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명부5(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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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스타 교육수사회 / 마리스타 교육원 / 마리스타 기술 교육원 / 마리아 수녀회 / 마리아 수도회 /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 /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 / 마리아의 집(춘천) / 마리아의 집(포항) / 마음터 공부방 / 마이러 하우스 / 마자렐로 센터 / 마전동본당 / 만성병 연구소 / 말씀의 집 / 맑음터 / 모현 호스피스 / 매괴국민학교 / 매괴여자 중·상업고등학교 / 매리지 엔카운터 / 매화동본당 / 메리놀병원 / 메리놀 수녀회 / 메리놀외방전교회 / 메스트르 / 명월구본당 / 명휘원 / 명휘해동일터 / 명휘 공동가정 '희망' / 명혜학교 / 명휘어린이집 / 명휘 종로 복지관 / 명휘 체육센터 / 모성학교 / 무세 / 미야사끼 까리따스 수녀회 / 밀알재활원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영) Marist Teaching Broth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2쪽)

프랑스의 라발라(La Valla) 본당 보좌신부 샴파냐(Champagnat) 에 의해 창설된 교육 수도회로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설립목적으로 한다. 한국에는 1971년 9월 13일에 진출하였다. 서울에서는 수도원을 개방하여 학생들과 일반인 그룹들을 지도하는 한편 본당 주일학교와 몇몇 단체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교리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안동에는 실기교육원을 설치하여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조각, 선반, 자동차 정비, 타자, 주산, 부기 등 실기교육을 시켜 그들의 사회진출을 돕고있다. 또 영주에서는 다미안 피부과 의원을 중심으로 나환자교육에 임하고있다. 이밖에 충주에 있는 충주 성심농아학교에도 3명의 회원이 파견되어 농아교육의 일원을 담당하고있다.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 (교회와 역사 244호 10쪽) - 1995. 9. 25발행

1817년 마르첼리노 샴파냐 신부(Marcellin Champagnat, 1789-1840) 가 프랑스의 에르미타즈에서 창설한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Institut des Freres Maristes des Ecoles) 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17년 9월이었다. 진출목적은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한다'는 마리스타 교육 정신을 바탕으로 특별히 한국의 불우청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이를 통하여 한국교회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함이었다. 사실 우리시대가 진정한 교육을 외면해 버린지는 오래이다. 많은 사람들이 출세의 방편으로, 혹은 계층 상승의 수단으로 교육을 필요로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바로 이땅에서 가난 때문에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을 펼쳐왔다. 그동안 25년 이라는 짧은 진출역사 속에서 성직자가 아닌 수사들로만 구성된 수도회로서 사도직을 전개하는데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이젠 서서히 수도회 고유의 카리스마를 한국교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하고 있다.

수사들이 먼저 동정 마리아처럼 살아가길 염원한 샴파냐 신부는 마리아께서 모든 것을 해주었다고 확신하였기에 마리아를 나날의 도움과 최고의 장상이라고 말하였다. 회원들도 창설자의 이런 정신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가장 완전한 첫 제자로 사신 마리아를 복음적 태도로 살아야만 하는 자신들의 존재와 태도를 제시하는 모범자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예수께로, 예수를 위하여 모든것을 마리아께"라는 표어가 바로 삶의 중심이 되었고 겸손, 단순, 겸허의 정신 또한 창설자로부터 오늘날 까지 전수되고 있다. 이 덕행은 먼저 수사들 사이에서 그 다음 사도직 현장에서 만나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진실함과 친절로 드러난다. 또 묵묵히 선을 행함으로써 생명과 재능을 교회와 세상을 위한 봉사에 기꺼이 바치고 서로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며 가족 정신의 전형을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찾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일치하는 한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가족정신은 사랑, 용서, 협조, 상호보완, 자아 포기, 타인들에게 솔직 담백함과 기쁨으로 이어진다.

한국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

마리스타 교육수사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체 수도회 차원에서 각 관구마다 10%의 회원들을 의무적으로 선교지로 파견하도록 결정하였다. 멕시코 관구에서는 이러한 수도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아시아 각국을 두고 대상지를 물색하였다. 그러던 중 1970년 초 아르투로자벤 관구장과 고 헨리코 수사가 한국을 방문하고 그 결과를 관구 총회에 보고하였다. 같은해 말 한국 진출이 결정된 마리스타 교육수사회의 목적은 마리스타 교육정신을 통하여 한국 교회발전에 협력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진출은 본격화되어 1971년 9월 13일 고 헨리코 수사와 엠마누엘 수사, 해수수사, 세르기오 수사등 4명의 멕시코 중앙 관구 회원들이 내한하여 서울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거주하면서 명도원에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8월에는 성북구 삼선1동에 전세집을 빌려 한국지부를 개설하였다.

1993년 10월에는 세계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19차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9년마다 개최되는 이번 총회를 통하여 참석자들은 전 수도회의 사명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이때 이루어진 작업은 한국에서의 마리스타 교육수사회의 진로 결정에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총회에서 수도생활의 도전으로 인식한 요소는 사회와 문화에 침투한 세속화, 무신론의 성행, 기술과 통신의 발달로 인한 물질주의, 소비주의, 인격상실, 인종주의, 성차별, 아이들의 권리 경시, 종교적 광신, 사이비 종교집단, 낙태와 안락사 등으로 표현된 인격과 생명 존중에가해진 침해 등이다. 이런 현상들은 세상의 모든 계층안에 가치의 우기를 초래하고 이로 인한 주된 희생자들은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의 주된 사목 대상인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었기 때문에 그 심각성은 더욱 절실하게 수도회에 인식되었다.

창설자의 은사와 부합하는 범위 안에서 모든 사도직에 개방된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의 사명의 근본요소는 가장 버림받은 이들, 특히 청소년들을 위한 그리스도교 교육을 통한 하느님 말씀의 직접적인 선포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리교육에 우선권을 부여하며 각자에게 직무수행에 온전한 마음으로 투신하고자 노력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데에 교육처럼 필수적인 것도 없다. 교육은 모든 사람을 위한 자연권이다. 따라서 아무리 비천한 사람들일지라도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은 물론이다.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청소년들을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들에게 그리스도적 정신을 불어넣어 주려 한다. 물론 이러한 일들을 하기엔 스스로의 힘이 너무 미약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때면 창설자 말르첼리노 샴파냐 신부의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해야 한다. 그러자면 항상 겸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검소하고 단순해야 한다."는 말에서 용기를 얻는다. 세계가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 강한 물질주의의 영향으로 세상에서 복음의 증거자가 되는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에서도 어려움이 많다. 즉 수사들의 전반적인 감소와 성소 결핍, 관구들의 노쇠화로 현행의 모든 사업체들을 존속시키는데 따르는 어려움, 교리교육적 열의의 상실, 아직도 가난한 자들과 충분히 함께 있지 못함 등이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수도회는 복음화를 심화 시키는 마리스타 학교를 건설하는데 더욱 투신하고자 한다. 또한 평신도들의 협조를 받아 과감하면서도 창의적인 교리교육과 크리스챤 운동을 전개시키려 하고 있다. 아울러 사회 변두리에서 만나게 되는 소외된 아이들과 청소년들― 거리의 아이들, 문맹아―을 돕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은 복음적 권고와 수도회 은사에 충실함과 함께 근본 요소로서 모든 식별의 기준처럼 회원들에게 인식되어 있다.

한국의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이제 진출 25주년을 맞이하면서 지금까지의 축척된 경험으로 다음과 같은 사업들을 계획하고 있다. 즉 청소년들을 위한 전문 캠프장 및 피정 센터,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기술학교, 약물 중독 청소년이나 가출 청소년들로 이루어진 10여명 안팎의 소공동체, 올바른 마리아 신심의 전파를 위한 마리아 센터를 세워 운영하는 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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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스타 교육원 (교회와 역사 244호 13쪽) - 1995. 9. 25발행

⸁ 안동 : 1973년 8월 합정동으로 수도원을 이전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게 된 마리스타 교육원은 본격적으로 사도직 활동을 모색한 결과 그 첫번째 결실로서 1973년 9월 안동에 첫 분원을 설치하게 되었다. 안동지방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안동교구가 인적, 물적으로 가장 가난하였고 진출한 수도회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안동 주변지역의 주민 대부분의 생업이 농업으로서 유교가 지배적인 지역이었기에 선교하기에 매우 어려운 조건들이 많았으나 바로 이런 소외된 지역이야말로 마리스타교육 수도회가 일할 곳이기에 첫 진출지로 결정한 것이다. 먼저 안동에서 공부하고 있는 타지방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및 독서실을 운영하였고 또한 실기 교육원을 설립하였다. 특히 이 교육원에서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의 교육에 주력하여 여학생들을 위해서는 주산, 타자, 부기를 남학생을 위해서는 조각, 선반, 자동차 정비에 관한 과목을 두어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동시에 일반 학교 교과 과목을 둠으로서 청소년들의 사회 진출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교육관 운영이 안정권에 들어서자 교구에 이를 양도하고 분원을 철수하였다.

⸂ 원주 : 1985년에 교육원(강원도 원주시 봉산2동)을 개설하여 피정지도와 교구 청소년들과 교리교사들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진광고등학교 지도 교사들의 교육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에 교구차원에서 교육관이 종합 사회 복지관으로 변경되면서 분원은 철수하였다.

⸃ 서울 : 본원인 합정동 수도원 안에 위치한 마리스타 교육관에서도 고등학생, 대학생, 일반인들에게 피정장소를 제공하고 지도하고 있다. 또한 본당 주일학교와 몇몇 단체에 속한 청소년들에게 교리교육도 하고있다. 교육관 운영을 위해 현재는 일반 레지오 단원을 위한 피정, 예비자 피정, 선택 프로그램 등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청소년 교육에 전력하면서 전문성을 살려 나갈 예정이다.

1973. 8 합정동 서울 본원에 마리스타 교육관 설립 (교회와 역사 244호 13쪽) - 1995. 9. 25발행

1973. 9 마리스타 교육수도회 에서는 안동에 마리스타 교육원을 설립 (교회와 역사 244호 13쪽) - 1995. 9. 25발행

1985. 강원도에 마리스타 교육원 개설 (교회와 역사 244호 13쪽) - 1995. 9.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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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스타 기술 교육원 (교회와 역사 244호 14쪽) - 1995. 9. 25발행

마리스타 기술 교육원(충북 중원군 산척면 영덕리 262-11)의 전신은 사회 복지가인 애드나 스미드씨가 1964년 서울역 부근에서 방황하던 구두닦이 청소년들을 돌보기 위하여 용산에서 시작한 '요한 보스코' 고아원이다. 그런데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시 당국으로 부터 고아원 이전을 요청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고아원 운영이 불가능하게 되자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가 이를 인수하여 충북 중원군에 새 건물을 짓고 기술 교육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는 부모가 없거나 가정 불화로 가출한 청소년, 결손 가정의 자녀와 영세민 자녀, 그리고 다른 사회복지 시설에서 잘 적응하지 못한 12-18세의 청소년들을 수용하여 사회적응을 위한 학습교육과 기술훈련을 연마시켜 직업인으로 양성시키고 있다. 졸업 후에는 취업알선까지 해주며 그들이 진정한 사회인으로 뿐만 아니라 4명의 수사와 일반 교사 및 보모들이 목공, 금속 공예, 배관 등의 기술교육과 함께 신앙교육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1988. 마리스타 기술교육원 설립 (교회와 역사 244호 14쪽) - 1995. 9.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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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수녀회 (교회와 역사 67호 7쪽)

마리아 수녀회의 창설동기는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소 신부) 가 부산 송도(지금은 남부민동) 본당주임으로 있을적이었다. 너무나 가난한 참상, 너무나 외로운 사람들의 처참한 상태를 그냥 볼 수가 없었던 소 신부는, 우선 버림받은 고아들만이라도 주님의 일꾼이 되어 돌봐 줄 사람들을 구했다. 당시 부산 교구장 최 재선 주교와 의논하여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모든 자금은 모국인 미국으로부터 모금해다가 재단법인을 결성했다. 우선 송도 본당 한쪽 헛간 바닥에 거적을 깔고서 시작한 마리아 수녀회의 공식 창설일은 1964년 8월 1일이다. "이 어린이들 중에 하나라도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 (마태 18,5) 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과 부모가 없어 버림받는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모성애로써 봉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 등 기도 생활과 함께 복음적 실천과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창설한 수도회다. 그리하여 버림받은 어린이와 불우한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봉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수도회다. 회원은 빈첸시오 바오로 성인의 까리따스 수녀회의 전통을 따른다. 마리아의 수녀회에서 행하는 사업의 규모는 아동복지 사업과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 고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버림을 받아서 마음과 몸이 몹시 지쳐있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는 지체부자유와 정신 박약한 가련한 어린이도 320여명이나 된다. 이들은 수녀들의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로써 참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구나, 어떤 과오를 저지른다고 해도 따뜻한 사랑과 손길로써 보호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낙원이다.

의료사업인 부산의 결핵요양소와 서울의 갱생원은 시 당국의 경영난으로 믿고 넘겨 준 의료기관인데, 모두 무료치료를 베풀고 있다. 서울 갱생원 원생 중 회갑을 지낸 환자들은 서울 소년의 집 구내로 옮겨서 양로원 같이 보살피고 있다. 교육사업은 모두 수녀회가 전액 부담하되, 부산으로 집결시킨 유치부를 마치면 부산의 중학교로 보낸다. 중학교를 마치면 남자는 기계공고로 전학시키고 여자는 고입예비고사에 합격하면 학구배치에 따라 여러 일반여고로 보내어, 학비 잔액을 부담하여 통학시킨다. 공업고교 과정을 마친 남자는 노동부가 시행하는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직을 시킬 수 있고 공전으로 전학 수용시켜 무상교육의 혜택을 지속시킨다. 여자의 경우는 여고를 마치고 대입 예시 합격하면 간호전문대, 교육대, 사범계 등으로 진학시켜 무상 교육 혜택은 연장된다.

1964. 8. 1 마리아 수녀회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1969. 9. 1 마리아 수녀회 결핵 요양소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1970. 3. 1 마리아 수녀회 무료진료소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1970. 10. 20 마리아 수녀회 구호병원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1973. 1. 31 마리아 수녀회에서 부산 소년의 집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1975. 1. 10 마리아 수녀회에서 서울 소년의 집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1975. 5. 5 마리아 수녀회에서 어린이 마을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1981. 1. 1 마리아 수녀회 갱생원 설립 (교회와 역사 67호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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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수도회 (영) Society of Mary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5쪽)

남자수도회의 하나로 1817년 프랑스 보르도(Bordeau) 에서 샤미나드(Chaminade)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1968년에 서울에 진출하여 효성중등야간학원을, 목포에서는 마리아회 고등학교를 각각 설립 운영함으로써 교육을 통한 사목활동에 힘쓰고 있다.

1980. 운영권을 한국인이 이양받아 방인 자치 수도회로 새 출발 (365쪽 마리아 수도회)

1968. 효성중등야간학원, 목포에서는 마리아회 고등학교를 각각 설립 운영 (365쪽 마리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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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도움 시약소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8쪽)

프룩투오사 수녀의 희생적인 의료봉사로 인하여 시약소는 언제나 많은 환자들로 붐비었다. 프룩투오사 수녀는 독일에서 약조제에 대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도 직접 약초를 뜯어다 제조하여 환자들의 치료에 사용하였다. 예를들어 우리나라의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새풀(Zinnkraut)을 끓여서 마시게 함으로써 담석을 녹아 내리게 하였다. 또한 방광염, 관절염, 피부병이나 신장염으로 소변을 볼 수 없을 때 또는 각혈을 멈추게 할 때에도 속새풀을 끓여 그 김을 쪼이도록 처방하였다. 외상에는 쑥을 알콜에 담갔다 건져내어 만든 베르뭍팅크투르(Wermuttinktur) 를 사용하였고, 역청과 유황을 섞어 만든 일명 '역청 고약'을 사용하였다.

그외에 피를 깨끗이 하는데는 민들레 생즙을, 감기나 기관지염에는 질경이를 복용토록 하였으며 벌레 물린데는 질경이 생즙으로 치료해주기도 하였다. 또한 프록투오사 수녀는 카밀레를 이용하여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하였는데 소화가 안될때나 대장에 이상이 생겼을 때 이 카밀레꽃 끓인 물을 마시게 하고 피부병이나 상처의 근을 빨때는 카밀레 끓인 물에 목욕을 하도록 처방하였다.

프록투오사 수녀는 1926년도에 입국하였지만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울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프록투오사 수녀의 서툰 한국어 구사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서로 통할 수 있었으니 바로 '이심전심'이란 말이 이에 합당하였다. 프록투오사 수녀는 늘 많은 환자들에게 시달리면서도 평화를 잃지 않았다. 때론 아주 참혹하게 된 아기나 엄마들을 대할 때 동정하며 정성껏 치료하는 수녀의 모습에서 숭고한 주님의 자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1938년 6월 시약소가 새로 아담하게 지어진 후에는 최 리오바 수녀가 간호수녀로서 프룩투오사 수녀를 도와 일하였다.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는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원산에 진출한 이후 주일과 축일 이외의 날은 계속하며 하루에 40-50명의 극빈자를 치료하였다. 새로 지어진 시약소는 프룩투오사 수녀가 한국에서 통용되는 정식 의사의 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인 의사 디오메데스 수녀의 명의로 허가를 받아 운영하였다. '시약소' 라는 표현보다는 '무료진료소' 라고 부르는 것이 더 그 뜻이 어울리는 사업이었다.

1938. 6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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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영) Little Company of Mary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6쪽)

1877년 7월 2일 메리 포터(Mary Poter) 수녀에 의해서 영국에서 창설된 수녀회. 1963년 11월 23일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낡은 공장터에서 시작된 초창기에는 주로 임종중에있는 영혼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하여 가난한 형제, 자매들과 함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을 기본정신으로 하여 1886년 5월 교황청의 정식인가를 받았다. 1963년 당시 춘천교구장 퀸란(Thomas Quinlan) 주교의 요청으로 호주관구 소속 마크 메이어(Sr. Mark Maher) 수녀 외 2명의 수녀가 내한하여 강원도 지방에 정착,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 3월 15일 강릉 갈바리의원을 개원하여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였고, 1973년 11월 20일에는 포천 평화의 모친의원을 개원한 뒤 1980년에는 치과를, 1981년에는 지체부자유자를 위한 물리치료시설을 개설하였다. 1974년 11월 15일에는 서울분원을 신설하고, 1975년 현 서울 후암동으로 이전하였다.

1965. 3. 15. 강릉 갈바리 의원 개원 (366쪽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1973. 11. 20. 포천 평화의 모친의원 개원 (366쪽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1981. 지체부자유자를 위한 물리치료실 개설 (366쪽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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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 (라) Congregatio Missionariarum Mariae Franciscanarum)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6쪽)

1877년 1월 6일 마리 드 라 파시옹 (Marie de la Passion)에 의해 인도 오타카문드 (Otacamund)에서 창설된 수도회. 1954년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내한하려 하였으나 중국에서의 수녀원 추방운동으로 1958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진출하였다.

1960년 5월 부산 양정동에 정착하여 성모의원과 함께 수예실을 운영하였다. 1975년 2월에는 부산성모의원을 폐쇄하고, 의료혜택이 더욱 필요한 성 프란치스코의원을 개원하였다. 한편 부산에서는 1961년 3월 성모여자중학교, 1964년 성모여자고등학교를 개교했으나 1974년 성모여중을 폐교하고 1979년 6월 성모여고를 부산교구에 이관하였다. 1966년 서울 가리봉동에 수녀원과 의원건물을 완공함으로써 모두 이전하여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1974년에는 부산에 있던 수련원도 서울로 이전하였다. 1972년 일본관구소속에서 준관구로, 1978년 정식관구로 승격되었다. 1979년에는 원래 학교부지로 매입했던 곳에 선화기숙사가 완공되어 5월 1일 첫 기숙생을 입사시켰다. 현재 한국관구 본부가 있는 서울 가리봉동 수녀원을 비롯하여 부산 양정동 수녀원, 강원도 정선수녀원에서는 관구장 수녀를 비롯한 65명의 (1983년 말 현재)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60. 5 부산 양정동에 정착하여 성모의원과 함께 수예실을 운영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1961. 3 부산에 성모여자중학교 개교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1964. 성모여자고등학교 개교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1974. 성모여자중학교 폐교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1975. 2 부산 성모의원을 폐쇄, 강원도 정선으로 이전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1976. 5 성 프란치스코의원 개원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1979. 5. 1 선화기숙사 완공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1979. 6 성모여고를 부산교구에 이관 (366쪽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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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집 (나눔지 26호 8쪽) - 1984. 9. 15발행

1976년 '한 영혼은 온 세상보다 귀중하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착한목자 수녀회는 윤락여성들 가운데 임신을 하게되는 경우에 그들과 새로운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마리아의 집'을 개원하게 되었다. 서강대 부근에서 얻은 작은 셋집에서 임신을 하게된 윤락여성들을 돌보면서 이들의 안전한 출산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육신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구원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육신을 당장 구원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사회에 나가 또다시 옛날의 비참한 길을 다시 밟지 않도록 새로운 영혼의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마리아의 집'은 서울에서 춘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10년전 윤락여성들이 많이 찾아왔던 것에 반해 지금은 가정의 잦은 불화로 가출하여 누구의 보살핌도 없는 여성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미혼모들이 마리아의 집에서 보호를 받고 정작 사회로 나가게 되면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 때문과 자신의 문제, 기술교육 기관 등 재활의 기틀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교육기관이 없기때문에 재활문제등이 생겨나지만 "나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느끼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한 미혼모의 고백에서 착한목자 수녀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빛 안에서 재생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1976. 마리아의 집 개원 (나눔지 26호 8쪽) - 1984. 9. 1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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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집 (예수성심시녀회) - 1998. 5. 27일 예수성심시녀회의 답신에 의거

무의 무탁한 18세 이상의 성인 여자 지체장애인으로서 재활이 가능한자를 위한 마리아의 집은 1982년 경북 포항시 남구에서 설립되었다. 이곳에서는 신앙생활 및 정서교육, 의료재활, 직업재활의 사업을 하고 있다.

1982. 12. 8 마리아의 집 설립 (예수성심시녀회)

소재지 : 우 790-310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장동 270-2/ 전화 0562)72-0586

마리아의 집 - 1998. 8. 26일 마리아의 집 답신에 의거

마리아의 집은 사랑의 사업을 펼친 설립자 루이 데랑드 신부의 뜻과 가톨릭 교회의 정신에 따라 가장 불쌍하고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과 신체 장애로 스스로 생활을 할 수 없는 자들의 생활을 보호하고 의료재활 및 사업재활훈련을 통하여 그들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인간존엄성의 유지와 인간다운 생활을 지속하게 한다.

1982년 12월 8일에 경상북도 포항시 대잠동에서 남 루도비꼬 신부가 설립하였다. 대지는 3,338평에 건물 503평, 자립작업장 238평이며 마리아의 집 운영을 담당하는 예수 성심시녀회의 수녀들은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하심에 완전한 감사와 신뢰로서 응답하며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20,28) 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본당에서 무슨일을 하던지 사회에서 소외당한 이웃과 형제들을 섬김으로써 예수 성심의 사랑이 온세상에 전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1982. 12. 8 마리아의 집 설립

소재지 : 우 790-310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장동 270-2/ 전화 0562)72-0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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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터 공부방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4호 37쪽) - 1995년 가을 발행

마음터 공부방은 상계동 천주교회(당시 주임신부 구요비)에서 상계 3, 4동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가난한 이와 함께 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1992년 4월 현재건물을 구입하여 개원 축성식을 가졌다.

1995년 현재 국민학생 63명, 중학생 28명 총 101명이 이용하고 있으며 상근하는 성심수녀회 수녀님 2분 그리고 자원봉사자 40명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마음터 공부방 식구는 상계 4동에 살고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어린이가 우선 대상이 되며 3년을 기준으로 무료 학습지도를 받는다. 가장 큰 후원은 상계동 본당에서 연 천만원 정도와 수녀님 두분의 생활비 및 활동비를 보조해 주는 것이다. 그밖에 현직 자원봉사자들이 조금씩 기금을 마련해 준다. 마음터 공부방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부제(국민학교 1-3학년, 4-6학년, 중학생)로 나누어 오후 2시부터 9시까지, 토요일은 국민학생들의 특별활동 시간이 있다. 국민학생들의 수업시간에는 숙제지도와 국어, 글짓기, 산수, 자연 등의 과목을 정해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갖고 특활반에는 문예부, 연극부, 기타부, 태권도부가 있다. 가장 인기있는 태권도부는 동네 태권도장을 운영하시는 신자분의 도움으로 시작되었고, 아이들은 이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공부방 방학은 여름과 겨울 각각 2주씩이고, 여름방학중에 국민학생은 공부방에서 1박 2일의 캠프를 열고, 중학생은 야외로 나가 캠프를 하게 된다. 이 캠프는 아이들의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경험과 공동체 의식을 가장 재미있는 방법으로 심어 준다.

공부방에는 몇 가지 걱정이 있다. 아이들의 가치관이 사회의 변화와 함께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반면에 교사들은 그 속도에 맞추기 어렵다는 것과, 지역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가정에서 당연히 배웠어야 하는 가정 교육을 대리로 맡아서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이러한 걱정거리의 해결책으로 선생님들은 아동상담을 통한 아동신상카드를 작성하여 선생님이 바뀌더라도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하고, 아이들 개개인에 맞는 교습법과 문제해결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마음터 공부방의 1995년 교육의 중점은 '책임감, 정의교육, 질서, 환경'이라고 한다. 선생님들은 공부방 아이들이 반에서 1, 2등 하는 것보다 올바른 인성을 갖춘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1992. 4 마음터 공부방 설립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4호 37쪽) - 1995년 가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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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러 하우스 (나눔지 166호 4쪽) - 1987. 9. 12일 발행

구리본당 관내에 새로이 양로원이 개설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외로운 노인 한분을 가정에 모시면서 시작된 할머니의 집이 이제는 7명으로 늘어 양로원으로 꾸며져 운영되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사능리 소재의 마이러 하우스는 87년 현재 65세에서 91세까지의 외로운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다.

1987. 5 마이러 하우스 개설 (나눔지 166호 4쪽) - 1987. 9. 12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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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렐로 센터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 살레시오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1971년 버스 인내양들에게 숙박시설을 제공하기 위하여 시작하였으나 버스회사 자체내에서 이들을 수용하게 되어 1976년 부터는 인근공장지역의 근로여성들을 위한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로 변경하여 이들에게 안전한 숙박시설과 여성 교양 및 종교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전인적 인격 성장과 여성적인 품위를 지니도록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1996년 부터는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영등포 구청의 시설인가로 '아동직업 보도시설'로 변경하여 가출소녀들을 위해 미용 등 직업기술 교육과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마자렐로 센터 내에 마자렐로 중학교를 개설하여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여성에게 무료중학과정을 실시하여 8회에 걸쳐 221명을 배출하고 1981년 중학교가 의무화 됨에 따라 폐교되었고 1989년 자녀의 교육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저학력 주부를 위한 중학과정(2년) 및 교양, 종교과정을 위해 1학급 (30-40명)을 개설하여 1993년에는 같은 여건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시작하여 1998년 현재 중, 고등학교 4학급네 110여명의 주부들이 공부를 하고있다.

1971. 마자렐로 센터 설립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150-055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 5동 253-242/ 전화 02)832-5796/ 모사전보 02)831-6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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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전동본당 麻田洞本堂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69쪽)

1939년 평북 신의주시 마전동에 창설되어 1942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본당. 1937년 신의주본당 운영의 성심학교가 신의주시 마전동에 설립된 후, 마전동 일대의 교세가 급격히 신장되자 1939년 신의주본당으로부터 분할 창설되었다. 초대 주임신부로 마컴(Markham, 馬)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의 기초작업에 노력을 기울이고 1940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에 분원을 설치, 본당일과 성심학교의 서무일을 전담케 하였다. 이어 2대 주임신부로 기본스(Gibbons 盧) 신부가 부임했으나 몇개월 사목한 후 서포(西浦)의 교구청으로 전임되어 1940년 말 크레이그(Craig)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크레이그 시부는 마전동 외곽지대의 전교에 힘쓰며 야학을 개설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목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회 성직자들이 일제에 체포, 구금되자 마전동본당은 신부 없는 본당이 되었고, 1942년 2월 신의주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은 오기선신부가 마전동 본당에 주재하며 신의주 일대를 사목하였으나 이해 6월 오기선 신부가 신의주 본당으로 이사함으로써 마전동 본당은 신의주 본당에 병합되었다. 마전동본당 운영의 성심학교는 1942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개교하여 빈민아동들을 교육했으나 1947년 가을 북한 공산정권에 몰수되었다.

1937. 마전동본당 운영의 성심학교(聖心學校) 개교 (369쪽 마전동본당)

1947. 마전동본당 운영의 성심학교(聖心學校)는 북한 공산정권에 몰수 당함 (369쪽 마전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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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병 연구소 (영) Institute of Chronic Diseases (가톨릭 중앙 의료원 부속 나병연구기관) - 1998. 4. 22일 홍보과 이승우(바오로)님의 답신에 의거

가톨릭중앙의료원 부속 나병연구기관으로 천주교 구라회 설립자인 미국 메리놀회 서요셉 신부(Rev. Joseph A.Sweeney. MM)의 제정적 지원을 받아 가톨릭 대학교 의과대학 미생물과학교실의 협조를 얻어 다음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가. 나병의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에 관한 연구

나. 의학과, 간호학과 학생의 나병교육과 임상실습

다. 나환자의 외래진료와 이동진료를 통해 나병의 조기발전과 치료 및 예방

라. 나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및 경제적 재활협조

만성병 연구소의 사업내용은 나병에 관한 역사적인 연구와 기초의학 및 임상의학 분야에 관한 연구를 하며 의과대학 학생과 간호학생들에게 나병에 관한 교육과 실습, 국제 교류를 통한 정보교환, 재가 나환자의 외래진료, 경기도 한강 이북지역에 있는 7개 나음성자 정착마을과 4개시 8개군 보건소 등록 재가 나환자의 나병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딸회와 공동으로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순회진료를 실시한다. 성 나자로 마을 나환자를 위한 순회진료를 실시하며 나환자 보조금 지급대행 (릴리회 지원아래 극빈 재가 나환자의 자녀를 위한 학비보조금 지급 대행, 한국 가톨릭 나사업연합회 지원으로 재가 나환자의 생계자금 지급 대행), 치과치료 알선, 강원도 내 강릉, 동해, 삼척, 속초, 태백 등 5개시와 고성, 명주, 삼척, 양양, 영월, 정선, 평창 등 7개군에서의 재가 나환자의 발견과 보건소에 등록된 나환자의 치료를 천주교 구라회와 공동으로 이동진료를 실시하고 있다.

1970년에는 충남지역 정착마을 나환자를 대상으로 또 1976년에는 강원도 원주에 있는 대명원과 경천농원에 의학과, 간호학과 하계 진료봉사 학생들과 진료봉사를 통하여 나병의 임상실습을 지도하였다.

1972년 천주교 구라회 이동진료 업무가 한강 성심병원 부속 한국의과학연구소로 이관 되면서 천주교 구라회의 이동진료 업무는 중단되었다. 그 후 대한나관리협회 경기지부 진료반 창설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1975년부터 1979년 6월까지 4회 경기도 전역의 이동진료를 하였으며 진료지역으로는 염광농원, 동진원, 부평농장, 청천농장, 경인농장, 삼성농장, 의왕농장, 간석농장, 경성농원, 고운마을, 성생농장, 천성농장, 상록촌, 금촌농장 및 포천농축단지 등에 살고 있는 나음성자들과 경기도 일원의 재가나환자들에게 나병진료와 합병치료를 실시하고 있다.

1961. 4. 1. 만성병 연구소 설립 (가톨릭 중앙 의료원 부속 나병연구기관)

소재지 : 우 137-701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505가톨릭 중앙의료원內/ 전화 02)590-1114/ 모사전보 02)532-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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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집 (교회와 역사 227호 18쪽) - 1994. 4. 25 발행

영세민 환자를 찾아나서는 거룩한 말씀의 회의 가정 방문실 팀은 몸이 아파 병원에 가고 싶어도 돈이 없고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해 직접 가정 방문을 실시하여 무료로 계속 치료해 주면서 영세민의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고자 시작되었다. 3명으로 구성된 가정 방문실 팀은 매일 오전 9시 부터 대상 가정을 찾아나선다. 영세민을 우선적으로 보살피며 죽음을 눈앞에 둔 말기 환자들을 위해서 호스피스도 함께 실시하고 있다. 환자들을 찾아 물리 치료와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정의 어려운 문제까지 해결해 주어야 할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정방문실은 간호 파트와 사회사업 파트로 구분하여 봉사 활동을 펴고 있다. 시청, 동사무소와 연결하여 영세민 카드 발급을 주선해 주기도 하고 수술환자의 병원을 알선해 주며 취업알선, 자녀 학비도 보조해 준다. 임종자는 그 지역 본당에 연락해 레지오 단원들이 활동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경비는 처음에는 외국 원조로 이루워졌고 지금은 아직 부족하지만 국내 은인들의 도움과 협조가 힘이 되고 있다.

소재지는 전주시 교동 2가 82번지 교동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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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터 (나눔지 196호 4쪽) - 1988. 4. 16발행

여자 정신지체 장애자들을 위한 기술교육장인 '맑음터'가 개설되었다. 16세-25세 정도의 훈련가능급의 여자 정신지체장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곳은 생활교육과 함께 학습지도 및 염색 등의 재활을 위한 훈련과정을 통해 자활을 목적으로 88년 현재 4명의 학생이 등록하여 통원교육을 받고있다.

1988. 4. 9. 정신지체장애자들의 집 '맑음터' 개설 (나눔지 196호 4쪽) - 1988. 4. 16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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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 호스피스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복지시설) - 1998. 3. 31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답신에 의거

갈바리 산 위에 서계셨던 마리아의 어머니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고 죽어가는 죄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목적으로 1987년에 설립되었다. 서울지역의 암 환자를 위하여 가정방문하여 의료적, 영적, 심리적인 도움을 주기 위하여 가정방문팀을 만들었으며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창설자의 정신을 더욱 가깝게 실천하기 위함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998년 현재 의사, 간호사, 상담사가 가정방문팀으로 구성되어있어 호스피스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1987. 모현 호스피스 설립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복지시설)

소재지 : 우 142-109 서울특별시 강북구 미아 9동 132-58/ 전화 02)984-8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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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괴국민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6쪽)

장호원의 초대신부인 부이용 신부는 1907년 민응식의 집 행랑채를 이용하여 매괴학당을 설립하고 남학생을 모아 가르쳤는데 교재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유년필독(幼年必讀)을 사용, 통감부의 일본인 관리들로부터 금서를 가르친다 하여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수가 점점 증가하여 60명에 달함으로 교사가 비좁아지자 1908년 3월에 학교를 크게 세워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는 발전을 보였고 이어 여학교도 설립하였는데 수녀들의 필요성을 절감한 부이용 신부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교는 1912년 10월 7일 매괴축일에 개교하였다. 여학교는 수녀들의 헌신으로 외교인들에게까지 좋은 인상을 주어 딸을 가진 부모들이 공립보다는 매괴학교로 보내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부족, 부모들의 몰이해, 유능한 교사부족 등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다. 결국 보통학교와 공립학교로 전학해 버리는 학생들이 점차로 늘어가게 됨에 따라 6년제였던 매괴학교는 부득이 4년제만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2년에 6년제로 다시 복귀한 후 1936년에는 공식학교 인가를 받고 3층 교사를 증축하여 교명을 매괴심상소학교(怘塊尋常小學校)라 하고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함으로써 1939년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일본인들이 이 학교를 빼앗아 공립화하고 교명을 욱산(旭山)으로 바꾸어 운영하였는데 1945년 해방을 맞아 다시 찾게 되었다. 그후 매괴학교는 1953년 매괴상업고등학교로 승격되었고 1966년에는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확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국민학교는 운영난이 심화되고 교육전망의 분석 결과 그 전망이 밝지 못하여 1972년 2월 28일자로 폐교하였다.

1908. 3 매괴학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7쪽)

1921. 10. 7 매괴여학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7쪽)

1936. 매괴학교를 매괴심상소학교로 교명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7쪽)

1972. 2. 28 매괴국민학교 폐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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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괴여자 중·상업고등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6쪽)

장호원본당 제6대 주임인 파디(Pardy, 1893-1938) 신부는 당시 장호원에 공립인 남자중학교만 있을 뿐 고등학교가 없는 것을 보고 전교를 위해서도 남자 고등학교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학교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52년에 매괴상업고등학교의 기성회가 결성되고 1953년에 1학급 73명의 학생이 입학하였으며 교사는 6명이었다. 그러나 교실이 없었으므로 매괴국민학교의 교사를 이용하였다. 1954년 매괴상업고등학교로 인가를 받고 학급도 6학급으로 늘어나자 1958년에 한·양식 성당과 사제관 및 한국 전통의 돌담을 헐고 그 자리에 학교 건물을 지었다. 그러다가 1965년에는 남학생 모집을 중지하고 매괴여자중학교 인가신청을 냈는데 남학생만을 모집하기로 구두로 결정했던 장호원 공립 중학교의 교장이 갑자기 이동되자 그 결정이 무효화되어 장호원 중학교에서도 여학생만을 모집하게 되었다. 이에 두 학교 모두 여학생만을 모집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미 인가신청을 냈고 또 남녀공학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운영상에 큰 곤란을 겪으면서도 1966년 3월, 128명의 학생으로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교명과 거행되었다. 11월에는 매괴상업고등학교를 매괴여자중·상업고등학교로 교명과 학칙을 변경하였다. 매괴상업고등학교는 1967년을 마지막으로 제12회 졸업생을 내었고 1970년에는 학칙변경 후 첫번 여학생 졸업생을 내었다. 교명은 바꾸었지만 졸업횟수는 그대로 계승하여 제 13회 졸업생으로 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매괴국민학교에서만 일해왔으나 1966년 3월 부터는 교구장의 요청으로 매괴여자 중·상업고등학교에서도 사도직이 시작되었다. 수녀들은 교장, 교사, 사서, 서무 등의 소임을 맡아 학교 행정 및 운영에 최선을 다하여 학교를 발전시켜 왔다. 특히 예의 범절과 생활지도에 역점을 두고 지도하고 있으며 교사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상업학교 학생에게 필수적인 주산·부기·타자 등의 실기 급수 수준을 계속 향상시켜왔다. 또 적극적 취업알선과 성적 우수자 및 가정 형편이 곤란한 학생들에게 교내의 각종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실력있는 학생들이 많이 지원하게 되어 음성군 내의 으뜸 여학교로 성장하였다. 특히 1988년 2학기에는 전국 상업학교 학력대회에서 개인 2등, 5등, 9등을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내었으며 전체적으로는 2등을 차지하여 이제는 상업학교로서는 군내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명실공히 명문이 되었으며 취업률도 거의 100%에 이르고 있다. 이 결과 군내의 타학교들이 학생모집에 부심하는 반면 매괴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는 6학급 정원모집의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였고 오히려 입학 시험 경쟁률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취업을 위한 실력향상뿐만 아니라 천주교 학교의 특색인 종교교육에 중점을 두어 중1부터 고3까지 매주 1시간씩의 종교수업이 있고 또 한시간씩의 예비자 교리 또는 신자 재교육을 실시하여 매년 약250여명의 영세자를 배출하고 있다.

1953. 매괴상업고등학교의 1학기 입학식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6쪽)

1966. 3 매괴상업고등학교를 매괴중·상업고등학교로 교명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6쪽)

매괴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80쪽)

1907년 충북 장호원성당(현 감곡성당) 의 부이용(Bouillion) 신부가 설립한 초등교육기관.

현 매괴여자중 상업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37년 교사를 증축하여 본격적인 육영사업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에 빼앗기면서 폐교가 되었다. 1945년 다시 학교를 되찾고 1953년 미국의 파디(T. Pardy) 신부가 매괴 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6년 여자 중학교를 병설, 1966년 11월 학칙을 변경하여 상업고등학교를 여자상업고등학교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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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지 엔카운터 (영)Marriage Encounter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81쪽)

대화를 통해 부부관계를 새롭게 하여 결혼생활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케 함으로 가정과 사회를 쇄신 시키려는 운동으로 1958년 스페인의 가브리엘 칼보(Gabriel Calvo) 신부와 몇몇 평신도에 의해 시작되었다. 청소년 지도신부로 일하던 칼보 신부는 청소년들의 탈선문제는 가정문제에서 비롯됨을 발견하고 부부의 참된 만남만이 가정을 화목하게 만든다는 것을 제시하여 이 운동을 제창하였다.

방법은 25쌍 내외의 부부와 지도신부가 한팀이 되어 2박 3일간을 같이 생활하면서 대화를 통하여 부부가 진정한 만남을 이루어 나가는 형식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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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동본당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0쪽)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전신은 마렴 공소였다. 이 마렴 공소가 1896년 8월에 본당으로 승격되어 황해도에서 첫번째 본당이 되었다. 다음 해에 매화동으로 이전하였고 2대 본당신부인 우도(Paul Oudot, 1865-1913) 신부의 초청으로 1909년 10월 1일 박 뱅상 수녀와 배 베로니카 수녀가 파견되어 분원이 개설되었는데 이들은 황해도에 파견된 최초의 수녀들이었다. 수녀들은 본당의 여학교 운영을 맡아 여학생들의 신앙생활이나 교과과정을 지도함에 있어서 그곳의 신도와 주민들에게 완전한 만족감을 주었다. 특히 여학교에서는 1912년부터 우도신부의 장려로 양잠강습소를 개설하여 양잠기술을 널리 보급하여 주민들의 소득증대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본당신부가 소집되어 본국으로 돌아가자 수녀들도 본원으로 귀원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동안 학교는 신자들의 자치에 맡겨졌었다. 수녀들의 재파견은 1919년 10월 샤보(Jules Chabot, 1886-1953) 신부의 귀임에 따라 이루어졌다. 1925년에는 수녀들에 의해서 본당의 가톨릭 여자 청년회가 창설되었고 1926년에는 유치원과 시약소가 개설되었는데 교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해 오던 수녀원은 1934년에 강양자 마리레지스 수녀가 새로 파견되어 옴으로써 4명으로 인원이 보강되었다.

해방 후에는 북한 인민정권의 방침에 의해 수녀들은 학교를 사임하고 본당일만 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어왔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5일에는 수백명의 좌익 폭도들이 매화동을 습격하여 많은 주민들과 수녀들을 학살하였다. 이때 김정자 수녀와 김정숙 수녀는 그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강양자 수녀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11월 2일에 죽은 두 수녀를 성당 뒷산에 안장하고 나서 무사히 월남하여 매화동에서 겪은 동산 치하의 생생한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황해도에서 제일 먼저 설립되었던 매화동분원은 북한에 있던 분원 중 가장 늦게까지 수녀들이 남았었던 분원이기도 하였다.

매화동에서 수녀들이 봉사했던 봉삼학교와 봉삼유치원, 그리고 소화시약소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도신부는 1898-1899년 사이에 종교교육과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안악지방에서는 이 봉삼학교를 안악지방 최고(最古)의 사학(私學)이라 일컬었다. 1899년에 학생수가 45명이던 남자부에서는 교리공부와 한문을 가르쳤으며 남자부에 이어 별도로 시작한 여자부에서는 기도문 이와에 한글과 가사도 가르쳤다. 초창기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1907년에 근대 초등교육기관으로 정식 설립되었고 2년 후에는 사립학교 인가를 받은 후 수녀들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의 지도를 맡겼다. 매화동에 파견된 박 뱅상 수녀와 배 베로니카 수녀는 여학생들의 신앙생활과 가사 등과 같은 교과과정을 지도하였는데 1919년 당시 4년제 보통학교 과정이던 봉삼학교의 여자부 교과과정을 보면 1학년에서 영세문답, 고해문답, 성체문답을 배우고 첫 영성체를 한 후 견진문답과 조만과를 배웠으며 학과는 기초를 공부하였다. 2학년 때부터 조선어, 산술, 수신(修身) 등의 과목을 배웠는데 주로 김정자 수녀가 가르쳤다. 처음에는 방 2개, 부엌 1개의 초가집에서 따로 공부하였으나 1923년부터는 남녀공학이 되어 함께 공부하였다. 5대 신인균(申麟均 요셉) 신부가 재임하던 1934년에는 학생수가 500명으로 증가하고 6년제 학교가 됨에 따라 교실을 증축하고 보통학교(사립봉삼보통학교) 인가를 신청했으나 후임 신부인 이선용(李善用 바오로, 1897-1953) 신부가 학교유지 문제를 우려하여 인가신청을 철회하는 바람에 사립봉삼학교로만 존속하다가 해방 후 공산치하가 되면서 인민학교로 흡수되어 버렸다. 수녀들은 분원이 생긴 이래 공산당에게 화를 당하기까지 줄곧 봉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봉삼유치원에서도 매화동본당의 4대 주임신부인 퀴클리에(Leon 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가 1926년에 성당 근처의 집 한 채를 매입하고 봉삼유치원을 개원하여 김정숙 수녀가 담당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편 시약소는 본당에서 운영하는 유일한 자선 의료기관이었는데 평일에는 환자들에게 시약만 하였고 의사들에 의한 진료는 주일에만 있었다. 이곳에서 봉사한 의사는 하(河) 의사와 표(表) 의사였고 박 뱅상 수녀와 강양자 수녀가 간호를 담당하였다. 수녀들은 위의 유치원과 시약소 사도직을 봉삼학교와 함께 공산당에게 화를 입기까지 성실히 계속해 나갔다.

1896. 10. 1 황해도 매화동본당은 공소에서 승격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0쪽)

1907. 봉삼학교는 근대초등교육기관으로 정식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0쪽)

1926. 봉삼유치원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0쪽)

1950. 11 매화동 본당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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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병원 - 1998. 4. 20일 메리놀 병원의 답신에 의거

성서 상에 표현된 그리스도의 치유행적에서 보듯 원래 가톨릭의 의료활동은 초대교회때부터 의료사업을 통해 병마와 싸우는 이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고 회복시켜 줄 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감동적이고 구체적으로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병든 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는 일을 사명으로 믿고 있었다. 현재 행하고있는 가톨릭 교회의의료사업에도 의료활동과 기도를 통한 치유의 효과를 동시에 함으로써 인간들이 現世에서의 병과 죽음을 극복하고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종말론적인 희망을 살리기 위해서 전력해 왔다.

메리놀 병원의 최초 설립자인 부산시 북병동 81-8번지는 본래 일본인 후쿠다 이와까기의 소유의 별장이었던 곳으로 4,278평의 대지에 일본식 2층 목조건물과 몇개의 부속건물, 정원 등이 있었다. 이곳은 해방이 되면서 적산으로 경상남도 관재국에 접수되었는데 당시 부산진 본당의 정재석 신부가 이곳에 임시 거주하고 있던 미 군정청 관재처장의 매부인 정모씨와 친분관계에 힘입어 중앙성당 초대 주임신부인 이명우 신부의 명의로 관재국과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당시 그 땅으로 어떠한 구체적인 사업을 할 계획은 없었지만 지금의 중앙성당을 매입할시 무연고자들의 무단점유로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다 "이 재산은 로마 교황청 직속 소유재산 임" 이란 큰 팻말을 붙여놓고 관리하고 있었다.

그 후 부산지역을 관리하고 있던 대구 대교구에선 이곳 부산지역의 중여성이 증가됨에 따라 가톨릭의 의료 및 사회사업으로서 사회적 진출에 유의하고 가톨릭대병원을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원래 큰 사업이었던 탓에 경제적 능력은 전무하다시피한 실정이었다.

이와같은 사정으로 원조를 메리놀회에 요청하였던바 메리놀 수녀회에서 기꺼이 수락하고 병원설립을 위해 1949년 12월 28일 로사 제제레파, 안드레아, 로사리마 수녀를 1차 선견대로 부산에 보냈다. 또한 나중에 토지매입 비용도 메리놀수녀회에서 대신 부담하고 북한 땅에서 다 이루지 못한 자선의료사업과 육영 사업등을 1950년 4월 15일 메리놀 병원을 이곳에서 개원함으로써 이루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병원이라기 보다는 진료소에 가까운 역할을 한 것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영리적이 아니고 무료진료 였으며 빈민구제사업의 일익도 담당하여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보급시키는 등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동시에 영신적인 전교사업을 위해 출발하였다. 이러한 것은 부산·경남지역에서는 최초의 한국가톨릭 의료활동으로 지역사회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구현시키고 가톨릭의 의료 및 사회사업 전체를 진보시키는 시발이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 구호 활동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환자를 진료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전쟁으로 인한 경제의 파탄으로 말미암아 빈곤이라는 것이 더 큰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중산층의 부재(不在)로 인해 부자가 아니면 모두 가난뱅이 뿐이었다. 그래서 전쟁동안 수십만명의 피난민들이 새로운 거주지에 정착하여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 때까지는 막대한 양의 원조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또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어느 정도라도 영양공급이 되어야 하는데 굶주리다 보니 의약품만으로 치료가 되는것이 아니었다.

가슴아픈 일은 무료로 준 다량의 치료약과 영양제를 복용치 않고 그들의 생계를 위해 그것을 팔아 생계를 보태는 이들이 허다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비극적인 6·25 사변의 후유증으로 인해 한국의 전통적인 숙명론을 강화시켰고 살아남기 위한 막바지 몸부림을 통하려 뿌리 깊었던 체면의식을 일거에 상실시켜 버렸다. 타기관에서도 구호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구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더 많았으며 특히 부산에는 자기자신과 그 가족들의 생계를 해결할 방도가 전혀 없는 절망적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1951년 4월 부터 구호활동을 메리놀 병원 주도하에 시작해 나갔던 것이다. 구호계획은 결핵환자 방문 치료프로그램에 들어있는 가족들과 병원에 찾아오는 극빈자를 상대로 시행되어 나갔다. 당뇨병, 신장염, 간장질환, 영양실조, 심장병 등 특수한 환자의 경우에는 음식물에 대해서도 의사가 처방을 내려서 나누어 주었는데 이 경우는 구호라기 보다는 의료행위 그 자체였다. 주로 구호품은 많은 어린이들을 가진 미망인 이거나 부모중 한명이 심각한 병에 걸린 경우와 어린 형제들끼리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에 지급되었다. 또한 아버지가 군에 입대하였을 경우와 어머니가 여럿의 아이를 버려두고 떠난 상태에있는 가족에게 지급되었다. 식량은 필요한 때 개인적으로 항상 지급되었는데 주로 쌀, 밀가루, 육류, 통조림, 지방우유, 땅콩버터, 건포도, 말린자두, 콩 등이었다. 쌀, 야채등은 자선기금 가구의 세대주에게 매주 목요일 아침에 배급되었다.

그리고 구호진료에만 그치지 않고 화재민들의 재생을 격려하며 장기간동안 급식을 계속 제공하였다. 이때 N.C.W.C 한국지부에서도 화재민을 수용하고 있는 학교구내에 급식소를 설치하고 이들이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매일 식량을 공급하였다.

⸂ 입양사업

병원에서 진료를 받던 5살 미만의 아이들 중에서 어머니들이 사망하거나 아이들을 돌 볼 능력이 없는 어머니들이 많았다. 미혼모나 부모가 있어도 살기가 힘들어 빈민구호 활동을 하고 있는 메리놀병원에다 아이를 버리면 아이를 무사히 키워주지 않겠나 하는 기대감에 바쁘게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사이에 병원에 그냥 놔두고 가거나 심지어는 아침에 병원문 앞에 핏덩어리를 그냥 버려두고 가는 경우가 허다하여 한때는 고아들이 초만원을 이룬적도 있었다. 이에 할 수 없이 수녀들은 갓난아이들을 따뜻하게 하려고 포대기에 싸서 두꺼운 마분지로 만들어진 상자에 넣어 간이난로 가까이에 두고 돌보면서 일하였다. 이러한 문제로 입양계획을 세워 병원에 오는 환자들 중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성이나 입양을 원하는 가정에 그들의 가정을 조사한 후 정식입양을 시켰으며 얼마동안은 병원에서 그 가정에 유아용 우유를 계속 공급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입양된 아이들 중 갓난아이는 일단 병원에 있게하여 몸무게가 안정되고 면역이 완전하게 될 때까지는 입양한 부모에게 정기적인 방문표를 주어 아이들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나중엔 노골적으로 자기의 아이를 입양시켜 달라는 어머니들의 문의가 쇄도한 적도 있었다. 수 많은 아이들은 자기를 키워줄 새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동안 병원내에서 자라다보니 수녀들을 자기의 어머니로 알았고 입양되어 헤어질 땐 그동안의 정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힘들게 달래야만 했다. 1954년 9월 1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들이 성모보육원을 개설하자 그곳으로 아이들을 옮겼으며 이때 입양된 아이들은 약200명이나 되었다.

⸃ 육아실 및 육아상담실(Well Baby Clinic) 설치

Well Baby Clinic 은 1954년 2월에 입양계획의 결과로써 시작되었다. 입양될때 까지는 버려진 아이를 키우면서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육아실과 육아상담실이 생겨났던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약35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번 오후에 수녀의사 감독하에 한국인 간호원과 간호보조원 각 1명이 돌봐주었다.

이때 육아실에는 생모의 젖이 부족한 아이, 친지가 양육하며 어머니가 없는 아이, 입양된 아이, 소아과에 입원할 정도의 심각한 질병을 가진 아이로 분류하여 진료를 하였는데 대부분이 극도의 영양실조에 걸려있었다.

당시에는 일반시장과 가정에서는 원유나 분유를 구하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공급처도 찾기가 힘들어 우선 병원에서 직접 분류된 이 아이들에게 미음과 분유, 우유병등을 공급해 주었고 보호자들에게는 우유병을 소독하는 법과 육아법을 가르쳤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소아진료소에서는 모든 소아환자에게 유아용 우유를 무료로 제공해 주었으며 수유하는 장소도 따로 만들어 주었다.

⸄ 나자렛 워크겼(Nazareth Work Shop)

전쟁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약50만명에 이르는 전쟁 미망인들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위한 생활대책이 강구되지 않고 있어서 한때는 생계유지를 위한 매춘이 성행되어 성윤리를 무너뜨리고 기약할 수 없는 삶에서 비롯된 향락주의로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많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이었고 수천명의 여성과 그에딸린 어린아이들이 비참한 빈곤으로 산중턱 판자촌이나 피난민 오막살이 집에서 살며 오직 구호품에만 매달리는 실정이었다. 이에 KAVA(외국 민간 원조기간 한국협회) 이사이며 평소 전쟁 미망인을 위한 복지활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메리놀회 메리 가브리엘라 뮬헤린(Mary Gabriella Mulherin) 수녀는 한국 국민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값싼 구호품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이라고 역설하고 병원 울타리내 한 건물을 예수와 성모마리아의 집이라는 뜻으로 '나자렛 집' 이라고 칭하고 여기서 1953년 5월 19일 전쟁미망인 계획(Widows' Projects) 의 일환으로 나자렛 워크겼을 실시하였다. 이 워크겼은 전쟁과부와 피난민 여성들이 그들 스스로 가족들의 생계비를 버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즉 쌀과 옷 등을 무기한으로 제공하는 구호사업 대신 그들이 직접 돈을 벌 수 있게끔 조성해 주는 것이었다. 우선 이들에게 자수와 바느질, 편물, 재봉질 등 수공예 중심으로 기술훈련을 시키고 생산능력을 갖추게 하여 생산된 물건의 판로는 수녀들이 책임지고 개척하였다. 여기서 생산되는 물품은 카드종류와 인형, 털 스웨터, 수예품 등으로 기존시장은 부산에 있는 외국군인들이 주일날 모이는 장소로 정해졌다. 이곳은 나자렛 워크겼에서 생산되는 생산품의 중요한 판매처로 계속되었고 다른 판로는 작은 시장과 백화점내의 작은 상점들이었다.

워크겼의 방법은 기술훈련을 시켜서 미망인들이 자기 집에서 직접 일을 할 수 있게하여 일하면서 자기의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재료구입과 판로에 관한것은 워크겼에서 책임을 지며 이들에겐 인건비를 지불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이 그 수입으로 구호에만 의존하던 것을 면하게 하고 그들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꾸려 가게끔 조성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의 꾸준한 생산활동을 보장해주기 위해 자수, 편물, 재봉질, 기타 수공예 기술등을 가르키는 기술자를 나자렛 집에 두었으며 12∼15명 정도의 작업반을 정규고용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미망인과 피난민 여성들이 워크겼에서 기술훈련을 받아 고용되었고 그 후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일자리나 사업장으로 옮겨갔으며 나머지는 병원내 나자렛 집에서 계속 일을 하였다.

1950. 4. 15 부산에 메리놀 병원 개원 (메리놀 병원)

소재지 : 우 600-094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4가 12번지/ 전화 051)465-8801/ 모사전보 051)465-7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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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 수녀회 (영) Maryknoll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83쪽)

1912년 미국 가톨릭 외국선교단체 메리놀 수도회 내에서 메리로저스(Mary Rogers) 수녀에 의해서 창설된 수녀회. 1924년 10월 한국진출. 메리놀 수도회의 수녀들은 본당활동과 의료사업, 교육사업등에 종사하였고 여자기예학원과 시약소및 고아원을 설립하여 기술교육 및 봉사활동을 하였다. 1932년에는 평양으로 진출하여 한국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후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라는 수도회가 되었다.

진남포에서는 1934년부터 부녀자와 소녀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3년 부터는 서울 영등포 공업단지에서 단체활동을 실시하였다. 1974년에는 전남 소록도 국립병원에서, 1976년 부터는 경북 울진군에서, 1977년 부터는 경기도 부평에서, 1979년 부터는 전남 광주의 천주의 성 요한 병원에서 각각 의료활동을 돕고있다.

1956. 충북 괴산군 증평읍에 메리놀의원을 개원 (383쪽 메리놀 수녀회)

1962. 부산에 메리놀 병원 개원 (383쪽 메리놀 수녀회)

1963. 부속 메리놀 간호전문대학 개교, 1967년 부산으로 이관 (383쪽 메리놀 수녀회)

메리놀 수녀회 (영) Maryknoll Sisters (교회와 역사 80호 7쪽)

메리놀 수녀회는 1912년 메리 로저스수녀에 의해 창립되었다. 창립정신은 인류에게 책임을 다하고 도움을 주고 문화적 배경과 지역적 제한 경제, 사회, 종교적인 범주를 벗어나 모든 국가간의 평화와 정의와 우정을 도모하고 나누는데 있다. 1924년 10월 메리놀회 신부들의 초청으로 평북 의주에 처음 진출하였다.

북한에서의 활동 (1926∼1942) :

1924년 부터 시작된 의주에서의 활동은 처음에는 본당 사목과 가정방문이었으나, 얼마 후 소규모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3명의 수녀를 의주에 남겨두고 1926년 수녀회 한국지부를 영유(永柔)로 옮기고 그곳에 여자기예학원을 세워 15세 전후의 소녀들에게 기술습득의 길을 열어주는 사업을 하였다. 또한 시약소와 고아원을 설치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1933년 멜시 수녀 등 3명은 신의주로 파견되어 성모회를 창설하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가정방문과 외래환자 진료소와 이동진료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1932년 메리놀회 신부의 요청으로 평양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한국여성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이 모임은 후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라는 수녀원의 창설동기가 되었다. 1935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입원실과 무료진료소를 설립하였으며 1936년 본당 사업과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또한 진남포에서는 1934년 부터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활동을 중지하고 메리놀회 수녀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해방후의 활동 (1950∼현재) :

본국에 철수했던 메리놀회 수녀들은 전쟁이 끝나자 1950년 제1진이 다시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의료사업과 전교사업을 통하여 주민들에게 봉사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1952년 제2진의 수녀들은 제차 부산에 진출하여 전쟁중인 비상시를 위하여 장기간의 의술봉사를 하여 왔으며 음식과 옷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결핵요양소와 교리학습을 위한 장기 계획도 수립하게 되었다. 휴전 후 메리놀 수녀들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956년 충북 괴산군 중평읍에 메리놀의원을 개원하여 의술치료와 보건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1960년 부산에서 가별(Gabrialla) 수녀가 신용협동조합을 처음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지금은 협동교육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1962년 부산 메리놀병원이 주한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대식 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1963년 메리놀 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은 콘로이(Conroy)수녀가 맡았으며 1967년 메리놀 병원의 관리가 부산교구로 이관되었다. 1962년 2월 인천교구 답동 본당에서의 종교활동을 돕고 학생지도 및 영어지도를 실시하여 왔으며 1967년 3월 인천시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회관에서 청소년 지도자 강습과 여성들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1963년 경기도 강화읍에 그리스도왕 의원이 설립되어 메리놀회 수녀들은 의사와 간호원으로 일하였으며 전교사업도 함께도왔다. 1969년 초 요안 서빈 수녀는 백령도에 소재한 김안드레아병원에서 간호과 책임자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74년 대한 적십자가 인수할 때까지 섬 사람의 건강과 아울러 간호보조원 교육과 훈련을 부지런히 해왔었다. 백령도에서 철수하여 본원에서 일하던 3명의 수녀들은 전남 소록도에 있는 국립병원에 자원봉사 간호원으로 활동하고 1973년 성신강림 대축일 김수환 추기경의 허락을 얻어 2명의 수녀가 그리스도께 헌신할 조그마한 단체의 조직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공업단지 근처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진료소의 간호원으로 상담자로서, 노조에서 간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 등을 맡아보게 되었다. 1976년 9월 가이에르 수녀가 서강대에서 영어를 담당하는 외에 경북 울진 진료소 활동, 부평 본당에서 종교사업과 노동자를 위한 사업활동 1979년 10월 광주의 천주의 성요한병원에서 환자가족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1980년 거창 나환자 마을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1981년 11월 부터 성남시에서 2명의 수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과 전교활동에 힘쓰고 있다.

1935. 메리놀 수녀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입원실과 무료진료소 설립 (교회와 역사 80호 7쪽)

1936. 메리놀 수녀회에서 본당사업과 유치원을 설립 운영 (교회와 역사 80호 7쪽)

1956. 충북 괴산군 증평읍에 메리놀의원 개원 (교회와 역사 80호 7쪽)

1962. 부산 메리놀 병원이 주한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대식 건물로 설립 (교회와 역사 80호 7쪽)

1963. 메리놀 간호전문학교 설립 (교회와 역사 80호 7쪽)

1979. 10 광주 천주의 성요한병원에서 환자가족을 위한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교회와 역사 80호 7쪽)

1980. 거창 나환자 마을에서 환자를 돌봄 (교회와 역사 80호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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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외방전교회 (영) Maryknoll Missionn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83쪽)

동방교회의 전교를 주목적으로 창설된 메리놀의 근본 정신은 "너희는 가서 이 세상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 28:19-20)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두고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22년이었다. 1927년 3월 17일 평안도 지방은 서울교구와 분리된 평양지목구로 설정되어 교구설정과 더불어 메리놀 회 수녀들도 교구내에 수녀원을 세우고 본격적인 선교활동과 자선사업을 전개하였다.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회원들이 본당사목과, 소록도 나환자 병원, 충주 성심 맹인학교, 노동청년회, 한국주교회의 매스컴 위원회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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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트르 Maistre, Joseph Ambroise, 1808∼1857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84쪽)

한국성 李. 조선교구 선교사. 안느시(Annecy)교구의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 1832년에 신부가 된 후 7년 동안 교구사제로서 활약하다가 1839년 이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뜻을 품고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40년 1월 15일 프랑스를 떠나 우선 마카오로 향하였다. 마카오의 경리부장이 그의 임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9월 21일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마침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는 한편, 경리부 일을 도왔다. 1842년 2월 프랑스 군함편으로 우리 신학생들의 귀국이 결정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 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를 떠났다. 이 때 그는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육로로 또는 해로로 10년간의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1852년, 1847년에 난파한 프랑스 군함들의 유물을 철거한다는 구실 아래 중국배를 타고 조선 서해안 고군산도에 이르러 상륙하는 데 성공, 서울로 올라왔다.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6년 새 교구장이 입국하기 까지 조선 교구의 장상직을 맡아보았다. 그간 성영회의 사업을 도입하였고 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고아나 기아를 거두어 키우는 성영회의 사업을 조선에서도 촉진시키고자 그는 성영회의 도움을 얻어 외교인들의 자녀들을 거두어 교우가정에서 양육하게 하였다. 비록 박해로 시설을 갖출 수는 없었을 지라도 어쨌든 조촐하게나마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사업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국내에서의 성직교육의 긴급성을 절감하고 1855년 제천 베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개설하고 우선 그곳의 회장으로 하여금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신학교 살림을 돌보게 하였다. 새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입국하자 그는 충청도로 내려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맡아 도던 중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인근 덕산 황무실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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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구본당 明月構本堂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89쪽)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본당.

1924년 교우촌 내에 보록학교가 개설된 후 1926년 대령동 본당의 창설과 함께 대령동 본당의 공소로 개설되었고, 이어 1931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36년 신첨본당을 분리, 창설하는 한편, 올리베타노 베네딕토 수녀회 분원을 설치하여 동(同)회의 수녀들로 하여금 진료소를 운영케 하였다. 그 후 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42년 성당 신축을 시작하였으나, 1945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교회의 재산을 몰수 당함으로써 폐쇄된 이후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다.

본당내의 신심단체로 부인들의 모임인 안나회를 포함하여 3개의 단체가 있었고, 본당 운영의 사업체로 해성학교, 진료소가 있었다.

1924. 명월구본당 교우촌 내에 보록학교 개설 (389쪽 명월구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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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휘원 - 1998. 6월 시립 명휘 어린이집 이 안토니나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은 故의민 황태자 영왕의 환국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어려운 이웃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르며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직업재활 교육원인 명휘원, 장애인 근로시설인 해동일터, 지체장애인 특수교육기관인 명혜학교, 명휘 어린이집, 명휘 체육센터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장애인이 가진 잠재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기 위하여 각 개인에게 알맞는 재활 교육과 인성교육을 단계적으로 실시하여 직업능력을 갖춘 기능인을 양성하는 동시에 건전한 인격을 갖춘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양재과, 편물과, 공예과, 보호자립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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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일터 (장애인 근로시설)

사회적 여건상(도로, 건축, 교통) 취업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후원자 김해동님의 도움으로 1996년 12월 해동일터를 건축하여 장애인 종합 복지 대책의 일환으로 자립 및 생산활동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미 직업교육을 받았으나 신체적 조건으로 인하여 일반 직장에 취업이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하여 기능의 습득과 다양한 직업을 주어 재활 및 자립 기반을 구축한다. 양재자립, 편물자립, 단순작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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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휘 공동가정 '희망' (Group Home)

명휘원에서는 지역 사회 내에 위치한 아파트를 구입하여 그룹홈 '희망'을 운영하고 있다. 담당 사회복지사를 파견하여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사회재활 서비스를 제공하여 사회 통합과 정상화 및 사회 자립을 이룰 수 있도록 교육시킨다. 1996년 7월에 6명이 입주하여 공동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지역사회 내에서의 재활교육과 다양한 서비스를 지원하고, 독립생활, 여가생활, 가족과 지역 주민과의 유대 강화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그리고 사회적응 훈련과 직업생활 교육, 사회재활 교육 등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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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학교 (지체장애인 특수 중·고교)

故의민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께서 1982년 명혜학교를 개교하였다. 1988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 명혜학교를 인수하고 1990년 고등부를 개교하였으며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자활인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명혜학교에서는 정상적인 학습이 가능한 학생에게 인문계 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적용하고 학습지체 학생에게는 지체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적용한다. 이 밖에 장애특성에 따른 재활훈련을 실시하고 개인의 적성에 알맞는 특별활동과 직업교육을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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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휘어린이집

전국 경제인 연합회에서 창립 30주년을 맞아 사회복지사업의 일환으로 6억원을 안산시에 지원하였고 안산시 가정복지과에서는 219평 대지 위에 300평의 건물(지하 1층, 지상 3층)로 1992년 11월에 완공하였다. 1993년 3월 1일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에서 안산시로 부터 위탁운영을 하게 되었다. 명휘 어린이집은 현대사회의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여성의 사회 참여 증가 및 가족 구조의 핵가족화로 급증하고 있는 보육 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전문적인 보육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영·유아의 건전한 육성과 보호자의 경제적·사회적 활동의 지원을 통한 가정복지 증진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 되었다. 생활보호 대상자와 편모편부 슬하에 있는 어린이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영·유아실, 소꼽방, 몬테소리 특별실, 실내·외 놀이터, 양호실, 식당, 교재 자료실을 갖추고 어린이들의 연령별로 12학급을 편성하여 교사 13명이 유아반 120명, 영아반 43명의 어린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있다. 명휘어린이집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발견하는 신앙 교육을 통하여 기쁘게 생활하는 어린이, 마음이 따뜻한 어린이, 행동이 올바른 어린이, 건강한 어린이로 성장하도록 인성 교육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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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휘 종로 복지관

명휘종로복지관은 구 재단법인 보린회를 명휘원으로 개칭하여 설립한 터에 1967에서 1978년까지 장애인 재활시설로 운영해 오다가 1978년 명휘원이 광명시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YMCA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1990년 명휘종로 복지관은 이사회를 통하여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기로 결정하여 서울시 종로구청의 공적부조와 약간의 후원금으로 걸식노인을 대상으로 무료급식소를 열었다. 1992년 2월 부터는 지역사회의 맞벌이 부부의 육아를 위하여 종로구청에 인가를 받아 성모 어린이집을 개원하였다.

노인복지-탑골공원을 이용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루 평균 150여명, 월 평균 3,750여명에게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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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휘 체육센터

스포츠 활동을 통한 장애인의 정신적, 신체적 재활과 장애인에 대한 지역 주민의 이해 증진, 명랑하고 활기찬 생활을 강조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71. 5. 5 사회복지법인 명휘원 인가

1971. 6. 3 명휘원 준공(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243번지)

1971. 8. 21 서울특별시로부터 사회복지시설 인가

1978. 10. 20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으로 명휘원 신축 이전

1985. 6. 1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에서 명휘원을 운영

1990. 5. 8 명휘원, 명혜학교 신축 이전

1993. 3. 1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에서 안산시로부터 시립명휘어린이집의 위탁운영을 받음

1996. 7. 4 장애인 공동가정 '희망' 설립

1997. 8. 1 명휘 체육센터 증축인가

소재지 : 우 425-170 경기도 안산시 사동 1273번지/ 전화 0345)406-1134∼6/ 모사전보 0345)406-9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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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학교 慕聖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394쪽)

황해도 재령 본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초등교육기관. 재령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르각(Le Gac) 신부는 선교의 전 단계로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899년 한문서당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모성학교의 전신이었다. 그후 2대주임 멜리장(Melizan)신부가 부임하면서 개신교의 교세가 급격히 신장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신식학교의 설립, 운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그 때까지 운영해 오던 한문서당을 개화된 신식학교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1909년 멜리장 신부는 초등학교 인가를 받아 교명을 모성학교로 하였다. 모성학교는 그 후 10여년간 운영되다가 재정난에 부딪혀 1918년 자진 폐교하였다.

1899. 모성학교의 전신인 한문서당 개설 (394쪽 모성학교)

1909. 모성학교는 초등학교 인가를 받아 교명을 모성학교라 함 (394쪽 모성학교)

1918. 모성학교 폐교 (394쪽 모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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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 Mousset, Germain 1876-1957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02쪽)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제 2대 대구교구장. 주교. 한국명 문제만(文濟萬). 프랑스에서 출생. 1900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졸업과 함께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해 10월 한국에 입국하였다. 1901년 첫 사목지인 제주도에 부임했으나 5월 신축교난이 일어나자 뮈텔주교에게 고난의 경과를 상세히 보고한 후 라크루(Lacrouts) 신부와 함께 목포로 피신했다가 10월에 제주도로 귀한, 다시 전교를 시작하였다. 1902년 마산본당(현 완월동 본당) 으로 전임되어 성당을 신축하고 창원, 진주, 통영, 거제 등지를 전교하는 한편 1910년 현 성지(聖旨)여중·고의 모체인 성지학교를 설립했고, 1911년 대구교구 당가(재정부장) 로 임명되었다. 그후 1928년 대구교구 부주교를 거쳐 1938년 2월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사망하자 이해 12월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5월 6일 주교로 성성되었고 그 후로는 대구교구의 교육사업에 주력하여 효성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주교관 내에 루르드 성모당을 건립하였다.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교구장직을 사임당하고 광복 후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지부장으로 활동, 그 성과로 인해 195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1957년 6월 8일 노환으로 서울에서 사망, 대구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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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사끼 까리따스 수녀회 (교회와 역사 82호 7쪽) - 1982. 5. 25발행

미야사끼 까리따스 수녀회는 1937년 8월 15일 당시 일본에 건너와 사제생활을 하고 있던 살레시오회 수도사제 안토니오 가보리(Antonio Cavoli)에 의해 일본 미야사끼市에서 창립되었다.

창설자인 가보리 신부는 당시 미야사끼에서 얼마동안 주임사제로 활동하였으며 1933년에는 최초의 양로사업을 그곳에서 시작하여 유아사업, 육아사업, 탁아사업으로 그 사업범위를 점차 확장시켜 나가면서 사업에 헌신할 수녀들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미야사끼 까리따스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56년 10월 18일로서 당시 광주교구장이었던 하롤드 주교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하롤드 주교는 친히 창립자를 만나 선교 수녀의 한국 파견을 요청했으며 창립자도 직접 한국에 와서 현지 답사를 하였다. 창립자인 가보리 신부는 일본에서 불가능했던 본당사목에의 꿈을 한국에서 실현할 수 있게되어 기꺼이 이를 수락했으며 10월에는 3명의 수녀가 광주 남동에, 12월에는 4명의 수녀가 나주에 각각 파견되어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한국인의 동 수녀회 지원자는 창립당시부터 있었으며 1956년도부터 1959년까지 4년간 한국에 파견된 한국인 수녀만도 11명이나 되었다. 수녀회는 이들을 중심으로 지원자를 받아들이고 양성하면서 한국내 본당에서의 포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포교활동으로 광주 교구장 산하 명도회에서 본당의 교리교육을 주관하고 교구내 성서연구와 그룹별 성서모임, 피정지도를 통해 신자 재교육의 역활을 수행하고 있다. 간접포교활동으로는 기아 일시 보호소 운영및 성 가롤로 병원 등의 사회사업을 통해 포교의 역활을 수행하고 있으며 교육분야에서는 수녀회가 직접 운영하는 4개소와 본당 운영의 7개소 등 11개 유치원과 제주의 신성 여자 중고등학교 골롬반 간호전문대학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밖에 경기도 성남시에 양로원 시설을 계획하고 있으며 전남 영암에서는 농장을 운영하며 농촌사목에도 힘쓰고 있다. (1982년 현재)

장위동의 까리따스 유치원과 청담동의 성요셉 유치원을 운영하여 취학전 아동들에 대한 예비선교 및 자모들에 대한 가정선교에도 노력하며 경기도 시흥군에 매주 1회 정기적으로 2명의 수련 수녀들을 파견하여 활동한다. 오전에는 유아들의 교육을 실시하고 오후에는 환자와 가난한 이들을 방문 위로함으로써 그들의 영적 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다. 또 강남 시립병원과 성모 성심병원을 매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신자 직원들의 재교육을 위한 전례및 성서 연구등의 모임을 갖고 있다.

미야사끼 까리따스 수녀회 (교회와 역사 224호 16쪽) - 1994. 1. 25 발행

⸁ 본당 사목

"너희는 온 세상에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라는 창립정신의 실현을 위해 한국에 진출한 이래 까리따스 수녀회가 최초로 시작한 활동이 본당 사목이었다. 이때부터 각 교구의 주교, 본당 사제를 도와 직접 포교의 사도직 활동에 임하게 되었고 현재 광주교구를 위시하여 서울, 수원, 전주, 청주, 제주, 부산, 원주 교구의 본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특별히 1986년 진출 30년을 맞으면서 그 동안 본당 사목의 내용을 '전례', '가정방문', '단체지도', '인관관계', '교리지도'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복음의 빛과 창설자의 정신에 따라 반성하는 기회도 가졌다. 가정 방문은 이 중에서도 창설자가 가장 강조한 포교 방법으로 진출 초기부터 본당사목에서 전력을 기울인 부분이었다. 당시에는 전쟁 후 외국에서 보내온 원조물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며 하느님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래 신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 성당 안에서의 활동 즉 각종 교리지도, 단체지도, 반 모임, 그룹별 성서 모임 등이 많아지고 회원들의 업무가 증가되어 가정 방문의 기회는 많이 줄어들었다.

주로 대세, 임종환자, 특별한 문제가 있는 가정만 방문하는 정도이기에 신자들을 만나는 장소는 가정이나 일터가 아니고 성당에서 회합이나 교리시간에, 그것도 개별적인 만남 보다는 단체 안에서의 만남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몇 가지 모색한 방안으로는 본당의 의사, 한의사들에게 생활 보호 대상자, 극빈자에게 정기적으로 무료 봉사할 수 있도록 권유, 가난한 가정, 문제 있는 가정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방문환자에 대한 관심과 방문, 가난한 가정의 자녀를 위해 직업학교 알선, 및 취업 알선, 본당 청소년을 위한 성 윤리 교육 배려, 미혼모에 대한 사후 처리에 관심과 협조, 본당 내 가난한 자, 고통중에 있는 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주3∼4회는 반드시 방문한다는 등의 목표를 세워 실천에 옮김으로써 보다 복음에 충실한 본당 사목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 사회사업

까리따스 수녀회의 창설자는 처음부터 사회복지 사업을 통하여 선교하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한다는 목표하에 이 사업을 시작하였다. 의지할데 없는 고아나 노인들을 위해 시설을 마련하여 좀더 인간다운 삶을 마련해 주고 싶은 열정이 사업을 추진하게 했던 것이다. 현재 병원, 양로원, 고아원, 탁아소, 복지관 운영, 교도소 사목을 하고 있다. 앞으로 사회사업의 전망으로는 근로자, 노동자를 위한 사회복지책의 하나로 특정 시설을 마련하는 방안과 봉사할 수도자가 직접 지역 사회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방법을 연구 개발하는 것 등이 계획되고 있다.

- 양로사업

창설자는 병들고 고통받는 소외된 노인들에 대한 지속적인 봉사를 위해 조직적인 단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이로 인해 까리따스 수녀회가 탄생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여러가지 여건으로 이 사업이 빛을 보지 못하다가 농장에서 수녀들이 일하기 시작한지 11년째가 되는 1981년 5월 기존의 조그만 집을 개축하고 의지할곳 없는 할머니 여섯 분을 모심으로써 양로 사업에 싹을 틔우게 되었다. 할머니들도 신자들이기에 아침 5시경 일어나 아침 기도로 로사리오 등의 기도를 한다. 아침식사 후에는 채소밭 가꾸기, 정원 손질 등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지만 많은 시간들을 사제들과 자신들보다 못한 이들, 그리고 은인들과 기도를 부탁한 이들을 위한 기도로 보낸다. 처음 할머니들이 이곳에 왔을 때는 자식들에 대한 원망과 지난날에 대한 쓰라린 추억 등으로 마음이 외롭고 메마른 상태였으나 지금은 모든 것을 어린 아이들과 같이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본원에 새 양로원이 신축됨으로써 신자 여부를 막론하고 의지할 곳없는 가련한 노인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앞으로는 이곳에 그치지 않고 여러 지방에 양로원을 세워 창립 정신대로 지역의 모델이 되는 사랑의 사업체를 이루고자 한다.

⸃ 교육사업

1956년 나주에서 본당 사목을 시작하면서 성모 유치원을 시작으로 하여 유치원 교육 사업도 시작되었다. 문교부 시책에 따르면서 처음부터 종교교육에 입각하여 원아의 영혼이 하느님의 존재를 받아들여 밝고 티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수도자가 대부분 행정, 관리직에 있게 되어 직접적인 유아 교육에 참여한다고는 볼 수 없다. 이외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갖고 있는 현 유치원 교육을 반성하며 몇 가지 노력하는 방안은 다음과 같다.

衁. 까리따스 고유의 유치원 교육 지침에 중점을 두면서도 우리 현실에 맞는 교욱 지침을 작성하여 유치원 교육 연구회를 조직

遁. 유아 교육에 임하게 될 회원들의 전문 교육 양성 실시

鑁. 유치원 교육을 통한 가정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저녀를 맡기는 부모에게 하느님의일을 전하는 일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인 자세

鱁.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가정의 유아들을 위해 토요일에도 유치원을 개원, 봉사 등을 추진중이다.

중고등학교의 경우 현재 수도회에서 경영하는 교육 사업이 아니면 회원들이 교육현장에서 회의 정신인 포교에 폭넓은 활동을 하지 못하고 수도자로서 공동 생활과 기도 생활에 철저하지 못하며 돈보스꼬 예방교육에 접근하지 못했음이 사실이다. 하여 제언으로 교육에 임하는 회원들이 돈보스꼬 예방교육을 깊이 연구 습득하여 오늘의 학교 교육에 부족한 인간교육, 인성 교육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과 교육 활동과 교의 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도록 자율성이 좀 더 부여될 것, 그리고 종교 담당 수녀들에게 피아노, 올겐, 기타 악기들도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할 것과 장래 실시할 학교 교육은 창설자의 정신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술학교, 야간학교 등의 특수 학교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전문적이고 실력있는 교육은 그들에게 수도자들이 봉사하는 그런 기술학교가 지금 한국 상황에서 더 까리따스 회원들에게 요구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 의료 사업

독일 가롤로 보르메오 수녀회에 의해 운영되던 성 가롤로 병원을 인수하게 된 것은 1974년 8월 6일이었다. 의료사업을 통한 사랑의 실천은 애덕 실천이라는 수도회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사업이었다. 마침 현 대주교를 위해 이 병원 인수의 요청이 전달되었다. 당시 수도회로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는 상태였지만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무경험과 작은 인원으로 병원의 많은 일을 감당해야 했던 초기의 수녀들은 적잖은 시행 착오와 실수도 저지르고 이러한 속에서도 더욱 분발하였고 애써 노력한 보람으로 이제는 순천과 인근 지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름도 친근한 성 가롤로 병원이 되었다. 더 큰 병원들도 있지만 규모에 비해 환자가 많은 곳, 곤란한 위급 환자들이 쉽게 운반되어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대병원이 아닌 중소병원으로서의 어려운 점과 수도자가 병원을 운영하는 데에 따르는 대외적인 곤란한 문제들이 여전히 있으나 어느 정도 안정과 질서를 찾은 단계에 와 있어 이제는 회의 정신을 살려 내실에 눈을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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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재활원 (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 1998. 8. 25일 밀알재활원의 답신에 의거

장애인에게 장애를 최대한 극복 할 수 있도록 제반, 재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장애인의 사회통합 및 사회복귀를 촉지하고,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자 1989년 서울 후원회를 조직하여 배종호(도마) 신부가 설립하였다. 대지 2,183평중에 364평이 본건물이고 작업장 및 관사가 150평이다. 밀알재활원에서 실행중인 작업은 다음과 같다.

직업재활사업 - 기초학습지도, 대인관계훈련, 사회생활훈련, 현장적응훈련

사회적응 프로그램 - 다양한 주변환경의 체험을 통하여 지역사회 내에서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는 능력 배양

교육 프로그램 - 신변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는 기능을 기르고 단체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습관을 기름

건강증진활동 - 일상생활 속에서 체력단련의 기회를 도모하고 운동을 통하여 서로간의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여 서로의 이해와 수용의 폭을 넓힘

여가활동 - 일상적인 집단생활에서의 분위기를 바꿔주고 야외활동을 통하여 자연환경속에서 다양한 학습의 기회를 제공

앞으로는 연장장애인 자립생활을 위한 공동 생활가정(GROUP HOME)을 운영할 예정이며 밀알재활원의 입소대상은 강원도내 거주하는 18세 이상 30세 미만의 정신지체인, 생활보호 대상자, 읍·면·동사무소 또는 시·군 사회복지과에 의뢰하면 입소할 수 있다.

밀알재활원은 지적능력과 사회적응 능력의 자체로 스스로 삶의 개발이 어려운 사람들의 삶 터가 되며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임을 서로 믿으며 장애를 극복하려는 굳은 의지들이 모인 소중한 공동체이다.

1982. 4 밀알회에서 정신지체아 및 보호자 상담 시작 (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1989. 11 밀알회 서울 후원회 조직 (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1990. 5 밀알회 춘천 후원회 조직 (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1993. 12 강원도 정신지체인 재활원 기공 사회복지법인 밀알회 설립허가 및 등록 (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1995. 1 밀알재활원 사회복지시설 인가 및 개원 (천주교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소재지 : 우 200-810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혈동리 116-1/ 전화 0361)261-3112∼3/ 모사전보 0361)26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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