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일




(다해) 마태 11,2-11; 16/12/11


제가 수색 예수성심 성당에 부임한지 이제 100일이 지났습니다.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김 신부님이 중고등부 교사 MT를 가시느라고 제가 초등부 어린이 미사를 땜빵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미사 시간에 36명의 어린이가 참석했습니다. 제가 20여년전 보좌신부 시절에 약 100여명의 어린이가 있는 본당에 부임하여 세 달 만에 200명으로 늘어 두 개의 강당 중에 한 개의 강당을 쪼개 3개의 교실로 만들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살다가 지금 여기 수색 예수성심 본당의 이 큰 성당에서 36명의 어린이와 미사를 봉헌하니까 도무지 적응이 안 되고, 마음 속으로 ‘이러다가 내가 은퇴하기도 전에 서울대교구가 반으로 쫄아드는 것 아냐?’ 하는 위기감이 들면서 정말 머리 털이 쭈삣쭈삣하게 설 정도로 아주 심각하게 다가왔습니다.

언젠가 독일 수도원 순례를 간 적이 있습니다. 독일의 대도시에 가서 카페에 들어갔는데, 높은 벽에 십자가도 걸려있고, 성모상도 있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도 있었습니다. 성전을 화려하게 지었지만 신자들이 다 빠져 나가서 카페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왜관 분도 수도원을 파견한 모원인 오틸리엔 성당은 지방 중소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우리 성당보다 훨씬 큰 성당인데도 주일날 미사가 9대나 되고 신자들이 꽉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20년 후 제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 있을지 모르지만, 혹시 병석에 누워있으리라고 가정하고 지금 같이 사는 김 신부님이 병문안을 오셔서, 제가 “김 신부님, 우리 같이 살던 수색 성당 지금 어떻게 되었어?” 라고 물을 때, “수색 성당이 지금 1층은 카페가 되었고, 2층은 디지털 미디어 시티의 촬영장이 되었습니다.” 라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해할까 하는 아찔한 생각을 해봅니다.

아니면 정 반대로 김 신부님이 제게,“수색 예수성심 성당이 서울의 변두리이긴 하지만 신자들이 열심하고 신심이 깊어서 그래도 그 동네에 복음의 산실로 잘 크고 있습니다.” 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정말 제가 편안하게 눈 감고 주님 대전에 올라갈 수 있을 듯싶습니다.

그것은 비단 20년 이후의 일이 아닙니다. 내년 상반기에 뉴타운 재개발로 우리 성당 신자 5,100명 중에 1,200명이 이사 갑니다. 제 임기 중에 1,700명만 남고 다 이주하게 됩니다. 이사 가신 분들은 다시 돌아 오시겠죠, 아니면 새로 이사오신 분들이 채워주시겠죠.

이사 가신 분들이 다시 돌아오느냐 안 돌아오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이 문제입니다. 단순히 신자 수의 증감은 이전과 재개발로 충당될 것처럼 보입니다만, 정작 본질적인 문제로 다시 돌아간다면, 36명의 어린이 미사 참례자수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풀어야 합니다.

지금 주일학교 고등부 2학년이 5명입니다. 그 아이들이 5년전 그러니까 초등부 6학년 때에는 20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5년새 1/4이 남았습니다. 지금 초등부 6학년 어린이는 채 10명이 안 됩니다. 통계적으로 비례해 본다면 1.5명이 됩니다. 주일학교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런가 하면, 지금 고2가 앞으로 5년 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내 디딜 때 우리 성당에는 몇 명이 나오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이들이 앞으로 20년 후에는? 통계 숫자로만 보면 우리는 망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 좌우를 바라보면 신자들이 성당에 이렇게 꽉 차는 것으로 보이지만, 20년 후 본당의 모습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도 고령화 되었다고 하는데, 그나마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부르는 우리 세대는 거의 성전에 나와 앉아 있을 수 없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고령화된 교우 연령층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성전에 36명의 어린이가 자라나 성인까지 다 합쳐 지금 1,500여분 미사참례자의 수가 1/4로 줄어 380여명만 미사를 참례하게 되는 비극이 초래될지 모릅니다.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죠?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을 들어 답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이사 26,19 이하) 그러시고는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6절) 라고 부언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변하겠지요.

어차피 우리는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만큼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울지 않는 아이에게는 젖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노력하는) 자를 돕는다.”는 영어 표현도 있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들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안에 드러난 뜻을 찾고 그 뜻을 가정과 지역 사회에서 실현하며 살면, 우리는 더욱 더 신실하고 충실한 주님의 교회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주일미사를 9대씩 드리는 건실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의 교회로 남아있지 못하게 되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이 성전 건물마저 카페와 촬영지로 바뀔 수 있다는 위기감과 자괴감에서 헤어나지 못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바로 ‘선교와 복음선포’, ‘그리스도교 공동체 양성’, ‘이웃사랑’입니다. 이 삼박자가 교회를 주님의 교회답게 하고, 우리가 교회로 사는 길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메시아나 다른 힘있는 어떤 이가 와서 우리를 구해주시리라고 믿고, 성전에 모여 기도만 하는 모습은 마치 감나무 아래 누워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과도 같을 수 있습니다. 다른 누가 대신 와서 우리 교회를 변화시켜 주지 않습니다. 갑자기 어디서 신자들이 우리 본당에 떼로 몰려오지도 않습니다.

대부분 본당의 통계를 보면, 우리 본당도 마찬가지로 전출입자들은 상쇄되고, 결국 예비신자를 권면하고 교육하여 세례 받은 수만큼 그 다음 해의 신자 증가수가 됩니다. 양보다 질이지만, 질이 좋으면 양도 늘게 됩니다. 적극적으로 선교하지 않으면, 쉬는 교우 수만큼 점점 줄어듭니다.

역사 이래 언제나 위기지만, 오늘 위기의 상황에 접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성전에 나와 주님을 찬미하며 기도하면서 하느님 대전에 신자로서의 맞갖은 삶을 살 때, 우리 교회는 주님의 교회로 남을 것이고, 양적 질적으로 튼실해 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성당이 우리 입맛에 맞도록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성당에 나오는 우리가 변함으로써, 우리가 가고 싶은 성당, 우리가 되고 싶은 교회 공동체를 우리 스스로 꾸미고 만들어 나갑시다. 우리 각자와 소공동체 단체와 소공동체 구역반에 주님을 초대하고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가 기도하고 찬미하는 여기 이 수색 예수성심 성당 내에 이루어지도록 노력합시다.

아울러 오늘 대림 제3주일이자 자선주일을 맞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사람끼리만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이미 성당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성당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신들만을 위한 친교나 기호클럽이거나 압력단체나 이익단체로 전락되지 않겠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의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하나되고 그 사랑이 넘쳐 흘러 우리에게 은총으로 내려오듯, 우리 교회 공동체의 사랑이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로 흘러 넘쳐 복음화의 물결이 퍼져나가도록 합시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5-6)




대림 제3주일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 (Misericordiae Vultus)2




(다해) 루카 3,10-18; 15/12/13


오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제정한 자선주일에, 지난 주일에 이어 자비로우신 주님을 기리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9-16항을 보겠습니다.

9.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본성을, 온갖 반대를 물리치시고, 연민과 자비로 끝까지 용서하시는 아버지로 보여 주십니다.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과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32 참조)에서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특히 용서해 주실 때에 더욱 기뻐하십니다. 자비는 모든 것을 이겨내는 힘이며, 마음속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고 용서를 통하여 위로를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라고 하시며,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 일뿐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됩니다. 거듭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럼에도 용서를 통해 우리는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증오와 분노를 버리고, 폭력과 복수를 포기해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고 기쁨에 넘쳐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10. 자비는 교회 생활의 토대입니다. 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자비와 연민이 가득 찬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의 나약함과 어려움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용서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희망을 갖고 미래를 바라보게 해 줍니다.

11.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오늘날 자비라는 개념이 무색해 보이고 거북하게 느껴진다고 전하시며, “교회는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할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비가 창조주와 구세주의 가장 놀라운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

12.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 그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나서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 본당과 공동체, 단체와 운동, 곧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든지 자비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13. 이 희년에 우리는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합니다. 이는 힘들지만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삶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14.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우리에게 순례의 단계를 보여 주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7-38).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요청하십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제 형제자매를 심판하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심판할 때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내면 깊숙한 곳을 보십니다. 질투심과 시기심에서 나오는 말은 얼마나 해롭습니까! 어떤 사람들을 험담하는 것은 그들을 곤란한 입장에 빠지게 하고 그들의 명예를 떨어뜨려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합니다. 우리가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는 우리의 편파적인 판단과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어떤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자비를 표현하기에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용서하고 자신을 내어 주라고 요청하십니다. 곧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의 도구가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음을 깨달아 우리도 남에게 관대하게 대하라고 요청하십니다.

15. 오늘날 이 세상에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희년에 교회는 이러한 상처들을 돌보아 주라는 부르심, 그들의 상처에 위로의 기름을 부어 아픔을 덜어 주고 자비로 감싸 주며 연대와 세심한 배려로 치유하여 주라는 부르심을 더욱 강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모욕적인 무관심이나 우리의 정서를 마비시키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습관과 파괴적인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합시다! 눈을 뜨고 세상의 비참함을, 존엄을 박탈당한 우리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외침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도움을 주어 그들이 우리의 현존과 우정과 형제애의 온정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 되고, 우리의 위선과 이기심을 감추려고 기꺼이 빠지는 무관심의 장벽을 모두 함께 무너뜨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를 더 많이 누립니다. 자비의 육체적 활동은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며,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자비의 영적 활동은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에 따라 우리가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지,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 주었는지,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었는지,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었는지,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었는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마태 25,31-45 참조). 또한 절망으로 몰아넣고 흔히 외로움의 근원이 되는 의혹에서 벗어나도록 우리가 도와주었는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수단을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이 무지를 극복하도록 우리가 도와주었는지, 외롭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는지,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용서하고 폭력을 낳는 온갖 분노와 증오를 떨쳐 버렸는지, 하느님께서 한없이 우리를 참아 주신 것처럼 그렇게 인내하였는지, 우리의 형제자매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 드렸는지 우리는 대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작은 이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바로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고문당한 이들, 상처 입은 이들, 채찍질 당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과 난민들의 몸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가 알아보고 만지며 정성껏 돌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한 말을 잊지 맙시다. “우리의 삶이 저물었을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

16. 루카 복음 4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나자렛 회당의 선포는 말과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고, 현대 사회의 새로운 노예살이에 얽매인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자신 안에 갇혀 있어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다시 볼 수 있도록 하고, 존엄성을 빼앗긴 모든 이가 다시 그 존엄을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제정한 자선주일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이 증언해야 하는 신앙에 대한 응답으로 다시 드러나게 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로마 12,8).




대림 제3주일 2014년 자선주일 담화문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나해)요한 1,6-8.19-28; 14/12/14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이 크고 작은 기다림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참된 기다림이란 그렇게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넘어 개개인의 실존 안에 이미 현존하는 희망의 신비입니다. 우리 신앙의 빛과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벌써 오셨음’과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림 시기의 제3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대림환의 세 번째 촛불을 밝혔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대림 제3주일을 자선주일로 제정하여 모든 교우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조건 없는 사랑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구세주 예수님에 대한 참된 기다림을 준비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초대는 구세주 오심이 그러하듯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며, 모든 교우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마땅히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당신 생명에 참여시키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 ‘갤럽’이 금년에 발표한 ‘2013 세계 삶의 질 지수 순위’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 86%는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삶의 질이 아시아 최하위 개도국 수준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절대 빈곤층은 약 41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절대 빈곤층은 가구의 월수입이 정부가 설정한 2014년 3인 가구 기준 132만 원의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이웃들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보호가 필요한 최저생계비 이하의 모든 국민에게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여러 보고서들은 기초생활수급자 수가 지난 2011년부터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고 보고하고, 홍보합니다. 그러나 이는 탈 수급자의 증가가 기초생활수급자의 소득 증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2010년 사회복지통합관리망을 도입함에 따라 수급자의 소득 및 부양 의무자 관계 파악이 용이하면서 수급 탈락자 수가 증가한 것입니다. 빈곤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에서조차 밀려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가난한 이웃들이 기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모든 자살은 타살이다.”라고 합니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국가나 정부의 몫으로만 한정지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마태 22,34-40 참조).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선하심을 증명해 주는 하느님의 행위를 본받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묻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라고 되물으십니다. 우리의 이웃은 율법교사의 답변처럼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그러므로 이웃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은 우리의 신앙 실천입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보잘것없는 나눔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거대한 빈곤 앞에 우리의 나눔 실천은 보잘것없는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 물 한 방울이 거기에 없다면 대양은 그 물 한 방울 만큼 채워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크기나 숫자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마더 데레사).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결단이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 희생입니다. “저는 아무런 희생도 따르지 않고 아픔도 없는 자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이웃 사랑의 나눔 실천은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2코린 8,9 참조) 우리 가운데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대림 시기를 보내는 회개와 보속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결과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는 말씀을 실천하는 여러분 모두가 풍요로운 대림 시기를 만들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2014년 12월14일, 자선주일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김 운 회 주교



대림 제3주일

(가해) 마태 11,2-11; 13/12/15

최근 천주교 의정부 교구는 교구 설정 10주년을 앞두고 ‘2013 의정부교구 신자들의 신앙의식과 신앙생활’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도시와 농촌이 결합되어 있는 도농복합교구인 의정부교구는 전체 신자의 33.3%인 6만4452명을 표본으로 1만4580명의 신자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지난 12월 1일자부터 가톨릭 신문과 평화 신문에 발표된 설문조사 내용을 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묻는 물음에 ‘건강’을 꼽은 신자가 43.5%이고, 그 다음이 ‘가족’ 33.5% 그리고 ‘종교’가 15.6%라고 응답함으로써 신자들의 세속주의 경향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신자들은 삶에서 '신앙'을 중요한 가치로 두지 않으면서도 '신자답게 살지 못한다는 죄의식'을 많이 갖고 있으며, 4명 중 3명이 교회 가르침과 사회가 상충할 때 자신의 평소 가치관과 세속 기준을 따르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신자들의 신앙성숙을 위한 새 복음화가 교회의 핵심 사목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교구가 현재 안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신자들의 소극성’이라고 답한 신자가 33.3%이고, 14.8%가 ‘평신도 양성 부족’을 꼽았으며 그 원인은 60.8%가 평신도에게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교구가 지금 가장 주력해야 할 분야’는 29%가 ‘신자들의 신앙성숙’을 꼽았고, ‘교구가 현 단계에서 전교를 위해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분야’에서도 58.8%가 ‘신자들의 신앙성숙’이라고 답함으로써, 신자들이 성숙한 신앙에 목말라하면서도 교회 안에서 갈증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신자들의 답답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신자들의 신앙 투신도를 묻는 설문에는 응답자의 87.3%가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또 83.3%가 '부활ㆍ성탄 판공에 반드시 참여하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이에 비해 '매일 아침ㆍ저녁기도와 삼종기도를 바치고 있다'는 응답은 37.6%에, '매일 꾸준히 성경을 읽고 있다'는 응답은 28.8%에 그쳤습니다. 이는 신자들이 의무준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신앙을 강화하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복음화 열의에 대한 물음에 31.0%가 '비신자에게 입교를 적극 권면하고 있다', 25.0%가 '냉담자 회두를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답해 낮은 선교 의식을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번 설문 응답자들이 의정부교구의 핵심 신자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신앙 투신도와 복음화 열의가 이러하다면 나머지 70%에 이르는 신자들은 이보다 훨씬 더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의 신앙 투신도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신앙교육이 강화돼야 할 것으로 분석됩니다.

'신자의 신원'에 대한 물음에는 93.9%가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79.7%가 '평신도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답했지만, '사회교리를 잘 알고 있다'고 응답한 이는 23.7%에 그쳤습니다. 이는 신자들이 자신의 신원에 대해 높은 만족도를 보이나 정작 가톨릭 평신도로서 세상에서 사도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74.7%가 교회 가르침보다 세상의 잣대로 판단하고, 84.4%가 삶의 근본 문제보다 세속 가치를 더 따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의 자부심은 평균 5점 만점에 4.68점을 주어 매우 높은 만족을 보이면서도 생명의식을 묻는 ‘사형제 유지’, ‘안락사 허용’, ‘인공유산 허용’, ‘인공피임 허용’ 등 네 항목 평균이 5점 만점에서 3.57점으로 비교적 높은 동의율을 보여 교회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강론 중 사제의 사회, 정치 관련 발언’에 대해 평균 10점 만점에 4.68점을 매겨 찬성보다 반대의사가 더 높아 사회교리에 대한 교육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사목의 중요변수’를 묻는 설문에서 ‘본당규모’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 본당 규모가 작을수록 공동체 의식을 비롯해 신앙의식, 공동체 참여 등이 모두 높게 나타났습니다. 의정부교구는 신자들의 전인격적 새복음화가 요구된다고 평가하면서, 그 해결 방안으로 교구와 본당의 모든 사목과 연결되는 새로운 맥락의 '소공동체 운동'을 제시했습니다.

설문 조사를 총괄한 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장 맹제영 신부는 “자본과 물질의 힘이 신앙을 압도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한 신앙인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고 있다.” 라며, “한국 교회 다른 교구들의 상황도 의정부 교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때 신자들에게 올바른 가치관, 신앙관을 심어줄 수 있는 지속적인 교육이 절실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삼성동 본당 신자 여러분, 의정부 교구 신자들의 현실이 우리와는 어떤 면에서 같고 어떻게 다릅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세례자 요한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마태 11,7-9)

그렇다면 오늘 이 물음을 우리에게 던져 봅시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성당에 오는가?’

‘우리는 무엇을 청하러 성당에 오는가?’

단순히 육적인 건강과 현세적인 가족의 입신양명을 추구한다면 굳이 성당에까지 나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스포츠 센터, 문화관, 복지관 등의 건강교실을 찾아야 할 것이고, 주일날 미사를 드리며 주님을 찬미하러 성당에 오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등산과 야외 놀이를 통해 건강을 다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당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단순히 신문들에서 평가한대로 자신의 건강과 가족 그 다음이 종교라는 식의 외적인 분석보다는 건강과 가족에 대한 여러 가지 접근 방식 중에 신앙적인 접근으로 분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테면,

‘신앙이 우리 자신의 건강과 가족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신앙이 어떻게 자신과 가족에게 건강하고 안전한 생활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까?’

등의 질문을 통해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다른 사회인과 달리 자신의 건강과 가족을 어떻게 유지하고 이끌어야 할지를,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일을 신앙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상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사항, 사고방식, 영감의 원천,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변화시키고 바로잡는"(현대의 복음선교 19항)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마태 11,10)



대림 제3주일

(다해) 루카 3,10-18: 2012/12/16

세례자 요한은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에게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라고 하고, 세리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13절) 라고 하고, 또 군인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14절) 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때는 물론이요, 오늘을 사는 이 세대의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이 가르침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어떤 이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일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불편한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고, 늙어서까지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 힘 있고 기회 있을 때, 한 몫 단단히 잡아야 겨우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길 정도로 불안한데, 스스로 죄 짖지 말고, 그나마 가진 것마저 남과 나누어 살라니? 그는 무엇을 믿고 이런 소리를 할까? 도대체 곧 오실 분은 무엇을 어떻게 하실 분이시기에 이런 준비를 시킬까?’ 사뭇 궁금합니다.

"그분(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그래서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고린 8,9) 또한 주님께서는 두 개의 목숨을 가지고 계시다가 하나는 이웃을 위해 하나는 예수님 자신을 위해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우리를 구하기 위해 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지만, 이를 아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다시 생명을 주어 되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신앙이며, 우리도 주님을 따라 형제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치면 우리도 마지막 날 주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부활하리라는 희망의 신앙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가족과 특히 형제들과 나누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없었고, 또 먹을 것, 입을 것 모두를 나누면서 살아왔습니다. 커가면서 혈연과 친지 등의 이름으로 우리의 것을 내놓으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는 심지어 빼앗기고 착취를 당하기까지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좋게 말해서 강요된 나눔 속에서 살아왔다고나 할까요? 그러면서도 우리가 나누면서 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나누어서 없어지고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시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고, 이 희망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고 확인된 것입니다.

오늘 스물아홉 번째 자선주일을 맞아, 특별히 주님의 부활신앙을 간직한 우리는 오늘의 어지럽고 불안한 세상에서도 우리를 나눔의 신비 안으로 초대하고 계시는 주님께 응답하며 나아갑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김운회 주교는 자선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선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이며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참사랑 안에서 행하는 자선은 자신의 삶과 신앙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합니다.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합니다. 또한 자선은 속죄의 길(토빗 12,9; 루카 3,7-11 참조)이며,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길(신명 15,7-11; 잠언 22,9; 루카 14,12-14 참조)이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길(마태 19,16-21; 25,34-40; 로마 2,7; 갈라 6,7-10 참조)입니다. 이렇게 자선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선 행위를 옥새처럼 귀하게 여기시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아끼십니다(집회 17,22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적극적으로 자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값싼 동정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참다운 자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자유와 품위를 존중하면서 겸손하게 실천해야 합니다(마태 6,3-4 참조).

오늘의 현실은 따뜻한 가슴을 지닌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9-37 참조)을 많이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의 눈으로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마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사랑의 발걸음으로 다가가 아낌없이 가진 바를 나눕시다. 사랑을 향해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맙시다. 그리하여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줍시다(루카 10,36-37 참조).

대림 시기는 우리 가운데 힘없고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은혜로운 때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을 맞이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참다운 자선임을 깨닫고 그 준비를 잘할 수 있도록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어서 오셔서 우리가 나누고 빼앗겨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주님 사랑으로 채워주셔서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시고, 풍요해진 사랑으로 더욱더 형제들에게 나를 봉헌하며 살게 해주소서. 아멘.



대림 제3주일(제22회 자선주일 담화문)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요한 1,6-8.19-28; 05/12/11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여기저기서 살기 어렵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삶의 고단함에 지쳐 보살핌이 필요한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계층간의 경제적, 정서적인 격차를 점점 악화시키는 자본주의의 냉엄한 현실은 여전히 우리를 무한경쟁의 구조 안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거대한 흐름에서 각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모습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선사받은 선한 모습을 가리는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악 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과 빛으로 오실 구세주 예수님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2. 우리 시대의 특징을 표현하는 하나의 말이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곧 ‘소비하는 인간’입니다. 일상화된 소비의 삶은 개인과 가정의 사회성을 형성하며 유지하고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반면, 소비주의, 쾌락주의와 물질주의로 물든 소비문화는 우리를 병들게도 합니다. 거리의 진열대마다 가득 쌓인 물건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광고나 홈쇼핑 채널은 더 편리하고 새로운 제품을, 더 많이 가지라고 유혹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팽배해 있는 ‘소비주의의 희생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도한 소비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하는 병적인 현상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공동체는 소비문화를 복음화 하는 일에 깨어있는 의식으로 적극 대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필요한 부분에서 필요한 만큼의 소비는 하되, 창조세계와 이웃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과소비를 삼가는 청지기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시고, 참 행복과 기쁨, 자유를 주심을 알기에 물질에 너무 얽매이는 부자유한 상태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3.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우리 공동체와 신앙의 근본 가치들을 무력화시키는 경제제일주의에서 파생된 소비주의에 물든 우리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실천적 메시지입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창조물이 조화롭고 행복하게 공존하길 바라십니다.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길 바라십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서로 나눌 때만 가능합니다.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나눌 수 있는 척도가 아니라, 나눔은 모두가 할 수 있고 모두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배려를 받고 계신 당신은 이웃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작은이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작은이들은 주위에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아픈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무시당하는 사람, 사고를 당한 사람, 실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 외국에서 돈 벌러 와서 차별받는 사람, 삶의 희망과 의욕을 잃은 사람,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이, 노약자 등등 다양한 모습의 작은이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조그만 사랑과 관심만 있다면 어려움에 처한 이들도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오늘 자선주일에 우리들의 사랑과 정성이 모아지면 교회 공동체가 좀 더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대림시기가 가난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기임을 상기하면서, “음식, 의복, 주택, 의료, 직업, 교육 등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없고, 재난이나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며, 추방을 당하고 옥고를 겪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그들을 찾아내어 열성적으로 보살피고 위로하며 도와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한다.”(평신도 교령 8항) 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도 나눔의 정신을 살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인적인 투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교회 공동체가 공동선 증진과 이웃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정성어린 나눔을 부탁드립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는 일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될 때 하느님께서 훨씬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가까운 곳에 있을 사회복지 기관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시길 당부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는 말씀대로 가톨릭교회가 나눔의 선행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세상에 희망의 씨앗을 심는 주님의 도구가 됩시다. 사랑과 빛으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며 말입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2005년 12월 11일

한국 카리타스(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유 흥 식 라자로 주교



대림 제3주일

(가해) 마태 11,2-11; 04/12/12

한국 노래 송창식의 ‘사랑이여’라는 노래의 가사 중에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촛불하나 이렇게 밝혀 놓으셨나요?”라는 내용이 있다. 자신의 마음에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상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가사이기도 하고,, 우리 같은 구도자들에게는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목말라하는 주님께 향한 우리의 갈망을 표현한 듯하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과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를 던지고 있다. 우리가 믿고 따르려고 애쓰고 있는 예수님이시라는 분이 우리의 모든 갈망과 원을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신가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 그분은 진정 우리 삶의 주인이시요, 주님이신가?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닦고 준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왔다. 그러나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마지막을 앞두고, 정녕 예수님께서 자신이 목숨을 바쳐 준비하고 기다려온 바로 그 구세주이신가하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묻게 한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3)

요한에게 있어 이 문제는 자신의 생명과 생의 의미가 걸린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과연 내가 제대로 준비했었는가?

아니면 내가 준비한 것은 다 허사로 돌아가고 또 새로운 분을 기다려야 하는가?

이제 내가 죽어야할 운명인데, 내 생애를 바쳐 주님만 오시기를 추구해왔고 그것을 위해 그동안 수고했던 노력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며 진정 허송세월만 보낸 것인가?

이제 내가 죽어야할 운명인데, 내가 준비하고 기다리던 구세주를 뵈옵지도 못하고 그냥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제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제자들을 통해서라도 내 사명을 계속 실현해야 할 터인데 과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가?

아니면 진정 내가 제대로 주님을 준비했고, 자기 사명을 다 수행하며 기쁘게 하늘나라로 가는 것인가?

그 간절한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 진다.”(4-5)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 61장 1절에 나타난 구세주의 표상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들어 자신이 메시아이며 그리스도 곧 구세주이심을 설명하신다.

실제로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 3장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한 세례 사건 이후 4장에서 첫 제자들을 부르시고 갈릴래아 전도여행을 시작하시면서, 5장부터 7장까지 산상 수훈을 가르치신 다음에, 8장부터 9장까지의 기적사화에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시고, 중풍에 걸린 백인대장의 하인을 고쳐주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내 쫓으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 하혈병을 앓는 여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회당장의 딸을 다시 살려주시고, 두 사람의 소경과 벙어리를 고쳐주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구해주신 자신의 일을 통해 자신이 구세주이심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과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6)

그리고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증언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성서에 ‘너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하신 말씀은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7-11)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말라기 3장 1절을 인용하여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 세례자 요한을 제시했고, 그가 훌륭하게 그의 사명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증언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11)

그렇다면 이제 이 복음을 우리의 현실 안에서 바라보기로 하자.

세례자 요한의 경우를 우리에게 비추어 보면서 자문하기로 하자.

우리는 무엇을 바라면서, 수고하고 있는가?

우리가 간절히 추구하면서, 애써 수고하는 일이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주님께서도 원하시는 일인가?

우리가 간절히 추구하면서, 애써 수고한 일이 결실을 맺어 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이 일이 주님께서 즐겨 받아주고 계시고, 기꺼이 우리의 일을 축복해주시고 함께해주시고 있다고 믿는가?

이러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올바른 목적과 성실한 노력으로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이”로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대림 제3주일(제20회 자선주일 담화문)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7)

2003/12/14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입니다(에페 2, 4).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필립 2, 6-7)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우리에게 완전히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행적, 생활 양식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 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최초의 메시아 선언(루가 4, 18-21)은 가난한 이들, 묶인 이들, 눈 먼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에게 하느님 은총의 해를 선포한 것으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를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아로서 당신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충실히 증언하고 증거하셨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 보이셨으며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요구는 예수님 가르침의 본질이며 복음 정신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요구를 두 가지로 표현하셨는데 하나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 35)는 새 계명을 통해서였고, 또 하나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 7)라는 참된 행복선언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한 생애동안 철저히 인간을 위하여 사신 삶을 통하여 말씀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몸소 호소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비를 보여 준 대상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 사실은 나자렛 회당에서 최초로 하신 말씀으로 선포되었고(루가 4, 18-19),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루가 7, 22)과 당신 제자들 앞에서(루가 14, 12-14)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하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루가 2, 7),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다가 가셨을 뿐만 아니라, 몸소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사시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세상에 보여주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실제적으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입니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자선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이자 그리스도인 소명의 본질입니다. 하느님 자녀들의 모임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이웃과 인류 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증거해야 할 필요성을 각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되었고 메시아로서 그분이 수행하신 사명 전체 속에 계시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명과 모습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선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육화시키며,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새롭게 되돌려 받는 참된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 7).

4. 그러므로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선을 끊임없이 독려하여 왔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통하여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다양한 자선사업을 구체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한국 교회 역시 선교의 자유를 얻은 이후 줄곧 이 땅에 고통 받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수많은 자선사업을 해 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교회는 본당의 복지활동을 통하여 고통 받는 이들을 돕고 있으며 교회가 운영하는 620여 사회복지 시설과 단체에서는 가정과 사회에서 외면당하는 아동, 청소년, 노인을 비롯하여 장애우, 나환우, 결핵환우, 불우여성, 무의탁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복지 분야에 9,000여명의 종사자들이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업에는 매년 막대한 재원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고통 받는 이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여러 가지 자선 활동에 적극적이며 정성어린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이 시대는 금전과 물질로 돕는 단순한 자선뿐만 아니라 실제로 복지시설을 찾아가 몸으로 봉사하는 더 큰 자선을 필요로 하며,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가장 큰 자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5. 우리 주위에는 가난과 병고, 무관심과 소외로 고통 받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촉구하시며, 이러한 자비와 사랑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호소하고 계십니다. 자선주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고통 받는 이들에게 자선을 실천하도록 일깨우기 위해 제정된 날입니다. 대림 시기는 가장 힘없고 가난한 아기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시기이며, 이러한 주님을 맞이하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는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선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처지에서 정성껏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여러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데 헌신하시는 모든 분에게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원합니다.

2003년 12월 14일 자선주일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장 봉 훈 주교



대림 제3주일
2003년 공항동 본당 사목계획서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2002/12/1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 37-40)

1. 하느님 사랑

1) 기도

우리는 우리를 만드시고 구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싶고 함께하고 싶고 모시고 싶어 기도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청하기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기도한다. 매일 삼종기도, 아침 저녁기도, 특수기도를 바친다. 특별히 묵주 기도의 해에 묵주기도를 바치며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뚜렷이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성령께 청하며 기도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 삶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순간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틍해 더 깊이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깨닫게 된다. 성서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또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깨닫게 된다.

2) 소공동체 묵상 나눔 - 말씀 선포와 수용 및 식별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형제들과 나눔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형제들에게 전하게 된다. 또 자신의 묵상을 나누는 형제들 통해 주님께서 어떻게 그에게 임하시고 사랑해주셨는지를 들으며, 성령을 통해 나에게도 전해지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깨달은 사랑이 감상적인 것이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이 아닌 현실에 적용 가능한 것인가를 식별하고 계획하게 된다.

3) 성사 생활

우리가 깨달은 주님의 뜻을 현실에 실현할 때 주님의 힘을 얻기 위해 성체성사를 영한다. 또한 실현 과정에서 생겨난 과오를 씻고 정정하며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고해 성사를 본다. 그리고 우리가 애써 실현하여 얻은 바를 미사 중에 주님께 제물로 봉헌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체성사로 축성하시고 성숙시켜 주님과 함께 다시 세상에 나아가게 된다.

4) 봉헌

주님과 주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고 이루기 위해, 기도와 묵상 중에 깨닫고 형제들과 계획한 바를 실현하면서 우리 자신을 바친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싶고 얻고 싶은 욕구를 거룩한 욕구로 바꾼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보답하는 의미로 나를 주님께 봉헌하게 된다.

2. 이웃 사랑

1) 인정과 포옹

주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거듭 부족한 나를 계속 사랑해주심에 감사드리며, 그 보답으로 우리도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비록 잘못을 저지른 형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 잘못을 그의 다른 많은 잘한 일과 함께 바라보며 받아들이게 된다. 잘못은 바로 잡아야 하지만,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감싸주며 보듬어 주게 된다. 또 그가 연약한 상황을 홀로 당하지 않도록 함께하게 된다.

2) 나눔

자선은 나의 속죄와 형제들의 선익을 가져오는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우리의 몸과 시간과 재능을 형제들과 나눈다. 형제들의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나눔으로써 점점 더 풍요하게 퍼트리게 된다.

3) 희생

뒤쳐지거나 불행을 당한 형제에게 나의 선행을 주님을 통해 보태어 줌으로써, 우리 모두가 함께 주님께 나아가게 된다. 또한 형제를 생각하여 아끼고 절제하고 겸손하게 삶으로써 내가 바치는 공과 덕과 함께 우리 모두가 차별과 불평등에서 오는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되게 된다.

4) 봉사

우리 스스로 절제하고 올바르게 살며 희생하여 얻은 바를 형제들에게 나눌 뿐만 아니라 형제들을 위하여 봉사하게 된다. 하느님 나라는 나 홀로 죄없고 착실히 산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과 함께 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마지못해서 그리고 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도래를 향한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적극적인 봉사를 살아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된다.

3. 실천 계획 1) 하느님 사랑을 위해

(1) 기도의 생활화

(2) 구역, 반 소공동체 모임과 각 단체의 복음 나누기

(3) 규칙적이고 능동적인 성사생활

(4) 성소자 발굴과 양성 및 청소년·청년 양성

2) 이웃 사랑을 위해

(1)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

(2)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정신의 실천

(3) 공동체 차원의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동실천

(4) 정기적이고 실질적인 봉사활동

3) 교구 시노드의 능동적인 참여



대림 제3주일(제19회 자선주일 메시지)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02/12/15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한국 천주교회는 해마다 대림 3주일을 자선 주일로 정하여 가난한 이웃에게 눈길을 돌려 자선을 베풀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라한 구유에 가난하게 태어나시고 사셨을 뿐 아니라, 특별히 가난한 이웃을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마태 25,40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새롭게 준비하는 이 대림 시기에 가난으로 고통을 받는 이웃들을 기억하고 필요한 도움을 베푸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필립 2,6-7 참조)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신 만물의 주인(골로 1,15-17 참조)이셨으나 스스로 종의 신분을 취하셨고,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고린 8,9 참조). 이렇게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강생(降生)의 신비는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가난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모습(루가 2,7 참조)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다가가셨을 뿐 아니라(루가 4,16이하 참조), 몸소 머리를 둘 곳조차 없이 사셨습니다(루가 9,58 참조). 또한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루가 6,20)이라는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마침내는 죽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어(마태 26,26-28)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심으로써 가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3. 현대 사회의 밑바탕에는 소유와 소비의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소유하며, 얼마나 풍족히 소비할 수 있느냐가 현대인의 정신과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습니다. 끝없는 소유욕과 지나친 소비가 전 세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을 절대적 가난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빈부의 차이를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부유하게 사는 것’이라는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살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물신숭배(物神崇拜)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루가 16,13 참조).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며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줌으로써 마침내 자신을 찾고 생명을 얻게 되는(마르 8,34 참조) 복음적 자유와 가난을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하게 인간이 되셨다면, 인간은 그 가난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4. 강생의 신비를 통해 드러난 복음적 가난은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에 연유하고 있으며(요한 3,16),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으로써 이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분명히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9-10 참조).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1요한 3,16-17)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의 눈길을 돌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활동이 메시아적 사명의 표지이자 교회의 회피할 수 없는 의무요 양보할 수 없는 권리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평신도교령 8항).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신(마태 11,2-6; 루가 4,18)예수님의 사명을 따라, 불우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선은 교회가 지닌 본질적인 사명 중의 하나입니다.

5. 구세주의 오심을 새롭게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림 시기에 우리는 가난한 이웃에게 복음을 ‘먼저 그리고 특별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금년에는 한반도를 휩쓸고 간 태풍으로 인하여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추위 속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는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구세주를 맞이합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데 성심껏 헌신해 오신 모든 분에게 하느님께서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002년 12월 15일 자선주일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장 봉 훈 주교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메시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어려운 이웃에게 전합시다

01/12/16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제 삼천년기의 첫번째 해를 정리하는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삼천년기를 맞이하며 우리 모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세기의 첫해가 기쁨과 평화로 가득한 해가 되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러한 기쁨과 평화 대신 고통과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말에 시작된 세계화는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빈곤의 심화로 고통을 가져오고 있으며, 테러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전 세계가 전쟁의 공포 속에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IMF의 관리 경제 체제를 외형적으로는 벗어났다고 하나, 아직도 수많은 노숙자들이 추운 겨울을 길거리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제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탄생은 바로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예수 그리스도(자비로우신 하느님 1항)의 강생 사건입니다. 강생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요한 14,9 참조).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사랑이며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십니다. 특별히 고통과 아픔 속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초라한 구유에 힘없는 아기로 가난하게 태어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탄생 순간부터 이들과 함께 하시어 기쁨이 되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강생은 사랑과 자비의 육화(肉化)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짧은 생애 동안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전하는 것을 당신 사명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의 선포만이 아니라(루가 4, 18-19), 행동으로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셨습니다.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벗으로 삼으셨고,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하여 주셨으며, 천대받는 이들을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모든 이들을 위하여 가장 가난하고 고통받으며, 천대받는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전 생애는 사랑과 자비 그 자체이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으로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특별히 이웃에 대한 사랑은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먼저, 그리고 특별하게 전해져야 할 우선적이고도 선호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아픔과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며, 실천적인 행동으로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시기의 셋째 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한 것은 바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일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미사 때마다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면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고린 11,24- 25 참조)고 하신 주님의 당부를 따라 우리의 것을 내어놓고 나눌 때, 어려운 이웃들은 고통과 절망 대신 삶의 기쁨과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장 봉 훈 주교



대림 제3주일
2001년도 주임신부의 교구장 사목목표 세부시행 계획

2000/12/17

1.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외아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와 성전(성서를 쓴 교회의 전승과 정신)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성서는 교회 공동체가,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양성 받은 사도들이 돌아가시자 주님을 신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한 책입니다. 성서와 성전을 통해 알게 된 주님을 기도하고 묵상하여 온전히 깨닫게 되고, 깨닫게 된 주님을 믿고 그 믿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 주님을 아는 것이고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 곧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복음화' 라고 합니다.

2. 주님과 주님의 교회인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면서 교회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8b.19.20a).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하는 대답이 들려 왔다."(사도 9,4b-5). 주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교회는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신자들의 모임' 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또한 주님을 믿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뿐 아니라 교회에 나오는 다른 신자들의 모습 중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교회에 손해를 끼친다고 여겨질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b).

3. 교회 공동체의 본질과 사명인 복음화

그러면 '복음화'란 무엇입니까? 복음화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 복음화란 정치적이고 사상적이고 종교적인 어느 정당함(또는 명분)에서든지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일입니다. 복음화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노동의 수단이나 소비의 수단이나 혁명의 수단과 동일화되지 않게 싸우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현실의 부조리와 한계 너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께 향한 갈망을 새겨 주는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희망의 복음의 증거자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일어나게 하고 그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 복음화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이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믿고 신뢰해야 하는데 그것은 방법이 아니고 방향이며 신앙고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소명은 각자의 선교 활동에서 언제나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선 복음을 알려야 합니다.

4. 복음화의 가장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인 소공동체 모임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살다 보면 정말 내 신앙하나 지켜 나가기도 벅찹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주님의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과거처럼 본당의 단위로 나누어진 교회 공동체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서로의 삶 속에 드러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서로의 삶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함께 격려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고 함께 아픔을 짊어지고 걸어나가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소규모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그 신앙생활이 전례생활과 기도생활 등등의 종교생활에만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는 선교와 봉사의 공동체가 되려 할 때 더욱더 그렇습니다.

5. 복음화의 단계

그러면 이러한 복음화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단계를 거치고 그 각 단계에 맞는 방법을 사용하여야 하겠습니까?

1)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진 복음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복음화 시킬 수 있을까?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 한다는 우리의 사명은 우리 삶의 개인적이고도 내적인 면이나 외적인 면에서 보람과 긍지를 그리고 힘을 줍니다. 지금까지 저는 자신들의 삶을 나누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 팀회합이나 본당 구역, 반모임에 참여하면서 신앙의 확신과 사제생활의 멋과 사목을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삶을 나누는 각종 신앙모임에 참여하여 나눔을 들을 때마다, 신자들의 삶 속에 주님이 살아 함께 하고 계시며, 복음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감명 깊게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저뿐만의 기쁨이 아니라 복음을 나누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가질 수 있는 공통적인 기쁨과 보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순박하고 단순하여 주님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 안에서 자기 삶의 길과 양식을 얻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피하지 않고 애써 자기 삶의 조건(자신이 하루에 겪는 여러 가지 일) 안에서 실현하고자 합니다. 또한 실제로 자신의 삶 안에서 실현시킴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진정한 복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한 걸음씩 주님과 복음의 사도가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면서 부러운 생각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복음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며 또한 복음을 믿고 그것을 이루려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확신이 거듭 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가 10,21)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되며 여러분을 통해 제가 복음을 얻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2) 복음화의 첫 단계 - 동일화와 상호신뢰

처음 구역, 반모임에 참석하는 신자들이나 교리반에 들어 온 예비자들은 자기 신상에 대한 간단한 질문에도 부담 없이 대답하지 못하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립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그의 삶에 애정을 가지고 대하게 되면, 그는 다음부터는 먼저 말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구역, 반모임에 데려오기 시작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 하는 첫 단계는 동일화와 상호신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의 임무는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고 스스로 사랑 받고 있다는, 그래서 자신의 존엄성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으로 기다리고 아껴주며 키워주려는 복음적인 열성이 필요합니다. 이는 가르치고, 지적하고, 보호해 주려는 상하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인격적인 관계이며, 주는 것만이 아닌 서로 주고받는 나눔 속에서, 같은 인간 조건에서부터 출발하려는 동일화의 진지한 자세와 그에 따라 형성되는 상호신뢰의 작업입니다.

이 동일화와 상호신뢰를 통해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여 창조 때의 본성을 회복하게 되며 우정 안에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3) 복음화의 둘째 단계 - 복음을 통해 주님과 만남

복음화의 첫 단계가 인간성 회복과 우정의 건설이라면, 두 번째 단계는 주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의 빛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는 성서를 같이 나누며 자신의 삶에 복음을 적용하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고 다소 지루하며 세상의 악과 싸우는 진통을 겪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현실 안에서 자기 소신대로 아니 덧붙여 복음의 말씀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 더욱더 파고드는 주님의 사랑과 완덕을 향한 열망이 심어지는 시기입니다.

자기 인생의 시기에 겪어야 하는 전직과 전업, 승진과 이전 등의 직장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복음적 활동과 가정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 등의 과제 앞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며 식별하는 순간들입니다. 옳은 것을 실천하려 하지만 두려움에 망설이는 순간, 사회적인 기준과 관점에서 더 낳은 방법과 자리 앞에서 고민해야 하는 순간 순간에, 그야말로 '삶과 마주친 신자'로서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스스로 그리고 함께 몸부림치며 찾아 나서는 제자들의 단계입니다.

이 때 사목자는 주님께 대한 신뢰와, 거듭되는 사회의 벽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좌절하게 됩니다. 또한 사목자의 영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리고 자기 수준에 맞게 적절히 선택할 수 있도록 존중해 주며 신중하게 대화합니다. 그리고 뒤에서 그 결정과 실천이 주님의 뜻과 사랑 안에 있음을 힘있게 인정해주고 지켜봐주며 위로하고 성원합니다.

4) 복음화의 셋째 단계 - 복음의 사도

두 번째 단계가 복음을 깨달아, 자신의 것으로 얻고, 맛들여,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단계였다면, 세 번째 단계는 인류구원을 위한 희생으로 십자가를 지고 세상의 죄악을 물리쳐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사도로서의 단계입니다.

차츰 가난한 이들은 복음을 실천하면서 자그만 하게나마 열매를 맛보고, 시련을 당하더라도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체험을 바탕으로 용기를 얻고 증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세상의 악과의 투쟁을 시작해 나가며 복음을 선포 증거하는 사목자의 '종이 아니라 벗으로서'(요한 15,15 참조) 함께 걸어가게 됩니다.

5) 쓰디쓴 체험을 통해 얻는 복음화의 값진 열매

복음화의 열매는 외형적이거나 조직적인 공동체의 건설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더 수축될 수도 있고, 세상의 광대함과 조직적인 악의 세력 앞에서 보잘 것 없는 한 알의 밀씨와도 같은 수확일 수 있으며, 풍요함보다는 현세에서는 패망하는 듯한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외형적인 모습은 실패요 허무한 것이지만, 내면으로는 주님께 순종함이고, 주님과의 일치요, 사도의 표징입니다. 우리 자신의 사도적 활동 안에서 우리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시간도 빼앗기고, 자신의 사회적인 꿈도 없어져 버리지만) 그 열매는 우리에게 참 꿈을 실현시켜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완성이며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6) 복음화의 방법론

복음화의 각 단계는 다른 단계와 완전히 구별되거나 명확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단계별로 다른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않겠습니다. 기초적이고 우선적인 방법은 바로 '나눔의 신비'입니다. 서로 자신의 삶을 나눔으로써 서로가 복음화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임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복음을 자신의 삶의 잣대로 하여 나누기 때문입니다.

삶을 나눌 때에는 '관찰'과 '판단'과 '실천'의 순으로 합니다. '관찰'은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내 입장도 아니고 상대의 입장도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이렇게 바라본 것을 모임에서 나누게 됩니다.

이렇게 나누면서 "주님께서는 이럴 때 어떻게 하실까?", "주님께서는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 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 그 사건이나 상황을 생각하고 나아갈 방향을 잡게 됩니다. 이것이 '판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삶 속에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을 판단한 후에는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실천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 때는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 실천을 하여도,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또 구역, 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나 망설임보다는 기쁨과 용기가 샘솟게 됩니다. 그리고 실패나 성공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주님의 사도로서 일하는 것이고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다음 주에 또다시 자신이 실천한 결과를 또다시 주님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실천약속을 하고 실천하는 방법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한 걸음씩 주님의 사도가 되어 가고 우리의 모임은 하느님 나라가 되갑니다.

6. 소공동체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교구의 사목지침에 따라 소공동체를 주력해 왔습니다.

구역 반으로 나누는 소공동체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복음을 나누며 주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구역 반을 중심으로 본당의 행사들도 주관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선교와 이웃돕기를 실현해 왔습니다. 또한 신심단체들도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선교와 봉사를 다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단지 복음을 나누고 교회의 종교행사를 주관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를 복음화하는데 그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소공동체의 본질과 사명을 '복음화'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미 '현대의 복음선교'에서 복음화에 대한 명백한 선을 그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을 복음화 활동의 전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현대의 복음선교 17). 복음화는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활동, 그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현대의 복음선교 18).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어긋나는 인간의 가치관, 사상,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것'입니다(현대의 복음선교 19)."

그러므로 구역 반으로 이루어진 소공동체가 지역 사회의 아픔과 갈등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지역주민들과 연대하고, 복음의 가르침대로 문제를 풀어나감으로써 우리가 사는 사회를 하늘 나라로 만들어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 결과는 교회의 복음 선교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한 이를 보편교회와 일치시키기 위해 지역사회의 문제를 본당의 미사 때 보편지향기도에 삽입시켜 본당 모든 교우들이 함께 마음 모아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은총을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본당의 전체 식구들이 지역의 식구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백성 즉 교회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시도를 통해 전례가 단지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신자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삶에 희망을 안겨주는 살아있는 전례가 될 것입니다.

본당의 단체들도 이러한 소공동체의 복음화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고유한 영성과 목표를 깊이 탐구하고 적용함으로써, 자기 영성이 추구하는 주님과의 친교를 통해 내적인 힘을 갖춰 사회환경의 변화에 시들지 않는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복음선교가 제 자리를 잡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함께 나누고 모색하는 본당의 복음화 연구모임을 갖게 될 것이며, 그 모임을 통해 우리의 문제들을 신앙의 눈으로 깊이 '바라보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방안을 개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임은 교구 시노드와 구체적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7. 2001년도 공항동 교회 소공동체 복음화의 구체적인 실천계획 과정

1) 소공동체의 복음화

(1) 소공동체의 복음화 기준을 선교와 연계시킨다.

(2) 소공동체 모임에서 단지 복음을 나누는데 그치지 않고 복음을 실현해야만 한다.

(3) 소공동체 모임에서 지역 사회의 문제를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모색한다.

그래서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소식이 되는 활동이 무엇인지 찾아서 실천한다.

(4) 월 1 회 가족이 다함께 모여 복음 나누기를 겸한 가족 기도 모임을 함으로써 복음을 생활화한다.

(5) 복음을 나누고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 성서공부에 적극 참여한다.

(6) 소공동체 모임에서 지역사회의 문제와 소공동체원들의 염원과 갈등을 보편교회의 전례인 미사 중의 보편지향기도를 통해 주님께 청함으로써 보다 교회 전례를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한다.

(7) 전례 교육을 통해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전례를 통한 하느님 체험의 강도를 보다 깊이 한다.

(8) 소공동체의 복음화와 이웃선교 및 이웃돕기활동을 위해 파티마의 성모 순례 기도회를 구역반 별로 갖는다.

(9) 2000년대를 향한 소공동체 복음화 교육들을 지속적으로 실시한다.

(10) 주일학교 초등부는 교리 전달이라는 주입식 교육 방법에서 소공동체원들끼리 복음을 나누고 함께 실현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체득하는 소공동체 교육 방법으로 전환한다.

(11) 중고등부도 같은 교육 방법론으로 이미 시작한 '작은 공동체'를 더욱 활성화시킨다.

(12) 청년들은 자체적으로 청년 반모임을 할 수 있도록 육성한다.

(13) 프란치스코 어린이집을 통해 우리 어린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공고히 한다.

(14) 본당 내의 모든 단체는 복음을 그 실천강령으로 하고 복음나누기를 의무적으로 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활동한다.

(15) 본당의 모든 단체는 복음을 기초로 최소한 년 1회의 피정과 연수를 한다.

(16) 본당의 모든 단체는 고유의 영성과 그 목표를 탐구하여 내실화함으로써 자립한다.

(17) 소공동체는 단체들과 함께 본당의 각 지역별 복음화 계획을 수립 실현한다.

2) 이웃 선교

(18) 선교분과장을 선교의 책임자로 둔다.

(19) 예비자 선교와 아울러 냉담자 회두를 위해 구역반과 동별 레지오 마리애가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20) 예비자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예비자 초대장을 전달하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 전교한다.

(21) 프란치스코 어린이집을 통해 비신자 가정의 자녀들과 그 부모들에게 전교한다.

(22) 어려울 때 잊지 않고 찾아가서 섭섭하고 소외된 채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한다.

(23) 냉담자들을 위해 꾸준히 본당 주보를 넣어주고 자기 체험과 친교를 통해 회두시킨다.

(24) 본당 사목협의회 교육분과 산하에 평신도 교리 교육위원회를 두어, 평신도 교리 교사와 나눔봉사자, 성서 봉사자를 육성하여 교리 교육을 활성화한다.

(25) 6개월로 그치는 예비자 교리 기간을 보충하기 위해, 세례성사를 받은 새영세자들이 성서를 전체적으로 한 번 읽고 견진성사를 받도록 성서 40주간을 구약과 신약반으로 나누어 1년여에 걸쳐 견진교리를 한다.

3) 사회사목

(26) 본당 내에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의 지구교육을 유치하여 회원들뿐만 아니라 전신자가 사회사목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의식을 고취시킨다.

(27)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할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를 더욱 양성시켜 본당의 사회사목 분야의 실질적인 담당자로 활동케 한다.

(28) 가난한 이들을 찾아 돌보고 시설을 방문하여 지원하는데 더욱 성의를 다한다.

-생활보호 대상자와 실직자, 소년소녀가장 및 독거노인, 결식아동들을 돕고 학자금도 지원한다.

(29) 가난한 집안의 어린이들을 프란치스코 어린이집에서 교육하고 보육한다.

(30) 죽은 이와 죽은 이의 가족을 위로하고 장례 봉사할 연령회를 더욱 활성화시킨다.

(31) 성모회는 창조환경의 보존과 유지, 북한 어린이와 난민 돕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사회사목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32) 본당의 사회사목분야를 점차적으로 교구 사회복지회와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물론 노동사목, 빈민사목, 사회교정사목위원회와 정의평화위원회와 연대하여 활성화시킨다.

(33)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묵주기도와 단식과 봉헌을 통한 북한동포돕기 기금을 봉헌한다.

4) 시노드

(34) 교회의 발전을 위해 본당의 복음화를 다지는 복음화 연구 모임을 신설하고, 교구 시노드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참여한다.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담화문(요약)

99/12/12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대희년의 마지막 준비를 합시다.

1. 우리는 대희년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기쁨으로 경축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을 통하여 전해져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 실천은 사랑을 받는 가난한 이들 뿐 아니라, 사랑을 주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2. 나자렛의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 18-19)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주님의 은총의 해가 가난한 이들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대림시기에 이처럼 가난한 이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야 합니다.

3. 오늘날의 세계는 힘없고, 빈곤하며, 밀려나고, 소외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보다는 물질을, 타인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만을, 함께 살아가기보다는 경쟁만을, 남을 섬기기보다는 지배하기를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조류의 무한경쟁 속에서 가난한 나라는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새로운 세계경제질서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위기도 이와 같은 조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화와 조류는 가난한 이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4. 주님의 은총의 해는 가난한 이들이 기쁨을 누리는 해입니다. 이 기쁨은 단지 내적인 기쁨일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드러나는 기쁨이며(제삼천년기 16항), 하느님의 자비가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질 때 일어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자비는 관심이며,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는 관대함이며, 그 아픔과 고통에 대한 치유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자비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면서 더 나아가 우리들도 사랑과 자비에 따라 삶을 영위하도록 '요구'하십니다(자비로우신 하느님 3항).

1999년 자선주일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장 봉 훈 주교



대림 제3주일

(가해)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하여 ; 98/12/13

1.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사도들이 발전시킨 교회는 사귐(koinonia)과 섬김(diakonia)과 복음선포(kerygma)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온갖 이념과 계층과 국경과 종족을 뛰어넘어 하늘에 계시는 한 아버지의 자녀로 서로 사귀고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현하는 공동체를 이룩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그 존재 목적입니다. 원시 그리스도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가진 것을 나누고, 빵을 쪼개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며 한 마음 한 뜻이 된 일치의 공동체를 이루었고 많은 이들이 그들의 일치된 삶에 매료되어 그 동아리의 일원이 되고자 스스로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교회는 괄목할만한 교세성장을 이루면서도 성장 자체가 본당의 비대화와 교회의 내적 공동화를 초래하여 복음 정신에 입각한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모습에서 오히려 멀어져가고 있다는 우려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즉 편향된 외적 성장이 지속되어온 가운데 사목자들에게는 신자들과의 인격적 만남이 매우 어려워졌고 신자들은 신자들대로 소속감과 유대감을 상실하여 교회 공동체는 갈수록 그 속이 비고 껍질만 두터워지게 되었습니다.

본당의 가장 기본적이고 역동적인 조직이라 할 수 있는 반 모임도 표면적으로는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내면에서는 형식적 모임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며 삶의 모든 부분을 함께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길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형제적 공동체로 성숙하기에는 아직 너무 소극적이고 미온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992년도 서울대교구 사목교서 중에서)

2. 복음화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미 '현대의 복음선교'에서 복음화에 대한 명백한 선을 그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교하고, 교회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을 복음화 활동의 전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현대의 복음선교 17).

복음화는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활동, 그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입니다(현대의 복음선교 18).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어긋나는 인간의 가치관, 사상,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것' 입니다(현대의 복음선교 19).

복음화란 종래에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던 '전교'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보다 역동적이며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고 신자로 만들 뿐아니라 그들이 생활하는 삶의 현장에 구체적인 변혁과 역전이 전개되도록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복음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1993년도 서울대교구 사목교서 중에서)

3. 소공동체

집에서 모여, 복음을 나누고, 함께 활동하며, 보편교회와 일치한다.



대림 제3주일

(다해) 루가 3,10-18: 97/12/14


세례자 요한은 세리들에게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고 하고, 군인들에게 는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 라."고 하고, 또 군중들에게는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때는 물론이요, 오늘을 사는 이 세대의 우리에겐 이 소리가 어떻게 들리는가? 미래가 보장되지 않아 힘있고 기회 있을 때 한 몫 단단히 잡아야 겨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불안한 세상인데, 스스로 죄짖지 말고 그나마 가진 것마저 남과 나누어 살라니? 그는 무엇을 믿고 이런 소리를 할까? 도대체 곧 오실 분은 무엇을 어떻게 하실 분이시기에 이런 준비를 시킬까?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그래서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고린 8,9) 또한 주님은 두 개의 목숨을 가지고 계시다가 하나는 이웃을 위해 하나는 예수 자신을 위해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이를 아시 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다시 생명을 주어 되살려 주셨다. 예수님을 부활시켜 주셨다. 우 리의 신앙은 바로 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신앙이다.

실제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가족과 특히 형제들과 나누면서 살아야만 했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없었고, 또 먹을 것, 입을 것 모두를 나누면서 살아왔다. 커가면서 혈연과 친지 등 의 이름으로 우리의 것을 내놓으면서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는 심지어 빼앗기고 착취를 당하기까지 하면서 살아왔다. 좋게 말해서 강요된 나눔 속에서 살아왔다 고나 할까? 그러 면서도 우리가 나누면서 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나누어서 없어지고 모 자란 부분을 채워주시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고 이 희망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시 작된 것이다. 부활신앙을 간직한 우리들은 오늘의 어지럽고 불안한 세상에서도 우리를 나눔의 신 비 안으로 초대하고 계시다.

주님 어서 오셔서 우리가 나누고 빼앗겨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주님 사랑으로 채워주셔서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시고, 풍요해진 사랑으로 더욱더 형제들에게 나를 봉헌하며 살게 해주소 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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