월 박병례(루시아) 수녀가 캐나다에서 특수교육 연수를 받고 제3대 원장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독일 까리따스의 원조로 1988년 1월에 엠마누엘 어린이집 기공식을 갖게되었으며 1989년 7월 5일 준공식을 하였다. 시설은 수치료실, 대근육실, 생활훈련실, 시청각실, 교육실, 음악치료실, 언어치료실, 개별지도실, 양호실, 자료도서실, 강당, 교무실, 사무실, 원장실, 탈의실, 식당, 주방, 자원봉사자실 등이며 1998년 현재 장애아동은 3세에서 8세까지 70명의 어린이가 교육을 받고 있으며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장애아동 및 그 부모를 위해 월 1회 무료교육을 실시하고 있다.(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의 답신; 가톨릭대사전 : 1260)

1981년 10월 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서울 흑석동에 '성모 어린이집'을 설립했다. 1981년 세계 신체 장애인의 해를 맞아 설립된 성모 어린이 집은 뇌성마비아들을 조기 발견하여 신체 기능을 회복시키는 물리 치료 및 탁아 사업을 하고 있다. 성모 어린이집의 특징은 치료와 교육을 병행하는 시설을 갖추고 5세까지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지적, 감각, 운동, 시각 등의 효과를 이용하여 물리 치료를 하는 것이다. 물리치료는 Vojita방법으로 1980년 연세대학교에서 이론에 대한 강의가 있었고 1981년 9월 3명의 독일인 물리치료사들이 한국에 나와 실습을 시킨 최근에 도입된 치료법이다. 개원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성모 어린이 집에는 십여 명의 어린이들이 치료를 받고 있으며 좋은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 382)

1981년 씨튼 까리따스 수녀회(Seton Sisters of Charity)가 지체부자유자를 위한 특수학교인 은혜초등학교 개교했다.(가톨릭대사전 : 713) 1981년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Little Company of Mary)가 지체부자유자를 위한 물리치료실을 개설했다.(가톨릭대사전 : 366)

1982년 3월 1일 서울 둔촌동 본당 안상무 신부의 집전으로 '애덕의 집' 축성미사가 거행되었다. 애덕의 집은 김근영씨의 노고와 희생으로 창설되었으며 행려자와 신체장애인 25명을 보호할 수 있는 조그마한 한옥집이 본당 신자들과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개설되었다. 1982년 현재 8명의 무의무탁하신 분들이 생활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좀더 많은 신체장애인과 행려자들을 보호할 계획이다(새벽지 73호 21-1982. 4. 1발행)

1982년 3월 15일 메리놀회 안 예도(Edward Wheland M.M) 신부가 발달 장애 아동의 조기교육을 위하여 갈릴리의 집을 설립했다. 발달이 늦어진 유치원 전의 아동들에게 특수교육을 실시하여 그들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동시에 현재 가지고 있는 장애정도를 줄이며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장애를 미리 예방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대상 아동은 정신지체, 다운 증후군, 언어장애, 자폐증, 학습장애아, 과잉행동등 발달 장애아들로서 사회적응훈련, 신변처리, 인지, 언어, 운동성 등을 영역별로 나누어 지도하는 것을 주요 교육내용으로 하고, 프로그램(portage Guide to Early Education)을 기본으로 한다. 입학은 교육받기를 희망하는 부모님들과의 상담을 통하여 가능하며, 공·사립 특수학교의 유치부 입학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보통 1∼2년간 지도한다. 갈릴리 집의 정신은 장애아도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소중한 존재이며 사랑 받을 수 있는 고유한 개성과 인격을 지니고 있음으로 이 어린이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충실히 기초를 닦아주고자 하며 그리하여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됨이 없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활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있다.(1998. 5. 15 김 마리 요셉 수녀의 답신)

1982년 4월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밀알회에서는 정신지체아 및 보호자 상담을 시작했다.(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1998. 8. 25일 밀알재활원의 답신)

1982년 12월 8일 예수 성심 시녀회가 경북 포항시 남구에 무의무탁한 18세 이상의 성인 여자 지체장애인으로서 재활이 가능한 자를 위해 '마리아의 집'을 설립하여, 신앙생활 및 정서교육, 의료재활, 직업재활을 제공하고 있다.(1998. 5. 27일 예수성심시녀회의 답신)

1982년 12월 17일 서울특별시에서 강동구 명일동 5번지 5,000평의 부지 위에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을 설립하여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 운영을 맡겼다. 상담, 치료, 교육 및 직업훈련 등을 통하여 장애인들의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고 그 기능을 원할히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복지이념을 구현하고자 설립되었다. 관훈은 "마음을 자유롭게, 능력을 당당하게, 인생을 소중하게"이며 복지회관의 이용대상은 지체, 정신지체, 청각 언어 및 정서 장애인 등으로 시각장애와 정신질환은 예외이다. 특전은 생활보호 대상자는 치료, 교육, 훈련비 등 이용료가 면제되고 영세가정을 상담 후 이용료가 면제된다. 1998년 현재 시설현황은 대지 14,463㎡에 본관동, 직업훈련장, 보호작업장, 리포츠 센터가 있다.(1998. 6. 11일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정진모 기획실장의 답신;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 372)

1983년 7월 1일 가톨릭 사회복지회에 정신지체 장애인들의 기술교육을 위하여 '늘 푸른나무'를 개설한 후 늘어나는 장애인들의 수용과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84년 3월 1일 수유3동에서 마포구 대흥동에 있는 새교육장으로 옮기었다. '늘 푸른나무'는 지능지수 40이상의 훈련 가능한 정신지체 장애인중 18세이상 남자들에게 목공예 교육을 통해 잠재능력을 개발하고 사회성을 높이기 위한 훈련등을 하고 있다.(나눔지 88호 2-1986. 3. 8발행)

1983년 9월 30일 부산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지산자활원'을 설립했다. 지산자활원은 메리놀 수녀회가 사회에서 소외당해온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재봉기술을 가르쳐 다시 사회에 나가 자립하도록 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장애인 복지시설이다. 한국외방선교수녀회 예비수녀들이 청소를 도와주고 있으며, 이웃들은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도와주고 있다.(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69)

1985년 4월 12일에 서울시는 노원구 상계동에 '성모 자애 장애인 종합 복지관'을 설립하고 맹인들을 위해 새로 조성되는 맹인촌의 운영권을 가톨릭 서울교구 사회복지회에 맡기고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인수하였다. 사회복지사업법 제 2조의 각호의 규정에 의한 요보호아동, 탁아시설, 노인복지시설 및 장애인 기타 요보호자를 수용하고 이들을 자활 자립할 수 있도록 선도함에 있어 이에 수반되는 사회사업을 그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맹인들이 대우빌딩 뒤 힐튼 호텔과 주차장 일대 양동에서 거주하면서 인근 남대문과 서울역에서 구걸을 하였다. 맹인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 때문에 집이나 방을 임대받기가 어려우므로 양동에서 맹인들 외에도 넝마주이, 지체장애인, 윤락여성들의 살고있었다. 정부에서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하여 남대문과 서울역 맞은편 등지에서 구걸하던 맹인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사회복지 시설이었다. 보사부에서 상계동 856번지의 건물을 착공하여 1985년 4월 15일 완공하였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성모자애재활원을 맡게된 동기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으로서 103위 성인을 주심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뜻이 우선이고, 200주년 모토가 "이 땅에 빛을"인데다가 맹인 개안수술도 있어서 아주 걸맞은 사명을 띄게 된다는 데에도 의의가 있었으며 수녀원에서 거리가 가까워 수련자들의 교육에도 좋다고 사료되었기 때문이다.

이 성모자애 재활원을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장애인들에게 가족 단위로 혜택을 주는 전용주택이었다. 부실공사를 하여 시공자 측에 개수를 요구했으나 쉽게 보수공사를 해주지 않아 준공이 차일피일 미뤄지게 되었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는 1985년 4월 12일 김복례(마르타) 수녀와, 이영옥(요셉) 수녀, 차희연(로즈마리) 수녀를 파견하였다. 한편으로는 이옥보(야고보) 수녀와 조정자(야고보) 수녀, 김연선(마가렛) 수녀를 일본에 파견하여 그곳에 맹인시설을 돌아보게 하였다. 1985년 4월 15일 서울 맹인자립회 회원 78세대 260명이 입주하였다.(1998. 5.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변서)

1985년 7월 1일 강북구 수유리에 현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성인 남자 정신지체장애인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의 공동체 정신에 입각하여 가톨릭 교회의 이념과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의 철학에 바탕을 두어 서로가 공존하며, 정신지체장애인들이 자신의 기술과 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고 성장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배움과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며, 또한 궁극적으로 일반 사회인들과 통합되어 지역 사회 내에서 가능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디록 생활 교육 및 재활을 위한 교육과정을 통해 자활과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직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동체 '늘푸른 나무'가 설립되었다. 1990년 7월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에서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지만 사랑이 없는 곳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천주의 성 요한의 정신에 따라 늘푸른 나무를 인수하여 20여분의 정신지체장애인 성인 남자들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용하며, 직원 2명과 수사 2명이 생활하고 있다.(1998년 11월 3일 늘푸른 나무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서울 분원 평화의 모후 공동체 답변)

1986년 3월 23일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가 창립되었다.(1998. 7. 14일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김기영 루도비꼬의 답신) 1986년 9월 28일 서울 가톨릭 맹인선교회에서는 신체적인 장애로 인하여 무가치한 존재로 여김 받고 소외되어 있는 맹인 중복 장애아들을 위한 재활시설 '라파엘의 집'을 설립했다 .'라파엘의 집'은 4월 맹인선교회 부회장인 이수남씨가 자택이었던 종로구 평동 13-27 소재의 대지 45평, 건평 41평의 가옥 1채를 희사하였다. '라파엘의 집'에 입소할 수 있는 장애인은 맹인으로서 언어 청각기능에 장애를 지니거나 정신지체자, 자폐성향을 지닌 자에 한하는데 이러한 중복 장애인의 수용보호에도 재활훈련과 교육, 신앙생활을 지도하며 장애인 및 가족의 상담과 중복장애인들의 재활 및 교육에 관한 조사와 관련자료의 수집과 홍보활동을 통한 중복장애인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높이는 계몽활동을 하고 있다.(나눔지 119호 3-1986. 10. 11발행)

1987년 2월, 1965년 3월 1일 발족한 부산 가톨릭 농아 선교회 지도신부였던 박용조(프란치스꼬) 신부가 1986년 9월 13일 수정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후 부산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 지도수녀를 요청하여 송순자(토마시나) 수녀가 1987년 2월 27일 파견되었다. 당시 부산교구내 장애인 신자수는 2,000 여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본당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조차 포기하는 상태에 있었다. 박용조 신부는 청각장애인들의 특성을 고려한 사목 프로그램을 전개할 공간이 없어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성 분도 치과 옆 공터를 최적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박 신부는 장애인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땅을 빌려줄 것과, 장애인회관을 운영해 줄 것 등을 수녀원에 제안하였다. 수녀원에서는 1987년 3월 총회 의결회의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에 부산교구에서는 수녀원 경내 성 분도 치과 옆 공터에 천주교 부산교구 장애인회관으로 70평의 조립식건물을 지어 '하나의 집'이라 명명하고 1987년 12월 6일 축복하였다. 축복식에 앞서 9월에 부산 가톨릭농아선교회 본부를 수정성당으로부터 이곳 하나의 집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이미 해오던 활동을 수용하고, 일관성 있는 프로그램을 계획하여 청각장애인을 위한 사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하나의 집에서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봉사하고 있다.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수화강습이 주야로 있는데, 1991년 말 현재 약 500명이 수료하였다.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야학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개최되고 있으며, 중고등학생들의 학습지도(영어, 수학), 문장공부 등이 있다. 전체적인 계획과 운영에는 수화교실을 통해 배출된 '더불어회' 봉사자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다른 지역의 농아선교회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해마다 1번씩 전국 청각장애인들이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함께 모여 피정을 하고 있다. 하나의 집에 파견된 수녀는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레지오 마리애를 지도한다. 때때로 청각장애인들의 직업알선을 위해 나서기도 하고, 직장에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을 돕기 위해 대신 변호사를 찾아보고 법정에 서기도 한다. 청각장애인들이 병원이나 관공서에 갈 때에 함께 가서 수화통역을 하기도 하고, 가정방문을 하여 가정과 사회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갈등 등을 들어주며 신앙생활을 격려하기도 한다. 보청기를 보급하고, 청각장애인 가정에 초인종 대신 깜빡이는 전등불을 달아주고 전화대신 FAX를 설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그들의 곤란을 덜어주는 구체적인 방법이 되었다. 하나의 집의 또 하나의 활동은 청각장애인들의 자녀들(정상아)을 위한 유아원 운영이다. 하나의 집 유아원에서는 약 10명의 어린이들에게 유년에 익혀야 할 좋은 습관과 성격형성, 언어교육 등 세밀한 지도를 하고 있다.(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 471)

1987년 7월 11일 부산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성 분도 장애인 직업 재활원을 설립했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는 1985년 8월, 임시총회에서 재활병원이나 재활원을 세우기로 뜻을 모으게 되었다. 마침 1985년 9월에 서울시에서 장애인 직업 재활 시설 건립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보사부에 설립계획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1985년 11월 19일, 염보현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장애인 복지시설 건립 지원계획을 통보받게 되었다. 1986년 5월 12일,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진우리 661번지에 매입해 두었던 부지에 서울시의 경제적 지원과 소사 땅을 매각한 금액으로 연건평 1,250여 평 규모의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을 기공하였다.

성 분도 직업 재활원은 1987년 5월 25일, 정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았다. 1987년 7월 2일에 준공식을 갖고 7월 11일 성 베네딕도 대축일에 개원식을 가졌다. 이 재활원은 "신체적 결함을 지닌 장애인들에게 심성개발과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키워주고, 직업 자립성을 증진시켜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설립 이념에 따라 구체적으로 직업재활, 사회교육, 심리상담을 도모하고 원생작품 직매장과 기숙사를 운영한다. 직업 훈련 과목은 도지기공예과, 직조공예과, 양재과, 자수과, 편물과, 제도과, 전산과이며, 과별로 전문교사들이 지도하고 있다. 그밖에 심성개발훈련, 신앙교육, 교양문학, 교양영어, 검정고시반, 요육훈련, 음악, 미술 등의 일반 교양과목과 다양한 수련회들을 병행한다. 의료재활을 위해 작업치료실과 운동치료실 시설을 갖추고, 직업치료사가 상주하며 치료하고 있으며 전문적인 의료재활을 위하여 강남성모병원의 재활의학과, 재활심리학과, 신경내과 등 전문의사들의 지원을 받아 매월 1-2회 이상 정기진료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 교육비는 전원 무료이며, 기숙사는 여자 기숙사만 운영되는데, 기숙사비도 생활보호대상자의 경우는 무료이고, 일반장애인에게는 실비만 받고 있다.

1988년 5월 20일부터 21일까지 첫 원생 작품바자회를 열었고, 1988년 7월에는 개원 1주년을 맞아 '성 분도의 참벗들'이란 재활원 회보를 창간하였다. 1989년 5월 10일에는 서울 진로 도매센터 지하 1층에 2년 계약으로 상설매장을 마련하여 재활원교육을 수료한 장애인의 생활자립을 돕기 위해 그들의 작품을 전시 판매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작품을 계속 충분히 공급할 수가 없어 계약 2년후인 1991년 4월말에 매장운영은 그만두었다. 1988년 8월 31일에 제1기생을 배출한 이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의 벽을 넘어 어엿한 직장인이나 사회인으로 자리잡은 졸업생들이 늘고 있다.(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 487)

1987년 9월 9일, 23세에 반신불수 장애인이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완치된 프랑스 태생 쥴리 수녀에 의하여 1804년 창설된 노틀담 수녀회의 한국 관구는 서울시와 공동재원으로 장애인들을 위한 직업재활기관 '노틀담 장애인 교육원'을 인천시 북구 계산동 산40번지에 8246평의 대지에 1540평의 지하1층, 지상3층의 초현대식 건물로 준공했다. 노틀담 장애인 교육원의 주요사업은 편물, 자수, 칠보, 금속공예의 직업훈련을 비롯하여 신체적인 기능회복을 위한 각종치료와 교양교육, 그리고 재활상담과 생활훈련 등으로 사회적응을 위한 구체적인 적응훈련, 예절교육 등 사회진출에 대비한 교육을 실시하는데 교육비는 무료이다.(나눔지 168호 4-1987. 10. 3 발행)

1988년 4월 9일 가톨릭 사회복지회에 여자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위한 기술교육장인 '맑음터'가 개설되었다. 16세-25세 정도의 훈련가능급의 여자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이곳은 생활교육과 함께 학습지도 및 염색 등의 재활을 위한 훈련과정을 통해 자활을 목적으로 88년 현재 4명의 학생이 등록하여 통원교육을 받고있다.(나눔지 196호 4-1988. 4. 16발행)

1988년 6월 15일 서울 서초구 도곡동에 김원휴 프란치스코가 행려지체,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공동체 및 그룹홈 형태로 살도록 하기 위해 '신망애의 집'을 월세방 한 칸으로 시작하여 1995년 5월에는 우면동 주공 임대아파트 101동 102호에 5명이, 101동 1301호에 4명이 입주하여 1998년 현재는 총 24명이 입주해 있다.(1998년 11월 4일 서울 가톨릭사회복지회 신망애의 집 강순애 사회복지사 답변)

1988년 7월 10일 인천교구 답동 성당에 '인천 가톨릭 농아 선교회'를 설립했다. 인천 지역 농아인의 선교수화 교육을 통한 수화 보급을 위해서 1988년 7월 10일 답동성당의 이춘근 시몬 스톡 수녀에 의해 설립되었다. 현재는 봉사자 20명과 농아인 10명, 지도수녀, 지도신부와 함께하고 있다.(1998년 7월 9일 인천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답신)

1988년 명휘원을 운영하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고(故) 의민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께서 1982년 개교한 지체장애인 특수 중학교인 명혜학교를 인수하고 1990년 고등부를 개교하였으며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자활인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명혜학교에서는 정상적인 학습이 가능한 학생에게 인문계 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적용하고 학습지체 학생에게는 지체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적용한다. 이 밖에 장애특성에 따른 재활훈련을 실시하고 개인의 적성에 알맞은 특별활동과 직업교육을 시킨다.(1998. 6월 시립 명휘 어린이집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이 안토니나 수녀의 답신)

1988년 12월 10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가 '아이들의 집'을 고아와 기아의 수용시설에서 지체 부자유 영아의 재활치료시설로 용도를 변경했다. 6·25 동란 후 고아와 기아, 혼혈아들을 수용하여 양육 및 입양을 목적으로 1954년 9월 1일 강 베드로 수녀가 부산 동대신동에 설립하였으나, 특수아동의 수용보호 및 치료시설의 필요에 따라 1998년 12월 10일에 부산 해운대구에 지체 부자유 영아의 재활치료 및 수용시설인 아이들의 집으로 그 목적을 변경하였다.

주요사업 내용은 부모가 없는 장애아동을 수용 보호하여 행복한 삶에의 원동력이 되도록 도우며, 또 갓난아기부터 보이타 치료를 집중적으로 하여 장애를 가볍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만 1세 이상 교육가능급 생활교육 아동에게 조기교육을 실시하여 인지능력을 높이고 지능개발을 돕는다. 또 개별적으로 언어지도를 한다.(1998년 2월 현재 정원 41명 중에 현 인원은 46명이고 시설은 대지 7,721㎡에 임야 23,502㎡이다. 마리아 동에는 경당과 아동방, 의무실, 치료실, 식당, 주방, 세탁실 등이 있고 요셉 동에는 사무실과 교육실, 그룹방 등이 있고, 강당과 놀이방이 설치되어있는 유희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매월 1,000여명 이상의 봉사자들이 아이들의 집에서 시설물과 정원 손보기, 밭일, 아이들 밥 먹이기, 주방과 빨래방 돕기, 시설물과 정원 손보기, 밭일, 그 외의 일들을 도와주고 있다.(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복지시설-1998. 6. 11일 아이들의 집 수녀의 답신)

1989년 5월 5일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가 살레시오의 집을 설립했다. 살레시오의 집은 사회와 자신의 삶에 적응치 못하는 노약자와 정신질환자, 심신장애인 등 생활능력이 없는 무의무탁한 부랑인들을 교회의 복음적 가르침에 따라 적당한 보호, 선도함을 목적으로 하여 1989년 5월 5일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설립되었다. 설립 당사자는 우총평 프란치스꼬, 김양순 요한나 프란치스카이며 현 건물에 안채 약 15평 정도의 규모이며 교우 임희만 요셉 형제의 전답 2,200평(2,000만원)을 50만원에 계약하여 6명의 식구를 이끌고 배론 성지 입구 옛 살레시오의 집에 입주하였다.(1994년 1월 12일에 살레시오의 집은 부랑인 시설로 인가를 받았다가 1998년 1월 1일에는 정신지체 장애인의 재활시설로 인가를 받았다. 살레시오의 집은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생활하고 있다.)(1998. 8. 26일 살레시오의 집의 답신)

1989년 5월 31일 가톨릭 사회복지회는 중복장애인들의 소공동체 '사랑손'을 개설했다. 중복장애인의 지속적인 재활 및 사회참여를 위한 보호 작업장이 오랜 검토와 준비작업 끝에 동작구 사당5동 181-266에 공동체의 집을 마련하였다. 89년 현재는 단순 정신지체장애인 5명으로 요보호장애인과 훈련 가능급 장애인들로 구성되어 차츰 훈련적응이 되면 자립작업장으로 교육시켜 나갈 계획이다. 본회 재활 사업부에서는 정신지체와 중복장애인들이 늘어감에 따라 비둘기 교실 수료자중 사회취업이나 자립이 불가능한 중복장애인들에게 생활과 보호작업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나눔지 259호 4-1989. 7. 8발행; 1998년 11월 7일 사랑손 답신)

1989년 11월 춘천교구 사회복지회가 장애인에게 장애를 최대한 극복 할 수 있도록 제반, 재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장애인의 사회통합 및 사회복귀를 촉구하고,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자 1989년 서울 후원회를 조직하여 배종호(도마) 신부가 설립하였다. 대지 2,183평 중에 364평이 본건물이고 작업장 및 관사가 150평이다. '밀알 재활원'에서 실행중인 작업은 첫째 직업재활사업으로 기초학습지도, 대인관계훈련, 사회생활훈련, 현장적응훈련, 둘째 사회적응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주변환경의 체험을 통하여 지역사회 내에서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는 능력 배양, 셋째 교육 프로그램으로 신변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는 기능을 기르고 단체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습관을 기름, 넷째 건강증진활동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체력단련의 기회를 도모하고 운동을 통하여 서로간의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여 서로의 이해와 수용의 폭을 넓힘, 다섯째 여가활동으로 일상적인 집단생활에서의 분위기를 바꿔주고 야외활동을 통하여 자연환경 속에서 다양한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앞으로는 연장장애인 자립생활을 위한 공동생활 가정(group home)을 운영할 예정이며 밀알재활원의 입소대상은 강원도내 거주하는 18세 이상 30세 미만의 정신지체인, 생활보호 대상자, 읍·면·동사무소 또는 시·군 사회복지과에 의뢰하면 입소할 수 있다. 밀알재활원은 지적능력과 사회적응 능력의 자체로 스스로 삶의 개발이 어려운 사람들의 삶터가 되며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임을 서로 믿으며 장애를 극복하려는 굳은 의지들이 모인 소중한 공동체이다. 1990년 5월에는 밀알회 춘천 후원회가 조직되었다.(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1998. 8. 25일 밀알재활원의 답신)

1989년 12월 28일 인보성체수도회가, 1981년부터 사랑의 선교수도회가 광주 광천동에 설립 운영하던 행려자 복지시설을 인수받아, 무의탁 성인 남자 장애인들이 장애에서 오는 불편함을 최소화 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가능한한 재활을 할 수 있도록 물리치료와 작업치료, 놀이치료를 비롯한 재활치료와 한글 및 산수의 교육재활과 농사 및 가축사육 등의 작업을 통한 직업재활을 병행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중증 장애인 및 독립생활이 불가능한자 등을 위한 사랑의 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997년 12월 17일부터는 용두동에 또 하나의 무의탁 장애 행려자들을 위한 그룹홈을 개원했다.(1998년 11월 13일 인보성체수도회 하 데레사 수녀 답신)

1990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운영하는 명휘 종로 복지관은 이사회를 통하여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기로 결정하여 서울시 종로구청의 공적부조와 약간의 후원금으로 걸식노인을 대상으로 무료급식소를 열었다. 탑골공원을 이용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루 평균 150여명, 월 평균 3,750여명에게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1998. 6월 시립 명휘 어린이집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이 안토니나 수녀의 답신)

1991년 9월 김경철(샤를르드 후꼬)이 단기 수용이나 특수학교를 졸업한 뒤 집에서 방치되거나 갈 곳 없는 성인 정신지체인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여 자활 및 사회적 자립을 이루도록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서울 송파구 마천동에 가정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한 소공동체 '가난한 마음의 집'을 설립했다. 현재 직업재활의 어려움으로 충북 괴산에 그룹 홈을 두어 교사 부부가 그곳에 가서 3∼4명씩 로테이션식으로 적성여부를 판단하여 서울에 적성이 맞는 사람은 서울에서 목공예, 수영, 태권도, 미술, 핸드벨 수업을 하고, 농사가 적성에 맞는 사람은 괴산에서 농사를 배워 1999년부터는 먹거리의 자급자족을 계획하고 있다.(1998년 11월 7일 가난한 마음의 집 답신)

(6) 행려자 복지

1976년 11월 15일 청주교구 무극 본당의 오웅진 신부가 충북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 산 1-45번지에,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며 먹을 것을 구걸해서 자기 보다 더 어려운 노인들을 먹여 살리는 최귀동 할아버지와 무극천 다리 밑에 살던 걸인 18명을 위한 꽃동네 '사랑의 집'을 준공했다. 오신부는 1981년 4월 11일 전국을 대상으로 후원회원들을 모집해 1982년 5월 25일 꽃동네 현부지 9807평을 매입하여, 1984년 3월 21일 사회복지시설 인가를 받았다. 1985년에는 정신요양원을, 1987년에는 노인요양원을, 1988년에는 꽃동네 수용인들을 위한 봉사자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자매회가 첫서원을 했고, 알콜중독자요양원, 언곡자애병원을, 1989년 4월에는 인곡자애병원을 개원했다. 7월 17일에는 가평꽃동네를 설립했고, 1990년에는 음성꽃동네 심신장애인요양원을 준공했다.(1998.10.30 서울 꽃동네 사무실 답신자료)

1980년 서울시가 갱생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마리아의 수녀회 소 재건(알로이시오) 몬시뇰 신부에게 운영을 맡겼다. 소 신부는 은혜롭고 평화로움의 마을이란 뜻으로 '은평의 마을'이라고 개칭하고 그리스도 수도회에 운영을 맡겼다. 현재 수사 17명이 루가 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모델로 시편 100편 2절의 '즐거운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자.'라는 표어를 가지고, 1,400여평의 공간에 2,00여명의 부랑인, 절름발이, 곰배팔이, 맹인, 벙어리, 정신질환자가 생활하고 있으며 서울시에서 80%의 재정지원을 받아 운영하며, 자립 가능성이 있는 분들을 위한 화훼, 특용작물 재배 등의 자활사업을 추진 중이다.(1998년 11월 6일 은평의 마을 김 베드로 수사 답신)

1980년 4월 1일 대구광역시는, 1958년 12월 31일 설립한 대구광역시 산하 부랑인 복지시설 희망원을 재단법인 대구대교구 천주교 유지재단에 운영을 맡겼다. 희망원은 가톨릭 교회의 사랑과 평화의 이념을 바탕으로 현 사회 속에서 자립생활을 못하거나 무의무탁한 부랑인들을 수용 보호하여 조기에 사회로 복귀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부랑인들에게 이들의 특성에 맞는 전문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가족 찾기 상담, 장애극복을 위한 치료, 생활의 정상화를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정상적인 조기 사회복귀를 위하여 자활사업과 노임소득사업을 통한 기술습득, 취업알선 등의 재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서로 돕자"라는 원훈 아래 부랑인의 시설입소, 수용보호 및 퇴소 등의 합리화로 보호수준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며 부랑인 각자의 특성에 따라 분리수용을 함으로써 전문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자활사업을 내실화하여 자립 가능한 자는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조기복귀 시킨다. 시설을 개방하여 지역사회의 자원으로 활용한다.(1998. 4월 희망원의 답신) 1980년 작은 자매 전교회는 서울 봉천동에 가마니 촌을 설립했다.(가톨릭대사전 : 994)

1981년 10월 4일 사랑의 선교수도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정신으로 어려고 괴로운 사람들 중 무의탁 노약자와 행려자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영적 사랑을 함께 나누기 위해 광주에 '사랑의 집'을 설립해, 1989년 12월 28일 광주대교구를 통해 인보성체수도회에 시설을 위탁하여 무의탁 남자 성인들을 위한 장애자 시설로 운영하고 있다.(1998년 11월 13일 인보성체수도회 하 데레사 수녀 답신)

1985년 10월 7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으로 '애덕의 집'의 운영을 시작했다. 애덕의 집은 평신도인 김근영 안토니오가 자신의 병고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더 병들고 버림받은 무의탁 행려 환자들을 데려다 돌보며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늘어난 인원이 각계각층의 후원으로 둔촌동에 집을 마련해 살다가, 김근영 원장이 1985년 초 병으로 사망하자 그 후 6개월 동안은 봉사자들끼리 운영해 오다가 이 집이 사회사업 기관으로 변질되기를 원치 않던 고인의 유언을 따라 김수환 추기경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그 운영을 의뢰하였다. 수녀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486에 땅을 구입하고 1989년 봄부터 현대식 시설을 갖춘 건축을 시작했다.(1995년에 자연학습장을 시작했고, 1996년 1월에는 장애인 직업재활 프로그램 제과실, '우리밀 과자 제과실'을 시작해 1997년 1월 장애인 보호작업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한 1998년 12월부터 정신지체 장애인 그룹홈을 운영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823; 1998년 12월 1일 애덕의 집 도성희 가타리나 수녀 답신)

1985년 10월 25일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파티마 요양원에서 완치 가능성이 없는 결핵환자 중 무의탁자나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임종의 집으로 '보금자리'를 설립했다. 설립 당시에는 농지와 축사가 딸린 판잣집 방 1칸 규모로 시작하여 현재 12명이 거주 가능한 주택의 규모이며 봉사자의 도움으로 농사 및 가축사육자가 생활을 이룬다. 결핵요양원과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건강관리를 해주며 운영은 후원회의 회비로 이루어 나간다. 파티마 결핵 요양원 폐문 후 타 의료기관에서 의뢰하는 난치성 결핵환자 또는 결핵 합병증으로 사회생활이 곤란한 무의탁자들을 수용하여 임종의 집 겸 사회복귀를 위한 자활 자립의 집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1998년 9월 3일 보금자리의 오 세레나 수녀의 답신) 1987년 2월 16일 우총평(프란치스꼬) 형제는 불구의 몸을 이끌고 자신보다 더 고통받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자신을 산 제물로 주님께 봉헌하고자 '작은 프란치스꼬의 집'을 개설했다.(나눔지 140호 2-1987. 3. 14발행)

1989년 1월 19일 예수 성심 시녀회의 최분이(소피아) 수녀와 이사장 탁정자 씨가 불우 결식 노인들에게 중식을 제공하기 위해 대구시 중구 교동 26-10에 무료급식소인 '요셉의 집'을 설립했다. 수녀들은 예수성심시녀회의 창설자 신부의 "남이 하기 싫은 일은 내가 한다."라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는 말씀에 바탕을 두고 활동하고있다. 설립당시는 좌석수 28석에 급식일수는 주6회 였던 것이 98년 현재 좌석수 48석에 급식일수는 주 5회로 변경하였다. 현재 급식인원은 400명이다.(1998년 5월 22일 요셉의 집 김 아오스딩 수녀의 답신)

1990년 6월 16일 동정 성모회는 대전 '성모의 집'에서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대전교구에서는 성체대회 한마음 한몸 운동의 일환으로 하루 세끼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기 위하여 무료 급식 식당을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시청에서 장소를 제공하면서 이 사업을 동정성모회에 부탁하였다. 이에 동정 성모회에서도 1989년 한국 진출 25주년을 기념하면서 그 동안의 표현으로 이 사업을 맡게 되었다. 대전시 동구 삼성 1동 노인 회관 2층에 성모의 집을 신축하여 1990년 6월 16일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의 주례로 축성하였다. 하루 이용자는 대개 노약자, 행려자, 무의탁자 등이고 매일 12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대략 230-250명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가진 것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시작된 성모의 집은 대전교구 30개 본당에서 매일 12-15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식사 준비, 배식, 설거지를 도와주는 등 대전 교구 신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운영되고 있다. 점심 제공 이외에도 무료 진료, 혜택 주선, 이발, 예비자 교리, 봉사자 및 이용자들의 사적지 순례 등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봉사자 1일 피정, 동구청의 재정 지원으로 성모의 집 공간 확장 등도 계획하고 있다.(교회와 역사 242호 12-1995. 7. 25발행)

(7) 근로자복지

1979년 5월 1일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구로구 가리봉동 수녀원 내 구로공단 내에 여성 근로자들을 위한 여성교육과 종교교육, 취미생활 등을 통해 전인교육을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선화기숙사'를 개설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인간 개발을 통하여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선화기숙사의 바탕이다. 처음에는 100여명이 입사했으나, 공단 내에 복지 아파트가 많이 생기므로 이용자가 줄었고 1989년 기숙사 수리 후에 운영의 어려움으로 이용자의 폭을 공단지역 내의 근로자에 제한시키지 않고 기타지역의 여성 근로자까지도 넓히게 되었다.(가톨릭대사전 : 366; 1998년 4월 21일, 11월 14일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의 답신)

1979년 11월 30일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하여 야기되는 노동문제에 관하여 근로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일반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명동에 '노동 문제 상담소'를 건립했다. 그후 구로본동 본당, 창동, 구로3동 본당, 시흥 본당에 상담소가 설립되었다.(가톨릭대사전 : 245)

1984년 4월 노틀담 수녀회는 '안내양 교양센타'를 근로 청소년들을 위한 '쥴리의 집'으로 변경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1969년 당시 버스 운송 사업은 주식회사 제도가 아닌 개인 사업이므로 안내양들의 대부분은 차주의 고용인으로서 그 집에 더부살이를 하거나 3∼4명이 함께 자취를 하는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용주들의 엄한 감시와 비협조적인 태도, 안내양 자신들의 심리적 저조 상태 등 이러한 여건 속에 그들을 한곳에 모은다는 것은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난관을 뚫고 노틀담 수녀회의 수녀들은 서울 9번 버스 종점인 수유리를 방문하여 80여명의 안내양들을 대상으로 어린이 옷 만들기 등 여성의 기본적인 가사일 등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 12월 25일 수유리에 있는 안내양 기숙사에서 신자이면서 냉담 중이던 안내양들에게 고백성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함과 동시에 뜻깊은 성탄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 이듬해인 1971년 12월 22일 KBS방송국에서는 수녀회에서 펼치는 안내양 교육에 대한 관심을 갖고 마리아 알렉산드라 수녀와 몇 명의 안내양들이 참석하여 대담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게 되었고 이러한 기회로 사회가 안내양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버스 안내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더불어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한 안내양들은 긍지를 지닐 수 있게 되었으며 1979년 3월 13일 비번인 안내양들이 30명씩 각기 다른 곳에서 자유로이 모여와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생활하고 가는 '안내양 교양 센타'의 발족을 보았다.

종전까지는 9번 버스 안내양들의 지도를 회사로 직접 나가서 하였는데 이때부터 수녀원의 한 건물을 교육 장소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0여명의 안내양들과 회사의 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내양 교양 센타(현 쥴리의 집)를 개원하였다. 직접적으로 연 2회, 3∼4개월 기간으로 안내양들을 상대로 실시하는 교양교육과 간접적으로는 자동차 노동조합 후원으로 근로자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일, 부녀 부장들을 교육하는 일들로 안내양들의 처우 개선 및 지위 향상은 물론 그들을 위한 사회와 국가의 관심과 배려에 주요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그러나 1982년 시 행정의 결정에 따른 버스 운송 자율화와 더불어 안내양 승차 제도가 폐지되자 1984년 4월부터 종전의 '안내양 교양 센타'를 '쥴리학원'으로 개명하고 방송 통신 고등학교 과정 이수를 돕는 사도직을 시작하여 이 과정을 밟는 근로 청소년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다.(교회와 역사 226호 18-1994. 3. 25 발행)

1984년 5월 5일 서울대교구 김몽은 신부가 일본 엠마우스와 프랑스의 국제 엠마우스의 도움으로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에 정신적, 물질적으로 좌절된 이들이 삶의 의욕과 자립의 가능성을 실천으로 확인하고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함께 살아가는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을 설립했다. 그 후 1995년 4월 27일 김몽은 신부는 엠마우스를 재단법인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증여하고 운영권을 이양하였다.

엠마우스 회관의 설립목적은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타격을 받아 좌절된 근로 여성들에게 노동을 통하여 자립성을 키우고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보다 더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형제애를 나누고 삶의 보람을 체험케 한다는데 있다. 엠마우스 운동의 정신은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에게 사랑만이 인류를 결속할 수 있고 공동번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운동의 목표는 모든 인간사회와 국가를 돕고 고통의 나눔,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주장하고 그 성취를 목적으로 한다.

회관 설립당시 한국사회는 산업의 발달과정에서 지방의 소년소녀들이 직장을 찾아 상경하였으나 거주할 곳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향 근로여성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1984년 7월 1일에 근로여성 2명이 들어와 엠마우스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차츰 엠마우스 식구들이 늘어 한때는 28명의 근로여성들이 좁은 공간에서 모여 살기도 하였다. 근로여성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숙소를 제공하고 낮에는 직장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밤에는 따뜻한 가족적 분위기 속에서 신앙으로 이끌어 주었다. 또한 이들에게 3년 내에 독립을 권장하고 새로 이향한 근로여성을 새식구로 맞이했다. 1984년부터 1992년까지 엠마우스를 거쳐간 여성은 약 80명이었다.

1984년 11월 24일부터 엠마우스 정신에 입각한 폐품수집을 시작하였다. 폐품의 주류는 의류이며 선별작업을 통해 쓸만한 것은 상설 판매장에 전시하여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싼값에 나누어져 좋은 호응을 얻었다. 이 사업의 폐품 재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자원 절약으로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환경보전과 사랑과 나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또한 있는 자와 없는 자, 즉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소통과 나눔을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회관 뒤 한옥을 매입하여 폐품선별 작업장, 식당, 성당 등을 증축하여 1990년 12월 23일 완공하였다. 엠마우스는 저소득 근로여성을 위한 것에서 사회의 새로운 요구를 찾기 위해 재검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첫째 산업화의 발전에 따라 좋은 시설의 기숙사를 갖춘 기업체가 많아졌고 둘째, 근로자에 대한 대우가 향상되어 곧 자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의 필요성을 알게되었고 엠마우스 사업목적을 변경하였다. 즉 현 사회에서 소외된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특성에 따라서 일상생활 적응 훈련(신변처리, 가사에 필요한 실습청소) 정서지도 및 사회적응 훈련을 시키기 위해 주간(월-토)에 엠마우스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는 각자 가정으로 돌아가는 이용시설로 변경하였다.(1998. 4. 28일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수녀의 답신)

1987년 국제 가톨릭 형제회는 당시 안양 지역에 살던 많은 근로자들이 근로자 회관에 갔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붙여 가톨릭의 위상으로 그런 견해들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으로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안양 근로자 회관에서 가톨릭 노동자 회관으로 변경했다.(1998년 5월 가톨릭 노동자 회관 답신)

(8) 청소년복지

1977년 김몽은 신부 및 법조계의 라향윤 씨와 고형원씨 등은 경기도 광주군 광지원리. 남한산성의 동쪽 기슭 아래에 동녘의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사랑의 집인 연성원을 설립했다. 소년보호 위탁처분 대상자로서 보호자 없는 불우 청소년을 위탁받아 이들이 사회악으로부터 물들지 않고 학과공부와 기술연마 및 가톨릭을 통한 사랑과 은총, 평화와 희망을 배움으로써 사회의 올바른 인간으로 연성하도록 했다.(나눔지 23호 9-1984. 3. 15발행)

1979년 12월 8일 살레시오 수도회는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아동으로써 보호자가 없는 아동친권자나 후견인이 입소를 신청한 아동 또는 가정법원 소년부에서 보호 위탁된 아동을 입소시켜 그들을 선도하여 건전한 국민으로 육성함을 그 목적으로 '살레시오 근로 청소년 회관'을 설립했다. 가정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보호 위탁된 아동, 아동상담소로부터 보호 위탁된 아동, 서울가정법원으로부터 6개월간 보호 위탁된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 1988년 8월 24일에는 서울시로부터 교호시설 인가를 받았다. 교육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목공예 직업훈련. 목공예 이론과 실습을 통해 기술습득과 기능사 2급, 3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직업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참여하는 기능인으로 양성하며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직업인으로 교육한다. 1년의 기초과정인 훈련과와 훈련과를 수료한 학생으로 취업을 위한 종합 기술과로 향상과가 있으며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국가지방기능올림픽 대회와 국가전국기능올림픽대회에 참가하여 입상할 경우 국제기능올림픽 대회의 참가기회를 부여한다. 향상과를 수료한 18세 이상의 학생으로 적성에 맞는 가구회사, 목공소, 실내 인테리어 등을 선정하여 취업알선을 해주고 있다. 건축과, 실내디자인과의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 희망자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둘째 도자기과 직업훈련. 도자기 실습을 통해 흙에서 전달되는 부드러움과 차분히 만들어야 하는 작업과정을 통해 정서적인 인격도야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며 더 나아가 전문적인 기술습득과 자격증을 취득해 본인 스스로의 성취감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교육한다. 도자기의 여러 성형방법을 통해 학생 자신에 대한 내적인 안정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도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인격형성과 적성에 맞는 학생을 선별하는 기초반과 기능사 시험의 응시를 원하거나 전문적인 기술습득을 통해 취업을 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산업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배양하는 정규반으로 편성되어 있다. 정규반을 졸업한 학생으로 기능사 시험의 응시를 원하거나 전문적인 기술 습득을 통해 취업을 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산업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배양한다.

셋째 상담지도.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내의 아동을 대상으로 처음 입소시부터 마지막까지 안에서 부딪히면서 겪게되는 성장상, 생활상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파악하여 해결책을 유도함으로서 보다 나은 인격체로서의 성장을 도모하고 퇴소후의 자신과 사회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키움으로서 바람직한 미래 설계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정기상담은 4/4분기로 전체아동들의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내에서의 생활을 점검하여 쉽게 눈에 안 띄는 아동들과의 상담을 통해 원활한 적응을 돕는다. 문제아동상담은 타 아동과의 관계, 생활 면에서 어려움이 있는 아동을 발견해서 상담을 통해 원활한 적응을 돕는다. 퇴소아동상담은 퇴소를 앞두고 있는 아동을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설정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미래 계획을 세우도록 해서 재비행의 방지와 건강한 사회인으로의 방향을 제시한다. 학생 상담은 학교 내에서의 생활태도, 부족과목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도모함으로써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아동의 원활한 학교생활이 되도록 돕는다.

넷째 일반학과교육.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내의 아동을 대상으로 보다 나은 자기성장과 사회적응을 도모하기 위하여 학력취득에 그 목적을 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마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학생들을 위해 한글 기초반,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자격과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검정고시반을 운영하고, 학업능력등급을 기준으로 한글, 산수기초,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을 공부한다. 과목합격으로 인해 정규수업 이외의 과목보충이 필요한 아동과 보충수업을 희망하는 아동을 대상으로 개인지도 수업진행, 외부에서 일반학교에 다니는 아동을 대상으로 개인지도를 한다. 그리고 특별활동으로는 연극, 태권도, 그림, 영어회화, 기타반, 바둑반, 피아노, 컴퓨터, 전자조립, 드럼 등의 특별활동을 실시한다.

다섯째 종교교육. 교리교육(매주1시간)과 종교행사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나누는 그리스도인으로 육성하고자 한다.(1998년 3월말 현재 정원 80명 중, 남학생 54명이 생활하고 있으며 "특히 보다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징표가 되며 그 전달자가 된다." 라는 회헌에 따라 봉사하고 있다.)(1998. 4월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의 답신; 가톨릭대사전 : 555)

1979년 경남 마산에서 선교사 살레시오 수녀회의 지부장 가타리나 무어(Catarina Moore) 수녀가 청소년들의 전인교육으로 돈 보스꼬의 독특한 삶의 스타일(일상의 성덕), 활동양식(da mihi animas ceter tolle -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 기도방법(일이 곧 기도 - 기도정신으로 성화된 일), 사목적 관계양식을 통하여 고유한 교육방법을 발전시킨 예방교육법에 따라 소외되고, 가난한 청소년들이 정직한 시민, 착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 '아욱실리움 센터'를 설립했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마산 지역에 공단을 만들면서 많은 여공들과 시골에서 상경한 어린 소녀들이 많아 이들의 복지를 위해 기숙사를 개설하여 120명을 수용하고 이들에게 여성교양 프로그램 및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의 생활을 통해 행복한 여성으로의 오늘을 해결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1998년 4월 살레시오 수녀회 수녀의 답신)

1980년 대구대교구가 오스트리아의 원조를 받아 청소년들의 복지를 위한 '가천 청소년 교육원'을 설립했다. 1983년부터는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운영에 참여했다. 특히 수녀회 카리스마의 교육적인 면을 적극적으로 살릴 수 있는 현장인 교육원은 그 교육 목적을 "내 안에서, 이웃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자"로 삼고 교육 지침으로 자연을 통하여 자신을 살펴보고 희망과 용기를 가진 새로운 생활태도를 수용하여 타인을 새롭게 만남으로써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발견, 기도와 전례를 통하여 신앙 생활의 기쁨을 체험하도록 돕고 있다.(교회와 역사 235호 18-1994. 12. 25 발행)

1984년 5월 23일 '김효주 아녜스의 집'을 개설했다. 18명의 식구(초등학생 7명, 한복, 미싱, 편물, 양재 등을 배우는 기술교육생 7명, 환자 2명, 상주봉사자 2명)가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청소년 자매들의 집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임의 지원으로 응암동 '데레사의 집'에서 분가하여 서로를 돕고 사랑하며 자활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나눔지 100호 2-1984. 5. 31발행)

1985년 마리스타 교육 수도회가 강원도 원주시 봉산2동에 '마리스타 교육원'을 개설하여 피정지도와 교구 청소년들과 교리교사들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진광 고등학교 지도 교사들의 교육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에 교구차원에서 교육관이 종합 사회 복지관으로 변경되면서 분원은 철수했다.(교회와 역사 244호 13-1995. 9. 25발행)

1985년 12월 글라렛 수도회에서는 무작정 상경한 가출 청소년이나 공단지역 등에서 일을 하다가 실직한 청소년들을 위한 '나눔의 집'을 개설하고 한상수 신부를 지도신부로 임명했다. 비행 및 실직 청소년의 자립을 돕기 위하여 마련된 중간의 집(Halfway House) 형태의 '나눔의 집'은 청소년들이 점차로 증대하고 있고 이들의 비행급증과 집단화, 그리고 난폭화 경향은 이미 사회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고, 아동복지법상 18세 이상의 고아는 현실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시설보호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이나 이들의 문제해결을 도와주기 위한 복지시설이 너무 부족하고 더구나 소단위의 자립을 돕는 중간시설은 전무한 상태에 처한 불우 청소년들의 집이다.

공장에서의 실직, 무작정 상경, 소년원에서의 퇴원 등의 원인으로 당장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이 모여 형제적인 사랑으로 생활을 나누며 약 3개월 정도 거주하면서 독립기반이 마련되면 작은 공동체를 이루도록 도와주고 그들이 나눔의 집과 연관을 갖고 서로 도우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운영을 맡고있는 안정선씨는 이곳에 살고있는 식구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열심히 살려고 하나 현실적인 바탕이 없어 자기와의 갈등으로 늘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지낼 때가 많다."고 한다. '나눔의 집'은 취업전 숙식 제공이나 가출 청소년의 귀가를 도와주고 취업알선 그리고 상담을 통하여 그들의 자아발견과 사회적응을 도와주는데 한 몫을 하고있다. 앞으로는 불우 청소년과 후원자의 자매결연, 여자청소년을 위한 소녀의 집 운영 등 보다 적극적인 청소년 보호선도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나눔지 92호 3-1986. 4. 5발행)

1986년 살레시오 수도회는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러분은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청소년은 가정과 사회로부터 필요한 보살핌과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고 하신 돈 보스꼬 성인의 말씀에 따라 부모의 사망이나 이혼, 질병, 알코올 중독등으로 결손가정이 된 아동의 지속적인 학교생활과 가정생활을 유지하도록 해주기 위해 그룹홈을 구로동에 설치해 현재 12개소에서 운영하고 있다.(1998년 11월 5일 살레시오회 나눔의 집 담당 백 분도 수사 답변)

1987년 6월 30일 서울시 도봉구는 방학 1동에 청소년 문화 함양과 쾌적한 면학 분위기 조성, 학생들의 지적 수준과 학습능률을 높이기 위해 '도봉 독서실'을 세워 학생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데 있고, 청소년들의 올바른 자유정신을 양양하고 진리에 입각한 인격완성을 위해 그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도봉구청은 1990년 6월 1일 재단법인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게 그 운영을 위탁했다.

도봉동의 동명은 마을이 서울근교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에 있음으로 얻어진 이름이다. 옛날부터 이 풍경 좋은 도봉산에 많은 명사들이 찾아들어 머물러 경치를 사랑하였다. 너와 내가 없는 둥근 지구라는 원탁에서 공존하며 국가와 국가간에 경쟁의 변모 속에 고도의 경제성장과 문화발전이 민족의 내일을 탈바꿈시키고 있는 세대라 하겠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경쟁에서 보다 부강된 국력의 초석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전국민이 언제 어디서나 필요에 따라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탐독하고 연구할 수있는 면학장소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으며 인구증가와 경제발전에 따라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독서실이 절대시 필요하였다. 인구는 기하급수로 급증하고 주택사정은 날이 갈수록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다.

단칸방을 쓰고 있는 가구는 전체 가구의 32.9%이며, 2개 이하는 전체의 67.1%이다. 특히 서울은 단칸방을 사용하고 있는 가구가 전체가구 중 33.7%로 각종 환경공해와 학습장소가 어려운 면학도들에게 학습의욕과 능률을 증진시킬 수 있는 사회교육 시설이 필요시 된다고 보겠다. 전국 도서관 수는 3,621개가 있으나 도서관 및 학교 도서관으로써 일반대중이 필요로 하는 공공도서관은 전국적으로 약 122개로써 극히 부족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을 뿐더러 필요에 따라서는 도서관에 입관하려고 하여도 대개의 공공도서관은 이른 새벽부터 초만원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어 몇 시간씩 기다려야 입관할 수 있는 현상이다.

지역적으로 부족한 공공도서관의 기능을 대신하고 영세자녀 및 불우한 면학도 들에게 학습장소를 마련하여 주어 국가와 사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홍익인간을 육성시키는 학술도장으로 모든 국민에게 평생을 통한 도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며 국민의 자질을 향상하게 함으로써 정의로운 민주복지사회의 건설과 문화창달을 기여하려는 것이 사설 도서실의 의무이며 임무라 할 수 있겠다. 도봉 독서실은 대지가 315평이며 건물이 361평으로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되어있다.

도봉 독서실 이용자는 년 평균 15만 명에서 16만 명에 이르며 수용인원은 438석이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우리 나라의 다도정신과 선비 사상과 화랑 사상을 자연스럽게 점하게 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워주고 공동생활 속에서 서로 협동하며 질서를 스스로 지킬 줄 아는 어린이로 성장시키기 위해 유치원 아이들에게 다례를 가르치고 지역주민 가정주부들에게도 다도를 가르치기도 하였었다. 청소년들이 자기 안의 모든 잡념, 즉 불만스러운 생각과 헛된 욕심 나쁜 생각 등을 버리고 마음을 순수하게 가짐으로써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정신통일을 이룩하며 더욱 열심히 공부에 몰입할 수 있도록 단전호흡 좌선을 교육시킨 일도 있었다.

1993년도에는 학생들에게 타자교육을 시켰다. 학생들에게 종교비디오를 보여 주고 일본인 후레아 신부가 도봉독서실에 상주할 때는 후레아 신부가 한 달에 한번씩 와서 독서실에서 미사를 하였다. 수녀들이 정숙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주고 있어서 청소년 선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음으로 학부모들과 지역주민에게 상당히 좋은 호평을 받고있다. 1998년 현재 수녀 3명이 청소년과 지역 주민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다.(1998. 4. 28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

1987년 서울시는 문제행동아동(비행, 가출, 도벽, 허언, 환각제사용, 학교 부적응 등)의 일시 보호 치료 및 정서장애아동(심리적 요인으로 인한 장애)을 통원 치료하여 아동의 문제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고 다각적인 방법을 통하여 임상적 치료를 위해 아동복지행정의 제일선 전문치료기관으로 '서울 시립 동부 아동상담소'를 장안동에 개설하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위탁했다. 구체적인 사업내용으로는 만3세-18세 미만의 남자 아동과 청소년으로써 요보호 아동의 일시보호와 일시적 위탁보호, 그리고 이들의 가족상담과 부모교육, 보호아동의 학습지도 문제행동아동(가출, 도벽, 학교 부적응, 환각제 사용 등)의 놀이치료와 상담치료,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 정서장애아동 언어지체, 정서불안, 행동장애, 주의 산만, 과격행동, 적응장애 등)들에게 주 1-2회의 통원 놀이치료와 부모상담, 서울가정법원으로부터 보호관찰 처분 및 수강명령을 받은 청소년들의 단기 전문교육 및 상담, 부모역할 훈련 프로그램, 실습생 지도 및 자원봉사자 교육을 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가족 구성원의 상호관계를 상담 지도하고 치료함으로서 아동들이 올바른 대인관계를 갖고 가정 및 학교,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통원치료와 보호치료를 겸하고 있는데 보호치료의 경우 그 규정은 6개월 기간이고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며 현 수용능력은 80명 정도이다. 현재 사회사업 전문가들을 포함한 30여명의 일반직원들과 6명의 수녀들이 미숙함과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청소년들을 위한 이 뜻깊은 예방 차원적 사도직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나눔지 1996. 봄 15쪽; 샬트르 100년사 : 827)

1988년 살레시오 수녀회는 서울에 버려진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적인 배려로 '나자렛 집'을 설립하여 가정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는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국가경제가 윤택해지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증가하면서 가정교육력이 떨어지고 여성의 자기인식과 자기실현 욕구는 이혼율의 증가를 초래하여 이에 따른 결손가정, 가정파탄, 가정교육의 약화 등이 강화되면서 청소년의 가출, 비행, 청소년 가장의 증가를 가져왔다. 나자렛 집의 규모는 15-20명의 청소년들이 3명의 수녀와 함께 가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살면서 교육을 받고 있으며 서울, 광주, 대전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가출소녀들의 일시보호와 귀가지도 및 사회복귀를 도우며, 시민교양교육, 초·중등교육, 직업·기술교육, 소녀들과 후원자의 결연 및 장학을 위한 교육을 하고있다.(1998. 5. 16 광주 나자렛 집 수녀의 답신)

1989년 서울 구로3동 본당에서 주로 주일에만 사용하는 교육관 시설을 평일에 지역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보스꼬 자습실'을 1989년에 개원하였다. 현재 중학생 40명이 이용하고 있으며 교육관 프로그램 담당을 겸임한 선생님 한 분과 자원봉사자 9명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상선정 기준은 없으며 이용회비는 월 10,000원이다. 보스꼬 자습실의 운영비는 본당에서 보조하고 있으며, 자원봉사자는 본당 청년회를 통하여 연결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고, 교사회는 주1회 열리는데 주로 교안작성 및 교육과 정보교환이 이루어진다.

중학생들이기 때문에 영어와 수학을 주로 배우고, 아이들의 정서교육을 위해 한 달에 1회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이 시간에는 체육대회, 레크레이션, 장기자랑, 비디오를 상영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더 외로워져 간다. 아마도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 아이들은 더더욱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런 면에서 자습실은 친구를 만들어 주는 역할도 한다. 같이 공부도 하고, 행사도 준비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때 아이들은 가난을 부끄러움이 아닌 불편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가톨릭 사회복지회보 4호 40-1995년 가을 발행)

1990년 2월 21일 서울 사랑의 집 연성원의 고형원과 안양근로자회관의 한상인과 마자렐로 청소년센터 민 아나스타시아 수녀 등은 복음정신에 입각하여 청소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교회와 사회에 고취하고 교회 내의 청소년복지사업을 촉진함으로써 청소년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며, 교회내 청소년 복지사업에 관한 조정, 종합계획 수집 및 자문, 단체간의 정보교환 연락 및 유대관계, 자원개발, 청소년들이 실태에 관한 조사 연구와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의식개발 및 홍보, 종사자의 자질 향상 및 복지증진의 활동을 하기 위해 '서울가톨릭청소년복지협의회'를 발족했다.(1998년 11월 13일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정선희 사회복시사 답신)

1990년 성 바오로 애덕원장이 경북 군위군 부계면에 가출 청소년이나 부모의 결별이나 중대한 이유로 양육이 불가능한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을 위해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을 설립했다. 교호시설인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은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부랑아동을 입소시켜 그들을 선도하고 건전한 국민으로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입소 대상은 만7세에서 15세 사이의 남자로, 일시보호소를 통해 주무관청에서 의뢰한 자와 긴급히 보호하여야할 필요가 있는 요보호 아동이며, 만 19세가 되면 퇴소함을 원칙으로 한다.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은 우선 개인과 가족에 대해 개인 및 집단 상담을 통해 가정문제를 예방 치료하며, 초, 중등과정은 학교를 보낸다. 또 가족기능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름, 겨울방학 때마다 가정생활을 실습시킨다.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의 말씀에 바탕을 두며, 문제 청소년 발생의 예방, 근면한 생활로 자립정신을 함양시켜주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육성하여 복지를 증진시켜 보다 밝은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미래를 지향한다.(1998. 5. 17일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 수녀의 답신)

1991년 5월 30일 까리따스 수녀회는 청소년들의 학습공간 제공과 지역 주민의 복지를 위해 마포구청에서 설립한 '염리청소년 독서실'을 위탁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8년 3월 2일부터는 특수사업으로 '노인급식소'와 '한글공부반'을 수녀회 자체경비로 운영하고 있다.(1998년 11월 11일 염리 청소년 독서실 답신)

(9) 여성복지

1976년 '한 영혼은 온 세상보다 귀중하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착한 목자 수녀회는 윤락여성들 가운데 임신을 하게 되는 경우에 그들과 새로운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마리아의 집'을 개원하게 되었다. 서강대 부근에서 얻은 작은 셋집에서 임신을 하게된 윤락여성들을 돌보면서 이들의 안전한 출산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육신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구원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육신을 당장 구원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사회에 나가 또다시 옛날의 비참한 길을 다시 밟지 않도록 새로운 영혼의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마리아의 집'은 서울에서 춘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10년전 윤락여성들이 많이 찾아 왔던 것에 반해 지금은 가정의 잦은 불화로 가출하여 누구의 보살핌도 없는 여성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미혼모들이 마리아의 집에서 보호를 받고 정작 사회로 나가게 되면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 때문과 자신의 문제, 기술교육 기관 등 재활의 기틀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교육기관이 없기 때문에 재활문제등이 생겨나지만 "나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느끼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한 미혼모의 고백에서 착한 목자 수녀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빛 안에서 재생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나눔지 26호 8-1984. 9. 15발행)

1987년 11월 1일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정기순(루치아)가 매춘과 미혼모등의 소외되고 불우한 여성들의 사회복귀를 통한 인간화를 위해 이태원 공동체를 신설했다.(1998년 11월 10일 이태원 공동체 답신) 1989년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이인복 마리아가 임신한 미혼의 여학생들이 낙태하지 않고 출산하도록 타이르고 지원하고 돌봐주기 위해 ,종로구 구기동 125-6에 '나자렛 성가원'을 설치했다.(1998년 11월 8일 나자렛 성가원 답신)

1989년 1월 20일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의 고 미리암 수녀가 성북구 하월곡동에 매춘 여성 및 성 폭행을 당해 소외된 여성들을 위한 쉼자리 '사마리아의 집'을 개설했다.(1998년 11월 14일 사마리아의 집 답신)

가톨릭 교회의 많은 사회복지활동이 여성 복지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미 장애인과 근로자 복지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 또 다루지는 않는다.

(10) 노인복지

1977년 6월 6일 성가 소비녀회는 서울 성북구 길음 1동 수녀원 본원에 할머니 15분을 모시고 신체장애인 양로원인 '안나의 집'의 준공식 및 축성식을 거행했다. 성가소비녀회를 창설한 성 베드로 신부의 취지에 따라 일반시설에서 입소조차 제외된 무의무탁하여 불구인 할머니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양로시설로 국가보조 없이 수녀원 재단에서 자체 부담하여 수녀들이 직접봉사하고 있다. 입소대상은 65세 이상의 할머니로 생활보호 대상자, 불구이거나 노환의 할머니, 법정 전염성이 없고 정신질환이 없는 할머니이다.(가톨릭대사전 :608; 1998. 5. 29일 안나의 집 수녀의 답신)

1977년 전주교구 중앙본당이 노인학교를 개설한 후, 1978년에는 양로원을 설치했다.(가톨릭대사전 : 1093)

1978년 3월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가 전북 옥구군 옥봉에서, 착한 목자 수녀회에서 1964년 윤락 여성을 지도하기 위하여 운영하던 기술학교 자리에 설립인가를 내어 1980년도에 할머니 30분을 모셔 '성언 양로원'을 설립했다. '의지할 곳이 없어 소외된 노인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은 바로 거룩한 말씀의 회의 창립목적(회헌과 회칙 제3조)에 따라, 일가 친척이 없거나 길거리에 버려진 할머니들을 마치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인생의 마지막을 잘 준비하여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함을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65세 이상의 할머니만 모여 사는 이곳은 현재 33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원하면 예비자 교리 후 영세를 받는데 3명만 제외하고 현재 모두 신자이며 매주 옥동 본당의 신부가 와서 미사를 봉헌한다. 노인들도 직접 활동은 못하지만 옥봉 성당 레지오 팀의 협조 단원으로 기도, 묵상 등을 활동으로 대신하며 수녀들의 지도로 간단한 청소, 빨래, 산책 등으로 생활한다. 총 책임 수녀 외에 총무, 간호사, 당사, 생활지도, 기사 수녀 등 모두 6명의 회원들이 봉사하고 있다.

이곳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성격이나 모든 면이 '정상적이지 못한' 노인들을 '정상적인 상태'로 선도하는 데 있다. 이미 오랜 세월을 어렵게 지냈던 노인들에게 남은 것은 배고픔과 이웃에 대한 원망,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뿐 순수함이 결여된 이들에게 아무리 좋은 방법의 선도라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홀로 어렵게 살다가 공동체 생활에 익숙하지 못함은 당연한 현상이고 사회에 대한 반감과 삐뚤어진 시각 등이 신앙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설득하고 교리를 가르쳐 영세시키는 노력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웃에 옥봉 성당의 교우들이 방문하여 도와주고 장례식에는 성당의 애령회에서 지금까지 임종한 할머니 165명의 장례 예절 일체를 봉사해 주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교회와 역사 227호 18-1994. 4. 25 발행)

1978년 12월 수원교구 파 레이몬드 신부는 서울시 금천구 시흥5동에 자손이 없고 가진 것도 없으며 또한 의지할 곳도 없는 불우한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쉬도록 '섭리의 집'을 설립했다. 이곳은 보통 가정집을 매입하여 25명 정도의 진학하지 못한 미감아들을 모집하여 기술교육을 시켜 취직을 알선하여 주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하지 못하는 미감아들을 모집하여 본인이 원하는 기술교육을 하였으나 2년도 못되어 희망자가 없으므로 기술교육은 포기하고 외로운 할머니들을 받들어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모시고 생활하고 있다.(1998. 5. 21일 섭리의 집 윤석만의 답신)

1981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용산에서 무의탁 노인들에게 봉사하기 시작하여, 1983년 안양에 임종의 집을 마련하고, 1993년에 안산시 고잔동에 사랑의 선교수녀원 '평화의 집'을 마련해 노인들을 모시고 있다.(한국천주교회 연감, 1994 : 490)

1984년 7월 6일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녀회가 독일 까리따스의 후원과 원주교구의 도움으로 양로원 부지를 마련하여 '사랑의 집'을 설립했다. 수녀회는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이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는 성서말씀에 입각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가난하고 병들어 소외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시설에서도 가정과 같은 안정되고 따뜻한 사랑 안에서의 노후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함을 목적으로 설립하여, 65세 미만부터 80세 이상의 할머니 할아버지 50분을 모시고 있다.

사랑의 집에서는 첫째 노인 간호와 치료사업으로 의사의 처방에 따른 약투여, 재활운동, 물리치료, 둘째 노인의 오락 프로그램으로 생활체조시간, 노래방, 민속놀이, 생일잔치, 셋째 노인의 상담사업으로 말벗 등으로 할머니의 대화를 듣고 요구를 나눔, 넷째 호스피스 간호로 말기환자나 임종이 가까운 노인께 안정을 주는 영적 간호, 다섯째 일상적인 서비스사업으로 와상노인의 욕창예방 등, 식사, 대변, 목욕 서비스를 중심으로 12명의 직원과 천주교 레지오 단체에서 주 2회 정규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직원들의 업무분담과 주말을 활용하여 고교생, 대학생, 일반 자원봉사자들이 지역사회의 관심사로 활동하고 있다.(1998. 9. 3 사랑의 집 답신)

1985년 성가소비녀회는, 1953년 서울교구로부터 인수받은 '천주교양로원'을 경기도 부천으로 옮겨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608)

1987년 5월 서울교구 구리 본당의 관내에 평신도 봉사자 중심으로 양로원 '마이러 하우스'가 개설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외로운 노인 한 분을 가정에 모시면서 시작된 할머니의 집이 7명으로 늘어 양로원으로 꾸며져 운영되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사능리 소재의 마이러 하우스는 87년 현재 65세에서 91세까지의 외로운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다.(나눔지 166호 4-1987. 9. 12일 발행)

1988년 5월 8일 가톨릭 사회복지회는 가톨릭 실업인회의 후원과 성가소비녀회의 도움으로 파고다 공원내의 불우노인과 노인행려자들을 위한 급식소인 '낙원노인정'을 개설하였다. 개설에 앞서서 5월 6일에는 성가소비녀회의 수녀들과 민주노인회, 지역본당신자등 80여명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을 가졌다.(나눔지 251호 2-1989. 5. 13발행)

1988년 7월 26일 성 요아킴과 안나 축일에 부산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성 분도 어버이집'을 설립했다. 돌보아주는 이 없는 노인들 특히 위급한 행려환자 할머니들을 모시어 돌보고 있다. 현재 성 분도 어버이 집에는 20명의 할머니가 살고 있는데, 거의 60세 이상의 할머니들로서 가난과 질병으로 신변처리가 거의 불가능하고 생계가 어려운 중에 임종을 기다리던 상태에서 이웃이나 천주교 신자들을 통해 이곳에 오게 되었다. 이들은 호적에 가족이 기록되어 있어 시립양로원 등 정부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딱한 처지에 있었다. 다행히 이곳 어버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건강상태가 좋아지는 할머니들이 늘어나서 분도 유치원 뒤편에 작은 집 한 채를 더 사서 '보금자리'라 부르고 중환자 할머니들을 따로 모시게 되었다.

어버이 집에는 치매증 때문에 방금 식사를 마치고 상을 물려 놓고도 들어서는 방문객에게 "나에게는 밥 안 준다"며 호소하는 할머니, 한밤중에 빨래를 한다며 방망이로 큰 소리를 내는 할머니, 밤마다 아들이 죽었다며 장판과 벽지를 찢으며 무덤을 만드는 할머니, 병원 한번 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된 할머니, 누군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임종이 가까워도 마음이 편치 않은 할머니들이 있다. 가난과 질병 때문에 외롭고 춥고 배고파야 했던 지난날이, 이해 받지 못하고 상처받고 서러웠던 일들이 때로는 임종이 가까워도 풀리지 않는 안타까움을 겪기도 한다. 수녀들은 이들의 마지막 순간까지 손발이 되어 줄 뿐 아니라, 기구한 삶을 살아온 할머니들이 자신의 한평생을 새로운 눈으로 되돌아보고 정리하면서 용서를 받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며 모든 이와 화해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이승을 하직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함께 아파하며 함께 울기도 한다.(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 458)

1990년 5월, 마라아의 작은 자매회가 1973년 11월 평화의 모친의원으로 개원하였다가 1987년 폐원한 자리에 무의탁 노인들을 위하여 양로시설을 설립했다. 1998년 현재 포천에 위치하고 있으며 20명-25명의 할머니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1998. 3. 31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답신) 1990년 경로수녀회는 가난한 노인들 안에서 주님의 섬기기 위해 수원 교구에 '평화의 모후원'을 세웠다.(1998년 11월 6일 경로수녀회 답신)

(11) 지역사회복지

1975년 9월 노틀담 수녀회는 오산에 유치원 교육을 위하여 마을회관을 운영하면서 지역사회 복지에 힘쓰기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254)

1976년, 1953년 10월 30일 방유룡 신부에 의해서 창설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Order of the Blessed Korean Martyrs)가 1955년 7월 현재 본원이 위치한 서울 성북동에 흙벽돌집을 만들어 입주하였고 그 당시 시유지였던 이 곳에 주변 빈민아동들을 위한 공민학교 운영을 하기 위해 가건물을 지어 서울시로부터 소유권을 불하받은 때인 1969년까지 학교운영을 해왔던 자리에 '피정의 집'을 마련하여 주민들과 신자들을 위한 피정과 연수활동에 제공하기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1259)

1976년 12월 9일 서울대교구는 목동 본당의 신정동 공소와 화곡동 본당의 신월동 공소를 통합하여 신정동 본당으로 승격하여 신설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2대 주임사제 오 안드레아 신부 재임기에 이르러 빈첸시오회의 구성과 아울러 한강성심병원 의료진의 지원으로 관내 무료진료소가 실시되었고, 장학금 지급, 장애인 수용소 방문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많은 활동 중 신정동 본당은 93년부터 특별히 교구차원에서 벌이는 환경보전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사목회 안에 환경보전분과를 두어 한마음 한몸 운동본부 생활실천부에서 주관하는 환경학교를 열어 200여명을 배출하였으며, 환경문제를 연구 실천하기 위하여 '하늘 땅 물 벗' 모임을 만들어 연구부와 재활용부, 도농직거래부, 그리고 무공해비누 등을 만들거나 수집한 것을 실비로 판매하는 사업부 등으로 조직 운영을 하고 있다. 또 수익금은 본당 내 불우이웃돕기 단체인 빈첸시오회에서 사용함으로써 자연환경을 창조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고,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더불어 사는 공동체활동으로 본당 활성화에 커다란 기폭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더불어 사는 본당 공동체의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본당의 사회복지 활동은 많은 부분에 있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정동 본당의 주요 사회복지활동은 첫째 사회복지단체의 후원사업으로 주로 무의탁 행려자를 위한 의료시설인 성가복지병원과 요셉의원을 돕는 외에 한빛 종합사회복지관을 매월 정기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둘째 불우 이웃 돕기를 위하여 부활과 추석시기에 어려운 이웃 30가정에게 생계비 지원을 하고 있으며, 또한 관내의 행려자와 신문배달학생, 우체부, 청소부 등에게도 사랑의 나눔을 하고 있다. 셋째 청소년 장학 사업으로 이웃의 신정5동, 등촌동, 한빛, 신월 등 지역사회복지관의 추천을 받아 법적으로 보호를 못 받고 있는 결손가정이나 생활이 어려운 소년소녀가장의 학자금 지원으로 중학생과 고등학생 10여명에게 4회에 걸쳐 분기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넷째 모금활동으로 사순시기에 전 신자를 대상으로 저금통을 가정마다 나눠주어 성지주일 공동 헌금의 날에 함께 거두어 이웃돕기 성금으로 쓰여진다. 다섯째 연중 사랑의 나눔 바자 개최로 지난 89년 이후 해마다 서울대교구 사회복지회 산하 장애인복지기관들을 초대하여 신자와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장애인 단체를 소개하고 장애인이 직접 만든 물품들을 전시하며 또 판매를 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사랑의 나눔 장터에는 장애인단체들의 자립의욕을 고취시키고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본당 차원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매해마다 계속해서 열고 있는데, 장애인에 대한 사회인식을 높이고 신자들과의 만남으로 지역사회 안에서의 열린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동안 장애인 단체들의 판로 개척과 자립의욕을 높이는데 많은 공헌을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 행사는 연중 활동 중 신정동 본당에서 가장 뜻깊게 준비하는 일 중의 하나인데 본당 공동체의 날처럼 각 단체들이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함께 먹거리 장터도 운영하여 바자 분위기도 조성하고, 판매 이익금은 참가한 장애인단체들에게 20만원씩 전달하고 한마음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나눔지 1996. 여름 38쪽)

1976년 마산교구는 경남 마산시에 '산산 가톨릭 여성회관'을 설립하여, 정기프로그램으로 학습반과 취미반, 특별 프로그램으로 젊은이 교실, 사임당 교실, 성교육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555)

1977년 부산 횡령산 지역의 도시 재개발 계획으로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운영하던 '성 분도 어린이 집'이 문을 닫게 되자, 수녀들은 철거민과 함께 문현동 산동네로 자리를 옮겨 개천가에 25평짜리 판잣집을 매입하고 1977년 10월 29일 염 그라치아 수녀와 여숙련 헬레나 수녀가 주축이 된 '성 분도 봉사자의 집'을 열었다. 수녀들은 버려진 임종자들을 돌보고, 탁아소를 운영하며 이웃들의 시급한 일손이 되어줌으로써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이와 함께 성 분도 병원의 무료 이동진료와 예비자교리, 미사 등 정기적인 모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점차 이 지역에 고층아파트와 큰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자 봉사의 영역과 성격을 조금씩 바꾸어 탁아소 및 주민봉사와 아울러 상담과 기도를 주로 하게 되었다. 부산은 물론 멀리에서도 매일 10-30여 명의 방문자들이 찾아와 상담을 하였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머물며 성체를 모신 경당에서 성체조배, 성서묵상 등 개인기도를 하며 쉴 수 있었고 기도모임을 통해 서서히 용서와 화해, 치유를 체험하였다.

1982년 8월, 장마와 폭우로 개천이 넘쳐 판잣집이 무너졌지만 그 자리에 같은 규모의 집을 새로 짓고 11월 4일에 축복하였다. 이 집은 장기 휴양자와 임종자들,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머무는 쉼터가 되고, 탁아소와 학생들의 독서실, 기도의 집이 되며, 봉사자들에게는 선업과 나눔의 자리가 되고 있다.(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 456)

1977년 서울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976년 상지회관 피정의 집이 건축되면서 저소득가정의 주부들에게 노동의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써 생계를 돕고 주부들의 바쁜 일손을 도와준다는 설립 목적으로 가지고 성북구 지역복지를 위해 상지회관 사회복지부를 개설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주된 사업내용은 파출부의 교육(한 달에 한 번) 및 직업보도와 파출부의 주택문제 해결, 파출부 자녀들의 학비조달(장학금) 등이다. (나눔지 1996. 여름 57쪽)

1980년 4월, 1834년 3월 4일 마리아 데 마티아스 (Maria de Mattias) 가 교육혜택을 받지 못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이탈리아 아쿠토(Acuto) 에 개설함으로 설립되어, 성혈흠숭은 '애덕 그 자체' 를 뜻하며 이웃에 대한 봉사를 통해 구원사업에 동참하고자 1977년 9월에 한국에 진출한 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Adorers of the Blood of Christ)가 마산 가톨릭 사회복지 회관의 일을 관장하기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198)

1981년 1월 6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초동 성당이 건립되었다. 강남 서초동에 위치한 서초동 천주교회는 곳곳에 비닐하우스와 꽃마을 철거민들이 상주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고소득층이 지역주민의 대부분인 지역적 특징을 가지고 잇다. 일반적으로 복지 수혜의 필요성과 욕구에 비례하여 사회복지가 발전하는 데 반해 서초동 천주교회는 부유층 신자들의 높은 시혜욕구와 열정을 잘 유도·수렴하여 본당 주변 지역의 사회복지활동 뿐만 아니라 타 지역 및 비신자들까지도 대상으로 하는 폭넓은 수용으로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사회복지 활동을 펴 나가고 있다.

서초동 본당의 구체적인 사회복지활동 내용을 보면 첫째, 1988년에 시작된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4명의 임원진을 포함하여 약 2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후원해 주는 명예회원들은 약 160여명에 이른다. 빈첸시오회는 첫째 성당 관내의 불우 교우 및 노인들에 대한 쌀과 성금을 지급하는 불우 이웃 나눔, 둘째 극빈환자 투약 및 진료비, 의료팀 지원 등의 의료시설 지원, 셋째 신망애의 집 등 4군데의 사회복지시설에 월별로, 두엄자리 등 12군데 사회 복지시설에 분기별로 일정액을 지원하는 복지시설 나눔, 넷째 고등학생 11명, 중학생 9명으로 총 20명에게 수업료 전액을 지원하는 학자금 지원, 다섯째 그밖에 돈이 많이 들어 치료받거나 수술받기 어려운 극빈환자들에게 수술비의 일정금액을 본당에서 지원하고 나머지 비용은 강남성모병원 자선병동 등에 협조를 구해서 시술을 해 주고, 퇴원 후에도 사후조치의 일환으로 병이 완쾌될 때까지 본당의 레지오 봉사단들이 조를 구성하여 봉사하고 있다. 사회복지분과의 둘째 활동인 소년소녀 가장돕기 후원회(회장 : 박남식)는 현재 확보된 6억 3천만원 정도의 기금을 가지고 불우한 소년소녀가장들이 자립할 때까지 지속적인 후원을 해 주고 있다. 1989년부터 1995년까지 총 125명의 소년소녀가장에게 약 1억 9천 정도의 후원금을 지급하였다. 셋째, 천주교 사회복지법인 '석문 복지재단'은 서초동 천주교회의 현석문 주보성인의 이름을 따서 설립한 것으로 소년소녀가장 돕기 후원회 활동자금의 집행을 담당하고 있다. 넷째, 복음의 핵심인 이웃사랑과 나눔을 묵상함으로써 신앙과 일상생활 속에서 나눔을 실천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는 나눔의 묵상회는 현재까지 26명 정도가 교육에 참가하였으며, 교육비의 50%를 본당에서 지원해 주고 있다.

이밖에 이색적인 복지 활동인 '축복미 나눔'은 3대 김병일 신부가 1994년도에 새롭게 주창한 것으로 농민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하여 혼배 성사 시에 화환 대신 쌀로 신혼부부를 축하해 주도록 제도화하여 그 쌀로 육아시설, 양로원, 무료급식소, 의료시설 등 사회복지시설에 94년도에 20㎏들이 196포, 95년도에 109포를 나누었으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다. 사회복지활동을 위한 자금은 본당 지원, 특별성금, 후원회비 모음, 기타 기탁금과 지금은 없어진 물품 판매 등으로 조성해 왔다. 곽성민 주임신부는 1996년부터 보다 많은 전신자들의 사회복지활동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기존의 사회복지 예산을 삭감한 대신 빈첸시오 명예회원 가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으며, 사순절 5주간 동안의 2차 헌금을 불우이웃 나눔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나눔지 1996. 봄 34쪽)

1984년 3월 서울대교구 서교 본당은 사회복지 후원회를 조직했다. '형제적 사랑과 복음적 청빈속에 가난하고 약한 이들과 함께 있는 교회'를 위해 서교본당은 1984년 3월 사회복지 후원회를 조직하여 본당지역 사회복지를 위하여 봉사활동을 하고있다. 후원회원 모집과 기금확보, 본당 교우들에게 불우한 이웃을 물질적이고 정신적으로 도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사랑의 나눔 정신을 계몽하는데 중점을 둔다.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 사랑의 고리(신체 장애인), 사랑의 선교회(삼선교), 은퇴신부등을 방문하여 후원금 위문품을 전달하며 본당지역내 가난한 교우, 불우한 상가집, 수재민, 노인들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서 믿음의 순교자가 되었으니 300년대의 우리교회는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눔으로서 새 생명을 찾도록 증거할 수 있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는 것이다.(나눔지 43호 4쪽-1985. 4. 20발행)

1984년 7월 인천교구 소사본당은 보육원과 양로원을 만들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야간학교도 설립한 후, 봉사하는 교회, 믿음을 다지는 교회를 지향하는 신자들의 의지를 모아 450평에 달하는 현대식 '성가정회관'을 개관하였다. 이곳은 교회는 물론 지역사회를 위하여 완전히 개방하고 있는데 특히 젊은이들의 교육장과 상담실을 비롯, 직장인들의 회합, 피정교육 및 각종 문화교육센터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가톨릭대사전 : 680)

1985년 11월 10일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류병순 마리 도미니카 수녀는 인천교구 답동분원에서 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회복지활동을 하였다. 그후 1987년 3월 2일 이춘근 시몬 스독 수녀가 교구 사회복지부에서 해성어머니 한글교실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해성어머니 교실은 문맹인 주부들에게 글을 가르쳐 가정 및 신앙생활의 향상을 돕기 위해 마련됐는데 종교와는 관계없이 25세 이상의 주부들을 대상으로 2년의 기간동안 한글교육과 산수, 일반 교양강좌를 실시하고 있으며 매일 평균 100명 정도의 주부들이 참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위한 교리반도 운영하여 문맹으로 인해 각 본당에서 교리를 배우지 못했던 영세자 및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샬트르 100년사 : 860)

1986년 8월 15일 부산교구 오수영(히지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에 의해 '오순절 평화의 마을'이 설립되었다. 사회복지법인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복지사업법 제2조에서 정하는 부랑인 보호사업과 장애인 복지사업, 그리고 지역사회 복지사업을 수행하여 사회복지 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경남 밀양시 삼랑진, 부산 무의탁 임시 보호소, 여주 평화 재활원이 설립되었다.

오수영 원장신부가 부산 동항성당에 주임신부로 부임한지 2개월이 지난 1986년 4월에 알콜 중독으로 몸을 제대로 못 추리는 김 비오 형제(55)와 그의 두 아들이 오수영 원장신부에게 보호를 요청해 왔다. 김 비오 형제는 알코올중독으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가장으로서의 가족들에 대한 부양능력이 없는 데다 부인마저 집을 나가 버려 학교에 다녀야할 아들들은 막막한 상태로 아버지를 따라온 것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을 그냥 외면할 수 없었던 오수영 원장신부는 우선 이들을 맞아들여 허기진 배와 피로에 지친 몸을 쉬게 하였다. 도시빈민과 결손가정이 많았던 이 지역에 오수영 원장신부의 향적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소식을 들은 병들고 생활능력이 없는 어머니와 어린 자녀 다섯, 그리고 자녀들로부터 소외 받고 보호받을 수 없는 노인들, 교도소에서 출감하여 갈 곳이 없는 이들, 알코올 중독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찾아와 보호를 요청하였다. 어느 날 이른 새벽에는 이름도 나이도 부모도 모르는 어린 정신지체아를 사제관 앞에 버리고 가버린 사람도 있었다. 마치 날이 저물면 둥지를 찾아드는 새들처럼 수없이 사제관을 찾아오는 이들 앞에서 본당 사목활동만으로도 바쁜 오수영 원장신부였지만 어쩔 수 없이 두 배의 마음을 써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처하게 된 오 신부는 일단 성당 안 10평 남짓한 창고를 개조하여 방3칸을 만들어 이들을 쉬게 하였으나 먹이고 입히는 문제는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교구에서 지급되는 사제 생활비를 몽땅 털어 넣기도 하고 오 신부의 뜻을 이해한 신자들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여 지내면서 그해 8월경에는 50여명이라는 대가족이 꾸려지게 되었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오순절날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기도하며 하나로 모여 있던 사도들 위에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불의 사랑을 체험한 사도들과 모든 신도들은 찬미와 기도와 영가를 부르며 초대교회공동생활을 시작했다(사도2,42-47 : 4,32-37).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나누는 가운데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나눔과 섬김, 사랑과 일치의 삶을 살았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바로 이 초대교회공동체의 정신으로 살아감으로써 세상을 복음화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이웃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구현하려고 어려운 이들끼리 함께 모여 서로를 아끼고 위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경남 밀양군 삼랑진읍 미전리 636에 위치한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부랑인 선도시설로서 부랑인, 행려환자, 무연고자등을 수용하고 있고, 수녀원 및 수도회와 피정센터가 함께 있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 재단의 본원으로서 대부분의 주요업무는 이곳에서 담당한다. 대지면적은 9천 4백 5십 9평방미터이고 98년 5월 현재 수용인원은 404명(남264명, 여 140명)이고 직원은 40여명이고 수녀회와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는 수도자들은 80여명이다.(1998. 5. 28일 부산 오순절 평화의 마을 정원기의 답신)

1988년 6월 사회복지 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가 정부로부터 사회복지법인 인가를 받고 1990년 11월 원주 가톨릭 종합사회복지관을 개관했다. 원주 가톨릭 종합사회복지관이 위치하여 있는 봉산동은 원주선과 중앙선철도 주변으로 형성된 지역으로서 설립당시(1990년)에는 원주시내에서 가장 낙후되고 영세민과 저소득층이 밀집되어 거주하던 곳이었으나 1995년부터 도시재개발 지역으로 신 아파트와 고급주택이 들어서면서 계층간의 빈부격차가 심해져 이들을 통합할 수 있는 주민참여 프로그램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다. 이에 따라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은 사회복지이용시설로서 지역 특성에 맞는 복지사업으로 하느님의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역주민들에게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 좀 더 나은 생활,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통한 주민의 복지증지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복지관에서는 종교 이념에 관계없이 장점, 약점, 경제 상태, 신체, 정신적인 태도나 행동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며 스스로 자기가 나갈 방향을 결정하려는 본인의 의사와 자유를 존중하며 자립원조에 필요한 것만을 제공한다.

원주 가톨릭 종합사회복지관은 천주교 원주 교구 사회사업국내 지역사회 복지부에서는 그 동안 부분적으로 해오던 지역사회 복지업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원주 시내에서 저소득층들과 도시 빈민층들이 밀집되어 살고 있는 곳을 대상으로 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 극빈가정자녀, 알콜중독환자, 무의탁 노인, 가출 청소년, 긴급 구호대상자들의 발견, 상담 및 방문, 사회복지시설과 연결하여 간병인과 봉사자 연결, 가정 돕기 등의 사업을 실시하여 왔고 좀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전문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기 위하여 천주교 교육원이었던 봉신2동 현재의 위치에 정부의 보조를 받아 지하 1층, 지하 2층의 연 건평 5백평 규모로 증축하여 맞벌이 가정을 위한 탁아방, 청소년 독서실, 상담실, 회의실, 부업교실등 각종 직업훈련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여 지역주민들의 교육과 계몽, 봉사활동과 나눔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1990년 11월 최기식 신부를 원장으로 개관하게 되었다.(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1998. 6. 10일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의 홍보담당 원유일의 답신)

1990년 10월 11일 서울시 노원구는 '중계마을 복지회관'을 설립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에 위탁했다. 지역 내의 주민 특히 저소득층의 주민들을 위해 봉사함으로 균형 있는 지역사회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특별히 여성의 직업사회 증가 및 맞벌이 가정이 늘고 있는 요즈음 주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적합한 환경에서의 아동 보호 사업이 필요하여 설립되었고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위탁 운영하게 되었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이 사도직의 목적과 효과로써 저소득 지역 주민에게 자립기관을 형성하고 생활수준의 향상과 정신적으로 윤택한 삶으로 이끌어 기쁨과 고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평화와 사랑을 심어 이 지역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위탁 운영하게 되었다. 대지가 274평이며 건물이 329평이다. 지하는 공동 작업장이며 1층은 어린이집, 할아버지방, 조리실, 사무실, 2층은 공부방, 마을회관 그리고 3층은 관리인 실이다. 1990년 10월 11일 양기희(베네딕타) 수녀, 권우이(막달레나) 수녀, 이정자(마리아) 수녀, 이국희(데레사) 수녀, 나옥자(젬마) 수녀 5명이 파견되었다.

어린이집은 아동의 발달과정에 적합한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어 건전하고 조화로운 신체 발달과 성장을 하도록 해 주고 있다. 어린이집 원훈은 "슬기롭고, 착하게, 바르고 튼튼하게"이다. 공부방은 주거환경이 협소한 가정의 청소년들에게 학습의욕을 고취시키고 보다 건전한 활동을 하도록 생활공간 및 학습장을 제공하고 있으며 영어, 수학, 한문 등 특강시간을 마련해 주고 중학생 대상으로 주2회 영어공부를 시키고 있다. 공부방은 좌석이 114석이며 운영시간은 06:00 - 22:00이다. 노인정은 지역 노인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노인들과의 친목을 더해주며 건전한 생활과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노인정의 노인들을 위하여 한의학과 교수를 초빙하여 건강 관리에 대한 교육도 실시하고 무료진료도 하고 있다. 노인들을 위하여 야유회도 하고 생활보호 대상자들에게 현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1998년 현재 수녀들이 어린이집과 노인정, 청소년 독서실,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의 건강을 위해 수녀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있다.(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 1998년 11월 10일 중계 마을 복지회관 답신)

1990년 12월 8일 부산교구 오순절 평화의 마을 오수영 신부는 '그리스도 우리 평화의 집' 축성식을 했다.(1998년 5월 28일 부산 오순절 평화의 마을 정원기의 답신)

(12) 의료복지

1975년 9월 26일 저소득층 결핵환자의 입원치료 및 요양을 목적으로 경상북도 칠곡군에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 왕 레지날도 신부에 의해 파티마 결핵 요양원 설립되었다. 파티마 결핵 요양원은 이 시대와 지역사회의 요청에 따라 의료를 통한 사도직 수행과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으며 이와 같은 사도직 수행을 통해서는 지역사회의 발전과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키 위하여 설립되었다. 설립당시는 66병상의 의원 규모로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의사와 방사선기사와 임상병리사가 각 1명씩 주 1회 파견되었으며 요양원의 운영은 대구 파티마 병원의 수입 및 수도원의 예산으로 운영되었다. 1982년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로 요양원은 이양되었고 1992년 7월에는 결핵환자수의 감소와 의료보험으로 인한 입원 환자수가 감소하여 폐원하게 되었다.(1998년 9월 3일 파티마 결핵요양원의 오 세레나 수녀의 답신)

1976년 5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서울 가리봉 수녀원 내에 성 프란치스코의원을 개원했다.(가톨릭대사전 : 366) 1976년 10월 서울 가톨릭 사회복지회는 결핵요양소 '시몬의 집'을 개설 운영하기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24)

1976년, 1963년 한국에 진출하여 예수의 생활과 같이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는 형제, 자매들의 선교단체인 '작은 자매 전교회'(Little Missionary Sisters)가 마산의 국립결핵병원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결핵환자들에게 신앙과 기도의 은혜를 전달하기 위해 병고를 함께 나누며 긴급한 필요성들에 응답하며 봉사하기 위하여 마산시 합포구 가포동 486번지에 정 루시아 수녀와 김 아녜스 수녀가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병원 안에 작은 프라테르니타를 형성하여 2수녀가 살기 시작하고 가포 공소가 생겨났다. 마산교구의 협조자 하 마리아씨가 10여년 그 곳에서 봉사하다가 수도회에 넘겨줄 의사를 표시하였고 작은자매 전교회에서 시작하게 되었다.(1998. 4. 23일 작은자매전교회의 답신; 가톨릭대사전 : 993)

1976년 서울대교구 의정부(현 의정부 2동) 본당의 6대 주임사제 최서식(라우렌시오) 신부는, 1957년 5월 7일 3대 주임사제 이계광(요한) 신부가 지은 성모병원을 가톨릭대학 의학부 제 7 부속성모병원으로 등록시키는 동시에 새로 마련한 420평 대지 위에 현대식 병원을 그해 12월에 준공하고 1986년 5월 1일 종합병원으로 승격되었다.(현재는 대지2만1천94㎥, 연건평3만3천4백74㎥(지하1층 지상9층) 규모의 신축병원을 완공하여 이전하여 94년 3월부터 5백 병상을 완전 가동하게 되었다.)(가톨릭대사전 : 928; 1998. 3. 28일 의정부2동 성당의 이영래의 답신 - 의정부본당 50년사 중에서 발췌)

1977년 4월 3일 안동교구 예천 한일신용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한일의원'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파견되어 간호수녀로 활동하였다. 병원은 1978년 운영난으로 폐원했다.(샬트르 100년사 : 961)

1977년 6월, 1957년 나환자들을 위한 '다미안 피부병 진료소'를 개설한 포항예수성심시녀회(Handmaid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가 포항성모병원을 개원하여 보다 효과적인 활동을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1213)

1977년 11월, 부산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1951년 11월에 개원한 성 분도 병원에서 성실히 원목활동을 펼쳐, 해를 거듭할 수록 그 활동범위와 대상을 넓혔고, 환자와 직원, 수녀들 사이의 신앙일치와 친교에도 큰 몫을 하였다. 그리고 환자방문과 상담, 도서대여, 직원과 환자의 교리강좌와 신심활동 등을 통해 외교인에게는 신앙의 빛이 되고 신앙인들에게는 성화를 위한 장(場)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의료봉사는 여러 면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급속한 발전은 새로운 전문지식과의 시설, 의료장비들을 끊임없이 요구하였고, 또 의료보험제도의 실시와 함께 모든 것이 제도화, 대형화되었다.

그러므로 수녀원의 의료봉사는 과학화, 기계화, 전문화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 생명에의 경외심을 높이고,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더 많은 노력과 인내와 봉사를 요구받고 있다. 1988년 8월 31일에 조건 없이 병원을 부산교구에 헌정한 뒤, 1988년 9월부터는 원목실을 비롯한 몇 부서에 약 10명의 수녀가 일반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 453)

1978년 5월 31일, 부산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1966년 2월부터 부산에 임시 치과진료소를 차려 남 골롬바 수녀와 치과 전문의 2∼3명과 함께 인근 주민들의 구강보건에 기여해오다가 '성 분도 치과의원'을 개원하여 부산직할시장으로부터 의료기관 개선신고필증을 받았다.(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 459)

1978년 12월 2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아산 재단에서 운영하는 보령 종합병원에 파견되어 간호과와 방사선과, 영양사, 물품구매관리, 원목실 등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샬트르 100년사 : 843) 또한 아산재단의 인제병원에는 간호, 보급과, 검사실, 약국, 원목 등 여러 부서에서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1987년 1월 31일 재단 측의 재정상황으로 철수함)(샬트르 100년사 : 1004)

1979년 3월 23일 대구대교구에서는 이 시대에 의료사업을 통한 사회봉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79년 3월 23일 '가톨릭병원' 신축을 위한 기공식을 거행한 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수녀회에서는 이 요청에 응답하여 1980년 2월부터 한업덕 마리 아오스딩 수녀, 윤성기 토마스 수녀가 이 병원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초대원장인 이문희 주교와 부원장이며 병원 건축담당장인 젤라(Stanislao Gzella,길) 신부 및 행정처장인 스테파노 선생과 함께 병원설립의 선발대가 되어 실제적인 개원준비에 적극 협력하였다. 6월 19일에는 안옥화 쎈땅 수녀 그리고 6월 24일에 메리놀 병원에서 오기옥 아나다시아 수녀가 보충 파견되었다. 병원이 세워진 곳은 일명 뱀사골이라는 야산으로 병원건물도 아직은 골조공사만 이루어진 때였다. 수녀들은 간호과의 업무를 돌보기도 하고 재봉실, 세탁부, 영양실 관계 등을 맡았다. 초창기의 어설프고 어수선함 속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수녀들의 숨은 희생과 초인적인 노력으로 마침내 8월 12일 250병상 규모의 가톨릭병원 개원식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병원은 개원하였으나 아직 병원경영 자체로서는 걱정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교구민들의 기도와 많은 은인들의 돌봄과 교구병원에 대한 신자들의 아끼는 마음으로 병원은 곧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선의의 신자들의 자원봉사활동 등으로 병원은 생기를 띠었고, 병원을 찾는 환자수도 차츰 늘어났다. 10월 1일에 제2대 병원장으로 박창수(朴昌壽 요한) 신부가 취임하여 직원들을 격려하며 병원관리를 철저히 함으로써 몇 개월만에 병원운영이 본 궤도에 올라서게 되었다.

병원은 계속 발전 일로에 있었으나 병원장 박창수 신부의 중환으로 1982년 7월 7일 제3대 병원장으로 박병원(朴炳元 필립보)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고, 그해 가을 별관 병동 신축공사로 320병상, 1983년 여름에는 본관건물을 증축으로 396병상, 1985년 봄에는 별관병동 증축으로 441병상을 보유한 종합병원으로 성장해서 대구지역 사람들의 영육간의 건강에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샬트르 100년사 : 888)

1979년 5월 18일 '한국 가톨릭 간호협회'(Catholic Nurses Association of Korea)가 발족했다. 2월부터 성모병원 가톨릭 간호원회가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전국의 가톨릭신자 간호원 130여명을 중심으로 가톨릭 신앙과 복음적 정신의 함양으로 선교활동을 함과 동시에 회원으로서 친목과 자질향상,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하기 위하여 서울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교육회관에서 발기총회를 갖게 되었다. 1981년 주교회의의 인준을 받고 1982년 4월 국제협회에 가입하였다. 주요활동 내용은 의료봉사활동과 세미나이며, 1982년 서울교구 외에 6개 교구에 간호원회가 조직되어 있다.(가톨릭대사전 : 1244)

1979년 용문에 무료 결핵 요양소인 '희망의 집'이 개설되었다. 1983년 5월 23일 희망의 집 운영위원회가 구성되고 모두가 다 한 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운영에 참여하도록 했다. 1980년 3월부터 성가소비녀회 수녀 3명이 상주하며 담당하고 있다.(나눔지 23호 8-1984. 3. 15발행)

1980년 3월 '성모 자애병원'은 대한병원 협회로부터 인턴 및 레지던트 수련 병원으로 지정을 받아 많은 수련의들을 배출하였으며 1981년 5월에 성모 자애 병원 부설 심신장애인 조기교육원을 개원하여 그 명칭을 엠마누엘 어린이 집이라 현판하였다. 이어 1982년 7월부터 병원을 확장하여 1986년 5월에 비뇨기과를 신설하여 병상수 310개 병상과 진료과목 16개과로 인천 직할시내 유일한 종합병원으로서 의료계의 일익을 담당할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성모 자애 병원은 사회적인 발전과 의료 정책 변화 등에 편승하여 1988년 2월 1일 기획실을 신설하고 동년 3월 1일 호스피스과를 신설하여 임종 환자까지도 돌보게 되었으며 1989년 2월 종합검진센타를 신설하고 동년 6월 전산실을 설치하였으며 1990년 9월 1일 안전관리과을 신설하였다. 1992년 7월에는 신관건물에 1층(130평)을 증축하여 405병상을 확보하고 오늘도 가톨릭 중앙의료원 이념 실천과 환자진료를 위한 교육, 연구, 진료를 사명으로 지역 사회의 의료 복지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원목실의 수녀들은 환자들이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입원 중에도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환자 방문과 상담을 하고있다. 말기 호스피스 환자들은 가정간호로 직접 가정방문을 통하여 마지막까지 인간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임종 후 사후처리까지 돕고있다. 사정의 여의치 못한 사람들은 임종방으로 모시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직장 내에서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직원을 위한 피정, 성지순례, 미사, 재교육, 예비자 교리 등 각종 신심행사를 실시하고 있다.(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의 답신)

1980년 5월 3일 강남성모병원 개원에 따른 중앙의료원의 기구 개편으로 1972년 3월부터 구 성모병원(중구 명동 2가 1) 소속의 한 부서로 체납, 탈원, 학술, 극빈 기타 자선 환자 취급업무를 수행하여 오던 사회사업과가 종전의 업무를 원무과에 이관하고 자선진료소에 내원하는 불우한 환자들에 대한 의료복지 사업을 전담하도록 한다는 의료원 방침에 따라 자선진료소 산하 사회사업과로 편제되었다.

1986년 6월 30일 성모병원의 자선진료소가 폐쇄되는 대신 그 제반업무는 가톨릭중앙의료원의 원목실에 이관되고, 자선진료소에 속해 있던 사회사업과는 의료원 원목실에 편제되었다. 성모병원과 강남성모병원 원목실장이 실무 책임자가 되어 자선진료에 관한 제반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고 각 병원 원목실에는 사회사업가가 배속되었다.(가톨릭중앙의료원 50년사 : 496-497)

1980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가 용인에 소화의원을 개원하여 영세민을 위한 진료를 시작했다.(가톨릭대사전 : 831) 1981년 1월 1일 마리아 수녀회가 부산의 결핵요양소와 함께 서울시로부터 갱생원을 위탁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서울 갱생원 원생 중 회갑을 지낸 환자들은 서울 소년의 집 구내로 옮겨서 양로원 같이 보살피고 있다.(교회와 역사 67호 7쪽)

1981년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가 강릉에 가난하고 외롭게 죽어 가는 이들을 위해 '갈바리 호스피스'를 개원했다. 1989년 폐원되었다가 1996년 6월에 다시 개원하였으며 갈바리 산 위에서 계셨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고 죽어 가는 죄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1998년 현재 12병상의 말기환자의 입원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말기환자를 가정 방문하여 치료하고 있다.)(1998. 3. 31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답신)

1982년 6월 29일 마리아 수녀회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사제)이 소년의 집 아동 1,800여명 및 18세 이상의 무의무탁한 부랑인, 노숙자 2,000여명을 수용하는 은평의 마을 환자와 저소득층 가정의 환자의 의료복지를 위해 소년의 집 시설 내 외, 내, 소아, 산부인, x-선, 마취, 임상병리과를 갖추고 79병상의 규모로 무료 자선병원 '마리아 수녀회 도티 기념병원'을 설립했다.(1998년 11월 6일 마리아 수녀회 도티 기념 병원 답신)

1987년 3월 1일 부산에 가난 속에서 고통당하는 심장환자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로 14년간 애써온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김옥희 미카엘라 수녀를 중심으로 하여 '심장환자 상담소'가 개원했다. 1973년 3월부터 메리놀 간호전문대학 응접실을 빌려 매월 1회씩 심장병 환자의 상담을 위한 모임을 가지다가, 부산교구의 시책으로 소화영아재활원이 다시 자리를 내 놓게 되자 1987년 3월 1일부터 부산 감만동에 임시로 심장환자 상담소를 개설하는 한편, 부곡동 부지에 상담소를 위한 건물을 신축, 1988년 12월 3일에 완공하여 이전하였다.(1991년 현재 환자수는 4,500여명이며, 크고 작은 수술에 응한 어린이들이 2,114명이고 그 중 사망수는 93명이다.)(샬트르 100년사 : 946)

1987년 8월 29일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환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며 그들이 자립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선우경식을 비롯한 가톨릭의료인들이 서울 관악구 신림1동에 요셉의원을 세워 진료하다가, 1997년 8월 17일 영등포역 주변 영등포 3가 423-57으로 이전 진료를 계속하고 있다. 요셉의원은 행려환자(알코올 중독자 포함), 의지할 데 없는 영세민 환자, 각종시설에 보호된 환자, 외국인 근로자 등 병이 나도 의료보험증이나 의료보호증이 없고 진료비가 없어 다른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없는 극빈환자를 매일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진료한다.

진료 후 입원을 요하는 중환자는 서울 가톨릭 의대 부속 강남, 여의도 성모병원, 보라매 병원 등에 자선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고, 자선 진료나 시립병원에 갈 수 없는 환자는 일반병원에 입원시키고 입원비를 대신 내줘야 하고 정밀 검사가 필요한 환자는 검사비를 대납해 준다. 결핵이 심한 환자는 성가소비녀회에서 운영하는 용문 희망의 집, 영보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광탄 시몬의 집, 서대문 시립 결핵 요양원 등으로 보내진다. 통원치료가 가능한 행려환자는 정릉의 임마누엘 집으로 보내거나 신림 10동 사도의 집에 머물게 한다.

병원 예산은 전액 후원금으로 충당하면서, 진료는 무료 진료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의사 1인과 약사 1인, 간호사 2인, 사회사업가 1인을 비롯한 15명의 직원과 전문의를 비롯한 120인의 의료 및 주방과 청소, 빨래를 담당해주는 300명의 일반 봉사자가 내과, 내분비내과, 심장내과, 소아과, 일반외과, 흉부외과, 정형외과, 부인과, 피부과, 비뇨기과, 이비인후과, 안과, 신경외과, 신경내과, 신경정신과, 치과 등 16개의 진료과목을 통해 일일 150명 연간 30,000명을 진료하고 있고, 기본검사 및 간기능 검사를 비롯한 임상병리검사, X-선 검사, 내시경검사, 초음파 검사를 하고 있으며, 알코올 중독자 재활센타를 운영하고 있다.(나눔지 166호 2-1987. 9. 12발행; 1998년 11월 25일 요셉의원장 선우경식의 답신)

1987년 11월 5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가 갈바리 산 위에 서 계셨던 마리아의 어머니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고 죽어 가는 죄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목적으로 서울 강북구 미아9동에 '모현(母峴) 호스피스'를 설립했다. 서울지역의 암 말기 환자들을 방문하여 의료적, 영적, 심리적인 평화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의사, 간호사, 상담사를 가정방문팀으로 구성하여 호스피스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1998년 3월 31일; 1998년 11월 10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답신)

1990년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송옥자는 가난하고 소외된 채로 가정에 있으면서 말기환자로 투병하는 분과 그 가족을 보살피고 지지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전담간호수녀 1인과 간호사 상근 봉사자 1인, 상담자 1인과 자원봉사자 등이 모여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가정 호스피스'를 시작했다.(1998년 11월 11일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가정 호스피스 답신)

3) 사회복지 활동의 시대적 성격과 그 의의

이 시기에 들어서는 교회 사회복지 활동의 주체가 완전히 뒤바뀐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본당 중심의 사회복지는 몇 몇 본당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대신 수도회들은 과감히 지역사회의 요구에 민감하게 움직여 본당의 초청이 아니더라도 지역사회와 사도직 단체의 초청으로 사회복지에 참여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는 직접 사회복지 활동을 찾아 나서고 기꺼이 헌신하게 되었음은 고무할 만한 일이다.

아울러 이 시기부터는 사회복지 시설을 정부가 설립하여 가톨릭 단체들에 운영을 위탁하는 사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는 사회복지 시설 설치에 따르는 막대한 재원과 유지에 드는 재정적 지원이 교회가 종래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다는 의식에서 단순히 후원회원들의 소액 월정 후원금이나 기존의 재화를 희생과 절제 차원에서 나누는 정도의 규모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사업과도 같은 차원에서 사회복지 시설 설비에 대한 투자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정부가 사회복지 시설의 운영을 천주교에 위탁하는 모습은 그 동안 천주교회가 이루어 왔던 사회복지 활동의 정신과 업적을 사회가 인정해 준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교회의 기본 조직인 본당의 구조가 책임자인 사제에게 집중되어 있는 형편인데 반하여 그 책임자인 사제들이 일정한 임기가 되면 교체되는 본당의 상황으로 보아 본당을 주체로 한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기에는 커다란 부담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다양하고 전문화되는 사회의 환경 안에서 일부 사제들은 본당을 떠나 특수사목이라는 형태로 사회복지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자 역으로 본당에서는, 사회복지 활동은 특수사목자들이나 수도회나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들이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고, 단순히 사회복지 분과나 빈첸시오 아 바오로 회를 통한 극빈자에 대한 자선 차원에 머물게 됨으로써 오히려 지역사회의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어야 할 본당의 우선적이고도 본질적인 모습은 상징적으로만 드러나게 되었다.



이 논문은 1998년 가을학기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은 논문입니다. 첨가나 수정하시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면 아래의 주소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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