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루카 11,4)



(나해) 마태 18,19ㄴ-22; ’21/06/2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성심을 기억하는 달인 6월은 한국 천주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지구촌에서 가장 오랜 분단의 상황을 겪고 있는 한반도가 이 분단과 휴전을 끝내고 다시 평화로워지기를 기도하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남북한이 분단의 과정에서 겪은 전쟁과 이념 갈등으로 주고받은 상처와 아픔은 지금까지 한반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상처와 아픔은 마음의 완고함으로 이어지고 복음의 기쁨을 누리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합니다.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는 지금 심각한 기후 위기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으로 겪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매년 각국의 군비 증강으로 말미암아 긴장 상태가 거듭되는 어려움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에 관한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을 통하여 코로나19 극복과 교회가 새롭게 나아갈 모습 그리고 인류가 더불어 사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길은 이웃을 남이 아닌 형제로 대하고, 세계를 사회적 우애가 펼쳐지는 무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 존엄성을 지닌 형제자매로서 “모든 얼굴과 모든 손과 모든 목소리를 아우르는 인류 가족”(‘모든 형제들’, 35항)을 이루도록 함께 꿈꾸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70여 년 동안 갈라져 살아온 남북한의 주민들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다른 시선으로 목소리만 높이면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치의 전제 조건이 화해이듯, 하나 됨의 전제 조건은 평화이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평화로움 속에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열매이어야 합니다. 평화가 배제된 화해와 일치는 또 다른 싸움을 일으킬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이루고자 용서하고 화해하며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교황께서는 ‘모든 형제들’에서 남녀노소 모든 사람의 취약성을 연대와 배려의 자세로 돌보자고 권고하셨습니다. 또 세상의 형제애를 위한 종교 간 대화, 사회·정치적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셨습니다. 따라서 인류가 한 가족이 되기 위하여 먼저 남과 북이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나눌 것을 제안합니다. 남과 북이 서로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나누는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야말로 한반도 분단이라는 깊고 긴 어둠을 뚫는 희망의 빛이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와 다릅니다. 세상은 힘으로 평화를 이루려 하지만, 힘으로 이룬 평화는 타인의 고통과 분노 위에 세워졌기에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불안정한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평화,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평화를 일구어 내야만 합니다.

인류 가족을 지킨다는 이유로 참으로 막대한 자원이 우리 삶을 위협하는 최첨단 무기와 핵무기를 보유하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기와 다른 군비에 투자할 돈으로 결정적인 기아 퇴치와 최빈국 발전 지원을 위한 ‘세계 기금’을 설립”(2020년 세계 식량의 날 영상 메시지)하자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권고를 받아들인다면 이 얼마나 용기 있는 결정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잠시 멈추어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세상에 분쟁의 일상화를 가져왔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해야 연대와 형제애 안에서 참된 평화를 추구하도록 우리가 회심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회심이란 한 개인, 한 민족이 삶과 역사의 흐름까지도 바꿀 수 있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마음들은 화해, 일치, 평화라는 은총들과 긴밀히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위한 기도와 더불어 저마다 삶의 자리인 가정, 이웃, 본당 공동체, 사회에서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들을 실천합시다. 아울러 북쪽의 우리 형제자매들을 기억합시다. 그들과 다양한 형태로 교류하고 공감하며 사랑의 나눔을 통한 연대의 정을 더욱 돈독히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이 말씀은 용서로 얻어지는 화해와 평화에 관한 심오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루카 11,4)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날마다 청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진심을 담은 선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주시는 고귀한 선을 얻어 누리며 사랑과 평화가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지내며,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매일 밤 9시에 바치는 주모경을 절실한 마음으로, 우리의 염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바칠 것을 다짐합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2021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김주영 시몬 주교

전문

-----------------------------------------


연중 제12주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꽃꽂이




연중 제12주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경축이동



(가해) 마태 11,25-30; ’20/06/21

안녕하십니까, 신자 여러분?

오늘은 우리 본당의 주보 성인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본당은 예수님을 따르는 성인들을 주보성인으로 정하여 그 축일을 지내는 데 반하여, 우리 본당은 예수님의 마음 자체를 주보성인으로 정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은 교회에서 일러주는 예수성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합시다.

2001년 교황청 경신성사성에 낸 ‘대중 신심과 전례에 관한 지도서: 원칙과 지침’ 166항을 보면,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뒤 두 번째 주일에 이은 금요일에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냅니다. 모든 신심 행위 가운데서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교회의 첫번째 신심입니다.

성서에 비추어 볼 때, '예수 성심'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 그분의 전 존재, 가장 내밀하고 본질적인 그분의 인격을 드러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창조되지 않은 지혜, 무한한 사랑, 인간의 구원과 성화의 주역이심을 의미합니다. ‘성심’은 그리스도이시며, 강생하신 말씀이시고, 구세주이시며, 본성상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당신 형제들에게 무한한 신적 인간적 사랑을 품고 계신 분이십니다.

교황님들께서도 성서에 토대를 두고 예수성심 신심을 설명하십니다. 아버지와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는(요한 10,30 참조)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과 긴밀한 친교를 이루며 당신과 당신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도록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하신"(마태 11,29) 분으로 드러내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창에 찔리신 그분을(요한 19,37; 즈가 12,10 참조) 바라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예언적 복음적 시선, 곧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바라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시선을 나타내는 예배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요한 19,34 참조) “교회의 놀라운 성사”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으며(요한 20,20 참조), 토마에게는 당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0,27 참조). 이 사건 역시 예수 성심에 대한 교회의 신심의 시작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167항).

다른 성서 본문들도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승리한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제시합니다(묵시 5,6 참조). 교부들은 이들 성서 본문을 열심히 성찰하였고, 그것들의 교리적 풍부함을 밝힙니다. 교부들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찰하도록 권고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리스도께서는 문이시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창에 찔렸을 때 여러분에게 그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무엇이 흘러나왔는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들어가고자 하는 곳을 선택하십시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물로 여러분은 정화되고 그 피로 여러분은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말합니다(168항).

중세기에 특별히, 학식과 성덕으로 유명한 많은 성인들이 이 신심을 발전시키고 권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베르나르도 성인(+1153년), 보나벤투라 성인(+1274년), 루갈다 성인(+1246년), 마르부르크의 마틸다 성인(+1282년), 헬프타 수도원의 두 성인 수녀 마틸다(+1299년)와 제르트루다(+1302년), 작센의 루들프(+1380년) 등은 예수 성심 안에서 ‘안식처’를 찾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 성심 안에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원천이시며, 성령께서 흘러나오시는 샘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비의 자리, 약속의 땅, 참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였습니다(169항).

현대에 들어서면서, 얀센주의자들이 하느님의 엄격한 심판을 주장하였을 때에, 예수 성심 신심은 신자들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과 주님의 성심으로 상징되는 그분의 무한하신 자비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1622년)은 예수 성심의 다양한 측면들인 겸손과 온유(마태11,29 참조), 넘치는 사랑과 자비를 자신의 삶과 사도직의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성녀(+1690년)에게 당신 성심의 풍성한 자비를 자주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요한 에우데스 성인(+1680년)은 예수 성심에 대한 전례 공경을 촉진하였고,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성인(+1682년)과 요한 보스코 성인(+1888년)과 다른 성인들도 예수 성심 신심의 열렬한 촉진자였습니다(170항).

예수 성심 신심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교황 비오 11세는 ‘개인적 봉헌’을 “확실히 예수 성심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신심 실천”이라고 묘사하셨습니다. 또 거룩한 혼인성사를 통하여 이미 일치의 신비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는 가정은 그리스도께 봉헌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가족 모두의 마음을 다스리실 수 있게 하는 ‘예수 성심께 드리는 가정 봉헌’이 있습니다. 1891년 승인된 ‘예수 성심 호칭 기도’는 성격상 명백히 성서적이고 여러 가지 대사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선을 기억하며 예수 성심께 갖가지 모양으로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자비를 청하는 ‘보속 행위로서의 기도’가 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성녀에게 하신 '위대한 약속'에서 비롯된 매달 첫 금요일의 신심 행위는 신자들 사이에 성사적 친교가 매우 드물었던 때에, 첫 금요일 신심은 고해성사와 성찬례를 활성화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지만, 오늘날에는 “근원적인 축일"인 거룩한 미사 거행에 신자들이 온전히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171항).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신랑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신심을 나타내는 놀라운 역사적 표현으로서, 회개와 보속, 사랑과 감사,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활동에 대한 사도적 투신과 헌신 등과 같은 기본적인 자세를 요구하여, 이 신심의 핵심 내용인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우위성을 드러냅니다(172항).

대중 신심이 성화상으로 그려져 긍정적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그 신심의 신학적 토대나 역사적 구원적 내용과는 상관없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묘사하여 신심의 대상을 과소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 들어 그리스도의 지고한 사랑의 표현인 예수 성심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는 그리스도(요한 19,34 참조) 이십니다(173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라고 일러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하루 하루를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나름 열심이 노력하고 한다고 하는데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때는 행복한 나날을 맞이하기 보다는 오히려 실패와 좌절을 맞기도 하고, 불안정한 오늘과 보장되지 않는 미래 앞에서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이 안타깝고 지친 마음을 주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위로해 주시고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늘 주님 앞에 나오면 평안해지고 행복해지기에,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러운 말씀이 덧붙여 옵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과연 편하다는 주님의 멍에와 가볍다는 짐은 무엇입니까? 오늘 독서에서 성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힌트를 던져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7.16)

주님의 사랑을 풀이해주시는 성 요한 사도의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인간적인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노예처럼 붙잡혀 있다고 여기던 죄악이 사실 우리의 탓이 아니라 악마가 우리에게 주는 굴레라면, 우리가 믿음과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내 스스로의 굴레는 용서라고 하는 사랑이구나!’ 하는 느낌이 깊어집니다.

오늘 본당 주보성인 대축일을 맞아,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께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을 축복해주시고 평안케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



연중 제12주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경축이동 꽃꽂이




연중 제12주일 성 요한 세례자 대축일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부제 강론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변화)



(나해) 루카 1,57-66.80; ’18/06/24

찬미예수님, 이번 한 주간 주님의 사랑 속에 행복한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보통 성인의 축일을 지낼 때는 대부분 그 성인께서 돌아가신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탄생을 또 다른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탄생일 축일로 보내는 경우는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세례자 요한 세 분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세례자 요한이 무언가 특별하구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특별함을 탄생일화로 전해 줍니다.

오늘 복음의 처음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루카 1,57) 사실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는 것부터가 사실 특별합니다. 많은 사람이 아기를 낳지 않나, 애를 낳는 것이 뭐가 특별한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엘리사벳에게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성경은 엘리사벨을 아기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다고 전합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벳과 그녀의 남편인 즈카르야 둘 다 나이가 많은 늙은 몸이었습니다. 늙은 나이에 아기를 평생 한 번도 낳지 못하던 부부에게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특별합니다. 지난 주 가톨릭 신문에 40세가 넘은 나이에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아 기르지만, 감사함을 전하는 기사가 올라 왔는데 그 부인에게 그 늦둥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듯, 과거에는 정말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요한이다’라는 점 또한 특별한 점입니다. 유다인들은 이름을 지을 때 조상의 이름, 그것도 가문의 이름들 중에 하나를 선택했던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어야 한다고 말하자 이웃과 친척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라며 반문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가르쳐 주신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웃과 친척들은 이상한 눈으로 엘리사벳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곤 남편인 즈카르야를 쳐다봅니다. 그러나 즈카르야 또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또한 하느님께 그 이름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요한이라는 이름은 ‘야훼는 자비로우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이름으로 당시의 관례를 깨는 변화가 이웃과 친척들에게 당혹감을 주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변화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야훼는 자비로우시다.’ 라는 것을 의미함으로써 새로운 변화에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날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의 태어남을 축일로 기리는 것은 하느님의 또 다른 특성인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드러낼 변화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출생에서부터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노부부의 출산이 그랬고, 그가 가진 이름이 그랬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행적, 회개의 세례에서도 그것이 드러납니다.

제2독서는 요한에 대해 전합니다. 먼저, 요한은 예수님 전에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회개, 즉 죄를 뉘우쳐 하느님께 몸을 돌림을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죄를 뉘우침은 물론이고, 죄를 용서받았다는 표시가 중요했습니다. 그 표시가 있어야 하느님하고 가까워짐을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 표시를 받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성전에서 사제에 의해 1년 한번 이루어 졌습니다. 대속죄의 날에 속죄물을 사제에게 가져가 바치고,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부자가 아닌 사람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날이 너무 힘겨운 날이었습니다. 이 날 대속제사를 집전하는 사람이 바로 사제였습니다.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이던 요한도 관례대로 한다면, 사제가 되어 이 제사를 집전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사제직분을 포기하고, 광야에 나가 예언자로 살아갑니다. 광야에서 요한이 한 것은 죄를 뉘우치라고 말하고, 그 뉘우침을 고백하는 이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외적으로 용서 받았음을 표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 그 과정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는 것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의 이름이 가진 그 의미처럼 회개와 죄의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심을 전했습니다. 요한은 그의 활동을 통해서 그가 가진 이름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져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새로운 변화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늘 변화는 우리에게 두려운 것으로 남아있습니다. 왜냐하면 변화 다음의 것을 우리가 그려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것에 우리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깨끗한 물속에는 손을 담그기가 어렵지 않지만, 흙탕물 속에는 손을 담그기가 참으로 두렵습니다. 안에 뭐가 있을지 알고요. 이렇듯 그 다음을 알 수 없다는 것 우리가 계획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에서 우리는 반감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변화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쇄신이라고 부릅니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내며 이번 한 주간에 일어나는 내 삶의 변화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게 되기를 빕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



연중 제12주일 꽃꽂이




2017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


이 나라 이 땅에 잃어버린 평화를 되찾게 하소서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이사 65,17)



마태 18,19ㄴ-22; '17/06/25

남북 분단 72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다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 전범 국가로서의 책임 때문에 분단의 멍에를 받아들여야 했던 독일은 과거의 상처를 딛고 통일국가로서의 위상을 떨치며 유럽연합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없이, 아니 오히려 전쟁의 피해자로서 식민지배 상태에서 원치 않는 분단의 아픔을 겪었던 우리는 아직도 대결과 갈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분단의 직접적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세력다툼 속에 한반도 통일과 관련한 우리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져 왔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격동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건국 이래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의 대규모 촛불시위가 이어졌고, 결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구속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었지만 큰 불상사 없이 보궐선거를 통해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여 안정적으로 정권교체를 이루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외신들에서는 대한민국의 성숙한 민주주의 의식에 찬사를 보내고 있지만,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지도자를 국민적 저항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권력 내부의 비정상적인 상황들이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준 것도 사실입니다.

비정상적 분단구조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은 제각각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사회적 양극화를 비롯해 환경, 인권, 종교, 그리고 최근에 두드러지게 대두되는 테러리즘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과 북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단순한 분단이 아니라 휴전선을 마주 대고 총부리를 겨누며 극도의 위기감 속에 정전체제를 유지한 체 64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정전체제 속에 각종 위협과 도발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세계적으로 이미 사라진 냉전논리가 우리 사회 전반을 물들이며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정상적 모습이 남과 북 모두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냉전논리는 우리 신앙인 안에도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분명하고도 유일한 계명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또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1요한 4,20 참조).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 신앙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이 북한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을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저주와 증오의 대상으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또한 사랑의 실천을 말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매도하거나 심지어 성직자들에게도 ‘종북’ 딱지를 스스럼없이 붙이기도 합니다. 냉전논리가 신앙에 우선하는 상황이 생기면서 이념의 우상화에 깊이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악에 대항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나 스스로 악해지는 것입니다. 악은 선으로 극복해나가야 합니다(마태 5,44 참조).

평화체제로의 전환

정전체제에서 비롯된 냉전 구도가 사회,정치,경제,문화,종교 등에 영향을 주면서 많은 폐단을 낳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냉전논리를 악용하기도 하고, 안보위기를 부추기며 온갖 적폐들을 양산하기도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검열을 강화하고, 그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너무도 쉽게 적으로 규정하여 매도하는 일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긴 냉전의 시간이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병들게 만들었고, 짙은 어둠 속에서 우리 미래는 더더욱 불투명해지고 있습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평화체제로의 전환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새로운 정부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데 힘을 기울여달라고 당부합니다. 확실한 안보는 평화가 항구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첨단무기나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하여 상대에게 위협을 가하는 세상의 불안한 평화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주님의 평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요한 14,27 참조).

불완전한 정전체제 속에서 한반도는 늘 긴장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최근 북한의 핵과 미사일, 그리고 남한의 사드배치와 관련된 논쟁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 전쟁위기를 더더욱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북한과 미국 사이의 치열한 설전과 무력시위가 자칫 큰 충돌로 이어져 우리 삶의 터전에 큰 재앙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습니다. “평화로 없어질 것은 아무 것도 없으나, 전쟁으로는 모든 것이 멸망할 것이다.”라는 교황 비오 12세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삶을 위하여, 나아가 자라나는 우리 미래세대를 위하여 전쟁위기를 극복하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국민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체험했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국민적 열망이 참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서로를 공멸로 밀어 넣는 대결구도에서 벗어나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한반도에서의 완전한 전쟁종식을 선포하고, 활발한 교류와 협력을 통한 평화의 시대를 열어나갈 때, 경제적 동반성장과 더불어 통일의 그날도 성큼 다가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전해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평화로 향한 길

먹구름이 짙게 드리운 가운데 새 정부가 출범하였습니다. 소통과 통합이라는 기치 아래 출범한 새 정부가 국민과의 활발한 소통을 바탕으로 세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참된 통합을 이룰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그리고 참 평화를 이루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과 더불어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합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운 혈육이라 하더라도 만남이 없으면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고, 남남이라 하더라도 자주 만나면 혈육 이상으로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남과 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적으로 종교와 민간차원에서 남과 북의 활발한 만남을 통해 서로가 한 형제임을 확인해 나갈 수 있도록 정부차원의 적극적인 노력을 당부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화의 일꾼으로 불림 받은(마태 5,9 참조) 교우 여러분! 평화의 여정은 기도와 함께 이루어가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화에 대한 간절함을 바탕으로 마음을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해봐야 소용없다는 냉소적인 생각은 무서운 유혹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루카 1,37 참조). 인내와 용기를 갖고 기도 운동에 동참해주시길 청합니다. 매일 저녁 9시 어디에서든 잠시 시간을 내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참된 평화와 나아가 통일을 위해 주모경을 함께 봉헌해 주시기 바랍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간절히 기도하시는 주님의 뜻을 기억하며 2016년 춘계 주교회의에서는 각 본당에 ‘민족화해분과’를 설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화해와 일치, 평화와 통일이라는 시대적 소명은 분단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평화운동을 각 본당 단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가야겠습니다. 냉전논리에 젖어 돌처럼 굳은 마음을 살처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에제 36,26 참조) 각종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들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남북 교류협력에 교회가 선도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재원 마련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올해는 파티마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세 목동을 통해 전해주신 성모님의 메시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평화와 구원을 위해 회개하고 묵주기도를 봉헌하라는 말씀은 분단과 갈등의 삶을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을 모시고 평화가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한반도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이사 65,17)

2017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이기헌 주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분단 70년을 맞는 한국 천주교회의 반성과 다짐



마태 18,19ㄴ-22; '15/06/21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올해는 우리나라가 광복의 기쁨과 남과 북으로 분단된 아픔을 겪은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이 겪었던 분단의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귀양살이 70년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70년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은총의 새 시대를 맞이하였듯이(2역대 36,21 참조), 올해 2015년이 분단과 갈등의 70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평화를 여는 해가 되기를 염원합니다.

그동안 남북한은 ‘7·4 남북공동성명(1972년)’을 비롯하여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을 약속한 ‘남북기본합의서(1992년)’, ‘6·15 남북공동선언(2000년)’, ‘10.4 남북공동선언(2007년)’ 등을 통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정치적 이해관계로 얽힌 남북 관계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과거의 유물이어야 할 냉전의 극한 상황이 한반도를 에워싸고 있으며, 내부적 이념 갈등도 이미 도를 넘어선 듯 보이고, 또한 비정상적인 상황들이 사회 전반을 병들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 70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자리에서 민족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언자적 소명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2코린 5,18)을 소명으로 남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거짓 평화와 자기 위안에 빠져 남북 분단의 갈등이 빚어내는 왜곡된 현실을 눈감아버린다면 신앙인의 소명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해 우리나라를 방문하시어, 분단된 남북한이 ‘평화의 기초이며 평화로 향하는 길인 형제애’를 회복할 것을 바라셨고, 모든 신자에게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죄악인 “무관심의 세계화”를 경계하라고 강력히 권고하셨습니다. 점점 심해져 가는 경제적 양극화 현상과 탐욕적 이기주의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에 대하여 무관심하도록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이웃인 북녘 동포들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으로 도울 때, 우리 믿음이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야고 2,14 참조).

우리는 정부와 북한 당국에 간절히 요청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로운 공존, 그리고 미래에 이루어질 통일로 가는 지름길인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은 정부 차원은 물론 민간 차원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인도적 차원에서의 협력은 정치적 이념이나 이익에 우선되어야 합니다. 종교단체와 민간단체들을 통한 상호 교류와 협력 사업이 활발해져 참된 평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정부가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또한 남북한 당국자들이 기존의 합의들을 서로 존중하여 분단과 냉전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용서와 화해를 앞세워야 합니다. 조건 없는 용서만이 민족 화해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힘과 무기로써가 아니라 진정한 대화를 통하여 군비를 축소하고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정착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모색하고 실천할 것을 요청합니다. 동북아 분쟁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한반도가 평화의 중심이 되도록 관련 당사국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면, 분단 상황에서 비롯된 긴장과 대립을 넘어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인 교우 여러분!

죽음의 어둠을 넘어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 위에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신 예수님의 전적인 신뢰에서 비롯되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어둡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기쁜 소식이 울려 퍼지도록 주님께 간청합시다.

이 땅에 평화를 이루고자 애쓰는 모든 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참된 평화의 도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2015년 6월 1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



마태 18,19ㄴ-22; '13/06/23

한국 천주교회에는 매년 6월이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 주일이 있고 남북통일기원미사를 드리지만, 올해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금년은 정전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춘계 주교회의 총회에서도 해마다 지내오던 6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달에 특별 기도를 바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러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또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한 지 60년이란 세월이 흘러 이제는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쟁의 상처는 미움과 증오라는 부산물을 우리 민족의 가슴에 남겨주었으나 그 부산물을 떨쳐버리는 것이 그토록 힘이 드는 가봅니다. 같은 민족끼리 이렇게 오랫동안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적대감정을 가지고 으르렁거리는 나라가 이 세상에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이제는 남과 북이 과거의 미움과 증오를 잊어버리고 화해의 손을 잡고 함께 살아가는 평화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상생의 길로

정전 60주년을 맞은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를 통한 용서와 화해입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비롯하여 남북관계와 통일을 논하는 자리에서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용서와 화해입니다. 용서와 화해를 통한 대화와 교류 및 상호협력 없이는 우리 한반도에 쌓여있는 불신과 불안, 더 나아가 전쟁의 위기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남과 북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비롯하여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들을 통해 화해와 협력을 모색해왔습니다. 그러나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서로 헐뜯고 비방하였고, 급기야 핵이라는 카드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동안 남북 갈등의 어떠한 사태에서도 존속시키며 남북경제협력의 큰 상징이 되어왔던 개성공단마저 중단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남북관계의 과정과 그동안 일어났던 여러 가지 돌발 사태 등을 보면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우리 민족의 생존이 걸린 일이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과제이기에 온 민족이 함께 마음을 모으고 인내하며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에 맡겨진 민족 화해의 사명을 기억하면서 먼저 우리 자신이 이 사명에 충실하였는지 반성해 보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남북이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본래 한 형제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도록 화해의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사명을 마음에 새기며 그동안 기도와 희생을 바쳐왔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기도와 희생은 소수의 일이었을 뿐, 대부분은 분단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북한주민들의 고통에 무심하게 살아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남과 북 우리 모두가 지나간 시간들을 떨쳐버리고 용서와 화해로 손을 잡고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데 한마음이 될 것을 다짐합시다.

새 정부에 바랍니다.

그동안 대북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졌습니다. 각 정권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대북정책을 펼쳐가며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다시금 대결의 길로 돌아섰습니다. 더욱이 남북 대화가 단절되고 남한은 물론 국제사회가 대북제재와 압력을 가하는 동안 북한의 핵 능력만 향상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이제는 북한이 먼저 비핵화해야 한다는 것에 매달리지 말고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융합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남북교류와 경제협력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길만이 화해와 평화를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독일통일을 위해 서독정부는 입으로만 통일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동독지역에 사회간접자본과 물류체계를 구축하였으며 분단 상황에서도 고속도로 4개, 국도, 국경을 통과하는 철도, 내륙운하는 물론 항공로도 3개나 건설하였다고 합니다. 통일을 지향하며 경제협력과 동서교류를 위한 서독정부의 이러한 지속적인 노력이 통일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생각합니다.

이제 새롭게 출발한 새 정부의 대북정책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도 신뢰를 위해 북의 행동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고 신뢰의 끈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남북관계의 길이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북한정부에 바랍니다.

북한은 어리석은 전쟁위협과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는 태도를 버리고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합니다. 북한의 핵 개발 전략이 오히려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일본의 군국주의화에도 빌미를 제공하여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 뿐 아니라 지난 기간 긴장 고조와 제재 그리고 대화의 악순환이 이제는 더 이상 국제사회에 통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와 민족번영을 위해서 시도했던 개성공단과 그 밖의 남북협력사업도 다시 재개해야하며, 지극히 인도적인 사업인 이산가족상봉이 하루빨리 재성사되어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남북관계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서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무기는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마르 9,29)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독일이 통일의 길로 나아갈 때, 독일교회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인도적 지원과 교류 협력사업도 활발하게 펼쳤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지속적인 기도운동을 펼쳤다는 것입니다. 매주 월요일 라이프찌히의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이 기도운동이 독일통일의 원동력이 된 ‘월요기도회’였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도 우리의 노력에 기도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정전 6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교회가 참회해야 할 일이 바로 민족의 화해를 비롯한 북한주민들을 위해 바쳐야 할 기도의 소홀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은 과정의 결실입니다. 힘을 키우는 방식으로는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하고, 함께 교류하고 협력하는 남과 북이 될 수 있도록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그분의 축복을 구합시다.

남과 북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3년 6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이 기 헌 주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마태 18,19-22; '12/06/24

화해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요한 20,19)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일치, 세상이 하나 될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셨던 주님(요한 17,11 이하 참조)을 기억한다면, 평화란 화해와 일치를 향한 노력의 결실임을 우리 신앙 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주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로마 5,10-11 참조) 하느님과 우리를 참사랑으로 화해시켜 주시고, 그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화해시켜 참된 일치를 가능케 하시고자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신앙인이 무엇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명백히 제시해 줍니다.

세상을 화해시켜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근본적인 삶이라면, 분단의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한국 교회에 주어진 시대적 소명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참된 일치를 향해 나아가도록 함께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더욱 깊어가는 분단의 아픔

민족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분단, 그리고 이어진 끔찍한 전쟁, 그 후 지속된 이념 갈등의 역사가 벌써 60년의 세월을 넘어섰습니다. 휴전의 상황 속에서 언제든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늘 한반도를 감싸고 있고, 그로 인한 크고 작은 충돌 속에 아픔과 상처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잠시 동안의 화해의 기운이 엿보이기도 하였지만, 세상의 악은 그 소중한 기회를 늘 앗아가기만 하였습니다.

분단이라는 상황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큰 상처가 되어 남아 있습니다. 곧 다시 돌아오겠다는 굳은 약속이 마음속에 피맺힌 응어리가 되어 가족과 고향 땅을 그리며 하루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이산가족들이 있습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한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있고, 다시 만날 그날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사람들 역시 세월의 무게를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념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 없이 오로지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어 탈북하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습니다. 낯선 땅에서 갖은 인권 유린을 당하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는 그들도 역시 우리의 동족이며 가족들입니다.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늘 불안하게 생활하다 북송의 위기를 맞아 절규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남북분단의 처참함을 다시금 보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험난한 국경을 넘고 또 넘어 우리나라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의 수가 벌써 23,000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차가운 시선을 무릅쓰고 새로운 체제에 정착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도 힘겹지만, 정작 그들 마음 안에 남아 있는 큰 상처는 두고 온 가족과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입니다. 그들 역시도 분단의 시대가 만든 새로운 형태의 이산가족임에 틀림없습니다.

한반도의 현재

지난해 말 북한 지역에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북한의 권력체계와 남북관계에도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이 흐른 지금 북한 내부의 상황은 과거와 다름없이 움직여 나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한 모습으로 남과 북이 대치 상황을 이루며 서로를 자극하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재 한반도가 처해 있는 상황을 ‘위기’로 진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기’란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내포하는 표현입니다. 위험을 고조시켜 전쟁과도 같은 끔찍한 공멸의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함께 마음과 지혜를 모아 현 상황을 미래를 위한 기회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위기관리란 전쟁의 승리를 위해 힘을 무한대로 키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슬기롭게 상황을 조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차원의 위기관리가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반도가 위험천만한 군비경쟁의 장이 아니라, 사랑과 나눔이 넘쳐나는 평화지대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통일을 향한 발걸음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통일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통일비용’과 관련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공론화시키려는 시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통일은 지역과 지역이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즉 주민통합이 그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20여 년 전 통일을 맞이하고, 그에 따른 어려움을 아직까지도 겪고 있는 독일의 경우를 살펴볼 때, 주민통합의 중요성이 더욱 잘 드러납니다.

따라서 통일을 위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잦은 만남, 즉 활발한 교류와 협력입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하나로 나아갈 수 있는 민간 차원의 교류가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종교·사회·문화 등에서의 만남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부의 허용과 나아가 적극적인 지원을 촉구합니다.

더 나아가 현재 남한이든 북한이든 우리가 안고 있는 경제문제의 가장 확실한 해법은 남북 경제 교류와 협력에 있습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모은다면 경제적 동반 성장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며, 또 그것이 남북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남과 북의 주민들이 함께 협력하고, 함께 성장하며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넓어진다면 그것이 통일 시대에 겪을 수 있는 혼란을 줄여주는 중요한 토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더욱 절실한 기도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평화는 우리 신앙인들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은 단지 일부 정치인들의 몫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신앙인에게 주어진 기본 사명입니다. 이웃의 불행과 아픔 그리고 상처를 외면하는 완고함(마르 3,5 참조)에서 탈피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하신 주님의 유일한 계명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한반도에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마르 9,29 참조)는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합시다. 분열과 갈등의 먹구름을 걷어내기 위해 우선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평화의 길’(루카 1,79 참조)로 이끌어주시는 주님께 간절한 마음을 모아 봉헌한다면 주님께서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평화의 사도로 불리움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심어주시는(에제 36,26 참조) 주님께 의탁하며 세상의 평화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됩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노력은 주님의 은총으로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이기헌 주교




남북통일 기원미사/삼위일체 대축일



(가해) 마태 18,19ㄴ-22; 2011/06/19

1980년대 말에 중고등학생 미사를 드리면서 ‘남한과 북한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때 중고등학생들의 대부분은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고, 그 이유를 우리 민족은 하나이기 때문에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중고등학생들의 대부분이 통일이 안 되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통일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우리 학생들)은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나라의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차라리 남이면 사랑이라도 할 텐데, 서로 같은 한 민족, 한 나라 국민이라고 외치면서도 적과 원수보다도 더 경계하고 원망하면서 수십 년을 보내는 우리의 답답하고 괴로운 현실이 아프기만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책임과 의무를 서로가 서로의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 풀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면 서로가 그 문제에 직접적인 원인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미해결의 원인과 책임을 상대에게 떠 넘기면서, 자기의 문제조차도 남에게 돌려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겪는 모든 문제의 한 쪽 끝에는 늘 이 국토의 분열과 민족의 불화인 분단과 통일의 문제가 우리의 한 쪽 발목을 잡고 있어,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우리를 죄와 악처럼 옭아매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마음이 맞는 둘이나 셋이 서로의 간절한 염원을 위해 빈다면 주님께서는 지체 없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둘이나 셋이 북이나 남처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서로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을 모으기 조차 어려울 것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자체도, 기도 자체도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만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얼키설키 엉키고 뒤섞인 현실 속에서 신음하면서, 우리 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남과 북으로 갈라진 국토의 통일을 위해 우리는 주님께 청합니다.

아울러 오늘 우리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느님은 땅에 있는 성자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모든 권한을 다 주십니다. 땅에 있는 성자는 자신이 받은 권한을 행사하며 그 열매로 얻어진 모든 영광을 전적으로 다 아버지께 돌립니다. 그리고 성령은 하늘과 땅을 헌신적으로 오가며 그 둘 사이를 끊임없이 일치시켜 줍니다. 그래서 삼위의 하느님께서 한 분 하느님이 되십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하나되신 하느님 그분의 사랑이 넘쳐 흘러 우리에게까지 다다르고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방법론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걸어나갈 길입니다.

우리가 집에서 가장은 집안 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아내는 남편의 신뢰와 전적인 위임을 바탕으로 집안 일을 하고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에게 이 모든 것이 다 아버지께서 자녀인 너에게 주라고 하신 것임을 밝힐 때, 자녀는 아버지의 존재와 사랑을 느끼며,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가 삼위일체적인 사랑으로 한 가족이 됩니다.

또 우리가 활동을 하면서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우리의 활동 대상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때, 우리는 우리 활동 대상자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고, 우리 활동 대상자는 우리와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 흐르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일치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저러한 현실적인 이유로 말미암아 지금 당장 우리 국토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로 적처럼 죽이고 비난하면서 평화를 깨트리는 일 없이, 같은 민족으로서 서로 용서하고 껴안고 도와주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재일치를 위한 운동까지 하는 같은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도 이교인들 앞에서 나는 개신교인이 아니라 천주교인이라는 것을 굳이 말해야 하는 서글픈 상황처럼,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나는 북쪽이 아니라 남쪽 사람이라는 것을 굳이 차별하여 말해야 하는 서글픈 상황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우리 민족의 상처들을 보듬어 주시고 치유해 주시어,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시던 주님의 말씀을 이루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하도록 허락하시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남북통일 기원 미사



(나해) 마태 18,19-22; '06/06/25

오늘은 우리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동포들이 죽어가고 희생됐으며 결국 오늘날까지도 국토가 분단되어 떨어져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아픔을 되새기며 다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남북의 통일을 기원하는 미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저는 전쟁이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저질러지는가 등등의 전쟁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단지 우리 한국전쟁에 참전한 외국인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픔도 크지만, 우리 민족의 전쟁 속에 끼어들어 죽어간 외국인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작년에 서울교구 사제모임을 워싱턴 D.C.에서 했을 때 한국전쟁 기념 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공원 안에는 한 겨울에 한 여름에 입는 판초우의를 입고 소총 한 자루를 지고 전쟁터를 향해 걷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그 밑의 기념판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국가는 그들이 결코 알지 못했던 나라와 그들이 결코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부름에 응답한 이 나라의 아들과 딸들을 기린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그 글귀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 어느 누구 하나도 일찍 죽고 싶지 않고 가족과 일가친척끼리 그리고 이웃들끼리 오순도순 행복하고 살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의 마음인데, 꽃다운 나이에 자기 돈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기 잘 살기 위해서도 아닌 죽음의 전쟁터로 나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의 평화라는 이름아래,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름아래 그저 소총 한 자루만을 들고 전쟁터로 나갔던 외국 참전군인들을 기억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전쟁이 어느 나라에서 일어났는지, 그 나라가 얼마나 추운지, 얼마나 더운지도 모른 체,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이 왜 싸우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체 전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서로 알지도 못하는 적을 향해, 원수도 진 적이 없는 이들에게 총을 쏘고 자신들도 죽어갔습니다.

우리는 매년 우리 민족의 화해를 위해 그리고 우리 국토의 통일만을 기원해 왔는데, 그 기념판의 글귀를 바라보면서 우리와 함께 했던 많은 외국인들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북한의 무력 침공에 대해 UN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 군대와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들이 미국이 지휘하는 ‘통합사령부’에 집결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맥아더 장군을 UN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미국 1,789,000명과 영국 56,000명, 캐나다 25,687명, 터키 14,936명,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필리핀 7,420명, 타이 6,326명, 네덜란드 5,322명, 콜롬비아 5,100명, 그리스 4,992명, 뉴질랜드 3,794명, 이디오피아 3,518명, 벨기에 3,498명, 프랑스 3,421명, 남아프리카 공화국 826명, 룩셈부르크 83명, 총 16개국 1,938,330명의 전투 군인과 스웨덴 160명과 인도 627명, 덴마크 630명, 노르웨이 623명, 이탈리아 128명, 총 5개국 2,168명의 의료진이 1953년 7월까지 참전했습니다.

천주교회는 교황님께서 1950년 9월 27일 미군종교구 산하에 세계 각국의 천주교 군종 신부님들이 활동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전쟁 중에 932분의 신부님들이 활동하셨고, 427분의 협조자가 있었습니다.

그중 미국에서는 샌 루이스 교구 소속의 육군 ‘Lawrence F. Brunnert 신부님’께서 군종사제로 한국 전에 참전하셨다가 1951년 5월 27일 선종하셨고, 보스톤 교구소속의 육군 ‘Francis X. Coppens 신부님’께서 1951년 5월 27일 선종하셨고, 도미니코회 소속의 육군 ‘Leo P. Craig 신부님’께서 1951년 4월 5일 선종하셨고,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육군 ‘Herman G. Felhoelter 신부님’께서 1950년 7월 15일에 선종하셨고, 위치타 교구 소속의 육군 ‘Emil J. Kapaun 신부님’께서 1951년 5월 6일 선종하셨고, 부룩클린 교구 소속의 공군 ‘William E. Maher 신부님’께서 1951년 9월 27일 선종하셨습니다. 미국 군종교구의 기록에 의하면 이렇게 6분의 군종 신부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매주 우리 미사에 오시는 케니 신부님도 6.25 참전 군종사제였습니다. 지금 병상에 누워계신 케니 신부님을 뵈러 갈 때마다, 마치 우리 민족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계신 듯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으며, 우리 민족의 숙제를 안겨드린 것만 같아 송구스럽기까지 합니다. 주님께서 그 병고를 가볍게 해주시고 주님 품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평안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 6.25의 비극을 되새기면서 세계 인류 가족들이 우리와 함께했던 그 노고를 함께 기억하기로 합시다. 자기 민족의 전쟁도 아닌 남의 전쟁에 와서 마치 가족처럼 대신 죽어가고 희생된 이국인 병사들을 기억하며 주님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 유가족들도 주님께서 보듬어 안아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주님,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

“주님, 그들의 병고를 가볍게 해주소서. 아멘.”

“주님,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지켜주소서. 아멘.”




남북 통일 기원 미사 2005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



2005/06/19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올해는 우리 민족이 광복의 기쁨을 맞이한 지 60년 회갑이 되는 뜻 깊은 해이고 남한과 북한의 두 정상이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한지 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아직도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 대립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있으며 긴장 상태에서 불안감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는 빠르게 성장해 나갈 것 같은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남북한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기로 하였고 이산가족들이 서로 상봉할 수 있도록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가며 남북한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 발전시키고 상호간에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으나 지난해에는 조문파동과 대량 탈북자 입국 등으로 경색국면을 맞았으며 올해 초에는 북한이 핵무기보유를 선언함에 따라 남북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은 6자회담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유엔안보리에 북핵문제를 회부해 경제제재를 하겠다는 암시를 하고 있으며, 북한은 이에 반발하여 경제제재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현실을 바라보면서 남북의 분단이 가져온 상처의 깊이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불신과 반목의 시절을 보내면서 사소한 일에도 쉽게 상처를 주게 되었으며 그 깊은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분단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는데 우선해야 할 남한 사회에서도 좌파 · 우파 · 진보 · 보수라고 서로 불신하고 배척하는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 교회 안에서도 북한과 북쪽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 북한을 지원하는 방식과 화해와 협력에 대한 의견에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창조된 사람들이 서로의 다양한 모습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서로 인격을 존중하며 화해하여 평화를 실현하기를 바라십니다.

이제는 남북한이 서로 벽을 쌓고 극한 대립으로 치닫기 보다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주님 안에서 열린 공간을 마련하여 남북한과 남남의 냉전 문화를 해소하는데 힘을 모아 대립의 문화에서 공존의 문화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가치관이 다르면 적이고 보수고 혁신이라고 폄훼하기보다는 서로 합의의 기반이 정착 할 수 있도록 진정한 대화를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좌파와 우파로 갈라지기 이전으로 되돌아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의 화해·일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에페소서 2장 14절)” 만드셨기에 우리의 정성 어린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신앙 안에서 남북이 함께 살아가는 일을 준비하는 사업들에 형제자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교형 자매 여러분께 주님의 사랑과 평화를 빌며, 북측의 형제·자매에게도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과 평화의 인사를 보냅니다.

‘평화를 빕니다.’

2005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

김 운 회 주 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남북 통일 기원 미사



2004/06/27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남과 북 모두에서는 정치·경제·사회 여러 분야에서 극심한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북한의 경우에는 경제·사회의 변화가 공식·비공식적 방식을 통해서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한의 경우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에 상생에의 방향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우리는 북한 룡천군에서 있었던 엄청난 사고를 접해야 했습니다. 이 사고는 남북으로 갈린 우리 민족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남쪽의 보수, 진보, 남녀노소 등 모든 계층의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는 룡천군 주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어렵지만 고통받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였고, 기꺼이 그 사랑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룡천군은 전 세계 곳곳과 특히 남한의 도움으로 하루하루 자리가 잡혀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룡천군의 빠른 복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계속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기원하며 기도를 드리는 오늘, 남북한의 화해와 일치에 앞서 자신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 지역간의 화해, 다양한 사회계층간의 화해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일치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당연히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고 합니다. 또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웃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19, 19)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단점과 싸우려고 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내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받아드리도록 합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현재 남북관계는 커다란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남북의 3대 경협사업인 동해/경의선 도로 철도연결, 금강산 관광사업, 개성공단사업이 질적 양적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으며, 남북 군사회담을 통해 서해상 우발적 충돌방지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중지 및 선전수단을 제거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북한사회는 대규모 시장이 개설되어 일반인과 국영기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물건을 판매하는가 하면, 개인들이 건물을 임대하여 식당 등을 운영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업자본가가 등장한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남한사회는 대화와 타협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는 현상도 점점 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아울러 서민들이 느끼는 서민경제는 더욱더 사회안에서 격차를 드러내고, 그 격차는 날로 고착되어가고 있습니다.

남북간에 놓여졌던 분단의 가시적인 흔적들은 이제 역사의 한 부분으로 그 자리를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흔적들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우리 민족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진정한 화해와 일치는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눈앞에 놓여졌던 분단의 그 흔적들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남과 북 내적 분단의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우리는 더 힘껏 노력해야 합니다. 우선 남과 북은 진지하게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바로 알아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분단 59년 동안 쌓여진 남과 북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 "정의와 평화와 기쁨"(로마 14, 17)의 씨앗을 심어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남북한의 변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회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사실은 우리 사회의 갈등이 교회 내에서조차 재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이에 따라 교회내의 일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앞에 두고 믿는 이들의 일치를 위해 바치신 기도가 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17, 21) 우리 교회는 이제 예수님의 간절한 이 기도에 화해와 일치의 구체적인 삶으로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남북한 형제·자매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간구합니다.

2004년 6월 27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김 운 회 주교




연중 제12주일



(다해) 루가 9,18-24; 2004/06/20

지난주간에는 서울대교구 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캐나다와 남미 그리고 미국 지역에서 사목하시는 본당 신부님들과 공부하시는 유학생 신부님들이 한 데 모여 그 동안의 삶을 나누고 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오시기로 되어 있던 이한택 주교님은 오시지 못하고, 대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오셔서 함께 해주셨다. 이젠 83세의 고령으로 다시 못 올지도 모르는 기회로 여기시고 미주지역의 서울교구 본당들을 방문해 주시기로 하셨다. 모든 본당을 다 방문하실 수는 없어도 몇 몇 본당만을 선별하여 방문하시기로 하셨지만, 그래도 일정이 강행군이라 우리 타코마 성당까지 오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추기경님께서 저희 본당을 비롯한 미주 순방의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

추기경님은 본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울교구 신부들을 서품시켜 주셨고, 비단 서울교구 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셔서 한국교회를 대표하신 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화와 현대화를 거치는 격동기에 한국 역사의 산증인이요 중심인물로 매년 한국을 움직이는 10인에 자리하심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의 큰 어른이다. 그리고 한 때 교황의 필리핀 방문 때는 몸으로 저격범을 막은 이유로 차기 교황후보로까지 추앙되신 분이셨다. 본인은 잠시 연로하신 추기경님을 뵈오며 과연 추기경님이 본인에게 어떤 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분인가?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18) 그러자 제자들이 답한다. "대개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마는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옛 예언자 중의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19)

그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뵈오며 떠올리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하나'는 누구이며,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기에 예수님을 뵈오며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일까?

'세례자 요한'은 당시 백성들의 부패를 힘있게 비판하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라는 회개의 설교로서, 유다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소리를 전한 예언자다. 그는 당시의 왕인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왕까지도 고발한 예언자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에게 비유한 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면 현실에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지를 올바르고 과감하게 제시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이다(마태 14, 2-12; 마르 6, 17ㄴ-19; 루가 3, 10-14 참조).

'엘리야'는 왕비 이사벨을 따라 다른 나라 신과 다른 종교의 문화를 섬기던 아합 왕과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절대적인 우위권을 증명해 보인 예언자다. 그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를 잘 짓게 해주시는 신은 바알신이라고 믿고 절하자 진정 비를 내려주고 농사를 잘 짓게 해 주는 신이 바알인지 주 하느님인지를 증명하고, 참 신앙의 길을 걷도록 요청한 예언자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가 다시 내려와 자신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구원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예수님을 엘리야에게 비유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현실적으로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길과 신앙이 가리키는 갈림길 사이에서, 어느 길이 참 신앙의 길이며 그것을 증명해 주시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1열왕 18, 20-40 참조).

'옛 예언자 중의 하나'는 '모세'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준 예언자로서, 하느님과 얼굴을 대면할 정도로 가까웠던, 그래서 그의 죽음도 확실히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마지막날 하느님의 이름과 권능으로 구원하러 오리라고 기대되던 성조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이 예언자에 비유한 것은 마치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모세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리라는 정치적이고도 현실적인 메시아(구세주)관에서 비롯되었다(출애굽기 참조).

이러한 백성들의 기대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는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20)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답한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20)

'그리스도'란 단어는 그리스어로 '기름부어 축성하여 세운 왕'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주님의 기름을 바른 자란 뜻의 '메시아'를 번역한 것이다. 기름 부음은 고대부터 왕이나 사제 또는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주어, 백성을 다스리고 인도하도록 기름을 부어 축성하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기름 부음받은 자' 또는 '기름 바른 자'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통해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시아라는 단어의 내용과 의미를 따라 우리말로 하자면 '구세주'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에 백성들이 히브리어로 '메시아' 또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또 기대하는 바는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명을 받은 자'이며, 그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에 만족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인 승자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새롭게 해석하시고 제시하신다. 메시아는 점령군인 로마군을 쳐부수고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실 분이 아니라, 백성들을 구하시기 위해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22)을 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세주는 사람들을 구하시기 위해 사람들의 미움과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그 값을 치르기 위해 고통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로로 훗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도 역시 메시아와 같이 백성들을 구원하시러 오실 구세주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혹여 그들의 기대가 현실적인 안녕과 출세지향적인 인간의 욕망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기를 빌면서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남을 향해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되새겨야 할 것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23)




남북 통일 기원 미사



마태 18,19-11; 2002/06/23

어느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주님 앞에서 기도했다고 합시다. 만일 부부가 서로 "주님, 저 이가 제 말을 좀 듣게 해주세요."라고 하면서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식으로 기도한다면, 모든 이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어떻게 한 쪽에게만 이익이 되도록 해 주실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가 기원하는 남북 통일도 마찬가지다. 남과 북 서로가 상대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서로를 자기 쪽에 유리하게 끌어들이면서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면, 다른 한 쪽에서 기꺼이 승낙하겠는가? 안된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이기기 위한 경쟁만 더 심화되고 서로의 차이는 더 깊어질 뿐이다.

현실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타협이라기 보다는 협상을 통해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대에게 유리한 조건들을 제시해야만 한다. '아주머니 떡도 싸야 사 먹는다'고 하듯이, 서로 잡아먹으려 하면서 단순히 한 민족이라는 개념만으로는 합치기 힘들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너희 중에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19-20)라고 말씀하신다.

'민족의 동일성'이라는 조건과 '외세의 이해관계'라는 환경 속에서, 우리의 목표인 민족의 화해를 통한 국토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 처지를 헤아리고 안아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주님은 이러한 배려의 마음을 용서의 방법론으로 풀라고 한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절) 현실적으로 줄 수만 있다면 주고, 용서할 수만 있다면 용서하라는 것이다. 마치 연인이 서로를 호감을 얻기 위해 선물 공세를 바치듯, 남북이 하나 되기 위해서는 서로를 얻기 위한 자기 버림을 해야 할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의 관점에서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것이다.

매년 맞이하는 6·25, 하루 빨리 통일의 염원을 이루려는 우리의 마음이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쌓인 울분과 북한을 비롯한 서로 다른 문화와 환경에 대한 증오와 경계를 풀고, 북한에 있는 형제들에게 남한 사회에 대한 불신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라도 탈북자들에 대한 선입견 없는 관심과 배려를 나누며, 북한의 형제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겠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2001/06/24

현대 세계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각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서로 존중하며 자주적인 발전을 보장하고 협력함으로써 공존하는 통합적인 지구촌 문명을 창조해 나가고 있습니다. 아직 가공할 무기를 보유하고 생산하며, 끊임없는 분쟁의 고통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평화의 중요성을 더 깊이 공감하고 이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보화의 덕택으로 지구촌 어느 한 곳에 지진이나 홍수가 발생하면 즉시 세계 각 국에서 인도적인 지원 인력과 물품이 쇄도합니다. 그만큼 인류는 과거 역사의 많은 고통을 통하여 서로를 아끼고 도울 줄 아는 역량을 키워 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는 아직 이러한 국경을 넘어선 폭 넓은 교류와 협력의 물길이 크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음을 보며 우리는 가슴아파 합니다. 지난 해 6월 15일 남북의 정상이 역사적인 만남을 이루면서 새시대의 막이 올랐음을 우리는 모두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1년 간 우리는 분단된 이 민족의 땅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데는 우리들의 결정이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지켜보았습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세계 열강의 정치, 경제, 외교상의 이해관계가 민감하게 교차하는 급소이며 이로 인하여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이나 시도들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참된 화해와 일치의 은총을 간구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시며 당신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에페소 2. 14-16)

예수께서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당신을 중죄인으로 몰아세운 유다인과 로마인들의 음모에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놓으시고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누구를 탓하고 책임을 추궁하기보다는 용서하는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6.25 전란으로 인하여 공산 치하에서 신앙 때문에 60여명의 사제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수도자, 평신도들이 같은 이유로 순교하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북한 땅에서는 교회 공동체의 전례를 집전할 수 있는 성직자가 한 명도 없어 북한 땅의 하느님 백성은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기쁨도 영광도 맛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북한 당국이 한국이나 외국의 사제들이 여행 중 평양에 세워진 장충성당을 방문할 때 비정규적이긴 하지만 미사 집전을 허락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충성당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북한 땅에서 유일하게 성찬의 전례가 거행되고 있는 자리입니다. 한국교회는 과거 6년 동안 장충성당을 통하여 식량난과 경제난에 고통받고 있는 북한 동포를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북한의 사정이 특별히 호전되지 못한 이상 우리들의 관심과 지원은 계속되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이들이지만 지금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동포를 모른 체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내 가장 작은 형제 중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고 가르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로서 이렇게 고통 중에 있는 형제들을 손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한국 사회도 경제위기를 아직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실업과 저소득의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 동포들은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여전히 국민 대다수가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고 의료체계 붕괴로 질병에 걸려도 대책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엄청난 고통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세상 역사를 주도하시는 주님께서 이 땅에 참된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간청합시다.

아울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북한 당국에도 호소합니다. 북한 동포들도 하느님을 믿고 예배할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허용하고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가톨릭 사제의 상주 허락을 호소합니다. 그리고 지역교회의 목자인 주교가 방문하여 신자들을 만나고 성사를 집행할 수 있도록 획기적인 조처가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이러한 결단과 조처는 북한이 국제 공동체의 일원으로 환영받고 성숙한 국제사회의 구성원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분단의 상처를 화해와 일치의 노력으로 치유하며 이 땅에 참된 평화를 이룩합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강 우 일 주교




연중 제12주일



(가해) 마태 18,19-22; '99/06/20

지난 6월 15일 화요일 오전 9시 28분부터 14분 동안 남북 해군이 서해 상에서 무력충돌을 했습니다. 어처구니도 없고 한편으론 분노마저도 끓었습니다 남북전쟁이 49년이나 지난 지금 시점에서 함포사격이라니 대체 무슨 짓들인가?. 코소보 사건이 지나니까 여기서 시작인가? 연초부터 일본과 서방세계에서 '한반도 위기론'을 들먹이더니 때맞춰 긴장을 유발시키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오늘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바라는 민족의 일치와 국토의 통일을 이루려먼 우선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마음을 모으기가 쉬운 일인가? 서로가 어떻게든 상대를 자기 발아래 굴복시키고 가능하면 자기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상황에서 대하려하니 마음은 설사 모은다 해도 서로에게 좋은 일을 이루기가 참으로 어려운 세상 물정입니다. 이해에 따라 관계를 맺는 것이 사회상황이다 보니 더욱 더 어렵습니다.

이러한 인간세계를 잘 아시는지라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 하십니다. 서로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기본선과 합의가 맺어지지 않고 지켜지지 않아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때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용서하여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21) 지금 당장은 분이 북받치고 복장이 터지더라도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 하신 주님의 말씀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민족의 일치와 국토의 통일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에페 5,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사랑에 감사하고 주님 사랑을 다시 그리며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 오늘 나와 맞서는 너를 용서하고 우리 함께 민족의 일치와 국토의 통일을 위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나아갑시다.




남북통일 기원미사



(다해) 마태 18,19-22 : '98/06/21

덥습니다. 이 더운 여름에 전쟁을 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갈 정도로 6.25전쟁은 지금 우리 생활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합니다. 심지어는 우리 민족의 재일치와 국토 통일이 경제적인 부담이 아주 많으므로 그냥 떨어져서 사는 것이 더 낳겠다고 말할 정도로 우리는 북쪽 지방의 식구들과 멀리 떨어져서 아주 남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하나로 합쳐서 사는 것보다 떨어져 사는 것이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통일 비용을 운운하며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이 다시 합쳐지는 것을 꺼려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남쪽 지방의 사람들이 더 잘산다는 식으로 자기 자랑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순진하고 어리석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우리는 통일 조국을 만들어 세계를 제패하려고 하거나 자본주의가 공산 계획경제보다 났다는 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박합니다. "남쪽에 사는 우리가 북쪽에 사는 친지들에게 가고 싶을 때 가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가서 함께 만나고, 같이 밥도 먹고, 같이 술도 마시면서 어울리는 것. 더 나아가서 함께 일하고 함께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이용하려고 하고 지배하려고 하면 누가 나에게 응해주겠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주려고 해도 반갑게 맞이하기가 쉽지 않은데, 더군다나 내 밑에 와서 살라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오히려 전쟁과 분단만이 고착되고 말겠지요.

화해는 서로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화해는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화해는 서로가 서로의 처지와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인정해 줌으로써 시작됩니다. 우선 내가 너에게 '내 말을 듣고, 내가 하자는 대로해라.'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고 그 욕심을 품는 나를 용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나에게 그런 욕심을 부릴 때 그를 너그러이 용서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 화해가 아닙니까?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마태 18,19)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합시다. 우리가 화해와 용서의 은총을 입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마태 18,22)합시다. 이렇게 화해를 이루고 나서 서로가 함께 서로에게 좋은 일을 모색해 나감으로써 일치의 문을 열 수 있겠습니다.




연중 제12주일



(다해)마르 4,35-41 : '97/06/22


지금 우리는 분단된 조국, 분열된 민족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조국은 우리의 뜻과 필요에 의해 분단된 것이 아니라, 1950년대의 국제 정세와 깊은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때는 2차대전이후 동서의 냉전체제와 그에 따른 반공(무력) 이데올로기로, 소련을 중심으로한 동유럽의 공산주의와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양의 자본주의가 서로를 적으로 삼고, 서로의 영역을 상대에게 질세라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력확장의 물결이 부딪힌 것이 우리의 한 반도였습니다. 다시 말해 6.25전쟁 종결이후 휴전선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강대국들에 의해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지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그러한 세력들의 대리전쟁을 치른 셈이죠. 물론 대리전쟁이라 하더라도 그 대리전쟁을 치른 것은 우립니다. 누가 대신시킨 것이 아니죠. 남 북의 소수 정치가들이 세계의 양대 세력을 등에 업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남을 지배하려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은 과거의 지나가 버린 사건만은 아닙니다. 오늘 날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데 있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가 애써서 소개하고 적용하여 모두 잘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의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하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도록 이용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결과는 바로 분열인데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마태 18,19)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위하고 아낀다면 우리는 다시 우리 민족의 일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20절) 그리고 그 일치를 이루기 위해 주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절)고 하신 대로 용서하여 한 마음이 되도록 합시다. 특별히 요즘 북한은 아주 어렵게 살고 있답니다. 우리 모두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연민을 정을 바쳐 도우며 일치를 향한 지속적인 사랑을 실천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북한의 굶주림 해결을 위한 2,000만단 묵주기도 바치기 운동'에도 적극 참여합시다.






E-mail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