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일

(다해) 루카 7,11-17; 13/06/09

그저께 예수성심대축일을 맞아 제19회 사제성화의 날을 가졌습니다.

서울대교구 사제들은 오전 10시30분 명동 대성당에서 모여, 새롭게 발견된 교회사의 단초들에 대한 강의를 듣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도보성지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순례지는 명동에서 시작하여, 수표교 창립지를 둘러 좌포도청, 의금부, 우포도청, 경기감영을 지나 103위 순교성인 중 44위의 성인들이 순교한 서소문 성지 순이었습니다.

지금의 종로구 청계천로 105번지, 종로구 관수동 ‘수표교(水標橋) 창립지.’ 북경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 베드로가 1784(정조8)년 겨울,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이벽(1754-1785)에게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레명으로 첫 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나라에는 평신도에 의한 자발적인 최초의 신앙공동체인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터라고 표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보면 이벽의 집이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 종로3가역에서 3호선의 9번 출구를 나오면 조선조의 ‘좌포도청’(左捕盜廳) 터가 나옵니다. 1894년 갑오개혁시 근대적 경찰기구인 경무청이 된 포도청은 서울을 동서로 나누어 동부와 남부, 중부 및 경기좌도 등의 치안을 좌포도청이 맡고, 서부와 북부 미치 경기우도의 치안을 우포도청이 맡았습니다. 1795(정조 19)년 을묘박해 때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최인길 마티아,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등 19분이 고문을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심아기 바르바라, 김이우 바르나바 2분, 1839년 기해박해 때 유대철 베르도를 비롯한 14분, 1846년 병오박해 때 김임이 데레사, 남경문 베드로를 비롯한 7분이 좌포도청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리델 주교는 1878년 1월에 포도청 옥에 갇혀 있다가 6월 중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현 종각역에서 1호선의 1번 출구를 나오면 조선조의 ‘의금부’(義禁府) 터가 나옵니다. 포도청이 경창청이라면, 의금부는 조선조의 중죄인을 다루는 형조와 한성부와 함께 삼법사(三法司)의 하나입니다. 오늘 날 대법원, 검창청, 국가정보원 정도의 사법기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인들 중 주교와 신부 및 평신도 지도자들이 국왕의 특지로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승훈 베드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황사영 알렉시오, 조동섬 유스티노 등 1801년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9분,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 등 8분, 1866년 병인박해 때 베드뇌 주교, 보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라 신부 등 8분이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현 종로구 광화문역 5호선의 5번 출구로 나오면 조선조의 ‘우포도청’(右捕盜廳) 터가 나옵니다. 치명일기에 나타난 우포도청 순교자는 박 사도요한과 심 마리아를 비롯한 18분입니다. 대부분의 기록들이 좌우를 구분하지 않고 포도청에서 순교하셨다고만 나오기에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1879년 5월 드게트 신부를 비롯한 충청도 공주 신자분들이 우포청으로 이송 당하여, 고문을 받고 이병교 레오와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르 등은 아사로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셨습니다.

현 서울 적십자병원에 1393(태조 2)년에 설치된 경기감영(京畿監營) 터가 있습니다. 경기관찰사(감사)는 조선조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군사, 행정, 감찰, 사법권을 행사했습니다. 1896(고종 33)년에 수원으로 이전되고, 그 자리는 한성부가 들어섰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홍인 레오 등이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조용삼 베드로가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라고 신앙을 고백하며 경기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현 중구 의주로 2가 16번지 서소문 공원에 서소문(西小門) 밖 순교성지가 있습니다. 조선조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서소문 밖의 광장은 조선조 공식 사형집행지였습니다. 서소문은 한강가 포구인 마포나 서강과 양화진의 나루를 이용하여 강 건너 남방으로 또는 성 밖 각지의 취락으로 통하는 도성의 성문이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한국 천주교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명도회 초대회장이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여신도회장 강완숙 롤롬바, 백서사건의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서소문 밖 광장에서 참수 순교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순교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성 남종삼 요한 등이 순교하였습니다. 서소문의 순교자들 중 44위가 현재 103위 성인 반열에 들었고, 지금 하느님의 종 125위가 시성 조사 중에 있습니다.

미사 강론 중에 서울대교구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님께서는 이곳 서소문 성지에서 6살 때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순교를 지키고 신앙을 키우다가 44세의 일기로 자신과 온 가족이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순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연 무엇이 생명보다 죽음을 선택하도록 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아서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처럼 보이는데, 왜 그렇게 가버렸을까?

지금 바로 죽는 것보다 살아서 두고두고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왜 순교의 길을 택하였을까?

주님은 교회 초기에 한 사람이라도 더 신자수를 늘리는 것이 시급했을 텐데, 왜 죽음으로 증거하도록 초대하시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것과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과 신자의 숫자를 늘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주님을 믿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증거하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현세적으로 죽는 일이든 사는 일이든, 현실적으로 좋은 일이든 아니든, 신자수가 늘어나는 일이든 줄어드는 일이든 관계없어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매 순간 매 처지에, 주님의 사람으로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첫번째 독서 열왕기 상권에서 예언자 엘리야는 “주 저의 하느님, 이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열왕 17,21) 라고 기도하면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었습니다. 전에는 예언자들의 기도를 통해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던 주님께서 오늘은 직접 오셔서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가부장적인 사회로 남편과 아들만이 상속자요, 경제생활의 주권자였던 이스라엘에게 과부와 고아는 결국 소외와 죽음 밖에는 살 길이 없던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남편도 없는 과부에게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주신다는 것은 그 여인에게 생명의 보장과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 기적을 보면서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7,16)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의 현세적인 삶과 구원을 위해 온갖 축복을 내려주시고, 자신의 생명마저 아낌없이 바쳐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기도합니다.

주님, 어려움 속에서 바치는 저희 기도를 들어주시고, 이 순간 이 기회에 저희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은총 내려 주소서.

저희가 겪는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고, 몸소 채워주시는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이 내려주신 저희 몸과 마음과 정신을 주님께 오롯이 도로 바쳐드리오니, 주님의 뜻을 일러주시고 이루어 주시어, 저희를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아멘.



연중 제10주일

성체성사의 해 시애틀 대교구장 사목서한 - 일치의 표징, 사랑의 끈(요약)

05/06/05

서문: 주님의 날

저는 우리 대교구의 미래가 희망으로 가득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성체성사가 선물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하나의 교회로서, 우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것같이 전례에 전적이고 의식적이며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제안합니다.

삶이 바쁘고 할 일이 많아서 경우에 따라서는 주일 미사에 꼭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현재 미국에서는 가톨릭 신자의 3분의 1 만이 매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불행한 실정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통계는 우리 교구에도 해당합니다.

주일은 우리가 매일 신경쓰는 일들에서 벗어나, 안식을 취하고 쉬면서 거룩하게 보내는 날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주일을 제8일로 여겼습니다. 그날은 주님의 부활을 시작으로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재창조의 영광스러운 시간이며, 새로운 창조의 여명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살아계시다고 하는 신비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주교 신자로서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우리 마음 속에서 조용히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체성사가 우리 교회 신앙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임을 인식하고, 전적이고도 능동적이며 의식적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도록 요청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참여하도록 다같이 불러주신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로서 거행해야 합니다. 다 같이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주일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현존의 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이 환하게 비춰진 것은 주일 낮만이 아니었습니다. 첫 부활절 저녁에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요한 20,22)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1고린 15,45) 주님께서는 오늘도 주일 미사에 성령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이제 성인 입교 예식이 거의 모든 본당 생활에 정착되어, 신자들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와 성체성사가 통합된 성사 예식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입교예식을 주일날 거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는 더 많은 교회들이 세례대와 세례장을 그 입구 가까이에 설치하여 신자들이 주일 미사에 올 때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성사생활로 들어가면서부터 그들이 받은 세례를 명확하게 기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매주일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해 성당에 오는 신자들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봉사자들-주례자, 독서자, 성가대, 성체성사의 집전자, 안내자들을 통해서도 맞이합니다. 그리고 가장 특별하게,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 성체성사의 요소인 빵과 포도주 안에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이 현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체성사의 가장 분명한 차원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찬례가 식사라는데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모여서 먹고 마시는 공동체는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충만히 살아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체를 모시기 위해 늘어선 줄은 하늘나라를 향한 순례의 양식을 얻는 줄입니다.

동시에 성체성사는 희생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도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아버지께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봉헌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도록 초대합니다. 이 희생제사에 동참하는 영성체는 우리가 전례를 마치고 세상에 나아가 찬미와 섬김의 삶을 살도록 촉구합니다.

성체성사 거행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생생한 느낌은 미사 밖의 성체께 대한 흠숭 곧 성체조배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감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 앞에 무릎을 꿇고 "개별적으 로 그리고 공동적으로 관상기도"를 바치도록 권장하십니다. 감추어 계신 신비에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움으로써, 하느님 백성이 매일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가운데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지를 발견하도록 준비시켜 줍니다.

함께하는 교회의 날

성체성사는 우리 모두를 하나의 교회로 일치시켜 주는 근원입니다. 제가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리고 대교구 전체가 통합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서부 워싱턴 교회가 한 식탁에 둘러 앉은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마치고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파견됩니다. 미사 끝부분에 주어지는 파견 강복은 "가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축복을 통해 좋은 일을 하라"는 사명이며, "복음을 널리 전하고 사회에 그리스도교 가치들을 고취시키도록 노력하라"는 주님의 명료한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환자를 돌보고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활동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드러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도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께서는 우리가 성체성사를 "더욱 정의롭고 우애로운 사회 건설에 실제적으로 투신하도록" 재촉하는 "평화의 위대한 학교"로 체험해야 한다고 쓰셨습니다.

영성체 후에 바로 떠나는 신자들은 미사의 마지막 순간에 주어지는 이런 중요한 선교사명을 놓칩니다. 파견 예식에서, 믿음이 충만한 우리 신자들이 "책임을 더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러 모인 전체 예식 중에 그리스도께서 진정 현존하셨던 것처럼, 이제 섬기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를 구현하도록 파견됩니다. 우리 주교좌 성당의 제대 위 천정 창에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 (루가 22,27)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교회가 서부 워싱턴 전역으로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섬기셨듯이 우리 역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성체성사의 선교 원동력이 개인적인 기도와 신심생활에서 우러나온다는 중요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일 성체성사에서 느끼는 교회의 보이는 친교 체험은 개인적인 신심 안에서 느끼게 되는 보이지 않는 일치와 친교의 원천이며 샘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성체 조배와 묵주 기도, 성체 거동 그리고 다른 전통적인 신심들은 성찬례와 같은 정신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많은 신심들이 개인적으로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그 기초는 우리 자신을 넘어서 공동체의 필요를 기억하도록 하는 교회의 공적인 전례 안에 두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 각 개인에게 주어진 은사나 장점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설하는데 쓰여져야 한다고 일찍부터 증언했습니다.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문화 속에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최고의 기도인 성체성사에서 드러나는 공동체적이고 교회적인 체험의 빛으로 우리 개인의 신심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찬 거행을 교회 문 앞에서 멈추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데 자발적으로 헌신하라고 하십니다.

결론

여러분의 대주교로서 저는 모든 본당 공동체들이 이 성체성사의 해에 전례를 더욱 더 거룩하게 거행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새롭게 봉헌하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께서는 우리가 "성체성사의 해"를 충실히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찬례 거행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성체성사가 우리를 위한 일치의 표징이며 사랑의 끈인가를 나타내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도록 그리고 우리 가운데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존엄성을 들어 높이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활기를 띄어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게" (시편 34,8) 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시애틀 대교구 알렉스 브르넷 대주교



시애틀 대교구장 성체성사의 해 사목서한

일치의 표징, 사랑의 끈


알렉스 브르넷 대주교

우리 구세주께서는 팔리시던 그 밤에 최후 만찬에서 당신 몸과 피의 성찬의 희생 제사를 제정하셨다. 이는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세세에 영속화하고, 또한 그 때까지 사랑하는 신부인 교회에 당신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를 맡기시려는 것이었다. 이 제사는 자비의 성사이고 일치의 표징이고 사랑의 끈이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어, 마음을 은총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가 미래 영광의 보증을 받는 파스카 잔치이다.

1963. 12.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47항

서문: 주님의 날

저는 우리 대교구의 미래가 희망으로 가득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성체성사가 선물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하나의 교회로서, 우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것같이 전례에 전적이고 의식적이며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제안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인 우리에게, 2004년 10월부터 2005년 10월까지를 “성체성사의 해”로 제정하시면서 성체성사가 우리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성체성사 신심의 위대한 해석자들인 성인들의 학교에 우리도 자리를 잡읍시다. 그들 안에서 성체성사 신학은 생생한 실재의 빛을 얻습니다. 이 빛은 ‘전염’되며, 이를테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1라고 하시면서 성인들의 삶을 보고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매 주일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신앙생활의 근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주일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거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종합이며 올바른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천 조건”2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사목서한에서, 저는 근본적으로 주일날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성체성사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갱신되도록, 그래서 우리가 믿는 바를 참되게 실현하고 삶으로써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봉헌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가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키도록 지지해주지 않는 사회의 풍토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삶이 바쁘고 할 일이 많아서 경우에 따라서는 주일 미사에 꼭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현재 미국에서는 가톨릭 신자의 3분의 1 만이 매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불행한 실정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통계는 우리 교구에도 해당합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 “원축일” 입니다. 산 정상에서, 화염과 연기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주일은 우리가 매일 신경쓰는 일들에서 벗어나, 안식을 취하고 쉬면서 거룩하게 보내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상에 경탄하며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입니다. 즐겁고 기쁘게 지냅시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주일을 제8일로 여겼습니다. 그날은 주님의 부활을 시작으로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재창조의 영광스러운 시간이며, 새로운 창조의 여명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살아계시다고 하는 신비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첫 부활절에 두 제자들이 겪은 체험을 바라봅니다. 낯선 분께서 그들을 성서의 말씀으로 잡아주었을 때, 그들은 성금요일 사건으로 슬픔과 비탄에 잠겨 예루살렘을 떠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의미와 패배로 여겨진 사건을 승리로 바꿔주시는 기초 교리로 그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분은 성금요일 사건이 메시아께서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 겪으셔야만 했던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일의 고민과 걱정으로 고달파 할 수도 있지만, 복음이 선포될 때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빵을 떼어” 나누게 되면, 우리도 부활하신 분께서 어떻게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고, 어떻게 우리와 함께 걸어가고 계신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루가 24, 13-35) 우리는 모여서 “그분께서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신 그 예를 행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오 천명을 먹이실 때 하셨던 예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이층방에서 하신 예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예입니다.

우리가 천주교 신자로서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우리 마음 속에서 조용히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체성사가 우리 교회 신앙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임을 인식하고, 전적이고도 능동적이며 의식적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도록 요청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참여하도록 다같이 불러주신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로서 거행해야 합니다. 다 같이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주일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현존의 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이 환하게 비춰진 것은 주일 낮만이 아니었습니다. 첫 부활절 저녁에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요한 20,22)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1고린 15,45)

세대를 거치면서도, 부활하시어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주일 미사에 계속 성령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단순히 지나간 부활절 사건을 기억하고 영예를 드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백성 한 가운데에 오늘도 현존하고 계시다는 신비를 알려줍니다. 주일 미사는 공동체가 이 커다란 구원의 신비를 통해서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해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도록 초대합니다.

이제 성인 입교 예식이 거의 모든 본당 생활에 정착되어, 신자들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와 성체성사가 통합된 성사 예식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세례성사에 선발된 예비자들은 세례수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성유를 바르는 예식을 통해 성령의 은사가 부어집니다. 그리고 새롭게 세례 받은 사람은 성체성사인 주님의 식탁에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입교 예식의 이런 중요한 부분이 공동체가 다 모인 매 주일 미사에서 재현됩니다. 저는 더 많은 교회들이 세례대와 세례장을 그 입구 가까이에 설치하여 신자들이 주일 미사에 올 때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성사생활로 들어가면서부터 그들이 받은 세례를 명확하게 기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수를 뿌리는 예절을 시작하면서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세례성사를 주일 미사 때 거행함으로써, 공동체가 세례성사를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출발로 이해하고 갱신합니다. 공동체의 전 신자들이 모일 때, 그리스도께서는 머리로서 지체인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현존하십니다.

이렇게 모인 신자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실제적 현존”이라는 의미로 믿고 깨달아야 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체성사를 “현존의 신비”라고 규정하시고 그분의 전임자인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성체의 형식으로 “실제적으로 현존”하신다는 말이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의 현존은 실제적이 아니라는 듯이 배타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 현존이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의 실재 안에 온전하고 완전하게 실체적으로 현존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3라는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여든 공동체 안에 현존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4선포된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가 “신자들을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하는 빛의 신비” 5임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며, 진리를 온전히 깨닫도록 공동체를 이끌고 계심에 마음을 열도록 해주십니다. (요한 16,13-14)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봉사자들-주례자, 독서자, 성가대, 성체성사의 집전자, 안내자들을 통해서도 맞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에게” (마태 25,40) 섬기신 분으로 보여져야 한다면,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형제들에게 섬기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보여져야만 합니다.6

결과적으로 그리고 가장 특별하게,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 성체성사의 요소인 빵과 포도주 안에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이 현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체성사의 가장 분명한 차원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찬례가 식사라는데 있습니다.”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모여서 먹고 마시는 공동체는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충만히 살아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체를 모시기 위해 줄 선 신자들은 순례의 기쁜 행렬이며, 성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순례의 길을 시작한 이들의 고마운 양식입니다.

동시에 성체성사는 희생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도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아버지께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봉헌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도록 초대합니다. 이 희생제사에 동참하는 영성체는 우리가 전례를 마치고 세상에 나아가 찬미와 섬김의 삶을 살도록 촉구합니다.

성체성사 거행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생생한 느낌은 미사 밖의 성체께 대한 흠숭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성체성사의 해 동안 미사 밖에서 이루어지는 성체 조배는 개별 본당들과 수도 단체들에게는 특별한 임무가 됩니다.”8 교황님께서는 “신앙의 신비”로서의 성체성사 안에 감추어 계신 그리스도의 역설적인 “빛의 신비”에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성체성사 안에 감추어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침묵의 순간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감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9 앞에 무릎을 꿇고 “개별적으로 그리고 공동적으로 관상기도”를 바치도록 권장하십니다. 감추어 계심과 침묵 그리고 관상기도에 대해 강조는 성사 거행이 왜 미사 밖의 성체 조배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지 않는지 말해줍니다. 감추어 계신 신비에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움으로써, 하느님 백성이 매일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가운데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지를 발견하도록 준비시켜 줍니다.

교황님께서는 “교회 교부들이 즐겨 하던 ‘신비 교육’에 전념해야 하며, 이 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은 전례 언어와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전례의 표징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신비로 넘어가며 그들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그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데 도움을”10 주는 기회로 이 한 해를 정하셨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날은 하느님의 백성의 삶 속에 매일, 매일 더 구체화될 것입니다.

함께하는 교회의 날

성체성사는 우리 모두를 하나의 교회로 일치시켜 주는 근원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성가 중에 “하나의 빵, 하나의 몸, 모두가 믿는 한 분 주님, 우리가 축복한 하나의 잔. 우리는 지구상에 많이 퍼져있지만, 이 한 분 주님 안에 한 몸입니다.” 11란 성가가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전체교회를 현존하게 합니다. 제가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리고 대교구 전체가 통합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서부 워싱턴 교회가 한 식탁에 둘러 앉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심을 새롭게 하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 주시는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믿으며 주님께 나아갈 양식을 모시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성체성사를 드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례 쇄신의 결과로 희생제사를 봉헌하는 제대와 신자들을 갈라놓던 난간들이 치워졌습니다. 세례로 평신도 사도직을 받은 신자들과 수품을 받은 사제로 이루어진 하느님 백성이 이 성사를 통해 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전례 안에, 선포된 말씀 안에, 주례자 안에, 모든 집전자들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12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넣어 주시고 우리를 움직이시며, 빵과 포도주를 성체와 성혈로 변화시켜 줍니다. 구원의 신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현존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아버지 앞에 나아와 봉사하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13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고, 미사를 마치고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파견됩니다. 미사 끝부분에 주어지는 파견 강복은 “가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축복을 통해 좋은 일을 하라”14는 사명이며, “복음을 널리 전하고 사회에 그리스도교 가치들을 고취시키도록 노력하라”15는 주님의 명료한 부르심입니다.

우리 교구의 많은 본당들이 파견 강복 바로 전에 병자들에게 성체를 모셔갈 봉사자들에게 성체성사의 이러한 선교사명을 주고 실현하도록 합니다. 또 다른 경우에 본당의 구성원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참여하도록 축복을 받고 파견됩니다. 우리가 이런 작은 활동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을 돌봄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드러나게 될 때, 그리스도께서도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께서는 우리가 성체성사를 “더욱 정의롭고 우애로운 사회 건설에 실제적으로 투신하도록” 재촉하는 “평화의 위대한 학교”16로 체험해야 한다고 쓰셨습니다.

영성체 후에 바로 떠나는 신자들은 미사의 마지막 순간에 주어지는 이런 중요한 선교사명을 놓칩니다. 파견 예식에서, 믿음이 충만한 우리 신자들이 “책임을 더 깊이 인식”17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체험하게 되는 일치가 전례의 끝부분에서 다시 강조되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교회 공동체와 동떨어진 그리스도인으로 떠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러 모인 전체 예식 중에 그리스도께서 진정 현존하셨던 것처럼, 이제 섬기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를 구현하도록 파견됩니다.

성 목요일 주님의 만찬을 기억하면서, 복음은 예수께서 거기 모인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 (요한 13,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월절 음식을 드시면서, 그리스도께서 일어나 제자단을 섬기신 것을 보고, 제자단은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어서서 섬겨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교좌 성당의 제대 위 천정 창에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 (루가 22,27)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교회가 서부 워싱턴 전역으로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섬기셨듯이 우리 역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성체성사의 선교 원동력이 개인적인 기도와 신심생활에서 우러나온다는 중요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일 성체성사에서 느끼는 교회의 보이는 친교 체험은 개인적인 신심 안에서 느끼게 되는 보이지 않는 일치와 친교의 원천이며 샘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18 이 성체성사의 해 동안 특별히 미사 밖에서의 성체 조배를 권장합니다. 성체 조배는 이 일치의 위대한 성사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인식하도록 도와줍니다. 성체는 일차적으로 병자와 언제 떠날지 모르는 임종자들에게 주어지기 위해 감실 안에 모셔집니다. 동시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하면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흠숭하도록 성체를 모셔둡니다. 그러한 기도는 성체성사를 공동 집전할 때처럼 “우리 믿음을 자연스럽게 밖으로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도록 해줍니다.”19

성체 조배와 묵주 기도, 성체 거동 그리고 다른 전통적인 신심들은 성찬례와 같은 정신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거룩한 전례는 그 본질상 이러한 신심 행위를 훨씬 앞서 가는 것이므로, 전례 시기를 고려하여, 그러한 행위들은 어느 모로든 전례에서 이끌어 내고 백성을 전례로 이끌어 들여야 합니다.”20 많은 신심들이 개인적으로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그 기초는 우리 자신을 넘어서 공동체의 필요를 기억하도록 하는 교회의 공적인 전례 안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 마을이나 시외의 환자들, 외로운 이들과 노인들을 위한 기도 지향 그리고 전쟁과 질병, 테러로 상처를 입은 세상을 위한 청원들은 우리 개인의 신심 차원을 넘어서게 해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 각 개인에게 주어진 은사나 장점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설하는데 쓰여져야 한다고 일찍부터 증언했습니다.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문화 속에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최고의 기도인 성체성사에서 드러나는 공동체적이고 교회적인 체험의 빛으로 우리 개인의 신심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찬 거행을 교회 문 앞에서 멈추지 말고”21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데 자발적으로 헌신하라고 하시는 부르심을 우리 믿음의 정점에서부터 듣고 있습니다.

결론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고린 10,16)

여러분의 대주교로서 저는 모든 본당 공동체들이 이 성체성사의 해에 전례를 더욱 더 거룩하게 거행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새롭게 봉헌하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에게 문화를 바꾸라고 한 사명은 주일 성체성사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정규적으로 만남으로써 이룰 수 있습니다.

전례력의 흐름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들어가고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세성사를 거행하는 공동체로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위대한 일을 발견하고, 우리를 위해 그렇게 큰 일을 하신 분께 무엇을 되돌려 드려야 하는지 식별합니다. (시편 116,2) 우리가 매주간 성체성사 예식에 들어가고 나오면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하고도 구체적인 감사는 우리의 활동이라는 것을 배우고 변화되며 새로워집니다. 여기 우리가 마땅히 섬겨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25,40)

교황 요한 바오로께서는 우리가 “성체성사의 해”를 충실히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찬례 거행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22 그것은 또한 성체성사가 우리를 위한 일치의 표징이며 사랑의 끈인가를 나타내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도록 그리고 우리 가운데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존엄성을 들어 높이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활기를 띄어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게” (시편 34,8) 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각주

1. Encyclical Letter Ecclesia de Eucharistia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17 April 2003) no.62.

2. Apostolic Letter?Dies Domini (주님의 날)? (5 July 1998) no. 81.

3. Apostolic Letter Mane Nobiscum Domine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7 October 2004)?no. 16, citing Mysterium Fidei (신앙의 신비) (3 September 1965) no. 39.

4. Mane Nobiscum Domine, no. 13.

5. Ibid. no. 11.

6. The General Instruction of the Roman Missal (로마 미사경본 총지침), no. 27, clarifies the teaching of the Constitution on the Sacred Liturgy, Sacrosanctum Concilium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no. 7, in acknowledging the real presence of Christ “in the person of the minister” without limiting this category to the presiding priest.

7. Mane Nobiscum Domine, no. 14.

8. Ibid., no. 18.

9. Ibid.

10. Ibid., no. 17.

11. “One Bread, One Body.” Text: John Foley, S.J. In Gather. Chicago: GIA, 1994.

12. Eucharistic Prayer II. (성찬기도 2양식)

13. Eucharistic Prayer II.

14. General Instruction of the Roman Missal, no. 90.

15. Mane Nobiscum Domine, no 24.

16. Ibid., nos. 27, 28.

17. Dies Domini, no. 45.

18. Ecclesia de Eucharistia, no. 35.

19. Sacred Congregation for Divine Worship. Eucharistiae Sacramentum (21 June 1973) no 5.

20. Sacrosanctum Concilium, no. 13.

21. Dies Domini, no. 45.

22. Mane Nobiscum Domine, no. 28.



연중 제10주일

(가해) 마태 9, 9-13; 2002/06/09

어떤 사람은 천주교 신자는 뭔가 부족하거나 약해서 하느님께 부탁하느라고 성당에 나간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주님께서 채워주시기를 청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인간 모두가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데도 그것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이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에게 주님의 도움과 보호하심이 필요 없다면,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필요 없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아껴주시고 보호해주시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마태오를 부르신다. 마태오는 당시 율법에 따르면 죄인이었다. 마태오는 늘 율법을 어겼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는 한편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이웃들에 대한 미움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자 그는 자기를 얽매고 있는 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를 따라 나섰다. 그는 그를 얽매고 있던 부담과 미움이란 죄악에서 벗어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가 죄인이지만 그 중에서도 모든 사람에게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삼으신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실 때 베드로는 주님께서 어떻게 내 발을 씻으시느냐고 마다하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요한 13, 8)고 하시면서,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14-15)라고 하셨다.

"죄인을 부르러"(마태 9, 13) 오신 예수님께 우리가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님께 용서를 받아 다시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자.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임을 인식해서 위축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 안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는 이웃을 신자로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인 복음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19, 19)는 주님의 말씀대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실현해서 기쁘고 또 형제가 우리의 도움을 받아 기쁘니, 참 기쁨이 아닌가! 우리의 목적은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그가 신자가 되고 아니고는 주님께서 하실 일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6, 6; 마태 9, 13)



연중 제10주일

(나해) 마르 3,20-35 : 97/06/08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에 돌아오시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마르 3,20) 예수님은 식사를 못하실 정도로, 어떻게든 잃어버린 양을 하나라도 더 구하시려고 그야말로 동분서주하시는 듯하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바쁘게 일하시는 예수님을 도와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예수님께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서 그런지 오히려 예수를 비방하고 있다.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22절) 그 비방이 어느 정도 심했는가 하면, 예수의 어머니와 사촌형제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데려가려고 찾아올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 처하신 예수님의 모습, 정말 우리 인간적인 마음에서 바라볼 때 정말 안쓰럽고 외로워 보인다. 우리 같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좋은 의도를 가지고 선한 일을 하는데 옆에서 사람들은 도와주기는커녕 갖은 비난과 모함을 해댈 때…. 실망하고 지치지 않겠는가? 그리고 한편 떠나고 싶고!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토로라도 하듯이 성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둘러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 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32-35절)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당신이 가셔야 할 그 길을 꿋꿋이 걸어가실 수 있으셨을까? 예수님은 실제로 주님의 그 말씀, '하느님의 뜻'(35절)을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시기에, 어둠의 세력이 어떻게든 실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하도록 하는 음모와 유혹을 이겨내셨다. 그리고 한편 아버지의 뜻이 인류에 의해 저버림을 당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오게 되셨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에 그 상황을 이겨나가고 그렇게도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35절) 개인적으로 당하는 어려움이나 활동에서 오는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말고 주님의 뜻에 의지하여 주님과 함께 활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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