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새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복음 선포

(가해) 마태 14,22-33; 14/08/10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은 제 3 장 ‘복음 선포’입니다. 교황은 이 3장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명시적으로 선포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복음화의 모든 활동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의 탁월성” 없이는 “진정한 복음화는 있을 수 없다.”고 명확히 선언합니다.

교황은 ‘하느님 백성 전체가 복음을 선포한다’라는 제하에서, 복음화는 교회의 과업이며, 복음화의 주체인 교회는 하나의 유기적이고 교계적인 제도 그 이상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백성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삼위일체에 뿌리를 내린 신비이지만,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순례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궁극적인 토대가 하느님의 자유롭고 은혜로운 주도권에 있다.”고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당신 자비의 활동입니다. 첫 말씀, 참된 주도권, 참된 활동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 주도권에 우리 자신을 맡길 때에만, 이러한 주도권을 간청할 때에만, 우리 역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복음화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혼자서는, 곧 고립된 개인으로나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공동체 생활에 따른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고려하시어 우리를 이끄시고, 이 백성이 교회입니다. 이 백성은 배타적인 엘리트 집단이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은 이 세상의 다양한 민족들로 구체화되며, 이 민족들은 저마다 고유문화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습을 지닌 백성입니다. 은총은 문화를 전제로 하고 이 하느님의 선물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화 안에서 구체화됩니다.

고유의 문화에 따라 하느님 은총을 경험한 다양한 민족들 안에서, 교회는 참다운 보편성을 표현하고, 다양한 모습을 한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모든 문화에서 발견되는 긍정적인 가치들과 형식들은 복음이 선포되고 이해되며 실천되는 방식을 풍부하게 합니다. 올바로 이해된 문화적 다양성은 교회의 일치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은 성령 안에서 복음화의 길로 초대되어, ‘선교하는 제자’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

복음이 한 문화에 전해지면 토착화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사를 각자의 재능에 따라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이 받은 신앙을 증언하고 새롭고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 풍요롭게 합니다. 대중신심은 일단 받아들인 신앙이 어떻게 한 문화 안에 구현되고 지속적으로 전달되는지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대중 신심은 신앙 활동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보다 하느님을 믿는 것에 더 역점을 둡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때, 특히 가난한 이들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을 향한 삶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경 구절은 거의 못 외우지만 묵주 기도에 매달리며 병든 아이를 간호하는 어머니들의 강인한 믿음을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간구하는 누추한 집 안에 켜진 촛불에서 퍼져 나가는 큰 희망을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우리의 마음 안에 부어진 성령의 활동으로 힘을 얻는, 하느님을 향한 삶의 표현입니다. 토착화된 복음화의 열매인 대중신심 안에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적극적인 복음화의 힘이 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할 준비가 늘 되어 있음을 의미하며, 그 첫 단계에 인격적인 대화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친교 안에서 다양함을 일치시키며 평화의 모범을 보여주시며, 동시에 다양성, 다원성, 다중성을 키워주십니다.

교황은 ‘강론’이란 제하에서, 평신도는 강론을 듣는 것이 어렵고 사목자는 강론을 하는 것이 어렵다며 풀어나가십니다. 강론은 성사적 친교에 앞서 하느님과 당신 백성이 나누는 대화의 최고 순간으로, 전례 상황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봉헌의 일부이고,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시는 은총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강론은 어머니가 자녀와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대화는 진리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말하는 기쁨에서 시작되고, 말을 매개로 하여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이들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대화는 이미 맺어진 계약을 더욱 강화하고 사랑의 유대를 굳건하게 만듭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우리 마음을 열정에 불타오르게 합니다.

교황은 ‘강론준비’라는 제하에서, 강론 중에 활동하시는 성령을 믿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것으로서,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 도구로 바친다는 것입니다.

사제는 먼저 성령께서 오시기를 간청하고, 성경구절에 집중하여,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며, 핵심 메시지를 발견하여,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연결시켜 바라봅니다. 사제는 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세로 말씀을 대하고, 우리의 열정을 새롭게 하여,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에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나는지 성찰하며, 먼저 하느님의 말씀으로 감화되어 그 말씀을 일상에서 실현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현하기 불편하거나 부담스러워 도망치려 하지 말고, 다른 이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만을 생각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여야 합니다. 또한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여,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인간 상황에, 하느님 말씀의 빛을 갈구하는 경험에 연결시켜야 합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만남의 기쁨, 실망,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 미래에 대한 불안, 사랑하는 이에 대한 관심 등의 특별한 환경에서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복음적 식별의 훈련을 합니다.

교황은 ‘케리그마(복음 선포)의 심화를 통한 복음화’란 제하에서, 주님의 선교 명령에는 신앙 성숙에 대한 요청도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그 성숙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우리의 모든 종교적 의무에 앞서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표현하여야 합니다.

최근 교리교육은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신비교육을 강조합니다. 모든 형태의 교리 교육은 ‘아름다움의 길’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참된 아름다움의 모든 표현은 주 예수님을 만나도록 이끄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보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현대적 표현을 활용하여 새로운 ‘비유의 언어’로 신앙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들은 가까이 계신 그리스도 현존의 향기와 그분의 시선을 구체적으로 전하며 ‘동행의 예술’로 이끌어야 합니다. ‘영적 동행’을 통해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벗어날 때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하느님을 벗어나 걸어갈 때 실존적으로 의지할 곳 없고 정처 없는 고아로 남게 되어 불안하게 됩니다. 참다운 영적 동행은 언제나 복음화 서명에 봉사하는 상황에서 시작되고 꽃피웁니다.

하느님 말씀은 강론뿐만 아니라, 모든 복음화는 그 말씀에 기초하고, 그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거행하고, 증언합니다. 성경 연구는 모든 신자들에게 열린 문이 되어, 복음화를 위하여 하느님 말씀에 친숙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연중 제19주일

(다해) 루카 12,35-40; 13/08/11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는 지난 7월 31일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연명의료의 환자결정권제도화 권고안”을 심의하고 발표한 내용에 관해 다음 같이 입장을 밝힙니다.

1. 죽음이 임박한 시기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는 모든 환자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적절하고 필요한 치료와 돌봄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본 윤리 원칙으로 일관되게 천명하여 왔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환자에게 의학적으로 무익하고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해로운 의료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며, 반대로 필요한 처치를 하지 않거나 중단하여 죽음의 시기를 인위적으로 앞당기는 경우도 매우 부당한 일로서 용인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연명의료의 지속이나 중단을 결정하는 1차적인 판단 기준은 의학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즉, 어떤 처치나 의료수단이 환자에게 '의학적으로 적절하고 필요한 것'이라면 지속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며, 반대로 '무익하고 불필요한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연명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하기로 결정한다면, 그 판단은 '그 연명의료가 환자에게 무익하고 불필요하다'는 이유에 의거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환자가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무의미하므로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라는 생각으로, 혹은 단지 투병기간이 길다는 이유로 연명의료의 중단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3. 이번 권고안에서는 연명의료 결정의 대상환자를 임종과정에 접어든 환자로 제한하고 대상 의료를 전문적인 의학 지식, 기술, 장비가 필요한 특수 연명의료로 제한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식물상태의 환자처럼 죽음이 임박하지 않은 환자가 연명의료 결정 대상에 포함되거나,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될 기본적 돌봄에 해당하는 처치(영양공급, 수분공급, 기본간호, 통증조절 등)가 부당하게 중단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환자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기본적인 돌봄이 제공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연명의료를 비롯하여 모든 의료행위는 환자와 담당 의사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환자와 의사는 모두 인격체로서 상호 존중과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환자가 단순히 전문 의료행위의 ‘대상’으로만 간주되거나 의사가 단지 전문적인 ‘기슬자’ 정도로만 여겨진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고 의사는 지식과 양심으로 환자를 대하는 인격적 협력 관계가 이루어지는 의료문화가 시급히 필요합니다.

5. 그러므로 연명의료 결정은 환자와 담당 의사의 상호 대화를 바탕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담당 의사는 환자에게 환자의 질병상태와 연명의료에 관한 의학적 소견을 알려주고 환자는 무익하고 불필요한 처치를 하지 않겠다는 의향을 담당 의사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호 대화와 경청을 통해 환자와 담당 의사가 함께 연명의료를 결정하고 향후의 처치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이와 같은 상호대화가 없이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연명의료를 결정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입니다.

6. 권고안에서 밝히고 있는 '연명의료 결정과 관련된 사회적 기반 조성’은 본 위원회가 연명의료 결정의 법제화보다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사실 어떤 제도이든 완벽한 것은 없으며,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판단과 행동에 의해 그 제도가 의도하는 목적이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호스피스-완화의료 제도 확립과 시설 확충, 병원윤리위원회의 활성화, 의료인들의 교육과 의식 개선, 죽음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 개선, 임종 과정 환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 등 현실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권고안이 추구하는 제도화의 취지가 변질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명경시의 태도나 행위를 오히려 용인해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적절한 여건 마련을 위한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법제화에 대하여 본 위원회는 매우 우려하고 있습니다.

2013년 8월 4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연중 제19주일

(나해) 요한 6,41-51; 12/08/12

요즘 우리 생의 목표라고 말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생을 좌우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자식 교육’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식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자식 하나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면서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3 엄마’라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양해되는 상황일 정도입니다.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지만, 가끔 언론에 오르내리는 기사들은 자녀 교육에 대해 헌신하는 부모들이 겪어야 하는 극심한 고통과 탈선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탈출한 다음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됩니다. 양을 치던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농사의 중요한 때와 절기마다 농사를 풍요롭게 해 준다는 농사의 신인 ‘바알’ 신과 관련된 각종 제례와 문화를 전수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알신을 섬기는 농사와 관련된 각종 제례와 문화행사가 농사를 짓기 위해 하는 것이지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결코 주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자위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 예언자가 주 하느님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 앞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누가 정말 농사의 풍요다산을 가져다 주는 신이냐? 바알 신이냐, 주 하느님이냐?’ 삼년이나 가뭄이 들었을 때, 엘리야 예언자는 바알신의 예언자들과 양신을 대상으로 비내리기 시합을 합니다. 바알 신의 예언자들은 하루 종일 기도했어도 바알 신은 비를 내려주지 못했고, 엘리야 예언자의 기도를 들은 주 하느님께서는 비를 내려주십니다(1열왕 17-18장). 엘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 하느님 주님을 선포합니다. 그 광경을 접한 백성들은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18,39)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참 하느님이 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바알신의 예언자들을 다 죽여버립니다. 그러자 바알신의 후원인격인 이제벨 왕후의 미움을 사서 자객을 보내게 되고 엘리야는 죽음에 처합니다(1열왕 19,1-2). 엘리야는 승리했지만, 현세적으로는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죽음의 위협을 피해 도망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게 됩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너는 제 조상들보다 나를 것이 없습니다.”(4절) 하느님께서는 절망과 공포 그리고 자포자기 속에 지쳐버린 엘리야에게 천사를 시켜 먹을 것을 주시며 주님께로 이끄십니다(5-8절). 결국 하느님의 대 예언자라고 하는 엘리야도 주님께서 자기 앞에 펼쳐주시는 현실 앞에 자기를 버리고 주님께 순응하는 고통을 다 겪고 나서야 꿈에도 그리던 하느님을 호렙산에서 만나게 됩니다(8-18절).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관상’을 삶의 방편으로 삼는 가르멜 수도회는 이러한 엘리야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적인 투쟁’과 ‘자기 포기와 하느님 체험 및 순응’을 가르멜 영성의 출발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위한다는 구실로 많은 것을 ‘인간이기 때문에’ 또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럴 수 밖에 없다.’ 라며 비그리스도교적 행위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 주 하느님을 대신하여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고 담보해 준다고 여기는 ‘대체신’은 무엇입니까? ‘생활신’ 또는 ‘처세신’은 무엇입니까? 주 하느님 이외에 무엇이 우리에게 생명을 보장해 주고 우리를 살게 해줍니까? 오늘 우리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성공을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하고 또 해도 된다고 여기는 비윤리적, 비인간적, 비인격적, 비그리스교적 행동은 무엇입니까?

현실에 대한 애착과 현실을 사회가 요구하는 내 방식대로 살고자 주님의 가르침과 계명에 대해 투덜거리는 우리를 향해 재차 물으십니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43-44절)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며,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4,31-5,2) 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미사 성제에서 주님의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해 생명의 빵을 모시게 됩니다. 생명의 빵을 모시며, 오늘 내가 머무르고 함께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고 생명의 사회로 바꾸어 나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주님의 이끄심 안에서 한 가지씩 점차로 실현해 나감으로써 주님을 더욱 굳게 믿고 주님 나라를 세우기로 합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



연중 제19주일

(가해) 마태 14,22-33; 05/08/07

지난 주 우리는 여자와 어린이를 빼고 남자만도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 백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나눠주던 제자들은 아주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따르기 시작한 주님은 병자도 고치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죽은 사람마저 살리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5,000명을 먹였을 뿐 아니라, 남은 것을 모았더니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 한 부족 한 부족에게 다 나누어 줄만큼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마치신 후 군중들을 돌려보내시고 기도하시러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기적을 연출하신 주님이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이고, 또 한편 그 기적으로 군중들에게 빵을 나누어 줄 수 있었던 자신들이 마치 직접 기적을 베풀기라도 한 양 들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돌아가는 배 안에서 술이라도 한 잔 받아놓고 흥겨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역풍이 불어오기 시작했고, 풍랑이 일었습니다. 새벽 4시가 될 때까지 제자들은 거센 바람과 풍랑에 맞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기적으로 5,000명을 먹인 자랑스런 주님의 사도들이 자연의 풍랑 앞에서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유령 같은 물체가 자신들을 향해 오고 있다고 느꼈고, 마침내는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구하러 오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27절) 남편이 문을 두드리자, "누구세요?"하고 묻는 집안의 목소리에 "나야!"라고 답하는 남편처럼 주님은 "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곧 나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주님의 말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심해라. 겁내지 마라. 인간 생명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만들고 주관하는 내가 왔다.’

어찌 보면 우리는 매일 긴장과 갈등 속에서 삽니다. 즐기는 것도 한순간이지 어떤 때는 머리만 더 아픕니다. 그런데 어머니 품같이 아무런 부담 없는 주님! 그냥 그대로 안겨 있어도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편안함, 바로 그걸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감격해서 묻습니다.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28절) 주님께서는 기꺼이 베드로의 원의를 받아 주십니다. "오너라."(29절) 그러나 주님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한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센 바람이 마치 자기를 덮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서 저자는 형상이나 물체가 아닌 바람을 '느낀다' 거나 '맞는다' 라고 하지 않고 '본다' 라는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베드로가 겁에 질린 거센 바람은 베드로를 실제로 물 속에 빠뜨릴 만한 실체가 아님을 넌지시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물에 빠진 것은 베드로가 한 눈을 팔다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물에 빠진 것이지 거센 바람에 휩쓸려 빠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베드로는 곧 "주님, 살려주십시오!"(30절) 라고 주님께 청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참으로 베드로의 위대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에 빠져서 살려 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것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한편 우리는 그가 주님께 청했다는 면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오라고 하셔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배에서 내려 주님께로 가다가 물에 빠졌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길을 포기하고 다시 배로 돌아오려고 했거나 뒤돌아서서 자기 동료들에게 살려 달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을 '주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살 길이 예수님께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 본능적으로 주님을 택했습니다.

한 번 봉사하다 썩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채 끝마쳤다거나, 잠깐 실습하고는 다 아는 듯이 멈춰 서 버림으로써, 주님을 맛들이지 못하고 그냥 떠나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떠나는 순간에도 주님께로 숨는다고나 할까, 주님께 매달립니다.

그래서 그가 끝까지 주님께 신뢰하며 주님께 청한 공로로 주님은 그를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순간적으로나마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잃고 거센 바람에 자신을 빼앗겼던 베드로를 건져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31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32절)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상의 기사에서 우리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떠나 있을 때 혼란을 맞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이 혼란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 제자들을 구해 주시러 오십니다. 혼란은 제자들을 죽일 수 없지만 제자들이 그 혼란에서 스스로 지쳐 쓰러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을 선택하고 또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베드로를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가령 그가 주님을 따르다가 좌절하거나 쓰러져도 그를 다시 바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다시 한번 함께하려고 할 때 비로소 주님은 그와 함께 세상을 당신 품안으로 거두어들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되돌아봅시다. 내가 주님과 떨어져 있어서 혼란과 곤경을 겪은 일이 있는지? 또는 그 때 나나 우리 구역, 반 공동체가 주님을 모심으로써 안정을 찾은 적이 있었는지? 그 때 고통 속에 있는 당신 백성들을 구하러 오신 주님을 맞이한 적이 있었는가? 눈을 감고 묵상 중에 물(곤경, 혼란)에 빠진 나를 건져 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껴 봅시다.

나는 나와 함께 살도록 내게 보내주신 가족과 이웃을 진정한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면 한창 혼란 속에서 헤매던 제자들이 주님께서 자신들을 구하러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유령'으로 받아들이고 놀라 경계하고 피했던 것처럼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지?

거센 바람은 베드로에게 무섭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었고 그래서 그는 무서운 생각과 거센 바람 때문에 자기가 예수님을 따라 물위를 걸어갔던 그 은총의 생활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들게 됩니다. 제자들의 첫 번째 유혹이라고 할까? 시련이라고 할까? 세례를 이제 받으려 하고 세례를 받고 주님의 길을 실제로 따라 걷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베드로는 자신을 억누르고 괴롭히고 있던 현실의 아픔 속에서 벗어나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나는 주님을 온전히 선택하고 주님의 길을 따라 걷는 데서 오는 어떤 어려움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 뇌물의 구조악 안에서 홀로 떨어져 마치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을 안고 있는지?

베드로는 물에 빠지자마자 "주님, 살려주십시오."(30절) 하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베드로처럼 이렇게 주님께 애원하는가?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혹 속에 빠졌을 때, 우리는 유혹에서 헤어나려는 생각과 주님께 되돌아가고자하는 반면에, 오히려 어떤 때는 정반대로 그 유혹이 더 좋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마치 이가 썩어 가는 줄도 모르고 지금 달고 맛있는 사탕을 입에 물고 계속 빨아대는 어린아이처럼. 그 유혹을 다시 한 번 더 느끼고 싶고, 심지어는 그 안에서 안주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성당에서 하지만 세상을 사는 것은 나니까 내가 살 수 있을 만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어쩔 수 없다고 강변하면서 그 유혹에서 나와 주님께 가려고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교회 안에서도 창피함 또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망설이고 가까이 다가서거나 직접적으로 주님께 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번 미사를 빠지게 되면 계속 빠지게 되니까 못 가게 됐다고 하는 아주 작은 사건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들 앞에서 스캔들이 될 만한 부끄러운 일들을 했을 때. 신앙공동체 안에서 정말 자기가 잘못했다거나, 또는 자기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을 했을 때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곧바로 고해성사를 보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에이!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누가 나를 반기지도 않고, 내가 어려울 때 위로해 주지도 않았기에 반발심으로, 사람들이 나를 아는데 나를 반겨줄까 하는 이유로, 자기 스스로 자격지심 때문에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를 충분히 도와주지 않거나, 또는 자기한테 먼저 와서 가자고 청하지 않은 이웃을 애써 핑계대면서, 스스로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더 많은 냉담의 시간과 주님과의 결별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경우도 본의 아니게 있는 반면에, 베드로는 이렇게 용기를 내서 물에 빠지자마자, 유혹에 빠지자마자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도 즉시 주님께 청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어두움 속에, 고통 속에 있을 때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제자로, 당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도록, 당신을 따르도록 불러주시고, 힘을 주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주님, 저를 더욱더 당신께 가까이 가게 해주시고, 이 어려움 속에서 저를 제자로 다시 받아 주시고 저를 불러 주십시오. 저에게 이 길을 헤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건져 주십시오."



연중 제19주일

(다해) 루가 12, 32-48(35-40); 2004/08/08

언젠가 한 번 어느 본당에서 봉성체를 하다가, 아내가 남편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내를 그야말로 아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는 것을 보았다. 아내는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니까 80이 다된 남편이 매일 아내를 씻기고, 때마다 식사를 해 먹이고, 약 먹이면서 자리를 못 비우면서까지 정성껏 돌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아유, 젊을 때 부인에게 속 썩인 것 다 갚으시나봐요."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정작 젊을 때부터 부인은 돌아다니기 바빴고, 병이 나서야 들어왔단다. 그 인생이 하도 측은해서 남편이 자식도 안 시키고 정작 자신이 돌보게 되었단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남편이 아내를 돌보는 일도 많아졌다. 할아버지들이 병들고 지친 아내들을 돌보는 일이 마치 황금연못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워 보인다.

언젠가 한 번은 한국에 독일마을이 생기자, 한국인과 결혼한 독일인 남편이 은퇴하면서, "지금까지 한 평생 나를 위해 희생해온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남은 생애는 아내의 고향인 한국에 돌아가서 살겠다."고 해서 독일인 마을로 들어왔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는 당신을 내 아내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나는 당신을 내 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여러분이 결혼식 때 주님 앞에서 또 하객들 앞에서 서로를 향해 바친 약속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약속을 잘 지키고 계시죠?

만일,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를 향해, 당신이 돈을 벌어올 때만 내가 당신을 배우자로 삼아주겠소.

만일, 당신이 건강하고 제 구실을 할 때만 내 배우자로 삼아주겠소.

만일, 당신이 내 말을 들어줄 때만 내 배우자로 삼아주겠소.

만일, 당신이 나에게 도움이 될 때만 내 배우자로 삼아주겠소.

만일, 당신이 나를 사랑할 때만 내 배우자로 삼아주겠소.

그렇다면 우리 중에 부부로 남아있을 가정이 얼마나 있겠는가?

매일 매일을 그냥 살아갈 때는 잘 모른다.

우리는 건강하고, 커다란 문제가 없고, 먹고사는데 커다란 지장이 없을 때는 우리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우리 집안이 행복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서로 부딪히게 되고, 심지어는 실망하게까지 되면... 그 때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내 삶은 어떤 것이었던가?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심각한 위협이나 고통을 안겨주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의 부부생활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진다면, 각자 정도차이일 뿐이지 그런 조건 속에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떻게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온전하고 충실하기만 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짐도 되고, 때로는 의지도 되니까 사는 것이지, 온전한 행복, 완전한 사랑이란 없다.

그러나 그런 불완전하고 불안한 조건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은총이다. 혼인 성사 때 사제가 "교회 안에서 고백한 이 합의를 주께서 친히 견고케 하시고 풍부히 강복하실 것입니다. 천주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기도하고 선언해 주듯이,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단 하루도 살 수 있겠는가?

우리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 정확히 모를 뿐이지. 주님 없이 주님의 백성들이 살 수 있겠는가.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원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그저 우리가 다행히 주님의 도움과 은총을 알아 믿고 감사드리며 착하게 살기를 기대하실 뿐이지. 아무 것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만을 믿고 주님의 은총만을 시험하면서, 방종하고 흥청망청 제 멋대로만 살면서 나쁜 짓을 골라하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 않는가?

우리의 결혼 생활만큼이나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것에 대해 무슨 조건을 단다면 그리고 누구의 탓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아니라 우리가 탓을 하는 그 사람의 신앙일 수는 있어도 결코 내 신앙이 될 수 없다. 누가 어쨌든, 누가 뭐라던, 무슨 일이 생기던, 세상에 무슨 일이 있던, 꾸준하고 진실하게 오늘 주님을 믿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께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다.

누구 때문에 주님을 믿는가?

왜 주님을 믿는가?

누가 나를 믿게 해 주는가?

누가 나 대신 믿어주는가?

믿는 것도 나요, 사는 것도 나다.

내가 주님을 믿기에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내가 오늘 여기 이렇게 살아있기에, 주님을 믿는 것이다.

부부의 사랑이 신혼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부부의 생활이 평화와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신앙 생활도 처음 세례 받을 때 그리고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주님을 잘 느끼던 그 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싫던 좋던, 보이던 보이지 않던, 내가 청하던 청하지 않던 나를 지켜 주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며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오늘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자식이 잘 되면 기뻐하고, 자식이 잘 하면 자식도 부모도 함께 행복하고 부모의 짐을 덜어주기라도 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것처럼, 주님도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고 주님께 회개하여 돌아오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머물면서 주님의 좋은 말씀들을 실천하고 주님의 구원사업을 함께 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요 목적이 아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을 얼마나 행복하겠느냐?"(38) 그러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40)



연중 제19주일

(나해) 요한 6, 41-51; 2003/08/10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다음 농사를 짓게 되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풍요다산을 가져다 주는 바알신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농사를 짓기 위해 바알을 섬기는 것이 결코 야훼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엘리야 예언자가 나서서 바알의 예언자와 시합을 벌인다. 정작 누가 농사를 짓게 비를 내려주시는 신인가? 바알신은 비를 내려주지 못했고, 엘리야의 기도에 야훼 하느님께서 비를 내려주신다. 엘리야는 백성들 앞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현실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바알신의 예언자들을 다 죽여버린다. 그러나 바알신의 정치적 후견자인 왕비 이세벨은 자기의 예언자들을 죽인 엘리야에게 복수하려고 자객을 보낸다. 엘리야는 승리했지만,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도망가게 된다. 절망과 공포 그리고 자포자기 속에 지쳐버린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먹을 것을 주시며 당신께로 이끄신다. 결국 하느님의 대 예언자라고 하는 엘리야도 주님께서 자기 앞에 펼쳐주시는 현실 앞에 자기를 버리고 주님께 순응하는 고통을 다 겪고 나서야 꿈에도 그리던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살면서 아쉬움과 결핍을 느끼며 많은 건의사항과 요구사항들을 표명한다. 그중 어느 하나 필요치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자신은 그 희망사항이 이루어지기 위한 의무를 이루지 못하면서, 나를 위해 네가 변하고 채우라고만 요구한다면 참으로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하라는 그리스도교 전승에 합당치 않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내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릴 것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 44. 48)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이 말씀을 우리의 현실 생활에 맞춰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 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에페 4, 31-5, 2)



연중 제19주일

(다해) 루가 12,32-48; 01/08/12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곧 다시 내려오실 것으로 알았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마태 16,28)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래서 그야말로 "하늘만 쳐다보고"(사도 1,11)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금방 오지 않으시자 해이해졌다. 고린토 교회에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이웃과 나누는 의미로 행해져야 하는 성찬의 전례를 망각하고, 오히려 "자기가 가져 온 것을 먼저 먹어 치우고 따라서 굶주리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술에 만취하는 사람도"(1고린 11,21) 생겨났다. 그래서 바오로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까지 말했다.

최근의 신자생활도 어찌 보면 사도직 없는 문화생활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리스도교 문화는 좋아하면서도 신자로서의 사명은 멀리하려고 한다.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를 위해 복음을 선포하고 희생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성당 저 성당, 이 활동 저 활동을 선택한다. 활동 없는 단체와 소공동체도 이짝이다.

우리의 신앙은 부활신앙이다. 마음에 들면 취하고, 싫으면 뱉어 버리고 또 다른 것을 취해 단물만 빨아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루가 9,23) 죽음으로써 부활의 새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죽으면 자기만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부활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오늘 나를 죽이고 희생하는 것이다. 현세가 아니라 영원한 내세를 바라보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다.

오늘 두 번째 독서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가 살던 고향과 친척들을 떠난 것이다. 사라도 나이가 많아 아기를 못 가질 것으로 여겼지만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100이 되던 해에 아기를 얻었다. 비록 그들이 현세에서는 하느님께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실지로 그들이 갈망한 곳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이었습니다."(히브 11,13.16) 지상에서는 우리의 꿈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부활시켜주신 하느님께서 우리도 부활시켜주시리라는 희망으로 믿고 산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기꺼이 주시기로 하신"(루가 12,32) 주님께서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40절)하신 말씀을 되새겨 오늘 우리의 신앙이 가리키는 바를 성실히 이루면서 살아야겠다.



연중 제19주일

(나해) 요한 6, 41-51: 2000/08/13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49절)고 하신다. 죽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육신이 썩지 않고 무한정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육신은 물질이기 때문에 상황이 변하고 때가 되면 소멸된다. 그것도 바람에 휘날리는 한 줌의 재로 말이다. 게다가 우리가 아는 지식에 의하면, 진시황은 불노초를 구하지도 못했고 또 먹었다해도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신앙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지상생애는 육의 소멸과 함께 끝나지만, 끝나지 않는 생애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말해주는 새로운 생명이다. 즉 영과 육이 하나된 새로운 몸으로 사는 것이다.

여기서는 지금 당장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싶고 또 나누어주고 싶어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서 말과 행동이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적인 생명이 지니 한계 때문이다. 아니 더 엄밀하게 말하면 육적인 생명이 지닌 한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이 우리의 믿음을 완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게 하고 또 주기는커녕 받아도 받아도 내가 움켜쥐고 있어도 모자란 것이다. 그 두려움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주님을 믿도록,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징표가 생명의 빵이다. 예수님께서는 보아야만 믿는 우리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성체성사를 남겨주신다. 이 작은 빵 한 조각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작은 징표인 것이다. 우리가 누릴 영생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밀전병 한 조각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은 징표를 통해,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주님의 육신 생명을 주시면서 베풀어주신 영생의 약속을 믿고 산다."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51절)

생명의 징표인 이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을 믿고 영생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살아나가기로 합시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에페 5, 1-2) 그래서 우리도 이 사회에 주님의 징표가 되자.



연중 제19주일

(가해) 마태 14,22-33; 99/08/08

5000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 있던 날 제자들은 기적을 연출하신 주님이 무척 자랑스러웠고, 또 한편 그 기적으로 군중들에게 빵을 나누어 줄 수 있었던 자신들이 마치 직접 기적을 베풀기라도 한 양 들떠 있었다. 어쩌면 돌아가는 배 안에서 술이라도 한 잔 받아놓고 흥겨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역풍이 불고 풍랑이 일었다. 새벽 4시가 될 때까지, 기적으로 5,000명을 먹인 자랑스런 주님의 사도들이 자연의 풍랑 앞에서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유령 같은 물체가 자신들을 향해 오고 있다고 느꼈고, 마침내는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풍랑 속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27절)

베드로는 감격해서 묻는다.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28절) "오너라."(29절) 그러나 주님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한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는 거센 바람이 마치 자기를 덮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서 저자는 형상이나 물체가 아닌 바람을 '느낀다' 거나 '맞는다' 라고 하지 않고 '본다' 라는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베드로가 겁에 질린 거센 바람은 베드로를 실제로 물 속에 빠뜨릴 만한 실체가 아님을 넌지시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물에 빠진 것은 베드로가 한 눈을 팔다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물에 빠진 것이지 거센 바람에 휩쓸려 빠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베드로는 곧 "주님, 살려주십시오!"(30절) 라고 주님께 청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참으로 베드로의 위대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물에 빠져서 살려 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것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가 주님께 청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베드로는 주님이 오라고 하셔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배에서 내려 주님께로 가다가 물에 빠졌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길을 포기하고 다시 배로 돌아오려고 했거나 뒤돌아서서 자기 동료들에게 살려 달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을 '주님!' 이라고 불렀다. 베드로는 자기가 살 길이 예수님께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 본능적으로 주님을 택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를 구해주신다. 그리고 주님은 순간적으로나마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잃고 거센 바람에 자신을 빼앗겼던 베드로를 건져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31절)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32절) 하고 말하였다.

이상의 기사를 정리해보면 제자들은 주님과 떨어져 있을 때 혼란을 맞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혼란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 제자들을 구해 주시러 오신다. 환란 속에서 제자 공동체인 교회는 주님께 의지하지 못하고 허둥댄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선택하고 또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베드로를 받아주신다. 그리고 그가 주님을 따르다가 좌절하거나 쓰러져도 그를 다시 바로 이끌어 주신다. 그래서 그가 주님과 다시 함께하려고 할 때 주님은 그와 함께 세상을 당신 품안으로 거두어들이신다.

오늘 복음을 읽으며 우선 나를 어둠과 혼란 속에서 끌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주니의 따뜻한 손길을 우리 매일 매일의 실생활에서 느끼시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물에 빠지자마자 "주님, 살려주십시오."(30절)하고 청한 베드로처럼 유혹 속에 빠졌을 때, 유혹 속에서 유혹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순간의 기쁨에서 헤어나 빨리 주님께 되돌아가기로 합시다.

"주님 제가 혼란 속에 있을 때 저를 지켜주시고 제가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을 모심으로써 평화를 얻게 해주소서! 아멘."



연중 제19주일

(다해) 루가 12,32-48 : 98/08/09

세끼 밥먹고 좀 절약하며 살면 되던 때에는 몰랐는데, 절약차원이 아니라 끼니 걱정을 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떤 신자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싶은 유혹 속에서 고민합니다.

주님께서는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 6,26.31-3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공허하게 들리십니까? 아니면, 진정 그렇다고 확신하십니까?

어려울 때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믿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어려울 때 드러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의 일생을 예로 들어 신자들에게 믿음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얻을 때, 또 그렇게 어렵게 얻은 자식을 다시 주님께 바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 어린 양 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루가 12,32)

어려워도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의지하며 꾸준히 선을 행하십시오. 그리고 어렵다고 유혹에 빠지지 말고 진솔하게 살아갑시다. 나라가 어려워도, 경제가 어려워도 우리를 살리시고 구하실 분은 주님이시라는 우리의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삶은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그 기원과 목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을 주님께 두고, 주님께서 약속해주신 그 영원한 희망을 이루어 나갑시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로마 12,2)



연중 제19주일

(나해) 요한 6,41-51 : 97/08/10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한 6,44ㄱ) 예수님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믿음은 참으로 믿음을 주신 분으로부터 생겨납니다. 바울로 사도도 필립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3)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쓰시면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주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당신께서 기뻐하실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영원 무궁토록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히브 13,21) 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그분께서 우리를 주님의 뜻 안에서 살도록 이끌어주십사 하고 청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주님과 함께 영원한 기쁨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기를 청하고 바라고 있다. 이러한 사도 바울로의 기도를 미리 염두에라도 두신 듯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릴 것이다."(요한 6,44ㄴ)

그러므로 오늘의 어두운 세상사 속에서도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다음 말씀처럼 산다.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게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1-32. 5,2) 그러면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해주신 그 선물을 얻을 것이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47절)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48-50절)



연중 제19주일

(다해) 루가 12,32-48 : 95/08/13 중고등부 주보 하늘마음

방학을 잘 보내고 있습니까? 그 좋고 즐거웠던 방학(?)이 이젠 끝나갑니다. 어떤 사람에겐 한없이 즐거운 방학이었겠고, 어떤 이에겐 방학이 더 긴장되거나 힘들었겠죠? 학기 중에 못 다한 공부나 특별활동 또는 아르바이트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보냈던 여러분의 방학! 이제 다시 개학날이 다가옵니다. 여러분이 개학하면 다시 만나서 즐겁게 어울릴 친구들이 그립고 기다려집니까? 아니면 개학하자마자 볼 시험과 친구들이라기보다는 입시의 경쟁자들이 되어버린 동료들과의 한판이 두렵습니까?

"주인이 돌아 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 줄 것이다."(루가 12,37) 평소에 공부를 아주 많이 했거나 아예 포기한 사람들은 그렇게 큰 걱정이 없겠죠(?)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 같지만은 않아요. 공부를 많이 했어도, 실력이 뛰어나도 '혹시 실수나 하지 않을까?' '혹시 채점이 잘못되지나 않을까?' '이번에 일등을 놓치거나 뺏기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이 또 들 수도 있겠죠? 언제 어느 자리에서나 자기가 처한 상황 앞에서 누구나 걱정거리를 간직하고 있나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걱정을 안할 수 있나요? 준비를 안해서 걱정인 것은 고사하고, 내가 아무리 준비를 열심히 해도 불안한 데…?! 더군다나 주님도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루가 12,40)하시는 판에…?! 그러나 "사라는 약속해 주신 분을 진실한 분으로 믿었던 것입니다."(히브 11,11b) 그리고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히브 11,13)

불안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옵니다. 불안은 마음 속에 걱정을 불러일으켜 긴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미래를 모르기때문에 아예 게을러지거나 죄를 짓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충해 줍니다."(히브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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