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명부13(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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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집 / 하양본당 / 한국가톨릭간호협회 / 한국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 /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 한국가톨릭농민회 / 한국가톨릭성령쇄신봉사자위원회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 한국순교복자수녀회 / 한국순교복자빨마원 / 한빛종합사회복지관 / 해성보육원 / 해성유치원 / 해성학교(전주) / 해성학교(원산) / 햇빛자리 / 현대해성병원 / 혜원 장애인 종합 복지관 / 혜화 유치원 / 호수천신학교 / 홍제동본당 / 화양동 성당 / 황민성 / 회령본당 / 효성 가정여학교 / 효성학원 / 후암동 병원/ 흥남본당 / 희망원 / 희망의 집

하나의 집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71쪽)

'하나의 집'은 부산지역내에 거주하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시설공간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부산 가톨릭 농아선교회'는 1965년 3월 1일에 발족하여 1990년 3월 27일에 부산교구 교구액션단체로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87년 2월부터였다. 1986년 2월 4일부터 부산 가톨릭농아선교회 지도신부였던 박용조(프란치스꼬) 신부가 1986년 9월 13일 수정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후 수녀원에 지도수녀를 요청함에 따라 송순자(토마시나) 수녀를 1987년 2월 27일 파견하였다.

당시 부산교구내 장애인 신자수는 2,000 여명으로 집계되었는데 , 이들 중 대다수가 본당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조차 포기하는 상태에 있었다. 박용조 신부는 청각장애인들의 특성을 고려한 사목 프로그램을 전개할 공간이 없어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성분도 치과 옆 공터를 최적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박 신부는 장애자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땅을 빌려줄 것과, 장애자회관을 운영해 줄 것 등을 수녀원에 제안하였다.

수녀원에서는 1987년 3월 총회 의결회의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에 부산교구에서는 수녀원 경내 성분도치과 옆 공터에 천주교 부산교구 장애인회관으로 70평의 조립식건물을 지어 '하나의 집'이라 명명하고 1987년 12월 6일 축복하였다. 축복식에 앞서 9월에 부산 가톨릭농아선교회 본부를 수정성당으로부터 이곳 하나의 집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이미 해오던 활동을 수용하고, 일관성 있는 프로그램을 계획하여 청각장애인을 위한 사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하나의집에서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봉사하고 있다.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수화강습이 주야로 있는데, 1991년 말 현재 약 500명이 수료하였다. 검정고시 중비를 위한 야학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개최되고 있으며, 중고등학생들의 학습지도(영어, 수학), 문장공부 등이 있다. 전체적인 계획과 운영에는 수화교실을 통해 배출된 '더불어회'봉사자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다른 지역의 농아선교회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해마다 1번씩 전국 청각장애인들이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함께 모여 피정을 하고 있다. 하나의 집에 파견된 수녀는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레지오마리애를 지도한다. 때때로 청각장애인들의 직업알선을 위해 나서기도 하고, 직장애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을 돕기 위해 대신 변호사를 찾아보고 법정에 서기도 한다. 청각장애인들이 병원이나 관공서에 갈 때에 함께 가서 수화통역을 하기도 하고, 가정방문을하여 가정과 사회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갈등 등을 들어주며 신앙생활을 격려하기도 한다. 보청기를 보급하고, 청각장애인 가정에 초인종 대신 깜빡이는 전등불을 달아주고 전화대신 FAX를 설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그들의 곤란을 덜어주는 구체적인 방법이 되었다. 하나의 집의 또 하나의 활동은 청각장애인들의 자녀들(정상아)을 위한 유아원 운영이다. 하나의 집 유아원에서는 약 10명의 어린이들에게 유년에 익혀야 할 좋은 습관과 성격형성, 언어교육 등 세밀한 지도를 하고 있다.

1987. 2. 27 부산 가톨릭 농아선교회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파견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71쪽)

1987. 12. 6 부산 '하나의 집' 축성식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은혜 60년사 4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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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본당 河陽本堂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18쪽)

하양본당은 1915년에 용평본당 소속 하양공소로 시작되었다가 1931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무학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하양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처음으로 파견된 것은 1956년 12월 4일이었다. 본당 주임 이임춘(펠릭스) 신부의 초청으로 서울에서 공순옥 마리 헬렌수녀와 강봉순 로렌죠 수녀가 전교와 유치원을 담당하기 위하여 부임하였다. 수녀들은 신부의 뜻을 따라 마을 중앙에 성가진료소를 조그맣게 개원하게 되어 간호수녀 1명이 추가파견되었으며 1961년 본당 증축에 잇따라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1963년에는 강당과 유치원이 신축되어 소화유치원 설립인가를 받았다.

하양은 농민이 많은 소규모의 읍이라 운영상의 애로점이 많아서 1968년 성가진료소는 문을 닫아 의료사도직을 그만 두게 되었고, 1969년에는 유치원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1975년 신학기에 유치원을 다시 개원하여 평신도가 운영했는데 1977년 2월에 본당신부의 요청으로 유치원수녀가 다시 부임하게 되었다. 1977년 3월 부터는 무학중고등학교 종교과목을 담당하면서 본당 일도 도울 수 있는 수녀가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1984년 2월 15일을 마지막으로 무학중고등학교 종교교사 파견도 그만두고 본당 전임수녀 2명과 유치원수녀를 합하여 3명의 공동체가 되었다. 그 후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운영상의 애로점이 거듭되어 수녀 사도직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음을 식별하여 1987년 2월 23일부로 유치원에서 손을 떼고 현재는 전교수녀 2명만이 본당 신자들의 전례생활과 신앙생활을 도와주고있다.

1956. 12. 4 하양본당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파견되어 성가진료소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18쪽)

1963. 하양본당의 소화유치원 개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18쪽)

1968. 하양본당의 성가진료소는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18쪽)

1987. 2. 23 하양본당의 소화유치원 폐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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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간호협회 (영) Catholic Nurses Association of Korea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44쪽)

가톨릭 신앙과 복음적 정신의 함양으로 선교활동을 함과 동시에 회원으로써 침목과 자질향상, 그리고 보다 저극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하기 위하여 1979년 5월에 발족한 간호인 협회. 1979년 2월에 이전부터 모임을 가져오던 성모병원 가톨릭간호원회가 협회를 발족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함으로써 1979년 5월 18일 전국의 가톨릭신자 간호원 130여명을 중심으로 서울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교육회관에서 발기총회를 갖게 되었다. 1981년 주교회의의 인준을 받고 1982년 4월 국제협회에 가입하였다. 주요활동 내용은 의료봉사활동과 세미나이며, 1982년 현재 서울교구 외에 6개 교구에 간호원회가 조직되어 있다.

1979. 5. 18 한국가톨릭간호협회 발족 (1244쪽 한국가톨릭간호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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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 (영) Catholic Leprosy Workers Association of Korea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44쪽)

나병으로 신음하는 형제들이 자립 갱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사업을 하기위해 1967년 10월 18일 발족된 연합회. 1968년 5월 한국 주교회의 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주요 사업내용으로는 신용조합 육성을 통한 자활지원, 부랑나환자들을 위한 정착마을 지원, 환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 등으로 전국 37개의 정착마을과 3개의 불구나환자들의 수용시설을 운영, 지원하고 있고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비롯한 11개 수도단체와 가톨릭 피부과 병원 등 11개 회원기간들이 진료와 정착사업을 돕고있다.

1967. 10 한국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 발족 (1244쪽 한국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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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영) Korean Young Christian Workers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44쪽)

1. 설립목적 : 한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청년 노동자들의 자발적 주체적인 운동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에 입각하여 청년노동자의 전인적 지속적 교육에 참여하고 노동계에 복음을 전도하며 정의와 사랑과 희망을 전파하고 실현하고자 한다.

2. 약사와 활동 : 가톨릭노동청년회는 (이하 J.O.C) 1958년 1월 서울 대학교 부속병원 간호원 10명이 가노청에 대한 소개책자를 연구하다가 당시 가톨릭 신학대학 교수인 박성종(프란치스코) 신부를 지도신부로 회합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뒤 한국을 방문한 J.O.C의 창설자 조셉 까르딘의 주례로 11월 17일 명동 대성당에서 첫 투사선서식과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60년 12월 20일 서울교구 연합회가 결성되었고 1961년 부터는 점차 지방교구로 확장되어 10월 21일 서울, 대구, 전주, 대전 교구의 남녀 대표들로써 전국 평의회가 조직 되었다. 이 해 11월 2일에는 한국주교회의에서 정식으로 가톨릭 평신도사도 단체로 인준을 받는 한편, 국제가톨릭노동청년회에도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한국J.O.C의 초기활동은 빈민촌 무료진료를 비롯하여 근로재건대 활동, 윤락 여성선도, 노동자를 위한 실비식당운영, 서독 파견광부들을 위한 활동, 해외 이민문제에 대한 활동, 가정부 생활실태조사 등이 있다.

1964년에는 수원교구와 인천교구의 연합회가 발족되어 한국 가노청이 9개 교구로 확장되었고 1965년 1월에는 성인 J.O.C이 발족되어 뒤에 가톨릭 노동장년회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1965년 10월 제5차 전국평의회에서 J.O.C 농촌부를 창설하였다가 다시 1966년 8월 제6차 전국평의회에서 가톨릭농촌청년회(J.A.C)로 독립되어 농촌실정에 맞는 청년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1966년 10월에는 춘천교구 연합회에서 원주교구 연합회가 분리, 독립하였다.

이 당시는 5.16후 정부가 추진한 경제개발정책의 수행과정에서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노사문제등 각종 사회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이에 따라 한국 J.O.C의 활동도 각 산업체의 노동조합결성, 임금인상 등 처우개선 활동, 직업여성 실태조사, 노동강좌, 버스 안내양교육, 이향노동자 상담활동 등 노동자들의 인권신장과 복지활동을 위한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한국 J.O.C는 '비 인간적 상황의 인간화', '노동자들의 단결의식 강화'를 목표로 회원들의 의식계발 교육과 회원,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조직의 확대, 핵심 지도자 양성, 지도투사의 자질 향상과 J.O.C의 내적역량등에 힘썼다. 이와함께 한국 J.O.C는 마산 수출자유지역 실태조사 및 체불임금 지불요구활동, 이향노동자 실태조사 및 대책활동을 통해 한국사회의 노동현실을 고발하고 개선을 촉구하였다. 또한 구체적인 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가 발생할 때마다 이에 항의하고 사정을 촉구하는 활동을 꾸준히 벌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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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농민회 (영) Korean Catholic Famers' Movement (한국가톨릭대사전,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1245쪽)

1966년에 창립된 한국의 가톨릭 농민운동단체. 가톨릭 농민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믿음으로 깨어나는 농민들이 '스스로' 그리고 '함께' 농민자신과 사회를 누룩처럼 변혁시켜 감으로써 농민구원, 겨레구원, 인류구원을 지향하는 생활공동체 운동이다.

1. 활동과제

⸁ 현장활동 : 삶의 현장인 마을에서 부락민의 일상적 요구에 응답하면서 마을을 생활 공동체로 변화시킨다.

⸂ 문화활동 : 생산과 문화, 일과 놀이와 전례의 일치를 시도함으로써 인간다운 공동체를 강조하며, 봉사활동, 권익활동, 마을 민주화활동, 건강활동, 연대활동 등을 추진한다.

⸃ 정책활동 : 농민을 비 인간화 시키는 구조적 모순을 없애는 활동을 통해 공동선을 확장시킨다. 농지제도

개선활동, 농축산물 가격보장활동, 농민조합의 민주화 활동, 부당한 농업세제 시정활동등을 추 진한다.

2. 활동약사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농촌청년부로 출발해서 1966년 10월에 창립된 '한국가 톨릭농촌청년회'는 농촌청년 중심으로 모범생활, 모범농사 등을 통한 마을 환경의 변화를 추구했으며 주로 생활교육을 통한 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농업희생이 강요되기 시작한 1, 2차 경제개발계획 (1962-1971)의 추진, 3선 개헌(1969), 비상사태 선포 (1971) 등 으로 나타난 권력독점의 심화, 농민개인과 정치경제 사회구조를 별것으로 생각하는 한 모범농촌 청년, 모범농장도 불가능 함을 인식하여 운동의 새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70년 '가톨릭 농민국제연맹'의 회원국으로 가입한다.

농민의 복리를위한 국내 유일의 농민운동단체로써 1970년대의 역할을 부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운동의 미 성숙함을 지원할 수 밖에 없었다. 가톨릭농민회는 운동의 역사성, 운동의 생명성의 결합을 깊이 성찰하면서 농민구원, 겨례구원, 인류구원, 우주구원을 하나로 꿰뚫는 성숙한 운동방향을 모색하고 그 새출발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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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성령쇄신봉사자위원회 (영) National Catholic Charismatic Service Committee (1250쪽)

성령쇄신운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전후하여 교회내에서 일어난 교회쇄신운동 가운데 하나이다.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를 체험 함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예수그리스도와 더욱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동료들과 따뜻한 사랑을 나누며 내적으로 충만한 평화와 기쁨 속에서 살며,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보다 활기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성령쇄신운동은 교회를 쇄신하는데 있어서 제도나 구조의 개혁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성령의 은사에 의해서 교회는 개혁된다고 한다.

성령쇄신운동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71년 당시 카리타스회 선교사로 파견되어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을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던 시미드(Erna Schmid) 수녀가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던 성령쇄신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와 이 운동을 전파하였다.

1971. 한국가톨릭성령쇄신봉사자위원회 한국진출 (1250쪽 한국가톨릭성령쇄신봉사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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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영) Order of the Blessed Korean Martyrs (1259쪽)

1953년 10월 30일 방유룡 신부에 의해서 창설된 방인 수도회. 당시 서울 제기동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방신부는 1964년 개성에서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를 창설한 이후 곧 남자 수도회를 창설하려 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하여 서울 제기동 본당에서 순교자적 정신의 실천으로 보다 더 완전한 신앙생활, 보다 더 완전한 구원에의 참여, 자아를 성화하여 이웃을 성화시키려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1955년 7월 현재 본원이 위치한 서울 성북동에 흙벽돌집을 만들어 입주하였고 그 당시 시유지였던 이 곳에 주변빈민아동들을 위한 공민학교 운영을 하기위해 가건물을 지어 서울시로부터 소유권을 불하받은 때인 1969년까지 학교운영을 해왔다.

1971. 복자유치원을 개원하여 복자수녀원에 그 운영권을 위임 (1259쪽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1976. '피정의 집' 을 마련하여 주민들과 피정과 연수활동에 제공 (1259쪽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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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복자수녀회 (영) Sisters of the Blessed Korean Martyrs (1260쪽)

1946년 4월 21일 방유룡 신부에 의해 창설된 방인 수녀회.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한국 순교 선열들의 순교정신으로 생활하며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창설되었고 1951년 12월 교황창의 인가를 받았다. 원래 1930년대부터 한국인에 의한 수녀회를 창설하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정책으로 실패하고 광복된 이듬해 개성 동홍동본당에서 창설회원 윤병현, 홍은순 회원과 함께 발족회를 가지면서 점성정신(點性精神), 침묵대월(沈默對越) 등 한국적인 수덕론을 제창하였다. 창설되던 해 10월에는 6명의 회원이 더 입회하였고, 소착복식도 처음 행해졌다. 한편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양재학원을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개성에 단독주택을 구입하여 본격적인 수도생활이 시작되었다. 6.25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서울 청파동으로 본원을 이전하였으나 곧 피난길에 올랐다가 1952년 12월이 되어서야 다시 서울에 정착하여 첫 착복식을 갖게 되었다. 그뒤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련지도를 받기도 하면서 1954년 12월 5명이 첫서원을 하였다. 1957년 9월에는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성모성심병원을 인수하여 운영케 되었다. 1960년에는 충청남도 천안에 복자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3년에는 밀양성모성심병원에 이어 부평의 성모자애병원을 인수하고, 1967년에는 교포들을 위하여 일본 오오사까에 분원을 설치하였다.

1960. 충남 천안에 복자여자중고등학교 설립 (1260쪽 한국순교복자수녀회)

1963. 밀양 성모성심병원과 부평 성모자애병원 인수 (1260쪽 한국순교복자수녀회)

1981. 부평 성모자애병원부설 심신장애자조기교육원 설립 (1260쪽 한국순교복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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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복자빨마원 (영) Palma Home for Widows (1260쪽)

1962년 10월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및 성직수도회의 창설자인 방유룡 신부가 복자회의 창설이념에 바탕을 두고 창설된 미망인 수도단체. 회원 각자는 무엇보다도 깊은 영성생활과 공동생활을 통한 형제애를 목적으로 한다.

병원과 회관 등지에서 회원 각자의 소질을 살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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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종합사회복지관 (나눔지 1996. 여름 8쪽)

천주교측이 정부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복지기관이 늘어남에 따라 천주교의 특성을 살린 복지관 운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지난 3월 21일 복지관 운영 관계자들이 모여 교구나 수도회가 정부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가톨릭 종합복지관 협의체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서울 한빛종합사회복지관 이명자 수녀(살레시오수녀회)를 선출하였다. 창립총회는 회장을 주축으로 임원진을 구성하고 정관이 마련되는 대로 개최될 예정이다.

현재 양천구 내에는 한빛, 신월, 신정 3개소의 복지관이 운영되고 있는데, 가장 먼저 91년 9월에 개관한 신월복지관에 이어 한빛복지관은 95년 11월 28일에 개관하였다. 한빛종합사회복지관(관장: 이명자 수녀)은 지역적으로 양천구 내에서도 가장 자립도가 낮은 저소득 밀집 지역인 신월 4동에 위치하고 있어 보다 많은 주민들의 욕구와 필요, 문제에 적극적으로 수용, 대처하기 위해 보다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 곳이다. 따라서 한빛복지관은 지역사회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주민들에게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사회복지서비스롤 제공함으로써 주민들의 자조, 자립능력을 배양하고, 지역주민들의 다양한 욕구와 문제에 부응하는 사업을 개발, 수행하며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주민들의 협동의식과 연대감 조성을 통해 지역사회의 통합을 이룩하는 복지센터로서의 역할 수행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대지 369평, 건평 1,221평의 지상 5층, 지하 1층의 건물에 강당, 자원봉사자시르 교육실, 취미교실, 상담실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어 놓고 전문 사회복지사 7명, 수도자 6명, 어린이집 운영진 등 총 26명의 직원과 각 단위 프로그램 유료 강사 18명, 그리고 뜻있는 많은 봉사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사업을 펼치고 있는 각 복지분야별 주요사업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아동복지사업은 아동들의 자아실현 증진과 잠재력 개발을 목적으로 아동 선도 및 사회교육, 방과후 어린이 공부방, 어린이 기능·예능 교실의 운영과 복지관내 상담실을 통한 정서지도 등을 하고 있다.

청소년복지사업은 청소년들의 여가활동과 사회교육의 기회제공을 목적으로 청소년상담 및 교양교실, 방과후 공부방(영어, 수학), 기능교실(컴퓨터, 논술) 운영, 도서대출, 청소년 클럽지도 등을 하고 있다.

가정복지사업은 사정의 자립·자활능력의 향상, 건전한 여가생활지원, 각종 문제의 예방 및 치료를 목적으로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가정문제종합상담과 취업알선(주로 파출부) 및 직업·부업 기능개발 훈련을 하고 있다. 특히 제때에 교육을 받지 못하여 큰 아쉬움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빛여성교실'에서는 현재 중등과정 교육을 지도하고 있다.

노인복지사업은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 및 노년기의 자아정체감 형성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각종노인문제 상담, 노인대학의 일종인 '한빛노인교실', 그리고 주 3회 한글과 산수를 지도하는 '노인한글교실'과 '노인산수교실' 등이 있다. 장애인복지사업은 많은 제반시설과 보다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전문인력을 필요로 하는 사업으로 전문장애인복지기관이 아닌 일반 사회복지관에서는 제반시설의 부족과 전문인력의 불충분 등으로 아직까지는 전문적인 서비스를 펼치는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복지관내의 단위별 사업 프로그램 중 가장 취약한 부분인 장애인복지사업은 현재 장애인의 사회적 무력감 및 소외감 해소를 목적으로 정보제공, 취업알선, 이송 등의 사업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보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의 관심과 투자가 요구되는 분야이다.

재가복지봉사센터는 저소득층의 복지요구 충족 및 지역사회의 통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약 60여명의 수해대상자들에게 가사, 간병, 정서, 결연, 자립지원, 의료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으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정오부터 1시까지 노인무료중식제공을 하고 있다.

지역사회복지사업으로는 지역사회의 문제에 주민들의 능동적 참여 조장 및 공동체의식 함양을 목적으로 자원봉사자 양성, 주민 건강과 무료진료, 대학생 실습 교육, 강당 및 식당을 대여하는 등의 편의시설을 제공하고, 사회조사, 홍보사업 등을 하고 있다.

부설 한빛 어린이집은 취학전 아동의 건전한 신체적, 정서적 발달, 저소득계층 아동의 보호와 교육을 목적으로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아동을 돌봐주는 종일제로 자모교육, 야외학습 및 견학, 예절지도 등의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심리상담사업은 밝고 보람된 장래와 행복한 인간관계 유지를 목적으로 개인, 가족문제, 집단상담 및 모래상자를 이용한 놀이치료를 하고 있으며 STEP교육, Sweet Home Academy 등의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아동, 청소년, 대학생, 일반인들을 대상으로하여 인성검사, 자아개념검사, 적성검사, 성격유형검사(MBTI), 어린이·청소년 성격유형검사(MMTIC) 등을 실시하고 있다.

지역사회 주민들과 더욱 가까이 호흡하며 고질의 다양하고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전문사회복지사들외에 복지관을 이끌어나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자원봉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무의탁, 거동불편노인, 신체장애인, 만성질환자, 소년·소녀가장 및 결손가정자녀 등을 대상으로 하는 자원봉사와 사랑의 후원사업에 동참해 주실 분들을 기다리고 있다.

특별히 미래에 주역인 청소년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중점을 두고 청소년들이 복지관을 기브게 드나들며, 다른 교육기관들과는 차별성을 가지고 단순한 지식의 전달 뿐만이 아닌 생활교육에 중점을 둔 사회교육기관으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다. 또한 앞으로는 재가아동들이 서로간에 폭넓은 교류를 할 수 있는 자조조직의 개발과 복지관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청소년들이 더욱 쉽게 찾아오고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복지관이 되도록 하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1995. 11. 28 한빛종합사회복지관 개관 (나눔지 1996. 여름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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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보육원 (나눔지 27호 6쪽) - 1984. 11. 15발행

1894년 "바다의 별"이라는 의미를 지닌 해성 보육원은 1894년 샤르트르 수녀회의 3명의 벽안의 수녀가 제물포 답동성당에 전교차 왔다가 길에 버려진 불구 고아들을 성당으로 데려다 보살핌으로서 시작 되었다.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8:5)의 주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벽안의 수녀들은 고아들과 아픔을 같이하며 고아들의 대리자로써 어린양을 돌보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실천한다. 해성보육원 에서는 1984년 현재 가정파탄으로 버려진 0-6세 까지의 아이들 150여명이 수녀님들과 보모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고 있다.

1894. 해성보육원 설립 (나눔지 27호 6쪽) - 1984. 11. 15발행

해성보육원 海星保育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331, 508, 509, 671, 672, 867쪽)

1894년, 인천 답동(옛 제물포)본당에 분원을 설립한 이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전교는 물론 보육원과 무료진료소 운영 등 활발한 사도직을 전개하여 왔다. 보육원은 남녀 어린이를 모두 돌보았다. 또한 이 보육원의 발전에 있어서는 본당 신부였던 드뇌 신부의 공이 매우 컸다. 드뇌 신부는 수십년을 두고 사재(私財)를 기울여 수녀원과 원아들을 돌보아 주었으며 용현동, 영종도 등지에 농지 20만평을 매수하여 보육원에 기증함으로써 운영에 확고한 재정기반을 수립해 주었다. 그러나 이곳도 특별한 수입원이 없이 외부의 원조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로부터의 원조가 거의 중단되자 유지들의 기부를 호소하거나 바자회를 열어 운영에 보태기도 하였다.

꾸준히 고아들을 돌보아 오던 인천 해성보육원에서는 해방과 더불어 연합군의 상륙으로 혼혈아가 급증하자 1948년 12월 15일, 용현동에 원사를 신축하여 해성보육원의 분원을 설치하였다. 초창기에는 남아들만 수용하였고 이곳에서 재배한 야채 등을 답동 보육원의 부식으로 날라다 먹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외국인이었던 아델 원장수녀와 필로메나 수녀는 일본으로 피난하고 100명의 원아들은 송도로, 후에는 덕적도로도 피신을 하여 큰 화를 면했으나 시설 일부는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고 비품과 서류 등은 분실되었다. 전쟁이 종식된 후에는 미군들의 원조를 받아 재건에 힘썼다. 1952년 부터 정부 대행 구호단체로 등록되어 국가 보조를 받기 시작하였고 그래 9월에는 용현동 소재 농지 9,000여평을 자경농지로 인정받아 자체경작을 하게 되었다. 1964년에는 원사 7동을 짓고 이듬해 3동이 추가로 신축되어 모두 10동의 한국식 가옥이 마련되었다. 각 집에는 서로 나이가 다른아동 12명과 보모 1명으로 가족 단위를 구성함으로써 가정의 분위기를 느끼며 생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용현동 보육원 분원이 확장되면서 1966년 7월 11일에는 해성 보육원으로 부터 독립하여 [해성육아원]이라 칭하고 시설 인가를 받게 되었다. 1975년에는 답동에 남아 있던 영아원까지 용현동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감소되는 원아수로 인하여 1980년에는 육아원을 폐지하고 영아양육만을 하였고, 1984년 부터는 여기에 미혼모들을 수용, 그들의 출산과 산후조리를 도왔다. 1987년 부터는 '해성영아 일시 보호소'로 지정되어 인천지역에서 발생하는 기아, 미아, 요보호 아동들을 일정 기간 동안 보호, 양육하면서 상담 후에 귀가 또는 입양시키고 있다.

1983년 6월 30일에 장애인실, 치료실, 상담실, 미혼모실 등의 후생복지시설을 고루 갖춘 신축건물을 준공했는데 이 건물은 아동들의 신체발육, 정서안정, 건강관리를 위해 통풍과 채광에 역점을 두었다. 아동들의 압양의 경우 국내입양을 주로 권하고 있으며 이때는 입양아가 잘 적응하여 성장하도록 사후지도에 노력하고 있다. 1987년 4월에는 구건물 4동을 철거하고 공지정원을 조성함으로써 아름답고 훌륭한 환경과 현대식 건물을 갖추었다. 여기에서 수녀들은 요보호 아동의 보호양육사업, 국내 및 국외 입양사업, 미혼모 보호사업, 지체부자유아 및 정신박약아 보호양육사업 등 많은 사회사업 활동을 사랑과 봉사로써 수행하고 있다. 1991년 현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이곳에 지체부자유아 및 정신박약아들을 위한 보호, 양육과 치료, 탁아소 운영도 새로히 계획하고 있다.

1894. 8. 18 해성보육원(海星保育院)설립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331, 508, 509, 671, 672, 8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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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유치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26쪽)

해성유치원은 처음부터 포교성베네딕도 수녀회에서 직영하였다. 이직 언어 소통이 원할하지 못한 선교 파견 수녀들은 에와수녀를 대동하고 유치원을 설립하여 건물도 변변치 못하였지만 1927년 4월 1일부터 개원하여 원아를 모집하였다. 연혁의 내용을 옮겨 당시의 상황을 알아본다.

1927년 여름… 지원자들이 쓰던「성 데레사의 집」지하주방은 시약소로 이용하게 되었고, 호수 천신학교는 해성학교의 낡은 건물에서 성 데레사의 집 한편으로 이사오게 되었다. 해성 유치원은 역시 해성학교의 낡은 건물에서 성 데레사의 딥 한편으로 이사오게 되었다. 해성유치원은 역시 해성학교의 헌 건물에서「성 데레사의 집」한편으로 100명의 원아를 데레고 이사했다. 그래서 성 데레사 집의 한편에서는 원아를 교육하게 되었다. 유치원은 이센가르드 수녀와 지원자 이 젤마나가 맡아 지도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밝혔듯이 해성유치원이 시작된 건물은 해성학교의 구 건물이었다. 그리고「성 데레사의 집」으로 이사한 유치원은 호수천신학교와 함께 같은 건물에서 비교적 부유한 원아와 가난하여 진학이 어려운 어린이들이 교육을 받게 되었다.

사람은 유년기의 교육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포교성베네딕도 수녀원에서도 어린이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갖고 유치원을 운영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지원자와 청원자들이 유치원 보모 양성을 위한 일반양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유치원의 교육비는 거의 무료였으며, 많은 어린이들이 해성유치원에 오려고 했지만 많은 인원을 수용할 건물과 인적자원의 부족으로 제한된 인원만 받아야 되는 어려움도 따랐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유치원에 자녀들을 보내려는 원산 시민들의 또 다른 의도는 수녀들이 알뜰하게 교육시키는 교육방법에 이끌려서 해성유치원으로 아이들을 보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원아의 수는 늘 100명으로 제한되었고, 교사는 수녀와 예비수녀로 짜여졌었다.

1927. 4. 1 해성유치원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26쪽)

해성유치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7쪽)

원산 해성유치원이 정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은 것은 1931년 9월 30일이었다. 발족 당시에는 보모가 없어 지원자 청원자들이 어린이들을 지도하였고 프랑스인 임마꿀라따 수녀가 수련수녀로서 보모직을 맡아 일하기도 하였다. 발족 당시 책임수녀는 독일인 이센가르드 그라프 수녀였으며 후임은 디아틸디스 수녀였다. 그러나 서양인이 책임을 맡기에는 언어소통과 행정처리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1933년 6월 이후부터는 김 데레사 수녀가 책임자로 유치원을 운영하였다.

유치원은 원아들이 늘어남에 따라 40명씩 3반으로 나누어 지도하였고 1938년 11월, 새로 지은 2층 건물로 이전하였다. 새 유치원 아래층엔 갖가지 운동기구, 놀이기구들을 설치하여 어린이들의 교육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2층의 방 두개는 부인 예비자들의 교리실로 사용하였다. 당시 유치원 원장으로 장 멕텔디스 수녀가 약 2년간 재임하였으며 여러 수녀들이 도왔다. 새 유치원으로 이전된 후 원아들은 더욱 늘어나 1941년 초에는 200명정도 수용하였으며 이후 다시 60명씩 4반으로 더욱 반을 늘여야 했다. 반이 늘어남에 따라 수녀들은 완구 등을 직접 만들어 놀이기구를 충당하기도 하였다.

원아들은 수녀들을 매우 따랐으며 수녀들은 원아들 뿐 아니라 학부모를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유치원은 교육과 선교를 동시에 할 수 있는 훌륭한 일터였다. 그래서 수녀원에서는 자질있는 예비 수녀들에게 보모자격증 획득을 위한 양성의 기회를 많이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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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학교 海星學校 (1279쪽)

⸁ 전주교구에서 설립, 운영하던 초등교육기관으로 현 성심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이 학교의 역사는 프랑스 선교사 보두네(Xaverius Baudounet) 신부가 1891년 설립한 여교당에서 시작된다. 이 여교당은 갑오경장(1894년) 이후 문을 닫았고, 1920년 라크루(Marcellus Lacrouts) 신부가 여교당의 자리에다 해성학원을 설립하였다. 이 해성학원은 1938년 인가를 받아 6년제 보통학교가 되었고, 교명을 해성학교로 변경하였다. 1945년 광복직전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폐교된 해성학교는 1948년 성심여자중학교로 새로이 출발하였다. 1952년 고등학교를 병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북 전주시 교동 208번지 소재.

⸂ 대구대교구에서 설립, 운영하던 초등교육기관으로 성립학교라고도 불렸다. 1899년 로베르(Robert) 신부가 설립하였고, 1908년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해성학교라는 정식명칭을 가지기 전까지는 주로 해성재(海星齋)라고도 불렸다. 1910년 여자부를, 1912년 고등과를 병설하여, 여자부는 그 뒤 계속 발전하여 1925년 효성학교로 분리, 독립하였으나, 고등과는 2년 뒤인 1914년 폐지되었다. 1930년대에 폐교되었다.

⸃ 황해도 황주본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초등교육기관, 1902년 황주본당의 초대 주임 한기근 신부가 성당 부근에 초가집을 지어 시작하였다. 1910년경 폐교되었다.

⸄ 1908년경 미리내본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초등교육기관.

⸅ 평양교구 진남포본당에서 설립, 운영하던 초등교육기관. 1921년경 설립된 해성학원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주임신부가 본국으로 소환되는 바람에 한 때 교육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1930년 스위니(Sweeney) 신부가 이제까지 산발적으로 실시하여 오던 사업을 정리하고 사립학교의 인가를 받아 4년제 보통학교로 출발하였다. 1935년 6년제로 개편하여 계속 발전하다가 일제말기 공립학교로 흡수되었다.

⸆ 연길교구 삼원봉본당에서 운영하던 초등교육기관. 1904년 라리보 신부가 설립한 화룡서숙(和龍書塾)에서 시작되었다. 1905년 덕흥서숙으로, 1911년 덕흥학교로 교명을 바꿨고, 1919년 6년제 보통학교인 해성학교로 개편되었다. 왕심학교라고도 불렸다.

⸇ 황해도 연평도본당이 설립, 운영하던 초등교육기관. 전덕규 등이 교육회를 결성, 신문화운동의 일환으로 1922년 설립하였다. 1935년 폐교되었다.

⸈ 그 밖에 천주교에서는 만주땅의 팔도구, 차조구, 훈춘, 합마당, 두도구, 명월구, 연길상시 등지에 해성학교라는 이름의 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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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학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24쪽)

1921년 5월, 워산 본당으로 부임해온 옥 엑카르트(Andreas Eckardt)신부가 원산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너무 많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서울에서 함께 온 오병주 선생과 동년 5월 15일부터 본당내에 온돌방 두칸을 빌려 야학 강습소로 개설하였다. 처음에 7명의 학생을 모아 이 야학 강습소로 출범하여 1922년 3월 7일부터는 4년제의 해성 보통학교로 승격하였고, 1926년 4월 1일부터 학업연한을 6년제로 연장하였다. 1928년에는 15학급의 학생 689명, 교사 17명으로 늘어났다. 학교 이름을「해성(海星)」이라고 지은 이유는 성모님의 이름을 따서 바다의 별이라는 뜻이 포함된 것이다. 성모님께서 넓은 바다에서 환히 비추어 주는 별처럼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지혜를 비추어 줌으로써 장차 이 나라에 큰 별이 되어 달라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제 당시 천주교회에서 세우는 보통학교는 대개「해성」이라는 학교명으로 통일한 것이다.

포교 성 베네딕도회의 수녀들이 원산 해성학교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1926년 그리소스토마 수녀가 해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동년 2학기부터는 방과 후에 해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예비수녀로서 맨처음 교사직에 있었던 이는 서울에서 온 청원자 김 데레사였다. 동년 3월 14일에는 원산에서 제일 인정받는 일본인 여학교에서 해성학교 학생들의 음악 발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원산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어린이들의 음악발표회였다. 유 플라치도 노이기르크(Placidus Neugirg, 兪, 1894. 10. 7 - 1967. 9. 7)신부가 어린이들과 함께 협주를 하였으며, 제일 갈채를 받았던 것은 그리소스토마 수녀가 지도했던 '나비'유희였다. 손님들의 대부분은 학부모들과 교회를 옹호하는 이들이었으며 그 외에 교인들도 있었다. 프로가 끝날 때마다 박수 갈채가 대단하였다. 동년 10월 20일, 또다시 일본 여학교에서 연주회가 있었다. 찬조출연으로 서울에서 온 독일인 스투데니(Studeny)와 유 플라치도 신부가 바이올린과 피아노로 멋진 연주를 하여 많은 갈채를 받았다. 이런 행사로 인하여 해성학교는 원산 전역에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원산에서 해성학교를 찾는 어린이들 중에는 15세부터 19세까지 나이가 많은 청소년들도 더러 있었다. 왜냐하면 돈도 없고 학교도 부족하여 취학의 기회를 놓친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성학교를 세웠기 때문에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아울러 이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교리를 지도하려고 노력했다. 본당 소속의 사립 국민학교의 해성보통학교에서는 교장은 명예직으로 원산 본당 신부가 역임하였으며, 부 교장인 오 병주 선생이 행정 처리를 하였다. 오병주 선생은 부 교장으로서뿐 아니라 신 보니파시오 주교의 비서로 수도원의 땅 매매 등의 행정 처리도 담당하였다.

1921. 5 해성학교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24쪽)

1922. 3. 7 해성학교가 4년제로 승격됨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24쪽)

1926. 4. 1 해성학교는 6년제로 학업연한을 연장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24쪽)

해성학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6쪽)

해성학교는 1938년 4월 1일, 학교명을 '원산 해성 심상소학교(元山海星尋常小學校)로 변경하였다. 1937년 12월의 학교 현황을 보면 학교 대지의 총 면적이 3,542평, 교사 건평이 656평, 재적학생수(12학급) 734명, 직원수 14명, 졸업생수(10회) 807명(남자 542명, 여자 265명)이었다. 또한 1937년 당시 해성학교에서 10년이상 근속한 교직원은 오병주 부교장, 이와야 도메 선생, 이겸순(李謙順)선생, 최창희(崔昌曦)선생 등 네 사람이나 되었다.

1922년 3월 7일, 해성학교가 4년제 보통학교로 승격됨에 따라 정규교사 자격증 소지자만이 근무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비수녀와 서원수녀에 이르기까지 교사자격증의 소유자는 모두 해성학교에서 교직에 봉사하였다. 학교의 모든 행정도 맡아서 수행하며, 수도자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지녔던 오병주 교감은 수녀들의 교무실을 2층에 마련해 주고 필요한 사항은 전화로 연락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로써 수녀들은 수업시간 이외는 사무실에서 모든 사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적극적인 교육의 장이었던 해성학교가 시설면과 수준히 점차 높아짐에 따라 학생수가 종전보다 월등히 많아졌다.

이에 따라 교리반의 학생수도 점차 많아졌다. 방과 후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녀들에게 교리지도를 받았다. 서양수녀들도 입국 후 어느정도 언어소통이 가능하게 되면 교리반을 맡아 선교에 열과 성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1937년부터 강화된 일본어 사용이 이중적인 부담을 주었다. 일제는 1940년 이후 해성학교의 교리수업도 꼭 일본어로 진행시키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래서 서양인 수녀들에게는 더욱 큰 부담이 되었으나 그것이 선교에 대한 열정을 제어할 수는 없었다.

1940년 2월 11일, 일제는 창씨개명을 실시하여 학교의 모든 학적부와 출석부에는 2개의 성(姓)이 올려졌다. 또한 일제는 1941년 3월 31일, 국민학교 규정을 공포하여 소학교의 명칭을 국민학교로 바꾸고 국민학교에서 한국어 학습을 완전히 폐지하도록 하였다.

1938. 4. 1 해성학교의 학교명을 '원산 해성 심상소학교'로 변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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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자리 (장애아동 주간보호 시설) - 1998. 6월 햇빛자리 정은희님의 답신에 의거

장애아동의 양육으로 인한 부담을 경감시켜 수용시설에 대한 위탁이나 방임을 예방하여 장애아동이 가정안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장애아동과 그 가족을 지원하고자 1994년에 마포구 공덕동에 서울 가톨릭 사회복지회에서 설립하였다.

만약 한 가정에 장애아가 있을 경우 가족 전체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맞벌이를 해야 할 경우 장애아동을 위탁할 곳이 없어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로 인하여 맞벌이를 포기하는 등 가정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증가하게 된다. 또 발달 장애아들은 생활처리 능력과 정서적 안정 및 사회 적응력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올바른 사회 적응력을 길러 재활의 틀을 마련해 주는 조기 특수교육이 필요하다.

햇빛자리에서는 장애아에 대한 일시적인 위탁 보호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가정과 사회의 유대 관계를 강화시키고 시설 위탁에 대한 욕구를 완화해 주며 장애 아동들에게 적절한 특수교육을 제공하여 장애아동들이 지닌 잠재적인 능력을 최대한 개발하여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재활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현재 실시하고 있는 주간 보호 프로그램의 내실을 기하면서 점차적으로 클라이언트의 욕구를 파악하여 주말 프로그램을 강화해 나가고 장애아와 행동수정 프로그램을 첨가해 나갈 것이며 장애와 부모간의 친목과 연계를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장애와 부모의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해소시킬 수 있도록 돕고 장소 협소와 실외공간 부족으로 인하여 단기 보호 프로그램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나 실외 놀이터가 있는 장소를 확보하게 되면 자원봉사자를 이용하여 단기보호 프로그램을 실시할 계획에 있다.

만 3세에서 10세의 발달 장애아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시각 장애는 제외) 1998년 현재 30평의 규모에 (탁아실 1, 교육실 1) 하루에 평균 10-15명이 이용하고 있다.

1994. 1. 11 장애아동 주간보호시설 햇빛자리 설립

1995. 3 햇빛자리 내에 장애아동 특수조기 교육실을 신설

소재지 : 우 121-021 서울시 마포구 공덕 1동 111-209 3층/ 전화 02)719-3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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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해성병원 現代海星病院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9쪽)

1974년 여름 메리놀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메리놀회 미국 수녀들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울산 현대 조선소에서 부속병원을 세울 예정인데 가서 봉사할 뜻이 있는지를 문의해 왔다. 이에 수녀들은 지대한 관심을 갖고 그해 10월 5일 병원설립워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1975년 2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병원지대를 1차 답사하여 회사측과 설계를 의논하고 1975년 8월 1일 설립자와 수녀회와의 병원관리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다. 9월 15일에는 110병상 규모의 현대조선소 부속병원의 준공을 보게되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1972년 현대조선소를 시작한 후 3년만에 근호자 15,000명의 복지 및 그 가족들과 주변 주민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느꼈고 당시 조선소 내에는 진료소가 1개 있었으나 초창기 조선소의 어려움 속에서 사고가 잦고 사망자도 상당수 있었다. 응급환자 발생시 시내 병원까지는 16㎞ 거리에 약 1시간이 소요되어 구내병원 설치를 절감한 것이다.

수녀들이 이곳에서 봉사하게 되자 조선소 주민들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그 당시 울산 시민은 20만 이었으나 시내에 성당은 하나뿐이었다. 시내까지는 한시간이 소요되며 방어진에 공소가 있을 뿐 조선소 주위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약화되어 갔는데 냉담신자들이 먼저 수녀들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첫해 성탄미사에는 비가 왔고 경당은 좁아 만원이 되어 창문을 열어놓고 우산을 든 100여명의 신자들이 사랑의 잔치에 참여하는 노천미사가 되었다. 이듬해 2월 부터는 정원에서 본당 주임 오수영(히지노) 신부의 협조아래 주일미사를 봉헌하였다. 수녀들은 낮에는 병월에서 근로자와 간부를 차별함이 없이 고통받는 환자들을 따뜻하게 돌보고 밤에는 첫영세 교리반, 부인회, 청년회, 예비자 교리반, 레지오 마리애등 준본당과 같이 말씀의 선포와 증거로써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려는 노력을 하였다.

병원 개월 후 7년만에 맞은편 산을 깎아 1982년 8월 28일 현대식 병원이 준공되어 10월 1일에 개원하였다. 이때 조선소 당국에서 수녀들의 봉사에 대한 신뢰와 감사의 뜻으로 바다의 샛별이신 성모님을 기리는 '현대해성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하도록 하였다. 1985년에는 개원 10주년을 맞이하는 해를 계기로 하여 정주영 회장은 병원과 수녀원 사이에 있는 언덕을 깎아 10억 비용을 들여 1,000명을 수용, 주보를 성 바오로롤 하는 성당을 지어 부산교구에 바쳐 1986년 11월 1일 헌당식을 가졌다. 수녀들은 이방인 고장에 주님의 빛이 빛나게 하신 놀라운 섭리와 사랑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맡은 바 임무에 성실하며 주님의 복음전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74. 10. 5 현대해성병원 설립위원회 발족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9쪽)

1975. 5. 1 현대해성병원 건축공사에 착공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9쪽)

1975. 9. 1 현대해성병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9쪽)

1975. 9. 15 110병상의 현대조선소 부속병원 준공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9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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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장애인 종합 복지관 (교회와 역사 268호 16쪽) - 1997. 9. 25발행

1996년 2월 1일에 청주 교구에서 설립하였으며 보혈 선교 수녀회에서는 복지관의 전반적인 운영과 특수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의료·교육·직업·심리 등의 재활 사업을 통해 단순히 장애 치료에 그치지 않고 장애인의 잠재 능력을 최대한으로 계발하여 사회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부설 기관으로 장애인 재가 복지 봉사 센터를 운영함으로써 정신 지체와 정서 장애인은 물론이고 교통사고나 산업 재해로 중도에 장애를 입은 이들의 재활과 자립을 돕고 있다.

1996. 2. 1 청주 교구에서 혜원 장애인 종합 복지관을 설립하여 보혈 선교 수녀회에서 그 관리를 함 (교회와 역사 268호 16쪽) - 1997. 9. 2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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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 유치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33쪽)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보존케 하여 한국의 얼을 심어야 되겠다는 오기선(요셉) 신부의 취지에 따라 옛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사용하던 철공소를 유치원 원사로 하여 1937년 1월 26일 장면을 초대 원장으로 그해 4월 12일 개원식을 갖었다. 개원당시 정원에서 4명이 초과된 94명 2학급으로 원아들이 입학하였다. 그 후 많은 학부형들이 수녀들이 하는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어린 자녀들의 교육을 수녀들에게 맡기기를 원했기 때문에 혜화 유치원은 혜화동 본당에 분원이 설립된 이래 계속 수녀들의 보살핌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대표적인 유치원으로 성장하여왔다.

조화있는 인간성을 갖추기 위해 짜여진 교육과정 속에서 매주 종교담화 및 성서이야기 등을 시간표에 넣고 시행하며 좀더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 연령별로 구분, 재원반, 유치반, 유아반으로 구성하여 운영하고있다.

1937. 4. 12 혜화 유치원 개원식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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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천신학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5쪽)

1938년 11월, 해성유치원이 이전하고 빈민학교인 '호수천신학교' 에서 '성데레사 집' 아래층을 모두 인수하게 되자 가난한 아이들의 기쁨은 매우 컸다. 호수천신학교를 통해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국민학교의 교과과정과 교리를 가르치는 그리소스토마 수녀의 열성적인 모습은 이 학교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다. 350명이나 되는 호수천신학교의 학생들은 '성데레사 집' 아래층에 있는 3개의 교실에서 오전, 오후로 나누어 공부하였다.

30년대 초반까지 그리소스토마 수녀는 거리에서나 어디서든지 가난하고 방황하는 어린이들을 만나면 학용품을 마련하여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애국정신을 심어주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굳건한 의지를 갖도록 일깨워주었다. 그리소스토마 수녀의 확고한 교육 이념 하에서 호수천신학교의 어린이들은 한글을 터득하고 점차 신앙에 눈뜨게 되었다. 1926년 발족을 본 호수천신학교는 1941년 4월에 드디어 정식 국민학교로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이전까지는 호수천신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적으로 중학교의 입학 자격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호수천신학교가 정식 국민학교로 인가됨에 따라 이제까지의 특과 4년제 과정에서 6년의 정규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치게 되었다.

6년의 정규 소학교 과정을 마치게 되면 병원의 보조원으로 일 할 수도 있고 똑똑한 아이는 그 곳에서 실습하다가 간호원 자격시험도 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입학을 원하는 어린이들은 더욱 늘어갔으나 여러가지 여건 상 이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음이 그리소스토마 수녀에게는 무엇보다 큰 고통이었다. 호수천신학교는 정식학교로 인가를 받은 후에는 남학생도 입학시켰으나 늘 여학생의 수가 훨씬 많았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여자보다 남자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었고 여자에게 돈을 들여가면서 공부시키려는 열의가 없었기 때문에학비가 저렴한 이 학교에는 여학생들이 더 많이 입학했던 것이다.

1941년부터는 일본인 막달레나 수녀와 사베라 수녀 그리고 지원자 한 명이 그리소스토마 수녀를 도와 함께 일하였다. 호수천신학교의 학생수가 증가됨에 따라 매년 영세자가 속출하였기 때문에 수녀들에게 큰 보람을 안겨 주었다.

1926. 호수천신학교 발족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5쪽)

1941. 4 호수천신학교가 정식 국민학교로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음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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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동본당 (1305쪽)

서울대교구 소속본당. 주보는 그리스도왕. 1941년 중림동 성당의 관할 공소로 발족.

9대 주임신부인 이석충 신부는 1975년 분도학교를 설립하여 불우한 아이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75. 분도학교 설립 (1305쪽 홍제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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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동 성당 (나눔지 2호 3쪽) - 1976. 11. 22발행

가난한 이웃에게 봉사하는 교회로서 널리 각광을 받고있는 서울의 화양동 성당은 속칭 부자 성당이 아니다.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만 보고도 어떤 성당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6년전 가발공장으로 사용되었던 창고같은 건물을 수리하여 창설된 성당이다.

화양동 본당은 오늘날의 교회가 해야할 일을 바르게 인식하고 외형적인 면 보다는 내적인면의 충실에 힘을 기울여왔다. 주임신부인 길토마스 신부는 첫째로 자력으로 본당 내주기, 둘째로 불우 이웃돕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화양동 성당 주변에는 공장들이 많이있다. 그러므로 중학교 과정을 밟지 못한 여공들이 많으며 가정형편으로 중학에 진학 못한 소녀들도 많다. 이러한데 착안하여 화양동 성당은 중학과정의 야간학교를 운영하여 이미 3회의 졸업생을 내보냈다. 그리고 이 화양동 성당은 1973년에 둁;웃인 중곡동 신설본당에 1백만원을 새 살림에 보태주었고 어려움을 겪는 구의동 신자들을 위해 성당신설모금을 벌여 1976년 9월 말 현재 9백여만원을 모금했다. 이운동을 위해 길 신부는 자신의 한달 생활비 5만원을 4만원으로 줄여쓰면서 모금운동에 앞장을 서고있다. 특히 화양동 성당은 작년 2월부터 매달 마지막 주일을 "이웃돕기 주일"로 정하고 이 헌금을 불우한 이웃을 돕는데 사용하고 있으며 본당신부의 헌금이 큰 몫을 차지한다.

본당신부의 이와같은 표양은 전체신자들에게도 잘 받아들여져 신자들의 여러 모임도 매우 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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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성 (1923-1984) (1308쪽)

세례명은 베드로, 주교. 대전교구 제2대 교구장. 1923년 8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에서 출생.

1951년 3월 24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황 주교는 재직시 대전 성모병원과 문화회관, 교육회관등을 건립하였다. 또한 복자들의 시성운동과 성지성역화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평신도의 조직화에 전력하였다.

1984년 대전 성모병원에서 성직자의 모범을 보이며 61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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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본당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50쪽)

회령본당은 1926년 갈리스토 신부에 의해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에 창설되었으며 본당의 주보는 '성 야고버'였다. 1931년 5월, 을라프 그라프(Olaf Graf, 1900. 1. 16 - 1976. 12. 31)신부가 보좌로 부임했고 동년 11월 갈리스토 신부가 영흥본당으로 전임되자 을라프 신부가 2대 주임이 되었다. 을라프 시부는 1933년 초등교육기관인 명악학교를 개설하였고, 1935년 유명한 예술적인 회령 성당을 건축하였다.

회령의 주민들은 처음보는 수녀들의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곤 하였다. 함흥교구의 가장 북방의 전교지인 회령본당은 원산 본원에서도 기차로 10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었으므로 본원과의 연락이 어려웠다. 회령에서도 시약소를 개설하여 최리오바 수녀가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나 많은 환자들이 시약소를 찾자 인근에서 약방이나 의원을 경영하는 이들이 이를 시기하여 무면허 시약소로 고발하는 바람에 시약소는 얼마 후에는 하는 수 없이 문을 닫아야 했다. 시약소가 문을 닫은 후 최리오바 수녀는 명악학교에서 방과 후 교리지도를 맡아 하였다. 다니엘라 분원장도 늘 함께 교리지도를 도왔다. 정식 교사 자격증을 소지한 윤 마우라 수녀는 교직에 임하면서 본당의 제의방을 도왔다. 처음부터 회령본당의 수녀가족은 독일인 분원장 수녀를 도와가며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다.

1938년 10월 다니엘라 수녀가 폐결핵으로 본원으로 가게되자 후임으로 에와 수녀가 분원장이 되었다. 동년 11월 다니엘라 수녀는, 역시 폐결핵 초기로 병 중에 있던 장 스콜라스티카 수녀와 함께 병 치료 차 마닐라로 갔다. 1939년 6월 6일 겔트루드 링크 수녀가 휴양차 회령으로 가게 되었고, 이어 1940년 3월 26일에는 박 골룸바 수녀가 회령으로 가서 폐쇄되었던 시약소도 다시금 개설하게 되었다. 시약소는 수녀원 옆의 한옥 한 채를 사서 박 골룸바 수녀가 맡아 원할하게 운영하였으나 이번에도 주위의 시기로 인해 1940년 6월 말경에 다시 문을 닫고 말았다.

1933. 회령본당의 을라프 신부는 초등교육기관인 '명악학교'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50쪽)

1940. 3. 26 회령본당에서 시약소 개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50쪽)

1940. 6 시약소 폐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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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 가정여학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50쪽)

해방 이후, 북한에 있는그리스도교 계통의 모든 교육 기관들은 공산정권에 의하여 제약을 받거나 폐교되었다. 원산본당의 경우, 원산 본당의 탁 파비안 신부가 거리에서 소련군 장교에게 체포되어 7시간의 심문을 받고, 아무런 혐의가 없음이 밝혀진 후에, 그래도 주어진 한계내에서는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45년 9월, 주민들이 간절히 원하던 여성 교육 기관인 '효성 가정여학교'를 창설하였다. 원산의 해성학교 교사는 소련군 당국으로부터 그들의 자녀를 위한 국민학교와 기숙사로 징발되었으므로 수녀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하는 협소한 호수 천신학교 뿐이었다. 학교의 교장직은 이 보니파시아 수녀가 맡게 되었고, 재단 이사장직은 탁 파비안 신부가 맡았다. 학교의 창립자는 역사 탁 파비안 신부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이전부터 이 보니파시아 수녀는 한국 여성의 교육을 이상적으로 전개해 나갈 교육 기관 설립을 늘 꿈꾸어 왔었다. 그러나 공산 치하에서 이러한 교육적 이상을 실현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한때는 제 후밀리타스 수녀와 청원자 이 마리아가 교사로서 함께 활동하였으나 모든 교직원이 미 신자들이었고 더우기 공산 정권하에서는 신앙 안에서의 이상적인 여성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2년제인 이 가정 학교는 겨우 1회의 졸업생을 배출시킨 후 1947년 가을 폐교되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공립학교에 편입되었다. 이후 학교 건물은 수녀원에 통지도 없이 공산정권 관리의 양성을 위한 학교로 징발되었다.

1945. 9 효성가정여학교 창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50쪽)

1947. 효성가정여학교 폐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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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학원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893쪽)

대구본당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는 1898년 봄에 계산동 현 성당구내에 한국식으로 십자형 성당을 기공하면서, 현 문화관 앞 뜰 일대에 간이(簡易)학교인 해성재(海星齋)를 지어 본당사목과 더불어 신자 자녀들의 일반교육에 관심을 쏟았다. 1909년 4월 9일에는 이 해성재를 구한국 정부의 학제(學制)에 준한 학교로 발전시켜서 남자학교인 사립 성립학교(聖立學校)로 인가를 받았다. 1910년 11월 19일에 성립학교에 여자부(야간학교)를 병설하여 본당 보좌 소세(Hippoloyto Saucet, 1877-1921) 신부가 그 책임을 맡으면서, 이 학교운영을 위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고자 대구대교구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주선으로 1912년 8월 23일, 서울본원에서의 수녀파견을 승낙하는 통보를 받은 소세신부는 서둘러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10월 10일에는 네명의 수녀가 대구에 도착하였다.

방 스테파나 수녀는 교감, 강부길 테클라 수녀와 이 아녜스 수녀는 교사, 김순옥 마리 세실 수녀가 성당 제의실과 수녀원 살림을 담당하여 부임하였다. 이 때부터 수녀들이 성립학교 여자부를 전담하여 운영교육하였다. 오전에는 일반과목, 오후에는 교리신간을 절충하여 성탄절에는 첫영성체, 성신강림 대축일을 기하여는 견진성사를 받도록 준비시켰다. 그 후 성립학교를 해성학교로 개칭하였다.

수녀들의 헌신을 바탕으로 1924년에는 정식으로 인가를 받고 4월 1일부터 남자부와 여자부가 분리되어, 여자부는 무세(Germain Mousset, 文濟萬, 1836-1957) 신부에게 운영권이 넘겨져 많은 발전을 하게 되었다. 야간학교를 주간 4년제로 승격시킨 후 1925년 5월 15일에는 6년제로 발전, '효성여자보통학교'로 개명하여 설립인가를 받고 무세 신부가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29년 4월 부터 벽돌 2층으로 본관에 8개 교실을 신축하여 구 교사를 철거하고 운동장을 넓혔고 안으로는 교육의 내실화(內實化)로써 명문 사립학교로 손꼽히게 되었다. 동시에 학교 운동장 북서편에 벽돌 2층으로 수녀원도 신축하였다. 이 해 8월25일 대구수련원에서 수련과정을 마친 허 골롬바 수녀와 이원애 쌘뽈 수녀가 파견되어서 제의실과 살림을 맡았고, 1930년부터는 매년 대구수련원 출신의 수녀들이 학교, 유치원, 제의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학교교육의 알찬 진전과 해마다 증가하는 학급과 학생수에 대비하여 1936년 8월 15일 본관 남쪽에 2층 2개 교실과 북쪽에 2층 4개 교실이 증축되어 12학급의 교실이 완비되었다. 1938년 2월 9일 드망즈 주교가 별세하자 교장이었던 무세 신부가 주교로 임명, 성성되어 평신도 서정식(徐廷植)이 학교 교장 및 유치원장으로 취임하였는데 일본인들이 득세하던 시기였다. 그 해 6월18일 조선총독부에서는 일시동인 교육시책이라 하여 효성여자보통학교를 효성소학교(曉星小學校)로 개칭하게 하여 공사립의 차별없는 황국신민교육(皇國臣民敎育)을 실시해야 한다고 강요하였다. 당시에는 경상북도 내의 유일한 명문 고등학교였던 경북여고(慶北女高)합격률로써 출신학교를 평가하였는데, 효성소학교 출신 합격자들은 성실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배출시켜 명문 소학교로 손꼽혔다.

일본이 태평양 일대에서 득세하던 시기(1940년대)에는 강제적으로 일어상용(日語常用),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해야 했고, 교사수녀들은 수도복 차림으로 교단에 서지 못하고, 전시제복인 몬빼이에 전투모를 쓰고 군사훈련도 받아야 했다. 1942년부터 서울수녀들의 계산동분원을 위한 파견이 중단되었다가 1944년에는 32년간 효성의 터를 마련하고 헌신해 오던 강부길 수녀가 마지막으로 서울 본원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대구 수련원 출신 13명의 수녀들이 함께하는 분원 공동체가 되었다. 1944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적인 조치로 서정식 교장은 물러가야 했고 일본인 교장이 새로 부임하였다. 일본인 패전으로 막을 내려야 했던 1945년 막바지에는 학업을 전제하다시피 하고 폐물수집, 군마초뜯기 등에 1학년생들까지 동원되었고 고학년생들은 보리베기, 모내기, 퇴비작업에 거름통까지 지고 증산시책에 가담하도록 강요당했다.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후 서정길 신부가 효성국민학교 제 5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효성유치원은 계산동본당으로 운영권이 넘어 가서 원상 복구되었다. 1946년 8월, 대구교구에서 대건중학교 3학급 설립인가를 받아 여자부 1학급은 효성국민학교 교실을 빌어 개교하였다. 이것은 대구교구의 효성학원(효성여자중악교, 효성여자 고둥학교, 효성여자 대학교)의 출발점이 되었다. 분원수녀들 중 중등교사 자격증 소지자 3명이 대건중학교여자부 강사를 겸임하였다. 1948년 교구신부의 대 이동관계로 박정희 엘리사벳 수녀가 효성국민학교 제7대 교장과 유치원장을 겸임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효성학교 교사는 공군본부로, 해성학교 건물은 포로수용소로, 본당 강당과 교리실은 육군 정훈국으로 사용되었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학교 당국에서는 학생들을 이끌어 군의 주둔이 해결될 때까지, 산으로 들로 다니며 야외수업을 하였고, 중·고교 강사 수녀들은 대봉동에 가설된 천막교사까지 통근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남한 피난한 서울 수련원 자매들은 대구수련원에서 수련기를 계속하여 서원한 후 1953년부터 계산동분원에도 대폭 부임하여, 이후 계속 서울수녀들이 파견되는 반면에 대구수녀들이 점차적으로 타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러는 동안 전석재(全碩在 이냐시오) 신부는 대구교구에 여자대학을 세울 것을 구상하여 1951년 12월 8일 교구유지재단의 결의를 얻고, 1952년 4월 10일에 2년제 여자전문대학으로서 문학과, 음악과, 가정과 3과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우선 그때까지 남산동본당 성당이었던 현 효성여중 본관 건물을 이양받아 그 해 5월 15일에 개교식을 올리고 초대학원장으로 전석재 신부가 취임하여 이듬해 1953년 2월에는 2년제 전문대학을 4년제 대학으로 승력시켰다. 전계조 마리 앙즈 수녀가 가정과 교수로서 1953년부터 57년까지 4년간 봉직하였고, 1970년에 조정옥 쟌 데오판 수녀가 불문과 교수로 나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쟁이 끝난 1958년 11월 19일, 효성국민학교 교사를 차지했던 효성여자고등학교가 대구교구청 구내 야산부지에 교사를 신축 완공하여 이사하자 효성국민학교편에서는 10년만에 본교사로 환원하게 되었다. 1966년 3월 1일부터 효성국민학교에 남녀공학이 실시되어 해성국민학교 폐교 20년만에 신자가정의 남아들의 종교교육의 길이 다시 열렸다. 이즈음 교장신부와 교사수녀들의 잦은 이동으로 수녀들이 주관하던 효성국민학교의 전통이 깨어지고, 1971년 12월 1일 평신도 김시완 교감이 제13대 교장으로 취임함으로써 성직자 내지는 수도자 교장제도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수녀들도 차차 감축되어 현재는 두 수녀만이 교육사도직에 헌신하고 있다.

현재 효성학원에는 수녀3명이 본원에서 출퇴근하며 사도직에 임하고 있는데 효성여자대학에 2명, 효성여자고등학교에 1명의 수녀들이 각각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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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 병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복지시설) - 1998. 4. 28일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답신에 의거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 후암동에 복자의원을 개원하고 김순옥(아오스딩) 수녀와 손순분(요한) 수녀, 강신자(루시아) 수녀, 박순옥(뻬르뻬뚜아) 수녀를 파견하였다. 당시 복자수사원에 윤수사가 내과의사였으므로 윤수사가 진료를 담당하고 손순분 수녀와 강루시아 간호사일을 담당하였다. 병원수녀들은 청파동 본원으로 거의 미사를 다녔으며 때로는 후암동 성당에서 미사를 하기도 하였다. 어느 때는 창설신부가 병원에 와서 미사를 하였다. 당시 손순부 수녀와 박순옥 수녀는 아스피랑스였는데 겨울에 검정 무명두루마기를 입었다고 한다.

후암동은 부촌이기 때문에 적은 복자의원에 환자가 오지 않아 운영이 안되었다. 병원이 지대가 높아 물이 밤에만 약간나와 수녀들이 다라이와 동이를 이고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병원건물은 수도여고 방순경 교장의 집이었다. 방교장은 당시 전후가 되어 수녀원 경제가 어려운것을 알고 수도여고 응접실 커버와 커튼을 병원수녀들에게 주어 수녀들이 교장 사택에 가서 세탁하여 손질을 하여 수도여고에 갔다 주었다.

복자의원은 개원한지 약1년만에 문을 닫았다.

1956. 6. 6 후암동 병원 설립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1957. 후암동 병원 폐쇄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의 복지시설)

소재지 : 설립당시 서울 용산구 후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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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본당 興南本堂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5쪽)

흥남(興南) 본당은 함경남도 함주군 흥남읍 하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당은 1936년 4월에 건립되었다. 흥남 본당은 함흥본당의 공소로 시작하여 1936년 4월 성당의 건축이 완공되자 초대 본당 신부로 북청(北靑) 본당의 주임이었던 임 갈리스토 히머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으로 승격된 것이다. 주보는 성 펠리치타스(St. Felicitas)였다. 아담한 흥남 본당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황토 언덕 위에 오똑하니 솟아 있었으며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하였고 전경이 아름다웠다.

초대 본당 신부인 임 갈리스토 신부는 본당 구역 내에 빈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해성학원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앞섰으며 이를 통하여 많은 선교 활동도 펴 나갔다. 제 2대 본당 신부로는 구대준(具大俊, 가브리엘 ; 1912. 음4. 27 - 1950. 5. ?) 신부가 부임했다. 1942년에 구 대준 신부는 보좌신부를 거치지 않고 원산교구의 삼목 본당(三木本堂) 중의 하나인 흥남본당의 주임 신부로 곧바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구 대준 신부는 나라 사랑의 뜻이 투철한 사제로서 일제 말의 사설 학원 폐지 압력에도 굴치 않고 해성학원을 운영하였으며 1944년에는 사제관을 내놓아 대건의원(大建醫院)을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을 시도하였다.

구 대준 신부는 사제관인 붉은 벽돌 이층 건물을 병원 청사로 내놓고 자신이 공경하던 한국의 첫번 사제인 김 대건의 이름을 따서「대건의원」을 개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 다음 구대준 신부는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선교 수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겔트루드 원장수녀는 이러한 구 대준 신부의 갸륵한 선교 정신에 감복하여 요청대로 선교 수녀를 파견하여 1948년 5월 20일, 흥남분원의 설립을 보게 된 것이다. 흥남 본당에는 수녀원 건물이 따로 없었으므로 수녀들은 학원으로 사용했던 교실 한칸을 칸막이로 막아서 생활하였다.

흥남 본당에는 열심한 신자들이 많아서 선교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으므로 본당 사목은 곧 활기를 띠게 되었고 특별히 본당의 강 술호(姜述鎬, 요셉) 회장은 수녀원의 일과 본당의 일을 적극적으로 돌봐주었다.

그런데 1949년 1월 25일, 구대준 신부는 한국의 북단인 회령과 계림의 본당 신부로 전임되었고 제 3대 본당 신부로 독일인 어 게롤드 신부가 부임하여 왔다. 구대준 신부는 이러한 시기에 독일인 신부를 북쪽으로 보내는 일은 위험한 일이라고 제의하고 위험한 북쪽 전교지에 부임을 자청하였던 것이다.

수녀들은 생활의 보탬을 위해 돼지를 기르기도 하였는데, 본당 신자들이 돼지먹이를 모두 갖다 주었다. 이렇듯 본당 신자들이 수녀들을 관심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므로 수녀들 또한 특별한 사랑으로 신자들을 대하였다. 1949년 1월 새로 부임해온 어 게롤드 신부는 포교 성 베네딕도회와 같은 소속이었으므로 가끔 수녀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곤 하였으며 늘 화목한 분위기에서 흥남 본당의 수녀 가족은 즐겁고 보람된 선교 활동을 펴 나갔다. 그러나 1949년 5월 14일 공산당에 의해 본당이 폐쇄되었으므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이 흥남 본당에서 선교한 것은 겨우 1년 남짓한 기간이었다.

1936. 4 흥남본당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5쪽)

1944. 흥남본당의 구대준 신부는 대건의원을 설립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5쪽)

1949. 5. 14 흥남본당은 공산당에 의해 폐쇄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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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원 (행려자) (대구 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 1998. 4월 희망원의 답신에 의거

대구광역시립희망원은 대구 광역시 산하 부랑인 복지시설로 1958년 12월 31일 설립되어 1980년 4월 1일 대구광역시로부터 재단법인 대구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에서 수탁운영을 받아 부랑인 복지사업을 실천한지 17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희망원은 가톨릭 교회의 사랑과 평화의 이념을 바탕으로 현사회속에서 자립생활을 못하거나 무의무탁한 부랑인들을 수용보호하여 조기에 사회복귀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부랑인들에게 이들의 특성에 맞는 전문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가족찾기 상담, 장애극복을 위한 치료, 생활의 정상화를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정상적인 조기 사회복귀를 위하여 자활사업과 노임소득사업을 통한 기술습득, 취업알선 등의 재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서로돕자"라는 원훈 아래 부랑인의 시설입소, 수용보호 및 퇴소등의 합리화로 보호수준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며 부랑인 각자의 특성에 따라 분리수용을 함으로써 전문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자활사업을 내실화하여 자립 가능한 자는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조기복귀 시킨다. 시설을 개방하여 지역사회의 자원으로 활용한다.

1958. 12. 31. 대구시립희망원 설립 (대구 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1980. 4. 1. 대구시립희망원 재단법인 대구 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에서 수탁운영 (대구대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소재지 : 우 711-830 대구광역시 달성군 회원읍 본리리 85/ 전화 053)632-1229/ 모사전보 053)635-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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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집 (결핵요양원) (나눔지 23호 8쪽) - 1984. 3. 15발행

1979년 불우결핵 환자들을 위한 조그만 보금자리가 용문에 탄생되었다. 이후 뜻을 같이하는 많은 가족들의 관심과 나눔으로 발전하고 있다. 1984년 현재는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공동운영방식은 1983년 5월 23일 희망의 집의 운영위원회가 공식적으로 구성되고 정관이 확정 됨으로써 명문화되었다.

1979년 가을 경기도 용문 근처에 처음으로 요양원 설립에 착수한 이래 많은 은인들의 나눔으로 1984년 현재는 약 43,000평의 산록위에 환우들의 거처 2동, 수녀원 1동, 성당 1동, 피정의 집 1동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환우들을 돌보는 일은 1980년 3월 부터 성가회 수녀님 3분이 상주 하시면서 담당하고 계신다.

1979. 용문 무료결핵요양소인 희망의 집 개설 (나눔지 23호 8쪽) - 1984. 3. 15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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