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일

(나해) 마르 5,21-43; 12/07/01

오늘은 여담 하나로 시작하겠습니다. 부담을 가지시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우스개 소리이니까 웃으시면서 들어주십시오.

제게 요즘 때아닌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제가 전년도에 부임하여 나름대로 사목적인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곤혹스런 사실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게 뭐냐고 하면, 제가 노력하면 할수록 본당 재정이 빵꾸 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만큼 비용도 더 들어 본당 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새 신부 때 보좌시절부터 지금까지만 해도, ‘교육비는 성당에서, 간식은 자모회에서’ 라는 식의 정식이라도 있어서, 무슨 미디어 교육이라든가 등의 주일학교 정규 프로그램과는 별도로 추가 교육 프로그램을 전문 수도회와 손잡고 이것 저것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모회와 신자들이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주로 노력봉사에 치중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주 프로그램비와는 별도로 간식비 등이 많이 들어 추가는커녕 기존의 프로그램을 하는 것만도 간단치 않습니다.

성인 교육을 하거나 어디 전문교육을 보내려고 해도, ‘신부님이 교육받으라고 하는 것이니까, 신부님이 교육비 내주세요’ 하시니까…… 내심 ‘이래서야 무슨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참 난감합니다.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사고방식과 행동수칙이 달라서 겪는 어려움이겠죠. 일례로 중국교회에 선교 나간 동창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중국교회는 신자들이 교회 유지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신부님을 보러 왔으니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돈을 주어야 한다고 요청한답니다.

그리고 가끔 신자분들의 소식을 들어보면, 다 그러시는 것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비용을 들여 이스라엘 성지순례도 가고, 해외여행도 심심찮게 다녀오시는 것도 같은 데, 성당에서 캠프 가자고 하니까 회비 10만원도 비싸다고 한다니, 혹시 어디서 숙박하시는지, 여행가실 때 하룻밤 자는데 숙박비는 얼마나 하는지 몰라도…… 쉽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신자분들이 기대하는 행사품질은 최상급인데 비해 부담비용은 최저비용으로 기대하시는데, 기업이나 지자체는 자사원들의 교육 등에 거의 전액지원하고 참가자들은 무료거나 겨우 명색이나 내는 영리단체와 세금으로 운영하는 사회 운영체계와는 달라서 심각한 문화적 차이를 느낍니다.

교회가 영리단체도 아니고, 어디서 지원이라도 받는 운영체계가 아니라, 운영은 신자들의 자발적인 재정부담과 무료봉사로 충당되며, 오히려 교구분담금과 각종 공과금, 인건비가 수입의 3/4를 차지하고, 선교와 이웃돕기 비용을 합친 본당의 순수 사목자금은 1/4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은근히 겁이 납니다.

또 신자분들 중에는, 옛날에는 성당에서 뭐도 주었고, 어떻게 해주었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계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에 맞춰 후원금도 들어오겠구나 하고 기대해보기도 하지만, 그 땐 참석자도 많았고, 여유도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만 하지, 그와 동시에 수입이 준다면 그만큼 지출도 줄어들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거나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실로 동요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지역별 차이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충격이 저를 아주 곤혹스럽게 하고, 정말 우스개 소리로 ‘이거 열심히 하면 안 되는 구나~!’ 하는 조심스런 자성 속에서, 복에 겨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중의 몇몇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피하고 절제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피해온 것이 이성교제던지, 다이어트던지, 취미생활이던지, 음주와 끽연 또는 마약으로 풀던 생활이던지, 그 어느 것도 영적으로 승화되며 절제된 덕이 아니라면 우리 삶의 어두운 그림자로만 남아있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 ‘빛’이 있다면, 그 반대인 ‘그림자’도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또 겉으로는 피하고 숨겨온 것들이 홀로 있을 때나, 마음 맞고 격이 맞는 친구와 있을 때나, 성당같이 사회경쟁체제와 직접적인 연관관계도 없고, 자신의 신분상승이나 사업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공동체에 오면 그림자 같은 것들과 터부시 해왔던 것들이 스물 스물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의 이면에 드러내고 싶지 않고, 추구하고 싶지 않고, 부정하고 피하고 꼭꼭 숨기고 싶은 그림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 그림자가 우리 인생의 빛을 계속 깎아 내리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고, 또 다시 그 그림자를 안고 괴롭게 살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소녀가 아파서 죽기 전에는 살려달라고 청했지만, 이제 죽었으니 더 이상 주님께 청할 필요가 없다며 포기했던 것과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우리의 생활 태도와 자세, 곧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가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고,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던 자만심에서도 헤어나기로 합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하는 사회의 통념과는 달리 “피할 수 없으면, 최소한의 악을 선택하라”는 이냐시오 성인의 권고를 따르며 주님께 매달리기로 합시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생의 어둠과 그림자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시고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시도록!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탈리타 쿰!”(마르 5,41)하시며 죽은 소녀를 다시 살려주십니다.

“탈리타 쿰!”하시며, 열두 살 소녀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일생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히던 우리의 어둠과 그림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롭게 우리의 참다운 인생을 살아가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림자를 어둠의 거울 속으로 가둬두지 말고, 절제와 승화로 우리의 총체적 인격을 빛으로 꾸려나가도록 노력합시다.

탈리타 쿰!



연중 제13주일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

- 배아는 생명입니다. 우리 모두는 배아였습니다 -

(가해) 마태 10, 37-42; 2005/06/19

최근 우리 사회는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연구 결과 발표로 열광의 분위기에 젖어 있습니다. 난치병 환자의 체세포를 핵이식하는 방법으로 환자 자신과 일치하는 인간배아줄기세포 생산에 성공한 것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성급하게도 산업혁명에 견줄 만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론매체도 이상하리만치 황우석 교수에 대한 찬양 일변도의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해 황우석 교수가 인간배아 복제에 처음 성공하였을 때 쏟아져 나왔던 찬반양론 가운데 생명윤리와 기술적 위험성을 문제 삼았던 정도의 비판이나 문제 제기마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황우석 교수의 발표로 척수마비, 파킨슨씨병, 치매, 당뇨병 같이 손상된 세포를 대체하는 효율적인 세포 치료의 실현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되었으며, 이러한 기술이 우리나라에 경제적으로도 매우 큰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해 있습니다.

돌이켜 보자면 1997년 복제양 돌리의 출현은 세상을 경악시켰습니다. 복제양 돌리의 출생 사건은 이전까지의 생명복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인 체세포 핵이식 방법에 따른 복제였다는 점에서 그 놀라움은 더욱 컸습니다. 생명복제 기술의 발전이 이제 단성(單性), 무배우자 생식을 가능하게 하였고, 나아가 그 기술이 인간에게까지 적용되어 복제인간의 출현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생식에 관한 기존의 상식은 이제 완전히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공학 기술은 이제 매우 구체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황우석 교수가 이번에 발표한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결과는 생명공학 기술의 치료적 활용의 범위를 확대한 것입니다. 이 연구에는 복제양 돌리를 만들 때 사용되었던 기술과 같은 체세포 핵이식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방법으로 만들어진 인간배아에게서 배아줄기세포를 추출하였고, 이를 활용하여 난치병 치료를 위한 세포치료제나 신약을 개발할 것이라는 것이 황우석 교수의 발표 내용입니다. 배아줄기세포란 인간배아의 생성 후 약 14일이 지난 배반포기 단계의 인간배아에서 추출할 수 있는 것으로 신체의 모든 장기나 조직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만능세포입니다.

그리고 황우석 교수의 이번 발표는 지난 2004년 2월에 이미 발표한 인간배아줄기세포 배양의 성공보다도 훨씬 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성 간, 다양한 연령층의 체세포를 이용한 배아복제뿐만 아니라, 난치병 환자들 자신의 체세포를 이용한 배아복제까지도 성공함으로써 배아줄기세포 치료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가능하게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작년의 연구에서는 여성의 난자 242개를 사용하여 단 한 개의 배아만을 만들었으나, 이번 연구에서는 185개의 난자에서 11개의 배아를 복제함으로써 복제 성공률이 작년에 비해 무려 1,440%나 높아진 것입니다. 이렇게 높아진 배아복제 성공률과 함께 배아줄기세포 배양 기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기대 못지않게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데 대한 걱정과 우려의 소리 또한 과거 어느 때보다도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가능성이 불투명하였던 배아복제가 이번 연구로 해서 한층 더 가능하고 현실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궁에 착상시키면 사람이 될 수 있는 복제배아를 줄기세포를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는 데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연구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반대의 입장과 함께 심각한 우려를 표명합니다.

첫째,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인간 생명체인 배아의 복제와 인간 생명체의 파괴라는 반생명적 행위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인간배아를 복제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생산해 낸다는 의미로서, 이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주 하느님의 거룩한 창작품(창세 1,26-28; 2,7 참조)으로 믿는 우리의 신앙에 대립합니다. 비록 복제된 배아라 할지라도 이는 분명 인간 생명이며, 따라서 인간배아에 대한 실험이나 조작은 인간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복제된 인간배아를 이용하여 치료제를 만들고, 의약품을 만드는 일이 마치 그 자체로 난치병을 치료하는 일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는 명백히 배아의 파괴를 전제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 생명체를 의학의 발전과 인류의 건강 증진이라는 미명으로 마음대로 처분해 버릴 수 있는 단순한 생물학적 재료 수준으로 격하시키거나, 한 번 쓰고 버릴 생물학적 재료로 취급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반생명적 행위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이번 연구로 복제인간의 출현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습니다. 황우석 교수는 인간복제를 원하지도 않고, 또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배아복제는 누군가에 의해 시도되어 끝내는 복제인간을 출현시키고 말 것입니다. 수정 후 14일이 지난 배반포기 단계의 인간배아가 줄기세포로 추출되는 대신 여성의 자궁에 착상되어 복제인간으로 출산되는 것이 난치병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의 성공적인 분화보다도 기술적으로 훨씬 더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제인간의 출현을 심각하게 염려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유린하고,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처사이며, 인류에게 수많은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인간배아 복제 연구로 해서 여성들은 자칫 생물학적인 몇 가지 기능만 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배아 생산과 복제를 위해서는 난자의 확보가 필수적입니다. 황우석 교수는 난자 기증자에게 난자 기증 사유와 절차를 충분하게 알려 주고 자발적인 동의를 얻어 난자를 기증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석연치 않은 대목도 없지 않습니다. 기술적으로 난자 채취 과정이 간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숙한 난자를 얻기 위하여 호르몬제의 투여, 난포의 성숙도를 확인하기 위한 검사, 이로 인해 초래될 부작용의 발생, 부작용이 야기시키는 위험 - 예컨대 난소 손상, 영구 불임, 생명의 위험 - 외에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의학적 또는 윤리적 문제들이 검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인간 생명체인 배아를 복제하여 질병 치료에 이용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한 인간을 다른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위로서 근본적으로는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라고 단언합니다. 의학과 생명과학의 목적은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고 살리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의 배아는 수정의 순간부터 확실하게 한 인간 생명으로 결정된 주체이며, 바로 그때부터 통합적이고 지속적이며 점진적인 발전을 시작하게 되므로, 그 진행 과정의 어떤 단계도 단순히 세포덩이로만 여겨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주체는 인간 개체로서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인간배아를 연구나 실험용으로 활용하는 행위는, 인간을 위하여 인간을 수단으로 삼고, 인간의 존엄성을 모욕하고, 인간 생명을 파괴하는 비도덕적 행위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난치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한다고 하여 환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한 생명을 치료하고자 또 다른 생명을 제삼자의 인위적인 개입으로 희생시키는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과학기술을 결코 지지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배아라 할지라도 틀림없는 인간 생명체입니다. 우리 모두는 배아였습니다. 배아줄기세포를 얻으려면 생명체인 배아를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배아 상태의 인간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방어하지 못하고 자기 결정권을 수행하지 못하는 생명을 질병 치료의 목적으로 임의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며 기득권자의 횡포입니다. 행위의 목표가 선한 것이라면 목표를 이루어내는 수단마저도 선해야 합니다. 행위의 목표가 윤리성을 지녀야 하듯이 그 수단도 윤리성을 지녀야 합니다.

난치병을 치료하는 방법 가운데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하는 것만이 유일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임상적으로도 효능을 발휘하고 있는 성체줄기세포 치료는 윤리적으로 논란이 되지 않을뿐더러 안전성도 탁월합니다. 많은 생명과학자들이 줄기세포가 인류의 건강과 생명에 큰 기여를 할 것이기 때문에 계속 연구,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배아줄기세포 대신 성체줄기세포를 활용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생명과학은 학문으로서 자율성과 자유를 담보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생명과학 역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자유와 자율성을 담보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와 자율성을 확보하려면 그에 따르는 책임과 건강한 양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공명심이나 상업성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한 책임과 양식을 갖추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생명과학은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목표로 삼을 때 그 도덕성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과학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눈부신 업적에 자만하지 말고 거듭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고뇌를 해야 합니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무엇이나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음에도 해서는 안 되는 경우를 식별하고 기꺼이 포기하는 용단을 내릴 때 생명과학은 신뢰와 지지를 얻을 것입니다.

생명과학 분야에 대한 우리 가톨릭 교회의 관심은 지대합니다. 왜냐하면 생명과학의 올바른 발전이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도 있고, 동시에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파멸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배아를 단순한 세포덩이로 여긴다거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미한 존재로 여기면서 파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 죽음의 문화를 급속도로 확산시킬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 결과에 열광하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냉철한 이성을 되찾아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거듭나기를 기대합니다.

2005년 6월 4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리주교위원회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연중 제13주일

(가해) 마태 10, 37-42; 2002/06/30

예수님께서는 오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37)라고 하신다. 이 말은 가정을 버리고 종교생활에 열중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인 '나' 역시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예수님의 인격적인 면에 국한시켜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현실 적용이란 면에서는 가족의 이기주의를 뛰어넘는 공공성과 영원성을 보아야 한다. 아울러 하느님 창조의 개별성과 독창성이란 시각에서 볼 때 가족을 자신의 소유나 담보로 보는 이기적 자세에서 벗어나라는 말과도 통한다. 가족 구성원 각 개인의 자유와 인격의 존중이라는 면에서 더욱 그렇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38)라고 하신 말씀도 실제로 만만치 않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다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요. 마음을 먹고 실천하고자 한다고 해서 자기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전능해져서 주님의 말씀을 즉시 다 실현할 수 있게 되지도 않고 주위의 다른 모든 것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주님께 기도만 하고 열심히 뛰기만 하면 자신의 현실이 다 극복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기의 허물과 완전치 못한 기질 그리고 부족한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 말씀을 실현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런데 지금까지 흘러나온 교회의 역사나 우리 자신의 가계를 보더라도 아직 신앙의 신비 안에 살고 있으니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주님의 하해와 같은 자비와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은총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하겠다고 나선다고 다 되지도 않고, 내가 안 하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쉽게 고쳐지거나 없어지지도 않는 내 개인의 악습에서부터 사회의 병폐까지! 우리의 작은 노력은 크게 보아주시고, 우리의 큰 잘못은 작게 취급하여 주시니! 내 한 목숨도 제대로 부지하거나 보존하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사실 한 가지로 어엿이 살아있는 교회와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때 감사드릴 뿐이다. 믿음조차도 선물로 주셔서 주님을 믿고 또 따를 수 있도록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연중 제13주일

(다해) 루가 9, 51-62; 01/07/01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에 들어가시려고 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반대되는 입장의 유다인의 마을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맞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고 나서 일행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단죄하려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다(요한 3, 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늘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시지만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길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벌을 내리시지도 않는다. 이것이 예수님 사랑의 방법론이다.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더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예수께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57절)하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58절)고 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데는 현세적인 권력이나 이득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부르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런데 한 사람은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59절)하며 머뭇거린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60절)고 촉구하신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복음 사업을 최우선 순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61절)하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62절)고 잘라 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세상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고 하신다.

주님을 따르고자 마음먹은 사람은 사심 없이 그리고 즉시 올곧은 마음으로 주님을 향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은 주님을 성실히 따르는데 반해 다른 이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되더라도 단죄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에게 사랑을 선포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중 제13주일

(나해) 마르 5, 21-43(21-24.35-43): 2000/07/02

오늘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를 다시 살려주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어린 딸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애타하는 아버지 야이로의 청을 들어주셨다.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고 판단하는데도 주님께서는 "탈리다 쿰!",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41)라고 하시며 다시 살려서 소녀를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돌려주셨다.

소녀와 또 자식을 자기 목숨처럼 아끼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주시고 그 마음을 채워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기적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해주시는지 느끼게 된다.

주님은 참으로 사랑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지어내셨다. 지혜서는 말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본성을 본떠서 인간을 만드셨다."(2, 23)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창조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했다.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니, 악마에게 편드는 자들이 죽음을 맛 볼 것이다."(2, 24)하는 지혜서의 말대로다.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안타깝게 여겨 예언자들을 보내 행복하게 사는 길을 일깨워주셨다. 그래도 성이 안 찬 주님께서는 직접 오셨다. 주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다.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와 같아지려고 하는 사랑의 본능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 9)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을 참으로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인다. 기쁜 소식 곧 복음인 것이다.

그뿐 아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주셨다. 그리고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고,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고쳐주셨고, 죽은 이들을 다시 살려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 모두를 살리시려고, 우리의 죗값으로 주님 자신이 직접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주셨다.

그 덕분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새로 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이웃에게 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우리가 주님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이 바로 이웃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주님의 뒤를 이어 우리 자신이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의 선교 활동으로 이웃을 방문함으로써 주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웃에게 주님 사랑의 손과 발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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