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일

(루카 16,19-31) 16/09/25

저는 어릴 때 부모님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랐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모자라지 않게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채워주셔서 풍요롭게 자라던 저에게도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도 다른 아이처럼 정규적으로 용돈을 받고 싶다는 복에 겨운 바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루카 16,19)는 데 반해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21절) 라고 둘을 비교하여 전합니다. 부자는 이름도 없고 가난한 자는 그대로 이름이 있습니다.

둘 다 죽었는데, 라자로는 천사들이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고, 부자는 땅에 묻히고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 곁에 있는 라자로를 보면서 부자는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고통에 대해 하소연을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25-26절)는 되돌이킬 수 없는 사후세계의 냉엄한 판결을 내려버립니다.

더 이상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다고 느낀 부자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27-28절) 부자는 자신이 고통의 늪에서 건져지는 것은 안 되더라도 자신의 남은 가족이라도 죽음의 길에서 건져보려고 절박하게 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 라고 말하며 그 청을 냉정하게 잘라 버립니다.

부자는 자신의 어리석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자식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전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30절) 라고 또 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현세 인간들이 복에 겨운 상황에서도 불평불만을 하고 고집스럽게 주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실을 정확히 직시하시고는 마치 벌이라도 내리시려는 듯이 선언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우리는 이 부자와 라자로의 사후세계와 거기서 만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예화를 통해 몇 가지 성경의 가르침을 접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부자의 선심공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 땅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끼리 흥청망청 부족함 없이 살던 이들은 죽은 후에 땅에 묻히고 저승에 가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후세계에 대한 경고와 그에 따라 현세 생활을 고쳐먹어야 한다는 회개에로의 초대입니다.

오늘 미사의 첫 번째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고 흥청망청하는 부자들의 방탕을 질타합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 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들을 만들어 낸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아모 6,1.4-7)

두 번째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희망과 위로입니다. 이 땅에서 어려움과 고통을 겪던 이들은 죽은 후에 땅에 묻혀 저승으로 가지 않고, 천사들의 손에 안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곁으로 가서 이 땅에서의 아픔에 대한 위로와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세 번째는 믿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믿고 따르려는 선한 이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따르면 됩니다. 그러나 믿고 따르려고 하지 않는 이들은 누가 가서 무슨 말을 해도 믿거나 따르지 않을 것임을 자성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은 세상의 여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우리의 나약한 신앙 때문에 얼굴이 붉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복음의 비유를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고, 물질적이고도 현세적으로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가지고, 더 오래 풍족하기만을 바라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돌아봅니다.

아울러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재물이 실제로는 사회의 생산과 분배의 제도를 통해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겨놓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재물 관리행태를 되돌아 봅니다.

또 우리보다 경제적으로나 현세적으로 더 낮거나 더 적거나 더 부족한 현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과 삶을 나누도록 우리에게 형제자매를 보내준 사실을 망각하고, 우리 눈에 띄는 것 자체를 불쾌해 하고 피하려 하며 굳이 외면하며 살아가면서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우리 사회의 만연한 죄악의 상황을 가슴 아프게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행태, 아니 동료 이웃을 돌보지 않는 삶을 질타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전승 안에 땅과 그 땅에서 나온 재물은 하느님께서 그 민족의 풍요를 위해 나누어 주신 선물이라는 사상에서 근거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다같이 살라고 맡긴 그 재물은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와 나누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를 따르지 않아 동생 아벨을 죽이고 저주 받은 카인의 복에 겨운 항변을 너무나도 잘 기억합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1티모 6,11.14)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노고를 잠시라도 멈출 필요는 없겠지만, 복에 겹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선물을 형제들과 공유함으로써,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는 주님의 새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가 되어, 이 땅에 함께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로 합시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연중 제26주일 한가위

(루카 12,15-21) 15/09/27

안녕하십니까?

교우 여러분, 한가위 명절을 축하드립니다.

메르스와 남북 군사대결의 갈등과 긴장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명절의 한가로움과 가족과의 단란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휴식이라 더 소중하게 여겨지면서도 다시 또 빼앗길까 두렵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이 한가위 추수시기에 우리에게 새 곡식과 새 결실들을 주셨습니다. 그나마 이 결실이 기쁘면서도,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이 결실에 비해 나갈 곳은 하도 많아, 들어 온 것이 들어온 것인지 조차 불투명하고 불안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탐욕에 빠져들지 않도록, 이런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부자가 많은 소출을 거두고 나서, 더 큰 창고를 지어 새 곡식과 모든 재물을 모아 두고, 스스로에게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위로했답니다.

그러자 주 하느님께서 이 부자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0-21)

우리 중에 누가 부자입니까? 무엇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으면 부자입니까? 어쩌면 100세 시대를 맞이하면서 아무도 부자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게 된 듯싶습니다.


오늘 한가위를 맞아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내가 어떤 결실을 거두었는가?

내가 지금 무엇을 가졌는가?

내 인생에 무엇을 다지고 모아 놓았는가?


한 가위 이 명절에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참으로 되새기고 싶은 글이 하나 있어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다'


매일 세수하고 목욕하고 양치질하고 멋을 내어보는 이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 가면서 이 육신을 위해 돈과 시간, 열정, 정성을 쏟아 붓습니다. 예뻐져라, 멋져라, 섹시해져라, 날씬해져라, 병들지 마라, 늙지 마라, 제발 죽지 마라......!

하지만 이 몸은 내 의지와 내 간절한 바램과는 전혀 다르게 살찌고, 야위고, 병이 들락 거리고 노쇠화되고 암에 노출되고 기억이 점점 상실되고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가 내 것인가? 자녀가 내 것인가? 친구들이 내 것인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닐진대...!

누구를 내 것이라 하고 어느 것을 내 것이라고 하던가?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만나고 흩어지는 구름인 것을 미워도 내 인연 고와도 내 인연.

이 세상에서 누구나 짊어지고 있는 고통인 것을...!


피할 수 없으면 껴안아서 내 체온으로 다 녹입시다.

누가 해도 할 일이라면 내가 합시다.

스스로 나서서 기쁘게 일합시다. 언제 해도 할 일이라면 미적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에 합시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 쏟읍시다.

운다고 모든 일이 풀린다면 하루 종일 울기라도 하겠습니다..

짜증부려 일이 해결된다면 하루 종일 얼굴 찌푸리고 있겠습니다.

싸워서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누구와도 미친듯이 싸우기라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일은 풀려가는 순서가 있고 순리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조금 양보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배려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낮춰 논 눈높이

내가 조금 덜 챙긴 그 공간


이런 여유와 촉촉한 인심이 나 보다 더 불우한 이웃은 물론 다른 생명체들의 희망 공간이 됩니다.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이 정말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정말 고마움과 감사함의 연속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다 들어 알고 있듯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한가위 여러분의 축제에 진정한 보화를 쌓으시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주까지 저희는 교황님의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살펴보았습니다. 회칙 끝머리에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지구를 위한 기도와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바쳐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오늘 대자연의 축복과 결실의 명절인 한가위에,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다같이 바치며 이 명절을 지냅시다.


아버지,

전능하신 아버지의 손으로 빚으신

모든 피조물과 함께 찬미하나이다.

모든 피조물은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현존과 온유로 충만하나이다.

찬미받으소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

주님에게서 만물이 창조되었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모 마리아께 잉태되시어

이 땅에 속하시며

인간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셨나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부활하신 분의 영광으로

모든 피조물 안에 살아 계시나이다.

찬미받으소서!


성령님, 성령님께서는 당신의 빛으로

이 세상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끄시며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피조물과 함께하시나이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저희 마음 안에 머무르시며

저희를 선으로 이끄시나이다.

찬미받으소서!


삼위일체이신 주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의 놀라운 친교를 이루는 분이시니

모든 것이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세계의 아름다움 안에서

저희가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쳐 주소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에 대하여

저희가 찬미와 감사를 드리도록 일깨워 주소서.

저희가 존재하는 모든 것과 내적 일치를 느끼도록

저희에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사랑의 하느님,

이 세상에 저희에게 맞갖은 자리를 보여 주시어

저희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시는 존재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나이다.

권력과 재물을 소유한 이들을 깨우쳐 주시어

무관심의 죄를 짓지 않게 하시고

공동선에 호의적이며 약한 이들을 도와주고

저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돌보게 하소서.

가난한 이들과 이 땅이 절규하고 있나이다.


주님,

주님의 힘과 빛으로 저희를 붙잡아 주시어

저희가 모든 생명을 보호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마련하여

정의와 평화와 사랑과 아름다움의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찬미받으소서!

아멘.




연중 제26주일

(가해) 마태 21,28-32; 14/09/28

TV 연예 프로그램 중에 ‘무한경쟁’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런데 TV에서만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 이름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실제로 각박하고 냉엄한 무한경쟁의 승부 속으로 몰아내는 듯합니다.

최근 한 신문기사를 보면, 만 45세 이하의 직장인이 5565세대가 되면, ‘신 보릿고개의 공포’가 밀려온다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정년은 55세에 닥쳤지만 국민연금은 65세까지 기다려야 하고, 자식들이 들러붙어 있어 소득은 줄었어도 애들 뒷바라지는 여전히 해야 하며, 나이 든 부모님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계속 노부모는 모셔야 하고, 노화가 본격화하면서 병원을 자주 찾게 되어 병원비는 급증하며, 그간 생활비 등으로 꾸어온 은행 빚이 명함이 없어지면서부터 대출상환 압박이 심해지고, 한 동안 직장에 다니느라 일에만 빠져 있다가 가정에서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됨으로써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들이 하나 둘 돌출되기 시작하면서 툭하면 다투게 되고, 재산은 있어도 현금 흐름이 막혀 ‘흑자도산’의 형태로 본의 아니게 자린고비의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들의 미래도 녹녹하지 않아 보입니다. 미지의 미래를 향해 무한한 꿈을 펼칠 수 있을 건만 같은데, 지금 하는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때 이 사회가 나를 기쁘게 맞아줄지, 내 자리가 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신기술, 신제품, 신마케팅 등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데 반해, 현실은 좀처럼 간극이나 빈틈이 보이지 않고, 사회의 기득권과 여러 가지 장애들이 우리 앞 길을 막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그러기에 젊은이의 패기와 열정이 숨쉴 곳이 있나 봅니다.

현실은 우리를 반기기보다 쥐어짜는 듯합니다. 그래서 더욱 결의를 다지듯 이를 악물고, 동료와 이웃을 나의 경쟁 상대요 적이라는 경계심을 가지고 덤비지만 모두 나보다 못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더 힘겹습니다. 누군가 도와주어도 앞서가기 힘든데, 누군가를 적으로 삼고 경계를 하면서 나아가자니 발 걸음이 더욱 더 무겁기만 합니다.

오늘 첫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인들에게,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 2,4) 라고 말합니다. 시쳇말로 해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네가 죽어야 하고, 내가 올라가기 위해서는 네가 떨어지거나 떨구어져 나가야만 하는 듯한 사회조건 속에서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너를 배제하고 젖혀야만 내가 살 수 있다면, 내가 살아난 다음의 세상은 나 홀로 외톨이 일뿐이고 너 없는 나로서 나의 존재마저 없어질 것이라면 너무 순수하거나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리로 치부되고 말겠습니까? 아니면, 너를 배제하고 젖히기 위해 쏟는 힘을 너와 함께할 수 있는 존재양식과 방법을 모색하고 이루기 위해 쏟는다면, 너와 내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 눈 앞에는 단지 흑과 백, 좌와 우의 두 개의 선택만이 보일지 모르지만, 정과 반의 합도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비전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어서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1-3.5)

우리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15,12) 라는 새계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처단하려는 유다교 지도자들과 로마 권력자들과 맞서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친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못한 백성들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탓하거나, 원망하거나, 맞서 싸우거나, 벌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어진 소명을 따라, 십자가 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 죗값의 대속제물로 삼아 희생제사를 바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총체적인 삶을 되돌아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의 불을 끄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아니면, 내 한 몸 살아남기 위해 서로 찍어내고, 깍아내리며 원수같이 싸워 누르려 하고 있는지?

내가 너와 함께하기 위하여 양보하고 희생당하면서 살아온 결과로 지금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아니면, 지금까지 싸운 결과로 많은 사람을 잃었고, 아직도 힘겹게 더 싸워야 하며, 불안하고 불행한 상태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주님께서는 오늘 두 아들의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묻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하는 아버지”(마태 21,28)의 말에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29절) 맏아들과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은”(30절) 다른 아들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31절)

우리가 일찍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대답만 하고, 회개하지 않으며, 생각을 바꾸지 않은채 끝내 예수님의 말씀이 옳고 그 방법이 진정 우리를 함께 살 수 있게 할 것이며 구원의 길이라고 믿지도 않고, 실행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 역시 유다인처럼 예수님께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31-32절) 라는 지적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곱씹으며 묵상합시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에제 18,26-27)



연중 제26주일

(다해) 루카 16,19-31; 13/09/29

어제 절두산에서 새남터까지 도보성지순례를 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을 마무리 하면서, 그 동안 교회에서 진행되었던 ‘하느님의 종 124위’의 시복시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지난 1984년에 시성되었던 103위 성인을 중심으로 하여 순교자 신심을 키워오다가, 1997년 가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시복시성특별주교위원회를 신설하여,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시성을 준비해 왔고, 지난 3월에 이분들의 시복에 관한 교황청 시성성 역사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하여, 17년 동안의 예비심사와 준비 및 심사과정을 거쳐 내년 가을쯤 복자품에 오를 예정입니다.

하느님의 종 124위는 1791년 신해박해 때 3위가 순교하셨고, 1795년 을묘박해 3위, 1797년 정사박해 8위, 1801년 신유박해 53위, 1814년의 1위, 1815년 을해박해 12위, 1819년의 2위, 1827년의 정해박해 4위, 1839년의 기해박해 18위, 1866년과 1868년의 병인-무진박해 19위, 1888년에 1위가 뒤늦게 순교하셨습니다.

이분들을 지역별로 구분해 보면, 한양에서 37위가 순교하셨고, 경기도 13위, 충청도 18위, 전라도 24위, 경상도 29위, 강원도에서 3위가 순교하셔서 순교지가 전국에 골고루 퍼져있습니다.

마산 교구의 시복대상자는 박대식 빅토리노, 신석복 마르코, 정찬문 안토니오, 윤봉문 요셉, 구한선 타데오 5위이시고,

안동 교구는 박상근 마티아 1위,

제주 교구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1위,

서울 대교구는 좌우 포도청에서 순교하신 윤유일 바오로와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 심아기 바르바라, 김이우 바르나바, 새남터의 주문모 야고보 사제, 경기 감영의 조용삼 베드로, 서소문의 최창현 요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최필공 토마스, 홍낙민 루카,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복혜 칸디다, 정인혁 타대오, 정철상 가롤로, 강완숙 골룸바, 강경복 수산나, 김현우 마태오, 문영인 비비안나, 김연이 율리아나, 이현 안토니오, 최인철 이냐시오, 한신애 아가다, 김종교 프란치스코, 홍필주 필립보, 현계흠 바오로, 손경윤 제르바시오, 이경도 가롤로, 김계완 시몬, 홍익만 안토니오, 조숙 베드로, 권 데레사, 송 베네딕도, 송 베드로, 이 안나, 당고개의 이성례 마리아 등 38위,

수원 교구는 남한산성 동문 밖의 한덕운 토마스, 양근리에서 참수된 윤유오 야고보와 윤정혜 아가타, 대석리 앵자봉 자락의 권철신의 조카요 권일신의 아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여주읍 창리 구장터 일대에서 순교한 최장주 마르첼리노와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정순매 바르바라, 정광수 바르나바 및 안성시 죽산면의 죽산도 호부 관아에서 교수형을 당한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홍인 레오 등 12위,

부산 교구는 동래에서 순교하신 이정식 요한, 양재현 마르띠노, 울산장대에서 군문효수를 당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등 8위,

대구 대교구는 관덕정과 경삼 감영 등지에서 순교하신 김종한 안드레아, 김사진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 안군심 리카르도, 김세박 암브로시오, 박경화 바오로, 김화중 야고보, 고성은 요셉, 고성대 베드로, 이시일 안나, 김희성 프란치스코, 구성열 바르바라, 김시우 알렉시오, 최봉한 프란치스코, 서석봉 안드레아,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 등 17위,

대전 교구는 공주의 황새바위 등에서 순교하신 원시장 베드로, 이도기 바오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정산필 베드로, 이국승 바오로, 김광옥 안드레아, 김정득 베드로, 황일광 시몬, 김원중 스테파노, 해미의 김진후 비오,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등 13위,

청주 교구는 청주 병영에서 순교하신 원시보 야고보, 배관겸 프란치스코, 청주 장터에서 순교하신 김사집 프란치스코, 청주 진영에서 순교하신 오반지 바오로, 진천 관아의 장 토마스 등 5위,

전주 교구는 전주 옥사, 전동 성당, 김제, 고창의 개갑장터 등에서 순교하신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김천애 안드레아, 최여겸 마티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유중철 요한, 유문석 요한, 이순이 루갈다, 유중성 마태오, 이경언 바오로, 이일언 욥,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정태봉 바오로, 김대권 베드로,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심조이 바르바라,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홍재영 프로다시오, 최조이 바르바라, 이조이 막달레나, 오종례 야고보 등 24위,

원주 교구는 강원 감영에서 남문밖 장대에서 순교하신 김강이 시몬, 최해성 요한, 최 비르짓다 등 3위이십니다.

순교 형태별로 보면, 목을 베는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신 분이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강완숙 골롬바 등 76위이시고, 죽을 때까지 매를 맞는 장사형이 원시장 베드로,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등 15위, 새끼줄로 목이 졸린 교수형이 박취득 라우렌시오, 유중철 요한, 유문석 요한,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등 11위, 산 사람의 사지를 잘라내고 목을 베어 여섯 토막으로 죽이는 능지처참형이 유항검, 윤지헌 등 2위, 사형수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메다는 군문효수형이 주문모 신부님 1위, 그 외 감옥에서 고문과 아사로 옥사하신 분이 12위, 방 프란치스코, 정산팔 베드로, 송 베네딕토, 송 베드로, 이 안나, 박 프란치스코, 오 마르가리타 등 7위는 순교의 형태를 알 수 없습니다.

신분별로 보면,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원시장, 윤유일, 정산필 등 진사, 학자, 밀사, 지평, 선생, 하급관리, 장교, 죄수와 여성 등 교회의 지도자나 회장 등 교회의 중책을 맡은 양반이 60위, 주문모 신부님의 복사인 김계완과 구한선 등 감사의 비장, 역관, 밀사, 궁녀, 면장, 위원, 아전, 농부 등과 김조이, 이봉금, 신선복 등 약업, 무역업, 상업 등에 종사한 상민 3위를 포함하여 평신도 지도자와 연락원을 맡은 중인이 33위, 이도기, 황일광, 김대권 등 도공, 종 등 천민이 4위, 최, 장, 이, 박, 오 등 성으로만 표현된 신분미상의 독신이나 과부, 외국인 등 27위이십니다.

연령별로 보면, 10대는 5위, 20대는 15위, 30대는 21위, 40대는 21위, 50대는 19위, 60대는 11위, 70대는5위이시고 연령을 알 수 없는 분이 27위로 3-40대가 제일 많습니다. 그 중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님이 12세로 최연소자이고, 김진후 비오님이 75세로 최고령자입니다.

세례명별로 보면, 세례명으로 보면, 베드로가 12위, 바오로 9위, 프란치스코 9위, 야고보 7위, 안드레아 7위, 요한 6위, 바르바라 5위, 마티아와 안토니오, 시몬, 토마스, 마르티노가 각 3위씩이고, 요셉, 타데오, 가롤로, 아가타, 바르나바, 마태오, 아우구스티노, 루카, 안나, 아나스티아가 각 2위씩입니다.

오늘은 ‘하느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분들이 예상대로 내년 가을 복자품에 오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연이어 진행되는 ‘증거자 최양업 신부’와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와 ‘근·현대 신앙의 증인인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 일정도 무사히 진행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전세계 교회 역사에 유래없는 순교자와 증거자들을 쏟아낸 우리 교회의 토대 위에 굳건히 서서, 우리 각자 삶의 현장에서 이분들의 후손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기로 다짐합시다.



연중 제26주일 한가위

루카 12,15-21; 12/09/30

예전에 외국 신부님과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훗날 본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주교님이 되셨는데, 추석 같은 이런 명절에 텔레비전에서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의 고향행렬을 보면서 참 부러워하셨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18세가 돼서 독립하면 그만인데 반하여, 10시간 12시간씩 걸려서라도 고향을 찾는 한국인들에게서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세상 어디서도 이처럼 가족과 부모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지닌 민족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참 아름답습니다. 부모를 찾는 것을 인간의 예와 자식 된 도리로 여겨 전통이 되다시피 한 이 행렬은 마치 하늘나라를 향한 행렬과도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하게 되는 가족 간에도 섭섭함과 원망이 싹틀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원수처럼 지내기까지 하여, ‘차라리 가족이 아니었더라면’ 하는 마음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인간관계 속에 적용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나마 살아있으니까 원수도 되는 것이지 상대가 죽어 없으면 그나마 원망할 대상도 없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관계가 어려울 땐 참으로 부딪히기 싫어서 아예 만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인간의 생애가 그렇게 무한정 남아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정작 상대가 이승을 떠나버리면, 살아생전에 다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내 남은 평생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무덤만이라도 정성껏 꾸미려고 하지만,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살아생전에 잘 할 것을 하는 아쉬움이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가족을 만날 때마다 이번에는 화해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만나면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그냥 넘어가게 되고, 오히려 더 심하게 싸우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모든 일이 돈과 관련되어 싸우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내외적인 욕심과 시샘, 질투, 증오와 분열 및 결별과 관련하여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고 말씀하십니다.

비단 화해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일 년 내내 간직한 채 실현하지 못한 좋은 뜻들을 꼭 실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담에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조금 풀리기만 하면, 나도 명절 때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기부도 하고 봉사도 해야겠다는 꿈과 계획들을 이번 추석에 실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신 주님과 더욱 닮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소득을 가지고 자신이 두고두고 누리기 위해 꼭꼭 감춰두었다가 하루아침에 죽어버림으로써 쓰지도 못하고 물거품이 된 사람을 예로 들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가족뿐만 아니라 주님의 형제들인 교우들과 가난한 이들에게도 내 입을 열고 손을 내밀어 우리 사랑을 나누도록 합시다.

조선 말기 순조 19년(1819)에 김애순이 한양의 세시풍속과 연중행사를 기록한 ‘열양세시기’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큼만 하여라.” 라고 했던 선현들의 말처럼, 이지러짐이 없는 풍요로움으로, 추석 명절 잘 보내시고 행복하소서……!!



연중 제26주일

(가해) 마태 21,28-32; 11/10/25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께 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까지 받아서 예수님의 수제자가 된 베드로가 왜 이런 질문을 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왔던 베드로가 아무런 조건 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예수님께 여쭈었겠습니까?

베드로는 더 이상 용서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한 두 번 용서해도 고치려고 하기는커녕 점점 더 큰 죄악을 일으키는 상대를 품기가 너무 버겁고 힘겨워서 그리고 변화하지 않는 죄악과 그 죄악에 사로잡힌 상대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 더 이상 용서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쭈었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용서하지 않고, 모른 체 하고, 직접 내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더 큰 피해를 안겨주지 않는 한 적당한 선에서 그쳐주기를 바라면서! 정 안 되면 처리하면서.

비단 용서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오늘 매일 이런 일과 부딪히고 있습니다. ‘알기는 하는데 그대로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면 무엇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알지만, 그 일을 하기에는 나의 노력과 투신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더 하고 싶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 그 일을 하기에는 내가 손해 볼 것 같아서…’ 우리는 오늘도 하지 않고 내일로 미루고 머뭇머뭇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라는 환경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살도록 쉽사리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라는 그 조건을 수긍하고 그 조건에 맞추라고 요구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조건을 바꾸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어떤 때는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려고 하는가 하면, 왜 어떤 때는 그 환경에 맞추기 보다 바꾸고 싶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언제 어떤 경우에, 여러분 생의 조건을 맞추려고 하고 또 바꾸려고 합니까?

우리가 살면서 어떤 것을 결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가보면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처럼 우리 일생을 결정짓게 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가장 힘있는 결정은 그리고 최후까지 남아 있는 무시할 수 없는 결정적 변수 중의 하나는 바로 “내가 하고 싶다”와 “내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내가 좋고 싫다는 것을 드러내기 싫어서 핑계처럼 다른 여러 가지 변수들을 댑니다. 남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까지 자위와 자기 합리화와 자기 최면을 쓰면서까지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중 맏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마태 21,29)고 합니다 큰 아들은 ‘내 생각이 아버지 생각보다 더 낳지만, 아버지가 하라니까 한다.’ 라든가, ‘나는 하고 싶지 않지만, 아버지가 하라니까 한다.’고 생각하고 일하러 갔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30)고 전합니다. 다른 아들은 속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버지가 지시한 것보다 낳다.’ 라든가, ‘아버지의 생각이 옳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 ‘아버지의 생각이 옳은 것 같지만, 그대로 하면 내가 손해 보거나 적어도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아버지의 생각이 옳은 것 같지만, 나는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하고 싶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31)

그러자 사람들이 “맏아들입니다.”(32)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의 이 대화 속에서 저는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둘 가운데 누가 더 잘했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셨는가? 그리고 만일 누가 더 잘 했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어떻게 나올까? 예수님께는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에 답하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의 말은 들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아버지는 누구인가? 예수님에게 있어 아버지는 아들인 우리가 거절해서는 안 되는 분, 아들인 우리가 그분의 말대로 해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들은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은 들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생애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선택 앞에서 어떤 것이 아버지의 말대로 하는 것인지 식별하여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말들 중에 어느 말이 아버지의 말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그 말은 누구를 위해 하는 말인지?’, ‘그 말대로 했을 때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것이 진행과정에서 여러 가지 변수와 함께 변화되어 처음부터 확실히 정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말대로 하면 무엇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면서 추구하는 것인가?’, ‘그 말이 추구하는 바가 현실 가능한 것인가?’, ‘그 말이 추구하는 바가 그 말을 듣는 이에게뿐만 아니라, 그 말을 듣고 행하는 이들과 함께 존재하는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는가?’ 등을 생각하고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나와 함께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좋고 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 말은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아버지의 말이 아니라, 그 말대로 하지 않을 때 편하고 도움이 되는 우리 몇몇의 말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기엔 불편하고, 귀찮고, 어려운 일이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또 그런다고 뭐가 더 잘되느냐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말이 나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취하거나 제3자에게 이득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면 우리는 아버지의 말로 여기고 묵묵히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부르시는 주님과 공동체의 기대와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나에게도 좋은 말은 무엇입니까?

9월 순교성월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오래오래 살고 싶지만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같아지기 위해서는 죽어야만 한다는 사회의 현실 아래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기꺼이 순교를 선택한 순교성인들의 삶이 우리들 안에서도 이어져 우리 교회가 신앙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되기를 기대하고 다짐합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32)

아멘.



연중 제26주일 한가위 미사

2004/09/26

오늘 한 가위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를 기억해 봅시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때--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때--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때--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때-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때-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때-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때-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때 : 여보.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때 :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때 :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조언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성가도 부르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 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 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당산나무 같은 크나큰 이름이다.

또 어머니는 누구인가?

어머니는 누구인가?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떡없는...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 보고 싶으시다고... 외할머니 보고 싶으시다고,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것만 같던...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아!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연중 제26주일

2003/09/28

서울대교구 시노드를 마치며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히브 7,19)

오늘 우리는 지난 3년이 넘게 열정을 쏟았던 교구 시노드를 마칩니다. 2000년 사목교서를 통하여 시노드 개최를 선언한 이래, 2001년 의제 선정 과정에서부터 2003년 5개월 여에 걸친 대의원 회의와 오늘 교서를 발표하기까지 많은 이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분들과 교구민 모두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주님의 축복을 보냅니다.

이 시간들은 참으로 뜻 깊고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풍요로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수도자와 모든 교우들이 주님의 뜻에 충실하면서도 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교회가 되고자 한 마음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우리 교구의 미래를 설계하는 토론에 참여하는 모습은 감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교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교구민이 기도하는 가운데, 시노드 대의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왔습니다. 여기에 우리 교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아졌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설계하였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또 더 나은 교회가 되고자 하는 교구민의 열망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대의원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중한 것이었고, 그것은 커다란 건물을 쌓아 올리는 한 장의 벽돌이었고 한 삽의 모래요, 자갈이고 시멘트였습니다. 어느 것 하나 하찮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모으고 주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참여하는 교회’, ‘함께 하는 교회’라는 하나의 완성된 건물을 짓고자 합니다.

교회는 이제는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성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듯이, 이제는 감각으로 알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를 우리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임무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먼저 말씀의 비추임을 받아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 곧 모든 교우들과 성직자, 수도자가 마음과 힘을 모아 하느님 뜻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할 때 올바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열심히 일하고, 누구는 구경만 하는 그런 자세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모두 참여하고 모두 함께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마태 6,10)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어 당신 죽음의 뜻을 밝혀 주셨고, 성령을 보내시어 그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계속하라고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을 계속하는 일, 그것은 교회에 주어진 보편적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수행하는 일을 교회는 ‘사도직’이라 하고, 교회는 이 사도직을 통하여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는 사명을 수행합니다. 우리 교회의 사도직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교회는 세상과 인류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때로는 이기주의나 향락주의에 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과 허무에 빠져 방황하기도 합니다. 폭력과 증오가 어지럽게 춤을 출 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주장들이 인류가 추구하여야 할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추임을 받아 진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 그리고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사회 정의와 복지의 실현,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모든 시도 등 이 모든 것들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임을 받아 검증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교회의 독선이나 아집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단 하나뿐인 길이십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세상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스스로 복음화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세상에 사는 일부분의 사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 세상의 문화, 곧 세상 자체를 복음화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선교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성직자, 수도자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애정 가득한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줍시다. 우리는 세상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함께 살고 세상 안에 살고자 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맛을 알고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그런 세상으로 변화시키고자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번 우리 교구 시노드에서는 세상의 변화를 위하여 먼저 우리의 성찰과 쇄신을 이루고자 하는 다짐을 담은 주제들과 세상을 향한 주제들을 선정하여 토론하였습니다. 시노드에서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청소년·청년, 선교·신앙 교육, 교회 운영 그리고 사회 복음화를 의제로 선정하고 대의원들의 토론을 거쳐 최종 건의안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그 건의안을 받아들여 우리 교구의 기초와 교우들의 영성을 더욱 튼튼히 다지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우리 교구의 미래를 생각하며 저의 뜻을 이 교서에 담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어떤 것은 바로 시행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아직도 많은 연구와 토론 과정을 거쳐 신중히 결정하여야 할 사안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제안들의 실현이 곧 하느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저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모든 교구민과 함께 순례의 여정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 순례의 여정에 모든 교우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하여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희망을 주셨고, 우리는 그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히브 7,19)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까지 우리 교우들이 교구 시노드에 보여준 관심과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보내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며 하느님과 형제들을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 모두 하나 되어, 시노드를 통하여 밝혀진 우리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꿈은 곧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2003년 9월 28일

우리 나라의 모든 성인과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 진 석 대주교



연중 제26주일

(가해) 마태 21 28-32; 2002/09/29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건져 낸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도자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모세와 홍해바다 그리고 십계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그 모세는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 처음엔 거절했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겠습니까?"(출애 3, 11) 하느님께서 힘이 되어 주겠다고 하셨는데도 그는 또 거절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도무지 말재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고 당신께서 종에게 말씀하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워낙 입이 둔하고 혀가 굳은 사람입니다."(출애 4, 10) 주님께서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11절)시며 그를 꾸짖으셨는데도 그는 "주님, 죄송합니다. 보내실만한 사람이 따로 있을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십시오."(13절)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 잘한다는 그의 사촌형 아론을 붙여까지 주시면서 모세에게 사명을 실현하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하느라고 고독과 불행을 짊어져야 했던 그 위대한 예언자 예레미야도 처음엔 거절했다. "아! 주님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예레 1, 6)

사도 베드로도 엄청난 고기를 잡아주신 예수님의 기적 앞에서 떠나주시길 간청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루가 5, 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10절)라고 하시면서 시몬을 주님의 말씀을 전할 사도 베드로 만드셨다.

많은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이 처음에는 대부분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망설이고 피하려고 했다. 그것은 주님의 부르심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이상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르심의 길은 인간 세상에서 누군가는 걸어야 할 길이고 이루어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께서 직접 부르시니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도 주님께서 부르셨기에 오늘 이 자리에 와 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공동체에 묻는다. 바오로의 이 질문은 우리에게 주님 부르심에 응답하라는 호소이면서 동시에 우리 신앙 생활의 기준이 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필립 2, 1-11)



연중 제26주일

(다해) 루가 16,19-31; 01/09/30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라는 거지는 살면서 고생이란 고생을 다하다가 하늘나라에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라자로를 무시했던 부자는 지옥불 속에서 고통을 당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복음을 읽으면서 과연 나는 그 부자와 어떻게 다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유다인이었기 때문에 매일 때를 맞춰 기도했을 것이고 회당에도 충실히 참석했을 것이다. 그리고 부자가 유산을 받았던지 자기가 벌었던지 간에 십일조를 그대로 다 내지는 않았더라도 적당히 냈을 것이다. 또 율법에 따라 가난한 이들에게 정기적으로 적선도 했을 것이다. 반면에 라자로는 종교활동은커녕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그나마 남의 부잣집 대문간에 들어다 놓아주어야만 얻어먹기라도 하는 거지였다.

그런데도 라자로라는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22절)다. 부자는 이름도 없이 죽어서 땅에 묻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다. 부자는 이른바 "살아 있는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25절)었기 때문이다.

부자가 언제 라자로에게 고통을 안겨 준 적이 있던가? 아니 라자로더러 불행을 겪으라고 말한 적이라도 있는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고통을 겪는 이들의 이웃에게 그 고통의 책임을 묻고 있다.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 충실히 일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자기 가정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 삶을 누리는 것에 불과하다. 즉 자기가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 생애를 통해 나쁜 짓 안하고 성실히 일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 생애 외에도 하느님께서 똑같이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 이웃의 생애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모스 예언자는 말한다. "저주받아라! 상아 침상에서 뒹굴고 보료 위에서 기지개를 켜며, 양 떼 가운데서 양 새끼를 골라잡아 먹고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잡아먹는 것들, 몸에는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술은 대접으로 퍼 마시며, 요셉 가문이 망하는 것쯤 아랑곳도하지 않는 것들."(아모 6,1ㄱ.4.6)

우리가 떵떵거리고 살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삶 속에서 우리 보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 어느 누구 하나와 구체적으로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라자로를 모른 체하는 부자와 다를 바 없다. 우리 인류가 서로 함께하기 위해서는 발전과 풍요를 어느 정도 포기하고 나누어야만 한다.



연중 제26주일(공항동 성당 주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2000/10/01

오늘 우리는 우리 공항동 성당의 주보이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기념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 하면 우리에게 '가난'이라는 단어가 연상된다. 프란치스코 성인님은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자기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걸하여 해결함으로써 자신은 가난한 이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 6-7)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이렇게 주님의 뒤를 이어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을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사도 4, 32; 2, 44-45 참조) 이들은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서로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을 선택했다는 것은 물질을 버리고 사람을 선택했다는 것이며 아울러 주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다.

그런가 하면 생활환경이나 박해에 의해 가난하게 된 사람들도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난한 과부처럼 자비심을 잊어버리지 않고(마르 12, 41-44)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히브 10, 34) 역경을 기쁜 마음으로 참아 받으면 하느님 나라에서 행복한 자가 된다. 또 가난한 처지에서 도움을 주려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도 커다란 사랑이 된다. 사랑은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내주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건을 가진 사람은 물건을 주고, 사랑을 가진 사람은 사랑을 주는 나눔이다.

그러나 오늘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는 사람은 필요한 것을 얻어야 한다. 그런 가난 아니 빈곤은 빨리 없어져야 하고, 주님께서는 빈곤한 사람에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사랑을 나누도록 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1요한 3, 17)

사랑을 주고받는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된다. 가난한 상황이 벌어질 때 우리는 서로 나누게 되고, 그러한 나눔을 통해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 오시고 진정 주님의 공동체가 발생하는 것이다.



연중 제26주일

(가해) 마태 21,28-32; 99/09/26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에 교회 내에 새로운 시각이 하나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이웃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라는 시각과 또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살도록 보내주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너의 좋은 점을 안단다"는 시각이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필립 2, 1) 실제로 우리 삶에 신앙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신앙이 나를 버팅겨주고 있습니까? 특별히 어렵고 힘들 때 주님께 대한 내 믿음이 나를 지탱시켜 주고 있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필립 2, 1)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성당에 안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이 있습니까? 성당에서 일하면서 서로 등진 사람이 있습니까? 서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부족한 면을 채워주시며 사십니까?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필립 2, 2) 그래서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필립 2, 3-4)

성당에 나오기는 하는데, 신자가 되기는 했는데 우리가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예수님의 말씀을 아는 것에 그치고 남에게 지키라고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면 예수님의 말씀도 하느님 나라도 우리가 바라는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몸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세상더러 변하라고 변하라고 외치고, 예수님을 믿으면 천당 가고 하느님 나라가 좋다고 아무리 외쳐도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세상은 변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웃을 것입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내가 변해야 내가 변한 만큼 세상이 변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자 세리와 창녀들은 뉘우치고 믿어서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 나라의 초석으로 봉헌합시다.



연중 제26주일

(다해) 루가 16,19-31: 98/09/27

우리는 많이 가지고 편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면 지금의 어려운 것은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지상에서 떵떵거리고 살던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고,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로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던 부자가 아브라함 품안의 거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참 후회스러웠겠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살아 생전에 잘했을 텐데. 그런데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부자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이기주의 속에 갇혀 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안녕과 행복만을 추구하던 부자는 죽어서 그꼴을 겪고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할아버지,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루가 16,27) 끝까지 자기가 살기 위해 라자로와 아브라함 할아버지를 이용하고 시키려고만 합니다.

주님은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루가 12,48ㄴ)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부자청년에게는 "너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될 것이다."(루가 17,2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쓸쓸히 떠나는 그를 보시고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17,24ㄴ-2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얻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적게 가졌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나마 가진 것을 헛되이 쓰지 않도록 절제하는 한편 가진 것을 움켜잡고만 있어서 마음이 썩지 않도록 늘 깨어있으십시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여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으신 주님께서 우리처럼 배고프고 졸립고 먹어야만 사는 인간조건을 가지고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모든 능력과 힘을 다 바쳐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셨고, 가난해지심으로써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도다."(2고린 8,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서로 하나가 되고 사람 하나를 구하는데 노력하셔서 여러분 자신을 구하고 주님의 뒤를 따르십시오.



연중 제26주일

(나해) 마르 9,38-43.45.47-48 : 97/09/28

우리 말에 '내유외강'(內柔外剛) 이라는 말이 있다. 밖으론 부드럽고 내적으로 강하라는 이 말은 이웃에겐 너그럽고 관용으로 대하고 자기 자신에겐 엄격하리만큼 충실하라는 말이겠다. 어떻게 하면 나를 알리고 내 이익을 챙길 수 있을까(?) 눈을 부릅뜨고 살피는 지금 시대에 뒤떨어진 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엉뚱한 소리를 하신다. 제자 중의 "요한이 예수께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하고 말하"(마르 9,38)자 "예수께서는 '말리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그리고 너희는 다른 이에게 죄를 짓게도 하지 말고, 너희 자신이 죄를 짓게 하는 유혹거리를 아예 없애 버리라고 하신다. 심지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차라리 손발을 가지고 죄를 짓는 것보다 낫다고 까지 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우리 각자의 이해관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뜻 안에서 보아야 하겠다. "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 차라리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이 백성에게 주시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민수 11,29)

이를 구체적인 우리의 삶고 일상에서 찾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따로 따로 만드셨다. 우리 중에 똑같은 이는 없다. 쌍둥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이름은 다르리만큼 구별되도록 하셨다. 그리고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나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소질을 주셨다. 그러므로 내가 내 소질을 발견하고 성숙시킬 수 있다면 다른 이의 소질이 부럽지 않을 수 있겠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장점을 내가 만족하고 그것을 개발하면 그것이 바로 내 힘이 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힘을 기르면, 이웃들을 인정하게 되고 존중하게 되며 하느님께 이렇게 우리를 서로 다르게 그러면서도 함께 모여서 완성을 이루도록 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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