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I


(나해) 요한 6,1-15; 15/07/26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6월 18일(목),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를 발표하셨습니다. 전년도 여름철에 회칙 ‘복음의 기쁨’을 살펴보았듯이, 이번 여름철에는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난 교황주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번 회칙은 환경에 관한 교회 교황의 첫 번째 공식 회칙입니다.

오늘은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의 ‘제1장 더불어 사는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17-61항)’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1장에서 교황님은 환경에 대한 최근의 과학적 발견을 피조물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을 통렬하게 자각하고 기꺼이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삼아 우리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19항) 그래서 이 장은 “현재의? 생태적 위기의 여러 측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I. 오염, 쓰레기, 버리는 문화(20-26항)

오염은 사람들의 건강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며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쳐 수많은 사람들이 일찍 죽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20항). “우리의 집인 지구가 점점 더 엄청난 쓰레기 더미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21항). 이 상황은 ‘버리는 문화’에서 기인하므로, 우리는 재사용과 재활용을 바탕으로 하는 생산 방식을 도입하고 재생이 가능하지 않은 자원 사용을 제한하여 이러한 문화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점에서 제한된 진척만이 이루어졌을 뿐입니다”(22항).

공공재인 기후

“기후 변화는 세계적 차원의 문제로 환경, 사회, 경제, 정치, 재화 분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25항). 기후 변화는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며 이주의 원인 가운데 하나이지만 “더 많은 자원과 경제적 정치적 힘을 지닌 이들은 대부분 문제를 호도하거나 문제의 증상들을 감추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26항). 또한 “우리의 형제자매가 관련된 이 비극에 대한 우리의 부족한 대응은 모든 시민 사회의 기초인, 우리 이웃에 대한 책임감의 상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25항). 기후를 보전하는 것은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중요한 도전 과제입니다”(25항).

II. 물 문제(27-31항]

모든 인간, 특히 어린이들이 오염된 물로 병들어 죽어 가고 있으며, 대수층(帶水層)은 공장과 도시의 폐수로 끊임없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물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보편적인 기본 인권입니다. 물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며, 바로 그래서 다른 인권들을 행사하는 데에 전제 조건이 됩니다”(30항). 가난한 이들이 물에 접근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그들의 침해할 수 없는 존엄에 맞갖은 생명권을 부인하는 것”(30항)을 의미합니다.

III. 생물 다양성의 감소(32-42항)

인간이 초래한 식물과 동물의 멸종은 생태계를 변화시키고 앞으로 나타날 결과들을 예측할 수 없게 합니다. “해마다 우리는 수천 종의 동물과 식물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들은 영원히 사라져 버려서 우리가 전혀 모르게 되고 우리 후손들은 전혀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33항). 이것들은 그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라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가치는 인간을 위하여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관련되어 있습니다. …… 살아 있는 피조물인 우리는 모두 서로 의존하기 때문입니다”(42항). 풍부하고 다양한 생물이 있는 지역을 보호하는 것은 생태계 균형과 생명의 균형을 이루는 데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종종 초국가적인 경제 이익은 이러한 보호를 저해합니다(38항).

IV. 인간 삶의 질의 저하와 사회 붕괴(43-47항)

현재 개발의 모습은 인류 대부분의 삶의 질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며, 이는 “지난 두 세기의 성장은 늘 온전한 발전을 이끌지 못하였다는 것”(46항)을 보여줍니다. “많은 도시들은 거대하며 비효율적인 체계를 갖고 있으며 에너지와 물을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습니다”(44항). 그리하여 건강의 측면에서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되고 일부 특권층을 위하여 보존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자연과의 접촉이 제한됩니다(45항).

V. 세계적 불평등(48-52항)

“환경과 사회의 훼손은 지구에 살고 있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48항). 국제적인 정치 경제 토론에서 이러한 이들은 “단순한 부수적 피해자들”(49항)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참된 생태학적 접근은 언제나 사회적 접근이 됩니다. …… 그리하여 지구와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모두 듣는 것입니다”(49항). 해결책은 출생률 감소가 아니라 세계 인구의 일부에 해당되는 “지나친 선택적 소비주의”(50항)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VI. 미약한 반응과 다양한 의견(53-61항)

이러한 주요 주제들에 관한 차이점을 인식하시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비극에 대한 미약한 반응에 깊이 충격을 받으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비록 긍정적인 예들이 없지는 않지만(58항), “자기만족과 커다란 부주의”가 팽배해져 있습니다(59항). 문화와 적절한 통솔력뿐만 아니라 생활 양식과 생산과 소비 형태를 기꺼이 바꾸려는 마음이 부족합니다(59항). 그러하기에 “생태계를 보존할 수 있는 법적 틀”을 시급히 마련하여야 합니다.

저는 자연의 자원 사용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를 가져오는 이기적 소비주의의 경향 속에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신선한 접근 방법을 제시해 준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진 것을 고스란히 다 소유한 상태에서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한 아이는 “저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라며 포기할 법도 한데, 조심스레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9절) 주님과 제자들 앞에 내 놓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아이가 내 놓은, 실제로 개수는 적지만 그 아이에게는 전부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넘는 이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아울러 자연을 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지나친 선택적 소비주의와 자기만족과 커다란 부주의로 인한 버리는 문화에서 벗어나, 아끼고 재 사용하고 재활용하여, 우리 모두에게 내려주신 생태 자원을 미래 세대에까지 잘 유지 보존하기로 합시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



연중 제17주일


새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공동 노력의 위기 속에서


(가해) 마태 13,44-46; 14/07/27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은 제 2 장 ‘공동 노력의 위기 속에서’입니다. 교황은 이 2장에서 닥쳐오는 세상의 도전과 유혹 속에서 주님을 향한 열정에 불타올라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잃지 말고 굳건히 복음을 선포하고 실현하자고 말씀하십니다.

교황은 복음화에 들어가기 위한 현실 진단에서 사회학적인 분석보다 ‘복음적인 식별의 맥락’ 안에서 ‘선교하는 제자의 시각’, 곧 ‘성령의 빛과 힘으로 길러지는 시각’을 갖자고 하십니다.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펴, 하느님 나라의 열매와 하느님 계획에 어긋나는 것을 식별하여, 선한 영의 움직임을 선택하고 악한 영의 움직임을 거부하자고 하십니다.

교황은 ‘오늘날 세상의 도전들’이라는 제하에서, 오늘날의 사람들이 건강과 교육, 커뮤니케이션 등의 분야에서 진일보하였지만,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수많은 질병과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살아 있다는 기쁨이 자주 퇴색되고,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이 갈수록 결여되며, 폭력이 증가하고,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처럼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물으시며, 이것이 바로 ‘배척’이라고 하십니다. 사용하다가 버리는 물건처럼, 사람도 사회에서 ‘쫓겨나고 버려진다.’고 아파하십니다.

자유시장이 세상을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고 ‘낙수효과’를 주장하지만, “잘 먹고 잘 살자는 문화가 우리를 마비시키고, 시장에 새 상품이 나오면 사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반면에, 기회의 박탈로 좌절된 모든 이의 삶은 우리의 마음에 전혀 와 닿지 못하고 단순한 구경거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소수의 소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만연한 부패와 이기적인 탈세가 늘어나면서, 특정 이데올로기를 따르지 않는 윤리는 균형과 더불어 인간다운 사회질서를 가져다 줄 수 있으며, “돈은 인류 세계에 봉사해야지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십니다.

오늘날의 경제체제는 더욱 안전한 삶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무분별한 소비를 부추겨 소비지상주의를 만들고 불평등을 야기시켜 폭력을 낳게 됩니다. 불평등에서 생겨난 폭력은 군비경쟁이나 교육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외향적이고 직접적이고 가시적이고 즉각적이고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우선시하며, 경제적으로는 발전했지만 윤리적으로는 빈약한 외래문화 사조에 침범을 당합니다. 물질주의와 소비주의, 개인주의 속에서 탄생한 신흥종교는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띠거나 하느님 없는 영성을 제안하고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교묘한 착취수단으로 등장합니다.

세속화 과정은 신앙과 교회를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축소시키고, 윤리를 왜곡시키며, 집단의 죄의식을 약화시켜 상대주의를 확산시킵니다. 개인주의는 인간관계의 발전과 안정을 약화시키고 가족의 유대를 왜곡시키는 생활 양식을 조장하여, “서로 남의 짐을 져주려고”(갈라 6,2) 완전한 일치를 이루려는 혼인을 덧없는 사랑의 감정에서 나온 것처럼 전락시킵니다.

남성 우월주의, 알코올 중독, 가정 폭력, 낮은 미사 참여율, 주술에 빠지는 숙명론이나 미신 또는 사적 계시에 심취하도록 합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마약과 인신매매, 소수자에 대한 학대와 착취, 노인과 병자 유기, 다양한 형태의 부패와 범죄가 일어나며, 만남과 연대보다는 고립과 상호 불신의 장소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교황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더욱 더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그리고 모든 문화와 모든 도시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누룩으로서 이 모든 도전에 맞선다면, 우리는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도시는 더욱 풍요롭게 될 것입니다.”라고 제안하십니다.

교황은 ‘사목 일꾼들이 겪게 되는 유혹들’이라는 제하에서,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든 이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의 죄와 우리 자신의 죄로 고통과 수치를 느끼더라도, 우리는 사랑으로 헌신하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지적하십니다.

미디어 문화와 일부 지식층들이 교회의 메시지에 회의와 냉소를 보이고, 사목일꾼들이 기도하면서도 열등감에 빠지거나 정체성과 확신을 상대화하거나 감추며, 행복하지 못하며, 투신이 약화되고, 강박감 속에서 선교의 기쁨은 줄고, 복음화 활동은 한정된 시간만 억지로 합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을 가져다 줄 선교 활력이 절실히 필요한데도, 많은 평신도가 사도직 활동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자유 시간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며 책임 맡기를 꺼려하고, 많은 사제들이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려고 하여 무기력한 나태의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적절한 동기가 없고 영성이 스며들지 못하여 즐겁게 수행하지 못하는 활동 때문에, 활동은 필요한 것이기보다 우리를 지치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만족스럽고 행복한 피로가 아니라, 긴장되고 힘겹고 불만스러우며 참을 수 없이 피곤한 활동이 됩니다.

복음화의 기쁨은 어느 누구도 또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요한 16,22 참조). 세상이 힘들어졌다고 해도,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는 것을 기억합시다. 현실적이라는 것이 덜 관대해진다거나 성령을 덜 신뢰한다는 것이 아니며, 대재앙만을 예견하는 불길한 운명의 예언자들과 뜻을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패배주의와 비관주의를 넘어 십자가의 승리를 거두어 나갑시다. 그리스도교 이상은 언제나 의심과 끊임없는 불신, 나를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오늘날 세상에서 우리가 지니게 된 온갖 방어적인 태도, 이 모든 것을 극복하라는 요청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반기지 않는 세상에서 도피하여 고립되어 병적인 개인주의와 영적 소비주의 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우리는 ‘어떤 기운’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와 성인들과 구체적인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특정한 경험이나 사상이나 정보에만 유일하게 관심을 두고 이로써 위로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 버리게 되는 영지주의적 경향이나 자신의 힘만 믿고 정해진 규범만을 지키며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신펠라기우스주의의 자아도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이웃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갑시다.

여행과 회합, 회식, 연회 등 눈에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지 말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복음을 이루기 위한 희생과 희망과 일상적 투쟁의 역사를 이어나갑시다. 질투의 유혹을 넘어서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며“(로마 12,21),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 6,9) 내가 싫어하는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으로 나아갑시다.

평신도들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교육을 받도록 하며,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그치지 말고 사회를 변화시키기를 청하며, “성모 마리아는 여성이지만 주교들보다 더 존귀하다.”고 하시면서 여성들이 사목적 책임을 사제와 더 많이 나누게 되기를 권하십니다.

공동체의 강렬한 사도적 열정으로 활기가 넘쳐 많은 지역에서 사제직과 봉헌 생활에 대한 성소가 늘어나기를 기대하며, 노인들은 기억과 경험의 지혜를 가지고 공동체가 과거의 잘못을 어리석게 되풀이 하지 않도록 경고해주며, 젊은이들은 인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공동체를 미래로 열어주어 희망을 새롭게 일깨우고 키우도록 촉구합니다.

교황은 말합니다. “도전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기쁨과 담대함과 희망찬 투신을 포기하지는 맙시다! 선교 열정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연중 제17주일


(가해) 마태 13,44-46(52); 11/07/24

지난 주간에 은퇴하신 아버지 신부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젊고 아직 자기 멋대로 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자기 하는 일 바쁘다고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송구스러웠던 터라, 오랜만에 만난 신부님은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내내 졸음을 이겨내기 위해 고생했지만, 그래도 해묵은 숙제를 푼 것 같기도 했고, 짐을 덜어놓은 것만 같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제게도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최고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요즘 사람들은 어떤 것에 촉각을 기울이고, 무엇을 생각하며 삽니까? 사람들끼리 모이면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일반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부자 될 수 있을까?’하는 것에 최고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듯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의 ‘부자’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존재의 생활양식과 생애가 우리 천주교 신앙 전통의 ‘성인’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존재의 생활양식과 생애와 어떻게 다릅니까?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데, 여러분은 성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혹시 부자도 되고 성인도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둘 다 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꿈꿀 수 없는 허상이겠지요.

가끔 신문 지상이나 뉴스를 보면 ‘유망주’라는 단어를 보게 됩니다. 유망주, 우량주는 눈에 확 드러나 보일 정도로 성장 일변도의 곡선을 그리고 있고, 작전주가 아니라면, 그 내용이 데이터로 검증되는 결실을 바탕으로 평가되고 선정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제적인 흐름뿐만 아니라, 교육마저도 보다 높고 보다 낳은 자리에 올라서서 최고의 수익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간주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식으로 미래에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는 소수의 이들만을 유망주라고 정하여 집중적으로 투자합니다. 마치 경제의 한계효용의 극대화 법칙이 교육, 사회, 문화 등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삶을 지배하는 듯싶어 심란합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 눈 앞에서 객관적이라고 하는 데이터로 성장곡선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미래의 성장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은 모두 열등의 것으로, 차등의 것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결국 우리 사회는 계속 각박하고 삭막한 피라미드식 경쟁체제에 몰두하고 있고, 개인과 사회뿐만 아니라 국가도 세계 나라들 사이에서 무한 경쟁체제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닌가 싶어 아프기까지 합니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또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투자가 요구되기 때문에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그리고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수익과 성장을 보장하는 데이터를 제공하지 못하는, 이른 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처럼, 인생에서 보이지 않는 가치나 의미, 기쁨과 보람 등이라든지, 자녀나 문제아에 대해 기다려 주고, 묵묵히 지지해 주면서 자신을 소모적으로 헌신하는 부모님의 사랑과도 같은 과거의 인본주의적이고 인격주의적인 전통적인 철학과 신학 및 그에 의거한 인간관계와 사회체제는 무너져 버리는 듯싶어 씁쓸합니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는 일등이 아닌 사람과 최고가 아닌 사회의 역할은 등한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그리고 앞으로도 성장과 경제적 고액 수익을 가져오지 못하는 분야는 도태되고 고립되어 버립니다. 각 세대 마다 대중들에게 각광 받는 자리와 역할이 있어왔고, 각광을 받지는 못하지만 꼭 있어야만 하는 사회의 공공부문이 천대받고 등한시 된다면 그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노고로 혜택을 입고 있는 사회의 전분야가 다 함께 고통을 받지 않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한 사람은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5)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숨겨 놓고 있는 보물은 무엇입니까?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여러분 만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생에서 그 누구와도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보물은 무엇입니까?

가끔 병고를 겪고 있는 신자들이 제게 말해줍니다. “신부님, 병이 나면 모든 것이 다 소용없어 집니다. 집도 돈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본인이 어떻게 해야지 가족도 도와줄 뿐 대신 아파해줄 수도 없고 어떻게 해 줄 수 없습니다. 신부님, 건강하셔야 합니다. 건강해야 하고 싶은 일도 합니다.” 맞는 말이고, 경쟁사회 속에서 늦게나마 철들은 현대인들의 자성적인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저는 또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돈도 벌어야 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기 위해 건강도 지켜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하고, 자기 희생도 많이 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도 하면서 성인성녀가 됩시다.” 현세를 떵떵거리다가도 하늘 나라에 들지 못하면 낭패가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최후에 웃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지금 우리 두 눈에 보이는 현실이라는 이 땅이 우리의 최후인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신앙 속에서 바라보는 하늘나라가 우리의 최후인지도 견주어보면서, 우리의 최후를 위해 무엇을 처분하고 무엇을 사야 할지 그려봅시다.

마치 숙제를 하나 더 짊어져야 하는 것 같이 부담스러워 하는 우리에게 성 바오로 사도는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무더운 여름 평안한 가운데, 우리 모두 성령께 의지하여 미래를 향한 좋은 선택과 좋은 실천을 이루어 나갑시다. 아멘.



연중 제17주일


(나해) 요한 6,1-15; 06/07/30

찬미 예수님!

안녕하십니까?

요즘 서류를 정리하다가 보니까, 우리들이 2001년 성전부지를 사기 시작부터 성당을 짓기 위해 모은 돈이 약 3백 7십 7만불입니다. 빚은 받을 것을 제외하면 약 82만불 정도가 됩니다.

처음 성당을 지으려고 할 때, 많은 사람이 그 많은 돈을 어디서 장만하느냐고 걱정들을 했지만, 막상 지어놓고 보니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가 하는 생각에 새삼 뿌듯합니다. 그리고 전임 신부님을 비롯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힘 그것은 바로 성령의 힘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배고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에게 넌지시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5)

그랬더니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 하고 대답합니다. 필립보의 이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다 아는 사실입니다. 흔히 안다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의 대응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며, 당연히 벌리지 않으면 더 좋다고 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런 줄 아는데 왜 거기다 대고 그런 질문을 던지셨을까? 예수님의 질문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제자들에게 던져주시는 사명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

같은 현실을 보고 같은 통계를 보고도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대응하는 데는 차이가 납니다. 필립보는 머리 속에서 ‘이건 안 되는 일이니까 아예 꿈도 꾸지 말자’는 대응을 하고, 안드레아는 ‘하면 좋겠는데 지금 안 되니 어떻게 하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과 청을 주님께 드립니다.

안드레아의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10)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11) 그래서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것만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성서기자는 보고하고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바치는 희생’과 ‘그 희생을 열매로 이루어 주시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바친다고 해도 주님께서 받아주시고 인정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또 주님께서 열매를 맺어 주시려고 해도 우리가 바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맺어줄 열매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이 시애틀 대교구에서 우리의 성전을 짓는데 노력했습니다. 셋방살이에서 벗어나 우리의 성전을 가지고 우리말로 우리 신자들끼리 모여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미하고 나누기 위해 우리의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백인 신자들이 싫어서, 백인 신자들과 같이 살고 싶지 않아서, 백인 신자들이나 다른 민족들과 함께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 성전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세입자로서가 아니라 세대주로서 당당하게 이 시애틀 교구의 다른 본당들과 동등하게 교류하고 함께 선교와 복음화의 노력을 펼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저 우리가 사는 데만 바쁘고, 우리 집 마련해서 우리끼리 알콩달콩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제자들 앞에 5000명의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라고 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늘 우리 앞에 물심양면으로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보내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민족 문화가 아름답고 우리의 신앙 유산이 훌륭하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한국 천주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순교의 정신과 순교와 치명에 이르는 그 깊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유산을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시애틀 대교구의 알렉스 부르넷 대주교님께서는 우리 본당을 방문하시거나 우리 한인들을 접하실 때마다 우리 한인 신자들에게 순교자들로부터 이어온 그 활기차고 시들지 않고 헌신적인 신앙의 유산을 여기 시애틀 교구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만의 성당을 짓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이제 우리는 우리와 함께사는 이곳 신자들에게 우리 신앙 활동과 우리 한인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유산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2006년 1월 한국인 이민 100주면을 맞이하여 미 의회에서 ‘한국인의 날’(Korean American Day)를 정할 때, 부시 대통령이 우리를 ‘한국계 미국인’(Korean American)이라고 부르지 않고 ‘한국의 유산을 지닌 미국인’(Americans of Korean Heritage)으로 부른바 있습니다.

우리가 이곳 시애틀 대교구에서 우리의 성당을 짓고 우리 신자들끼리 우리의 방식대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인으로서, 한국인 교회로서 이웃 교회와 교류하고 함께 복음화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성당을 지은 우리 신자들이 새롭게 다가서야할 신앙의 단계이며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귀찮다고 여기거나 달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먹을 것을 마련해 나눠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와 함께 사는 이 시애틀 대교구민들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유산을 나눠주라고 보내준 신자들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또한 사명으로 받아들여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눈과 생활 방식 속에서 불가능을 가능케 해주신 성령께 의지하여 우리의 선교와 복음화의 노력을 열매맺을 수 있도록 헌신합시다.

우리가 간직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성전을 지었다고 안주하지 말고, 이제 성전을 지어 본격적으로 이 땅에 하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연중 제17주일


(가해) 마태 13,44-52(46); 05/07/24

어떤 사람들은 성당에 와서 신부님이 담배를 피는 것을 보고. ‘신부님이 지저분하게 왜 담배를 피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성당에 와서 신부님이 담배 피는 모습을 보고, ‘신부님도 담배를 피우시는구나!’하면서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껴서 성당에 나오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담배를 피고 안 피고가 문제가 아니고, 보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관찰자의 대상이 아니라 관찰자의 주관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똑 같은 행동을 해도, 어떤 사람은 마음에 들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관적인 판단이 대상에 따라 차별적인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데서 오는 결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같은 한 사람이 밥 먹을 때와 노래할 때, 그리고 일할 때와 잠잘 때의 모습이 사뭇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일한 상대의 서로 다른 모습에 대해 제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나의 주관적인 감성이 다르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어떤 모습은 살면서 여러 사람의 행동을 통해 익숙하고 친근하기 때문에 그리 문제가 되지 않고 또 어떤 모습은 낯설어서 받아들이기 힘들거나 거북스럽고 또 어떤 모습은 전혀 기대하기 어려웠던 모습인데도 그에게서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서 이상해하면서도 감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의 변화하는 모습도 변수이지만 나의 선입관과 인생 경험 그리고 주관적인 판단과 판단의 기준도 커다란 변수가 됩니다.

그 외에도 내가 다른 어떤 사람을 힘겨워 하면서, ‘하느님 저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정말 용서하기 힘듭니다.’ 하고 하소연하는 동시에 그 다른 어떤 사람도 나를 겪으면서 ‘하느님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정말 용서하기 힘듭니다.’ 라고 똑같이 하느님께 하소연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떤 고민에 빠지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면 내 얼굴에 미소가 아니라 썩소가 피어나고 내 자신이 한 없이 가소롭게 여겨집니다.

내 주관적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오류도 모자라서, 나는 상대에게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용서해 주는 사람이고, 베풀고 나눠주는 사람이며 지시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착각과 상대보다 우위에 앉으려는 열등감의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상대가 나를 어떤 평가 기준으로 그리고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가가 내 활동영역과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입니다. 상대가 변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나는 나며, 또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상대와의 관계가 변화되는 것만이 아니라면, 과연 내가 어떻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상대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까?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도 한도가 있고, 더군다나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 해도 수긍할만큼 변화되는 것이 아나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즉 우리 활동의 기준은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13,44)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곧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처세술이 아니라, 내 인생의 목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라는 목표를 향해 총체적으로 정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 삶에 처세적으로 적용한다면, 누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주문하는가가 우리 행동을 결정짓는 가치기준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우리 삶의 가치기준이고 목표이며 그 하늘나라를 향한 우리의 열정이 우리 삶의 평가기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내가 그 하느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러는 과정에 생겨나는 사람들과의 오해나 문제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집불통이나 외통수로 뻗대 나가면서 상대와 불편한 관계를 만들라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오늘 솔로몬은 하느님께 사람들 가운데서 옳은 것을 가려내고 사람들을 잘 다스릴 지혜를 달라고 청합니다. “소인에게 명석한 머리를 주시어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흑백을 잘 가려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하늘나라를 향해 꾸준히 진실하고 선하게 살아가며 주님의 복음을 자기 삶에 적용하고 실현함으로써 이 땅에 하늘나라를 이루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므로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지도 말고, 또 반대로 다른 이들에게 무리하게 요구하지도 말고 서로의 인격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위치에서 겸손하고 꾸준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이 땅에 하늘나라를 만들어 갑시다.

“또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30)



연중 제17주일


(다해) 루가 11, 1-13; 2004/07/25

언젠가 한 번 예비자 교리 시간에 한 아가씨가 왔는데, 어떤 동기로 성당에 나왔느냐고 물으니까 이런 대답을 했다. 자기가 중학생 때 학교에 갔다와 보니 어머니가 울고 있었단다. 집주인이 서울에 사는데 부도가 나서 집이 날아갔고, 자기네는 전셋돈 마저 못 받게 된 형편이었단다. 그때 하느님은 몰랐지만, 그래도 자기 어머니 눈에서 그저 눈물만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단다. 빌고 또 빌었더니, 기적같이 문제가 해결돼서 자기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지워졌단다. 그렇게 기도가 들어졌지만 성당엔 다니지 않았단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 대학 시험을 쳤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단다. 그래서 재수를 시작하면서 다시 중학교때 자기 기도를 들어주셨던 하느님을 생각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단다. 이번에는 꼭 대학에 붙게 해 달라고. 한 세 달을 그렇게 기도하다가 문득 자기 머리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단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하느님을 무엇으로 만들고 있는가? 하느님이 하느님이셔야지, 내가 해 달라는 대로 해 주는 하느님이라면 그건 하느님이 아니라 미신이나 내 수호신이지 하느님이 아니구나 싶더란다.

그래서 그 때부터 재수생이면서도 내 하느님 말고 과연 천주교에서 하느님이라고 모시는 그분은 도대체 누구이신가 알고 싶어서 예비자 교리에 나왔단다.

하느님께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는가?

그렇다.

아닌가?

그럼 어느 쪽인가?

하느님께 기도하면, 들어주시는가 안 들어주시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분의 신앙 인생 경험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우리는 아까 그 예비자의 경우처럼, 내가 원하는 것과 원하는 방법과 원하는 시간이 주님의 뜻 안에 있다면 그리고 주님밖에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 없다면 주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그것도 특별히, 그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이 약해서 안 들어주시면 성당에 안 나올 것 같고 하느님을 믿지 않을 것 같은 경우에는 가끔 못 이기시는 척하고 들어주신다. 그리고 부모님이 아프시다던지 등의 상황에서 그 청이 간절하기 이를 데 없고 확실한 믿음으로 청할 때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명확히 되새기고 넘어가야 할 것은 '몇 시간 기도했느냐?', '어떻게 기도했느냐?', '무슨 기도를 했느냐',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느냐?'가 기도가 들어지고 안 들어지고의 기준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뭐냐? 기도가 들어지고 안 들어지고의 기준은 바로 하느님의 뜻 안에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냐 원하시지 않는 일이냐가 기준이라는 것이다.

기도의 성사 여부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럼 뭐냐, 왜 기도하냐?

하느님께서 해 주실 때까지 그냥 기다리면 돼지, 뭐 하러 기도하냐?

그런데 그건 또 그렇지 않다. 앞의 그 예비자의 경우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 안에 없다면,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를 정화시켜 주신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만드신다.

우리가 청하고 또 청하면서 기도하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내가 청하는 것의 실체가 과연 내 인생에 무엇인지 그리고 허황되고 이기적인 것이었구나를 깨닫게 된다.

둘째, 그것이 진정 나에게 올 때 과연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우리가 뒤돌아보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해결책 하나를 세우면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기다리신다. 우리가 제대로 알고 청하도록.

셋째, 우리가 청하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능력이 있는가를 주님께서는 기다리신다. 꼬마가 칼을 달라고 해도 부모가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꼬마가 칼을 다루게 될 때까지 안 주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을 우리 스스로 깨닫도록 우리를 일깨워 주시고, 우리가 스스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준비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그 은총을 주님께서 내려주실 때 우리가 그 은총을 받아 형제들에게 봉사할 수 있을 바로 그 때 주신다.

넷째, 그것이 나에게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것인지를 깨닫고 스스로 포기하거나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거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하도록 주님께서는 기도 중에 변화시켜 주신다. 나의 기쁨이 다른 이들의 슬픔과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영적 성장은 기도를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을 설사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깨닫고 거기서 그쳐버리고 더 이상 기도하기를 포기해 버린다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

기도가 지금 당장 이루어지거나 안 이루어지거나, 지금 당장 간절한 것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충실하고 끊임없이 꾸준히 기도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자라나고 우리가 실수하더라도 주님께서는 파멸에 이르는 상황까지 이르지 않도록 막아 주신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을 우리의 비약의 계기로 삼아주시기까지 하신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로마 8, 28) 이것은 단순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식의 인간 개인의 노력에 의한 재기 수준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당장은 비록 잘 안된 것 같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패한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는 나 때문에 망친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라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그것이 변화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힘만으로는 주님께 계속 집중하지 못하는 우리의 나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협조자 성령을 보내주신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로마 8, 26-27) 우리가 지치고 힘들었을 때 그리고 악몽에 시달리고 헤매일 때,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께 소리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않던가! 그리고 언뜻 언뜻 주님께 매달리고, 주님을 목말라하고, 주님께 잦아들게 되지 않던가? 아, 기도해야 한다. 아, 성당 가야 한다. 아, 주님께 청하고, 감사드려야 하는구나!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또 다른 데에 있다. 우리는 우리 인력대로 안되기 때문에 기도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우리가 청하는 것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인간의 손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다. 인간 세상 안에서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갈증, 우리 존재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목마름이 주님 안에서 밖에 가셔지지 않고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 25)

기도하고 기도하고, 노력하고 노력해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영혼이 충만해지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우리의 갈증을 채워줄 주님의 그 능력으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연중 제17주일


(나해) 요한 6, 1-15; 2003/07/27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바다에 소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소금이 얼마나 있는가? 소금은 바닷물의 약 3%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3%밖에 안 되는 소금이 망망대해라고 하는 바다를 썩지 않게 한다.

하느님께서 죄많은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없애버리시려고 할 때, 아브라함이 청한다. "죄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께 기어이 쓸어버리시렵니까? 저 도시 안에 죄없는 사람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곳을 쓸어버리시렵니까? 죄없는 사람 오십 명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창세 18 23-24) 하느님께서는 열 명만 되어도 살려주시겠다고 하셨지만, 그나마도 없어서 그 도시는 벌을 받아 망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무기력하고 별 도움이 안된다고 느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여 망설이고 있는 나를 부르고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나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시고, 내 협력을 필요로 하신다.

오늘 먹을 것이 필요한 오천 명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5절) 필립보가 말한다. "이 사람들에게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온다 해도 모자라겠습니다."(7절) 그러나 안드레아는 같은 상황을 앞에 두고 전혀 다른 각도로 말한다. "여기 웬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8절) 필립보는 자신의 부족함을 이유로 주님의 뜻을 피하려고 하지만, 안드레아는 차마 부끄러워서 떳떳이 내 놓을 수도 없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주님 앞에 내놓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듯 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안드레아가 내놓은 그 작은 것을 가지고 기적을 베푸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이 없어도 능히 오천 명 아냐 만 명이라도 먹이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을, 우리의 참여를 바라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프란치스코 성인만을 통해서 활동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통해서도 활동하시고자 하신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자.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기도를 바쳐드리자. 우리의 시간과 희생을 그리고 우리의 땀과 노고를 주님께 봉헌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당신 영광을 밝히 드러내시도록 하자.



연중 제17주일


(가해) 마태 13 44-52; 2002/07/28

누구나 아끼는 것이 있다. 사람들에게 재산 등록 1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집이나 자동차를 가리키기도 하고 카메라나 낚싯대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성서나 십자가를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가족이나 자녀라고 답하는 이도 있다. 자기에게 소중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건강이나 가족의 화목과 일치, 동료나 이웃과의 우정과 상호신뢰를 우선으로 꼽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실제로 나를 온전히 의지하고 맡기기엔 어딘지 모르게 미덥지 못해 우리 생애는 불안하고 외롭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신앙에 귀의하게 된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솔로몬은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흑백을 잘 가려 낼 수 있는 명석한 머리'를 주님께 청한다(1열왕 3, 9 참조).

그리고 모든 일이 사람이 하는 일이라 노력하는 대로 다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일을 하려고 열심히 했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나 좋은 결과보다는 나쁜 쪽으로 일이 흘러나갈 때 그리고 사람들의 오해나 누명을 쓰거나 그것 때문에 오히려 박해를 받을 때 포기하고 싶고 좌절하기 쉽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런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 28) 비록 지금 마음에 꼭 들 정도로 좋은 결과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다 실패한 것도 아니고 포기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것은 그 과정과 결과에 관계없이 좋은 것이다. 현실에서 바로 실용화될 수 없다고 해서 필요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주님께서 비록 우리 눈에 직접 보이지 않아도 엄연히 살아 계신 것처럼, 지금 사람들 앞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해도 꾸준히 이루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고 하늘 나라에서 꽃피게 될 것이다.

그럼 과연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있는 것을 다 팔아 살 정도로 우리에게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이 이야기해주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귀하게 여기고 애타게 찾아 헤매는 것이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고 누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악착같이 붙잡아야만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라면 의연히 포기하면서 살아야 하겠다. 비록 오늘 구차하게 살 필요는 없더라도 마지막날 주님 앞에서 수치스럽게 설 수야 없지 않겠는가?



연중 제17주일


(다해) 루가 11,1-13; 01/07/29

필요한 것도 많고 나갈 것도 많은 요즘 주님께 청해야 할 것은 왜 그렇게 많은지. 오늘 제자들은 주님께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청해야 할지 묻는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통해 답하신다.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 그리고 그 아버지의 나라가 올 수 있도록 우리는 서로 용서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약화시키고 미루게 하는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청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귀찮아서라도 들어줄 정도로 간절히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시고야 마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어 의지하여 청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고 하신다. 성령은 욕심 많은 인간에게 인간을 만드신 아버지의 나라를 일깨워 주신다. 그래서 인간 각개의 이기적인 본능을 넘어서, 아버지의 뜻대로 다스려지는 아버지의 나라가 올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간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게 한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지은 죄와 그로 인한 아우성을 들으시고 벌하시려는 가시자, 아브라함이 청한다. "저 도시 안에 죄 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 버리시렵니까? 죄 없는 사람 오십 명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창세 18,24) 이러한 아브라함의 청은 오십 명에서 열 명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대신 용서를 청하는 아브라함에게서 아버지의 나라를 기다리며 성령을 받은 이들의 모범을 본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용서를 청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골로 2,13)라고 전한다.

한편 오늘자 가톨릭 신문에서 떼제 공동체의 창설자 로제 슈쯔마르소슈 수사는 "용서와 화해가 없다면 우리 인간에게 어떤 미래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그리스도인들이 단순 소박하고 자비로운 마음,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친교와 일치를 이루는 길이 열린다."고 말한다.

그렇다 용서는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필수적인 요건이다. 아브라함의 대속과 로제의 용서를 염두에 두면서 그러한 사랑의 덕을 가능케 하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도록 간절히 청한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가 서로 용서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고 주님을 나라를 이룰 수 있는 힘을 주시라고!



연중 제17주일


(나해) 요한 6, 1-15: 2000/07/30

요즘은 너나 없이 여기 저기서 '권리주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동안 독재정권 하에서 억눌려 지내던 시민의식이 터져 나왔다는 면에서는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한편 그 방향이 거의 자기나 자기 집단의 이기주의식 욕구충족을 위한 것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게 한다. 형식적으로는 국민을 담보로 아니 국민 전체를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실제로는 결국 각 전문 직종과 분야의 기득권 보호와 이권 획득을 위한 논쟁 속에서 국민의 불편만 가중되고 있다. 정작 그들의 주장대로 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국민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는 확인되지도 보장되지도 않을 뿐이다. 과정에서 소외되는 국민이 결과에서 존중받고 혜택을 누리리라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소치리라. 그러니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는 주제와 문제들이 떠오를 때면, 과연 그 이면에는 어떤 이권관계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만 가득하다.

과연 얻을 것과 보호받을 권리만 있는가? 또 그러한 혜택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자신들의 권리주장과 관철이 오히려 사회에서 격리되고 외면되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세상이 뭐라도 좋다, 난 단지 나 편하고 배부르게 살기만 하면 된다는 후안무치의 상황만 같아 실로 낯뜨겁다.

정작 얻을 권리만 있고, 줄 권리는 없을까? 보호받을 권리만 있고, 보호해줄 권리는 없을까?

많은 군중이 모였다. 그런데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바라고만 있다. 제자들은 "해도 모자라겠습니다"(7절)며 엄두도 못 내고 또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8절)며 자포자기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짜증을 내지도 않고, 피곤해하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거침없이 헤치고 나가시며,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신다. 왜 그럴까?

주님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친 소년의 모습도 행복해 보인다. 잔디밭에 앉아 예수님의 기적을 얻어먹는 군중들보다도, 나눠주는 제자들과 소년의 모습은 안 먹어도 배불러 보인다.

예수님의 권리는 이른바 내 주는 권리다. 시민 사회의 권리가 이기적이라면, 예수님의 권리는 이타적인 권리다. 이른바 사도성이다. 예수님에게서 이 사도직의 본질을 본다. 그것은 가르쳐주고자 하고, 먹여주고자 하면서 이웃에게 자신을 "달라는 대로"(11절) 다 내주려는 이타적인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사도적 활동이다.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내주시는 성체성사를 받아먹고 감사드릴뿐 아니라, 소년과 제자들처럼 내가 받은 은총을 형제들과 나누면서 사랑의 성사를 확산시켜 나가야 하겠다.



연중 제17주일


(가해) 마태 13,44-52(13,44-46); 99/07/25

요즘 신문지상에 재산증식에 관한 이야기가 새롭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주식과 재테크 등 제법 전문용어까지 등장하여 그럴싸하게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 그 재산 증식이 무엇하는 것인지, 그 자체로 생산력이 있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가기 않는데도, 이젠 점점 더 땀흘려 일하는 것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수치와 가상의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는 듯 하는 불안감마저 감출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투자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무엇을 얻기 위해 이리 저리 애쓰고 계십니까?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13,44)

솔로몬은 어린나이에 왕에 즉위했습니다. 그래서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1열왕 3,5)고 물으셨다. 그러자 솔로몬은 "소인에게 명석한 머리를 주시어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흑백을 잘 가려 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감히 그 누가 당신의 이 큰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1열왕 3,9)하고 대답했다. 주님께서는 이 솔로몬의 청을 마음에 들어하셨다. "네가 장수나 부귀나 원수 갚는 것을 청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옳은 것을 가려내는 머리를 달라고 하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리라. 이제 너는 슬기롭고 명석하게 되었다."(1열왕 3,11-12)

우리는 많은 걱정을 하고 삽니다. 뭘할까부터, 점심으로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나갈까 등등. 그런데 이 모든 걱정거리들이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이런 걱정거리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인지? 아니면 정말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이른바 '지나쳐 버리는 것'과 '사라져 버리는 것'에 우리 자신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든 것을 팔아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사듯이, 내가 처해있는 자리에서 내 개인적인 부귀와 영화를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그 직책과 역할이 내게 요구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 일함으로써 내가 만나는 형제들과 이웃들 사이에 하늘나라를 이룹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연중 제17주일


(다해) 루가 11,1-13 : 98/07/26

가끔 "기도가 안돼요.", "어떻게 기도해야 되나요?"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세례를 받고 잘살려고 하는데, 이렇게 저렇게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여러 가지가 혼란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내가 신자라는 생각도 잊어버리고 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잘 살고 싶은 데 막연히 거룩하게 살고 싶은 희망만 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성사생활이나 기도생활 모두가 혼란스러워지고 또 한편으로 무감각하고 무의미해지기도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루가 11,2ㄷ)도록, 그래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청하여라.

둘째,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대로 용서하여라.

그리고 나서 셋째, 아버지께서 구원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잃지 말고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청하고, 때로는 '귀찮게',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루가 11,8.-10)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셔서"(루가 11,13 참조)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해주실 것이고, 또 그 뜻을 우리가 현실에서 이루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실수와 죄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빕니다. "주님, 죄없는 사람이 열 사람밖에 안되어도 용서해주시겠습니까?"(창세 18,24.32 참조) 그러자 주님께서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창세 18,32)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잘한 일이 열 가지밖에 없겠습니까? 또 우리 사회에 잘한 사람이 열 사람도 없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열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시려고, 우리의 잘못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려 용서해주"(골로 2,13ㄴ.14ㄴ 참조)신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우리를 구해주시리라고 믿고 주님을 따라가기로 합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해지려는 마음을 먹고, 주님의 말씀을 찾고 연구해서 현실에서 이루고자 하면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실 것이다.



연중 제17주일


(나해) 요한 6,1-15 : 97/07/27

우리의 인생은 그냥 내가 정직하고 내 한 몸 성실하게 사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또 한 두 번 잘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침을 먹었어도 점심과 저녁을 오늘뿐만 아니라 내 생애 그칠 때가지 계속 해야하는 것처럼 그렇게 계속 다가온다. 이것은 무엇인가? 내가 무슨 전생에 그렇게도 많은 죄를 지었기에 내게 이런 수고를 계속시키시는 것인가? 나를 원망하고 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며 한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을 보자. 주님께서 죄가 많아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는가? 그렇지 않다. 주님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당신 백성 중에 죄지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십자가 형벌을 뒤집어쓰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내 한 몸 뿐아니라, 나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새로운 사건들과 내가 처리하도록 나에게 주어지고 심지어는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과 사건들을 기꺼이 지고 가야겠다.

사도 바울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4,1) 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바로 우리가 거룩하고 흠없는 산 제물로 주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내 생애도 깨끗하고 곱게 살아야겠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처럼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나 자신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제물이 되어 사는 삶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3절)고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3절)는 삶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주시는 희망도 하나"(4절)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시는 같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의 십자가도 맡아주기를 청하고 계시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우리에게 맡기시는 것도 진실한 의미로는 은총이며 그 십자가를 짊어질 힘마저 주시는 것도 은총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바라는 신앙고백이며 희망이다.



연중 제17주일

(다해) 루가 11,1-13 : 95/07/31 중고등부 주보 하늘마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자.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가 11,2-4) 내가 친구와 싸워 하느님께 친구를 벌주시라고 기도하고, 또 그 친구도 나를 벌받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어떠실까? 주님이 이 세상에 살 때 아버지께 청한 것은 단 하나 그저 "오늘 먹고살게만 해주십시오."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의미없는 것인가? 우리가 먹기위해서만 태어난 것일까? 또 용서하면 그가 날 우습게 보지 않을까? 그리고 오히려 그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우리가 주님의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고 아버지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을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신앙고백과 나와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나만의 하느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대로 안되는 것이 다행"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다. 그리고 오늘 먹고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으며, 또 내가 주님의 일을 하려면 주님을 정확히 알아 모셔야 하는데 주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요, 자신을 희생시키고 대신 죽어주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삼풍 백화점 붕괴사건을 보면서, 또 우리가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또 그래서 똑같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람"(요한 15,13)이 아니라 정 반대의 경우일 때가 많다.

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잘못을 저지르다 못해 없어져야 할 퇴폐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구해달라고 기도한다. 또 주님은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왜냐하면 오늘 떵떵거리고 남들의 시샘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사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라고 보이지만,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골로 2,12b)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청할 것은 바로 "하느님이 우리의 생사고락에 함께 하심"이다. 그것을 알고 느끼고 살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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