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일



(나해) 마르 6,27-35; ’24/09/15

한가위 명절 연휴를 앞두고 있는 오늘 우리는 다가오는 9월 20일 우리나라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기억합니다.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을 맞이하며, 오늘 우리 시대의 순교는 어떤 것인지, 우리 신앙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오늘에 사는 방법은 무엇인지, 우리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설계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모색해 보기로 합시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의 사명 실현보다는 자신과의 관계 및 지상에서의 안위와 편익을 도모하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를 일깨우시고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하며 꾸짖으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의 뒤를 따라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이루어야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주님과 주님의 말씀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에 따라 살고자 노력합시다. 주님을 모르거나 심지어 거부하는 세상 한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주님의 힘을 받아 우리가 선포한 말씀을 스스로 삶으로 실천하여 증거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그러시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선포하고, 우리 몸으로 복음을 살고자 할 때, 거부당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매일 예기치 않게 들이닥치는 사건과 상황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평소에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며 기도하면서, 주님을 조금씩 조금씩 더 많이 알려고 하고, 또 깨우친 것을 가슴 속에 잘 새겨 두어, 일상에서 갑자기 닥치는 상황 앞에서 자신이 깨달은 주님의 말씀을 적용하고 실현해서 주님을 모시고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주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합시다.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생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생업에만 충실한 사람은 자기의 삶에 대한 인정은 받을지 몰라도, 칭찬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자기가 헌신했던 사람들과 그 사실을 아는 이들에게 감사와 칭찬을 받고 존중받으며 그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헌신하고 형제들을 위해 봉사할 때, 자기 교회가 됩니다. 교회의 주인이자 지도자가 되는 셈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5-17)

셋째,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아 감싸주고 삭히며 채워 줍시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옵니다. 그것도 돈 많고 좋은 인격자만 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인격적으로도 모나고 죄많은 사람들이 그 죄를 씻고,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며 찾아옵니다.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가지고 있지만, 죄인들이 모여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따라 구원되기를 바라는 ‘죄인들의 모임’이라고도 합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벗어버리고 다시 태어날 수 있을 때까지는 그 죄와 죄로 인한 폐해를 대신 앓게 됩니다. 교회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지만, 교인들 너도나도 그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자만 한다면, 그 교회는 아수라장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이에게 채워 주기 시작한다면, 교회는 진정 주님의 사랑이 살아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4-25.27)

신앙은 우리 생명, 우리 생애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는 체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또한 신앙을 키우는 방법은 우리가 은총으로 받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 나갈 때, 우리가 실천하는 그만큼 성숙해 나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고 실천할지를 깊이 생각하고, 구역 반과 단체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구현해 나감으로써 순교의 정신을 이어갑시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자극을 주는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삶에 희망을 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삶에 위로를 안겨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삶에 힘을 실어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각자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하시는 주님께 응답하여, 그 말씀을 실현함으로써, 우리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이어갑시다.

아울러 주님께서 오늘 우리 눈에 띄게 하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거슬리게 하면서, 우리를 자극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초대하며, 우리가 함께하고 도와주도록 요청하시는 사건과 상황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우리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도록 청하는 사람과 상황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기꺼이 응답하면서 순교 정신을 이어갑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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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 꽃꽂이




연중 제24주일



(다해) 루카 15,1-10(32); ’22/09/11

언젠가 예비신자분들이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성지순례를 가서 한국 초기교회순교선조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와서는 자기는 ‘천주교 세례를 받지 못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순교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순교를 하겠다 안 하겠다’의 여부를 말하기 이전에 지금 이 시대에는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박해를 가하지는 않는데도 그 분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는 참 아쉬웠지만, 나중에 되돌아보면 어떤 의미에서 그분은 신앙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 시대는 반상의 신분차이가 엄격히 존재하고 남존여비가 심각하게 남녀평등을 저해하고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한국 천주교 초기 교회 신자들은 주 하느님 앞에 모두 동등한 한 형제자매임을 선언했기에 조선시대의 패륜아요 사회부적응자요 파괴논자로 비춰졌고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예비신자분은 여타 예비신자분들이 그렇듯이 세례받기 위한 과정을 다 마쳤으니 세례를 받아도 되었을 텐데 굳이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유혹에 빠진 것은 틀림이 없지만, 나름 진지하게 신앙을 고민했구나 하는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지요.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니만큼, 신앙도 주님께서 이끌어주시기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겠지요.

앤소니 드 멜로 신부의 ‘종교 박람회’라는 책에 보면 새례받은 새 신자와 그 친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한 분이 교리를 받고 신자가 되자, 친구가 와서 축하해 주며 물었답니다.

“야, 축하한다. 너 십이 기도문 다 외웠니?”

“아니, 다 못 외웠어.”

“그럼 사도신경은?”

“보고는 해도 외우지는 못해.”

“그럼, 묵주기도도 못하겠네?”

“응, 그 기도도 잘 못해.”

“그럼 너 어떻게 세례받았어?”

“응, 난 기도문은 다 못 외우지만, 세례받기 전에는 사업에 실패해서 매일 집에 술 먹고 늦게 들어가 마누라하고 싸움도 많이 했는데…… 세례받고 나서는 술도 끊고 집에도 일찍 들어가 가족들과 사이도 좋아져 화목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까 빚도 청산하고 그 전 만큼은 아니더라도 사업도 조그맣게나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어.”

우리가 세례를 받는 의미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면서까지 우리를 살려주시려 하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새 생명을 선택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상의 가치관과 처세술을 포기하고, 주 예수님께서 일러주시고 보여주시는 새로운 가치관과 그리스도교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얻고자 노력하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행복을 넘어, 인간을 위한 희생을 통해 부활이라는 새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신 주 예수님의 영원한 행복인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초대하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과 방법을 우리가 믿고,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길을 걸어가서 구원되고 싶으며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에 따른 새로운 삶의 처세술인 희생적인 사랑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믿고 선택하고 다짐하는 새로운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이 예수님께서 몸소 사시고 우리에게 따라오도록 초대하신, 믿고 바라며 사랑하는 신망애의 길입니다.

2016년 9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렸던 칼쿠타의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시성식에서, 교황님은 한평생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신 수녀님의 생애를 소개하셨습니다.

“역사의 주인공들은 항상 두 부류입니다. 한편은 하느님, 다른 한편은 인간들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하느님의 소명과 뜻을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질문해야 합니다. 내 인생에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중략>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은 모든 자비의 행위들입니다. 우리가 도와주는 형제 안에서 우리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얼굴을 인식합니다(요한 1,18 참조). 우리가 형제들의 필요성에 응답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드리게 되며, 하느님 아드님께 옷 입혀드리고 방문해드렸으며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마태 25,40 참조).

우리는 우리가 기도할 때 부르짖고 신앙을 고백한 것을 구체적으로 행동하도록 불렸습니다.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해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1 요한 3,16-18; 야고 2,14-18 참조).

예수님을 추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동시에 기쁨 가득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셔서 필요한 순간에 허리를 굽히셨던 것과 같이 나도 그분께 다가가 신앙을 잃었거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 그 어떤 가치나 이상도 없이 사는 젊은이들, 위기에 처한 가정, 아픈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이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과 정신에 있어서 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버려진 아이들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홀로 살아가고 있는 노인들도 돌보아야 합니다. 도움을 요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희망을 주고 위로하는 교회가 현존해야 하고 여러분이 현존해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가 수행했던 도시 주변과 인생의 주변에서 사명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사명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을 계속해서 증거하는 일입니다…… 우리 행동의 유일한 기준은 조건 없는 사랑임을, 그 사랑은 그 어떤 이념과 고리로부터 자유로운 사랑임을 보다 더 잘 깨닫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벅학자들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자,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라고 답하십니다.

오늘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우리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가?’

‘지금 여기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우리의 신앙 고백을 되새기며, 주님 사랑 안에서 새로 나기로 합시다.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 그리고 신앙 안에서 맺어진 형제 자매들과 세상 곳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며 애타하는 사람들, 우리가 도와주도록 우리 눈에 띄도록 우리에게 보내주신 가난하고 어렵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응답합시다.

민속 명절인 추석을 맞으며 그간 무심했던 인간관계를 되돌아보며, 부모 형제 일가친척들, 우리가 돌봐왔던 사람들, 외면하고 지나쳐온 사람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안부를 전하고 다가가 사랑을 나누며 회개의 새로운 길을 다시 시작하기로 합시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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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 꽃꽂이




연중 제24주일



(나해) 마르 8,27-35; ’21/09/12

제가 보좌 신부 시절에 모셨던 주임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 신부님은 한 달에 반 이상을 밖으로 활동을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신부님이 그렇게 자리를 비우셨어도, 성당에는 이렇다 하게 큰 어려움이 없었고, 그야말로 큰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그 신부님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성체조배를 하면서 성당과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찾았습니다. 그 신부님은 기도 중에, 그날 하루 신부님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함께하시며 힘을 주시고, 또 그 신부님이 활동하시는 동안 성당과 교우들에게 안 좋은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 주시라고 기도하시기 때문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 덕분인지 본당 신자들도 “우리 신부님은 늘 좋은 일을 하시고 다니신다!”라며 믿고 의지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각박하고 경쟁이 하도 심해서, 한 번이라도 더, 한 걸음이라도 더 뛰어야만 그나마 간신히 먹고 살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루 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활동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프라도 사제회 창설자 안뜨완 슈브리에 신부님은 성탄 밤 구유 앞에서 기도하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나는 그동안 홍수가 났을 때나 고아들에게 먹을 것을 찾아 얻기 위해 분주하게 여기저기 쫓아다녔지만, 정작 살려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구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바치느냐 안 바치느냐의 여부에 따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거나 안 주시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인간적인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한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해서 죽을 사람이 살아나거나 기도를 안 바쳤다고 해서 살 사람이 죽을 운명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바치는 이유는 우리를 살게 해주시고 오늘 아침 눈을 뜨며 숨을 쉬게 해주시도록 배려해주신 주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올려 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자녀다운 찬미를 주 하느님께서는 즐겨 들어주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바치는 이유는 주 하느님께서 오늘 나와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하는 일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이끌어 주시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사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바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그 뜻에 따라 활동함으로써 우리가 하는 일을 축복해주시고 열매를 맺어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생 시절 8시에 공동 저녁기도를 마치면 대침묵 속에서 10시까지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개별적으로 성당에 남아 8시부터 9시까지 복음묵상을 더 하고 나면, 공부 시간은 9시부터 10시까지로 한 시간 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한 시간 기도하고 한 시간 공부하면, 두 시간을 하는 것보다 더 집중하게 되어서 그런지, 하나를 봉헌하면 열 배로 갚아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있어서 그런지, 충분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경험이 저 자신을 오늘까지 기도하게 해주고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카리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걸으시면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그러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28절) 라고 답합니다.

당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에게 비유한 내용을 보자면, 세례자 요한이 메뚜기와 들꿀만 먹고 광야에서 청빈하고 무결점으로 살면서, 헤로데 왕이 동생의 아내를 데려다가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을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을 하다가 헤로데가의 눈 밖에 나서, 잡혀 죽을 정도로 순결하고 고귀한 영혼이 예수님으로 다시 왔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엘리야에 비유하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면서부터, 야훼 하느님 말고 농사의 신이라고 하는 바알 신께 제사지내는 농사풍습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과연 농사를 잘 짓게 해주고 진정 백성들을 살리시는 참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가뭄이 깊어지자 가르멜 정상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누구에게 기도를 해야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는지 기도 내기를 하여 밝힌 예언자였고, 마지막날 죽지 않고 다시 살아 돌아오리라고 믿었던 데에서 기인합니다.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내용은 모세와 같이 이스라엘을 식민세력에게서 해방시킨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는 모습이며, 그 역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마지막 날 다시 살아오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현실구조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이들을 그리워하고 그분들이 자신들과 같이 나약한 백성들을 구하러 다시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말을 들으시다가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며 활동하던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하문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절ㄱ)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ㄴ) 라고 고백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남들이 말하는 나 말고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며, 무엇을 기대하며, 어떻게 해주리라고 알고 있느냐?

남들이 경험하고 만났다고 하는 나 말고, 너는 나랑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교회에서 말하고, 교리서에 쓰여 있는 나 말고, 너는 진짜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 네가 아는 나는 누구냐?

내가 너에게 늘 다가가고, 너와 함께하면서 나를 드러내기 위해 보내는 메시지를 받아 듣고, 그 말씀에서 힘을 얻고, 그 말씀을 실현하면서 나를 만나며 경험하고 있느냐?

그렇게 고백을 했으면서도, 베드로는, 머리와 입으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 그리스도의 사명과 본질에 대해서는 망각한 채, 자신과의 개인적인 관계만을 강조하며 머무르는 어리석은 우를 범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자, 베드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구세주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섬기며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 죽어야 한다는 점도 인정할 수 없었겠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의 곁을 떠나 그냥 그렇게 죽어버리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사업보다는 현세의 연과 자신과의 관계에만 매달려 있는 베드로에게 호통을 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33절) 그러시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와 사명에 대해 더욱더 강조하시면서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4-35절)

어쩌면 내가 살아있어야 내가 믿는 하느님도 나와 함께하시므로, 내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와의 이해관계 속에서만 살아 계시지 않고, 나와 우리 모두의 구원을 향한 열린 지평에 살아 계십니다. 내가 나만의 이해관계와 나와 내 가족, 내 친지들만의 신분 상승과 물질적인 풍요를 꿈꾸며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고,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붙잡는다면, 예수님은 우리 곁을 쓸쓸히 떠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고 기도하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너와 우리 모두의 구원을 향한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간다면, 주 예수님께서는 진정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주님 구원사업을 이루실 것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 성인분들 그리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순교 복자분들이 목숨을 걸고 주님의 뜻을 따랐던 순교 정신을 오늘 우리 가슴 속에 되새깁시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또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찾고 또 실현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세워나가기로 합시다.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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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 꽃꽂이




연중 제24주일



(가해) 마태 18,21-35; ’20/09/13

언젠가 한 번 젊은 부부가 찾아와서 결혼생활의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번 결혼 생활을 오래한 나이 지긋한 분들에게 찾아가서 상의하지, 왜 나를 찾아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어른들에게 가서 이야기하면, 저희들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그 다음날 자신들의 문젯거리를 다른 어른들과의 술자리 안주거리로 삼아 다 퍼트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비밀을 온천하에 공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안타까운 우리의 현주소였습니다.

또 한 번은 교우 한 분이 동네 사람들과의 갈등관계를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청하기에 몇몇 분들에게 상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그분은 원래부터 다른 사람들과 사이가 안 좋았어요.” “그분에게 문제가 있는 거에요.” 등의 말을 하면서 도움을 청한 사람의 처지를 헤아려주고 도와주려는 분들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대부분 도와주기는커녕 쪽박을 깨는 샘이었습니다.

이번에 코로나19로 투병하고 계신 할머니 한 분께 전화를 드렸더니 그분이 대뜸, “신부님, 다 나아도 성당에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창피하고 성당에 누를 끼쳐서요.”라고 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걱정부터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라고 답하면서, “어서 빨리 나아서 건강하고 기쁜 모습으로 성당에 오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요즘 일각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를 마치 죄인처럼 바라보고 안 좋은 감정들을 주고받는 경향이 보입니다. 하지만 확진자는 어떤 의미에서 전염 가능성을 가진 환우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전염된 피해 환우입니다. 환우들이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면 코로나19 확진자들은 우리를 대표해서 병을 앓으며,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약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도움도 받고 실례도 하고 신세도 끼치면서 삽니다. 좋은 일만 하고 도움만 주면서 살면 좋겠지만,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서로 주고받으며 삽니다. 때로는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받으면서 삽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지 않고 이렇게 부족한 점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고, 또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도록 만드셨을까요? 어린이들이라면 바로 대답할 것입니다.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라고요.”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라고 하셨는데, 누군가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기는커녕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탓하고 외면하고 쪽박만 깨준다면, 그것은 주 하느님의 뜻도 아니고 그런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도 아니고 사람들이 그런 공동체에는 함께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감염되어 투병하고 있는 환우들에게는 “왜 걸렸어?” “니가 잘못했으니까 걸렸지?” 하는 추궁과 “저 사람 때문에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하는거야!” 라고 비난하기 보다는, “어디가 얼마나 아파?” “빨리 낳아.”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마음 단단히 먹고 잘 이겨내” 하는 위로와 배려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환우를 만나서 감염의 단계와 원인을 파악하고, 단계를 측정하여 분석하고 치료하며, 이동경로를 찾아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은 방역당국이 할 역할이고, 같은 환우를 만나면서 환우가 겪고 있는 고통을 함께 나누고 같이 아파해주며 위로와 배려를 해 주는 것은 가족과 가족같은 이웃사촌들과 우리 그리스도교 교형자매들이 할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식사를 하다가 “환우들이 완치되어도 바이러스가 계속 나온다고 하는데 그러면 어떡하지?”하고 걱정을 하니까, 부주임 신부님께서 “완치된 후에 나오는 바이러스는 마치 죽은 바이러스처럼 약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전염병 전문 담당 의료진들과 보건당국에 확인을 해보니, “일단 병원에서 환우를 내보내는 것은 사회에 피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라고 판정을 내려서 내보내는 것이므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는 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병상 수가 적기 때문에 또는 음성 판정을 두번씩 받은 후에도 경과를 지켜보아야 할 환우들은 바로 사회로 내보내지 않고, 격리시설인 생활치료센터에 보내서 완전히 회복되고 더 이상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을 때까지 경과를 지켜본 후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 없다고 판정을 내린 다음에 내보냅니다.”라고 부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완치 후 한 달 정도 쉬게 했다가 복귀시켜 주시면 더 좋습니다.”라고 제안해 주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주님을 모시는 우리 그리스도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1코린 12,13-14) 그리고는 그리스도교회의 신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2-23.26.27) 라고 알려줍니다.

방역당국에서 방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만큼 스스로 방역수칙을 잘 지키면서 개인위생에 조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또는 자신의 방심과 실수로 인하여 감염된 확진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누구를 탓한다고 확산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므로, 환우들에게 낙인을 찍고 비난하거나 저주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더 이상 전염병이 확산이 되지 않도록 다같이 노력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환우들이 어서 빨리 쾌유되어 건강하고 기쁜 모습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희대의 투병으로 고통 속에 있는 환우들을 치료하는 의료진과 함께 환우 가족들을 위로하고, 기도하고 배려하면서, 환우 개인이나 어느 누구의 책임과 노력만이 아니라 다 같이 고통을 나눠 짊어지면서 새로 났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교구장님과 주교님들을 비롯한 전국의 신부님, 수녀님, 평신도분들이 우리 성당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성전에 모여 다시 주님께 찬미의 제사를 올릴 때까지, ‘코로나19 확산방지와 사랑의 공동체 회복'을 위하여 묵주의 9일 기도를 바쳐주십시오. 묵주기도를 바치시면서, 각단마다 아래의 지향을 기억해 주십시오.

- 아래 -

1단 전염병균의 소멸과 피조물의 생명을 위하여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코로나19 전염병균이 하루빨리 소멸되어, 인류와 피조물의 생명이 평안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단 전염병균의 확산을 저지하는 분들을 위하여

코로나19 감염을 저지하기 위하여 수고하는 방역 당국과 환우의 쾌유를 위하여 치료에 온 힘을 다 기울이는 의료진과 전염병균의 치료제와 백신을 개발하기 위하여 수고하는 연구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3단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방역수칙에 따라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과 손씻기 등의 노력을 기울이는데도, 우리도 모르게 스며드는 병원균의 침투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4단 투병 중인 환우와 환우 가족의 평안을 위하여

코로나19로 투병하고 있는 환우들이 하루빨리 쾌유되고, 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해소되어 평온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5단 사랑의 공동체 회복을 위하여

투병 중인 환우들과 환우의 가족 및 우리가 모두 사랑으로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고, 감싸주고, 배려하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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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 꽃꽂이




연중 제24주일



미사의 영성 12 주님의 기도1



(다해) 루카 15,1-10; ’19/09/15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께 많은 것을 청하면서 삽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은총만을 바라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시편 127,1) 우리가 하는 일에서부터 우리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가 숨이나 쉴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 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시편 90,3-5)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항상 부족하고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욕심꾸러기처럼 더 달라고, 더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며 조르고 있습니다. 한편 정반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한쪽으로 감춰 두거나, 감사히 쓸 줄을 몰라 낭비해 버리기도 합니다. 남에게 주자니 아깝고 내가 쓰자니 만족할 수 없어 한쪽에 내버려둬 나도 남도 못 쓰게 돼 결국 썩거나 폐기 처분해 버림으로써 자원을 고갈시키기도 합니다. 지구상의 다른 한쪽의 사람들에게는 그것 때문에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데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적어서 고생이 아니라, 어느 소수의 사람들이 모두가 다 나누어 먹고 살아야 할 에너지를 독차지하고 썩히고 있어 고생입니다. 어리석고 욕심 많은 고집불통의 인간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계속 하느님께 이것저것 달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한 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마태 6,8)는 하느님께서는 거꾸로 우리가 무엇을 청하기를 원하고 계신지도 여쭈어 봅시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이렇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주님께 묻고 가르쳐 주시는 대로 사는 길이 우리가 걸어가야 하고, 영원히 사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가 청하도록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고 따르셨던 주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은 세상이 하느님 나라로 변화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 살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서 진짜 사는 것같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라고 마련해주신 나라. 그러므로 이 나라는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다리고, 기대하고, 고대하는 그 나라여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온몸을 다 바쳐 뛰셨고, 마침내는 죽으시면서까지 그토록 간절하게 이루시고자 하셨으며, 이 나라를 마저 완성하도록 우리를 뽑으셔서 사명을 주시기까지 하셨는데도 정작 우리는 이 나라를 원하고 있습니까? 여기 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주님께 청해야 할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를 이루는 길을 알아봅시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던 세상은 로마의 식민지 세상이었고, 사람들은 정치적인 힘을 가진 메시아가 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무리 참된 인간의 길과 가치를 이야기하고 기적을 베풀어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부담스러워하고, 심지어 죽이려는 움직임마저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참담한 세상에서, 주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저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시오!(루카 22,42; 23,34 참조)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나라인지를 잘 알아듣고, 그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에서 누리는 영생을 차지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나라는 우리가 현세적인 욕망과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마태 6,33)음으로써 들어가기 시작하는 나라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이겨낼 수 없는 억울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고 나면 흔히 “하늘 무서운 줄 알아야지….” 또는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며 분을 달랩니다. 이러한 말이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여 자신의 위안이나 처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 말에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과 절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마태 6,9ㄴ) 하느님이 땅에 계신다면 욕심 많고 힘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씀은 하느님은 사람이 조종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왔느냐?”(잠언 30,4)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이들과 약한 자들,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을 모른 체하지 않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9ㄴ.10ㄴ)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위에 높으시고 그분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다. 누가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과 같으랴? 드높은 곳에 좌정하신 분 하늘과 땅을 굽어보시는 분 억눌린 이를 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거름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시편 113,4-7) 그분은 하늘에서 의인의 죽음을 기억하시고 원수 갚아 주실 것입니다. 사제 여호야다의 아들 즈가리야가 죽으면서 외쳤던 유언처럼,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2역대 24,22ㄷ-) 또한 하늘에서 땅의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이사 63,19)

그러나 한편 이렇게 거룩하신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하늘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그분은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겪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힘을 주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탈출할 때 이러한 주님의 이끄심과 보호하심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셨다. 그리하여 바닷물이 갈라지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탈출 14,21-22)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탈출 13,21-22) 그리고 그들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다른 어느 민족도 감히 대항하거나 건드릴 수조차 없는, 최고의 거룩하고 완전하신 분, 그 하느님을 체험해 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실 뿐 아니라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려 줄 말이다.’ 그러자 백성이 다 함께,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모세는 백성의 말을 주님께 그대로 아뢰었다.”(탈출 19,4-6.8)

이러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느님, 바로 그분이 신약에 와서 예수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현실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1.23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31-32ㄱ) 이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를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당신의 아들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연중 제24주일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복음 선포



(나해) 마르 8,27-35; ’18/09/16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은 제3장 ‘복음 선포’입니다. 교황은 이 3장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명시적으로 선포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복음화의 모든 활동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의 탁월성” 없이는 “진정한 복음화는 있을 수 없다.”고 명확히 선언합니다.

교황은 ‘하느님 백성 전체가 복음을 선포한다’라는 제하에서, 복음화는 교회의 과업이며, 복음화의 주체인 교회는 하나의 유기적이고 교계적인 제도 그 이상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백성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삼위일체에 뿌리를 내린 신비이지만,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순례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궁극적인 토대가 하느님의 자유롭고 은혜로운 주도권에 있다.”고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당신 자비의 활동입니다. 첫 말씀, 참된 주도권, 참된 활동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 주도권에 우리 자신을 맡길 때에만, 이러한 주도권을 간청할 때에만, 우리 역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복음화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혼자서는, 곧 고립된 개인으로나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공동체 생활에 따른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고려하시어 우리를 이끄시고, 이 백성이 교회입니다. 이 백성은 배타적인 엘리트 집단이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은 이 세상의 다양한 민족들로 구체화되며, 이 민족들은 저마다 고유문화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습을 지닌 백성입니다. 은총은 문화를 전제로 하고 이 하느님의 선물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화 안에서 구체화됩니다.

고유의 문화에 따라 하느님 은총을 경험한 다양한 민족들 안에서, 교회는 참다운 보편성을 표현하고, 다양한 모습을 한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모든 문화에서 발견되는 긍정적인 가치들과 형식들은 복음이 선포되고 이해되며 실천되는 방식을 풍부하게 합니다. 올바로 이해된 문화적 다양성은 교회의 일치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은 성령 안에서 복음화의 길로 초대되어, ‘선교하는 제자’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

복음이 한 문화에 전해지면 토착화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사를 각자의 재능에 따라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이 받은 신앙을 증언하고 새롭고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 풍요롭게 합니다. 대중신심은 일단 받아들인 신앙이 어떻게 한 문화 안에 구현되고 지속적으로 전달되는지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대중 신심은 신앙 활동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보다 하느님을 믿는 것에 더 역점을 둡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때, 특히 가난한 이들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을 향한 삶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경 구절은 거의 못 외우지만 묵주 기도에 매달리며 병든 아이를 간호하는 어머니들의 강인한 믿음을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간구하는 누추한 집 안에 켜진 촛불에서 퍼져 나가는 큰 희망을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우리의 마음 안에 부어진 성령의 활동으로 힘을 얻는, 하느님을 향한 삶의 표현입니다. 토착화된 복음화의 열매인 대중신심 안에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적극적인 복음화의 힘이 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할 준비가 늘 되어 있음을 의미하며, 그 첫 단계에 인격적인 대화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친교 안에서 다양함을 일치시키며 평화의 모범을 보여주시며, 동시에 다양성, 다원성, 다중성을 키워주십니다.

교황은 ‘강론’이란 제하에서, 평신도는 강론을 듣는 것이 어렵고 사목자는 강론을 하는 것이 어렵다며 풀어나가십니다. 강론은 성사적 친교에 앞서 하느님과 당신 백성이 나누는 대화의 최고 순간으로, 전례 상황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봉헌의 일부이고,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시는 은총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강론은 어머니가 자녀와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대화는 진리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말하는 기쁨에서 시작되고, 말을 매개로 하여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이들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대화는 이미 맺어진 계약을 더욱 강화하고 사랑의 유대를 굳건하게 만듭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우리 마음을 열정에 불타오르게 합니다.

교황은 ‘강론준비’라는 제하에서, 강론 중에 활동하시는 성령을 믿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것으로서,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 도구로 바친다는 것입니다.

사제는 먼저 성령께서 오시기를 간청하고, 성경구절에 집중하여,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며, 핵심 메시지를 발견하여,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연결시켜 바라봅니다. 사제는 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세로 말씀을 대하고, 우리의 열정을 새롭게 하여,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에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나는지 성찰하며, 먼저 하느님의 말씀으로 감화되어 그 말씀을 일상에서 실현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현하기 불편하거나 부담스러워 도망치려 하지 말고, 다른 이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만을 생각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여야 합니다. 또한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여,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인간 상황에, 하느님 말씀의 빛을 갈구하는 경험에 연결시켜야 합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만남의 기쁨, 실망,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 미래에 대한 불안, 사랑하는 이에 대한 관심 등의 특별한 환경에서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복음적 식별의 훈련을 합니다.

교황은 ‘케리그마(복음 선포)의 심화를 통한 복음화’란 제하에서, 주님의 선교 명령에는 신앙 성숙에 대한 요청도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그 성숙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우리의 모든 종교적 의무에 앞서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표현하여야 합니다.

최근 교리교육은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신비교육을 강조합니다. 모든 형태의 교리 교육은 ‘아름다움의 길’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참된 아름다움의 모든 표현은 주 예수님을 만나도록 이끄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보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현대적 표현을 활용하여 새로운 ‘비유의 언어’로 신앙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들은 가까이 계신 그리스도 현존의 향기와 그분의 시선을 구체적으로 전하며 ‘동행의 예술’로 이끌어야 합니다. ‘영적 동행’을 통해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벗어날 때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하느님을 벗어나 걸어갈 때 실존적으로 의지할 곳 없고 정처 없는 고아로 남게 되어 불안하게 됩니다. 참다운 영적 동행은 언제나 복음화 서명에 봉사하는 상황에서 시작되고 꽃피웁니다.

하느님 말씀은 강론뿐만 아니라, 모든 복음화는 그 말씀에 기초하고, 그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거행하고, 증언합니다. 성경 연구는 모든 신자들에게 열린 문이 되어, 복음화를 위하여 하느님 말씀에 친숙해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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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 꽃꽂이



연중 제24주일



(다해) 루카 15,1-10; 16/09/11

언젠가 예비신자분들이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성지순례를 가서 한국 초기교회순교선조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와서는 자기는 ‘천주교 세례를 받지 못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순교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순교를 하겠다 안 하겠다’의 여부를 말하기 이전에 지금 이 시대에는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박해를 가하지는 않는데도 그 분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는 참 아쉬웠지만 나중에 되돌아보면 어떤 의미에서 그분은 신앙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 시대는 반상의 신분차이가 엄격히 존재하고 남존여비가 심각하게 남녀평등을 저해하고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한국 천주교 초기 교회 신자들은 주 하느님 앞에 모두 동등한 한 형제 자매임을 선언했기에 조선시대의 패륜아요 사회부적응자요 파괴논자로 비춰졌고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예비신자분은 여타 예비신자분들이 그렇듯이 세례받기 위한 과정을 다 마쳤으니 세례를 받아도 되었을 텐데 굳이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유혹에 빠진 것은 틀림이 없지만 다른 한 쪽으로 진지하게 신앙을 고민했구나 하는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의 ‘종교 박람회’라는 책에 보면 새례받은 새 신자와 그 친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한 분이 교리를 받고 신자가 되자, 친구가 와서 축하해 주며 물었답니다.

“야, 축하한다. 너 십이 기도문 다 외웠니?”

“아니, 다 못 외웠어.”

“그럼 사도신경은?”

“보고는 해도 외우지는 못해.”

“그럼, 묵주기도도 못하겠네?”

“응, 그도 잘 못해.”

“그럼 너 어떻게 세례받았어?”

“응, 난 기도문은 다 못 외우지만, 세례받기 전에는 사업에 실패해서 매일 집에 술 먹고 늦게 들어가 마누라하고 싸움도 많이 했는데…… 세례받고 나서는 술도 끊고 집에도 일찍 들어가 가족들과 사이도 좋아져 화목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까 빚도 청산하고 그 전 만큼은 아니더라도 사업도 조그맣게나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어.”

우리가 세례를 받는 의미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면서까지 우리를 살려주시려 하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새 생명을 선택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상의 가치관과 처세술을 포기하고, 주 예수님께서 일러주시고 보여주시는 새로운 가치관과 그리스도교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얻고자 노력하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행복을 넘어, 인간을 위한 희생을 통해 부활이라는 새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신 주 예수님의 영원한 행복인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초대하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과 방법을 우리가 믿고,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길을 걸어가서 구원되고 싶으며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에 따른 새로운 삶의 처세술인 희생적인 사랑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믿고 선택하고 다짐하는 새로운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이 예수님께서 몸소 사시고 우리에게 따라 오도록 초대하신, 믿고 바라며 사랑하는 신망애의 길입니다.

지난 9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칼쿠타의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시성식에서 한 평생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신 수녀님의 생애를 소개하셨습니다.

“역사의 주인공들은 항상 두 부류입니다. 한편은 하느님, 다른 한편은 인간들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하느님의 소명과 뜻을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질문해야 합니다. 내 인생에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중략>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은 모든 자비의 행위들입니다. 우리가 도와주는 형제 안에서 우리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얼굴을 인식합니다(요한 1,18 참조). 우리가 형제들의 필요성에 응답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드리게 되며, 하느님 아드님께 옷 입혀드리고 방문해드렸으며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마태 25,40 참조).

우리는 우리가 기도할 때 부르짖고 신앙을 고백한 것을 구체적으로 행동하도록 불렸습니다.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해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1 요한 3,16-18; 야고 2,14-18 참조).

예수님을 추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동시에 기쁨 가득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셔서 필요한 순간에 허리를 굽히셨던 것과 같이 나도 그분께 다가가 신앙을 잃었거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 그 어떤 가치나 이상도 없이 사는 젊은이들, 위기에 처한 가정, 아픈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이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과 정신에 있어서 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버려진 아이들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홀로 살아가고 있는 노인들도 돌보아야 합니다. 도움을 요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희망을 주고 위로하는 교회가 현존해야 하고 여러분이 현존해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가 수행했던 도시 주변과 인생의 주변에서 사명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사명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을 계속해서 증거하는 일입니다…… 우리 행동의 유일한 기준은 조건 없는 사랑임을, 그 사랑은 그 어떤 이념과 고리로부터 자유로운 사랑임을 보다 더 잘 깨닫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벅학자들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자,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라고 답하십니다.

오늘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우리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가?’

‘지금 여기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우리의 신앙 고백을 되새기며, 주님 사랑 안에서 새로 나기로 합시다.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 그리고 신앙 안에서 맺어진 형제 자매들과 세상 곳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며 애타하는 사람들, 우리가 도와주도록 우리 눈에 띄도록 우리에게 보내주신 가난하고 어렵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응답합시다.

민속 명절인 추석을 맞으며 그간 무심했던 인간관계를 되돌아보며, 부모 형제 일가친척들, 우리가 돌봐왔던 사람들, 외면하고 지나쳐온 사람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안부를 전하고 다가가 사랑을 나누며 회개의 새로운 길을 다시 시작하기로 합시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0)



연중 제24주일



(나해) 마르 8,27-35; 15/09/13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7-3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어린이 여러분, 찬미 예수님!

◎ 신부님, 찬미 예수님.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했어요?

◎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주 그리스도님이시면서도 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돌아가신다고 했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나에게 잘못한 친구들을 용서하고,/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고,/ 친구들을 도와주고,/ 친구들 대신 해주기도 합니다.

† 신부님의 말을 따라서 함께 기도합시다.

◎ 예수님,/ 언제나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예수님,/ 저희가 예수님의 사랑을 가득 받아서/ 기쁘고 또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로,/ 친구들을 도와주고자 하오니/ 저희에게 힘과 용기를 주세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연중 제24주일



(다해) 루카 15,1-32(10); 13/09/15

우리는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순교의 얼을 이어받기 위해 9월 28일 절두산 성지에서 새남터 성지까지 걸어서 순례를 하기로 했습니다. 절두산 성지는 어떤 곳입니까?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에 새 학문으로 전해진 천주교가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 본격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1785년 명례방 사건으로 김범우(토마스)가 유배가서 죽었고, 모친상에서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상례를 지낸 진산 사건으로 윤지충(바오로), 권철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이 순교했고, 1801년 신유박해로 300여명이, 1839년에 기해박해로 130여명의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철종 때는 박해가 다소 누그러졌습니다. 원자 탄생에 즈음하여 귀양을 갔거나 옥에 갇힌 신자들을 풀어 주었습니다. 박해가 완화되자 신자수가 늘어났고, 배교자들도 돌아왔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선교사들을 더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동시에 조정에 남종삼(요한 바오로) 등 신자들이 생겨났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부인 민부대부인은 교리 공부 중에 고종이 즉위하자 베르뇌 주교에게 미사를 청하기도 했으며,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는 천주교를 알려주었고, 대원군도 천주교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특히 1860년 영·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정의 신하들은 천주교에 대해 더욱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금세 서양 세력이 쳐들어오기라도 하듯 두려움에 떨며 피난을 서둘렀고, 높은 자리에 있는 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가 겸손하게 보호를 부탁하고 위험에 대비하여 종교 서적이나 고상, 성패를 장만하려는 교섭까지 벌였습니다. 포졸들도 제각기 천주교인들을 수색하는 데 조금이라도 협력했거나 그들에게 고문을 가한 일에 대해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이렇듯 천주교에 대한 태도가 변하고 있음을 지켜본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될 날이 그리 멀지 않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희망을 더욱 부풀게 만든 것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문제였습니다. 1860년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뒤 체결된 북경 조약으로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게 되었고, 러시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집권자들은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마땅한 대응책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의 몇몇 지도층 신자들은 프랑스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러시아인의 침입을 물리치고, 그토록 바라던 신앙의 자유를 찾도록 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홍봉주(토마스), 임은상, 심세경, 남종삼 등은 ‘이이제이’(以夷制夷), 곧 오랑캐를 불러들여 다른 오랑캐를 물리치는 방어책을 논의하고는 대원군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을 통해 대원군에게 전달했습니다.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대원군은 정책을 바꾸게 됩니다. 대원군은 첫째,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위협적으로 통상을 요구하는 행위가 잠잠해졌기 때문에, 굳이 천주교 신자들이 제안한 이이제이 방어책을 채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둘째, 대원군의 반대파 대신들인 조두순, 정원용, 김병학 등이 대원군이 천주교와 접촉하려는 태도를 비난했습니다. 셋째, 청나라에서는 1862년 이후 서양인들을 사형에 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미국, 프랑스 등 서양 함대들이 조선까지 와서 무력시위로 통상을 요구하는 두 차례의 병인양요까지 겹쳐, 조정 대신들이 천주교 탄압을 요구했고, 대원군은 ‘병인척사윤음’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권력 기반이 약했던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쪽으로 정책을 전환했고, 신앙의 자유를 찾으려던 천주교 신자들의 노력은 오히려 1866년의 처절한 병인박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1866년 10월 23일부터는 천주교 신자들이 프랑스 함대를 양화진으로 불러들여왔다는 혐의로, 새남터나 서소문 밖이 아니라 절두산에서 주로 처형했습니다. 10월 23일에는 이의송(여정, 프란치스코), 이의송의 처 김이쁜(마리아), 이붕익(천조, 베드로), 감한여(베드로), 최경원(야고보), 10월 25일에는 김중은(베드로)과 박영래, 11월 11일(음력 10월 5일)에는 김진구(재구, 순칠, 안드레아), 최수(서방, 베드로), 김인길(요셉), 김진(베드로), 11월 16일에는 강명흠(베드로), 황기원(안드레아), 이기주(바오로), 김진의 처 김큰아기(마리아), 11월 20일에는 이용래(아우구스티노), 원후정, 박성운(바오로), 11월 24일에는 성연순(전순), 원윤철(사도 요한 또는 베드로)이 각각 절두산에서 효수형을 당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박내호(사도 요한)와 유 바오로(또는 마오로)도 절두산에서 참수를 당하였고, 1867년 음력 8월 2일에는 강 요한과 조 타대오가 이름을 모르는 5명과 함께 평신도들은 절두산에서 참수를 당하였습니다.

1866년경 천주교 신자 2만 3천명 중 2/3인 8천여명이 병인박해로 순교했습니다. 그 중 약177명이 절두산에서 순교했습니다. 병인박해 100주년을 전후하여 1967년 10월 21일 병인순교 백주년 기념 성당과 기념관을 준공했고, 1977년 국가사적 제399호로 공고되었습니다.

지난 9월 10일 염수정 서울대교구장을 비롯한 한국 천주교 주교단 19분이 서울지역 성지 도보순례를 했습니다. 주교단은 비가 오는 가운데 아침 8시30분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서울 혜화동 대신학교에서부터 좌포도청, 수표교, 명동성당, 서소문, 당고개, 새남터를 거쳐 절두산 순교 성지까지 약 16Km를 완주하고 파견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강론 중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장 강우일 주교님은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분의 말씀과 행동은 그 시대가 가진 기존의 가치와 세계관, 지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순교자들 역시 당시 사람들이 가진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를 믿고, 기다리고, 선포했기에, 세상과 충돌했고, 결국 제거 당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존 세상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계관과 가치관에 안주하고 충돌을 두려워한다면, 예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예수님과 맞춰갈 때, 그분은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이고, 세상과 충돌하더라도 우리를 지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를 언급하시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회개는 단순히 선심공덕을 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세상의 가치관과 관심 사항, 관례, 풍습, 사고 방식, 영감의 원천, 생활 양식 등을 복음 말씀에 비추어 역전시키고 바로잡으며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지를 순례하며 순교자들의 신앙을 되새기며,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변화해 가면서 순교의 얼을 이어받도록 합시다.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지난 주간 교황님께서 선택하셨던 방법을 따라봅시다. 미국의 시리아 무력 침공건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교황님께서 평화를 위해 선택하신 방법은 더 이상의 대 세계적인 호소와 외교적인 노력을 마치고 전세계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단식과 기도를 봉헌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의가 주님의 뜻안에 있다면, 우리의 원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사람과 그 상황을 위해 영성체를 하고, 그 사람과 그 상황을 위해 희생하고, 그 사람과 그 상황을 위해 단식하고, 그 사람과 그 상황을 위해 기도하면서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계상황을 신앙으로 이겨나가기로 합시다.

언제 어떻게 하느님 나라 건설과 인류 사회 평화를 향한 우리의 원의를 이루어주실지는 주님께서 하실 일이지만, 오늘 여기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외적인 활동과 내적인 희생을 통해 우리 할 바를 다하며, 순교의 얼을 이어받기로 합시다.


연중 제24주일



(가해) 마태 18,21-35; '11/09/11

오늘 추석을 맞이하며 부모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 봅니다. 첫 번째는 인터넷에 소개된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글입니다. 이 글을 통해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 봅시다.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때--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때--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때--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때-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때-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때-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때-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때-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前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때-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때-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助言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後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車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 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짧은 묵상도 나눠봅니다. 제목은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글입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 보고 싶으시다고... 외할머니 보고 싶으시다고,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것만 같던...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아!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20.25) 우리가 마음속에 미움을 간직하면, 우리 안에 심어져 있는 사랑이 깨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원동력으로 심어주신 사랑은 미움과 원망, 이기심, 자기 중심적 사고 때문에 상처입고, 찢어지고, 만신창이가 됩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합니다.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답게,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가족으로 공동체로 함께 살기 위해서는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사랑을 던져주신,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가장 큰 아픔을 안겨주신 부모님과 가족이 있다면,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여 자유롭게 놓아드리고, 우리도 미움이라는 죄악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져, 다시 가족이 됩시다.

용서는 사랑의 조건이자, 인간성 회복의 시작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를 가능케 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자 아버지의 나라를 여는 열쇠입니다. 아멘.

추석 잘 준비하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고향에 내려가시는 분은 잘 다녀 오시고, 가족과 가정에 대한 정겹고 새로운 추억을 담고 오시기 바랍니다.


연중 제24주일



(가해) 마태 18,21-35; 05/09/11

얼마 전 어느 할머님이 경노당에 있는데, 다른 한 분이 일본 할머니를 데려오셨답니다. 그래서 이 할머니가. ‘내가 얼마나 일본 사람에게 핍박을 받고 살았는데 왜 여기 미국까지 와서 일본 사람을 만나야 되느냐’고 화가 났답니다. 그런데 그 일본 할머니도 혼자고 이국땅에서 쓸쓸히 사는 모습이 불쌍해 보여서, 이 할머니가 일본말로 일본 국가를 불러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좋아하더랍니다. ‘용서는 해야 하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일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참으로 용서하기 힘든 과제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일본이나 나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들을 왜 주님께서는 용서하라고 하십니까? 용서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길을 가다가 꿈에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습니까? 내 마음이 거북하고, 마치 내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내 마음이 두근거리고, 화가 나고, 보복하거나 못 본 척 무시하거나 다른 길로 피해가게 됩니다. 내 마음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인가? 왜 우리는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기쁘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상하는가? 왜 우리는 용서하거나 용서받으면 기분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마음의 짐처럼 죄라도 진 듯이 부담스러운가?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애초에 세상에 내실 때 우리에게 진실하고 선하고 좋은 것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거짓말을 하거나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거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쁜 짓보다 좋은 행동을 하고 싶어 하고 나쁜 짓을 하면 역시 마음이 거북합니다. 나쁜 일을 하고도 멀쩡한 것 같은 것은 그가 아직 가치 기준이 명확하지 않거나 양심이 무뎌졌거나 그저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또 집안도 치우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보기 흉한 것을 보기 좋은 것으로 꾸미고, 삽니다. 주변이 지저분하면 마음도 심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아니거나 반대되는 것을 보면 불편하고 편치 않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사랑보다 미움이 하느님보다 악이 지배하려고 할 때, 우리의 본성상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어떤가? 왜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외아들 예수님에게 사람들의 죄값을 짊어지고 죽도록 하면서까지 사람들을 용서해 주셨는가?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만드셨고, 또 하느님께서 만든 사람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고 또 한 없이 사랑스러운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를 지음으로써 스스로의 인격과 사랑의 본성을 파괴하고 결국 악마의 자식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번 사람들을 용서하시려고 예언자도 보내고 벌도 주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점점 더 죄와 악에 물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죄값을 대신 치루어야만 했는데, 결국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그 죄값으로 삼으시고 사람들을 죄와 악에서 구해내서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일 수 없었고 또 하느님이실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져주듯이 말입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내 피다.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다행히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선물로 주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번 고해성사를 통해 새로 태어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가 용서하면서 살 수 있는 힘을 주님께로부터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부담스럽습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도 자기 죄가 부끄럽고 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는 용서받고 싶지만, 벌 받기는 싫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죄를 되갚을 수 있을지 엄두가 안 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1요한 4,18)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에게는 아무런 벌도 묻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공짜로 사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1)

죄와 악에게 찌들리고 사로잡혀서 용서하기도 힘들고 스스로의 힘으로 죄악에서 벗어나기도 힘든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남겨주셨습니다.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서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조종하는 악과 또 그 악의 공격으로 괴로워하고 화가 나고 보복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내 마음 속의 악으로부터 해방되고 용서할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고, 상처난 우리 가슴을 주님 사랑으로 위로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기를 청합시다. 그리고 성사를 통해 새로워지고 다시 구원의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나아갑시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마태 18,21)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22.35)

어제 오늘(부터) 우리는 성전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를 엽니다. 그동안 바자회를 준비해오신 사목협의회와 성건위, 바자준비위원들 그리고 구역장, 단체장들과 티켓을 구매해주시고 기증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무료로 광고해 주신 코엠TV와 한국일보 그리고 물신양면으로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 바자회는 성전을 지어 주님께 바치려는 우리의 정성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을 지어 바치면서 우리 마음속에 형제들에 대한 껄끄러움이나 분열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은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 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 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준비한 우리의 정성을 형제들과 이웃들과 나누면서 우리의 미움과 원한은 다 떨쳐버리고 맑고 고운 마음도 함께 나누며 화해의 축제를 벌려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지금 카트리나 태풍으로 수해를 입을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정성을 모읍시다.

좋은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연중 제24주일



(다해) 루가 15, 1-32(10); 2004/09/12

순교자 성월인 9월에 접어들면서 미사 때 읽는 복음 말씀이 읽는 이들의 가슴을 무겁게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지난 주 연중 제 23주일에 읽은 복음은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루가 14, 33)라고 하셔서, 우리 마음을 움찔하게 하신다.

월요일에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루가 6, 9)하심으로써,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겨왔던 자신들의 관습과 예의범절을 하루아침에 다 깨 버리시고 다시 생각하도록 하신다.

화요일에는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뽑으시고 사람들을 고쳐주셔서 "예수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와 누구든지 다 낫는 것을 보고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예수를 만지려고 하였다."(루가 6, 19)는 기사를 접하게 하심으로써, 우리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서 훌륭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함에 대해 참으로 부담스럽게 하신다.

수요일 하루는 성모 성탄일이라 하루 쉬게 하시고, 목요일에는 급기야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 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루가 6, 27-30)라고 하심으로써, 그야말로 쥐구멍이 어딘지, 도대체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것인지 고개를 못들 정도의 죄인으로 만드신다.

금요일에는 또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가 6, 42)고 하심으로써, 단점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신다.

토요일에는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큰물이 들이치면 그 집은 곧 무너져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 것이다."(루가 6, 49)라고 하심으로써 세속에 살면서 우리 양심이 무뎌지는 것을 모르고 또 차일 필 미루면서 주님의 말씀을 외면해 왔던 우리의 마음을 재촉하신다.

오늘은 드디어 우리에게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어서 빨리 회개하라고 하신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루가 15, 7)

그런데 회개의 길이 너무나도 무겁고 부담스러워 보이는 것은 어찌된 일 일까? 이번 주간에 우리가 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그야말로 화를 내지 말아야 하는 것은 고사하고 섭섭해하지도 말고, 내 것을 달라기는커녕 남이 달라는 대로 다 내어줘야 하고, 따지기는커녕 용서하고 다 받아주어야만 하고, 자기 잘못 때문에 남의 잘못은 아예 거론하지도 말며, 지체없이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야만 하는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은 실상 우리가 주님께 실존적으로, 살면서 몸으로 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무엇을 얼마만큼 열심히 했던지 여부는 고사하고, 그저 주님께서 우리를 축복해주시고 도와주시기만 바랬다. 우리가 착한 일을 얼마나 했던지 여부는 고사하고, 그저 은총만을 내려주시기를 기대하고 살아왔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어떤 잘못을 했던지 여부는 고사하고, 주님께서 용서해주시기만을 청했다. 아니 나를 의인으로 받아주시기만을 청했다. 심지어는 주님 앞에서까지 의인인체 하면서 살아왔다.

그런 우리에게 비해 주님께서는 용서를 청하지도 않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에 급급했다.

아니 살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주님은 생각지도 않고 사는 우리에게 몸소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고 주님의 식탁에 초대해 주신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에 부담이 간다고 하소연하지만 실상 부담을 가지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시는"(루가 15, 4)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낀다. 읽어버린 양 한 마리인,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는다. 우리를 찾았기에 너무나도 기뻐하실 주님 사랑을 믿기에 우리는 주님께 다가간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께서는 주님을 반기고 주님 앞에 고개 숙이는 우리를 그저 반기고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시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주님께 의지한다.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24)

이렇게 주님을 믿고 의지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이 회개의 과정은 우리의 잘못을 하나씩 들추어내고 괴로운 가슴을 멍에 삼아 주님께 힘겹게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이끌어주시기에 주님을 믿고 의지하여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우리 새 삶의 영적 순서이고, 우리를 다시 주님의 자녀로 삼아 축복해 주시는 주님의 은총이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22-23)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나해) 요한 3, 13-17; 2003/09/14

살다보면 주님께서는 정말 무심하다고 여길 정도로 자비하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천년도 하루 같고 하루도 천년 같으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잘했을 때는 정말 기뻐하시고, 심지어 우리가 그것 때문에 자기 자랑과 자만과 교만에 빠질 때까지도 그냥 그렇게 착각에 빠져 즐기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조금이라도 고민스럽고 힘들어 할 때는 지체 없이 다가와 위로해 주시고 건져주신다. 아니 주님은 늘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아쉬울 때만 주님을 찾고, 조금이라도 편하면 주님을 버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적이고도 현세적인 편이와 즐거움에 빠져 주님을 잊어버리기에 그렇게 느낄 것이다.

이렇게 이기적이고도 어리석은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고 돌아가셨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시며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계시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에, 참고 기다리신다.”(2베드 3, 9) 이 얼마나 큰 기쁜 소식인가! 부끄럽고 송구스럽기 그지없지만 반면에 우리의 마음 속 깊은 데서부터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했을 때, 못 보신 것처럼 모른 체 하신다. 오히려 혼자 아파하시며 안타까워하신다. 이런 면은 성모님과 수호천사들이 경고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고 있는 상황에 비춰보면, 더욱 더 무한한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랑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 16)

이제 저는 서울대교구 사제 인사이동으로 5년 동안 정들었던 공항동 본당의 이 제대를 떠나 미국 워싱턴 주의 타코마 한인 교포 성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뒤돌아보면 주님과 교우 여러분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저와 연관하여 신앙에 걸림돌이 되신 분이나 신앙에 도움이 되신 분 모두 새로 부임하시는 주임신부님과 함께 주님 보시기에 좋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시고 주님께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17)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을 구원하신 주님을 전하고 그 분 말씀을 잘 실현하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틈나는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연중 제24주일



(가해) 마태 18 21-35; 2002/09/15

어떤 술꾼의 아내가 있었다. 그 아내는 날마다 술먹고 들어오는 남편뿐만 아니라 자기 남편을 매일 전화로 불러내는 술꾼 친구들이 싫었다. 언제나 없어질까 하고 미워하다가, 성당에 와서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 44)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 친구들이 잘 되기만을 기도했다. 그런데 정작 그 친구들이 잘 되고 나니까 자기 남편은 거들떠보지도 않더랍니다. 그 결과 자기 남편도 일찍 들어오게 되었고 술도 끊었단다.

오늘 집회서의 말씀은 우리의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원망과 분노는 가증스러운 것이니 죄인이 좋아하는 것이다. 보복하는 자는 주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며, 주님께서 그의 죄를 엄격히 헤아리실 것이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자기 이웃에 대해서 분노를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으랴?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는가? 자기도 죄짓는 사람이 남에게 원한을 품는다면, 누가 그를 용서해 주겠는가? 네 종말을 생각하고 미움을 버려라. 한 번은 죽어 썩어질 것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생각하고 네 이웃에게 원한을 품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생각하고 남의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27, 33-28, 9) 그런가하면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죄를 지은 여인을 단죄하려는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 8, 7)고 하신 바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자기 자신 앞에서 겸손해 질 수밖에 없다.

어느 인디언 마을에서는 잘못한 사람이 있을 때, 그를 가운데 세우고 마을 사람들이 둘러서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그 잘못한 사람이 자기에게 잘 한 일을 한 가지씩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 방법은 잘못한 사람의 자존심을 꺽지 않고 그의 진가를 공동체 전체가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딛고 일어나 다시금 공동체를 위한 봉사자로 새로 태어나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공동체가 용서와 재활을 넘어 그를 사랑으로 품어 안아 봉사자로의 새 생을 허락하는 좋은 방법중의 하나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 22)고 말씀하신다. 저는 미움이 사라질 때까지 기도하라고 한다. 주님께서 커다란 사랑으로 오셔서 내 마음 안에 악마가 심어놓은 미움이라는 불씨를 사그라뜨리고 온전히 꺼주시길 청하라고 한다. 사랑이 승리할 때까지!


연중 제24주일



(다해) 루가 15,1-32; 01/09/16



  9월 11일 테러가 있었다. 사람들은 미국을 공격한 테러리스트를 악마로 규정하고, 또 다른 이들은 미국이 그동안 전 세계에서 벌려왔던 인권말살과 경제적 테러에 대한 보복이라고 규정했다. 그 어느 쪽이던 평화보다는 폭력으로 사태가 진전됨은 참으로 가슴 아프고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삼가 조의를 표한다.

  철학사조에 '윤리주의'가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벌을 통해서라도 선을 추구하여 윤리를 세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보면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 윤리주의적 사고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반대로 착한 사람은 고생하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떵떵거리며 산다. 마치 악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법에도 호소해 보지만, 법 역시 가진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 가진 사람들은 법망을 살 살 피해나가고 오히려 힘없는 사람만 걸려든다고 한다. 그래서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기라도 폭력으로 응징한다는 것이 테러리즘이다. 이것은 선을 이루기 위해서 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윤리주의의 또 다른 방법론이다.

  그럼 그리스도교 방법론은 어떤가? 우리 자식이 잘못을 하면 어떻게 하는가? 참는다. 참다 참다못해 폭발적으로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잘 될 때까지 그저 참고 못본체하고 묵인해주고 용서해주면서 감싸주는 것이 우리 부모님네들의 정서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다. 설사 돌아오기만 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정신을 고쳐주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니 기꺼이 받아들여주는 부모님의 그 정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심어주신 사랑이며 그리스도교의 방법론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그래서 종으로 써달라는 자식의 합당한 청에 오히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22-24절)고 하신다.

   가족과 형제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이 순간에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하신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접목시킬까?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모세의 기도를 바친다. "주님, 어찌하여 이토록 화를 내시옵니까? 당신의 종을 기억해 주십시오."(출애 32,11.1 3참조)




연중 제24주일



(나해) 마르 8, 27-35: 2000/09/17

저희 천주교 공항동 성당을 찾아주신 예비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오시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동안 여러 신자들의 권유를 듣고, 천주교를 보고 어려운 결단을 내리셔야 했을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지의 권유를 따라서 또는 부모님의 장례나 천주교의 사회 참여를 보시고 개인적으로 결단을 내려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와 계기로 오셨던지 또 여러분 자신은 잘 느끼시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이미 예전부터 부르고 계셨고 오늘 여기까지 오시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하느님은 여러분의 지난 인생동안 함께해주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슬플 때 함께 슬퍼하셨고, 여러분이 기쁠 때 함께 기뻐해주신 분이십니다. 여러분과 함께하시면서 여러분이 어려움 중에 있을 때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힘을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우리 각자에게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 땅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또 사는 동안 꼭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여러번의 고비를 넘겨왔습니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마치 우연처럼 그리고 자연스럽게 해결되고 다행처럼 생각되는 그 사건의 뒤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주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나에게 가족을 주셨고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환경이 더 좋아지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함께해주신 하느님을 깨닫고 또 감사드린다면, 이제 우리는 한 번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기를 바라실까'하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완전하게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천주교회를 통해 세상에 내려주신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는 분들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드리고 함께 그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도 하느님과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천주교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생애과 그 길을 잘 받아들이고 소화시키셔 구원을 얻고 또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하늘나라로 변화시키는 데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연중 제24주일



(가해) 마태 18,21-35; 99/09/12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워서, 보고 싶어서 서로 만났으면서도 정작 만나면 싸웁니다. 그중에는 삶이 피곤하고 불만족스러워서 남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서 그런 사람도 있고, 지나간 일을 잊지 못하고 아깝고 아쉬워해서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집회서 저자는 "원망과 분노는 가증스러운 것이니 죄인이 좋아하는 것이다."(27,33)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이웃에 대해서 분노를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으랴?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는가? 네 종말을 생각하고 미움을 버려라. 한 번은 죽어 썩어질 것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28,3-4.6-7)고 합니다. 정말 이 말씀엔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 고개도 들 수 없다는 표현이 맞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7-8) 이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백성이오니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십시오.' 그러자면 나도 없어지고 너도 없어지게 되므로 서로간의 분쟁과 갈등을 넘어 우리 모두 서로를 위해 살게 되겠지요. 용서가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를 버리는 것도요. 그러나 그럼 어떻게 합니까? 서로가 불목과 싸움으로 살 수야 없지 않습니까? 결국 서로 죽게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마태 18,21)하고 묻자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고 하십니다. 에수님께서는 부자청년이 주님의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했을 때, "너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루가 18,22)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화목하게 살아서 이 땅에 하늘 나라를 이루는 일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연중 제24주일



(다해) 루가 15,1-32: 98/09/13

늦깍이 세례자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지난 세례식에서 연기되었을 때 여러분은 여러 가지로 불편해 하셨습니다. 왜 연기되셨습니까? 물론 주임사제가 세례를 연기한다는 결정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결정이 내려졌습니까? 여러분은 세례자가 채워야할 교과과정을 충실히 밟지 않았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미사나 교리나 구역 반모임을 빠지거나 마르코 복음서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내린 결정이고 여러분 행위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리는 것은 여러분에게 핀잔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 인간의 모두의 모습을 되새겨보기 위한 것입니다. 세례가 연기되었다는 결정을 들었을 때 어땠습니까? 당연하고도 좋은 결정이라고 생각하셨습니가?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안되면 기분 나빠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그런 일이 있어났다고 인정하고 그 부족분을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불평 불만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생겨난 일인데도 그 일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원망까지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어떤 행위를 했는지, 또 자신의 행위가 어떤 면에서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같은 잘못을 계속 반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한편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되면 기고만장하고 교만해져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봅시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에게 나가라고 했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내쫓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 스스로 나가 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원해서 부모와 가족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되자 기고만장해서 자기 재산을 다 써버렸습니다. 결국 알거지가 되버렸습니다. 그제야 그는 자기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복음서는 그 아들의 상태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었다."(루가 15,17) 그런데 다행히도 그에겐 돌아갈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라도 돌아가기만 한다면 그 아버지께서 자기를 굶어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되돌아갔고, 자기가 원하는 정도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가 생전에 아니 그가 떠나기 전에 누렸던 모든 것을 다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잔치마저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 기회,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우리 자신에게서 해방되어 아버지께 돌아가도록 합시다. 이제나, 저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께!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계획과 욕망에 빠져 재물과 세상에 끌려 다니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 나도록 합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증거 삼아 보여주십시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부유하고 행복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