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명부3(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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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안 양로원 / 다미안 피부과 의원 / 답동본당 / 당진본당 / 당진 성모 병원 / 대구 가톨릭 병원 / 대구 결핵 요양원 / 대구 월성 가톨릭 종합 사회 복지관 / 대신리본당 / 대전본당 / 대철 베드로의집 / 대한천주교연맹 / 덕산 신생원 / 덕원본당 /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 / 데레사의원 / 데레사의 집 / 도봉 독서실 / 도시사목 / 돈 보스꼬의 집 / 돈 보스꼬 작은집 / 돈의학교 / 동성중고등학교 / 동정성모회 / 동혜원 / 동평학교

다미안 양로원 (교회와 역사 244호 16쪽) - 1995. 9. 25발행

나환우의 수가 감소하면서 연령이 노령화 되고 또 그 자녀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학교를 선택하여 다니게 되면서 새로운 사목 대책을 마련하던중 나환자 노인들의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해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에서 설립되었는데, 지금은 약 30여명의 노인들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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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안 피부과 의원 (교회와 역사 244호 15쪽) - 1995. 9. 25발행

영주에 있는 다미안 피부과 의원은 6·25 동란 때 간호 장교로 참전하였던 벨기에인 데레사 캄비에(Therese Cambier)여사가 안동교구 내에서 구라 사업을 목적으로 다미안 재단 한국 지부를 설립하고 경북 영주시 상망동259-1번지에 진료소와 병동을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 1981년 부터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에서 안동교구로 부터 운영과 관리를 위임받아 운영하고 있다. 의료사업으로는 신환자 조기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외래 진료, 4개 군, 2개의 시 800여 나환자들을 위한 이동 진료 및 단기 입원 치료와 재활치료를 하고 있다. 또한 교육사업은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의 주된 내용으로서 신앙 교육의 차원에서 6개 정착 마을의 주민들과 입원환자들을 위해 교리교육, 말씀의 전례, 피정을 지도하고 있고 매년 정착 마을 자녀들을 위해 여름 산간학교를 개최하고 있으며 영농 교육을 위해 강사를 초청하고 기타 상담 및 가정 방문도 하고 있다. 또한 사회사업 차원에서 정착 마을 자녀들을 위한 장학 사업과 학자금, 생계비, 자립금, 교육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초기에는 골롬반 수녀회와 함께, 지금은 성모 영보 수녀회와 함께 환우들의 전인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나병 퇴치 사업도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여 향후 20-30년이면 구라 사업 종결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구라사업의 마지막 단계인 불구 노약자 시설 설립의 필요성에 따라 갈 곳 없는 노인 나환우들을 위한 양로원과 외래 진료등을 다미안 병원 안에 건립하여 1990년 4월 27일 두봉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시에 거행되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외국 원조에 의존하였던 구라사업 기관들은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되었지만 후원회가 결성되어 후원금으로 이를 충당하고 있다.

1981. 안동교구에서부터 다미안 피부과 의원을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에 위탁운영 위임 (교회와 역사 244호 15쪽) - 1995. 9.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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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동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70쪽)

인천직할시 중심부에 자리잡고있는 답동본당은 1889년에 설립되었다.

초대 빌렘(J. Wilhelm) 신부가 부임하여 지금의 본당자리에 부지 3,212평을 마련하여 성당건립 정초식을 가졌다. 그 후 제5대 드뇌(E. Deneux) 신부가 고아원과 그밖에 수녀원 건물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인천시립박문소 학교를 건립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초급과정의 교육을 가르쳤다.

1900. 인천 사립 박문소 학교 설립(현 가톨릭회관 자리) (270쪽 답동본당)

1904. 5대 드뇌 신부가 고아원을 위해 해성보육원 건물 확장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을 신축함 (270쪽 답동본당)

1937. 5대 드뇌 신부 해성병원 건립, 또 수녀원과 고아원, 병원과 학교, 유치원을 건립함 (270쪽 답동본당)

1945. 6대 임종국 신부 부천의 소화여자 고등학교를 인천 박문고등학교로 개편 (270쪽 답동본당)

답동본당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60쪽)

인천 답동본당은 1897년에 건물이 완성되었으나 점차로 신자들이 증가하자 드뇌(Eugene Deneux, 全學俊, 1873-1947) 신부는 1933년, 성당의 신축공사에 착수, 1937년 6월 30일에 현재 모습의 성당을 건립하였다. 1982년 8월 9일에 답동성당은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 본당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첫 파견된 이래 본당 신부를 도와 전교는 물론 불우한 이웃들과 환자돌보기, 해성보육원 창설에 따른 고아들의 양육, 보호에 전력하였고 본당 내에 병원, 학교, 유치원이 설립됨에 따라 다양한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70년대에 인천교구청 기구확장에 따라서 교구사목국, 교육국, 성서후원회에서도 봉사하게 되어 인천교구 사목의 활성화에 협조를 하고 있다. 현재 11명의 수녀들이 함께 모여사는 답동분원은 각기 맡은 소임의 다양함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한 공동체로 생활하고 있다.

해성병원 - 1894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이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후 환자들에 대한 진료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그 것이 해성병원의 시초이다. 1935년 10월 14일, 아일랜드인 필로메나(Philomena Ralph) 수녀가 내한하여 보육원 아동들과 일반 환자를 위해 부속병원을 본격적으로 확장 개설하였고 1938년 10월 15일에 드뇌 신부는 사재(私財)를 들여 부속병원용 건물 3층을 현대식으로 신축하였다. 이 건물에는 16개의 방이 있었으나 주로 보육원 아동들을 위한 시설이라 입원시설은 없고 진찰과 시약만 하였다.

그 후 1961년 10월 30일에는 해성병원의 시설을 인가받았고 1970년 5월 30일에는 병원의 원사 1층을 대폭 수리, 이전하여 병원시설을 보완하였다. 1975년 인천의 답동에 있던 해성보육원은 1948년 용현동에 분원을 마련한 이후 영아원까지 모두 용현동으로 이전하자 아기들의 치료를 위해 1주일에 2∼3번씩 답동에서 왕진을 다녀야 했다. 또 급하면 가까운 의원으로 아기를 데리고 나가야 하는 불편 등으로 인하여 1984년 4월 28일에 해성병원은 인천의 해성보육원으로 이전하였다. 1991년 현재 1985년 11월에 이전해온 원주 바오로 병원과 통합되어 홍순자 아드리아나 의사수녀 외에 2명의 수녀들이 보육원 아기들과 인근 주민들의 진료에 힘쓰면서 의료사도직을 통한 복음전파에 노력하고 있다. 해성병원은 초기에는 서울보다도 훨씬 활발한 의료활동을 전개했었다. 그러나 이 병원은 본디부터 보육원 원아들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수녀회 에서는 수녀들을 기타 다른 의료기관으로 많이 파견한 이유 등으로 인해 해성병원은 보육원 부속병원으로서만 계속 작은 규모로 유지되어오고 있다.

박문유치원 -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드뇌 신부에 의해 1937년 3월 1일에 설립된 박문유치원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인천에서 우수한 유치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한동안 휴원하기도 했으나 1957년에 2학급으로 증설되면서 시설도 과학교육에 입각한 교구를 점차로 구비하고 강당, 보육실, 자료실, 양호실, 소꼽방, 실내·외 유구장, 풀장 등 다양한 설비를 갖추었다. 또한 위치도 답동성당 구내인데다가 이웃에 국민학교와 수녀원 등이 있어 좋은 교육환경을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 4,64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박문유치원은 학습발표, 리듬악기 발표, 연극발표회 등 다양한 발표회와 전인교육을 통해 매해 150명의 원아들을 교육하고 있다.

박문국민학교 - 1899년 인천 답동에 수녀원이 설치되면서부터 수녀들은 꾸준히 보육원 원아들과 신자들의 자녀 및 무산아동(無産兒童)들을 모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기관이 발전하여 1900년 9월 1일에 인천항사립박문소학교가 설립되었다. 그후 드뇌 신부는 1914년에 급증하는 아동들을 수용하기 위해 인천사립박문소학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6월, 남자부 교사 6학급을 다시 신축하여 1917년 4월 1일에는 이 2개교를 합병하여 인천박문학교로 개칭하였다. 수녀들은 박문학교 여자부를 운영하면서 특히 매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갖고 교리, 성서, 역사, 복음 등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 당시 수녀들의 학교는 제물포에 있는 학교들 중에서 가장 좋은 학교로 평가받고 있었다.

1925년 11월 27일에는 1922년에 개정된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인천사립박문보통학교로 6년제 정식인가를 받았다. 그후 1938년 4월 1일에는 개정교육령에 의해 인천박문심상소학교로, 1941년에는 다시 인천박문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6월 3일에는 건물 소개령으로 인해 남자부 교사를 헐게 되어 공립국민학교로 편입시켰으며 여자부 교사만이 남게 되었다. 당시 교사수녀들은 매일 아침 신사참배를 위해 학생들을 인솔하고 신사에 다녀와야 했으며, 남자부교사가 소개된 후에도 여자부를 위해 끝까지 헌신하면서 학교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1958년, 제 3대 교장으로 박영숙 데오판 수녀가 취임하면서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을 위임받았고 제 4대 교장인 이밀마 데레사 수녀 때 남녀 병설 12학급으로 인가받으면서 안정된 환경속에서 계속적인 발전을 해나갔다. 1961년부터 다시 인천교구에서 학교운영을 맡게 되자 수녀들은 계속 머무르며 교사 혹은 서무로서 일하였다. 그러다가 1977년 3월 2일에 제 10대 교장으로 이종후 빌뚜데스 수녀가 취임하여 제 3대, 제 4대의 수녀교장 이후 약 15년만에 다시 수녀가 학교운영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해 6월에 도서실을 개설하였고 1981년 11월에는 12개 교실을 증축하여 학교시설을 확장하였다. 이듬해에는 교내방송국을 개설하였으며 1984년 12월에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명문사학으로서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학부형들의 참여와 활동또한 대단하여 인천시내학교 어머니 글짓기 대회, 어머니 합창대회, 어머니 배구대회 등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하였다.

1988년 2월 최루시아 임마꿀레 수녀가 제11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현재는 교육시설을 완비하고 특별히 예능교육, 정보처리기능교육, 조기영어교육 등을 실시하면서 기초학력을 신장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또 매주 1시간씩의 종교시간을 담임교사들이 직접 맡고 있어 신앙생활과 실행활과의 연결 및 품성교육을 겸하고 있으며,천주교회 학교의 특성을 잘 살려 나가고 있다. 1989년말 현재 교장수녀와 함께 교사수녀 1명, 일반교사 18명, 직원 9명 등이 972명의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가톨릭 회관 - 1973년 3월 1일 인천 가톨릭회관이 준공되고 1975년 3월 31일부터 이명자 마리안나 수녀가 부임하여 교구의 전반적인 사목을 돕다가 1980년부터는 회관 내에있는 각 국이 분리 운영되어 사목국, 교육국, 성소후원회에 각각 담당수녀가 파견되어 교구사목을 돕고 있다.

〈사회복지부〉- 1985년 11월 10일에 류병순 마리 도미니카 수녀는 답동분원에서 자체적인 사회복지활동을 전개, 주로 청소년 근로자를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고 그후 1987년 3월 2일 이춘근 시몬 스독 수녀가 교구 사회복지부에서 개설하여 답동분원으로 이관한 해성어머니 한글교실을 담당하면서 답동분원의 사회복지 활동은 본격화 되었다. 해성어머니 교실은 문맹인 주부들에게 글을 가르쳐 가정 및 신앙생활의 향상을 돕기 위해 마련陖는데 종교와는 관계없이 25세 이상의 주부들을 대상으로 2년의 기간동안 한글교육과 산수, 일반 교양강좌를 실시하고 있으며 매일 평균 100명 정도의 주부들이 참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위한 교리반도 운영하여 문맹으로 인해 각 본당에서 교리를 배우지 못했던 영세자 및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1889. 답동본당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60쪽)

1894. 8. 18 답동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60쪽)

1900. 9. 1 인천항사립박문소학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60쪽)

1935. 10. 14 답동본당 부속병원 건물을 확장 개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60쪽)

1937. 3. 1 박문유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60쪽)

1961. 10. 30 해성병원 시설 인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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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71쪽)

서울 대교구 소속본당. 당시 금사리에서 전교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로망투(Emile Fromentoux)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당진본당이 설립되었다. 제 6대 변갑선(치릴로) 신부의 임기때는 성가수녀회가 진출하여 전교활동을 담당하였고, 부속유치원, 중학교, 진료소, 고아원과 신용조합을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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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성모 병원 (교회와 역사 227호 18쪽) - 1994. 4. 25 발행

충남 당진군 당진읍에 소재하고 있는 성모 병원은 읍소재지에서의 병원 운영이기에 대단히 그 역할이 크다. 영세민들과 병원 차량을 동원하여 어촌을 다니며 무료 진료하고 있다. 1993년 부터 가정 방문실도 경영하여 극빈자 치료와 후견을 돌보고 있다. 연 환자수는 4700명 가량이며 벽촌이라 의사 얻기가 힘겨워 1993년부터 의원 명의로 고쳐 운영하고 있다. 입원 병상은 20개 정도이고 비록 작은 규모의 3층의원이나 치료 대상은 매우 광범위하다.

1993. 당진 성모 병원에서 무료 진료를 시작 (교회와 역사 227호 18쪽) - 1994. 4. 25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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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가톨릭 병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88쪽)

대구대교구에서는 이 시대에 의료사업을 통한 사회봉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79년 3월 23일 가톨릭병원 신축을 위한 기공식을 거행한 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수녀회에서는 이 요청에 응답하여 1980년 2월 부터 한업덕 마리 아오스딩 수녀, 윤성기 토마스 수녀가 이 병원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초대원장인 이문희 주교와 부원장이며 병원 건축담당장인 젤라(Stanislao Gzella,길) 신부 및 행정처장인 스테파노 선생과 함께 병원설립의 선발대가 되어 실제적인 개원준비에 적극 협력하였다. 6월 19일에는 안옥화 쎈땅 수녀 그리고 6월 24일에 메리놀병원에서 오기옥 아나다시아 수녀가 보충파견되었다. 병원이 세워진 곳은 일명 뱀사골이라는 야산으로 병원건물도 아직은 골조공사만 이루어진 때였다. 수녀들은 간호과의 업무를 돌보기도 하고 재봉실, 세탁부, 영양실 관계 등을 맡았다. 초창기의 어설프고 어수선함 속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수녀들의 숨은 희생과 초인적인 노력으로 마침내 8월 12일 250병상 규모의 가톨릭병원 개원식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병원은 개원하였으나 아직 병원경영 자체로서는 걱정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교구민들의 기도와 많은 은인들의 돌봄과 교구병원에 대한 신자들의 아끼는 마음으로 병원은 곧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선의의 신자들의 자원봉사활동 등으로 병원은 생기를 띠었고, 병원을 찾는 환자수도 차츰 늘어났다. 10월 1일에 제2대 병원장으로 박창수(朴昌壽 요한) 신부가 취임하여 직원들을 격려하며 병원관리를 철저히 함으로써 몇 개월만에 병원운영이 본 궤도에 올라서게 되었다.

병원은 계속 발전 일로에 있었으나 병원장 박창수 신부의 중환으로 1982년 7월 7일 제3대 병원장으로 박병원(朴炳元 필립보)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고, 그해 가을 별관 병동 신축공사로 320병상, 1983년 여름에는 본관건물을 증축으로 396병상, 1985년 봄에는 별관병동 증축으로 441병상을 보유한 종합병원으로 성장해서 대구지역 사람들의 영육간의 건강에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1979. 3. 23 대구 가톨릭병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88쪽)

1980. 7. 6 대구 가톨릭병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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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결핵 요양원 (대구 가톨릭 사회복지회) - 1998. 5. 20일 대구 결핵요양원의 유재명님의 답신에 의거

재단법인 '태린회'로 발족되어 폐결핵환자 수용시설로 인가를 받아 대구시립희망원에서 결핵환자 54명을 인수하여 1968년 3월 8일 개원한 대구 결핵 요양원은 치료시기를 놓친 빈곤한 폐결핵 환자의 치료기간 중 입원보호와 대구 가톨릭 의료원 내과 전문의의 월 2회 진찰, 투약, 주사 등과 또한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한의사회의 주 2회의 한방진료, 치료 및 자활에 도움이 될 생활교육, 기능교육, 신앙생활을 지도하며 취업 등 사회재활에 도움이 될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 입원 대상자는 생활보호 대상자나 무의무탁한 폐결핵 환자로 14세 이상인 자이며, 그외 수술후나 균음전된 환자와 계속적인 투약과 치료가 필요한 환자이다.

1968. 3. 8 대구 결핵 요양원 설립 (대구 가톨릭 사회복지회)

1977. 7. 15 대구 결핵 요양원의 후원회인 '밀알회' 발족 (대구 가톨릭 사회복지회)

소재지 : 우 704-340 대구시 달서구 송현동 982/ 전화 053)634-3411∼2/ 모사전보 053)634-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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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월성 가톨릭 종합 사회 복지관 (교회와 역사 235호 22쪽) - 1994. 12. 25발행

1994년 5월 31일에 개관한 안동시 종합 사회 복지관은 안동시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다. 가톨릭 정신과 사회 복지의 실천 의지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이 사회의 현실에서 빈곤, 장애, 질병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소외되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위해 실질적인 도움 및 보다 나은 삶을 주고자 위탁 운영하게 되었다. 1994년 4월 안동시가 안동교구에 운영을 위탁하였고 교구에서는 다시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에 위탁하여 현재 3명의 회원이 평신도 전문 직원들과 함께 활동중에 있다.

주요 사업으로 가정 문제 종합 상담실을 운영하고 직업 기술훈련, 부녀자 교양교육, 아동복지 사업으로는 아동 문제 상담·탁아소 및 어린이집 운영, 어린이 공부방, 극빈 가정 아동 결연 후원·방과 후 학습 교실 운영·청소년 장학 지원·청소년 문화 광장·학습 및 기능 교실·시청각 교육실 운영, 노인복지 사업으로 노인 문제 상담실과 노인 학교 운영·독거 및 불우 노인 결연 및 지원사업·경로당 운영, 보건 및 의료 서비스 제공·무료 급식소 운영, 장애인 복지 사업으로 심신 장애자 상담·장애인 취업, 부업 알선, 지역사회 복지 사업으로 주민 욕구 조사 및 연구·자원봉사단 운영, 주민 사회교육, 집단 프로그램 운영, 주민 편의시설 제공, 그 밖에 무료 직업 안내소와 각종 복지시설도 운영하고 있다. 현재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의 3명의 수녀들이 파견되어 가능한 많은 주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리고 근무하는 직원들과 자원 봉사자들과의 협조 체제 아래서,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1994. 4 대구 월성 가톨릭 종합 사회복지관의 운영을 안동교구에서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에 위탁 (교회와 역사 235호 22쪽) - 1994. 12.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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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리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78쪽)

1934년 평양시 대신리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의 본당.

초대 주임신부로는 양기섭(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을 신축하였다 대신리 본당의 신심단체로는 청년으로 조직된 예수성심회, 40세 이상의 여교우들로 조직된 성부 안나회, 40세 이하의 교우들로 조직된 소화 데레사회,

미혼 여성들로 조직된 성모성심회, 남녀 중학생으로 조직된 미사회등이 있었다.

1935. 나자렛 양로원과 영해 고아원 설립 (278쪽 대신리본당)

1936. 6년제 초등교육기관 동평학교 설립 (278쪽 대신리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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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79쪽)

이 본당은 일제 하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대전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신설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당시의 관할구역은 대전을 비롯하여 충남의 대덕군(大德郡), 연기군(燕岐郡), 충북의 청주(淸州), 영동군(永同郡), 보은군(報恩郡), 옥천군(沃川郡)일원이었다.

1921년 초대 이종순 신부는 이미 매입해 둔 목동(牧洞) 소재 1만여평 대지 위에 성당 및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1926년 루블레 주임신부는 현 대흥동(大興洞) 성당을 준공 낙성하고 그 곳으로 이전했으며, 목동의 구 성당은 철폐하였다. 1941년 소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본당 주임신부 코르미어(Pierre Cormier, 高) 신부를 비롯한 3명의 신부가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85년 5월 본당이 재부활되면서 목동의 구성당으로 이사하였고, 본당 명칭이 목동본당으로 정착되었다. 한편 1948년 대흥동 본당에는 서울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이 파견되어 상주하면서 희망의원(현 성모병원)의 일을 돌보기 시작했고, 1956년에는 대덕군 산내면에 교회묘지를 조성, 1957년에는 소화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71년 현재의 목동본당이 신축 축성되었고, 한편 대흥동본당은 대전교구 주교좌 성당으로서 1962년 대규모의 성당건물(523평)이 신축되었다.

1957. 소화(小花) 유치원 개원 (279쪽 대전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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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철 베드로의집 - 1998. 6. 30일 대철베드로의집 김혜경 데레사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강원도 정선군 내의 탄광촌의 결손가정의 아동들을 보호하여 육성하기 위하여 1988년 12월 8일에 성모카테키스타회의 이수자 시도니아 수녀에 의해 설립되었다. 98년 현재 연면적 745평, 건평 156평에 아동 20명, 직원 4명이 탄광마을의 특성과 어려움속에서 만들어진 고아와 결손가정 아이들을 가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함께하고 있다. 현재 10명 미만의 아동과 더욱 친밀한 가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계획하고 있는 중이다.

1988. 12. 8 대철 베드로의집 설립

소재지 : 우 233-830 강원도 정선군 남면 무릉 3리 2반/ 전화 0398)591-2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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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천주교연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81쪽)

산발적으로 추진되어온 가톨릭 운동을 통합하여 본격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1949년 8월 26일 결성된 한국 가톨릭 평신도 운동의 중앙추진단체. 이와 더불어 각 청년단체들도 가톨릭 운동의 활성화를 위하여 '전국가톨릭청년연합회' 결성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필요성과 흐름을 수용하여 대한 천주교 연맹을 결성한다. 연맹은 대내적으로 단결을 강화하며 운동의 통일을 기하고 대외적으로는 입법, 행정, 교육, 산업, 문화 등 각 방면에 가톨릭 정신을 보급함과 동시에 국제적으로는 한국 가톨릭 운동을 대표한다는 목적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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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신생원 (성체회의 복지시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소재한 고아원을 윤을수(라우렌시오) 신부님께서 1962년에 인수하여 현재의 덕산면 읍내리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당시 소사 인보 성체회원으로서 파견된 3명의 회원들이 고아들을 돌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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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본당 (함경도 천주교회사 299쪽)

덕원본당에서는 각 공소마다 야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활동은 특히 전교의 차원에서 아주 효과가 있었다. 당시 조선의 각 청년회에서는 활발히 야학 활동을 벌여 애국 계몽운동의 차원에서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다. 반면에 덕원 본당에서 설립한 야학교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일반 야학교와는 달랐으므로 일본 경찰은 가톨릭 교회 측에서 야학교를 설립하는 데 대해 어느 정도 중립을 지켜 주었다. 그러나 국민 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결국 야학교는 조선 청년들의 교육열에 부응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활동이 지식의 전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교리의 전달에 있었고, 또 그들 자신이 국민 교육의 기초가 학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느끼고 있었을지라도 자연히 이것은 민중계봉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야학교는 덕원 본당 관내에서만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교구에서는 각 본당에 야학을 장려하고 있었고, 실제로 다른 곳에서도 야학이 큰 결실을 맺곤 하였다. 베네딕도 회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우선 어린이들과 젊은 사람들을 위한 예비자교리와 교리 강의를 체계화하고, 강화하고자 하였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확실한 교리 내용을 전달해 줌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양육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 교사들은 공립학교나 사립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세속의 일반 과목도 가르쳐 주어야 했다.

야학교에서의 수업은 덕원에서는 대체로 일요일과 첨례날에 이루어졌으며, 지방 공소에서는 일이 끝난 저녁때나 추수가 끝난 늦가을 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덕원본당과 같은 경우는 수도원에서 두번 강의를 하였는데, 즉 일요일 성당에서 본미사 후에 어린이들과 성인들을 위해 함께 수업을 열고, 또 한번은 더 늦은 시간에 어린이들만을 위해서 두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야학에 다니는 학생 대부분이 외교인들이라는 점이다. 야학 초기인 1929년의 기록에서도 "현재 50명의 소년들과 35명의 소녀들이 이 강의를 듣고 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외인들이다. 특히 여기(덕원을 말함)에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어느 마을의 외인 어린이들이 이날에 아주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들은 일요일 수도원의 기도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와서는 가끔 오후에 만도 후까지 남아 있는다."고 하여 외교인들이 야학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야학 활동이 전교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29. 덕원본당에서 야학교를 운영 (함경도 천주교회사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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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84쪽)

1927년 함경남도 덕원에 세워진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1909년 한국에 진출하여 서울의 백동(栢洞, 現 惠化洞)에 수도원을 세우고 교육사업을 위주로 활동하던 오틸리엔 성 베네딕도회가 1920년 원산교구를 관할하게 되자 수도원을 포교지로 이전하게 되어 1927년 3월 덕원에 세워졌다.

1928년 덕원신학교 교사가 신축되고 1930년 인쇄소가 설치되었으며, 이어 병원이 개설되어 이후 원산교구의 전례·교육·문화·출판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8.15광복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교회에 대한 박해가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5월 원산교구장 겸 대원장 사우어(B. Bauer, 辛) 주교를 비롯하여 수도원 내의 수사, 신부들이 체포되고 수도원을 포함한 모든 수도원 재산을 몰수당함으로써 폐쇄되었다.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사회복지활동 (함경도 천주교회사 532쪽)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워지고 1949년까지 성공적으로 운영된 학교 외에 의료사업이 외교인에 대한 전교의 좋은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툿찡 수녀들은 고산·원산·청진본당에서 시약소를 운영하였다.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은 원산 수酨르의 빈민 약국이었다. 여기서 프룩투오사 수녀가 2명의 수녀와 함께 열심히 일하였다. 수녀들은 가벼운 병을 치료하고, 이웃 병원의 의사 안(安) 박사의 감독하에 가난한 병자에게 무료로 약을 주고, 매일 가정방문을 하여 환자를 돌보고 그들에게 약과 함께 식료품도 시사하였다. 천주교 영향을 받고 입교할 뜻이 있는 남녀 중환자들에게 영세 준비도 시켰다. 특히 프룩투오사 수녀는 죽어 가는 어린이들에게 열심히 대세를 주었다. 그는 원산에서 활동한 25년 간 2천명이 넘는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주어 그들의 영혼을 구하였다. 1930년대에 내과 의사인 디오메데스 수녀가 툿찡에서 왔다. 이 수녀는 처음에 원산에서 활동하고 오랫동안 연구하고 나서 동경의 독일 대사관 소속 독일 의사와 같이 일본 당국의 국가 의사 시험에 응시하였다. 다행히 시험에 합격되었고 그후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 함흥으로 가서 병원을 시작하였다.

덕원의 작은 병원도 주요한 활동을 하였다. 병원장은 요셉 그라하머수사였는데 그는 1928년 서울에서 의사 자격증을 획득하였으므로 환자를 받고 치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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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34쪽)

해방 직후 1945년 12월 29일 범일동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정재석(鄭在石 요셉) 신부는 학교 설립의 뜻을 가지고 후원자들을 모으고 기성회를 조직하여 팔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어려운 상황으로 학교설립을 위한 기도는 무산되고 이듬해인 1946년 3월 성당 구내에 소화보육원을 설립했다. 한편 당시 항구도시 부산은 귀환동포 속에 섞인 고아들이 많았으므로 해가 거듭됨에 따라 원아들의 수가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피난민으로 초만원을 이루자 보육원의 수용능력은 한계에 다달았고 환자 치료문제가 대두되었다. 정 신부는 1951년 10월 관계 당국의 협조를 얻어 데레사진료소를 설립하여 원아들의 건강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특히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도 치료, 투약 함으로써 봉사하였다. 1951년 1·4 후퇴 후 부산은 다시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공지는 도로변 산중턱까지 판자집으로 뒤덮였다.

당시 서울에서 온 중학 이상의 각종 학교는 학생들의 임시 수용을 위해 각양각색의 가교사를 세웠는데 이때 범일동성당 구내에는 교장 박순경 루시아씨에 의해 서울 수도여자중고등학교의 가교사가 서게 되었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고 정부가 환도하자 피난학교들도 환교하게 되었다. 이때 정신부는 수도여고 가교사를 인수하고 교직원을 확보하여 1954년 4월 20일 학생을 모집했고 교명을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라 하였다. 이 학교는 같은 해 5월 10일에 중학교 3학급 고등학교 2학급인 160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그 해 9월 1일 정 신부는 노력끝에 문교부로부터 중학교 9학급 고등학교 6학급의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정 신부는 시내 대학교수 여러 명을 강사로 초빙하는 등 데레사여고를 명문으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교사들도 사명감을 가지고 학교교육을 위해 심혈을 바쳤다. 당시 학생들에게는 점심시간에 우유를 끓여 공급하였는데, 소화보육원 수녀들이 협력해 주었다.

1955년 8월 1일 정 신부와 교직원들은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 교실 14개를 신축했고, 1956년 3월 1일에는 범일동 가교사를 떠나 수정동 신축교사로 이사했다. 1957년 5월 30일 부산교구가 대구교구에서 분리됨으로써 부산교구유지재단이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인 최재선 주교가 취임하였다.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는 부산교구 유지재단에서 운영 관리하였고 정 신부가 7월 10일 다시 제 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정 신부는 당시 신설된 부산교구를 위해 할 일이 많았으므로 학교 실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를 초청하여 전담시키기로 내정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최재선 주교의 초청으로 서울 계성여자중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던 박정희 엘리사벳 수녀가 교감으로, 왜관 순심중학교의 서상분 말다 수녀가 교사로 취임함으로 데레사학교 분원은 1957년 8월 31일에 창설되었다. 부임 초기 수녀들은 범일동 소화보육원 분원에서 기거하며 통근하다가 10월경 가교사 옆에 있는 대지 300평 5칸 목조건물을 구입하여 두 수녀가 입주하게 되었다. 한편 이해 11월 21일에는 [레지오 마리애]교내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여 최재선 주교 임석하에 첫 회합을 개최하는 등 교내 종교활동 활성화에도 노력하였다. 12월 김숙경 마리 루이 수녀가 서무과장직을 맡아 긴급한 본교사 건축에 뜻을 두고 제반 경비절약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듬해 1월경 김필양 에프렘 수녀가 부임하여 집안 살림을 맡게 되어 교사수녀들은 학교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학교는 교사수녀의 부족을 메우기 위한 최재선 주교의 착상으로 여러 회의 수녀들을 강사로 채용하게 되었는데 복자회에서 가정과, 분도회에서 음악과, 프란치스코회에서는 영어과를 담당하는 국제 수녀학교를 방불케 하였으나 박정희 교감수녀의 지도 하에 서로 협조함으로써 활기 넘치는 학교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59년 9월 범일동구역에 본관 5층 22개 교실이 완공되어 이전함으로써 산위 가교사 신세를 면했다. 학교분원은 보육원분원의 큰 마루방 하나를 얻어 침실과 공동실로 사용하였고 공지에 온돌 하나와 부엌을 만들어 침실 겸 식당으로 사용하는 등 옹색한 살림살이였으나 성당과 시장이 가까워 편리한 점도 있었다.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는 교통이 편리하고 학교시설 등 교육환경이 갖추어진 범일동 본교사로 이전한 후부터 우수한 학생모집, 교원책용, 가톨릭 이념에 충실한 인문계 여자고등학교로서의 면모를 점차적으로 갖추게 되었다.

1972년 3월에는 문교부 시책에 따라 중·고교가 분리되므로 정의순 베드로 수녀가 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윤필술 쟌 마리 수녀가 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중고교 교장 겸임시대의 막을 내렸다. 1981년 4월 30일 문현자 호스띠아 수녀가 제6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수녀원 분원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3층으로 된 학교건물을 증축하게 되었다. 이에 수녀들은 남천동 생활관에서 기거하며 통근을 하다가 건물이 완공된 6월에 학교 건물 1층에 부설된 현 수녀원 분원건물로 입주하였다. 문현자 교장수녀가 취임했던 당시는 1980년 7·3조치로 과열과외가 사라지고 학원 정상화 작업이 정착되어 가면서 동시에 교복 자율화로 자칫 방종과 이탈현상이 예상되는 때였으므로 취임 후 전인교육의 구체화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정신에 바탕을 둔 믿음과 사랑으로써 성실하고 슬기로우며 아름다움을 지닌 한국 여성을 키운다"는 학교교육 목표의 근본 정신을 구현할 방안으로 학생들의 정신적 방향을 이끌어 갈 표상으로서 모녀상(母女像)을 세웠다. 또한 교회학교의 특색을 살려 "종교교육을 통한 품성 도야"를 교육방침으로 설정하고 그 구체적 실천 방안을 사랑의 실천, 정직한 마음, 감사하는 생활 등으로 구분하여 전인교육의 기본 덕목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위한 행사로 '성모의 밤'과 '소화에서 만납시다'를 연말에 종교반 중심으로 개최하여 헌금과 행사 이익금을 고아원과 소록도 나환자 수용소에 보내고 있다. 또한 정직한 마음의 실천을 위해 교내에서의 습득물 신고제를 두고 적극권장, 지도하고 있다.

1954. 5. 10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34쪽)

1957. 8. 31 데레사여자중고등학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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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사의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5쪽)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의 수녀들은 1951년 9월 10일 소화보육원 어린이들과 부근의 가난한 집안의 어린이들의 치료를 위하여 비영리기관으로 범일동본당 구내에 데레사의원을 개설하였다. 이곳에는 소아과와 내과를 두고 전임의사 1명과 간호수녀 2명이 종사하였다. 데레사의원도 소화보육원과 같은 사정으로 1971년 남천동보육원 뒤 언덕에 신축하여 영아들의 진료와 인근 주민들의 치료에도 기여하게 하였다. 그 당시 보육원 원아수는 남아 43명, 여아 80여명이었다. 신축공사는 건축비를 절감하기 위해 직영으로 했는데 수녀들은 일꾼보다 앞장서서 벽돌운반이나 잡석처리를 하며 건축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여 변두리 주민들도 버스를 타고 나가 종합병원을 찾았고, 의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시설 또한 과학화되어 가는 가운데서 모든 설비가 미비한 데레사의원은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교구의 시책대로 이 건물을 내놓고 현재 영아재활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 이전했다가 1977년 12월 28일 폐원하였다.

1951. 9. 10 데레사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5쪽)

1977. 12. 28 데레사의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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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사의 집 (나눔지 24호 13쪽) - 1984. 5. 15발행

미감아들과 자기들의 자녀를 한 교실에서 공부시킬 수 없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던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미감아에 대한 사회의 편견으로 정상인이면서도 사회로부터 격리되는등 불우한 생활을 보내야만하는 미감아들의 생활상을 보고 파현우(다미안 사회복지회 책임신부)는 그들의 복지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설립된것이 "데레사의 집"이다. 경제적인 자립이 없이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기능할 수 없기에 기숙사에 함께 거주하면서 각자의 특성과 재질에 따라서 기술(간호보조, 양재, 미용 등) 을 습득하게 되었다. 기술을 습득하면서 취업을 하게되고 어느정도 기반이 닦이면 독립하여 나가도록했다. 이러한 경제적 자립의 지지와 함께 중요한것은 정신적 독립으로 사회에나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세심한 정서지도를 하는 것인데 종교적인 신앙이 커다란 역활을 하고있다. 요사이에는 미감아뿐 아니라 편부모슬하의 자녀, 고아, 그리고 부모의 질병이나 기타이유로 가정에서 양육될 수 없는 14-18세의 청소년들과 무의탁 환자들을 보호하고 있으며 워낙은 소녀들을 위한 시설이지만 혈연 관계에있는 경우에는 소년도 함께 살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러한 사랑의 보금자리의 마련에는 많은 은인들의 후원의 땀이 서려있는데 생계비는 물론, 교육비, 그리고 환자들의 치료비등 모든것이 은인들의 후원에 의해서 충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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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 독서실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 28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1987년 6월 30일 서울시 도봉구 방학 1동에 청소년 문화 함양과 쾌적한 면학 분위기 조성, 학생들의 지적 수준과 학습능률을 높이기 위해 도봉구의 지원아래 세워졌으며 학생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데 있고, 청소년들의 올바른 자유정신을 양양하고 진리에 입각한 인격완성을 위해 그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도봉구청으로부터 1990년 6월 1일 재단법인 한국순교복자수녀회로부터 위탁을 받았다.

도봉동의 동명은 마을이 서울근교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에 있음으로 얻어진 이름이다. 옛날부터 이 풍경좋은 도봉산에 많은 명사들이 찾아들어 머물러 경치를 사랑하였다. 너와 내가 없는 둥근 지구라는 원탁에서 공존하며 국가와 국가간에 경쟁의 변모속에 고도의 경제성장과 문화발전이 민족의 내일을 탈바꿈시키고 있는 세대라 하겠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경쟁에서 보다 부강된 국력의 초석의 기반을 다지기위해서는 전국민이 언제 어디서나 필요에 따라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탐독하고 연구할 수있는 면학장소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으며 인구증가와 경제발전에 따라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독서실이 절대시 필요하였다. 인구는 기하급수로 급증하고 주택사정은 날이 갈수록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다. 단칸방을 쓰고있는 가구는 전체 가구의 32.9%이며, 2개 이하는 전체의 67.1%이다. 특히 서울은 단칸방을 사용하고 있는 가구가 전체가구중 33.7%로 각종 환경공해와 학습장소가 어려운 면학도들에게 학습의욕과 능률을 증진시킬 수 있는 사회교육 시설이 필요시 된다고 보겠다. 전국 도서관 수는 3621개관이 있으나 도서관 및 학교 도서관으로써 일반대중이 필요로 하는 공공도서관은 전국적으로 약 122개로써 극히 부족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을 뿐더러 필요에 따라서는 도서관에 입관하려고 하여도 대개의 공공도서관은 이른 새벽부터 초만원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어 몇시간씩 기다려야 입관할 수 있는 현상이다.

지역적으로 부족한 공공도서관의 기능을 대신하고 영세자녀 및 불우한 면학도 들에게 학습장소를 마련하여 주어 국가와 사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홍익인간을 육성시키는 학술도장으로 모든 국민에게 평생을 통한 도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며 국민의 자질을 향상하게 함으로써 정의로운 민주복지사회의 건설과 문화창달을 기여하려는 것이 사설 도서실의 의무이며 임무라 할 수 있겠다.

도봉 독서실은 대지가 315평이며 건물이 361평으로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되어있으며 1987년 6월 30일 개관식을 하였다. 1987년 6월 1일 도봉구청과 한국순교복자수녀회와 위탁체결을 하였다.

1987년 6월 22일 윤행자 요셉 수녀와 이옥보 야고보 수녀가 파견되었으며 동년 8월에 김복례(마르타) 수녀가 파견되고 동년 9월에 이은경 아가다 수녀가 파견되었다.

도봉 독서실 이용자는 년 평균 15만명에서 16만명에 이르며 수용인원은 438석이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우리나라의 다도정신과 선비 사상과 화랑 사상을 자연스럽게 점하게 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워주고 공동생활 속에서 서로 협동하며 질서를 스스로 지킬 줄 아는 어린이로 성장시키기 위해 유치원 아이들에게 다례를 가르치고 지역주민 가정주부들에게도 다도를 가르치기도 하였었다. 청소년들이 자기안의 모든 잡념, 즉 불만스러운 생각과 헛된욕심 나쁜 생각등을 버리고 마음을 순수하에 가짐으로써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정신통일을 이룩하며 더욱 열심히 공부에 몰입할 수 있도록 단전호흡 좌선을 교육시킨 일도 있었다.

1993년도에는 학생들에게 타자교육을 시켰다. 학생들에게 종교비디오를 보여 주고 일본인 후레아 신부가 도봉독서실에 상주할 때는 후레아 신부가 한달에 한번씩 와서 독서실에서 미사를 하였다. 수녀들이 정숙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주고 있어서 청소년 선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음으로 학부모들과 지역주민에게 상당히 좋은 호평을 받고있다. 1998년 현재 수녀 3명이 청소년과 지역 주민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다.

1987. 6. 30 도봉 독서실 개관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1990. 6. 1 서울시 도봉구청으로 부터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위탁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132-021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 1동 713-13/ 전화 02)90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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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사목 (영) Urban pastoral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298쪽)

도시사목은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특별히 필요로 하는 사목활동이다.

사목활동은 목동이 가축떼를 돌보고 있다는 성서의 비유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예수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육성하기 위한 모든일과 활동을 의미한다. '사제직무교령'에 따르면, 신자공동체의건설, 그것의 일치를 위해서 참고 책망하는 것, 교리교육, 전례의집행, 회합소집과 진행,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을 돕는 것, 젊은이와 가정을 도와서 신자생활을 인도하는 것, 병자와 임종자를 방문하는 것, 예비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 자선사업, 기도와 보속등이 모두 사목활동의 일부이다 (사제직무 교령, 6).

가톨릭의 사회적 교리와 원리가 포괄적으로 본격적으로 선포된 것은 1891년에 교황 레오13세의 <노동헌장>이 발표된 부터이고 그 이후 1981년에 발표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노동하는 인간>을 포함해서 대개 9개의 사항이 나왔다.

1935년부터 미국연방회의에서 제정된 노동조합법, 사회보장법, 공정근로기준법의 출현에 크게 기초가 되었다.

노동조합의 육성을 위한 사목활동과 연관을 맺으면서 발족한 노동자의 조직체가 가톨릭 노동청년회 (J.O.C) 이다. 이 운동은 벨기에에서 기독교 노동조합의 지도신부로 일하던 젊은 카르딘 신부가 1925년 4월 18일에 가톨릭 청년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발족시킨 조직체로서 2차 세계대전이후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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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보스꼬의 집 (나눔지 12호 5쪽) - 1979. 5. 25발행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산 55의 1에 자리잡고있는 돈 보스꼬의 집은 지난 6.25 동란때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기 까지 불우아동을 위하여 애써오고 있다. 특히 사회로부터 경원되고 있는 불우한 "한센씨 병(나병)" 환자 가정의 미감아동들에게 일반 가정의 어린이와 똑같은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감아동시설]이다. 교육비가 부족한 형편이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보다 바람직한 어린이의 보호, 교육과 원의 운영을 위해서는 외국인에 의한 원조보다 우리 이웃의 사랑과 도움을 더욱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1945. 돈 보스꼬의 집 설립 (나눔지 12호 5쪽) - 1979. 5.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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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보스꼬 작은집 (살레시오회의 복지시설)

성 요한 보스꼬, 일명 '돈 보스꼬'라고도 불리우는 성인은 1815년 이태리 북부 또리노시 근교에 위치한 베끼라는 마을에서 탄생하였고 1814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산업화와 근대화로 가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방황하고 희생되어야 했던 많은 가난한 청소년들과 함께 모여 놀고 기도하며 함께 일하고 먹고 자는 일에 이르기까지 교육사업에 온 일생을 바쳤다. 돈 보스꼬는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이러한 일을 계속하고자 1856년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립하였고 1875년 부터 유럽 각지를 비롯한 남미에까지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 세계 101개 나라에서 1만 7천여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같은 정신과 활동을 추구하는 살레시오 여자수도회를 비롯한 8개의 수도회와 단체가 살레시오 가족을 구성하고 있다.

대전 광역시 서구 정림동에 위치한 돈 보스꼬 작은집은 이러한 돈 보스꼬 성인의 정신을 이어 받아 도움이 필요한 젊은이들을 가족적인 분위기 안에서 정직한 시민과 착한 그리스도인들로 교육하고자 설립된 젊은이들의 보금자리이다.

소재지 : 우 302-230 대전광역시 서구 정림동 35-4/ 전화 042)584-0654/ 모사전보 042)585-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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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학교 敦義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5쪽)

평양교구 진남포본당이 운영하던 초등교육 기관으로 1900년에 설립되었다. 초대교장 이평택(파트라치오) 을 중심으로 착실하게 성장한 돈의학교는 설립 몇해 만에 평안도에서 손꼽히는 사립학교로 부상하였다. 2대 교장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을 맞아 더욱 충실하게 성장하였으며 민족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전통있는 학교가 되었다. 1908년 교사를 증축하여 300여명을 교육시키는 커다란 학교로 발전하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일어나고 이에 따라 본당주임 르레드(Jules Lereide, 申) 신부가 본국으로 소환되어 가면서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916년 폐교하였다.

1900. 돈의학교 개교 (305쪽 돈의학교)

1916. 돈의학교 폐교 (305쪽 돈의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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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중고등학교 東星中高等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제단법인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중등교육 기관. 학교내에 을조(乙組) 를 편성하여 신학교의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을조의 경우 남대문 상업학교의 교육과정을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받고 방과 후 신학원에서 신학교육에 필요한 라틴어와 교리및 지도신부의 영성을 받았다. 1968년 5월 김수환 추기경이 이사장으로 취임되어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마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7. 9 소의학교라는 교명으로 외교인이 설립한 초등교육기관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1922. 4. 1 교회에서 인수하여 5년제 갑종상업학교로 변경하면서 남대문 상업고등학교로 개칭.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1928. 혜화동으로 이전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1946. 6년과정 인문계 중학교로 개편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1950. 5 신교육법에 의해 3년 과정으로 된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조직변경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1953. 본교로 복귀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1968. 5. 김수환 추기경 이사장으로 취임 (309쪽 동성중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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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성모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09쪽)

1609년에 영국인 메리 워드(Mary Ward)에 의해서 벨기에의 성 오메(St. Omer) 에서 창설된 활동여자 수도회. 청소년 교육과 그밖의 모든 자선사업활동을 전개하던 이 수도회는 초창기 교회로부터 반대와 오해를 받기도 하다가 1909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서 인준을 받았다. 1956년 8명의 한국여성이 입회.

현재 초대관구장 박기주 수녀를 중심으로 서울, 대전, 충북, 보은, 전북, 이리, 경남 진해, 충무에서 활동하고 있다.

1965. 대전 성모여자 중학교 개교 (309쪽 동정성모회)

1966. 대전 성모국민학교 개교 (309쪽 동정성모회)

1967. 보은 성모의원을 개설 (309쪽 동정성모회)

1968. 대전 성모여자고등학교의 설립인가를 받음 (309쪽 동정성모회)

1972. 나환자를 위한 이리 성모병원을 개설 (309쪽 동정성모회)

동정 성모 수녀회 (라) Institutum Beatae Mariae Virginis (교회와 역사 81호 7쪽) - 1982. 4. 25발행

동정성모회는 1609년 영국인 메리워드(Mary Ward)에 의해 벨기에의 성 오메(St. Omer)에서 창설된 여자 활동 수도회이다. 창설자 메리워드는 2년의 준비끝에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이 수도회는 창설했는데 이름 그대로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고 성모마리아의 여종으로서의 봉사를 목표로 청소년 교육과 그밖의 모든 자선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당시 나타나기 시작했던 사도활동들은 봉쇄와 병행되거나 지방주교에게만 인정받을 수 있었으므로 이 수도회는 교회로부터 완전한 승인을 얻기까지 300년동안 반대와 오해를 받는 등 갖가지 고난과 시련의 특이한 역사를 겪었다. 창설자인 메리워드는 교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수차례나 로마와 도버해협을 건너 왕래하고 유럽전역을 도보로, 마차로 여행 하면서 후세에 "사도 바오로 이후 주 그리스도를위해 가장 긴 여행을 해낸 여성" 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 비오 10세는 수도회 창설 300년만인 1909년 4월 20일 인준을 하였다. 동정 성모회의 한국 진출은 1964년 6월 10일로서 당시 독일에 유학중이던 예수회 박고영 신부가 이 수도회의 교육사업을 보고 한국에의 진출을 요청한 것이 그 실마리가 되었다.

서울 분원의 회원들은 대방동에 있는 공군부대와 개봉동, 오류동, 본당 등에 나가 사목활동을 펴고 있으며 월1회 성소자 모임도 지도하고 있다. 대전 공동체는 1965년 학교건물과 수도원건물이 완공되면서 시작되어 성모국민학교와 성모여자 고등학교 등 청소년 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성모국민학교는 1966년 2월 17일에 객교하여 "감사할 줄 알며 거짓 없고 자기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어린이"를 배출시키고 있다. 또한 성모여자고등학교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을 위하여 몸바칠 여성"이라는 여성상의 구현을 위하여 전인교육을 이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충북 보은 분원에서는 성모병원, 성모유치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북 이리에서는 성모의원과 2개 시와 6개 군의 나환자 정착촌 12개에서 의료 및 구호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곳 성모의원에서는 나환자 전용병동도 새로 건립하였다. 또한 경남 충무분원에서는 본당사목과 충무유치원 사업을 돕고 있으며 진해분원에서는 군종사목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해군 사관학교 등 각 군부대에 나가 군종사목에 종사하는 한편, 군인가족들에는 가정방문화 그룹활동 등을 통해 교리교육과 성경연구를 실시하고 있다.

동정성모회는 현재보다 견고하고 지속적인 사도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분원확장을 보류하고 회원들의 영성교육과 사도직을 위한 전문직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94년에 한국진출 30주년을 지낸 한국 동정 성모회는 400여년 간 학교 교육에 헌신하여 온 수도 공동체의 정신을 이어 받아 자신의 카리스마인 교육은 물론이고 앞으로 신앙의 옹호와 전파를 위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이면 어떤 분야에서도 투신할 각오를 다지며 동시에 새로운 변모와 발전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다.

1966. 2. 17 동정 성모회는 대전에 성모국민학교를 설립 (교회와 역사 81호 7쪽) - 1982. 4. 25발행

1967. 충북 보은 분원에서 성모병원 설립 (교회와 역사 81호 7쪽) - 1982. 4. 25발행

1972. 전북 이리에 성모의원 설립 (교회와 역사 81호 7쪽) - 1982. 4.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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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혜원 (작은자매 전교회의 복지시설) - 1998. 4. 23일 작은자매전교회의 답신에 의거

"하느님께 대한 우리 봉헌을 가장 가난한 이들 속에서 행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생활은 오직 하느님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가난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전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적인 우정의 분위기 안에서 사업을 하지 않고 그들의 가장 긴급한 필요성에 응답하는 봉사와 선물의 자세로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나누는 것입니다." 라는 회헌을 바탕으로 나환우들의 정착 마을에서 기도의 우월성과 작은 프라테르니타(형제애를 나누는 곳 이란 뜻) 생활을 통해 형제애를 증거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봉사를 하기위하여 작은자매 전교회에서 서 이멜다 자매와 나 마리아데레사 자매가 동혜원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고창 본당에 배 요셉 신부님이 계실때 시작하였으며 마을에 280-300명 정도가 있었는데 계발이 안되어 길도 없었고 외부에서의 도움의 손길이 없었으며 치료실이나 약품제공도 없어 개인적으로 치료를 하고 있었다. 자매들의 이동이 있었으나 계속해서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산 17번지에 주거하고 있다.

1967. 8. 22. 동혜원에 작은자매 전교회 회원들이 사목활동을 시작 (작은자매 전교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631-320 경상남도 마산시 합포구 가포동 486/ 전화 0551)23-7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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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평학교 洞平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10쪽)

평양교구 대신리 본당에서 1936년 5월 14일 개교한 학교. 그 해 4월 25일 6년제 국민학교로 인가받고 교사가 준공되는 동안 성당내 가(假)교실에서 수업하였다. 이듬해 부근의 동덕학교가 폐교됨에 따라 학생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동평학교는 적령기를 넘도록 취학하지 못한 빈민 학생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여 많은 학생들에게 취학의 기회를 주었다. 1948년 10월 폐교되었다.

1936. 5. 14 동평학교 개교 (310쪽 동평학교)

1948. 10 동평학교 폐교 (310쪽 동평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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