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일

(다해) 루카 3,10-18; 16/09/04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청송 심씨 안효공파 26세손 심놀보 동생 흥보입니다. 어릴 때 흥보라는 이름이 흥보 놀보전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과 같아서 아이들이 놀려 별로였었습니다. 자라면서 보니, 제 이름을 한 번 들으면 기억을 잘 해주시고, 또 ‘도울 보’(輔)라는 학렬의 돌림자 앞에 ‘일 흥’(興)자를 붙여주셔서 그 뜻이 ‘일어나 도와주어라’ 라는 아버님의 큰 뜻을 자주 헤아리며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되새기곤 합니다.

저는 지난 2월 16일에 주 하느님의 은총으로 삼성동 주임사제로서의 5년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주교회의 제주 엠마오 연수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 수녀님들이 하도 맛있고, 기름지고, 풍요로운 음식을 해주시는 바람에, 매일 오후 1시 30분부터 4시 30분까지 오름을 오르고 올레길을 걸었어도, 돌아와 성모병원에서 혈당을 재보니 당화혈색소 10.7 공복혈당 270이 나왔습니다.

그 결과를 보고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죽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참을 고민하다가, 주교님께 저 안식년 못하고 복귀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주교님께서 “산 밑에 조용하고 안정된 본당으로 보내줄 테니, 거기 가서 미사만 드리고 기본만 하면서 건강을 회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산 밑의 본당이 어딘가 했더니, 거기가 수색성당이었습니다. 서울교구 인사발령을 보고 한 신자가 “거기가 신부님이 원하는 본당입니까?” 하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점지해 주신 본당이 제가 원하는 곳입니다.” 라고 답하고, 지난 8월 30일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왔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를 보내시면서, “심 신부님 건강을 위해 음식을 조절하는 것은 좋은데, 청소년 담당 신부는 어떻게 해?” 라고 하문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부터 저는 매운 것 알러지가 있어서 싱겁고 하얀 음식, 청소년 담당 신부는 청소년 담당 신부가 좋아하는 음식을 따로 차려 먹었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혹시 저희와 음식을 나눌 때에는 저뿐만 아니라 김 신부님을 각별히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김 신부님이 근처 식당에서 젊은 이들과 식사나 차를 하는 장면을 보시고 몰래 계산해 주시면, 주교님의 염려를 확실히 덜어주실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같이 모임을 하던 한 신부님이 “심 신부님은 너무 완벽을 추구해서 차가워 보이니, 수염이라도 기르면 신자들이 좀 비빌 언덕이 있지 않을까 싶다.” 고 하셨습니다. 수염을 기르고 나서 최근에 거울을 보니 별로 예쁘지 않았습니다. ‘수색으로 가면서 깍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당뇨성 심장질환으로 산에도 못 올라가고, 추운 겨울에 밖에 나가면 찬바람이 폐부를 찔러 꼼짝 못하고 집에만 있기가 십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는 수염이 조금 걸러줘서 그런지 가슴이 들 아팠고 또 턱주가리가 시리지 않아서, 겨울을 상기하며 계속 기르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혹여 다소 보기 흉해도 너그러이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당뇨성 녹내장을 예방하는 방법이 ‘목을 조이지 않고 풀고 다니는 것이라.’고 해서, 미사나 성무를 집행할 때 외에는 목을 풀고 다니니 그 점 또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형님 두 분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부모님의 과보호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지난 본당에서는 그런 저에게 ‘귀돌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여러 신자들의 심정을 일일이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 점도 제가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한다고 하는데 잘 모르고 경험이 미천하여 그런 것이오니 양해해 주시고 감싸주시며, 여러분의 활동으로 채워주시기를 감히 청합니다.

지치고 병든 몸을 끌고 수색 성당에 와서, 여러분에게 송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매일 여러분을 위해 정성껏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조배를 하면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건강해지는 가장 좋은 비결은 음식조절과 운동도 한 몫을 하겠지만, 사랑하고 사랑받아 화목하고 평안해지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5년 임기를 마치고 이임하는 날 몸과 맘이 건강해져서, 주교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주신 뜻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여러분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떠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저를 어여삐 여기셔서 사랑해 주시고, 저의 부족한 면을 여러분의 활동으로 채워주시기를 청하면서, 우리 공동체에 주님 사랑의 결실이 온전히 맺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라고 하시면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3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는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대로 가족이나 성격, 과제들처럼 우리를 힘겨워하거나 고통스럽게 만드는 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 것이라고 여기는, 그것도 가장 좋아하거나, 자랑스러워 하거나, 내 삶을 보장해 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라면 그것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입에 단 것이 몸에 해롭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수색 성당으로 오면서 역사가 100년이 넘는 본당이라 전임자이신 이기헌 사도 요한 신부님을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역대 신부님들께서 사목하시던 곳이라 마음 속으로 부담이 적지 않았습니다. 부임하는 날 신자분들과 사목협의회원분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셔서 참 편안하고 마치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신자분들처럼 반가웠습니다.

그 다음날 수요일 미사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6-9) 라고 하셔서 더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둔촌동 성당으로 이임하신 전임 주임사제 이기헌 사도 요한 신부님께서 하루 빨리 새로운 공동체에 적응하셔서 사목활동에 전력을 기울이실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희생을 봉헌해 주시길 청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서 서로를 감싸주고 덮어주고 채워주면서, 주님께 의지하여 늘 화목하여 평안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기도하며 살아가렵니다. 아멘.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연중 제23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V

(나해) 마르 7,31-37; 15/09/06

오늘은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의 제1장 지구의 환경 오염과 제2장 피조물에 대한 창조의 가르침, 제3장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 제4장 온전한 생태학(137-162항)에 이어, ‘제5장 접근법과 행동 방식(163-201항) ’을 살펴보겠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회칙과 관련하여, 교회일치 차원에서 정교회와 함께,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World Day of Prayer for the Care of Creation)로 선포하셨습니다.

이 장은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에 관한 문제를 다룹니다. 분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는 “국제 정책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이 참여하는 대화와 행동을 위한”(15항) 제안이 필요합니다. 이 제안은 “현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자기 파괴의 소용돌이에서 탈출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163항)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실천적인 제안이 이념적으로 피상적이거나 환원주의적인 방식으로 개발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화가 필수적이며 이 용어는 이 장의 모든 절에 나와 있습니다. “폭넓은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쉽지 않은 환경 문제들이 있습니다. …… 교회는 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정치를 대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특정 이익이나 이념이 공동선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솔직하고 열린 토론을 권장하고 싶습니다”(188항).

이 장은 국제 공동체의 환경에 관한 대화(164-175항), 새로운 국가적 지역적 정책을 위한 대화(176-181항), 정책 결정 과정의 대화와 투명성(182-188항), 인간 성취를 위한 정치와 경제의 대화(189-198항), 과학과 종교의 대화(199-201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I. 국제 공동체의 환경에 관한 대화(164-175항)

상호 의존은 우리에게 “소수 국가들의 이익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 세계적 관점에서” 해결책을 제안하며, 공동 계획을 가진 하나의 세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164항). 이 회칙은 겁내지 않고 국제적 역학을 과감하게 비판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환경에 관한 세계 정상 회담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치적 의지가 결여되어 참된 의미가 있는 효과적인 세계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166항). 그런데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서 시작하여 여러 교황님들께서 되풀이하여 말씀하신 대로 필요한 것은 세계 통치의 형태와 수단입니다(175항). “이른바 ‘인류 공공재’의 전체를 다룰 통치 제도에 대한 합의”(174항)가 필요한 것입니다.

II. 새로운 국가적 지역적 정책을 위한 대화(176-181항)

“지역 사람들과 단체들은 …… 더 큰 책임감, 더 강한 공동체 의식, 다른 이를 보호할 준비, 그리고 창조 정신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179항). 또한 우리 자신의 땅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이익만을 추구하고 눈앞의 선거 승리에만 초점을 맞춘 근시안적인 효율성의 논리를 버려야 합니다.

III. 정책 결정 과정의 대화와 투명성(182-188항)

환경과 사회의 관점에서 경제적 제안들을 분석하고 평가하여 사회적으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182-188항). 어떤 정책과 사업 계획이 “참다운 온전한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는지를 “식별하기” 위하여, 솔직하고 투명한 정책 결정 과정의 수립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185항). 특히, 새로운 계획의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포함한 투명한 정치적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특혜의 대가로 특정 계획의 실제적인 환경 영향을 은폐하는 부패는 대부분 올바른 정보를 주지 못하고 충분한 논의를 허용하지 않는 허점투성이의 합의만을 낳을 뿐입니다”(182항).

IV. 인간 성취를 위한 정치와 경제의 대화(189-198항)

세계 금융 위기를 계기로 “윤리 원칙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새로운 경제와 더불어 투기 금융 관행과 가상의 부를 규제하는 새로운 방식”(189항)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환경은 시장의 힘으로 바르게 보호되거나 증진될 수 없는 재화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90항). 다른 시점으로 보는 것은 “생산과 소비의 감소가 때로는 또 다른 형태의 진보와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니다. “자연 자원의 지속가능한 사용을 촉진하려는 노력은 돈 낭비가 아니며 오히려 중기적으로 다른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투자입니다”(191항). 더욱 근본적으로 “발전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는 것”(194항)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사람들의 진정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과 관련됩니다. 동시에 “정치학이 없는 경제학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196항). 정치학과 경제학은 함께 새로운 온전한 접근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V. 과학과 종교의 대화(199-201항)

경험 과학은 삶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며, “만일 우리가 조화롭게 살고 희생을 하며 남을 배려하는 중요한 동기를 잊는다면”(200항) 과학기술적인 해법들은 효력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종종 종교적 언어로 표현됩니다.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걸맞게 살아가야 하며 신앙에 어긋나게 행동하여서는 안 됩니다.

VI. 종교들은 “자연을 보호하고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며 존중과 우애의 관계망을 수립하는 대화”(201항)를 나누어야 합니다. 또한 학문 간의 대화도 학문적 고립 극복에 도움이 됩니다. “다양한 환경 운동들 사이에도 개방적이고 존중하는 대화가 필요합니다”(201항). 대화에는 인내, 자제, 관대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우리 본당 설립 15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본당 설립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교회의 사명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해 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주 하느님께 우리가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물적 영적 양식을 청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왜 무엇을 하도록 우리 교회를 세우셨는가?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교회 신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교회에게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마태 28,18-20). 교회는 주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를 설립하고, 주님과 공동체의 친교와 일치를 통해 공동체를 양성하며 복음을 선포합니다. 복음 선포는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고 스스로 실현하는 복음화와 주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희생봉사로 진행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추구하고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주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와 어떤 함수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 내 바램이 전 인류 형제자매들과의 바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더 나아가 대자연과 피조물 전체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자문하고, 함께 대화하며 이루어나갑시다.

“에파타! 열려라!”(마르 7,34)



연중 제23주일


새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2,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

(가해) 마태 18,15-20; 14/09/07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은 제 4 장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2’와 제 5 장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입니다.

교황은 이 4 장 후반부의 ‘공동선과 사회 평화’라는 제하에서, 기쁨과 사랑에 이어 평화의 열매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갈라 5,22 참조)에 대해 말합니다.

사회 평화는 사회의 일부가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여 얻은 화친이나 단순한 폭력의 부재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평화가 가난한 이들을 침묵시키거나 구슬리는 사회 구조를 정당화하려는 구실로 쓰인다면 이는 거짓 평화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의 국민은 지배 권력에 휘둘리는 군중으로서가 아니라 사명감과 책임감을 지닌 국민으로서 활동하여 그들 삶의 사회적 차원을 드높입니다. 책임감 있는 시민 의식은 하나의 덕이고, 정치 생활에 대한 참여는 도덕적 의무입니다. 평화와 정의와 형제애로 이러한 국민을 이룩하는 데는 네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얻으려는 충만함과 벽과 같은 한계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하는데, 쉽고 빠르게 해결하려는 마음보다 성령을 기다리듯이 공간을 장악하기 보다 시간의 과정에 관심을 기울입시다.

갈등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거나 갈등의 포로가 되어 방향을 잃기보다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새로운 전진의 연결 고리로 만들어 친교를 증진시켜 일치에 이르게 합시다.

천사 같은 순수주의, 상대주의의 독재, 공허한 미사여구,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 반역사적 근본주의, 선의가 없는 도덕주의, 지혜가 없는 지성주의 등의 생각을 거부하고 실재에 집중합시다.

전체는 부분보다 크고, 그 부분들의 단순한 총합보다도 더 큽니다. 우리의 모델은 모든 중심에서 똑같고 차이가 없는 구체(球體)가 아니라 고유성을 간직한 모든 부분의 집합인 다면체(多面體)입니다. 복음은 모든 이의 모든 순간까지 전체성이라는 고유한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황은 ‘평화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대화’라는 제하에서, 국가와 문화와 학문을 포함한 사회와, 가톨릭 교회 이외의 다른 신앙인들과 나누는 대화에 대해 말합니다.

교회는 ‘평화의 복음’(에페 6,15)을 선포하고, 이 보편선을 수호하는 모든 국가 권위와 국제 권위와 협력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국가와 또 사회와 나누는 대화에서 모든 개별 분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회의 다양한 분야들과 함께 각 개인의 존엄성과 공동선에 대한 최선의 응답을 하는 계획들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성을 추구하고 신뢰하며, 과학의 놀라운 진보를 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 일치 운동은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하신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며, 인류 가족의 일치에 이바지합니다. 한 신앙의 뿌리인 유다교인들과 이슬람 형제들과의 대화와 진리와 사랑의 열린 자세로 양심에 충실한 비그리스도교 신자들과의 대화 그리고 진선미를 진심으로 추구하는 선한 이들과 대화하고 격려하고자 합니다.

교황은 제 5 장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는 두려움 없이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열어젖히는 복음 선포자라고 선언합니다. 영으로 충만한 복음화란 성령께서 이끄시는 복음화입니다.

교황은 ‘새로운 선교 열정의 동인’이라는 제하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는 기도하며 일하는 복음선포자라고 말합니다. 투신과 활동에 그리스도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적인 공간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성체 조배를 하고 기도 안에서 말씀과 만나고 주님과 진실한 대화를 나누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쏟지 않으면, 우리의 활동은 쉽게 무의미해지고, 우리는 노고에 지치고 열정도 사그라지고 맙니다.

사랑의 요구와 부합하지 않는 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영성을 제시하려는 유혹, 강생의 함축된 의미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으려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기도에 쏟는 시간이 선교 생활을 하지 않는 핑계거리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복음화의 첫 번째 동인은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 그분께 구원받은 우리의 경험입니다.

선교사는 성령의 활동으로 개인과 민족들이 무의식적이나마 이미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진리,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법에 대한 진리를 알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선교사의 열성은 자기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나옵니다.

이 확신은 그리스도의 우정과 그분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개인적 체험으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개인적 체험을 통한 확신이 없으면 열정적인 복음화를 꾸준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여야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기가 더 쉽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는 예수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을 추구하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합니다. 우리 자신의 적합성이나 이해관계나, 작은 한계나 소망을 떠나, 이해와 동기를 뛰어넘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복음을 전합니다.

선교는 바로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며 또한 그분의 백성을 향한 열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우리를 당신 백성 한가운데로 이끌어주시어, 우리도 사회 속에 깊이 들어가 함께 삶을 나누고, 그들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고, 물심양면으로 필요한 것을 돕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함께 손잡고 새 세상을 건설하고자 노력합니다.

이따금 우리는 주님의 상처들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유혹을 느끼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의 한 가운데에 들어가 인간의 고통을 어루만져주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희망의 이유를 제시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는 영적인 힘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새로운 기쁨을 배웁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사도 20,35)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희망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희망의 깊은 원천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스며든 새 생명의 힘입니다.

어려움도 있습니다. 실패와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인한 고통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적인 확실성, 곧 하느님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활동하실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 ‘신비 감각’이 필요합니다.

선교는 거래나 투자도 아니고 인도주의적 활동도 아니며, 광고에 따라 모인 관객의 수를 세는 공연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곳에서 열매를 맺으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깁시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로마 8,26) 또 우리가 복음화 임무를 맡고 다른 이들의 선익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전구기도를 바칩니다.

교황은 ‘복음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란 제하에서, 마리아께서는 성령과 함께 언제나 백성 한가운데에 계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며 성령께서 오시도록 간청하셨고(사도 1,14 참조), 그리하여 성령 강림 날 선교의 폭발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복음화하는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마리아는 새로운 복음화의 별입니다.

살아있는 복음의 어머니, 작은 이들을 위한 기쁨의 샘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2013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프란치스코



연중 제23주일

(다해) 루카 14,25-33; 13/09/08

오늘(어제) 저희는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시리아, 중동, 전 세계를 위한 기도와 단식의 날’ 을 봉헌합(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9월 7일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성 베드로 대성전에 모여 하느님께 시리아와 세계 곳곳의 분쟁과 폭력 지역에 평화의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하시며, 이 지향을 위해 모든 지역 교회에서도 단식하고 모여 기도할 것을 청하셨고, 우리 본당도 동참합(하였습)니다."

오늘(어제) 7시 특전 미사를 마치고, 8시부터 9시까지 11, 12, 13구역이, 9시부터 10시까지는 8, 9, 10구역이, 10시부터 11시까지는 5, 6, 7구역이, 11시부터 12시까지는 1, 2, 3구역이 한 시간씩 맡아서 단식하고 기도를 바쳐주시기 바랍(바쳤습)니다.

저는 교황님의 이번 기도 요청 공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도 매스미디어를 통해, 교황님처럼 똑같이 세상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접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상황을 아파하면서도 어떤 때는 그 사건의 이해 관계자들을 비난하고 불평하기도 하며, 그 희생자들을 위해 화살기도를 바치고는 그냥 그렇게 넘어가 버리기도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마치 놀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줄거리를 가진 드라마를 바라보듯이 흥미(?)를 갖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도 합니다. 제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책임질 수도, 처리할 수도, 관심을 가진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어떻게 해줄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서 하루하루 자기 사는 것에 급급하여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는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하고 방관자처럼 지내고 마는 경우도 많습니다. 업무와 일과, 운동과 건강, 취미와 문화 생활, 심리와 영성 생활 및 이상과 꿈 그리고 미래와 노년의 삶 등이 제 머리를 쥐어 짜고 있고, 저와 저의 본당 신자들 그리고 제 교구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일들을 저의 주 영역처럼 느끼고 삽니다.

그런데 교황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우리 모두에게 단식하며 기도하자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시리아인들이나 분쟁과 폭력 속에 내몰린 희생자들은 교황님의 가족이나 친지도 아니고, 천주교 신자도 아니고, 업무상 관련자나 동료들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교황님은 관련 대상자들과 희생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단식하고,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 혼자가 아니라 세상에 같은 믿음을 가진 천주교 신자들에게 함께 마음을 모아 연대하여, 오늘(어제) 교회의 방법으로 단식과 기도의 날을 갖자고 초대하십(셨습)니다.

세상 저 멀리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를 접하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지금 당장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성금을 보낼 수 있다면 보내는 정도 이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또 그분들의 희생에 연대하는 의미로 단식을 합니다.

그리고 죄악이 지배하는 듯한 세상에서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무기력감을 느끼며 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아 주님께 봉헌하며, 주님께서 헤아려 주시어 평화를 내려주시고 몸소 위로해 주시기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교황님의 이러한 모습에서 저는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은 지상 교회 책임자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겪고 있는 어려운 형편과는 전혀 상관없이 천상에서 지복직관을 누리기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인류를 구원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변화되도록 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급기야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뭐래도 먹고 사는 것이,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인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짊어지고 있는 육신 생명과 질병, 성격과 단점, 신분과 사회적 자리와 위치, 인격적 감정적 수준 등이 우리가 짊어지고 걸어가는 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과 친지들이 나에게 얹어주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에서 나에게 짊어지도록 요청하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 경시할 수 없는 내 십자가들입니다.

여러분의 십자가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들이 내 인생의 장애요 부담입니까?

아니면, 축복입니까?

내 십자가가 내 삶의 여정을 방해합니까?

아니면, 내 십자가가 내 신앙생활의 거룩한 목표인 하늘 나라 건설과 인류 사회의 평화를 한층 더 가깝게 합니까?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십자가로 등장하는 내 육신 생명과 가족 친지, 인류 사회 형제자매들이 내 생애에 답답함과 괴로움을 안겨줍니까?

아니면, 내 십자가를 짊어지면 질수록 내 삶에 기쁨과 보람을 가져다 주고, 내 이상을 일구어 준다고 여기십니까?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부활하시어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우리 몫을 다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의미와 우리 인생의 목표와 미래를 일구어 나가기로 합시다.

세계 교회의 목자이신 교황님께서 가지신 그 자부적 · 자모적 사랑으로, 그분에게 지상교회의 책임을 맡기신 하느님의 아버지 · 어머니와 같은 사랑으로, 우리 가족과 세상의 아픔과 어둠 그리고 폭력과 분쟁, 특별히 전쟁으로 신음하는 인류 형제 · 자매들을 위해 시간과 열정을 바쳐 단식하고, 기도하며 우리의 생명을 바칩시다.

9월 순교자 성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바치셨고, 순교자들은 주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형장에서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 하늘 나라 건설과 인류 사회의 평화를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합시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연중 제23주일

(나해) 마르 7,31-37; 12/09/09

그리스도교 신자는 누구나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런데 가끔 기도시간이 아까울 때가 있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을 때는 왠지 모르게 기도보다, 먼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습니다. 할 일은 많은 데 그것들을 다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런가 하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일이 눈에 닥치고, 일 속에 빠져 들어가 그 일부터 하노라면, 새삼 특별히 마음을 먹고 자기에게 닥친 일을 미루지 않는다면, 그냥 세상사에 편입돼 버립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위해 아주 의도적으로 그것을 끊거나 미루고 기도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기도하기 아주 힘듭니다.

또 기도가 무슨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것처럼 기도만 하면 낳을 것처럼 말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때는 몸이 피로하거나 아플 때는 귀찮아서 기도하기보다는 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앙생활에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기도가 차선책으로 밀려나는 세상에서 꾸준히 기도하기가 힘들고, 그러기에 점차 주님 안에서의 평안함,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살기가 힘들어 집니다.

기도한다고 세상만사가 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피조물이요 자녀로서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주님과 피조물의 관계, 주님과 자녀의 관계, 곧 주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설정되고 얻게 되고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되는 관계 속에서 평안함과, 충만함을 간직하게 됩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있을 때 누리는 그 편안함과 충족감. 분노와 갈등 그리고 갈증과 불안을 잊게 하고 실제로 씻어주며 채워주는 영의 안식과 풍요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굶주리지 않는 기쁨과 충만함이 우리를 기도의 장으로 달려가게 해줍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 다다르고 세상 그 누구나, 어느 곳에서도 해결할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우리 인간 근원에서 솟아나는 갈증과 원의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시고, 주님을 만나는 길이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으로 달려가 자리 잡습니다.

아울러 그 한 결실로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우리 생명의 양식을 받아 누리게 되고, 우리가 힘겨워할 때마다 흔들림 없이 헤쳐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또 기도에는 물리적으로 계산할 수 없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봉헌과 열매의 관계가 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1시간을 기도하면 1시간의 활동시간이 줄어드는 셈이지만, 영적으로는, 1시간 기도해서 줄어든 물리적 시간에, 두 세 배로 영적으로 집중할 수 있고, 주님의 은총으로 3∼4시간 일한 효과를 얻게 됨을 체험적으로 고백합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 주님께 봉헌하는 기도의 원칙입니다.

오늘 "에파타!"(마르 7,34; 열려라!)하시면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듣게 하시고 말하게 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 골몰해 빠져있고 반드시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처럼 닥친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라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본질적으로 살 수 있고 또 실제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하며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의 귀와 정신을 주님께 맞추며 기도의 깊이로 들어갑시다.

매일의 기도 중에 주님 사랑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의 정을 돈독히 쌓고 주님과 하나되어 우리 삶의 평화와 기쁨을 누리고 유지합시다. 기도 중에 주님을 더 뵈옵고 싶어지고 주님을 더 자주 그리고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어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샘솟을 수 있도록 자주 그리고 깊이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축복과 은총에 감사드리며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영원과 무한에 대한 구원의 갈망을 주님에게서 채우며, 속이 타 들어가는 목마른 갈증을 주님 생명의 말씀과 성체성사로 적시도록 합시다.

매일의 기도 중에 주님의 사랑을 받고 더 받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또 받아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 기쁨과 참 평화를 받아 누립시다. 우리의 불평과 불만, 시기, 분노, 억울함 등 살면서 우리 안에서 솟구치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주님께 호소하고 주님의 위안과 위로를 받아 현세를 이겨내도록 합시다.

매일의 기도 중에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가슴에 되새겨, 갑자기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주님의 뜻을 제 때에 떠올려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영적 투쟁을 준비합시다.

매일의 기도 중에 우리가 살면서 불확실하고 미완성적인 사건과 상황을 겪으면서 주님께서 이 사건과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기를 바라시는지 헤아려 그에 적절한 실천방법을 모색합시다.

매일의 기도 중에 우리가 헤아리고 모색한 실천계획이 진정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 실천계획을 잘 이룰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합시다.

매일의 기도 중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의 힘을 받아,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님의 뜻을 실현하여, 우리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기로 합시다.

오늘 선서하는 복사들과 성소자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사도로 자라나고, 다음 주에 있을 예비자 환영식에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열정과 봉헌을 굽어보시고, 성공과 실패라는 어설픈 인간적인 단기적 가시적 평가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만큼, 보내주시는 만큼, 숫자나 대상에 연연하지 않고, 감사히 받아 환영하도록 합시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3; 마르 12,11)

“에파타!” “열려라!”(마르 7,34)



연중 제23주일

(가해) 마태 18,15-20; 11/09/04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도한다고 떡이 생기냐, 돈이 생기냐?”, “기도하면 너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냐?”, “기도 안 하면 천벌이라도 받냐?”, “기도하면 위험과 고통이 없어지냐?”, “기도 시간을 꼭 정해놓고 해야 하냐?”, “기도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어려운 사람을 찾아 위로하고 봉사하는 것이 더 낳지 않냐?”, “왜 기도하냐?”

떡을 얻고 돈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가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양식을 청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마태 6,11) 우리 삶의 현실적인 필요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우신 업적을 발견하고 깨달아 그에 대해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께서 한 평생 애쓰셨던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우리도 투신할 때 곁들여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미태 6,31-33)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원을 들어주시고, 기도 안 한다고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또 내가 달라는 대로 주고, 청하는 대로 해주신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세상에 나와 같은 너 들이 그렇게도 많은 데, 우리 중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을 위해 달라는 대로, 청하는 대로 주신다면, 그분은 기도하는 이의 개인수호신이거나 그 민족신이거나 미신일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싸우면, 자식들이 누구 편을 들어야 합니까? 자식들이 서로 싸우면서 자기 편을 들어달라면, 부모는 누구 편을 들어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도한다면, 또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이기고, 지배하고, 이용하고, 괴롭히기 위해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너나 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인류 모두는 물론이고 살아있고 존재하는 피조물 모두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안 하고, 주일 미사 빠진다고 천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모님께 안부 인사 제대로 안 드린다고 지금 당장 벌받아 죽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기도한다고 위험과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한다고 우리에게 닥칠 어려움이나 사고나 죽음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나 기도하지 않는 이나 똑같이 세상을 살면서 겪을 것을 그대로 다 겪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물론 하느님께서는 필요하시다면 미리 그러한 일을 겪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모든 것을 다 겪어낼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슬퍼할 때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가 기뻐할 때 우리와 함께 기뻐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겨워 할 때 우리와 함께 힘겨워하시면서,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이웃사랑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꼭 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활동으로서의 봉사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활동에 앞서 그 활동의 원천이 되는 주님의 영과 힘을 기도 중에 얻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루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매일 하루를 마치면서 홀로 떨어져 기도하셨던 그 모습대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실 때나 기적 등의 중요한 일을 하시기 전에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활동에 앞서 기도합니다. 베네딕토 성인도 수도회칙에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고 기록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활동이 무엇이며, 또 우리가 하는 활동이 주님의 뜻 안에 있기를 청하며,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온전히 활동할 수 있도록,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가 하는 활동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마침내 열매 맺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으로 여겨주기도 하지만, 봉사활동 자체가 기도를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봉사활동과 신앙생활은 또 다른 형태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신명기와 레위기를 인용하여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신명 6,5)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하였습니다.”(루카 10,27)

우리가 기도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현실에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웃은 사랑하지 않고 기도만 한다면 이런 세인들의 비난이나 지적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성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자식과 부모 또 다른 어느 누구도 우리 인간 내부에서부터 샘솟는 목마름과 갈증을 온전히 채워주실 수 없고, 그 목마름과 갈증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을 해도, 저것을 해도, 이렇게 해 봐도, 저렇게 해 봐도, 채워지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 우리의 욕망과도 같은 갈증과 인간 내부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1.13)

그리고 이 갈증과 목마름은 마치 한 끼라도 못 먹으면 배고파 지치고, 먹을 것을 찾아 나서는 것처럼, 우리를 기도 중에 하느님 앞에 나아오도록 해 주고, 하느님 안에서 그 갈증과 목마름을 해결하여 오늘을 영적인 기쁨과 내적인 평화 속에서 살아나가도록 해줍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기도 안에 숨는 것도 아니요, 육적이고 현실적인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얻고자 함도 아닙니다. 또한 불안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기도했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심리적인 안정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주님을 뵈옵고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을 새기고, 그 말씀을 내 현실에서 내가 적용할 수 있는 만큼 적용하며 주님과 함께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연구와 기도 중에 들은 주님의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기도자가 실천한 수 있는 만큼 실천해 나가면서 우리의 내적 영적 생활은 풍요해 지고 성장할 것입니다. 그 풍요로움과 성숙은 하느님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사명을 살찌워 줄 것입니다.

육과 영으로 이루어진 우리 몸은 외적이고 육적인 현실 세상에서 살아갈 양식과 내적이고 영적인 신앙 생활을 영위할 양식을 다 얻도록 요구하고 있고, 그 양식들은 우리 인생을 살찌우고 풍요롭게 해 줍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우리 신앙생활의 기쁨을 여러분이 직접 진실하고 깊게 사시면서 체험하시고, 그 체험으로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그 체험에서 오는 기쁨을 형제들과 나눕시다. 그래서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많은 분들이 다가오는 예비자 환영식에 우리와 함께 주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기쁨과 행복에 참여하게 되길 바랍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아멘.



연중 제23주일

(가해) 마태 18,15-20; 05/09/04

얼마 전 한국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패션 70’이라는 드라마였는데, 그 드라마는 6.25전쟁이후 70년대에 이르기까지를 그렸습니다. 4명의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의 인생역정을 그린 드라마였습니다. 얽히고설키다 못해 꼬이기까지 한 인생을 풀어가는 극이었습니다. 그 드라마를 통해 사람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만남과 이별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장면들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훑었고, 그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미래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극은 성공과 부자가 되는 길을 그렸다기 보다는 가족과 친지들의 관계를 개선하고 향상시켜나가려는 시도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고자 하는 의도를 표현했습니다. 작가는 한 더미라는 전쟁고아 출신의 선하고 맑은 마음을 간직한 한 여성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모든 아픔을 끌어안아주고 기다려주고 함께해주고 밀어주면서, 사연을 담고 있는 모두의 과거와 현재를 인간적으로 바로 잡아 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또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서로 다른 부모에게 태어나 서로 다른 부모 밑에서 서로 다른 경험들을 하면서 자라왔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환경과 서로 다른 조건 그리고 서로 다른 인격을 주고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지금 한 순간에 어느 한 사람을 보면 정말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끼는 자신조차 남과는 다른 아니 남이 보기에는 이상하리만치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것이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애초에 처음 세상에 날 때부터 하느님께서 서로 다르게 만들어 주셨고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 속에서 자라게 하셨기 때문에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서로 다르게 만드셨을까? 무엇 때문에 오늘 인간 세계가 이렇듯 전쟁과 경쟁과 불신 속에 빠져 있을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서로 시샘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잡아먹으면서 서로를 계발하고 성장시키도록 만드셨을까?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인간들끼리 서로 헐뜯고 생채기를 후벼 파면서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 자기 것을 채우고 세상을 지배하도록 하셨을까? 과연 하느님께서 그런 것을 원하셨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하느님께서는 서로 다르게 만드셨을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다른 점 때문에 서로 싸우고 잡아먹도록 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서로 다르게 만드셨을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다른 장점들을 주시면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가지고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완전한 하나를 이루라고 만드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1고린 12,27) 그러면서 “몸은 한 지체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발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다른 것들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또 보기 흉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꾸밉니다. 이것은 몸 안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1고린 12,14-26 참조)하고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각자 서로 다름을 보면서

‘왜 이렇게 했느냐?’

‘왜 너는 나와 다르냐?’

‘왜 너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하느냐?’

‘왜 너는 내가 하자는 대로 안하느냐?’

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너와 내가 함께 우리를 둘러싼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이 다름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다름을 채워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다름을 통해 더 큰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

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중심주의와 자기 우선주의에서 벗어나 나와 다른 너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너와 함께 우리라는 공동체를 건설하고 함께 꾸려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 13, 8)

그리고 결코 서로를 포기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끌어안으면서 주님께서 펼쳐주신 아름다운 세상 안에서 살아나가기로 합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마태 18,19)



연중 제23주일

(다해) 루가 14, 25-33; 2004/09/05

언젠가 성무일도서의 끝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 끝기도를 마칠 때 이렇게 기도한다. "전능하신 천주여,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아멘."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해 달라는 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우리는 죽어간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 보다 더 적어 보인다. 그러길래 사람들이 가끔 아기가 태어날 때는 세상을 다 거머잡으려고 손바닥을 꼭 쥐고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버려둔 체 심지어는 욕심마저도 접은 체 손바닥을 피고 간다고 하지 않던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대로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기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제자로서는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첫 번째가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방식, 자기의 의도를 버리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 그리고 두 번째가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 그리고 이 두 번째의 길은 반드시 첫 번째를 이루어야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33)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길이 죽음의 길인가? 주님을 따르는 길이 생명의 길이요. 기쁨의 길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길이 죽음의 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현세의 죽음이 미래의 탄생이다. 비단 마지막날 지상에서의 죽음이 천국에서의 탄생일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세속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신앙 안에서 그리고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5, 24) 그리고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 35)라고 하셨고, 또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7, 39) 그리고 주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면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1, 25-26)하시고는 "너는 이것을 믿느냐?"(26)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라고 하신다.

우리는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에게서 죽음 곧 자기 버림을 본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 6-7)

왜 그분은 당신이 누리는 모든 권능을 다 버리고 인간이 되어 오셨는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간이 되어 오실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그 희망을 발견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리면 끝날 것으로 여겨서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래서 예수님은 실패한 것처럼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죽음을 죽음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다시 살려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죽음마저도 쳐 이기시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오셨다.

어떻게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이 사람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다고 거기 매달려 사람들이 죽이는 대로 그렇게 죽으실 수 있었는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던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성사의 영성이며 우리 신앙인의 결단이다. 자신과 자신의 죄에서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세례성사.

이제 우리에게 결단만이 남아있다. 세속을 따르지 않고 죽음으로써 하늘나라의 영생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세속을 따라 삶으로써 그냥 세속에서만 살고 부활의 희망 없이 죽음으로 그쳐버릴 것인가?

우리 각자가 선택할 길이다. 믿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오늘 사도 바오로는 버림의 방법론에 대해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노예를 부리는 필레몬이라는 주인에게 노예인 오네시모를 지금 당장 해방시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노예해방을 외치기 보다, 노예를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노예 해방 제도가 생겨나기 전이라 하더라도 노예를 노예로 부리지 말고 형제처럼 지내라고 말함으로써 실질적인 노예해방을 말한다. 세속 안에 육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가면서도 세속의 방법론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제부터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서 그대와 같이 있게 될 것입니다."(필레 16) 그리고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는 것처럼 그를 맞아 주시오."(17)

그러면서도 그는 필레몬의 자유 선택을 존중하고 그의 변화를 기다린다. "그를 내 곁에 두어 그대를 대신해서 내 시중을 들게 하려고도 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대가 선을 행하는 것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13-14)

우리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주님을 선택하고,

서로 평가하거나 비교하지 말고,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감사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겸허하게

주님의 뒤를 따라 걸어갑시다.



연중 제23주일

(나해) 마르 7, 31-37; 2003/09/07

가끔 기도시간이 아까울 때가 있다. 할 일이 너무 많을 때는 웬지 모르게 기도보다 먼저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할 일은 많은 데 그것들을 다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모자란다.

그런가하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일이 눈에 닥치고, 일 속에 빠져 들어가 그 일부터 하노라면 새삼 특별히 마음을 먹고 자기에게 닥친 일을 미루지 않는다면 그냥 세상사에 편입돼 버린다. 그래서 기도하기 위해 아주 의도적으로 그것을 끊거나 미루고 기도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기도하기가 힘들 때가 있다.

또 기도가 무슨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것처럼 기도만 하면 낳을 것처럼 말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때는 몸이 피로하고 귀찮아 기도하기보다는 쉬고 싶을 때도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앙생활에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기도가 차선책으로 밀려나는 세상에서 꾸준히 기도하기가 힘들고 그러기에 점차 주님 안에서의 평안함,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살기가 힘들다.

물론 기도하면 세상 만사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기도하라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피조물이요 자녀로서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주님과 피조물의 관계 주님과 자녀의 관계 곧 주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함으로써 얻게되고 누리게 되는 평안함과, 충만함을 간직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있을 때 누리는 그 편안함과 충족감. 분노와 갈등 그리고 갈증과 불안을 잊게 하고 실제로 씻어주며 채워주는 영의 안식과 풍요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굶주리지 않는 기쁨과 충만함!

그리고 또 그렇게 주님께서 주시는 우리 생명의 양식을 받아 누림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힘에 벅찬 일이 생길 때 흔들림 없이 헤쳐나가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기도에는 물리적으로 계산할 수 없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봉헌과 열매의 관계가 있다. 물리적으로는 1시간을 기도하면 1시간의 활동시간이 줄어드는 셈이지만, 영적으로는 1시간 기도해서 물리적으로 줄어든 시간에 영적으로 집중할 수 있고 주님의 은총으로 3∼4시간 일한 효과를 얻는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 주님께 봉헌하는 기도의 원칙이다.

오늘 "에파타"하시면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듣게 하시고 말하게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급해 보이고 반드시 지금 당장 해야하는 것처럼 닥친 유혹을 떨쳐버리고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본질적으로 살 수 있고 실제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고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연중 제23주일

(가해) 마태 18 15-20; 2002/09/08

어느 유행가에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는 가사가 있다. 그러나 진정 사랑의 적이랄 수 있는 것은 '무관심'이다. 차라리 화를 내고 핍박이라도 하면 그것은 존재라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이 죽던 말던 상관치 않고, 아예 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무관심이야말로 사랑의 최대의 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웃에 관심을 갖고 교류를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옆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지를 알려면 상당한 관심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오래 공을 들여서 만나도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면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서로가 다르고 서로 자신을 앞세우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계를 지속하면서 부딪히는 일이 생기면 피하기 일쑤이고 그나마 자기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끼어 들기조차 꺼린다. 신자들끼리도 그렇다. 서로 알아서 해 주기를 바라지만 막상 일이 생기면 서로 눈치만 보고 누군가 대신 해주기를 바랄 뿐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 예전부터 충고는 커다란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일로 평생 다시 못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수마저 될 불이익을 감수할 정도의 사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이 듣기 싫어하고 말 잘못해서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을 꺼리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예제키엘 예언자는 누가 잘못했는데도 충고하지 않으면 비록 죄는 그가 지은 것이지만 그 벌에 대한 책임은 그 죄를 보고도 입다물고 모른 체한 우리에게 있다고 경고한다(에제 33, 8 참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고와 충고를 거듭할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해 우리에게 마음을 모아 구하라고 하신다(마태 18, 15-20 참조). 그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 13, 8)라고 한다. 그러면서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한 이 한마디로 요약될"(9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10절)라고 말한다.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자의 완성을 위해 서로 책임을 느끼게 한다. 그 책임은 사랑함으로써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받아들이게 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 충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서로 부등켜안고 함께 나아가도록 촉구한다.



연중 제23주일

(다해) 루가 14,25-33; 2001/09/09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그 때 골로사이에서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바오로에게 시중을 들려고 왔다. 바오로는 골로사이에서 오네시모에게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반갑게 맞았지만, 그를 포기하게 된다. 오네시모의 봉사는 좋은 의도였지만, 그가 자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네시모는 필레몬이라는 사람의 종이었다. 오네시모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결정하고 행동할 수 없는 이른바 다른 사람에게 속한 부자유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오네시모를 그 주인 필레몬에게 되돌려 보낸다.

바오로가 그 시점에서 노예해방을 주장하고 오네시모를 취했다면, 사람들은 바오로가 자기 이익 때문에 그랬다고 바오로를 오히려 비난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오네시모를 그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면서, "이제부터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서 그대와 같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는 것처럼 그를 맞아 주시오."(필레 16.17)라는 편지를 쓴다. 바오로는 도망쳤던 종을 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달라는 청을 하는 것이다. 결국 바오로가 노예해방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종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말을 통해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동등한 자유인끼리의 관계인 형제 관계로 변화시키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노예해방을 권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당시 그리스도교 전파이후 많은 곳에서 노예해방이 늘어났다.

스승이며 사제인 바오로가 자신이 세례를 주었던 신자 필레몬에게 좋은 것을 제시해 주면서도, 그 신자가 스스로 좋은 것을 깨닫고 판단하여 좋은 행동을 하도록 그의 자유를 인정하고 인권을 존중해 준다. 바오로는 오네시모에게 자신을 계속 돌봐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대가 선을 행하는 것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14절)라고 필레몬에게 말해서, 필레몬이 직접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서 자기에게 파견해 주도록 청한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고 하신다. 어려운 사정에 처했다 하더라도, 신앙 공동체를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교 교리가 가르치는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33)



연중 제23주일

(나해) 마르 7, 31-37: 2000/09/10

예전에 외국 신부님과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분이 본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주교님이 되셨는데, 추석같은 이런 명절이 되면 텔레비젼에서 꼬리를 문 자동차의 고향행렬을 보면서 참으로 부러워하셨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18세가 돼서 독립하면 그만인데 반하여, 10시간 12시간씩 걸려서라도 고향을 찾는 한국인들에게서 감동을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어디서도 가족과 부모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지닌 민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참 아름답습니다. 부모를 찾는 것을 인간의 예와 자식된 도리로 여겨 전통이 되다시피한 이 행렬은 마치 하늘나라를 향한 행렬과도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하게 되는 가족간에도 섭섭함과 원망이 싹틀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원수처럼 지내기까지 하여, 차라리 가족이 아니었더라면 하는 마음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인간 관계 속에 적용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나마 살아있으니까 원수도 되는 것이지 상대가 죽어 없으면 그나마 원망할 대상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가 어려울 땐 참으로 부딪히기 싫어서 아예 만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인간의 생애가 그렇게 무한정 남아있는 것같지는 않습니다. 정작 상대가 이승을 떠나버리면, 살아 생전에 다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내 남은 평생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무덤만이라도 정성껏 꾸미려고 하지만, 어리석을뿐만 아니라 살아생전에 잘 할 껄 하는 아쉬움이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가족을 만날 때마다 이번에는 화해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만나면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그냥 넘어가게 되고, 오히려 더 심하게 싸우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귀먹은 반벙어리에게 "에파타"(7, 34)하시며,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풀어서 말하게 하십니다. 화해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일년 내내 간직한 채 실현하지 못한 좋은 뜻들을 입을 열어 말하듯이 실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담에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조금 풀리기만 하면 나도 명절 때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기부도 하고 봉사도 해야겠다는 이번 추석에 실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신 주님과 더욱 닮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차별대우를 하지 말라'(야고 2, 4)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가족뿐만 아니라 주님의 형제들인 교우들과 가난한 이들에게도 내 입을 열고 손을 내밀어 우리 사랑을 나누도록 합시다.



연중 제23주일

(가해) 마태 18,15-20; 99/09/05

모니카 성녀가 하루는 암부로시오 주교님께 가서 자식 문제로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답니다. 그랬더니 주교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결코 아들은 망하지 않고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위로해 주셨답니다. 그 주교님의 말대로 모니카 성녀의 아들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되었답니다. 훗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너무나 훌륭해서 그 어머니가 성녀가 되었겠지만, 자식이 잘되기만 바라며 가슴을 끌어안고 애타하는 어머니의 눈물이 아들을 성인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식은 자식이니 버릴 수도 없다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이런 우리의 심정을 잘 아시는 주님은 혹시라도 우리가 포기할까봐, 충고의 의무까지 언급하고 계십니다. "네가 죄인에게 버릇을 고치하고 타일러 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죄인은 자기 죗값으로 죽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나는 너에게 지우리라."(에제 33,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라.'는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8,15-17)

그러시면서 결론적으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8,1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떻게든 용서해 주고 풀어주어라.'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로마인들에게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 13,8.10) 그리고 "원수 갚는 것은 하느님께 맡기고, 가능하면 평화롭게 지내십시오."(로마 12,18-21 참조)라고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벅차다고 생각되더라도, 주님께서는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눈물로 지새우기까지는 못하지만, 기도라도 해주면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웁시다.



연중 제23주일

(다해) 루가 14,25-33: 98/09/06

견진성사 면담에서 "지금까지는 신앙이 나를 위한 것인 줄 알았고, 또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살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미약하나마 이웃에게 봉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라는 다짐을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6)

신앙은 나를 하느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바라고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나를 도구로 써 달라고 주 하느님께 봉헌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바치는 데까지는 많은 고민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은 주님께 대한 체험과 확신이 들어야 지워집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살려주셨다는 확신과 체험이 내 삶 속에 자리잡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칠 수 있고, 주님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형제들에게 나를 던져 봉사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나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세상의 복음화에 투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평신도 사도직'을 수여 받습니다. 사제가 교회 공동체 내에서 교우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공동체를 복음화하는 사명을 받는 것처럼,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가정과 직장, 사회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실천하며, 자신과 세상에 닥쳐오는 상황과 조건들을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변화시킬 사명을 받았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주님의 자녀가 된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견진성사를 받음으로써 주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는 주님의 좋은 일을 하고 싶지만 자신의 미성숙한 인격과 부적절한 태도, 원만하지 않은 성격, 조급함 그리고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꾀 등으로 일을 망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좋은 의도마저 포기하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러한 것들을 자신이 짊어지고 갈 십자가로 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37) 라고 아버지께 청했듯이 우리도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도록 청합시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의 일을 기꺼이 이룰 수 있도록.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7)



연중 제23주일

(나해) 마르 7,31-37 : 97/09/07

성서를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도 차별대우를 하십니다. 부자보다는 가난한 이들에게, 건강한 사람보다는 병자에게, 의인보다는 죄인이라고 사회에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더 자주 가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차별대우에 대해서 아주 심한 어투로 불평하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루가 19,7) "바리사이파의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죄인이며 세리들과 한 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저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같이 음식을 나누고 있으니 어찌된 노릇이오?' 하고 물었다."(마르 2,16)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루가 7,39) 그런데 다른 한편 우리들은 예수님의 그런 차별대우가 부끄럽거나 밉기보다는 오히려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주님의 그런 모습과 그 방법을 아주 좋은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잊혀진 이들을 찾아 나서는 길. 그 길이 우리에게는 더 없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못해서 걱정이고 죄송스러울 뿐이지!?

한편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은 우리에게도 기쁜소식이다. 가난한 이가 잘 살게 되었다는 소식은 비단 가난한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기쁜소식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이 잘 살 정도면 나머지는 더 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구약으로부터 메시아가 오신 것이라는 증거와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는,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다. 주님이 승천하신 오늘 여기서 하느님의 예언을 이룰 이가 누구인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아닌가?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의 자녀라고 먹을 것만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점차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뜻과 말씀을 이루어야 하겠다.


E-mail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