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일 군인주일

(다해)루카 17,5-10; 16/10/02

1989년 10월 1일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에서 발행한 ‘교구 사제 사목 지침’ 제25항을 보면, “모든 사제는 교황과 지역 주교가 발표한 문헌들을 반드시 구하여 그 내용을 연구하고 이를 신자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라고 명하고 있고, 2003년 12월 29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표한 ‘사제 사목 생활에 관한 규범’ 13항을 보면, “사제는 교황과 지역 주교가 발표한 문헌들의 내용을 숙지하고 신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도록 한다.” 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침들에 따라 저는 주임사제로서 여러분께 교황님과 교황청 문헌 및 주교님들과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 문헌들을 기회가 될 때마다 자주 전한다는 것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제49회 군인 주일을 맞아 한국천주교회 군종교구장님이신 유수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님의 ‘군인 주일 담화문’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1요한 4,7)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49회 군인 주일을 맞이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전?후방 각지에서 조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국군 장병들과 군종사제들, 군종교구민들과 이들의 사목을 위해 기도와 후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여러분께 감사와 사랑의 인사를 드립니다.

북한은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 등을 통해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국제사회의 불안감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북한의 이러한 위협과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과 러시아의 견제, 일본의 군비 증강 등 내외적으로 복잡한 외교 문제가 공존하는 가운데 오늘날에도 묵묵히 맡은바 위치에서 국방의 의무에 충실한 국군장병들과 이들을 돌보는 군종사제들이 있습니다. 군종교구는 군선교 65주년을 맞이하여 “축복의 형제애”라는 사목 목표 아래, 이웃사랑과 형제애의 실천을 위해 일치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 당신께서 외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서 이 세상에 보내 주신 데서 드러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바오로 사도는 믿음, 희망, 사랑 세 가지 중심이 되는 덕을 말하여 그 중의 으뜸은 사랑이라고 설명합니다. 형제애야말로 모든 덕의 으뜸으로 두고 있음을 봅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지난 7월 25일 프랑스 루앙 인근 생테티엔 뒤 루브레 성당에서 자카 아멜 신부가 미사 중 살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테러 발생 다음날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봉헌하고 나온 파리 시민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중 한 구절인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이라는 구절을 담은 현수막을 들고 사랑과 평화를 염원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방세계가 IS에 대한 분노를 이슬람 전체로 돌리려는 여론을 우려하며 “소수의 극단주의자는 가톨릭을 포함해 모든 종교에 다 있다. 이슬람을 폭력적인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발언하였습니다. 교황의 이 발언은 극단주의자들의 증오 범죄를 똑같은 증오와 복수로 대응하는 건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과 같음을 의미하고 강경 대응은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것이기에 평화적이고 복음적인 해결을 원하셨습니다. 아울러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교회가 테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누구에 대항해 고함치거나 싸우고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다. 미움을 통해 미움을, 폭력을 통해 폭력을, 테러를 통해 테러를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전쟁 중인 세상에 대한 우리의 답은 한 가지다. 형제애, 형제적 사랑 그것뿐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군에 입대하는 장병들은 불안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군에 들어오게 됩니다. 계급구조 속에서의 임무 부여와 지시, 개인적인 고충과 선임과 후임들의 관계 안에서 적응하며 국방의 의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삭막하게 느낄 수 있는 군대 안에서 이들에게 힘을 주고 희망의 역할을 하는 곳이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미사에 참례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곳에는 군종사제가 방문하여 형제애를 실천합니다. 또한, 군가족들은 성당에 오는 병사들을 위해 시간과 희생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예수님 사랑의 계명을 몸소 보여줍니다. 병사들이 입대하며 어렵고 길게 느껴지는 군생활의 새로운 활력과 윤활유의 역할을 군복음화에 투신하는 군종사제들과 군종교구민들이 앞장서며 형제애를 체험하게 합니다.

형제애는 인간 완성의 길이자 개인, 사회, 국가 세계 평화의 길이요 복음전파의 지극히 효과적인 길이며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형제애를 보이시면서 축복애로 초대하십니다. 우리 군종교구는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선교와 복음전파에 충실하며 65주년을 넘어 새로운 군선교의 장(場)을 열어 갈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고 내일의 창조적인 꿈과 희망을 심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단의 상황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아파하면서도 군종교구는 2016년을 “축복의 형제애”로 정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사랑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이 사랑의 마음이 군종교구를 내적으로 변화시켜 복음적인 삶을 살게 하며,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투신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군선교 65주년과 제49회 군인 주일을 맞아 이 시간에도 묵묵히 주어진 소명에 최선을 다하는 전?후방 각지의 국군 장병들, 그리고 군종사제와 수도자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형제?자매 여러분께 겸손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보여주신 그동안의 기도와 격려에 감사드리며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2016년 10월 2일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




연중 제27주일

(나해) 마르 10,1-12; 15/10/04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어떤 것을 기대하고 삽니까?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이 아이가 장차 커서 무엇이 되기를 기대합니까? 어떤 사람이 되기를 기대합니까? 자기 한 몸 노력해서 여러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공공사업의 봉사자들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또는 세세 대대에 길이 이름을 남길만한 업적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상가나 예술가, 문화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앉아 여러 사람을 호령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결혼할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 배우자가 가진 것보다 앞으로 가질 수 있을 것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결혼하자고도 합니다. 자기 부모에게 돈 얻어 와서 결혼할 사람이 혹여 미래에 자신들이 어려워졌을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입신양명한 사람들이 과연 행복하고 평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인간의 네 가지 욕구인 신체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 욕구 가운데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삶의 질이 낮아지고 그 공허가 당신의 활력과 관심을 삼켜 버리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 행태 심리학자인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1943년 ‘인간의 동기와 성격’이라는 책에서 다섯 가지의 단계적 욕구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 욕구의 첫 단계는 ‘생리적 욕구’로 먹고 마시고 자고 입고하는 생존 욕구의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안전 욕구’로 신체적 감정적 불안으로부터 보호되고 안전하게 살기를 바라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소속감과 애정 욕구’로 동료와 친교를 나누기 위해 집단을 만들거나 집단에 소속되기를 바라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는 ‘존경 욕구’로 내적인 자존 자율을 성취하여 다른 동료 구성원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단계입니다. 다섯 번째는 ‘자아실현욕구’로 자신을 계발하고 발전시켜 자신의 능력과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자아를 완성시키려고 하는 단계라고 합니다.

2002년 폴 R. 로렌스와 니틴 노리아는 ‘욕구: 인간의 본능, 어떻게 선택을 이끄나’라는 책에서 인간의 ‘네 가지 욕구’를 발표합니다. 그 첫 번째는 ‘성취 욕구’ 즉, 사회적 지위와 같은 무형의 가치 등 희소한 것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결속 욕구’ 즉, 개인이나 집단과 유대를 맺는 것, 셋째는 ‘이해’ 즉,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주변 사물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며, 넷째는 ‘방어’ 즉, 외부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최근의 어떤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소중한 욕구를 ‘삶’과 ‘사랑’과 ‘배움’과 ‘유산’ 등 네 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삶의 욕구는 의식주와 경제적 풍요, 건강 같은 신체적 욕구이며, 사랑의 욕구는 인간관계를 맺고 소속감을 갖으며 사랑을 주고받으려고 하는 사회적 욕구, 배움의 욕구는 발전하고 성장하려고 하는 정신적 욕구이고, 유산의 욕구는 의미와 목적, 개인적 적합성을 가지고 공헌하려고 하는 영적 욕구라고 밝히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며 갈구하고 꿈꾸는 욕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우자에게 무엇을 기대하며 삽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배우자가 지금 이 시기에 최우선적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우자와 함께 한 평생을 살면서 무엇을 함께 이루고자 합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우자와 여러분의 가족과 함께 이 사회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습니까?

앞으로 10년, 20년 후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누구와 함께 살고 있으리라고 예상합니까?

지금의 배우자와 함께 있겠습니까?

그날 오늘을 되돌아 보면서 배우자와 가정 그리고 이웃 친지들과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앞에서, 여러분이 오늘 선택한 결정과 하고 있는 일과 사정 때문에 뿌듯하고 자랑스러워하며 반갑게 맞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며 회피하시겠습니까?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인생이 기쁨과 보람이겠습니까? 아니면, 슬픔과 수치겠습니까?

단순히 동물적 본능의 먹고 사는 삶. 인간적, 인격적 생존 단계에서 부부관계와 가정생활, 사회생활을 통해 인류 사회를 구성하고 발전 향상시키며 사는 삶. 한 걸음 더 나아가 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인류 구원을 위한 자기 희생을 통해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는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기반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로 합시다.

당장 눈 앞에 닥친 결혼과 이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취업과 실직 등의 각박하고 긴박한 전쟁 같은 삶만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지금 당장 피부로 다가오는 정치적 경제적 긴장과 갈등의 현실 외에도 우리 인간 삶에는 다른 많은 요소들과 가치들이 엄존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통합적이며 다각적인 삶의 부분과 순간들을 꾸며봅시다.

눈에 보이는 생활 너머에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 그것도 우리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 예수님의 힘과 이끄심으로 마침내 인간 성취와 완성과 구원이라는 목표가 마침내 이 땅에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과 그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희망으로 살아갑시다.

믿음과 희망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희생과 봉사로 부부와 가정과 사회와 인류와 자연을 향해 기여하며 살아갑시다. 서로를 향한 신뢰와 서로 함께 힘을 모아 일치를 이루리라는 희망과 서로의 사랑에서 피어나는 희생 봉사로 헌신합시다. 그럼으로써 주 그리스도 예수님으로부터 거룩한 삶을 살라고 부름을 받고 그에 응답하여 주님을 따라 주님의 힘으로 온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부부가 됩시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 10,8)



연중 제27주일 제47회 군인 주일 담화

(가해) 마태 22,1-14; 14/10/12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47회 군인주일을 맞이하여 군의 복음화를 위해 수고하는 군종사제들과 함께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한결같은 사랑으로 국군 장병들과 군종교구를 위해 기도와 도움을 주신 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14년은 우리에게 슬픔과 기쁨이 함께 하는 해입니다. 세월호와 전후방 각지에서 발생한 장병들의 사고는 많은 국민과 아들을 군에 보낸 부모님과 군대에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 반면, 교황님의 방문과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은 우리 사회에 희망과 용기와 그리고 삶의 참된 길을 알려주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이런 슬픔과 기쁨의 해를 보내며 군종교구장으로서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라는 군종교구 사목표어를 묵상하고 한국교회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전후방 각지에서 만나는 장병들을 보고 있으면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납니다(창세 12,4ㄱ). 이 여정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 인간적인 안정감을 모두 버리고 막연한 미래를 향해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순례의 길을 떠났지만, 아브라함의 삶은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이는 비극(창세 12,10-20,20)도, 조카 롯과 분쟁으로 가족 간에 갈라서야 하는 이별(창세 13,9)도 경험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의 징표였던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봉헌하는 일도 생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런 시련과 고통을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넘기고, 축복의 근원이 됩니다.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우리 청년들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인간적 안정감을 주던 모든 것을 버리고, 막연한 장소인 군대로 입대합니다.

예수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을 끊었다면 군대는, 아직까지 가지고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탯줄을 끊고 자립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립은 관계의 단절과 결핍 때문에 고독과 두려움과 공허함을 느끼게 합니다(복음의 기쁨 87항). 또한 GP, GOP, NLL 등을 지키는 긴장된 임무와 레바논과 남수단, 필리핀, 소말리아와 같은 먼 거리 장시간의 파병, 잦은 인사이동에 장병들은 고독과 격리를 체험하게 됩니다(정의와 평화의 봉사자 315항). 이 단절과 결핍을 매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마르지 않는 샘물을 갈망하던 사마리아 여인처럼, 장병들은 자신들이 처해있는 어려움과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비어있는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종교를 찾고,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애덕의 교회 -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교회는 이렇게 종교를 찾고, 하느님을 찾는 장병들에게 애덕을 통해 선교 사업을 합니다. 애덕은 복음 선교의 언어이자 내용이고, 복음의 핵심적 활동입니다. 실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고, “애덕을 보면 삼위일체를 보는 것”입니다(정의와 평화의 봉사자 334항).

그래서 군종교구는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라는 사목목표를 세우고 사랑으로 장병들에게 다가서고, 사랑으로 장병들의 육적, 영적인 공허함을 채워주고, 교회 본연의 모습인 친교의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군 성당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친교의 현장입니다. 두서너 가정이 200~300명 되는 장병을 돌보기도 하고, 가족이 없는 곳은 군종신부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는 대대와 연대 장병들을 위해 종일 운전하며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소속부대 지역 전체를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지친 몸을 이끌고 야간에 근무하는 장병을 위해 위문을 다닙니다. 때로는 이런 노력이 장병들 안에서 눈으로 보이는 결실로 이어지지 않을 때 인간적인 실망과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생깁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실망과 포기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하느님께 돌아오는 장병의 모습에서, 힘든 가운데 사랑을 실천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군종 신부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시며 꼬깃꼬깃 넣어두었던 쌈지 돈을 손에 쥐어 주시는 어르신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며 격려를 받습니다.

요즈음 군대에 불미스럽고 안타까운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몇몇 분들은 군대에 많은 실망과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이 사건들은 군의 시스템 문제만이 아닌 인성교육이 무너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살펴볼 기회입니다. 이런 어려운 여건 안에서 복음을 살아가려는 장병들을 위해, 그리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함께 하고 있는 군종신부들을 위해 군종교구민과 한국교회 모든 신자분들의 더욱 많은 기도와 도움이 요청되는 시기입니다.

복음의 기쁨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교 열정을 빼앗기지 않도록 도와주십시다.”

2014년 10월 5일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F.하비에르) 주교



연중 제27주일

(다해) 루카 17,5-10; 13/10/06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이며 전교의 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0년에 발표한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교 교령의 정신을 이어받아 “복음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자문하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도 비그리스도인에게 선교하는 것이 타당한가? 여러 종교 간의 대화가 선교를 대신하지 않는가? 인간적 발전이 교회 사명의 목적이 아닌가? 인간의 양심과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모든 개종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어떤 종교를 통하여도 구원될 수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선교할 필요가 있는가?”(교회의 선교 사명 4항)

우리가 선교하는 이유는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함이며,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 함께 구원받기 위해서 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 항로에서 겪게 되는 모든 번뇌와 격정 그리고 그에 따른 고통을 씻어주시고,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고 그 기쁨에 참여하자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우리가 우리 교회를 하느님 사랑의 자리요 구원의 표징으로 여길 때, 우리가 기쁠 뿐만 아니라 우리 친지들을 기꺼이 교회에 데려오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를 해야 할 우리 자신이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전혀 기쁘고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친지들을 교회에 데려오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사랑과 평화를 느끼게 해줄 수 없습니다. 내 스스로 주님을 찾고, 자신의 삶에 닥친 문제를 주님 안에서 해결하려고 주님께 갈망할 때 주님의 위로를 받게 되며, 기도 중에 얻은 주님의 말씀과 뜻을 실행해 나갈 때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기쁘고 평안하게 살고 있다면,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우리가 오라고 하기 전에 우리 교회를 찾을 것이고,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 교회에서 구원의 표지를 발견하고자 할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삼성동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십니까?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삼성동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해 있어 기쁘고 행복합니까?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삼성동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다니면, 구원될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사는 현세상은 유한하고 불완전하기에, 이 삼성동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지상 교회에서 완전한 체험과 확신을 가져다 줄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니는 이 삼성동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고 계시다는 믿음과 주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를 온전히 구원해 주시리라는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애착과 헌신 그리고 형제들에 대한 희생과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드러낼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든 순간 모든 면이 다 구원의 표지가 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주 예수님의 이끄심과 보호하심 덕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나도 살고 너도 초대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요즘 우리 교회의 현실은 예비신자를 교육하여 세례를 받게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쉬는 교우’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왜 쉬는 교우들이 생겨납니까? 왜 그리스도의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교회에서 쉬는 교우들이 발생합니까? 교리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쉬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생명의 귀중함과 혼인, 정의, 평화 및 사회교리 등을 부담스러워하거나, 교회가 존재하고 이루어야만 하는 보편적인 구원 사명과 자신이 원하는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다르거나 충돌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사랑과 위로 그리고 희망과 구원을 발견하지 못해서 떠납니다. 어떤 때는 교회 공동체에 섭섭함과 상처를 가지고 떠나기까지 합니다.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진리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느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교회에 희망과 비전보다는 실망과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교리는 맞지만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교리에 담겨진 하느님 사랑을 자신의 일상에서 살지 못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비신자들을 권면함과 동시에 쉬는 교우들을 회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가 싫어서 떠난 분들에게 우리가 다가가서 단순히 교회 공동체에 다시 나오라는 말을 하면, 그분들이 좋아할까 싶습니다. 우리는 교회 신자들의 수를 늘리거나 교회 조직을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예비신자들을 권면하고 쉬는 교우들을 회두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활동하는 예비신자들과 쉬는 교우들에게 우리 인류를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시며 구원에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기쁜지 알리고자 하는 것이며, 그 길에 접어듦으로써 구원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겨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올 전교주일 강론에서 “교회의 선교 정신은 개종 권유가 아니라 선의 길을 밝혀 주는 삶의 증언에 있습니다. 이는 희망과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구호 단체나 기업이나 비정부 기구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으로 활력을 얻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놀라운 만남을 체험하였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깊은 기쁨의 경험, 곧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구원의 메시지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길에서 교회를 이끄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친지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의 구원을 위한 우리의 헌신은 우리가 구원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베풀면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면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샘솟고 자리잡게 됩니다.

밤새 일했어도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왔던 베드로와 그 동료들이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져 큰 기적을 얻었던 체험을 기대하며,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예비신자 선교와 쉬는 교우 회두의 방법을 버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합시다.

예비신자들과 쉬는 교우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구원의 길과 평화와 행복을 위한 현세의 길을 기원하고 안내하며, 그분들을 위해 영성체를 하고, 그분들의 이름으로 희생하고, 그분들의 구원과 현세적인 평화와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주님께서 몸소 이루어주시기를 간구하며 이번 10월 전교의 달과 묵주기도 성월에 예비신자 선교와 쉬는 교우 회두를 위해 헌신합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연중 제27주일

(나해) 마르 10,2-16: 2012/10/07

추석 잘 세셨습니까? 오랫 만에 가족과 친지들과 좋은 시간을 가지셨는지요?

요즘 안팎으로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다는 소리가 많이 들립니다. 실업의 장기화와 선뜻 풀리지 않는 경제상황 그리고 그에 따른 불안정한 생계 수입 등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정을 위협하는 외적인 요인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가족끼리 똘똘 뭉쳐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가족의 일치를 위협하고 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족의 일치와 화목의 끈이 인격적인 만남과 사랑이 아니라 인간 삶의 외적 조건으로 맺어졌을 때 가져올 수 있는 위험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는 가장의 충실성과 성실성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무시하고 관계성과 수완에 더 점수를 얹어주며, 보장되지 않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 늘 주위와 세상의 변화를 살펴보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가정 내에서도 배우자 상호간의 헌신과 사랑에서 생겨나는 인정과 존중 및 신뢰보다는 자기 우위와 자기중심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자기투사와 자기이상에 따른 요구로 불평과 불만, 무시와 불신이 가정의 화목을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배우자의 방탕과 불륜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며, 시댁과 친가 사이에서 고민하고, 남편의 권위로 대표되는 어른이자 가장으로서 지켜야 할 삼강오륜 등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도덕적인 덕목이 무한경쟁과 결과중심의 현대 세계에서 무능력으로 몰려 지아비를 바라보는 지어미의 마음을 한층 더 무겁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취학과 면학 및 진학 등과 수업을 마치고 사회에 첫 출발을 해야 하는 젊은이들의 처지가 가정의 우환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들어 점점 심해지는 실업의 상황이 점점 더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직장인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직업 훈련을 받는 것도 아닌 니트족이 90년대 중반 50만 명에서 2012년 현재는 13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특히 대졸 이상 고학력 니트족이 8배나 늘었다고 합니다. 꿈을 펼치려고 해도 꿈을 펼칠 기회가 없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고 해도 그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으니, 그로 인한 부작용은 차지하더라도, 우리의 다음 세대가 불안과 상실, 눈물의 순간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어둡고 아픈 사실이 우리를 씁쓸하게 하고, 이렇게 취업과 결혼과 출산마저 포기해야만 하는 젊은이들의 처지가 우리의 가정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산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산이 있어 산에 간다."고 합니다. 내가 배우자를 선택했다고도 하지만 내가 선택할 배우자가 먼저 있었고 또 내 눈에 띄었다는 면에서 볼 때, 내 눈에 띄게 한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배우자를 점지해 주셨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좋아서 결혼까지 이르렀지만, 살다 보니 서로 안 맞는 것들이 너무 많아 서로를 맞추어 가는 과정이 마찰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신혼 초에는 사랑에 눈이 멀고, 자식 자라는 데 신경 쓰느라 그냥 참고 넘어왔지만, 자식 농사 다 지었으니 더 이상 눈치 안보고 이제 자기 삶을 살겠다는 노년의 이혼이 최근 들어 더욱 급증하고 있습니다. 한 평생 선물이어야 할 배우자와 가족이 노년에 짐이요 멍에가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이 날이 갈수록 화목해지고 의지가지가 되지 못하고, 싫증나고 멍에로 여겨저 벗어버리고 싶게까지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오로 사도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4-25) 라고 말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런 저런 일이 수없이 생겨나는 세상에서 "둘이 한 몸이 되는 것"(마르 10,8; 창세 2,24)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혼하기 위해 결혼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결혼은 해도 손해고 안 해도 손해라면서, 결혼하는 날부터 지옥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결혼생활이 지옥만 있고 행복은 없습니까? 행복은 욕망 분의 성취도라고 합니다. 결혼생활에서 오는 행복을 얻으려면 자신의 욕망을 줄이거나 서로간의 노력을 기울여 부부간의 애정과 일치라는 성취도를 늘려 행복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쩌면 배우자의 기여도보다 배우자의 존재자체에 더 큰 평가와 기대를 두어야 할지 모릅니다.

한 이불 속에 살면서 상대를 존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존경은 못하더라도 존중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함께 살려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쪽이 희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 두 번이 아닌 희생을 계속 한 쪽으로 강요한다면 그 상대가 병이 나거나 폭발하여 대들거나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 다소 일이 늦어지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맞춰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맞추기 위해서 함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맞춰야만 부부가 하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탓하지 말고, 자신의 애초 선택과 결혼서약에 충실해야겠습니다.

한 평생 배우자에게 자신의 바램과 기대를 맞춰 달라고 기대하고 요구할 때, 그 상대 배우자가 자신의 바램과 기대를 채워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기대하는 이나 기대를 받는 이나 부담스럽게 되고, 결국 채워주지 못하게 되면 불만과 실망이 쌓이게 되고 급기야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 반대로 자신이 배우자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어떻게 상대 배우자에게 없는 점과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노력한다면 평생 감사할 수 있을 것이고 배우자로 인생을 함께해 주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도 커다란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부부와 가족 간의 사랑에서 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며, 서로를 위해 희생하며 헌신하는 사랑으로 가정이 세워지고 유지됩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가족을,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어머니를 성모님으로, 자녀들을 어린 예수로 섬기고 믿음으로 지지합시다. 그러한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을 어여삐 보시고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은총이 우리 가정에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맺어지고 지켜지며, 주님의 사랑으로 화목하고 평안하며, 주님의 은총으로 하나되고 번성하여 성가정을 이루도록 합시다.

우리를 맺어주시고 평안하게 해주시고 번성케 해주시는 주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우리 가정에 내려주신 주님의 뜻을 찾고 또 그 뜻을 이룹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가정으로서 나의 가정뿐 아니라 어려운 형편에 처한 가정들도 잘 돌보도록 합시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8)



연중 제27주일 제38회 군인주일 담화문

2005/10/02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38회 군인주일을 맞이하여 그 동안 한결같은 사랑으로 군 사목을 위하여 기도와 도움을 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군인주일인 오늘은 조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국군 장병들을 기억하며 또 이들을 돌보고 있는 군종사제들의 사목활동을 위해 아낌없는 기도와 후원을 보내는 날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광복 60주년과 대한민국 국군

올해는 우리 나라가 광복을 맞은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강제 체결된 이른바‘을사조약’으로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은 8.15 광복을 통해 암울한 질곡의 역사를 끝내고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일제 식민지시대, 주권상실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며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설치한 국가조직이 군(軍)이었습니다. 즉,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우리의 국군(國軍)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군이 채 정비가 되기도 전에 좌우 이념논쟁 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고 당시 변천하는 동서 냉전 체제의 굴레를 피할 수 없어 쓰라린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을 겪게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건군 초기에 민족 최대의 국난인 6.25 전쟁을 맞게 되었지만, 8.15 광복 정신에 확고한 건군이념을 갖고 있던 국군이 있었기에 이 땅의 자유와 평화는 흔들림이 없이 지켜졌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우선 북핵 문제와 6자회담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고 안보를 배경으로 한 한미관계에 있어서도 국민들의 태도는 극단적인 대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정치권에서 보여주는 혼란스럽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정책수립과 그 대처에 우리는 불안함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여기에 국론통일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광복 60주년을 맞이한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민족공조’와 ‘외세배척’ 그리고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은 지난 광복 직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연해 있는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 분열과 갈등,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소비 향락 산업의 극치와 개인주의 팽배 등은 오늘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지난날 이 땅의 우리의 선배들이 치른 희생과 설움을 망각한 듯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국민의 성원 속에 ‘새로운 軍’을 만들어 나가야…!

이러한 사회, 정치적 혼란 속에서 우리 군은 최전방 소초(GP)에서 총기 난사 사고, 해군 제초제 사건 그리고 공군 전투기 추락 등 연이은 사고로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이로 인해 지금 사회가 갖는 군에 대한 인식은 참으로 어둡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서울 지역 대학생 중 46%가 필요하면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답했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45.5%가 군에 지원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예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신세대 젊은이들의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곳이 군이며 그래서 그 어떠한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불안함을 안고 있는 곳이 바로 군이기에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물론 요즈음 군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고들을 통해 그 누구보다도 군 스스로가 새로워지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겸허한 반성과 채찍질을 가해 병영 문화를 혁신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강한 군인을 만들고 새로운 군을 만들기 위해 이제는 국민들도 좀더 군에 대해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군복무를 앞둔 젊은이들의 군복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모든 국민들이 군을 격려하고 포용하며 사기를 북돋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군은 사기를 먹고 사는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7월26일 오전 훈련 중이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대 장병들이 급류에 휩쓸린 전우를 구하기 위해 강에 뛰어들었다가 4명이 익사하였습니다. 이들 장병들의 살신성인이 온 국민을 안타깝게 했고 이들의 남다른 군인정신에 감탄했었습니다. 또한 8월 5일 창설 56년 만에 해병 1000기를 배출한 우리 나라 해병대는 미해병대가 부러워할 만큼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원입대의 관문을 뚫으려면 3대1정도는 기본이고, 대학 재학생이 제대와 복학을 맞추기 유리한 시기에는 최대 10대1까지 높아진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우리 군은 이라크 자이툰 부대와 아프가니스탄 등 여러 곳에 파견된 평화유지군의 활동에서 보듯이 세계 선진국 군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음은 물론 파병국 국민들로부터 더 큰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으로 가난한사람들!”(마태 5,3)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광복 60돌과 서른 여덟 번째 군인주일을 지내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군에 대한 따듯한 격려와 사랑 가득 찬 기도를 여러분들과 함께 바치고 싶습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국방, 튼튼한 국방’이라는 인식아래 제2의 건군을 위해 진력하는 우리 군을 위해 기도합시다.

특별히 군인들을 위한 기도 중에 지난 봄 선종(善終)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생각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재임기간 중 군인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군인들을 “평화에 대한 봉사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돌아가시기 직전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들도 행복하십시오.”라고 마지막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이 ‘행복’에 대한 메시지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우리 군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입니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처음으로 집을 떠나 군이라는 낯선 환경과 제도 아래서 생활하는 군인들은 참으로 외롭습니다. 군복무를 수행하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어쩌면 병영은 오지이며 소초(GP)는 무인도입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룩하는사람들!”(마태 5,9)

그렇습니다. 군인들은 비록 ‘마음은 가난하지만 또한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이기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상행복’의 참된 수혜자입니다. 오늘도 전후방 각지에서 묵묵히 자기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에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행복’을 전달하기 위해 군종교구 내의 모든 사제들과 교구민들은 모두가 하나 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 군인들의 마음이 가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군종 사제들은 더 열심히 사목하며 그들 곁에 있을 것입니다. 개신교나 불교에 비해 군 사목을 위한 성직자들이 부족하고 재정적으로도 너무나 열악하지만 “평화에 대한 봉사자”로서 군인들이 얻게 될 참된 천상행복을 군 사목 현장에서 이루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른 여덟 번째를 맞는 군인주일에 군 사목에 전념하는 저희들이 군인들을 위한 천상행복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오늘 군인주일에 여러분들이 주시는 기도와 관심, 특별히 재정적인 지원은 군인들은 물론 이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군종 사제들에게 힘이고, 그들 안에 천상행복이 실현되는 하늘나라 건설에 큰 밑바탕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도와 격려를 부탁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언제나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5년 10월2일

천주교 군종교구장 이 기 헌(베드로) 주교



연중 제27주일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2004년 전교의 달 담화문

선교활동은 교회의 유지와 성장을 위한 원동력이다

2004/10/03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0월은 전교의 달입니다. 전교의 달은 하느님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를 본받아 교회가 수행하는 선교의 의미를 되새기며, 교회의 온 구성원이 선교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권고하는 기간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냥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피와 땀과 노력이 동반된 선교활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목숨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도들의 선교를 통해 곳곳에 세워진 교회는 또한 그 후계자들인 주교들을 중심으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신도들의 열성적 선교활동을 통해 지속되고 발전되며 유지되어 왔습니다. 세상에 세워진 어떤 교회도 선교활동이 없이 자연적으로 세워진 교회는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활동은 교회를 유지하고 지속시킬 뿐 아니라, 교회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선교활동은 교회 내의 일부 구성원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구원 메시지를 사명과 긍지를 가지고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메시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에 대한 자긍심과 소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기쁨과 소신이 없다면, 예수님과 교회를 사랑할 수 없으며, 영적인 빈곤 상태에 빠져 다른 곳에서 그 공허감을 채우려 할 것입니다.

최근 우리 교회 신도들이 요즈음 불고 있는 새로운 사상들에 호기심과 기대감을 갖고 방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뉴에이지 사상, 신과학 운동, 단학, 참선 또는 타종교의 수행을 찾아다니며 영적 갈증을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은 우리 신도들이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깊이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 없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좋은 전통과 사상을 이해하거나 맛보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전하려는 열정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풍부하게 있는 영적 보물을 찾지 않고 왜 다른 것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합니까? 우리는 예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태 16, 15)라고 물으시는 것에 대해, 사도 베드로의 고백처럼,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 16),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요한 6, 68-69) 라는 신앙고백에 동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엔 2000년 역사 안에서 형성되어 온 영적 전통들과 구원의 방법들, 그리고 삶을 의미 있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원천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전통과 구원의 방법들은 교회가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하고 도전해 온 많은 영적 이단들에 대처하고 교회 공동체 다수의 동의와 체험 안에서 확립한 교회의 보물들입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 때에 많은 이단들이 발생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영지주의, 몬타니즘, 그리고 중세에는 카타리파 이단, 얀세니즘, 엄격주의 등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영적 현상들에 대해 신중하게 대처해 왔으며, 지나친 물질주의도 경계하고, 지나친 영성 위주의 삶도 경계해 왔습니다. 현대에도 우리의 전통적 신앙을 혼란시키는 사상들이 존재합니다. 현대에 불고 있는 많은 영적 운동들은 참된 식별이 필요합니다. 무작정 영적 운동이라고 따라 갈 수는 없습니다. 일부의 영적 운동들에는 편하고 좋은 것만을 추구하고, 희생과 봉사의 정신은 도외시하는 사조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세상의 절대자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일 필요는 없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과 거리를 두게 하고, 예수 없는 하느님만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영적 현상들에 우리 신자들이 왜 호기심을 갖거나 현혹됩니까? 과연 예수 그리스도 없는 복음화가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과 성령의 도우심이 있고, 또한 하느님과 성령께서 함께 활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에 대해 기쁨을 갖지 않고 다른 곳에 마치 좋은 것이 있는 듯 방황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 갈증을 적셔 줄 '샘솟는 물'(요한 4, 10)을 주시는 분으로서, 그분이 가르쳐준 하늘나라의 신비는 참으로 소박하면서도 그윽하고 친밀하면서도 신비로운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늘나라의 신비로움에 감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샘물처럼 솟아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요한 4, 14)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를 이끌어 주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 6)으로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실 구원자이심을 굳게 믿고, 교회는 바로 이러한 영적으로 샘솟는 물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구원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 구원을 위한 성사이며, 이 성사적 표지는 사랑과 나눔, 섬김과 친교를 통한 선교적 봉사를 통해 나타남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를 수행하는 교회는 바로 그분의 도구가 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 13-16)이 되는 일을 수행합니다. 우리의 진리와 정의의 빛을 세상에 비추고, 사랑과 봉사의 길을 갈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볼 것이며, 하느님을 알고 배우고 섬기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말씀으로 복음화 되고, 또한 우리 주변의 여러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문화를 복음화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화 된 공동체가 복음화 하는 공동체'('현대의 복음 선교', 13항)로서 선교의 삶을 기쁨과 열정을 갖고 새로운 방법으로 살아가는 새 복음화입니다.

삶을 통한 선교는 자신이 처한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고 보여 주신 사랑을 기쁜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과 더불어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이야기하고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사는 마을이나 직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믿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 각자가 초대교회의 신도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배우며, 실천하고, 전한다면, 오늘의 다종교적 시대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하려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갖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활하고 전하면서, 오늘의 신앙적 위기 상황을 오히려 신앙을 증거하고 전파할 호기로 삼아, 제삼천년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선교 사명을 수행합시다.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교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빕니다. 아멘.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장 경 갑 룡 주교



연중 제27주일 군종주일 군종교구장 담화문

2003/10/05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로 36번째를 지내는 군인주일을 맞이하여 전후방 각지에서 조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수고하는 군인들과 또 이들을 돌보고 있는 군종신부들과 함께 여러분 모두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그 동안 여러분들의 한결 같은 사랑으로 저희 군인들과 군종신부들을 위해 기도와 도움을 주심에 또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위기와 기회’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습니다. ‘개혁과 통합’의 기치 아래 ‘참여정부’가 출범하였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대내외적으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가중되고만 있습니다. 정전협정 50주년을 맞이하였지만 우리가 염원하는 한반도의 평화는 북한의 핵 개발 위협으로 국제사회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고, 이로 인한 정부의 정책혼선, 국민의 정치불신, 기업의 윤리 투명성 결여, 과격한 노조의 불법파업 등으로 경제는 복합적 위기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가치관의 극심한 혼란 속에 진보와 보수세력 간의 이념 갈등은 심화되고, 생계형 자살과 윤리의식의 부재가 낳은 죽음의 문화가 더욱 만연해 가고만 있습니다. 더욱이 국민의 신뢰를 우선적으로 받아야 하는 군에서 각종 군기 문란 사건으로 사회 일부에서는 군 기강이 해이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낳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 ”(1요한 1,3ㄱ).

그러나 우리 신세대 병사들은 작년 서해교전을 비롯한 실전에서 지휘관이 놀랄 정도로 용감하고 일사불란하게 전투를 수행해왔습니다. 또한 홍수와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때는 물론이거니와 물류대란으로 국가기간 산업이 흔들릴 때에도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휴일 없이 대민지원을 우선적으로 했습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이 힘든 일을 기피한다고 하지만 해병대 지원 경쟁률이 25대 1까지 치솟았고, 공수부대에 가고 싶어 3수, 4수까지 하는 청년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군에서 일어난 여러 불미스러운 일도 군 스스로 내놓은 ‘사고예방 종합대책’을 통해 병영 내의 참된 인권을 키워가며 거듭 새롭게 태어나려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군장병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친교를 이루는 군종신부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군인들에게 전하는 군종신부들이 최선을 다해 군생활에 임하는 그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며 느낀 점들이기에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1요한1,3ㄴ).

21세기가 요구하는 정보화, 과학화에 발맞추어 의식수준 또한 한 차원 더 높이며 스스로 거듭 태어나려는 군인들에게 이제는 여러분의 작은 힘을 모아 주십시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때인 젊음의 시기를 군대에서 보내는 군인들과 우리 80명의 군종신부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참다운 보화 때문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말씀처럼 “젊음은 특별한 보화”입니다. “젊음의 시기는 특별히 인간 ‘나’에 대한 강렬한 발견의 시간이며, 인간 ‘나’에 관한 고유한 속성과 능력을 발견하는 때입니다”(전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서한, 3항). 그래서 군종신부는 바로 이런 젊은이들을 위해 있는 이들입니다. 군대라는 공동체 속에서 남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그들이 그 관계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금년에는 “그리스도를 배우는 해”라는 군종교구 사목목표 아래 이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성서를 통해 배우고, 이웃에게 행하는 것’을 나누기 위해 군종신부들이 최선을 다해 사목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군종신부들이 젊음이라는 보화를 조국을 위해, 국민을 위해 기꺼이 내놓은 군인들과 그리스도안에서 나누는 바로 이 친교에 여러분들도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사귀며 얻는 친교의 결실, 바로 ‘나눔’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마태19, 21).

실제로 군선교 지원은 시급하기도 하고 중요한 여러분 모두의 몫입니다. 개신교에서는 2020년까지 해마다 20만 명씩 군인들에게 세례를 주면 2020년에는 전체 국민의 75%가 개신교 신자가 된다는 ‘비전2020’이라는 전략을 세우고 막대한 예산을 군에 쏟고 있습니다. 또한 불교에서도 우리 가톨릭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은 재정을 군선교에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20대의 젊은 청년들이 한국 가톨릭 교회의 미래요, 그들이 제일 많이 모여있는 군이 선교의 황금어장이라고 말로만 강조하고 느낄 뿐이지 이를 위한 물질적 지원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군사목과 군선교 지원 -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많은 이들은 지금의 우리 나라가 안고 있는 복합적 위기와 사회갈등의 해소방법 중 하나를 가정-학교-사회에서의 올바른 교육을 통한 참된 가치관 형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군은 창군이래 국민교육의 도장으로서 역할을 성실히 해왔고, 군인들은 건전한 민주시민으로서 그 첫발을 군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들에게 민주시민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 나도록 그리스도의 생명 말씀을 가르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친교를 이루게 하려는 것은 우리 교회의 책임이요, 우리 교회의 진정한 미래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를 배우는 일은 앞으로도 군종신부들을 통해 꾸준히 지속될 것입니다.

군선교 지원이야말로 더할 수 없는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입니다.

군인주일은 군인들에게 기도와 관심을 쏟고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날입니다. 오늘 이 군인주일을 지내며 그 동안 군사목을 위하여 쏟아주신 여러분들의 따뜻한 사랑과 후원에 감사드리며 우리 군종교구민과 모든 사제들은 맡겨진 일들을 성실히 수행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다시 한 번 기도와 격려를 부탁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언제나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3년 10월 5일

천주교 군종교구장

이 기 헌 베드로 주교



연중 제27주일(공항동 성당 주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가해) 마태 21 33-43; 2002/10/06

오늘 우리는 본당의 주보성인인 프란치스코 성인님을 기억한다. 프란치스코 성인님 하면 우리는 얼핏 가난을 연상한다. 프란치스코 성인님이 가난을 선택한 이유는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님이 행한 그 가난은 그저 가지지 않는 가난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없어진 가난이다.

우리 모두는 현세를 살고 있다. 가족과 친척, 친지들과 함께 살고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을 버리거나 포기하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편익을 버리고 자기 가족 친지 이웃들에게 더욱 더 봉사하라고 한다. 열심히 벌어서 형제들과 나누라고 한다 가능하면 자기 가족 친척 뿐만아니라 이웃 심지어는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과도 나누기를 원한다. 우리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눔으로써 프란치스코 성인님의 가난 정신을 산다. 성인님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 보다, 얼마나 이웃들과 나누는가를 보고 기뻐한다.

그리고 동시에 성인님은 우리가 없어서 기죽고 불행하다고 느끼지 말고 오히려 가난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가족, 친지, 우정, 사랑, 평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알아채고 감사하라고 한다. 이렇게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내 인격과 내 생애, 나 자신'을 형제들과 나눔으로써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이 평화를 누리기를 원한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필립 4, 6-7)

진정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채워주리라 믿고, 오늘 이렇게 살아있음을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짐으로써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갈망하며 또 그렇게 투신하면, 주님께서는 기꺼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해주실 것이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함으로써만 간직할 수 잇는 평화를 누릴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상기한다.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 속에 품"(8절)고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들은 것과 본 것을 실행하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9절)



연중 제27주일(공항동 성당 주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다해) 루가 17,5-10; 2001/10/07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가난하게 태어나심으로써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위안이 되셨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라고 말하고는 그 의미를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라고 밝힌다. 이렇게 예수님의 가난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것을 다 버리고 우리와 똑같은 처지가 되신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다.

오늘 우리 본당의 주보이신 프란치스코 성인님도 우리에게 가난의 성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분은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구걸하여 빌어먹음으로써 자연과 가난한 이들과 형제되어 일생을 사셨다. 그는 생산구조와 분재구조를 제도적으로 개혁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의 분배구조를 이탈하고 자기에게 분배된 재화를 재분배함으로써 경제구조와 그 경제구조가 지배하던 당시의 사회와 종교를 개혁하셨다. 프란치스코 성인님은 세상을 버리고 주님을 선택함으로써, 물질보다 주님의 말씀을 사는 가난을 취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현대 세계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난해지셨고 프란치스코 성인님은 주님을 선택하셔서 주님의 뒤를 따라 가난한 이들의 형제가 되셨다. 프란치스코 성인님의 가난을 이어받은 그 수도회의 삶을 우리는 '공유' 개념 안에서 찾는다. 현세적인 물질의 소유자는 있되 함께 사용한다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더 이상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자기의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내어놓은 삶이다. 우리네 일반인의 삶에 연결하여 쉽게 말한다면 가족의 범위를 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세상 모든 이를 가족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란치스코 성인님께서 형제를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내어준 가난 즉 자기 공여를 주님의 삶에서 발견하고 실현하고자 했다면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서도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양보와 포기와 용서와 희생을 선택해야겠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연중 제27주일

(나해) 마르 10, 2-16: 2000/10/08

요즘 결혼생활에 순탄치 않다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 실업의 장기화와 불안정한 생계 수입 등의 경제적인 어려움, 가정을 지탱하는 남편의 권위가 무능력으로 몰리는 등 결혼생활을 위협해 온다.

산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산이 있어 산을 간다"고도 한다. 내가 배우자를 선택했다고도 하지만. 내가 선택할 배우자가 먼저 있었고 또 내 눈에 띄었다는 면에서 볼 때 내 눈에 띄게한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배우자를 점지해 주셨다고 고백할 수 있다.

처음엔 좋아서 결혼까지 이르렀지만, 살다보니까 서로 안 맞는 것들이 너무 많아 서로를 맞추어 가는 과정이 마찰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신혼 초에는 사랑에 눈이 멀고, 자식 자라는 데 신경 쓰느라 그냥 참고 넘어왔지만, 자식 농사 다 지었으니 더 이상 눈치 안보고 이제 자기 삶을 살겠다는 노년의 이혼이 급증한다.

과연 결혼을 유지해주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런 저런 일이 수없이 생겨나는 세상에서 "둘이 한 몸이 되는 것"(8절)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이혼하기 위해 결혼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결혼은 해도 손해고 안 해도 손해라면서, 결혼하는 날부터 지옥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정말 결혼생활이 지옥만 있고 행복은 없는가? 행복은 욕망 분의 성취도다. 결혼생활에서 오는 행복을 얻으려면 자신의 욕망을 줄이거나 서로간의 노력을 기울여 부부간의 애정과 일치라는 성취도를 늘려 행복을 만들어야 한다.

한 이불 속에 살면서 상대를 존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리다. 그러나 존경은 못하더라도 존중은 해야 한다. 아니 함께 살려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 쪽이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두 번이 아닌 희생을 계속 한 쪽으로 강요한다면 그 상대가 병이 나거나 폭발하여 대들거나 파국에 이르게 된다. 다소 일이 늦어지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더라도, 서로를 서로가 인정하고 맞춰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함께 할 수 있다. 맞추기 위해서 함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맞춰야만 부부가 하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상대를 탓하지 말고, 자신의 애초 선택과 결혼서약에 충실해야겠다.

우리를 맺어주시고 지켜주시는 주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우리 가정에 내려주신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가정으로서 나의 가정 뿐 아니라 어려운 형편에 처한 가정들도 잘 돌보아야 하겠다.



연중 제27주일(공항동 성당 주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99/10/03

오늘은 본당의 주보성인이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님을 기리는 본당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님은 주님의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심으로써 교회를 쇄신시키신 분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박해시기가 끝나고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과 로마제국의 식민지 국가들의 국교가 됨으로써 교회는 많은 재산을 희사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기보다, 더 큰 성당건물을 짓고 성사 집전과 교회법의 테두리안에서 신자들의 조직을 관리하는 측면의 사목정책으로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정신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흔히 '면죄부'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전대사' 문제, 이른바 베드로 성전을 짓기 위해 헌금하는 사람은 헌금의 양에 따라 죄를 사해준다는 일도 이 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루터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교회의 정책을 반대하면서 각 지방에서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하려는 토호정치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개신교의 여러 분파들, 성공회라는 영국교회 등.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교회를 떠받친 두 분의 성인이 있었는데 한 분은 설교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신 도미니코 성인님이시고 다른 한 분이 바로 우리 본당의 주보성인이신 프란치스코 성인님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1. 33)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며 일생을 사셨습니다. 자신의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져 가난해진 프란치스코의 삶은 여러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많은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프란치스코 성인님께 존경과 희사를 해서 가난한 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가난한 교회, 가난한 이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기도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교회가 바로 가난한 교회이며 프란치스코 성인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이룬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역이나 단체다 하는 구분과 대조도 없이 신자 누구나 복음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가난한 교회가 됩시다.



연중 제27주일

(다해) 루가 17,5-10: 98/10/04

저는 1993년 11월 5일에 여기 이 진건 본당에 부임하여 오늘까지 만 5년의 임기를 다 채우고 서울대교구 사제 정기 인사이동으로 공항동 본당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저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과 성령님께 그리고 2,000년대 복음화를 향해 저와 함께 애써주신 수녀님들과 총회장님을 비롯한 사목협의회원들과 구역 반장님들과 단체장님들과 교리교사들, 그리고 묵묵히 주임사제의 사목정책에 참여해주시고 기도와 희생으로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부모님 같은 염려와 배려로 저를 돌보아 주셨던 어른들과 한 가족처럼 저를 아껴주셨던 형제 자매님들께 인간적으로도 짙은 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편 저 때문은 아니더라도 저와의 연관으로 신앙에 걸림돌이 되셨던 모든 분들께 용서를 청합니다.

저는 이 본당에서 '복음 나누기를 통해 각자 자신에게 들려온 그 복음 말씀을 자신의 가정과 직장과 지역사회에서 실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복음화'를 위해 일했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도직 단체와의 중복된 일정 때문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아파서 구역모임에 못나간 적이 없었던 것을 되돌아보면서,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주시면서 그 사명을 이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도 같이 주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해주셨고 더욱 더 열심히 뛸 수 있도록 굳은 믿음을 저에게 심어주셨습니다. 또한 격주 또는 매주 형제 자매들이 함께 모여, 복음을 나누는 모습이 저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고 또 제 사목 활동에 힘을 주었습니다.

저는 부족한 점도 많고 결점도 많은 인간입니다만 저에게 이렇게 커다란 짐을 맡겨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서도, 저의 부족함과 부당함 때문에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첫 시간에 성당 문을 열고 '주님 저희 본당을 지켜주시고 저희 신자들을 보호해 주시고 이끌어주십시오'하고 기도드렸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혼자서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도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사제생활을 이 본당에서 선물로 받아 가지고 갑니다.

저는 사제로서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10)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얻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생활 원칙으로 삼으십시오. 또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그대가 많은 훌륭한 보화를 잘 간직하시오"(2디모 1,13-14) 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충실히 신앙생활을 하셔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 기꺼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연중 제27주일

(나해) 마르 10,2-16 : 97/10/05

결혼을 시킬 때마다 신랑·신부에게 물어본다. "무엇을 보고 아내와 결혼하였습니까?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사람들은 뚜렷하게 무엇이라고 밝히지 않는다. 아니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보다 남녀간에는 '사랑' 이란 묘한 감정이 있어, 둘을 결합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마저 든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말처럼! 그런데 항상 사랑이라는 감정이 부부생활을 지배하지는 않는 것같다. "내가 뭘 보고 이런 사람을 내 배우자로 선택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가끔 들으니 말이다. 그리고 감정만으로는 부부생활의 충실성을 채우기엔 부족해 보인다.

또 "산이 있어서 산에 간다." 는 말을 들으면서, 내가 내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내 눈에 띄게 하신 분은 주님이심을 안다. 그런 면에서 결혼은 자기가 하지만 부족한 사람들의 결합을 부부로 맺어주시고 축복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마르 10,9)

어떤 이는 자랄 때 "우리 아버지가 외삼촌이었으면…" 또는 우리 어머니가 내가 아는 어떤 좋은 분이었으면 하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정적인 마음과 생각에 그치는 것이지 실제로 부모를 바꿀 수 있겠는가!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우리 자식을 바꿀 수 있겠는가! 오히려 부족한 나를 자식으로 받아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려야 할 형편이 아닐까? 부모 자식의 관계에서부터 가족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인간관계는 그저 그렇게 주어졌을 뿐이다. 사람이 살다가 정 안 맞으면 헤어질 수도 있다고 말할 지 모르겠지만, 그 헤어져야만 한다는 경우가 만일 우리 부모님이라면 환영하겠는가?

바오로 사도는 "남편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 라고 했다. 또 "아내된 사람들은 주님께 순종하듯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에페 5,22) 라고 말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배우자에게 감사드리자. 나를 받아주신 가족에게 그리고 그런 감사를 드리고 이젠 감사를 받도록 노력하자. 서로에게 충실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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