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일

(가해) 마태 11,25-30; 17/07/09

2014년 2월 7일자 어느 일간지에 ‘남자수난시대’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현대세계 한국 사회의 남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세대별로 간단히 정리한 내용입니다. 20대는 ‘답’이 없고, 30대는 ‘집’이 없고, 40대는 ‘내’가 없고, 50대는 ‘일’이 없으며, 60대는 ‘낙’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들이 겪고 있는 가정과 사회생활의 형편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로 공감이 되고 연민이 느껴집니다.

높은 청년실업률의 장기화로 ‘이태백’과 ‘삼포시대’ 라는 신조어가 말해 주듯 젊은 패기와 도전을 찾아보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인생이 얼룩지고 있는 20대.

미혼 남성의 40.4%(미혼여성 19.4%)가 “경제적 이유로 결혼하지 않고 있다.” 라고 답한 30대, 또 막상 결혼은 했지만 아이 보육비와 교육비로 허덕이면서 내 집 마련이 요원한 듯한 30대.

‘사오정’으로 빠른 퇴직과 은퇴 대상이 되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시달리기 시작하는 40대.

해마다 차이는 조금씩 있어도 한 가정당 평균 6천여만원에서7천여만 원에 이르는 빚을 안고 있어, 각 세대 가운데 가장 많은 빚을 안고 있는 50대.

본인 스스로 부인과 자녀들로부터 대화가 안 통한다고 가족 안에서 자신이 왕따 취급을 받고 있다고 느끼며 그 원인이 은퇴하고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해서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60대 .

신문지상에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70대 이상의 어르신들은 오늘 살아있기는 하지만 사회의 주역이 아니어서 상대적인 박탈감과 소외를 겪으면서 나를 억울함과 아쉬움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각 세대마다, 사람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각자 나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고, 어디 한 곳 기댈 곳조차 없이, 자기 혼자의 힘으로 단지 자기 주먹 하나로 먹고 살아가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 살아가는 이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름 할 바를 다하고 있다고 여기는 대도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을 인정해주거나 믿어주기는커녕 이해해주지도 않는다고 느껴 극도의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도 있습니다.

오라는 곳은 많아도 어디 한 곳 마음 편히 갈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가서 뭐라고 해야 할지, 얼마를 들고 가야 할지, 가도 그 구성원 누구 하나 자신을 따뜻하고 정겹게 맞아주기 보다는 정으로 꽉꽉 쪼아대듯 몰아내는 듯한 분위기가 나를 버겁고 힘겹게만 합니다.

비단 현대 세계에서 살면서 외적으로 겪게 되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오는 갈증도 많습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같이 사는 가족은 고사하고라도 내 몸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 힘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눈, 코, 입에서부터 몸의 어느 한 곳 성치 못하고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쑤셔오고 아파오는 통증을 온 몸으로 겪으며, 내 맘대로 통제되지 않는 내 몸 상태로 인하여, 나 스스로 좌절과 패닉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데 할 수 없고, 무엇인가 해야 하는데 적절히 풀어나가지 못하고.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며 이 사람 저 사람 다 배려하고 돌보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안타까워하고 있는 나 자신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상은 크고 높지만 마음에만 담고 행동으로 옮겨오지 못한 채 너무나도 오랜 세월을 돌아왔기에 선뜻 나서지지 않고,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느끼고 도전하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계획했고 꿈꾸어 왔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접하며, 왠지 모르게 온 몸이 물에 젖은 듯 무거워집니다.

꼭 무엇을 하지 않아도,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세계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 해결되지 않는 한계로 인한 답답함과 아쉬움이 어딘지 모르게 찌뿌등한 내 몸과 맘을 지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이 느끼고 계획했던 대로, 아니 그 정도는 다 아니더라도 고민과 갈등 없이 나름 편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계십니까?

이러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안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하신 그 말씀에 나타나듯, 그 누구도 그 어느 것도 대신할 수 없는 내 영혼의 평화의 안식입니다.

마치 어머니 뱃속에 열 달 동안 담겨 있던 그 때처럼, 어릴 적 어머니 품에 안겨 있던 그 때 그 순간처럼, 무상무념의 지복직관의 그 평안함과 안녕입니다. 그 무엇을 더 주지 않아도, 그 어떤 것을 새로 해주지 않아도, 현실과 재물과는 전혀 색다른, 내가 나인 그대로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는 내 영혼의 쉼입니다. 그 쉼을 축복처럼 주님께서 내게 주십니다.

그런데 마치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처럼, 그 평화로운 안식은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안식은 주님의 말씀과 삶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는 현실 노동계에서와는 동떨어진 기도의 세계에서나 얻을 수 있는 평화의 안식이 아닙니다. 현실의 갈등과 경쟁에서는 이겨내지 못하니까 내게 맞는 적당한 포기와 차선의 선택으로 얻을 수 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현실에서 일방적인 양보와 손해로 이어지는 희생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나름 의미와 일리는 있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선택하기 꺼려지는 방법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경쟁이 무색하리만큼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으로 쟁취하듯 쏟아 붓는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현실과는 사뭇 다른 가치의 수용과 선택 그리고 식별과 헌신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얻게 되는 평화의 안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15,12)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방법은 나를 살리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님 생명을 주신 바로 그 가치와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해 주님께서는 주님 친히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렵게만 보이는 그 방법을 너무나도 편하고 가볍다고 말씀해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의 안식을 꿈꾸어 봅니다. 우리가 탐욕스런 소유욕과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권력욕 그리고 남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명예욕의 헛된 망상을 넘어서기를 기대하고 다짐하면서.

오늘 유난히도 이해인 수녀의 ‘수녀’라는 시의 첫 구절이 새삼 되뇌어집니다.

“누구의 아내도 아니면서

누구의 엄마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 여인아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부끄러운 조바심을

평생의 혹처럼 안고 사는 여인아.”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평화의 안식과 그 안식을 얻는 길을 따라 걷고자, 우리 수색 예수성심 성당을 찾아오신 예비신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여러분이 예비신자 교리 과정을 통해, 주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과 성사를 통해, 기꺼이 내려주시는 평화의 안식을 찾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연중 제14주일

(나해) 마르 6,1-6; 06/07/09

찬미 예수님!

안녕하십니까?

한 번 옆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아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잘 모르는 분이십니까?

우리같이 작은 공동체에서는 미사에 참석하면 대부분 옆 사람을 다 압니다.

그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대부분 다 압니다.

혹 과거를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그를 보아온 이래부터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는지는 어느 정도 압니다. 그래서 어떤 때 그가 무슨 소리를 하면, 그의 평소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너나 잘 하세요’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가 평소 언행을 조심하고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많은 봉사로 주위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면 그의 말마디에 수긍이 가고 동감합니다.

만일 우리 옆 사람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하셨던 것처럼, 나와 함께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면서 마치 동업이라도 할 듯이 나를 자기 인생에 초대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와 마음을 합쳐 좋은 일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아유 방해나 말지’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보이는 대로만 봅니다. 아니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만큼, 그리고 우리에게 보인 만큼 그 보인 대로 그를 안다고 여기고 그를 평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보아왔다고 자처하는 동네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좋은 말씀을 하시자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2-3)

그들은 예수님의 어린 모습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이 보아온 예수님이 자신들이 보아온 그 모습과 다르기에 이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스승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아는 너는 이러 이러한 단점을 지닌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 그 이상을 그들은 바라보지도 못했고 인정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도 우리 동네의 한 아기에 불과했고, 내 아이와 함께 지내던 철부지 그 젊은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가 아는 너는 내가 아는 너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변했지만 자기 인식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는데 사람의 인식은 고착되니 말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천부당만부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상대를 다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시기와 질투를 던진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내면과 진면목은 모릅니다.

우리 옆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자라왔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무엇을 어떻게 하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나를 바라보는 옆 사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더 더욱 잘 모르는 것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과거 우리가 잊고 싶고 씻어버리고 싶은 사건을 왜 내가 겪도록 만드셨는지?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우리를 어디로 어떻게 이끄셨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자리와 이 사람들을 통해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는지,

과연 다음 단계는 또 무엇이기에 나를 지금 이렇게 준비시키고 계시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의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꿈이 지금 얼마만큼 이루어졌습니까?

그리고 그 꿈이 자라면서 어떻게 수정되고 변화되었습니까?

그 꿈이 그냥 한 낱 지나가는 꿈처럼 어린 시절 누구나 가질 수 있었던 단순한 소망과 바람이 아니라, 그 꿈이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신 꿈이었다면 그 꿈을 우리가 어떻게 가꾸고 있는지 되새겨 봅시다.

우리가 지니고 가꾸었던 그 꿈을 오늘 내 인생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을지!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듯한 이 현실 세상 속에서 주님께서 내 영혼에 심어주신 사명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꿈 많던 어린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이제 어른이 되어 내 꿈을 꿈으로만 그치지 않고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내 인생의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서 다시금 아니 이젠 진정으로 주님께서 내게 심어주신 고귀한 이상과 사명을 실현해 보기로 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도전해 볼 수 있는 만큼이 얼마 만큼이고, 어떤 방법으로, 어느 방향으로, 어떤 의미에서 이룰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동시에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그 영혼 속에 심어주신 고귀한 이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배려하며 존중해 주기로 합시다. 함께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함께 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심어주신 하느님의 고귀한 이상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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