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일
오늘 복음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
"교회가 살라고 하는 방향이 정확히 무엇이냐?“
등의 질문에 답을 하는 듯합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하고 묻습니다. 다시 풀어 말하면,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에게 반문하시며 그의 답을 요구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그 율법학자가 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27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율법학자와의 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정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하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으십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길가에 쓰러져 있는데 사제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쳐 버리고,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수라고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돌보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33-34절)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35절)
그러시고는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학자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그 율법학자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37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라고 하십니다. 결국 율법학자는 잘난 척 하다가 숙제만 하나 더 얻은 셈이 되고 맙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제가 사제가 처음 되었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엔 교회에 얽매여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다, 현실 교회 안에서 천주교 신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놓여 있는 듯합니다. 성당에 혹시라도 가난한 이들이 찾아오면, 이 사람이 가난을 핑계삼아 사기를 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도와주어야 하는 것인지를 식별하느라 긴장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활동적인 사회사목분과원들이나 빈첸시오회원처럼 누군가 사제와 함께 그 식별과정을 함께해 주기라도 한다면, 그냥 단순히 지나쳐가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습니다. 비단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 교회의 사제가 짊어진 일들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면, 사제뿐만 아니라 그 교회가 이 현실 사회의 요구를 지나쳐 버리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사제적 백성으로서의 자기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엔 ‘옳으냐 그르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대도 중요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그것도 조직적으로 함께할 때, 비로소 더 낳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의 진정한 본질입니다. 잘난 어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라, 함께 서로의 장점을 나누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합쳐서, 보다 더 나은 한층 더 고양된 하나로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양성 안의 일치와 연대가 현대 교회의 화두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누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냐를 찾아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더 본질적인 것은 저기 멀리 외국이나 가난한 나라의 양로원이나 고아원에 사는 불쌍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곧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27절)하는 제2계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이 어떻게 얼마만큼 하느냐가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얼마만큼 할 것인가를 정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내 주위에, 누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조차 알고 있지 못한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처럼 지나쳐 가는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그야 말로 창피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비단 주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우리는 그 누구의 이웃도 되지 못할 것이고, 그 누구도 우리의 이웃이 되어 우리와 함께하려 들지 않아서, 아무런 이웃도 없이 쓸쓸하고 외롭게 살게될지 모릅니다.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늘 주위의 형제자매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합시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향해 "자비를 베"(37절)품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 주"(36절)기로 합시다. 오늘 미사를 드리며,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우리 본당 식구들에게 기꺼이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비단 성당에서 함께 미사드리고, 함께 활동하며, 구역반에서 함께 사는 식구들뿐만 아니라, 처음 만나는 이들과도 함께 인사하고 서로를 나누어,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또 실제로 이웃이 됨으로써,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된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연중 제15주일
용소막 정남진 안드레아 신부님 후원모금강론
찬미 예수님
용소막 성당이란 이름은 많이 들어보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워낙 오래된 본당이기도 하고요. 본당 설립된 것이 1904년 5월 4일이니 벌써 거의 120년이 다 되어갑니다. 명동성당이나 약현성당, 풍수원 성당 같은 오래된 순례지이기도 하고요. 당시 이야기를 조금 들려드리면... 당시 성당을 지을 때, 외국 신부님은 신자들 사는 모습을 보고는 이분들이 성당 짓는 데에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나 싶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일을 시작하고 보니 달랐던 거예요. 정말 기술이 필요한 부분이야 중국 기술자가 투입됐지만, 벽돌이나 목재 같은 재료들은 신자들이 직접 공수합니다. 붉은 벽돌, 회색 벽돌도 직접 가마터서 다 구웠고, 목재 같은 것은 저 멀리 배론에서 잘라다가 장마 때를 이용해서 물에 둥둥 띄워서 줄을 묶어 가져왔다고 합니다. 인력이 필요한 부분들도 스스로 다 해내십니다. 당시에는 멀리 영월, 단양 지역도 용소막 관할구역이었는데, 그 먼데 사는 신자들이 여름엔 각자 집에서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짐을 싸 들고 와 신자들 집에 머물면서 겨울 내내 성당을 지었다고 합니다. 당시 용소막 총회장님 가족들은 자기 논에 농사를 지을 시간이 없어, 신자들이 총회장님의 논농사를 대신 지어 주었다고 하니,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요?
하지만 용소막 건물들은 그 오랜 역사만큼 많이 낡아 있기도 합니다.
1) 교육관 같은 경우는 이미 수십 년이 지나 오래되기도 했지만(40여 년), 당시 부실 공사로 지어져서 금이 가고, 벽체가 무거운 콘크리트 지붕을 버텨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더 이상 리모델링을 할 수 없어 부수어야 하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2) 선종완 신부님 유물관 역시 처지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건물 역시 그 옛날, 유물관으로서가 아니라 그 없던 시절에 고아들 유치원으로 쓰려고 지은 창고형 건물입니다. 부실하기 그지없는 데다 건물 위치 역시 신자들 동선을 가로 막고 있는 상황이고요. 선종완 신부님은 성서학자시면서 처음으로 구약 성경을 원어에서 우리 말로 번역하신 분으로, 이 유물관은 신부님의 삶과 업적을 알리면서 우리가 편하게 읽고 있는 이 우리말 성경이 어떤 고된 과정을 거쳐서 우리 앞에 오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인데... 이 열악함 속에서 이 건물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해 안타까운 곳입니다.
3) 수녀원 건물은 신자들이 옆에 있는 강이나 산에서, 돌무더기들을 머리에 지고 와서 직접 지은 돌집입니다. 오래전에 지은 거라 굉장히 좁기도 하지만, 이 돌집이 단열이 안 되어 정말 춥습니다. 겨울에는 수녀님들이 그야말로 냉동고에서 사십니다. 한 마디 불평도 안 하시고 계시길래 몰랐는데, 겨울에 무심코 들어갔다가 방 온도가 17도밖에 안 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수녀님들은 신자분들께 부담드리고 싶지 않다고 만류하시지만, 우리 신자분들은 하나 같이 수녀님들 수녀원은 꼭 다시 지어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셔요.
하지만 용소막의 오랜 역사가 건물에만 묻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세월은 신자분들 연령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용소막이 오래된 만큼, 우리 어르신들도 연세가 많으십니다. 시골이라 이젠 사람도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다 다른 곳으로 나갔고요. 원주 8경이라고, 성당이 너무 예쁘다고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만 정작 도움을 주는 분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대다수가 노인인 이 성당에서 이분들이 성당을 힘겹게 지키고 보존하고 계십니다.
명동성당을 대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 이 성당이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있어서인지 한국 신자라면 명동성당은 함께 지켜야 할 유산으로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용소막 역시 그런 한국 천주교회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지켜 주어야 할 모두의 유산이고 보물입니다. 이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얼마 안 되는 우리 어르신들이 힘겹게 짊어지고 계시는 것 같아 늘 마음이 아픕니다.
사실 걱정도 많습니다. 성당 건물 짓는 거 아니라고 관심 가져 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외면당하면 어쩌나. 하지만 용소막 성당이라는 이름 아래엔, 이 성당 건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져 하느님의 집이 됩니다. 교육관도, 수녀원도, 유물관도 하느님이 머무시는 하느님의 집입니다. 하느님 집을 짓는 이 일에, 우리 어르신들의 어려움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본당에서 어떤 어르신들은 ‘하느님 집’ 사업을 위해서 공공 근로(노인 일자리)를 하십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그 작은 봉급을 매달 모아 가져다주십니다. 어떤 분은 일부러 배추 농사를 한 고랑 더 지어서, 어떤 분은 요양 보호사를 일부러 한 집 더 다니시면서 그 돈을 따로 모아 내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느님의 집 하나하나가 그냥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저런 소중한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서 하느님의 집이 봉헌되는 것이구나 싶습니다.
저는 제 개인의 영화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내 돈 벌겠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지요. 우리 사랑하는 어르신들, 이분들을 대신에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 용소막 성당을 조금만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의 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얼마나 애써 힘들게 벌고 계시는 줄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께 청하는 것이 너무 죄송스럽고 낯이 없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재물이라는 것은 뜻있게 썼을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돈이 없어 못 쓰는 시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디에 내 돈을 의미 있게 쓸 것인지를 찾게 되는 시대가 아닐까요. 의미 있는 곳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 재물을 쓸 줄 아는 것이 진정으로 성숙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용소막 성당은 이곳 어르신들만의 공간일 수 없습니다. 이곳은 한국 신자 모두의 소중한 유산이며 집일 것입니다. 어르신들의 어려움에 여러분들이 함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문의: 용소막 사무실 건축 모금 담당 : 010-2629-2343
후원 계좌: 농협 351-1039-8752-03 (천주교원주교구유지재단)
(이체하실 때, 보내시는 분의 성함 뒤에 본당명을 함께 써주세요: ‘홍길동등촌3동’)
연중 제15주일
우리는 가끔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옛날에는 잘 했어요.” “옛날에는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옛날은 시간이 지나듯 가버리고, 오늘은? 지금은? 그 옛날의 영화에 어울리지 않게 그냥, 아니 어쩌면 과거 우리의 결과가 오늘의 이 모습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는 더 약해지고 과거의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게 점점 초라해 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독수리의 수명은 70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독수리가 다 70년을 사는 것은 아니랍니다. 몇 마리만 제 수명을 다 살 수 있답니다. 그 몇 마리는 40년이 지난 후에 아무도 몰래 바위산의 꼭대기로 올라가, 자기 부리로 바위를 찍어 두꺼워진 자기 부리를 다 쪼개 새 부리가 나오게 하고, 새로 나온 부리로 자기 발톱을 찍어 발톱도 새롭게 하고, 새 발톱으로 날개를 다 뜯어서 새로운 날개로 만들어 새로운 생애를 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답니다. 그렇게 자기를 재생시킨 독수리가 70년의 수를 다 누리게 된답니다.
독수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어제나 과거의 영화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날마다 ‘우리의 나약해진 육과 안락하고 풍요한 오늘의 내 처지 때문에 더 이상 도전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꾸준하고 충실히 계속 정진하고 단련하지 않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인생의 길을 안내하고, 생명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씨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와 그 말씀과 함께하는 우리 인생의 역사를 밭에 비유하여 말해주십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마태 13,3-4)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19절) 결국 예수님의 좋은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과 어긋나고 심지어는 반대되는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리스도교 신비의 영역에 대해 인정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절)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해 주십니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20-21절) 결국 성당에 나오는 것이 자기에게 경제적이고도 현실적으로 이익이 되면 나오고, 그렇지 못하거나 오히려 손해를 보면 안 나오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성당에 나와 위로도 받고 좋은 동료들이라도 만나서 함께 하기를 바라고 나왔지만,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위로를 받지 못했다거나, 좋은 친구를 만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함께 일하다가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기고 섭섭한 감정을 간직한 채 떠나는 사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절)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해 주십니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절) 결국 이 세상에 자기 하고 싶은 일과 실제로 하는 일이 많아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당에 나오는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마음에만 간직하고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 역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8절)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해 주십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23절) 즉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그 뜻을 깨달아 실제 자기 삶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이루고 실현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시작하고 이미 지금 여기서 벌써 하늘나라의 삶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제 남은 수를 다 누리기 위해 오늘 자기 부리와 발톱과 깃털을 스스로 짓이겨 새로 만들어내는 독수리처럼, 과거와 옛날이라는 두껍고 무겁기만 한 영예의 옷을 벗어 던지고, 다시 한번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는 좋은 땅’(23절)이 되기 위해 “(들을) 귀 있는 사람”(9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성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0-21) 라고 말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의 미래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우리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인내로 새로 납시다.
지금까지의 생애에서 우리가 체험해 왔듯이, 어릴 때나 부모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셨지, 성인이 된 지금, 누가 우리의 생애를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가 대신 채워주지도 않습니다. 주님도,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지 않고, 주님께 찬미를 올려드리지 않고, 불평과 불만 그리고 자기 불만족으로 마치 자해하듯 자신을 깍아 먹고, 주위와 사회를 탓하는 이들에게서는 그 닫힌 마음 때문에 아무 일도 하시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께 그리고 형제자매들에게 마음을 열고, 생애와 존재 자체로 감사드릴 것을 찾으면서, 그 관계를 되새기며, 함께하고자 하는 이에게 은총과 축복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아니, 이미 내게 주어진 은총과 축복이, 주님과 형제자매들에게 감사하며 주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내 안에서 싹트기 시작하고 기지개를 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려거든 주님께 다가가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청하십시오.
‘저를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시고 이끄시는 주님,
오늘 제가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자 하는데,
이 일을 하고자 하는 제 마음이 주님의 뜻 안에 있다면 받아 주시고,
주님의 뜻 안에 없는 것이라면 수정해 주시어 주님의 뜻에 맞게 변화시켜 주시며,
이 일로 말미암아 저뿐만 아니라 주님과 형제자매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기회가 되도록 허락해 주시고,
축복해주시며,
친히 함께하시어,
이루어 주소서.
아멘.’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연중 제15주일
한때 우리는 어렵게 살았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충분치 못해서 이래저래 고생하면서 살았습니다. 옷은 매일 남의 것을 대물려 입고, 고기도 명절이나 기제일이 되어서나 얻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콩 한 톨도 칼로 잘라 나눠 먹으면서 우애를 키우며 자라났습니다. 심지어는 한국 천주교회 사회복지사를 연구하다 보면, 우리 선조들은 성당을 짓기도 전에 먼저 양노원이나 고아원, 시약소(초기 보건소)를 먼저 지어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빈곤했고, 가난했지만 그나마 있는 것을 나누어 먹고 삶으로써 나름 행복했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은 먹을 것이 풍족하다 못해 다 먹지도 않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고, 싸놓고 있다가 상해서 버리기까지 합니다. 부부가 맛벌이를 해도 남는 돈이 없다고들 하지만, 아이들 공부시키랴 유학보내랴 엄청난 돈을 퍼부어 넣고, 정작 부모는 휴가 때 어디 가질 못해 성당에 옵니다. 도로는 관광버스로 가득 차 있고 노는 날이면 유원지마다 인산인해입니다. 비행기는 늘 만석이며, 관광지 곳곳의 숙박업소는 꽉꽉 찬다고 합니다.
현대는 삶의 질의 향상과 소비성향의 다양화와 고급화로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대에 비해 여러 가지로 풍족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빈곤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풍족해 졌으면서도 덜 행복해 하면서 살아갑니다. 물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기회적으로 더 많이, 더 자주, 더 먼저, 더 좋은 것을 갖고 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데서 오는 상대적인 빈곤함과 박탈감이 우리를 우울하고 불행하게 만든다고 여깁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율법 교사가 유다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루카 10,28) 라고 으쓱대며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자, 그가 다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고 몸마저 폭행을 당해 초주검이 되어버렸습니다. 얼마 후 한 사제가 그 곁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마주치고는 길 반대쪽으로 멀찌감치 지나가 버립니다. 사제는 제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지, 교리를 가르치러 가야 하는지, 면담을 하러 가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해야 하는 종교 일정에 맞추느라 그런지 몰라도, 마치 강도 만난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거나 자신에게 해라도 끼칠까 걱정스러운지 멀리 돌아가 버립니다. 그 다음에 유다인의 사제 지파라고 하는 레위인 역시 그 곁을 지나가다가 멀리서 그를 보고는 피해갑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그를 보기는 하지만, 선뜻 나서서 도와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마치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처럼, 어느 누구 하나 찾아와 ‘많이 아프냐?’고 걱정스런 말 한마디 내 걸어주지 않고, 누구 하나 어루만져주지도 않은 채, 이러 저러한 이유로 자신들의 인생에 빠져, 어려운 이웃은 돌봐줄 틈 없이 지나쳐가 버립니다.
그런데 이 때, 평소에 유다인들과의 관계에서 원수같이 지내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는 그를 바라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의 몸에 손을 대며 그의 상처와 고통의 정도를 살핍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줍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강도 만난 사람을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가 간호해 줍니다. 밤새 그를 돌보던 사마리아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자기,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맡기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자기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까지 호의를 베풀며 자기 길을 떠납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고는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그러자 율법 교사는 부끄러이 대답합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37절ㄱ)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ㄴ) 예수님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율법 교사마냥, 어려운 사람과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사람이 등장했을 때, 자기가 아는 대로 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해가 버립니다. 어쩌면 율법 교사도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종교지도자들처럼 다르지 않았는가 봅니다. 그가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다음에는 더 이상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며 으쓱대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교회가 강조하는 가난은 곧 이웃에게 나눠줌으로써 가난해지는 선택한 가난, 다른 말로 이웃 돕기로 말미암아 없어진 가난을 이야기합니다. 그럼 어느 정도까지 가난해져야 합니까? 교회는 나와 내 가정의 오늘과 내일의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을 유지할 만큼의 여유를 남겨놓고 나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민족과 사회의 형편에 비추어 각자가 정합니다.
이웃 돕기를 많이 하기 위해서는 내가 돈을 많이 벌고 또 교회 내에 부자가 많아져야 합니까? 꼭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부자보다는 가난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심정을 잘 알기에 더 잘 도와줍니다. 아니 동감하고 동정하기에 누구보다 먼저 나누게 됩니다.
가만히 앉아 따져보면, 미래를 위한 저축은커녕 오늘 나 살기도 빠듯한데 이웃과 나눌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누는 것만큼 아니 어떤 때는 물질뿐만 아니라, 나누는 기쁨과 보람까지 합쳐 10배 이상을 다시 채워주시고 갚아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의 믿음을 통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간의 다섯 번째 행복을 자기 성취와 실현 너머의 나눔에서 오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눔은 주는 것만이 아니라 받는 것도 나눔입니다. 없던 것이 들어와서 기쁜 것일 뿐만 아니라 나를 찾아와 나와 함께 자신을 나누는 그 형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어서 또 기쁘고 행복합니다.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면서,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는 이 성서 구절을 통해, 교회는 근대 사회에서 자본가와 기업가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데 대해 노동자들이 반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가 자본가들의 편에 서서 당대 재산의 불균형과 소득의 불공정한 분배 상태를 미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이 구절을 통해 가난을 찬미하면서, 나중에 죽으면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터이니 지금 가난하게 살아도 된다고 노동자들을 호도한다는 평가와 그에 대한 단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1833년 파리 대학의 프레드릭 오자남과 6명의 동료 대학생들은 이 구절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도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물질적 정신적인 것들을 제공해주자고 나섰고, 그로부터 성 바오로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설립되어 오늘날 전세계 교회의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교인인 우리가 가난한 형제들을 외면하게 된다면, 또 다시 세상은 교회에게 도전해 올 것이며, 우리가 듣고 나누고 믿는 예수님의 복음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위선과 방해물이라고 평가하고 단죄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2의 니체와 제3의 니체가 나타나 그리스도교인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는 죽었다고 외칠 것입니다.
오늘날의 가난은 비단 물질적인 결핍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인간 삶을 위협하는 모든 형태의 어려움을 가난으로 보아야 합니다. 육체적인 질병, 정신적인 불안정과 외로움, 사회적인 소외와 고립, 제도적으로 제한된 기회와 정보, 물질만능주의와 매스 미디어를 통해 영향력을 가중시키고자 하는 큰 손들의 횡포, 전통문화와 가치의 몰락과 편중 등등의 어려움에서 헤매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복음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드러내고 그로 인한 기쁨이 참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삶으로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우리 신자들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운 이를 발견하고, 다음 기회나 다른 이에게 미루지 않고,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향한 측은한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고 그의 어려움을 보듬고 싸매어 돌보는 모습입니다. 누가 가난한 이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그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님께 그 어려운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 어려운 이에게 다가가고, 대화하며, 주님과 나와 어려운 이와의 삼위일체적인 인격적인 관계를 공유하며, 어려운 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그(녀)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자신이 한 조치와 행위가 주님 사랑 안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께서 몸소 함께해주시라고 청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만일 어려운 이에 대해 조사하고 심사하고 실행하고 평가하는 일에 그친다면, 우리는 사회복지사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방법론은 먼저 주님께 그 어려운 이를 위해 기도하고 봉헌하며, 그에게 측은한 마음을 간직한채 그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삶과 사랑과 신앙을 공유하며 함께함으로써, 주님께서 몸소 그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청하는 주님의 사도가 취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눈에 어려운 이들의 모습을 띄게 하고, 우리 귀에 어려운 이들의 호소를 들리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어려운 이를 맡기시는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기리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가 발견하고 경험하는 어려운 이들을 주님께 봉헌하고 기도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의 나눔을 이어갑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연중 제15주일
우리 모두는 어쩌면, 세상에 나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까?’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신앙을 접하면서부터, ‘어떻게 하면서 살아갈까?’ 하는 삶의 의미와 질도 찾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성 바오로는 한 편의 시와도 같은 찬미기도문을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냅니다. 이 기도문은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친히 보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의 마음을 꽉 채워줍니다. 이 기도문에서 사도 성 바오로는 우선 우리 인간을 창조하고 먹여 주고 돌봐 주고 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찬미를 올려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에페 1,3ㄱ) 이어서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깊이와 혜택을 기억하며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3ㄴ) 하느님께서는 지금은 현세를 살면서 죄악에 물들어 허물이 많아진 우리를 애초에 선택하셔서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4절)
이는 온전히 아버지 하느님의 용서하시고 감싸주시는 무한한 사랑의 덕분입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5절)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찬미를 드리는 이유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이,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감당하기에 벅찬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6절)
우리가 주 예수님에게서 받은 은총은 바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마저 내어주신 구원의 은총이며, 그 은총으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다시 아버지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7절) 이 은총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려고 하실 때 이미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안배하신 구원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8절ㄱ)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큰 은총을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는 신비를 우리에게 보낸 예수님을 통해 알려주시고 드러내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8ㄴ-9절) 참으로 영광스럽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벅차고 분에 넘친 은총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만 베풀어주실 수 있는 권능의 구원이며, 참으로 우리가 감히 기대하거나 마땅히 받을 수 있기에는 부당하기까지 한 은총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머리로 하여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도록 안배하십니다.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10절) 아버지 하느님께서 모든 권한을 주시고 땅에 있는 우리에게 보내 주신 아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사업에 따라 우리 모두는 각자 주님 사랑 안에 자리 잡게 되었고,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 명단에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11절)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마침내 아버지의 나라에 다다르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12절) 아버지 하느님과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조금 더 깊이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주 예수님의 사랑을 마치 피부로 느끼듯이 생생히 느끼면서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실현하며 한 걸음씩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13절) 성령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정성과 열정이 무르익어 마침내 열매를 맺어 주님 앞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거듭 주 예수님을 깊이 알고 체험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함몰하여 삼위일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14절)
이 기도문을 통해 사도 성 바오로가 느끼고 깨달아서 찬미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도 기쁨과 확신에 차서 주님을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지금 어떻게 희생하고 계시는지를 느끼고 체험하는지?
주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넘쳐흐르는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느끼고 깨우치는지?
이 질문에 ‘네’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요, 주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 6,8-9) 라고 이르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만일 주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듯이 확연히 느낀다면, 우리가 만일 주 예수님께서 나를 구하시기 위해 주님 자신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생명을 나누어 주심을 절절히 체험할 수 있다면, 우리가 만일 우리 눈에는 직접 보이지 않지만, 성령께서 나와 함께하시면서 나를 보호하시면서 나를 주님께로 이끌고 계신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신뢰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주님께 맡기고 안빈낙도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내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함께하시며 마침내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복음의 말씀이 비춰주는 대로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살면서 이러저러한 환경을 바꾸면서 삶의 편의와 질을 향상시키고자 꾀할 수도 있겠지만, 복음 말씀을 이루면서 살겠다는 굳은 신뢰와 의지로 다른 변수들을 잊어버리거나 차제에 두고서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복음의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고 예견하십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10절)
비록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전하고 살아가는 양식인 복음의 기쁜 소식을 인정해주거나 들어주지 않고 따라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할 바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예수님의 분부대로 제자들은 파견되어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12-13절) 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삶의 방향과 길을 일러주시는 듯합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당장 선교사가 되어 집과 가족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자리 그 상황에서 예수님의 복음이 비춰주는 길과 방향을 찾읍시다. 묵묵히 그리고 꾸준하고 성실히 복음 말씀을 실현하며 우리 자신을 복음화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우리가 추구하는 하느님 나라를 이루며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로서 나와 함께하는 가족과 일가친척과 동료와 이웃 친지들에게 삶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이끌면서, 주 예수님께서 펼쳐주시는 참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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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일
“사람은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이 알아듣는 만큼만 알아듣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똑 같은 말을 들어도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만큼만 알아듣는 경우가 있고, 다른 생각을 하다가 잘 못 들은 경우도 있고, 제대로 알아듣기는 해도 그 말을 듣고 자신에게 들려주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변화되는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영화나 작품을 바라보듯이 한 걸음 떨어져 평가하고 분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 13,3-8)
그러시고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9절)라고 덧붙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을 해 주실 때 다 똑같이 좋은 말씀으로 들려주시도록 전해주시지, 왜 어떤 사람에게는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처럼 형편없이 들리도록 전해 주시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15절)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군중들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러시고는 제자들에게 따로 이 비유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19절)
어떤 사람은 좋은 집에 살면서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출세를 해서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웬 딴 나라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고, 오히려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20-21절)
어떤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미 깊게 받아들이기고 그 말씀에서 새생명의 빛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깨달음과 감격은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질 뿐 현실의 각박함이나 이해관계 속에서 곧 묻혀지고 맙니다. 하늘 나라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절박함이 없거나 간절함이 없으면 예수닝의 말씀은 그저 값비싼 골동품이요 도서관의 귀중한 자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을 말을 무시하라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모든 말들과 문화들과 사상들을 존중하지만, 선택의 귀로에서 상대화되거나 열등의 순위에 머무르시기는 원치 않으십니다. 다른 아버지가 그럴싸해 보인다고, 우리 아버지를 다른 아버지와 바꿀 수 없은 것처럼 말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절)
세상 경험이 많다고 여기고, 굴곡진 인생을 산 사람들 중에는 ’적당히‘라는 말을 즐겨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좋은 줄은 알지만 세상에 사람을 감격하게 하고 혹하게 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그런 좋은 명언 중의 하나로만 여기고 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한데, 일단 나 먹고 산 다음에 여유가 있어야 선택할 만한 이웃 사랑이니,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한 양보니,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이니 거론할 단계가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살다 보면, 활동하다 보면 적당히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마주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한 번에 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것을 싹 하루 아침에 다 바꾸시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반쯤 허리를 빼고 예수님의 말씀을 저울질하거나, 다리를 반만 걸치고 시작도 하지 않은 채 비교만 하면서 어떻게 다가올지도 모를 안 좋은 상황을 미리 가정하고 걱정하며 지레짐작으로 주저앉고 만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19-23절)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고 나니, 예수님의 말씀이 진정 생명의 빛이더라.”고 선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기 저기 그럴싸한 것들과 곳들을 다 거치고 나서, 결론적으로 찾는 주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배냇신자로 어려서부터 아무런 의심이나 흔들림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곧게 살아온 순수하고 충실한 주님과 교회의 사람으로서 묵묵히 걸어가며 성취해가는 복음의 길도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새생명의 말씀이라는 같은 선물을 받으면서도, 어떤 이는 자신에게 아주 귀한 것으로 여겨 감격하여 받을 수 있고, 어떤 이는 그렇게 귀하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고, 심지어는 하찮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학자는 행복이 기대와 욕망 분의 성취도라고도 말합니다. 자신의 기대와 욕망이 크면 클수록 행복이라는 성취도는 작아질 수 밖에 없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기대와 욕망이 복음 말씀과는 전혀 다른 방향과 목적에 있다면, 영적인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헤매일 수도 있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시며 우리 인류를 구하시고 이끄시는 주 하느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길을 찾고 진리를 발견하며 영원한 생명의 길로 접어들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은 복음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입니까?
여러분은 복음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에 큰 감동을 받으십니까?
여러분은 복음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십니까?
주님의 복음 말씀이 여러분 삶에 참으로 기쁜 소식이길 바랍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새생명의 빛이시기를 바랍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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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일
미사의 영성 6 봉헌
예언자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1열왕 17,1 참조).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비가 안 오니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특별히 농사를 잘 짓게 해준다던 ‘바알’신에게까지 기우제를 지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삼 년’(1열왕 18,1)이 흘렀습니다. 엘리야가 백성들 앞에 나서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21절) 엘리야는 바알 예언자들에게 도전장을 내고 카르멜 산 정상에서 대결을 합니다. 먼저 바알 예언자들이 하루 왠 종일 하늘을 향해 기도를 바치며 외쳤지만 하늘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23-29절). 그리고 엘리야는, 일찍이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린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돌을 열두 개 가져왔습니다. 엘리야는 그 돌들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제단 둘레에는 곡식 두 스아가 들어갈 만한 도랑을 팠습니다. 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황소를 토막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물을 네 항아리에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시오.” 하고 일렀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두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두 번째도 그렇게 하자, 엘리야는 다시 “세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일렀습니다. 그들이 세 번째도 그렇게 하였을 때, “물이 제단 둘레로 넘쳐흐르고 도랑에도 가득 찼다.”(31-35절) 그리고 나서야 엘리야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37절) 엘리야의 기도가 끝나자 마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의 장작과 제물과 도랑의 물을 다 태워버렸고, 백성들은 야훼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심을 믿게 되었고, 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채 내려오기도 전에 비가 홍수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38-46절).
엘리야의 기적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봉헌과 연관하여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기우제를 준비시키는 가운데, “물을 네 동이씩 세 번 제물 위에 부어 제단 주위로 넘쳐흘러 옆 도랑에 가득 괼” 정도로 제물 위에 부으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자, 삼 년이나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남은 물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 고이고이 신주 모시듯이 아끼고 아껴야 할 물을 제물 위에 부으라니! 그것도 엘리야가 제단을 쌓을 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여 열두 개의 돌을 모았다면, 네 동이씩 세 번 부은 물은 이스라엘에 남은 물 모두를 주님께 바치라는 요구였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했을까? 아까워서 그리고 불안해서 못 내놓는 이들에게 한 번 더, 한 번 더해서 결국 열두 지파의 것 모두를 바치라고 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신약에서도 행실 나쁜 여인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요한 12,3)을 때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4-5) 만일 엘리야와 함께 하느님께 기우제를 드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심을 믿지 못한다면, 믿더라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워 물마저 다 말라 버릴 줄 알고 아까워했더라면, 엘리야의 지시대로 물을 주님 대전에 가져다 부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유다)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6 참조) 주님은 주님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1열왕 18,45)
이러한 봉헌의 자세는 같은 열왕기 상권 17장에 나오는 시돈 지방의 사렙다 과부에게서도 드러납니다. 가뭄 중에 엘리야가 과부에게 물과 빵 한 조각을 달라고 하자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12절) 라고 답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내 놓으라고 하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15절)
우리는 미사 전례에 드러난 봉헌의 전형적인 모습을 창세기 22장 1절에서부터 18절까지 나오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대로 그의 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0세에 얻은 자신의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아브라함(창세 22,5)의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아들 예수님의 믿음을 발견합니다. 또한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등에 지고(6절 참조) 야훼이레로 올라가는 이사악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스스로 제물이 되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모습! 그리고 또 한편 인간에게는 인간이 애지중지하는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치 않으셨던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상의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시는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 이것이 봉헌을 가능케하고 이루는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냥 단순히 아버지의 명령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정말로 옳은 것이기에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ㄱ) 하느님 아버지께 향한 아들 예수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 그리고 그 희생 제사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 라는 희생 제사이며, 미사 봉헌의 의미이며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 봉헌은 그냥 죽음으로 그치지 않는, 아니 그칠 수도 없는 부활의 영광을 향한 희생 제사이며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러한 봉헌이 이웃을 구원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2,16-18)
이제 봉헌의 시간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상의 문제들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 눈앞에 닥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것 하나도 제대로 응답하지 않고, 또 우리가 섣불리 응답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에 스스로 알아서 살아 나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합리적인 이성을 앞세워 강변하며, 엄두도 나지 않고 또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오늘도 부담 속에서 자신을 애써 합리화하며 지나치려고 하십니까?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마태 14,15)
아니면, 매일 나와 우리 한 가족 먹을 것조차 넉넉지 못하지만 “이것이라도 써 주십시오.” 하며 바치겠습니까?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 주님께 다시 드리오니 써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우리의 봉헌은 하늘 나라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9.11.13) 그러므로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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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일 - 성 원귀임 마리아 순교기념 천상탄신 경축미사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부제 강론
찬미 예수님, 이번 한 주간 주님의 사랑 안에 행복한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서울 신학교 신학원생 중에 코쟁이 미국 신학생이 있습니다. 머리가 노란 미국 사람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한국 성인전을 읽다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보다 한국 성인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국 성인들에 대한 공부를 더욱 더 하게되었습니다. 오늘은 성 원귀임 마리아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녀 원귀임 마리아(1819-1839년)는 1818년 고양군 용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9살 되던 해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셔서 고아가 됩니다. 고아가 된 원귀임은 열심한 교우인 고모뻘 되는 원 루치아의 집에서 삯바느질을 하면서 생활하게 되었고, 원 루치아로부터 요리문답과 경문을 배웠다고 합니다. 원귀임 마리아는 15세의 나이에 세례를 받고, 얼마 안 있어 동정을 지키기로 서원하고 이듬해에 머리를 올려 시집간 여자 머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성녀는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누구보다도 신앙이 깊어 복음을 실천하려고 애썼으며, 박해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웃에게 예수님을 전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6년 후 기해박해가 일어납니다. 원귀임 마리아도 포졸들에게 잡혀 심문과 배교 유혹, 고문을 5개월간 받았습니다. 심문을 받으며 포도대장과 나눈 대화가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포도대장이 묻습니다. “네가 천주교인이냐?”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배교하라. 그러면 살려주마.” “저는 천주를 공경하고 제 영혼을 구하고자 합니다. 제 결심은 단단해서 죽어야만 한다면 죽겠습니다. 그저 무엇보다도 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배교하면 영혼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성녀께서는 7월 20일,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성녀에 대하여 보면서 저는 곧바로 순교에 대한 열망이나 나도 순교해야지 하는 생각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포도대장과 성녀의 대화 속에서 ‘배교하면 영혼을 잃게 됩니다.’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배교가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없다.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죠. 배교하면 영혼을 잃게 되는데 그럼 반대로 영혼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느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계시다.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하는 일은 나만 하느님을 만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하느님을 모든 이에게 전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은 밖으로 나아가야 하고, 모르는 이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드리고 있는 미사에서도 드러납니다. 사실 ‘미사’라는 단어는 라틴어 missa를 음역한 것이죠. missa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보냄, 파견’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미사가 끝날 때 뭐라고 외치죠.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바로 이 파견 때 외치는 이 문장에서 미사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말에서 미사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은 초기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는가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 때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에서는 “교회는 본성상 선교적이다”(2항)라고 말함으로써 교회의 존재이유와 선교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 선교이며, 교회에서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선교’라고 했을 때,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은 해외 선교입니다. 이태석 신부님같이 복음이 아직 전달되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 성당 건설하기, 세례를 주는 것이 떠오릅니다. 그럼 성당이 온 동네마다 있는 한국, 특히 서울에서는 선교할 일이 없는가. 아니 있습니다. 오늘날 선교의 가장 큰 특징은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1975년을 기점으로 선교를 재해석하여 ‘복음화’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는 새로운 선교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지역에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교회를 확장하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성당 밖 가정이나 직장, 학교에서 복음적인 생활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사회, 생활하는 문화, 생각하는 의식구조 등을 복음의 가치가 살아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 선교는 성당 안의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는 신앙생활을 강화하는 것이고, 성당 밖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복음화는 성당 안팎의 사람들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성당 안에 있는 우리들은 성당 밖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복음의 기쁨 49항에서 “자기 안위만을 신경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로 전하는 것이든, 행동과 생활로 전하는 것이든, 전하고 표현함으로써 영혼을 구하고, 하느님과 함께 있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내가 믿는 바를 기도와 행동으로 표현하고, 기도한 바를 살아가야 믿음은 굳세어 지고, 하느님은 점점 가깝게 느껴집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반대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의 선행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따라와야지, 내가 말한다고 따라오나? 나만 부끄럽지!’ 라는 생각이 들 때어 망설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인들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단어를 외치며 선교할 때 거부감이 들었던 때가 떠올라, ‘내가 성당에 가자고 말하면 오히려 역효과 나지 않을까?’하는 우려로 주저할 때도 있습니다. 또 가족들도 “엄마나 가시죠.” 라고 말하거나, “신앙의 자유가 있다.” 라고 말하면 뭐라 답해야 할지 참으로 당황스럽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난감하지 그지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에 나설 용기가 없습니다. ‘내 삶이 부족한데 누구에게 믿음을 전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듭니다. ‘나도 잘 모르는데!’ ‘말이나 잘하는 사람이 전해야하지 내가 하면 누가 듣기나 할까?’ 하는 우려도 듭니다.
그런데 과연 이 세상에 정말 모든 것을 다 알고, 삶도 거룩하고 완벽하게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나 사두가이를 뽑으시지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 존중해주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는 어부들과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들을 제자들로 뽑으셨습니다. 그들을 사도로 변화시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실 하느님께서 부르셔서 신자가 되었고, 또 이렇게 주님 앞에 서서 선교의 대열에 서도록 불림을 받은 것입니다.
또 다른 시각으로 볼 때, 우리 주변에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무시당하고 억울한 상황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의 씨앗이 아닌, 생명과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선교하고자 하는 마음만을 간직하고 나서지만, 실제로 우리의 입을 열어 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고 우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주 하느님을 알리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주 하느님이십니다. 단지 우리는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활동하시도록 우리를 도구로 맡겨드릴 뿐입니다. 사실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일이기에 하느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오늘 성녀 원귀임 마리아의 기념 미사를 드리며, 성녀의 순교 정신이 우리 안에 깃들어 있음을, 내가 순교자의 후손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가 순교자의 후손인 우리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나와 함께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용기와 힘을 얻고 성령의 이끄심에 나를 맡깁시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어디서 생겼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우리 선조 순교자들을 통해 전해 받은 신앙입니다. 이번 한 주간 내가 전해 받은 신앙을 내가 살고 있는 가정과 사회와 동네에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성령께 의탁하며 선교하며 순교정신을 살기로 합시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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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일 - 성 원귀임 마리아 순교기념 천상탄신 경축미사 꽃꽂이
연중 제15주일 농민주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농촌에서 생명산업인 농업을 지키며 수고하는 농민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시와 농촌이 더불어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실천을 생각하는 농민주일입니다.
오늘날 농업과 농촌, 농민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인식은 어떻습니까? 농업은 경쟁력 없는 산업이기 때문에 해외에서 값싼 농산물을 들여오는 편이 낫다고 합니다. 농촌은 불편하며 쓸쓸하고 떠나고 싶은 곳처럼 보기도 합니다. 농민들은 수입개방에 반대하는 시위나 하면서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류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산업화와 더불어 탈농촌화가 시작된 지 반세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농촌의 문화와 정서에 낯선 세대들도 많아졌습니다.
농민주일을 맞아 농업과 우리 자신의 삶이 어떤 관계 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식량안보 수입쌀 문제
현시점에서 전 세계 식량생산량으로 120억 인구가 충분히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5초마다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 기아로 죽어갑니다.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1/4을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있습니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섭씨 1도 상승할수록 곡물생산량은 7-10%씩 감소합니다. 미국, 영국, 스웨덴, 독일 등의 식량자급률이 100%를 웃돌며 프랑스는 무려 300%가 넘는 반면,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2%, 쌀을 제외하면 5%까지 떨어져 있습니다.
2017년 대선을 하루 앞둔 지난 5월 8일, 농식품부는 밥쌀용 쌀 수입 입찰공고를 냈습니다. 폭락한 산지쌀값을 조금이라도 지지하기 위해 밥쌀용 쌀 수입을 전면 중단해도 모자랄 판에, 밥쌀용 쌀 수입을 강행하여 현재 80kg쌀 한 가마의 가격은 12만원 대로 20년 전 쌀값으로 내려갔습니다. 국내 쌀 생산은 줄이면서 밥쌀용 쌀을 수입하는 정부정책으로 농민들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안전한 먹거리 유전자 조작 농산물 (GMO)문제
지난해, 전북 완주에 있는 농촌진흥청에서 GMO 쌀과 GMO 작물을 시험 재배했습니다. 올해 5월에는 강원도 태백, 충남 홍성 등 전국에서 LM0(유전자조작생명체) 유채가 대규모로 발견되었습니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GMO)이란 농산물의 생산량 증대, 유통, 가공 과정의 편의를 위해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기존 육종방법으로는 나타날 수 없는 형질이나 유전자를 지니도록 개발된 농산물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제초제에 죽지 않는 콩, 해충을 죽이는 독소를 스스로 만드는 옥수수, 면화 등이 있습니다. 이를 개발하고 수입하는 기업들은 생산과 소득에 도움을 주며 안전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GMO가 처음 등장한 1994년 이래 지금까지 안전성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질의 작물이 인간과 자연 생태계에 미칠 영향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GMO 작물 제초제에 들어있는 발암물질이 우울증, 면역력 저하 등 여러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의 유전자 조작 농산물 수입국입니다. 전체수입량은 일본이 더 많지만 일본은 사료용으로만 소비합니다. 식용 수입은 우리나라가 1위로 개인당 연간 44kg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수입된 GMO 농산물들은 주로 가공품으로 제조되고 있습니다. 면화, 콩, 옥수수, 유채 등의 원재료가 수입되어 간장, 두부 유화제, 탈지대두, 콩기름, 간장, 고추장, 된장, 올리고당, 빵, 음료, 주류감미료, 참치 캔의 면실유 등으로 생산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선택할 기회도 없이 이미 우리 밥상에 올라와 있습니다.
농업은 우리 삶의 근본 교회의 농민사목
한국 교회는 농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50년 전 ‘가톨릭 농민회’를 창립했습니다. 농민들의 인권과 농업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자는 방향을 설정하였습니다. 소득을 올리기 위해 땅을 약탈하듯 뽑아내는 화학농법이 아니라, 온갖 생명이 더불어 살아가고 후대에도 지속될 수 있는 농업과 환경을 물려주기 위한 생명의 농업을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1994년부터는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여, 농민과 도시민이 상생하기 위한 도농 교류, 생명 농산물 나눔 등의 활동이 일어났습니다.
농촌이라는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가톨릭 농민회라는 잎이 돋아났다면, 그 영양을 바탕으로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이라는 꽃이 피어난 것입니다. 이제는 주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던’ 세상을 일구어 우리 삶의 근본인 농업, 사람과 모든 생명이 건강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기 순환적 농법이 더욱 넓게 자리 잡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농촌 살리기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
농업의 문제가 더 이상 농민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생존이 달린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업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생명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교회의 농민사목,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합시다.
먼저 생명 농산물들을 이용한 생명의 밥상 차리기를 적극 실천합시다. 다른 농법보다 더 어렵고 힘든 과정과 생산량 저하를 감수하면서도 생명의 농업을 지키는 가톨릭 농민회 회원들의 유기농 농산물을 구매합시다. 불편하고 비싸다는 인식을 버리고, 농업 생명과 우리 밥상 생명을 위하여 노력합시다.
도시와 농촌이 만나는 교류를 실천합시다.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커다란 세상과 단절된 도시 문명에서 벗어나, 기술과 자본에 대한 믿음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신비를 체험하는 기회를 가져봅시다. 농촌을 살리고 생태적 회개를 시도하며, 생산과 소비를 넘어 생명과 환경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는 신앙인으로 거듭납시다. 그리고 올바른 식생활 문화를 이루기 위해 교육과 대화의 장을 만들어 갑시다.
한동안 우리는 성장과 경쟁, 기술과 자본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 허상을 좇아 정신 없이 살아왔지만 생명이라는 가치, 농업이라는 문명은 소중하고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우리의 삶은 농촌의 현실, 농업의 위기, 농민들의 처지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농촌이 병들고 농업이 무너지면 우리 전체가 심각한 손실을 입습니다.
우리 본당의 가정 생명분과에서도 펼치고 있는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에 참여하여, 도농이 더불어 살아가며,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 모든 생명이 어울리며 자신의 삶을 꽃피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1-32)
연중 제15주일
우리가 살다 보면, 가끔 안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그 일이 자신의 잘 잘못에서 기인된 것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은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졌길래 이런 일을 당하는가?”하는 의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아, 내가 기도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겼구나.”하며 자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의 주관자는 주 하느님이시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님께서 벌리시는 것도 아니고, 그 일 하나하나를 주 하느님께서 관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 하느님을 믿는 마음에서, 주님과 내 삶의 순간들을 연결시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매 순간 매 사건의 동인과 조건과 생성 과정 속에는 나와 주 하느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세상에는, 나와 주 하느님 외에도, 내 인생에 관여하는 다른 이들과 자연도 있습니다.
내가 지금 당장 뭔가 얻고 싶고,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에는, 나의 노력뿐만 아니라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 즉 자원이 뒷받침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관계 당사자인 이웃들의 협력이나 승인 내지는 묵인이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당사자들의 노력과 조건들의 조합 이외에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 일이 주 하느님의 뜻 안에 있기를, 기꺼이 주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때가 되어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나와 다른 이들과 자연이 그 조건을 무르익고 채워지도록 준비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당장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생기고,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거나 또는 안 이루어지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단기적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장기적으로 그것도 내 일생을 다 걸어 투신하고, 생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난 다음에 이루어질 것도 있습니다. 그런 꿈과 희망이 내 생애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지고 채워져, 마침내 그날 그때에 그렇게 주 하느님의 축복 안에서 성취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주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 아픔과 고통의 순간에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청하기도 하고, 단기적으로 어떤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 하느님은 우리가 기도하고 열심히 하면 들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안 들어주시는 마음 좁은 분이 아닙니다. 또 주 하느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좋고 옳은 것과 인간 윤리의 가치 기준에 구애받지 않으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와 믿는 이들만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 삶과 활동의 이해관계 당사자들 모두의 하느님이십니다.
아울러 천 년도 하루 같으신 하느님이시기에, 내 전대와 후대의 사람들마저 고려하시고 섭리하십니다. 마치 성가대의 지휘자처럼, 모든 이해 관련 당사자들과 그 조건들을 다 고려하여, 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가고 계시며, 인간 구원의 업적을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인 구원이 마지막 날 이루어질지라도, 그날 그 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오늘 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주 하느님께서, 주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고, 주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 구원을 꼭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또 그렇게 구원되기를 바라기에, 오늘 여기서 미리 그 희망을 앞당겨서, 마치 그 희망이 이루어진 듯이, 우리가 기쁨과 행복감을 미리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희망과 복음은 바로 이 기쁨과 행복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우리 희망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축복의 결실인, 우리 인간 구원이 그날 그 순간에 이루어지고 말리라는 믿음과 희망 안에서, 오늘 하나하나 하루하루를 사랑으로 이루고, 그 기쁨과 행복을 이웃에게 전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주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그 구원을!
주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와 어떻게 함께하시면서, 축복과 은혜를 어떻게 베풀어 주셨는지를 되새기며, 마지막 날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야 말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한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제한된 인간 조건 안에서도, 불안과 조바심과 좌절을 뒤로 하고, 주 하느님 말씀의 구현을 통해 이루어지는, 기쁨과 평화를 미리 앞당겨 누리며, 그 기쁨과 평화 속으로, 형제자매들을 전교라는 이름으로 초대합니다.
자, 그럼 이제,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 각자 자신의 지난 세월을 되새겨 봅시다.
각자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되새기면서, 그동안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고 극진히 보살펴주셨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에페 1,3) 우리가 자랄 때 아찔했던 순간들,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하고 새로운 학교와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그 많은 사건 중에, 주님께서 어떻게 함께 해주셨는지! 사회에 첫 발을 내 딛을 때, 결혼을 했을 때, 부모 곁을 떠나 보금자리를 새로 꾸미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 그 순간 순간을 어떻게 이끌어주셨는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7절) 게다가 우리를 그냥 돌보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의 어둠에 갇혀 있도록 하지 않으시고, 죄에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8-9절)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대신 죽여가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으며,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해주시고, 점지해주시고 미리 뽑아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4-5절)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를 기어이 구원하시고야 말리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10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로 이웃형제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11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 1,17-18 참조 - 복음 환호송)
연중 제15주일
새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서문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2013년 11월 24일 신앙의 해를 마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교황 즉위 첫 권고문으로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을 발표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권고에서 새로운 복음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복음의 기쁨」은 총 288항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문 ‘복음의 기쁨’, 제1장 ‘교회의 선교적 변모’, 제2장 ‘공동 노력의 위기 속에서’, 제3장 ‘복음 선포’, 제4장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 제5장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 결어 ‘새로운 복음화의 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부터 오는 8월 15일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아시아 청년 대회’와 16일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을 위해 방한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서문 복음의 기쁨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늘 새로운 기쁨, 함께 나누는 기쁨’이라는 제하에서, 오늘날 사람들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에 빠져 살고 있다고 진단하십니다.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과 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과 고립된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 버립니다.” 라고 지적하십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앙인들에게도 매우 현실적인 위험입니다. 많은 이가 이러한 위험에 빠져 삶을 잃어버리고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찬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품위 있고 충만한 삶을 위한 선택이 아니고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도 아니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에 솟아오르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아닙니다.” 라고 하시며 “날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하십니다. 아울러 “우리가 예수님께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서 언제나 그곳에,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라는 확신을 일러주십니다.
교황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이들에게 샘솟는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으로 빛나는 복음은 끊임없이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라고 하십니다. 그 기쁨은 주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님 말씀을 듣고 이루는 이들에게 나눠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부활시기 없이 사순시기만 살아가는 듯한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회복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쁨이 더디지만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확고한 신념으로서, 극심한 비탄 속에서도 서서히 되살아 나도록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만 행복해질 수 여기면서, 온갖 핑계와 불평거리를 찾는 것은 유혹이라고 명확히 지적하십니다. “왜냐하면 ‘기술 사회가 쾌락의 기회를 중대시켜’왔지만 ‘기쁨을 낳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진 것 없는 매우 가난한 이들의 기쁨”이 참으로 ‘자연스러운 기쁨’이며, “직업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다하면서도 너그럽고 단순하며 믿는 마음을 지닌 이들의 진정한 기쁨을 떠올립니다.” 라고 안내하십니다.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며, “우리 자신을 벗어나 우리 존재의 가장 완전한 진리에 이르도록 이끄시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만길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라고 전언하시며. “바로 여기에 복음화 활동의 원천이” 있다고 확언하십니다. 즉 복음화 활동의 원천을 “삶의 의미를 되찾아 주는 사랑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규정하시며,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가져다 주는 사랑의 생활을 촉구하십니다.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이라는 제하에서 교황은 선은 널리 퍼져 나가면서 뿌리 내리고 자라나기 마련이기에, “우리가 품위 있고 충만한 삶을 바란다면,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선익을 추구”하라고 제시하십니다. “생명은 내어 줌으로써 더 자라나고, 고립되고 안주하면 약해집니다. 참으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는 제쳐 두고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전해 주려는 열정에 불타오릅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생명을 내어 주는 그만큼 생명을 얻고 또 자라납니다.” 라고 생명과 사랑의 역설적인 신비를 일러주십니다.
교황은, 교회 생활은 하느님께서 주도하신다고 하시며,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1요한 4,10)는 것을, 그리고 그분 홀로 ‘자라게 하신다.’(1코린 3,7)는 것을 언제나 분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라고 명확히 지적하십니다. 그러한 확신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온 생애가 걸린 매우 어렵고 힘든 사명 앞에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라고 복음화의 사명과 그에 따른 기쁨의 생활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복음화 사명의 새로움은 역사의 단절이나 망각이 아니며, 오히려 “기억은 우리 신앙의 한 차원이며, 둘째 규범이라고” 언급하시며, “복음화의 기쁨은 언제나 감사하는 기억에서 생겨납니다.” 라고 하시며, 이는 우리가 ‘끊임없이 간청해야 하는 은총’이라고 제시하십니다.
교황은 ‘신앙 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라는 제하에서, 지난 2012년 10월 7일부터 28일까지 열렸던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3차 정기총회를 토대로, ‘그리스도 신앙의 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를 세 분야로 나누어 새로운 복음화를 권고하십니다.
먼저 일반 사목은 “자주 정기적으로 공동체 예배에 참여하고, 주님의 날에 모여 주님의 말씀과 빵으로 힘을 얻습니다.” 라고 하신 베네딕토 교황의 강론은 인용하시며, “신앙인들의 영적 성장을 지향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더 온전하게 응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라고 밝힙니다.
둘째,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의 요구대로 살지 않는 이들’에게 “신앙의 기쁨을 되찾는 회개, 복음대로 살려는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회개를 경험하여” 신앙의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하십니다.
셋째, 복음화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 또는 여전히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하시며,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 때문”이라고, 복음의 기쁨에 대해 일러주십니다.
교황은 열정과 생명으로 가득 찬 새로운 복음화의 단계에서, ‘교회 개혁과 선교 활동’, ‘사목 일꾼들이 직면한 유혹들’, ‘교회, 모두 복음을 전하는 하느님 백성’, ‘강론과 그 준비’, ‘가난한 이들의 사회통합’, ‘평화와 사회적 대화’, ‘선교 영성의 활성화’에 대해 논의하며, 새로운 지침을 제안하신다고 하십니다. 다음 주부터는 본문에서 구체적인 주제의 논의와 새로운 지침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연중 제15주일
우리는 다음주 금요일 26일부터 주일 28일까지 성가정 영성 캠프를 갑니다.
우리가 성가정 영성 캠프를 가면서 꿈꾸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어떻게 놀고, 어떻게 쉬고 싶습니까?
무슨 기도를 하고 싶습니까?
영성 캠프는 기도와 놀이와 일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도하고 놀고 밥 먹고 잠자는 일상입니다.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성체조배와 묵상, 묵주기도를 바치고, 복음 나누기와 나눔을 하고 매일 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조별 모임과 촛불놀이, 추적놀이, 조별 촌극 발표 등의 프로그램화한 놀이를 합니다. 그리고 식사도 하고 간식도 먹고 술도 한 잔 하고 잠도 자고 샤워도 하면서 일상을 삽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제한된 상황과 처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회사와 일이라는 짐과 활동 그리고 가족이라는 울타리와 십자가 등등. 그런 환경과 처지에서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하늘나라를 현실에서 온전히 이루기 힘들어 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오늘의 일상에서는 하늘 나라를 살지 못합니다.
일상을 떠나 성가정 영성 캠프를 가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늘 나라의 구현’입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할 수 없었던 하늘나라를 직접 설계해 보고 실현해 보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어떻게 삽니까?
하늘 나라에서는 언제 일어나 무엇을 합니까?
하늘 나라에 가게 되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우리가 꿈꾸는 하늘 나라는 어떻게 생겼고 무엇을 하는 생활입니까?
우리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하는, 기도하고 사랑하고 생활하는 하늘 나라가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고 쑥스럽겠습니까? 아니면 평화롭고 행복하겠습니까?
우리가 꿈꾸는 하늘 나라가 우리가 사는 일상과 어떤 면에서 같고 어떤 면에서 다릅니까?
우리가 꿈꾸는 지상의 하늘 나라인 교회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 지, 성가정 영성 캠프라는가상의 하늘 나라에서 우리의 삶으로 구성하고 만들어 봅시다.
오늘 복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올 성가정 영성 캠프의 셋째날 주제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꿈이요 목표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사제도, 종교인도, 모든 사람들이 강도 만난 그 사람을 그냥 모른 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유다인과는 원수같이 지내던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그 사람을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3-35)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그러자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27절) 하신 성경 말씀을 끄집어 내면서,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하면서 시비를 걸었던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라고 이르셨습니다.
복음의 정신대로 살자고 모인 훠꼴라레의 두 회원이 로마의 훠꼴라레 본부에서 같이 잠을 자게 되었답니다. 한 회원은 북쪽에서 왔고 한 회원은 남쪽에서 왔답니다. 북쪽에서 온 회원은 잠을 자다가 남쪽에서 온 회원이 더워서 고생할까 싶어 창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한 참을 자다가 남쪽에서 온 회원이 북쪽에서 온 회원이 추울까 싶어 창문을 닫아주었답니다. 그렇게 둘은 번갈아 가면서 서로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창틀만 있고 창틀에는 유리가 없었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삶이 하늘 나라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원되어 하늘 나라에 가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하며,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갈망하는 우리의 염원이 우리의 가정과 사회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당장 현실화시키지 못하는 아쉬움을 접고, 성가정 영성 캠프에서 실험해 봅시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성가정 영성 캠프라는 가상의 하늘 나라에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구현해 봅시다. 뭔가 도와주어야 하고 또 내 도움을 기다리는 이웃 캠프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하늘 나라를 구현해 봅시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빵을 나누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생전의 예수님을 알아 뵙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라고 청했습니다. 하루 종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깨닫게 되고 성체성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된 제자들의 이 말씀이 올 해 우리 영성 캠프의 주제입니다.
우리도 올 루카 복음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을 성가정 영성 캠프에 초대합시다. 성가정 영성 캠프의 기도와 놀이와 일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발견합시다. 우리가 발견한 예수님을 우리 삶과 인생의 주님으로 믿어 고백하며, 주님을 향한 우리의 꿈과 갈망을 실현하며 하늘 나라를 이루기로 합시다. 성가정 영성 캠프에서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살아봅시다.
그리하여 영성 캠프를 마치고 현실로 돌아오면서, 캠프에서 만난 예수님을 형제 자매들과 나눕시다. 캠프에서 살던 하늘 나라를 현실에서 살아봅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과 평화를 형제 자매들과 나누기로 합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연중 제15주일
사제 수품을 받기 전에 사제 수품 후보자들은 교구장님과 면담을 하게 됩니다. 저도 당시 교구장님이셨던 김수환 추기경님과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면담 때, 저는 “주일학교 교사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일을 기획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일을 기획하고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신부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하는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사제 수품 24년이 지난 지금도 외적인 성과에 연연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실제로 하느님 나라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얼마만큼 성취했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과 얼마나 깊이 함께하는가가 관건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몇 명이 얼마의 예산을 들여서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가 아니라, 프로그램 안에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현존하실 수 있을까 하는 것과 그 프로그램을 통해 신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통해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지상 교회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몸소 임하시고 주님께서 신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변화시키시도록 기도 중에 봉헌하고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주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이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과 삶을 통해 함께하는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이 예기하지도 못했고 원하지도 못했던 상황과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주님께서는 왜 자신이 그 일을 겪도록 허락하셨는지, 그 일을 통해 주님께서는 자신과 당사자들과 관계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당사자들과 관계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등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마주치는 사건과 상황들 속에서 주님과 대면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뜻을 찾아 따르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을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서 가장 신경 써야 할 지팡이는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인 복음(말씀)입니다.
살면서 재수가 없어서, 백이 없어서, 운이 없어서 내가 이 일을 이런 식으로 겪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그 일을 풀어 해결하도록 숙제를 주시며 그 일을 통해 주님을 찾도록 그래서 주님과 함께 그 일을 풀어나가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에페 1,8-9)
주님을 믿는 내가 가정이나 세상이나 교회에서, 직업상이거나 아버지, 어머니, 자녀라는 신분상 겪는 것 중에 잘 안 풀리거나 쉽게 큰 성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도 아니요, 현세에서 죄를 많이 지어서도 아니요, 시련이나 시험도 아니요, 주님께서, 주님을 믿는 내가 주님께 청하고 의지하며 주님과 함께 겪어낼 만 하다고 보시기에 나에게 겪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작위적이거나 자신이나 어느 누구의 인간적인 노력여하로 성공과 실패 여부를 평가하거나 지금 잘 안 풀린다고 해서 스스로를 폄하하거나 포기하고자 하는 유혹과 악에 빠져 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11)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의 일을 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노력이나 생각이나 느낌조차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 의지하며, 주님과 함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면서 느껴온 ‘신자라면, 이렇게 또는 저렇게 살고 행동해야 한다.’는 선입감과 고착된 가치관 그리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집중하기 보다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인간적인 노력에서 회개합시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을 유지하고 반복하는데 그치지 말고, 매일 변화되는 세상의 변화된 상황에 주님의 말씀을 새로이 적용하며 새로운 복음화를 이루어 나아가도록 합시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마르 6,12)
아멘.
연중 제15주일
우리는 가끔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옛날에는 잘 했어요.” “옛날에는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옛날은 시간이 지나듯 가버리고, 오늘은? 지금은? 그 옛날의 영화에 어울리지 않게 그냥, 아니 어쩌면 과거 우리의 결과가 오늘의 이 모습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는 더 약해지고 과거의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게 점점 초라해 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독수리의 수명은 70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독수리가 다 70년을 사는 것은 아니랍니다. 몇 마리만 제 수명을 다 살 수 있답니다. 그 몇 마리는 40년이 지난 후에 아무도 몰래 바위산의 꼭대기로 올라가, 자기 부리로 바위를 찍어 두꺼워진 자신의 부리를 다 쪼개 새 부리가 나오게 하고, 새로 나온 부리로 자기 발톱을 찍어 발톱도 새롭게 하고, 새 발톱으로 날개를 다 뜯어서 새로운 날개로 만들어 새로운 생애를 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답니다. 그렇게 자기를 재생시킨 독수리가 70년의 수를 다 누리게 된답니다.
독수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어제나 과거의 영화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날마다 ‘우리의 나약해진 육과 안락하고 풍요한 오늘의 내 처지 때문에 더 이상 도전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꾸준하고 충실히 계속 정진하고 단련하지 않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인생의 길을 안내하고, 생명을 가져다 주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씨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와 그 말씀과 함께하는 우리 인생의 역사를 밭에 비유하여 말해줍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마태 13,3-4)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19) 결국 예수님의 좋은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과 어긋나고 심지어는 반대되는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리스도교 신비의 영역에 대해 인정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20-21) 결국 성당에 나오는 것이 자기에게 경제적이고도 현실적으로 이익이 되면 나오고, 그렇지 못하거나 오히려 손해를 보면 안 나오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성당에 나와 위로도 받고 좋은 동료들이라도 만나서 함께 하기를 바라고 나왔지만,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위로를 받지 못했다거나 좋은 친구를 만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함께 일하다가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기고 섭섭한 감정을 간직한 채 떠나는 사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 결국 이 세상에 자기 하고 싶은 일과 실제로 하는 일이 많아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당에 나오는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마음에만 간직하고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 역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8)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23) 즉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그 뜻을 깨달아 실제 자기 삶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이루고 실현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시작하고 이미 지금 여기서 벌써 하늘나라의 삶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제 남은 수를 다 누리기 위해 오늘 자기 부리와 발톱과 깃털을 스스로 짓이겨 새로 만들어내는 독수리처럼, 과거와 옛날이라는 두껍고 무겁기만 한 영예의 옷을 벗어 던지고,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는 좋은 땅’(23)이 되기 위해 “들을 귀 있는 사람”(9)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로마 신자들에게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0-21) 라고 한 성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의 미래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우리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인내로 새로 납시다.
아멘.
연중 제15주일
찬미 예수님!
안녕하십니까?
요즘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활동을 나가려고 해도 개스값이 너무 비싸서 부담스럽다고 합니다.
오늘 미사 때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가두선교 발대식을 하고, 8월 27일까지 가두선교를 하게 됩니다. 무더운 여름에 낯선 사람들을 상대로 선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건만 용기를 내서 선교의 일선으로 나가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을 위해 박수쳐 줍시다.
박수만 칠 것이 아니라, 기회되면 함께 나가서 동참해도 좋겠습니다. 정 안되면 옆에서 도와주기라도 하면 좋겠고요.
선교를 한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한쪽으로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전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일본에까지 와서 선교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지나치게 엄격했던 선교사들에 대해 불평도 하고 지금 와서 새로운 평가들도 하지만, 정작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 가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나선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존경받을만 합니다. 단순히 다른 나라와 다른 사람들 속으로 이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스스로 살면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선교는 생각만 해도 참 어려운 일이겠구나 싶습니다.
과연 선교사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복음을 전할 그 나라 그 지방 그 사람들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겠고, 자기가 전해야할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겠지만, 정말 주님께 미치지 않고서는 선교하겠다는 엄두도 못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주님께서, 하루 아침에 그냥 자고 나면 눈 떠지고, 밤에 자고 나면 그냥 아침이 되어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되는 일이 아니고, 그 결실을 맺을 때까지는 무던하고 부단히 자기의 희생과 노력을 한참이나 쏟아 부은 뒤에나 가능한 일인데 선뜻 그 십자가의 길을 나서는 선교사들을 바라볼라치면 성소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부럽고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가두 선교를 나서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가두선교를 나가서 단순히 교회의 소식지와 소개서를 나눠주고 말 수도 있겠지만, 가두선교가 결실을 맺어 우리 성당의 예비자 교리반에 들어오기까지는 여러분이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대상자에게 대한 지속적이고 진실한 선교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러자면 무엇을 얼마만큼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교회, 즉 교리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믿는 믿음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학 박사가 아닌 만큼 교리를 다 알 수도 없고 그리고 박사라고 하더라도 다 알지는 못한다고 치면, 교리를 다 모르는 것에 대해 두려워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기에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그 시간에 일러 주실 것이니 그대로 말하여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마르 13,1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대로 살아야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도 제대로 못살고 덕은커녕 우리가 계획한 것도 다 하지 못하고 사는데, 어떻게 우리가 살지도 못하는 믿음을 완전히 다 이루며 살 수 있겠습니까! 물론 믿음대로 믿으면서 살아갈 수만 있으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우리 사는 모습을 다 보고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인격적으로 존중은 받기는커녕 그저 손가락질이나 당하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때가 있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모범을 보이지도 못하면서 선교할 수 있겠냐고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는 쓰시겠다고 부르시니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7)
제자들이 교리를 다 잘 알아서, 다 모범을 보일 정도로 착하고 열심해서 주님께서 그 제자들을 선교하도록 파견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그럼 무엇인가?
제자들이 선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대로 하면 된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하라는 대로 열심히 한 것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선교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고, 또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과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사명에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 참 하느님이실뿐만 아니라 그 하느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구원으로 이끌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또 주님의 말씀대로 그 하느님께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들어주시리라는 희망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또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선교에 투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을 위해 우리 스스로 점검해 봅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믿는다고 했는데, 그럼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를 살려주시고, 오늘 이 험악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주고 계시다는 것을 언제 어떻게 느꼈는가? 내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나를 살려주셨다는 것을 언제 어떻게 확실히 믿게 되었는가?
내 생명과 연관한 내 믿음을 고백하고 설명할 수 있는 상황과 사건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고 마침내 구원하시리라고 믿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주님께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는가? 나에게 있어서 주님께서 나를 구원으로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을 심어주신 적이 언제 어떤 일을 통해서였는가? 뭘 근거로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리라고 확실히 믿고 바라고 있는가?
지난 체험과 추억이 없다면, 주님께서 지금 내가 주님께 바라는 것을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어떻게 믿고 기도하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주님의 구원에 연결해 주고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또 그러기에 주님께서 살려주셨다는 사실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형제들에게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주님 앞에 데려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을 모시고 구원의 길을 향해 함께 걸어 나가기로 합시다.
믿음만으로 다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노력하고 준비하고 결심하는 것을 다 가능하게 하는 것이 주님께 대한 믿음이기에 더욱 굳센 믿음과 믿음을 더욱 깊게 하는 기도생활을 통해 우리의 선교사명을 준비하고 실현하도록 합시다.
이어지는 가두선교 발대식에서 이분들에게 진정 주님의 영이 충만하게 내려오셔서 이들과 함께하시고, 주님께서 이들이 전하는 복음을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도록 그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고, 전해진 주님의 복음이 이들과 이들에게서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을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합시다.
잠시 우리 믿음의 근저를 되새겨봅시다.
연중 제15주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주먹을 꽉 쥐고 나오지만, 돌아갈 때는 두 손을 피고 죽는다.” 이 말은 세상에 태어날 때는 세상에서 무엇이든 다 하려고 하고 다 가지려고 하지만 결국 세상을 떠날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해왔습니다. 결국 인생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보내는 시간인지, 아니면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을 보내는 것인지 의아해 할 때도 있지만, 인생은 자신의 꿈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희망과 번뇌의 연속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면에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던 때와 마음은 먹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고생하고 희생해야할 모든 것 때문에 망설여지는 때가 다르다는 것도 실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과 ‘씨를 받은 땅의 종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서 뿌린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우리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길바닥에 떨어져 새가 와서 쪼아 먹은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그나마 잊어버리는 사람”(4. 19)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좋은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과 어긋나고 심지어는 반대되는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리스도교 신비의 영역에 대해 인정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져 싹은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뜨자 타 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라버린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고,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는 사람”(5-6.20-21)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성당에 나오는 것이 자기에게 경제적이고도 현실적으로 이익이 되면 나오고, 그렇지 못하거나 오히려 손해를 보면 안 나오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성당에 나와 위로도 받고 좋은 동료들이라도 만나서 함께 하기를 바라고 나왔지만,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위로를 받지 못했다거나 좋은 친구를 만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함께 일하다가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기고 섭섭한 감정을 간직한 채 떠나는 사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혀버린 씨는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7.22)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이 세상에 자기 하고 싶은 일과 실제로 하는 일이 많아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당에 나오는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마음에만 간직하고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 역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씨는 말씀을 듣고 잘 깨달아 열매를 맺은 사람”(8.23)이라고 하십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그 뜻을 깨달아 실제 자기 삶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이루고 실현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시작하고 이미 지금 여기서 벌써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상 네 가지 땅 중에 어떤 땅에 해당하십니까? 길바닥입니까? 돌밭입니까? 가시덤불입니까?
아니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몇 배의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슴 속에 심어주신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고 얼마만큼의 열맺를 맺고 계십니까?
주님의 말씀을 잘 되 새기고 깨달아 실제 삶에서 실현하셔서 좋은 열매를 맺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3)
연중 제15주일
지난 주 우리 본당에 새사제가 탄생했다. 참으로 기쁘고 경하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제는 탄생함으로써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만큼 본당 교우들 모두가 꾸준히 열심히 기도해야겠다.
가끔 교구에서 인사발령을 낼 때, 보좌신부가 모자라서 본당을 신설하지 못한다는 말을 한다. 본당을 하나 새로 신설하기 위해서는 기존 본당의 보좌신부들을 빼서 본당 주임사제로 임명에 해야 한다. 그런데 기존본당에서 보좌신부를 하나 빼면 그 자리에 다른 보좌신부를 임명해야 하는데, 새로 임명할 보좌 신부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매년 20∼40여분의 새신부가 나오지만, 본당에서 보좌신부를 청하는 수는 평균 50여명이 넘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속적인 사제 양성을 위해 유학도 보내야 하고, 교회의 전통과 유지 발전을 위해 성음악과 성미술 등의 전문화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회사목 분야 등에 사제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정말 터무니없이 모자란다. 지난 화요일 복음 중 "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마태 9, 37-38)라는 말씀이 정말 마음 깊숙이 와 닿는다.
2002년도 서울대교구 통계를 보면 신자 1,409,022명에 본당 248개다. 한 본당에 평균 2명의 사제가 있다고 본다면, 사제 1인당 약 2,841명의 신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본당에 봉직하는 사제들이 그 본당 신자의 이름이나 제대로 외운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신자들이 바라고 또 교회가 지향하는 사목사제상, 이른바 신자들의 애로를 들어주고 감싸 안아주며 주님의 위로를 전해주고 은총을 빌어주는 것 자체가 교회의 현실 수치만 봐도 불가능해 보인다.
새사제의 탄생을 경하하는 마음 뒤에, 새사제가 발령을 받아 떠나면 우리 본당에는 신학생이 그나마 한 명도 안 남는다. 사제 양성기간이 7년 군대까지 10년이라고 볼 때, 내년에 신학교에 한 명이 새로 입학한다 해도 앞으로 10년 후에나 새신부가 하나 탄생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 교구에 등록한 예비 신학생이라고는 겨우 고등학교 2학년생 한 명 있으니 앞으로 11년 전에는 우리 본당에 새사제 탄생은 없는 것이다. 어디서 신학생을 꾸어오거나 이사와 주지 않으면 말이다. 여러분의 자녀는 지금 몇 살인가? 여러분의 손자는?
귀엽고 귀한 여러분의 자녀를 성직자 수도자로 봉헌해 주십시오. 여러분 주님의 뒤를 이어 이 땅에서 교회를 이끌어 나갈 성직자 수도자가 될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성소자들을 보내주십시오.
연중 제15주일
예수님의 말씀인 씨가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간다."(19절)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교리나 무슨 운동이 우리 생활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면 얼른 가입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가담하지 않는다. 예비자들이 교리를 다 받고 나서 과연 내가 평생 몸담을 곳인가의 여부를 결정할 때와 같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 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20-21절) 좋은 일을 하려고 하지만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때, 열심히 일하지만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고 호응해주지 않을 때, 좋은 의도로 일을 시작했지만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때, 좋은 일을 했지만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고 심지어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모함을 받을 때 쉽게 포기하고 싶고 실제로 그런 이유로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22절)을 의미한다. 좋은 일이라고 여겨 열심히 일하지만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지 않을 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계속 복음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한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달아 열매 맺는 사람"(23절)을 의미한다.
우리는 과연 신앙 면에서 어떤 땅일까? 아니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귀를 세우고 듣고 있는가?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주님의 좋은 말씀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님의 말씀을 무시할 수도, 현실을 떠날 수도 없다. 우리는 다양하고 변화하는 사회의 현실 안에서 하늘 나라를 이루라는 말씀의 본 뜻을 잘 깨닫고,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 제도나 환경을 조성해 반드시 실현해야만 한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계란 한 덩이 같은 우리의 시도가 한 번 실패한다고 해서 포기할 수도 없다(로마 8, 23 참조).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인 우리들을 통해 몸소 활동하시고 열매를 맺으시도록 우리를 봉헌하며 주님의 좋은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자(이사 55, 11 참조).
연중 제15주일
어떤 할머니가 물었다. "우리 며느리가 교회의 집사인데 하도 집안에서 못되게 굴어서 그러는데 나는 천주교 나오면 안됩니까?" 그래서 대답했다. "천주교는 언제나 문이 열려있지만 집안의 화목이 우선 아닌가요?" 우리 천주교우들의 집안에는 이런 일이 없을까요?
어떤 교우가 사회 복지 시설에 가서 하루 종일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오니까, 정작 옆집에 혼자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더란다. 그것도 죽은지 3일이 지난 뒤에 발견해서 썩을 대로 썩어 냄새가 코를 찌르더란 소리를 듣고는 생각했단다. 내 집안, 내 이웃도 못 돌보면서 무슨 낯으로 주님을 뵈오랴?
지금까지는 소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자각시키기 위해 본당의 행사와 주요업무를 구역 반이 담당하는 것에 주력했다. 그 결과 단체가 먼저냐 구역이 먼저냐 하는 불필요한 긴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소공동체는 본당 교회에서 성장한 모습으로 그리고 단체는 특화된 자신의 영성으로 지역별로 나뉘어진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26-27)고 하셨다. 본당 일에 그리고 멀리 떨어진 사회 복지 시설에 단체별로 봉사함으로써 신앙생활을 다 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시대를 마감하고, 신자들 모두가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복음을 실현함으로써 지역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을 바라보는 이웃의 시선은 따가워지기만 할 것이다.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기도할 것인가? 그리고 자기가 듣고 믿는 복음을 어디서 실현할 것인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하고 묻던 율법 교사에게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다. 우리말에도 '이웃 사촌'이란 말이 있다.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자기를 나누는 것이 참 사랑을 실현하는 길이다. 본당 일과 단체 모임과 봉사활동에 바빠서 자기 집안이나 이웃을 돌보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처럼 지나쳐간 사람들이 될 뿐이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37)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가 속한 구역 반별로 소공동체 모임과 단체가 함께 어우러져 지역 교회로서의 그 소명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차츰 그 범위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
연중 제15주일
예수님께서는 오늘 열두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전에는 교회에서 선교를 전교의 차원으로 행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어서 빨리 온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신자로 만들기 위해 세상 끝까지 나갔습니다. 선교사들은 사람들을 성당으로 데려와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어 신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흙탕물이라는 세상에서 붕어를 건져다가 교회라는 어항에 넣어둔 것은 좋았지만, 그 붕어가 다시 세상으로 나갔을 때 붕어는 다시 흙탕물에서 고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이제 붕어를 어항으로 옮길 것이 아니라, 흙탕물인 세상을 좋은 물로 바꿔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교도 전교에 그칠 것이 아니라 복음화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본당의 규모도 서로 알고 지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분당하고, 교회를 '소공동체들로 엮어진 공동체'로 삼아 소공동체들의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복음화의 사명을 다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현대의 복음선교 17항에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을 복음화의 전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복음화는 '교회가 선교하는 메시지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활동, 그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18항).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것'입니다(19항). 그러므로 복음화란 종래의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던 '전교'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보다 역동적이며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고 신자로 만들뿐 아니라 그들이 생활하는 삶의 현장에 구체적인 변혁과 역전이 전개되도록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복음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참된 복음화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처럼 적당한 규모의 소공동체를 확립하여야 합니다'(23항).
이것이 우리가 구역, 반모임을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가정과 동네를 하느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소공동체로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소공동체 구역, 반원들과 함께 공동으로 실천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바꾸고자 합니다.
제5회 농민주일 담화문
"온 땅은 본래 하느님의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7월의 셋째 주일은 농민들의 대희년이자 한국 주교회의가 제정한 농민주일입니다. 올해로 다섯 번째 맞는 농민주일은 고된 농사일을 통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농민들에게 한마음으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또한 점차로 그 가치가 망각되고 있는 농촌과 농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이 더욱 널리 확산되기를 기원하는 날입니다.
지금 우리의 농촌은 무분별한 농축산물 수입, 상대적인 농가 소득 저하, 만성적인 농가 부채, 지속되는 농촌 붕괴 현상 등 여러 문제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또한 금년 봄 구제역 파동과 밀, 보리 등 겨울 작물의 흉년은 농민들의 어려움을 가중시켰습니다. 더군다나 전세계적으로 농산물의 무역 자유화가 더욱 확대될 전망이어서 우리 농촌의 생산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근본 원인은 인간이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함이 없이 물질적 풍요와 편리만을 무한정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정보화와 세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 물결은 선진국 중심의 안녕과 번영을 극대화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어 모든 인류의 진정한 발전과 복지에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제3세계의 농촌 붕괴 현상 역시 지구적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생명과 환경 파괴' 현상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총체적으로는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외면, 지구 생태계 파괴, 기상 이변, 자원 고갈, 국가 간 빈부 격차의 심화, 수급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식량난 등 수많은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은 바로 이와 같은 위기 현상에 대해 한국 교회가 제시하는 대안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농촌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깨닫고, 생명 중심의 가치관을 재정립하며, 도시와 농촌에 공동체를 건설하여 도·농이 공동체적으로 창조 질서를 보전하는 일에 앞장서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운동을 '생명·공동체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대희년의 기본 정신은 "하느님의 드높은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본래의 하느님의 것이며(신명 10,14), 인간은 단지 그것을 올바르게 이용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희년이 되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리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레위 25,8-55). 그것들은 곧 본래의 창조 질서, 평등과 조화와 공생의 질서로 돌아가라는 촉구입니다.
대희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대안적인 생활 양식을 만들어 가라는 부르심에 충실하기를 다짐해야만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현대 사회는 그 생활 양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는 한 결코 생태학적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것"(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 13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 극단적인 편리함과 효율성의 추구를 벗어나 생명 중심적인 문화를 건설하고 자연 친화적인 생활 양식을 영위해 나가는 데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농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새기며, 농민 여러분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아울러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이 '새 하늘 새 땅'을 위한 대안 운동으로 다시금 자리가 매겨지고 확산되어 나갈 수 있도록 여러분 모두의 참여를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2000년 제5회 농민주일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장 봉 훈 주교
연중 제15주일
지난 6월 30일(수요일) 오전 1시 30분 ㅅ유치원의 원아들이 여름 행사를 갔다가 19명의 아동들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린 생명이 너무 아까워서 억울하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분통이 터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어처구니없고 예기치 않은 일을 당하게 되면, "왜 하느님께서 이런 현실을 그냥 내버려두시는가?"하고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2세 교황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고통'이라는 서한에서 "사람들은 흔히 바로 세상에서부터 인간에게로 고통이 오고 있는데도, 인간은 이 물음을 세상을 향해 묻지 않고, 세상의 창조자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께 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구약성서의 욥기 1장 12절과 2장 6절을 예로 들면서, "선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통을 겪는 것을 허락하실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또 한편 야고보 사도는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야고 1,13-15)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벌이라도 받아서 빨리 죽지 않고 잘 사는 것을 보고 억울해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들으라는 듯이, 사도 베드로는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2베드 3,9.1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가? 사도 바오로는 오늘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 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로마 8,20-2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뿌려진 '주님의 말씀'이라는 씨를 열매맺기 위해 주님께 신뢰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기도하고, 해가 쨍쨍 내리 쪄도 타지 않게, 가시가 자라도 숨이 막히지 않게 우리 스스로를 좋은 땅이 되도록 갈고 닦아야 하겠습니다.
연중 제15주일
율법교사는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0,25) 하고 주님께 묻는다. '영원한 생명'이란 주제가 우리에게도 관심거리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주님을 만나면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청할까? "지금 내가 무슨 사업을 하면 돈을 벌까요?" "지금 내가 하는 사업이 망하지 않게 해주세요." 지금은 어려운 시기라 그럴까? 아니다. 언제나 우리는 현세의 물질적인 풍요라는 유혹 속에 직면해 있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솔직하다. "먹고사는 것이 먼저지…"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삶에서 최우선의 자리는 하느님이 아니라, 나다. 입으로는 구원을 말하고 마음은 주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면서도 실제 우리 몸은 구원을 찾지 않는다. 아쉽게도 이것이 우리 신앙의 현주소다.
그런데 누가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고, 누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 전체가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의 은혜라고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루가 10,27)는 주님의 말씀을 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셨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항상, 아니 일생을 계속 주님께 매달리고 매달려도 받지 못했다고 느끼며 불평만을 계속 할 것이다. 한편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가 10,29)라는 질문에 주님은 '나에게 도와달라고 청하는 사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신다. 실제로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소수이며, 또 우리가 마음만 합치면 도울 수 있다. 기회를 기다리고, 조건을 맞출 것이 아니라, "주 하느님의 말씀은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4) 라는 주님 말씀처럼 우리가 안 해서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이루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너도 가서 그렇게 (사랑)하여라."(루가 10,37) 하시고 주님은 몸소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로 1,20ㄴ)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나마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신'(골로 1,20ㄱ) 주님, 이제 저희를 내세워 당신의 뜻을 이루십시오." 아멘.
연중 제15주일
우리 각자 자신의 지난 세월을 되새겨봅시다. 각자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되새기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주시고 극진히 보살펴주셨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에페 1,3) 우리가 자랄 때 아찔했던 순간들,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하고 새로운 학교와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그 많은 사건들 중에 주님께서 어떻게 함께 해주셨는지! 사회에 첫 발을 내 딛을 때, 결혼을 했을 때, 부모 곁을 떠나 보금자리를 새로 꾸미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 그 순간 순간을 어떻게 이끌어 주셨는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7절) 게다가 우리를 그냥 돌보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의 어둠에 갇혀 있도록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총으로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주셨습니다."(8-9절)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대신 죽여가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해주시고 점지해주시고 미리 뽑아주셨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4절) 그리고 마지막날 우리를 기어이 구원하시고야 말리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10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로 이웃형제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