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명부7(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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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강보금자리 / 사랑손 / 사랑의 고리회 / 사랑의 선교 수녀회 / 사랑의 선교회 / 사랑의 집(수원) / 사랑의 집(원주) / 사리원 본당 / 사회보장 / 사회사업 / 사회사업 위원회 / 사회주교위원회 / 산남 종합 사회 복지관 /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 살레시오 사회교육 문화원 / 살레시오 수녀회 / 살레시오 수도회 / 살레시오의 집 / 살레시오 초·중·고등학교 / 상지회관 사회복지부 / 새싹 어린이 집 / 생명의 집 / 쌘뽈 국민학교 / 쌘뽈 기숙사 / 쌘뽈원 / 쌘뽈여자중고등학교 /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 샴파냐의 집 / 서구종합사회복지관 / 서교본당 사회복지 후원회 /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 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 / 서울애화학교 / 서울 SOS 어린이 마을 /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 서울특별시립소년의집 / 서정리본당 / 서초동 본당 / 선산 성심 양로원 / 선화기숙사 / 섭리의 집 / 성가병원 / 성가수녀회 / 성가정 입양원 / 성 골롬바 병원 / 성공회 / 성광원 / 성녀 루이제의 집 / 성 라자로 마을 / 성모보통학교 / 성모병원 / 성모 영보 수녀회 / 성모 어린이 집 / 성모의 마을 / 성모의 집 / 성모 자애 병원 / 성모자애원(포항) / 성모 자애원(서울) / 성모 자애 보육원 / 성모 자애 장애인 종합복지관 / 성모조기교육원 / 성모 조산소 / 성 바오로 병원 / 성바오로보육원 /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 / 성 분도 봉사자의 집 / 성 분도 빛둘레집 / 성 분도 어버이 집 / 성 분도 장애자 직업 재활원 / 성 분도 치과의원 /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 성 빈센트 병원 /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 성신간호전문대학 / 성심맹아원 / 성심수녀회 / 성심양로원 / 성심원(서울) / 성심원(진주) / 성심의원 / 성언 양로원 / 성언의 집 / 성영회 / 성요셉병원 / 성 원선시오 수녀회 / 성재덕 / 성지여자중고등학교 / 성체 어린이집 / 성체회 /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 부속의원 / 소년 예수의 집 / 소록도 미감아 보육소 / 소록도본당 / 소사본당 / 소화영아재활원 / 솔샘 아가방 / 송학놀이방 / 수원본당 / 숭공학교 / 숭신학교 / 시립아동상담소 / 시몬의 집 / 시튼 까리타스수녀회 / 신고산본당 / 신성학교 / 신의주본당 / 신정동 본당 / 심장환자상담소

사강(沙江)보금자리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5. 2일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 산하 단체인 사강 보금자리는 처음에 사강 본당 신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지역 재에서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는 노약자, 병약자, 행려자들을 처음에는 꽃동네로 보내다가 몇몇 뜻 있는 신자들이 이런분들을 직접 돌보아 드리고자 부지를 매입하고 1991년 9월 26일에 완공하였다.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백미리 592번지에 위치한 이곳은 한동안 본당신자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나 전담하는 단체가 없어 어려움이 증대되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 의뢰하여 이를 위탁운영하게 되었다.

보금자리는 국가 법규에 인정된 시설이 아닌 비인가 시설로써 국가에서 정해놓은 법규때문에 다른 시설에서 수용하지 못하는 어려운 사람들도 함께하는 시설이기도 하다. 1998년 현재 2명의 수녀가 상주하면서 치매환자, 중풍환자, 정신지체 환자 등 12명의 할아버지들을 돌보고 있다. 일주일에 두회 목욕과 치료를 해드리고 매 주마다 일반사회단체, 신자들로 구성된 본당 단체에서 봉사를 해주고 있다.

1991. 9. 26 사강(沙江)보금자리 설립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소재지 : 우 445-880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백미리 592/ 전화 0339)57-8061

사강(沙江)보금자리 (교회와 역사 271호 12쪽) - 1997. 12. 25발행

수원교구 사회 복지국 산하 단체인 사강보금자리는 처음에 사강 본당 신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사강 본당에서는 1990년 3월 현재의 부지를 조성한 후 1991년 4월 10일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9월 26일에 이를 완공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백미리에 위치한 이곳은 한동안 본당 신자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나 전담하는 단체가 없어 어려움이 증대되자 1994년 11월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이를 위탁 운영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찾게 되었다. 1990년 현재 3명의 수녀가 상주하면서 11명의 무의탁 할아버지의 생활을 돕고 있는데 남성 봉사자들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91. 9. 26 사강(沙江)보금자리 축성식 (교회와 역사 271호 12쪽) - 1997. 12. 25발행

1994. 11 사강(沙江)보금자리를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위탁 운영을 맡음 (교회와 역사 271호 12쪽) - 1997. 12.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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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손 (나눔지 259호 4쪽) - 1989. 7. 8발행

중복장애자의 지속적인 재활 및 사회참여를 위한 보호 작업장이 오랜 검토와 준비작업 끝에 사당동에 공동체의 집을 마련하였다. 89년 현재는 단순정신지체장애자 5명으로 요보호장애자와 훈련 가능급 장애자들로 구성되어 차츰 훈련적응이 되면 자립작업장으로 교육시켜 나갈 계획이다. 본회 재활 사업부 에서는 정신지체와 중복장애자들이 늘어감에 따라 비둘기 교실 수료자중 사회취업이나 자립이 불가능한 중복장애자들에게 생활과 보호작업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1989. 7. 1. 중복장애자 소공동체 '사랑손' 개설 (나눔지 259호 4쪽) - 1989. 7. 8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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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고리회 (나눔지 25호 6쪽) - 1984. 7. 15발행

처음에는 1달에 1번정도 모임을 갖다가 1978년 10월에 공동체로 탄생된 사랑의 고리회는 사랑의 선교회 총장인 앤드류 신부님의 도움으로 설립되었다. 이곳에는 22세에서 35세까지의 활동이 가능한 신체장애자 여성으로 기도를 통해 장애자들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장애자들을 방문하거나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맞아서 어려운 고통도 함께 나누며 이곳에 올 수 없는 경우에는 편지를 써주기도 한다. 하느님께 모든것을 맡기며 하느님의 계획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1978. 10 사랑의 고리회 발족 (나눔지 25호 6쪽) - 1984. 7. 1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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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선교 수녀회 (교회와 역사 278호 19쪽)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설립한 마더 데레사 수녀의 세속이름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ojaxhu) 이다.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에서 태어난 그녀는 신심 깊은 알바니아계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아 일찍이 예수회 선교사가 지도하는 본당의 청소년 단체인 신심회에 가입하는 등 신앙 생활에 열심이었다. 어느날 인도 벵골지방에서 예수회 선교사가 보내 온 편지를 신심회 회원들과 돌려 가며 읽은 그녀는 큰 감화를 받아 1928년 11월 29일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는 로테로 수녀회(동정성모회) 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6일 켈커타에 도착하여 1931년 5월 24일에 '예수의 작은 꽃'으로 알려진 리지외의 데레사를 수도명으로 택하였다.

전체 인구의 30%가 절대 빈곤 계층인 인도는 힌두이즘이라는 종교 전통과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 제도인 카스트로 인해 그러한 사회적 현실이 당연시되어 왔으며,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시도와 노력이 부족하였다. 켈커타 거리에는 불평등과 사회적 무관심으로 연일 수많은 빈민들이 굶주리거나 질병으로 고통당하다 죽어 갔다. 20년 가까이 그들과 같은 지역에서 생활해 왔던 데레사 수녀는 자신이 재직 중인 고등학교의 상황과는 너무나 다른 인도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점차 빈민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조금씩 키워가게 되었다. 그러던 1946년 9월 10일, 그녀는 피정차 히말라야 산 기슭의 다르질링으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신 주님을 섬기고 따르라는 '부르심 안에서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일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강한 확신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자신의 원의를 총원장 수녀에게 밝혔으며, 그로브터 1년반 만인 1948년 4월 12일에 재속 수녀로서 빈민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해도 된다는 교황청의 허락을 얻어냈다.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 가시기 직전에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목마르다" (요한 19,28)에 근원을 두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목마름을 축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그분을 간호애 주고 먹을 것을 주며 옷을 입혀 주고 그분을 방문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란 단순히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사람,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태아, 인종 차별을 당하는 사람, 알코올 및 마약 중독자, 삶의 희망과 신앙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 성령의 힘 안에서 희망을 갖지 못한 모든 이들을 뜻한다.

"가진 것이 많으면 베풀 것이 없다" 고 했던 마더 데레사 수녀는 그 어떠한 富도 피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회원들 역시 고통이 뒤따르지 않는 활동은 사회사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예수의 인류를 위한 끝없는 목마름을 채워 드리기 위해 가장 가난한 모습 속에 투영되어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가장 완전한 신뢰와 자아 포기, 그리고 항상 기뻐하는 정신으로 함께 나누고 있다.

한국 진출과 현황

1981년 5월 마더 데레사 수녀의 방한을 계기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정식으로 초청함에 따라 같은 해 6월 30일 세명의 인도 회원이 입국하였다. 원래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본부에서는 9월경에 회원을 파견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하였다가 일본·대만과 동시 진출이 결정되면서 당초 계획보다 3개월 앞당겨 회원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봉천동 본당 관할 봉천 1동 공소의 사제관에서 2개월동안 생활하다가 같은 해 8월 21일 봉천 1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용산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휴양의 집'으로 거처를 임시 옮겼으며, 1981년 9월에는 휴양의 집 내에 평화의 집(양로원)을 마련하여 20여 명의 무의탁 할머니들을 돌보면서 본격적인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2년 1월에는 11명의 지원자가 입회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9명이 같은 해 6월 수련을 위해 필리핀으로 떠났다. 그후 1983년 4월에 경기도 안양시 안양 2동에 본원을 건립하였으나 안양시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수녀원 부지 가운데 일부가 편입됨에 따라 1993년 10월 8일 안산시 고잔동 656-25번지에 수녀원을 완공하고 이듬해 5월 10일 본원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1985년 6월 14일에는 인천시 만수동에 첫 번째 분원을 마련하고 온정의 집 (양로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현재 안산과 인천의 양로원에서 각각 40여명의 할머니 들을 돌보는 외에 시립병원을 방문하여 임종 직전의 무의탁 행려 환자들을 데려와 임종을 지키고 있으며 극빈자 가정도 방문하여 봉사하고 있다.

한국 진출 17년째를 맞이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1998년 5월 현재 종신 서원자 9명, 유기서원자 2명 등 총 11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데 지원자 부족으로 사도직 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업은 그분의 방법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기에 수녀회를 알리기 위한 특별한 홍보 활동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 최근 한국의 수도회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인 거의 유사한 형태의 사도직 활동으로 인해 획일화되고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이때, 오직 자신들이 봉사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원자로 그 섬김의 생활이 널리 퍼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거절당하고 버림받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체험할 때, 그리고 자기들을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상대방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 전에 먼저 함께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기꺼이 함께 있을 때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사랑이 참되다면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려 들 것입니다."

1981. 6. 30 사랑의 선교 수녀회 한국에 진출 (교회와 역사 278호 19쪽)

1985. 6. 14 인천에 온정의 집(양로원) 운영 (교회와 역사 278호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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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선교회 (영) Convent of the Missionaries of charity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35쪽)

1) 1950년 10월 7일 마더 데레사에 의해 인도 캘커타에서 창설된 수녀회. 1981년 6월 한국진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 봉사하는 것을 활동목표로 한다. 1981년 서울의 봉천동에서 용산구 산천동으로 이전하여 무의탁 노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맹인부모와 그 자녀들에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 1963년 마더 데레사 수녀에 의해 인도 캘커타에서 창설된 남자 선교수도회. 1977년 7월 5일 한국진출.

버림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을 활동목적으로 한다. 1980년 2월에는 한국지부에 극동관구 본부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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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집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 1998. 5. 2일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자선식당인 사랑의 집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빈곤한 노인 및 행려자,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하고 수원교구 빈첸시오 아 바오로 이사회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수녀가 파견되었다. 수원 청년회의소 지하에 자리잡은 사랑의 집은 1992년 6월 29일 김남수 주교님을 모시고 축성식을 하였다. 수원 청년회의소는 수원시 장안구 팔달로에 있는 건물로써 수원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팔달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노약자, 행려자, 병약자, 저소득 근로자들로써 하루 평균 130여명이 점심식사를 제공받고 있다. 종파를 초월하여 지역사회의 사랑의 나눔에 동참할 수 있도록 연중무휴로 매일 나눔의 급식을 실천하고 있으며 아울러 함께 한다는 사랑의 취지에서 주기적으로 대상자들의 가정방문과 진료대상자들 돕기, 극빈자들의 신앙상담, 노인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월 4회 수지침 봉사, 이발, 주식과 부식을 지원해 주고 의류, 가정용품을 나누어 쓰고 있다. 또한 신앙지도와 입교권면을 함으로써 한마음 공동체를 가꾸어 가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봉사자들의 도움과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는 은인들에 의해 꾸려 나간다.

이러한 활동으로 얻어진 현장체험과 합리적 운영을 위한 전문적인 프로그램 개발과 교양복지 여건이 마련되면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가 지향하는 빈체시오회적인 사랑의 현장에서 자율적이고 구체적인 인격봉사를 할 수있을 것이다.

1992. 6. 29 사랑의 집 개설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소재지 : 우 442-023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 3가 131-27/ 전화 0331)253-7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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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집 (프란치스꼬 전교봉사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9. 3 사랑의 집 답신에 의거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이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 18-19) 는 성서말씀에 입각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가난하고 병들어 소외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시설에서도 가정과 같은 안정되고 따뜻한 사랑안에서의 노후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함을 목적으로 하여 1984년 7월 6일에 설립되었다.

노인 요양원 사랑의 집을 운영하는 단체는 프란치스꼬 전교봉사 수녀회이며 이곳에서는 65세 미만부터 80세 이상의 할머니 할아버지 50분이 생활하고 계신다. 사랑의 집에서 시행하고 있는 주요사업은 다음과 같다.

① 노인 간호와 치료사업 - 의사의 처방에 따른 약투여, 재활운동, 물리치료

② 노인의 오락 프로그램 - 생활체조시간, 노래방, 민속놀이, 생일잔치

③ 노인의 상담사업 - 말벗 등으로 할머니의 대화를 듣고 요구를 나눔

④ 호스피스 간호 - 말기환자나 임종이 가까운 노인께 안정을 주는 영적 간호

⑤ 일상적인 서비스사업 - 와상노인의 욕창예방 등, 식사, 대변, 목욕 서비스

12명의 직원과 천주교 레지오 단체에서 주 2회 정규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직원들의 업무분담과 주말을 활용하여 고교생, 대학생, 일반 자원봉사자들이 지역사회의 관심사로 활동하고 있다.

1984. 2 부지를 마련하여 '사랑의 집' 신축공사 (프란치스꼬 전교봉사 수녀회의 복지시설)

1984. 7. 6 독일 까리따스 후원과 원주교구의 도움으로 '사랑의 집' 개원식 (프란치스꼬 전교봉사 수녀회의

복지시설)

1997. 11. 30 '사랑의 집' 물리치료실 신축공사 완공 (프란치스꼬 전교봉사 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220-100 강원도 원주시 단계동 776-24/ 전화 0371)43-5411/ 모사전보 0371)43-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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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원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35쪽)

봉산검수 본당에서 1900년에 분리 독립되었다. 초대 신부로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가 부임했다.

1934년 서울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파견되어 전교사업과 유치원 및 성모성심 학원일을 맡아보기 시작하였다.

사리원본당 沙里院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3쪽)

매화동 본당의 관할공소로서 1897년에 개설된 황해도 사리원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된 것은 1916년 6월이었다. 이곳의 첫 주임사제로 부임한 이기준(李起俊 도마, 1884-1977) 신부는 1921년 성모성심학원(聖母聖心學院)이라는 일종의 개량서당(改良書堂)을 개설하고 초등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사리원본당의 제 4대신부로 부임한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1874-1961) 신부는 성당건축과 함께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수녀원을 준공한 이후 1934년 12월 4일, 김명제 신부는 전교와 유치원, 학원 등을 맡아 일해 줄 수녀들을 초청하였다. 수녀들은 본당일과 봉화유치원, 명성학원(1939년에 4년제 여자국민학교로 개칭, 인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전교와 교육사업에 열중하면서 일제말의 어려움을 견디어 나갔다.

사리원본당의 사목을 도우며 열심히 일해 오던 수녀들은 1940년대 후반기를 기하여 그들의 사도직을 떠나와야 했다. 즉 해방 후 3명의 본당수녀 중 유치원을 담당하던 홍석영 모니카 수녀가 1947년에 요양차 본가인 은율로 돌아가고 같은 시기에 강봉련 제노베파 수녀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서울 본원으로 떠남에 따라 황인경 말가리다 수녀만이 남아 본당일을 하였다. 홍석영 수녀가 담당하던 유치원은 홍 수녀가 사리원에 부임한 1935년에 수녀원에 사무실을 겸한 방 하나를 마련하여 교우집 아이들 40여명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 되었다. 1937년 11월 28일에는 정식인가를 받아 1개반 80여명 정원으로 봉화유치원을 개원하여 10여년간 일하였으나 1947년 홍 수녀가 이곳을 떠남으로써 수녀없이 유치원이 유지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공산당에 의해 폐원되었다. 한편 사리원본당에서는 1939년에 명성학원(明星學院)이라는 4년제 여자국민학교를 개설하였는데 개원 초에는 일반 공·사립학교에의 입학시기를 놓친 나이 많은 처녀들이 대부분 입학하였다. 성당 지하실에 칸막이로 2개 교실을 만들어 1개 교실에서 2개 학년이 합반으로 수업하였다. 초창기의 학원선생은 최진옥 마티아, 남순우 레지나, 김 멜라니아, 조환 예로니모 등 서울 분원에서 파견되어 온 지원자들이었는데 이들이 1∼2년간 교사로 봉직한 후 본원으로 복귀한 후에는 유자격 평신도 여교사들이 가르쳤다. 명성학원은 일제의 정책으로 비록 인가를 받지 못하였으나 4년제에서 6년제로 발전하고 질적으로도 다른 학교에 뒤지지 않는 교육을 실시하여 졸업생들 중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우수한 자질을 발휘한 여성들이 많았다.

수녀들이 모두 떠난 후 혼자 남아 있던 황인경 수녀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0월에는 본당신부가 납치되고 폭격이 심해지자 사복차림으로 해주까지 왔으나 월남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래서 황 수녀는 사리원으로 되돌아 갔다가 두번째 시도 끝에 해주 부근의 한 포구에서 나룻배를 타고 월남하였다.

1916. 6 황해도 사리원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3쪽)

1937. 11. 28 봉화유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3쪽)

1939. 4년제 여자국민학교인 명성학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3쪽)

1950. 사리원 본당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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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보장 (영) Social security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5쪽)

근대 산업국가에서는 경제적인 안정과 복지증진을 위해서 개인과 가족을 각종 재해와 빈곤으로부터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데, 이 방법을 사회보장제도라 부른다.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경제적인 보장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졌으나 구조적 실업에 의한 개인의 직장박탈, 공황에 의한 산업파탄 등과 같이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빈곤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이의 개선을 위한 요 구가 크게 일어나게 되고, 이에 따라 실업보험과 빈민구제책 등의 새로운 제도가 등장하였다.

사회보장은 근로자와 일반 민중의 생활수준의 상대적인 저하를 막고 사회생활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하여 실업보험, 산업재해보험, 의료보험, 국민보험 등 다양한 형태로 각 국에서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보장은 빈곤방지에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며, 보험료의 사용자 부담에 따라 사회보장 전체의 비용을 보험료나 대중과세에 의존, 관리, 운영이 정부의 손에 집중되어 있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것이 각국의 실정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회보장제도가 국가의 전체 수입을 정의와 공평의 기준에 의하여 재 분배 하는데 유용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국민의 생활수준의 균형을 회복하는 도구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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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업 (영) Social servic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5쪽)

가톨릭 교회는 단순한 전례의 공동체나 신앙의 공동체일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세상의 빛(마태 5,13-16)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사회안의 어두운 곳을 찾아서 어두움을 없애고 광명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너무도 어두운 곳이 많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든사람, 육체는 건강하나 정신이 병든사람, 정신은 건강하나 육체가 병든사람 등이 있다.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을 살펴주고 그들의 희망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버림받고 소외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현세적인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교회의 사업중에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문화사업, 사회사업등이 포함된다.

*구미근로여성복지관 - 1973년 경북 구미시 송정동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구미공단 근로여성들의 인격도야 및 생할향상을 위해 기능교육, 취미교육, 교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설립단체는 왜관 성 베네딕토 대 수도원이다.

*국제마리아의 사업회 -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고 1969년(여자), 1974년(남자)에 설립되었다.

주된 활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회원이 소득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며 퍼콜라레 운동을 하는 남녀 회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덕산 신생원 -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으로서 1952년에 설립된후 요보호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하고 원생을 초·중·고등학교에 진학 시키고 졸업 후에는 기술을 습득시키고 있다.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 1976년 경남 마산시에서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은 정기프로그램으로 학습반과 취미반이 있고 특별 프로그램으로 젊은이 교실, 사임당교실, 성교육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 1979년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설립하였다. 불우이웃 청소년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의식개발, 교육, 협동, 우정, 자립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쎈뽈원 - 충남 논산군 논산읍에 있으며 1973년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이 되었다. 노인복지시설을 설치운영하며, 성인불구자의 복지사업을 하고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 1966년에 설립되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근로자의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문제에 대한 기업인의 이해를 촉구시키고 노사간의 긴밀한 협조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곳이다.

*성심원 - 서울대교구가 불우아동 및 부상아동을 보호하기위해 1946년 서울 강남구 잠원동에 설립하였다. 파티마 성모수녀원에서 담당운영하고 있다.

*성인복지원 - 1976년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설립, 부양가족이 없고 경제적으로 자활이 분리한 60세 이상의 여자노인을 수용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 본부는 서울 명동에 있으며 마음의 가난함을 생활화하는 단체로 1961년 설립되었다. 주된사업은 환자, 가난한자, 걸인을 돌보고 노쇠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며 불우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이다.

*소화영아재활원 - 1946년 소아보육원으로 출발하였다. 주된사업은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사업이며, 부산교구재단에서 운영하고있다.

*엠마우스집 - 1981년 설립된 것으로 성인지체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 - 1969년에 불우아동을 수용하여 직업보도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성 빈첸시오 청소년 복지회에서 설립하였다.

*춘광대구 요양원 - 극빈 폐결핵 환자 요양원으로 1966년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진영성모의원 별관 -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불우한 결핵환자를 고쳐주는 것이 주된목적이다.

*한국 SOS 어린이 마을 - 요보호 아동들을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하고 퇴소후에는 독립생계를 유지토록 자립능력을 배양하고 있다.

*꽃동네 -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중 특기해야 할 것은 충북 무극에 있는 꽃동네로 청주교구 오웅진 신부가 혼자서 걸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면서 시작되었다. 꽃동네의 특징은 구걸할 수만 있으면 퇴거토록 하는 것으로 자생의 능력이 전혀 없는 노인만을 보호하는 곳이다.

*성모 자애원 - 예수성심 시녀회가 심신 장애아를 재활시키는 곳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 6.25 이후 기아가 날로 증가하여 버림받은 생명들을 입양, 양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갈릴리 어린이집 - 6-7세의 정신지체아 어린이들을 받아 교육하고 있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의 근로자의 집 - 근로자의 수용과 교육에 힘쓴다.

*성 프란치스코의 집 -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일을한다.

*마리아 자매원 - 문제청소년을 교도하고 상담과 숙소를 제공하여 미혼모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국민학교과정과 중학교 과정을 이수시킨다.

*성심 양로원 - 불우한 노인을 수용하여 물질적 정신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성가 양로원 - 무의탁 노인들을 구호한다.

*백백합 보육원 -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호, 육성한다. 설립단체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다.

*해성 보육원 - 요보호 아동과 지체 부자유자아 및 정박아 수용 및 양육, 국내외 입앙을 하고있다.

이상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업 중 그 일부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나 이 이외에도 수십개의 사회사업단체가 있으며 그들은 보이지 않게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사업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첫째, 교회는 특별히 정부나 일반 사회단체에서 망각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버림받고 소외된 계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이 하기 어려운 사업을 찾아서 그들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임무다.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을 느끼게 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회사업은 양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몇명을 도와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교회의 사회사업은 어떤 기관이나 단체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사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자기의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인의 소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가톨릭 신자는 사회사업가이며 모든 신자가정은 사회사업단체인 것이다. 세째, 교회 당국이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재정적 뒷바침을 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성당도 지어야 하고 문화사업도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오늘의 현실 안에서 연장시키는 일이다. 특히 도시교구나 본당에서는 그 지역사회안에 어두움을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여 그들을 위한 예산을 배정함으로써 정말 가톨릭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1894. 해성 보육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15. 백백합 보육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35. 성모자애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46. 소화영아재활원 시작 (555쪽 사회사업)

1946. 성심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52. 덕산 신생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54. 영원한 도움의 성모보육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63. 한국 SOS어린이 마을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63. 경기도 안양의 근로자의 집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66. 춘광대구 요양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66. 서강대학교 부설 산업문제 연구소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69. 국제마리아의 사업회(여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69.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 설립(555쪽 사회사업)

1970. 성심 양로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73. 쎈뽈원 정식으로 사회복지법인으로 인정 (555쪽 사회사업)

1973. 구미 근로 여성복지관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74. 국제마리아의 사업회(남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75. 마리아 재매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75. 진영성모의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76. 성인복지원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76.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79.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기숙사 설립 (555쪽 사회사업)

1981. 엠마우스집 설립 (555쪽 사회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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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업 위원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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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교위원회 (영) Commission for Social Affai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60쪽)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 산하 상설 주교위원회 가운데 하나. 6명의 주교와 총무신부 1명으로 이뤄져 있다. 사회복지, 정의, 평화, 매스컴, 교육 등 사회전반에서 발생하는 제반문제를 연구, 심의 하며 인성회, 나가산업회, 정의 평화 위원회, 매스컴 위원회 등의 단체들을 지도하고 감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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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 종합 사회 복지관 (교회와 역사 268호 16쪽) - 1997. 9. 25발행

1991년 8월 2일 청주시 홍덕구 수곡동의 영구 임대 주택 단지 내에 건립되어 보혈선교 수녀회에서 그 관리를 책임맡고 있다. 개원 첫 해에 산남 어린이집을 비롯하여 청소년 독서실, 노인정을 운영하기 시작하였으며 1992년 부터는 청소년 야간 공부방과 재가 복지 봉사센터, 인표 어린이 도서관을 마련하였다. 또 같은 해 8월 31일 부터는 삼성복지재단 지원으로 사랑의 도시락 싸주기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큰 호응을 얻는 등 주민들로부터 요청되는 재반 사회 복지 문제들을 같이 해결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전문자원 봉사자와 후원회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편이다.

1991. 8. 2 보혈 선교 수녀회에서 청주시의 산남 종합 사회복지관을 관리 (교회와 역사 268호 16쪽) - 1997. 9. 25발행

1992. 산남 종합 사회복지관에서 청소년 야간 공부방과 어린이 도서관을 마련 (교회와 역사 268호 16쪽) - 1997. 9.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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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살레시오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의 답신에 의거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아동으로써 보호자가 없는 아동친권자나 후견인이 입소를 신청한 아동 또는 가정법원 소년부에서 보호 위탁된 아동을 입소시켜 그들을 선도하여 건전한 국민으로 육성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가정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보호 위탁된 아동, 아동상담소로부터 보호 위탁된 아동, 서울가정법원으로부터 6개월간 보호 위탁된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 교육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목공예 직업훈련 - 목공예 이론과 실습을 통해 기술습득과 기능사 2급, 3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직업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참여하는 기능인으로 양성하며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직업인으로 교육한다. 1년의 기초과정인 훈련과와 훈련과를 수료한 학생으로 취업을 위한 종합 기술과로 향상과가 있으며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국가지방기능올림픽 대회와 국가전국기능올림픽대회에 참가하여 입상할 경우 국제기능올림픽 대회의 참가기회를 부여한다. 향상과를 수료한 18세 이상의 학생으로 적성에 맞는 가구회사, 목공소, 실내 인테리어 등을 선정하여 취업알선을 해주고 있다. 건축과, 실내디자인과의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 희망자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 도자기과 직업훈련 - 도자기 실습을 통해 흙에서 전달되는 부드러움과 차분히 만들어야 하는 작업과정을 통해 정서적인 인격도야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며 더 나아가 전문적인 기술습득과 자격증을 취득해 본인 스스로의 성취감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교육한다. 도자기의 여러 성형방법을 통해 학생 자신에 대한 내적인 안정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도 자신감있게 살아갈 수 있는 인격형성과 적성에 맞는 학생을 선별하는 기초반과 기능사 시험의 응시를 원하거나 전문적인 기술습득을 통해 취업을 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산업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배양하는 정규반으로 편성되어 있다. 정규반을 졸업한 학생으로 기능사 시험의 응시를 원하거나 전문적인 기술 습득을 통해 취업을 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산업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배양한다.

⸃ 상담지도 -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내의 아동을 대상으로 처음 입소시부터 마지막까지 안에서 부딪히면서 겪게되는 성장상, 생활상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파악하여 해결책을 유도함으로서 보다 나은 인격체로서의 성장을 도모하고 퇴소후의 자신과 사회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키움으로서 바람직한 미래 설계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 정 기 상 담 : 4/4분기로 전체아동들의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내에서의 생활을 점검하여 쉽게 눈에 안 띄는 아동들과의 상담을 통해 원할한 적응을 돕는다.

* 문제아동상담 : 타 아동과의 관게, 생활면에서 어려움이 있는 아동을 발견해서 상담을 통해 원할한 적응을 돕는다.

* 퇴소아동상담 : 퇴소를 앞두고 있는 아동을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설장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미래 계획을 세우도록 해서 재비행의 방지와 건강한 사회인으로의 방향을 제시한다.

* 학생상담 : 학교내에서의 생활태도, 부족과목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도모함으로써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아동의 원할한 학교생활이 되도록 돕는다.

⸄ 일반학과교육 -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내의 아동을 대상으로 보다 나은 자기성장과 사회적응을 도모하기 위하여 학력취득에 그 목적을 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마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학생들을 위해 한글기초반,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자격과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검정고시반을 운영

학업능력등급을 기준으로 한글, 산수기초,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을 공부한다.

과목합격으로 인해 정규수업 이외의 과목보충이 필요한 아동과 보충수업을 희망하는 아동을 대상으로 개인지도 수업진행, 외부에서 일반학교에 다니는 아동을 대상으로 개인지도를 한다. 그리고 특별활동으로는 연극, 태권도, 그림, 영어회화, 기타반, 바둑반, 피아노, 컴퓨터, 전자조립, 드럼등의 특별활동을 실시한다.

⸅ 종교교육 - 교리교육(매주1시간)과 종교행사를통해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나누는 그리스도인으로 육성하고자 한다.

1998년 3월말 현재 정원 80명 중, 남학생 54명이 생활하고 있으며 "특히 보다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징표가 되며 그 전달자가 된다." 라는 회헌에 따라 봉사하고 있다.

1979. 12. 8. 살레시오 기숙사 개원 (살레시오회의 복지시설)

1988. 8. 24. 서울시로부터 살레시오 근로청소년 회관 교호시설 인가 (살레시오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150-071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1동 929-1/ 전화 02)832-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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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 사회교육 문화원 (영) Salesian Cultural Center for Social Education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5월 살레시오여자수도회의 답신에 의거

살레시오 사회교육 문화원은 시민의 평생교육을 위한 모든 형태의 조직적인 교육활동을 통하여 건전한 시민의 자질을 형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사회 교육법 제 1조) 특별히 청소년과 부모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실행함으로서 생명문화 건설에 힘쓴다. 이로써 살레시오 수녀회의 창립자 돈 보스꼬의 교육목표인 "정직한 시민, 참된 그리스도인' 을 한국사회와 교회안에서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성인 교육 프로그램은 부모를 위한 아동의 창의적 독서지도, 주부학교, MBTI, AP Teens, PET, 청소년 영성과 성(性), 치료 레크레이션, 수화, 메스 미디어 교육이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은 주말 동아리 활동, 인성교육과 성교육, 사고력 성장교육, 주말 자원봉사활동, 기타교실, 어린이 프로그램은 NIE(신문학습교실),영어교육, 성격유형 검사와 상담(MMTIC), 그리고 기타교실, 이밖에도 청소년 사목센터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1998. 6. 1 살레시오 사회교육 문화원 개원식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150-053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5동 253-242/ 전화 02)844-0388/ 모사전보 02)844-0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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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 수녀회 (영) Salesian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67쪽)

1872년 이탈리아의 신부 성 보스코(Giovanni Bosco) 와 성녀 마자렐로(Maria Dominica Mazzarello)가 함께 창립한 세계 최대의 여성 종교단체이다.

보스코는 "청소년 교육 여하가 장래 사회의 건전성을 좌우한다."는 것을 믿고 청소년을 위한 살레시오 대가족

(살레시오 수도회, 살레시오 수녀회, 살레시오 협력자회)을 창설하였다.

살레시오 수녀회는 1957년 4월 서울 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본당에 부임 함으로써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1956. 살레시오 중학교 개교 (567쪽 살레시오수녀회)

1961. 살레시오 여자중학교 개교 (567쪽 살레시오수녀회)

1963. 살레시오 국민학교 개교 (567쪽 살레시오수녀회)

1971. 마자렐로 센터 설립 (567쪽 살레시오수녀회)

1979. 아욱실리움 센터 설립 (567쪽 살레시오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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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 수도회 (라) Societas Sancti Francisci Salesii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67쪽)

185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보스코(Don Giovanni Bosco, 1815-1888)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보호성인으로 해서 창립한 수도회이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청소년 남자, 특히 빈곤하고 불행한 남자 청소년을 위해서 그리스도교적 자선사업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소년의 집을 설치해서 소년들이 가두(街頭)의 위험에서 떨어져서 자유롭게 오락과 정신수양으로 시간을 보내게 하고, 또한 도제(徒弟)의 집, 학생의 집, 청소년 단체, 기숙학교, 신학교, 직업학교, 고아원 등을 경영하고 있다.

한국진출 : 1953년 당시 광주교구장서리 해롤드 현(Herry) 신부가 일본(日本) 살레시오 수도회 관구장 타시나리 신부가 제의한 동회의 광주에서의 청소년 교육사업 요청을 수락함으로써 이루어 졌다. 한국에 최초로 파견된 회원은 일본관구에서 일하던 아르키메데(Martell, 馬) 신부였다. 그는 1954년 5월에 입국, 광주시 중흥동 371번지에 대지 2만5,000여평을 매입, 한국땅에 최초로 살레시오 교육사업 터전을 만들었다. 그후 1955년 9월까지 4명의 회원이 더 내한, 도합 5명으로 일본관구소속 광주수도원이 이루어지고 초대 원장에 마르텔리 신부가 취임, 이듬해는 수도원 경내에 살레시오 중학교 본관(816평) 을 건축, 첫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그후 1958년 6월 서울에 진출, 도림동 본당을 사목, 1959년 4월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가 인가되고 1963년 2월 최초의 한국 살레시오 수도회는 일본관구 소속에서 벗어나 로마총장 직속인 한국 살레시오 지부로 인준을 받아 준 자치적인 행정을 하게 되었고, 초대 지부장에 마리오(Ruzzedda Mario) 신부가 취임하였다. 1974년 청소년 생활관과 피정의 집을 개설, 1979년에는 서울 강서구 신월동에 수용인원 120명의 살레시오 회관(피정의 집) 을 건립, 연평균 1만여명의 서울 근교 중고등학생과 각 본당 청소년들이 이용하고 있다. 1979년부터는 신도림동(대림동) 수도원에 미감아(未感兒)등 불우 청소년을 위한 기숙사를 개설, 80여명을 수용하고 목공과와 농과를 두어 기술습득을 시키고 있다.

⸁ 살레시오 수도원 :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929의 1에 위치, 대지 2,748평평, 연건평 540여평에 한국지부사무소, 수도원 수련소 및 지원소, 그리고 노동청소년 기숙사와 목공훈련소, 농과를 운영하고 있다. 기숙사의 노동청소년중 58명은 외부직장을 가지고 있고 목공훈련소에 12명과 농과에 5명이 일하고 있다.

⸂ 돈보스꼬 청소년 센터 : 살레시오 수도회 공동체 중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신부 2명, 수사 4명, 회원 6명이 사목활동을 하고 있다.

⸃ 구로 3동본당 :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 위치하며 입지조건이 공단지역이어서 관내의 가난한 노동청소년들을 위해 평일에도 퇴근후 성당에 와서 공부와 종교교육을 받을수 있게 하고 있다.

⸄ 살레시오 회관 :

⸅ 화곡동 기숙사 : 강서구 화곡동에 위치하며 74평 대지에 건평 57평의 기숙사 건물에서 1976년부터 미감아들을 위한 교육사업을 시작했으나 1979년 12월 대림동에 위치한 살레시오수도원내 노동청소년 기숙사로 옮기고, 이후 테제공동체가 임시로 사용하게 하고 있다.

1959. 4.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인가 (567쪽 살레시오 수도회)

1972. 3. 돈 보스코 직업훈련소 준공 (567쪽 살레시오 수도회)

1979. 살레시오 회관(피정의 집) 건립 (567쪽 살레시오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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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의 집 - 1998. 8. 26일 살레시오의 집의 답신에 의거

살레시오의 집은 사회와 자신의 삶에 적응치 못하는 노약자와 정신질환자, 심신장애자 등 생활능력이 없는 무의무탁한 부랑인들을 교회의 복음적 가르침에 따라 적당한 보호, 선도함을 목적으로 하여 1989년 5월 5일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설립되었다. 설립 당사자는 우총평 프란치스꼬, 김양순 요한나프란치스카이며 현 건물에 안채 약 15평 정도의 규모이며 교우 임희만 요셉형제의 전답 2,200평(2,000만원)을 50만원에 계약하여 6명의 식구를 이끌고 배론성지 입구 옛 살레시오의 집에 입주하였다.

1994년 1월 12일에 살레시오의 집은 부랑인시설로 인가를 받았다가 1998년 1월 1일에는 정신지체 장애인의 재활시설로 인가를 받았다. 살레시오의 집은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생활하고 있다.

1989. 5. 5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살레시오의 집 설립

1994. 1. 12 살레시오의 집 부랑인시설 인가

1998. 1. 1 살레시오의 집 정신지체 장애인 재활시설로 인가

소재지 : 우 390-870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2리 541-1/ 전화 0443)42-7523/ 모사전보 0443)45-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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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 초·중·고등학교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살레시오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1954년 광주 교구장 현 헤롤드 주교는 살레시오회 선교사 신부인 마르텔리 신부를 비롯한 살레시오 수도회를 광주에 초청한 후 1958년에는 가톨릭 여성교육을 위해 성 요한 보스꼬의 예방 교육 정신에 따른 전인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시작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전남 광주에서 살레시오 초등학교는 1963년에 여자중학교는 1958년에, 그리고 여자고등학교는 1961년에 선교사 살레시오 수도회의 지부장인 Archimede Martelli 신부가 설립하였다. 설립당시의 규모는 초등학교는 12학급이었고 중학교는 9학급, 고등학교는 9학급 이었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 라는 돈 보스코의 설립목적에 따라 소외되고, 가난한 청소년들이 정직한 시민, 착한 그리스도 인이 되도록 교육하고 있다.

1958. 살레시오 여자중학교 설립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1961. 살레시오 여자고등학교 설립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1963. 살레시오 초등학교 설립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501-150 광주시 동구 지산동 480 살레시오 초등학교/ 전화 062)227-1015

소재지 : 우 500-160 광주시 북구 일곡동 482 살레시오 중학교/ 전화 062)571-2992

소재지 : 우 501-150 광주시 동구 지산동 480 살레시오 여자고등학교/ 전화 062)22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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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회관 사회복지부 (나눔지 1996. 여름 57쪽)

상지회관 사회복지부는 1976년 상지회관 피정의 집이 건축되면서 저소득가정의 주부들에게 노동의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써 생계를 돕고 주부들의 바쁜 일손을 도와준다는 설립 목적으로 가지고 성북구 지역복지를 위해 1977년에 설립되었으며, 서울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주된 사업내용은 파출부의 교육(한달에 한 번) 및 직업보도와 파출부의 주택문제 해결, 파출부 자녀들의 학비조달(장학금) 등이다.

1977. 상지회관 사회복지부 개설 (나눔지 1996. 여름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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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어린이 집 (나눔지 3호 2쪽) - 1977. 2. 22발행

성남 새싹 어린이 집은 1970년에 성남시 직업여성들을 위해 성체회에서 설립한 탁아소이다. 철거와 집단 이주라는 갑작스러운 생활환경변화와 직장 관계로 부모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어린아이들을 탁아보호하는 것이다. 노천천막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새싹 어린이 집]을 개설하기까지 6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곳을 거쳐간 어린이는 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시설관계로 더 많은 어린이를 수용하지 못함은 가슴아픈 일이나 부족한 가운데서 어린 새싹을 돌보고 있다.

1970. 성체회 수녀들이 성남에 새싹 어린이 집을 설립 (나눔지 3호 2쪽) - 1977. 2. 22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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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집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 1998. 5. 2일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낙태 위험에 처한 미혼모와 그 밖의 임산부를 아무 조건없이 돌보아 주므로써 한 생명이라도 살려 보려는 뜻으로 설립되어진 생명의 집은 1993년 10월 31일 수원교구로 부터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로 위탁되었고 2명의 수녀를 파견하므로써 시작되었다. 또한 1995년부터는 가정폭력으로 인한 피해여성이 증가되는 사회추세에 따라 학대받는 여성들에게도 임시 주거를 제공하는 쉼터를 겸해서 상담과 가족보호 등을 해주므로써 여성들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1998년 현재 생명의 집에서 하는 일은 임산부의 산전, 산후 관리를 위해 성 빈센트병원에서 정기적인 진료를 시키고 있고 출산 후 간호와 어린이 입양문제까지 주선해 주고 있다. 또한 그들이 독립해서 나가기 전까지 모든 법적 관련 문제 해결과 취업알선, 아동보호관리 지도를 하고 있으며 비밀을 철저히 유지해 주고 있다. 이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은 연간 약 150명에 이른다.

앞으로 여성과 부녀복지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인식의 전환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과 가톨릭 가정폭력 상담협의회를 통한 정보교류, 전화상담자의 전문성 지도와 봉사자 확보, 미혼모 대상의 성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이 집을 퇴소한 사람들의 관리와 계속적인 지원 등 이곳에서 해야할 일들이 많이 있다.

1993. 10. 31 수원교구로 부터 생명의 집을 위탁경영 받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소재지 : 우 449-860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장평리 산1/ 전화 0335)34-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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쌘뽈 국민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1쪽)

쌘뽈 국민학교는 1963년 3월 12일 각 학교 1학급 50명씩 충청남도 교육위원회로부터 인가를 받아 대건중고등학교가 사용했던 목조건물의 일부를 교사로 인수받고 개교하였는데 위치는 현 쌘뽈여중고의 교문과 차고 쪽이었다. 초대교장은 쌘뽈여중고의 교장이었던 박상일 수녀가 겸임하였고 착실한 국민학교로 인정받으며 발전하였으나 남녀공학으로 변경시키는데 필요한 대지부족 문제와 쌘뽈여중고를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장기적인 안목과 재정상의 이유로 재학생들을 모두 이웃의 국민학교에로 분산 전학시키고 개교 5년만인 1968년도에 졸업생 없이 폐교하였다.

1963. 3. 12 쌘뽈 국민학교 개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1쪽)

1968. 쌘뽈 국민학교 폐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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쌘뽈 기숙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0쪽)

쌘뽈여자 중·고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논산은 개교당시 교통수단이 매우 불편할 뿐 아니라 제2훈련소의 설치로 급격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활지도가 큰 문제로 등장하였으므로 학교에서는 기숙사를 실비로 운영하여 원거리 통학생의 편리를 도모하는 한편 다른 지방에서 온 많은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돕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를 알게 된 당시 충남교구장 라리보 주교가 기숙사를 위해 140만환을 기증해 주어서 1962년 5월 31일 축성식을 마치고 학생들을 입사시켰는데 위치는 현재의 강당 앞 부분이었다. 그 당시 입사비는 2,000환, 월사비는 13,000환이었고 수녀들과 가깝게 생활한 까닭인지 후에 이곳을 거쳐 수녀가 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워낙 건물이 낡고 위험해서 계속 학생들을 받기가 곤란하여 입시생수를 단계적으로 줄이다가 1979년에 폐사하였다.

1962. 5. 31 쌘뽈 기숙사 축성식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0쪽)

1979. 쌘뽈 기숙사 폐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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쌘뽈원 (대전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 1998. 4월 쌘뽈원 글라라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1952년 10월 하순경, 당시 논산 천주교회에서 일하고 있던 오채경(말지나) 수녀가 성당 문전에 쓰러져 있는 노걸인 노파를 발견하였다. 오 수녀는 중병인 노인에게 세례를 주어 부엌방을 마련하고 간호하였는데 일주일 남짓하여 선종하자 장례까지 치루어 주었다. 그 후로 계속해서 무의무탁한 노인들이 모여와 입주를 간원하므로 논산 천주교회의 생제(Pierre Singer, 成在德) 신부는 1953년 1월 3일 양로원을 세워 이들을 부양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원장으로는 생제신부가 부임 하였으며, 1965년 재단법인 대전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으로 인가받은 후에는 수녀들이 원장으로 부임하여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쌘뽈원이 쌘뽈여자 중·고등학교 부지내에 있었으나 1971년에 현 위치에 대지 585평을 매입하여 1977년 3월에 건물(236평)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1978년 9월 15일에 입주하였다. 이로써 학교 재단과 분리하여 독립운영하게 되었다.

1979년 5월에는 용인주택, 영안실, 창고 등을 준공하고 1981년에는 격리수용실을 세웠다. 또 1986년 10월 18일에는 보사부의 도움으로 2층에 60평 넓이의 경당을 마련하였다.

현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6명의 수녀들이 4명의 직원과 함께 50여명의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으며 대건중고등학교의 강석준(미카엘) 신부가 매일 미사를 비롯하여 고백성사 및 병자성사 등을 집전 해 주고 있다.

1953. 1. 3 쌘뽈원 설립 (대전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소재지 : 우 320-080 충청남도 논산시 부창2동 66-2/ 전화 0461)735-4044/ 모사전보 0461)32-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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쌘뽈여자중고등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48쪽)

1952년 전투가 소강된 상태에서 육군 제2훈련소가 논산에 위치하게 되면서부터 논산군의 인구는 급격히 팽창하여 20만으로 불어났고 읍내 인구만도 3만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논산에는 여학교가 없어서 여학생들은 멀리 대전으로 또는 20리 떨어진 논산보다 작은 강경으로 통학해야 했다. 주민들은 계속 도에 여학교를 설립해 줄것을 호소하였으나 냉담한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힘에 벅찬 여학교 경영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에 천주교재단의 대건중고교가 새 교사로 신축 이전하면서 구 교사가 남게되자 당시 논산 부창동본당의 생제신부가 여학교를 시작할것을 착안하고 이를 추진하다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이 사업을 의뢰하였다. 수녀원에서는 이 학교를 이양받기는 하였으나 그 당시 학교를 위한 인력, 재력의 기원을 해 줄 형편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침 전주 성심여중고에서 철수하게된 3명의 수녀들이 오게되어 개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인력자원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 여학교는 1961년 12월 19일 해성여자중고등학교로 중·고 각각 6학급씩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1962년 3월 9일 개교식을 갖게되었다.

부창동 본당과 한 울 안에 있어 긴밀한 관계아래 서로 도와가며 생활하고 있는 쌘뽈여자중고등학교는 한때 송구부와 무용부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고 완전 개가식 도서관은 충남에서 손꼽히는 우수한 도서관이며 방송실은 TV를 통한 학습지도뿐만 아니라 부족하기 쉬운 정서순화를 위해 명상의 시간을 마련하여 학생과 교사가 다함께 참여하여 이 시간의 활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가톨릭 정신에 입각하여 설립된 학교이니만큼 종교교육에도 힘을 쏟고있다. 중 1부터 고 2까지 매주 1시간씩 종교수업을 실시하고 있으며 종교수업 이외에 예비자 교리시간을 운영하여 많은 학생들이 세례를 받고있다. 교사들을 위한 교리시간도 마련하여 교사중 2/3가 신자교사가 되었다. 학생들의 종교활동으로는 중학교 8팀, 고등학교 11팀의 레지오 마리애가 활동중이고 학년별 예비자 교리는 교장수녀를 비롯하여 모든 수녀들이 담당하고 있다.

1962. 3. 9 쌘뽈여자중고등학교 개교식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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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영) Sisters of St. Paul de Chartre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86쪽)

1696년 프랑스의 르베빌라셰나르(Levesville la Chenard) 교구성당 사제인 루이 쇼베(Louis Chauvet) 신부가 창립한 자선 수도회.

1888년 7월 22일 한국진출, 1885년 조선교구 7대 교구장 블랑 주교는 서울 곤당골에 영해원이란 고아원을 운영해 오던중 어려움이 많아 이 수녀원에 운영을 맡기기로 결심, 프랑스본부에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 마침내 그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그 해 6월 마르세이유 항구를 떠난 자카리아 수녀와 에스테르 수녀는 도중에 사이공에서 같은 수녀회의 중국인 수녀 두 사람과 합류, 1개월 반만에 입국한 것이다. 당시 영해원에는 고아 2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네 수녀는 우선 약 40일간 우리말을 익힌 후 종현(鐘峴, 현 明洞)에 거처를 정하고 갖은 어려움을 극복해 가며 영해원 운영에 헌신하였다. 한편 1890년에는 수련원이 정식 발족되어, 4년후 7명의 첫 수련자를 배출하였다. 초대원장 자카리아 수녀는 과로가 겹쳐 이국땅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이 수녀회활동이 한국 진출 후 활발한 활동을 보인 것은 3대 원장 가밀 수녀 때부터였다. 가밀 원장수녀는 수녀회 공동묘지매입, 인사카드작성, 성당 및 보육원 분원을 신축하였고, 수녀들의 지방분원 파견 등을 추진, 실행하였고, 본당 부설 소학교의 설립 등 교육사업에도 착수하였다. 1909년 평양, 황해도 안악의 매화동, 제주도의 각 본당에 수녀들을 파견한 데 이어, 1912년에는 대구, 진남포, 장연, 안성, 장호원 등의 본당에도 파견하였으며 일반학교에도 수녀들이 진출할 수 있도록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1차 세계대전의 혼란으로 고아들을 위해 보내오던 성영회의 원조가 두절되자 수녀원과 고아원은 극도의 가난에 허덕였다. 이 딱한 사정을 보다못해 당시 경향잡지사 주필겸 편집자이면서 수녀원 지도신부였던 한기근(바오로) 신부는 강론이나 글 등의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 것을 호소하였으며, 이에 호응한 각 본당신부들과 교우들의 도움으로 150여명 고아들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정이 다시 어려워졌다. 수녀들과 고아들은 굶주림에 허덕였으며, 전쟁 말기에 가까와지자 외국인 성직자들에 대한 일제의 추방과 연금사태 때문에 그들 밑에서 일하던 수녀들은 모두 본원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분군대에 의해 용산 보육원 건물이 징발당해 그곳 고아들이 명동으로 합류케되자 가중된 식량난 때문에 수녀원을 분산시키고, 수련자들은 귀가조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막바지에는 고아원 건물마저 징발당하여 고아들은 양평, 서산 등지로 소개되었고, 1945년 3월에는 장티푸스가 창궐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8.15광복 후 그간 흩어져 있던 수련자들도 다시 모여들고 징발당했던 건물도 되찾아 수녀들은 다시 질서가 잡혀갔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나자 서울을 중심으로 일에 종사하던 수녀들은 대구, 부산, 제주도 등 사방으로 다시 흩어졌으며 고아들도 안양과 대구에서 4년간 피난시켜야 하였다.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1952년 4월부터는 일부수녀들이 서울로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수련원이 서울에 완전 복귀한 것은 1955년이었다. 베아트릭스 관구장과 으제니 수련원장은 6.25전쟁 초기에 얼마든지 외국으로 피신할 수 있었는데도 계속 남아있다가 그 해 7월 18일 공산당에게 피납되어 베아트릭스 관구장 수녀는 평양, 만포진 등을 거쳐 '죽음의 행진' 도중 11월 3일에 총살당함으로써 순교하였고 으제니 수련원장 수녀는 3년간의 포로생활 끝에 휴전 후인 1953년 3월 본국 프랑스로 송환되었으나, 그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 황해도 안악 매화동본당에 남아 학교와 본당을 지키던 김 안젤라 수녀와 김 마리안나 수녀는 1950년 10월 공산당에게 피살, 순교하였다. 이렇듯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1888년 이땅에 정착한 한국 최초의 수녀회로서 한국인 수도회 창설이나 외국 수녀회의 입국을 도왔다. 1960년 4월에는 최초의 한국인 관구장이 탄생하여 모든 행정권이 한국인 수녀들에게 이관되는 등 획기적인 개혁이 있었다. 1967년 한국관구는 효과적운영을 위해 서울과 대구의 2개관구로 나뉘고, 중북부지역은 서울관구가, 남부지역은 대구관구가 통할하게 되고 총회원수는 700명이 넘게 되었다.

① 교육분야 : 1979년도부터 첫 서원반 전원에게 의무적으로 교리신학원을 이수케 해서 일단 졸업한 후에야 전교수녀로 파견키로 했으며 일반대학의 사회사업과, 보육과, 간호학과, 신학과 등에도 다수의 수녀들을 진출시키고 있다. 1976년에는 수녀회의 구성당을 보수하여 교육관으로 개방하여 평신도를 위한 베델 성서모임을 운영하고 있으며, 젊은 여신자들을 위한 성서모임 연구회, 근로여성들을 위한 교양강좌 등 평신도 재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② 의료분야 : 아산재단이 사회복지사업의 일환으로 강원도 인제와 충남 보령에 건립한 병원에 수녀들을 파견하여 환자들에게 봉사하고 있으며, 성 바오로 병원의 구매부 수익금의 총액을 유치하여 병원의 일반 직원들의 자녀에게 장학금 혜택을 입게 하고 있다.

③ 특수사목분야 : 소외된 자들의 벗이 되기 위하여 육군통합병원, 교도소, 시립병원등에 전담수녀를 파견하여 그들의 영적인 건강을 돌보게 하고 그들을 격려해주고 있다.

④ 사회복지사업분야 : 양로원, 고아원등 기존 봉사사업을 계속하는 한편 1980년도에는 심신장애자의 해를 맞아 교구청 가톨릭사회복지사업회 '농아, 맹아 선교부'에 전담수녀를 파견, 농아, 맹아를 위시한 지체부자유자들에 대한 봉사에 투신케 하고 있다. 또한 바자회, 숨은 애긍 등으로 가난한 무명단체 등을 돕는 일도 계속하고 있다.

⑤ 본당사목분야 : 1978년 신천리 무허가 판자촌에 수녀들을 투입하여 생활조건 향상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있으며, 소외된 자들에 의한 영적, 경제적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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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파냐의 집 (교회와 역사 244호 15쪽) - 1995. 9. 25발행

마리스타 기술 교육원의 원생들은 18세가 되면 졸업을 하고 각자의 생활을 책임지게 되어있다. 그런데 많은 원생들의 경우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립 의식이 낮을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나 직업 의식의 부족, 여가 선용 결함 등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마리스타 교육원의 서울 사무실에는 후원회의 일보다 졸업생들의 뒤처리에 바쁜 경우가 많았다. 한 달을 채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 둔다거나 손쉬운 서비스 계통의 직업으로 이직하는 경우, 또한 직장에서 사고를 당해도 올바를 산재 처리의 요구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험을 통하여 재학생 관리 만큼이나 졸업생 관리도 뭗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마련한 것이 샴파냐의 집이다. 서울 본원에 공간을 마련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지방 졸업생부터 주말마다 이 집을 이용하도록 하였다.

이 집은 교육원을 졸업한 이들은 몰론이고 중간에 탈락된 이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다. 개원 1년 후 눈에 띄게 탈선과 사고가 감소하면서 점차 이 집은 여가 선용의 장소, 졸업생들의 보금자리, 때로는 실직되어 다음의 직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되었으며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휴양지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샴파냐의 집은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도와 주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지금은 토요일과 일요일 등 쉬는 날에 교육원 출신들이 이곳을 이용하여 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으며 그들이 직장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 등을 상담해 주고 있다. 또한 그들의 봉급도 관리해 줌으로써 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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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종합사회복지관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6호 55쪽) - 1993년 여름 발행

감만동에 세워진 남구 복지관에 이어 두 번째로 운영권을 위탁받은 서구종합사회복지관 개관식을 지난 2월 26일 오후 3시 이갑수 주교님을 위시하여 부산시장 등 내외 귀빈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청 공원내에 세워진 복지관에서 개관식을 가졌다.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 1가 11-33번지인 대청공원 도서관 밑에 세워진 연건평 638평의 가형종합 사회복지관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맡아 운영하게 되는데 상담실을 위시하여 청소년들을 위한 독서실, 주부들을 위한 교양교육과 취미교육, 맞벌이 부부를 위한 탁아사업 외에도 주민 소득증대 사업으로 부업장 개설 그밖에 각종 교육, 무료 예식장 운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전개될 예정이다.

1993. 2. 26 서구종합사회복지관 개관 (가톨릭 사회복지회보 6호 55쪽) - 1993년 여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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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본당 사회복지 후원회 (나눔지 43호 4쪽) - 1985. 4. 20발행

'형제적 사랑과 복음적 청빈속에 가난하고 약한 이들과 함께있는 교회'를 위해서 1984년 3월 사회복지 후원회를 서교본당에서 조직하여 본당지역 사회복지를 위하여 봉사활동을 하고있다. 후원회원 모집과 기금확보, 본당 교우들에게 불우한 이웃을 물질적이고 정신적으로 도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사랑의 나눔 정신을 계몽하는데 중점을 둔다.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 사랑의 고리(신체 장애자), 사랑의 선교회(삼선교), 은퇴신부등을 방문하여 후원금 위문품을 전달하며 본당지역내 가난한 교우, 불우한 상가집, 수재민, 노인들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서 믿음의 순교자가 되었으니 300년대의 우리교회는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눔으로서 새 생명을 찾도록 증거할 수 있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는 것이다.

1984. 3. 서교본당 사회복지 후원회 조직 (나눔지 43호 4쪽) - 1985. 4. 20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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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 1998. 7. 14일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김기영 루도비꼬님의 답신에 의거

그리스도의 정신에 기초하여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교회와 사회에 농아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고취하며 농아인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 활동과 회원들의 복지 증진에 주력하는데에 그 설립목적이 있다.

1957년 10월 10일에 서울시 돈암동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농아인 교리반을 만드셨다. 1959년 농아 중학생 6명과 중림동의 약현성당에 찾아가 이 시몬스덕 수녀님과 상의하여 농아부가 설립되고 그 후 농아부는 여러차례 수녀님이 교체되었다. 1965년 학생회가 발족되어 활동하다가 1969년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명동성당의 주교관 뒤 여성회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가 1980년 명동성당의 협조로 교육관에서 사무실을 갖추는 등 숱한 이동과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정착이 가능하게 되었다.

1981년 1월 25일 안경렬 사회복지부 신부님과 함께 복지회관에서 가톨릭 농아복지회 발족 준비회의를 가졌다. 1986년 3월 2일 명동에서 창립기념미사를 올림으로써 농아선교회가 창립되었다. 초대회장에 나수웅씨, 부회장은 곽태일씨가 선출되어 농아선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설립 취지는 다음과 같다. 극소수를 제외한 이 나라 대다수의 농아인은 온갖 역경과 고통에 좌절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삶을 포기하다시피 살아가고 있다. 농아인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써 복음대상에서 제외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여 교회와 사회에 농아인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고취하여 전국 교회내의 농아인의 복음화 및 복지증진에 주력함을 그 목적으로 하며 또한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주된 사업 내용으로는 선교사업과 각종 보도매체를 통하여 농아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계몽과 사회적인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홍보사업으로는 매주일 발행되는 주간소식지와 두달에 한번 후원회의 소식과 기타 사항을 알리는 회보가 있고, 친목행사와 매년 정기적으로 기초반, 회화반으로 구분하여 수화교육을 실시하여 수화보급에 노력하며 수화교육을 마친 자로서 농아인과 함께 하고자 하는 직장인 모임인 반딧불, 주부모임인 반석회의 봉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현재 평택농아양로원을 후원하고 있다.

또 수화미사는 일반인의 미사에 농아인들을 위해 미사통역을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전례가 농아들에 의해 준비되고 행하여 지는 미사이다. 정순오 신부님의 집전으로 수화와 말을 병행하므로 일반신자도 참례할 수 있으며 특히 매달 첫째 주일에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1957. 10. 10 돈암동 천주교회에 농아부 창립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1965. 명동성당에 농아부 창립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1986. 3. 23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창립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1991. 10 한국 가톨릭 농아선교회 설립 인준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1997. 7. 7 장애아 어린이집 및 중복장애아 조기 교실 개원 (서울 가톨릭 농아 선교회)

소재지 : 우 142-073 서울시 강북구 수유3동 10-3/ 전화 02)995-7394/ 모사전보 02)903-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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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7쪽)

1987년 말, 서울시에는 장안동에 동부시립아동상담소를 신설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위탁경영을 요청하였다. 수녀회에서는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해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카리스마를 재확인 시켜줄 수 있는 뜻깊은 사업이라 생각하고 많은 이의 관심과 기도속에 파견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1988년 2월 15일에 조영숙 쟌 뽀린수녀, 정인순 아졔스 수녀, 정신채 라파엘라 수녀, 김보애 안나 수녀가 입주하게 되었다. 수녀들은 개관을 위해 약 2개월간 기자재를 준비한 후 1988년 4월 13일에 개소식을 가졌으며 7월 말에는 수녀원도 그 옆에 따로 신축되어 안정된 생활공간을 이루게 되었다.

이 아동상담소는 오늘날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요보호아동과 일반 가정의 문제아동을 돕기위한 기관이다. 종래의 우리나라 아동상담소들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여 단지 일시보호 수용하여 각 시설로 배치해 주는 정도에 그쳤다. 이 아동상담소는 이러한 이제까지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아동상담소 본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대상아동들은 만3세에서 18세 까지로서 문제아동들, 즉, 자폐증, 중증정서장애자, 술, 담배, 환각제 사용 청소년, 폭력적인 아동, 가출소년들에게 심리검사와 전문가에 의한 놀이치료, 시청각운동, 작업을 동반한 상담 심리치료를 시행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가족 구성원의 상호관계를 상담 지도하고 치료함으로서 아동들이 올바른 대인관계를 갖고 가정 및 학교,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통원치료와 보호치료를 겸하고 있는데 보호치료의 경우 그 규정은 6개월 기간이고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며 현 수용능력은 80명 정도이다. 현재 사회사업 전문가들을 포함한 30여명의 일반직원들과 6명의 수녀들이 미숙함과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청소년들을 위한 이 뜻깊은 예방 차원적 사도직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88. 2. 15 서울시에서는 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의 운영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위탁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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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 (나눔지 1996. 봄 15쪽)

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는 아동복지행정의 제일선 전문치료기관으로서 문제행동아동(비행, 가출, 도벽, 허언, 환각제사용, 학교 부적응 등)의 일시 보호 치료 및 정서장애아동(심리적 요인으로 인한 장애)을 통원치료하여 아동의 문제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고 다각적인 방법을 통하여 임상적 치료를 도모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구체적인 사업내용으로는 만3세-18세 미만의 남자 아동과 청소년으로써 요보호 아동의 일시보호와 일시적 위탁보호, 그리고 이들의 가족상담과 부모교육, 보호아동의 학습지도 문제행동아동(가출, 도벽, 학교 부적응, 환각제 사용 등)의 놀이치료와 상담치료,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 정서장애아동 언어지체, 정서불안, 행동장애, 주의산만, 과격행동, 적응장애 등) 들에게 주 1-2회의 통원 놀이치료와 부모상담, 서울가정법원으로부터 보호관찰 처분 및 수강명령을 받은 청소년들의 단기 전문교육 및 상담, 부모역할 훈련 프로그램, 실습생 지도 및 자원봉사자 교육을 하고 있다.

1987. 서울시립동부아동상담소 개설 (나눔지 1996. 봄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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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애화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96쪽)

성 베네딕토 수녀원이 설립한 초·중등 농아교육기관, 1974년 개설한 청각장애자 상담소 운영을 통하여 농아에 대한 정규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설립하였다. 전인교육을 통하여 건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하고, 1인1기(一人一技)의 기능을 연마케 하여 농아들이 독립된 인격체로 자립할 수 있게함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있다. 서울시 도봉구 미아3동 124의 2번지 소재.

1974. 베네딕토 수녀원이 서울애화학교 설립 (596쪽 서울애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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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SOS 어린이 마을 - 1998. 4월 서울 SOS 어린이 마을의 답신에 의거

SOS 어린이 마을이 한국땅에 설립된지 33년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임스트에 첫 SOS 어린이 마을이 세워진 후 유럽 외의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대구에 SOS 어린이 마을이 설립되었다. 1982년 설립된 서울 마을은 16명의 어머니들이 16가정을 꾸려오고 있다. SOS 어린이 마을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한 생애를 바치는 거룩한 사랑으로 인위적으로 맺어진 아이들을 형제, 자매로 키우며 하루 24시간 365일을 자기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만 전념한다. 마을에 오는 어린이들은 어린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가정을 잃고 주위로부터도 소외되어 버림을 받아야 했던 아픔과 상처를 지닌 체 마을 식구가 된다. 98년 현재 서울마을에는 149명의 아동들이 자신의 SOS 어머니와 새로운 형제, 자매를 만나 잃어버렸던 가족의 사랑과 보금자리를 찾아 생활하고 있다. 중고생 남학생들을 위한 집으로 기숙사3동과 그 후에 자립을 돕기 위한 자립관 2동이 마련되어 있고 헤르만 그마이너의 사회복지관에서는 유치원을 운영하여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SOS 마을의 모습을 엮고 있다. 모든 어린이들은 아름답고 밝은 미래를 여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며 소망이다. SOS (Save Our Souls)어린이 마을은 소외되고 아픈상처를 안고 마을로 오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심리와 정서를 치유해 주어 차별 없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찾아주며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고 어린이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을 되찾아 주어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시켜 준다. 나아가서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사회안에 살면서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자기자신을 책임지며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성장하게 도와준다.

1963. 5 대구 SOS 어린이 마을 설립

1982. 4 서울, 순천 SOS 어린이 마을 설립

소재지 : 우 701-040 대구 광역시 동구 검사동 962-5 대구마을/ 전화 053)983-3154

소재지 : 우 158-093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월3동 149-7 서울마을/ 전화 02)692-0253

소재지 : 우 540-010 전남 순천시 와룡동 158-6 순천마을/ 전화 0661)52-7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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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 1998. 6. 11일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기획실장 정진모님의 답신에 의거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에 위치한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은 상담, 치료, 교육 및 직업훈련 등을 통하여 장애인들의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고 그 기능을 원할히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복지이념을 구현하고자 설립되었다.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의 관훈은 "마음을 자유롭게, 능력을 당당하게, 인생을 소중하게"이며 복지회관의 이용대상은 지체, 정신지체, 청각 언어 및 정서 장애인 등 으로 시각장애와 정신질환은 예외이다. 특전은 생활보호 대상자는 치료, 교육, 훈련비 등 이용료가 면제되고 영세가정을 상담 후 이용료가 면제된다.

1998년 현재 시설현황은 대지 14,463㎡에 본관동, 직업훈련장, 보호작업장, 리포츠 센터가 있으며 복지관은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에서 위탁운영하고 있다.

1982. 12. 17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을 서울특별시에서 설립

소재지 : 우 134-080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317-24/ 전화 02)441-5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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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립소년의집 - 1998. 6. 11일 서울특별시립소년의 집의 답신에 의거

서울시립소년의 집은 시립아동보호소의 장기수용아동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재단법인 마리아 수녀회가 0세-18세 미만의 아동을 수용하여 보호와 아울러 아동의 교육을 위하여 소년의집 초등학교를 병설 운영하고 졸업 후 부산소년의 집으로 전원, 소년의 집 중학교와 소년의 집 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계속 수학(修學)하여 졸업과 동시에 취업, 자립하여 건전한 시민으로 육성케 하기 위하여 1975년 서울시 은평구 응암동에 설립되었다.

서울특별시 시립 소년의 집에서는 0세-18세 미만의 요보호 아동과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가 아동을 養育하기에 부적당하거나 養育할 능력이 없는 경우에 수용보호하게 되며 입소절차는 요보호 아동이 발생하면 일시보호 후에 상담조사를 하여 감별을 한 후 수용보호를 하게 된다.

1975. 1. 1 서울특별시 시립 소년의 집 설립 (구시립아동보호소 수용아동 800명인수)

1975. 3. 2 서울소년의집 초등학교 개교

소재지 : 우 122-011 서울시 은평구 응암동 42-5/ 전화 02)354-9957/ 모사전보 02)384-5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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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리본당 西井里本堂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598쪽)

평택 본당 관할의 공소로 출발한 서정리는 성녀 소화 데레사를 주보로 모시고, 이 지방의 중심에 위치하여 날로 교세가 발전함에 따라 1932년 5월, 몰리마르(Josephus Molimard) 신부가 평택본당 신부로 있으면서 이 곳에 본당을 세우기 위하여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서정리에 대지 200평을 구입, 근방 20여 공소의 성금을 모아 1934년 10월에 연와조 57평의 성당과 사제관을 세웠다. 몰리마르 신부는 평택에 주재하면서 주일마다 이 곳을 찾아와 미사를 드리다가 1938년 10월에는 프랑스인 교우들의 지원으로 고딕식 100평의 현 성당과 65평의 사제관을 짖고, 그 자신이 서정리본당의 신부로 옮겨와서 1947년 8월까지 사목할동에 열중하였다.

그 뒤 클리어리(Patrick Cleary, 吉)신부가 2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는데 6.25동란으로 귀국하니, 한때 사제없는 본당이 되기도 하였다. 1952년 7월 유수철(도미니꼬)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야간학교를 개설하였다. 1953년 5월 유신부는 효명중학교(曉明中學校)를 설립하고 1955년 미839부대의 지원을 얻어 285평의 교사를 증축, 그 뒤 고등학교까지 병설하여 실업계공업학교를 거쳐 종합학교로 발전시켰다. 1961년 4대 강원유(요한) 신부를 거쳐, 윤병희(바오로) 신부가 5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자 1962년 12월 '레지오 마리애 샛별 꾸리아'를 창단하여 지도신부를 겸하였다. 이 본당에는 현재 2,019명의 신자가 있고, 공소는 8개소이다.

1953. 5 서정리본당의 5대 유신부는 효명중학교 설립 (598쪽 서정리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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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본당 (나눔지 1996. 봄 34쪽)

강남 서초동에 위치한 서초동 천주교회는 곳곳에 비닐하우스와 꽃마을 철거민들이 상주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고소득층이 지역주민의 대부분인 지역적 특징을 가지고 잇다. 일반적으로 복지 수혜의 필요성과 욕구에 비례하여 사회복지가 발전하는 데 반해 서초동 천주교회는 부유층 신자들의 높은 시혜욕구와 열정을 잘 유도·수렴하여 본당 주변 지역의 사회복지활동 뿐만 아니라 타 지역 및 비신자들까지도 대상으로 하는 폭넓은 수영으로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사회복지 활동을 펴 나가고 있다.

1981년 1월 6일에 설립된 서초동 천주교회는 초대 김유종 주임신부에서 현재 4대의 곽성민 주임신부, 신경남, 김시용 보좌신부와 성가소비녀회가 담당하고 잇다. 사목협의회 산하 10개 분과, 6개 지역 39구역, 181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신자수는 약 1만 2천 2백명에 이르고 있다.

서초동 천주교회의 사회복지활동은 사목협의회(회장 : 임한진) 산하 사회복지분과내 빈첸시오회, 소년소녀가장돕기 후원회, 나눔의 묵상회, 한마음 한몸 운동, 천주교 석문복지재단 등 5개 단체가 주축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회복지활동 내용을 보면 첫째, 1988년에 시작된 빈첸시오회는 4명의 임원진을 포함하여 약 2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후원해 주는 명예회원들은 약 160여명에 이른다. 주요 활동 내용으로는 ① 성당 관내의 불우 교우 및 노인들에 대한 쌀과 성금을 지급하는 불우 이웃 나눔 ② 극빈환자 투약 및 진료비, 의료팀 지원 등의 의료시설 지원, ③ 신망애의 집 등 4군데의 사회복지시설에 월별로, 두엄자리 등 12군데 사회 복지시설에 분기별로 일정액을 지원하는 복지시설 나눔 ④ 고등학생 11명, 중학생 9명으로 총 20명에게 수업료 전액을 지원하는 학자금 지원 ⑤ 그밖에 돈이 많이 들어 치료받거나 수술받기 어려운 극빈환자들에게 수술비의 일정금액을 본당에서 지원하고 나머지 비용은 강남성모병원 자선병동 등에 협조를 구해서 시술을 해 주고, 퇴원 후에도 사후조치의 일환으로 병이 완쾌될 때까지 본당의 레지오 봉사단들이 조를 구성하여 봉사하고 있다.

둘째, 소년소녀 가장돕기 후원회(회장 : 박남식)는 현재 확보된 6억 3천만원 정도의 기금을 가지고 불우한 소년소녀가장들이 자립할 때까지 지속적인 후원을 해 주고 있다. 1989년부터 1995년까지 총 125명의 소년소녀가장에게 약 1억 9천 정도의 후원금을 지급하였다.

셋째, 천주교복지법인 석문복지재단은 서초동 천주교회의 현석문 주보성인의 이름을 따서 설립한 것으로 소년소녀가장돕기후원회 활동자금의 집행을 담당하고 있다.

넷째, 복음의 핵심인 이웃사랑과 나눔을 묵상함으로써 신앙과 일상생활 속에서 나눔을 실천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는 나눔의 묵상회는 현재까지 26명 정도가 교육에 참가하였으며, 교육비의 50%를 본당에서 지원해 주고 있다.

이밖에 이색적인 복지 활동인「축복미 나눔」은 3대 김병일 신부가 1994년도에 새롭게 주창한 것으로 농민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하여 혼배 성사시에 화환 대신 쌀로 신혼부부를 축하해 주도록 제도화하여 그 쌀로 육아시설, 양로원, 무료급식소, 의료시설 등 사회복지시설에 94년도에 20㎏들이 196포, 95년도에 109포를 나눔하였으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다.

사회복지활동을 위한 자금은 본당 지원, 특별성금, 후원회비 모음, 기타 기탁금과 지금은 없어진 물품 판매 등으로 조성해 왔다. 곽성민 주임신부는 1996년부터 보다 많은 전신자들의 사회복지활동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기존의 사회복지 예산을 삭감한 대신 빈첸시오 명예회원 가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으며, 사순절 5주간 동안의 2차 헌금을 불우이웃 나눔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지속적인 평가를 통해 사회복지 활성화를 도모하면서 다양하고 전문적인 사회복지활동을 펼쳐 나가고 있는 서초동 천주교회의 사회복지분과를 중심으로 한 사회복지활동은 본당의 사회복지를 전담하는 기구 역할의 한정성을 뛰어 넘어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원봉사에 대한 끊임없고 식지 않는 열정이 이러한 활동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으며, 복지활동의 내면에서나 구체적 실행방법에 있어서도 전문 사회복지 기관에 못지 않는 전문성을 발휘하면서 거듭나고 있다.

1981. 1. 6 서초동 천주교회 설립 (나눔지 1996. 봄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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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성심 양로원 (교회와 역사 235호 21쪽) - 1994. 12. 25발행

1970년 왜관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설립한 선산 성심 양로원을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가 인수받은 것은 1992년이었다. 버림받은 병자들에게 봉사하는 것 역시 창립의 중요한 목적인 만큼 인수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현재 3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선산 성심 양로원은 일반 양로원과는 달리 노인 마을 형태로서 노인들이 그 동안 생활 해 온 방식대로 자유롭게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65세 이상의 무의탁 노인들이 생활하고 있는 양로원의 일상은 미사, 기도모임, 교리, 면담이 있고 특별행사로 소풍, 생일잔치, 민속의 날과 어버이 날 행사, 성지 순례를 하고 있다. 또한 봉사자들이 와서 세탁, 김장, 이·미용, 농사일, 청소, 봉사와 정기 검진도 하고 있다.

노인들 가운데 홀로 어렵게 생활한 경우가 많아 공동체 생활에 익숙하지 못하고 사회에 대한 반감과 타인에 대한 미움 등이 자칫 신앙생활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요한 10, 10)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된 회원들의 봉사와 헌신은 노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넉넉하였다. 청원자들이 이곳에서 봉사함으로써 이론을 실천하는 교육의 장으로서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1970. 왜관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선산 성심 양로원을 설립 (교회와 역사 235호 21쪽) - 1994. 12. 25발행

1992.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에서 선산 성심 양로원을 인수받음 (교회와 역사 235호 21쪽) - 1994. 12.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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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기숙사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의 복지시설) - 1998. 4. 21일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의 답신에 의거

1979년 당시 구로공단이 생김으로써 공단내에 여성 근로자가 급증하여 시골에서 올라온 아가씨들을 위한 기숙사의 필요성에 의해 그들에게 여성교육과 종교교육, 취미생활등을 통해 전인교육을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구로구 가리봉동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원 내에 이영주 마리안나 수녀에 의해 설립되었다. 공단 지역내의 근로자에 한하여 입사시켜 정원이 100명 정도였으나 급격한 사회 변화로 시내 기숙사 및 복지 아파트가 많이 생기므로 이용자가 줄었고 1989년 기숙사 수리후에 운영의 어려움으로 이용자의 폭을 공단지역 내의 근로자에 제한 시키지 않고 기타지역의 여성 근로자 까지도 넓히게 되었다. 1998년 현재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야간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4명과 직장여성이 50명 정도 되었다. 1997년만 해도 정원 72명에서 수용인원은 68명 정도였는데 현재 IMF로 직장을 잃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숙생들이 있어 현재 인원은 54명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인간개발을 통하여 복음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이 선화 기숙사의 바탕이 된다.

1979.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 선화기숙사 설립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152-021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 1동 131-1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 內/ 전화 02)854-0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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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의 집 - 1998. 5. 21일 섭리의 집 윤석만님의 답신에 의거

섭리의 집은 자손이 없고 가진것도 없으며 또한 의지할곳도 없는 불우한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나실때까지 쉬는 곳으로 1978년 12월에 서울시 금천구 시흥5동에 현재 수원교구 소속사제인 파 레몬드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곳은 보통 가정집을 매입하여 25명 정도의 진학하지 못한 미감아들을 모집하여 기술교육을 시켜 취직을 알선하여 주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하지 못하는 미감아들을 모집하여 본인이 원하는 기술교육을 하였으나 2년도 못되어 희망자가 없으므로 기술교육은 포기하고 외로운 할머니들을 받들어 세상을 떠나실때까디 모시고 생활하고 있다.

1978. 12 섭리의 집 설립

소재지 : 우 153-035 서울시 금천구 시흥5동 420-4/ 전화 02)803-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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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병원 聖家病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4쪽)

최덕홍(요한, 1902-1954) 주교는 대구교구장으로 착좌한 후 대구에 가톨릭 병원의 설치를 시도하던 중 평신도 박영대씨의 개인병원이었던 '대구중앙병원'을 구입하여 교구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최주교는 개업을 위한 준비와 병원운영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1950년 3월 23일 부터 고도리 마리비안네 수녀와 김순심 베놔 수녀 그리고 최서시 십자가의 요한 수녀 3명이 임시 파견되어 병원개업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 병원은 오랫동안 운영난으로 부진했던 시설인 만큼 안팎으로 손댈 곳이 많았다. 3명의 수녀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어 본원 수녀들과 수련자들까지 동원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해성병원'(海星病院)이라는 이름으로 1950년 5월 1일에 개업하였고 이와 동시에 분원도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그 당시 병원에는 내과, 소아과, 안과의 4과와 4명의 의사가 있었고, 수녀 공동체에는 분원책임으로 부임한 하외학 데레사 수녀와 병원에 근무하는 수녀 3명, 그리고 지원자를 합하여 7명이었다. 개업 후 55일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병원은 피난민수용소처럼 되었다가 곧 이어서 야전병원으로 변하였다. 의사들도 차레로 피난가고 그 중 최 의사 한 사람만이 끝까지 남아서 수녀들과 함께 전쟁을으로 인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돌보았다. 1955년 안정을 되찾은 후 '해성병원'을 '성가병원'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서정길(요한 1911-1987) 주교는 대구교구장으로 착좌한 후 대구교구의 숙원사업인 가톨릭 종합병원의 설립을 시도했다. 서정길 주교는 1960년에 이르러 독일 미제레올(Misereor)의 후원으로 병원신축을 계획하면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한국관구에 수녀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침 덕원에서 월남하여 대구에 안착하기 시작한 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에서 이를 수락하여 현 파티마병원 신축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운영이 부진하던 성가병원을 점차적으로 정리하다가 파티마병원 개원 전, 1962년 8월 30일로 문을 닫았다.

1950. 5. 1 '해성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성가병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4쪽)

1962. 8. 30 '성가병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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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수녀회 (영) Holy Family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08쪽)

1943년 12월 생제(Singer) 신부에 의해 창설된 방인 수도회. 일제 말기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불우한 이들을 돕기 위한 '성가 소비녀'의 공동체가 시작되자 1943년 이재현 신부, 공베르(A. Gombert) 신부와 함께 생제(Singer) 신부가 회칙을 작성하여 노기남 주교의 인준을 받고 창립인가도 받았다. 1945년 6월 수련생활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로부터 지도를 받았고, 1947년 1월에 첫 허원식을 라리보 주교에 의해 거행할 수 있었다. 1953년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양로원'을 인수받아 1979년 증축한 후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하고 있다. 1958년 8월에는 서울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한 뒤 1969년 현재의 서울 하월곡동으로 이전하고 가톨릭의대 부속병원인 종합병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한편 1962년에는 소사에 있는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착수하였다. 이밖에 편물과 보세가공을 가르치는 '나자렛 기술학원'(1960-1969)과 '미망인 양재소'(1964-1980)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968년 8월에는 서울 혜화동에 있던 본원을 현재의 서울 정릉1동으로 이전하여 1969년 1월 창립 25주년과 함께 신축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74년 성가회 명칭을 '성가수녀회'로 개칭하면서 1976년에는 새 회헌과 규칙의 인준도 받았다. 1985년 현재 3개의 병원과 1개의 학교를 비롯하여 1977년 개원한 신체장애양로원인 '안나의 집'등의 특수사목활동분야에서 활동할 뿐만 아니라 본당 사목활동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953. 1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양로원'을 인수 (608쪽 성가수녀회)

1958. 8 서울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 (608쪽 성가수녀회)

1960. '나자렛기술학원' 운영 (608쪽 성가수녀회)

1962. 소명여자 중고등학교를 인수 (608쪽 성가수녀회)

1964. '미망인 양재소' 운영 (608쪽 성가수녀회)

1977. 신체장애 양로원인 '안나의 집' 운영 (608쪽 성가수녀회)

1985. 경기도 부천에서 '천주교양로원'을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운영 (608쪽 성가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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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정 입양원 (나눔지 250호 4쪽) - 1989. 5. 6발행

새생명의 귀한 아기들을 하느님의 사랑안에서 성가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한 성가정 입양원이 개설되었다. 대지 600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사무실과 상담실, 신생아실, 유아실, 결연자대기실, 자료실, 소성당, 수녀원, 강당, 식당, 미혼모숙소 등으로 일시보호아동 30명 까지 수용할 수 있는 시설과 함께 피정과 연수교육을 겸할 수 있는 교육시설을 갖추게 된다.

1989. 4. 25 성가정 입양원 신축건물 기공식 (나눔지 250호 4쪽) - 1989. 5. 6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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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골롬바 병원 (성체회 복지시설) - 1998. 4. 8일 성체회 한율리엣다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1951년 8월 10일 운현궁 마마께서 윤을수 신부에게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것을 사용권을 위임하여 처음에 골롬바 어린이 집으로 시작하였다. 고아들이 점점 많아지자 청평으로 고아원을 옮기고 결핵 요양원으로 변경하였다. 시작할때 당시 성 루가 병원 박병래 원장이 주치의였으나 환자유치 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세브란스 흉부 내과 과장이었던 김기호 박사가 주치의로서 환자를 관리하고 치료해 주었다. 장기치료가 요구되는 결핵환자들이 좋은 환경에서 휴양하며 치료하였고 병실은 11실이 있었다. 1966년 2월에 폐원하였다.

1951. 8. 10 골롬바 어린이집 설립 (성체회 복지시설)

1958. 3 성 골롬바 병원 개원 (성체회 복지시설)

1966. 2 성 골롬바 병원 폐원 (성체회 복지시설)

소재지 : 자하문 밖 부암동 (옛 대원군 별장)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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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聖公會 (영) Anglican Communion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11쪽)

한국성공회는 1965년에 두 개의 교구로 분할되어 최초로 한국인 사제를 주교로 축성하여, 서울 교구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한국성공회는 몇가지 뜻 깊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기독교(N.C.C)에의 참여, 지역사회 개발과 기아해방운동의 전개, 평신도 교육과 자급 사제직의 시도, 산업선교의 도입, 성 미카엘 신학원의 재개·확충 등이 그것이다. 1965년 이후의 성공회의 역사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선교정책을 변천하는 한국과 세계의 상황에 맞추어서 전개한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성공회의 세 교구는 각각 관구의 교구로서 동남아 성공회 이사회(The Council of the Church in East Asia) 에 속해 있으면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관할을 받는다. 이것은 한 언어와 한 문화를 향유하는 한 민족의 교회로서는 부자연한 상황이다.

대한 성공회는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천신신학교를, 정박아 교육기관으로서 성베드로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선교사업을 돕고 독자적인 사회복지사업을 추진하는 성가수녀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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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광원 (교회와 역사 207호 4쪽) - 1992. 8. 25발행

성광원의 처음 이름은 양생원이라 했다. 양생원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라 다두라는 나환자의 어머니가 논산 성당의 신자였다. 1956년 3, 4월경 그녀는 성재덕 신부를 찾아와 자기 아들이 마을에서 못살고 외진곳에서 사는데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 당시 10세대 정도의 나환자들이 외진 곳에서 정부의 대책도 없이 소외된 채로 있었다. 그들은 걸식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성 신부가 그녀의 청을 듣고 진료반을 보내줌으로써 나환자 이동 병원 진료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정석주, 박병태, 김재영 외 17명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서로 돕고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 명칭을 양생원(養生圓)으로 발족하고 가톨릭 구제회에서 구호를 받게 되었다. 진료반이 이곳에 올 때 N.C.W.C(미국 천주교 전재부흥위원회)의 보조로 밀가루, 옥수수 등과 구호품이 전달되었다. 이후 나환자 집단이 점점 불어났고 성 신부의 도움으로 논산 본당을 통해 정식으로 밀가루, 옥수수 가루를 배급받게 되었다.

1960년 5월에 양생원을 성광원으로 개칭하고 논산군 광석면 율리 산 49의 2번지 부지 22,440평을 매입 계약했다. 이는 충남 나협회의 주선으로 정부에서 매입 기증한 땅이다. 당시 나환자들은 59명이었고 이때 비로소 나환자 정착지로 책정되어 현재에 이른다.

1956. 나환자 이동 병원 진료소인 성광원이 양생원이라는 이름으로 발족 (교회와 역사 207호 4쪽) - 1992. 8. 25발행

1960. 양생원이 성광원으로 개칭 (교회와 역사 207호 4쪽) - 1992. 8.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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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루이제의 집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 1998. 5. 2일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답신에 의거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께 봉사하신 성 빈센트와 성녀 루이제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의 영성과 사업목적에 따라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로 설립하였다. 성녀 루이제의 집은 현 시대의 요청에 따라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에게 봉사하여 위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재현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자 파데르본으로부터 건축비와 부지 매입금을 지원받아 1987년 6월 13일에 25,574평을 매입한 후 신축공사에 착수하여 1992년 5월 9일에 완공하였다.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 문학리 586-2번지에 위치한 이곳에서 할머니 3명의 입소로 시작하여 현재 만 65세 이상의 무의탁 할머니 40여명과 이들의 생활을 돕기 위한 수녀 5명, 상주 봉사자 2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매월 노인들의 건강을 검진하여 이를 철저히 기록할 뿐만 아니라 건강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매일 6시40분에 아침기도와 묵주기도 10단을 바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매 주마다 종파를 초월한 단체들의 손길이 그치지 않고 자선진료팀의 방문과 수지침 봉사, 각종 단체들의 노력봉사로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다. 재정은 국가 보조금과 후원회 기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1992. 5. 9 성녀 루이제의 집 설립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소재지 : 우 445-960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 문학리 586-2/ 전화 0339)52-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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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라자로 마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86쪽)

성 라자로 마을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채 불구의 몸으로 유랑하는 나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이 땅에서 나병을 영구히 퇴치하려는 목적으로 조지 캐롤(George Carroll) 몬시뇰에 의해 1950년 6월 2일 문을 열었다. 현재 이곳에는 음성나환자로 이루어진 자활주민 235명(79세대)과 양성·불구·보호 환자 110명(남 58, 여 52명)이 모여 살고 있으며, 나환자연합회와 국립나병연구소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이 마을에 수녀를 파견한 것은 성 라자로 마을에 1983년에 피정의 집 '아론의 집'이 완공되자 이경재 알렉살델 신부가 그 관리를 수녀원에 위임해 옴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1983년 9월 15일, 양명숙 세라피나 수녀, 진말돌 프란치스까 수녀가 아론의 집 담당으로, 유국향 로마나 수녀가 유아원 개설 준비 담당으로 파견되어 설립하였다. 이어 정인순 이레나 수녀가 경리 담당으로, 양희진 아숨다 수녀가 전교사목 담당으로 파견되었다. 유아원은 개설이 어려워 중단되었고 1985년 1월에는 성 라자로 마을에서 환자 간호를 담당하던 성모영보수녀회가 떠나가 이 분야의 일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맡게 되었다.

이 지원은 양성나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봉사의 특수성 때문에 원칙적으로 종신서원수녀만을 파견하고 있다. 수녀들은 이곳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부숴지고 찢겨진 나환자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위로가 되어주고 있다. 또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각계 각층에 불러 일으키고 형제적 사랑의 나눔을 위해 수시로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들과 원생들의 기교가 되어 주며, 희생과 고통의 그리스도 신비체를 몸소 체험함으로써 힘든 봉사 속에서도 큰 기쁨으로 나날을 봉헌하고 있다.

1950. 6. 2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에 성 라자로 마을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86쪽)

1983. 9. 15 성 라자로 마을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파견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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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보통학교 聖母普通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24쪽)

기명학교와 성모여학교의 후신(後身). 1898년에 평양의 제 2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르 메르(Le Merre) 신부는 평안도 전지역을 관장하면서 포교에 전념하는 한편, 교육사업에도 눈을 돌려, 1905년 9월 1일 관후리 천주교회 안에 남자 교육기관인 기명학교를 설립하고 1906년 5월 1일에는 여성에게도 신학문(新學問)을 배울 기회를 주기 위하여 성모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에 20평과 10평 규모의 교실 2개를 가지고 유아반과 소학교반으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사방에서 아동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들었으므로 다시 교실을 새로 증축하여 여학교를 따로 신설한 것이다. 이에 여학생을 담당케 하기 위해 서울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의 수녀들을 교사로 초빙하여 학생지도와 포교사업에 봉사케 하니 학생수는 날로 늘어나고 전교사업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27년 평양교구가 설립되면서 1929년 3월 15일에 기명과 성모의 두 학교를 병합하여 성모보통학교로 승격 개칭하게 되었고, 1936년 10월에는 상수구리(上水口里)에 3층 철근 콘크리크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였는데, 성모보통학교는 날로 발전하여 명실공히 평양 굴지의 명문학교가 되었다. 이에는 30여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한 성 바오로회 수녀들의 공이 컸다. 그들은 1940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 사업을 인계하고 서울 본원으로 돌아갔다. 1945년 광복후 공산당 치하에서 몰수당하여 폐쇄되었다.

1905. 9. 1 관후리 본당내에 기명학교를 설립 (624쪽 성모보통학교)

1906. 5. 1 성모여학교 설립 (624쪽 성모보통학교)

1929. 3. 15 기명과 성모학교를 병합하여 성모보통학교로 승격 개칭 (624쪽 성모보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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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병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3쪽)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경성교구 청년 연합회]를 추측으로 하여 병원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라리보 주교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온 교구민들이 힘을 모아 병원을 건립하는데에 이르게 되었다. 즉 1935년 경성교구에서는 당시 경성부 영락정 1정목 39번지에 소재하고 있던 일본인 무라카미 병원을 인수하여 성모병원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성모병원 본관은 540평 대지에 350평 건평으로 목조 2층 건물이었다.

초대 병원장으로 박병래가 부임하였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회계, 물품관리, 사무, 간호 등을 위해 9명의 수녀가 파견되어 병원 2층에 수녀원을 마련하고 분원을 이루게 되었다.

1936년 5월 1일 많은 이들의 기대와 축복 속에 개원한 성모병원은 서울교구의 첫 의료사업이요, 가톨릭 교회내 최초의 정식 병원답게 훌륭한 의술과 친절한 태도로써 일반인들에게 매우 호평을 받아 개원 초부터 외래 환자만도 하루에 100명을 훨씬넘었다. 특히 헌신적인 간호수녀들의 봉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처음에 25병상 규모로 시작된 성모병원은 날로 발전됨에 따라 확장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마침 용산에 있던 예수성심학교를 일제가 일본 군대막사로 징발하려고 획책하자 교구에서는 신학생들을 덕원 신학교로 이전시키고 그곳에다 성모병원 분원을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5월 원효로 성모병원 분원이 개원되었고 이곳에서도 6명의 수녀들이 파견되어 간호와 병원운영을 도와주었다.

해방 후에도 무난하게 운영되어 가던 성모병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내무성 중앙병원으로 징발되었다. 이후 3개월간 인민군은 성모병원과 주교관에 상주하면서 이곳의 물건을 징발 사용하고 미처 피난 하지 못해 남아있던 수녀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최종희 토마스 수녀는 인민군들 몰래 식량과 물건을 감추어 놓았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3번이나 총살당할 뻔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인민군의 정령하에서 성모병원의 기능은 거의 마비되었으나 서울이 수복되자 병원은 재정비되어 활기를 되찾았다. 1956년 5월 1일에는 개원 20주년을 맞이하여 의의깊은 축하식을 가졌는데 이때 홍순덕 이렌 수녀가 20주년 근속 표창을 받았다.

한편, 1954년에 설립된 성신대학 의학부에 이어 중림동 성당 구내에 성 요셉자선병원과 성요셉간호고등기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성요셉자선병원은 1959년에 병원을 확장, 신축하여 유로 병상 60베드와 무료 병상 20베드를 갖추고 자선진를 담당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1959년 3월 6일부터 성요셉병원의 관리를 성가회로부터 인계받아 맡게 되었다. 또 방용자 데레사 수녀는 성요셉간호고등기술학교의 교감으로 부임받았다. 이처럼 병원과 학교에서 일하게 된 수녀들은 처음에는 성모병원 분원에 속하여 있었으나 1960년에 따로 성요셉 분원을 설립하고 윤성기 토마스 수녀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윤 수녀가 성모병원 분원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성요셉분원은 성모병원 분원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1962년 8월에 가서야 완전히 독립된 분원으로 재발족되었는데 수녀들은 간호사로, 교사로, 간호사 기숙사의 사감으로 다양한 사도직을 수행해 나갔다. 이 성요셉병원은 성모병원 내에 자선진료소가 설립되어 자선진료의 임무가 이전된 데다가 병원관리 효율성 문제, 노후된 건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1974년 8월 31일자로 폐원되었고 이에 따라 이곳

분원수녀들은 다시 성모병원과 통합되었다.

성모병원은 1957년에 양기섭(베드로) 신부가 제4대 병원장으로 취임하면서 크게 발전하여 이듬해 3월 종합병원으로 승격되었다. 날이 갈수록 병원 신축의 필요성이 더해갔고 또 가톨릭중앙의료원으로서의 병원기구로 개편하고자 하는 의도하에 1957년, 신축병원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엄청난 건축비용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결국 1961년 12월 1일, 지하 2층, 지상 8층에 300병상수를 갖춘 현대식 병원이 준공되었다. 병원이 준공됨에 따라 수녀원도 신관 7층으로 이전하였으나 1966년에 병원 본관에 이어 7층 건물을 신축, 정신과 병동을 개설하자 수녀원을 다시 이 병동의 6, 7층으로 이전하여 안정된 생활공간을 이루고 원목실, 의무기록실 등에도 새로이 파견되는 등 사도직에 활기를 띠어갔다. 설립 초부터 여의도로 이전하기까지 병원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어 온 성모병원 수녀원은 현재 새로 신축된 병원 별관 건물인 요셉관 4, 5층을 수녀원으로 마련하고 24명의 수녀가 간호과, 경리과, 회계과, 원목과, 호스피스과, 방사선과, 자제과, 임상병리과, 약제과, 검사실, 양재실, 영양실 등 여러 부서에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원목과와 호스피스과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녀들은 환자들의 정신적 치유와 죽음을 맞는 환자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지니게 함으로써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한편 가톨릭 의대 및 간호대학에서 강사 및 교수로 일하는 수녀들은 약리학, 간호학, 종교 등을 가르치고 있다.

1935. 성모병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3쪽)

1936. 5 성모병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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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영보 수녀회 (교회와 역사 70호 7쪽)

성모영보 수녀회는 한국인에 의해 한국에서 설립된 관상(觀想) 수녀회이며 반봉쇄(半封鎖) 수녀회이다. 이 수녀회의 정신은 실제로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 빈궁한 자를 돕고, 근면한 생활로 노동의 존귀함을 드러내자는 데에 있다. 예수께서 가난한 이와 병들어 신음하는 자와 더불어 생활하셨던 모습대로 그들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버림받은 사람을 위해 기도와 노동과 봉사로 정신적으로 부유해지고자 한다. 이 수녀회는 1985년 당시 가톨릭대학 교수이며 성서학자인 宣種完 라우렌시오 신부가 그 선친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 일부를 매각한 돈과 성서 번역을 위해 사육하였던 메추라기 수입을 보태 경기도 부천시에 12정보의 땅을 매입함으로써 태동되었다. 2년 후인 1960년 3월 25일 정식으로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이 수녀회의 특징은 국민학교 졸업정도의 학력이 낮은 처녀들에게도 입회를 허용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초창기에 처녀들로서는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노동과 가난 가운데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메마른 땅에 농사를 지어 수확한 감자로 주식을 삼으며, 메추라기와 젖소와 칠면조를 사육하고 미사용 포도주를 시도하는 한편 仁川에 나가 우유룰 판매하는 등 자립하고자 하였다. 흙벽돌로 지은 초라한 건물과 성당에서 생활하고 기도하면서 성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 생활을 이웃 주민들에게 증거하고자 하였다. 수녀들은 안양 성 라자로원에서 1976년부터 수녀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수용된 나병환자들을 돕고있다. 또한 파주군 광탄의 시몬의집 에서는 1980년부터 수녀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수용되어있는 폐결핵 환자들의 간호와 세탁, 식사 등 궂은 일을 비롯하여 구령사정도 돌보고 있다. 전북 함열본당 상지원에서는 60세대의 음성 나환자 간호 및 미감아 교리지도를 담당하고 있다.

1960. 3. 25 성모 영보 수녀회 설립 (교회와 역사 70호 7쪽)

1976. 안양 성 라자로원에서 성모 영보 수녀회의 수녀들이 활동 (교회와 역사 70호 7쪽)

1980. 파주군의 시몬의집과 전북 함열본당의 상지원 성모 영보 수녀회의 수녀들이 활동 (교회와 역사 70호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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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어린이 집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382쪽)

1981년 세계 신체 장애자의 해를 맞아 설립된 성모 어린이 집은 뇌성마비아들을 조기 발견하여 신체 기능을 회복시키는 물리 치료 및 탁아 사업을 하고 있다.

성모 어린이 집의 특징은 치료와 교육을 병행하는 시설을 갖추고 5세까지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지적, 감각, 운동, 시각 등의 효과를 이용하여 물리 치료를 하는 것이다.

물리치료는 Vojita방법으로 1980년 연세대학교에서 이론에 대한 강의가 있었고 1981년 9월 3명의 독일인 물리치료사들이 한국에 나와 실습을 시킨 최근에 도입된 치료법이다.

개원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성모 어린이 집에는 십여 명의 어린이들이 치료를 받고 있으며 좋은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윤 알마 수녀는 물리 치료와 전반적인 사무 관계를 담당하고 있으며 길 발렌티나 수녀는 어린이들의 식생활과 건강을 돌보며 장애자 어린이들의 필요에 응하고 있다.

1981. 10. 7 성모 어린이집 설립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3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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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의 마을 (성모의 기사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5. 28일 성모의 마을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성모의 마을은 사회의 그늘에서 참으로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를 나누어 지고자 충남 논산시 상월면에 건립된 중증장애인 요양시설이다. 1992년 12월 설립인가를 받고 1995년 6월에 문을 열어 중증장애인을 위한 삶의 터전으로 가꾸어가고 있으며 주요사업은 중증장애인을 위한 물리치료, 보장구, 컴퓨터를 이용한 학습프로그램, 일상생활 환경적용 프로그램들로 중증장애인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입소대상은 생활보호대상자 70%, 일반 30%, 10세이상 40세 미만의 중증장애인 1급대상(대,소변 및 식사 등 기본적 생활을 혼자 할 수 없는 분)이며, 성모의 마을은 80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한다.

성모의 기사회 수녀들은 사제순교자이신 콜베 신부님의 정신에 따라 원죄없으신 성모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고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을 통해 예수성심의 왕국을 전파하기 위해 기도하고 활동한다.

1992. 12. 21 중증장애인 요양시설 성모의 마을 설립 (성모의 기사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320-930 충남 논산군 상월면 대촌리 122-1/ 전화 0461)32-2085/ 모사전보 0461)33-0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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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의 집 (동정 성모회의 복지시설 - 교회와 역사 242호 12쪽) - 1995. 7. 25발행

대전교구에서는 성체대회 한마음 한몸 운동의 일환으로 하루 세끼 식사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기 위하여 무료 급식 식당을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시청에서 장소를 제공하면서 이 사업을 동정성모회에 부탁하였다. 이에 동정 성모회에서도 1989년 한국 진출 25주년을 기념하면서 그 동안의 표현으로 이 사업을 맡게 되었다. 대전시 동구 삼성 1동 노인 회관 2층에 성모의 집을 신축하여 1990년 6월 16일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의 주례로 축성하였다. 하루 이용자는 대개 노약자, 행려자, 무의탁자 등이고 매일 12시 부터 오후 1시 30분 까지 대략 230-250명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가진 것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시작된 성모의 집은 대전교구 30개 본당에서 매일 12-15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식사 준비, 배식, 설거지를 도와주는 등 대전 교구 신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운영되고 있다. 점심 제공 이외에도 무료 진료, 혜택 주선, 이발, 예비자 교리, 봉사자 및 이용자들의 사적지 순례 등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봉사자 1일 피정, 동구청의 재정 지원으로 성모의 집 공간 확장등도 계획하고 있다.

1990. 6. 16 대전 성모의 집 축성식 (동정성모회의 복지시설 - 교회와 역사 242호 12쪽) - 1995. 7.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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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자애 병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가톨릭 의과대학 성모자애병원은 가톨릭 정신에 입각하여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전인적 건강을 구현하기 위한 의료기관이다. 국민보건과 불우한 환자구료를 위한 교육, 연구, 진료를 사명으로 지역사회 의료복지 향상에 기여함을 목저으로 한다. 특히 최대 다수 주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최상의 진료를제공한다. 1955년 6월 27일 에 인천직할시 북구 부평 6동에서 김영식(베드로) 신부에 의해 설립되어 1963년 4월 9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인수받았다. 부평이란 이름은 고려 충선왕 2년(1310년)에 부평구라고 불려진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원래 부평지역은 현 계산동이 그 중심지였으나 부평역이 생기면서 그 주변과 시장지역을 부평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지역은 본시 부평군 부내면 대정리로 1940년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소화정이라 불렸으며 해방과 더불어 1946년 부평동으로 개칭되었다. 김영식 신부는 황해도 연안에서 1947년 10월 7일 무의무탁한 고아들을 가정적인 보육방법으로 육성하고자 사회사업법인 연백성모원을 설립하였다. 그후 김신부는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1953년 5월에 원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인천시 북구 부평동 665번지에 자리잡고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점차 연로하게되자 김신부는 원아들을 잘 돌볼 수 있는 수도회를 찾던 중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창설자이신 방유롱(안드레아) 신부를 통하여 연백성모원을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맡겼다. 그리고 원아 보건 후생 대책과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위하여 1955년 6월 27일에 설립한 성모자애병원을 보육원으로 운영하고 원아들을 잘 보육하는 조건으로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운영권을 이양하였다. 이때의 집은 75평의 목조 이층 건물이었고 수용능력은 50명이었으나 당시 4세에서 20세 까지의 70여명의 보육원생들이 함께 생활하였으며 이때부터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사회복지 사도직과 의료봉사 사도직이 인천교구에서 시작되었다. 김영식 신부는 1963년 1월 7일 상호 11시 5분에 숙환으로 성모병원에서 선종하였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1963년 4월 9일 황우경(스테파노) 수녀와 박순옥(ꥉ뻬뚜아) 수녀를 파견하였으며 1963년 6월 30일 정수자(막달레나) 수녀와 1963년 7월 20일 심상임(막달레나) 수녀를 파견하였다. 김신부는 6.25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었고 이땅에는 전쟁의 상처가 널려있었고 황폐하고 굶주리고 병든 자들과 전쟁으로 혼열 고아들이 많이 발생된 비참한 사회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김신부는 미 제 8057부대 가진스키중령과 솔지반 군종신부, 그리고 가톨릭 구제회 한국 지부장 캐롤 몬시뇰의 협조로 1954년 9월 22일 성모자애병원의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연건평 119평 아담한 2층 건물을 완공하고 1955년 5월 5일 낙성식을 가졌다. 1955년 6월 27일부로 원아 후생 보건 사업으로 내과, 외과, 방사선과등 3개과에 초대 의무원장이신 노신주씨 외 의사 2명과 간호사 2명, 그 외에 5명 등 10명이 가족적인 분위기로 첫 개원을 하게되었다. 병원이 개원되면서 미8군에서는 더욱 관심있게 원조를 베풀어 1958년에는 미8군 제 6의료창 사령관으로부터 링켈, 다이아징 등 19종에 달하는 의약품을 미8군 군사 원호청을 통해 전달되었다.

1962년 1월 9일 총건평 211평에 현대식 병실 50명을 수용할 수있는 입원실과 특히 산부인과에서는 최신식 자동분만대를 설치하고 당시 제 3대 병원장이신 진병집 원장의 운영방침의 일환으로 월간 1500명의 환자들 중에서 무의무탁한 환자들은 무료로 치료해 주었고 그로 인해 병원을 찾는 환자는 급증하였다. 탁월한 의사진과 의료기구등을 설치한 성모자애병원은 1962년 4월 7일 가톨릭의대부속병원으로 약정편입, 새로운 발족을 함에 따라 의사진을 보강하는 한편 진료의 학술적인 탐구를 위해 대학에 의사 인사권을 맡기어 보다 훌륭한 의료진을 보강하고 내과에 가톨릭 의대 교수인 이순익 박사와 정형외과 과정으로 서독 하이델베르그대학에서 다년간 연구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부속병원으로 신 발족함에 따라 지역보건 향상에 기여는 물론 불우한 환자들의 쇄도 양상은 진료비가 저렴하고 특히 미8군으로부터 원조를 받은 X-ray기와 산모를 위한 무통분만기로 분만은 거의 무료봉사를 하였던 실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병원은 미8군 지정병원, 공무원 요양지정병원, 산엽재보상보험지정병원, 한국 자동차 보험지정병원, 경찰 전문학교 지정병원으로 되어 있었다. 특히 성모자애병원은 미제 121명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임상검사 및 조직 검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한편 모자 보건에 대한 계몽운동이 잘 안되어 있어 분만은 거의 무료 봉사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모자 보건 계몽 및 무의촌 이동 진료를 계획하고 최초로 무료 이동 진료를 실시하여 인술을 베풀었다.

그 외에도 인천시 북구 가정동과 자매결연을 맺고 영세민 구후로 밀가루 20포와 매월 1회 순회 무료진료를 실시하였다. 이외에도 병고와 가난으로 사경에 처한 지역주민들을 무료로 인술을 베풀어 지역주민을 감격하였다. 1980년 3월에 대한병원 협회로부터 인턴 및 레지던트 수련 병원으로 지정을 받아 많은 수련의들을 배출하였으며 1981년 5월에 성모 자애 병원 부설 심신장애자 조기교육원을 개원하여 그 명칭을 엠마누엘 어린이 집이라 현판하였다.

이어 1982년 7월에는 인구증가와 더불어 환자가 급증함에 따라 병상을 증설하여 총 310병상을 확보하고 1983년 3월 1일부로 피부과와 신경정신과를 개설하였으며, 지하 1층과 지상 3층에 1층을 증축하여 보험계 및 중앙공급실 및 교수 연구실로 이용하고 있으며 1984년 3월에 안과를 개설하고 환자진료에 임하고 있으며 1985년 2월 지하 1층과 지상 5층 별관 준공을 하였다. 연탄가스와 중독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대형 고압산소기를 설치하여 인접 각 시군에서 발생되는 가스 중독으로 인한 환자의 사망 예방과 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85년 2월에 준공된 지하 1층 지상 5층의 현대식 건물은 임상검사실 및 스텝 연구실과 의학도서실등을 확장하고 동년 4월에 사회사업과를 신설하였으며 1986년 5월에 비뇨기과를 신설하여 병상수 310베드와 진료과목 16개과로 인천 직할시내 유일한 종합병원으로서 의료계의 일익을 담당할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성모 자애 병원은 사회적인 발전과 의료 정책 변화 등에 편승하여 1988년 2월 1일 기획실을 신설하고 동년 3월 1일 호스피스과를 신설하여 임종 환자까지도 돌보게 되었으며 1989년 2월 종합검진센타를 신설하고 동년 6월 전산실을 설치하였으며 1990년 9월 1일 안전관리과을 신설하였다. 1992년 7월에는 신관건물에 1층(130평)을 증축하여 405병상을 확보하고 오늘도 가톨릭 중앙의료원 이념 실천과 환자진료를 위한 교육, 연구, 진료를 사명으로 지역 사회의 의료 복지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성모 자애 병원에서는 의료서비스 개선을 위하여 교직원 소양교육도 실시하고 병원 부조리 사정추진 계획의 일환으로 환자들의 불편과 불만을 스스로 시정하고 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보다 나은 양질의 진료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환자 불편 불만 신고센타를 설치 운영하는 한편 원내 1층 외래 및 각 병동마다 환자 불편 불만 신고함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내원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보다 나은 진료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전교 직원 및 환자들을 대상으로 쓰레기 줄이기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으며 쓰레기 줄이기 운동전개의 일환으로 음료수병 및 캔종류, 꽃다발 등을 사양하는 홍보물을 현관에 계시하여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원목실의 수녀들은 환자들이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입원중에도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환자 방문과 상담을 하고있다. 말기 호스피스 환자들은 가정간호로 직접 가정방문을 통하여 마지막까지 인간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임종 후 사후처리까지 돕고있다. 사정의 여의치 못한 사람들은 임종방으로 모시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직장 내에서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직원을 위한 피정, 성지순례, 미사, 재교육, 예비자 교리 등 각종 신심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1955. 6. 27 성모 자애 병원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1963. 4. 9 성모 자애 병원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인수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403-016 인천시 북구 부평 6동 665/ 전화 032)510-5500/ 모사전보 032)510-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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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자애원 (예수성심시녀회의 복지시설) - 1998. 5. 27일 예수성심시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가난한 이들안에 예수성심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라"는 창설자 신부님의 정신과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예수성심의 사랑을 나누어 그들이 삶의 기쁨과 구원에 희망을 가지고 사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우므로써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 하고자 한다.

1936. 2. 18 성모 자애원 설립 (예수성심시녀회의 복지시설)

1977. 1. 28 법인설립 허가변경 "사회복지법인 성모자애원" (예수성심시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790-039 포항시 남구 대잠동 270-2/ 전화 0562)72-0586/ 모사전보 0562)82-7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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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자애원 (나눔지 67호 3쪽) - 1985. 10. 5발행

성모자애원의 설립은 1962년 개신교 신자가 개원하여 운영하던 중 다시 불교와 개신교를 넘나드는 파란을 격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폐쇄위기에 있는 자애원을 가톨릭 사회복지회가 85년 8월에 인수하였다. 성모자애원에는 6개동의 집이 있다. 한동은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5개동에 5세-18세 70명의 아동이 살고있다. 2-3개의 방과 마루, 화장실로 이루어져있는 각 집에는 연령, 성별로 나누어 한집에 10-15명의 아이들이 잠을 자고 공부를 한다. 아이들에게 특별한 질병은 없지만 영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병에대한 저항력이 없다. 성모자애원의 운영은 서울시에서 지원과 신자들의 기부금과 수녀회의 도움으로 아이들의 생활과 교육을 돌보고 있다.

1962. 성모 자애원 설립 (나눔지 67호 3쪽) - 1985. 10. 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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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자애 보육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처음에 한 개인에 의하여 1962년 6월 16일에 설립하여 운영되어 왔으며 1971년 12월 20일 도봉구 상계동으로 시설이전을 하였다. 시설도 부족한데다가 수차에 걸쳐 운영진이 바뀌면서 성장과정 어린이들에게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어 서울시에서 가장 낙후된 환경과 시설로 지목, 폐원 위기의 어려운 형편에 이른 것을 서울 가톨릭 사회복지회에서 직접 인수하여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운영토록 주선하였다.

1985년 2월 차영자(요한) 수녀와 김정자(쁘로따시오) 수녀, 김경숙(마리아) 수녀가 파견되었으며 한달 후인 3월 김용자(아가다) 수녀가 파견되었다.

1985년 1월 31일 58명의 어린이를 인수하였다. 수녀들이 처음 파견되어 갔을때 다 쓰러져가는 몇 재의 붉은 벽돌집이 있고 그 안에는 문도 없고, 눈이나 비가 오면 화장실이 넘쳐 오물은 방안까지 스며들고 마당은 수렁이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보다 더 슬프게 만드는 것은 어린이들의 얼굴 표정에서 감정을 찾아볼 수 없고 차갑고 굳은 표정이었다. 정박아로 특별 치료와 교육이 필요한데도 방치되어 있는 어린이들, 간염에 걸려있는 어린이가 무려 30명이 넘고 게다가 3명은 결핵을 앓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있었다. 간장, 고추장, 된장부터 구걸해야 하는 형편에 어린이들에게 영양가있는 음식을 마련해 준다는 일은 꿈만 같았다. 수녀들은 동분서주 하며 은인을 구하였다. 원아들에게 공부할 수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전에 원장 사택을 개축하여 도서관을 만들어 주었다. 신학생들도 고락을 함께 해주며 어린이들의 학습지도를 해주었다. 이렇게 겨우 자리가 잡혀가는데 7개월만에 성모자애원은 무주택 주민을 위한 택지개방 지역로 묶여 철거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간의 줄기찬 노력과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과 격려가 있었다. 3년간의 가건물 생활, 천막 생활 끝에 비로소 1987년 여름 현재의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었다. 성모자애원에는 가정교육의 하나로 웃어른 공경, 올바른 마음과 몸가짐, 바른 언어 사용, 책임감있는 생활, 질서있는 생활, 양보하는 생활을 가르치고있다. 그 외에도 학습지도, 지속적인 신앙교육, 정서교육을 시키고 상담도 해주고 있다.

수녀들의 기도와 사랑, 후원자들의 알뜰한 보살핌과 자원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봉사는 결국 어린이들의 냉랭한 가슴안에 서서히 따스함이 스며들어 있고 그들안에 사랑의 싹을 트일 수 있었다. 수녀들은 봉사자 어머니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역할 등의 교육이 있다면 부지런히 좇아가 교육을 받는다. 성모자애원은 매달 첫째 주 월요일에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보육원 출신자 세쌍의 혼배가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였다.

원장 차요한 수녀는 성모자애원의 고아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여 고운 문화재단에서 제정한 제 1회 고운봉사상을 수상하였다. 원아들이 학교에서 시설 아동이라는 것을 다른 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학교에서 해 오라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주고 있다. 그렇게 하기까지는 원아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도시락 반찬에도 마음을 쓰고 있다. 많은 은인들과 수녀들의 정성으로 현재 원아들은 모두 건강하고 명랑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1962. 6. 16 성모자애 보육원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1985. 2. 1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성모자애 보육원을 인수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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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자애 장애인 종합복지관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사회복지사업법 제 2조의 각호의 규정에 의한 요보호아동, 탁아시설, 노인복지시설 및 장애자 기타 요보호자를 수용하고 이들을 자활 자립할 수 있도록 선도함에 있어 이에 수반되는 사회사업을 그 목적으로 1985년 4월 12일에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에 설립하고 서울시가 맹인들을 위해 새로 조성되는 맹인촌의 운영권을 가톨릭 서울교구 사회복지회에 맡기고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인수하였다.

맹인들이 대우빌딩 뒤 힐튼 호텔과 주차장 일대 양동에서 거주하면서 인근 남대문과 서울역에서 구걸을 하였다. 맹인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 때문에 집이나 방을 임대받기가 어려우므로 양동에서 맹인들 외에도 넝마주이, 지체장애자, 윤락여성들의 살고있었다. 정부에서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하여 남대문과 서울역 맞은편 등지에서 구걸하던 맹인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사회복지 시설이었다. 보사부에서 상계동 856번지의 건물을 착공하여 1985년 4월 15일 완공하였다. 서울시가 맹인들을 위해 새로 조성되는 맹인촌의 운영권을 가톨릭 서울교구 사회복지회에 맡기게 되었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성모자애재활원을 맡게된 동기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으로서 103위 성인을 주심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뜻이 우선이고, 200주년 모토가 "이 땅에 빛을" 인데다가 맹인 개안수술도 있어서 아주 걸맞는 사명을 띄게 된다는 데에도 의의가 있었으며 수녀원에서 거리가 가까워 수련자들의 교육에도 좋다고 사료되었기 때문이다.

이 성모자애 재활원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장애자들에게 가족 단위로 혜택을 주는 전용주택이었다. 부실공사를 하여 시공자 측에 개수를 요구했으나 쉽게 보수공사를 해주지 않아 준공운 차일 피일 미뤄지게 되었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는 1985년 4월 12일 김복례(마르타) 수녀와, 이영옥(요셉) 수녀, 차희연(로즈마리) 수녀를 파견하였다. 한편으로는 이옥보(야고보) 수녀와 조정자(야고보) 수녀를 일본에 파견하여 그곳에 맹인시설을 돌아보게 하였다. 1985년 4월 15일 서울 맹인자립회 회원 78세대 260명이 입주하였다.

지상 3층, 지하 1층의 붉은 벽돌 연립주택 식의 78세대 260명이 가족단위로 생활할 수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꾀 쓸만해 보였지만 그 내부는 하자 없는 부분을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건물 내부에 방음 방수처리가 안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지하에도 하수구가 없어서 곳곳에서 새어나온 하수가 고이게 되면 영락없이 모터나 인력으로 물을 퍼내야 하는 실정이었다. 부실 공사로 누전이 되었으며 물이 새어 맹인들의 이부자리가 전부 젖기도 하였다. 성모자애 재활원 주변지여이 아파트 단지 조성으로 인한 주거 밀집 지역으로 개발되면서 인근 주민들이 본 시설에 대해 이전을 촉구하고 민원사례가 쇄도하였다.

성모자애 장애인 종합 복지관의 수용보호는 3년간의 직업재활교육(점자, 안마, 침술 등의 각 기능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자격증을 취득하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립을 도모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었으나 교육을 할 공간이 너무 협소하고 공사 시초부터 부실 공사로 인하여 벽의 균열, 누수, 전기 누전 등 하자가 많고 화재 등 재해의 발생소지가 높고, 시설 낙후로 불가피하게 외곽으로 이전해야 될 상황에서 시 구청의 도움을 받아 외각 토지를 물색하였으나 자연녹지, 자연보호, 농지 전용지 등으로 적절치 않아 결국 군사 보호지역이나 상대 녹지인 현 소재지를 1992년 3월에 계약하고 6월에 상계동 856번지를 매도하고 1993년 11월 율현동으로 이전하였다. 1991년 1월 한국 맹인직능개발센타 신축 추진 발대식을 갖고 1993년 12월 10일 기공식을 하였으며 1994년 3월 14일 신축공사 착공식을 하여 1997년 1월 28일 수용시설에서 이용시설로 그 용도를 변경하였다.

1985. 4. 12 성모 자애 장애인 종합 복지관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1997. 1. 28 수용시설에서 이용시설로 성모 자애 장애인 종합 복지관 용도변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139-202 서울시 노원구 상계2동 726-4/ 전화 02)937-6900/ 모사전보 02)937-6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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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조기교육원 (가톨릭사회복지회보 창간호, 52쪽) - 1993년 여름 발행

서울 금호동 성당 옆에 있는 성모조기교육원은 특수교육이 절실한데도 비싼 교육비 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영세민 가정의 장애아동을 위해 서울 대교구 사회복지회와 금호동 본당이 공동으로 마련하여 1992년 5월에 개원하였다. 성모조기교육원은 통학이 가능한 만4세-6세의 정신지체, 자폐아, 발달장애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 교육내용은 언어, 신변처리, 인지, 사회생활, 근육운동과 적응훈련으로 진행하고 있다.

1992. 5. 1 성모조기교육원 개원 (가톨릭사회복지회보 창간호, 52쪽) - 1993년 여름 발행

성모조기교육원 연락처 : 02)238-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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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조산소 (나눔지 3호 2쪽) - 1977. 2. 22발행

성모조산소는 1972년 11월에 성남시 어머니들의 모자보건사업을 위해 시작되었다. 집단이주를 할 철거민들이 정착하기 까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애로가 많았으나 그 중 가장 큰것은 의료혜택이었다. 특히 높은 출산율과 저임금, 그리고 산후처리의 불충분으로 인해 신생아 사망율이 아주 높았다. 기아에 못이겨 자기 아이를 닭으로 착각하고 삶은 1972년 2월에 있었던 그 일은 우리모두를 경악케 했었다. 이러한 성남시의 비참한 모자를 위해 성체회의 두명의 수녀가 전세방을 얻어 조산소를 시작한 것이다. 산모와 아기와 함께 침식을 하며 밥과 빨래시중은 물론 가정분만때는 보호자 역활도 해야 한다. 굶주림에 못이긴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지 않아서 죽어가는 아기를 발견하여 임종을 돕는가 하면 한밤중에 임신중독산모가 찾아와 사정을 할 때면 모든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일을 시작하고는 한다. 새생명의 비극을 막기 위해 "행복한 가정운동"도 하고 청소년 상담도 하며 산모와 어린생명을 돌보고 있다.

1972. 11 성체회 수녀들이 성남 성모조산소를 운영 (나눔지 3호 2쪽) - 1977. 2. 22발행

성모 조산소 (성체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평택본당 안 세시리아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1970년대 초 경기도 광주 대단지로 불리던 지금의 성남시에서 폭동이 일어났었다. 서울시의 인구분산 계획의 일환으로 남한산성 밑자락을 불도저로 밀어내고 비탈진 지형위에 서울의 청계천 위에 밀집되어 살던 판자촌 주민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땅 20평과 천막 1개를 주어 이곳으로 이주시켜 놓은 것이다.

이곳으로 옮겨온 노동자들의 하루 생계터전은 청계천 주변의 노상이었다. 성모 조산소의 목적은 모자보건 사업을 위해서 였지만 그곳의 실정에 맞게 하다보니 피치못하고 의료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수진동 성당을 무대로 신자중심의 가족계획 상담실을 운영하면서 임산부들의 전인교육을 위해 힘썼고 그에따른 문제점들을 발견하다가 보니 전적인 의료봉사를 하게 된 것이다. 어떤 임산부는 낙태경험이 11-13번까지 있었다. 그 임산부는 입이 돌아가고 눈은 초점이 흐려지고 낙태의 후유증으로 건강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으며 영양실조에까지 겹쳐 고생하고 있었다. (당시는 지금 같은 시술이 발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만 하여도 성남에는 전문의가 거의 없었다. 일명 무자격 의원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일반조산소에도 낙태시술을 위법으로 하고 있었다. 성체회 수녀들은 그곳의 조산원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밤중에 왕진이 들어와 찾아가 보니 언덕을 넘어 비탈길 중턱에 움막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촛불 하나로 부엌과 방한칸을 비추어주고 있는데 방으로 들어가 보니 너무 비좁아서 산모는 대각선으로 누워있고 비지땀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하였다. 이상은 없는것 같은데 초산에다 가난하여 영양이 없고 두려워 겁을 많이 먹은것 같았다. 포도당 주사를 넣어주고 순산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부엌도 구차하게 이를데 없었다. 그 뒤 가톨릭 구제위원회에 의뢰하여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를 얻어다가 가가호호 방문하여 나누어주곤 하였다.

또한 무료진료를 주1회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광주대단지가 성남市로 승격된 이후 안정이 되면서 조산소 사업을 마치고 잠시 유아원으로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1989년 부터는 현재의 인보의 집 할머니들을 위한 무료양로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1977. 성모조산소 새로운 건물로 이전 (성체회의 복지시설)

1989. 5. 9. 성모조산소 양로원으로 용도변경 (성체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설립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 18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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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병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6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하고있던 제기동 성모병원이 차츰 번창하여 입원실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늘어나므로 홍순덕 이렌 수녀, 의사인 홍순자 아드리아 수녀, 이계 요세파 수녀는 1961년 5월 15일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여 가톨릭 의대 부속병원으로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70년 10월 15일에는 강원도 원주시에 분원을 개원하여 빈곤하고 불우한 벽지의 형제들에게 의료혜택을 주고 원성군 내 산간벽지를 순회하며 무료진료를 실시하는 등 사회복지사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75년 3월 연건평 4천평, 지하 2층, 지상 10층의 신관기공식을 가진 후 76년 11월 6일 당시로는 청량리 일대에 제일높은 건물로 청량리를 상징하는 새 병동을 준공하기에 이르러 250개의 병상으로 확장하였다. 종합병원, 부속병원으로서의 모든기능을 갖추고 발전시켜 나가면서 개원 20년 사이에 모두 17개의 임상과를 두게 되었다.

한편 의료사업 외에도 원내봉사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있는데 1985년 7월 5일 병원장을 고문으로 하여 발족시킨 자선회는 가난한 이웃과 고통받는 이들에게 힘이되어 준다는 취지아래 매월 작은 둥지회, 외방선교회, 결핵돕기회, 늘푸른 나무, 해성영아원 등을 돕고 있으며 또한 사정이 어려운 병원직원들에게도 도움을 주고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선회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년에 한 두 번씩 바자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1978년 7월 1일에 세워진 장학회는 구내매점 운영으로 얻어지는 이익금을 기반으로 장학금 재원을 확보하여 그해 8월 19일에 장학금을 지급한다. 인천 혜성보육원의 원아들과 쌘뽈양로원의 노인들을 위해서도 무료진료를 하고있다. 또한 1986년 부터는 애덕의 집 지체부자유자들의 진료를 무료로 담당하고 있으며 성직자 및 수도자들에게도 많은 혜택을 주고 인근의 불우한 주민돕기에도 솔선수범하고 있는데 무료입원 및 통원환자는 월 평균 10-20명에 이르고 있다. 성바오로 병원은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니만큼 환자의 질병뿐만아니라 영적 간호의 중요성도 인식하여 1973년 7월 16일 병원내에 원목실을 신설하여 가톨릭 병원으로서의 본연의 사목활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1986년으로 개원 25주년을 맞은 성바오로병원은 단순히 육신의 병을 치료해주는 병원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복음의 증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61. 5. 15 성 바오로 병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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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보육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95쪽)

한국 천주교회의 고아구제사업은 교회 초창기에서부터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명도회(明道會) 등의 평신도 단체에 의해 시작되었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부터는 더욱 체계적인 교회의 사업으로 정착되었다. 이에 따라 성영회(聖櫖會)가 1854년도에 설립되어 고아들을 양육하였는데 특히 메스트르(Ambroise Maistre, 李 1808-1857) 신부는 성영회 사업을 확고히하고 발전시키는데 힘썼다. 그는 보육원 건물을 세우고자 희망했으나 그당시에는 아직도 박해가 극심하던 터라 주로 신자들의 가정에 위탁, 양육 시켰다. 그뒤 병인박해로 일시 중단되었던 교회의 고아구제사업은 1880년 블랑(Jean Blanc 白圭三, 1844-1890) 신부에 의해 재개되었고 1884년 그가 조선교구의 제7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자 그는 고아구제사업을 우선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3월 15일, 서울 곤당골(현 을지로 1가)에 있는 기와집을 구입하여 [천주교고아원]이란 이름으로 보육원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고아원이었다.

블랑 주교는 고아들의 양육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에 수녀를 청하여 마침내 1888년 7월 22일, 4명의 수녀가 최초로 서울에 도착하기에 이르렀다. 도착 직후 수녀들은 정동에서 약 한달간 머무른 다음 종현에 있는 기와집 두 채를 고쳐 1888년 9월, 정동의 수녀원과 곤당골의 고아원을 모두 옮기고 9월 8일, 정식으로 [천주교고아원]을 인수받아 수도회 부속사업으로 경영하게 되면서 원장에 자카리아(Zacharie Heurtault) 수녀가 취임하였다. 이때의 고아의 수는 남아가 80명, 여아가 65명이었다.

수녀들의 보살핌으로 원아들이 급증하여 150명이 넘게되자 1889년, 목조 2층 원사와 평가(平家)를 신축 낙성하였는데 이 원사가 완성된 후로는 이곳에서 남자 아이들에게는 한문과 경문을 그리고 돗자리 짜는 법과 기타 여러가지 실업을 가르쳤고 여아들에게는 바느질과 가사를 가르쳐 구제 및 교육계몽사업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많은 어린이들이 들어왔지만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병이나 굶주림의 빈사상태에서 왔기 때문에 당시 수녀원의 지도신부였던 코스트 신부의 대세를 받고 사망하는 어린이의 수도 또한 많았다. 수녀들은 격무와 재정난 등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정성껏 고아들을 돌보았는데 주일마다 대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고아들의 깔끔한 옷차림과 성당에서의 나무랄데 없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였다. 또한 아이들은 수녀들로부터 성가를 배워 미사 때 노래하였는데 그 노래 소리가 마치 프랑스의 성가대가 부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1901년 부터는 운영상의 여러 가지 사정을 참작하여 신입 남아들의 수용을 중지하고 여아들만 돌보게 되었다. 특별한 수입원이 없던 당시로서는 존타그부인이 운영하고 있던 존타그 호텔(Sontag Hotel)에서 나오는 세탁물이나 외국인들의 세탁물을 해주고 받는 돈이 생활에 큰 보탬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정도 수도원과 고아원이 자리를 잡아 갈 때 스타니슬라 원장수녀가 별세하여 1910년 1월 1일에 제 3대 원장으로 가밀 수녀가 취임하였다. 가밀 수녀는 이후 33년간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든든한 기반을 닦아놓았다. 초기부터 샤르트르 본부와 프랑스 성영회에서 보내주는 보조금이 고아원 운영의 큰 부분을 차지해 왔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러한 외국의 원조가 끊기고 보조금도 1/3로 줄어들어 극심한 재정난에 이르게 되었다. 국내사정도 약화되어 쌀값 등 생필품 값이 크게 올라 생활유지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홍수 등으로 인해 더욱 크게 늘어난 고아들을 원하는 대로 다 받을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수녀들은 극도의 내핍생활을 해가며 한편으로 새 고아원을 짓기 위한 절약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하여 1925년부터 고아원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다만 얼마라도 건축비에 보태기 위해 1925년, 1926년, 1927년 세차례에 걸쳐 이틀씩 바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동안 40여년간 저축했던 돈과 수녀들과 고아들이 수공예품을 만들어 판 돈, 그리고 국내·외의 관대한 회사에 의하여 드디어 1926년 5월, 벽돌 3층으로 된 고아원 본원사를 신축 낙성하여 입주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녀들의 손에 의해 구호되고 양육된 고아의 수는 4.500명이 넘었다. 1932년에는 천주교고아원에서 천주교 보육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고아들의 수가 많아져 수용능력이 부족하게 되자 용산 삼호정(현 산천동)에 1만 8천원의 공사비로 3층의 보육원 분원 건물을 지어 1936년 7월 8일 라리보 주교의 주례로 강복식을 거행하고 50여명을 수용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소개령(疏開令)에 의해서 보육원을 옮기기 위해 1944년 겨울부터 하우현천주교회로 짐을 옮기고 아이들을 피난시키던 중 해방이 되어 다시 본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다시금 피난생활이 시작되었다. 1950년 7월 16일에는 수녀원과 보육원을 모두 인민위원회에게 접수당하고 수녀들은 식량과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고아들을 데리고 충무로에 있는 가정보육사범학교 건물로 옮겨갔다. 거기서도 다시 쫓겨나 필동에 있던 이범석 장군의 저택에서 얼마간 지냈으나 서울 탈환작전으로 필동일대가 불바다로 변하여 다시 명동의 본원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서울이 수복되어 안정되는가 싶었으나 12월 21일 중국 지원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다시 악화되었다. 이에 서울시 사회과의 지시로 10세 미만의 어린 고아들을 안양으로 소개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1951년 1월 20일 UN군 비행기의 오폭으로 안양에 소개되어 있던 50여명의 어린이들이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자 남은 아이들은 일주일 후 다시 서울 본집으로 들어와 지내면서 부족한 식량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 한편 1951년 1월 3일에 10세 이상의 아동들은 대구로 피난하여 성요셉식당의 유치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한편 전쟁 기간 중 서울에서는 영아원이 파괴되었으므로 전쟁전에 격리실로 사용하던 건물에 100여명의 전쟁 고아들을 수용하여 돌보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던 120여명의 아이들은 1952년 9월 1일, 대구시 대봉동 173번지에 원사를 신축하여 이사하였다. 이렇게 서울과 대구에서의 고생을 하던 당시에는 미군들의 원조가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파괴된 서울 원사를 신축하기 위해 1953년 가을에 공사를 착공하여 이듬해 10월 7일 축성하였는데 연건평 330평의 3층 벽돌집에 110명의 아이들이 입주하였다. 1954년에 용산에 있던 아이들이 다시 명동으로 합해지고 1957년 11월 7일에는 대구에 있던 아이들도 전원 복귀하였다. 1966년 9월 24일에는 명칭을 [천주교 성바오로보육원]으로 변경하였다. 1969년 9월 23일에는 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천주교쌘뽈유지재단으로 명의를 이전했고 아동복리시설 인가를 갱신하였다.

이처럼 숱한 역경과 어려움을 헤쳐오며 수녀들은 어린이들을 사랑과 인내로써 양육하고 이들이 떳떳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돌보아왔다. 이미 보육원 초기부터 원내에서는 필요한 공부와 수예, 재봉 등을 가르쳐 왔고 1930년경 부터는 좀더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여 유치반, 초등반, 중등반 등으로 나누어 일반 학교와의 유대관계를 맺어나갔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학령기에 달한 모든 아이들을 계성국민학교로 통학시키고 가능한 대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교육시키려 하였다. 또한 적령기에 달하면 교우가정에 혼인을 시키기도 하고 자립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은퇴한 후에도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곤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아보육사업은 차츰 방향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사회가 안정되면서 고아의 수는 점차로 줄어들었고 대신 양로사업이나 정신 박약아, 장애인 등과 같은 특수 사회사업에의 요청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변천 및 요청에 따라 사업 전환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남아 있던 81명의 원아들 중 9명은 연고자에게 인도하였고 3명은 국내 입양, 4명의 국외 입양, 가출 2명, 그리고 63명은 다른 사회복지기관으로 나누어 이주시켰다. 이렇게 하여 성바오로보육원은 1977년 9월 6일 폐원되었다.

1885. 3. 15 블랑신부는 '천주교 고아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95쪽)

1932. '천주교 고아원'의 명칭을 '천주교 보육원'으로 변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95쪽)

1966. 9. 24 '천주교 보육원'에서 '천주교 성 바오로 보육원'으로 명칭을 변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95쪽)

1977. 9. 6 '천주교 성 바오로 보육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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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 - 1998. 5. 17일 성 바오로청소년의 집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가출 청소년이나 부모의 결별이나 중대한 이유로 양육이 불가능한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이 시급하였기 때문에 1990년 성 바오로 애덕원장이 경북 군위군 부계면에 설립하였다. 교호시설인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은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부량아동을 입소시켜 그들을 선도하고 건전한 국민으로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입소 대상은 만7세에서 15세 사이의 남자로, 일시보호소를 통해 주무관청에서 의뢰한 자와 긴급히 보호하여야할 필요가 있는 요보호 아동이며, 만 19세가 되면 퇴소함을 원칙으로 한다.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은 우선 개인과 가족에 대해 개인 및 집단 상담을 통해 가정문제를 예방 치료하며, 초, 중등과정은 학교를 보낸다. 또 가족기능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름, 겨울방학 때마다 가정생활을 실습시킨다.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의 말씀에 바탕을 두며, 문제 청소년 발생의 예방, 근면한 생활로 자립정신을 함양시켜주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육성하여 복지를 증진시켜 보다 밝은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미래를 지향한다.

1990.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 설립

소재지 : 우 716-830 경북 군위군 부계면 가호2동 530-1/ 전화 0578)82-2834/ 모사전보 0578)82-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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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 봉사자의 집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6쪽)

부산 성분도병원에서는 1975년 1월부터 '구호과'를 '사회봉사과'로 바꾸고 염일례 그라치아 수녀를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무료진료환자 중에 많은 이가 황령산 기슭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생활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를 답사하였다. 전포동 황령산 기슭에는 부산시에서 거두어 온 쓰레기가 쌓여있고, 양주변에 거지, 넝마주이, 노무자, 전과자, 결핵환자, 정신병자, 알콜중독자, 나환자들이 사회에서 소외된 채 천막이나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들은 식수마저 해결하기 어려운 인간 이하의 상황에 있었고, 버려지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은 우선 그들을 방문하여 인간적인 만남을 시작하였으며, 서서히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여 벗이 되어갔다. 마침내 공동묘지 주변에 10평의 천막을 치고 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돌보았다. 염일례 그라치아 수녀와 김옥순 비아 수녀가 수련원 청원자들과 함께 수녀원에서 출퇴근하였다. 좀 후에는 7세 미만의 어린이들을 오전에 돌보고 오후에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목요일 오후에는 성분도병원의 무료 이동진료반의 봉사로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이 어린이집은 1년 6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수녀들과 청원자들은 버려진 어린이와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공동묘지 사잇길을 오르내리면서 어린이 교육과 급식, 환자방문, 빨래, 집안정리, 치료 등의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 봉사활동은 1977년, 황령산 공동묘지지역 재개발 계획에 따라 공동묘지와 무허가 판자촌이 철거당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수녀들은 철거민과 함께 문현동 산동네로 자리를 옮겨 개천가에 25평짜리 판잣집을 매입하고 1977년 10월 29일 염 그라치아 수녀와 여숙련 헬레나 수녀가 주축이 된 '성분도 봉사자의 집'을 열었다.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 속에 가난한 자로 살면서 그들에게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와 기쁨과 평화를 되찾아 주는 편한 이웃이 되었다. 수녀들은 수련원 청원자들과 실습기 수련 수녀들의 협조로 버려진 임종자들을 돌보고, 탁아소를 운영하며 이웃들의 시급한 일손이 되어줌으로써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또한 그들의 일터를 함께 찾고 복지시설과 공공기관에 드나들면서 사회의 보호 손길을 트는 일도 수녀들의 몫이었다. 이와 함께 성 분도병원의 무료 이동진료와 예비자교리, 미사 등 정기적인 모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점차 이 지역에 고층아파트와 큰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자 봉사의 영역과 성격을 조금씩 바꾸어 탁아소 및 주민봉사와 아울어 상담과 기도를 주로 하게 되었다. 부산은 물론 멀리에서도 매일 10-30여 명의 방문자들이 찾아와 상담을 하였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머물며 성체를 모신 경당에서 성체조배, 성서묵상 등 개인기도를 하며 쉴 수 있었고 기도모임을 통해 서서히 용서와 화해, 치유를 체험하였다.

1982년 8월, 장마와 폭우로 개천이 넘쳐 판잣집이 무너녔지만 그 자리에 같은 규모의 집을 새로 짓고 11월 4일에 축복하였다. 이 집은 장기 휴양자와 임종자들,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머무는 쉼터가 되고, 탁아소와 학생들의 독서실, 기도의 집이 되며, 봉사자들에게는 선업과 나눔의 자리가 되고 있다.

1976. 2. 24 황령산 '분도어린이집' 개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6쪽)

1977. 황령산 어린이집에서의 어린이교육과 급식, 환자방문, 빨래, 집안정리, 치료 등의 봉사는 판자촌의 철거로 폐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6쪽)

1977. 10. 29 '성 분도 봉사자의 집' 개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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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 빛둘레집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7쪽)

성분도빛둘레집에는 탁아소와 국민학생들을 위한 공부방이 있다. 1987년 이 지원을 설립할 당시 당감동 화장막 뒷산 골짜기는 전과자들의 무허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수녀들은 이곳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봉사할 것이 있지 않나 생각되어 1987년 9월 조그만 전셋집을 얻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폭우로 집이 무너지자 옆의 공터를 빌려 천막집을 건립하여 탁아소와 독서실을 마련하고 '성 분도 빛둘레집'이라 이름하고, 축복식과 개원미사를 봉헌하였다. 봉사자들이 놀이터를 만들고, 가야 본당 레지오단원들의 협조를 받아 계단과 마당을 조성하였다.

현재 이곳은 인근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는 등 도시 계획으로 인해 철거될 위기에 놓여 있다.

1987. 9 '성 분도 빛둘레 집'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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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 어버이 집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8쪽)

현시대에는 노인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는 수도자나 성직자의 부모중에 고령이거나 병환 중인데 돌보는 이가 없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들만이라도 어떻게 도와 드릴 수 없을까하여 노인들을 위한 소박한 집을 구상하게 되었다. 우선 본원에 인접해 있는 집한채를 사서 '성 분도 어버이 집'이라 이름하고 1988년 7월 26일 성 요아킴과 안나 축일에 축복하고 문을 열었다. 아직까지는 수도자나 성직자의 친부모는 모시지 못하였고, 돌보아주는 이 없는 노인들 특히 위급한 행려환자 할머니들을 모시어 돌보고 있다. 현재 성 분도 어버이집에는 20명의 할머니가 살고 있는데, 거의 60세 이상의 할머니들로서 가나과 질병으로 신변처리가 거의 불가능하고 생계아 어려운 중에 임종을 기다리던 상태에서 이웃이나 천주교 신자들을 통해 이곳에 오게 되었다. 이들은 호적에응 가족이 기록되어 있어 시립양로원 등 정부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딱한 처지에 있었다. 다행히 이곳 어버이집에서 지내는 동안 건강상태가 좋아지는 할머니들이 늘어나서 분도유치원 뒷편에 작은 집 한채를 더 사서 '보금자리'라 부르고 중환자 할머니들을 따로 모시게 되었다. 성 분도 어비이 집은 설립 준비부터 현재까지 염일례 그라치아 수녀가 책임을 맡고 있으며 수녀들의 간헐적인 협조를 받았다. 1989년 2월부터 지금까지 진정애 마인라드 수녀가 함께하고 있고, 1991년 6월부터는 김해숙 프리스카 수녀도 돕고 있다. 또한 이곳은 실습기 수련수녀 1명 혹은 2명이 파견되는 훌륭한 수련의 도장이기도 하다. 어버이집에는 치매증 때문에 방금 식사를 마치고 상을 물려 놓고도 들어서는 방문객에게 "나에게는 밥 안준다"며 호소하는 할머니, 한밤중에 빨래를 한다며 방망이로 큰 소리를 내는 할머니, 밤마다 아들이 죽었다며 장판과 벽지를 찢으며 무덤을 만드는 할머니, 병원 한번 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된 할머니, 누군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임종이 가까워도 마음이 편치 않은 할머니……들이 있다. 가난과 질병 때문에 외롭고 춥고 배고파야 했던 지난 날이, 이해받지 못하고 상처받고 서러웠던 일들이 때로는 임종이 가까워도 풀리지 않는 안타까움을 겪기도 한다. 수녀들은 이들의 마지막 순간까지 손발이 되어 줄 뿐 아니라, 기구한 삶을 살아온 할머니들이 자신의 한편생을 새로운 눈으로 되돌아보고 정리 하면서 용서를 받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며 모든 이와 화해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이승을 하직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함께 아파하며 함께 울기도 한다. 수녀들은 이곳의 할머니들을 친부모 모시듯 섬기면서 갖가지 가시밭길을 걸어온 그들에게서, 또 그 생애에서 인간의 아름다움과 존엄함.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와 구원을 깨달으며 고달픔도 잊고 늘 기쁨과 감사에 벅차한다.

1988. 7. 26 성 분도 어버이 집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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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 장애자 직업 재활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87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은 1985년 8월, 임시총회에서 재활병원이나 재활원을 세우기로 뜻을 모으게 되었다. 마침 1985년 9월에 서울시에서 장애자 직업 재활 시설 건립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보사부에 설립계획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1985년 11월 19일, 염보현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장애자 복지시설 건립 지원계획을 통보받게 되었다. 장애자재활원 개원 준비를 위해 1986년 2월부터 전정숙 체칠리아 수녀를 책임자로 3월부터 이경희 알비나 수녀와 8월부터 이현숙 안나마리 수녀가 임명되었다. 1986년 5월 12일,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진우리 661번지에 매입해두었던 부지에 서울시의 경제적 지원과 소사땅을 매각한 금액으로 연건평 1,250여 평 규모의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을 기공하였다. 그리고 1987년 2월, 임남훈 그레고리아 수녀, 이정모 베닉나 수녀, 이영자 요한닛다 수녀, 진말둘 프란치스까 수녀, 이 알비나 수녀, 이 안나마리 수녀, 송경자 마리데레사 수녀가 서울 분도병원에 기거하면서 재활원의 준비와 기초작업을 하였다. 이들은 그 해 6월 28일에 곤지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성 분도 직업 재활원은 1987년 5월 25일, 정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앗다. 1987년 7월 2일에 준공식을 갖고 7월 11일 성 베네딕도 대축일에 개원식을 가졌다. 이 재활원은 "신체적 결함을 지닌 장애자들에게 심성개발과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키워주고, 직업 자립성을 증진시켜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설립 이념에 따라 구체적으로 직업재활, 사회교육, 심리상담을 도모하고 원생작품 직매장과 기숙사를 운영한다. 직업 훈련 과목은 도지기공예과, 직조공예과, 양재과, 자수과, 편물과, 제도과, 전산과이며, 과별로 전문교사들이 지도하고 있다. 그밖에 심성개발훈련, 신앙교육, 교양문학, 교양영어, 검정고시반, 요육훈련, 음악, 미술 등의 일반 교양과목과 다양한 수련회들을 병행한다. 의료재활을 위해 작업치료실과 운동치료실 시설을 갖추고, 직업치료사가 상주하며 치료하고 있으며 전문적인 의료재활을 위하여 강남성모병원의 재활의학과, 재활심리학과, 신경내과 등 전문의사들의 지원을 받아 매월 1-2회 이상 정기진료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 교육비는 전원 무료이며, 기숙사는 여자 기숙사만 운영되는데, 기숙사비도 생활보호대상자의 경우는 무료이고, 일반장애자에게는 실비만 받고 있다.

원생 작품바자회는 1988년 5월 20-21일 처음으로 개최한 이래 해마다 열고 있으며 1988년 7월에는 개원 1주년을 맞아〈성 분도의 참벗들〉이란 재활원 회보를 창간하였다.

1989년 5월 10일에는 서울 진로 도매센터 지하 1층에 2년 계약으로 상설매장을 마련하여 재활원교육을 수료한 장애자의 생활자립을 돕기 위해 그들의 작품을 전시 판매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작품을 계속 충분히 공급할 수가 없어 계약 2년후인 1991년 4월말에 매장운영은 그만두었다.

1988년 8월 31일에 제1기생을 배출한 이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의 벽을 넘어 어엿한 직장인이나 사회인으로 자리잡은 졸업생들이 늘고 있다.

1987. 7. 11 성 분도 장애자 직업 재활원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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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 치과의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9쪽)

1965년 수녀원 새 건물이 부산 광안동에 준공된 후에도 부산 초량동에 있는 성 분도 병원에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그대로 남게 되어 광안동 새 건물에는 공간의 여유가 있었다. 또 수녀원 주위에 점차 주택들이 들어서자 이웃을 위한 봉사를 모색하게 되었고, 초량 성 분도병원을 모체로하여 광안동에서도 의료봉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1969년 8월 22일, 작은 규모로 내과, 소아과, 치과를 개설하여 의원을 열었는데 이것이 바로 성 분도 치과의원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1966년 2월부터 현 변전소 자리에 임시 치과진료소를 차려 남복순 골룸바 수녀가 봉사를 시작하여 치과 전문의 2-3명과 수련원 자매들의 봉사로 인근 주민들의 구강보건에 기여해오고 있었다. 당시 성당 아래층과 수녀원 한 모퉁이를 이용하여 병원 개설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 졌다. 그러나 개설 2년반만에 내과, 소아과를 폐쇄하고, 치과만을 유지하면서 '성 분도 치과의원' 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1978년 5월 31일, 부산직할시장으로부터 의료기관 개선신고필증을 받았다. 이 의원은 시작 때부터 10여 년 간, 남 골롬바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로 기틀을 닦았다. 인근 이웃에 대한 의료봉사는 물론 수도가족과 성직자, 다른 수도회 수도자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81년 12월 8일, 현재 건물로 이전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78. 5. 31 성 분도 치과의원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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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교회와 역사 271호 9쪽) - 1997. 12. 25발행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여러분을 받아들이거든 여러분에게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거기 있는 병든 이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다가왔습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시오" (루가 10,8-9).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치유적 봉사직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내려 준 복음 전파의 사명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Sisters of Charity of St. Vincent de Paul)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St. Vincent de Paul)와 성 루이즈 드 마리악(St. Louise de Marillac)의 '자비'의 정신을 본받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을 목적으로 1841년 3월 25일 독일의 파데르본에서 설립되었다. 그 후 150여년 간 교회 공동체 내에서 봉사와 자비의 사명을 충실히 지켜온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는 1965년 한국에 진출하여 의료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초기에는 거의 모든 의료시설들을 독일에서 지원받아야 할 정도로 재정이 열악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도직 활동을 꾸준히 전개한 결과 1990년에는 독일의 모원에서 독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고, 현재 사도직 활동 범위의 확대와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섬겼던 빈첸시오 성인의 모범과 정신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19세기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새롭게 시작되는 공동체에 영적인 원동력이 되어 이후 끊임없는 영감을 주었다.

빈첸시오 성인은 '사랑의 딸들'을 위한 규칙서를 쓰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공경심과 섬김'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애덕의 정신을 이어받은 회원들은 활동의 근본 동기를 예수 그리스도에 두고, 예수를 섬기고 공경하는 것을 활동의 목적으로 삼아 교회와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며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묶인 이들에게는 해방을 알렸으며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하느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기 위하여(루가 4,18-19) 우리에게 파견되셨던 분이다. 소비주의와 물질적 쾌락주의에 빠져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신을 거부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삶의 의미와 내적인 생활을 갈구하면서 하느님을 찾고 있는 극적인 현대 사회 속에서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들은 복음 선포자로서의 사명을 깊이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회원들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헌신과 냉철한 현실 참여로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하려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모토로 하고 빈첸시오 성인의 영성, 곧 가난하고 불쌍한 병자, 임종자, 극빈자, 수인(囚人), 고아, 미혼모, 노약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자비'를 핵심적인 생활 지침으로 하여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한국 진출과 변모

1960년대 초 한국의 실정은 전후 복구 처리만 급히 마무리한 채 식량과 약품을 비롯한 여러 물자들을 거의 대부분 외굴의 원조에 의지하던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는 서울에서 불과 40㎞가량 떨어진 수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변변한 진료소조차 하나 없었다. 이에 초대 수원교구장 윤공희(빅토리노) 주교는 보다 원할한 전교를 위해서는 교구내에 병원 사도직을 수행하는 수도회가 설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중 1963년에 주로 독일 내에서만 활동하던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를 초청하게 되었는데 이미 수녀회 내에서도 선교 사업을 모색하고 있었던터라 이 일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이듬해인 1964년 파데르본 모원에서는 수원시 팔달구 지동 93번지 일대에 수녀회 부지를 매입한 후 지원자를 모집하여 그 해 11월 6일에 최영자(도미니코), 손경자(헬레나), 양복모(마리아) 등을 포함한 9명의 첫 한국인 지원자들이 독일 모원에서 양성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어 1965년 1월 8일에는 독일인 수녀가 입국하여 성 빈센트 병원을 중심으로 고유의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1971년에는 수련소를 마련하였고 1971년 11월 27일에는 한국 지부로 승격되었다.

이후에도 의료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수녀회는 한국의 특성에 맞게 독자적으로 모든 과제들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함에 따라 관구제도가 없는 독일 수녀원으로부터 독립하여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로 교황청의 인가를 얻고, 설립 총회를 열어 한국인 초대 총원장을 선출함으로써 교구 설립 수녀회로 출발하였다.

의료사업으로는 성 빈센트 병원, 자선 진료소가 있으며 사회복지 사업으로는 성녀 루이제의 집(양로복지시설), 사강 보금자리의 집(양로 복지시설), 생명의 집(미혼모의 집), 인애 놀이방 등에서 사도직 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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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빈센트 병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 1998. 5. 2일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답신에 의거

빈센트 성인의 정신에 따라 병원을 통하여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고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목적으로 1963년도에 설립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의 정황은 6·25전쟁이 끝난지 10년 남짓한 기간이었으므로 외국, 주로 미국의 원조에 의하여 겨우 전후의 복구가 마무리되는 듯한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어려운 때였다. 따라서 이 수원지역은 수도 서울에서 불과 40㎞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병든 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의료시설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실정이었다.

이때 수원교구가 설립되어 윤공희(빅토리노) 신부가 주교품에 오르면서 초대교구에 수도회와 교회의 의료기관이 설립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던 차에 마침 교황 대사로 있던 ANTONIO DEL GUIDICE 신부로 부터 독일 파데르본(Paderborn)에 있는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권고에 따라 한국에 전교하기 위하여 대상지역을 물색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교황대사의 주선으로 이들을 초청하게 되었다. 이 초청을 받은 수녀회에서는 이를 기꺼이 수락하여 1차로 두명의 수녀를 파견하여 윤공희 주교와 논의하고 모든 상황을 파악한 후 귀국하여 본원에 결과보고를 하였다. 결과보고를 접수한 수녀회에서는 공동체를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이 공동체의 주보이신 빈센트 성인의 정신에 따라서 의료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제반준비를 추진하게 되었다. 따라서 1964년부터 수원시 지동 93번지 일대에 부지를 구입하는 한편 같은해 11월에는 한국의 수녀가 되고자하는 지원자 9명이 독일 모원으로 가게되었다. 이들은 수녀가 되어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귀국하여 당시 한국 분원과 병원발전을 위한 초석으로의 역할을 하게된다.

이와같이 제반준비가 진행되면서 드디어 1965년 1월 8일 독일 파데르본(Padeborn) 모원에서 세명의 수녀가 파견되어 병원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에 착수하게 되고 그해 3월 19일 해방과 더불어 기공식을 하게된다. 병원건물은 착공한지 2년만인 1967년 5월 10일 준공하였고 그해 6월 3일 가톨릭의과대학 제5부속병원으로 개원 및 축성하게된다.

자선진료는 병원의 설립이념에 따라서 병원이 개원된 지 약 5개월 후인 1967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 외래진료실은 진찰실과 대기실, 약국을 갖추고 주3회, 월, 수, 금요일에 1일 70-80명을 진료하였으며 입원 진료 시설은 5개의 병실에 욕실, 남녀화장실, 간호사실을 갖춘 25병상 규모로 이중 남녀 성인 환자용으로 각각 10병상씩 할애하고 소아환자를 위하여 5병상을 마련하였다. 또한 자선진료를 위한 전담인력을 배려하였던바 자선병동 개설 당시 전담의사는 이정동 수련의였으며 간호인력은 이위순 수간호사를 비롯한 5명의 간호사와 4명의 간호보조원이 배치되어 수고하였다. 자선 진료 과목은 병원내 전 의료진의 도움으로 당시 개설되었던 모든 임상과를 망라하였다. 그러나 제한된 진료시설에 무료진료를 받고자 하는 환자의 수효가 점차 늘어감에 따라 부득이 자선 무료진료 대상자를 선별하여 진료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인지라 이를 위하여 행정서관인 읍·면·동회장과 각 본당 신부님들의 협조를 의뢰하여 극빈자 카드 소지자와 본당 신부님들의 추천을 받아오는 환자, 기타 가난하다고 인정되는 환자 순으로 대상을 정하고 입원의 우선순위도 정하였던 바 가정내의 역할 면에서는 가장이나 젊은이, 어린이, 학생순으로 하였고 상병에 의한 우선 순위는 부인과 수술, 탈장, 맹장, 내과적 질환, 기타질환 순으로 하여 입원시켰다. 또한 당시 사회적 여건이 어려운 때인지라 성 빈센트 병원에서의 자선무료진료는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소문이 널리 퍼짐에 따라 찾아오는 환자들을 보면 수원지역을 비롯한 경기도 남부뿐만이 아니라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의 거의 대한민국 전역이 대상이었다.

병원이 개원된 1967년 6월 이래 1978년 까지 사회구호 사업은 병원을 찾아오는 가난한 환자들에 대한 자선진료를 위주로 하여 시행되어 오다가 1979년 부터는 연 3-4회씩 의사와 간호사, 구급차와 의약품을 동원하여 무의촌을 찾아다니면서 의료봉사활동을 전개하여 왔다.

병원에 천주교 신앙단체인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와 '레지오 마리애회'가 일찍부터 조직되었고 이들의 자선봉사활동 또한 활발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기쁨이 되고 있다.

1967. 6. 3 가톨릭의과대학 제5부속병원으로 성 빈센트병원 개원 및 축성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소재지 : 우 442-060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지동 93-4/ 전화 0331)402-114/ 모사전보 0331)48-5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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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영) St. Vincent de Paul - 1998. 4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답신에 의거

자선과 정의의 정신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려 노력한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靈性은 빈첸시오 聖人께서 보여주신 은사를 따라 빈첸시오회 회원들과 사랑의딸회 수녀들이 상호 협력한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다."(마태 26,11) 라는 말씀에 따라 회원들은 자신에게 허용된 시간과 재물을 봉사에 활용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움이 만족스러운 해결을 이루도록 돕는다.

1961년 1월 6일 서울 명동성당이 라우렌시오 신부의 설립 의뢰로 뉴질랜드 회장 게이노와 노기남 대주교의 후원으로 회원 5명이 모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1년 5월 3일 상계동의 음성 나환자 마을을 방문하고 1982년 4월 18일 용문 결핵환자요양소(희망의 집)에 노력봉사 하였다. 1992년 2월 2일 김정남(바르나바) 신부의 지도로 협의회 조직이 형성되어 신내동 무의탁 할머니를 성가복지병원에서 진료를 받도록 도와주었으며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바자회를 개최하며 각 명절때마다 외롭고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전달하며 실천적인 사랑을 행하고 있다.

1961. 2. 8 조성세(안드레아)를 비롯한 다섯명의 회원이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활동을 시작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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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간호전문대학 聖神看護專門大學 (영) Holy Spirit College of Nursing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47쪽)

골롬바노 수녀회가 1967년 전라남도 목포시 산정동 97번지에 설립한 학교. 이 학교는 골롬바노 수녀회가 1955년에 성 골롬반병원을 개원하면서 이미 설립하기로 확정되었었다. 당시 광주 교구장이던 헨리(Harold Henry,玄, 골롬바노회 소속) 주교는 병원과 학교를 같이 설립하기로 하여, 1963년 4월에 학교법인 설립허가를 받았고, 1966년 11월 학교설립인가를 얻어 1967년에 개교하게 된 것이다. 1972년 3월부터 학교명을 골룸반간호전문학교로, 다시 1979년 1월부터 성신간호전문대학으로 개편인가를 받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성신간호전문대학은 순수한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하여 하느님과 이 세상, 개인의 변화를 교육이념으로 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적인 생활에 입각한 삶을 이해, 실천하며, 병원 및 지역사회의 발전과 보건향상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여 효율적인 의사소통과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이해하도록 하고 보건요원으로서의 책임감을 갖도록 하게 하고 있다.

1967. 성신간호전문대학 개교 (647쪽 성신간호전문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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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맹아원 - 1998. 8. 28일 성심맹아원의 답신에 의거

시각장애인에게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능력과 장애극복 의지를 길러주고, 직업적 기능습득을 통하여 성실한 자활인으로 육성시키고자 1961년 3월 31일 충북 충주시에 설립되었다. 성심맹아원의 설립자는 옥보을 메리놀회 신부이며 남자 51명에 여자 30명과 함께 673평에서 생활하고 있다. 설립당시는 충주시 지현동에서 30명의 맹아와 생활하였으나 지금은 충주시 호암동에 81명이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생활하고 있다.

1961. 3. 31 충주 성심맹아원 설립

소재지 : 우 380-130 충북 충주시 호암동 산 42-6/ 전화 0441)43-1432/ 모사전보 0441)851-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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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수녀회 (영) Society of the Sacred Hear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49쪽)

1800년 11월 21일 성녀 마를렌 소피바라(Madeleine Sophie Barat) 수녀가 프랑스에서 창립한 수녀회.

1956년 10월 10일 한국 진출. 젊은 이들의 교육으로써 예수 성심에게 영광을 주는 것을 창립 목적으로 하여 1956년 한국에 진출하자 곧 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미 1908년 일본에 진출한 수녀회의 극동관구장 브리짓 키오(Brigid Keogh) 수녀에게 한국 진출을 요청하자 관구장이 직접 내한하여 현 수녀원과 성심여자고등학교가 있는 서울 원효로의 옛 예수성심신학교 및 성당 건물을 이수하고 1956년 10월 서울 분원장 맥하디 플린트(McHardy Flint) 수녀 외 7명이 내한하였다. 수녀회 본부에서의 10만달러 예치로 법인설립을 하고, 많은 어려움 끝에 1957년 2월 12일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57년 4월 18일 성심여자중학교의 첫 입학식을 가졌다.

1960년 3월에는 성심여자고등학교가 개교하는 한편, 같은 해 9월 미국 수련원으로부터 한국인 수녀 2명이 내한하여 더욱 활동하기에 좋아졌다. 교육의 일괄성을 위하여 1963년 성심국민학교, 1964년 성심여자대학이 각각 서울과 춘천에서 개교하였다. 아울러 가난한 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서울 봉천동에서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천막학교를 개설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하였다. 1975년과 1982년에 교육의 효율화를 위하여 중학교와 국민학교를 각각 폐교하였고 1975년 3월 한국지구로 독립하여 승격됨과 동시에 같은해 9월에는 부천(富川)에 성심여자대학의 분교를 신설하였다. 1978년에는 강원도 사북읍 고한리 광산촌에서 활동을 실시하였다. 현재 서울 원효로의 본원을 비롯하여 춘천, 원주, 인천의 분원과 함께 서울 원효로에 수련원공동체가 있고, 한국지구장 한순희 수녀를 중심으로 43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1957. 4 성심여자중학교 개교 (649쪽 성심수녀회)

1960. 3 성심여자고등학교 개교 (649쪽 성심수녀회)

1963. 성심국민학교 개교 (649쪽 성심수녀회)

1964. 성심여자대학교 개교 (649쪽 성심수녀회)

1975. 9 부천 성심여자대학교 분교 신설 (649쪽 성심수녀회)

성심수녀회 (교회와 역사 86호 7쪽) - 1982. 9. 25발행

성심수녀회는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1800년 11월 21일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 (Madeleine Sophie Barat)가 동료수녀들과 함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서원을 함으로써 창립되었다. 바라 성녀는 "이 회의 유일한 창립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이다."라고 말하면서 젊은이의 교육을 통해 예수성심께 영광을 드릴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성심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것은 1956년 10월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가톨릭 교육을 통한 것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서울 교구장 노기남(바오로) 주교는 이 수녀회에 한국 진출을 요청하였다. 1956년 10월 한국에 처음 진출한 창설수녀들은 서울 분원장인 맥하디 홀린트(Mchardy Flint) 수녀 등 모두가 7명이었으며 그들의 국적은 각기 달라 호주, 애란, 중국, 일본, 몰타, 폴란드, 벨기에 등이었다. 7명의 창설자들은 잠시도 그들의 사명의 가톨릭 교육을 잊지 않았고 진출 후 곧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들 가운데 주 매분 수녀는 곧 모든 사람에게 한국인으로서 받아들여질 만큼 한국어에 능통하여 졌다.

1956년 11월 한국에서의 첫 교육사업인 성심여자 중학교는 소정의 시험을 치러 18명의 신입생으로 역사적인 입학식을 가졌는데 (모집인원 30명에 49명이 응시했으나 전형 결과 18명만 합격시켰다.) 이처럼 적은 숫자로 학교를 경영한다는 사실에 한국교육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모든 면에서 전통적인 성심학교 교육은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1961년 총원장 수녀가 극동지구와 북미지역 대원장 수녀를 동반하고 한국에 온 것을 계기로 하여 한국에서의 성심교육은 큰 계기를 맞이하였다. 총원장 수녀는 성심 여자 중·고등학교와 성심 여자대학의 신설을 허락한 것이다.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물론 '성심'에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성심'에서 대학까지 마칠 수 있게 해 줄것과 이 좋은 교육이 국민학교부터 일관성있게 이루어지길 총원장에게 간청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그리하여 성심 국민학교는 1963년에, 성심여자대학은 1964년에 각각 신설되었으나 '성심'이 꿈꾸는 일관교육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것은 성심 국민학교의 졸업생이 나온 다음 중학교가 평준화됨으로써 졸업생 중 성심여중에 추첨으로 입학한 학생이 단 한명이라도 결과를 빚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성심 수녀회는 인력과 재정 등 여러사정도 고려하여 고등학교와 대학교육에 전념키로 하고 중학교와 국민학교는 폐지시키기로 하였다.

1978년 3월에는 강원도 사북읍 고한리 광산촌에 분원을 설치하여 본당사목과 산재병원에서의 간호활동, 유아교실을 통한 가족상담 및 피정지도, 광부환자 및 가족방문 등의 사도직에도 봉사하고 있다.

1957. 2 성심여자중학교 개교 (교회와 역사 86호 7쪽) - 1982. 9. 25발행

1963. 성심국민학교 개교 (교회와 역사 86호 7쪽) - 1982. 9. 25발행

1964. 성심여자대학교 개교 (교회와 역사 86호 7쪽) - 1982. 9.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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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양로원 - 1998. 9. 2 성심양로원의 답신에 의거

모 안스가리오 신부는 소외되고 버림받은 무의탁 노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구미시에 성심양로원을 설립하였으며 성심양로원은 "내가 온 것은 그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0,10)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식 단독주택으로 입원이 가능한 인원은 60명이다.

1970. 12. 1 성심양로원 설립

소재지 : 우 730-800 경북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 82-2/ 전화 0546)481-3289/ 모사전보 0546)481-5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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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 (나눔지 13호 6쪽) - 1979. 7. 15발행

서울시 강남구 잠원동에 위치한 성심원은 1946년 7월에 원장 이우철 신부가 창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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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복지시설) - 1998. 9. 5 성심원의 김정이 크레센시아님의 답신에 의거

그리스도의 복음정신과 프란치스꼬 성인의 모범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며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받은 나환우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치료와 생활보호에 헌신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아 주며 신앙생활을 통해 기쁨과 감사의 삶으로 이끌어 주는데에 성심원의 설립목적이다.

1959년 6월 18일 진주시 현남동 구생원(나환자집단시설)에서 종교적 갈등으로 추방된 천주교신자들이 갈데 없는 유랑인이 되었을 때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주 콘스탄시오 신부가 현 성심원부지를 구입하여 나환우 60여명을 피신시키며 "성심원"을 개원하였다.

나병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사회와 가족들의 냉대 속에서 살아온 400여 명의 성심원 가족들은 90%가 중복장애인이다. 나환인들은 60여개의 동으로 형성된 독신사, 가정사, 부부요양소에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꼬 수도회)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의 수도자들과 직원,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 성심원에서의 사회사업은 불구 노약 나환인을 수용보호하며, 나병에 대한 대중 교육 및 계몽, 그리고 나환인 자녀들에게 장학제도를 실시하며 성당과 교육관을 이용하여 종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959. 6. 18 성심원 설립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복지시설) - 1998. 9. 5 성심원의 김정이 크레센시아님의 답신에 의거

소재지 : 우 666-800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 100 전화 0596)73-6966 모사전보 0596)73-6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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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의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03쪽)

1941년 9월 24일, 함흥 분원에서는 경 엘리지오 신부가 '성심의원' 축성식을 하였고, 개원식의 축하객 중에는 당시 한국 의학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수녀원을 도운 김명학 박사의 가족이 모두 참석하여 수녀들을 기쁘게 하였다. 의원에서 길을 건너 층계를 올라가면 수녀원이었다. 함흥의 '성심의원'은 건물의 구조가 네모로 되었고, 그 건물은 가운데 굴뚝이 높이 솟아 있어서 '굴뚝이 있는 집'이라고 칭하여졌다. 의원은 다움날인 9월 25일에 개원하였다.

성심 의원장인 디오메데스 수녀는 하루 60-80명의 환자들을 진료하였으며, 때때로 왕진도 가야했다. 성심의원에는 새벽 4시부터 사람들이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의사인 디오메데스 수녀는 아침 미사 후에 의원에 나가면 거의 밤 12시가 되어서야 수녀원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당시는 공심재를 엄하게 지키던 때였으므로 저녁 12시 10분전에 들어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와 다시금 환자를 진료해야 되는 경우도 많았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인근에 널리 알려진 '성심의원의 원장, 독일의 유명한 박사, 하늘이 낸 의술을 가진 독일의사'라는 칭호를 받고 동분서주했다.

1944년 2월 10일, 디오데메스 수녀가 심한 고열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원산의 프로테스탄트에서 운영하는 '구세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폐렴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충분한 영양 섭취와 요양을 해야한다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디오메데스 수녀가 요양하고 있는 동안 한국인 의사의 청원자 비르깃다(마리아 루까스 수녀, 李鍾元)가 약 3개월간 요양한 후, 계속 쉬라는 의사의 지시도 무시한 채 가난한 환자들을 다시 진료하였다. 의원의 초창기에는 대개 독일에서 약을 원조받고 있었기 때문에 진료에 어려움이 적었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의약품을 수송하기가 여려워졌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의약품의 부족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를 대할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원산을 거쳐 매월 1회씩 신고산의 약방도 순회하며 한달동안 기다린 환자들을 치료하느라고 개인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디오메데스 수녀가 진료하는 날이면 두 곳의 시약소 앞에는 환자들이 긴 대열을 지녀 진료를 받으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한달에 한번씩 다니러 오는 수녀를 기다리다 병사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선교수녀들에게서 대세를 받고 귀천할 수 있겠지만 디오메데스 수녀는 자신을 기다리다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채 병사하는 환자 때문에 늘 마음 아파했다.

1941. 9. 24 성심의원 축성식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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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언 양로원 (교회와 역사 227호 18쪽) - 1994. 4. 25 발행

'의지할 곳이 없어 소외된 노인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은 바로 거룩한 말씀의 회의 창립목적(회헌과 회칙 제3조)에 분명히 제시된 활동 내용이다. 일가 친척이 없거나 길거리에 버려진 할머니들을 마치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살아가는 성언 양로원. 노인들의 여생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잘 준비하여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함을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곳에 양로원이 들어선 것은 1978년. 착한 목자 수녀회에서 1964년 윤락 여성을 지도하기 위하여 운영하던 기술학교 자리에 설립인가를 내어 1980년도에 할머니 30분을 받으면서부터이다. 65세 이상의 할머니만 모여 사는 이곳은 현재 33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원하면 예비자 교리 후 영세를 받는데 3명만 제외하고 현재 모두 신자이며 매주 옥동 본당의 신부님이 와서 미사를 봉헌한다. 노인들도 직접 활동은 못하지만 옥봉 성당 레지오 팀의 협조 단원으로 기도, 묵상 등을 활동으로 대신하며 수녀들의 지도로 간단한 청소, 빨래, 산책 등으로 생활한다. 총 책임 수녀 외에 총무, 간호사, 당사, 생활지도, 기사 수녀 등 모두 6명의 회원들이 봉사하고 있다.

이곳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성격이나 모든 면이 '정상적이지 못한' 노인들을 '정상적인 상태'로 선도하는 데 있다. 이미 오랜 세월을 어렵게 지냈던 노인들에게 남은 것은 배고픔과 이웃에 대한 원망,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뿐 순수함이 결여된 이들에게 아무리 좋은 방법의 선도라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홀로 어렵게 살다가 공동체 생활에 익숙하지 못함은 당연한 현상이고 사회에 대한 반감과 비뚤어진 시각 등이 신앙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설득하고 교리를 가르쳐 영세시키는 노력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웃에 옥봉 성당의 교우들이 방문하여 도와주고 장례식에는 성당의 애령회에서 지금까지 임종한 할머니 165명의 장례 예절 일체를 봉사해 주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1978. 성언 양로원 설립 (교회와 역사 227호 18쪽) - 1994. 4. 25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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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언의 집 (교회와 역사 227호 18쪽) - 1994. 4. 25 발행

1991년 7월 2일 불우노인과 결식 아동의 식사 제공을 위한 성언(聖言)의 집 개원 축성식이 나길모 인천교구장의 주례로 거행되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시간은 오후 12시 30분에서 2시 30분까지 운영하며 식사 가격은 200원 혹은 무료이다. 매일 할아버지, 할머니 약 160여 분과 20명 가량의 아동들이 성언의 집을 찾고 있는데 성언의 집을 운영하는 거룩한 말씀의 회의 회원들은 음식뿐만 아니라 필수품과 학용품도 나누고 다정한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곤 한다. 때문에 성언의 집은 노인들과 아동들의 주린 배만을 채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마음들에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다.

1991. 7. 2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운영하는 빈민식당 '성언의 집' 개원 축성식 (교회와 역사 227호 18쪽) - 1994. 4. 25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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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회 (라) Sancta Infantia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50쪽)

버림받은 아동들을 위한 구제사업기관.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인 홀본 잔송(Holbon Jansong)에 의해 창설되었다. 모든 어린이들을 구제하기에는 재원이 모자랐으므로 죽음의 위함에 처해있는 어린이들에 세례를 주고 살아나면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맡겨 이를 키우도록 하는 방식으로 어린이 구호사업을 폈다. 우리나라에는 1852년 8월 말에 조선에 입국한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우리나라 각지를 돌며 전교활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죽음에 직면한 고아가 많음을 보고, 파리에 있는 성영회 본부에 재정적인 원조를 청하여 1855년경에 고아들에 대한 구제사업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사업인데 메스트르 신부는 죽어 가는 외교인 어린이들에게 영세를 주는 한편 고아들을 모아 몇몇 독실한 여교우들로 하여 이들을 돌보게 하였고, 점차 고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어린이들은 신자가정에 맡겨 키우게 하는 한편, 그들이 커 감에 따라 자립할 수 있도록 생업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그의 이러한 자비심에 감동되어 새로 입교하는 자가 자연 많았고,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여러 곳으로 번져 나갔으나 재정상의 어려움과 박해로 인해 사업은 더욱 어려워 졌다. 그러나 1875년 12월 20일 메스트르 신부가 충남 합덕에서 선종한 뒤에도 이 사업은 계속되어 1859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신자로서 대세를 받고 죽은 아이가 701명, 프랑스의 고아원 본부에서 보내온 경비로 양육하는 고아가 43명에 달한다. 이 사업은 1859년 까지는 서울에 유모(乳母)를 둔 고아원으로 발전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다가 1880년에 다시 계속되어 1886년 부터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인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영회의 고아사업은 개화와 더불어 전국의 주요 도시에 퍼져갔고, 남자에게는 목공, 약국, 철공 등의 기술을 습득케 하고, 여자에게는 재봉틀 사용법을 가르치는 등 직업교육을 시킴으로써, 자립의 길을 열어 주는 근대적인 고아구제사업으로 발전해 갔다.

1855. 메스트르(Naistre, 李) 신부가 성영회 본부에 재정적인 원조를 청하여 고아구제사업을 펴기 시작 (650쪽)

1866. 병인박해로 성영회의 고아구제사업이 중단 (650쪽)

1880. 성영회의 고아구제 사업이 계속됨 (650쪽)

1886. 성영회의 고아사업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인계함 (6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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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회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56쪽)

병인 박해로 중단을 강요당했던 고아 구제사업은 개항 이후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자 다시 시작되었다. 고아 구제사업이 재착수한 때는 1885년 3월 15일이었다. 서울의 성영회 고아원은 그 후 계속 원아들의 숫자가 증가되었고, 1886년에는 수용된 원아가 80명에 이르렀으며 1890년에는 182명으로 증가되어갔다.

고아들의 수는 늘어갔으며 고아 수용시설에 보호되고 있는 아동들 외에도 성영회의 전통에 따라 신도 가정에 위탁되고 있는 아동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처럼 수용시설이나 신도 가정에서 양육되고 있던 고아들을 전문적으로 보호해 줄 수녀들이 요청되었고 여기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고아들의 보호에 본격적으로 종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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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요셉병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21쪽)

노기남 주교의 권고에 의해서 유을준씨는 피난 당시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던 중림동 성당구내의 가명국민학교를 기반으로 새 병원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서울교구와 미국 원조기관인 C.A.C(가톨릭 자선회 : Catholic Charities)의 지원을 받아 1954년 3월 1일 성요셉자선병원을 개원하였다. 이듬해인 1955년 10월 가톨릭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으로 된 후 계속 발전하여 1959년에는 병원을 신축, 완공하였다. 새롭게 신축된 성요셉자선병원은 병실수 35개로 치과를 제외한 전과목을 진료하였다.

이 병원은 초기부터 성가회 수녀들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성가회에서 미아리에 성가병원을 개원하게 되자 그곳으로 떠나게 되어 1959년 3월 6일부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병원 관리를 맡게 되었다. 파견된 수녀들은 처음에는 성모병원에 속하여 있었으나 1960년에 성요셉병원 분원을 설치하고 윤성기 토마스 수녀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윤 수녀가 성모병원 수녀원 원장이 되자 다시 성요셉병원 분원은 성모병원 원장수녀의 책임하에 있게 되었다. 그후 1962년에 가서야 완전한 분원으로 발족하였다.

성요셉병원은 설립 초부터 자선진료 담당 병원으로서 유료병상 60베드와 무료병상 20베드를 갖추고 무료진료와 실비진료를 겸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성모병원 내에 자선진료소가 설립되어 자선진료의 임무가 이전됨과 더불어 위치에 따른 병원관리의 효율성 문제, 낡은 건물로 인한 붕괴 위험성 등으로 1974년 8월 31일자로 폐원되었다.

1954. 3. 1 성 요셉 자선병원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21쪽)

1974. 8. 31 성 요셉 자선병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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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원선시오 수녀회 (영) Sisters of Charity of St. Vincent de Paul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51쪽)

1841년 레베부르(Friedrich Lebebur) 주교에 의해 창설된 수녀회. 1965년 한국진출.

전교와 교육, 사회사업활동을 통하여 수녀회의 창립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한국 내에서는 경기도 수원에 성 빈센트 병원을 개원하여 의료봉사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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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덕 聖載德 Pierre Singer (교회와 역사 207호 2쪽) - 1992. 8. 25발행

1949년 성 신부는 논산본당 제 8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61년까지 사목활동을 하였다. 논산본당은 1921년 전북 화산(나바위) 본당에서 분리되었는데, 루블레(Rouvelet) 신부가 부임하여 논산읍 망월동에서 첫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 루블레 신부는 논산 부창동에 사제관과 성당을 신축하였다. 성 신부가 부임했던 1949년 논산의 인구는 약 20만명이었고, 그 중 논산 중앙에 2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논산은 지방의 소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신자가 약 1,500여명인 논산 성당은 조용하고 공기가 맑은 교외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1958년에 논산 본당은 대전교구로 편입되었다.

성 신부는 이곳에서 6·25와 1·4후퇴를 겪으면서 부산으로 피난하는 어려움을 맛보아야만 했다. 특히 6·25전란에는 교회가 공산군에 징발되었고 사제관도 소실되었다. 그리고 주위 일대에는 거의가 전란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빈민촌을 이루었다. 성 신부도 이때 기아에 허덕이며 감자만을 주식으로 하는 생활을 하였다. 당시 논산은 구호대상 지역으로 책정되어 미국에서 천주교회 측으로 많은 구호 물자가 왔다. 이와 함께 성 신부는 모국 불란서에 원조를 청하여 논산 일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신자들도 점차 급증하게 되었다.

성 신부는 늘 검소하고 가난한 생활로 모범을 보이면서 신자들과의 유대 관계를 중시하였다. 신자들과 만나 그 집의 상황을 파악하면서 밀접하게 지냈다. 성 신부는 사목활동 중에서 어린이 사목에 각별한 주위를 기울였다. 늘 어린이들을 주위에 두었고 그들과 함께 수영도 하고 놀이도 하였다. 또한 사제관에 환등기, 어린이 놀이 기구를 마련하여 두고는 끊이지 않고 어린이들이 와서 놀게 하였다. 또한 뛰어난 유모어 감각으로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즐겁게 하였고 많은 어린이들을 사제 성소로 이끌었다.

성 신부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성당 신축, 사제관 건립, 대건중고등학교 교사 신축 등의 대사업을 이루었다. 1954년에는 6·25 동란 때 불타 없어진 사제관을 65평의 건물로 신축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임하면서 대건중학교의 대리 경영을 맡아 직접, 간접으로 경제면, 운영면에서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1947년에 설립된 대건중학교는 1951년에 고등학교로 인가 받았으며 1956년에는 현 위치에 부지를 매입하교 본관 2층, 6학급을 증축하여 대건중고등학교의 일부를 현 쌘뽈여중고등학교의 위치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교황청으로 부터 150,000달러의 원조를 받아 1960년 11월 새 교실 증축을 마치고 완전히 쌘뽈여중고의 위치에서 새 교사로 이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성 신부는 자금 조달의 어려움과 교사들 문제로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1961년 10월에는 237평의 성당이 준공되었다. 신자가 점점 급증하여 성당이 비좁게 되자 성 신부는 교황청에 원조를 청하여 1960년 2월 성당 착공에 들어갔다. 성 신부는 성당 건립에 보탬이 되고자 담배마저 끊고 겨울에는 하루에 연탄 한장을 아껴 때며 지냈다. 그리고 반듯한 돌이 있으면 주워 모으면서 성당 건립기금을 마련치 않고 교무금으로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정성을들여 세운 성당이 준공된 다음 곧 흥산 본당 주임 으로 임명되었다.

성 신부는 본당외에 논산에 쌘뽈 양로원, 성광원, 쌘뽈여자중고등학교 등을 설립하였고 대전교구에서는 처음으로 레지오 마리애 도입과 시약소를 설치하는 등의 헌신적인 사목을 하였다. 그는 특히 어린이를 위한 사목과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이 일관되게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사목활동은 그의 일대기에서 가장 정열을 쏟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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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여자중고등학교 聖旨女子中高等學校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54쪽)

1910년 9월, 마산 완월동에 초대 주임으로 무세 신부가 부임하여 복음을 전파하면서 지방 교육사업과 민중계몽의 필요성을 통찰하고 빈민대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본당 부속건물에서 성지학원을 개설하였다. 무세 신부는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통치 아래 우리말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없는 시기에 외국인으로서, 또한 천주교 신부로서 우리 교육에 공헌한 바가 실로 크다 하겠다. 1932년 제 2대 본당 주임으로 베르몽(Jules Bermond, 1881-1967) 신부가 마산교구에서는 첫째로 완월동성당을 석조로 완공하고 성지학원 교사를 개축했으며, 벽돌 2층의 수녀원 건물을 마련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를 초청하므로 정 미카엘 수녀와 노 바르토로메오 수녀가 파견되었다. 분원이 창설되자 정 미카엘 수녀는 전교를, 노 바르토로메오 수녀는 학원교사로 수년간 열성적으로 일했다. 1935년 성지학원 내에 성지 강습회를 부설하고 청소년의 중등교육을 시작하였으나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지강습회는 일단 폐쇄되고 '사립학술강습회'로 개칭하여 인가를 받았다.

해방이 되자 본당 박성춘(레오) 신부는 학원 건물을 이용하여 성지여자중학원을 설립, 3학급의 인가를 받았으며 본관 신축을 목표로 미군부대에 원조자재를 요청하는 한편 학교부지에서 캐낸 화강석을 다듬어 공사에 착수하였다. 1949년 5월 28일 박성춘 신부는 성지학원을 여자중학교로 승격시킬 목적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구천주교유지재단 이사회를 거쳐 문교부의 정식 인가를 얻어 성지여자초급중학교의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6월 20일 개교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임시 휴교 중 12월 12일 김영호(金永浩 멜키오르, 1912-1978) 신부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2월 25일에는 성탄축하 음악, 연극을 수녀 반주로 시민극장에서 2일간 공개하여 시민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1951년 7월 김영호 교장신부는 어려운 재정 아래 힘겨운 노력으로 미 해병대의 보조를 받아 중지된 공사에 착공하여 석조건물 본관 10개 교실을 완공하였고, 8월 31일에는 대한민국 교육법 개정에 의하여 3년제 6학급의 여자중학교로 인가 받고 9월에는 성지여자고등학교를 부설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1952년 4월 15일에는 성지여자고등학교로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김영호 신부가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여 중·고를 겸임하였다. 1957년 11월 제 3대 정삼규(鄭三圭 요한) 신부가 취임한 후 교사증축에 전력을 기울여 구 체육관과 학교 관리실, 도서실 등을 준공하였다. 도서실에 큰 관심을 가진 정의순 베드로 수녀의 운영으로 도서관교육 우수학교로 인정을 받았으며 1960년도부터는 수녀들이 서무과장직을 맡게 되었다. 1961년 학생과장으로 재직중이던 윤필순 쟌 마리 수녀가 제 4대 교장에 취임하게 된다.

1965년 2월 부산교구에서 마산교구가 신설 분리되어 부산 데레사여중고와 마산 성지여중고의 교장 교감이 교체되어 성지여중고의 제 5대 교장에는 김재석(金在石 요셉) 신부가, 교감에는 김영옥 이냐시오 수녀가 부임해 왔으며 김재석 신부 재직 당시 마산교구 김수환 주교 성성식이 성지학교 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다음 해 12월 김영옥 수녀가 제 6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중학교 6교실에 증축되었다.

1968년 2월제 7대 교장으로 최계주 골롬바 수녀가 취임하여 현 성지분원 건물을 새로 지어 이사하였고 철거한 구 수녀원 자리에 고등학교 별관 3층 14개 교실을 신축하여 고3 진학반의 학업 분위기를 높였다. 1970년 12월에는 고등학교 24학급의 증설인가를 받았고 이듬해 8월에는 현 도서관 4층 교사를 준공하였으며 기숙사 운영으로 베드민턴 선수의 숙식 제공 등 학교전반에 걸친 알찬 발전을 기하였다. 1973년 3월 제 8대 교장에 박정희 엘리사벳 수녀가 취임하여 첫 사업으로 완월동성당 부지매입에 협조하여 학교 내에 자리하고 있던 성당을 학교에서 쓰고 본당성당을 신축 이전하기로 결정하였고 학교 내에 있던 주교관도 문화관으로 이전하였으며 구 체육관이 베드민턴 연습과 시합에 부적당함을 절감하여 체육관을 지어 선수양성에 전력하였다. 구체육관은 개조하여 가정실습실, 인쇄실, 도서관으로 사용하였다. 1975년 12월에는 고등학교 33학급의 증설인가를 받아 본관 석조 3층을 지었다. 1977년 12월 부산교구 학교재단에서 분리, 성지재단을 창설하여 장병화(張炳華 요셉) 주교가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함으로 부산교구에 종속되었던 10년동안의 불편을 덜게 되었다. 1978년 동편 기숙사 단층건물을 철거하고 중학교 운동장을 확장함과 동시에 수녀원 서편 공지에 선수기숙사 및 합숙소를 신축하여 중·고 베드민턴 선수 전원이 입주하였다.

1979년 중·고 분리시책에 따라 중·고가 완전히 분리되어 중학교는 김재석 신부가 제 9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고등학교에는 박정희 수녀가 유임하였다. 그 해 봄 별관에 4층 3개 교실을 증축, 교사 학생용 식당을 신축하였고 음료수 자동판매기 2대를 설치하였다.

1982년 봄 최신 방송실 겸 영사실을 만들어 각 교실에 텔레비젼 장치를 하여 방송수업을 할 수 있게 하였다. 1983년 9월 1일에 제 9대 교장으로 김옥순 마리세실 수녀가 취임하여 시설 현대화로써 교육환경을 일신하였다. 1984년에는 컴퓨터실 및 어학실습실 설치로 학생들의 어학실력 향상에 시대와 더불어 호흡을 맞추고 있다. 성지학교는 학교명과 같이 교직원 학생전원이 하늘의 거룩한 뜻을 준행하는 그리스도교적 덕성을 기르고자 애쓰고 있다. 1985년 2월에는 근로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한 산업체 특별학급을 부설하여 현재 12학급에 이르렀다. 1987년 3월 중학교 김재석 교장신부의 별세로 근화여자중학교 교감 김수덕 아녜스 말가리다 수녀가 중학교 제 10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수녀 중심 학교운영으로 교육을 통한 선교에 쇄신분발의 뜻을 새롭게 하였다.

현재 9명의 수녀가 중·고 교장, 서무, 경리, 교사 등으로 일하면서 학교의 행정, 관리 등 여러 분야를 담당하여 학교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

1910. 9 마산 완월동 본당의 부속건물에서 성지여자중고등학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54쪽)

1932. 4 성지여자중고등학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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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 어린이집 (성체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성체 어린이집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1970년경 서울 청계천에 철거민들이 성남으로 피난와서 살게 되었다. 그때에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생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어른들은 맞벌이 부부로 일터로 나가거나 또는 부모가 질병으로 앓고 있는 가정의 어린이들을 인보성체 수도회의 수녀님들이 돌보기 시작하면서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처음에 천막을 치고 어린이 260명에게 점심과 간식을 만들어 먹였다. 정부에서 쌀,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를 보내주어서 매일 밥, 빵, 수제비, 과자를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목욕시키고 손톱을 깍아주고, 머리를 잘라주는 신변보호, 지도 뿐이 아니라 교육을 더불어 하면서 하루종일 어린이와 같이 지내게되자 일손이 필요해서 일반교사를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에 150평의 건물을 증축하여 식당과 교실 3개, 부엌을 건축하였다. 이곳에서 자란 어린이는 학교에 가고 해마다 새로운 어린이는 어린이집에 들어오고 있다.

새싹어린이집은 인보성체수도회 전 회원들의 노력의 성과인 창립인가 10주년 기념 바자회의 수익금과 모금액의 일부로 10월 28일 원사 기공식을 갖고 12월 12일 520명의 어린이와 귀빈학부형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였다. 설립당시는 '새싹어린이집'이라고 명칭하였고 1998년 현재는 성체 유치원이라고 칭한다.

근로 또는 질병으로 인하여 아동을 보호할 능력이 결여된 보호자의 아동을 입소하여 시설생활을 통하여 집단생활을 경험하게 하고 부모를 대신하여 아동을 양육함으로서 아동의 복지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며 유용한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함을 목적으로 한다. 어린이 생활지침은 다음과 같다.

⸁ 어린이들에게 생활을 통하여 집단생활을 경험하게 하여 보살펴주고 개별적인 필요를 만족 시켜줄 수 있도 록 협력해 준다.

⸂ 정서적 안정감을 조성케하여 심신이 조화있게 발달되도록 도모한다.

⸃ 세심한 주의가 미친 환경속에서 어린이의 건강, 안정등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습관과 태도를 올바로 길러준다.

⸄ 적극적인 활동을 촉구하여 자주 및 협조정신을 배양한다.

⸅ 생활면을 통한 여러가지 현상에 대하여 흥미와 관심을 갖도록 한다.

⸆ 사회 생활에서 필요한 언어 동작을 정확히 익히도록 한다.

⸇ 각 개인의 특성을 중요시하여 창의력 개발에 힘쓴다.

⸈ 실생활을 통해 사고 능력의 기초를 닦는데 조력한다.

성남 성체 유치원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창립자 윤을수 신부의 말씀을 따르고 있다. "남을 대할 때 행동이나 태도가 언제나 유쾌하고 온화하고 그리고 평화스럽고 재미있게 상종하라.", 그리고 사목활동 할 때 "음식에 굶주리고 병고에 신음하고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쓸 수 있는 재주, 기능, 시간 등을 이용해서 정신적 위안을 주고 물질적 후원을" 당부하였고 그 말씀을 생활속에 잠재하고 있다.

1970. 7. 8 '새싹 어린이집' 설립 (성체회의 복지시설)

1971. 3. 1 도청 지시로 탁아소 정식 개원 (성체회의 복지시설)

1978. 9. 1 '성체 어린이집'으로 명칭 변경 (성체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461-181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수진 1동 664-1/ 전화 0342)751-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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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회 (영) Congregation of the Blessed Sacra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67쪽)

1958년 6월 5일 윤을수 신부가 경기도 소사에서 창설한 수녀회

청결, 청빈, 순명으로 주의 영광을 현양함과 동시에 포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회사업으로 애덕을 실천하고자 한다. 인보 수도회의 정신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성체성사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곧 그 인보에 그 원천을 두고있다.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정신임을 생활로써 보여주신 창립자를 본받아 모든 요구호자들이 그들의 가정을 성화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도록 사회사업과 복음선포에 임하면서 시대와 지역교회의 요구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1951년 윤을수 신부가 군종생활을 하면서 5명의 전쟁고아들을 보살핀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1956년 전쟁고아들을 돌볼 여성들을 위한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하고 학교내에 따로 인보성체회를 신설하였다.

창설 직후부터 예산, 인제, 나자로 요양원, 서울 영등포, 용인, 원주, 백령도, 흑산도,공주, 서울 성 골롬반 의원,진안, 남원, 이리, 순천, 진해 등 전국에 회원들이 활동하였다.

1983년 말 80여개의 본당을 비롯하여 사회사업, 교육기관, 의료기관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1970. 경기도 성남시에 성체어린이집 개설 (667쪽 성체회)

1973. 성남시에 성모조산원을 개원 (667쪽 성체회)

1974. 수원교구로 부터 효신실업학교를 인수하여 운영 (667쪽 성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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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꼬 수녀원 부속의원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의 복지시설) - 1998. 4. 21일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의 답신에 의거

"예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기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 23),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파견되었다." 라는 성서말씀과 회헌을 바탕으로 1967년에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의료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에서 설립하였다.

1967년 설립 당시에는 가리봉 지역이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의사 2명과 약사 1명 그리고 간호사 1명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 형태로 시작하였다. 1997년 현재는 의사 1명, 간호원 4명, 보조원 3명, 사무직원 1명이 활동하고 있다.

1967. 10. 6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 부속의원 설립 (성 프란치스꼬 수녀원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152-021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 1동 131-1/ 전화 02)865-8135/ 모사전보 02)862-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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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예수의 집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6. 12일 소년 예수의집 장 데레사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결손 가정의 불우아동(만 6세∼18세) 을 대상으로 가족적인 분위기 안에서 생활, 교육, 상담 등으로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함께하는 삶을 목적으로 1991년 7월 5일 서울시 송파구 마천동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장안동에 위치한 동부아동시립상담소에서 좋아진 가출소년들이 결손가정으로 갈곳 없어 학업을 계속할 수 없기에 이런 아동들의 거처를 마련하여 가족적인 분위기 안에서 건전한 사회인으로 성장시킬 곳이 절실하였다. 또한 결손가정으로 무관심상태에서 버려진 아이들이기에 올바른 가치관 확립이 되어있지 않아 도벽과 가출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교육과 환자, 불우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함을 창립목적으로 한 수녀들은 이와 같은 직무를 전제로 하는 모든 형태의 활동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고 있다." (회헌 중에서)

약 15명 정도가 가족적인 분위기로 생활할 수 있는 규모이며 유치원 초·중·고등학교의 과정 교육 및 직업기술을 위탁교육 시키고 있다.

1991. 7. 5 소년 예수의 집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138-122 서울시 송파구 마천2동 93-7 마천동 천주교회 앞/ 전화 02)400-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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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미감아 보육소 (교회와 역사 223호 22쪽) - 1993. 12. 25발행

미야사끼 까리따스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 5년 후인 1961년 당시의 소록도 국립 나병원 원장은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5천여 나환자 자녀들이 양육과 교육을 가톨릭 교회의 수녀들에게 맡기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뜻을 당시 교구장이던 현 대주교에게 알렸고 이 요청이 전달되자 장상들은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130여명의 미감아들이 있었는데 가장 나빴던 것은 아이들의 식생활이었고 방한 시설도 형편없어 겨울에는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수녀들은 이것들을 해결해 줄 것을 병원 당국에 청했으나 병원측에도 어떤 뚜렷한 대책이 없음을 알게 되자 평양교구 안주교님을 통하여 N.C.W.C(가톨릭 구제회)의 원조로 어느 정도 식생활을 개선하는 동시에 당시 까리따스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편물학원에 의뢰하여 털쉐타를 짜서 입히는 등 영적 교육과 아울러 할 수 있는 한 물적 혜택을 주도록 노력하면서 부모의 사랑조차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까리따스 특유의 가정적 정신으로 돌보았다. 특히 어려웠던 점은 병원측 관계자들이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예산과 물건을 중간에서 빼돌려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알게 된 수녀들은 그들과 맞서서 아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그들과 갈수록 어려운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과 함께 이 보육소의 국가운영이 강조되어 병원측으로 이관되자 많은 아쉬움을 간직한 채 4년 반 정도 계속되었던 이 사업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

1961. 소록도 국립 나병원에서 까리따스 수녀원에 미감아 보육소의 운영을 부탁 (교회와 역사 223호 22쪽) - 1993. 12.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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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본당 小鹿島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25쪽)

소록도에 국립나병원이 설치되던 시초에는 환자들을 입원과 동시에 무조건 장로교에 입적시켜서 1916년에서 1935년까지는 장로교 중심으로 생활이 이루어졌다. 1935년에 3명의 천주교신자 환자들이 입원함으로써 차츰 신자가 늘자 광주교구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1946년에 이곳에 공소가 설치되었고, 한국전쟁이후 신자수의 증가로 전교회, 청년회 성가단 등이 조직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0년 8월 13일에는 본당으로 승격, 성 골롬반회의 미국인 미카엘(James Michaels, 권) 신부가 부임하여 사목하였는데 가톨릭구제회(N.C.W.C)의 혜택도 있어 신자수가 1,100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해마다 신규 영세자 보다는 사망자가 늘어나고 음성환자로 확인되어 자활촌으로 전출하는 환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1978년 4월 27일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이곳으로 왔을 때는 신자들이 420명이었으며, 그 중 젊은이는 34명이었고, 아홉마을에 걸쳐 사도회장과 총무 등의 조직은 형식상 조직되어 있었으나 본당운영은 매우 어려웠다. 섬 전체가 국립나병원 통제 하에 놓여있어 외부인사의 출입이 거의 없고,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으며〔제2의 안내소〕를 경계로 하여 도민들의 왕래도 제한되고 있으며 환자들은 외부와 완전 단절된 곳에 고립되어 있다. 본당설립 이후 18년동안 외국인 본당신부 10여명이 사목하였던 곳이다. 이곳에 수용된 환자 3,000명 중 2,600명이 장로교 신자로서, 말단 행정까지 그들이 관장하여 가톨릭 신자는 거의가 고령자이거나 중환자들이었다. 1961년 10월 11일 까리따스 수녀회의 수녀들이 미감아보육원을 돌보다가 그만 두었고, 1965년 2월 24일 오스트리아 그리스도왕 시녀회에서 3명의 간호수녀가 파견되어 현재까지 봉직하고 있다. 1973년 2월에 성체수녀회에서 본당수녀를 파견하였으나 1975년 7월에 철수하였고 1974년 5월 30일부터 현재까지 메리놀회 간호수녀 3명이 병원에서 봉사하고 있다. 1978년 3월 13일의 방문 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파견을 결정했다. 수녀들은 두개의 본당, 즉 관사(官舍)와 병사(病舍)본당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수녀원에서 양성당은 약 2㎞의 거리라 원내에 경당을 차려 성체를 모셨다. 이 섬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란 서로 잘 아는 사이라 보통으로 모든 행사가 온 섬에 알려지기 마련이고 옛 풍습을 고수하며, 서로간의 친목, 단결하는 장점이 있는가 하면, 허례와 낭비도 많다. 외국선교사의 놀라운 신앙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치본당의 규모를 갖추지 못한 것이 무리도 아니다. 가족 가운데는 학업, 취업관계로 낮에는 섬을 떠나는 유동 인구도 많아 평일에는 수, 금요일에 미사를 드리는데 참여하는 신자는 손꼽을 정도이고 주일미사 참석자도 몇명 안되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직원들의 자녀교육이었다. 그리하여 1979년 2월부터 '쌘뽈유치원'을 개원하여 36명의 원아들을 받아 이경례 비비안나 수녀가 담당하였다. 이어서 주일학교, 중고등학생회, 청년회, 레지오 마리애, 성체회를 조직하면서 신앙생활을 체험시키고, 1979년부터는 간호보조원양성소 학생들중 희망자를 대상으로 교리교육을 실시한 결과 매년 10여명의 영세자들이 나왔다. 성인 영세자들도 열심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부진하던 본당에거 그간 총 330여명의 새 교우가 탄생하게 된 것은 유치원 어린이들을 통하여 부모들에게 미친 영향이 컸다. 그러는 사이에 관사지대의 신자수가 장로교의 두배로 늘었다. 신앙생활에 열심해진 신자들은 멀리하던 병사와의 친근감도 생겨 병사본당까지 가서 미사에 참여하는 이도 있고, 특히 성탄, 부활 전야미사, 성모의 밤 전례등은 합동으로 올리게 되었다.

병사본당의 예비자는 소수이지만 굳은 뜻과 용기로 박해를 각오하고 개종하는 환자들이라 열성이 대단하다. 병사성당은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어 크기는 하지만 환자들 300여명이 마루바닥에 앉았다 섰다 할 때마다 그 소란과 아픔과 불편은 표현하기 어려웠다. 양 벽은 진물자국으로 때묻었으며, 나무에 밴 악취는 청소, 소독이 해결해 주지 못하였다. 1983년 7월 10일 (구라주일)에 구라사업 연합회장이었던 이경재(李庚宰 알렉산드로) 신부의 노력에 의해 모인 헌금으로 병사본당의 마루를 인조석으로 바꾸고 의자를 설치하여 환자들의 거동을 편리하게 해 주었으며, 수리가 필요한 부분들을 다듬어서 성당의 모습이 새로워졌다. 또한 1982년에는 구라사업 연합회로부터 25인승 버스를 얻어 먼 곳에서 오는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수녀들은 이 밖에도 섬 북쪽에 있는 환자전용의 교도소를 방문하고 예비자 교리와 미사 등을 통해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 한편,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소록도방문 이후부터는 교회와 사회의 관심이 높아져 많은 봉사위문단과 각 본당의 봉사자들이 섬을 방문해 오곤 한다. 이제 이곳 환자들은 대구본원을 외가집이라 부를 정도로 수녀들을 따르며 밝게 생활하고 있다.

1979. 2 소록도본당내 '쌘뽈유치원'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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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80쪽)

8.15광복 이듬해인 1946년 4월 인천본당(답동)으로부터 분리되어 설정된 본당이다.

1949년 2월 신성우(마르꼬)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신축자금을 마련중에 6.25동란이 발발하자 1.4후퇴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도망와서 폭격으로 불탄 임시성당을 복구하였다. 수복 후 신자수가 늘어나자 주일미사도 근처의 솔밭에서 지내야 되는 형편임으로 신신부는 자신이 농사를 지어서 번돈과 인근 미군부대의 원조와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54년 11월 28일 114평의 성당을 준공하였다.

보육원과 양로원을 만들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야간학교도 설립하였다.

소사본당은 봉사하는 교회, 믿음을 다지는 교회를 지향하는 신자들의 의지를 모아 450평에 달하는 현대식 '성가정회관'을 지어 1984년에 개관하였다. 이곳은 교회는 물론 지역사회를 위하여 완전히 개방하고 있는데 특히 젊은이들의 교육장과 상담실을 비롯, 직장인들의 회합, 피정교육 및 각종 문화교육센터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1955. 성가보육원을 유치 (680쪽 소사본당)

1959. 성가양로원 설립 (680쪽 소사본당)

1984. 7 성가정회관 설립 (680쪽 소사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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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영아재활원 小花櫖兒再活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3쪽)

소화영아재활원은 원래 소화보육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8·15 해방 후 부산 범일동 본당 주임 정재석 신부가 후견인이 없는 불쌍한 어린이들을 모아서 본당 근처에 있던 30평짜리 한옥에 수용한 것이 소화보육원의 출발이다. 정 신부는 이 사업의 운영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위촉하였다. 1946년 2월 10일에 분원이 설립되어 파견된 수녀들은 협소한 집에서 갖추어진 시설도 없고 보건위생 조건도 불비한 가운데서 초창기의 정신 그대로 가난과 겸손 그리고 인내로써 사랑의 일을 말없이 계속하였다. 그러던 사이에 한국전쟁으로 부산은 피난민으로 붐볐고 소화보육원은 서울, 대구의 수녀회에서 운영하던 두 보육원 아이들을 피난 수용하는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 전쟁기간동안 피난민들이 느는 만큼 고아가 늘어가자 정부당국의 후원자 은인들의 도움으로 급히 144명의 원사를 마련하였고 원아들의 보건위행과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의 진료를 위하여 부속건물로 진료소도 지었다. 이것이 데레사의원의 시작이 되었다.

소화보육원의 원아수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늘어갔지만 시설은 날로 협소해졌다. 또한 본당과 학교 사이에 자리잡은 보육원은 보육환경이 부적당했고 이전 문제가 거론되었다. 부산교구청에서는 보육원 대지를 내놓고 교구소속 대지였던 남구 남천동으로 이전하라고 하였다. 부산의 변두리였던 남천동은 그 당시 황무지와 다름없었던 거의 쓸모없는 땅이었다. 431평의 대지에 새원사를 지어 1963년 9월 12일에 옮기게 되었다.

당시 보육원과 부속 데레사의원의 운영권자가 모호하여 실무상에 애로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교섭한 결과 부산교구장 이갑수 가브리엘 주교는 1977년 3월 30일에 소화보육원의 운영권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에 정식으로 이양하였다.

한편 1979년까지 보육하던 영아원의 영아들은 차차 입양되고 이곳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영아불구시설'로 전환시켜 영아장애인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영아들의 질병은 다양하였고 병원왕래에 교통편이 원할하지 못해 어려움이 컸다. 이 사정을 아산재단에 알려 1979년 6월에 미니버스를 얻게되었다. 이 해 연말부터 수녀들의 사업이 알려져 수용 인원수가 많아져서 새로운 시설로의 이전이 요청되었다. 그래서 데레사의원이 폐원된 후 여러번 시설변경이 시도되었던 종전의 병원건물을 시청의 원조로 개수하여 1980년 4월에 입주하였다. 1980년 초에 비만오면 웅덩이로 변하는 건물 앞의 공지를 교육청에서 학교건립을 위하여 퍼내는 흙을 얻어 매립했다.

시대적 요구와 소명감에서 시작한 이 일은 시행착오를 거듭하여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경험부족과 재정적인 어려움, 주위의 이해부족 등 어려움이 말할 수 없었다. 정상아 15명당 보모 1명으로 해결될 수 있는 영아원 운영이 장애인인 경우에는 5명에 보모 1명이라도 힘겨운 일이다. 장애인의 유형은 가지가지이다. 그러나 장애인들도 조기치료를 하면 효과적이므로 치료기구, 물리치료실 등의 구비에 필요한 재정적인 뒷바침이 있어야 한다.

1980년 말에 소화영아불구시설을 '소화영아재활원'으로 명칭변경 신청하였다. 기존건물을 다시 개수공사하여 시설을 갖추어 1981년 1월 19일에 소화영아재활원으로 개원한 후 수녀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던 중 1987년 남천동 재활원 자리에 교구청사를 이전하려는 교구의 계획으로 다시 재활원의 이전문제가 대두되었다. 무척 난처했고 앞으로도 이런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부산교구청과는 상관없이 사업체를 단독으로 운영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재활원을 위하여 교구청측에서 내놓은 부곡동 야산에는 그 동안 재활원 사목실을 빌려 상담해오던 심장환자 상담소를 위한 건물 신축이 계획되어 1988년 2월 1일 기공식을 가졌고 1989년 10월에 완공을 보았다.

1946. 2. 10 소화영아재활원(小花櫖兒再活院)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3쪽)

1979. 소화영아재활원은 '영아불구시설'로 용도를 변경하여 장애인 수용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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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샘 아가방 (나눔지 142호 2쪽) - 1987. 3. 28발행

도봉구 미아동에 솔샘 아가방 탁아소가 개설되었다. 지역의 영세민 맞벌이 부부들의 취학전 아이들을 오전8시부터 오후 7시까지 맡아, 대리모로서의 역할을 하며 아이들의 사회성과 정서교육등을 담당하며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을 덜어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도와준다.

1987. 3. 16 탁아소인 솔샘 아가방 개설 (나눔지 142호 2쪽) - 1987. 3. 28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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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놀이방 (나눔지 1996. 봄 47쪽)

송학놀이방은 재개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시급한 요구에 따라 지역의 맞벌이 부부 자녀들을 위험에서 보호하고 조기교육을 통한 정서함양, 인지학습, 생활습관훈련, 공동생활훈련 등을 하고 있다. 가난한 지역 주민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사는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1994년 6월에 설립되어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에서 위탁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 탁아소로, 아이들이 마음놓고 뛰놀며 건강하고 밝게 자라도록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는 사랑의 공간이다. 주로 3세에서 5세의 영·유아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참담하게만 보였던 철거가 끝난 지금은 철거민들의 임시거주지인 가이주단지 '송학마을'안에 마련된 16평의 공간에서 16명의 아이들을 두분의 수녀와 한명의 교사가 돌보고 있다.

1994. 6 송학놀이방 설립 (나눔지 1996. 봄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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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694쪽)

1891년 왕림본당의 공소로 부터 시작. 주보는 대천사 성 미카엘.

1906년에는 북수리에 있는 기와집 두채와 행랑채를 사들여 내부를 개조하고 성당으로 만들었다.

1930년에 폴리(Desideratus Polly) 신부의 부임으로 본격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당시 수원에는 이 본당밖에 없었고, 전교가 잘 안되기로 알려진 침체한 곳이었다. 폴리신부는 부인들로 '명도회'를 조직하여 전교활동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어린이 교리반을 만들고 돈 보스코회 등 신심 단체도 구성하여 신자들의 교육과 의식개발에 힘썼다. 이것은 일제 식민치하의 한국인들에 대한 일종의 민중계몽운동이기도 하였다.

학원을 만들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극빈자 자녀들에게 수업료 한푼 받지않고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1959년 고등동 본당이 분활되면서 부터 수원본당은 '북수동 본당'으로 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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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공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00쪽)

건전한 직공 양성을 통해 선교사업을 전개한다는 목적으로 베네딕토 수도회가 1910년 혜화동에 설립한 직업학교. '기도하고(崇) 일하라(工)' 라고 한 베네딕토 수도회의 이념에 따라 학교명을 숭공이라고 하였다. 철공소와 목공소를 개설하여 좌물쇠 제작, 양철제품 제작, 페인트 칠 등의 기술을 연마시켰고 한문, 일본어, 수학과 교리교육도 병행하였다.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숭공학교의 제작품으로는 명동성당의 강론단이 있다.

1921년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짐에 따라 숭공학교도 폐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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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신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00쪽)

베네딕토 수도원이 1911년 설립한 일종의 사립학교. 지금의 가톨릭대학 신학부 자리에 개교하였다. 종교학, 윤리학, 교육학, 한국어, 일본어, 세계사, 지리, 수학, 박물학, 음악, 도화, 체육등을 교육하였다.

1913년 9월 일제의 탄압으로 제1회 졸업생 만을 배출하고 2년만에 폐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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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아동상담소 (나눔지 112호 3쪽) -1986. 8. 23발행

시립아동상담소는 국가기관으로 아동에 관한 Service 를 하는 곳이다. Service 내용으로는 가출 및 부랑아 단속 및 보호, 문제아 상담 및 치료, 기아, 미아 일시보호 및 귀가조치, 국내입양, 각종 심리검사, 지능검사 실시, 지능개발실 운영, 순회아동 상담실 운영, 아동권익보호 신고소 운영, 요보호 아동 시설수용, 기타 아동에 대한 제반문제 처리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상담소는 시립이므로 모든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으며 아동을 가진 부모는 누구든지 이용하여 혜택을 입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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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집 (나눔지 2호 4쪽) - 1976. 11. 22발행

경기도 고양군 광탄면 신산리에 결핵환자들이 집단하여 살고 있는 보금자리가 얼마전 문을 열었다. 시몬의 집은 신산리 분지에 있는 외딴집이다. 지금 여기서 생활하고 있는 결핵환자 9명 <그중 3명은 교우>은 얼마전 까지는 다른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정에 의해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새로운 보금자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교구에 호소해 온 사람이 최 젬마씨이다. 최 젬마씨의 상담을 받은 교구에서는 마리조양이 벨지움의 청년들이 보내온 90만원을 전달해 준것을 기금으로 하여 새로운 집과 대지를 구입했고 교구자체는 집수리를 맡았다. 그리고 성모병원에서는 철 침대 14개를 회사했다. 지금 이 보금자리는 교직을 가지고 있으며 그외의 시간은 이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최 젬마씨에 의해 여러가지 일들이 처리되고 있으며 김정흥 군종신부가 옆에서 도와주며 미사도 봉헌해 주고있다. 이 환자들은 자기들의 친척이나 다른 도움으로 생활비나 약값을 받고 있으며 교구에서는 집을 마련해 주기만 했다.

'시몬의 집 돕기회 (나눔지 89호 4쪽) -1986. 3. 15발행

한국 천주교회의 선교를 향하여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소외된 이웃, 특히 결핵환자들에게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형제적 사랑의 나눔을 실천해 줌으로서, 그들에게 삶과 희망과 기쁨을 찾을 수있도록 후원해 주는 나눔의 공동체이다. 주요활동은 무의탁및 영세가정 결핵환자들의 요양치료, 환우들에게 정신적이고 물질적 지원을 통한 복음선교, 시몬의 집을 위한 모금활동 등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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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까리타스수녀회 (영) Seton Sisters of Charity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13쪽)

1870년 성녀 엘리자벳 앤 시튼(Elizabeth ann Seton) 수녀에 의해 미국에서 창설된 수녀회. 1960년 한국 진출.

겸허와 사랑, 소박을 하나로 구체화 시킬 수 있는 교육사업을 중요한 사업으로 하고 있다. 당시 광주교구장 헨리(Hennry) 주교의 초청으로 처음 목포에 4명의 수녀가 내한하였다. 1961년 강진의 금릉중학교를 인수하기 위해 강진으로 이전하여 1962년 3월 금릉여자중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1965년 한국인 첫 지원자를 받았고, 1972년 수련소가 한국내에 설치되었다. 1973년 서울 성북동으로 진출하였다. 1979년 2월 목포 연동본당으로 처음 본당활동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11월 광주 근교에 수련원을 증축하였다. 1981년에는 지체부자유자를 위한 특수학교인 은혜국민학교를 개교하였다. 현재,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에 소재한 본원을 비롯하여 4개의 분원 및 특수학교 1개교, 중 고등학교 1개교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1. 지체부자유자를 위한 특수학교인 은혜국민학교 개교 (713쪽 시튼 까리따스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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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산본당 新高山本堂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48쪽)

신고산은 소역까지 포함하여 경원선 상행의 일곱째 역에 위치한 읍으로써 명승지와 연결이 된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기도 맑고 조용한 분워기의 고장으로서 휴양지로도 적당한 곳이었다. 신고산에는 고산(高山)본당이 있었는데 이는 1896년, 함경남도 내평리에 창설된 내평본당이 1930년, 교통이 편리한 고산역 부근으로 이전되면서 신고산의 고산본당으로 개칭된 것이었다. 또한 고산본당은 원산교구가 설정된 이후 1921년부터 베네딕토회 신부들이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다.

수녀원은 벽돌로 지은 남향의 단층 건물이었으며 수녀원 한편에는 유치원 건물도 건축하였다. 텃밭 끝쪽에는 한옥이 한 채 있었는데 이를 수리하여 시약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밭에는 파스칼 판가우어(Paschalis Fangauer, 1882. 1. 8 - 1950. 4. 16) 수사가 수녀들을 위해 여러가지 과실수와 채소 등을 심어 주었다. 1935년 3월, 나 카누토 신부가 신고산의 본당 회장이 살던 집을 매입하여 본당에서 경영하는 시립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명은 '해성 보통학교'로서 소학교의 교과과정을 가르쳤다. 수업은 수사와 몇 명의 평교사가 맡아 하였는데 방과 후에는 늘 5, 6명씩 청원자와 수녀들이 교리시간을 배정 받고 철저히 교리지도를 했다. 이 지역에는 공립보통학교도 있었으나 해성학교에 입학을 원하는 학생이 늘어남에 따라 교리반의 학생도 증가되어 수녀들의 일도 더욱 많아졌다.

1936년 4월부터 시작된 고산본당의 성당신축은 1937년 6월 20일에 완공되어 유 플라치도 본당신부의 주례로 축성하였다. 새 성당은 2,500평 부지에 건평 122평으로 아름다운 성전이었다. 사제관도 곁에 지었으며, 옛 사제관을 헐어서 해성학교를 증축하였다.

시약소는 처음에 수녀원 객실에서 하다가 후에는 텃밭 끝쪽에 위치한 한옥으로 옮겼다. 시약소의 방 한개는농지에서 일하는 가족이 사용하였다. 신고산본당에서는 의사 면허를 가진 이가 없었으므로 독립적으로 시약소를 운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고산의 시약소는 원산본당의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에 속해져서 인가를 받은 후 의사인 디오메데스 수녀가 매월 한 번씩 다녀갔다.

1935. 3 신고산 본당의 나 카누토 신부가 '해성 보통학교'를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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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학교 晨星學校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22쪽)

1909년 프랑스 선교사 라크루(Marcellus Lacrouts) 신부가 제주도에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으로 현재의 신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16년 일제의 우민화정책에 따라 탄압을 받고 무기휴교를 당했다가 1964년 신성여자중학원으로 재개교하였다. 1953년 고등학교를 병설하였고 1977년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800번지의 현 교사로 이전하였다.

1909. 신성학교 설립 (722쪽 신성학교)

1916. 일제의 탄압에 따라 신성학교 폐교 (722쪽 신성학교)

1946. 신성여자중학원 으로 재개교 (722쪽 신성학교)

1953. 신성고등학교를 병행 (722쪽 신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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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31쪽)

1922년 평북 신의주시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천주성신(天主聖神). 1910년 인천에서 신의주로 이주해 온 김소사가 이듬해 구네군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한 후로 신의주 일대가 전교되기 시작하여 1912년 공소가 개설되었고, 그 뒤 1921년 신의주가 평안북도의 도청소재지가 되면서 교세가 급격히 신장, 1922년 신의주시 초음동에 성당이 건축되고 초대 주임신부로 박정렬 신부가 부임하였다. 1924년 본당이 신의주시 전사동으로 이전되었고, 4대 주임 페티프런(Petipren) 신부 시절인 1930년 메리놀 수녀회 분원이 설치됨과 동시에 의사수녀, 간호원 수녀들이 시약소와 성모병원을 개설하였다. 본당운영의 사회사업체로는 1930년 개설된 성모병원, 시약소, 야간학교 등이 있었다.

1930. 성모병원 설립 (731쪽 신의주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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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동 본당 (나눔지 1996. 여름 38쪽)

논밭 사이사이의 구릉아래로 조선조시대의 전형적 농가 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이 지역은 1921년 이전에는 김포군 양동면 양천에 속하여 천주교의 전파로 점차 신자들이 모여살기 시작하다가 양화진 남쪽에 목동리 공소가 생기면서 점차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목동리 공소에는 신정리를 비롯해서 등촌리, 염창리, 화곡리, 신월리, 가양리, 방화리 등이 이에 속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은 1964년 10월부터 용산구 남산 기슭의 속칭 해방촌과 성북동 등 서울 시내의 철거민들이 신정 2동 안양천 제방 등에 집단 이주하여 판자집을 짓고 정착하면서 이지역 상주인구 판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외에도 외지로부터 많은 인구가 전입해 왔으므로 신자수도 증가하여 1972년 목동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였고, 다시 1976년 12월 9일 신정동공소와 화곡동 본당의 신월동공소를 통합하여 신정동본당으로 승격신설되었다.

초대주임신부는 성 골롬반 수도회의 진제랄드 신부가 부임하여 초기 800여 명의 신자로 시작하여 성당의 건축을 완료하였고 사목회, 연령회, 청년회 등 주요 평신도 단체들이 결성되어 대사회적인 활동과 함께 초본당적인 친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등 활발한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2대 오 안드레아 신부 재임기에 이르러 더욱 높아졌다.

이는 빈첸시오회의 구성과 적극적인 이웃돕기활동등으로 나타났다. 주요 사회봉사활동으로는 한강성심병원 의료진의 지원으로 관내 무료진료소가 실시되었고, 장학금 지급, 장애인 수용소 방문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84년에는 신월동본당을 분가하였고, 그후 400평의 대지에 5천여명의 신자에 이르도록 3대 조피트리시오 신부, 4대 신오복 안토니오 신부, 5대 차가롤로 신부에 이르도록 주임신부는 골롬반수도회의 외국선교사들에 의해 본당이 운영되어 왔다.

1988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서울대교구 소속 조학문 신부가 6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전개하였고, 계속해서 한국신부가 본당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7대 이재돈 신부, 제8대 김준철 신부에 이어, 현재는 김태선 주임신부가 제9대 본당사제로 부임하여 이형재 보좌신부와 순교복자수도회 수녀들과 함께 사목협의회(회장 : 고영동)를 중심으로 7천 5백여명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랑으로 봉사하는 본당 공동체의 운영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많은 활동 중 신정동본당은 93년부터 특별히 교구차원에서 벌이는 환경보전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사목회 안에 환경보전분과를 두어 한마음 한몸 운동본부 생활실천부에서 주관하는 환경학교를 열어 200여명을 배출하였으며, 환경문제를 연구 실천하기 위하여 하늘 땅 물 벗 모임을 만들어 연구부와 재활용부, 도농직거래부, 그리고 무공해비누 등을 만들거나 수집한 것을 실비로 판매하는 사업부 등으로 조직 운영을 하고 있다. 또 수익금은 본당 내 불우이웃돕기 단체인 빈첸시오회에서 사용함으로써 자연환경을 창조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고,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더불어 사는 공동체활동으로 본당 활성화에 커다란 기폭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더불어 사는 본당 공동체의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본당의 사회복지 활동은 많은 부분에 있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정동 본당의 주요 사회복지활동에 대해서 사회복지분과 신순철 위원장은 본당의 특성과 활동계획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사회복지단체의 후원사업으로 주로 무의탁 행려자를 위한 의료시설인 성가복지병원과 요셉의원을 돕는 외에 한빛종합사회복지관을 매월 정기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둘째는 불우이웃돕기를 위하여 부활과 추석시기에 어려운 이웃 30가정에게 생계비 지원을 하고 있으며, 또한 관내의 행려자와 신문배달학생, 우체부, 청소부 등에게도 사랑의 나눔을 하고 있다. 셋째로는 청소년 장학 사업으로 이웃의 신정5동, 등촌동, 한빛, 신월 등 지역사회복지관의 추천을 받아 법적으로 보호를 못받고 있는 결손가정이나 생활이 어려운 소년소녀가장의 학자금 지원으로 중학생과 고등학생 10여명에게 4회에 걸쳐 분기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넷째로는 모금활동으로 사순시기에 전 신자를 대상으로 저금통을 가정마다 나눠주어 성지주일 공동 헌금의 날에 함께 거두어 이웃돕기 성금으로 쓰여진다. 다섯째는 연중 사랑의 나눔바자 개최로 지난 89년 이후 해마다 서울대교구 사회복지회 산하 장애인복지기관들을 초대하여 신자와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장애인 단체를 소개하고 장애인이 직접 만든 물품들을 전시하며 또 판매를 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사랑의 나눔장터에는 장애인단체들의 자립의욕을 고취시키고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본당 차원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매해마다 계속해서 열고 있는데, 장애인에 대한 사회인식을 높이고 신자들과의 만남으로 지역사회 안에서의 열린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장애인 단체들의 판로 개척과 자립의욕을 높이는데 많은 공헌을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 행사는 연중 활동 중 신정동본당에서 가장 뜻깊게 준비하는 일중에 하나인데 본당 공동체의 날처럼 각 단체들이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함께 먹거리 장터도 운영하여 바자 분위기도 조성하고, 판매 이익금은 참가한 장애인단체들에게 20만원씩 전달하고 한마음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1976. 12. 9 신정동공소와 화곡동본당의 신월동공소를 통합하여 신정동 본당으로 승격신설 (나눔지 1996. 여름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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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환자상담소 心臟患者相談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6쪽)

가난속에서 고통당하는 심장환자 어린이들을 돌보는일로 14년간 애써온 김옥희 미카엘라 수녀를 중심으로 하여 1987년 3월에 한업덕 아오스딩 수녀와 박정희 엘리사벳 수녀가 함께 새 분원을 설립하였다. 김 수녀가 심장병환자 어린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1973년 메리놀병원 소아과 병동에서 근무했을 때부터였다. 죽음을 눈앞에 둔 세살난 어린이의 어머니를 납득시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주었는데 놀랍게도 소생하였기에 퇴원 후에도 계속 찾아보고 성모의원, 국제약국에서 약을 얻어 주기도 하였지만 심장수술이 필요한 이 어린이를 위해서는 구원의 길이 막막하였다. 수술비는 물론이고 국내 어느병원에서도 이 어린이를 도와줄 곳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부산 하야리아(Hajaleah) 미군 부대의 주선과 메리놀 간호학교장 콘로이(Conroy) 수녀의 도움으로 이 어린이는 1975년 12월에 미국 미네소타 메트로폴리탄(Minesota Metropolitam) 병원에서 수술을 받도록 예약되었고 항공료도 뜻있는 학생들과 본당의 협조로 모금되었다. 이 어린이의 수술이 성공했고 그 희소식이 각처에 알려지게 되어 모여 오는 환자들을 버려두지 못하게 되었다. 1973년 3월부터 메리놀 간호전문대학 응접실을 빌려 매월 1회씩 심장병 환자의 상담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부산 하야리야 부대에 이어서 서울 용산 미8군 121병원에서도 4-5명의 환자를 무료로 진찰해 주었고 정밀검사를 해 주었다. 그리고 차후에는 서울대학병원 세브란스 병원에서도 검사와 미국에 갈 수 있는 진단서를 알선해 주게 되었다.

그 이후 국내 각처, 특히 큰도시의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서도 심장병 치료의 문을 열어 주었다. 즉, 대구 영남병원, 메리놀병원, 부산 백병원, 고신의료원, 부산침례병원, 서울에서는 성 바오로 병원, 성남 인하대학병원, 부천 세종병원 등이었다. 현재 대구 영남병원 심장내과 심봉섭 과장, 흉부외과 강면식 과장과 이철주 과장은 매월 첫주에 부산까지 와서 환자 100여명에게 무료진찰을 해주고 있으며 수술받은 환아들을 보살펴 주고 있다. 세브란스 병원의 조범구 박사는 매월 둘째주일에 정기적으로 왕진해 주고 있다.

1991년 현재 환아수는 4,500여명이며, 크고 작은 수술에 응한 어린이들이 2,114명이고 그 중 사망수는 93명이다. 그 후 부산교구의 시책으로 소화영아재활원이 다시 자리를 내 놓아야 하게 되자 1987년 3월 1일 부터 부산 감만동에 임시로 심장환자 상담소를 개설하는 한편, 부곡동 부지에 상담소를 위한 건물을 신축, 1988년 12월 3일에 완공하여 이전하였다.

1987. 3. 1 심장환자 상담소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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