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명부9(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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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 진료소 / 작은자매전교회 / 작은 프란치스꼬의 집 /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잠실 어린이 도서관 / 장미유치원 / 장애자 종합 복지관 / 장호원본당 / 재령 성심의원 / 전·진·상 가정복지센타 / 정남규 / 제기동 성모의원 / 제물포 고아원 / 제물포 시약소 / 제천종합사회복지관 / 종현 고아원 / 중계마을 복지회관 / 중앙본당 / 쥴리 학원 / 증평본당 / 지산자활원 / 진광중고등학교 / 진남포본당 / 진영본당

자선 진료소 (교회와 역사 271호 12쪽) - 1997. 12. 25발행

1967년 11월 1일 성 빈센트 병원 내에 개설된 자선 진료소는 전 의료진의 지원과 협조로 성 빈센트 병원의 진료 과목과 동일하게 운영되었다. 제한된 진료 시설에 비해 무료 진료를 희망하는 환자수는 급증하고 있어 부득이 대상자를 선별해서 진료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던 중 1977년 의료 보험 제도의 도입으로 1978년 11월에 자선 진료제도는 폐지되었다. 그 대신 타병원에서 진료를 꺼리는 의료 보호 환자에 대한 진료를 확대하는 한편, 생활이 어려우면서도 의료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감면해 주는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 1967년 11월 부터 1978년 11월 까지의 자선 진료 실적은 연인원 외래환자 58,717명에 입원 환자가 52,700명에 이르렀으며, 1978년 11월 부터 1991년 말까지의 의료보호 환자의 진료 실적은 연인원 외래 환자 54,497명에 입원환자는 106,371명에 달하였다.

1967. 11. 1 성 빈센트 병원 내에 자선 진료소 개설 (교회와 역사 271호 12쪽) - 1997. 12. 25발행

1978. 11 자선 진료소 폐지 (교회와 역사 271호 12쪽) - 1997. 12.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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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자매전교회 (영) Little Missionary Sist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993쪽)

1951년 10월 이탈리아의 쿠네오(Cuneo) 에서 가스파리노(Gasparino) 신부가 창설한 수도회. 1963년에 한국진출.예수의 생활과 같이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는 형제, 자매들의 선교단체이다. 현재 한국에는 작은 자매전교 수녀회만 진출하였는데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회 신부의 추천으로 이탈리아 모원 소속인 4명의 수녀가 1965년 부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67. 8. 전라북도 고창에 나환자촌인 동혜원을 설립 (993쪽 작은자매전교회)

1976. 마산에 국립결핵병원을 설립 (993쪽 작은자매전교회)

1980. 서울 봉천동에 가마니촌을 설립 (993쪽 작은자매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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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프란치스꼬의 집 (나눔지 140호 2쪽) - 1987. 3. 14발행

차가운 길모퉁이에 버려진 형제, 자매들을 위한 집이 개설되었다. 불구의 몸을 이끌고 자신보다 더 고통받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자신을 산 제물로 주님께 봉헌하고자 우총평(프란치스꼬) 형제에의해 설립된 작은 프란치스꼬의 집은 현재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기력조차 없는 15명의 형제, 자매에게 구원의 안식처가 되고있다.

1987. 2. 16. 작은 프란치스꼬의 집 개설 (나눔지 140호 2쪽) - 1987. 3. 14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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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라) Ordo Fratrum Minorum (영) Franciscan Order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20쪽)

1223년 9월 27일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에 의하여 창설된 최초의 탁발 수도회.

프란치스코는 1182년 이탈리아의 부유한 집에 태어나 귀족적인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어느날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무너져 가는 주님의 성전을 고쳐라."는 계시를 받고, 모든 재산을 버린 뒤 거룩한 복음에 따라 1206년 부터 기도와 보속의 회개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회의 정신은 복음을 완전무결하게 생활화하는데 있다. 즉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께서 성인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하느님께 반대되는 모든 이기적인 경향, '육의정신'을 버리고 주님의 정신대로 사는 것이 형제들의 이상인 것이다. '작은 형제'란 주님의 정신에서 흘러나온 성인의 독특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피조물과 형제적인 일치가 될 수 있는 가난과 겸손의 뿌리이다.

한국진출 : 프란치스코회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37년 9월 캐나다 성 요셉관구의 드콰이어 (J. Dequire, 요한)과 벨레로즈(M. Bellerose)신부가 부산에 도착한 뒤부터이다. 이들은 대전에 수도원을 건립하기로 작정하고 9월 30일부터 대전에서 거주하였다. 1938년 8월 피에르(Pierre) 신부가 입국하여 가족은 3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1938년 12월 15일 대전 목동(牧洞)에 수도회를 건립하여 '천사의 모후 성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소위 태평양 전쟁이 발발되자 일제는 죄 없는 서교사들까지 적으로 몰아 모진 감금생활을 겪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옥고에서 풀려났으나, 휴유증으로 한 회원은 끝내 병사하고 말았다.

1947년에 한국인 안선호(安仙鎬, 베다) 신부가 캐나다 유학길에 오르고, 남은 신부들도 각기 수련을 위해 출국하였다가 1950년 6월에 다시 입국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수도원 건물은 공산군에게 점령당하고, 유엔군이 수복한 뒤로는 피난민 자녀들을 위한 교육장으로 쓰인 것이, 현재 대성(大成)중·고등학교로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 6월 17일 진주에 있던 콘스탄치오 신부가 옥봉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천, 의령등 하동 지방에 두루 복음을 전파하였다. 1959년에는 4명의 이탈리아 회원들이 삼천포(三川浦)에도 본당을 신설하여 남해(南海)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6월에는 경남 산청면 내리(內里)에 2만 8,000여명의 대지를 마련하여 성심원(聖心院)이란 나환자 자활촌을 만들었다. 한편 대전에서는 공 안드레아 신부가 1959년 1월 목동본당의 주임신부로, 그리고 4월에는 벨레로즈 신부가 노기남 주교의 명으로 서울교구의 본당을 맡았다. 1960년 진주지방에서 콘스탄치오 형제에 의하여 병실 39동과 대수술실을 갖춘 나환자들을 위한 성심 인해병원이 개설되었다. 전국에서 나환자들이 모여들어 수일간에 200여명의 환자를 수용하였다. 이 해에 사천에도 본당을 신설하였다. 대전 수도원에서는 1961년에 첫 단순서원식이 있었다. 한편 성심원의 원장 정 시온 신부는 나환자를 위한 자활부락 건설에 착안하여 현대식 주택 개량에 힘써 1964년까지 가옥 82동을 건립하고 농토를 마련하는 한편, 정미소, 축사, 목공소, 매점, 창고, 보육원, 세탁소, 이발소, 미장원까지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추게 하였다.

이렇듯 눈부신 발전으로 1963년 12월 10일에는 로마본부로부터 일본과 한국 프란치스코회 총장대리로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李) 신부가 임명되어 한국에 부임, 한국본부 설치를 서둘렀다. 장소를 물색한 결과 수림으로 둘러싸인 작은 언덕 위에 수도원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1965년 9월 8일에 낙성된 지금의 프란치스코회 본부 정동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명도원이란 이름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의 언어교육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 학원이 개설되었다. 현재 이회가 맡고 있는 직접 선교의 본당은 8개(1개 준본당 포함)본당이다. 이곳에서 9명의 성직자와 6명의 평신도 형제들이 일하고 있다. 과거 이 회에서는 16개의 본당을 관할한 적도 있었으나 8개의 본당을 교구에 이양하였다. 이것은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이 직접 선교도 중요하지만, 가난하고 겸손하긴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뜻을 따라 사회에 평화를 심고, 사회사업과 특수사목에 치중하는 신앙에서 온 결과였다.

한편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는 각자 소속본당에서, 그리고 신심단체에서 핵심메머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단체라기 보다 개인적 수덕에 전념하는 조용한 단체라는 인상을 주고 있으나, 이들이 수도생활을 통해 체험한 영성생활을 교회안에서 실천함으로써 사도직 활동에 좋은 표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선활동으로 교회사업을 비롯하여 성소후원회, 군종후원회, 교도소후원회, 은퇴사제후원회, 구라회, 불우 이웃돕기 등에 대부분의 형제회가 단체 혹은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운영하고 있는 소년원, 양로원, 나환자촌, 신학원 등의 방대한 사업을 돕고 있다.

1959. 6 프란치스코회는 경남 산청면 내리에 나환자 자활촌인 성심원을 건립 (1220쪽 프란치스코회)

1960. 프란치스코회는 진주에 나환자를 위한 성심 인해병원을 설립 (1220쪽 프란치스코회)

1971. 7. 프란치스코회는 성북동에 평화의 모후 신학원을 설립 (1220쪽 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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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어린이 도서관 (나눔지 9호 4쪽) - 1979. 2. 15발행

채규철, 유정희씨 부부가 개인으로선 우리나라 최초로 어린이 도서관을 강남구 잠실4동 시영아파트에 개관한 것을 1977년 12월 17일 이었다. 장소가 협소하긴 하지만(13평) 천여권의 책을 구비하고 있다. 또 [잠실어린이 신문]을 무료로 발간하여 어린이들의 글짓기 습관을 키워주고 회원어머니들까지 독서회를 갖는등 화목한 동네분위를 만드는 센터역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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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유치원 薔薇幼稚園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4쪽)

1971년에 군인가족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김계춘(金啓春 도미니코) 신부의 초청으로 송제세 레지나 수녀가 본원에서 출퇴근하면서 서울 이태원에 있던 군인아파트 내의 신자들에게 교리를 1주일에 1번씩 가르쳤고 1971년 6월 5일부터 임계신 스테파노 수녀가 역시 본원에서 출퇴근하며 유치원을 담당하였고 1972년부터는 아파트 내 자모들을 위한 교리를 1주일에 3일간 하면서 성모회를 창립하여 전교에 힘을 쏟았다.

장미 유치원은 군인가족의 자녀들을 위해 시작되었다. 군인가족은 자주 거주지를 이동하게 되므로 어린의 교육이 소홀하게 되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한 문제점을 안게 되며 가족의 신앙교육도 어려운 점이 많아 1971년에 당시 군종의 김계춘 신부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유치원 설립준비를 하였다. 곧이어 이소동 장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71년 봄에 유치원을 짓고〔장미유치원〕이라 칭하였다. 이외에도 비품 등 설비를 위해 소종철 참모총장은 피아노와 집기류 등을 기증하고 원호담당관과 장교회에서도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1년 6월 5일부터 임계신 수녀가 출퇴근하며 유치원 교육을 담당하였고 6월 22일 2학급 운영 승인 인가를 받아 2학기부터 군인자녀들을 입학시켜 39명의 첫 해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어 1971년 9월 2일에는 건물 낙성식과 개원식을 정식으로 갖고 관리권을 수녀원에 위임한다는 계약을 문서화하였다. 군인자녀가 80%를 차지하는 장미유치원은 원생들이 자주 이동되는 특수성 때문에 학기 초에 정원을 초과하여 입학시킨다. 연령별 학급편성과 교사의 증원이 요청되었으나 교육비를 인상할 수 없고 입원대상 아동이 지역상 한정되어 있으며 이동이 잦은 관계로 실시치 못하던 중 1989년 군인아파트가 대전으로 이전함과 더불어 유치원과 아파트 사목을 위해 파견된 수녀들은 1988년 12월에 귀원하였다.

1971. 장미유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4쪽)

1989. 12 장미유치원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0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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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자 종합 복지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372쪽)

서울 특별시는 1981년 12월 1일 강동구 명일동 5번지 5,000평의 부지 위에 장애자를 위한 종합 복지관을 설립하고 1982년 7월 완공 단계에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 운영을 위탁해 왔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는 장애자를 위한 특수 사도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1982년 8월 24일자로 곽요안나 수녀, 염보나벤뚜라 수녀, 윤알마 수녀, 신마리데레사 수녀를 파견하여 동년 11월 1일자로 정니꼴라오 수녀를 추가 파견하여 12월 17일 개관하였다.

장애자 복지관은 장애자의 재활을 목적으로 운영되며 교육 내용은 상담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적응 훈련과 도자기, 수예, 목공예의 기술 습득, 물리 치료를 통한 신체 기능 회복을 원칙으로 하며 대상은 지체, 정박, 언어, 청각 장애자들이고 일일 수용능력은 120명 내외다.

시설을 살펴보면 상담실, 물리 치료실, 작업 훈련실, 오락실, 기도실 등 다양한 설비를 갖추고 있다. 수녀들은 전체 운영과 진료 및 상담 교육을 통해 사회 복음화를 목적으로 일하고 있다.

1982. 12. 17 장애자 종합 복지관 개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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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원본당 長湖院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855쪽)

장호원본당의 초대 신부였던 부이용(Camille Bouillon, 1869-1947) 신부는 한때 민비가 피신해 있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이 의병과 일본인들과의 격전으로 거의 불타 버리자 남은 집을 헐값에 매입, 1896년 12월 5일에 한국식 건물로 임시성당을 지었는데 당시 교우수는 5∼6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년후인 1897년에는 46명의 영세자와 관할 공소가 27개나 되는 본당으로 커지자 1903년 새 성당을 신축했고 1907년부터는 소규모로 학교를 설립하여 남학생들을 모집했고 곧이어 여학생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여학교 설립에 따른 교사의 필요성과 사목보조자로서의 필요성을 절감한 부이용 신부는 오래 전부터 수녀 파견을 요청한 결과 1912년 10월 3일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이 안나 수녀와 전(?) 수녀가 파견되었다.

수녀들은 본당과 학교의 소임을 겸하여 열심히 활동하였다. 1914년 성체성혈대축일에 지방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체거동을 하면서 수녀들은 소녀 복사단을 만들어 흰옷에 푸른색 띠를 두르게 하고 꽃을 뿌리게 했는데 그때의 모든 행사 절차가 지금까지도 그대로 존속되어 오고 있으며, 그때 당시의 성가대도 수녀가 지도하였다.

이처럼 본당과 학교에서 수녀들은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으나 본당에서 도저히 수녀들의 생활비를 지출할 수 없게 되자 1932년 8월에 철수하였다. 그러다가 1944년 6월 20일 당시 대동아 전쟁의 막바지에 외국인 사제들이 모두 감금당하자 한국인 유영근(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일본인들이 강탈하려는 사제관을 지키는 한편 수녀들의 손이 필요한 곳이 많음을 보고 다시 초청하였다.

지금까지 77년에 걸쳐 모두 80명의 수녀들이 거쳐간 이곳 장호원본당은 현재 교장수녀를 포함하여 학교수녀 6명, 본당수녀 2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본당수녀들은 학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청년지도, 예비자교리와 가정방문 등 전교에 힘쓰고 있다. 그런데, 행정구역상 장호원이 경기도와 충청북도로 나뉘어져 경기도에서는 장호원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지니게 되었고 충청북도에서는 음성군 감곡면이 되어 현재는 감곡본당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1907. 장호원 본당내 소규모 학교를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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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 성심의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338, 983쪽)

재령본당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1891-1943)신부는 의료사업을 통한 사랑의 실천과 전교에 뜻을 두고 문창리 관문거리에 있는 삼성의원을 인수하여 설비를 새로 갖추고 1940년 9월 1일 성심의원으로 개원하였다. 그리고 이 병원의 운영을 위해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요청하여 3명의 수녀가 재령본당에 파견되었다.

이 성심의원은 내과와 소아과 7개의 병실을 갖추었고 정식 의사가 2명에 간호사로 구성되어 손색없는 병원으로 날로 번창하였다. 한편 전 데오도리나 수녀는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일제 말엽에 시작한 병원이었으나 교회의 병원이라서인지 일본의 방해나 간섭은 없었고 오히려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수녀들은 구호대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구호하고 치료하는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당의 박해가 시작되자 병원을 처분하고 수녀들은 본원으로 돌아갔고 책임자인 이 아뽈리나 수녀만이 재령에 남아 진료를 계속하였다. 3·8선으로 인해 서울에서 수녀들을 파견할 수가 없어 몇 개월 후에 장연분원의 박막례 알릭스 수녀와 매화동분원의 박백상 수녀가 재령으로 와서 합류하였으나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1974년 7월 10일 해주본당의 김철규(바르나바) 신부의 주선으로 모두 월남하였다.

1940. 9. 1 재령 성심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338, 983쪽)

1947. 7. 10 재령 성심의원 철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338, 9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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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상 가정복지센타 (나눔지 2호 2쪽) - 1976. 11. 22발행

전·진·상 가정복지센타는 국제 가톨릭 여자 협조회의 근본정신인 全(온전한 희생), 眞(진실한 사랑), 常(항상 기쁨) 을 생활속에 실천하기 위해 마련된 AFI 회원들의 단체이다.

이 센타는 영등포구 시흥4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센타는 이 지역의 빈곤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진료사업과 기타지역 사회의 정신적 물질적인 문제를 함께 발견하고 걱정하고 해결해 나가는데 도움을 주며 복음의 정신을 생활화 하고 증거하고 있다. 이 센타를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최소희(약사), 유송자 데레사(사회사업가), 미리헬렌(간호원), 임성균(보조약사) 등이다. 이들은 1975년 사회사업을위한 자금보조책과 지역주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있는 사랑방의 역활을 하기 위해 그 첫 사업으로 약국을 개업했다. 그리고 제2차로 차수한 것이 진료소였다. 1975년 10월 18일 문을 연 이 진료소는 처음에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환자를 받았다. 몇 시내 병원에서 의사들이 무료로 진찰하고 처방을 해주다가 매주일마다 여러차례 진료를 해주고 있으며 약국에서는 환자들이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A급 30%, B급 45%, C급 60%, D급 70%로 할인하여 약을 조제해 주고있다. 그리고 진료부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는 한강 성심자선병원, 흑석동 성모병원, 성 프란치스코병원, 빈센트 병원 등에 치료를 의뢰한다. 진료소에는 언제나 상주하고 있는 간호원은 간단한 치료를 해주고 있으며 필요시에는 가정을 방문하여 치료해주고 있다. 약국에서는 약사 최소희씨와 보조약사 임덕균(교리교사를 겸함)씨가 상주하여 약국을 찾아오는 손님을 통해 지역사회의 실태파악과 유대의 강화를 꾀하고 있다. 그들은 주민들의 위생교육을 실시하며 진료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적절한 환자를 의뢰하고 있다.

그리고 센타에서는 사회사업가 유송자양이 가정방문과 냉담자를 대상으로 상담을 실시하여 문제를 파악하고 구분하여 처리하고있다. 파악된 문제별로 필요한 도움을 주며 센타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기관에 의뢰해주고 있다. 특히 가정방문이나 상담을 통해 파악된 아동중 경제적인 문제로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경우나 질병의 치료가 힘든 경우에는 벨지움의 뜻있는 사람들과 연관을 맺어주어 도움을 받게도 하고있다. 가난한 이웃속에 파고들어 치료와 투약의 혜택을 줄 뿐만 아니라 선교면에서도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는 전·진·상 복지센타는 주민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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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규 鄭南奎 (교회와 역사 205호 16쪽) - 1992. 6. 25발행

정남규는 1886년 5월 14일에 서울 玉洞(現 종로구 玉仁洞)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한일합방 후 義城郡守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경성의 재무주임으로 있던 어느날 정남규는 뭬텔 주교로부터 관리 생활을 그만두고 교회일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에 그는 20년간의 일본 관리 생활을 청산하고 1923년 종현성당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財團설정을 위한 전국 각 교회의 조사를 시작하였다. 뭬털 주교가 경성교구를 재단으로 설립하고자 한 것은 경성교구의 교회 재산 대부분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소송이 불가능해 일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구교구의 교구장이었던 드망즈 주교는 뭬텔 주교와 생각이 달랐다. 대구교구의 교회재산은 새 법률에 따라 문서들이 작성되어 있었고 소유권도 외국인의 명의로 되어 있을 때 더욱 안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대구교구의 재단법인 설립은 그만큼 늦어졌다(1938년 6월 18일 '대구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으로 설립). 경성교구는 1924년 10월 27일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으로 설립되었다. 교회 재산의 정리를 마친 후, 정남규는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양로사업은 블랑 주교의 제안으로 1885년 7월 2일 종로구 똥골에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시작되었는데 1893년 재정난으로 중단되었다. 정남규는 1924년 4월에 사고무친한 예순살 이상의 노인을 종현성당에 수용하여 보살피기 시작하였다. 그가 양로원을 시작하게 된 것은 불쌍한 노인들을 돌보고자 한 자선심에 비롯하였지만 3·1운동 후 천주교회에서도 사회적, 시대적 요청에 부흥하여 신자들에게 자선을 위한 조직을 강력히 권고하던 분위기에서 다분히 기인하였다.

1926년 11월 20일 정남규는 黃金(現 을지로 1가)에 19間 짜리집을 매수하여 무의탁 병자노인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양로원이란 이름도 붙이지 않고 그대로 몇 사람의 노인을 거두기 시작하였는데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사이에 양로원이 생겨 자기네의 여생을 맡길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하루에도 두어 사람씩 찾아와서 애원하였다. 이에 적은 방과 경비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기에 교회 측과 다시 절충하여 라리보 주교로부터 3,554원을 차용하고 약간의 私財까지 더하여 1930년 3월 23일 하왕십리 955번지에 가옥 25間을 매수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십여명의 노인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처음에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양로원에 수용되어 있는 노인들이 모두 육십 세 이상이라 일년에도 몇명씩 사망하였다. 일정한 묘지가 있는 것도, 장례 비용같은 것도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할 수 없이 공동묘지에 매장하였고 그 불편이 너무 심하여 사망한 노인들을 모시고자 山 하나를 구입하였다.

1936년 하왕십리의 집이 헐고 좁아 교회측과 다시 절충하여 의논한 결과 뚝섬 골프장 동쪽 솔밭 언덕 1,660평을 매수하여 건물 1동을 신축하여 양로원을 이전하였다. 당시 수용 노인수는 65세 이상의 할머니 24명으로 두 사람은 90세 이상이었다. 노인들에게 병이 나면 성모병원의 의사들이 돌보아 주었다.

정남규 회장이 시작한 양로원에 처음으로 무의탁 노인을 수용한 것은 1925년 12월 1일이었고 첫 수용자는 81세 된 할머니였다. 양로원은 처음에 교회 유지들에게서 애긍전을 받은 것으로 시작되었으나 시일에 감에 따라 열이 식어 끝내는 정 회장의 개인 사업이 되다시피 하였다. 정남규와 경성측후소에 근무하던 아들 정태준, 소학교 교원이던 자부와 딸 은준이 양로원을 이끌어 갔다. 1950년 6월 까지 연 수용인원은 267명이었고 생존자는 27명이었다.

정남규 회장이 피납된 후 양로 사업은 원사가 파괴되어 중단되었다가 1951년 9·28수복 후 윤을수 신부가 재활을 위임받아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성당으로 원사를 이전하였다. 그 후 1958년 4월 1일 '재단법인 천주교 유지재단'에서 서울 성가수녀회로 이관되어 부천시 소사읍 조종리 188번지로 원사가 이전되었고 '성가 양로원'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90년 6월 5일 부천시 남구 소사동에 연건평 1,312.09평의 원사가 신축되었는데 수용인원은 10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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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동 성모의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9쪽)

1944년, 제기동본당에 수녀원 분원이 생겼고 1946년에 회사받은 돈으로 집 한채를 사서 그 방 하나에 진료실을 꾸미고 진료하기 시작하였가. 그러다가 1947년, 미군의 원조와 본원의 도움으로 병원을 건립하여 성모병원 제기동 진료소라 이름하고 여의사 이혜춘을 채용하여 정식으로 진료업무를 하게 된 것이 성모의원의 시작이다. 이 진료소는 거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손으로 지어진 병원으로 규모는 작았지만 가난한 지역사회 주민들을 위한 사도직의 터전이었기에 자랑스러웠다. 방 5개로 이루어진 진료소와 수녀들이 거처하는 2개의 방, 그리고 조그만 부엌과 마루 등의 구조를 가진 작은 병원이었지만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며 발전해 나가던 중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의사가 피랍되고 많이 파괴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9·28 수복 후 병원수리를 하고 홍순자 아드리아나 수녀를 중심으로 다시 진료를 시작하지 병원이 없어 헤매던 사람들이 줄지어 모이기 시작했다. 홍연봉 다니엘라 수녀, 조복순 엘리아 수녀가 간호 수녀였고 한 푼이라도 싸게 약을 구입하기 위해 황수자 베네딕다 수녀는 남대문까지 걸어다니며 약을 사오기도 했으며 손수건에 민속 그림을 그려 미군들에게 판매하여 조금씩 모은 돈으로 병원을 확장시키려 노력했다.

이 병원은 성바오로병원이 생기기 전까지는 유일한 수녀원 직영병원이었기 때문에 20여년 동안 수녀들의 치료와 휴양에 큰 도움을 주었고 한때 본원이 경제적으로 곤란했을 때에는 큰 힘이 되었다. 점차로 환자가 늘어나 입원실이 부족하게 되고 교통도 불편하여 병원 확장이 불가피하게 되자 당시 내한한 르네 총장수녀의 도움으로 청량리에 대지 400평을 확보하고 약과 물건을 2 : 1의 비율로 나누어 1957년 12월 8일 성바오로의원이 분가하였다. 가난한 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가난하게 시작하여 보람있게 일하면서 진료 이외에도 양주군, 고양군 등 교외지역에 사는 환자들 방문과 교리반 봉사 등 전교에도 힘을 냵던 제기동성모의원은 이후 원주에 성 바오로 병원 분원이 세워지자 1969년 7월 1일로 폐원하고 원주로 이전되었다.

1947. 성모병원 제기동 진료소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9쪽)

1969. 7. 1 제기동 성모의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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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고아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64쪽)

1894년 8월 18일 제물포에 수녀원이 세워지고 수녀들이 부임하게 되자 고아들을 보호하는 사도직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물포의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과 환자들을 보살피던 중 그해 가을에 길에 버려져 있던 네 살인 교우 여아와 12세된 여자 어린이를 수녀원에서 양육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제물포 고아원의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1894년 중에 이미 8명의 고아가 수녀원에서 보호받고 있었고 그후 1895년에 이르러서는 원아의 숫자가 15명에 이르게 되었다.

제물포 고아원은 1896년 8월 15일 별도의 건물을 낙성했다. 이 건물은 건평이 120평에 이르렀고 건물의 건축공사는 제물포 본당의 마라발 신부가 지휘 감독했다. 이 건물은 원아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활용되었으나 곧 수용의 한계에 부딪혀 1909년에는 다시 새로운 건물을 지어야 했다. 제물포 고아원도 남아와 여아들이 모두 수용되어 있었다. 또한 영아들을 위한 영아원도 별도로 운영되고 있었다.

1894. 8. 18 제물포에 수녀원 설립되고 고아들이 수녀원에서 보호받음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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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시약소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86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일반 환자를 위한 의료 사도직 분야에 직접 투신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여름 부터였다. 이때 제물포에 진출한 수녀들은 수녀원 건물의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에 입주하였고 시약소를 설치하여 무료진료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약소에는 많은 환자들이 찾아왔다. 1897년 8월 이후 1898년 4월 까지 8개월 동안에 제물포 시약소에는 모두 2,623명의 외래환자를 받아들여 진료했고, 275명의 환자를 직접 방문해서 치료해 주었다. 이는 이 기간동안 시약소에서 월평균 327,88명의 환자를 받아들여 진료했고 또 34.88명의 환자들을 직접 방문해서 치료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는 휴일을 포함해서 매일 평균 11명 정도의 외래환자를 진료했고 한 곳 이상의 가정을 수녀들이 직접 방문해서 치료했음을 뜻한다. 이때 제물포 시약소에는 보통 2명의 수녀가 봉사하고 있었고, 이들은 각기 오전·오후로 시간을 분담해서 진료와 시약을 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제한된 봉사인원을 가지고서는 외래환자를 받는 일과 방문진료를 다함께 진행시키기가 어려웠다.

무료 시약소는 질병의 치료와 더불어 선교를 목적으로 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약소에서는 외래환자와 왕진환자의 숫자를 집계함과 함께 의료 사도직의 실천과정에서 베푼 임종대세자의 숫자도 파악하고 있었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환자를 왕진하면서 그들의 영혼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고, 죽을 위험이 있는 환자들에게 대세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대세를 받은 환자가 살아날 경우에는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인근의 신도들과 연락을 취하여 주었다.

이시기에 있어서 의료사도직 분야는 환자를 위해서는 치유와 구원을, 교회를 위해서는 선교의 성과를, 수녀회 자신을 위해서는 소명의 확인을 가능케 해주는 일이었다. 이 당시의 의료사업은 그 규모나 시설면에 있어서 그리고 의료행위의 수준에 있어서는 결코 완벽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교회에서 운영하는 본격적인 의료기관의 출현을 촉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894. 제물포 수녀원이 설립되고 수녀들은 시약소를 설치하여 무료진료 활동을 시작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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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종합사회복지관 (사랑의 씨튼 수녀회) - 1998. 6. 15일 제천종합사회복지관의 답신에 의거

지역 사회의 복지증진과 연대를 위한 매체로서 아동, 청소년, 노인 장애인, 주부 등 주민들을 대상으로 각종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며, 나눔을 통하여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를 이루고자 1994년 12월 7일 설립되었다.

충북 제천시 하소동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설립되어있는 이 복지관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의 말씀을 근본 이념으로 삼고 있다.

1994. 12. 7 제천종합사회복지관 설립 (사랑의 씨튼 수녀회)

1996. 1 제천종합사회복지관부설 재가복지봉사센터 인가 (사랑의 씨튼 수녀회)

소재지 : 우 390-240 충북 제천시 하소동 345/ 전화 0443)44-29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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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현 고아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60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조선에 진출한 직후 고아원의 운영과정에서 드러난 일부 난관을 극복하면서 수녀원의 전체 구성원이 고아를 위한 봉사에 투신하고 있었다.

1903년 종현의 고아원에서는 32명의 수녀들이 이소사(李召史)등 여직원 11명 및 남직원 3명과 함께 고아들을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고아원에서는 길에 버려진 아이들을 수용하기도 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고아원에서 원아를 받아들인 규정은 아마도 성영회의 규정을 원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영회에서는 남아의 경우 6세 이하, 여아는 8세 이하는 맡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었으며, 두 돌이 차지못한 아이를 유모가 없을 경우에는 받지 말아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아동을 받아들일 때에는 친권을 포기하겠다는 부모의 각서를 받았다. 아동을 받아들일 때 부모의 친권을 포기하도록 했던 것은 원아의 양육에 대한 부모의 간섭으로 예상되는 폐단을 미리 막기 위해서였다. 이 고아원에서는 남아와 여아들이 별도로 나뉘어 보호되고 있었다. 고아들 중에는 정박아도 있었다. 종현 고아원의 원아들은 거의 200명 내외의 숫자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1888년 당시 원아들은 종현성당의 뒷쪽에 있던 변변치 않은 시설에 보호되고 있었다. 그 시설은 남녀 원아들이 각각 수용되어 있던 남당과 여당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남당은 지형적으로 낮은 곳에 있었고 20여개의 층계를 올라가면 수녀원 건물이 있었다. 또 수녀원에서 10개의 층계를 지나 올라가면 여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건물은 원아들의 숫자가 늘게 되자 수용의 한계에 부딪혀 새로운 건물을 신축해야 했다. 그리하여 새 건물을 세우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고 신축된 건물은 1890년 9월 8일 성모성탄 첨례날 축성되었다. 신축건물로는 원사와 평사가 각각 1동씩 있었다. 원사에는 7세 이상의 아동들을 수용하고 평가에는 유아와 영아들을 수용했다. 이 원사는 목조 2층으로 건평이 241평이나 되는 당시에는 상당히 큰 건물이었다.

종현 고아원은 초기부터 겨울철 난방에는 석탄난로를 쓰고 있었고 석탄 창고가 별도로 있었다. 그런데 1889년에 세운 원사의 건물만으로는 장소가 점차 비좁아졌다. 그리하여 1894년과 1895년에는 남아들을 여아들과 분리해서 수용하고자 하는 계획이 진행되어 나가기도 했다.

수녀원과 교구에서는 남자원들을 별도로 수용할 건물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남자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의 시설을 확충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난관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재정적인 부담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고아원에 인접한 건물 한 채를 구입하는 데에도 8,000냥(약 2,300달러)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현 고아원에서는 남자 원아들의 신규 수용을 중지했고, 수용되어 있던 남자들도 신도 가정에 위탁하여 양육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종현 고아원의 남자 원아수는 이렇게 감소되어 갔지만 여자 원아들의 신규 수용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자 원아들만으로도 기존의 공간이 부족하게 되자 1906년 늦은 봄에는 전에 석탄 창고가 있던 곳에 들어서 있던 한옥을 개축하고 넓혀서 여당에서 지내던 5-6세 부터 10세의 여아들을 돌보았다.

1888.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종현성당의 뒷쪽에 있던 시설에서 고아들을 보호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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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계마을 복지회관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지역내의 주민 특히 저소득층의 주민들을 위해 봉사함으로 균형있는 지역사회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1990년 10월 11일 노원구에서 설립하였다.

서울 특별시의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노원구에 설鱁립된 중계마을 복지회관은 저소득 밀집지역에 위치한 복지시설로써 여성의 직업사회 증가 및 맞벌이 가정이 늘고 있는 요즈음 주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적합한 환경에서의 아동 보호 사업이 필요하여 설립되었고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위탁운영하게 되었다. 한국순교복자 수녀히에서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이 사도직의 목적과 효과로써 저소득 지역 주민에게 자립기관을 형성하고 생활수준의 향상과 정신적으로 윤택한 삶으로 이끌어 기쁨과 고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평화와 사랑을 심어 이 지역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위탁운영하게 되었다. 대지가 274평이며 건물이 329평이다. 지하는 공동 작업장이며 1층은 어린이집, 할아버지방, 조리실, 사무실, 2층은 공부방, 마을회관 그리고 3층은 관리인실이다. 1990년 10월 11일 양기희(베네딕타) 수녀, 권우이(막달레나) 수녀, 이정자(마리아) 수녀, 이국희(데레사) 수녀, 나옥자(젬마) 수녀 5명이 파견되었다. 어린이집은 아동의 발달과정에 적합한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어 건전하고 조화로운 신체 발달과 성장을 하도록 해 주고 있다. 어린이집 원훈은 "슬기롭고, 착하게, 바르고 튼튼하게"이다.

공부방은 주거환경이 협소한 가정의 청소년들에게 학습의욕을 고취시키고 보다 건전한 활동을 하도록 생활공간 및 학습장을 제공하고 있으며 영어, 수학, 한문 등 특강시간을 마련해 주고 중학생 대상으로 주2회 영어공부를 시키고 있다. 공부방은 좌석이 114석이며 운영시간은 06:00 - 22:00이다.

노인정은 지역 노인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노인들과의 친목을 더해주며 건전한 생활과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노인정의 노인들을 위하여 한의학과 교수를 초방히여 건강 관리에 대한 교육도 실시하고 무료진료도 하고 있다. 노인들을 위하여 야유회도 하고 생활보호 대상자들에게 현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1998년 현재 수녀들이 어린이집과 노인정, 청소년 독서실,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의 건강을 위해 수녀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있다.

1990. 10. 11 중계마을 복지회관을 노원구에서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소재지 : 우 139-220 서울시 노원구 중계본동 19-47/ 전화 02)423-78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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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093쪽)

전주교구의 주보자 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1993년 12월 당시 교구장인 김양홍(스테파노) 신부가 여러 교우들의 청원에 의하여 전주 전동본당에 있는 한옥 사무실을 철거하고 그곳에 '비성거리'라는 공소를 신축하고 이후 1947년 까지는 공소시기로 있다가 그 해 비성거리 성당을 설립하여 초대 주임신부로 김재덕 신부가 부임하였다. 김신부는 장래 순교자기념본당을 세우려는 포부와 함께 전주시내에 전동본당 하나로써는 너무복잡하고 또한 비성거리의 성당이 너무 협소함으로 전주시 대동에 일산가옥 2층을 임차하여 '대동성당'을 개설하였다.

1952년 2월 1일 임대 사용 중이던 대지및 건물을 매입하여 구내에 성모당과 성모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인 중앙본당은 전북 전주시 서노송동 639의 40에 소재한다.

1952. 2. 1 성모유치원 설립 (1093쪽 중앙본당)

1975. 성모유치원 신축 개원 (1093쪽 중앙본당)

1977. 노인학교 개설 (1093쪽 중앙본당)

1978. 양로원 설치운영 (1093쪽 중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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쥴리 학원 (교회와 역사 226호 19쪽) - 1994. 3. 25 발행

쥴리 학원은 1948년부터 노틀담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안내양 교양 센타'를 시대의 요구에 따라 서울 시내의 방송 통신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공간으로 변경하면서 시작되었다. 방송 통신 고등학교는 3년에 걸쳐 방송을 통하여 공부하고 여름과 겨울 방학을 기해 적정의 수업을 받으며 시험을 통해 진급하고 졸업 시험에 통과 하면 문교부에서 인정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러나 방송만을 통한 공부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보충할 수 있도록 돕는 야학이 쥴리 학원의 설립 취지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보다 진취적인 사회 진출을 할 수 있도록 도우며 그들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므로 소속감과 대인 관계를 원할하게 하도록 돕기 위해 정규 수업뿐 아니라 연수회, 체육대회, 학년별 소풍 및 졸업 여행, 종교행사 등 정서적인 교육을 연중 계획으로 한다. 수업은 주 3일에 걸쳐 4, 50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으며 이들 모두는 낮에 공장이나 사무실 등지에서 일하고 하숙을 하거나 기숙사에 기거한다. 신자는 각 학년 1, 2명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에게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성탄절과 부활절을 기해 간단하게나마 복음을 저파할 수 있고 매 행사 때마다 시작과 끝을 종교 의식으로 하며 내용이 무엇인지 그들이 모를 지라도 훗날 신앙을 갖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하는 예비 선교의 장이다. 교사들은 무보수의 완전 자원 봉사로서 현직 교사, 직장인, 대학원 생들이다. 이들은 일반 고등학교의 수준을 상위하는 수업을 하며 짧은 시간에 학생들에게 개인 지도도 한다. 교사들은 매월 1회 모임을 갖고 한달에 한 번 평가 내지 수업의 보완 내용 등을 의논한다. 이들은 연중 2회의 연수회를 갖고 수도 공동체와도 연중 1, 2회의 야유회를 통해 친교의 시간을 가지며 자연스럽게 신앙 생활의 단면들을 나누기도 한다. 바쁜 생활에도 자신들의 시간을 할애하는 그들은 학생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며, 학생들도 그들의 봉사에 대해 감사의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다. 사도징의 취지와 목적에 부합하는 종교적인 교육 내용과 수도회의 카리스마와 정신을 살릴 수 있는 최적의 사도직인 만큼 다각적인 방법으로 활성화를 모색하고 있다.

1984. 4. '안내양 교양 센타'를 '쥴리 학원'으로 용도 변경하여 노틀담 수녀원에서 운영 (교회와 역사 226호 19쪽) - 1994. 3. 25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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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096쪽)

주보로 '치명자의 모후'를 모시는 이 본당은 1919년 장호원 본당에서 분할되어 처음에는 충북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에 성당을 짓고 1920년 윤의병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창설되었다. 그러나 '고마리 본당'은 지리적으로 부적당한 위치에 있었음으로 1936년 4월에 폐지되어 공소로 되고, 그 대신 증평본당이 신설되었다.

1923. 숭애의숙학교를 설립 (1096쪽 중평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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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자활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69쪽)

지산자활원은 메리놀 수녀회가 사회에서 소외당해온 장애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재봉기술을 가르쳐 다시 사회에 나가 자립하도록 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장애자 복지시설이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이곳에서 봉사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9월 28일이다. 그간 메리놀 수녀회에서 맡아온 자활원의 관리운영을 위탁받아 최금순 베로니까 수녀와 이사순 크리스티나 수녀를 이곳에 파견하였다. 이곳 자활원의 초기 지원생활은 물질적으로는 모든 면에서 많이 부족하였지만 하느님께서 더 큰 사랑과 은총으로 축복해 주심을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자활원은 여러 가지로 변모하였고 많는 지원수녀들의 나눔으로 지금은 경제적으로 조금씩 안정되어 간다. 한국외방선교수녀회 예비수녀들이 청소를 도와주고 있으며, 이웃들은 여럭 가지 생활용품을 도와주고 있다. 이곳 지원수녀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나눔이 더욱 풍요롭다는 것을 느끼며 많은 것에 감사하며 생활하고 있다.

1983. 9. 30 지산 자활원 설립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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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중고등학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80쪽)

원주교구에서 설립한 학교인 진광중고등학교는 1984년 4월부터 종교과목을 신설하고 학교 지도신부였던 장석윤(비오) 신부의 초청으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파견되어 4월 5일자로 부임하면서 종교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 여경림 오틸리아 수녀는 태장본당 분원에서 출퇴근하였는데 부임 당시에는 강사로서 중학교 1학년 4개 반과 고등학교 1학년 6개 반에 주 1회씩 종교수업을 담당하였다. 여경림 수녀가 정식 교사로 발령을 받은 1985년 3월 이후로는 중 1, 2학년 8개 반과 고 1, 2학년 12개 반에서 주 1회씩 종교수업뿐 아니라 종교행사까지 맡아 하게 되었다. 특히 명상의 방을 운영하여 남학생들의 정서순화에 도움을 주고 교리반과 견진반을 통해 학교신자를 배출하고 있으며 가톨릭 학생회를 조직, 운영하는 등의 활동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여경림 수녀 이후 방영자 데레사 수녀는 종교와 사회과목을 담당하였고 현재는 이정옥 아녜스 수녀가 종교와 함께 영어과목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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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포본당 鎭南浦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해성학교와 마리아유치원, 그리고 양로원과 고아원 사도직에 봉사하였다. 진남포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르레드(Jules Lereide, 申승겸, 1883-1917) 신부의 요청으로 1910년 9월 15일에 이 펠릭스 수녀와 이 마리아 수녀가 파견되어 지정(智貞)여학교에 근무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후 1914년 본당신부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병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본국으로 소환되어 가자 수녀들은 본원으로 귀원하였다. 그러다가 1921년 제 4대 본당신부인 뤼카(Francois Lucas, 1878-1934) 신부의 부탁으로 그해 10월 11일 오채경 말지나 수녀와 강옥섬 아오스딩 수녀가 7년만에 다시 파견되어 본당에서 설립한 해성학교와 마리아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리아 유치원은 1918년에 본당의 남녀청년회에서 문맹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설립한 것으로 1918년 그들은 50명의 원아를 수용하여 기초교육사업을 벌였다. 1921년 6월에 뤼카 신부가 본당에 부임하면서 그는 전통적 미풍양속을 내세워 남녀7세 부동석에 의한 도덕관을 주장하여 마리아유치원 여자부를 분리하여 해성학원(海星學院)이라 이름하고 직접 운영하면서 남자부는 신자 유지들에게 일임하였다. 수녀들이 처음 부임했을 때는 학생수가 33명이었는데 이듬해 봄에는 70여명, 가을에는 100여명이 넘게 되어 갑·을·병 3반에 유치반 한 반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1926년 4월에 메리놀회의 더피(Patrick Duffy)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마리아유치원과 해성학교의 시설을 보강하였다. 이후 해성학교와 더불어 유치원은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1930년 4월 스위니 신부는 100여평의 학교 건물을 신축하고 사립학교 인가를 받아 해성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가 되었다. 1935년 3월에는 6년제로 개편함으로서 학교의 규모와 교육내용을 더욱 충실히 하였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학교수녀들의 공로가 컸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1937년도 해성학교의 현황을 보면 800여평의 대지 위에 건물 216평, 11학급 642명의 학생들과 4명의 수녀들을 비롯한 13명의 교사들이 있었다. 이외에도 본당 내에는 1931년, 포스피칼(Hubert Pospichal) 신부가 무산아동을 위해 세운 성심학원과 5개의 공소에 상설야학이 있어 문맹퇴치에 공헌하였다.

마리아유치원은 1945년 초, 일인들의 강압으로 폐원되었다. 그러나 해성학교는 공립학교로 잠시 흡수되었다가해방이 된 후 다시 교회에서 운영하여 왔으나 1947년도를 마지막으로 공산정권에 몰수당하였다. 1933년 스위니 신부는 본당에 양로원과 고아원을 개설하여 무의무탁한 노인, 불구자, 고아들을 수용하고 그 자신의 독자적인 부담으로 이를 운영하였다. 스위니 신부가 떠난 후에 운영난에 봉착했으나 이 소식이 일반사회에 전해지자 1936년 진남포부 당국에서 양로원 운영보조비로 500원을 보조하여 줌으로써 교회에서는 더욱 용기를 내어 양로사업에 진력하게 되었다. 1933년부터 1937년 사이의 부양자 총수는 98명, 1937년도 수용인원은 58명이었다. 이 양로원과 고아원은 많은 시련속에서도 꾸준히 운영되어 오다가 1945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남포본당에서 철수한 이후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수녀들에 의해 돌보아졌고 침묵의 교회가 되기 바로 직전,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었다.

본당내 시약소 사도직은 양기섭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있던 1941년 양기섭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사업을 계승하였다. 양 신부는 1943년에 성심학원과 유치원의 문을 닫고 그해 10월 3일 소화병원을 신설하였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등의 진료과목에 입원실 7개, 의사 3명 그리고 간호수녀 3명으로 구성된 손색없는 의료진으로 외래환자를 진료하면서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봉사를 함으로써 의술로나 운영에 있어서 호평을 받았다. 전교에도 많은 도움을 주며 발전해 갔으나 1945년 10월에 폐원되었다.

1910. 9. 15 평안남도 진남포 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1918. 진남포 본당에 마리아유치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1921. 6 진남포 본당에 마리아유치원 여자부를 분리하여 해성학원을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1933. 진남포본당에 양로원과 고아원을 개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1943. 진남포 소화병원 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1945. 10 진남포 소화병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1945. 진남포 마리아유치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1947. 진남포 해성학원은 공산정권에 몰수당함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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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포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104쪽)

1900년 평남 진남포시 용정리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성 안나. 초대 주임신부로는 파리외방전교회의 포리(Faurie) 신부가 부임하면서 1916년에는 돈의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어 2대 주임신부 레드(Lereide)는 1908년 성당을 신축하고 이듬해 지정여학교를 개설했으며 4대 주임신부인 뤼카(Lucas) 는 해성학교를 설립한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인해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 회의 선교사들이 일제(日帝) 당국에 체포 구금 될 때까지 본당사목을 담당하여 이 시기에 성당이 신축되고 시약소와 양로원이 개설되었다. 1942년 양기섭(베드로) 신부가 9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43년 본당의 소화 병원을 개설 하는 등 1945년 까지 전력을 다하여 사목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1대 주임 조문국 신부가 6.25 동란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북한공산 정권에 체포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었다. 본당운영의 사업체로는 해성학교, 마리아 유치원, 성심학원, 양로원, 시약소, 소화병원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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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109쪽)

경남 김해군 진영읍 진영리 230번지 소재의 마산교구 소속의 본당. 주보는 예수 성심.

초대 정재석 주임신부 이래 현재 16대 강윤철 신부에 이르도록 본당 발전을 위하여 사제와 신자들이 합심 노력한 끝에 연령회 조직 및 교회신자의 묘지확보 등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진영본당은 현재 소화유치원과 성모병원을 운영하여 지역사회의 발전과 유대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10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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