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이동



(나해) 루카 9,23-26; ’21/09/19 유동철 리노 부주임 신부님 강론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는 대축일 경축 이동을 통하여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미 다들 잘 아시다시피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전통을 중시하는 유교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국 사회 안에서 많은 어려움과 박해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고, 목숨을 바쳐 그 믿음을 굳건히 지켜 나가셨습니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순교의 피로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열어 주셨고, 지금 우리는 신앙 선조들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피를 흘리는 순교는 없지만,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할 땀과 희생의 순교는 요청됩니다. 한두 번 순교하는 마음으로 참고 살 수는 있지만, ‘날마다’ 십자가를 지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리고 우리 신앙 선조들의 믿음과 피의 순교를 묵상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제로서 주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의 길을 따르기 위해 선교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년간의 시간이었지만, 아주 보람되고, 주님의 은총 안에서 소중한 시간,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제가 경험했던 이 시간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간략하게 사진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잠시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사실 사진을 제가 찍어야 해서 제가 나온 사진도 많지 않고, 제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아서 사진이 많지도 않지만, 그래서 이 짧은 영상으로 저의 6년간의 삶을 다 보여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영상을 만들면서 저 역시 지난 선교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생김새의 다름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괜히 그들이 저에게 해꼬지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어 공부를 하고, 1년 동안 현지인 신자 집에서 하숙생활을 하면서 과테말라 사람들이 참 착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즉 생김새의 다름에서 오는 어려움은 제 편견이었던 것이죠.

또한 언어 공부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저는 언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롭게 스페인어 배우는 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1년간 어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6개월 간 과테말라 신부님과 살면서 사목 실습을 했습니다.

사목 실습 이 후 과테말라 대교구로부터 정식 발령을 받아 약 4년 반 동안, 자난6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San Lorenzo el Cubo 라는 성당에서 지냈습니다. 네, 사진에서 보신 교우들이 모두 그 성당 교우들입니다. 사실 이 성당은 본당은 아닙니다. 청주교구 신부님이 주임신부님으로 계신 성당의 공소입니다. 하지만, 제가 모든 책임, 재정적인 부분, 성사적인 부분을 비롯한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제가 다 책임을 갖고 신자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과테말라는 1820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군부독재 시대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85년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시설을 운영하던 단 한 명의 신부님만 빼고, 모든 신부님들을 내쫓았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스페인계 신부님이 많이 계셨는데, 독재를 하기에 있어서 그들이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사제는 부족했고, 그래서 성사 생활을 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과테말라 신자들은 성사가 아닌, 준성사적인 부분에서 신앙을 간직해 나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보신 것처럼, 그들은 스페인 지배 시대 때부터 해왔던, 행렬이라는 독특한 신앙 문화를 만들어냈고, 십자가의 길 또한 실제 예수님이 진짜 걸으셨던 것처럼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도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공동체는 특별히 공소였기에, 사제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 짧았습니다. 그래서 미사나 다른 성사보다는 이 행렬이나, 성체 현시 등을 사제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준성사를 더 중요시하기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돈 문제도 걸려있었기 때문에, 몇몇 이들은 이 행사를 결코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성주간에, 성목요일에 주님 만찬 미사가 그리고 부활 성야 미사가 성 토요일 저녁 7시에 있었는데, 이 두 날에 5시부터 11시까지 행렬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해왔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성삼일 전례가, 성삼일 미사가 매우 중요하다고, 설득도 해보고, 싸워도 보았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5년 동안 마을, 성당 밖에서는 수백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5시부터 밤 12시까지는 행렬을 했고, 그 행렬과는 따로 저녁 7시에 성당에서는 100명도 안 되는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 만의 전통을 바꾸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어려움도 있었지만, 사실 좋은 부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사람들은 나눔을 실천할 줄 알았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은 약 1950-60년대의 한국처럼 개나 고양이, 닭이나 오리, 심지어 돼지까지 마당에 놓아 길렀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키우는 닭이 알을 낳으면, 저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잔치를 할 때면, 초대해서 같이 춤도 추고, 기쁨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아까 사진에서 잠깐 보신 음식 사진이 잔치 음식입니다. 매우 소박하죠, 밥, 고기 조금, 그리고 야채 샐러드 정도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시간을 공유하고 음식을 나누며 그들과 기쁨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지난 2018년,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직선 거리로 약 15키로미터 떨어져 있는 화산이 크게 폭발했습니다. 저는 그 때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성대히 봉헌하고, 성체 행렬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행렬 중에 화산재가 비처럼 내렸고, 제의는 검은 물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행사 후에 성체분배자들과 식사를 하는 도중, 화산에 가까운 본당의 본당 신부님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과테말라에서 제가 있던 지역에는 한국의 농촌 ‘네 이장이 말씀드립니다.‘라며 마을 방송을 하듯이 성당에서 마을 전체에 방송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송으로 이렇게 화산이 폭발해서 ‘도움이 필요하다, 먹을 것이나, 약품들, 물 등의 도움을 받습니다.’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성당으로 물건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 마을은 가난한 지역에 속했지만, 그래도 단 2-3 시간 만에, 트럭 8대 분량의 많은 물건들을 봉헌해 주셨고, 그 도움으로 화산 폭발로 고통받는 지역에 잘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을 겪은 6년 간의 시간을 돌아보았을 때, 개인적으로 저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 삶 안에 역사하시는 하느님, 나의 주님, 그리고 부족하지만, 사제로서의 삶, 선교사로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그분의 섭리, 사랑과 자비를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주님께서는 제가 과테말라에서 과테말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셨고, 그 안에서 행복함을, 평화를, 그리고 사랑을 느끼고 나눌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제 영적으로,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이 선교사제로서의 시간은, 과테말라에서 보낸 시간은 저에게 아주 소중한 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오늘 제 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들은 하느님의 도움에 힘입어 모든 것을 이겨내며,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하느님에게 딱 붙어서, 그 사랑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목숨을 바쳐서, 또 최양업 신부님이 온 삶을 바쳐서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듯이, 그리고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이 자신을 버리고 용기를 갖고 목숨을 바쳐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셨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사랑 안에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땅끝까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살아가고 계신 모든 평신도 선교사들, 선교 수도자들, 그리고 선교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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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영성 13 주님의 기도2



(다해) 루카 9,23-26; ’19/09/22

하느님은 이토록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해 주시려고 하는데 반하여 세상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총에 감사드립니까? 세상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이웃과 자연에게 봉사하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재능과 힘을 우선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이익만을 위해,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용하며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사람이 자신을 만드신 하느님을 모실 줄 알고, 그 하느님이 만드신 또 다른 ‘나’인 ‘너’를 자기 생존의 도구요 희생물로 삼으려는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머리와 자기 손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섬겨야 합니다. 세상이 하느님 나라로 변하려면, 온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받들 때 가능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유일한 희망의 절규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마태 6,9ㄷ 참조)라는 청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들끼리의 사랑의 실천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란 우리의 기도문은 ‘거룩히 빛나야 할 아버지의 이름’이란 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곧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탈출 3,7-8.14ㄴ.15ㅁ) 그러므로 인간 사회 안에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이, 사람들 모두에게 명확하게 드러나고, 심어지기를 기대하는 희망이며 요청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을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란 청원의 또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어느 곳에 있는 어떤 나라입니까?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 6,10) 아버지의 나라는 장소나 영역이 아닙니다.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아니, 여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광야에 계시다.’ 하더라도 나가지 마라. ‘보라, 골방에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마태 24,23.26)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함께하심과 드러나심 그리고 지배하심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마르 10,15 참조)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참조)처럼 밭에 있는 보물을 얻기 위해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마태 13,44 참조)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요한 3,3 공동번역: 새로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잘 깨달아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마태 13,21 참조)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혹시 하늘 나라를 펼치기 위하여,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마태 5,10)이 될지언정, 비록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습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되는”(마르 4,31-32)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겨자씨같이 작은 믿음을 세상이란 땅에 심어 놓으면, 마치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루카 13,21) 오르는 누룩처럼 하늘 나라는 퍼져나가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로마 14,17)의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륜을 저지르는 자나 더러운 자, 탐욕을 부리는 자, 우상 숭배자, 간음하는 자, 도둑, 주정꾼, 중상꾼, 강도”(에페 5,5; 1코린 6,9.10 참조)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마태 7,21)해야 들어갑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마태 5,20)기 위해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마태 5,19)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물려받지 못합니다.”(1코린 15,50)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힘에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4,20)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루카 12,32)는 주님의 말씀을 믿읍시다.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2티모 4,18)이라는 희망을 간직합시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루카 9,62)처럼 현세에 대한 미련을 두지 맙시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둘”(루카 9,60) 정도로 급박하고 우선적으로 이 나라를 선포하고 내 삶으로 살아냅시다. 그러면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루카 9,27)가 비록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어도 “이미 와 있는 것”(루카 11,20)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청원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지배하소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지배하려는 이들을 걷어 내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당신께서 직접 다스려 주셔서 억울하거나 악에 시달리는 일이 없게 해 주소서. 이 세상에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소서!” 하는 염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사람들에게도 올바르게 살라는 요청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말의 심판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나라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 11,3)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5)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면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본 바와 같이 ‘우리에게 하느님이 함께하심과 드러나심 그리고 지배하심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불평등과 부당한 대우와 환경 속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해 주시리라. 다시 말하면 아버지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의도하셨던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생명을 나누시기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일을 함께 하기 위해 우리에게 당신의 모상을 심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떠난 후에도 거듭 하느님과 하나되기 위해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계시는 그 아버지의 애정을 우리와 세상에 받아들임으로써,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로마 14,17)을 누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하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고 스며드는 미움과 복수 그리고 절망의 유혹을 극복하고,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겠다는 다짐이며, 더 나아가 사람은 자신의 악한 뜻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의 힘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의 악의를 굴복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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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일



(가해) 마태 20,1-16; ’17/09/24

가끔 태중 신자들이 새로 세례 받은 신자들을 보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니느라 부모님이 하도 엄해서 하고 싶은 것도 다 못하고 살았어요……!!” 또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하고 싶은 것, 할 것 다 한 다음에 죽기 전에 세례받아도 되겠네요.” 글쎄요. 답은 “그렇습니다!” 이겠죠.

그럼 뭐 하러 일찍 세례 받고 신앙 생활을 합니까? 일찍 세례를 받고 올곧게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한 이들은 조금 억울해해야 하는 상황인가요? 결론을 말하자면,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신앙생활에서 오는 기쁨과 평화를 지금까지 만끽하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 천국에 가서 주님을 온전히 뵙게 될 때에 그 만큼 더 기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15.21.27) 누군가는 신자들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 남들이 하는 것 다 못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주님을 겉으로뿐만 아니라 속으로까지 믿고 또 그 믿는 대로 사는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내려주시는 그 평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확인해 주실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절)

교우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과 함께하는 삶과 관련하여,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마태 20,1-5)

그뿐 아니라 주인은 오후 세시와 다섯 시쯤에 나가서, 똑 같은 조건으로 일꾼들을 뽑아 자신의 포도원으로 일하러 보냅니다. 그리고는 일을 마칠 때 포도원 관리인에게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8절) 하고는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이들부터 이른 아침에 맨 먼저 와 일하는 이들에게 모두 다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똑같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맨 먼저 온 이들은, 일찍부터 와서 하루 종일 일한 이들과 늦게 온 이들에게 똑같이 품삯을 나누어 주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항의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13-14절)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십니까? 왜 처음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온 신자들과 뒤늦게 신자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똑 같은 기쁨과 평화를 선사해 주십니까? 먼저 시작하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더 큰 기쁨과 평화를 선사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꾼의 시간이 우리의 일생이라면, 그리고 우리 인생의 품삯이 액수의 정도가 아니라 구원이라고 하는 영원한 새생명이라면 어떻게 달라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 나 할 것 없이 똑같이 새로운 생명의 길로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단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언제부터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아니라, 각자가 처해있는 여러 가지 다른 상황 속에서 각자의 여건과 처지에 맞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들처럼.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0,6-7)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님께서는 죄의 용서와 구원을 허락하는 권한이 주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

베드로 사도는 주님 구원의 시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평화는 그 기간과 질에 있어서 각자에게 다른 것이지, 구원의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화 말고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들에게는 그 만큼 더 오래 그가 시작할 그 때부터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해서 기쁨과 평화 속에 머물러 있으며, 또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마칠 때 주님 안에서 완성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더욱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이제와 영원히 그분께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2베드 3,15.18)

단지,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미지근하게 한다거나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오 20,16)

한 가지 더 우리는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생활 때문에 기쁨과 평화를 얻는 것이지, 누가 그 기쁨을 함께 누린다고 해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평화가 줄어들거나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기쁨과 평화는 함께 할 때 더 커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구원이 ‘세례자이냐 비신자냐?’ 또는 ‘얼마나 열심히 일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선택이며 주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구원은 그 누구와도 비교됨 없이 각자가 주님 앞에 서서, 따로 따로 그가 처한 생의 여건과 처지와 상황에 맞춰 주어지는 것임을 확인합니다.

구원의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중단 없이 나아갑시다. 이 길을 함께 걸어가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형제들과 함께 악마가 유혹하는 매 순간의 서로 다른 의견차이를 불목과 분열로 이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을 통해 주님 사랑의 섭리와 안배를 청하면서.

아울러 이 시간에도 “아무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는 “아무도 우리를 성당으로 가자고 하거나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이들이 없도록, 주 예수님을 전하고, 주님 대전에 모셔오도록 노력합시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4)



연중 제25주일 한가위 미사



2005/09/18

오늘은 우리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하고 놀았나 생각해 봅시다.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는 잘 쉬고 잘 놀아야하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의 놀이에 대해 살펴봅시다.

서민들은 '줄타기', '연날리기', '제기차기', '씨름', '소맥이놀이', '널뛰기', '농악' 등을 하면서 놀았고, 양반들은 '바둑두기', '시조·창하기', '자수놓기', '글씨쓰기', '가야금 연주', '투호놀이' 등을 하면서 여가를 보냈습니다.

여자들은 주로 '자수놓기', '그네뛰기', '널뛰기', '강강술래', '놋다리밟기', '투호놀이' 등을 하였고, 남자들은 '줄타기', '고싸움', '소싸움', '씨름', '농악놀이', '바둑두기', '북놀이' 등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바둑두기', '장기두기', '씨름', '강강술래', '소싸움' 등을 했고, 아이들은 '비석치기', '연날리기', '윷놀이', '제기차기', '말타기놀이', '가마싸움', '팽이치기', '풀각시놀이', '구슬치기', '썰매타기', '달맞이' 등을 했습니다.

혼자서는 '자수놓기', '글씨쓰기', '시짓기', '사군자 그리기' 등을 하였고, 여럿이 모여서는 '놋다리밟기', '고싸움놀이', '줄다리기', '강강술래', '가마싸움' 등을 했습니다.

계절 별로는 봄에는 '풀각시놀이', '꽃생이놀이', '꽃놀이' 등을 했고, 여름에는 '북놀이', '풀묻기', '삼굿', '두꺼비집짓기' 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달맞이놀이', '강강술래' 등을 했고, 겨울에는 '팽이치기', '썰매타기', '자치기', '잉어놀이' 등을 했습니다.

추석 명절에는‘가마싸움’, ‘각시놀음’, ‘강강술래’, ‘강릉단오제’, ‘고싸움’, ‘그네뛰기'’, ‘다리밟기’, ‘닭싸움'’, ‘밀양백중놀이’, ‘반보기’, ‘밭고랑기기’, ‘소싸움’, ‘쇠머리대기’, ‘씨름’, ‘연산백중놀이’, ‘줄다리기’, ‘지신밟기’, ‘차전놀이’ 등을 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놀이를 가나다 순으로 간단히 살펴보면;

‘가마싸움 ’은 일명 가마놀이라고도 하는 학동들의 놀이입이다. 추석전각 서당의 학동중 대표를 뽑고 각기 가마와 기를 만들며 가마싸움 준비를 합니다. 15일이 되면 가마를 끌고 마을을 누비고 다니며 기세를 올리고 나서, 넓은 마당에 나아가 달려가 가마를 부딪혀 부서지는 편이 지게 되는 놀이입니다. 이긴 편에서 그 해에 등과가 나온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강강술래’는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와 도서지방에 널리 전승되고 있는 여성들의 집단놀이로서 주로 한가위 밤에만 놀아왔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밤을 비롯하여 달이 밝은 밤에 수시로 놀아온 놀이입니다. 이 놀이의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고대 농경시대의 공동 축제때 노래부르며 춤추던 놀이형태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면서 점차로 변화되어 오다가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이 강강수월래를 의병술로 이용해서 왜적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돌아가게 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사람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져 내려왔다고 봅니다.

‘반보기’는 옛날 시집간 여자들이 시집살이하면서 마음대로 친정에 갈 수 없자, 추석이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날짜와 장소를 미리 정해서 서로 좋아하는 음식을 장만하여 한나절 동안 회포를 풀었다고 합니다. 중간에서 만나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 뜻으로 반보기랍니다. 또 이웃 마을의 여인들과 어울려 지내기도 했답니다.

‘밭고랑 기기’는 추석 전날 8월 14일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나이 수대로 밭고랑을 기어가는데 이렇게 하면 그 아 이는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밭농사도 잘된다는 뜻으로 전라남도 진도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 때에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고 하기도 한답니다.

‘소멕이 놀이’는 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난 뒤 알맞은 시간에 소놀이가 진행됩니다. 멍석안에 두사람이 들어가 소의 형상으로 꾸며서는 그 소를 끌고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부농집이나 그 해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대문 앞에서 '소가 배가 고프고 구정물을 먹고 싶어 왔으니 달라'고 외치면 주인이 나와서 일행을 맞이하고 술과 떡과 찬을 차려 대접합니다. 거북놀이와 비슷하지만 개인이나 가정의 복락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이 놀이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깊이 들어 있습니다. 중부지방에 널리 퍼져 있으며 황해도 일부 지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올게심니’는 추석을 앞두고 잘 익은 벼나 수수 등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 기둥이나 대문 위에 묶어 걸어두는 것입니다. 이 것은 다음 해에 풍년이 들게 해 달라 는 기원의 뜻이고, 올게심니한 곡식은 다음 해에 씨로 쓰거나, 떡을 해서 사당에 올렸다가 먹었다고 합니다.

‘원놀이’는 음력 설이나 추석 명절때 청 장년들이 하는 놀이로서 지금으로 말하면 모의 재판 같은 성격의 놀이입니다. 한 사람을 원님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학동들은 백성이 되어 사건을 놓고 판결을 받는 놀이입니다. 경북 영양 예천 문경 등지에서 전해 내려오던 놀이이며, 안동에서는 주로 서당 학동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원님은 사건을 잘 해결하지만 서투른 원님은 백성들의 놀림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추석입니다. 여러분 미사 때 우리 조상들을 기억했듯이, 형제 자매들을 기억하고, 이웃 사촌이라고 하는데 이웃과도 즐거운 한 때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명절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함께하셔서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 주 하느님께 감사하여 기뻐 뛰어라. 너희 하느님께서 가을비를 흠뻑 주시고, 겨울비도 내려 주시고, 봄비도 전처럼 내려 주시리니, 타작마당에는 곡식이 그득 그득 쌓이고, 독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라. 이제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으며 너희 주 하느님을 찬양하리라.”(요엘 2,23-24.26)

좋은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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