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신 200주년 기념 미사



요한 10,11-16; ‘21/08/21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신 2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에 태어나셨습니다. 1836년 12월 한국에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 신부님으로부터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셨고, 1844년 12월 최양업 신부님과 함께 부제서품을 받으시고,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금가항 성당에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서품을 받으셨고, 귀국하셔서 1년 남짓 사제생활을 하시고, 1846년 6월 5일 관헌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시다가, 9월 15일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보다 늦게 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기록에 의하면 제일 늦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신학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다른 두 분 신학생에 비해 조금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건강도 좋지 않아 힘겨워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 분 중에 제일 먼저 사제서품을 받으셨고, 귀국하셨지만 제일 먼저 순교의 영광을 받으시고, 185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되시고,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오르시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성인품에 오르셨습니다.

굳이 비교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같이 공부하신 신학생들과 인격면에서나 성품면에서 서로들 다르셨고, 교회 내의 사목 생활이란 면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걸으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천주교회 초기 조직 체계 설정을 위한 선교사 영입이라는 역할을 주로 맡으셔서 활로를 개척하다가 관헌에 체포되어 장렬하게 순교하셨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박해시기의 한국 교회 신자들의 사목을 위해 외국인 선교사제들을 대신하여 전국의 사목현장을 몸으로 뛰시면서 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하는 사목활동의 역할을 주로 맡으셔서 그야말로 땀의 순교자가 되셨습니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학생은 신학 공부 중 위열병에 걸려 투병 중에 1837년 11월 26일 먼저 돌아가심으로써, 다른 두 신학생과 후배 한국인 신학생들의 양성과 활동을 위한 거름이 되셨고, 천국에서 한국 신학생들을 위한 수호자처럼 전구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세 분을 기억하며, 주 하느님께서는 각기 다른 사람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부르시고, 각기 다른 양성과정을 거쳐, 각기 다른 역할을 주시고, 각기 다른 사목생활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안배하셨습니다. 세분은 각기 다르셨지만, 사랑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천주교회를 통해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에 각기 응답하여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이 신학생으로 처음 선발되어 공부를 할 때, 갖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마카오에서 공부를 하다가 민란으로 두 번이나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야만 했고, 몇 번에 걸쳐 귀국길에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중국으로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렇게 어려운 역경을 겪고, 번번이 귀국에 실패할 때마다, ‘아,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 떠날 만도 한데,

‘과연 무엇이 이분들을 계속 사제로 살도록 이끄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학생들은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으니까 그나마 그렇다고 쳐도, 나중에 귀국할 때나 귀국한 이후에도 박해의 칼날을 피해 도망치듯 쫓겨 다니며 숨어서 숨어서 사제생활을 영위하셔야 할 때,

‘과연 국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이렇게 활동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회와 동시대 사람들이 반기지 않고, 오히려 백안시하고 박해하려고 하는 선교활동이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러다가 잡혀서 죽고, 결국 그렇게 끝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과 의구심이 들지는 않으셨을까? 그때마다

‘어떻게 그런 현실적인 어려움과 이겨낼 수 있었고, 또 그 어려움을 당하며 느끼는 감정들을 잘 정리하고 이겨내서 사제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묵상에 잠기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을 치는 목자에 비유하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목숨을 바치십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절)

사회에서 내노라하는 다른 지식인들은 지식을 팔아먹기는 할망정 혹여 어려움이 닥치기라도 하면 다 버리고 도망을 가버리지만, 주 예수님께서는 위험이 닥치고 원수가 다가와도 우리를 버리고 도망가시지 않습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12절) 삯꾼들은 자기 먹고 살기 위해서 오는 것이지 양들을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3절)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명 한 명을 아시고, 사랑하시기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 자신의 생명을 바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는 바로 우리를 구하라고 예수님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며,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잘 아시고,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우리 보잘것없는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 자신을 희생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듣고서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라는 일이기에 마지 못해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느끼고 믿기 때문에, 아버지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5절)

예수님께서는 비단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심지어는 박해하고 죽이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사랑하시며 구하려고 하십니다. 특별히 이 일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현해야 하는 역할이며 사명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16절)

신앙은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초대이며, 그 초대에 응답함으로써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시작과 부름이 인간적인 것 아니고, 인간의 힘으로 응답하고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주 하느님의 도우심과 이끄심을 느끼고 청하며, 신앙인으로 신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일깨워 주시는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깨우쳐 주고 계신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돌봐 주고 계신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채워주고 계신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섭리로 이끌고 계신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은총으로 안배해 주고 계신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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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


프란치스코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xaultate) III



(가해) 마태 16,13-20; ’20/08/23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제3장 스승님의 빛 안에서’,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라는 소제목에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곧 성덕’이라고 제시하십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은 강렬한 경험입니다. 기본 욕구와 생존 본능에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열렬히 정의를 바라고 의로움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흡족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의가 곧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정의는 가끔 사소한 이해관계로 훼손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조작되고는 합니다.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다.'는 말처럼 세상 안에서는 모든 것이 거래가 됩니다. 어떤 이들이 삶의 좋은 것들을 쉽게 나누어 가지는 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의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참된 정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승자들의 대열에 편승하기를 택합니다. 참된 정의는 사람들이 각자 내리는 결정에서 의로울 때에 그들 삶 안에서 이루어지고,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위한 공정을 추구하는 가운데 드러납니다. '정의'라는 낱말은 가장 힘 없는 이들을 향한 공정에서 드러납니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주어라.”(이사 1.17)

가끔 안타깝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나와 비슷한 성격으로 나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상식에 맞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안 그럴 때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특별히 자식을 키우면서 그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합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치다시피 해서 키운 자식은 절대로 오류가 없고 잘못될 일이 없다고 무의식 중에 여기고 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음을 부정하고 싶어도 사실이 그러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쓴 글은 아무리 다시 보고 몇 번을 검토해 보아도 다 맞는 것만 같고, 틀린 부분을 발견하기가 아주 힘듭니다.

게다가 우리는 불의와 부정을 보아도, 내게 지금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으면 그냥 못 본체 넘어가려고 합니다. 상대가 잘 해서가 아니라 굳이 끼어들어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고, 그것을 지적함으로써 그 사람과 원수 되고 싶지 않고, 그로 인한 새로운 불이익을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가슴 속 한 가운데서는 어딘지 모르게 체하기라도 한 듯 가슴이 아려 옵니다. 왜냐하면 우리 양심이 이것은 사리에 맞지 않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선한 양심을 심어 주신 주 하느님의 외침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인간 어느 한 쪽의 승리와 지배보다는 인간 모두에게 골고루 공동선을 구축해주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목말라 합니다 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런 나라를 꿈꾸면서.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라는 소제목에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고 행동하는 것이 곧 성덕’이라고 제시하십니다.

자비에는 두측면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하여 베풀고 도와주고 봉사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 또한 여기에 포함됩니다. 마태오는 이를 하나의 황금률로 요약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베푸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넘쳐흐르게 베풀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조금이나마 우리 삶에서 재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하신 말씀과 아울러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6,36-38) 이어서 루카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내용을 덧붙입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우리가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 사용하는 그 되는 우리가 용서받는 데에도 사용될 것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데 사용하는 그 되로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받을 상이 측량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앙심을 품고 보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용서하는 사람들, “일흔 일곱번”(마태 18,22)까지도 용서하는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용서받은 이들의 군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가엾이 여기십니다. 주님께 정성되이 다가가 그분 말씀을 귀여겨듣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그분의 꾸짖음을 들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18,33)

어떤 때 상대는 아무런 미안한감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괜히 나 혼자만 용서한다고 하면, 좀 우스운 상황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용서는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멍들고 상처 입은 마음과 미움과 원망으로 굳어버린 마음을 풀어놓아 평안한 마음으로 거리낌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라는 소제목에서 ‘사랑을 더럽히는 온갖 것들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곧 성덕’이라고 제시하십니다.

소박하고 깨끗하며 때 묻지 않은 마음.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은 그 사랑을 해치고 약화시키거나 위태롭게 하는 어떠한 것도 자기 삶에 들어오지 않게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바로 우리의 원의, 곧 보이는 겉모습을 떠나 우리가 참으로 찾고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l사무 16,7)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말을 건네고자 하시고(호세 2,16참조), 그 마음 안에 당신 법을 넣어 주고자 하십니다(예레 31,33 참조).

우리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여도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회개가 어렵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는 것보다, 내가 내 영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끊고 또 오랫동안 내 삶에 밀착되어 같이 살다시피 했던 악습들을 고치고 새로워지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시도는 해 보지만 실패하기 쉽고 또 그래서 자신을 저주하기조차 했던 세월들 속에서 아예 결심을 하기조차 힘든 상황에 놓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우리를 잘 알고 계시는 주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에제키엘 예언자를 시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십니다.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주고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에제 36,25-27)

“숨은 일도 보시는”(마태 6,6) 아버지께서는 무엇이 불순하고 불성실한지, 그저 겉치레나 피상적일 뿐인지 알아보십니다. 아드님 또한 그러하시며,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요한 2,25 참조). 주 하느님께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을 기대하십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기”(l코린 13,3)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마음에서 살인, 도둑질, 거짓 증언 그리고 다른 악한 행동들이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고 봅니다(마태 15,18-19 참조). 우리를 참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깊은 바람과 결심은 이 마음속 원의에서 생겨납니다. 마음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마태 22,36-40참조), 이러한 사랑이 공허한 말이 아닌 진정한 원의일 때, 그 마음은 깨끗한 것이며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사랑의 찬가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l코린13,12), 진리와 사랑이 이길 때에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보리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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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


한마음 한몸 운동본부 이정민 비오 신부님 강론



(다해) 루카 13,22-30; ’19/08/25

복음에서 좁은 문이라는 표현이 새삼 우리 삶의 많은 어려움을 생각하게 합니다. 선하든 악하든, 돈이 많든 적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에서 어려운 시기를 겪게 마련입니다. 어쩌면 행복함에 미소짓던 시간보다, 아파하며 남몰래 눈물 흘리던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 곧 고통의 바다라고 말하는 불가의 가르침이 참으로 와 닿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 모든 번민과 시련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오 텅빈 주머니가 불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어려움을 살아야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독서 히브리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 12,7). 주님은 이 시련을 통해 나를 구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신앙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는 이는, 고통 중에도, 때로 주저앉아 울면서도, 끝내 인내하고 성장하여 구원의 길로 달려갑니다.

독서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좁은 문은 분명 주님의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66,18). 좁은 문을 열심히 통과해 가야하는 이유는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좁은 문을 힘겹게 선택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좁은 문으로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조롱하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좁은 문은 이사야가 말하듯 우리가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주님의 영광, 부활의 길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애타게 기다리며 원하십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그 누구도 예외없이 당신을 따라 새로운 예루살렘인 하느님 나라에서 이 영광의 순간을 맛보기를요.

우리는 매일매일 선택해야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선택을 해야겠죠. 하느님의 사랑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분의 사랑을 거부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로 결심했다면, 부모가 자식에게 감당할 수 없는 벌을 부과하지 않듯이, 하느님 또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십자가를 허락하심을 깨닫게 될것입니다. 자식에게 매를 드는 부모의 가슴이 찢어지듯이, 우리를 시련속에서 더 이끄시기위해 단련시키시는 하느님의 마음 또한 그러함을 깨닫게 됩니다. 광야에서 40년간의 시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하느님께서, 모진 십자가 고통 후에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느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삶의 십자가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한 번 더 힘내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일어서봤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커왔습니다. 부모의 따뜻한 품 안에서 잘 자라나는 아기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다 헤아리지 못하지만 부모의 사랑안에서 행복하게 잘 커왔습니다. 주님의 자녀인 우리도 같습니다. 주님의 사랑 매번 다 헤아리지 못했지만 지금껏 잘 커왔습니다. 때로는 그 사랑이 보이지 않아 투정도 부리지만 그래서 너무나 좁아 보여 두려웠던 우리 각자의 좁은문 주님과 함께 다시 힘을 내 활짝 열어 나아가길 함께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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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공동 노력의 위기 속에서

(나해) 요한 6,60ㄴ-69; ’18/08/26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은 제 2 장 ‘공동 노력의 위기 속에서’입니다. 교황은 이 2장에서 닥쳐오는 세상의 도전과 유혹 속에서 주님을 향한 열정에 불타올라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잃지 말고 굳건히 복음을 선포하고 실현하자고 말씀하십니다.

교황은 복음화에 들어가기 위한 현실 진단에서 사회학적인 분석보다 ‘복음적인 식별의 맥락’ 안에서 ‘선교하는 제자의 시각’, 곧 ‘성령의 빛과 힘으로 길러지는 시각’을 갖자고 하십니다.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펴, 하느님 나라의 열매와 하느님 계획에 어긋나는 것을 식별하여, 선한 영의 움직임을 선택하고 악한 영의 움직임을 거부하자고 하십니다.

교황은 ‘오늘날 세상의 도전들’이라는 제하에서, 오늘날의 사람들이 건강과 교육, 커뮤니케이션 등의 분야에서 진일보하였지만,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수많은 질병과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살아 있다는 기쁨이 자주 퇴색되고,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이 갈수록 결여되며, 폭력이 증가하고,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처럼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물으시며, 이것이 바로 ‘배척’이라고 하십니다. 사용하다가 버리는 물건처럼, 사람도 사회에서 ‘쫓겨나고 버려진다.’고 아파하십니다.

자유시장이 세상을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고 ‘낙수효과’를 주장하지만, “잘 먹고 잘 살자는 문화가 우리를 마비시키고, 시장에 새 상품이 나오면 사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반면에, 기회의 박탈로 좌절된 모든 이의 삶은 우리의 마음에 전혀 와 닿지 못하고 단순한 구경거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소수의 소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만연한 부패와 이기적인 탈세가 늘어나면서, 특정 이데올로기를 따르지 않는 윤리는 균형과 더불어 인간다운 사회질서를 가져다 줄 수 있으며, “돈은 인류 세계에 봉사해야지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십니다.

오늘날의 경제체제는 더욱 안전한 삶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무분별한 소비를 부추겨 소비지상주의를 만들고 불평등을 야기시켜 폭력을 낳게 됩니다. 불평등에서 생겨난 폭력은 군비경쟁이나 교육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외향적이고 직접적이고 가시적이고 즉각적이고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우선시하며, 경제적으로는 발전했지만 윤리적으로는 빈약한 외래문화 사조에 침범을 당합니다. 물질주의와 소비주의, 개인주의 속에서 탄생한 신흥종교는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띠거나 하느님 없는 영성을 제안하고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교묘한 착취수단으로 등장합니다.

세속화 과정은 신앙과 교회를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축소시키고, 윤리를 왜곡시키며, 집단의 죄의식을 약화시켜 상대주의를 확산시킵니다. 개인주의는 인간관계의 발전과 안정을 약화시키고 가족의 유대를 왜곡시키는 생활 양식을 조장하여, “서로 남의 짐을 져주려고”(갈라 6,2) 완전한 일치를 이루려는 혼인을 덧없는 사랑의 감정에서 나온 것처럼 전락시킵니다.

남성 우월주의, 알코올 중독, 가정 폭력, 낮은 미사 참여율, 주술에 빠지는 숙명론이나 미신 또는 사적 계시에 심취하도록 합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마약과 인신매매, 소수자에 대한 학대와 착취, 노인과 병자 유기, 다양한 형태의 부패와 범죄가 일어나며, 만남과 연대보다는 고립과 상호 불신의 장소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교황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더욱 더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그리고 모든 문화와 모든 도시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누룩으로서 이 모든 도전에 맞선다면, 우리는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도시는 더욱 풍요롭게 될 것입니다.”라고 제안하십니다.

교황은 ‘사목 일꾼들이 겪게 되는 유혹들’이라는 제하에서,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든 이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의 죄와 우리 자신의 죄로 고통과 수치를 느끼더라도, 우리는 사랑으로 헌신하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지적하십니다.

미디어 문화와 일부 지식층들이 교회의 메시지에 회의와 냉소를 보이고, 사목일꾼들이 기도하면서도 열등감에 빠지거나 정체성과 확신을 상대화하거나 감추며, 행복하지 못하며, 투신이 약화되고, 강박감 속에서 선교의 기쁨은 줄고, 복음화 활동은 한정된 시간만 억지로 합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을 가져다 줄 선교 활력이 절실히 필요한데도, 많은 평신도가 사도직 활동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자유 시간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며 책임 맡기를 꺼려하고, 많은 사제들이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려고 하여 무기력한 나태의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적절한 동기가 없고 영성이 스며들지 못하여 즐겁게 수행하지 못하는 활동 때문에, 활동은 필요한 것이기보다 우리를 지치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만족스럽고 행복한 피로가 아니라, 긴장되고 힘겹고 불만스러우며 참을 수 없이 피곤한 활동이 됩니다.

복음화의 기쁨은 어느 누구도 또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요한 16,22 참조). 세상이 힘들어졌다고 해도,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는 것을 기억합시다. 현실적이라는 것이 덜 관대해진다거나 성령을 덜 신뢰한다는 것이 아니며, 대재앙만을 예견하는 불길한 운명의 예언자들과 뜻을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패배주의와 비관주의를 넘어 십자가의 승리를 거두어 나갑시다. 그리스도교 이상은 언제나 의심과 끊임없는 불신, 나를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오늘날 세상에서 우리가 지니게 된 온갖 방어적인 태도, 이 모든 것을 극복하라는 요청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반기지 않는 세상에서 도피하여 고립되어 병적인 개인주의와 영적 소비주의 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우리는 ‘어떤 기운’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와 성인들과 구체적인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특정한 경험이나 사상이나 정보에만 유일하게 관심을 두고 이로써 위로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 버리게 되는 영지주의적 경향이나 자신의 힘만 믿고 정해진 규범만을 지키며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신펠라기우스주의의 자아도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이웃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갑시다.

여행과 회합, 회식, 연회 등 눈에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지 말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복음을 이루기 위한 희생과 희망과 일상적 투쟁의 역사를 이어나갑시다. 질투의 유혹을 넘어서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며“(로마 12,21),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 6,9) 내가 싫어하는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으로 나아갑시다.

평신도들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교육을 받도록 하며,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그치지 말고 사회를 변화시키기를 청하며, “성모 마리아는 여성이지만 주교들보다 더 존귀하다.”고 하시면서 여성들이 사목적 책임을 사제와 더 많이 나누게 되기를 권하십니다.

공동체의 강렬한 사도적 열정으로 활기가 넘쳐 많은 지역에서 사제직과 봉헌 생활에 대한 성소가 늘어나기를 기대하며, 노인들은 기억과 경험의 지혜를 가지고 공동체가 과거의 잘못을 어리석게 되풀이 하지 않도록 경고해주며, 젊은이들은 인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공동체를 미래로 열어주어 희망을 새롭게 일깨우고 키우도록 촉구합니다.

교황은 말합니다. “도전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기쁨과 담대함과 희망찬 투신을 포기하지는 맙시다! 선교 열정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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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 꽃꽂이




연중 제21주일 -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가해) 마태 16,13-20; '14/08/2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저의 한국 방문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저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나라에, 그리고 특별한 방식으로 한국 교회에 베풀어 주신 많은 은혜에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한 은혜들 가운데에서, 특히 지난 며칠 동안 아시아 전역에서 그토록 많은 젊은 순례자들이 이곳으로 와서 우리와 함께 한 체험을 제 마음에 간직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보여 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 나라의 전파를 위한 열정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영감(靈感)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의 방문은 바로 이 미사 집전을 통해 마지막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미사에서 하느님께 평화와 화해의 은총을 간구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한반도 안에서 하나의 특별한 공명(共鳴)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오늘의 미사는 첫째로, 또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한 가정을 이루는 이 한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 가운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무엇인가를 청할 때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을 지니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마태 18,19-20 참조). 그렇다면 온 민족이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청을 하늘로 올려 드릴 때, 그 기도는 얼마나 더 큰 힘을 지니겠습니까!

오늘의 제1독서는 재난과 분열로 흩어졌던 백성을 일치와 번영 속에 다시 모아들이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제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것은 희망으로 가득 찬 하나의 약속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바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미래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하나의 명령과 분리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 돌아와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신명 30,2-3 참조). 화해, 일치, 평화라는 하느님의 은혜들은 이러한 회심의 은총과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회심이란,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민족으로서, 우리의 삶과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마음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미사에서,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이러한 약속을 한민족이 체험한 역사적 맥락에서 알아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지난 6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분열과 갈등의 체험입니다. 하지만 회심을 촉구하는 하느님의 긴박한 부르심은 한국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하나의 도전을 제시합니다. 그 도전은, 참으로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는 데에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질적으로 기여했는가를 점검해보라는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여러분 각자가, 개인으로서 또한 공동체 차원에서, 불운한 이들, 소외된 이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들, 많은 이가 누리는 번영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복음적 관심을 증언하는가에 대하여 반성하도록 도전해 옵니다. 또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한국인으로서, 이제 의심과 대립과 경쟁의 사고방식을 확고히 거부하고, 그 대신에 복음의 가르침과 한민족의 고귀한 전통 가치에 입각한 문화를 형성해 나가도록 요청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이 말씀은 화해와 평화에 관한 예수님 메시지의 깊은 핵심을 드러냅니다.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날마다 기도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정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용서야말로 화해로 이르게 하는 문임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우리의 형제들을 아무런 남김없이 용서하라는 명령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근원적인 무언가를 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또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은총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불가능하고 비실용적이며 심지어 때로는 거부감을 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무한한 능력을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고 또한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분열의 간격을 메우고, 모든 상처를 치유하며, 형제적 사랑을 이루는 본래적 유대를 재건하는,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한국 방문을 마치며 여러분에게 남기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힘을 믿으십시오! 그 화해시키는 은총을 여러분의 마음에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은총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십시오! 여러분의 집에서, 여러분의 공동체들 안에서, 그리고 국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화해 메시지를 힘차게 증언하기를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또한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함께, 그리고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선의의 모든 형제자매와 함께 이루는 우정과 협력의 정신 안에서, 여러분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누룩이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 위한 우리의 기도가 이제 더욱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올려져,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로 마침내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고귀한 선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대화하고, 만나고, 차이점들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기회들이 샘솟듯 생겨나도록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또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함에 있어 관대함이 지속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한국인이 같은 형제자매이고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며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더욱더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저는 이제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대통령님과 정부 당국자들과 교회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방문이 이루어지도록 어떠한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신 모든 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저는 특별히 복음에 봉사하기 위하여, 또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건설하기 위하여 날마다 일하고 있는 한국의 사제들에게 직접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또 그분의 화해시키는 사랑의 직분을 맡은 사람으로서(2코린 5,18-20 참조), 존경하고 신뢰하며 조화롭게 협력하는 유대를 여러분의 본당 안에서, 여러분 사제들 사이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주교들과 함께 계속 이루어 나가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향한 여러분의 남김 없는 사랑의 모범, 여러분 직무에 대한 충실성과 헌신,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애덕 가득한 관심으로, 이 나라에서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돌아오라고, 당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이 알았던 것보다 훨씬 큰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땅 위에 우리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부디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화합과 평화를 이루는 가장 풍요로운 하느님의 강복 속에서 참으로 기뻐하는 그 날이 오기까지, 한국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그 새로운 날의 새벽을 준비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프란치스코 교황



연중 제21주일



(다해) 루카 13,22-30; '13/08/25

오늘은 8월의 마지막 주일로서 상반기를 마무리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9월 하반기를 시작하기 전에, 지난 상반기 동안 우리와 함께해 주면서 우리를 돌봐주셨던 주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하고, 이제 새롭게 하반기를 시작하며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의 노고를 열매 맺어주시기를 청하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편안한 자세로 앉으시고, 몸에 긴장을 푸시고, 두 눈을 감으시고, 마음 속에서부터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갈망을 간직한 채 주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기도문을 천천히 읽어 내려갈 때, 여러분의 청원으로 삼아 마음 속에서 따라서 바쳐주시고, 제가 기도문을 다 마쳤을 때부터 여러분 자신의 개별적인 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기도 중에 여러분이 가정과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과 갈등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 안에서 잠시나마 평화를 누리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새로워지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해요!

예수님, 어서 오세요.

예수님, 어서 오셔서 저희와 함께해 주세요.

예수님, 저희에게 오셔서 저희의 어려움과 고민을 함께 나누어 주세요.

예수님, 어서 오셔서 저희에게 힘을 주세요.


예수님, 사랑해요!

예수님, 어서 오셔요.

예수님, 어서 오셔서 저희와 함께해 주세요.

저희가 일하다 지쳤을 때,

사람 때문에 짜증나고 화가 났을 때,

사람들이 나를 원하거나 원망할 때,

가정이나 직장에서 나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때,

집안에서 외롭고 힘겨울 때

상사에게 모욕을 당하고 불이익을 당했을 때,

예수님의 사랑으로 위로해 주세요.

예수님께서 백성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셨을 그때처럼 저희를 구원해 주세요.


예수님, 사랑해요!

예수님, 어서 오세요.

예수님, 어서 오셔서 저희와 함께해 주세요.

집안에서 부모님과 마찰을 빚을 때,

서로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사랑의 표현이 서로 다른 것이리니 하고 여기게 해 주소서.

세대차와 문화의 차이 뒤에 숨겨져 있는 사랑을 발견하게 해 주시고,

선인들의 지혜를 깨우쳐 알게 해 주시며,

어른들을 존경하고, 스스로 존중받는 법을 익혀 알게 해 주시고,

부모님과 선인들의 손길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안배를 느끼게 해 주소서.


예수님, 사랑해요!

예수님, 어서 오세요.

예수님, 어서 오셔서 저희와 함께해 주세요.

부부의 사랑을 축복해 주시고,

나를 반대하고 내 뜻을 따라주지 않을 때 서운해 하기보다

주님께서 내 좁은 마음을 채워주시려고 배우자를 선물로 보내주셨음을 깨닫게 해 주시고,

나를 존중해주지 않고 섭섭하게 대할 때 겸손과 사랑의 희생으로 자존하게 해 주시며,

서로에게 기대하며 상대 배우자가 채워주지 못한다고 실망하고 원망하기보다

배우자에게 나를 선물로 내주어 배우자의 삶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해 송구스럽게 해 주시고,

제 욕심을 줄여 더 이상 스스로 실망의 덫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내 잣대로 지적하고 내가 바라는 대로 변화되기를 요구하기보다

배우자의 빈 곳을 하나라도 더 채워주려 노력하게 하시고,

배우자를 선물로 주신 주님과 배우자에게 감사하며 살게 해 주소서.


예수님, 사랑해요!

예수님, 어서 오세요.

예수님, 어서 오셔서 저희와 함께해 주세요.

자식들이 부모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거나 분노하기보다

부모와 다른 자식들의 새 세대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부모가 바라는 것과 다른 자식들의 바람도 존중하게 해 주시며,

주님께서 자식들에게 심어준 사명이 무엇인지도 헤아리게 해 주소서.


예수님, 사랑해요!

예수님, 어서 오세요.

예수님, 어서 오셔서 저희와 함께해 주세요.

세상에서 생업에 종사할 때,

열심히 준비했어도 사람들의 호응이 적을 때,

저희가 틀리거나 나쁘지 않았어도 사람들이 반응이 점점 줄어들고 약화될 때,

저희와 함께하셔서 저희를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세요.

예수님께서 보내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한 명의 새 사람도 벗도 얻을 수 없으며,

예수님께서 채워주시지 않으면 저희의 노력이 열매를 맺을 수 없사오니,

주 친히 함께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어 열매맺어 주소서.


예수님, 사랑해요!

예수님, 어서 오세요.

예수님, 어서 오셔서 저희와 함께해 주세요.

일터에서 외톨이가 되었을 때,

내 잘못이 아닌데도 책임을 져야할 때,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그 일과 역할을 맡아야할 때,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좋지 않은 결과를 냈을 때,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오해받고 멸시받을 때,

동료들과 일터를 위해 희생해야할 때,

진리와 정의와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소서.


예수님, 사랑해요!

예수님, 어서 오세요.

예수님, 어서 오셔서 저희와 함께해 주세요.

가정과 일터에서 살면서 세상의 경쟁과 물질주의에 휩싸일 때,

재물과 권력과 명예의 유혹에 흔들릴 때,

탐욕과 시기와 질투의 허상으로 가려진 공허한 먹이사슬에서 빠져나오게 해 주시고,

모욕과 멸시와 소외에 맞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주님을 따르다가 손해를 입고 천대를 받을 때,

저희와 함께하셔서 저희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지혜와 사랑과 능력을 주소서.


예수님, 사랑해요!

예수님, 어서 오세요.

예수님, 어서 오셔서 저희와 함께해 주세요.

저희가 아무리 노력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게으르거나 악한 것도 아닌데 잘 풀리지 않을 때,

왠지 모르게 힘이 빠지고 우울해질 때,

스스로 부끄럽고 왜소하다고 느낄 때,

저희에게 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저희에게 힘과 희망을 안겨주시며,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어,

주님을 모시고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게 하소서.


성모님, 성모님도 사랑해요!

성모님, 저희에게 예수님을 알려 주세요.

성모님, 저희를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세요.

성모님,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순명하여 아기 예수님을 가질 수 있었듯이,

주님과 사람들이 저를 요구할 때,

그 요구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여겨

순명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세요.


성녀 소화 데레사님, 성녀님도 사랑합니다.

저희가 예수님만을 사랑하던 성녀님의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정열과 사랑의 마음을 갖도록 해주세요.

오로지 예수님만을 사랑하여 세상 선교사들의 주보성인이 되신 성녀님,

저희가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며, 저희 몸으로 살아나갈 때,

예수님에게서 힘과 능력과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사랑받게 전구해 주세요.


☞ 여기서부터 여러분 자신의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십시오.


……


주님께 청하고 싶은 말을 다 드렸으면,

잠시 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들으신 후,

아래와 같은 말로 기도를 마치십시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연중 제21주일



(나해) 요한 6,60-69; '12/08/26

어떤 아내는 남편에게 이야기합니다.“제발 일찍 좀 들어오세요! 늦으면 전화라도 하고요! 기다리는 사람 생각 좀 해주시고요! 그리고 술 좀 작작 드세요!” 또한 어떤 남편은 아내에게 말합니다.“집 좀 지켜 집 좀! 매일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야? 집에서 청소도 하고, 맨날 방구석이 이게 뭐야, 이게 사람 사는 집이야? 돼지 우리지!”

답답합니다! 답답할 것입니다! 게다가 요란스럽게 여기저기서 부딪히고 걸리적거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그런 배우자의 모습을 보면 정말 짜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나는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나는 내 마음 속에서 그리워 왔고, 아직도 (변화되어 새 사람으로 내 앞에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내 마음 속의 배우자와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매일 술만 먹고 늦게 귀가하는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도,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매일 집을 비우고 쏘다니는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난 지금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점을 간직한 그 사람이, 좋아서 결혼했습니다. 이점만은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 좋은데 그 점만 조금 고치면….”하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가 내 배우자가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바라는 ‘그 점만’, 그리고 ‘조금’이라고 하는 그 부분이, 나에게는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상대에게는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배우자에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자의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고치라고 지적하는 것도 대단한 용기겠지요! 배우자의 부족한 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요, 용기 있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더 큰 용기는 지적하는 것을 넘어, 자기가 아는 배우자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것이 진정한 용기요,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에페 5,28) 자신의 취향과 자신의 희망사항을 채워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참사랑이라기보다는 이기주의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배우자에게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화를 내는 점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그 점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배우자의 그 점을 포용할 여유가 없는, 배우자가 내 한계를 넘어섰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불만과 불안감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적절한 배우자를 점지해 주셨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완성시키기 위해 나의 부족한 점을 배우자가 채워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우자가 신경에 거슬리고, 나를 화나게 할 때마다, 하느님과 배우자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 배우자는 나를 사랑해서, 나의 한계를 깨뜨리고 성숙시켜 주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에페 5,31)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기 전까지, 그 동안 서로 다른 가문과 서로 다른 환경, 다른 문화, 다른 성장과정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결혼하였다고 해서, 아니 결혼한 부부라고 해서, 자기와 같은 마음과 같은 행동을 기대한다는 것은 욕심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어리석은 기대였을 것입니다. 서로 같을 수 있다면 하나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민과 걱정도 없을 것입니다. 같으니까요!

‘하나 된다!’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서로 같다는 의미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완성에 이른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보완하여 하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부모라는 한 모습으로, 이웃과 친지들에게 한 가정으로서의 모습을…. 각자 대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하나의 결정과 하나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또 함께 그것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에페 5,26) 그러므로 하나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바쳐 우리를 키우시고 살리시듯이 우리도 서로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합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볼 때, 우리의 부족하고 불완전한 결합을, 주님께서 성사로 들어 올려 주시고 축복해 주셨다는 것에 우리는 감사드릴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죄많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7-8)

우리 역시 우리의 혼인 서약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서약이란, 서로가 좋을 때뿐 아니라, 어렵고 심지어는 헤어지고 싶고 떠나고 싶을 때까지도 포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하나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좋아한다는 사랑의 감정을 떠나, 무엇보다도 부부간의 용서는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령 배신과 배반의 외도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다가 지쳐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

설사 살아서 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더라도, 또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의 자녀가 걸어 나갈 길을 포기하지 맙시다. 한평생 외도로 아내를 괴롭혀온 한 남편이 죽어 가면서, 차마 자기 아내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친구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합니다. “나는 죽어서 아내의 가슴에 묻히겠습니다!”

우리의 처지 안에서, 오히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호소를 들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웃을 우리 주변에 살도록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가난한 이웃을 맡기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인격적인 완성을 위해, 내 배우자를 나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나에게 사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자신과 인생을 나누어 온 배우자를, 이제 자기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삶이 자기를 속인다는 말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남편은, 변천하는 사회사의 흐름 속에서 꾸준히 변화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과 친척들 안에서 보내야 하는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과거에 비해 너무나 변화된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멀어졌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남편은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잡기 위해 일에 매달리다시피 하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아이들은 다 커서 자신들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아내는 어떻습니까? 아내는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느라 자신의 친정과 친구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꿈과 문화 그리고 자기 계발의 순간을 다 놓쳐 버렸습니다. 어느덧 나이만 덜렁 들어 버린 자신을 발견하고서는, 허전해하고 억울해하는 40대 아내의 방황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가정을 위해 자신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애써 일해 온 서로를 기억하면서,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갑시다. 지난 순간들을 기억하면서, “나 밖에 돌볼 사람이 없어서, 나밖에 맡아 줄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 이 배우자를 보내셨다!”는 다짐을, 혼인 서약의 충실성과 책임감과 함께 가져봅시다. 어쩌면 이제부터 서로의 인격을 완성시킬 때가 아니겠습니까?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9)



연중 제21주일



(가해) 마태 16,13-20; '11/08/2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6,15)고 물으셨고, 이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라고 답합니다. 저는 베드로가 이렇게 자기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가능하게 해준 내적 영성 체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내적 영성 체험의 고백이 베드로를 주님의 사도가 되게 해주고, 결과적으로 주님으로부터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게 됩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19)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께 우리 본당에서 신자들의 내적 영성 체험을 위하여, 2013년부터 시행할 신자 영성교육에 대해 설명하고, 이를 위해 8월 23일부터 9월 6일까지 매주 화요일 오후 8시에 진행되는 영성교육과 곧바로 이어질 영성봉사자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에 많은 분들이 기꺼이 참여하실 수 있도록 그 취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 동안 교회에 나오고, 교회에서 평신도 사도로 열심히 활동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봉사활동은 물론이요, 봉사활동을 하면서 겪게 되는 사건과 상황 그리고 또 무시할 수 없는 봉사자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오해와 갈등으로 봉사와 활동을 그만두게 되는 상황에서 그냥 그렇게 그만두는 것이 그 사람뿐만 아니라 교회도 커다란 손실을 입기 때문에 더욱 더 안쓰럽습니다. 더군다나 봉사활동만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신앙마저도 시들어 버리고 잠시라고는 하지만 성당마저 나오지 않는 경우를 바라볼 때면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으로 복잡해집니다. 자신의 탓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악의 심술 때문에 좋은 뜻과 열정을 바치는 것을 중단하고 포기하며 변절해서 결국 악에게 빼앗기고 마는 신자들을 바라볼 때면 억울하기까지 합니다.

그런가 하면, 직장에서 일하며 직장 복음화를 위해, 가정에서 가사를 돌보며 가정 복음화를 위해, 사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사회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어느새 스며드는 갈등과 고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과 예기치 않은 일들에 대한 부담 등이 스트레스와 짐으로 등장하여 지치게 되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좋은 뜻을 펼치고 좋은 일을 하면서도 보람은 있다가도 온전히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충분하고 풍요하게 채우고자 하는 갈증과 갈망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상처입지 않는 신앙, 흔들리지 않는 강건한 신앙을 간직하도록, 목마르지 않고 지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샘솟는 영적인 물을 삶과 활동에 채울 수 있도록 평신도 사도들을 위한 영성 차원의 양성과정을 기획했습니다. 동시에 성직자들과 일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듯한 영신수련 과정을 어떻게 하면 일반 신자들에게 대중화시킬 수 있을까 하던 몇 년의 고민도 한 몫을 더하였습니다. 이러한 기획 과정에서 수도자들이 서원 이후의 지속적인 양성 프로그램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수도회원들은 지도신부의 개인별 면담에 의한 영신지도가 없더라도, 회원들끼리 성경 묵상과 나눔을 통해 각자의 묵상과 경험이 서로에게 힘을 주고, 그 안에 숨어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끼게 되고, 공동식별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나눔의 풍요함과 은총을 깨우치게 되었다며 이 프로그램에 대한 격려와 기대를 표해주었습니다. 수도회원들의 이러한 요청들에 힘입어 오랫동안 구상하고 망설이던 이 프로그램을 ‘공동체 묵상나눔과 공동식별을 통한 사도직 영신수련’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물론 이 프로그램의 양성과정을 따라 관상기도를 할 경우에는 영성지도자를 선택하셔서 규칙적이고 구체적인 영성지도를 받아가면서 이 과정을 진행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양성과정은 구세사를 6개의 주제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2010년 가톨릭 교리 신학원에서 처음 구상을 시작할 때는 24주에 걸쳐 매일 기도하고 묵상, 관상하고 나누면서 진행하도록 꾸몄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매일 기도하고 나누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주 5일 묵상을 월 5주 묵상으로 삼아 24주를 24개월로 확장하여 진행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냥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무슨 영신 성숙이 되겠느냐고 의아해 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성경에 나오는 인간 역사를 단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과 상황들의 기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하고자 애쓰시는 구세사(救世史)로 삼습니다. 그리고 구세사를 깊게 바라보며 묵상하면 하느님께서 성경의 주인공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지켜주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동시에 그 성경기사들이 하느님께서 과거의 인간들에게 베푸신 사랑의 흔적으로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서 그 성경기사들을 읽는 오늘의 나를 부르고 계시며, 내가 그 부르심을 내 삶의 역사와 관련하여 눈뜨게 되고 응답할 때, 주님께서 오늘의 나를 어떻게 함께해 주셨고 사랑하고 계신지를 깨닫고 느끼게 됩니다.

첫 주제 ‘세상의 어둠과 아픔 속에서’는 우리가 살면서 세상에서 겪는 예기치 않았던 갈등과 어려움에 관한 고난의 현장과 풀리지 않는 신비,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인 죄와 악, 그리고 예언자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 돌아서서 미래를 향해 새로운 길을 걷도록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두 번째 주제, ‘희망의 서곡’은 죄와 죽음이라는 한계를 겪는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고통을 통해 자비로운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희망의 목소리를 듣고 가난하고 겸손한 탄생으로 천지개벽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과 세례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는 과정입니다.

세 번째 주제, ‘말씀 선포’는 은총의 해를 선포하시고 주님의 사도직을 수행하기 시작하셔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산상설교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담뿍 담긴 하느님 나라의 길과 그 길에서 얻는 기쁨과 평화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눈뜨고 응답하는 과정입니다.

네 번째 주제, ‘구원 행적’은 말씀 선포로 시작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믿게 하시고, 병자와 죽은이들의 몸을 고치시시고 되살리시는 치유 기적을 통해 전인간을 구원해 주시고, 그 은혜를 입고 회개하는 이들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시며,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내려주시고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아버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요청하시는 주님을 따라 치유받고, 용서받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 기도하는 과정입니다.

다섯 번째 주제, ‘주님의 이루심’은 주님께서 말씀과 행적으로 보여주시고 증명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몸소 예수님의 삶으로 이루시고 완성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욕심과 애착과 의지에서 죽고 주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 주님의 뜻을 따르기 시작하며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의 이끄심과 힘으로 교회를 이루는 과정입니다.

여섯 번째 주제, ‘희망의 성취’는 교회의 성사를 통해 성사생활을 하면서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사랑의 일치와 겸손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리며 희망찬 거룩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구세사를 되짚어 가며, 주님과의 관계를 맺어가고 깊어지면서, 주님을 향한 갈망이 더욱 샘솟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힘으로 더욱 더 커다란 열망과 열정을 간직하며 성숙해짐으로써 악의 심술에도 흔들리지 않고 쓰러지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강건하고 충실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설사 실수하고 지치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주님의 위로로 힘을 얻고 새로워지기 바랍니다.

단순하고 직접적인 영성성숙의 양성과정이지만, 또 다소 길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택하지 않는 길이기에 좁은 길이 될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 과정을 걷고자 선택하시고 시작하시는 분들께, 주님께서 그렇게도 원하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뵙도록 해 주시고 그분을 모시고 그분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위로를 가득 안겨 주시기를 빕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서 이 과정을 밟는 여러분의 영을 몸소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연중 제21주일



(가해) 마태 16,13-20; '05/08/21

언젠가 한 젊은이가 왔습니다. 두 시간에 걸쳐 자기가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계약 결혼이야기도 있고, 전혼의 비밀 때문에 현재의 배우자와 갈등을 겪는 이야기도 있었고, 재산과 돈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없겠는가 여겨 혹시 대부나 주변에 결혼과 부부생활에 대해 조언을 듣고 또 중재를 청할 사람은 없겠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말해보았지만 자기가 오늘 말했으면 그 다음날 믿고 청한 사람들이 걱정해주고 도와주기는 고사하고 자기 이야기를 술안주삼아 떠들어 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울해집니다. 우리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실망만 안고 떠나가야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따지고 보면 우리 집안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꼭 문제라고 까지 할 수는 없어도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아쉬움에 처할 때가 있었고, 생각지 않은 갈등과 오해 속에서 고민하고 방황할 때도 있었고, 예기치 않은 일로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과 싸움, 실수와 과오로 인한 사고와 범죄, 실직과 부도, 성격이나 정신의 병적인 장애, 질병이나 알코올과 마약 또는 도박 등의 중독 등

이런 어려움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사전 예고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갑자기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라는 공동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15)

그러자 제자 중의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

이 말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기와 함께, 자기 삶 속에 살아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기가 기쁘고 행복할 때 자기와 함께 기뻐해주시고 행복해 해주시며,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짐을 나누어 져주시고 함께 슬퍼해주시고 힘을 주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고 또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갑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따라간다고 해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현실에서 장밋빛 미래를 펼쳐주시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따라간다고 해서 베드로가 주님만을 향해 실수나 잘못도 없이 곧게 나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다 압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어리석은 짓도 많이 하고,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고, 다른 제자들보다 훌륭한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배반까지 했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해 일하다가 결국 주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고 하늘에 올라 주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오늘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무엇을 가져다 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언제, 어떻게 함께해주셨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인 이 교회가 우리에게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교회는 누구입니까?

교회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교회가 여러분의 삶에 어떤 부분을 어느 정도 차지하고 있습니까?

교회에 무엇을 청하십니까?

그리고 교회에 무엇을 봉헌하고 계십니까?

교회에 나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리스도처럼 보이지도 않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을 믿고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하셨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다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물론 교회가 어떤 한 사람을 대신해 줄 수도 없고, 사회의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죄악 앞에서 우리 인간과 함께 수난하시고, 우리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주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기만 할 것입니까?

신부나 수녀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청하기만 할 것입니까?

여러분이 교회가 아닙니까?

여러분이 살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거꾸로 여러분에게는 누가 찾아오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주님의 교회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된 이 교회에 어떤 사람이 문제가 생겨서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주시겠습니까?

주님께 바라는 것이 이 교회를 통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이 교회 안에서 구원의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가정 위원회’가 발족합니다.

이 가정 위원회는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조그만 시도가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고, 도움을 청하고 싶을 때, 이 가정위원회 위원들을 찾아주시고 함께 여러분의 어려움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위원회 위원들이 다른 모든 신자분들보다 확연히 훌륭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이름으로 하소연을 들어주고 어려움을 감싸 안아주고 가정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나가달라는 교회의 청에 응답한 분들이고 사제의 사목에 참여하는 신자들입니다.

가정위원회는 앞으로 교회의 혼인교리와 성가정을 이루기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입니다.

동시에 교회의 이름으로 결혼과 부부생활 그리고 가정의 문제를 지닌 분들과 상담할 것이며, 그 비밀을 지키며 필요할 때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가정과 가정들을 위한 연구를 펼쳐나갈 것입니다.

이 가정위원회가 점점 커지고 넓어져서 여러분 모두가 서로 서로의 짐을 자기 것인 양 짊어지고 함께 걸어 나가 우리 모두가 주님의 교회를 이루게 되기를 바랍니다.



연중 제21주일



(다해) 루가 13, 22-30; 2004/08/22

구원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구원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여기 저기서 구원에 대해 말하는 사람도 가지 가지다.

그런데 여기 저기서 이렇게 하면 구원이 되고, 저렇게 하면 된다는 말을 듣다 보면 맥이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구원이 되고, 저렇게 하면 구원이 안 된다면, 뭐하러 믿고 뭐하러 따르나? 그냥 내가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되지. 그리고 구원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라면 새삼 뭐 구원받으려고 돌아다닐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이다.

아무리 날고 기어 받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데. 겉포장만 바꿨지 속은 똑같은 상태에서 뭐 어쩌구 저쩌구 해 봤자 기본은 하나다. 굳이 철학적으로 논하지 않아도 이치는 하나다.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것이 인간 생의 조건이라면, 그 어느 한 쪽을 배제하고 다른 한 쪽만으로 완성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정신세계를 강조한 나머지 먹지도 않고 기도만 한다고 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정신세계를 부정하고 먹고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물질주의적 접근방식도 인간 생애를 풍요롭게 해주지는 못한다. 또 요즘 와서 느낌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이성의 세계가 역사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감각을 강조하는 세계도 인간의 구원에 대해 말은 많이 하지만 구원과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고 단지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믿음 안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 25) 오히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불확실성의 세계 속에서 확실한 것은 우리의 믿음뿐이 없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 4)

한 개인을 보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정도 차이 일뿐 먹고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먹어야 하고, 먹으려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일해야 하고, 죽어라 일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일하려면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일할 수 있을 만큼 또 쉬어야만 다시 일하면서 살 수 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사는 것 외에 자기 성취와 자기 완성을 위해 자기계발을 해 나가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라 자기 혼자는 살 수 없고 같이 살도록 주어진 세상에서 살려면,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른과 아이, 남편과 아내 그리고 이웃 사람들인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와 이웃뿐만 아니라 자기가 온전히 제어할 수 없는 자연이 우리에게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이웃', '자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어우르도록 조건지어주신 창조주 '하느님'과 두루 두루 그리고 정도에 맞게 관계를 맺고 살아나가야 한다. 그런데 자기 할 바만 다하게 되면 가끔 관계가 소홀하게 되는 독불장군이 되기도 하고, 관계를 중시하다 보면 자기 할 바를 소홀하게 되어 겉으로만 번드르했지 속 빈 강정처럼 되어 우스워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일생 우리가 살면서 풀어 나가야할 우리의 숙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라"(루가 13, 24)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그 좁은 문이란 무엇인가? 이어지는 말씀에,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린 뒤에는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할 것이다."(25) 그리고 "너희가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해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하고 대답할 것이다."(26-27)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그 좁은 문이란 자기가 먹을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나서 적당히 해도 되는 것은 아닌 듯 싶다.

그러면 좁은 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좁은 문에 대해 하신 말씀을 따르자면,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24)고 하신 것으로 보아 좁은 문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지만 들어가지 못하는 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는 길이 아니다.

그럼 그런 것이 어떤 것일까? 많은 사람이 찾는 것은 쉽고 편하고 부담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굳이 애쓰고 고생하지 않아도 돈만 주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살아도 살아도 쉽게 풀어지지 않는 것이 인생인데 하루 아침에 그것도 마치 상품을 사듯이 돈내서 해결 될 것이라면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인간의 인생과 삶에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하겠는가. 그걸 기대하고 그리로 쫓아가는 사람의 심정만 애가 타지 실상 얻을 것은 없지 않겠는가?

오늘 날 좁은 문으로 표상되는 일들을 우리 삶 속에서 찾아본다면 이런 것일 수 있다. 누구 어느 다른 사람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힘으로 자기 노력에 의해 자기 몸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좁은 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고. 인생은 단순하지 않지만, 인생의 답은 아주 단순하다. 우리가 단순한 답을 단순하게 펼쳐나가지 않고, 뭔가 손쉽고 자기가 노력하는 것에 비해 더 높고 좋은 보상을 바라기에 꼬이는 것이다.

어쩌면 자기가 삶에서 터득하고 익혀왔다고 자부하는 요령보다도, 교과서 안에만 갇혀져 있는 것같은 진리들을 고지식하고 무식하리만치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나씩 하나씩 그것도 자기 몸으로 직접 이루어나가는 일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그 나머지는 다 부질없는 유혹일 뿐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인생의 진리들과 우리가 마음속으로는 고귀한 가치를 인정하고 수긍하면서도, 살면서 무시해왔던 그 모든 아름답고 인간으로서 갖추어야만 했던 가치들을 주님 안에서 다시 되돌아보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 재현하기로 하자.

오늘 알렐루야의 성서구절을 보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

사도 베드로가 주님께 드린 고백을 오늘 우리의 고백으로 되풀이하자.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 68)

아멘.



연중 제21주일



(나해) 요한 6, 60-69; 2003/08/24

일이 잘 안 풀리고 답답할 때 무엇을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술과 여행으로 달래는가 하면, 심지어는 점을 치러 가는 이마저 있다. 그리고 뭇사람들도 미신이라고 하는 고사나 굿을 하는 이도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는 일에 현혹되고 휘말리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교회를 찾는 예비자들도 절박한 상황 앞에서 유혹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 27)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주님께 청한다. 그리고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들어주시지 않는다 해도,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시간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믿고 또 알기에 주님께 청한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마태 7, 8)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 주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살려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고 청한다. 그리고 믿기 때문에 지금 당장 없어도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기에 어떻게 해서든 자기 힘으로 자기가 원하는 시기에 자기가 원하는 방법대로 이루려고 비정상적인 방법까지 써가면서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했던 아름다운 꿈마저 잃어 버리고 부정과 아픔으로 얼룩진 체 끝내버리지는 않는다.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 25)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인위적인 개입보다는, 주님께서 완성시켜주실 그 날을 기다리며 우리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봉헌한다. 내가 주님과 주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곁들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불확실하고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도 우리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주님의 교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좋은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요한 6, 68-69)



연중 제21주일



(가해) 마태 16 13-20; 2002/08/25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15절)하고 물으신다. 이 말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말과도 통한다. 그리고 '주님을 믿어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라고 고백한다. 베드로처럼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생생이 살아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첫째 인간 생명의 존엄과 인간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해야 한다. 수태부터 생성되는 인간 생명은 비록 그것이 인간 남녀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경우에 다 수태되는 것도 아니요 또 자녀의 성별을 부모가 결정지을 수 없다는 면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비록 한 때 악에게 휘둘려 선을 행하지 못하고 선에 대한 갈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그 사람의 양심에 새겨 넣어 주신 주님의 선성을 발견하고 기대하여야만 한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마태 18, 10)라고 하시면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선에 대한 갈망 속에서 인간 각자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이야기하신다.

둘째 공동체와 이웃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주님께서 나에게 함께 살도록 보내주신 가족과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한다. 비록 각자의 선택으로 모였지만 그 선택을 한 데로 모아 마주보고 살게 해 주신 것은 주님이시기에 주님께서 보내주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19, 19)라고 하신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2, 7)라고 한다.

셋째 어려운 이웃에 대한 우선적인 배려가 있어야 한다. 모든 이가 함께 평등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배려해서 남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주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라고 하신다.

넷째로 이상의 것들을 아우를 수 있는 복음선포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 속에 이상의 것들을 심어주고 또 그렇게 삶으로써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드러낼 복음선포자들을 많이 양성해야 한다.



연중 제21주일



(다해) 루가 13,22-30; '01/08/26

구원에 대한 지난 주간의 말씀을 들어보자. 월요일 복음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하자, 주님께서는 "계명을 다 지키고 나서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하셨다.(마태 19,16.21)

화요일에는 '구원은 사람이 착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26절)이며 또 그러기에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찌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30절)이라고 했다. 그럼 착한 일을 할 필요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하고 대답할 것이다."(루가 13,27)고 하신다.

수요일 마태오 복음 20장 '포도원 일꾼들의 품삯'에 대한 말씀을 통해, 과거 젊었을 때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도 아니요, 앞으로 돈 벌고 여유 있으면 좋은 일 많이 하겠다는 결심만도 아니요, '지금 이 순간에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목요일 마태오 복음 22장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자격도 없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살려 아버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잔치상에 앉게 해주신 주님'의 은총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토요일 마태오 복음 23장에서는 누구에게도 스승이나, 아버지나, 지도자라는 말을 듣지 말고,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11-12절)고 하셨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 인간이 무엇을 얼마만큼 했느냐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선택의 결과다. 이미 하느님의 선택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들에게 기쁘게 다가가는 것이다. 비록 형제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들이지 않아도, 경우에 따라서 주님의 견책을 받게 되더라도(히브 12,11), 우리는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누리게 되는 그 구원의 기쁨으로 오늘을 산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우리는 복음을 읽고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복음을 꾸준하고 진실하게 실현해 나감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완성해 나간다. 한편 우리가 듣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히브 4,12)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고 말"(이사 45,23) 것이기 때문이다.



연중 제21주일



(나해) 요한 6, 60-69: 2000/08/27

제자들은 오늘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60절)하고 불평한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옳고 그대로 살면 좋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나를 내 주면서 살지 않는다. 오히려 나에게 하나라도 더 보탬이 되도록 받으면서 살고 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 말씀이 하느님 나라에서라면 몰라도, 이 세상을 사는데는 좋지 않다고 여기고 있으며 예수님도 믿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는 거부마저 한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무슨 믿음이냐?" "나도 없는데 누굴 주란 말이야?"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61-62절) 육이 내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육은 죽으면 썩어 없어질 뿐이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다. 그런데도 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적으로 육을 지니고 있는 우리가, 육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우리를 이 육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육에서 해방시켜 주고, 영적으로 살게 해준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63절)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신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믿고, 우리가 경험했던 것만을 인정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게 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 그토록 고생하셨다. 마지막에는 죽음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경험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인간에게 신앙을 깨우치도록 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65절) 그러자 "이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66절)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67절) 시몬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68절)라고 대답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몸인 성체성사를 받아 모시며, 생명을 이루는 주님의 말씀을 실현하여 하늘나라를 이루기로 합시다.



연중 제21주일



(가해) 마태 16,13-20; '99/08/22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나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기를 바라는가?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모습을 기대하는가?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 나름대로 평가하고 또 여러 가지 자신들의 기대를 표현합니다. 정의와 윤리의 투사인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의 왕국을 현실 생활 속에 건설한 '엘리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인 모세,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 '예레미야'.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바라고,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새기고 있는가?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16)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신 하느님께서 자기와 함께 살아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주님이 되시길 기대했습니다. 주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주님께서 오셔서 주님을 명확히 뵈옵고, 자기 삶에 해당하는 주님의 말씀을 확실히 전해듣고 자신들과 함께 해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믿고 기대하는 바를 받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17)

믿는 이들의 행복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또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이들은 이 지상에서 하늘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미리 사는 사람들이다. 우선 교회를 건설하는 일이다. 아니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도록 주님께 자기를 내맡기는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를 통해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루고자 주님 앞에 나오는 일이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18)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 주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아 사람들을 죄와 악의 굴레에서 풀어내 살리는 일이다. 교회의 사명이자 본질은 바로 예수 우리 주님의 뒤를 따라 나 자신을 바쳐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19)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아시니 마지막 날까지 다른 이들의 평가와 기대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주님께 다가갈 수 있다.



연중 제21주일



(다해) 루가 13,22-30 : 98/08/23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해도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고 대답할 것이라"(루가 13,24.27)고 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주님께서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13,21)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가? 아예 우리가 처음부터 안 하려고 했던가, 몰라서 못했던 것이 아니고, 하려고 하다가 쓰러지고, 잘 하다가 실수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마치 법처럼 가혹하게 끝나버리는가?

그렇지 않다. 부자 청년이 자기가 가진 것이 많아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떠나가게 되자, 사람들이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루가 18,26) 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27)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또 부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루가 24,47-48)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만일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믿고 회개하여 다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올바르게 살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다시 받아주실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또 용서받음으로써 주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는 증인인 한편 또 다른 면에서 우리 공동체는 회개하고 다시 살려고 하는 죄인들을 받아들여 용서해주고 의인삼아 함께 살 수 있도록 증거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이지만, 또 한편 자비를 베푸는 공동체가 됨으로써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증거하게 된다. 우리 교회는 잃어버린 아들이 다시 돌아오자 그를 끌어안고 그가 집을 떠나기 전에 누리었던 위치를 다시 안겨주고, 잔치마저 벌여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간직한 교회인 것이다.(루가 15,20-24 참조)



연중 제21주일



(나해) 요한 6,60-69: '98/08/24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갈 사람들이 혹시 라도 길에 가다가 배고파서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풀 위에 앉게 하시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베풀어 남자만 세어도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배불리 먹고 예수님 덕분에 편히 집에 돌아가게 된 것을 감사드리고 집에 돌아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전하고 자기 생업을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을 배불리 먹여주신 예수님 곁에서 고생하지 않고 먹고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지금 함께 사는 가족과 집, 재산들을 주님께서 주셨다고 믿어 주님께 감사드리고, 이것이 주님의 축복이라고 알리고, 우리가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드리기는커녕 부족한 것과 불편한 것만을 거론하며 못마땅해하고 불평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잘 아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65절)

그런데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27절)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63절)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 올라가자, 주님의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자.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주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느니."(이사 2,3)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요한 6,67)는 질문에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68절)고 대답했다. 베드로가 그런 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베드로의 주님께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69절)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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