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명부6(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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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교실 / 바오로 수도회 / 박문여자중·고등학교 /박병래 / 박성종 / 범어동본당 / 백백합보육원 / 베네딕토수녀회 / 포교 성 베네딕토수녀회 / 베네딕도 수도회 / 베들레헴 집 / 베타니아의 집 / 보금자리 / 보령종합병원 / 보스꼬 자습실 / 보은 성모의원 / 보혈 선교 수녀회 / 본동종합사회복지관 / 복자여자 중·고등학교 / 부산성분도병원 / 북수동본당 / 분도유치원 / 블랑 / 비들기 교실 /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 빈첸시오의 애덕자매회 / 빈첸시오의 집

바오로 교실 (나눔지 89호 2쪽) - 1986. 3. 15발행

만18세 미만의 통원이 가능한 정신지체 장애자들에게 사회생활에 필요한 적응력 훈련과 국민학교 과정의 학습지도 등을 중점적으로 교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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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수도회 (라) Pia Societas Sancti Pauli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35쪽)

1914년 8월 20일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에 의해서 이탈리아 알바(Alba) 시에 창설된 수도회.

주보로 사도 바오로를 모시는 이 수도회는 사회 홍보 수단을 통하여 포교에 종사한다. 현대문명의 이기인,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출판물 등 각종 홍보수단에서 흘러넘치는 비도덕과 오류와 악의 소리를 눌러 이기기위한 목적으로 창설 되었다. 이 수도회의 특수목적은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령을 위해 효과적이고 신속한 홍보수단을 이용하여 가톨릭 전교에 힘을 다하고 있다.

출판분야에는 현재까지 성서, 영성, 교리, 전례, 문학, 청소년, 아동용 등의 서적이 출판되었다.

소리와 영상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인간전체를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된다는 사명에 따라 시청각 교리교재 연구소에서는 교회의 전례생활과 영성에 도움을주는 레코드, 카세트도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1974. 3. 시청각 교리교재 연구소 개설 (435쪽 바오로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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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여자중·고등학교 (교회와 역사 226호 17쪽) - 1994. 3. 25발행

1967년 한국 진출을 한 노틀담 수녀회가 교육 중심의 사도직을 한다는 것을 알게된 인천교구 나길모 주교는 1970년부터 인천 박문여자 중고등학교를 맡아 교육해 줄 것을 거듭 부탁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 공동체 실정으로는 역부족이었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공동체가 기반을 잡아가면서 1974년 마리아 알레산드라 지부장 수녀는 교회의 요청에 응하고 수녀회의 특징도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교육사업 확충의 필요성을 느끼고 박문여자 중고등학교 운영을 맡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1979년, 이미 시작된 학교 신축공사 기금을 위한 바자회를 개최하는 등 열성으로 환경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독일 관구의 지원으로 1980년 5월 17일에는 현대식 교육시설을 갖춘 교사 낙성식 및 개교 40주년 행사를 거행하였다.

진리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참다운 청소년 교육실현에 사도직 목표를 두면서 창립자의 청소년 교육정신과 카리스마가 학교 현장에 살아 생동하며 좋으신 하느님에 대한 깊은 체험을 박문인 모두가 할 수 있도록 주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일제 말기 학교 설립 취지인 여성 교육의 사학 전당으로서의 우수한 전통을 계속 살리며 가톨릭적 전통을 갖춘 여성 교육, 실력있고 성실한 품격을 갖춘 교육, 불우 이웃을 사랑하는 교육, 예절 바른 여성 교육을 중시한다.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심성 계발 프로그램을 통하여 학생들의 자기 발전을 돕고 학력 신장의 적극적 태도를 가지며 순결 교육을 통하여 전통 예절 계승과 부도(婦道)를 익히고 행복한 가정 운동으로 미래의 배우자 선택과 행복한 가정 형성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배려룰 기울이고 있다.

고등학교의 경우 평준화 이후 종교 교육 문제, 학력의 격차로 인한 갈등 등 많은 문제점이 뒤따랐으나 이를 극복하여 인문계 고등학교로서의 튼튼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학생과 학교 사도직 협력자들 의 예비자 교리 실시로 세례자가 태어나도록 힘쓰며 격년제 교직원 연수와 학사 시찰 실시로 사도직 협력자들과의 관계형성과 사도직 정신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1974. 노틀담 수녀회는 인천교구의 박문여자 중·고등학교의 운영을 위임 (교회와 역사 226호 17쪽) - 1994. 3.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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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래 1903-1974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42쪽)

의학박사. 성모병원 초대원장. 세례명 요셉. 본관 밀양.

충남 논산 출생으로 경성의전(京城醫專)을 졸업하고 1936년 부터 성모병원의 초대 원장으로 20년 동안 봉직하면서 서울교구 의료사업의 기초를 마련했다. 6.25 사변중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가톨릭의사협회원들과 함께 수복지역에서 의료봉사활동을 벌였고 1956년 2대 성모병원장과 가톨릭대학 의학부 3대 학장을 겸임하였다.

성 루가의원을 개원하였고,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원으로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뜻을따라 많은 가난한 환자를 돌보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의 추도사에서 "성실과 사랑에 찬 고매한 인격으로 육체의 병뿐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고쳤던 인술(仁術)의 실천자" 라고 추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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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종 1925-1983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43쪽)

서울교구 신부. 초대 가톨릭 노동 청년회 (J.O.C) 지도신부. 세례명 프란치스코.

성 술피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된뒤 로마 성 그레고리오 대학에 진학하여 1958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J.O.C의 초대 신부로 임명되어 1969년 7월까지 지도신부로써 기본 이념을 정립하고 기틀을 마련하였다.

1960년에는 군종신부단장, 1962년 이민회(移民會) 지도신부, 1966년 한국 청소년 문제협의회 부원장을 겸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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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동본당 泛魚洞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05쪽)

1949년 대구교구에서 현 범어동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1951년 성당을 신축하고 계산동본당 소속 공소를 범어동성당으로 승격시켰다. 초대본당주임 권영조(마르코) 신부가 본당 전교와 유치원을 위해 수녀파견을 요청하자 1953년 4월 1일 정갑순 알로이시오 수녀와 이봉순 방지거 수녀가 부임하였고 1954년 4월 6일부터 샛별유치원을 개원하여서 가톨릭적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에 결핵환자 수용소가 된 동부시립병원이 바로 옆에 있어서 2명의 수녀는 비참하게 죽어가는 환자들을 방문하면서 위로하여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한편 지산동을 중심으로 범물동, 두산동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던 범어동 본당 소속 지산공소가 1975년 4월부터 준본당으로 승격되어 노경삼(다니엘) 신부가 그곳에 부임하면서, 수녀의 도움을 청하여 그 당시 샛별유치원 책임자였던 권영자 말가리다 수녀가 약 1년 반동안 주일마다 미사준비, 주일학교 교리교육 등을 맡아 협력하였다. 1977년에 대구대교구 산하 지산본당으로 승격되었고, 본당 가까이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가 수련원을 마련하여 자리잡은 고로 소임수녀들이 나와서 봉사하게 되었다. 그동안 1,000여명의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발전을 거듭해 왔던 샛별유치원이 수도회 방침에 의해 1983년 2월 2일 폐원되었다.

1954. 4. 6 범어동 본당 내 샛별 유치원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05쪽)

1983. 2. 2 범어동 본당 내 샛별 유치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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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백합보육원白白合保育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02쪽)

보육원은 1915년 10월 15일 대구교구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설립하여 그 운영을 대구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맡겼다. 보육원은 처음에는 수녀원 건물의 일부를 사용하였다. 대구본당(현 계산동 대주교좌 성당)의 초대주임 로베르 신부는 대구지방의 고아양육을 위해 이미 프랑스인 양모를 정하여 그들의 양육비 보조금을 받아냈고 본당신자 유지들에게 양육비를 지원하여 고아들을 맡겨 양육하고 있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이러한 고아 약 30여명을 맞아들여「천주교수녀원부설 여자고아원」을 시작했다. 1922년 이후 원아수의 증가에 따라 고아원 건물을 점차적으로 증축 혹은 신축하여 영아부, 육아부, 아동부 등을 분리시켰다. 한편 수녀회의 지원자들의 수가 많아지고 수련원 개설문제가 제기됨과 아울러 원아수의 급증으로 1925년에는 고아원 설립 10주년 기념으로 원사를 신축하였고 그 당시 관공서 기관에 수용되어 있던 어린이 40여명을 인계받아 양육하였다. 일제말(日帝末)인 1944년 2월 10일, 그 명칭을「천주교 백백합 보육원」으로 개칭했다. 보육원이 설립되던 당시부터 어린이들의 보건위생을 위하여 수녀원내에 진료소가 부설되었다. 이 진료소에서는 보육원아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주변의 극빈자들에게도 자선 활동의 일환으로 무료진료 및 시약을 해왔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져서 수녀들을 믿고 의지하는 신자들은 물론이고 외교인들도 즐겨 이곳을 찾아와서 외래환자가 많아졌다. 이에 수녀원에서는 이 진료소를 평신도 의사 박영대(대구 중앙병원장)선생을 촉탁의사(囑託醫師)로 모시고 월요일마다 외래환자들이 진찰을 받게하고 그 밖의 요일에는 수녀들이 의사의 처방대로 치료시약하도록 하였다. 1934년에는 이를「대구성요셉의원」으로 확장 개칭하였다.

해방 이후 1946년 3월 15일에는 미군정청(美軍政廳) 당국으로부터 다시 후생시설 등록증명을 받았다. 성요셉의원은 원래에 보육원 어린이들의 보건위생을 위하여 설립된 시설이었다. 그러나 시대적 변천과 의학기술의 눈부신 발전 및 종합병원과 전문의들의 속출로 성요셉의원은 창설당시의 목적에 부응되기가 어려웠다. 이에 수녀회에서는 1973년에 접어들면서 이 의원을 서서히 정리, 폐원하였다.

한편 보육원에서는 해마다 성장아들이 많아졌고 그들의 사회적 적응을 위한 교육과 결혼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많았다. 때마침 1967년 이래 사회복지 사업에 관한 국가의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보육원에서는 성장한 여아들을 사회에 진출시켜 사회인으로 경헙을 얻도록 배려하는 국가의 시책에 준하여 해마다 성장한 아이들을 사회로 복귀시켰다. 한편 1968년부터 시청에서는 복지사업기관인 일시보호소를 대구본원과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운영을 하도록 요청했고 일시보호소에대한 사무감사가 엄격해졌다. 그러나 이때는 마침 대구관구가 설립된 직후라서 재정상의 어려움이 많아 수녀원에서는 이를 보류해오다가 1969년 11월 17일에 시설의 운영을 독립시켰다. 그리고 백백합보육원 분원도 독립분원으로 설립되었다.

1915. 10. 15 대구에 백백합보육원 (白白合保育院)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02쪽)

1934. 대구 백백합보육원내에 진료소가 개설되어 그 이름을 대구성요셉의원으로 개칭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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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수녀회 (라) Benedictina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 수녀회로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와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있는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830년 1월 9명의 동정녀들이 블룸(Joset Lenoz Blum)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자매들의 학원'이라는 공동체 생활이 효시가 된 후 1892년 9월 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타노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회의 수족에 연합됨으로써 발족된 수녀회로서 1931년 9월에 한국에 진출하였다.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904년 7월 27일 성 오틸리엔(St. Ottilien)의 모원으로부터 분할 독립된 투칭(Tutzing)의 모원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투쟁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수녀들이 1925년 11월 25일 한국에 진출하였다.

⸁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 1931년 9월 한국 진출. 1963년 10월 교황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설립목적은 지역사회의 여성교육과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할 봉사자를 양성하는데 있다. 1931년 당시 욘갈 교구장 브레허(T. Breher, 白)주교의 요청으로 6명의 수녀가 처음 내한하여 연길교구 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용정하시 본당에 첫 분원이 생긴 이후 1945년까지 7개의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원수에 있어서도 1939년까지 20명의 수녀가 스위스 모원으로부터 파견되었고, 1944년까지 21명의 한국인 수녀가 서원하였다. 그러나 1945년 8.15광복 이후 러시아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사상통일공작'에 의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월남하기 시작한 수녀들은 남한의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인 1951년 4월 유을준 의사와 람께 부산 초량동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2년 부터는 지원자들도 입회하기 시작하였고,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했던 수련장 베다(Konig Beda) 수녀도 1958년 3월 다시 내한하여 수련지도를 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 동래구 광안동에 대지를 마련하여 1965년 우선 수련원부터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후 본원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9년 경기도 부천·소사에 지원(支院)을 설립하고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의료봉사활동 이외에도 부산에서는 1949∼1980년에 걸쳐 10개의 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울산·대구·마산 그리고 미국의 뉴옥 등지에서도 전교활동을 하고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교구청 사목국, 해외교포 사목 등 특수 사목에서도 활동을 하고있다. 1972년 12월 대리구(代理區)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에 임남훈 수녀가 피임되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1년 6월 관구로부터 교황청 직속 수녀회로 승격되어 모원과 동등한 자립수녀회로 인가를 받고 초대 총원장에 김지상 수녀가 피임되었다.

1951. 4 유을준 의사와 함께 부산 초량동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 (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1952. 서울 동자동에 성 분도병원을 개원 (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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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원산교구의 활동 : 1920년 8월 25일 원산교구가 설정됨에 따라 성 베네딕토 남자 수도회는 그 사목을 위임맡아 덕원으로 수도원을 이전하고 함경남·북도의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수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당시 교구장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는 독일의 투찡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rers of Tutzing)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4명의 수녀가 1925년 11월 21일 내한하였다. 1926년 수녀원에서 방 한칸을 내어 전교를 시작하여 그 예비자반은 후에 '호수천사학교'로 발전하였고 1927년 6월 6일에는 새 수녀원의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며 아울러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분원장으로는 마틸데 히르시 수녀가 임명되었고 1927년 5월 3일 첫 지원자를 받았다. 1926년에 사목활동을 시작한 원산수녀원에서는 해성국민학교, 해성 유치원, 본당활동,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또한 1926년에 신설된 함흥 분원에서는 본당활동과 학교에서의 전교활동을, 1940년 신설된 청진 분원에서는 성심의원 운영과 본당활동을, 1948년 신설된 흥남 분원에서는 본당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서양수녀들의 일어 사용, 3개월 마다의 거주신청 경신, 신사참배, 국내여행 신고, 식량난 등은 물론 1944년에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모든 학교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광복 후에도 소련군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학교와 유치원이 소련군 장교숙소와 군인 교육기관으로 바뀌고 토지개혁으로 인한 농토도 몰수당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정치보위부 교화소로 옮겨졌다가 5월 16일 일부 수녀들은 수녀원으로 되돌아왔으나 곧 해산당하였고 서양수녀들은 서양신부, 수사들과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54년 1월 22일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대구에서의 활동 : 1950년부터 월남한 수녀들과 6.25동란으로 피난나온 수녀들이 부산에서 미군들의 삯빨래 등으로 생활하다가 1951년 10월 20일 당시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주선으로 대구 남산동 본당 내 사제관 일부에서 정착하였고 1955년 1월 현 대구 신암동에 건물을 신축하여 정착하였다. 1956년 대구 분원이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고 초대 원장에는 오테마라(M. Othemara Ammann) 수녀가 임명되었다. 대구에서의 활동으로는 1956년 현재 파티마의원을 개원하고 1958년에는 대구 신암동 본당에, 1960년에는 반야월 본당에, 1955년에는 대구 시립병원과 희망원에서, 1968년에는 국군간호학교에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대구시내 3개본당(신암동, 공평동, 동인동), 서울시내 3개본당(왕십리, 돈암동, 동선동), 경북 성주, 상주, 김천, 경산, 함창, 경남 마산에 각각 분원과 선교활동, 의료활동, 교육활동에 적어도 4명 이상의 수녀가 파견되어 있다.

1933. 고산 분원에서 본당활동, 해성유치원, 해성보통학교, 약방, 농장 운영 (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1940. 청진 분원에서 성심의원 운영 (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1955. 대구 시립병원과 희망원 운영 (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1956. 파티마 의원 개원 (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1962. 원산 수녀원에서 해성국민학교, 해성유치원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운영 (462쪽 성 베네딕토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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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 수도회 (교회와 역사 98호 7쪽) - 1988. 8. 25발행

베네딕도 수도회는 수도회의 시조로 불리우는 베네딕도 성인이 서기 530년경 이탈리아의 몬테까시노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 효시이다. 회원들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정신을 받들어 그분이 사랑하셨던 것을 사랑하고 그분이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며 복음적 권고에 따를것을 서약함으로서 하느님과 일치할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베네딕도 성인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규칙서는 수도생활의 제도와 양식을 규정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수도회에서 지켜지고 있다.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한국에 처음 진출한 것은 1909년이었다. 조선교구장 뮈델 주교의 요청에 따라 이해 3월 사우에르신부 등 2명의 수사신부가 내한한데 이어 그 해 11월에는 수사 6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1911년 당국의 설립인가를 받아 최초의 사립 사범학교인 숭덕사범학교를 세우고 23명의 학생으로 개교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지원자의 부적으로 2년 뒤 폐교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수도회는 그후 1920년 8월 원산교구가 새로이 설정되자 이 교구를 맡아 함경남도와 간도를 포교지방으로 관할하게 되었다. 사우에르 신부가 초대주교로 취임하였으며 1927년에는 서울의 수도원을 함경남도 덕원으로 옮기는 한편 그 곳에 이상적인 신학교와 자선병원, 인쇄공장 등을 설치하여 전교, 의료, 교육, 출판사업 등에 있어 빛나는 업적을 남기었다.

1974년에는 분도출판사가 서울분원에 지사를 설치하여 동사 발행의 출판물 보급과 선전에 힘쓰고 있다. 그 후 1979년 부터는 분도회관 건물을 분원 및 신학원으로 사용하고 분원과 신학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성 베네딕도 피정의 집'으로 개칭하여 주로 신자들의 피정을 위해 사용토록 하고있다.

1909. 성 베네딕도 수도회 한국 진출 (교회와 역사 98호 7쪽) - 1988. 8. 25발행

베네딕토회 (영) Benedictine Order O.S.B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462쪽)

일정한 장소에 정주 하면서 공동체생활을 통한 철저한 수도생활이 가장 우선적인 베네딕토회의 목적이지만 지역교회의 필요성에 따라 교육, 학문, 포교활동 등 다양한 활동에 종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에 종사할 경우 반드시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기 때문에 대수도원의 공동체를 이탈하여 혼자 생활하면서 활동해야 할 때에는 일시적 혹은 임시적으로만 활동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베酈기토회 수도원안에서의 학교운영이나 신학, 철학, 과학 등의 연구활동 및 예술활동 등의 문화활동은 세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09년에 한국에 진출한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토회도 선교를 목적으로 독일에서 발족되었다. 이 수족은 1884년 베네딕토회의 회원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안에서는 수도자, 밖에서는 선교사, 그래서 포교 성 베네딕토회로도 불리는 이 수도회는 이러한 창설의 기본정신에 따라 다른 선교회처럼 일정한 지역을 맡아서 교구와 본당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하는 교구내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교운영, 예술활동 등을 통해서 문화적으로 교구 전체의 사목을 돕는데 있었다. 그러나 창설 즉시 진출한 동아프리카(현 탄자니아) 에서는 부득이 교구중심의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한국에서는 교육사업을 통한 기본적인 선교방침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한국진출 : 성 오틸리엔의 성 베네딕토회는 당시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1909년 2월 사우어(Sauer) 신부 등 2명의 수사신부가 내한하여 서울 백동(現 惠化洞)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함경남도 덕원을 거쳐 경상북도 왜관에 정착할 때까지 많은 어려움과 수난을 당하였다.

⸁ 서울시대(1909∼1920) : 사범학교 설립과 운영계획으로 뮈텔 주교가 초청한 본 수도회는 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서울 백동 낙산 아래 10헥타르(약3만평)의 땅을 매입하여 수도원의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고 1911년 3층 벽돌로된 거대한 수도원을 완공시켰다. 이미 1909년 말 정식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아울러 1910년에는 내한 목적으로 숭공학교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1913년 수도원은 대수도원으로 승격하였으나 숭신학교는 폐교하게 되었다. 지원자가 없다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몇몇 수사들이 중국으로 동원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목공, 철공, 열차,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직공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이 수도회는 수도생활뿐 아니라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포교수도회로서 본당사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의 반대로 이를 서울에서 실현시키지 못하고 함경남북도와 간도지방을 관할하는 원산교구가 설정되던 1920년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여 숭공학교를 폐교하고, 1927년 서울의 수도원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 덕원시대(1920∼1949) :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 에서는 아프리카 포교지가 붕괴된 뒤 자연 한국 포교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20년 8월 5일에 교황청에서도 한국의 원산교구 위임을 허락하자 곧 1921년 5월 1일 사우어 신부는 주교로 성성되었다. 교구 사목은 원래 이 회의 선교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서울의 베네딕토회원들은 이 제의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6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1927년 덕원의 새 수도원을 완공하여 그 해 11월부터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덕원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리하여 덕원수도원은 원산 포교지에 있어서 수도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되어 1940년 1월 12일 덕원면속구가 될 때까지 수도원 생활뿐만 아니라 원산교구 내에 있어서의 본당사목활동, 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야만 했다. 이에 투칭(Tutzing)의 포교 베네딕토회 수녀들이 1925년 11월 원산으로 내한하여 본당사목활동을 도울 뿐만 아니라 빈민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인 해성학교, 유치원 시약소 등을 개설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40년 덕원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다. 이 밖에 덕원수도원에서는 출판시설을 갖추어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바오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다. 일제의 탄압속에도 이처럼 발전한 수도회는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주둔하고, 1946년 토지개혁이 실시된 뒤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결국 1949년 5월 9일에 수도원의 모든 장상을 비롯한 신부, 수사들은 체포되어 독일인 신부 6명과 한국인 신부 5명이 1950년 10월 처형되었고, 사우어 대 수도원장을 비롯한 18명의 신부, 수사, 수녀 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954년 1월 42명의 신부. 수사·신부들이 생환되어 2년간의 휴양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서의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 왜관시대(1952∼현재) : 1951년 미국을 방문중이던 샹트오틸리엔의 크리소스토모 총원장은 당시 미국에 체류중인 스위스 출신의 전 연길교구 선교사 비테를리 신부에게 한국에 다시 진출하여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회를 건설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그를 한국 베네딕토회의 장상으로 임명하였다. 비테를리 신부는 일본을 거쳐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남쪽으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토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테를리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 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이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식구가 크게 증가되었다.

1955년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바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왜관에서도 분도 출판사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교회의 문서전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1971년 4월 왜관수도원의 대 원장직이 이동호 신부에게 이양됨으로써 베네딕토회는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또한 덕원교구에서 활약하던 스위스의 올리베타노 수녀들도 다시 한국에 진츨하여 각기 대구와 부산에 수도원 공동체를 신설함으로써 베네딕토회 여자수도회도 남한에서 완전히 그 기반을 굳혔다.

1910. 숭공학교 건립, 실업교육을 실시 (462쪽 베네딕토회)

1911. 숭신학교 건립, 사범교육을 실시 (462쪽 베네딕토회)

1925. 빈민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 해성학교, 유치원, 시약소를 개설하여 활동 (462쪽 베네딕토회)

1927. 덕원신학교 건립 (462쪽 베네딕토회)

1955.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 성 바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 교육에 전력. 분도출판사 설립 (462쪽 베네딕토회)

베네딕도 수도회의 의료활동 (함경도 천주교회사 266쪽)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온 후 가장 두드러진 역할 중의 하나는 의료봉사 활동이었다. 이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요셉 그라하머(J. Grahamer) 수사와 김재환(플라치도) 수사였다. 덕원 수도원에서 정식으로 일제당국의 인가를 얻어 의원을 개설한 것은 1928년 5월 부터였다. 당시 그리하머 수사는 이미 그의 치료솜씨에 고무된 많은 인근부민들로부터 칭송을 얻고 있었는데 서울의 국립병원 원장의 추천을 얻어 3년동안 의사 실습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교부받았다. 그는 서울에 있을 당시 10년 동안 공립 병원과 대학 병원에서 많은 수술을 도움으로써 이 자격증을 얻게 되었다. 그라하머 수사는 개원 즉시 김 플라치도 수사와 1명의 여자 간호원의 도움을 받아 헌신적으로 또 기술적으로 많은 환자들에게 봉사하였다. 실제로 개설 인가가 나오기도 전에 매일 20-30명의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였는데 그중 14,350명은 내과 환자들이었고, 4,530명은 외과 환자들이었다. 그 후 이 의원이 정부의 승인을 받게 되자 환자들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하여 매일 50-60명의 환자가 의원 문을 두드렸다.

처음 의원에서는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로 약을 주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원가만을 지불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28년 5월부터 1929년 1월까지 원산약국에서 제공한 약값만 해도 2,720엔(500마르크 이상)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의원에서는 점차 무료진료를 축소하고 약값을 올려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치료비는 1회에 대략 50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비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하루의 수입은 38억원에 불과하였고 반면에 지출은 인건비를 제외하고도 35원이나 되었지만, 영적이익이 너무 커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수도원은 물론이고 신학교, 본당 등에 천연두, 콜레라, 티푸스 등이 전염할 때면 이들 두 수사의 일은 더욱 바빠졌다. 1929년 여름에 이들은 작은 병원을 건립하였다. 그때까지도 치료실과 붕대실이 불충분하여 그라하며 수사는 조수 3명과 함께 손님을 위한 건물의 방 한 칸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방은 약국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이제 병원이 새로 마련되어 의사를 위한 방 2개 대기실과 약국을 위한 방들이 각각 하나씩 마련되었다. 그러나 수요에 비해 여전히 건물을 비롯한 제반 시설이 부족하였으며 병원의 운영은 자선 사업의 일환으로 행해졌으므로 거듭 적자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의료활동이 가톨릭을 홍보하여 신앙을 갖도록 인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선교와 마찬가지로 항상 모든 경우에 즉각적인 효과를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라하머 수사는 수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부득이 소액의 입장권을 발행하였다. 그러자 많은 환자들이 오지 않게 되었지만 이것은 그라하머 수사 환자 모든 환자들을 볼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한 조치였다. 2명의 수사는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지치고 굶주린 데다가 수도원에 돌아와서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그들을 찾는 환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1930년대 초에는 도움을 청하는 환자수가 평균 50-6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그라하머 수사는 주로 병원 안에서 일을 처리했고 중병일 경우에만 왕진을 나갔으나, 김 플라치도 수사는 붕대 가방을 들고 매일같이 나가다녔다. 마을에서 올 수 없는 병자들이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의료적 방문활동을 통해 직접 가톨릭 교리를 전하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라하머 수사와 김 플라치도 수사는 환자를 돌보는 중에 수많은 임종대세를 베풀 수 있었다. 이들은 1928년 5월에 의료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1930년 1월까지 1년 6개월 동안에만도 104명에게 임종 대세를 주었는데, 육체적으로 더 이상 구제될 희망이 없는 대부분의 환자들의 경우 죽기전에 대부분 임종 대세를 받으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요셉 그라하머 수사는 일에 지쳐 한때 본국으로 요양차 귀국하였고, 그동안 김 플라치도 수사가 혼자서 의료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약 1년만인 1932년에 그라하머 수사가 여러 가지 물약과 약제들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의료 활동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33년의 기록에 의하면, 1932년 1년동안 덕원병원에서는 21,065번의 진찰을 했고, 27,210회 약품을 조제하였으며, 2,070번 왕진을 해야만 했다. 2명의 수사가 이러한 의료활동을 담당하였으니, 그들의 노고가 얼마나 많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라하머 수사는 유럽에서 돌아오자마자 병원 증축에 착수하였다. 이 증축은 1933년 봄에 완성되었는데, 이로써 병원은 대기실 1개, 진찰실 1개, 붕대실 1개, 전기 방사선 치료실 1개, 약국 1개, 수술실 1개 등을 갖추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옛 야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8개의 병실 겸 입원실을 만들었는데 병실들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덕원 병원에서는 1934년 후반에 들어 다시 병실을 증축하게 되었다. 늘어나는 환자에 비해 병실이 턱없이 부족하였으므로 그라하머 수사는 환자들을 이웃에 있는 신자들의 집에까지 수용해야 했었다. 이에 그라하머 수사는 병원 소유의 한옥을 헌 다음 그곳에 병실로 쓰일 건물을 마련하였는데, 11월경에는 건물이 거의 완공되어 2인용 병실 6개, 욕실과 세면장, 작은 약국 1개, 휴게실 1개 등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병원은 이미 독일에서의 후원금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이 무렵부터는 완전히 자비로 운영해야만하였고, 이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이 후에도 병원은 나날이 성장해 갔으며, 그만큼 환자나 예비자들도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라하머 수사는 1935년 1월 16일에 그의 수도 허원 은경축을 지냈고, 다음해에는 두번의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일시활동을 중단해야만 했었다. 뿐만 아니라 1937년 5월 26일에는 방화로 보이는 화재가 병원에 발생하여 건물 일부가 손상을 입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활동에 대한 그라하머 수사와 김 플라치도 수사의 열정과 전교활동에 대한 노력으로 두 문제에서 모두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34년에서 1935년까지의 결실을 예로 들면, 이 1년간의 진료자수는 21,065명이었고, 약품을 나누어 준 수는 27,210명에 달하였다.

1928. 5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사들은 덕원에서 의료활동을 시작 (함경도 천주교회사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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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 집 (나눔지 17호 4쪽) - 1983. 1. 15발행

행려환자와 노숙자, 가난한 근로자들을 위한 헌 옷과 진료와 식사를 제공하며 위급한 환자들에게 침식을 제공한다. 임종을 위한 집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현재 1983년 현재 과천에 영생의 집 건립을 추진하여 10월중에 착공할 예정이다. 영보수녀원에서 운영 관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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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니아의 집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08쪽)

수도회의 연륜이 100년이 되어감에 따라 연로한 수녀들의 거처문제가 생기고 노후 요양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1936년 7월 8일 용산 삼호정(현 산천동)에 바오로 보육원 분원을 신축하여 50여명의 아이들을 분산 이주시켰을 때 원아들을 돌보고 가까이 있는 수녀원 묘지도 돌볼겸해서 보육원 2층을 노인수녀들의 거처로 정하였는데 이를 휴양지가 생긴 시초로 볼 수 있다. 1954년에 보육원이 명동으로 다시 합해진 후 이 건물은 백합유치원으로 개조되었고 1964년에는 수도회 관구로 사용할 2층 건물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교통의 불편 등으로 인해 2년만에 관구는 다시 명동으로 옮겨지고 관구 건물은 대신 1966년 5월부터 휴양의 집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7년에 본원에 있던 바오로 보육원이 폐원되어 건물이 비게 되었다. 이때 백합 유치원의 건물이 너무 낡아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재정적인 여유가 없음으로 1978년 3월 27일, 휴양의 집은 베타니아의 집으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은퇴한 노인 수녀들이 남은 여생을 기도와 휴식으로 보낼 수 있는 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편 1978년 폐원되었던 백합유치원 옆에 있던 휴양의 집 건물에는 2명의 수녀가 남아서 수녀원 묘지를 돌보며 집을 지키고 있었다. 1981년 9월 1일부터 약 1년간은 당시 한국에 진출하여 갈 곳을 마련하지 못한 사랑의 선교수녀회에 집을 내주고 그곳에서 기반을 닦도록 도움을 주었다. 1982년 4월 26일에는 용산에 있던 수녀원 묘지를 용인으로 모두 이장하였다. 이후 백합유치원 건물은 1983년 9월에 모두 철거했고 수녀원 건물은 1985년 7월에 철거했다. 이후 약 4, 5년간은 공터로 남겨두었으나 시에서 공한지세를 재촉하므로 1987년 8월 15일 명동에 있던 계성유치원을 이전할 목적으로 이 자리에 유치원과 더불어 특수사목에 종사할 수녀들의 거처를 함께 짓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8년 12월 13일에 준공을 하고 계성유치원이 이전하면서 새로 산천동 분원이 설립되었다. 명동 베타니아의 집은 1984년 1월 25일 노인 수녀들에게 알맞는 구조로 개축 수리하기로 하고 공사기간동안 수녀들은 성바오로 병원과 소래, 용현동, 논산 쌘뽈여자중고등학교 등의 분원으로 분산 이주하였다가 5월 27일 수리가 끝남에 따라 다시 베타니아의 집으로 돌아왔다.

1966. 5. 3 베타니아의 집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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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금자리 - 1998. 9. 3 보금자리의 오세레나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파티마 요양원에서 완치 가능성이 없는 결핵환자 중 무의탁자나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임종의 집이 되고 있는 보금자리는 1985년 10월 25일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설립하였다. 설립 당시에는 농지와 축사가 딸린 판자집 방 1칸 규모로 시작하여 현재 12명이 거주 가능한 주택의 규모이며 봉사자의 도움으로 농사 및 가축사육자가 생활을 이룬다. 결핵요야원과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건강관리를 해주며 운영은 후원회의 회비로 이루어 나간다.

파티마 결핵 요양원 입원환자 중 무의탁자나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완치 가능성 없이 임종만을 기다려야 되는 경우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없어서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파티마 결핵 요양원 폐문 후 타 의료기관에서 의뢰하는 난치성 결핵환자 또는 결핵 합병증으로 사회생활이 곤란한 무의탁자들을 수용하여 임종의 집 겸 사회복귀를 위한 자활 자립의 집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1985. 10. 25 보금자리 설립 - 1998. 9. 3 보금자리의 오세레나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소재지 : 우 718-820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189-1 전화 0545)973-7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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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종합병원 保寧綜合病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43쪽)

아산재단에서는 우리나라 의료 취약지구 중 5곳에 병원을 세워 지역사회의 의료발전과 사회사업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계획하에 보령에 종합병원을 세웠다. 아산재단의 이사장 정주영은 환자진료에 헌신할 수 있는 수녀들을 요청, 이에 1978년 12월 2일 최광필 클레멘스 수녀를 분원장으로 하여 간호수녀인 최옥화 세레나 수녀와 민명희 필로메나 수녀, 그리고 영양사로 김순희 로자리아 수녀, X-Ray 기사로 윤형숙 마리아 수녀가 파견되었다. 일반기관에서 일하는 만큼 수도생활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간혹 있기는 하나 수녀들의 모든 언행이 곧 전교와도 연관된다는 생각으로 주어진 전문분야의 일 이외에도 환자나 어려운 이들을 방문하고 환자들 대세나 직원들의 상담역으로 이들의 영신사정을 돌보아 주는 일에 보람을 찾고 있다. 같은 보령군에서 본당 사도직에 임하고 있는 대천분원과는 서로 협력하고 격려해 가면서 필요한 때에는 본당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한다. 현재 7명의 수녀들은 간호과 및 방사선과, 영양사, 물품구매관리, 원목실 등에서 일하면서 지역사회 주민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78. 12. 2. 보령 종합병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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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꼬 자습실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4호 40쪽) - 1995년 가을 발행

작고 허름한 집들이 빽빽히 자리잡고 있는 구로동은 공단지역인 만큼 사람들로 밀집되어 있다. 단칸방에 3대가 함께 사는 가정도 있으니 아이들이 공부할만한 공간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밤이 되면 집대신 골목에서 자리를 잡고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며 지나가는 아이들의 지갑을 노리는 탈선 천소년들이 서성인다.

구로3동 천주교회에서는 본당에서 주로 주일에만 사용하는 교육관 시설을 평일에 지역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보스꼬 자습실을 1989년에 개원하였다. 현재 중학생 40명이 이용하고 있으며 교육관 프로그램 담당을 겸임한 선생님 한분과 자원봉사자 9명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상선정 기준은 없으며 이용회비는 월 10,000원이다. 보스꼬 자습실의 운영비는 본당에서 보조하고 있으며, 자원봉사자는 본당 청년회를 통하여 연결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고, 교사회는 주1회 열리는데 주로 교안작성 및 교육과 정보교환이 이루어진다.

중학생들이기 때문에 영어와 수학을 주로 배우고, 아이들의 정서교육을 위해 한달에 1회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이 시간에는 체육대회, 레크레이션, 장기자랑, 비디오를 상영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더 외로워져 간다. 아마도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 아이들은 더더욱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런 면에서 자습실은 친구를 만들어 주는 역할도 한다. 같이 공부도 하고, 행사도 준비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때 아이들은 가난을 부끄러움이 아닌 불편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989. 보스꼬 자습실을 개설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4호 40쪽) - 1995년 가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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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성모의원 (동정성모회의 복지시설) - 1998. 3월 동정성모회의 답신에 의거

'보다 더 큰 하느님의 영광과 큰 자유와 사랑으로 이웃에 봉사' 라는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보은 성모의원은 가난하고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양질의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지역보건 의료복지 향상을 도모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1967년 3월 충북 보은읍에서 백 제랄드(Rev. Gerald Farrell(M.M.MD) 메리놀회 의사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1998년 현재 진찰실 2곳, 접수실 상담실, 임상병리실, 약국, 치료실, 주사실, 영양실이 있으며 의사 2명, 약사 1명, 간호사 3명, 간호조무사 5명, 일반사무직 3명 등 총 15명의 직원이 있다.

1967년 보은 본당주임이신 백 제랄드 의사신부님이 의료취약지구에 거주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의료혜택을 베풀고자 의원을 얻어 보은성모의원을 신축개설(재단법인 청주교구)하고, 동정성모회에 모든 운영권을 맡기셨다. 그 당시 보은군 내에는 인구 12만명으로 2개의 의원(한지의사 → 검정고시 합격자)과 한 개의 보건소 뿐이었음으로 읍, 면 주민들을위한 적절한 치료는 미비한 상태였다. 외래진료 중심의 의료기관으로 시작한보은 성모의원은 지역 주민의 일차진료를 담당하고 무의촌 이동진료를 실시하였다. 중환자나 수술환자의 경우에는 병원입원알선과 수술등을 지원해 주었다. 그 외 보은군 밖의 타지역 주민들, 특히 청주 수동본당, 미원본당을 위해서도 이동진료를 실시했고 시기에 맞춰 각종 예방접종도 실시하였다. 이 때에 가난한 가정을 방문하여 고충상담도 하고 분유나 옥수수 가루, 헌옷, 생계비 또는 장학금을 지급해 주는 일 등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물심양면으로 봉사활동을 전개하였다.

환자의 수가 점차로 늘어나고 지역주민의 호응이 높아짐에 따라 병원확장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972년 독일 미세레올 재단의 지원으로 병원을 중축하여 보건복지부의 무의촌 의사 파견으로 내과, 소아과, 외과, 산부인과를 두고 병원급으로 승격시켜 20개의 병상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간 열심히 의료복지에 투신했던 본회 정태옥(루까) 수녀님이 병환으로 1980년 48세의 나이로 병원을 떠나면서 의료인력 주축이 약화되어갔다. 젊은 층의 이동인구가 늘어나면서 1993년도에는 보은군 인구가 4만 5천명으로 크게 줄어들었으나 이와 반대로 보은군내 의료기관이 10개이상 늘었으며 보건소도 각 면마다 설립되어 병원이 존폐가 거론되게 되었다.

물론 가정방문간호와 같은 활동으로 구체적인 사업의 축소안도 나왔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1988년 부터 실시된 의료보험료의 저렴한 비용으로 병원의 자체 운영이 어려운데다가 의료인의 구인난이 겹쳐 더 이상 병원의 존재의미가 약하다고 판단되어 1993년도 말에 보은성모의원은 휴업을 거쳐 폐업하게 되었다.

1967. 보은성모의원 개원 (동정성모회의 복지시설)

1993. 보은성모의원 폐업 (동정성모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설립당시 충북 보은군 보은읍 삼산리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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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혈(寶血) 선교 수녀회 (영) Missionary Sisters of the Precious Blood (교회와 역사 268호 12쪽) -1997. 9. 25발행

1885년 9월 8일 트라피스트회(Trappists)의 판너(Franz Pfanner, 1825-1909년) 신부에 의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나탈(Natal) 주 마리안힐에서 설립된 보혈 선교 수녀회는 자신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스스로 모여든 다섯명의 여성들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보혈선교 수녀회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우리의 선교 지역은 국경을 초월합니다"라는 창립자의 정신을 실천하는데 노력하였고 그리하여 창립 이래 아프리카내륙으로 향하는 회원들의 행렬은 계속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선교지의 기후와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여 열병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이유로 1892년에는 마리안 힐에 있던 수련소를 네델란드의 헬든 페닝켄으로 옮겼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증가하는 지원자들을 위하여 1903년에 다시 알레 릭스텔로 이전하였다. 아울러 "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도회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면서 날마다 드리는 미사를 중심으로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하면서 세상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불이 이미 타오른 다면야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루가 12, 49) 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회원들은 선교지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사업이 무엇인가를 인지하고 거기에 대응하면서 예수 성혈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국의 보혈선교 수녀회 :

1979년 여름, 청주 보육원의 원생이 암매장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사건 수숩을 위해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신경 정신과 의사 강홍조는 원생들의 참상을 목격하고서 보육원을 인수하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의 충북재활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강홍조 의사의 노력에 의해 재활원은 현대적인 의료장비와 시설을 갖추게 되었지만 원생들의 교육까지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청주교구장 정진석(니꼴라오) 주교는 세계 여러나라에서 특수교육 사도직을 전개하고 있는 보혈 선교 수녀회를 수녀회 설립 100주년이던 1985년에 한국으로 초청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 11월 24일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한국인 수녀 3명이 입국하였고 청주시 홍덕구 운천동 운천 주공 아파트에 임시 수녀원을 마련한 후 2명의 수녀가 충북 재활원에 파견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수녀들은 재활원 내에 마련된 정신지체 및 정서장애 특수학교인 '청주성신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하였고 자립 작업장을 만들어 20세 이상의 원생들에게 재활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던 중 충북 재활원이 인적, 물적인 조건들을 갖추고 정상을 찾게 되면서 5년만에 철수하였다. 이에 앞서 수녀회에서는 1989년 5월에 부강 성당 내에 있던 한옥을 수리하고 본원을 이곳으로 잠시 이전하였다가 1990년 10월 6일 현재의 소재지에 수녀원, 수련소, 엠마우스 피정의 집을 신축하고 입주하였다.

골롬반 외방 선교회 수녀들과 '믿음과 빛'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일반재활 교육에 참여하지 못하는 재가 장애인들을 위하여 매달 한차례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봉사자들과 만나 신앙교육및 사회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장애인들에게 신앙심을 복돋아 주는 한편, 일반인들에게는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버릴 수 있도록 하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으며 산남 종합 사회 복지관과 혜원 장애인 종합 복지관에서 사도직을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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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동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법인 대구 가톨릭 사회복지회) - 1998. 5. 20일 본동종합사회복지관의 답신에 의거

지역 주민들의 다양한 복지 욕구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실질적인 종합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더불어 함께 하고자 1993년 2월 27일 대구 광역시 달서4구 송현2동에 설립되었다. 대한주택공사에서 본동 주공 영구임대 아파트 단지내에 복지관을 건립하여 대구광역시에 무상으로 기부하고, 이를 다시 1993년 1월 8일 대구광역시와 대구구 천주교 유지재단이 위탁 운영 협의를 체결함으로써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종합 복지 서비스를 수행한다. 1층은 노인정, 어린이집, 장애아동 치료실, 주민건강관리실이 있으며, 2층에는 사무실, 독서실, 컴퓨터 교실, 목욕탕, 재가 복지봉사센터, 미용실, 사회교육실, 이용실, 상담, 심리치료실, 주방이 있다. 3층에는 강당과 직업기능교실, 동한어린이 문화센터, 사회교육실이 겸비되어 있다. 1997년 12월 위탁 운영 협의 갱신으로 운영 주체가 대구구 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사회복지법인 대구 가톨릭사회복지회로 변경되었다.

본동종합사회복지관의 기본방침은 다음과 같다.

1. 지역주민의 욕구에 따라 지역주민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은 그대로 유지하되, 중점사업과 특수사업을 선별하거나 개발하여 복지관의 특수성과 독창성을 최대한 확립하여 나간다.

2. 당면과제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증을 거쳐 중, 장기적으로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실천계획에 의해 단계적으로 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지역사회 복지증진을 위한 토대를 다져 나간다.

3. 특히 지역사회와의 상호 신뢰감을 조성하고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복지관으로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 지역 주민의 욕구사정에서부터 객관성을 부여하여 서비스의 역진성은 물론 이로 인하여 목적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

4. 지역주민의 욕구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서비스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통합적 서비스 수행과 수요처의 명료화를 통해 무엇보다 지역주민이 자원봉사와 후원자로서 동참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나간다.

복지사업부에서는 비행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건전한 문화조성과 상담의 기능을 강화하며 정신장애인을 위한 낮보호 프로그램의 도입 및 실시, 결손가정의 지속적인 상담과 관리를 통한 rapport를 형성한다. 또 지역사회의 조직강화를 위한 사업과 초기 비행아동의 학교적응을 돕기위한 프로그램의 개발을 실시하고 있으며 노인회 조직강화를 위한 사회참여 기회의 확대를 조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극적이고 합리적인 홍보활동을 통한 복지관의 건전한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1993. 2. 27 대구 본동종합사회복지관 설립 (사회복지법인 대구 가톨릭 사회복지회)

소재지 : 우 704-350 대구광역시 달서구 본동 1128번지/ 전화 053)636-5567∼8/ 모사전보 053)636-5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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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여자 중·고등학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 1998. 4. 28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복자정신과 순교정신을 현양하고 전인교육에 의하여 미래의 민족운명을 좌우할 여성교육을 담당코저 1960년 3월 15일 충남 천안시에서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공동 창설자인 윤병현(안드레아) 수녀가 설립하였다.

복자여자 중학교는 1961년 3월 8일 설립인가가 났으며 1961년 4월 4일 중학교가 개교되었다. 1962년 3월 31일 김정진(바오로) 신부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63년 3월 2일 복자여자고등학교를 개교하게 되었으며 제2대 교장으로 백남익(디오니시오) 신부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71년 개교 10주년때는 사회전, 바자회, 주산 타자 경기를 하였으며 무용, 음악, 연극 등 예술제도 하였다. 1974년 제4대 교장으로 양위순(아가다)수녀가 취임하였으며 상고, 가정과를 모두 인문 고등학교로 변경인가 받고 학급도 증설하였고 1976년에는 중·고등학교를 분리, 운영체제에 들어갔다. 1986년 25주년때는 "복자의 밤"을 9월 25일 하오 6시 30분부터 화려한 막을 올렸다. 1400여명 복자의 딸들이 모인 교정에서 시낭송, 독창, 무용을 하였으며 체육대회, 취미전, 백일장을 하였다. 1991년 개교 30주년에는 학예 발표회, 각종 전시회가 있었으며 개교 30주년 및 한글날 기념 제9회 교내 백일장 대회가 있었다. 학교교육에서 종교교육에서 종교교사를 따로 두어 종교수업, 종교행사, 진로지도 상담을 해주고 있으며 종교 특별반 운영등의 업무를 배당하여 매년 다양하고 심도깊은 종교교육을 시키고 있다. 종교수업은 종교담당 수녀가 맡고 종교행사는 종교과 교사들이 주축을 이루어 일반교사들 협조를 받아 나날이 그 본래의 취지를 잘 살려나가고 있다.

1993년 충남 교육청으로부터 독서교육 시범학교로 지정되었다. 한글날을 전후하여 매년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글날 기념 백일장을 실시하여 우수한 작품을 뽑아 시상하고 있다. 도서관도 정비하여 현재 17500여권의 장서와 380석의 열람실과 냉난방 시설을 완비하고 사서교사와 사무직원을 전담 배치하여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반개가식으로 개관하고 일요일은 물론 방학중에도 항시 개관 함으로 열람석은 연중 무휴 초만원을 이루고 있으며 독서교육 우수교로 선정된바 있다.

복자여자 중·고등학교에서는 팽배해 가는 개인 집단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 주의의 시대에서 밝은 미래사회를 만들고자 학생들에게 3가지 중점적인 실천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첫째로 5개의 이웃 돕기회 (성모자애재활원을 돕는 복두례회, 결핵환자를 돕는 릴리회, 장애 어린이 교육을 돕는 엠마누엘회, 보육시설을 돕는 목련회, 장애자와 환자들을 위한 꽃동네회)를 조직하여 전체 교직원과 학생들이 적어도 1개이상의 회원이 되어 매원 자신들이 희망한 일정금액의 회비를 모아 이웃돕기를 실시하고 있다. 둘째로 일년중 적어도 한번, 각 학급별로 주말을 이용하여 학급활동의 일환으로 가까운 이웃에 있는 고아원, 양로원 등의 사회복지 시설을 담임교사와 함께 방문하여 학용품, 놀이기구 등을 전달하고 간단한 다과도 함께 니누며 대화, 놀이 등으로 이웃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현장교육을 실시하며 셋째로 3학년 학생들은 매년 고입, 대입 시험이 끝나고 학창시절을 정리할 무렵에 충북 음성군에 꽃동네를 직접 방문하여 청소세탁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복자 여자 중·고등학교는 전인교육이란 차원에서 학생 개개인의 취미와 특기를 고려하여 클럽활동 부서 35개반을 조직하고 운영하고 있다.

복자여자 중·고등학교에서는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근검절약 정신을 길러 저축을 증대시키고 자조자립 정신들 기르고자 1978년에 학생, 교직원이 공동출자하여 천안복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여 수신업무와 공동구매 업무를 실시하고 있다. 복자여자고등학교는 일반계여자 고등학교로써 근래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대학입시의 경쟁대열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학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학교교육의 본질을 이탈하면서 이 대열에 설 수는 없다. 학교교육을 제자리에 세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부모들의 진학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고 교사들 또한 걱정스러운 생각이 만만치 않았으나 육성회, 자모회를 통하여 자녀들에게 대한 과잉기대나 경쟁적인 입시 뒷바라지보다 걬의 지혜와 도리를 일깨워 선량아로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지도하여 먼저 자녀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쌓는 가족관계를 만들어 갈 것을 부탁하고 직원연수를 통하여 바른교육풍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심어주면서 치열한 보충수업 경쟁에서 벗어나 독서교육을 강화하고 자율학습을 정착시켜 특별활동이 활발하여 지고 이웃사랑이 생활화되어 가게 하면서도 대학 진학이 또한 향상되어 가고 있다. 현지 16명의 수녀가 교장 및 교사 사무직 등에서 일을 하고 있다.

1960. 3. 15 복자 여자 중·고등학교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1976. 복자여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분리 운영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소재지 : 우 330-130 충남 천안시 성황동 9-1/ 전화 (중) 0417)568-0778, (고) 0417)568-18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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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분도병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3쪽)

1951년 11월 5일, 유을준 아타나시오 의사와 함께 부산 초량동에 자선병원을 개설한 부산 성 베네딕도회의 수녀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병원을 운영하였다. 당시 이렇다 할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수녀들은 병원 한 모퉁이를 분원으로 삼고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1954년 2월, 병원장 유을준 의사가 병원 전체를 수녀원에 양도하고 떠남에 따라 성분도병원은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의료봉사의 초석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14일에는 정식 병원으로 인가를 받아 내과, 소아과, 외과, 이비인후과, 안과, 치과, 임상병리과 등 7개의 진료과목을 갖추었다.

1955년 5월 15일에는 병원을 3층(본관:건평 474평)으로 증축하고 1960년 9월에는 병원을 5층(별관:건평 438평)으로 증축하였다.

부산 성분도병원은 1965년 11월 29일에 비영리 종합병원으로 허가를 받고, 12월에는 수련의 교육병원으로 지정받았다. 그후 수차례의 증축공사, 의료장비와 의료진 확충을 통해 1975년 5월 9일에는 종합병원 인가를 받고, 1988년에는 총 99실 301개 병상을 갖춘 병원으로 성장하여 부산 지역사회의 보건 향상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1977년 11월부터 전개한 원목활동은 해를 거듭할 수록 그 활동범위와 대상을 넓혔고, 환자와 직원, 수녀들 사이의 신앙일치와 친교에도 큰 몫을 하였다. 그리고 환자방문과 상담, 도서대여, 직원과 환자의 교리강좌와 신심활동 등을 통해 외교인에게는 신앙의 빛이 되고 신앙인들에게는 성화를 위한 장(場)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의료봉사는 여러 면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급속한 발전은 새로운 전문지식과의 시설, 의료장비들을 끊임없이 요구하였고, 또 의료보험제도의 실시와 함께 모든 것이 제도화, 대형화되었다. 그러므로 수녀원의 의료봉사는 과학화, 기계화, 전문화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 생명에의 경외심을 높이고,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더 많은 노력과 인내와 봉사를 요구받고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보건후생사업이 점점 조직화, 대형화, 제도화되어감에 따라 가난한 이,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가 어려워지고 수녀원의 병원운영은 많은 과제와 어려움을 안게 되었다. 특히 1988년 4월 병원에 노동조합이설립되면서 노동쟁의, 파업 등으로 병원운영이 어려워지자, 1988년 8월 31일에 조건없이 병원을 부산교구에 헌정한 뒤, 1988년 9월 부터는 원목실을 비롯한 몇 부서에 약 10명의 수녀가 일반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고 1989년 봄부터는 병원의 거처를 거두고 수녀원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1951. 11. 5 부산 성분도병원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3쪽)

1988. 8. 31 부산 성분도병원을 부산교구에 헌정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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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수동본당 北水洞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74쪽)

수원 북수동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파견된 때는 1935년이었다. 당시의 서울교구에서 세운 4년제 소화학술강습소(1934년 창설)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1935년 4월 1일에 오채경 말지나 수녀와 이고명 아타나시아 수녀, 이민선 마리 요셉 수녀가 파견되어 본당과 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 파견 초기 수녀들은 본당전교보다 학교교사로서 더 많은 봉사를 해왔다. 그러다가 점점 학교가 발전함에 따라 학교수녀를 더욱 요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구대로 교사수녀를 증원 할 수가 없어 1961년 살림을 고등동분원으로 합치고 북수동분원은 철수하게 되었다. 4년후인 1965년 2월 13일, 수원교구장 윤공희(빅토리노) 주교와 북수동 본당신부였던 유봉구(아우구스티누스) 신부의 요청으로 재차 개원된 이후로 학교수녀는 1명으로 교리를 담당하고, 본당 전교를 위해 2명의 수녀들이 파견되어 일하고 있다. 학교에서 교리를 담당하고 있는 수녀는 학교의 모든 종교행사를 주관하고 교리시간을 전담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교리시간을 운영함으로써 어린이들의 정서순화와 인성함양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북수동분원은 현재 수원지구 분원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77년에 수녀원 건물이 새로 증축되었고 1979년 9월 30일에는 성당을 새로 신축한 가운데 전례와 각 단체지도, 예비자교리 및 교우들과의 신앙의 유대에 중점을 두면서도 사도직에 임하고 있다.

북수동본당 소화국민학교

1934년, 4년제 소화학술강습소로 창설되어 샤르트르 수녀회의 수녀들이 교사로서 일하였고 1946년 1월 14일에는 소화국민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계속해서 수녀들은 교사, 경리, 서무 등 다양하게 활동하며 1961년에 북수동 분원이 철수하기까지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북수동분원이 재차 개원된 1965년 이후로는 학교수녀는 1명이 파견되어 월1회 미사조회와 교리교육, 상담 등을 담당하면서 어린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어린이들의 특별활동을 위하여 강사들을 초청하여 다양하고 활발하게 학습시키고 있는 소화국민학교는 수원시의 유일한 사립국민학교로서 12학급, 660여명의 학생들에게 알차고 효율적인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소화국민학교가 명문국민학교로서 널리 알려져 있음은 해마다 나타나는 높은 입학경쟁률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1934. 소화국민학교는 4년제 소화학술강습소로 창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74쪽)

1946. 1. 14 소화국민학교 인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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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유치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4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회헌 '봉사' 부분에 "우리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돌보며 가르친다."(회헌 4,33)고 되어 있는 것처럼, 어린이들이 맑은 웃음과 밝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사랑과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복음선포의 가장 효율적이며 바람직한 방법 중 하나이다. 이러한 취지로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는 주의환경이 삭막하고 놀이터가 없어서 거리에 방치된 어린이들이 마음놓고 뛰어놀며 학습할 수 있는 장소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 2월, 2반으로 편성된 분도유치원을 본원 울타리 안에 개원하였다. 주변에 큰 주택단지가 형성됨에 따라 유치원을 찾는 어린이들이 점차 많아져 1972년과 1974년, 1976년에 각각 1반씩을 증설하였다. 유치원은 점차로 정성이 깃든 알뜰한 교육의 장으로, 사랑을 쏟는 어린이 동산이 되었다. 분도유치원은 수녀원 울 안의 모든 장소가 어린이를 위한 자연학습장이 되어 산과 나무, 채소밭, 꽃, 새와 곤충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이 시내에 널리 알려지자 해마다 원아모집 때가 되면 많은 학부모들로 붐볐다. 이렇게 되자 수녀원 주변에 있는 가난한 어린이들에게는 입학의 문이 좁아지는 등 본래의 취지에 맞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수녀원에서는 인근의 어린이들에게 놀이터를 개방하기 시작하였고 1976년 5월에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수녀원 경내에 '성분도어린이집'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한 울타리 안에서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분리 운영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했다. 이에 1978년에는 어린이집을 분도유치원에 통합하여 유치원 5반 중 1반은 보육료를 감면받는 어린이들로 편성하였는데, 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그 이듬해부터는 통합하여 5반을 고르게 편성하였다.

1982년에 분도유치원은 새로 지은 은혜의 집 1층으로 옮겼으나 도로 가까이에 있어 사고의 위험이 높고 터마져 떨어져있는 데다가 수녀원 경내의 좁은 자연환경이 아쉬워 2년만인 1984년에 다시 옛 건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후 건물이 너무 낡아서 1990년 7월 19일부터 개축공사를 시작하여 9월 4일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하였다.

1970. 2. 28 부산 성 베네딕도회의 수녀들은 분도 유치원 설립 (부산 성베네딕도 은혜 60년사 4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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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 Blanc, Jean Marie Gustave, 1844-1890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40쪽)

파리 외방전교회원. 제7대 조선교구장. 주교. 한국명 백규삼(白圭三).

1884년 6월 20일 프랑스에서 한국 교회의 제6대 교구장이던 리델(Ridel, Felix Clair, 李福明, 1830-1884)주교가 서거(逝去)하게 되자, 1878년 이래 부주교의 직책을 맡고 있던 블랑 신부가 1883년 나가사키에서 주교로 성성괴어 조선교구의 제7대 교구장에 정식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가 교구장에 취임한 1883년은 한국에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묵인되던 때였다. 오랫만에 지상에 나와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은 교회는 직접선교를 중심으로 하되 간접선교인 사회사업에도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교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간접선교의 활동으로는 고아원과 양로원의 운영을 들 수 있다.

블랑 주교는 한불통상조약이 체결되기 한 해 전인 1885년 3월에 서울 곤당골(現 을지로 1가)에 집 한 채를 구입해서 고아원을 설립하여 무의무탁한 아이들을 받아들여 열심한 교우 몇 명을 채용하고 그들을 돌보아 주게 하였다. 블랑 주교는 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해 온 5개월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고아원의 운영을 위해서는 수녀들의 봉사가 절실히 요청됨을 인식하여 있었다. 그래서 그는 파리외방전교회의 본부에 제출한 1885년도 연말보고서에서 "이 고아원을 맡아 줄 몇 명의 수녀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바램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게 된 직접적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한편, 블랑은 조선교구의 교구장에 취임하기 전 주교 서품을 받기 위해 일본 나가사키에 갔다. 그때 그는 1878년 이래 일본에 진출하여 고아원, 진료소 등 교회 내 여러 분야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활동을 본 바 있었다. 또한 그는 이미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 해외선교에 종사하고 있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알고 있었으며 이 수녀회가 가난한 이들의 교육과 환자 방문 등을 중심으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조선 교회에도 이러한 수도회가 필요함을 느꼈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의 조선 진출을 권유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블랑 주교가 1885년 3월에 시작한 고아원은 점차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1885년 고아원이 설립된 직후 39명의 아동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1886년 고아원에 수용된 원아 수는 모두 250명이 넘었다. 또한 블랑 주교는 1885년 고아원과 함께 양로원을 개설했다. 블랑 주교는 1886년 종현에 집 두 채를 더 사서 남녀 고아원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윗집에는 여아를 수용하고 아랫집에는 남아를 수영한 후 남당(男堂), 여당(女堂)이라 불렀다. 남당, 여당의 두 집에는 주방, 세탁소, 간호, 교사 등 각 부면에 사람을 두고 운영해 왔다. 블랑 주교가 고아원을 운영하고자 한 데에는 최소한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즉 그 하나는 버림받은 고아들을 구제하여 훌륭한 천주교 신자로 키우고, 또 하나는 병든 어린이를 치료하고 죽음이 임박한 어린이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1885. 3 블랑주교는 곤당골(現 을지로 1가)에 집 한 채를 마련해 고아원을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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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들기 교실 (나눔지 17호 10쪽) - 1983. 1. 15발행

비들기 교실은 만 18-25세의 손을 사용할 수 있는 지체부자유자들을 1-2년간 재단, 미싱, 봉재, 교리, 음악, 미술 등 전 과목을 무료로 지도하여주며, 기술연마에 앞서 인화단결에 교육중심을 두어 화목한 사랑의 교실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지난 81년 4월 20일에 개실되어 제1기 수료생을 이미 배출하였다. 비들기 교실의 교사진들은 모두 각 방면의 1급교사로서 이 교실은 후원회의 성금과 희사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1981. 4. 20. 비들기 교실 개실 (나눔지 17호 10쪽) - 1983. 1. 1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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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영) Society of St. Vincent de Paul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25쪽)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처해있는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평신도 단체.

1973년 4월 부터 준비 회합을 거쳐 1975년 2월 21일 한국전국이사회가 창립되었다.

본회의 회원들이 어떤 도움을 베푸는 것은 그 회원들이 은인으로서 대접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 받는 과정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빈첸시오회 (독) Barmherzige Schwestern vom HL. Vincenz Paul zu Parderborn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26쪽)

프랑스 파리에서 1633년 뱅상 드 폴 (Vicent de Paul) 신부와 루이즈 드 마빌락 (Luise de Mavillac)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가난해서 의료혜택을 받지 봇하는 이들을 위한 사회사업과 양로사업을 추진한다.

1967. 6 수원에 성 빈센트 병원을 개원 (526쪽 빈첸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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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시오의 애덕자매회 (영) Daughters of Charity of St. Vincent Paul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25쪽)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고루되어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1633년 프랑스 파리에서 성 빈첸시오와 성 루이즈 드 마빌락(Luise de Mavillac) 에의해서 창립되었다. 1978년 일본인 수녀 2명이 처음 내한하였고 안양에 정착하여 라자로 마을에서의 봉사와 정착촌 이동진료등의 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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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시오의 집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6호 53쪽) - 1993년 여름 발행

서울 상봉본당은 본당구역내 무의탁 노인들의 안식처인「빈첸시오의 집」을 5월 11일에 개원했다. 상봉동본당은 서울 변두리 지역으로 영세민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라 본당차원에서 관할지역내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는 방안의 하나로 빈첸시오의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10명이 거주할 수 있는 빈첸시오의 집에는 현재 무의탁 할머니 4명이 입주해 살고 계시며 본당 신자들이 조를 짜서 매일 두명씩 교대로 나와 할머니들의 식사와 빨래 등을 거들며 봉사하고 있다.

1993. 5. 11 빈첸시오의 집 설립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6호 53쪽) - 1993년 여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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