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일
그리스도교 신자는 누구나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런데 가끔 기도시간이 아까울 때가 있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을 때는 왠지 모르게 기도보다, 먼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습니다. 할 일은 많은 데 그것들을 다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런가 하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일이 눈에 닥치고, 일 속에 빠져 들어가 그 일부터 하노라면, 새삼 특별히 마음을 먹고 자기에게 닥친 일을 미루지 않는다면, 그냥 세상사에 편입돼 버립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위해 아주 의도적으로 그것을 끊거나, 미루고 기도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기도하기 아주 힘듭니다.
또 기도가 무슨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것처럼, 기도만 하면 낳을 것처럼 말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때는 몸이 피로하거나 아플 때는 귀찮아서 기도하기보다는 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앙생활에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기도가 차선책으로 밀려나는 세상에서 꾸준히 기도하기가 힘들고, 그러기에 점차 주님 안에서의 평안함,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살기가 힘들어 집니다.
기도한다고 세상만사가 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피조물이요 자녀로서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주님과 피조물의 관계, 주님과 자녀의 관계, 곧 주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설정되고 얻게 되고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되는 관계 속에서 평안함과, 충만함을 간직하게 됩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있을 때 누리는 그 편안함과 충족감. 분노와 갈등 그리고 갈증과 불안을 잊게 하고 실제로 씻어주며 채워주는 영의 안식과 풍요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굶주리지 않는 기쁨과 충만함이 우리를 기도의 장으로 달려가게 해줍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 다다르고 세상 그 누구나, 어느 곳에서도 해결할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우리 인간 근원에서 솟아나는 갈증과 원의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시고, 주님을 만나는 길이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으로 달려가 자리 잡습니다.
아울러 그 한 결실로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우리 생명의 양식을 받아 누리게 되고, 우리가 힘겨워할 때마다 흔들림 없이 헤쳐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또 기도에는 물리적으로 계산할 수 없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봉헌과 열매의 관계가 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1시간을 기도하면, 1시간의 활동시간이 줄어드는 셈이지만, 영적으로는 1시간 기도해서 줄어든 물리적 시간에, 두 세 배로 영적으로 집중할 수 있고, 주님의 은총으로 3∼4시간 일한 효과를 얻게 됨을 체험적으로 고백합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 주님께 봉헌하는 기도의 원칙입니다.
오늘 "에파타!"(마르 7,34; 열려라!)하시면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듣게 하시고 말하게 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 골몰해 빠져 있고, 반드시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처럼 닥친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라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본질적으로 살 수 있고 또 실제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하며,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의 귀와 정신을 주님께 맞추며, 기도의 깊이로 들어갑시다.
매일의 기도 중에 주님 사랑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의 정을 돈독히 쌓고, 주님과 하나되어, 우리 삶의 평화와 기쁨을 누리고 유지합시다. 기도 중에 주님을 더 뵈옵고 싶어지고, 주님을 더 자주 그리고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어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샘솟을 수 있도록, 자주 그리고 깊이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축복과 은총에 감사드리며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영원과 무한에 대한 구원의 갈망을 주님에게서 채우며, 속이 타 들어가는 목마른 갈증을, 주님 생명의 말씀과 성체성사로 적시도록 합시다.
매일의 기도 중에 주님의 사랑을 받고 더 받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또 받아,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 기쁨과 참 평화를 받아 누립시다. 우리의 불평과 불만, 시기, 분노, 억울함 등 살면서 우리 안에서 솟구치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주님께 호소하고, 주님의 위안과 위로를 받아 현세를 이겨내도록 합시다.
매일의 기도 중에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가슴에 되새겨, 갑자기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주님의 뜻을 제 때에 떠올려,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영적 투쟁을 준비합시다.
매일의 기도 중에 우리가 살면서 불확실하고 미완성적인 사건과 상황을 겪으면서, 주님께서 이 사건과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기를 바라시는지 헤아려, 그에 적절한 실천방법을 모색합시다.
매일의 기도 중에 우리가 헤아리고 모색한 실천계획이 진정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 실천계획을 잘 이룰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합시다.
매일의 기도 중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의 힘을 받아,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님의 뜻을 실현하여, 우리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기로 합시다.
“에파타!” “열려라!”(마르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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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도한다고 떡이 생기냐, 돈이 생기냐?”
“기도하면 너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냐?”
“기도 안 하면 천벌이라도 받냐?”
“기도하면 위험과 고통이 없어지냐?”
“기도 시간을 꼭 정해놓고 해야 하냐?”
“기도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어려운 사람을 찾아 위로하고 봉사하는 것이 더 낳지 않냐?”
“왜 기도하냐?”
떡을 얻고 돈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가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양식을 청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마태 6,11) 우리 삶의 현실적인 필요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우신 업적을 발견하고 깨달아 그에 대해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께서 한 평생 애쓰셨던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우리도 투신할 때 곁들여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원을 들어주시고, 기도 안 한다고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또 내가 달라는 대로 주고, 청하는 대로 해주신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세상에 나와 같은 ‘너’들이 그렇게도 많은 데, 우리 중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을 위해 달라는 대로, 청하는 대로 주신다면, 그분은 기도하는 이의 개인수호신이거나 그 민족신이거나 미신일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싸우면, 자식들이 누구 편을 들어야 합니까? 자식들이 서로 싸우면서 자기편을 들어 달라면, 부모는 누구 편을 들어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도한다면, 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이기고, 지배하고, 이용하고, 괴롭히기 위해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너나 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인류 모두는 물론이고 살아있고 존재하는 피조물 모두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안 하고, 주일 미사 빠진다고 천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모님께 안부 인사 제대로 안 드린다고 지금 당장 벌받아 죽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기도한다고 위험과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우리에게 닥칠 어려움이나 사고나 죽음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나 기도하지 않는 이나 똑같이 세상을 살면서 겪을 것을 그대로 다 겪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물론 하느님께서는 필요하시다면 미리 그러한 일을 겪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모든 것을 다 겪어낼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슬퍼할 때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가 기뻐할 때 우리와 함께 기뻐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겨워 할 때 우리와 함께 힘겨워하시면서,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말합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이웃사랑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꼭 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활동으로서의 봉사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활동에 앞서 그 활동의 원천이 되는 주님의 영과 힘을 기도 중에 얻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루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매일 하루를 마치면서 홀로 떨어져 기도하셨던 그 모습대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실 때나 기적 등의 중요한 일을 하시기 전에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활동에 앞서 기도합니다. 베네딕토 성인도 수도회칙에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고 기록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활동이 무엇이며, 또 우리가 하는 활동이 주님의 뜻 안에 있기를 청하며,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온전히 활동할 수 있도록,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가 하는 활동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마침내 열매 맺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으로 여겨주기도 하지만, 봉사활동 자체가 기도를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봉사활동과 신앙생활은 또 다른 형태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신명기와 레위기를 인용하여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신명 6,5)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하였습니다.”(루카 10,27)
우리가 기도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현실에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웃은 사랑하지 않고 기도만 한다면, 이런 세인들의 비난이나 지적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성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자식과 부모 또 다른 어느 누구도 우리 인간 내부에서부터 샘솟는 목마름과 갈증을 온전히 채워주실 수 없고, 그 목마름과 갈증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을 해도, 저것을 해도, 이렇게 해 봐도, 저렇게 해 봐도, 채워지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 우리의 욕망과도 같은 갈증과 인간 내부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1.13)
그리고 이 갈증과 목마름은 마치 한 끼라도 못 먹으면 배고파 지치고, 먹을 것을 찾아 나서는 것처럼, 우리를 기도 중에 하느님 앞에 나아오도록 해 주고, 하느님 안에서 그 갈증과 목마름을 해결하여 오늘을 영적인 기쁨과 내적인 평화 속에서 살아나가도록 해줍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기도 안에 숨는 것도 아니요, 육적이고 현실적인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얻고자 함도 아닙니다. 또한 불안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기도했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심리적인 안정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주님을 뵈옵고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을 새기고, 그 말씀을 내 현실에서 내가 적용할 수 있는 만큼 적용하며, 주님과 함께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연구와 기도 중에 들은 주님의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기도자가 실천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해 나가면서, 우리의 내적 영적 생활은 풍요해지고 성장할 것입니다. 그 풍요로움과 성숙은 하느님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사명을 살찌워 줄 것입니다.
육과 영으로 이루어진 우리 몸은 외적이고 육적인 현실 세상에서 살아갈 양식과 내적이고 영적인 신앙 생활을 영위할 양식을 다 얻도록 요구하고 있고, 그 양식들은 우리 인생을 살찌우고 풍요롭게 해 줍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우리 신앙생활의 기쁨을 여러분이 직접 진실하고 깊게 사시면서 체험하시고, 그 체험으로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그 체험에서 오는 기쁨을 형제들과 나눕시다. 그래서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많은 분들이 다가오는 10월 15일 예비자 환영식에 우리와 함께 주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기쁨과 행복에 참여하게 되길 바랍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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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순교자 현양의 밤
우리 나라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순교성인과 아울러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122위 순교복자 이외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계십니다. 특별히 지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의 순교자분들의 시복을 추진중입니다. 이분들은 우리 나라 초대교회의 증거자들에서부터 병인박해의 순교자분들이십니다. 오늘은 그분들 중 몇 분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벽(李蘗) 요한 세례자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덕조’, 호는 '광암'으로, 1754년 포천 화현리(현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무반집안에서 난 이벽은 학문에 더 뜻을 두었고, 광주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살던 나주 정씨 집안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된 뒤에는 정약전·약용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문을 닦았습니다. 그는 안동 권씨와 사별하고, 해주 정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이벽은 1779년 겨울 천주교리에 대해 토론하며, 서울 수표교(현 서울시 종로구 관수동과 중구 수표동 사이) 인근으로 이주하여, 1779년경에는 경기도의 주어사에서 김범우와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베드로 등과 천주교리를 연구하였습니다.
이승훈(李承薰) 베드로는 본관이 ‘평창’이고, 자는 ‘자술’, 호는 ‘만천’으로 서울 만석방의 약현(현 서울시 중구 중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위의 나주 정씨와 혼인하여 25세인 1780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784년 3월 북경에 가서 예수회의 그랑몽(양동재[梁棟材] 요한)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귀국합니다.
1784년 겨울 베드로는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권철신의 아우인 권일신과 정약전·약용 형제에게 한국 최초의 세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벽의 세례명은 요한 세례자, 권일신의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의 세례명은 요한 사도였습니다. 이벽 요한 세례자의 활약으로 서울에서는 홍낙민 루카, 최창현 요한, 김험우 토마스, 충청도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와 전라도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경기도의 권철신 암브로시오 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무렵 이벽의 집에서 갖던 신앙 공동체 모임을 김범우 토마스의 집인 명례방(明禮坊)으로 옮깁니다.
1785년 봄 어느 날 명례방에서 요한 세례자의 주도 아래 집회를 갖던 중, 범법 행위를 단속하는 형조의 관원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도박꾼들의 모임으로 여겨 수색하였고, 그곳에 모여 있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형조로 압송하고, 그곳에 있던 교회 서적과 성물들도 모두 압수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중인 신분인 집주인 김범우 토마스는 형조판서의 문초를 받으면서 “천주교에는 좋은 점이 아주 많으니, 천주교를 그르다고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하며 신앙을 증언한 뒤 충청도 단앙으로 유배되어 기도생활을 하다가 주님께 돌아가셨고, 양반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이승훈 베드로는 가족들에 의해 배교를 강요당했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가족의 배교강요를 받다가 모진 고초 속에 31세의 나이로 주님께 돌아가셨습니다.
1791년 천주교 신자들의 제사 폐지 문제와 관련한 진산 사건으로 이승훈 베드로는 체포되어 관직을 잃었고, 1795년 주문모 신부님의 입국이 발각되자 예산으로 유배를 다녀왔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한국천주교 우두머리로 잡혀 서소문에서 참수형을 받으셨습니다.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791년 진산사건으로 체포되어 형조에서 “천주교에서의 가르침이 도리에서 벗어나는 사악한 가르침이 아닌 이상 어찌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하다고 배척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셨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순교하셨고, 형님 권철신 암브로시오는 1801년 신유박해 때 65세의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내포의 사도로 일컬어지던 충청도의 이존창 루도비코는 권철신의 제자였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로 공주감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홍산에서 전교활동을 하다가, 1795년 서울에서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을 만난 후 다시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을묘박해를 피해 내려온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기도 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공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왕족인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 순교자가 계십니다. 송 마리아는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부인으로 며느리 신 마리아와 함께 양제궁에 사시다가, 송 마리아의 아드님이자 신 마리아의 남편인 상계군 이담이 정치적 상황에서 역적으로 몰려 강화로 유배된 후에 두 분이 함께 사시다가 천주교를 믿게 됩니다. 1794년 주문모 신부님의 입국으로 세례를 받고,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서 미사를 드리고 강론을 들으며 신앙을 키워나갔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보 신부님은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서 양제궁으로 옮기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발각되어 정순왕후의 명에 따라 사약을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황사영 알렉시오는 15세인 1790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약현의 따님 정명련(난주) 마리아와 결혼하셨습니다. 그는 “천주 신앙은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이라고 확신하며 신앙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김한빈 베드로와 제천 배론 김귀동의 집으로 피신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방책으로 북경 주교에게 백서를 작성하여 황 토마스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으나 발각되어, 12월 대역부도죄인으로 판결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으로 26세의 일기로 순교하셨습니다.
평양의 김큰아기 마리아는 의원을 하던 김진에게 재혼하여 1863년 서울로 이주하여 약현에 거주하다가 1864년에 남편 베드로는 그 이듬해에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중에 남편 베드로가 평양에 치료를 갔다가 체포된 후 마리아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매질 아래 죽어서 한결같이 천주의 가르침에 따라 즐겁게 좋은 곳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서울 우포도청에 자수하여, 32세의 일기로 양화진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황해도 재령군에 살던 안여집 요한 사도는 슬하에 6남 2녀를 두시고, 성품이 순량하고 정직하며 찬찬하고 의리가 있어 이웃 사람들에게서 군자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1866년 병인박해가 발발하고 포교들이 쳐들어온다고 하자 공소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킨 후, 처자식과 함께 묵주 기도를 하며 포교들을 기다렸다가 포교들과 점심을 차려먹고 해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습니다. 그는 문초중에 “나는 하늘을 공경하고, 영혼을 구하는 데 힘썼으며, 나라를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도리를 실천해 왔는데, 어찌 이것이 죄가 될 수 있느냐?”고 항변하며 “이미 나의 목숨을 천주를 위하여 바치기로 작정하였소. 천주는 만민의 왕이요, 만민의 아버지이신데, 어찌 백성이요 자식된 자로서 그분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죽기로 결심했으니, 속히 처형해 주시오.” 라고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1866년 12월 44세의 일기로 배지사형을 받아 순교하셨습니다.
평민 신분인 심능석 스테파노는 횡성에서 태어나 1838년 20세 때 천주교리를 배우고 샤스탕 정 신부님에게서 세례를 받고, 페레올 주교님에게 견진성사를 받고 성사생활을 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로 도피생활을 하다가 1868년 강릉 계촌에서 체포된 후, “우리는 결박하지 않아도 도망갈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집에 가서 남에게 진 빚을 갚고 모든 일을 처리하게 한 뒤에 재산을 적몰하십시오.”라고 청하여 일을 다 처리한 후, 서울 좌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당하다가 49세에 순교하셨습니다.
충청도 홍산 태생의 강영원 바오로는 부모를 따라 입교하였고 부모가 홍산에서 순교하자 전라도 용담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나의 소망은 ‘박해를 당하게 되었을 때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입니다. 지존하고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수난을 받으셨으니, 나같이 비천한 사람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르지 않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했었고, 1871년 신미박해로 체포되어 신발도 없이 눈길을 걸어 나주로 압송됩니다. 옥중 생활에 지쳐 세상 복락을 생각하게 되자,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유감을 입은 탓이니, 이 유감을 물리치고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자.”고 서로 권면하며 박해를 이겨내다가 곤장 30대를 맞고 1872년 백지사형을 받아 50세의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이분들의 시복을 기리며,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기로 합시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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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안녕하십니까, 사랑하는 등촌3동 성당 신자 여러분,
여러분도 2021년도 하계 서울대교구 사제 인사발령장을 보아서 잘 아시겠지만, 저는 지난 8월 20일자 서울대교구 사제 인사발령으로 새로 이 등촌3동 성당에 주임사제로 부임한 심흥보 베드로 신부입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유아, 어린이, 청소년, 청년 사목은 물론 본당 사목 전체를 관할할 부주임사제 유동철 리노 신부님이십니다.
얼마 전에 동생 수녀와 휴가를 하면서, “나 어느 성당으로 가게 될까?” 하는 말을 던졌더니, 그 말을 들은 동생 수녀가 “오빠에게 제일 잘 맞는 성당, 주님께서 보내고 싶으신 성당으로 가실 거야.”라는 말로 응해주었습니다.
제가 힘 닫는 만큼, 이곳을 제게 가장 잘 맞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로 삼아 살겠습니다. 여러분도 이 본당 이 자리가 제게 가장 잘 맞는 곳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매일매일 이 성전 이 제대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제가 바칠 수 있는 열과 성을 다하여 주님의 성찬례를 봉헌하면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면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축복을 내리시어 성가정을 이루게 해주시고, 주님 사랑 안에서 화목하고 평안하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마르 7,34),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입장에서 보면, 살면서 누가 뭐라고 하긴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도 않고, 물어볼 수도 없고, 자신이 무슨 표현을 하려고 해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되지도 않고 해서, 얼마나 답답하고 힘겨운 생애를 살았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평생 말 한마디라도 제대로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해서 사고를 몇 번이나 당하고 또 그렇게 못 듣고 말을 제대로 못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괄시를 당하고 살았을까 쉽게 연상이 됩니다. 그가 자기 귀로 사람의 말을 듣고 싶어서 얼마나 기도를 절절히 했으며, 때로는 자신을 그렇게 낳아준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저주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어쩌면 그의 그 간절한 기도가 예수님을 그에게 오시도록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귀를 열어 주실 때, 얼마나 신이 났을까 싶습니다. 그동안 눈치만 보면서 막연히 그런 뜻이겠거니 추측이나 하면서 살아왔던 그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직접 들었을 때, 누군가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자신에게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 때, 얼마나 큰 기쁨을 느꼈을까! 사랑하는 어머니가 자신을 부르는 다정하고 사랑 가득한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직접 알아차렸을 때, 그에게 펼쳐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놀라움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웠을까 싶습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새 소리, 물소리, 이러저러한 소리들이 그를 놀라게 하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여기게 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 터질 듯 솟구쳐오는 울먹임, ‘아, 이게 사는 거지!’ ‘이렇게 하는 것이 사는 거야!’ 하는 그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우리는 지금 듣고 말하는 데 별 어려움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듣고 살고 있습니까? 어떤 소리를, 어떤 소식을 듣고 있고 또 어떤 소식을 듣고 싶어 하는지?
가정에서 때로는 잔소리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부모님과 배우자의 정겨운 목소리, 자녀들의 귀엽디귀엽기까지 한 때로는 투정 어린 목소리 등등,
직장에서 상사의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업무지시 소리, 동료들의 힘찬 업무수행 소리, 불평 어린 뒷자리 소리 등등,
출퇴근하면서, 동네에서, 사회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목소리, 우려의 목소리, 탄식과 경고의 소리 등등.
누군가는 그런 소리도 했습니다. “세상 다른 모든 사람이 무슨 못 들을 것을 그리 많이 들었기 때문에, 저이는 듣지도 못할까?!” “세상 다른 모든 사람이 무슨 못 할 말을 그리 많이 퍼부었기 때문에, 저이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까?!”
이쯤 되면 우리 스스로 식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간직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소리와 소식들은 무엇인지? 우리를 멍들게 하고 죄짓게 하는 소리와 소식들이 무엇인지?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이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본 사람들이 놀라서 수군거립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37절)
이 시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색해 보고 실현해 봅시다.
우리 주위에 누군가가 나에게서 기쁜 소식과 좋은 말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이가 나에게서 어떤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지? 내가 그에게 가서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을지? 내가 무슨 말을 하여 그를 기쁘게 하고 구원해 줄 수 있을지?
“에파타!”(마르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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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프란치스코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xaultate) V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제3장 스승님의 빛 안에서’, ‘스승님께 층실하여’라는 소제목에서 ‘성덕은 일종의 무아경에 빠진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제시하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 진정 새롭게 출발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고자 하셨던 굶주리는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자 및 수감자 들의 얼굴에서 그분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 기사 내용은 “단순한 사랑의 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주는 그리스도론의 한 구절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그분을 알아보라고 한’ 이 부름은 그리스도의 마음 그 자체, 곧 모든 성인이 닮고자 하는 그분의 심오한 생각과 선택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이 단호한 요구에 참으로 열린 마음으로 곧 해석하려 들지 말고 이 요구를 깨닫고 받아들이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하는 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다시 말하여, 그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만약, 그러나”라는 말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덕’이란 이러한 당신의 요구 없이는 이해되거나 실천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자비는 “복음의 뛰는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추운 밤에 거리의 노숙자를 만났을 때 그를 골칫거리, 게으름뱅이, 길을 막는 걸림돌, 양심을 찌르는 가시, 정치인이 풀어야 하는 과제, 심지어 공공장소를 어지럽히는 쓰레기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믿음과 사랑으로 그에게 응대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그 사람을 자신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 아버지께 무한한 사랑을 받는 피조물, 하느님의 모상,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은 형제자매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이 생생한 인식 없이 과연 성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인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건전하고도 끊임없는 불편함을 수반합니다. 비록 단 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 우리가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고 정당화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예로서, 캐나다 주교단은 성서적으로 이해되는 ‘희년’이란 단지 어떤 선행을 베푸는 것을 넘어선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점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이는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 세대들의 해방을 위해서도 분명히 공정한 사회 경제 체계의 회복을 목표로 해야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더 이상 배척은 존재하지 많을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훼손하는 이념들’이란 소제목에서 우리가 이념으로 인하여 빠지게 되는 두 가지 해로운 오류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하나는 복음의 이러한 요구들을 자신이 주님과 맺는 개별적 관계, 주님과의 내적 결합, 주님 은총에 대한 열린 마음과 분리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의 오류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교는 일종의 비정부 기구로 변질됩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빈첸시오 드 폴 성인,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 그 밖의 다른 많은 성인들이 자신들의 삶으로 증언한 빛나는 영성이 빠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성인들에게 기도, 하느님 사랑, 복응봉독은 그 무엇도 이웃에 대한 그들의 열정적이고 효과적인 헌신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또 다른 유해한 이념적 오류는 다른 사람들의 사회 참여를 피상적, 현세적, 세속적, 유물론적, 공산주의적, 대중 영합적인 것으로 보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그들은 마치 더 중요한 다른 문제들이 있다는 듯이, 자신들이 수호하는 특정윤리 문제나 명분만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라는 듯이, 이러한 사회 참여를 상대화 시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명확하고 단호하며 열정적으로 무죄한 태아를 수호해야 합니다. 발달 단계와 무관하게 언제나 신성하고 모두가 사랑받아야 하는 인간 생명의 존엄이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신성합니다. 곧 극도로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혜택받지 못한 이들, 은밀하게 안락사에 노출된 취약한 병자들과 노인들, 인신매매 희생자들, 신종 노예살이의 피해자들, 갖가지 형태로·거부당한 이들의 생명도 신성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흥청망청 쓰고 버리며 오로지 최신 소비재에 빠져 살아가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멀리서 이를 바라보기만 하며 자신의 삶전체를 절망적 가난 안에 살아가는 곳인 이 세상의 불의에 눈 감는 관념적 성덕을 이상적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아울러 ‘생명 존중의 윤리’만큼이나 이민 문제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구약성경도 한 때 이집트에서 이방인이었던 이스라엘을 상기시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주 하느님의 요청을 듣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틴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리라.”(이사 58,7-8)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예배’라는 소제목에서 단순한 예배 참여와 기도 그리고 윤리 규범을 준수하는 것만이 아니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리고 우리가 받은 하느님 은총을 우리 형제자매에게 헌신으로 증언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하느님 마음에 들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도를 바쳤는지를 확인하는 식별의 기준은 우리가 얼마나 더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보면 안다고 하십니다.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일 뿐 아니라, 참된 히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교회 생활의 토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자비가 정의와 진리를 배척하지 않는 것이 산실이며, “무엇보다도 자비가 정의의 완성이며 하느님의 진리를 가장 찬란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자비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희생 제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우리 신심을 북돋우고 이웃에게 보탬을 주고자 당신께 그 희생 제물을 봉헌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을 비참에서 구하는 자비야말로 하느님께서 더욱 기꺼이 받으시는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고, 우리 이웃의 행복에 더욱 직접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합니다.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는 이점을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수많은 인간적 약점, 인간적 결핍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굽어보시어 우리, 곧 여러분과 제가 죄와 어려움과 약점들을 가졌음에도 세상에서 당신 사랑과 연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대한 당신 사랑을 보여주라고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만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다면 남을 돌아볼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소박한 생활을 증진하고 소비 사회의 수요 열풍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고 실천하기 어렵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소비 사회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기를 열망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피폐해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피상적 정보, 즉각적 커뮤니케이션, 가장 현실 등에 사로잡힌다면 우리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우리 형제자매들의 고통받는 현실에서 멀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이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도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삶,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약속하며 새롭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성인들의 힘 있는 증언은 참행복을 실천하고 최후의 심판을 위한 기준을 따르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마디의 단순한 말씀을 주셨지만 이는 모든 이에게 실제적이고 유효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연구와 성찰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이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복음을 더욱 잘 실천하도록 도움을 줄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이 위대한 성경 본문을 자주 읽고 기억하며 기도하고 실천하려 노력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선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죄사함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로 어려운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는 노력을 기울여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설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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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미사의 영성 11 성변화 후 환호 - 신앙의 신비여
“성당에 가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우리는 이런 류의 질문들은 믿지 않는 친지들과 심지어는 부모와 배우자에게서 들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당에 다닌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생기기는커녕 내야 합니다. 가끔은 “돈 없으면 성당에도 못 다닌다.”는 이야기마저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손해인데도 왜 사람들은 성당에 나오고 교회를 이루려고 애씁니까? 그것도 죽자 사자 성당 일에 매달리는 사람마저 있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실제로 교회의 역사 안에서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순교자들이 있었고, 게다가 우리는 103위 순교 성인들을 자랑으로 삼는 후예들이 아닙니까? 현세적인 이득도 없는데, 무엇이 우리를, 어떤 매력이 우리를 이렇게 교회로 모이게 합니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고, 돈이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 할 것 같은 사회 안에서 그리고 과학과 의학으로 무엇이든 다 해결할 것 같은 이 사회에서 이런 일이 생겨난다는 것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요한 복음 6장에 나오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1-13) 곧 한 소년이 내어놓은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주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것을 내어놓으면 나는 죽을 텐데 죽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먹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신비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 기적을 돈 내고 돈 먹기 또는 돈 나눠 먹기(?)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루카 9,23-24)임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인간이 여기서 ‘나’ 라고 이야기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의지함으로써, 자신이 살아왔던 방법과 처세적인 습관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내 놓은 본인도 먹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다 먹게 된다는 이 기적을 통해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양식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4-57)
그리고 그분이 빵을 당신의 몸으로, 당신의 몸을 우리 영생의 양식으로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당신이 우리 생명과 존재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주인이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안위를 걱정하신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그렇다면 우리를 그렇게 따르지 않으면 미치게 하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고, 우리의 인생을 걸머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가 먹고 마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먹고 마시며 우리 생명의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님이라는 분은 누구입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그분은 우리 현세에서 실패한 분입니다. 그분은 인간사회에서 죄인들과 함께, 죄인으로서도 아주 최극형에 해당하는 십자가형으로 죽으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주인이시고,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우리 생명의 길이라고 여기며 따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분이 죽음의 세력을 쳐부수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5-6)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그렇다면 십자가의 의미,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의 열쇠요 전제조건입니다. 부활하고자 한다면, 아니 영원히 죽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면 죽어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그리고 죽는 것이 신자의 근본이요, 기본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그럼 무엇을 죽이고, 무엇을 얻을 것입니까? 우리는 바로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이해관계로부터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이해관계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따라야 합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고 체험하여 얻은 내 존재와 삶의 사고방식과 이해관계를 버리고, 주님의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너를 밟고 일어서는 방법에서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방법을, 그리고 그것이 진정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상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요 가르침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 그렇기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십자가를 짊어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마태 26,42; 마르 14,36) 사도 바오로는 또한 예수님이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이유가 하느님의 뜻이 인간의 뜻보다 우선하고 더 낫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2-25)
지금까지 보아 온 바와 같이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선포하고자 하고, 십자가가 우리 신앙의 본모습이라고 외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은 열매이지만, 십자가는 부활의 과정이요 전제조건입니다. 부활은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의 하느님 나라이지만, 십자가는 오늘 여기서 십자가를 짊어진 주님의 자녀들에게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하늘나라의 문이요 그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7-19)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그것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희생해야 할 순간에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루카 24,38) 일도록 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짊어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우리의 자랑이요 권리로 여길 수 있어야겠습니다.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1코린 1,31)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우리가 바로 주님의 은총으로 회개했다는 것을 알 것이며, 우리를 통해 주님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도 회개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6-48) 그때 비로소 십자가가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짊어지는, 주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요 응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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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언젠가 한 번 예비신자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실 텐데, 왜 노는 날 사람들에게 들과 산으로 놀러 가라고 하지 않고 성당에 오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만일 성당에 오면서 우리의 오늘이 있도록 해주신 주 하느님과 조상님과 은인들에게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고, 그저 오늘 나의 행복과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기 위해서 나 좋고 나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산다면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삭막하고 불행해질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 안에서도, 우리가 만일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도, 우리의 잘못이 드러나지 않기를 기도한다면? 우리가 만일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고도, 그에게 아무런 사과나 보상도 없이 넘어가기를 바라면서 기도한다면? 입장이 서로 다른 둘이, 이를테면 부부나 형제가 서로 싸우고 나서, 서로 상대가 회개하고 변화되어 자기편을 들어주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청한다면? 인류 재원과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는데, 나나 소수의 사람들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위해 기도한다면?
주 하느님께서 이런 마음으로 청하는 이들의 기도를 어떻게 들어주실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의 이런 기도는 주님 십자가의 무게만 더 해 드리지 않을까? 아울러 형제자매들 사이에 분열만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듯싶습니다. 주님보다는 악마가 더 좋아할 것이고요.
주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우리는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지으면, 그에게 죗값을 요구하거나, 그에게 보복하려고 하거나, 소극적인 방법으로라도 그를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그가 필요하거나 그를 놓치고 싶지 않으면, 그와 협상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만일 그를 사랑한다면,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사과를 하며 다시 제 영으로 돌아오면, 우리가 형제 하나를 얻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하여 그를 이해하고 그를 다시 대화의 상대로 삼고 그의 잘못을 용서하게 될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나에 대한 그의 잘못을 겪으며 당혹스럽고 배반당한 아픈 마음을 추스르고 우리 스스로 제 영으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마음 속에서 수많은 시간을 악과 싸우게 됩니다. 나를 배반하도록 상대의 마음을 충동한 악이 동시에 나에게도 나를 배반한 상대에게 보복하라고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 악의 요구와 충동을 이겨내고, 주님 사랑으로 다시 회복 될 때까지 우리는 여러 번 속을 끓이고 마음을 되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아직 나에 대한 상대의 잘못에 대해 분풀이를 씻어내지 못했거나, 상대가 아직 자신의 잘못과 잘못으로 인한 폐해가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했을 때, 우리는 아직도 긴장과 갈등의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내가 마음을 잡아 다시 제 영으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아직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자존심 때문에 뉘우치려고 하지 않을 때, 역시 가슴 한 구석에 멍과 같은 아픔을 계속 품고 살게 됩니다.
이렇게 둘 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때를 염두에 두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16절) 어느 한 편의 이해관계의 득실이 아니라,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확실히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주고 지적하며,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줄 제 삼자가 필요함을 일깨워줍니다. 성서 상에는 ‘고엘’이라고 해서, 민족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어려움을 배려해주고 돌보아줄 변호인의 역할을 피해자의 가족과 인척 관계에서 담당하도록 제도적으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고엘 중, 그 어느 누구도 피해자의 편의를 잘 돌봐주지 않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그 피해자를 편들어 줄 변호인을 주 하느님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주 하느님의 현세적인 존재를 교회 공동체로 지정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교회는 주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진리의 말씀을 그 판단과 보호의 근거와 기준으로 삼습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흘러나오는 진리와 정의를 바탕으로 한 충고와 중재를 통해 평화를 얻습니다.
한 두 번 말해서 듣지 않으면 욕이나 해버리고 돌아서도 되건만, 주님께서는 단죄가 목적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사랑으로 거듭 요청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그것은 사람을 악마에게 빼앗겨 버리고 싶지 않고, 그가 주님께서 창조 때에 마음 속에 심어주신 사랑으로 다시 나, 제 본래의 영으로 되찾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심지어 긴장과 갈등의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싸움의 당사자 마저 화해를 통해 새로운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라는 소명을 연상시키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19-20절) 여기서 말하는 둘이나 셋이 싸움의 당사자라면, 여기서 말하는 둘이나 셋이 우리나라와 일본이라면, 그리고 또 오늘 우리가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남과 북이라면! 서로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관계이면서, 잘 안 되기를 바라며, 심지어는 원수같이 지내는 둘이 마음을 모아, 더 나은 세상의 건설을 청하기를 바라시는 주님. 그 주님의 마음은 서로 마음을 졸이며 긴장과 갈등 관계에 있는 우리보다 더 마음 깊이 아리고 쓰라린 아픔으로 고통을 겪고 하루 빨리 해소되고 화해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자식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화는, 자신을 내어주는 아픔을 전제하지 않고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전제와도 같은 말씀에서부터, 우리는 사랑이 그저 오늘 내가 좋아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더 좋은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취하는 것이 아님을 일러줍니다. 내 생명을 바쳐야 너를 살릴 수 있고, 내 생명을 바쳐 희생할 때 너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내 뼈를 깍아내리듯 내어주는 사랑 없이 우리는 형제를 얻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정치나 사회에서 가르치고 추구하는 방식과 다른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인간관계의 기초 방식입니다.
우리 생애를 통해 축적되고 뿌리 깊게 자리잡은 죄악의 깊이가 어느 한 순간에 제거되거나 어느 한 두 조건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캄캄한 밤도 동이 트는 새벽 빛에 사라지고 맙니다. 주님 사랑의 하느님 나라에 초대되어, 우리 안에서 우리 스스로 악에게 매달려 습관적으로 잡혀있는 상처와 원한 깊은 여러 장벽과 굴레들을 주님 사랑의 빛으로 비추어 봅시다. 그리하여 주님 사랑의 영에 힘입어, 악이 우리 마음 속에 애초에 상처와 장벽의 굴레를 심어놓던 그 기간의 몇 배 이상으로 걸리는, 지루하지만 중단 없는 노력으로, 진리와 정의의 복음 말씀을 이루어나가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시작합시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생성과 현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일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하느냐 하는 작업 방식의 선택이 아니라, 형제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사랑 안에서 하느님 나라는 생겨나고 현존한다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오늘의 현실을 다시 보고 새롭게 살도록 초대합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며 사랑의 첫걸음을 내어 딛읍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연중 제23주일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청송 심씨 안효공파 26세손 심놀보 동생 흥보입니다. 어릴 때 흥보라는 이름이 흥보 놀보전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과 같아서 아이들이 놀려 별로였었습니다. 자라면서 보니, 제 이름을 한 번 들으면 기억을 잘 해주시고, 또 ‘도울 보’(輔)라는 학렬의 돌림자 앞에 ‘일 흥’(興)자를 붙여주셔서 그 뜻이 ‘일어나 도와주어라’ 라는 아버님의 큰 뜻을 자주 헤아리며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되새기곤 합니다.
저는 지난 2월 16일에 주 하느님의 은총으로 삼성동 주임사제로서의 5년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주교회의 제주 엠마오 연수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 수녀님들이 하도 맛있고, 기름지고, 풍요로운 음식을 해주시는 바람에, 매일 오후 1시 30분부터 4시 30분까지 오름을 오르고 올레길을 걸었어도, 돌아와 성모병원에서 혈당을 재보니 당화혈색소 10.7 공복혈당 270이 나왔습니다.
그 결과를 보고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죽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참을 고민하다가, 주교님께 저 안식년 못하고 복귀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주교님께서 “산 밑에 조용하고 안정된 본당으로 보내줄 테니, 거기 가서 미사만 드리고 기본만 하면서 건강을 회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산 밑의 본당이 어딘가 했더니, 거기가 수색성당이었습니다. 서울교구 인사발령을 보고 한 신자가 “거기가 신부님이 원하는 본당입니까?” 하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점지해 주신 본당이 제가 원하는 곳입니다.” 라고 답하고, 지난 8월 30일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왔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를 보내시면서, “심 신부님 건강을 위해 음식을 조절하는 것은 좋은데, 청소년 담당 신부는 어떻게 해?” 라고 하문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부터 저는 매운 것 알러지가 있어서 싱겁고 하얀 음식, 청소년 담당 신부는 청소년 담당 신부가 좋아하는 음식을 따로 차려 먹었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혹시 저희와 음식을 나눌 때에는 저뿐만 아니라 김 신부님을 각별히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김 신부님이 근처 식당에서 젊은 이들과 식사나 차를 하는 장면을 보시고 몰래 계산해 주시면, 주교님의 염려를 확실히 덜어주실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같이 모임을 하던 한 신부님이 “심 신부님은 너무 완벽을 추구해서 차가워 보이니, 수염이라도 기르면 신자들이 좀 비빌 언덕이 있지 않을까 싶다.” 고 하셨습니다. 수염을 기르고 나서 최근에 거울을 보니 별로 예쁘지 않았습니다. ‘수색으로 가면서 깍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당뇨성 심장질환으로 산에도 못 올라가고, 추운 겨울에 밖에 나가면 찬바람이 폐부를 찔러 꼼짝 못하고 집에만 있기가 십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는 수염이 조금 걸러줘서 그런지 가슴이 들 아팠고 또 턱주가리가 시리지 않아서, 겨울을 상기하며 계속 기르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혹여 다소 보기 흉해도 너그러이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당뇨성 녹내장을 예방하는 방법이 ‘목을 조이지 않고 풀고 다니는 것이라.’고 해서, 미사나 성무를 집행할 때 외에는 목을 풀고 다니니 그 점 또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형님 두 분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부모님의 과보호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지난 본당에서는 그런 저에게 ‘귀돌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여러 신자들의 심정을 일일이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 점도 제가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한다고 하는데 잘 모르고 경험이 미천하여 그런 것이오니 양해해 주시고 감싸주시며, 여러분의 활동으로 채워주시기를 감히 청합니다.
지치고 병든 몸을 끌고 수색 성당에 와서, 여러분에게 송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매일 여러분을 위해 정성껏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조배를 하면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건강해지는 가장 좋은 비결은 음식조절과 운동도 한 몫을 하겠지만, 사랑하고 사랑받아 화목하고 평안해지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5년 임기를 마치고 이임하는 날 몸과 맘이 건강해져서, 주교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주신 뜻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여러분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떠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저를 어여삐 여기셔서 사랑해 주시고, 저의 부족한 면을 여러분의 활동으로 채워주시기를 청하면서, 우리 공동체에 주님 사랑의 결실이 온전히 맺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라고 하시면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3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는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대로 가족이나 성격, 과제들처럼 우리를 힘겨워하거나 고통스럽게 만드는 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 것이라고 여기는, 그것도 가장 좋아하거나, 자랑스러워 하거나, 내 삶을 보장해 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라면 그것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입에 단 것이 몸에 해롭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수색 성당으로 오면서 역사가 100년이 넘는 본당이라 전임자이신 이기헌 사도 요한 신부님을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역대 신부님들께서 사목하시던 곳이라 마음 속으로 부담이 적지 않았습니다. 부임하는 날 신자분들과 사목협의회원분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셔서 참 편안하고 마치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신자분들처럼 반가웠습니다.
그 다음날 수요일 미사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6-9) 라고 하셔서 더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둔촌동 성당으로 이임하신 전임 주임사제 이기헌 사도 요한 신부님께서 하루 빨리 새로운 공동체에 적응하셔서 사목활동에 전력을 기울이실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희생을 봉헌해 주시길 청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서 서로를 감싸주고 덮어주고 채워주면서, 주님께 의지하여 늘 화목하여 평안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기도하며 살아가렵니다. 아멘.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연중 제23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V
오늘은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의 제1장 지구의 환경 오염과 제2장 피조물에 대한 창조의 가르침, 제3장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 제4장 온전한 생태학(137-162항)에 이어, ‘제5장 접근법과 행동 방식(163-201항) ’을 살펴보겠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회칙과 관련하여, 교회일치 차원에서 정교회와 함께,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World Day of Prayer for the Care of Creation)로 선포하셨습니다.
이 장은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에 관한 문제를 다룹니다. 분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는 “국제 정책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이 참여하는 대화와 행동을 위한”(15항) 제안이 필요합니다. 이 제안은 “현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자기 파괴의 소용돌이에서 탈출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163항)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실천적인 제안이 이념적으로 피상적이거나 환원주의적인 방식으로 개발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화가 필수적이며 이 용어는 이 장의 모든 절에 나와 있습니다. “폭넓은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쉽지 않은 환경 문제들이 있습니다. …… 교회는 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정치를 대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특정 이익이나 이념이 공동선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솔직하고 열린 토론을 권장하고 싶습니다”(188항).
이 장은 국제 공동체의 환경에 관한 대화(164-175항), 새로운 국가적 지역적 정책을 위한 대화(176-181항), 정책 결정 과정의 대화와 투명성(182-188항), 인간 성취를 위한 정치와 경제의 대화(189-198항), 과학과 종교의 대화(199-201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I. 국제 공동체의 환경에 관한 대화(164-175항)
상호 의존은 우리에게 “소수 국가들의 이익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 세계적 관점에서” 해결책을 제안하며, 공동 계획을 가진 하나의 세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164항). 이 회칙은 겁내지 않고 국제적 역학을 과감하게 비판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환경에 관한 세계 정상 회담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치적 의지가 결여되어 참된 의미가 있는 효과적인 세계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166항). 그런데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서 시작하여 여러 교황님들께서 되풀이하여 말씀하신 대로 필요한 것은 세계 통치의 형태와 수단입니다(175항). “이른바 ‘인류 공공재’의 전체를 다룰 통치 제도에 대한 합의”(174항)가 필요한 것입니다.
II. 새로운 국가적 지역적 정책을 위한 대화(176-181항)
“지역 사람들과 단체들은 …… 더 큰 책임감, 더 강한 공동체 의식, 다른 이를 보호할 준비, 그리고 창조 정신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179항). 또한 우리 자신의 땅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이익만을 추구하고 눈앞의 선거 승리에만 초점을 맞춘 근시안적인 효율성의 논리를 버려야 합니다.
III. 정책 결정 과정의 대화와 투명성(182-188항)
환경과 사회의 관점에서 경제적 제안들을 분석하고 평가하여 사회적으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182-188항). 어떤 정책과 사업 계획이 “참다운 온전한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는지를 “식별하기” 위하여, 솔직하고 투명한 정책 결정 과정의 수립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185항). 특히, 새로운 계획의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포함한 투명한 정치적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특혜의 대가로 특정 계획의 실제적인 환경 영향을 은폐하는 부패는 대부분 올바른 정보를 주지 못하고 충분한 논의를 허용하지 않는 허점투성이의 합의만을 낳을 뿐입니다”(182항).
IV. 인간 성취를 위한 정치와 경제의 대화(189-198항)
세계 금융 위기를 계기로 “윤리 원칙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새로운 경제와 더불어 투기 금융 관행과 가상의 부를 규제하는 새로운 방식”(189항)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환경은 시장의 힘으로 바르게 보호되거나 증진될 수 없는 재화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90항). 다른 시점으로 보는 것은 “생산과 소비의 감소가 때로는 또 다른 형태의 진보와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니다. “자연 자원의 지속가능한 사용을 촉진하려는 노력은 돈 낭비가 아니며 오히려 중기적으로 다른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투자입니다”(191항). 더욱 근본적으로 “발전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는 것”(194항)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사람들의 진정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과 관련됩니다. 동시에 “정치학이 없는 경제학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196항). 정치학과 경제학은 함께 새로운 온전한 접근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V. 과학과 종교의 대화(199-201항)
경험 과학은 삶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며, “만일 우리가 조화롭게 살고 희생을 하며 남을 배려하는 중요한 동기를 잊는다면”(200항) 과학기술적인 해법들은 효력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종종 종교적 언어로 표현됩니다.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걸맞게 살아가야 하며 신앙에 어긋나게 행동하여서는 안 됩니다.
VI. 종교들은 “자연을 보호하고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며 존중과 우애의 관계망을 수립하는 대화”(201항)를 나누어야 합니다. 또한 학문 간의 대화도 학문적 고립 극복에 도움이 됩니다. “다양한 환경 운동들 사이에도 개방적이고 존중하는 대화가 필요합니다”(201항). 대화에는 인내, 자제, 관대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우리 본당 설립 15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본당 설립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교회의 사명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해 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주 하느님께 우리가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물적 영적 양식을 청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왜 무엇을 하도록 우리 교회를 세우셨는가?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교회 신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교회에게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마태 28,18-20). 교회는 주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를 설립하고, 주님과 공동체의 친교와 일치를 통해 공동체를 양성하며 복음을 선포합니다. 복음 선포는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고 스스로 실현하는 복음화와 주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희생봉사로 진행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추구하고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주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와 어떤 함수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 내 바램이 전 인류 형제자매들과의 바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더 나아가 대자연과 피조물 전체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자문하고, 함께 대화하며 이루어나갑시다.
“에파타! 열려라!”(마르 7,34)
연중 제23주일
새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2,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은 제 4 장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2’와 제 5 장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입니다.
교황은 이 4 장 후반부의 ‘공동선과 사회 평화’라는 제하에서, 기쁨과 사랑에 이어 평화의 열매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갈라 5,22 참조)에 대해 말합니다.
사회 평화는 사회의 일부가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여 얻은 화친이나 단순한 폭력의 부재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평화가 가난한 이들을 침묵시키거나 구슬리는 사회 구조를 정당화하려는 구실로 쓰인다면 이는 거짓 평화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의 국민은 지배 권력에 휘둘리는 군중으로서가 아니라 사명감과 책임감을 지닌 국민으로서 활동하여 그들 삶의 사회적 차원을 드높입니다. 책임감 있는 시민 의식은 하나의 덕이고, 정치 생활에 대한 참여는 도덕적 의무입니다. 평화와 정의와 형제애로 이러한 국민을 이룩하는 데는 네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얻으려는 충만함과 벽과 같은 한계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하는데, 쉽고 빠르게 해결하려는 마음보다 성령을 기다리듯이 공간을 장악하기 보다 시간의 과정에 관심을 기울입시다.
갈등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거나 갈등의 포로가 되어 방향을 잃기보다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새로운 전진의 연결 고리로 만들어 친교를 증진시켜 일치에 이르게 합시다.
천사 같은 순수주의, 상대주의의 독재, 공허한 미사여구,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 반역사적 근본주의, 선의가 없는 도덕주의, 지혜가 없는 지성주의 등의 생각을 거부하고 실재에 집중합시다.
전체는 부분보다 크고, 그 부분들의 단순한 총합보다도 더 큽니다. 우리의 모델은 모든 중심에서 똑같고 차이가 없는 구체(球體)가 아니라 고유성을 간직한 모든 부분의 집합인 다면체(多面體)입니다. 복음은 모든 이의 모든 순간까지 전체성이라는 고유한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황은 ‘평화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대화’라는 제하에서, 국가와 문화와 학문을 포함한 사회와, 가톨릭 교회 이외의 다른 신앙인들과 나누는 대화에 대해 말합니다.
교회는 ‘평화의 복음’(에페 6,15)을 선포하고, 이 보편선을 수호하는 모든 국가 권위와 국제 권위와 협력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국가와 또 사회와 나누는 대화에서 모든 개별 분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회의 다양한 분야들과 함께 각 개인의 존엄성과 공동선에 대한 최선의 응답을 하는 계획들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성을 추구하고 신뢰하며, 과학의 놀라운 진보를 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 일치 운동은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하신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며, 인류 가족의 일치에 이바지합니다. 한 신앙의 뿌리인 유다교인들과 이슬람 형제들과의 대화와 진리와 사랑의 열린 자세로 양심에 충실한 비그리스도교 신자들과의 대화 그리고 진선미를 진심으로 추구하는 선한 이들과 대화하고 격려하고자 합니다.
교황은 제 5 장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는 두려움 없이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열어젖히는 복음 선포자라고 선언합니다. 영으로 충만한 복음화란 성령께서 이끄시는 복음화입니다.
교황은 ‘새로운 선교 열정의 동인’이라는 제하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는 기도하며 일하는 복음선포자라고 말합니다. 투신과 활동에 그리스도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적인 공간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성체 조배를 하고 기도 안에서 말씀과 만나고 주님과 진실한 대화를 나누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쏟지 않으면, 우리의 활동은 쉽게 무의미해지고, 우리는 노고에 지치고 열정도 사그라지고 맙니다.
사랑의 요구와 부합하지 않는 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영성을 제시하려는 유혹, 강생의 함축된 의미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으려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기도에 쏟는 시간이 선교 생활을 하지 않는 핑계거리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복음화의 첫 번째 동인은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 그분께 구원받은 우리의 경험입니다.
선교사는 성령의 활동으로 개인과 민족들이 무의식적이나마 이미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진리,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법에 대한 진리를 알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선교사의 열성은 자기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나옵니다.
이 확신은 그리스도의 우정과 그분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개인적 체험으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개인적 체험을 통한 확신이 없으면 열정적인 복음화를 꾸준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여야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기가 더 쉽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는 예수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을 추구하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합니다. 우리 자신의 적합성이나 이해관계나, 작은 한계나 소망을 떠나, 이해와 동기를 뛰어넘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복음을 전합니다.
선교는 바로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며 또한 그분의 백성을 향한 열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우리를 당신 백성 한가운데로 이끌어주시어, 우리도 사회 속에 깊이 들어가 함께 삶을 나누고, 그들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고, 물심양면으로 필요한 것을 돕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함께 손잡고 새 세상을 건설하고자 노력합니다.
이따금 우리는 주님의 상처들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유혹을 느끼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의 한 가운데에 들어가 인간의 고통을 어루만져주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희망의 이유를 제시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는 영적인 힘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새로운 기쁨을 배웁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사도 20,35)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희망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희망의 깊은 원천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스며든 새 생명의 힘입니다.
어려움도 있습니다. 실패와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인한 고통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적인 확실성, 곧 하느님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활동하실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 ‘신비 감각’이 필요합니다.
선교는 거래나 투자도 아니고 인도주의적 활동도 아니며, 광고에 따라 모인 관객의 수를 세는 공연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곳에서 열매를 맺으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깁시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로마 8,26) 또 우리가 복음화 임무를 맡고 다른 이들의 선익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전구기도를 바칩니다.
교황은 ‘복음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란 제하에서, 마리아께서는 성령과 함께 언제나 백성 한가운데에 계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며 성령께서 오시도록 간청하셨고(사도 1,14 참조), 그리하여 성령 강림 날 선교의 폭발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복음화하는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마리아는 새로운 복음화의 별입니다.
살아있는 복음의 어머니, 작은 이들을 위한 기쁨의 샘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2013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프란치스코
연중 제23주일
오늘(어제) 저희는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시리아, 중동, 전 세계를 위한 기도와 단식의 날’ 을 봉헌합(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9월 7일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성 베드로 대성전에 모여 하느님께 시리아와 세계 곳곳의 분쟁과 폭력 지역에 평화의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하시며, 이 지향을 위해 모든 지역 교회에서도 단식하고 모여 기도할 것을 청하셨고, 우리 본당도 동참합(하였습)니다."
오늘(어제) 7시 특전 미사를 마치고, 8시부터 9시까지 11, 12, 13구역이, 9시부터 10시까지는 8, 9, 10구역이, 10시부터 11시까지는 5, 6, 7구역이, 11시부터 12시까지는 1, 2, 3구역이 한 시간씩 맡아서 단식하고 기도를 바쳐주시기 바랍(바쳤습)니다.
저는 교황님의 이번 기도 요청 공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도 매스미디어를 통해, 교황님처럼 똑같이 세상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접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상황을 아파하면서도 어떤 때는 그 사건의 이해 관계자들을 비난하고 불평하기도 하며, 그 희생자들을 위해 화살기도를 바치고는 그냥 그렇게 넘어가 버리기도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마치 놀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줄거리를 가진 드라마를 바라보듯이 흥미(?)를 갖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도 합니다. 제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책임질 수도, 처리할 수도, 관심을 가진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어떻게 해줄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서 하루하루 자기 사는 것에 급급하여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는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하고 방관자처럼 지내고 마는 경우도 많습니다. 업무와 일과, 운동과 건강, 취미와 문화 생활, 심리와 영성 생활 및 이상과 꿈 그리고 미래와 노년의 삶 등이 제 머리를 쥐어 짜고 있고, 저와 저의 본당 신자들 그리고 제 교구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일들을 저의 주 영역처럼 느끼고 삽니다.
그런데 교황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우리 모두에게 단식하며 기도하자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시리아인들이나 분쟁과 폭력 속에 내몰린 희생자들은 교황님의 가족이나 친지도 아니고, 천주교 신자도 아니고, 업무상 관련자나 동료들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교황님은 관련 대상자들과 희생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단식하고,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 혼자가 아니라 세상에 같은 믿음을 가진 천주교 신자들에게 함께 마음을 모아 연대하여, 오늘(어제) 교회의 방법으로 단식과 기도의 날을 갖자고 초대하십(셨습)니다.
세상 저 멀리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를 접하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지금 당장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성금을 보낼 수 있다면 보내는 정도 이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또 그분들의 희생에 연대하는 의미로 단식을 합니다.
그리고 죄악이 지배하는 듯한 세상에서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무기력감을 느끼며 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아 주님께 봉헌하며, 주님께서 헤아려 주시어 평화를 내려주시고 몸소 위로해 주시기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교황님의 이러한 모습에서 저는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은 지상 교회 책임자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겪고 있는 어려운 형편과는 전혀 상관없이 천상에서 지복직관을 누리기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인류를 구원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변화되도록 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급기야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뭐래도 먹고 사는 것이,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인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짊어지고 있는 육신 생명과 질병, 성격과 단점, 신분과 사회적 자리와 위치, 인격적 감정적 수준 등이 우리가 짊어지고 걸어가는 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과 친지들이 나에게 얹어주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에서 나에게 짊어지도록 요청하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 경시할 수 없는 내 십자가들입니다.
여러분의 십자가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들이 내 인생의 장애요 부담입니까?
아니면, 축복입니까?
내 십자가가 내 삶의 여정을 방해합니까?
아니면, 내 십자가가 내 신앙생활의 거룩한 목표인 하늘 나라 건설과 인류 사회의 평화를 한층 더 가깝게 합니까?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십자가로 등장하는 내 육신 생명과 가족 친지, 인류 사회 형제자매들이 내 생애에 답답함과 괴로움을 안겨줍니까?
아니면, 내 십자가를 짊어지면 질수록 내 삶에 기쁨과 보람을 가져다 주고, 내 이상을 일구어 준다고 여기십니까?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부활하시어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우리 몫을 다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의미와 우리 인생의 목표와 미래를 일구어 나가기로 합시다.
세계 교회의 목자이신 교황님께서 가지신 그 자부적 · 자모적 사랑으로, 그분에게 지상교회의 책임을 맡기신 하느님의 아버지 · 어머니와 같은 사랑으로, 우리 가족과 세상의 아픔과 어둠 그리고 폭력과 분쟁, 특별히 전쟁으로 신음하는 인류 형제 · 자매들을 위해 시간과 열정을 바쳐 단식하고, 기도하며 우리의 생명을 바칩시다.
9월 순교자 성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바치셨고, 순교자들은 주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형장에서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 하늘 나라 건설과 인류 사회의 평화를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합시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연중 제23주일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도한다고 떡이 생기냐, 돈이 생기냐?”, “기도하면 너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냐?”, “기도 안 하면 천벌이라도 받냐?”, “기도하면 위험과 고통이 없어지냐?”, “기도 시간을 꼭 정해놓고 해야 하냐?”, “기도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어려운 사람을 찾아 위로하고 봉사하는 것이 더 낳지 않냐?”, “왜 기도하냐?”
떡을 얻고 돈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가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양식을 청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마태 6,11) 우리 삶의 현실적인 필요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우신 업적을 발견하고 깨달아 그에 대해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께서 한 평생 애쓰셨던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우리도 투신할 때 곁들여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미태 6,31-33)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원을 들어주시고, 기도 안 한다고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또 내가 달라는 대로 주고, 청하는 대로 해주신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세상에 나와 같은 너 들이 그렇게도 많은 데, 우리 중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을 위해 달라는 대로, 청하는 대로 주신다면, 그분은 기도하는 이의 개인수호신이거나 그 민족신이거나 미신일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싸우면, 자식들이 누구 편을 들어야 합니까? 자식들이 서로 싸우면서 자기 편을 들어달라면, 부모는 누구 편을 들어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도한다면, 또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이기고, 지배하고, 이용하고, 괴롭히기 위해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너나 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인류 모두는 물론이고 살아있고 존재하는 피조물 모두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안 하고, 주일 미사 빠진다고 천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모님께 안부 인사 제대로 안 드린다고 지금 당장 벌받아 죽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기도한다고 위험과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한다고 우리에게 닥칠 어려움이나 사고나 죽음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나 기도하지 않는 이나 똑같이 세상을 살면서 겪을 것을 그대로 다 겪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물론 하느님께서는 필요하시다면 미리 그러한 일을 겪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모든 것을 다 겪어낼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슬퍼할 때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가 기뻐할 때 우리와 함께 기뻐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겨워 할 때 우리와 함께 힘겨워하시면서,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이웃사랑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꼭 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활동으로서의 봉사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활동에 앞서 그 활동의 원천이 되는 주님의 영과 힘을 기도 중에 얻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루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매일 하루를 마치면서 홀로 떨어져 기도하셨던 그 모습대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실 때나 기적 등의 중요한 일을 하시기 전에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활동에 앞서 기도합니다. 베네딕토 성인도 수도회칙에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고 기록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활동이 무엇이며, 또 우리가 하는 활동이 주님의 뜻 안에 있기를 청하며,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온전히 활동할 수 있도록,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가 하는 활동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마침내 열매 맺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으로 여겨주기도 하지만, 봉사활동 자체가 기도를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봉사활동과 신앙생활은 또 다른 형태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신명기와 레위기를 인용하여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신명 6,5)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하였습니다.”(루카 10,27)
우리가 기도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현실에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웃은 사랑하지 않고 기도만 한다면 이런 세인들의 비난이나 지적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성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자식과 부모 또 다른 어느 누구도 우리 인간 내부에서부터 샘솟는 목마름과 갈증을 온전히 채워주실 수 없고, 그 목마름과 갈증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을 해도, 저것을 해도, 이렇게 해 봐도, 저렇게 해 봐도, 채워지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 우리의 욕망과도 같은 갈증과 인간 내부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1.13)
그리고 이 갈증과 목마름은 마치 한 끼라도 못 먹으면 배고파 지치고, 먹을 것을 찾아 나서는 것처럼, 우리를 기도 중에 하느님 앞에 나아오도록 해 주고, 하느님 안에서 그 갈증과 목마름을 해결하여 오늘을 영적인 기쁨과 내적인 평화 속에서 살아나가도록 해줍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기도 안에 숨는 것도 아니요, 육적이고 현실적인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얻고자 함도 아닙니다. 또한 불안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기도했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심리적인 안정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주님을 뵈옵고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을 새기고, 그 말씀을 내 현실에서 내가 적용할 수 있는 만큼 적용하며 주님과 함께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연구와 기도 중에 들은 주님의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기도자가 실천한 수 있는 만큼 실천해 나가면서 우리의 내적 영적 생활은 풍요해 지고 성장할 것입니다. 그 풍요로움과 성숙은 하느님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사명을 살찌워 줄 것입니다.
육과 영으로 이루어진 우리 몸은 외적이고 육적인 현실 세상에서 살아갈 양식과 내적이고 영적인 신앙 생활을 영위할 양식을 다 얻도록 요구하고 있고, 그 양식들은 우리 인생을 살찌우고 풍요롭게 해 줍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우리 신앙생활의 기쁨을 여러분이 직접 진실하고 깊게 사시면서 체험하시고, 그 체험으로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그 체험에서 오는 기쁨을 형제들과 나눕시다. 그래서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많은 분들이 다가오는 예비자 환영식에 우리와 함께 주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기쁨과 행복에 참여하게 되길 바랍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아멘.
연중 제23주일
얼마 전 한국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패션 70’이라는 드라마였는데, 그 드라마는 6.25전쟁이후 70년대에 이르기까지를 그렸습니다. 4명의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의 인생역정을 그린 드라마였습니다. 얽히고설키다 못해 꼬이기까지 한 인생을 풀어가는 극이었습니다. 그 드라마를 통해 사람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만남과 이별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장면들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훑었고, 그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미래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극은 성공과 부자가 되는 길을 그렸다기 보다는 가족과 친지들의 관계를 개선하고 향상시켜나가려는 시도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고자 하는 의도를 표현했습니다. 작가는 한 더미라는 전쟁고아 출신의 선하고 맑은 마음을 간직한 한 여성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모든 아픔을 끌어안아주고 기다려주고 함께해주고 밀어주면서, 사연을 담고 있는 모두의 과거와 현재를 인간적으로 바로 잡아 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또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서로 다른 부모에게 태어나 서로 다른 부모 밑에서 서로 다른 경험들을 하면서 자라왔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환경과 서로 다른 조건 그리고 서로 다른 인격을 주고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지금 한 순간에 어느 한 사람을 보면 정말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끼는 자신조차 남과는 다른 아니 남이 보기에는 이상하리만치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것이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애초에 처음 세상에 날 때부터 하느님께서 서로 다르게 만들어 주셨고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 속에서 자라게 하셨기 때문에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서로 다르게 만드셨을까? 무엇 때문에 오늘 인간 세계가 이렇듯 전쟁과 경쟁과 불신 속에 빠져 있을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서로 시샘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잡아먹으면서 서로를 계발하고 성장시키도록 만드셨을까?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인간들끼리 서로 헐뜯고 생채기를 후벼 파면서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 자기 것을 채우고 세상을 지배하도록 하셨을까? 과연 하느님께서 그런 것을 원하셨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하느님께서는 서로 다르게 만드셨을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다른 점 때문에 서로 싸우고 잡아먹도록 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서로 다르게 만드셨을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다른 장점들을 주시면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가지고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완전한 하나를 이루라고 만드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1고린 12,27) 그러면서 “몸은 한 지체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발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다른 것들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또 보기 흉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꾸밉니다. 이것은 몸 안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1고린 12,14-26 참조)하고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각자 서로 다름을 보면서
‘왜 이렇게 했느냐?’
‘왜 너는 나와 다르냐?’
‘왜 너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하느냐?’
‘왜 너는 내가 하자는 대로 안하느냐?’
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너와 내가 함께 우리를 둘러싼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이 다름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다름을 채워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다름을 통해 더 큰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
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중심주의와 자기 우선주의에서 벗어나 나와 다른 너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너와 함께 우리라는 공동체를 건설하고 함께 꾸려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 13, 8)
그리고 결코 서로를 포기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끌어안으면서 주님께서 펼쳐주신 아름다운 세상 안에서 살아나가기로 합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마태 18,19)
연중 제23주일
언젠가 성무일도서의 끝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 끝기도를 마칠 때 이렇게 기도한다. "전능하신 천주여,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아멘."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해 달라는 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우리는 죽어간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 보다 더 적어 보인다. 그러길래 사람들이 가끔 아기가 태어날 때는 세상을 다 거머잡으려고 손바닥을 꼭 쥐고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버려둔 체 심지어는 욕심마저도 접은 체 손바닥을 피고 간다고 하지 않던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대로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기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제자로서는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첫 번째가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방식, 자기의 의도를 버리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 그리고 두 번째가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 그리고 이 두 번째의 길은 반드시 첫 번째를 이루어야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33)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길이 죽음의 길인가? 주님을 따르는 길이 생명의 길이요. 기쁨의 길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길이 죽음의 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현세의 죽음이 미래의 탄생이다. 비단 마지막날 지상에서의 죽음이 천국에서의 탄생일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세속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신앙 안에서 그리고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5, 24) 그리고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 35)라고 하셨고, 또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7, 39) 그리고 주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면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1, 25-26)하시고는 "너는 이것을 믿느냐?"(26)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라고 하신다.
우리는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에게서 죽음 곧 자기 버림을 본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 6-7)
왜 그분은 당신이 누리는 모든 권능을 다 버리고 인간이 되어 오셨는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간이 되어 오실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그 희망을 발견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리면 끝날 것으로 여겨서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래서 예수님은 실패한 것처럼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죽음을 죽음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다시 살려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죽음마저도 쳐 이기시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오셨다.
어떻게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이 사람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다고 거기 매달려 사람들이 죽이는 대로 그렇게 죽으실 수 있었는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던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성사의 영성이며 우리 신앙인의 결단이다. 자신과 자신의 죄에서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세례성사.
이제 우리에게 결단만이 남아있다. 세속을 따르지 않고 죽음으로써 하늘나라의 영생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세속을 따라 삶으로써 그냥 세속에서만 살고 부활의 희망 없이 죽음으로 그쳐버릴 것인가?
우리 각자가 선택할 길이다. 믿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오늘 사도 바오로는 버림의 방법론에 대해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노예를 부리는 필레몬이라는 주인에게 노예인 오네시모를 지금 당장 해방시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노예해방을 외치기 보다, 노예를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노예 해방 제도가 생겨나기 전이라 하더라도 노예를 노예로 부리지 말고 형제처럼 지내라고 말함으로써 실질적인 노예해방을 말한다. 세속 안에 육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가면서도 세속의 방법론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제부터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서 그대와 같이 있게 될 것입니다."(필레 16) 그리고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는 것처럼 그를 맞아 주시오."(17)
그러면서도 그는 필레몬의 자유 선택을 존중하고 그의 변화를 기다린다. "그를 내 곁에 두어 그대를 대신해서 내 시중을 들게 하려고도 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대가 선을 행하는 것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13-14)
우리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주님을 선택하고,
서로 평가하거나 비교하지 말고,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감사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겸허하게
주님의 뒤를 따라 걸어갑시다.
연중 제23주일
가끔 기도시간이 아까울 때가 있다. 할 일이 너무 많을 때는 웬지 모르게 기도보다 먼저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할 일은 많은 데 그것들을 다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모자란다.
그런가하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일이 눈에 닥치고, 일 속에 빠져 들어가 그 일부터 하노라면 새삼 특별히 마음을 먹고 자기에게 닥친 일을 미루지 않는다면 그냥 세상사에 편입돼 버린다. 그래서 기도하기 위해 아주 의도적으로 그것을 끊거나 미루고 기도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기도하기가 힘들 때가 있다.
또 기도가 무슨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것처럼 기도만 하면 낳을 것처럼 말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때는 몸이 피로하고 귀찮아 기도하기보다는 쉬고 싶을 때도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앙생활에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기도가 차선책으로 밀려나는 세상에서 꾸준히 기도하기가 힘들고 그러기에 점차 주님 안에서의 평안함,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살기가 힘들다.
물론 기도하면 세상 만사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기도하라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피조물이요 자녀로서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주님과 피조물의 관계 주님과 자녀의 관계 곧 주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함으로써 얻게되고 누리게 되는 평안함과, 충만함을 간직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있을 때 누리는 그 편안함과 충족감. 분노와 갈등 그리고 갈증과 불안을 잊게 하고 실제로 씻어주며 채워주는 영의 안식과 풍요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굶주리지 않는 기쁨과 충만함!
그리고 또 그렇게 주님께서 주시는 우리 생명의 양식을 받아 누림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힘에 벅찬 일이 생길 때 흔들림 없이 헤쳐나가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기도에는 물리적으로 계산할 수 없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봉헌과 열매의 관계가 있다. 물리적으로는 1시간을 기도하면 1시간의 활동시간이 줄어드는 셈이지만, 영적으로는 1시간 기도해서 물리적으로 줄어든 시간에 영적으로 집중할 수 있고 주님의 은총으로 3∼4시간 일한 효과를 얻는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 주님께 봉헌하는 기도의 원칙이다.
오늘 "에파타"하시면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듣게 하시고 말하게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급해 보이고 반드시 지금 당장 해야하는 것처럼 닥친 유혹을 떨쳐버리고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본질적으로 살 수 있고 실제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고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연중 제23주일
어느 유행가에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는 가사가 있다. 그러나 진정 사랑의 적이랄 수 있는 것은 '무관심'이다. 차라리 화를 내고 핍박이라도 하면 그것은 존재라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이 죽던 말던 상관치 않고, 아예 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무관심이야말로 사랑의 최대의 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웃에 관심을 갖고 교류를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옆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지를 알려면 상당한 관심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오래 공을 들여서 만나도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면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서로가 다르고 서로 자신을 앞세우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계를 지속하면서 부딪히는 일이 생기면 피하기 일쑤이고 그나마 자기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끼어 들기조차 꺼린다. 신자들끼리도 그렇다. 서로 알아서 해 주기를 바라지만 막상 일이 생기면 서로 눈치만 보고 누군가 대신 해주기를 바랄 뿐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 예전부터 충고는 커다란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일로 평생 다시 못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수마저 될 불이익을 감수할 정도의 사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이 듣기 싫어하고 말 잘못해서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을 꺼리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예제키엘 예언자는 누가 잘못했는데도 충고하지 않으면 비록 죄는 그가 지은 것이지만 그 벌에 대한 책임은 그 죄를 보고도 입다물고 모른 체한 우리에게 있다고 경고한다(에제 33, 8 참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고와 충고를 거듭할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해 우리에게 마음을 모아 구하라고 하신다(마태 18, 15-20 참조). 그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 13, 8)라고 한다. 그러면서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한 이 한마디로 요약될"(9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10절)라고 말한다.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자의 완성을 위해 서로 책임을 느끼게 한다. 그 책임은 사랑함으로써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받아들이게 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 충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서로 부등켜안고 함께 나아가도록 촉구한다.
연중 제23주일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그 때 골로사이에서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바오로에게 시중을 들려고 왔다. 바오로는 골로사이에서 오네시모에게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반갑게 맞았지만, 그를 포기하게 된다. 오네시모의 봉사는 좋은 의도였지만, 그가 자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네시모는 필레몬이라는 사람의 종이었다. 오네시모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결정하고 행동할 수 없는 이른바 다른 사람에게 속한 부자유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오네시모를 그 주인 필레몬에게 되돌려 보낸다.
바오로가 그 시점에서 노예해방을 주장하고 오네시모를 취했다면, 사람들은 바오로가 자기 이익 때문에 그랬다고 바오로를 오히려 비난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오네시모를 그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면서, "이제부터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서 그대와 같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는 것처럼 그를 맞아 주시오."(필레 16.17)라는 편지를 쓴다. 바오로는 도망쳤던 종을 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달라는 청을 하는 것이다. 결국 바오로가 노예해방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종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말을 통해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동등한 자유인끼리의 관계인 형제 관계로 변화시키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노예해방을 권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당시 그리스도교 전파이후 많은 곳에서 노예해방이 늘어났다.
스승이며 사제인 바오로가 자신이 세례를 주었던 신자 필레몬에게 좋은 것을 제시해 주면서도, 그 신자가 스스로 좋은 것을 깨닫고 판단하여 좋은 행동을 하도록 그의 자유를 인정하고 인권을 존중해 준다. 바오로는 오네시모에게 자신을 계속 돌봐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대가 선을 행하는 것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14절)라고 필레몬에게 말해서, 필레몬이 직접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서 자기에게 파견해 주도록 청한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고 하신다. 어려운 사정에 처했다 하더라도, 신앙 공동체를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교 교리가 가르치는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33)
연중 제23주일
예전에 외국 신부님과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분이 본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주교님이 되셨는데, 추석같은 이런 명절이 되면 텔레비젼에서 꼬리를 문 자동차의 고향행렬을 보면서 참으로 부러워하셨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18세가 돼서 독립하면 그만인데 반하여, 10시간 12시간씩 걸려서라도 고향을 찾는 한국인들에게서 감동을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어디서도 가족과 부모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지닌 민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참 아름답습니다. 부모를 찾는 것을 인간의 예와 자식된 도리로 여겨 전통이 되다시피한 이 행렬은 마치 하늘나라를 향한 행렬과도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하게 되는 가족간에도 섭섭함과 원망이 싹틀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원수처럼 지내기까지 하여, 차라리 가족이 아니었더라면 하는 마음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인간 관계 속에 적용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나마 살아있으니까 원수도 되는 것이지 상대가 죽어 없으면 그나마 원망할 대상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가 어려울 땐 참으로 부딪히기 싫어서 아예 만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인간의 생애가 그렇게 무한정 남아있는 것같지는 않습니다. 정작 상대가 이승을 떠나버리면, 살아 생전에 다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내 남은 평생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무덤만이라도 정성껏 꾸미려고 하지만, 어리석을뿐만 아니라 살아생전에 잘 할 껄 하는 아쉬움이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가족을 만날 때마다 이번에는 화해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만나면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그냥 넘어가게 되고, 오히려 더 심하게 싸우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귀먹은 반벙어리에게 "에파타"(7, 34)하시며,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풀어서 말하게 하십니다. 화해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일년 내내 간직한 채 실현하지 못한 좋은 뜻들을 입을 열어 말하듯이 실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담에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조금 풀리기만 하면 나도 명절 때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기부도 하고 봉사도 해야겠다는 이번 추석에 실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신 주님과 더욱 닮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차별대우를 하지 말라'(야고 2, 4)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가족뿐만 아니라 주님의 형제들인 교우들과 가난한 이들에게도 내 입을 열고 손을 내밀어 우리 사랑을 나누도록 합시다.
연중 제23주일
모니카 성녀가 하루는 암부로시오 주교님께 가서 자식 문제로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답니다. 그랬더니 주교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결코 아들은 망하지 않고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위로해 주셨답니다. 그 주교님의 말대로 모니카 성녀의 아들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되었답니다. 훗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너무나 훌륭해서 그 어머니가 성녀가 되었겠지만, 자식이 잘되기만 바라며 가슴을 끌어안고 애타하는 어머니의 눈물이 아들을 성인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식은 자식이니 버릴 수도 없다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이런 우리의 심정을 잘 아시는 주님은 혹시라도 우리가 포기할까봐, 충고의 의무까지 언급하고 계십니다. "네가 죄인에게 버릇을 고치하고 타일러 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죄인은 자기 죗값으로 죽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나는 너에게 지우리라."(에제 33,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라.'는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8,15-17)
그러시면서 결론적으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8,1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떻게든 용서해 주고 풀어주어라.'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로마인들에게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 13,8.10) 그리고 "원수 갚는 것은 하느님께 맡기고, 가능하면 평화롭게 지내십시오."(로마 12,18-21 참조)라고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벅차다고 생각되더라도, 주님께서는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눈물로 지새우기까지는 못하지만, 기도라도 해주면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웁시다.
연중 제23주일
견진성사 면담에서 "지금까지는 신앙이 나를 위한 것인 줄 알았고, 또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살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미약하나마 이웃에게 봉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라는 다짐을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6)
신앙은 나를 하느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바라고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나를 도구로 써 달라고 주 하느님께 봉헌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바치는 데까지는 많은 고민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은 주님께 대한 체험과 확신이 들어야 지워집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살려주셨다는 확신과 체험이 내 삶 속에 자리잡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칠 수 있고, 주님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형제들에게 나를 던져 봉사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나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세상의 복음화에 투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평신도 사도직'을 수여 받습니다. 사제가 교회 공동체 내에서 교우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공동체를 복음화하는 사명을 받는 것처럼,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가정과 직장, 사회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실천하며, 자신과 세상에 닥쳐오는 상황과 조건들을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변화시킬 사명을 받았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주님의 자녀가 된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견진성사를 받음으로써 주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는 주님의 좋은 일을 하고 싶지만 자신의 미성숙한 인격과 부적절한 태도, 원만하지 않은 성격, 조급함 그리고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꾀 등으로 일을 망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좋은 의도마저 포기하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러한 것들을 자신이 짊어지고 갈 십자가로 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37) 라고 아버지께 청했듯이 우리도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도록 청합시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의 일을 기꺼이 이룰 수 있도록.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7)
연중 제23주일
성서를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도 차별대우를 하십니다. 부자보다는 가난한 이들에게, 건강한 사람보다는 병자에게, 의인보다는 죄인이라고 사회에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더 자주 가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차별대우에 대해서 아주 심한 어투로 불평하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루가 19,7) "바리사이파의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죄인이며 세리들과 한 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저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같이 음식을 나누고 있으니 어찌된 노릇이오?' 하고 물었다."(마르 2,16)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루가 7,39) 그런데 다른 한편 우리들은 예수님의 그런 차별대우가 부끄럽거나 밉기보다는 오히려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주님의 그런 모습과 그 방법을 아주 좋은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잊혀진 이들을 찾아 나서는 길. 그 길이 우리에게는 더 없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못해서 걱정이고 죄송스러울 뿐이지!?
한편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은 우리에게도 기쁜소식이다. 가난한 이가 잘 살게 되었다는 소식은 비단 가난한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기쁜소식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이 잘 살 정도면 나머지는 더 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구약으로부터 메시아가 오신 것이라는 증거와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는,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다. 주님이 승천하신 오늘 여기서 하느님의 예언을 이룰 이가 누구인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아닌가?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의 자녀라고 먹을 것만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점차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뜻과 말씀을 이루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