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일

(나해) 마르 6,7-13; 15/07/12

우리가 살다 보면, 가끔 안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그 일이 자신의 잘 잘못에서 기인된 것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은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졌길래 이런 일을 당하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아, 내가 기도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며 자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의 주관자는 주 하느님이시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님께서 벌리시는 것도 아니고, 그 일 하나하나를 주 하느님께서 관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 하느님을 믿는 마음에서, 주님과 내 삶의 순간들을 연결시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매 순간 매 사건의 동인과 조건과 생성과정 속에는 나와 주 하느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세상에는 나와 주 하느님 외에도 내 인생에 관여하는 다른 이들과 자연도 있습니다.

내가 지금 당장 뭔가 얻고 싶고,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에는, 나의 노력뿐만 아니라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 즉 자원이 뒷받침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관계 당사자인 이웃들의 협력이나 승인 내지는 묵인이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당사자들의 노력과 조건들의 조합 이외에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 일이 주 하느님의 뜻 안에 있기를, 기꺼이 주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때가 되어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나와 다른 이들과 자연이 그 조건을 무르익고 채워지도록 준비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당장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생기고,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거나 또는 안 이루어지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단기적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장기적으로 그것도 내 일생을 다 걸어 투신하고 생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난 다음에 이루어질 것도 있습니다. 그런 꿈과 희망이 내 생애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지고 채워져, 마침내 그 날 그 때에 그렇게 주 하느님의 축복 안에서 성취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주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 아픔과 고통의 순간에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청하기도 하고, 단기적으로 어떤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 하느님은 우리가 기도하고 열심히 하면 들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안 들어주시는 마음 좁은 분이 아닙니다. 또 주 하느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좋고 옳은 것과 인간 윤리의 가치 기준에 구애 받지 않으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와 믿는 이들만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 삶과 활동의 이해관계 당사자들 모두의 하느님이십니다.

아울러 천 년도 하루 같으신 하느님이시기에 내 전대와 후대의 사람들마저 고려하시고 섭리하십니다. 마치 성가대의 지휘자처럼, 모든 이해 관련 당사자들과 그 조건들을 다 고려하여, 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가고 계시며, 인간 구원의 업적을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인 구원이 마지막 날 이루어질지라도, 그 날 그 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오늘 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주 하느님께서 그 하느님 나라에서의 우리 구원을 꼭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또 그렇게 구원되기를 바라기에, 오늘 여기서 미리 그 희망을 앞당겨서 마치 그 희망이 이루어진 듯이 우리가 기쁨과 행복감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희망과 복음은 바로 이 기쁨과 행복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우리 희망의 궁극적인목표이자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축복의 결실인 우리 인간 구원이 그 날 그 순간에 이루어지고 말리라는 믿음과 희망 안에서, 오늘 하나하나 하루하루를 사랑으로 이루고 그 기쁨과 행복을 이웃에게 전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주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그 구원을!

주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와 어떻게 함께하시면서, 축복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되새기며, 마지막 날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야 말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한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 우리가 처해있는 이 제한된 인간 조건 안에서도 불안과 조바심과 좌절을 뒤로 하고, 주 하느님 말씀의 구현을 통해 이루어지는 기쁨과 평화를 미리 앞당겨 누리며, 그 기쁨과 평화 속으로 형제 자매들을 전교라는 이름으로 초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 1,17-18 참조)



연중 제15주일


새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서문

(가해) 마태 13,1-23; 14/07/13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2013년 11월 24일 신앙의 해를 마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교황 즉위 첫 권고문으로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을 발표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권고에서 새로운 복음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복음의 기쁨」은 총 288항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문 ‘복음의 기쁨’, 제1장 ‘교회의 선교적 변모’, 제2장 ‘공동 노력의 위기 속에서’, 제3장 ‘복음 선포’, 제4장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 제5장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 결어 ‘새로운 복음화의 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부터 오는 8월 15일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아시아 청년 대회’와 16일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을 위해 방한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서문 복음의 기쁨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늘 새로운 기쁨, 함께 나누는 기쁨’이라는 제하에서, 오늘날 사람들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에 빠져 살고 있다고 진단하십니다.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과 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과 고립된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 버립니다.” 라고 지적하십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앙인들에게도 매우 현실적인 위험입니다. 많은 이가 이러한 위험에 빠져 삶을 잃어버리고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찬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품위 있고 충만한 삶을 위한 선택이 아니고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도 아니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에 솟아오르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아닙니다.” 라고 하시며 “날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하십니다. 아울러 “우리가 예수님께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서 언제나 그곳에,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라는 확신을 일러주십니다.

교황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이들에게 샘솟는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으로 빛나는 복음은 끊임없이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라고 하십니다. 그 기쁨은 주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님 말씀을 듣고 이루는 이들에게 나눠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부활시기 없이 사순시기만 살아가는 듯한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회복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쁨이 더디지만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확고한 신념으로서, 극심한 비탄 속에서도 서서히 되살아 나도록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만 행복해질 수 여기면서, 온갖 핑계와 불평거리를 찾는 것은 유혹이라고 명확히 지적하십니다. “왜냐하면 ‘기술 사회가 쾌락의 기회를 중대시켜’왔지만 ‘기쁨을 낳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진 것 없는 매우 가난한 이들의 기쁨”이 참으로 ‘자연스러운 기쁨’이며, “직업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다하면서도 너그럽고 단순하며 믿는 마음을 지닌 이들의 진정한 기쁨을 떠올립니다.” 라고 안내하십니다.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며, “우리 자신을 벗어나 우리 존재의 가장 완전한 진리에 이르도록 이끄시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만길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라고 전언하시며. “바로 여기에 복음화 활동의 원천이” 있다고 확언하십니다. 즉 복음화 활동의 원천을 “삶의 의미를 되찾아 주는 사랑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규정하시며,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가져다 주는 사랑의 생활을 촉구하십니다.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이라는 제하에서 교황은 선은 널리 퍼져 나가면서 뿌리 내리고 자라나기 마련이기에, “우리가 품위 있고 충만한 삶을 바란다면,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선익을 추구”하라고 제시하십니다. “생명은 내어 줌으로써 더 자라나고, 고립되고 안주하면 약해집니다. 참으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는 제쳐 두고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전해 주려는 열정에 불타오릅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생명을 내어 주는 그만큼 생명을 얻고 또 자라납니다.” 라고 생명과 사랑의 역설적인 신비를 일러주십니다.

교황은, 교회 생활은 하느님께서 주도하신다고 하시며,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1요한 4,10)는 것을, 그리고 그분 홀로 ‘자라게 하신다.’(1코린 3,7)는 것을 언제나 분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라고 명확히 지적하십니다. 그러한 확신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온 생애가 걸린 매우 어렵고 힘든 사명 앞에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라고 복음화의 사명과 그에 따른 기쁨의 생활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복음화 사명의 새로움은 역사의 단절이나 망각이 아니며, 오히려 “기억은 우리 신앙의 한 차원이며, 둘째 규범이라고” 언급하시며, “복음화의 기쁨은 언제나 감사하는 기억에서 생겨납니다.” 라고 하시며, 이는 우리가 ‘끊임없이 간청해야 하는 은총’이라고 제시하십니다.

교황은 ‘신앙 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라는 제하에서, 지난 2012년 10월 7일부터 28일까지 열렸던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3차 정기총회를 토대로, ‘그리스도 신앙의 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를 세 분야로 나누어 새로운 복음화를 권고하십니다.

먼저 일반 사목은 “자주 정기적으로 공동체 예배에 참여하고, 주님의 날에 모여 주님의 말씀과 빵으로 힘을 얻습니다.” 라고 하신 베네딕토 교황의 강론은 인용하시며, “신앙인들의 영적 성장을 지향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더 온전하게 응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라고 밝힙니다.

둘째,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의 요구대로 살지 않는 이들’에게 “신앙의 기쁨을 되찾는 회개, 복음대로 살려는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회개를 경험하여” 신앙의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하십니다.

셋째, 복음화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 또는 여전히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하시며,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 때문”이라고, 복음의 기쁨에 대해 일러주십니다.

교황은 열정과 생명으로 가득 찬 새로운 복음화의 단계에서, ‘교회 개혁과 선교 활동’, ‘사목 일꾼들이 직면한 유혹들’, ‘교회, 모두 복음을 전하는 하느님 백성’, ‘강론과 그 준비’, ‘가난한 이들의 사회통합’, ‘평화와 사회적 대화’, ‘선교 영성의 활성화’에 대해 논의하며, 새로운 지침을 제안하신다고 하십니다. 다음 주부터는 본문에서 구체적인 주제의 논의와 새로운 지침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연중 제15주일

(다해) 루카 10,25-37; 13/07/14

우리는 다음주 금요일 26일부터 주일 28일까지 성가정 영성 캠프를 갑니다.

우리가 성가정 영성 캠프를 가면서 꿈꾸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어떻게 놀고, 어떻게 쉬고 싶습니까?

무슨 기도를 하고 싶습니까?

영성 캠프는 기도와 놀이와 일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도하고 놀고 밥 먹고 잠자는 일상입니다.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성체조배와 묵상, 묵주기도를 바치고, 복음 나누기와 나눔을 하고 매일 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조별 모임과 촛불놀이, 추적놀이, 조별 촌극 발표 등의 프로그램화한 놀이를 합니다. 그리고 식사도 하고 간식도 먹고 술도 한 잔 하고 잠도 자고 샤워도 하면서 일상을 삽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제한된 상황과 처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회사와 일이라는 짐과 활동 그리고 가족이라는 울타리와 십자가 등등. 그런 환경과 처지에서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하늘나라를 현실에서 온전히 이루기 힘들어 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오늘의 일상에서는 하늘 나라를 살지 못합니다.

일상을 떠나 성가정 영성 캠프를 가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늘 나라의 구현’입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할 수 없었던 하늘나라를 직접 설계해 보고 실현해 보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어떻게 삽니까?

하늘 나라에서는 언제 일어나 무엇을 합니까?

하늘 나라에 가게 되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우리가 꿈꾸는 하늘 나라는 어떻게 생겼고 무엇을 하는 생활입니까?

우리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하는, 기도하고 사랑하고 생활하는 하늘 나라가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고 쑥스럽겠습니까? 아니면 평화롭고 행복하겠습니까?

우리가 꿈꾸는 하늘 나라가 우리가 사는 일상과 어떤 면에서 같고 어떤 면에서 다릅니까?

우리가 꿈꾸는 지상의 하늘 나라인 교회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 지, 성가정 영성 캠프라는가상의 하늘 나라에서 우리의 삶으로 구성하고 만들어 봅시다.

오늘 복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올 성가정 영성 캠프의 셋째날 주제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꿈이요 목표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사제도, 종교인도, 모든 사람들이 강도 만난 그 사람을 그냥 모른 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유다인과는 원수같이 지내던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그 사람을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3-35)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그러자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27절) 하신 성경 말씀을 끄집어 내면서,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하면서 시비를 걸었던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라고 이르셨습니다.

복음의 정신대로 살자고 모인 훠꼴라레의 두 회원이 로마의 훠꼴라레 본부에서 같이 잠을 자게 되었답니다. 한 회원은 북쪽에서 왔고 한 회원은 남쪽에서 왔답니다. 북쪽에서 온 회원은 잠을 자다가 남쪽에서 온 회원이 더워서 고생할까 싶어 창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한 참을 자다가 남쪽에서 온 회원이 북쪽에서 온 회원이 추울까 싶어 창문을 닫아주었답니다. 그렇게 둘은 번갈아 가면서 서로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창틀만 있고 창틀에는 유리가 없었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삶이 하늘 나라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원되어 하늘 나라에 가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하며,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갈망하는 우리의 염원이 우리의 가정과 사회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당장 현실화시키지 못하는 아쉬움을 접고, 성가정 영성 캠프에서 실험해 봅시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성가정 영성 캠프라는 가상의 하늘 나라에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구현해 봅시다. 뭔가 도와주어야 하고 또 내 도움을 기다리는 이웃 캠프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하늘 나라를 구현해 봅시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빵을 나누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생전의 예수님을 알아 뵙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라고 청했습니다. 하루 종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깨닫게 되고 성체성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된 제자들의 이 말씀이 올 해 우리 영성 캠프의 주제입니다.

우리도 올 루카 복음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을 성가정 영성 캠프에 초대합시다. 성가정 영성 캠프의 기도와 놀이와 일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발견합시다. 우리가 발견한 예수님을 우리 삶과 인생의 주님으로 믿어 고백하며, 주님을 향한 우리의 꿈과 갈망을 실현하며 하늘 나라를 이루기로 합시다. 성가정 영성 캠프에서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살아봅시다.

그리하여 영성 캠프를 마치고 현실로 돌아오면서, 캠프에서 만난 예수님을 형제 자매들과 나눕시다. 캠프에서 살던 하늘 나라를 현실에서 살아봅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과 평화를 형제 자매들과 나누기로 합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연중 제15주일

(나해) 마르 6,7-13; 12/07/15

사제 수품을 받기 전에 사제 수품 후보자들은 교구장님과 면담을 하게 됩니다. 저도 당시 교구장님이셨던 김수환 추기경님과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면담 때, 저는 “주일학교 교사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일을 기획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일을 기획하고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신부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하는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사제 수품 24년이 지난 지금도 외적인 성과에 연연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실제로 하느님 나라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얼마만큼 성취했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과 얼마나 깊이 함께하는가가 관건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몇 명이 얼마의 예산을 들여서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가 아니라, 프로그램 안에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현존하실 수 있을까 하는 것과 그 프로그램을 통해 신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통해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지상 교회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몸소 임하시고 주님께서 신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변화시키시도록 기도 중에 봉헌하고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주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이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과 삶을 통해 함께하는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이 예기하지도 못했고 원하지도 못했던 상황과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주님께서는 왜 자신이 그 일을 겪도록 허락하셨는지, 그 일을 통해 주님께서는 자신과 당사자들과 관계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당사자들과 관계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등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마주치는 사건과 상황들 속에서 주님과 대면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뜻을 찾아 따르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을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서 가장 신경 써야 할 지팡이는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인 복음(말씀)입니다.

살면서 재수가 없어서, 백이 없어서, 운이 없어서 내가 이 일을 이런 식으로 겪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그 일을 풀어 해결하도록 숙제를 주시며 그 일을 통해 주님을 찾도록 그래서 주님과 함께 그 일을 풀어나가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에페 1,8-9)

주님을 믿는 내가 가정이나 세상이나 교회에서, 직업상이거나 아버지, 어머니, 자녀라는 신분상 겪는 것 중에 잘 안 풀리거나 쉽게 큰 성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도 아니요, 현세에서 죄를 많이 지어서도 아니요, 시련이나 시험도 아니요, 주님께서, 주님을 믿는 내가 주님께 청하고 의지하며 주님과 함께 겪어낼 만 하다고 보시기에 나에게 겪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작위적이거나 자신이나 어느 누구의 인간적인 노력여하로 성공과 실패 여부를 평가하거나 지금 잘 안 풀린다고 해서 스스로를 폄하하거나 포기하고자 하는 유혹과 악에 빠져 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11)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의 일을 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노력이나 생각이나 느낌조차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 의지하며, 주님과 함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면서 느껴온 ‘신자라면, 이렇게 또는 저렇게 살고 행동해야 한다.’는 선입감과 고착된 가치관 그리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집중하기 보다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인간적인 노력에서 회개합시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을 유지하고 반복하는데 그치지 말고, 매일 변화되는 세상의 변화된 상황에 주님의 말씀을 새로이 적용하며 새로운 복음화를 이루어 나아가도록 합시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마르 6,12)

아멘.



연중 제15주일

(가해) 마태 13,1-9(23); 11/07/10

우리는 가끔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옛날에는 잘 했어요.” “옛날에는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옛날은 시간이 지나듯 가버리고, 오늘은? 지금은? 그 옛날의 영화에 어울리지 않게 그냥, 아니 어쩌면 과거 우리의 결과가 오늘의 이 모습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는 더 약해지고 과거의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게 점점 초라해 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독수리의 수명은 70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독수리가 다 70년을 사는 것은 아니랍니다. 몇 마리만 제 수명을 다 살 수 있답니다. 그 몇 마리는 40년이 지난 후에 아무도 몰래 바위산의 꼭대기로 올라가, 자기 부리로 바위를 찍어 두꺼워진 자신의 부리를 다 쪼개 새 부리가 나오게 하고, 새로 나온 부리로 자기 발톱을 찍어 발톱도 새롭게 하고, 새 발톱으로 날개를 다 뜯어서 새로운 날개로 만들어 새로운 생애를 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답니다. 그렇게 자기를 재생시킨 독수리가 70년의 수를 다 누리게 된답니다.

독수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어제나 과거의 영화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날마다 ‘우리의 나약해진 육과 안락하고 풍요한 오늘의 내 처지 때문에 더 이상 도전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꾸준하고 충실히 계속 정진하고 단련하지 않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인생의 길을 안내하고, 생명을 가져다 주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씨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와 그 말씀과 함께하는 우리 인생의 역사를 밭에 비유하여 말해줍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마태 13,3-4)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19) 결국 예수님의 좋은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과 어긋나고 심지어는 반대되는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리스도교 신비의 영역에 대해 인정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20-21) 결국 성당에 나오는 것이 자기에게 경제적이고도 현실적으로 이익이 되면 나오고, 그렇지 못하거나 오히려 손해를 보면 안 나오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성당에 나와 위로도 받고 좋은 동료들이라도 만나서 함께 하기를 바라고 나왔지만,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위로를 받지 못했다거나 좋은 친구를 만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함께 일하다가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기고 섭섭한 감정을 간직한 채 떠나는 사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 결국 이 세상에 자기 하고 싶은 일과 실제로 하는 일이 많아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당에 나오는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마음에만 간직하고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 역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8) 그리고 그 비유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23) 즉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그 뜻을 깨달아 실제 자기 삶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이루고 실현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시작하고 이미 지금 여기서 벌써 하늘나라의 삶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제 남은 수를 다 누리기 위해 오늘 자기 부리와 발톱과 깃털을 스스로 짓이겨 새로 만들어내는 독수리처럼, 과거와 옛날이라는 두껍고 무겁기만 한 영예의 옷을 벗어 던지고,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는 좋은 땅’(23)이 되기 위해 “들을 귀 있는 사람”(9)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로마 신자들에게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0-21) 라고 한 성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의 미래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우리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인내로 새로 납시다.

아멘.



연중 제15주일

(나해) 마르 6,7-13; 06/07/16

찬미 예수님!

안녕하십니까?

요즘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활동을 나가려고 해도 개스값이 너무 비싸서 부담스럽다고 합니다.

오늘 미사 때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가두선교 발대식을 하고, 8월 27일까지 가두선교를 하게 됩니다. 무더운 여름에 낯선 사람들을 상대로 선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건만 용기를 내서 선교의 일선으로 나가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을 위해 박수쳐 줍시다.

박수만 칠 것이 아니라, 기회되면 함께 나가서 동참해도 좋겠습니다. 정 안되면 옆에서 도와주기라도 하면 좋겠고요.

선교를 한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한쪽으로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전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일본에까지 와서 선교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지나치게 엄격했던 선교사들에 대해 불평도 하고 지금 와서 새로운 평가들도 하지만, 정작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 가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나선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존경받을만 합니다. 단순히 다른 나라와 다른 사람들 속으로 이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스스로 살면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선교는 생각만 해도 참 어려운 일이겠구나 싶습니다.

과연 선교사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복음을 전할 그 나라 그 지방 그 사람들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겠고, 자기가 전해야할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겠지만, 정말 주님께 미치지 않고서는 선교하겠다는 엄두도 못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주님께서, 하루 아침에 그냥 자고 나면 눈 떠지고, 밤에 자고 나면 그냥 아침이 되어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되는 일이 아니고, 그 결실을 맺을 때까지는 무던하고 부단히 자기의 희생과 노력을 한참이나 쏟아 부은 뒤에나 가능한 일인데 선뜻 그 십자가의 길을 나서는 선교사들을 바라볼라치면 성소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부럽고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가두 선교를 나서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가두선교를 나가서 단순히 교회의 소식지와 소개서를 나눠주고 말 수도 있겠지만, 가두선교가 결실을 맺어 우리 성당의 예비자 교리반에 들어오기까지는 여러분이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대상자에게 대한 지속적이고 진실한 선교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러자면 무엇을 얼마만큼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교회, 즉 교리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믿는 믿음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학 박사가 아닌 만큼 교리를 다 알 수도 없고 그리고 박사라고 하더라도 다 알지는 못한다고 치면, 교리를 다 모르는 것에 대해 두려워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기에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그 시간에 일러 주실 것이니 그대로 말하여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마르 13,1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대로 살아야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도 제대로 못살고 덕은커녕 우리가 계획한 것도 다 하지 못하고 사는데, 어떻게 우리가 살지도 못하는 믿음을 완전히 다 이루며 살 수 있겠습니까! 물론 믿음대로 믿으면서 살아갈 수만 있으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우리 사는 모습을 다 보고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인격적으로 존중은 받기는커녕 그저 손가락질이나 당하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때가 있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모범을 보이지도 못하면서 선교할 수 있겠냐고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는 쓰시겠다고 부르시니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7)

제자들이 교리를 다 잘 알아서, 다 모범을 보일 정도로 착하고 열심해서 주님께서 그 제자들을 선교하도록 파견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그럼 무엇인가?

제자들이 선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대로 하면 된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하라는 대로 열심히 한 것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선교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고, 또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과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사명에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 참 하느님이실뿐만 아니라 그 하느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구원으로 이끌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또 주님의 말씀대로 그 하느님께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들어주시리라는 희망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또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선교에 투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을 위해 우리 스스로 점검해 봅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믿는다고 했는데, 그럼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를 살려주시고, 오늘 이 험악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주고 계시다는 것을 언제 어떻게 느꼈는가? 내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나를 살려주셨다는 것을 언제 어떻게 확실히 믿게 되었는가?

내 생명과 연관한 내 믿음을 고백하고 설명할 수 있는 상황과 사건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고 마침내 구원하시리라고 믿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주님께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는가? 나에게 있어서 주님께서 나를 구원으로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을 심어주신 적이 언제 어떤 일을 통해서였는가? 뭘 근거로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리라고 확실히 믿고 바라고 있는가?

지난 체험과 추억이 없다면, 주님께서 지금 내가 주님께 바라는 것을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어떻게 믿고 기도하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주님의 구원에 연결해 주고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또 그러기에 주님께서 살려주셨다는 사실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형제들에게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주님 앞에 데려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을 모시고 구원의 길을 향해 함께 걸어 나가기로 합시다.

믿음만으로 다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노력하고 준비하고 결심하는 것을 다 가능하게 하는 것이 주님께 대한 믿음이기에 더욱 굳센 믿음과 믿음을 더욱 깊게 하는 기도생활을 통해 우리의 선교사명을 준비하고 실현하도록 합시다.

이어지는 가두선교 발대식에서 이분들에게 진정 주님의 영이 충만하게 내려오셔서 이들과 함께하시고, 주님께서 이들이 전하는 복음을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도록 그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고, 전해진 주님의 복음이 이들과 이들에게서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을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합시다.

잠시 우리 믿음의 근저를 되새겨봅시다.



연중 제15주일

(가해) 마태 13,1-23; 05/07/10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주먹을 꽉 쥐고 나오지만, 돌아갈 때는 두 손을 피고 죽는다.” 이 말은 세상에 태어날 때는 세상에서 무엇이든 다 하려고 하고 다 가지려고 하지만 결국 세상을 떠날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해왔습니다. 결국 인생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보내는 시간인지, 아니면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을 보내는 것인지 의아해 할 때도 있지만, 인생은 자신의 꿈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희망과 번뇌의 연속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면에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던 때와 마음은 먹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고생하고 희생해야할 모든 것 때문에 망설여지는 때가 다르다는 것도 실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과 ‘씨를 받은 땅의 종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서 뿌린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우리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길바닥에 떨어져 새가 와서 쪼아 먹은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그나마 잊어버리는 사람”(4. 19)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좋은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과 어긋나고 심지어는 반대되는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리스도교 신비의 영역에 대해 인정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져 싹은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뜨자 타 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라버린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고,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는 사람”(5-6.20-21)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성당에 나오는 것이 자기에게 경제적이고도 현실적으로 이익이 되면 나오고, 그렇지 못하거나 오히려 손해를 보면 안 나오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성당에 나와 위로도 받고 좋은 동료들이라도 만나서 함께 하기를 바라고 나왔지만,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위로를 받지 못했다거나 좋은 친구를 만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함께 일하다가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기고 섭섭한 감정을 간직한 채 떠나는 사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혀버린 씨는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7.22)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이 세상에 자기 하고 싶은 일과 실제로 하는 일이 많아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당에 나오는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마음에만 간직하고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 역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씨는 말씀을 듣고 잘 깨달아 열매를 맺은 사람”(8.23)이라고 하십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그 뜻을 깨달아 실제 자기 삶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이루고 실현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시작하고 이미 지금 여기서 벌써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상 네 가지 땅 중에 어떤 땅에 해당하십니까? 길바닥입니까? 돌밭입니까? 가시덤불입니까?

아니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몇 배의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슴 속에 심어주신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고 얼마만큼의 열맺를 맺고 계십니까?

주님의 말씀을 잘 되 새기고 깨달아 실제 삶에서 실현하셔서 좋은 열매를 맺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3)



연중 제15주일

(다해) 루가 10,25-37; 2004/07/11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이곳 파이브 마일 파크에서 본당 전체 야외미사를 봉헌하면서, 모처럼 신자들이 모여 즐겁고 기쁜 하루를 보내시기 바란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 "교회가 살라고 하는 방향이 정확히 무엇이냐?" 등의 질문에 답을 하는 듯 하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5)하고 물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이겠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에게 반문하시며 그의 답을 요구하신다.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26)

그러자 그 율법학자가 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27)

그러자 예수님께서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28)하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율법학자와의 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율법학자가 예수님 앞에서 잘난 척을 하느라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하고 물은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으신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길가에 쓰러져 있는데 사제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쳐 버리고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수라고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돌보아 주었다는 이야기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33-34)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35)

그러시고는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학자에게 물으신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36)

그러자 그 율법학자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37) 하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하신다(37). 결국 율법학자는 잘난 척 하다가 숙제만 하나 더 얻은 셈이 되고 말았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사제가 처음 되었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엔 교회에 얽매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느님의 사람으로써 어떻게 해야하는가 보다, 현실 교회 안에서 천주교 신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놓여져 있다. 성당에 혹시라도 가난한 이들이 찾아오면, 이 사람이 가난을 핑계삼아 사기를 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도와주어야 하는 것인지를 식별하느라 긴장하게 된다. 그러나 빈첸시오회처럼 누군가 사제와 함께 그 식별과정을 함께해 주기라도 한다면 그냥 단순히 지나쳐가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비단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 교회의 사제가 짊어진 일들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면, 사제뿐만 아니라 그 교회가 이 현실 사회의 요구를 지나쳐 버리지는 않게 될 것이다. 그 때 교회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사제적 백성으로서의 자기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엔 옳으냐 그르냐도 중요하지만 연대도 중요하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그것도 조직적으로 함께할 때 비로소 더 낳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의 진정한 본질이다. 잘난 어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라 함께 서로의 장점을 나누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합쳐서, 보다 더 나은 한층 더 고양된 하나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양성 안의 일치와 연대가 현대 교회의 화두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누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냐를 찾아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라고 한다.

그리고 더 본질적인 것은 저기 멀리 외국이나 가난한 나라의 양로원이나 고아원에 사는 불쌍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곧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27) 제2계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이 어떻게 얼마만큼 하느냐가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얼마만큼 할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내 주위에 누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조차 알고 있지 못한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처럼 지나쳐 가는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그야 말로 창피한 사람이 될 것이다. 비단 주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우리는 그 누구의 이웃도 되지 못할 것이고 그 누구도 우리의 이웃이 되어 우리와 함께하려 들지 않아서 아무런 이웃도 없이 쓸쓸하고 외롭게 살 것이다.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늘 형제 자매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향해 "사랑을 베풂"(37)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 주자."(36) 오늘 야외미사를 드리며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구역 식구들에게 기꺼이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비단 구역 식구들뿐만 아니라, 처음 만나는 이들과 함께 인사하고 서로를 나누어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주고 이웃이 됨으로써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된 교회가 되도록 하십시오.



연중 제15주일

(나해) 마르 6, 7-13; 2003/07/13

지난 주 우리 본당에 새사제가 탄생했다. 참으로 기쁘고 경하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제는 탄생함으로써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만큼 본당 교우들 모두가 꾸준히 열심히 기도해야겠다.

가끔 교구에서 인사발령을 낼 때, 보좌신부가 모자라서 본당을 신설하지 못한다는 말을 한다. 본당을 하나 새로 신설하기 위해서는 기존 본당의 보좌신부들을 빼서 본당 주임사제로 임명에 해야 한다. 그런데 기존본당에서 보좌신부를 하나 빼면 그 자리에 다른 보좌신부를 임명해야 하는데, 새로 임명할 보좌 신부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매년 20∼40여분의 새신부가 나오지만, 본당에서 보좌신부를 청하는 수는 평균 50여명이 넘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속적인 사제 양성을 위해 유학도 보내야 하고, 교회의 전통과 유지 발전을 위해 성음악과 성미술 등의 전문화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회사목 분야 등에 사제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정말 터무니없이 모자란다. 지난 화요일 복음 중 "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마태 9, 37-38)라는 말씀이 정말 마음 깊숙이 와 닿는다.

2002년도 서울대교구 통계를 보면 신자 1,409,022명에 본당 248개다. 한 본당에 평균 2명의 사제가 있다고 본다면, 사제 1인당 약 2,841명의 신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본당에 봉직하는 사제들이 그 본당 신자의 이름이나 제대로 외운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신자들이 바라고 또 교회가 지향하는 사목사제상, 이른바 신자들의 애로를 들어주고 감싸 안아주며 주님의 위로를 전해주고 은총을 빌어주는 것 자체가 교회의 현실 수치만 봐도 불가능해 보인다.

새사제의 탄생을 경하하는 마음 뒤에, 새사제가 발령을 받아 떠나면 우리 본당에는 신학생이 그나마 한 명도 안 남는다. 사제 양성기간이 7년 군대까지 10년이라고 볼 때, 내년에 신학교에 한 명이 새로 입학한다 해도 앞으로 10년 후에나 새신부가 하나 탄생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 교구에 등록한 예비 신학생이라고는 겨우 고등학교 2학년생 한 명 있으니 앞으로 11년 전에는 우리 본당에 새사제 탄생은 없는 것이다. 어디서 신학생을 꾸어오거나 이사와 주지 않으면 말이다. 여러분의 자녀는 지금 몇 살인가? 여러분의 손자는?

귀엽고 귀한 여러분의 자녀를 성직자 수도자로 봉헌해 주십시오. 여러분 주님의 뒤를 이어 이 땅에서 교회를 이끌어 나갈 성직자 수도자가 될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성소자들을 보내주십시오.



연중 제15주일

(가해) 마태 13 1-23; 2002/07/14

예수님의 말씀인 씨가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간다."(19절)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교리나 무슨 운동이 우리 생활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면 얼른 가입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가담하지 않는다. 예비자들이 교리를 다 받고 나서 과연 내가 평생 몸담을 곳인가의 여부를 결정할 때와 같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 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20-21절) 좋은 일을 하려고 하지만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때, 열심히 일하지만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고 호응해주지 않을 때, 좋은 의도로 일을 시작했지만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때, 좋은 일을 했지만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고 심지어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모함을 받을 때 쉽게 포기하고 싶고 실제로 그런 이유로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22절)을 의미한다. 좋은 일이라고 여겨 열심히 일하지만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지 않을 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계속 복음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한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달아 열매 맺는 사람"(23절)을 의미한다.

우리는 과연 신앙 면에서 어떤 땅일까? 아니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귀를 세우고 듣고 있는가?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주님의 좋은 말씀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님의 말씀을 무시할 수도, 현실을 떠날 수도 없다. 우리는 다양하고 변화하는 사회의 현실 안에서 하늘 나라를 이루라는 말씀의 본 뜻을 잘 깨닫고,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 제도나 환경을 조성해 반드시 실현해야만 한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계란 한 덩이 같은 우리의 시도가 한 번 실패한다고 해서 포기할 수도 없다(로마 8, 23 참조).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인 우리들을 통해 몸소 활동하시고 열매를 맺으시도록 우리를 봉헌하며 주님의 좋은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자(이사 55, 11 참조).



연중 제15주일

(다해) 루가 10,25-37; 01/07/15

어떤 할머니가 물었다. "우리 며느리가 교회의 집사인데 하도 집안에서 못되게 굴어서 그러는데 나는 천주교 나오면 안됩니까?" 그래서 대답했다. "천주교는 언제나 문이 열려있지만 집안의 화목이 우선 아닌가요?" 우리 천주교우들의 집안에는 이런 일이 없을까요?

어떤 교우가 사회 복지 시설에 가서 하루 종일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오니까, 정작 옆집에 혼자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더란다. 그것도 죽은지 3일이 지난 뒤에 발견해서 썩을 대로 썩어 냄새가 코를 찌르더란 소리를 듣고는 생각했단다. 내 집안, 내 이웃도 못 돌보면서 무슨 낯으로 주님을 뵈오랴?

지금까지는 소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자각시키기 위해 본당의 행사와 주요업무를 구역 반이 담당하는 것에 주력했다. 그 결과 단체가 먼저냐 구역이 먼저냐 하는 불필요한 긴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소공동체는 본당 교회에서 성장한 모습으로 그리고 단체는 특화된 자신의 영성으로 지역별로 나뉘어진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26-27)고 하셨다. 본당 일에 그리고 멀리 떨어진 사회 복지 시설에 단체별로 봉사함으로써 신앙생활을 다 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시대를 마감하고, 신자들 모두가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복음을 실현함으로써 지역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을 바라보는 이웃의 시선은 따가워지기만 할 것이다.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기도할 것인가? 그리고 자기가 듣고 믿는 복음을 어디서 실현할 것인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하고 묻던 율법 교사에게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다. 우리말에도 '이웃 사촌'이란 말이 있다.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자기를 나누는 것이 참 사랑을 실현하는 길이다. 본당 일과 단체 모임과 봉사활동에 바빠서 자기 집안이나 이웃을 돌보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처럼 지나쳐간 사람들이 될 뿐이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37)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가 속한 구역 반별로 소공동체 모임과 단체가 함께 어우러져 지역 교회로서의 그 소명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차츰 그 범위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



연중 제15주일

(나해) 마르 6, 7-13: 2000/07/16

예수님께서는 오늘 열두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전에는 교회에서 선교를 전교의 차원으로 행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어서 빨리 온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신자로 만들기 위해 세상 끝까지 나갔습니다. 선교사들은 사람들을 성당으로 데려와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어 신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흙탕물이라는 세상에서 붕어를 건져다가 교회라는 어항에 넣어둔 것은 좋았지만, 그 붕어가 다시 세상으로 나갔을 때 붕어는 다시 흙탕물에서 고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이제 붕어를 어항으로 옮길 것이 아니라, 흙탕물인 세상을 좋은 물로 바꿔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교도 전교에 그칠 것이 아니라 복음화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본당의 규모도 서로 알고 지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분당하고, 교회를 '소공동체들로 엮어진 공동체'로 삼아 소공동체들의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복음화의 사명을 다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현대의 복음선교 17항에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을 복음화의 전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복음화는 '교회가 선교하는 메시지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활동, 그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18항).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것'입니다(19항). 그러므로 복음화란 종래의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던 '전교'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보다 역동적이며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고 신자로 만들뿐 아니라 그들이 생활하는 삶의 현장에 구체적인 변혁과 역전이 전개되도록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복음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참된 복음화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처럼 적당한 규모의 소공동체를 확립하여야 합니다'(23항).

이것이 우리가 구역, 반모임을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가정과 동네를 하느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소공동체로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소공동체 구역, 반원들과 함께 공동으로 실천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바꾸고자 합니다.


제5회 농민주일 담화문

"온 땅은 본래 하느님의 것입니다"

2000/07/16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7월의 셋째 주일은 농민들의 대희년이자 한국 주교회의가 제정한 농민주일입니다. 올해로 다섯 번째 맞는 농민주일은 고된 농사일을 통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농민들에게 한마음으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또한 점차로 그 가치가 망각되고 있는 농촌과 농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이 더욱 널리 확산되기를 기원하는 날입니다.

지금 우리의 농촌은 무분별한 농축산물 수입, 상대적인 농가 소득 저하, 만성적인 농가 부채, 지속되는 농촌 붕괴 현상 등 여러 문제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또한 금년 봄 구제역 파동과 밀, 보리 등 겨울 작물의 흉년은 농민들의 어려움을 가중시켰습니다. 더군다나 전세계적으로 농산물의 무역 자유화가 더욱 확대될 전망이어서 우리 농촌의 생산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근본 원인은 인간이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함이 없이 물질적 풍요와 편리만을 무한정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정보화와 세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 물결은 선진국 중심의 안녕과 번영을 극대화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어 모든 인류의 진정한 발전과 복지에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제3세계의 농촌 붕괴 현상 역시 지구적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생명과 환경 파괴' 현상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총체적으로는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외면, 지구 생태계 파괴, 기상 이변, 자원 고갈, 국가 간 빈부 격차의 심화, 수급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식량난 등 수많은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은 바로 이와 같은 위기 현상에 대해 한국 교회가 제시하는 대안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농촌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깨닫고, 생명 중심의 가치관을 재정립하며, 도시와 농촌에 공동체를 건설하여 도·농이 공동체적으로 창조 질서를 보전하는 일에 앞장서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운동을 '생명·공동체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대희년의 기본 정신은 "하느님의 드높은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본래의 하느님의 것이며(신명 10,14), 인간은 단지 그것을 올바르게 이용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희년이 되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리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레위 25,8-55). 그것들은 곧 본래의 창조 질서, 평등과 조화와 공생의 질서로 돌아가라는 촉구입니다.

대희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대안적인 생활 양식을 만들어 가라는 부르심에 충실하기를 다짐해야만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현대 사회는 그 생활 양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는 한 결코 생태학적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것"(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 13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 극단적인 편리함과 효율성의 추구를 벗어나 생명 중심적인 문화를 건설하고 자연 친화적인 생활 양식을 영위해 나가는 데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농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새기며, 농민 여러분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아울러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이 '새 하늘 새 땅'을 위한 대안 운동으로 다시금 자리가 매겨지고 확산되어 나갈 수 있도록 여러분 모두의 참여를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2000년 제5회 농민주일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장 봉 훈 주교



연중 제15주일

(가해) 마태 13,1-23(13,1-9); 99/07/11

지난 6월 30일(수요일) 오전 1시 30분 ㅅ유치원의 원아들이 여름 행사를 갔다가 19명의 아동들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린 생명이 너무 아까워서 억울하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분통이 터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어처구니없고 예기치 않은 일을 당하게 되면, "왜 하느님께서 이런 현실을 그냥 내버려두시는가?"하고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2세 교황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고통'이라는 서한에서 "사람들은 흔히 바로 세상에서부터 인간에게로 고통이 오고 있는데도, 인간은 이 물음을 세상을 향해 묻지 않고, 세상의 창조자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께 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구약성서의 욥기 1장 12절과 2장 6절을 예로 들면서, "선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통을 겪는 것을 허락하실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또 한편 야고보 사도는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야고 1,13-15)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벌이라도 받아서 빨리 죽지 않고 잘 사는 것을 보고 억울해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들으라는 듯이, 사도 베드로는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2베드 3,9.1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가? 사도 바오로는 오늘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 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로마 8,20-2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뿌려진 '주님의 말씀'이라는 씨를 열매맺기 위해 주님께 신뢰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기도하고, 해가 쨍쨍 내리 쪄도 타지 않게, 가시가 자라도 숨이 막히지 않게 우리 스스로를 좋은 땅이 되도록 갈고 닦아야 하겠습니다.



연중 제15주일

(다해) 루가 10,25-37 : 98/07/12


율법교사는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0,25) 하고 주님께 묻는다. '영원한 생명'이란 주제가 우리에게도 관심거리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주님을 만나면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청할까? "지금 내가 무슨 사업을 하면 돈을 벌까요?" "지금 내가 하는 사업이 망하지 않게 해주세요." 지금은 어려운 시기라 그럴까? 아니다. 언제나 우리는 현세의 물질적인 풍요라는 유혹 속에 직면해 있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솔직하다. "먹고사는 것이 먼저지…"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삶에서 최우선의 자리는 하느님이 아니라, 나다. 입으로는 구원을 말하고 마음은 주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면서도 실제 우리 몸은 구원을 찾지 않는다. 아쉽게도 이것이 우리 신앙의 현주소다.


그런데 누가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고, 누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 전체가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의 은혜라고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루가 10,27)는 주님의 말씀을 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셨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항상, 아니 일생을 계속 주님께 매달리고 매달려도 받지 못했다고 느끼며 불평만을 계속 할 것이다. 한편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가 10,29)라는 질문에 주님은 '나에게 도와달라고 청하는 사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신다. 실제로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소수이며, 또 우리가 마음만 합치면 도울 수 있다. 기회를 기다리고, 조건을 맞출 것이 아니라, "주 하느님의 말씀은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4) 라는 주님 말씀처럼 우리가 안 해서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이루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너도 가서 그렇게 (사랑)하여라."(루가 10,37) 하시고 주님은 몸소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로 1,20ㄴ)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나마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신'(골로 1,20ㄱ) 주님, 이제 저희를 내세워 당신의 뜻을 이루십시오." 아멘.



연중 제15주일

(나해) 마르 6,7-13 : 97/07/13

우리 각자 자신의 지난 세월을 되새겨봅시다. 각자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되새기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주시고 극진히 보살펴주셨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에페 1,3) 우리가 자랄 때 아찔했던 순간들,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하고 새로운 학교와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그 많은 사건들 중에 주님께서 어떻게 함께 해주셨는지! 사회에 첫 발을 내 딛을 때, 결혼을 했을 때, 부모 곁을 떠나 보금자리를 새로 꾸미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 그 순간 순간을 어떻게 이끌어 주셨는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7절) 게다가 우리를 그냥 돌보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의 어둠에 갇혀 있도록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총으로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주셨습니다."(8-9절)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대신 죽여가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해주시고 점지해주시고 미리 뽑아주셨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4절) 그리고 마지막날 우리를 기어이 구원하시고야 말리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10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로 이웃형제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11절)


E-mail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