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



(나해) 요한 6,24-35; ‘21/08/01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주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얼마나 기도하고 봉헌해야만 할까?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

오늘 복음을 보면,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왜 찾아 나섰을까? 예수님에게 꿔준 돈이라도 있어서 빚을 받으려고 찾아 나섰을까? 아니면, 예수님이 단순히 좋은 선지자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적절한 처세술을 알려주시는 분이기에 찾아 나섰을까? 그 군중들은 열 일 제쳐놓고 왜 예수님을 찾아 나섰을까?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는 왜 예수님께 기도하며 예수님의 뜻을 찾고 예수님께 다다르려고 할까 성찰해 보게 해 줍니다.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요한 6,24-25)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애타게 찾아 헤매며 달려온 군중들을 달갑게 맞이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에게서 올바른 삶의 길을 찾고, 예수님께서 일러주시는 복음의 길을 걷고자 하지 않고, 자신의 입신양명을 꾀하거나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한 적절한 수고와 노력 없이 그저 남보다 먼저, 남보다 많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탐욕에 눈이 먼 이들이나, 당장 자신에게 닥친 문제나 해결해 달라고 매달리는 이들을 반가워하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6-27절)

하지만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라도 하시면, 그것을 채워서라도 자신들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며 덤벼듭니다. 정작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서 청하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세상 구원을 위해 너희 자신을 나와 함께 희생제물로 바치자고 하시면 모두 도망이라도 가버릴 터인 줄 예상도 못 하고 들이댑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눈앞의 이익이 떨어지리라는 허망한 탐욕스러운 기대에 스스로 빠져 무지막지하게 달려드는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입장에서는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엉뚱한 답변인가?!’ 싶을 정도의 명제를 숙제처럼 건네십니다. 군중들은 여태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뭔가 현세의 결핍을 채워주고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뭔가를 해주시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믿었다고 생각하며 쫓아왔는데, 기껏 하시는 말씀이 ‘믿으라’니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뭔가 새롭고 특별한 어떤 것을 하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새삼 뭘 더 믿으라는 것일까?’하고 어이가 없어, 자신들의 방식대로 재차 묻습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30-31절)

군중들은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뭔가를 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또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쫓아왔는데, 맥이 빠져 버립니다. 그래서 마치 항의라도 하려는 듯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는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2-33절)

군중들은 정말 알아듣기 힘든 말씀만 계속하신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하라는 대로만 하면 자신들이 기대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여기고는 매달립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그런 간절한 염원을 못 알아들으시기라도 하신 듯,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을 그들에게 요구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이 산문우답과도 같은 선문답을 통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과 군중들이 원하는 내용이 서로 대비되며 영원히 평행선을 그을 것만 같은 현장이 펼쳐집니다. 자신의 입신양명과 보다 나은 안정된 생존을 갈구하는 군중들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구하시려는 예수님, 사람을 살리시려는 예수님, 사람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펼쳐주시며 거룩한 주님의 길을 걷도록 초대하는 예수님 앞에 선 우리의 어리석은 자화상을 바라봅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나를 버리고 나를 희생하는 것이 결국 내 구원의 열쇠이며, 너와 내가 함께 살기 위한 길이라는 역설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몸소 실현하시며 초대하시는 신앙의 신비로 발견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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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일 꽃꽂이




연중 제18주일



(가해) 마태 14,13-21; ’20/08/02

요즘 성당에서 기도하다 보면, 새벽미사와 오전 10시 미사 후에 기도하시는 분들이 눈에 띌 만큼 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사의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통한 우리 주 예수님의 생명의 양식을 얻고 그 양식을 소화시키기라도하듯 미사 후 곧바로 돌아가시지 않고 앉아서 그 양식을 곱씹는 모습이 참 보기도 좋아 진정 참 생명의 양식이 되기를 기대하며 간구합니다. 아울러 성체성사를 통해 받아 모신 주님 은총의 충만함에 취해서 그 충만하고 평안함에 깊이 머물고자 하는 신앙의 정취를 바라봅니다. 혹여 눈이라도 뜨면 그 은총의 황홀함이 새나갈까봐, 몸 전체를 휘감는 성령의 그느르심이 혹여라도 흐트러질까 두려워 간절하고 곧은 자세로 성체조배를 하는 신자들의 자세가 주님 보시기에 참으로 어여쁘시겠다는 마음으로 흡족합니다.

오후 시간에도 어림잡어 한 시간 간격으로 청체조배를 하시는 분들이 꼭 계신 것을 발견합니다. 성경책이나 매일 미사 책을 들고 오셔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 사랑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절실함이 엿보입니다.

요즘 살기가 어려워져서 그런지, 청할 것이 많아서 그런지, 기도에 점점 맛을 들이셔서 그런지 어쨌든 참 좋은 현상입니다. 감실 안에서 하루 종일 외롭게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여기기보다는 훨씬 좋아졌다고 느끼고, 이유가 어떻든 간에 주 예수님을 찾는 이들을 바라보시면서 주 예수님께서도 흐믓해하실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또 누군가에게 말한다고 한들 해결되지 않는 안타까운 실정을 주님께 말씀드리고 봉헌하며 맡겨드리는 성체조배가 우리를 잠시나마 하늘 나라의 천상 기쁨을 누리도록 허락합니다.

주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채워지지 않는 나의 갈증, 들끓어 오르는 분노,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고 기운이 빠지는 나를 봉헌하다 보면, 차츰 나도 모르는 새에 편안해지고, 주님 은총의 영역 안에 들어가서 마치 주 하느님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듯한 평안함에 접어들게 됩니다. 세상의 그 휘황찬란하고 풍족한 가공의 세계 그 어디에서 누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충만함과 풍요함, 부모나 배우자, 자녀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의지가지가 되는 이들에게서 얻는 것과는 다른 평안함과 잔잔한 기쁨이 나를 포근하게 덮어줍니다.

기도에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 제단 벽에 붙어있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나를 이끕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코로나로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지친 영혼을 주님 대전에 나아와 아무도 모르게 주님과 단 둘이 평안한 안식에 젖어드시면 좋겠습니다.

간혹 기도할 시간조차 없이 바쁘다고 여기면서도 하루 일과 이후의 행동을 살펴보면, 밥 먹고, 술 먹고, 친구 만나고, 운동하고, 취미 생활하고, 텔레비전 시청하고, 전화 통화하고, 멍 때리고, 마실 가고, 여행도 가고 할 것은 다 하는 듯합니다. 입으로는 “힘겹다. 힘겨워! 괴롭다. 괴로워! 죽겠다. 죽겠어! 허전하다. 허전해!“ 하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주님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는 것을 보면, 주 하느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마지막 순번을 차지하고 계신 것인지, 아니면 주님을 찾을 만큼 힘겨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을 통해 어딘지 모르게 신선한 자극을 받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우리는 가끔 물질과 눈에 보이는 변화무쌍한 사회현상 속에서 눈 감으면 코 베어갈 것만 같은 다급함과 번잡함 속에서 한참을 정신없이 먹고 마시다가 언뜻 두려움과 불안함이 그 깊이를 더해갈 때가 되서야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하면서 주님과 함께할 때 얻게 되는 기쁨과 평화는 전혀 생소하기만 하고, 긴박함과 다급함만이 나를 뒤덮습니다. 심지어는 주님 앞에 기도하러 왔으면서도 주님은 뵙지 못하고, 자신의 번잡함과 조급함 속에서 쉼과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주님 안에서 평화와 안녕을 찾으려면, 자신의 번잡하고 다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님께 집중하여 허송세월 같은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을 보낸 다음에야 겨우 주님과 채널을 맞추고 주님과 만나 잠시 잠깐만이라도 평화와 안녕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판기에 동전을 투입하면 곧 바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채울 수 있는 욕구 만족 체계에 익숙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주님과 만나고 주님과 하나되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안녕을 얻는 과정이 지나치게 길고 성직자 수도자에게만 가당한 일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는 물질 문명의 감각적인 편안함과 충족감에 깃들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자칫 내적인 평화와 안녕이 허울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커피나 알코올을 섭취함으로써 오는 감각적이고 심리적인 충족감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오는 포만감과 멋있는 자연경관을 바라볼 때 오는 시각적인 경이로움과 신비한 현상이나 제한적인 공간과 질서 안에서 만끽할 수 있는 과학적 배합과 산물 및 매스 미디어 기기의 작동에서 오는 유사 신비 구성과 효과의 환상적인 결과물들을 정신과 영혼의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착각하거나 알고 있으면서도 당장 눈앞에 펼쳐질 수 있는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대체현상과 결과물에 만족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대인들은 정신과 영혼세계에 도달하려는 지고한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에 해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도 같은 성직자 수도자들이나 신비가들이나 정신세계의 지도자들에게서 그 만족감과 자기 인생에 마주치는 순간의 답을 얻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간의 내부라고 할 수 있는 정신과 영혼에서 오는 문제의 해답을 외부세계에서 얻을 수 없듯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외적인 물질세계의 쾌락과 대체 효과에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갈증과 욕구는 굶주린 늑대처럼 더 기승을 부리고 방황과 허무는 깊어만 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십니다(마태 14,13-21). 2,00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지치고 배고픈 이들을 배불리 먹여 주신 이 기적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주님의 자비로우신 연민과 풍요로운 은총을 느끼며 마음 깊이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빵을 배불리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아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라고 잘라 말하십니다.

자기 삶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현대의 물질 세계에서 취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그 갈망에서 드러나듯이 인간의 인생에서 누적된 질문과 근원적인 욕구를 하루 아침에 해결해 주거나 채워줄 수 있는 인간이나 해답은 현세에서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물질세계의 효과나 기술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역대적으로 수많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과 신비가들과 수덕 은수자들을 비롯한 종교가들이 오랜 기간의 수련을 통해 얻은 결과를 현대인들에게 전해주고자 하였지만, 또 수많은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인간의 정신세계를 연구하고 그 결과물을 현대세계에 드러내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모든 노력은 하나의 시도였고 순간의 한 단초요 단면일뿐 온전히 전해줄 수도 드러내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자신의 영혼에서 솟아나는 갈망과 갈증 그리고 정신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 안에서 스스로 찾고 헤매는 방황의 과정을 거쳐 직접 체험하여야만 합니다. 누가 대신 채워줄 수도 없고 답해줄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얻고 싶으시면,

(주님을 만나겠다는 마음의 결정 속에서) 잠시의 여유와 기회를 잡아,

(성당이나 세상을 떠나거나 벗어난)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의 번잡함과 조급함을 가라앉히고,

주님과 채널을 맞추기 위해 주님께 집중하여,

주님을 찾고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서,

주님과 하나된 순간에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십시오.

“주님, 당신 손을 펼치시어 저희를 은혜로 채워 주소서.”(시편 1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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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일 꽃꽂이




연중 제18주일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경사도직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강론

(다해) 루카12,13-21; ‘19/08/04

찬미 예수님!

'앞벌 논가에서 개구리들이 소낙비 소리처럼 울어대고 삼밭에서 오이 냄새가 풍겨오는 저녁 마당 한 귀퉁이에 범산넝쿨, 엉겅퀴, 다북쑥, 이런 것들이 생짜로 들어가 한데 섞여 타는 냄새란 제법 독기가 있는 것이다. 또한 거기 다만 모깃불로만 쓰이는 이외의 값진 여름밤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쑥대불의 알싸한 내를 싫찮게 맡으며 불부채로 종아리에 덤비는 모기를 날리면서 … 여름밤은 깊어지고 아낙네들은 멍석 위에 누워서 생초 모기장도 불면증도 들어 보지 못한 채 꿀 같은 단잠이 퍼붓는다.'

여름이면 생각나는 노천명 시인의 수필 ‘여름밤에’의 한 단락입니다. 값진 여름밤의 운치를 느끼기 전에 후덥지근한 더위와 왱왱거리는 모기와 싸우다 보니 꿀 같은 단잠은 남의 말 같습니다. 잘 주무십니까? 편안하신지요?

성서 못자리 5권 강의가 다음 달 첫 수요일(9월 4일) 저녁부터 시작하여 15주간 공부합니다. 이번 강의는 전체 강의 중 마지막으로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 그리고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을 살펴봅니다. 3년 과정의 마지막으로써 그동안 공부한 것에 결실을 맺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부터 개강 후 3주간까지 접수를 받습니다. 많은 분들이 신청하시어 함께 주님 말씀의 은총으로 더욱 풍성한 삶을 이어가시면 좋겠습니다.

간단하게 오늘 연중 18주일 독서와 복음을 묵상합니다.

탐욕에 대한 경계와 함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담긴 주일 복음 말씀(루카 12,13-21) 안에 세상 모든 것이 ‘허무’라는 제1독서 코헬렛의 지혜가 그대로 메아리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허무의 결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물질적 탐욕에서 비롯된 형제간의 다툼에 대한 중재를 거절하십니다. 동기간의 우애는 유산이 아니라 서로를 아끼는 사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이렇게 탐욕이 사람들 사이에 이을 수 없는 틈을 만든다는 말씀과 함께 소유하고 있는 재물이 삶의 실상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경고를 분명한 가르침으로 제시하십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비유 속 주인공인 어리석은 부자는 땅 주인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즉, 수확한 많은 곡물을 어디에 두느냐에 대한 고민이지요. 그의 혼잣말 속에 담긴 흥분은 다름 아닌 이것입니다. 보다 큰 곳간을 만들어 안전하게 수확한 곡물을 저장하는 상상을 하면서 이 모든 것을 자축하며 행복한 휴식을 만끽하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부자의 혼자만의 야단법석 가운데서 예수님은 그 부자는 물론 재산 다툼의 중재를 청한 이의 귀에 몹시 거슬리는 우울한 말씀을 하느님의 음성으로 건네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비유 끝에 덧붙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들어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성당 문이 활짝 열린 주일마다 하느님을 외면하는 신자들에게 가장 적당한 말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당 안 신자석에 앉아있는 이들 중에도 자신의 미사참례와 두둑한 헌금 봉투가 하느님의 보상을 확신한다는 나름 의로운 생각에 빠져 있는 이들이 있지요. 물질에 바탕을 둔 혼자만의 의로운 생각은 하느님 보시기에는 어리석기만 하합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들’에 대해 눈을 감는다는 것은 교회 밖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우리의 구원관을 무디게 하고 위태롭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만큼 따로 더 없을 듯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히브리어로 ‘허무’라는 말은 ‘입김, 실바람, 수증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재물도 심지어 그가 목숨도 하느님 보시기엔 한낱 허무하게 사라질 입김, 실바람, 수증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리석게도 허무하게 사라질 재물에 자기 존재를 걸고 맙니다.

바오로는 이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재물에 대한 욕심 즉, 탐욕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콜로3,5)

그리고 이 탐욕을 제거하는 방법도 소개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3,1-2)

발은 땅에 딛고 있으면서 고개는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를 생각해봅시다. 더 가져야겠다는 탐욕이 우리를 유혹할 때마다 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봅시다. 그분만이 우리들의 참된 안식처이기 때문이지요.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주님, 물질에 대한 갈증보다 당신을 사랑하려는 영혼의 갈증에 애태우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을 찾아 당신 안에 영원히 머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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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일 꽃꽂이




연중 제18주일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경사도직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강론

(나해) 요한 6,24-35; '18/08/05

찬미 예수님!

“더위야,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다니엘의 동료 세 사람,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지요. 하지만 구약 성경의 이 말씀이 올 여름은 너무나 싫습니다. 마음까지 녹일 듯 상상초월의 무더위가 극성을 떠는 때라 그런 가봅니다. 하지만 이 세 젊은이가 뜨거운 불가마 속에서 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드리며 부른 찬미의 기도이니 “에구 덥다. 더워서 미치고 팔짝 뛰겠네!” 라고 쉽게 내뱉기가 무안해집니다. 그래서 세 젊은이가 그 다음으로 바친 찬미가를 나지막이 중얼거립니다. “소나기야,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하느님의 엄청난 모험 - 사랑의 모험 3가지!

간담을 서늘케 하는 무서운 이야기도 좋겠지만 짜릿하고 신나는 모험으로 이 무더위를 잠시 이겨내고자 하느님 사랑의 엄청난 모험 3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첫 번째,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의 모험은 시작됩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하느님은 결심하십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게 첫 번째 모험이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할 사람은, 뱀의 유혹에 빠져 절대로 먹지 말라 하신 동산 나무 열매를 따 먹습니다. ‘열매를 먹으면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될 줄 알았던’ 사람의 착각이 하느님 사랑의 엄청난 모험을 이렇게 마음 아파하게 합니다.

두 번째 하느님 사랑의 엄청난 모험은 하느님 당신이 직접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한 처음부터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지요. 그 말씀은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사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말씀이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말씀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모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하나밖에 없는 아드님 예수를 내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지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하지만 같은 식탁에서 예수님이 건넨 빵-예수님의 몸을 먹은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그분을 배반하지요. 돈 때문에 스승을 버린 제자로 인하여 하느님 사랑의 엄청난 모험은 불행선언으로 이어집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긴 그 사람!” 사실 이 세 번째 모험은 이미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먼저 제공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연중 17주일) 복음 말씀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연중 18주일 복음은 이 기적에 이어지는 장면으로, 요한 복음 6장 “생명의 빵”이라는 담화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6,35)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

형제 자매 여러분!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시지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의 모험을 우리가 하려면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알아보고 믿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 생명의 빵을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세상 한 가운데에서 알아보고 믿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다가오는 가을 서울대교구 성서 사도직 프로그램인 성서 못자리를 권해드립니다. 9월 5일 수요일부터 시작하는 성서 못자리 제3권은 ‘역사의 예수와 바오로 서간’입니다. 입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1권과 2권을 통해 신약성경 만들어지게 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을 배웠지요. 이제 신앙의 그리스도에게서 역사의 예수로 거슬러 올라가 참으로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어떻게 기적을 행하셨는가를 공부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첫 작품인 바오로 사도의 13개 편지를 살펴봅니다.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의 모험을 체험하고, 그 사랑 안에서 말씀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과 생명의 빵으로 영원한 양식을 주신 예수님을 박해하다 은총으로 알아본 바오로 사도! 그의 신앙고백, 복음 선포,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과 권고야 말로 하느님의 일, 하느님 엄청난 사랑의 모험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데 최고의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지름길 역할을 할 성서 못자리 성경 공부를 다시금 강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엄청난 하느님 사랑의 모험을 은총으로 체험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요, 저와 함께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의 모험에 빠져, 말씀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알아봅시다. 생명의 빵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찾아 나섭시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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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일 꽃꽂이




연중 제18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II



(나해) 요한 6,24-35; 15/08/02

지난 주,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의 제1장 우리가 사는 집인 지구의 환경 오염에 대해 알아보았고, 오늘은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의 ‘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62-100항)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2장은 신앙이 주는 빛(63-64), 성경 이야기의 지혜(65-75항), 세상의 신비(76-83항), 창조의 조화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전하는 메시지(84-88항), 보편적 친교(89-92항), 재화의 보편적 목적(93-95항), 예수님의 눈길(96-100항)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1장에서 기술한 문제에 맞서기 위하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몇 가지를 택하십니다. 성경의 설명은 피조물에 대한 인류의 “엄청난 책임”(90항)과 모든 피조물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자연 환경이 모든 인류의 유산이며 모든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공공재”(95항)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관점을 보여줍니다.

I. 신앙이 주는 빛(63-64항)

복합적인 생태 위기는 영성과 종교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와 학문의 대화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자연과 자신의 형제자매 가운데 가장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는 데에 충분한 동기”(64항)를 부여합니다. 자연에 대한 책임감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부입니다.

II. 성경 이야기의 지혜(65-75항)

성경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두 활동 방식은 긴밀하고 분리 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습니다”(73항). 창조 이야기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죄가 창조 질서 전체의 균형을 어떻게 깨뜨렸는지를 성찰하는 데에 핵심이 됩니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세 가지 관계, 곧 하느님과의 관계, 우리 이웃과의 관계, 지구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세 가지 핵심적인 관계는 이 세상과 우리 안에서 깨어졌습니다. 이러한 불화가 죄입니다”(66항).

지구는 소유물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지구는 우리에게 관리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파괴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이 저마다 장점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자연법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깊은 신앙심으로 창조주를 찬미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시편이 이를 상기시켜 줍니다.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성은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며 우리는 결국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고, 심지어 그분의 피조물을 우리 발아래 두며 짓밟아 버리는 무제한적 권리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러”(75항) 다른 세속적 권력을 숭배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III. 세상의 신비(76-83항)

“창조는 모든 것의 아버지께서 손을 내미시어 주신 선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76항). “우리는 창조된 것들에서부터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그리고 그분의 사랑이 넘치는 자비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77항).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는 “하느님의 충만하심”(83항)에 이를 때까지 계속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보편적 친교 안에서 지성과 개별적인 정체성을 선물 받은 인간은 “고유성”(81항)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자신의 보호에 맡겨진 피조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으며, 인간의 자유는 발전을 촉진할 수 있고 퇴보를 야기할 수도 있는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IV. 창조의 조화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전하는 메시지(84-88항)

“모든 피조물은 각각의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84항).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성경에 담겨 있는 고유한 계시와 더불어, 작렬하는 태양과 드리워진 어둠 안에도 하느님께서 드러내시는 것이 있습니다”(85항). 온 세상에서 그 상호 보완성을 통하여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풍요로움이 나타납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며, 우리를 찬미로 초대합니다.

V. 보편적 친교(89-92항)

“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르셔서 존재하게 된 우리는 모두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함께 보편 가정, 곧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며 겸손한 존중이 가득 찬 숭고한 공동체를 이룹니다”(89항). 이는 우리가 지구를 거룩하게 만들고 있다거나, 인간이 피조물 가운데 으뜸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같은 인간에 대한 세심함과 연민과 배려가 없다면 자연과의 깊은 친교의 감각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91항). VI. 재화의 보편적 목적(93-95항) “지구는 본질적으로 공동 유산이므로, 그 열매는 모든 이에게 이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한 부분을 소유한 이들은 모든 소유권에 적용되는 “사회적 담보”를 존중하여 이를 관리하라고 부름 받습니다(93항).

VII. 예수님의 눈길(96-100항)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초대하시어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과 맺으신 부성의 관계를 깨달으라고 하십니다”(96항). 그리고 몸과 물질이나 삶에 기쁨을 주는 것을 무시하지 말고 “피조물과의 충만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라고 하십니다”(98항). “모든 피조물의 운명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99항). 세상이 끝날 때, 모든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지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 세상의 피조물은 더 이상 자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이 모든 피조물을 신비롭게 간직하시며 그들의 목적인 충만으로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100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을 위해 평생 우리가 벗삼아 함께 살아나가야 할 자연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합시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공동유산으로 내려주신 지구를 연민의 정을 가지고 세심하게 배려함으로써, 하느님의 충만하심이 드러나고, 인류와 피조물 전체와의 조화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연중 제18주일



(다해) 루카 12,13-21; 13/08/04

여러분의 기도와 성원 덕에, 올 루카 복음을 따른 성가정 영성 캠프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오늘은 지난 7월 5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첫 번째로 발표하신 회칙 "신앙의 빛"(Lumen Fidei)을 요약하여 전해드리겠습니다.

서론(1-7항)에서 교황은 첫째, 신앙은 모든 인간 실존을 밝혀주고, 인간이 선을 악에서 구별해 내도록 도와준다고 말합니다. 신앙을 과학적 진리 추구와 반대되는 환상이며,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것처럼 보는 이 시대에 더욱 그렇습니다. 둘째, ‘신앙에 관한 공의회’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 50주년을 맞는 이 신앙의 해에, 신앙은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는 선물이기에 신앙을 기르고 북돋워 주어야 합니다. “믿는 이는 본다.” 라고 하시며, 신앙의 빛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어 인간 실존의 모든 측면을 비춥니다. 신앙의 빛은 과거, 곧 예수님의 생애에서부터 오지만, 드넓은 지평을 열어 미래에서도 옵니다.

제1장(8-22항) : “우리는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아브라함에게서 드러나듯이, 신앙은 하느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고립된 자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향해 자신을 열라는 ‘부르심’을 받아들이며, 거기에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신앙은 희망과 밀접히 이어져, 시간 속에서 우리의 여정을 계속하게 합니다. 신앙은 또한 ‘부성애’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께서는 낯선 분이 아니라 바로 만물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을 지탱해 주시는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앙은 우상숭배를 반대합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을 수많은 욕망에 헤매게 하고, 약속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신뢰합니다. 언제나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며, “비뚤어진 우리 역사의 굴곡”을 바로 잡아줍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이기에, 자신을 기꺼이 내맡기는 마음가짐입니다. 이 무상의 선물은 “믿고 의탁하는 겸손과 용기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으로 이끄는 빛의 길, 곧 구원의 역사를 볼 수 있게 해줍니다”(14항). 우리가 주님께로 끊임없이 돌아섬으로써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신앙의 빛"은 중개자이신 예수님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열어 주시며 신앙의 토대인 하느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며 …… 신앙이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해 인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신뢰할 만한 증인”, “믿기에 합당한 분”이 되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진정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며, “그분께서 바라보는 방식에 참여하게 합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며, 동시에 예수님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일상에서 건축가나 약사나 변호사가 전문가이듯이, 신앙에서도 예수님이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분을 믿고, 우리 삶 안으로 맞이합니다.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며, 그분을 믿고 따릅니다.

우리는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사랑이신 주님께 자신을 열어 보이며 구원을 받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눈으로 볼 수 있고, 그분의 마음과 아드님이신 그분의 자세에 동참합니다.”(21항)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믿는 이의 삶은 교회의 삶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 “하나”가 되고,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면서 그들 자신이 됩니다. “신앙은 사적인 문제나 개인주의적인 개념이나 개인적 견해가 아닙니다.” 신앙은 “들음에서 나오고 말로 표현되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제2장(23-36항) : “너희가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리라”(이사 7,9 칠십인역)

교황께서는 ‘신앙’과 ‘진리’ 사이의 유대를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역사 안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입이다. “진리 없는 신앙은 구원되지 못합니다.” 현대 문화는 기술의 사실만 진리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인간이 과학적 방법으로 세우고 재는 데 성공한 사실, 편리만을 찾는 진리는 공동선에 이바지하기보다는 오로지 개인에게만 유효한 개별적 진리들이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진리 그 자체, 개인으로 또 사회 안에서 우리 삶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진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이는 지난 세기의 전체주의가 개인의 삶을 파괴하며 그릇된 세계관을 강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대 세계의 거대한 망각”으로 이어집니다. 곧, 상대주의의 이점과 광신주의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든 것의 근원인 진리에 대한 물음, 곧 하느님에 관한 물음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어서, ‘신앙’과 ‘사랑’의 유대를 강조합니다. 사랑은 ‘덧없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게 합니다. 신앙은 진리와 사랑과 이어져 있습니다. 참 사랑만이 시대의 시련을 극복하고 앎의 원천이 됩니다. 신앙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의 진실한 사랑에서 생겨나기에, “진리와 신의는 함께 다닙니다.” 신앙을 밝혀 주는 진리의 중심에는 강생하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베푸시어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교황께서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대화”에 관한 성찰을 전개합니다. 오늘날 진리는 흔히 개인의 삶에만 유효한 ‘주관적 실재’로 격하되어 있습니다. 공통된 진리는 두려움을 자아내고, 진리는 전체주의의 완고한 강요와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하느님 사랑의 진리라면, 이는 폭력적으로 강요되지 않고 개인을 억압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은 믿는 이를 겸손하게 만들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살고, 다른 이들을 존중하도록 이끕니다. 신앙은 학문 분야에서 비판 의식을 일깨우고, 이성의 지평을 넓혀 창조주를 경이감을 가지고 바라보도록 이끕니다. “하느님께서는 빛이시고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이 당신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교황께서는 “다른 이들에게 선을 행하러 길을 나서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빛?은 신앙이 없다면 신학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알리시는 주체입니다. 신학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하여 알고 계시는 그 앎에 참여합니다. 교회의 교도권은 신학이 그 원천, 곧 그리스도의 말씀과 만날 수 있도록 보장합니다. 다음 주에는 "신앙의 빛"의 3장 복음화와 4장 신앙과 공동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탐욕에 빠져서 하느님의 진리와 인간적인 우애를 멀리하고, 현세적 재물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그리고 또 신앙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보다는, 지금 당장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풍요와 편이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20-21절)

주님께서 우리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풍요와 편이를 넘어, 영원한 생명을 향한 신앙에 충실하여, 현실에서 영원을 향해 주님의 축복을 나누는 신앙인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연중 제18주일



(나해) 요한 6,24-35; 12/08/05

모든 분들의 기도와 성원 가운데 2박 3일의 성가정 영성 캠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1년 전부터 영성 캠프를 준비해 주시고, 후원해 주시고, 배려해 주시고,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첫날 연풍성지에서 한 분이 아파서 서울로 돌아오면서 모든 우환을 대신 다 짊어져주셔서 그런지 커다란 어려움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첫날 연풍성지가 있는 동네가 워낙 작은 지역이어서 어린이와 성인들만도 200여명이 넘는 우리 신자들이 한꺼번에 점심을 먹을만한 식당이 없어 걱정을 많이 했는데, 고맙게도 연풍성지 담당 신부님께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고, 또 우리 교우들만을 위해 미사도 드려주시고 성지 안내도 해주셔서 성 황석두 루카 회장을 비롯한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로 오 베드로 신부, 위앵 민 루카 신부, 장주기 요셉 회장 등 5분의 성인의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성지에서 잠깐 머무는 동안 커다란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었는데,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우리 신자들이 잠시나마 뜨거운 해님을 피해 쉴 수 있었습니다. 그 나무 그늘에서 겨자씨 비유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도 이 느티나무처럼 우리 교우들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을 삼성동 성가정 성당이라는 주님의 품 안에서 쉬게 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속리산 유스 타운에 들어가 말씀전례를 하고 식사 후 구역별로 복음 나누기를 했는데, 많은 분들이 의외로 스스럼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가정을 주제로 나눔을 해주셨기에 감사드릴 수 있었고, ME가 준비한 촛불예식을 통해 각자가 밤하늘 별 빛 아래에서 자신의 가정을 주님께 봉헌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첫날은 일찍 쉬고 둘째 날 오전 성체현시를 하고 묵상을 했는데 우리 교우들이 그나마 관록이 있으셔서 대부분 지루해하지 않으시고 비교적 기도에 깊이 들어가셨고, 진지하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마 그나마 에어컨이라도 없었으면 힘들었을 날씨인데도 이번에 강당과 숙소에 모두 에어컨이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둘째 날 저녁, 촌극발표가 있었는데 우리 신자분들이 마치 카드 섹션이라도 하듯이 오랜 시간 준비한 것처럼 매끄럽게 발표해 주셔서 좋았습니다. 멋있고 짜임새 있게 발표하시는 것을 보면서, 저 정도라면, 내년부터는 혹시라도 우리 신자들이 힘겨워할 까봐 주최측에서 발표 대본을 미리 다 준비해주기보다 각 구역에서 직접 복음을 각자 삶의 현실에 맞추어 창의적으로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 그렇게 되면 시상도 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부님이 하고자 하는 대로 진행되는 것입니까?”라고 묻기도 하셨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자분들이 영성 캠프를 통해 주님을 만나 뵙고 체험하도록 준비하는 것뿐이고, 실제로 주님을 만나는 일은 주님과 신자 각각이 체험하는 일이며, 영적 체험이라는 것이 그 때 그 당시에 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집에 돌아와서 또는 얼마를 지난 다음에 회상하면서 그 때의 체험을 새삼 재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저는 준비하고 기도할 뿐입니다.”란 말만 응답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셋째 날 수사님의 강의를 듣고 우리가 각자 그리고 구역별로 ‘어떻게 본당에 기여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여 발표하였는데 선교와 구역별 활동, 소통과 희생 봉사를 결심하신 많은 분들께 기대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발표를 들으면서 강론 때 저는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오늘 발표 중에 나오는 근처의 커다란 ‘C’나 ‘D’ 본당처럼 성당 건물도 크고, 재정도 충분한, 물질적으로 풍부한 본당은 아니지만, 교우들의 마음이 착하고 고와서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 주고, 서로의 잘못을 덮어주고 헤아려주고 채워주며, 외롭고 힘겨워하는 이들을 모른 체 하지 못하고 다가가 위로해주는 연풍성지의 느티나무 같은 큰 마음을 가졌기에 우리 삼성동 교회 공동체에 많은 사람들이 와 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 삼성동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고 살기 위해서는, 그분의 말씀을 꼭꼭 씹고 또 씹어, 우리 삶의 영양가 있고 맛있는 영양분으로 받아 삼키고, 성체성사의 힘으로 그 말씀을 실현하여,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생생하게 살아 숨쉬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는 9월 16일 예비신자 환영식을 준비하면서 8월 11일 토요일 11시부터 9월 15일 토요일 17시까지 36일간 평일에는 여성 반별로 주일에는 남성 구역별로 고리기도를 하게 됩니다. 여기 제대 위에 앉아계신 어르신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나누는 우리 교우들의 기쁨에 찬 생활이 우리를 찾아오는 예비신자들에게도 기쁨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며, 그 동안 쉬던 교우들에게도 다시 한 번 주님께 향한 신앙에로의 초대가 되기를 기대합시다.

주님께 진실하고 충실히 기도하고 권면하면서 우리의 역할을 다하고, 우리의 정성을 보시고 주님께서 몸소 그 분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시어, 선교하는 우리 초대의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삼성동 성가정 교회 공동체에 모여 와, 우리와 함께 주님의 품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위로를 얻도록 합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베풀고 나서 예수님을 따라 온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우리는 주님께 조금이라도 더 잘 먹고 마시며,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안락하게 살도록 해달라고 청하기 위해서만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총을 아끼고 절약해 쓰고 남긴 것을 주님께서 함께 살라고 보내준 동시대, 동지역의 사람들과 나누며, 하느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주님의 교회에 모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혼자 악착같이 자기 식구 하나 먹여 살리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도 쉽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벌고 미래를 위해 비축해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이렇게 모인 이유는 우리를 살리신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18.22-25)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길이며, 또 우리가 살 수 있는 생명의 길임을 믿어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4)



연중 제18주일



(가해) 마태 14,13-21; 11/07/31

교우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안녕하신지를 여쭈어야 할 정도로, 갑자기 많은 양의 비가 쏟아져 내려 우리를 놀라게 했고, 여러모로 걱정을 하게 만든 한 주간이었습니다.

10여 년 전 신자 633명의 시골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때는 한 주 헌금이 40여 만원 나와서 복사기는 기증받았어도 복사기 A/S 할부금도 못 낼 처지로 빠듯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신자 가정에 안 좋은 일이 생겨, 아주 힘들어 하길래 이차헌금이라도 해서 도와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신자들에게 그 사정을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평소 주일 헌금의 3배나 되는 헌금이 모여서 모든 신자들이 서로 다 놀랬던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난한 것만은 아니었구나.’ ‘우리가 가난해도 조금씩 모으면 풍요로워지는 구나.’ ‘주님은 필요한 곳에 베풀어주시는 구나.’ 대단한 사실도 아니고 특별한 일도 아닌 단순한 진실인데도 직접 우리가 체험하게 되니 놀랍고, 또 우리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 사목할 때, 하루는 신자들이 야외 미사를 가자고 하길래 미사는 괜찮은데 그 많은 사람을 다 어떻게 먹이느냐고 했더니… 신자들이 하는 말이 먹는 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평소에도 성당에 오려면 차를 몰고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이나 걸려서 오는데 먹을 것까지 어떻게 가지고 오느냐고 해도 아무 걱정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날이 되니까, 기본적으로 자기 막을 것은 각자 집에서 싸오고, 구역 별로 LA갈비, 삼겹살 등 공동음식을 또 만들어 와서 나눠주고 심지어는 드럼 통까지 들고 와서 불을 때고 국을 끓여주는데 정말 입이 딱 벌어지고 목구멍까지 음식이 꽉 찰 정도로 잘 먹었습니다. 서울에서 사목할 때는, ’이젠, 주차장 없고, 귀찮으면 신자들이 안 나와… 먹여주고 재워줘도 다 오지도 않고 불평마저 하는데 뭐!’ 하는 생각만 하다가, 정작 한국 사람들이 가고 싶어한다는 미국에 가서 그런 꼴을 겪고 보니까, ‘아, 귀찮아도 하고자 만 하면, 그리고 나누면 배가 되는 구나!’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루 종일 하늘나라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시다가 저녁 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12) 제자들의 이 제안은 틀린 말도 아니고, 또 듣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합리적이고 적절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 하고 이르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마치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먹이라는 말인가?!’라고 항변이라도 하듯이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 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받으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군중에게 배불리 먹도록 다 나눠주시고, 남은 것만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다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고, 그걸 주면 나도 굶게 되고 그들도 굶게 되니, 어떻게 내 놓을 수 있겠느냐고 포기하는’ 현실적인 사고방식과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주님께서 이것을 받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하는 신앙심 차이입니다. 그 자리에는 그야말로 먹을 것을 하나도 안 가지고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먹을 것을 가져왔지만 적게 가져와 내놓고 먹기에는 너무 적어서 내 놓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 중에는 요한 복음 6장 9절과 이 기사를 보고 어떤 아이가 철없이 자기 먹을 것을 내놓았기 때문에 어른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면서 내 놓게 되어 거기 온 사람들이 다 먹고도 남아서 ‘나눔의 기적’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쨌든 지금 여기서 그 때 그 상황을 슬로우 비데오로 되돌려 볼 수 없는 없고, 이것이 나눔의 기적이었는지 주님께서 기적의 은총을 베풀어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뻥튀기처럼 부풀리셨는지 어쩌셨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경험한 것은, 필요한 곳에는 언제나 주님께서 그 필요가 메워주셨고, 또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적으면 적은 대로, 나누면 나누는 대로 주님 은총 안에서 신비하게 살게 되더라는 체험입니다.

따지고 보면 가난한 이들이 매일 매일 달라고 덤벼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만이 돌보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가난한 이들 외에도, 본당 일을 하면서 그 짐을 서로 서로 조금씩 나누어 짊어져야 하겠지만, 자신이 짊어진 그 짐을 기쁘고 감사히 짊어지고 나갈 때 자신에게는 공덕이 되고 교회 공동체에는 기쁨과 행복이 됩니다. 우리가 앞에서 성찰해 보았듯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은 이것뿐이니 주님께서 저와 저의 이 보잘 것 없는 재능을 받아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청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것을 커다란 은총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알고 또 그렇게 알기에 믿고 청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서로 남에게 의지하고, 서로 남 탓을 하면서 기대기만 한다면, 우리에게는 불만족과 탐욕 때문에 계속 불평과 아픔만이 남을 것입니다. 오늘 조금 귀찮고, 오늘 조금 모자라고, 오늘 조금 걱정하면서도,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서로 노력할 때, 주님은 과거 2000년 전의 그 빵의 기적을 오늘 우리에게도 되풀이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오늘 감당해야 할 조금의 수고가 우리에게는 마치 불가항력적인 것이라고 여겨 포기한다면, 그 어느 누구도 탓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어느 누구도 우리가 믿는 신앙에서 오는 기적의 영광은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본적인 것은 스스로 행하면서, 서로 나누면서 주님께 청할 때 우리는 우리 신앙에서 제시하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삼성동 성가정 성당 교우 여러분, 이번 9월 말에 있을 야외미사 겸 체육대회 때 배터지게(?) 먹을 수 있겠구나 하고 기대해도 되겠지요?! 괜히 구역반장들만 고생시킨다고 저 원망하지 않게 해 주세요…. ㅋㅋㅋ.

하느님께서 오늘 복음에 맞추어 비를 쏟아 부으셨는지는 몰라도, 오늘 갑자기 많은 양의 비가 쏟아져 내려 수해를 입은 수재민들 위한 2차 헌금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성을 기대합니다.

아멘.



연중 제18주일



(가해) 마태 14,13-21; 05/07/31

언젠가 쇼핑을 갔다가, 참 맛있게 보이는 소고기 포가 하나 있길래 점원에게 “이것 맛있냐?”고 물었더니 거기 있던 점원이 하는 말이 “그건 개 먹이에요.”하잖아요. 그래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맛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개나 먹는 거구나 하면서 말이에요.

어떤 때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을 때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우리의 인격을 존중해 주시고 우리의 존재를 아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다가가는 우리들을 반겨주시고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온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도 남자만 오 천 명이나 되는 군중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파란 풀밭에 편안히 앉아 쉬도록 해주시면서 생명의 빵과 물고기를 먹여주십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휴가라도 가서 편안히 해 주는 밥 먹어 가며 쉴 때 얼마나 행복하고 편안할까! 그런가하면 휴가는 가서도 고생 돌아와서도 고생이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과 휴식은 우리에게 진정 생명을 가져다주는 말씀이며 길이 길이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시고, 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어떤 때는 정말 나에게 오기만 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생명의 말씀과 편안한 휴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 어떤 때는 기도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저 주님께서는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 생명을 나눠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짧은 기도시간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 생명을 나눠주셔서 우리가 고달프고 지치지 않게 해 주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우리가 주님께 안 가서 그렇지, 우리가 가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현세에서 살아갈 길과 힘을 주십니다.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39)

혹시 남편 잘 되고 자식 농사짓는데 도움이나 되나 싶어서 여기 저기 기웃 거리자만 별 소득 없이 고생만 하는 우리에게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 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 하는 데 써 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 보아라. 맛 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이사 55,1-3)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작은 선교 노력과 물적인 정성으로 교회를 이루시고 주님의 사업을 펼쳐나가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6)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양식을 풍부히 받아먹고 행복해 할 때, 그 행복을 형제들과 나누도록 초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도록 하셨듯이(19 참조), 우리에게도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은총을 나누고 전하도록 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애쓰시는 구원 사업에 우리도 동참합시다. 기쁘고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나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나아갑시다.



연중 제18주일



(다해) 루가 12, 13-21; 2004/08/01

여러분은 얼마나 버십니까? 각자가 다르다.

그런데 도대체 얼마나 벌어야 하는가? 얼마나 받아야 정당하고 충분한 것인가?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직종마다 다르고, 또 시대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다.

1891년 노동헌장 반포 이후 교황님은 말씀하신다.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 인간적인 삶은 뭐냐? 그것은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간직할 수 있는 정도다. 인간으로서의 품위는 단지 밥만 먹고사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문화생활과 여가활동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세끼 밥 먹고, 일하고, 성당에 가고,, 적어도 한 주 또는 형편에 따라 한 달에 한 번은 가족끼리 외식을 하고, 일가친척의 애경사에도 참여하고, 박물관이나 영화도 보고, 휴가도 가고, 자선도 하고, 목돈이 들어갈 때를 대비해서 보험도 들고 여유자금도 준비하고 등등이다. 그리고 또 현세와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벌고 얼마나 받아야 하는가? 그렇게 따지면 지금 내가 벌고 받는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섭섭하지 않고 기죽지 않고 살려면 한이 없다고 느낄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인간적인 품위를 말하는가? 그것은 최소한의 검소한 인간적인 삶을 말한다.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각 나라는 한 개인의 '최저 임금제'와 한 가정의 '최저 생활비'를 정하게 되었고, 그 최저 비용은 각 나라마다 자기 나라의 사회 현실에 맞춰 정해 발표한다.

그런데 돈을 벌고 쓰는 문제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적게 벌어 많이 쓰고, 또 어떤 사람은 많이 벌어서 적게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적게 벌면서도 악착같이 절약해서 돈을 모으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많이 벌고도 여기 저기 흥청망청 많이 써서 돈을 모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돈을 관리하는 방법도 달라서, 어떤 사람은 미래와 비상시를 위해 돈을 비축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어서 가져가지도 못하는 돈을 왜 모으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있는 만큼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이 없어서 고생해 본 사람은 여유돈을 항상 비축해 두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또 각자마다 돈 쓰는 경우와 기준이 다르고, 보장된 사회 속에 사는 사람과 보장되지 않은 사회에 사는 사람이 또 다르기에 딱히 '이것이 좋다' 그리고 '이래야 한다'라고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돈이 적으냐 많으냐가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어떤 사람은 돈만 많으면 뭐든지 다 해주고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다. 돈이 많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각 집안과 가정들을 보면 오히려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다. 아니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없으면 집안이 서로 도우는데 반해서, 있으면 다 돈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또 그 있는 것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한 집안이나 한 사회가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늘 복음도 그렇다. "선생님, 제 형더러 저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13)

정의를 이야기하고, 남의 재산 소유 정도에 대해 왈가 왈가하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한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이냐?"(14)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똑같이 돈에 눈독이 들어서 싸우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15)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가 그야말로 맘 편하게 돈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부자에게 말한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20)

그러시고는 이어서 말씀하신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21)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말한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골로 3, 1-2. 4)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다시 읽을 수 있다.

얼마나 돈을 벌고 또 얼마나 저금하고, 또 어떻게 돈을 쓰며 살아야하는가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고, 하느님께 관심을 둬라.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관심을 두고 하느님께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나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그리고 또 '어떻게 나에게 들려주신 그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까?'하며, 주님의 말씀에 굶주리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목말라하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께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다.



연중 제18주일



(나해) 요한 6, 24-35; 2003/08/03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통해 오천 명 이상의 유다인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15절) 그래도 군중이 뒤쫓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26-27절)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은 당연히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께 먹을 것을 달라고 청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보다 더 높은 직장과 직책 그리고 더 좋은 음식과 더 나은 집과 경제적인 안정을 얻기 위해 기도한다면 그것은 탐욕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탐욕은 그치지 않고 한 단계 한 단계 더 깊어지고 높아질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시기와 질투와 오욕의 굴레요 먹이사슬과도 같은 전쟁터요, 행복의 실체를 주지 못하는 허황된 것이다. 그런 것들은 주님의 뜻과 관계없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얻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결국 후회와 아픔만 가득찬 최후를 맞이하게 할 것이며, 그러기에 우리에게 선한 것과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서 그런 청은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지난 주 빵의 기적을 통해 깨달았듯이, 우리의 것을 주님께 봉헌하면서 형제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청한다면 오늘 이 시대에도 기적이 재연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내주시는 생명의 말씀과 양식을 받아먹고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의사나 치료사의 기술만으로는 줄 수 없는 영원한 생명과 사상가나 운동가의 힘만으로는 줄 수 없는 진정한 구원을 얻어 누리게 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 생명의 빵을 먹고사는 신자생활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진리가 있을 따름인데 여러분이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고 배웠다면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에페 4, 20-24)



연중 제18주일



(다해) 루가 12,31-21; 01/08/05

최근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이 되서 25억원을 타게 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 사람은 동생들에게 집 사줘서 잘 살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좋은 일이다. 만일 우리에게 25억짜리 복권이 당첨되면 무엇을 할까? 만일 우리 본당에 교구에서 상금을 준다면? 구역반장 단체장 수고했다고 예루살렘 성지순례부터 보낼까? 신자들 모두 한 번 회비 안내고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벌일까? 마곡지구에 방화1동 성당 부지를 구입할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열심히 일해서 많은 소출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창고를 지어 자기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려고 했다. 그리고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하셨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20-21) 누구처럼 복권에 당첨된 것도 아니고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자기를 위해 쓰는 것을 탐욕이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골로 3,1) 그리고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5)라 한다.

전도서도 말한다. "지혜와 지식을 짜내고 재간을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겨 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전도 2,21)

성당에 나오면서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가끔은 자기가 힘들 때, 신자 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도움을 받을 이가 언젠가는 나일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내가 아니다. 내 눈 앞에 지금 당장 그가 누구인지 모를 뿐이지! 여기서 우리는 '공유'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아야 겠다. 쉽게 말해서 물질은 나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나누라고 준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가장이 벌어서 가족이 먹듯이, 내가 벌어서 우리가 산다는 것인데, 누가 우리라는 팔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성당이다. 성당은 사세확장과 매출증대로 한창 잘 나간다는 회사가 아니다. 이 지역사회와 신자들과 함께 사는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기대하는 것도 이런 것이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어린이, 노인, 장애우 등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연중 제18주일



(가해) 마태 14,13-21; 99/08/01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14,14)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가르치시고 고쳐주시고 나자 저녁 식사 때가 되었다. 제자들은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15)하고 말했다. 제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예수님께 온 사람들을 교회가 다 먹여 살려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이 그냥 남들이 아니라, 당신이 먹여 살려야 할 자식들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셨다."(14,16)

그러자 제자들은 걱정을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17)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으로는 저들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그것을 이리 가져오너라."(18)하셨다. 그리고 "군중을 풀 위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19) 그래서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19) 그러자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 되는(21)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20)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 한 부족 한 부족에게 돌아갈 몫처럼 열두 광주리를 남겼다. "남은 조각을 주어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20)

오늘 이 복음을 다시 정리해 보면, 첫째 문제 상황이 펼쳐졌고, 다 그것을 알고 있고, 나름대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저녁이 되어 먹어야 할 상황입니다. 제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 제자들은 인간 각자가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온 사람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과제를 제기하시고, 그 과제를 제자 공동체가 해결하도록 제시해주십니다.

넷째 그러나 실제로 제자 공동체인 교회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다섯째 제자 공동체는 이 과제를 다시 주님께 맡깁니다. 자신들이 그 과제를 해결하는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바치고 주님께 처분을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과제를 주님께서 직접 풀어주시라고 자기의 소유물과 노력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여섯째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바친 제물을 거두어서 다시 나누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때의 나눔은 단순히 가진 것을 다 합한 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필요한 것을 다 채우고 또 다른 필요한 이들에게까지 나눠 줄만큼 더 많은 양이 됩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보고서 모두 그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또 풀려야 하는 것인 줄도 알지만, 그 문제의 정도가 개인이 풀기에는 너무나 어렵다고 느껴 다 포기하다시피 할 때, 교회가 일어나 자신의 소유와 능력을 주님께 바치면, 주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주시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문제야, 문제!"하며 세상을 사는 우리를 향해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돈을 써 가며 양식도 못 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 하는 데 써 버리느냐?"(이사 55,2) 그리고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이사 55,3)

그리고 문제의 상황 한 가운데 처해 고생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라고 말씀하시며 격려하십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연중 제18주일



(다해) 루가 12,13-21 : 98/08/02




예수님께서는 상속을 더 받으려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을 모른 체하다가 돈을 써보지도 못한 채 죽는 어리석은 부자에게 말씀하신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루가 12,15ㄱ) 욕심은 첫째, 타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의 소유물을 쌓으려는 것과 둘째, 인색함으로써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집착하는 것 두 가지다. 바오로는 욕심을 성적인 무질서에까지 연관시켜 이야기한다. 그래서 욕심은 물질적인 이득이든 감각적인 쾌락이든 간에, 이웃에게 봉사하려고 하기보다는 이웃을 이용하려고 든다. 실제로 욕심이 많은 자는 자기를 위하여 타인을 희생시키고, 필요하다면 폭력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욕심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정신적 시련을 피하려고 하는 데서부터 생겨난다. 그래서 항상 만족할 줄 모르고 언제나 불평만 늘어놓으며,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심지어는 남의 것까지 노리는 죄마저 짓게 된다. 결국 하느님을 무시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욕심꾸러기들에게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빵만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신명 8,3; 마태 4,4)


주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으"(필립 2,6)셨다. 그러나 욕심 많은 자는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이라면 빼앗아서라도 가져가야 성이 풀리고, 추하리만큼 청승맞게 그것을 지킨다. 주님은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우리를 부요하게 하"(2고린 8,9)셨다. 그러나 욕심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한다.(야고 5,1-6; 루가 20,47; 마태 12,40) 바오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1디모 6,10)라고 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겸손하게 이웃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이웃을 위해 봉사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골로 3,1ㄱ)하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받들어, 돈에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욕심을 부리기로 합시다.





연중 제18주일



(나해) 요한 6,24-35: 97/08/03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천주교회를 통해 신앙을 갖도록 하셔서 저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께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하고 말씀하십니다.

얻어도 또 얻고 싶고 얻어도 얻어도 모자라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거나,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자신의 부귀영화와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요? 주님께서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백성들이 혹시 배고파할까봐 빵의 기적을 베풀었는데, 정작 그 백성들은 자신들을 향한 주님의 애틋한 사랑을 기억하고 기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리 먹은 것만을 기억하고 또 그렇게 배불리 먹고 싶은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옵니다. 요새 청소년의 말로, 빈대, 거머리?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그러면 주님의 기적의 뜻을 깨닫고 기리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근본 정신인, '나를 사랑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보답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하려는 열망'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자세이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기려보자. 나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사랑은 어떤 것이었는지? 내가 진정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만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다고 믿고 있는가? 그리고 그 믿음의 바탕아래 주님의 사랑에 대해 응답하고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일고 있는가? (아니면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주님 사랑만을 의지하고 받아먹기에만 급급하고 있는가?) 우리가 믿는 바는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주님의 길을 걸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힘도 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도 포함한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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