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일




(가해) 마태 1,18-24; 16/12/18


벌써 대림 제4주일입니다. 판공성사 보랴, 찰고지 풀랴, 사랑 나눔 나가랴, 대림 저금통 꾸미랴 할게 많죠? 힘드신가요? 힘들다고 느끼신다면, 여태 편안하게 사신 것이라고나 할까요. 당연하고 즐거우시다면, 정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살고 계신 것이리라고 자부하실 만합니다.

대림절, 새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고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새로 오심을 활동으로 증거하고 전하시느라 정말 수고가 많으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화요일 복음에 나오는 다른 아들처럼 아버지의 말에 대답만 하고 안 갈 수도 있었는데, 두 말없이 기꺼이 다녀 오셨으니 여러분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다음 주 12월 25일 성탄 대축일과 그 다음 주 1월 1일 신정인 천주의 모친 성마리아 대축일이 지난 다음 주, 그러니까 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우리는 예비신자 환영식을 하려고 합니다.

성전 제단 오른쪽에 놓인 성탄 트리가 잘 보이시죠? 지난 월요일 본당 수녀님들과 봉사자들이 성탄 트리를 예쁘게 꾸며놓았습니다. 저는 여기에 우리의 청이자 결심으로 소공동체 구역과 소공동체 단체 별로 우리들이 모셔올 예비신자의 이름을 카드에 써서 하얀 솜 위에 올려 놓고, 그분이 우리 성당에 오시도록 주님께 기도하며 말과 행동으로 권면하면서 예비신자 환영식을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본당에서 시행하고 있는 일명 ‘예비신자 봉헌 트리’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것 저것 안 하고 조용히 앉아서 기도만 하며,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만을 받아 누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 나와서 주님께 청하고 바라는 것이 있듯이, 주님도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리스도교인임을 밝히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핍박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수년에 걸쳐 엄청난 순교의 피를 흘리고 나서야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교회의 신앙생활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정해 주고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다고 여길 수만은 없습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물질적이며 현세적이고 경쟁적인 경제구조와 그와 동반하는 전제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문화가 우리를 비인간화와 탈신앙화로 부추기고 내몰고 있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민족적인 정서 안에 겸양지덕이 있어서, 스스로 밝히고 권하는 것이 점잖아 보이지 않고 마치 무슨 이익을 추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 예비신자 권면이라는 우리의 본질적인 노력이 조심스러운 면도 없지 않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선교라고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께서 서로 사랑하셔서 하나가 되고, 그 사랑이 흘러 넘쳐 우리를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시며 마침내 구원하시는 신비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 신비 안에 들어가고자 하고 그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도 삼위일체 주 하느님처럼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되고 그 사랑이 형제 자매들에게 흘러 넘치게 되면, 우리가 주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성당에 오고 싶고 함께하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성당에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의 본질은 구원하시는 사랑이고. 그 사랑은 흘러 넘치기에 선교가 되므로 교회의 본질은 사랑의 선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참으로 단기간 안에 이루어지거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며 구원받아야 할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역시 현대 사회 안에서 안분자족하기엔 부족하다고 여기며 더 많은 은총을 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교인의 모범을 보이거나 현대 사회를 위한 밀알로 나 자신을 희생하기엔 영적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 역시 그러한 완성과 충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 구원의 빛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처지가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빛이 희미하거나 구원의 길을 잘못 비추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과 기쁜 소식인 복음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자신의 아내가 될 마리아가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 아기를 가진 것을 알게 되자 고민하게 됩니다. 수치스럽고 황당하며 율법대로 돌에 맞아 죽도록 처리하기엔 지금까지 사랑해온 여인에게 너무나도 야박한 처사이고,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와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에,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그러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0-21절)

우리 또한 요셉처럼 주님께서 이루신 일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전하기에는 인간적으로 부끄럽고 모자란 면이 많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포기하고 조용히 물러나고 싶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언자 요엘의 말을 이어 전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요엘 3,5)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3-15) 그러시고는 나약하고 부족하면서도, 성령에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를 격려해 주십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2015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인구는 총 5,080만명입니다. 그 중 우리 천주교 신자의 수는 565만명입니다. 복음화율은 11.12%입니다.

올 해 우리 본당 관할구역의 인구수는 총 47,005명입니다. 그 중 우리 본당 신자수는 2,243세대의 4,155명입니다. 복음화율은 8.84%입니다. 전국 평균보다 2.28% 뒤쳐집니다.

올 해 본당으로 교적을 옮기신 분은 181분이고, 교적을 가져가신 분은 247분입니다. 33분이 돌아가셨고, 126분이 세례를 받으셔서 전체적으로는 27분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본당 관할구역내에 거주하면서 쉬는 교우는 247분입니다. 참고로 구역외 신자는 813분으로 전체교우의 약 4%입니다.

동별로 나눠보면, 증산동이 19,057명 인구에 2,007명 신자로 복음화율이 10.53%이고, 수색동이 15,942명 인구에 1,219명 신자로 7.65%이고, 북가좌1동이 3,744명 인구에 558명 신자로 14.90%이고, 북가좌2동이 8,262명 인구에 371명 신자로 4.49%의 복음화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 구역별로 나눠보면, 1구역 14.83%, 2구역 11.27%, 3구역 11.42%, 4구역 8.39%, 5구역 4.53%, 6구역 6.97%, 7구역 4.56%, 8구역 7.21%, 9구역 12.23%; 10구역 15.08%, 11구역 4.64%, 12구역 10.67%, 13구역 16.12%, 14구역 20.60%입니다.

내년부터 이 복음화율이 어떻게 변화되고 또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 궁금합니다.

변화하는 세상 안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 존재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변화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겠지만, 우리를 살리시고 구하시는 주님의 신비를 굳게 믿고 살아가기로 합시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던지, 주님의 부르심과 이끄심에 힘입어 주님 구원의 신비를 우리 삶의 말과 행동으로 기꺼이 전합시다. 우리를 구하러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며, 구원의 이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합시다.

오늘 예수 아기의 탄생을 준비하며,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며 구원의 길로 함께 나아갈 형제자매를 한 명씩 떠올리며, 기도와 영성체를 통해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의 이끄심에 의지하여 예비신자를 탄생시키기로 합시다.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오면서 누구 누구를 주님의 품으로 인도했었는지 되돌아 보고, 그분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돌보며, 이번 성탄 축제에 시작하는 예비신자 환영식을 맞이하여 또 한 명의 주님의 자녀를 탄생시키며, 예비신자들이 우리와 함께하는 임마누엘 주 예수님을 맞이하도록 안내합시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대림 제4주일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 (Misericordiae Vultus)3




(다해) 루카 1,39-45; 15/12/20


지난 주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9-16항에 이어 오늘은 17-25항 끝까지 보겠습니다.

17. 주님께서는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며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모르는 체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버리시리라(미카 7,18-19 참조).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6-7.10)

18. 저는 자비의 선교사들을 파견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을 보살피는 교회의 어머니다운 배려의 표지가 되어 참으로 신앙의 근본이 되는 이 자비의 신비가 지닌 부요에 하느님 백성이 깊이 들어가게 해 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로마 11,32). 실제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자비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19. 저는 하느님의 은총과는 멀리 떨어진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간절히 요청합니다. 저는 죄와 맞서 싸우시지만 죄인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으로 이를 요청합니다. 인생이 돈에 달려 있고 돈 앞에서는 그 무엇도 가치와 존엄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돈이 곧 힘이라는 끔찍한 덫과 허상에 빠져 범죄조직의 폭력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20. 정의와 자비는 두 가지 대립하는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한 실재의 두 가지 차원으로 충만한 사랑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정의가 하느님의 뜻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단순히 의인들과 죄인들로 나누는 율법의 준수를 정의로 여기는 관점에 맞서시며, 죄인들을 찾아 그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는 자비의 위대한 은사를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율법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그분의 깊은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는 자비로 구원을 가져다 주십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시편 51[50],11-16 참조).

21. 자비는 결코 정의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 참회하고 회개하여 믿도록 하는 많은 기회를 주십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잠시이지만 그분의 자비는 영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용서로 정의를 넘어서십니다. 죄인은 용서의 온유함을 느끼고 회개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은총으로 모두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

22. 희년에는 대사도 수여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여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시고 또한 늘 새롭고 놀라운 방법으로 끊임없이 용서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총의 힘을 느끼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죄의 힘도 느낍니다.

교회는 성인의 통공으로 살아갑니다. 성찬례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인 이 통공은 우리를 성인들과 복자들과 영적인 결합을 이루게 합니다(묵시 7,4 참조). 성인과 복자들의 거룩함은 우리의 나약함에 도움을 줍니다.

?23. 이 자비의 희년에 고귀한 종교 전통과의 만남이 촉진되기를 빕니다. 이 희년에 종교인들이 모두 닫힌 마음과 서로 무시하는 마음을 없애고 모든 폭력과 차별을 몰아내기를 바랍니다.

24. 마리아의 온 생애는 사람이 되신 자비의 현존을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당신 마음 안에 하느님 자비를 고이 간직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자비로운 눈길로 우리를 끊임없이 바라보시며 우리가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자비의 얼굴을 바라보게 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25.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당신 생명을 나누어 주시려고 언제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두십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이 희년에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여, 용서와 지지, 도움과 사랑의 행위와 말씀이 강렬하고 분명하게 울려 퍼지게 하소서. 언제나 용서하고 위로하며 끊임없이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교회가 모든 이의 목소리가 되어 확신에 차 끊임없이 노래하게 하소서. “주님, 예로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시편 25[24],6).

칙서를 마치며, 대림 제4주일, 자비의 주님으로 다가오시는 아가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제안하셨던 ‘자비의 희년에 바치는 기도’를 다같이 바칩시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자비로워지라고 가르치시며

주님을 본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말씀하셨나이다.

저희에게 주님의 얼굴을 보여 주소서.

저희가 구원을 받으리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넘치는 눈길로

자캐오와 마태오를 돈의 종살이에서 풀어 주시고

피조물에서만 기쁨을 찾던 간음한 여인과 막달레나를 구원하셨으며

베드로가 배반을 한 뒤에 눈물을 흘리게 하시고

참회하는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하셨나이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이 듣게 해 주소서.

주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보이는 얼굴이시며

용서와 자비로 모든 이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얼굴이시니

이 세상에서 교회가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주님의 보이는 얼굴이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주님을 섬기는 이들도 나약함으로 갈아입고

무지와 잘못에 빠진 이들과 함께 아파하기를 바라셨으니

주님을 섬기는 이들을 만나는 모든 이가

하느님의 보살핌과 사랑과 용서를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소서.

주님의 영을 보내시고 그 기름을 부어 주시어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며

자비의 희년이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되어

주님의 교회가 새로운 열정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억압받는 이들과 갇힌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해 주소서.

자비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비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대림 제4주일

(나해) 루카 1,26-38; 14/12/21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인들이 유다인들을 감옥에 잡아 넣었을 때입니다. 군인들이 매일 저녁 노동력이 없는 이들을 살해했답니다. 한 가족이 그 수용소에 갇혀 있었답니다. 아버지는 매일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와 가족이 안전한지를 살피고 자리에 누웠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큰 아들이 울고 있었답니다. “왜 우느냐?”고 물으니, 병사들이 와서 할머니와 막내 아들을 데려가려고 하는데, 막내 아들이 어머니에게서 안 떨어지겠다고 발버둥을 치다가, 병사들이 강제로 띄어내자 어머니를 부르며 울어댔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내가 같이 가겠다.”고 나서서 막내 아들의 손을 잡자, 그렇게 세상이 끝날 것처럼 몸부림치던 막내 아들이 울음을 그치고,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가스실로 향했답니다.

저는 이 이야기 속에서, 어린 아이가 자신이 죽으러 가는 줄 알았는지 몰랐는지 잘 모르지만,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면 어디를 가던지 두렵지 않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듯, 울음을 그치고 걸어나가는 어린 아들을 봅니다. 문득 시편 작가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1.4)

또한 죽으러 가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찾으며 울고 부는 어린 아들을 위로해 주고 힘을 주기 위해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가스실로 향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봅니다. 죄악의 굴레 속에서 노예처럼 헤매며 죽어가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어쩌면 인간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주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 인간과 함께하기 위해, 사랑으로 인류 세계에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와 희망의 말씀을 전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28.30-33.35.37)

부모와 배우자, 자식 다 있으면서도, 때로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도, 먹을 것을 다 먹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을, 무엇인지, 어디에서 솟구치는지도 정확히 모르지만 한 없이 샘솟는 갈증을. 우리 생과 영혼에 모자라는 2%를 채워주시러 오시는 주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풍요롭고 충만하게 채워주시러 오시는 주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사랑으로 채워주심으로써, 우리 영혼이 충만해져 평안하고 여유롭기를 청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아무런 걱정 없이, 더 바램 없이 나누고 베풀 수 있을 텐데……

성 아우구스티노는 “믿으면 더 깨닫게 되고, 깨달으면 더 믿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 갈망하는 만큼,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하신 주님의 가르침처럼, 먼저 손을 내밀어 나누고 베풀며 희생 봉사하면,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내가 애써 찾아도 쉽게 얻지 못하는 평화와 기쁨을,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희생 봉사함으로써 형제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얻게 될 것이며, 설령 내가 나누고 베푼 사람들에게서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마음 속에 희생 봉사한 사실 그 자체로 자존과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줄 것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그 큰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이다.”(루카 14,14)

마리아는 오늘 보이지 않는 미래를 바라보며, 그 미래가 어떤 것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결코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하느님의 말씀 앞에 서서, 함께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에 희망을 걸며 자신을 바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대림 제4주일

(가해) 마태 1,18-24; 13/12/22

성탄절이 가까워 옵니다. 어릴 때부터 성탄은 참 좋고 즐거운 시기였습니다. 초등부 시절엔 주일학교 성탄 예술제와 복사단 선물 등, 중고등부에 올라오면서 예술제뿐만 아니라 밤새 놀기 시작했던 시기였습니다. 선배 형·누나들과 친구 후배들과 어울려 밤새 기타치고 노래하며 놀던 생각이 그득합니다. 성탄절이 가까이 다가오면 길거리에서부터 캐롤 음악이 펼쳐지면서 마음이 흥겨워집니다. 예수 아기가 탄생한다는 설레임과 기쁨은 우리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와 더불어 우리를 충분히 들뜨게 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신앙인들에게나 믿지 않는 다른 이들에게나 기쁜 시기입니다.

성탄은 정말 우리에게 기쁜 소식입니까?

성경 기자들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사건의 당사자라고 볼 수 있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기쁜 소식이었겠습니까?

어머니 마리아는 남부끄럽게 처녀인 자기가 아기를 가져야만 했고… 남편이 될 요셉이나 부모님이나 자기를 아는 사람들 앞에 기쁘게 나설 수 있었을까… 아기를 밴 상태에서 호구조사를 위해 만삭의 배를 이끌고 움직여야 했고… 아기를 낳자마자 헤로데의 칼날을 피해 에집트로 도망쳐야 했고… 돌아와 예수 아기를 성전에 봉헌할 때도,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잃어버렸을 때도… 예수 아기가 자라는 순간 순간 마리아에게는 마음 속에 담아놓고만 있어야 할 사건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사건이 기쁜 소식이고 실제로 기뻤겠습니까?

양부 요셉에게는 마리아가 혹시 결혼도 하기 전에 다른 남성과 눈이 맞아 임신한 것은 아닌가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겪어야만 했고… 예수 아기의 탄생 이후 마리아와 함께 아기 예수를 키우며 힘겨운 세월을 보내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 두 분의 경우만 봐도 성탄 사건은 그야말로 좋아서 기쁜 소식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세에서 살면서 바라는 그런 기쁜 소식과는 너무나도 먼 감정입니다.

당사자인 예수님 자신도 세상에 처음 날 때부터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인간적으로, 현세적으로 좋아서 즐거운 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습니다. 거듭되는 사람들의 불신과 음모, 그리고 사명에 동참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이기적인 탐욕을 채우기 위해 다가서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허망함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우리가 공경지례로 섬기는 성인분들의 모습에서 보듯이, 그분들의 생애는 인류 해방과 세상 구원을 위한 수난의 십자가의 길이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마태 6,10) 바라는 그 희망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현실에선 결코 이루어진 적이 없는 그리고 어쩌면 우리 생애에 완성될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도 없는, 그러나 꼭 이루어져야만 하는 희망 그 희망으로 기쁜 것입니다.

그러기에 꿈을 향한, 주님을 향한, 신앙인들의 순교나 증거의 순간들이 고통과 부담이 아니라 영광의 부활을 희망한 복음적 기쁨이었으리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모든 말을 미래지향형으로 이야기합니다.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방황하는 요셉에게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라고 말해줍니다. 이 말마디만 들으면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천사는 덧붙여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22-23절)

그렇다면 이 성탄의 사건은 그 수혜자인 우리와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는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당사자들에게는 미래지향적인 기쁨을 만들어 내기 위한 고난의 가시밭길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그리고 우리 각자가 주보성인으로 섬기는 성인들이 우리와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 구원의 기쁨을 알려주기 위하여 희생하셨듯이, 우리도 성탄 시기에 이웃의 미래지향적인 희망의 기쁨을 안겨주기 위하여 희생해야 하겠습니다.

헤로데와 어둠의 세력들은 예수 아기의 탄생 소식을 듣고 두려워했으며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목동들과 동방박사들과 예언자들은 예수 아기에게서 구원의 기쁜 소식의 서광을 발견하고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믿고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고 고백하며 섬기는 성인들처럼 형제들에게 장차 일어날 구원의 기쁨을 만들기 위해 수고 수난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택은 현세적인 기쁨이 아니라, 희망적인 기쁨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택은 우리 자신의 입신양명과 영달과 안위를 위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 신앙인의 희생을 통한 인류 사회의 해방과 구원을 향한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택은 현세적으로 즐거움과 만족을 가져다 줄 좋은 기쁨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것이어서 결코 우리는 수혜자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거름이 될 정도로 애써서 이루어내야만 할 하느님 나라를 향한 희망과 사랑의 기쁨입니다.

성탄 기쁘게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앙인이 기대하고 즐겨 말하는 성탄의 기쁨과 친교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신 주 예수님 그리고 그 예수님을 우리에게 안겨주시고 우리에게 주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수고 수난하신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힘마저 주시는 성령과의 일치이며, 친교입니다. 우리끼리 좋아서 즐거운 친교가 아니라, 우리 희생을 통해 다른 이들이 기뻐하기 때문에 우리도 보람스러워 기쁜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영과의 친교 안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걸으신 친교의 희생제사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겨운 시기에 기뻐하는 이유는 그 현세적인 어려움을 이겨내고 새로운 시대, 곧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아기 예수님께서 오시리라는 희망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생애에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구원의 하느님 나라 때문에 기뻐하는 이유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시라는 믿음 때문이며,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님의 이끄심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죄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며, 그런 믿음과 희망 때문에 오늘 우리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교하고 희생 봉사하며 사랑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대림 제4주일

(다해) 루카 1,39-45: 2012/12/23

우리는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주는 것 없이 반가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반가운 사람은, 처음 그 사람을 만날 때, 앞으로 반갑게 맞이하기로 작정해서 반가워진 것이 아니고, 또 미운 사람도 처음 만날 때부터 미워하겠다고 작정한 것도 아닌데 지금 와서 보면 그런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안 만나기라도 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기도를 할라치면 망각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주님과 내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나를 괴롭힙니다.

그 때마다 주님께서 내 마음 안에서 미움과 분노를 비롯한 각종 부정한 감정들을 몰아내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워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상태가 점점 굳어지고 굳혀져 내 마음에 벽이 생기고, 나도 모르게 내 마음 안에 사랑을 지워버리고, 그 대신 원망과 미움, 분노와 질투의 감정이 자리 잡고 앉아서 나를 지배하고 말기에, 또 그렇게 되면 난 평안하지도 못하고 늘 불안하고 답답하기만 하기에 간절히 청합니다. 내 힘으로 다 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또는 내 잘못과 오해로 생긴 그 모든 일을 주님께서 채워주시고 일깨워 주시며 이끄시어 다시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해달라고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서 주님의 뜻을 믿고 받아들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일치감과 동료애를 느끼며 자신의 신앙을 굳혀갑니다. 마리아는 처음 천사가 방문하여 예수 아기를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듣고 반신반의했으며, 정말 천사의 말대로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졌는지, 그리고 엘리사벳이 어떻게 아기를 가졌는지 궁금했고, 엘리사벳에게 찾아가 묻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구심과 궁금증이 가득한 마리아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성령께서 엘리사벳에게 임하셔서 엘리사벳의 입을 열어 마리아를 외치듯 반기게 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자신의 배 속에서 아기가 뛰노는 것을 느낀 엘리사벳은 마리에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3-44절) 라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찬미의 노래를 불러줍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5절) 엘리사벳은 자신의 남편 즈카르야가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가 벙어리가 되었고, 천사의 약속대로 아기가 태어난 후 천사의 말을 따라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정했을 때 비로소 입을 열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루카 1,13.63 참조)을 기억하며 마리아를 칭찬한 것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은 아기를 가지지 못해 소외 당하고 멸시당해 서럽던 지난 육십 평생의 세월을 기억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같은 은총으로 아기를 가지게 된 마리아를 축하합니다. 엘리사벳은 자신과 같이 현실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하느님의 은총을 입게 된 마리아, 또 그 불가능해 보이는 하느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질 것을 믿고, “보소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며 청했던 마리아를 축하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기를 가지게 된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집니다. 엘리사벳은 현세에서 부정하게 비칠 수 있는 사건을 통해 오히려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발견합니다. 처녀가 아기를 배었다는 인간적으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사건을 맞이하여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당혹감과 비난과 단죄와 동정의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안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발견하고 축하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자주 세상과 제자들을 비교하면서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상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울며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이렇게 서로 이해를 달리하고 시각을 달리하는 상황 앞에서 우리 신자들은 서로 다른 믿음과 서로 다른 문화와 서로 다른 가치관을 확인하며 주님의 마음을 간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어떻게 되었을 때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지?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그 사람들 안에서 무엇을 발견하는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지 되돌아 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같은 믿음 안에서 서로의 삶 속에 함께하신 하느님을 발견하고 감사드리며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서로를 축복하고 우애를 나눕니다. 우리도 우리 손으로 다 베풀고 배려할 수는 없어도 늘 우리 마음 안에 담고 있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합시다. 늘 내가 접하고 또 내게 다가오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 사람을 이끄시고 보살펴 주시며 축복해 주시는지 발견하고, 그와 함께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에게 하느님 사랑의 힘과 은총이 함께하고 있음을 일깨워주며 축복과 위안을 기원합시다. 매일의 사건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그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뜻을 찾고, 일깨우며, 되새겨, 이루어나가도록 노력합시다.

주님, 제 마음 안에 담겨있는 모든 부정하고 소극적인 감정들을 주님 사랑으로 다 씻어주소서.

주님, 제가 그 동안 살면서 다 채우지 못했던 순간들을 기억해 주시고 주님 은총으로 채워주소서.

주님, 오늘 제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의 움직임을 발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의 계획을 발견하게 하소서.

주님, 제가 만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보내주신 마리아처럼 대하게 하시고,

제가 만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께 향한 저의 신앙을 확인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정녕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시고,

정녕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제 눈으로 뵈옵게 해주소서. 아멘.



대림 제4주일

(나해) 루카 1,26-38; 11/12/18

오늘은 예수 아기의 탄생을 둘러싼 부모의 믿음과 성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된 요셉에 대해 알아봅시다. 요셉 성인은 자기가 결혼하기로 약속했던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참 결혼준비로 설렜던, 어쩌면 밤 잠도 설칠 정도로 행복했던 요셉에게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에겐 그게 정말 사실인가 하는 의구심도, 나와 결혼하기로 해놓고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배반감도, 자신의 처지에 대한 상실감 등등의 여러 가지 상념으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웠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뜻밖의 사건을 접한 요셉 성인의 성정에 대해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그러니까 요셉은 의로운 성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정한 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율법을 따르자면, 자기 아기도 아닌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는,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요셉에게 있어서 마리아는 누구인지 모르는 다른 남성과 관계하여 수태한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했던 마리아에 대한 감정적인 복수를 하고자 마음 먹지는 않았고, 율법에 따라 돌팔매로 형벌을 받도록 고발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떠나 보내고 싶어합니다. 비록 자신은 상대의 부정을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부정을 까발려 피해를 주지는 않겠다는 것이 요셉의 성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요셉에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그러자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자기 형편을 따져보고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는 성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마리아의 상황을 바라봅시다. 어느 날 갑자기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너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고, 그 아기는 야곱 집안을 다스릴 것이라고 전합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몹시 놀랐고,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반문합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마리아 역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실에 대해 우선 거부합니다.

그러나 요셉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마리아에게도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6-37) 그제서야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

마리아는 처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사건 앞에서, 또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곧 돌팔매질로 사형을 당하게 된다는 상황 앞에서, 인간적으로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순수한 신앙으로, 자신 인생의 앞길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를 염려하고 주저하고 거부하지 않고 단순하게 주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오늘 우리 생활 안에서 우리 형편과 처지를 인간적으로 되새기고 살펴볼 때 전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지만,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힘입어 받아들이고 순명해야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봅시다. 오늘 우리에게는 천사가 요셉 성인과 성모 마리아께처럼 우리 꿈에 그리고 직접 나타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대신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전승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전승에 비추어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과 처지를 비록 인간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지만,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이룰 수 있게 되기를 청합시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새로 오시는 예수님의 삶이 우리 이성 안에서 정리된 교리와 규정만이 아니라, 우리 신앙 안에서 펼쳐지는 정신과 희망의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신비스러운 탄생을 기다리면서 보아야 할 또 다른 점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게서나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드러나듯이 그분들은 자신들에게 드러난 개인직인 사건을 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여 이스라엘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로 시작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며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리라.”로 마치는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에서나,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로 시작하여 “이미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위하여 영원히 우리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바로다.”로 마치는 성모의 노래(루카 1,46-55)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분들은 주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신 개인적인 사건을 주님께서 자기 민족들을 찾아오신 공동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사이에 생긴 세례자 요한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생긴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는 성령께서 작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께서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생긴 우리와 우리 부부의 사랑에서 생긴 우리 자식들의 탄생 사건에도 임하지 않으셨을까?

이러한 묵상은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우리에게 공동체와 세상에 봉사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심어주신 소질과 장점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해줍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남다른 소질과 장점은 무엇입니까? 그 장점과 소질을 이용하여 어떻게 공동체에 봉사하시렵니까? 인간적으로 헤아리고 또 헤아려도 선뜻 나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벗어나,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 힘입어 주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시기를 빕니다. 어둠을 바라보면 맥이 빠지고 주저하고 포기하게 되지만, 같은 문제에서도 빛을 바라보면 희망과 새로운 길을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죄로 덮인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꺼이 맞이하여, 우리도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새 생활을 시작합시다. 아멘.



대림 제4주일

(나해) 루카 1,26-38; 05/12/18

언젠가 한 번 견진성사가 끝난 다음에 한 견진자에게 이번에 구역장을 맡아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그야말로 순순히 대답하더라고요. 대개 구역장을 하라고 하면, 욕심이 많거나 자기가 구역장을 맡아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안한다거나 못한다거나 이사간다고 하거나 다음에 한다고 하는데, 너무나 쉽게 대답을 하니까 오히려 제가 이상하게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대답을 잘 하십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저희 대모님이 ?신부님이 뭐를 시키거나 부탁하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대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도대체 그분이 누구신지 궁금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견진자가 제게 자기 대모 이름을 알려 주었는데, 그 대모는 과장 섞어 말한다면 하도 말을 안 들어서 아예 한 쪽으로 제켜놓기까지 한 사람이었는데, 오히려 자기 대녀에게는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하지 못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천사에게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

성모님의 이 대답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가 열렸고, 구세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낳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한 인간의 겸손하고도 신실한 이 응답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모님께서 처음부터, 무조건 아니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할 만하니까 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성모님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8)라고 인사하면서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0-33) 라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때 처녀인 마리아의 입장에서 자기가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난 것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텐데, 게다가 자기는 남자와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데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며, 또 어떻게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등등의 의구심과 고민이 마리아의 순간을 당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천사에게 의아해 하며 묻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34)

우리에게도 신앙은 반드시 우리가 간직해야 할 유산이고 걸어가야 할 길이지만 신앙을 우리 삶 속에서 실현하며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사회 안에서는 우리가 믿고 원하는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짐이 될 수도 있고,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항변합니다. '∼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5-37)

오늘 우리는 이렇게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께 임하셨던 성령께서 저희에게도 임하셔서 저희가 믿고 따르는 신앙이 우리 삶 속에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이 진정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우리가 믿는 신앙이 실제로 이루어짐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더욱 굳세지고 풍요로워지길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예수 아기께서 우리 가운데 태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듯이, 우리 믿음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며.

다가오는 예수 아기의 탄생을 맞이합시다.



대림 제4주일

(가해) 마태 1,18-24; 04/12/19

이해인 수녀가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라는 책에 쓴 ‘수녀’라는 제목의 시의 첫 구절에 이런 내용이 있다.

“누구의 아내도 아니면서

누구의 엄마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 여인아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부끄러운 조바심을

평생의 혹처럼 안고 사는 여인아.”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 특별히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참 착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 착함이 가끔 정돈되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모습도 본다.

‘내가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될까?’, ‘내가 이렇게 하면 저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안 될까?’를 고민하면서 망설이고 주저하면서 맘고생하는 반면,

또 다른 한 면에서는 가끔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판단이 서로를 힘들게 한다.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든가.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다!’라는 선입관과 고착된 선언들이 마치 벽처럼 서 있다. 내 마음과 내 배려와 내 호의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느낌이 주려고 한 사람이나 받으려고 하지 않은 사람이나 또는 거절의 의도 없이 그냥 지나쳐간 사람과 그 사람의 대응 때문에 아파한다.

서로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서로를 놓아주지 못하고,

서로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서로를 힘들게 하는 부작용마저 보인다.

마치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지만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부끄러운 조바심을 평생의 혹처럼 안고 사는 여인처럼’ 안타까워 보인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서로 미워하고 그것이 괴로워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서로를 더 들볶고 있다.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랑하려고 했던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오히려 사랑이 또 하나의 율법 규정처럼 착하고 연약한 우리의 마음을 더욱 더 죄스럽게 하고 있다.

서로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상대를 대하려고 하지만, 서로 다른 표현방식과 태도가 오히려 서로를 멀어지게 하고 아프게 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서로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지만, 서로의 환경과 조건이 다르고 서로의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 서로 갈라지는 현상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그리고 서로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슬픔이 서로를 처음의 그 사랑보다는 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는 악의 장난이 상황을 점점 꼬이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절망을 심화시키고 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은 마리아가 자기와 약혼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18)

요셉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요셉은 배신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긴 긴 밤들을 지새면서 이 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몰라 방황했다.

그러다가 착한 요셉은 마리아를 놓아주기로 한다.

자기가 마리아를 사랑한 만큼 마리아가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요셉은 괴로웠지만, 마리아를 고발해서 창피를 주고 벌을 받게 하기 보다는 사랑의 배려로 마리아를 자유롭게 보내기로 마음먹고, 남모르게 파혼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20-21)라고 일러준다.

그제서야 요셉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려 했던 자신의 사고와 행동방식에서, 천사의 말과 행동방식을 따르기로 결정을 바꾼다.

요셉은 율법과 유대사회의 혼인 규정에 그치지 않고 개인적인 배려를 뒤로하고, 자기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사고와 행동방식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 아기가 인간세계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 의해 외형적으로 사생아로 태어나야 했던 상황에서, 마리아에게 예수 아기를 잉태케 했던 하느님께서 그 약혼자인 요셉에게까지 개입하심으로써 예수 아기가 한 가정 안에 정상적으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또한 그렇게 태어날 아기가 그 아기를 안전하게 태어날 수 있도록 이해관계 당사자들과 함께하셨던 그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들과 함께하실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오늘 요셉의 변화 속에서 우리의 인간관계의 변화를 기대해 본다. 우리는 서로의 사고방식과 대응방식이 다르더라도, 또 내 눈에 보이고 내 눈에 비춰진 대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의 선한 마음과 좋은 의도를 헤아려 주려고 노력해야겠다.

꼭 내 맘 같이 않아도, 꼭 나와 동의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를 주고 존중해 주면서, 우리 모두가 한 공동체로 살아가고 주님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꿈꿔본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을 넘어,

그 무엇보다도 우리 죄인을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맞으면서,

너를 제외하고는 나 홀로 주님께 사랑받을 수 없고,

너를 제외하고는 내가 주님 앞에 설 수조차 없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바벨탑이후 서로 다르게 되어 뿔뿔히 흩어졌던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다시 하나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진정 우리와 함께해 주시면서

우리를 악에서 건져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모아주시기를 간구하자.

“거룩하신 아버지

몸소 창조하신 만물이 아버지를 찬미하나이다.

아버지께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만물을 살리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백성을 끊임없이 모으시어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깨끗한 제물을 드리게 하시나이다.“

아멘.



대림 제4주일

(다해) 루가 1, 39-45; 2003/12/21

우리가 살다 보면 참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정말 주는 것 없이 반가운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반가운 사람은 내가 처음 그 사람을 만날 때 나는 이 사람을 앞으로 반갑게 맞이하기로 작정해서 반가워진 사람이 아니고 또 미운 사람도 처음 만날 때부터 이 사람을 미워하겠다는 작정을 하고 만난 것도 아닌데 지금 와서 보면 그런 관계를 맺게 되었다.

반가운 사람이 작정하고 결심해서 반가운 것이 아니고 고맙고 만나고 싶고 그리운 감정이 차곡 차곡 싸여 와 오늘 내 가슴속에 담겨 있듯이, 미운 감정도 그렇다. 미움을 비롯한 내 마음 안의 온갖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감정 역시 내가 결심하고 작정한 것이 아니라 내가 원치 않는데도 마음속에 쌓여온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없어지겠지 하면서도 때만 되면 나타나고 떠올라서 나를 괴롭힌다. 특히 기도가 안된다. 주님께 무엇 하나라도 청하려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꼭 그 미운 감정, 분노와 질투, 시기 등 부정적인 감정과 그 대상이 마치 내가 기도할 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나타나서 주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나를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막아버린다.

미워하기 위해 미워하는 것도 아니지만 손쉽게 잊혀지지도 풀어지지도 않는다. 누가 미워하고 싶어서 미워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사랑하기 싫어서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 사람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데도 인간 관계, 특별히 좋지 않은 관계에 있는 사람 사이는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기도라도 하는 일이다. 인간적으로 갖은 수를 다 써보고 또 해도 해도 안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은 기도뿐이다. 주님께서 내 마음 안에서 미움과 분노를 비롯한 각종 부정한 감정들을 몰아내시고 주님의 은총으로 내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차게 해 주십사고 기도해야 한다. 내 힘으로 다 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또는 오해로 생긴 그 모든 일에 주님께서 채워주시고 일깨워 주시며 이끄시어 다시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하고 빌어야 한다.

만일 기도라도 하지 않으면 그 상태가 점점 굳어지고 굳혀져 내 마음에 벽이 생기고 나도 모르게 내 마음 안에 사랑을 지워버리고 원망과 미움, 분노와 질투의 감정이 내 안에 자리잡고 앉아서 나를 지배하고 만다. 그래서 난 평안하지도 못하고 늘 불안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오늘 마리아는 천사가 말한 대로 석녀였던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정말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으시다는 천사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기가 하느님의 힘으로 아기를 배었고, 자기 뱃속의 아기가 정녕 하느님의 아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면서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기를 배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엘리사벳은 그저 처녀인 주제에 아기를 밴 부정한 여인 마리아를 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인 위대한 여인 마리아를 본 것이다. 마리아를 통해 아들 예수를 수태시키고 예수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발견한 것이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42-45)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기를 가지게 된 엘리사벳은 하느님을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진 것이다. 엘리사벳은 현세에서 부정하게 비칠 수 있는 사건을 통해 오히려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발견한 것이다. 처녀가 아기를 배었다는 인간적으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사건을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슬픔과 동정의 마음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안에서 축복과 은총을 발견한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서 주님의 뜻을 믿고 받아들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일치감과 동료애를 느끼며 자신의 신앙을 굳혀간다. 엘리사벳은 자신과 같이 불가능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인 마리아를 축하한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그 사람들 안에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러 갑니까?

우리가 우리 손으로 다 베풀고 배려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늘 우리 마음 안에 담고 있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까?

이제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 안에 기쁨으로 오실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청소하고 주님을 맞이합시다.

주님, 제 마음 안에 담겨있는 모든 부정하고 소극적인 감정들을 주님 사랑으로 다 씻어주소서.

주님, 제가 그 동안 살면서 다 채우지 못했던 순간들을 기억해 주시고 주님 은총으로 채워주소서.

그리고 주님, 오늘 제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의 움직임을 발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의 계획을 발견하게 하소서.

주님, 제가 만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보내주신 마리아처럼 대하게 하시고,

제가 만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께 향한 저의 신앙을 확인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정녕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시고,

정녕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제 눈으로 뵈옵게 해주소서. 아멘.



대림 제4주일

(나해) 루가 1, 26-38; 2002/12/22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 후보자들과 그들을 지지하고 선택하는 유권자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선택하는 서로 다른 기준을 본다.

우리는 자기와 생각이 같고 추구하는 것이 비슷하며 지금의 기득권을 유지시키는 가운데 자기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을 좋게 받아들인다. 그런가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좋은 줄은 알지만 부담스러워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모두 정의를 말하고 이상을 꿈꾸면서도,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기득권과 욕망 중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의 것을 내 놓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마저 갖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는 자기 보호와 진보를 향한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다소 이기적인 개인 차원이 있다. 또한 장애자들이나 뒤쳐진 이들을 향한 공공부조와 복지를 통해 공동체를 유지해야 하는 사회적 차원이 있다. 그리고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놓여있지는 않지만 외국인들이나 세계 인류, 환경이나 자연 및 우주 등 공동선을 향한 인간의 이상과 연관하여 인간 삶의 의의와 가치를 드러내주는 이상적인 차원이 있다.

이중에 신앙은 어느 차원에 속할까? 우리는 우리 각 개인의 삶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려는 개인적인 욕구와 형제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마저 이루어야 한다는 사명마저 가지고 있다. 이 차원들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어느 차원의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 먼저 해야 할까?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많지만 하나의 실마리를 풀어 문제 전체를 풀 듯이 우리의 인생도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사는가가 곧 그 삶의 문제를 푸는 길일 수 있다.

이런 고민 속에서 마리아는 오늘 이렇게 대답한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 38) 그런 면에서 우리는 내가 먼저 살아야 너를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 또는 다른 사람 없이 너 혼자 어떻게 살 수 있느냐 등의 우선 순위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문제로 풀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은 주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산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는 각 분야와 순간에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 우리의 욕구와 행동을 주님의 뜻을 향해 변화시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순간과 상황들을 도피하지 않고 기꺼이 맞이하며 예수 아기를 바라보자.



대림 제4주일


2002년도 천주교 공항동 성당 사목계획서

-주임신부의 교구장 사목목표 세부시행계획

01/12/23

1.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외아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와 성전(성서를 쓴 교회의 전승과 정신)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성서는 교회 공동체가,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양성 받은 사도들이 돌아가시자 주님을 신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한 책입니다. 성서와 성전을 통해 알게 된 주님을 기도하고 묵상하여 온전히 깨닫게 되고, 깨닫게 된 주님을 믿고 그 믿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 주님을 아는 것이고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 곧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복음화' 라고 합니다.



2. 주님과 주님의 교회인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면서 교회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8b.19.20a).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하는 대답이 들려 왔다."(사도 9,4b-5). 주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교회는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신자들의 모임' 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또한 주님을 믿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뿐 아니라 교회에 나오는 다른 신자들의 모습 중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교회에 손해를 끼친다고 여겨질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b).



3. 교회 공동체의 본질과 사명인 복음화

그러면 '복음화'란 무엇입니까? 복음화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 복음화란 정치적이고 사상적이고 종교적인 어느 정당함(또는 명분)에서든지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일입니다. 복음화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노동의 수단이나 소비의 수단이나 혁명의 수단과 동일화되지 않게 싸우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현실의 부조리와 한계 너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께 향한 갈망을 새겨 주는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희망의 복음의 증거자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일어나게 하고 그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 복음화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이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믿고 신뢰해야 하는데 그것은 방법이 아니고 방향이며 신앙고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소명은 각자의 선교 활동에서 언제나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선 복음을 알려야 합니다.



4. 복음화의 가장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인 소공동체 모임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살다 보면 정말 내 신앙하나 지켜 나가기도 벅찹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주님의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과거처럼 본당의 단위로 나누어진 교회 공동체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서로의 삶 속에 드러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서로의 삶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함께 격려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고 함께 아픔을 짊어지고 걸어나가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소규모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그 신앙생활이 전례생활과 기도생활 등등의 종교생활에만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는 선교와 봉사의 공동체가 되려 할 때 더욱더 그렇습니다.



5. 복음화의 단계

그러면 이러한 복음화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단계를 거치고 그 각 단계에 맞는 방법을 사용하여야 하겠습니까?

1)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진 복음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복음화 시킬 수 있을까?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 한다는 우리의 사명은 우리 삶의 개인적이고도 내적인 면이나 외적인 면에서 보람과 긍지를 그리고 힘을 줍니다. 지금까지 저는 자신들의 삶을 나누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 팀회합이나 본당 구역, 반모임에 참여하면서 신앙의 확신과 사제생활의 멋과 사목을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삶을 나누는 각종 신앙모임에 참여하여 나눔을 들을 때마다, 신자들의 삶 속에 주님이 살아 함께 하고 계시며, 복음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감명 깊게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저뿐만의 기쁨이 아니라 복음을 나누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가질 수 있는 공통적인 기쁨과 보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순박하고 단순하여 주님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 안에서 자기 삶의 길과 양식을 얻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피하지 않고 애써 자기 삶의 조건(자신이 하루에 겪는 여러 가지 일) 안에서 실현하고자 합니다. 또한 실제로 자신의 삶 안에서 실현시킴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진정한 복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한 걸음씩 주님과 복음의 사도가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면서 부러운 생각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복음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며 또한 복음을 믿고 그것을 이루려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확신이 거듭 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가 10,21)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되며 여러분을 통해 제가 복음을 얻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2) 복음화의 첫 단계 - 동일화와 상호신뢰

처음 구역, 반모임에 참석하는 신자들이나 교리반에 들어 온 예비자들은 자기 신상에 대한 간단한 질문에도 부담 없이 대답하지 못하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립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그의 삶에 애정을 가지고 대하게 되면, 그는 다음부터는 먼저 말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구역, 반모임에 데려오기 시작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 하는 첫 단계는 동일화와 상호신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의 임무는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고 스스로 사랑 받고 있다는, 그래서 자신의 존엄성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으로 기다리고 아껴주며 키워주려는 복음적인 열성이 필요합니다. 이는 가르치고, 지적하고, 보호해 주려는 상하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인격적인 관계이며, 주는 것만이 아닌 서로 주고받는 나눔 속에서, 같은 인간 조건에서부터 출발하려는 동일화의 진지한 자세와 그에 따라 형성되는 상호신뢰의 작업입니다.

이 동일화와 상호신뢰를 통해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여 창조 때의 본성을 회복하게 되며 우정 안에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3) 복음화의 둘째 단계 - 복음을 통해 주님과 만남

복음화의 첫 단계가 인간성 회복과 우정의 건설이라면, 두 번째 단계는 주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의 빛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는 성서를 같이 나누며 자신의 삶에 복음을 적용하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고 다소 지루하며 세상의 악과 싸우는 진통을 겪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현실 안에서 자기 소신대로 아니 덧붙여 복음의 말씀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 더욱더 파고드는 주님의 사랑과 완덕을 향한 열망이 심어지는 시기입니다.

자기 인생의 시기에 겪어야 하는 전직과 전업, 승진과 이전 등의 직장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복음적 활동과 가정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 등의 과제 앞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며 식별하는 순간들입니다. 옳은 것을 실천하려 하지만 두려움에 망설이는 순간, 사회적인 기준과 관점에서 더 낳은 방법과 자리 앞에서 고민해야 하는 순간 순간에, 그야말로 '삶과 마주친 신자'로서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스스로 그리고 함께 몸부림치며 찾아 나서는 제자들의 단계입니다.

이 때 사목자는 주님께 대한 신뢰와, 거듭되는 사회의 벽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좌절하게 됩니다. 또한 사목자의 영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리고 자기 수준에 맞게 적절히 선택할 수 있도록 존중해 주며 신중하게 대화합니다. 그리고 뒤에서 그 결정과 실천이 주님의 뜻과 사랑 안에 있음을 힘있게 인정해주고 지켜봐주며 위로하고 성원합니다.

4) 복음화의 셋째 단계 - 복음의 사도

두 번째 단계가 복음을 깨달아, 자신의 것으로 얻고, 맛들여,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단계였다면, 세 번째 단계는 인류구원을 위한 희생으로 십자가를 지고 세상의 죄악을 물리쳐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사도로서의 단계입니다.

차츰 가난한 이들은 복음을 실천하면서 자그만 하게나마 열매를 맛보고, 시련을 당하더라도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체험을 바탕으로 용기를 얻고 증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세상의 악과의 투쟁을 시작해 나가며 복음을 선포 증거하는 사목자의 '종이 아니라 벗으로서'(요한 15,15 참조) 함께 걸어가게 됩니다.

5) 쓰디쓴 체험을 통해 얻는 복음화의 값진 열매

복음화의 열매는 외형적이거나 조직적인 공동체의 건설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더 수축될 수도 있고, 세상의 광대함과 조직적인 악의 세력 앞에서 보잘 것 없는 한 알의 밀씨와도 같은 수확일 수 있으며, 풍요함보다는 현세에서는 패망하는 듯한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외형적인 모습은 실패요 허무한 것이지만, 내면으로는 주님께 순종함이고, 주님과의 일치요, 사도의 표징입니다. 우리 자신의 사도적 활동 안에서 우리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시간도 빼앗기고, 자신의 사회적인 꿈도 없어져 버리지만) 그 열매는 우리에게 참 꿈을 실현시켜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완성이며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6) 복음화의 방법론

복음화의 각 단계는 다른 단계와 완전히 구별되거나 명확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단계별로 다른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않겠습니다. 기초적이고 우선적인 방법은 바로 '나눔의 신비'입니다. 서로 자신의 삶을 나눔으로써 서로가 복음화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임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복음을 자신의 삶의 잣대로 하여 나누기 때문입니다.

삶을 나눌 때에는 '관찰'과 '판단'과 '실천'의 순으로 합니다. '관찰'은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내 입장도 아니고 상대의 입장도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이렇게 바라본 것을 모임에서 나누게 됩니다.

이렇게 나누면서 "주님께서는 이럴 때 어떻게 하실까?", "주님께서는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 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 그 사건이나 상황을 생각하고 나아갈 방향을 잡게 됩니다. 이것이 '판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삶 속에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을 판단한 후에는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실천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 때는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 실천을 하여도,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또 구역, 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나 망설임보다는 기쁨과 용기가 샘솟게 됩니다. 그리고 실패나 성공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주님의 사도로서 일하는 것이고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다음 주에 또다시 자신이 실천한 결과를 또다시 주님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실천약속을 하고 실천하는 방법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한 걸음씩 주님의 사도가 되어 가고 우리의 모임은 하느님 나라가 되갑니다.



6. 복음화의 주역인 평신도

1) 소공동체 복음화

사제 혼자 6000여명이 넘는 신자들을 다 복음화시킬 수 없습니다. 개인 면담은커녕 성사 집전 조차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구역, 반으로 함께 모여 소공동체를 이루고 복음을 나누고 주일 미사에서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 교회 공동체와 일치하여 복음을 실현하게 됩니다.

구역 반으로 이루어진 소공동체가 지역 사회의 아픔과 갈등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지역주민들과 연대하고, 복음의 가르침대로 문제를 풀어나감으로써 우리가 사는 사회를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2) 평신도를 선두로

사제가 교회 안에서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신자인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합니다.

평신도는 사제와 수도자의 대리자가 아닙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평신도를 대신해서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최고의 선교사는 일반일들과 함께 세상에 살고 일하는 평신도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복음 전파의 대상자일 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자로서 복음화의 선두에 서야 합니다.



3) 지도자 양성

교회의 미래를 위해 지속적으로 지도자들을 양성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나누며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영유아와 청소년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며, 전례와 성사 및 교회의 유산을 보존하고 유지시키며 전수할 지도자들을 양성해야 합니다.

교회 내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습득하고 투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들이 될 성소자들도 양성해야 합니다.



7. 2002년도 공항동 교회 공동체 복음화의 구체적인 실천계획 과정

1) 소공동체 복음화

(1) 소공동체에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복음을 나누고 나눈 복음을 자신들의 가정과 직장 그리고 동네에서 실현해나간다. 특별히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소식이 되는 활동이 무엇인지 우선적으로 찾아 실천한다.

(2) 월 1 회 가족이 다함께 모여 복음 나누기를 겸한 가족 기도 모임을 함으로써 복음을 생활화한다.

(3) 복음을 보다 깊이 나누고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 성서공부에 적극 참여한다.

(4) 청소년들도 어려서부터 복음을 생활해 나가는 실습을 통해 교육한다.

(5) 프란치스코 어린이집을 통해 영유아들의 신앙교육을 공고히 한다.

(6) 본당 내의 모든 단체와 모임은 복음을 기초로 활동하며 최소한 년 1회의 피정과 연수를 한다.

(7) 소공동체는 단체들과 함께 본당의 각 지역별 복음화 계획을 수립 실현한다.

(8) 월보를 통해 본당 공동체의 복음화와 친교를 다진다.



2) 평신도를 선두로

(9) 평신도가 자발적으로 복음화의 주역으로 참여한다.

(10) 소공동체와 단체들은 자신들의 활동 계획 수립과 아울러 본당의 행사 계획을 수립 집행한다.

(11) 평신도가 교회 운영에 책임감을 가지고 활동한다.



3) 지도자 양성

(12) 교회의 복음화에 주역이 되기 위해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한다.

(13) 공동체에서 나눈 복음을 실현한 결과를 다시 복음의 빛으로 되새기고 시도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복음의 사도로 성장한다.

(14) 복음의 사도가 되기 위해 성서(성서 40 주간, 성서 모임, 여정, 성서 못자리)와 신학(가톨릭 교리 신학원) 및 활동에 관련되는 전문 교육을 습득한다.

(15) 성직자, 수도자가 될 성소자들도 양성한다.



4) 시노드

(16) 이 시대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이루어 나가면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앞당긴다.



대림 제4주일

(다해) 루가 1, 39-45; 2000/12/24

구역모임에 나가보면 몇 분이 안 모입니다. 구역 별로 채 10분이 넘는 모임이 손꼽을 정도입니다. 매일 나오시는 분만 나오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란 소리마저 나옵니다. 그런데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무슨 잔치나 계모임도 아니요, 신자들 대상으로 돈이나 벌어볼까 하거나 자리라도 하나 얻어볼까 하는 심사가 아닌 다음에야 구역모임에 나올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구역 모임에 나오는 이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말씀' 즉 '복음'을 들으러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구조화되고 험악해 지는데 비해 주님의 말씀을 찾는 이들은 아주 미약해 보입니다. 구역모임에 많은 이들이 모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유혹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쥐고 흔들 또 하나의 권력집단이 아닙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소금이 있기 때문인데 그 소금의 양은 겨우 바닷물의 3%랍니다. 그 3%의 소금이 거대한 바다의 물결을 썩지 않고 유지하게 한답니다.

구역모임에 나오는 분들은 적습니다. 실제로 집에 있으면서도 고의로 안 나오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겠습니까? 나오지 않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고 나온 신자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나마 참석한 신자는 정말 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주님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복음과 복음을 나누는 신자들은 얼마 안되지만, 소금을 통해 바닷물을 정화시키고 유지시키시듯이 구역모임에 나오는 신자들을 통해 그 구역을 정화시키고 지키고 계십니다.

우리가 나누는 복음이 그리고 그 복음을 실천하는 일이 미약해 보이고 또 지금 당장 우리 눈 앞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지만, 언젠가 복음은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 복음은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힘이 있고 그 힘은 세상을 변화시키고야만 말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어머니가 되신 처녀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이 말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1, 45) 우리가 들은 복음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그 복음 말씀을 실현해 나갈 때 우리는 하늘나라를 얻을 것입니다. 마리아를 반기는 엘리사벳처럼 우리 서로가 복음을 나누고 실현하려는 동지로 맞아들일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를 이루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될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 양식이며 복음의 실천이 우리를 재미있게 해주는 놀이입니다.



대림 제4주일

99/12/19
2000년도 천주교 공항동 성당 사목계획서

-주임신부의 교구장 사목목표 세부시행계획



1.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외아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와 성전(성서를 쓴 교회의 전승과 정신)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성서는 교회 공동체가,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양성 받은 사도들이 돌아가시자 주님을 신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한 책입니다. 성서와 성전을 통해 알게 된 주님을 기도하고 묵상하여 온전히 깨닫게 되고, 깨닫게 된 주님을 믿고 그 믿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 주님을 아는 것이고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 곧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복음화' 라고 합니다.



2. 주님과 주님의 교회인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면서 교회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8b.19.20a).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하는 대답이 들려 왔다."(사도 9,4b-5). 주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교회는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신자들의 모임' 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또한 주님을 믿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뿐 아니라 교회에 나오는 다른 신자들의 모습 중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교회에 손해를 끼친다고 여겨질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b).



3. 교회 공동체의 본질과 사명인 복음화

그러면 '복음화'란 무엇입니까? 복음화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 복음화란 정치적이고 사상적이고 종교적인 어느 정당함(또는 명분)에서든지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일입니다. 복음화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노동의 수단이나 소비의 수단이나 혁명의 수단과 동일화되지 않게 싸우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현실의 부조리와 한계 너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께 향한 갈망을 새겨 주는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희망의 복음의 증거자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일어나게 하고 그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 복음화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이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믿고 신뢰해야 하는데 그것은 방법이 아니고 방향이며 신앙고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소명은 각자의 선교 활동에서 언제나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선 복음을 알려야 합니다.



4. 복음화의 가장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인 소공동체 모임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살다 보면 정말 내 신앙하나 지켜 나가기도 벅찹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주님의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과거처럼 본당의 단위로 나누어진 교회 공동체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서로의 삶 속에 드러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서로의 삶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함께 격려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고 함께 아픔을 짊어지고 걸어나가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소규모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그 신앙생활이 전례생활과 기도생활 등등의 종교생활에만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는 선교와 봉사의 공동체가 되려 할 때 더욱더 그렇습니다.



5. 복음화의 단계

그러면 이러한 복음화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단계를 거치고 그 각 단계에 맞는 방법을 사용하여야 하겠습니까?

1)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진 복음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복음화 시킬 수 있을까?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 한다는 우리의 사명은 우리 삶의 개인적이고도 내적인 면이나 외적인 면에서 보람과 긍지를 그리고 힘을 줍니다. 지금까지 저는 자신들의 삶을 나누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 팀회합이나 본당 구역, 반모임에 참여하면서 신앙의 확신과 사제생활의 멋과 사목을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삶을 나누는 각종 신앙모임에 참여하여 나눔을 들을 때마다, 신자들의 삶 속에 주님이 살아 함께 하고 계시며, 복음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감명 깊게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저뿐만의 기쁨이 아니라 복음을 나누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가질 수 있는 공통적인 기쁨과 보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순박하고 단순하여 주님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 안에서 자기 삶의 길과 양식을 얻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피하지 않고 애써 자기 삶의 조건(자신이 하루에 겪는 여러 가지 일) 안에서 실현하고자 합니다. 또한 실제로 자신의 삶 안에서 실현시킴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진정한 복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한 걸음씩 주님과 복음의 사도가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면서 부러운 생각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복음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며 또한 복음을 믿고 그것을 이루려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확신이 거듭 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가 10,21)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되며 여러분을 통해 제가 복음을 얻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2) 복음화의 첫 단계 - 동일화와 상호신뢰

처음 구역, 반모임에 참석하는 신자들이나 교리반에 들어 온 예비자들은 자기 신상에 대한 간단한 질문에도 부담 없이 대답하지 못하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립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그의 삶에 애정을 가지고 대하게 되면, 그는 다음부터는 먼저 말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구역, 반모임에 데려오기 시작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 하는 첫 단계는 동일화와 상호신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의 임무는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고 스스로 사랑 받고 있다는, 그래서 자신의 존엄성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으로 기다리고 아껴주며 키워주려는 복음적인 열성이 필요합니다. 이는 가르치고, 지적하고, 보호해 주려는 상하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인격적인 관계이며, 주는 것만이 아닌 서로 주고받는 나눔 속에서, 같은 인간 조건에서부터 출발하려는 동일화의 진지한 자세와 그에 따라 형성되는 상호신뢰의 작업입니다.

이 동일화와 상호신뢰를 통해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여 창조 때의 본성을 회복하게 되며 우정 안에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3) 복음화의 둘째 단계 - 복음을 통해 주님과 만남

복음화의 첫 단계가 인간성 회복과 우정의 건설이라면, 두 번째 단계는 주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의 빛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는 성서를 같이 나누며 자신의 삶에 복음을 적용하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고 다소 지루하며 세상의 악과 싸우는 진통을 겪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현실 안에서 자기 소신대로 아니 덧붙여 복음의 말씀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 더욱더 파고드는 주님의 사랑과 완덕을 향한 열망이 심어지는 시기입니다.

자기 인생의 시기에 겪어야 하는 전직과 전업, 승진과 이전 등의 직장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복음적 활동과 가정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 등의 과제 앞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며 식별하는 순간들입니다. 옳은 것을 실천하려 하지만 두려움에 망설이는 순간, 사회적인 기준과 관점에서 더 낳은 방법과 자리 앞에서 고민해야 하는 순간 순간에, 그야말로 '삶과 마주친 신자'로서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스스로 그리고 함께 몸부림치며 찾아 나서는 제자들의 단계입니다.

이 때 사목자는 주님께 대한 신뢰와, 거듭되는 사회의 벽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좌절하게 됩니다. 또한 사목자의 영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리고 자기 수준에 맞게 적절히 선택할 수 있도록 존중해 주며 신중하게 대화합니다. 그리고 뒤에서 그 결정과 실천이 주님의 뜻과 사랑 안에 있음을 힘있게 인정해주고 지켜봐주며 위로하고 성원합니다.

4) 복음화의 셋째 단계 - 복음의 사도

두 번째 단계가 복음을 깨달아, 자신의 것으로 얻고, 맛들여,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단계였다면, 세 번째 단계는 인류구원을 위한 희생으로 십자가를 지고 세상의 죄악을 물리쳐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사도로서의 단계입니다.

차츰 가난한 이들은 복음을 실천하면서 자그만 하게나마 열매를 맛보고, 시련을 당하더라도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체험을 바탕으로 용기를 얻고 증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세상의 악과의 투쟁을 시작해 나가며 복음을 선포 증거하는 사목자의 '종이 아니라 벗으로서'(요한 15,15 참조) 함께 걸어가게 됩니다.

5) 쓰디쓴 체험을 통해 얻는 복음화의 값진 열매

복음화의 열매는 외형적이거나 조직적인 공동체의 건설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더 수축될 수도 있고, 세상의 광대함과 조직적인 악의 세력 앞에서 보잘 것 없는 한 알의 밀씨와도 같은 수확일 수 있으며, 풍요함보다는 현세에서는 패망하는 듯한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외형적인 모습은 실패요 허무한 것이지만, 내면으로는 주님께 순종함이고, 주님과의 일치요, 사도의 표징입니다. 우리 자신의 사도적 활동 안에서 우리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시간도 빼앗기고, 자신의 사회적인 꿈도 없어져 버리지만) 그 열매는 우리에게 참 꿈을 실현시켜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완성이며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6) 복음화의 방법론

복음화의 각 단계는 다른 단계와 완전히 구별되거나 명확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단계별로 다른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않겠습니다. 기초적이고 우선적인 방법은 바로 '나눔의 신비'입니다. 서로 자신의 삶을 나눔으로써 서로가 복음화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임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복음을 자신의 삶의 잣대로 하여 나누기 때문입니다.

삶을 나눌 때에는 '관찰'과 '판단'과 '실천'의 순으로 합니다. '관찰'은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내 입장도 아니고 상대의 입장도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이렇게 바라본 것을 모임에서 나누게 됩니다.

이렇게 나누면서 "주님께서는 이럴 때 어떻게 하실까?", "주님께서는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 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 그 사건이나 상황을 생각하고 나아갈 방향을 잡게 됩니다. 이것이 '판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삶 속에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을 판단한 후에는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실천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 때는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 실천을 하여도,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또 구역, 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나 망설임보다는 기쁨과 용기가 샘솟게 됩니다. 그리고 실패나 성공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주님의 사도로서 일하는 것이고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다음 주에 또다시 자신이 실천한 결과를 또다시 주님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실천약속을 하고 실천하는 방법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한 걸음씩 주님의 사도가 되어 가고 우리의 모임은 하느님 나라가 되갑니다.



6.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며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1997년을 성자 예수 그리스께, 1998년을 성령께, 1999년을 성부께 봉헌하며 2000년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제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며 우리는 그동안 준비했던 것들을 열매 맺고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본당을 동별, 구역, 반별로 나누어, 해당 지역의 예비자와 냉담자와 가난한 이들을 해당 지역 구역 반이 책임지고 품어 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지속적인 성서의 봉독과 연구 그리고 우리가 읽은 성서의 말씀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알아듣기 위해 각자 기도를 바치고, 그 말씀을 식별하고 함께 이루기 위한 구역·반의 복음나누기에 더욱더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토대아래 미사와 성사생활을 통한 빠스카 신비를 진솔하게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내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구체적인 말씀과 전례 그리고 성사라는 기본적인 신앙행위를 통하여 확고한 내적체험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바탕 아래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열망이 불꽃처럼 피어올라, 우리를 우리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지역의 빛과 소금이 되는 복음의 증거자로 헌신하도록 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망 안에서만이 우리는 우리의 거울인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신앙이 자연스럽게 전수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취지 아래 정진석 대주교님이 서울대교장 취임 이후 지속적으로 강조해오신 세가지 사목방침, 즉 소공동체의 복음화, 선교, 유아의 종교교육을 실현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지금껏 수고한 우리의 노력에 더하여 올 해 부터는 구역반모임의 소공동체에서 복음을 나누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나눈 복음을 자신과 지역사회에서 실현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소공동체의 활동 속에 이웃에 대한 선교를 포함시켜 조직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선교의 전문화와 체계화를 그리고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실현을 이루는 두 번째 방편인 사회사목분야를 심화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첫 해에는 영유아의 종교교육을 위해 어린이집을 설립하여 우리 자녀들의 종교교육과 이웃 선교 그리고 어려운 집안의 자녀들을 돌보아 주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올 서울대교구장님의 사목교서 세부지침에 나와 있는 '부채 면제 혹은 일부 탕감', '집세 동결', '어려운 이웃에게 경제적 도움 주기', '용서와 화해', '지역 사회복지 기관과 연계하여 실직자 돕기', '소년소녀가장 돕기', '소외된 노인 돌보기', '결식아동지원', '학자금 지원' 중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실직자 돕기와 소년소녀가장 돕기 및 소외된 노인 돌보기 및 장학금 지원은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될 것이며 단계적으로 확산해 나갈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은 우리와 우리와 함께하는 지역주민들에게 2000년대를 기쁨의 해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7. 2000년도 공항동 교회 소공동체 복음화의 구체적인 실천계획 과정

1)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는 본당

(1) 본당에서는 2000년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용서와 화해, 회개의 기쁨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마르코 복음을 중심으로 꾸며진 대림 판공찰고지를 통해 주님을 미리 익히고, 판공 성사를 통해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회개와 용서를 거쳐 이웃과의 나눔을 할 수 있도록 초대한다.

(2) 이웃들에게 참 기쁨이 될 수 있는 방안을 구역 반모임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찾아 실현하도록 한다.

-용서와 화해, 부채 면제 혹은 일부 탕감, 집세 동결, 어려운 이웃에게 경제적 도움 주기 등



2) 2000년대를 맞는 소공동체의 복음화

(3) 1998년도부터 남성은 월 2 회 구역모임에, 여성은 주 1 회 반모임에 참여하여 복음을 맛들이고, 복음의 빛으로 자신의 삶을 나누기 시작한 신앙생활을 더욱 더 심화시킨다. 또한 월 1 회 가족이 다함께 모여 복음 나누기를 겸한 가족 기도 모임을 함으로써 복음을 생활화한다.

(4) 구역 반모임에서 복음 나누기 7단계가 익숙해진 다음, 복음을 천주교회의 정신과 신학교리의 흐름에 맞추어 봄으로써, 복음을 자신의 실제 삶에 명확히 적용할 수 있도록 '가톨릭 교리서'라는 교재를 통해 전신자가 지속적인 교리 교육을 심화한다.

(5) 소공동체의 복음화와 이웃선교 및 이웃돕기활동을 위해 파티마의 성모 순례 기도회를 구역반 별로 갖는다.

(6) 2000년대를 향한 소공동체 복음화 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한다.

(7) 주일학교에서는 1999년부터 복음을 나눔으로써 배우는 교리 교재를 사용하여 교리교육을 더욱 심화한다. 주일학교 초등부 1학년부터 6학년까지는 '예수님 어서 오세요'로, 중등부와 고등부는 '하늘나라 망원경'으로 나눔 교리를 한다.

(8) 청소년 복음화의 일단계로 1998년부터 시작한 어린이 반모임에서 주일학교에서 배운 교리를 지역에서 어린이 반모임을 통해 복음 나누기를 함으로써 복음을 생활화한다.

(9) 주일학교는 중등부와 고등부로 나누어 청소년들이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점차로 청소년 반모임을 갖도록 육성한다.

(10) 청년들은 자체적으로 청년 반모임을 할 수 있도록 육성한다.

(11) 교구장님의 방침대로 어린이집을 건립하여 본당의 우리 어린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공고히 한다.

(12) 본당 내의 모든 단체는 복음을 그 실천강령으로 하고 복음나누기를 의무적으로 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활동한다.

(13) 본당의 모든 단체는 복음을 기초로 최소한 년 1회의 피정과 연수를 한다.

(14) 본당의 각 지역 복음화를 위해 동별, 구역 반별 복음화 계획을 수립한다.



3) 이웃 선교

(15) 선교분과장을 선교의 책임자로 둔다.

(16) 예비자 선교와 아울러 냉담자 회두를 위해 구역반과 동별 레지오 마리애가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17)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예비자 모집과 양성을 위해, 예비자 환영식 2개월 전에 예비자 봉헌식을 갖고, 1개월 전에 선교 다짐대회를 가진 후 예비자 환영식을 한다. 그리고 세례전 1개월 전에 예비자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한 주 전에 세례자 피정을 하고 세례성사를 받도록 한다.

(18) 예비자 봉헌식에는 신자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예비자를 선정하여 봉헌한다. 우리가 선정한 예비자가 우리 성당에 오고 안 오고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기에 우리는 단지 우리가 주님께 모시고 갈 형제자매를 선정하여 기도하고 권면하며 주님께서 그 형제자매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노력한다.

(19) 신자 한 사람씩 자신들이 봉헌한 예비자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본당 차원에서 '예비신자들을 위한 기도의 날'을 정해 전 교우가 기도한다.

(20) 예비자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예비자 초대장을 전달하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 전교한다.

(21) 어린이집을 통해 비신자 가정의 자녀들과 그 부모들에게 전교한다.

(22) 어려울 때 잊지 않고 찾아가서 섭섭하고 소외된 채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한다.

(23) 냉담자들을 위해 꾸준히 본당 주보를 넣어주고 자기 체험과 친교를 통해 회두시킨다.

(24) 우리의 선교의식을 강화하고 충실하게 하기 위한 선교 다짐대회를 가진다.

(25) 본당 사목협의회 교육분과 산하에 평신도 교리 교육위원회를 두어, 평신도 교리 교사와 나눔봉사자, 성서봉사자를 육성하여 교리 교육을 활성화 한다.

(26) 예비자 교리 기간을 6개월로 줄여 평신도 교리 교사와 나눔 봉사자가 적극적으로 인도하게 한다.

(27) 세례성사를 받은 새영세자들이 적어도 성서를 전체적으로 한 번 읽고 견진성사를 받도록 하기 위해 견진교리로 성서 40주간을 구약과 신약반으로 1년여에 걸쳐 교육하며 성서 봉사자가 담당하게 한 후, '칠성사생활'이란 교재를 통해 성서의 말씀을 생활화하는 성사생활로 마무리하여 견진성사를 받도록 한다.



4) 사회사목

(28) 본당 내에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의 지구교육을 유치하여 회원들뿐만 아니라 전신자가 사회사목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의식을 고취시킨다.

(29)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할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를 더욱 양성시켜 본당의 사회사목 분야의 실질적인 담당자로 활동케 한다.

(30) 동별로 빈첸시오 회원을 모집하여 본당의 전 지역을 골고루 보살피도록 한다.

(31) 가난한 이들을 찾아 돌보고 시설을 방문하여 지원하는데 더욱 성의를 다한다.

-생활보호 대상자와 실직자, 소년소녀가장 및 독거노인, 결식아동들을 돕고 학자금도 지원한다.

(32) 가난한 집안의 어린이들을 프란치스코 어린이집에서 교육하고 보육한다.

(33) 죽은 이와 죽은 이의 가족을 위로하고 장례 봉사할 연령회를 더욱 활성화시킨다.

(34) 성모회는 창조환경의 보존과 유지, 북한 어린이와 난민 돕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사회사목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35) 본당의 사회사목분야를 점차적으로 교구 사회복지회와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물론 노동사목, 빈민사목, 사회교정사목위원회와 정의평화위원회와 연대하여 활성화시킨다.

(36)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묵주기도와 단식과 봉헌을 통한 북한동포돕기 기금을 봉헌한다.



대림 제4주일

주임신부의 교구장 사목목표 세부시행 계획 : 98/12/20

1.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외아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와 성전(성서를 쓴 교회의 전승과 정신)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성서는 교회 공동체가,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양성 받은 사도들이 돌아가시자 주님을 신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한 책입니다. 성서와 성전을 통해 알게 된 주님을 기도하고 묵상하여 온전히 깨닫게 되고, 깨닫게 된 주님을 믿고 그 믿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 주님을 아는 것이고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 곧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복음화' 라고 합니다.

2. 주님과 주님의 교회인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면서 교회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8b.19.20a).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하는 대답이 들려 왔다."(사도 9,4b-5). 주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교회는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신자들의 모임' 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또한 주님을 믿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뿐 아니라 교회에 나오는 다른 신자들의 모습 중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교회에 손해를 끼친다고 여겨질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b).

3. 교회 공동체의 본질과 사명인 복음화
그러면 '복음화'란 무엇입니까? 복음화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 복음화란 정치적이고 사상적이고 종교적인 어느 정당함(또는 명분)에서든지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일입니다. 복음화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노동의 수단이나 소비의 수단이나 혁명의 수단과 동일화되지 않게 싸우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현실의 부조리와 한계 너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께 향한 갈망을 새겨 주는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희망의 복음의 증거자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일어나게 하고 그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 복음화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이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믿고 신뢰해야 하는데 그것은 방법이 아니고 방향이며 신앙고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소명은 각자의 선교 활동에서 언제나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선 복음을 알려야 합니다.

4. 복음화의 가장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인 소공동체 모임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살다 보면 정말 내 신앙하나 지켜 나가기도 벅찹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주님의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과거처럼 본당의 단위로 나누어진 교회 공동체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서로의 삶 속에 드러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서로의 삶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함께 격려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고 함께 아픔을 짊어지고 걸어나가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소규모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그 신앙생활이 전례생활과 기도생활 등등의 종교생활에만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는 선교와 봉사의 공동체가 되려 할 때 더욱더 그렇습니다.

5. 복음화의 단계
그러면 이러한 복음화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단계를 거치고 그 각 단계에 맞는 방법을 사용하여야 하겠습니까?

1)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진 복음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복음화 시킬 수 있을까?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한다는 우리의 사명은 우리 삶의 개인적이고도 내적인 면이나 외적인 면에서 보람과 긍지를 그리고 힘을 줍니다. 지금까지 저는 자신들의 삶을 나누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 팀회합이나 본당 구역, 반모임에 참여하면서 신앙의 확신과 사제생활의 멋과 사목을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삶을 나누는 각종 신앙모임에 참여하여 나눔을 들을 때마다, 신자들의 삶 속에 주님이 살아 함께 하고 계시며, 복음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감명 깊게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저뿐만의 기쁨이 아니라 복음을 나누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가질 수 있는 공통적인 기쁨과 보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순박하고 단순하여 주님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 안에서 자기 삶의 길과 양식을 얻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피하지 않고 애써 자기 삶의 조건(자신이 하루에 겪는 여러 가지 일) 안에서 실현하고자 합니다. 또한 실제로 자신의 삶 안에서 실현시킴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진정한 복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한 걸음씩 주님과 복음의 사도가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면서 부러운 생각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복음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며 또한 복음을 믿고 그것을 이루려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확신이 거듭 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가 10,21)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되며 여러분을 통해 제가 복음을 얻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2) 복음화의 첫 단계 - 동일화와 상호신뢰
처음 구역, 반모임에 참석하는 신자들이나 교리반에 들어 온 예비자들은 자기 신상에 대한 간단한 질문에도 부담 없이 대답하지 못하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립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그의 삶에 애정을 가지고 대하게 되면, 그는 다음부터는 먼저 말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구역, 반모임에 데려오기 시작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 하는 첫 단계는 동일화와 상호신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의 임무는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고 스스로 사랑 받고 있다는, 그래서 자신의 존엄성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으로 기다리고 아껴주며 키워주려는 복음적인 열성이 필요합니다. 이는 가르치고, 지적하고, 보호해 주려는 상하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인격적인 관계이며, 주는 것만이 아닌 서로 주고받는 나눔 속에서, 같은 인간 조건에서부터 출발하려는 동일화의 진지한 자세와 그에 따라 형성되는 상호신뢰의 작업입니다.
이 동일화와 상호신뢰를 통해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여 창조 때의 본성을 회복하게 되며 우정 안에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3) 복음화의 둘째 단계 - 복음을 통해 주님과 만남
복음화의 첫 단계가 인간성 회복과 우정의 건설이라면, 두 번째 단계는 주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의 빛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는 성서를 같이 나누며 자신의 삶에 복음을 적용하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고 다소 지루하며 세상의 악과 싸우는 진통을 겪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현실 안에서 자기 소신대로 아니 덧붙여 복음의 말씀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 더욱더 파고드는 주님의 사랑과 완덕을 향한 열망이 심어지는 시기입니다.
자기 인생의 시기에 겪어야 하는 전직과 전업, 승진과 이전 등의 직장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복음적 활동과 가정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 등의 과제 앞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며 식별하는 순간들입니다. 옳은 것을 실천하려 하지만 두려움에 망설이는 순간, 사회적인 기준과 관점에서 더 낳은 방법과 자리 앞에서 고민해야 하는 순간 순간에, 그야말로 '삶과 마주친 신자'로서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스스로 그리고 함께 몸부림치며 찾아 나서는 제자들의 단계입니다.
이 때 사목자는 주님께 대한 신뢰와, 거듭되는 사회의 벽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좌절하게 됩니다. 또한 사목자의 영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리고 자기 수준에 맞게 적절히 선택할 수 있도록 존중해 주며 신중하게 대화합니다. 그리고 뒤에서 그 결정과 실천이 주님의 뜻과 사랑 안에 있음을 힘있게 인정해주고 지켜봐주며 위로하고 성원합니다.

4) 복음화의 셋째 단계 - 복음의 사도
두 번째 단계가 복음을 깨달아, 자신의 것으로 얻고, 맛들여,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단계였다면, 세 번째 단계는 인류구원을 위한 희생으로 십자가를 지고 세상의 죄악을 물리쳐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사도로서의 단계입니다.
차츰 가난한 이들은 복음을 실천하면서 자그만 하게나마 열매를 맛보고, 시련을 당하더라도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체험을 바탕으로 용기를 얻고 증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세상의 악과의 투쟁을 시작해 나가며 복음을 선포 증거하는 사목자의 '종이 아니라 벗으로서'(요한 15,15 참조) 함께 걸어가게 됩니다.

5) 쓰디쓴 체험을 통해 얻는 복음화의 값진 열매
복음화의 열매는 외형적이거나 조직적인 공동체의 건설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더 수축될 수도 있고, 세상의 광대함과 조직적인 악의 세력 앞에서 보잘 것 없는 한 알의 밀씨와도 같은 수확일 수 있으며, 풍요함보다는 현세에서는 패망하는 듯한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외형적인 모습은 실패요 허무한 것이지만, 내면으로는 주님께 순종함이고, 주님과의 일치요, 사도의 표징입니다. 우리 자신의 사도적 활동 안에서 우리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시간도 빼앗기고, 자신의 사회적인 꿈도 없어져 버리지만) 그 열매는 우리에게 참 꿈을 실현시켜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완성이며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6) 복음화의 방법론
복음화의 각 단계는 다른 단계와 완전히 구별되거나 명확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단계별로 다른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않겠습니다. 기초적이고 우선적인 방법은 바로 '나눔의 신비'입니다. 서로 자신의 삶을 나눔으로써 서로가 복음화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임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복음을 자신의 삶의 잣대로 하여 나누기 때문입니다.
삶을 나눌 때에는 '관찰'과 '판단'과 '실천'의 순으로 합니다. '관찰'은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내 입장도 아니고 상대의 입장도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이렇게 바라본 것을 모임에서 나누게 됩니다.
이렇게 나누면서 "주님께서는 이럴 때 어떻게 하실까?", "주님께서는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 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 그 사건이나 상황을 생각하고 나아갈 방향을 잡게 됩니다. 이것이 '판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삶 속에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을 판단한 후에는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실천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 때는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 실천을 하여도,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또 구역, 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나 망설임보다는 기쁨과 용기가 샘솟게 됩니다. 그리고 실패나 성공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주님의 사도로서 일하는 것이고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다음 주에 또다시 자신이 실천한 결과를 또다시 주님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실천약속을 하고 실천하는 방법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한 걸음씩 주님의 사도가 되어 가고 우리의 모임은 하느님 나라가 되갑니다.

6.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한편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기 위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7년부터 1999년에 이르는 3년을 구세주 강생 2천년을 준비하는 마지막 단계로 삼고 그 첫해인 지난 1997년을 성자 예수 그리스께 봉헌하도록 선포하셨습니다. 또 이 해를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인지하고 그분의 강생의 신비를 심화하며 생활화하는 기간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유일한 구세주"(히브 13,8)라는 대주제를 제안하셨습니다. 둘째 해인 1998년 성령의 해를 맞이하여, 서울대교구장님께서는 '가정의 복음화'와 '북한 동포 돕기'와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도록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셋째 해인 올해 1999년은 성부의 해입니다. 성부의 해엔 "복음선포는 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첫째가는 봉사입니다." 라고 하시면서 복음선포의 중요성과 시급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본당을 동별, 구역, 반별로 나누어, 해당 지역의 예비자와 냉담자와 가난한 이들을 해당 지역 구역 반이 책임지고 품어 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지속적인 성서의 봉독과 연구 그리고 우리가 읽은 성서의 말씀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알아듣기 위해 각자 기도를 바치고, 그 말씀을 식별하고 함께 이루기 위한 구역·반의 복음나누기에 더욱더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토대아래 미사와 성사생활을 통한 빠스카 신비를 진솔하게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내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구체적인 말씀과 전례 그리고 성사라는 기본적인 신앙행위를 통하여 확고한 내적체험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바탕 아래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열망이 불꽃처럼 피어올라, 우리를 우리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지역의 빛과 소금이 되는 복음의 증거자로 헌신하도록 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망 안에서만이 우리는 우리의 거울인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신앙이 자연스럽게 전수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1999년도 공항동 교회 소공동체 복음화의 구체적인 실천계획 과정
1) 1998년도부터 남성은 월 2 회 구역모임에, 여성은 주 1 회 반모임에 참여하여 복음을 맛들이고, 복음의 빛으로 자신의 삶을 나누기 시작한 신앙생활을 더욱 더 심화시킨다. 또한 월 1 회 가족이 다함께 모여 복음 나누기를 겸한 가족 기도 모임을 함으로써 복음을 생활화한다.
2) 구역 반모임에서 복음 나누기 7단계가 익숙해진 다음, 복음을 천주교회의 정신과 신학교리의 흐름에 맞추어 봄으로써, 복음을 자신의 실제 삶에 명확히 적용할 수 있도록 '일하며, 쉬며, 또!'라는 교재를 통해 전신자가 교리 교육을 심화한다.
3) 1999년부터 주일학교에서는 복음을 나눔으로써 배우는 교리 교재를 사용하여 체계적인 교리교육에 힘쓴다. 주일학교 초등부 1학년부터 6학년까지는 '예수님, 어서 오세요'로, 중등부와 고등부는 '하늘나라 망원경'으로 나눔 교리를 한다.
4) 청소년 복음화의 일단계로 1998년부터 시작한 어린이 반모임에서 주일학교에서 배운 교리를 지역에서 어린이 반모임을 통해 복음 나누기를 함으로써 복음을 생활화한다.
5) 주일학교는 중등부와 고등부로 나누어 청소년들이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점차로 청소년 반모임을 갖도록 육성한다.
6) 청년들은 자체적으로 청년 반모임을 할 수 있도록 육성한다.
7) 본당 내의 모든 단체는 복음을 그 실천강령으로 하고 복음나누기를 의무적으로 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활동한다.
8) 본당의 모든 단체는 복음을 기초로 최소한 년 1회의 피정과 연수를 한다.
9) 본당의 각 지역 복음화를 위해 동별, 구역 반별 복음화 계획을 수립한다.
10) 예비자 선교와 냉담자 회두를 위한 동별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와 지역 선교단이 활동한다. 본당에서는 지역의 복음화 활동으로 선발된 예비자들을 교육할 평신도 예비자 교리 교사를 양성 활동한다.
11)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할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를 동별로 설립한다. 본당에서는 그 대표들을 본당의 부대표로 임명하고 육성한다.
12) 죽은 이와 죽은 이의 가족을 위로하고 장례 봉사할 연령회를 동별로 설립한다. 본당에서는 그 대표들을 본당의 부대표로 임명하고 육성한다.
13) 이렇게 점차적으로 자모회와 제대회 및 기타 신심 활동단체를 동별로 설립 운영함으로써 지역의 복음화를 주체적으로 실현하며 각 지역은 분당의 준비를 한다.
14) 본당 내에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한 첫 사회복지활동으로 어린이집을 운영한다.



대림 제4주일

(다해-1) 루가 1,39-45 : 97/12/21

우리는 모두 잘 살고 싶고, 열심히 살고 싶고, 또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됩니다. 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도 아닌데 잘 안됩니다. 잘 되고 잘 살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해도 원하는 만큼 안되지만, 괴로움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풀고 또 풀어주고 싶은 데도 잘 안됩니다. 내가 기대한 만큼 받지 못할 때 또 섭섭한 처우를 당 할 때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때, 해도 해도 잘 안될 때 그렇습니다. 이 렇게 선하고 싶고 좋은 방향으로 나가려고 해보았지만 잘 안돼서 절망과 아쉬움, 섭섭함, 안타까 움과 갈증 속에서 목말라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수 있는, 우리의 주인 이신 주님께 청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변화시켜 주시라고 청하십시오. 오셔서 사랑에 굶주리고, 아쉬워하고, 애석해하는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주 님 사랑으로 채워주십사 하고 청하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아쉬움과 실망을 씻어주시고, 우리 의 갈증을 사랑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주시기를 청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고 하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데도 잘 안되는 지금 우리에게 그 선한 마음을 우리에게 심어주신 주님께 청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씻어주시고 성하게 해주시고 위로해 주셔서 우리를 풍요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오시면 정말 나의 갈증이 적셔지고 매듭이 풀어진다는 믿음 안에서 주님께 청하십시오. 그리고 미움과 분열보다 사랑과 화해가 더 좋고 반 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믿음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오늘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주님께 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그리고 나서 주님의 사랑으로 마음의 부자가 되고 여유가 생기고 힘이 생기면, 그 때 에누리없 이 용서하고 베푸십시오. 나에게 섭섭함과 괴로움을 안겨 준 사람들에게 오히려 베풀고 나누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비로소 자신과 주님 앞에 서서 말씀드리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


(다해-2)

우리는 왜 신앙을 가지려고 하는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편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왜 세상에 살도록 하셨을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며 무슨 일을 어떻게 하시기를 바라셨을까?

여기서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다. 우리 인생 속에서 작게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과 우리가 해야 할 일 사이에서, 크게는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자기의 생각과 하느님의 창조의도 차이에서 오 는 이른바 존재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자의식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다른 두 방향의 질서 아 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오는 갈등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이 되면서 예기치 않게 새롭게 생겨나는 문제에 대한 갈등이다. 그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하느님의 뜻 안에 있지 않거나 또는 하느님의 뜻 안에 있지만 현세와 악의 세력과 반대되는 것이기에 받아야 하는 현세적인 수난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싸워 이겨내야 하는 십자가이다.

구세주 예수님을 맞이하는 오늘 대림 4주일에 우리는 우리 삶의 방향과 존재의 목적에 대해 질 문을 던진다. 왜 사는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 것인가? 사도 바울로는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한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 그럼 여기서 말하는 당신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뜻으로서, 말 그대로 자기가 하고 싶고 자기 개인의 사리사욕과 만족을 위한 일이 아니다. 한편 자기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그가 만족할 수 있을 정도의 희생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는 예수님 의 죽음으로 구원받았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희생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목숨을 바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구원된 우리가 예수님의 뒤 를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 고 그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로의 재인용을 보면, 주님께서 는 "'당신은 율법의 희생제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 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히브 5,5ㄴ) 라고 말씀하신다.

참 제물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 제물은 율법의 희생제물과 봉헌물과 어떻게 다른 가? 만일 율법에서 말하는 희생제물과 봉헌물을 자기 자신의 원의와 편이를 위해 바친다면 그것 은 율법에 의 해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물이긴 해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은 아닐 것 이다. 참 제물은 하느님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열과 성을 바치는 제물이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신약의 제사를 완성하셨다. 이렇게 인간 세상에 제물로 오신 주님을 맞이하는 세례자 요한은 어미 뱃속에서 기뻐한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 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 습니다."(루가 1,43-44)

우리 구원의 주님께 기도합시다. 주님 제가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 몸바치게 해주소서. 제 몸이 다할 때까지 온전히 주님 복음의 사도가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주님 구원의 도구되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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