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2017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주간 담화문


“화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가해)요한 1,29-34; 17/01/15

교회는 매년 1월 18일부터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까지를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자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올 해는 광주 대교구장이시며 주교회의 교회 일치와 종교간 대화위원회 위원장이신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님과 한국 그리스도교단들의 책임자들이 연대 서명한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주간 담화문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 평화를 빕니다.

2017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주간을 맞아 이 땅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과 선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여러분들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더불어 올해의 기도 초안을 작성한 독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1517년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는 당시 교회의 폐습을 시정하고자 95개 논제를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루터의 의도와 달리 이후 서방의 그리스도교는 개신교와 천주교로 갈라졌습니다. 지난 오백 년 간 개신교 신자들과 천주교 신자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기보다 불목하여 마치 남남처럼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은 올해를 루터 축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축제로 지내기로 결정함으로써 그 동안의 반목과 갈등을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회 개혁을 위한 부르짖음은 비단 오백 년 전 유럽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전에도, 또 그 후에도 그러한 부르짖음은 도처에 있었으며, 누구보다도 한국교회가 개혁의 필요성과 그에 대한 요청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개혁은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구성원들의 인간적 부족함에서 기인한 복음의 왜곡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교회의 본모습을 찾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진정한 개혁은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라고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됩니다.

올해 일치 기도주간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고린토5, 14.20) 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선이 온 누리에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의 복음은 우리에게 밀려오고 우리에게 변화를 촉구합니다. 화해를 이끄시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갈등과 반목에 머무르지 않고 서로 화해하기를,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비록 교회의 분열이 큰 상처를 남기기도 했지만, 복음을 살아가는 여러 교회의 다양한 모습 안에서 복음의 풍요로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치는 복음에 따른 삶의 다양성을 부인하지 않고 각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선물을 서로 인정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화해한 다양성을 지향합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교 교단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하느님의 화해의 사절로서 자신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웃에게 눈을 돌립니다. 꿈을 실현할 수 없는 청년 실업자들, 가난으로 내몰린 노인들, 불안함 속에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해방을 고대하는 북녘의 동포들과 함께하고 이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서로 화해해야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리스도인 사이의 증오와 경멸, 그릇된 비난, 선입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화해의 길을 걷는 모든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님들께 깊은 감사를 전하며 이 길을 함께 걷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합니다. 또한 이러한 풀뿌리 교회 일치 운동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세례의 상호 인정과 소속 교단의 차이로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그리스도인 가정에 더 큰 도움을 가져오기를 고대하며 기도합니다.

화해의 사절로 우리를 이 땅에 파견하신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분들께 가득하시길 빌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축제가 벌어지기를 기원합니다.

2017년 1월 18일

한국천주교 김희중 대주교

한국정교회 조성암 암브로시오스 대주교

대한성공회 김근상 주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영주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이성희 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 전용재 감독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권오륜 목사

한국구세군 김필수 사령관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 이동춘 목사

기독교대한하느님성회 총회장 오황동 목사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장 김철환 목사




연중 제2주일

(다해) 요한 2,1-11; 16/01/17

여기 삼성동 성당에서 살다가 다음엔 어디로 가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지금 강남에서 살고 있으니 다음엔 강북의 어려운 곳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무심코 ‘그러다가 아예 보좌 신부님이나 수녀님도 없는 곳으로 가게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런 걱정을 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면서, 결국 지금까지 저는 신부로서 ‘해야 하니까 했고, 주어진 것이기에 해왔구나 !’ 하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사제는 용서해야 하니까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니까 사랑하고,’ 하고 싶든 안하고 싶든 관계없이 그렇게 의식적으로 제 삶과 행동을 제어하면서 살았기에, 보람과 기쁨이 있었던 반면에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고 부담이 들기도 하였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결국 사람이 되어 오시기까지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처한 같은 조건과 상황을 취하셨건만, 예수님을 따르겠다던 저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편하고 풍요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오셔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예수님께 알립니다. 어쩌면 마리아는 그 혼인잔치의 음식담당 책임자였거나, 혼주의 거절할 수 없는 절친이었거나, 아니면 혼인 당사자들이 어렵게 어렵게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포도주마저 떨어진 것을 너무나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아들 예수에게 청했나 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집에서 어머니가 음식을 만들 때나 시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기적같이 어머님을 도와 드렸나 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또 그런 일이 갑자기 생기자 아들 예수님에게 청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자신을 공적으로 드러낼 때가 되지 않았다고 여겼지만 다급한 현실과 어머니의 간절한 청원과 예수님 자신도 꼭 그 문제를 풀어주고 싶으셨는지 자비하신 연민의 정으로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움직인 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청원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우리가 꿈꾸던 일을 계획하고 그 계획이 잘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예기하지 않았던 일이 생겨나 암초에 걸린 듯 고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일 저 일을 하며 그 난관을 헤쳐나가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나서도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께 도우심을 청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청하듯이.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문제를 푸실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기는 그 방법대로 안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5절)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생각지 않았던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주십니다. 예수님은 물독에 물을 채워 놓고 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십니다(7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최양업 토마 신부님 그리고 최방제 프란치스코는 17살에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지부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앞 길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카오에 까지 와서 신학 수업을 했지만 난데없이 마카오에서 민란이 생기자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필리핀 롤롬보이로, 또 한 번은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옮겨서 공부하셔야 했습니다.

생의 여러 번의 우여곡절 속에서 김대건 신부님은 자신 앞에 펼쳐진 예기치 않은 사건들과 상황에 처할 때마다 김 신부님은 주님께 자신의 처지를 아뢰었고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께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그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공부를 하던 과정에서 생겨난 두 번의 민란 속에서, 부제품을 받고 홀로 압록강 관문을 넘으려다 눈 속에서 죽을 뻔 했을 때도, 강경 나바위를 향해 오다가 풍랑을 만나 되돌아가야 했을 때에도, 귀국한지 채 일년도 안 돼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사로잡힐 때도, 감옥과 순교의 현장에서도 그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기꺼이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시면서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그를 도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청하지도 않았을 때에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 내셨고, 우리를 신앙으로 부르셨으며,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가르침대로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에도, 지금 이 순간 주님 앞에 나아와 주님께 나의 처지를 아뢰는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주님의 모든 사랑과 은총을 아낌없이 철철 흘러 넘치게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지극히 자비로우신 사랑과 은총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아들 예수님의 전 생애에 걸친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길에 동반하셨듯이.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요한 2,5)




연중 제2주일

(나해) 요한 1,35-42; 15/01/18

살다 보면, 어떤 일은 지금 당장 꼭 필요하지 않아서 선택을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재를 살면서 우선 순위상 첫 번째에 있지 않거나, 이해관계상 차선으로 밀리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시급하여 거기까지 생각할 수 없었거나,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않은 새로운 것에 대한 망설임과 두려움이 선택을 주저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마음 속에 마치 부채처럼 다시금 떠오르고, 거듭 내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것이 있습니다.

신자들 중의 젊은이들에게 성소가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따라 교회 내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있는데, 차마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소는 마음에서 무언가 부르짖고는 있는데도, 현실의 육적인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고 선명하게 규명되지 않은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 나오는 ‘사무엘의 부르심’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무엘이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1사무 3,3-4)고 나옵니다. 사무엘은 잠결에 누군가 자기를 부르긴 불렀는데 그 부르심이 하느님인줄 모르고, 자신의 현실 경험상 엘리가 자신을 부른 줄 알고 “‘예.’ 하고 대답하고는, 엘리에게 달려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5절) 하고 답합니다. 그러나 정작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5절)고 하자,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눕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고, 사무엘은 다시 엘리에게 가게 됩니다. 성경은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7절) 라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렇게 두 번씩이나 사무엘이 엘리에게 가서 자기를 부르셨느냐고 묻자,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시는 줄 알아차리고, 사무엘에게 일렀다.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8-9절)라고 가르쳐 줍니다.

주님께서 세 번째로 사무엘을 찾아와 서시어, “사무엘아, 사무엘아!”(10절) 하고 부르시자, 사무엘은 드디어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0절)라고 대답합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무엘은 주님의 부르심을 알아듣지 못했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해 본 엘리의 안내로 ‘주님 부르심의 양식’을 알아차리고 주님께 응답하게 됩니다. 여기 이 성경기사에서는 그나마 주님의 부르심을 귀로 듣는 것처럼 드라마틱하게 묘사했지만, 실제 세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은 귀로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 주님의 부르심을 귀로 듣는다면 병원에 가야 할 지 모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직면하여, 스스로 식별하거나, 전혀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는 누군가 경험자의 조언과 주님의 부르심을 알아차리는 방법과 응답하는 방법을 일러주어야 하고, 또 그 방법대로 알아차리고 응답하게 되면, 그제서야 성소자가 됩니다. 부르심이 있어도 본인이 깨닫지 못하면 성소자가 될 수 없고, 본인이 주님의 부르심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응답하지 않으면 성소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개인의 느낌이 주님의 부르심을 경험한 제 삼자(교회)에 의해 주님의 부르심이라고 인정될 때, 비로소 성소가 있다고 판정을 받게 되고 성소의 길을 공식적으로 걷게 됩니다.

이번에 우리 본당의 류호준 안드레아 군이 성소를 인정받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합격하여, 서울대교구 신학생으로서 성소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축하해 주시고, 지금부터 시작되는 10여 년간의 교육과정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담뿍 담고, 주님의 뒤를 이어 거룩한 사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자들에게 성소가 생소한 부르심이라면, 일반인들에게는 ‘신앙에로의 부르심’이 생소합니다. 언젠가 마음 한 구석에 ‘종교를 가지게 되면 천주교를 가져야지’ 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기도 합니다. 커다란 위험을 겪고 생의 전환기를 맞았다든지, 전과는 달리 뭔가 더 깊은 갈망이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왔다든지, 천주교 신자들과의 접촉에서 위로나 뭔가 새로운 인생의 빛을 발견하게 되면 성당을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실제로 본인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여러 사람을 통해 여러 경로로 여러 번 부르심이 있으신 후에 응답하게 된 것이라고, 축하하며 환영합니다. 오늘 우리 성당을 찾아오신 예비신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여러분이 오늘부터 시작하는 예비신자 교리 시간과 신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지금까지 주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해 주시고, 주님 사랑 안으로 부르셨는지를 깨닫고, 기쁨과 평화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미사 전례와 교리를 통해 여러분에게 더 깊이 다가오시는 주님을 선명하게 알고, 주님 사랑에 맛들이고, 주님 사랑에 취하여, 주님의 자녀가 되어, 거룩해지고 이웃을 용서하며 이웃과 삶과 사랑과 열정을 나누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라고 말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38절) 고 물으셨고, 그들이 “랍비(선생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38절)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39절)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39절) 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 안드레아가 형 시몬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그리스도)를 만났소.”(41절) 라고 고백하며,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베드로)라고 불릴 것이다.”(42절) 라고 명하십니다.

요한의 제자 두 명은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지내는 동안,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른 예수님을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구세주 ‘주님’으로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성당에 나오는 동안, 성당과 여러분의 일상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여러분을 사랑해주시는 구세주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리를 가르치는 분들의 말을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며 알아듣는 데에 그치지 말고, 여러분의 일상과 지나간 여러분의 인생역사 안에서 그분께서 여러분과 어떻게 함께하시면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지켜주셨는지를 되새기고, 선명하게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기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세례를 받는 그날 새로운 이름을 받고, 주 예수님께서 일러주시는 은총의 그 거룩한 새 인생의 길로 접어들기를 바랍니다.

예비신자 여러분, 여러분을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같이 여러분의 가족과 친지들 앞에서 마음에서 우러나와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났소.’ 라고 고백하며 증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연중 제2주일

(가해) 요한 1,29-34; 14/01/19

날이 추워지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근심이 깊어집니다. 제일 먼저 떠 오르는 생각은 ‘이 어려움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어떻게 하면 풀릴까?’ 하는 상념들입니다.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언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나를 이끌어 주실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래서는 안 되지만 또 그런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속 시원히 말해 주는 곳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 라고 하셨건만, ‘천주교에서는 미래에 대해 알려주는 곳이 없을까?’ ‘왜 미래에 대해 물으면 안되나?’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구세주를 기다리던 유다인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요한 1,31.33)

세례자 요한은 요한 복음 1장 31절과 33절 두 곳에서, 자기도 그분이 언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오실지, 어떻게 생긴 분이신지 모른다고 증언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단지 그분에 대해 자신이 전해 들은 내용을 전합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33절)

그렇게 자신도 명확히 모르면서도, 세례자 요한은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주시게 하려는 것이었다.”(31절) 라고 자신이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일의 성격과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전지전능하시며, 영원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부님이나 수녀님, 교리 교사나 부모님이나 대부모님 등 다른 어느 누가 말해주어서가 아니라,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내가 직접 느끼고 깨달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 이름 ‘야훼’라는 단어의 뜻에서 나오는 내용같이 ‘우리의 앞 길을 열어주실 분’이시며, ‘나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이끄셔서, 마침내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늘 고백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34절)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아니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피부에 와 닿도록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 마음 속에는 불안이 싹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드리고 있는 이 미사를 ‘기억’과 ‘재현’의 제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죽어가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어렵고 힘겨울 때마다 우리를 도와주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고비마다, 선택의 귀로에 놓여있을 때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걱정과 불안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매 순간 매 자리에서 주님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인생 속에 살아계시면서 함께해주셨던 주님을 기억하며, 그 기억을 다시 상기하고 되새겨 우리 삶 안에서 재현함으로써 오늘의 불안과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결정하던지,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던지, 늘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좋은 데로 이끄시어, 마침내 구원해 내시리라는 사실을 믿고 희망합니다.

우리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처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만들어 주신 길이 따로 있어서, 운명처럼 예정된 대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변화하는 것에 맞춰 새롭게 대응할 때마다 그리고 우리가 기존 질서의 여정을 하나씩 선택할 때마다,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개척해 나갑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동쪽으로 가면 합격하고, 저 길로 가면 성공하고, 이쪽 줄에 서면 승진하고 강성하리라고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주변 환경의 변화 그리고 시대와 상황을 둘러싼 여러 여건들과 변수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선택이 우리 시공의 처지를 새롭게 합니다.

그러기에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도 않았고, 완전히 달성하지도 못했어도, 또 앞으로 당분간은 더 힘겨운 가시밭 길을 걸어가게 될 지도 모르지만, 우리와 함께해 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께 희망을 걸고 살아가기에 작게나마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지켜봐 주고 계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마음 속에 싹터 오르는 조바심과 조급함, 걱정과 불안 그리고 실망과 낙담과 포기를 넘어,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우리를 구원해 주실 주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오늘을 이겨나가기로 합시다.

오늘 성당에 오신 예비신자 여러분,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이 오늘부터 시작하는 교리기간 동안에 지금까지 여러분의 인생에 함께해 주시면서 사랑해 주셨던 주님을 느끼게 되고, 그분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되시길 기도하며 기대하겠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29.32.34)



연중 제2주일

(나해) 요한 1,35-42; 06/01/15

사람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쉽게 발견하는 것은 그의 약하고 모자라는 모습입니다. 자식도 귀엽긴 하지만 실제로 우리 눈에 띄는 것은 잘하는 모습보다는 실망스런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고 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재의 모습만이 그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보이지 않고 그의 현재 행동만이 드러나 내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부모가 “넌 그것 밖에 못하니?”등의 질문을 자식에게 던짐으로써 부모의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는 실망스런 평가가 자식에게 창의성과 가능성을 죽이고 오히려 반대로 주눅을 들게 만드는 아쉬움도 종종 보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8장 25절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고 더 보이지 않는 가능성과 숨어있는 재능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우리의 신앙이 너무나 미약한지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드러나는 모습만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단죄하는 경우마저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고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께 감사만 드릴 뿐 전혀 행동으론 보답하지 못해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가능하면 사람들의 장점만을 보아주고, 지금 당장 못해도 그 가능성을 보아 일을 맡기고 양성하는 일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지금 당장 일 잘하고 검증된 사람만 찾고 새로운 사람들을 키우려 하지 않으니, 부활의 희망이라는 미래보다 오늘이라는 현실에 드러난 과거 속에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미사 전례 안에서 읽은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궁금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고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36)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먼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자 요한의 두 제자는 자기 선생님의 말을 듣고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그 두 제자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는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38ㄱ)십니다.

그러자 그 요한의 제자들이 말합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38ㄴ)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39ㄱ)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39ㄴ)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뒤따라가서 도대체 무엇을 보았을까?

그들이 어떻게 예수라는 한 인간 안에 숨어있는 그리스도라는 천주성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메시아라고 확인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언제나 궁금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 복음서 안에 써 놓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그들이 그들의 이 첫 만남이 하도 명확해서 그 때 그 시간을 적어놓았습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39)

이 제자들의 질문과 대답을 오늘 우리의 삶에 비추어 본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성당 신자들 사이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발견하십니까?’하는 질문이 될 수 있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세례를 받은 이후에, 언제 어떻게 예수님을 성당에서 만나고 느끼십니까? 누구를 통해서 그리고 어떤 기회에 느끼십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 각자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느끼는 것도 서로 다르다고 봅니다.

“와서 보시오!”라는 성서 구절은 지난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의 표어였습니다. 과연 무엇을 우리가 보여주기 위해 사람들을 성당에 오라고 초대하는가 하고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그 때의 기록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이를 계기로 하여 적극적인 선교의 자세를 분명히 하고, 전국 교구의 주교들이 합동으로 봉헌한 미사에서 신도들과 함께 이웃을 향한 봉사의 자세를 확인하였다”고 썼습니다.

우리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또한 사람들도 초대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본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아야 남들에게 보라고 보여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부모님과 선배 신자들인 성당을 통해 본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자각하고 또 내가 사는 신앙생활의 방법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과 뭔가 달라도 달라보여야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보고 발견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말 이 현실 사회에 그냥 두 눈으로 발견하기 힘든 그야말로 천주성을 간직하고 있는 신비스러운 것이어야 사람들을 초대하고 보여줄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래야 그분들이 우리를 보고 신비스럽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 불륜을 멀리하십시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였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15-16.18ㄱ.19-20) 말이 아니라, 몸으로 드러내고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 독서에서 소년 사무엘이 처음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스승이신 엘리가 부르는 줄 알고 엘리에게 세 번이나 달려갑니다. 세 번째가 되서야 엘리는 주님께서 소년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알아차리고 사무엘에게 이릅니다.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여라.”(1사무 3,9)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만나고 하느님을 따르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현실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며,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악마의 움직임 그리고 그 움직임에서 승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힘들고 지쳐도 사라지지 않는 희망.

아무리 부정과 불의와 폭력이 판을 치는 것 같아도 마침내 승리하고야 마는 진리.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많아도 결국 드러나고야 마는 어머니 같은 사랑.

그리고 동시에 주님의 승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 안에 숨겨져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주님께서 그에게 주어진 선물인 그만의 장점과 가능성을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믿고 바리기에 현세에서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가치를 존중해 주고 또한 나 자신도 스스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의 표지를 발견하고 선포하며 그 믿음을 살아나가기로 합시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41)



연중 제2주일

(가해) 요한 1,29-34; 04/01/16

한국인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칭찬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좀 부정적인 시각이긴 하지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근-현대를 거치며 외적의 침입과 열강의 간섭 속에서 나면서부터 서로를 경계하고 서로를 경쟁상대로 바라보도록 훈려되어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는 상대의 결점과 약점은 쉽게 발견하고 공격하는데 반해, 상대에 대한 좋은 점과 장점을 발견하고 축하해주고 이끌어주는 데는 다소 인색하고 상대의 단점을 채워주는 데는 더욱 더 익숙하지 않다. 더군다나 그런 문화 속에서, 후배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따른다는 것은 힘들다.

그런데 오늘 세례자 요한은 사촌 동생벌인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칭찬한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29)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한다.

올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에 교황님께서 평화를 언급하시면서 죄에 대해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

“인류는 태초부터 악의 비극을 겪어 왔으며, 악의 뿌리를 찾아 그 원인을 밝히고자 애써왔습니다. 악은 인간과 상관없이 세상에 작용하는 비인간적인 어쩔 수 없는 힘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악의 비극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을 지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분 짓는 자유가 있습니다. 악은 언제나 이름과 얼굴이 있습니다. 악에는 자의로 악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역사의 여명기에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께 반항하고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고 이야기합니다(창세 3-4 참조). 이러한 최초의 잘못된 선택 이후 세기를 내려오며 수많은 잘못된 선택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선택들은 각기, 개인의 구체적인 책임과 각 개인이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맺는 근본적인 관계가 내포된 고유한 도덕적 차원을 지닙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악은 사랑의 요구를 거부하는 비극입니다. 반면 도덕적 선은 사랑에서 생겨나며, 사랑으로 드러나고, 사랑을 지향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러한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로서 주님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도덕적 선의 살아 있는 원천인 그리스도교 사랑의 내적 논리는 자신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이끕니다.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로마 12,20).”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세상의 죄를 없애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셨으면서도, ‘죄’란 면에서는 우리와 같지 않았다.

예수님은 스스로 죄를 선택하지 아니하셨다.

그 대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사람들의 죄 값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대신 보상하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그만하고 탈출하려고 할 때, 이집트 왕이 풀어주지 않자 하느님께서 10가지의 재앙을 내리셨다. 그 10번째 재앙이 이집트 안에 있는 맏배와 맏아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맏아들을 살리기 위해 이스라엘 집을 표시하기 위해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죽음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지나치도록 함으로써 그 죽음의 대재앙에서 이스라엘을 구했던 것을 기억하여, 성서는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신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기억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구원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로

우리 주위에 죄로 고민하고,

자기가 한 말과

자기가 한 행동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그 죄의식과 벌로 방황하며,

죄와 악에게 휘둘려서 영혼과 삶이 황폐해지고

죄와 악에게 사로잡혀 노예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형제들을

덮어 주고, 보듬어 주고

마치 내가 아픈 것처럼 함께 아파하면서 품어 안아줌으로써

그의 죄를 용서해주며,

그 죄로 인한 벌을 감해주고,

그가 죄와 악에서 해방되어

다시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의 자유인으로 태어나도록

끌어주고 밀어주며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서로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가?

분노와 증오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속을 풀어주고 녹여주고 씻어주실 분은 주님뿐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주님 사랑으로 가득하길 청한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서 미움과 증오를 몰아내고 사랑으로 바꿔주시기를 청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사랑으로 변하여 형제에게서 미움과 증오가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서 나에게 미움과 증오를 일으키게 나쁜 일을 하도록 한 악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또 그가 나에게 악한 행위를 했을 때 내 안에서 복수하고 싶고, 미워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나도록 나를 충동하는 악을 극복하기 위해 주님의 사랑을 청한다.

주님 사랑의 힘으로

나를 괴롭히는 이 안에서 활동하는 악과

내 안에서 그에게 부정적으로 대응하려는 악을 동시에 제거하고

주님 사랑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아울러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천주성을 발견하도록 요한을 이끌어주신 성령께서 우리도 이끌어주시어,

우리도 성령의 눈으로 형제 안에 숨어있는 천주성을 발견하고

그 천주성에 힘입어 그 형제를 존중하고 사랑하도록 하자.

그래서 이 죄많고 부족한 인간 세계 안에서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채워주며

서로에게 서로를 선물로 내어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 나라를 이루어나가기로 하자.

오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다시 여러분에게 들려드리며 축복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1고린 1,3) 아멘.



연중 제2주일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제90차 세계 이민의 날 담화

2004/01/18

1. 금년도의 이주민과 난민의 날 주제는 '평화의 관점에서 본 이주'로 정했습니다. 이 주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전쟁, 폭력, 테러리즘, 압제, 차별, 불의에 시달리다가 이주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입니다. 홍보매체들은 고통과 폭력과 무력 분쟁의 모습을 그대로 전달해줍니다. 여러 나라와 대륙이 이러한 비극에 시달리고 있고 가장 가난한 나라들이 그런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이 비극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고향을 떠나 알몸으로 타향으로 이주해온 사람들과 절망을 뚫고 모국을 도망친 난민들이 개인과 가정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조차 마련하지 못해 어려운 지경에서 허덕이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점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 지구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런 긴장된 상황이 전개되는데 우리가 어떻게 평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까?

2. 인류의 대부분이 평화를 갈망하고 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뜨거운 열망이 있기에 우리는 모든 인간의 보다 나은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한 모든 방도를 찾아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의 죄악과 그 뿌리에서부터 싸워나갈 필요가 있음을 끊임없이 확신해야 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 가정에서 시작하여 학교, 여러 단체나 조직, 국가적 차원뿐 아니라 국제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가 어우러져서 힘을 모아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장기적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와 화해의 구체적인 행동과 노력이 절실합니다. 우리 사이의 차별과 분열은 이를 해결하려는 분명한 전망이 없이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인권의 존중과 정의의 실현이 없이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우리는 다시 한번 힘차게 증언해야 합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가 "정의는 평화를 가져온다."(이사야 32. 17)라고 말했듯이 정의와 평화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3. 이주민과 난민에 관한 평화의 구체적인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 사람들의 이주하지 않을 권리, 즉 모국에서 인간의 품위를 지니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지방과 국가의 행정, 동등한 무역,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을 통하여 모든 국가는 주민들의 거주 이전과 표현의 자유와 함께 식량, 건강, 노동, 주거, 교육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가야 합니다. 이런 필요가 충족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타국으로 이주를 강요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사람은 이주할 권리를 갖습니다. 복자 요한23세 교황께서는 회칙 '어머니와 교사'에서 이 권리에 입각하여 세상의 재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언급하십니다(30항 33항). 물론 각 국 정부는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필요성을 고려하고 이주민들의 인간적인 품위와 가정의 필요를 최대한 존중하며 이민을 조절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미 이주민, 난민, 정치적인 망명자들을 위한 국제적인 협약이 체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협약들은 앞으로 더욱 더 보완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우리 중 아무도 이주민들이 겪는 문제들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은 종종 아주 극적인 상황과 사건 속에 휘말리게 됩니다. 매스컴에서는 우리 심금을 울리고 때로는 전율을 느끼게 하는 이주민의 모습, 어린이, 젊은이, 성인, 노인의 깡마른 얼굴에 슬픔과 고독에 가득 찬 눈망울을 보여줍니다. 이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소에서는 때로는 심한 제재가 가해집니다. 그러나 지구촌 곳곳에서 우려스러운 이러한 사태를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 공적, 사적 조직들이 기울여 온 노력은 참으로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안정된 미래를 찾아 나선 사람들을 바다에서 작은 배에 유기하는 비양심적인 인신매매범들의 행위는 고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치명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이들에게는 신속하고 구체적인 대응이 필요합니다.

5.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민들의 세계는 세상에 평화를 공고히 하는데 효과적인 공헌을 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민은 사람과 공동체 사이 뿐 아니라 문명과 문명 사이의 만남과 이해를 용이하게 해왔습니다. 이러한 여러 문화간의 풍부한 대화는 본인이 2001년 평화의 날 메시지를 통하여 언급한 바와 같이 '세계의 화해를 건설해 나가는데 필요한 길'을 닦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이주민들을 합당한 인격적인 처우로 존중할 때 실현됩니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서로의 차이를 조화로 이끌고, 때로는 가치관이 달라도 서로 무관심으로 치닫지 말고 대화를 추구하는 환대의 문화, 평화의 문화를 우선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개방의 연대는 평화의 조건과 실현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모든 이주민들이 서로의 정체성을 존중하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민족의 문화적 유산을 지켜주면서 점진적인 통합을 노력할 때 이주민들은 겟토를 형성하는 위험을 모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 전체의 저항을 받아 완전히 고립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한 지역을 차츰 정복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다양성'이 서로를 보완하며 만났을 때 '상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공존'하는 삶이 풍성해지고 우리는 모든 문화에 존재하는 분열보다 일치를 추구하는 가치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그 가치는 인간이라는 동일한 '토양(Humus)'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공존하는 삶은 각자의 특성을 존중하며 서로 관용의 길을 걸어가기 위하여 유익한 대화의 장을 펼쳐 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주의 현상은 전 인류가 평화의 미래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6.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마태. 5. 9)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다른 사람들과 형제적인 친교와 일치를 추구하는 일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에 그 원천과 모형이 있습니다. 본인은 이주민, 난민, 그리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함께 만드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이 은총의 원천에서 힘을 얻어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아무도 불의에 대해 체념하거나 역경과 난관에 맞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꿈'을 여럿이 공유하고, 이에 대한 이주민과 난민들의 공헌을 평가할 줄 안다면 인류는 모든 이의 가정이 되고 우리들의 이 지구는 참으로 '공동의 우리 집'이 될 것입니다.

7. 예수님은 당신의 삶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나아 가야할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당신의 부활을 통하여 선이 악을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는 것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수난에 일치하여 성부께 바치는 우리들의 보속과 노력은 하느님 구원의 섭리가 실현되는데 이바지 할 것임을 확인하여주셨습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본인은 이주민들과 연관된 모든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 평화의 역군이 되도록 초대합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외아들의 어머니 마리아의 전구를 빌며 이분들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할 것을 약속하며 모든 이에게 저의 축복을 보냅니다.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을 맞으며

2004/01/18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일치를 바라시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새해 첫 달에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을 마련하고 교회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며, 교회 일치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을 맞이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는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특별히 담화문을 발표하게 됨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모아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간 오랜 경제 성장 중심의 정책으로 많은 이들이 물신주의에 빠져들어 있음을 느낍니다. 물질 때문에 좌절과 시기, 미움, 경쟁심, 때로는 투쟁과 이혼, 낙태, 자살, 살인 등의 사회악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산천은 이미 병들어 있으며, 참 가치가 거짓 가치에 밀려나고 있고, 사람들은 날로 천박하게 변해 가고 있습니다. 서로 헐뜯으며 국가와 국민의 전체의 안녕보다는 소수의 이익을 위해 투신하는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참다운 인생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사회의 잘못된 사고를 바로잡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먼저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1908년 폴 왓슨의 제안에 따라 성 베드로 사도 축일과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 사이의 날들로 정해졌던 한주간이 이제는 매년 1월 18일에서 25일까지 고정적인 기도 주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천주교와 개신교는 갈등과 대립 속에서 지내왔지만 천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면서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발표하였습니다. "일치 교령" 1장에서 “일치의 재건을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 촉진하려는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대한 목적의 하나이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이고 유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많은 교파들이 사람들에게 저마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상속자라고 내세우고, 참으로 모든 이가 자신이 주님의 제자라고 공언하지만, 그리스도 자신이 갈라지시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분명코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며, 세상에는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야 할 지극히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 있다."(1항)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천주교회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여러 가지 일치 노력을 해 왔습니다.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인준으로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 의장 카시디 추기경의 이름으로 발표된 “교회 일치 운동의 원칙과 적용에 관한 지침서”는 일치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안내서로서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됨을 서로 인정한다는 것이 일치의 희망을 언제나 보여 주고 있으며 지역 주교는 유능한 사람을 일치 문제에 관한 교구 책임자로 임명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199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회칙을 발표하셨습니다. 이 회칙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일치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8항의 예를 들어보면 “일치 운동은 신앙의 빛과 사랑의 인도를 받는 그리스도인 양심의 의무이며 그리스도교 일치의 희망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적 일치에 그 신적 근거를 가진다고 강조했습니다.

1999년 10월 31일, 교황청과 루터교 세계 연맹은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에 서명하였습니다. 이 합동 선언문에는 “이 합동 선언문이 의화 교리의 기초 진리들에 대한 합의를 정식화할 수 있게 하였고, 의화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수렴에 이르게 하였다. 이 합의에 비추어 볼 때, 16세기에 각기 내려진 교리적 정죄들은 오늘의 상대방에게 적용되지 않는다."(13항)라고 선언함으로서 교회 일치를 위한 거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2000년 5월 14부터 20일까지 13개국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 주교들의 회의가 열려서 일치를 위해 노력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아시아에서도 2001년 1월 태국에서 아시아 그리스도인 협의회와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가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일치 증진을 목적으로 회의를 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괄목할 만한 교회 일치의 발전이 있음에도 아직도 많은 난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우선 개신교 교파가 너무 많이 갈리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교파와의 합의가 다른 교파에서는 효용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천주교와 개신교는 합동으로 성서를 번역하는 역사적인 작업을 함께 하였으나 정작 천주교와 일부 개신교파에서만 공동 번역 성서를 사용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멀고 먼 일치의 길인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 1). 주님을 의지하고 나아갑시다.

우리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 21-2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망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일치입니다. 함께 이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며 특히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에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도 서로 미워하거나 음해하는 마음으로 행동한다면 비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비웃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일치 운동이 실현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포기함 없이 함께 이 어두운 사회에 하느님의 뜻을 일깨워 주고, 정부와 시민들이 인권을 짓밟는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경고하며, 가난하고 비천하여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권리와 요구에 대한 존중을 가르쳐 이 세계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하나되게 하소서", 43항)

"일치 교령"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요구하는 대로 공동선을 위한 온갖 일에서 그 교파들이 더욱 폭넓은 협력을 추구하고 또 가능한 곳에서는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를 바친다."(4항)라고 언급했습니다. 매년 교황청은 각 지역 교회에 일치 기도를 위한 여러 가지 자료를 보내 주고 있습니다. 한국 전체 교회의 차원에서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와 개신교 교회협의회 일치위원회가 합동으로 매년 일치 주간에 일치 기도회를 개최해 오고 있습니다. 올해에도 예수님 말씀대로 일치를 위해서 함께 기도할 것입니다. 각 교구 본당에서도 이미 교황청에서 배포한 일치 주간을 위한 참고 자료를 가지고 미사 후 또는 각 단체 회합 후 응용하여 사용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교회 일치를 위한 기도가 주님께는 찬미가 되고 우리에게는 새로운 일치의 축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

위원장 최기산 주교



연중 제2주일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제89차 세계 이민의 날 담화

모든 인종 차별, 외국인 혐오, 지나친 국수주의의 극복을 위한 노력

2003/01/19

1. 현대 세계에서 이민은 광범위한 현상이 되었고, 모든 나라가 출발국이나 통과국, 또는 도착국으로서 여기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민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모든 인류 가족에게 봉사하는 순례자인 교회가 복음의 보편적 사랑의 정신으로 맡아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올해 세계 이민의 날은 어떤 이유에서든 집과 가족을 멀리 떠나 있는 모든 사람의 어려움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고, 또한 이들 형제 자매들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의무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가장 취약점이 많은 외국인들입니다. 곧, 불법 이민들, 난민, 망명 요청자들,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폭력 분쟁으로 추방된 사람들,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들로 인신매매라는 끔찍한 범죄의 희생자들입니다. 최근에도 우리는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를 표방하며 타민족을 강제 이동시키는 비극적인 일들을 목격하였습니다. 이것은 표적이 된 집단의 삶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러한 사태의 밑바탕에는 복음에 위배되는 사악한 의도와 행위들이 깔려 있으며, 이것은 세계 곳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호소를 불러일으킵니다.

2. 가톨릭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국적이나 사회적 신분, 또는 민족적 기원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거룩한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로 결정됩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세계 각지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실제로 오늘날 모든 개별 교회를 살펴보면 명백합니다. 이민들이 예전에는 고립되어 있던 작은 공동체들까지도 다민족 다문화 공동체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외국인을 거의 볼 수 없었던 곳들이 이제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거처가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 성찬례에서 이전에는 들어 보지 못한 언어로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점점 더 자주 듣게 됩니다. 이로써, "뭇나라 백성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온 세상 사람들아, 주님을 찬미하라."(시편 116[117],1)는 옛 시편의 권고가 새롭게 상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공동체는 보편성을 체험하며 살아갈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편성은 모든 민족 안에 작용하는 성령의 모든 활동에 교회가 근본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교회는 민족이나 다른 외적인 특징들을 근거로 지역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관련된 모든 이들의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세례 받은 사람들의 기본권인 예배를 드리고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개별 본당 공동체에 새로 들어온 신자가 그 지역 언어를 모른다거나 그 지역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해서 환영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경우에 '잃어버린 양'이 되기 쉽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별 때문에 이 '보잘것없는 이들'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목자와 신자가 모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3. 이는 제가 세계 이민의 날 담화에서 자주 언급해 온 주제이기도 합니다. 곧 누구든지 도움을 요청하러 오면 이를 환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이러한 개방성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활기차게 하며, 성령께서는 다른 문화에서 온 새 신자들이 가져다 준 선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풍부하게 하십니다. 복음적 사랑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 표현은 세계 모든 곳의 이민과 난민들에 대한 수많은 연대 계획을 고무하기도 합니다. 이민과 난민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이러한 교회의 유산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알려면 성녀 프란체스카 하비에르 카브리니와 조반니 바티스타 스칼라브리니 주교와 같은 인물들의 업적과 유산, 그리고 가톨릭 구호 기관인 '카리타스'와 국제 가톨릭이민위원회가 오늘날 펼치고 있는 광범위한 활동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물론 연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연대를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며, 오늘날 여러 사회에 점점 더 알게 모르게 깊이 침투해 있는 폐쇄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현상에 대처하기 위하여 모든 차원에서 방대한 교육과 양성 수단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가톨릭 사회 교리에 바탕을 둔 긍정적인 태도를 길러 줌으로써 온갖 인종 차별과 외국인 혐오를 물리치도록 부모들과 교사들에게 호소합니다.

4.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기 중심적 경향을 극복하고 다른 문화 민족들 안에서도 하느님의 작품을 발견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오직 진정한 복음적 사랑만이 공동체가 다른 사람들을 단지 포용하는 선에서 벗어나 그들의 차이점을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강한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에 힘입을 때에만 매일의 도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기주의가 아닌 이타주의를, 두려움이 아닌 개방을, 거부가 아닌 연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저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새로 온 사람들에게 탁월한 연대의 정신을 보여 주도록 촉구하며, 이민들에게도 그들을 받아 준 나라에 감사하고 그들을 환대하는 민족의 법률과 문화와 전통을 존중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하도록 촉구합니다. 이를 통해서만 사회적인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가 다른 이민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길은 사실상 쉽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는 참으로 십자가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용기를 잃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일치의 성사인 교회의 도움을 받아(교회 헌장 [인류의 빛], 1항 참조)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민족을 당신께 이끌고자 하십니다.

때때로 이 길에는 그릇된 것을 지적하고 올바른 것을 촉구하는 예언자적 말씀이 필요합니다. 긴장이 야기될 때에, 근본적인 인간 존중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신뢰를 받는냐 받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새 천년기], 49항 참조) 목자들과 신자들의 도덕적 용기에 달려 있습니다.

5.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다양한 문화 공동체는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나 공동체들과 일치를 강화하는 훌륭한 기회가 됩니다. 사실 이들 중 많은 공동체가 이민들의 문화와 그들의 특별한 재능을 진정으로 높이 평가하고 인종 차별이나 외국인 혐오, 지나친 국수주의를 예언자적으로 반대하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그들 공동체 안에서만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와 더불어 노력해 왔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낳아 주시려는 그 순간 거절을 당하신 경험이 있는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교회를 모든 문화와 민족을 하나의 단일한 인류 가족 안에 일치시키는 표지이며 도구가 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성모님께서 우리가 모두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강생과 끊임없는 현존의 증인이 되게 해 주시도록 빕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역사와 세상 안에서 온갖 차별과 거부, 소외를 없애시려는 당신의 활동을 계속하고자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방인을 환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많은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2002년 10월 24일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연중 제2주일

(가해) 요한 1, 29-34; 02/01/20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월이 되면 토정비결이나 새해의 운세를 본다. 심지어는 점장이에게까지 찾아가서 새해엔 어떻게 되나 하고 궁금해한다. 키엘케골이란 철학자은 인간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안해한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오늘 세례자 요한은 행복한 사람이다. 확실한 것을 찾았으니 말이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34)

세례자 요한이 본 것은 무엇인가? 그는 예수님에게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32)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33)을 알게 된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새롭게 살려는 결심과 각오를 불러일으키려는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물로 씻을 뿐만 아니라, 세례자를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29)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바쳐 당신 피로 세상의 죄를 씻어주시고 구원해 주셨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어 구원해 주시며 주님의 길을 걷도록 이끌고 계시다.

그러면 주님을 믿어 세례를 받은 우리는 구원되었는가?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세례성사로 구원되었다. 그러나 현세에서 받은 구원은 자칫하면 슬퍼지기도 하고 다시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항구하고 공고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죄짓지 말아야겠고, 꾸준하고도 충실히 복음을 따라 우리 자신을 복음화하여야만 한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은 이 길을 성령의 도우심을 빌며 실현해 나간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네가 나의 종으로서 할 일은,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살아남은 이스라엘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이사 49, 6)



연중 제2주일

(다해) 요한 2, 1-11; 01/01/14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서로 다른 얼굴,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다. 우리는 진정 서로 다르다.

가끔 이 다름은 서로에게 경계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같은 민족 같은 형제 중에서도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부분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이에게서 발견하고 질투와 원망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낯설은 이들에게는 적대감마저 갖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다름 안에서 서로가 공통점을 발견하거나 서로에게 호감이 가는 부분을 발견하면 참 기뻐한다. 그래서 이 다름은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게 해주고, 서로의 차이가 지닌 성품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이 다름은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을 뵙게 해주고 그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도록 하는 잔치에 초대하는 것 같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1고린 12, 4-6)

그리고 이 다름은 각자가 지닌 장점을 가지지 못한 다른 이에게 도와줌으로써 서로를 보충하여 마침내 인류사회를 완성시키라고 부른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7절) 주님께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셨다. 그 기적은 포도주가 다 떨어져 떨떠름한 이들에게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기적의 힘을 발휘함으로써 잔치를 완성시켜 주신 것이다.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공적으로 드러내셨다. 그리고 마리아는 주님의 축복을 인간세계에 현실화시켜주시는 전구자로 등장하셨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2, 46)했던 나타나엘과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었다. "주님께서 너를 사랑해 주시고, 너의 땅의 주인이 되어 주시겠기 때문이다."(이사 62, 4) 주님의 오심을 경축하며 서로의 재능을 나누어 기쁨을 선사합시다.



연중 제2주일

(나해) 요한 1, 35-42 : 2000/01/16

오늘 요한의 제자 두 명이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뒤돌아 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라삐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1, 38)

하루는 24시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루 24시간 동안 잠을 자던지, 밥을 먹던지, 일을 하던지 무엇인가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기대하고 무엇을 하는가는 서로 다르겠지요.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 저희에게 무엇을 주십시오" 그리고 "저희를 위해 어떻게 해주십시오" 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이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라고 청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알고 싶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소년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엘리가 가르쳐준 대로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 9) 라고 대답합니다. 두 번째 독서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시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1고린 6, 19-20) 라고 가르칩니다.

이 두 독서들은 주님 앞에 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가져야할 자세를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듯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 몸을 사용하다가 죄짓지 말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자기를 바치면서 살아라. 그러면 너의 희망이 이루어질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보냈던 제자 안드레아가 형 베드로를 찾아가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우리도 우리를 살리신 주님을 위해 살아갑시다. 주님 앞에 서서 우리를 봉헌합시다. "주님, 주님께 저를 바치오니 주님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도구로 써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그렇게도 기다리고 기대하던 우리의 꿈도 동시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연중 제2주일

(가해) 요한 1,29-34 : 99/01/17

교회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려 예수님이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요한 1,34)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라.'고 말씀해 주셨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요한 1,33-34)라고 말함으로써, 어떻게 자신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알게 되었는지를 자기 일상의 실제 체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누가 만일 여러분에게 '당신은 어떻게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성당에서 가르쳐 줬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성서에 써있다고 말하시겠습니까?

우리 삶 속에 주님께 대한 구체적인 체험과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 주님을 자신있게 설명하고 선포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에게 시련과 박해가 닥칠 때마다 쉽게 방황하고 배교할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뼈저리게 느꼈는지? 언제 예수님이 나를 살려주시는 구세주라고 확신하게 되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전에, 내 신앙의 기초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내 생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의 기초 위에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주님의 본 모습을 새기십시오. 요한은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요한 1,32)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개인적인 체험 위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구세주의 모습 즉,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을 새기게 됩니다. 우리도 내가 믿는 나의 주님이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구세주이실 수 있는지 명확히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 신앙이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내 체험 속에 예수님을 가둬두지 않고 참 예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알고 내가 체험한 만큼만의 예수님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님을 체험한 나의 신앙고백이 될 것입니다.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이사 49,6)



연중 제2주일

(다해) 요한 2,1-11 : 98/01/18

오늘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들과 함께 가나 지방의 한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셨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러자 성모 마리아께서는 주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리고 청한다. 주님은 우선 "어머니, 저나 어머니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요한 2,4ㄱ) 그리고 둘째로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ㄴ)는 말로 거절하신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계속 청하신다.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하여라."(요한 2,5) 하고 이른다. 주님께서는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맛있는 포도주를 즐기며 잔치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 혼인잔치의 기적이야기에 나오는 마리아를 통해 현대 사회 안에서의 신앙인의 역할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마리아는 잔치가 흥겹기 위해 꼭 필요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주님께 알린다. 그런데 그 잔치는 실제로 마리아나 아들 예수가 꼭 도와주어야 할 정도의 인간관계에 있는 일도 아 니었다. 또 주님이 지금 당장 원하시는 일도 아니었다.

둘째, 주님께 거절을 당했지만 마리아는 계속 청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주 간절하게 기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빨리 아니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냥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그 사정이 그렇게 간절하지도 않은 것이어서 그런가? 또는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주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므로 주님 곁을 떠나버리기까지 한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주님의 곁을 떠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계속 청한다.

셋째, 마리아는 주님께서 꼭 들어주시리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가 청한 바를 주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므로 사람들에게 주님의 명을 따르도록 준비시킨다. 마리아는 주님께 끊임없이 청하면서 한 걸을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준비마저 한다. 감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입만 벌리고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감나무가 익도록 물과 비료도 주고 가지도 치며 준비를 하고 익은 것을 보고는 익혀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따 먹는다 고나 할까.

넷째, 마리아를 통해 세상은 다시 흥겨웁게 된다. 그리고 세상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게 된다. 마리아의 이런 수고를 통해 주님은 은총을 베풀어주시고 다같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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