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일



(다해) 루카 12,49-53; ’25/08/17

교회는 속지주의를 택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속지주의란 그 성당의 관할구역 안에 사는 신자들을 돌보는 사목정책입니다. 그와 대비되는 제도로는 속인주의라고 해서, 노동자, 농민, 어민, 상공인 등 특정인들을 돌보는 사목정책이 있습니다. 속지주의 사목정책의 취지는 자기가 사는 곳을 복음화하기 위해서입니다. 멀리 가서 자기는 변화하지 않고, 남만 변화하라고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자기가 사는 곳에 복음을 실현해야 하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간과하고, 자기가 아는 사람이 많고 가기가 활동하기 편한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이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을 모르는 이들이 있는 곳에 가서 익명으로 머물고자 하는 이들마저 있습니다. 불편하고 어려운 것을 좋게 만들려는 사도직 수행과 희생보다는 지금 당장 좋게 보이는 것을 취하여 조금 편하게 살고자 하는 의도도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성당에 와서 세례를 받고 싶어합니까? 예비신자들은 하느님을 정확히 알고 모시기 위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 하느님께 현세적이고 내적인 축복을 받기 위하여, 험한 세상에 혼자서 살기는 힘드니 신앙 공동체에 속해서 교회 식구들과 어울려 살기 위하여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굳이 신자가 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은총을 다 내려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교회가 예비신자들에게 세례성사를 베푸는 이유는, "'당신도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죽이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이웃을 구하고, 하늘나라를 완성하라.'라는 사명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교회 공동체 신자들과 함께, 자기가 사는 곳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복음화에 참여하라고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의 선교 사명을 이루는 길이, 신자 개인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망각하고 교회 일각에서는 세례를 받는 것이 마치 무슨 천당 가는 티켓이나 자격증을 따듯이, 사회에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도 되는 듯이, 이 성당에서 안되면 저 성당으로, 이렇게 해서 안 되면 저렇게 해서라도, 영세만 받으면 된다라는 식의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든지 등의 자기의 아픔을 치유하고 자기 생의 편익을 위해 성당을 찾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을 때가 되서는 적어도 자기 개인의 안일과 유익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은혜를 느끼고 깨우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에 따라 이웃과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길이고 자기 구원의 길이라는 깨달음과 선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삶에 편익을 가져다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편하게 해주고, 자신들의 기대를 채워달라고 청했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해달라는 사람들의 이러한 탐욕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라고 한탄하십니다.

인간의 한없는 욕심은 주님을 계속 십자가에 못 박고 있고, 십자가에서 결코 내려오시지 못하도록 매달아 묶어 놓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우리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며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을 따라,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참조)

예수님께서는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루가 12,50ㄱ)라고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할 세례는, 인류 구원을 위한 '수난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난은 에수님께서 무슨 죄가 있어서 당하신 것도 아니고, 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피하지 않으시고 당해주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짊어지시기를 원하셨고, 인류 구원을 위해 대신 희생하는 십자가상 속죄제사는 사실 예수님만이 지실 수 있는 십자가이시기에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절ㄴ)라고 한탄하시면서도, 주님께 주어진 것이기에 기꺼이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짊어지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쥐여주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제는 사제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고, 신자는 신자이기 때문에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51절ㄱ)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어떤 평화를 바라십니까? 우리는 첫째, 나와 내 가족에게 아무런 사고 없기를 바랍니다. 둘째,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현 상황을 계속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세에서 더 편안하고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사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고 또 그것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평화가 아니고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51절ㄷ)라고 잘라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하나라도 더 가져서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고, 그것이 좋은 것인 줄로만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벌기보다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눠주라고 하시고, 어렵고 힘겨워하는 이들과 함께 인생을 공유하고, 다른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라면 조금 불편하고 거칠게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신 이유입니다.

성전에서 예수 아기를 처음 발견한 예언자 시므온은 이미 예수 아기를 성전에 안고 들어온 어머니 마리아에게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루가 2,35ㄱ)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예수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로서 겪게 될 고통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시기 때문에 예수 아기를 통해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가 2,35ㄴ)라고 한 예언자의 말이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는 맑고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서, 구세주 예수님을 맞이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적인 탐욕과 숨은 음모가 드러날 것이며, 그러한 이기주의적이고 현세적인 탐욕이 전혀 설 자리가 없는 예수님에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잔악한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ㄷ) 그러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12절ㄱ)라고 희망을 안겨주십니다. 그 이유는 주 예수님을 따라 희생봉사하는 이들에게 주어질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2절ㄴ)라고 약속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구원의 희생제사를 바라보며,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올려드리며, 이처럼 큰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주님께 보은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뒤를 따라, 기꺼이 주님 사랑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이뤄내도록 합시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루카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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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일 꽃꽂이




연중 제20주일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 청하는 전구 기도



(나해) 요한 6,51-58; ’24/08/18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선종 163주년을 맞이한 6월 15일을 전구 기도의 날로 정하여 기도를 바친 데 이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4년 8월 16일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124위 순교자를 복자품에 올리신 10주년 되는 날을 기념하여,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 청하는 전구 기도 영상을 제작하여, 시복시성을 염원하기로 하였습니다.

‘길 위의 목자’,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님(1821~1861)께서는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이시지만 한국인으로서 본격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치신 첫 번째 사목자라 할 수 있습니다.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귀국하신 지 1년 만에 순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최 신부님께서는 박해를 피하여 심심산골에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해마다 7천 리(2,800km)가 넘는 험한 산길을 다니시며, 선종하시기까지 12년 동안 전국 120여 곳의 교우촌을 순방하셨습니다. 이동이 어려운 여름 장마철에도 쉬지 않고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옮기시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는 등 교회 재건을 위하여 헌신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계속된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쳐 안타깝게도 1861년 6월 15일 40세의 나이로 선종하셨습니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 시성을 위한 기적 심사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 안건은 이미 2016년 교황청 시성부에서 영웅적 덕행에 관한 성덕 심사를 통과하였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이를 승인하시어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는 ‘가경자’(可敬者, Venerable) 호칭을 받으셨습니다. 신부님의 시복을 위한 다음 절차는 기적 심사입니다. 순교자의 경우에는 순교 심사를 통과하면 복자로 선포되지만, 최양업 신부님처럼 증거자인 경우에는 성덕 심사 이후에 기적 심사를 거쳐야 합니다.

이 기적 심사는 최양업 신부님께 ‘전구’(轉求, intercession)를 청하여 얻은 다양한 은총 체험 가운데 특히 기적적으로 치유된 사례를 수집하고 입증하는 절차로 진행합니다.

최양업 신부님께 청하는 전구 기도

최양업 신부님께 청하는 전구 기도는 특별히 위중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본인, 친지 등)의 기적적 치유를 위하여 최 신부님의 전구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때 구체적인 사람의 치유를 지향으로 주모경, 묵주 기도 등과 함께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 시성 기도문’을 바쳐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각 교구에 배포된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을 위한 전구 기도 안내’ 리플릿을 참고하여 주십시오.

최양업 신부님의 전구로 인한 치유의 은총 체험이 있다면,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02-460-7665)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위원회에서 제작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 청하는 전구 기도’ 동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문




연중 제20주일



(가해) 마태 15,21-28; ’23/08/20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공평무사하게 대하신다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다소 엉뚱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유다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 그리고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6절)라고 잘라 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자신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당시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을 전제로 하여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이 진정 있을까? 당시의 풍습대로 이방인이 유다교인으로 개종할 경우 어느 정도 그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2등 국민으로서의 대기자였습니다. 유다교는 유다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이방인이 유다교로 개종하면 구원의 여지는 남겨주겠다는, 일종의 종교적 개방성을 보여 주려는 노력의 흔적이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유다교로 개종하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는 아예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가톨릭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까?

가톨릭 교회의 초기 교부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가톨릭 교회 교리서 846항, 이하 교리서)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세 말기에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가 창궐하여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할 때, 이를 막기 위한 한 방편으로 “가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까지 선포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와서는 ‘비그리스도교 선언’을 통해, “가톨릭 교회는 다른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2항) 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신앙의 형태, 즉 ‘보편적 형제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형제로 대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모든 사람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이웃 형제들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1요한 4,8)”(5항)

현대의 대표적인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 신부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를 내세우며,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더라도, 주님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와 비슷하게 사는 이는 비록 세례는 안 받았더라도 이미 그리스도인이며 주님의 구원대열에 들어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도 “사실, 자기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847항)라고 선언합니다.

교회는 이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절망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길을 통해서 그들에게 유효한 회개의 기회를 주실 수 있다.”라고 말하고, “교회는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교리서 2283)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며, 성찬전례 감사기도 제4양식에서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주님만이 그 믿음을 아시는 죽은 이들도 모두 생각하소서.”라고 기원합니다.

이러한 교회의 움직임은 세상의 종말을 미루시는 하느님에 대한 성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충분히 연상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다시 복음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가나안 여인은 딸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그 딸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자신이 취할 수는 없었습니다. 즉,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 유다인만을 그 재생의 대상으로 삼겠다는데, 자신이나 자신의 딸이 유다인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부인은 그 절망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왜 유다인들만 구원해 주어야 하느냐?’고 주님의 구원 대상 선택에 대한 부당성을 따지거나, 주님의 차별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에 자존심을 굽혀가며, 비굴하리만치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그러자 모든 이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그 부탁을 들어주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서 바라보시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 믿음은 ‘나도 주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당당한 하느님 백성입니다’라는 정당한 탄원이 아니라, 비록 ‘제가 지금 주님의 규정과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저와 제 딸도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백성이오니,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해 주십시오’라며, 자신의 정당성 주장보다는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의 대상인 하느님 백성이지만, 우리는 하느님께 구원을 요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구원을 청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우리가 구원의 좌석을 확약받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기자라는 것을!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이 우리의 공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된다는 사실을 신앙 안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본받아 이렇게 청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믿어 세례를 받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말씀을 실행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살아왔어도,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또 죄까지 지었사오니, 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죄를 씻어주시고 구원해주소서. 아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연중 제20주일



(다해) 루카 12,49-53; ’22/08/14

예전에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첫해에는 마치 천국에 온 것처럼 좋기만 하였습니다. 하고 싶고, 되고 싶었던 것이 이루어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첫해에는 그저 기쁘고 좋은 것만 보였습니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는 것이 지난 세월의 인생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고 또 추구하는 이상이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경쟁 사회와는 대조되는 사회였기 때문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처음 천주교를 찾는 분들이나, 새로 이사 와서 새로 성전을 짓고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세울 때의 기분도 이와 같으리라 여겨집니다. 예비신자 교리를 받고, 대부모님을 만나고, 내가 배운 교리 지식대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에 대한 기대와 지난 세월의 갖가지 어려움과 방황 속에서 저질렀던 죄악을 다 씻고 새로 태어나는 세례의 은총을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이사 와서 새 성당에 들어와 새 신자들을 만나고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경우나 새로운 지역에 새로 본당이 설립되고 신자들이 합심하여 새 성당을 건립하고 구역반과 각 단체를 세우며 신앙 공동체를 새롭게 건설하는 활기차고 주님 은총의 그느르심 안에서 친교를 누리는 새내기 공동체의 모습과도 비견될 수 있습니다.

신학교 2년차가 되면서부터, 어디서인지 모를 불평과 불만 그리고 동료 이웃 신학생들에 대한 비교와 판단 등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내 주제 파악을 하고 그나마 나를 받아주고 양성시켜 주시는 신학교 당국을 통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기는 하면서도, 옷깃에 스치는 사소한 자극들이 왠지 모르게 불평과 불만을 가져오게 되었나 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주신 동료 이웃을 보면서도 기쁨과 감사의 정만을 품기에는 부족한지, ‘어떻게 저런 사람이 신학생이라고 신학교에 들어와 살 수가 있지?’라고 하는 오만불손한 마음에서 주제넘은 생각들이 하나둘 표출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현실 세계에 바로 비추면, 현실은 지옥과도 같이 보인다.”라는 교수 신부님의 말씀처럼, 내 존재 양식과 내 삶의 형편은 뒤로하고 내 눈에 드러나는 이웃에 대한 주제넘은 우월감과 비난과 단죄를 표명하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시고 함께 살라고 맺어 주신 형제들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부족하고 나약한 점이 있다면 내 몸과 마음으로 채워주어야 할 자세와 소명을 망각하고, 거꾸로 나 하나 잘랐다는 식으로 형제들의 부족하고 나약한 점들을 내 나름의 윤리의식에 맞춰서 판단하고 그것도 모자라 충고한답시고 끄집어내서 지적하고 단죄하며 경원시하기 시작한 이기적인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는 주 하느님의 은총만을 바라보고 주님 은총을 받은 이로서의 걸맞은 삶을 살아야만 하는데, 괜실한 탐욕으로 이웃을 사랑으로만 받아들이고 친교를 맺지 못했습니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그만 내가 직접 살아내지도 못하는 이론으로 들어온 반 푼어치 윤리 지식과 우물 안 개구리처럼 폭 좁은 내 나름의 경험치로 형제를 심판하고 비난하고 단죄하는 죄악의 노예처럼 행동했음을 부끄러이 고백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과 마음이 기쁘고 반갑기만 하지 않고, 좋은 점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나라면, 우리는 스스로 악마에게 내 영혼을 빼앗기고 죄악의 노예로서 살기 시작하는 것이겠습니다. 누구는 이래야 하고,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그렇지 못하고, 누구는 저래야 하는데 저러지 못하고 등등. 나의 현주소는 고사하고서라도, 사건과 상황의 이해당사자와의 진행 과정과 그나마 현실의 한계 안에서 취한 나름의 고육지책임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그저 상대의 형편과 처지와는 전혀 다른 외적으로 드러나는 일면만을 바라보고는 최고의 이상을 기준 삼아 비교 비난하는 어리석음이겠습니다.

사랑은 넘치면 흘러내려 퍼져나가고 점점 더 커지고 늘어나 풍요로워지고 평안해지는 데 반해, 죄악은 사랑보다 더 매혹적이어서 더 급속히 퍼져나가고 견고해지는 대신 더 이상의 물질적인 이득을 추구하고 취한 이득을 이웃과 공유하지 못하는 독점적인 이해관계에 빠지게 됨으로써 사회와 관계는 더 각박해지고 피폐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조직신학과 교의 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 점점 하느님과 교회와 사회에 대한 사고체계가 머릿속으로는 급격히 팽창하는 반면에, 마음과 삶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 삶 안에서 이론과 실재,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큰 차이를 가져오면서, 불균형한 상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이상과 목표와 비교하면서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교회공동체의 불완전한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실망이 커짐으로써 교회 장상들과 동료 신학생들과의 불편하고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저는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더 깊이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실천하여 더욱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시기에,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나 자신’이 아닌 ‘너’에게 적용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스스로의 영적 성숙에 방해가 되고,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보다는 거꾸로 비난과 갈등의 현실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미성숙함이 실천신학을 배우고 또 사목 실습에 들어가면서, 그동안 공부한답시고 한걸음 뒤에 서서 방관자처럼 무책임하게 비판하고 비난하는 현실이 아니라, 나름 보듬어 안고 책임을 지고 돌봐야 하는 사목 현장으로 바뀜으로써, 양을 찾아 나서고 구하시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바치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절)

불완전하고 불의한 세상을 똑같이 바라보면서, 조직신학을 공부할 때는 신학지식과 이론체계로 가득 차 비판과 비난의 일색이었지만, 실천신학을 접하며 사목 실습을 하기 시작할 때는 사목자의 용서와 자비를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악마는 우리에게 네가 보는 세상은 불의하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비춰 비난하고 단죄하라고 유혹하며 그 안에서 너 하나 살아나갈 길을 모색하라고 유혹하고, 성령은 우리에게 네가 보는 세상은 불의하므로 너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평화와 사랑의 하느님 나라로 바꾸기 위해 같은 믿음을 지닌 형제자매들과 함께 헌신하라고 충동합니다.

그 무렵 주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애를 끓이는 사랑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으로 태어난 피조물들과 우리 인류가 하느님 사랑보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악마의 유혹에 빠져듦으로써 사랑과 친교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탐욕과 경쟁의 혼란과 갈등으로 피폐해지는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안타깝고 고통스러워하실까 하는 자각에 부끄럽고 한스러운 마음을 끌어안고 쓸어 담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절)

같은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와 역사와 사회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처방을 내고 또 서로 다른 생활양식을 취하듯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모습도 신앙성숙의 단계마다 신앙 실천의 깊이에 따라, 서로 다르고 심지어는 상반되기까지 하는 생활양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경험을 해오면서, 오늘 독서에 나오는 성 바오로의 가르침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2,1-2)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다가오시고 거듭 용서하시며 축복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주저하거나 흔들림 없이 스스로 주님 말씀을 이루기 위해 회개하고 헌신하여, 형제자매들과 함께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평화와 구원의 하느님 나라로 변모시켜 나갑시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브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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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일 꽃꽂이




연중 제20주일


프란치스코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xaultate) II



(가해) 마태 15,21-28; ’20/08/16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의 ‘제3장 스승님의 빛 안에서’에서, 누군가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명확하다고 말씀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을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행복’ 안에서 우리는 스승님의 얼굴을 발견하고, 날마다 자신의 삶에서 스승님의 얼굴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행복하다는 것, 곧 복되다는 것은 거룩하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과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이들은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참행복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시대 흐름에 거슬러 나아가기’라는 소제목에서, 참행복은 결코 평범하거나 수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그 권능으로 우리를 채우시어 우리의 나약함, 이기심, 안일함, 오만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실 때라야 이를 실천할 수 있다고 일러줍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라는 소제목에서 교황님은 ‘마음이 가난한 것이 곧 성덕’이라고 말합니다.

부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재물에 안심하고, 그 재물을 잃을 위험에 놓이면 현세에서의 그들 삶의 모든 의미가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부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마음이 부유할 때, 우리는 거기에 만족하여 예수님이나 다른 이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어릴 때 부모님과 자녀들이 한 방에 모여 살 때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자신의 방이 생겨 따로 생활하게 되면서 자신만의 공간과 자신만의 시간 그리고 자신의 것이 가족의 다른 구성원과 별도로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내 것이 생겨서 좋은 것과 함께 살 때의 좋은 것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너와 구분되는 나만의 것이 생겼을 그 순간 이외의 순간에는, 내 것을 유지하고 관리하며 나와 구분되는 너에게서 나와 내 것을 보호하느라 다소 거리감을 느끼며 긴장감이 깃드는 기쁨이었습니다. 점점 너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너와의 구분과 차이가 깊어질수록, 나의 기쁨은 내가 간직하고 나만의 것이었을 때의 기쁨으로 제한되고 어딘지 모르게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되돌아보면 그 긴장감 감도는 기쁨은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할 때의 그 기쁨과는 사뭇 다르고 그보다 결코 더 좋다고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것을 공유할 때 너를 받아들이고 함께할 수 있는 우리의 기쁨이지만, 내 것을 나만의 것으로 구분하고 제한할 때 너는 더 이상 내 안에 임의로 들어올 수 없는 너로서의 타인이 되고 기쁨도 너와는 다른 나만의 것이 됨으로써,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너의 슬픔이 나의 기쁨이 될 때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경우에는 우리의 기쁨이 아니라 내 기쁨이 되었고, 우리 나라가 아니라 나와 내가 나의 것을 공유하기로 허용한 내 부류와 그 소수의 나라가 되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라는 소제목에서 ‘온유하고 겸손하게 응대하는 것이 곧 성덕’이라고 제시합니다.

이 세상은, 모든 이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오만과 허영이 다스리는 왕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타인에게 화를 내고 인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지치고 피곤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월감 없이 자애와 온유로 타인의 잘못과 한계를 대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실제로 도움을 주고, 쓸모없는 불평에 우리의 힘을 낭비하는 일을 멈출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완전한 사랑은 남의 허물을 참아 주고, 남의 과오에 분노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경우에나 온유하라고 합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온유를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갈라 5,23 참조).

온유는,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는 사람들의 내적 청빈의 또다른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너무 온유하면 사람들은 나를 어리석은 이, 바보, 또는 나약한 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때로는 그렇게도 여길 수 있지만 그냥 놓아두십시오. 온유한 편이 언제나 낫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깊은 갈망이 충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이들은 살아서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온유한 사람들은 주님께 희망을 둡니다. 주님께서도 온유한 사람들을 신뢰하십니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내 말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다.”(이사 66,2)

모자라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보라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조상과 부모의 업보를 받아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 교회는 주 하느님께서 결코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묻지 않으신다고 했으니,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태어난 환경과 사회 여건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어딘지 모르게 수탈당하고 이용당하며 제대로 인정받거나 대우받지 못한 채 힘겹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 세대와 부류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상놈, 노예, 종 등으로 대변되는 이들이 성경에도 있습니다. ‘아나윔(Anawim)’이라고 표현되는 단어는 가난한 이들과 온유한 사람들을 둘 다 일컫습니다. 어쩌면 꼭 경제적으로 가난하거나 사회적으로 하층민으로 취급되지 않아도, 천성이 맑고 깨끗해서 마음 속에 악이나 독이 없는 사람들이 현세에서는 이용당하고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이유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시당하고 이용당하고 천대받아도 그들을 무시하거나 이용하고 천대하는 이들보다 평안해 보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겸손과 온유와 선함을 바라볼 수 있는 이들과 함께 평온과 잔잔한 기쁨과 행복을 유지하게 됩니다. 마치 때린 사람은 죄책감과 보복이 두려워 잠을 설치지만, 맞은 사람은 편안히 자는 것과도 마찬가지 이치로 말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라는 소제목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 곧 성덕’이라고 제시합니다.

세상은 우리와 정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오락, 재미, 기분 전환, 여가가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가족이나 주변의 질병과 슬픔 같은 문제들을 외면하고 눈을 돌립니다. 세상은 슬퍼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무시하는 편을 택하고, 이를 덮어 두거나 감추어 버립니다. 현실을 숨길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달아나는 데에 많은 힘을 소모합니다. 그러나 어디서든 십자가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사물을 참으로 존재하는 그대로 보고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은, 삶의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용기를 낼 수 있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해 달아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통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고 그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하며 그들에게 위안을 중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그들은 타인을 우리의 살에서 나온 살이라고 느끼고, 가까이 다가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타인과 함께 아파하니 모든 거리감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라고 한 바오로 성인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봉사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됩니다. 나 혼자 기쁘고 만족스럽고 충만할 수 없을 때, 누군가와 함께함으로써 그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숙하게 되는 것을 바라보면, 진정 내 가슴 속에 더 큰 기쁨과 보람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아울러 타인의 아픔을 고소해하거나 나의 기쁨으로 위안 삼기보다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 속에 하느님을 모신 사람입니다.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 속에서 신음하시며 호소하시는 주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으면, 결국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동으로 내가 그 예수님의 호소에 사랑으로 응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연중 제20주일


미사의 영성 9 성변화2



(다해) 루카 12,49-53; ’19/08/18

우리 나라에 ‘목마른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저자 도미니크 라피르의 원작 ‘기쁨의 도시’(la cite de la joie)를 영화화한 ‘시티 오브 조이’(city of joy)를 보면, 한 시골에서 올라온 농부가 도시에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갖은 수고를 다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인도의 빈민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기 딸을 남부럽지 않게 시집보내기 위해 결국 자기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딸의 정조를 위해 권력가의 아들과 싸우다 칼에 심한 상처를 입었어도 딸의 결혼 지참금을 채워 주기 위해 무리하게 일을 하고서는 딸의 결혼식 피로연 도중에 죽습니다. 딸에게 부모로서 할 바를 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죽음도 모르고 일하다가 지참금을 채워 주고 죽음으로써 결국 자기 딸에게 자기를 바쳤던 주인공 아버지의 사랑이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그 영화를 보며 젊은이의 결합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지참금 제도가 결국 인간을 괴롭히는 사회의 굴레로 등장하게 된 우리 인간 세상의 어둠을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같은 사건 안에서 자식을 위해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자신의 몸을 바치는 아버지의 사랑을 봅니다. 또 그의 말도. “자식의 지참금을 마련하는 것은 아버지의 의무이기 이전에 권리입니다!” 사랑은 용서해 주어야만 하는 의무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에게 주어지고 그래서 또 한편 하느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권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 앞에 죄없는 인간으로 서기 위해 우리를 위해 몸바친 우리 주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마치 딸의 결혼 지참금이라는 멍에를 메고 죽어간 영화의 주인공처럼, 참으로 주님은 인간을 둘러싼 모든 제도적 사회적인 굴레의 희생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죄와 악의 멍에와 굴레에서 해방시켜 다시 하느님이 천지창조 때 우리에게 새겨 주신 아버지의 모상을 가지고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철없는 자식을 달래기 위해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처럼, 주님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다시 말해서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면서 무절제하고 대책없이 저지르는 인간의 죄악에서 인간을 살리기 위해 희생해 주셨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주님을 죽이는 이들의 행동은 참으로 철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애도를 표하기는커녕, 그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루카 23,34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35절)리고,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36-37절)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39절) 이들은 자신들이 죽이는 이가 주님이라고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비인륜적인 모습인가에 대한 자기 인식마저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 주님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의 잘못을 비호하듯이 역성을 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34절) 그리고 주님은 자기 죽음의 의미를 알고 계시고, 자기 죽음으로 인간을 다시 구하실 수 있는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46절; 시편 31,5참조)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시고 올리브산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던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23,38)던 것처럼 사람들은 예수님를 정치적으로 판단하여 죽여 버렸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이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런 의미로 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요한 10,17-18) 그리고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되돌이켜 보면, 우리는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아주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20)

그러나 한편 우리는 같은 루카 복음 23장에서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발견하고 주님께 청한 사람들도 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가 모욕하는 것을 본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40-42)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이방인인 로마인들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였다.”(47) 또한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48)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49) 그리고 “의회 의원이며 착하고 의로운 이.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유다인들의 고을 아리마태아 출신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50-53)신 요셉이라는 사람.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응답을 받은 다른 죄수의 자세 안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 선 인간의 기본자세와 처지가 어떠해야 하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처지를 택하여 오셔서 우리와 같은 취급을 당하신 주님, 우리의 잘못으로 욕먹고 비난받는 우리 주님의 사랑 앞에 선 인간의 청원. 차마 청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죄스러운.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주님 앞에 선 우리의 청원. 미사의 기도문 안에서도 이러한 청원을 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평화의 기도 중에서)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따라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평신도 사도로 선발되었다는 것은 잘 알면서도, 사랑은커녕 사랑의 전제라 할 수 있는 용서가 왜 그리 어려운지? 용서하자니 억울하고 내 감정이 허락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용서하지 않고 잡고 있을 때면 내 가슴 속에 숨어 있다가, 내가 한가할 때나 기도할 때마다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고 나를 잡고 있는 사람과 사건, 상황들. 내가 용서해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잡혀 있는 셈입니다. 나의 미움이라는 감정 속에 사로잡혀,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고 갇혀 있는 내 모습 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라도 용서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괴롭기만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4.17-21) 사도는 우리에게 그저 우리의 어머니들이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차별대우와 아내와 어머니로서 당해야 하는 시집살이와 시댁과의 관계 안에서 그러해 오셨고 또 그대로 일러 주셨던 것처럼 “남이 뭐라든지, 어떻게 하든 내 할 바나 다하라.”고 가르칩니다. 원수 갚는 일은 주님의 몫이니까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불공평한 세상을 탓하며 억울해하고 불평하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8.9.15)

한편 우리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 구약성경 기자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용서와 관용을 전제로 제시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집회 28,2-7) 또한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2.14-15)

실천적인 면에서 사제가 성작을 들고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하면서 성혈을 축성할 때, 내가 용서할 수 없고 내 마음 속에 얹힌 것처럼 맺혀있는 가련하고 한 서린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도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서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성체를 영하십시오.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다시 회복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회복된 사랑으로 그를 용서할 수 있도록 빌면서. 동시에 그렇게 한 명씩 한 명씩 용서해 주고 마지막으로 용서의 대명사인 자비로우신 주님 앞에서 나의 용서를 청하십시오.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받아 주소서.”



연중 제20주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교회의 선교적 변모



(나해) 요한 6,51-58; ’18/08/19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은 제 1장 ‘교회의 선교적 변모’입니다. 교황은 이 1장에서 교회를 관리하는데 그치지 말고 선교로 출발하며, 그 동안 시행해왔던 모든 선교 목표와 조직 및 양식과 방법을 현대인들에게 맞추어 재구성하고 다시 시도하자고 말씀하십니다.

교황은, 복음화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하신 예수님의 선교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시며 일장을 여십니다.

‘출발하는 교회’ 라는 제하에서, 교황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 예레미야에 이어 예수님의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믿는 이들에게 어떻게 ‘출발’하라고 촉구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모두 선교를 향한 이 새로운 ‘출발’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

제자 공동체를 활성화시키는 “복음의 기쁨은 선교의 기쁨”이라고 하십니다. 일흔 두 제자들이 선교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아버지께 찬미를 드리셨을 때, 첫 개종자들이 제자들의 오순절 설교를 각 나라 사람들이 각기 자기 나라 말로 들었을 때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 기쁨에는 언제나, 출발하여 복음을 전하고 자기 자신을 떠나 좋은 씨앗을 뿌리며 끊임없이 나아가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과 이루는 친교는 그분과 함께 가는 여정이라고 하시며 “친교와 선교는 서로 깊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라고 강조하십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장소에서, 온갖 기회에,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출발’하는 교회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을 따라 형제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 ‘첫걸음 내딛기’를 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들의 일상생활에 뛰어들어 그들과 거리를 좁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인간의 삶을 끌어안고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지며 ‘뛰어들도록’ 합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자들은 ‘양들의 냄새’를 풍기고, 양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기나긴 길이라도 한 걸음 한 걸음을 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복음화는 무한한 인내로 이루어지며 온갖 제약을 헤아리기에, 주님의 은총에 충실한 복음화는 또한 ‘열매를 맺습니다.’ 끝으로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기뻐하게 됩니다.’ 복음화로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작은 열매를 맺을 때마다 기쁨에 찬 교회는 일상과 전례 안에서 기쁨을 샘솟게 하고, 교회는 복음화하고 복음화됩니다.

교황은 ‘사목 활동의 쇄신’이라는 제하에서, 교회는 단순한 관리에서 그치지 말고, 온 세상에서 ‘지속적인 선교 자세’를 유지하자고 하십니다. 교황 바오로 6세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교회의 모든 쇄신은 본질적으로 교회 소명에 대한 충실성의 증대에 있다.” 라고 단언하십니다. 그 소명은 선교 선택이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입니다.

“본당은 그 지역에서 사는 교회의 현존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 생활이 성장하는 장소이며, 대화와 선포, 아낌없는 사랑 실천, 그리고 예배와 기념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이며, “이 모든 활동을 통하여 본당 사목구는 그 구성원들이 복음 선포자가 되도록 격려하고 교육합니다.“ 라는 건의문을 인용하여, “본당 사목구는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살아 있는 친교와 참여의 장소가 되고 온전히 선교를 지향하여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다른 교회 기관들과 기초 공동체와 소공동체들, 여러 운동들과 단체들은 모든 영역과 분야를 복음화하고자 성령께서 불러일으키신 교회의 풍요입니다. 이들은 자주 교회의 쇄신에 이바지하는 새로운 복음화의 열정과 세상과 대화하는 역량을 키워줍니다. 이들은 지역의 본당 사목구라는 풍요로운 실재와 계속 접촉하며 개별 교회의 전반적인 사목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유리할 것입니다.” 라고 하시며 복음과 교회의 일부에만 집중하거나 뿌리 없는 유랑인이 되지 말도록 권고하십니다.

그 목표는 선교이며, 선교를 핵심으로 하는 사목은 “우리는 늘 이렇게 해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안이한 태도를 버리고, 지금까지 행해왔던 복음화의 모든 목표와 조직, 양식과 방법을 과감하게 창의적으로 재고하도록 권하십니다.

교황은 ‘복음의 핵심으로부터’ 라는 제하에서, “새로운 법의 기초는 성령의 은총이며, 이는 사랑을 통하여 행동하는 믿음 안에서 드러난다.”는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의 말을 인용하며, 가장 큰 덕은 ‘자비’임을 전합니다.

“복음은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라고,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 다른 이들의 선익을 추구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라고 하며, 선교의 핵심은 특정한 이념이나 교리나 도덕적 측면이 아니라 복음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의 향기’가 선교 안에 살아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교황은 ‘인간 한계 안에서 구체화하는 선교’ 라는 제하에서, 교회는 선교하는 제자로서 계시된 말씀을 해석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며, “신앙의 유산과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이 서로 별개” 라고 밝히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려면 과거의 표현 헝태들이 반드시 쇄신되어야 한다는 것을 밝힙니다.

신앙은 언제나 어떤 십자가를 지니고 있고, 다소 모호함을 지니고 있기에,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복음 선포자의 생활 방식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그 때 비로소 “친교와 사랑과 증언으로 마음의 동의를 일깨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교회 내에서 오래되었더라도,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데 좋은 규칙이나 규범이나 수단이 되지 못한다면 쇄신시키자고 하십니다. “복음적 이상의 가치를 줄이지 않으면서, 날마다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성장이 가능한 단계마다 자비와 인내로 동행해야 합니다.”

선교하는 마음은 복음을 이해하고 성령의 길을 식별하며 자라야 한다고 하시며,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때마다, 거리의 진흙탕에 신발이 더럽혀지더라도 좋은 일을 하자고 제안하십니다.

교황은 ‘열린 마음을 가진 어머니’ 라는 제하에서, 교회는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 놓아, 누구나 어떻게든 교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교회는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자고 하십니다.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유대가 있다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밝혀, 친구와 부유한 이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자주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이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다가가자고 하십니다.

교황은 “이제 출발합시다.” 하시며,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고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가 되어,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에서 위로와 빛을 받지 못하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망각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고 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연중 제20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III



(나해) 요한 6,51-58; '15/08/16

오늘은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의 제1장 지구의 환경 오염과 제2장 피조물에 대한 창조의 가르침에 이어, ‘제3장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101-136항) ’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3장에서 교황님께서는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철학과 사회과학과 대화를 나누어 “그 증상과 심층적 원인들을 성찰”(15항)합니다. 이 장은 기술: 창조성과 힘(102-105항), 기술적 패러다임의 세계화(106-114항), 현대 인간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115-121항), 실질적 상대주의(122-123항), 고용 보호의 필요(124-129항), 새로운 생명공학(130-136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I. 기술: 창조성과 힘 기술(102-105항)

기술이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기술은 “온갖 기술 지식, 특히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경제적 재원을 확보한 이들이 인류 전체와 온 세상을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도록” 합니다(104항). 인류는 “올바른 한계를 정하고 바른 자제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건전한 윤리와 문화와 영성”(105항)을 필요로 합니다.

II. 기술적 패러다임의 세계화(106-114항)

지배적인 기술관료적 사고방식은 현실을 제한 없이 조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는 삶의 모든 측면에 관련되는 환원주의입니다. 과학기술의 산물들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결국 생활 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기회들의 형태를 잡아가는 틀을 만들어내기”(107항) 때문입니다. 또한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경제와 정치를 지배합니다. 특히 “경제는 이윤을 목적으로 기술의 모든 발전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시장 자체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사회 통합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109항).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기술만을 믿는 것은 “전 세계의 체제가 안고 있는 가장 뿌리 깊은 진짜 문제들을 숨기는 것”(111항)을 의미합니다. “과학과 기술 발전은 인류와 역사의 발전과 동일시 될 수 없기에”(113항) 그렇습니다. “문화적 혁명”(114항)이 가치들의 회복에 필요합니다.

III. 현대 인간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115-121항)

현실보다 기술의 추론을 중시하는 현대 인간중심주의는 더 이상 자연을 타당한 규범이며 살아있는 피난처로 인식하지 않습니다(과르디니 참조).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인간의 자리와 자연과 맺은 우리의 관계를 이해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배’는 책임 있는 관리의 의미에서 더욱 올바르게 이해되어야만 합니다”(116항). 잘못 이해된 인간중심주의의 비판은 그와 마찬가지로 불균형적인 “생태중심주의”를 향한 변화가 아니라 “올바른 인간학”을 향한 변화입니다(118항). 이 “올바른 인간학”은 “인간관계의 중요성”(119항)과 모든 인간 생명의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습니다. “자연 보호에 대한 관심과 낙태의 합리화는 양립될 수 없습니다”(120항).

- 현실적 상대주의(122-123항)

잘못 이해된 인간중심주의는 “어떠한 것이 자신에게 즉각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여기어” 현실적 상대주의를 야기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다양한 태도들이 서로를 촉진하여, 환경 훼손과 사회 부패를 야기하는”(122항) 논리가 담겨있습니다. “문화 자체가 부패하고 객관적 진리와 보편타당한 원칙들이 더 이상 성립되지 않을 때, 법은 자의적으로 부과되는 것이나 피해야 할 장애물로만 여겨질 수 있습니다”(123항).

- 고용 보호의 필요(124-129항)

온전한 생태학은 “노동의 가치를 고려해야 할 필요”(124항)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일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에 속하며, 성장과 인간 발전과 개인적 성취를 위한 길”(128항)이기 때문입니다. “단기간에 더 큰 금전적 이익을 얻고자 인적 투자를 중단하는 것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업 행위입니다”(128항). 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의 참다운 혜택을 보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자원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이 가해져야 합니다”(129항).

- 새로운 생명공학(130-136항)

주요 기준은 유전자 변형 식품이며, 이는 “복합적인 환경 문제”(135항)입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유전자 변형 식품이 경제적 발전을 가져와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었지만 많은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134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특히 군소 생산자들과 농촌의 일꾼들, 생물다양성, 생태계망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광범위하고 책임 있는 과학적 사회적 토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가능한 정보를 고려하고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독립적인 학제적 연구에서”(135항)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과학과 기술의 현대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56절) 라고 초대하십니다.

교황님은 기술의 발전을 격려하시면서도, 어떻게 그 기술을 활용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십니다. 이윤추구를 위한 기술개발보다, 기술을 통한 공동체의 발전과 사회통합을 가져오는 새롭고 올바른 인간학을 역설하십니다.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현실적 상대주의로 인하여 자연 환경의 훼손과 인간 사회의 문화적인 부패를 가져오도록 하지 말고, 인간 발전과 개인적인 성취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고용을 증대하며,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과학적 사회적 토론을 신설하여, 인류를 구하기 위한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를 구하신 주님의 가르침과 사랑의 희생을 기초로 한 새로운 생명공학을 펼쳐 나갑시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프란치스코 교황 제6차 아시아 청년 대회 폐막 미사 연설



해미 읍성, 2014년 8월 17일

사랑하는 젊은 친구 여러분,

“순교자의 영광이 너희를 비추고 있다!” 제6차 아시아 청년 대회 주제의 한 부분인 이 말씀은 우리 모두를 위로하고, 우리의 힘을 북돋아 줍니다. 아시아의 젊은이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귀한 증언, 위대한 증거의 상속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이시고, 우리 삶의 빛이십니다! 한국의 순교자들은 ― 그리고 아시아 전역의 수많은 순교자들은 ― 자신의 몸을 박해자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은 온갖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광스럽게 승리한다는 영원한 증언을 남겨 주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확실성과 그 승리에 우리도 동참한다는 확신으로, 우리는 이 시대와 환경 속에서 오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려는 도전을 똑바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방금 우리가 묵상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아시아 청년 대회 주제의 다른 부분인 “아시아의 젊은이여, 일어나라!”는 말씀은 여러분들에게 의무와 책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 마디씩 잠깐 묵상해 봅시다.

우선 첫 번째 표현인 “아시아”라는 낱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바로 여기 한국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기만의 자리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풍요로운 철학적 종교적 전통을 지닌 아시아 대륙은 여러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여야 할 거대한 개척지로 남아 있습니다. 아시아에 살고 있는 젊은이로서, 이 위대한 대륙의 아들딸로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사회생활에 온전히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에 신앙의 지혜를 불어넣으십시오.

아시아인으로서 여러분은 또한 아시아 안에서, 여러분의 문화와 전통들 안에서, 참되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 모든 것을 보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또한 복음이 이 유산을 정화하고 승화시키고 완성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례 때에 받은 성령, 견진 성사로 여러분에게 그 인호가 새겨진 성령의 현존을 통하여, 그리고 여러분의 목자들과 일치하여, 여러분은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긍정적인 가치들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여러분들은 무엇이 가톨릭 신앙에 반대되는지, 무엇이 세례 때에 받은 은총의 삶에 어긋나는지, 이 시대 문화의 어떤 측면들이 사악하고 타락하여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지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시아 청년 대회의 주제로 다시 돌아가서, “젊은이” 라는 두 번째 낱말을 묵상해 봅시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친구들은 바로 젊은 시절의 특징인 낙관주의와 선의와 에너지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본성적인 낙관주의를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으로, 여러분의 에너지를 윤리적인 덕으로, 여러분의 선의를 자신을 희생하는 순수한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시도록 여러분을 맡겨 드리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걸어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삶과 문화에서 희망과 덕과 사랑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극복해 내는 승리의 길입니다. 이 길에서 여러분의 젊음은 세상과 예수님께 드리는 선물이 될 것입니다.

젊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노동자이든 학생이든, 이미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든 혼인을 하였든, 수도 생활이나 사제직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였든, 여러분은 교회의 미래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현재에도 반드시 필요한 사랑받는 지체입니다! 서로 일치를 이루십시오. 언제나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주교님들과 신부님들과 함께, 더 거룩하고 더 선교적이고 겸손한 교회, 또한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을 찾아 섬기는 가운데 하느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하나인 교회를 일으켜 세우며 올 한 해를 보내십시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생활에서도 외국인과 궁핍하고 가난한 사람과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멀리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 기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여인처럼, 이 사람들은 특별히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부르짖는 그 여인의 절규를 되풀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간청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환영 그리고 우정을 찾는 모든 이들의 부르짖음입니다. 우리 익명의 도시들 속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이고, 여러분 또래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외치는 절규이며,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죽음과 박해의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순교자들의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것은 흔히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 절규에 우리가 응답합시다. 마치 곤궁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주님과 더 가까이 사는 데 방해가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도움을 간청하는 사람들을 밀쳐 내지 마십시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도움을 바라는 모든 이들의 간청에 연민과 자비와 사랑으로 응답해 주시는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시아 청년 대회 주제의 세 번째 부분 “일어나라!”는 말은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책임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덕의 아름다움과 복음의 기쁨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죄와 유혹을, 또 그러한 압력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은 끊임없이 “기뻐하고 환호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기뻐하거나, 춤추거나, 환호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시편 67,6).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자비를 입었습니다”(로마 11,30).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친구들이, 직장 동료들이, 그리고 여러분의 국민들과 이 거대한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신 그 자비로, 이제 그들도 자비를 입게”(로마 11,31 참조) 하십시오.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아시아의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교회와 하나 되어, 분명 여러분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다줄 이 길을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이제, 성찬의 식탁으로 나아가며, 예수님을 세상에 낳아 주신 우리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 간청합시다. 그렇습니다.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는 예수님 모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머니의 자애로운 도우심으로, 저희가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충실히 섬기며, 이 나라와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서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프란치스코 교황 아시아 주교들과 만남 연설



해미, 순교 성지, 2014년 8월 17일

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 충실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이 곳 성지에 함께 모인 여러분께 주님 안에서 한 형제로서 따뜻한 인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국 순교자들의 사랑의 증언은 비단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까지 축복과 은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가 그들 기도의 도움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충실한 목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영 말씀을 해 주신 그라시아스 추기경님께 감사 드리며, 또한 연대를 이루어 각국 지역 교회의 효과적인 사목 활동 증진을 위하여 일하는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다양한 문화가 생겨난 이 광활한 대륙에서, 교회는 유연성과 창의성을 발휘하여 대화와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증언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대화는 아시아 교회 사명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아시아 교회」, 29항 참조). 그런데 다른 이들과, 또 다른 문화와 대화를 시도할 때, 무엇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또 목표 지점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근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우리의 정체성,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공감하고 진지하게 수용하는 자세로, 상대방에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열 수 없다면 진정한 대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의식하고 다른 이와 공감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대화의 출발점이라 하겠습니다. 자유롭게 열린 마음으로 의미 있는 대화를 하려면 우리 자신은 누구이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지 않으려면, 생각과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표현한다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우리는 항상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세속 정신에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중 세 가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상대주의라는 거짓된 빛입니다. 상대주의는 진리의 빛을 흐리게 하고, 우리 발이 딛고 선 땅을 뒤흔들며, 혼란과 절망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상황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습니다. 상대주의는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쳐서, 급변하는 혼란스러운 세상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으며, 이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 궁극의 토대를 두고 있다.”(「사목 헌장」, 10항; 히브 13,8 참조)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게 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상대주의란 그저 하나의 사고 체계가 아니라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실천되는 상대주의입니다.

두 번째로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방식은 피상성입니다. 피상성은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기(필리 1,10 참조)보다는 최신의 유행이나 기기, 오락에 빠지는 경향을 말합니다. 덧없는 것을 찬양하는 문화, 회피와 도피의 길이 수없이 열려있는 문화에서는, 이런 피상성이 사목에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사목 활동과 그 이론에도 영향을 미쳐 신자들과의 만남을 가로막고, 특히 탄탄한 교리 교육과 건전한 영성 지도가 필요한 청년들과의 직접적이고 유익한 만남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원칙인 진리는 후퇴하고 덕행은 형식에 불과하게 되며, 대화는 한갓 협상의 형태나 서로 반대하자는 합의로 전락하게 됩니다.

또한 세 번째 유혹도 있습니다. 쉬운 해결책, 이미 가지고 있는 공식, 규칙과 규정들 뒤에 숨어 확실한 안전을 택하려는 유혹입니다. 신앙은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 본성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며 증언을 불러일으킵니다. 선교를 낳습니다. 곧, 신앙은 우리가 담대하면서도 겸손하게 희망과 사랑을 증언하게 해 줍니다. 성 베드로 사도께서는 우리가 지닌 희망의 이유에 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라고 말씀하십니다(1베드 3,15 참조).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궁극적으로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섬기려는 조용한 노력에서,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과 소망하는 것을 또 우리가 믿는 그분을 우리의 모범을 통하여 보여 주려는 조용한 노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2티모 1,12 참조).

다시 말씀 드리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살아 있는 믿음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며, 이로부터 진지하고 솔직하고 가식 없이 일상의 대화와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또 좀 더 공식적인 대화의 기회에 스스로 나서도록 요청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므로(필리 1,21 참조)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하여” 준비된 자세로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이 말합시다. 그분 말씀의 단순성은 우리 삶의 단순성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우리 대화의 단순성에서 드러나며 우리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 일의 단순성에서 드러납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열매 맺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주님과 대화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은총으로부터 생겨나고 그 은총으로 자라나기 때문에, 정의와 선과 평화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의 삶에서, 또 여러분에게 맡겨진 공동체의 삶에서 맺고 있는 열매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진행되는 교리 교육이나 청소년 사목에서, 번창하는 사회의 변두리에서 신음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서, 그리고 사제직과 수도 생활에 대한 성소를 키워 내는 노력들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진정한 대화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분명한 정체성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요구됩니다.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 말로 하지는 않지만 전달되는 그들의 경험, 희망, 소망, 고난과 걱정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공감 능력은 영적 통찰력과 개인적 경험의 결실이며, 우리가 다른 이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들이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전달하고자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대화를 위해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려 깊은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합니다. 공감하는 능력은 진정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며, 진정한 대화에서는 형제애와 인간애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나 생각, 그리고 질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진정한 대화는 마음과 마음이 소통하는 진정한 만남을 이끌어 냅니다. 다른 이들의 지혜로 우리 자신이 풍성해지며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과 함께 더 큰 이해와 우정, 연대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대화를 향한 우리의 투신은 강생의 논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와 함께 사셨으며, 우리가 하는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아시아 교회」, 29항 참조). 다른 이들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저는 아직 성좌와 완전한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몇몇 국가들이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주저 없이 대화를 추진해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저를 형제로서 따뜻하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광활한 땅과 그 오랜 문화와 전통을 가진 아시아 대륙을 보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참으로 작은 양 떼(pusillus grex)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무리이지만 그럼에도 복음의 빛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양들을 잘 아시고 모든 양 하나 하나를 사랑하시는 좋으신 목자께서 여러분과 당신의 일치,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당신 양 떼의 다른 모든 구성원들과 여러분의 일치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시기를 빕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에 여러분을 맡겨 드리며, 또 주님 안에서 누리는 은총과 평화의 보증으로서 진심으로 저의 강복을 드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평신도 사도직 단체와 만남 연설



꽃동네, 영성원, 2014년 8월16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약동하는 한국 평신도사도직의 다양한 표현을 대표하는 여러분을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되어서 저는 참으로 기쁩니다. 여러분을 대표하여 따뜻이 환영해 주신 가톨릭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 권길중 바오로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이, 한국 교회는 사제의 수효가 부족하고 모진 박해의 위협이 있었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회의 친교 안에서 대대로 보존해 온 평신도들의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오늘 시복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은 그 역사의 감동적인 첫 장을 보여 줍니다. 이분들은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신앙을 증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범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연대하는 삶으로도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이 값진 유산은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과 봉사의 활동 안에 줄곧 살아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 교회는 복음이 지닌 구원 진리와,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고 변모시키는 복음의 능력, 그리고 일치와 정의와 평화 안에서 인류 가족을 일으켜 세우는 복음의 풍요로움을 보여 주는 평신도들의 믿음직한 증언을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의 교회는 유일한 사명을 지니고 있으며,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 사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평신도로서 여러분이 받은 은사는 여러 가지로 많고 또 여러분의 사도직이 다양하지만,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은 현세 질서를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우고 완성시키며 그분의 나라가 오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여 교회의 사명 수행을 진전시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저는 가난한 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일에 직접 참여하는 여러 단체의 활동을 높이 치하합니다.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준 모범처럼, 신앙의 풍요로움은 사회적 신분이나 문화를 가리지 않고 우리 형제자매들과 이루는 구체적인 연대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없기”(갈라 3,28)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활동과 증언으로 우리 사회의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하시는 주님을 모셔다 드리는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활동은 자선 사업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 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으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인간 증진이라는 분야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시도록 격려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저마다 품위 있게 일용할 양식을 얻고 자기 가정을 돌보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저는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교리 교사와 스승으로서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형태로 한국 교회의 생활과 사명에 탁월한 공헌을 해 온 한국 가톨릭 여성 신자들에게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동시에 저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증언이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정생활이 큰 위기를 겪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혼인한 부부들과 가정들이 교회와 사회 생활에서 그들의 고유한 사명을 완수하도록 도와주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초 단위이며, 어린이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선성과 청렴과 정의의 횃불이 되도록 인간적, 정신적, 도덕적 가치를 배우는 첫 학교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교회의 사명을 위하여 여러분이 보태는 도움이 어떤 특별한 것이든, 저는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서 여러분이 지속적인 교리 교육과 영성 지도를 통하여 더욱더 알찬 평신도 양성을 계속 추진하도록 요청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서, 일치와 선교 활동으로 교회의 성장을 위한 봉사에 여러분의 식견과 재능과 은사를 활용하는 가운데, 온 마음과 정신으로 여러분의 목자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활동하도록 부탁드립니다. 근본적으로 여러분의 공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는 아시아 전역에서 그렇듯이 친교와 참여, 은사를 함께 나누는 영성에 기초를 둔 교회관의 발전에 전폭적으로 좌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아시아 교회 45항 참조).

성덕과 열정으로 한국 교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여러분이 하고 계신 모든 일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사도직의 혼이며, 하느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전해지고 자라나는(교회 헌장 33항 참조)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여러분의 사도직을 위한 끊임없는 영감과 힘을 이끌어 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여러분의 본당, 단체, 운동들의 육체적 정신적 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쁨과 평화를 주시고, 우리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여러분을 자애로이 보호해 주시기를 빕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 수도 공동체들과 만남 연설



꽃동네 연수원, 2014년 8월 16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친교의 시간을 나누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이 대표하는 카리스마와 사도직의 커다란 다양성으로 한국과 그 너머에 있는 교회의 삶이 놀랍도록 풍요로워졌습니다. 이 저녁 기도를 바치며,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선과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사랑 받는 나라에서 하느님 나라 건설에 헌신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친절한 환영 말씀을 해 주신 한국 남녀 수도회와 사도 생활단 장상 협의회 회장이신 황석모 신부님과 이광옥 스콜라스티카 수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 몸과 마음 스러질지라도, 하느님은 제 마음의 반석, 영원히 제 몫이옵니다.”(시편 73,26)고 한 시편 말씀은 우리 삶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시편 작가는 하느님께 의지하는 기쁨에 찬 신뢰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기쁨이란 삶의 모든 순간에, 특히 커다란 어려움이 있을 때에 똑같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기쁨은 “한줄기 빛으로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는 끝없이 사랑 받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에서 생겨납니다.”(복음의 기쁨, 6) 하느님께 사랑 받는다는 굳건한 확신이 여러분 성소의 중심에 있습니다.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보여 주는 만질 수 있는 표징이며 천국의 영원한 기쁨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증거가 기쁨에 찬 것이어야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끌어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기도 생활과 하느님 말씀 묵상과 성사 거행과 공동체 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이러한 삶이 부실해지면, 우리 여정의 초창기에 그토록 친밀하게 알았던 그 기쁨을 흐리게 하는 나약함과 어려움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쁨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라는 신비 안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수도회의 카리스마가 관상을 더 지향하든 활동 생활을 더 지향하든, 여러분의 과업은 바로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생활이 언제나 쉽지는 않다는 것을 저는 체험으로 압니다만, 공동체 생활은 마음의 양성을 위한 섭리적인 토양입니다. 아무런 갈등이 없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몰이해가 생기면 그것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바로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자비와 인내와 완전한 사랑 안에서 성장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기도와 공동체 안에서 키워 가는 하느님 자비의 체험이 여러분의 존재 전체와 활동 전체를 형성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정결과 청빈, 순명은 하느님 자비의 반석 위에 굳건하게 머무는 그만큼 하느님 사랑에 대한 기쁜 증언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증언은 수도자의 순명과 관련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성숙하고 관대한 순명은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고난을 통하여 순명을 배우신(수도 생활 교령 14항 참조) 그리스도께 기도 안에서 일치하도록 요구합니다. 지름길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온전히 바라십니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더욱더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또 “우리 자신에게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려하시는 하느님 자비의 생생한 체험은 또한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완전한 애덕에 도달하려는 갈망을 지탱하여 줍니다. 정결은 우리 마음의 반석이신 하느님 사랑에만 자신을 바치는 여러분의 자기 증여를 표현합니다. 우리 모두 개인적으로 얼마나 힘든 노력이 따라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 일어나는 유혹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하는 겸손한 신뢰와 한결같은 인내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청빈의 복음적 권고를 통하여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비가 힘의 원천일 뿐 아니라 보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치더라도, 우리는 죄와 나약함으로 무거워진 우리 마음을 그분께 봉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나약하게 느껴지는 때에 우리는, 우리가 부유해지도록 가난해지신 그리스도(2코린 8,9 참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덕 생활에서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용서와 치유를 받아야 하는 우리의 이 근본적인 필요 그 자체가 가난의 한 형태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밖에도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여러분의 생활 양식에서 청빈의 구체적인 표현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저는 특히 여러분의 주의를 흩어버릴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추문과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이자 “어머니”입니다. 봉헌 생활을 지켜 주기에 “방벽”이고, 성장하도록 돕고 올바른 길로 이끌기에 “어머니”입니다.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또한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우리의 희망을 인간적인 수단에만 두도록 이끌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청빈의 증거를 파괴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봉헌 생활이 교회와 세상을 위한 소중한 선물임을 보여 주기 위하여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매우 겸손하게 하십시오. 여러분 자신만을 위하여 봉헌 생활을 간직하지 말고 사랑 받는 이 나라 곳곳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 봉헌 생활을 나누십시오. 여러분 모두 미래의 봉헌된 사람들을 위한 양성에 기여할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성소자들을 끌어당기고 키워 가는 여러분의 노력 속에서 끊임없이 여러분의 기쁨을 드러내십시오. 여러분이 관상 생활에 전념하든 사도적 생활에 전념하든 여러분은 한국 교회를 위한 사랑에, 그리고 여러분의 고유한 카리스마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일치와 성덕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건설하는 사명에 열정을 지닌 이들이 되십시오.

여러분 모두, 특히 여러분 공동체의 연로하고 병든 구성원들을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사랑 가득한 보살핌에 맡겨 드리며,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항구한 은총과 평화의 보증인 저의 강복을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연중 제20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미사 강론



(가해) 마태 15,21-28; '14/08/17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성 바오로는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영광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 신앙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어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고, 그분의 승리는 또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승리를 경축합니다. 이제 그분들의 이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 옆에 나란히 함께 놓이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저는 그분들에게 공경을 드렸습니다. 이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환희와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함께 참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음을, 순교자들은 성 바오로와 함께 증언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순교자들의 승리, 곧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교회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처럼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복자 바오로와 그 동료들을 오늘 기념하여 경축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여명기, 바로 그 첫 순간들로 돌아가는 기회를 우리에게 줍니다. 이는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민족,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과 종교적 진리의 탐구를 통해 촉발되었습니다. 복음과 처음으로 만난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무언가의 깨달음은 곧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첫 세례들과 더불어 충만한 성사 생활과 교회적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교 활동의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믿는 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 교회의 삶(사도 4,32 참조)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한국의 신자 공동체들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평신도 소명의 중요성, 그 존엄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저는 여기 있는 많은 평신도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리며, 특별히 날마다 삶의 모범으로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화해시키시는 사랑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가정에 저의 인사를 전합니다. 또한 여기 있는 많은 사제들에게도 특별한 인사를 드립니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행하는 직무 수행을 통해, 지난 세대의 한국 천주교인들이 일구어 온 풍요로운 신앙의 유산을 지금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진리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간청할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기를 청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어 세상 안에서 거룩함과 진리의 누룩, 즉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요한 17,14 참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오늘의 이 경축을 통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마음에 품고 기리고자 합니다. 특별히 지난 마지막 세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진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억합니다.

오늘은 모든 한국인에게 큰 기쁨의 날입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선의를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이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서로 화합하여 일하도록 영감(靈感)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에서 평화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전구와 더불어 모든 한국 순교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온갖 좋은 일과 믿음 안에서, 또 한결같이 거룩하고 순수한 마음과 사도적 열정 안에서 항구함의 은총을 받아,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부터 아시아 전역을 거쳐 마침내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연중 제20주일



(다해) 루카 12,49-53; '13/08/18

지지난 주 회칙 "신앙의 빛"(Lumen Fidei) 전반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세상은 신앙을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환상으로 여기고, 공통된 진리는 두려움을 자아내고, 진리는 전체주의의 완고한 강요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오늘날 진리는 흔히 개인의 삶에만 유효한 ‘주관적 실재’로 격하되어 있다고 진단합니다. 교황님은 이를 풀어나가기 위해 ‘신앙과 진리 사이의 유대’와 ‘신앙과 사랑 사이의 유대’ 및 ‘신앙과 이성 사이의 대화’를 전개했습니다. 오늘은 제3장 복음화와 제5장 신앙과 공동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3장(37-49항) : “나도 전해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1코린 15,3 참조)

교황께서는 제3장에서 복음화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그 사실을 혼자서 간직하지 않고 이웃에게 전달합니다. 사람과 사람, 세대와 세대로 이어지는 신앙의 증언은 신앙과 기억의 유대로 이루어집니다. 신앙은 “개인의 결심”만이 아니라, “나”를 “우리”에게 여는 것이고 언제나 “교회의 친교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은 “혼자 힘으로 믿기는 불가능”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인은 “자아”가 확장되고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새로운 관계들이 생겨납니다.

신앙이 전수되는 ‘특별한 수단’은 바로 “육화된 기억”을 전하는 성사들입니다. 유아 세례와 예비 신자 기간을 거치는 어른 세례.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세례를 줄 수 없”으며, 신앙은 고립된 개인의 활동, 곧 혼자 수행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교회의 친교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체성사는 “신앙의 소중한 양식”, “기억의 행위, 신비를 현존하게 하는 것”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이끌어” 우리가 심오한 실재를 체험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신경을 바치며 신자는 신앙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참여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법을 배웁니다. 십계명은 “일련의 금지 명령”이 아니라,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 하느님 자비의 품 안에 머물도록 해 주는 “구체적인 지침들”로 이루어진 “감사의 길”입니다.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하느님이 한 분”이시고, 신앙이 한 분이신 주님을 향하고 우리에게 “공통된 전망”을 주며,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하나인 “온 교회가 이 신앙을 공유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신앙만이 있습니다.

제4장(50-60항) :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11,16)

교황께서는 제4장에서 신앙과 공동선의 유대를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생겨난 신앙은 인류의 유대를 강화시키고 인류가 정의와 권리와 평화를 위해 봉사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세상을 멀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사람들 사이의 유대는 오로지 유용성이나 이해관계나 두려움에 바탕을 두게 됩니다. 신앙은 인간관계의 가장 깊은 바탕, 곧 하느님 안에 그 궁극적 목적이 있음을 이해하고, 이러한 인간관계를 공동선에 이바지하게 합니다. 신앙은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신앙은 공동선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단순히 내세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다 함께 희망의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교화에 이바지합니다.

신앙의 빛이 비추는 첫 분야는 혼인입니다. 혼인을 바탕으로 한 가정은 남녀 사이에 안정된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는 성별 차이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영원한 사랑”을 약속합니다. 가정은 사랑이 자녀 출산으로 이어지는 창조에 동참합니다.

교황께서는 “젊은이들은 인생을 최대한 열심히 살고자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 삶의 지평을 폭넓게 하고,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확고한 희망을 줍니다. 신앙은 소심한 이들을 위한 피난처가 아니라 우리 삶을 향상시켜 줍니다.” 이렇게 하여 신앙은, 모든 사회 관계 안에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면서 보편 형제애를 가지게 합니다. 보편 형제애란 단순한 평등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성애에 대한 공동 체험이고 각 개인의 고유한 존엄에 대한 이해입니다.

신앙이 비추는 또 다른 분야는 자연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자연을 존중하고, “그저 효용과 이익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물을 은총으로 간주하는 개발 모형들을” 찾도록 합니다. 신앙은, 그 권위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고 공동선을 위하여 봉사하는 통치 형태가 공정한 통치 형태라고 제시합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모든 분쟁을 극복하게 하는 용서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신앙이 약해질 때 인류애의 토대들도 약해질 위험이 있다.”고 교황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우리 사회에서 제거한다면, 우리는 상호 신뢰를 잃고 두려움으로만 결합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공연히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앙은 사회생활을 비춰줍니다.

신앙이 빛을 비추는 또 다른 분야는 고통과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 없지만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손에 고통을 맡겨 드림으로써, 이 고통은 “신앙이 자라는 순간”이 됩니다. 고통 받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고통의 이유를 밝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존하시며, 우리를 동반해 주시고, 그늘진 곳에서는 빛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은 희망과 연결됩니다. “희망을 빼앗기지 맙시다. 또한 우리의 진보를 가로막는 안이한 답변과 해결책으로 우리 희망이 사라지지 않게 합시다.”

결론(58-60항) : “행복하십니다, …… 믿으신 분”(루카 1,45)

"신앙의 빛"의 끝에서, 교황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완전한 표상’이신 마리아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신앙과 기쁨’을 잉태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마리아께서 믿는 이들을 도우시어, 믿는 이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고, 예수님의 눈으로 보는 법을 가르쳐 주시도록 기도하셨다고 제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실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현실 세계와의 불협화음을 가져올지 모릅니다. 교황께서는 회칙 ‘신앙의 빛’에서 “신앙은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신앙은 공동선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단순히 내세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다 함께 희망의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교화에 이바지합니다.”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 세상에 살면서도 현실 세계의 경쟁과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현세에서 공동선을 향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로 합시다.



연중 제20주일



(나해) 요한 6, 51-58; '12/08/19

현대 전자 세대의 특징은 짧고 빠르고 새로운 것에의 추구인 듯합니다. 요즘 패이스 북을 쓰다 보니, 어떤 글을 볼 때 그 글의 내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길이가 긴 것은 읽기도 힘들고, 여기 저기 읽을 기사들이 많다 보니까 아예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능하면 쓰고자 하는 내용을 함축하여 짧게 올립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이렇게 저렇게 하여, 되든 안 되는 눈 앞에 결과가 나와야지, 오래 걸리고 다소 복잡하거나 힘겹다고 여기면, 아예 시도할 엄두도 내지 않습니다.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면, “아, 그거 예전에 해 본 거야, 들어본 거야!” 하고 여기면서,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현세의 흐름 속에서 가장 타격을 입는 것이 그리스도교 영성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빨리 눈앞에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기에, 그 깊이도 얇고, 체험의 질을 맛보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지식은 강의나 책으로 연구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추구하는 주님과의 일치와 그에 따른 평화와 기쁨의 체험은 오랜 기간을 걸쳐 직접 수련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그리고 또 기도하면 좋다는 것도 체험적으로 압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자주 정기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듯합니다. 우선 기도 안 한다고 지금 당장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사는데 심각한 장애를 가져다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기도할 때는 먹고 사는데 무슨 심각한 장애를 가져오거나, 심한 병에 걸려 생사를 좌우하거나, 성공이나 취학과 취직, 승진 등의 신분상승이나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풍요가 필요할 경우에만 기도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먹고 사는데 지금 당장 아무 어려움도 없는데 왜 기도합니까? 시간도 없고 할 일도 많은데 왜 괜히 시간을 버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낭비합니까? 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배우고, 한 명이라도 더 만나서 설득하고, 한 가지라도 더 해서 자기를 발전시키고 일을 성사시켜야 하지 않습니까? 프라도 사제회의 창설자 복자 앙뜨완 슈브리에 신부님은 성탄절 밤 구유 앞에서 묵상하다가, “지금까지 내가 사람들의 영혼을 구령하기 위해, 이리 저리 뛰며 이것 저것 해왔지만 제대로 이룬 것이 없구나. 주님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기도를 할 줄 아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기도도 무슨 배우는 과정이나 기술로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는 이유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잘 만날 수 있을까를 배우는 것이고, 기도는 주님을 만나는 방편입니다. 기도의 방법을 배웠다면 이제 그 방법을 이용하여 실제로 기도하여야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기에,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고 안다는 것 자체는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런 현상과 아울러 요즘은 성경이나 교회의 가르침을 하나라도 더 습득하는데 열심인 듯합니다. 외국처럼 은퇴한 다음 신학교나 교리신학원을 찾는 발길이 잦은 것처럼, 뭔가 내가 지금까지 모르던 것에 대해 배워서 알고자 하는 지식욕은 발전하는데 비해, 그 배운 지식을 나누고, 실습하고, 봉사하는 것에는 인색합니다. 교회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은 많아지는데 비해, 교회 내에서 봉사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자신이 배운 것을 나누고 봉사하는데 쓰지 않고, 엉뚱하게도 다른 이들을 평가하는데 쓰고 있으니, 일하는 사람도 힘겨워하고 그래서 점점 다른 사람 앞에 나서서 일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봉사하는 사람들이 더 줄어드는 이상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노력은 하는데 좋은 결실을 맺기가 어렵고, 교회 공동체가 성숙하는데 힘겨워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교리와 가르침은 우리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요청하고 독려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5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가 지루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지난 번에 기도했다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한 술에 배부를 수 없고, 아침 먹었다고 점심이나 저녁을 또 먹지 않습니까? 지루하고 단조롭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매일 밥먹듯이 꾸준히 정기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받들겠다는 표현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어떤 일을 겪을 때, 처음부터 주님의 뜻을 찾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우선 놀라고 당황하며, 자기의 능력대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다 해봐도 안 되어서 포기할 정도가 되었을 때 그제서야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기도할 때도 우리가 한 40분을 기도한다고 할 때, 39.9999분 정도를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또는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분심 중에 있다가, 이래도 저래도 느껴지지 않고 체험되지 않아 포기할 때쯤 되었을 때 0,0001초 순간에 주님께서 체험케 해주십니다. 아니, 자기를 완전히 포기할 때, 비로소 자기 의지에 가려있던 주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39.999분은 허송세월을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주님을 뵙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시간이기도 하고, 주님께 집중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어린이들이 기도 중에 쉽게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54절) 꾸준하고 진실되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겠다는 갈망을 가지고 기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순간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달고 시원하며 황홀합니다. 기도 중에 그리고 성사를 통해 뵈옵고 접하는 주님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55절)

주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 인생의 문제와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갈증을 푸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이벤트식 쇼나 행사로 여기거나, 기도와 성사생활 속에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짜릿함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지루하고 답답해 보이지만, 솔직하고 우직하게, 무뚝뚝하고 담백하게 자기 내면의 문제를 대면하고 주님의 빛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에, 주님과의 깊은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우리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56-57절)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포기하고 주님께 맡기는 일, 그리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알게 된 주님의 뜻을 생명의 빛으로 삼고 실현함으로써 구원의 길로 나갑시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8절)



연중 제20주일



(나해) 요한 6, 51-58; 2003/08/17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자식이 없나, 부모가 없나, 남편이 없나, 아내가 없나, 옷이 없나, 집이 없나, 먹을 것이 없나? 왜 힘들어할까? 죽어라 일해서 얻는 것은 얼마나 좋고 얼마나 많으냐가 차이지 결국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또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것은 얼마나 높고 얼마나 영향력이 있느냐가 차이지 결국 명예와 권력을 쫓는 것일 뿐이다.

부모가 있어도 남편과 아내가 있어도 자식이 있어도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잘 곳이 다 있어도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갈증 그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먹어도 먹어도, 가져도 가져도 모자란 우리의 갈증과 허전함, 우리의 근원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가셔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빵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54-55절)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산다. 성체성사를 영해 주님을 모시고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위안 그리고 충만함으로 오늘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성체성사를 영한다고 해서 우리가 잘못을 안 저지른다거나 위험에 처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와 악의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우리와 함께 해주심으로써 우리가 죄와 악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57절) 주님과 함께하는 길, 그것은 우리가 불안과 조급함 그리고 외로움에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도 불안하거나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선택하지 못한 것이거나 주님을 마음으로만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선택하고 또 그렇게 계속 우리가 선택한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성체성사를 영한다면 우리는 늘 우리와 함께해주시는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8절)



연중 제20주일



(가해) 마태 15 21-28; 2002/08/18

오늘 복음에서는 '구원의 폭'에 대해 나온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24절)라고 하시는 예수님께 가나안 여자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27절)라고 하면서 애걸한다. 사랑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28절)라고 하시며 고쳐주신다.

초대교회는 이 사건을 이방인 전교의 근거로 잡고 있다. 더 나아가 유다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제 이방인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과 아울러 오히려 이방인들을 선교하면서 그들의 깊은 믿음에 대해 감탄하고 치켜세우게 된다.

사도 바오로도 오늘 제2독서에서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순종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로마 11, 30)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다인들이 아주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선물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로마 11, 29) 그래서 유다인의 구원 방법은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방인)이 받은 하느님의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를 받게 될"(로마 11, 31) 것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 하느님께 불순종했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정말 자비가 아닐 수 없다. 당신을 거부하는 이들까지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오묘한 섭리다. 사도 바오로는 이 점과 연관해서 "나는 내 동족 유다인들에게 시기심을 불러일으켜 그들 가운데 일부나마 구해 주고 싶습니다."(로마 11, 14)라고 말한다.

가끔 성당 시설을 사용하고 또 성당의 시혜를 받는 대상을 선정할 때마다 "꼭 신자여야만 하나?", 또는 "돈은 우리가 냈는데, 우리는 왜 빠지고 다른 이들이 들어가나?"하는 유혹과 불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서는 신자인 우리와 신자 아닌 다른 이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다른 이라고 구분하는 그이가 내일 신자가 될 수도 있다.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그 사랑은 다른 이들에게 넘어갈 것이고 그 사람이 받은 은총의 열매를 통해 그 사랑은 다시 한 번 나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에로의 부르심은 주님의 사랑이시기에 감사드릴 뿐이다.



연중 제20주일



(나해) 요한 6,51-58: 2000/08/20

유다인들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 모여 왔더니,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51절)라고 하신다. 먹는 빵에서 사는 빵을 주시겠다고 승화시키신 것이다.

그랬더니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52절) 그렇다. 우리네 인생은 그저 먹을 것만 달랠 줄 알았지, 우리가 먹고살게 해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왜 우리를 먹고살게 해 주시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왜 빵을 더 많이, 더 빨리, 더 맛있게 해 주시지 않는가에 대해 불만마저 품고 산다. 우리가 먹는 빵은 먹어도 때되면 배고파서 또 먹어야 하고, 쌓아도 쌓아도 부족하고 한편 빼앗길까 불안하기까지 한 재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54절)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영원한 생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몸을 모심으로써 우리가 얻게될, 새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 곧 예수님의 몸을 먹으면 우리가 다시 배고프지 않고 죽지 않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다. 안 먹어도 살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죽음으로 대표되는 인간 세계의 물질과 육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새 생명을 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육에 구애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힘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57절) 아버지께서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 안에서 사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죽을 수 있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을 죽일 수 있을 만큼 힘이 되어 주시는 주님을 모시고, 우리는 무엇을 할까?

우리는 주님의 몸을 모시고, 주님을 더욱 굳게 믿어, 매순간 "주님의 뜻이 무엇이지를 잘 알고"(에페 5, 17)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몸으로 세상을 위한 희생제사를 지내야 하겠다. 비록 육으로는 죽더라도, 살려주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고 오늘 성체성사를 영해야 겠다.



연중 제20주일



(나해) 요한 6,51-58: '98/08/17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우리가 미사 때마다 먹는 것은 밀가루 빵이지만 그 빵을 통해 우리가 모시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축성된 밀가루 빵을 성체라고 하며, 결국 우리는 성체, 곧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이 몸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54-55절) 한편 우리가 주님의 몸을 영하여 얻게 되는 생명은 어떤 생명인가? 그 생명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새 생명, 곧 성자를 낳으신 바로 그 생명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 그러므로 성체를 영함으로써 우리가 받는 생명은, 언제든지 무슨 일이 있게 되거든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대신 죽어주고 너는 살리리라 하시는 그 사랑이며, 그 사랑이란 생명이다. 이 생명은 주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고 또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다시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부활하신 그 생명을 이루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우리의 원칙이요, 방향이요, 우리 삶의 참된 양식이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절) 우리는 이 생명을 받아 하느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뼈저리게 알게 되고, 하느님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깨달아 주님의 일을 하게 해주시고 또 그 일을 할 힘마저 주신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길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