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


새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교회의 선교적 변모

(가해) 마태 13,24-43; 14/07/20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은 제 1장 ‘교회의 선교적 변모’입니다. 교황은 이 1장에서 교회를 관리하는데 그치지 말고 선교로 출발하며, 그 동안 시행해왔던 모든 선교 목표와 조직 및 양식과 방법을 현대인들에게 맞추어 재구성하고 다시 시도하자고 말씀하십니다.

교황은, 복음화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하신 예수님의 선교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시며 일장을 여십니다.

‘출발하는 교회’ 라는 제하에서, 교황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 예레미야에 이어 예수님의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믿는 이들에게 어떻게 ‘출발’하라고 촉구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모두 선교를 향한 이 새로운 ‘출발’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

제자 공동체를 활성화시키는 “복음의 기쁨은 선교의 기쁨”이라고 하십니다. 일흔 두 제자들이 선교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아버지께 찬미를 드리셨을 때, 첫 개종자들이 제자들의 오순절 설교를 각 나라 사람들이 각기 자기 나라 말로 들었을 때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 기쁨에는 언제나, 출발하여 복음을 전하고 자기 자신을 떠나 좋은 씨앗을 뿌리며 끊임없이 나아가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과 이루는 친교는 그분과 함께 가는 여정이라고 하시며 “친교와 선교는 서로 깊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라고 강조하십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장소에서, 온갖 기회에,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출발’하는 교회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을 따라 형제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 ‘첫걸음 내딛기’를 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들의 일상생활에 뛰어들어 그들과 거리를 좁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인간의 삶을 끌어안고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지며 ‘뛰어들도록’ 합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자들은 ‘양들의 냄새’를 풍기고, 양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기나긴 길이라도 한 걸음 한 걸음을 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복음화는 무한한 인내로 이루어지며 온갖 제약을 헤아리기에, 주님의 은총에 충실한 복음화는 또한 ‘열매를 맺습니다.’ 끝으로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기뻐하게 됩니다.’ 복음화로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작은 열매를 맺을 때마다 기쁨에 찬 교회는 일상과 전례 안에서 기쁨을 샘솟게 하고, 교회는 복음화하고 복음화됩니다.

교황은 ‘사목 활동의 쇄신’이라는 제하에서, 교회는 단순한 관리에서 그치지 말고, 온 세상에서 ‘지속적인 선교 자세’를 유지하자고 하십니다. 교황 바오로 6세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교회의 모든 쇄신은 본질적으로 교회 소명에 대한 충실성의 증대에 있다.” 라고 단언하십니다. 그 소명은 선교 선택이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입니다.

“본당은 그 지역에서 사는 교회의 현존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 생활이 성장하는 장소이며, 대화와 선포, 아낌없는 사랑 실천, 그리고 예배와 기념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이며, “이 모든 활동을 통하여 본당 사목구는 그 구성원들이 복음 선포자가 되도록 격려하고 교육합니다.“ 라는 건의문을 인용하여, “본당 사목구는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살아 있는 친교와 참여의 장소가 되고 온전히 선교를 지향하여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다른 교회 기관들과 기초 공동체와 소공동체들, 여러 운동들과 단체들은 모든 영역과 분야를 복음화하고자 성령께서 불러일으키신 교회의 풍요입니다. 이들은 자주 교회의 쇄신에 이바지하는 새로운 복음화의 열정과 세상과 대화하는 역량을 키워줍니다. 이들은 지역의 본당 사목구라는 풍요로운 실재와 계속 접촉하며 개별 교회의 전반적인 사목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유리할 것입니다.” 라고 하시며 복음과 교회의 일부에만 집중하거나 뿌리 없는 유랑인이 되지 말도록 권고하십니다.

그 목표는 선교이며, 선교를 핵심으로 하는 사목은 “우리는 늘 이렇게 해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안이한 태도를 버리고, 지금까지 행해왔던 복음화의 모든 목표와 조직, 양식과 방법을 과감하게 창의적으로 재고하도록 권하십니다.

교황은 ‘복음의 핵심으로부터’ 라는 제하에서, “새로운 법의 기초는 성령의 은총이며, 이는 사랑을 통하여 행동하는 믿음 안에서 드러난다.”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말을 인용하며, 가장 큰 덕은 ‘자비’임을 전합니다.

“복음은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라고,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 다른 이들의 선익을 추구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라고 하며, 선교의 핵심은 특정한 이념이나 교리나 도덕적 측면이 아니라 복음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의 향기’가 선교 안에 살아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교황은 ‘인간 한계 안에서 구체화하는 선교’ 라는 제하에서, 교회는 선교하는 제자로서 계시된 말씀을 해석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며, “신앙의 유산과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이 서로 별개” 라고 밝히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려면 과거의 표현 헝태들이 반드시 쇄신되어야 한다는 것을 밝힙니다.

신앙은 언제나 어떤 십자가를 지니고 있고, 다소 모호함을 지니고 있기에,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복음 선포자의 생활 방식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그 때 비로소 “친교와 사랑과 증언으로 마음의 동의를 일깨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교회 내에서 오래되었더라도,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데 좋은 규칙이나 규범이나 수단이 되지 못한다면 쇄신시키자고 하십니다. “복음적 이상의 가치를 줄이지 않으면서, 날마다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성장이 가능한 단계마다 자비와 인내로 동행해야 합니다.”

선교하는 마음은 복음을 이해하고 성령의 길을 식별하며 자라야 한다고 하시며,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때마다, 거리의 진흙탕에 신발이 더럽혀지더라도 좋은 일을 하자고 제안하십니다.

교황은 ‘열린 마음을 가진 어머니’ 라는 제하에서, 교회는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 놓아, 누구나 어떻게든 교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교회는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자고 하십니다.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유대가 있다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밝혀, 친구와 부유한 이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자주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이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다가가자고 하십니다.

교황은 “이제 출발합시다.” 하시며,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고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가 되어,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에서 위로와 빛을 받지 못하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망각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고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연중 제16주일

(다해) 루카 10,38-42; 13/07/21

지난 주간에 제가 올 성가정 영성 캠프의 주제,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를 설명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구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놀러 가는데 하느님 나라는 왜 들먹이느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죽으면 갈 하느님 나라를 죽기도 전인 지금 신앙생활을 하며 성당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여기서 우리가 마지막 날 갈 하느님 나라를 오늘 여기서 미리 앞당겨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성 캠프에 참여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오늘 영적 여정을 통해 캠프에 참여하기로 합시다.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묵으”(루카 24,29)시기를 청하며, 루카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을 찾아 떠나는 영성 캠프의 여정의 길은 이렇습니다.

첫째 날,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고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이 응답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온전한 신뢰와 전적인 의탁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의 전 생애를 의탁합니다.

둘째 날,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습니다.”(루카 9,57) 하며 주님의 길을 걷고자 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 예수님께서 펼쳐주시는 새로운 나라,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그리워하며,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자신이 살면서 간직하고 의지해왔던 모든 가치관과 처세술을 버리고 복음 말씀을 선택하며 회개합니다.

셋째 날,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하시며,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라는 주님의 명을 실현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헌신적인 사랑을 쏟아붓습니다.

올 루카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성가정 영성 캠프의 첫째 날 주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입니다. 석녀라고 불리던 엘리사벳이 노인이 되었는데도 천사 가브리엘을 시켜 아기를 가지게 한지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다시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도록 하십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그분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전합니다(30-33절). 마리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당황해하며 되묻자, 천사는 성령께서 잉태시켜 주실 것이고, 엘리사벳도 이미 임신하였다고 알려줍니다(34-37절).

하느님의 아기를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전언에 마리아는 신뢰와 기대에 가득 차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오늘 이 대답이 평범한 여인에게서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살게 되는, 이른바 자신의 생애를 송두리째 바꾸게 될 귀로에서 주님의 말씀을 선택한 것입니다. 자식 가진 어미로서 어느 어미치고 편치 않은 일생을 살겠지만, 마리아는 자식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고, 여러 사람의 질시와 몰이해로 시달리는 아들을 보며 애달파 해야 했고, 급기야는 사람들의 원망과 증오를 한 몸에 받고 어미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한아름 가득 안으며, 한 평생을 눈물로 보내야 했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어머니 역할에 충실했고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이 응답으로 마리아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온전한 신뢰와 전적인 의탁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의 전 생애를 의탁합니다.

마리아에게 들려주신 하느님의 초대와 축복을 우리의 삶에 연결시켜 봅니다.

우리는 언제 어떤 경로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신앙 때문에 언제 어떤 상황을 겪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언제 어떻게 어려운 상황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우리 개인에게 다가온 주님의 초대와 축복을 형제자매들과 나눌 수 있었습니까?

둘째 날 주제는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습니다.”(루카 9,57) 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신성을 발견하고(20절 참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감동과 희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느님 나라와 제자들이 바라는 하느님 나라는 사뭇 다른 나라였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왕위에 오르실 영광의 예수님을 기대했지만, 정작 예수님은 사람들을 섬기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처절하게 돌아가실 분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22절)

그러기에 예수님 덕에 좋은 자리를 차고 앉아, 새시대의 부귀영화를 기대하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진면목을 깨닫고 회개하여 새롭게 봉사하는 삶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3절)

그래서 이제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57절) 라고 드린 말씀을 따라, 제자들은 이제 전혀 새로운 삶의 길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제 제자됨에 대한 아무런 현실적 물적 보상이나 보장도 없이 자신보다 타인의 안위를 돌봐야 하고(“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8절]),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따라야 하며(“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60절]), 아무런 미련이나 주저함 없이 복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절]). 그러나 제자들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치신 대가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처럼 마지막 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 예수님께서 펼쳐주시는 새로운 나라,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그리워하며,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자신이 살면서 간직하고 의지해왔던 모든 가치관과 처세술을 버리고 복음 말씀을 선택하며 회개합니다.

제자들의 신앙고백과 주님을 따르는 길을 우리의 삶에 연결시켜 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께 누구를 위해 무엇을 청합니까?

우리가 주님의 참 모습을 뵈오며 지키고 이루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셋째 날 주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입니다. 지난 주 강론 때 말씀드렸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하시며,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라는 주님의 명을 실현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헌신적인 사랑을 쏟아붓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오늘 우리의 삶에 연결시켜 봅시다.

우리가 돌보아야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와 함께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주님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마르타에게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마리아를 두둔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보다 왜 그 일을 하는지를 살피시고,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뜻을 찾는 모습을 기대하시는 주님께 다가서기로 합시다. 올 성가정 영성 캠프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담뿍 받아와 형제자매들과 나누기로 합시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연중 제16주일

(나해) 마르 6,30-34; 12/07/22

초등부 어린이들에게 캠프나 피정에 갔다 와서, “뭐가 기억나고, 뭐가 가장 좋았느냐?”고 물으면, 단연 먹는 것입니다. 뭐를 얼마만큼 몇 시까지 먹고…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휴가와 성당 행사 중에 무엇이 기억에 남고, 무엇이 좋았습니까?

여행은 우리에게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를 가져다 줍니다. 가족과 친지들끼리 함께 먹고 마시며 현실의 어려움과 고단함을 잊고 쉴 때 마음과 몸의 휴식과 스트레스와 압박에서 벗어나 여유를 누리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선교사목 활동으로 수고한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하고 말씀하십니다.

여행과 휴식이 우리에게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해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돌아왔을 때 우리가 힘겨워했던 일들이 다 사라져준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해야지 우리 대신 어느 누가 해결해 놓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충전이 없이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어려움들을 다 극복하지도 못하고, 우리 인격과 생의 근원에서 피어나는 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답답하고 지루한 생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번 캠프를 다녀와서 여러분의 마음에 무엇이, 어떤 추억이 남게 되기를 바라십니까? 친교와 신나는 놀이, 연풍 성지, 법주사 방문, 외박, 여행? 어떤 프로그램이 어떻게 진행되던지, 결국 참여자들이 추구하는 것이 참여자들에게 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번 성가정 영성 캠프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기대하고 추구할 것인가가 관건이 되겠습니다.

올 2012년 영성 캠프에서 우리가 “일어나 가자”(마르 14,42)라는 표어를 내걸고 걷게 될 영적 여정은 이렇습니다. 캠프에 참여하지 못하시는 분은 오늘 마음으로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

첫날 주제는 ‘가정 공동체’입니다. 마르코 복음 7장 24-30절에 나오는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 여인은 예수님께 다가와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26절) 청합니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딸이 마귀에게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게 되기를 청하는 부모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부모의 마음이라도 가끔 드라마에 나오는 부모 중에는, “내가 너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니?”,”너한테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데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지, 이제 와서 네 맘대로 하려고 하니?” 이런 부모의 마음은 내가 부모로서 너를 만들어 주었으니 내가 너를 위해 프로그래밍한 대로 살아야 한다. 내가 소개해준 배우자와 내가 제시해주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마귀나 그 누구의 소유와 조종과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기를 바라는 페니키아 여인의 마음과 자식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부모의 계획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대로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드라마 상의 여인들의 마음은 둘 다 자식을 위한다고 하지만 정반대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타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라는 타인이 기대하는 자녀가 되도록 요구하는 마음입니다.

가족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배우자, 내 자녀에게 내가 원하고, 나에게 도움이 되고, 내가 좋다고 여기는 대로 해주기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랑하기에 그 인격 그대로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바라고 좋다고 여기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변화되고 따라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조바심하고 원망하고 심지어는 자기를 따라주지 않는다고 원망까지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기억하고 마주보며 생각하면서 기대하고 있는 가족 구성원 그 누구와 가족 구성원 그 누구의 인격 자체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가족 구성원 그 누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주님은 “가 보아라!”(29절) 하시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 여인의 기대와 요청에게서 그 딸을 놓아주며, 그 딸아이를 고쳐주십니다.

첫날 ‘영성1. 복음 나누기’를 통해 스스로 점검하며, 주님 안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가족 구성원 그 누구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과 생각과 의도에서 놓아주면서, 그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몸소 임하시도록 하시거나, 주님께서 그에게 원하시고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주님께서 왜 나를 그 구성원의 가족으로 엮어주시고 내가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 주님의 뜻을 헤아려 보고 따르시렵니까?

그 묵상을 마치고 다른 가정들의 예를 들으며, 우리는 ‘촛불 예식’을 통해 우리 가정을 주님께 봉헌하며, 주님의 힘으로 새로운 가정을 꾸려나갈 힘을 달라고 청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날 주제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마르코 복음 2장 1-12절에서 중풍병자들의 친구들이 예수님 근처에 모인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중풍병자를 “그분께 가까이”(4절) 데려갈 수 없게 되자,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4절) 보냅니다. 자기 힘으로는 자기 자신조처 어쩌지 못하는 처지에 처해있는 중풍병자의 벗들이 그를 살리기 위해 지붕을 뚫어 그분께 가까이 내려 보내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5절)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둘째 날 오전 성체현시를 하고 성체 앞에서 ‘영성2. 묵상’을 하면서 우리의 삶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과 의미를 새깁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의 순간마다 영육적으로 나를 인도해주시고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과 그분들을 통해 나를 이끌어오신 주님과의 정을 되새기며 한 분 한 분 감사 드립니다. 묵상 중에 지금까지 받아온 은총에 감사 드리는 의미로, 앞으로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할 때 배려하고 희생으로 함께하며 갚고자 다짐합니다.

이번 한 번만, 이것 하나만 더 해주시기만을 바랄 때 우리 마음 속엔 만족보다 이기적 탐욕이 자라나고 원망과 불만과 그에 따른 불안한 감정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고 방황하며 불행하게 합니다. 그보다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깨닫고 감사 드리며, 베풀고 나눔으로써 스스로 채워지는 기쁨을 통해 진정 채워지고 구원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우리 중 어느 누구를, 잘 잘못을 따지지 않고 예수님께 데려가 고쳐줄 것인가?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명을 이어받은 지상 교회인 우리가 우리 교회 신자 구성원뿐만 아니라, 주님 교회의 이름으로 이 시대의 다른 어느 누구를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설 것인가? 어떠한 상황이 오늘 우리 사회의 중풍 걸린 상황인지, 또 주님께서는 그 중풍적 상황을 어떻게 치유하고자 하시는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단지 우리의 꿈과 요망사항에 그치는 것만 같은 이러한 기적들이 우리의 현실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교회(우리 가정, 우리 사회, 우리 나라, 우리 세계)를 주님께 맡기고 청하며 실현할 것인지?

저녁엔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의 기적 이야기들을 ‘영성3. 복음나누기’를 통해 구역별로 하나씩 되새기고, 오늘 우리의 다양하고 복잡하게 변화된 실 생활에 맞추어 표현하면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우리 존재와 삶의 참 기쁜 소식이신 주님을 살피게 됩니다. 아울러 여흥이 이어집니다.

셋째 날 주제는 ‘파견’입니다. ‘영성4. 공동체의 일치와 친교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란 강의를 들으며,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 구역별로 어떻게 본당 공동체에 기여할지를 모색합니다. 2박 3일의 영성 캠프 동안 영적으로 충만하게 양성된 우리가 우리 가정의 현실, 우리 교회의 현실, 우리 사회의 현실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됩니다. 마르코 복음 16장 14-18절에 나오는 파견사화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옛날에는 … 하루 종일 먹었어요.” “옛날에는 뭐~ 뭐~ 받았어요…” 옛날에 대한 추억과 교회를 통해 나오는 은총 속에 감사하며 우리끼리 그 은총을 소유할 때,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이 더 들어올 필요도 없고, 들어 오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들어온다 해도 겉돌 수 밖에 없습니다. 환경이 변해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새롭게 개척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그 동료들 그대로 계속 함께하기를 바라는 사적인 친교 클럽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려고도, 주님께서 내려주신 은총의 결과를 다른 이들과 나누려고도 하지 않을 때, 교회는 선교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질을 간직하지 못하고, 교회에 내린 주님의 선교 사명도 수행하지 못한 체 정체될 뿐입니다.

삼위의 하느님께서 서로 사랑하여 하나되시고, 삼위의 하느님 사이에서 흘러 넘친 그 사랑이 세상을 만들고 유지합니다. 주님 사랑이 흘러 넘치지 못하고 소수에게 갇히게 된다면, 사랑은 사람들 사이의 친교로 축소되고, 사랑을 상실하지 않고 조금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이들의 불안과 분쟁으로 교회 공동체는 내적으로는 분열되고 외적으로는 배타적이 되며, 이기주의와 그룹만의 게토주의로 변질되어 이웃 사랑은커녕 내부의 사랑조차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은 넘치는 것이고, 나누는 것이며, 나눌수록 커지고, 확산됩니다. 사랑을 받으면 기쁘고, 줄 때는 더 뿌듯합니다. 사랑이 상대를 향해 희생적으로 표현되면, 그 사랑은 상대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고, 생기를 북돋아 주며 그러기에 그를 살립니다.

세상을 죄악의 어둠에서 구해 살리시고자 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바치신 헌신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살려주시고, 우리에게 주님을 따라 세상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사랑으로 생명을 바치고 돌아가신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 형제자매들을 구하는 사랑의 선교를 살아가라고.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이상이 우리가 캠프 중에 ‘주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나누는 영적 여정’입니다.

이번 영성 캠프에서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 뵙고, 주님 안에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의 길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가 얼마나 굳건하게 우리를 서게 하고 우리 내면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는지 체험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캠프를 준비하는 지금부터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몸소 나타나시어,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연중 제16주일

(가해) 마태 13,24-30(43); 11/07/17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나 상황을 겪게 되면 질문을 던집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시는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막지 않으셨는지?’ 등의 불만 섞인 의구심을 던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 하시면서 수확 때에 태워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첫 독서 지혜서의 말씀을 들어보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지혜 12,19) 라고 위로합니다.

성 베드로 사도도, 주님께서는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1베드 3,9) 라고 말합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성 바오로 사도는 쉽사리 회개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삶을 맘 먹은 것처럼 그렇게 쉽게 변혁시키지 못하는 우리에게,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6-27) 라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가라지를 뽑아버리겠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하신 답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마주치는 사건과 상황 속에서 어느 것이 밀인지 어느 것이 가라지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일을 하는 결과가 나오겠지요. 교회는 이것을 ‘영적 식별’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유구한 전통 안에서 영적 식별의 기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영성 식별에 있어 교회 전통의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기준은 결과를 보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마태 7,20)라고 하셨다. 사도 바오로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잡아놓고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고민하며 식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최고 의회원들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 34-39)

둘째, 그러한 결정이 내려졌을 때, 그 결정으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손해를 보는지 견주어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참된 은사들은 교회(의 발전)에 도움을 주고(1코린 14,4.12.26 참조), 공동 이익을 위하여(1코린 12,7 참조)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과 일치에 기여한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신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네가 살기 위해 너를 죽이는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경의 기적들처럼 우리 일상에서 드러나는 기적은 주님께서 직접 베푸셨다는 확실한 표징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세상 자연 질서가 잠시 멈추거나 변화된 것을 기적으로 보고, 어떤 이는 자연이 애초에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그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기적으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면에는 인간적으로 할 수 없다는 확실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고 함으로써 나약한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 언급합니다. 또한 이 연장선에서 우리는 약할 때, 인간이 자기 힘으로 이것 저것을 다 하다 하다 못해서 포기할 정도가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임하십니다, 아니 그 때서야 인간은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게 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넷째, 하느님의 계시는 교회에 위탁된 신앙의 내용이 되는 기존의 계시와 조화를 이루며 또한 그것을 풍부히 합니다(1코린 14,37-38; 15,3-8; 갈라 1,15-16; 필리 3,12 참조).

다섯째, 식별의 과정에 불안보다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평화가 깃들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를 자아내며,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세적 슬픔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2코린 7,10)라고 합니다. 자끄 퀼레는 참된 선물은 빛과 평화로 드러난다고 합니다(1코린 12,2; 14,32-33; 2코린 7,10; 로마 8,5; 14,17-18 참조).

여섯째, 형제적 사랑은 성령의 열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1코린 3,3; 8,13; 로마 14,15; 2코린 6,4-7 참조).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열매를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라고 말합니다.

일곱째, 사랑은 성령의 변화없는 표지인 동시에 식별과 관련된 하나의 원칙입니다(1코린 13,4-5; 에페 4,14-15 참조). 사도 바오로는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 1,9-10)

여덟째, 사도 바오로는 식별의 최고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에 둡니다(1코린 2,10.15; 11,29 참조).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1코린 2,2) 그리고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받아라.’할 수 없고, 성령께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저는 영의 식별이라는 관점에서, 언제나 무엇을 결정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추가로 점검해 보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첫째, 내가 완전한 정보의 바탕 위에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인지? 불완전하거나 왜곡되거나 추측된 정보를 가지고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 충분한 검토와 나의 최소한의 손실을 감안한 결정인지? 감정에 휘말리거나 한 쪽으로 기울고 있거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이상만을 가지고 빨리 결정해 버림으로써 속단과 경거망동의 폐해를 피해야 합니다.

셋째, 긍정적인 시각과 진취적인 지향을 가지고 결정하는지? 가급적 만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가능하면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하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안배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악의 유혹과 난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생각하는 것 너머나 아니면 다른 방향에서 충분히 검토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의 현실에서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하는지? 결정을 내리기 전에,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그리고 결정을 내린 후에, 그 결정이 주님의 뜻에 맞는지를 깨닫도록 주님께 식별의 은총을 내려주시고, 우리의 결정이 주님의 뜻 안에 있다면 그 결정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힘을 내려 주시도록 기도했는지? 내 결정이 주님의 뜻 안에 있는 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주님의 뜻은 무엇인지 별도로 생각해 보고, 주님의 뜻이 확인될 때까지 깊이 숙고하고 기다리면서 천천히 결정을 내립니다.

다섯째,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현실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평화와 위안 속에서 살기 위해 노력하며,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지?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한 주간이 여러분 모두에게 기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다가오는 사건들을 처리하면서,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그래서 마지막 날에 우리가 가라지가 아니라, 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번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이 숨쉬는 순간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아멘.



연중 제16주일

(가해) 마태 13,24-43; 05/07/17

미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긴 어려울 때 하는 농담이 있습니다. “하느님,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은 하느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밖에는 용서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죄인이라는 판단과 단죄가 동반되어 다소 험상궂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웃기 위해 친한 친구들끼리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단지 개인적인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저런 사람이 살아서 버젓이 돌아다닌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우려를 자아내게 하는 사람도 있고, 또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다니면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정말 ‘하느님이 저런 사람은 안 데려 가시는가’ 하는 하소연을 할 때가 다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손가락 짓을 받고 지탄을 받는 사람들. 모든 사람의 원성과 미움을 사고 있는 정치, 권력가들, 법과 관습과 돈과 명예와 사회를 등지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기 이득을 취하고 괴롭히는 사람들. 우리는 쉽게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고 벌주고 싶어 하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역시 우리를 향해 미움과 증오의 감정을 보내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가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밭의 가라지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과 세상에 복음이라는 밀씨를 뿌렸지만, 죄와 악이라는 가라지도 같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은 “원수가 그랬구나!”(28)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 버릴까요?”(28)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29)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느끼고, 교육적으로 맞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너나 할 것 없이 완전하지 못한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참으로 위안을 주고 희망을 안겨줍니다.

지혜서에서는 주님의 이러한 자비하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관용을 보이심으로써 당신 백성에게, 의인은 사람들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셔서, 당신 자녀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셨다.”(지혜 12,19)

빨리 주님을 뵈옵고 싶은 이들에게는 아쉬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주님은 부족하고 나약한 이들이 회개하고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시느라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계속 습관처럼 같은 죄를 지으며 새롭게 태어나기를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우리는 아이들이 잘못하면 나무라고 바르고 좋은 것을 알려주기 위해 지적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잘 실현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와의 싸움, 세상과 현실에 길들여져 있는 자신의 육과 사랑과 믿음으로 길들여져 있는 자신의 영과의 싸움 그것이 우리를 하늘나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살라고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먽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어 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게 하겠다.”(24)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43)

우리의 마지막을 기쁨으로 맞이합시다.



연중 제16주일

(다해) 루가 10, 38-42; 2004/07/18

프랑스에는 최근에 복자품에 오른 '안뜨완 슈브리에'라는 신부가 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이 어느 성탄절에 구유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면서 참 귀중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신부님은 사제가 된지 10년 동안 그야말로 죽도록 애써 일했는데, 그 때 와서 되돌아보니 사실상 열매 맺은 것이 별로 없다고 느낀 것이다. 나이만 들고 세월만 보냈지 실상 이루어 놓은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이루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과 가까웠는가가 사제로서 주님의 사람으로서의 본질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다. 주님과 가까워야만 주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주님의 뜻을 깨달아야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고, 자기의 욕심에서가 아니라 진정 주님의 일을 할 때야만 그 일이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 실상 열매는 자기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맺어주는 것이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주님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미사 성제에 참여하고 기도하는 일뿐이다. 미사 성제에 참여하지 않고 기도하지도 않으면 주님과 가까워질 수도 없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도 없고 결국 애만 끓이고 일은 잘 이루어지지도 않고 고생만 하게 된다.

시편 작가들도 이렇게 노래하지 않는가. "주께서 집을 지어 주시지 않으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지켜 주시지 않으면 집 지키는 자들의 파수가 헛되리로다."(시편 127, 1) 집을 짓는데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해도 그것이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라면 시련은 있겠지만, 언젠가는 어엿하게 지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으려고 지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어질 수 없을 것이 아닌가. 10명의 파수꾼이 한 명의 도둑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오늘 복음서에서 마르타는 말한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주십시오."(40) 예수님이 거지인가? 예수님이 언제 밥 달라고 했나? 예수님은 밥을 먹으러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러 오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누가 더 마음에 들고 누가 더 아름답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들으려고 발치에 앉아 경청하는 마리아가 마음에 들겠는가? 아니면, 자기는 듣지도 않으면서 그나마 듣고 있는 마리아마저 끌고 가려는 마르타가 예수님 마음에 들겠는가?

마르타는 마르타 대로 자기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으니 자기 할 일은 의당 예수님께 음식을 만들어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매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으신 것이 아니겠는가? 진정 주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주님을 도와드리겠다고 나서면 마르타처럼 엉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러 이러한 것을 바라실 것이라고 우리가 주님 대신 생각하고 우리가 주님 대신 결정해서 우리가 노력하다가 안되면 '주님께서는 내가 일하시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는가 보다', '주님의 일은 애써 일해도 되지 않는 고통의 십자가 길뿐이로구나' 하면서 포기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자기가 저 좋아서 자기 일을 하면서 주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한 셈이 돼버리는 것이다. 안타깝기에 그지없는 일이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주님을 핑계삼아 자기 일을 하는 사람마저 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왜 안 도와 주냐?'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만 주는 셈이 되고 만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자기 열성에 자기가 빠져 일하다가 지치거나 일이 잘 안 되거나 사람들과 관계가 안 좋아지면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원망하면서 떨어져 나가 그나마 차라리 일을 안한 것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런 사람을 보고 우리는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럴 때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께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기 전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주님께 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럼 주님께 여쭈면 주님께서 우리 귀에 대고 말씀하셔 주시는가 그렇지 않다. 주님의 말씀은 우선 성서에 있다. 성서의 말씀을 읽고 또 읽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또 우리가 알아들은 말씀의 뜻이 진정 무엇인지 기도 중에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은 것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우리는 미사성제에서 받는 것이다. 그렇게 미사 성제를 통해 우리가 깨달은 주님의 말씀을 실현할 힘을 얻어서 자신의 일상에 적용한다. 적용한 것을 다시 미사 성제를 통해 봉헌하고 주님께 바치는 기도와 형제들과의 나눔 중에 되새기고 식별하여 한 걸음 한 걸음씩 더욱 더 주님의 뜻에 그리고 주님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하기 보다 먼저 자기가 생각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것이고 마치 주님께서 자기에게 시킨 것이라고까지 착각한다. 우리가 하루 종일 가게를 지킨다고 손님이 들어오는가? 주님께서 보내주시지 않으면 가게를 지키고 애써 일하는 모든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리고 들어오는 손님 하나 하나를 주님께서 보내주신 손님이라고 여겨 감사드리고 귀하게 여기고 대접한다면 주님께 보답하고 형제들에게 광고하는 셈이 아닌가?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충실히 그리고 끊임없이 청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기에는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가 하더라도, 그나마 이렇게 라도 살게 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드리는 의미로 주님의 일도 해야한다. 주님의 일은 교회에 봉사하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신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41-42)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담화문 - 쌀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애써 농사지은 것을 약탈해 가도 보고만 있어야 하겠습니까"(이사 1, 7)

2003/07/20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7월 셋째 주일은 한국 천주교회가 제정한 농민주일입니다. 농민주일은 농촌에서 생명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을 기억하고 그 수고에 마음을 모아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또한 우리 농업·농촌의 현실을 직시하고 어려움에 처한 우리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의 지혜와 힘을 모으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1994년 우르과이라운드협상 타결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농촌을 살리기 위해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이 운동을 범 교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995년 가을 주교회의에서는 농민형제들이 가장 힘든 시기인 7월 셋째주일을 농민주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교구별로 이 운동을 추진할 교구본부를 설립하고 농촌에서는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마을이나 공소에서 생산공동체를 만들어 생명농업을 실천하고, 도시에서는 생명농업을 통하여 생산된 먹을거리를 나누며 도·농이 하나되는 공동체적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농촌을 살리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농촌은 더욱 어렵게 되엇습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이후 1,312개 전 품목의 농산물이 수입개방되어 농가소득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빚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농촌공동체는 파괴되어 가고 농촌을 떠나는 농민은 줄을 이어 이제 전 인구의 7.5%인 359만 명만이 남아서 농촌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4년 말 타결목표로 현재 진행 중인 세계무역기구농산물협상은 우리 농업·농촌을 송두리째 삼킬 기세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도하개발의제(WTO/DDA)라 불리는 이 협상은 대폭적인 관세 및 국내보조 감축을 통해 완전한 농산물 시장 개방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만약 수출국의 주장대로 이번 협상이 타결된다면 우리의 농업·농촌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될 전망입니다. 이에 앞서 농업강국인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된다면 이는 우리 농업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우루과이라운드협상에서 10년간 관세화를 유예받았던 쌀마저도 더 큰 폭의 개방여부를 놓고 내년부터 재협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농업·농촌은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심각한 농업위기가 비단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문제이자 국가의 문제라는 데 있습니다. 농산물 수입개방의 확대는 기본적으로 식량자급율 하락으로 인한 식량안보의 위협과 함께 장기간 저장·운송되는 수입농산물의 특성상 국민건강을 크게 위협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수강산이라 칭하던 우리의 환경도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파괴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하느님 창조질서를 위협하는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농업은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식량생산기능 이외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수많은 공의적, 다원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별히 홍수조절과 대기정화, 수자원함양 등 화경적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진 각 국이 자국농업보호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농업의 절대적 가치 때문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쌀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쌀은 지난 5천년 동안 우리 겨레를 먹여 살려온 생명이자 문화며 민족의 혼입니다. 쌀은 우리나라 전체농가의 74.9% 농업소득의 54%에 달하는 농가경제의 버팀목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농업은 인간과 자연이 협력하여 하느님 창조사업에 가장 친숙하게 동참하는 생명산업이자 기초산업입니다. 그리고 농촌은 모든 생명이 창조질서에 따라 공존·공생하는 생명의 터전이며 우리 모두의 고향입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전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쌀을 지키고 농촌을 살리는 일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생명·환경·농업문제를 극복하는 일이며 하느님 창조질서를 회복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기가 막혀 땅이 꺼지게 한숨만 쉬고"(예레 14, 4) 있는데 우리는 "애써 농사지은 것을 약탈해 가도 보고만 있어야 하겠습니까"(이사 1, 7)

생명이신 하느님은 농부이십니다(요한 15, 1). 농민이야말로 자연을 돌보고 생명을 섬기고 가꿈으로서 하느님 창조사업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생명의 일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우리의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놓으신 것처럼 농민들 또한 온 몸으로 우리의 양식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농민들의 노고와 농업·농촌의 중요성을 생각하면서 하느님 창조질서를 보전하고 위기에 처한 생명·환경·농업을 살리고자 하는 우리 농촌살리기운동에 다함께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2003년 제8회 농민주일에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장

장봉훈 가브리엘 주교



연중 제16주일

(가해) 마태 13 24-43; 2002/07/21

농담 중에 "주님, 이 사람은 주님밖에 구원할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말은 끔찍한 말이다. 더구나 같이 사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동료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더욱 섬뜩한 일이다.

우리가 이런 감정을 갖는 이유는, 첫째 사고의 체계와 행동의 유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옛날엔 이방인이 적이었다. 둘째는 상대의 존재나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 때문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속 좁은 탓이다. 그리고 셋째는 자신에게 손해를 깨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나 부족한 현실 안에서 살고 있지만 누구는 그나마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감사드리면서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실현할 수 있을까 노력함으로써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일하지만, 누구는 한계와 어둠만을 보고서 좌절하고 불만과 불평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우리에게 지혜서는 말한다. "주님은 관용을 보이심으로써 당신 백성에게 의인은 사람들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셔서, 당신 자녀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셨다."(지혜 12, 19)

또 어느 한 개인에게뿐 아니라 공익에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도 주님은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마태 13, 29-30ㄱ)라고 하신다. 주님은 인간의 모든 조건을 다 고려해주시고 아직 행하지 않은 아니 오히려 겉으로 표출된 악과는 정반대되는 의구스러운 선성마저도 헤아려주라는 말로 들린다.

게다가 나 개인이 접하는 가족과 이웃뿐만 아니라 나라는 개체의 범위를 벗어나는 사회 그리고 중동의 이기적인 정책과 강대국의 불법적인 패권주의에 의해 선과 복음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앞에서 더욱 더 나약함과 부족함을 넘어서는 무기력함마저 느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라고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 26)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향한 나의 열정을 식히지 말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희망에 대한 믿음에서 샘솟는 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가자.



연중 제16주일

(다해) 루가 10,38-42; 01/07/22

어떤 사람이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한탄했다. 애써 일하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보면, 겪는 사람은 어렵겠지만 세상이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 뜻대로 안 풀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 사람의 꼭 그런 일 말고도, 내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정성껏 상대에게 안겨 줘도 받는 사람에게 꼭 도움이 되고 기쁨이 되리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것이 더 좋을 정도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해 주어도 감사받기가 어려운데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 것을 내 좋다고 생각해서 준다고 한 들 어떻게 환영받겠는가 한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무엇을 대접할까 하고 이리 저리 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르타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마리아를 두둔하신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41-42절) 가끔 구역 반모임이나 환자 봉성체를 가면 그 집주인은 오신 손님들에게 대접할 것을 준비하느라 몸과 마음이 분주하다. 그러느라 정작 자신이 신경 쓰고 모셔야 할 말씀과 성체로 오신 예수님은 놓쳐 버린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주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서 고통에 대해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 24) 세상의 탐욕스런 사람들이 남의 것을 빼앗아 없어진 것들과 그 반대의 사람들이 자기도 얻으려고 했지만 얻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결핍과 불만 그리고 원망이 생긴다. 그리고 그 피해는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뒤집어쓰기 일쑤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 안에서 또 매일의 일상에서 우리는 뜻하지 않게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그 고통이 주님의 뜻을 행하다가 받는 고통이라면 주님께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당하신 고통에 내가 참여하게 되었다는 기쁨과 보람으로 이겨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잘못해서 받는 고통이라면 주님과 형제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새로 나는 과정으로 달게 받아 주님 십자가를 가볍게 해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향한 올곧은 마음, 주님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 주님의 뜻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열렬한 마음만이 오늘 우리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이다.



연중 제16주일

(나해) 마르 6, 30-34: 2000/07/23

밖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와서 쉴라치면 아기가 빽빽거리고 운답니다. 그러면 자기가 난 아이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저기 밖에 데리고 나가서 자!"란 소리가 절로 나온답니다. 가끔 동물들도 에미가 지쳤는데도 새끼들이 에미 사정 모르고 젖꼭지만 빨아대면 발로 차버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인간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시편 작가는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27, 10)라고 했다. 물론 그런가 하면 살모사처럼 자기 갓난 새끼들에게 자기 몸을 먹이로 주는 동물들도 있다. 우리의 부모들도 우리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다 바치다시피 한 결과로 오늘 우리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열두 제자들의 선교 보고를 듣고 나서 제자들과 함께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마르 6, 31) 하신다. 왜냐하면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32절)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를 그냥 두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고는 여러 동네에서 모두 달려나와 육로로 해서 그들을 앞질러 그 곳에 갔다."(33절) 쉴래야 쉴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이것이 오늘 사도들이 처한 상황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34절)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보다, 자식들이 더 급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 6-7) 그래서 예수님도 먹어야 하고, 쉬어야 하는 인간의 조건을 지닌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 조건조차 채울 수 없을 정도로 말 그대로 바쁘시고 절박하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또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로마 5, 7)라고 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유다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에페 2, 16) 그래서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 14)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오늘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르겠다고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사도직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다.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 23)



연중 제16주일

(가해) 마태 13,24-43(13,24-30); 99/07/18

지난 월요일 아침 미사를 마치고 기도하면서 정말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편안함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29-30)라고 말씀하신 그 구절이 마음속에서 저를 살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끝날 까지 기다려 주시겠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참 무모하기도 한 일입니다. 끝날 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 인지요. 아마 이렇게 기다리실 수 있는 분은 사랑이 정말 많으신 분이실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을 졸이게 하고, 또 참고 기다려준다는 것이 오히려 사람 못된 심성만 키워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데도. 그걸 기다려주신다니. 참으로 주님은 사랑이 많으실 뿐만 아니라 넒은 분이시라 모든 사람과 모든 일이 그분의 손바닥 위에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끝날 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으랴!

이렇게 감탄만 하다가, 문득 '나를 기다려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는 순간 찡하는 울림이 일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다 이루어보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신다. 그 순간 급한 일도 없고 여유마저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 끝마치지 못하고 실수하고 실패해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와도 또 돌아와서 감히 앞에 서지 못하고 쭈삣 쭈삣하고 주위만 맴돌고 있어도, 루가복음에 나오는 잃었던 아들을 다시 맞아들이시는 아버지처럼 아예 먼저 집밖에 나와서 작은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멀리서 돌아오는 기미만 보고서도 쫓아 나와 맞아주시는 하느님을 그리면서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관용을 보이심으로써 당신 백성에게, 의인은 사람들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셔서, 당신 자녀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셨다."(지혜 12,19) 주님은 참으로 우리에게 큰사랑을 베풀어주심으로써,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들어하고 방황하면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주님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고 형제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도록 합시다.



연중 제16주일

(다해) 루가 10,38-42 : 98/07/19

무엇이 진정 중요한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타는 음식을 만드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바쁘게 음식을 장만하던 마르타가 예수님께 청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루가 10,40)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루가 10,41-42) 예수님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서로 다른 환영 방식을 모두 다 인정해 주셨다. 그래서 마르타에게 마리아의 방식도 존중해 주라고 이야기하신다. 그리고 마리아의 손님 맞는 방식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 예수님의 마음에 꼭 드는 방식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마태 6,33)고 하신 바 있다.

시편에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시편 127,1) 분도 성인도 분도 수도회의 모토를 "(먼저)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em!)고 하셨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예수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명확히 전해 받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뜻이라고 깨달은 대로 실천하고, 실천한 후에 또 다시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뜻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점점 예수님의 뜻을 온전히 실현해 나간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실행하는 방법이 예수님의 뜻이 아니고 나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내 기도를 통해 나를 정화시켜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라면 박해나 나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연중 제16주일

(나해) 마태 6,30-34 : 97/07/20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고 말씀하셨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마르 6,31) 예수님은 식사를 못하실 정도로, 어떻게든 잃어버린 양을 하나라도 더 구하시려고 그야말로 동분서주하시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신 듯하다. 바로 전 구절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의 활동보고를 듣고 계셨다. 예수님은 이미 마르코 3장 14절에서 "열 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주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같은 정을 쏟아주고 계시다. 오늘 이렇게 회합시간에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우리를 회합으로 불러주시고 그 회합에서 우리 활동의 보고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계시니 말이다.

그런데 그 활동보고 중에는 고생과 고전한 것도 있으리라. 그것은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하였을망정 사람들이 사도들의 예상대로 그렇게 기뻐하면서 기꺼이 따라오지 않았던 경험이리라. 틀림없이 옳고 바른 것인데 사람들이 동의해 주지 않았던…, 생명의 길인데도 바로 쫓아오지 않는 이들…, 오히려 복음과 영원한 생명보다는 육체적인 행복과 부귀영화를 쫓아가는 것 등을 보고 아쉬워하고 실망하던 순간들이 그것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던 것같다. 사람들이 자신의 현세적 물질적 도움이 되는 듯할 때 비로소, 아니 그런 곳에서는 눈에 불을 밝히고 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요한 복음 6장 26절에서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이렇게 꾸짖고 계시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활동의 결실이 크지 않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으레 실질적이고 현세적인 이익에 쉽게 현혹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새삼 실망하거나 답답해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세상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고 가르쳐주"(33절)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실제로 생명을 주시고 계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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