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현양의 밤



루카 9,23-26; 등촌3동 103위 한국순교성인 성당; ’24/09/07

오늘 순교자 현양의 밤에는 시복시성 운동을 하고 있는, 우리 서울대교구의 전신인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이신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소 주교님’을 기리기로 합시다.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Barthelemy Bruguiere) 주교님은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카르카손 교구의 레삭 도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자작농이었던 프랑수아와 테레즈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카르카손으로 가서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마치고, 1815년 12월 23일에 사제로 서품되고, 대신학교의 교수로 4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가르칩니다.

아시아의 먼 땅에 가서, 이방의 민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1825년 9월 17일, 33세의 나이로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갑니다. 4개월 반 동안 선교사 소양 교육을 마치고, 1826년 2월 5일 시암 선교지, 오늘날의 태국으로 떠나, 1827년 6월 4일 방콕에 도착하여, 시암 대목구 선교사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브뤼기에르 신부님이 시암 대목구에서 활동하던 무렵, 교황청에는 조선의 교우들이 보낸 편지가 도착합니다. 유진길과 정하상 등이 쓴 편지에는, 조선에 성직자를 보내달라는 간청이 들어 있습니다. 포교성성 장관이던 카펠라리 추기경은 조선 교우들의 정성에 감동합니다. 그래서 조선 선교지를 북경 교구에서 분리하여, 대목구로 독립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조선 선교지를 맡아줄 선교회를 구할 수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카펠라리 추기경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서한을 보내어 조선을 맡겠느냐고 문의합니다. 하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역시 인적 및 물적 자원이 부족하고, 또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는 이유를 들어 완곡하게 거절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접한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교황님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편지를 보냅니다.

첫째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돈이 없어서 못 간다. 당장 뱃삯이라도 있어야지 조선 선교하라고 하면서 어떻게 맨손으로 가라 하느냐?!’라고 하지만,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돈이 필요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마어마한 부자의 아들도 태어났을 것이다. 그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어도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를 본받아 복음을 전한다는 이들이 어떻게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 선교를 하고자 함에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대에게 진짜 없는 것이 무엇인가? 돈이 없는가? 신앙이 없는가?'"

둘째로 “‘보낼 신부가 없다.’라고 하지만, 이것은 말은 된다. 그렇지만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열두 제자를 거느리셨다. 지금 사도로서 봉사하는 사제수가 몇 명이냐, 열두 명은 더 되지 않느냐? 그럼, 지금 예수님 시대보다 많다. 억지소리 같지만, 어떤 지역에 신부가 50여 명이 필요한데 현재 6명밖에 없다. 그런 처지에, 조선에 보낼 신부가 어디 있느냐고 말하겠지만, 그래도 6명 중 1명은 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44명이 모자라나 45명 모자라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 조선에는 한 명도 없다. 조선의 평신도 편지를 보았다면,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

셋째, “‘도대체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가느냐?’고 하지만, 대단히 부끄러운 이야기다. 그들은 사제도 없는 곳에서 이미 순교를 하며 목자가 있는 곳을 찾아, 그 어두운 곳에서 편지를 보냈는데, 목자라는 사람들이 양떼의 편지를 받고, 그게 어디인지 몰라서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찾아가야 한다.”

넷째, “‘조선에 갈 수 있을지 그것도 문제이고, 조선은 박해를 하고 있어, 신부를 보내봐야 붙잡혀 죽는데 그곳을 어떻게 보내느냐?’라고 하지만, 조선에 가서 손해 볼 것 하나도 없다. 사제가 양떼를 만나면 사목을 해서 좋고, 가서 죽는다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아서 좋다. 내가 한 말이 절대로 맞다. 우리는 지금 백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라, 신앙이 모자라고 애덕이 모자라는 것이다. 내 말이 안 맞아도 좋으니, 실제로 조선에 사제 한 사람이 가야 하지 않느냐? 한 사람도 갈 사람이 없으면 나라도 가겠다.”

당시 시암 대목구의 장상이던 플로랑 주교는 자신의 후임으로 삼았던 브뤼기에르 신부의 조선선교를 향한 열정에 감동하여, 그를 조선에 양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포교성성에 편지를 보내, 새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가는 것에 동의한다고 알립니다. 카펠라리 추기경은 자신이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으로 선출되자, 1831년 9월 9일 조선 대목구를 신설하고, 초대 대목구장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는 칙서를 반포합니다.

당시 브뤼기에르 주교는 말레이 반도의 작은 섬 페낭(Pinang)에서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칙서 반포 1여 년 후,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7월 25일 파리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자신이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되었음을 알게 되자, 바로 조선으로 출발합니다. 8월 4일 페낭을 떠나 싱가포르, 마닐라를 거쳐서,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포교성성 대표부를 찾아가서 교황 칙서를 건네받습니다. 12월 19일 무렵 마카오를 출발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북경으로 가서 조선 교우를 만나고자 합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1833년 3월 1일 복안현 정두촌에 상륙하여, 복건 주교관에 기거하면서 북상 계획을 세운 뒤, 7월 20일 다시 배를 탔고, 절강성 북부 해안에 상륙하여 운하를 따라서 내륙으로 들어간 다음, 남경 근처에서 양자강을 건넙니다. 7월 31일부터는 육로로 중국 대륙을 종단하기 시작합니다. 섭씨 40도를 훌쩍 넘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절강성에서 산서성의 경계까지 뻗은 화북 평원지대를 걷고 또 걸어서, 8월 13일에는 황하를 건넜습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드디어 산동의 어느 교우 마을에 간신히 도착합니다.

1개월 정도 앓아누웠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서 오는 교우들을 만나기 위해서 북경으로 들어가겠다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북경에서는 박해가 일어날지 모르니 일단 안전한 산서 지방으로 가라는 연락이 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1833년 10월 10일에 산서의 태원부 기현 구급촌이라는 작은 마을로 가서, 이탈리아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1년 후 1834년 9월 22일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조선 교우들과 연락을 취하기에 훨씬 쉬운 북경 근처의 서만자로 갑니다. 10월 8일 서만자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교우들과 연결되었고, 조선 교우들은 반드시 조선으로 모시겠다고 약속합니다.

1835년 10월 7일 마침내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서만자를 출발하여, 조선 교우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만주 봉황성 부근의 변문으로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10월 19일 마가자 교우촌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다음 날 저녁에 갑자기 몸의 이상 증상을 느낍니다. 페낭에서 만주까지 이어진 3년의 여정으로 누적되었던 과로가 뇌출혈을 일으킨 것으로 짐작됩니다. 아무 것도 마땅히 먹을 수 없어서 몸무게가 1/3로 줄었던 가운데에서도, 주교님은 “나는 가야 한다. 내 양떼가 기다리는 곳으로, 내가 가야 할 곳이 얼마나 멀고 얼마나 험난한지 모른다. 단 하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당신이 내게 맡기신 당신 양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임무임을 안다.”라고 각오를 다집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그렇게도 그리던 조선 선교의 꿈을 눈앞에 두고, 10월 20일 저녁 8시 15분경에 43세로 선종합니다. 마가자 교우촌의 산기슭에 쓸쓸히 묻혀 있었던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유해는, 1931년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으로 옮겨져, 현재 용산 성당 성직자 묘역에 모셔져 있습니다.

동료 사제들의 아무런 도움이나 배려도 받지 못하면서도,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고 바랐던 조선 선교의 소명과 꿈을 채 펼쳐보지도 못하신 채, 우리나라를 바라보시면서 생을 마치신 주교님의 선교적 열정과 애정을 기리며, 우리 다 같이 마음을 모아 큰 소리로 시복기도를 바칩시다.

브뤼기에르 초대 교구장 시복시성 기도문

모든 성인들의 덕행으로 찬미와 영광 받으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성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성인성녀들을 공경하여 그 표양을 본받게 하셨나이다.

조선 선교를 자청한 뒤 온갖 고난과 질병을 극복하면서

오로지 조선에 들어가 선교 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온 삶을 봉헌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로에 의지하여 청하오니

저희들이 거룩한 순교정신을 본받아

신망애 향주삼덕에 뿌리를 박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로로 저희를 이 세상에서 보호하시며

저희의 마음속 지향을 들어 허락하심으로써

(잠깐 침묵 중에 기도의 지향을 아뢴다.)

당신 권능을 드러내시고 저희가 희망하는 대로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가 복자와 성인들 대열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한국의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순교자 현양의 밤



(가해) 마태 16,21-22; ’23/09/03

우리 나라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한국순교성인과 아울러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122위 순교복자 이외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계십니다. 전년도에 우리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시복을 추진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순교자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근·현대 신앙의 증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분들은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와 주로 덕원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돌아가신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와 동료 37위 순교자분들이십니다. 이분들은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한국전쟁 중에 순교하셨습니다. 특별히 올 해 한국전쟁 발발 73년을 맞는 해에 이분들을 기억한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제가 10여년 전에 서울교구 신부님들과 함께 독일 수도원으로 사제 피정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독일 성 베네딕토회 오틸리엔 연합 수도회는 1884년 독일 보이른 지역 15개 수도원 소속 1,806분의 수도자들이 설립하였습니다. 성 베네딕도회의 영성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라는 이상을 표방하며, 자신들이 파견된 해당 교구에 가서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교 및 예술 활동 등을 통해 문화적으로 교구 전체의 사목을 도왔습니다.

그 수도원은 아프리카 우간다에 선교사를 파견하다가, 1909년 2월 당시 서울대교구장 뮈텔 대주교님의 간곡한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사우어 신부등 2분의 선교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이분들은 지금 서울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즉 서울 대신학교가 들어서 있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백동)에 처음 자리를 잡고 1911년 수도원을 세우고, 1913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10년에는 ‘숭공기술학교’를 세워 목공, 칠공, 원예 등 7개 작업분야를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1911년에는 ‘숭신사범대학’을 세웠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1921년 사우어 신부를 원산교구의 주교로 성성하고, 1927년 원산교구 자치를 위임하자, 우리나라 베네딕도 수도회는 함경도 덕원으로 수도원을 옮기고 신학교도 세웠습니다. 1925년부터는 투칭의 포교 성 베네딕도회 수녀들의 협조를 받아 활발한 사목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28년에는 원산교구로부터 독립 설립된 연길지목구에 1922년부터 수도원을 세워 활동하기 시작한 연길 베네딕도 수도원은 1931년 11월부터는 스위스 캄의 올리베타노 수녀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아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 1934년 8월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고, 같은 해 9월 5일 브레허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성성되고, 1937년 4월 연길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주교로 성성되었습니다.

1940년 교황청으로부터 덕원 수도원 자치구는 덕원 면속구로 승격되고,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명하여 12개의 본당과 89개의 공소 신자 11,000명, 신부 34명, 수녀 33명의 교세를 갖추게 되었고, 1946년 연길 대목구는 교구로 승격되어 중국교회로 소속을 달리하게 되었으나 공산당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1945년 해방 후 덕원에 있던 베네딕도 수도원은 소련군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1950년 10월에는 독일 신부 6명과 우리나라 신부 5명이 처형되었고, 사우어 아빠스 주교를 비롯한 신부, 수도자 18명이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하고, 많은 수의 수사 신부님들이 외국으로 추방당합니다.

1951년 7월 피난길에 나섰던 한국인 수도자들은 대구 주교관으로 이사해서 공동생활을 시작하였고, 1951년 9월 베넥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는 교황청의 재가를 받아 미국 뉴튼 수도원에 체류하던 이성도 디모테오 신부를 덕원 면속수도원과 함흥교구장 서리로 임명하여 1952년 6월 경북 왜관읍 왜관 성당과 낙산 성당에서 왜관감목대리구장으로 착좌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1954년에는 한국에서 추방되었던 비테롤리 신부와 21명의 수도자들을 왜관 수도원으로 다시 파견하여, 2007년 현재 사제 48명을 비롯한 종신 서원자 108명등 139명의 수도자들이 본당과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 사회사업과 문화 예술 및 피정의 집 등에서 활동하고 있고, 2009년 9월 25일에는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아울러 1949년부터 1952년 공산치하에서 덕원과 연길, 보이른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 및 함흥 교구 소속으로 순교하신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6위’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수사들을 파견했던 독일의 오틸리엔 수도원 소속의 뮌스터 슈바르작 수도원 대성당의 입구 왼쪽에는 덕원 수도원에서 순교하신 독일과 우리나라 신부, 남녀 수도자, 신학생 38위를 모신 소제대가 있습니다. 저는 신부님들과 함께 피정을 가서 독일 수도원 성당에 모셔져 있는 그 소제대를 바라보면서 부끄럽고 감사하고 창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까지 와서 헌신적으로 봉사했지만 정작 저를 비롯한 한국 교회에서 제대로 기억해주지도 못하고 있는데 반해, 그곳에선 먼 나라에까지 가서 순교한 이들을 위해 소제대를 마련하고, 그분들 한 분 한 분의 영정을 마련하여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나라 신앙의 순교 선조들에 이어 피와 땀을 흘려 한국 교회의 자양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25)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분들의 시복을 기리며,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기로 합시다.

아무도 특별히 봐주지 않아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기억해 주지 않아도, 오직 한 분 주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불태우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평신도들 그리고 선교사분들께 감사와 존경 그리고 희망을 보탭니다. 당대 사람들에게 인정은커녕 버림받고 배척받으며, 이상한 사람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심지어는 죽음으로 제거당한 분들이 오늘 우리에게 성인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가끔 복음 선교와 인류 사회 형제자매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는 희생에는 소극적이면서도, 인류 공동체에서 인정받고 부각되는 영광은 부러워합니다. 오늘 형제들에게 기억되기 위해 이리저리 애써도 내일이면 잊혀지고 말지만, 오늘 부각되지 못해도 복음에 대한 열정과 형제들의 구원을 위한 희생으로, 어머니처럼 두고두고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 먼 훗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납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순교자 현양의 밤




루카 9,23-26; 수색 예수성심 성당; ’19/09/21


우리 나라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2위 한국순교성인과 아울러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122위 순교복자 이외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계십니다. 특별히 지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의 순교자분들의 시복을 추진중입니다. 이분들은 우리 나라 초대교회의 증거자들에서부터 병인박해의 순교자분들이십니다. 오늘은 그분들 중 몇 분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벽(李蘗) 요한 제례자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덕조’, 호는 '광암'으로, 1754년 포천 화현리(현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무반집안에서 난 이벽은 학문에 더 뜻을 두었고, 광주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살던 나주 정씨 집안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된 뒤에는 정약전·약용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문을 닦았습니다. 그는 안동 권씨와 사별하고, 해주 정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이벽은 1779년 겨울 천주교리에 대해 토론하며, 서울 수표교(현 서울시 종로구 관수동과 중구 수표동 사이) 인근으로 이주하여, 1779년 경에는 경기도의 주어사에서 김범우와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베드로 등과 천주교리를 연구하였습니다.

이승훈(李承薰) 베드로는 본관이 ‘평창’이고, 자는 ‘자술’, 호는 ‘만천’으로 서울 만석방의 약현(현 서울시 중구 중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위의 나주 정씨와 혼인하여 25세인 1780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784년 3월 북경에 가서 예수회의 그랑몽(양동재[梁棟材] 요한)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귀국합니다.

1784년 겨울 베드로는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권철신의 아우인 권일신과 정약전·약용 형제에게 한국 최초의 세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벽의 세례명은 요한 세례자, 권일신의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의 세례명은 요한 사도였습니다. 이벽 요한 세례자의 활약으로 서울에서는 홍낙민 루카, 최창현 요한, 김험우 토마스, 충청도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와 전라도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경기도의 권철신 암브로시오 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무렵 이벽의 집에서 갖던 신앙 공동체 모임을 김범우 토마스의 집인 명례방(明禮坊)으로 옮깁니다.

1785년 봄 어느 날 명례방에서 요한 세례자의 주도 아래 집회를 갖던 중, 범법 행위를 단속하는 형조의 관원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도박꾼들의 모임으로 여겨 수색하였고, 그곳에 모여 있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형조로 압송하고, 그곳에 있던 교회 서적과 성물들도 모두 압수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중인 신분인 집주인 김범우 토마스는 형조판서의 문초를 받으면서 “천주교에는 좋은 점이 아주 많으니, 천주교를 그르다고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하며 신앙을 증언한 뒤 충청도 단앙으로 유배되어 기도생활을 하다가 주님께 돌아가셨고, 양반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이승훈 베드로는 가족들에 의해 배교를 강요당했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가족의 배교강요를 받다가 모진 고초 속에 31세의 나이로 주님께 돌아가셨습니다.

1791년 천주교 신자들의 제사 폐지 문제와 관련한 진산 사건으로 이승훈 베드로는 체포되어 관직을 잃었고, 1795년 주문모 신부님의 입국이 발각되자 예산으로 유배를 다녀왔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한국천주교 우두머리로 잡혀 서소문에서 참수형을 받으셨습니다.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791년 진산사건으로 체포되어 형조에서 “천주교에서의 가르침이 도리에서 벗어나는 사악한 가르침이 아닌 이상 어찌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하다고 배척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셨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순교하셨고, 형님 권철신 암브로시오는 1801년 신유박해 때 65세의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내포의 사도로 일컬어지던 충청도의 이존창 루도비코는 권철신의 제자였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로 공주감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홍산에서 전교활동을 하다가, 1795년 서울에서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을 만난 후 다시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을묘박해를 피해 내려온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기도 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공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왕족인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 순교자가 계십니다. 송 마리아는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부인으로 며느리 신 마리아와 함께 양제궁에 사시다가, 송 마리아의 아드님이자 신 마리아의 남편인 상계군 이담이 정치적 상황에서 역적으로 몰려 강화로 유배된 후에 두 분이 함께 사시다가 천주교를 믿게 됩니다. 1794년 주문모 신부님의 입국으로 세례를 받고,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서 미사를 드리고 강론을 들으며 신앙을 키워나갔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보 신부님은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서 양제궁으로 옮기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발각되어 정순왕후의 명에 따라 사약을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황사영 알렉시오는 15세인 1790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약현의 따님 정명련(난주) 마리아와 결혼하셨습니다. 그는 “천주 신앙은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이라고 확신하며 신앙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김한빈 베드로와 제천 배론 김귀동의 집으로 피신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방책으로 북경 주교에게 백서를 작성하여 황 토마스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으나 발각되어, 12월 대역부도죄인으로 판결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으로 26세의 일기로 순교하셨습니다.

평양의 김큰아기 마리아는 의원을 하던 김진에게 재혼하여 1863년 서울로 이주하여 약현에 거주하다가 1864년에 남편 베드로는 그 이듬해에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중에 남편 베드로가 평양에 치료를 갔다가 체포된 후 마리아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매질 아래 죽어서 한결같이 천주의 가르침에 따라 즐겁게 좋은 곳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서울 우포도청에 자수하여, 32세의 일기로 양화진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황해도 재령군에 살던 안여집 요한 사도는 슬하에 6남 2녀를 두시고, 성품이 순량하고 정직하며 찬찬하고 의리가 있어 이웃 사람들에게서 군자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1866년 병인박해가 발발하고 포교들이 쳐들어온다고 하자 공소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킨 후, 처자식과 함께 묵주 기도를 하며 포교들을 기다렸다가 포교들과 점심을 차려먹고 해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습니다. 그는 문초중에 “나는 하늘을 공경하고, 영혼을 구하는 데 힘썼으며, 나라를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도리를 실천해 왔는데, 어찌 이것이 죄가 될 수 있느냐?”고 항변하며 “이미 나의 목숨을 천주를 위하여 바치기로 작정하였소. 천주는 만민의 왕이요, 만민의 아버지이신데, 어찌 백성이요 자식된 자로서 그분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죽기로 결심했으니, 속히 처형해 주시오.” 라고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1866년 12월 44세의 일기로 배지사형을 받아 순교하셨습니다.

평민 신분인 심능석 스테파노는 횡성에서 태어나 1838년 20세 때 천주교리를 배우고 샤스탕 정 신부님에게서 세례를 받고, 페레올 주교님에게 견진성사를 받고 성사생활을 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로 도피생활을 하다가 1868년 강릉 계촌에서 체포된 후, “우리는 결박하지 않아도 도망갈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집에 가서 남에게 진 빚을 갚고 모든 일을 처리하게 한 뒤에 재산을 적몰하십시오.”라고 청하여 일을 다 처리한 후, 서울 좌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당하다가 49세에 순교하셨습니다.

충청도 홍산 태생의 강영원 바오로는 부모를 따라 입교하였고 부모가 홍산에서 순교하자 전라도 용담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나의 소망은 ‘박해를 당하게 되었을 때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입니다. 지존하고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수난을 받으셨으니, 나같이 비천한 사람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르지 않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했었고, 1871년 신미박해로 체포되어 신발도 없이 눈길을 걸어 나주로 압송됩니다. 옥중 생활에 지쳐 세상 복락을 생각하게 되자,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학 되는 것은 유감을 입은 탓이니, 이 유감을 물리치고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자.”고 서로 권면하며 박해를 이겨내다가 곤장 30대를 맞고 1872년 백지사형을 받아 50세의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이분들의 시복을 기리며,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기로 합시다.




순교자 현양의 밤




(마르 8,31-35) 공항동 성당; 01/09/22/20:30


어느 나라의 한 대통령이 "정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바라지말고, 여러분이 정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주십시오."라고 했단다.

실제로 우리의 삶을 고단하고 척박합니다.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우리가 한층 더 부족함을 느낍니다. 갑작스런 실직과 빚으로 집과 재산을 다 넘겨 버리고 살 길이 막막한 이들도 있고, 세끼 먹을 것이 없어서 끼니를 걱정하는 이들까지 있어 조금이라도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면 더욱 더 주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주님, 저희 집안을 지켜주십시오."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면, 실제로 하느님께서 더 주신다 하더라도,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사람들에게 과연 남과 나눌 정도로 남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없다. 흔히들 거지는 받아먹기만 해서 줄 줄 모른다고 하고, 언제 줄지 몰라서 한 번 줄 때 다 먹어 버린다고 한다.

내 것을 다 채우고 나서 남과 나누려면 줄 것이 없다. 아니 내 것도 모자란다. 저축도 쓰고 나서 남은 것을 하려면 없다고 하지 않는가? 먼저 띄어 놓고 나서 써야 그나마 저축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과부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우리가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 들으면 그냥 돌아설 수 없다. 내가 하고자 하고 얻고 싶은 것을 조금만 참고 조금만 늦추고 한 단계 낮추어야만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다. 가족이 어떻게 사는가? 아버지가 벌어온 것을 온 식구가 나누지 않는가? 친척끼리 어떻게 사는가? 조금 여유있는 형제가 여유없는 형제를 도와서 살지 않는가? 나는 왜 한 평생 아내와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는가? 가족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곧 주님의 마음이다. 먹여 살리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를 세상에 내려보내셨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한 번쯤 되돌아본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예수님께 내려준 사명이 세상 인류를 구하라는 것이었다면, 우리에게 내려준 사명은 무엇일까? 우선 일차적으로 가족이고 친척 친지들이다. 그런데 그것은 굳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하는 일이다. 아니 그것은 동물적인 본능이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를 이뻐해 주고 아낀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가족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니 가족을 자기가 직접 낳고 기르는 자식만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로마 5,7-8)

물론 최소의 범위로 자기 자식만이라도 확실히 챙길 수 있다면 다른 이들에게 짐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마르 8,31) 주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서약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람의 일만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에는 옛날처럼 예수님을 믿는다고 죽이는 사람들이 없다. 즉 일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던 안 믿는다고 하던 어떤 혜택이나 불이익도 없다. 오히려 오늘날엔 예수님을 믿는 이가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기도 많이 하고 성서 많이 읽고 미사 자주 드려서 어떻게 사는가? 보통 사람과 어떻게 다르게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통신앙보다 정통행실이 더 중요한 시기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 8,34ㄴ)고 말씀하신다.

교회 안에서도 오늘날엔 과거처럼 직책을 서로 맡으려고 하지 않고 안 맡으려고 떠민다. 과거엔 겸손하게 거절해야 했지만 오늘날엔 자기가 십자가로 삼고 짊어져야 한다. 자기가 조금만 노력하고 희생하면 할 수 있고 할 줄 알면 할 수 있다고 응답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설사 할 수 없는 일이라도 그것이 기술직이 아닌 다음에는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착한 일을 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이제는 그리스도 신자로서 자기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공동체와 이웃에게 응답하며 사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5-38)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순교하는 길은, 남 모르게 더욱 많이 그리고 깊이 성서를 읽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길이며 자기가 찾은 그 뜻을 자신의 현실에 적용하는 길이 진정 순교하는 길이다. 누가 보던 보지 않던, 누가 뭐라고 하던 말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해야겠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주님의 목소리를 따르는 일이 순교하는 길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요한 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