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일

(나해) 마르 6,1-6; ’18/07/08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부제 강론 (자기중심적 사고)


찬미 예수님, 이번 한 주간도 주님의 사랑 안에 행복한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신학교에는 텃밭이 있습니다. 관심 있는 신학생들 몇몇이 모여서 가꾸어 갑니다. 다들 초보이다 보니 씨앗을 심을지, 모종을 심을지 결정하는 것도, 물을 언제 줄 건지도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희는 하나하나 물어보고 찾아가면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몇 년 하다 보니 노하우 같은 게 생겼습니다. 저희가 가꾸는 식물 중에 포도나무가 있습니다.

하루는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할 때였습니다. 동기 부제가 자신이 알아온 것이 있다면서 가지치기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던 저는 속으로 제가 아는 방법대로 하지 않으니 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공부한 정성이 있으니 동기의 방법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가지가 돋아나야 하는데 별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뭇잎이 자라나지 않고 있는 포도나무를 보면서, 다른 동료 연장자 신학생에게 ‘형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다 망했다’면서 핀잔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계속 흘러도 가지에서 새 잎이 돋지 않자, 그 동기도 실망했는지 더 이상 나무 관리를 하지 않고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 포도밭에 가 보았더니 무성한 포도나무가 떡하니 있었습니다.

우리가 포도나무에 좀 더 관심을 갖고 기다렸다면, 그전에 내 방법만이 아니라 그 동기가 알아온 방법을 믿었다면, 포도나무도 포기하지 않지 않았을까하는 후회가 남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십니다. 그 곳 주민들은 내가 어릴 때 보았던 예수가 어떻게 많은 지식을 갖고, 기적도 베풀까 하며 의심하며 믿지를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경험에 갇혀서 현실을 외면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생활을 하다보면 내 경험에서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이나 인물이 나타나면,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나보다 더 뛰어나다면 그 인정은 더욱 어렵습니다. 또한 이미 형성되어 있는 조직에 그가 들어오는 것이라면 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스템을 흔드는 것이기에 원래 있던 사람들은 그를 쫒아내고 싶어 합니다. 박힌 돌들은 굴러온 돌을 싫어합니다. 저도 스스로 완전하지도 않고 늘 배워야 한다고 머리로 생각하지만, 마음속에서는 그렇지가 않은가 봅니다. 자신의 한계에 갇혀 있는 상태를 ‘자기중심이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에 서서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지 않고, 잘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완고한 마음’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것이 자기 모습이라 해도 인정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자기가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방법보다 자기 방법이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둘 다 틀린 방법이 아니라면, 그의 방법을 받아주는 것이 그에게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는 경험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하느님을 증거하는 데 더 나은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2코린 12,7)라고 말씀하십니다.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가슴 속에 따끔거림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가시라면, 그 따끔거림이 느껴지는 대화를 잘 되새겨 보고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머리로는 인정하기 싫지만, 마음이 이미 인정하고 있을 때 그런 따끔거림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따끔거림은 하느님께서 나를 깨우는 방법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나 자신이 자만하지 않도록 해주기 위한 사인입니다. 이 사인을 잘 알아듣게 된다면,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날 것이고, 그 한계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제 한계에서 벗어나게끔 저를 도와주었던 많은 이들이 저에겐 예수님이었습니다.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그 때 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포도나무를 가꿀 때, 그 동기가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이끌어준 예수님의 사도였습니다. 제가 가진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드러나게 도와주었으니까요. 오늘 제 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시며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하여라.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에제 2,4)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지도 않는 말을 예언자는 계속 해 왔습니다. 이 말씀은 제 주위에도 계속 예언자를 보내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 주위에 자기 자신이라는 한계에 갇혀서 타인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지금도 계속 예수님께서는 우리 주위에서 나를 깨우기 위하여 예언자들을 보내주고 계십니다. 타인을 받아들일 때,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이렇게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본 것과 경험한 것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 것과 경험해 본 것과 다르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아예 다른 것들은 발견하지도 못하고, 기대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늘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데, 우리는 언제 어떻게 우리와 함께하셨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시각과 관심과 경험세계의 주파수가 달라서 지나쳐 버립니다. 또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활동방식에 빠져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아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지나쳐간 상황과 사건들 속에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활동하시는지를 되새겨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 지나간 한 주간을 주님께 감사드리러 미사에 참례한 오늘 이 순간에 잠시 되새겨 봅니다.

지난 한 주간동안 주님께서 언제 어떻게 나와 함께하셨는지?

지난 한 주간 주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셨는지?

지난 한 주간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주셨는지?

오늘 내가 주님께 무엇을 감사드리고 있는지?

그리고 내일부터 나와 함께하고 계신 주님과 함께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갈 것인지?

(11시 미사 때)

오늘 우리 성당을 처음 찾아오신 예비신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이 여러분과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여러분의 일상 안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느끼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나날이 잔잔한 기쁨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 한 발짝 다가서는 예비 신자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오늘부터 수색 예수성심 성당 공동체에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또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 우리 공동체가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뿌듯한 일입니다. 이 분들이 주 예수님을 알아 느끼고 사랑하게 되도록 기도하고, 배려하며, 지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중 제14주일 꽃꽂이




연중 제14주일

(가해) 마태 11,25-30; 17/07/09

2014년 2월 7일자 어느 일간지에 ‘남자수난시대’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현대세계 한국 사회의 남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세대별로 간단히 정리한 내용입니다. 20대는 ‘답’이 없고, 30대는 ‘집’이 없고, 40대는 ‘내’가 없고, 50대는 ‘일’이 없으며, 60대는 ‘낙’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들이 겪고 있는 가정과 사회생활의 형편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로 공감이 되고 연민이 느껴집니다.

높은 청년실업률의 장기화로 ‘이태백’과 ‘삼포시대’ 라는 신조어가 말해 주듯 젊은 패기와 도전을 찾아보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인생이 얼룩지고 있는 20대.

미혼 남성의 40.4%(미혼여성 19.4%)가 “경제적 이유로 결혼하지 않고 있다.” 라고 답한 30대, 또 막상 결혼은 했지만 아이 보육비와 교육비로 허덕이면서 내 집 마련이 요원한 듯한 30대.

‘사오정’으로 빠른 퇴직과 은퇴 대상이 되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시달리기 시작하는 40대.

해마다 차이는 조금씩 있어도 한 가정당 평균 6천여만원에서7천여만 원에 이르는 빚을 안고 있어, 각 세대 가운데 가장 많은 빚을 안고 있는 50대.

본인 스스로 부인과 자녀들로부터 대화가 안 통한다고 가족 안에서 자신이 왕따 취급을 받고 있다고 느끼며 그 원인이 은퇴하고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해서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60대 .

신문지상에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70대 이상의 어르신들은 오늘 살아있기는 하지만 사회의 주역이 아니어서 상대적인 박탈감과 소외를 겪으면서 나를 억울함과 아쉬움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각 세대마다, 사람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각자 나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고, 어디 한 곳 기댈 곳조차 없이, 자기 혼자의 힘으로 단지 자기 주먹 하나로 먹고 살아가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 살아가는 이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름 할 바를 다하고 있다고 여기는 대도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을 인정해주거나 믿어주기는커녕 이해해주지도 않는다고 느껴 극도의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도 있습니다.

오라는 곳은 많아도 어디 한 곳 마음 편히 갈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가서 뭐라고 해야 할지, 얼마를 들고 가야 할지, 가도 그 구성원 누구 하나 자신을 따뜻하고 정겹게 맞아주기 보다는 정으로 꽉꽉 쪼아대듯 몰아내는 듯한 분위기가 나를 버겁고 힘겹게만 합니다.

비단 현대 세계에서 살면서 외적으로 겪게 되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오는 갈증도 많습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같이 사는 가족은 고사하고라도 내 몸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 힘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눈, 코, 입에서부터 몸의 어느 한 곳 성치 못하고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쑤셔오고 아파오는 통증을 온 몸으로 겪으며, 내 맘대로 통제되지 않는 내 몸 상태로 인하여, 나 스스로 좌절과 패닉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데 할 수 없고, 무엇인가 해야 하는데 적절히 풀어나가지 못하고.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며 이 사람 저 사람 다 배려하고 돌보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안타까워하고 있는 나 자신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상은 크고 높지만 마음에만 담고 행동으로 옮겨오지 못한 채 너무나도 오랜 세월을 돌아왔기에 선뜻 나서지지 않고,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느끼고 도전하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계획했고 꿈꾸어 왔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접하며, 왠지 모르게 온 몸이 물에 젖은 듯 무거워집니다.

꼭 무엇을 하지 않아도,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세계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 해결되지 않는 한계로 인한 답답함과 아쉬움이 어딘지 모르게 찌뿌등한 내 몸과 맘을 지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이 느끼고 계획했던 대로, 아니 그 정도는 다 아니더라도 고민과 갈등 없이 나름 편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계십니까?

이러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안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하신 그 말씀에 나타나듯, 그 누구도 그 어느 것도 대신할 수 없는 내 영혼의 평화의 안식입니다.

마치 어머니 뱃속에 열 달 동안 담겨 있던 그 때처럼, 어릴 적 어머니 품에 안겨 있던 그 때 그 순간처럼, 무상무념의 지복직관의 그 평안함과 안녕입니다. 그 무엇을 더 주지 않아도, 그 어떤 것을 새로 해주지 않아도, 현실과 재물과는 전혀 색다른, 내가 나인 그대로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는 내 영혼의 쉼입니다. 그 쉼을 축복처럼 주님께서 내게 주십니다.

그런데 마치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처럼, 그 평화로운 안식은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안식은 주님의 말씀과 삶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는 현실 노동계에서와는 동떨어진 기도의 세계에서나 얻을 수 있는 평화의 안식이 아닙니다. 현실의 갈등과 경쟁에서는 이겨내지 못하니까 내게 맞는 적당한 포기와 차선의 선택으로 얻을 수 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현실에서 일방적인 양보와 손해로 이어지는 희생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나름 의미와 일리는 있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선택하기 꺼려지는 방법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경쟁이 무색하리만큼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으로 쟁취하듯 쏟아 붓는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현실과는 사뭇 다른 가치의 수용과 선택 그리고 식별과 헌신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얻게 되는 평화의 안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15,12)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방법은 나를 살리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님 생명을 주신 바로 그 가치와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해 주님께서는 주님 친히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렵게만 보이는 그 방법을 너무나도 편하고 가볍다고 말씀해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의 안식을 꿈꾸어 봅니다. 우리가 탐욕스런 소유욕과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권력욕 그리고 남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명예욕의 헛된 망상을 넘어서기를 기대하고 다짐하면서.

오늘 유난히도 이해인 수녀의 ‘수녀’라는 시의 첫 구절이 새삼 되뇌어집니다.

“누구의 아내도 아니면서

누구의 엄마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 여인아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부끄러운 조바심을

평생의 혹처럼 안고 사는 여인아.”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평화의 안식과 그 안식을 얻는 길을 따라 걷고자, 우리 수색 예수성심 성당을 찾아오신 예비신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여러분이 예비신자 교리 과정을 통해, 주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과 성사를 통해, 기꺼이 내려주시는 평화의 안식을 찾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연중 제14주일

(나해) 마르 6,1-6; 06/07/09

찬미 예수님!

안녕하십니까?

한 번 옆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아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잘 모르는 분이십니까?

우리같이 작은 공동체에서는 미사에 참석하면 대부분 옆 사람을 다 압니다.

그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대부분 다 압니다.

혹 과거를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그를 보아온 이래부터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는지는 어느 정도 압니다. 그래서 어떤 때 그가 무슨 소리를 하면, 그의 평소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너나 잘 하세요’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가 평소 언행을 조심하고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많은 봉사로 주위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면 그의 말마디에 수긍이 가고 동감합니다.

만일 우리 옆 사람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하셨던 것처럼, 나와 함께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면서 마치 동업이라도 할 듯이 나를 자기 인생에 초대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와 마음을 합쳐 좋은 일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아유 방해나 말지’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보이는 대로만 봅니다. 아니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만큼, 그리고 우리에게 보인 만큼 그 보인 대로 그를 안다고 여기고 그를 평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보아왔다고 자처하는 동네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좋은 말씀을 하시자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2-3)

그들은 예수님의 어린 모습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이 보아온 예수님이 자신들이 보아온 그 모습과 다르기에 이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스승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아는 너는 이러 이러한 단점을 지닌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 그 이상을 그들은 바라보지도 못했고 인정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도 우리 동네의 한 아기에 불과했고, 내 아이와 함께 지내던 철부지 그 젊은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가 아는 너는 내가 아는 너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변했지만 자기 인식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는데 사람의 인식은 고착되니 말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천부당만부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상대를 다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시기와 질투를 던진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내면과 진면목은 모릅니다.

우리 옆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자라왔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무엇을 어떻게 하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나를 바라보는 옆 사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더 더욱 잘 모르는 것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과거 우리가 잊고 싶고 씻어버리고 싶은 사건을 왜 내가 겪도록 만드셨는지?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우리를 어디로 어떻게 이끄셨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자리와 이 사람들을 통해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는지,

과연 다음 단계는 또 무엇이기에 나를 지금 이렇게 준비시키고 계시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의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꿈이 지금 얼마만큼 이루어졌습니까?

그리고 그 꿈이 자라면서 어떻게 수정되고 변화되었습니까?

그 꿈이 그냥 한 낱 지나가는 꿈처럼 어린 시절 누구나 가질 수 있었던 단순한 소망과 바람이 아니라, 그 꿈이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신 꿈이었다면 그 꿈을 우리가 어떻게 가꾸고 있는지 되새겨 봅시다.

우리가 지니고 가꾸었던 그 꿈을 오늘 내 인생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을지!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듯한 이 현실 세상 속에서 주님께서 내 영혼에 심어주신 사명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꿈 많던 어린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이제 어른이 되어 내 꿈을 꿈으로만 그치지 않고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내 인생의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서 다시금 아니 이젠 진정으로 주님께서 내게 심어주신 고귀한 이상과 사명을 실현해 보기로 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도전해 볼 수 있는 만큼이 얼마 만큼이고, 어떤 방법으로, 어느 방향으로, 어떤 의미에서 이룰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동시에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그 영혼 속에 심어주신 고귀한 이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배려하며 존중해 주기로 합시다. 함께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함께 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심어주신 하느님의 고귀한 이상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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