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일 제32차 세계 병자의 날 교황 담화문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관계의 치유를 통한 아픈 이들의 치유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 참조) 한처음부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친교를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삼위일체의 모습을 반영하는 우리 삶은 관계와 우정과 주고받는 사랑의 연결망을 통하여 충만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바로 이 친교의 계획이 인간의 마음 깊이 뿌리내려 있기에, 우리는 버림받음과 고독에 대한 체험을 무언가 두렵고 고통스럽고 심지어 비인간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이따금 심각한 질병에 걸려 취약하고 불확실하며 불안한 시기에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코로나바이러스19 감염증의 세계적 확산 시기에 몹시 외로웠던 모든 이를 생각합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방문객을 맞이할 수 없었던 환자들뿐만 아니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격리 병동에 갇혀 지낸 많은 간호사, 의사, 지원 인력이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의료진의 도움을 받지만 가족과 멀리 떨어져 홀로 임종의 시간을 맞아야 했던 모든 사람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또한 전쟁과 그 비참한 결과로 도움도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남겨진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과 괴로움과 고립감에 함께합니다. 전쟁은 가장 끔찍한 사회 병폐이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희생을 치르게 합니다.?
또한 평화와 더 많은 자원을 누리는 나라에서조차, 노년과 질병의 시기를 외로움 속에서 그리고 때로는 버림받는 상황으로도 경험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점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 암울한 현실은 주로 개인주의 문화, 곧 온갖 대가를 치르고 얻는 생산성을 찬양하고, 효율성의 신화를 조장하며, 개개인이 더 이상 보조를 맞출 힘이 없을 때에는 무관심해지고 냉혹해지기까지 하는 개인주의 문화의 결과입니다. 그러고 나면 개인주의 문화는 버리는 문화가 됩니다. 버리는 문화에서 “사람은 존경하고 보호할 우선 가치로 더 이상 여겨지지 않습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 장애인, 태아처럼 ‘아직 쓸모없는 존재’, 노인처럼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라면 더욱 그러합니다”(‘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18항).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의 존엄성과 필요에 중점을 두지 않는 어떤 정치적 결정을 이끌어 냅니다. 이러한 정치적 결정은 모든 사람이 건강에 대한 기본권과 의료 혜택의 기회를 누리도록 보장하는 데에 필요한 정책과 자원을 늘 장려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의료 혜택을 단지 의사와 환자와 가족 구성원 사이에 ‘치료의 연대’를 수반하지 않는 서비스 제공으로 축소시켜 버리는 것도 취약한 이들이 버림받고 고립되는 데에 일조합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다시 한번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초기에 이 말씀을 하시어 인류를 위한 당신 계획의 심오한 의미를 우리에게 밝혀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서서히 스며들어 의심과 균열과 분열에 이어 결국 고립을 야기하고 마는 죄의 치명적인 상처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죄는 사람과 그의 모든 관계를, 곧 사람이 하느님과,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과, 피조물과 맺는 모든 관계를 공격합니다. 그러한 고립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죄는 사랑의 기쁨을 앗아가고 우리가 삶의 모든 중요한 여정에서 혼자라는 숨 막히는 느낌을 체험하게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질병에 필요한 돌봄의 첫 번째 형태는 함께 아파하고 사랑으로 곁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병자를 돌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의 돌봄을 의미합니다. 그가 하느님과, 다른 이들 곧 가족 구성원과 친구와 의료인과, 피조물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맺는 모든 관계를 돌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렇습니다. 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이 일이 분명히 이루어지게 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표상을 바라봅시다(루카 10,25-37 참조). 걸음을 늦추어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그의 역량을, 고통받고 있는 형제의 상처를 돌보는 그의 온유한 사랑을 살펴봅시다.
삶의 중심이 되는 이 진리를 기억합시다. 이는 누군가 우리를 환영해 주었기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고 사랑을 위하여 우리가 창조되었으며 친교와 형제애로 부름받았다는 진리입니다. 우리 삶의 이러한 측면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질병에 걸리고 허약할 때 우리를 지탱해 줍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가 다 함께 채택해야 하는 첫 번째 치료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일시적이든 만성적이든 질병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친밀감과 온유함에 대한 여러분의 갈망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이를 숨기지 말고, 여러분이 다른 이들의 짐이 된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마십시오. 병자들의 상태는 우리 모두에게, 정신없이 바쁜 삶의 속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라고 촉구합니다.
급변하는 이 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특히 예수님의 연민 가득한 눈길을 닮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고통받고 외로운 이들, 소외되고 버림받았을 이들을 돌봅시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기도 안에서, 특히 성찬례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고독과 고립의 상처를 치유합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개인주의, 무관심, 버리는 문화에 맞서 싸우고 온유와 연민의 문화를 증진하는 데에 힘을 모으게 되는 것입니다.
병든 이들, 취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관심과 사목적 염려의 중심에도 그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절대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병자의 치유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전구해 주시고 우리가 친밀감과 형제적 관계의 장인이 되게 도와주시도록 성모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립시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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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꽃꽂이
연중 제6주일
가끔 해외 성지순례를 가 보면, 아주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성당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 성당에 들어가기 전부터 성당 외관에서 비춰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 대단하다!’라는 느낌을 받게 해줍니다.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종탑과 외부 장식들이 정교하고 화려하고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지은 성당이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지금보다 훨씬 경제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한참 못 미쳤을 것만 같은 그때 그 시절에 ‘저 성당을 지으려고 신부님과 신자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하는 존경심마저 들게 해줍니다.
그런 성당 안에 들어가면, 정말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의 갖가지 화려한 성물과 성화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을 자아내게 해줍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절로 ‘이 정도는 되야 성당을 성당답게 지었다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성당도 잘 지어 놓아야 두고두고 여기저기 세상 끝에서부터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관람료도 받아서 성당 관리도 되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성당을 구경하고(?) 나서면서 마음이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성당 안에 기도하는 본당 신자는 없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성당에서 기도가 아니라 감상하고 나오는 관광객이 다수를 이루는 성당이 ‘기도하는 집’으로서 무슨 가치가 있을까? 그 성당은 그리스도교 문화 양식에 따른 건축물이나 그리스도교 신앙 문화박물관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성전에 들어가시어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 버린 성전을 안타까워하시며 하시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라고 인용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 본당 신자들이 “우리 성당(건물)은 화려하고 멋있어요, 선조들이 갖은 희생과 노력으로 지은 성당이에요!”라는 자부심을 품고 사는 것은 좋겠지만, 정작 성당 건축의 본래 목적대로, 신자들이 주님 대전에 나아와 자신의 인생사에서 겪게 되는 희로애락을 바치는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면, 주님께서는 얼마나 허전하고 아쉬워하실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그 신자들을 바라보시면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하시지는 않으실까 하는 염려마저 듭니다.
다른 또 한편으로 그 성당을 지을 때 많은 헌금과 희생이 필요했을 텐데, 화려한 성당 건축의 그늘 아래 가난한 이들의 한숨과 선교와 행사와 단체 보조는 또 어떻게 했을지, 당시 본당 신부님과 신자들의 고민을 엿보기도 합니다. 지금도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소박하고 검소한 기도하는 집보다 성당 건물이 크고 웅장해야 ‘저기 뭔가 있나 보다!’ 하면서 찾아온다고들 하니, 세상의 죄를 짊어진 그리스도 예수님보다 화려한 부활의 영광만을 바라고 또 보여주고 싶어 하는 면에서는 신앙의 괴리를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비슷한 유혹과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주님과 형제자매들이 기뻐하실까?’하는 마음으로 기획하고 실행하는 데 정열을 다 쏟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자칫 ‘내가 생각하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떠올려서, 주님의 이름을 빌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37절)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가?’를 미사성제와 기도와 복음나누기를 통해 찾고, 그렇게 찾아 얻은 주님의 뜻을 교회의 가르침에 맞춰 식별하여, 단순하고 소박하게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나와 내 가정, 내가 일하는 일터에 적용하면서 희생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면서 '무엇을 어떻게 하여, 주님과 형제자매들이 기뻐히실까?'를 찾는 노력에 그치지 않고,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를 미사성제와 기도와 복음나누기를 통해 찾고, 그렇게 찾아 얻은 주님의 뜻을 교회의 가르침에 맞춰 식별하여, 단순하고 소박하게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나와 내 가정, 내가 일하는 일터에 적용하면서 희생 봉사하며 살아갑시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외적 행동의 방향과 진퇴를 찾는 것과 아울러, 비록 달갑지는 않더라도 이 시대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과제처럼 주어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채워나가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내적으로 순수하고 진실하게 주님을 사랑하며,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신앙인이 됩시다.
지난 2월 8일 사제수품 12주년을 맞은 유동철 리노 신부님에 이어, 오늘은 주 대전에 불충하고 부덕하고 부당한 저의 사제수품 3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제생활을 하면 할수록 기도가 필요하다는 간절한 마음을 간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지 않으면, 저의 모든 삶과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감히 여러분께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께서 저와 함께해 주시어, 제게 주님의 뜻을 일러주시고, 그 뜻을 잘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고 채워주시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사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십시오.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간 본성에 불과한 주제에, 꼴에 맞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는 저에게, 주님께서 함께하시어, 저를 주님 뜻에 맞갖은 사제가 되게 해 주시고, 주님의 뜻을 따라 교회와 형제들을 사랑하고 희생 봉사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마태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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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꽃꽂이
연중 제6주일
어떤 예비신자가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가난이 싫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아서 가난이 정말 싫습니다. 그런데 성당에 오면 가난하게 살라고 하니 불편합니다.”
네,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물질적인 결핍과 불편한 삶의 조건을 유지하라고 권장하지 않습니다. 교회 역시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과 물질을 인정하고 소유하도록 권장합니다. 교회는 사람이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을 하는 데에도 부족한 물질적인 결핍을 주위 사람들이 함께 채워주고 메꿔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그렇게 채워주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라고 선언하십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가난을 바라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켜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서 하늘에서 지복직관을 누리며 그냥 사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굳이 하느님의 권한과 복된 환경을 두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예수님을 처음 발견한 목동들은 사회적으로 최하층에 속하는 자신들보다도 더 가련하고 불쌍하게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발견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런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가족이 한방에서 살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가족들이 모두 서로 공유하며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자라면서 내 방이 생기고, 내 것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고, 내 것이 생기면서 그만큼 가족은 멀어져갔고, 내 것이 생기면서 전과 같은 행복은 누리지 못했습니다. 가족은 점점 ‘내’가 아니라 ‘너’가 되었고, ‘우리’라는 상징적인 단어로만 하나였습니다.
이는 비단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라고 하는 관계도 비슷하게 되어갔습니다. 처음 성당을 지을 때는 우리 신자 모두가 한 식구였다가, 더 깊은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어느덧 구역반으로 나누면서, 어제까지는 한 식구였던 우리 교우가 지금은 다른 구역이 되었습니다. 구분과 전문화로 얻는 장점이 분명 있지만, 그전처럼 피부로 느끼는 하나와는 구별되었고 점차 낯설어 가고 행사할 때만 만나는 이웃이 되어갑니다.
되돌아보면, 없을 때는 우리 모두 하나였다가, 뭔가 가지기 시작했을 때, 뭔가 구분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전처럼 행복해지지 않다는 어설픈 아쉬움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품 안에 있을 때나 내 자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 성장하여 일가를 이루며 떠나가는 자식을 보면서 그저 행복하게 살기만 바라면서 축복을 하고 마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가난한 것이 죄악은 아닙니다. 가난할 때의 장점이 분명 있습니다. 가난할 때는 너와 내가 하나였고, 또 가난하기에 서로 비교도 많이 안 되고, 서로가 서로를 격 없이 받아들이고 나누며,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하나로서 누리는 행복을 느끼고 삽니다.
그런데 더 성장하고, 더 많은 물질을 가지고, 더 높아졌을 때는 그만큼 자신이 가진 것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더 많은 재물을 가지고 더 높아지기 위하여, 아예 가난할 때보다 더 많은 재물과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형제자매들과 이웃 친지들과 함께하는 시간과 공유가 줄어들고 오히려 경계마저 하게 되어, 함께한다는 것이 행복하기 보다는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교회는 과거로 돌아가라고, 가진 것을 무작정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것을 지키고 나와 너를 구분하며 스스로 자신 안에 갇혀 외롭게 고립되어 살지 말 것을 권장합니다. 교회는 함께할 때의 장점을 발견하고, 함께할 때 얻는 우정과 협동, 우리의 전통적 가치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실현됨으로써 얻게 되는 잔잔한 기쁨을 간직하라고 제안합니다.
삶을 공유하고 인격을 나눌 때 얻을 수 있는 행복! 한 소년이 자신이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리고 되돌려 받아 나눌 때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 함께 먹을 수 있는 기적이 발생했듯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한계상황을 함께함으로써 기적처럼 발생하는 행복한 상태를 복원하기를 지향합니다.
비록 자신이 가진 것은 다른 이들과 공유하기 위해 내놓아 없어져 버리는 듯하지만,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다른 이들을 형제자매로 얻고 자신이 땀 흘려 얻은 것을 공유함으로써 얻게 되는 내적인 풍요와 만족과 자부심과 보람으로 행복해질 수 있음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복의 원형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한평생 자신의 신분상승과 재산축적을 위해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위로하고, 다른 이들의 결핍을 채워주시다가,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죗값으로 송두리째 바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21절)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다시 이런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어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국 생명을 바쳐 구하신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다시 오실 것을 희망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22절) 우리는 우리 본당의 주보이신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을 기억합니다. 주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키기 위하여, 사회에서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람들에게서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까지 생명을 바치신 순교성인들은 하늘에서 지금 주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십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23절) 비단 순교성인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님을 닮아, 우리를 낳으시고 길러주시며 우리를 위해 인생을 다 바치신 부모님들과 우리의 긍정적인 성장을 위해 사회에서 수고하고 희생하신 일가친척들과 선생님들과 모든 공직자분들과 봉사자분들도 기억합니다. 그분들 역시 주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품 안에서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는 대신 자신들의 신분상승과 재산축재를 위해 신경을 쓰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그렇게 사셨다면, 그분들은 우리와 헤어질 때보다 더 좋은 환경을 누리고 계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같이 우리의 감사와 공경까지는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24절) 평소에 자신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누릴 때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겠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잃거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아무도 찾아오지도 온정의 손길도 내밀지 않을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25절) 설사 누군가에게는 인정과 존경을 받을지언정, 지금 우리가 부모님이나 은인들에게 바치는 감사의 온정은 받지 못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허울좋은 부러움과 시샘의 영광과 칭송을 받을지언정, 마음속으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차디차고 외로운 대접을 받아 슬퍼하며 울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26절)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하느님 나라를 간직한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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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꽃꽂이
연중 제6주일
언젠가 중증 지체 장애자 요양원에 들어가 한 주간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겨울방학 때는 아이들이 대부모 집이나 자매결연을 맺은 가정으로 놀러가고 남은 아이들만 한 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가서 아이들과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저를 향해 오는 것 같았습니다. 잠깐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방 한 가운데에서 그 아이의 울음 소리가 났습니다. 저를 향해 오던 아이가 제가 다른 아이와 놀고 있으니까, 오다 말고 선생님께로 향했나 봅니다. 그런데 선생님도 다른 아이들을 돌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그 아이는 사면초가로 자기 한 몸 둘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이 선생님, 저 선생님 사이를 그야말로 맴돌다가, 갈 곳이 없으니까, 그만 울고 만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많은 아이들이 다 저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혹시 자기에게 오지 않나 해서 말입니다. 그 중에는 침대에 눕혀져서 주사바늘로 위에 직접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만 할 정도로 증세가 심각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큰 짐을 진 아이들입니다. 애처롭다는 감상적인 표현보다는, 상대의 처분만 바라면서 자신의 원의를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는 표정 없는 아이들의 모습이 서글프고 안타까웠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정말 몸 둘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점점 이상해지고, 또 이상해지니까 더욱 더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 어느 누구 하나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아서 맴도는 사람들. 감싸주고 안아주지 않아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주님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고 말씀드립니다.
저도 한 동안 매일 같은 지향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주님의 거룩한 사도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는 중증 장애자 요양원의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 기도는 제가 주님께 청할 기도가 아니라, 그 아이들이 주님께 그리고 그 집을 찾는 이들에게 하는 청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었습니다. 제 손길이 자기에게 스쳐가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마음입니다. 적극적으로 요구할 기력조차 없고, 저항하고 극복할 아무런 희망조차 간직하지 못한 아이들. 그저 남이 자기에게 다가와 먹여 주고 안아 주기만을, 그야말로 처분만 바라는 아이들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나병환자는 유다 사회에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간주하고 동네 밖에서 기거하도록 했습니다. 또 나병환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은 천형을 받은 것으로 여겼기에, 그러한 상황에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처분만 바라며 자포자기해 버렸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이들이 떠오릅니다. 저의 처분만 바라는 이들은 장애자 요양원에서뿐만 아니라 본당의 교우들 그리고 본당 관할구역 내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가슴 속에 익명으로 남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당을 향해 거는 지역사회의 기대들. 정의와 진실 그리고 선행은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더욱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새로 나게 하시어, 가난한 이들의 사도로 삼으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고쳐 주시고, 그들을 다시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해서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44절) 라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을 아주 엄중히 지적하시면서도, 그들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축소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밀려난 그들에게는 그러한 사정이 있어 배려해준다고 하더라도,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이라도 더, 한 명이라도 더 알려서 예수님을 믿게 해야 하는데, 거꾸로 알리지 말라고 하니 무슨 의도이실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와서 병을 고치고 주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주 하느님의 뜻대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 아니라, 병만 고쳐주기를 바라면서 오는 이들을 반가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이들이 아니라, 병을 고치는 의사나 능력자나 기적자로 비춰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그들을 보면서 ‘다 부질없는 일!’ 이라고 실망하거나,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고 여기실지 모릅니다.
그 때 어린 환우들을 바라보면서 이 구절을 떠 올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이 아이들을 정상으로 되돌려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환우들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다 되돌려주실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언제 어떻게 되돌려주실지, 아니면 그냥 그대로 살면서 나름대로 주님 사랑을 느끼도록 하실지는 주님께서 하실 일임을 압니다.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것만이 선하고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자신이 처한 위치와 처지 속에서도 주님 사랑을 느끼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주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따르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하기를 원해서 그런지,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45절) 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적을 행하는 이를 알고 있다는 것이 마치 자신이 기적을 베푸는 이들에게 가는 지름길이요 통로라고 착각하며 제시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기적을 베풀 수 있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도 할 줄 아는 것 마냥 착각하기도 합니다. 운동을 하는 법을 안다고 해서 운동을 잘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구원의지에 따른 행위를 받아들이고, 그 듯을 헤아리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변화의 노력없이, 그저 자신들의 현세적인 탐욕만을 바라는 이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으셨나 봅니다.
우리는 주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와서 빌면, 현세의 입신양명이 해결된다고 하며 미신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며 주 하느님의 뜻을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이 땅에서 내 몸으로 채우고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빌면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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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꽃꽂이
연중 제6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VI
오늘은 우리 모두의 집인 지구 생태환경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제1장 우리가 사는 집인 지구의 환경 오염과 제2장 피조물에 대한 창조의 가르침, 제3장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 제4장 온전한 생태학’, ‘제5장 접근법과 행동 방식’(163-201항)에 이어 ‘제6장 생태 교육과 영성’(202-246항)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회칙의 마지막 장은 모든 사람을 생태적 회개로 초대하는 핵심 부분입니다. 문화 위기의 뿌리는 깊으며 습관과 행동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육과 훈련이 열쇠입니다. “동기 부여와 교육 과정 없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15항) 모든 교육 분야의 참여가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학교, 가정, 매체, 교리교육”(213항)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6장 생태 교육과 영성
I. 새로운 생활 양식을 향하여(203-208항)
현실적 상대주의와 소비의 문화가 존재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인류는 최악의 것을 자행할 수 있지만 또한 정신적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서 벗어나 선한 것을 선택하여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 어떠한 체제도 선하고 참되며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개방성, 곧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작용하는 하느님 은총에 응답하도록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을 완전히 억누를 수 없습니다. 저는 온 세상의 모든 이에게 우리의 이러한 존엄을 잊지 말라고 호소합니다.”(205항) 생활 양식과 소비자 선택의 변화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힘을 발휘하는 이들에게 큰 압력을 행사”(206항)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대안적 삶의 방식을 참되게 발전시킬 수 있고,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208항)
II. 인류와 환경의 계약을 위한 교육(209-215항)
환경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환경 교육은 행동과 일상 습관, 곧 물 절약, 쓰레기 분리 수거, 나아가 “필요 없는 전등의 소등”(211항) 또는 난방비 절약을 위한 따뜻한 옷 입기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211항).
III. 생태적 회개(216-221항)
신앙과 그리스도교 정신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 세상의 보호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도록”(216항) 깊은 동기 부여를 해 줍니다. 개인적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 문제는 공동체 관계망이 다루어야 합니다.”(219항) 생태적 회개는 감사와 관대를 의미하며 창조성과 열정을 발전시킵니다(220항).
IV. 기쁨과 평화(222-227항)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제안된 것처럼 “자유롭게 의식적으로 발휘된 냉철함은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223항) 이와 마찬가지로 “행복은 우리를 해치는 일부 욕구를 억제하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이 줄 수 있는 많은 다른 가능성들에 열려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223항) “우리가 식사 전후에 잠시 멈춰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그것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227항)
V. 사회적 사랑과 정치적 사랑(228-232항)
“온전한 생태계는 또한 폭력과 착취와 이기주의의 논리를 타파하는 단순한 일상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230항) 그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사회를 사랑하고 공동선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애덕에 대한 “탁월한 표현입니다.”(231항) 사회에서 자연과 도시 환경을 보존하면서 공동선을 위하여 활동하는 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VI. 성사의 표징과 안식일 거행(233-237항)
우리는 또한 하느님을 가까이 만나 뵙고 또한 그분의 신비의 징표를 담고 있는 창조를 묵상하면서 그분을 만납니다. 성사들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자연을 받아들이시는지를 특권적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교는 물질과 육체를 부인하지 않으며 그것들에 완전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특히 성찬례는 “하늘과 땅을 결합시킵니다. 성찬례는 모든 피조물을 품고 그 안에 스며듭니다. …… 그러므로 성찬례는 또한 환경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위한 빛의 원천이며 동기로 모든 피조물에 대한 관리자가 되라고 우리를 이끌어줍니다.”(236항)
VII. 삼위일체와 피조물들의 상호 관계(238-240항)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의 친교를 이루시는 한 분 이신 하느님을 믿으면서 삼위일체가 모든 피조물에 그 표징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239항) 인간은 또한 삼위일체의 역동성을 본받으라는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 다른 이들, 모든 피조물과 친교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 자신에서 벗어납니다.”(240항)
VIII. 모든 피조물의 모후(241-242항)
예수님을 돌보시는 마리아께서는 이제 예수님과 함께 사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가 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공정을 노래합니다.”(241항) 마리아 곁의 요셉은 복음에서 의로운 사람이며 노동자로 참으로 온유하고 강한 인물로 나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을 보호하도록 가르치고 힘을 실어줄 수 있습니다.
IX. 태양 넘어(243-246항)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한없는 아름다움 앞에 서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영원한 삶은 경외를 함께 나누는 체험이 될 것이며, 그 경험 안에서 눈부시게 변모된 모든 피조물은 합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궁극적으로 해방된 모든 가난한 이에게 줄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243항) 우리의 고난과 근심이 희망의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 중심에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생명의 주님께서 언제나 현존하여 계시기”(245항)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도록 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기쁘면서도 불편한 이러한 긴 성찰의 결론으로”(246항), 교황님께서는 두 가지 기도, 곧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와 그리스도인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드릴 것을 제안하십니다.
교황님께서 새로운 길로 제시해 주신 이상의 회칙 내용을 마무리 하면서, 교황님께서 요청하신 두 기도 중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를 함께 바치며 강론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고자 하시는 교황님의 지향에 우리 정성을 모아 다 함께 큰 소리로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온 세계에 계시며
가장 작은 피조물 안에 계시나이다.
하느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유로 감싸 안으시며
저희에게 사랑의 힘을 부어 주시어
저희가 생명과 아름다움을 보살피게 하소서.
또한 저희가 평화로 넘쳐 한 형제자매로 살아가며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하소서.
오,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저희가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소중한 이들,
이 지구의 버림받고 잊힌 이들을 구하게 하소서.
저희 삶을 치유해 주시어
저희가 이 세상을 훼손하지 않고 보호하게 하시며
오염과 파괴가 아닌 아름다움의 씨앗을 뿌리게 하소서.
가난한 이들과 지구를 희생시키면서
이득만을 추구하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저희가 하느님의 영원한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모든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경외로 가득 차 바라보며
모든 피조물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도록
저희를 가르쳐 주소서.
하느님, 날마다 저희와 함께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저희에게 힘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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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꽃꽂이
연중 제6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27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문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이 말씀은, 거저 주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자랄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며 하신 말씀입니다.
2019년 2월 11일 인도의 콜카타에서 장엄 거행되는 제27차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교회는 자신의 모든 자녀, 특별히 병자들의 어머니로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보여 준 것과 같은 너그러운 행위가 가장 믿음직한 복음화의 수단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병자들을 돌보는 데는 소명감, 온정, 그리고 상대방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손길처럼 기꺼이 베푸는 소박하면서도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묻습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1코린 4,7) 바로 인간 생명은 선물이기 때문에 개인의 소유물이나 재산으로 평가 절하될 수 없습니다. 특히 “생명나무”(창세 3,24)를 조작하도록 인간을 유혹하는 의학과 생명 공학의 발전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날 버리는 문화와 무관심의 문화에서, ‘내어 줌’은 개인주의와 사회 분열에 대항하는 가장 적절한 패러다임이 됩니다. 또한 이 ‘내어 줌’은 민족들과 문화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와 다양한 형태의 인간적 협력을 촉진합니다. 대화는 내어 줌의 전제 조건입니다. 대화는 인간 성장과 발전을 가능하게 하여 사회에서 권력 행사의 기존 관행을 타파할 수 있게 합니다. ‘내어 줌’은 단순히 선물을 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산이나 물건의 이전이 아니라 자기 증여를 의미합니다. ‘내어 줌’은 무상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것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열망을 포함하기에 선물을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러한 상호 인정이 사회관계의 기초가 됩니다. ‘내어 줌’은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강림으로 정점에 이른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우리 각자는 가난하고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데에는 부모님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또한 삶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이의 도움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타인이나 어떤 상황 앞에서 ‘피조물’로서 우리가 지닌 한계를 언제나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을 솔직히 인정할 때, 우리는 겸손해지고 삶의 중요한 미덕인 연대를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그와 같은 깨달음은 우리가 책임감 있는 행동으로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선을 증진하도록 이끕니다. 동떨어진 세계가 아닌 다른 이들과 맺는 ‘형제적’ 관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공동선을 목적으로 사회 연대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그리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우리 한계들을 극복할 수 없기에,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다른 이에게 의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몸소 예수님을 통해 당신 자신을 낮추셨고(필리 2,8 참조) 지금도 계속 그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우리 가난을 굽어 살피시어,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선물들을 베풀어 주시므로, 우리 자신의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도에서 장엄 거행되는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저는 기쁨과 존경의 마음으로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성녀를 떠올리고자 합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와 병자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 사랑의 모범입니다. 그분의 시성식에서 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너그럽게 전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인간 생명, 특히 태어나지 못한 아기와 버려져 외면당한 이들을 환대하고 보호하면서 모든 이를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 그분은 길가에 버려진 채 죽어가는 쇠약한 이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그들의 존엄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권력자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들이 초래한 빈곤이라는 범죄에 대하여 그들의 책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마더 데레사에게 자비는 자신의 모든 일에 맛을 내는 ‘소금’이었습니다. 또한 자비는 빈곤과 고통으로 눈물조차 말라버린 많은 이들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도시의 변방과 삶의 변방에서 펼쳐진 성녀의 사명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 곁에 계시다는 것을 알려 준 훌륭한 증언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시성 미사 강론, 2016년 9월 4일).
마더 데레사 성녀는 우리 행동의 유일한 기준이 언어, 문화, 인종, 종교와 무관하게 모든 이를 향하여 거저 주는 사랑이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성녀의 모범은 끊임없이 우리를 이끌어, 우리가 이해와 온정의 손길이 필요한 모든 이, 특히 고통받는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지평을 열게 해 줍니다.
거저 주는 무상성은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에 누룩이 됩니다. 자원봉사자들은 사회보건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착한 사마리아인의 영성을 호소력 있게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환자들의 응급 처치와 이송을 담당하는 모든 자원봉사 단체들, 그리고 혈액과 조직과 장기의 기증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감사와 격려를 드립니다. 병자들, 특히 특별 치료가 필요한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의 권익 수호와 연관된 분야는, 여러분 덕분에 교회의 보살핌과 관심이 드러나는 특별한 자리가 됩니다. 의식 개선과 예방 분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의료에서 영적 보살핌까지, 의료 시설과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자원봉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질병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고령이거나 심신이 약해진 수많은 이들이 여러분의 봉사로 혜택을 입습니다. 세속화된 세상에서 여러분이 계속해서 교회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자원봉사자는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좋은 벗입니다. 자원봉사자는 귀여겨들어 줌으로써 아픈 이들이 수동적인 치료 대상에서 벗어나 관계 에서 능동적인 주체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이러한 관계는 아픈 이가 희망을 되찾고 더욱 수용적인 태도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자원봉사 활동은 내어 주고자 하는 깊은 바람에서 나온 가치와 행동과 생활양식을 전달합니다. 또한 이는 더욱 인간다운 의료를 실현하는 방법이 됩니다.
무엇보다 가톨릭 의료 기관들에서 무상성의 정신이 두드러져야 합니다.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전 세계에서, 가톨릭 의료 기관들은 복음의 빛으로 운영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시설들은 어떤 희생도 아랑곳 않는 이윤 추구의 논리, 대가를 바라고 주는 논리,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착취의 논리에 대항하여 증여와 무상성과 연대의 의미를 보여 주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이윤 추구와 버리는 문화를 극복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거저 줌의 문화를 다양한 수준에서 증진하도록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가톨릭 의료 기관은 단지 기업체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가톨릭 의료 기관은 영리보다는 인격적 보살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건강에는 다른 이들과의 상호작용이 꼭 필요하며, 이러한 건강은 신뢰와 우애와 연대도 요구하는 관계적인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는 함께 나누는 것일 때만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보화입니다. 거저 줌의 기쁨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을 드러내는 척도입니다.
병자의 치유이신 성모 마리아께 여러분 모두를 맡겨 드립니다. 대화와 환대의 정신으로 우리가 받은 선물들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는 형제자매로 살아가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주고, 이타적인 봉사의 기쁨을 알 수 있도록, 성모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저는 사랑과 기도로 여러분과 함께할 것을 약속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저의 진심 어린 교황 강복을 보내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18년 11월 25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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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26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문
교회의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는 주님의 명령(루카 9,2-6; 마태 10,1-8; 마르 6,7-13 참조)에 충실하게, 그리고 교회의 창설자시요 스승이신 주님의 탁월한 모범에 따라, 병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활력으로 봉사하여야 합니다.
1. 주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신비를 탁월하게 밝혀 줍니다. 십자가는 절망적 비극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이제 그 사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각 제자의 삶을 위한 토대요 규범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모님을 온 인류의 어머니로 부르시는 성소’의 원천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제자들의 어머니로서, 그들을 돌보시고 그들 삶의 여정을 한결같이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어머니는 자신의 자녀를 기를 때에 영적 물적 차원을 모두 돌봅니다.
십자가상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성모님의 영혼을 칼로 꿰찔렀지만(루카 2,35 참조), 그분을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그분 앞에 자신을 내어 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온 인류에 대한 배려를 보여 주셨고, 이와 똑같은 배려의 역할을 맡으시도록 성모님을 부르십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묘사하면서,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 성모님께서 이 역할을 수행하시기 시작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이 역할에는 끝이 없습니다.
2.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은 메시아 백성인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성모님을 자신의 어머니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성모님에게서 모든 제자의 본보기를 눈으로 보며, 예수님께서 성모님에게 맡기신 어머니 소명과 그 소명에 수반된 배려와 계획을 관상할 수 있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계명에 따라 사랑할 수 있는 자녀들을 사랑으로 낳으십니다. 이것이 어머니로서 자녀를 돌보라는 부르심을 받은 성모님의 소명이 요한과 온 교회에 맡겨진 이유입니다. 성모님께서 받으신 어머니 소명에 제자들의 공동체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 요한은 예수님과 모든 것을 공유한 제자로서, 스승께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아버지와 만나도록 이끄시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자만심 때문에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들(요한 8,31-39 참조), 육체적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요한 5,6 참조)을 예수님께서 많이 만나셨다고 증언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셨고, 모든 눈물을 씻어 줄 하느님 나라의 풍성한 생명의 표징으로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성모님처럼 제자들도 서로를 돌보며 그 너머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예수님의 성심을 압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은 모든 이에게 선포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모든 이를 향합니다. 단지 그들이 인격체요,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그렇습니다.
4. 교회는 곤경에 빠진 사람들과 병자들의 어머니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2,000년의 역사를 통하여 병자들을 위한 일련의 감동적 활동으로 그 소명을 구체적으로 이행했습니다. 적절한 공공 의료 제도가 구축되어 있는 나라들에서는, 가톨릭 수도회들과 교구들과 그 소속 병원들이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인간을 치료 과정의 중심에 두며, 또한 생명과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가치들을 온전히 존중하는 가운데 과학적 연구를 이행하는 것을 활동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의료 제도가 불충분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나라들에서는, 교회가 보건을 증진하고 영아 사망을 근절하며, 널리 퍼진 질병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치료를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을 때조차 교회는 어느 곳에서나 병자들을 보살피고자 애씁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치료를 해 줄 수 있는 기관이라고는 선교회와 교구의 병원들뿐인 일부 지역에서는, 부상당한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야전 병원”으로서의 교회 모습이 매우 구체적 현실로 나타납니다.
5. 이처럼 병자를 돌보는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특히 현재 이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금의 우리를 풍요롭게 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병자에게 봉사하는 단체들을 설립한 많은 분들의 자기희생과 너그러움, 사랑에서 촉발되어 수 세기 동안 지속되는 많은 활동들의 독창성, 그리고 병자에게 혁신적이고 신뢰할 만한 치료를 제공하고자 과학적 연구에 투신한 것을 교훈으로 여기고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의 유산에서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의료 행위를 돈벌이 사업으로 전락시키려 하고 마침내 가난한 이들은 내팽개치고 마는 상업 정신에서 가톨릭 병원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병자의 품위를 존중하고 언제나 병자를 치료 과정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지성과 사랑의 요구입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공공 부문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들도 또한 자신들의 봉사를 통하여 복음을 설득력 있게 증언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는 교회에게 자신의 치유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베드로(사도 3,4-8 참조)와 바오로(사도 14,8-11 참조)의 치유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선교 사명은 예수님의 선물에 대한 응답입니다. 자애와 연민 가득한 주님의 시선을 병자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교회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만성 질환이나 중증 장애에 시달리는 자녀, 부모 또는 친척을 돌보는 많은 가정들의 따뜻한 사랑과 인내를 잊을 수 없습니다. 가정들이 보여 주는 그러한 돌봄은 인간 사랑의 특별한 증거입니다.
7. 자애로우신 성모님께 육신과 영혼의 질병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을 맡겨 드리고 싶습니다. 성모님께서 그들이 희망을 잃지 않게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병든 형제자매를 환대하도록 성모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병자에 대한 봉사라는 복음적 과제를 실천하는 데에 특별한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을 교회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께 바치는 기도 안에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생명과 건강에 대한 봉사 소명을 사랑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간청하며 하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동정녀 마리아께서 제26차 세계 병자의 날을 위하여 전구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병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주 예수님과의 일치 안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그들을 돌보는 모든 이를 응원해 주시기를 빕니다. 모든 이, 병자들, 의료계 종사자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 저의 진심어린 교황 강복을 보내드립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연중 제6주일
너희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수색 예수성심 성당
김원철 레오 신부 고별강론
+ 찬미 예수님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입춘이 지났음에도 한기가 가득한 날씨와 관계없이 우리의 믿음은 따뜻한 봄과 같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푸른 싹을 틔울 준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를 살펴보면 무수한 규칙과 법, 그리고 규정과 의무들이 우리들의 삶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무를 조금 더 구체적이고 공공으로 지키고자 서로가 약속한 것이 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법을 악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법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서,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지켜야 할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처음 세 개의 계명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위해서, 나머지 일곱 개의 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위해서 지켜야 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그토록 강조하는 율법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10개의 계명만으로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구체적으로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될 수 있는 613개의 세칙서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점차로 율법의 근원이 되는 정신 보다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보다는, 단지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한다.” 라고만 이야기 합니다. 때문에 사람이 아파서 신음하고 있는데도 “안식일이기 때문에 일해서는 안 된다.”고 만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점차로 잊어가는 정신을 일깨워 주십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한다마는, 나는 인간을 말로 괴롭히는 것까지도 금한다. 율법이 간음하지 말라고 강조하나, 나는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금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율법을 위해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기억할 계명의 정신 두 가지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러분은 하루를 생활하시면서 얼마나 10계명을 지키고 계십니까?
아니,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명심하라고 말씀하신 사랑의 정신을 얼마나 실천하고 계십니까?
법이란 딱딱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하지만 다리를 지탱해 주는 기둥이 없다면 다리는 얼마 되지 않아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사랑이란 율법의 정신이 사라진다면, 율법은 오히려 타인과 나를 분리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저울이 될 것입니다.
제 1 독서에 나와 있듯이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었음에도, 나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 잠시 우리들이 처한 상황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이유와 핑계를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한 주간을 생활하시면서, 그 동안 나는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핑계거리를 만들고 살고 있었는지 바라보시며,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실천 하시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연중 제6주일
용인에 가면 인보성체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중증 지체 장애아 요양원인 '요한의 집'이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 겨울에 피정 삼아 잠시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겨울방학 때는 아이들이 대부모 집이나 자매결연을 맺은 가정으로 놀러 가고 남은 아이들만 한 방에 모여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 방에 들어갔습니다. 광호와 준식이라는 아이와 놀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저를 향해 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두 아이들과 계속 놀고 있는데 갑자기 울음 소리가 났습니다. 저를 향해 오던 아이가 제가 다른 아이와 놀고 있으니까, 오다 말고 선생님께로 향했나 봅니다. 그런데 선생님도 다른 아이들을 돌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그 아이는 사면초가였습니다. 그 아이는 그 순간 자기 한 몸 둘 데가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 선생님 저 선생님 사이를 그야말로 맴돌다가 갈 곳이 없으니까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정말 몸 둘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점점 이상해지고, 또 이상해지니까 더욱 더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 어느 누구 하나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아서 맴도는 사람들. 감싸주고 안아주지 않아 방황하는 수 많은 영혼들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많은 아이들이 다 저만 쳐다보고 있었나 봅니다. 혹시 자기에게 오지 않나 해서 말입니다. 그 중엔 침대에 눕혀져 주사바늘로 위에 직접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만 할 정도로 증세가 심각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큰 짐을 진 아이들입니다. 애처롭다는 감상적인 표현보다는,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는, 표정 없는 아이들의 모습이 서글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주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으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그러자 그는 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됩니다.
저도 한 동안 매일 같은 지향의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주님의 거룩한 사도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날 저는 요한의 집 아이들을 보면서 그 기도는 제가 주님께 청할 기도일 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이 주님께 그리고 그 집을 찾는 이들에게 하는 청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제 손길이 자기에게 스쳐가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마음입니다. 적극적으로 요구할 기력조차 없고, 저항하고 극복할 아무런 희망조차 간직하지 못한 아이들. 그저 남이 자기에게 다가와 먹여 주고 안아 주기만을, 그야말로 처분만 바라는 아이들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나병환자는 유다 사회에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간주하고 동네 밖에서 기거하도록 했습니다. 또 나병환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은 천형을 받은 것으로 여겼기에, 그러한 상황에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못하고 자포자기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고쳐주시고, 그들을 다시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 1,44) 라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저를 바라보는 이들을 떠올려봅니다. 제 처분만 바라는 이들은 요한의 집에서뿐 아니라 본당 교우들. 본당 관할구역 내에서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렵고 힘겹게 인생을 살며, 외롭고 허전하다고 느끼며, 위로 받고 싶고, 힘을 받기를 청하는 소외된 이들의 가슴 속에 익명으로 남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당을 향해 거는 지역사회의 기대들. 정의와 평화, 그리고 선행은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더욱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의 사랑과 은총과 위로와 평화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그려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하는 사도 바오로 말을 되새깁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0,31.33; 11,1)
연중 제6주일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 창립시기에 독특한 특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후기 조선의 소외된 지식인들이 새로운 사회 탐구의 한 방안으로 성리학을 모색하던 중에 생겨났습니다. 서쪽에서 온 학문이라는 뜻의 서학이라는 천주교의 교리와 사상을 연구하던 중 서학이 단순히 학문이 아닌 종교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새시대의 정치사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선교사들의 선교를 통해 생긴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들이 자체적으로 찾아 얻은 교회이며, 그 교리를 현실화 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승훈이 중국에 가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과 동료 선비들을 세례시키고 중인과 상인계급까지 아우르는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유교 사회 속에서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루려고 하자 당시 사회의 커다란 반발과 저항을 받아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기 전에 첫째, 신앙공동체가 자생적으로 발생했고, 둘째, 세례자가 생겼으며, 셋째, 교회 공동체가 설립되었고, 넷째, 순교자가 생겼다는 4가지 독특한 특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초기교회가 사회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자 지도층이었던 지식인인 양반들의 많은 수는 교회를 떠났고, 중인과 상인들이 교회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떠난 양반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신분적이고 사회적인 위치와 권리를 박탈당하기 보다는 배교를 선택했고, 중인과 상인들은 자신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주고 자신들의 존재를 존중해주는 새로운 사회인 교회를 선택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가 시작되던 1791년부터 한불 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1886년까지 선교를 활발히 할 수 없었습니다. 선교는 커녕 숨어서 살아남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1960년대와 70년 군부독재시대에는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가톨릭 학생회, 가톨릭 청년회, 가톨릭 노동 청년회 등과 모든 본당과 신자들은 감시와 견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신자들은 드러내 놓고 신자라고 밝히기를 꺼려했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선교를 하기에는 사회에서 받을 불이익 때문에 개인적이고 신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우리 천주교회를 선교 없는 교회처럼 만들어 놓다시피 했습니다.
또 우리 사회는 무엇인가 드러내 놓고 말을 하면, ‘왜 설쳐 대느냐?’ ‘왜 겸손하게 자기를 감추고 조용히 살면 되지, 뭐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으면서 나서느냐?’는 문화적인 분위기가 우리를 움츠리게 만듭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 신자들도 앞서서 사람들에게 신앙을 선포하고 권유하기 보다는 남 모르게 기도하면서 묵묵히 선행을 실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지금은 천주교인이라고 해서 드러내놓고 박해를 받는 시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자가 성화되어 성인군자처럼 되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모범을 보고 따라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을 살다 보면 우리 한 몸 살기조차 힘듭니다. 무한 경쟁세계에서 주위에 신앙의 모범을 보이면서 내가 양보하고 희생하다 보면 사회에서 뒤처지고 밑지고 손해 볼까 두려워 우리도 악착같이 그 경쟁체제 안으로 들어가 남들처럼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나 살아남고자 합니다. 또 그렇게 경쟁체제 안에서 아귀다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처럼 살아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는 한참을 더 노력하고 기다려야 한다고 자평합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해 봅니다. 실제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우리는 신앙을 처음 시작할 때보다 더 성화되었다고 자부할 수도 없고, 이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격적이고 생활 면에서 훌륭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또는 언제쯤 그렇게 보여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성화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남에게 드러내놓고 자신할 만한 신앙의 모범을 보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녀들에게 좋은 길을 권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좋은 길을 선택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녀들을 보면서, 어떤 때는 강요를 해서라도 좋은 길로 가도록 하고, 어떻게든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대신해 주면서까지 그 길로 인도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한 가지 더, 우리가 신앙의 모범을 잘 보인다고 해도, 사람들이 우리를 따를지는 미지수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동을 받는 것에 끌리기는 해도, 이해관계를 따라 더 잘 움직이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평화를 누리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평화를 주는 길보다 평화를 얻기 어려운 길을 선택하여 걷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지 마라. 그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시는 대로 말하여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마르 13,11) 사도 바오로는 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라고 선교에 대해 말합니다. 베드로 역시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라고 말합니다.
우리 강남 11지구 복음화율을 보면, D본당 30.8%와 D1동본당 25.7%, A본당 24.3%, 및 또 다른 D본당 23.2%, A1동본당 19.7%, Ch본당 19.0%에 이어 14%로 16개 본당 중 9번째에 속합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살펴보았듯이 순수 삼성동 지역의 복음화율은 11.41%로 삼성동 성당 설립 당시의 12.80%에 비해 1.39%가 감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성동 지역 인구증가율 29.65%에 비하자면 신자 증가율은 15.60%로 지역 인구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하고 거꾸로 신자증가율이 인구증가율보다 14.05%가 떨어졌습니다.
박해시나 외부의 뚜렷한 외압이 없는데도 신자 수가 제자리 걸음이거나 감소했다면, 공동체의 내부 상황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숫자는 외부로 드러나는 수치일 뿐이지만 숫자가 공동체의 현황을 드러내는 여러가지 표지 중의 하나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성이라는 질적인 향상이 깊어지면, 숫자는 줄어듭니까, 늘어납니까, 그대로 입니가? 아니면 양적인 성장은 질적인 성숙과 아무런 함수관계가 없는 것입니까? 신자 5천여명의 본당에서 예비신자 환영식에 예비신자 스스로 찾아온 신자들 십여명이 대부분이고 본당 신자들의 선교로 오는 예비신자가 한자리 숫자라면... 우리 모두가 교회의 선교 사명에 대해 한 번 짚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그는 예수님께서 ‘하고자만 하시면’ 자기를 고쳐주실 수 있으리라고 믿고 주님께 청합니다. 그런 그의 믿음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깨끗이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너희가 하고자만 하면 나를 전할 수 있다. 너희가 전하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나에게 오게 하겠다.’
여러분, 선교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만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선교는 많이 알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예비자 환영식을 앞두고 하는 행사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으면서 모두 선교사명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예언직, 왕직, 사제직을 우리의 삶 한 가운데서 실현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매일 매일 살면서 자기가 머물고 있는 가정과 직장,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동시에 선교는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고 살아나가는 신앙생활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단지 복음을 전할 뿐이고, 그 사람이 우리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도록 그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 아니십니까? 우리는 교회 신자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오는 기쁨과 희망을 함께 나누기 위해 교회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부터 50년 전인 1962년 교회의 교부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하면서 사회를 향해 문을 활짝 열고 신앙을 쇄신하고자 했습니다. 올 2012년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 삼성동 본당이 지역사회에 문을 열고 신앙을 전하며 우리 본당 스스로 복음화하여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나가기로 합시다.
‘구체적으로 그 어느 누구에게 신앙생활에서 오는 나의 이 기쁨과 행복을 전할 것인지?’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어떤 은총을 선물로 받았는지?’ ‘어떻게 신앙 생활의 기쁨과 희망을 전할 것인지?’ 등을 실현 가능하게 계획을 짜고 실천하여 교회의 선교 사명을 이루기로 합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연중 제6주일
지난 주간에 최재봉 안나 할머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비록 누워는 계셨어도 따님들의 병구완으로 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갑자기 가버리시니까 너무나 섭섭하고 인간 생명이 이렇게 끝나는 구나하고 생각하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장례미사를 드릴 때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처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참으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되새깁니다.
장례 미사의 기도문은 하나 같이 주님께 우리 죄와 허물을 못 본체 해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굽어보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해 주시기를 청하는 내용입니다.
‘고별식 기도문’에서,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 이 교우를 맡기오니 나약한 인간으로서 저지른 죄를 주님의 자비로 용서하시고 하느님 나라에서 성인들과 함께 끝없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그리고 묘지를 축성하고 ‘하관 기도문’에서,
“주님 비오니, 죽은 우리 형제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부족한 행실에 벌을 내리지 마소서. 이 형제는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사오니, 지상에서 참된 신앙으로 신도들 무리에 들었듯이 천상에서는 주님의 자비로 천사들 반열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매일 미사 중에 평화를 구하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 생애가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게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못 본체 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셔야만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치고 밤마다 끝기도를 바치면서 양심 성찰을 해보면, 그저 내 생애가 부끄럽고 죄스럽기 그지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 뜨고 날만 새면 이렇게 저렇게 말하고, 이리 왈 저리 왈 하고 떠들어 댑니다.
그리고 누구는 이렇고 누구는 저래서 문제고,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고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고 이렇게 또 저렇게 해야만 한다고 자기주장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 앞에, 아니 하느님을 부정하는 이들도 죽음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되새길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마태 6,27) 하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 질문에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라고 감히 대답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명을 한 순간이라도 늘릴 수 없습니다.
아니 늘리기는커녕, 언제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꽥하고 죽는 순간에도, 지금 죽는 것이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조차 없습니다.
아니, ‘꽥!’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주님께서 주신 생명, 주님께서 도로 데려가시니 그러시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처지입니다.
그런 주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주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요구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주시는 대로 받고, 그저 주시기에 황송해하고 감읍하며 살아갈 수밖에!
그럼 우리 인간의 처지가 그렇게 비참해 보일정도로 미소하고,
우리 인간의 생명이 그저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을 뿐이지,
주님께서 부르시기만 하면 언제 어떻게든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미약하기만 한 것인가?
그것은 참으로 아쉽고 씁쓸하지만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 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 다른 무엇이 더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처지가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고, 우리 생명을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언제든지 다시 부르시면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비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언제 데려 가실지는 모르지만 오늘 이렇게 살아있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요구할 수도 청할 수도 없는 생명 자체를 주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명을 온전히 보전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죄악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도록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죄를 대신 씻어주시고 살 수 있도록 구원의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말씀과 성체성사를 남겨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해주셨고, 성체를 모시고 주님과 하나되어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리고 그 길을 우리가 깨우치고 발견하고 걸을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애초에 우리를 다시 데려가시기 위해 우리 인간을 지어내신 것도 아니요, 언제든지 우리 생명을 회수하시기 위해 주님 생명을 나눠주신 것도 아니요, 우리를 어떻게든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주님 은총의 뜻이요 결실이 우리의 생애다.
우리는 언제 지상 생애를 마치게 될 줄도 모르고, 주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우리를 소환하실 수 있다. 그야말로 처지로 말하면 정말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생으로 따지자면 아무 권리도 없고 연장할 수도 없는 우리를 오늘 이렇게 살려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주님 앞에서 오히려 우리는 감사할 뿐만 아니라 기쁘기까지 하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가 늘 눈만 뜨고 입만 열면 내뱉는 불만족과 불평과 요구가 아니라, 인정과 감사와 순종이 우리가 주님 앞에서 가져야할 자세라는 것을 너무나도 자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오늘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나병 환자의 기도를 우리 자신의 기도로 바칩시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0)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1)
그리고 우리의 고쳐지지 않는 교만과 탐욕을 주님의 은총으로 깨끗이 씻고,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하며, 그 은총을 갚기 위해 형제들에게 증거하고 나누고 널리 전하며 기쁘게 살아가기로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 일이 잘 풀리고,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을 얻었을 때의 기쁨은 언제 깨지고 어느 누구에게 빼앗길 줄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지탱되는 기쁨이지만, 주님과 형제들에게 바치고 봉사하고 나서 생겨나는 뿌듯한 기쁨은 참 기쁨이신 주님과 연결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으로 마칩시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1코린 10,31)
그리고 혹시 시간이 나시고 기회가 되시면, 오늘 사제 수품 18주년을 맞이하는 저의 사제직을 위해 주님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
연중 제6주일
지난 월요일 1988년 서울 관구 신학교 사제 수품자 전국 동창모임이 있었다. 1년 임기의 동창회장의 1년 임기가 만료되어 신나는 마음으로 갔다. 저녁을 먹고 동창들의 근황을 들으면서 참석하지 못한 동창들의 근황을 발표한 후 새 회장을 선출하려는데 난데없이 1년 더 하라는 것이었다. 사양에 사양을 거듭했건만 막무가네로 떠미는 바람에 연임됐다. 2년 전에 서울동창을 임기 끝났다고 그만두었더니 후임이 이러 저러한 이유로 아직까지 동창회를 못하게 되어 그냥 수락하고 말았다. 다녀와서 동창들에게 혹 띠러 갔다가 혹 붙이고 왔다고 불평을 했더니, 한 동창이 혹 띠러 갔다가 붙이고 온 혹이 우정이라며, 여태껏 동창회장을 2년 연임한 친구도 없었고, 3번씩이나 전체박수를 받으며 회장에 선출된 이도 없다면서 부담스럽지만 나누어서 일하자며 회신을 보냈다.
그런데 동창들의 재임 요구를 들으면서 문득 본당 생각을 했다. 본당의 신자들에게 일을 맡기기 위해 얼마나 요구를 했던가? 대과가 없으면 연임이요, 할 수만 있으면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라고 요구했고, 평신도 지도자 뽑기가 하도 어려워서 아예 대상 신자를 불러놓고 따라해 보세요 하면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를 반복하도록 하고 자리를 수락하도록 요구하지 않았던가?
돈도 되지 않고 생색도 나지 않는 자리와 역할들. 요즘은 다 위 자리나 책임지는 자리에 앉기를 싫어한다. 아주 잘하지 않으면 그저 욕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구하기 위해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주님께서 주신 시간과 몸과 재능을 가지고 어떻게 주님의 일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고 보호해 주기까지 하시니 간신히 간신히 그 길을 걸어갈 뿐이다. 이렇게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주님 덕에 우리도 하고자만 하면 주님을 따라 하늘 나라를 위해 헌실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고린 10, 31) 대가 없는 선물이 오히려 가치 있듯이, 우리의 희생 봉사는 형제들에게 커다란 선물이 될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니 오롯이 도로 바쳐 드리오리다. 아멘.
연중 제6주일
요즘 어떤 재벌그룹의 전 총수가 공개적으로 수배되고 국제적으로 도피하는 생활이 보도되고 있다. 오늘 내가 부러워하는 자리와 갖고 싶어하는 것이 내일 내 수치와 죄악이 되지 않아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20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난을 싫어하고, 그 처지를 불행으로 여긴다. 그래서 모두 벗어나려고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셨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처지로 오셨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셨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과 능력과 가진 것이 모든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선물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고 또 나누면 하느님께서 더 채워주시니 이들은 행복하다. 이들은 주님처럼 다른 이들에게 다 내줌으로써 물질적으로는 가난해졌지만 하느님과 형제들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21절) 남에게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어서 자기가 대신 당하거나, 이웃의 불행 때문에 함께 우는 이들은 주님의 위로를 받아 웃게 될 것이다.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모여와' 이웃을 도와주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세상의 행복과 구원을 막고 지연시키는 불의와 사리사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슬퍼하는 이들을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위로해 주신다.
반면에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사리 사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항상 불만족하고 불안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22-23절)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다가 오해를 받거나 미움을 사고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옳고 또 그렇게 해야 되는 줄도 알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면 행복할지 못 미더워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시해주는 행복은 바로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이며,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다. 이 희망을 이루어나가자.
연중 제6주일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40절).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41절) 하시자 그의 병세가 곧 나았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통과의례를 명하십니다. 고쳐주신 것은 예수님이시지만 그가 유배지와도 같은 격리지에서 다시 가족과 이웃이 있는 사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가 부정을 씻고 정상인이 되었다는 판정을 사제로부터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44절)고 이르십니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44절)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물러가서 이 일을 널리 선전하며 퍼뜨렸기 때문에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45절). 사람들을 피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더 많이 고쳐주시면 좋았을 텐데! 5000천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후에도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피해가셨습니다. 그 뒤 예수님을 찾아 온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 26-27). 그러시면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한 6, 29)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간절한 바램을 얻으면 곧 싫증나고 결국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에 두지 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영원히 변치 않고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얻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된다고 해서 사회와 동떨어지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 따로 사회생활 따로가 아니라 신자로서 복음을 전하며 사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매 순간 매 기회에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선택하면서 세상의 부정을 씻고 주님께서 깨끗하게 변화시켜 주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고린 10, 31) 그래서 세상을 구하는 주님의 사도가 됩시다.
연중 제6주일
살다보면 거짓말을 하게 된다. '본의 아니게'란 말과 함께! 우리가 좋은 일을 했을 때는 누군가가 '내가 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반면에 내가 좋지 못한 일을 했거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을 때는 '내가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몰라주기를 바란다. 아니면 적어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정황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과장도 하고 거짓말도 한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예수님은 지난 주 수요일 평일 미사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1-23) 그러시면서 오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17.20)라고 하시면서 떳떳이 살도록 명하신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남의 죄를 짊어지고, 또 자기가 대신 그 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변호해 주고 역성해 주며 아예 자기가 했다고 대답하는 것은 참으로 주님을 믿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또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님은 '영신수련'이라는 책 165-167항에서 "첫째 범하면 대죄가 되는 하느님의 계명이나 사람의 계명 하나라도 일부러 거스르지 않아야 하고, 둘째 고의로 소죄 하나라도 범할 생각이 없어야 하고, 셋째 우리 주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기 위해서 부귀보다도 가난한 그리스도와 같이 가난함을 원하고 선택하며, 명예보다도 극도로 업신여김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업신여김을 원하며 또 이 세상에서 지혜롭고 현명한 이로 보이기보다는 앞장서서 천대를 가득히 받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차라리 무식하고 미련한 사람같이 취급되기를 원하고 또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겸손의 세 단계'라 한다. 진정 우리가 겸손해지면 '예' 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리라.
연중 제6주일
지난 월요일 저녁 9시 한국방송공사 뉴스에서는, 결혼을 한 후 10년 동안 매일 남편의 술주정 때문에 폭력으로 고생하던 부인이 엉겁결에 흉기로 남편을 살해한 사건을 보도했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풀어 달라고 탄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집안에는 우리 천주교의 십가고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단칸방에서 아버지의 불성실한 생활과 술주정 때문에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거치지 못한 청소년이 도둑질을 하다가 경찰에 잡혀갔습니다. 남편을 살해한 그 부인이나 그 청소년이 저지른 죄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거나 무죄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2중의 피해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부인은 자기의 남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남편 죽인 여자로 살아야 하고, 그 청소년은 가족과 단란하게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년원을 전전하며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아, 너희가 배부르고 웃게 될 것이다."(루가 6,20-21) 아무도 채워주고 대신해 줄 수 없는 그들의 아픔과 한을 주님께서 채워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해 질 것입니다. 지금의 아픔을 주님께서 꼭 갚아주시고 채워주시리라는 희망이 이들에게 행복이 될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 주변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멀리하고 단죄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참으로 마음 아파하면서 함께 슬퍼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이들이 깨우치고 그 사랑으로 힘을 얻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람들에 비하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다 만족하고 다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가정과 물질을 통해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루가 6,24ㄴ)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1고린 15,19) 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인인 우리는 물질을 가졌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더 나은 물질적인 욕구와 풍요를 기대하기 보다, 오늘 날 우리 주변에 손상되고 파산된 가정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위로해 줍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위로를 전달해 주는 이가 되기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