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명부8(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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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반 /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 아욱실리움 센터 / 아이들의 집 / 안나의 집 / 안내양 교양 센타 / 안성본당 / 안양 가톨릭 근로자 회관 / 안양 나자로원 / 안양시장애인종합복지관 / 안주본당 / 애기들의 집 / 애덕 농아자활원 / 애덕의 집 / 애덕 일치회 / 애육원 / 약현본당 / 에스오에스 어린이 마을 / 엠마누엘 장애 어린이집 /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 / 여성문제 상담소 / 연길상시본당 / 연백성모원 / 연성원 / 연안본당 / 영광본당 / 영남노동교육원 / 영등포본당 /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 영유본당 / 영 엠마우스 / 예수 그리스도의 집 / 예천본당 / 오류골 성인 복지회관 / 오산 어린이의 집 / 오순절 평화의 마을 / 오스트리아부인회 /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 왕림본당 / 요셉의원 / 요셉의 집 / 요한 교육원 / 요한보스코 기술교육원 / 우리들의 집 / 우양의집 (애덕회) / 원산본당 /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 / 원주본당 / 원주 성바오로 병원 / 유당마을 / 윤을수 / 윤의병 / 은성원 / 은율본당 / 의료사업 / 의정부본당 / 의정부 성모병원 / 의주본당 / 이리 성모 의원 / 이천본당 / 익산 남촌 마을 / 인보 기술 학교 / 인보의 집 / 인성회 / 인애 놀이방 / 인제병원 / 인지의 집 / 인천 가톨릭 농아 선교회 / 일신 우리집


아녜스 반 (교회와 역사 226호 19쪽) - 1994. 3. 25 발행

1985년부터 노틀담 수녀회 근처에 있는 재동국민학교 저학년의 지진아를 위한 사도직을 시작하였다. 1, 2, 3학년의 학생들로서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학생들은 학급에서 정상적인 수업을 받기가 어렵고 집안이 어려운 관계로 부모님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학교에서 빈부의 격차에서 오는 위축감 때문에 제대로 자신들의 소신을 펴지 못한 학생들이라서 성격의 장애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일주일에 세 번은 학교 수업이 끝나고 수녀원에 와서 보충수업을 받게 된다. 이들에게 부족한 학업 성적을 증진시키고 수업 외에 부활절, 성탄절 행사를 통해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고 원만한 성격을 형성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돕는다. 여름의 하기 캠프는 학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며 교사들의 사랑을 통해 활달한 모습으로 회복하도록 돕는다. 아녜스 반의 교사들도 자원봉사자들로서 학생들의 수업 지도뿐 아니라 생활면에서도 인지 발달에 신경을 쓴다. 교사들은 책임 있게 학생들을 위해 봉사하며 때로는 물질적 지원도 아끼지 않으며 일년에 한 번은 학생들을 위해 일일 찻집을 개최하여 남은 이익금으로 학생들을 돕는다. 이들의 봉사에서 형제적 사랑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이 신자이며 수사들과 신학생들이 동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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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영) Franciscan Missionary Sisters of Assisi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63쪽)

1703년 1월 2일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창립된 수녀회. 1980년 한국 진출. 1905년 전교와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이 가난하고 단순하며, 겸손한 생활을 통해 예수를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한다는 정신을 가진다. 서울 종암동에 있는 임시 본원과 부산 대연동에 보육원인 프란치스코의 집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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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욱실리움 센터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월 살레시오 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청소년들의 전인교육으로 돈보스꼬의 독특한 삶의 스타일(일상의 성덕), 활동양식(da mihi animas ceter tolle - "나에게 영혼을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 기도방법(일이 곧 기도 - 기도정신으로 성화된 일), 사목적 관계양식을 통하여 고유한 교육방법을 발전시킨 예방교육법에 따라 소외되고, 가난한 청소년들이 정직한 시민, 착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정신에 따라 1979년 경남 마산에서 선교사 살레시오 수녀회의 지부장 Catarina Moore 수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마산 지역에 공단을 만들면서 많은 여공들과 시골에서 상경한 어린 소녀들이 많아 이들의 복지를 위해 기숙사를 개설하여 120명을 수용하고 이들에게 여성교양 프로그램 및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의 생활을 통해 행복한 여성으로의 오늘을 해결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92년 창원에 공단조성 계획이 있어 그곳으로 이전하면서 지역의 필요성에 따라 수련관으로 변경하여 창원지역의 청소년들을 위한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기숙사의 연장으로는 나자렛 집(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기관) 출신의 여중고생과 지방에서 온 창원지역 거주의 야간 여고생을 위한 기숙사로 약 20여명의 여학생들의 학교 교육과 병행하여 가정일을 배우고 온전한 여성으로의 성장과 자립을 돕고 있다.

1979. 아욱실리움 센터 설립 (살레시오 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641-530 경남 창원시 소답동 27블럭 1롯트 現'젊음의 집'/ 전화 0551)55-8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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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집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6. 11일 아이들의집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6·25 동란 후 고아와 기아, 혼혈아들을 수용하여 양육 및 입양을 목적으로 1954년 9월 1일 강 베드로 수녀가 부산 동대신동에 설립하였다. 그러나 특수아동의 수용보호 및 치료시설의 필요에따라 1998년 12월 10일에 부산해운대구에 지체 부자유영아의 재활치료 및 수용시설인 아이들의 집으로 그 목적을 변경하였다.

주요사업 내용은 부모가 없는 장애아동을 수용보호하여 행복한 삶에의 원동력이 되도록 도우며, 또 갓난아기 부터 보이타 치료를 집중적으로 하여 장애를 가볍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만 1세이상 교육가능급 생활교육 아동에게 조기교육을 실시하여 인지능력을 높이고 지능개발을 돕는다. 또 개별적으로 언어지도를 한다. 1998년 2월 현재 정원 41명 중에 현 인원은 46명이고 시설은 대지 7,721㎡에 임야 23,502㎡이다. 마리아동에는 경당과 아동방, 의무실, 치료실, 식당, 주방, 세탁실 등이 있고 요셉동에는 사무실과 교육실, 그룹방 등이 있고, 강당과 놀이방이 설치되어있는 유희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매월 1,000여명 이상의 봉사자들이 아이들의 집에서 시설물과 정원 손보기, 밭일, 아이들 밥 먹이기, 주방과 빨래방 돕기, 시설물과 정원 손보기, 밭일, 그외의 일들을 도와주고 있다.

1954. 9. 1 부산 동대신동에 고아와 기아등을 수용하는 시설인 성모보육원 설립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복지시설)

1988. 12. 10 고아와 기아의 수용시설에서 지체부자유영아의 재활치료시설로 아이들의 집 용도 변경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복지시설)

1997. 3 재 부산 특수학교인 혜남학교 초등부 분교를 실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612-082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2동 614/ 전화 051)521-5980·4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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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집 (나눔지 15호 6쪽) - 1980. 4. 30발행

안나의 집은 지체 장애자 할머니들을 모시는 곳이다. 시중들기가 무척 힘들지만 할머니들 생애의 마지막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운영은 일정한 외부의 원조없이 성가수녀회에서 절약하여 자체 해결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성서공부와 전례참례를 실시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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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집 (성가소비녀회의 복지시설) - 1998. 5. 29일 안나의 집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서울시 성북구 길음 1동에 자리잡고 있는 안나의 집은 1977년 불우 할머니 15분의 입소로 시작되었다.

성가소비녀회를 창설한 성베드로 신부의 취지에 따라 일반시설에서 입소조차 제외된 무의무탁하여 불구인 할머니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양로시설로 국가보조 없이 수녀원 재단에서 자체부담하여 수녀들이 직접봉사하고 있다. 1998년 현재 정원은 32명이며, 입소대상은 65세 이상의 할머니로 생활보호 대상자, 불구이거나 노환의 할머니, 법정 전염성이 없고 정신질환이 없는 할머니이다.

1977. 6. 6 안나의 집 준공식 및 축성식 (성가소비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136-111 서울시 성북구 길음 1동 555-24/ 전화 02)940-5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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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양 교양 센타 (교회와 역사 226호 18쪽) - 1994. 3. 25 발행

1969년 당시 버스 운송 사업은 주식회사 제도가 아닌 개인 사업이므로 안내양들의 대부분은 차주의 고용인으로서 그집에 더부살이를 하거나 3∼4명이 함께 자취를 하는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용주들의 엄한 감시와 비협조적인 태도, 안내양 자신들의 심리적 저조 상태 등 이러한 여건 속에 그들을 한곳에 모은다는 것은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난관을 뚫고 노틀담 수녀회의 수녀들은 서울 9번 버스 종점인 수유리를 방문하여 80여명의 안내양들을 대상으로 어린이 옷 만들기 등 여성의 기본적인 가사일 등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 12월 25일 수유리에 있는 안내양 기숙사에서 신자이면서 냉담 중이던 안내양들에게 고백성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함과 동시에 뜻깊은 성탄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 이듬해인 1971년 12월 22일 KBS방송국에서는 수녀회에서 펼치는 안내양 교육에 대한 관심을 갖고 마리아 알렉산드라 수녀와 몇 명의 안내양들이 참석하여 대담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게 되었고 이러한 기회로 사회가 안내양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버스 안내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더불어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한 안내양들은 긍지를 지닐 수 있게 되었으며 1979년 3월 13일 비번인 안내양들이 30명씩 각기 다른 곳에서 자유로이 모여와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생활하고 가는 '안내양 교양 센타'의 발족을 보았다. 종전까지는 9번 버스 안내양들의 지도를 회사로 직접 나가서 하였는데 이때부터 수녀원의 한 건물을 교육 장소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0여명의 안내양들과 회사의 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내양 교양 센타(현 쥴리의 집)를 개원하였다. 직접적으로 연 2회, 3∼4개월 기간으로 안내양들을 상대로 실시하는 교양교육과 간접적으로는 자동차 노동조합 후원으로 근로자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일, 부녀 부장들을 교육하는 일들로 안내양들의 처우 개선 및 지위 향상은 물론 그들을 위한 사회와 국가의 관심과 배려에 주요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그러나 1982년 시 행정의 결정에 따른 버스 운송 자율화와 더불어 안내양 승차 제도가 폐지되자 1984년 4월 부터 종전의 '안내양 교양 센타'를 '쥴리학원'으로 개명하고 방송 통신 고등학교 과정 이수를 돕는 사도직을 시작하여 이 과정을 밟는 근로 청소년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다.

1979. 3. 13 노틀담 수녀회는 '안내양 교양 센타' 설립 (교회와 역사 226호 18쪽) - 1994. 3. 25 발행

1984. 4 '안내양 교양센타'를 근로 청소년들을 위한 '쥴리의 집'으로 변경 운영 (교회와 역사 226호 18쪽) - 1994. 3. 25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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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75쪽)

주보로 '착한 의견의 모친'을 모시고 있는 이 본당은 1901년 아산 공세리 본당에서 분할되어 창설되었다.

초대신부인 공베르(A. Gombert) 신부는 통진군수를 지낸 백 씨의 집을 사서 임시성당으로 살았다. 그는 1901년 1월 안법학교를 설립하고 운영비를 자비로 댔다. 1912년에는 안법학교 여자부를 신설하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 2명을 초청하여 여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1901. 1. 안법학교 설립 (775쪽 안성본당)

1912. 안법학교 여자부를 신설 (775쪽 안성본당)

1936. 안법학교를 보통학교로 승격 (775쪽 안성본당)

1947. 안법국민학교를 초급중학교로 승격 (775쪽 안성본당)

1951. 8. 안법고등학교 개교 (775쪽 안성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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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가톨릭 근로자 회관 - 1998. 5월 가톨릭 근로자 회관 답신에 의거

근로자들 스스로가 그리스도 신앙을 바탕으로한 건전한 가치관을 형성하도록 돕는 목적에서 1963년 설립되었다. 수원교구 설정당시 윤공희 대주교님과 전 루까 신부님께서 당시 산업개발과 함께 안양지역내 공장으로 취업차 모여드는 젊은 남녀근로자들을 위한 사업으로의 계획을 추진시키고자 국제 가톨릭형제회원 서정림 말가리다(독일인), 한성인 벨따(한국인)에게 근로자 및 부량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으로 운영책임을 맡기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안양지역은 제지공장과 섬유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수자원이 풍부한 조건에 따라 등장한 이 산업은 노동집약적인 공장이므로 노동력이 대거 지방에서 유입되었다. 특히 여성노동자들과 나이어린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는 상황에서 그들을 위한 복지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저학력의 10대와 20대초반의 소녀노동자들을 위한 특수사목이 요청됨을 교회는 인삭하게 되었고 그들을 위한 기숙사 사업을 통하여 생활교육과 사회적응에 필요한 교육들을 실시 하였으며 지역의 노동자들을 가노청운동에 동참하도록 조직하여 나갔다.

1987년 당시 노동자들의 대 투쟁을 통하여 이곳에 살던 많은 근로자들이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다. 노동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그들은 근로자 회관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긴장했기 때문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감시를 당하게 되었고 전직 혹은 퇴사를 강요당하게 되어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붙여 가톨릭의 위상으로 그런 견해들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으로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1998년 사업의 확장과 아울러 이용자들이 복지관으로 부르게 되므로 이름을 전·진·상 사회복지관으로 변경하였다. 이 전·진·상 사회복지관의 카리스마는 설립자들이 JOC활동을 통하여 노동사목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으므로 가노청의 정신이 활동정신이 되었으며 AFI 의 우선적인 방향 중 "현실참여를 통한 인간해방"을 기초로 하여 활동하고 있다. 1998년 현재 지하 1층, 지상 3층에 여자 근로청소년 80명 수용의 기숙사 시설과 회의실, 강의실, 식당, 휴게실이 있다.

1963. 수원교구에서 안양 근로자 회관 설립

1965. 수원교구에서 국제 가톨릭 형제회에 근로자 회관의 운영 및 건립사업을 위임

1990. '안양 근로자 회관'에서 '안양 가톨릭 근로자 회관'으로 명칭이 변경

소재지 : 우 430-014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4동 676-136/ 전화 0343)49-2876/ 모사전보 0343)46-2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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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나자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13쪽, 1000쪽)

1950년경에 캐롤(George Carroll 1906-1981) 주교와 이경재(알렉산데르) 신부가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나환자들을 위해 이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 안양 나자로원의 출발이다. 나자로원의 운영과 생활은 미국 가톨릭구제회(N.C.W.C)의 보조와 성모병원에서 대부분 충당해 주었고 치료와 투약은 성모병원의 만성병 연구소를 중심으로 하여 의대생들이 무료로 해 주었다. 또 성모병원에서는 수녀들의 생활비도 대주었다. 그러나 이듬해 교구 분할이 되면서 이전까지 서울 교구에 속해 있던 나자로원이 수원교구 산하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에 자연히 성모병원의 보조와 진료가 중단되었다. 이 진료는 이후 1971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수원교구에서는 운영상의 난점등을 들어 미감아 학교를 해체하라 하였고 수녀들도 나환자들과의 생활 등에 어려움을 느껴오던터라 파견된지 1년만에 철수하였다. 이때 7명의 미감아들은 지방에 있는 부모에게 보내고 남은 20여명은 백령도 미감아 수용소로 보냈다. 그후 이곳에서 1975년에 홍경희 헬렌 까리따스 수녀가 7개월 정도 자원봉사를 하기도 하였다.

1950. 캐롤 주교와 이경재 신부가 안양 나자로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13쪽, 1000쪽)

1966. 4 안양 나자로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13쪽, 1000쪽)

1967. 8. 13 안양 나자로원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513쪽, 10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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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장애인종합복지관 - 1998. 6월 안양시장애인종합복지관의 답신에 의거

사회복지 이념구현을 바탕으로 장애인의 종합적인 상태를 진단하고 판정하여 장애인들에게 상담지도, 의료재활, 사회교육, 직업재활을 통하여 장애인의 재활자립을 도모하고 재가장애인에게 상담치료 및 재활에 대한 전반적인 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지역사회 복지건설을 위한 장애인복지증진에 기여하기 위하여 1995년 2월 11일 안양시에서 설립하여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지회에 위탁하여 '한마음 큰 사랑'정신에 입각하여 운영하고 있다.

1995. 2. 11 안양시장애인종합복지관 설립

소재지 : 우 430-012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 2동 22-1/ 전화 0343)72-7773∼4/ 모사전보 0343)72-7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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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779쪽)

1930년 평남 안주군 안주읍 북문리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본당.

초대주임신부로는 바론신부가 부임하여 1937년까지 사목하면서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고 성모학원과 성모병원을 개설하였다.

1934. 성모학원 개설 (779쪽 안주본당)

1935. 성모병원 개원 (779쪽 안주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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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들의 집 (나눔지 18호 16쪽) - 1983. 3. 15발행

지난 1983년 2월 7일 난지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유아들을 위한 애기들의 집이 개설되었다. 명동본당 주임신부(김수창)와 가톨릭 사회복지회 지도신부(최선웅)의 공동 후원으로 지난 해 11월 부터 준비작업을 거쳐 시작된 이 사업은 주민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불어 넣어주며 주민들과 함께 이웃사랑의 실천을 목적으로 하여 맞벌이 부부들의 자녀를 보호하며 정서생활을 통한 조기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대지 30평에 건평 8평의 판자집을 개조하여 만든 애기들의 집은 만2세-5세의 유아들로써 1983년 현재 16명의 유아들이 2명의 교사에 의해 탁아보호와 지도를 받고 있으며 이 외에 지역 주민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전교사업과 청소년 교육사업, 지역주민 조직사업, 사회복지회 상담실과 연결된 주민 상담사업등을 펼쳐 나갈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1983. 2. 7 애기들의 집 개설 (나눔지 18호 16쪽) - 1983. 3. 1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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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덕 농아자활원 (나눔지 47호 3쪽) - 1985. 5. 18발행

애덕 농아자활원은 1961년 5월 미아3동(現애화학교) 대지 1,500평 위에 설립(26가구주거) 하여 생활수단으로 미 8군 골프장 닦기, 뉴질랜드산 토끼양육, 국수공장 운영, 극빈자를 위한 식당운영등을 전전하다가 71년 허 까리따스 수녀님 (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이 서독에서 인형옷 수출계약을 맺고오심을 계기로 1985년 현째까지 인형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봉제완구는 미8군 및 동남아 등지에 수출하고 있으며 1976년 6월에는 수유3동에 APT시 연립주택을 건립하고 자활원 낙성식과 함께 전가구가 이주해옴에 따라 총26세대 15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세대 반 이상이 자체내 인형공장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고 그 외에는 다른 곳으로 목수, 재단, 양복일을 하고있다. 자활원 설립목적은 무주택자인 농아들에게 집을 주고 생계를 돕는 일거리를 주어 자립정신을 키우고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약간 아쉬운 점은 성당에 나가도 통역해줄 사람이 없다는 점과 수화로 미사를 집전하실 수 있는 사제가 안계시다는 점이다. 앞으로 수화교리사및 통역사 양성이 시급하다.

1961. 5 애덕 농아자활원 설립 (나눔지 47호 3쪽) - 1985. 5. 18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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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덕의 집 (새벽지 73호 21쪽) - 1982. 4. 1발행

1982년 3월 1일 둔총동에 소재를 둔 애덕의 집에서 많은 본당 신자들과 후원자들을 모시고 본당신부(안상무)의 집전으로 축성미사가 거행되었다. 애덕의 집은 김근영씨의 노고와 희생으로 창설되었으며 행려자와 신체장애자 25명을 보호할 수 있는 조그마한 한옥집이 본당 신자들과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개설되었다. 1982년 현재 8명의 무의무탁하신 분들이 생활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좀더 많은 신체장애자와 행려자들을 보호할 계획이다.

1982. 3. 1 애덕의 집 개원 (새벽지 73호 21쪽) - 1982. 4. 1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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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덕의 집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3쪽)

애덕의 집은 평신도인 김근영 안토니오가 자신의 병고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더 병들고 버림받은 무의탁 행려 환자들을 데려다 돌보며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공동체 인원이 차츰 많아지자 김근영의 뜻에 감동한 각계각층의 도움으로 둔촌동에 집을 마련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김근영원장이 1985년초에 병으로 사망하자 그 후 6개월 동안은 봉사자들끼리 운영해 오다가 이 집이 사회사업 기관으로 변질되기를 원치않던 고인의 유언을 따라 김수환 추기경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그 운영을 의뢰하였다. 이에 1985년 10월 7일, 이유순 아뽈리나 수녀를 비롯하여 최광필 클레멘스, 노연신 안당, 홍경희 헬렌 까리따스 수녀가 파견되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정식 분원이 되었다. 현재 애덕의 집은 무의탁 남자 장애인만을 수용하고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는데 30여명의 이들 환자들의 연령은 10대에서 80대까지 다영하며 장애 상태는 뇌성마비, 중풍, 하반신 마비 등이다. 그런데 현 시설은 대부분 거동이 힘든 환자들이 오르내리기에 벅찬 계단이 많고 협소하여 매우 불편할 뿐 아니라 시설미비로 정부 보조마저 받기 어려운데다 증축할 공간이 없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보다 나은 환경과 시설을 구비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여 보살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경기도 벽제에 땅을 구입하고 1989년 봄부터 건축을 시작하였다.

1985. 10. 7 애덕의 집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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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덕 일치회 (나눔지 171호 4쪽) - 1987. 10. 17발행

1969년 당시 소록도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파레이몬드신부는 나환자 자녀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몇몇 협력자들과 함께 그들을 위한 기숙사를 만들고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게 하여 사회에 진출시키었다. 이일은 그 후 나환자 자녀들만이 아니라 불우한 환경의 청소년들을 위하여서도 개방되었고 기숙사는 가정을 잃어버린 청소년들에게 가정적인 분위기를 맛보게 하려는 '가정공동체'로 변모되었다. 이러한 사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가난한 이들의 종인 애덕일치회'가 창립되었다. 애덕일치회는 엄격히 분류하면 재속회에 속하지만 회원만의 봉쇄공간은 전혀없다. 청소년, 소녀들안에서의 그들의 엄마가 되고 누나가 되고 언니가 되어 기쁨과 슬픔, 작고 사소한 감정까지도 서로 나눈다. 또한 청소년들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 누구에게서나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기꺼이 응답함으로써 소명을 실천한다. 회원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겠다는 자헌약속을 1년간 하고 매년 약속을 갱신한다.

1987년 현재 신림동의 '예수 그리스도의 집'이 소년의 집이고 응암동 '데레사의 집'과 화곡동의 '김효주 아녜스의 집'등이 소녀들을 위한 집이며 무의탁 할머니들을 위한 가정이 5곳 있다. 또한 청산동 철거민들을 위해 유아원도 운영하고 있다. 이 모든 가족들의 생계는 은인들의 협조금으로 유지된다. 특별히 '가난한이들을 선택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가난한 이들이 되어' '그들 안에서' 살아가는 회원들은 역시 그들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사랑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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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육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답신에 의거

라리보(원형근) 주교가 고아들을 모아 애육원을 설립하여 당시 대흥동본당 신부였던 오기선 신부에게 운영을 맡겼다고 한다. 오기선 신부가 대흥동 본당에 18년간 사목하다가 1965년 서울로 올라가게되자 대전교구에서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수녀를 초빙하였다. 그리하여 김복남(아가다) 수녀와 여금순(세시리아) 수녀를 1965년 8월 10일 파견하였으며 김 아가다 수녀는 보육원일을 하고 여세시라아 수녀는 본당일을 하였다.

수녀들이 처음 파견될 당시 원아둥에는 4세에서 25세의 청년까지 있었으며 남녀 합쳐서 80여명되었다. 취학전 아동이 10여명되고 국민학생 중고등학생 대학생까지 있었다. 1966년 대흥동 본당에 본당수녀로 공영숙(마리아) 수녀와 김선옥(루시아) 수녀, 윤영란(베드로) 수녀가 파견되어 정식으로 본당일을 하였다.

김 아가다 수녀가 애육원에 처음 부임하여 갔을 때 아무것도 없어 교우들에게 된장과 간장까지도 기증을 받았다고 한다. 김아가다 수녀는 살림을 하나 하나 장만해 가면서 원아들에게 가정적분위기를 만들어 주어 가며 예모있는 사람으로 교육하였다. 1967년 애육원은 용전리로 이사하였다. 용전리에는 논과 밭이 있어 소, 돼지, 닭도 키우고 동물의 분뇨로 농사를 지으니 일년에 벼를 100가마정도 추수하고 콩도심고 채소는 농사짖는 것으로 풍족하게 먹였다. 여름에 오이는 매일 큰 광주리고 하나씩을 땄다고 한다.

교우들한테서 원아들이 입을 옷가지를 얻어 한 보따리 그득히 이고 논 밭길을 한시간 정도 걸어 애육원 가까이 오면 원아들이 뛰어나오며 반갑게 "지금 오셔유" 하면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듯하였다고 한다. 애육원의 원아들이 갈마동의 프란체스코 수사원에서 하는 보육원과 합치게 되어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수녀들은 1969년 9월 13일 철수하였다.

1965. 8. 10 애육원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1969. 9. 13 갈마동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하는 보육원과 합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수녀들은 철수

소재지 : 설립당시 대전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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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현본당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6쪽)

서울 약현본당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학교와 유치원 사도직에 봉사하였다. 약현본당에서는 이미 1895년부터 약현서당을 세워 어린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해 왔으며 1901년에는 특히 여자 어린이의 교육에 관심을 가진 두세(Camille Doucet, 1853-1917) 신부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학생은 30여명이었으며 2명의 한국인 수녀가 매일 아침 학교에 나와 교리, 경문, 바느질 등을 가르치고 본원으로 돌아갔다. 1906년에 남자 학교 건물을 새로 마련하고 학교명을 약명(藥明)학교로, 여학교는 가명(加明)학교라 하였다. 1909년에는 두 학교가 가명학교로 통합되었고 1919년에 교사가 신축되면서 가명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초기부터 꾸준히 아이들을 가르쳐 오던 수녀들은 1911년 3월 20일 정식으로 분원이 설립되어 더욱 학교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약현분원은 서울 시내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설립된 수녀원의 분원이었다. 당시 두세 신부는 어려운 재정난 속에서도 두 학교를 공립학교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고 노력하며 교과목을 공립학교와 같게 하고 또 교육도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떨어지지 않게 운영하였다.

수녀들은 이렇게 정성껏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학교발전에 헌신하였다. 그후 비에모(Paul Villemot, 1869-1950) 신부가 1918년에 모든 면에 손색이 없도록 여학교를 개축하였고 이듬해인 1919년에는 남학교를 신축하였다. 그해 6월 15일 뮈텔 주교는 두 학교의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때까지도 남학교는 약명, 여학교는 가명으로 불리웠고 1922년도 재학생수는 남학교 250명, 여학교 220명이었다.

이 무렵 천주교회의 교육사업은 몇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우선 재정난으로 인한 운영의 난관이 있었고 또 1915년에 개정된 [사립학교규칙]에서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을 금하였으므로 학교 창설자의 목적과 의의가 위협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10년간의 유예기간이 있었으므로 그 기간을 최대한 이용하였고, 그 이후에 교리교육을 방과후에 실시하는 방법을 마련하였다. 또 한가지 문제는 1924년부터는 모든 교사들에게 교원자격증이 엄격히 요구될 것이었으므로 인적·물적자원의 결핍상태에서 어렵게 운영되고 있는 본당학교들이 현상유지나 될지 불안한 점이었다. 이런 문제들이 당시 천주교 학교 전체가 겪는 어려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계성보통학교는 1924년에 6년제 지정보통학교 인가를 받았고 이어 약명·가명 양교 역시 1924년에 지정보통학교 인가를 위한 교섭을 시작했다.

이듬해에 양교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명보통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어 학업을 마친 학생들에게 공립상급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졸업장을 줄 수 있게 되었다. 1926년도부터는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여자부가 좋은 성적을 내게 되어 이로 인해 입학지원자가 초과되어 교사를 증축해야 했다. 당시 가명학교는 재학생이 약600명의 큰 학교로 발전되어 있었으며 증축공사는 1928년 6월 10일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1930년에는 4,000원의 공사비를 들여 여자부 교사를 증축하기 위해 임시로 봉래정 전 남대문상업학교 교사로 옮겨가 수업을 하였다. 증축공사 준공 후에는 학예회를 열어 일반 학부형들에게 기쁨을 주었으며 이후 해마다 개최하는 학예회 및 전람회는 일반의 호평을 받았다. 가명학교의 발전과 함께 한 수녀들의 헌신은 이후 일제말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으나 한국전쟁 후 1954년부터는 성가회 수녀들이 약현본당에 오게되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철수하였다.

1895. 약현성당 설립, 어린이들에게 초등교육 실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6쪽)

1911. 3. 20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약현본당에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6쪽)

1924. 가명·약명학교가 통합되어 가명보통학교로 인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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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오에스 어린이 마을 (영) S.O.S Children's Villag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05쪽)

오스트리아인 헤르만 그마이너(Hermann Gmeiner)가 2차 세계대전 후 고아들의 참상을 보고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1949년부터 설립하기 시작한 어린이 마을이다. S.O.S 는 "우리들의 영혼을 구하소서" (Save Our Souls)의 머리 글자를 딴 말이다. S.O.S 어린이 마을은 부모가 없거나 있다고 할지라도 부모가 어린이들을 부양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어린이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보살피자는 데 그 설립목적이 있다. 이 마을에는 여러 층의 나이로 구성된 7-8세의 어린이들이 한세대를 이루어 형제애를 서로 나눈다.

세계의 모든 S.O.S 어린이 마을은 연합체를 이루고 있으며, 본부(S.O.S Kinderdorf International)는 오스트리아에 있다. 이 마을의 운영은 본부에서 모금한 비용으로 충당된다. 우리나라에는 S.O.S 마을이 1963년 대구시 동구 검사동 98번지에 처음으로 설립되었고 그 뒤 1981년 서울시 강서구 신월동 산36의 5번지 서울 S.O.S 어린이 마을과 전라남도 순천시 와룡동 158의 6번지 순천 S.O.S 어린이마을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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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장애 어린이집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 자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이 세상에 사랑의 신비를 갖춘생명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아픔으로 일찍 고달픔을 배운 어린이들을 찾아 정성스럽게 보살피며 그들에게 하느님의 더 높은 희망과 삶의 보람을 찾아주고자 1981년 5월 2일 인천광역시 부평구에서 황해도 연백본당 주임사제 김영식 베드로 신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엠마누엘 어린이집은 장애아동(정신지체, 언어지진, 자폐, 정서불안) 들의 조기교육기관이다. 장애자들은 사회적 편견으로 이중의 고통과 불행을 겪는다. 김영식(베드로) 신부는 황해도 연안에서 1947년 10월 7일 무의무탁한 고아들을 가정적인 보육방법으로 육성하고자 연백성모원을 설립하였다. 성모자애병원은 1955년 6월 27일 설립되어 전쟁고아들과 주민들에게 봉사해오다가 1963년 4월 병원과 연백성모원이 한국순교복자 수녀회로 양도되었으며 1978년 4월에는 정부의 소수수용기관 통폐합 정책으로 대부분의 고아들을 자립시키고 나머지 어린이들은 혜성보육원에 통합되었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이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박루시아 수녀와 전난향(데레사) 수녀를 일본에 파견하여 가마쿠라에 소재한 성모방문회에서 운영하는 심신장애자 교육원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와 전적으로 가난하여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온 장애아동 7명으로 시작되었다. 아동들의 장애상태는 정신박약, 자폐증, 다운증후군, 정서장애 아동들이었다. 정신적, 신체적인 결함을 갖고 자유룰 누리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애를 가진 아동에 대한 조기교육인 것이다. 이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엠마누엘 어린이집 조기교육원을 설립하여 장애별 아동들의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여 사회의 한 일원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며, 그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 더욱 희망찬 삶을 찾아주고자 개원을 하게된 것이다.

1982년 2월 물리치료실을 신설하고 재활의학과 의사 및 물리치료사가 정기치료를 시작하였다. 1983년 3월 제2대 원장으로 최영숙(바오로) 수녀가 부임하면서 특수조기교육원으로 시설을 변경하였다. 언어치료와 유아반을 신설하고 몬테소리 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의 범위를 넓혔다. 1987년 2월 박병례(루시아) 수녀가 캐나다에서 특수교육 연수를 받고 제3대 원장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독일 까리따스의 원조로 1988년 1월에 엠마누엘 어린이집 기공식을 갖게되었으며 1989년 7월 5일 준공식을 하였다. 시설은 수치료실, 대근육실, 생활훈련실, 시청각실, 교육실, 음악치료실, 언어치료실, 개별지도실, 양호실, 자료도서실, 강당, 교무실, 사무실, 원장실, 탈의실, 식당, 주방, 자원봉사자실 등이며 1998년 현재 장애아동은 3세에서 8세까지 52명의 어린이가 교육을 받고 있으며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장애아동을 위하여 매달 무료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981. 5. 2 엠마누엘 장애 어린이집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소재지 : 우 403-016 인천시 부평구 부평6동 657-30/ 전화 032)522-0920/ 모사전보 032)528-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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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정신적, 물질적으로 좌절된 이들이 삶의 의욕과 자립의 가능성을 실천으로 확인하고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함께 살아가는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1984년 5월 5일 김몽은 신부가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에 설립하였다. 그 후 1995년 4월 27일 김몽은 신부는 엠마우스를 재단법인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증여하고 운영권을 이양하였다.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은 1976년 김몽은 신부가 옥수동에 저소득 근로여성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여 돌보기 시작한데서부터 출발한다. 김몽은 신부는 옥수동 땅을 매각하고 또 일본 엠마우스와 프랑스의 국제엠마우스의 도움으로 마포구 하수동(현재 상수동)의 부지 101평을 매입하여 지하 1층, 지상 2층 연건평 143평에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을 건립하였으며 1984년 5월 5일에 축성식을 가졌다. 엠마우스 회관의 설립목적은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타격을 받아 좌절된 근로 여성들에게 노동을 통하여 자립성을 키우고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보다 더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형제애를 나누고 삶의 보람을 체험케 한다는데 있다. 엠마우스 운동의 정신은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에게 사랑만이 인류를 결속할 수 있고 공동번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운동의 목표는 모든 인간사회와 국가를 돕고 고통의 나눔,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주장하고 그 성취를 목적으로 한다. 회관 설립당시 한국사회는 산업의 발달과정에서 지방의 소년소녀들이 직장을 찾아 상경하였으나 거주할 곳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향근로여성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1984년 7월 1일에 근로여성 2명이 들어와 엠마우스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차츰 엠마우스 식구들이 늘어 한때는 28명의 근로여성들이 좁은 공간에서 모여 살기도 하였다. 근로여성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숙소를 제공하고 낮에는 직장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밤에는 따뜻한 가족적 분위기 속에서 신앙으로 이끌어 주었다. 또한 이들에게 3년내에 독립을 권장하고 새로 이향한 근로여성을 새식구로 맞이했다. 1984년 부터 1992년까지 엠마우스를 거쳐간 여성은 약 80명이었다.

1984년 11월 24일부터 엠마우스 정신에 입각한 폐품수집을 시작하였다. 폐품의 주류는 의류이며 선별작업을 통해 쓸만한 것은 상설 판매장에 전시하여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싼값에 나누어져 좋은 호응을 얻었다. 이 사업의 폐품 재활용 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자원 절약으로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될뿐만 아니라 환경보전과 사랑과 나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또한 있는 자와 없는 자, 즉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소통과 나눔을 하는 매개체역활을 하고 있다.

회관 뒤 한옥을 매입하여 폐품선별 작업장, 식당, 성당 등을 증축하여 1990년 12월 23일 완공하였다. 엠마우스 저소득 근로여성을 위한 것에서 사회의 새로운 요구를 찾기 위해 재검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첫째 산업화의 발전에 따라 좋은 시설의 기숙사를 갖춘 기업체가 많아졌고 둘째, 근로자에 대한 대우가 향상되어 곧 자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신지체 장애자들을 위한 시설의 필요성을 알게되었고 엠마우스 사업목적을 변경하였다. 즉 현사회에서 소외된 정신지체 장애자들을 대상으로 특성에 따라서 일상생활 적응 훈련(신변처리, 가사에 필요한 실습청소) 정서지도 및 사회적응 훈련을 시키기 위해 주간(월-토)에 엠마우스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는 각자 가정으로 돌아가는 이용시설로 변경하였다. 1992년 6월에는 근로여성들이 모두 자립하여 나갔고 본격적인 정신지체 장애 여성공동체로 자리를 잡아갔다. 1994년 8명의 정신지체 장애여성들에게 첫영성체 준비를 시작하였다. 매주 교리봉사자들의 교리와 특히 여름 5박6일 간의 여름캠프에서는 집중교리를 했다. 동년 12월 17일에는 5명의 엠마우스 자매들이 첫 영성체를 하였다. 1995년도에는 엠마우스 식구들을 위하여 보호작업장과 직업개발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다. 준비작업으로 손바느질을 연습하고 있다.

1998년 엠마우스 공동체의 기본수단인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이것을 선별 정리하여 상설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재활용품을 활용하고 있다. 또한 정신지체 장애여성 8명과 수녀 4명 그리고 사랑과 나눔을 통하여 자신보다 더 가난한 자들을 돕고자하는 봉사자들과 함께 엠마우스 공동체로 인류의 존엄성을 귀중히 여기고 평화와 공동번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984. 5. 5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1992. 6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을 정신지체 장애 여성공동체로 용도변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1995. 3 김몽은 신부는 엠마우스 근로여성회관을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양도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소재지 : 우 121-160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532-6/ 전화 02)337-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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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제 상담소 (대전 가톨릭 사회복지회)

가정과 사회안에서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여성들을 위하여 서신, 전화, 면접 상담을 하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친여성들이 쉬어 머물며 스스로 존엄성을 다시 찾아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쉼터인 여성문제 상담소는 1996년 대전광역시 대덕구 오정동에 설립되었으며 이곳에서는 상담을 통하여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리고 법적, 의료적 문제를 전문가로부터 도움을 받는 동시에 같은 처지의 여성들과 함께 문제 해결과 자립방안을 위한 공동노력을 하고 있다. 부설기관으로는 가정폭력 상담소, 성폭력 상담소, 여성의 쉼자리가 있다.

1996. 5. 1 여성문제 상담소 개소 (대전 가톨릭 사회복지회)

1997. 11. 10 여성문제 상담소 부설 성폭력 상담소 개소 (대전 가톨릭 사회복지회)

1998. 3 여성문제 상담소 부설 여성의 쉼자리 개소 (대전 가톨릭 사회복지회)

소재지 : 우 306-010 대전광역시 대덕구 오정동 74-4/ 전화 042)636-2033∼4/ 모사전보 042)625-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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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상시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22쪽)

1931년 창설되어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한국순교복자.

초대주임으로 퀴겔겐(Kugelgen) 신부가 부임하여 이듬해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고 해성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본당설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본당운영의 사업체로 해성학교, 야학, 유치원등이 있었다.

1932. 해성학교 개교 (822쪽 연길상시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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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백성모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김영식 베드로 신부는 1952년 무의무탁한 전쟁고아 15명을 모아 연백성모원을 설립하였는데 전쟁이 끝난 무렵에는 고아가 120명이나 되었다. 점차 연로하게된 김영식 신부는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창설자인 방유룡(안드레아) 신부를 통하여 연백성모원을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맡겼다. 그리고 원아들의 보건후생대책과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위하여 1955년 6월 27일에 설립한 성모자애병원의 운영권을 보육원을 운영하고 원아들을 잘 보육하는 조건으로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 이양하였다. 당시 집은 75평의 목조 2층 건물이었고 수용능력은 50명 정도 되었다. 보육원에는 여자들만이 있었고 많을 때에는 120명 까지도 되었다. 1964년 병원 맞은편에 집 3채를 짓고 병원에서 분리 되었다. 미군부대에서 두채를 지어주고 당시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가 한채를 지어주었다. 보육원 운영비는 성모자애병원과 N.C.W.C와 미군부대의 원조도 받고 시청에서 1인당 보리와 양쌀이 하루 3홉씩 나오는데 그것도 18세 이하만 배급을 주었다. 서 수산나 수녀가 영어를 잘하여 보육원 원아들에게 영어발음을 우리말로 토를달아 노래를 가르쳐 미군부대에 가서 일주일에 한번씩 노래를 불러주었으며 꽃꽃이도 하여 미군부대로 부터 원조를 받았다. 원아들이 백여명이 넘을 때도 많았는데 식비보다 교육비가 많이 들어갔다. 원아들중에 공부를 잘하면 대학까지도 시키고 그렇지 못한 원아들에게는 양재 편물 등 기술교육을 시켜 자립할 수 있게 하였다.

원아들이 전부 여아들이므로 수녀들은 특별히 신경을 써서 늦게 귀원하거나 늦게 외출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특별히 가정적인 교육을 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수녀들이 항상 원아들과 한상에서 식사를 하고 원아들이 병이나면 간호를 하였다.

미군부대의 원조가 끊어져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한 원아는 정신병이 생겼는데 수녀들이 3년동안 정신병원에 데리고 다녀 완치되었다. 현재는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시는 옷도 흔하지 않고 제품이 많지 않으므로 수녀들이 옷도 만들어 입히고 간식도 만들어 먹였다. 수녀들이 미숙하나마 최선을 다해 어머니 역할을 하였다. 1978년 4월에 정부의 소수 수용기관 통폐합 정책으로 대부분의 고아들을 자립시키고 나머지 어린이들은 혜서보육원에 통합하게 되어 보육원을 폐쇄하였다.

1952. 연백성모원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1978. 4 연백성모원 폐쇄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소재지 : 설립당시 인천시 북구 부평 6동 657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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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원 (나눔지 23호 9쪽) - 1984. 3. 15발행

경기도 광주군 광지원리. 남한산성의 동쪽 기슭 아래에 동녘의 햇살을 가장 먼저받는 사랑의 집인 연성원은 1977년 김몽은 신부 및 법조계의 라향윤씨와 고형원씨 등이 설립하였다. 소년보호 위탁처분 대상자로서 보호자 없는 불우 청소년을 위탁받아 이들이 사회악으로 부터 물들지 않고 학과공부와 기술연마 및 가톨릭을 통한 사랑과 은총, 평화와 희망을 배움으로써 사회의 올바른 인간으로 연성하는 곳이다.

1977. 연성원 설립 (나눔지 23호 9쪽) - 1984. 3. 1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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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23쪽)

해주본당 관할의 공소가 있던 황해도 연백군 군청소재지 연안읍에 본당이 설정된 것은 1937년 5월로 안학만(루가) 신부가 초대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제4대 김영식(베드로) 신부가 평양교구 강서 본당으로부터 부임하여 전교하다가 1951년 유엔군의 후퇴 때 그가 돌보던 고아들을 데리고 월남하였다. 김신부는 경기도 부평본당 주임으로 재임하면서 이 고아들을 위해 보육원을 설립운영하는 한편 성모자애병원도 설립운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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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26쪽)

광주 대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성 로베르토. 1937년 성골롬바노회 소속 멀컨(Thomas Mulkern) 신부가 현 교회 대지 1,851평을 매입, 한옥 1동을 개축하여 약 4평의 경당겸 사제관을 신축함으로써 영광본당은 시작되었다.

초대 멀컨신부는 두개의 교실규모인 '성심학원' 이라는 국민학교를 세워 3년과정 200명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1938. '성심학원' 개교 (826쪽 영광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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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노동교육원 (영) Yongnam Labor Educational Institute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27쪽)

1973년 대구 대교구가 교구 내 미조직, 조직 노동자 및 노동운동지도자를 위해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가난하고 약한 이를 위한 교회의 사도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교육을 통해 노동자로 하여금 민주적인 가치관을 형성케하고, 사회적인 양심에 따라 살도록 하며 나아가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찾도록 한다. 주요활동은 ⸁ 노동조합 간부양성을 위한 2개월 과정의 노동대학 운영, ⸂ 노동조합 중견간부와 조합원의 재교육, ⸃ 유로직업안내소 종사원 교육, ⸄ 버스안내원 교육, ⸅ 노사문제 간담회 개최, ⸆ 근로자의날 강연회 개최, ⸇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들을 위한 세미나 개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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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28쪽)

서울 대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요한 돈 보스코. 현 명칭은 도림동본당. 1929년 이전부터 약현(중림동) 본당의 영등포 공소로서 발족, 1936년 영등포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58년 살레시오회 소속인 수아레스(Joseph Suarez) 신부가 본당주임으로 부임, 같은 해에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 가 도림동 본당을 중심으로 창설, 1963년 9월 현 성당지대에 현재의 성당을 준공하였다. 1964년에는 샛별유치원이 개원하였고, 1968년에는 불우 청소년을 위한 애전 고등공민학교가 개교하였다.

1964. 샛별유치원 개원 (828쪽 영등포 본당)

1968. 애전 고등국민학교 개교 (828쪽 영등포 본당)

영등포 본당 (교회와 역사 74호 6쪽)

서울 영등포구 道林洞 본당은 명동, 중림동, 혜화동 본당에 이어 서울에서 네 번째로 설정된 천주교회이다. 이 교회는 江南 永登浦 지역의 유일한 천주교회였기 때문에 명칭도 영등포 본당으로 불리웠다. 본당이 설정되기 전에는 중림동 천주교회에서 관할하는 공소에 속했다. 1930년 6월경 교우들의 열성으로 영등포 경찰서 뒷쪽에 5백圓을 들여 8間의 경당을 신축하였다. 150명 가량의 교우들은 태반이 지방에서 상경한 노동자들이었다. 이때 까지도 영등포는 아직 서울시에 편입되지 못하고 경기도 시흥군에 속해 있었으나 신흥 공업지구로 발전됨에 따라 인구가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1936년에 교우 수는 460여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예수 성심회를 중심으로 다각적인 본당 승격운동을 벌인 결과 그 해 5월 10일 혜화동 본당에서 사목하던 徐起昌(프란치스코) 신부를 초대 본당 주임신부로 맞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21일 徐신부는 영등포에 작은 성당을 건축하고 본당주보를 돈 보스꼬로 삼았다.

1945년 11월 朴一奎(안드레아) 3대 주임신부가 부임한 후 청년회원들이 주동이되어 永靑報를 월간으로 발행하는 한편, 大建商社라는 이름의 천주교 복지센타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1963년 10월 구로동 본당을 분할하고, 이듬해 4월에 샛별 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68년 3월에는 불우 청소년 교육을 위한 애전고등공민학교를 구 성당에 개교하였다. 1970년 11월 朴成鍾(프란치스꼬) 신부가 13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뒤 본당 평협과 부인회가 조직되었고 1973년 여름에 인근 수재민 2,600여명을 애전학교에 수용하고 구호의 손길을 펴기도 했다.

1964. 4 샛별유치원 개원 (교회와 역사 74호 6쪽)

1968. 3 애전고등공민학교 개교 (교회와 역사 74호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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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영) Sisters of our Lady of perpetual Help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31쪽)

1932년 6월 27일 당시 평양교구장인 몬시뇰에 의해 창설된 방인수녀회. 1950년 12월 부산 메리놀 수녀들과 함께 메리놀 병원과 군부대 세탁일을 하면서 피난민과 고아들을 돌보았는데 이것이 현재의 성모보육원이다. 1955년 수녀원을 흑석동으로 이전하고 그 옆에 성 마리아 의원을 개원하였다. 1971년 8월에는 부인들로 구성된 성모자매회를 발족하였다. 1980년에는 경기도 용인군에 소화의원을 개설하여 영세민을 위한 진료를 시작하였다.

1955. 성 마리아 의원 개원 (831쪽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1980. 소화의원 개원 (831쪽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교회와 역사 103호 10쪽)

여명기 : 한국여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 분의 일에 동참하고자 했던 것은 선조들이 신앙을 받아들인 지 10년후 상 골롬바 여회장의 활약과 당시 사회 관습에서 용납되지 않던 동정생활을 하며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던 이 누갈다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신유교난에 순교하므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쳤으며 이들이 품었던 원의는 한국인 수녀회를 탄생시키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창설기(1832∼1940) : 8명의 지원자와 3명의 지도수녀가 1932년 6월 27일 John E. Morris 평양 교구장의 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교구장이 수녀회의 창립을 선언함으로써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탄생되었다. 이 수녀회의 명칭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라고 한 것은 길의 인도자로 알려진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의 특별한 인도로 창립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기원을 내포하고 있다. 1935년 메리놀 회원인 한국인 장 앙네다 수녀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원자들의 지도수녀로 부임해 옴으로써 본격적인 수도자 양성이 시작되었다. 같은해 수녀회 회헌과 설립 인가를 로마 성청에 신청하였다. 1938년 2월 25일에 교황청수도자성성으로부터 수도회 설립인가와 회헌을 인준받았다.

시련기(1941∼1950) :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1942년 6월 메리놀 외방선교회 성직자 수도자들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면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내외적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1942년 12월 장 앙네다 수녀는 오 주교의 임명으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수도복으로 갈아 입고 초대원장으로 부임하였다.

1950년 5월 14일 인민군 검찰요원에 의해 수녀원을 몰수 당하고 회원들은 강제 해산되어 본가로 귀가하게 되었다. 수녀원을 떠난 회원들은 어디를 가도 정치보위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재건기(1950∼1960) :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진주고 평남지방에 흩어져 있던 서원수녀 16명이 평양 상수구리 수녀원에 모여 재건에 착수하였다. 또한 평양 교구 복구작업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각 본당에 파견되어 정리사업을 서둘렀다.

1951년 3월 7일 부산 메리놀 병원이 개원되자 회원들은 병원일을 도우면서 세탁일, 자수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피난민들과 고아들을 돌보며 교리를 가르치는 등 사명을 다하였다. 1955년에는 서울 영등포구 흑석동으로 본원을 이전하고 성 마리아 의원을 개원하였다. 이 마리아 의원이 가톨릭 의대 부속병원으로 까지 성장하였으나 1980년 2월 복음 사도직을 원칙으로 하는 수도회로서 경영주가 될 수 없다는 이유와 기타의 이유로 폐원하였다.

발전기(1960∼현재) : 1963년 정릉 현 위치에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1970년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수도생활을 쇄신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회헌을 개정하기도 하였다. 70년대 중반기에서 부터 회원들의 영성생활을 강화하는 한편, 3대 서원을 중심으로 한 내적 생활을 반성하고 점차적으로 수련을 시작하였다.수녀들은 교회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심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청소년을 위한 사도직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도수녀들을 파견하였으며 교육관을 개관하기도 하였다.

70년대 말기에 와서는 매해 창립 이념에 따른 실행 목표를 정하고 안으로는 수도 생활을 재 정립하고 밖으로는 창립 목적인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55. 성 마리아 의원 개원 (교회와 역사 103호 10쪽)

1980. 2 성 마리아 의원 폐원 (교회와 역사 103호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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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32쪽)

1902년 평남 평원군 영유읍 이화리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성파트리시오.

초대 주임신부로 섭가지본당 주임이던 망(Meng) 신부가 부임하여 교세신장에 주력하는 한편 1908년 영청(永淸) 학교를 개설하였고 1911년 보댕(Bodin) 신부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1916년까지 사목하였다.

1924년 부터 메리놀회 신부들이 본당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부터 교세가 신장되어 본당내에 시약소, 양로원, 고아원, 기술학교 등이 개설되었다. 또한 1925년 지역 최초의 고딕식 연과조성당이 건축되고 이듬해 메리놀 수녀회 한국지부가 본당에 설치되어 본당의 사무와 부속사업을 전담하게 되었다.

광복 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12월 10일 주임신부이던 홍도근(요한) 신부가 체포되고, 이어 1950년 6월 25일 성당을 비롯한 사제관, 양로원, 수녀원 등 모든 부속건물이 몰수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1926. 시약소와 고아원 설립 (832쪽 영유본당)

1927. 영유여자기예학교 개설 (832쪽 영유본당)

1931. 양로원 개설 (832쪽 영유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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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엠마우스 (나눔지 13호 7쪽) - 1979. 7. 15발행

1975년 4월6일 엠마우스(Emmaus)한국위원회 위원장이신 김몽은신부님에 의해 명동성당 청년단체의 일원으로서 엠마우스 운동을 적극 추진함을 목정으로 창립되어 남녀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엠마우스 운동의 목적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를 위해 먼저 봉사하자." 이며 엠마우스 운동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신이다. 엠마우스 정신은 공동생활과 노동을 통해 세계의 가난한 이를 위해 봉사하며 빈곤에 관한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신속한 행동을 취하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고쳐나가는데 있다. 주요 활동은 회원들이 여름방학과 휴가를 이용해 일정한 캠프장에서 넝마주의와의 공동 생활과 노동을 통해 폐품수집을 한다. 그 밖에 자선 바자회와 자선영화를 상영하며 성경공부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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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집 (나눔지 108호 3쪽) - 1986. 7. 26발행

다미안 사회복지회를 새로지어 만든 생활공동체 [착한 사마리아인 모임]은 30여년을 한국 땅에서 나환자, 불우 청소년, 사회에서 소외당한 이들을 돕고 있는 벨기에인 파 레몬드 신부의 사랑과 나눔의 결실로 맺어졌다.

노동관계사목으로 35세에 한국에 온 파 신부는 소록도 인근 전남 고흥의 녹동성당에 부임한다. 소록도는 나환자들이 살고있는 특수지역으로 당시에는 나환자의 자녀들인 미감아는 부모와는 떨어져서 살아야만 되어 자녀들은 자연히 소록도의 인근지방에서 많이 살고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국민학교를 졸업하거나 중퇴하는것이 보통이었고, 식모나 식당등에 취업하여 일을 하지만 부모가 나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붸겨나는 일이 예사여서 그들의 생활이란 매우 가슴아픈 일들이 많았다. 파 신부는 그런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키기로 결심하고 시골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서울이나 부산같은 대도시에서 하숙을 시키며 기술교육을 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던중 75년에는 아주 서울로 올라와 응암동에 아이들이 함께 살도록 하였다. 다시 78년도에는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지원으로 신림동에 남자청소년을 위한 생활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떠오르는 별, 그리고 미래의 주인인 청소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며 때때로 실수하며 부모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를 당하거나 부모로 부터 버림을 받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권리 또한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집은 정녕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으로 그늘 밑 들풀을 어루만져 비춰주는 한줄기 빛처럼 살며시 오늘을 비추어 주고있다.

1978. 예수 그리스도의 집 남자 기숙사 개설 (나눔지 108호 3쪽) - 1979. 7. 1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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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본당 醴泉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1쪽)

경상북도의 북부지방에 있는 안동교구 소속인 예천분원에 처음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가 파견된 것은 1977년 2월 26일, 예천 한일신용협동조합 이사들의 초청으로 조합에서 운영하는 '한일의원'을 위해서였다. 김순림 가브리엘 수녀와 간호수녀들인 남순자 아가다 수녀, 김순연 오틸리아 수녀가 파견되었다.

그 해 4월 3일 한일의원이 개원되어 간호수녀들이 병원에서 근무하자 본당에서도 수녀를 청하여 9월9일 전교수녀로 서차선 유리안나 수녀가 부임하여 예천에서 의원과 본당에 봉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78년 한일의원이 운영난으로 폐원되어 간호수녀들이 철수하고 김순림 가브리엘 수녀와 서 유리안나 수녀만 남아 전교에 힘을 다했다. 예천본당의 현재 신자수는 2,200여명에 가깝고 매년 140여명씩 영세자를 내지만 농촌지역이라 중학교 졸업만 하면 도시로 진출하여 젊은층이 줄어감으로 인해 교세 확장이 부진한 편이다. 그 반면 반모임이 활발하여 본당 전체가 활기를 띠고 교사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주일학교가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지금은 2명의 수녀가 활발히 움직이는 모든 단체에 더욱 활력을 불어 넣어주며, 젊은층의 많은 전출로 인해 발생한 본당 운영의 어려움을 극복하기로 노력하고 있다.

1977. 4. 3 예천본당의 수녀들이 파견된 한일의원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1쪽)

1978. 한일의원 운영난으로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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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골 성인 복지회관 (새벽지 67호 18쪽) - 1981. 9. 1발행

60년대부터 지역 주민의 자주성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성장을 발전시켜 오고 있는 오류지역은 금번 성인복지회관을 마련하여 성인들의 소득증진을 통하여 국가 산업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회관에서는 노인들의 중식을 제공하는 등 소득사업에 참여 할 수 있도록 제반문제를 협조하여 노인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가부장적 신뢰감을 회복하여 노인들의 소외감, 고독감을 덜고 보람을 느끼는 생을 영위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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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어린이의 집 (교회와 역사 226호 16쪽) - 1994. 3. 25 발행

1972년 3월 18일 오산읍 창학리에 10,230평 대지를 구입하여 노틀담 수녀회에서는 오산 수녀원을 시작하였다. 수녀들은 각 가정을 방문하여 어머니들이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과 지역사회의 요구를 듣고 사도직의 방향을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가난한 농촌 주민들의 자녀, 직장을 가진 어머니와 인근 공장 직원들의 자녀들을 맡아 돌보며 아울러 주변 농촌지역에도 관심을 주어 수녀들이 직접 나가서 어린이들을 지도하기로 하였다. 1975년 3월에 유치원 건물을 준공한 후 정식 인가가 나기까지 약 2년 동안 '어린이집'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1976년 9월 1일 오산읍에서 떨어진 서리에서 '이동 어린이 집'을 개원하여 그 곳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봉사하게 되었다. 그 후 구역이 좀더 넓은 가장리로 옮겨 2년여 동안 어린이들의 정서 함양과 간접적인 신앙교육에 주력하였다. 1979년 3월 7일에는 '이동 어린이 집'운영을 신자 수도 많고 교육을 필요로 하는 어린이들이 더 많은 벌음리로 옮겨 1985년 2월 21일까지 봉사하다가 문교 정책에 의한 국민학교에 새로운 병설 유아원이 생긴 관계로 더 이상 수녀원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폐원하게 되었다. 이로써 오산읍의 '노틀담 유치원'과 '이동 어린이 집'의 이원적인 유아 교육 사도직은 일원화가 되었다.

1975. 3 노틀담 수녀회는 '오산 어린이 집' 개원 (교회와 역사 226호 16쪽) - 1994. 3. 25 발행

1976. 9. 1 노틀담 수녀회는 오산에서 떨어진 거리에 '이동 어린이 집' 개원 (교회와 역사 226호 16쪽) - 1994. 3. 25 발행

1985. 2. 21 '오산 어린이 집'과 '이동 어린이 집' 폐원 (교회와 역사 226호 16쪽) - 1994. 3. 25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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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평화의 마을 - 1998. 5. 28일 오순절 평화의 마을 답신에 의거

사회복지법인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복지사업법 제2조에서 정하는 부랑인 보호사업과 장애인 복지사업, 그리고 지역사회 복지사업을 수행하여 사회복지 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1986년 8월 15일 설립되었다. 설립자는 오수영(히지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이며 경남 밀양시 삼랑진, 부산 무의탁 임시보호소, 여주 평화 재활원이 있다.

오수영 원장신부가 부산 동항성당에 주임신부로 부임한지 2개월이 지난 1986년 4월에 알콜 중독으로 몸을 제대로 못 추리는 김 비오 형제(55)와 그의 두 아들이 오수영 원장신부에蕁게 보호를 요청해 왔다. 김비오형제는 알콜중독으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하여 가장으로서의 가족들에 대한 부양능력이 없는 데다 부인마저 집을 나가 버려 학교에 다녀할 아들들은 막막한 상태로 아버지를 따라온 것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을 그냥 외면할 수 없었던 오수영 원장신부는 우선 이들을 맞아들에 허기진 배와 피로에 지친 몸을 쉬게 하였다. 도시빈빈과 결손가정이 많았던 이 지역에 오수영 원장신부의 향적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소식을 들은 병들고 생활능력이 없는 어머니와 어린자녀다섯, 그리고 자녀들로부터 소외받고 보호받을 수 없는 노인들, 교도소에서 출감하여 갈 곳이 없는 이들, 알콜 중독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찾아와 보호를 요청하였다. 어느날 이른 새벽에는 이름도 나이도 부모도 모르는 어린 정신지체아를 사제관 앞에 버리고 가버린 사람도 있었다. 마치 날이 저물면 둥지를 찾아드는 새들처럼 수없이 사제관을 찾아오는 이들 앞에서 본당 사목활동만으로도 바쁜 오수영원장신부였지만 어쩔 수 없이 두 배의 마음을 써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처하게 된 오신부는 일단 성당 안 10평 남짓한 창고를 개조하여 방3칸을 만들어 이들을 쉬게 하였으나 먹이고 입히는 문제는 말 그대로 속수무책 이었다. 교구에서 지급되는 사제 생활비를 몽땅털어 넣기도 하고 오신부의 뜻을 이해한 신자들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여 지내면서 그해 8월경에는 50여명이라는 대가족이 꾸려지게 되었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오순절날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기도하며 하나로 모여 있던 사도들 위에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불의 사랑을 체험한 사도들과 모든 신도들은 찬미와 기도와 영가를 부르며 초대교회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사도2,42-47 : 4,32-37).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나누는 가운데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나눔과 섬김, 사랑과 일치의 삶을 살았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바로 이 초대교회공동체의 정신으로 살아감으로써 세상을 복음화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이웃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구현하려고 어려운 이들끼리 함께 모여 서로를 아끼고 위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삼랑진

삼랑진읍 미전리에 위치한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부랑인 선도시설로서 부랑인, 행려환자, 무연고자등을 수용하고 있고, 수녀원 및 수도회와 피정센터가 함께 있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 재단의 본원으로서 대부분의 주요업무는 이곳에서 담당한다. 대지면적은 9천 4백 5십 9평방미터이고 98년 5월 현재 수용인원은 404명(남264명, 여 140명)이고 직원은 40여명이고 수녀회와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는 수도자들은 80여명이다.

소재지 : 우 628-900 경남 밀양군 삼랑진읍 미전리 636/ 전화 0527)52-4241/ 모사전보 0527)51-1984

여주분원

93년 10월경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장안리 산5번지 임야 2만 3천5백여평을 이강훈씨로부터 기증을 받음으로 장애인 시설 계획을 구체화 한다. 이에따라 94년 10월 7일 여주분원 축성미사를 가짐으로 분원을 신설하게 된다. 그러나 기증받은 땅이 정지 과정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게 되어 95년 5월 22일 여주군 점동면 청안리 산 29번지 외 1필지 11만 7천 6백㎡을 재매입하여 평화재활원 건립을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1995년 9월 14일 평화재활원 기공식을, 96년 6월 14일에는 그 중 "평화수련원 및 성당착공식"을 하였다. 1차로 건립되는 건물은 영유아를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이다.

무의탁 장애인을 보호함으로 삶의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이들을 건전하게 교육하여 개개인의 가치개발과 지역사회 복지증진 및 밝은 사회조성에 기여하고자 시작된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장안리 산 51번지에 있는 여주평화재활원은 면적이 7만7천6백53평방미터로 영유장애아100여명을 보호할 수 있는 여주 천사들의 집과 성인당애인 200여명을 보호할 수 있는 평화재활원이 있다. 1997년 5월 23일축성을 가진 여주 천사들의 집에는 98년 5월 현재 영유장애아들이 30여명 생활하고 있고 성인장애인을 위한 평화재활원은 올해(1998년) 10월경에 준공예정에 있다.

소재지 : 우 469-870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청안리 산29번지/ 전화 0337)84-0553/ 모사전보 0337)84-0522

부산임시대기소

부산 무의탁임시호보소는 대지 면적이 3천 7백 84평방미터이고 부산시 해운대구에 위치하고 있다. 94년부터 이곳을 임시 대기소로 이용하였는데 구청에서 입소심사를 마친 원생을 삼랑진 평화의 마을에 이주시킬 때까지 임시로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수용인원은 유동적이기는 하나 대체적으로 20여명 정도 머물게 되고 법닝 업무를 관장하는 직원과 시설내의 있는 수녀원의 지도자가 원생들을 돌보고 있다.

소재지 : 우 608-062 부산시 남구 우암2동 125/ 전화 051)69-2016/ 모사전보 051)645-3389

1986. 8. 15 오순절 평화의 마을 설립

1990. 12. 8 오순절 평화의 마을 그리스도 우리 평화의 집 축성식

1994. 10. 7 오순절 평화의 마을 여주분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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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부인회 (독) Katholische Frauenwerk in Oesterreich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59쪽)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들의 복지향상과 선교를 목적으로 조직된 여성 활동단체. 단체회원은 기혼, 미혼의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고, 1958년부터 우리나라의 교육사업, 양로사업, 고아사업, 의료사업에 96억5,180만원에 상당하는 기금을 보내어 지원을 하였다. 단체의 본부는 빈에 있으며, 오스트리아의 각 교구에 지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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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교회와 역사 75호 7쪽)

"우리는 교회의 사명에 참여하고, 교회와 함께 생활하고 느끼며 교회의 모든 관심사에 대하여 개방되어 있다."(회헌 1)는 정신으로 스위스 캄 하일리히크로이쓰에 소재하는 수도회의 모원에서 9명의 동정녀들이 요셉볼륨( Josef Leonz Blum) 신부의 지도 아래 1830년 "가난한 자매들의 학원"을 열면서 공동생활을 시작한 것이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기원이다.

1930년 연길교구장 백 테오도르(Theodr Brecher O.S.B) 주교는 스위스 캄으로 서한을 보내 전교수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수녀회에서는 1931년 3월 첫 파견자로서 6명의 수녀를 선정하여 1931년 11월 연길에 도착하였다.

1947년 가을 3·8선을 넘어온 한국인 수녀들은 노기남 주교의 주선으로 청주성심보육원에서 어린이들을 돌보며 살게 되었다. 1951년 김충무(글레멘스) 신부와 유을준(이냐시오) 의사와 함께 자선병원을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부산시 동구 초량동 31의 3에 2층 적산가옥을 매입하여 1951년 11월 5일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였다. 초창기에는 성 분도병원을 본원으로 하여 주고 의료활동에 종사해 왔으나 1949년 부터 중앙성당의 지원 뿐만 아니라 경북 상주, 김천, 부산 송도와 초장동, 수정동 성당 등에 지원을 설립하여 본당사목과 유치원을 돕게 되었다.

1963년 10월 교황 직속 수도회로 승격된 이후 1972년 12월 1일 한국수도공동체가 대리구로 승격하였으며 1981년 6월 8일 교황청으로 부터 자립수녀회로 독립함을 인정하고 인가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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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림본당 旺林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2쪽)

'갓등이'라 불리우던 왕림본당은 경기도 와성군 봉담면 왕림리에 있는 유서 깊은 성당으로 1893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Laurent Imbert, 1796-1839) 주교가 은신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1888년 7월, 앙드레(Jacques Andre, 1861-1890)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 한강 이남 경기도에서 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1901년에는 웅장한 기와집 성당을 신축하였고 그 뒤에 삼덕학교(三德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광성국민학교로 발전하였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57년간 왕림본당에서 일했으며 1981년 지역적인 여건으로 광성국민학교가 폐교되고 그 자리에 한국에서의 제4 신학교인 수원 가톨릭대학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오랜 역사를 지니며 많은 수녀들이 사도직을 수행해 왔던 왕림본당은 1984년 1월 19일에 철수되었다.

1901. 왕림본당 내 후에 광성국민학교로 발전한 삼덕학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2쪽)

1981. 광성국민학교 폐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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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원 (나눔지 166호 2쪽) - 1987. 9. 12발행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질병문제에 보다 깊이 동참하려는 지역의료인들의 노력의 결실로 2차진료기관인 요셉의원이 문을 열었다. 앞으로 요셉의원은 난곡, 신림동, 구로1동, 구로3동, 성남시 은행동 및 상대원동 지역의 가난한 주민으로서 지역 주말진료를 일단 거친 후 지역보건종사자의 의뢰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 진료를 하게 된다.

1987. 8. 29. 요셉의원 개원 (나눔지 166호 2쪽) - 1987. 9. 12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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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집 -1998. 5. 22일 요셉의 집 김아오스딩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대구시 중구 교동 26-10에 자리잡고 있는 요셉의 집은 1989년 1월 19일 예수성심 시녀회의 최분이(소피아) 수녀와 이사장 탁정자 씨가 불우 결식 노인들에게 중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설립하였다. 예수성심시녀회의 창설자 신부님의 "남이 하기 싫은 일은 내가한다."라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는 말씀에 바탕을 두고 활동하고있다. 설립당시는 좌석수 28석에 급식일수는 주6회 였던 것이 98년 현재 좌석수 48석에 급식일수는 주 5회로 변경하였다. 현재 급식인원은 400명이다.

1989. 1. 19 무료급식소인 대구 요셉의 집 설립

소재지 : 우 700-140 대구직할시 중구 교동 26-10/ 전화 053)426-8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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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교육원 (나눔지 1호 2쪽) - 1976. 9. 27발행

도봉구에 위치한 삼양동성당 <주임신부 김택구>에 "요한 교육원"이 교우들의 축복과 기대를 안고 개설된 것은 1976년 4월이다. 이 교육원에는 삼양동 일대의 중학 미진학 아동 60여명이 야간을 이용하여 중학과정의 교육을 받고 있다. 미아동 일대의 인구 약20만 중 그 40%가 하위의 생활을 하고있다. 그러므로 국민학교를 졸업한 대부분의 아동들이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하고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무슨 힘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 이고장에 위치한 교회가 안고있는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이 교회의 본당신부님과 교우들은 주일학교 교육에 대해 림은 인식과 열성을 다했다. 그리하여 6개의 교실을 마련했다. 책상과 걸상도 훌륭한 것으로 마련했다. 이러한 시설은 서울 어는 본당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리 만큼 훌륭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훌륭한 시설은 주일을 제외한 날에는 그대로 방치되고만다. 그리하여 삼양동 성당에서는 이시설을 이용하여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아동들에게 중학교 과정의 교육을 실시할 것을 결정하고 그동안 본당신부님을 중심으로 하여 사목의원회와 교우들이 한뜻으로 뭉쳐 그 준비에 발벗고 나선결과 드디어 발족을 보게되었던 것이다.

"요한교육원"은 원장 차중재씨를 비롯하여 각 대학에 재학중인 20여명의 청년교우의 희생적인 봉사정신에 의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있다. 교회의 이러한 사업은 전교에도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지역사회에도 크게 도움을 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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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보스코 기술교육원 (나눔지 28호 10쪽) - 1985. 1. 15발행

산업혁명으로 황폐해진 유럽의 한 농촌에서 버려진 불우청소년들을 모아 오직 사랑으로 돌보며 그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교육가이며 신부였던 보스코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교육방침을 따라 사랑으로 가득한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는 요한보스코 기술교육원은 소년들을 보호 수용하는데 그쳤던 초창기와는 달리 벼천하는 사회의 기능에 맞추어 기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985년 현재 가구제작과, 목공예과, 배관과의 3개과를 두고있다. 1년 과정의 기술습득 후에는 취업까지 알선해 주고 있는데 만 14세-18세의 보호자가 없거나 극빈가정의 청소년들에게 입학의 기회를 주고있다. 거의 100%의 취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 기술원 원아들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취업 한달만에 보따리를 싸서 다시 기술원으로 되돌아 오거나 이곳저곳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례가 많다. 이처럼 많은 것은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들의 불안정한 성격탓이라고 볼 때 이들에게만 성실치 못하다는 비난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곳 기술원은 이들의 정서지도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있다. 60여명의 원아들에 20명이 넘는 직원은 이들의 사랑의 손과 발이 되어 생활부터 진료등 모든것을 부모처럼 닦아주며 다듬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1969. 요한보스코 기술교육원 사회복지법인체로 인가 (나눔지 28호 10쪽) - 1985. 1. 1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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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집 (가톨릭사회복지회보 통권 6호 60쪽) - 1996. 11. 6일 발행

교구 내 장애인 자활공동체인 우리들의 집에서는 장애노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양로원 축성식을 지난 6월 24일 실시하였다. 교구장 이갑수 주교님의 집전으로 축복식이 거행되었으며 현재 '우리들의집'은 400여평의 대지 위에 숙소 및 작업장을 갖추고 있으며, 무공해 비누, 참기름을 제조 판매하고 있고, 가족들이 함께 하는 단순노동을 통하여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1996. 6. 24 장애인 자활공동체 '우리들의 집' 축성식 (가톨릭사회복지회보 통권 6호 60쪽) - 1996. 11. 6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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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양의집 (애덕회) - 1998. 7. 4일 우양의집 김젬마 수녀님의 서신

우양의 집은 음성결핵 자활촌으로서 현재 20여명 형제들의 집이다. 정부의 보조없이 후원회의 도움과 책임을 맡고있는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녀회가 된장, 미숫가루 등을 만들어 판매금으로 생계유지를 하고 있다.

소재지 : 우 413-830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하지석리 268-4/ 전화 0348)943-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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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89쪽)

1887년 함경남도 원산시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함경도의 첫 본당이었다.

1920년 8월 5일 원산교구가 설정되고 초대 교구장에 사우어(B. Sauer) 주교가 임명되자 원산본당은 원산교구로 이관되고 동시에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원산교구로 이관된 후 에카르트(A. Eckardt) 신부가 부임하여 1921년 빈민아동 교육을 위해 해성학교를 설립하였다. 1925년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원산교구에 진출하여 본당내에 야학, 시약소, 노인과 아동을 위한 교리강습소, 해성유치원 등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1921. 5 원산본당에서 빈민아동을 위하여 해성학교를 설립 (889쪽 원산본당)

원산본당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75쪽, 173쪽)

원산본당의 제 9대 본당 신부로는 포교 성 베네딕도회의 옥 안드레아 엑카르트(Andreas Eckardt, 1884-?)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 쌍트 오틸리엔에 학교 설립의 뜻을 전하였고, 서울에서 초빙하여 온 오병주 선생과 함께 1921년 5월 15일, 온돌방 2칸을 빌려 야학 강습소를 개설하였다.

미취학 아동이 많음을 안타까이 여긴 엑카르트 신부는 스스로 교단에 서서 지도 하였으며, 빈곤한 어린이들에게는 일체의 학비를 면제시키고 학용품까지도 대주면서 신 교육을 펼쳐 나갔다. 3개월 후에는 학생이 60명에 달하여 주야로 강습소를 운영하였다. 한국 사람들의 높아가는 향학열에 따라 입학 지원자는 격증하였고, 일반 사회에서 완전한 초등교육 기관으로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에 1922년 3월 7일에는 4년제 보통학교로 승격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나 운영난에 봉착하자 옥 신부는 교사 한 명의 급료를 원산 본당의 유지비에서 엄출키로 하였으며, 한 명분은 옥 신부 자신이 부담하였고, 나며지 한 명은 원산 교회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그밖의 경비는 원산 사회 유지들의 보조금과 학생들의 수업료로 메꾸어 갔다. 이후 1923년 4월 1일부터 학교 경영은 원산 본당에서 맡기로 하였다. 1924년 4월, 학생수가 450명에 달하여 교사 증축이 불가피하게 되자 건평 450의 벽돌건물을 건축하였고, 1926년 4월 부터는 교육 기간을 6년으로 연장하였다. 이렇듯이 해성학교는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학생 수가 더욱 증가하였다.

청각 장애자 교리 -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이 처음으로 청각 장애자에게 교리를 지도한 것은 1930년초, 원산 본당에서였다.

교육의 혜택을 못받아 문맹을 면치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던 그리소스토마 수녀가 하루는 열심한 신자 가정에 청각 장애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의 부모들이 청각 장애자인 아들 요한의 첫 영성체 때문에 고심하는 것을 알게된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요한을 정상아들의 교리반에 출석시켜 교리 지도를 시도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소스토마 수녀의 지극히 정성어린 지도로 첫영성체와 견진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 때가 대개 1930년대 초반으로 알려진다. 그리소스토마 수녀 다음으로 청각 장애자에게 교리를 지도한 이는 일본안 막달레나 수녀였다. 막달레나 수녀에 이어 청각 장애자를 지도한 이는 까리따스 수녀였다. 까리따스 수녀가 원산 본당에서 본격적으로 청각장애자 교리지도를 한 것은 1940년 이후부터였다. 그러나 이전에도 한 두명이 개인으로 교리를 배웠다. 정상인 교리지도도 힘겨운데 수화까지 익혀가며 장애자에게 교리지도하는 것은 참으로 큰 인내를 수반하였지만 까리따스 수녀는 개인으로 찾아오는 장애자를 위해 이런 많은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하였다.

1921. 5. 15 원산본당에 야학강습소 개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선수녀원사 75쪽, 173쪽)

1930. 원산본당의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청각 장애인을 위한 교리 시작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75쪽, 173쪽)

원산본당 元山本堂 (함경도 천주교회사 자료집 제2집-원산교구연대기,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공립국민학교의 권리와 의무를 다 누리고 있는 원산본당 학교는, 1924년 4월에 3학년이 이미 있던 2학년에 추가되었고, 그렇게 공립학교처럼 6학년이 될 때까지는 매년 성장할 것이다. 이 학교는 남학교인 동시에 여학교인데, 국가의 인가에 따라 학교 조직이 완료되면, 600명의 소년과 300명의 소녀들을 가르치게 된다. 이제 소녀들을 따로 가르쳐야 하고 또 소년들이 각 학년마다 그 숫자가 많아서 두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 교실을 증가시키는 것이 긴급하게 필요해졌다. 옛 학교의 교실 4개만을 가지고는 벌써 불충분하게 되었고 그래서 일부 소년들은 오전에, 또 다른 일부 소년들은 오후에 같은 교실에서 가르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24년 9월 말, 주교가 간도로 견진성사를 주러가는 도중에 며칠 간 이곳에 들렀을 때, 이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 건축은 각각 60명 가량을 수용하는 교실 4개의 전체 신축 학교 계획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미장이일은 베드로 수사의 감독하에 중국인들이 했고, 조수일은 대개가 가난한 교우들인 조선인들이 했으며, 목수일은 야누아리오와 고트립(아우어) 두 수사가 맡아 했다.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12월 초, 건물 골격이 완성되어 최소한 그것을 임시로 널판지로 덮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3월 말, 작업이 계속되어, 5월 중순에는 드디어 건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더 큰 과제가 생겼다. 원산의 작은 성당은 아마 세상의 모든 주교좌 성당 중에서 가장 빈약하고 가장 작은 성당일 것이다. 주일이나 첨례때에는 미사를 두 번 드리는데도 교우들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서 있거나 장궤를 하고도 자리가 없었다. 여름에는 더워서 안에 있을 수가 없다. 성당에서의 주교 미사란 공간의 부족으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작년의 통계에 따르면 신자수는 시내가 452명이고 근교에 130명이 있다. 그러므로 더 큰 성당을 건축하는 것이 불가결하게 되었다. 주교님과 많은 상의와 계획 끝에 결국 국민학교를 곧 전부 건축하고, 그 건물의 일부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빈약한 포교지 자금을 동원하는 크고도 의협적인 결정이었다.

봄 동안에 바위들을 폭파하고, 머릿돌을 놓았다. 5월말에는 건축이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미장이일은 중국인 진 요셉 도제들을 데리고 했는데, 그들가운데는 교우들도 여러명 있었다. 11월 말, 건물은 전차 완성단계에 들어섰다. 이 건물은 이미 봄에 완공 된 건물을 포함하고 있는데, 1층에는, 각각 60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9개의 교실이 있고, 중간건물 2층에는, 교실 1개와 교사실, 그밖에 성당과 제의실이 있다. 12월 초에 몇몇 교실과 성당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12월 8일에 축성을 하게 되었다. 성당의 시설을 위해서는 성 분도 수도원이 관대하게 많이 기여했다.

1924. 12. 8 원산본당의 학교와 성당 축성식 (함경도 천주교회사 자료집 제2집-원산교구연대기,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원산본당의 교육활동과 의료활동 (함경도 천주교회사 334쪽)

베네딕도 수도회의 표어처럼 수녀들도 "기도하고 일하라"는 뜻에 충실히 따랐다. 그 중에서도 수녀들은 원산 정착 이래 교육과 의료활동에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우선 교육활동은 1926년부터 크리소스토마 슈미트 수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에 여자 어린이들을 모아 작은 수녀원 마당에서 교리 지도를 하였고, 이어 해성학교 운동장 옆에 있는 초가집(해성학교 초기에 야학 강습소로 사용하던 집)을 빌려 어린이들에게 소학교 교육의 기초를 지도하였으며, 새 수녀원(성 임마꿀라따의 집)이 완공되면서 옛 수녀원(성 데레사의 집) 한쪽에 교실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나오는 어린이가 점점 늘어 곧 100명 이상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빈민학교인 "호수천신학교"의 시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녀원에서는 1927년 4월 1일, 호수천신학교 한쪽에 "해성유치원"을 개원하여 수녀와 예비수녀가 원아들의 교육을 맡도록 하였다.

호수천신학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여자 소학교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유치원도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게 되었다.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1938년 학생수가 350명 정도에 이르자 성 데레사의 집 아래층에 3개의 교실을 마련하였고, 4년제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이 학교는 비록 빈민학교로 출발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과 교육 체제가 보통학교에 손색이 없게 되었고, 마침내 1941년 4월에는 6년제 정식 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학교에는 남녀 모두에게 입학을 허가하고 있었으나 주로 여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한편 해성유치원은 1931년 9월 30일에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유치원 책임자는 처음에 이센가르도 그라프 수녀, 다아틸디스 수녀 등이 맡다가 언어 소통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1933년 6월 부터는 한국인 김 데레사 수녀가 책임을 맡았다. 그 후 유치원에서는 원아들이 늘어남에 따라 3반으로 나누어 운영하였으며, 1938년 11월에는 수녀원 앞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전하였다.

의료활동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원산 수녀원이 자리잡게 되면서 이미 헤르메티스 그로호 수녀가 시작하였었다. 그 뒤 시약소 운영에는 1926년 10월에 입국한 푸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Fruktuosa Gerstmayer) 수녀가 참여하였으며, 헤르메티스 수녀가 1927년 7월 필리핀으로 요양차 떠나면서 푸룩투오사 수녀가 혼자 시약소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 시약소는 개설한지 얼마 안되어 주민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었고 날로 일손이 부족하게 되어 1928년 6월에 입국한 오트마라 암만 수녀가 푸룩투오사 수녀를 도와 일하게 되었다. 1929년 4월 사우어 주교는 수녀원을 방문하고 5칸 정도의 가옥을 매입하여 시약소로 사용토록 해주었다. 이때부터 시약소는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로 불리었다.

시약소에서 1928년 한 해 동안 치료한 환자수는 4,700명에 달하였으며 그중 400명이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1930년에는 4,800명이 치료를 받았다. 프룩투오사 수녀는 독일에서 약 조제법에 대해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직접 약초를 뜯어다가 갖가지 약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투약하거나 치료에 이용하였다. 1938년, 시약소가 새로 건립된 유치원 1층으로 이전된 뒤 수녀원에서는 독일인 의사 디오메데스 메페트르(Diomedes Meffert) 수녀의 명의로 허가를 받아 이를 운영하였는데, 이때부터 최 리오바 수녀가 간호 수녀로 프룩투오사 수녀를 도와 진료에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약소라기 보다는 '무료진료소' 형태를 띠게 되었다.

1926. 원산본당에서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은 소학교 교육의 기초를 여자어린이들에게 지도 - 호수천사빈민학교의 시작 (함경도 천주교회사 334쪽)

1927. 4. 1 원산본당에서 해성유치원을 설립 (함경도 천주교회사 334쪽)

1931. 9. 30 원산본당의 해성유치원은 정식설립인가를 받음 (함경도 천주교회사 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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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 1998. 6. 10일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의 홍보담당 원유일님의 답신에 의거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이 위치하여 있는 봉산동은 원주선과 중앙선철도 주변으로 형성된 지역으로서 설립당시(1990년)에는 원주시내에서 가장 낙후되고 영세민과 저소득층이 밀집되어 거주하던 곳이었으나 1995년 부터 도시재개발 지역으로 신 아파트와 고급주택이 들어서면서 계층간의 빈부격차가 심해져 이들을 통합할 수 있는 주민참여 프로그램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다. 이에 따라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은 사회복지이용시설로서 지역 특성에 맞는 복지사업으로 하느님의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역주민들에게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 좀 더 나은 생활,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통한 주민의 복지증지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복지관에서는 종교 이념에 관계 없이 장점, 약점, 경제 상태, 신체, 정신적인 태도나 행동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며 스스로 자기가 나갈 방향을 결정하려는 본인의 의사와 자유를 존중하며 자립원조에 필요한 것만을 제공한다.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은 천주교 원주 교구 사회사업국내 지역사회복지부에서는 그동안 부분적으로 해오던 지역사회복지업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원주 시내에서 저소득층들과 도시 빈민층들이 밀집되어 살고 있는 곳을 대상으로 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 극빈가정자녀, 알콜중독환자, 무의탁 노인, 가출 청소년, 긴급 구호대상자들의 발견, 상담 및 방문, 사회복지시설과 연결하여 간병인과 봉사자 연결, 가정 돕기 등의 사업을 실시하여 왔고 좀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전문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기 위하여 천주교 교육원 이었던 봉신2동 현재의 위치에 정부의 보조를 받아 지하 1층, 지하 2층의 연 건평 5백평 규모로 증축하여 맞벌이 가정을 위한 탁아방, 청소년 독서실, 상담실, 회의실, 부업교실등 각종 직업훈련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여 지역주민들의 교육과 계몽, 봉사활동과 나눔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1990년 11월에 개관을 하게 되었다.

1988. 6 원주 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법인 인가

1990. 10. 11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 개관 - 초대원장 최기식 신부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1992. 1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 부설 재가복지봉사센터 개설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1992. 3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 부설 삼광학원(노인학교) 개설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1997. 5. 12 원주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 부설 무지개 탁아방 개원 (사회복지법인 원주 가톨릭 사회복지회)

소재지 : 우 220-082 강원도 원주시 봉산2동 950/ 전화 0317)44-6617/ 모사전보 0317)731-2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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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891쪽)

원주교구 소속의 본당으로서 현재는 강원도 원주시 원동 85-1 소재의 주교자 원동이며 본당주보는 '천주 성총의 모친' 이다. 1896년 당시의 풍수원을 맡고있던 르메르(Le Merre) 신부가 원주군청 가까이에 거처할 집을 구입하고 그해 8월 17일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1901년 1월 조제(Jaugey) 신부가 5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10년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28년 7대 정규랑(레오) 신부가 부임하여 10년간 사목하는 동안 원주본당은 크게 발전하였다. 1931년 4년제의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나 1937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고 1934년에는 소화유치원을 설립한다.

1910. 원주본당에서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 설립 (891쪽 원주본당)

1931. 원주본당 내에 4년제의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운영 (891쪽 원주본당)

1934. 원주본당 내 소화유치원 설립 (891쪽 원주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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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성바오로 병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3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돌보고자 하는 수도회의 목적과 정신에 따라 당시 의료시설이 충분치 못하여 거의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던 강원도 원주교구로부터의 봉사요청을 받아들여 원주시 변두리에 성바오로병원 원주 분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원주시 개운동(開運洞)에 대지가 1,000평 건평이 350평에 달하는 2층 병원 건물을 신축하고 1970년 10월 7일에 병원 낙성식과 축성식을 가졌다. 그 해 10월 15일 개원한 이래 원주 성바오로병원은 원주교구에서 일반진료와 극빈환자들을 꾸준히 치료하여 왔다. 또한 매주 수요일마다 강원도 횡성군, 원성군, 평창군 등의 무의촌에 이동진료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원주지역내에 의료기관이 확충되고 의료보험의 확산으로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한 이전문제가 논의되어 오다가 결국 인천 해성보육원 어린이들을 위한 해성의원에 통합하기로 하고 1985년 10월 31일, 개원 16년만에 문을 닫았다. 그동안 의사수녀를 비롯하여 간호수녀들의 노고가 컸고 직접 간접으로 의료활동을 통한 복음화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큰 몫을 담당해 온 원주 성 바오로병원 자리에는 병원건물을 개축한 [성 바오로의 집]이 개원되어 지역사회 교육의 장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1970. 10. 7 원주 성바오로병원의 낙성식과 축성식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3쪽)

1970. 10. 15 원주 성바오로병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3쪽)

1985. 10. 31 원주 성바오로병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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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당(裕堂)마을 (나눔지 209호 2쪽) - 1998. 7. 16발행

국내 최초의 유료양로원이 수원에 설립되었다. 대지 4,159평, 연건평 1,502평으로 1인용 24실, 2인용 20실, 44인용 6실로 총 인원 88명이 입주 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추었다. 입주자격은 만 65게 이상의 신체건강한 노인으로 소정의 생활비 부담능력이 있으면 거주가 가능하다. 시설면을 살펴보면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영양사 및 조리사가 상주하여 1일 3식 및 간식 1회를 제공하며 의사의 지시가 있는 식이요법의 필요시에는 그에따른 특별식을 제공한다. 건강관리를 위해서는 의무실에 의사, 간호사를 배치하여 건강상태를 파악하고 건강상담 및 잔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며 각종 오락시설과 문화체육시설로 노인들의 심신이 건강한 생활유지를 위한 시설을 갖추었다. 또한 생활전반과 인간관계, 재산관계 등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필요시 이에 응할 수 있도록 1급 사회복지사가 상주하여 노인들을 보살핀다. 유당마을은 노년생활을 알차고 보람있게 자립하여 보낼 수 있도록 한다.

1988. 7. 1. 유당마을 개원 (나눔지 209호 2쪽) - 1998. 7. 16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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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을수 尹乙洙 1907-1971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17쪽)

신부. 인보성체 수녀회의 창설자. 세례명 라우렌시오. 1932년 사제서품. 1953년 부터 인보회 사업에 투신하여, 서울 자하문 밖에 고아원과 결핵요양원을 설립한 후 1956년 경기도 부천에 사회사업과 전교사업을 위한 인보성체회를 창설했고, 1960년 안양 성 나자로 마을 원장에 부임, 병원과 요양원, 정착촌을 건설했으며 1963년 오류동 본당 초대 주임신부, 성 골롬반병원장, 경남 충무 충열여자중고등학교장을 역임하였다. 1964년 서울 대교구 부주교로 임명되어 교구행정에 관여하다가 1965년 신병 치료차 도미(渡美) 하여 1971년 귀국했으나 병이 재발하여 성모병원에 입원 중 5월 9일 사망하였다.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윤을수 신부의 사회복지활동과 사회복지 이념 - 1998. 4. 8 성체회 한율리엣다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 가톨릭 사회복지, 1997. 11. 13 가을, 통권 8호에 실린 글입니다.

尹乙洙(라우렌시오) 신부는 일제시대와 6·25남침을 전후한 한국역사의 격동기에 살았던 민족주의자, 사회사업가, 성서학자 신부로서 한국천주교회의 거목이었다. 6·25가 발발하여 미 제1군단 군목으로 있으면서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것을 계기가 되어 1956년에 구산후생학교(鳩山厚生學校) 를 설립하게 된다. 소사 벌응절리에 있었던 구산후생학교는 사회사업을 위한 전문학교고 인보성체 수도회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안양의 성 라자로 마을 나환자들을 돌보는데도 심혈을 기울였고 개간사업과 의료사업등 많은 사회사업을 하였다. 인보정신에 따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나환자, 고아, 전쟁후 가난한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을 실천했다.

윤신부는 1950년 인보회 한국지부장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사업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951년 미 제1군단 군목으로 무임하면서 전쟁터에서 많은 고아들을 발견하고는 이들을 모아서 돌보기 시작하였다. 사회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1951년 3월에 골롬바사를 창립하였다. 골롬바사는 윤신부가 직접 관할하였던 사회사업 모든 기구들을 통합해서 일컫는 명칭이었다. 윤신부는 미군의 원조를 받으면서 소사에 어린이집을 짓고, 가톨릭 구제회의 안주교를 통하여 구호물자를 많이 가져오기도 하고, 국내외의 재원을 동원하는데 직접 나서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자하문 밖 부암동 대원군 별장 석파정을 빌려서 골롬바 어린이집을 창설하였다.

윤신부의 사회복지 사업은 고아원 운영과 구호물자 배급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전쟁의 상처가 어느정도 아물어갈 무렵 1957년 5월부터 1965년 4월까지 8년간 안양 성 나자로원 3대 원장으로 부임한 윤 신부는 소외된 나환자 한사람, 한사람늘 버림받아 보호받는 사람들로 보지않고 존엄한 인격을 가진 형제로서 가난하지만 기쁨에 넘치는 마음으로 살 구 있도록 이끌어 주었고 자상한 어버이로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1961년 9월에는 독일 구라협회에 호소하여 보내온 원조액으로 새로운 시설의 병원을 지어서 양성 나환자들이 불편없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여주었고 자활생계가 불가능한 이들에게는 종신 보호하는 시설을 갖추어 주고 양성 나환자들에게는 계속 병원 치료를 하며 그 자녀들을 따로 격리하여 양육하고 보호하였다.

안양의 고천초등학교의 분교를 나자로 요양원안에 개설하여 미감아들을 취학시켰고 유아는 백령도에서 보호하여 성장아동은 육지로 취업을 알선해 주어서 재활의 길을 마련해 주었다. 이밖에도 재활사업에 특별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1961년 9월에는 가평의 임야 50만평을 매입하여 완치 나환자 100세대의 자활계획을 세웠고 부천 소사에 '성 누수마을' (현 경인농장)을 마련하여 나환자 80세대를 살게 해주었다. 1962년에는 성 나자로원에 100세대의 집을 짓고 축산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현재의 의왕농장으로 발전시켰고 경기도 양주군 양수리에 임야 3만평을 구입하여 '인덕 귀어촌'이라 이름짓고 경북 봉학에 있는 '갱화원'에 산과 전답을 마련해 주고 취학을 못한 어린이 여섯명을 분교에 입학시켜 교육을 받게 하는등 의왕 정착지, 부평 십정동 마을을 위시하여 나환자가 자활할 수 있도록 다섯군데는 마련해 주었다.

윤신부의 영성생활은 나의 존재에 대한 깊은 사랑과 행복감, 존중에서 우러나오는 '나 자신의 행복'에서 출발하여 인보정신을 통한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안에서 일치를 지향하는 완전한 행복의 길이었다. 윤신부의 전 생애는 한마디로 '사랑' 그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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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병 尹義炳 1888-1950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17쪽)

신부. 세례명은 바오로. 호는 죽총(竹叢). 1888년 경기도 안성의 청룡에서 출생.

1904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1920년 9월 18일 종현성당에서 서품을 받았다. 1923년 아동교육을 위하여 숭애의숙을 설립하였다. 그 후 1935년 황해도 은율로 전임되어 1936년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성모유치원과 성당학교를 개설하여 수시로 신부들을 초청하여 교리강습회와 강연회를 여는 등 교육사업에 헌신적으로 사목하였다. 1950년 6월 24일 상오2시 북한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되어 비밀리에 해주로 이송된 후 행방불명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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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원 (나눔지 185호 4쪽) - 1988. 1. 30발행

대방전철역에 위치한 은성원은 40여년간 사회사업에 투신하여 몸바쳐온 백수남(데레사) 원장에 의해 설립되어 88년 현재는 불우여성을 위한 무료직업훈련원과 파출부 사업, 직업보도 사업 등과 함께 3년 전부터 미혼모 사업을 하고 있다. 6·25당시 부산에서 모자원으로 시작하여 그후 9·28수복후 서울에 올라와 3남매를 기르며 모자원사업을 계속 하였는데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곤란에 처한 여성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사작하여 지금은 30여명의 미혼모 여성을 보호하면서 출산및 입양, 그리고 산후 미혼모의 건강을 보호하며 직업보도훈련과 재활을 지도하고 있다. 현재 산업사회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하여 무분별한 성도덕의 문란과 그 부산물로 미혼모 문제가 날로 심각해가고 있다.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지 모르기 때문에 불행에 빠지는 젊은 여성들이 이 사회에는 너무나 많다. 미래에 대한 계획없이 임신한 경우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본인의 현재의 처지는 물론이거니와 가족간의 갈등과 미혼부와 문제 그리고 직장이나 주변이들의 차가운 시선이나 냉대또한 이들에게는 못견디는 일들이며 출산후의 사후대책도 막연할 뿐이다. 이럴때 임신 때부터 상담을 하여 미래에 대한 현실적인 계획과 적응은 꼭 필요한 과정이다.

이외에도 은성원은 직업보도 훈련은 물론 무료직업안내소를 운영하여 가정부와 파출부, 환자돌보기 등 여성들을 위해 직업안내를 하고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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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율본당 殷栗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9쪽)

1887년, 로(Jean Rault, 1860-1902) 신부가 황해도의 고정 선교사로 임명되어 은율에서 40리 상거한 장련(長連)에 정착하여 전교하면서 은율에 처음 공소를 개설한 이래, 1902년 5월에 공소로부터 본당으로 승격된 황해도 은율본당 관내에서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물론 유치원마저도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아쉬움을 느껴왔다. 그러다가 이보환(李1褓煥 요셉, 1893-1944) 신부가 부임한 후 유치원부터 설립하기로 중론이 모아져 300원의 기금으로 1923년에 성모유치원(후에 해성유치원, 은율유치원으로 개명)을 개원하였다. 첫해에 원아수는 54명에 달하였고, 유자격 교사 2명이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한편 1929년 4월 8일, 은율본당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1895-1950 행불) 신부는 가정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해성야학원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개설하자 8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 해성학원과 앞의 유치원을 위해 1931년 8월 18일 은율분원이 신설되어 이화 우술라 수녀와 김 발렌티나 수녀, 그리고 송 에밀리아 수녀 등 3명의 수녀가 파견되었다. 수녀들은 학원 학생들 뿐만 아니라 유치원 원아들에게도 교리와 유희, 노래 등을 열심히 가르치고 전교도 하게되자 세인의 평판도 좋아지고 학교와 유치원이 크게 발전하였다.

1936년에는 본당유지의 기증으로 2층 연와조 양관(洋館)을 건축, 1층을 유치원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평양 대신리본당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1905-1982) 신부는 축성식에 참석했다가 시설이 미비한 것을 보고 돌아가 미끄럼틀과 그네 등을 평양에서 제작하여 기증했다. 그리고 성모 유치원의 명칭도 은율유치원으로 바꾸었다.

8·15해방 후 북한지역의 공산화로 인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철수하였다.

1902. 5 공소에서 은율 본당으로 승격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9쪽)

1923. 은율본당 내 성모유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9쪽)

1929. 4. 8 은율본당 내 해성야학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9쪽)

1945. 8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은율본당에서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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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업 Medical mission work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26쪽)

교회의 의료사업은 선교상 필요에 의해 수행되는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의료 서비스를 가르키는 말이다. 열악한 환경속에서 건강을 돌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교회가 뿌리내리려고 번성할 수 없다. 의료사업을 통해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회복해 주고, 지켜줄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감동적이고 구체적으로 전해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교활동의 중요한 수단이 되어 온 교회 의료사업의 창시자는 바로 예수그리스도 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치유사화는 신약성서의 여러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병, 중풍, 열병, 하열병, 소경, 등 수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해 준 예수의 행적이 신약성서에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열 두 제자를 파견하면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주고, 죽은 사람들을 살려 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내 쫓아라." (마태10:5-8, 마르6:7-13, 루가9:1-6) 고 분명하게 지시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치유행위는 전통적인 성서해석학자들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가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리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현대적인 해석과 같이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표현이다.

의료사업은 사랑의 실천행위로 초대 교회 때부터 교회가 수행해야 할 사명중의 하나로 인식되어 온듯하다.

한국천주교 의료사업의 역사는 대체로 4개의 기간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1) 박해시대(수용기- 1886) : 약국경영과 개인 차원의 의료시술이 고작이던 시절로 최필제가 개설, 운영하던 약국과 김종교, 이중배 등의 의료시술이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선교사들이 입국한 후에는 성영회 사업의 하나로 약국이 개설되고 환자들에게 무료로 약을 나누어 주었다.

2) 간이진료소시대(1886-1930) : 한불조약 이후 진출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메리놀 수녀회, 베네딕토 수도원에 의해 진료소와 시약소가 설립, 운영되던 시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서울(1898년). 제물포(1900년)에 진료소를 개설하였고, 대구(1915년)에 시약소를 개설하였다. 메리놀 수녀회는 의주(1926년), 영유(永柔, 1926년), 비현(枇峴, 1928년), 베네딕도 수도원은 덕원(1926년), 원산(1927년)에 각각 시약소를 개설, 운영하였다. 이상 7개의 간이진료소에서 치료한 환자수는 1930년까지 8만1,125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3) 병원설립시대(1930-1945) : 서울의 성모병원(1936년)을 비롯한 대구의 해성병원(1936년), 원산의 마리아 도움(1933년), 신의주의 성모병원(1936년), 연길의 병원(1931년 으로 추정), 안주의 성모병원(1935년), 진남포의 소화병원(1940년), 재령의 성모병원(?), 청진의 성모병원(?), 함흥의 성심의원(1941년) 등이 개원되었다. 그외 시약소도 늘어났다.

4) 발전기(1945- ) : 1950년까지 부진했던 한국 가톨릭의 의료사업은 6.25 동란과 더불어 의료수요가 대폭 증가하면서 미국, 서유럽 각국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외국 수도원의 진출로 전환기를 맞게 된다. 수많은 병원들이 이 기간에 세워졌고, 의료인양성을 위한 가톨릭의과대학(1945년), 간호학교(1954년), 지산(메리놀)간호전문대학(1964년), 성신간호전문대학(1967년) 등이 설립되었다.

이로써 1983년말 현재 가톨릭 의료사업은 병원 29개소, 의원 23개소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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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28쪽)

1945년 8.15 광복 후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덕정리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김피득(베드로) 신부는 본당을 매각하고 의정부시 의정부동에 설립하였다. 1953년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계광(요한) 신부는 주한 미 1군단의 원조와 교구청의 지원으로 새 성당건물을 준공하고 이듬해에는 역시 미 1군단의 도움으로 유치원 건물을, 1957년 에는 본당부속 성모병원을 건축한다. 이계광 신부는 1967년 전임되기까지 16년간 재임하면서 성당건립과 전교사업은 물론 교육과 의료사업에도 크게 전력하여 본당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1973년 6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한 최서식(라우렌시오) 신부는 1976년 본당부속 성모병원을 가톨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등록시키는 동시에 새로 마련한 420평 대지 위에 현대식 병원을 그해 12월에 준공하였다.

1981년 부활절을 기하여 의정부4동 본당을 신설, 분리 독립시킴으로써 이 본당 명칭은 의정부2동 본당으로 바뀌었다. 이 본당의 주보는 성모성심이며, 경내에 성가수녀회 수녀원과 유치원이 있다.

1976. 가톨릭대학의학부부속성모병원 개원 (928쪽 의정부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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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성모병원 (의정부 2동성당의 복지시설) - 1998. 3. 28일 의정부2동성당의 이영래님의 답신에 의거 - 의정부본당 50년사 중에서 발췌

의정부시 교외의 쾌적한 환경 속에 자리잡은 의정부 성모병원은 가톨릭 정신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발휘함으로 자선과 의료봉사로 지역주민들의 보건 증진에 이바지 하는한편 사목을 통해 환자의 영육을 함께 치료하는데에 그 뜻을두고 1957년 5월 7일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271번지에 석조건물 2백65㎥를 건축하여 외과, 산부인과 2개과로 최초 개원하였다. 그 후 1976년 5월 1일부터 4차에 걸친 대대적인 증·개축을 실시하여 대지 2천8백16㎥, 연건평 5천90㎥(지하 1층 지상 4층) 의 병원사옥을 완공한 후, 점차 현재의 규모인 1백50병상으로 확충하여 왔다. 개원 이래 약 20년간을 의정부 천주교회 부속으로 지역사회 의료발전을 위하던 중 의료진과 재정상의 여러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러나 1976년 5월 1일 가톨릭대학의학부 제 7부속병원이 됨으로써 CMC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으며 1986년 5월 6일 종합병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급격히 변화하는 주변환경과 의료시설의 한계로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아래 1993년 5월 3일 대지2만1천94㎥, 연건평3만3천4백74㎥(지하1층 지상9층)규모의 신축병원을 완공하여 이전한 후 94년 3월 부터 5백 병상을 완전 가동하게 됨으로써 한수 이북유일의 대학 병원으로서 그 막중한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1957. 5. 7 의정부 성모병원 개원, 초대 병원장 이계광 신부 취임 (의정부 2동성당의 복지시설)

1976. 5. 1 의정부 성모병원 가톨릭대학부속병원으로 승격 (의정부 2동성당의 복지시설)

1986. 5. 6 의정부 성모병원 종합병원으로 승격 (의정부 2동 성당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480-130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65-1/ 전화 0351)820-3000/ 모사전보 0351)847-8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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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29쪽)

1911년 평북 의주군 의주읍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모승천.

1921년 해성유치원과 1924년 해성학원이 개설되었고 1926년 메리놀회 수녀들에 의해 시약소와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광복 후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김교명 신부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1921. 해성유치원 개원 (929쪽 의주본당)

1924. 해성학원 개원 (929쪽 의주본당)

1926. 시약소와 고아원 설립 (929쪽 의주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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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성모 의원 (동정성모회의 복지시설 - 교회와 역사 242호 11쪽) - 1995. 7. 25발행

1972년 나환우진료 및 일반 진료를 위하여 설립되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목적으로 나환자 치료사업과 나병 퇴치에 역점을 두고 지역사회에 보건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침상 수는 19병상으로 나환자 입원용으로만 이용되고 있으며, 기타 외래 환자는 연평균 81,540명이다. 주요 이용자는 생활정도가 중하위 계층의 40대 후반이다. 그러나 나환자들의 고령화 현상으로 인해 점차 나사업의 활동 범위가 축소되면서 재활과 복지, 그리고 임종을 돕는 호스피스에 역점을 두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망을 심어 주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또한 지역사회의 보건 향상에도 일익을 담당하면서 현재 8명의 회원들이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72. 이리 성모 의원 설립 (전주교구) (동정성모회의 복지시설 - 교회와 역사 242호 11쪽) - 1995. 7.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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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본당 伊川本堂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7쪽)

이천 본당은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개하리(江原道 伊川郡 伊川面 開下里)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천에 선교사가 정착한 것은 1892년,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인 노(Jean Rault, 1860. 11. 25 - 1902. 9. 13) 신부가 염산리(簾山里)에 정착하면서부터 였다. 초대 노 신부 당시 이천의 신자 수는 900여명이었다. 그 뒤에 강 레옹 뒤테르트르(Leon Dutertre, 姜 良, 1866. 1. 3 - 1904. 3. 11)가 선교하였고, 1896년 포내(浦內) 본당을 분할하였다. 포내 본당은 임시 폐쇄되었다가 1928년에 다시 이천본당에서 관할하였다. 1908년, 염산리에서 이천읍 내의 개하리로 본당을 이전하는 한편, 그 해에 '경천애국(敬天愛國)'을 교지로 한 명의(名義)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천본당은 산간벽지에 위치하고 있어 교구장의 방문이 없다가 1936년 11월 16일, 서울교구장 원 라리보 주교의 사목방문이 이루어져 200여명의 신자들이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1937년도에는 신자수가 1220명으로 증가되었다. 1939년 4월 25일 춘천 지목구가 설정됨에 따라 이천 본당은 이에 편입되었으며 해방 후 이천 본당은 공산 정권하에서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으나 근근이 선교는 계속할 수 있었다.

1948년 중순경 이천 본당의 김봉식 신부가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선교수녀를 청하였다. 김 신부는 김 요세파 수녀의 남동생으로 연길 대목구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해방 후 소련군의 진주로 인하여 남쪽으로 피신하였으며, 이천 본당 재임시 공산 정권의 반종교정책에 역행하여 전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1908. 명의학교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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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남촌 마을 (교회와 역사 242호 11쪽) - 1995. 7. 25발행

1974년 소록도에서 가톨릭 신자 7만명이 익산 남촌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형성된 이 마을에 회원들이 파견된 때는 1982년 10월 부터이다. 익산 마을의 경우 당시 주위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활발히 활동하였기 때문에 천주교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으며 신자 세대는 정착촌 중에서도 극심한 가난과 소외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인근 본당들의 도움이 늘어났고 회원들이 나환우들의 신앙 및 생활 지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나환우 가족들의 생활 수준도 향상되었다. 1983년 3월 부터는 유아원도 개설 운영함으로써 나환우 2세들의 바른 성장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1982. 10 익산 남촌 마을에 나환우 정착 생활 시작 (교회와 역사 242호 11쪽) - 1995. 7.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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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보 기술 학교 (성체회 복지시설) - 1998. 4. 8일 성체회의 한율리엣다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 1984. 8. 15일 성체회의 윤을수 신부 유고집 중에서 발췌

1960년대의 수많은 극빈자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세우신 중학교 과정의 교육장이었다. 여기에는 '골롬바 어린이집'의 어린이들과 '영성원'(미감아)의 어린이들도 함께 교육울 받았다. 1964년 말에 폐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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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보의 집 (인보성체 수도회의 복지시설) - 1998. 6. 10일 전주 인보의집 총무 이현희 수녀님의 답신에 의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인보 정신으로 시대의 징표에 따른 어렵고 괴로운 사람들"(인보성체수도회 회헌48조) 중 무의탁 노인을 모시고 물질적, 정신적, 영적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1991년 11월 21일에 전주 본원내 노렌죠의 집을 개조하여 설립하였다. 창립자의 카리스마에 따라 가난하고 소외된 노인들을 가족처럼 모시기 위해서 소그룹 홈(42평)으로 시작하였다. 현재 인보성체 수도회에서는 사회복지법인 천주교인보회를 설립하여 97년 5월 전주시의 도시계획에 의거하여 설립당시의 집이 철거되었고 현재는 수도원 내 舊 유치원 건물을 개조하여 현재 7분의 할머니와 생활하고 있다.

1998년 6월 30일 준공 예정에 있는 "인보노인종합복지관"을 건축중이며 완공이 되면 지금의 노인들을 복지관으로 이주할 것이다.

1991. 11. 21 인보의 집 설립 (인보성체 수도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우 560-100 전주시 완산구 중노송동 361/ 전화 0652)34-0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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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회 (영) Human Development Committee-Bishops Conference of Korea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69쪽)

인성회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인성회'의 약칭이다. 1. 개괄 ① 소속 : 인성회는 주교회의 산하 전국 위원회(National Committee) 중 일개 위원회이며 주교위원회(Episcopal Commision) 가운데에는 사회 주교 위원회(Commision for Social Affairs) 에 소속되어 있다. 성청에는 Caritas Internationalis에 정회원으로 소속되어 있으며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인간 발전위원회 OHD-FABC에 소속되어 있다. ② 목적 : 인성회는 종교, 사상, 이념에 관계없이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같은 인간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존엄성을 지키면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인간공동체 건설에 교회가 기여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③ 기능 : 이와같은 목적을 수행시키기 위하여 ㉮ 교회의 대 사회적 활동과 사업을 교회 내외적으로, 또한 국내외적으로 대표하고 이와 유사한 민간기구 및 국제기구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 교회의 대 사회적 사업을 활성화 시키며 격려, 조화 시키고 정책을 제시하는 등의 조정역할을 하며 ㉰ 인적, 기술적, 물질적 자원을 개발, 동원, 배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④ 관장분야 : 이와 같은 기능은 교회의 ㉮ 제반 긴급 구호 및 자선활동 ㉯ 복지사업 ㉰ 개발활동 ㉱ 사회의식계발운동에 걸쳐 발휘된다. ⑤ 조직 : 인성회는 주교단에서 선출된 담당주교가 대표, 지휘, 감독을 총괄한다. 담당주교 산하에 전국위원회를 설치하여 그 구성을 인성회 각 교구 위원회 대표, 사회사업 전국기구 대표, 위촉위원, 사무국장으로 되어있다. 각 교구는 교구 형편에 맞게 인성회 교구위원회를 설치토록 되어 있으며, 전국위원회 사무국을 중앙에 설치하여 제반 업무를 수행토록 되어 있다.

2. 설립배경 : 한국전쟁 후 서울 대교구 윤을수 신부가 한국 카리타스(Caritas Coreana)를 설립하여 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구로 발전시킬 의도였으나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유명무실해졌고, 그 뒤 대전 교구장 황민성 주교의 명의로 명맥을 이어 오다가 평양교구 관리자이며 미국 가톨리 구제위원회(Catholic Relief Services - U.S.C.C) 책임자 캐롤 몬시뇰(Msgr. George M. Carroll. M.M)이 조정자로 임명되었으나 역시 명칭만의 기구로 존속되었다. 1971년 12월 아시아지역국 교회의 카리타스 설치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당시 발족한 교황 자문 기구인 Cor Unum의 성격이 명확히 규정되지 못하였기에 구체적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 캐롤 몬시뇰은 주교회의에 한국 카리타스 부활을 위한 제의를 하였다. 1974년 당시 교황청 Cor Unum위원인 박희섭이 '한국 가톨릭 사회발전 심의회' 설립을 주교회의에 제출하였으며, 한국에서의 철수를 고려 중이던 미국 가톨릭 구제위원회는 '개발사업 및 복지사업을 위한 제안서'를 제출하여 한국 카리타스의 부활을 요청하였다. 1974년 11월 춘계 정기총회는 카리타스의 부활을 원칙적으로 결정하였으나 구체적 기구 성격에 대한 두가지 제안의 통합을 모색키 위하여 12월 마닐라에서 개최된 아시아 대륙 카리타스협의회에 박희섭, 최재선 양인을 파견하여 이 회의에 참석한 교황청 실무자와 접촉토록 하고 각국 교회기구에 대한 연구결과를 보고토록 하였다. 1975년 춘계 주교총회는 양인의 보고서를 토대로 지학순 주교에게 양 제안의 통합안을 성안토록 위임하였으며 이 통합방안은 동년 6월 25일 주교단의 인준을 받아 인성회란 명칭으로 정식 발족을 보게 되었으며 총재 주교로 지학순 주교를 선임하게 되었다.

3. 활동의 원칙 : ① 정신 : 인성회 헌장 취지문에서 밝혔듯이 사회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 복음적인 정신으로 ㉯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교회론에 입각하여 ㉰ 역대교황들의 사회회칙 및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따라서㉱ 한국상황에 대한 한국적 전통과 문화를 고려하며 ㉲ 현 한국교회의 체질에 맞도록 활동을 한다.

② 대상 : 인성회 활동의 대상은 우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며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단체·기관·공동체 등이다. 긴급한 재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만성적 빈곤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 불의한 제도나 구조로 고통받고 소외받은 사람들이다.

③ 방법 :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접근방법은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과 요구가 다양하기에 다양성있는 방법을 존중한다. 긴급구호, 사회봉사적 복지적 접근, 개발을 통한 개선적 접근, 운동을 통한 개혁적 방법을 다 함께 인정한다. 그러나 중효한 점은 가난의 원인제거에 대한 접근방법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제 원칙은 이미 교회가 수백년동안 쌓아온 전통적 체험 위에서 근대에 들어와 제시되고 있는 교회의 가르침, 사회과학적 접근방법 및 새로운 형태로 근래에 제시되고 있는 방법들을 포괄적으로 포함한다.

④ 실천적 적용 : 이러한 방법의 실천적 적용은 현대세계와 현 한국실정 및 현 교회체제를 고려하여 우선적으로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자각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웃사랑 실천에 기본을 둔 교회공동체의 사회의식계발과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투신을 긴급한 과제로 삼는다. 아울러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는 제반 구호활동, 자선활동, 복지사업, 개발활동, 사회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단체·기관·공동체들을 활성화시키고, 격려하며, 조화시키고 조정하며 지원하는 접근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실천적 적용이 효과적이기 위하여 교계제도상의 조직과 제도속에서도 특히 교구의 자율적 수행과 대사회적 활동에 종사하는 교회 공식 기구와 단체들의 자율성을 권장하고 존중한다.

4. 활동내용 : 교계제도 속에서 활동하기에 당연히 인성회 교구위원회의 설립과 활성화 및 적극적인 활동을 필요로 한다. 특히 교구 산하의 제반 사회적 사업과 활동이 사목적 성격으로 통합되고 조정되어 교구장을 머리로 교구 상황과 여건 및 능력에 맞는 활동이 전개되어 지역 속에서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는 모습을 드러내며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도구가 되도록 한다. 교회 내의 수많은 사회적 사업과 활동을 하는 기구나 단체 또는 기관들의 상호 유기적 연결과 협조, 공동목표의 설정과 자원의 공정한 배분 등은 효과적인 사회사업과 활동의 요체가 된다. 이를 위하여 분야별 직종별 기존 사업과 활동들을 협의체적으로 모이게 하고 특히 편중된 분야에는 적절한 권고를 하여 낙후된 분야에는 적극적 참여를 권장하고 전연 손대지 못하는 분야에는 적극적 참여를 권장하고 유도하며 지원하는 활동을 한다.

가장 중요하고도 심혈을 기울이는 활동은 '사순절 운동'이다. 이는 전세계 교회가 사순절기간 동안 벌이는 신자 신앙쇄신교육과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의 운동이다. 전통적 사순적 개념인 회개와 보속을 새롭게 환기시키며 이를 현대적으로 의미를 부여시키고 실천하도록 권고하는 단식재, 사순절운동의 본질인 이웃사랑 실천,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의식 및 사회의식을 강조하는 교육 및 피정, 공동체적 나눔의 표현인 공동헌금이 사순절운동의 요체이다. 교체 또는 특정한 이들의 전문적인 전유물로 인식되어 왔기에 일반신자들의 참여가 유도되지 못하였으며 항상 외국에 의존하는 형태였기에 사순절운동은 신자의식 계발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인성회 교구 위원회의 활성화 및 사회사목 기관단체들의 효과적인 조정을 위하여는 종사자들에 대한 교육과 연수가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전국차원에서 개최되는 전국세미나는 교구 및 사회사목 기관 단체에서 참여하는 중요한 훈련이다. 아울러 특정한 주제로 열리는 연수회도 관심있는 종사자들을 훈련시키는 중요한 기회이다. 사회사목에 필요한 제반정보와 자료의 발간은 중요한 업무이며, 각종 사회 사업이나 활동 단체들에 대한 전문적 서비스도 중요한 일이다. 국제적 협력은 전국위원회 사무국이 주로 담당한다.

1975. 6. 25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인성회 발족 (9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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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애 놀이방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 1998. 5. 2일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1996년 6월에 개최된 제1차 총회에서 빈민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한 집을 마련하자는 결정에 따라 1997년 11월 3일 수원시 정자동 동신2차 아파트 201동 206호에 '인애 놀이방'을 개설하였다. 대상자는 영세민, 결손가정의 어린이들로서 만3세부터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어린이들이다. 현재 10명의 어린이들이 오전9시에 와서 공부와 놀이 등을 하고 점심식사 후에는 3시까지 낮잠을 잔 후 보호자들이 데리러오는 시간까지 수녀2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간식이나 점심식사 준비는 각 본당의 신자들이 교대로 봉사해 주고있다. 장소가 넓지 않아 제한된 인원만 받을 수 있고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좁지만 그들 가정에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감사하면서 노력하고 있다.

1997. 11. 3 인애 놀이방 개설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소재지 : 우 440-300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 동신2차 아파트 210동 2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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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병원 麟蹄病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4쪽)

강원도의 벽지 주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기 위해 인제병원을 설립한 아산재단은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를 더욱 헌신적으로 할 수 있는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78년 12월 2일에 서정향 쟌 젬마 수녀, 노연신 안당 수녀, 김영신 데오필 수녀 그리고 홍혜경 마리엣다 수녀가 파견되었다. 그후 간호, 보급과, 검사실, 약국, 원목 등 여러 부서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또 틈나는 대로 인제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는 등 10년 가까이 봉사해 오다가 급격한 환자의 감소로 인한 재단측의 재정적 곤란 및 수녀 인력의 불필요함 등을 감안한 결과 아산재단과 합의하여 1987년 1월 31일자로 인재병원에서 철수하였다.

1978. 12. 2 인제병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4쪽)

1987. 1. 31 인제병원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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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의 집 (가톨릭사회복지회보, 창간호 53쪽) - 1993 여름 발행

경기도 양주에 장애아를 둔 18명의 어머니들이 13년간 저축하여 24명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인지의 집은 단지 자기 아이들만이 아니라 장래에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아이들까지 이용하도록 한다. 어머니들은 사회복지회에 위탁관리를 요청했고 사회복지회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 연결하여 이 시설의 관리 운영을 담당하게 된다.

1993. 5. 27 인지의 집 개원 (가톨릭사회복지회보, 창간호 53쪽) - 1993 여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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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가톨릭 농아 선교회 - 1998. 7. 9일 인천 가톨릭 농아 선교회의 답신에 의거

농아인의 선교수화 교육을 통한 수화 보급을 위해서 1988년 7월 10일 답동성당의 이춘근 시몬스톡 수녀님에 의해 설립되었다. 현재는 봉사자 20명과 농아인 10명, 지도수녀, 지도신부와 함께하고 있다.

당시는 인천지역 농아들의 전교가 필요했기에 설립되었다.

1988. 7. 10 인천 답동성당에 인천 가톨릭 농아 선교회 설립

소재지 : 우 400-090 인천시 중구 답동 3 가톨릭 회관 111호/ 전화 032)765-4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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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 우리집 Group Home - 1998. 7. 14일 일신 우리집의 답신에 의거

농촌지역 사회에 거주할 곳이 없는 저소득층 결손가정의 자녀들을 일시보호 또는 자립할때까지 건전하게 육성하며 함께 사는 사랑과 지혜를 나누는 동시에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경기도 여주에 1993년 9월 1일 설립되었다. 본 시설의 당초 계획은 가스나 본드를 흡입하는 청소년들을 돕는 시설로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동네사람들의 반발로 어린이집을 설치하게 되었다.

현재 대지 500평, 건평 49평에서 12명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1993. 9. 1 일신 우리집 (Group Home) 설립

소재지 : 우 469-880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신혜리 일신동 302-15/ 전화 0337)84-7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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