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명부1(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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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명학교 / 가톨릭근로자회관 / 가톨릭노동청년회 / 가톨릭농민회 / 가톨릭 농아선교회 /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 가톨릭 맹인 선교회 / 가톨릭사회복지회 / 가톨릭사회운동 / 가톨릭야학연합회 / 가톨릭중앙의료원 자선진료소 / 가톨릭 피부과 의원 / 가흥종합사회복지관 / 갈릴리 집 / 갈바리 의원 / 갈바리 호스피스 / 강릉본당 /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 / 경남장애인종합복지관 / 경로수녀회 / 계산동 유치원 / 계성국민학교 / 계성여자고등학교 / 계성유치원 /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 골룸바노 수녀회 / 관후리 본당 / 광주 씨튼 어린이집 / 교도사목 / 교도사목회 / 구라사업 / 구로 나눔의 집 / 구산후생학교 / 까리따스 농장 / 꾸러기 동산 어린이 집 / 국립결핵병원 / 국제가톨릭형제회 /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 그리스도의 성혈흠숭수녀회 / 기아 일시 보급소 / 김기봉 / 김수환 / 김효주 아녜스의 집

가명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쪽)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보통학교. 약현성당에는 이미 1895년부터 약현서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실시해 왔으며 1901년에는 두세(Doucet)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에는 남자학교 건물을 새로이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학교라고 하였다. 이들 2개의 학교는 1909년 가명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는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27년 가명 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하여 폐교되었다.

1895. 약현성당 어린이 교육 (4쪽 가명학교)

1901. 두세(Doucet)신부 여학교 설립 (4쪽 가명학교)

1906. 약명(藥明)학교 남학교 설립 (4쪽 가명학교)

1909. 가명학교로 통합 (4쪽 가명학교)

1919. 가명보통학교로 승격 (4쪽 가명학교)

1950. 6. 25 동란으로 폐교 (4쪽 가명학교)

(참조 1927 가명유치원 신설) (4쪽 가명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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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근로자회관 (영) Catholic Worker's Center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5쪽)

사회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에게 각종 문화적인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가톨릭이 설립, 운영하고 있는 사회복지기관으로 노동자에 대한 노동교육을 행하고, 노동자들에게 숙식 및 회합실, 행사장을 제공한다.

1969. 안양 근로자 회관 설립 (15쪽 가톨릭근로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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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노동청년회 (영) Jeunesse Ouvriere Chretienne /Young Christian Word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쪽)

청년노동자로 구성되어 청년노동자들과 함께, 청년노동자들의 손으로, 청년노동자들을 위하여 노동계를 그리스도적인 생활양식으로 만들고자 하는 단체로서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세가지 성격을 갖고 있다.

첫째, 일상생활을 통하여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둘째, 하루하루의 생활환경 속에서 동료노동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수련을 쌓아야만 한다.

셋째, 청년노동자들에게 공동적으로 해결 되어야 하는 문제에 있어서나 일치되어야 할 상황속에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청년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벨기에의 가르딘(Joseph Cardijn)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1925. 교황청 인가 (16쪽 가톨릭노동청년회)

1958. 11. 16 간호원 9명과 박성종 지도신부가 함께 결성 (16쪽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노동여자청년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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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농민회 (영) Catholic Farmaer's Move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쪽)

농민 스스로의 단결과 협력으로 농민의 권익을 위하고 인간적 발전을 도모하며, 사회정의의 실현을 통한 농촌사회의 복음화와 인류공동체 발전에 기여함으로 1954년 유럽의 8개국 18개 운동단체들이 가톨릭 농민회 국제연맹(Mouvement International de la Jeunesse Agricole et Rural Catholiques)을 창설하였다. 1958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으며 벨기에 루벵에 국제본부가 있다.

한국가톨릭농민회는 1964년 10월 가톨릭노동청년회의 '농촌청년부'로 시작하여 1966년 10월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J.A.C.) 창립총회를 가진 후 1970년 9월 제7차 가톨릭 농민회 국제연명(MIJARC) 총회에 대표자를 파견, 정회원국으로 가입함과 아울러 1972년 3월 제 3차 전국 대의원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한국 가톨릭농민회'로 정식 출범하였다. 그 뒤 같은 해 10월 바티칸 소재 국제가톨릭농촌단체협의회(I.C.R.A.)에 가입하였다.

첫째, 농민문제의 기본문제인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지실태조사를 실시하여 그 해결을 촉구하는 한편 농민의 토지상실, 농촌오염, 투기자본의 농토잠식, 부실경지정리로 인한 문제 등으로부터 농민보호활동을 추진하며 영세한 농업구조가 안고있는 불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각종 협동활동을 추진하여 협동의식을 높인다.

둘째, 농산물에 대한 정당한 값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활동한다.

셋째, 농업관계 조합장 선거제 실시등 실제적인 조합운영의 활동을 제시한다.

네째, 민주적인 농업정책이 실현될 수 있도록 법적인 보장을 위한 농림관계법의 공청회를 유관 단체와 함께 개최하여 자주적인 농민의사와 법이 잘 화합될 수 있도록 활동한다.

다섯째, 농민들의 진정한 생산문화를 찾을 수 있도록 농민문화부활을 위한 활동을 한다.

1973. 가톨릭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에 가톨릭농민회 가입 (16쪽 가톨릭농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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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농아선교회 (나눔지 17호 3쪽) - 1983. 1. 15발행

1983년 현재 명동성당에 교육관 105호에 적을 두고 있는 서울대교구 가톨릭 농아선교회는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성격을 모색하는 일환으로 1982년부터 명동성당 내에 통역미사를 시작하였으며 세종로 성당에 주일학교 초등부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또 공동체 의식을 나누고자 수사님의 지도아래 매 주일마다 계성여중 교실에서 신자재교육을 실시하고 있고 예비자 교리시간도 마련하였다. 수화교육 이수자들로 구성된 반딧불회와의 긴밀한 협조속에서 선교회의 활동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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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8쪽)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이어받아 자선과 의료사업으로 지역사회 주민에 대한 보건증진에 이바지하는 한편 유능한 의료인을 양성, 연구를 통한 의술 향상으로 의학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여 1935년 3월 11일 경성구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설립한 병원이다.

1935. 3 당시 경성부 영락정 1정목 39번지(현 중구 저동1가 39번지)에 소재한 무라까미(村上)병원을 인수하여 성모병원으로 개칭, 초대 병원장에 박병래 박사가 부임 25병상으로 시작 (18쪽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1946. 9. 23 현 산업재해병원이 위치한 생산사립병원 사토오병원을 인수 (18쪽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1954. 4 성신대학에 의학부가 신설 (18쪽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1955. 10 성신대학 의학부 제1부속병원으로 인가 (18쪽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1959. 2 성신대학이 가톨릭대학으로 교명이 변경, 가톨릭대학 의학부 제1부속병원으로 병원명을 바꿈 (18쪽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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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맹인 선교회 (나눔지 18호 2, 3쪽) - 1983. 3. 15 발행

맹인의 복음화와 맹인 선교자로서의 자질 개발과 맹인의 선교활동을 지원하고 점자 및 녹음 테이프 서적을 출판, 보급하므로써 맹인의 독서 생활에 기여하는 동시에 맹인의 재활 및 복지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서 1979년 4월 13일에 창립하였다. 시행중인 사업은 맹인미사와 점자 강습회, 녹음도서관을 운영하며 맹인의 원할한 사회참여를 목적으로 한다.

1979. 4. 13. 가톨릭 맹인 선교회 발족 (나눔지 17호 2, 3쪽) - 1983. 3. 15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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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사회복지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4쪽)

위기에 처해있는 이웃을 도움으로써 복지사회 구현에 기여하고 하느님 나라에 모든 사람이 동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1976년 5월 1일 발족한 서울대교구의 복지기관

첫째, 서울교구 내의 사회사업기관들 간에 서비스의 통합 조정의 기능을 맡아 효과적으로 돕는 일,

둘째, 사회복지 서비스의 기능이 미개발인 분야에 대해서는 직접 그 기능을 제공하고,

셋째, 새로운 프로그램의 개발사업을 추진하는 동시에 인력 개발을 추진확대해 가는 일

1976. 5. 1 가톨릭사회복지회 발족 (24쪽 가톨릭사회복지회)

1976. 10 결핵요양소 '시몬의 집' 개설 운영 (24쪽 가톨릭사회복지회)

가톨릭사회복지회 (나눔지 1호 4쪽) - 1976. 9. 27발행

각나라 각지방마다 가톨릭복지활동에 대한 조직이나 명칭은 꽤나 다양하지만 그 나름대로 연합체를 이루며 국제 까리따스안에 연결되고 서로 협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인성회가 주교회의 산하기구로 발족되어 있고 각 교구에는 가톨릭사회복지회, 사회사목위원회, 인성회 등 이름은 달라도 엇 비슷한 활동을 맡고 있으며 전국적인 유대관계를 이루려고 한다. 서울교구에서는 당분간 거교구적 기구의 창설을 뒤로 미루게 되며 앞으로 교구내의 복지활동을 파악, 연결, 조정하며 북돋는 것과 밖으로는 국내외 여러 기구들과 협력관계를 맺는것이 우리의 급선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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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사회운동 (영) Catholic Social Move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4쪽)

가톨릭 교회는 인류구원의 보편적 성사로서 모든 인간의 구원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이 보편성을 뜻하기 때문에 교회는 그 누구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는 그 본질이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6) 이며, 사회의 누룩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 사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구원의 표지로서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육화(肉化)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귀중한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특히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을 더욱 사랑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교인의 구원의 기준은 보잘 것 없는 이웃에 대하여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마태 25:31-40).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그 임무는 사랑의 실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교회의 역사를 보면 사랑의 공동체의 기능보다도 전례의 공동체라는 기능이 더 많이 드러난 것 같다. 환언하면 신앙을 통한 자기 영혼의 구령에만 집착하여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교회의 현대화 과정속에서 가톨릭 교회는 사회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황 레오 13세의〈Rerum Movarum, 노동헌장, 1891〉이후 많은 회칙을 통하여 버림받은 자,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억압당한 자들에 대하여 교회는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를 강조하여 왔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을 위한 사목, 농민을 위한 사목, 병자나 노인을 위한 사목이 활발히 전개되어 왔으며, 특히 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사회적 예언직이 성실히 수행되어 왔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사회운동은 넓게는 모든 사회적 분야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는 정의·평화운동, 노동자·농민을 위한 운동과 각종 구조사업·의료사업·교통사업 등 사회복지사업으로 구별할 수 있다.

1. 정의평화운동

2. 노동운동과 노동청년회 : 이 운동은 1925년 카르디안 추기경이 "남녀 청년 노동자는 노예가 아니다. 그들은 기계도 아니며 동물도 아니고 오직 하느님의 아들 딸이다. 그들은 생을 잃은 죽은 존재가 아니며, 미래의 인간도 아니고, 오로지 하루하루 생을 영위하는 오늘 여기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인간성과 더불어 천상의 존엄성을 띤 하느님의 귀여운 자녀들이다"라는 정신으로 창설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신장시키기 위해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부터였다. 1960년대 인천에서 전 미카엘 신부에 의해 가톨릭 노동청년회(JOC)가 창설된 이후 각교구로 확산하여 교구단위 또는 본당단위의 가톨릭 노동청년회가 조직되었다. 가톨릭 노동청년회의 초기활동은 주로 교육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965년 강화도의 심도직물에서 노동청년회에 가입한 노동자에 대한 부당해고이후 가톨릭 노동청년회의 활동은 보다 적극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71년 영창실업 사건이 일어나자 가톨릭 노동청년회는 억압받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관여하였다. 1972년에는 삼림식품사건, 한국모방 퇴직금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에도 가톨릭 노동청년회는 유린당한 노동자의 인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눈물겨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1973년의 광진섬유 사건 때도 가톨릭 노동청년회의 활동은 대단하였다. 1975년 1월에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특히 가톨릭 노동청년회의 총재주교였던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지주교의 석방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77년 1월 15일 원주교구 가톨릭 노동청년위원회 연합회는〈우리의 주장〉이라는 노동자의 인권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가톨릭 노동청년회의 활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인천 동일방직 사건이었다. 1976년 4월 인천에 있는 동일방직주식회사는 가톨릭 노동청년회의 활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JOC의 위원을 부당해고 하였다. 이에 항의하여 가톨릭 노동청년회원들은 단식투쟁을 감행하고 소위 '똥물사건'까지 당하면서도 용감하게 투쟁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78년 4월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노동자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한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한국 천주교 정의 평화위원회도 그리스도교인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 뒤 1978년에 마산 자유수출지역 사건과 태평섬유분회사건이 일어났고, 1979년에는 원주제사 사건과 충남방적 종교탄압 사건 등이 일어났다. 이 때에도 노동청년회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복음적 정신으로 큰 활동을 벌여 노동자의 인권을 위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요약컨데 한국 천주교회는 노동청년회를 중심으로 가난하고 버림받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그 사명을 다함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3. 농민운동과 가톨릭 농민회

4. 기타 사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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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야학연합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9쪽)

가톨릭 교회에서 주관하는 근로청소년을 위한 야학교의 연합단체. 대학생 및 가톨릭 노동청년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직업청소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주기 위하여 서울대교구 각 본당내에서 시작된 야간학교가 1980년 5월 15일 효율적인 운영을 위하여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83년 현재 서울 대교구내 총 8개교가 가입되어 있으며 역촌동본당 내 성 분도학교가 그 대표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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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중앙의료원 자선진료소 (나눔지 63호 3쪽) - 1985. 9. 7발행

가톨릭이 이땅에 전래되어 200년의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전교사업 못지않게 활발하게 전개해온 또하나의 활동으로 의료사업을 꼽을 수 있을것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이 가난한 이에게는 생명의 양식을, 그리고 육신이 병든 이에게는 따뜻한 치유의 손길로서 질병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병자들의 빛이 되었듯이 가톨릭에 있어서 의료사업은 생명의 존엄성의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를 갖고 행하여져 왔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실리와 이익을 추구하는 하나의 기업으로 전락하여 다른 일반병원 못지않게 넘기힘든 높은 문턱을 유지하여 왔다.

명동 성모의원은 잘 알려져 있지만 명동 성모병원과 산재병원으로 연결된 구름다리 넘어 길건너 한쪽에 위치한 이 자선 진료소를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않다. 1964년 설립된 자선 진료소는 산발적이고 비전문적으로 실시되어온 구료사업을 조직적이고 전문적으로 실시하여 효율적인 구료사업으로 도모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과 취지가 있다. 대상은 일반 극진환자, 의료보호 환자, 학술상 희귀병을 가진 극빈환자, 그리고 다른병원에 입원 중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치료를 중단해야 하는 환자들에게 혜택을 주고있다. 어떤 경로로든 환자가 찾아오면 사회사업가가 대상자의 적격여부를 면접과 가정방문을 통해서 선별한다. 대상자로 선정된 환자라고 할지라도 진료비 전액을 지불해 주는 것은 아니다. 환자가 부담할 수 있는 능력만큼 부담 시키고 그 차액을 보조해 준다. 그러나 대부분이 극빈자이기 때문에 환자부담은 소액일 뿐이었다. 84년의 경우 입원과 외래, 이동진료소를 포함하여 자선진료소를 이용한 환자수는 모두 2,980명으로 1억5천6백여만원의 의료비가 지급되었다. 자선진료소의 의료비는 가톨릭중앙의료원에 의해서 지급되어진다. 그러나 이곳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생활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퇴원 후 또는 입원시에 의료적인 도움외에 여러가지 복합적인 가정문제를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환자들 뿐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나서서 의료혜택을 베풀고 있는데 시립남부 부녀보호소, 마포구 도화동, 성나자로 마을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지역사회 보건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가톨릭 외대생들로 조직된 하계진료반은 매년 무의촌 지역을 방문하여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전하고있다.

1964. 가톨릭중앙의료원 자선진료소 설립 (나눔지 63호 3쪽) - 1985. 9. 7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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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피부과 의원 (재단법인 대구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 1998. 5. 20일 가톨릭 피부과 의원 답신에 의거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환자의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덜어주고 피부진료를 통해 나환자를 조기발견 치료하여 그들의 사회복귀를 도와주며 나병등으로 급증하는 장애인들을 위한 의료적, 사회적 재활사업을 통하여 국민보건향상에 기여하고자 대구시 봉덕동에 서정길 대주교가 설립하였다.

과거 일제통치시대 나환자는 강제 수용되었는데 해방과 6·25 사변 등 사회혼란으로 나환자들은 수용소를 뛰쳐나와 거리를 배회하며 유랑구걸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이러한 나환자들의 참상을 알고 계시는 서정길 대주교님께 어느 나환자가 찾아와 구호를 요청하게 되자 교구청에 근무하고 있는 오지리인 뤼듸 신부에게 이 일을 맡아 나환자를 도와주라는 것이 동기가 되어 천주교 대교구 구라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루듸 신부는 자기본국을 통하여 자선사업단체인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에 재정지원을 얻게되어 나환자를 위한 구라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우선 나환자들이 구걸하지 않고 일정한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의성 신락원과 고령 은양원 두곳에다 정착장을 마련하였다. 이때는 환자의 치료도 중요하였지만 이들이 당장 거처해야 할 주택과 먹을 식량이 더 긴박한 문제였으니 구호 사업과 치료사업을 동시에 전개해야할 실정이었다. 나환자의 치료를 위해 이들을 간호하며 돌봐줄 사람을 구하던 차에 마침 멀고 먼 이국땅 오지리에서 간호원(엠마 프라이싱거) 한분이 지원하게 되어 그를 받아들여 이곳으로 오게하였다. 나환자도 일반환자와 같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을 수 있는 현대식 병원을 건립하고자 부지를 물색하고 이곳에다 대지를 마련하여 막상 병원을 세우려 하니 주민들이 반대하여 이명우 부주교를 비롯하여 서순봉 교수, 지방관서장 등이 주민들을 설득시켜 합의를 보고 나환자를 수용할 때에는 담장을 쌓아 입원환자는 병원 밖으로 못다니도록 한다는 주민들의 요구조건을 들어 병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나환자의 입원치료를 위한 병실이 건립되자 고령 은양원에서 나환자를 돌보고 있던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가 이곳 병원으로 숙소를 옮겨 병실을 관리하게 되고 대구 가톨릭 간호협회와 경북의대 부속병원의 협조를 얻어 입원환자의 진료와 정착장(은양원, 신락원) 환자도 매일 정기 순회진료를 하게 되었다. 당시 재정사정은 빈약하여 병원 건립 뿐만 아니라 운영비, 인건비, 치료약품까지 외국원조단체인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었다. 또한 N.C.W로 부터 밀가루, 옥분, 헌옷 등 구호물자가 전달되어 입원환자 부근에 살고 있는 어려운 재가 나환자에게 배분해 주었다. 초창기 이곳은 병원이라기 보다는 나환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용시설에 불과한 형편이었다. 병원 본관건물이 세워지고 엠마 프라이싱거 여서께서 원장직을 맡게된 후부터는 병원형태로 차츰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을 포함한 많은 외래환자들이 병원을 이용하게 되었도 그 중 여러명의 초기 나환자를 발견하여 치료해줌 으로서 나병퇴치에 좋은 성과를 얻게 되었다. 이곳에 장기수용되어있던 나환자는 경남 산청병원으로 이송하고 이곳 병실은 단기 입원실로 바꾸어 많은 나환자에게 치료의 혜택을 고루 줄 수 있도록 입원 대상을 넓혔다. 또한 엠마 원장은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와 서독구라협회 영국 등으로부터 우리나라 나병관리사업에 필요한 지원을 많이 얻을 수 있어 나사업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 피부과 의원은 일반 외래피부환자 진료수입과 릴리회 성금 등으로 자체에서 구라사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은 퍽 자랑스러운 일이다. 다행히 최근 나병으로 발견되는 신환자 발생이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가톨릭 피부과 의원은 오직 나환자들에게 각종 치료의 혜택과 생계대책을 마련하는 등 설립자의 정신에 따라 성실히 나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96년 9월, 35년동안 가톨릭 피부과 의원을 이끌어 왔던 엠마 프라이싱거 원장이 정년으로 퇴임하고 96년 10월 부터는 3대 원장 채 영희(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엠마 프라이싱거 전임원장의 업적과 정신을 유지,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사회복지법인 엠마재단을 설립하였고 동 법인에서는 장애인재활시설 및 재활병원을 운영할 계획에 있으며 이로 인해 나병등으로 인하여 복합장애를 지닌 장애인들을 위하여 보다 양질의 재활의료서비스를 제공하므로써 그들의 사회복귀를 도울 것이다.

1960. 대구시 봉덕동에 가톨릭 피부과 의원 설립 (재단법인 대구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1963. 가톨릭 피부과 의원이 대구시 북구 읍내동으로 이전 (재단법인 대구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소재지 : 우 702-200 대구 광역시 북구 읍내동 1140/ 전화 053)320-2000/ 모사전보 053)32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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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종합사회복지관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4호 106쪽) - 1995년 가을 발행

지난 94년 12월 28일에 개관한 "가흥종합사회복지관"은 영주시민들로부터 천주교 안동교구룰 통하여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위탁운영하고 있다. 시민운동장 앞, 가흥주공임대아파트 단지내에 자리잡은 복지관은 영주시민 전체를 위한 종합사회복지관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맞벌이 부부가정을 위한 어린이집, 지역아동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한 꿈나무 공부방, 샘물독서실, 청소년 어울마당, 바람개비 캠프, 지역청소년들을 위하여 푸른나무 공부방, 샘물독서실, 청소년 어울마당, 동아리 모임 등 다양한 집단활동 및 개별상담도 실시하고 있다.

컴퓨터 교실은 국교생, 청소년, 주부들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주부들을 위한 꽃꽂이, 에어로빅 교실도 좋은 호응을 얻고 있으며 노인들을 위하여 은빛 노인정, 노인대학, 체조교실, 물리치료, 무료진료, 한글교실을 운영하며 노인문제의 사전예방과 심리적 안정도모, 건강예방 및 진료, 사회교육 등을 실시하여 노인복지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복지관을 직접 이용하지 못하는 무의탁노인이나 재가장애인, 소년소녀가장 등을 위한 반찬서비스, 가사봉사 서비스, 생활용품지원, 생계비지원, 푸른나무 장학금 등의 재가복지사업도 시행하고 있다.

평소 이웃에 관심이 많은 분들께서 사랑과 봉사의 마음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기를 기대하며 적극적인 후원과 더욱 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기다린다.

"영주시의 삶의 질 높이기"에 일익을 담당하는 종합사회복지관으로서, 시민 스스로가 지역공동체 속에서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서로 도와가며 따뜻한 인정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불씨의 역할을 다하도록 계속 분투 노력할 것이며, 모든 시민들이 복지관을 내집처럼 찾아와 이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994. 12. 28 안동교구에 가흥종합사회복지관 설립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4호 106쪽) - 1995년 가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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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집 (예수성심시녀회의 복지시설) - 1998. 5. 15 김마리요셉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갈릴리 집은 발달 장애 아동의 조기교육을 위하여 1982년 미국의 메리놀회 안 예도 신부(Rev. Edward Wheland M.M)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발달이 늦어진 유치원 전의 아동들에게 특수교육을 실시하여 그들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동시에 현재 가지고 있는 장애정도를 줄이며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장애를 미리 예방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대상 아동은 정신지체, 다운 증후군, 언어장애, 자폐증, 학습장애아, 과잉행동등 발달 장애아들로서 사회적응훈련, 신변처리, 인지, 언어, 운동성 등을 영역별로 나누어 지도하는 것을 주요 교육내용으로 하고 있다. 프로그램은 portage Guide to Early Education을 기본으로 한다. 입학은 교육받기를 희망하는 부모님들과의 상담을 통하여 가능하며, 공·사립 특수학교의 유치부 입학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보통 1∼2년간 지도한다. 갈릴리 집의 정신은 장애아도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소중한 존재이며 사랑받을 수 있는 고유한 개성과 인격을 지니고 있음으로 이 어린이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충실히 기초를 닦아주고자 하며 그리하여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됨이 없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활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있다.

1982. 3. 15 갈릴리 집 설립 (예수성심시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360-220 청주시 상당구 사천동 25-36/ 전화 0431)212-4091/ 모사전보 0431)211-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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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리 의원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 1998. 3. 31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답신에 의거

60년대 초 강릉지역의 가난하고 열약한 지역에 후천성 질환, 특히 결핵과 영양실조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으나 이에 대응할 병원은 전무상태였다. 그 당시 도림병원과 명주의원외에 다른 의료시설이 없어서 춘천교구의 교구장 이셨던 퀸란 주교님이 호주에 있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을 초대하여 이 지역에서 의료봉사를하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3월에 강릉에 설립하였고 외래 의원으로 (1998년 현재) 하루 평균 10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갈바리 의원은 예수님의 치유의 현존을 모든이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65. 3. 갈바리 의원 개원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140-190 서울 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44/ 전화 02)754-9861/ 모사전보 02)757-3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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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리 호스피스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 1998. 3. 31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답신에 의거

강릉에서 사도직을 통하여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실현하기 위하여 호스피스 병동을 개설하여 특히 가난하고 외롭게 죽어가는 이들을 위하여 1981년에 설립하였다. 1998년 현재 12병상의 말기환자의 입원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말기환자를 가정방문하여 치료하고 있다. 1989년 폐원 되었다가 1996년 6월에 다시 재 개원 하였으며 갈바리 산 위에서 서 계셨던 마리아의 어머니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고 죽어가는 죄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 함으로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1981. 갈바리 호스피스 개원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1996. 6. 갈바리 호스피스 재 개원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140-190 서울 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44/ 전화 02)754-9861/ 모사전보 02)757-3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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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본당 江陵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1947년 성골롬바노회의 제라프티(Brain Geraphty, 池) 신부가 60여명 고아들의 양육을 위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를 요청하여 공순옥 마리 헬렌 수녀를 비롯한 4명의 수녀가 강원도 강릉에 있는 성심보육원에 파견되었다. 원아들은 대부분 남자 아이들이어서 이들에게 공부 이외에도 기술이나 밭농사를 가르쳤다. 한국전쟁 때에는 대구로 피난하여 원아들을 돌보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보육원 외에 본당에서 전교도 하였는데 점차 원아의 수가 줄어 1962년에 보육원을 폐원하고 전교만 하다가 몇 달 후에 전교 수녀들도 철수하였다.

1947. 8. 25 성심보육원아들의 양육을 위해 강릉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1962. 성심보육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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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말씀의 시녀회 (교회와 역사 85호 7쪽) - 1982. 8. 25발행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는 1964년 4월 10일 장화자(힐데갈드) 수녀에 의해 부산 동항 천주교회 구내에서 창설된 방인 수도회이다. 장 수녀는 독일문학을 전공키 위해 서독에 유학 중 영세입교하여 유학생의 신분으로 전교에 힘쓰다가 복음전파를 위한 수도회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학위 취득마저 포기하고 귀국했으며 그 후에도 몇차례 서독왕래를 거듭한 끝에 당시 부산지방에서 선교중이던 트라우너(Trauner, Anthony)신부의 지도로 마침내 이 수녀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같은 해, 같은 장소에 마리아회 수녀회가 창설되어 수녀원의 장소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은 한 곳에서 두 수녀회가 새로 발족할 수는 없다는 교구장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러한 사정으로 수녀원은 1967년 11월 21일 대전교구장 황민성(베드로) 주교의 배려로 대전시 대흥동에 자리잡게 되었다.

1967년 대전에 본원을 설치한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는 최초의 사목활동으로 교도소와 소년마을에 대한 선도사업, 문창동 본당에서의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수녀회에서는 본당사목(유치원 포함) 외에 갖가지 특수사목활동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데 그 중요한 것으로는 대전시내 각 군 부대에 대한 교리 및 성가지도, 각급학교에 강사 파견, 병원 및 벽지 의료기관에 대한 간호수녀의 파견, 교도소 및 소년원에 대한 전교활동, 양로원 사목, 농장에 대한 축산과 농경지도, 탁아소에 대한 봉사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공군 기지 교회, 제2사관학교생도 등에 대한 교리 및 성가 지도, 각 대학교 및 중고등학교의 강사 파견, 병원과 벽지 의료기관에 대한 월 1회 미사봉헌과 매주 마다 교리지도 등을 하고 있으며 수도회 자체사업으로는 양로원 운영과 농장경영을 하고있다.

1967. 11. 21 대전 대흥동에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 설립 (교회와 역사 85호 7쪽) - 1982. 8. 25발행

거룩한 말씀의 회 (교회와 역사 227호 15쪽) - 1994. 4. 25 발행

1964년 5월 10일 장화자(張和子, 힐데갈드. 이하 장 수녀로 약칭) 수녀에 의해 창설된 '거룩한 말씀의 회'는 한국에서 여자가 세운 최초의 수도회이다.

거룩한 말씀의 회는 먼저 자기 성화를 위하여 복음 삼덕인 청빈, 순명, 정결 서원과 회의 회칙을 기쁘게 실천하며 공동체 안에서의 수도생활을 일반 목적으로 하고 나아가 복음 전파를 특수 목적으로 하여 창설되었다.

특히 복음전파를 위해서는 첫째,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의 복음 전파와 특히 외국에 나가 있는 교포들의 영신 지도 및 선교를 위한 사도적 소명 이행에 많은 비중을 두어 수녀들을 양성하여 선교사로 파견하며 둘째,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영육간의 자선을 베풀되 특히 의지할 곳이 없이 소외된 노인들과 가족이 없는 허약자나 불구자들에게 보다 관심을 갖고 사랑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상의 창립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먼저 회원 각자는 본 주보로 성령께, 특별 주보로 원죄 없으신 동정 성모 마리아와 복음의 정신을 부흥시킨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청한다.

거룩한 말씀회의 정신이자 모토는 하느님이시며 '말씀'으로 강생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성령의 감도하심에 따라 적합한 방법으로 하느님 뜻에 맞는 봉헌된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하여 세상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교회의 뜻에 순응하여 주님의 시녀로서 마리아를 본받고 겅 프란치스코의 겸손한 종의 정신을 본받아 가난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즉 주의 여종과 선교사로서 그리스도 왕국의 번영에 이바지 함에 두고 있다.

1983년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 라고 하던 수녀회 명칭을 '거룩한 말씀의 회'로 개칭하였다. '시녀'는 본래 주의 여종이라는 의미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1983년 3월 7일 황민성 주교의 인준을 얻어 시녀라는 말을 생략하였다. 그러나 시녀의 정신만은 준수하고 이를 삶으로 실천하고자 한다. 1974년 4월 10월 25일 마산교구 합천본당을 기적으로 전국 7교구에 걸쳐 35개 본당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며 교도소와 목동 소년 마을에서 범죄 소년을 위한 봉사와 선도 활동을 시작으로 특수 사목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 교도사목

교도사목은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포로들에게는 해방을…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고" (루가 4, 18)라는 말씀에 근거한다. 1968년 5월 부터 대전시 중구 중천동 대전 교도소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매주 교리와 영신 지도를 담당하였고 교도소 측에서 요구할 때 종교 특강도 한다. 매년 부활과 성탄, 두 차례 영세 입교식을 하지만 예외적으로 영세, 견진성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재소자들의 영세자수는 천여 명에 이르며 신변 보증인이 되어 석방을 도와주고 재소자들의 가족도 돌보며 석방 후에도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계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소년원 사목

1970년 봄부터 법무부 측의 요청으로 소년원 감별소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0년부터는 역시 소년 범죄자 숙소이며 동시에 기술 학교인 소년 효광원을 담당하여 지금까지 봉사하고 있다. 19년 동안 교육, 성가지도, 상담, 교리 강좌, 레크리에이션, 비디오 관람, 성가경연대회, 운동경기 시합, 예술 발표회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밝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훌륭하게 적응하고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그동안의 노고는 모두 잊게 되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

⸃ 군사목

⸄ 성언의 집

⸅ 성언 양로원

⸆ 말씀의 집 (가정 방문실)

⸇ 당진 성모 병원

⸈ 해외 교포 사목

⸉ 본당 사목

이 외에도 충남 대덕군 진잠면 세동리 소재 성언 농장에 3명의 수녀를 파견하여 무직 농촌 부부에게 축산과 농경을 지도하고 1990년 5월 성언 농장에 피정의 집도 건립하였다. 본원에 유아원을 설치하여 현재 80명이 있으며 1979년부터 81년 까지 미군부대 봉사활동, 1992년 8월 25일 전주 성심 여자 중학교 교사 파견, 1993년 3월 4일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경리 수녀 2명 파견, 2월 8일 대전 가톨릭 대학 경리 및 관리를 위해 7명을 파견하여 활동 중이다.

거룩한 말씀의 회의 모든 사도직은 무엇보다도 기도가 언제나 뒷바침되는 활동이었다. 특별한 축일이나 국내외적으로 기도의 필요성이 요구될 때 그리고 원내 중대한 행사 전이나 기도할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24시간 성체 조배로 두 사람이 한 시간씩 교대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자비와 은총을 간구한다.

'거룩한 말씀', 만물을 존재케 하고 무한하게 하는 '말씀'을 수도회의 정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수도회.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조용하게, 역시 가난하고 조용한 모습으로 '말씀'의 신비로운 힘을 통해 창조를 계속 한다. 교도소, 소년원, 감별소, 성지원, 군인, 운전 기사 선교 등 특수 사목을 펼치면서 아울러 본당, 의료사업, 사회복지 사업, 방문 간호 등 그들의 손길을 반기는 곳이라면 지체없이 봉사한다. 특수 사목 분야, 참으로 어려운 활동이지만 그러나 수도회는 이곳을 영혼들의 황금어장이라고 한다. '말씀'이 지닌 부드러움과 자애, 사랑을 마음껏 펼치고 응답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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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장애인종합복지관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관리) - 1998. 5 경남장애인종합복지관 사회교육과 박해경님의 답신에 의거

경상남도장애인종합복지관은 장애발생 예방을 위한 계몽으로 장애를 극소화 하고, 상담, 치료, 교육 및 직업훈련을 통하여 재활에 기여하며 장애인들의 권익보호 및 그들의 종합적인 잠재능력과 기능을 개발하여 원할하게 활용할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지역사회의 한사람으로 자립자활의 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현 운영은 천주교 마산교구 사회복지법인『범숙』에서 하고 있다.

복지관을 이용하고자하는 장애인에게 접수면접, 각종 검사를 통해 장애원인, 유형, 정도와 잠재능력을 진단하고 평가하여 재활방향을 모색한다.

전인재활사업

Ⅰ. 의료재활사업

장애의 조기 발견, 예방을 위하여 소아정신과, 재활의학과의 전문의 진료와 신체적 기능회복, 치료를 위한 물리치료, 작업치료, 언어치료, 식도발성교육, 보장구대여 등을 실시한다.

Ⅱ. 교육재활사업

잠재능력 개발과 건강한 사회인으로 생활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 배양을 목표로 정신지체인, 학습장애아, 발달장애아 등에 대한 유아, 유치부 과정의 조기특수교육을 실시한다.

Ⅲ. 직업재활사업

장애인의 직업적, 경제적 재활능력을 최대한 개발하여 소득있는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직업평가, 취업알선, 지원고용, 직업적응훈련, 보호작업훈련, 자립작업장 운영 및 재가장애인을 위한 재택고용을 실시한다.

Ⅳ. 사회심리재활사업

정서, 행동적 문제를 수반하는 아동의 행동수정 및 부적응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심리치료와 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장애 수용, 재활의지 고취 및 환경적응력 배양을 위한 개별상담과 재활전화상담, 종교활동, 운동회, 병영훈련, 가족캠프, 겨울학교, 성탄제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사회교육 및 홍보조사연구사업

Ⅰ. 사회교육사업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올바른 사회통합을 이루도록 하며 관련종사원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컴퓨터 교육, 장애아동 부모 및 장애인 관련기관종사원교육, 실습생지도 등 다양한 사회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Ⅱ. 홍보조사연구사업

복지관의 여러 사업들을 홍보하고, 비장애인으로 하여금 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자 관보발행, 대외홍보, 견학, 도서실 및 자료실 운영, 장애예방계몽교육, 장애관련 계몽캠페인 등을 실시하며 조사연구사업으로 사례 연구, 장애인 복지에 관한 각종 자료조사 등을 실시한다.

1992. 10. 22 경남장애인종합복지관 개관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관리)

1993. 1. 1 경남장애인종합복지관 재가장애인순회재활서비스센터 운영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관리)

1993. 7. 1 경남장애인종합복지관 진주 분관 개관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관리)

소재지 : 우 641-270 경상남도 창원시 봉곡동 179-1/ 전화 0551)66-2223∼4/ 모사전보 0551)66-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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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수녀회 敬老修女會 (영) Little Sisrers of Poor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9쪽)

1971년 한국에 진출한 수녀회, 예수의 진복팔단 정신을 생활 방침으로 1840년 쟌느 주강(Jeanne Jugan)수녀가 불쌍한 한 할머니를 간호함으로써 시작된 이수녀회는 교황청 직속 수도단체로서 양로사업만을 위해 활동하며 프랑스 브르타뉘(Bretagne)주 생폴(Saint Paul)에 본부가 있다. 1971년 9월 한국에 진출한 수녀회 회원들은 명도원에서 언어교육을 마친 뒤 1973년 7월 청주교구에서 운영하던 성심원을 인수받아 활동하기 시작함으로써 한국지부가 설립되었다. 초대 지부장으로는 브뤼네(Bunet) 수녀가 취임하였다.

1973. 7 경로수녀회가 청주교구로부터 성심원을 인수 받음 (69쪽 경로수녀회)

경로수녀회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통권 6권 36쪽) - 1996. 11. 8 발행

경로수녀회의 본 명칭은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Little Sisrers of Poor)이다. 명칭은 한국에 들어오면서 가난한 노인들을 섬기는 사도직임을 감안하여 '경로수녀회'라고 부르게 되었다. 경로수녀회는 인간의 존엄성이 점점 상실되어 가고 "품위있게 죽을 권리"라는 명목으로 안락사를 권장하는 현대의 비극앞에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라고 가르치신 창립자 쟌 주강의 교훈을 따라 묵묵히 정성을 다해 소외된 노인들을 존경과 사랑으로 모시고자 노력하는 수도회이다. 현재 수원의 "평화모후원"과 청주 성심원에 2개의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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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동 유치원 (교회와 역사 226호 17쪽) - 1994. 3. 25발행

1984년 3월 19일 노틀담 수녀원 건물 공사를 위한 사무실로 사용했던 곳을 개조 수리하여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원을 열어 인근의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어린이들 20여명과 함께 3월 23일 임시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그 후 1985년 2월 26일에 유치원 인가를 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4. 3. 23 노틀담 수녀회 계산동 유치원 설립 (교회와 역사 226호 17쪽) - 1994. 3.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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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국민학교 (한국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792쪽)

계성국민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은 공식연도는 1909년이나 구한말에 세워진 발간된 [경향잡지]와 같은 교회잡지에 이미 1906년부터 계성학교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975년까지 는 1906년을 개교연도로 삼고 개교 기념행사를 가져왔다. 1882년부터 1883년도 조선교구 통계표에 당시 종현본당 신부였던 블랑 신부가 "1882년 본당 관하에서 운영되던 학교가 하나있고 11명의 학생이 재학중이었다,"라고 기록한 것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교구 6대 교구장이던 리델 (Felix Ridel, 李福明, 1830-1884) 주교가 1882년 9월, 종현성당 관하 인현동에 세운 초등교육기관인 인현서당을 말하는 것으로 계성국민학교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따라 최종적인 고증을 거쳐 개성국민학교의 개교 원년을 1882년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 1883년 8월에는 인현서당을 종현으로 옮겨 종현성당, 한한학원 또는 종현학원 등으로 불렸는데 이 서당은 천주교회의 전액 부담으로 운영되면서 1886년에는 40명 가량의 학생들에게 국어와 한문 읽기, 쓰기 등을 가르쳤다. 그 후 1906년에 본당신부였던 프와넬 (Victor Poisnel, 朴道行, 1855-1925) 신부의 적극적인 재정 후원과 최봉섭의 협조를 얻어 종현학원을 개편 확장하여 비로소 신식교육기관으로 탈바꿈 하였다.

그 후 본당 교육사업의 발전을 위해 1924년 4월 17일 남·여 학교를 통합하여 총독부로부터 정식 6년제 계성지정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이때부터 공립상급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졸업장을 줄 수 있게 되었다. 2년 뒤에는 계성보통학교 남자부 교사를 2층 양옥으로 건축하였으며 교실부족으로 이듬해에 또 증축 하였다. 1924년에는 보호자회를 설립하였고 1928년에는 동창회를 창립하여 학교발전을 도모하였다. 이와같은 내외적 성장과정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학교 발전을 도모하였으며 김 세리나 수녀, 박영숙 데오판 수녀등이 오랫동안 교사로 헌신하였다. 1938년 4월, 경성계성심상소학교로 교명을 개칭하였다. 한편 일제의 탄압으로 나라안의 모든 학교가 국어교육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을 당시에도 계성학교는 방과후에 종교교육을 통해 한글을 계속 가르치기도 하였다. 1941년 4월, 계성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어린이들의 종교교육에도 주의를 기울여 주 1시간의 교리교육을 실시, 희망자에게 세례를 주어 1972년부터 1989년까지 547명의 영세자와 282명의 첫영성체자를 내었다. 앞으로도 예상되는 학급당 인원수의 감축에 따라 수업료의 증가요인이 내재되어있고 사립학교라는 특성에 따른 여러 가지 어려움들도 없지는 않으나 종교적인 일체감에 의한 화합분위기와 오랜역사와 전통속에서 긍지있는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다.

1882. 계성국민학교의 전신인 인현서당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7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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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여자고등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797쪽)

계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가 설립된 것은 1944년 8월 10일의 일이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고성순 양셀모 수녀와 고두희 레몬다 수녀가 학교교사로 파견되어 출퇴근 하였고 1945년 고성순 수녀가 장질부사로 사망하자 대신 강봉련 제노베파 수녀가 부임하였다. 당시에는 이미 성당 구내에 계성유치원, 계성국민학교, 계성여학원 등 세 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여기에 학교를 세울 뜻을 굳힌 것은 식민지 지배 말기에 이르러 일제가 의무교육을 방지하여 사립국민학교를 공립으로 흡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학교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성당 구내에까지 일본인들의 간섭이 뻗치게 되어 자주적인 교육이 불가능해 질 것임으로 차제에 국민학교 남자부는 폐지하고 여자부만을 살려서 동성상업고등학교(현 동성중고등학교)와 맞먹는 여학교를 세워 교육구국과 가톨릭적 여성의 양성이라는 뜻을 펼치기 위해 학교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1957년 5월에 계성여학교의 운영권이 서울교구로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로 이관되자 수녀원에서는 학교발전을 위해 한층 더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1958년 10월 11일에 성지관의 낙성을 보았다. 성지관이 낙성될 무렵의 학생수는 중학교 15학급에 930명, 고등학교 10학급 583명으로 모두 1,513명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도 계속적인 학급증설에 불가피하게 되어 1961년에는 본관 3층이, 1963년에는 성지관 4층이 증축되었고 1973년에는 성미관이 완공되었다. 한편 내실에도 힘을 기울여 훌륭한 교사진의 확보를 중요하게 여겨서 제9대 조규옥 마리 안젤리카 교장은 교사들의 처우를 점차적으로 개선하여 타학교에 비해 파격적인 대우를 해 줌으로써 훌륭한 교사들을 많이 영입할 수 있었다. 1969년 3월에 중·고교가 행정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중학교 초대 원장으로 고영희 뻬르뻬뚜아 수녀가 취임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각종 교육제도의 개혁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고 이 영향으로 학교도 여러면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고등학교 평준화로 학력면에서뿐만 아니라 종교교육면에서도 이질화가 나타났으나 그러한 여건 속에서도 종교교육의 활성화에 꾸준히 힘써 교직원의 대부분이 입교하였고 매년 세례를 받는 학생도 증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을 건학이념으로 삼아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성장해 오던 계성여자중학교는 좁은 구내에서 중고등학교가 함께 생활하게 됨에 따라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과 과다학급 운영의 어려움을 덜고 고등학교만이라도 건실하게 키워가야 하겠다는 결단아래 개교한지 43년만인 1987년 2월 28일 제38회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이와같이 학교발전 계획에 따른 중학교의 폐교와 교사정비 작업이 1987년 초에 이르러 마무리되자 교육의 내적충실을 위하여 교직원과 학생 모두가 한마음으로 서로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학교장은 모두 수녀가 맡게 되었으므로 교장의 교체가 일반 사학에 비해 잦은 편이었다. 그러므로 교장의 장기근속에서 오는 어떤 압력이나 파벌조성 등 흔히 있을 수 있는 사학의 질병이 없는 장점도 있었지만 반면에 교육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되기 쉬운 결함도 없지 않았다. 교사 수녀들로는 학교 초창기부터 소수의 대학 출신 수녀들이 파견되었으며 종교교과와 수녀들이 전공한 일반 학과의 과목을 가르쳤다. 이밖에 학교의 도서실과 서무·경리직도 수녀들이 맡아 알뜰한 운영으로 학교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수녀들은 계성 초창기부터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거쳐 학교를 재건하고 학교의 내외적 성장과 발전을 이루기까지 교사들과 함께 열심히 일했으며 특히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직영의 교육기관이므로 교회의 교육목적을 소홀히 함이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품성교육과 종교교육에 충실을 다하였다. 현재 교장수녀를 비롯하여 13명의 수녀들이 교사로서, 혹은 서무나 도서실 등 각 부서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

1944. 8. 10 계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797쪽)

1957. 5 계성여자중고등학교의 운영권이 서울교구로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로 이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7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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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유치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1쪽)

계성유치원은 1925년 계성보통학교 유치반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명동본당에서 박종기 스콜라스티카 수녀가 예비자반을 운영하며 이 예비반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읽고 쓰는법을 가르쳤는데 반응이 좋아 곧 유치반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교실부족으로 곧 중지되었다가 1927년에 교실이 증축되면서 1928년부터 다시 유치원생을 모집하여 학교부속사업으로 운영해 왔다. 그 후 1935년에 3,000원의 경비를 들여 원사를 낙성하고 9월 2일부터 원아를 모집, 9월 8일에 개원식을 갖고 정식으로 출발하였다. 여기에 최초로 부임한 수녀는 김정녀 울프러시아수녀 였다.

1941년 9월 18일 화재로 유치원이 전소하여 종현성당 강당 지하실에서 수업을 하면서 복구작업에 착수하여 1942년 봄에 새 원사의 낙성을 보았으며 원아들의 다양한 재능은 전국에 알려졌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폐원되었다가 1954년 4월 5일부터 다시 그전 국민학교 자리에서 문을 열었으나 그 자리에 성신대학 의학부(현 가톨릭 의과대학)가 개교함에 됨으로써 또 다시 폐원되었다.

그 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계성여중고, 국민학교를 직영하게 되면서 유치원 설립의 필요성을 느껴 1966년 10월 28일 당시의 관구장 방 아녜스 데레즈 수녀를 설립자로 하여 재설립 하였고 1967년 3월 7일 계성여중고 탁구장으로 쓰던 건물을 개조하여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71년 3월 1일 계성국민학교 지하 1,2층 348.05평에 최신시설을 갖춘 새 원사로 이전하였다. 1972년 5월 23일 재단법인 천주교 쌘뽈수도원 유지재단으로 설립자 명의변경이 이루어졌다. 1986년 계성국민학교 보수공사 이후 계성여고 생활관으로 이전, 원아수를 줄이고 임시로 사용하였다. 1987년 8월 15일부터 용산의 현 위치에 634.23평에 이르는 계성유치원과 함께 437.84평의 수녀원 건물의 착공작업에 들어가 1988년 12월 말에 준공을 보고 1989년 신학년부터 8학급 240명의 원아를 모집하여 새로운 최신식 시설을 갗추고 원아교육에 임하고 있다.

수녀원 직영인 유치원인 만큼 다른 어떤 유치원에서보다 창의적이고 수도회 고유의 카리스마를 실천하는 교육기관이 되도록 유념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1925. 계성보통학교 유치반으로 개성유치원 시작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1쪽)

1935. 9. 8 계성유치원 개원식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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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영) Order of the Friars Minor Conventual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2쪽)

1223년 이탈리아 중부의 한 작은 도시 아시시에서 성 프란치스코에 의하여 창설된 수도회.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가 되어 겸손되게 주 그리스도의 표양을 본받아 생활하였기 때문에 '작은 형제회'라고 하였다. 꼰벤뚜알(Conventual)이라는 말은 '공동' '집합'이라는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같이 모여사는 것을 의미한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이 명칭을 받은 후 점차 보편화 되었는데 1517년에는 레오 10세의 대칙서 Ite et vos에 의하여 프란치스코회 엄격주의파와 구별, 이 수도회 고유의 명칭으로 되었다. 꼰벤뚜알회는 초기부터 은둔생활과는 달리 모여 사는 수도자들의 단체였다. 이 수도회의 정신은 곧 창설자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이며, 수도자들은 교회안에서 가난하고, 단순하며 겸손한 방법을 통하여 화기애애한 형제 공동체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파견되어 예수를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그의 왕국을 확장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한국진출 : 프란치스코 제2회의 한 가족인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58년 가을이었다. 부산에 본원을 두고 점차 대구, 서울, 일광, 기장(부산) 그리고 부평(인천)으로 활동영역을 넓히면서 주로 전교사업, 영성사업(성모의 마을 및 피정의 집), 구라사업, 육아사업 및 성소육성에 주력해 왔다.

서울 한남동 707번지에 자리잡은 꼰벤뚜알 수도원 분원의 현재 원장은 나 빅토리오 신부이다. 외국에서 이 수도회 회원들이 2년간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 거주하는 숙소 및 수도원 연락소가 1966년에 신축되었다.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는 현재 25명의 회원이 부산의 본원과 서울 한남동과 혜화동, 대구, 기장, 부평 등 분원에서 활동하고 있다. 본원에는 수도원외에 본당, 유치원, 보육원 등의 시설이 있으며 서울 한남동에는 피정센터, 성모의 마을, 기장과 부평에는 각각 본당 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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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바노 수녀회 (영) Missionary Sisters of St. Columban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3쪽)

성 골룸바노 수녀회는 1922년 2월 1일 아일랜드에서 당시 성 골롬바노 선교회 총장인 존 블로윅(John Blowick)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포교활동을 함에 있어서 포교지의 전통적인 관습을 극복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전교수녀들의 적극적이며 정성어린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골롬바노회 내에 전교수녀회를 창설하게 된 것이다. 이 수녀회원들은 각 지역에서 전교활동 외에 주로 의료사업, 교육사업, 사회사업 등을 하고 있다.

한국진출 : 1955년 광주교구의 헨리(Harold Henry, 玄) 주교의 초청으로 엔다(Enda Staunton)수녀를 비롯한 4명의 수녀들이 한국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들은 그해 목포에 수녀원을 설립, 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사업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에 춘천에도 성 골롬바노 의원을 개설, 1960년에는 제주도 한림에 진료소를 개설함과 아울러 성 골룸바노 선교회 신부들의 협조를 얻어 직조업에 착수, 지역개발에 이바지하는 동시에 부녀자들의 경제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1963년에는 삼척에도 의료시설을 개설(성 요셉의원), 1975년에는 영주에 분원을 설치하여 수녀들이 나환자 진료소인 다미안 의원에서 근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1971년 서울에 본원을 신축, 수녀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사업과 지방에서 활동중인 수녀들의 뒷바침을 해주고 있으며, 서울에서 수녀들은 서울 가톨릭의대와 협력하여 한국 천주교 회의 산하 '행복한 가정운동'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47명의 수녀들이 서울의 본원과 목포, 춘천, 제주, 삼척, 영주 등 5개 분원에서 의료사업, 간호원 교육사업, 사회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1955. 춘천에 성 골롬바노 의원을 개설 (93쪽 골룸바노 수녀회)

1960. 제주도 한림에 진료소를 개설 (93쪽 골룸바노 수녀회)

1963. 삼척에 성 요셉의원을 설립 (93쪽 골룸바노 수녀회)

1975. 골룸바노 수녀회의 수녀들은 영주의 다미안 의원에서 봉사활동 (93쪽 골룸바노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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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후리 본당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평양 관후리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성모보통학교와 양로원, 그리고 무료숙박소에서 그들의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1896년 르장드르(Louis Le Gendre, 崔昌根, 1866-1928) 신부는 평양 외성(外城)에 평안도 지방의 첫 본당인 평양본당을 세웠고 다시 1898년 5월 9일에 평양시내 중심인 장대현(將台峴)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그후 2대 본당신부인 르메르(Louis Le Merre, 1858-1928) 신부는 1909년 봄, 사제피정 후 스타니슬라 원장수녀에게 학교교사로서 일할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미 1905년에 평양 관후리본당 내에 남자교육기관인 기명학교를 설립한 바 있는 르메르 신부는 이듬해 5월 1일에는 여학생들을 위한 성모여학교를 세웠고 이들을 위한 교사로서 수녀들이 적임자라 생각하였으므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르메르 신부는 수녀들의 숙소 마련과 매월 생활비 6원씩과 연료와 채소, 여비 그리고 의복비 등을 본당에서 부담하기로 수녀원 측과 결정을 보았다. 이에 따라 가밀 원장수녀는 지방으로의 첫 파견을 결정하였고 1909년 9월 14일에 수녀 둘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쌘쟝 수녀와 김 세리나 수녀로서 이들이 평양에 도착함으로써 평안도에서는 최초로 수녀들의 전교와 교육활동이 시작되었다. 수녀들을 찾는 아동들과 부모들의 수가 나날이 늘어나게 되어 수녀들은 학교에서 교사의 직책을 맡아 볼 뿐 아니라 학부모들의 온갖 일에 상담역까지 보게 되어 교육 뿐만 아니라 전교사업에도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1929년 3월 15일, 기명·성모의 양교가 병합되어 6년제 지정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아 성모보통학교로 승격 개칭되었고 이후 성모학교는 평양교육계에서 명문으로 알려져 입학지원자가 늘어나게 됨에 따라 1936년 10월에는 본당 주임 크노르(Joseph W. Connors, 權) 신부의 노력으로 상수구리(上水口里)에 세워진 3층 철근 콘크리이트 최신식 건물의 긴축교사 낙성식과 함께 신교사로 학교 전부를 이전하였다. 이 건물은 공사비 75,000원의 거액을 투자하여 연건평 533평에 스팀시설과 실내수도, 수세식 화장실, 전기시설 등을 구비하였으며 교실 12, 교무실 1, 실험실습실을 갖추었다. 성당 경내에 있는 구 교사는 수리를 거쳐 성모학원, 성모유치원, 주일학교, 신자집회소 등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이후 성모보통학교는 시설면에서나 교육 내용면에 있어서 명실공히 평양굴지의 명문교로 발전하였다.

1940년 6월 27일 한국 최초의 방인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가 창립된 지 8년만에 첫서원식을 가져 11명의 수녀를 배출하고 그해 7월 관후리본당에 분원을 설치하게 됨에 따라 30여년간 교육사업과 전교 및 자선사업을 맡아오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모든 소임을 성모회의 수녀들에게 인계하고 그해 7월 30일 본원으로 복귀하였다.

1934년 1월 본당주임 크노르 신부는 성당 내에 있던 성모학교 구 교사 중 한 건물을 정식 양로원사로 정하고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을 모았다. 재정은 본당신부가 맡고 수녀들은 이들을 정성껏 돌보아 오던 중 분원철수에 따라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에서 인수하여 1949년까지 운영하였다. 양로원과 함께 설치되어 무의무탁한 걸인과 고아 등 15명을 수용하고 수녀들이 돌보았는데 후에 양로원에 흡수되었다.

1896. 평양교구의 관후리 본당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1909. 9. 14 관후리 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1929. 3. 15 기명·성모학교가 성모보통학교로 승격 개칭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1940. 7. 30 관후리 본당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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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씨튼 어린이집 (사랑의 씨튼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5. 20일 조미아 데보라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지역주민의 편리를 위해서 영유아(2세∼7세)들의 다양한 발달을 위한 교육과 부모님들을 위한 보육측면의 서비스를 위하여 광주광역시 본촌동의 마을회관에 씨튼 어린이집을 설립 하였다. 1992년 4월 22일 이전에는 마을회관에서 운영하였다가 1992년 4월 22일 이후에 사랑의 씨튼 수녀회 본원인 광주 본촌동에서 운영하고 있다. 영육아 보호시설로 91평이며, 지역주민의 자녀들의 교육과 지역에 대한 봉사를 위하여 현재 영유아 보육시설로 계속되고 있다. 원훈은 '사랑을 심고 꿈을 키우는 어린이' 이다.

1992. 4. 22 광주 씨튼 어린이집 설립 (사랑의 씨튼 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500-210 광주광역시 북구 본총동 산63번지/ 전화 062)571-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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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사목 (영) Prison evangelization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18쪽)

교도소 수감자의 처우 개선(prison reform)과 수감자에 대한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특수사목의 한 분야. 교회의 교도사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즉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게 하고…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게 하셨다."(루가 4,18)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초기교회 때에는 박해받는 신자들의 방문을 위주로 하다가 313년 종교자유후엔 일반 수감자의 방문으로 바꾸었다. 325년 니체아 공의회에서 가난한 자의 대리인(procuratores pauperum)에게 교도소를 방문하여 수감자에게 봉사할 것을 명했고, 에우제니오 4세(1435년), 바오로 6세(1611년), 인노첸시오 10세(1655년) 교황 등은 수감자의 처우 개선에 관한 규칙을 제정하였다.

한국에서는 초기 박해시대와 일제시대에는 간헐적이고, 개별적으로 시행되다가 1970년 4월 교도소 사목본부(Pastoral Center for Prisoner Evangelization)를 설립하고 교구별 사목본부를 두었다. 그리고 그 밑에 교도소 후원회와 교도소 사목자문위원을 두어 수감자에 대한 복음 전도와 사회선도교육을 실시한다.

월간지로 '새남터'를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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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사목회 (영) Prison Apostolat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18쪽)

교도소 수감자들의 복음화와 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위하여 1970년 4월 2일 발족한 평신도단체. 당시 김홍섭 판사와 고중렬 교도관, 박귀훈 신부외 몇 명이 중심이 되어 '교도소 후원회'를 발족함. 1974년에는 각 교도소용 명상자료와 성가녹음테이프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1975. 7. 기관지 '빛'을 발간 (118쪽 교도사목회)

1978. 8. '교도사목후원회'로 개칭(118쪽 교도사목회)

1980. 2. 다시 '교도사목회'로 개칭(118쪽 교도사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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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4쪽)

나병은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를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Hansen)에 의해 나균(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나병을 천형병(天刑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나병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와 제자들에게 나병을 고쳐주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에 따라 사도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왔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서양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라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시켰다.

그 후 각 교구별로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는 중국에서 구라사업을 하다가 입국하여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해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이들 진료소는 훗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함)

1958. 성 라자로원은 경기도 시흥의 세브란스 결핵요양소를 매입하여 이전 (164쪽 구라사업)

1959. 프란치스코회가 산청에 성심인애병원 설립 (164쪽 구라사업)

1960. 칠곡에 가톨릭 피부과 의원 설립 (164쪽 구라사업)

1960. 전주교구와 프랑스 국제농촌개발협조회(CIDR)가 공동으로 이리성모병원 설립 (164쪽 구라사업)

1961. 만성병연구소가 가톨릭중앙의료원에 개설 (164쪽 구라사업)

1961. 오스트리아 부인회 (오지리 부인회)설립 (164쪽 구라사업)

1962. 베네딕도회가 성주성심의원 개원 (164쪽 구라사업)

1964. 10 한국가톨릭농민회-가톨릭노동청년회 '농촌청년부'로 시작 (164쪽 구라사업)

1966. 왜관 베네딕토수도원에 주한 대표부 설치 (164쪽 구라사업)

1966. 베네딕도회가 대구 파티마의원 설립 (164쪽 구라사업)

1969. 안양 가톨릭 근로자 회관 (164쪽 구라사업)

1970. 2. 3. 릴리회 (김광자창설)설립 (164쪽 구라사업)

1970. 4. 교도소 후원회(교도사목회) 발족 (164쪽 구라사업)

1971. 다미안 제단 대구와 안동에 한국부지 설립 (164쪽 구라사업)

1974. 벨기에 다미안재단이 영주다미안의원을 설립 (164쪽 구라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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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 나눔의 집 (나눔지 154호 2쪽) - 1987. 6. 20발행

가출로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위안처를 제공하고자 '나눔의 집'에서 '구로 나눔의 집'이 분가되었다. 전세집으로 25세 미만의 여자 1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으로 공단지역의 갈 곳 없는 소녀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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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후생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67쪽)

성체회(聖體會)창설자인 윤을수 신부가 설립한 특수목적기관. 윤신부는 6.25 사변 중 군종신부로 복무하면서 전쟁고아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전쟁 후에도 계속 고아 육영사업을 전개, 이들에게 봉사할 여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여성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56. 구산후생학교가 설립되어 성체회 회원의 양성 (167쪽 구산후생학교)

1964. 구산후생학교 제정난으로 폐교 (167쪽 구산후생학교)

구산후생학교 - 1959. 11. 22일 가톨릭 신문에서 발췌

사회사업을 통하여 전교활동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1956년 11월 19일에 설립되었다. 성경, 교회사, 교리, 윤리, 성사, 라틴어, 종교음악과 그외는 초급대학 일반과목에 준한다. 입회자격은 고등학교 졸업자로 또는 동등한 자격을 가진 만 17세이상 25세 미만의 여성으로 교구장이나 수도원장의 추천을 받은자이며 학제는 2년 으로 일단 입학하면 기숙사에서 합숙하며 준 수도생활을 하였다. 실습은 각 지역으로 파견되어 의료반과 동반한 무의촌 순방, 요구호자 가정조사 및 돌봄, 개간지, 개척지에서 조력, 섬지방 순방등을 하여 표양으로 전교한다. 1956년 8월 서독 ꋅ헨에서 사회사업가 대회에 참석한 윤을수 신부가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서구에 사회사업 사조는 과거 소규모적인 시설 사회사업 (양로원, 고아원)에서 벗어나 광범위한 사회사업 즉 지역사회 개발에 대하여 착안하여 그 방면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음을 보고 그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바 있었으며 특히 로마에 본부를 둔 "국제 천주교 사회사업연맹" (까리따스)으로 부터 공산주의와 대항하는 대는 일반사회사업 보다는 지역사회를 위한 사회사업가를 양성할 목적으로 이곳에 소재하는 보육원(골롬바 어린이집)에 개교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전의 사회사업과는 달리 각 지역에서 걸쳐 그 지역에 순응하여 지도자로서가 아닌 협조자로서 일하며 그지역 복구 향상을 위하여 헌신하므로 보다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1956. 11. 19 구산후생학교 개교 (성체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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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리따스 농장 (교회와 역사 223호 23쪽) - 1993. 12. 25발행

농장은 1964년 5월 전남 영암군 신북면에 임야 4만 7천평을 매입하고 이를 개간하여 배, 포도, 복숭아 등의 과일 나무를 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4년 가까운 기간은 외부 사람에게 위임하여 관리했으나 1969년 11월 부터 까리따스 수녀회에서 관리를 시작했다. 긴 수도복을 입은 수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는 모습은 인근 주민들과 함께 일하는 이들 눈에 이상하게 보였지만 그들도 차차 수녀들의 인애와 사랑을 알게 되어 신앙에 대해 나아가서는 수도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생활은 당시나 지금이나 의식 속에 박혀 있는 노동에 대한 그릇된 인식, 그로 인해 할 수만 있다면 농촌을 떠나려는 농민들의 마음 속에 노동의 가치와 일하면서 시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1971년에는 10,000여평의 주위 야산과 논 3,000여평을 매입하여 식생활을 해결하게 되었고 농장은 6만 여평이 되었다. 1972년에는 주위 농민들의 일손을 도와 주기 위해 탁아소를 건립하여 256명의 어린이들을 모아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베풀면서 동시에 이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부모들까지 신앙을 갖도록 하여 농촌사목의 한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후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젊은 세대가 줄어듬으로 인해 어린이들도 줄어 들어 1975년에는 폐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해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오고 전화가 가설됨으로 인해 문화 혜택을 받게 되었다. 1970년 이후에는 매년 수련자들이 이곳에 2-3주씩 머물면서 수녀들의 일손을 도움으로써 노동과 자연 안에서 만남의 현존을 체험하게 되고 노동의 가치와 농민들과의 연대감을 재인식하는 소중한 기간이 되어 현재는 수련 프로그램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농장 사업을 통해 '일하는 것이 본회의 특징이다'라는 창설자의 정신을 되새기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을 통해 많은 경제적 도움을 받았지만 앞으로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수도회 정신을 살리는 사업들을 적극 뒷바침함과 동시에 농장 자체로도 해야 할 일을 모색하고 있다.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에 비해 지금은 일손 부족으로 적기에 손질을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안고 있지만 이는 농촌 전반의 문제이기에 젊은 회원들의 자발적인 투신과 희생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진단하고 있다.

1964. 5 까리따스 농장 시작 (교회와 역사 223호 22쪽) - 1993. 12.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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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러기 동산 어린이 집 - 1998. 6. 13일 원장 이화복님의 답신에 의거

꾸러기 동산 어린이집이 위치한 구로 3동은 한국 수출 산업공단과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철강, 전자, 봉제 등 소규모의 가내 공장들이 밀접해 있어 공장과 주거지역이 혼재된 곳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이 공장 노동자, 일일 노동자들이며 좁은 골목과 나무 한그루, 놀이터 조차 제대로 없는 환경에서 방치되어 있는 많은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시키고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는 안전하고 교육적인 환경의 필요성을 절감한 6명의 여성들이 탁아소를 설립하여 운영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4세-5세 대상의 어린이 집은 몇 군데 있으나 12개월 미만의 영아, 탁아 공부방 시설의 부재로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고 2-3년간은 직장을 가지기 어려우며 유치원, 국민학교 어린이들은 주변의 열악한 환경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부부가 함께 일을 해야만 하는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일을 할 수 가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지역의 현실에서 영아 탁아, 유치 탁아, 공부방의 필요성에 대한 주민들의 요구가 있었으나 공간의 협소함으로 그 요구를 수용할 수는 없었다. 이에 꾸러기 동산 어린이집은 맞벌이 가정의 부모들에게는 안심하고 자녀를 맡김으로 해서 가정 경제 및 사회경제에 도움을 주고 어린이들에게는 편안하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자랄 수 있는 교육의 공간을 위해 건물신축을 하였고 1997년에는 서울시 모범시설로 지정이 되었다.

1988. 8. 3 4평의 공간으로 꾸러기 동산 개원

1996. 1. 30 꾸러기 어린이 집 건물 신축

소재지 : 우 152-053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3동 791-25/ 전화 02)855-3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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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결핵병원 (작은자매 전교회의 사목시설) - 1998. 4. 23일 작은자매전교회의 답신에 의거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결핵환자들에게 신앙과 기도의 은혜를 전달하기 위해 병고를 함께 나누며 긴급한 필요성들에 응답하며 봉사하기 위하여 마산시 합포구 가포동 486번지에 정루시아 자매와 김아녜스 자매가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병원안에 작은 프라테르니타를 형성하여 2자매가 살기 시작하고 가포 공소가 생겨났다. 마산교구의 협조자 하마리아씨가 10여년 그 곳에서 봉사하다가 수도회에 넘겨줄 의사를 표시하였고 작은자매 전교회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병원 내에는 불교와 기독교 단체도 존재하고 있음) 자매들의 이동이 있었지만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976. 국립결핵병원에 작은자매 전교회 활동 (작은자매 전교회의 사목시설)

소재지 : 우 631-320 경상남도 마산시 합포구 가포동 486/ 전화 0551)23-7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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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가톨릭형제회 (영)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76쪽)

불일치와 부정의가 있는 현실에 도전함으로써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복음을 기초로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주력한다. 全眞常 정신을 중요시하며 全은 온전한 자아의 봉헌을 뜻하며 眞은 참다운 사랑을 뜻하며 常은 끊임없는 기쁨 속에서의 생활을 뜻한다.

1956. '편선자선교회'에서 명명을 개칭, 같은해 교황청으로부터 인준을 받음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1956. 3 국제가톨릭형제회 한국진출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1962. 2 전진상 교육관을 완공하여 운영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1963. 서울에서의 첫 수련을 시작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1964. 전주에 가톨릭 여학생관을 설립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1969. 안양의 근로자 회관을 설립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1975. 시흥에 전진상가정 복지센터설립 (176쪽 국제가톨릭형제회)

국제가톨릭형제회 (영)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교회와 역사 205호 6쪽)-1992. 6. 25발행

국제가톨릭형제회는 1937년 이본 풍슬레(Yvonne Poncelet)에 의해 벨기에에서 창설되었다. 국제가톨릭형제회의 회원들은 교구장의 지휘아래 교구에서 요청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하고, 대개의 경우 직접 선교보다는 평신자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교육과 의료, 사회사업 등 그 지역 개발에 필요한 분야, 즉 후진국 여성들의 모자보건, 양육법, 양재나 가사 등 여성들의 기초교육과 의식계발을 비롯하여 고등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이르기까지 그 지방 교회가 발전하는데 필요한 기초작업을 주로 해왔다. 국제 가톨릭 형제회가 한국에 진출하게 된 것은 1956년 3월 당시 서울교구의 교구장이었던 노기남 대주교의 끈질긴 노력으로 독일인 1명과 이탈리아인 1명이 한 팀이 되어 파견된 것이 그 시초를 이룬다. 이 팀이 처음 위임받은 일은 여대생을 위한 기숙사의 운영을 중심으로 한 여성교육이었다. 주교의 원의에 따라 명동 주교관 곁에(現 전진상 교육관) 작은 일본식 가옥에 지방여대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기숙사를 개설하였다. 특히 1962년 2월 전진상 교육관의 준공으로 기숙사생들의 생활교육은 물론 서울 시내 각종 평신자 활동 단체를 탄생시키는 데 모체역할을 해왔다.

A.F.I 회원들은 어려운 문제점을 안고도 1981년에 28명이었던 정회원이 점차 증가하여 1992년 현재 36명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A.F.I 회원이 운영하고 있는 것은 서울의 전진상 교육관, 안양의 근로자 회관, 시흥의 전진상가정 복지관 등이 있으며 이곳에 종사하지 않는 회원들은 각자의 직업을 통해 레브 신부의 가르침인 "그 시대에 살아야 한다"(Etre de son temps)는 말을 되새기며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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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영) Sisters of the Christian Doctrin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98쪽)

1700년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여교사, 간호원 몇명과 함께 프랑스의 장 바텔로(Gean Vatelot)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1966년 한국에 진출하여 안동교구의 초청으로 룩셈부르크 관구 소속 수녀 3명이 처음으로 내한하여 상지전문대학을 설립하는 한편, 1970년에는 수녀원 독립건물을 신축하였다.

1966.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에서 상지전문대학을 설립 (198쪽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

1985. 칠곡에 나환자 피부과 병원 (198쪽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영) Sisters of the Christian Doctrine (교회와 역사 235호 18쪽) - 1994. 12. 25 발행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1700년 프랑스 알사스 로렌 지방에서 장 바틀로(Jean Vatelot, 1688∼1748)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 당시 독일과 프랑스는 알사스 로렌 지방을 사이에 두고 오랜 국경 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였고 가난과 질병, 무질서와 혼란 등 전쟁이 남긴 온갖 병폐의 만연, 특히 젊은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윤리적 탈선에 빠지는 심각한 현상이 가정과 사회를 짖누르고 있었다. 바틀로 신부는 교육사업과 간호 사업을 통해 그 지역 주민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삶의 희망과 인간다운 삶을 찾도록 하기 위하여 본당이나 동네, 소외된 지역 등 생명에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부르심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그들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이런 시작은 곧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를 탄생시켰다. 현재 프랑스 낭시(Nancy)에 총원을 둔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유럽, 남미, 아프리카, 한국 등지에서 1천여명의 회원들이 주로 교육 사업을 하며 의료사업, 윤락 여성들과 가출 소녀들의 재교육 등 특수 교육 및 전교 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한국 진출

1966년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안동에 진출한 것은 당시 대구대교구 안동 감목 대리 구인덕(Celestin Coyos, 具仁德) 신부의 초청으로 시작되었다. 구인덕 신부는 농촌 지역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맡아줄 수 있는 수녀회를 찾고 있었다. 이때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룩셈부르크 관구장이 이 요청을 검토한 후 받아들여 룩셈부르크 관구 소속의 셀린(Celine Knauf) 수녀와 안젤린(Angelin Kellen) 수녀가 1966년 9월 17일 한국에 파견되었다. 두 수녀는 이틀 후부터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명도원에서 1년간 한국어 교육을 받은 후 1967년 안동시 율세동 393번지 3만여평의 부지에 상지전문대학과 수녀원 신축을 시작하였다. 1968년 처음으로 지원자들이 입회하여 1970년 청원기를 시작하고 1972년 율세동 수녀원이 축성되었다. 수녀회 진출의 처음 목적은 안동 지역에서의 교육 사업 전개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특성상 수도회의 봉사의 손길을 요구하는 데가 너무도 다양하여 가능하면 창립정신을 살리면서 교회의 요구에 능동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 교육사업

상지전문대학 : 1967년 안동시 율세동 393번지 30,000여평의 부지에 젊은이들의 전인 교육과 기능인 양성을 목표로 신축하여 1969년 10월에 학교법인 상지학원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70년 상지 여자실업 전문학교로 개교하면서 상과 40명, 의상과 80명, 보육과 40명, 총 160명 정원으로 시작하였다. 이때 셀린 수녀, 안젤린 수녀, 아녜스 수녀가 각각 불어와 의상학, 영어를 강의하였다. 같은 해 12월 학교 법인 상지학원 상지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면모를 갖추었고 다시 1990년에 현재 상지전문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당시 상지 전문대학의 설립은 수도권 중심으로 집중된 한국적 교육 풍토에 이정표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 유아 교육학과, 식품 영양학과 등 총 14개 학과에 3천여명이 재학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에 이르러 운영권을 교구로 이양하였다. 사실 현 교육 현장의 상황으로 전문대학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수도회 내에서도 교수 인원 확보에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수녀회 차원보다는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교육의 질을 높이고자 교구로 운영권을 이양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교수직과 서무과장, 사서과장, 기숙사 운영을 위하여 회원들이 파견되고 있다.

상지 기숙사 : 학업 때문에 안동에 올라온 타지방 학생들을 위하여 시작되었다. 숙식을 함께 제공하는 '기숙사'와 경제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저렴하게 방만 빌려주는 '자취사'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데 지원자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입소 경쟁률이 높아짐에 따라 점진적인 확장 계획도 생각하고 있다. 현재 수녀 1명이 기숙사 사감으로 파견되어 다양한 월례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인간교육과 생활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사실 현재 고등학교의 교육 현실은 오직 입시 위주로만 운영되어져 전인교육을 위한 기회들이 매우 적다. 때문에 수도회에서는 이 기숙사 생활을 통해서라도 참된 인간교육과 복음화를 시도하고 있다. 또한 기숙사 학생들 중에 봉사하는 회원들의 모습을 보고 성소를 택하는 경우도 있어 성소 개발의 어장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상지전문대학 부속 유치원 : 전문대학 부속 유치원으로서의 새로운 교육 이론을 도입하여 유치원 교사 양성에 도움을 주며 어린이들에게는 기본 생활 습관 지도를 교육 목표로 삼아 운영하고 있다. 이외 유아교육의 현장으로 가은 유치원, 상주 남성동 유치원, 안동시 종합 사회 복지관 어린이 집, 대구 월성 가톨릭 종합 사회복지관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가천 청소년 교육원 : 1980년 대구대교구가 오스트리아의 원조를 받아 교육원을 설립한 3년 후인 1983년부터 정식으로 파견되었다. 특히 수녀회 카리스마의 교육적인 면을 적극적으로 살릴 수 있는 현장인 교육원은 그 교육 목적을 "내 안에서, 이웃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자"로 삼고 교육 지침으로 자연을 통하여 자신을 살펴보고 희망과 용기를 가진 새로운 생활태도를 수용하여 타인을 새롭게 만남으로써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발견, 기도와 전례를 통하여 신앙 생활의 기쁨을 체험하도록 돕고 있다.

⸂ 안동교구청 사목국

⸃ 생명의 공동체

교구청 사목에서 농민 교육의 일환으로 실시한 공소 봉사자 학교 1기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모임으로 주로 10여 개 농민 고동체들과 안동, 영주, 상주, 점촌, 예천의 도시 주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모임에서는 삶의 방향을 생명의 가치관, 공생의 가치관으로 전환하여 주로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 지역에 조직되었다. 이 모임의 활성화를 위하여 1991년 9월 당시 사목국 장인 조창래 신부의 요청으로 회원이 파견되었다. 주요 활동 내용은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생활양식의 변혁 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 본당사목

⸅ 노인복지

⸆ 의료복지

⸇ 종합복지

⸈ 부산교구 교도사목

1992년 9월 3일 부산 주례 본당에 파견을 시작하면서 부산교구도 교도 사목을 위해서도 회원이 파견되었다. 주요 활동은 부산 교도소, 구치소, 소년원, 감별소에서 봉사하고 있는데 특히 소년원의 원생들을 위한 재활교육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교도사목 후원자들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5,000여 명의 수인들을 위해 따뜻한 손길을 펼치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 교육 수녀회 회원 각자는 내적 생활의 시간, 일과 휴식 시간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명확히 하는 개인 내규를 설정하고 생활한다. 개인 내규는 세상 한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더 잘 살도록 도와 준다.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자 하는 회원들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모범을 보이신 스승이며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모든 것에서 생명에 봉사하고자 한다. 또한 인간의 진보와 발전에 관계되는 모든 것에 개방되어 있으며 인간의 모든 면, 즉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정신적 차원에서 모든 인간이 성숙한 인간으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할 때까지 인간생명에 종사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1970년대에 안동으로 진출한 것은 사실 모험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안동은 인구 12만명의 농촌으로 둘러쌓여 있는 유교가 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활동에 수반되는 어려움은 너무나 분명했다. 때문에 서울과 대구 등 도시로 진출코자 하는 유혹도 많았지만 창립자의 정신대로 스승이며 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모든 것에서 생명에 봉사하는 교육자들이 되기 위해 안동에 정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4년 10월 17일 관구 설정 축하 미사를 봉헌하는 기쁨을 맞게 되었다.

시대의 고통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소명, 사건이나 고통안으로 뛰어든 성서의 말씀을 사는 회원들, 비록 오늘의 현실이 어둡고 폭력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고통의 현장이기에 그 안에는 무수한 인간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 소명은 더욱 다급해지고 교회는 산적된 문제들을 끌어안은 채 화의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문제, 전인적 인격의 형성,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오늘도 교회의 딸로서 산다.

1967.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안동에 상지전문대학을 설립 (교회와 역사 235호 18쪽) - 1994. 12. 25 발행

1990. 상지전문대학의 운영을 안동교구로 이양 (교회와 역사 235호 18쪽) - 1994. 12. 25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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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성혈흠숭수녀회 (영) Adorers of the Blood of Chris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98쪽)

1834년 3월 4일 마리아 데 마티아스 (Maria de Mattias) 가 교육혜택을 받지못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이탈리아 아쿠토(Acuto) 에 개설함으로 설립된 수녀회. 1977년 9월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수녀회의 근본정신인 성혈흠숭은 '애덕 그 차체' 를 뜻하며 이웃에 대한 봉사를 통해 구원사업에 동참한다.

가톨릭 사회복지회의 일을 관장

1980. 4. 마산 가톨릭 사회복지 회관의 일을 관장 (198쪽 그리스도의 성혈흠숭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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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일시 보급소 (교회와 역사 223호 22쪽) - 1993. 12. 25발행

윤리적 타락과 범죄 행위로 인한 사회 문제 중 한가지 양상이 기아(棄兒)문제이다. 무책임한 부모가 죄없는 생명들을 길거리에 버림으로써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자 행정 당국은 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구상하기에 이르렀고 도지사 부인이 주측이 되어 '기아 일시 보호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역부족을 깨닫자 도지사를 통해 수도회에 기아들을 맡아 줄 것을 청했다. 당시 까리따스 문화 복장 학원 기숙사로 이용하기 위해 사두었던 집을 개조하여 간호 수녀를 포함한 3명의 수녀가 소임을 맡게 되었다. 그 후 계속적으로 시청을 통해 기아들을 받아 보호, 양육하기 시작했으나 이 일은 너무나도 어려움이 컸다. 한편 이 사업이 처음부터 사랑보다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시작했기에 그 운영 방침이 수도회 생각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수녀들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따라 한 생명이라도 구하려고 전력을 쏟는 반면 그들은 너무나 기계적이고 냉정했으며 오히려 수녀들의 자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곤 했다. 결국 이 사업은 1974년 1월 31일에 그 운영권을 다시 주무 관청으로 이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롬은 기간이었지만 수도자로서 이 세대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체험 할 수 있었던 은혜로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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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봉 金基奉, 필립보, 1914∼1967 (교회와 역사 208호 11쪽) - 1992. 9. 25발행

舊敎友 집안인 깁기봉 신부의 가계는 연안 김씨인 것만 확인된다. 1938년 6월 11일 사제로 서품된 김 신부의 첫 부임지는 구태인읍본당에 부임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말기에 접어 들자 일제의 압박은 더욱 극심해졌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이거하였다. 당시 만주 지역은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일제가 메리놀회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기에 만주 지역의 사목은 평양교구에서 도와주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평양교구 자체도 원래 메리놀회의 선교 지역이었고, 선교사들이 추방되었기에 1943년 6월 29일 洪龍浩(프란치스코) 주교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신부 수가 많지 않았고, 1942년 2월 부터 평양교구에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하던 서울교구 소속 신부들이 교구 귀속문제로 인하여 1944년 12월경 서울교구로 돌아 갔기에 평양교구 자체도 형편이 대단히 어려웠다. 만주에 이어 북경의 北堂성당에서 사목하던 김기봉 신부는 중국이 공산화되고 북한에서의 여러 상황이 심상치 않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부산교구로 돌아왔다.

부산으로 돌아온 김기봉 신부는 청학동 본당의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강당을 신축하여 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수녀원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어 영도 신성동 3가에 聖母建設園이란 고아원을 설립하여 사회 사업을 시작하였다. 6·25 한국전쟁 중 최후의 거점이었던 부산에서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들었고, 그런 중에 버려지거나 방황하는 아이들이 많이 생겨났다. 김기봉 신부는 그러한 아이들을 돌보아야 겠다고 생각하여 영도 청학동 본당에서 신선동본당을 독립시키는 한편 그 안에 고아원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먼저 신선동 3가 84번지에 있는 목조 건물을 매입하여 본당 신설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당시 신선동 3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 페트릭 데니어 특무상사의 협조를 얻어 황무지 930평을 정리하는 한편 1954년 8월 11일에는 사회부장관으로부터 재단법인 성모건설원을 인가받았다.

1955년 1월 1일자로 본당 승격된 신선동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김기봉 신부는 미군들의 협조를 얻어 1956년 11월에 건평 60평의 성당과 사제관을 낙성하였다. 이어 8월까지 고아원 원사 2동과 부속건물 2동을 완공하여40명의 원아들을 수용하였다. 원아들은 점점 증가되어 1956년 10월에는 70여명을 수용하였다. 그 후 성모건설원은 1957년 5월에 정부로부터 시설 기구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1959년 이후에는 정부 보조 및 의원 단체의 보조가 끊어질 우려가 보이므로 가톨릭 부인회에 호소하여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로부터도 많은 원조를 받았다. 그 결과 새 원사를 광안동의 대지에 신축하고 이듬해 10월에는 성모건설원을 신선동으로부터 이전하였으며 이때 부터는 본당 사목생활을 마감하고 성모건설원에만 주력하였다.

1957년 8월 26일 운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대양중공업고등학교를 천주교 부산교구 재단에서 인수하자 대양 중고교(지금은 중학교만 남아 있음)의 4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1960년 5월 13일까지 교육사업에도 헌신하였다. 교훈은 충직, 진실, 덕망이었다. 특히 학교 내에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여 전교에 주력함으로써 수많은 학생들을 영세시켰다. 이어 1963년 1월에는 광안동 성모건설원 2층에 신경전문치료병원인 '성 필립 신경정신과'를 개설하였다. 정신신경 계통의 환자 치료를 목적으로 하였고, 나아가 거기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성모건설원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대지 165평, 건평 65평, 병실 10개, 침대 20개, 의사 1명, 조수 2명, 간호사 1명의 규모로 연간 9,89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당시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주임이던 오석환 교수가 담당의사로 초빙되었고 오석환 교수에 이어 팽갑주씨가 담당 의사로 근무하였는데 운영난으로 3년만에 폐원하였다. 병원의 일반 진료소는 병원 주위의 난민들의 구제치료 및 성모건설원 아이들의 치료를 하였다.

1967년 4월 6일 김기봉 신부는 숙환으로 휴양 중이던 부산 광안동 성모건설원에서 선종하였다. 4월 7일 서품 동기인 최재선 주교의 집전으로 영결미사가 봉헌되었고, 부산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54. 8. 11 김기봉 신부는 사회부장관으로부터 재단법인 성모건설원을 인가받음 (교회와 역사 208호 11쪽) - 1992. 9. 25발행

1957. 8. 26 김기봉 신부는 대양 중공업고등학교의 4대 교장으로 취임 (교회와 역사 208호 11쪽) - 1992. 9. 25발행

1963. 1 김기봉 신부는 광안동 성모건설원에 신경 전문 치료병원인 '성 필립 신경 정신과' 개설 (교회와 역사 208호 11쪽) - 1992. 9. 25발행

1966. '성 필립 신경 정신과' 폐원 (교회와 역사 208호 11쪽) - 1992. 9.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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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1922- )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22쪽)

서울 대교구장. 대주교. 추기경. 세례명 스테파노.

1968년 서울 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 라고 말함으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쇄신과 현실참여의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교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로 모든 사회구조나 정치형태는 공동선을 추구함에 있어서 평등적인 권익을 보장하고 특권의식과 배금주의를 버리며 혁신과 정화의 근본이되는 인간내면의 회심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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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주 아녜스의 집 (나눔지 100호 2쪽) - 1984. 5. 31발행

한국 순교성인의 이름을 딴 '김효주 아녜스의 집'이 개설되어 18명의 식구(국민학생 7명, 한복, 미싱, 편물, 양재 등을 배우는 기술교육생 7명, 환자 2명, 상주봉사자 2명이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있는 청소년 자매들의 집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임의 지원으로 응암동 '데레사의 집'에서 분가하여 서로를 돕고 사랑하며 자활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1984. 5. 23. 김효주 아녜스의 집 개설 (나눔지 100호 2쪽) - 1984. 5. 31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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