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일
우리 중에 누구 하나 어느 한 사람 잘 못살고 싶어서 못살고, 착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악하게 살고, 실수하고 싶어서 실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 하나 죄짓고 싶어서 죄 짓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잘 살고 싶고, 모범적으로 살고 싶고, 착하게 살고 싶지만,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어떻게 못 하는 우리의 나약함이 우리를 어려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사회의 환경이 자기 하나의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크기에 그 힘과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병환자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걸리는 병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걸린 나병 때문에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거기다가 하나 더, 나병 환자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의식 때문에 더 힘겹게 살아갑니다.
그 사회의식은 바로 ‘낙인’입니다. 낙인은 일반인들이 어떤 사람이나 어떤 집단에게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을 그와 그 집단의 전부로 치부하고, 그 현상의 이름을 그나 그의 집단에게 명명하고, 그가 속한 전체 사회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색다르게 바라보고 취급합니다. 결과적으로 낙인은 그와 그 집단을 실제로 그런 사람들로 비추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낙인을 찍어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 스스로도 사람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자신들에게 붙여준 이름이 나타나는 대로 변화된다는 것이 교육심리학적인 '낙인이론과 낙인효과'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일반 사람들은 나병환자들을 바라보면서, 나병 환자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병에 걸렸다고 여겼습니다. 또 그들은 사회의식적으로 나병환자들에게 대중과 격리되어 한 평생 자기 병고를 통해 자기 죗값을 짊어지고 살도록 요구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을 돕고 아끼면서 치료해 주고, 비록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잘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근본인 반면, 당시 유다 사람들은 나병을 쉽게 제거하지 못하고, 그 병의 원인조차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하자, 나병에 걸린 사람이 죄를 지어 나병에 걸린 것으로 치부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병 환자들도 죄인으로 낙인을 찍어 격리시키고 도와주지 않자, 나병 환자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기 위해서 죄를 짓게 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죄를 지어 나병에 걸린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래서 사람들 앞에 떳떳이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모든 행위를 다 죄로 인식하고, 또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마치 자신들의 운명인 양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반 환자들은 예수님께 달려들어 고쳐달라고 애원을 하는데 반해,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차마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루가 17,12)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감히 ‘저희를 고쳐주십시오.’라고 청하지도 못하고,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3절)라고 소리 높여 말합니다.
그들의 청을 들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밝혀주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ㄱ)
그것은 그들을 죄인으로 낙인을 찍은 당시 사회의 일반인들과 또 그렇게 판정한 사제들에게 그들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라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나병환자들에게도 '너희는 죄인이 아니다.' 내지는 '너희 죄는 씻어졌다.'라는 말씀을 해주심으로써, 그들의 병든 몸과 마음을 정상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복음사가는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14절ㄴ)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기적을 통해, 나병환자들을 나병에서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들을 나병을 가진 죄인이라는 스스로의 인식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진 몸을 보이도록 함으로써,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복구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감사드리려고 돌아온 열 사람 중의 한 사람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8절)라고 하시면서 돌려보내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나병을 고쳐주시고 사회로 복귀시켜 주신 분이 사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란 사실을 믿고 감사드리러 찾아온 이를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한가지 우리에게는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돌아온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16절)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유다인들은 하느님이 가르치는 대로 병자들을 사랑으로 치유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병자 중에서도 유다인 환자는 예수님이 고쳐준 것에 대해 감사드릴 줄조차 모릅니다. 오히려 유다인들이, 이방인이며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다며 낙인을 찍었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자신이 처한 처지와 우리 삶에 대해 불평하고 만족하지 못해 탐욕을 부리고, 자기 분수를 모르고 방황하는 우리를 한층 더 부끄럽게 하고, 우리 생애를 다시 한번 돌아보도록 합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과 일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오늘 이렇게 살게 해주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겸손되이 믿어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만큼은 아니어도, 오늘 이렇게 눈뜨고 살아서 먹고살게 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구원되어 살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되돌아봅시다.
우리는 혹시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낙인찍고 있지는 않은지?
갖가지 별명으로 그를 낙인찍고, 그를 그런 상황에 몰아넣고,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 놓고 있지는 않은지?
심지어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만들어 내거나, 의심하거나, 오해하거나, 과장시키거나, 자기 이로운 대로 해석해서, 그나 그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제거시키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만일에 그가 그런 상황에 실제로 놓여있다면, 우리는 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단점과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함께하고,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지도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내 자신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우리의 삶을 허락하시고, 살게 해주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믿는 사마리아 사람인지?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펼쳐주신 나의 생과 일상에 감사드리며 사는 사마리아 사람인지?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향해 묻고 계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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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가 게으르고 못나서 그렇다고 ……. 가난은 자기 탓이다.”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가난한 이들은 사회에서 도태시켜야 한다.”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가난의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늘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고 합니다.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 구석까지 모조리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고 남은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그것들을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겨 두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23,22)라고 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배려하라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 때에는 아까워하지 마라.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너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토빗 4,7)라는 말씀을 전하십니다.
심지어는 “너희가 가난한 동족을 괄시하고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그가 너희를 걸어 주님께 호소하면 너희에게 죄가 될 것이다.”(신명 15,9)라고 까지 합니다.
왜 주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고 하십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달려와 주 예수님께,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라고 묻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18절) 라고 하시며, 계명들을 다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가 다 지켜왔다고 대답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2절)라고 전합니다.
불행한 결말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경고 삼아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하고 절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이라는 물질세계와 제한과 한계 속에 처해있는 인생을 위로해 주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자비와 위로를 먹고 살아갑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죗값으로 바치며, 자비를 베풀어주셨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을 우리 생애의 주님으로 모시고 찬미를 올립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8-11)
그렇게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셨지만, 우리는 현세적인 제약과 인간의 처지와 조건을 내세우며 스스로의 나약함과 부족함에 헤어나지 못하고 거듭 주님께 애원합니다. “주님, 제 구원의 하느님 낮 동안 당신께 부르짖고 밤에도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 제 기도가 당신 앞까지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시편 88,2-3)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며, 주님께서는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거듭 위로해 주시고,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스스로 지은 죄를 용서 받고 싶은 우리에게,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라고.
현세에서 잘 살고 싶은 우리에게, “네 복이 완전해지도록 가난한 이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집회 7,32)라고.
마침내 구원 받고 싶은 우리에게,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루카 12,33)라고.
자캐오와 초대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이 권고를 받아들여 구원받았습니다.
자캐오는 자기 집을 찾아주신 주 예수님께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하고 말씀드립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바라보면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9절)
초대교회의 공동체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2-35)라고 전합니다.
사도들은 망설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성 요한 사도는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1요한 3,17)라고.
성 야고보 사도는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라고.
성 야고보 사도는 또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5-17)라고 덧붙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구제 활동 노력은 성도들의 궁핍을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게 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9,12)라고 이릅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우리를 반기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4-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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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어떤 분들에게 성당에 오시게 된 동기에 대해 물으면 여러 경우의 답이 나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유언으로 남겨서, 천주교 신자와 결혼하려고 했더니 배우자 될 사람이 성당에 다녀야 한다고 해서, 자식이 첫 영성체를 하면서 어버이도 성당에 같이 다니기를 하도 원해서, 천주교 신자들이 부모님이나 집안 어르신의 장례를 잘 치러주는 모습을 보고, 마땅히 잘 아는 사람도 없이 혼자 늙어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믿고 따르고 함께할 사람 하나 얻고 싶어서, 막상 무슨 일이 생기거나 어려울 때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누군가의 삶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여서, 평화를 얻기 위해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 등등…….
그런데 어떤 연유와 경로로 성당에 오게 되었든지 간에, 오는 사람은 자기가 원해서 왔다고 할지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경로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사람을 부르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에게 맞는 적절한 사람들과 여러 가지 방법과 경로와 연유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면서 주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왜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셔서 아무런 아쉬움이나 어려움이 없으신 하느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실까? 주 하느님 혼자서도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아무런 결핍이나 허전함 없이 풍요하고 충만하실 텐데, 왜 우리를 부르실까? 우리는 여기서 주 하느님이 철학적인 개념이거나 자연 체계나 시스템이 아니며, 범접하거나 통교할 수도 없는, 인간세계와는 전혀 다른 별도의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본성상으로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무한하고 충만한 사랑이 넘쳐흘러, 또 다른 유한한 존재를 창조하게 되고, 주 하느님께서 창조한 피조물들을 불러, 주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자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사랑이 경계선을 긋고, 이웃과 격리하여 독립되기 시작하면, 이미 사랑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삶의 신비를 하나 또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할 때, 우리는 한 식구가 되고, 그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어 행복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경계하고 선을 긋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평온케 하는 사랑을 손상하게 되며, 그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신 주 하느님과 그만큼 멀어지게 되며, 또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은 그만큼 부자유스럽게 되어 거북하고 불편하여 힘겨워진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첫 범죄, 원죄로 자신이 누리던 에덴동산의 행복을 자승자박으로 손실하게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서로를 개방하고 나누느냐 하는, 사랑의 질에 따라, 너와 나의 인격을 드높이게 되고, 그 인격적인 관계가, 주 하느님 안에서 그만큼 밀접히 일치하게 되고, 그에 따라 내 삶의 평화와 행복의 질이 드높여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 손님들을 부른 임금의 비유를 드십니다. 임금은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부르지만, 많은 사람이 그 초대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잔치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마태 22,5) 그러자 임금은 그들을 벌하고,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8-9절)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 하느님의 잔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한 분들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누군가의 강권에 의해, 체면상 억지로 안 오면 안 될 것 같아서, 예의상 와 주신 분들이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든지, 여러분께서는 여러 신자분의 권유와 여러분 생의 여러 경로와 방법을 통해 이 잔치에 오셨습니다. 그런 점은 여기 처음 오신 여러분들이나,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 다 똑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저러한 이유와 서로 다른 계기가 있기는 하겠지만, 주 하느님께서 여러 경로와 여러 방법을 통해 섭리하시고 안배하시는 부르심에 따라 주 대전에 이렇게 모여들었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믿고 고백하며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 미사라고 부르는 주님의 잔치는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은총을 스스로 확인하고 그에 감사드리며, 우리에게 그런 축복과 은총을 내려주신 주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잔치입니다. 그리고 이 잔치에서 더 큰 우리 인생의 축복과 은총을 받고 평화와 안녕을 누리는 잔치입니다.
이 잔치를 통해 우리는 주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아 새 사람이 되고, 주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과 축복으로 충만해져서, 주 하느님을 믿는 새 사람으로서의 길을 걸어갑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미래의 우리 인생의 길에 탄탄대로를 열어주시고, 아무런 고통과 슬픔이 없게 해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쁘거나 슬프거나 힘겨울 때,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울어주시며, 우리와 함께 힘겨워하시면서, 우리가 다시 일어나실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렇게 불어넣어 주시는 새 생명의 힘으로,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위로 속에서 평안하게 살도록 해주며, 또 다시 어렵고 힘겨워진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사랑과 위로를 바탕삼아 꿋꿋이 살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성령의 은총으로 새로워진 우리는, 우리의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바탕으로, 어제의 우리처럼 어딘지 모르게 힘겹고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이웃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래서 어제의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과 축복으로 오늘을 마련해 주신, 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얼마나 크고 충만한 것인지 알리고, 그 형제자매도 주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살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에는 비록 보잘것없은 사람이었지만, 차츰 주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충만해지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주 예수님의 은총과 축복을 나누게 됨으로써, “혼인 예복을 입”(11절)고 주 대전에 다다르게 됩니다. 마침내 우리는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여, 주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와 행복을 충만히 누리며 “선택된 이들”(14절)의 대열에 섭니다.
여러분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주 하느님께서 펼쳐주시고 나눠주시는 이 사랑의 전례와 새로운 생명의 잔치를 편안히 받아들이시고, 기꺼이 참여하여 참 평화와 안녕을 누리기를 빕니다. 여러분에게 들려주시고 선사해 주시는 주 하느님 사랑의 말씀과 새 생명이, 여러분을 구원의 기쁨 속으로 신속하고 막힘 없이 안아가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필리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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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가끔 부모님들이 다 큰 자식들을 바라보며 섭섭한 속내를 드러내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제는 저 잘라서 큰 줄 알아.” 그런 말을 듣다보면, ‘지금까지 자기들을 키워주고, 지금의 순간을 누리도록 해준 것이 부모의 덕인 줄 알면 좋겠는데!’라는 섭섭함이 배어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뜨면 자연히 숨을 쉬게 되고, 수도만 틀면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고, 스위치만 켜면 전기가 들어오니까 그런 것들과 관련하여 감사를 드리기보다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삽니다. 오히려 그런 기초 설비들이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번 엎어지거나 쓰러지거나 다치거나 그야말로 어디 한 군데 깨지거나 부서지는 사고라도 났다가 회복하게 되면, 그나마 숨쉬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만에라도 새삼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하는 표현처럼,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향한 누군가의 선물이거나 희생이거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라는 동안에, 잠들고 깨고 내 할 일 하는 동안에, 알게 모르게 부모님이나 누군가의 희생과 공덕으로 내가 오늘을 살아 있고 오늘 이렇게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평소에 기도하는 연습과 습관을 들여놓지 않아서 그런지, 그동안 그렇게, ‘시간이 나면 기도해야지!’ 하면서 다짐하고 미뤄왔던 기도를, 정작 일거리가 줄어들었을 때도 하지 않습니다. 일터에 나가기 전, 일터에서 돌아와서, 그리고 잠들기 전에 기도하면서, 생활 안에서 주님과의 맛있고도 유익한 시간을 간직하지 못하면, 그저 계속 눈 앞에 다가오는 일을 처리하기에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일을 마쳐도 영화나 TV, 동료나 친구, 육체적인 휴식과 관광, 술이나 취미생활로 심리적인 안정을 채우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노는 날이나 공휴일에 일터에 나가지 않으면, 그동안 못했던 집안일을 하거나 다른 곳에 놀러 나가기는 할지언정, 성당에 기도하러 오지 않거나 집에서 일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쩌면 평소에 기도에서 오는 기쁨과 평화를 깊이 맛 들이지 못했던 결과이기도 할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얻는 기쁨과 평화에 대한 체험이 없으니, 더 깊이 더 자주 기도하지 않고,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또 그러기에 기도하지 않고, 그러자니 점점 더 주님과의 신앙의식과 신앙감감이 멀어져 갈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일과 인간관계와 봉사활동' 그리고 '기도생활' 그리고 '휴식과 문화와 취미생활'을 적절히 배분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청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치유해주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 그것도 유다인들과는 원수같이 지내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를 보고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
그러시고는 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예수님께 치유된 유다의 나병 환자 아홉 사람이 자신들이 치유된 사실에 대해, 예수님께 아무런 감사 표시나 그로 인한 보은의 행위도 없이 떠나 버린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감사를 표하지 않은 유다인 아홉에게 베풀어주신 치유의 은총을 거두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작 예수님의 백성들이라고 할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예수님의 제2차 대상인 외국인,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돌아온 것을 보시고는, 황망해 하시면서도, 그 외국인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던 사마리아인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 믿음은 자신의 나병이 자연히 치유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고 여기는 신앙의 인식이며, 그에 대해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우리 본당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미사가 감사의 기도라면서, 예수님께서 우리 신자들이 한 주간 동안 살아가는데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러 온 신자는 등촌3동 성당 103위 한국순교성인 성당 4,000여 신자 중 520명뿐이냐?’
성경에는 예수님께 감사를 표한 사마리아 사람이 어떻게 보은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의 부모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오늘이 다 주 예수님의 은총이고,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를 위해 희생한 덕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인식하며 감사드리며 주 예수님을 찾아뵙기를 기다리실 뿐입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지난 주간 동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올려드리기를, 그리고 또 다가오는 한 주간을 주님 은총과 사랑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청하는 모습만을 바라십니다.
그냥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입 싹 씻고 모른 체한다면, 주님을 얼마나 섭섭하게 해 드리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배은망덕한 사람일까! 하느님은 몰라도, 주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자기 두 주먹으로 살 수 있다고 자만하거나, 주님께 감사기도 한 번 올려드리지 않으면서도, 평안히 살 수 있으리라 여기는, 어리석은 욕심쟁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기에게 생명과 두 주먹을 준 분이 누구인 줄 알았다면, 그런 어리석음을 자랑스럽게 내지를 수 있을까?! 남 이야기 같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하루 종일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오늘의 우리 삶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하거나 하루를 마칠 때까지 한순간이라도 기도를 바칠 줄 모른다거나, 심지어는 저 잘라서 얻을 것이라고 여겨 오만불손하고 방탕하다거나, 지금까지 준 것은 턱없이 부족하니 더 많이 내려달라고 어린아이처럼 떼만 쓰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얼마나 안타까워 하실까 싶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님께서는 우리가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갖가지 은총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노력까지 기울인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며 흡족해하실까 싶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렇게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우리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더 드러내실 수 있을 것이며, 주님 몸소 주님의 구원 사업을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와 보은이 비단 미사 참례와 기도 행위에 그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드리는 찬미와 흠숭 행위인 미사와 기도와 봉헌 이외에도 보은의 행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직접적인 보은의 행위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에게 우리가 받았다고 여기는 은총을 다시 나누는 행위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는 우리의 보은 행위가 될 수 있겠습니다.
오늘 한 번 조용히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가 주님께 감사드릴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께 어떻게 감사를 표하며 보은할 수 있을지?
아울러, 주님께 감사드리는 표현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형제자매 중 어느 누구에게, 어떻게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셨다고 여기는 은총을 나눌 수 있을지?
우리 다 함께 구원될 믿음을 살기로 합시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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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지난 한가위에 유 신부님과 동생 수녀와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어머님 아버님들은 왜 우리 자식들의 요청을 들어 주셔야만 했을까?’
‘안 들어 주셔도 그만이었을 텐데!’
‘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의 부모님들께 요구했어야만 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손으로 땀흘려 마련했어야 할 일이 아니었던가?’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해줘도, 들어주고 또 들어주어도, 자식들에게서 좋은 소리 한번 못들을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왜 들어 주시려고 그토록 애쓰셨을까? 그런데도 ‘왜 하나라도 더 좋은 것을 사주고, 하나라도 더 좋은 것을 먹이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셨을까?’ 그 마음에는 무엇이 들어있어서 그렇게 하셨을까? 지금에서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갖고 싶은 것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달라고 조르고 갖은 심술을 다 부렸던, 우리 부모님이라는 존재의 마음 안에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사랑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치 않고서야 왜, 그리고 어떻게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위해 그런 수고와 희생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에게 그럴싸한 말을 하며 혼란스럽게 하여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 앞에 겸손하라.’고 이르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18절) 그러시고는 유다인들이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이라고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십계명에 관하여 일러주십니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19절)
그러자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20절) 라고 자랑스럽게 그렇지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2절)
어쩌면 부자 청년은 자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가지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누리고 있었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에 둘러 쌓여 더 이상 필요한 것도 새삼 얻어야 할 것조차 없이 편하게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지루하고, 단조롭고, 그야말로 재미없었는지 모릅니다.
다른 부모들이 그 청년이 가지고 있는 재물과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자기 자식에게 주기위해서 안달복달을 하면서 갖은 수고를 다 하고 있었을 텐데, 정작 그 부자청년은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었는 데서 그만두지 않고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고 즐거워하지 못하고 무료하다고 여기고 있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찾아와 새로운 뭔가를 도전하듯이 청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그런데 더 좋은 그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 그 청년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포기해야 한다고 하니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여겨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에는 최고의 기대치요 바람이었건만 정작 그걸 누리고 있는 부자청년에게는 그것이 별 것 아닌 것이었고, 더 이상의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누리고 있던 것을 버리고, 그가 괜찮다고 여기는 것을 향해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이 고개를 푹 숙이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시고는,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빌게이츠처럼 억만장자는 아니어도 나름 자신들이 먹고 살 정도의 재산은 가지고 있는 제자들이 놀라서 예수님을 원망스럽게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런 제자들의 시선을 아시는지 모르는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25절)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하면서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서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시기에, 제자들을 바라보며 이르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현세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까지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주눅까지 들어있는 듯한 우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셨는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괜찮다!’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만 보시고도 기뻐하시고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고,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능히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주님 말씀을 이루면서 살 수 있도록 해주신다!’고.
어쩌면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찾아 얻어도 부자청년처럼 행복할 수도 없는 꿈을 꾸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그런 것을 얻고자 예수님께 기도마저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원한 생명을 향한 우리의 첫 걸음에 예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차마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예수님 사랑의 십자가 길을 걷겠다고 꿈꾼다는 것 자체가 호사요 사치라고 여겨 엄두조차 못내고 망설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말씀해 주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에 힘입어 영원한 생명을 향해 기꺼이 나아갑시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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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언젠가 교우 한 분이 여쭈셨습니다.
“신부님,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같은 값이라면 아무래도 하느님을 믿는 제 편을 들어주시겠죠?”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아마도 맞는가 틀리는가 하는 말을 하기 전에, 일종의 전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주 하느님을 믿는 이로서 주 하느님의 뜻을 잘 지켜온 사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다른 이들에게 돌아갈 이득을 가로채거나 다른 이들을 괴롭히지 않은 사람?!’
지난 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복음이 생각납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하고 큰 소리로 외치자,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라고 답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노력과 의지없이 단순히 가족이나 동네 사람같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관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하시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느님의 자녀 답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만일 주 하느님께서 성당에 다니는 사람만 사랑하고 성당에 다니는 사람만 성공하게 하고, 성당 다니는 사람에게 이 생과 저 생의 삶의 조건에 특혜를 주신다면,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은 주 하느님이 불공정하고 불평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주 하느님께서 우리 편을 들어주시라고 기대하고 요구하면, 우리는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예수님의 아버지 주 하느님을 단순히 우리의 수호신이나 미신으로 격하시키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만 은총을 내려 주신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세상 만물과 사람을 만드셨다면서, 자기를 따르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차별하고 너무 옹졸하고 째째하신 것 아니냐?” 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천주교 신자는 주 하느님께 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나와 나의 가정에서부터 우리가 함께 하는 이 사회 이 민족, 이 세계에서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담긴 말씀을 가슴 속 깊이 새겨 주시고, 일상에서 접하는 상황에 맞추어 그 말씀을 실현할 힘을 주십니다.
주 하느님께서 미사에 참례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당에 오지 않고 미사 참례도 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성찬 전례와 기도를 통하여 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그러한 은총을 받지 않을 뿐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배제하거나 골라서 특혜를 주시지 않지만, 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을 받으려고 나서지 않는 사람에게 은총을 억지로 넣어 주시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받을 사람이 청하고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생생한 현실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우리의 현세와는 전혀 관계도 없는 허상의 신기루 같은 믿음이 아니라,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현세에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런 믿음 생활이 아니라 순교자들처럼 자신의 삶을 걸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임금은 종들에게 초대받은 이들에게 가서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마태 22,4) 라고 불러오게 합니다.
그런데 정작 초대받은 이들은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5절) 고들 합니다. 오늘도 여러가지 이유로 성당에 나오지 않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바빠서!” “할 일이 많아서.” 그리고 이렇게들 말합니다. “성당에 간다고 밥이 나옵니까? 떡이 나옵니까?” 심지어는 “현실 상황도 모르고, 성당에 나오라고 한다.”고! 아마도 여기서 ‘현실 상황’이라고 말하는 이의 현실 상황은 자신이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는 상황으로서의 현실 상황을 이야기하는가 봅니다.
그런가 하면, 한 술 더 떠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6절) 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선교에 나선 사람들을 반갑고 감사로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성당 나오라고 말한다고 해서 거부와 조롱과 박해를 합니다.
결국 임금은 초대해도 안 오는 사람에게는 음식을 대접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8-9절)
이 말을 들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참으로 씁쓸합니다. 그 전에 초대받은 이들은 그야말로 ‘아무나’에도 끼지 못하니 말입니다.
임금의 말대로 종들이 거리에 나가 악한 살마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아무나 데리고 와서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찹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12절) 라고 묻습니다. 그가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임금은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13절) 라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이 비유를 마무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4절) 라고 말을 마치십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는 ‘혼인 예복’이란 단순히 세례성사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고백하고 수락한 대로 주 하느님을 온 세상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인이신 주 하느님께서 일러주시는 사랑의 뜻을 실현하는 사람이 혼인 예복을 입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10월 7일자로 우리 교우 중에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분들 전원이 병원 치료를 마치고 퇴원하였음을 기쁜 마음으로 알려드립니다.
우리가 다같이 은평보건소에 가서 530여명 전원이 음성 판정을 받은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오늘을 잊지 말고 너와 나의 건강을 위하여 개인 위생과 방역 수칙을 잘 지키면서 신앙 생활을 해 나갑시다.
아울러 지금 병중에 있으시거나 자가격리 중이거나 허약하지 않으신 분들은 이제 한달이면 얼추 쉴 만큼 쉬셨으니 성당에 나오시면 좋겠습니다. 성실히 미사 참례하시면서 주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서 참 기쁨을 누리시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텅 빈 성전에 외로이 홀로 계신 주 예수님 대전에 다같이 모여 찬미와 감사의 예를 올려드립시다. 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성찬례에 참여하여, 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을 담뿍 받고 형제자매들과 나눔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하늘나라로 변화시키는 혼인 예복을 입기로 합시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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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미사의 영성 15 하느님의 어린양
구약성경의 시대부터 사람들은 죄를 많이 지으면 죽게 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죄는 죽음을 가져온다.’고 믿었습니다. 이 말은 신약의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라는 말에서도 연상됩니다. 또 그와 연관하여 사람의 외관적인 흉함이나 질병, 그리고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죄로 인한 벌로 이해해 왔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인식 안에서 고대 근동지방의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져 달라고 기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원은 심지어 동물은 물론이요, 동료 인간을 인간의 속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죽은 친?인척 특히 부모님들이 자신의 배우자중 한쪽의 사망 시, 그 사체에 두고 “자식들의 질병이나 불행을 다 안고 가시라.”고 청하는 우리의 풍습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죄로 인해 불행을 겪는다는 사고방식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구세주란 사실을 선선히 받아들이기 어렵게 합니다. 구세주가 왜 죽어야 합니까? 그것도 죄인처럼? 실제로 우리는 일정한 한 공간을 차지하고 삽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서 느끼면서 이웃과 관계를 맺고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 우리는 어떤 대상의 내용과 속이 어떻든 간에 외적으로 우리 눈에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대상에 대해 좋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어디가 찢어졌다든가, 대칭을 이루고 있지 않다거나, 기준이 모호하지만 균형을 이루지 않은 것을 보면 어딘지 좋지 않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 유사하거나 자연스럽게 일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호감을 보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경계와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비참과 벌의 상징인 죽음에 처해진 십자가상의 예수님과, 권능과 거룩함의 상징인 하느님이 인간의 편향된 사고 안에서는 서로 충돌과 긴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이사 53,1) 왜냐하면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이사 52,14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고난받는 야훼의 종’에 관한 기사는 실제로 인간들의 속죄를 위한 속죄제물로서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한편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져서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가 수난받는 이스라엘의 의인들을 그린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모습 안에서 그리스도 수난의 신학적인 배경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이사 53,4-6.8ㄴ)
이미 구약성경의 욥의 기사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이스라엘은 이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 안에서,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죗값을 선하고 죄없는 인간에게 대신 물으심으로써 죄인들의 죄를 씻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비참하게 그리고 죽음으로 처해진 이유는 바로 그가 우리 인간의 속죄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이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이사 53,10)
실제로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구약의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전승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해 왔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어 속죄 제물이신 예수님에 대해 선포하도록 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ㄴ) 그분은 바로 하느님의 성령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3ㄴ-34) 또한 사도행전 8장 26절에서 40절(특히 32절-33절)에서 필립보가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성경을 풀이해 줄 때, 이 고난받는 야훼의 종을 예수와 연관시켜 설명해 준 후 그의 청에 따라 그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첫째 서간 2장 24절과 25절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교회는 성경의 구세사적인 전망 안에서, 탄생에서부터 죽으심에까지 이르는 예수님의 전생애를 인간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사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1베드 1,20)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 주 하느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이집트인들을 치던 마지막 재앙에서, 이스라엘을 죽음의 천사에게서 건지시려는 표식으로, 아스라엘 집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도록 합니다. 신약성경은 이스라엘을 건지려던 표식과 예수님 죽음의 의미가 일치함을 제시하면서 예수님을 빠스카양에 비유합니다. 유다인들이 파스카 양을 잡던 과월절 준비일의 낮 12시경에 돌아가신 주님.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요한 19,14) 인류를 죽음의 운명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생명의 길에 접어들도록 해주신 주님. 그분은 바로 인류를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시키시는 속죄제물, 즉 구원을 위한 파스카의 어린양이십니다.
한편 이렇게 자신의 수난으로 세상을 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 곧 우리 주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의 생활 자세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베드로 사도도 시련 속에 빠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병고와 아픔을 겪을 때마다 그것이 우리의 죄로 인한 벌로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내 이 고통을 부둥켜안고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난에 기꺼이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미사 때 우리는 성체성사를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며 외치는 사제의 함성 속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던 주님의 음성과 주님 수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듣습니다.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예절 당시 사제가 외치는 구원의 선포,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그것은 바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요한 3,15-16)기 위한 주님의 초대이며,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의 식탁에로의 초대이자 은총의 축제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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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2018년 전교의 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장 담화
전교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전합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을 하든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일하는 복음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나 구원을 선포하셨을 때에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데에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전교는 하느님을 세상에 내어 주어 그분을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전교 활동은 자기 마음속에 간직되어 넘쳐 나는 ‘복음의 기쁨’을 세상에 드러내는 거룩한 작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전교에 앞서 우리의 삶이 그분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성령의 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불이 먼저 우리 개인 안에서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타오르기를 바라십니다.
성령의 불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안의 사랑과 일치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하는 일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결코 튼실한 전교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가슴 아프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강권에 못 이겨 마지못해 한두 번 성당에 따라와 교리반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고 나서는 결국 냉담하고 돌아서는 많은 이들을 통해서 이를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 내지 못한 결과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전교에 대한 생각을 확고히 해야겠습니다. 전교는 예수님처럼 하루를 온전히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교의 바탕은 다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2티모 4,2)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께서는 “사도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착한 이들의 소심증, 더 정확히 표현해서 비겁한 태도에 있다.”(‘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 39장, 31항)고 하시면서 선교의 사명을 지닌 평신도들이 사도직의 직분에 소홀한 모습을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쉬넨스 추기경도 “우리는 흔히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 38장)라고 지적하면서, 선교 활동을 주저하는 우리의 허약한 속내를 상기시켰습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도직을 통해서 부여받은 선교 사명을 실천하는 데에는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전교의 목적은 결코 ‘교회의 세 불리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력으로 죽어 가는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전교는 하느님을 향한 역사적 여정에 있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는 은혜로운 작업입니다. 아직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이웃을 최고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 다닐 것입니다.”(묵시 21,24)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거룩하고 소중한 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하는 전교가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내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는 은총을 청합시다. 내가 누리는 삶의 기쁨과 행복이 하늘 나라를 확장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임을 명심합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 내 생각과 말과 행위가 이웃에게 복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2018년 10월 21일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장 손삼석 요셉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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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어떤 분들에게 성당에 오시게 된 동기에 대해 물으면 여러 경우의 답이 나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유언으로 남겨서, 천주교 신자와 결혼하려고 했더니 배우자 될 사람이 성당에 다녀야 한다고 해서, 자식이 첫 영성체를 하면서 어버이도 성당에 같이 다니기를 하도 원해서, 천주교 신자들이 부모님이나 집안 어르신의 장례를 잘 치러주는 모습을 보고, 마땅히 잘 아는 사람도 없이 혼자 늙어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믿고 따르고 함께할 사람 하나 얻고 싶어서, 막상 무슨 일이 생기거나 어려울 때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누군가의 삶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여서, 평화를 얻기 위해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 등등…….
그런데 어떤 연유와 경로로 성당에 오게 되었든지 간에, 오는 사람은 자기가 원해서 왔다고 할지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경로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사람을 부르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에게 맞는 적절한 사람들과 여러 가지 방법과 경로와 연유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면서 주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십니다.
왜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셔서 아무런 아쉬움이나 어려움이 없으신 하느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실까? 주 하느님 혼자서도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아무런 결핍이나 허전함 없이 풍요하고 충만하실 텐데 왜 우리를 부르실까? 우리는 여기서 주 하느님이 철학적인 개념이거나 자연 체계나 시스템이 아니며, 범접하거나 통교할 수도 없는 인간세계와는 전혀 다른 별도의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본성상으로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무한하고 충만한 사랑이 넘쳐 흘러 또 다른 유한한 존재를 창조하게 되고, 주 하느님께서 창조한 피조물들을 불러 주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자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사랑이 경계선을 긋고 이웃과 격리하여 독립되기 시작하면, 이미 사랑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삶의 신비를 하나 또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할 때 우리는 한 식구가 되고, 그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어 행복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경계하고 선을 긋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평온케 하는 사랑을 손상하게 되며, 그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심어주신 주 하느님과 그만큼 멀어지게 되며, 또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은 그만큼 부자유스럽게 되어 거북하고 불편하여 힘겨워진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첫 범죄, 원죄로 자신이 누리던 에덴동산의 행복을 자승자박으로 손실하게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서로를 개방하고 나누느냐 하는 사랑의 질에 따라 너와 나의 인격을 드높이게 되고, 그 인격적인 관계가 주 하느님 안에서 그만큼 밀접히 일치하게 되고, 그에 따라 내 삶의 평화와 행복의 질이 드높여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 손님들을 부른 임금의 비유를 드십니다. 임금은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부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초대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잔치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마태 22,5) 그러자 임금은 그들을 벌하고,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8-9절)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 하느님의 잔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한 분들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누군가의 강권에 의해 체면상 억지로 안 오면 안 될 것 같아서 예의상 와주신 분들이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든지 여러분께서는 여러 신자분들의 권유와 여러분 생의 여러 경로와 방법을 통해 이 잔치에 오셨습니다.
이 잔치는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은총을 스스로 확인하고 그에 감사드리며, 우리에게 그런 축복과 은총을 내려주신 주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잔치입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서 더 큰 우리 인생의 축복과 은총을 받고 평화와 안녕을 누리는 잔치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펼쳐주시고 나눠주시는 이 사랑의 전례와 새로운 생명의 잔치를 편안히 받아들이시고 기꺼이 참여하셔서 평화와 안녕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에게 들려주시고 선사해주시는 주 하느님 사랑의 말씀과 새 생명이 여러분을 구원의 기쁨 속으로 신속하고 막힘 없이 안아가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오늘은 군인주일입니다. 군종교구장이신 유수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님은 올 해 군인주일 제정 50주년을 맞이하여 발표한 담화문을 통해, “군 사목을 위해 기도와 후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와 사랑의 인사를” 표하십니다.
군 사목에 종사하고 있는 군종신부님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군에 자녀를 보낸 부모님들은 거리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보면 꼭 자신의 자녀들을 보는 것 같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자신의 신원을 드러내기 위해 군복을 입습니다. 군복을 입고 하는 말과 행동은 한 개인으로서의 말과 행동이 아니라 군인이라는 존재로서 하는 말과 행동으로 비추어집니다. 그 때문에 군복을 입은 누군가가 부정한 일을 한다면 사람들은 군인이 어떻게 그런 부정한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오늘날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뉴스에서 군인에 대한 사건들을 보더라도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군대라는 조직의 일원으로 사건을 바라봅니다. 그 때문에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군인들은 말과 행동에 있어 군인다운 면모를 보여야 합니다. 이러한 군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참 쉽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한여름의 더위와 한겨울의 추위가운데에서도 군인들은 한시도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고 아쉬운 소리도 전합니다.
“많은 경우에 군인 주일이나 가족 중에 누군가 군에서 복무할 때에는 군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군에서 복무하는 모든 이들은 내가 누구를 위해 나라를 지키고 있는지 잊지 않습니다. 그런 병사들을 위해 여러분의 기도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특별한 어느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두 번 군대에 오는 군종신부들이 군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인 것처럼,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이 땅 위에 우리가 모두 그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자 여러분, 바쁘고 이리 저리 신경 쓰실 일이 많으실지라도, 그 중 일부, 잠시라도 이 나라 이 땅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과 군인들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고 있는 군종신부님들과 수녀님들 선교사분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넉넉히 후원해 주십시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필리 4,19)
연중 제28주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뜨면 자연히 숨을 쉬게 되고, 수도만 틀면 물이 쏟아져 내리고, 스위치만 켜면 전기가 들어오니까 그런 것들과 관련하여 감사를 드리기보다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삽니다. 오히려 그런 기초 설비들이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번 엎어지거나 쓰러지거나 다치거나 그야말로 어디 한 군데 깨지거나 부서지는 사고라도 났다가 회복하게 되면, 그나마 숨쉬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에라도 새삼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청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 그것도 유다인들과는 원수같이 지내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를 보고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
그러시고는 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예수님께 치유된 유다의 나병 환자 아홉 사람이 자신들이 치유된 사실에 대해 예수님께 아무런 감사 표시나 그로 인한 보은의 행위도 없이 떠나 버린 데 대해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감사를 표하지 않은 유다인 아홉에게 베풀어주신 치유의 은총을 거두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작 예수님의 백성들이라고 할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예수님의 제2차 대상인 외국인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돌아온 것을 보시고는 황망해 하시면서도, 외국인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던 사마리아인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 믿음은 자신의 나병이 자연히 치유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고 여기는 신앙의 인식이며, 그에 대해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우리 본당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미사가 감사의 기도라면서, 예수님께서 우리 신자들이 한 주간 동안 살아가는데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러 온 신자는 5,113명 중 1,356명뿐이냐?’
성경에는 예수님께 감사를 표한 사마리아 사람이 어떻게 보은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와 보은이 비단 미사 참례와 기도 행위에 그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드리는 찬미와 흠숭 행위인 미사와 기도와 봉헌 이외에도 보은의 행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직접적인 보은의 행위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에게 우리가 받았다고 여기는 은총을 다시 나누는 행위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는 우리의 보은 행위가 될 수 있겠습니다.
오늘 한 번 조용히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가 주님께 감사드릴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께 어떻게 감사를 표하며 보은할 수 있을지?
아울러, 주님께 감사드리는 표현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형제자매 중 어느 누구에게, 어떻게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고 여기는 은총을 나눌 수 있을지?
우리 다 함께 구원될 믿음을 살기로 합시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연중 제28주일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2014년 전교의 달 담화문(요약)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만민 선교는 여전히 가장 시급한 과제이며, 교회의 모든 지체들은 이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적이기 때문입니다. 곧 교회는 태생적으로 ‘밖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전교의 달은 선교지에 있는 신생 교회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여러 대륙의 신자들이 기도하며 구체적인 연대 활동에 전념하는 탁월한 시기입니다. 이날은 은총과 기쁨의 기념일입니다. 이날이 은총의 기념일인 것은 성부께서 보내주신 성령께서 당신의 활동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지혜와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쁨의 기념일인 것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파견되신 성부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선교 활동을 지지해 주시고 함께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기쁨, 예수님과 선교하는 제자들의 기쁨에 관하여 저는 루카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루카 10,21-23 참조).
1. 루카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보내시며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게 하시고, 제자들은 이 선포의 사명을 완수하고 기쁨에 가득 차 돌아왔습니다. 거룩하신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루카 복음사가는 이어서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0-21.23)
2. 제자들은 기쁨에 가득 차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받은 권한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그들이 받은 사랑에 기뻐하라고 당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제자들은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였고 또한 그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이 감사의 기도에서는 드러내 보이심이 두드러집니다.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이시고 또 감추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 곧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주권을 드러내시고 사탄을 물리치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신만의 생각으로 가득 찬 이들과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내세우는 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감추셨습니다.
3.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이 ‘선하신 뜻’은 아버지의 인류에 대한 자비로운 구원 계획입니다. 아드님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에게까지 이르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감싸며, 우리가 성삼위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 줍니다.
아버지께서는 기쁨의 샘이십니다. 이 기쁨을 아드님께서 드러내 보이시고 성령께서 그 기쁨에 생기를 북돋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 다음 바로 이어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복음의 기쁨', 1항)
동정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나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 특별하게 경험하셨고, ‘우리 즐거움의 샘’(causa nostrae laetitiae)이 되셨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또한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면서(마르 3,14 참조),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 기쁨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지 못합니까?
4.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입니다. 이는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과 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과 고립된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2항) 이 때문에 더욱 인류는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려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에 더욱 더 사로잡히는 사람, 하느님 나라를 위한 열정에 불타는 사람이 되어 복음의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의 모든 제자는 복음 선포의 기쁨을 널리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사제직과 봉헌 생활에 대한 성소가 부족합니다. 이는 흔히 공동체 안에 강렬한 사도적 열정이 없어서 매력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에서 생겨납니다. 따라서 저는 본당 공동체와 협회와 단체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고 가장 궁핍한 이들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 뜨거운 형제적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기쁨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열정과 갈망이, 곧 참다운 성소들이 솟아납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평신도의 선교 성소를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신분과 사명에 대한 의식이 커졌고, 이와 함께 복음 전파에서 평신도가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맡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인식 또한 확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평신도는 효과적인 사도 활동을 위하여 적절한 양성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전교의 달은 또한 이 만민 선교에 즐겁게 참여하려는 갈망과 그 도덕적 의무에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키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금전적 기부는 먼저 주님을 향하고, 그 다음으로 다른 이들을 향한 자기 봉헌의 표시입니다. 이렇게 하여 물질적 봉헌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류의 복음화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이 전교의 달에 모든 지역 교회를 생각합니다. 복음화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저는 여러분 모두 복음의 기쁨 속에 잠겨 여러분의 소명과 사명을 밝혀줄 수 있는 사랑을 키워나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적 순례를 하고 있는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신 그 ‘첫 사랑’을 기억할 것을 당부합니다. 이는 향수에 젖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쁨 안에 머물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현존을 느낄 때,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다른 이들과 믿음과 희망과 복음적 사랑을 나눌 때에 기쁨 안에 머물게 됩니다.
교회가 겸손하고 기쁜 마음으로 실천하는 복음화의 모범이신 마리아의 전구로 환대하는 집, 모든 민족의 어머니가 되기를,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낳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연중 제28주일
2013년 전교의 달 복음화위원장 전교의 달 담화문
1. 행복하십니까?
살맛나십니까?
마음속에 기쁨이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 남미 여러 나라 국민들은 70%대인데 반하여, 우리나라 국민들은 10%대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풍요한 나라에 속한다는 이 땅에서 세계 최고에 이르게 된 자살률이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드리운 절망의 검은 그림자를 잘 대변합니다. 한여름의 닫힌 공간 속에서 곰팡이가 번성하듯, 미래가 닫힌 듯한 분위기 속에서, 마약, 도박, 알코올, 성, 인터넷, 게임 등, 각종 중독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종교 분야에서까지 사이비 현상이 독버섯처럼 성행하여 많은 사람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1%를 위한 99%”라는 말이 잘 나타내듯, 우리 사회의 경제적 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 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사랑이 없는 삶을 이어가거나 거기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고통스러워도 희망이 있다면, 사람은 마음속 깊이에 기쁨을 간직하고 영웅적 힘을 발휘하여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하지만 희망을 잃는 순간 삶은 무거운 짐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이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을 참으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우울한 마음에서 기쁨에 넘치는 마음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요한 14,27)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복음서는 그것을 증언합니다. 2천 년 교회 역사도 같은 증언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히브 12, 1)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본당이나 단체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강론 전에 교우들 가운데 한 분을 강론대에 초대하여 신앙 체험을 함께 들어왔는데, 그때마다 히브리서의 이 말씀이 지금도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절실히 깨닫곤 했습니다.
2.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인류에게 가져다주신 희망을 우리는 자신 안에만 가두어 둘 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세기 유럽의 대표적 지성인 가운데 하나로서 그리스도 신앙인도 아닌 어떤 분은 외쳤습니다. “콘스탄티노 대제가 우리에게서 훔쳐간 희망을 지금까지 장물로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 신자들이여, 이제 그것을 우리에게 돌려주어라. 예수의 삶과 죽음은 우리의 재산이기도 하다, 거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로제 가로디). 예수라는 분을 만나 그 이전까지 애지중지하던 모든 것들을 “쓰레기로 여긴”(필리 3,8) 바오로도 외쳤습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 24).
그리고 그분 생전에 최측근의 자리를 지키며 누구보다도 큰 사랑을 받았던 요한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 강림까지를 몸소 체험하고는, 참으로 사는 길,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기쁨과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증언하며 온 인류에게 외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1요한 1,1-4).
3. 기쁨을 주는 가르침, 곧 복음을 귀로만 듣게 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듣고, 보고, 만질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을 복음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복음 선포의 기치 아래 열정, 방법, 표현에서 온 교회가 새로움을 모색하고 있는 이때, 혜성처럼 등장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모든 종교, 나아가 각 분야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단순하고 복음적인 언행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고 계십니다.
이분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믿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게’(1테살 2,13 참조) 함으로써, 우리가 입으로뿐 아니라, 얼굴과 눈빛,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에서까지 복음을 증언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변질되어 가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소금이 되고, 어두운 사회에 빛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마태오가 전하는 주님의 마지막 당부를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장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연중 제28주일 ‘신앙의 해’ 개막 기념 미사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히브 12,2)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신앙의 길로 나아갑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2011년 10월 11일자로 자의 교서 「믿음의 문」을 내면서 ‘신앙의 해’를 거행하시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셨습니다. 신앙의 해는 2012년 10월 11일에 시작되어 2013년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끝납니다. 신앙의 해가 시작되는 2012년 10월 11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이 되는 날인 동시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반포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황님께서 신앙의 해를 선포하신 것은 세계 교회가 심각한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위기는 지역 교회마다 다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유럽 교회의 신앙을 위협하는 가장 큰 세력은 과도한 과학적 사고방식과 개인주의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신앙의 중요성과 의미를 상실한 것, 한마디로 ‘식어버린 신앙’이 유럽 교회의 당면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도 이런 형태의 위험이 서서히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에 못지않게 위험스러운 것은 ‘허약한 신앙’입니다. 단적인 예로 많은 이들이 가톨릭 신앙에 대해 호감을 갖고 교회의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매년 거의 입교자의 숫자만큼 냉담자가 양산됩니다. 신앙에 입문했지만,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작은 난관에 부딪치거나,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여 신앙을 저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한 성경과 교리지식이 너무 부족해서 이단적 교설에 빠져드는 신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한국 신자들의 신앙의 위기는 신앙의 기초가 약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해의 모든 프로그램을 ‘신앙의 기초’ 강화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 사랑 안에 살도록 부르십니다. 하느님은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신약에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당신과의 친교로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십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헌장」 2항) 이러한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이란 우리와 친교를 이루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해서 그분과의 친교 안에 머물게 될 때 우리는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초대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하느님이 초대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꾸준히 기도하면서 하느님과 자주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교회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좀 더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미사 중에 주님과 일치를 이루고 신자들 서로 간의 친교를 이룹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과 친교를 이룸으로써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에 나아가 사랑의 봉사를 실천할 힘을 얻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표어로 요약해봅니다.
첫째,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로마 10,17) 둘째,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마르 9,29; 사도 1,14) 셋째, 교회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사도 2,42; 콜로 2,7) 넷째, 미사로 하나되는 신앙(사도 2,42; 1코린 10,17) 다섯째,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사도 2,46; 갈라 5,6; 1코린 13,13)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주님과의 친교가 깊어지고,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화를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에 입문하지만, 신앙의 삶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그래서 신앙의 맛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냉담자들이 양산되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을 자주 읽고 묵상하면서, 꾸준히 기도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배우면서, 미사에 성심껏 참석하면서 사랑의 봉사라는 열매를 맺게 될 때 신앙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해는 한 해의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고 신자들의 신앙의 기초를 다지고, 성장하고 활성화하는 데에 출발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교구와 한국 교회에 가득히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2012년 10월 11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
연중 제28주일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2005년 전교의 달 담화문
청소년 선교에 힘을 모읍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05년 전교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새삼 주님의 간곡한 명령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이 숭고한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직도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피할 수 없는 사명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래 가톨릭교회의 선교 현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향후 중점 방안을 수립하고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청소년 선교의 부진
근래 수년간의 교세 추이를 관찰하면 가장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는 것이 청소년 선교의 부진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 특히 40대 미만의 연령대에서 교세가 줄곧 감소세를 보여 왔습니다. 이는 외적으로 유아 세례율의 급감, 초ㆍ중ㆍ고 주일 학교의 운영난, 본당 청소년 신자의 공동화 등의 현상으로 체감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청년들도 경제가 어려워지고 경쟁이 더욱 치열하며 생활이 각박하게 되자, 성당에서 만나기가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신앙생활보다는 일반 세속의 생활이 더욱 관심을 끌게 되고 복음적 가치는 등한시 되었습니다.
청소년 선교에 총체적인 노력을 기울입시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청소년층에 대한 대비책을 조속하고도 체계적으로 강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인터넷 세대’로 일컬어지는 청소년층의 취향에 파고드는 복음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곧 이들 세대가 지니고 있는 의문, 문제, 욕구 등에 부응하는 선교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 기울이고 그들의 요청에 적절히 응해주어야 합니다. 이들의 필요에 눈높이를 맞추어 때로는 해방자(루가4,16-21)로, 때로는 치유자(마르1,40-42)로, 때로는 착한목자(요한10,1-6. 10-16)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합니다.
전반적으로 이들 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느낌, 재미, 편의, 자율, 감각 등입니다. 이런 기준에서 이들이 바라보는 가톨릭 신앙은 ‘재미없고’,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신앙으로 비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이 선호하는 방법을 통해 복음을 생활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각 연령대별로 다음과 같은 노력을 기울일 것을 적극 제언합니다.
1) 유아 세례를 적극 권장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유아 세례율은 30%를밑돌고 있습니다. 이를 제고하기 위해서 신혼부부의 신앙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아가 철이 든 다음 신앙 선택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가정의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적극 권장하는 문화를 형성해야 할 것입니다.
2) 취학 이전 아동을 위해서 가정의 조기 신앙 교육을 강화하는 노력을 기울입시다. 가정에서의 규칙적인 기도 생활과 전례력에 따른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신앙 안에 머물도록 하여 믿음의 기초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3) 취학 연령층인 초ㆍ중ㆍ고 학생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종합적인 접근을 꾀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대에게는 신앙 형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인격도야와 학업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교육 및 문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시행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아울러 청년들은 이미 “사도직 활동의 주체들이자 협력자”로서, 교회의 정신에 따라서 교회를 위하여, 또한 동료와 부모, 이웃을 위하여 활동할 장을 적극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4) 캠퍼스 선교에 보다 큰 관심과 역량을 쏟아야 합니다. 그동안 가톨릭교회는 캠퍼스 선교를 거의 방치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해당 지역 교회 당국은 심기일전하여 전문 사목자를 양성하여 파견하고, 신자 교직원들의 적극적인 관여를 독려하고, 학생들의 자발적인 복음화 노력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군인 선교에 더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20대의 젊은 청년들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미래요, 그들이 제일 많이 모여 있는 대학과 군부대가 선교의 황금어장이라고 말로만 강조하고 느낄 뿐이지 이를 위한 인적 및 물질적 지원은 미흡하였습니다. 기도와 관심을 쏟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6) 혼인을 앞둔 신자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혼인과 가정의 중요성, 자녀의 신앙 교육에 대한 사명감, 행복한 부부생활을 위한 원리 등을 교육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7) 근로 청소년을 위해 복음화 역량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 근로 청소년들이 직장 및 근로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여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조직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길은 ‘신앙의 대물림’을 위해 전 교회적인 방안을 강구하는 것입니다. 박해 시대 가톨릭교회가 존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신앙의 대물림이었습니다.오늘날 가톨릭교회의 어려움은 교회가 신자들에게 이 원리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유아 세례, 첫영성체, 주일 학교, 견진성사 등을 꼬박 챙겨주는 것은 ‘신앙 대물림’ 교육원리를 터득한 다음의 구체적인 방안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결국 20-30대 신앙의 양상은 신앙 대물림 교육의 성패에 따른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아직도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젊은 세대가 기쁜 소식을 접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다음의 고백은 미래 세대를 위한 우리의 선교 사명을 일깨우는 경종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고린 9,16).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장 최 영 수 주교
연중 제28주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천주교 시애틀 대교구의 타코마 한인 성당의 주임사제로 새로 부임한 심 놀부 동생 흥보, 심흥보 베드로 신부입니다.
저를 타코마 한인 성당의 주임사제로 봉직하도록 불러주신 주님과 저를 이곳으로 초청해 주신 시애틀 대교구 알렉산더 부르넷 대주교님 그리고 저를 이곳으로 파견하여 주신 서울 대교구 정진석 니꼴라오 대주교님 그리고 저를 반갑게 맞아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9-20)라고 말씀하셨고 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 21)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로마 12, 10. 18)라고 말했습니다.
선임자이신 최종건 신부님과 선배 신부님들의 열정적인 사목에 뒤이어 저도 여기 미국 시애틀 대교구라는 보편 교회와 일치하여 주님 보시기에 참 좋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심으로써 우리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공짜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다시 살게 해 주신 주님을 믿고 감사함으로써 우리도 서로를 공짜로 용서합시다. 우리 형제 자매들 서로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허물을 감싸 보듬어 안아줍시다. 그러한 신앙행위로써 교우들 서로 뿐만 아니라 우리 성당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는 신앙 공동체가 되도록 합시다.
오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마르 10, 21)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따르지 못한 부자청년은 주님을 외롭게 떠나 버립니다. 우리도 우리가 듣고 알아 믿는 주님의 말씀을 실현하여 우리 공동체를 하늘 나라로 만듭시다.
연중 제28주일
지난 주일 본당의 날에 많은 교우들이 참석해서 좋은 시간을 가졌고, 우리가 즐기고 남은 수익금 4,014,530원을 유아의 신앙교육과 선교 및 지역복지를 위해 설립한 프란치스코 어린이집 빚상환에 봉헌했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우리 교우들이 한 데 모여 봉성체 환자들과 예비자까지 챙기면서 나눠 먹었으니 다행이지 그나마 교우들마저 얼마 없었다면 얼마나 썰렁했겠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다른 사회의 모임에서는 모임 한 번 하려면 인원동원 하는 게 더 큰 일이고, 자기와 마음이 맞지 않고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불참하기 일쑤고 또 자기에게 현실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으면 도와주지도 않는다. 그리고 머리 꽤나 돌리고 능력있다는 사람들은 다 빠지고 자기가 잘 부릴 수 있는 사람을 앞세워서 시키면서 뒤에서 조종하려고 한다. 자기는 욕먹거나 고생하지 않고 뒤에서 실리만 챙기려고 하고, 내세운 사람이 못한다 싶거나 자기에게 불편한 일이 조금만이라도 생기면 불평과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붓기가 다반사다. 또 화합과 일치를 위해 모인다 해도 각자의 자존심과 이해관계에 얽혀 좋은 열매를 맺기가 쉽지 않고, 심지어는 더 대립된 양상을 가져오기도 해서 차라리 안 만난 것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 아니더라도 아무나 데려오라고 하신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설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반겨 주신다. 아무런 자격도 물으시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주님을 믿는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처음에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더라도,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지금은 변해있어야겠다. 아기는 자기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때까지 엄마가 짜증이 날 정도로 칭얼대며 쫓아다닌다. 그처럼 우리가 아직까지도 주님의 뜻과 주님의 사랑을 실현할 생각은 않고 주님께 자기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이기적으로 청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예복도 입지 않은 체 잔치에 참석한 사람처럼 쫓겨날 것이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필립 4, 13)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우리도 진실하고 꾸준히 주님의 말씀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한량없이 풍요하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19절)이다.
연중 제28주일
예전에는 부모님과 어른에 대한 효에 관해서 새삼 말할 필요가 없었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과거 대가족 시대에는 함께 모여 살았기 때문에 모두가 한 식구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지금 핵가족 시대에 와서는 주택뿐만 아니라 호적마저도 각자 분가해 살아나가기 때문에 가족의 개념과 폭이 사뭇 다르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배우자를 얻게 되면서 배우자 서로 상대편 가족에 대한 관계가 한 치 걸러 두 치라고 피붙이와 다르고, 자녀 교육비와 부모와 형제 그리고 자기 집이라는 이중 삼중의 가계비 중복의 부담도 현실적인 한계로 등장하고 있다.
효는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낳기만 하고 저버렸다든지, 낳았지만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든지, 부모는 노력을 했지만 자식에게 필요한 만큼 또는 자식이 원하는 정도의 양육이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감사보다 섭섭한 마음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가 자기가 원하는 타입의 자식을 얻을 수 없듯이, 자식도 자기가 원하는 타입의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저 주어진 것일 뿐이다. 부모에게 자식이 맡겨진 것처럼 자식에게 부모도 맡겨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효를 말할 때는 그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바쳐야 하는 감사의 정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맺어주신 관계 당사자 서로가 가져야 하는 감정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으로 아니 사랑으로 안될 땐 미운정 고운정으로라도 서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효는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인간 각자가 지녀야할 기본감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하지 못하고 산다.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주어도 그 사랑의 정도와 질이 자식들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르며, 똑같은 사랑을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받는 자식들마다 각자 자기에게 느껴지는 감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사랑에 감사하기 보다 남과 비교하게 되면서 자기에게 온 것이 작다고 느껴 감사보다는 섭섭함이, 기쁨보다는 억울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 자기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은총을 발견하여야 한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과 나와 함께 살도록 보내주신 가족과 형제, 이웃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장점 등. 그러면 형제들에게 주어진 다른 장점들을 시샘과 비교 없이 동등하게 발견하게 된다. 우리 모두가 합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18)
연중 제28주일
우리는 지난주 본당의 날 기념미사 때, 하늘나라를 얻는 가난에 대해 보았다. 그러면 어느 정도가 가난한 삶인가? 예수님께서는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21절)라고 말씀하신다. 수도자들은 재물을 포기하고 주님만을 선택하여 청빈을 산다. 그런데 오늘 가족과 함께 물질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26절)하고 수군거린 제자들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교황님께서는 1981년 발표하신 회칙 '노동하는 인간' 제19항 '임금과 기타 사회적 혜택'이라는 항목에서,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성인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란 가정을 꾸려 적절히 유지하기에 충분하고 가정의 장래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보수를 의미한다"고 하신다. 이는 '가족 임금'으로서 배우자가 직업을 가지지 않고 자녀를 양육하고 가족을 돌볼 수 있을 정도의 임금 또는 보조금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임금 외에도 의료보험, '휴식' 및, '연금'과 '노후 대책' 그리고 '산업 재해 보험'에 관한 권리까지도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교황님의 말씀을 듣다 보면, 우리 중에는 '그렇게 많이 받아야 하는 거야? 가난의 정도를 말하기는커녕 내가 받는 것보다 더 받으라'는 소리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아직 사회복지 혜택이 충분치 못해서, 사회인 각자가 스스로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다. 노후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교육 및 결혼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그 반대로 빚보증 잘 못 서서 돈 떼고, 공사대금 떼이고, 받을 것 못 받아서 고생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우리가 지금 당장 굶어 죽을 정도로 가난한 상황은 아니면서도,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대한 분노와 미움이 가난해진 경제 상황보다도 더 처절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더러 가난해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보화를 얻"으라고 하신 말씀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가난한 상황에서 하늘의 보화를 얻으려면, 우리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라도 '없던 것으로 하고' 잊어야 하겠다. 그리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하겠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다"(27절)고 하셨다. 그리고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더 어려운 이들을 기억하며 함께하면서 이 어려운 시기를 이겨나가자.
연중 제28주일
최근 어떤 선생님께서 이런 하소연을 해왔습니다. "몇 몇 학생들은 아무리 선생님이 점수를 주려고 해도 아예 공부를 안 하기 때문에 점수를 줄 수가 없다." 과거에는 어떻게든 대학교에 가려고 기를 썼지만, 이젠 웬만하면 대학에 갈 수 있으니까 별로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부가 대학입시를 통과하기 위한 지식 습득과 암기 위주였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간 후 그리고 입시가 치열하지 않게 되면 의미 없는 것이 된다.
과거 먹을 것이 많지 않고, 의료 수준이 낮을 때는 마치 미신 섬기듯 매달리더니, 이젠 자신의 현세 생활에 하느님이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주일미사 한 번 빠지면 대죄요 고해성사 안 보면 영성체도 못하고 반쪽 짜리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 과거에는 신자 개개인에게 큰 문제로 여겼다. 그러나 요즘엔 주일미사 빠진다고 그야말로 벼락맞는 것도 아니고 자기 삶에 손해보는 것이 아니니까 시간 나면 참례하고 다른 일이 있으면 그것부터 하고 나서 또는 그것도 안되면 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나보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빌고 있는지도 모른다.
복음의 진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이들의 개인적이고도 현세적인 축복과 풍요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복음은 본래 공동체에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이며,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이 가리키는 대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함으로써 새롭게 이루는 사회공동체 건설의 지침서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으로 가진 자와 풍요한 자 그것도 자신의 것을 내놓기 싫어하는 이에게는 복음이 부담스러울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안위와 개인적인 삶의 질을 선호하는 이들에게는 공동체를 향한 복음이 귀찮거나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복음은 어느 한 개인에게 현세적인 축복을 가져다주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니며, 또 인간도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로마 4, 12-13) 우리가 주님을 믿고 복음에 헌신하는 이유는 우리 개인의 현세적인 안위와 축복된 삶이 아니라 형제들과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연중 제28주일
찬미 예수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난 10월 9일자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주교님께서 행하신 '서울대교구 사제 정기 인사이동'에 따라 여기 이 공항동 본당 주임사제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사제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들에게 사랑받는 것입니다. 여러 신자분들도 사제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시겠지요. 여러분들은 여러분 본당에 부임해 오는 사제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여러분에게 주님의 말씀을 맛있게 받아먹을 수 있도록 좋은 양식을 전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거룩하신 분이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제가 그런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늘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저의 인간적인 결점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여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뒤를 따라 형제 자매들에게 저를 바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제가 저에게 맡겨진 형제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사목협의회 회원들과 구역·반장, 단체장님들과 본당의 어른들과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주님 안에서 친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저에게 현세의 좋은 것들을 선물하기보다, 여러분이 주님을 초대한 가운데 형제·자매들과 함께 복음을 나누고 구역·반모임에서 나눈 그 복음을 공동체적으로 실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본당의 주임 사제에게 주는 가장 커다란 선물이요, 제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니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는 분이시다."(2디모 2,11-13) 라는 말씀을 디모테오에게 전했습니다. 저도 매일 매일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해 주셔서 여러분을 지켜주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는데 단 한 명의 이방인만이 예수님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나마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의 뜻에 맞추어 실현하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 다함께 마음과 힘을 모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실현하여, 이 지역에 하느님 나라가 오도록 다 같이 노력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한 점이 있으면, 주님께 청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루가 17,19) 라는 말씀과 함께, 저희에게 주님의 말씀을 실현할 힘마저 주실 것입니다.
연중 제28주일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은 다른 사람 마음 한번 아프게 하거나 원망 한번 산적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 한번 안 끼치고 또 자기 계발과 성숙을 위해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 온 사람들은 정말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은 대견해 하시면서도 착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신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마르 10,21)
그런데 지금 바로 이렇게 내게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이는 "난 정말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며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의기소침한 우리에게 주님은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마르 10,27) 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위로의 말씀도 현재의 우리에겐 전혀(?) 위로가 안된다.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교회는 예전부터 우리 범인(?)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어느 정도 현실에서 실현하고 살 수 있도록 십일조 규정을 두었다. 즉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가난한 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교구에서는 사제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본당의 운영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금인 교회의 예산도 십분의 일을 가난한 이들에게 쓰도록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아예 월급을 받을 때나 수입을 잡을 때 아예 십분의 일은 소득에서 없는 것으로 빼놓고 계산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라도 가난한 이들의 몫을 잡아 두어야겠다. 내 시간과 노력과 재물의 십분의 일을.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할 때, 가난한 이들에게 내주는 것이 곧 주님께 내주는 것이라고 하셨기에 그리고 주님을 믿음으로써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우리를 가난한 이들에게 내 주어야겠다. 착하고 성실한 삶에 그치지 않고 어려운 이웃에게 헌신하는 주님의 사도로서