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VI

(나해) 마르 7,1-8.14-15.21-23; 15/08/30

오늘은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의 제1장 지구의 환경 오염과 제2장 피조물에 대한 창조의 가르침, 제3장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에 이어, ‘제4장 온전한 생태학(137-162항) ’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회칙에서 제안하는 핵심은 정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온전한 생태학입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우리의 고유한 자리와 우리와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존중하는 생태학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15항)입니다. 사실, “자연은 우리 자신과 분리되거나 우리가 사는 단순한 배경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139항). 이는 모든 분야에서 사실입니다. 경제와 정치, 여러 문화, 특히 가장 위협을 받는 문화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 문제와 인간 사회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오늘날 환경 문제의 분석은 인간, 가정, 직업 관련 도시 상황의 분석과, 인간들 자신과의 관계 분석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141항). 따라서 “자연계와 사회 체계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포괄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과 사회와 관련된 두 가지 별개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당면한 것입니다”(139항).

이 제4장 온전한 생태학은 환경 생태학, 경제 생태학, 사회 생태학(138-142항), 문화 생태학(143-146항), 일상생활의 생태학(147-155항), 공동선의 원칙(156-158항), 세대 간의 정의(159-162항)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I. 환경 생태학, 경제 생태학, 사회 생태학(138-142항)

모든 것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지구의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성분들은 우리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단편적이며 분리된 지식은 더 폭넓은 관점으로 통합되어야 합니다. 이는 “생태계들 사이의 관계와, 사회 상호 작용의 다양한 분야들 사이의 상호 관계”(141항)를 고려하려 하고, 또한 제도적 차원을 포함합니다. “사회 제도의 건전함은 환경과 인간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칩니다”(142항).

II. 문화 생태학(143-146항)

가장 넓은 의미에서 “생태학은 인류의 문화적 보화를 보호하는 것도 포함합니다”(143항). 이는 민족들의 권리와 문화를, 그들 문화의 지역 사회 주체들의 적극적 참여와 “토착 공동체에 대한 특별한 관심”(146항)으로 통합하여야 합니다.??

III. 일상생활의 생태학(147-155항)

온전한 생태학은 일상생활을 포함합니다. 이 회칙은 도시 환경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인간은 적응이라는 훌륭한 능력을 갖고 있고, “환경의 제약에 반응하는 개인과 집단은 주변 환경의 적대적 영향을 완화하고 무질서와 불확실성 안에서도 생산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놀라운 창의력과 관용을 보여 줍니다”(148항). 그럼에도 공적 공간, 주택, 교통을 포함한 인간 삶의 질의 온전한 개선은 여전히 더욱 진전될 필요가 있습니다.(150-154항).

생태학의 인간적 차원은 또한 “인간 삶과 우리 본성에 새겨져 있는 도덕률의 관계”(155항)를 나타냅니다. “우리의 몸은 환경과 다른 생명체와의 직접적인 관계 안에서 우리 자신을 확립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을 하느님 아버지의 선물이며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피조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됩니다”(155항).

VI. 공동선의 원칙(156-158항)

온전한 인간 생태학은 “공동선의 개념과 분리 될 수 없는 것”(158항)입니다. “불의가 판치고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인권을 빼앗기고 소모품처럼 여겨지게 되는”(158항) 오늘날의 상황에서 공동선을 위한 노력은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158항)에 기초한 연대를 이루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V. 세대 간의 정의(159-162항)

공동선은 또한 미래 세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삶이 짧아 기다릴 수 없는” 오늘날의 가난한 이들을 잊은 채로 “세대 간 연대와 분리된 지속가능한 발전을 더 이상 논할 수 없습니다”(159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이사 29,13; 마르 7,6-7) 라고 예언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들어,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8) 라고 설명하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연을 잘 가꾸어 우리에게 이롭게 사용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꾸고 돌보다 보니,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을 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까지 여기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교황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의 필요에 따라 자연을 가꾸기도 하지만, 주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우신 의도와 유지 관리하시려는 뜻도 존중하기로 합시다. 아울러 개인이나 어느 한 부류의 필요와 이익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 전체의 선익을 고려하여, 공동선의 개념에 관련하여 자연을 가꾸고 개발하기로 합시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8)



연중 제22주일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1

(가해) 마태 16,21-27; 14/08/31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은 제 4 장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1’입니다. 교황은 이 4 장 전반부에서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을 다룸으로써 복음화 사명의 참되고 본질적인 의미가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교황은 ‘케리그마의 공동체적 사회적 반향’이라는 제하에서, 케리그마(복음선포)에는 명료한 사회적 내용이 담겨있고, 복음의 핵심에는 공동체 생활과 다른 이들에게 대한 헌신이 있으며, 첫 선포의 내용에는 사랑을 중심으로 한 직접적인 도덕적 의미가 담겨있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믿는 것은 성령께서 모든 인간의 상황과 모든 사회적 관계에 파고 들어가려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의 핵심에서 우리는 복음화와 인간 증진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구원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과 참다운 형제애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유대가 성경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더 이상 형제애와 정의의 복음의 삶을 살아가려는 열정을 잃고 그러한 삶에 더 이상 감탄하거나 매료되지도 않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해롭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등의 성경구절에서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형제자매들을 향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우선하며, “사랑의 봉사는 교회의 사명을 이루는 구성 요소이며 교회의 본질 자체를 드러내는 필수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단순히 하느님과 개인적인 관계나,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자선 목록’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즉 이 세상에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제안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다스리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은 보편적인 형제애, 정의, 평화, 존엄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사목자들은 인간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 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부르시지만, 그들이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종교가 국가 사회 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라고, 국가 사회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누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콜카타의 데레사 복자의 메시지가 들리지 않도록 이를 성당 안에 가두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 것으로서,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 기준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간추린 사회 교리』를 공부하고 활용하십시오. 더 나아가서 교황이나 교회가 사회적 현실을 해석하고 현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독점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각 지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각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책임이라고 말하십니다.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이란 제하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시어 언제나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 곁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사회에서 가장 방치된 이들의 온전한 발전에 대한 우리 관심의 바탕이 된다고 하시며,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담아 잘 들어주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가난한 사람들이 “여러분을 걸어 주님께 호소하면 여러분에게 죄가 될 것입니다.”(신명 15,9) 라고 경고하십니다.

자비의 복음과 인간 사랑으로 인도되는 교회는 정의를 요구하는 울부짖음을 듣고 있으며, 온 힘을 다 기울여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고자 합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하신 말씀은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고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발전을 촉진하도록 일하라는 의미입니다. ‘연대성’이라는 말은 어쩌다가 베푸는 자선 행위 이상의 것입니다.

연대는 소수의 재화 독점을 극복하고 공동체 차원에서 모든 사람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전제로 합니다. 재산의 사회적 기능과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 사유 재산에 앞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들의 자발적인 행동입니다. 연대는 가난한 이들에게 속한 것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결정으로 실천되어야 하며, 새로운 확신과 태도가 생겨나지 않은 채 구조만 바꾸면, 그 구조는 오래지 않아 부패하여 억압적이고 비효율적인 구조가 될 뿐입니다.

평화는 인권 존중뿐만 아니라 민족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합니다. 남보다 잘사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남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너그러이 일정한 자기 권리를 양보합니다.

브라질 주교님들은 “날마다 국민, 특히 권리를 침해 당한 채 빈민지역과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땅도 집도 먹을 것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곤경과 슬픔에 함께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가난을 보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그들의 고통을 아는 우리는 분노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먹을 만큼 충분한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굶주림은 재화와 소득의 불의한 분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분노합니다. 이 문제는 낭비의 만연으로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양식이나 ‘품위 있는 생계’의 보장만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복지와 번영’, 곧 교육과 의료 혜택, 고용을 바랍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는 가차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2-13)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1베드 4,8) 정통 교리의 옹호자들이 가끔 수동적이라거나 특권층이라는 지탄을 받으며, 무참한 불의의 상황과 그 불의를 지속시키는 정치 체제와 관련하여 공모자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가장 작은 이들, 사회가 저버린 이들을 선택합시다.

하느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실”(2코린 8,9) 정도로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마태 25,35) 고 하셨고, 모든 이에게 베푸는 자비가 천국의 열쇠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25,35 이하).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선택해왔습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라고 초대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다른 이를 “어떤 의미에서 나 자신과 하나”라고 여기며 다른 이를 향하여 관심을 쏟도록 하십니다. 가난한 이가 겪는 최악의 차별은 영적 관심의 부족입니다. 평신도의 근본 소명과 사명은 복음을 통하여 다양한 현세의 일들과 모든 인간 활동을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어느 누구도 가난한 이들과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을 쏟는 데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사회를 약화시키고 침체시켜 새로운 위기로 이끌기 마련인 병폐에서 사회가 치유되어야 하기 때문에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해야 합니다. 정의의 증진은 더 나은 소득 분배, 일자리 창출, 단순한 복지 정신을 넘어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진보를 분명히 지향하는 결정, 계획, 구조, 과정을 요구합니다. 어떤 교회 공동체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지 않고 안주하면, 종교실천이나 무익한 모임이나 공허한 말로 위장한 영적 세속성에 빠지게 됩니다.

온갖 인신매매의 희생자들, 배척과 부당한 대우와 폭력의 상황에 시달리는 여성들, 자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무죄한 태아들과 자연의 피조물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살펴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연중 제22주일

(다해) 루카 14,1.7-14; 13/09/01

저는 지난 8월 22일부터 23일까지 서울대교구 한마음 한몸 자살예방센터의 지원으로 한국 자살예방협회에서 주관한 자살예방 교육에 참여했습니다. 그 교육을 받으며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 잠깐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라고 합니다. 연령대로 보면, 10대에서 30대까지의 사망원인의 1위가 자살이라고 합니다. 50대 이상에서도 심혈관계 질환 다음으로 가장 높은 사망원인이 자살이랍니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는 한 해 평균 1만 5천여 명이, 하루 평균 약 44명이, 한 시간에 1.8명 꼴로 자살하고 있습니다. 2011년의 기록을 보면 인구 50,734,384명 중 약 3.13%인 15,906명이 보고된 자살자의 수입니다. 같은 해 범죄로 인하여 생명을 잃은 사람은 1,500명이라고 하니, 자살자의 수가 염려할 만큼 많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보고되지 않아 통계에 잡히지 않은 자살자의 수는 5%에서 25%가 더 많다고 합니다. 일례로, 자살하기 위해 차를 몰고 사망하여도, 교통사고로 잡고 사망원인을 자살로 삼지 않기에 더 많은 사례가 있다고 봅니다. 치명적이지 않은 자살 행위자는 실제 자살자의 수보다 약 40에서 100배가 많다고 합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약 2,484,408명이 2011년에 자살을 생각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통계적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누가 자살을 합니까?

우울한 사람,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 왕따나 소외를 당하는 사람, 성적이나 실적이 안 좋은 사람, 학교나 사회에서 폭력을 당하는 사람, 자살자의 유가족.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모두 다 자살을 하는 것도 아닌 데 비해, 저 친구나 저 이는 아닐 거야 하는데도 자살을 했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나니,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자살의 가능성 앞에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자살을 합니까?

자살은 자신이 지금 죽을 만큼 힘들다는 심정을 행동으로 표현하며, 자신이 지금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문에 나고 싶어서, 유명해지고 싶어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자살은 우리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합리적이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으며, 결코 권하거나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자살로 생명을 마치기에는 너무나도 귀중합니다. 자신의 생명은 자신에게 맡겨져 있을 뿐이지 자기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 그리고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라는 면에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단절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자연인과 신앙인의 기본 가치관입니다. 그럼에도 충동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저버리는 이들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자신의 생명을 잘 유지하고 성숙시키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살에도 징후가 있습니까?

자살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가족 몰래 수면제나 진통제 등의 약을 사 모으거나 위험한 물건을 감춘다든지, 자해나 자살시도 등 죽음과 관련된 직접적인 활동을 하겠다고 위협한다든지, 일기장이나 노트 또는 메모지 등 자신에게 소중한 소유물을 남에게 맡기고 주변을 정리한다든지, 자살 사이트나 엽기 사이트에 심취하는 등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죽고 싶다”, “나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더 이상 사는 것이 의미가 없어”, “내가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사라진다면” 등의 말을 일기, 그림, 노트, 시 등에 쓰며 죽음을 암시한다든지, 죽은 가족에 대한 죄의식이나 재결합의 소망을 표현한다든지, 자살 이후 자신의 모습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든지 등도 자살의 직접적인 언어표현입니다.

그런가 하면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죽음에 대해 관심을 보이거나 혹은 농담으로라도 자살에 대한 계획을 말한다든지, 선천성 심장질환, 심한 복통, 심한 두통, 암내, 피로감 등 감정과 관련된 신체적 불편함을 호소한다든지, 혼자 외롭게 행동하며 자신의 좌절, 실패, 불행에 대한 대화를 회피한다든지, 자기능력에 대해 회의하고 절망감을 표출하거나 열등의식에 사로잡힌다든지, 평소와 다르거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폭력이나 반항적인 행동을 보인다든지, 오랫동안 불안정하고 침울하던 학생이 뚜렷한 이유 없이 갑자기 평화스럽게 보이거나 즐거워지는 등 태도가 변한다든지, 우울감 해소를 위해 자신과 비슷하게 느끼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의지하려 한다든지 하는 간접적인 행동표현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없어지는 것이 훨씬 나아”,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라는 등의 표현을 한다든지, 상실이나 실연 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지나치게 미화시키는 내용의 대중음악에 심취한다든지 하는 것이 자살의 간접적인 언어표현입니다.

심지어는 자살을 모험적이고 로맨틱한 것으로 생각한다든지, 이전에 비해 외모에 대한 정상적인 관심이 부족하다든지, 평상시와 달리 식사와 수면상태가 지나치게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등의 변화가 있다든지 등이 자살의 상징적 의사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럼 이런 이와 같은 징후를 보이는 자살 고위험자를 발견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자살이 의심되면, 그것이 확실하지 않더라도 가족이나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알려야 합니다. 특히,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더라도 자살과 관련된 경우에는, 꼭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주위에 알려야 합니다.

두 번째, 혼자 있지 못하게 합니다. 자살은 혼자 하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주변에 누군가가 있으면 쉽게 자살하지 못합니다. 비록 그 사람이 불편하다고 하더라도, 자살 충동은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옆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함께하도록 합니다.

세 번째, 자살을 시도할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이나 상황을 가깝게 두지 못하도록 합니다. 고위험자가 충동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있는 장소에 있지 못하게 하고, 주변에 그런 자살에 사용할 만한 위험한 약이나 물건을 치워줍니다.

네 번째, 전문가를 만나도록 합니다. 자살 고위험자의 자살 가능성을 낮추는 가장 중요하고 빠른 길은 이들이 정신과 의사를 포함한 자살예방전문가를 빨리 만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보건복지부의 24시간 자살예방상담소’인 129나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 자살예방센터’ 24시간 핫라인인 1577-0199 또는 ‘한마음 한몸 자살예방센터’인 1599-3079(생명친구)나 ‘생명의 전화’인 1588-9191 등으로 연락하거나 안내해 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누군지도 모르는 저 마포대교에서 떨어지려고 하는 사람들만이 아닌, 내 주변에서 혹시 자살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여, 죽음의 유혹보다는 삶과 생명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언제 기회와 여건이 되면, 우리 본당에서 ‘생명지킴이 교육’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쏟으며, 자살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도록 예방합시다. 그러나 “그런 생각하면 못쓰지”, “그런 생각하면 죄야, 죄!” 등으로 비난하거나, “내가 다 해결해 줄께” 라는 등의 불완전한 희망을 심어주지는 맙시다.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되, 어떠한 상황에서도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미래를 보여줍시다. 죽어야 할 이유를 넘어서는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도록 일깨우고, 자존감을 북돋아 주며, 주님께 의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생명의 문화를 넓혀 나갑시다.



연중 제22주일

(나해) 마르 7,1-8.14-15.21-23; 12/09/02

그리스 터키 지방의 성지순례를 하다보면, 한때 사도 바오로가 목숨을 걸고 전교했고 그 활발했던 신약의 소아시아 교회들이 지금 모두 다 없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과 바오로의 서간에 나오는 코린토, 갈라티아, 필리피, 콜로새, 테살로니카 교회 그리고 묵시록에 나오는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 등의 일곱 교회들은 벽돌 한 장 제대로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허물어졌고 그 신자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천주교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회교를 국교로 하는 오스만 터키족이 쳐들어와 모조리 부셔버렸고, 지금은 사도 바오로의 선교여행을 성지순례하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을 위한 박물관과 성당터 흔적만을 남겨놓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신앙이 인간 각자의 자유로운 믿음과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군대의 사령관이나 마을의 촌장, 국가의 왕이 종교를 선택함으로써 집단적으로 개종하고 국교화되는 종교는 곧 더 큰 힘이 지배하게 될 때 다른 종교로 대체되고 그 종교는 흔적마저 사라져버립니다. 하느님은 진리 자체이고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영원하시지만,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이 자신들의 존재 근거인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을 상실하면 교회는 사라져 버립니다.

교회가 단순히 교회를 찾는 이들에게 기분 전환 정도의 심리적인 위안이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정신적인 안정 그리고 교회의 조직을 통해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제공하는데 그친다면 그 교회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돈으로 치장된 인테리어와 데커레이션 그리고 버라이어티 쇼이기 때문입니다. 더 분위기 좋고 기분을 좋게 해주는 다른 소재들이 세상에 많이 생겨났습니다.

천주교회는 천주교 신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사회는 늘 소수의 계층과 세력들이 사회 구성원 전체가 받아야 할 혜택을 자신들을 위해 치부하고 사용하려고 했고,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샀고 결국엔 패망하거나 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게 되는 결과도 가져왔습니다. 천주교가 천주교 신자들의 편이와 이익만을 제공해준다면, 그 성당은 그 사회에서 배척되고 말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아무래도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기도하는 신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주지 않겠느냐?” 라고 하면서 자신들과 자신들의 가정의 안위와 편익만을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가 아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내려주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은총과 사랑을 한없이 베풀어주시면서 골고루 나누어 쓰도록 하셨는데, 그 은총을 받아 나누어야 할 신자들이 자신들은 최소한의 것만 취하고 형제들과 나누려고 자신의 것을 버려야 하는데, 거꾸로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독점하려 든다면,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은총은 오히려 점점 줄어들어 재화처럼 한정될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기쁨과 축복마저도 빼앗길 것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

가끔 예비신자 교리를 마친 세례 후보자들을 면담하면서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까지 살면서나 공부하면서 혹시 주님이나 하느님께 대한 느낌이나 생각이 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어떤 분들은 이러 저러한 체험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어떤 분들은 “아직,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라는 답변을 합니다. 그런 답변을 들을 때마다, 사도 바오로가 헌신적으로 뛰었지만 지금은 터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떠올리며, 섬뜩 섬뜩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아무런 느낌 없이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세례자가 안타깝기도 하고, 자신의 생명을 걸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 세례자들이 자신들의 길을 비춰줄 주님에 대한 아무런 느낌이나 생각조차 없다면 어떻게 신앙의 길을 걸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도 들고, 혹여 우리의 교육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싶어 자책하며 무척 힘겹습니다. 이러다가 교회는 있어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지향을 가지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그리스도교회는 없어지고, 교회 안에 신자는 있어도 신앙은 없는 교회가 되지는 않을지?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우리가 믿는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기에 죽음의 처지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도, 나와 나의 가족 그리고 재물과 육이라는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현세에서의 편의와 이득만을 추구한다면 우리 교회는 내적으로 썩어버리고 분열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주님의 말씀이 기본과 근거를 이루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미신행위나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주님과 친교를 이루는 고리인 내적 체험이 없다면, 그 신앙은 이론적이고 논리적이며 신학적인 교의와 사상에 그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신비체험은 있지만 그 체험이 내적 감흥으로만 머물고 기도와 절제와 희생 봉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종교적인 신심행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 1,21-22.27)

마음속으로부터 주님을 깊이 믿고 그 말씀을 실현하여 하늘나라를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형제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스스로 따르고 봉사하면서, 인간 구원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온전히 실현할 때 비로소 우리 교회는 천주교회가 되고 하늘나라를 향해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다가오는 9월 16일 예비신자 환영식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생애 안에 담아왔던 우리의 신앙을 형제들과 나누기로 합시다. 우리 마음 안에 살아계시면서 우리를 육으로뿐만 아니라 영의 인도로 살게 해주시는 주님과의 친교를 형제들과 나누기로 합시다.

순교자 성월을 시작하는 오늘, 우리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보여주고, 증거하면서 초대합시다. 내가 완전하지는 않아도 나와 함께하시면서 나를 돌봐주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내가 얼마나 기쁘게 살고 있는지. 나의 갖가지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으로, 내가 얼마나 평안하게 살고 있는지. 무한경쟁의 사회와 각박한 현실에서 삶에 찌들고 지쳤을지라도,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에 우리 가슴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고,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기에 가족과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드리며, 주님의 도우심으로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묵묵히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 믿는 이의 삶으로 증거합시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신명 4,7-8)



연중 제22주일

(가해) 마태 16,21-27; 11/08/28

우리는 늘 이해관계 안에 살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집 안에서 몇 째 아들과 몇 채 딸로, 학교에 다니면서도 어머니의 치맛바람으로 반장도 되고 그러면서 점차 친구들과 주위의 시샘과 질투도 사면서 자라납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는 앞집, 뒷집 그리고 내가 머무는 어느 곳에서든지 여러 사람들과의 이해관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자신의 체험세계와 자기가 처한 이해관계 속에서 번번히 예수님을 대합니다. 지난 주일 복음인 마태오 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고 물으시자, 시몬이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7-18)라고 칭찬해 주시며, ‘베드로’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십니다. 그리고 덧붙여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9)라고 하늘나라를 짊어지고 갈 열쇠마저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21)며 수난 예고를 하시자, 베드로는 질색팔색을 하면서 반대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22) 어떻게 얻은 열쇠인데… 예수님께서 그 왕국을 지키시고 계셔야 자신의 열쇠관리가 빛을 볼 수 있을 텐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지금 당장 왕국을 설립하기는커녕 그 주춧돌마저 손에 쥐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잡혀서 돌아가신다니?! 게다가 그렇게 돌아가신 지 사흗날에 또 되살아나셔야 한다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씀이신가? 베드로는 답답하고 그야말로 대책이 안 설 정도로 당황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 혼이 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

그리고 이어지는 마태오 복음 17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비처럼 하얘집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아 정말 이분에게 줄 대고 이분을 따라가기만 하면 정말 뭔가 되긴 되겠구나 싶어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17,4) 그러자 마치 베드로의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근거한 “베드로의 이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5)고 전합니다.

그런가 하면 급기야 마태오 복음 26장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 뒤따라 갔다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제자 아니냐고 묻자, 베드로가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26,74)하면서 세 번씩이나 부정하자 마자 닭 울음 소리를 듣습니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75)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이 슬피 우는 모습이 우리 인간의 현주소인 듯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현실의 이해관계 안에 놓여있고, 또 그 안에서 나약하고 부족한 본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회의 장벽 앞에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자꾸만 쓰러질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배반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 인간에 실망하시거나 나무라시거나 탓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 대신에 우리에게 새 생의 희망의 길을 열어주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계속 주님의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맡겨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오늘 가톨릭 신자인 우리에게, 우리 가톨릭 교회의 제1대 교황이었던 베드로의 신앙행태를 우리에게 가감없이 묘사해 전해줌으로써 우리에게 새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전해줍니다.

성 바오로 사도도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우리가 주님의 사도직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고 말해줍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18-26.28)

그러면서도 오늘 두 번째 독서를 통해 이해관계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 삶의 조건과 상황 그리고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 속에서 새 희망의 길을 식별하며 걸어나가도록 촉구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1-2)

오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촉구하시는 주님께 우리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우리 다 같이 큰 소리로 응답합시다.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멘.’



연중 제22주일

(나해) 마르 7,1-8.14-15.21-23; 06/09/03

찬미 예수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저는 휴가 동안 시카고에 있는 Catholic Theological Union 이란 신학 전문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에 등록하여 수업을 듣고 왔습니다. 시카고는 정말 더웠습니다. 매일 82도 84도의 더위가 계속되고 습도는 75도나 되고, 시애틀에서 비 다 그치고 갔는데도 비는 오고 그야말로 한국의 여름 같았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16일까지 기숙사에 들어와야 한다고 해서 부지런히 갔더니, 막상 들어가 보니 수업이 21일부터 시작한다고 21일부터 밥을 준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고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한국시장에 가서 밥통도 사고, 냄비도 사고 이것저것 사서 거기 사는 수녀님들이 찌게 끓이는 법 등을 배워서 밥을 해먹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살다가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참 황당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남자들은 참 불쌍하다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자기 먹을 것조차 스스로 준비할 수 없고 부인이나 다른 누구가 대신 준비해줘야 먹고 살아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밥은 밥통에 넣고 한 일주일동안 밥 다 먹을 때까지 보온에 두었다가 시간만 되면 꺼내먹고, 된장찌개는 물에다 된장 풀어서 호박, 두부, 양파, 파, 버섯 썰어넣고 멸치 넣어서 끓여 먹는데 준비하는 데만 한 시간 꼬박이 걸렸습니다. 반찬이라고는 김하고 멸치하고 장조림인데, 그나마 찌게에 이것저것 다 넣어 먹으니까 그게 반찬이겠거니 하면서 먹습니다. 혼자 해 먹으니까 재밌기도 하고, 남이 해 주면 이것저것 남기기도 하는데 이건 내가 손수 만드니까 버릴 것 없이 다 먹어치웁니다.

집중수업 기간 동안에 아침 6시에 일어나 성당가서 기도하고 7시 30분에 미사 드리고, 8시에 밥 차려먹고 설거지 한 다음에 학교에 가서 9시부터 수업하고 12시 점심시간에는 밥 차려 먹을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샌드위치 한 쪽 먹고 4시 30분 수업이 끝나고 돌아와 찌게 해 먹고 6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묵주기도하면서 걷고 와 막상 숙제를 해야 하는데 얼마나 졸린지 그냥 꾸벅 꾸벅 졸면서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간신히 버텨 나갑니다.

어제는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는 빨래 돌아가는 동안 옆에 의자에 앉아서 책 읽느라고 꼬박 꼬박 졸면서 세탁하고 건조했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정말 전쟁 같고, 생존경쟁이구나 싶었습니다. 집을 떠나 신학교 때부터 제가 사제생활을 하는 동안 뒤에서 밥해 주고, 빨래해 주고, 청소해 주신 모든 분들께 새삼 감사드립니다.

공부할 시간은 모자라고 숙제는 많고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것저것 그냥 끼니를 때우면서 지냅니다. 다음 주부터 정규 수업시간 때는 좀 시간적인 여유가 있겠구나 싶었는데, 집중수업 마치자마자 또 숙제를 내 줘서 여기 오면서도 숙제를 들고 왔습니다.

잠시 휴가를 이용해서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몸은 고되고 정신은 없지만, 편한 마음으로 움직이는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한 본당의 주임사제라는 직책이 한 인간이 짊어지고 가기엔 너무나 벅찬 자리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2006년 6월 30일까지 첫 번 임기를 마치는 저에게 시애틀 대교구장님께서는 2009년까지 두 번 째 임기를 살아달라는 인사발령장을 내려주셨지만, 지금 사제 생활 19년차로 살아가는 저로서는 앞으로 사제로서 살 삶이 지금까지 살아온 기간보다 훨씬 많은데, 내 사제 삶에 새로운 것을 충전하지 않고 그냥 본당 신부로서 일만하다가 세월을 다 보내는 것이 아쉬웠고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청력은 감퇴되고 눈은 점점 나빠져 가고 다시는 공부할 기회가 돌아오지 않겠구나 하는 마음에 선택한 것이 주교님께 받아들여져 공부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이곳을 떠나는 마음은 아쉽지만, 그나마 성당을 다 짓고 가게 되서 위안이 됩니다.

이렇게 늦은 감이 없지 않은 저에게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고 배려해 주신 서울대교구 정진석 추기경님과 염수정 주교님을 비롯한 교계 여러분과 이곳 타코마 한인 성당에서 봉직하는 동안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신 시애틀 대교구의 Alex. J. Brunett 대주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고 배려해 주신 본당 신자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제 주위의 많은 분들을 통해 성 정하상 바오로 타코마 한인 성당에서 무사히 임기를 마치도록 허락해주시고 교회를 통해 또 새로운 세계로 저를 부르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차부인 재치부인이라는 연속극 주제가 가사에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궂은 일 좋은 일”이 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겪은 모든 일 중에 서로의 장점과 서로에게 기쁘고 감사했던 일 만을 담아가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21-22)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쥐어주신 좋은 재주들을 잘 살려서 서로의 삶에 충실하여 우리 모두 좋은 사람이 되어 하늘에게 기쁘게 만납시다.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서로 웃으면서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제 미사와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하겠습니다.

혹 시간이 나고 여유가 되시면,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연중 제22주일

(다해) 루가 14, 1. 7-14; 2004/08/29

우리말에 허세를 부린다는 말이 있다. 허세라는 단어는 허장성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특히 남자들이 허세를 부리는 이유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나온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이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다른 사람들이 자기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자기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위치와 신분으로 또는 소유와 명예 등으로 치장하고 가장하는 것이다.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나 자기 말을 듣게 하려고 미리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나 방법만 다를뿐 같은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위선과 거짓으로 자신을 드러내어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하는 이유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에 자신감이 없거나 열등감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선물로 주신 자기 고유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또 그러기에 자신만의 장점을 발전시키지 못한 체 남의 장점이 부러워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고 싶어하거나 남을 깍아내림으로써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이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몸은 한 지체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발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사도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가르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1고린 12, 12-15; 27. 29. 31)

그리고는 그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3, 4-7)

우리가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그 성격과 자질과 특성을 계발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를 찾음으로써 남을 찾아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기에 내가 가지지 않은 점을 다른 이에게서 찾을 수 있고, 또 그렇게 찾게됨으로써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함께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 감사드리며, 형제들을 경쟁상대가 아니라 진정 나에게 보내주신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서로 도와서 하나의 교회를 이룰 수 있다.

그 때 비로소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 14, 11) 자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가졌기에 스스로 낮출 수 있고,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하느님께서 주신 자기 자신을 가졌기에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나갈 수 있다.

그리고 높다고 여겨지는 형제에게 굽실거리지 않고, 낮다고 여겨지는 형제에게 차별대우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서로가 이해관계 속에서 만나지 않고 형제로 만날 수 있게 된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 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 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12)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형제를 우리보다 못하다고 여기던 과거의 생각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선물로 여길 수 있게 되어 형제를 아끼고 존경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13)

가진 사람만이 나눌 수 있다. 가지지 못한 사람은 나누지 못하고 더 가지려고 탐욕스럽게 달려들 뿐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졌는가? 자기 자신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의 돈이나 시간이나 몸을 나눌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자신의 것을 나눔으로써 형제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께 받아 누릴 기쁨과 평화를 이미 이 땅에서 미리 받아 누리는 것이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에서 천국의 삶을 미리 앞당겨 누리며 사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있고, 잔치가 벌어져 있고 또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교회가 있고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이 계시고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가 계십니다."(히브 12, 22-23)



연중 제22주일

(나해) 마르 7, 1-8. 14-15. 21-23; 2003/08/31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주일미사 한 번 빠졌다고 꼭 고해성사 보아야 하냐?" "고해성사 본다고 죄를 안 짓게 되는 것도 아닌데 봐서 뭐하냐?" "고해성사 본다고 뭐가 달라지냐?" "내 죄를 남에게 말하기 싫다." "성체를 영하려면 고해성사를 봐야하는데, 고해성사 보기 싫고 그래서 성당 안 간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우리 스스로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고해성사는 성체성사를 영하기 위한 사전 준비요 의무다. 왜 우리는 고해성사를 보게 되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예수님께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죄와 분노 그리고 그에 따른 죄책감은 기도할 때마다 슬그머니 떠올라 우리를 분심에 들게 하고, 우리의 생각과 영을 붙잡고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이미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그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21-23절)라고 말한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그것도 즐겨 잦아들고 갊아 들어 주님과 하나되는 것을 방해하는 죄와 악이라는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께 더욱 더 깊이 들어가고 싶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인간에게 죄의식을 불어넣어 수치스럽게 하거나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하나되기 위해 자신을 정화하고 은총의 지위를 회복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은총의 성사이다. 자기 죄로 인해 주님께 나아갈 수 없다면 얼마나 큰 형벌인가? 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몸으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신 주님께서 우리의 나약함과 부당성을 아시고, 우리가 계속 빠져드는 죄악의 수렁에서 우리가 헤어날 수 있도록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바로 고해성사다.

성사를 주는 이가 천사냐 인간이냐도 아니요 어떤 사제가 성사를 주느냐도 아니요, 교회의 사제에게 죄를 사하는 권한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를 씻고 주님께 흔쾌히 나아가도록 하자.



연중 제22주일

(가해) 마태 16 21-27; 2002/09/01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24절)라고 말씀하신다.

"자기를 버리고"라는 말씀은 특정 사물이나 사람에게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과 달리 애착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말이다. 돈에 대한 애착을 예로 들자. 돈을 쓰면서 자기를 과시하려는 마음, 돈으로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지배하려는 마음, 돈만 주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른 이들의 호의와 수고를 감사하지 않고 그냥 자기 것으로 취하려는 마음을 버리라는 말이다. 또 정반대로 돈이 없어서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는 마음, 돈이 없으면 풀이 죽고 돈이 되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버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버려야 하나 그리고 버려서 무엇하나?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만을 바라고 그분의 뜻을 담고 그분의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그것과 다른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기억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씀은 버릴 수도 없으며 끌어안고 가야할 자신의 기질과 성격 그리고 생을 통해 굳어진 습관에서부터 시작해서 부모나 가족 중의 반갑지 않은 부정적인 모습과 상황들을 말한다. 우리를 먹여 살리고 우리를 지금까지 있게 해 왔던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특성, 기술, 장단점, 고쳐지지 않는 묵은 습관들 그리고 부모와 가족 및 자신이 함께하는 동료와 이웃 그리고 우리 사회와 민족의 부담스러운 삶이 자신이 짊어지고 걸어야할 자기 십자가다.

그러기에 이 자기 십자가는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 자신에게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 면에서는 주님 앞에 자신을 겸손케 하고 주님을 더욱 열망하게 하는 요인도 된다.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은 진정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과 목표를 보여준다. 우리가 사는 이유와 목표는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찬미하고 나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를 내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보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 생애를 통해 세상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사를 봉헌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구원의 신비는 자기를 채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버림으로써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를 이루고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연중 제22주일

(다해) 루가 14,1.7-14; 01/09/02

70년대에 교회에서 유행한 말이 있었다. "나는 너의 좋은 점을 안단다." 우리가 안다는 것이 흔히 상대의 약점과 단점을 안다는 것을 뜻하고,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상 속에 교회가 던져주는 빛이었다.

예수님도 자기의 고향인 나자렛이란 동네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셨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아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마르 6,3) 그래서 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거기서 병자 몇 사람에게만 손을 얹어 고쳐주셨을 뿐, 다른 기적은 행하실 수 없었다."(5절) 한다. 이 못믿음(불신앙)과 못따름(불순종)은 예수님의 기적마저도 막는다. 이는 의심과 교만이라고 하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온다. 집회서는 "오만한 자의 불행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뿌리가 그에게 깊이 박혀 있는 까닭이다."(3,30)라고 한다.

또 한가지 "사람은 선물이다."란 말도 함께 유행했다. 산 길을 걷다가 사람이 지은 집이나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하면 반갑고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정작 사람을 만나면 불안하고 경계하게 될 때가 있다. 하느님을 믿지 못하면, 사람을 형제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사람이 선물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람은 한낱 경계와 경쟁의 대상이요, 지배의 대상일 뿐이다.

집회서는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더 겸손하여라.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집회 3,20)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보다 더 높고 귀한 사람들에게 밀려 맨 끝자리로 쫓겨가지 않도록 미리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루가 14,10) 하시고는 곧이어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13-14절)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망신당하지 않기 위한 처세술의 일환으로 밑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중에는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낮은자들이라고 버림받는 이들에게 잘해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11절) 스스로 자기를 낮춤은 자기를 지켜줄 뿐아니라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가치관과 자세를 일러준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연중 제22주일

(나해) 마르 7, 1-8. 14-15. 21-23: 2000/09/03

한때 사도 바오로가 목숨을 걸고 전교했고 그 활발했던 신약의 소아시아 교회들은 없어졌다. 사도행전과 바오로의 서간에 나오는 고린토, 갈라디아, 필립비, 골로사이, 데살로니카 교회 그리고 묵시록에 나오는 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이아 등의 일곱 교회들은 벽돌 한 장 제대로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허물어졌고 그 신자들 모두 뿔뿔히 흩어져 천주교 자체가 없어졌다.

회교를 국교로 하는 오스만 터키족이 쳐들어와 모조리 부셔버렸고, 지금은 사도 바오로의 선교여행을 성지순례하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을 위한 박물관과 성당터 흔적만을 남겨놓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신앙이 인간 각자의 자유로운 믿음과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군대의 사령관이나 마을의 촌장, 국가의 왕이 종교를 선택함으로써 집단적으로 개종하고 국교화되는 종교는 곧 더 큰 힘이 지배하게 될 때 다른 종교로 대체되고 그 종교는 흔적마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교회가 단순히 교회를 찾는 이들에게 기분 전환 정도의 심리적인 위안이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정신적인 안정 그리고 교회의 조직을 통해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제공하는데 그친다면 그 교회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돈으로 치장된 인테리어와 데코레이션 그리고 버라이어티 쇼이기 때문이다. 더 분위기 좋고 기분을 좋게해주는 다른 소재들이 세상에 많이 생겨났다.

천주교회는 천주교 신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천주교가 천주교 신자들의 편이와 이익만을 제공해준다면 그 성당은 그 사회에서 배척되고 말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한정된 재화를 골고루 나누어 쓰도록 하셨는데, 그 재화를 하느님을 믿는다는 천주교 신자만이 독점하려고 들면 나머지 사람들에게 돌을 맞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해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6. 8절)

나와 나의 가족 그리고 재물과 육이라는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현세에서의 편의와 이득만을 추구한다면 교회는 내적으로 썩어버리고 분열될 것이다. 마음속으로부터 주님을 깊이 믿고 그 말씀을 실현하여 하늘나라를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형제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봉사하면서 인간 구원과 하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온전히 실현할 때 비로소 우리 교회는 천주교회가 되고 하늘나라를 향해 성장해 나갈 것이다.



연중 제22주일

(가해) 마태 16,21-27; 99/08/29

처음 본당의 주임사제가 되었을 때, 걱정이 되어서 잠이 안 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 본당에는 다행히 신자가 얼마 안되었지만 그래도 주임사제가 신자 한 분 한 분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사를 정확히 계획하고 세세히 점검하고, 좋은 결실을 얻기 위해서 아주 열심히 했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했습니다. 그래서 긴장과 부담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실제로 밖에만 나가면 본당에 무슨 일이 생겼고, 휴가는커녕 피정이나 교구 연수에 가 있을라치면 신자분들 중에 누가 돌아가신다던지 등 본당에 무슨 일이 생겨서 도중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 나가서 자기는커녕 본당을 비운다는 것 자체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하루 기도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구나." "주님께서는 악으로 덮여 있는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주님의 사람이 필요한 것이구나." "본당 신부나 수도자나 좋은 신자들이 주님이 활동하기 위한 하나의 거점이구나." 그 후론 긴장과 부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여유도 생겼고, 기쁨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16,2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25)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 한 구석에 왠지 모르는 불안감이 베어들고 움츠려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말씀은 온전히 다 이룰 자신이 없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우리더러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믿고 새로 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로마 12,2) 그러므로 세상 사회의 관습과 요구 앞에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설사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자비와 은총으로 채워주시리라는 믿음과 희망 안에서 오늘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로마 12,1 참조)기로 합시다.



연중 제22주일

(다해) 루가 14,1.7-14 : 98/08/30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사랑 받고 싶어합니다. 사랑 받고 싶은 욕구의 또 다른 표현은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기를 알리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 13,24.27) 과연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사는 이 현대에 맞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자기를 낮추면 낮출수록 오히려 짓밟으려고 덤비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나를 알리고 내 주가를 높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 세상 사람들이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결혼식 중 어느 곳을 더 찾습니까? 그리고 자기 잔치에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중 어느 사람이 참석하기를 바랍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루가 14,13)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루가 14,14)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지도 못하는 세상의 눈치를 보고 살지 말고 하느님을 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겸손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나에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2고린 12,9ㄷ.10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자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로마 2,6)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종 하신 최민순 신부님께서는 '두메꽃'이라는 시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외딸고 높은 산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누가 보지 않아도 또 지금 당장 잘 나가지 않아도, "숨은 일도 보시"(마태 6,6)고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마태 6,8ㄴ)시는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고 내가 택하고 나에게 주어진 나의 길을 충실히 그리고 꾸준히 걸어나갑시다.



연중 제22주일

(나해) 마르 7,1-8.14-15.21-23: 97/08/31

요즘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는 사상 중의 하나는 '자유'라는 단어로 표상 되는 개인주의입니다. 그런데 이 개인주의가 실용주의와 맞물려,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으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 우리는 개인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예를 야밤 시내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폭주족'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펼치고 싶은 마음은 존중되어야 하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밤거리를 불안과 위협을 느끼며 통행해야 하는 타인과 그들이 내는 소음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타인의 입장은 무시되어 된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고성방가 등으로 자신의 개별적인 자유를 강조하면서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해해도 좋다고 생각하면 곤란하겠지요. 또 자신의 자유만을 내세워 근검절약 등 공동의 목표와 질서를 무시해도 곤란하겠지요. 또 교통법규 준수를 거절하는 등 자신의 자유를 내세워 공동체의 건설과 유지를 위한 법마저 거절한다면 그 공동체에서 더 이상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게 됩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밥 먹기를 거절한다든지, 현세 생명을 끊으려한다든지,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든지 등 자신의 존재근거마저 부정하게 되는 행위를 자유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존엄하기 때문에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취지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현세의 이와 유사한 분위기를 타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빌어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있구나."(마르 7,6)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자신의 편이와 안전 및 행복을 위해서 사용도 해야하겠지만, 먼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보다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이웃의 행복을 위해 사용할 때 진정으로 우리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야고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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