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일

(다해) 루가 9, 18-24; 2004/06/20

지난주간에는 서울대교구 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캐나다와 남미 그리고 미국 지역에서 사목하시는 본당 신부님들과 공부하시는 유학생 신부님들이 한 데 모여 그 동안의 삶을 나누고 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오시기로 되어 있던 이한택 주교님은 오시지 못하고, 대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오셔서 함께 해주셨다. 이젠 83세의 고령으로 다시 못 올지도 모르는 기회로 여기시고 미주지역의 서울교구 본당들을 방문해 주시기로 하셨다. 모든 본당을 다 방문하실 수는 없어도 몇 몇 본당만을 선별하여 방문하시기로 하셨지만, 그래도 일정이 강행군이라 우리 타코마 성당까지 오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추기경님께서 저희 본당을 비롯한 미주 순방의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

추기경님은 본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울교구 신부들을 서품시켜 주셨고, 비단 서울교구 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셔서 한국교회를 대표하신 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화와 현대화를 거치는 격동기에 한국 역사의 산증인이요 중심인물로 매년 한국을 움직이는 10인에 자리하심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의 큰 어른이다. 그리고 한 때 교황의 필리핀 방문 때는 몸으로 저격범을 막은 이유로 차기 교황후보로까지 추앙되신 분이셨다. 본인은 잠시 연로하신 추기경님을 뵈오며 과연 추기경님이 본인에게 어떤 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분인가?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18) 그러자 제자들이 답한다. "대개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마는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옛 예언자 중의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19)

그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뵈오며 떠올리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하나'는 누구이며,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기에 예수님을 뵈오며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일까?

'세례자 요한'은 당시 백성들의 부패를 힘있게 비판하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라는 회개의 설교로서, 유다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소리를 전한 예언자다. 그는 당시의 왕인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왕까지도 고발한 예언자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에게 비유한 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면 현실에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지를 올바르고 과감하게 제시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이다(마태 14, 2-12; 마르 6, 17ㄴ-19; 루가 3, 10-14 참조).

'엘리야'는 왕비 이사벨을 따라 다른 나라 신과 다른 종교의 문화를 섬기던 아합 왕과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절대적인 우위권을 증명해 보인 예언자다. 그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를 잘 짓게 해주시는 신은 바알신이라고 믿고 절하자 진정 비를 내려주고 농사를 잘 짓게 해 주는 신이 바알인지 주 하느님인지를 증명하고, 참 신앙의 길을 걷도록 요청한 예언자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가 다시 내려와 자신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구원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예수님을 엘리야에게 비유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현실적으로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길과 신앙이 가리키는 갈림길 사이에서, 어느 길이 참 신앙의 길이며 그것을 증명해 주시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1열왕 18, 20-40 참조).

'옛 예언자 중의 하나'는 '모세'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준 예언자로서, 하느님과 얼굴을 대면할 정도로 가까웠던, 그래서 그의 죽음도 확실히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마지막날 하느님의 이름과 권능으로 구원하러 오리라고 기대되던 성조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이 예언자에 비유한 것은 마치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모세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리라는 정치적이고도 현실적인 메시아(구세주)관에서 비롯되었다(출애굽기 참조).

이러한 백성들의 기대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는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20)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답한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20)

'그리스도'란 단어는 그리스어로 '기름부어 축성하여 세운 왕'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주님의 기름을 바른 자란 뜻의 '메시아'를 번역한 것이다. 기름 부음은 고대부터 왕이나 사제 또는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주어, 백성을 다스리고 인도하도록 기름을 부어 축성하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기름 부음받은 자' 또는 '기름 바른 자'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통해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시아라는 단어의 내용과 의미를 따라 우리말로 하자면 '구세주'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에 백성들이 히브리어로 '메시아' 또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또 기대하는 바는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명을 받은 자'이며, 그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에 만족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인 승자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새롭게 해석하시고 제시하신다. 메시아는 점령군인 로마군을 쳐부수고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실 분이 아니라, 백성들을 구하시기 위해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22)을 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세주는 사람들을 구하시기 위해 사람들의 미움과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그 값을 치르기 위해 고통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로로 훗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도 역시 메시아와 같이 백성들을 구원하시러 오실 구세주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혹여 그들의 기대가 현실적인 안녕과 출세지향적인 인간의 욕망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기를 빌면서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남을 향해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되새겨야 할 것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23)



연중 제12주일

(가해) 마태 18,19-22; 99/06/20

지난 6월 15일 화요일 오전 9시 28분부터 14분 동안 남북 해군이 서해 상에서 무력충돌을 했습니다. 어처구니도 없고 한편으론 분노마저도 끓었습니다 남북전쟁이 49년이나 지난 지금 시점에서 함포사격이라니 대체 무슨 짓들인가?. 코소보 사건이 지나니까 여기서 시작인가? 연초부터 일본과 서방세계에서 '한반도 위기론'을 들먹이더니 때맞춰 긴장을 유발시키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오늘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바라는 민족의 일치와 국토의 통일을 이루려먼 우선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마음을 모으기가 쉬운 일인가? 서로가 어떻게든 상대를 자기 발아래 굴복시키고 가능하면 자기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상황에서 대하려하니 마음은 설사 모은다 해도 서로에게 좋은 일을 이루기가 참으로 어려운 세상 물정입니다. 이해에 따라 관계를 맺는 것이 사회상황이다 보니 더욱 더 어렵습니다.

이러한 인간세계를 잘 아시는지라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 하십니다. 서로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기본선과 합의가 맺어지지 않고 지켜지지 않아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때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용서하여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21) 지금 당장은 분이 북받치고 복장이 터지더라도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 하신 주님의 말씀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민족의 일치와 국토의 통일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에페 5,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사랑에 감사하고 주님 사랑을 다시 그리며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 오늘 나와 맞서는 너를 용서하고 우리 함께 민족의 일치와 국토의 통일을 위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나아갑시다.



연중 제12주일

(다해)마르 4,35-41 : 97/06/22

지금 우리는 분단된 조국, 분열된 민족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조국은 우리의 뜻과 필요에 의해 분단된 것이 아니라, 1950년대의 국제 정세와 깊은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때는 2차대전이후 동서의 냉전체제와 그에 따른 반공(무력) 이데올로기로, 소련을 중심으로한 동유럽의 공산주의와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양의 자본주의가 서로를 적으로 삼고, 서로의 영역을 상대에게 질세라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력확장의 물결이 부딪힌 것이 우리의 한 반도였습니다. 다시 말해 6.25전쟁 종결이후 휴전선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강대국들에 의해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지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그러한 세력들의 대리전쟁을 치른 셈이죠. 물론 대리전쟁이라 하더라도 그 대리전쟁을 치른 것은 우립니다. 누가 대신시킨 것이 아니죠. 남 북의 소수 정치가들이 세계의 양대 세력을 등에 업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남을 지배하려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은 과거의 지나가 버린 사건만은 아닙니다. 오늘 날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데 있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가 애써서 소개하고 적용하여 모두 잘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의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하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도록 이용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결과는 바로 분열인데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마태 18,19)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위하고 아낀다면 우리는 다시 우리 민족의 일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20절) 그리고 그 일치를 이루기 위해 주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절)고 하신 대로 용서하여 한 마음이 되도록 합시다. 특별히 요즘 북한은 아주 어렵게 살고 있답니다. 우리 모두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연민을 정을 바쳐 도우며 일치를 향한 지속적인 사랑을 실천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북한의 굶주림 해결을 위한 2,000만단 묵주기도 바치기 운동'에도 적극 참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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