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십자가 현양 축일

요한 3,13-17; 14/09/14

사람들은 살기 위해 무엇인가를 외부로부터 취합니다. 육체적인 생존을 위해 먹을 것, 입을 것을 취하고, 정신적인 안정과 사회 안에서의 적응과 구성원들간의 관계성 정립 그리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역사적인 변천 사항들과 당대 주변 사람들의 사조와 사상, 문화 등을 살피고 도움이 되는 것을 취하면서 삽니다.

현대 사회 사람들은 사는 데 필요한 뭔가 실속이 있다는 정보를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얻으려는 가운데 현대는 정보의 홍수 속에 놓이게도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요치 않은 정보들로 혼선을 이루기도 하고 또 필요한 정보들을 너무 많이 얻다 보니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또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 몰라서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 많은 정보들이 보여 주고 제시해 주는 세상의 가치들이 오히려 사람들을 허망하고 공허하게 까지 만들 때도 있습니다. 누구나 한다고 해도 다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소수의 되는 이 외에는 오히려 많은 수의 사람들이 허탈감과 위축감 그리고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근원적인 면에서 볼 때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이 영적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물질적인 현세에 살고 있지만, 정신적인 영역도 있으며, 영적인 세계에서 왔고 영적인 영역에도 속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 제단 위의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예수님은, 우리가 보다시피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물질적인 무엇인가를 더 얹어주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은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십자가에 못으로 결박 당하여 묶여 있는 죄인이며, 뭔가 자기 시대에서 실현하고자 했지만 실패하여 저버려진 루저이며, 세상 누가 봐도 가련한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3-24)

하느님은 왜 인간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 인간에게 더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재벌2세나 왕세자나 장군의 아들로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으시고, 연약한 아기로 예수님을 보내셨고 급기야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하셨습니까?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우리의 구세주로서 우리의 기도를 받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계속 그분이 매달려 있는 십자가와 그분을 결박하고 있는 못의 무게를 더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분을 십자가와 못으로부터 자유스럽게 풀어주며 부활 승천케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은행장이나 대통령이나 장군으로 오시지 않으셨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 주려고 오신 것도 아니며,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해방시키고 구원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같은 처지의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면서도, 우리처럼 죄를 짓거나 죄로 인해 죄와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굴레에 사로잡히거나 굴복하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처음 만드실 그 때처럼 사랑을 간직한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지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셨고, 급기야는 그 사랑의 표징으로 우리에게 당신 생명인 몸과 피를 내어주시고, 그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우리가 지은 죄와 우리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면서도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당신 생명을 담보로 내 놓으신 예수님에게, 새생명을 주시고 부활시켜 주셨고, 결국 지금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우리 구원의 주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필리피인들에게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 2,4) 라고 지적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필리 2,6-11) 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그 죄값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요구하셨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잘 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돌아가셨고, 주 예수님은 죽음에 그치지 않고 그 공로로 부활하여 오늘 우리 앞에 주님으로 오셨다고 증언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히브 9,28) 라고 말하며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속죄 제물이었음을 명확히 밝히고, 마지막날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러 다시 오실 것을 예언합니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이 모습을 ‘주 하느님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예견한 바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이사 53,4-5.12)

예수님의 대속 제물과 구원의 희생제사 개념은 구약 레위기의 속죄제사와 대속제물에서 옵니다. 곧 사람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그 죗값으로 동물을 속죄제물로 대신 바치는 제사를 드리는데, 신약의 인간 구원을 위한 속죄제사와 제물이 바로 주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며, 그로 인한 인간 구원의 표징을 부활에서 발견합니다. 주 하느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가난한 탄생’과 ‘십자가상 희생제사’ 그리고 영생을 향한 ‘성체성사’가 우리 믿음의 열쇠입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죄에 빠진 인간을 구하시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믿고 생명을 바쳐 우리 인간을 구하신 아들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믿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하늘과 땅이라는 구원의 하느님 나라로 이끄시는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온전히 구원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비신자 여러분과 신자 여러분, 오늘부터 여러분이 주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세상에 낳으시고 생의 순산 순간마다 나를 지켜주시고 함께해 주셨는지를,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주 예수님이 오늘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성령께서 지금 나를 어떻게 이 성당에 들어오게 하시고 어디로 인도하고 계신지를 깨달아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의 생애와 주님 구원의 방법론을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라고 그의 기도문,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 선언하였습니다.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에게서 구원의 주 하느님성을 체험으로 발견하고 믿음으로써 주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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