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일

(나해) 마르 4,26-34; 15/06/14

사람들은 가끔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정의는 사람들이 말하는 자비와는 조금 달라 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라나온 문화와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윤리적인 기준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모두 한 문화환경 속에서 자라나지 않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태어나,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환경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서로 다른 문화환경 속에 처한 각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윤리적인 잣대가 아니라, 사랑이고, 그 사랑은 바로 용서하시는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마르 4,26-28) 라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31-32절) 라고 덧붙이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시 재생의 기회를 주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 안에 하느님의 선성을 심어주셨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통해 인간의 죄악으로 손상된 선성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완성시켜 주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죄인을 용서해주면, 감사할 줄 모르고 더욱 더 큰 죄를 지을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그렇지만 주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해주면, 주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회개에 이르는 새 인간의 길로 접어든다고 기대하십니다.

마치 사랑의 씨가 용서받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자라나고, 오늘 용서받은 마음이 겨자씨처럼 자라나서 새로워지고, 내일 용서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커다란 아량과 자비를 베풀게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올해 12월 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부터 내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를 ‘자비의 희년’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도록 이끄는 마음의 변화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사, 선물, ‘하느님의 작품’입니다(에페 2,8-10 참조). 우리가 비참한 처지에 있어도 사제가 우리를 하느님 이름으로 환대하고 이해할 것을 확신합니다.” 라고, 하느님의 자비와 그 자비를 믿는 우리의 회개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우리 변호인은 우리 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주 예수님이라고 일러주십니다.

교황님은 ‘용서받은 죄많은 여인’(루카 7,36-50)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의 길을 열어줍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심판을 대비시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죄지은 여인을 자비롭게 사랑하셨기에, 그 여인은 예수님께 다가가 회개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립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용서받고 싶었습니다. 사랑과 용서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으로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죄인인 자기를 사랑으로 이해하신다고 깨달았습니다.

예수님 덕에 하느님께서는 그 여인의 죄를 씻어주시고, 더 이상 그 죄들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이사 43,25 참조). 하느님의 용서는 위대합니다! 그 여인은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 여인은 진실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말없이 주님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여인은 괴로워하며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의 선하심에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심판 이외에는 그 어떤 심판도 내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심판입니다. 심판을 뛰어넘는 자비인 사랑입니다.

집 주인인 바리사이 시몬은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계산하기 때문에, 사랑의 길을 잃어버립니다. 시몬은 사랑하지 못하고, 그저 심판만을 생각합니다. 시몬은 그 여인을 심판하면서, 진리에서 멀어지게 되고 심지어 자신이 초대한 분이 누구이신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바리사이는 누가 주인을 가장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시몬의 심판이 사랑으로 바뀌자, 비로소 그는 옳은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외적인 것에 머물지 말고, 모든 사람이 얼마나 너그러울 수 있는지 보라고 하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 자비에서 배제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모든 이를 환대하며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죄가 클수록, 교회는 회개하는 이들에게 더 큰 사랑을 베풉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큰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큰 사랑으로 우리의 죄 많은 마음을 치유하여 주시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시고 결코 놀라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들이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그를 끌어안습니다(루카 15,17-24 참조).

예수님께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이 돌아온다면 행복해 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안아 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사랑하는 마음이 겨자씨처럼 자라났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좋은 것을 좋아하는 마음에 그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용서하고, 존중하며, 자비를 베푸는 마음입니다.

자비로운 사랑은, 이번에 용서해 주면 더 큰 죄를 짓지 않을까 두려워하거나 혹여 배신당하지나 않을까 망설이는 한계가 있는 사랑에 그치지 않고, 죄를 지은 사람을 자식처럼 끌어 안고 품어 안는 무한하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저는 이 희년에, 우리 모두 죄인이기에 자비가 간절히 필요한 교회가 하느님 자비를 다시 발견하여 더욱 풍요롭게 하는 기쁨을 찾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그 자비로 우리 시대의 모든 이를 위로하여 주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늘 용서하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결코 지치지 말고 용서를 청합시다.”



연중 제11주일

(나해) 마르 4,26-34; 12/06/17

지난 주 수요일에 예술의 전당 무대 위에 섰습니다. 우리 본당 성가대가 예술의 전장에서 열린 ‘고 김수환 추기경 선종 3주년 기념 및 호국연령을 위한 음악회’에 한국 가톨릭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참석했기 때문에, 제가 관람하러 갔다가, 나중에 음악회가 다 끝난 뒤에, 저도 무대에 올라서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덕분에 저도 예술의 전당 무대에 올라서게 된 것입니다. 웃으라고 말씀 드린 것인데 제가 말씀 드리면 항상 심각해 져서, 웃기려는 의도가 항상 머쓱해 집니다. 감사합니다. 웃어주셔서…ㅋㅋㅋ

이건 다른 이야기 입니다만, 장터의 무대에도 세 번만 올라가면 사람이 바뀐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 더, 이 역시 뚱딴지 같은 이야기인줄 알지만, 그래도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상황이 펼쳐지면 여러분의 모든 것을 걸고 투신하시겠습니까?’

자식의 성공과 미래? 자신과 배우자의 승진? 유망주와 비전? 취미와 특기 생활? 사랑과 연애? 우정과 신의? 정직과 신의? 의미와 가치? 신앙생활? ‘무엇이 여러분을 가장 솔깃하게 하고, 여러분을 움직이게 합니까?’

또 다른 면에서의 접근이라면, 여러분의 비전과 희망이 무엇인지를 여쭙는 질문과도 연결되겠습니다. ‘여러분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하고 계신 것이 여러분의 미래를 보장해주고 앞당겨 줍니까?’

‘여러분이 지금 하고 계신 것이 여러분의 꿈을 이루어줍니까?’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어느 하나 확실하게 이룰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 때까지, 누구 하나 알아주거나 칭찬해 주지 않아도, 당장 눈 앞에 확실한 결과와 효과가 드러나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그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언젠가는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또 내 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에는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간직한 채! 그리고 그 때 오늘의 내 노력이 조금이나마 기여했기를 바라면서…….

어쩌면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그러면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도 같은 답을 던집니다.

‘네가 바라는 것이 진정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더냐?’

그러나 어쩌면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꾸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6-7) 우리는 남들과 같이 이 사회에서 살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남들과 같은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서 꾸준히 나아갑니다(로마 8,24-25 참조).

또 ‘네 보잘것없는 그 정도의 노력에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주님의 말씀을 제시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0-32)

우리가 꾸는 꿈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 2,13)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강론이 엉뚱하게 들리시지는 않겠죠?

여러분이 꿈꾸는 미래가 여러분의 소명과 여러분의 업무과 같은 것이며 같은 방향이라면, 여러분에겐 즐겁기도 하고 보람차서 여러분의 열정을 쏟아 부을만한 것이겠죠?! 그리고 그 꿈이 조금씩 이루어져 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설렘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 피어 오르고, 여러분은 새로운 희망과 꿈을 이어 지으시겠죠?! 그리고 그 꿈이 설사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꿈의 성취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 꿈을 이루는 길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고귀한 꿈과 희망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노력합시다.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에제 17,24)



연중 제11주일

(가해) 마태 9,36-10,8; 05/06/12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하던 바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아주 상심한다고 합니다. 남들은 그 정도면 되었을 텐데 하고 바라보는데도 정작 본인은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느끼면서 더 높고 더 낳은 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얻어지지 않고 채워지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더욱 더 심각한 것은 실제로 자신의 처지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그 굴레 속으로 더욱 더 깊이 빨려들어갈 때 절망을 느낍니다. 그것이 경제적인 수준이던, 사회적인 신분이던, 개인적인 죄의 차원이던지...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고, 하려고 의도했던 방향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때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하는데 또 반복하게 될 때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자기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고,

어디 하나 마땅히 갈 곳도 없고

누구 하나 기댈 사람도 없을 때

사람들은 절망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과연 이 나락에서 누가 건져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묵주기도의 성월이나 묵주기도를 바치고 나서 이어 바치는 ‘성모 찬송’ 기도에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처지를 보시고 구해주십니다.

누구하나 돌봐주기는커녕 잡아먹으려고 덤벼드는 세상 안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이 기댈 곳은 주님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라는 이국땅에서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인종이 많아진다는 이유로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한 채 강제노동을 해야 했고, 심지어는 아들이 태어나면 죽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노예살이가 지겨워 탈출하려고도 했고 독립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모세가 나서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9가지의 재앙을 이집트인들에게 내리면서까지 반항했지만 그들의 독립 소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10번째 재앙을 이집트인들에게 내리면서 이스라엘을 구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기와 새 삶의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를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왔는지 보지 않았느냐?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출애 19,4-6)

가끔 어린이들이 묻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사람들만 사랑하십니까?

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뻐서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서에 나오는 대로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형제인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버리는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자기 농사가 제대로 안되니까 자기들이 팔아버린 요셉 밑으로 살려달라고 스스로 기어들어온 민족입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처지는 고소하고 벌 받아 마땅하다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쌍하고 처량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과거가 어떠했던지, 그들의 행실과 죄과가 어떠했던지,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진 자승자박이던지 간에, 지금 당장 굶거나 괴로워하면서 자기 생을 힘겨워하는 그들의 모습이 가련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를 구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러시기에 더욱 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합니다.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로마 5,6-8)

우리가 잘나서도 아니요,

우리가 착해서도 아니요,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도 아니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죄와 악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 지금 힘들어하는 분이 있다면 주님의 이 커다란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고통과 근심 속에 계시다면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을 위로삼아 이겨내십시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10)

그리고 절망과 어둠 속에서 헤맬 때나 그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났을 때 다시 한 번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게다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11)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죄와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될 때 예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제자들에게”(마태 9,36) 하신 말씀에 응답합시다. “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38)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 사랑과 은총을 경험삼아 우리 주위에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형제자매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사도가 됩시다.



연중 제11주일

(가해) 마태 9, 36-10, 8; 2002/06/16

기도하면서 가만히 헤아려보면 우리 교회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구에서 매일 날아오는 공문에서 요구하는 여러 가지 일들, 지구에서 본당들이 연합해서 함께 해야할 일들, 본당 신자들의 영신 교육을 비롯한 그리스도교 문화 계발과 체험활동 등을 위한 일들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본당이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맡아야할 역할 등이 많이 있다. 그리고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의 연령별, 지역별, 직능별 대상들을 위한 선교와 신앙교육 및 문화, 복지 활동 등이 우리 교회를 바라보고 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자기가 어떤 도움을 얻을까 하는 생각으로 다가가면 피곤하기만 하고 자기에게 커다란 기쁨과 만족을 주지 못한다. 그 반면에 자기의 몸을 바쳐 형제들의 영신 사정들을 헤아리고 도울라치면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다보면 어려움도 있지만 기쁨이 배가된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몰라서 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안 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면서도 내가 하지 않고 어느 누군가가 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다가 그냥 반복되고 골이 깊어만 간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그렇다. 건의해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살면서 어떤 문제를 느끼고 그것을 풀어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바로 그 사람이 스스로 해야만 풀어진다. 실제로 그 사람만큼 그 문제를 잘 이해하고 해결의 필요성에 대한 사명감을 느끼는 이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달라고 청하여라."(9, 36-38)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정부가 다하지 못하는 일을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맡아주기를 기다린다.

그러면 정작 신자인 우리 자신은 이 많은 일을 누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겠습니까? 사제나 수도자, 구역 반장이나 단체장 몇이 이 일을 다 해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입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어느 누구에게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추수할 일꾼의 자격과 능력을 주십니다.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출애 19, 6)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고 우리가 기꺼이 선택한 평신도 사도직을 통해 주님의 뜻과 교회의 정신을 따라 세상에서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연중 제11주일

(가해) 마태 9,36-10,8; 99/06/13

예수님께서는 오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9,37-38)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 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10,1) 그리고 이 열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6)고 보내십니다.

그러면 오늘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허덕이는 이들은 누구일까? 오늘날엔 의사도 있고 심리상담가도 있고 학교 선생님도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부르신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제 영적인 일을 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 영의 안정과 성숙 즉 주님과 일치하고 주님 안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을 방해하는 현실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고 또 그런 상황과 처지를 가져오게 하는 사회의 반인간적 반그리스도교적인 모든 것과 싸워야 한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인생의 길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소년들과 술이나 마약 또는 도박 등으로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기 인생을 노예처럼 빼앗겨 버린 사람들, 삶의 주체를 상실해 버린 사람들, 친인척과 이웃사촌간의 불화와 배신으로 혼란에 처해 헤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양심적이고 착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참고 희생하고 정직하게 살려다 보니까, 자본주의 경쟁사회 안에서 어딘지 모르게 낙오자요 무능력자처럼 낙인이 찍히고 밀려나 버렸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겪는 이들 뿐만아니라 그 가족들과 같이 고통을 겪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심지어 먹고 사는게 먼저지 무슨 기도고 믿음이냐? 그게 다 뭐 필요하냐고 생각하는 이마저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돈마저도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인지 모르고 방황하고 애써 헛고생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7) 우리 모두 주님의 부르심을 느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지금까지 돌보아 주셨고, 그 외아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셔서 우리를 구하시러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알리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희망을 불어넣어 주어야 하겠다.



연중 제11주일

(나해) 마르 4,26-34 : 97/06/15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놓았다.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마르 4,26-27) 우리는 우리가 밥을 먹으면서도 우리가 먹는 그 밥이 어떻게 우리의 영양분이 되어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활동할 수 있는 힘이 되는지 잘 모른다. 그냥 일하다 지치면 기운이 떨어지고 기운이 떨어졌을 때 밥을 먹으면 다시 기운이 샘솟는 것을 경험하여, 기운이 떨어졌을 때는 먹으려고 할뿐이다.

우리에게는 먹는 것 이외에도 또 다른 경험이 하나있다. 그것은 신앙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 신앙 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성체성사의 경험이다. 밥 한 끼를 안 먹었다고 지금 당장 굶어죽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성체성사를 영하지 않아도 또 성체성사를 우리 삶안에서 실현하지 않아도 지금 당장 냉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끼니를 거르면 힘이 없고 심지어는 영양결핍으로 병치레를 하게 되거나 영양실조로 육체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성체를 하지 않고 또 우리의 생활 안에서 말씀을 듣고 나누어 실천하는 성체성사를 이루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 역시 약해지고 만다. 우리의 신앙이 약해지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보다 세상살이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은 제쳐놓고 세상살이를 더 좋아하게까지 된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행동 여하에 따라 결과가 빚어지는 일이 있는가하면, 우리의 행동 여하에 관계없이, 우리에게 주어져 그것이 그렇게 주어진 대로 열매를 맺는 것도 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오신 주님, 우리에게 주님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님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가 주님 사랑의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마르 4,28) 주님 사랑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말씀이신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직접 활동하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시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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