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일



(가해) 마태 10,37-42; ’20/06/28

지난 월요일 사목협의회장단과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음식점 외벽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애완동물 병이나면 가축병원 달려가도

늙은부모 병이나면 그러려니 태연하고

열자식을 키운부모 하나같이 키웠건만

열자식은 한부모를 귀찮스레 여겨지네

자식위해 쓰는돈은 아낌없이 쓰건만은

부모위해 쓰는돈은 하나둘씩 따져보네

자식들의 손을잡고 외식함도 잦건만은

늙은부모 위해서는 외출한번 못하도다

제자식이 장난치면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모님이 훈계하면 듣기싫은 표정이네

시끄러운 아이소리 잘한다고 손벽치며

부모님의 회심소리 듣기싫어 빈정대네

제자식의 오줌똥은 맨손으로 주므르나

부모님의 기침가래 불결하여 밥못먹네

과자봉지 들고와서 아이손에 쥐어주나

부모위해 고기한근 사올줄은 모르도다”

아마도 그 음식점이 고깃집이어서 상품판매 전략으로 고기를 사들고 가라고 써 붙인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우리 현실의 한 단면을 표현한 듯하여 씁쓸합니다. 요즘 어떤 세대들에게 ‘효’에 대해 이야기하면 ‘조선시대 꼴통 노친네’라는 소리를 듣기가 십상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성당에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야외행사를 하다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사무실에 전화불이 나지만, 노인대학 야외행사가 늦어져도 전화 한 통 없는 우리 세태를 볼 때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시각이라고도 여겨집니다.

자기 한 몸을 아끼고 다스리는 것과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애써 찾아 나서는 분야, 자기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 자신이 유달리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잘 해주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퍼부어 주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비호의적이거나 또 자신이 보기에 비호감적이어서 다소 꺼려지더라도 자신이 보호해야 하고 마땅히 예를 갖추어야 하는 관계라면, 자신의 감흥여부나 선익과 손해여부와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간직해야 할 자세와 주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말씀은 우리가 좋고 싫고, 멀고 가깝고를 떠나 제대로 하지 않으면 패륜으로까지 여겨지는 관계를 소홀히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실천적인 면에서 손은 안으로 굽는다는 식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한 부정이나 자신의 친지들과만의 그룹 이해를 위한 단합이나 부패 등의 집착과 타락을 방지하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아울러 비단 가족 뿐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눈에 띄게 해주시고, 자신의 귀에 들리게 해주심으로써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회적 관계인들에게도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살면서 지나온 궤적 속에 번번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들이 있습니다. 떨쳐버리고 싶지만 떨쳐지지도 않고 쉽게 지워지지도 않는 우리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키와 몸무게와 외모 등의 동물적인 외연과 아울러 어려서부터 마음에 새겨진 상처와 부정적인 감정들이 꽈리를 틀 듯 자리잡고 앉아 어느새 나의 부분을 차지하고 내가 되어버린 성격들과 습관들이 내 십자가마냥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감추고 싶고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버릴 수 없고 무시할 수도 없는 가족과 친지들의 단점과 아픔들이 내 십자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숙제마냥, 주님께서 나니까 믿고 맡기신 나만의 능력인지도 모를 짐들이 내 십자가입니다. 그렇고 보면 비단 십자가는 내 단점이나 약점 또는 걸림돌이나 장애일 뿐만 아니라 장점이나 능력이며 소명일 수도 있겠다는 묵상을 해 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자기를 주장하면 할수록,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추진하면 할수록 동료들과 친구들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나를 버리면 너를 얻고, 나를 찾으면 너를 잊고 잃게 되는 관계 속에서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왜 내가 너와 다르고, 나를 너와 다르게 만드신 주님께서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러기에 내가 잘못해서 너를 용서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주님께서 사랑하고 아끼시는 피조물 중의 하나이기에, 또한 주님께서 내가 너를 용서하고 사랑하기를 바라시기에 나를 버리고 너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일적인 면에서도 나와 너의 오늘 뿐만이 아니라, 주님이 세상 모든 이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꿈꾸고 이루시고자 하신 하느님 나라를 기억하며,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주님의 사도들과 거룩한 형제자매들을 기억합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내가 잘나고 좋아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고, 함께 주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나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잘 압니다. 그리고 나와 내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소명과 사도직을 받아들이는 것임도 잘 압니다. 그렇게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교회를 통해 내게 주어진 사도직을 받아들이는 것임도 잘 압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과 관계를 통해, 주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셔야 하시기에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를 드립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1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사람보다, 그 그림을 보고 감탄할 줄 알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의 마음이 더 아름답다.”고들 합니다. 그처럼 주님을 믿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대자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세상에서, 주님께서 엄연히 살아 계시고 몸소 활동하고 계심을 발견하고 깨우칠 수 있는 현명한 지혜와 복음의 시각을 열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비록 나는 온전히 따르지 못하지만, 복음과 사랑의 업적을 몸소 이루려고 노력하고 마침내 이루고야 마는 성인들과 복음의 증거자들을 지지하며 사랑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2절)

오늘 이 시기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허락하시고 이끌어 주신 사회적 약자들을 기억합니다. 어린이, 고아, 노인, 여성, 장애자, 환우, 상이군인, 농민, 어민, 도시 빈민, 노숙자, 이산가족, 산재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이민자와 망명자 등 하루 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분들을 기억합니다.

아울러 매일 성전에서 주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과 기도하는 수도자들, 희생 봉사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기억합니다. 문화적으로 척박하고 신앙의 적대적인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제들과 수도자들 평신도 선교사들을 기억합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묵묵히 자신의 인생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기억합니다. 비록 성당에는 나오지 않지만 자신이 받은 세례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나름 이 사회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쉬는 교우들도 기억합니다.

세례를 받은 신자는 아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추구하는 모습과 유사하게 살아가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도 기억합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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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꽃꽂이




연중 제13주일

미사의 영성 4 대영광송



(다해) 루카 9,51-62; ’19/06/30

이스라엘의 성지 베들레헴에 있는 ‘목자들의 들판’ 성당에는 루카 복음 2장 8절에서부터 20절까지 나오는 예수 탄생의 기쁜소식을 목동들에게 알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벽화를 보면 할아버지, 아버지, 어린 아들 이렇게 3대의 목동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이 벽화는 천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과 천사의 말대로 아기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의 동굴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를 찾아 인사하는 장면. 그리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확인한 후 돌아오는 장면. 이렇게 3개의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처음 천사가 목동들에게 나타났을 때, 할아버지 목동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거룩함에 대한 경건한 자세로 듣습니다. 반면 그 아들은 눈이 부신 듯 한 손으로 빛만 가린 채 무슨 일인가 하며 쳐다보고 있고, 어린 손자는 마치 천사에게 달려라도 나갈 듯이 한 발을 세우고 얼굴 가득히 환희로 반깁니다. 한편 아기 예수를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그린 마지막 그림에 나오는 각 사람들의 태도도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젊은 아버지 목동은 자신이 지금 본 사실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실 안에서 자신의 갈 길을 그냥 걸어가는 듯 양들에게 피리를 불며 몰고 갈 뿐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마치 예루살렘 성전의 시메온을 연상케라도 하듯이, 현실에서 자신의 꿈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져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황홀함에 빠져 눈의 초점마저 잃고 하늘만 바라보고 걷습니다. 한편 그 손자 목동은 마라톤에서 아테네 군의 승전보를 알리려는 페이디피데스처럼, 어서 가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꺾어 손에 들고 춤을 추듯 맨 앞에 서서 활짝 핀 웃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물론 그 그림은 이름 모를 한 예술가의 창작에 의한 것이지만, 그 그림들에 나타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둘러 싼 목자들 각자의 얼굴 표정과 자세는 복음을 향한 우리 인간의 한 단면들을 특징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목동들은 기뻐할 수 있었을까? 어린 아기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 하나 제대로 누일 곳조차 없이 동물들의 동굴 속 말구유에 포대기 하나 걸치고 초라하게 누워 계십니다. 그분의 가난한 탄생.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서 빨리 부자가 되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자신들보다 더 가난하게 태어난 아기 예수님은 오히려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도 우리와 같이 가난하게 오셨습니다. 아니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로 오셔서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우리편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공감과 희망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적인 여유 속에서 그저 자기 한 식구 잘 먹고 편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관심사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의 존재 가치와 삶의 의미에 대한 감각조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은 물질적인 치장과 소유라는 자기 생명의 담보로부터 해방시켜주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꾸미고 그릴 수 있는 하느님다운(?) 권위와 외적인 힘을 모두 포기하시고, 오히려 보호를 받아야 할 연약한 아기로, 그것도 말구유에 포대기 하나 걸치고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가난해지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가난을 “(그리스도 예수)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또 이러한 가난의 성격을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라고 풀이했습니다. 그러 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가난하게 되어 버린 이들에게 오히려 풍요와 여유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눈만 뜨면 다가오는 세상의 위협 속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참으로 인생의 여정에 지치고 지친 이들에게, 그저 주어진 삶을 마치는 것 외에 더 이상의 희망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버림받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권력 싸움 속에서 그리고 세태의 변화 속에서, 결국 변절하고 쓰러지고 말 그런 한 세대의 풍운아요 영걸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히브 5,7-10)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노래는 오늘 이 시대에도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요,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가졌기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문구가 오늘의 인간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의 인간 군상은 어쩌면 물질적인 욕망의 무한한 늪에 빠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의 희생을 전제하고 요구하며 너무나도 배타적인 이기주의의 먹이사슬 속에서 포효하고 방황하는 동물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달려 왔던 목동들, 그 목동들의 말을 신기하게 받아들였던 사람들, 2천 년 전 자신들의 부족들이 믿고 의지하며 살던 신심과 사상을 뒤로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교 백성들과 이교도에게서 구세주를 찾아온 동방박사들처럼 참 진리를 향한 제한과 편견 없는 사람들의 행렬을 발견합니다.

무엇보다 구세주가 탄생하시리라는 천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구세주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어머니 마리아와 무명의 여인들과 제자들을 발견합니다. 또한 오늘 예수님의 성모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고 주님의 명을 따라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감으로써 주님의 평화 속에 있는 교회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자신도 발견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그 삶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서 하늘 높은 곳으로 울려 퍼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어느 마을에 구역미사를 봉헌하러 갔을 때, 할머니 한 분이 미사를 봉헌하러 간 저를 반기시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신부님, 구역반 미사를 저희 집에서 지내게 되어 얼마나 큰 영광인 줄 모르겠습니다.”

영광을 자신의 출세나 입신양명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힘과 지배가 불가능한 저 너머의, 진정으로 거룩한 분과 그분과의 연관관계 안에서 찾는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은 오늘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하고 조종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그 영광을 빛내는 이들에게서도. 이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평화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즉 십자가의 길을 강요 받았음에도 거부하지 못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이요, 또 한편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걸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성탄 밤 천사와 함께 하늘의 군대가 부른 이 노래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가난해지도록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가난한 이들이 외치는 기쁨의 노래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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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꽃꽂이




교황주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나해) 마태 16,13-19; '15/06/28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6월 18일(목),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를 발표하셨습니다.

오늘 교황주일을 맞이하여, '찬미를 받으소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회칙은 더불어 사는 집, 곧 지구를 돌보는 데에 관한 것으로 6장 246항에 걸쳐 기술만능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 의한 환경 문제를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성찰하며 온전한 발전을 위한 접근법으로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이라는 회개와 행동을 촉구합니다.

교황은 이 회칙에서 “인류는 힘을 합쳐 우리 공동의 보금자리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이 여전히 있다.” 라고 강조하며,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의 일과 모든 노력의 목표가 무엇인지? 지구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질문을 던집니다.

회칙의 주요주제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구의 약함 사이의 긴밀한 관계’,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새로운 패러다임들과 기술로부터 유래한 힘의 형태들에 대한 비판’, ‘경제와 발전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들을 찾으라는 요청’, ‘각각의 피조물이 갖는 진정한 가치’, ‘생태의 인간적 의미’, ‘기탄없고 솔직한 토론의 필요’, ‘국제적·지역적 정책의 엄숙한 책임’, ‘쓰고 버리는 문화 그리고 새로운 생활양식에 대한 제안’입니다.

제1장 “더불어 사는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17-61항)는 현재 지구에 나타나는 생태 위기 현상에 주목합니다. 이는 지구가 겪는 고통을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인식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 고통의 예로 회칙은 ‘오염과 기후 변화, 특히 화석 연료 사용으로 초래되는 지구 온난화’, ‘식수 오염’, ‘생물 다양성의 감소’, ‘낮아진 인간 삶의 질과 사회의 붕괴’, ‘세계적인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지도력의 부족’을 언급합니다.

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62-100항)은 피조물에 대한 인류의 책임을 성경의 전승에 비추어 설명합니다. 성경은 자연 환경은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모든 인류의 유산이며 모든 이가 책임져야 하는 것(95항)이라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하느님과의 관계, 우리 이웃과의 관계, 지구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죄가 창조 질서 전체의 균형을 어떻게 깨뜨렸는지를 성찰합니다. 이러한 손상이 바로 죄라고 합니다(66항).

제3장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101-136항)은 현재 상황을 분석하여 그 증상과 심층적 원인을 철학과 사회과학과의 대화를 통하여 성찰합니다. 현대의 과학 기술 발전이 인류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들이 온 인류와 세계를 지배하는 결과도 낳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올바른 한계를 정하고 바른 자제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건전한 윤리와 문화와 영성이 필요합니다(105항). 세계에 대한 인류의 ‘지배’는 책임 있는 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116항). 고용과 노동 문제도 온전한 생태학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기간에 걸쳐 더 큰 금전적 이익을 얻고자 인적 투자를 중단하는 것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기업 행위라고 합니다(128항).

제4장의 제목인 “온전한 생태학”(137-162항)은 이 회칙이 정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안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환경의 문제와 인간 사회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우리는 자연계와 사회 체계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포괄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환경 생태학, 경제 생태학, 사회 생태학, 문화 생태학, 일상생활 생태학, 공동선의 원칙, 세대 간의 정의를 다룹니다.

제5장 “접근법과 행동 방식”(163-201항)은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대화는 인류가 자기 파괴의 소용돌이에서 탈출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163항). 교황은 “교회가 과학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정치를 대신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며, “특정 이익이나 이념이 공동선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솔직하고 열린 토론을 권장”합니다.

제6장 “생태 교육과 영성”(202-246항)은 모든 이에게 ‘생태적 회개’(216-221항)를 권유합니다. 뿌리 깊은 문화적 위기 상황에서, 교육과 훈련 없이 인간의 습관과 행동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모든 교육 분야, 무엇보다도 학교, 가정, 매체, 교리교육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환경 교육은 일상생활과 습관을 변화시킬 수 있고(211항) 생활과 소비의 방식을 바꾸면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206항). 사회를 사랑하고 공동선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애덕의 탁월한 표현입니다(231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 세계의 신자들에게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와 “그리스도인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바쳐주기를 청하며 회칙을 마무리합니다.




교황주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가해) 마태 16,13-19; '14/06/29

옛날에 당나귀가 불상을 이고 다니다가, 사람들이 모두 불상에 절을 해대자, 당나귀가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는 자기에게 절을 하는 줄 알고, 기고만장하고 오만불손하게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실수로 불상을 땅에 떨어뜨리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불상을 일으켜 세우고는 당나귀에게 커다란 벌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늘 되새겨보는 이야기이지만, 오늘의 저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에 불과한데, 마치 제 자신이 주님의 비서실장쯤 되는 양 착각하고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봅니다.

가끔 신혼부부들에게 “상대에게 기대하고 살지 말고, 서로 기여하면서 살아라.”고 하는데, 정작 저는 여기 와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기여했는지 되돌아 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속으로 거창하게 어떤 업적을 남기고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따지기 보다, 그저 한 인간으로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매달릴 때 정말 편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주님 앞에 서서 주님께서 지금까지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되새기며, 이렇게 다시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의 매 순간 매 자리에 함께해 주셨음을 저는 압니다.

제가 양이고자 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의 목자가 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다가서려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를 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알고자 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옵고자 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에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느끼고자 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를 안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저를 바쳤을 때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교리를 가르칠 때 주님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미사를 드릴 때 주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성사를 집전할 때 주님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제가 환자를 방문할 때 주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는 제 입을 열어 당신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제가 곤경 중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제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제가 악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제 대신 싸워 주셨습니다.

제가 분노와 갈등으로 밤을 지새울 때 주님께서는 휴식을 주셨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 주님께서는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가 고독해할 때 주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텅비고 허전해진 가슴으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맬 때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배불려 주셨습니다.

제가 목말라 할 때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로 적셔 주셨습니다.

제가 실수했을 때 주님께서는 못 본 체해 주셨습니다.

제가 피곤에 지쳤을 때 주님께서는 제 대신 일해 주셨습니다.

제가 잘못했을 때 주님께서는 채워 주셨습니다.

제가 유혹 중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셨습니다.

제가 유혹에 걸려 넘어졌을 때 주님께서는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또 범죄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저와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제가 거듭 범죄하여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제 죄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에게 생기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 곁을 떠나 도망치고 싶을 때 주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나를 휘감아 나도 모르는 새에 다시 주님 앞에 앉아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제가 다시 주님 사랑의 빛 안으로 나오도록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끌어내 주시고

이 모든 일들을 저에게 겪도록 하심으로써

저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고 계십니다.

이 모든 제 생애의 순간 순간들이 그리고 저의 전생애의 역사가

주님의 오묘한 섭리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주님 앞에 다가와서 청합니다.

주님이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와

주님이 저와 함께해 주셨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며 청합니다.

말씀으로 저를 일러 주시고

성체성사로 먹여 주시는

주님 앞에 서서 청합니다.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저는 주님밖에 매달릴 분이 없어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뿐이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저는 주님이 하시고자만 하시면

저에게 주님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제가 주님의 일을 할 때 제가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고

그 사랑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살아왔기 때문에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를 복음의 사도로 써주소서.

제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펴 주시어

주님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언제나 주님께 다가와 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저를 불러 주소서.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주인이십니다.

주님 제게 오셔서 저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소서.

아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교황주일


(다해) 루가 9,51-62 : '13/06/30


교황주일




연중 제13주일



(나해) 마르 5,21-43; '12/07/01

오늘은 여담 하나로 시작하겠습니다. 부담을 가지시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우스개 소리이니까 웃으시면서 들어주십시오.

제게 요즘 때아닌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제가 전년도에 부임하여 나름대로 사목적인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곤혹스런 사실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게 뭐냐고 하면, 제가 노력하면 할수록 본당 재정이 빵꾸 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만큼 비용도 더 들어 본당 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새 신부 때 보좌시절부터 지금까지만 해도, ‘교육비는 성당에서, 간식은 자모회에서’ 라는 식의 정식이라도 있어서, 무슨 미디어 교육이라든가 등의 주일학교 정규 프로그램과는 별도로 추가 교육 프로그램을 전문 수도회와 손잡고 이것 저것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모회와 신자들이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주로 노력봉사에 치중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주 프로그램비와는 별도로 간식비 등이 많이 들어 추가는커녕 기존의 프로그램을 하는 것만도 간단치 않습니다.

성인 교육을 하거나 어디 전문교육을 보내려고 해도, ‘신부님이 교육받으라고 하는 것이니까, 신부님이 교육비 내주세요’ 하시니까…… 내심 ‘이래서야 무슨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참 난감합니다.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사고방식과 행동수칙이 달라서 겪는 어려움이겠죠. 일례로 중국교회에 선교 나간 동창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중국교회는 신자들이 교회 유지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신부님을 보러 왔으니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돈을 주어야 한다고 요청한답니다.

그리고 가끔 신자분들의 소식을 들어보면, 다 그러시는 것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비용을 들여 이스라엘 성지순례도 가고, 해외여행도 심심찮게 다녀오시는 것도 같은 데, 성당에서 캠프 가자고 하니까 회비 10만원도 비싸다고 한다니, 혹시 어디서 숙박하시는지, 여행가실 때 하룻밤 자는데 숙박비는 얼마나 하는지 몰라도…… 쉽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신자분들이 기대하는 행사품질은 최상급인데 비해 부담비용은 최저비용으로 기대하시는데, 기업이나 지자체는 자사원들의 교육 등에 거의 전액지원하고 참가자들은 무료거나 겨우 명색이나 내는 영리단체와 세금으로 운영하는 사회 운영체계와는 달라서 심각한 문화적 차이를 느낍니다.

교회가 영리단체도 아니고, 어디서 지원이라도 받는 운영체계가 아니라, 운영은 신자들의 자발적인 재정부담과 무료봉사로 충당되며, 오히려 교구분담금과 각종 공과금, 인건비가 수입의 3/4를 차지하고, 선교와 이웃돕기 비용을 합친 본당의 순수 사목자금은 1/4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은근히 겁이 납니다.

또 신자분들 중에는, 옛날에는 성당에서 뭐도 주었고, 어떻게 해주었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계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에 맞춰 후원금도 들어오겠구나 하고 기대해보기도 하지만, 그 땐 참석자도 많았고, 여유도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만 하지, 그와 동시에 수입이 준다면 그만큼 지출도 줄어들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거나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실로 동요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지역별 차이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충격이 저를 아주 곤혹스럽게 하고, 정말 우스개 소리로 ‘이거 열심히 하면 안 되는 구나~!’ 하는 조심스런 자성 속에서, 복에 겨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중의 몇몇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피하고 절제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피해온 것이 이성교제던지, 다이어트던지, 취미생활이던지, 음주와 끽연 또는 마약으로 풀던 생활이던지, 그 어느 것도 영적으로 승화되며 절제된 덕이 아니라면 우리 삶의 어두운 그림자로만 남아있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 ‘빛’이 있다면, 그 반대인 ‘그림자’도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또 겉으로는 피하고 숨겨온 것들이 홀로 있을 때나, 마음 맞고 격이 맞는 친구와 있을 때나, 성당같이 사회경쟁체제와 직접적인 연관관계도 없고, 자신의 신분상승이나 사업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공동체에 오면 그림자 같은 것들과 터부시 해왔던 것들이 스물 스물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의 이면에 드러내고 싶지 않고, 추구하고 싶지 않고, 부정하고 피하고 꼭꼭 숨기고 싶은 그림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 그림자가 우리 인생의 빛을 계속 깎아 내리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고, 또 다시 그 그림자를 안고 괴롭게 살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소녀가 아파서 죽기 전에는 살려달라고 청했지만, 이제 죽었으니 더 이상 주님께 청할 필요가 없다며 포기했던 것과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우리의 생활 태도와 자세, 곧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가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고,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던 자만심에서도 헤어나기로 합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하는 사회의 통념과는 달리 “피할 수 없으면, 최소한의 악을 선택하라”는 이냐시오 성인의 권고를 따르며 주님께 매달리기로 합시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생의 어둠과 그림자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시고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시도록!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탈리타 쿰!”(마르 5,41)하시며 죽은 소녀를 다시 살려주십니다.

“탈리타 쿰!”하시며, 열두 살 소녀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일생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히던 우리의 어둠과 그림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롭게 우리의 참다운 인생을 살아가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림자를 어둠의 거울 속으로 가둬두지 말고, 절제와 승화로 우리의 총체적 인격을 빛으로 꾸려나가도록 노력합시다.

탈리타 쿰!




연중 제13주일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

- 배아는 생명입니다. 우리 모두는 배아였습니다

(가해) 마태 10, 37-42; 2005/06/19

최근 우리 사회는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연구 결과 발표로 열광의 분위기에 젖어 있습니다. 난치병 환자의 체세포를 핵이식하는 방법으로 환자 자신과 일치하는 인간배아줄기세포 생산에 성공한 것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성급하게도 산업혁명에 견줄 만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론매체도 이상하리만치 황우석 교수에 대한 찬양 일변도의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해 황우석 교수가 인간배아 복제에 처음 성공하였을 때 쏟아져 나왔던 찬반양론 가운데 생명윤리와 기술적 위험성을 문제 삼았던 정도의 비판이나 문제 제기마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황우석 교수의 발표로 척수마비, 파킨슨씨병, 치매, 당뇨병 같이 손상된 세포를 대체하는 효율적인 세포 치료의 실현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되었으며, 이러한 기술이 우리나라에 경제적으로도 매우 큰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해 있습니다.

돌이켜 보자면 1997년 복제양 돌리의 출현은 세상을 경악시켰습니다. 복제양 돌리의 출생 사건은 이전까지의 생명복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인 체세포 핵이식 방법에 따른 복제였다는 점에서 그 놀라움은 더욱 컸습니다. 생명복제 기술의 발전이 이제 단성(單性), 무배우자 생식을 가능하게 하였고, 나아가 그 기술이 인간에게까지 적용되어 복제인간의 출현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생식에 관한 기존의 상식은 이제 완전히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공학 기술은 이제 매우 구체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황우석 교수가 이번에 발표한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결과는 생명공학 기술의 치료적 활용의 범위를 확대한 것입니다. 이 연구에는 복제양 돌리를 만들 때 사용되었던 기술과 같은 체세포 핵이식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방법으로 만들어진 인간배아에게서 배아줄기세포를 추출하였고, 이를 활용하여 난치병 치료를 위한 세포치료제나 신약을 개발할 것이라는 것이 황우석 교수의 발표 내용입니다. 배아줄기세포란 인간배아의 생성 후 약 14일이 지난 배반포기 단계의 인간배아에서 추출할 수 있는 것으로 신체의 모든 장기나 조직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만능세포입니다.

그리고 황우석 교수의 이번 발표는 지난 2004년 2월에 이미 발표한 인간배아줄기세포 배양의 성공보다도 훨씬 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성 간, 다양한 연령층의 체세포를 이용한 배아복제뿐만 아니라, 난치병 환자들 자신의 체세포를 이용한 배아복제까지도 성공함으로써 배아줄기세포 치료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가능하게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작년의 연구에서는 여성의 난자 242개를 사용하여 단 한 개의 배아만을 만들었으나, 이번 연구에서는 185개의 난자에서 11개의 배아를 복제함으로써 복제 성공률이 작년에 비해 무려 1,440%나 높아진 것입니다. 이렇게 높아진 배아복제 성공률과 함께 배아줄기세포 배양 기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기대 못지않게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데 대한 걱정과 우려의 소리 또한 과거 어느 때보다도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가능성이 불투명하였던 배아복제가 이번 연구로 해서 한층 더 가능하고 현실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궁에 착상시키면 사람이 될 수 있는 복제배아를 줄기세포를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는 데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연구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반대의 입장과 함께 심각한 우려를 표명합니다.

첫째,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인간 생명체인 배아의 복제와 인간 생명체의 파괴라는 반생명적 행위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인간배아를 복제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생산해 낸다는 의미로서, 이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주 하느님의 거룩한 창작품(창세 1,26-28; 2,7 참조)으로 믿는 우리의 신앙에 대립합니다. 비록 복제된 배아라 할지라도 이는 분명 인간 생명이며, 따라서 인간배아에 대한 실험이나 조작은 인간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복제된 인간배아를 이용하여 치료제를 만들고, 의약품을 만드는 일이 마치 그 자체로 난치병을 치료하는 일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는 명백히 배아의 파괴를 전제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 생명체를 의학의 발전과 인류의 건강 증진이라는 미명으로 마음대로 처분해 버릴 수 있는 단순한 생물학적 재료 수준으로 격하시키거나, 한 번 쓰고 버릴 생물학적 재료로 취급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반생명적 행위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이번 연구로 복제인간의 출현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습니다. 황우석 교수는 인간복제를 원하지도 않고, 또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배아복제는 누군가에 의해 시도되어 끝내는 복제인간을 출현시키고 말 것입니다. 수정 후 14일이 지난 배반포기 단계의 인간배아가 줄기세포로 추출되는 대신 여성의 자궁에 착상되어 복제인간으로 출산되는 것이 난치병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의 성공적인 분화보다도 기술적으로 훨씬 더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제인간의 출현을 심각하게 염려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유린하고,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처사이며, 인류에게 수많은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인간배아 복제 연구로 해서 여성들은 자칫 생물학적인 몇 가지 기능만 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배아 생산과 복제를 위해서는 난자의 확보가 필수적입니다. 황우석 교수는 난자 기증자에게 난자 기증 사유와 절차를 충분하게 알려 주고 자발적인 동의를 얻어 난자를 기증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석연치 않은 대목도 없지 않습니다. 기술적으로 난자 채취 과정이 간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숙한 난자를 얻기 위하여 호르몬제의 투여, 난포의 성숙도를 확인하기 위한 검사, 이로 인해 초래될 부작용의 발생, 부작용이 야기시키는 위험 - 예컨대 난소 손상, 영구 불임, 생명의 위험 - 외에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의학적 또는 윤리적 문제들이 검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인간 생명체인 배아를 복제하여 질병 치료에 이용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한 인간을 다른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위로서 근본적으로는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라고 단언합니다. 의학과 생명과학의 목적은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고 살리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의 배아는 수정의 순간부터 확실하게 한 인간 생명으로 결정된 주체이며, 바로 그때부터 통합적이고 지속적이며 점진적인 발전을 시작하게 되므로, 그 진행 과정의 어떤 단계도 단순히 세포덩이로만 여겨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주체는 인간 개체로서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인간배아를 연구나 실험용으로 활용하는 행위는, 인간을 위하여 인간을 수단으로 삼고, 인간의 존엄성을 모욕하고, 인간 생명을 파괴하는 비도덕적 행위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난치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한다고 하여 환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한 생명을 치료하고자 또 다른 생명을 제삼자의 인위적인 개입으로 희생시키는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과학기술을 결코 지지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배아라 할지라도 틀림없는 인간 생명체입니다. 우리 모두는 배아였습니다. 배아줄기세포를 얻으려면 생명체인 배아를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배아 상태의 인간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방어하지 못하고 자기 결정권을 수행하지 못하는 생명을 질병 치료의 목적으로 임의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며 기득권자의 횡포입니다. 행위의 목표가 선한 것이라면 목표를 이루어내는 수단마저도 선해야 합니다. 행위의 목표가 윤리성을 지녀야 하듯이 그 수단도 윤리성을 지녀야 합니다.

난치병을 치료하는 방법 가운데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하는 것만이 유일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임상적으로도 효능을 발휘하고 있는 성체줄기세포 치료는 윤리적으로 논란이 되지 않을뿐더러 안전성도 탁월합니다. 많은 생명과학자들이 줄기세포가 인류의 건강과 생명에 큰 기여를 할 것이기 때문에 계속 연구,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배아줄기세포 대신 성체줄기세포를 활용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생명과학은 학문으로서 자율성과 자유를 담보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생명과학 역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자유와 자율성을 담보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와 자율성을 확보하려면 그에 따르는 책임과 건강한 양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공명심이나 상업성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한 책임과 양식을 갖추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생명과학은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목표로 삼을 때 그 도덕성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과학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눈부신 업적에 자만하지 말고 거듭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고뇌를 해야 합니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무엇이나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음에도 해서는 안 되는 경우를 식별하고 기꺼이 포기하는 용단을 내릴 때 생명과학은 신뢰와 지지를 얻을 것입니다.

생명과학 분야에 대한 우리 가톨릭 교회의 관심은 지대합니다. 왜냐하면 생명과학의 올바른 발전이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도 있고, 동시에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파멸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배아를 단순한 세포덩이로 여긴다거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미한 존재로 여기면서 파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 죽음의 문화를 급속도로 확산시킬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 결과에 열광하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냉철한 이성을 되찾아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거듭나기를 기대합니다.

2005년 6월 4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리주교위원회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교황주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마태 16 13-19; 2003/06/29

어떤 사람이 성당에 와서 기도했단다. "주님, 이번에 불량 물건을 선적했는데, 걸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부족한 인간의 안타까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지만, 참으로 주님께서도 들어줄 수 없는 기도다. 그는 오히려 주님을 자기 범죄의 공범자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나 기도했을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묻는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13절) 그러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14)이라고 말하더라고 대답한다.?

그럼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그는 어떻게 하면 현실에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지를 제시한,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마태 14, 2-12; 마르 6, 17ㄴ-19; 루가 3, 10-14 참조). "엘리야"는 현실적으로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길과 신앙이 가리키는 갈림길 사이에서, 참 신앙의 길을 걷도록 한 예언자다(1열왕 18, 20-40 참조). "예레미야"는 어떻게든 이스라엘의 패망을 막으려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조국이 패망하고 유배가는 것을 보아야 했던 비운의 예언자다. 그리고 "옛 예언자 중의 하나"로 거론되는 인물은 이스라엘을 에집트 노예살이에서 구출한 '모세'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이 예언자에 비유한 것은 모세처럼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리라는 정치적이고도 현실적인 메시아(구세주)관에서 비롯되었다(출애급기 참조).

베드로는 대답한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 속에서 생각과 개념만으로 남아계시거나 기도할 때만 살아나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희망과 고민을 다 아시고, 그때마다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와 함께 아파하시면서 생생이 살아 숨쉬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진정 살아 계실 수 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세상 한 가운데 하늘나라를 만들어 가신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이런 고백을 들으며 복을 빌어주시고 교회를 맡겨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 앞에 불러 주님을 믿도록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에게 주님을 전할 때, 주님께서는 이웃에게도 믿음을 심어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자신에게 현세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수난당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어야 한다.




연중 제13주일



(가해) 마태 10,37-42; 2002/06/30>

예수님께서는 오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37)라고 하신다. 이 말은 가정을 버리고 종교생활에 열중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인 '나' 역시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예수님의 인격적인 면에 국한시켜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현실 적용이란 면에서는 가족의 이기주의를 뛰어넘는 공공성과 영원성을 보아야 한다. 아울러 하느님 창조의 개별성과 독창성이란 시각에서 볼 때 가족을 자신의 소유나 담보로 보는 이기적 자세에서 벗어나라는 말과도 통한다. 가족 구성원 각 개인의 자유와 인격의 존중이라는 면에서 더욱 그렇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38)라고 하신 말씀도 실제로 만만치 않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다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요. 마음을 먹고 실천하고자 한다고 해서 자기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전능해져서 주님의 말씀을 즉시 다 실현할 수 있게 되지도 않고 주위의 다른 모든 것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주님께 기도만 하고 열심히 뛰기만 하면 자신의 현실이 다 극복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기의 허물과 완전치 못한 기질 그리고 부족한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 말씀을 실현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런데 지금까지 흘러나온 교회의 역사나 우리 자신의 가계를 보더라도 아직 신앙의 신비 안에 살고 있으니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주님의 하해와 같은 자비와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은총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하겠다고 나선다고 다 되지도 않고, 내가 안 하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쉽게 고쳐지거나 없어지지도 않는 내 개인의 악습에서부터 사회의 병폐까지! 우리의 작은 노력은 크게 보아주시고, 우리의 큰 잘못은 작게 취급하여 주시니! 내 한 목숨도 제대로 부지하거나 보존하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사실 한 가지로 어엿이 살아있는 교회와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때 감사드릴 뿐이다. 믿음조차도 선물로 주셔서 주님을 믿고 또 따를 수 있도록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연중 제13주일



(다해) 루가 9, 51-62; 2001/07/01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에 들어가시려고 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반대되는 입장의 유다인의 마을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맞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고 나서 일행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단죄하려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다(요한 3, 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늘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시지만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길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벌을 내리시지도 않는다. 이것이 예수님 사랑의 방법론이다.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더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예수께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57절)하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58절)고 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데는 현세적인 권력이나 이득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부르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런데 한 사람은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59절)하며 머뭇거린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60절)고 촉구하신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복음 사업을 최우선 순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61절)하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62절)고 잘라 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세상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고 하신다.

주님을 따르고자 마음먹은 사람은 사심 없이 그리고 즉시 올곧은 마음으로 주님을 향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은 주님을 성실히 따르는데 반해 다른 이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되더라도 단죄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에게 사랑을 선포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중 제13주일

(나해) 마르 5, 21-43(21-24.35-43): 2000/07/02

오늘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를 다시 살려주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어린 딸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애타하는 아버지 야이로의 청을 들어주셨다.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고 판단하는데도 주님께서는 "탈리다 쿰!",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41)라고 하시며 다시 살려서 소녀를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돌려주셨다.

소녀와 또 자식을 자기 목숨처럼 아끼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주시고 그 마음을 채워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기적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해주시는지 느끼게 된다.

주님은 참으로 사랑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지어내셨다. 지혜서는 말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본성을 본떠서 인간을 만드셨다."(2, 23)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창조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했다.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니, 악마에게 편드는 자들이 죽음을 맛 볼 것이다."(2, 24)하는 지혜서의 말대로다.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안타깝게 여겨 예언자들을 보내 행복하게 사는 길을 일깨워주셨다. 그래도 성이 안 찬 주님께서는 직접 오셨다. 주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다.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와 같아지려고 하는 사랑의 본능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 9)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을 참으로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인다. 기쁜 소식 곧 복음인 것이다.

그뿐 아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주셨다. 그리고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고,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고쳐주셨고, 죽은 이들을 다시 살려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 모두를 살리시려고, 우리의 죗값으로 주님 자신이 직접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주셨다.

그 덕분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새로 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이웃에게 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우리가 주님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이 바로 이웃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주님의 뒤를 이어 우리 자신이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의 선교 활동으로 이웃을 방문함으로써 주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웃에게 주님 사랑의 손과 발이 되는 것이다.




교황주일


(다해) 루가 9,51-62 : '98/06/28


(가해) 마태 10,37-42; '99/06/27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맞으며


주님,

주님은 제가 주님께 저를 바치겠다고 처음 결심했을 때,

제게 행복을 안겨 주셨습니다.

훗날 그 때의 저를 보셨던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던 것같이

그 때 저는 제일 편안했고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 행복은 인간이 주님과 함께할 때 얻을 수 있다던 바로 그 행복이었습니다.

저는 그 행복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주님,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단 한가지 일만 있었습니다.

주님의 일은 바로 저를 향한 주님의 사랑 그 한 가지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의 매 순간 매 자리에 함께해 주셨음을 저는 압니다.

제가 양이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의 목자가 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다가서려고 했을 때 주님은 저를 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알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옵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에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느끼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를 안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저를 바쳤을 때 주님은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교리를 가르칠 때 주님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미사를 드릴 때 주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성사를 집전할 때 주님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제가 환자를 방문할 때 주님은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제 입을 열어 당신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제가 곤경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제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제가 악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은 제 대신 싸워 주셨습니다.

제가 분노와 갈등으로 밤을 지새울 때 주님은 휴식을 주셨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 주님은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가 고독해할 때 주님은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텅비고 허전해진 가슴으로 먹을 것을 찾아헤맬 때 주님은 말씀으로 배불려 주셨습니다.

제가 목말라 할 때 주님은 성체성사로 적셔 주셨습니다.

제가 실수했을 때 주님은 못 본 체해 주셨습니다.

제가 피곤에 지쳤을 때 주님은 제 대신 일해 주셨습니다.

제가 잘못했을 때 주님은 채워 주셨습니다.

제가 유혹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안스러워 어쩔 줄 모르셨습니다.

제가 유혹에 걸려 넘어졌을 때 주님은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또 범죄하였을 때 주님은 저와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제가 거듭 범죄하여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은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제 죄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했을 때 주님은 저에게 생기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 곁을 떠나 도망치고 싶을 때 주님은 성령의 힘으로 나를 휘감아 나도 모르는 새에 다시 주님 앞에 앉아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제가 다시 주님 사랑의 빛 안으로 나오도록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끌어내 주시고

이 모든 일들을 저에게 겪도록 하심으로써

저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고 계십니다.

이 모든 제 생애의 순간 순간들이 그리고 저의 전생애의 역사가

주님의 오묘한 섭리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주님 앞에 다가와서 청합니다.

주님이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와

주님이 저와 함께해 주셨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며 청합니다.

말씀으로 저를 일러 주시고

성체성사로 먹여 주시는

주님 앞에 서서 청합니다.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저는 주님밖에 매달릴 분이 없어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뿐이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저는 주님이 하시고자만 하시면

저에게 주님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제가 주님의 일을 할 때 제가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고

그 사랑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살아왔기 때문에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를 복음의 사도로 써주소서.

제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펴 주시어

주님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언제나 주님께 다가와 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저를 불러 주소서.

주님은 제 영혼의 주인이십니다.

주님 제게 오셔서 저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하소서.

아멘.






교황주일




(나해) 마태 16,13-19 : '97/06/29



주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병이나 낮게 해달라고 찾는 의사인가? 아니면 돈이나 많이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비는 은행장인가? 아니면 건강의 비결이나 되는 듯이 외쳐대는 텔레비전 박사인가? 주님께서 "사람이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마태 16,13) 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14절) 라고 대답하였다.

우리 각자는 주님의 이 물음에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 생애의 순간 속에서 주님은 어느 분이신가? 내가 주님께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왜 주님을 믿는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15절)고 제자들에게 직접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살면서 그저 우리의 머리 속에서 알고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라, 베드로는 우리 각자의 삶 속에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직·간접으로 개입하시는 살아계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아울러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도 주님이 살아 계십니까? 그리고 그분이 또 그분과의 관계가 여러분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시몬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주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찾아 얻는다기 보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지요. 그것도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그 뜻을 이루려고 애쓰는 거기에 행복이 있고요! 주님이 나에게 필요한 분이시지만,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바로 그대로의 것을 주시는 담보물은 아니시지요. 내 욕심에서 풀려나와 주님을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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